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천] '사과향기 그리운마을' - 보현산댐 수몰지역 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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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llage Book of HWABUK


사과꽃 향수를 머금고 입석·용소·하송 ·발행일 : 2013년 7월 00일 ·발행인 : ·편집인 : ·발행부서 : ·발행처 : ·기획 및 제작 : 한국기록문화연구소 조상민 ·취재 : 구자희, 김소영 ·편집디자인 : 조은지 ·사진 : 조상민, 박정수, 윤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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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득 한 마 을

입석 · 용소 · 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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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입석리

용소리

하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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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시간이 만나 역사가 됩니다. 사람과 공간이 만나 삶이 됩니다. 보현은 오랜 역사와 그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아름답게 조화된 곳입니다.예부터 깊고 푸른 한강과 드럽은 평야가 주는 생명력으로 살기 좋은 곳이였으며, 오래전부 발달한 문화가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와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또한 보현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건강하고 선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이 웃음이 이어질 수 있는것은 지금까지 보현산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이곳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땅을 가꾸고 발전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마음을 모아 또 한걸음 내딛기 위해 오랜시간 이어진 버현이라는 공간과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 들의 역사가 변화라는 이름 앞에 서 있습니다. 보현은 오랜 역사와 그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아름답게 조화된 곳입 니다.예부터 깊고 푸른 한강과 드럽은 평야가 주는 생명력으로 살기 좋은 곳이였으며, 오래전부 발달한 문화가 현재까지 도 이어져 내려와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또한 보현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건강하고 선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이 웃음이 이어질 수 있는것은 지금까지 보현산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이곳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땅을 가꾸고 발전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마음을 모아 또 한걸음 내딛기 위해 오랜시간 이어진 버현이라는 공간과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 들의 역사가 변화라는 이름 앞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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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006

발간사 우리동네 사계

012

016

여름

020

가을

024

겨울 마을이야기

030

화북면 소개

032

35번 국도를 따라서

034

입석리

038

용소리

042

하송리 화북의 문화재

048

오리장림

050

옥간정

051

모고헌

052

공덕동 삼층석탑, 정각리 삼층석탑

053

자천교회 넉넉한 마음으로

056

용소리의 설

058

8.15마을잔치

060

입석리의 추석

062

당제 사과마을 사람들

066

김재환

068

김상우

070

최호기

072

전동하

074

정운상

076

고옥남

078

조용달

080

정연동 자연의 품, 보현산

084

보현산의 자연

088

보현산 천문대

092

햇살이 준 선물, 사과 집, 사람을 기억하다

098

마을지도

100

입석리 가옥들

106

용소리 가옥들

118

하송리 가옥들

120

입석리 대표가옥

122

용소리 대표가옥 마을의 흔적을 담다

10

126

마을화보

146

주화씨의 추억

148

이장님 이사가는 날

150

제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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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꽃 향수를 머금고

우리동네 사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천천히 더디게 오다가도 봄여름가을겨울, 직선으로 흐르는 계절. 멈추고 싶은 순간, 기억에 품고 싶은 마을의 시간을 담았다

普 賢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초록 이 불어오는 대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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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사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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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 마을 이야기 賢 사과꽃 향수를 머금고

삶은 풍경을 닮는다고 했던가. 시골 외갓집처럼 정이 넘치고 푸근함이 느껴지는 그 곳, 여기 보현산 아래 세 마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과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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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산의 지맥이 마을의 앞뒤를 병풍처럼 둘러 싸고 있는 입석리는 마을 앞을 고현천의 상류가 흐르는 산 높고 골 깊은 산간마을이다. 하지만 청송~영천간 국도 35호선이 마을 앞을 통과하 여 교통은 비교적 편리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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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야기 입석리

입석, 설 립자 돌 석자. 저기 오다보면 동리 서있다고 해서 입석. 그게 자빠추면 큰 비가 온다고 해서 화북면에서 와서 삐딱하니 누웠다 해서 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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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김덕립(金德立)이란 선비가 처음 마을을 개설하여, 뒷산 이름을 따서 보현이라 부 르다가 동리 입구에 큰 바위가 서있어 "선돌"이라 하였다. 지금은 그 한자의 음을 따서 입 석(立石)이라 통칭하게 되었다. 또한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 이 마을은 옛날 포항과 신녕, 상송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용되었고, 가라리로 부르다가 배나무가 많다고 하여 배 나무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해발 1,124m의 보현산 바로 아래 있는 마을로 산에서 내려다보면 산봉우리를 손으로 짚 고 있는 모습이기에 ‘지풍기미’라는 호칭을 쓰게 되었으며, 일설에는 보현산 밑에 자 리해서 골이 깊다는 의미로도 쓰였다고 전해진다. 여름에는 냉기가 돌고 겨울에는 온기 가 감돈다고 하며, 청명한 날에는 마을 뒤 보현산꼭대기에서 동해안의 흰 파도가 보인다 고 한다.

선돌바위 마을이름의 원류가 된 선돌바위는 자연적으로 양 옆에 돌2개가 놓여있고 그 위에 약 40톤의 바위가 서있었다고 하며 일제 때 기사년(己巳年)에 가뭄 이 심해 그 바위를 넘어뜨리면 비가 온다는 설에 따라 온 면민이 동원되어 그 바위를 넘어뜨리게 되어 지금은 바위가 서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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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향기 그리운마을

화북의 문화재

예부터 성현들의 지혜를 고이 간직한 경북 영천 고려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선비의 격식과 고유의 정취가 흐르는 문화유적과 푸른 산림 이제 화북면에 위치한 여섯 가지 정취를 느껴보자

普 賢



화북의 문화재 오리장림

오리장림

(五里長林) 푸르게, 울창하게 5리(2km)에 걸쳐 펼쳐진 자천리의 숲, 오래된 숲에 가면, 바라만 봐도 세월의 흔 적과 고유의 정취가 느껴진다. 경북 영천시 화북면에는 오리장림(五里長林)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숲이 있다. 오리장림(五里長林)이란 이름은 숲의 길이가 5리(2㎞)에 달해 붙여졌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나무들을 따라 국도가 나 있지만 과거 도로가 나기 이전부터 길게 울창한 숲을 이뤘다 한다. 지역 주민들은 보통 자천리에 있 다고 해 ‘자천숲’이라고도 불린다. 오리장림에는 은행나무와 왕버들, 굴참나무, 시무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풍게나무, 회화나무, 말체나무, 곰 솔, 개잎갈나무 등 나무 12종 282그루가 있으며, 수령은 200~350년으로 추정된다. 수고는 6~24m 수관폭은 8~28m로 노거목이 많아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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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숲이 마을을 감싸고 액운을 막아줘 오리장림은 조선시대인 1500년대 에 마을 주민들이 손수 만들었다고 하는데, 마을의 바람을 막고 제방을 보호해 홍수를 막는 역할을 했다. 이에 더해 마을 수호의 기능도 하고 있어, 마을 주민들은 숲이 만들어진 때부터 매년 정월 대보름날 자정에 이곳에 서 마을의 평안을 위한 제를 올리고 있다. 1980년대 이후 국도 35호선이 개설되면서 숲은 좌우로 갈라지게 되었고 인근에 학교가 들어서고 태풍 등으로 숲이 훼손되어, 현재는 마을 앞 군락지 등 몇 곳에서만 옛 향취를 느낄 수 있다. 오리장림의 원형복원을 위해 영 천시는 보현산다목적댐 수몰지역에서 노거목을 이식해와서 복원에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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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향기 그리운마을

자연을 품다, 보현산

구름을 발 아래두고 운해가 펼쳐지는 곳 어둠이 내린 후 영롱한 별빛이 찾아오는 곳 그리고 보현산이 주는 선물들

普 賢



자연을 품다, 보현산 보현산 천문대 v

별과 내가 하나 되는 곳,

보현산천문대 글 _ 성현일 (보현산 천문대장)

귀뚜라미 소리가 귓전에 맴돌던 지난 밤. 별똥별이 긴 꼬리를 미처 감추기도 전 관 측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불청객은 별을 보고 싶어 무 작정 천문대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오직 별과 나뿐이라 여겼던 깊은 밤, 깊은 산 한가운데에서의 낯 선 만남. 그들로 인해 화들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보니 뭔가 모를 동질감이 다가왔다. 별을 바라 보는 눈은 달라도 별이 맺어준 인연이 있어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 보현산천문대는 관측과 연구 를 하는 곳이며 일몰이후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란 설명을 하니 방문객들은 고개를 끄덕 였다. 별을 쫓아 어둠을 뚫고 여기까지 온 그들의 마음은 산정 도착 이전에 벌써 저 밤하늘 너머에 가 있었으리라. 쏟아지는 별빛 속에서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관측실로 돌아오니 모니터 속 우 주는 여전히 초롱초롱한 별 빛을 보여주고 있었다. 별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낭만과 별을 과학으로 바 라보는 천문학자의 눈빛이 어우러지며 보현산천문대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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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124m 보현산 정상에서 느끼는 새벽의 공기는 차가움 그 이상이다. 새벽 공기를 가르고 동쪽 하늘이 밝아오면 발 아래 산봉우리들은 멋진 운해 속에서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밤을 꼬박 세운 관측자들이 잠자리로 향할 시간이다. 이 무렵 꼬불꼬불한 산 길을 달 려온 통근차는 숨가쁜 엔진을 식히며 앞 마당에 직원들을 내려 놓는다. 하루를 마무리 하는 관측자들 의 손짓과 하루를 여는 직원들의 미소가 맞닿으며 보현산천문대의 또 다른 하루가 채워진다. 땅거미 가 질 즈음 보현산천문대 망원경은 한낮의 긴 잠에서 깨어 이제 제 세상인양 굉음을 울리며 기지개 를 켠다. 저 먼 과거에서 날아온 별 빛을 반가이 맞이한 망원경은 우리에게 우주의 모습을 조금씩 보 여준다. 언덕 너머에 걸터앉아 옛 이야기를 해주시던 할아버지의 나즈막한 음성처럼 별 빛은 그렇게 다가온다.

천문대의 보물은 망원경이다. 보현산천문대에는 만원권 지폐의 뒷 면을 장식하고 있는 1.8m 망원경이 숨을 쉬고 있다. 망원경이 제 성능을 발휘하 도록 빈틈없이 관리하는건 연구원들과 엔지니어들의 몫이다. 그들이 섬세하고 부 드러운 손길로 망원경과 관측장비를 정비하는 동안 각종 지원업무를 수행하는 행정원들의 손놀림도 바빠진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은 여느 가정집 식사장면을 옮겨 놓은 듯 편안한 분위기가 된다. 직원 수가 적다보니 개인의 비밀도 없다. 천 문대에 상주하는 직원들은 밤낮없이 부대끼며 일상을 공유하고, 매일 출퇴근하 는 직원들은 2시간여의 출퇴근 시간을 통근차 속에서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 끈 끈함은 겨울철이 되면 최고조에 이른다. 그건 겨우내 녹지 않는 눈 덕분이다. 경 사진 산길에 눈이 쌓이면 일반차들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눈길이 펼쳐지고, 도로 위의 눈을 치우며 ‘함께’라는 단어를 자연스레 배운다. 통근차도 다닐 수 없는 빙판길이 되는 날엔 ‘운명공동체’란 단어까지도 낯설지 않게 된다. 겨울은 그 렇게 보현산천문대의 직원들을 가족으로 만들어준다.

일년의 절반인 겨울이 지나고 마지막 눈덩이마저 녹으면 이젠 나머지 절반인 여름으로 가는 길목이다. 겨울과 여름 사이 잠시 스치는 봄기운 속에서 나무들은 급한 걸음으로 새싹을 틔우 고, 보현산의 풍경을 순식간에 바꾸어 버린다. 하얗던 산허리가 금새 초록빛으로 물들고 나면 우거진 나무그늘이 마냥 좋은 계절 여름이 성큼 다가선다. 하늘이 가까워서일까? 그 어느곳 보다 유난히 눈 부신 태양을 마주하면 며칠전까지 이어졌던 겨울의 기억이 금새 지워진다. 이젠 선명한 백조자리와 견우, 직녀의 이야기가 밤하늘을 가득 메우는 여름밤이 수개월 동안 지속된다. 따가운 여름의 햇살 을 가득 받던 낮과 청명한 밤하늘을 촘촘히 수놓던 은하수가 보이지 않을 때 쯤이면 여름의 끝자락 은 서둘러 떠난다. 풀벌레와 다양한 식물들이 한껏 생명력을 뽐내고 나면 어느새 서늘한 기운이 몰려 오는 가을밤이 펼쳐진다. 그것도 잠시, 밤이 길어 천문학자가 행복해지는 겨울이 산을 감싼다. 그렇게 보현산의 한해가 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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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해 여름. 태풍으로 산 비탈이 무너지고, 도로가 유실되면서 보현산천문대가 고립된 적이 있 었다. 도로가 뚝- 끊어져 버렸으니 쌀과 부식을 나를 방법도 없었다. 출퇴근을 못하고 여러날을 산에 서 지낸 직원들은 그 생활에 익숙해지고 급기야 가족을 점점 잊어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가족들이 불평을 할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던 것은 산이 주는 평온함이 가족들에게도 전달되었기 때 문이 아닐까 싶다. 또한, 보현산의 맑은 하늘처럼 직원들의 맑은 마음은 방문객들에게도 전해져 연구 소인 보현산천문대가 유명 관광지를 능가하는 인기장소가 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천문연구원은 국내의 유일한 천문학 연구기관이다. 우주를 품어 안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덕연구단지 내의 정부출연연구소로 소백산과 보현산 두 곳에 천문대를 두고 있다. 밤낮없이 연구에 매진하는 천문학자들 속에서 여러해를 지내는 동안 싹터 오던 목마름. 별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던 별에 대한 갈증은 결국 나의 발걸음을 보현산천문대로 향하게 만들었 다. 입학식을 마친 초등학생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그렇게 첫걸음을 디뎠던 보현산천문대와 이 산자락 이 이제는 편안한 고향처럼 느껴진다. 이곳에 온지 어언 5년이 되었기 때문일까? 낮에는 보현산천문 대의 대장으로 운영을 책임지고 어둠이 깔리면 한명의 천문학자로 돌아가 연구에 집중한다. 구름 속 에서 막 태어나는 원시별과 일생을 마치며 한껏 부풀어 오른 붉은색의 큰 별에 관한 연구로 천문대의 밤을 밝힌다. 작년에는 40억 광년 거리에서 벌어진 거대한 블랙홀이 별을 잡아 먹는 장면을 포착하여 보현산천문대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입석과 하송, 용소리를 휘어 감던 고현천 줄기가 곧 다목적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출퇴근길에 보았던 자그마한 마을의 그 평화로운 풍광이, 지역주민의 삶터가 이제 역사와 물 속 으로 사라진다. 저 집엔 누가 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게 했던 마을이 영영 사라지게 된다. 분명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오늘의 변신이라 모두들 믿지만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그곳에 뿌리가 있 기 때문일 것이다. 터전을 떠나야 하는 주민들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쌓이면서 보현산천문대 관측 자들의 불안한 마음도 감출길이 없다. 천문대의 기본적 입지조건은 건조한 대기와 맑은 하늘 그리고 어두운 밤하늘이다. 댐이 건설되어도 보현산천문대의 관측환경이 나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 영롱한 별이 항상 보현산천문대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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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산천문대 별지기는 오늘도 밤하늘의

별과 하나가 된다.

여름철의 대표적인 별자리

백조자리 보현산천문대에서 은하수와 함께 볼 수 있

직녀

는 백조자리는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별 자리입니다. 날개짓을 하며 날아가는 백조 자리의 가장 밝은 별과 양 옆에서 밝게 빛 나는 두 개의 별(견우와 직녀)은 삼각형 모 양을 이루기 때문에 여름철의 대삼각형이 라 불립니다.

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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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향기 그리운마을

사과마을 사람들

당나무를 향해 달리기 했던 기억, 여름철 얼음굴에서 더 위를 피했던 어린 날, 시집와 한평생 살아온 마을. 하 나의 공동체였고, 한 가족이었던 그 시절. 별빛마을 사 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普 賢



사과마을 사람들 정운상

섬마에서의 90해

정운상 용소리의 마을원로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 바로 정운상씨의 집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 에 집앞 텃밭에서 고추를 가꾸고 있는 정운상씨를 만날 수 있었다. 1921년생인 정운상씨 는 올해로 만 92세이다. 아직도 정정하시다는 말에 정운상씨처럼 90세를 넘긴 할아버지 가 한분 더 있다며 너스레를 떠셨다.

“여기가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요. 여기를 섬마라고 하는데 왜 섬마냐 하면, 이 마을 양쪽으로 골짜기 하천이 흘러요. 그래서 섬처럼 돼 있다고 해서 섬마야.” 아버지대부터 이곳 용소에서 살았다는 정운상씨는 한 평생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1980 년대 들어서 모두 사과농사를 시작했지만 정운상씨는 다른 농사는 안 짓고 논농사만 지 었다. 9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곳에서 지내면서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모두 기 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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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댐 짓던 기억 “그런데, 내가 19살 때 일본에 다녀왔어요.”

인터뷰 중에 뜬금없이 정운상씨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잠시 그는 생각에 잠기더니 일본에 서의 일들을 이야기해주셨다. 시골에서 성장한 청년이 낯선 타국 땅에 돈벌러 갔던 기억 이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나보다.

“일본이 좋다는 말만 듣고 갔어요. 징용가기는 싫고, 깜냥도 없고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일할 사람을 모집한다고 해서 따라갔지요. 큰 댐을 만드는 데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해서 거기에서 일했어요. 3년 부역을 하기로 하고 조선으로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라고 했는데 저는 더 일을 했죠. 그때 저를 ‘요시하마’(吉浜)로 불렀어요. 당시 영천에서만 몇 백명 이 일하러 갔었고 말이죠.”

일본에서의 일은 고됐지만 돈을 벌어 집에 부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운상씨는 더 머물며 일을 하셨다고 한다. 일하러온 사람들 중에는 중간에 도망가서 아예 일본에 터를 잡은 사람도 있었다. 할아버지 가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마을 사람들이 일본에 다녀온 할아버지를 구경하러 몰려오기도 했었다고 한다. 일본 에 다녀온 탓에 정운상씨는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스물넷에 청송분과 결혼을 했다.

섬마에서 100해를 바라보다 그렇게 다시 용소리로 돌아 온 정운상씨는 평범한 농사꾼으로 살아왔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열심히 농사지어 얻은 쌀을 공출해갔고,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이 간장이나 식량을 가져갔다. 해방되면 잘 살게 해줄테 니 식량을 달라고도 했었다. 전쟁 후에는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고, 모를 심어도 물이 없어 흉작일 때도 많았다. 물이 귀한 곳이었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산골짜 기에서 벼농사는 만만치 않았다. 봄에 모를 심으려고 한말을 꾸면 가을에는 두말로 갚아야 했고, 고픈 배는 나 물죽, 보리, 조밥으로 채웠고 그나마도 못 먹을 때도 생겼다. 그 와중에서도 두 아들과 네 딸을 키워내 자식농사 를 잘 거두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제 망백(望百)을 넘은 나이가 되었다. “100”이라는 숫자를 보기까지 이제 섬마에서 사 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고, 댐을 짓던 어린 청년은 이제 고향땅에 지어지는 댐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 는 시간이 흘렀다. 고향에 살아온 아쉬움이 왜 없겠는가. 그래도 하루하루를 고향에서 보낸다는 사실에 감사 하다는 정운상씨. 새 로운 곳으로 이주하지만, 섬마에서의 기억을 안고 오래오래 건강히 사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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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꽃 향수를 머금고

넉넉한 마음으로

일년 중 꼭 그 날에만 먹을 수 있는 시절 음식 친척과 마을 사람들의 만남과 모임 일상생활의 고된 삶과 일 사이, 지친 몸을 쉬고 다음 일에 힘을 가해주는 우리의 명절

普 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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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당제 마을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당제는 마을의 당제나무 주위에서 열린다. 당제는 마을에서 동회를 열어 모든 면에서 모범적 이고 마을에서 인정받는 사람으로 제관을 선출하며, 동신당에 제를 올리는 것으로 주재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 지역마다 형태가 다 양하다.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그날부터 금기에 들어가 집밖의 출입을 제한하고 언행을 조심한다. 출입문 밖에는 금줄을 치고 황토를 떠다가 붙여 마을의 부정을 막는다. 이처럼 동제는 마을이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며, 과거 조상들이 살아온 뿌리를 이 어가는 풍습이다.

한동안 당제를 지내지 않았던 용소리는 마을에 좋지 않은 소식이 생기자, 다시 당제를 지내기로 했다. 어느날 갑자기 소를 잃어버린 권석만씨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는데, 인근 마을에서 당나무를 뽑으니 소가 한 마리도 없이 다 죽은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생각 이 들어 당제를 다시 지내기로 건의했다. 그런 생각을 갖고 마을 사람들 몇몇이 당제를 주도하고 회의 끝에 당제를 지냈다. 그러자 그 후, 거짓말처럼 일주일동안 없었던 소들이 축사에 모인 것이다. ‘당제’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제를 통해 마을의 액운을 쫓은 것이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용소리의 당제는 마을을 지탱하는 구심점이자 주민에게 안식을 선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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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사람을 기억하다

입석리 대표가옥 01 전경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입석안길 4-5 건축연대

1940년대 후반

지붕재료

시멘트기와

구조

ㄱ자형

보수 및 개조여부

有 (1970년대)

주용도

주택

난방방식

보일러

지붕구조

우진각지붕

<평면도> 3.149m

9.46m

6.469m

잡동사니 창고 방1 (할머니방)

방2

수돗가

막하 창고

방2

위채

11.954m

방1

아래채 0

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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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

5M


거주사 입석리 마을회관 뒤 위치한 권필례씨의 집. 스무살 청송 아가씨는 영천 화북 입석리로 시집을 왔 다. 입석에서 어느덧 64년 이상 거주하고 있는 그녀가 이곳에 처음 왔을 당시, 지금 가옥이 있던 자 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보현산 산골답게 주변의 나무를 베어와 집을 지을 수 있는 재료를 마련하 였고, 대목장을 불러 현재 가옥의 토대가 된 초가집을 지었다.

현재 북서향인 권필례씨 댁은 크게 위채-아래채 2채로 구성되었는데, 먼저 아래채를 지었고 그 후 살림살이가 안정되면서 위채를 지었다. 예전에는 보현산에서 캐온 구들장으로 난방을 했지만, 요 즘에는 보일러를 사용한다.

초가집이던 지붕은 1970년대에 시멘트기와로 개조하였고, 이때 흙바닥이던 마당에 시멘트칠을 하였다. 지금은 시멘트 마당 앞 작은 밭에서 소일거리를 하지만, 마을에 50가구가 넘던 과거에는 벼농사와 보현산자락에서 콩, 담배, 깨 등을 재배하였다.

아래채에서는 자식들이 공부하고, 창고에서는 누에도 기르며 이런저런 재미가 있던 정든 집. 지 금은 권필례씨 혼자 살고 계시지만, 남편 김병무씨와 6남매가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 평상에서 보았던 보현산에 핀 안개, 마당 앞 작은 앵두나무를 가족들은 조금씩 그리워할 것이다.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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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채 방 1

02 아래채 방 2

03 잡동사니 창고

04 위채 욕실

05 위채 방 1

06 위채 주방

43


집, 사람을 기억하다

입석리 대표가옥 01 전경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입석안길 4-5 건축연대

지붕재료

1940년대 후반

구조

보일러

난방방식

주택

지붕구조

有 (1970년대)

보수 및 개조여부

ㄱ자형

주용도

시멘트기와

우진각지붕

<평면도> 3.149m

9.46m

6.469m 잡동사니 창고 방1 (할머니방) 수돗가

막하 창고

방2

방1

위채

11.954m

아래채 0

평상

44

방2

1

3

5M


거주사 입석리 마을회관 뒤 위치한 권필례씨의 집. 스무살 청송 아가씨는 영천 화북 입석리로 시집을 왔다. 입석에 서 어느덧 64년 이상 거주하고 있는 그녀가 이곳에 처음 왔을 당시, 지금 가옥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 었다. 보현산 산골답게 주변의 나무를 베어와 집을 지을 수 있는 재료를 마련하였고, 대목장을 불러 현재 가 옥의 토대가 된 초가집을 지었다.

현재 북서향인 권필례씨 댁은 크게 위채-아래채 2채로 구성되었는데, 먼저 아래채를 지었고 그 후 살림살 이가 안정되면서 위채를 지었다. 예전에는 보현산에서 캐온 구들장으로 난방을 했지만, 요즘에는 보일러 를 사용한다.

초가집이던 지붕은 1970년대에 시멘트기와로 개조하였고, 이때 흙바닥이던 마당에 시멘트칠을 하였다. 지 금은 시멘트 마당 앞 작은 밭에서 소일거리를 하지만, 마을에 50가구가 넘던 과거에는 벼농사와 보현산자 락에서 콩, 담배, 깨 등을 재배하였다.

아래채에서는 자식들이 공부하고, 창고에서는 누에도 기르며 이런저런 재미가 있던 정든 집. 지금은 권필 례씨 혼자 살고 계시지만, 남편 김병무씨와 6남매가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 평상에서 보았던 보현산에 핀 안개, 마당 앞 작은 앵두나무를 가족들은 조금씩 그리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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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채 방 1

02 아래채 방 2

03 잡동사니 창고

04 위채 욕실

05 위채 방 1

06 위채 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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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사 입석리 마을회관 뒤 위치한 권필례씨의 집. 스무살 청송 아가씨는 영천 화북 입석리로 시집을 왔다. 입석에서 어느덧 64년 이상 거주하고 있는 그녀가 이곳에 처음 왔을 당시, 지금 가옥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 다. 보현산 산골답게 주변의 나무를 베어와 집을 지을 수 있는 재료를 마련하였고, 대목장을 불러 현재 가옥 의 토대가 된 초가집을 지었다.

현재 북서향인 권필례씨 댁은 크게 위채-아래채 2채로 구성되었는데, 먼저 아래채를 지었고 그 후 살림살이 가 안정되면서 위채를 지었다. 예전에는 보현산에서 캐온 구들장으로 난방을 했지만, 요즘에는 보일러를 사 용한다.

초가집이던 지붕은 1970년대에 시멘트기와로 개조하였고, 이때 흙바닥이던 마당에 시멘트칠을 하였다. 지 금은 시멘트 마당 앞 작은 밭에서 소일거리를 하지만, 마을에 50가구가 넘던 과거에는 벼농사와 보현산자락 에서 콩, 담배, 깨 등을 재배하였다.

아래채에서는 자식들이 공부하고, 창고에서는 누에도 기르며 이런저런 재미가 있던 정든 집. 지금은 권필례 씨 혼자 살고 계시지만, 남편 김병무씨와 6남매가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 평상에서 보았던 보현산에 핀 안 개, 마당 앞 작은 앵두나무를 가족들은 조금씩 그리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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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꽃 향수를 머금고

집, 사람을 기억하다

일년 중 꼭 그 날에만 먹을 수 있는 시절 음식 친척과 마을 사람들의 만남과 모임 일상생활의 고된 삶과 일 사이, 지친 몸을 쉬고 다음 일에 힘을 가해주는 우리의 명절

普 賢



집, 사람을 기억하다

입석리

용소리

하송리


하송리

용소리 B

용소리 A 입석리 B

입석리 A


집, 사람을 기억하다

입석리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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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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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21

18 17 24

20 15 16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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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입석안길 4

02 입석안길 4-5

03 입석안길 5

04 입석안길 8

05 입석안길 9

06 입석안길 9-1

07 입석안길 11

08 입석안길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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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입석안길 15

10 입석안길 22-1

11 입석안길 22-5

12 입석안길 22-11

13 입석안길 23

14 입석안길 30

15 입석안길 31

16 입석안길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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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입석안길 33

18 입석안길 38

19 입석안길 41

20 입석안길 42

21 입석안길 44

22 입석안길 44-1

23 입석안길 46

24 천문로 2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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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천문로 2664-5

26 천문로 2664-6

27 천문로 2665

28 천문로 2667

29 천문로 2669

30 천문로 2672

31 천문로 2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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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집, 사람을 기억하다

01 입석리 (지풍기미 마을)

1 3

2 5

4 배나무정길

7 9 8 12

10

13 14 11 44

6


01 배나무정길 39

02 배나무정길 41

03 배나무정길 43

04 배나무정길 44-5

05 배나무정길 44-10

06 배나무정길 58

배나무정길 61

배나무정길 63

배나무정길 65

배나무정길 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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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배나무정길 70-3

12 배나무정길 70-7

13 배나무정길 70-11

14 배나무정길 70-13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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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사람을 기억하다

02 용소리

44


01 법화길 2

02 법화길 4

03 법화길 6

04 법화길 8

05 섬말안길 2

06 섬말안길 4

섬말안길 5

섬말안길 6

섬말안길 13

섬말안길 14

45


11 섬말안길 25

12 섬말안길 26

13 섬말안길 27

14 섬말안길 31

15 섬말안길 32

16 섬말안길 34

17 섬말안길 34-1

18 섬말안길 41

19 섬말안길 44

20 섬말안길 46

46


21 섬말안길 50

22 섬말안길 50-1

23 섬말안길 51-5

24 섬말안길 51-7

25 섬말안길 55

26 용소리 815

27 천문로 2760

28 천문로 2766

29 천문로 2768

30 천문로 2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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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천문로 2772

32 천문로 2775

33 천문로 2776

34 천문로 2778-1

35 천문로 2780

36 천문로 2783-4

37 천문로 2783-6

38 천문로 2783-9

39 천문로 2783-12

40 천문로 278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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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천문로 2783-14

42 천문로 2783-16

43 천문로 2783-19

44 천문로 2783-20

45 천문로 2783-21

46 천문로 2783-22

47 천문로 2783-23

48 천문로 2783-28

49 천문로 2783-33

50 천문로 278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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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천문로 2783-38

52 천문로 2786

53 천문로 2788

54 천문로 2792-6

55 천문로 2792-7

56 천문로 2792-9

57 천문로 2792-11

58 천문로 2792-16

59 천문로 2792-18

60 천문로 279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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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천문로 2792-22

62 천문로 2792-24

63 천문로 2792-26

64 천문로 2792-27

65 천문로 2795-3

66 천문로 2795-5

67 천문로 2795-6

68 천문로 2796-1

69 천문로 2796-5

70 천문로 27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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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천문로 2833 대성건업

72 천문로 2833 심가네 매점

73 천문로 2833 환희슈퍼

74 천문로 2840

75 천문로 2841

76 천문로 2843

77 천문로 2846

78 천문로 2849

79 천문로 2852

80 천문로 2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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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천문로 2859

82 천문로 2859-3

83 천문로 2859-5

84 천문로 2859-6

85 천문로 2860

86 천문로 2862

87 천문로 2868-1

88 천문로 2919

47


집, 사람을 기억하다

03 하송리

1 3

2 5

4 배나무정길

7 9 8 12

10

13 14 11 44

6


01 내국길 3

02 내국길 5

03 내국길 5-1

04 내국길 6

05 내국길 7

06 내국길 9

내국길 9-1

천문로 29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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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꽃 향수를 머금고

마을의 흔적을 담다

보현산을 둘러싸고 있는 용소리, 입석리, 하송리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습들을 담아보았다. 보현산을 둘 러싸고 있는 용소리, 입석리, 하송리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습들을 담아보았다.

普 賢



마을의 흔적을 담다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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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흔적을 담다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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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향기 그리운마을

비움, 그리고 시작

옛길의 모습이 점차 변해가고, 친구이자 가족 같던 이웃 들, 정든 집을 이젠 떠나야 한다. 점점 변해가는 마을 의 모습을 보며 때로는 한숨을 지을지언정, 함께 마을 정자에서 이야기 나눴던 기억들이 이젠 서로의 기억 속 한 페이지로 남는다. 이제 새로운 곳에서의 첫 페이 지를 만들어갈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본다.

普 賢



비움, 그리고 시작 주화씨의 추억

어릴 적 추억이 있는 곳, 우리 동네 용소리

용소리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언니, 오빠, 동생들과 물놀이하며 무더운 여름날을 보내고, 추운 겨울날에는 눈싸움하며 뛰놀던 그때가 그립기만하다. 컴퓨터도 없고 오락기도 없었지만, 맨 땅에 줄긋고 돌멩이 하나만 있으면 하루 종일 해가 저물어 가는 줄도 모르고 놀던 그 때. 이제 세월이 흘러 같이 물놀이하고 눈싸움하던 친구들은 모두 흩어졌지만, 내 기억 속 어린 날의 추억들은 바로 어 제같이 선명하다.

우리 집 담장보다 키가 작았을 때, 내 키가 이 담장보다 빨리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새로 지은 우리 집에 내 방이 생겨 마냥 좋아 콩닥콩닥 뛰고 좋아했었는데…….

어느 집 담벼락 밑에서 언니들과 공기놀이하는 모습도, 지금은 말라버린 시냇물에서 가재잡고 물놀이하던 모습도, 온 동 네를 뛰어다니며 숨바꼭질 하던 일도 생생하게 기억 이 난다. 추운 날씨에도 쥐불놀이를 하겠다며 빈 깡통 에 구멍을 뚫고 저녁을 일찍 먹고 동네 중간에 있는 논 에 하나둘씩 모여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어울려 놀기 도 했다.

이렇게 많은 추억들을 간직한 우리 동네는 항상 마을 중간에 있는 소나무들처럼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꺼라 생각했는데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속의 추억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 같아 마음 이 아프다. 위 : 용소리 마을 중간에 있는 시냇가에서 김주화씨 친구들 (1994년) 좌 : 사촌오빠 고등학교(현 영천전자고) 졸업식에서 김주화씨(빨간옷)와 동생 김진우씨(초록색옷), 어머니 고옥남씨 (1989년 2월) 우 : 상송초등학교(현재 폐교로 없어짐) 가을운동회에서 김주화씨(한복)와 동생 김진우씨(체육복), 어머니 고옥남씨 (1991년)


옆집에 가면 사과가 잘 익었다며 먹어보라며 나무에 달린 큼직한 사과 하나를 따주시던 아저씨도 생각나 고, 뒷집에 송아지가 뛰쳐나왔다며 쫓아가시는 할아버지도 생각이 난다. 어디하나 추억이 깃들지 않은 곳 이 없다.

동네 오빠가 군대 가는 날 꼬깃꼬깃 접어 넣어두신 돈을 두 손에 꼭 쥐어주시며 마치 당신의 아들, 손자가 군대 가는 것처럼 눈물을 훔치시는 정 많으신 할머니들……. 동네 주민이라기보다는 그냥 한 가족이었다.

누구 집 딸이 시집간다는 방송이 마을 구석구석에 울려 퍼지고, 누구 댁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방송, 누 구 집에 불이 났으니 양동이를 들고 나와 협조해 달라는 방송, 집나온 강아지를 찾는다는 방송……. 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접하기 힘든 방송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정 많던 동네가 하루하루 바뀌어 갔다.

하루가 지나면 아들네 집으로 이사 가시는 할아버지도 있고, 또 얼마가 지나면 이사 가신 할아버지 댁의 철 거 작업이 시작되고, 또 얼마가 지나면 그 자리에 누가 살았는지, 집이 있었는지도 모르게끔 변해 있다. 고물 장사들이 가져가기라도 할 텐데 그마저도 되지 않는 주소표지판만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사람들 이 떠나고 썰렁한 동네를 돌아보니 마을 곳곳마다 추억들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용소리는 매년 이사 다니던 우리 가족들이 정착할 수 있었던 동네였고, 잦은 이사로 인해 친구가 없던 나에 게 많은 친구들도 만들어 주었다. 내 기억 속 추억들의 대부분은 용소리에서 듣고, 보고, 겪은 것들이다. 더 이상 이 동네에서의 추억을 만들어 갈 수는 없지만, 지금 내 마음속에 있는 추억들을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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