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사랑 CONTEST 20155 안보사랑 콘테스트 입상작 모음집
發刊辭
안녕하십니까! 경찰청장 강신명입니다. 우리 청소년들과 북한이탈주민들의 소중한 글들이 널리 읽혀져 우리의 안보의식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KOREAN NATIONAL POLICE AGENCY
2008년에 시작한 ‘안보사랑 콘테스트’가 국민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로 어느덧 여덟 번째를 맞이했습니다. 특히 올해는 작년에 비해 3배 가까이 급증한 7,500여건의 작품이 출품되는 등 어느 때보다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저는 이번 행사에 출품된 초·중·고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정성이 깃든 작품을 통해 우리나라 국민들의 변함없이 높은 안보의식을 알 수 있었고,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은 북한이탈주민의 수기를 보면서 다시 한번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소중함을 알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국가 안보의 근간이고, 이것이 그동안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으며, 앞으로도 밝고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나갈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국 광복과 함께 창설되어 창경 70주년을 맞은 우리 경찰 역시 앞으로도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 가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번 행사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은 분들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보내고, 아쉽게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작품을 응모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많은 작품을 공정하게 심사해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들께도 지면을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참가자 여러분의 소중한 작품들이 담겨있는 이 책을 많은 국민들이 접하고, 우리의 안보의식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5년 6월
경찰청장
CONTENTS
: 2015 안보사랑 콘테스트 입상작 모음집
>> 광고영상 부문 08 09 10 11
최우수상 우 수 상 장 려 상 장 려 상
누구나 안보지킴이가 될 수 있다 | 감창빈 국가안보의 시작 | 김민경 튼튼한 뿌리, 국민을 지키는 국가안보 | 조상희 지켜내 대한민국 | 송은석
>> 포스터 부문 (성인) 14 15 16 17 18 19
최우수상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장 려 상 장 려 상
국가안보위협 언제나 우리곁을 매돌고 있습니다 | 조대한 작은 구멍을 방치하면 큰 구멍이 됩니다 | 정용호 국가-국민 간 안보고속도로 | 김현수 새고 있는 안보 | 최영곤 안보가 깨지면 대한민국을 지킬 수 없습니다 | 홍다솜 대한민국 안보 뒤엔 언제나 경찰청이 있습니다 | 손미영
>> 포스터 부문 (중·고교) 20 21 22 23 24 25
최우수상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장 려 상 장 려 상
유비무환 | 이은서 분실물을 찾습니다 | 정우진 안보의식으로 꽉 채워주세요 | 정주현 우리의 안보의식 | 김유현 이얍! 철저한 안보의식! 안전한 대한민국 | 전루빈 철통보안 속 국민의 안전 | 이준영
>> 포스터 부문 (초교) 26 27 28 29 30 31
최우수상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장 려 상 장 려 상
자랑스런 대한민국 함께 지켜 나가요 | 이선아 안보에는 날짜 없다 매이래일 안보의식 | 김다은 안보가 쌓이면 행복도 쌓여요 | 차한빛 안보사랑 종합세트 모두 갖춘 짱짱맨! | 심효선 우리 가족의 행복! 국가안보 위에 탄탄! | 김민찬 나라의 안보 우리의 힘으로 | 홍예서
>> 웹툰 부문 34 35 36
최우수상 설명혜 경사의 열혈! 안보강의! | 최대랑 우 수 상 잭 & 자이언트 | 김보은 장 려 상 빨간두건 이야기 | 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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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38 50 57 79 92
최우수상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장 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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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려 상 추운 겨울은 지나가고 봄날은 온다 | 강
따뜻한 마음으로 철조망 푸는 그날까지 | 김 무 한 개 | 임 대한민국이 없었으면 나는 안길 품이 없었다 | 한 인간의 참된 존엄을 찾기까지! | 현 2015년 25회 신지식인 선정은 나의 세 번째 인생 시작이다. 탈북민 제1호. | 김
>>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116 121 126 130 134 139
최우수상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장 려 상 장 려 상
선배님이 남기고 간 교훈 | 신수영 (경북 성주 선남초) 나라를 사랑하자 | 김태혁 (대전 대덕 회덕초) 너는 어떤 한국에서 왔니? | 이정우 (서울 신서초) 우리의 소원은 통일 | 문지혜 (경기 고양 화수초) 할머니의 특별한 밥그릇 | 박호원 (경기 남양주 심석초) 통일을 위한 우리의 발걸음 | 이국희 (대전 성천초)
>> 안보사랑 글짓기 (중·고등 부문) 144 151 157 163 169 174
최우수상 우 수 상 우 수 상 장 려 상 장 려 상 장 려 상
바람 | 정하린 (서울 문정중) 그 해, 5월의 기억 | 강예은 (전남 화순중) 당신은 평화롭습니까? | 임성현 (울산 대송중) 남과 북 | 임수정 (서울 미림여자정보과학고) 국가 안보의 첫걸음 | 이소민 (대전 만년중) 옆 집 | 마한빈 (서울 미림여자정보과학고)
>> 심사평 182 186
2015 안보사랑 콘테스트 심사평 | 김현탁 (소설가), 박덕규 (시인, 소설가) 주제를 구현하는 방법의 다양화가 돋보였던, 아주 뜻 깊은 잔치
| 한규훈 (숙명여대 홍보광고학과 교수) 유현재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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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영상 부문
08 09 10 11
최우수상 누구나 안보지킴이가 될 수 있다 | 감창빈 우 수 상 국가안보의 시작 | 김민경 장 려 상 튼튼한 뿌리, 국민을 지키는 국가안보 | 조상희 장 려 상 지켜내 대한민국 | 송은석
광고영상 부문
최우수상
누구나 안보지킴이가 될 수 있다 ↳ 감창빈
/ 8
광고영상 부문
우수상
국가안보의 시작 ↳ 김민경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9
광고영상 부문
장려상
튼튼한 뿌리, 국민을 지키는 국가안보 ↳ 조상희
/ 10
광고영상 부문
장려상
지켜내 대한민국 ↳ 송은석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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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부문
성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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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국가안보위협 언제나 우리곁을 매돌고 있습니다 | 조대한 우 수 상 작은 구멍을 방치하면 큰 구멍이 됩니다 | 정용호 우 수 상 국가-국민 간 안보고속도로 | 김현수 장 려 상 새고 있는 안보 | 최영곤 장 려 상 안보가 깨지면 대한민국을 지킬 수 없습니다 | 홍다솜 장 려 상 대한민국 안보 뒤엔 언제나 경찰청이 있습니다 | 손미영
중·고교
20 21 22 23 24 25
최우수상 유비무환 | 이은서 우 수 상 분실물을 찾습니다 | 정우진 우 수 상 안보의식으로 꽉 채워주세요 | 정주현 장 려 상 우리의 안보의식 | 김유현 장 려 상 이얍! 철저한 안보의식! 안전한 대한민국! | 전루빈 장 려 상 철통보안 속 국민의 안전 | 이준영
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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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자랑스런 대한민국 함께 지켜 나가요 | 이선아 우 수 상 안보에는 날짜 없다 매이래일 안보의식 | 김다은 우 수 상 안보가 쌓이면 행복도 쌓여요 | 차한빛 장 려 상 안보사랑 종합세트 모두 갖춘 짱짱맨! | 심효선 장 려 상 우리 가족의 행복! 국가안보 위에 탄탄! | 김민찬 장 려 상 나라의 안보 우리의 힘으로 | 홍예서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13
포스터 성인 부문
최우수상
국가안보위협 언제나 우리곁을 맴돌고 있습니다 ↳ 조대한
/ 14
포스터 성인 부문
우수상
작은 구멍을 방치하면 큰 구멍이 됩니다 ↳ 정용호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15
포스터 성인 부문
우수상
국가-국민간 안보고속도로 ↳ 김현수
/ 16
포스터 성인 부문
장려상
새고 있는 안보 ↳ 최영곤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17
포스터 성인 부문
장려상
안보가 깨지면 대한민국을 지킬 수 없습니다 ↳ 홍다솜
/ 18
포스터 성인 부문
장려상
대한민국 안보 뒤엔 언제나 경찰청이 있습니다 ↳ 손미영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19
포스터 중·고교부문
최우수상
유비무환 ↳ 이은서
/ 20
포스터 중·고교부문
우수상
분실물을 찾습니다 ↳ 정우진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21
포스터 중·고교부문
우수상
안보의식으로 꽉 채워주세요 ↳ 정주현
/ 22
포스터 중·고교부문
장려상
우리의 안보의식 ↳ 김유현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23
포스터 중·고교부문
장려상
이얍! 철저한 안보의식! 안전한 대한민국! ↳ 전루빈
/ 24
포스터 중·고교부문
장려상
철통보안 속 국민의 안전 ↳ 이준영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25
포스터 초교 부문
최우수상
자랑스런 대한민국 함께 지켜 나가요 ↳ 이선아
/ 26
포스터 초교 부문
우수상
안보에는 날짜 없다 매일매일 안보의식 ↳ 김다은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27
포스터 초교 부문
우수상
안보가 쌓이면 행복도 쌓여요 ↳ 차한빛
/ 28
포스터 초교 부문
장려상
안보사랑 종합세트 모두 갖춘 짱짱맨! ↳ 심효선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29
포스터 초교 부문
장려상
우리 가족의 행복! 국가안보 위에 탄탄! ↳ 김민찬
/ 30
포스터 초교 부문
장려상
나라의 안보 우리의 힘으로 ↳ 홍예서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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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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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설명혜 경사의 열혈! 안보강의! | 최대랑 우 수 상 잭 & 자이언트 | 김보은 장 려 상 빨간두건 이야기 | 박병진
웹툰 부문
최우수상
설명혜 경사의 열혈! 안보강의! ↳ 최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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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부문
우수상
잭 & 자이언트 ↳ 김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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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35
웹툰 부문
장려상
빨간두건 이야기 ↳ 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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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예부문>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최우수
따뜻한 마음으로 철조망 푸는 그날까지 김
우 수
무 한 개 임
우 수
대한민국이 없었으면 나는 안길 품이 없었다 한
장 려
인간의 참된 존엄을 찾기까지! 현
장 려
015년 25회 신지식인 선정은 나의 세 번째 인생 시작이다. 2 탈북민 제1호. 김
장 려
추운 겨울은 지나가고 봄날은 온다 강
따뜻한 마음으로 철조망 푸는 그날까지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최우수상
♥ 김 “선생님, 안 가면 안 돼요?” “저는 이제 가야 해요. 나중에 우리 꼭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 나요.”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나는 대답대신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아이는 내 품에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마음 줄 곳이 없었다. 내가 아이에게 해준 것이라곤 그냥 이야기를 들어준 것뿐인데 아이는 내게 마음을 열었다. 우리 사 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 는 한 인간과 한 인간,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따뜻한 유대감만이 있었다. 나도 마지막으로 고향을 탈출할 때는 이 아이처럼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세상 어디에도 내 한 몸 기댈 곳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새 이 렇게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학업에 매진하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처럼 미약한 존재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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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만으로도 내겐 큰 힘이 된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마음으로 서 로를 어루만지며 살아가는 따뜻한 세상. 나는 한국에 정착해 살면서 남과 북에도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서로 진심으로 아끼 고 생각하며 따뜻하게 껴안는 힘을 통하여. 마치 이 아이와 나처럼. 그 것이 지구상에 남아있는 마지막 분단국가인 한반도가 지닌 숙제가 아 닐까. 나는 지금 서울의 한 대학에서 간호학과 수업을 들으며 간호사가 되 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가 위로해주고 나도 위로를 받았던 그 아이는 정신병동 실습에서 만난 아이였다. 간호학과의 여러 분야 중에 서도 나는 정신과와 가장 잘 맞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고향을 탈출해 여러 나라를 거쳐 한국으로 오기까지 온갖 고난을 다 겪으며 우 물처럼 깊은 고독감에 허덕인 나날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더 잘 이 해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고 민을 들어주고 그들이 가진, 또 내가 가진 마음의 병을 함께 치료하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나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의 숙명에 대 해 생각해보게 된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한국에 막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진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타국을 전전할 때나 고향에 살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때는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만이 나의 과제였다. 어떻게 하 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이 험난한 세상을 버틸 수 있을까. 그땐 그 방법이 돈을 버는 것뿐이다. 내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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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진달래와 백살구로 유명한 두만강 근처 마을이다. 봄이 되면 학교 운동장 근처나 길가에 꽃이 떨어져 하얗게 흐드러진 길을 동 무들과 걷곤 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오빠, 나 이렇게 네 식구. 아버지는 직장에서 간부로 일하다가 90년 중반에 배경(출신성 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다. 전쟁 당시 할아버지의 일 곱 형제 중 다섯이 남한으로 갔다고 한다. 북에서는 남한으로 넘어간 형제들이 있으면 토대가 안 좋다는 표현을 쓰는데, 할아버지는 평양 만수대 예술단에서 가수 생활을 하다가 형제들이 남한으로 갔다는 이 유로 이곳 북쪽 끝 마을로 쫓겨났다. 아버지도 토대가 나빠 간부직에 해임되고 대를 이어 오빠도 좋은 직장에 다닐 수 없다. 그 일을 겪은 후 아버지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매일 술을 마시다가 간경화라는 병 을 얻었다. 종종 피를 토하기도 하지만 약을 살 돈이 없었다. 어머니는 농장에서 일을 하며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덕분 에 나는 일곱 살 때부터 집에서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짐승을 키우 며 살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쌀독이 비면 식구들은 제일 먼저 내 얼 굴을 들여다봤다. 그럼 나는 산으로 밭으로 나가 풀을 뜯어 죽을 쑤었 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지기 싫었던 나는 우리 집에 돈도 없고 힘도 없 지만 공부만큼은 지기 싫어서 집안일을 하면서도 학교에서 이를 악물 고 공부를 했다. 나는 반에서 늘 성적이 좋았지만 반장은 항상 토대 좋 은 집안의 다른 아이가 차지했다. 학교에서도 할아버지의 일로 차별을 받아야 했다. 나를 더 힘들게 한 것은 늘 밖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아 픈 아버지 모습이었다. 돈만 좀 있으면 어머니도 쉬게 하고 아버지도 병원에 모시고 갈 수 있을 텐데. 또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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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할 수 있는 일을 좀 더 찾아볼 수 있을 텐데. 당시 마을에는 중국으 로 가서 돈을 벌어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고향에서 돈 벌기란 여 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고등중학2학년(한국의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갈 결심을 했다. 내 나이 열다섯이었다.
누가 중국만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던가? 현실은 냉혹했다. 내 가 고향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태어나 탄광마을에서 벗어 난 적도 없고, 특히 부모님을 떠나 살아본 적이 단 하루도 없던 내게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이란 나라는 하루하루 적응하기조차 어려운 곳 이었다. 중국 사람들의 시선 또한 나를 힘들게 했다. “가난한 나라에 살면서 못 배운 것들…….”이라는 시선이 화살처럼 내 몸에 박혔다. 그러면 난 고개를 숙이고 조용한 곳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나도 우 리 가족에겐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인데.” 나는 서러워 주저앉아 울었 다.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결국 중국에 온 지 9 개월 만에 스스로 경찰을 찾아가 나를 집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어렸던 나는 그렇게 스스로 북송을 자초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나는 다시는 부모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 다. 그러다 또 다시 현실을 마주하니 막막했다. 부모님께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오히려 짐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번 중국에서 자유로 운 생활을 맛본 나는 고향이 너무 답답했다. 아무런 꿈도 꿀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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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미래도 그릴 수 없는 갑갑한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내 마음속에 다시 그런 의문이 싹텄다.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고향에는 미래가 없었다. 뇌물로 모든 것이 통하고, 돈 이 없으면 꿈조차 꿀 수 없고, 최악의 경우엔 온가족이 길바닥에서 굶 어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라.
그러던 어느 날, 때마침 친구가 함께 중국으로 가자고 제안을 한다.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았다. 혼자보다는 친구와 같이 가면 서로 의지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으리라. 그렇게 열일곱살에 또 다시 두만강을 건 넜다. 하지만 이번에는 믿고 의지하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 중국 으로 가기 전에는 둘도 없는 친구처럼 잘 지내다 중국으로 도착하니 친 구의 태도는 180도로 변했다. 결국 그 친구는 중국 남자를 유혹해 그 사람과 살았고, 나는 인신매매로 팔려가 조선족 집에서 가정부로 일을 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남들에게 악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왜 나한 테만 이런 일이 생길까 싶었다.
그렇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중국 돈 8천원을 모 았다. 한국 돈으로 백만 원 남짓 되는 돈이지만 내게는 큰 돈이었다. 그걸 집으로 부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내가 일하는 집 막내아들이 중국과 북한을 자주 다닌 덕분에 막내고모와 연결이 되 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 서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 돈을 부치고 다시 8천원 정도 돈이 모였 다. 이번에는 만 원을 모아서 집에 보내야지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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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모으고 있는데 중국 공안국에 잡히고 말았다. 일하는 집 막내아들이 불법도박을 하다가 걸려서 집 수색 하면서 내가 덤으로 잡힌 꼴이었다. 두 번째 북송 길에 올랐다. 중국 도문을 거쳐 북한 남양으로 이송 되었다. 첫 북송 때는 미성년이어서 쉽게 나왔는데 이번에는 두 번째 인데다 19세 성인이고 때마침 위에서 무시무시한 방침이 내려왔다. 2004년 이후로 중국 간 사람들은 무조건 7년형을 선고한다는 것이었 다. 그럼 난 두 번이니 14년을 살아야 한다는 건가? 북한 남양 보안부 에서 17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감방에서의 하루 일과는 오전 5시에 기상하면 그때부터 순서대로 서 서 세수를 하고 줄에 맞추어 같은 자세로 곧게 앉아 있어야 한다. 움직 이면 처벌을 받는데 카메라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 도 움직이는 사람이 보이면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을 백 번 시킨다. 이 렇게 움직이지 않고 너덧 시간 있다가 10분 동안 일어나서 움직이게 한다. 매일 앉아 있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다리에 쥐가 나고 마비도 왔다. 처음에는 너무 아파서 처벌을 받은 적도 있는데 1주일 정도 지 나니 조금씩 버틸 만했다. 하지만 이번엔 배가 너무 고팠다. 식사는 옥수수 가루(강냉이 가루) 에 물만 부어서 삶은 죽이었다. 그것도 한국 식당 밥그릇과 비슷한 크 기의 그릇에 반 정도의 양. 사흘을 안 먹고 버티다 먹었는데 돌이 계속 씹혔다. 돌 씹히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그것보다 괴로운 건 소금 간이 하나도 안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싱거운 강냉이 죽만 먹고 살자니 정 말 미칠 것 같았다. 감방에 같이 있는 아줌마는 두 달이 넘도록 있었다는데 그분이 어디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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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소금을 구했는지 나에게 잔잔한 소금 3알을 몰래 주었다. 평상시에 는 짜다고 생각 없이 버리곤 했던 그 소금 한 알이 엄청난 행복과 감동 을 주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엔돌핀이 샘솟 듯 솟아났다. 보위부 다음으로 간 곳은 단련대였다. 여기서는 씻기도 어렵고, 불 도 없고, 보안서(경찰) 사람들의 일을 해주는 일꾼 역할을 해야 했다. 보안서에서 벽돌을 나르고 산에 가서 모래를 삽질해서 차로 실어 나르 는 일과 함께, 밭에서 배추, 무, 두부콩을 맨손으로 뽑아 가을걷이를 했다. 매일 일을 시키면서 먹을 거라곤 자그마한 감자 서너 알과 물에 된장을 조금 타서 그릇에 주는 게 다였다. 주는 것만 먹고 일하다 보 면 영양실조에 걸린다. 그래서 난 콩 가을걷이를 하면서 옆 옥수수 밭 에 몰래 들어가 생옥수수를 훔쳐 먹었다. 그걸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서 걸어 다닐 때마다 몇 알 씩 먹곤 했다. 영양실조로 15킬로 빠지고 콩도 비린 맛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죽지 않고 버텼다. 그 감옥살이를 마치고 고향 마을 보안서로 이동해 지내는 동안 가족 소식 을 듣게 되었다.
11월 어느 날 아버지가 면회를 오셨다. 처음 아버지를 만났을 때, 난 웃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태어나서 아버지 가 우는 모습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참 메말랐다라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나를 보는 순간부터 울기 시작해서 한참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가 운다. 그리고 어머니도 울고, 오빠도, 나도 운다.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더 강한 아버지였기에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미 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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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간은 흘러 그로부터 11년이 지났다. 보고 싶다. 가족들. 그런데 가족사진 한 장 없다. 아버지, 어머니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 고, 기억도 점점 흐릿해져간다. 그래서 내 가슴 깊이 묻고 살려고 애를 써본다. 그렇게 강하던 아버지가 겨우 나 같은 딸 때문에……. 아니, 아버지에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우는 아버지 모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아버지와 대화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 다. 나는 그래도 그동안 약간의 뿌듯함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중국에 서 일한 돈을 집에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 고 있었다. 오히려 무슨 돈이냐고 물으셨다. 순간 난 아무런 말도 못하 고 멍하니 있었다. 알고 보니 이때까지 보낸 돈이랑 옷을 막내고모가 중간에서 가로챘던 것이다. 막내고모를 믿었는데, 그렇게 또 믿는 도 끼에 발등을 찍혔다. 그동안 통화하면서 고모가 했던 말이 모두 거짓 이었다는 사실에 내 가슴은 멍들었다.
아무튼 나는 이제 감옥에서 오 년을 살지 십 년을 살지 알 수 없었 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두만강을 건너야 할지 말지 이런 갈림길에 서 있었다. 두만강이라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우울해졌다. 많은 생각을 했다. 이제 떠나면 부모님은 또 언제 만날까? 어쩌면 다시는 못 볼지 도 모르니 그냥 감옥살이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심정을 막내 삼 촌에게 고백했더니 삼촌이 조언을 해주었다. “너도 여기서 살아봐서 알겠지만 여기는 미래가 없다. 네 자신을 위 해서는 이곳을 떠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겠 지만 어디든 네 힘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에서 네 인생을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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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마음속에 가족을 잊지 않고 네가 잘되는 것이 부모님을 위하는 길 이다.”
드디어 세 번째로 두만강을 건넜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고모가 중국에서 아는 사람을 통해 중국에서 나를 받아주기로 했다. 그렇게 되어 중국에서 아는 언니를 만나서 6개월 동안 같이 지냈다. 중국에서 지내는 동안 경찰만 보면 나는 그늘로 숨어 도망 다녔다. 오 년 가까이 경찰을 피해 다녀서 그런지 경찰만 봐도 심장이 울렁거렸 다. 같이 지내는 언니가 하루는 더 이상 피해 다니지 말고 한국으로 같 이 가자고 했다. 한국이 잘 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만약에 내가 남 한에 갔다는 것을 북한에서 알게 되면 가족이 피해를 입을까봐 생각조 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언니가 한국에 간 사람들이 많고도 많다고, 한국 간 사람들 다 잡으면 북한에 남을 사람이 없다고 했다. 곰곰이 생 각해보니 ‘만약에 한국 가는 길에 잡히면 그 자리에 죽어버리자, 그럼 우리 가족에게 피해도 주지 않겠지’, 생각했다. 그래서 언니와 함께 한 국으로 떠났다. 다행히 성공했다. 3개월 넘게 라오스에 숨어 있다가 태국을 거쳐 인 천공항에 도착했다. 참 신기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걸어가는데 의자에 앉아 있던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내게 다가오더니 “아줌마 잘 왔어요, 한국에 온 걸 환영해요.” 하고 두 손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너 무 놀랐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 정도로 창피하고 무서웠다. 내가 북한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어쨌든 그렇게 나는 처 음으로 한국과 대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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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온 지도 벌써 6년이 되었다. 처음 한국 사회로 진출했을 때 내 수중에는 단돈 천 원도 없었다. 그렇게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청소 년 쉼터에서 가난하고도 낮선 생활이 시작되었다. 오로지 내 머리 속 에는 돈을 벌어야하겠다는 압박감으로 가득 찼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쉼터에 사는 수녀님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되었 다. 한국에서 일(취직)을 하려면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은 해야 된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앞이 캄캄했다. 그땐 이미 스무 살이 넘은 나이였는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서른. 생각만 해도 끔찍했 다. 그때 수녀님이 검정고시학원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래, 열심히 공 부해서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취직해야지라는 생각으로 1년 4개월 만 에 중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마쳤다. 얼마 후 쉼터 생활을 마치고 집을 배정받아 혼자 살게 되었고 그렇게 공부를 조금 시작했던 나에게 변화 가 찾아왔다.
어느 날 서울 모 여자대학교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학교 캠퍼스를 보면서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부러웠다. 나도 대학생이 되면 어떤 기 분일까? 그 순간 돈 때문에 꽁꽁 묶여 있던 내 머릿속에 자유라는 단어 가 떠올랐다. “어디든 네 힘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에서 네 인생을 살아라.” 막내삼촌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그동안 당장의 앞날에 대한 고민에 휩싸여 진짜 내가 지닐 수 있는 자유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 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하며 앞으로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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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지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대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서도, 타국에서도, 꿈도 꿀 수 없었던 배움의 자유. 그것을 나 는 대한민국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이 생겼다.
물론 공부 부족에 대한 걱정이 우선이었다. 또 대학에 갈 수 있다면 어떤 학과를 선택해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쉼터에서 지내는 동안 수녀 님이 병원에 가서 봉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었다. “지금은 네가 가장 가난해 보이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자는 건강한 사람이라는 걸 한번 보고 느꼈으면 좋겠어.” 수녀님 소개로 나는 서울○○병원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2년 동안 병실 봉사를 했다. 환자들을 위해 침대와 기구들을 소독하고 주변을 소독 솜 으로 깨끗이 닦았으며 암환자들 모자도 만들었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보 면 태어나자마자 장애인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암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내 신체가 건강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에는 한국 사회에서 내 가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이렇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내게는 큰 희망이 되었다. “그래,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선택하자!” 그렇게 나는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전문적인 간호사가 되어 많 은 지식을 쌓고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검정고시를 마친 해 7월에 대학교에 원서를 넣었고 각종 시험과 면접을 통과하여 당 당히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지금은 졸업반이다. 물론 혼자 대학교 를 다니면서 여러 번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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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꿈에도 그리운 내 아버지를 내가 직접 돌보 고 싶다!”
또 한 가지 꿈은 언젠가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에 세워진 병원에서 신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병을 앓는 사람들을 내 손으로 돌보고 간 호하고 싶다는 것이다. 다가올 미래에 한국은 물론 북한도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 들이 많아지면 그 사회는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해진다. 나는 내 경험 과 지식을 바탕으로 남과 북에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따 뜻하게 보듬고 이해하며 그들이 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
그래서 난 이번에 대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원에 가려고 한다. 간호학 과 함께 심리학 공부도 열심히 해서 대한민국의 훌륭한 정신과 전문 간 호사가 되어 한반도를 더욱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드는 데 작은 힘을 보 태고 싶다. 우리는 한민족이기에 언제까지나 분단인 채로 살 수는 없 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으로 한반도의 중 앙에 가로막힌 철조망을 푸는 날이 왔을 때, 나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 과 내가 사랑하는 한반도 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소임을 다하고 싶다. 그날을 위해 나는 오늘도 열심히 공부를 한다. 이런 삶을 선택할 수 있 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자유가 아닐까, 그런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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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개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우수상
♥ 임 강원도 ○○군의 메마른 언덕길로 올망졸망 세명의 남녀가 터벅터벅 힘겹게 걷고 있다. 때는 무더운 여름철이라 길가의 아카시아 가로수들 에는 매미가 청승맞게 울어대고 이따금씩 지나가는 군용트럭에 길바닥 은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듯 먼지가 자욱해서 눈뜨기는 고사하고 숨쉬 기조차 힘들었다.
뜨거운 태양은 길가의 나무들이며 논밭이며 모든것을 태워 버릴 듯 강렬하게 내려쬐이고 멀고 가까운 산발마다 벌거벗고 황폐화되고 누덕 누덕 뙈기밭으로 변모되어 나무한그루 찾아보기 힘드니 길가는 행인들 다리쉼 할 한점의 그늘 또한 찾아볼 수 없다.
“아버지 저기 잠깐 쉬였다가요” 앞서 걷던 젊은 청년이 뒤따라오는 말라깽이 노인에게 하는 말이다 “그래 좀 쉬었다가자” 말소리조차 힘겨운 늙은 노인의 얼굴은 온통 땀범벅인데다 어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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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위고 말랐는지 꼭 걸어가는 송장 같았다. 게다가 유리알 한쪽만 있는 도수 안경끼고 귀밑까지 내려오는 모자 를 쓰다보니 마치 산 사람의 초상이라기보다는 귀신의 화상에 가까웠 다. 그 옆에 따라붙은 노인보다는 나이가 좀 적어보이는 아줌마 역시 초라하고 궁상맞기 짝이 없다. 신발바닥이 다 떨어져 천으로 깁고 발가락이 튀어나와 또 천으로 둘 러감고 하여 신발도 아니고 짚신도 아닌걸로 겨우 땅짚고 가는데 머리 는 언제 감았는지 멀리서도 하얀 서캐(이의 알)가 다 보인다. 그 여인도 몹시 앙상해서 응당 여성의 소유물인 가슴이나 엉덩이 같 은 볼륨은 찾을수가 없다. 다만 말소리와 행동보고 느낌으로만 여성임 을 알뿐…. 일행 세명중에 그 중 깨끗하다고 하면 앞서가는 젊은이뿐이다. 자재가 없는지 공사하다 중단된 콘크리트 다리기둥의 한쪽그늘에 일 행은 앉아서 잠시 숨을 고르며, 노인은 주머니에서 쌈지를 꺼내여 담 배하나 붙여 물더니 길게 담배연기를 내 뿜으며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네가 이 못난 애비땜에 여기와 고생이구나” 그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청년이 거칠게 쏘아 붙혔다. “아버지탓 아니에요” 그러는 아들을 물끄럼히 지켜보는 노인의 근엄한 눈가에 축축히 눈 물이 괴여 올랐다. 아들이 북조선에서 제일 못산다는 강원도, 강원도에서도 제일 가난 하다는 김화군까지 오게 된 것이 다 전적으로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노인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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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조선에 닥쳐온 “고난의 행군”전까지는 잘나가는 황해북도 작 가 동맹위원회의 쟁쟁한 현역작가였다. 김일성사망과 함께 닥쳐온 전 대미문의 기아전쟁에 제일 먼저 목숨 잃는 사람들이 나약한 인테리들 이였다. 우선 첫 타격으로 1997년 아내가 먼저 굶어죽었다. 아내를 땅에 묻어줄 기력은 커녕 고개들고 하늘 쳐다볼 기운조차 없 어 죽기만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강원도 김화군으로 시집간 막내딸이 살려냈고 또 데려갔다. 강냉이 3키로그램 얻어들고 집으로 돌아오다 초기 만나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한 어머니의 무덤 아닌 무덤앞에 국경에서 군 복무하는 아 들이 왔다가 기절하고 돌아갔다.
가난은 선한인간도 야수로 만들었다. 그렇듯 점잖고 온순하던 막내사위가 칼 빼들고 낟알때문에 아버지를 내 쫓았다. 노인은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나이가 이십년이나 아래인 아줌마를 데리고 산비탈자락에 구뎅이를 파고 움막을 짓고 하루하루 초근목피로 생명을 지탱해가고 있었다. 화는 꼭 쌍으로 온다더니 국경도시 회령에서 군제대후 예쁜 여자얻 어 새 살림 하던 아들이 강원도 ○○로 쫓겨온 것이였다. 이유는 ‘장군님 방침’이였다. 최근들어 국경경비대 제대군인들이 제대후 고향으로 귀가하지 않고 국경지역에 남아서 밀수, 마약범죄, 인신매매등 온갖범죄를 저지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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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써 공화국의 대외적권 위와 위신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그렇기 때 문에 전부 고향으로 돌려 보내려는 것에 대한 김정일 방침이 떨어진 것 이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신과 같은 존재의 지시라 갑자기 국경도시들 이 아비규환 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멀쩡히 살던 수백쌍의 신혼살림들 이 깨져나가고 갈라지고 차마 눈뜨고 못 볼 생이별 장면들이 수없이 목 격됐다.
아들도 방침에 쫓겨 임시적으로 강원도 산골에 왔지만 국경지대가 좀 조용해지고 진정되면 다시 아내와 자식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뭐가 어찌되던 당장 시급한 것은 끼니가 문제였다. 성인 남자 한명이 더 추가되니 하루 두번먹던 풀죽도 하루 한번 먹 는 것 마저 다행이였다. 아버지와 아들은 굶기를 반복하면서도 살겠다고 허리에 낫 한가락 차 고 뱀이 욱실거리는 김화의 산발을 누비고 다니며 싸리나무를 해왔다. 이렇게 한짐 지고온 싸리나무로 광주리며 바구니들을 엮어 장마당에 내다팔고 적게나마 강냉이가루라도 사들고 와 그것을 풀과 버무려서 죽을 쒀 먹었다.
두달도 안되여 아들도 아버지처럼 점점 여위고 못쓰게 변해갔다. 광주리며 바구니도 제철과 시기가 있는 거라 산나물과 새싹이 움트 는 봄철과 수확 계절인 가을철이라야 팔리지 그때가 아니면 그것만으 로는 먹고살기 힘들다하여 지금 새엄마의 먼 친척이 있다는 황해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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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세 식구가 구걸동냥에 나선 것이였다. “아버지 뒤따라오세요. 저 앞에 보위부초소가 있는데 그 옆 어딘가 돌아가는 길 있는지 확인하고 올께요” 아들은 노인과 새 엄마에게 지금부터의 행동사항을 일일히 가르친다 음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한 오십리씩 가면 보위부 단속초소가 곳곳마다 있는데 해당군행정위 원회 2부에서 발급 해준 “여행증명서”가 없으연 절대로 통과할수가 없 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은 초소를 피해 가는길을 알아보려 간 것이 였다. 삼십분거린데도 한시간이 지나도록 아버지 일행이 안나타나자 아들 은 이상한 생각에 오던길 돌아서 다시 내려갔다. 얼마도 못가서 길옆의 무우밭한쪽 귀퉁이에서 앙칼진 사내의 목청이 들려왔다. “이 쌍간나영감태기야 니들 처먹으라고 여기다 무우심어논줄 알아? 앙-이 빌어먹을 종간나 두상태기야 어디 죽어봐라” 이어서 “어쿠쿠—으억” 하는 외마디 비명과 “살려줘요 제발 잘못했 수유” 하는 여인의 처절한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갑자기 아들의 눈빛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한달음에 무우밭에 달려가보니 왠 남자가 아버지와 새 엄마를 무릎 끓리고 죽어라하고 발로 밟아대고 있는게 아닌가. “개××--” 아들은 천둥같은 소리지르며 그대로 튕겨오르더니 그놈의 머리통을 힘껏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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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쫓겨오고 생 이별한 그 아픔, 배고품과의 싸움 짓밟힌 자 존심…. 이 모든것이 그대로 웅축된 분노의 주먹이 그놈의 얼굴에 사정없이 내려 꽃혔다.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여러명의 무밭경비원들이 청년을 덮쳤다. 청년은 쓰러진 아버지를 두팔로 감싼채로 경비원들의 무지한 발길질 에 온몸을 맡긴채 정신을 잃고말았다. 쓰러진 아버지와 아들 옆에는 먹다만 무우 한개가 짓밟힌채로 놓여 있었다.
이것이 바로 2008년 8월 강원도 세포에서 고산가는 어떤 무우밭에 서 내가 당했던 실제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이 땅, 대한민국으로 오기까지의 수많은 위험과 고통, 뼈아픈 고난과 시련, 아픔과 쓰라림의 한갖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 남한에 와보니 제일 흔하고 또 비싸지도 않은 무, 가끔 시장이 나 마트에서 무우를 볼때마다 강원도 무우밭에서 배고파서 무한개 뽑 아먹다가 경비원에게 들켜 줄매맞고 피터지던 아버지와 내 모습이 떠 올라서 눈물이 내 가슴을 찢어놓고있다. 아~아버지! 불쌍한 나의 아버지! 공화국창건 기념일인 9·9절 날에도 다른 집들은 운동회간다고 맛 있는 음식거리들 싸들고 학교운동장에 다들 구경갔지만 아버지는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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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굶다보니 그날 초기를 만나 쓰러지셨죠. 그때 내가 아랫마을 황영 감집가서 온갖 별소리 다들으며 밥 한공기 얻어들고 올라와 숟가락으 로 뭉그려 죽 만들어 아버지 살렸을때 아버지는 저를 귀쌈 한대 후려치 셨죠 “이놈아 죽게 내버려두지 왜 살렸냐” 그리고는 절 부둥켜안고 통곡하시던 모습이 자꾸 얼른거려 살아있는 저 자신이 꼭 죄인 같아요.
아버지, 지금저는 한국에 와있어요. 아버지가 꿈속에서 그려보던 흰쌀밥도 고기반찬도 매일매일 먹고보 니까 이제는 보기조차 싫어집니다. 내가 매일 끼니때마다 먹는 쌀밥이며 고기반찬이며 하는 것들이 그 대로 눈물이고 피가되어 넘어갑니다. 무우 한개때문에 죽도록 엊어터져야 했고 강냉이 한알 때문에 굶어 죽어야만한 아버지와 어머니, 이 못난 아들 용서해주세요. 저만 살겠다고 혼자 도망쳐서 이곳에 온 죄 많은 이 아들 용서하세요. 오늘도 무우한개놓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아버지모습 그려봅 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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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없었으면 나는 안길 품이 없었다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우수상
♥ 한 신의 영혼과 같은 사진 나는 60년대 말 평안남도 ○○에서 사랑하는 부모님의 품에서 태어 나 무남독녀 외동딸로 가정의 사랑을 받으며 어린시절과 청춘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기억중에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어머니 얼굴 과 우리집 벽에 신의 영혼처럼 걸려있는 그 사진이다. 부모님께서 구세주처럼 충성을 하며 살아온 그 길을 당연히 나도 숙 명으로 여기며 김일성대원수님이라 칭송하였고, 철이 들면서부터는 부모님의 이름보다 더 숭엄하게, 친근하게 아뢰었다. 아버지는 아침에 눈뜨면 3상의 초상화를 닦고야 첫 일과를 시작하였으며 당신들은 죽물 도 못 먹고 살았지만 ‘나라를 해방시켜주시고 사회주의를 꽃 피워주신 김일성 대원수님의 은덕과 배려로 나는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이 먹고 입고 살고 있다’ 고 늘 주지시켜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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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절세의 영웅이시며 강철의 영 장이신 김일성의 위대함과 불굴의 투쟁정신’을 그린 <김일성원수님의 혁명활동>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충성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김일성에 대한 불온사상은 상상도 못해봤고 학교에서 누군가 실수로 언행을 했다면 생활총화*에서 날카로운 비판과 사상투쟁을 면할 수 없 었으며, 친척중에 이러한 일로 출당을 받거나 추방을 당한 자가 있다 면 그를 멀리하고 발길을 끊었다. 나는 아버지가 출당을 받은사람이었다는 것을 결혼한 후에야 알았 다. 아버지는 복당(조선로동당원으로 다시 회복되는 것)을 평생의 염 원으로 삼았고 그것이 가정에 떳떳하고 자식을 위한 것으로 알고 밤낮 을 가리지 않고 성실히 일하였고 어머니 역시 직장에서 누구나 존경하 는 모범 노동자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야 그들의 충성심과 순결함은 한낮 물거품에 지나 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슴이 미어짐을 느낀다. 북한의 무서운 세뇌교육은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하였고, 우리들의 몸 은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묶이게 하였고, ‘위대한 수령님’만 외워대며 그 어떤 다른 말도 들리지 않는 ‘인간 로봇’으로 만들어 버렸다. 북한 주민이 굶어 죽으면 김일성도 인민들의 고통으로 잠 못 이룬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고, 미국놈들 때문이라 저주도 하였으며, 먹지 못해도 김 일성을 지키기 위한 군대에 자식들을 10년간 묵묵히 보냈다. 김일성의 무서움 앞에 미국이 승산이 없는 전쟁을 할 수가 없게 되
* 북한의 자기비판 모임으로 「일일총화」·「주간총화」·「월간총화」·「연간총화」 등으로 나뉘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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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있는 쌀과 유엔에서 지원해 주는 물품을 가로 막아 인민들이 식량난을 겪고 있는 것이고, 남한에서 지원해 주는 모 든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담대한 지략과 방법의 결과라고 하니 인민 (주민)들은 속아 넘어갈 수 밖에 없다.
가혹한 추위만큼이나 모진 시집살이 나는 1989년 결혼을 하고 그 해에 아들을 낳았다. 남편이 군관학교 교원을 하여 가족들은 배급을 받고 살았는지라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 다. 나의 출신성분이 문제가 되어 시집의 반대가 심했으나, 나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남편은 이같은 반대를 무릅쓰고 나와 가정을 이루었 다. 하지만 남편은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군복을 벗어야 했고 온 가족 이 ○○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모든게 내탓인것 같아 시부모님 보기 가 죄송하였다. 게다가 북한의 수도곁에서만 살다가 북쪽의 끝인 ○○에서의 생활 은 너무나 춥고 적응하기 힘들었다. 북한의 생활이 괜찮았던 때에도 함경북도는 배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장사촌이라 불리우는 곳에서는 희귀한 중국상품들을 팔고 사며 생계를 유지하는 곳이었다. 평안남도에서는 그 누구도 곱게 보지 않던 ‘장삿꾼’들이 ○○에서는 활 개를 쳤고 부모님처럼 직장일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굶주림속에 허덕 여야 했다. ○○땅에서는 장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혹한의 추위를 견뎌내 야 했다. 추위가 너무 심하였으나, 석탄과 나무가 너무 비싸 겨울에는 이불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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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나올 수가 없었고, 시장에서 떨고 나면 익숙치 않은 추위에 손이 퉁 퉁 붓곤 하였다. 혹독한 추위만큼이나 가정의 불화는 더욱 고통스러웠다. ○○땅에 아버지를 묻고, 홀로 되신 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와서 시 집에 짐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라 생활력도 없다, 출신 성분도 나쁘다, 애초에 반대했을 때 앞집 돈많은 여자와 결 혼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는가…. 등등 시어머니의 심한 구박과 모진 시집살이는 결혼전 부모님 슬하에서 곱게 자란 상황과 너무도 달라 견 디기 힘들었다. 남편이 군복을 벗고 시작한 사회생활의 첫 발도 순탄치 않았다. 평안남도에서 친정의 집을 팔아 가지고 온 돈은 시부모님들과 우리 네식구 살리는데 점점 줄어들었다. 나의 해 본적 없는 장사는 돈을 늘 리는 것이 아니라 줄이고 있었다. 시아버님은 1년을 병석에 누워버려 장마당 출입의 돈으로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힘들었다. 쓰는 돈이 더 많고 버는 돈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그런 나의 심중을 알고 있었지 만, 시부모님의 처사로부터 나를 막아주지는 못하였다. 친정어머니도 밖에서 장사를 하고 집에서는 거의 식사도 안하셨다. 빚을 지면 안된다는 한가지 생각으로 억척스럽게 3년을 버티고 살 아 어느정도 살만하게까지 이르렀지만, 시집에서는 나를 계속 천하게 대했고 아들이 대학도 다녔고 군사복무도 하고 간부배경은 되었었지 만 나의 성분이 나빠서 더욱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는 빈정은 여전하 였다. 남편은 내가 참고 견디기를 바랬고 부모님들을 설득시키려 하지 않았다. 시부모님의 성격이 대단하였고,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심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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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더 힘들게 하였다. 어느 날 친정어머니를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몇푼 쥐어주고 설득시키 던 시어머니의 행위가 나를 분노케 하였고 결국 이혼에까지 이르게 하였 다. 친정어머니는 나 모르게 평안남도로 가려고 하셨으나, 3일동안 차가 다니지 않다보니 할 수없이 시장에 있던 나를 찾아오셨다. 몇 푼 안되는 돈으로 비싼 음식을 사드시지도 못하고 돈을 아끼시다 휘청거리며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어머니를 추궁하여 시어머니가 벌인 일임을 알게 되었 다. 그동안 시어머니의 모든 부당한 처사를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친정어 머니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버지도 안 계시고, 집도 없는 고향에 돌아 가시라니, 그게 웬 말인가. 남편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하나, 나는 이혼 을 요구했고 애들도 시집에 두고 불쌍한 내 어머니를 위해 뛰쳐나왔다. 하지만 나와 보니 집이 없어 막막하였다. 무슨 수라도 써야 했다. 나는 중국에 두달가량 넘어가 미싱일을 해주고 집을 마련할 돈이 생기 면 돌아오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에게 있던 모든 돈을 다 털어 어머 니께 드리고 중국으로 탈북을 했다. 이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이 되었 고, 남편과 아이들과도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인신매매로 팔려가다 3일만 숨어 지내면 찾으러 와서 나를 돌려보내주겠다는 브로커의 말을 순진하게 믿고 속임수에 넘어가 인신매매에 걸려 깊은 중국땅에 흘러들어와 남편 아닌 남편과 동상이몽을 하며 6년을 물처럼 흘려보 냈다. 홀로 친구집에 맡기고 온 어머니의 생사여부도 알 수 없고 가족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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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그리움으로 집 뒤울안에서 운적이 수백번이 넘는다. 중국의 동네 에서는 나를 희귀한 동물처럼 찾아와 말을 시켰다. 나는 미칠것만 같 았다. 돈에 팔려온 상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말을 빨리 배워야 탈출할 수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중국 남편에게 순종하기 시작했다. 말을 알아들으면서 윗동네에 나와같은 동료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그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식구나 그집 식구나 완강히 반대 했다. 하지만, 절절한 우리의 만남을 누구도 막지 못했다. 그나마 이 낯선 땅에서 은복이를 만난 것이 나에게는 생명수와도 같 았다. 그도 분명이 나와 같은 심정이리라. 하지만 그는 나와는 사정 이 좀 달랐다. 자신은 돌아가봐야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하기 때문에 여 기에 온 것이 어머니를 돕는 것이라 했다. 가난에 못이겨 중국에 팔려 오는 것을 알면서 온 것이다. 여기서 배부르게 살고 돈이라도 식구들 에게 보내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돈을 벌어 가족들을 다 시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나와는 좀 달랐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너무나 반가운 인연이었고 형제보다 더 가까워질 수 밖에 없었 다. 우리 사이를 말리다 못해 양쪽 가족들도 경계를 하면서도 만나게 해주었다. 그 즐거움도 오래가진 못했다. 은복이가 북한에서부터 결핵을 앓았 는데 중국에 와서 방치한 것이다. 은복이네 식구들은 그를 그저 종으 로 생각하는 듯 싶었다. 병원에 가면 돈을 쓰게 되어 달갑지 않아 했고 은복이도 한푼이라도 모아두느라 병원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날 은복이가 죽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허둥 지둥 짝을 바꾸어 신은 것도 모르고 뛰쳐 왔지만 그는 이미 얼굴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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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채 관도없이 천 같은 것에 싸여 사람들 어깨에 들리워 산으로 오르 고 있었다. 나는 통곡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가 숨질 때 나라도 곁에 불러 주 었었으면 그의 얼굴이라도 한번 더 봤을텐데, 내가 돌아가도 그 집 가 족들 주소라도 알아두었다가 마지막 돈이라도 전달해 줄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으로 자책을 했다. 그의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은복이와 고향 식구들, 주소라도 미리 알아둘 생각을 왜 못했을까? 은복이 돈이 아니 라도 나라도 북한에 돌아가게 되면 내 돈이라도 들려주고 은복이 잘 있 다고 거짓말이라도 해 주었을텐데…. 그러면 불쌍한 은복이 원이라도 풀어줄텐데…. 돈에 팔려온 ‘상품’인지라 죽어서도 관도 없이 땅에 묻혔다. 집안 식 구끼리 장례식도 없이 밭 옆에 외로이 묻히었다. 나는 혼자 그의 묘 에 가서 엎드려 울고 울었다. 우리는 왜 이런 설움을 안고 살아야 하 니? 우린 왜 이렇게 죽어서도 사람값에도 못 드니? 누울 관도 없이 동 네 죽은 개 묻듯이 돌밭에 묻혀버린 그가 너무도 가여워 설움이 북받 쳐 올랐다. 이 심심 산골에 내가 뜨면 누가 은복이를 기억하며 그에게 음식이라 도 올려놔 주겠는가 싶었다. 나도 여기서 이렇게 죽으면 은복이와 다 를 바 없을 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은복이네 식구들 말이, 북한에서 굶다가 여기와서 그래도 먹고 싶은거 다 먹고 갔으니 그래도 자기네로서는 은복이를 섭 섭하게 안 보냈다고, 병이 없었으면 어차피 도망갔을 거라고, 애라도 낳고 갔으니 다행이라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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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후 다시 벙어리가 되었고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집안에서 일 을 찾아 헤맸고 남편과 함께 일도 다녔다. 잊기 위해 노력해야 되었고 조금만 시간이 있어도 죽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사는 의미가 없고 세 상에 태어난 것이 원망스러웠다. 언뜻언뜻 두고 온 식구들이 머리를 스쳤고, 그때마다 목이 메어오고 가슴이 북받쳐 올라 일에만 온 정신 을 쏟으며 살았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도와줄 브로커를 찾지 못한 채 5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보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려 해도 너무도 많은 세월이 지나갔 다. 돌아가면 보위부에서 나를 탈북죄로 가두어 감금할 것이 뻔했다.
미옥(가명)이와의 만남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서 장을 보는데 누군가 나의 뒤를 따르는 것 같고 자꾸 눈이 마주치는 한 여인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무작정 나 에게 말을 건넸다. ‘북한에서 왔지요?’ 하는 말이 꿈처럼 들리고, 눈물 이 핑 돌았다. 미옥이는 온 지 7년이 되었고 한국에 갈 궁리를 한다고 했다. 나 는 남한에 대해 안좋게 세뇌당한 터라 속으로 몹시 놀랐다. 하지만 그 의 결심은 확고했다. 미옥이는 3번이나 도망갔다가 식구들에게 붙들 려 왔다고 한다. 그만큼 의심을 많이 산 지라 그 집 식구들은 동료와 못 만나게 한다고 한다. 나를 어떻게 알아봤냐고 물었다. 그는 나를 보 지 못했지만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보기와는 달 리 한족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일을 막히지 않고 잘 한다는 소문이 파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여자를 많이 탐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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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에 혼자 나갔다가도 돌아오곤 하여 도망갈 여자가 아니라고 다들 칭 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를 만나기 위해 3일을 시장에 내보내 달라고 구경나가자고 졸라서 나왔다고 한다. 미옥이 식구들은 그를 위 험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7년동안 한번도 시장구경도 안시켰다고 한 다. 그날도 한족 시누이가 옆에 있었는데 나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영 마땅치 않게 여기는 눈치여서, ‘이런 좋은 시누이가 있었네, 한번 놀러 와요’ 라고 중국말을 하면서 서로 통성을 하였다. 미옥이 식구들은 미옥이를 죽도록 농사일을 도맡아 부려먹고 아이를 낳았는데도 아이를 안아보지도 못하게 하고 시집 사람들이 번갈아 맡 아 본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부르르 내 몸이 떨렸다. 도망칠 것 이 분명하니 아이에게는 정들이지 말라는 심보인 것이다. 그는 정말 옷도 변변히 입지 못하고 얼음하나 사먹을 수 있는 땡전한푼 손에 없 다고 한다. 농사지어 판 돈도 시어머니가 관리했고 순전히 몸종노릇만 하고 있는 것이다. 미옥이는 자기도 돈 벌러 나가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면 도망치 기 쉬울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도망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브 로커를 만나지 못하면 북송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5년 세월을 흘려보낸 것이 아닌가. 미옥이는 내가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으니 도와달라고 하소연했 다. 그런 그가 왜 그리 가엾어 보이는지 나보다도 그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할수 있는 힘껏 그를 도와주리라 결심했다. 먼저 도망간 친구가 심양에 자리 잡아서 거기가면 한국행이 쉬운데 심양친구와 연락을 하려 해도 핸드폰도 없고 돈도 한푼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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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나는 미옥이집 식구들을 안심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집에 서는 북한친구들은 오지도 못하게 하고 미옥이도 못나가게 했다. 우리 집에서도 그 집에 갈 궁리조치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부딪쳐 보기 로 했다. 아기의 간식을 사들고 그 집을 방문했다. 긴장을 하며 그집 대문앞 에 섰다. 쫓겨 나오게 될것인가? 들여놓을 것인가? 돌아서게 된다면 다시는 그를 만날 수가 없다는 생각으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 반겨 주었다. 그들은 나의 소문을 많이 들었고 장을 보러 가면 나를 주의깊게 보 았노라고. 시장천을 끊어다가 옷을 해 입는 것도 보았다고 하길래 ‘그 래요, 그럼 미옥이네 집에도 미싱손이 필요하면 돈 근심말고 얘기하시 면 다 해드릴께요’ 하는 말에 기뻐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북 한말을 하면 불안해 하여 되도록 짧게하고 중국말로 했다. 미옥이와 난 짧은 북한말을 하며 대화를 하였고 그들에게는 엉뚱하게 번역을 해 주었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에게 이 동네 사는 다른 탈북민 친구들 좀 만나고 싶다고 집을 모르니 미옥이와 잠시 다녀온다고 핑계를 대어 미옥이와 나와서 다른 탈북민 친구집을 방문하여 그집 한족에게 들키지 않게 화장실로 갔다. 내 전화로 미옥이의 친구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없는 번호였다. 이 번호 저번호 맞춰본지 한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그 집 한족식구가 오면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할텐데 초조하게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오 늘 전화번호를 찾아내지 못하면 다시 오기는 힘들다. 분명히 번호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역번호와 뒷자리수를 이것저것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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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시도하며 화장실에서 땀을 흘리며 긴장속에 전화를 하였다. 하 늘이 도와준 것 같았다.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가 눈물을 핑 돌게 하였 다. 나는 미옥이에게 얼마간의 돈과 함께 나의 핸드폰을 쥐어주었다. 무사히 가기만을 바랬다. 며칠 후 그는 무사히 도망쳐 한국행에 들어 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와이프를 잃은 그 집에서는 온 식구가 우리집에 달려들어 불을 지르 고 경찰에 잡아가겠다고 도끼눈을 하고 달려 들었다. 나는 눈앞이 캄 캄했다. 그들은 경찰에 신고하려 했고 내 신변이 위급하게 되었다. 그 순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나는 북송되어도 겁날것이 없다고 사람값에도 못가는 천대와 수모를 당하며 너희들과 사느니 차라리 북 송되어 사형장에 나서더라도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으면 한이 없을 것 같다고 분노하였다. 그들은 주춤하고 놀라운 시선으로 멍하고 서있었다. 나는 미옥이가 어디에 도착하면 분명히 나 한테 전화가 꼭 올것이니 며칠만 기다려 보자고 했다. 그러면 행처를 알아내서 당신들에게 줄터이니 며칠을 참아달라고 달래보았다. 그들 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그대로 돌아갔다. 긴장이 풀리고 입맛도 없었다. 미옥이 식구들이 다시 나한테 달려 들기 전에 나도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심양으로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집근처에서 떨어진 시내에 나가 택시와 시간, 장소를 약 속해 두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택시기사는 우리집 윗 동네집의 아 들이었던 것이었다. 그는 내가 택시 예약할 때부터 어느집의 누구인지 알고 나의 속셈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꿍꿍이를 모르고 나는 그 날만 기다렸다. 택시가 약속장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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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모든 조치를 해 둔 상태였다. 갑자기 온 동네사람들이 몰려나와 둘러쌌다. 차는 움직이지 않고 우리집 식구들 온 형제가 들러붙어 나를 발로 차고 때리고 다리를 부러뜨려 버린다고 승냥이처럼 달려들어 때렸다. 나는 정신을 잃어갔다. 내가 이렇게 죽 는구나 하며 쓰러졌다. 그 순간에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던 것이 기억 이 난다. 사람들 누구하나 말리지도 않았다. 남편은 ‘잘먹이고 입혀줬 는데 뭐가 모라자 도망치냐’며 죽도록 때렸다. 이런 깊은 농촌에서 장 가도 못가는 처지에 내가 중국인이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정신 을 차려보니 몸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의 피가 그냥 말라있는걸 보니 병원에도 안 실어간 모양이었다. 이러다 죽으면 묻고 살면 족쇠를 채 우고 살 것처럼 으르렁 거렸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인신매매에 팔려 온 몸이니 구원해 달라고 경찰에 찾아가지도 못하니 하소연 할데가 없 는 내 신세가 너무도 억울하여 엄마를 소리쳐 부르며 미친사람 마냥 대 성 통곡하였다. 제 정신이 겨우 들면서부터 귀가 이상하였다. 하지만 그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붓고 멍이 들고, 걸을 수도 없었다. 온 몸이 쑤시고 통증이 시작되었다. 그 후 나는 귀가 이상한 것을 알았지만 아랑곳하 지 않았다. 도망부터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앉아서 죽을 순 없었다. 매를 맞아 귀의 고막이 터졌고 한국에 와서야 치료 받을 수 있었다.
국적도 없는 방랑자 신세 그날 새벽 실내화를 신고 모두 잠든 틈을 타 개들이 짖어대는 속에 달리기 시작했다. 온 몸은 물주머니가 되어 버렸고 늘 다니던 반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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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으로 신발도 벗겨진 줄도 모르고 달리기만 햇다. 인가를 피해가며 5 시간을 헤매였다. 날이 밝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만신창이가 된 나의 행색을 쳐다보았다. 미친여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신분증이 없으니 잠 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뒤덜미를 누가 잡는 것 같은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길을 물어 천신만고 끝에 심양 에 도착했다. 심양에서 친구들을 만나 당분간 먹고 잘수 있는 일자리를 찾았다. 친구들은 벌써 한국에 갈 준비를 끝내고 나와 같이 가기를 요구했으나 나는 겁이 나 갈 수가 없었다. 탈북할 때에도 함정에 빠져 인신매매를 당했던 나는 쉽게 결심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 후 친구들은 한국으로 떠나 갔고 나는 홀로 낯설고 물설은 심양에서 집도 없고, 돈도 없고, 국적도 없이 일자리를 찾아 떠돌아 다녔고 한시도 맘 놓고 살지 못했 다. 중국공안이 지나칠때면 가슴이 섬뜩했고, 경찰차가 지나가면 내앞 으로 달려드는 것 같았다. 친구들은 무사히 갔는지 소식이 전혀없고 나는 사막에 흩어진 모래 알처럼 그저 막막하기만 하였다. 내키지 않던 한족식구들과 살던 그때 마저도 그리웠다. 국적도 없이 돌아갈 수 없는 고아신세, 서럽기보다 는 억울하고 통분해서 북한에서 나를 낳아준 부모님들이 원망스럽기까 지 했다. 북한에서 태어난 죄로 중국에서 신분도 없이 험하디 험한 삶 의 자욱자욱들을 만들며 산송장과 다름없이 살았다. 출신성분을 이유 로 남편과 사랑하는 아이들과 이별의 아픔을 겪고 생사여부를 알 수 없 는 어머니에게 불효를 끼치고 이국땅에서 이토록 헤매고 있는 내 신세 가 한스러웠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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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했다 다시 북송되어 온 자들을 보며 한때는 나도 손가락질을 했 었다. 조국을 배신하고 살아서 차려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길을 원해서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출신성분이 좋지않아 어쩔수 없이, 가족 을 먹여 살리려고, 부모님의 고생을 덜어드리려고, 불온사상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총구를 피해….북한의 하늘 아래서 각기 다른 이유이지 만 같은 탈북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나는 홀어머니에게 집을 마련해 드리고자 두만강을 넘었지만 반역자가 되어 국적없는 고아 신세가 되 어버린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 신고를 당하게 될지 몰라 늘 거처를 옮기며 헤매었 고, 내 정체가 드러날까봐 늘 공포와 우울증에 시달렸다. 심양에서는 조선족들을 자주 만날 수 있지만 탈북민이라는 사실이 탄로나면 누구 나 인신매매의 대상으로 여겼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민족이라 서 호의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했다. 그들에게조차 우리는 돈벌이의 대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여권을 가지고 온 탈북민도 체류기일 넘기고 돈을 마련하지 못해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접근하다 가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신고해 버리기도 한다. 이런 얘기 를 전해들을 때마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나는 조선족들과의 접촉을 가급적이면 피했다. 그들은 혼처자리라고 들고와서는 나를 위 하는 척 접근하지만 한번 인신매매를 경험한 나이기에 쉽게 넘어가진 않았다. 하지만 그 댓가로 또 어떤 위기가 올지 불안에 떨어야 했다. 나는 지쳐갔다. 성격도 점점 거칠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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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찾아온 위기 친구들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었다. 브로커에 의하면 한국에서 친구 들에게 신분증과 집을 주고 신변 보호도 해준다는 것이다. 이게 정말 사실일까? 또 속아서 팔려가는 것은 아닐까? 한국에 가면 가족들과 더 멀어지는 것 같고 만약 실패하여 북송되기라도 하면 온 가족이 총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남한에 가면 북 한의 가족을 데려올 수 있다는 꿈같은 말에 난 한국행을 결심했다. 또 다른 함정일이지 모르지만 몸을 맡기기로 하였다. 친구들이 알려준 브로커에게 연락을 하니, 나 혼자 심양에서 청도 까지 오라고, 거기서 만나자고 한다. 탈북민이 여럿이면 돈을 주고 데 리러 오겠지만 나는 혼자라 타산이 안 맞으니 청도까지 혼자 오라는 것이다. 신분증없이 두 개의 검문소를 통과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 천만한 일 이다. 한국에 먼저 간 친구들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하지 만 이젠 브로커를 믿고 부딪혀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청도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2일간을 달려가야 했다. 검문소 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만약 실패하면 자살할 결심이 되어 있었 다. 한족과 함께 살 때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던 터였다. 중 국어를 전혀 모를 때 집에 있는 약을 닥치는 대로 집어 먹어 자살을 시 도한 적도 있었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버스에 오르면서 나는 하늘을 우러르며 한국에 가고자 하는 나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십사고 빌 고 또 빌었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나는 기사에게 중국어로 검문소에서 검사를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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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으로 하는지를 묻고, 요구하는 대로 돈을 줄테니 통과시켜줄 방법 이 없냐고 물었다. 그는 매일 지나는 버스이기 때문에 그냥 보내줄 때 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돈으로도 어쩔수 없다고 했다. 난 실망하지 않고 1초의 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검문소가 나타나자 버스를 세웠다. 가늘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그 날따라 경찰이 긴 총을 들고 버스 문앞에 두 줄로 늘어서 있고 2명이 올라왔다. 검문소 경찰이 아니었다. 무슨 사건이 발생하여 범인 수색 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눈 앞이 캄캄했다. 나는 뒤좌석에 앉아있었는 데 경찰들이 점점 좁혀들어오고 있었다. 매 승객마다 얼굴을 확인하고 신분증이 없는 사람들은 내리라고 하였다. 나는 스스로 일어나 걸어 갔다. 이제 버스에서 내리면 도망칠 구멍이 없었다. 내가 내리기 위해 앞문으로 걸어가는 동안 경찰은 남은 승객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순 간 나는 번개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버스기사들은(장거리라 2 명이다) 신분을 먼저확인 후 버스에서 내려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장 거리 버스는 운전석이 객석보다 낮게 되어 있었고 커튼이 쳐져 있었 다. 나는 내리는 척 하다가 재빨리 버스기사 자리에 앉아 커튼을 쳐버 렸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 보았으나 다행히 아무도 경 찰에게 신고하지는 않았다. 자기일이 아니면 관심없는 듯 했다. 만약 연변이었다면 누군가라도 신고를 했을것이었다. 경찰들은 내려가면서 운전석으로는 오지 않았다. 운전기사 자리에 누군가 있을 것이라고 생 각하지 않은 것이다. 밖에 있던 경찰관들도 밖에 내린 사람들만 재차 확인할 뿐이었다. 한참이 흘렀고 내렸던 사람들도 신분을 확인받고 올라왔다. 버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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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기자 눈물이 핑 돌았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가 버 스기사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버스기사는 머리를 끄덕였다. 사 정을 알만하다는 표정이었다. 버스기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도와주 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음은 어떻게 한다?’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두 번째 검문소가 가까워오자 버스기사 한명이 따라오라고 했다. 이 번에는 쉽게 넘어가기 힘들다며, 화장실에 들어가 있으라는 것이었다. 화장실이 고장나 운영을 안한 지 2달이 되어간다고 했다. 경찰들이 자 기들과는 얼굴을 익힌지라 자기들 말은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버 스 기사들조차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첫 번째 검문소에서 날 이상하게 생각한 승객 누군가가 날 신고할 수도 있는 터이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들을 믿고 운명에 맡기기로 하였 다. 화장실에 들어가자 밖에서 열쇠를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는 무장한 경찰관들은 없고 차단소 경찰관들 뿐이었다. 경찰이 올라와 서 신분증 검열을 시작했고 마침내 화장실 문을 잡아당겼다. 문을 열 라고 소리쳤다. 버스기사는 화장실을 사용안한지 오래 되었고 사용못 하여 열쇠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벽에 최대한 바싹 붙어 서있었고 경찰관은 뿌연 유리로 안을 들여다보는 듯하였으나 많 은 공구들에 가려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경찰은 앞으로는 열쇠를 가지고 다니라고 하고는 버스에서 내렸다. 오그라들었던 심장이 털썩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청도에 도착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마중나온다던 브로커가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연락은 전혀 되지 않았고 나는 불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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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떤 고비를 겪고 여기까지 왔는데, 일이 계 속 꼬이는 느낌이었다. 나는 기진맥진한 걸음으로 도시 간판들을 보며 헤매었다. 여관에는 신분증을 요구하기 때문에 위험하였다. 식당에서 일을 해야 먹고 잘 수 있는데,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질 않았다. 너무 배고프고 지쳐 어느 식당 문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노라니 허무한 생각과 내 몸하나 누일 곳 없다는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얼마쯤 흘렀 을까 식당의 사장님인 듯한 분이 다가와 ‘왜 여기 앉아 있느냐’고 말을 건넸다. 난 대답할 힘조차 없었고 그저 눈물만 주루룩 흘렸다.
‘남조선 괴뢰도당’을 만나다 그는 나의 행상이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들어오라고 하고 음식을 내 어주었다. 난 그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의심도 않은 채 주는 음식을 게 걸스럽게 먹었다. 이 후 정신을 가다듬고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내가 북한사람이고 탈북민이라고 짐작한 듯했다. 나는 자세한 대답을 피하며 다짜고짜 일을 시켜달라고 했다. 그는 자리는 없지만 사정이 급한 것 같으니 당분간 일하라고 했다.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그 후 나는 사장님이 한국분이라는 것을 알았고,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좋은 분이신 것 같았지만, 썩은 자본주의에 거지들이 득실거 리고 병든 세상이라고 배웠던 남한의 국민이 아닌가. 한국드라마도 몇 번 보았지만 드라마일 뿐 현실로 믿지 않았고, 미국놈과 남조선괴뢰도 당의 모략에 의해 북한이 식량난을 겪고 있다고 배웠던 그 남조선에 사 는 사람들에 대한 의혹을 금방 떨쳐내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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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장님 부부들의 따뜻한 배려에 나의 마음은 조금씩 움직이 기 시작했다. 조선족 직원이 이유 없에 나에게 시비를 걸면 가차없이 내보냈고 진심으로 나를 위해주었다. 그들 부부는 내가 한국에 가는 것 만이 살길이라고 기회가 되면 꼭 한국에 가라고 나를 일깨워 주었다. 그러던 중 김정일의 사망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좋은일인지 나쁜일 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항상 미국놈들과 남조선놈들이 전쟁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때 전쟁이 일어나게 않겠는가? 그러 면 내 어머니와 가족들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공포가 엄습해왔 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의 뉴스에서는 전쟁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김정일의 사망에 따른 북한의 정세만 초점을 두고 보도할 뿐이었 다. 미국도 전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나는 의아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너무도 이상해서 사장님께 물어보았고 사장님은 한국에 대해 너무도 모르는 나를 보며 웃어 보였다. 사장님의 설명은 나를 그 깊은 악몽에서 깨어나도록 제동을 걸어주었다. 정세가 이쯤되면 탈북을 막 는 북한의 악날한 책동이 더 심해질 것이었다. 애도기간에 탈북하거나 북송되는 자들에겐 가혹한 형벌이 내려질 터이고 중국에 숨어사는 우 리들의 숨통은 더욱 더 조여질 것이다. 난 브로커와 연락을 닿기 위해 온 정신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날 나 와 청도에서 만나기로 하였던 브로커에게서 연락이 왔다. 후에 안 일 이지만 그도 당시에 붙잡혔다 손을 써서 풀려났다고 한다. 그는 지금 정세가 매우 좋지 않으니 음력 설명절이 지나고 연락을 끊지 많고 기 다리라고 했다. 그렇게 하여 나는 드디어 시련을 마감하고 대한민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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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하게 되었다. 그냥 그렇게 살다 어느 현해탄에 묻힐지 몰랐던 우리가 한국의 보 호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꿈처럼 생각되었고 새 삶의 희망을 찾게 되었 다. 그토록 설움만 받고 행복이 무언지도 모르고 살았던 우리를 품어 준 곳은 북한에서 그토록 비난하던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그저 놀랍고 믿기 어려웠다. 탈북민들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들여 우리를 비행기로 입국시켜 준 고마움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처음 하나원에서 8.15해방과 6.25 전쟁, 3대독재 패밀리와 북한 체제 등에 대한 선생님들의 말씀은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우리에게 북한에 대한 나쁜 인식을 심어주려는 목적의 사상 교육이라고 생각했 다. 하지만 하나원 생활을 거치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불편함이 있을까 챙겨주는 세심한 필수품에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 고, 밝은 얼굴로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눈에서 밝은 세상을 보 았다. 정착생활에 필요한 필수과목들을 배우며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 고 짐승만도 못한 운명을 한탄하며 걸어왔던 우리들은 점차 달라졌다. 선생님들과 대화를 할때면 웃음꽃이 피어났고 삶에 대한 간절함이 가 슴 차게 하였다. 하나원에서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지 금도, 아니 일생동안 잊을 수 없다. 국적을 박탈당한채 얼마나 많은 날 들을 방황하고 헤매었던가. 사선을 헤치고 왔다며 집을 주고, 사회에 정착할 수 있게 자세하게 교육해주고, 하나센터에서는 실생활까지 알 려주며 대한민국 국민과 똑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이 나라 야말로 나를 낳아준 부모님보다도 어쩌면 더 고마운 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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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님들은 그처럼 충성을 다했던 김일성, 김정일이 백성을 기만 하고 세상을 속였다는 사실을 모르신채 가셨다. 이제 나는 그 생각하기 싫은 과거에서 깨어났지만 김정은의 발밑에서 그 포악한 폭력 앞에 기 를 뺏기고 노예로 살고 있을 북한주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진다. 김정은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세계를 알고 저들의 잘못을 아는 인 민들이다. 그리하여 중국과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을 모두 반역자, 배신자로 몰 아 처형하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을 외부세계와 철저히 차단하고 있는 김정은이 다른 세상을 다녀온 자들의 눈과 입과 귀가 무서운 것은 어쩌 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자루속의 송곳은 감출수가 없듯이 이 또한 오래갈 수는 없다. 통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며 그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터질때는 반드시 올 것이다. 쓰고 싶은 말들이 많고 감사의 마음을 더 크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을 고를 수가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대한민국에 와서 귀수술도 받아 건강 도 많이 회복하였고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북한에서는 받아볼 수 없는 복지혜택도 대한민국 국민과 똑같이 받고 있고 탈북민에 대한 정부의 특별한 관심속에 더 바라는 것 없이 살고 있다.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통일이 되어 두고온 고향땅에 묻히고 싶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 니 옆에서.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새로운 가정을 지킬 것이다. 가정을 지키는 자그마한 일도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총을 메고 지키 는 일만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설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지 키는 것도 대한민국을 지키는 큰 몫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대한민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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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으로서 자신을 수양해 나가며 열심히 살 것이다. 다시 한 번 제 2 의 고향을 만들어주고 제 2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대한민국에 감사하 며 부족한 수기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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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참된 존엄을 찾기까지!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장려상
♥ 현 꽃피는 4월의 봄이다. 모든 만물이 소생하고 새싹이 움트고 사람들에겐 따뜻한 사랑과 희 망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4월! 4월의 하늘가에는 따뜻한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봄의 아름다움을 알리며 꽃잎들이 귀여운 자태를 뽐내며 거리와 마을을 눈부시게 장식 한다. 움터나는 새싹과도 같이 나에게도 올 한해 열심히 일해서 보람 있고 즐거운 한해를 보내려는 마음의 결실이 꽃잎처럼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이 4월이 너무도 끔 찍할 만큼 고통스럽고 아픈 상처들로 많은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아프 고 괴로운 4월로 기억되고 있다. 이글을 쓰면서 나의 마음은 자연히 죽을 때 까지 평생 기억하고 싶 지 않은 저 고통의 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의 고향은 한반도의 일명 철의 도시라 불리는 함경북도이다. 집에 서 몇 걸음 나가면 도랑물이 졸졸 흐르고 앞산에는 봄이면 진달래와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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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이 그림처럼 피어나고 푸르른 바다가 있는 살기 좋은 고장이다. 잊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은 그런대로 무난히 흘러갔다. 김일성의 인덕정치로 인민들에게 쌀밥에 고기죽을 먹이는 것이 자신의 평생소원 이라고 박차를 가할 때였고 또 70~80년대는 북한이 부유했고 잘 살 때였다. 내가 자라던 시기에는 구걸이나 도둑질하는 사람도 없었고 너 나없이 어느 집 별차 없이 잘 살고 있었다. 의사인 어머니와 직장 사장급인 아버지의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어 려서부터 남자이상으로 말괄량이였고 장난도 심했으며 특히 모험을 대 단히 즐겼다. 또래의 아이들과 솔방울 따러 산에 올라가면 그 큰 높이 의 소나무에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려 그네 타듯했고 다른 사람들의 흉 내를 잘 내어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넉살좋은 여자애였다. 희망도 컸고 꿈도 많았다. 보도하는 방송원이 되고 싶었고 노래하는 배우들을 보면 가수가 되고 싶었고 예술체조를 하는 애들을 보면 또 그 것도 하고 싶고 무슨 악기나 다 치고 싶을 만큼 예술의 천재가 되고 싶 었다. 또 액션영화를 보면 무술 하는 여배우처럼 나도 매력 있는 액션배우 가 되고 싶어 실제로 영화배우 시험에도 도전하기고 하였다. 나의 변 덕스러운 요구에 부모님도 어느 장단에 맞출지 갈피를 잡지 못하셨다. 춤을 배우다가 아코디언을 배웠고 그것도 잠시 노래를 배우다가 결정 내린 것이 아나운서였다. 학교 선생님이나 소년궁전 선생님이 성대가 좋고 발음이 정확하고 감정이 풍부하다며 부모님께 권유하고 나도 소 질이 있는 것 같아 도전을 했지만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공부도 예외 될 수 는 없었고 아버지의 엄한 통제 속에서 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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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히 배움을 길을 닦아나갔다. 인텔리 출신의 부모덕에 공부도 아버지 의 요구에서 벗어나지는 않았고 시험에서도 90점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 당시 북한은 봉건사상이 한창 일 때라 여자는 대학보다는 시집을 잘 가면 대학 열 개 나온 것보다 더 낫다고 하였지만 우리 아버지는 자 식들 중에 유달리 내게 큰 희망을 거셨고 많이 사랑해 주셨다. 내가 뭘 하고 싶다면 거의 다 들어 주실 정도였고 밥상에서도 자신의 밥이나 맛 있는 반찬은 내 그릇에 꼭 덜어주실 만큼 아껴주셨다. 나는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공부도 예술도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고 열심히 하며 집안이 웃음이 되었고 원래 무뚝뚝한 아버지가 직장에서 항상 내 자랑을 하실 정도였다. 그렇게 근심 걱정 없이 살던 우리 집에 너무 뜻밖의 때 이른 어머니 의 사망으로 웃음을 잃었고 나도 모르게 기가 죽어 “얌전한 소녀”즉 “말 하는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어머니의 3년상을 지낸 후 아버지에게 재 혼을 권유했지만 아직 어린 자식들에게 눈칫밥을 먹이고 싶지 않다고 번번이 거절하셨고 정말 말씀 데로 평생을 홀로 사시다 외롭게 가셨다. 지금도 우리 위해 자신을 바친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저 아프고 죄스러 운 눈물뿐이다. 철없던 그 시절에는 부모님은 밥 한 끼도 못 드셔도 그래도 되는 줄 알았고 아픈 걸 참고 일해도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 알았고 밤잠 못 주 무셔도 그래야만 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어머니가 돌 아 가셨을 때 우리가 다자는 깊은 밤 어두운 집안 창문의 한쪽에 쭈그 려 앉으셔서 그렇게 소리죽여 울고또 우시 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부모 님은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처음 알았다. 어머니를 잃고 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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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자식 중 그 누구도 의사가 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으셨고 나의 군 임대를 추진하셨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신체검사과정을 거쳐 드 디어 군복을 입고 군에 가는 날이 다가왔다. 인민보안성 예술선전대로 뽑혀 가게괴어 군복을 입고 집에 가니 아버지는 기뻐 하시면서도 섭섭 함을 감추지 못하셨고 고향을 잊지 말고 군 생활 잘하라고 힘과 용기를 주셨다. 눈물겹게 고향과 부모형제들을 떠나 평양에서 복무 한 나는 별 힘든 훈련과정을 거치지 않고 선전대에서 나의 재능을 키워가고 있던 1994 년 뜻밖에 김일성 사망소식이 방송될 특별 보도자료를 보게 되었다. 오직 “우리 수령님”,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 관”으로 그 이름 빛나던 김일성의 사망소식에 나는 아니 전군이 오열 했고 믿을 수가 없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보도하면서 그렇게 울고 울던 내가 지금 생각 해 보면 참 우습기 짝이 없다. 김일성의 사망으로 북한은 1995년 말 부터 전 세계를 떠들썩했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나는 군에서 근심 걱정 없는 생활을 하고 있어서 다소 놀랐지만 사퇴는 벌써 배급이 자주 끊겼고 직장에 나가도 월급도 밀리면서부터 미국의 “경제봉쇄”가 시작되었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집이었다. 김 일성의 사망으로 아버지는 정신적 충격으로 뇌혈전(반풍)이 와서 오른 쪽 팔다리와 시력이 자기 기능을 다리지 못하고 있었고 병으로 인해 직 무변동이 생기면서부터 우리 집도 차츰차츰 기울기 시작했다. 홀아버 지를 모시느라 결혼도 연애 한번 못한 언니들도 아버지 병시중으로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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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도 없는 직장 일을 하고 또 이것저것 장사도 하며 집안을 돌보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엄한 당부로 군에 있는 나는 이 모든 것을 전혀 알 수 도 없었고 아버지의 병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1988년 세계 13차 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면서 ○○○ “통일의 꽃” 도 보게 되었고 군사 대표단으로 참가한 후 표창 휴가로 집에 와서 건 강한 아버지를 보고 올라 간지 몇 년 사이 너무도 많은 것이 변했고 달 라졌다. 아버지의 병이 심각해지자 큰언니가 생각다 못해 나에게 등기 편지를 보내와서야 나는 당시 집안의 위기와 시련을 알 수 있었다. 나 는 부랴부랴 휴가를 신청하고 이틀 뒤 급행열차를 타고 저녁쯤 도착하 여 문을 여니 예전에 내가 있을 때의 그런 온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아랫목에 누워계시는 아버지의 수척해진 모습을 보니 눈물이 쏟아져 아무말을 할 수가 없어 그저 그사이 눈에 띄게 늙으신 아버지의 여윈 손만 쓸어만질 뿐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온갖 고민 끝에 제대 신청서를 냈고 입대 할 때와 는 다른 군복을 벗고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를 간호하였다. 워낙 연세 도 좀 있으시고 체력이 약하시다 보니 병은 좀처럼 수 그러 들 줄 몰랐 고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고 나름대로 모았던 예단들 저 금했던 돈들, 팔수 있는 것을 다 팔았다. 나도 제대하면서 준비해왔던 군복들, 신발 등 다 팔다 싶어 했으나 워낙 약값이 비싸 가진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튼 우리 형제 들은 당장은 아버지 병을 고치는데 모든 힘을 모았다. 작은 장사부터 안한 것이 없었다. 쌀을 사면 약값이 모자랐고, 약을 사면 쌀값이 모자 랐다. 우리는 허리띠를 더 조르고 아침과 저녁을 먹고 점심 한 끼는 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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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면서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상태는 여전했다. 1996년도에서 부터는 하루에 한기 먹을 때도 있었고 풀죽도, 송기 로 떡을 빚어 먹어도 보았고 도토리 죽, 먹는 풀인지도 모르면서 뜯어 다 먹으며 죽지 않고 살면 내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3일을 물도 못 먹으며 방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지만 앓고 계신 아버지가 걱정되어 식은땀을 철철 흘리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옆 집에 가서 100그람의 쌀을 꾸어다가 간신히 밥을 해서 대접하니 정 신없이 잡수시던 모습, 너무 불쌍하고 가슴 아파 지금도 가슴이 아려 온다. 그렇게 평생 법 없이 사는 양반으로 소문날 만큼 바르게만 살아오셨 고 비리는커녕 집안에 TV한대도 못해 놓으면서도 힘든 사람들, 직원 들의 고충을 다 들어 주셨고 해결해주신 우리아버지의 손에서 당원이 되고 대학에 간 사람들만 얼마였던가! 좋을 때는 인정 많은 우리 사장 님이라고 이것저것 싸들고 저들의 목적을 위해 문턱 닳도록 우리 집문 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병으로 일을 못하시고 드러누우시자 그림자도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언니들과 상의하고 돈을 빌려 마른 오징어를 사가지고 양강도 에 왔으나 백주에 사기꾼에게 떼이고 한순간에 오도 가도 못하는 “꽃 제비”가 되었다. 동전 일전 한 푼 없이 집에 갈수도 먹을수도 없이 헤맨지 3일째 되 는날 이제 더는 정말 눈 뜰 기력조차 없어 운명에 맡기고 있을 때 혜성 처럼 나타난 고마운 은인(후에 알고 보니 인신매매꾼)에게 구원되어 돈을 벌러 간다는 구수하 말에 속아 국경인 압록강을 건너게 되었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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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아닌 친척을 찾는데 성공하였고 얼마간의 돈을 보내 아버지의 병 간호에 도움을 주었고 조선족으로 위장하여 돈을 벌면 다시 나가리라 결심했지만 우리친척과 등을 진 조선족의 고발로 아닌 밤중에 중국 공 안에 잡혀 도문시의 변방대에 약 보름간 갇혀 있다가 북한 온성에 있는 남양으로 북송되었다. 나는 그 당시 사회물정을 몰랐고 또 잡혀나가면 총살당하는 줄 알았 다. 온성군 보위부 단련대에서 죽도록 맞으며 온갖 일을 하다가도 집 결소로 이송된 후 반성문을 쓰면서 담당 보안원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있을 때 중국에서부터 같이 잡혀온 ○○군에 고향을 둔 여자애가 내가 한국에 갔었다는 허위진술을 해 나는 특별 감시대상이 되어 경찰서에 가서 족쇄를 찬 채 발길질을 당하고 이틀간을 밥도 물도 못 먹고 고문 만 당했다. 나에게 한국에 갔었다고 자백을 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라 고 말할수록 고문의 강도는 높아지고 애기 주먹만한 콩떡 하나로 하루 를 넘겼고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수갑을 차고 서서 밤을 보냈다. 열흘이 지속되자 나는 더 버틸 힘도 나의 결백을 밝혀줄 증인도 없 었으며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길 편안히 가고 싶어 허위자백을 하고 예심기간과 재판을 거쳐 요덕수용소로 혁명화**를 가게 되었다. 말로는 가서 1-2년 생활 잘하고 나오면 된다지만 나는 거기 들어가 면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걸 포기하였다(나중에 알 게 되었지만 일단 들어가서 죽으면 개죽임이 되며 죽어도 나오지 못하 는 곳이었다).
** 혁명화 : 개인의 이익을 버리고 당과 혁명을 위하여, 그리고 집단과 대중을 위해 물불을 가 리지 않고 몸바쳐 싸우는 강한 의지를 갖게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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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팔방이 가파른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그곳에서 아침부터 옥수 수 죽을 먹고 산에 올라 땅을 파고 풀을 뽑고 돌을 골라내는 등 힘에 부치는 농사일을 하면서 5년을 살았다. 처음 들어갔을 때에는 영양실 조가 와서 발등이 빵처럼 부어 남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 하러 갔다. 거 기는 일을 못해도 일하는 현장에 누워있거나 앉혀놓았다. 다른 반찬도 없이 절인 양배추 국에 강냉이 눈으로 만든 죽을 먹고 잘 먹고도 그 힘 에 부친 농사일을 해낸다는 것을 보통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 이었다. 오늘 죽으면 죽고 내일 죽으면 죽는다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하루 하 루를 버티던 나를 정신 차리게 한 것을 다름 아닌 같이 일하던 한 여자 아이의 죽음이었다. 온성에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들어온 그 아 이는 처음에는 생기도 있었고 무엇보다 노래를 잘했다. 그러던 아이가 폐결핵에 걸려 한달을 앓다가 피한사발을 토하고 그대로 가버렸다. 죽 은 아이를 수용소에서는 가마니에 싸서 평지에 그대로 묻어버렸다. 비 석도 무덤도 없이 부모 친척들의 장례도 없이 개처럼 그대로 묻혀 한줌 의 거름이 되 버렸다. 나는 그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여기 서 죽으면 개죽음이 되는구나. 가문과 나 자신에게 평생의 ‘먹’이 되느 니 어떻게든 살아서 나가야 된다는 반감 비슷한 생존감이 뇌리를 쳤다. 그때부터 나는 이 악물고 살기 위해 심어야 하는 종자콩이며 옥수 수, 팥, 심지어는 돋아나는 풀도 먹을 수만 있다면 다 먹었다. 내가 여 기서 가치없이 이대로 죽어버리면 생전 그렇게 자신보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셨던 아버지의 임종조차 지켜드리지 못한 죄책감을 풀 수 없 을 것 같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눈도 못 감으시고 괴로워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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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같았다. 이안에서 무슨 체면이며 수치와 모욕을 가지랴. 살아나가 려면 창피를 몰라야 했고 슬픔과 아픔의 괴로움 속에 허덕이지 말아야 했다. 냉정해야만 했고 가혹해야만 하는 주어진 현실에 직시해야만 했 고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들어야 했다. 또 하나의 커다란 사건! 도주를 시도한 두 탈주병에 대한 공개총살 이었다. 수용소 군인들과 군견, 우리들까지 총동원하여 산속을 참빗작 전으로 샅샅이 흩던 3일째 되는 저녁에 끝내 발각되어 잡혀 개처럼 끌 려 들어왔고 바로 총살감이 되었다. 이미 맞아 터지고 멍들고 온몸이 찢겨진 두 사형수는 그저 겉모습만 사람이었다. 입에 자갈을 물리고 말도 못하게 흰 천으로 막고 산 밑에 박은 말뚝에 제몸하나 가누지 못 하는 그들을 밧줄로 묶어세우자 세 명의 사형집행관들이 자동소총으로 아무런 손 떨림이나 아픈 표정 없이 머리와 가슴에 사정없이 총을 쏘니 머리에서는 뇌가 튀어 나오고 가슴에서는 선지피가 샘솟듯 콸콸 쏟아 져 내려 온몸을 적셨다. 당시 처음 피를 보고 놀라고 매스꺼움에 잠시 기절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깨어나니 이미 만신창이 된 그들에게 두 번 죽음이 치러졌 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 앞을 지나며 돌을 힘껏 던지고 침을 뱉으라는 것이었다. 살짝 던지는 사람들은 죽도록 뭇매를 맞았다. 우리들이 던 지는 돌들에 그들의 몸은 너덜너덜 걸레조각이 되었고 거적대기에 말 아 삽으로 차에 싣고 어디론가 가져가 묻어버렸다. 지금도 그때일을 생각하면 속이 울컥거린다. 너무 비참했고 잔인했던 그들의 죽음은 조 금이라도 있던 도주와 반항의 싹을 단칼에 자라낸 계기가 되었다. 아직도 나의 몸에는 수용소에서의 상처들이 역력히 남아 고통의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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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을 불러일으킨다. 나 역시 자살을 시도 했다는 이유로 2년이 연기되 었고 삶과 죽음을 오가며 5년이라는 시간을 버텨냈다. 한번 날아간 새 도 다시 살아나오지 못한다는 그 죽음의 요덕수용소를 나는 인간이 아 닌 한갓 동물로 살아나왔다. 그렇게 살아나왔지만 북한은 여전히 경제난으로 허덕이고 있었고 내 몸 하나 품어줄 자그마한 보금자리도 없었다. 형제들은 수용소에 갔다 온 나를 전염병 환자 취급했고 어디 갈 때면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리 며 나와의 접촉을 피했다. 이미 나는 사랑도 믿음도 잃었고 다시 이곳 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다시 탈북을 시도해 중국으로 와서 처음의 경험을 살려 말과 글에 익숙해 지는데 집중했고 깊은 농촌마을에 가서 일하면서 알게 된 중국 남자와 결혼하여 6년 만에 아들을 낳았지만 위험의 순간은 언제나 내 곁에서 떠날 줄 몰랐다. 혼자였을 때는 까짓것 나하나 였지만 어렵게 생긴 아이를 보고 있 자니 예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쩌면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귀한 선 물을 나는 잃고 싶지 않았고 그때 까지는 없었던, 아니 몰랐던 모성 애로 꼭 지키고 싶었다. 그러자면 나와 아이의 보금자리 역시 중국은 아니였다. 또 언제 잡힐지 언제 내 아이와 생이별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그 땅을 떠나 어쩌면 새로운 사랑이 있을지도 모를 신비의 세계로 “모 험”을 하기로 하고 이미 누명을 쓰며 알게 된 미지의 세계 “대한민국” 이라는 열차에 두 생명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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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국으로 오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밤길을 걸어야 했고 산 길을 걸어야 했고 떨리는 손으로 어린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이며 곤명 과 라오스, 태국의 산을 넘고 넘으며 손끝이 닳아 떨어지고 무릎이 터 져 멍이 되면서도 오직 하나. 사랑과 자유를 위하여 인간의 존엄을 찾 기 위해 헤쳐 나온 사선의 고비를 그 얼마이며 경찰에게 또다시 잡힐 뻔했던 아슬아슬한 순간들, 악어강에서 두 모녀가 물려죽는 모습을 보 며 어린생명만은 살려보려고 이몸을 바쳤던 위험천만한 일촉측발의 순 간들을 어찌 한 두마디 말과 글로 다할 수 있겠는가. 길가의 조약돌 마냥 이리차이고 저리차이며 인간이 존엄과 자존심 사랑까지도 무참히 짓밟히고 유린당했던 피눈물 나는 그때로 다시 돌 아가서는 안 되었기에.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게 그런 불행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에 필사 적으로 정말 마지막 초인간적인 힘을 다해 길수 있는 것 기었고, 넘어 질 수 있는데 까지 넘어지면서 어찌보면 내가 갈망하던 사랑의 빛이 보 일지도 모를 나를 안아줄 따뜻한 손길이 기다리는 것 같은 아득한 저 멀리 여명의 언덕으로 한걸음 또 한걸음 다가갔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둘도 없는 목숨을 내걸고 기적같이 찾아 온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지금은 비록 화려하고 부유한 생활은 아 니어도 내 나름의 소박하고 마음편한 생활을 하며 삶의 희열을 한껏 느 낀다. 물론 한국에서의 생활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기쁘고 만족스러운 건 아니다. 이 땅에서도 아픔도, 슬픔도 당했고 인간관계에서도 적지 않 은 상처를 입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심한 스트레스 우울증으로 마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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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꽁꽁 닫고 사람들 만나기조차 꺼려했고 자주 떠오르는 지나간 과 거의 아픔들이 악몽처럼 나를 괴롭혔고 그 화풀이를 어린 자식에게 풀 어버리는 힘든 한때도 있었다. 나는 왜 몰랐을까 내가 아프면 나보다 더 아픈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을, 내가 외롭고 힘들면 더 외롭고 힘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힘들어 할 수록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병만 깊어진다는 것을 명상음악 을 들으면서 혼자 눈물을 흘렸다. 나는 왜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사랑 하지 못했는지, 나는 왜 지금까지 자신의 귀중함에 대해 느끼지 못했 는지 남의 아픔에 대해서는 가슴아파하면서도 나 자신의 아픔엔 소홀 해 왔던지 지금에 와서 너무 후회가 된다. 지금에야 비로소 느끼게 되 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도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이세상도 나를 더 이상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심오한 진리이다. 지금 이시각도 저 북한 땅에서는 나의 형제들이 굶주림과 기아의 빈 궁 속에서 고통과 아픔으로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다. 그들이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게 하려면 내가 사는 이 나라 대한민국을 더 부강하고 위 대한 조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부모님의 평생의 소원이자 나의 소원인 아나운서의 희망은 일생의 꿈으로 남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룰 수 도 있을 언젠가는 나에게도 찾아올 기적의 빛을 그리며 사랑하는 아들 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시도 쓰고 수기도 쓰며 열심히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나는 지친 삶에 부대끼며 사랑도 꿈도 망각하고 있었다. 내 꿈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살만한 마음의 여유와 희 망도 없이 오직 삶과 죽음의 길에서 헤매면서 생존만 생각하며 고달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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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멈추고 돌아보니 비로소 보이는 사랑과 꿈! 그 것이 나에게도 있었다는 분명한 사실. 있어도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나의사랑, 나의 꿈이었다. 나의 작은 싹도 틔워주시려고 밝은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살길 바라며 진심어린 노력과 마음을 기울여 주시고 뜨거운 사랑과 관심속에서 걸 음걸음 이끌어 주시는 우리 신변보호 담당 형사님과 나를 비롯한 2만 5천여명의 수많은 탈북민 모두를 따뜻한 사랑으로 안아주고 입혀주고 인간의 자유과 행복을 찾아주고 참된 사랑과 꿈, 인간의 참된 존엄을 안겨준 내나라, 내 조국 위대한 대한민국에 진심어린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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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5회 신지식인 선정은 나의 세 번째 인생 시작이다. 탈북민 제1호.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장려상
♥ 김 2015.5.6 오후에 짤막한 문자가 핸드폰에 도착했다. “2015년 25회 신지식인에 선정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인증식은 5.27 오후 15시에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할 예정이니 참석바랍 니다” 가슴이 벅찬 순간였다. 정말 내가……. 바로 한국신지식인협회 홈페이지 공지사항 ‘[공고]제25회 신지식인 선정자 명단(1차)’를 클릭 하여 ‘김○○’ ‘김○○’ 속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 하며 내려갔다. ‘2. 특허(4) : 김○○, 김정갑, 나병철, 박정열’에 내 이름이 첫 번 째로 또렷하게 있음에 다시한번 희열을 느꼈다. 남한에서 대단한 사 람들이 신청하는 그 것도 특허분야에 내가 당당히 선정될 수 있다 니……. 같이 일하는 내 친구 광철이도 부르고 남장군 김여사님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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렀다. 다시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남장군 김여사님은 “야 김동지, 이 김○○가 니 이름이 맞냐?” 사무실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오늘따 라 초록 5월의 푸르름이 내 마음을 더욱 더욱 뛰게했다. 이 기쁨을 제 일먼저 서울에 계시는 어머니와 누님한테 알렸다. 어머님은 “아야 그게 사실이가? 거짓말 아니메이. 그것 되면 고생 다 한 것이고 이제 돈만 벌 먼 된 것 아니메이. 우리아들 최고다”라고 묵뚝뚝하게 말하시는 어머님과 옆에서 기뻐하는 누님의 목소리를 들으 니 북한에서 탈북하여 중국에서 고생한 수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담배 한 대를 피고 있었고 말수가 적은 고향친 구 광철이(가명)도 옆에서 같이 담배 두세대를 피우며 나를 보고 가만 히 웃고만 있었다. 말은 한해도 내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 쁨을 우리 김형사님한테도 전화했다. 나의 불평불만을 묵묵히 받아주 고 지원해주시고 있는 우리 김 형사님은 “다 자네가 열심히 노력하고 애쓴 결과다. 이제 자네도 공인이니 더욱더 열심히 살고 모범을 보여 야 하네”하며 격려해 주셨다. 또 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고 격려해주신 ○○경찰서 보안협력 위원회 문영수 위원장님과 민평통○○군협의회 명예위원으로 위촉시 켜주고 지원해주신 정금연 회장님도 기뻐하시며 “열심히 노력하니까 노력한 만큼 댓가를 얻는 것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국가다“ 라며 격려 해 주셨다. ○○군농업기술센터 이병창 과장님도 ”다 네가 열심히 노 력한 결과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국가 우리나라다“라며 기쁨을 같이 했다. 다들 주변사람들이 말씀하시는 ‘성실히 노력한 만큼 얻은 것이고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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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한 만큼 그 댓가를 받는다’는 것이 역시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다 시한번 절실하고 가슴깊이 느끼게 됐다. 열심히 일해도 배고프고 고달 픈 저 북쪽사회에서 도저히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확 실히 비교되는 사회임을 또 한번 느꼈다. 내 고향 ○○은 겨울이면 유 독히 춥다. 칼로 살을 베는 듯한 겨울바람과 베고픔은 나를 더욱더 억 세고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그 추운 겨울에도 10여km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개구리를 잡아 먹기도 했고 옥수수대 껍질을 벗겨 씹어 먹기고 수없이 했다. 86년 인민학교에 다닐 때 학교 에서 씨름을 많이 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강 제로 씨름을 시켰다. 때리기만 않했지 격투기 싸움이나 다름없는 몸싸 움이었다. 배고파 힘도 못쓰고 넘어지면서 상대친구가 나를 깔고 넘어 지는 바람에 내 왼쪽 팔꿈치 관절이 부러졌다. 치료를 제대로 하지못 해 휘어져 굳어진 바람에 왼쪽 팔은 힘도 제대로 못쓰게 되었고 짝짝이 팔이되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군대도 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농 장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장사를 하며 어머니와 누나를 먹여 살려야 했 다. 일을 해도 댓가가 부족해 늘 배가 고팠고 되거래장사를 해도 집안 사정은 늘 그대로였다. 왜냐하면 내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94년도부터 90년대 중반은 그 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기 때문였다. 몇 년 사이에 수 백만명이 넘게 북한 주민들이 배고파 죽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우리 가족이 살았던 ○○뿐만 아니라 청진에서도 길가에 쓰러져 죽어 있는 사람들의 시체 가 띄엄띄엄 있어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고 공터 한 쪽에 모여진 시체 들은 가마니나 옷가지로 덮여진 채 방치되곤 해서 사람썩는 냄새가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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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그 기간 중 사망한 김일성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금수산기념 궁전을 짓는데만 전 북한 인민이 3년치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을 사용했다는 소리를 남한에 와서 들었다. 그 즈음에 청진에서 장사를 하면서 화교를 만났다. 화교가 하는 말 이 “북조선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탈출 하고 있고 중국에 있다가 다시 남조선으로 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배고픔을 채우고자 불법으로 중국을 수차례 오가며 되거래(다시판다)장사를 했다. 장사를 하면서 경비대 군관과 보위부 들에게 수없이 뇌물을 받쳤지만 액수가 적어서인지 결국 불법으로 중 국을 오갔다는 죄로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고 감금되었다. 뇌물을 주고 풀려났지만 다시 처벌도 두렵고 또 더 이상 북한에서 희망이 없어 나 는 어머니와 누나를 설득하여 수 차례 계획하여 97년 8월 중순 새벽에 압록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했다. 중국에서 5년을 숨어 살면서 우리가 족은 안 해본 일 없이 다해 보았다. 먹는 것은 어느정도 북한생활에 비 해 나아졌지만 여전히 불안의 연속이었다.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남한 의 실상을 잘 알게 되었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남한으로 가면 남한 정부에서 살 수 있도록 지원해 준다는 것을 알고 중국동포의 도움을 받 아 우리가족은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걸쳐 기대하고 고대한 남한에 발 을 내딛게 되었다.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고 사회에 배출되었을 때 불안도 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중국에서 5년동안 생활을 한 탓에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민 주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법을 지키며 열심 히 노력하면 반드시 그 댓가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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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형과 같이 중국을 대상으로 무역업을 해서 노력한 만큼 성과도 좋았 지만 이후 정부의 북한제재조치로 무역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해 아쉬 웠지만 정부의 방침인 만큼 우리는 법을 잘 지켰다. 만약 북한에서 북 한정부가 하지 못하도록 했다면 나는 살아 남기위해 뇌물을 받치고 모 든 편법을 통해서라도 돈을 벌기 위해 실행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북한에서 살아남는 길이기 때문이다. 서울생활 10년은 나 에게 새로운 변화와 도전을 갈망하는 생활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생 명산업에 연구를 계속했다. 중국에서는 성행하지만 아직 한국에서 널 려지지 않는 사업을 구상하던 중 중국에서 경험한 개구리 사육과 애완 동물 먹이인 밀웜사육을 구상했다. 그러던 차에 전남 ○○에서 올라온 형님을 알게 되어 ○○에서 정착하여 우선 사업비가 적게 드는 개구리 사육 사업을 시작했다. 300평 정도의 논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개구 리 사육을 했지만 온도와 습도조절이 어려워 결국 실패했다. 그동안 내 가 모아둔 자금 대부분을 써서 정신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거쳤다. 이 어려움을 잘 알고 있던 신변보호관 김형님과 저는 밀웜사육 사 업계획서를 자세히 작성하여 ○○군농업기술센터와 상의하기로 결정 하고 사업계획서을 제출한 결과 농업기술센터에서 지원이 가능하다 는 연락을 받고 새로운 도전의 힘이 생겼다. 사업장소를 옮겨 40평정 도의 가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중국에 있는 지인들과 연락 하고 밤을 세우며 책들을 보면서 차근차근 실행해 나갔다. 사업장내 먼지로 기관지와 비염에 질병이 생겼지만 독한 맘을 먹고 연구를 계 속했다. 2012년도에 밀웜은 남한에서 애완동물 먹이로만 판매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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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하여 판로가 넓지 않아 어려웠다. 그렇지만 생산비용을 줄이고 가 격을 낮춘게 관건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과학적인 사육방법이 필요 해서 혼자 밤을 세워가며 수많은 실험을 통해 밀웜의 생태와 장비의 세밀함을 연구하여 특허청으로부터 2012.12.13. 밀웜 산란장치, 2014. 파리 산란용 반죽 조성물 및 이를 이용한 파리 산란 유도방법, 2014.11.18. 밀웜분리유닛과 이를 이용한 밀웜 선별기 등 3건의 특 허를 인증받았다. 또 밀웜사육과 관련된 2건을 출원해 놓은 상태이다. 특허 3건은 고 품질 생산과 저비용으로 생산량을 증가시켰고 현재 월 평균 1000여만 원 상당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최근 남한에서 고기능생물소재산업 기 술이 비젼이 있어 대학교 생명학 교수들이 같이 연구하자는 제안이 들 어오고 있다. 북한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여기 남한에서 이뤄지 고 있는 것에 나름 자긍심이 생긴다. 노력한 만큼 댓가를 얻고 인정을 받는 이 사회가 정말 고맙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사회이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이 사회가 도와준 것이다. 신변 보호관 김형사님, ○○경찰서 보안협력위원회, 민평통○○군협의회, 농업기술센터에서 지원해주고 마을 주민들이 도와준 덕분이다. 그래 서 그 고마움에 보답하고 내 자신을 겸허하게 다스리기 위해 작년부터 매월 수익금 5%를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을 통해 지역 결식아동을 위한 나눔을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다. 저의 이런 생활을 보고 주변에서 “탈 북민이 이런 특허를 인정받은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남한에서 이런 나 눔도 같이 하는 것이 훌륭한 일이다. ○○에 신지식인 몇 명 있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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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공적이다” 신지식인을 신청하라며 조언 과 지원을 해줘 신지식인을 반신반의하면서 신청했다. 그 결과 2015 년 제25호 신지식인 선정은 나의 세 번째 인생의 시작점이 되었다. 첫 번째는 북한에서 태어나 배고프고 고달푼 인생이었고, 두 번째는 남한에 들어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의 경험과 생활이고, 세 번째 가 노력한 만큼 그 댓가를 인정받고 신지식인으로 나를 인정받은 것이 다. 확실하지 않지만 이제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할 때가 온 것 같다. 밀 웜은 고단백 물질로 작년에 식약청에서 식용 가능한 식품으로 공시되 었다. 고단백 건강식품으로 가공하여 중국까지 수출하는 사업을 구상 하고 있다. 5.27 국회의사당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신지식인 인증을 받았다. 노력한 만큼 인정받는 민주 자본주의 남한사회라면 나의 또 다른 도 전도 가능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나를 여기까지 인정해주고 지원해 주신 주변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다시한번 전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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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은 지나가고 봄날은 온다 북한이탈주민 안보체험 수기 부문 장려상
♥ 강 한국에서 처음으로 주민등록증을 받고 앞뒤를 돌려가며 신기하게 들 여다보기만 하던 그 때로부터 벌써 3년이 지나갔다. ‘한번 눈을 감았다가 뜨면 10년이 지나 간다’는 북한속담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되새겨진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태어나 주민등록증을 두 번 받아 보았다. 하나 는 평양시민증, 또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 주민등록증, 분단의 비극이 가져다 준 또 다른 모습이다. 뒤돌아보기 아쉬울 만큼 3년이란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버리고 아 쉬움만 남았다. 그나마 빗방울처럼 스쳐지나간 한국생활 3년이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간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나름대로 마음의 위안을 가져보기도 한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 건이(가명)는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 되 었다. 나는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정말 빠 르다. 요즘은 그나마 어렵고 힘든 과정 속에서 한 단계 진입했다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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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만족감에, 지치고 힘든 심신의 피로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루 일 과를 시작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거기에다가 기말시험으로 한창 준비 중인 건이가 최근에 들어 부쩍 공부에 취미를 돌리는 것 같 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돌이켜보면 지금처럼 아들이 대견스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낮 선 환경에서 한국생활을 경험해야 했던 중학교 초기에 건이는 그나마 성적도 괜찮고 우수상도 받았다. 한국적응을 괜찮게 할 것 같아 마음 이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껏 기대를 부풀게 했던 아들이 언제인가 부터 읽고 싶은 책에만 매달려 학업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잔소리 와 타이름에 욕설까지 동반하면서 아들의 학업에 대한 관심을 집중적 으로 돌려보려고 애썼지만 막무가내였다. 사춘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애들의 심리적 반응? 아니면 낯설고 물설 은 대한민국의 문화와 생활환경을 익히는데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일까, 결국 나는 건이와 딜을 할 수밖에 없었다. ‘1년까지만 네가 무엇을 하든 재촉하지 않을 테니 읽고 싶은 책은 1년만, 그리고 나서 공부에 열중한다. 알았지?’ 아들도 쾌히 승낙했다. 나도 대학원 공부와 강사활동, 아르바이트, 회사 등 여러 가지로 하 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새벽 5시에 눈을 뜨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보통 12시를 훌쩍 뛰어넘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시간에 아들 때문에 겪게 되는 스트레스 또한 매일과 같 이 후회를 불러왔다. 논문집필을 시작할 때는 아들의 학업생활까지 돌 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정도, 차라리 데리고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도 은근 슬쩍 해보면서 2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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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자정도 훨씬 지나고 새벽 2시를 가까이 하고 있는데 아들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혹시 불을 끄지 못한 채 잠이 들었나 싶어 문을 열어보니 열심히 책을 들여다보는 아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깜 작 놀라 얼떨결에 ‘너 아직 안자?’ 소리쳤다. 하지만 어쩌다 밤늦게까지 교과서들을 펼쳐 놓고 공부하는 아들의 모습에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 지 못했다. 드디어 자기가 할 일을 찾은 듯 싶어 마냥 기쁘기만 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건이는 새벽 4시, 혹은 저녁 늦게까지 열심 히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확실히 건이는 달라지고 있었다. 얼마 후 이러한 건이가 모의고사와 중간고사에서 깜짝쇼를 보였다. 대부분 과 목이 전국단위 1순위, 2순위를 차지하는 성적표를 내 앞에 내 놓았는 데, 도무지 믿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깜짝 놀란 나는 즉시 반응을 보이 며 익살을 던졌다. ‘얘, 혹시 학교에서 성적이 잘 못 평가된 거 아니야? 갑자기 1순위, 2순위가 뭔데? 이건 너무 비약이잖아?’ 엄마의 질문에 건이도 섭섭한 듯, 아니면 응당하다는 듯 익살을 부 렸다. ‘그럼 엄마가 대신 시험평가를 하시든지…’. 한마디 휙~ 뒤로 던지 고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 버린 아들, 나는 또 한번 눈을 비비고 작은 숫자들을 이리저리 비교해가며 성적표를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저 절로 가슴이 쿵쿵 뛰고 처음으로 아들이 대견해 보였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건이의 시험결과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보 기에도 무척 기특해 보였다. 내심 기특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북한에 있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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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생사여부를 아들에게 알려주지 못한 미안함이 동시에 맴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2012년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삼촌을 비롯한 모 든 일가 분들이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됐다는 소식을 차마 아들에게 알 릴 수 없었다. 밝고 명랑하게, 새로운 곳에서 꿈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아들의 맑은 눈동자에 영원한 그늘을 줄 수 없어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혼자만 품고 있으리라 결심했었다. 성장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쓰리고 아팠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도 잠시, 대학원 등록금에 가정유지비, 아들 공 부하는데 필요한 자금 및 갖가지 생각으로 매일과 같이 근심과 걱정은 떠나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로또라도 맞을까? 막연한 생각으로 하늘 을 쳐다볼 수도 없는 긴박하고 바쁜 생활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하루 한 시간도 낭비할 수 없었다. 이렇게 우리는 과도기 3년을 이겨냈다. 바람처럼 스쳐지나가 버린 3년, 그 3년의 흐름 속에 우리는 기쁨 과 슬픔, 힘들고 어려웠던 추억의 순간순간들을 고스란히 발자취로 남겼다. 북한에서도 이렇게 빨리 세월의 흐름을 만끽해보지 못한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욕망과 꿈에 실려 1년 365일이 하루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한국정착 3년 동안 봄이면 온갖 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물 드는 내가 사는 새 세상의 기쁨을 아직은 맘껏 만끽하지 못했다. 아들 과 함께 가고 싶은 곳도, 누리고 싶은 것도 참 많았지만,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고도 험난한 녹녹치 않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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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형제 없이 부단한 노력과 도전으로 개척해야만 하는 대한민국에 서의 새 삶은 새로운 인생출발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가끔 은‘하루가 한 시간이 되어줄 수 없을 가’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져보기 를 그 몇 번, 하지만 현실은 우리에게 그러한 기회를 마련해주지 않았 다. 이것이 바로 ‘후회’와 ‘來世’의 진실게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욕 망이 아닐까? 고향을 등지고 낯설고 물설은 이 땅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 리 북한이탈주민들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에서의 첫 걸음은 ‘후회’와 ‘來 世’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부여’라는 사회성명제를 제시했다. 이러한 명제는 나의 학업과 생활, 그리고 한국정착과 적응에 있어서 다양한 가치관의 장단점을 명확히 해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 도 하며 아들과 내 생활의 척도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성공의 탑은 끝없는 삶의 욕망과 피타는 노력에 의해 결정되는 마음속의 탄탄대로일 뿐, 아직은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 을 3년간의 한국정착과정에 우리는 더 절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한국정착과정에서의 가장 큰 어려움은 새 생활과 진로 개척에 대한 고민과 어려움보다는 2만 7000명의 탈북민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가치관과 생활방식 사이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이미지가 한국사회에 미치는 사회적 영향이다. 왜서일 가? 우리는 누가 뭐래도 북한이탈주민이기 때문이다. 나와 아들이 탈북자라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탈북자사회의 이미지가 한국사회에 미치는 사 회적 영향력을 우리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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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일이지만 가끔은, 가끔씩은 자주 들려오는 북한이탈주민 들의 부정적인 생활모습과 불법 및 사기행각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 는 다양한 생활방식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들은 성장하는 아들에게 도 치명적인 정신적 피해를 가져다주는 경우가 과반사이다. 한국사회 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러한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수치스럽고 대 한민국에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순간이 가장 괴롭고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이러한 순간들은 바쁘고 짧은 3년 의 시간들에 어김없이 찾아들어 우리를 자극했다.
나는 가끔 아들의 황당하기도 하고 정확한 질문에 당황하기도 한다. ‘엄마, 북한사람들 한국 와서 왜 이렇게 살아요? 마약은 뭐구, 이민 은 뭐죠? 그리고 TV 방송 출현하는 사람들은 왜 자기 신분을 감추는 거죠?’ 가슴 아픈 일이지만 북한이탈주민들이 출현하는 방송프로그램을 가 장 싫어한다. 내가 어쩌다 한번 종편채널을 보면 아들은 ‘엄마, 그건 왜 보시는데요? 다른 것도 볼 것이 많은데 왜?’ 당돌한 질문과 질책에 나는 얼른 채널을 돌려버렸다. 이러한 아들의 질책은 평상시와는 너무 도 다른 모습이다. 각자 공부시간과 도서관도 서로 다르고, 서로가 바 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함께 밥 먹는 시간도 차려 지기가 어렵다. 그러다보니 서로 얘기 할 시간은 밤 12시쯤 지나서야 필요한 얘기만 할 수 있었다. 더욱이 평시에 별로 말이 없는 아들은 질 문에 답하는 것 외에는 목소리 한번 듣기도 어려울 형편이었다. 그러 한 아들이 가끔은 이상하고 불만에 가득 찬 질문을 엄마에게 질풍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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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한 아들이 일부 몇몇 사람들이 불법행위 에 노출되어 있고, 자신의 신분도 위장하고 과다 거짓광고를 하는 모 습을 보고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민주주의 기본원칙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 요한 아들에게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들과 이슈들은 나름대 로의 불평불만도 자아냈다. 어느 날, 저녁 11시가 훨씬 지났을까, 학교에서 돌아오는 건이를 기다리며 원고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데 ‘톡’소리가 울렸다. 황급히 휴 대폰을 열어보니 건이의 문자가 눈길을 끌었다. ‘엄마, 이 사람들 뭐 하는 거죠?’ 여러장의 사진과 함께 또 다른 문자 가 떴다. ‘세월호 시위 때문에 그런지 버스가 기어가요. 경찰들 몇 천 명은 족 히 될 듯… 경찰차가 부셔지고 넘어지고… 옛날 영화 속 장면이 그대로 재현 됐어요’ ‘얼른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 타고 와’ 조급한 마음에 답장하고 기다 리는데 한 시간 남짓 지나 아들이 집에 들어섰다. 들어서는 아들의 입 에서 볼멘소리가 또 튀어나왔다. ‘아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시위대 횡포가 너무 도를 넘는 것 아닌 가요? 이건 아닌 것 같은데요?’ 무심히 넘길 수 없는 아들의 불평에 갑 자기 나도 긴장해졌고 시위대 상황을 경청하고 나서야 사태의 신중함 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탈북하여 처음으로 보는 광경이라 아들의 심경 도 이해는 됐다. 하지만 아들의 불만은 세월호 가족을 이용하여 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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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위대진입과 폭력적인 시위를 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일부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과도하게 자신들의 기득권 추구 에 폭력적인 행태로 이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나름대로의 분석도 첨가 하는 아들 앞에서 나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실 이다’는 생각에 곧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들의 폭력적인 행동 이 그대로 청소년들의 분석의 대상으로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금이 나마 했더라면, 또한 아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일부 어른들의 행실에 분격하기도 했다. 이것이 탈북하여, 우리가 처음으로 보아 온 폭력적인 민중시위의 한 모 습이었다. 민주주의 기본원칙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시위는 합법적이라고 하지만, 조금은 씁쓸한 생각에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 상인데 그래도…’라는 한 가지 아쉬움을 남긴 채 잠자리에 들었다. 정착 초기에 나는 새로 시작하는 삶은 두려운 것도 갈팡질팡하는 것 도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오직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 이러한 생활방식이야 말로 성공적인 대한민국정착을 위한 가장 올바른 길이라 고 생각하고 대한민국정착의 첫 걸음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맑은 눈동자에 비치는 탈북민사회의 이모저 모가 불합리한 불평불만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죽음을 무릎 쓰고 탈북하여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건만, 금전적인 유 혹에 빠져 불법도박이나 불법마약장사를 하는 사람들, 유흥업소나 사 기 및 협잡으로 순간적인 경제생활의 욕구를 채워나가는 사람들이 상 당부분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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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이다. 또한 대한민국을 북한에서의 범죄경력이나 직업이탈을 위한 ‘신분세탁장소’로 간주하는 사람들, 한국정착과 적응에 실패하고 제3국으로 불법 이민을 취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가치 관을 지닌 생활방식들 사이에서, 혹은 성공적인 정착보다는 ‘편하고 쉽 게’ 살아가려는 각종 이색적인 정착수단들 사이에서 탈북민사회는 방 황하고 있으며, 특히 새 세대 탈북청소년들과 성공적인 정착과 적응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탈북민들에게 실망감을 더해주고 있음을 나는 3 년간의 현실체험 속에서 더욱 절감할 수 있었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자정도 훨씬 넘었는데 갑자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 사람들이 끝내 떠난 대요’ 벌떡 일어서서 전화를 받는데 별안간 울컥 화가 치밀었다. 내일로서 벌써 12명째 캐나다 불법이민을 떠난 다는 소식이다. 나는 다짜고짜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탈북민단체장 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부랴부랴 1시간 족히 넘어 내가 도착한 곳은 시의 어느 한 임대 아파트였다. 밤2시가 지났는데도 여러 사람들이 벌써 와 있었다. 3개 월 전부터 주변에 있는 친구들과 가족들 8명을 꼬드겨 캐나다, 프랑 스, 영국으로 떠나보내고 마지막으로 브로커 가족이 떠난다는 것이다. 이들의 계획은 이미 3개월 전부터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여러 차 례에 걸쳐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한국 및 탈북민브로커 와 짜고 은밀히 진행되는 은행대출 및 자동차할부대출을 포함한 각종 이민 자금마련을 위한 불법도박행위는 치밀하게 계획되고 전개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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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행여나 도움이 될까 싶어 나는 신변보호담당관에게도 저지시켜 줄 것을 당부했지만,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어 도무지 그들의 돌발행동 을 막을 길이 없었다. 한때는 국방부 소속 안보강사로 활동했고, 탈북단체에서 북한민주 화를 위해 투쟁한다고 하던 사람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캐나다 불법이 민을 떠난다는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캐나다, 프랑스, 영국 등지에 불법 입국하여 한국 시민임을 숨기고 탈북자로 위장하여 다시 이민신 청을 한다는 것이다.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과 아들까지 모두 중퇴, 캐 나다로 떠나는 그들의 결심은 확고했다. 다짜고짜 그들에게 물었다. ‘한민족인 한국에서도 정착을 하지 못하면서 해외에서 어떻게 정착 을 한다고, 그리고 애들의 인생은? 한국에서 받은 주민등록증은 어떻 게 하는데? 후회하지 말고 여기에서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터를 닦는 것이 더 현명한 생각이 아닐까? 또 외국에 불법 입국하기도 전에 잡히 면? 한국 신분이 밝혀지면 그 때는 어디로 가죠? 북한으로? 아니면 중 국?’ 연이어 쏟아내는 질문과 설득에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공항에 서 잡히면 다시 돌아오면 되고, 또 다시 다른 나라로 나가면 된다고 한 다. 몇 년 살다가 이민등록이 안 되면 그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해외에서 몇 년 떠돌이 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오면 여기서 받아준 대? 그리고 사기와 협잡으로 가지고 나갔던 돈은 어떻게 갚을 건데? 그 다음 생활은? 거지? 아니면 노숙자?’ 분격한 나머지 할 수 있는 말 은 다 했지만 그들을 만류할 수 없었다. 이민생활을 하지 못하고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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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돌아오게 된다면 또 다시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 본다는 막연 한 대답들만 내 머리를 뗑그날로 그들은 한국을 떠났고, 한 팀은 미국에서 정체가 발각되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가 한 달 후 다시 영국으로 들어갔다. 과연 언제부터일가, 언제부터 북한이탈주민들이 자기들이 살아왔던 지난날의 생활처지를 감감 잊은 채 인생의 목적도, 희망도 없이 세상 을 방황하는 것 일까, 죽지 못해 살아야 했던 지난날의 가슴 아픈 북한현실, 인간의 초보 적인 자유마저 송두리 채 빼앗긴 채, 3부자만을 위해 살아야 했던 지 나간 시절의 잊지 못할 추억들은 북한이탈주민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잊어서는 안 될 생활의 지침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정부와 국민 들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 속에서 자아실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 는 우리 북한이탈주민들이 과연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본성적인 요구에 충실하게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현재 대한민국에서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 심히 준비하고 살아가는 탈북민들은 불과 1%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다. 참으로 역겹고 지겨운 모습들, 나도 그러 한 사람들과 똑 같은 탈북민이라는 생각에 몸서리쳐질 때가 한 두 번 이 아니다. 밝고 씩씩하게 성장하고 적응해가는 아들의 모습이 탈북민 사회의 한 성원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종종 마음에 걸리는 것은 사실이다. ‘먼저 온 통일’이라는 자랑스러운 탈북민사회의 이미지가 아닌 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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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응, 마약, 이민, 사기, 도박, 유흥 등의 비사회적 명제에 더 노출 되어 있는 탈북민사회의 이미지가 더더욱 마음을 상하게 한다. 결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불법이민을 떠났던 그들은 올해 1월과 2월에 1년, 혹은 1년 반도 채우지 못한 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방황했던 그들의 인생은 과연 어떠할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잊으려 해도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이러한 현상들은 온 몸 신경세포 의 줄기를 타고 깊숙이 뿌리내려 순간순간 뇌신경을 자극한다. 나는 가끔 언젠가는 나도 이민을 택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 빠져들기도 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가고 싶어도 대한민국에서 탈북 민사회가 보여주는 이탈행위들은 같은 탈북민으로서의 수치심과 함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가슴 아픈 현실이다. 내 아들도 탈북자사회 현재의 부정적인 이미지 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녹녹치 않겠다는 생각에 잠못 이루기도 했다. 언제 이러한 비극이 우리 탈북자사회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과연 문제점은 무엇인지, 우리는 항상 고민하며 더 나은 탈북민사회와 더 나은 탈북민들의 정신도덕적 생활문화적응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 여야 할 텐데…. 갈수록 깊어지는 생각과 함께 아직도 망망대해를 헤 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엄마의 이러한 고민과 반대로 오히려 한국학생들과 씩씩하 고 명량하게 성장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나는 탈북청소년들의 또 다른 미래를 보는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확실히 아들은 탈북 민사회가 아닌 자유 대한민국의 더 넓은 품에서 세상 이치를 깨우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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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진로를 개척해 나가는 것 같았다.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건이를 무척 좋아하고 따른다고 한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3년간 내가 바라본 한국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융합이었지만, 그래 도 좋은 것이 더 많은 행복한, 또한 행복해질 수 있는 나라였다. 북한 에 비해 훨씬 더 좋은 살기 좋은 나라임에 틀림없었다. 건이는 왜 일부 사람들이 한국을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한다. 나는 아직 확실히 답을 내리지 못했다. 피를 나눈 형제도, 부모도 없는 낮선 땅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우리 들에게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보다, 어려움과 고달픔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목적론과 존재론에 충실한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그 러한 순간들이 흘러가는지 미처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흘러간 시간들이 쌓이고 또 쌓이면 언젠 가는 우리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한 중심에 우뚝 서 있지 않을까, 이것이 살아가는 이유이고 보람이고 꿈을 향해가는 제2의 인생의 목표 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종종 관심과 배려에 대한 얘기를 곧 잘 한다. 북한이탈주 민들이 한국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사회 와 정부의 관심과 배려가 관심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관심과 배려는 자기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라는 반문을 지속적으로 한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성공적인 한국적응과 정착을 위해 정부가 기울이 는 노력과 공공기관 및 지자체, 그리고 사회협력단체들과 영리 및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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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 민간단체들의 관심과 배려, 대한민국국민들의 관심과 사회 곳곳 에 자리 잡고 있는 다양한 적응프로그램들과 정착지원시스템들은 가시 적, 거시적 차원에서 상당수 많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관 심과 배려들은 북한이탈주민 자신들이 어떠한 관점과 자세로 받아들 이고 노력하는가에 따라 실질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다가오지 못할 수도 있다. 정든 교향을 등지고 새로운 곳에서 새 생활을 마련해가는 북한이탈 주민들 속에서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적으로 잘 정착할 수 있 었던 탈북민들의 사례가 그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로 될 것이다.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정체감은 한국사회에서의 북한이탈주민의 자질 과 의무에 대한 현실적인 정체감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남북한이 하나가 되는 길은 곧 ‘먼저 온 통일’로서의 북한이탈주민들과 한국국민 들의 사회통합이 가장 최우선 과제이며, 이것은 곧 북한이탈주민들의 성공적인 정착과 적응을 통한 탈북자사회의 올바른 이미지개선을 통해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았다.
내가 3년 간 만나볼 수 있었던, 다양한 가치관 속에서 누가 보건 말 건 묵묵히 인생의 터전을 만들어가는 성실한 북한이탈주민들은 예외 없이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우월성과 정당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 으며 더 낳은 미래를 향해 항시적으로 도약하고 있었다. 이것이 참말 로 먼저 온 통일로서의 탈북자들이 살아가야 할 진정한 정착방법이 아 닐까, 다시한번 기대해 본다. ‘춥고 고단했던 겨울이 지나가면 언젠가는 따뜻한 봄날이 찾아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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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을까’ 이러한 희망과 기대가 우리 북한이탈주민들의 마음속에 영원하 기를! 그날을 기다리며 나와 건이는 간다. 아니, 우리 온 가정이 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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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NATIONAL POLICE AGENCY
최우수
선배님이 남기고 간 교훈 신수영 (경북 선남초)
우 수
나라를 사랑하자 김태혁 (대전 대덕 회덕초)
우 수
너는 어떤 한국에서 왔니? 이정우 (서울 신서초)
장 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문지혜 (경기 고양 화수초)
장 려
할머니의 특별한 밥그릇 박호원 (경기 남양주 심석초)
장 려
통일을 위한 우리의 발걸음 이국희 (대전 성천초)
국민이 행복한 나라, 치안강국 대한민국
2. <문예부문>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선배님이 남기고 간 교훈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최우수상
♥ 신 수 영 (경북 성주 선남초) 새 학기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난 봄바람이 살랑 살랑 불어오는 3월 26일 아침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아침조회가 있으니 학생들은 강당으로 모여 주십 시오.” 작년 담임이셨던 선생님의 낯익은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교실로 울 려 퍼졌다. “아니, 오늘은 월요일도 아닌데 웬 아침조회를 한다는 걸까?” 방금 운동장을 돌고 숨이 찬 모습으로 교실로 들어오던 주은이가 말 했다. “나도 몰라, 혹시 상장이라도 주시려는 건 아닐까?” 의문스런 표정으로 내가 말했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혹시 우리가 상을 탈 수도 있으니 기대해볼 까?” “그래, 정말 상을 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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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이와 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담임 선생님의 뒤를 따라 강 당으로 가는 길에도 괜히 발걸음이 가볍고 콧노래가 나왔다. 강당에는 벌써 다른 학년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드디어 식이 시작되었는데 사회를 보시는 선생님의 첫 번째 멘트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부터 천안함 용사 5주기 추모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왠지 저음의 침울한 목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아, 상을 주는 게 아니었구나! 어쩐지 이상하더라. 그런데 천안함 용사가 뭐였더라?' 내가 애써 천안함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했으나 기억이 가물가물하였 다. 그러는 사이에 천안함 용사를 비롯하여 나라를 지키다가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추모하는 묵념도 올리고 어느덧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시간이 되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우리 학생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차근차근 말씀해 주셨다. “지금부터 5년 전 오늘인 2010년 3월 26일, 서해 해상에서 경계 임무수행 중이던 해군 제2함대사 소속 천안함이 북한 잠수정의 기습 어뢰공격으로 침몰하여,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하고 58명이 구조된 국가안보 차원의 중대한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라 를 지키다가 전사하신 천안함 46용사와 용사들을 구조하다 돌아가신 고 한주호 준위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전 국민과 함께 기리고자 『천 안함 용사 5주기 추모식』을 전 국가적으로 오늘 실시하고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침착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씀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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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생각났어. TV뉴스와 신문에서 많이 본 기억이 나.”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서서히 예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런데 전사한 천안함 46용사 중에는 우리 선남초등학교 선배님도 있습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다. 순간 내가 잘못 듣지 나 않았는지 다시 한 번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전사한 천안함 46용사 중에 우리 학교 선배님이 계셨다고?” 나만 놀란 것이 아니라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고 있던 다른 아이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뉴스에 나오는 걸 수없이 보면서 안타깝기는 해도 우리와는 상관없는 멀리 있는 이야기인줄 생각했는 데…….” 다른 아이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다시 한 번 또박 또박 말씀해 주셨다. “전사한 천안함 46용사 중에 우리 학교 67회 졸업생인 김선명 상병 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 후배들 입장에서 가만히 지나갈 수 가 없어서 이렇게 나라를 지키다가 희생되신 선배님의 명복을 빌고 천 안함 사고의 원인과 과정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국가 안보의 중요 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렇게 추모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나니 이제 모든 사태가 짐작이 가고 이해 가 되었다. “오늘 추모식을 마치면서 각 학급별로 미션을 주겠습니다. 미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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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는 ‘전사한 천안함 용사들이 우리들에게 남기고 간 교훈’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교장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안함 용사들, 즉 전사하신 우리 학교 선배님이 남기고 간 교훈을 반 친구들과 선생님과 함께 찾아보면 되겠구나!” 교실로 돌아 온 우리들은 친구들과 선생님과 모두 함께 선배님이 남 기고 간 교훈을 찾아 보았다. 우리들이 찾아 낸 미션 해결 내용은 다음 과 같다. 첫째, 항상 국가 안보를 지키려는 마음의 자세와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북한은 같은 민족이지만 자기네들의 필요에 따라서 수시 로 남한을 공격하고 놀라게 하므로 언제 북한의 도발이 있더라도 철통같 은 안보태세로 막아내고 우리나라를 지켜 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국가 안보는 남이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지킨 다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나 하고는 상관없는 일처럼 막연하게 군 인들이 다 지켜줄 것처럼 믿고 무관심하게 지내서는 안 되고 항상 응원 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셋째, 국가를 위해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철저하게 수행하 고, 언제나 나라사랑 하는 안보의식을 가지고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가야 한다. 각자 맡은 바 위치에서 군인들은 군사적인 현장에서 나라를 지키고, 우리 학생들은 우리나라 안보를 지켜가려는 철저한 안보의식을 가지고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해 간다면 평화 통일은 꼭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의견들을 이야기하면서 나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정의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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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겨났다. 작게 나만 보지 말고 큰 시각으로 나라사랑하는 마음까지 기르고 우리나라 안보를 지켜가려는 의지를 기른다면, 북한도 함부로 도발하지 못 하고 결국 평화통일로 갈 것이고, 일본도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하교하면서 교문에 걸린 현수막도 한번 올려다보고 가세요.” 담임 선생님의 당부 말씀이 생각나서 교문을 나서면서 현수막을 쳐 다보았다. 『천안함 용사 5주기 추모, 국가를 위한 희생 통일로 보답하자』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 선배님의 희생이 남긴 교훈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가 에 노오란 봄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달라진 내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나에게 한들한들 손을 흔들며 소리 없이 응원하고 있었다. 내 기분 도 하늘을 날아갈 듯 덩달아 한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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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사랑하자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우수상
♥ 김 태 혁 (대전 대덕 회덕초) 우연히 TV를 엄마와 보고 있었는데, 스티븐 유 (유승준) 이라는 남 자라 내가 즐겨보던 아프리카 TV에 나와 무릎을 꿇고 울면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모르는 가수였기에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이 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물어보니 우리나라 국적의 남자는 군대를 꼭 가야 하는데 저 가수는 군대를 가기 싫어서 우리나라 국적을 버리고 미국 시 민권자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는 우리나라에 들어 올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왜 자신의 나라를 위하여 꼭 가야하는 군대를 가지 않고 다른 나라의 사람이 되었을까? 우리나라를 버리고 말입니다. 나도 가 끔 TV를 보면 유격 훈련이나, 군대사고나 이런 무서운 방송을 보면 군 대를 정말 가고 싶지 않지만, 그럴 때 마다 엄마는 자신이 태어나고 살 고 있는 국가(민족)을 위해 또 가족을 위해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고 하였습니다. 먼 옛날 이순신 장군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 몸 바쳐 싸우셨고, 일 본에 나라를 빼앗겨 국가가 없어졌을 때 도 많은 국민들은 자신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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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민족 가족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는데 망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 렇게 지킨 자랑스러운 나의나라 나의조국을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 나 는 꼭 군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라 사랑의 길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거창한 것도 아닙니다. 주위에서 작은 것부터 실천하면 서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즘 일본은 독도가 우리 땅이라며 우 기며 독도의 날을 정했습니다. 나는 일본이 독도의 날을 정했다고 한 것을 알고 짜증나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고, 독도의 날을 없애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나기에 우리 땅 이라 말해야 하는데 사건을 만들고 관심을 가져서 좀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독도에 그렇게 많은 관심은 없어서 이런 말을 할 자격 이 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방송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영상을 찍는 사람이 어떤 학교에 교과서에 지도를 찍었습니다. 일본에서 교과 서에 독도를 ‘다케시마’ 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다케시마라고 부르면서 자기네 땅이라고 써져 있다고 신문에 있는 걸 아빠가 보다가 말을 해주 셨습니다. 일본이 독도를 왜 가지고 싶었을지 궁금합니다. 왜 독도를 가지고 싶어 하였을 까요? 정말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해가 안 됩니다. 그냥 우리 대한민국에 땅이라고 인정을 했으면 이런 사건도 없었을 텐데 왜 그래서 사건을 일으켰을까요. 나중에 사회 시간에 배운 인터넷으로 찾 아 볼 것입니다. 정말 궁금합니다. 인터넷에서 바로 찾아보았습니다. 정말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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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독도에 해양동물과 해초류가 풍부하고 제일 같고 싶어하는 이유는 천연 가스층이 있다는 것이였습니다. 천연 가스는 인터넷에 쳐 보니 공해가 하나도 없고, 아주 훌룡한 에너지 자원이라고 합니다. 천 연가스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하다고 합니다. 지금 공기가 오염되었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독도는 옛날에 독도를 아주 사랑하 는 사람이 있었기에 이렇게 깨끗하고, 청정지역이 된 것 같습니다. 인 터넷에 쳐보니 안용복 선생님, 홍순칠 대장을 볼 수 있습니다. 안용복 선생님은 일본인들이 독도에 와서 고기를 잡은 것을 보고 일 본인들에게 직접 가서 항의를 했지만, 우리나라는 왜 그런 항의를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끌고 갔습니다. 홍순칠 대장은 독도에 의용수비대를 설립하여 본의 침략을 막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본받아 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이렇 게 까지 하는 것을 본 받고 싶습니다. 전 이 글짓기를 하며 몰랐던 것 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독도에 관심을 많이 주고 그런 분 들을 본 받아서 나중에 훌룡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빨리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나라사랑에 통일까지 붙일 것 입니다. 6.25 전쟁…. 정말 슬픈 기억입니다. 우리와 북한이 통일만 했어도 반으로 나누워지지 않고 사이좋게 살 수 있었는데 말입 니다. 진짜 통일하면 6.25…. 이 기억이 없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 다. 일본에서 해방되고 우리는 우리에 정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사회체제를 가지고 다툼이 시작되 었습니다. 다툼을 해결하지 못해 결국 ‘휴전선’ 이라는 선을 긋게 되고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서로 달라서 우리는 말과 행동 등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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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많이 다릅니다. 난 싸움이 싫습니다. 대화로 해결 할 수 없을까? 라 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나라면 대화를 하여 나부터 양보해서라도 떨어 져 있는 가족을 서로의 인명피해를 위해서라도 싸움은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한 민족이 서로 총, 칼 등을 겨누며 눈물 흘리며 싸웠을 것 을 생각하면 정말 슬픕니다. 세계 대전이후 통일을 하지 못한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알려 져 있습니다. 난 이해가 안 됩니다. 뭐가 안 되냐면 그런 것 가지고 한 나라가 반 갈려 두 나라가 되고 그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을 하고, 전쟁 을 통해 많은 사람이 죽고, 결국 그 두 나라가 휴전을 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휴전선을 무너뜨려 경계선을 지키는 군인이 필요 없는 평화통일이 되지 남북이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맞이하고 싶 습니다. 독일도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려 평화통일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남북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두 나 라로 갈렸지만 한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진정한 통일이란 서로 사랑하고, 양보하고, 배려 등 그런 것 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통일이 되면 지금보다 더욱더 아름 답고, 평화로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을 한다면 우리 에 생활모습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먼저 우리가 가고 싶었던 금강산을 소풍이나 관광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북한에 여러 가지 음식 을 먹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차로 유럽까지도 여행이 가능할 것 같습 니다. 그리고 스포츠, 올림픽 대회에서 더 우수한 성적을 거눌 것입니 다. 그리고 사진으로만 보던 것을 실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국기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 땅도 밟을 수 있고, 학교도 전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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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도 바뀔 것이고, 나라가 더 강력해 질것입니다. 이렇게 통일 을 하면 여러 가지로 좋을 것입니다. 꼭 통일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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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떤 한국에서 왔니?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우수상
♥ 이정우 (서울 신서초) 우리 가족은 일 년 동안 중국에서 살다 왔다. 중국에서 내가 다니던 국제 학교에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학교 에 간 첫날 자기 소개를 한 후 나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았다. “안녕? 나는 한국에서 온 이정우라고 해” “어떤 한국에서 왔어?” 어떤 한국이라니? 한국이 한국이지 어떤 한국은 또 뭐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한 내가 잠깐 멍하니 서 있자 외국 친구들의 질 문이 하늘의 별처럼 쏟아졌다. “South KOREA야? 아님 North KOREA야?” “South KOREA와 North KOREA는 어떻게 달라?” “한국에서는 아직도 전쟁을 해?”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친구들의 질문을 받으며 짧은 순간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평소에 나는 남한이랑 북한이 어떻게 다른지, 통일에 대한 내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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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지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막연하게 남한은 민 주주의고 북한은 공산주의고 통일은 하면 좋겠지만 통일이 안 되어도 나는 지금 별로 불편함이 없으니 나하고는 먼 이야기쯤으로 생각하고 생활해 왔던 것이다. 그런 내가 갑자기 한국의 대표가 되어 많은 외국 친구들 앞에서 분 단된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한다니……. 친구들의 질문에 뭔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기는 했는데 도대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건 지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 날 이후로 외국 친구들이랑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 마다 내 가 분단된 나라에 사는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얼마 뒤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중국으로 넘어오는 북한 주민들 에 대한 특집 방송을 보게 되었다. 처음엔 중국말만 나오는 채널들을 돌리다가 한국말이 들려 반가워서 보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너무 안 타깝고 슬퍼서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와 내 동생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굶어죽지 않 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숨어 생활하 고 있었다. 일명 꽃제비라고 불리는 어린 아이들은 강이 얼어붙는 겨 울에만 군인들의 눈을 피해 강을 건널 수가 있어서 아이들의 발과 손은 차마 눈을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온통 동상으로 피부가 괴사되어 있 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동상으로 인해 손과 발을 절단하는 경우도 종 종 있다고 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해도 아이들은 대부분 다 시 북으로 잡혀가거나 나쁜 사람들에게 팔려가 협박을 당하며 노예처 럼 일을 하게 된다니 정말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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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동상 걸린 발을 치료도 못 받고 지하 실에 숨어사는 꽃제비들의 현실이 얼마나 비참하던지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동생은 너무 무섭다며 방을 나가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무서워서 텔레비전을 끄고 싶은 마음도 살짝 들었다. 하지만 한국은 왜 나라가 두 개로 나누어져 있냐, 곧 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위험한 나라라고 들었다는 친구들의 질문과 얘기가 자꾸 만 내 머릿 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그동안 나는 북한 어린이들의 얼마나 굶주림과 노동에 시달리고 있 는지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나와 내 동생은 이렇게 좋은 집에서 부모님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 으며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데 북한의 어린이들은 단지 굶주 리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하다니……. 북한의 어린이들은 꿈을 꿀 희망조차 없다는 사실이 나를 가장 슬프 게 했다. 늘 반찬 투정에 장난감 안 사준다고 짜증을 부리던 내 자신의 행동이 이렇게 후회된 적이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우리나라의 분단된 현실과 통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외국인들에게는 South 코리아와 North 코리아로 기억되는 나라.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분단된 국가.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함께 웃고 함께 울던 부모 형제들이 이제 서 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를 위협하는 위험한 나라. 남한과 북한. 왜 어른들은 우리에게는 형제끼리 친구끼리는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한다고 하면서 하나의 나라, 하나의 형제인 남한과 북한은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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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고 갈라져 있는 걸까? 나는 아직 어려서 많은 의미를 알지는 못하지만 만나고 싶은 가족이 있어도 38선이 가로막아 만날 수 없고 북한의 아이들이 굶주리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왜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살고 있는 걸까? 나도 동생이 얄미울 때도 많지만 만약 서로 떨어져 죽 을 때까지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어서 빨리 통일되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북한의 어린 아이들이 목 숨을 걸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운 부 모 형제들이 만나지 못해 생이별로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매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기차타고 수학여행을 백두산으로 갔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북한의 불쌍한 어린이들을 위해서라도 화해를 하고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까운 미래에 내가 다시 외국 친구들에게 자기 소개를 해야하는 날 이 온다면 나는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나는 자랑스러운 통일된 대한민국에서 온 이정우야.”라고. 비록 아직 내 몸은 38선을 넘지 못하지만 나의 마음은 38선을 이미 훌쩍 뛰어 넘었다. “북한의 친구들아! 우리 빨리 통일이 되어 곧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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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통일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장려상
♥ 문 지 혜 (경기 고양 화수초)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은 주몽이다. 그에겐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주몽의 친자식이 아닌 재혼한 부인 소서노와 전남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두 아들과 주몽은 친자식, 친할아 버지는 아니었지만 단단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세월은 흘러 주몽도 나이가 들었다. 이것은 두 번째 고구려의 왕을 뽑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때 동부여에 있던 유리가 주몽을 찾아온다. 주몽은 자신의 아들임을 주장하는 유리에게 증거를 보이라고 했다. 유리는 품안에서 반 토막으 로 부서진 칼을 꺼냈다. 그 칼의 나머지 반은 주몽이 가지고 있었다. 두 칼을 맞추어 보니 교묘하게 맞았다. 주몽은 반갑게 아들 유리를 맞 이하였다. 이렇듯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혈육의 정은 끊으려도 끊 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설날 때 마다 할아버지 방에서 혼자 제사를 지내신다. 이번 설날에도 역시 혼 자 제사를 지내셨다. 제사상은 조촐했다. 조그마한 책상 위에 고조할 머니와 할아버지의 이름을 적은 지방을 놓았다. 쌀 위에 향이 꽃힌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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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를 놓으신다. 귤과 사과, 배 등의 과일을 한가지씩 올렸다. 제사가 시작되자 제일 먼저 술잔에 청주를 따르셨다. 향이 피워진 향로 위로 술잔을 한바퀴 빙 돌리신 다음 두 번 큰절을 올리셨다. 절을 드리시는 할아버지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다. “아유, 아버지….” 땅이 꺼지듯 한숨을 푹 쉬셨다. 우리 할아버지는 평안북도가 고향이 시다. 지금으로부터 64년전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할 아버지는 20살, 북한에서 군인으로 끌려갔다. ‘펑! 펑!’ 여기저기서 대 포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할아버지 의 부모님을 북한에 남겨둔 채…. 검버섯이 난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부모님을 그리워 하는 짙은 슬픔이 베어 있었다. 뒤에서 바라보던 나 는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 슬픔의 깊이가 얼마나 되기에 저러시 는 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할아버지의 가슴 속에도 유리와 같은 칼 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환하게 떠오르는 고향 땅. 어릴적 함께 뛰놀던 친구들…. 그러나 가지 못한다. 남북한의 분단 때문이다. 제사 의식을 마치자 나는 쟁반을 들고 할아버지 방으로 갔다. 제사 음식을 내오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는 차분하게 제사상 앞에 앉아 계셨다. 아마도 지난날을 생각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나는 할아버지께 다가가 두 손을 꼭 잡아드렸다. 따뜻했다. 이런 것이 혈육의 정인가 싶기도 했다. “할아버지 많이 보고 싶으시죠?” 할아버지의 슬픔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할아버지 부모님은 이 남쪽 땅에 계시지 않단다. 그러니 오늘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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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면 더 간절히 생각이 나는 구나” 역시나 슬픔에 잠겨있는 목소리였다. “그럼 왜 헤어지시게 된 거에요?” 할아버지는 약간의 생각을 하시고는 말했다. “나는 그동안 부모님을 모시러 가리라 다짐했단다. 하지만 그럴 수 가 없었지…” 그날의 아픔이 생각나신 듯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이야기를 듣는 나 도 뭔가 울컥했다. “나는 그동안 부모님을 모시러 가지 못한 죄책감에 밤잠을 설치고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았단다. 별의별 방법을 다 써서 부모 님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부모님을 잊은 적 이 한 번도 없단다” 할아버지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지 않으셨다.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셨을 연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이산 가족 상봉 신청을 하여 북한의 친척을 만나게 되면 부모님의 죽음이 확 인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고향과 부모님의 묘를 갈 수 없는데 친척 얼굴 한번 본다고 무슨 해결이 되겠냐는 것이 할아버지의 생각이셨다. 문제는 분단이었다. 유리는 아버지 주몽을 만나기 위해 동부여에서 고구려까지 찾아갔 다. 그러나 그 시대보다 더 편리한 교통수단인 자동차고 있고 비행기 도 있는 요즘이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부모님을 만나러 갈 수가 없다. 할아버지의 제사는 단지 조상님의 죽음을 기리는 의식이 아니다. 부모 님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가슴속에도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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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은 칼을 품고 있다. 아직 그 칼을 꺼내지도 못하고 있다. 언젠간 꼭 통일이 되어 할아버지의 칼과 할아버지 부모님의 칼자루를 맞추어 하나가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내손을 곽 잡은 할아버지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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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특별한 밥그릇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장려상
♥ 박 호 원 (경기 남양주 심석초) 새하얀 눈이 우리 동네를 모두 덮은 날이었습니다. 한낮이 되었는데 도 꽁꽁 얼어붙었던 추위가 계속되던 때에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누굴까? 아는 얼굴이 아닌데…….” 엄마는 밖을 내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하셨습니다. 엄마를 따라 현관문 밖을 보았더니,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우리집 문 앞에서 서성이고 계셨습니다. “아이고, 사람이 있었소. 다행이오. 사람을 찾으러 왔거든. 그런데 갑자기 집이 어디인지 생각나질 않아서…….” 할머니는 머리를 몇 번 조아리시면서 또 다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분명히 이 근처인데 말이야.” 할머니가 말씀을 하시는 동안, 찬 바람이 불어대는 소리가 들렸습니 다. 할머니는 추위에 덜덜 떨고 계셨는데, 얼굴까지 추위에 빨갛게 되 어 있었습니다. “할머니, 너무 추우니까 일단 저희집에 들어오세요. 몸을 녹이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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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 제가 이웃들에게 연락을 해서, 찾으시는 분에 대해 물어볼게요.” 우리 집으로 들어오신 할머니에게 엄마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해 주었습니다. 차를 드시면서 몸을 녹이시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차를 드시는 대신 엄마에게 사람을 찾아달라고 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 내 동생 찾아 왔어. 내 동생에게 전해 줄 게 있는데…….” 갑자기 할머니는 가방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의 가방 속에서 나온 것은 하얀 쌀밥이 담긴 밥그릇과 육포, 초콜릿 과자, 사탕이었습니다. 육포, 초콜릿 과자, 사탕이 할머니의 가방 속에서 나온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쌀밥 그릇을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다닌 할머니가 조금은 신기하게 보였습니다. “1·4후퇴 때 북에 두고 온 내 동생 갖다 줄 거야.” “북한에 있는 동생이요?” 엄마의 두 눈이 동그랗게 되어 할머니께 물어보셨습니다. 할머니는 어려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부모님 없 이 할머니와 동생이 남았는데, 너무 어린 동생은 할머니네 이모가 데려 가 키워주시고 할머니는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생과 떨어져 사는 사이에 우리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피난을 내려 온 할머니는 우리나라에 살게 되시고 할머니 동생은 북한에 남아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북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찌나 마음이 찢어졌는 지 몰라. 북한 주민들 굶어서 뼈만 남은 거 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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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주름 진 눈물이 고였습니다. “지금은 내가 동생 있는 데를 알았으니까, 동생한테 따순 밥 갖다 주 려고…….” 할머니는 고인 눈물을 닦으셨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굶었겠소, 쯧쯧. 그동안 나만 배부르게 밥 먹었던 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오. 이제 내가 만날 동생한테 따뜻한 쌀 밥 먹여 줄 거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시던 엄마의 얼굴이 난처해 보였습니다. 할머니가 하얀 쌀밥 그릇을 품에 감싸 안으시자, 엄마는 동네 이웃 들에게 전화를 해서 할머니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가 동네 아줌마들과 전화를 하고나서 조금 있다가 어떤 아줌마 가 찾아왔습니다. 우리집에 찾아온 아줌마도 추위에 떨었는지 얼굴이 빨개져 있었습니 다. 그런데 집에 들어온 아줌마가 밥그릇을 품에 안은 할머니를 보자,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엄마, 집에서는 언제 나갔어?” 집으로 찾아온 아줌마는 할머니의 딸이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딸을 보자 감싸 안았던 밥그릇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면 말 했습니다. “우리 동생 따순 밥 먹여야 한다니까.” “엄마, 북한에 있는 동생한테 어떻게 밥을 갖다가 줘.” 알고 보니 정말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셨던 것이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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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치매에 걸리게 되면 몸과 마음이 모두 아프게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몸과 마음이 아프게 되어, 북한에 있는 동생 에게 갈 수 있다고 잘못 판단하신 거라고 했습니다. 결국 할머니는 할머니의 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할머니는 풀어놓으셨던 음식들을 다시 가방 속에 꼭꼭 넣어 가셨습니다. 현관문 을 열고 밖으로 나가시면서도 계속해서 동생한테 가야한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습니다. ‘할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나는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겨울이 끝나고 봄이 다가오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동네를 지나가다가 어른들이 하시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치매로 고생하시던 할머니 말이야. 결국 돌아가셨다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북에 있는 동생한테 따순 밥 가져다준다고 하셨다던데?” 할머니에 대한 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되자, 나는 너무 슬펐습니다. 처음으로 남한과 북한으로 나누어진 우리나라에 대해 생각도 해보았 습니다. 솔직히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분단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 습니다. 일가친척 중에도 전쟁을 겪은 분이 없어서 분단의 아픔을 경 험한 분도 안 계십니다. 그래서인지 전쟁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또 통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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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통일에 대한 프로그 램을 보긴 했지만, 재미없고 따분하기만 했습니다. 예전에 어떤 친구가 통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마도 통일에 대해서 예전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던 내가 할머니를 만난 다음에, 전쟁으로 분단된 현실이 정말 가슴 아픈 것임을 알았습니다. 또 먹을 것이 부족하고 힘들게 살아가 는 북한 주민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을 만났더라면……’ ‘할머니의 동생이 할머니가 준비한 따순 밥을 먹었더라면…….’ ‘아니,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할머니만 생각하면 마음이 따끔따끔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보았습니다. “올해 안에 이산가족 1만 6천 명의 영상 편지 제작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상봉과 혈연관계 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 작업이 조기 완료 되게끔 지원하겠다고 합니다.” 뉴스를 보면서 또 다시 마음이 따끔따끔해졌습니다. 영상 편지를 만 들고 있을 이산가족들이 흘릴 눈물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또 동생 에게 따순 밥 먹이겠다던 할머니 생각도 났습니다. ‘할머니께서는 하늘나라에서 동생을 꼭 만나셔서 따뜻한 밥 함께 드 세요.’ 나는 하늘나라에 계실 할머니를 향해 조용히 속삭여 보았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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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위한 우리의 발걸음 안보사랑 글짓기 초등 부문 장려상
♥ 이 국 희 (대전 성천초) 5학년 어느 날, 도덕 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는 갑자기 “비익조”라는 새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평소 에 한번도 보지 못하였고, 모습도 참 특이한 새였다. “전설에 따르면 비익조라는 새는 눈과 날개, 다리가 각각 하나씩이 라서 짝을 맞추어야만 날 수 있다고 해요. 너희들은 이 새를 보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니?” 선생님의 질문에 갑자기 교실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선생님께 서는 이 새를 왜 보여주신 걸까?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제야 선생님께 서는 그 이유를 말씀해주셨다. “남한과 북한도 이 비익조라는 새와 같습니다. 그런데 통일을 이루 어야 할 다른 한쪽인 북한에 대해서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까?” 나와 친구들은 모두 북한 동포들을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 에 북한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은 선생님과 함께 북한 동포들의 생활모습에 대해서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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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보았다. 북한은 우리와 같은 민족인데도 우리와 사는 모습이 많이 달랐다. 우리는 초등학교를 6년 다니지만 북한에서는 소학교를 4년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국, 사, 수, 과, 영, 예체능의 과목을 배우는 반 면 북한에서는 주로 지도자님과 관련된 과목과 ‘사회주의 도덕’, ‘수 학’, ‘국어’, ‘자연’, ‘위생’, ‘음악’, ‘체육’, ‘공작’ 등의 과목을 배우고 있 었다. 남북이 다른 것은 학교생활 뿐만 아니라 언어, 생활모습 등도 많 이 달랐다. 사실 남한과 북한은 한민족이었다. 그런데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남한과 북한이 둘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과거에 한민족이었 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북한 주민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 끝난 뒤, 선생님께서는 우리에 게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는지 안 되었으면 좋겠는지를 물었다. 그 말에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손을 든 친구들도 있었고, 친 구들도 있었고, 통일이 되면 안된다는 말에 손을 든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통일이 되는 것에 대해서 찬성하는 쪽에 손을 들었다. 물론, 통일이 되면 안 좋은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는 원래 한 민족, 한 형제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통일된 하나의 국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통일이 되면 전쟁의 위험이 없고 평화로운 나라가 될 것이다. 중국 과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 넓은 아시아와 유럽 대륙으로 뻗어나갈 수 있 게 될 것이다. 또, 지금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 한 국만의 우수한 재 능을 더욱 넓게 펼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힘은 지금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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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배 이상 커지게 될 것이다. 통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끈질긴 노력과 튼튼한 힘이 있어 야 한다. 그리고,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우리 민족 모두가 자유롭게 활동하고 각자의 꿈을 키우며, 행복한 생 활을 할 수 있는 통일 국가가 이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3단계가 필요하다. 1단계로는 남북한이 대립 단계를 넘어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발전하 기 위해 여러 가지 교류와 협력을 해야 한다. 2단계로는 남북한이 서로에 믿음을 바탕으로 평화로운 관계를 맺으 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와 지구를 만들어 운영 한다. 3단계로는 남북한 의회 대표들에 의해 마련된 통일 헌법에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통일 정부와 통일 국회를 구성하고 여러 제도와 기구들을 통합하여 완전한 통일을 이룬다. 나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통일을 이루어 모두가 주인이 되는 나라, 모든 사람이 화합하는 나라, 더불어 잘사는 나라, 세계 평화에 기여하 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통일에 대해서 생각해보면서 떠오른 책이 한 권 있다. 예전에 읽었던 “헤겔 아저씨네 희망 복지관”이라는 책이다. 그 책에 서 바로 이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문 안쪽에 있다.” 이 말처럼 남한과 북한도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먼저 다가가다 보 면 언젠가는 꿈에 그리던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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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도 예전에는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끝없는 노력으로 결국에는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곧 통일이 찾아올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면서 나도 통 일을 위해 열심히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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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예부문>
안보사랑 글짓기 중·고등 부문
최우수
바람 정하린 (서울 문정중)
우 수
그 해, 5월의 기억 강예은 (전남 화순중)
우 수
당신은 평화롭습니까? 임성현 (울산 대송중)
장 려
남과 북 임수정 (서울 미림여자정보과학고)
장 려
국가 안보의 첫걸음 이소민 (대전 만년중)
장 려
옆 집 마한빈 (서울 미림여자정보과학고)
바람 안보사랑 글짓기 중·고등 부문 최우수상
♥ 정 하 린 (서울 문정중)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경찰청 앞에 있는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 기를 멋지게 휘날려주는 ‘태극바람’이라고 해요. 전 바람이라서 아무 도 저를 볼 수 없다는 슬픈 점이 있지만,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다닐 수 있답니다. 저는 정말 행운아에요. 왜냐고요? 제 취미가 여행이거든 요. 특히나 이번에는 북한에 다녀왔답니다. 비록 제가 자리를 비울 땐 태극기가 멋지게 펄럭이지는 못할테지만, 괜찮아요! 친구한테 부탁해 놨으니까요. 오늘은 정말 행복한 날이에요. 여러분께 저의 기나긴 북 한에서의 여정을 말씀드릴 수 있으니까요! 자, 그럼 이제부터 이 태극 바람의 북한 여정을 들어보세요!
저는 삼팔선을 시작으로 함경북도, 두만강까지 갔다가 압록강을 거 쳐 평양을 향해 북한 전체를 한 바퀴 돌고 오는 경로를 계획했어요. 삼 팔선에 도달했을 때였어요. 남한 군인과 북한 군인이 무장한 채로 서 로에 대한 경계와 대치를 팽팽한 상태로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 었어요. 너무 무서웠는지라 저는 바람답지 못하게 슬금슬금 지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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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조심히 올라갔어요. 이리저리 다니다가 갑자기 맛있는 냄새가 나 길래 그 쪽으로 가보았어요. 아니나다를까, 과연 그 곳에는 탁자다리 가 부러질랑 말랑한 진수성찬 한 차림이 예쁘게 차려져있었어요. 역시 그 집은 북한의 고위 간부네 집이었나봐요. 훤칠한 몸에 살이 통통히 오른 남자가 고루고루 먹기 시작했어요. 그 집을 떠나고 서민들이 모 여 사는 마을로 갔어요. 그 곳의 아이들은 쥐라도 잡아먹겠다고 쥐덫 을 만들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동냥을 하고 있었어요. 아까 그 집과는 정말 대조적이었어요. 밥을 먹고 있는 집이라면 거의 다 풀죽 정도로 허기를 채우고 있었어요. 꽤 사는 집으로 보인 집은 겨 우 자전거 한 대 정도를 가지고 있었고요. 이 처참한 광경은 차마 도와 주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저는 바람인지라 할 수 없이 그들을 뒤로한 채 떠나는 방법 밖에는 없었어요. 그때였어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허리가 꼬부러진 할머니 한분께 서 통곡을 하고 계셨어요. 한국전쟁 때 배우자와 헤어지게 되었는데,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 나갔다가 남한에 계신 배우자의 사망 소식을 들 으셨대요. 이산가족들이 죽기 전까지 빨리 통일 이루어져야 할 텐데 요……. 전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리기 위해 이 몸을 훽 돌려 방향을 꺾었어요. 그 다음엔 저만치 보이는 민둥산의 깡마른 아이들이 저들끼 리 하하호호거리며 칡뿌리를 캐고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어찌나 까르 르거리던지 굶주림을 잊고서는 남은 힘마저 웃는 데에 쓰는 것 같았어 요. 갑자기 남한의 아이들이 생각났어요. 우리나라 아이들을 매일 같 이 스마트폰과 TV에서 눈을 뗄 수 없던데……. 오히려 이곳의 아이들 은 더 밝고 활발해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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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뭇한 생각을 하다가 어디선가 ‘탕’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저는 재 빨리 그곳으로 가 보았지요. 어머나, 세상에…. 어느 누군가가 공개총 살을 당한 모양이었어요. 이미 총에 맞고 고꾸라진 남자 주위에 사람 들이 둘러앉아있었거든요. 북한은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나라에 충성 을 다하라는 의미에서 공개처형을 집행한다고 해요. 무시무시한 광경을 뒤로 돌아다니다보니 어느 새 벌써 두만강이었어 요. 근데 그 곳에는 탈북하려는 가족이 있었어요. 그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강을 조심조심히 건너고 있었어요. 북한사람들은 탈북할 때 두만 강을 많이 건넌대요. 만약 탈북에 실패한다면 바로 총살을 당한대요. 그리고 탈북을 해서도 중국 공안에게 잡히면 다시 북송되어 죽임을 당 하거나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된대요. 정말 끔찍하죠? 안 그래도 그 근 처에는 탈북에 실패한 모양인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모아져 있었어요. 전 탈북하는 가족을 응원하며 그 자리를 떠났어요. 만일 대 한민국에 무사히 들어오게 된다면, 사람들에게 보호 받고 무시와 놀림 을 당하지 않길 기도하면서요. 공포 그 자체인 두만강을 따라가다 보니 압록강이었어요. 역시 그 곳에서도 시체를 볼 수 있었고 탈북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저는 이렇게 탈북을 시도하려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새터민으로서 우 리나라로 오게 된다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이 사람들을 보호해줘야 한 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실패해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데, 대한민 국에 와서 살기 위한 다짐 하나로 목숨을 걸고 온 거잖아요. 인간답게 살 권리를 찾아 탈북한 용기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 장소는 북한의 수도 평양이었어요. 평양에는 아까와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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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빌딩들이 꽤 많았어요. 그리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훨씬 세련되고 깔끔하였어요. 이렇듯 북한은 평양 말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다 못 사 나봐요. 여기까지가 저의 북한 여정이었어요. 저는 사람들이 볼 수 없어서 안전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었지만 만약에 저도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 었다면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바람이 있다면, 여러분이 남북의 평화통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거예요. 만약에 통 일이 된다면 우리는 한 민족으로서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겠죠? 저는 북한에서 온 ‘백두바람’이에요. 저에게는 특별히 맡겨진 임무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정처 없이 이리저리 자유롭게 돌아다녀요. 원래 그게 일반적인 바람의 임무죠. 하하. 오늘은 제가 여러분께 북한 에 있다가 대한민국을 다니면서 느낀 것을 이야기 해드리려 해요. 북한 과 남한의 모습이 너무나도 달라서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요. 또한 처음 으로 북한을 벗어나서 한 여행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앞으로도 처음 본 남한의 모습은 절대로 잊혀질 것 같지 않아요. 바로 시작할게요! 저는 대한민국의 서울야경이 그렇게 멋있다고 해서 바로 서울로 가 려고 했어요. 오는 길에 인천에 잠시 들렸는데…. 제 입이 쩍 벌어지게 된 이유는 바로 인천국제공항이었어요. 그렇게 웅장하고 멋진 건축물 에 이어 주변에는 항공기 여러 대가 줄을 지어 있는 모습이 얼마나 환 상적이던지……. 저는 인천의 여운에 젖은 채 서울로 향했어요. 도착 했을 즈음은 한창 낮이라 야경은 천천히 기다렸다 보기로 했어요. 시 간이 가기를 기다리며 서울의 전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했어요. 우 와—. 고층 빌딩이 북한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정말 많았어요. 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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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도요. 아파트도 50층 이상인 아파트가 많았어요. 정말 놀랐어 요. 그리고 길거리에 다니고 있는 수많은 차들을 보니 실감이 났어요. 대한민국이 엄청난 속도로 짧은 기간 안에 커다란 경제 발전을 이루었 다는 걸요. 한 가지 더 놀란 건 서울이라는 도시인데도 주변에 나무가 울거진 산이 둘러싸여 있는 거였어요. 북한에는 산이라고는 거의 민둥 산뿐인데……. 그리고 놀라기보다 생소했던 건 사람들의 모습이었어 요. 북한과는 달리 옷차림이라던지 머리스타일 등 패션은 다들 제각각 이었고 개성이 넘쳤어요. 심지어 머리색이 금발인 사람도 있었는데,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할 머리색이지요. 북한에서는 거의 남자는 짧게 친 머리, 여자는 긴생머리나 단발머리가 다예요. 그리고 옷차림은 거 의 무채색이에요. 드디어 밤이 되어서 서울야경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였어요. 저는 정말이지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번쩍번쩍거리는 광경은 처 음이었거든요. 정말 안타까웠어요. 북한사람들은 언제쯤 이렇게 멋진 야경을 볼 수 있을지 궁금했거든요. 그들은 항상 하루만 내다볼 수밖 에 없어요. 풀죽으로 입에 겨우 풀칠하고 사는데, 사치라고는 생각할 수 없거든요. 하루를 무사히 살아넘기면 그것에 대해 감사해하고요. 워낙 굶어 죽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지요. 저는 서울야경을 보면서 계 속 북한주민들이 생각이 나 마음이 불편했어요. 이런 멋진 광경을 태 어나서 평생 한 번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대부분이거든요. 멋진 서 울야경에 감탄하고 북한주민들을 생각하며 다음 날 저는 울산으로 향 했어요.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 저는 조선소에 가보았어요. 대한민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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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거인의 나라 같았어요. 무엇이든지 규모가 굉장했거든요. 배가 얼마나 크던지 어제 서울에서 본 빌딩만했어요. 제가 북한에 있을 때 본 배라고는 조촐한 낚시배뿐이었어요. 조선소를 보고 저는 바로 제주도로 향했어요. 그 곳에는 수많은 외 국인 관광객이 있었어요. 신기했어요. 북한에서는 다른 눈 색깔, 다 른 머리색을 한 외국인 관광객을 한 명도 볼 수 없어요. 그리고 북한 사람들도 마음대로 해외로 나갈 수 없어요. 이렇게 외국인과 한국인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대한민국의 자유를 몸소 느낄 수 있었 어요. 비록 저는 자유롭게 제 몸을 이끌 수 있는 바람이지만 부러웠어 요. 항상 자유롭지 못하고 인권침해만 당하는 북한주민들을 보다가 이 런 자유로운 한국인을 보니까 괜히 부러웠나봐요. 그래서들 북한에서 는 대한민국으로 오려고 목숨까지 걸고 탈북해오나봐요. 그들의 용기 는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몸부림에서 나오나봐요. 그러니까 그들은 무 시를 당하면 안 되고, 놀림을 받아서도 안 되고 보호받아야 되요. 이렇 게 북한사람들이 목숨까지 걸어야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점은 정말 안 타까워요. 그래서 통일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져서 그들이 자유를 얻 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통일 중에서도 평화통일이죠. 제주도에서 통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점점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재빨 리 서해안을 따라 다시 북한으로 돌아왔어요. 대한민국이 경제발전을 이룬 모습과 자유로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나서 이곳 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났어요. 고위 간부들 아니면 모두들 몸이 야위어 서 끼니걱정만 하고 있어야하거든요.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권침 해를 당하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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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야기를 마치면서 저의 부탁이자 바람 한 가지를 말씀드릴게요. 북한사람들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유를 원하고 있어요. 자연히 모두 가 통일을 원하고 있죠. 하지만 남한, 즉 대한민국은 자본주의에 민주 주의이니 정말 잘 살아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니까요. 그래서 대한 민국의 사람들 은 통일에 대한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아요. 다만 북한사 람들은 끼니를 걱정할 때 한국인들은 자신의 성공에만 관심이 있지요.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요. 그래서 저는 한국사람들이 평화통일 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해요. 그리고 같은 한민족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상이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는 이 유만으로 다른 민족이라고 착각하지 말기를 바라요. 지금까지 백두바 람의 대한민국 여정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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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5월의 기억 - 故 안병하 전 전남도경국장을 기리며 안보사랑 글짓기 중·고등 부문 우수상
♥ 강 예 은 (전남 화순중) 1. 그 분께서 즐겨 드시는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대전행 버스에 몸을 실 었다. 아침의 나른한 햇살과 살랑이며 감도는 봄바람이 나를 이끄는 듯하다. 달리는 버스 안 창가에 비치는 모습. 주름진 내 모습과 함께 오버랩 되는 이제 막 피어나는 꽃들이 역설적 조화를 이룬다. 매년 5 월이면 늘 그러했지 않았던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캔버스 삼 아 그 분의 모습을 그려본다. 놀랍게도 이제는 그립기까지 한 그 날의 분노와 두려움을 떠올린다. 너무나 두려웠던 나머지 꺼내보고 싶지 않 았던, 그러나 잊어서는 아니 되었기에 잊지 않고자 억지로 꺼내놓았던 힘겹게 참아냈던 그 날의 분노와 두려움을.
2. 손이 덜덜 떨린다. 밤사이에 공수부대가 들어와 많은 학생들이 연 행되었다고 했다. 최대한 빨리 학교로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 았다. 반쯤 나간 정신을 붙잡고 시위에 필요한 물건을 챙긴 가방을 맸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경찰 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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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신발을 신으려 허리를 숙이자, 뒤편에서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너 지금 어디 가냐?" "학교 가요. 약속이 있어서." 아버지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시선을 맞추지 않았 다. 늦을 것 같아서 마음이 급해졌다. "니가 지금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그냥 집에서 공부나…." "언제부터 그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았어요? 항상 당신 일이 먼저였 잖아. 내버려 두세요! 알아서 할 테니까." 순간 감정이 들끓어 큰 소리를 냈다. 아버지가 무능하다고 생각했 다. 과연 아버지는 내가 하려는 일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는 알고 계실 까? 이 나라는 아주 오래 전에 죽었다. 내가 지금껏 배운 국가의 의미 를 지금 이 곳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나랏일을 하는 아버지 역시 내 삶 속에서 의미를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국가는 자신을 아버 지처럼 대해주기를 바랐고, 아버지는 자신을 국가처럼 대해주기를 바 랐다. 아버지의 시선을 외면하며 도망치다시피 집을 나왔다. 한시 빨 리 학교에 도착해야했다. 시간이 없었다.
3. 딸이 집을 나간 후 멍하니 현관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경찰서로 향했다. 국장실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광주 시내에 내 모습이 오버랩 된다. 이 곳 광주에서 도경국장인 내가 해야 할 일은 무 엇일까? 그 때였다. 신군부에서 경찰 병력을 무장하라는 지시가 내려 왔다. 그것도 모자라 경찰력만으로 치안 유지가 어려우니 군 투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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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청하여 시위대를 힘으로 굴복시킬 것을 강요했다. 내가 지금 바라보 는 창밖의 광주는 이제 곳 아수라장의 한복판이 되어 무고한 시민들이 체포될 것이다. 전쟁터와 같은 그 곳으로 내 딸이 달려갔다. 늘 그래왔 듯 이번에도 난 내 딸의 편이 되어주지 못할 것 같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눈앞이 하얘졌다. 때마침 울리는 기분 나쁜 노크소리에 애써 정 신을 차렸다. “안 국장님. 안녕하셨습니까? 연락이 올 것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말 씀이 없어 직접 찾아왔습니다. 상황 자체가 급한데 뭐하고 계시는지도 한 번 볼까 해서 허허. 그나저나 올라오며보니 영 준비 상태가 엉망이던데, 제가 알던 모습 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허허허허. 자 이제 그만 꾸물거리 고 같이 나가시지요. 선배님?” “대대장. 내 그 쪽이랑은 더 이상 할 말 없네. 나가주게.” “여전하시군요. 한동안 자주 뵙겠군요.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선배 에 대한 예우는 여기까지입니다.”
4. 공수부대를 파견한 계엄군의 시위 진압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폭 력적 방법은 물론 시민들을 향해 총구를 돌리고 발포하기에 이르렀고, 발포 명령의 영향이 경찰에까지 미쳤다. 나의 신념이 나를 이끌었다. 나는 경찰이다. 내가 시민들을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내 딸을 저 지옥 과도 같은 곳에서 지켜내야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이 나 라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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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민이 모인 곳을 향해 총을 쏠 수 없다! 벌써 4·19를 잊은 것인가? 경찰을 무장시킬 수는 없다! 경찰들은 무기를 버리라! 계엄군 은 공격을 중단하라!” 더 이상 경찰이 역사의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한 몸 희생해서 무고한 광주 시민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나아가 경찰의 명예를 더럽히 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 부당한 지시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거부할 수 있다. 이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5. 사실 시위 내내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의 신념 덕분에 나를 비롯 해 시위해 참여한 시민들은 경찰들에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아 버지가 존경스러웠다. 언제고 아버지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 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나의 아버지에게는 본인께서 지 켜줘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6. 죽거나 다친 시민들. 딸 아이 또래의 학생들도 보인다. 보고 싶고, 걱정 된다. 아이가 나를 닮았다는 것을 알고 굉장히 슬펐다. 이 시대 에 나 같은 사람이 설 곳이 있던가. 가르치지 않았어도 아니 오히려 말 리고 혼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그 아이가 자랑스럽다.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보고 싶다. 걱 정된다. 낡은 지갑 속 자리 잡은 딸아이의 사진으로 마음을 달래본다. 총성이 울렸다. 시민들이 동요되었다. 그간 계속되었던 악몽이 재현되 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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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되지 마십시오! 경찰의 지시에 따라주십시오!” 갑작스러운 혼란에 지갑을 떨어뜨렸다. 지갑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 리다 오늘의 악몽은 지난날의 그것과는 다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대학 생들과 계엄군 몇 이 대치중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 그토록 만나고 싶었 던 딸이 있었다. 딸과 눈이 마주친 순간 급하게 주위의 경찰들을 불렀다. “저기 있는 학생들, 풀어줘야 해. 정 안 되면, 도망칠 수 있게 시간 이라도 벌어.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어떻게든…” 두려웠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두려웠던 적이 또 있었던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던 부하 경찰들이 고개를 숙이고 딸 쪽으로 뛰어갔다. 나 역시 계엄군들을 향해 달렸다. 계엄군의 관심이 경찰 쪽으로 돌려 졌다. 계엄군을 막아서는 동시에 나의 시선은 딸을 쫓았다. 급하게 발 걸음을 옮기던 딸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다정히 웃어주었다. 다행이었다. 그 와중에 웃어줄 수 있었던 내 자 신이 기특했다.
7.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아버지의 부하 경찰분의 도움 덕분에 비겁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버지를 기다렸다. “괜찮아!”라고 말씀하시며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8. 아버지의 묘역에 국화들이 놓여 있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국화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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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를 더했다. 눈물을 참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술잔을 채우 며 꾹 다물었던 입술이 터졌다. 그해, 5월의 기억. 아버지는 무심하고 무뚝뚝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나를 아껴주었고 , 그리고 더 할 나위 없이 멋진 경찰이었던 나의 아버지……. “아빠는 좋겠네.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다 지켰잖아. 고마워요. 사 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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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평화롭습니까? 안보사랑 글짓기 중·고등 부문 우수상
♥ 임 성 현 (울산 대송중) 기자가 오늘도 터벅터벅 방송국로 향한다. 그는 오늘도 지치고 힘든 하루지만 새가 지저귀고, 하늘이 파란 것을 보니 평화롭다고 느낄 수 있었다. 방송국에 도착한 그는 매일 그랬듯이 의자에 앉아서 잠시 휴 식을 취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기위해 컴퓨터를 켜고, 써놓았던 기 사문을 열려고 하였지만, 있지 않았다. 그는 엄청난 절망감에 빠졌다. 기자가 안절부절 못하는 도중, 기자는 문득 생각이 났다. ‘오늘 아 침만 해도 세상이 평화롭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런 내가 이러한 사소 한 일들 때문에 평화롭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면 연평도, 천안함에 대 한 사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대한민국이 평화롭다고 느끼게 될까?’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래! 이거야!”하고 기자는 자리를 벅차고 일어섰다. 기자는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고 밖에 나가서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지금 평화롭다고 느껴지십니까?”라고 물어보 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YES’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평화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니 사람들이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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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별다른 일도 없고, 지금 저의 삶에 별로 문제도 없고 그러니까 평 화로운거 아니겠습니까?” 기자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지금은 ‘정전’이 아닌 ‘휴전’ 상태이고, 북한의 여러 도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평 화롭다고 느껴지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당황한 기색 이 얼굴의 표정에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 후, 사람들은 대답을 ‘NO’ 라고 하였다. 그 후, 기자는 감사의 인사를 한후, 방송국으로 다시 향 하였다. 기자는 방송국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이 기사를 써내려 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평화롭다고 생각하는가?’ 대한민국 국민 10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대부분의 사 람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평화롭다고 답하였습니다. 평화롭다고 생 각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에 별다른 안좋은일도 없고 그렇게 아주 좋은 일도 없다고 대부분이 답하였습니다. 하지만, 휴전얘기를 꺼내자 마자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그리 평화로워 보이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문가는 이런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자신만의 얘기로 생각하지 않고, 큰 폭으로 바라보아야한다고 답하였습니다. 이 상 기자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기사를 보고 자신은 이렇게 대답을 하지 않는 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설문조사를 할때는 대답을 YES라고 하고 이런 기사를 읽고 나서는 NO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렇듯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물론, 사 람들마다 대한민국의 평화의 기준은 다를 수있다. 어떤 사람은 ‘지금 대한민국이 좋고, 통일을 할 필요가 별로 없어보입니다.’ 이렇게 답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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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지금 대한민국이 남북으로 나누어 져 있고, 서로 도발을 하는것이 매우 두렵습니다. 이런 것을 계속 볼때 마다 남북이 화해를 하고 통일을 하였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와같이 많은 의견이 갈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통일이 꼭 우리나라의 안보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다. 물론,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객관 적인 측면으로 볼때는 우리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고, 국방비 에 많은 예산을 쏟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언제 전쟁이 다시 날지 두려워서 벌벌 떠는 사람도 있다. 많 은 이산가족도 이직 남아있을것이다. 이와같이, 남북 분단은 많은 문 제가 있다. 나는 이때까지 초등학교에서 남북통일에 대한 글쓰기를 많이 해보았 다. 초등학교 때,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굳이 통일을 해야되냐’ 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솔직히 나도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물 론 지금도 한번씩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것 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남북통일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 을 가진 아이들의 생각을 보면 이렇다. ‘남북 통일이 되면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더 잘살기 때문에 우리가 경제적으로 불리한 조건 아니냐. 아무리 같은 한민족이라고 해도, 한국어지만 언어도 살짝 달라서 잘 어울리지 못할것 같은데 굳이 통일을 해야되냐. 정치적 대립은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등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남북 의 통일을 가로막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북이 평화통일로 통일이 될것인가, 전쟁으로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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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통일로 통일이 될것인가, 묻는다면 거의다 평화통일을 외칠 것이 다.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희생되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슬픔에 빠진다면 그무엇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들이 한두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인 2000년도, 내가 6살때인 2007년도 때만 해도 남북이 정상회담을 하면서 남북사이가 매우 좋아져서 통일에 한 걸음 내딛은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남북간의 갈등이 일어날 만한 사건들이 일어나서, 남북간의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로 지금까지 있다. 통일의 단점을 얘기했으니, 통일의 장점을 보자. 일단, 통일을 하면 전쟁의 염려가 줄어들것이다. 자, 한가지만 얘기했는데도 매우 큰 장 점이 드러나있다. 그러면 여러 가지를 말해보면 아주 많다고 볼수 있 다. 남한과 북한의 영토가 합쳐져서 자원 기차를 통해 유럽쪽에도 교 류를 비용을 줄일 수 있어서 경제도 차츰 발전해 나갈 수 있을것이다. 또, 북한에 묻혀있을 지하자원으로 인한 경제개발, 군사력 강화, 영토 확장, 이산가족 문제 해결 등, 셀 수 없이 많은 장점이 있다. 아직도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은 많다. 이렇듯, 남과 북이 통일을 이뤄낸다면, 매우 좋은일이 많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갑작스럽게 통일을 하게 된다면, 많은 혼란이 일 어날 것이다. 나는 통일도 차근차근 계단을 쌓아가면서 천천히 진행되 는게 좋다고 본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정치문제, 군사적 문제, 경제 적 문제, 언어의 이질성, 남과 북끼리의 차별, 비무장 지대(DMZ)지 뢰문제 등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해결 하지 않고 남북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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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된다면, 오히려 더 심한 갈등을 겪어서 통일을 하게 된 의미가 사 라진 듯이 생활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미없는 일을 빨리할 빠에는 오래 걸리더라도 의미있는 일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오늘 신문 기사에서 ‘통일시대 대비, 남북 건강 격차부터 줄여야’라는 기사가 있었다.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는 건강부터, 경제 등 의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런 것을 줄이기 위해서는 북한에게 지 원을 해주는 것도 좋은 일중의 하나지만, 이런 사람들을 배려하고 이 해할수 있는 자세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어 있던 독일의 통일방법도 참 고를 하여 교훈을 얻어 남북통일을 이루어 내는 것이 좀더 기초가 탄 탄한 통일의 발판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평화에 대한 의식을 개인보다는 공동체 의식을 갖고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그리 고, 2015년은 광복 70주년이자, 분단 70년째이다. 나는 분단 70년 이 100년까지 가지 않고, 내가 살아있을때, 남북이 통일을 하면서도, 서로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수 있는 것을 내눈으로 바라 보고 싶다. 나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한 민국에 많기 때문에 통일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덕분에, 지금의 사람들이 통일을 원 하는 사람들도 더 많아질 수 있는 것 같다. 나 하나쯤이야 하고 통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면, 결국에는 모두가 통일에 대한 의식 이 제대로 잡히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앞으로 통일에 대해 안좋은 생 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내 의견을 얘기하고, 그 사람이 통일에 대 해 좋은 의식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대한민국과 북한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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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은 한민족이다. 그러니 남북 정상회담을 해서라도 통일을 위한 타 협점을 찾아서 실천을 해야한다. 그러긴 위해 우리 전국민 모두가 노 력을 해야한다. 노력은 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남북 통일 에 대한 좋은 의식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남북통일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나라가 지금의 한반도, 북한과 대한민국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 겠다. 지금의 남과 북도 잘 해결되어 모두가 행복한 한반도가 되었으 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평화롭습니까?’라고 물었을때 모두가 YES라고 답할수 있는 세상이될 수 있는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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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안보사랑 글짓기 중·고등 부문 장려상
♥ 임 수 정 (서울 미림여자정보과학고) 임진각을 내가 처음 방문했을 때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그때는 남북분단이 무엇인지, 북한의 대해서도 잘 몰랐을 시기였다. 가시같 이 생긴 모양의 철조망이나 철도, 표지판 등등이 왠지 모를 엄숙한 분 위기를 만들어냈고 분단의 흔적들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때의 나 는 호기심으로 DMZ 전망대에 올라가서 북한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 만, 그때 당시 작았던 키와 날씨 탓에 북한의 모습을 자세히 보지 못하 였다. 망원경을 들여다보았을 때는 뿌옇기만 하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남한과 북한의 사이를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철조망 하나만, 강 하나 만 건너면 다른 세계인 듯 한 그곳이 우리와 같은 민족이 살고 있는 북 한이다. 그 뒤로 나는 커가면서 북한에 대해 알게 되고 북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한과 남한은 단지 따로 사는 것이 아닌 38선과 마음의 벽으로 인해 갈라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꼭 이루어져야 할 평화 통 일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탄도 미사일 발사실험부터 과거에 천안함 피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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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사건 등등 북한은 우리에게 수많은 도발과 위협을 가했다. 많은 사 람이 이러한 북한과 “통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하고 나 역시 일 부분 동의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하지만 요즈음 TV에 많이 방영되고 있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 ‘잘 살아보세’와 같은 탈북자들의 북한의 실 태에 대한 진솔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TV 프로그램들을 보니 남한을 위협하려는 적이 아닌 북한의 측은한 모습이 보였다. 전쟁을 일으키 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남한에 도움을 요청하는 하나의 방법이지 않았 나?”싶기도 했다. 아무리 우리를 위협하는 북한일지라도 북한을 이해 하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내 몸에도 한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모양이다. 나의 외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이고 6·25전쟁 당시 현재 나와 비슷한 나이에 피난을 나오셨다. 피난을 나오시는 도중 동행하시 던 증조할아버지는 다리에 총을 맞으셨고 남한에서 10여 년 정도 힘 겨운 생활을 보내시고 돌아가셨다. 북한에서는 보리밥과 같이 끼니도 제대로 때우기 힘든 생활을 하셨다고 들었다. 우리나라도 경제 위기를 맞았을 때 북한과 같은 생활을 하였지만, 이내 곧 많은 성장을 해서 남 한은 과학기술과 여러 가지 반도체 등의 기술로 많은 발전을 하게 되 었다. 하지만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많은 인구가 굶어 죽고, 권력층만 부유한 경제가 하락한 상태이다. 한때 같은 곳에 서 같은 것을 먹으며 생활하던 한 민족이 전쟁으로 이렇게 상반된 생활 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프다. 세계에서는 지금 “남한과 북한 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선진국인 독일도 동독과 서독으로 나뉜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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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독일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믿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특히 베를린장벽을 부수고 서로 얼싸안으며 기뻐하던 모습이 남북한의 3.8선이 붕괴되어 환호하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나는 현재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외할아버지와 함께 TV를 시청하는 도중에 북한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반가워하시면서도 그 리워하시는데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속상하다. 남북분단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산가족 상봉이 어려울뿐더러, 기약 없는 이별에 대한 그리움이 오히려 더 커지게 된다. 이러한 이산가족의 아픔을 없 애려면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통일보다도 먼저 ‘평화’조차 이루어지지 않 는 것이 실상이다. 분단 후 남북한 교류가 가장 활발하던 시기에도 정 치적인 부분에서 일부 평화가 이루어졌을 뿐, 내부적인 사람들의 인식 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이렇게 분단되어있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 질수록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힘들 것이다. 우선 통일이 되려면 사 람들의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한민족이었던 북한을 경계하고 서로 를 미워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고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 어지기 위해선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들의 의견과 인식이기 때문에 북 한과의 동질감 의식을 일깨워야 한다. 단지 “한민족이어서 통일을 해야 한다”라는 막연한 생각 말고 나라 의 경제적, 외교적 측면으로 봐도 통일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 한다. 만약 통일이 된다면 당장은 남한에 경제적으로 손해이지만 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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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내다보면 남북한이 함께 힘을 합쳐 큰 강대국이 될 가능성이 크 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형태의 나라이다. 육지로 무역을 하려면 바다를 통해 건너가거나 다른 나라를 거쳐야 해서 해외 진출을 하는데 지리적으로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북한과 통일이 된다 면 대륙으로 진출이 가능해지고 인도와 중동과의 육로교통이 활발해질 수 있다. 또한,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유럽과의 교류까지 가능해진다. 그리고 국가의 신뢰도가 높아져 외국 기업들의 투자도 증가할 것이고 세계평화에도 이바지하게 된다.
현재 남북한은 전쟁을 잠시 중단한 휴전 상태이다. 항상 전쟁의 위 험성에 불안한 상태이고, 그렇기에 더욱 북한을 적대시하게 된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당시보다 기술도 많이 발전한 상태여서 더욱 끔찍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우리나라도 북한을 향한 경 계태세로 인해 북한 못지않은 군사력이 낭비되고 이산가족의 심리적 고통이 커지며 북한과의 문화적 차이가 크게 나고 있다. 북한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과도한 국력소비와 공산주의체제이다. 북한은 약 100만 명으로 큰 규모의 군사력을 갖추 고 있다. 하지만 토지에 비해 군사력이 막대하게 소비되고 있다는 점 이다. 또한, 이러한 낭비로 인해 북한 국민의 생활은 점점 더 열약해지 고 기술이 발전하지 못해서 풍부한 자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한의 경제 상황은 제자리이다. 통일을 이룬다면 북한과의 경제적인 차이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군사력과 자원 남한의 기술력이 더해진다면 어려움을 극복하고 평화 통일을 이루어낸 독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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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강대국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고 장기적으로 바라본다면 지금까 지 소비한 분단비용보다 통일비용이 더욱 적게 들 것이다. 북한은 독 재적인 권력층 때문에 국민은 그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공개처형이나 수용소에 수용되는 등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해 나가고 있는 북한에서 기본적인 인권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국민의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통일이 이 루어져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현재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린 남 북한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 공단과 같은 사업이 더욱 활발히 시행되어서 북한과 개방적이고 협력적인 나라가 되어야 한다. 또한,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가 더욱 많이 주어져야 하고 서로를 향한 인식이 개선되어야 한다.
나는 남한과 북한이 다른 나라로 국제적인 장소에서 만나는 모습을 보면 가장 마음이 아프다. 특히 올림픽과 같은 세계적인 대회에서 남 북한이 경기 하는 모습을 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같은 얼굴, 같은 언 어를 쓰고 있는 서로가 경쟁 상대, 적이 되어서 싸워야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한 민족이었던 서로를 경쟁자, 다른 나라로 보고 이겨라 져라 하며 응원하는 모습이 속상하고 부끄럽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거짓말 처럼 남북한이 웃으면서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서 로가 여유를 가지고 상대방을 배려하면 충분히 이겨내어 평화적인 통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미워하 며 살아야했던 지난 과거들, 말도 못할 그리움을 지우고 살아야했던 이산가족들의 지난 슬픈 세월들을 이제는 지워야 할 때 이다. 남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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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된 지 약 65주년이 되었다. 이미 많은 것이 변해버리고 달라져있 지만 통일이 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시작하라는 말처럼 우리는 이제라도‘평화 통일’을 찾아나서야 한다. 유리창에 낀 안개를 투명하게 닦아내듯이 남북한의 관계 사이에 뿌옇 게 낀 안개 같은 존재의 38선을 깨끗하게 지워내야 한다. 독일의 베를 린 장벽이 무너져 통일을 이루어 낸 것처럼 남북한사이에 존재하는 38 선도 사라져 평화 통일을 이루고 다시 한 민족으로 살아가는 날이 오기 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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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안보의 첫걸음 안보사랑 글짓기 중·고등 부문 장려상
♥ 이 소 민 (대전 만년중) 안보 security는 라틴어 “securitas”에서 유래된 말로 근심, 걱정 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고, 국가 안보란 국가안전보장의 준말로 걱 정, 근심, 불안이 없는 국가의 상태를 의미한다.
나는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속담에 빗 대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속담은 게으르고 미련해서 구멍 난 외양간을 보고도 고치기를 미루다가 소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외양간을 고치는 사람을 비웃는 말이다. 소는 농경사회였던 과거 우리나라에서 집안에서 보물 취급을 받을 정도로 중요시 여겨졌었다. 그 소를 키우 는 외양간이 뚫렸다면, 소를 잃기 전에 고쳐야 한다. 소를 잃은 후에는 뉘우쳐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 5천년 역사에는 930여 회의 크고 작은 외침이 있었다고 한다. 대략 평균적으로 5년 반 마다 한번 씩 외환을 겪은 것이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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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불과 40년 동안만 해도 1592년 임진왜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있었다. 이처럼 전쟁이 되풀이 되는 이유는 혹독 한 전쟁을 겪고도 또 다시 일어날 전쟁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칠 줄 모르고 살아왔다. 국가안보라 는 외양간에 구멍이 뚫려 소를 잃어도 외양간을 방치해 두었기 때문에 무려 930여 회나 소를 잃었던 것이다. 조선을 지나 대한제국, 대한민 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대한민국을 이룬 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졌으 며, 6.25 전쟁을 겪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며 지금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기까지 우리는 일제 강점기, 미국과 소련의 남북 주둔, 6.25 전쟁, 북한의 수 없는 핵을 비롯한 갖가지 위협까지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면서도“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를 반복하고 있다.
“천하수안 망전필위”라고 아무리 천하가 평안하다고 해서 전쟁을 잊 으면 반드시 국가에 위기가 오고야 만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 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가 우리나라의 국가 안보를 위해서 할 일은 무 엇이 있을까?
첫째, 우리는 군사적 안보를 굳건히 해야 한다. 현재 우리는 북한과 휴전 상태로 위험한 상황이다. 북한은 판문점 도끼사건, 여러 간첩들 의 위협, 사이버 상에서의 테러인 해킹까지 여러 방법으로 우리 남한 을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군사적 안보를 지키기 위해 병역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아는 남자 친구들만 해도 군 대를 가고 싶지 않다는 친구들이 많다. 그런 친구들 한명 두명 모여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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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명이 되어 장차 우리 또래가 우리나라를 지켜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병역을 기피한다면, 우리나라는 지켜질 수 없다. 둘째, 정치적으로도 안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 우 리는 분단이라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남북의 협상과 대화를 늘려야 한다. 대화만이 우리 남한과 북한을 평화적으로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될 것이다. 또한, 백두산 관광이나 이산가족 상봉 등의 서로에게 도움 이 될 수 있는 장을 연다면 남과 북이 조금이나마 더욱 더 평화적으로 서로를 알아가고 협력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국제적 차원에서는 외국과의 경제교류나 다양한 세계기구들 의 활동에 참여하며 외국과의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교류를 하며 다 른 나라와의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경제적 차원에서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 유지, 국민들의 소득 과 복지수준 향상, 빈부격차와 경제적 불평등 해소 등을 위해 노력해 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안으로는 국민들의 경제적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며, 우리나라 밖으로는 국제적으 로의 경제수준에서의 우리나라 경제수준을 향상시켜 경제적 안보를 강 화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사회적 차원에서는 도덕적으로의 해이를 극복하고, 사회적 연 대감을 조성하고, 사회 정의를 구축해야 한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도 덕적 자존감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환경적 차원에서는 환경 친화적인 경제 성장을 추구하고, 자연 환경과 생명을 사랑하며 보호하려는 의식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개인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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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리아스는 2000년 8월 유엔 회 의장에서 ‘인간 안보'에 대하여 역설하였다. 그는 오래 전부터 지구촌 의 안보는 인류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주장해 왔다. 지구 촌 시대에는 국경을 초월하여 전세계가 동일한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 문이다. 우리 시대에는 개인의 안보, 국가의 안보, 지구촌 안보가 서 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리아스는 “이제 우리는 인간의 안전 보 장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협력을 기울려야 한다.”라고 역설하였다. 아리아스의 주장처럼 우리는 개인의 안보, 또는 국가의 안보만을 지키 려고만 하지 말고 지구 전체의 안보를 지키려고 노력하해야 한다. 그 러면 나 개인, 또는 국가의 안보는 당연히 따라 올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라는 헤밍웨이의 소설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로버트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다 심각한 부 상을 당해 일행과 함께 이동을 할 수 없게 된다. 헤어지지 않으려고 울 부짖는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와 일행들을 떠나보내고 로버트는 쫓아오 는 추격대를 막기 위해 기관총을 겨눈다. 그러나 부상 때문에 자꾸만 정신을 잃고 만다. 흐려져 가는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서 로버트는“세 계 평화와 인류의 자유를 위해서!”,“사랑하는 조국 아메리카를 위해!”, “아름다운 마드리드와 스페인을 떠올리자!” 등등 여러 말을 내뱉으며 정신을 차려보려 하지만 그의 의식은 흐려지기만 한다. 그러다 마지막 으로 로버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와 그 뱃속에 있는 어린 생 명을 떠올리며 정신을 가다듬고 추격군을 향해 기관총의 불을 내뿜는 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 나라의 안보를 위한 것은 바로 그 누구를 위함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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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남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 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과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메시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안보를 지키 기 위한 첫걸음이자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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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안보사랑 글짓기 중·고등 부문 장려상
♥ 마 한 빈 (서울 미림여자정보과학고) 아침부터 기분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아파트 오르막길의 벚꽃들은 모습을 감춘지 오래였지만 잔상이 남은것만 같 았다. 더러워진 운동화끈을 묶은 후 평소보다 발랄하게 현관문을 열었 다. 습관적으로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 애다. 안 그래도 컸던 눈이 오늘따라 커보인다. 늦어서 머리를 감지 못했나, 뒷 머리는 다 뻗 쳤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그랬을까? 이름이 뭘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쟤는 일주일 전에 우리 옆집으로 이사 온 애다. 쟤네 부모님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항상 큰 눈으로 큰 가방을 메고 뻗친 머리로 야 무지게 문을 잠근 후 우다다다 달려가는 것만 봐왔기 때문이다. 내일 도 나오겠지. 생각하며 나도 학교가는 길을 바라 봤다. 선생님께서 조 례하시기 5분 전, 학교까지는 뛰면 5분. 야무지게 문을 잠근 그 애의 손처럼 눈을 한번 깜빡인 후 학교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눈 앞에 청록 색 셀로판지를 가져다 댄 것처럼 온 세상이 파랬다. 아침부터 날아 갈 듯 한 기분으로 등교한 나와는 달리 담임선생님께서는 어제 안 좋은 일 이 있으셨는지 내가 오자마자 벌점을 주셨다. 딱 1분 늦었는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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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 항의하려 오른손을 번쩍들고 선생님께 눈을 맞췄다. 하지만 선생 님께서는 나에게 발언권의 기회를 넘겨주시지 않은 채 교실밖에서 작 은 손을 데리고 오셨다. 선생님의 왼손에 잡힌 작은 손은 참 예뻤다. 투박하지만 길쭉한 손은 누구나 예쁘다고 생각 할 만큼 길쭉했다. 그 애였다. 아침에 뻗친 머리는 어떻게 알고 정리했는지 단정해져 있었 고, 흔들리는 동공은 전학생임을 온몸으로 티내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저 애를 어떻게 소개할까 하며 점차 상상의 나래로 빠지려는 순간, 선 생님께서는 설명을 시작하셨다. 저 애의 고향은 함경북도라고 했다. 익히 듣던 지역들과의 이름과는 거리감이 있는 느낌에 가까운 곳에서 오진 않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북한에서 무력하게 노동착취를 당하는 어머니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다 가족들과 함께 탈북을 시도했다고 했 다. 선생님께서 조례를 마치시고 문을 나가신 순간부터 우리반의 모든 시선은 그 아이로 집중되었다.
“내레 요즘은 밥은 먹고 삽네다” 장난기가 다분한 목소리 하나의 시 작으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일학년 이반 전체로 퍼졌다. 순식간에 모든 아이들이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본 북한 말투를 흉내내며 쉬는시 간을 보내고 있었고, 아이들의 목소리와 비례하여 그 애의 얼굴은 점 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당황스러운 것을 표 현하듯 떨리는 눈동자는 나를 올곧게 보며 도와달라고 외치는 것 같 았다. 별 일 아니었다. 그저 전학생이 온 것이고, 친구를 사귀는 과정 을 겪고 있는 것이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냥…옆 집 애일 뿐이 다.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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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조례에서 종례까지 시간이 지났다. 생각보다 많이 신경이 쓰 였던 하루였다. 아침에 눈이 마주친 이후로 그 눈빛이 아른거려 말도 걸 지 못했다. 종례가 끝나고 신발을 갈아신은 후 버스에 올랐다. 하교 시간 이라 사람이 많아 갑갑했다. 투덜대며 엘리베이터를 타러 걸어갔다. 동 글동글한 뒷통수가 보였다. 뭐라 말을 걸어야만 할 것 같았다. 곰곰이 생 각한 후 안녕, 하며 오른 손을 흔들었다. 그 애의 이름은 희경이라고 했 다. 희경이와의 대화는 굉장히 별 게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은 좋았다. 집에 가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북한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빈곤에 시달리며 한 평생을 보내고 자신을 위해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북한에서 희경이가 왔다고 생각하니 오늘 아침일이 또 괜히 떠올 라 미안했다. 내일은 희경이와 같이 학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을 먹은 후 현관을 나섰다. 같이 학교에 가려고 20분이나 일찍 나와 문앞에서 기다렸다. 어제와는 또 다른 기분이 몽실몽실 퍼졌다. 곧 희경이가 나왔고 내가 기다릴 것이라는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는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같이 가자고 말하니까 신발을 고쳐 신고 고개 를 끄덕였다. 등교를 같이 하며 희경이는 어렵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 려주었다. 상상했던 것 보다 더 생소했다. 희경이는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중국을 통해 남한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지금 부모님들께서는 탈 북자 교육에 참여하며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집에 새벽에 잠깐 들어오 신다고 했다. 부모님들께서는 무엇보다도 희경이가 학교에 잘 적응 하 기를 바라고 계시며 희경이도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희경이와 대화를 하는데도 많이 생소하고 알아듣기 힘든 말씨와 말투에 모든 말을 정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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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희경이의 마음만은 잘 느껴졌다. 내가 희경이 와 등교를 같이 하는 것 만으로 희경이는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고 했 다. 반 친구들이 희경이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진 것만 같았다. 어제 까지만 해도 북한 말투를 흉내내며 놀렸던 남자아이들도 희경이에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기 바빴다.
희경이는 북한에서 온 것에 대해 조금은 수줍어 했지만 전혀 부끄럽 게 생각하지 않았고 선생님께서 종례를 하시기 전까지 희경이는 금새 학교에 적응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희경이의 성격과 말솜씨에 빠져버 렸고, 어제 일을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친구들도 몇몇보였다. 선생님께 서도 달라진 반의 분위기에 웃음을 지어보이셨다. 오늘의 종례 내용은 이번 주에 백일장대회를 갈 사람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고, 주제는 통 일과 안보에 대한 내용이라고 하셨다. 짭잘한 상금을 듣고 몇몇은 손 을 들기 시작했고, 주말에는 자야한다는 신념을 갖고있는 나는 굉장한 내적갈등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희경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 고 반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희경이를 띄워주기 바빴다. 그 틈에 나도 손을 들었고 나와 희경이는 같이 백일장에 가게되었다. 학교 근 처 공원에서 자유롭게 앉아 주제에 맞춰 글을 쓰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 와 희경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집중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평범한 17세가 글을 쓰는 것의 표본을 보여주는 듯 ‘나는’ 으로 시작 해서 ‘우리나라가 빨리 통일이 되면 좋겠다.’로 끝나는 글을 썼고, 내 가 다 쓰고 휴대전화를 갖고 놀때까지 희경이는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 다. 무슨 내용이냐고 물어보니 예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께 편지를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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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했다. 언뜻 들으면 왜 통일과 안보에 관련된 글쓰기를 하는데 할머니께 편지를 쓸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희경이네 할머니께서는 암이셨다고 했다. 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치료받을 경우 완치할수 있 는 상태였지만 금전적인 문제와 의료기술이 발달되지 않아 치료를 받 지 못해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래서 빨리 통일이 되어 북한에 있는 자 기 친구들과 어른들이 치료를 제대로 받고 건강해 졌으면 좋겠다고 말 했다. 정갈한 글씨로 클마니, 하고 시작한 편지는 점점 번졌고, 글자 가 흐릿해져갔다. 희경이는 울고있었다. 할머니께서 아파서 돌아가셨 을 때 희경이네 가족은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저는 일없숨네다 하 는 말이 가장 많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희경이네 할머님께서는 살아계 실 때 희경이를 많이 아끼고 걱정하셨던 것 같다.
곧 희경이도 글쓰기를 끝냈고 제출한 후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 으로 돌아왔다. 엄마께서 희경이를 데리고 한번 집에 놀러 오라고 하 셨기 때문에 희경이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갔다. 텔레비전을 켠 후 같 이 TV를 보았다. 사실 희경이가 우리나라 TV 프로그램에서 하는 말 을 잘 알아들을 지 걱정했는데 희경이는 나와 같은 부분에서 웃었고 진 지한 부분에서는 진지했다. 약간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것이 실감났고, 신기했다. 희경이도 남한에서 잘 적응하기 위해 노력을 굉장히 많이 한다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희경이 는 전학 온 처음 날 보다 훨씬 밝아진것같다. 처음엔 쭈뼛쭈뼛대며 말 도 잘 걸지못하고 수줍어했는데 이제는 많이 밝고 유쾌하다. 우리 반 친구들이 첫날처럼 희경이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어울리지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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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지금의 밝은 희경이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북한에서 온 사람 을 몇 명 더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무 작정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불쌍하고 힘든 사 람들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사람이고, 어려서부터 많은 일을 겪은 사 람일 뿐이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히경이를 통해 탈북자에 대 한 편견이라던가 잘못된 생각들을 많이 바로잡고 잘 이해해줄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앞으로 희경이가 적응해야할 것들은 많이 있지만 나와 같이 적응해 나가기로 했다. 오늘은 희경이와 함께 등교를하며 서로의 언어를 알려주었다. 햇빛이 응원해주는 듯 등굣길을 따사롭게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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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NATIONAL POLICE AGENCY
심사평 김현탁 (소설가), 박덕규 (시인, 소설가) 주제를 구현하는 방법의 다양화가 돋보였던, 아주 뜻 깊은 잔치 한규훈 (숙명여대 홍보광고학과 교수) 유현재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국민이 행복한 나라, 치안강국 대한민국
심사평
2015 안보사랑 콘테스트 심사평
심 사 평
♥ 김 현 탁 (소설가) ♥ 박 덕 규 (시인, 소설가) 나라를 편안하게 지키는 일은 군인이나 경찰만의 몫이 아니다. 국가 의 위기는 언제 어떻게 찾아들지 모르기 때문에 온 국민이 대비하고 있 어야 한다. 국민의 안보 의식은 그 나라의 운명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의식은 특히 글을 쓰면서 강화되는바, 안보에 관해서도 글쓰기 를 통해 그 소중함을 깨달아 보다 철저한 안보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된 다. 안보사랑 콘테스트에 글을 투고한 모든 사람은 그런 점에서 국민 의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 안보의식을 철저히 다지는 좋은 시간이 되었 을 것이다. 투고된 글을 보면서 심사자들 역시 잠시 해이해져 있던 안 보의식을 새롭게 다질 수 있었다.
‘북한이탈주민 체험수기’는 모든 글들이 아주 절절한 체험을 다루고 있어 하나하나 귀하게 읽혔다. 체제의 모순과 누적된 자연재해 등으로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와 살 수밖에 없게 된 북한이탈주민이 이렇게 많 고 또한 이렇게 하나같이 역경에 놓여 있다는 사실부터 제대로 알려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 점에서도 이 글들은 모두 값진 글이라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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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2000년대 들어 북한의 배급 시스템이 어느 정도로 와해되어 있 는지를 짐작하게 만드는 자료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최우수’로 뽑힌 <따뜻한 마음으로 철조망을 푸는 그날까지>(김○○) 는 그동안 극심한 상황에서 살아남아 결국 한국에서 간호사로 정착한 체험을 수준 높은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다. 탈북 새터민으로 이땅에서 새로운 힘을 얻어 살아가는 모습이 생생했다. 사실의 전달력과 상황에 대한 분명한 세계관이 잘 느껴지는 글로도 널리 읽혔으면 싶다. <무 한 개>(임○○)는 인텔리 출신의 아버지와 함께 극심한 가난에서 살아 남으려는 몸부림을 국경 지대에서 무 한 개를 훔치다 폭행당한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 재현하고 있는 글이다. <대한민국이 없었으면 나는 안 길 품이 없었다>(한○○)는 가정의 해체, 인신매매, 불법 체류 등 탈북 의 배경과 과정이 세세하게 드러나 있어 장편수기 같은 느낌을 준다. 두 편이 모두 절절한 체험과 거침 없는 상황 설명 등에서 돋보여 ‘우수’ 로 뽑혔다. 그 밖에 <인간의 참된 존엄을 찾기까지>(현○○), <2015 년 25회 신지식인 선정은 나의 세 번째 인생 시작이다>(김○○), <추 운 겨울은 지나가고 봄날은 온다>(강○○) 등도 얘깃거리가 충분해 ‘장 려’가 되었다. 안보사랑 글짓기 부문은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학생의 글 모두 학교 에서 받은 안보교육을 기반으로 현장 답사나 스스로의 역사 공부 등으 로 안보의식을 다지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초등학교 글짓기의 <선배님 이 남기고 간 교훈>(신수영)은 천안함 폭침에 희생된 군인이 자신이 다 니던 학교의 선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충격을 무리 없이 잘 표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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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글이다. 체험과 느낌의 전달이라는 면에서 매우 안정돼 있는 글 심 사 평
이기도 해서 ‘최우수’로 뽑는 데 전혀 망설여지지 않았다. <나라를 사 랑하자>(김태혁)는 자칫 구호로 흐를 수 있는 주제를 언론에서 알게 된 정보를 궁리하고 짐작하는 과정으로 편안하게 구체화했다. <너는 어 떤 한국에서 왔니>(이정우)는 외국인들이 기정사실화하는 한국의 분 단 현실을 반성하는 태도가 잘 드러났다. 둘 모두 ‘우수’로 손색이 없었 다. 그 밖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문지혜), <할머니의 특별한 밥 그 릇>(박호원), <통일을 위한 우리의 발걸음>(이국희) 등도 함께 읽어볼 안보사랑 글로 ‘장려’에 들었다.
중고등학교의 글짓기의 <바람>(정하린)은 남과 북을 넘나들며 경험 하는 바람을 각각 ‘태극바람’과 ‘백두바람’으로 설정해 이질화된 남북이 서로 통합하는 관계를 상상해 보는 재미있는 글이다. 의인화 기법이 얼마간 ‘아이스럽게’ 느껴진다는 약점이 있지만 그런 방법적 새로움이 경직될 수 있는 주제를 부드러운 이야기 세계로 이끌게 했다는 장점이 인정돼 ‘최우수’로 뽑혔다. <그 해 오월의 기억>(강예은)은 1980년 광 주민주화운동의 값진 뜻을 드라마 기법으로 흥미롭게 재현했다는 점에 서 주목을 받았다. <당신은 평화롭습니까?>(임성현)는 안보에 관한 한 방심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통일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짚어주 려 애쓴 글이다. 둘 모두 남다르게 의젓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 에서 ‘우수’로 뽑았다. 그 밖에 <남과 북>(임수정), <국가안보의 첫걸 음>(이소민), <옆집>(마한빈) 등이 주제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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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로 안보의식을 되다지는 기회를 주고 있어 ‘장려’로 뽑았다. 입상한 모든 분에게 축하를 드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나라를 편안하 게 지키는 국민으로서의 책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져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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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를 구현하는 방법의 다양화가 돋보였던, 아주 뜻 깊은 잔치
심 사 평
♥ 한 규 훈 (숙명여대 홍보광고학과 교수) ♥ 유 현 재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금번 콘테스트의 심사에 참여하면서 가장 주안점을 둔 사항은 “너무 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메시지를, 어떻게 하면 대중 친화적으로 전달 할 것인가”에 대한 사항을 살펴보겠다는 마음가짐 이었습니다. 개인적 으로는 안보와 국가, 그리고 이 같은 소중한 개념을 효과적으로 전달 할 수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 곱씹어 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고 생각됩 니다. 저와 응모자 여러분들 모두에게 이처럼 소중한 기회를 주신 대 한민국 경찰청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금번 2015년 안보사랑 콘테스트는 올해로 6회째를 맞고 있으며, 매년 증가하는 출품작들은 그간의 노력에 대한 축적된 성과를 대변한 다고 확신합니다. 작년부터 더욱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는 응모자들의 관심은 여러 심사위원들이 수주에 걸쳐 심사를 해야 하는 곤란을 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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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지만 기쁘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광고영상 부문, 웹툰 부문, 그리고 포스터 부문으로 구분하여 본 대 회는 응모작을 받았으며, 각 부문별로 수상작을 선정하였습니다. 포스 터의 경우 기회의 균등성을 살리는 취지에서 나이 대 별로 세부 부문을 조정하여 콘테스트를 진행하였습니다.
먼저, 가장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포스터 부문의 경우 초등학교, 중/고교, 성인부로 나뉘어 시행되었는 바 각 부문에 응모된 작품은 연 령대 별로 독특한 특징과 나름의 시사점을 만끽할 수 있는 장이었다고 판단됩니다. 초교 부문에서는 어린 학생들의 순수함과 색깔의 자유로 운 배색, 그리고 간단하지만 뭉클한 메시지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놀랍게도 저학년 학생들의 작품도 상당수 제출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 니다. 우수작 선발에서 완성도를 무시할 수는 없었으며, 메시지의 정 연함과 구도, 그리고 가독성 및 창의성 등을 고려하여 선정하였음을 말씀 드립니다. 최우수작인 “자랑스런 대한민국, 함께 지켜 나가요!” 와 우수작인 “안보에는 날짜 없다 매일매일 안보의식” 등 전시회에서 어린 학생들의 작품을 찬찬히 모두 감상해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아 울러 중/고교 부문에서는 초교 학생들이 보여줄 수 없는 고도의 역량 이 군데군데 발견되었으나, 메시지의 아이디어에서는 해당 연령대에 서 기대되는 탄탄한 논리성이 다소 결여되었다는 인식을 지울 수없었 습니다. 성인 부문에서는 역시 완성도가 탄탄한 작품들이 다수 발견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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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으며, 특히 최우수로 선정된 “국가 안보위협, 언제나 우리 곁을 맴 심 사 평
돌고 있습니다” 포스터의 경우 잠수함과 상어 등의 오브제를 적절하게 배합함으로써 가독성과 창의성, 그리고 의미성을 모두 확보했다고 판 단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웹툰의 경우, 기술적인 역량이 기본적으로 확보된 응모자들만 참여 할 수 있다는 한계성이 다소 발견되었으며, 더욱 다수의 참여작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선발된 일부 작품들의 경우 현재 각 포털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인기 기성 작가들 의 작품과 감히 견줄만한 수준이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대단히 인상적인 구조와 탄탄한 전개를 가진 수작들이었다고 판단됩니 다. 이 또한 전시회에서 직접 살펴보시기를 적극 추천 드립니다.
끝으로 광고영상은 대단히 다채로운 접근으로 저를 비롯한 심사위원 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을 등장시켜 축제 상황을 연출하여 주목도를 높이는 감성적 접근도 있었으며, 컴퓨 터 그래픽을 활용하여 당장 일선 미디어에 활용해도 손색없을 만큼의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독특한 상징으로 은유법을 적용, 여운이 남는 작품을 만든 사례도 있었습니다.
총평을 드리자면, 본 콘테스트의 핵심 주제인 ‘안보사랑’을 전달하기 위해 실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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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할 수도 있는 주제를 유머 소구, 공포 소구, 그래픽 소구, 감정적 소구 등을 적용하여 다채롭게 접근한 작품도 다수 발견되었으며, 최근 디지털화된 시대를 반영하여 유니크한 컴퓨터 그래픽 및 SNS 상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인터페이스 등을 아이디어에 활용한 시도도 있었 습니다. 광고영상의 경우, 기존에 사용되지 않았던 랩이나 힙합 등 음 악 장르를 작품에 반영하는 시도도 발견되어 다양성의 방점을 찍었다 고 생각됩니다.
다시 한번 수상자 여러분 모두, 그리고 응모는 했지만 아쉽게도 수 상하지 못한 여러분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축하와 감사의 말씀을 전하 고자 합니다. ‘안보사랑’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반드시, 언제나 유념 해야 할 사안이며, 이처럼 중요한 주제를 고민하고 자신의 작품 속에 구현해내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하셨던 모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 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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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사랑 CONTEST
2015 안보사랑 콘테스트 입상작 모음집
발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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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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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보안국 서울시 서대문구 통일로 97 Tel : 02) 3150-1484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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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커뮤니케이션즈 Tel : 02) 3141-3648
2015 안보사랑
CONTEST
국민과 함께 희망찬 미래
대한민국 안보의식엔 쉼표가 없습니다
2014 포스터부문 우수상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