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 한국 근현대인물화전
1. 갤러리현대 개관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기획전을 위해 다섯 명의 자문위원들은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한국 근현 대미술의 성장과 발자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화전을 여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인물화는 전통사회가 근대사회로 넘어가면서 크게 부상한 미술 장르이다. 제임스 케이힐(James Cahill, 19262014)은 『중국 회화사』에서 동양화(중국화)는 기원 1천 년을 넘어서면 산수화가 메인 장르를 차지하게 되고 이는 19 세기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으며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인물화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고 했는데 우리나 라 회화사 역시 똑같은 길을 걸어왔다.
전통회화에도 물론 인물화 장르가 있다. 초상화야 변함없이 초상화일 수밖에 없는 일이고 풍속화, 신선도, 그리고 산수인물화도 또한 인물화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근대미술에서 인물화는 그 내용과 형식이 다르다. 우선 인물 그 자체를 다룬다. ‘시골 소녀’, ‘여인 좌상’처럼 불특정한 인물을 클로즈업하며 삶의 체취와 인간 서정의 갖가 지를 드러낸다. 나아가서는 사람, 즉 인간적 가치를 드러낸다는 명확한 주제 의식이 뒤따른다. 그래서 이번 전시의 제목을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어느 시점에 근대 사회로 들어섰고, 그 근대의 개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분야마다 다르다. 미술의 경우도 어느 시점을 잡아 말하기 힘들다. 다만 우리 근대미술의 성격은 서양화의 본격적인 도입과 함께 전개되었 고, 1백 년 전인 1920년대로 들어서면 이미 근대미술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서양화는 그 당시 ‘양식’, 또는 ‘신식’으로 불린 교통, 통신, 신문, 복식, 건물, 교육, 사회제도 등 서양 문물의 이입 과 함께 어차피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근대의 추세이자 상징이었다. 그리고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 낯선 이질 문화인 서양화는 당시 사람들에게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11
한 예로 춘곡 고희동이 조선인 최초로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왔을 때 『매일신보』 1915년 3월 11 일 자에는 「서양화가의 효시」 라는 표제 하에 다음과 같은 소개 글이 실려 있다.
“동양의 그림과 경위가 다른 점이 많고 그리는 방법도 같지 아니하며 또한 그림 그리는 바탕과 그 쓰는 채색 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른 그림인데… 기름기 있는 되다란 색으로 그린 것이라 …”
서양화는 이처럼 재료와 기법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소재 내지는 주제 또한 낯선 것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인 물화이다. 서양화의 풍경화는 전통회화의 산수화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고, 정물화는 화조화나 기명절지화에서 유 추해 볼 수 있었지만, 인물화는 달랐다. 특히 인체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누드화에 이르러서는 가히 충격적인 것 이었다.
1916년 김관호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일본 정부(문부성)가 주관하는 공모전인 《문부성 전람회》(약칭 문전(文展))에 <해질녘>(1916)을 출품하여 당당히 특선하자 당시 『매일신보』는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면서 춘원(春 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의 동경 발 속보로 ‘아! 특선, 특선이라! 특선이라면 미술계의 알성급제(謁聖及第) 다… 장하도다 우리 김 군!’ 이라는 흥분에 가득 찬 관람기를 게재하면서도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게재하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서양화를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 우리 근대미술의 초기 모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특별전에서 우 리는 도쿄예술대학(도쿄미술학교의 후신)에 소장된 김관호의 <해질녘>을 전시회의 서막으로 삼고 싶었고, 다행히 도 학교 측의 호의로 모처럼만에 우리는 근대미술 초기, ‘기름기 있는 되다란 채색으로 그린 대동강 변에서 벌거벗 고 목욕하는 두 여인’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2. 우리 근대미술 초기의 양상은 이처럼 서세동점(西勢東漸) 시절 어쩔 수 없이 서양화를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도 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여러 미술학교 중 도쿄미술학교는 조선인 서양화가의 배출대 역할을 하 였다.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이 학교 출신 조선인 화가는 모두 43명으로 이들이 결국 우리 근대미술의 주역으로 되 었다.
이 학교의 미술 교육 경향은 아카데믹한 사실주의, 또는 일본화된 인상파 회화였고 이런 화풍은 일본 문부성이 주 관하는 문전에서 관학파를 이루어 그것이 한동안 우리 근대미술의 주류로 옮겨오게 되었다. 당시 작품들은 현전하
12
는 것이 드물지만 마침 도쿄미술학교는 졸업 작품으로 자화상을 제출하게 되어 있었던바 그것이 지금껏 학교에 전 하고 있어 조선인 유학생 자화상 중 고희동, 김관호, 이종우, 오지호, 김용준 등 5인의 자화상을 대여하여 전시하게 된 것은 이번 전시회의 큰 자랑이자 보람으로 삼을 만하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사회 전반에 걸쳐 신문화 운동이 활기를 띄우게 되면서 1920년대로 들어서면 미술계라고 부를 수 있는 인프라가 서서히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전통서화가들은 서화협회(書畵協會)를 결성하고 서화협회전 (약칭 협전(協展))을 개최하여 대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런 민족적 기류를 차단하기 위하여 1922 년, 일본 문부성 전람회를 본 따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鮮展))를 만들고 대대적으로 재정적, 행정적 지원을 다 함으로써 결국 우리 근대미술은 선전을 통하여 전개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 선전의 초기의 스타 화가가 나혜석, 김종태(金鍾泰, 1906-1935) 등이었다.
한편 1920년대 지식인 사회에서는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사조가 일어났는데 1930 년대로 들어서면서 일제의 탄압으로 경향성은 약화되고 민족주의적 성향만 남게 되어 일본화풍을 거부하는 향토적 서정주의가 크게 부상하게 된다.
오지호의 <아내의 상>(1936), 박상옥의 <소년입상>(1936), 배운성의 <가족도>(1930-35), 서진달의 <나부입상(裸 婦立像)>(1934), 후대의 작품이지만 심형구의 <여인>(1959)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이 되면 근대미술의 연륜이 점점 쌓이면서 기량이 출중한 화가들이 등장하여 이인성은 <가을 어느 날>(1934), <흰색 모자를 쓴 자화상>(1940년대), <어린이>(1940년대) 같은 작품에서 야수파적인 싱싱한 필치 를 능숙하게 구사해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김인승은 고전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명작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해방 후에 그린 <욕후(浴後)의 화장(化粧)>(1955), <도기를 다루는 소녀>(1955)에서 그런 면모를 여실히 볼 수 있다.
3. 1940년대 초, 일제 말기로 되면 문학에서 『문장』 지가 상징하듯 모더니즘이 도입되기 시작하여 이중섭, 김환기 등 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고 등장하지만 이내 대동아전쟁의 황국신민화 시절로 들어가 전시체제에 화가들이 동원되 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곧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든 것이 1953년 7월, 휴전협정 이후 폐허 속에 다시 시작하는 역사의 아픔과 변질을 겪게 되었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은 한국 사회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에포크를 가르는 민족사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하지
13
만 그에 걸맞은 미술적 반응은 미미하기만 하다. 해방공간에서 논의되었던 예술 논쟁은 대단히 격렬한 것이었고 또 전쟁 중의 종군 화가나 피난지에서 보여줄 수 있는 정신적, 사회적 고뇌는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되 나 이를 작품으로 말해주는 것은 아주 드물다. 이는 전쟁과 분단이 낳은 민족사적 손실이자 피해를 의미한다.
그런 가운데 이쾌대의 <군상Ⅲ>(1948), 그리고 소련 국적의 고려인인 변월룡이 북한에서 그린 <양지의 소녀> (1953), 이중섭의 <가족과 비둘기>(1954년경), <길 떠나는 가족>(1954) 등이 간접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작품은 비록 현실의 직접적인 반영은 아니지만, 인물화가 갖고 있는 본연의 기능, 우리네 삶의 이런저 런 모습과 거기서 일어나는 감성의 환기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의 커다란 성과의 하나로 받 아들일 수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폐허 속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미술계는 두 개의 큰 골격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선전의 뒤를 이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國展))의 권위주의이고, 또 하나는 미술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아 카데미즘이다. 이 둘이 결합하면서 선전 시절부터 내려온 관학파 화풍은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국전은 동양화(한국화)와 서양화(유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열렸는데 서양화에서는 인물화가 대세를 이루었다. 장 리석의 <복덕방 노인>(1958), 박영선의 <모델>(1957), 이봉상의 <나부(裸婦)>(1955), 임직순의 <여인>(1961), 박항 섭의 <가을>(1959), 권옥연의 <폐허에서>(1951), 최영림의 <동심춘심(童心春心)>(1970) 등이 당시의 기류를 잘 보 여준다. 그 시절 특히 여인 좌상이 대통령상의 단골 소재로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견고한 권위주의는 많은 부작용과 비리를 낳아 반(反)국전파가 등장하게 되었고 국전파와는 별도로 떨어져 자신의 예술에 매진한 일군의 화가들이 따로 있었다. 김환기의 <항아리와 여인들>(1951), 장욱진의 <모기장>(1956), 박수근의 <길가에서>(1954), 김흥수의 <길동무>(1957) 등은 당시는 주류가 아니었지만, 역설적으 로 미술사적으로는 이 시기의 커다란 예술적 성과로 수렴되고 있다.
이 시기 동양화 부문을 보면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1899-1976) 등 한 국화 6대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었는데 여전히 산수화가 대종을 이루고 있었고 이당 김은호가 인물화에 뛰어 났지만, 그 소재가 신선도와 미인도에 머물고 있어서 인물화로서의 성과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상태에서 인물화 에 주목하고 나타난 화가들이 있어 그 명맥을 이어주고 있다. 고암 이응노의 <거리풍경-양색시>(1946), <영차영차> (1954), 운보 김기창의 <보리타작>(1956), 천경자의 <목화밭에서>(1954), <탱고가 흐르는 황혼>(1978) 같은 작품 은 가히 명작이라고 할 만하다.
14
4. 1957년 현대미술운동이 일어나면서 미술계는 국전을 중심으로 하는 국전파와 추상미술파가 대립하고 결국 국전은 구상과 비구상(추상)으로 나누어 시행하면서 우리 현대미술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로 들어서면 현대화랑의 개관으로 상징되는 상업화랑의 시대가 열린다. 당시 우리 사회는 고급 맨 션아파트가 상징하는바 본격적으로 중상층이 등장하고 있었고 이들이 미술의 새로운 수요자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0년대 초 서울에 겨우 서너 곳에 불과했던 화랑이 70년대 말로 되면 50곳을 훌쩍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해방 후 우후죽순으로 생긴 미술대학을 졸업한 신진 화가들로 미술 인구도 급증하여 그들의 개인전, 그룹전 이 자주 열리면서 대관 전시장이 속속 문을 열면서 인사동에는 화랑가가 형성되었다. 이때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미술붐’이 일어났다.
이런 상태에서 80년대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과 함께 리얼리즘 미술운동이 일어났다. ‘현실과 발언’ 동 인으로 상징되는 이 리얼리즘 운동은 곧 민족미술협의회가 결성되면서 민중미술운동으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미술 의 상업주의, 서구의 경향을 거의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추상미술을 모두 거부하면서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살아 있 는 미술을 지향했다. 기존 미술계는 이들의 미술을 ‘(반독재) 운동권 미술’이라며 미술 외적 운동이라고 철저히 외 면하고 폄하하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민중미술은 결국 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을 상징하는 한국 현대사가 낳은 독특한 미술사조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특히 외국에서는 한국 사회가 낳은 독특한 미술 형식으로 ‘Minjung art’라는 이름으로 크게 주목하는 바가 되었다. 이렇게 80년대 민중미술은 나라 안팎에서 새로운 자리매 김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80년대 인물화가 민중미술 계열 화가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이만익의 <정읍사>(1976), 강연균의 <시장 사람들>(1989). 황영성의 <겨울 가족>(1985), 류병엽의 <광화문의 아침>(1987-2009), 권순철의 <자화상> (1994), 김홍주의 <무제(자화상)>(1979), 손상기의 <공작도시-취녀>(1982), 김명희의 <김치 담그는 날>(2000) 등 은 우리 인물화 전통의 튼실한 계승을 보여준다.
80년대에 갑자기 인물화로 변신하면서 나타난 박생광의 <여인과 민속>(1981), 이숙자의 <보리밭 누드>(1997), 정종미의 <보자기 부인>(2008)은 한국 채색인물화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 작품들이며, 김원숙의 <사랑의 춤> (2002)은 수묵화로서 인물화의 멋을 담고 있다. 한편 김호석은 초상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지곡서당 청명 선생님>(1991) 같은 우리 시대다운 초상화를 남겼다.
그러나 80년대 인물화의 주류는 역시 민중미술이었다. 1990년대 들어와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민중미술운동은 화
15
가마다 여러 방향에서 자기 변화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런 가운데 몇몇 화가들이 이 흐름의 상징성을 갖고 한국 근 현대인물화에서 움직일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추상미술은 물론 관학파, 상업주의의 작품 모두가 인물화를 외면하였지만, 민중미술의 기본은 인간, 사람, 사회적 삶이 주제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수렴하게 된 것이다.
민중미술 계열의 화가를 보면 오윤은 민중 판화의 신경지를 개척하여 <애비>(1981), <할머니>(1983) 등 많은 감동 적인 인물화를 남겼고 또 많은 후배들이 그 뒤를 따랐는데 이번 전시회에 그의 드문 유화로 <비천>(1985)이 출품되 어 오윤 예술의 깊이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신학철은 <한국 근대사> 시리즈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랴! 어서 가자>(2016), <지게꾼>(2012)처럼 농촌과 농부를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그렸으며 이종구는 양곡부대나 버려진 문짝에 <아버지와 소>(2012), <활목 할머니> (1990)를 그려 현실감을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반면에 황재형은 일찍이 태백 광산촌으로 들어가 광부의 일상을 그 리면서 기층 민중의 삶을 드러내는 작품을 계속 발표해 오고 있다.
김정헌의 <딸-혜림>(1984), 노원희의 <어머니>(1990). 최민화의 <식사>(1992) 등은 작가의 삶에 근거하여 딸, 어머니, 자기 자신을 형상화한 것인데 임옥상의 <보리밭>(1983), 강요배의 <흙가슴>(1990), 홍성담의 <봉선화> (2014)는 민중의 특정한 모습을 보편적 인물화로 일반화시킴으로써 주제를 고양시키는 고도의 상징적 조형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번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한국 근현대인물화》전은 54명 화가의 71점으로 꾸며지게 되었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 인물화의 지평이 생각 이상으로 넓고 다양하여 과연 우리 근현대미술 1백 년의 발자취와 성장을 상징 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유홍준 미술평론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