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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식민지의 상징,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는 무엇인가 광복 그리고 철거 조선총독부와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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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무엇인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의 상징”

조선총독부 청사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이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 정부청사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시행한 조선총독부는 최고 행정

로 사용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전용되었다. 그 후

관청으로 사용한 건물이다.

이 건물의 철거와 보존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있었지 만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철거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35년의 식민통치 기간에 조선총독부 는 남산 왜성대와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 2곳과 용산, 경무대

이러한 조선총독부는 다른 식민지 사회와 달리 입법, 사

의 총독 관저 3곳을 비롯하여 관사 다수를 건립하였고.

법, 행정에서 전권을 행사한 총독을 정점으로 고도의 중

총독부 청사는 1907년에 남산 왜성대의 통감부 청사를 총독

앙집권체계를 식민지 조선사회에 이식함으로써 민족차

부 청사로 전용하였다가 1926년에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철

별을 구조화하고 관료제의 비대한 발달을 초래하는 데

거하고 청사를 신축하였다.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광복 그리고 철거

일제강점기 말기에 ‘내선일체화’, 일본식성명강요, 한민족의

그러나 반대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라는 명분 아래 한민족의 전통 ·풍습

그들은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보류 동의안’ 제출, ‘건물

·언어 등을 말살하는 정책을 펼친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훼손 및 철거 금지 가처분 신청’ 공개집회를 하며 철거를 반

15일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대했고, 김영삼 대통령 규탄 등이 뒤를 이었다.

광복 후, 이승만 정부가 설립되자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남겨 둘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총독 부 청사는 바로 철거되지 않았고, 한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으 로 서울의 중심부에 남아있었다. 그러던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총독부 중앙돔 랜턴의 해체를 시작 했다.

일본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자신의 나라로 이전하겠다는 의 견을 내비쳤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예정대로 조선총독부 청 사 철거를 진행하였다. 1996년 11월 13일. 총독부 청사의 지상 부분이 철거 완료되었으며 1996년 12월에 완전 철거 됨으로써 조선총독부 청사는 남겨진 사진으로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잔재인가, 네거티브 문화재인가 ”

조선총독부가 일본의 조선 정복 기념물로서 36년 간의

일제강점기가 남긴 흔적이었으나 조선총독부 청사는 당

식민지배에 큰 영향을 행사한 최고 기관이었다. 한 민

대에는 세계적인 건축물로 문화유산에 속할 뿐 아니라 긴

족의 얼과 혼을 빼앗는 것에 영향을 끼친 건물은 광복

세월 동안 한국의 중앙청 건물로 사용된 역사적, 문화적

이후에도 한반도의 중심지, 서울의 심장 부분에 해당하

가치를 지닌 건물이었다.

는 곳에 있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서대문형무소처럼 아픈 역사를 간직 조선총독부 건설 당시 위치를 이유로 하여 일본 제국주

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철거하여 치욕의 역사를 잊는 것

의는 경복궁의 일부를 헐었다.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을

이 아닌, 보존하여 그것을 기억하는 문화재로써 남겨야

가리는 위치에 건설되었으며, 이 자체는 광복 이후 경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게 나오기도 하였다.

복궁 재건에 방해가 되었다.

조선 총독부 즉, 우리를 식민 통치한 기구이다. 이러한 조선 총독부는 아픔이 담겨있는 곳일지 몰라도 어쩌면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이 조선 총독부 건물은 누구에게는 역사적 아픔을 가지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잔재 일지도 또한 누군가에게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최고의 건물이라고 확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 다. 기준점도 없고 절대값도 없는 이 건물, 지금은 사라졌지만 누군가의 머리 속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조선총독부와 독립운동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

조선총독부 의옥 사건

일본 제국주의의 핍박이 심해지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총독부 의옥 사건은 1929년에 일어난 의옥사건이

만주로 거처를 옮겨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1월

다. 1927년 제 4대 조선 총독으로 임명되어 총독으로서

9일 밤, 만주 지린성에서 독립지사들은 김원봉을 주축으

의 임무를 일정한 기간 동안 맡게 되었는데, 1928년 조

로 하여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인 의열

선의 독립운동가인 조명하가 육군 특명 검열사의 자격

단을 조직하였다. 의열단의 설립 목적은 ‘일제의 수탈과

으로 타이완에 온 구게이자 쇼와 덴노의 장인인 구니노

억압 기관 파괴’였다.

미야 구니요시를 독검으로 찌르는 의거로 일본 정부 내 의 그의 신뢰도는 떨어졌고, 그는 더욱 곤경에 빠졌다.

1921년, 단장 김원봉으로부터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 하라는 밀령을 받은 김익상은 국내로 들어와 전기 수리공

이에 더하여 1929년 입헌민정당에 의해 경성에 미두취

으로 변장하여 9월 12일 총독부에 잠입하였다. 곧 그는 2

인소 설립을 허가해주는 대가로 야마나시의 측근을 통

층 비서과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다.

해 5만원 상당의 뇌물을 야마나시 한조에게 전해줬다 고 하는 사건이 발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총독부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의옥사건이다. 이에 의해 야마나시 한조는 총독직을 사

폭탄은 폭발하였다. 폭발로 인해 혼란한 틈을 타, 현장을

임하였다. 후에 미두취인소 설립을 인가해준 측근은 집

빠져나왔고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행유예, 그 중 하나인 츠키노는 유죄, 야마나시 한조는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제2장 붉은 벽돌담 아래에서 담장 안으로 기록의 공간 형장의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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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안으로 서대문 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해 1908년 10월 21 일 개소되었다. 개소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식 감옥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맞서 싸운 한국민을 저지하고 탄압하기 위 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민에 대한 억압과 처벌의 장소로 이용되 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 · 순국하였으며, 광복 이후에 는 독재정권에 의해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되어 고난을 치 렀던 곳이다. 서대문 형무소는 1908년부터 1987년까지 감옥 운영 기간 동안 식민 권력과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자유와 평 화를 위해 수많은 희생이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정문

◀ 역사전시관

입구를 통해 들어오면 여러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들 이 보인다. 그 중 정면에 있는 건물은 과거 보안과 청 사로 사용되던 역사 전시관으로 이 곳부터 관람을 시 작하게 된다.

1층의 전시물들 ▶

역사 전시관 1층에는 서대문형무소와 관련된 자료를 모으고 있는 도서관과 기획전시실이 있다. 기획전시실 내에는 여러 전시물과 그 시대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설명 그리고 이야기들이 있다. 기획전시실은 관람 동선에 따라 전시물과 사건이 시간 순서대로 놓여 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역사 이해에 도움이 된다.


기록의 공간 2층 또한 1층과 같이 전시물과 사건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하지만 동선에 따라 걷다 보면 전시물이 전혀 없는 방에 도착하게 된다. 그 방에는 과거의 사진과 사진의 주인에 대한 글귀가 사방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정말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그 시선에 사람들은 글 몇 줄로 알고 있던 역사에서 벗어나 실체를 얻게 된다. 나는 이 공간에 들어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마주해 압도됐다. 역사전시관 내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대문형무소의 지하는 고문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꼬챙이로 손톱 밑 혹은 입 안을 찌르며 고문했던 것이 재연되어 있는 손톱찌르기 고문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가두는 독방 등이 재연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고문에 사용된 못상자, 형벌을 주던 태와 쇠도리께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서대문형무소에서는 당시의 두려움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체험기구 역시 전시하고 있다. 수감자들의 얼굴을 가리는 용 수를 머리에 쓰게 되면 모형임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약간 차단되 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벽관고문체험을 하게 되면 고문의 고통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 게 된다. 성인 남성 한 명이 들어가기에도 비좁은 공간은 몸을 곧 게 펴는 것도 힘들 정도이며 앉기도, 일어서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잠시 동안 있었음에도 불편했던 것은 물론, 금방 몸이 피로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러한 고통을 견뎌 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묵묵히 견뎌 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민족 독립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 통감부는 그들에게 항거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였다. 옥사는 중앙에서 전체를 한 눈에 감시하기 용이하도록 부채꼴 형태로 지어져 있다. 옥사 내에는 주로 수감 되었던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와 설명 그리고 관련된 전시물들로 채워져 있다.

일제는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여성을 투옥하기 위해 1916년 여옥사를 신축하였고, 1945년 까지 옥사를 증개축하면 서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하였다. 여옥사는 해방 이후인 1979년까지 사용되다 철거되었고 복원공사를 통해 2012년 외형복원, 2013년 여성독립운동가 전시관으로 개관하였다. 옥사와 마찬가지로 주로 수감되었던 여성 운동가에 대한 이야기와 설명 그리고 관련된 전시물들로 채워져 있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수형기록표는 독립운동에 신분, 나이, 성별의 구분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듯 했다.


형장의 이슬 변호인도 없는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애국지사들은 이 나무 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 함을 눈물로 토해내며 통곡했다. 사형장 안 쪽에는 이 나무와 같 은 날 심어진 미루나무가 한 그루 있지만 이 나무와는 달리 크기 가 매우 작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 그들의 애통함 때문이 아 닐까?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애국지사들이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 져 간 장소이다. 1923년에 세워졌으며, 5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격리되었다. 사형장치는 교수형 집행을 위한 개폐식 마루판과 교수줄, 죄수 가림막 뒤쪽에 위치해 마루판을 밑으로 내리는 레버 장 치로 구성되어 있다. 마루판 아래 지하공간은 시신 수습실로 사형수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였다.

시구문은 사형집행 후 시신을 외부로 반출하기 위해 뚫어놓은 통로이다. 구타, 고문 등으로 시신에 흔적 이 많을 경우, 사형 사실을 외부로 공개 했을 때 사회 적으로 문제가 우려되는 경우, 시신을 인도할 유족이 없는 경우 등에도 이용되었다. 외부와 연결된 통로의 길이는 약 200m 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되 지 않는다. 해방 이후에도 사용하다가 1987년 서울 구치소 철거 계획에 따라 입구를 봉쇄했다. 현재 복원 중에 있으 며 약 40m 정도 복원된 상태이다.



제3장

광복을 위한 투쟁,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도마 안중근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자신의 삶과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누군가의 아들, 딸이었고, 한 가정의 아버지, 어머니였다. 평범한 학생이거나, 시골의 촌부였고, 혹은 명망 있는 양반가의 자제 였다. 하지만 나라의 위기 앞에 이들은 한 순간의 망설임 없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이름을 기억한 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관심의 시작을 뜻한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 에디터 김치현


백범 김구

白凡 金九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제일 먼저 백범 김구 선생을 떠올릴 것이다. 혹시 당신은 백범의 뜻을 알고 있는 가? 백범의 뜻은 하얀 호랑이가 아니라 조선 시대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던 백정 및 일반 백성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아무리 신분이 낮고 배움이 적은 일반 백성이라 할지라도 배우기만 하면 나라를 바로 세울 인재로 만 들 수 있다는 김구 선생의 신념이 담겨져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자서전인 《백범 일지》. 《백범 일지》는 상 · 하 두 편과 일기 끝에 수록된 <나의 소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편은 김구 선생이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있을 때인 1929년에 쓴 글이다. 지나간 생활과 독립운동을 돌아보는 내용 이 담겨 있으며, 김인과 김신 자신의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 식으로 작성했다. 하편은 1932년 그가 중심이 되어 만든 한인애국단의 활동과 해 방을 맞이할 때까지 이어진 독립운동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해 방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조국으로 돌아오는 과정과 그가 산남 지방을 돌아볼 때의 기록도 덧붙였다. 책에 쓰인 <나의 소원>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 국가를 바라 는 김구 선생의 마음이 여실히 나타나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김구 선생이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고. 첫 번째 이유는 《백범 일지》를 이광수가 윤문하여 과장

두 번째 이유는 정부수립 이전까지는 이승만과 비슷한

했다는 것이다.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확실하지 않은 사실로 《백범 일지》가 과장됐다, 김구 선

맞는 말이다. 김구 선생은 강경 보수다. 실제로 극좌파

생이 친일파와 결탁했다 등 의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김일성을 암살하려는 시도도 했었고, 공산주의를 좋지

이미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이 원본 백범일지, 활자본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김구 선생은 이승만

등을 공개했다. 그런데도 백범일지를 이광수가 윤문하

과는 달랐다. 중요한 순간마다 좌우합작을 시도했기

여 과장했다는 소리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

때문이다. 충칭 임시정부에서 김원봉과 조선혁명당을

다. 이광수가 윤문한 것은 김구 선생 특유의 서체를 알기

받아 들였고, 조국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이 되려

쉽게 바꾼 것 뿐이다. 즉, 이 과정에서 이광수의 서체가

했을 때 극좌파인 김일성과 김두봉을 만나 대화를 시도

백범일지에 들어간 것이다. 따라서 김구 선생이 친일파

했다.

와 결탁했다는 말은 옳지 않은 소리다.

민족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민족을 위한 중요한 선택을 한 그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이다.

“ 민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고귀한 희생을 치뤄 우리나라의 독립에 힘쓴 백범 김구 선생. 우리가 기억해야 될 위인이 아닐까?”


도마 안중근

多默 安重根

“ 이토 히로부미 저격, 하얼빈 의거 ” 안중근 의사 앞에 도마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를 아는

플랫폼에 이토가 히로부미가 하차했을 때 워낙 많은 수

가? 안중근 의사는 가톨릭신자로서 세례명 토마스를

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 히로부미인지 분

수여 받았다. 과거에는 한국 가톨릭에서 이를 토마스를

간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체념하던 순간. 이토의 하얼빈

도마로 국역했기 때문에 도마라고 불렸다. ‘도마 안중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

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

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의거’를

준 덕분에 안중근 의사는 얼굴을 확인하고 이토를 저격

생각할 것이다. 이 사건은 안중근 의사의 전 생애를 설

했다. 안중근 의사는 총을 쏘고 마지막 한발을 남겼는데

명해주는 대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 본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자결용이라고 추측했다. 그러

은 이 일을 의거가 아닌, 상관의 명령을 받고 대한의군

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안중근 의사는 당시 자결할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이토를 처단 후 재판에서 이토의

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

죄를 낱낱이 밝힐 생각이었다고 스스로가 여러 번 진술

군 소속으로 활동한 군인이다. 안중근 의사와 거사를

했다. 총알 한발을 남긴 이유는 이미 이토가 쓰러져서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

더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 립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제삼국인 러시아에서 공 정한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결국 일제의 압력에 의해 뤼순에 있는 일본 법원 으로 송치되고 말았다. 놀랍게도 의거 소식이 들리자 대 한민국은 물론 러시아, 영국, 스페인, 심지어 일본에서 까 지 수 많은 국제 변호사들이 안중근 의사의 변호를 맡겠 다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치외법권으로 인해 선임이 불허 되었고, 일제 측의 관선 변호사가 변론을 맡게 된다.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返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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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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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글꼴

이미지 출처

그녀- 길원옥

제1장 – 국가기록원

그녀-이옥선

제2장 - 서대문 형무소 홈페이지

나눔명조

제3장 – 국가기록원

나눔손글씨 붓

제4장 – 마리몬드 홈페이지

맑은고딕

제5장 – 나비레터, 마리몬드,

문체부 바탕체

희움, 애니휴먼, 소녀해방단,

문체부 제목 바탕체

브런치

조선일보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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