민음
생각
민음 생각
01
설득의 정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김남우 외 옮김
02
4
그리스의 위대한 연설
페리클레스 | 뤼시아스
이소크라테스 | 데모스테네스
김헌 외 옮김
03
04
10
불온한 철학사전 볼테르 | 사이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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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시학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이세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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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정치 ‘소통의 정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위기의 로마공화정을 이끈 설득의 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김남우 외 옮김
0 1
정치는 타협의 기술이며, 타협은 토론의 결과다 윈스턴 처칠의 성공 비결, 우드로 윌슨이 리더십의 첫째로 꼽은 것, 오바마 대통령이 갈고닦은 것, 마틴 루서 킹이 감동을 전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바로 언어의 힘이다. 수사학 전통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 하여 로마공화정을 이끌었던 천재 키케로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자 연법에 토대를 제공하고, 토머스 제퍼슨의 공권(公權) 개념에 아이디 어를 준 인물도 바로 키케로다. 역사상 가장 탁월한 변호사였던 키케 로의 열정, 그리고 로마의 위기 극복 드라마를 한눈에 보여 주는 7편 의 대표 연설문을 통해 키케로 수사학의 정수를 배운다.
5
“토론과 설득을 문제 해결 원칙으로 삼는 일이 시급하다.” 금태섭 변호사 연설은 배우기에는 힘들지만, 중요한 일이며, 큰 위엄을 지니고, 그 무엇보다 최고의 영향력을 가져옵니다. 법률가인 여러분한테 구할 것은 건강한 삶이지만, 연설가들한테서 구할 것은 삶 자체입니다. 그리고 법률가의 해답과 결정은 종종 연설로써 번복되며, 연설에 의 한 변론 없이는 확고하게 유지되지 못합니다. 제가 충분히 성공한 연 설가라면 이렇게까지 연설을 칭송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저 는 저 자신에 관해서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위대한 연설가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6
— 본문에서
라틴어 원전 국내 최초 번역! 키케로에게서 배우는 설득의 힘 “아무것도 용서하지 마라.” 아니, 어떤 것은 용서하되 다 용서하지 는 마십시오. “호의를 얻을 목적으로 행동하지 마라.” 아니, 의무와 신의가 요청하는 경우에만 호의를 무시하십시오. “동정에 휘둘리지 마라.” 물론 지극히 엄정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도 적인 것도 상찬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의 견해를 고수하라.” 갖고 있던 기존의 견해보다 더 나은 다른 견해가 있지 않은 한은 그 말이 맞습니다.
— 본문에서
7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Marcus Tullius Cicero
oecrCi
8
마지막 로마공화정을 이끌었던 정치가, 연설가, 사상가.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 몰론에게서 수사학을 익혔고, 아카데미아 학파를 대표하는 라리사의 필론에게서 철학을 배웠다. 스물다섯 신참 변호사 시절 탁월한 변론술로 심지어 술라의 측근을 패소시키기까지 했지만, 후한이 두려워 한동안 희랍으로 피신하여 학문에 몰두했다. 이후 로마 역사상 최대
양민 수탈 사건의 주인이었던 베레스 탄핵에 성공하여 당대 최고의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다. 기원전 63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는데, 이때 카틸리나 반역음모를 밝혀 ‘국부’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키케로의
절차 위반이 문제가 되어 테살로니아로 망명한다. 삼두체제를 계획한
카이사르가 공화주의자 키케로를 회유하는 데 실패하자 그를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로마로 돌아왔지만 원로원 파로서 카이사르 파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또다시 이집트로 망명했다.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정계에 복귀했으나, 다음 해에 정권을 장악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키케로는
정치적으로는 뛰어난 변론으로 불의에 항의했고, 뜨거운 신념으로 독재에 항거했다. 학문적으로는 수사학자로서 『연설가에 대하여』 등을 집필했고
로마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위대한 공화주의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로서 『국가론』 등을 집필했다.
9
그리스의 위대한 연설 정치적 글쓰기의 전범 그리스 원전 국내 최초 번역
페리클레스, 뤼시아스,
이소크라테스, 데모스테네스 김헌, 장시은, 김기훈 옮김
0 2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만이 훌륭한 연설가가 될 수 있다.” 그리스 수사학의 목표는 ‘지혜로운 인간’과 ‘공동체의 회복’이었다. 아테네의 전설적인 연설가들이 찬양과 비난의 균형, 과장과 축소의 미학을 보여 주면서 ‘말의 힘’으로 다수를 행동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열정 때문이었다. 전쟁에 지친 국민을 단호하게 이끈 페리클레스, 가장 뛰어난 법정연 설문 작성자였던 뤼시아스, 정치적 수사와 ‘올바른 삶’의 관계를 진 지하게 고민했던 이소크라테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최고 웅변 가가 된 데모스테네스, 세계 역사를 움직인 그리스 수사학의 거장 4 인의 대표 연설을 통해 언어의 힘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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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가 무엇이든 상대보다 더 훌륭하게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말은 동일한 것에 관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으 며, 중대한 일을 평범한 것으로 만들고, 사소한 것들을 중대한 것처 럼 옷 입힐 수 있으며, 옛날의 일들을 최신의 것처럼 기술하고, 최근 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고풍스럽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주제로 삼아 먼저 말했어도 그 주제에 관해 말하는 것을 더 이상 피해서는 안 되며, 그들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려고 시도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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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크라테스 본문에서
“언어에는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 있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진통제처럼 아테네 시민들을 달랬다. 그리고 아테네 시민으로 하여금 당장에 겪는 고통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찬란한 미래를 위한 통과의례일 뿐이라고 믿게 만드는 환각 제처럼 달콤했다. 페리클레스는 독재자처럼 강압적이고 폭력적으 로 전쟁을 강요하지 않았다. 범속한 민중 선동가처럼 시민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들려 주면서 그들의 감정을 부추기지 않았다. 그는 아 테네의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이 겪는 고통을 가 감 없이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굴복하면 안 되는 이유를 냉정하고 단 정하게 제시하였다.
— 페리클레스 뒷이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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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크라테스
ISOKRA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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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
PERIKLHS
페르시아전쟁 이후 아테네를 강국으로 만든 지도자로서, 정치개혁으로 민주주의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아크로폴리스를 완성하고 문화예술
부흥에도 힘썼다. 뛰어난 웅변술을 갖춘 군인으로서 펠로폰네소스전쟁을 주도했다.
뤼시아스
LUSIAS
아테네 최고의 법정 연설문 작성자.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한 이후에
30인 참주정의 박해를 피해 도망갔던 뤼시아스는 민주정의 회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다.
이소크라테스
ISOKRATHS
부유한 피리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유명한 소피스트들로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당대 최고의 교사로서 플라톤과 다른 의미의 철학을 내세우면서 서로 경쟁했다. 아테네에 학교를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여 서양 인문교양 교육의 바탕을 마련하였고, 유려한 문체로 웅변술을 산문예술로 끌어올렸다.
데모스테네스
DHMOSQENHS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유산을 빼돌린 친척에게서 재산을 되찾기 위해 웅변술을 배웠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그리스가 연합하여
마케도니아의 제국주의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여 박해를 받고 피신했으나, 체포되는 순간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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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철학사전 언론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목숨 건 지식인
볼테르
사이에 옮김
0 3
프랑스, 스위스에서 불태워졌던 금서 국내 최초 번역 권력과 편견에 대항했던 볼테르의 사상은 18세기 계몽주의 정신의 핵심으로, 프랑스의 톨레랑스 전통과 비판적 정신의 원류가 된다. 계 몽주의란 이성을 신봉하는 사람을 위한 종교다. 독자에게 스스로 생 각하기를 촉구하는 『불온한 철학사전』은 무신론, 평등, 관용에서부 터 데카르트, 뉴턴 등 당대 앞선 사상가들을 소개하는 개념사전이면 서 또한 간통, 경박함, 우정 등 일상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에세이이 기도 하다. 역사학자 자크 바전은 “이 사전에는 ‘술술 읽히고 재미난’ 이라는 수식어를 제목에 덧붙여도 손색이 없다.”라고 말했다. 일평생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강조한 볼테르가 투명하고도 재치 있는 언어 로 전하는 ‘상식의 힘’으로 사유하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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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성의 가장 깊은 뿌리는 계몽주의다.” 피터 게이 문인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소수의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 치는 사람으로, 대학에서 궤변을 늘어놓거나 아카데미에서 설익은 소리를 하지 않고 방에서 혼자 글을 쓰는 진정한 지식인이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박해를 받았다. 인간이라는 불쌍한 종족은 편협한 정신 을 가지고 있어서, 잘 다져진 땅을 걷는 사람들은 새로운 길을 가리 키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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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 중에서
통렬한 풍자가 가득한 불온한 글 사랑은 종류가 너무 많다. 그래서 사랑을 정의하려면 누구에게 물어 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경솔한 사람들은 흔히 며칠 동안의 변덕, 애정 없는 육체적 관계, 존중심 없는 감정, 환심을 사기 위해 꾸며 낸 태도,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습관, 소설적인 환상, 처음엔 좋지만 곧 환멸이 뒤따르는 애정 등 수많은 망상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 「사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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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비판적 정신의 원류 사랑이나 존경심이 그렇듯이 우정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이웃을 도와주라는 말이지, 이웃과 나누는 대화가 지겹더라도 기쁘게 즐기라는 뜻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수다 쟁이에게 비밀을 털어놓으라는 뜻이 아니며, 낭비벽이 있는 사람에 게 돈을 빌려주라는 뜻도 아니다. 우정은 함께 노를 젓는 부부 사이 와 같아서 이혼을 하듯 갈라설 수 있는 결합이다. 우정은 남의 마음 을 헤아릴 줄 알고 덕스러운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암묵적인 계약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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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 중에서
“이탈리아에 르네상스가 있고, 독일에 종교개혁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다.” 빅토르 위고 옷을 이러저러하게 차려입고 점잖게 걷고 점잖게 이야기하는 사람 을 무턱대고 존경한다면, 그건 편견에 의한 것이다. 그런 사람 앞에 서는 허리 굽혀 인사해야 한다고 당신의 부모는 말했다. 그가 정말 그런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채 알기도 전에 당신은 그를 존경한다. 당신은 점점 나이를 먹고 아는 것도 많아진다. 존경했던 그 사람이 실지로는 자만이 하늘을 찌르고 제 이익 챙길 생각만 하 는, 술수 많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편견」 중에서
21
볼테르
Voltaire
22
18세기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역사가, 극작가,
시인이며,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1694년 프랑스 파리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 공부를 시작했으나 곧 그만두고 시를 썼다. 1717년 루이 15세의 섭정 오를레앙 공에 대한 풍자시가 문제가 되어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비극 「오이디푸스」를 완성하고 ‘볼테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1726년 지체 높은 귀족 로앙 샤보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또다시 옥살이를 겪고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에서 신체제를 접한 그는 타고난 비판 정신으로 봉건적 프랑스 사회를 비판하는 『영국인들에 대한 편지 혹은 철학 편지』를 출간하였다. 이 때문에 또 정부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피신했다가, 벨기에, 파리 등을 오가며 『뉴턴 철학 개요』 등 집필에 몰두했다.
1745년 그간의 작품 활동을 인정받아 왕실 역사편찬관과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풍자를 즐기는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애써 얻은 지위는 다시 위태로워졌다.
1758년 볼테르는 시골에 내려가 농사지으며 동료 계몽주의자들과 함께 계급, 인권 문제, 구교도의 차별 등에 맞서 싸웠다.
이는 반세기 후 일어난 프랑스혁명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디드로와 함께 집필한 『백과전서』를 비롯하여 볼테르의 저서들이 금서가 되어 불태워졌지만, 1778년 파리로 돌아간 볼테르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흥분 속에서 무리한 활동으로
그해 볼테르는 84세로 다사다난했던 생을 마감했다. 『관용론』,
『역사철학』, 『루이 14세의 세기』, 『자연법』, 『캉디드』, 『자디그』, 『자이르』 등 철학에서 비극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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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시학 스트라빈스키의 하버드대 화제의 강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이세진 옮김
0 4
“혁신은 전통과 함께 갈 때에만 생산적일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 스물아홉 살에 「불새」, 서른한 살에 「봄의 제전」으로 파리 음악계를 발칵 뒤집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변신으로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혁신 아이콘이 된 스트라빈스키, 그가 ‘전적인 새로움’과 ‘완 전한 형식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의 독창적인 ‘창조적 상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음악의 거장은 “전통이 창조의 연속성을 보장한다.”고 강 조한다. “예술은 통제될수록 더욱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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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빈스키는 독창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질서를 찾았다.” 피터 게이 “창조 능력은 결코 저 혼자 뚝 떨어져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능력은 늘 관찰의 재능과 함께하지요. 그리고 진정한 창작인에게는 늘 자기 주변에서, 가장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요 소들을 발견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26
— 본문에서
“예술은 통제될수록 자유롭다.” 스트라빈스키 브람스는 베토벤의 옷가지에서 무엇 하나 빌려가지 않고도 베토벤 의 전통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새것을 만들기 위해서 전통을 회복 하는 것이다.” 전통은 창조의 연속성을 보장해 줍니다.
— 본문에서
27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Igor Stravinsky
28
스트라빈스키는 1882년 러시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마린스키 극장의 유명한 베이스 가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예술가들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애서가였던 아버지의 서재에서 음악 서적들뿐만 아니라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 괴테, 단테 등 세계 문학의 고전들을 탐독하면서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들어갔지만,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눈에 띄어 작곡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댜길레프의 발레뤼스를 위해 작곡한 발레음악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이 크게 성공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곡으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스트라빈스키는 나이 서른에 전위적인 모더니스트가 된 것이다.
조국에서는 러시아혁명으로 땅을 빼앗기고, 양차 세계대전을
피해 유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45년 미국으로 귀화했다. 그동안 발레곡 「풀치넬라」, 오페라 「오이디푸스 왕」 등
신고전주의 시기를 거쳤고, 노년에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독창적으로 활용한 「아곤」으로 또 한 번 전성기를 맞았다. 이처럼 끊임없는 혁신으로 20세기 음악의 거장이 된 스트라빈스키는 1971년 4월 6일 타계했다.
『음악의 시학』은 1939년 하버드대학교에서 했던 유명한
시학 강의로, 음대생들과 음악 애호가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이 책에서 스트라빈스키는 특히 창의적 상상이 헛된 공상이나 과장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규율과 전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나의 자유는 나 자신에게 부과하는 그 좁은 틀 안에서의 움직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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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힘은 창의력의 바탕이며, 말의 힘은 올바른 판단에서 비롯됩니다. 『신약성서』는 세상을 짓고 아름다운 질서를 부여한 신(Theos)이 곧 말(Logos)이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말은 곧 신이다. 말은 없던 세상을 있게 한 창조의 원동력이 며 주체였다. 말의 힘을 이보다 더 강력하게 보여 주는 문서가 세상에 또 있을까? 말이 신이고 신이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들었다면, 말은 인간에게 신이 허락한 가장 귀중한 선물이며 본성일 것이다. — 김헌, 『그리스의 위대한 연설』에서
새로운 인문고전 시리즈 ‘민음 생각’을 시작합니다. 깊은 생각과 명징한 말은 성숙한 인간을 만듭니다.
문학, 예술, 철학에서 전범이 되는 산문을 엄선합니다. 창의적인 사유와 행복한 독서를 위하여 크고 넓은 생각을 하겠습니다.
[사은품] 〈민음 생각〉 미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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