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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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행복한 나라, 치안강국 대한민국

2 0 1 4 안 보 사 랑 C O N T E S T 입 상 작

2014 안보사랑

CONTEST

모 음 집

안보사랑 CONTEST 2014 안보사랑 콘테스트 입상작 모음집


發刊辭

안녕하십니까! 경찰청장 이성한입니다.

2008년 이후, 올해로 일곱 번째를 맞은 ‘안보사랑 콘테스트’는 해를 거듭할 수록 많은 관심과 참여 속에 대표적인 안보홍보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습니다. 최근 통일에 대한 우리사회의 고조된 관심을 반영하듯이 이번에 출품된 작품 하나하나에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 평화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콘테스트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6·25 전쟁의 교훈 과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자유를 찾아 우리 사회에 정착한 북한 이탈주민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많은 분들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 이번 콘테스트를 통해 얻은 가장 큰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안전’이라는 문제가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안보’는 국민안전을 위한 선결조건입니다. 저는 우리 선조 들의 고귀한 땀방울로 일궈 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우리 모두의 하나된 안보의식으로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우리 모두가 안보의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새기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수상의 영예를 안은 분들께는 축하를, 아쉽게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작품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는 진심어린 감사를 보내며, 많은 작품을 공정하게 심사해주신 심사위원 여러분들께도 지면을 빌어 깊은 감사 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책에 담겨있는 우리 청소년들과 북한이탈주민들의 소중한 글들이 널리 읽혀져 우리의 안보의식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6월

경찰청장


CONTENTS

대 상

l 2014년 안보사랑 콘테스트 입상작 모음집

“7살 주형이가 어른들에게 묻습니다” • 08 (광고영상 부문) 황슬우

광고영상 부문 최우수상 _ 안보사랑 ucc(아기염소) 백지원 • 09 우 수 상 _ 안보의식을 활짝 펼쳐 주세요 엄준호 • 10 장 려 상_ 당신의 일상을 위한 우리의 일상 김태연 • 11

포스터 부문 최우수상 _ 튼튼한 국가안보 경찰청이 지킵니다 이화연 • 14 우 수 상 _ 대한민국 안보의식엔 쉼표가 없습니다 김희숙 • 15 우 수 상 _ 국가안보, 113으로 지켜주세요 홍아름 • 16 장 려 상_ 안보가 사라지면 국가도 사라진다 정필문 • 17 장 려 상_ 대한민국을 지키는 구원투수 113 구유진 • 18 장 려 상_ 낚이겠습니까? 김다운 • 19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최우수상 _ 할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선물 김윤서 (경기도 의정부부용초) • 22 우 수 상 _ 압록강 빨래터 이광연 (남양주 심석초) • 27 우 수 상 _ 마음의 문을 열고 김보경 (대전 대전송촌초) • 32 장 려 상_ 나의 기도 이정훈 (울산 성안초) • 35 장 려 상_ 진짜 통일 변윤지 (서울 신용산초) • 39 장 려 상_ 할머니의 의자 이윤진 (당진 원당초) • 44


KOREAN NATIONAL POLICE AGENCY

안보사랑 글짓기 (중・고등 부문) 최우수상 _ 내 짝 박수민 (서울 휘경여중) • 50 우 수 상 _ 아주 특별한 우편배달부 강수현 (인천 관교여중) • 57 우 수 상 _ ‘우리의 소원은 통일’ 진짜? 이소정 (울산 범서고) • 64 장 려 상_ 초우 김경환 (고양 고양예술고) • 70 장 려 상_ 분단의 슬픔 김바다 (대전 둔산중) • 75 장 려 상_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돌아 본 기억 전민성 (충남 금산고) • 80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최우수상 _ 꿈을 되찾기 까지 천○○ • 86 우 수 상 _ 가슴 아픈 추억 전○○ • 94 우 수 상 _ “달리자! 그날까지~” 박○○ • 106 장 려 상_ 참 잘 오셨습니다 조○○ • 118 장 려 상_ 무산 통일 빵집 김○○ • 128 장 려 상_ 오늘이 있어 행복하고 내일이 있어 행복하다 이○○ • 136

심사평 2014 안보사랑 콘테스트 심사평 김봉현 (동국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 • 150

2014 안보사랑 콘테스트 심사평 한규훈 (숙명여대 홍보광고학과 교수) • 153

좋은 글의 자양과 요람 김문주 (문학평론가, 영남대학교 국문과 교수) • 156

가슴을 울리게 하는 메아리를 김현탁 (소설가, 한국현대문학연구소장) • 159


KOREAN NATIONAL POLICE AGENCY


광고영상 부문

대상

7 살 주형이가 어른들에게 묻습니다 황슬우

최우수상

안보사랑 ucc(아기염소) 백지원

우수상

안보의식을 활짝 펼쳐 주세요 엄준호

장려상

당신의 일상을 위한 우리의 일상 김태연


광고영상 부문

대 상

“7살 주형이가 어른들에게 묻습니다” 황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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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영상 부문

최우수상

안보사랑 ucc(아기염소) 백지원

국민이 행복한 나라, 치안강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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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영상 부문

우수상

안보의식을 활짝 펼쳐 주세요 엄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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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영상 부문

장려상

당신의 일상을 위한 우리의 일상 김태연

국민이 행복한 나라, 치안강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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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NATIONAL POLICE AGENCY


포스터 부문

최우수상

튼튼한 국가안보 경찰청이 지킵니다 이화연

대한민국 안보의식엔 쉼표가 없습니다 우수상

김희숙

국가안보, 113으로 지켜주세요 홍아름

장려상

안보가 사라지면 국가도 사라진다 정필문

대한민국을 지키는 구원투수 113 구유진

낚이겠습니까? 김다운


포스터 부문

최우수상

튼튼한 국가안보 경찰청이 지킵니다 이화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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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부문

우수상

대한민국 안보의식엔 쉼표가 없습니다 김희숙

국민이 행복한 나라, 치안강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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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부문

우수상

국가안보, 113으로 지켜주세요 홍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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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부문

장려상

안보가 사라지면 국가도 사라진다 정필문

국민이 행복한 나라, 치안강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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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부문

장려상

대한민국을 지키는 구원투수 113 구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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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포스터 부문

장려상

낚이겠습니까? 김다운

국민이 행복한 나라, 치안강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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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할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선물 김윤서 (경기도 의정부부용초)

우수

압록강 빨래터 이광연 (남양주 심석초)

우수

마음의 문을 열고 김보경 (대전 대전송촌초)

장려

나의 기도 이정훈 (울산 성안초)

장려

진짜 통일 변윤지 (서울 신용산초)

장려

할머니의 의자 이윤진 (당진 원당초)

국민이 행복한 나라, 치안강국 대한민국


문예부문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국민이 행복한 나라, 치안강국 대한민국

1.


할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선물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최우수상

김 윤 서 (경기도 의정부부용초)

나는 오늘 우리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분단의 고통과 피난의 기억이 생생하신 우리 할아버지는 지금 도 가끔 그 날을 떠올리며 마음속 깊은 곳 슬픔을 꺼내 놓으십니다. 우리 할아버지 고향은 강원도 금화… 지금은 비무장지대 안에 있어 가 볼 수도 없는 곳입니다. 예전에는 군부대 방문을 통해 먼발치에서 고향을 보신 적도 있다 고는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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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뛰어놀고 살아오신 고향을 갈 수 없는 현실과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실 수 없다는 슬픔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그런 할아버지 마음을 헤아리듯 얼마 전 TV를 통해 이산가족 상 봉에 대한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단걸음에 엄마 아빠에게 할아버지께 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TV에서 이산가족 만날 수 있다고 하던데 요. 보셨어요?” “아이고! 우리 손녀 고마워라. 이산가족 얘기 나오는 TV 보면서 이 할아비 생각했었어?”하시며 나를 꼭 껴안아 주셨습니다.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 고향이 북한에 있다면서요? 가족들도 북한에 계시고…”라고 말하려는데 내 목소리가 작아졌고 갑자기 말 꼬리를 흐려 버렸습니다. 제가 괜히 할아버지 아픈 기억을 들춰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 이 들어서요. 그런데 아빠가 제 말을 이어 할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요 아버님! 고향에 아직 살아 계신 가족들 있으실 거 아니에 요? 한번 신청해 보세요.” “에이 이제 다 돌아가시고 누가 있겠어? 바로 밑에 동생도 죽었다 하고 막냇동생이나 살아있을까?” 할아버지도 목소리가 작아지셨고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물도 글썽이시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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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흐르는 침묵의 시간… 내가 괜한 말을 꺼낸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할아버지 죄송해요.’라며 속으로 되뇌고 있는데… 그때였습니다. “그래 내가 80 중반인데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 이번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되면 꼭 신청해서 아직 살아 있을 것 같은 막냇동생을 꼭 찾아봐야겠구나.”라고 말씀하시며 물끄러미 창밖 먼 곳을 바라 보셨습니다. ‘휴~ 다행이다.’ 난 그냥 할아버지 고향인 북한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는데. 이토록 감춰 오신 슬픔이 크 신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아빠께 오늘 일을 다시 여쭤 봤습니다. “아빠! 제가 할아버지께 괜히 이산가족 상봉 얘기를 했나 봐요.” “아니야 아마 할아버지는 윤서가 그런 관심을 보여주고 할아버지 를 걱정해 주고 있는 모습에 기뻐하셨을 거야.” “그런데 할아버지 표정이 좀 어두워 보여서요.” “그건 아빠도 잘은 알 수 없지만, 아빠 생각에는 찾고 싶고 보고 싶은 가족이지만 만약 찾더라도 돌아가셨거나 힘든 상황을 보시게 될까 봐 걱정되셨을 거야. 그리워한 시간이 엄청나신데 실망과 걱정 이 더 크실 수도 있으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고 대답하는 순간 창밖 넘어 먼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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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향하던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 한국과 북한. 같은 언어를 쓰고 내 부모 형제가 살고 있지만 만날 수도 없고 그 저 서로에게 총칼만 겨누고 사는 현실. 나라를 지키는 젊은 군인 아저씨들의 생명이 위협받고 연평도처 럼 북한에 가까운 곳에 사는 국민들까지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사 는 대한민국. 분단된 국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겠지만 오늘 할아버 지를 보며 그 상황 안에 속해 있는 많은 분의 슬픔이 느껴져서 마음 이 아팠습니다. ‘통일’, ‘평화통일’, ‘남북통일’ 등 통일이라는 단어들을 들어온 순 간들이 생각납니다. 다른 사람의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정말이지 오늘 할아버지를 뵙기 전까지 한 번도 통일에 대해서 진 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라를 지키고, 어둡고 차가운 고 통을 견뎌가며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고생과 희생으로 우리나라 대 한민국을 지켜주기에 우리가 지금처럼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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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이제 그 이상이 필요할듯합니다. 지키는 것보다 합치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 줄 테니까요. 지금부터라도 지키려는 노력보다 합치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 할 아버지와 같은 모든 분의 염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는 잠들기 전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하려 합니다. 작은 힘이지만 통일을 위해 관심과 성의를 다하겠다고. 그리고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동생을 찾으신다면 할아버지 손을 잡고 꼭 같이 그 자리에 갈 것이라고, 그리고 제가 꼭 안아드리겠습 니다. 두 할아버지를… 꼭…

작은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저의 마음을 담아 할아버지 꿈속으로 선물을 보내드려야겠습니다. 선물을 받고 좋아하실 할아버지의 환한 미소가 벌써 기다려집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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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빨래터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우수상

이 광 연 (남양주 심석초)

“에고, 아직도 저렇게 빨래를 하니. 쯧쯧.” 할머니의 혀끝을 차는 소리가 나의 귓가에 노크했다. 할머니께서 는 북한 주민의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계셨다. “꼭 우리 60년대 모습이야. 같은 민족끼리 어찌 사는 모습이 다 를꼬.” 할머니는 금세 눈물을 흘릴 것처럼 두 눈이 넘칠 것 같았다. 고위 간부들은 아파트에서 우리처럼 세탁기로 빨래를 하지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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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 주민들은 압록강에 나와 빨래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물은 그대로 북한 주민들에게 식수로 사용된다고 하였다. “밥을 짓거나 마실 물은 새벽에 담아 가요.” 북한 주민의 목소리가 나의 두 눈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끌었다. 빨래가 다 된 옷들과 이불은 넓은 돌 위에 넓게 펴져 햇빛에 말려지 고 있었다. 가끔 옷을 더럽혀 오면 엄마는 초벌 빨래를 해야 한다며 세탁기에 빨래를 넣기 전에 앉아 손으로 옷을 비비며 빠신다. “어휴, 허리야. 너 때문에 엄마 허리가 금방 꼬부랑 할머니 되겠다.” 엄마는 가끔이신데, 북한 주민들은 매일 저렇게 빨래를 하고 있다. ‘나중에 우리가 통일되었을 때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로 만나 야 하는 거 아니야?’ 기역자로 꺾인 허리를 가진 북한 주민과 꼿꼿한 허리를 가진 남한 주민이 통일되어 만났을 때 서로 포옹을 하며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 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북한에 있는 우리 형님을 꼭 만나야 하는데…….” 일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습관처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 다. 형님 할아버지의 허리가 기역자인 것도 모르고 돌아가셨을 할아 버지를 생각하니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를 예뻐해 주시며 용돈을 주시던 할아버지와 함께 갔던 ‘제3 땅굴’ 여행이 그림처럼 나 의 기억 속에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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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연아, 뭐하냐? 빨리 준비해야지.” 곰처럼 느릿느릿한 할아버지께서 오늘따라 재빠른 여우처럼 움 직이셨다. “아버님, 그렇게도 좋으세요?” “좋다 말고, 직접은 아니지만 내 형제가 사는 땅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구나.” “광연아, 할아버지 잘 모시고 다녀와라.” 할아버지께서는 폐암 수술을 받으시고, 일 년을 병원에서 계시 다가 이제 퇴원을 하셨다. 병원에 계시면서 할아버지는 북한에 있는 형님을 찾으셨다. “나 이대로 못 죽는다. 형님을 뵙고 못한 이야기를 꼭 해야 하는데.” 북한에 계신 형님 할아버지 때문인지, 할아버지는 힘든 수술과 항암 치료를 잘 견디셨고 퇴원하자마자 북한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 는 파주에 가기로 한 것이다. 파주에 들어서자 넓은 논과 함께 철조망이 여기저기 만들어져 있 었다. 할아버지는 철조망을 보시며, 꼭 자기 가슴에 철조망이 있어 따가운 것처럼 가슴을 만지셨다. 입구에서 헌병이 올라와서 신분을 확인하고 우리가 탄 버스는 조금씩 북한과 가까운 곳으로 다가갔다. 먼저, 영사관에서 상영되는 제1 땅굴과 2, 3, 4 땅굴을 보았다. 겉으로는 통일하자고 이야기하며 몰래 땅굴을 파는 북한 사람들을 보며 할아버지는 슬픈 표정으로 두 눈을 감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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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세상에서 제일 싫은 친구가 앞에서는 친한척 하며 뒤에서 욕하는 친군데……. 저렇게 나쁜 마음을 가진 북한과 통일이 되면 정 말로 행복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의 마음과는 다르게 통일이 되는 게 싫을 것 같았다. 할 아버지의 거동이 불편하여 기차처럼 생긴 것을 타고 제3 땅굴도 견 학하였다. 그리고 도라 전망대에 올라 북한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500원 동전 두 개로 비춰지는 북 한의 모습이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에게 보고 싶은 가족들을 생각 나게 한 것이다. 할아버지도 형님을 부르며, 두 손을 만질 수 없는 북한을 향해 흔 들고 계셨다. 멋지게 지어진 도라산역을 보며 할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씀하셨다. “광연아, 다음번에는 꼭 경의선을 타고 평양으로 가자.” 타는 곳에 평양방면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보니, 교통카드를 찍고 금방이라도 평양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행 후 할아버지께서는 마음이 아픈 만큼 몸도 아프신지 다시 병 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매일 나와 함께 갔던 여행 사진을 보시며 암과 싸우셨지만, 작년 이맘때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직도 화면에는 북한 주민들의 빨래하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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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내 또래의 친구들이 압록강에서 물수제비를 하며 노는 모습도 보였다. 할아버지처럼 나에게는 북한에 친척이 없다. 그러 나 북한 주민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슬픈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가 한민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햇빛이 좋은 날만 되면 빨래를 하기 위해 압록강으로 모인다는 그 들을 보며 소원 한 가지를 생각했다. 하얗게 반짝반짝 말려지는 빨래처럼 통일을 위해 큰 힘을 쓸 수 있 는 어른들의 욕심도 햇빛에 말려져서 깨끗하게 사라졌으면 좋겠다. 압록강 빨래터에서 더 이상 허리를 굽히며 힘들게 빨래를 하지 않 기 위해서라도 통일을 위한 지저분한 욕심 얼룩들을 서로 힘을 합쳐 깨끗하게 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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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을 열고…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우수상

김 보 경 (대전 대전송촌초)

“엄마 베트남은 벌써 통일했다고 하던데, 이제는 전쟁 안 해?” “응, 당연하지 전쟁은 나라가 분단되어 있을 때 가능성이 높은 거야.” 동생이 학교에 돌아와서 땀범벅이 되어버린 몸을 씻은 후 학교에 서 배운 내용과 궁금증을 엄마께 이야기하였다. 마침 통일 글쓰기 의 내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얼룩말을 발견한 사자처럼 눈을 반짝이 며 귀를 ‘쫑긋’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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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글에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 “그럼 우리가 왜 분단이 되었는지 알고 있니?” “응, 8·15 광복 이후 김일성 국방위원장과 이승만 대통령이 민 주주의, 공산주의를 놓고 갈등이 생기면서 북쪽과 남쪽에 두 개의 정 부가 생겨났기 때문이지.” 레몬즙을 ‘쭉’ 짜듯이 5학년 때 배운 내용을 머리에서 짜냈다. “잘 알고 있구나. 그럼 전쟁을 왜 하는지, 통일을 왜 해야 하는 지, 그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직접 생각해봐.” 답을 원해서 한 질문에 오히려 더 많은 과제를 주게 되었다. 가 장 먼저 통일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통할 통과 한 일을 합쳐서 ‘하나 로 통한다.’ 라는 뜻일 것이다. 통일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서로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통일은 남과 북으로 갈려 있는 우리 국토와 우리 겨레가 하나로 되는 일’이라는 의미가 있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신채호 선생님의 말씀이 다.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요, 내일의 길잡이이다.’ 라는 말이 있듯 이 역사는 미래를 위해 꼭 알아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통일을 위해 서는 분단의 역사를 확실히 알아두어야 한다. 피눈물 흘리던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지만 그 기쁨도 오래가지 못하였 다. 8·15 광복 이후 우리나라 대부분의 국민이 사회주의와 공산화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38선을 세워서 북한은 소련, 남한은 미 국의 주도로 갈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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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왜 통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는 같은 한민족이기 때문이다. 가족끼리 토라지고 싸우기도 하지만 가족이기에 용서가 되고 화해를 하는 것 이다. 통일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 동포들에 대한 사랑과 관 심이다. 비록 내 또래의 친구들이 북한에 쌀이나 값진 물건을 사줄 수는 없더라도 뉴스에서 북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북한의 가난한 어 린이들을 위해 학용품을 기부하여 공부에 도움을 주고 가엾은 북한 아이들을 안타까워해 주는 마을은 가질 수 있다. 부모님과 앉아서 북 한 뉴스를 보며 북한에 대해 알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비록 우리의 몸은 휴전선을 넘을 수 없지만, 마음만이라도 재주를 넘는 손 연재 선수처럼 ‘훌쩍’ 넘어서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아기 늑대 세 마리와 못된 돼지’라는 책을 읽어보면 그동안의 아 기늑대들이지은 단단한 집은 돼지의 쇠망치와 다이너마이트에 의해 먼지가 되었지만 약한 꽃집만은 늑대들을 보호해 주었다. 못된 돼지 가 북한이고, 아기늑대는 남한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아무리 단단 한 방어벽도 우리를 지켜줄 수는 없다. 이제라도 꽃집처럼 굳게 닫 혀 있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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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도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장려상

이 정 훈 (울산 성안초)

나는 올해 74세가 된 할머니랑 사는 초등학생이다. 우리 할머니는 마산에 외삼촌이랑 살고 계시다가 2014년 2월부 터 엄마가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를 보살펴 주기 위해 울 산으로 이사를 오셨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엄마랑 아빠랑 살고 있 었고 내가 태어난 곳이 울산에 있는 병원이어서 나는 나의 고향을 누 가 물으면 ‘울산 보람병원’이라고 항상 남들에게 얘기하곤 했었는데,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면서 나랑 대화할 시간도 많아지고 늘 막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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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한잔을 드시면서 이런저런 말씀이 늘어가면서 나는 할머니의 고 향이 어디인지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내가 들을 때 너무나도 환상적 이였다. 공부도 안 해도 되고 매일 들로 산으로 소나 가축들과 어울려 지 내고 해가 지면 집에 들어와도 누구 하나 혼을 내거나 따로 찾아다 니신 적이 없다고 한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의 불만은 오직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조금 고픈 정도,, 나는 눈만 뜨면 학교를 가기 위해 먹기 싫은 밥을 먹어야 하고, 엄마의 잔소리와 시작하는 아침이 참 힘든데 학교에서도 오후까지 내가 좋아하는 태권도를 가기 전까지는 몇 시간 동안 선생님 말씀 듣 고 공부를 해야 하는 현실이 참 싫은데… 아, 참 좋은 것도 있긴 있 다. 친구들과 체육 시간에 맘껏 뛰놀고 10분씩 있는 나에게 꿀맛 같 은 시간이지 ㅋㅋ 할머니도 어릴 때는 나와 같은 꼬마였다는데, 할머니는 지금의 나 를 부러워하고 나는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부러워하는 이런 상황이 나 로서는 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할머니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큰 전쟁 을 겪은 얘기를 듣고는 나는 할머니가 부러운 마음이 싹 가셔 버렸다. 할머니의 고향은 평안도 땅이라는데 엄마랑 우리나라 지도를 펼 쳐놓고 예전에 할머니의 고향이 어디쯤인지 들은 적이 있다.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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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우리나라 지도에서 우리가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을 가르쳐 주시며 38선 얘기를 하셨다. 난 그때는 어려서 왜 이름이 38 선인지에 대한 궁금증만 애기했었는데 할머니의 고향이 버스나 택시 아니 비행기로도 못 가는 멀고 먼 곳이고, 전쟁이 일어나면서 버리 고 온 집에 대한 이야기며 할머니의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하실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했다. 잔소리쟁이 엄마라도 난 엄마랑 함께 살고 있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할머니의 아버지는 집을 나가 생사를 모르게 되었고 지금까지 집 을 나가신 날을 제삿날로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난 책으로만 그리 고 엄마의 얘기로만 듣던 전쟁이라는 것이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무서운 것이라 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예전에 독립기념관을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전쟁에 관한 사진전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엄마에게 난 “이런 그림은 누가 그리는 거 야”라고 물은 적이 있다. 무서운 그림들은 모두 전쟁그림이라고 생 각하며 난 자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분명 그림이 아니라 할머 니가 살았던 세상에 사진 이였음을 난 이제 알게 되었다. 우리 할머니는 전쟁으로 할머니의 아버지를 잃고 할머니의 엄마 는 동그란 대야에 생선을 넣어 파셨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생선 을 구울 때마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난다고도 말씀하신다. “할머 니의 엄마는 왜 그런 직업을 가졌어?” 라고 물으면 “전쟁으로 먹을 것도 없고 할머니 형제들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킨다고 그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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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다. 전쟁은 아마도 가족도 형제도 가난도 모든 것을 힘들게 하는 대개 큰 힘을 가진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 할머니는 매일 내게 말씀하신다. “우리 손자는 좋은 세상에 태어나 엄마아빠도 멋지고 호강한다. 그러니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 그런 말씀을 들으며 내 가 지금 이렇게 행복한 이유는 할머니 같은 전쟁을 치른 나이 많은 어른들이 지금 같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어나기도 싫고 공부하기도 싫은 내 마음이 할머니를 보면 한 번씩 미안해진다.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할머니에게 들은 그런 전쟁 같은 건 절 대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이다음에 크면 38선 너머에 있는 할머니의 고향에 할머니를 데려가고 싶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들도 산도 모두 구경 시켜 드리고 싶다. 그런데 걱정이다. 우리 할머니가 그때까지 건강하실지? 하느님한테 매일매일 기도해야겠다. “우리나라에는 절대 전쟁 같은 건 일어나지 말고 빨리 통일되어 북한에 있는 친구들과 우리 할머니 얘기를 하며 공부하게 해 주십 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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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통일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장려상

변 윤 지 (서울 신용산초)

어느 날 4교시 도덕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조용 히 시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도덕책을 펴세요. 오늘은 5단원을 배울 거예요. 바로 통일에 관한 단원이지요. 그러면 시작하기 전에 통일에 대해서 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모두 자신의 통일에 대한 생각 과 이유를 말해 보세요. 먼저 한 남자아이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이 남자아이를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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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가 일어나서 말했다. “저는 통일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된다면, 민주주의 국가가 될 것인지 공산주의 국가가 될 것인지도 정해야 하고, 남한 과 북한은 경제 차이가 크게 나기 때문에 경제가 기울어질 수도 있 습니다.” 남자아이의 말이 끝나자 또 한 여자아이가 손을 들었다. “저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되면 우리의 국토 가 넓어지고 북한과 힘을 합쳐 강대국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상봉 가족도 만나게 할 수 있습니다.” 여자아이가 말을 끝내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두가 잘했어요. 통일되면 좋은 점이 있겠지만 나쁜 점도 있겠 죠. 그러면 통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진정한 통일은 무엇일 까요?” 선생님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내가 5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그 뒤로 나는 통일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통일은 무엇일까? 통일은 필요한 것일까? 통일을 어떻게 해야 할 까? 무엇이 진정한 통일일까?……’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직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분단국가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남한과 북한으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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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어져 있다. 남한은 박근혜 대통령이 다스리고 있고, 북한은 김정 은이 다스리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강대국들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부터 시작해서 러시아, 일본, 중국…….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잘 지내 왔다. 그 래서 통일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오히려 이런 이유 로 통일을 하루아침 빨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북한에서 쳐들어올까 봐 걱정하는 것은 똑같다. 이런 불안함 을 없애는 방법이 통일이다.

통일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게 가장 큰 문제점이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군사를 준비해 북한으로 쳐들어간 후 북한을 점령한다. 2. 김정은을 죽인다. 3. 대화를 통해 해결한다.

누가 뭐래도 가장 좋은 방법은 3번이다. 가장 성공하기 쉬운 방법이다. 또한, 성공하면 누구나 행복하고 피해도 없고 기분도 좋다. 하지만 그래도 싸움을 택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에는 대화했 을 때와 안 했을 때를 상상해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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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화했을 때

드디어 통일되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이 나란히 건물에서 나오는 것이 방송되었다. 6·25 전쟁의 아픔은 씻 은 듯이 없어졌고 기쁨과 행복함만이 존재했다. 상봉 가족도 서로 만나 안고 울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는 행복만이 존재하였고, 모 두가 웃으며 지냈다.

2. 싸움했을 때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국민들은 무너져 버린 집을 보며 슬픔에 잠겼다. 기나긴 싸움이 끝나고 나라는 황폐해졌다. 바닥에는 시체와 죽기 직전인 사람들이 뒹굴고 있고 모두가 슬픔과 배고픔, 아픔 속에 서 헤매고 있다. 도시는 6·25 전쟁을 재현해 놓은 것처럼 변했다.

이 두 가지 장면을 생각했을 때 1번을 고르지 않는다는 것은 비상 식적이다. 도대체 누가 2번을 좋아할까? 싸움으로 애꿎은 목숨을 빼 앗아 가고 국민도 죽고 국토도 폐허가 되고……. 하지만 1번은 완전히 꿩 먹고 알 먹고 이다. 국민도 멀쩡하고 국 토도 넓어지고, 모두가 행복하고……. 진정한 통일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누구도 싸우지 않고 기쁜 것. 통일됐다 하더라도 국민에게 아픔 또는 상처를 준다면 통일을 안 하 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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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통일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통일을 하더라도 싸움으로 인해 국민들이 나라에 등을 돌린다면 그것을 통일, 즉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통일이 빨리 된다면 좋겠지만 그런 것은 하루아침에 짠! 하 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통일을 위해 우리는 준비하고 또 준비해 야 한다.

나는 이 글을 쓰며 더 많은 것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통일이 란 무엇이고, 어떻게 통일을 하고, 가장 중요한 진정한 통일이 무엇 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런 것들을 알지는 못한다. 나는 다만 어떤 일이든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되는 것만이 생기면 좋겠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자신이 원하는 일만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참을성과 준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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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의자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장려상

이 윤 진 (당진 원당초)

제사가 있는 날이면 모든 집안 식구들이 모여 청소하랴, 음식 장 만하랴 떠들썩하다. 엄마와 큰 엄마, 작은 엄마들은 음식을 만드시면서 부엌에서 음 식을 만드시면서 흐흐흐, 하하하 웃음이 끊이지 않고, 아빠와 큰 아 빠, 작은 아빠들은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시느라 하하하, 허허허 웃 음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둠이 깔린 마당에서 달리기도 하고 자 전거도 타면서 신나게 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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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시끌벅적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조용한 곳이 있다. 거실 끝에 있는 작은 문이 달린 방. 그 방은 아무도 관심도 없고, 문 을 두드리지도 않는다. 그 방은 연세가 백 살이신 증조할머니 방이 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움직임도 없는 그 조용한 방. 제사 준비를 마치고 모두 한자리에 모이자 그 방문이 열렸다. 허 리가 반 이상 구부러지고 머리가 하얀 증조할머니께서 흐느끼기 시 작하셨다. 영문도 모른 채 우리는 서로 쳐다보고 눈치만 보았다. “진정하세요. 어머님.” 할머니가 나직한 목소리로 증조할머니를 위로하셨다. 증조할머 니의 눈물에 모든 가족은 고개 숙인 채 숙연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 었다. “우리 아들이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이 좋은 것 먹지도 못 하고 보지도 못하고,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도 모른 채 세월만 흐 르고 있구나! 그때 그 빨갱이 놈들만 쳐들어오지 않았어도 우리 금쪽 같은 아들 잃어버리지 않았을 텐데.” 가여운 모습으로 절규하시다 지친 증조할머니를 어른들이 방으 로 모셔갔다. 나중에 엄마를 통해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6·25 전쟁 중에 큰할아버지는 아기셨는데 병이 나셔서 많이 편찮으셨다고 하신 다. 그래서 증조할머니께서 약을 사러 나오셨다가 집에 돌아가 보니 큰할아버지께서 없어졌다고 하신다. 온 동네를 다 뒤졌지만, 그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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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도 할아버지는 없으셨단다. 전쟁이 끝나고도 할머니는 미친 듯 이 할아버지를 찾으셨지만 결국 찾지 못하신 채 많은 병만 얻게 되 셨단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 찾으시려고 무던히 노력하셨지만 아 무 결과가 없었단다. 살아 계신지 돌아가신지도 모른 채 제사 지내는 그 부모의 맘이 어떨까? 자식을 잃어버리고 생사도 모른 채 어느덧 100살이 되신 증 조할머니의 고통은 생각만 해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또 부모를 잃어버린 채 전쟁 통에 혼자 외로움과 무서움에 시달렸 을 큰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난 잠시 엄마께서 교육을 받으시러 서울로 2박 3일 집을 비우셨 을 때도 무척 보고 싶고 힘들었는데 큰할아버지께서는 어떠셨을까? 평상시 관심도 없고 느껴지지도 않던 ‘전쟁’이란 단어가 역사책에 만 쓰여 있던 두 글자인 줄 알았는데 우리 집 거실에서 느낀 후 얼마 나 무섭고 끔찍한 단어란 걸 알게 되었다. 전 세계 유일하게 한민족이 분단된 채 이별의 아픔을 겪고 수많 은 전쟁고아와 이산가족을 만든 6·25 전쟁은 같은 민족끼리 서로 의 형과 아우를 향해 총칼을 겨눈 인류 역사에서 볼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이었다. 6·25 전쟁 같은 전쟁이 앞으로도 미래에도 절대로 일어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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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른들이 힘들게 지켜 오신 우 리나라, 대한민국을 더 사랑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 위 해 더욱더 노력하고 열심히 생활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증조할머니, 힘내세요. 그리고 어딘가 살아 계실 큰할아버지께 서도 힘내시고 꼭 두 분이 만나시길 바랄게요. 증조할머니가 매일 똑같은 자리에 앉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다리고 계세요. 얼른 돌 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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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내 짝 박수민 (서울 휘경여중)

우수

아주 특별한 우편배달부 강수현 (인천 관교여중)

우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진짜? 이소정 (울산 범서고)

장려

초우 김경환 (고양 고양예술고)

장려

분단의 슬픔 김바다 (대전 둔산중)

장려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돌아본 기억 전민성 (충남 금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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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부문

안보사랑 글짓기 중·고등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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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짝

안보사랑 글짓기 중 · 고등 부문 최우수상

박 수 민 (서울 휘경여중)

며칠 동안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미열이 나고 기분도 가라 앉았다. 마음만 벌써 봄맞이로 바빠,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 넘기고 얇게 입고 나온 탓에 점심도 잊은 채 책상 위에 엎드려 끙끙대고 있 었다. 어렴풋이 창밖으로 눈을 찌를 듯 햇볕이 들어오고 교정에 있는 나무들이 언제 그렇게 파릇해졌는지 교실 밖 세상은 봄 천지였다. 꿈 을 꾸는 듯 그 풍경 앞으로 희미한 그림자가 들어오더니 내 옆에 앉 았다. 모든 게 귀찮다는 듯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깜빡 잠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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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나에게 그 불완전한 형상이 말을 걸었다. “야야, 어카니 선생님 오신 다야…” 말을 걸며 베고 있던 팔을 흔 들어 깨웠다. 놀라 정신없이 일어나 몸을 추스르고 수업을 어찌 받았는지도 모 르게 종례시간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의 종례는 생각보다 길었고, 우 리 반에 새로 온 전학생이 내 짝이었다. 소개하는 내내 중3이 되어 오고야 만 사춘기 반항을 소심하게 하듯 인피니트 노래를 흥얼거리 며 끝나길 바랐다. 소개가 끝나고, 비로소 내 짝의 반쪽 얼굴을 보 았다. 핼쑥한 얼굴, 쪽 찢어질 듯 양쪽으로 올라간 두 눈, 굳게 담은 입술,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 옷매무새… 그 전학생은 잠시 멍해 있는 나에게 반쪽 얼굴을 마저 돌려주었 다. 영원히 닫혀있을 것만 같던 그 입술이 열리며 살짝 눈인사를 나 에게 건넸다. 나는 답례하듯이 어색하게 웃는 둥 마는 둥 얼버무리 고 교실을 나와 담임선생님께 받은 호출 때문에 교무실로 갔다. 선 생님은 나에게 그 전학생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고향은 북한이고, 배고프고 힘들어서 가족 모두 탈북을 시도했지 만, 그 과정을 겪으며 많이 힘들었으니 친구들 모두 도와주라고 하셨 다. 그 당부의 말씀은 꿈을 꾸는 듯 아득히,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귓 가를 스쳐 가버렸다. 벚꽃이 봄바람에 눈처럼 흩날리는 교정을 뒤로 하고 친구들과 정문 앞 떡볶이집에 들러, 시끌벅적 떠들어 대며 먹 지 못한 점심 대신 무엇으로 채울지 주문을 하는 내 눈에 그 전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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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쪽을 보며 서 있었다. 나에게 그 전학생은 단지 탈북자 이방인 이었고 못사는 제 나라를 등진 의리 없는 아이일 뿐이었다. 더구나 십 대들의 옷차림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 왠지 정이 가지 않고 생소했다. 이런 말할 수 없는 묘한 경계심을 갖은 눈으로 낯선 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다. 몇 분 아니 몇 초가 지났을까, 고맙게도 음식을 나르는 분주한 주인아주머니 덕분에 언제 그 전학생을 보았 는지도 잊고 우리 모두는 빠른 젓가락질로 허기를 채웠다. 그 짧고 어색한 마주침으로 인해 나는 오랫동안 선생님의 당부도 잊은 채 아 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우리 반 전체가 단합대회를 하 게 되었다. 단합대회는 학기 초에 서로 서먹한 관계를 개선하고 반 의 화합을 하자는 취지로 생긴 행사이다. 그러다보니 회장인 내가 조 편성을 해야 했고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전학생은 어쩔 도리 없 이 우리 조가 되었다. 조원들끼리 음식재료를 서로 분담하여 맛있게 만들어 먹고 조별 대항 게임도해야 하는 판이라 조원들은 서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불만 섞인 눈빛만 서로들 주고받으며 각자 가지고 올 재료를 분담하 였다. 4월의 초입에 들어서며 교정에는 봄기운이 가득하였고 우리 교복치마 사이로도 봄바람이 불어오던 그 단합대회 날이 되었다. 방 과 후 등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곳에 자리를 잡고 조원들 모두 어색함 으로 음식하기를 시작했다. 그 전학생은 말없이 시키는 잡무를 해나갔고 서먹하던 조원들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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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도 둘러 앉아 봄 냄새를 반찬 삼아 수다를 떨며 저녁을 먹고 있었 다. 하지만, 그 전학생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우리 중 그 누구도 그 아이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전체 게임 시간이 되어 분위기가 고조될 즈음, 담임선생님이 꼬 리물기게임을 하자고 제안을 하셨고 어쩔 수 없이 난 또 회장이기 때 문에 그 전학생의 꼬리가 되어 허리춤을 잡아야만 했다. 다른 조에 잡히기는 싫었지만, 슬그머니 전학생의 허리춤을 놓으려는 그 순간 힘이 부족해 놓는 줄 알고 그 전학생이 내 손을 잡아 자기 허리춤에 팔을 걸어 주었다. 그 전학생과 나는 봄 이슬을 맞은 듯 땀을 흘리며 서로 꽉 끌어안다시피 하며 열심히 게임에 몰두했다. 속 좁았던 나의 이제까지의 행동에 대한 대가라도 치르는 듯 전학생의 허리춤을 꽉 잡고 언제 그렇게 어색했느냐는 듯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헤어지 는 시간이 되어 우리 반 모두는 선생님을 필두로 둥글게 모여 허심탄 회하게 서로를 다독이는 마음 밭 가꾸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그동안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지켜보시며 안타까우셨던 우리 모두의 치졸함을 꾸짖음 대신 그 전학생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질문하셨는지도 모른다. 그 질문은 그동안 몇 명의 친구들과 친해졌는지, 오늘 처음으로 한 단합대회가 어땠냐는 질문이었다. 선생님은 물어보시며 웃으셨 지만 나는 왠지 둥그렇게 앉아 있는 우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꾸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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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 둘러보시는 것만 같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그 전학생은 처 음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고향은 중국과 국경을 맞닿고 있는 함경북도 산골이다.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언니와 남동생 이렇게 다섯 식구가 살았고 출신 성 분이 낮은 그 아이는 물론 가족 모두는 힘든 노동을 해야만 겨우 목 에 풀칠할 수 있었다. 혹독한 겨울을 문풍지와 낡은 이불로 맞서 싸 우듯 힘겹게 견뎌내야만 하다 보니 아버지는 불을 지필 땔감과 먹을 것을 구하러 산중으로 가야 했다. 눈이 쌓인 비탈길을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척추를 심하게 다쳐 자리에 눕게 되었고, 몸 여기 저기 다친 상처는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이듬해 봄을 넘기지 못하 고 돌아가셨다.

집안의 버팀목이 사라지고 남겨진 가족들은 더 이상 고통과 굶 주림을 견딜 수 없어 험난한 중국과의 국경선을 넘기로 결심하게 되 었다. 돈이 없다 보니 어떻게 탈북을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국경선 근 처에 살다 보니 강이 얼어붙는 겨울이 그나마 탈북하기 쉽다고 귀동 냥으로 들었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해 겨울, 바위처럼 단단히 얼어붙은 강을 살고 싶다는 단 하나의 목표 로 이를 악물고 건너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와 남동생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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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되었지만, 그 전학생은 언니와 오던 중 언니를 잃고 1년이 넘어 서야 우리 정부의 도움으로 어머니와 남동생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기나긴 탈북의 힘겨운 여정과 언니와 헤어진 아픔을 떨리는 입 술로 이어가는 그 아이의 이야기에 우리 반 모두는 그동안의 미안함 과 같은 나이에 겪은 믿겨 지지 않는 사실로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 전학생은 오늘처럼 아무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여유로운 저녁 시 간에 친구들과 얘기하며 보내는 이 시간이 가장 좋았고, 언니를 만 난다면 이런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꼭 같이 나누고 싶다고 하였다. 친구들과 아직 친해지지 못했지만, 오늘부터 다가가도록 노력하 겠다고 우리 반 모두를 감싸 주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 도 하고 자신을 받아준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다고 하였 다. 어렵게 큰 다짐이라도 하듯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그 아이의 얼 굴을 처음으로 자세히 마주 대하게 되었다. 많이 힘들었을 내 짝이 안쓰러워 친구가 되어 곁에서 지켜주겠노라고 무언의 눈빛을 가득 쏟아 주었다. 내 짝은 환한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밑에 체인 돌들도 소중하고 아파트 진입로에서 있 는 목련도 새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현관을 들어서면서 흘러나오 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 너머로 엄마가 “왔니?”하며 나오는데 참 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의아해하시는 엄마에게 이 눈물의 의미를 설 명하지 못했고 중3이 되어 지속된 툴툴대던 나 자신의 이기심과 사 춘기라는 명목 하에 세상에 대한 반항과 편협함을 후회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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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는 든든해 보이는 아빠와 포근해 보이는 엄마 사이에 누워 행복함을 마음껏 느끼며 그 눈물의 의미를 말씀드릴 수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나를 한껏 안아 다독여 주었다. 사춘기를 겪고, 매 시험을 치르고 현장학습을 가고 친구들과 아 무 걱정 없이 추억을 만들며 나 자신의 미래를 고민할 때 나와 같은 나이의 북한 아이들은 굶주림과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이 일상의 행복이 가슴 밑바닥까지 소중하고 감사했다. 나라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고 이 나라를 지켜내는 것이 일부 경 찰이나 군인, 대통령과 각계 정치인들인 어른들 만에 것이 아니라 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게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온 그 전학생, 내 짝이 너무 대견해 보였고 그날 이후로 내 일상은 조금씩 변했다. 나라의 힘이 국민들 모두를 아우르지 못해 지금도 목숨을 건 탈북자들이 다른 나라의 이 방인으로 떠돌아다녀도 지켜줄 수 없어 죽거나 다시 북송되는 현실 이다. 내가 중학교 들어서면서 사춘기를 빌미 삼아 했던 일련의 모 든 행동과 마음의 게으름은 이 나라가 굳건히 지켜주기 때문이라는 놀라운 사실과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보이지 않게 지켜주는 나라의 힘을 느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나 는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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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우편배달부 안보사랑 글짓기 중 · 고등 부문 우수상

강 수 현 (인천 관교여중)

집배원은 길을 나섰다. 아직 채 동이 트지도 않은 어두운 새벽이 었다. 통일 3년, 그동안 막고 있던 봇물이 터지듯 수많은 사건이 일 어났고, 수많은 직업이 새로 태어나고 사라졌다. 통일우체부도 그 중 하나였다. 통일 직후 북부의 행정 혼란으로 남, 북 간 통행이 어 려워지자 대안으로 내세운 ‘통일 우체국’은 3년이 지난 지금 남은 이 산가족을 찾아주는 일과 그들 간의 우편배달을 병행하고 있었다. 오 늘은 그가 이 일을 시작한 지 꼭 두 달이 되는 날이다. 집배원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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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엔 도시락을 들고 배달할 우편이 빼곡히 담긴 가방을 짜증스럽게 고쳐 맸다. 동료 중 이산가족이 안타까워 전업까지 했다는 사람들 이 간혹 있었지만, 그가 굳이 통일우체부가 되길 선택한 이유는 쏠 쏠한 보수 때문이었다. 집배원은 차에 올라탔다. 내비게이션에 위치를 입력하는 그의 손 길이 바쁘다. 오늘 처음 배달할 곳은 면 소재지에서도 한참을 들어 가야 하는 시골 마을이었다. 우편의 보내는 사람 란에 언뜻 ‘평안북 도’란 글자가 눈에 띄었다. 첫 근무를 시작할 적에 그것이 얼마나 신 기했던지 새삼 통일이 됐음을 실감했던 게 기억난다. 그는 배달하는 김에 새벽 공기를 맡으며 비탈길을 산책할 심산이 었다. 그러면서 한가롭게 먹는 도시락은 훌륭한 아침 식사다. 라디 오의 볼륨을 올리고 목적지로 향했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북한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흥얼거리는 그의 옆자리에 편지를 잔뜩 머금은 가방이 입을 꾹 다문 채 놓여있었다. 도착한 곳은 마당이 딸린 자그마한 가정집이었다. 그는 대문 앞 에서 손목에 감은 시계와 대문을 번갈아 보며 고민하는 것 같더니 곧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편지 왔습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더욱 센 손길로 문을 때렸다. 새들도 깨지 않아 고요한 새벽을 와장창 깨는 문소리에 놀란 집주인이 방 안의 불 을 켰다. 집배원은 환해진 창문을 보며 전해줄 우편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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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성이 대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 다. 집배원은 아침잠을 깨워 죄송한 마음을 담아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하다가 당황한 기색을 해 보였다. 남성의 눈은 초점이 없어 그 가 앞을 보지 못함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씨?” 그제야 집배원은 소리 내어 인사했다. 남자도 얼결에 고개를 살 짝 숙이고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눈먼 자신 앞으 로 올 우편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테다. “그, 저는 통일 우체국에서 왔습니다.” “……” “아버님께서 보내신 거라는데요.” 집배원이 우편을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집배원의 말을 들은 남자 의 표정이 눈에 띄게 상기되었다. “내가 눈이 불편해서 그런데 대신 읽어줄 수는 없겠소?” 남자가 우편을 손에 쥐어주고 발길을 돌리려는 집배원을 불러 세 웠다. 남자는 대답을 기다리며 우편을 만지작댔다. 그의 표정에 편 지를 읽고 싶어 안달 난 마음이 엿보였다. 집배원은 고민하다가 마 지못해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편지를 뜯자 손바닥만 한 종이 두 장이 나왔다. 그중 한 장은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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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부터 지녀왔을지 모를 만큼 낡아 있었다. 집배원은 줄곧 읽히기를 기다려왔을 낡은 편지부터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아들아, 핏덩어리였던 너와 네 어미를 두고 생이별을 해야 했던 그 날이 아직도 아른거린다. 그래, 지금쯤 열 살이 넘었겠구나. 여기도 조금 안정이 되어가는 추세다. 들리는 말에 아래쪽은 살기가 더 열악하다 하 더구나. 그때 어떻게든 너와 네 어미를 부여잡고 이쪽으로 왔어야 하는 데, 아직도 후회를 금할 수가 없다. 영 불안하던 정세가 나아지고는 있지 만, 제작 년까지만 해도 간혹 들리던 휴전이 곧 끝날 거라는 얘기는 온데 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어설프게 끝난 싸움이 십 년이나 이어져 오니 사람들도 이제는 희망을 버린 모양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한 민족이 허 리가 뚝 끊긴 채로는 더는 버틸 수가 없다. 피가 끌어당기는 거란다. 내 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이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인 것처럼 아마 분명히 진 정한 평화가 올 거다. 네가 뛰어다니고 재잘대는 말소리가 무척이나 듣 고 싶다. 곧 그 날이 올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단다.

집배원은 낡은 종이를 뒤로 넘겼다. 앞 장과 같은 글씨체가 빼곡 했다. 육십 년의 세월이 그 사이에 존재할 터였다. 그는 목을 가다듬 고 다른 편지를 읽었다.

통일이란다. 통일이란다, 아들아. 내 명이 버텨준 것이 감사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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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맡으시는 통일행정원이 곧 모든 서류가 정리되어 직접 너를 찾 아갈 날이 머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평양 같은 데는 일찌감치 정리가 마 무리되었다던데, 아무래도 이곳이 지방이라 속도가 더딘가 보다. 기다리 라는 말에 얌전히 기다릴 수가 없어 이렇게 편지를 부친다. 혹시 내가 조 금 남은 서류를 정리하는 동안에 눈을 감으면 어쩌나 하는 주책없는 노 파심도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구나. 통일 우체국에 신청을 해 네 주소를 받아든 날에는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네 주소를 찾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기에 그 기쁨이 더 배가 되었 다. 네게 편지를 부칠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던지! 통일되기 전에는 온통 간신배들만 있다며 떠들어대던 남한사람들도 만 나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더구나. 그것보다는 민주주의라는 게 낯설다. 육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열등한 것이라고 귓전을 때리며 방송하던 것 이 갑자기 삶에 뛰어들어오니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다. 더구나 통일 되고 방송국도 새로 생겨나면서 집에 그림 상자를 들였는데, 그 민주주 의에 대해 옹호적인 분위기라서 한 번 더 놀랐다. 당황스러운 것은 나 하 나뿐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대부분 사람이 그런 모양이다. 아이들은 볼 게 많아진 그림 상자 앞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있더구나. 이제는 너도 주름진 손을 가졌을지 모르겠다. 지난 세월이 세월이니만 큼 그간 나를 원망했을지도 모르겠구나. 용서해라. 나는 내 생이 끝나기 전에 네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온몸이 저릿해질 만큼 안도가 된 다. 그간 행여 네가 사고를 당하지는 않았나,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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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나? 잠을 설친 날이 여러 날이다. 그런데 네가 무사히 있다니 그것 만으로 네게 감사하다. 통일된 후로 생전 쥐어보지도 못한 액수의 돈을 처음 받아봤다. 앞에서 말했던 통일행정원이 챙겨준 것인데, 젊은 아가씨가 싹싹한 것이 여간 마음에 드는 게 아니구나. 여하튼 요즘 남, 북한의 물가가 얼마나 차이가 났었는지를 몸소 느끼는 중이다. 아래쪽에서 연신 올려보내는 대형차에 먹을거리가 잔뜩 실려있어 끼니 걱정도 없다. 그러니 내 걱정은 미뤄두고 너도 채비하려무나. 이제 한반도를 실컷 누 빌 수 있게 되면 먼저 이쪽으로 와라. 이곳의 산과 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 보여주고 싶구나. 나는 아직도 가슴이 벅차다. 너를 볼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아버지가.

“주게.” 남자가 목이 멘 목소리로 집배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집배원은 편지를 접어 봉투 안에 넣었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남자의 손 에 우편봉투를 쥐여주었다. 정수리에 흰머리가 그득한 남자는 고개 를 떨어뜨렸다. 그가 평생 그리워하던 아버지였다. 자신의 아이를 낳았을 때, 결혼했을 때, 월남전에서 두 눈을 잃었을 때까지 평생을 그리워하던 아버지였다. 이제야 아버지의 두 뺨을 만져볼 수 있단 것에 가슴이 벅차면서도 그의 아버지가 들떠 말하던 산과 들을 볼 수 없음에 숨이 턱 막혀 서러웠다. 그는 손으로 두 눈을 매만졌다.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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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너무나도 앞이 보고 싶었다. 집배원은 인사를 전하고 마당을 나섰다. 문득 돌아본 뒤편에서 남자가 바람에 흩어질까 두려운 것처럼 편지를 주름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집배원은 아직 전해야 할 우편이 가득한 가방을 어깨 에 들쳐 멨다. 그는 가방 끈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어깨에 닿는 끈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루를 시작할 채비를 끝낸 새들이 바지런하게 짹짹대며 이리저 리 자리를 옮겼다. 집배원은 새벽의 한적한 산책길에 열려 했던 도 시락통을 그대로 들고 서둘러 차로 향했다. 그의 바빠진 마음만큼이 나 ‘통일 우체국’이라 쓰인 하얀 차는 금세 비탈길을 빠져나갔다. 하 얀 자동차 뒤로 어느새 환하게 동이 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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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통일’. 진짜? (통일 후 이점과 이전, 이후의 노력은 무엇인가)

안보사랑 글짓기 중 · 고등 부문 우수상

이 소 정 (울산 범서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통일 관련 행사가 있을 때면 흔히 떠오르는 말, 자주 불리는 노래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가? 언젠가부터 우리는 통일에 관심이 멀어진 듯하다. 아니, 통일에 대 한 생각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통일을 위한 노력은 현저히 줄었 고 심지어 일부에서는 대북지원이나 교류를 주장하는 이들을 종북, 빨갱이로 몰아가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통일을 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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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경제적 부담으로 여기는 다수의 사람과 정치적 수단으로만 이용 하는 정치가들. 이러한 현 상황에서 평화통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 하다. 그러나 통일은 언젠가는 이루어져야 할 숙제이며 미래를 내다 봤을 때 한반도에 수많은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렇 다면 통일의 긍정적 측면과 통일을 위해 진행되어야 할 노력에는 어 떤 것이 있으며 통일 이후에 있을 한반도의 변화에는 어떻게 대처해 야 할 것인가?

통일 이후 한반도는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되는데 그중 하나로는 국 방비의 감소를 꼽을 수 있다. 2012년, 한국의 국방비는 국내총생산 의 2.59%인 32조 9576억 원이다. 그러나 통일부 산하 국책연구기관 인 통일연구원의 조한범 선임연구원의 조사로는 통일 이후 적정국방 비는 국내총생산(GDP)의 1.2~1.5%이며, 2030년 통일이 되면 향 후 20년간 국방비가 매년 20조 원씩 20년간 400조 원의 절감 효과를 볼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수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나 통일 이후 독일의 국방비가 GDP 대비 2%대에서 1%대로 축소된 것을 감안하 면 어느 정도 신뢰할만한 지표임은 분명하다. 국방비의 감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물론이고, 통일이후 찾아올 한반도 평화에 따 라 모병제의 시행도 기대해볼 수 있다. 만에 하나 국방비가 감소하 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제 터질지 모를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사실만으로 국가위상은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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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수많은 일자리 창출, 북한 내에 매장된 자원의 확보와 투 자, 대륙과 연결된 반도의 이점을 활용함으로써 엄청난 경제적 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지하자원의 잠재가치는 남한의 21배로 현재 중국에 헐값으로 팔리고 있는 북한의 지하자원이 남한 의 기술력과 합쳐진다면 국가경쟁력은 상당히 증가할 수 있다. 그리 고 통일 후 중국, 러시아를 잇는 시베리아 철도가 연결되면 시간과 비용을 크게 단축시켜 무역, 관광산업의 활성화를 가져올 것이다.

통일은 문화산업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다. 북한 내 특색 있는 문화상품의 개발은 물론 60년간 인적이 끊긴 비무장지대를 이용한 생태관광과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북 한에 많이 남아있는 순우리말도 역시 한국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 고 알리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또한, 통일 후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 왜곡 등 대외적 문 제에 대해 더욱 더 강력한 요구를 할 수 있고 그동안 분단의 한계로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던 간도 영토 및 문화재의 문제도 논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통일이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경우 남한은 경제 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고 한반도의 사회적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한 통일을 위해 철저하고 체 계적인 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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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남북한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해 들여야 할 막대한 예 산을 고려하여 현재 우리나라는 미리 이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현 재 적용하고 있는 부가가치세 일부를 통일세로 책정하여 실질적 추 가부담은 없되 예산이 모일 수 있도록 한다거나 매년 국가 예산의 일 부를 통일비로 두어 지출 없이 저금할 수도 있다. 통일기금마련을 위한 기관을 국가적으로 운영하여 기부금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의 하나다. 통일비 마련을 위한 방법은 점차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적 용해야 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통일에 대한 반감을 사지 않 도록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투명하게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을 위한 대비는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도 필요하다. 대북지 원을 중단하기보다는 통일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철저히 검토하고, 다방면으로 서서히 시행하여 남북교류의 물꼬를 터야 한 다. 또한 북한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사회, 문화적 차이를 줄이 고 통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줄이기 위한 교육과 프로그램의 마련 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남북한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통일이 되고 나면 한반도에는 큰 변 화가 일 것이다. 철저한 대비를 한다고 하더라도 분명 수많은 난관 과 사회적 혼란이 존재할 것이다. 이는 우리보다 먼저 통일을 이루 어 낸 다른 국가의 사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남북으로 분단되었 다가 평화적 협상을 통해 통일을 이룩해낸 예맨은 경제위기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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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차이로 인한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내전이 발생하였다. 즉, 통일 후에도 지속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완전한 통일을 이루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이후 발생할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러 부분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

통일 이후 구체적인 정치제도, 대표의 선출 등은 논외로 두고 사 회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급격한 남하 이주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에 시행될 개발과 산업육성정책을 공개하고 일시적인 유 예기간을 두어 이에 대비하여야 한다. 또한, 사회적 차별과 문화적 차이에 따른 불편함이 발생할 수 있 으므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이를 해결해야 한다. 교과과정에 한반 도의 통일 과정과 남북한의 이해와 관련된 과목을 신설하고 국어, 역사과목에서도 남한, 북한의 언어와 역사를 모두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통일이 되면 남북한 교류, 정책,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서의 전문가와 행정기관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대학 및 대학원에 관련 과를 신설하여 체계적인 국가인력 양성에 힘쓰고 깊이 있는 연 구를 통해 효율적, 전문적인 제도 및 기관을 구축해야 한다. 통일 이후 온전한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다방면으로의 투 자와 노력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투자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니라 큰 독에 물을 채우는 과정임을 명심하고 점진적으로 시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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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년간 민족공동체로서 같은 역사와 언어 등을 공유하던 우리 가 서로 총을 겨누고 적이 된 지도 벌써 60년이 흘렀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도 다른, 한민족이 아니라 두 개의 국가가 되어 버렸다는 것은 큰 착각일지도 모른다. 다르다고, 늦었다고 말하기 전에 그동안 우 리는 통일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를 먼저 되돌아보자. 정권이 바뀜에 따라 쉽게 흔들렸던 대북정책, 통일에 무관심했던 다 수가 오랜 시간 남북을 가로막고 있는 38선은 아니었을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 말에 진심을 담기 위해 우리의 관심이, 한반도를 뒤 덮을 통일의 염원이 간절히 필요하다. 통일을 위한 오늘의 작은 노력 이 내일의 큰 목표를 이룩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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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우 1)

안보사랑 글짓기 중 · 고등 부문 장려상

김 경 환 (고양 고양예술고)

강으로 가는 꿈을 자주 꾸는구나. 돌아가시기 전 할아버지가 나에게 해준 말이었다. 무슨 강이요? 물으면 할아버지는 이름은 모른다고, 아주 넓고 긴 강이고 푸른 물결 이 반짝이는데 뱃사공과 자신만 나룻배 위에 타고 있다 말씀하셨다. 그때는 할아버지가 꾸는 꿈을 이해하지 못했다. 할아버지 무릎 위

1) 장사를 지낸 후 첫 번째 지내는 제사. 혼령을 위안하기 위한 제사로, 장사 당일을 넘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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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올라앉아 손톱이 하나씩 잘려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평범한 일상 이 그 날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것도 전혀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우날 밤에는 비가 쏟아졌다. 타닥타닥 떨어지는 빗소리를 따 라 조문객들의 발걸음 소리가 붐볐다. 나는 아침에 다녀온 무덤 터 를 떠올리며 그 안으로 내려지던 할아버지의 관을 생각했다. 염포에 묶여 말이 없던 할아버지. 수의. 오동나무 관. 빗줄기는 점점 거세 져 마당에 물웅덩이를 만들고, 나는 어른들이 모인 곳 옆방에서 조 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늙어 돌아가셔서 호상이지.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문 너머에서 이모부가 아버지를 위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에 귀를 갖다 대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 다. 장례식장을 계약하고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리는 것은 엄마에게 맡겨두고 혼자서 산으로, 호수로, 시골집으로……. 이곳저곳을 쉬 지 않고 돌아다녔다. 할아버지를 장례식장에 모시던 날 아버지는 여 행에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갔던 곳을 다녀왔어” 나직이 말했다. 그곳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정리했을까. 이모부 의 말에 아버지는 어색하게나마 웃으려고 노력하는 투로 말했다. “그렇죠, 뭐. 좋은 곳이면 살아생전 바라신 그 강으로 가셨으면 좋겠네요.” “강? 고향에 강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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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이모부에 대화에서 나는 할아버지가 내게 해주셨던 말 을 떠올렸다. 강. 그래, 그 강은 무엇이었을까. 밤마다 할아버지의 잠 속에 흘렀다는 크고 넓은 강……. 문득 강 얘기를 하시던 할아 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주 그리운 곳을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 고, 다신 찾아갈 수 없는 곳을 떠올리는 것 같기도 한 아득한 표정 이었다.

“두만강요. 아버지 태어난 곳이 함경도라 그랬거든요.” 나는 문지방 뒤에서 대화를 엿들으며 조용히 숨죽였다. 할아버지 가 북한 출신이었다는 것은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줄곧 강원도 토 박이인 줄로만 알았고 내 앞에선 고향 얘기는 안 하시던 할아버지였 다. 내 기억 속의 북한은 텔레비전 화면 너머나 인터넷 기사에서 보 았던 이산가족 상봉 이야기나 금강산 관광, 탈주민, 억압된 사회 분 위기가 전부였다. 물론 할아버지가 지금의 북한과 같은 사회를 산 것 은 아니었겠지만. 할아버지가 이북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생경했다.

“제가 어릴 적부터 자주 말씀하셨어요. 당신 아기 때 아버지 손 붙잡고 매일 그 강을 찾아갔고, 나이 조금 먹어서는 그 강에서 멱 감 고, 술 마시고, 밤새우고. 어머니도 그곳에서 만나시고, 가끔 나룻 배를 타고 강을 떠다니셨다고. 전쟁 때 피난 와서 경상도에 자리 잡 으셨으면서도 저 태어나고 고향 그립다고 강원도까지 옮겨가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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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강 가까이 가고 싶다며……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더 이상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가 울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빗소리는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조문객들도 하 나둘씩 차를 타고 떠나가는 중이었다.

삼팔선 너머, 우리나라 영토의 끝. 그 길고 긴 강. 할아버지는 평 생을 그 강을 건너기 위해 보낸 것일까. 밤마다 꿈속에서라도 강을 바라보며, 뱃사공과 함께 강을 건너기만을 기다리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고향을 둔다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아픔과 그리움을 더 깊이 알고 싶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달빛이 구름 뒤에 머무르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할아버지에겐 저 빛이 고향 강의 물빛 같은 것 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흐르는 그 푸른 강. 언젠가 그곳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 강 에 손을 담가보고 싶었다. 삼팔선이 지워지고 모두 편안한 잠을 자 는 날이 온다면. 지금의 북한은 할아버지의 고향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통일이 된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 을까. 내가 만날 강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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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의 얼굴을, 고향을. 아버지도 분명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 것이 었다. 옆방에선 이제 더 이상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집을 떠나는 사람들의 발소리, 차 시동 거는 소리, 배웅하는 소 리. 창밖이 소란스러웠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비가 그치자 물 냄새가 짙었다. 아득 하게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할아버지가 강 위에서 나에게 손 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나도 이 강을 건널 것이라고,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나는 예감 했다. 초우의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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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슬픔 안보사랑 글짓기 중 · 고등 부문 장려상

김 바 다 (대전 둔산중)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새벽 갑작스럽게 일어나게 된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와 더불어 크나 큰 피해를 주었다. 다행히 우리는 미군의 도움을 받게 되어 전쟁은 휴전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에는 38선이 그어지게 되면서 분단국가가 되었다. 남과 북이 갈라진 지 벌써 60년이 넘었다. 그동안 남한과 북한의 생활은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의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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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공휴일이라고 하고 학교이름에도 김일성, 김정일 교과서 이름 에도 김일성, 김정일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또한, 한민족임 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쓰는 언어가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한민족인 데 다른 언어를 쓴다는 사실이 조금 안타까웠다. 북한 사람들은 북 한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탈북한다고 하는데 탈북을 할 때는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한다. 만약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죽거나 아니면 수용 소로 끌려가 그곳에서 사람대접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운 좋게도 탈 북에 성공해서 남한으로 넘어오게 된다고 하더라도 서로 사용하던 언어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을뿐더러 탈북자라고 해서 무시를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탈북자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더 이 상 탈북을 하다가 죽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렇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일이다. 얼마 전 이산가족들 이 서로 만나서 우는 장면을 인터넷 뉴스 기사로 보게 되었다. 가족 끼리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안쓰러웠다. 매년 상 봉하는 이산가족의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6·25 전쟁 때 헤어 진 가족들이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족들 곁으로 돌려보내 드리고 싶다. 같은 피로 이루어져 있는 가족이지만 몇십 년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 아 있다. 헤어진 가족들은 통일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자 신의 가족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다가 죽게 되었는지 죽어 있는지 살아있는지 생사도 모르고 있다. 매번 이산가족들은 서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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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때 “이번이 마지막 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항상 할 것 같았 다. 하지만 통일을 하게 된다면 이산가족들이 상봉하여 매일매일 옆 에서 같이 지낼 수 있다.

우리나라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여 국방비에 지 출하는 금액은 엄청나다. 하지만 만약 북한과 통일한다면 국방비에 지출되는 돈을 절약하여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사용하거나 사회단체에 기부하는 등 좋은 일에 사용될 수 있다. 북한의 군사력 이 남한의 군사력보다 좀 더 센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과 남한의 군 사력을 합쳐 더 센 군사력을 만들 수 있다. 북한의 넓은 땅을 개발시 켜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 있다. 남한의 자본과 북한의 노동력을 합 쳐서 일하게 된다면 잘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북한의 땅에서 나 오는 자원을 합쳐 더 많은 자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북한과 남한 이 통일하게 된다면 우리는 북한을 통해 러시아 여행도 기차로 여행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비행기로 가는 것보다 비용이 절약되고 주변의 풍경도 감상하며 여행할 수 있게 된다. 북한에는 백두산이나 금강산, 소백산 등이 있다. 만약 통일되어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여 행이나 등산을 오면 이곳은 관광 명소가 될 것이다. 북한과 통일을 하게 되면 이러한 많은 장점이 있다.

하지만 문제점도 생기게 된다. 통일하기 위해선 서로의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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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하고 이해해야 하지만 북한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국가와 남한 이 추구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의견은 계속해서 나뉘어 서로의 싸움 이 될 수도 있다. 아까도 얼핏 말했지만, 남한과 북한은 서로 사용 하는 언어가 약간씩 다르므로 어떤 말을 해도 서로 못 알아듣는 경우 가 많을 것이다. 흔히 남한에서는 아이스크림이라고 하지만 북한에 서는 ‘얼음보숭이’라고 한다. 도시락도 ‘곽밥’이라고 하며 골키퍼를 ‘문지기’라고 한다. 이렇듯 우리가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조금씩 다 르므로 의사소통이 힘들 수 있다. 북한 아이가 남한으로 또는 남한 아이가 북한으로 가게 될 경우 아이들 사이에 경계심 때문에 친구를 사귀는 것이 힘들 것이다. 또한, 북한에 지원해주어야 하는 것들을 지원해주면 우리나라의 예산이 부족해질 수도 있다. 60년간 분단되어 살아온 국민들이 하루 아침에 통일되면 서로 적응하기가 힘들 것이다. 북한 대다수의 직업 은 군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통일을 하게 된다면 군인이라는 직업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다. 그렇게 되면 실업자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또 대통령 선출 문제도 다르다. 남한 같은 경우 5년마다 투 표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지만, 북한은 대로 물려주어 대통령을 하기 때문에 통일이 되면 누가 대통령이 될지에 대한 의견이 둘로 나 뉘게 될 것이다. 국기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은 ‘태극기’를 사용하지만 북한은 우리와는 달리 ‘공화국 국기’라는 북한 의 국기를 사용한다. 이렇듯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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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통일을 꼭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다. 영화 ‘코리아’도 1991년 제41회 세계선수권 대회 에서 사상 최초로 결성되었던 남북 단일팀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 된 영화이다. 우리는 영화 ‘코리아’를 통하여 많은 감동과 교훈을 얻 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만약 우리가 통일하게 된다면 북 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에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이 해하며 배려하는 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처럼 진짜 남한과 북한이 통일하게 된다면 혼자서는 해낼 수 없던 일들이 함께하면 이 루어질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항상 말로만 “통일을 해야 한다.”라고 하지만 정작 이를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몇 없다. 매일 말로만 하지 말고 우리 가 먼저 손 내밀어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진정으로 통일을 위한 다면 통일을 위하여 많이 노력해야 한다. 물론 지금 우리 나이에 통 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서로서로 배 려하며 60년간 지속하였던 휴전을 끝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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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돌아 본 기억 안보사랑 글짓기 중 · 고등 부문 장려상

전 민 성 (충남 금산고)

작년 중학교 여름방학 때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다녀왔다. 금산 문화원에서 가족들과 함께 견학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 다. 난 여행 가방, 카메라, 필기구, 먹을 것까지 준비했다. 금산을 떠날 때 날씨가 좋았지만,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빗방울이 세차게 차 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도착하면 비가 그치겠지 하는 예감으 로 마냥 기분이 들떠 신 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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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여 처음 들어간 곳은 6·25 역사관이다. 6·25 전쟁이 어 떻게 일어났는지, 전쟁의 참혹한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이었다. 포로수용소는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 난 후 사로잡은 북한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당시로써는 육지와 의 교통수단이 배밖에 없었던 섬에 만들었다 한다. 그곳에는 인민군 포로 15만 명 중 공군 포로 2만여 명을 철조망 등으로 울타리를 쳐놓 고 천막을 만들어 수용하고 UN군 병사들이 감시했다고 한다. 북한 인민군 중 여자 포로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여자들도 총을 잡고 전 쟁에 참여했나 보다. 이러한 사실은 나와 엄마 아빠가 태어나기 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전쟁을 겪은 분들이 알만한 일들이다. 이곳을 둘러보며 그때까지 들떠 있던 나는 조용하고 걱정스러운 표 정으로 변해 있었다. 다음에 간 곳은 포로생활관, 포로사상 대립관. 그곳은 포로들이 어떻게 수용소 생활을 했는지 보여주는 곳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은 보이질 않고 불안, 고달픔, 배고픔으로 가득 차 있는 표정들이었다. 이 사람들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공산주의라는 보이지 않 는 이념의 지배자들에 의하여 순수했던 인간의 육체와 마음을 전쟁 의 노예로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한쪽 마음이 아파져 왔다. 왜 피 를 흘리면서까지 욕심을 채워야만 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 전쟁 중 죽지 않고 포로로 잡혀 다시 전쟁터에 나가지 않은 포로들에게 큰 다 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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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한 점은 같은 인민군 포로들 간에도 다투거나 집단으 로 싸웠다는 것이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싸웠다는 것이 처 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같은 처지에서 공산주의 찬성, 반대세력 으로 편갈림이 되어 싸우게 되었고, 김일성과 공산주의 찬양하는 세 력은 북쪽으로,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세력은 남한에 남기로 했다는 것 때문에 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상과 이념의 대립이 두 편 으로 갈라놓게 한 것이다. 치고받고 싸우며 폭동으로 이어지기도 했 다는 것이다. 난 사상의 대립이 이처럼 무섭다는 것을 그제 서야 깨 닫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나라 일부 사람들은 북의 남한에 대한 침략과 6·25 이후 간첩 남파와 북의 무력도발에 대해 우리가 자초하거나 사건조 작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무엇에 근거하여 그런 주장을 하는 지 전쟁을 겪지 않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다음에 돌아본 곳은 포로설득관이다. 이곳은 공산주의와 자유 주의 사상의 대립이 뚜렷하여 이 때문에 포로들끼리 편갈림이 생겨 서로 싸우고 선동하여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패가 나뉘게 되 었다고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포로에 대하여는 자유주 의로 올 수 있도록 사상의 교육, 설득, 전환을 유도하였는데, 이것 을 방향을 바꾼다는 뜻에서 전향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사상 전향이라는 각서를 쓰고 자유민주주의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희망하 는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희망하는 사람들보다 더욱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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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공산주의를 겪어 본 포로들이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인간적인 면에서 훨씬 낫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빠께서 보시는 TV 프로그램 중에 ‘남북의 창’ 방송을 가 끔 따라 보곤 한다. 거기에서 북한의 문화와 정치, 그리고 어린이, 청소년들의 생활상을 보는데 모든 사람의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하 고 틀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일체 된 행동, 개성 이 없는 목소리, 옷 입는 맵시, 뭐든지 부자연스럽다. 모두가 김정 일, 김정은 한 대상만을 향하여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 다. 한 사람을 놓고 어쩌면 저렇게 열광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 는다. 무슨 유명 해외 팝가수가 공연을 와서 청소년들이 환호를 지 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선 대통령을 보고 저렇게 소리 지르며 환호하는 것이 강요가 아니라면 가능한 일일까? 상상할 수 없다. 학교에서 배울 때 선생님께서 공산주의, 사회주의 근본은 이념의 순수성으로 볼 때, 정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제일 평등한 세상을 만 들기 위한, 지상낙원을 이루기 위한 제도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 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따지고 본다면 현재의 북한을 포함한 여러 공산주의 국가는 공산주 의라는 말 자체를 쓰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공산체제 안에 서도 차별성, 계급성, 상류층, 하류층, 노동층이 구분되어 엄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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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데 어떻게 모든 면에서 평등이 이루어지겠는가? 특히 북한 은 공산주의 이념의 순수성을 알지도 못한 채 그들 방식대로 독재로 써 대를 이어 체제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통령과 정부는 북한보다 북한을 추종하는 남한의 일부 세력이 더 큰 문제라고 하였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민주국가이기 때 문에 정부의 잘못된 판단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우리 사회를 비판만 하면서 북한체제를 옹호하여 그들을 따르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는 민족전쟁의 아픔을 딛고 지금의 경제 대국으로 이어져 왔다. 우리가 한마음으로 뜻을 모아 통일의 창을 활짝 여는 그 날까지 우리 의 조국 사랑은 계속되어야 한다. 나의 친구 할아버지께서는 8년 전에 돌아가셔 전북 임실 호국원 에 안장되어 계신다. 6·25 전쟁에 참여하여 전적비에도 성함이 새 겨져 있다고 한다. 누가 우리를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 들어 놓았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위와 같은 사실 들을 생각하면 선조들을 비롯한 호국영령들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어 지고 조국의 소중함이 더욱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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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부문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최우수

꿈을 되찾기 까지 천 ○○

우수

가슴 아픈 추억 전 ○○

우수

“달리자! 그날까지〜” 박 ○○

장려

참 잘 오셨습니다. 조 ○○

장려

무산 통일 빵집 김 ○○

장려

오늘이 있어 행복하고 내일이 있어 행복하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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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꿈을 되찾기 까지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최우수상

천◦◦

4월의 하늘에 찬란한 태양이 눈 부시다. 푸른 하늘, 하얀 꿈이 어 우러진 교정에는 봄꽃이 만개해 말 그대로 꽃동산이다. 흐드러지게 핀 목련꽃 잎이 밤새 소복이 내려 쌓인 함박 눈송이마냥 하얀 잎 새 를 흔든다. 낙원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강의실 을 향해 총총걸음을 다그치는 여대생들의 모습에서는 봄기운이 물 씬 풍긴다. 젊음이 좋다. 청춘의 열정이 넘쳐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풋풋해지고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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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 속에서 두꺼운 전공교재를 들고 굳은 결심을 다지는 나도 당 당한 이 교정의 주인공이다. 오늘도 나는 꿈을 향한 발걸음을 힘차 게 내딛는다.

내 고향은 한반도 최북단의 중국과 접한 국경 마을이다. 앞에는 두만강이 흐르고 뒷산에는 봄이면 진달래며 철쭉이 피어나는 산간마 을이었다. 고향에서의 천진난만한 유년시절은 참 빨리도 흘러갔다. 그 시절에는 참 꿈도 많았다. 하늘 높이 나는 비행기를 보면 비행사 가 되고 싶고 TV에 나오는 어린 학생들의 예술 공연을 보면 가수가 되고 싶었다. 분명 거창하게 마음먹고 굳은 결심을 다졌던 꿈이 하 룻밤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변덕쟁이 소녀였었다. 그 시절 꿈꿨던 직 업을 손으로 꼽자면 아마 열 손가락이 모자랄 것이다.

한민족의 우수한 DNA는 남북한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남한에 땅 팔고 소 팔아 자식 공부시킨 부모님들의 교육열이 있었다면 북한 에도 없는 살림에 치마폭에 쌀이며 기름, 돈을 싸들고 자식들을 공 부시키는 어머니들의 교육열이 있었다. 북한에도 분명 교육열이 높 은 사람들이 많고 “치맛바람”도 있다. 나의 어머니도 워낙 열성이 높 으셔서 나는 예술 체조도 해보고 아코디언도 해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수학시험지를 받아 든 아버지의 환한 미소를 보고 수학에 전념하 기도 했다. 평소에는 유교적 관념이 강하셔서 여자는 시집을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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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되지 공부 잘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던 아버지였다. 또 막둥이인 남동생에게는 애정표현을 잘하시면서도 딸인 나에게는 무뚝뚝하셨 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딸이 공부 잘한다는 자랑을 동네방네 그렇게 하고 다니시는 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사실 공부에는 그 렇게 열성이 없었던 나였지만 아버지의 딸 사랑에 그만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고등중학교1) 1학년 때였다. 반에서 중간이던 성적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더니 급 기야 1, 2위를 다투게 되었다. 특히 수학과 물리 같은 이공계 과목 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간호사였던 어머니의 바람대로 의 사가 될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신분제도나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태어나 면서부터 출신 성분에 따라 앞길이 정해져 있는 계급사회인 북한에 서 중국 태생의 할아버지와 한국태생의 외할머니를 두고 있는 내가 진학할 수 있는 대학의 등급은 의대에 못 미쳤다. 등잔불을 켜고 밤 을 새워가며 공부해 항상 학급에서 1, 2등을 다투고 전교 2, 3위를 놓쳐본 적이 없었고 1지망으로 청진 의학대학을 적어냈지만, 그것 은 어디까지나 나만의 바람이었다. 나보다 성적이 떨어졌던 친구들 이 출신 성분이 좋고 뇌물을 바쳐 국방대학이나 중앙의 유명한 대학

1) 우리나라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말하는 북한의 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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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갈 때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은 고작 지방의 자그마한 공업대학이 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등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불의의 사 고로 돌아가시고 나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었다. 어머니가 홀로 장사를 해서 버는 돈으로 가까스로 끼니를 이어가던 우리 집 형 편으로는 뇌물이 어림없었다.

결국 나는, 마음에도 없는 공업대학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그 러나 지방대학의 반도체 학과는 휴강하는 날이 더 많았고 희망이 보 이지 않았다. 거기다 경제난과 식량난이 본격화된 90년대 중후반의 북한상황은 나를 대학교정에서마저 몰아냈다. 지성의 상아탑에서 지성을 쌓아야 할 나이에 나는 생활 전선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홀 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신 어머니에게 대학 뒷바라지까지 시킬 수 없었던 나는 장삿길에 나섰다. 18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못해 본 일이 없었다. 꽁꽁 언 주먹밥 한 덩이를 먹으며 칼바람 몰아 치는 한겨울에도 길가에 먼지가 자욱이 이는 한 여름날에도 돈을 벌 고 식량을 구매하기 위해 주변 농촌과 산골 마을을 집집마다 돌아다 녀야 했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하셨는 데 그 눈빛이 나를 더 서글프게 했다. 모녀가 무진 애를 써 보았지 만, 북한의 식량 상황은 더 악화됐고 어머니의 얼굴에선 눈물이 마 를 날이 없었다. 어머니를 애써 위로해드리며 한 푼이라도 더 벌려 고 아등바등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밤이면 모녀가 부둥켜안고 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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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의 눈물을 흘린 날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모녀는 끝내 두만강을 건너게 되었다. 중국 연길 쪽에 조부 쪽으로 먼 친척들이 연변조선족자치주 중견간부로 계셨었는데 그분들의 도움을 받아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중국방문 권유를 받아왔지만 어떻게 해서나 아버지 켠 친척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보려고 했던 어머니와 나의 자 존심이 북한에서는 설 자리를 잃었다. 어린 남동생까지 세 식구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극한상황에서 체면과 자존심만 차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중국에 건너간 한동안은 친척들의 도움으로 배 고픔은 면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생겼다. 친척들이 배고 픔은 덜어줄 수 있었지만, 신변안전은 보장해 주기 어려웠다. 당시 북한과 중국 당국의 탈북자 색출이 강화돼 숨겨준 중국 사람들까지 모조리 처벌을 받고 있었다. 끝내 눈치가 보여 우리 가족은 다른 곳 으로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곳에서 마음씨 고운 한국인 사장님을 만나 우리 가족은 불안함 속에서도 단란한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중국말을 전혀 하 지 못했지만 나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식당일과 회사 일을 했 다. 열심히 일해 월급날이면 생활비를 제외하고 돈을 저축할 수 있 었던 것은 북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중국식 자본주의의 진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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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모았던 2만 위안의 돈을 중국 국적을 해준다는 사기꾼의 말에 속아 홀랑 다 잃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내 가 회사에 나간 사이에 어머니와 남동생마저 중국 공안의 불시검문 에 걸려 북송되었다. 홀로 중국대륙에 남은 나는 눈물로 밤을 새우 며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돈을 벌어야만 가족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중국 공안의 탈북자 색출이 덜한 상하이로 갔다. 거기서 회사 일을 시작한 나는 밤잠을 안 자고 열심히 일하고 아르바이트까지 두 가지, 세 가지 일을 해 1년 만에 가족을 구할 수 있는 돈을 마련했다. 그 돈 을 송금한 날의 그 간절함과 뿌듯함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손꼽 아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며칠 후 엄마와 전화연결이 되었다. 밤마다 눈물로 애간장을 끓이며 그렇게 듣고 싶던 엄마의 목소리였다. 나는 “어머니”란 말만 연신 외치며 참고 참았던 설움과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시 모여 살 수 있었다.

그로부터 또 몇 년 후, 나는 아직 다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한국을 향해 출발했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이 호구조사에 들어가면서 신변안전에 대한 불안이 커지자 어머니가 먼저 한국으 로 떠났다. 일전에 남동생은 불운하게도 또다시 북송되었다. 온 가 족이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결행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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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당시에는 한국의 탈북자정책에 대한 정보가 없다 보니 위험 을 무릅쓰고 어머니가 먼저 길을 개척하기 위해 떠난 것이었다. 회 사 일로 멀리 떨어져 일하던 내가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어머니의 결심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가 떠난 지 몇 달 뒤, 한국에 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였다. 그렇게 되어 나도 어머니의 뒤를 따라 외할머니가 태어났다는 남한, 어려서부터 금기시됐던 내 조국 의 반쪽 땅을 밟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한국사회정착 은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는 경제적 자립과 안정적 정착을 위해 전문지식을 배우기로 결심했고 세무회계 학원에 다니게 됐다. 세무회계는 어렵긴 했지만 배울수록 재미있었 다. 나는 열심히 공부해 6개월 동안 전산회계 1, 2급과 세무회계 2 급, 기업회계 2급 등 회계 관련 자격증을 4개나 취득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들도 한 번에 따기 힘든 세무회계 2급 자격증과 기 업회계 자격증을 북한에서 온 내가 한 번에 따는 것을 본 학원에서 세무회계에 특별한 소질이 있다며 학원 강사직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는 자신감도 부족한 데다 북한 억양 때문에 사양하고 세 무회계사무소에 취직했다. 그리고 세무회계사무소에 다니며 열심 히 일해 모은 돈으로 남동생도 마침내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렇게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차츰 자신감이 생기고 욕심이 생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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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왕이면 세무사가 되고 싶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그 대가가 반 드시 차려지는 한국사회에서 길게 내다보고 호흡하는 것이 중요하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나이지만 도전장을 내밀었 고 나는 지금 이화여대의 교정에 서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꿈 을 잃고 살아왔다. 꿈이 무엇이었던지 기억할 마음의 여유도 희망도 없이 오직 생존을 위해 정처 없이 달려왔다. 그런데 내게도 분명 꿈 이 있었다. 아름답고 찬란한 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을 다시 이 루기 위해 나는 십 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학생들과 같은 2014학 번이 됐다. 출발선은 비록 다르지만 꿈을 향한 나의 도전은 지금부 터 새로운 시작이다.

나는 세무회계 관련 공부를 열심히 해 꼭 탈북여성 1호 세무사가 되고 싶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성공정착의 서사시를 쓰고 “먼저 온 통일미래”의 참모습을 한국사회에, 한국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 다. 또 통일이 되면 북한 동포들도 자유와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남 북한 경제 통합에 기여하고 싶다. 북한에서 못다 이룬 꿈을 이 땅에 서 보란 듯이 이뤄내고야 말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나는 매 일 밤 도서관에서 열정의 등불을 밝혀가고 있다. 어린 날의 소중한 꿈을 되찾아 주고 보다 높은 꿈과 목표를 갖게 해준 이 땅의 모든 것 에 감사한다. 그리고 인생의 존엄을 찾아준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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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추억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우수상

전◦◦

길가엔 벚꽃이며, 진달래, 튤립 많은 꽃이 봄을 알리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완연하게 피어있다. 이맘때 쯤 이면 내 고향 뾰족 산 에도 핑크빛 물들이며 진달래가 활짝 피어나고 두껍게 얼어붙었던 얼음장들도 쩡쩡 소리를 내며 압록강 흐름을 따라 떠내려간다. 산에 도 파릇파릇 새싹이 돋기 시작했고 우리 집 텃밭에도 가을에 씨 뿌 렸던 시금치가 겨우내 잠을 자고 봄을 알리며 손가락 크기만큼이나 돋아났을 것이다. 마을 어귀에서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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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온다. 멀리서 한 아이가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다. “엄마~” “어 머니 빨리 갔다 오시오~” 5살 난 아들이 내 품에 안겨 울먹이며 하 는 말이었다. “응~ 엄마가 올 때 간식이랑, 장난감이랑 많이 사올게. 그러니 큰엄마 말 잘 듣고 있어~” 이렇게 우는 아들과의 헤어짐이 생이별이 될 줄이야 꿈에도 상상 못 했다. 내가 고향을 떠나 온 지도 만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서 1년 6개월 그리고 한국행에 올랐다. 나는 태어나서 결혼을 하고 새 가정을 꾸릴 때 까지 줄곧 한곳에서 부유하진 않지 만 그래도 삶의 어려움을 크게 모르고 살아왔다. 같은 동네에서 부 모님들의 중매로 남편을 만났고 그때부터 나의 결혼 생활이 시작되 었고 기쁨과 함께 고난도 시작되었다. 시어머님을 모시고 갓 제대 되어 학교에 입학한 학생인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새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하는 힘든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나름 살아보겠다고 애썼 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았다. 임신해서 6개월부터 기차 타고 평성까 지 달리기에 나섰다(기차 타고 이곳저곳 장사 다니는 것을 기차 달 리기라고 부른다) 북한에서 기차 타고 다니려면 보통 빨라서 3~4일이다. 그것도 차표를 잘 떼면 좌석에 앉아 갈 수 있고 차표도 못 떼면 열차 전무에 게 돈을 찔러 주고 복도에 서서 가는 것이다. 차표도 예약하거나 줄 을 서면 다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매표소에서는 얼마 팔지 않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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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간부나 역 안내원들이 자기들 안면으로 빼내서는 야매가격으로 판다. 그러니 차표 없이 몰래 오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니 기차 안 은 온통 사람 천지에 짐이며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래서 다른 차 칸으 로 옮겨가려면 짐을 딛고 누워있는 사람을 가로 타고 지나가야 하고 뒷욕도 많이 듣는다. 열차 승무원들이 차 칸을 지나다 사람이나 짐 이 걸치면 단 마디에 욕이 나오고, 발로 걷어차고~ 그리고 차표 검 열하면서 짐도 단속하는데 금속품이라도 있는지 쇠꼬챙이로 배낭도 쿡쿡 찔러보고 짐이 많으면 주인을 불러서는 벌금을 받아낸다. 열차 안 치안을 담당한 사람들이 자기 돈주머니 채우는 데만 눈이 아홉이 되고 이용객의 편리나 안전은 생각지도 않는다. 임신 6개월 되어 배도 어느 정도 불어 올랐는데 이 상태로 기차 타고 4~5일 동안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가다 보면 발이 너무 부어서 신발을 벗었다 다시 신발을 신으려면 신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장사 짐은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역에 도착하면 10분간 정착하는 시간 내에 짐을 다 내려야 한다. 사 람이 복도에도 입구도 꽉 메우게 차있는 차 안에서 짐을 내리기는 쉬 운 일이 아니었다. 배낭이 얼마나 큰지 내가 메고 걸으면 배낭이 걷 는지 사람이 걷는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럭저럭 짐을 내리고 역 개찰구로 나가자면 역원에게 차표검열을 마치고 지나가야 한다. 또 짐이 크거나 많으면 공민증(시민권)을 빼앗고 역 검열대로 데려 간다. (그들도 단속을 많이 해서 뇌물을 받아 살림에 보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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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눈에 쌍심지를 켜고 검열한다.) 한번은 그 큰 배낭을 메고 개찰구를 빠져나갈 때 검열원이 나를 검열하지도 않고 그냥 내보낸적이 있다. 키가 원래 작은 데다 임신 해서 배까지 나온 데 내 키만 한 배낭을 진 것을 보니 애처로웠던 모 양이다. 큰 짐을 져서 또 벌금을 내야 하지 않을까 걱정한 터였는데 다행이었다. 휴 이렇게 집채만 한 배낭을 메고 물건을 파느라 이곳 저곳 수없이 헤매고 다녔다.

버스비도 아낀다고 거의 한 시간 거리를 걸어 다녀야 했었다. 임 신하고 사과가 그렇게 먹고 싶었었는데 돈이 아까워서 못 먹었다. 시장에 나가면 모든 것이 눈에는 풍년이다. 그 많은 과일을 보고 지 나면서도 차마 남편보고 사과 사달라는 말이 혀끝에서 맴돌면서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것 사는 돈이면 조금 보태어 잡곡 1kg은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후 아기가 태어나 돌 지나고 아이를 업고 장마당 중기데꼬(TV 를 비롯한 가전제품 중간 도매)도 서봤고 그것도 단속이 너무 심하고 장마철이라 아이가 자꾸 아프고 해서 그만두고 다시 음식장사를 했 다. 떡 장사를 하면서 다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정말 가슴 아픈 추 억도 있었다. 어느 날 주문 들어온 깨떡을 빚고 있는데 누워 자던 아 들이 일어나 칭얼대기에 떡 하나 쥐여줬더니 소리 없어~ 그래 돌아 보니 아니 글쎄 떡이 목에 걸려서 아이가 말도 못하고 네 사지를 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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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엎드려 있다, 이미 눈은 돌아가고~~ 너무도 황당해 뭘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고 애만 안고 울고불고~~ 길 가던 사람들도 울음소리에 들어오고 옆집에서 들어오고 물을 먹여봐라, 병원 가야 된다, 그날 남편이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매대 탁자를 만들고 있던 참에 처음엔 떡 걸린 줄 모르고 인공 호흡시키다가 다행히 떡이 목구멍에서 빠져 나왔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나니 숨이 나왔다. 뭐라 말할 힘도 서 있을 힘조차 없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야 말았다. 눈 깜박할 몇 분 새에 하마터면 큰일이 일어날 뻔했다. 휴~ 그때 일은 상상하 기조차 싫고 다시 꿈에 나타날까 두렵다. 그날 이후로 바로 떡 장사를 다 접었다. 부모 잘 못 만나 무서운 생사의 고비를 넘긴 것 같아 너무도 미안하고 미안했다. 임신 초기 에 입덧이 심해서 잘 먹지도 못했더니 아이가 영양이 부족해서인지 작게 태어났지만 자라는 동안 자주 앓음을 달고 살았다. 면역력이 약해서인지 감기도 잘 걸리고 기관지에 폐렴으로 넘어가 주사도 많 이 맞고 고생도 많이 했다. 그렇게 남편도 학교를 졸업하고 괜찮은 직장의 계획지도원으로 취직해서 그나마 생활이 좀 나아졌다. 그러다 또 여러 가지 사건도 일어났고 그 일로 남편이 중국으로 들어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친 정엄마마저 뇌암 이라는 진단을 받고 앓아누우셨다. 그때 내가 처 한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암담했다. 북한은 말로는 무료 치료라고 하지만 그건 다 옛말, 좀 이름 있다는 병원 과장선생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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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병을 보이고 진단받고 약간의 치료받는 것도 매일 돌아갈 때에는 돈을 주머니에 넣어준다. 병원에서 도움받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 다. 매일 들어가는 포도당이며 비타민 주사들도 다 약 파는 개인 집 에서 사서 맞아야 했다. 그리고 혈관주사침이며 관이며, 약은 다 중 국에서 나오는 것이고, 주사침과 관도 한번 쓰고는 집에서 소독해서 여러 번을 관이 뿌옇게 되면 다른 것으로 교체한다.

남한에서는 상상도 못 하는 일이다. 그러는 동안에 아빠가 엄마 를 살려 보겠다고 매일매일 일지를 쓰시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셨 다. 의술이 있다고 소문난 사람들이며, 평양의 이름 있다는 병원을 찾아 엄마를 업고 다니셨다. 이때의 이야기는 너무도 가슴 아파 더 이상 쓸 수 없다. 아빠의 희망은 운신은 못 해도 살아만 계셔서 삼륜 차에 태우고라도 다니는 것이었지만 하늘은 야속하게도 아빠와 우리 의 곁에 빈자리를 남겨두고 엄마를 빼앗아 갔다. 엄마를 떠나보내시 던 날 땅 치며 울던 내 곁에 와서 울면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 주던 네 살짜리 아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그 자리에 왔던 많은 조객이 어린 아들애가 하는 걸 보고 더 슬펐다고 했다. 그런데 화는 쌍으로 온다고 슬픔도 채 가시기 전에 따로 살림을 차리고 옷 수선을 하며 살아가던 언니도 갑자기 다리를 쓰지 못해 걷기도 어려울 정도 로 힘든 상태였고, 오랜 간호와 갑자기 겪은 충격으로 아빠의 건강 상태도 나빠지고, 점점 야위어져 곁에서 보기가 안쓰러웠다. 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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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이 있다고 해도 빈자리를 채워 드릴 수 없었고 아픈 마음의 상처 를 메워 드릴 수 없었다…. 몇 개월 후 한 달 만에 돌아오기로 한 남편한테서 소식은 왔지만 눈이 띄어질 희소식은 없었고, 일이 안돼서 돈을 벌다가 들어가야 겠다는 소식과 나도 함께 들어와 돈을 벌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 다. 중국에서 남자가 돈 벌기에는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 들어갈지는 모르겠다는 험악한 소식뿐이었다. 남편한테 한 가닥의 희망을 가졌던 것도 물거품처럼 살아지고 아 무 궁리도 나지 않았다. 오랜 기간의 투병 끝에 밑천은 다 떨어지고 참으로 난감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그때 중국에서 한 달간 주방에서 버는 돈이면 북한 돈으로 몇십만 되었다. 오랜 고민 끝에 중국 가서 한 1년 열심히 벌어오는 길밖에 없고, 이 길이야말로 내 가족, 부모, 형제 살리는 길이라고 결심 내렸다. 처음엔 아빠도 반대하고, 오빠 의 반대 때문에 뜻을 못 이루고 2년 만에야 탈북하게 되었다. 일단 간다고 하다가 못 간 터라 압록강에 빨래하러 나가서도 강 건너 저 편 중국에서 혼자 고생하고 있을 남편 생각하며 멍하니 그쪽만 바라 보고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거의 1년 후 확고하게 결 심 내리고 아빠한테 얘기를 꺼내놓으니 아빠는 예견하고 있는 듯 아 무 말씀도 없이 담배만 빨고, 한숨을 쉬고 계셨다. “너 갔다가 정말 돌아올 거냐며, 일단 가면 다시 안 온다며 힘없이 말씀하실 때 아빠 꼭 돌아온다고, 1년만 기다려주세요, 내가 벌어 와야 운신하기도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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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언니도 도와줄 거 아니냐고, 허락해달라고 애원했고, 아빠의 허 락을 받고 집을 나서게 되었다. 이 길이 가족하고 다시 만날 수 없는 길이 되었고, 한 달 만에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아들과의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무사히 압록강을 건너 마중 나온 조선족의 집에 들어가 젖은 옷을 갈아입고 그날 아침으로 버스를 타고 백산으로, 거기서 기차를 갈아 타고 남편이 있는 천진까지 무사히 들어갔다. 역에 마중 나온 남편 과 상봉하고 쉴 새도 없이 며칠 후 남편과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되었 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떡집에서 일하는데 한 달에 중국 돈 천 위안 도 못 받으며 일하였다. 월급도 좀 높은 식당에 가서 일하려고도 해 봤지만, 우리가 그곳을 떠나면 그 집 주인들이 공안에 신고라도 할 까 봐 힘들지만, 그곳에서 그냥 버텨 내기로 했다. 새벽부터 일어 나 힘들게 일하면서도 그래도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있었다. 북 에 두고 온 아들을 생각하며 힘든 것도 외로움도 이겨 냈다. 길거리 를 지나치다가도 아이들 옷을 파는 매장만 보면 두고 온 아들애 생각 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 흔한 과일도 처음엔 사 먹을 수가 없 었다. 그것을 볼 때면 항상 애 생각나고, 그 과일 하나 변변히 사주 지 못한 게 너무도 죄스러웠다.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그래도 한푼 두푼 모아서는 집으로 부쳐주곤 했다. 그렇게 보내는 돈을 가운데서 수수료를 떼고 나면 가족이 받는 돈은 몇 푼 안 되었다. 이렇게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 또 집에도 보내고 나면 언제 돈을 모아 다시 돌아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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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막막했다. 그리고 중국에 들어오니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TV를 보고, 또 그곳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으 며 다 거짓말이라고, 우리 장군님 쪽잠에 좨기밥1) 드시면서 인민을 위해 로고를 바치시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며, 믿질 않았 고 그들을 욕하지 말라고 두둔까지 해나 섰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 각을 하고 있었다. 차차 그 생활에 익숙해가면서 정말 우리가 속아서 여태껏 살아왔 다는 것을 느끼고, 아마도 그런 생각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는 내 생각을 바꿔놓은 것 같다. 결국에 거기서 수소문 끝에 한국행에 올랐고, 가족과 아들과의 만남의 길은 점점 멀어만 져갔다. 탈북할 때 애 아빠에게 보여준다 고 가지고 떠났던 아들 사진도 쿤밍의 이름 없는 산에 묻히고 아들 사진 한 장도 못 가진 채 한국으로 왔다. 메콘강을 건너기 전 짐이 많 으면 배가 뒤집힌다고 짐을 축소하라고 해서 사촌 언니 배낭 성경책 속에 사진을 넣어두었었는데 생각을 못 하고 다른 것을 버리면서 성 경책도 버렸단다. 너무도 가슴이 미어지고 아팠다. 언제 다시 만날 지 모르는데 그 사진마저도 잃었으니 말이다. 한국에 무사히 입국하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북한에서 배워왔던 모든 것이 거짓이고 북한보다 더 잘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원을 나 1) 손에 들고 먹을 수 있도록 속에 반찬을 넣어 만든 밥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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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 집을 장만해주고, 많은 배려를 받게 되니 북에서 고생하고 있 을 아들이며 가족에게 우리만 복을 누리는 것 같아 너무도 미안하고 죄스러움에 입주한 첫 날밤 눈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열심히 벌 어 하루빨리 아들이며 가족을 데려와 함께 잘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바로 한 달 만에 일을 시작했다. 여기서는 내가 일한 만 큼 노력한 만큼 살 수 있단다. 북한에서는 아무리 힘들게 일하고 노 력해도 빈곤 속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북한에서의 뼈아픈 추억이 아마도 그때의 원동력이 되었고, 아들 이 힘이 되었다. 그래서 아는 분의 소개로 안성에 내려가 주유소에 서 일하게 되었다. 회사에 남보다 먼저 출근해서는 마당 쓸고, 주유 기 닦고, 나름 열심히 했다. 사장님과 주유하러 오시는 분들도 정말 열심히 산다며 우리 부부를 칭찬해 주시고 힘도 주셨다. 하루 12시 간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추운 겨울날 칼바람 속에서도 우리를 웃게 해주고 용기를 준 것은 돈을 모아서 하루속히 아들을 데려올 수 있 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힘든 고비를 넘기면서 2012년 그렇 게 만나보고 싶었던 아들을 중국으로 데려왔다. 그때는 아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기쁨과 뭐든 해주지 못한걸 다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 다. 처음 화상채팅으로 아들과 만났을 때 3년이라는 기간이 아이를 빨리 철들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찌나 대견스러운지~~ 브로커와 연결을 해놓고 연락 올 시간만을 기다리면서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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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20일 동안 매일같이 채팅하면서 집 소식도 묻고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니 수학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꿈이 과학자라 고 했다. 너무나 대견스럽다. 그런데 이런 기쁨도 한순간이었다. 어 느 날 전화를 하니 아예 받지를 않는다. 항상 전화하면 5초 안에 전 화를 받았는데 전화를 안 받는다. 초조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화장 실 갔겠지 아니면 TV 보느라 못 들었나?,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며 10분 기다렸다가 또 하기를 수십 번!!! 한순간에 무겁고 큰 것이 내 가슴을 누르는 듯한 압박감과 초조 함이 밀려들었다. 겨우 2일 만에 연락이 되었지만 글쎄 공안에 잡혔 단다. 너무도 황당한 소리에 소스라치듯 놀랐고 내 가슴은 쿵쿵 무 엇에 쫓기는 마냥 걷잡을 수 없었다. 그때가 마침 추석 때이고 며칠 안 있으면 중국 국경절이라 손쓸 사이도 없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서 도와줄 사람들을 찾았지만, 그들도 너무 늦어서 손쓸 수가 없단 다. 이미 상부에 서류가 다 작성되어 올라갔단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도 이 일은 미 지수로 남아 내 머리 한구석에서 맴돈다. 그렇게 중국에서 보름이란 기간 있다가 북송되었다. 북한에서 또 함북도 구치소에 들어가 20일 넘게 있다가 뇌물을 주고 나왔단다. 8살짜리 애한테 뭔 죄가 있다고 11월 그 차디찬 감방에 가두어두고 돈을 요구하는 그 인간말종들. 그 찬 감방에서 추위에 떨고 무서움에 떨고, 배고픔에 떨었을 걸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고, 그 어린것을 정신적, 육체적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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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을 겪게 했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죄스럽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안부조차 알 길 없다. 애가 나왔다는 소식을 받고 할머니가 다신 애를 아빠 엄마한테 보내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로는 연락이 아예 끊겨버렸다. 지금 듣기로는 연선2)을 더욱 강화 하고 조금이라도 한국하고 연락한 눈치만 보이면 가차 없이 추방하 고 어디론가 데려간단다. 가족 모두 무사한지, 아들은 잘 있는지~ 자전거 사주면 안 되느냐고 조를 때 아빠 엄마 만날 때까지 참으 라고 만나서 사준다고 한 게 너무 마음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다. 비 단 나 하나뿐이 아닌 북한을 떠나온 수많은 엄마와 아이들이 이런 아 픔을 가지고 있다. 하루빨리 남과 북이 통일되어서 다시는 이와 같은 가슴 아픈 일 들이 되풀이되지 않고 또 가족 잃은 아픔과 설움이 가셔지고 이산가 족의 상봉이 속히 실현되길 항상 기도한다. 한 줄기 빛없는 암흑의 철장 그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부 모 형제 아들 모두 만나는 그 날까지 항상 건강 하시 길 삼가 바라오 며, 하루속히 만나는 그 날이 오기까지 부모님에게 떳떳한 자식이 되 고, 자식 앞에 떳떳한 부모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2) 국경에 인접한 지역 경계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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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자!~ 그날까지”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우수상

박◦◦

자국민의 행복과 인권에는 무관심하고 자신들의 기득권밖에 모 르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에 의해, 그 땅에서 억울하게 굶어 죽어가 다, 가난과 독재를 피해 난민 아닌 난민이 되어 이국땅 곳곳에서 쓰 러져가는 수천, 수만의 북한주민들의 비참한 고통과 수난을 역사는 똑똑히 기억할 것입니다.

벌써 여름이 다가온다. 엊그제가 겨울이고, 봄인 것 같더니 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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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더워서 밖을 나서기가 두려울 정도이니 말이다. 한국에 정착한 지 어느덧 4년, 쌓이는 경험 속에 내 나이도 삼십 대 후반을 내달리고, 지금은 통일부 전문 강사로, 대학생으로, 쌍둥이 엄마로 늘 바쁜 나 날 속에서 달리면서 살고 있다. 나를 보는 분마다 “성공하셨네요~” 라는 말씀을 하신다.성공의 시작은 어디이고, 끝은 어디일까? 참 간 단하면서도 어려운 단어이다. 주변에서는 흔히 물질의 “부”를 지니 면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성공에 대하여 아 직은 잘 모르지만 나는 나름 자신 있게 대답한다. “최고가 되기 전에 최선을 다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시민이 되리라고….” 흔히 자 유라는 말의 깊이를 생각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는 들으면 들을수록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폐쇄된 북한의 세뇌교육만을 받다가 남한에 나와 개방형 교육, 글로벌 세상 의 지식을 배워가는 남한의 대학생활이 얼마나 보람차고 재미있는지 모른다. 실로 이 모든 자유를 준 대한민국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또 자유로운 남한생활에 젖어 있을 때면 이 자유를 찾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나는 지금도 늘 짓궂게 떠오르는 아픈 추억들로 가슴이 먹먹해지 고, 매일 뜨는 밥 한술, 누리고 있는 자유에 미안한 마음으로, 오늘 은 시간을 거슬러 유리병 속에 갇힌 인생을 살아야 만 했던 억눌렸 던 삶을 탈출하던 과정을 통하여 오늘에 소중한 대한민국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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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말해보려고 한다.

1. 눈물 젖은 두만강

“뛰어~”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세 명은 동시에 낭떠러지로 굴 러 두만강 기슭까지 도달했다. 7월의 두만강은 장마로 인하여 물이 급격하게 불어 있었고, 무섭게 밀려오는 황토물은 연약한 세 인간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이 덤벼들었다. 커다란 바위들에 부딪혀 솟구치 는 검푸른 흙탕 물결이 작은 포말을 허공에 뿌리며 온몸을 위협했다. 눈앞에서 큰 산이 무너지듯 물이 쏟아져 버리는 것 같았고 등골 은 으스스하게 전율이 느껴졌다. 거친 물소리와 긴장감으로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아픈지 볼 겨를이 없이 셋은 손을 가지런히 잡고 두 만강에 들어섰다. 단번에 가슴부위로 물이 차올랐고 밑바닥의 돌은 왜 그리 미끄러 운지 겨우 몸을 지탱하며 물속을 헤쳐 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울리는 호루라기 소리, 다급한 욕 소리와 함께 곧이어 총소리가 들려왔다. 5m 남짓한 폭의 두만강이 왜 그렇게 넓게만 느껴지는지, 사품1) 치는 거센 물결에 몸 균형을 맞추기는 매우 힘들었고 뒤에서는 총알이 진 한 화약 냄새를 풍기며 내 귀 옆을 스쳐 지나간다. 허둥지둥 내 몸은 마비가 온 것 마냥 감각이 없었고, 어떻게 하나 빨리 이 강을 벗어나

1) 세차게 흐르는 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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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셋은 잡은 손을 더 으스러지라 부여잡고 강을 건넜다. 갑자기 왼쪽의 손이 풀리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21살의 동 료가 총에 맞았는지, 아니면 발을 헛디뎠는지 빠른 물살에 순식간에 저만 치로 떠내려갔고, 나는 무게중심을 잃어 물을 몇 번이나 삼키 기를 반복하면서 급류에 정신이 혼미해져만 갔다. 물 밖에서 외치는 목소리는 상황의 차이로 인해 더 큰 좌절을 이 끌어내지만, 같은 물 안에서 외치는 누군가의 힘이 실린 한마디는 함 께 한다는 신뢰를 넘어서는 연대의식을, 그리고 나 또한 그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몫을 느끼게 하지 않는가? 나도 어떻게 두만강을 건넜는지 아직도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혼비백산이라는 말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죽을 것 같은 절박함 으로 온몸이 경직되고, 동병상련의 고통을 나눔으로 인해 나는 넋 이 나간 마냥 울고 또 울었다. 끝까지 내 손잡고 두만강을 건넌 친구 가 나를 보며, 여기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무주고혼2)의 신세가 되 니 힘을 내자고 나를 부추겨 세웠다. 일단 눈앞에 북한군은 이미 두 만강을 건넌 우리 둘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욕을 해대지만 거친 두만 강의 물결 소리가 그들의 악의 찬 말들을 삼켜 버렸고, 중국 땅에 들 어선 우리를 그들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총소리가 국경지 대에서 울렸으니 중국의 변방대가 곧 들이닥칠 것을 예상한 우리는

2) 자손이나 모셔줄 사람없어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외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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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를 잃은 설움을 가슴에 묻고 다시 살길을 찾아 떠나야만 했다. 걷고 또 걸어도 타향의 산은 호락호락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 다. 낮에 들었던 총소리와 동료의 죽음으로 나는 이미 반 정신이 나 간 상태였고 아무 의지도 없이 넘어졌다, 쓰러졌다 반복하며 행여 있을 인가를 찾아 정처 없이 헤맸다. 어느새 산속은 칠흑같이 어두 워졌고 더 이상 걸을 엄두가 나지 않는 찰나 앞에서 네댓 명의 사람 들 발걸음 소리와 말소리가 들렸다. 아무 말할 기운도 없던 나는 이내 머리를 두 손으로 꼭 잡고 그 대로 풀 가에 옹크리고 주저앉았고 옆에 있던 동료는 갑자기 후다닥 반대편으로 뛰어간다. 영문을 알 새도 없이 마주 오던 사람들이 그 의 뒤를 쫓아내 옆을 스쳐 지나갔고 그들이 비친 손전등에 그들이 중 국 변방대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 못 가서 “살려주세요~” 동 료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이 그렇게 눈앞에 서 동료를 또 잃었다.

2. 운명을 거슬러~

잡은 손 놓지 말자던 우리 셋의 약속은 불과 하루를 넘기지 못하 고 두만강에서, 중국의 이름 모를 산속에서 산산조각 났다. 공포감 과 허탈함, 허기짐이 겹친 몸은 자꾸 땅 밑으로 잦아들었지만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안고 겨우겨우 다리를 끌며 숲길을 헤쳤다. 한 참을 걸으니 어느 외진 집을 발견하였고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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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7평 안 되는 작은 방에서 마침 저녁을 먹 으려던 노인 부부가 화들짝 놀라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하더 니 겁먹은 눈길로 나를 아래위로 흩어본다. 그 당시 키 158cm 몸무 게 37kg인 바짝 마른 여자가 복장은 북한군 장교 복장이었으니 그들 이 놀랄 만도 하였다. 최근에 종종 북한군들이 가만히 중국으로 건 너와 소를 훔쳐가고 가축이며 옷가지를 가지고 달아나는 경우가 많 다고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던 두 노인 부부는 나의 자초지종을 듣더 니 이내 저녁상에 내 밥 한 그릇을 올려준다. 이틀 연속 굶고 있었 던 나는 밥 한 공기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고 이내 쏟아지는 피로 에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잤을까?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에 정신을 차린 나를 보고 여기에 계속 있으면 잡혀간다고, 안쪽으로 들어가야 돈도 벌고 살 수 있다고 한다. 내 동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어디에 전화하더니 서너 시간 후에 택시 한 대가 들어섰다. 세 명이 차에서 내리더니 나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급히 단장을 시키더니 차에 앉힌 다. 이렇게 나는 인신매매조직에 의해 화룡에서, 연길로, 연길에서 하얼빈으로 물건이 되어 도매상이 물건을 주문하듯이 열흘간을 여기 서 저기로 팔리게 되었다. “범의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이 대로 팔리다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어갈지는 누구도 모른다.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달리는 버스에서 스쳐 지나가는 주위를 유심히 익혀 두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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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휴게소에 잠시 들렀는데 그때가 나에게 유일한 기회였다. 나를 감시하던 인신매매꾼은 화장실을 알려주고는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었다. 그 당시 중국의 화장실은 재래식으로 창문도 없었고 여럿이 들 어가서 볼일을 볼 수가 있었는데 변기 아래는 공용으로 뻥 뚫려있었 다. 여름이라 냄새는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코를 찔렀고 금방 인분 을 퍼낸 것 같은 화장실 변기 아래는 구더기가 꿈틀거린다. 더러움 을 인지할 때가 아니었던 나는 무작정 네모 반듯한 변기 아래로 내려 갔다. 그때 아마 변을 보려고 아래를 내려다 본 사람이 있었다면 심 장마비가 왔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나를 발견한 사람이 없었고 나 는 순조롭게 화장실 뒷문을 열고 탈출에 성공할 수가 있었다. 변기 에서 잠시였지만 7월 태양의 화기와 함께 똥독이 나의 온몸을 벌겋 게 달구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인근 야산으로 정처 없이 뛰고 또 뛰다가 나는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얼마 후에 내 머리가 통째로 떨 어져 나가는듯한 아픔과 분노에 찬 소리에 눈을 떠보니 일그러진 얼 굴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는 게 아닌가? 정신만 잃지 않았어도… 이렇게 나는 다시 인신매매조의 손에 잡 히고 말았다. 이미 나를 중간 매매상에게서 원화 20,000원(한화 400만 원)을 주고 샀는데 도중에 없어져 버렸으니 그들이 얼마나 찾았을지 상상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죽도록 맞았다. 나는 연약한 여자도, 사람도 아닌 그들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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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이었다. 그 자리에서 매 맞아 죽은들 하소연할 곳도 없었고, 억울 한들 내 편을 들어줄 그 누구도 없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내가 버린 조국이 나에게 주는 죗값인 줄 알 았다. 북한군 여군 장교로 평양에서 빨간 물을 먹을 대로 먹은 나였기 에 잠시 돈 벌어서 군 간부들에게 아부·아첨 하려 했던 나의 멍청 함을 원망했고, 나를 따라준 죄 없는 여 사병들에게 미안했다. 맞아 서 아픈 것이 아니라, 죄책감으로 나는 실신할 것만 같았다. 주먹으 로 치고, 발로 차고 꼬집고 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 서야 다시 한 번 도망치면 죽여 버린다는 위협과 함께 그들의 매질 은 끝났다. 입안은 다 터져 침을 삼킬 수도 없었고 내 머리는 저절로 떨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더 좋은 가격에 팔 수 없었던 그들은 나 를 감금하고 대소변도 받아 내면서 나를 감시했다. 한 달이 거의 되 어 내 상처들도 점차 아물어 갔고 떨던 머리도 더 이상 떨지 않으니 또 그들의 전화통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이 나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그러고는 중국말로 뭐라 뭐라 하고는 가기를 몇 번, 아마 나의 몸 가격을 심하게 불렀던 것 같다. 뜻대로 팔리지도 않고, 가져간 경비가 거덜이 났는지 그들은 나를 한 할머니(그 역시 브로 커)한테 맡기고 연길로 돌아갔다. 그 할머니는 두 자녀를 두고 있었 는데 큰딸은 중국에서 이혼하고 13살 딸애를 두고 일본으로 시집갔 고, 아들은 마약중독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상태였다.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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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름은 팅팅 이었는데 한국말 한마디도 모르는 그 애는 내가 북한 에서 온 걸 알고 모질게 굴었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를 욕하는 것 같았고, 조금만 자기 앞에서 서성거려도 눈을 흘기고, 밥을 먹으 려고 하면 반찬을 집게도 못하게 못되게 굴었다. 괘씸하고 분했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웃음을 지어 보였고 숙제할 때면 은근히 옆에 앉 아서 수학문제를 풀어주기도 하고, 조선말을 한마디씩 가르쳐 주기 도 하였다. 거부반응을 보이던 팅팅은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 때마다 슬쩍 내 옆에 교과서를 내밀었고 나는 모르는 체 풀어주고 하면서 점 점 우리는 친해져 갔다. 자신 손녀딸의 횡포에도 꾸준히 웃어주고 조선말을 가르쳐주고, 수학문제를 풀어주는 나를 지켜보던 할머니는 내가 너를 살려 줄 테 니 중국에 있지 말고 한국에 가서 사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시는 것이 었다. 처음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매 맞는 것보다 무서웠다.

미국의 식민지로, 거지가 득실거리는 남녘땅에 북한사람이 가면 청와대 지하실에 가두고 온갖 고문을 하다가 죽인다고 교육받고 자 란 나였기에 또 그곳까지 팔려가는 줄 알고 무릎 끓고 할머니한테 빌 고 빌었다. 할머니 집에서 살게 해주라고, 나는 불평불만 안 하고 할 머니 하라는 대로 하고 살겠다고 제발 한국에는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인신매매 중간상으로 많은 탈북자를 보아왔던 할머니는 넌지시 웃으면서 너희 나라가 그래서 못산다고, 사람들을 눈뜨고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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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 만들고 있는데도 모르는 멍청이라고 한다.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고, 수령을 욕하는 할머니 가 미웠다. 더 이상 남한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셨지만, 그 후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남한의 드라마 “겨울동화”에 빠지기 시작했 다. 볼수록 배우들의 연기에 심취되었고, 간간이 할머니가 부르는 남한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에는 남한에 대한 수많은 물음표가 나를 대한민국이라는 적군의 나라를 동경하는 데까 지 이르게 되었다. 불과 3개월 만에 나는 자본주의를 터득하게 되었 고, 매일매일 엄습해오는 체포라는 강박감에서 자유를 얻고 싶었다. 이렇게 되어 나는 할머니에게 한국에 가면 돈을 갚기로 하고 한국 행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3. 인생 탈바꿈~

대한민국으로 오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생명 의 끝자락에서 몸부림도 쳐보고, 많은 곡절과 사연들이 있었지만, 대한민국으로 오기까지 노정은 이미 인터넷상이나 TV로 많이 알려 져 있어서 생략한다.

내가 그렇게 무서워했던 대한민국~ 나는 지금 이 나라의 당당한 국민으로, 떳떳이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에 입국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면서 나는 울고 또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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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내가 버린 나라, 조국이 버린 주민을 자유의 품에 안아 생명 과 용기를 준 대한민국에 최선을 다하리라 굳은 맹세를 다졌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의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대 한민국 흙 한 줌도 보듬고 싶을 만큼 이 땅이 고마워서 울고, 그래서 북한에 두고 온 그리운 얼굴들 때문에 또 운다. 이별은 떠나는 마음보다 보내는 마음이 더 아프다 했지만 살아도 삶이 없던 그 땅에선 이별의 권리마저 없었던 우리 탈북자들 모두가 아직도 탈북하지 못한 가슴 반쪽을 부여잡고 좋은 음식이면 좋은 음 식에 목이 메어 울고, 설날이면 또 가는 한 세월에 울고 있다. 분단 의 철책선이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듯 생살까지 찢으며 가로 지른 그 수난자들이 바로 우리 탈북자들이다. 한국으로 찾아오는 험난한 길에서 극도의 공포도 체험해 보았고, 외로워 보았고, 슬퍼 보았고, 친구를 잃은 상실의 아픔도 느꼈다. 나에겐 이젠 더 이상의 아픔이란 있을 수가 없다. 이제 또 어려운 일 에 부딪힐지라도 지금껏 겪었던 그 모든 좌절과 비극에 절대 비할 수 는 없다. 얼마든지 견딜 수 있으며 백번이라도 다시 일어날 용기가 혈맥에 가득 차 넘친다.

대한민국에서 나에겐 행복할 권리와 성공의 의무만 있으며 또 그 것을 위해 열심히 살날만 남았다. 통일부에서 통일교육전문강사로 서 한민족, 한강토인 남과 북이 왜 이렇게 둘로 나뉘어 서로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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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는 삶을 사는지, 참다운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장되는 진정 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자랑스럽게 호소하고, 호남대학 교에서 중국학과를 전공하며 더 큰 꿈을 위하여 달리고 있다. 대한 민국에 정착하여 초기에 지하철을 탈 때나 버스를 탈 때도 거의 모든 사람이 뛰어다니는 것에 의아하기도 했다. “왜 저리 뛰어다니지? 늦었으면 좀 일찍 다니지~” 나름 핀잔도 주면서 나만의 여유를 가져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똑같이 뛰고 있다. 늦어서가 아닌 열정의 산 물인 것 같다.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삶의 조건이다. 그 리고 열심히 달려가는 것은 내 몫이다. 꿈을 꿀 수 있고, 꽃 피울 수 있다는 것. 그게 너무 좋은 것이다.

영화 같은 이야기, 아니 영화보다 더 가슴 아픈 이야기를 글 몇 줄 에 쓸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대에 살아본 사 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북한의 현실을 알리고, 목숨을 건 두려 움의 연속에서 자유를 찾아 헤매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에 함께 통곡 하고 기도하면서 오늘도 나는 삶의 무게에 주저하지 않고, 통일이라 는 밝은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힘차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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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잘 오셨습니다.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장려상

조◦◦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추위와 굶주림, 숨 막히는 공포 속에서도 마음속에 등대처럼 간 직하고 그려보던 따뜻한 남쪽 나라, 대한민국에 도착하여 내가 들 은 첫 마디였다. 참 잘 오셨습니다. 중국에서 북송 되어(강제북송은 아니고 나 스스로 자수하고 들어 간 것이지만) 북한으로 들어간 뒤 지금까지 2년이란 세월, 인생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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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막바지에서 하루에도 몇 번을 생사를 오가며 보내던 그 시간 동 안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따뜻한 남쪽 나라는 내가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솟구치게 할 수 있었던 힘의 모든 것이였다. 그렇게 마음 속에 굳게굳게 자리 잡고 그려보고 또 그려보던 그곳에 오는 걸음이 었지만 기쁨과 설렘만이 마음속에 꽉 차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껏 말로만 듣던 그곳, 그 사람들이 반세기 동안 반목과 질시로 대립한 북쪽의 사람들인 우리를 어떻게 맞아줄지… 먼저 간 사람들을 통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적게나마 그 러한 위구심은 마음속 한곳에 머물러 쉬이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너무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하는 그 한마디, ‘아 역시 한 민족 한 겨레로구나, 어쩔 수 없는 하나로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마음속의 위구심과 긴장감은 눈 녹아내리듯 사라지고 어느덧 내 마음속은 안정과 따스함이 자리 잡았다. 그 속에서 머리를 치며 떠오르는 기억, 생각하는 것마저도 괴로 운 그 일들이 이 순간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 2년 전의 지금이라서…? 나는 2009년 4월에 탈북하여 중국에서 1년간 생활하다가 나 스스 로 중국공안국에 찾아가 자수하고 북으로 송환 되었다. 중국과 인접한 국경지대에서 나서 자라 여러 경로를 통해 세상 돌 아가는 형편을 간접적으로나마 많이 접하면서 북한 사회의 모순과 김정일의 부패상, 현시대에 반한 북한체제의 불합리성에 대해 알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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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 알고 있었던 나로서 북한 체제에 대한 그 어떤 동경심으로부터 스 스로 다시 입북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민족이라고 자화자찬하는 김일성민족구 성원들의 몸값이 얼마인지 중국에서 1년간 생활을 하며 체험한 나 는 단지 북한에서 태어난 이유 하나로 중국인들한테서 차별받고 무 시당하는 것에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던 터에 한순간의 예기치 않 은 일로 인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북으로 들어갈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에 내가 한국에 올 생각을 했더라면, 그리고 왔더라면 인생 길을 많이 질러왔을 것이다. 내가 처음 한국행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은 중국감옥에 비 치되어 있는 책 중에서 ‘한비야’님이 쓰신 글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그분의 글을 읽고 한국으로 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고 또 한국의 여 러 단체도 탈북하여 한국으로 가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 을 알게 되었다. 중국감옥에 들어와 며칠 흐른 뒤 마음이 안정되고 이성으로 돌아 오니 암담한 북한의 실상이 밟혀오며 내가 한 선택에 후회가 밀려들 기 시작했다. 허나, 이미 엎지른 물, ‘이렇게 된 바엔 이 기회에 북한에 나가 그동안 보고 싶었던 사람 들을 한 번 더 보고 다시 오자, 나는 자수를 하고 나가는 터이니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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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처벌이야 안 하겠지, 이내 풀려나겠지.’ 북한법의 양면성에 대해 서는 어느 정도 알지만, 그들이 북한 노동당의 포섭정책에 대해 국 민들에게 그렇게 입 아프게 떠뜨는 터에 보는 눈과 선전을 목적으로 라도 인차 내보낼 거야! 이것이 그때 내 생각 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내 인생 최대의 오산이고 그 선택은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최악의 선택인 줄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중국감옥에서 1달간 체류한 나는 중국 단동을 거쳐 북한 신의주 로 송환되었다. 중국경찰들에게서 문건을 넘겨받으며 우리를(내가 북송될 때 여 러 명의 사람과 함께 북송되었었다.) 얼핏얼핏 쳐다보는 북한 보위 원들의 눈빛을 보니 어느 정도 마음을 놔도 될 듯싶었다. 허나 그것 역시 오산, 중국경찰들이 가자마자 그들은 금시 포악 한 야생짐승으로 변하였고 그들의 눈빛은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기 에 충분하였다. 함께 북송된 분들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탓에 그들이 묻 는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를 하지 못해 대답을 제때 제때에 하지 못 하였다. 그러자 바로 주먹과 구둣발이 그 나이 많으신 분들의 얼굴이며 허 리며 배에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그분들이 쓰러져 땅에 뒹구는 것을 보고 나는 일으켜 드릴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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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하고 엄습하는 공포에 눈을 딱 감고 말았다. ‘너 새낀 어디서 잡혀 왔어?’ 내 차례가 되어 그들이 묻는 말 이였다. ‘전 잡혀 나온 게 아니고 자수하고 나왔습니다.’ ‘이 개새끼 그래 지금 칭찬이라도 해달라고 지껄이는 게야? 거기 서 그냥 뒈지든지 하지 무슨 임무 받고 또 넘어왔어?’ 환대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이러한 태도에 난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간단한 확인을 마치고 자그마한 차에 짐짝처럼 구겨 실린 우리는 신의주보위부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나는 1달 동안 자수하고 나왔다 는 이유로 간첩혐의를 받으며 모진 고문을 당했다. 나를 담당 예심 했던 보위원은 간첩 잡아 실적 올릴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모질게 때리고 얼리고 하며 나에게서 자그마한 언질이라도 잡으려고 안 깐 애를 썼다. 그때에야 이들에게 나는 강제로 북송된 사람들보다 더 위험한 존 재이고, 나 스스로는 이 세상 가장 어리석고 미련하고 한심한 놈임 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하지만 불행과 고통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보위부의 조사를 넘기고 신의주 보안서로 이송된 나는 그것에서 그해 2010년 12월 말까지 수용생활을 하였다. 그곳에서도 별도의 감시와 심문은 계속 되였고 거기에 굶주림은 말 그대로 극도였다. 한 끼 식사는 삶은 통강냉이 130~150알과 소금물 한 그릇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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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였다. 아무리 건장하던 사람도 그곳에서 1달 지나면 앙상한 뼈에 얇은 가죽을 씌어놓은 모양으로 되어 버린다. 아침 5시부터 기상시켜 농사일과 각종 공사, 보안서에 떨어지는 온갖 사회적인 노동을 수용자들이 맡아서 해야 하였으며 일감이 없 으면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시키는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함께 생활 하던 여자애들 여럿이 죽어 나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불과 한두 달 전에 그곳에 들어올 때만 하여도 날씬한 몸매며 뽀 얀 피부며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던 그들이 극도의 굶주림과 고 된 노동, 열악한 환경에서 병까지 만나 그 아름다움은 어느 구석에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 나가는 것을 보며 태어 나 지금껏 진심에서 우러나왔건 아니었건 조국이라 이름 지어 부르 던 이곳이 이 세상 가장 극악한 인간 도살장임에 마음속 머릿속 모든 것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고 텅텅 빈 가슴에 허탈감만 밀려들었다. 믿기지 않는 그 일은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었다. 북한에선 탈북한 사람들을 민족반역자라 낙인찍고 죄목도 민족반 역죄로 규정짓고 처벌한다. 허나 그들이 정말 민족을 배반하였는가? 그들은 배고프고 살기 힘들어 남의 나라 땅에 갔지만, 마음속에 는 언제나 고향에 두고 온 부모형제 처자식들을 묻고 좋은 일 생기거 나 색다른 음식 앞에 놓이면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괴로워하고 힘 들 때면 또 힘들어 생각을 떠올리며 한시도 잊지 않고 고향 생각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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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온 이들 생각에 마음을 저미며 살아간다. 체제나 정치는 거부할지라도 나서 자란 그 땅, 그곳 그 사람들을 잊지 못하며 아픔으로 포장해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이다. 결코, 민족을 배반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민족반역자들을 규정짓는다면 국민들의 생활은 안중에 도 두지 않고 국민들이 원하지도 않는 황당한 그 체제를 유지하려고 저들만의 만족스러운 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이 고열을 짜 내 대포, 총을 만들고 국민들이 피땀으로 살쪄가는 김부자 족속들과 그 체제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민족을 배반한 자들인 것이다. 그해 겨울에 접어들며 입고 있던 홑옷 한 벌밖에 없던 나에게는 추위라는 또 다른 고통이 덮쳐들었다. 압록강의 눈바람 속에서 내 몸 을 가려 줄 수 있는 것은 북송될 때 입고 나갔던 봄, 가을옷 한 벌이 전부였다. 스스로 나왔다지만 아무런 준비나 계획도 없이 불식간1)에 결심하고 행한 일이라 남들처럼 더 껴입을 철 맞지 않은 옷도 없었 다. 그곳에서 입은 동상으로 나는 회령시보안서예심과 구류장에 있 는 동안 손, 발톱 모두 뽑게 되었다.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나는 반드시 여기서 살아서, 꼭 살아남는 것으로 이들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하고 스스로 악착같이 몸 관리를 하였다. 그 해 12월 말 회령보안서로 이송 되어 그곳에서 다음 해 6월까지 예심을 받았고 그 과정에 재판에서 노동교화형 1년을 판결받고 이름

1)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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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떠올려도 몸서리쳐지는 전거리제2) 12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첫 재판 때 나는 스스로 나온 것을 내세우며 예심기록을 전부 부인하고 판결을 거부했었다. 허나 나의 그러한 행동은 그들의 심기만 불편하 게 하여 1달 후 2차 재판에서는 가형3)까지 받게 될 상황에 이르렀다. ‘중국에서 자수는 인정도 안 한다, 게다가 네가 무슨 맘으로 다시 나 왔는지 어찌 안단 말인가? 이것도 관대하게 봐줘서 1년 보내는 거니 그리 알고 군말 말고 판결받고 갔다 오라’는 것이 돌아온 대답이었 다. 살인왕국 인간 백정들에게 자그마한 미련이라도 가졌던 어리석 은 인간에게 내려진 어리석음의 죄값 이였다. 북한의 감옥들에서 그곳 사람들끼리 통용되는 ‘북한사회에서 자 수는 자멸의 길이다’는 말이 뼛속까지 사무치었다. ‘그래… 어리석은 나의 죗값을 치르고 꼭 살아서 나가 너희에게 털끝만치라도 미련을 가지는 사람들이 또 있다면 그들을 깨우칠 것 이다.’ 교화소 생활은 시작되었고 나는 그곳에서 인간이 살아서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굶주림과 아픔, 수모, 분노를 느껴보았다. 씹을 적마다 흙이 씹히는 아기 주먹만 한 뜬 강냉이밥과 걸쭉한 흙탕국(난 처음 거기 들어갔을 때 국이 너무 걸어서 여기엔 무슨 된 장이 이리도 많아 된장을 이렇게 많이 넣고 국을 끓이는가 하고 생각

2) 전거리라는 지역에 소재한 3) (형벌이) 더욱 무겁게 내려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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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었다. 이미 있던 사람들로부터 금방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땅에 파묻은 염 시래기를 국 끓이는데 따로 넣을 소금이 아깝다고 대충 씻 고 그대로 끓인 탓에 가마에 가라앉은 감탕이었다.)에 목숨을 걸어 야 했고 어깨에 피멍이 들도록 통나무를 메고 무더운 삼복 철에 등에 는 아름드리나무 단을 메고 통나무를 쇠고랑으로 연결해 배에 걸고 맨땅에서 끌어야 했으며 사나운 채찍을 피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허 리 한번 못 펴고 밭고랑을 기어 다니기도 하였다. 그 속에서 어리석은 자신을 끝없이 저주하였고 반드시 살아나가 이 복수를 하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또 다지며 그 생활을 이겨냈다. 2012년 1월 나는 그곳에서 살아나왔고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모 진 고생 속에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던 한국행을 실현하기 위 해 노력하던 중 구류장과 교화소에서부터 함께 고생하며 생각을 합 친 동료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살아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결심을 하고 떠나 한국에까지 오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그때와 내가 대한민국에 처음 입국하던 때, 그리고 지금을 비교해보곤 한다. 태어나 20여 년 세월 어머니 조국 이라 부르던 그곳은 찾아간 자식에게 쇠고랑을 채워 죽음으로 떠밀 었고 내 손으로 수년 세월 고생하며 피땀으로 세운 집은 비법 월경 하였다는 이유로 강제로 빼앗아 나를 한지로 내몰았지만 받아만 줘 도 고맙겠다고 생각했던 대한민국은 찾아온 우리를 참 잘 왔다고 당 신들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 국민이라며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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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주고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꿈을 펼칠 수 있게 진학의 길도 열어주었고 안착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해 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 땅에 오늘과 같은 현대화가 이루어지는 동 안 아무 보탬도 주지 못하고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들고 앉 은 것 같아 늘 송구하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북한에서는 조국을 단 순히 조상의 뼈가 묻혀있고 내가 나서 자란 곳 이 아닌 진정한 자기 삶을 펼칠 수 있는 곳이라고 정의한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리고 그곳이 바로 이 땅 대한민국임을 뼈아픈 경험을 하고서야 알 게 되었다. 어떤 이 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얻어진 조국이지만 나에게는 목 숨과 바꿀 각오로 찾아온 곳이기에, 어렵게 안긴 조국이기에 더없 이 소중하다. 내 삶 그 자체이기에… 내 몸 한 부분과도 같은 조국, 대한민국이여! 그대의 자식들을 위해 항상 건강하시라! 그리고 영원무궁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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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 통일 빵집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장려상

김◦◦

나는 2008년 한국에 왔다. 북한에서 몰래 보던 한국드라마에서 주 인공들의 절박하고 애절한 사랑의 대사들 보다 그들 뒤로 배경이 된 빵집이 궁금하고 그들이 타고 다니던 차가 타고 싶었다. 정말인지 가 짜인지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몰래몰래 듣던 노 래가 조선족들의 노래인 줄 알았는데 전부 남한의 노래라는 사실을 듣게 된 후 거짓말하지 말라며 직접 확인해 보겠다고 마음으로 다짐 한 한국에 내가 왔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배부르게 먹고 즐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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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산다고 수도 없이 들었고 남한은 꽃제비1)들이 넘쳐나고 이 밥 구경은 할 수도 없다고 귀에 못이 앉도록 들었는데, 30년 가까이 속고 산 것이 분하고 화가 난다. 나는 벌써 한국에 와서 정착한 지가 6년이 되었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며 대학을 다닌 지가 5년이 되었 다. 나는 모 대학에서 외식조리학과에 다니며 제과제빵과 외식학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다. 올해 졸업반인데 대학원 진학을 목표에 두 고 있다. 내 꿈은 통일조국이 되면 내 고향에 돌아가 그곳에 멋진 빵 집을 차리는 것이다. 내가 배운 기술을 고향 땅 사람들에게 마음껏 펼 쳐 보여 그들에게 맛있는 빵과 제과들을 맛보이는 것이 꿈이다. 며칠 전 학교에서 여러 가지 빵을 제조해서 집에 아이들을 주기 위해 가지 고 왔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딸에게 줬는데 이 녀석이 얼마 먹지 않 고 먹다 남은 빵들을 지우개처럼 공책에 낙서한 것을 지우고 있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딸애에게 소리를 쳤다. “그 빵이 없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너는 그걸 그렇게 장난질하는데 사용하는 거 니!” 딸아이는 내가 큰 소리로 말을 해 너무 놀랐는지 한참을 울었다. 딸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 길고 길었던 겨울이 생각났다.

1995년 겨울. 나는 학산고등중학교 6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그해 여름부터 사

1) 북한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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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 사이 떠돌던 ‘위기의 시기다, 고난의 시기다’라는 말은 겨울이 되어서야 몸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엄마는 마을에서 사람들 머리를 해주는 일을 하며 우리 4식구 생활을 책임지셨는데 머리를 하는 사 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더니 겨울 즈음에는 거의 찾아오는 이가 없었 다. 그것은 곧 밥상으로 이어졌다. 간간이 먹던 고기반찬은 물론이 요 나물 반찬도 거의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옥수수 죽이나 술 찌꺼기 로 만든 술빵을 먹는 것만으로 행복해야 하는 시기였다. 학교에 가면 40여 명이던 반 아이들은 하루가 지날수록 등교하는 숫자가 줄어들었다. 나중에는 반에 나오는 여자아이는 나 혼자였다. 다른 여자아이들은 나물을 캐거나 나무를 하러 산과 들로 돌아다녔 다. 나는 그나마 여름 가을에 엄마가 머리 해주는 일을 많이 해두셔 서 겨울을 날 정도의 옥수수와 술빵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왔다. 거의 머리 하는 손님이 없던 집에 몇 집 건너 사는 영철이 오빠가 머리를 하러 와있 었다. 영철이 오빠네는 엄마와 영철이 오빠, 그리고 나보다 몇 살 아 래인 동생 영호, 이렇게 세 식구였다. 그런데 영철이 오빠는 군대의 부름을 받고 머리를 자르기 위해 우리 집에 온 것이다. 정확히 말하 면 엄마의 말을 들으니 머리를 자르러 온 것이 아니라 집 앞에서 서 성이던 영철이 오빠에게 엄마가 왜 그렇게 서성이냐 물으니 처음에 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더니 이내 군대에서 오라는데 머리를 자르 고 가야 하는데 머리를 자를 돈이 없다고 머리 자르는 가위를 빌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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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어쩔까 고민 중이었다고 한다. 엄마는 군대에 있다가 돈이 생기 면 달라고 하면서 영철 오빠의 머리를 잘라 주고 계셨다. 나는 학교 를 다녀오자마자 엄마가 만들어 놓은 술빵을 부엌에서 꺼내와 머리 를 자르는 것을 구경하며 먹었다. 내가 술빵을 먹는 모습을 머리를 자르는 영철이 오빠는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자꾸 보는 것이 싫어 서 방으로 들어가려다 그만 술빵을 머리카락을 잔뜩 밀어 모아놓은 곳에 떨어트렸다. 나는 얼른 주워들었지만 잔 머리카락들이 잔뜩 빵 사이에 묻어 있었다. 나는 물에 씻어 먹기 위해 빵을 집어 들었는데 엄마가 속병 난다고 버리라고 소리를 크게 치셨다. 나는 너무 아까 웠지만, 그냥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영철 오빠가 머리를 자르는 엄마에게 빨개진 눈으로 물어 보았다. “성철 오마니! 그거 저 주시면 안 됩니까?” 엄마는 나에게 했던 말과 똑같이 영철 오빠에게 말했다. “이거 먹으면 속병 나서 안 돼!” 영철 오빠는 엄마의 말에도 다시 한 번 간청하였다. “일없습니다! 걱정 마시고 저 주세요! 우리 영호가 2일 동안 아무 것도 못 먹었습네다!” 엄마는 오빠의 말에 한참을 생각에 잠기시더니 머리 다 자르고 얘기하자 하시고서는 묵묵히 머리를 자르셨다. 한참 후 머리를 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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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후 영철 오빠의 머리까지 감겨주시고는 부엌으로 가서 큰 술빵 몇 개를 보자기에 싸서 나오셨다. 그리고는 영철 오빠에게 그 빵을 주 면서 군대 잘 다녀오라고 하였다. 영철 오빠는 한참을 고맙다는 인 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영철 오빠가 돌아간 후 나는 한참을 엄마에 게 화를 내었다. 저 빵은 엄마의 몫으로 따로 빼놓은 건데 저걸 주면 엄마는 정말 조금씩 드셔야 하기 때문이었다.

영철 오빠가 집에 머리를 하러 다녀간 후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학 교가 끝나고 나는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집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영호를 보았다.

“야! 리영호! 너 여서 뭐하는기야!” 영호는 눈이 괭한 얼굴로 손에는 작은 나무 몇 개를 들고 있었다. “누나! 이 나무랑 그 빵이랑 바꿔주면 안 됩니까?” 영호는 몇 일 전 자기 형이 가져간 술빵과 저 잔 나무 몇 개랑 바 꾸자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은 내 동생이 내 말을 가로막으며 말 했다. “나도 빵 구경도 못 했어 야! 그리고 그 나무쪼가리 가지고 무슨 빵을 달라 하네. 일 없으니께 날래 돌아가라.” 동생의 단호한 말에 영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없이 뒤돌아 서 갔다. 어째 그 뒷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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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아! 우리 빵 조금만 때어서 저 녀석 줄까?” “언니 빵이나 때주라~ 난 얼마나 아껴서 먹고 있는데…… ” 난 선뜻 내 빵을 가져와 영호를 주기가 겁이 났다. 영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집에 옥수수와 빵이 어느 정도 있 다고 소문나면 다른 어른들이 찾아와 뺏기라도 할까 봐 나는 그것이 더 겁이 났다. 음식이 사람을 잡아먹을 형국이었다.

영호 녀석이 집 앞에 다녀가고 3일인가 지나고 어머니는 나와 오 빠에게 신의주 큰 집에 다녀오라고 했다. 학교에 나가도 아이들이 없 어서 공부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으니 어머니는 그나마 여건이 좋은 신의주 큰 집에서 며칠간 집안일을 해주고 오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 다. 심심하기도 하고 큰 집 언니들을 본 적도 오래되어서 나는 다녀 오겠다고 하였다. 오빠는 집에 여자들만 두고 떠나는 것이 불안하다 며 가기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신의주 큰 집은 나 혼자 다녀오기로 하였다. 다음날 일찍 기차를 타기 위해 나는 역전으로 갔다. 역 안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궁금해서 가보니 간 밤에 맹추위에 역 안으로 추위를 피하려 들어 왔다가 추위와 배고픔 에 아사한 시체를 놓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 시 절 아사한 시체들은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던 시기였다. 학교 가 는 길이나 장마당 가는 길이나 어디서든 어렵지 않게 보는 광경이었 다. 그런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이유는 엄마와 아이가 너무 꼭 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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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고 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시체 옆에는 작은 나무들 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났다. 아니겠지 하면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보니 역시 영호와 영호 어머니였다. “미안하다! 영호야!” 마음속에서 계속 미안하다는 말이 맴돌았 다. 나는 보안원들이 와서 짚으로 시체를 덮기 전까지 한참을 읊조 렸다. 그리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영호의 배고픈 마음을 슬픈 눈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나무를… 그해 겨울은 너무 길고 너무 춥고 너무 배가 고팠다. 딸아이가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에 생각에 잠겼던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엄마! 반성문 다 썼어요.”

아이가 건낸 반성문에는 음식으로 장난치지 않겠다는 약속과 용 서해달라는 애교가 함께 있었다. 나는 딸아이에게 다가오라고 하고 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 하며 꼭 안아주었다. 우리 아이들은 모른다.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지금 누리고 있 는 여유로움과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말 이다. 아니 어쩌면 그 상황을 겪어 보지 못한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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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모를지도 모른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몇십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그런데 공산당과 간부들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말로 포장하고 자기들의 잘 못을 백성들에게 떠넘겨버렸다. 아직도 고향에 남아 있는 오빠는 ‘고난의 행군’ 속에 갇혀 있다. 하지만 눈멀게 하고 귀 막는 것이 영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분명 머지 않은 시간에 통일이 된다고 확신한다.

그 날이 오면 나는 고향 역전에 큰 빵집을 열 것이다. ‘무산 통일 빵집’ 그곳은 고향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만들어 제 공하는 곳이 될 것이다. 혹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영호도 그 빵집 을 찾아와 줄 것이다. 나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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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있어 행복하고 내일이 있어 행복하다.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장려상

이◦◦

오늘도 나는 스마트폰 알람에서 울리는 흥겨운 음악소리에 달콤 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반쯤 열려있는 베란다 창문으로는 상쾌 한 새벽공기와 함께 눈부신 햇살이 살며시 들어오고 맑은 아침을 노 래하듯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재잘재잘 들려오는 이 아침은 나의 정 신을 맑게 해준다. 잠에서 깨어나 창밖을 바라보니 맑게 갠 푸른 하 늘위에 산봉우리를 넘어선 찬란한 태양이 누리를 비치고 있고 베란 다 앞 화단에는 활짝 핀 꽃들 사이로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이 아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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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듯 푸른 잎을 살랑살랑 흔들고 그 나뭇가지 사이로 이름 모를 새 들이 분주히 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미모를 뽐내며 아름다운 소리로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열심히 지저귀고 있다. 새해를 맞이한 지 엊 그제 같은데 벌써 5월 중순이다. 화창한 봄은 언제 왔다 갔는지 날씨 는 벌써 여름 날씨에 접어들었다. 분주한 일상 속에 하루하루가 어 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그래도 언제나 기분 좋은 아침이다. 누구나 바쁜 아침이지만 요 즘 들어 나의 아침은 몹시 바쁘다. 사내애들은 그냥 밥 먹이고 가방 메어 보내면 된다고 그러던데 나는 딸아이여서 그런지 머리단장부터 옷차림에 이르기까지 손길이 많이 간다. 아침에 큰딸을 밥 먹이고 준 비시켜 학교에 보내면 다음은 아기와 내 차례이다. 아기 기저귀를 갈 아주고 분유를 먹여 서둘러 준비를 하고 친정집에 아기를 맡기고 대 학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숨 가쁘고 행복한 전투이다. 이렇게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시간 식구들이 단란하게 모여 앉아 푸짐하 고 맛있는 저녁상을 마주하고 낮에 있은 일을 미주알고주알 나누는 우리 집 저녁 풍경은 마냥 즐겁고 행복하다. 맏딸이 자랑하며 보여 주는 피아노 연주와 댄스 실력도 봐줄만 한데 언니를 흉내 내며 엉덩 이를 돌리며 춤을 추는 아기의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보고 있노라면 온 집안 가득 웃음소리가 넘치고 가족들의 입이 귀에 걸려 돈 놓고는 못 웃어도 아기 놓고는 웃는다던 옛 속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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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산책로를 거닐면서 불야성을 이 룬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감상하다보면 문득 북한의 기억들이 떠 오른다. 지금 대한민국에서의 나의 삶은 북한과 너무 대조적이다. 언제나 전기가 살아 있고 수돗물이 콸콸 나오고 도시 가스가 들어오 며 전기밥솥으로 밥을 짓고 세탁기가 빨래를 해주며 일회용 기저귀 를 사용하는 나의 현실이 북한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북한이지만 행복하고 즐거움 뒤엔 언제나 나의 뇌를 괴롭히며 검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악령 같은 존재이다. 그 악령이 나의 뇌를 북한으로 끌어다 놓는다. 그리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소름 돋는 북한일상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첫닭이 우는 이른 새벽이면 집집마다 쾅쾅쾅 문을 두드리며 아침 동원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인민반장의 고함소리에 너도나도 단잠에서 화들 짝 깨어나는 게 북한의 새벽이다. 이것이 하루 시작이고 아침일과이 다. 정말 짜증나고 싫지만 그래도 누구하나 대놓고 불평 한마디 못 하고 인민반장 지시대로 삽이나 곡괭이 아니면 자루나 대야 같은 운 반용기를 갖춰가지고 손으로 눈곱을 비비며 반장을 따라 공사장으 로 군말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은 중세기 부역에 끌려가는 노 예들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이렇게 매일 새벽이면 모든 가정에서 한 명씩 공사장에 나가 한 두 시간씩 무보수로 일을 하고 들어간다. 공 사장에 갔다 와도 한숨 돌릴 새 없이 집안일을 해야 한다. 우선 수도 가 안 나오니 물통을 들고 압록강에 가서 물을 길러 와야 한다.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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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막기 위해 압록강에 나가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아침시간이면 물 긷는 사람들로 붐빈다. 도시의 모든 폐수와 하수도가 그대로 흐 르는 강물은 그야말로 세균이 득실거리는 더러운 물이지만 그 물로 밥도 짓고 식수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해야 한다. 물을 길어 다 물탱크에 채우고 나면 장작을 패고 불을 지펴 밥을 지어야 한다. 나무가 마르고 날씨가 좋으면 장작불이 잘 붙는데 날씨가 흐려 기압 이 낮으면 불이 잘 붙지 않고 아궁이로 연기가 쓸려 나와 눈물을 흘 리며 부채질을 하여 고생스럽게 밥을 지어야 한다. 별로 차릴 것도 없는 아침상이지만 힘든 하루를 버티자면 아무것 이라도 대충 해 먹어야 하는데 그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 고생스럽 게 밥을 해 먹고 나면 고민거리가 또 생긴다.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집엔 화장실이 없어 동네에 판자나 토피로 지은 쓰러져 가는 공동변 소로 가는 것이다. 북한은 대부분 하모니카 식 공동주택에서 사는데 극소수 단독 세대를 제외한 대부분 공동 세대들은 화장실이 없으므 로 동네 공동변소로 가야 한다. 공동변소도 사용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을 놓치면 문을 잠가 버리므로 바쁘던 안 바쁘던 하루를 보내려 면 줄을 서서 일을 봐야 한다. 아파트 집들은 화장실이 있지만 수도 가 어쩌다 나오니 계단으로 걸어 내려와 공동변소에 줄을 서야 한다. 제일 고생스러운 사람들은 고층에서 사는 노약자들이다. 몸도 물 편한데 높은 고층에서 내려와 공동변소에 줄을 서서 일을 보자니 얼 마나 힘들겠는가? 이렇게 볼일까지 마치고 나면 애들이 있는 집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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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애를 유치원까지 데려다 줘야 한다. 그것도 도시락을 싸서 보낼 여유가 있는 집이라야 가능한 일이고 도시락은 커녕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든 대다수 집들에선 애들을 그냥 유치원이 고 뭐고 안보내고 그대로 방치한다. 아침마다 어린이집 통학버스가 아파트 현관 앞까지 찾아와 선생님들이 살뜰하게 반기며 애들을 데 려가는 대한민국과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다. 그리고 나면 남편은 월급도 배급도 안주는 직장에 출근한다. 직 장에 안 나가거나 안다니면 보안서에 잡혀가 출근 안한 정도에 따라 최소 1개월부터 최장 6개월까지 강제노동단련대에서 가혹한 폭행을 받으며 강제노동을 해야 하므로 무조건 보수도 없는 직장에 출근해 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집식구를 벌어 먹일 무거운 책임을 집에 남은 가정주부들이 대부분 떠안는다. 여름이면 얼굴이 까맣게 타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식구들을 벌어 먹이느라 무거운 짐을 지고 뙤약볕 에 뛰어 다니고 눈보라 몰아치는 북방의 추운 겨울이면 손발이 꽁꽁 얼어 추위에 떨면서도 가족을 위해 행방 없이 뛰어 다녀야만 했다. 몸이 혹사되어 망가지는 것은 어차피 피하지 못할 운명이라 받아 들이지만 아무리 뛰어 다녀도 특별히 안정적인 벌이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나도 북한에서 생활할 땐 살아 보려고 안 해 본 일이 없 는 것 같다. 여느 집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집도 콧구멍만한 작은방 한 칸에 부모님과 오빠 언니 남동생과 나까지 6식구가 살았다. 밤이 면 자리가 비좁아 잠자리가 불편하지만 그렇게 살아야 하거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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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춘기도 그 작은 방에서 식구들 과 함께 보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그러나 북한은 하모니카식 공동주택이 대부분인데 절대 다수 인 민들이 그런 집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작은방이라도 먹을 것만 있으 면 큰 불평 없이 살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먹는 문제이다. 남 들처럼 굶어 죽지 않으려면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야 한다. 그래서 나는 빵도 만들고 순대도 만들어 팔기도 하고 깊고 먼 시 골에 중국 상품을 가지고 가서 약초, 옥수수, 콩 등 농토산물과 염소 를 비롯한 축산물도 가져다 팔기도 했으며, 그것도 잘 안 되어 기차 를 타고 평양과 함흥을 비롯한 대도시를 다니며 식료품과 의류장사 도 해 보고 금속과 약초를 날라다 국경경비대에 돈을 찔러 주고 중국 과 밀수도 했지만 국경단속이 점점 심해지면서 밀수도 못하게 되었 다. 나중엔 중국 친척들에게 부탁하여 중국 상품을 세관으로 받아 장 마당 상인들에게 넘겨주면서 비교적 먹고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 어졌지만 중국에서 보낸 짐을 받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하는 일마다 국가에서 모두 불법으로 정해 놓은 일이어서 세관 검사들에 게 뇌물을 찔러 주고 그들의 부탁을 다 들어 주어야 세관에서 물건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10여 명이 넘는 검사들의 요구를 다 들어 주자 면 너무 곤란하다. 어느 한명의 요구라도 잘 들어주지 않으면 그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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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 제재를 가하고 제동을 걸어 중국에서 보낸 짐이 다시 퇴송되거 나 세관창고에서 몇 주일 씩 잡혀 있어야 한다. 과일이나 식료품 같 은 것은 인차 받지 못하면 겨울엔 얼고 여름엔 썩고 의류나 공업품 은 장마당에서 요구하는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계절이 바뀌거나 다 른 사람들이 먼저 물건을 뿌려 놓아 물건을 가져가도 장마당 상인들 이 받아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이윤의 80~90%정 도 뺏겨도 회전만 빠르면 된다는 위안으로 검사들의 부탁을 다 들어 주고 세관에서 짐을 빼내 와야 한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은 세관 에서 통과한 물건이 세관 밖으로 나오면 단속 품으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관 앞과 길거리에 단속을 나온 규찰대와 단속원들에게 걸 리면 또 뇌물을 찔러 주고 집까지 갖고 와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에 서는 개인들이 사고파는 모든 것이 다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법 대로 살자면 직장에 출근하여 오직 국가에서 주는 식량배급과 부식 물로 살며 직장에서 주는 월급으로 국영상점 생활필수품을 사서 생 활해야 하는데 국영상점은 텅텅 비어 있고 식량배급과 부식물은 아 예 주지도 않고 월급도 없는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무슨 짓이 든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 국가를 믿고 법을 준수하고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생활한 사람들은 식량배급이 끊긴 90년대에 수백만이 굶어 죽었다.

그리고 굶주림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수십만 북한 주민들이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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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을 넘어 탈북 하여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를 떠돌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숨어 살고 있다. 그래도 인민들은 불평이나 정 부를 탓하지 못한다. 불평한마디 하고 정부의 뜻을 잘 받들지 못한 사람들은 반역자로 낙인 되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중세기적 고 문과 학대를 받으며 숙청되고 그 가족들도 연좌제에 걸려 모두 정치 범 수용소로 보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사 람만 수십만이다. 그것뿐만이 아닌 죄 아닌 죄를 지은 생계형 범죄 자들도 군중들을 강제로 집합시켜 놓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 처 형하여 주민들이 절대로 반항도 불평도 못하게 공포를 조성한다. 주 민들이 하는 일이 모두 불법이고 범죄지만 워낙 국가에서 해결해 주 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단속하여 정도에 따라 뇌물을 받아먹고는 눈 감아 주고 그냥 넘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단속하는 시기와 단속 하는 사람들 기분에 따라 죽을 수도 있고 살수도 있다. 단속하는 사 람들 처지도 별로 좋지 못하다. 그들은 식량과 월급을 받긴 하지만 본인 혼자의 식량과 소주 몇 병 값밖에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월급으 로 가족들 생계를 유지하기가 너무 어려워 밤낮으로 주민들을 단속 하여 뇌물을 받지 않고 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단 속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자기들도 집에 소중한 가족을 먹여 살 려야 하고 그 자리를 유지하거나 출세하려고 간부들에게 뇌물을 바 치려면 주민들을 착취하고 피눈물을 흘리게 해야 하는 악마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서 살 때 우리 옆집에 아기 한명인 신혼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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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연로하신 어머니까지 모시고 4식구가 살고 있었는데 아기 이름 을 ○○라고 불렀다. ○○아빠가 시보안서 순찰대에 다녔는데 ○○ 아빠는 4식구를 벌어 먹이느라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밤낮을 지새우며 국경연선에 잠복도 나가고 기차역 대합실과 길거리를 다니며 주민 들을 단속하여 생계를 유지했는데 사람이 인정 많고 마음이 너무 여 리어 웬만한 사람들은 불쌍하다고 다 놔주고 단속을 해도 뇌물을 조 금 밖에 못 받다보니 가정형편이 점점 어려워지고 거기에 간부들에 게 뇌물도 못 받치니 간부들 눈 밖에 나서 결국엔 먹을 알 없는 김일 성기념탑 경비대로 조정되었다. 그런 남편에게 매일 바가지를 긁던 ○○엄마 목소리가 쟁쟁히 들려오고 ○○할머니가 살길이 막막하다 고 한숨을 길게 내쉬며 푸념하던 일들이 눈에 선하다. 잘못 만들어 진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기가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인민들을 탄압하 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로 변하는 세상에서 법관들과 단속원들도 어찌 보면 부조리한 세상이 낳은 불쌍한 인간들이다. 그런 세상에서 나라의 모든 국력과 전체인민이 독재자의 정권유지를 위한 도구와 노예로 전락되어 버렸다.

미래도 희망도 없는 인간 생지옥에서 더는 살래야 살 수가 없어 눈보라 몰아치는 추운 겨울 2살짜리 어린 딸을 등에 업고 목숨을 걸 고 압록강을 건너 사선을 헤쳐 이역만리를 돌아 천신만고 끝에 찾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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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 러나 아무리 북한보다 살기 좋은 대한민국일지라도 처음부터 순탄했 던 것은 아니었다. 세계와 단절된 너무나 상반된 체제에서 살다보니 여기서 접하는 모든 것이 신기하며 낯설고 생소했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는 게 없었고 그것 때문에 누가 모른다고 무시 할 것 같아 혼자서 속을 많이 태웠다. 아는 사람도 없고 어디에 물어 보고 도움 받을 데도 없이 밖에 나가면 외톨이 같아 마음은 항상 무 겁고 내가 과연 언제가 되면 제대로 정착하여 살아갈 지 답답하기만 했다. 이렇게 남한 사회를 하나하나 힘들게 알아가고 한걸음, 한걸 음 힘겹게 정착하는 과정에 저에게 희망을 안겨준 것은 다름 아닌 양 산경찰서 보안계장님이셨다. 시와 경찰서에서 탈북민들을 위해 조 직한 행사들에서 우리 탈북민들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 고심하시던 보안계장님께서 나의 작은 재능을 발견하시고 나를 격려해 주시면서 작곡가님을 소개시켜 줄 테니 가수로 데뷔하라고 하셨다. 계장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너무 꿈같아 내 귀를 의심했다. 사실 어릴 적부터 노래에 취미가 있어 학교 음악소조에 다니기도 했고 사회에 나와서 는 기껏해야 명절이면 기관기업소에서 조직한 김일성, 김정일을 찬 양하는 충성의 노래모임이 같은 것에 출연하는 정도였지만 가수라는 꿈은 나 같은 처지에서 감히 엄두도 못 내고 바라보지도 못하는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장님이 나보고 가수가 되 라고 하시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 펼쳐져 작곡가님이 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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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들어 주시고 아주 특색 있고 좋다고 하시며 저를 위해 정성 껏 노래도 지어주시고 앨범도 만들어주셨고 계장님과 작곡가님의 적 극적인 도움으로 나를 위한 후원회가 조직되어 많은 분들이 아낌없 는 도움과 응원을 해 주셨으며 나를 양산시 가수로 내세워 주셨다. 나는 나의 앨범을 받던 날 너무 감격하여 눈시울을 적셨다. 낳아 주신 부모님도 생각하지 못한 나의 작은 재능을 발견하시고 이렇게 가수로 내세워 주신 계장님께 너무 고맙고 감사하여 무슨 말로 인사 드려야 할 지 생각이 안 떠올랐다. 딸애가 북한 애라고 학교에서 성 향이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때도 계장님과 보안계 형 사님들이 적극 나서서 도와주셨으며 딸애가 그늘없이 공부하도록 학 교에 많은 관심을 주신 덕에 이젠 딸도 학교에서 걱정 없이 명랑하 게 잘 자라고 있다. 북한에서 살 땐 보안원이라고 하면 인민들을 착 취하고 탄압하며 주민들의 고열을 짜내는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대 한민국 경찰들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고 지켜주는 국민 의 친근한 가족이다.

그런 경찰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렇게 우리 탈북민들의 행복과 안정된 정착을 위해 특별한 관심과 마음을 바쳐 노력하시는 우리 보안계장님을 비롯한 담당형사님들을 생각하면 가슴 뭉클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 고마운 나라에서 사는 게 꿈만 같아 나라 사랑 안보교육을 할 때면 선열들이 목숨 바쳐 피로써 이룩한 귀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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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소중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열렬히 사랑하고 지키자고 절절 히 호소한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인권이 보장된 자유민주 주의 하에서 살면서 인권이란 말조차 모르고 인민을 노예로 취급하 는 세계 최악의 독재 집단인 인간생지옥 북한 체제와 북한 독재자를 찬양하고 추종하는 종북세력들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게 도무지 이해 가 안 되는 현실이다. 북한이 어떤 나라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 실인데 과연 그들은 북한의 무엇을 보고 넋이 빠졌기에 그리도 북한 을 찬양 추종하는지 모르겠다. 독재정권하에서 굶어 죽은 수백만 북 한 인민들과 정치범수용소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수십 만 북한인민 들의 죽음에 대해서, 또한 북한의 도발로 수십 명의 귀중한 대한민 국 군인들의 가슴 아픈 희생 앞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들이다.

나는 북한에 있을 때 인권이 무엇인지,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 랐으며 그저 굶지 않고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는 게 사람의 운명이 라고 생각했다.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자연 재해와 대형 참사들로 사 람들이 수 백, 수 명씩 죽어 가도 세상이 원래부터 그러려니 했으며 그저 요행수로 살아남는 게 사람 운명인줄 알았다. 사람 목숨이 파 리 목숨보다 못한 세상에서 사람의 죽음을 별치 않은 일로 여기던 나 였다. 이번 세월호 침몰로 온 나라 온 국민이 슬퍼해주고 전 세계가 애도해주는 현실을 접하면서 나도 거기에 동참하여 희생자들을 추모 해 눈물을 흘리고 슬퍼했다는 게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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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유베트남 패망에 피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때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공산베트남보다 절대적인 우위 를 자랑하던 자유베트남이 무기와 식량 탄약도 부족하고 신발이 없 어 폐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발에 동여매고 다니던 보잘 것 없던 공 산베트남에게 총 한방 제대로 못 쏴보고 물먹은 담벼락처럼 무너진 것은 자유베트남에서 각계각층에 분포되어 활동하던 5만 여명의 종 북세력들 때문이었다. 종북세력을 척결하고 국민이 하나로 단합될 때만이 대한민국의 융성번영이 있고 휘황찬란한 내일이 있다고 생 각한다. 나에게 오늘의 행복과 새 삶을 안겨주고 내일의 희망을 꿈 꾸게 해 준 대한민국에 감사하며, 나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나는 소중한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영원토록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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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김봉현(동국대학교 광고홍보학과) 안보사랑 콘테스트 심사평 한규훈(숙명여대 홍보광고학과 교수) 좋은 글의 자양과 요람 김문주(문학평론가, 영남대학교 국문과 교수) 가슴을 울리게 하는 메아리를 김현탁(소설가, 한국현대문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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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심사평

2014 안보사랑 콘테스트 심사평

김 봉 현 (동국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

2014년 안보사랑 콘테스트는 광고영상, 포스터, 그리고 올해 새 로 신설된 웹툰 부분을 포함한 시각영상부문에서 총 1,069 편의 작 품이 출품되어 어느 해 보다 열띤 경쟁을 벌였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출품 작품의 아이디어 독창성, 작품의 완성도와 공감성 및 실제 캠 페인에서의 활용성 등을 기준으로 공정한 심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영예의 대상으로 ‘7살 주형이가 어른들에게 묻습니다’ 편을 선정하였습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때론 무관심해질 수 있는 ‘국가안보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아주 명쾌하고 쉬운 방식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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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점이 매우 돋보였습니다. 특히, ‘국가안보를 지키는 힘은 국민들 의 관심’이며 이는 ‘어린이에게도 어렵지 않다’는 역설적 말과 어린 아이의 입을 통한 간결한 영상은 자칫 무겁고 딱딱해질 수 있는 주 제를 일방적으로 주입하거나 강요함 없이 뛰어난 주목도와 함께 메 시지에 대한 공감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 높은 평가 를 받았습니다. 아울러, 이번에 새로 신설된 웹툰부문에서 최우수상에 선정된 ‘남쪽 돼지 삼형제’편은 ‘아기돼지 삼형제’ 동화를 웃음과 재치로 자 연스럽게 패러디함으로써 자칫 교훈적 메시지가 가져올 줄 수 있는 내용의 지루함과 진부함을 훌륭하게 탈피하면서 국가안보의 중요성 과 필요성을 훌륭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습 니다. 포스터 부문에서는 굳건히 잠긴 자물쇠의 단순한 비주얼을 통해 경찰청이 ‘국가안보의 지킴이’라는 메시지를 아주 간결하고 명쾌하게 전달하고 있는 ‘국가안보 경찰청이 지킵니다’ 편이 최우수상에 선정 되었습니다. 모름지기 광고포스터는 처음 노출되었을 때 첫눈에 쉽 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 명료할 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의 임팩트를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안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국민들 사이에 국가안보에 대한 당위적 인식이 높은 탓에 실질적인 관심과 공감으로 이어지는데 그 한계를 가지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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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것도 사실입니다. 머리로만 당위적으로 인식하되, 마음으로 공 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국가안보를 중심으로 ‘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이끌어내는데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심사위원은 이제 국가안보라는 당위적 주제에 대해 계몽적 이거나 지나치게 교훈적인 캠페인 방식이 요즘의 젊은 세대에게는 더 이상 설득적이지 못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면 에서 이번에 수상한 작품들은 그 한계를 훌륭하게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의 수준이 예년보다 한층 더 진일보했다는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 훌륭한 작품들이 각각의 부문에서 우수상 및 장려상에 다수 선정되었습니다. 일일이 모두 다루지 못함을 양해바 랍니다. 내년에는 더욱 뛰어난 작품들을 기대해보면서 다시 한 번 수 상한 작품들 모두에 축하의 말씀을 전하며, 수상하지 못하였지만 최 선을 다해준 출품작에도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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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2014 안보사랑 콘테스트 심사평

한 규 훈 (숙명여대 홍보광고학과 교수)

지난 해에 이어 올해 안보사랑 콘테스트의 시청각부문(광고영상, 포스터, 웹툰) 심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두 해의 출품작 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데, 이번 제5회 콘테스트의 출품작 은 전 대회에 비해 양적·질적으로 확연히 성장하였음을 느낄 수 있 었습니다. 이는 곧 경찰청이 주최하는 안보사랑 콘테스트가 국가안 보를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의 경연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많은 국민 들의 관심과 참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긍정적 인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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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문별로 살펴보면 먼저 광고영상부문의 경우, 작년 대회에서는 북한의 대남도발 상기를 통한 위협소구나 113 신고 강조 등의 일방 적 메시지가 무거운 톤으로 전달된 작품이 대다수였던 반면에, 올해 는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 상업광고 등의 다양한 형식이 차용되 면서 메시지 전달방식이 밝은 작품들이 많아졌고, 그 표현방식 또한 다양화된 것이 고무적이었습니다. 영예의 대상을 차지한 “7살 주형 이가 어른들에게 묻습니다” 작품의 경우, 안보의식 고취를 위한 구 체적 실천방안을 비교적 명료하고 밝게 제시한 것이 심사위원들로부 터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가장 많은 작품이 출품된 포스터부문도 경합이 치열하였지만, 소 재의 다양성 부족은 지난 대회에 이어 올해에도 극복되지 않은 아쉬 움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고정신 강조를 위해 ‘113’이란 숫자를 이용한 작품이라든지 태극기나 우리나라 지도를 시각적 소재로 활 용한 작품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국가안보 메시지의 속성상 기존 에 몰랐던 사실의 새로운 인식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의 상기와 각성을 통한 태도 변화가 실질적인 커뮤니케이션 목표가 되는 만큼, 보다 창의적이고 참신한 접근을 시도한 작품이 앞으로 더 많이 출품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올해 신설된 웹툰부문은 시청각 심사부문 중 전반적으로 가장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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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완성도를 보였고, 그만큼 심사에 애로를 겪었습니다. 실상 국가 안보란 주제는 평상시 국민들이 스스로 관심을 갖고 주목하는 대상 이 아니기에 만화와 같은 기법으로 시각적 주목을 이끌어 내고자 하 는 접근은 현실적으로 매우 유효해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의 활용성도 높은 웹툰부문이 올해 콘테스트에 신설되면서 곧바로 치 열한 경쟁부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반길만한 일입니다. 다만 시각적 차원의 완성도에 비해 내용적 차원의 설득력과 독창성이 다소 부족 했던 점이 아쉬운데, 이는 설명과 계몽에 대한 강박관념에 억눌리지 않고 독자들에게 친근하고 편안하게 주제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한층 개선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콘테스트의 심사는 우수한 출품작들이 많아 더 많은 수상작을 선정하지 못한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내년 대 회에서부터는 공모분야별로 수상작 수를 더 많이 배정하고, 아울러 젊은 학생들의 참여를 장려하기 위해 출품자의 소속에 따른 시상분 야 세분화(청소년부, 대학생부, 일반부로 구분)도 적극적으로 고려 해 보실 것을 제안합니다. 해마다 경찰청이 주최하는 안보사랑 콘 테스트가 국민의 안보의식 고취에 지속적으로 기여해 나가길 기대 합니다. 그리고 올해 콘테스트의 수상자분들, 진심으로 축하드립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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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좋은 글의 자양과 요람

김 문 주 (문학평론가, 영남대학교 국문과 교수)

글쓰기는 돌아보는 일이면서 발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글은 삶 과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의식하지 못했거 나 지나쳤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점 에서 글쓰기는 단순히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서 삶의 지평을 넓히고 생각을 확장하는 의미 있는 과정, 그것 자체가 중요 한 목적이 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좋은 글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글쓴이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하고 깨닫게 함으로써 좀더 높은 차원의 생각에 이르게 합니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단지 멋진 표현을 잘 쓰거나 화려한 수사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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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니라 삶과 세상을 새롭고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뜻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좋은 글은 읽는 이의 시각과 사유를 넓고 깊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글쓰기 관련 심사 자리에서 가장 빈번하게 논의되는 평가 의 기준은 얼마나 자신의 사유와 체험에 기반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 니다. 사회적으로 글쓰기와 관련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에 부응할 만큼 괜찮은 글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뻔한 상투적 내용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유사한 내용의 글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러한 글들은 글을 쓰는 이유를 망실(亡失)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심사에서 심사 위원들은 자신의 체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한 글들을 우선적으로 추 리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정보가 넘치는 상황이 오히려 진솔하고 창의적인 생각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의 기능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번 안보 관련 글쓰기 공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응모 한 많은 학생들의 글은 인터넷 상에 있는 정보들로 구성된 탓에 비 슷비슷하였으며,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내용들을 동원 함으로써 진정성이 결여된 것이 적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것으로 충 분히 소화되지 않은 내용으로는 좋은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좋은 글 이 갖추고 있는 설득력과 감동은 자기-체험과 사유에서 비롯됩니 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글쓴이가 겪는 진지한 자기 성찰과 통찰은 읽는 이에게 새로운 사유의 영역을 경험하게 합니다. 글을 글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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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것은, 글의 소재를 글쓴이가 얼마나 자신의 것으로 사유하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번 <안보사랑 콘테스트> 공모에서 수상작들은 대체로 소박하 지만 자신의 생각을 찬찬히 정리한 글들입니다. 그것들은 거창하거 나 상투적으로 이념과 통일의 문제에 관해 설명하지 않고 큰 소리 로 어떤 교훈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겪은 작은 일상에 관 해 이야기하다가 글들은 어느새 분단과 안보의 문제에 도달해 있습 니다. 그래서 그러한 글들을 읽다보면 우리를 둘러싼 한반도의 현실 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 속에는 정보나 주장이 담겨 있 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체험과 생각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 리를 둘러싼 안보의 문제를 가까운 현실로서 경험하게 해줍니다. 특 히 ‘북한이탈주민 체험수기’는 글쓴이들이 경험한 절실한 체험을 통 해 북한의 실제 상황을 생생하게 웅변해 줌으로써 그 어떤 대북 안보 교육보다 효과적으로 북한 체제의 문제를 증언해 줍니다. 체험의 절 심함이야말로 이 글들이 갖고 있는 힘입니다. 글의 생명력은 진정성에서 나오고, 진정성은 자신을 찬찬히 돌아 보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이 능력이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이며, 좋은 글의 자양(滋養)이자 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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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가슴을 울리게 하는 메아리를

김 현 탁 (소설가, 한국현대문학연구소장)

인생사에서 누구나 바라는 소망이 있다면, 행복한 삶의 추구일 것이다. 유구한 인간의 역사 속에서 경제가 넉넉하지 못한 시대에서는 생 명의 유지가 우선이었을 테지만 현대처럼 물자가 풍부한 시대에서 는 웰빙과 웰다이를 추구하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아직도 인간의 행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권력의 유지만을 위한 집 단이 있다 그 집단은 지구촌에서 널리 알려진 북한의 집단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북한은 체제 유지를 위해 국민의 삶이 고통스럽든, 궁핍하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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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곳 하지 않고 권력구축에 혈안이 되어 온갖 사악한 행태를 자행하 고 있다. 그렇게 악랄한 체제하에서 견디지 못한 북한의 주민들은 가까이 는 중국으로, 또 대한민국으로 끝없는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전장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사선을 넘어 탈출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그 탈북자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매년 그들의 입을 통해, 글을 통 해, 안락에 젖어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번에 응모한 탈북자의 수기도 예년과 다름없이 북한에서의 생 활상과 어렵움을 여지없이 잘 나타내 주었다. 그 중 대상을 차지한 탈북자의 수기는 목숨을 건 탈북 이후 한국에 정착하여 각종 자격증 을 취득하여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일부 탈북자들이 남한의 문화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하 는 반면, 대한민국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아갈 수 있다는 표 본을 보여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또 우수상의 수기는 안일한 대한민국 일부의 국민들에게 북한체 제의 위협성과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나타내어 안보에 둔감했던 우리 에게 문학성 짙은 문체로 일깨움을 주었다. 또한 초, 중, 고 학생들의 작품은, 평이한 관점에서 감동없는 표 준의 나열이 많아 아쉬웠고초등부에는 어린이답지 않은 어휘들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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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선에 오른 작품은, 주변의 이 야기를 통하여 느낀 바를 진솔하고 감동스럽게 전해주어 진정한 안 보 의식이 가슴속에 녹아 있음이 엿보였다. 문학적 글쓰기는 단순한 사례나 보고문, 기록문, 설명문이 아님 은 더할 나위없다. 작품 속에 뭉클한 감동과 재미, 설득력, 합리성이 내포되어 있을 때, 가슴 한 켠을 울리는 수작이 탄생된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비유나 상징을 통한 문체의 충실함이 뒤따 라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한 충족 여건을 갖춘 작품이 독자 앞에 다 가섰을 때, 작품의 신선한 메아리가 창공을 멀리멀리 퍼저 나갈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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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사랑 CONTEST

2014 안보사랑 콘테스트 입상작 모음집

발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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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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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보안국 서울시 서대문구 통일로 97 Tel : 02) 3150-1484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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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커뮤니케이션즈 Tel : 02) 3141-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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