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덕지게 어깨동무 2017 vol11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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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기념사업회 2017 Vol.11


목차 한편의 시

마석 모란공원에 가 보지는 못했다

박태순

권두칼럼

의문사 투쟁 30주년을 앞두고

박래군

포토에세이

형의 마지막 숨길 따라, 가려진 진실 찾아 거문도로 갑니다

노용헌·백기욱·이원근

과거청산

과거청산운동의 기록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신명철

특집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어깨동무가 만나다

의문사유가족 디지털 아카이브 사업 경과보고

정원옥

자료의 수집·저장을 넘어 어떻게 활용·확장할 것인가

이혁승

이내창기념사업회 디지털아카이브의 첫 걸음을 응원합니다

김유승

의문사유가족을 기록하는 이유

이찬민

잃기 위해 시작한 아카이브, 고민과 출발

장민경

구속과 수배, 투옥으로 점철된 젊은 시절 후배들과 더 가깝게 지내고파

조환준

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적폐청산

이주연

내창이형이 없었다면 우리가 다시 만날 일도 없었겠지?

이주연

4 6 11 24 34 36 45 50 53 58 66 78 81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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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생각하기

나누기

어깨걸기

함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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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거청산의 현주소를 ‘알아야’ 한다

정원옥

지연되는 정의와 재난참사의 반복

미류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우리의 과거청산

강혁민

이수정의 국악이야기 : 개가수 박춘재의 재담

이수정

연극으로 세상 읽기 : 마당극을 기억하시나요?

김경락

빅데이터에 대한 이해와 분석의 예

혁이

강곤의 현장들, 기록들 통계조차 없다 - 결혼이주여성, 그리고 이주와 다문화

강곤

용수의 축구와 노동 이야기

김용수

연재소설 : 귀신을 보았다 ①

박인

미남 공장장 협동조합 부적응기

박형오

제4회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선정

운영위원회

좀 더 일찍 했어야 했던 운동! : 회원 늘리기 운동 중간 결산

김기수

회원동정

백기욱

2017년 상반기 사업일지

운영위원회

84 93 96 103 107 111 119 123 129 133 136 138 143 151


한 편의 시

마석 모란공원에 가 보지는 못했다 박태순

전태일과 박영진과 문송면이 강민호가 있는 곳 그리고 또 다른 이름들이 있는 곳 거기에 묻혀질라고 두런거려 본다

비가 우둑거리면 받쳐 든 우산이 우산에 가려진 얼굴들에 그늘이 드려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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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꽃 한 송이 조금 들고 울어 줄 친구라도 다른 동지들을 찾기 위해 왔다 들러줄 것이다 와서 동지가를 목청껏 불러주면 더없이 고마울 것이다

그렇듯 시간이 흐르려면 무수한 싸움을 몸에 새겨가야만 한다.

박태순_1966년 화성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부터 문예부 활동을 하면서 습작을 시작했고, 1985년 한신대학교 철학과에 입 학한 후 학생운동을 했다. 1986년부터 수원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였고, 1989년 이철규·이내창 열사의 사인진상을 요구하 는 수원지방검찰청 점거농성 사건으로 부산교도소에서 1년 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92년 8월 29일 귀가 중 시흥역에서 의문 의 죽임을 당한 뒤 아직까지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마석 모란공원에 가 보지는 못했다>는 박태순이 의문사를 당하기 1년 전에 쓴 것이다.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박 태순의 유해를 찾고 나서야 그는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 2017년 7월 2일, 그의 유해는 가족의 바람에 따라 경기도 일산 보광사로 이장되었으며, 마석 모란공원에는 가묘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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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 투쟁 30주년을 앞두고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30년 전만 해도 ‘의문의 죽음’ ‘의혹의 죽음’ 등의 용어가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었 다. 이런 용어가 ‘의문사’로 통일된 계기는 1988년 유가족들의 133일 간의 농성투 쟁 과정에서였다. 그해 10월,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에 공권력에 의해서 자식을 잃은 사연을 안 은 채 견뎌왔던 유가족들이 전국에서 종로5가 기독교회관으로 모여들었다. 농성장 이라고 해야 NCCK 인권위원회 사무실 바닥에 스티로폼 한 장 깔고 한겨울을 보냈 다. 튼튼한 몸으로 군에 갔는데 갑자기 자살했고, 경찰서에 끌려갔는데 소식이 없다 가 주검으로 돌아왔고, 누구는 아예 누구에 의해서 끌려가 죽임을 당했는지조차 모 르는 사연을 풀어놓았다. 이소선 어머님을 비롯한 유가족들이 의문사 유가족들의 농 성에 동참해서 이끌어주었다. 먼저 싸움에 나섰던 유가족들이 농성도, 기자회견도, 집회와 거리시위도, 정치권 사업도 이끌어주었다.

1988년의 의문사 농성 당시는 전두환, 노태우 체포 투쟁이 한창이던 때였고, 여소야대 국회에서는 5·18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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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와 5공청문회가 열리던 때였다. 서울에서는 매일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낮 에는 그런 집회시위의 현장에 자식들이 사진을 코팅해서 붙이고는 의문사를 알리 는 일에 주력했다. 세상은 이런 억울한 죽음이 있었는지조차 모를 때였으므로 일단 은 의문사를 알리는 일이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자식이 죽은 사연을 말하다가는 끝 내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울기 일쑤였다. 그러다 밤이면 농성장에 돌아와 자신들이 겪은 기막힌 얘기 보따리를 밤새 풀어놓았다. 자식이 죽어서 돌아왔는데 왜 죽었는 지도 몰라 애간장을 태우는 유가족들은 친인척들에게도 풀어놓지 못했던 기막힌 사 연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서슴없이 풀어놓았다. 그러다가는 소주 한 잔 나누 면서 긴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종국에는 “○○야, 보고 싶다. 한 번만이라도 만나 보고 싶다”고 한 엄마가 울면 다른 엄마들이 따라 울어서 울음바다로 끝났다. 아빠 들은 담배만 피우고 천장으로 눈길을 보냈다. 매일 밤의 이야기 자리는 낮의 집회시 위 때의 무용담으로 시작해서 이렇게 간절한 그리움과 원망과 분노의 울음으로 끝 나고는 했다. 그 농성에 함께 하면서 엄마 아빠들의 얘기를 듣고 사진이며 진정서 등을 정리해 서 의문사 최초의 자료집을 만들었다. 그래서 나온 자료집이 <내 자식 죽인 놈들 제 명에 못 살리라!>. 첫 해의 농성으로 하나의 사건도 해결하지 못했지만, 우리사회에 분명하게 해결해야 할 중요사건으로 등재하는 데는 성공했다. 의문사 유가족들은 유 가협의 지회를 만들었고, 다음해부터 유가협의 결의로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을 만 들기 위한 서명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새로 발생한 조선대 이철규, 중앙대 이내 창 사건들의 유가족들이 합류했다. 정치 상황에 따라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런저런 노력들이 이어졌고,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뒤에는 여의도에서 400일이 넘는 농성 끝에 의문사진상규명특별 법을 만들었으니 그게 1999년 말이었다. 그 법에 의해서 2000년 10월 대통령소속의 직속기구로 민관 합동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했다. 10년 투쟁이 한국인권 사에 큰 획을 긋는 성과를 낳았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이 이어져서 공권력에 의한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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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 사건 44건에 대한 조사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사건들이 드물게 진상규명에 이른 것들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는 진상규명 불능의 판정을 받았다. 조사기구의 한 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이런 앞선 움직임이 있어서 이어서 군의문사진상규 명위원회, 진실과화해위원회가 속속 발족되어 활동할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훗 날 역사가들은 5·18진상규명 투쟁과 함께 의문사 진상규명 투쟁이 갖는 의의를 높 이 평가할 것이라 생각한다.

의문사 유가족들의 투쟁을 기억해야 공권력의 작위에 의한, 또는 부작위에 의한 부당한 행사로 인한 죽음들은 의문사 로 통칭되는 사건들 외에도 수없이 많다. 한국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 제주 4·3의 학살만이 아니다.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5·18이 그렇고, 2009년의 용산참사 가 그렇고, 2014년의 세월호 참사가 그렇다. 단일한 의문사만이 아니라 집단 의문사 사건들도 수없이 많다. 그들 사건들이 모두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사회에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에 대한 저항운동은 이렇듯 의문사 유가족들의 투쟁으로 확연하게 자리 잡았다. 그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누군가 그 길 을 열어 가는데 엄청난 용기를 냈어야 할지도 모른다. 초기의 미숙하기만 했던, 어 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답답했던 그분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그 뒤에 의문사로 남을 사건들의 해결에 긍정적인 시그널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백만 명도 넘는 사람들 이 모여서 촛불을 들었다. 그 광장의 끄트머리, 사람들의 눈에도 잘 띄지 않는 곳에 서 낯익은 얼굴을 보고는 했다. 1988년 기독교회관에 순진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사 람 좋은 허원근 아버지, 허영춘 씨. 양 가슴에 한 발씩, 그리고 머리에 한 발의 총을 쏴서 자살했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의문사의 주인공 허원근 사건은 자살과 타살을 번 복하다가 대법원에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론 났다. 다행히 순직이 인정됐다고는 하 지만, 위암에 걸리면서까지 아들의 진상규명을 원하며 싸워왔던 그 아버지가 받아든 성적표는 어쩌면 초라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아버지가 걸어온 길은 많은 사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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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진상규명 투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잘못된 검시제도와 은폐와 조 작을 일삼는 공권력을 이만큼이나마 바로 잡는데 일조하였다. 허영춘 씨와 함께 했던 의문사 유가족들의 투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이렇듯 명확하다. 그분들에게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사건들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일로 답할 수는 없을까? 문재 인 정부에서 의문사를 비롯한 과거사의 해결을 위한 조사기구들이 제대로 만들어지 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과거를 그대로 묻어두고는, 그리고 그 책임자들을 제대로 처 벌하지 않고는 이 나라에 정의가 세워질 수 없다. 정의를 세우는 일이 더 이상 지연 되지 않도록 정부와 의회가 결단하도록 함께 움직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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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마지막 숨길 따라, 가려진 진실 찾아 거문도로 갑니다 내창이형과 함께하는 거문도답사기행 사진

노용헌·백기욱 / 글 이원근

누구의 무덤이나 납골당 앞이 아니라(그러니까 고인을 추모하거나 제사를 모시는 그런 합당한 일 말고), 그의 죽음이 이루어졌거나 시신이 발견된 장소, 그 지점에 발 을 딛고 서는 일은, 결코 달가울 리가 없다. 이번 답사는 그래서 탐탁지 않았으나 그 래도 한 번은 가봐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출발이었다. 그럼에도 전혀 예상치 못하게 15명이나 신청을 하였고, 그 중 7명은 내창이형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들이었다.

출발. 2017. 6.16(금). 센트럴시티 → 여수 346.8km 자정 출발 심야우등버스를 탔다. 공교롭게도 지하철 3호선에서 사고가 나 일행 중 몇은 마음을 졸이면서 왔다. 제일 늦은 이는 심규한(83) 선배였다. 버스가 시동을 부 르릉 걸고도 몇 분을 더 기다리고서야 가까스로 도착했는데, 이것이 이틀 일정 중 일 어난 유일한 ‘사건’이었다. 내창이형과 가장 비슷한 여정을 이용한 이는 홍우림(86) 선배였다. 그는 평택역에 서 기차를 탔다. 형은 1989년 8월 14일 수원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회의를 마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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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사라졌다, 이튿날 거문도행 배를 탄 것으로 보아 수원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내려 간 것으로 추측된다. 아니다. 친절한 누군가가 여수까지 차로 데려다주었을 수도 있 다. 확인되지 않은 것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28년간은 까마득히 멀지만 어 쩌면 가까운 시간이기도 하다. 심야우등은 피곤으로 가득 차 고요했다. 다만 두 사람. 소주 4팩을 들고 탄 김근한 (87) 형은 연신 부스럭거렸고, 여름방학을 맞아 미국에서 온 김영상(87) 형은 근황을 알리느라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모두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잘 잤다.

여수 도착. 2017. 6.17(토). 04시 0분. 여수버스터미널 → 선착장 2.9km 버스에서 내려 선착장으로 갔다. 낯선 얼굴을 향해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눴다. 잠 이 깨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 홍우림 선배가 도착했다. 고두현(06) 이 촬영을 했다. 아침식사는 인솔자이자 가이드인 조환준(86) 선배가 미리 예약해 둔 해장국집에 서 했다. 너무 일찍 도착해 식당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요가로 굳은 몸을 풀었다. 마치 신흥종교집단의 아침기도마냥 엄숙하고 기괴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흠칫 놀 랐다.

승선. 2017. 6. 17(토). 08시 여수 → 거문도 114.7km 조국호 배의 이름은 ‘조국’호였다. ‘세월’호에 이은 ‘조국’호. 왜 배의 이름은 다 이런 것일 까. 우린 잘생긴 민정수석을 잠깐 생각했고, 세월호를 오래 상기했다. 거문도로 들어 가는 사람들이 많아 증선했다고 관계자는 말했다. 28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배는 물 위를 날아갔다. 쾌속선. 잠깐 잠이 들고 다시 잠이 깨는 사이 배는 감쪽같이 거문도 에 닿았다. 28년의 세월이 5시간 넘던 항해를 1시간 반으로 당겨놓았다. 형은 89년 8월 15일 오전 8시편 신영훼리호를 탔다. 여수경찰서는 당시 형 혼자 승 선한 것으로 결론지었으나 1차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 승선시 안기부 직 원 도연주와 그 일행 백승희의 승선신고서가 앞뒤로 나란히 발견된 점에 근거해 동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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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용의자로 두 사람을 지목했다. 당시 배 안에서 형을 목격한 모습은 여러 가지였다. 생각에 골똘히 몰두해 있거나 주위를 뛰어다니는 아이에게 짜증을 내거나, 혼자 술잔을 기울이거나 또는 몇몇의 눈초리를 의식해 위축되거나 하는 그런 식이었다.

거문도 도착. 2017. 6. 17(토). 09시 30분. 형의 행적을 쫓다. 6월 중순의 섬은 예상과 달리 쌀쌀했다. 거문도는 여객선터미널이 있는 고도를 가 운데에 두고, 동도와 서도 이 세 섬으로 이뤄져있다. 89년 당시 신영훼리호는 12시 50분에 도착했고, 모두 32명이 내렸다. 형은 거문 도 선착장에 하선한 뒤 인근 김모씨가 운영하는 민박집 정문으로 뛰어 들어가 후문 으로 도주하였다고 전해진다. “쫓기는 듯한 겁먹은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한 손에 가 방을 들고 방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과 동시에 신발을 신은 채로 마루에 올라와 방 을 가르쳐줬더니 그건 쳐다보지도 않고 뒷문이 있느냐 물어보고 뒷문을 가르쳐줬더 니 ‘죄송합니다’하고 급하게 뒷문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이 진술에 비추어보면 형은 배에서 내린 뒤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추정된다. 28년의 세월은 골목길 과 집들도 모두 바꿔놓아 당시 민박집이었던 곳의 골목과 뒷문을 살펴보고 각자 의 문을 꺼내놓는 시간을 가졌다. 대체 무엇이 형을 이곳으로 끌고 왔을까. 누구에게 쫓 기고 또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일까. ‘희망식당’ 자리도 둘러보았다. 형은 오후 1시 30분경 이곳에서 볶음밥을 먹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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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 뒷문으로 황급히 도주한 뒤 불과 20여분만이다.

당시 점심시간이 되어 저 혼자 들어갔으나 손님이 많은 관계로 마땅히 앉아서 먹 을 장소가 없어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 변사자(이내창)와 비슷한 사람과 한자리에 앉 아 서로 마주보며 콩국수를 먹게 되었지요. --그 사람이 먼저 들어와 혼자 있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오래 걸려 제가 미안한 생 각에 가만히 보니 전날 신문을 보고 있어 당일자 한국일보를 보라고 가져다 드 렸지요. --그 사람이 먼저 볶음밥을 먹었지요. --그 변사자(이내창)와 비슷한 사람이 먼저 식사를 하고 나갔는데 곧바로 다시 돌 아와 가게 문 앞에 서서 저를 보고 하는 말이 “저 건너를 가려면 어떻게 갑니까” 하고 물어 제가 손을 들어 여객선터미널 쪽을 가리키면서 “그쪽에 가면 통선이 있습니다”라고 답변을 하자 이제는 “민박을 하려면 어떻게 합니까”하고 다시 물 어 옆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계절’ 주인여자를 가리키면서 “민박이 7천 원짜 리가 있고 1만 원짜리가 있는데 저 집에 가면 쌉니다”하였더니 아무런 말도 하 지 않고 다시 여객선터미널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형은 그 뒤 삼호다방에도 들렀다. 오후 3시다.

이내창은 8월 15일 오후 3시경 최○자(일명 최희)가 근무하던 삼호다방에서 여자 1명과 같이 들어와 콜라 등을 마시고 한참 이야기를 하였다. 여자는 먼저 나가 다방 밖에서 대기하던 남자 1명과 함께 이내창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내창은 다방에 혼자 남아 최○자에게 요구르트를 사주고 잠시 대화를 한 후 다방을 나가서 기다리고 있 던 남녀 2명과 함께 여객선 터미널 방향으로 걸어갔다.

당시 이내창을 목격한 다방 종업원 최씨는 지난 2017년 3월 25일 방영된 SBS <그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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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에서 담당 PD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Q

그때 기억나세요?

나죠. 내가 오죽했으면 이름까지 안 잊어버리고 있어요.

얼굴도 기억이 나요.

Q

이분 맞아요?

네.

Q

여기서 같이 이내창 씨랑 같이 있었던 분이 누구예요?

이 여자하고

Q

분홍 옷 입은 여자?

네.

Q

이 여자는 조사받을 때 이내창 씨랑 다방에 간 적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아니에요 이 여자 확실해요. 지금도 내가 이 사진을 기억해요.

Q

여자 분을 기억하시는 이유가 있어요?

네. 조금 특이했어요. 옷차림새도 그랬고 조금….

조금 하여튼 특이했어요, 여자가.

최씨가 지목하는 여자는 여전히 도○○입니다.

검찰청인가? 어디서 대질심문을 했어요, 제가.

학생 네 명인가 다섯 명인가 세워놓고 한 번 찝어 봐라, 누군지.

그래 내가 찝기까지 했는데. 거기서.

Q

거기서 이분을 지목했어요?

네. 봤어요. 네. 조용한 상태에서 자 지금부터 뭐 불이 켜집니다.

여기에서 보신 분 있으면 지목해주세요 하고 물어보는데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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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딱 켜지고 저거 하니까 응? 저 아가씨인데!

나도 모르게 손이 가는 거예요

최씨는 이내창의 사망 직후 여수경찰서의 수사 과정에서 최초 진술했던 내용을 번 복하였으나, 의문사위원회의 조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초 진술 내용을 유지하면서 아직도 생생히 도○○씨가 이내창과 동행했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형은 끊임 없이 스스로를 드러냈다. 가는 곳마다 흔적을 남겼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똑똑히 기 억하게 만들었다. 먼저 말을 시켰고, 대화도 여러 번 주거니 받거니 이어갔다. 가방 과 다이어리도 들고 있었다. 도주-식사-음료수-일행 등 풀기 어려운 행적들이 계 속 이어진다.

서도 덕촌리. 형은 배를 탔고, 지금은 다리로 건넌다. 여객선터미널, ‘희망식당’, ‘삼호다방’이 있는 ‘고도’와 유림해수욕장이 있는 ‘서도’는 삼호교로 연결돼 있다. 89년 당시는 다리가 없어 나룻배로 넘나들었다. 나룻배는 유일 한 교통수단이어서 섬에서 섬으로 들어가려 면 꼭 이 배를 타야만 했다. 형은 ‘삼호다방’ 을 나와 바로 배를 탄 것으로 보인다. 거문 리 선착장 3시30분. 나룻배 선장 이○우의 증언이다.

이○우의 진술에 따르면, 이내창은 8월 15일 오후 3시 30분경 거문리 선착장에서 남녀 2명과 함께 이○우가 운전하던 덕성호 선박을 타고 유림해수역장 초입인 연륙 교 제방 옆 간이 선착장에 하선하여 유림해수욕장 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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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위 덕성호 승선 무렵 이내창은 위 남녀 2명의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였고 이내 창의 배 삯은 여자가 계산하였다.

형은 3시 30분경 배를 타고 들어와, 오후 7시 경 시신으로 발견됐다. 거문도에 도 착하자마자 신발을 신은 채 남의 집 마루를 가로질러 황급히 도망쳤다가, 식당에서 태연히 볶음밥을 먹고, 삼호다방에서는 종업원에게 요구르트까지 사주며 흔적을 남 기다가, 배를 타고 들어와 불과 두 시간여 만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를 어찌 해석 할 것인가. 누가 그를 이 먼 곳으로 불러들인 것인가. 그는 누구에게 쫓겼을까. 무 슨 일을 해야만 했을까. 가방은 어디 있으며, 다이어리는 어디에 떨어뜨린 것일까.

유림해수욕장. 죽음의 자리. 유림해수욕장은 생각과 달리 좁고 초라했다. 밀려오는 바닷물 사이로 해초가 성가 시게 떠올랐다 가라앉곤 했다. 형이 28년 전 누워 있었을 그 자리에 초를 켜고 음식 을 올렸다. 바람이 갑자기 거세져 불이 자꾸 꺼졌다. 술잔을 돌려 한 모금씩 따랐다. 그날 밤 고두현감독이 그간 만들었던 영화를 바로 그 자리, 유림해수욕장에서 틀 었다. 2년 전 형의 이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등이 밤하늘을 가로질러 망막에 들어 오는 순간, 몇이 조용히 흐느꼈다. 파도가 천천히, 그러나 주기적으로 철썩 촤르르르르 자갈과 모래알을 굴려대며 소 리를 만들어내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영사막 속에서 형이 “학원자주화” 구호를 외치 고, “노태우정권 타도하자”며 주먹질을 하였다. 학우들이 따라 외치고 있었다. 스물 여덟의 형이 자기가 죽어 발견된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영화가 끝났을 때 우리는 동시에 한 곳을 바라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유림해수욕 장 옆 편 숲 속에 가로등 불빛이 비추어져 한 사람의 형상을 고스란히 만들어내고 있 었다. 거기 누군가가 눈, 코, 입 가득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모두 형이 순간, 잠깐 왔 다 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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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울로. 2017. 6.18(일). 형이 건너나오지 못한 길을 우리는 걸어서 나왔다. 삼호교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더없이 잔잔했다. 저 바다 위 어느 배에서 던져졌다면 유림해수욕장까지 조용히 흘 러왔을 것이다. 다시 ‘조국’호를 탔고, 우르르 배에서 내렸다. 28년 전 밤, 그러니까 8월 16일 저녁. 갑자기 마련된 배에 승선인원이 한정돼 있어 이십여 명만이 형의 유해를 가져오기 위해 거문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머지는 여 수 선착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때 전경들이 버스를 몰고 나타났다. 우왕좌왕 스크럼을 짜고, 서둘러 무장을 시 작했다. 마땅한 무기가 없자 길 옆 가로수 지지대를 하나둘 뽑기 시작했다. 손에 잡 히는 모든 것을 모조리 들었다. 돌멩이며 꼬챙이며 술병이며, 심지어 누군가는 바다 에서나 쓸 법한 이름 모를 기구들을 구해왔다. 생생히 기억난다. 그 밤 술 취한 전경 들과 우리들의 일촉즉발의 대치. 형은 이미 죽었고 우리도 여기서 죽어야겠다, 이를 악물었던 그 칠흑 같던 밤. 점심은 여수 출신 정상길(96)의 주장에 따라 여수시 중앙동 함남면옥에서 했다. 육 수를 스스로 부어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제조해 먹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정상길은 “ 이집 맛이 갔다”며 뻘쭘해 했지만 모두들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거문도 답사가 마무 리됐다. 여수엑스포역에서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전날 김선미 부친상 소식을 들은 일행들은 여수엑스포역에서 발권된 승차권을 모두 수원역으로 바꾸어 다시 굳 어진 몸으로 문상을 갔다.

함께한 사람. 고두현, 김경주, 김근한, 김영상, 김용수, 노용헌, 백기욱, 심규한, 양주연, 이석표, 이원근, 정상길, 정원옥, 조환준, 홍우림 김근한 “절박하고 절실하며 때론 일희일비 절망도 했습니다. 떠나오는 배 안의 엄청난 진동이 절대,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는 가슴 울리는 박동으로 전이돼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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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 “30주기 때는 꼭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신발 끈 질끈 매고, 다음을 다잡는 1박3일 거문도 기행이었습니다.”

노용헌 “드론 촬영을 하고 싶었는데 하필 당일 고장 나서 못한 게 가장 아쉽다. 두현후배가 준비해온 유림해수욕장에 서 형의 영상은 사실, 영상을 보면서 내내 형의 울음소리, 형의 목소리, 그리고 건너편 나무숲에 비쳐진 형처럼 보이는 얼굴, 우리의 행사를 형은 지켜보는 듯 했다. 파도소리, 조명이 만들어낸 형의 얼굴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무엇을 할까하고 생각한다. 어쩌면 풀리지 못한 의문을 우리는 어떻게 풀까하고, 형의 사인의 중요한 단서 는 가방, 그리고 안경, 왜 찾지 못했을까하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이석표 “머리를 짓누르는 일 속에서 해방되어, 젊은 친구들과 보낸 1박 3일 행복했습니다. 단지 이내창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가 무겁네요. 다음 기회에도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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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운동의 기록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신명철

공주 가는 길은 한적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대기에서는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 다. 하얗게 비꽃을 피워냈다. 숲은 몸을 흔들어 젖은 비를 털어낸다. 광덕산을 끼고 유구에서 마곡사로 향했다. 길은 구불구불 이어져 그리 깊지 않은 데도 적막의 세계 로 안내한다.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고 싶다. 생각은 길을 벗어난다. 마음 가는 대로 몸이 따를 수 있다면. 마곡사 입구에서 개울 길 따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상가를 알리는 표식이 붙 었다. 어설퍼 보이는 폐교에 조등이 걸려 있다. 운동장은 진흙창이다. 교실이었을 공 간 한 칸이 분향소가 됐다. 육십 중반의 상주는 초췌했다. 구십 노모를 떠나보내는 일이 담담하기에 추슬러야 할 감정이 넘치는 듯했다. 산중턱 안에 놓인 폐교는 고즈넉하다 못해 외롭다. 비는 억수로 쏟아 붓다가 잠시 쉬기를 반복했다. 농민운동을 하는 분들이 문상객 겸 상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이 들 그림이 걸렸을 벽면에 어머니와 자식의 사진을 붙여 놨다. 삶의 흔적을 돌아보고 싶은 아들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조등이 켜졌다. 마을장례는 오랜만이다. 그러고 보니 상여를 내는 장례를 본 기억도 가물가물하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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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오경애님 조문

다. 이제는 낯선 풍경이지만 살갑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 상을 치러주니 이런 시도조차 가능할 수 있었다. 선풍기가 돌아도 땀은 비 오듯 쏟아진다.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매한가지라 했더니, 앞산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비가 퍼부어댄다. 비를 쏟아내는 구름의 깊이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한다 한다.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그도 그럴 수 있겠다 싶다. 태양의 빛에 타버리지 않을 구름이란 물방울을 얼 마나 품어야 할까. 구름은 한시적이지만 집요하다. 불온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깊다. 잔뜩 찌푸린, 구름과 맞닿은 길에서 나는 불순한 습기에 부르르 떤다. 진저리친다. 먹장구름이 세상을 덮어도 보이지 않는 태양은 변함없이 작열할 테다. 빛이 강렬하 다는 게 희망일까. 사람살이가 단순하지 않듯이 희망이란 단어도 교과서적일 수 없 다. 죽음이 일상이 되지 못하듯 희망도 순탄치 않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포괄적 과거청산 의지를 천명했다. 이에 따라 모든 국가 폭력을 함께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했다. 의문사 유족은 통 크게 합의했다 말한다. 누가 누구를 받아주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날 이후로 이내창 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의문사에만 한정할 수 없었다. 이미 그 시절부터 의문사는 계륵이었다. 집요함을 넘어 악착같다고 노골적인 비 난을 받기도 했다. 정말 중요한 사건이 많은데, 의문사는 이제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 느냐는 빈정거림도 감수해야 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내창 사건을 다루는 시늉도 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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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고 2010년 종료했다. 그해 겨울, 의문사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았던 몇몇이 모였다. 과거청산운동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 즈음에 한국전쟁 유족과 본격적 인 관계를 맺게 됐다. 2011년 봄이 한창이던 때다. 그날 만난 한국전쟁 유족들은 점잖고 진중했다. 활동 가들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고 유족과 함께 반드시 이뤄내자 한다. 지극한 공손함에 진땀이 났다. 목소리가 내는 파동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앞으로의 여정이 만만치 않을 거란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렇게 만난 대한민국 유족들은 칠십, 팔십대이다. 의문사 유족은 자식을 잃었고, 한국전쟁 유족은 부모를 잃어 연배가 비슷하다. 돌이켜보면 의문사 유족이 여의도 에 노숙을 하자고 나설 때는 한참 젊었다. 지금 내 나이보다 조금 많거나 적은 나이 다. 어느새 나도 육십에 가까우니, 우리는 함께 늙어간다. 유족이 이십여 년을 누구 의 부모라는 이름으로 살 때 과거청산 활동가는 국가기구에 들어가기도 하고, 단체 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연구자로서 위치를 잡기도 했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 자식 을 낳고 혹은 홀로 단단해지면서 중년이 됐다. 세월은 같이 흐른다. 낡아간다. 비슷 하게 닮아간다. 유족의 투쟁은 민주화 과정에서 훌륭한 역할을 했다. 아버지 어머니로 모셨다. 언 제나 그리 부르고, 지나쳐도 감내했다. 자신들이 투쟁하지 않았으면 특별법이 생기 지도 않았고, 국가기구는 세울 수 없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다. 유족이 나서지 않 고서야 불가능했다. 때론 거칠고, 무모해도 유족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민주화 운동 의 가장 큰 공로자이자, 산 증인이다. 특별법을 만든 장본인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다. 더 무엇이 필요한가, 유족에게. 유족에게서 노인을 볼 수는 있어도 어른을 보기 쉽지 않다. 가슴이 아프다. 하루라 도 빨리 사인을 밝혀 마음 편히 쉬게 해주고 싶었다. 잘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게 모두 활동가 탓이라 해서 되겠는가. 언제부턴가 활동가를 하대하는 풍조가 생겨났 다. 유족이 국가기구에 취직시켜줬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한다. 밥 빌어먹으려고 의 문사 사건을 팔고 다닌다 한다. 유족이 자식이라 부르던 활동가에게 모멸감을 준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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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 고집불통인 척하는 것도 부끄럽고, 나이듦의 지혜를 더하지 못하고 무모하기 만 한 것도 안쓰럽다. 유족 앞에 줄서기를 바라지 말았으면 한다. 내가 주도권을 잡 아야 한다는 생각도 버렸으면 한다.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경험한 실패는 우리가 감내해야 한다. 국가 기구에 들어가겠다는 사람을 백안시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이도 있지만 옳지 않다. 불편부당한 태도이다. 그들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내 사건은 해결되기 바라 는 것은 모순이다. 의문사 30년, 오늘은 많이 부끄럽다. 놓아버리고 싶은 것이 많다.

활동가에 대해서 대체로들 빠트리는 게 있어 보인다. 덜 조심스럽다. 자원봉사와 차이를 못 느끼는 감수성도 흔하다. 유족은 그렇다 쳐도 그래서는 안 될 사람들이 어 찌 이럴까 놀라게 한다. 타박을 평가라 하고, 투정을 비판이라 우기면서 원칙을 세우 면 융통성 없다 하고, 헌신하는 품성에는 감사할 줄 모른다. 과거청산운동에 10년, 20년을 헌신한 사람은 과거청산운동 최고의 전문가이다. 입법, 조사, 연구, 조직, 대중사업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정보의 집산지이자 가 치의 생산 단위이다. 그들은 과거사 사건을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연구자이다. 그들 이 과거청산운동의 맥을 짚고, 쟁점을 만들어낸다. 국회든, 행정부든 과거청산 과제 를 국가가 책임지라 끝없이 요구하고 각인시킨다. 정책 자료를 만들고, 쟁점을 비교, 제안한다. 성명서를 만들고 기자회견을 조직하기도 한다. 그들은 실천운동가이다. 그들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다시 쓰고 있다. 과거청산이 이뤄지지 않고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없다. 그 일에 24시간을 쓴다.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면서도 고마움을 표하는 걸 보지 못한다. 그게 서운하다는 게 아니다. 잘못됐다는 거다. 이제는 별로 기대도 없다. 결기 하나로 버 텨온 삶이다. 과거청산운동에 인생을 걸었기 때문에 소름끼치게 슬프고 억울한 날 들을 감내할 수 있다. 그래서 활동가는 과거청산이 과업이기도 하고, 직업이다. 철학 이다. 과거청산운동가로 만들어진 몸이다. 닳고 삭아서 후줄근해지더라도 삶이 추 레해지지는 않는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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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운동을 필생의 과업으로 대할 사람이 많아야 비로소 해결의 터를 닦는다 할 수 있다. 그래서 활동가들에게 가정을 유지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물적, 정신 적 토대가 보장되어야 한다.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해야 한다. 과거청산운동의 진척 과 성과와 함께 과거청산운동에 헌신하는 활동가의 삶의 질도 높아져야 하고, 존중 받아야 한다. 그들은 오늘도 활활 타고 있다.

과거청산운동이 새로운 전환점에 들어섰다. 대통령이 바뀌어서도 아니고, 유족이 전면에 나서서도 아니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연이 닿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소수가 역할을 자임한 만큼 실천했다. 어려운 시절을 견뎌냈다고 하는 게 적당하다. 과거청산운동은 하루로 거르지 않고 끊임없이 작동했다. 샘물과 연못을 잇는 대나 무 수로는 늘 젖어 있었다. 간헐적이다. 그 위로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물줄기가 되 겠다고 나선다. 이내창기념사업회가 변화의 동인이다. 총회에서 결의한 대로 의문사 30년을 준비 하기로 했다. 이내창을 기억하는 일에서, 이내창을 포함한 모든 의문사 사건을, 유족 을 받아 안기로 했다. 광화문광장에서의 만남과 촛불의 경험이 결의에 근력을 붙이 는 역할을 했다. 그 출발을 방송과 함께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오래 준비한 일이 다. 일이 겹쳐 몸은 고단해도 시의적절했다. 3월 25일에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내창 사건을 재조명했다. 배정훈 PD가 오 래전부터 다루고 싶어 했던 의문사 사건, 그 중에서도 이내창 사건을 마침내 방송하 기로 마음먹었다. 방송은 미제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하는 게 콘셉트인데, 이 내창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늪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입장에서는 무조건 해 야 하는 일이지만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방송이 꼬이면 참 민망한 일이다. “우리가 계속 소리를 내야 한다고, 잊지 않았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PD는 말한다. 가자고 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팀은 여수, 거문도에서 2주를 보내며 샅샅이 훑었고, 한 팀은 서울, 인천을 오갔다. 이내창기념사업회에서는 큰형님과 김성희, 조 환준이 인터뷰에 나섰다. 방송국에서, PD와 별도로 검증 작업을 거쳐 방송을 완성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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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 유가족 아카이브 사업 인터뷰

<다음세대의 과거청산> 강좌

다. 새벽 3시쯤에 야근을 시작한다는 그들을 두고 홍대 어름에서 소주를 마셨다. 조 금씩 건강에 금이 가기 시작한 세 사람이 말보다 술을 앞세웠다. 2017년 최대 사업은 ‘아카이브’와 ‘강좌’ 사업이다. 아카이브 사업은 의문사진상 규명운동 30년을 기록하는 일이다. ⑴ 의문사유가족의 사진영상 아카이브 구축 ⑵ 의문사유가족의 구술아카이브 구축과 스토리펀딩 홍보로 구분할 수 있다. 아카이 브 사업은 ‘인권재단 사람’과 ‘4.9통일평화재단’에 프로젝트 공모 신청을 하면서 본 격화했다. 두 곳에서 1100만 원의 지원금을 확보했다. 우선 공부를 먼저 하기로 했 다. 이내창기념사업회 회원, 자유인문캠프 등 후배 20여 명이 일상적으로 결합했다. 강좌 사업명은 <다음세대 과거청산>이다. 4월에 시작한 1차 강좌명은 ‘지연되는 정의와 역사의 반복’이다. 총 6강으로 구성했고, 주최는 4.9통일평화재단·이내창기 념사업회·자유인문캠프기획단 3개 단체가 함께했다. 아카이브와 강좌는 사업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늙어가는 이내창기념사업회 선배 와 젊은 후배들이 결합했다는 점이 빛난다. 과거청산운동은 다음 세대까지 이어갈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부끄러운 과거를 넘겨주는 부끄러운 선배이지만, 부끄럽 지 않은 삶을 살아갈 후배들을 보고 싶다. 그 역할을 나누고 애쓰는 이내창기념사업 회가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

2017년은 다르다. 신선과 개운, 쾌청 어디에 속하는지 몰라도, 맑았다. 사람들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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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순 열사 이장. 2017. 7. 2

저마다 빛이 났다. 희망은 현재진행형이다. 숨결이 숨결을 만나 한 호흡을 이뤄낸 경 험은 과거와는 다른 오늘을 만든다. 과거청산운동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관심 밖의 일이 과제가 됐다.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나선다. 격변의 시간이다. 기대가 커졌지 만 나는 조심스럽다. 지금 당장이라도 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것처럼 보 인다. 국회의원의 목소리도 크다. 2017년은 선물처럼 다가왔다고 한다. 세상이 바 뀌었다고, 많은 것을 이뤄낼 거라고들 한다. 그런데 왜 자꾸 불안한 거지? 입 안에 돌 이 씹히듯 버석거리는 건 뭘까. 다만 지금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지난 겨울에서 봄까지의 위대한 경험이다. 교감이 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숨을 쉬었다. 경험은 과거와는 다른 오늘을 만든다. 오늘을 살아갈 지혜를 가질 수 있었다. 믿고 한 발 나아간다. 2017년 3월부터 7월까 지 과거청산운동은 이내창기념사업회의 사업과 함께였다. 6.10 범국민추모제에도 참여했고, 박태순 열사 이장에도 함께했다. 그 외에도 많은 일들을 벌이고 치렀지만 주요 활동을 특집으로 다루기 때문에 유해발굴공동조사와 과거청산결의대회만 간 략하게 언급한다.

4차 유해발굴공동조사가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진주군 명석면 용산리에서 있 었다. 지난 2014년에 이어 두 번째다. 1차 발굴지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38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유해는 나무껍질처럼 뼈의 강건함을 잃었다. 흙도 뼈도 푸석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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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유해발굴공동조사. 진주군 명석면 용산리

푸석하다. 힘이 가해지면 부스러져버리니 나도 모르게 손길이 섬세해진다. 유해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감정은 노골적이지 않다. 유해발굴의 일은 대부분 노가다이다. 입구를 다듬고, 길을 만들고 물길을 낸다. 건 장한 젊은 자원봉사자들도 녹초가 되기 마련이다. 처음 며칠은 삽질과 괭이질로 하 루를 채웠다. 이후엔 유해가 있는 지점까지 호미로 파 들어가고, 흙을 퍼 나른다. 양 동이에 흙을 담아 발굴지 옆에 버리는 일이 끝없이 반복된다. 흙은 쌓여 산을 이루고 발굴지는 차츰 아래로 깊이 내려간다. 발굴한 유해는 수습해 세척과 강화처리를 한다. 뼈는 지상으로 나오면 급속하게 부식이 진행된다. 장기 보관을 위한 조치이다. 유해는 60년 만에 빛을 봤지만 가족 에게도, 추모시설로도 못 가고 컨테이너 박스로 들어가야 한다. 임시 보관 장소다. 플라스틱 통에 담긴 유해에 절을 올리는 유족들 심정이 오죽할까. 한동안 부산하던 산 아래 계곡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갔다. 인적이 없었던 모습 그 대로 적막에 잠긴다. 숨었던 야생동물들도 본래의 자리를 차지한다. 열흘 남짓 연구 자와 활동가, 자원봉사자들이 흘린 땀은 1년 후를 기약한다. 유해발굴은 소소해 보여도 한 번에 2천만 원이 넘는 예산이 필요하다. 기계의 도 움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노고로 완성하는 일이라 숙박비와 밥값이 가장 큰 비용을 차지한다. 매번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으고, 모금을 통해서 치러낸다. 국가 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겠다고 나섰는데 모금은 늘 순조로웠다. 고맙다. 사람의 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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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 2017. 6. 10

은 위대하다.

7월 4일에는 과거청산 결의대회의가 열렸다. 과거청산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 했다 자평한다. 정세균 국회의장의 인사말은 부드럽지만 강력했다. 우원식 원내대 표는 결기를 세우며 법 통과를 약속했다. 한국전쟁 유족 400여 명, 인권침해사건 유 족과 단체에서 100여 명이 참가해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이 가득 찼다. 구호 소리 도 쩌렁쩌렁하고, 박수도 떠나갈 듯했다. 문재인 정부의 공약사항이기도 해서, 실현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얼굴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반 가운 얼굴도 많다. 국회 행안위에서는 우선 심의 안건으로 다루기로 했다. 19대 때 에는 13개 법안이 발의됐지만 논의조차 시작도 못하고 모두 폐기됐는데, 20대 국회 에서는 속도가 붙기를 기대한다. 겉은 화려하나 속은 아리다. 주최로 세우지 않으면 함께하지 않겠다는 우격다짐 도 있었고, 불평과 왜곡도 여전했다. 일은 소수에게 집중됐다. 조직하고, 점검하고, 독려하는 일에서부터 행사 준비하고 자료집 만들고, 하다못해 현수막 거는 일까지 여전히 몇 사람이 해내야 했다. 과거청산운동은 너나없이 늙었다. 대접을 받아야 하 는 사람들만 한 가득이다. 요즘 교육운동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킨 모임이 있다. 회원이 1000명에 이르 니 작지 않은 조직이다. 발랄하고 젊다. 이 조직이 얼렁뚱땅 정했다는 원칙 두 가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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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정의를 향한 과거청산 결의대회. 2017. 7. 4

가 있다. 전국 행사에서 한 번 연단에 올라간 사람은 다음 행사부터는 노란 조끼를 입고 ‘자봉’을 해야 한다. 누구든 일을 하겠다고 적극 나서는 사람이 운영진이 된다. 이내창기념사업회에서 두 번째는 실현하고 있는데, 전국 행사가 없으니 첫 번째는 그냥 다들 자봉에 나서는 걸로 해야겠다. 회춘이란 게 불가능한 일이니 젊은 벗들이 관심 가져주길 소망한다.

장마는 늘 한시적이다. 구름의 깊이가 무한해 보여도 억지로 버틸 수는 없다. 구름 의 윗자리는 불에 그을리고, 아래쪽은 물을 쥐어짜낸다. 그렇게 엷어지다 엷어지다 바삭바삭해진다. 그리고 소멸한다. 과거청산운동에도 볕이 들기를 바란다. 맑은 날 운동장에 내가 서 있지 않아도 무방하다. 빛이 희망이 되어 순탄한 일상이 가능하다 면, 한가하고 싶다. 박수를 치는 사람이면 좋겠다 생각한다. 선의가 선의로 받아들여 지는 날이 비 개인 날 아침처럼 맑게 오리라 믿는다. 그러는 사이 늙어갈 것이다. 잘 늙고 싶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 문자메시지가 온다 /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 그리 알라고 한다 / 모든 아버지는 촌스 럽다’ 이상국의 시 <혜화역 4번 출구> 일부이다. 나도 촌스러워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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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의문사유가족 구술·영상·사진 디지털아카이브 구축사업

의문사유가족 디지털 아카이브 사업 경과보고

정원옥

자료의 수집·저장을 넘어 어떻게 활용·확장할 것인가

이혁승

이내창 기념사업회 디지털 아카이브의 첫 걸음을 응원합니다.

김유승

의문사 유가족을 기록하는 이유

이찬민

잃기 위해 시작한 아카이브, 고민과 출발

장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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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끈덕지게 어깨동무>는 의문사유가족의 목소리를 지면에 담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왔 다. 국가폭력 사건이 유가족에게 어떤 고통을 남겼는지,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싸움에서 유가족 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기록하는 것이 의문사 사건의 재발을 막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 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년에 두 번 발행되는 소식지의 성격상 많은 유가족의 목소리를 싣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의문사유가족의 목소리를 담는 일을 기념사업회의 공식적인 사업으로 해보자는 아이디어는 소식지의 한계를 넘어보자는 운영위원회의 문제의식에서 나왔다(서병훈 운영위원장이 제안 했고, 이혁승 운영위원이 적극적으로 받았다). 소식지를 받아보는 한정된 사람들이 아닌, 더 많 은 시민들에게 의문사유가족의 목소리를 듣게 하고, 수집된 자료를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의문 사유가족 디지털아카이브 구축 사업’(이하 아카이브 사업)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시의적으로도 아카이브 사업은 의미가 있었다. 2018년은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이 시작된 지 30 년이 되는 해이고, 2019년은 내창이형의 30주기를 맞는 해이기 때문이다. 의문사의 진실을 밝 히기 위해 싸워온 유가족의 삶을 사회적으로 기억하도록 하는 일이 곧 이내창을 기억하는 30주 기 기념사업이기도 할 것이다. 기념사업회는 2017년 총회를 거쳐 아카이브 사업을 기념사업회 의 공식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이번 특집은 30주기 기념사업의 하나로 진행 중인 아카이브 사업에 대한 회원들의 이해를 높이 기 위해 마련됐다. 그 동안 아카이브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에 대한 정원옥의 경과보고 와 디지털아카이브의 성격과 활용 방안을 고찰한 이혁승의 글을 싣는다. 중앙대학교 문헌정보 학과 교수이자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인 김유승 교수의 글은 아카이브 사업에서 유념해야 할 점들을 세심하게 짚어준 것이다. 구술팀에 참여하고 있는 이찬민은 사전교육에서 배우고 느낀 점들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영상팀에 참여하고 있는 장민경이 이번 아카이브 사 업의 첫 면담 사례인 김을선 어머니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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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의문사유가족 디지털 아카이브 사업 경과보고: 사업단 조직에서 의문사유가족 면담까지 정원옥

아카이브사업단 기획팀

아카이브사업단을 조직하다 2017년 총회에서 내창이형 30주기 기념사업의 하나로 ‘의문사유가족들의 삶·투 쟁을 담은 디지털아카이브 구축’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기념사업회 단위 에서 추진하기엔 벅찬 과제이고, 예산 확보 방안도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자식을 잃은 고통을 투쟁으로 승화하며 30년 넘게 진상규명운동을 해 오신 의문사유가족들의 삶과 투쟁은 더 늦기 전에 기록될 필요가 있다”는 사업의 취지에 공감하면서 기념사업회 공식 사업으로 승인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구술, 영상, 사 진 등의 자료를 수집하고,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한다는 사업의 윤곽만을 제시했 을 뿐, 디지털아카이브를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모으는 일이었다. 사업의 취지에 공감하면서 재능 을 기부해줄 기념사업회 안팎의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먼저 재학생 단위에 참 여를 제안했다. 운영위원인 고두현과 <끈덕지게 어깨동무>에 종종 글을 보내준 강남 규를 비롯해 자유인문캠프 기획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재학생 장민경과 이재정에게 사업의 취지를 설명하였는데, 모두 흔쾌히 함께 하겠다고 나섰다. 더 고마운 것은 이 후배들이 아카이브 사업을 주변에 알리면서 참여하고 싶어 하 는 사람들을 물색하고, 추천해준 것이다. 고두현은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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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면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양주연 선생님을 소개해주었다. 강 남규는 막 제대하고 복학을 앞두고 있는 이찬민(<중앙문화> 기자)을, 이재정은 부득 이한 사정으로 자신은 참여하지 못하는 대신 조은희(<중대신문> 기자 출신)를 추천 했다. 아카이브 사업이 산뜻하게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재학생 단위의 열렬한 호응에 힘입은 바가 크다. 재학생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아카이브 사업은 의문사유가족의 삶 과 투쟁을 기록하는 사업일 뿐만 아니라, 진상규명운동의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가는 사업으로 그 의미가 더 커졌다. 현재 아카이브사업단은 기획팀, 구술팀, 영상팀, 사진·자료수집 팀, 아카이브팀, 스토리펀딩 홍보팀으로 나누어져 있다. 처음부터 팀이 이렇게 나뉜 것은 아니고, 사 업의 내용을 구체화하면서 새로운 팀이 만들어지고 사람을 모으는 방식으로 팀이 늘 어났다. 현재 아카이브사업단의 소통창구가 되고 있는 카카오 톡에는 17명이 모여 서 활동하고 있다. 아카이브팀과 스토리펀딩 홍보팀은 1차 자료가 어느 정도 수집되 는 하반기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아카이브 사업단 구성과 참여자> 구분

참여자

기획팀

신명철, 정원옥, 전경미

구술팀

강곤, 강남규, 이찬민, 조은희

영상팀

고두현, 양주연, 장민경

사진·자료수집팀

조환준, 노용헌, 최호식, 이재각

‘인권재단 사람’, ‘4.9통일평화재단’ 지원 사업에 선정되다 아카이브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된 것은 ‘인권재단 사람’과 ‘4.9통일평화재단’의 지 원 사업에 선정되면서부터였다. ‘인권재단 사람’은 “폭력과 차별에 반대하고, 인권의 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인권단체의 현장 활동, 연대 사업, 교육 및 기록 작업”등의 사 업에 최대 6백만 원을 지원하는 <인권프로젝트-온>이라는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 ‘4.9통일평화재단’은 “우리 사회의 인권수호 및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며 한반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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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개인 및 단체의 다 양한 공익 활동”에 최대 5백만 원을 지원 하는 <동행> 사업을 7년째 이어오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인권재단 사람’에는 “의 문사진상규명운동 30년의 기록: 의문사 유가족 사진·영상 아카이브 구축사업”으 로, ‘4.9통일평화재단’에는 “의문사진상규명운동 30년의 기록: 의문사유가족의 구 술아카이브 구축 및 스토리펀딩 홍보”사업으로 선정되어 각각 6백만 원과 5백만 원 을 지원받게 됐다. 사진과 영상 아카이브, 구술과 스토리펀딩 홍보로 사업내용에는 차이가 있지만, 의문사유가족의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함으로써 의문사진상규명 운동 30년을 기록하겠다는 사업의 취지와 목표는 대동소이하다. 사업의 취지와 목 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업의 배경 및 필요성 1988~1989년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의 ‘135일 농성’으로 시작된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은 1998~1999 년 여의도에서의 ‘422일 천막농성’을 통해 김대중 정부로 하여금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을 통과시키게 하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법과 국가기구에 의한 과거청산을 실현시킨 첫 사례로 평가 되고 있다. 하지만, 과거청산의 포문을 열었다는 역사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은 성공 하였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1기 2000~2002, 2기 2003~2004)에서 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2005~2010)에 이르기까지 11년의 국가기구 조사에서도 많은 의문사 사건의 진 실이 규명되지 못했거나 인정이 된 경우에도 책임자와 가해자가 적시되지 못하는 등의 한계를 낳았기 때 문이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받은 사건 의 경우에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기각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진실규명과 명예회복만을 바라며 진상규명운동에 참여해온 대다수 유가족들에게는 국가기구의 조사 결과가 오히려 더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준 셈이다. 국가폭력에 의한 대표적 인권침해사건인 의문사 문제가 해결되지 못 하였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민주화 수준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생명권 및 인권에 대한 존중이 여전히 미 흡한 사회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 사업은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이 과거청산운동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진실규명을 이루지 못했고 유가족에 대한 사회적 평가마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기획됐다. 더욱이 2018년은 유가협 의문사지회가 설립된 지 30년이 되는 해다. 의문사지회 설립 30주년을 얼마 앞두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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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시점에서 의문사유가족의 구술 및 사진을 수집·보존하고 영상을 제작·기록하여 디지털 아카이브로 공개하려는 사업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필요하다. 첫째, 이 사업은 의문사진상규명운동 30년이 갖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밝히고 성과와 한계를 기록 하기 위해 요청된다. 둘째, 대다수 유가족들이 80대로 매우 연로한 상황에서 유가족들의 증언을 수집· 기록·보존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셋째, 의문사 관련 자료들은 산재되어 있거나 유실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사진 및 기록물들을 디지털화하여 보존·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유가족의 구술·사진·영상 아카이브가 구축된 홈페이지의 개설을 통해 의문사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 시키고, 미해결 인권침해사건의 자료저장실 및 생명권 및 인권 교육의 플랫폼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사업의 목적 및 기대효과 의문사유가족의 구술·사진·영상 디지털아카이브 구축을 통해 의문사진상규명운동 30년을 기록하 려는 사업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증거가 부족한 의문사 사건의 특성상 유가족의 증언은 가장 강력한 증거로 기록되고 보존될 필 요가 있다. 유가족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사업은 유가족의 목소리를 의문 사 사건의 중요한 증거자료의 하나로 남길 수 있게 한다. 둘째, 유가족들의 삶과 투쟁을 보여주는 사진과 기록물들을 디지털로 복원하여 영구보존하고, 오픈 아카이브의 구축을 통해 연구자, 학생, 시민 등 의문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자료와 정 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셋째,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선봉에서 우리 사회의 진보를 이끈 운동의 주체로 의문사유가족들의 삶 과 투쟁을 재평가하고, 진상규명운동 30년의 기록이 미해결 인권침해사건의 진실규명과 희생자들의 명 예회복을 위한 사회적 실천의 전환점이 되도록 한다.

기념사업회가 외부 지원 사업에 지원하여 선정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재정이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1100만 원을 지원받아 재학생들에게 최소한의 활동비를 지 급하고 진행비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더 큰 의미는 아카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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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브 사업의 필요성과 목적에 대해 사회적 공감과 지지를 얻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아 카이브 사업에 힘을 보태준 ‘인권재단 사람’과 ‘4.9통일평화재단’에 다시 한 번 감사 의 마음을 전한다.

두 달 간의 사전교육을 진행하다 아카이브 사업은 의문사유가족을 면담하기 위한 사전교육을 시작하면서 본격화 됐다. 사전교육은 3월 8일부터 4월 26일까지 8회에 걸쳐 진행됐다. 국가기구가 발 간한 보고서를 읽고 토론하는 공부에서부터 의문사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논문들 과 진상규명운동을 다룬 영화, 유가족의 구술집에 이르기까지 의문사 사건과 유가 족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교육이 한 축을 이루었다면, 면담과 디지털아카이브 구 축에 필요한 방법론을 습득하는 것이 다른 한 축이었다. 이 외에도 PNU Locality Aarchives, 김세진·이재호 기억저장소, 세월호 아카이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OPEN ARCHIVES,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자료관 등 타 기관·단체의 아 카이브를 검토하고, 참조할 만한 점들을 분석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사전교육은 아카이브 사업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전수해준 많은 분들의 노력으 로 더 풍성해질 수 있었다. 기념사업회 내부에서는 신명철, 조환준, 정원옥, 강곤, 이 혁승이 각자의 전문지식을 나누어주었다. 외부 자문으로는 ‘4.9통일평화재단’의 안 경호 사무국장, 박현주 과거사 연구자, 김유승 중앙대 문헌정보학과 교수가 참여해 주셨다. 한편, 사전교육은 시종 진지하면서도 활기찬 분위기로 진행됐다. 두 달 간 진행된 사전교육에서 재학생들은 거의 100%에 가까운 출석률을 보여주었는데, 재학생 단 위의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 적극적인 참여가 기념사업회 선배들과 외부 자문가들 을 긴장시키면서 사전교육의 충실도를 높이는 데 큰 힘이 됐다. 사전교육은 매주 수 요일 7시 합정역 근처의 한국YMCA 본부에서 진행됐다. 조환준 형이 매번 공간을 빌리느라 고생했다. 사전교육 내용을 정리하고 밴드 등을 통해 홍보하는 데 애쓴 전 경미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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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사전교육 일정 및 내용> 일시

성격

자문

사업 설명 및 교육 일정 확인

비고

3.8

예비모임

이혁승·정원옥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차 Ⅰ』 1장, 2장, 5장, 8장, 권고

소개와 발표

3.15

국가기구 조사

안경호

『진실을 향한 여정』

발제와 토론

Ⅱ. 의문사 발생의 구조적 요인과 관행

3.22

국가기구 조사

신명철

3.29

학위논문

정원옥·박현주

4.5

운동

다함께

4.12

사건분석

신명철·조환준·안경호

4.19

방법론

강곤

구술사 방법론

강의와 토론

4.26

방법론

김유승 (중앙대 문헌정보학과)

아카이브 구축 방법론

강의와 토론

이재승, 조현연, 김원, 조돈문·노광표 『국가폭력에 의문사 사건과 애도의 정치』 (2014) 서론 1 - 45쪽 『한국이행기 정의의 딜레마』(2015) 1-31쪽 경순 감독의 <민들레> 정경식 어머니, 김을선 구술집 <어머니> 아카이브 대상 사건 분석

발제와 토론 발제와 토론 감상과 토론 발제와 토론

수집정책의 마련 김유승 교수는 ‘노근리 학살사건’의 기록을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한 기록전문가 이기도 하다. 흑석교정 87학번이며, 89년 내창이형 진상규명투쟁 때는 교문 앞 시위 를 하다가 노량진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었단다. 그는 내창이형 아카이브를 만드는 줄 알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왔다가 의문사유가족 아카이브를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 에 깜짝 놀라면서 몇 가지 우려되는 점들을 지적해주었다. 아카이브의 대상이 되는 의문사유가족이 대략 30여 명이라고 할 때, 기념사업회의 역량으로는 부담스러울 수 있는 규모이며, 아카이브를 구축·유지하는 비용이 지속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현실적 어려움을 감안하고서라도 아카이브 를 만들려고 할 때, 그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아카이브의 목표와 내용, 사회적 기 여를 담은 ‘사명’의 작성과 어떤 기록물을 어떤 방식으로 어느 범위까지 수집할 것인 가에 대한 수집정책을 명문화하는 것이라고 조언해주었다. ‘사명’은 “의문사유가족 들의 기록을 어떤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며, 수집 정책은 기록물들을 무작위로 수집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김유승 교수의 자문에 따라 초안이나마 아카이브 수집정책을 마련했다. 전체를 싣 는 것은 지면의 한계로 어렵고, 가장 중요한 아카이브의 ‘사명’만을 소개하자면 아 래와 같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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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박태순의 어머니 홍흥유님.

의문사유가족 디지털 아카이브 수집정책(초안) Ⅰ. 사명

A. 목적

의문사유가족 디지털 아카이브는 국가폭력에 의한 의문사 사건의 피해자이자 진상규명운동의 주체 인 유가족의 목소리를 담은 음성, 영상, 문서, 박물 등 다양한 유형의 자료들을 포괄적으로 수집하여 디 지털화한다. 의문사유가족 디지털 아카이브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끈 사회운동의 주체로 의문사 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함으로써 의문사의 진실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국가적·사회 적 실천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데 기여한다. 의문사유가족 디지털 아카이브는 의문사 사건의 사회적 기 억을 구성하는 유가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집·기록·디지털화하고, 이를 모든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 용할 수 있는 개방형·참여형 아카이브를 지향함으로써 미해결 인권침해사건의 자료저장실, 인권교육 플랫폼으로 활용되도록 할 것이다.

B. 이용자 정의

의문사유가족 디지털 아카이브는 본 아카이브의 자료를 온라인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모든 이를 이용 자로 규정한다. 유가족과 추모·기념사업회 회원, 시민사회단체, 학생과 교사, 학술연구자, 문화예술 관 련 종사자 등 의문사 사건 및 유가족의 살아온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모든 시민을 포함한다.

의문사유가족을 만나러 가다 아카이브사업단의 조직에서부터 ‘인권재단 사람’과 ‘4.9통일평화재단’ 지원 사업 신청, 사전교육 진행과 수집정책 마련까지 2월부터 4월까지 숨 가쁜 일정이 마무리 된 이후에야 비로소 유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게 되었다. 유가족들의 현재 상황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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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식의 어머니 김을선님.

허원근의 아버지 허영춘님.

모두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수소문을 통해 연로하신 분, 병환 중에 계신 분, 아카 이브 참여 의지가 높으신 분들을 우선 대상으로 하여 섭외를 하고 면담을 진행하기 로 하였다. 첫 면담 대상은 대우중공업 노동자로 일하다 의문사한 정경식의 어머니였다. 마 산 진동으로 내려가 김을선 어머니를 면담하는 과정에서 사업단은 부모님뿐만 아니 라 형제·자매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의문사 는 부모님의 삶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삶을 뒤바꾸고 가족이 해체되는 고통을 안겨준 사건이라는 것을 현장에서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상규명운동에는 부모님 대신 형제·자매들이 참여한 사례가 적지 않다. 또한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경우에는 형제·자매들의 목소리를 대신해서 들을 수밖 에 없다. 부모님이 살아 계신 경우라 하더라도 자식을 잃고 싸우는 부모님을 돌봐야 하고 자신의 고통도 견뎌야 하는 형제·자매들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기록된 적이 없 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까지 정경식 사건의 김을선 어머니와 누이 정경연의 면담이 마무리됐다. 박태순 사건의 홍흥유 어머니와 누이 박희순, 허원근 사건의 허 영춘 아버지 면담은 진행 중이다.

함께 길을 만들면서 가야 하는 일 6월 22일에는 ‘진실과 정의를 향한 과거청산결의대회’를 앞두고, 진화위법 개정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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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과정을 설명하는 의문사유가족들과의 간담회가 있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하지는 못 했지만, 참석한 몇몇 유가족들에게 아카이브 사업의 취지와 목적에 대해 간단히 설 명 드렸다. 유가족들은 왜 이내창기념사업회가 이러한 사업을 하는지에 대해 의아 해하시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보 존하기 위해 곧 찾아갈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반가움과 기대를 감추지 못하셨 다. 이미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말했을 테지만,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다시 한 번 기 운을 내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은 것이 유가족들의 심정일 것이다. 아카이브 사업 단을 기다리고 계실 유가족들에게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남았다. 아카이브 사업은 2017~2019년까지 진행되는 중기 프로젝트다. 이제 막 면담이 시작되었고, 디지털 아카이브를 어떤 형태로 구축할 지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의 가 필요하다. 스토리펀딩을 통한 홍보도 기념사업회로서는 또 하나의 실험이다. 아 카이브가 구축된 이후에도 이용자들이 더 편리하게 이용하고 자주 찾을 수 있게 하 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관리 방안을 세워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지만, 기념사업회의 역량을 믿기 때문에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기념 사업회 회원들과 함께 길을 만들면서, 서로를 믿으면서 가야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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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의 수집·저장을 넘어 어떻게 활용·확장할 것인가 이혁승

아카이브사업단 아카이브팀

카이사르는 자신의 배에 불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적들이 그의 바다를 통한 통신 능력을 막으려 하자 자신의 배를 태워버렸다. 이 불길은 부두를 태우고 나서 번 지고 번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까지 불태우기에 이르렀다.

플루타코스가 묘사한 세상의 모든 지식이 있었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마지 막 장면이다. 기원전 220년 국제무역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는 학술과 배움의 전당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그 시대 귀족들은 학문의 완성도가 높았던 아테 네와 로도스는 물론이거니와 이전 시대 최고의 도서관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 도서 관의 책들을 통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옮겨왔다. 프톨레미 3세는 알렉산드 리아에 정박하는 모든 배에서 책을 압수한 다음 복사본을 만들어 원본과 교환하기도 했다. 이 시절의 두루마리 책자의 무차별적 수집행위가 문화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 되었는지 아니면 귀족들의 수집욕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불과 두 세기 만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학술연구와 지식의 성지가 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유모를 갑작스러운 종말을 맞이하였지만, 이 시기 이루어진 철학적 성 과는 이후 헬레니즘 문화의 기틀이 되어 서구의 역사와 문화의 근간이 됐다고 한다.

2017년 이내창기념사업회는 의문사유가족 디지털아카이브를 추진하고 있다. 2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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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천 년 전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귀족들의 열성적 지지도, 집권자의 응원도 없다. 단지 뜻이 맞는 구성원들이 모여 돈을 모으고 노력을 뭉쳐 지난 30년을 기록하고자 하는 절실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디지털 아카이빙의 본질적 요소를 이해한다면 우 리가 진행하는 작은 행위가 갖고 있는 확산의 힘이 결코 작지 않으리라는 점 또한 짐 작할 수 있다. 디지털 아카이브(Archive)의 특징인 동시성, 비소멸성, 연결성, 확장 성 등의 특징 등을 하나하나 살피며 서로의 아이디어를 쌓아나가다 보면 이 사업의 목적인 인권존중의 문화가 시민사회에 굳건히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아카이브의 첫 번째 특징은 동시성에 있다. 흔히 동시성은 자료의 생성부 터 전달 공유에 이르는 과정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속도의 측면과 한 번에 여러 사 람이 동일한 자료를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 확산의 두 측면으로 이야기된다. 의문사 유가족 디지털 아카이브의 경우, 영상자료와 음성자료의 수집 후 후반작업이 수반 됨으로써 생성과 공유가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는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텍스트 자료는 이러한 동시성에 기반을 둔 저작자와 열람자 간 의 상호작용에서 자료의 질적 수준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위키피디아 와 같은 오픈형 디지털 라이브러리 경우, 동시성과 집단지성으로 콘텐츠를 생성하고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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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완하고 있다. 의문사유가족 디지털 아카이브에서도 시스템이 안정화 되고 활용의 성격이 보다 분명하게 규정된다면 오프형 아카이브로의 전환을 모색해볼 수 있다. 수집의 효율이나 콘텐츠의 재생산에 집단지성을 활용하는 것이다. 생성된 자료가 동질성을 가지고 있을 경우, 오픈형 디지털 아카이브는 자료의 소 실이나 왜곡을 방지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일례로,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서비스 시 스템을 해킹하거나 자료를 왜곡한다 하더라도 동일한 자료가 제휴 또는 연계된 다른 아카이브나 구독자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복구나 대응이 쉬울 수 있다(이 과정에서 디지털 스템프라던가 원본을 증빙할 수 있는 기술 적 요소가 필요하다). 우리가 수집하려는 데이터는 그 성격상 사이버 테러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초기 배포 시 다수의 사용자가 안정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 특성인 비소멸성은 저장된 콘텐츠가 사용횟수나 형식에 관계없이 초기의 퀄리티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특징을 말한다. 사진이나 문서자료의 디지털 화를 진행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한 비소멸성은 우리가 하는 작업에서도 매우 중 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의문사유가족이 보유하고 있는 자료들의 대부분이 서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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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나 사진형태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 보존성이 저하되고 있고, 또 사건과 직 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은 유관자료들, 예컨대 가족사진, 성장을 기록한 앨범, 메 모나 유작 등은 관리영역을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자료들은 의문사 당사 자뿐만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게 해주는 정황적 증거물이며 시대의 상황 을 내포하고 있는 역사자료다. 현재 아카이브팀은 문서와 사진자료의 원활한 수집을 위하여 광학스캐너 장비를 챙겨 현장에서 관련 자료를 스캔 저장하고 있으며, 광범위한 자료 수집을 통하여 저 장물간의 관계를 분석하는 작업 등을 통하여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새로운 이야 기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비소멸적 특성에 기반한 강점이 잘 발휘되기 위해선 자료의 유형에 따라 적절한 저장방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이동이 편리하면서 저장물의 퀄리티를 담보할 수 있는 전문 기자재 가 필요한데 현재 기념사업회의 역량에서 적절한 기자재를 수급하는 것은 현실적으 로 어려움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세 번째 특성인 연결성은 디지털아카이브가 갖는 가장 큰 이점이라 할 수 있다. 디 지털 콘텐츠에서의 연결성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콘텐츠 간의 연결, 콘 텐츠 내에서 참조될 수 있는 자료의 연결, 저장된 콘텐츠에 덧붙여지는 신규 저장물 의 업데이트 등 콘텐츠 차원의 연결은 물론이고, 저작물과 저작자 간의 연결이나 저 작자와 열람자 간의 연결까지를 의미한다. 최근에는 소셜네트워크 등이 활발해짐에 따라 디지털 자료의 수집이나 확산에서 네트워크의 활용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 대한 자료가 필요할 때 일일이 그 자료를 찾아다니기보다는 그 자료를 가지고 있을 법한 네트워 크에 자료를 요청하는 방식으로 자료를 수집하거나 디지털 라이브러리 자체를 표준 화된 형식으로 제작하여 추가적인 작업 없이도 어느 루트로 접속하던 통합적으로 자료가 검색되어 마치 하나의 아카이브 또는 라이브러리를 이용하는 것처럼 사용할 수 있는 LOD(Linked Open Data)방식의 자료 공유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올해는 의문사유가족 디지털 아카이브가 온라인에서 서비스되는 것 자체를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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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고 있지만, 내년 사업에서는 데이터 표준 플랫폼으로의 이전을 통하여 자료간 의 연결성을 확보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네 번째 확장성은 기념사업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해줄, 가장 기대할만한 특성이다. 현재 디지털 아카이빙은 영상녹화, 사진촬영, 구술녹취, 자료 스캔 등 크게 네 분야로 나누어 진행되고 있다. 해당 분야 모두 전문성이 요구되어지 며, 그 수준이 확장성을 대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영상자료는 뉴스, 영화 등을 포괄 하는 다양한 영상물에서 소스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활용 은 소스의 완성도에 전적으로 영향 받게 된다. 이 점은 영상뿐만 아니라 사진, 녹취 등 모든 영역에서 수집단계부터 엄밀하게 관리되어야 할 부분이다. 바로 이 점에서 기념사업회가 가지고 있는 인적역량은 기대수준을 훨씬 상회한 다. 현직 영화감독, 사진작가, 작가, 분야별 전공자와 전문가 등이 참여하여 제작되 고 있는 1차 저작물은 그 자체의 열람에서보다 2차, 3차 저작물로의 확산에서 더 빛 을 발할 것이다. 여기에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면, 기념사업회 회원들에 의한 콘텐츠 의 확장이다. 디지털 아카이브의 영상클립이 삽입된 영화, 녹취에서 확장된 소설, 온 오프라인에서 열리는 사진전, 노래의 가사, 연구 자료에서의 인용 등 기념사업회 회 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만들어 내는 새로운 콘텐츠를 꿈꾸어 본다면, 지금의 작업 이 가지는 의미와 십시일반의 노력이 정말 가치 있는 일임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단순한 자료의 저장에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아카이브의 모든 특징들은 확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기념사업회의 아카이브 사업 역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해야할 디지털 아카이브 사업은 회원 여 러분의 도움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아카이브 팀에 직접 참여해도 좋고, 2차 저작 물 제작 등에 회원 적극적인 의견 개진과 아이디어 제공이 있기를 바란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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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이내창 기념사업회 디지털 아카이브의 첫 걸음을 응원합니다. 김유승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

열사가 우리 곁을 떠난 지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 동안 이 땅의 민주와 정의를 위해 던졌던 그의 삶을 잇기 위한 투쟁과 연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열사의 정신을 잇기 위한 우리의 희망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열망은 그의 삶과 정신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실천하는 발걸음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기억과 기록은 승리자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류의 기억을 강요당했고, 주류 의 기록을 학습해야 했습니다. 자본의 독점과 비슷하고도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기억과 기록은 독점당했습니다. 소외된 자들의 기억과 기록은 주류 역사의 그림자 뒤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구적 가치를 지니는 기억과 기록을 담는 도구, 기관, 또는 시설을 지칭하는 ‘아키이브’는 권력 투쟁의 산 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주류의 기억과 기록의 틈바구니에서 소외된 작은 목소리를 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류 기록의 대변자 역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결과로, 하워드 진(Howard Zinn) 은 활동가로서의 아키비스트를 주창했고, 그의 Activist Archivist의 정신은 오늘 의 디지털 아카이브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리적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제적 편익성과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정보의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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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사전교육을 마치고. 오른쪽에서 네번째 김유승 중앙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확장성, 그리고 이를 통한 이용자 편의성의 극대화라는 측면에서 디지털 아카이브 는 소외된 기억과 기록을 담아내는 도구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기존 주류 아 카이브가 챙기지 않았던 사회의 소외된 다양성을 담아내어, 주류의 편향된 기억과 기록을 균형의 관점으로 바로잡는 도구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주, 통일, 평화의 한 길을 걸었다는 이유로 의문의 죽임을 당 한 열사들의 기억과 기록을 담아내고자 하는 이내창 기념사업회 디지털 아카이브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다만, 다수의 민간 디지털 아카이브가 구축보다는 유지에 더 많 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 일상적인 재정적, 인적, 기술적 문제들을 겪고 있다는 점은 이제 첫발을 내딛는 이내창 기념사업회 디지털 아카이브가 유념해야 할 지점 입니다. 물리적 공간이 없다 해도 디지털 아카이브의 구축에는 상당한 재정과 사람 의 노력이 요구됩니다. 더구나 디지털 정보자원의 특성으로 인해 유지, 관리 비용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한번 치르고 잊어지는 행사처럼, 의지만으로 열렸다 가 오래지 않아 방치된 다수의 사례들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처음 설계에서부터 내부 역량에 대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기관의 역량에 맞는 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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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명과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맞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운영 계획이 마련되어야 합 니다. 기록의 수집 및 기증 범주와 방법으로부터, 서비스 제공 및 활용 방식, 나아가 저작권과 관련된 사항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고민이 필요합니다. 하지 만, 열사의 뜻을 이어가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길이 없 으면, 걸어서 길을 만들고, 지치면 잠시 쉬었다 다시 일어나 것을 서로가 믿어 왔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철저한 준비입니다. 무엇보다 디지털 아 카이브의 존재 가치와 의의에 공감하는 더 많은 이들의 관심과 연대가 관건입니다.

이내창 기념사업회가 구축할 디지털 아카이브는 주류 사회에 독점된 기억과 기록 의 한계를 넘어, 소외된 사회의 다양성을 담아냄으로써, 우리 역사의 빈칸을 채우는 아카이브가 되길 바랍니다.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역사의 진보를 이끄 는 아카이브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열사의 삶과 정신을 공유하고, 재생산해내는, 그리하여 오늘 우리 공동체 삶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돕는 공간이길 바랍니다. 열사 의 삶과 정신을 통해, 서로의 아픔이 치유되는 공간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세기를 넘나드는 기억과 기록으로 열사의 삶과 정신을 담아내고자 하는 험난한 여정에 용감히 첫발을 내딛은 이내창 기념사업회 디지털 아카이브에 뜨거운 응원 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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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 유가족을 기록하는 이유 사전교육을 마치고 이찬민

아카이브사업단 구술팀 사회학과 13

군대에서 나온 지 보름쯤 되었을까. 친한 선배한테 전화가 왔다. 내창 선배 30주기 를 맞아 선배들과 함께 의문사 유가족 생애를 구술로 풀어보자고 말했다. 난 좋다고 했다. 왜 그렇게 빨리 결정했을까. 갓 전역한 복학생의 호기였을까, 광장에 200만 촛 불이 모이는 동안 아무것도 못했다는 부채감 때문이었을까, 내창 선배라는 이름 앞 에 숙연해진 마음 때문이었을까. 돌이켜보면 참 무심했던 것 같다. 한 사람의 삶을 기록한다는 게, 자식을 잃은 부모와 대면하고 당신의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치열했 던 투쟁의 경험을 기록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무엇보다 내가 왜 이 일을 해 야 하는지 별다른 고민도 없이 ‘좋다’고 답해버렸다.

3월 8일 첫 모임. 아카이브 구축에 참여하는 선·후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81학 번 선배부터 13학번 후배까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 소개가 오갔다. 나이도 직업도 경험도 모인 동기도 가진 능력도 제각각이었다. 그중엔 내창 선배가 돌아가셨을 당 시에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웠던 선배도 있었다. 국가기구에 참여해 의문사 사건을 조사한 선배도 있었다. 수십 년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고 있는 선배들을 마주하 니 쉽게 내려버린 결정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론 ‘적어도 같이하는 선배 들께 죄송한 마음은 안 들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카이브 구축 계획은 예상보다 훨씬 크고 중요한 사업이었다. 기념사업회 내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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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단기사업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의문사 사건에 대한 사회적 기억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수십 명에 달하는 유가족을 몇 년에 걸쳐 만나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구술팀에 참여했지만, 구술 채록 경험 은커녕 낯선 사람에게 말도 잘 못 붙이 는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 이 앞섰다. 그래도 혼자가 아닌 선배들이 함께하므로 열심히 배운다는 마음으로 임 하기로 했다.

사전교육은 크게 의문사 세미나, 의문사 사건분석, 아카이브 방법론 세미나 이렇 게 세 주제로 진행됐다. 두 번째 모임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매주 돌아가 면서 발제를 준비하고, 발표한 내용에 관해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제일 먼저 읽은 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였다. 의문사에 대한 기본개념, 특별법이 제 정되기까지의 노력, 위원회의 조사활동과 한계, 그리고 법적·제도적 보완책 등을 검 토했다. 모두 아카이빙 작업에 앞서 알아야 할 사전지식이었다. 의문사위는 국가가 나선 과거청산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드러난 진실보다 밝히 지 못한 죽음이 더 많았다. 세 차례에 걸쳐 국가기구 차원의 조사가 이뤄졌지만, 수 사권이 없는 조사기구는 많은 진실을 밝혀내기엔 미약했다. 진실이 규명된 사건들 에서도 가해자가 특정된 경우는 없었다. 그마저도 정권이 바뀌면서 흐지부지 마무 리됐다.

왜 그렇게 지난했을까. 분명히 민주화를 달성하고 정권도 교체됐었는데 왜 지금도 수많은 죽음이 묻혀 있을까. 셋째 주와 넷째 주는 그런 궁금증에 어느 정도 답을 주었 다. 국가보안법, 안기부 등 반인권적 악법과 공안기구와 반공레드콤플렉스 같은 이 념이 권위주의 정권 시기에 한국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동원됐는지 살펴보았다. 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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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 노동현장과 학원, 군 내부 등 각 영 역의 특수성을 고려하면서 의문사가 발 생한 구조적 원인을 파악했다. 특별히 넷째 주에는 의문사 진상규명 운동과 관련하여 학위논문을 쓰신 정원 옥 선배와 박현주 선생님이 발제자로 참 여했다. 원옥 선배는 “의문사의 진실이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것은 의문사를 발생시켰던 정치·사회적인 구조가 근본 적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박현주 선생님도 의문사 진상규 명 과정에서 나타난 사실 왜곡, 이념공격과 같은 반동적 흐름을 분석하며 여전히 해 결되지 않은 구조적 문제를 지적했다. 감춰진 죽음의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단순히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가족의 억울함을 해소하는 차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의문사 진상규명은 민주화가 얼 마나 공고화됐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을 지탱하던 제도 적·이데올로기적 유산에서 멀어져야만 진실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의문사 진 상규명운동은 잔존하는 폭력통치기의 정치·사회적 구조에 끊임없이 문제제기 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또한 유가족의 투쟁과 기억을 기록하려는 우리의 작업도 한국사 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대우중공업 노조 활동을 하던 중 의문사 당한 정경식 열사 어머니의 삶을 기록한 구술집 『어머니』. 의문사 특별법 제정을 위해 여의도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는 유가협 회원들의 투쟁을 담은 영화 <민들레>. 다섯 번째 모임에서 우리는 두 작품을 통해 의문사 유가족들을 미리 만나보았다. 자식의 명예회복과 죽음의 진실을 밝히 기 위해 풍찬노숙과 삭발투쟁을 마다하지 않던 가족들. 의문사특별법은 ‘민들레의 투혼’으로 수십여 년을 감내해온 그들의 투쟁으로 이뤄낸 결실이었다. 민주화 이후 세대인 나는 제도권 교육을 통해서 ‘비전향장기수 전향공작 사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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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사전교육 참고자료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을 배웠다.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은 비교적 오래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 심리적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국가폭력에 의한 죽음으로 인정받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었다. 민주화를 달성했다고 해서 과거의 은폐 되고 조작된 죽음이 자연히 밝혀지는 게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해 국가기 구의 재조사가 이뤄질 때 비로소 나에게까지 기억이 공유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의문사 유가족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실에 대한 대 가를 의문사 유가족이 대신 치렀기 때문이다.

의문사 공부를 마치고 아카이브 실무 교육이 진행됐다. 먼저 아카이브 대상 의문 사 사건을 분석하고 인터뷰 대상 유가족을 정했다. 의문사위에 참여하신 신명철 선 배, 조환준 선배, 그리고 ‘4.9통일평화재단’ 안경호 사무국장님이 자문을 맡아주셨 다. 현재 대다수의 부모들이 70~80대로 연로한 상황이고, 이미 돌아가신 분도 계셨 다. 더 늦기 전에 유가족 중 고령에 지병을 가진 분들을 우선적으로 찾아뵙기로 결정 했다. 올해까지 대략 여섯 분 정도 인터뷰 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7주차에는 ‘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에서 활동하시는 강곤 선배의 구술사 강의가 있었다. 구술사의 가치, 면담자가 지녀야 할 태도, 인터뷰 방법론 등을 배웠다. 인터 뷰할 땐 무엇보다 서로의 신뢰가 중요하다. 내 기억이 왜곡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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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야 숨겨온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소수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기록 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과 상상력의 중요성에 기록자가 지녀야 한다. 강 곤 선배는 이를 위해서 평소에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인터뷰 준비과정, 취재요령, 기록방법 등 구체적인 인터뷰 방법론 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 시간에는 아카이브 구축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참고가 될 만한 다른 디지 털 아카이브 홈페이지를 조사한 뒤 중앙대 문헌정보학과 김유승 교수님을 모셔 자 문을 구했다. 아카이브 구축 작업은 생각보다 기술과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일이었 다. 교수님은 수집정책을 세워 아카이브의 목적, 기록물의 수집범위를 명확히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지속적으로 기록물을 수집하고 관리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도 고려해보라고 했다. 감사하게도 김유승 교수님 역시 내창 선배를 기억하고 같이 싸웠던 중앙대 동문으로서 앞으로도 우리 아카이브 과정에 계속 관심을 두고 도움 을 주기로 했다.

이렇게 여덟 번에 걸친 사전교육을 마무리했다. 이제 곧 유가족을 만난다. 어떤 마 음으로 그들을 마주해야 할까. 라포 형성은 어떻게 할까. 가족을 잃은 고통의 기억과 투쟁의 경험에 내가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구술자를 배려하는 세심한 질문이란 무엇일까. 내 질문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진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모두 쉽지 않은 질문들이지만, 유가족의 헌신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의문 사 진상규명운동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또 그것을 기록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사 전교육을 통해 느낀 점들을 상기한다면 어렵더라도 고민을 게을리할 수 없을 것 같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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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기 위해 시작한 아카이브, 고민과 출발 (고 정경식의) 김을선 어머님, 정경연 누이 댁을 방문하며 장민경

아카이브 사업단 영상팀 사회학과 12

87년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는 없다. ‘문민정부’가 시작된 해에 태어나, 어릴 적 자 주 접한 단어는 ‘청산’, ‘기념’과 같은 것이었다. 의문사라는 것은 그 사이 어디 즈음 위치한 것이었고, 꽤 오랫동안 나에게, 아니 어쩌면 ‘우리’에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죽음이었다.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이름도 얼굴도 몰랐다. 최루탄에 맞았다 거나, 어느 날 아침 물 위로 시체가 떠올랐다는 ‘이야기’에만 익숙했을 뿐이다. 당대 폭압적인 정권의 거울상 혹은 그림자로 생각하고 넘어갔을 뿐, 해당 인물들에 대해 더 깊이 관심 가진 적은 없었다. 다만 몇 년 전 본 다큐멘터리를 통해,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한 조사관들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이내창기념사업회에 속한 몇몇 선배들을 만나게 된 시기도 그 즈음이었다. 이후 의문사가 특정한 시절에 머무른 채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정 도는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익명의 죽음들, 규명되지 않은 진실, 그것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최근까지 있었다, 딱 거기까지가 내가 아는 사실의 전부 였다. 그런 나에게 아카이브 활동을 함께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원옥 선배로부터 왔 다. 좋다고는 했지만, 시작하는 시점에서 드는 걱정은 꽤 컸다. 다만, 사라질 증언을 기록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는 당위와, 그러한 일에 함께 해보고 싶다는 욕심, 그 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것을 같이 ‘잃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 더 앞섰다. 그 시절에 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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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억이나, 상실한 것이 없는 나도, 슬퍼하는 사람들 옆에서 ‘구체적으로’ 애도하 고 싶었다. 그래서 만나고 싶었다.

유가족 방문에 앞서 사전 교육 일정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아카이브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방문 순서 는 건강상태, 나이 등을 기준으로 정해졌다. 첫 면담 대상은 고 정경식의 김을선 어 머님이었다. 건강도, 기억력도 많이 안 좋아지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김을 선 어머님뿐만 아니라 많은 유가족들이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했다. 남은 평생 을 의문사한 자식의 삶뿐만 아니라, 진실을 덮는 현실을 증언해온 분들인데, 시간 앞 에서 무력해지는 듯해 안타까웠다. 출발을 며칠 앞두고 구술사에 대한 간단한 세미나에 참여하며 그런 고민이 들기도 했다. 누군가의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으로 출발하는 ‘생애사’는 어떤 물음과 답변에 중심을 두고 이뤄져야 할까? 개인의 전 생애를 쓰는 것일까? 그런데 결국엔 의문사 당사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의문사 당사자의 삶에 대한 대변, 어떤 경우에는 미화로 머무는 건 아닐까? 이 작업은 구체적으로 어 떤 의의를 갖게 될까? 이런 생각들이 부끄럽지만 아직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다. 결 국 출발하는 날까지도 나는 그 답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우선은 이번 구술 작업을 참여하는 과정에서 풀어야하는 숙제 중 하나로 가져가기로 했다. 어쩌면 앞뒤가 바 뀐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5월 19일 마산으로 떠나다 출발 시간은 10시, 장소는 합정역 5번 출구였다. 신명철 선배와 조환준 선배의 차 에 적당히 나눠 탄 일행은 내려가는 길 휴게소에 잠시 들러 돗자리를 펼쳤다. 안경 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님으로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사건 브리핑을 들었다. 사전 세미나를 하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난 여전히 이름과 사건, 기관들에 익숙해 지질 않았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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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고 정경식1)은 마산 대우 중공업에서 민주 노조 운동을 하다 의문사한 노동자였다. 김을선 어머님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그 위로 아들이 하나, 아래로는 딸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러니까 고 정경식에게는 형과 누이였다. 그는 한 마디로 착한 아들, 동생, 오빠였다. 사전에 읽어간 김을선 어머님의 구술사에도 나왔듯, 그는 어릴 적 총명했 고, 동생을 아꼈고, 아픈 아버지의 병간호를 잘 했고, 커서는 잔업까지 꼬박꼬박 다 한 후 받은 월급을 집에 보탰다. 언변이 좋아 작업장에서도 소문이 났고 민주노조 준 비 과정에서 앞장서서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스레 회사 측에 동조하던 이들과 는 적대하게 됐으며, 그 중 임○식이라는 사람과의 충돌로 인한 합의금 문제가 발생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정경식은 임○식의 연락을 받고 나간 후 연락 이 두절됐고 9개월 후 유골로 발견됐다. 동네 숲 길 나무 아래에서, 너무나 말끔한 상 태였다. 느닷없이, 사건은 일어났지만 책임자는 없었다. 그를 잃은 데서 온 아픔은 한동안 오직 그 가족의 몫이어야 했다. 1) ‘열사’라 쓰기엔 뜻풀이 상 괴리감이 느껴지고, 그렇다 해서 단순히 ‘희생자’라 쓰기엔 무력해보여 망설이다가, 우선 호칭 붙 이기를 미루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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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지에 다와 갈 무렵에는 괜히 불안해져 김을선 어머님의 구술사가 담긴 세미나 자료집을 뒤적거렸다. 가서 실수나 하지 말았으면 했다. 영문도 모른 채 사라진 자식 에 대한 마음이 어떠하였을지 조금이라도 가늠은 해보고 싶었다. 스스로 이루지 못 해 바라던 꿈들을 투사했는지도, 아들 자체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깊었는지도 모르 겠다. 어찌됐건 결과적으로 그의 죽음으로 인해 간직한 모든 것들을 잃게 되었고, 이 로 인해 받았던 상처와 상실감의 정도는 엄청났을 것이라, 짐작해보았다. 동일할 수 는 없겠지만, 그 누구든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보내는 마음과, 잃었던 마음과, 어느 정도는 통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투쟁 이후, 남겨진 사람들 누이 댁에 도착하자마자, 한상 가득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을선 어머님이 따오신 상추, 정경연 누이가 준비해주신 전, 회, 과일 등이 가득했다. 상다리가 부러 질 것 같았다. 감사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이 교차로 들었지만, 입 안에 음식들을 넣 은 채 오물오물 거리기 바빴다(너무 맛있었다…). 그 사이 안경호 국장님과 김을선 어머님은 그간 못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앉은 자리에서 곧 수십 년의 세월 이 오갔다. 김을선 어머님은 구술사 책 속에서 그려진 강한 모습이 더 이상 아니었다. 생선 냄 새 깊게 밴 옷을 입고 온갖 투쟁 대열 속에서 아들 찾아 달라 외치던 3부 4장에서의 모습, 법정에서 판결문을 찢고, 경찰서장에게 쓰레기통을 퍼붓던 4부 2장에서의 모 습. 나는 그 속에서 검고 꼿꼿한 머리에, 주름지고 거친 손, 건조한 입술을 가진 중장 년의 강한 여성을 상상했는데, 지금 눈앞에 앉아 계신 분은 차분한 흰머리에 서글서 글한 인상을 가진, 80세가 훌쩍 넘으신 작은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나는 밥 생각이 없다, 며 수저를 자주 들지 않으시던 할머니. 요즘에는 밥을 잘 먹지 못한다고 하셨다. 많은 것이 예전만 못하다고, 기억이 가 물가물해지고, 말도 왔다 갔다 한다며 고개를 저으셨다. 김을선 할머니는 여든넷의 나이를 실감하시는 듯 했다. 그 사이 감옥에서 보낸 날은 수십 일이 될 테고, 단식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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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쟁에 일 년 넘게 버틴 국회 앞 천막 농성까지 합치면, 온전히 건강한 몸일 수가 없으 실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늦게 진행한 구술사 과정에서 할머니는 좀처럼 쉬질 않으셨 다. 두 시간, 세 시간이 넘도록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아직 풀어야할 것이 많았기에, 축적된 시간은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덥고 답답한 공기 탓에 당시에는 생각 못했지 만, 그 자리를 나와서야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김을선 할머니에게는 ‘유가족’으로 서의 삶 자체가, 이전까지 살아온 삶의 응축이자 발현이었던 셈이다.

오래된 과거사, 또는 지금 여기 이야기 김을선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 그녀는 딸이라 글을 배우지 못했고, 학 교도 들어가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똑똑이’라 불리었고 말도 잘했지만 집에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런 한편 삼촌, 아버지, 어머니, 남편 할 것 없이 성실해도 ‘당하고’ 살다 간 사람들이었다. 구조적으로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을 지나, 자신들은 그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다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매일같이 생선을 팔았다. 정경식 누이의 말처럼, 그녀는 “내 마치로 옛날에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여자라서 못 시키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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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었으니까 나는 그런 사람 안 만들고 싶어서. 오로지 안 굶기고 내 새끼들 공부 가르치고 하기 위해서” 하루도 쉬지 않았고, 실은 그 때문에 딸의 운동회도 한 번 가보지 못했다. 교육과 생활에 대한 부담을 온전히 개인에게만 지운 사회에서, 어 머니와 딸이 누릴 수 있는 몇 가지 행복은 미래로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정경식의 누이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어야했다. “내가 중학교 가면 오 빠는 고등학교 가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안 가야만이 오빠가 할 수 있을 거라 싶고. 나는 여자니까, 오빠는 또 사회생활을 해야 되니까.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했기 때 문이었다. 처음에는 미싱을 배우러갔다가 본드 냄새를 견딜 수 없어 그만둔 후, 그 다음에는 아는 분 소개로 다른 회사에 들어갔다. 미성년자 신분 탓에 오빠 친구 분의 명의를 빌려 취직했다. 일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갔던 젊은 시절을 회상한 누이는, 한 번도 놀아보지 못했던 것이 참 아쉽다고 했다. 당시 많은 집들이 그러했을 것이 다. 돈이 넉넉하지 못한 집의 경우 특히, 전략적으로 아들이 교육받고, 어머니와 딸 들이 그것을 뒷바라지한 방식이었을 테다. 당장의 생활고를 해결하기 급급한 상황 에서, 몸과 머리는 일터와 가족을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축적되는 한을 달리 풀 수 있는 언어나, 활동을 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고 정경식의 성장과 활동은 이 들의 희망을 대변해주기도 했을 것이다. “오빠가 이 민주화할라 하는 이유”에 대해 누이는 그렇게 짐작했다. 어릴 때 아버 지가 정미소 일을 하러 갔다가 허리를 다쳤지만, 제대로 된 치료도, 보상도 받지 못 했다. 사장은 병원비도 안 되는 돈을 어린 큰아들에게 쥐어준 뒤 도장까지 받아뒀 다. 걸을 수 없게 된 아버지의 남은 생을 책임지는 이는 가족뿐이었으며, 그때의 기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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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

억은 노동자로서 노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 다, 라고 말이다. 김을선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꿈꾸는 기라, 우리가. 우리 맘에는 민주화 로 하고 싶은 사람은 마음은 간절한데, 아직 꿈꾸고 있어요.” 아직 민주화는 오지 않 았다고, 민주화된 세상은 “우리 쪽이 자유롭고, 자유롭다고 감투 이런 게 아니라 마 음 포근한 세상”이라고.

구체적으로 함께하기 위해 만약, 어느 날 길을 걷다 모르는 분이 의문사 진상규명과, “우리 쪽이 자유로운 세 상!”이라고 외치셨을 때, 나는 3초 정도만 주춤거리다 곧바로 스쳐지나갔을지 모른 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다면 스마트폰을 켠 뒤 검색 정도 했을까. 그분들의 언어가 무 엇을 뜻하는 지 좀처럼 모르기에, 외치는 대상의 삶도, 외치는 분의 삶도 아는 바가 없기에 스쳐지나가는 나에게는 그분들을 알아볼 눈과 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과정에서, 유가족의 오래된 삶의 맥락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 다. 일단 만났고 들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듣게 된 한숨과 바람은, 이제는 결코 쉽 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됐다. 그분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는, 내가 발 딛고 선 시간대와 살아가는 사회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사건의 ‘스토리’ 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실재하고 있는지를 안다는 것, 관계를 맺는다 는 것은, 나를 더 이상 관조적인 사람으로 두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 서 만들었으면 하는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엇이 ‘우리 쪽에 자유롭고, 마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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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세상’인지를, 공감 속에서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익숙해져 잃은 것인지도 몰랐던 관계, 권리, 감각 같은 것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멋모르고 뛰어든 이후에야, 나는 앞서 들었던 물음에 대한 답을 얕게나마 찾을 수 있었다. 그분들이 살아온 20년, 30년간의 삶 자체가 피해자/가족이자 운동주체로 서, 또는 운동주체이자 피해자/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좀처럼 떼어놓을 수 없는 것 이었기에, 유가족으로서의 구술생애사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구나. 물론 이에 대한 고민이 여기서 그칠 것 같진 않지만, 우선 내가 느낀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 지일 테다. 처음에 비해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 아카이브 결과물을 낼 때 즈음엔 더 깊이 있게 이 문제들을 이해하고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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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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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과 수배, 투옥으로 점철된 젊은 시절 후배들과 더 가깝게 지내고파 이석표 글·사진

조환준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온 바로 다음 날, 경기도 파주에 있는 그의 사무실

그 이후까지도 소위 학생운동을 했다는 인사들에

로 찾아갔다.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해 잠깐 회사

게 있어 대외적으로 중앙대 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

구경을 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도 답사 여행

한 명이 바로 이석표(사회복지학과 73학번) 선배

의 피곤함이 남아있는 듯 보였다. 근처 그가 숨겨

다. 민주동문회와의 회의나 연말 총회 같은 공식모

두고 애용하는 한적한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평

임 후 뒤풀이 석상에서 몇 차례 만나 술잔도 나누

일 오후라 그런지 객이라곤 우리 밖에 없었다. 순

고, 자연스레 살아온 얘기를 듣다 보니 그에겐 몇

하게 생긴 누렁이 한 마리가 꼬리를 살래살래 흔

세대에 걸친 운동사가 고스란히 그의 삶에 담겨 있

들며 반겨주었다. 임진강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

었다. 이번 ‘거문도 답사’ 준비를 하던 중 민주동문

는 야외에서 차 한 잔을 나누며 그와 얘기를 나눠

회 운영위 모임에서 행사 준비사항을 설명하던 차

본다.

에 그가 대뜸 동행하겠노라 하니, 심규한 회장과 정상길 사무국장 또한 보필의 ‘의무’를 핑계로 동

이석표는 1973년에 중앙대 사회사업학과에 입학

행하기로 했다. 그 3일간의 ‘거문도 답사’를 다녀

했다. 지금의 사회복지학과다. 그 전에 경기공업고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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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등전문학교(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를 다니다 중

하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거야. 그래서 내

퇴한 이력이 있다. 5년제 과정에서 고등학교 과정

가 그 교수를 찾아갔어. 내가 책임지고 한

중 그만두었는데, 이유가 재미있다. 미술 수업시간

학기 동안 써클을 번듯하게 만들 테니까

에 선생님이 수업은 안 하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았

그 때까지만 맡아 달라 했지. 그리고 나중

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길로 그만 뒀다고. 속사정이

에 그 교수한테 추인을 받는 형식으로 해

더 있어 보이기는 하나 부당한 ‘갑질’에 대해선 선

서 어쨌든 그 써클은 우여곡절 끝에 시작

천적으로 가만히 두고 보질 못하는 유전자가 이유

이 된 거야.

라면 이유일 것이다.

무슨 써클이었나 대학 입학 후 어떻게 지냈나

그 시절엔 ‘자유총연맹’이라는 관변단체

1973년에 입학했는데, 그 때는 학원에 대

에서 군·경 가족 중심으로 각 대학에 관제

한 정권의 규제가 뭐 말도 못했거든. 1972

써클을 한창 만들 때였거든. 그래 그 친구

년 10월 박정희가 특별선언해서 유신체제

딴에는 이 자유총연맹을 구실로 하면 외려

가 들어선 직후였으니까 대학가는 뭐 찍

방패막이가 되서 써클 운영하기가 수월할

소리도 내지 못했지. 학생들이 지금처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야. 그래

자율적으로 동아리다 학회다 만들어서 자

서 거기에 나하고 김기선 등 몇 명 끌어들

유롭게 자신들 주장을 펼치고 표현하는 생

여서 써클을 만들었지. 활동이라고 해봐

활은 상상도 못 했어. 때마침 동기 중 한 명

야 ‘산업시찰’이라는 명목으로 1주일에서

이 아버지가 해병대 장성인 친구가 있었

10일 정도 포항제철 같은 대기업의 생산

어. 그 친구가 나서서 써클을 하나 만들려

현장을 방문하거나, 군부대 방문해서 시

고 했는데 문제가 생긴 거지. 그 땐 써클을

찰하는 거. 그게 주된 써클 활동이야. 그러

등록하려면 지도교수가 누구고 그 교수의

다가 2학년 때인 1974년에 농활을 갔어.

도장을 찍어서 재가를 받은 서류를 내야

충북 청원군 수신면 백자리로. 지금은 충

하는데, 이 친구가 자기 맘대로 도장을 파

남으로 바뀌었을 텐데. 그러니까 겉으로

서 한 거야. 교수한테 말도 안하고. 그러니

보이는 거는 당시 정부 입장에서 보면 아

그 교수가 나중에 이걸 알고 친구를 고소

주 건전하지. 군부대 방문하고 농활가고,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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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현장 가고 하니까. 그러면서 유신

내놨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

에 저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1974년

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을 가지

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잖아? 그 때 중

며, 임기 6년에 횟수의 제한 없이 연임할 수 있도록

앙대 연루자가 한 명도 없었어. 이게 다행

고안된 헌법. 또한, 대통령 선출 방식이 국민의 직

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나는 참 수치

접 선거에서 관제기구나 다름없는 ‘통일주체국민

스러웠어.

회의’의 간선제로 바꾸는 이른바 유신헌법. 행정· 입법·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절대적 대통령제였다. 이 유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국회를 해산한 후 정당 및

신은 ‘10월 유신’으로 명명되었고, 이는 일본의 ‘메

정치활동의 중지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

이지 유신’에서 따온 것이다.

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사령부 가 설치되었고, 계엄사령부는 포고를 통하여 정치

이후, 대학가는 암흑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야만 했

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지하

다. 1973년에 대학에 입학한 이석표 같은 이들은

고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도록

‘위장’된 써클을 만들거나 지하 써클에 숨어 지내

했고, 대학들을 휴교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을

야만 했다. 1974년 봄학기에 들어서자마자 전국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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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중심으로 유신 반대

로 또 한 번 변신하여 중앙대 학생운동의 산실로

투쟁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은 그 배후로 ‘인혁당

자리 잡았다.

재건위’를 지목했고, 이 사건을 수사하던 중앙정보 부는 4월 3일 긴급조치 4호와 국가보안법 위반을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생이던 김

이유로 전국에 걸쳐 사건 관련자 1천여 명을 조사

상진 열사가 학내 집회 석상에서 할복 자

검거하고, 그 중 250여 명을 구속시켰다. 그 중 중

결을 했잖아. 그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적

앙대생이 한 명도 없었던 데 대해 이석표는 부끄러

이었어. 그것도 학내 집회 도중 연단에서

움을 감추지 않았다.

할복 자결을 했다는 것이. 다른 학교에서 도 시위가 이어졌고, 그러자 박정희가 5월

1학년 2학기, 1973년 10월에 학과 동기

13일에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거든. 그래

김영철이가 시위를 주도했어. 그 때 영철

서 우리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 해

이가 손가락을 깨물어서 혈서를 썼거든.

서 김상진 열사의 자결 사실과 유신체제

영철이가 어떤 친구인가 하면, 중대부중·

철폐의 주장이 담긴 유인물을 만들기로 했

부고를 장학생으로 다녔어. 중앙대에도

지. 그 때 문리대에는 나하고 김기선, 경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했으니까. 이런 친구

영준, 김영철 등이 있었고, 정경대에 백상

가 1학년들을 대표해서 시위를 주도하니

태(정치외교학과), 안정배(경제학과) 등이

까 학생들도 많이 따랐지. 구류를 살고 나

있었어.

와서는 1975년도에 비상총학생회장을 맡 아 4월 9일에 경영준(도서관학과)과 같이

서로 동지를 찾던 이들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

시위를 벌였어. 두 사람 다 이 건으로 제

었고, 특히 안정배는 “유신 헌법의 독재성을 알리

적되었어.

는 헌법내용알리기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벌이자”, “동아일보 백지광고는 바로 한국 언론의 실상이

이 무렵 이석표와 친구들이 만든 중앙대의 위장 써

다”등 유신을 반대하는 내용의 글을 주요 일간지

클도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등록 후 ‘민

에 투고하던 청년논객이었다.

족사상연구회’로 개명한 데 이어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이후에는 ‘민속극연구회’

그래서 친구들하고 5월 하순 경에 만났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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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물을 만들어서 뿌리자고. 근데 5월 22

그건 발각되지 않아서 형량이 커지진 않

일, 서울대에서는 시위가 있었거든? 김상

았는데, 이 건으로 긴조 9호 위반으로 영

진 열사 추모 시위이자 유신 철폐시위였

등포구치소에 수용되었어. 거기서 서울대

는데 우리 중대는 전혀 몰랐어. 그래서 거

오둘둘 팀들을 다 만난거야. 이부영, 원혜

기에는 참여를 못했고, 우리끼리 모여서

영, 박인배 등 해서.

유인물을 만들려고 몇 차례 모여서 상의 를 했어. 나하고 김기선, 백상태, 안정배 4

이 미수에 그친 유인물 배포 사건은 유인물 제호

명이서. 그리곤 각자 원고를 작성해서 6월

에서 유래되어 ‘시론정보(時論正報)’사건으로 불

26일경에 만나서 강촌으로 놀러가는 것처

린다. 처음에는 제호로 ‘의혈탑’, ‘중앙시론’등으로

럼 위장해서 강촌에 가서 유인물을 만들

하려 했으나, 중앙대의 상징어가 들어 있어 중앙대

계획으로 학교 앞에 있는‘우리 다방’에서

구내로 한정되는 셈이었다. 실제 처음에는 교내에

만나기로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정보

서만 배포하려 했는데, 논의를 하면서 중앙대뿐 아

부에서 알고선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우

니라 다른 학교에도 배포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

리를 덮친 거야.

력을 얻어 제호를 바꾸게 됐다. 덕분에 영등포 구 치소에서 서울대 학생운동권들과 합법적으로 조

그럼 미수에 그친 거 아닌가

우하게 됐다. 당시 영등포구치소에는 서울대 교내

그렇지. 결국 유인물은 만들지도 뿌리지

에서 시위를 하다 구속된 학생들이 수감되어 있었

도 못했는데 어쨌든 까고 보니까 서로 준

다. 서울대생들은 김상진 열사의 할복 자결 사건

비한 원고 내용이 나오는 거야. 내용에 뭐

이후 약 한 달 후인 5월 22일, 1천여 명의 학생들

별거 있어? 유신 까고, 박정희 까고 하는

이‘김상진 열사 추도식’을 거행한 후 긴급조치9호

거니까 이건 뭐 그런 걸 소지하고 있는 자

철폐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이 시위로

체만으로 문제가 되는 거였으니까. 그런

서울대 총장이 사임하고 당시 박현식 치안본부장

데 내가 등사기 준비를 맡았었거든. 그 때

과 서울남부경찰서장이 경질되었으며, 29명의 학

등사기를 집어넣을 수 있는 양복 케이스

생이 구속됐다. 이를 흔히‘오둘둘 사건’이라 칭하

를 준비했는데 거기에 등사기가 딱 들어

고 있다.

갔던 거야. 이걸 몰래 숨겨뒀는데 다행히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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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영등포구치소 수감되기 전에, 1975년이

든. 거 그대로 하잖아. 절대 빈 말을 하는

지. 남기 형(백남기·행정 68)도 처음으로

사람이 아니고. 재미있는 거는 기원이 형

학교에서 만났어. 그 때는 내가 오픈 활동

(송기원·문창 68)하고 둘이 1980년에 학

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을 때였으니까 그

교에서 다시 만나. 근데 공교롭게도 두 사

러면서 자연스럽게 선배들과도 만나게 되

람이 나이도 같고, 학번도 같은 68학번이

더라고. 그런데 1976년에서 1977년은 다

야. 고향도 같은 전남 보성 출신이야. 거기

른 대학 사정도 비슷하겠는데, 중대도 암

다 두 사람이 1975년에 같이 학교에서 제

흑기를 가졌지.

적이 돼. 서로 다른 사건으로다가. 기원이 형은 ‘대학인의 선언’을 주도했고, 남기 형

백남기 선배에 대한 기억을 좀 더 해보면

은 1971년에 위수령에 대해 항의하다가

남기 형은 분명한 사람이야. 뭐 가식이나

제적되었고, 이후 복학했다가 1975년 또

허언이 없는 사람이거든. 딱 한다면 그냥

유신 반대 시위했다고 제적되거든. 1980

결행하는 사람이야. 학교 다닐 때도 자기

년 민주화의 봄을 맞아 전국 대학의 제적

가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면 백두산이고,

생들이 복학을 해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딸을 낳으면 도라지라 이름 짓겠다 했거

둘이 만나자 마자 또 사건을 하나 치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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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렸지.

제적된 대학생들이 일제히 복학하는 시기를 맞이 하게 된다. 중앙대에도 왕고참인 68학번 백남기와

‘유신잔당 장례식’은 안정배의 아이디어였고, 상

송기원, 73학번인 이석표, 김기선, 백상태, 안정배,

여는 백남기가 흑석동 일대의 목공집을 수배해서

김영철, 경영준, 손원대 등 1970년대 중앙대 학생

만들고, 상여 행렬 인솔은 송기원, 손원대 등이 맡

운동의 계보를 총망라한 인물들이 속속 학교로 돌

았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고 있다. 장례식은 오후 3

아왔다. 물론 전부 다 복학이 허용된 것은 아니었

시부터 학교에서 시작됐다. 장례식을 마친 후 흰

다.

가운을 입은 의대생과 약대생들이 상여를 맸다. 송 기원이 ‘상두가’를 선창하며 1천여 명의 시위대를

4월부터 형들하고 같이 계획을 논의했어.

이끌었다. 교내를 한 바퀴 돌고 정문에 이르렀을

학생운동 새 판을 짜는 거였는데, 먼저 4

때 경찰은 철수한 상태였고, 그대로 노량진, 영등

월 초에 복학생들이 단식농성을 시작했

포, 여의도, 마포, 서대문, 시청을 거쳐 서울역에 도

어.‘유신잔당 재집권 음모 분쇄 및 학원민

착했다. 비가 오는 가운데 4시간 30여 분의 대장정

주화를 위한 복교생 단식농성’인가 그럴

을 마쳤고, 상여와 흰색 가운의 조합 때문인지 처

거야. 어수선한 시국에 재학생들에게 상

연하고 비장한 분위기도 흘렀다는 후문이다. 서울

황 인식을 분명히 해 주려는 목적이 있었

역 광장에서 석유를 뿌려 상여를 불태우는 것으로

던 거지. 또 기존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장례식을 마쳤다. 그리고 백남기, 송기원을 필두

학생회를 부활시키려고 남기 형이 부회장

로 이 시위를 주도했던 복학생들도 5·17계엄확대

을 맡았어. 그렇게 해서 단식농성이 끝난

조치로 인해 또다시 구속되거나 수배의 생활을 맞

후에는 5월 7일과 8일, 이틀에 걸쳐 교내

게 된다. 새벽에 군이 탱크를 앞세워 교내까지 진

에서 횃불을 들고 계엄철폐 시위를 벌였

입했고 흑석동 교정 기숙사에 있던 백남기는 자신

어. 그렇게 세를 모아서 5월 14일 유신 잔

은 잘못한 일이 없다며 같이 도피하자던 후배들의

당을 상징하는 상여를 메고 중대생 4천여

권유를 뿌리치고 남아 있다 체포됐다. 김기선, 백

명이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역에 진출했

상태가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고, 송기원, 이석표

어. 그 때 서울역 광장에 백만이 모였을 때

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관련되어 수배된 후

니까. 마지막에 그 상여를 화형식을 해버

1980년 6월 16일을 전후로 체포 구속됐다. 나머지

이내창기념사업회

73


어깨동무가 만나다

사람들도 긴 수배생활을 이어갔다.

슨 소리냐, 이럴 때일수록 민주정부 수립에 대한 얘기들을 적극적으로 국민들에게 알

사실 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는 진짜

려야 한다, 이런 주장들이었지. 그 때 내가

전혀 관련이 없어. 그 전에 1979년 11월에

‘민청협(민주청년협의회)’ 집행부로 활동할

있었던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라고

때였는데, 그 때 민청협 단체와 종교계에서

있어. 그걸 주도했다 해서 그 때 이해찬,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출은

설훈, 송기원, 이신범, 이석표 등한테 수배

저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관혼상제

조치가 내려졌어. 벽보에도 붙었다니까.

를 이용해서 집회를 하자는 의견들이 나온 거야.

위장결혼식이란게 뭔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잖아. 그러자

그래서 실제 결혼식을 한 건가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졌거든. 대통령이 총

결혼식은 가짜지만 실제처럼 했지. 1979

살당했으니까. 그러면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년 11월 24일, 토요일인가 그랬을 거야.

에서 대의원들이 후임 대통령을 뽑으려고

그 때 내가 장소 섭외 임무를 맡았는데, 마

하는 거야. 국무총리 최규하를 꼭두각시로

땅한 장소가 없었고 시간이 다 예약이 돼

세워놓겠다는 거지. 그래서 재야에서는 무

있어서 오후 5시에 했나 그랬을 거야. 신

슨 소리냐. 통일주체국민회부터 당장 없애

랑은 준비가 되어 있었어. 홍성엽이라고

고 대통령은 국민들이 직접 뽑아야 한다, 유

연세대 출신인데. 이 친구가 대단한 게, 위

신 헌법은 폐지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장결혼을 할 거를 사전에 가족들한테 얘기

한다, 이런 내용들을 국민들에게 정확히 알

해서 부모 친지들한테 다 설득을 해 놓은

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집회란 집회는

거야. 그래서 진짜처럼 접수대도 마련하

아예 열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런데 유일하게

고 당일 날 축의금도 다 걷었다니까(웃음).

집회가 허용되었던 것이 ‘관혼상제’와 관련 한 집회는 예외적으로 허용이 된 거지. 그래

신부는 누구였나

서 재야에서도 10·26 이후에 의견들이 좀 나

신부는 가상의 여인이지. 이름은 윤정민

뉘었어. 사태를 좀 두고 보자 하는 흐름과 무

이야. 돌아가신 윤형중 신부에게서 성을 끈덕지게 어깨동무

74


따오고, 민주정부를 줄이고 거꾸로 해서

어떤 내막인가

이름은 정민으로 한 거야. 그래서 정말 결

1980년 대학에서 새 학기 시작하기 전에

혼식장처럼 다 만들어 놓고, 주례를 함석

재학 중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제적되었

헌 선생님이 봤어. 식이 시작 되서 신랑 입

던 학생들에 대해서 전부 다 복학 조치가

장하고, 신랑이 주례 선생님 앞에 딱 섰을

내려졌어. 수배도 해제 되고. 서울대 애들

때 함석헌 선생님이 준비한 선언문을 낭독

도 백 프로 다 복학했어. 그래서 나도 학교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 때부터 거기는 집

에 가서 복학 신청을 했는데, 복학 허가를

회장이 되는 거였지. 구호 나오고, 박수 치

안 해주는 거야. 나만 그랬던 거 같애. 그

고 함성 지르고 하면서. 밖에서도 시위대

래서 1984년에 나중에 복학할 때 내 학적

들이 있었지. 이 사람들도 같이 선언문 낭

부를 보니까 1980년에 복학을 못한 상태

독하면서 구호 외치고 같이 집회를 연 거

였는데도 또 제적 처리가 되어 있더라고.

야. 그러니까 시경에서 부랴부랴 경찰 투

그러면서 그 옆에 ‘복학영구불가’ 뭐 이렇

입하면서 현장에서 사람들 잡아갔고, 밖

게 적혀 있는 거야. 한마디로 ‘부관참시’를

에 시위대가 광교까지 나가면서 가두시위

해놓은 거지. 그래서 내가 이거에 대해서

하고 그랬어. 그 때 그 건으로 나는 수배가

는 아직까지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게 있

떨어졌다니까. 그러다가 1980년 6월 16

고. 나중에 전두환이가 1984년에 정치인

일경에 ‘민주주의회복을 위한 국민연합’

해금하고 학원자율화조치 하잖아. 그 때

청년 조직 주요 지도부가 다 검거되었어.

또 복학할 수 있게 되었거든. 그 땐 복학

그 때 나도 잡혀 들어갔고, 징역 7년을 선

했지. 그래서 난 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

고받았는데 1982년 8월 15일에 형집행정

만인데, 예전 생각이 나잖아. 그래서 학교

지로 석방되었어. 출소 후에 1984년 전두

측에다가 요구했지. 복학하는 학생들한테

환이가 유화정책 펼 때 학교에 복학했는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면제해라. 또 이

데, 1980년에는 학교에서 나를 복학을 안

미 복학해서 등록금을 납입한 친구들한테

시켜줬거든? 1984년에 복학하면서 학적

는 환불조치를 해라. 그랬더니 학교에서

부를 보니까 1980년에 학교에서 나를 아

그렇게 하겠다는 거야. 그러면서 나한테

주 부관참시를 시켜놨더만.

는 그냥 등록만 하고, 학교에 나오지는 않

이내창기념사업회

75


어깨동무가 만나다

피』가 문제가 돼서 기원이 형하고 오봉옥 이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이문 구 선배는 구속은 면했지. 그러다가 1991 년에 『실천문학』에 연재되었던 정지아(문 창 84)의 소설 『빨치산의 딸』을 단행본으 로 발간했는데, 이걸로 나도 구속되었어. 실제 밑 작업은 기원이 형이 다 한 건데, 아도 자기들이 알아서 졸업시켜주겠다는

기원이 형이 워낙 많이 들락날락 했어야

투로 얘기를 하는 거야(웃음).

지(웃음).

실천문학사 대표를 한 적도 있다

결혼은 언제 했나

『실천문학』이 처음에 무크지로 1980년도

1985년 4월에 했어. 한 1년 연애하고 결혼

에 처음 발행이 되었어. 1985년부터 내가

했는데, 아내는 내가 빵에 있을 때가 제일

영업부장으로 참여를 했지. 그 때 대표를

행복했다고 해(웃음). 아니 신변이 가장 안

문창과 이문구 선배가 했고, 송기원 선배

전한 곳에 있지, 술도 못 먹게 하지, 또 회

가 주간, 이해찬 의원이 편집부장, 내가 영

사에서는 집에다 꼬박꼬박 월급 갖다 주

업부장 할 때였는데 5공 때 출판물에 대한

지, 영치금도 넣어 주지 하니까 농담 삼아

검열이 그때까지도 심했잖아. 1985년에

그 때가 제일 좋았다는 거야. 출소한 후에

기원이 형이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구속

도 실천문학 일을 하다가 1995년에 지금

되었고, 형사사건 발생할 때마다 출판사

의 문화유통북스를 설립하고, 실천문학사

대표가 법적인 책임을 져야 되는 구조였으

는 그만 뒀지.

니까, 이게 불합리한 면이 많았지. 실천문 학도 등록취소로 폐간됐다가 다시 복간되

문화유통북스는 어떤 회사인가

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고. 그래서 1990년

예전에는 출판사마다 작은 창고를 두고

1월에 내가 실천문학 대표를 맡게 되었어.

영업부에서 포장해가지고 일일이 총판이

그 해 2월에 오봉옥의 시집 『붉은 산 검은

나 서점에 갖다 주었잖아. 그러다가 17개 끈덕지게 어깨동무

76


출판사 사장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창고를

민주동문회도 층이 좀 더 넓어질 필요가 있고, 재

두고 재고 관리하면서 유통을 같이 하자

정적으로도 튼튼해져서 어려운 후배들 도와주는

는 취지로 유통회사를 따로 만들었어. 지

일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덕담도 건네주었다.

금은 대형 창고만 3개 동을 운영하고 있

크기 않는 키지만 다부진 인상, 이따금씩 웃는 그

으니까, 아무리 출판 경기가 안 좋아도 지

의 얼굴엔 수배와 구속, 저항으로 점철된 젊은 날

금 같이 하고 있는 사람들하고는 끝까지

의 굴곡진 삶을 고스란히 품은 여유가 묻어나왔다.

갈 거 같아.

새삼 그가 이번 거문도 답사에 동행한 것이 참 고 맙게 느껴졌다.

이번에 이내창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 거문도 답사에도 후배들과 같이 갔다 왔다. 소회가 어 떤까

난 아주 좋았어. 1989년에 나는 학교에 없 었는데 얘기로만 듣던 현장에 가 보니까, 뭐 화도 나고 안타까운 심정이 들기는 다 마찬가지였을 거 같고. 처음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가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 는 게 좋았다는 거지. 힘들더라도 한 번 간 거, 사건 후에 동문들이 처음으로 거문도를 다시 찾아 갔다는 거, 이게 하나의 ‘역사’가 되는 거니까. 그리고 1박 3일지만 ‘가족’이 라는 게 뭐야. ‘동거’를 하는 게 가족이잖아.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행동을 해 보는 거. 그렇게 하니까 가끔 만 나는 동문이라 만날 때마다 서먹하지만 뭐 랄까 벽을 하나 허물었다고 할까. 다음엔 훨씬 가깝게 만날 수 있을 거 같아(웃음). 이내창기념사업회

77


어깨동무가 만나다

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적폐청산 박인식 문예창작학과 81 글·사진

이주연

를 했을 때 선배는 점잖게 거절을 하다가 “조건이 하나 있다. 어깨동무에 내 소설을 실어 주면 인터 뷰에 응하겠다.”는 요구를 얹었다. 아니, 소설까 지?! 이쯤 되니 인터뷰와 상관없는 사적 호기심이 잔뜩 일었다.

이력이 굉장이 독특합니다. 문창과를 전공하고 박인식 선배를 만나기 전, 구글 검색창을 열었다.

도대체 왜 족부의학을 공부하게 됐는지도 궁금

주어진 키워드는 박인식이라는 이름과 족부의학,

하구요.

두 가지가 전부. 하지만 구글은 이 조합만으로도

학교 다닐 때 같이 소설 공부하던 친구들 중

꽤 많은 결과를 내놓았다. 박인식 선배는 국내 유

에서 나만 등단을 못했다. 그래서 기왕 이

일한 족부 전문의이자 화가, 그리고 한 기업의 대

렇게 된 거 남들이 잘 안 하는 걸 해 보고 싶

표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었다. 인터뷰 요청 전화

었다. 우리가 미처 신경 쓰지 않는 부위에 끈덕지게 어깨동무

78


대해 학문이 있다는 게 굉장히 신선했다.

주로 두 가지다. 하나는 연애이야기고 다

인생을 걸만하다고 생각했지. 또 외국에 가

른 하나는 시대에 대한 고민이다. 특히 폭

서 더 많은 경험을 쌓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

력에 대해 다루고 싶다. 우리 사회에 만연

각도 들었고. 88년에 졸업하면서 바로 떠나

해 있는 어떤 폭력성에 천착하다 보면 조

호주와 영국에서 11년 공부했다.

선시대까지 올라간다. 그때는 뭐 말 안 들 으면 다 때렸으니까. 일제시대, 군사독재

그래서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시절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사에는 늘 폭

직업이 여러 가지다. 그 중 하나가 족부의

력의 기억들이 있다. 군인들의 물리적인

학 전문의, podiatrist라는 것이다. 두 번

폭력부터 경제적 폭력, 문화적 폭력까지.

째가pedorthist라고 하는 치료신발전문

도대체 왜 이렇게 됐는지, 그런 역사를 훑

가다. 세 번 째는 소설가, 네 번째가 화가.

고 싶다.

다섯 번째가 회사 경영자이다. 주로 회사 일과 치료 일을 병행하고 있고, 틈틈이 글

이내창 추모사업회 신입 회원으로 함께하게 된

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학교 다닐 때 운동하던 친구들은 다 거기 이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을 관통하는, 일

있어서 늘 관심은 있었지만 그간 마땅한

관된 가치관이나 철학이 있나요?

기회가 없었다. 이내창은 학교 다닐 때 술

난 완벽주의자다. 뭐든 끝까지 가야 직성

자리에서 몇 번 봤다. 난 이내창의 판화 작

이 풀린다. 사실 이렇게 사는 게 나도 피곤

품을 좋아해서 소장하기도 했다. 모든 일

하긴 하지. 하지만 성격 상 몰아붙일 수밖

은 내가 졸업하고 호주에 있을 때 벌어졌

에 없다. 일종의 성취감 때문일 것이다. 경

지. 소식을 들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험을 해보니 10년쯤 해야 뭔가를 이루는

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어깨동무에 소설

거 같다. 소설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결국

을 실어달라는 거다. 거기에 내가 하고 싶

2014년에 등단을 했다.

은 말이 다 들어있다. 내가 워낙 앞에 나서 는 건 싫어하기도 하고, 나는 작가니까 작

소설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이내창기념사업회

79

품으로 말하고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깨동무가 만나다

박인식의 ‘신령스러운 기운(靈氣)’ 전시회

이후 세대에게 제시하고 싶은 우리 사회는 어떤

걸 잘 모른다. 노예처럼 부려먹기만 한다.

모습일까요?

이거야말로 발에 대한 인간들의 적폐라고

문재인이 추구하는 나라에 동의한다. 한

생각한다.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다. 마음

마디로 적폐 청산. 이걸로 다 설명이 되지

이 발까지 닿아야 한다. 발은 그 자체가 아

않나. 이내창도 그렇고 민주화 과정에서

픈 것보다 허리나 골반, 척추 등 다른 부위

의문사한 이들 모두 다 적폐의 희생자들

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족부

이니까. 이걸 풀어내는 게 우리의 가장 큰

의학은 우리 신체의 구조적인 모순을 찾아

과제라 생각한다.

원인을 제거하여 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다. 이런 게 바로 적폐 청산이 아닐까 싶

끝으로 동문들의 발건강을 위해 조언 하나만 한

다.

다면.

발은 나를 이동시키고, 내 몸을 유지하고, 직립시키는 중요한 부위인데 사람들이 그 끈덕지게 어깨동무

80


내창이형이 없었다면 우리가 다시 만날 일도 없었겠지? 전경미 축산학과 96 •박천삼 산업경제학과 96

대학 졸업하고 처음이니 얼추 20년만의 만남이었

천삼

다. 천삼이와 경미를 만나러 가는 길, 도대체 얼마

지. 경미하고는 꾸준히 연락하고 지냈으니

나 어색할 것인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산업경제

까.

학과 96학번 박천삼과 축산학과 96한번 전경미.

주연

나는 이들과 같은 학교 동기라고는 해도 사실 아는

사업회 운영위원회에 발을 담근 거야?

것이 별로 없었다.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막상 만

경미

나고 나니 세월의 공백이나 친분의 깊이보다 반가

기가 됐지. 아이 키우고, 생활인으로 살다

움이 앞섰다. 인생의 뜨거웠던 한 시절을 함께했다

보니까 점점 나라는 사람, 전경미라는 사

는 것만으로 우리는 생각보다 꽤 가까운 사이었다.

람이 희미해지는 거 같더라고. 뭔가 나를

응, 경미가 연결이 돼서 가입했

아니 근데 경미는 어쩌다가 기념

지난 겨울 탄핵 촛불 집회 때 계

찾고 싶었고, 사회 변혁에 기여하고 싶었 주연

천삼이는 이번에 기념사업회 신

는데 이내창 기념사업회는 가장 쉽게 접근

규 회원으로 가입했다던데, 경미가 영업

할 수 있는 조직이었어.

했겠지?

천삼

이내창기념사업회

81

나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아. 졸업


어깨동무가 만나다

의 삶보다 죽음을 먼저 알았고, 위인전 속 인물처 럼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우리의 무엇을 어떻게 움직여 여기까지 오게 했을까.

경미

나는 산업대 부회장이 된 후에 내

창이 형의 일화들, 일테면 하루 세 번 학 우들을 만난다거나 주머니에 항상 동전 을 넣고 다녔다는 그런 이야기들이 굉장 히 인상 깊게 다가왔어. 나도 학생회 간부 니까 그런 품성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 지. 그때 내창이형이 나를 움직이기 시작 천삼이와 아이

했던 거 같아. 지금도 기념사업회 운영위 원으로 합류하면서 처음엔 좀 부담스럽기

한 후에도 여러 사회 문제에 계속 관심은

도 했지만 오히려 지금은 내가 더 많이 배

있었지. 난 정의당원으로 가입하기도 했

우는 거 같아. 과거사 강연들 들으면서 공

는데 막상 활동은 적극적으로 안 하게 되

부도 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도 더 많

더라구. 결혼하고, 직장생활하고, 먹고 살

은 관심을 갖게 되고. 내창이형이 아니었

기 바쁘니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으면 경험하기 힘든 일들이니까.

계속 기회를 살피고 있었던 거 같아. 그래

천삼

서 경미가 기념사업회 회원 가입 권유를

닿지 않았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갔을

했을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 마치 기

때, 총학생회에서 나눠준 다이어리, 거기

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서 내창이형의 존재를 처음 알았는데 그냥

솔직히 난 학교 다닐 땐 그렇게 와

무슨 전설 같았어. 집회 나가거나 선거할 96학번인 우리들에게 내창이형은 먼 사람이다. 기

때 내창이형 동상 앞에서 인사하고 묵념하

념사업회를 움직이는 선배들은 대부분 내창이형

고 뭐 그랬잖아. 그것도 좀 형식적인 코스

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지만 우리는 아니었다. 그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의 끈덕지게 어깨동무

82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백광문(생명공학) 이건옥 (축산) 박천삼(산업경제) 전경미 (축산)

뜨거운 기억들에는 항상 내창이형이 있었

경미

던 거 같아. 그런 기억들이 조금씩, 꾸준히

사업회를 다시 찾았는데, 쉽지 않았지. 난

나를 움직이고 있었던 거고. 그리고 무엇

그래서 어깨동무가 중요한 거 같아. 우리

보다 내창이형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우

가 여전히 이렇게 여기 있다는 걸 계속 이

리가 이렇게 다시 만날 일도 없었겠지?

야기 하고 알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관심도

나도 나름 긴 공백기를 갖고 기념

많아지고 가까워지지 않을까. 천삼이의 말대로, 내창이형은 과거의 우리를 20년

천삼

만에 호출하고, 거의 소실되다시피 한 인연을 다

겠다! 1년에 한번이라도 모여서 신입회원

시금 이어주었다. 인생을 뒤흔들 정도로 강한 파

환영회 하고 뭐 그러는 거야. 학술적인 콘

장을 일으키지는 않았겠으나 이내창이라는 사람

텐츠도 물론 중요하지만 좀 더 편하게 접

은 우리 삶 구석구석에서 이처럼 끈덕지게 살아 있

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 좋을 거 같아.

었다. 우리는 그때 놓치고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신입생 환영회 때 우리가 처음 내창이형을

솔직하고 유쾌하게 나누었다. 그리고 오늘의 이 기

알았던 것처럼 말이야.

신입생 환영회 같은 거 해도 재밌

분 좋은 경험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는 데 동의했다.

이주연_96년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현재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자 고양이 이도의 충실한 집사로 살아가고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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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한국 과거청산의 현주소를 ‘알아야’ 한다 2017년 상반기 <다음세대의 과거청산>강좌 정원옥

사무국장

끈덕지게 어깨동무 끈덕지게 어깨동무

84 84


우리 형편이 그나마 가장 낫다 <끈덕지게 어깨동무>를 다시 만들기로 한 것은 2012년 신년총회에서였다. 2010 년 12월 31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하고도 2년쯤 지 났을 무렵이다. 신명철 선배는 그 해 신년총회에 참석은 못하고, 오프라인 소식지를 만들 것을 제안하는 긴 호소의 글을 보내왔다. 과거청산이 중단되고 공론장이 실종 되었는데, 과거청산운동의 흐름과 쟁점을 기록하는 공론지를 이내창기념사업회가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필요성에는 공감하겠는데, 우리가 왜? 그 때도 갑론을박이 치열했었다. 굳이 만들 어야 한다면 온라인매체로 만들자는 의견들이 적지 않았다. 재정도 넉넉지 못한 형 편에서 투자 대비 효과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청산운동 공론지를 만들어보자는 결론에 이른 것은 내창이형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서는 누군 가는 계속 과거청산운동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국가기구 조사 10 년 동안 과거청산운동의 동력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선배는 그나마 이내창기 념사업회의 형편이 가장 낫다고 했다. 신명철 선배가 과거청산운동 대중강좌를 기획해보자고 제안한 것은 올해 3월이 었다. ‘의문사유가족 디지털아카이브 구축사업’, ‘회원배가운동’, ‘거문도 답사기행’ 준비 등으로 기념사업회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하필 왜 지금 과거 청산운동 강좌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청산운동 30년, 국기기구 조사 10년의 내용과 과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배가 준 제안서의 내용을 부 연해보면 이렇다.

과거청산운동은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지만, 대부분 잘 알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기사를 읽었어도 어떤 슬픔과 노고가 담겨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그냥 스쳐 가는 과거의 일들이 되고 만다. 그렇게 과거청산은 남의 일이 된다. 우리가 배우는 과거는 정제된 역사의 기록일 수 없다. 이유는 과거는 변형되고 왜곡되었을 뿐 아니 라 범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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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이재승 건국대 법학대학원 교수

정호기 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국가범죄의 기록을 밝히기 위해서는 과거사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 동안 국가기구 가 무엇을 했는지, 또 무엇을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모여서 함께 배우고 토론하고 공 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강좌를 기획하게 된 취지였다. 이번에도 선배는 재학생들을 주체로 결합시킬 수 있는 등 이내창기념사업회의 형편이 가장 낫다고 했다. 진짜 그 런가. 기념사업회가 새롭게 벌인 일들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지만, 우리밖 에 이 일을 할 단체가 없다는 선배의 꼬임에 나는 또 넘어가고 있었다.

가슴 답답해지는 과거청산 강좌를 누가 들으러 올까 과거청산에 대해 듣고 배우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지 만, 실상은 거의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과거청산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1990년대에도, 국가기구에 의한 포괄적 과거청산이 이루어졌던 2000년대에도 시 민들을 대상으로 한 강좌는 거의 없었다. 과거청산을 주제로 대중강좌를 연다는 것 은 한 마디로 모험이었고, 실험이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거청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수강 신청을 할까. 수 요가 예측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획팀이 꾸려졌다. ‘4.9통일평화재단’의 안경호 사 무국장과 홍수정 자료실장, 이내창기념사업회의 신명철 진상규명분과장과 나, 중 앙대학교 자유인문캠프 기획단의 이재정, 과거사연구자 박현주 선생님이 함께 하 기로 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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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소연 ‘진실의 힘’ 상임이사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교수

기획팀은 강좌의 취지와 목표, 강의 주제와 강사 선정, 예산과 일정 등에 대해 논 의했고, 몇 가지 원칙을 공유했다. 첫째, 시민 대상의 강좌로 한다. 둘째, 매년 2회에 걸쳐 지속적으로 강좌를 기획한다. 셋째, 새로운 강사를 발굴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다(연구자, 전문가, 활동가 등). 넷째, 과거사 문제에 대한 철학적 접근과 문화 적 체험을 강좌 구성에 포함시킨다. 마지막으로, 강사의 일방적 강의가 아닌 수강생 들과 함께 배우고 이해하고 토론하는 강좌를 지향한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과거청산을 “남의 일”, 피해자의 일이 아닌 우리 모 두의 일, 나 자신의 이해도 걸려 있는 일로 바라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자신과 관계가 없는 일이라면 누가 가슴 답답해지는 과거청산 강좌를 6주나 걸쳐 듣 겠다고 오겠는가. <다음세대의 과거청산>이라는 강좌의 제목은 이러한 고민 속에서 모색된 것이었다. 다음세대는 과거사를 경험하지 않은 후속세대나 젊은 세대를 뜻하는 용어가 아니 다. 그것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자신의 과제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려는 용어다. “지연되는 정의 역사의 반복” 또한 2017년 상반기 과거청산의 현주소를 나름대로 진단하면서 고심 끝에 뽑은 강좌의 주제다. 하반기에는 하반기 의 상황에 부합하는 또 다른 주제로 강좌를 기획하게 될 것이다. 역할 분담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강사 섭외는 나와 안경호 사무국장님이 맡았 다. 이재정이 수강신청 구글폼을 만들었다. ‘4.9통일평화재단’, 이내창기념사업회,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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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

박현주 과거사 연구자

자유인문캠프가 각자의 네트워크를 통해 홍보를 진행하기로 했다. 예산은 170만 원 가량으로 책정되었고, ‘4.9통일평화재단’이 110만 원, 기념사업회가 60만 원을 분담 했다. 홍수정이 장소 대여를 했고, 웹자보와 플래카드, 배너 디자인은 강지우가 수고 해주었다. 노용헌이 사진을, 고두현이 촬영을 맡아주었다. 일을 하다 보니 기념사업 회의 형편이 가장 낫다는 신명철 선배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기획팀에서 스텝 까지 3분의 2가 기념사업회 사람들이었다.

과거청산에 대해 듣고 배우고 토론하다 한 달 가량의 홍보 기간 동안 21명이 신청을 했다. 신청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소 문을 듣고 개별 강좌를 들으러 오기도 했다. 참여연대, 인권운동사랑방, 천주교 인 권위원회 등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참여가 두드러졌고, 기념사업회 회원, 과거사위 원회 조사관, 대학원생 등 수강생들의 소속도 다양했다. 기획팀과 사진, 촬영 등 스 텝이 열 명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30명 정원의 강의실은 매번 꽉 찬 느낌을 주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는 수강생들이 다수여서였을까. 강 의실의 열기는 뜨거웠고, 강사들도 긴장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대여 시간이 제한 되어 있어 충분한 토론을 하지 못한 점은 아쉬웠지만, 대부분의 강사들이 두 시간을 꽉 채워 열강을 할 정도로 강의안을 충실하게 준비해왔다. 강사들은 얼마 안 되는 강 의료를 기꺼이 뒤풀이 비용으로 내놓았고, 강사와 수강생들이 어울려 못다 한 이야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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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들을 나누는 뒤풀이가 매번 밤늦도록 이어졌다. 21명의 수강생이 많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청자가 적을 경우 공부 모임으로의 전환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기획팀의 낮은 기대치에서 과거청산 대중 강좌의 출발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적자도 나지 않았다. 수강료 3만 원, 전 강의에 출석한 수강생에게는 원하는 과거청산 관련 도서를 선물하기로 홍보 가 되어 있었다. 기획팀은 적자도 기쁜 마음으로 감수할 작정이었는데, 아쉽게도 6 회를 모두 출석한 수강생은 없었다. 한 번 결석한 수강생 네 명에게 과거청산 관련 도서를 증정하는 것으로 강좌는 마무리됐다.

지속적인 대중강좌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어떤 일이든 멋모르고 시작할 때는 즐겁다. <끈덕지게 어깨동무>가 다시 발간되 었던 2012년 여름, 편집부는 마포의 어느 옥상 호프에서 감격에 겨워 밤새워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과거청산이 중단된 절망적 상황에서도 우리는 무언가 새로 운 역사를 써나가기 시작했다는 코 끝 찡함을 나누어가졌다. 그런데 5년여의 세월 이 흐르는 사이, 1년에 두 번 발간하는 소식지의 마감일은 왜 그리 자주 찾아오는 느 낌인지, 매번 쫓기고 허덕이면서 ‘그만 만들 거야’ 라고 남몰래 다짐하는 사람이 나 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청산 대중강좌도 아직은 감동의 여운에 젖어 있다. 무려(?) 21명이나 강좌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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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고, 과거청산 문제로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을 새롭게 만났으며, 다루어야 할 주 제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매년 두 차례 6회의 강의를 조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지속성이다. 대중강좌가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함께 시작한 사람들로부터 우정과 연대를 확인 받는 일이 중요하다. 함께 하고 있다는, 과거청산 운동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고 있다는 신뢰와 동지의식이 기반이 된다면 가는 데까지 가볼 용기를 낼 수는 있겠다. 아직은 다음 강좌를 기획하는 일이 즐겁다. 마지막으로, 수강신청을 해준 민주동문회의 심규한 회장님, 강순모 선배님, 기념 사업회의 서병훈 운영위원장님, 조환준, 김경주, 전경미에게 감사드린다. 수강신청 을 하지는 않았지만, 강좌를 들으러 와준 이원근과 강곤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한다. 노용헌과 고두현이 있어서 모든 강의가 기록될 수 있었다. 언제나 강의실 맨 뒷자리 를 지켰던 신명철 선배의 어깨가 조금은 펴졌을 지도 모르겠다. 기념사업회의 형편 이 그나마 가장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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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취지 4·16참사, 백남기 농민 사망, 블랙리스트 작성, 역사교과서 국정화, 한일위안부협상, 사드 배치 등은 모두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결과로 반복되고 있는 동시대 국가폭력 사건들이다. 국가폭력에 의 한 희생, 공작정치, 역사왜곡, 전쟁정치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은 한국 과거청산의 현주소를 말 해주는 것이다. 국가범죄의 가해자들이 처벌받기는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고, 과거청산의 성과들이 무 참히 훼손되고 부인되는 현상은 현재 자행되고 있는 국가폭력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 지연되는 정의 가 역사의 반복을 불러온다. 압제 하의 폭력에는 언제나 저항이 따랐다. 압제에 맞선 저항이 곧 과거청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 지만, 한국사회에서 과거청산은 민주화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과거 국가가 저지른 범죄행 위를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민주주의를 공고히 해야 하는 과제는 이른바 ‘과거사’라는 말처럼 현재에 서 멀어져가고 있다. 오히려 구질서를 옹호하는 세력들이 반격에 나서, 과거청산의 정당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새로운 국가폭력으로 이어져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이 말해주는 것은 과거청산의 실패인가? 과거 압제 하의 폭력에 정의를 세우려 는 노력은 20세기 후반을 특징짓는 세계적 현상이었고, 과거 정치적 폭력의 유산을 다루는 싸움은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다. 과거청산 노력이 한 세대의 시간을 통과하는 현 시점은 과 거청산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새롭게 시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음세대의 과거청산>강좌는 한국 과거청산의 현주소로부터 출발한다. 과거청산이 과거의 잘못 을 바로잡는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의 국가범죄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또한 과거청산이 피해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명권 및 인권과 직결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기획 된 것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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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달라는 과제를 상속받았다는 의미에서 다음세대라고 할 수 있 다. 다음세대의 과거청산은 피해자 중심의 과거청산운동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 기 위한 과거청산에서 국가폭력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과거청산을 실현할 수 있을까. 이러한 가능성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진행되어온 과거청산의 성과를 성찰적으로 되돌아 보는 한편, 남은 과제들에 접근하는 다양한 시각과 방법을 모색하고 동원해야 한다. 한국 과거청산에는 국가폭력으로 점철된 비극의 역사만큼이나 특수하고 복잡한 난제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소통하고, 함께 풀어야 한다. <다음세대의 과거청산>강좌는 ‘4.9통일평화재단’, 이내창기념사업회, 자유인문캠프기획단이 함께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이다. 피해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해자들과 ‘더불어’ 우리 모두의 생존과 삶 의 조건을 바꾸기 위한 실천으로서의 과거청산을 지향한다. 우리 모두는 더 이상 국가폭력이 반복되는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 정의를 앞당기고 역사의 반복을 멈추게 하는 데 <다음세대의 과거청산>강좌 는 작지만 의미 있는 실험이 될 것이다.

강좌 구성 구분

성격

강사

1강

총론

건국대 법학대학원 교수

2강

제도

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위원

3강

사건

‘진실의 힘’ 상임이사

4강

철학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교수

5강

운동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

6강

문화

감상 후 다함께 토론

이재승

정호기

송소연

진태원

안경호

제목

일시

국가폭력 그리고 죄와 책임

4.20(목) 19:00

과거사의 진상규명운동과 제도화 : 5ㆍ18민중항쟁을 중심으로

4.27(목) 19:00

폭압기구와 국가폭력 피해자의 삶

5.11(목) 19:00

을의 민주주의와 과거사 문제

5.18(목) 19:00

의문사를 통해본 과거청산운동

5.25(목) 19:00

파트리시오 구즈만 감독의 <자개단추>

6.1(목) 19:00

장소

카톨릭 청년회관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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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의 과거청산> 강좌 후기

지연되는 정의와 재난참사의 반복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5·18 민중항쟁 진상규명의 현재를 한 마디로 평가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질 문을 던진 강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관료의 승리”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순간 울컥했다. 강의 내내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를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 이다. 과거청산 활동 중 한국에서는 가장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되는 5·18 진상규명 이 그렇다면, 다시 구성되어야 할 세월호 특조위는 어떻게 활동해야 할까?

‘4.9통일평화재단’과 중앙대 이내창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과거청산 강좌를 듣기 로 한 것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지연되는 정의와 역사의 반복’이 라는 강좌 제목에서 나는 반복되는 재난참사와 지연되는 정의를 떠올렸다. 피해자 의 입장에서 재난참사와 국가폭력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난할수록, 소수자일수록 재난과 폭력에 노출되기 쉬우며, 인간의 존엄을 되찾는 길이 험난하기만 하다. 재난 참사나 공안기구의 범죄 모두 정부와 기업 등 거대한 권력구조 안에서 발생하므로 피해자들은 2차 피해를 입으며 외롭게 싸우게 되고, 보상이나 화해 강요로 사건 자 체를 덮으려는 힘이 강하게 작동한다. 문제가 쉬이 해결되지 않으면 몇몇 개인들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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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하면서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청산을 중단시킨다. 정의를 지연시키 는 국가의 매뉴얼이다.

5·18민중항쟁이나 4·16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은 국가범죄나 재난참사 진상규 명 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앞서나갔다. 국가의 흔한 수법을 넘어서는 ‘을’들의 투쟁 이 만들어낸 역사다. 5·18의 죽음과 4·16의 죽음을 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들의 투쟁과 연대로 두 사건은 한국사회를 뒤흔든 정치적 사건 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쟁점이 됐다는 것은 진상규명의 한계로 작용 하기도 했다. 5·18민중항쟁이 ‘야당’의 정치적 자산이 되면서, ‘여당’은 그것을 정치 적 약점으로만 인식하고, ‘화해’라는 말로 봉합이 강요됐다. 4·16세월호참사는 박근 혜 파면이라는 역사를 이끌어낸 결정적 힘이었다. 그런 만큼 정치적 쟁점으로 소모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정의가 또다시 지연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청산의 역사를 배우는 시간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사회운동도 과거의 한계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전히 막막한 점도 있다. 재난참사도 공 안기구의 범죄와 마찬가지로 국가폭력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지만 작동 방식이 똑같지는 않다. 공안기구의 범죄에서는 작위의 범죄가 주로 문제시된다면 재 난참사에서는 부작위의 범죄가 주로 문제시된다. 국가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들 을 하나씩 밝혀가는 것이 전자에서 정의를 세우는 방식이라면, 재난참사에서는 국 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밝혀나가야 정의를 세울 수 있다. 어찌 보면 한 국사회에서 재난참사의 진상규명은 미답의 길이기도 하다.

미답의 길 앞에서 멈출 이유는 없다. 인권의 역사는 언제나 그렇게 열려 왔다. 작 위와 부작위는 큰 차이가 아닐 수도 있다. 게다가 권력구조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 건들은 작위와 부작위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인권에 대한 국가의 의무와 책임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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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쪽에 우선순위를 둘 수 없다. 고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 중 요한 만큼 국가기구가 고문에 의존하지 않도록 교육하고 구조를 바꾸는 것이 필요 하다. 재난참사를 예방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필요한 만큼 안전성 을 떨어뜨리는 업무지시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5·18민중 항쟁의 진상규명이 아직 멈추지 않은 것처럼, 과거의 수많은 국가폭력 사건으로부 터 진실과 정의를 이루기 위한 싸움이 멈추지 않은 것처럼, 인간의 존엄을 향한 여정 에 막다른 길은 없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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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의 과거청산> 강좌 후기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우리의 과거청산 강혁민

평화학 연구자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2017년 상반기 ‘지연되는 정의와 역사의 반복’이라는 이름 으로 개최된 다음세대의 과거청산 세미나를 수강한 강혁민이라고 합니다. 먼저세미 나 후기를 위해 제게 소중한 지면을 허락해주신 주최 측 관련자분들께 감사의 말씀 을 전합니다. 아울러 세미나를 기획하고 준비하시고 진행하신 ‘4.9통일평화재단’ 안 경호 국장님과 홍수정 실장님, 이내창기념사업회 정원옥 박사님, 중앙대 자유인문 캠프기획단의 스텝 분들, 그리고 강의를 맡아주신 다섯 분의 강사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번 과거청산 세미나는 제게 진실로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아일랜드 에서 평화학을 공부하면서 과거청산과 화해를 중심으로 논문을 마친 후, 한국 과거 청산 관련자 모임으로는 몇 번 되지 않은 소중한 모임 중 하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동안 관련 학자들과 활동가들을 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조언들을 들었지만 하나의 조직적인 형태로서 한국의 과거청산 활동과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여섯 주간 동안 만났던 각계각층의 선생님들과 나눈 담화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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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제가 과거청산에 더 관심을 가지고 연구할 수 있도록 도울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총 여섯 번의 강의중 개인적인 사정으로 네 번의 강의만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면에서는 각각의 강의에서 제가 깨닫고 느낀 점들을 서술하고 이와 더불어 세미 나의 발전을 위하여 몇 가지 바라는 점들을 제안해보려고 합니다.

세미나를 여는 첫 강의는 지난 4월 20일 ‘국가폭력 그리고 죄와 책임’이라는 제목 으로 건국대학교의 이재승 교수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국가폭력과 이행기의 정의 담론의 총론으로서 이교수님께서는 무엇보다 과거를 청산해야할, 할 수 있는, 그러 나 동시에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법적 개념과 근거들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도 와주셨습니다. 한국의 과거청산 뿐만 아니라 독일과 남아프리카, 그리고 남미 국가 들의 과거 청산활동에서의 법적 다툼의 실례들을 보여주셨고, 이와 함께 사법적 대 응 방식이 가지고 있는 강점과 약점들에 대해서도 균형있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이 교수님의 강의에서 개인적으로 주목한 점은 폭력의 재발 방지를 위한 사회적 차원 에서의 억지력 행사였습니다. 폭력적 과거를 다루고 화해된 미래로 나아간다는 것 은 드러난 폭력에 의한 가시적 상처를 치료하는 것 이상의 작업을 요청하는데, 그것 은 폭력을 가능케 한 구조적 폭력의 메커니즘을 변혁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변혁이라는 것은 최근의 이행기 정의 논의에서 중심축으로 발전되어온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상이라는 ‘좁은’ 차원에서의 정의구현을 넘는, 가해의 구조와 의식,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적 쇄신과 혁신이라는 ‘넓은’ 차원의 변혁 적 정의(transformative justice)를 의미합니다. 변혁적 정의의 구현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범주에 들지 않는 일반시민들의 각성과 주체적 의식달성을 목적합니다. 이 러한 각도에서 본 과거청산의 과업은 보통 사람들을 각성케 하여 다양한 형태로 폭 력을 행사하는 국가를 혁신시키고 감시하는 일로 참여케 하는 것입니다. 일반 주체 들의 각성은 또한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개념화시킨 형사적 죄, 도덕적 죄, 정 치적인 죄, 그리고 특별히 형이상학적인 죄의 탕감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부합되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첫 번째 강의에서 주어진 메시지는 사실상 다음 다섯 번의 강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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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반복되고 확장된 형태로 논의되었습니다.

두번째 강의는 ‘과거사의 진상규명운동과 제도화: 5·18민주항쟁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정호기 박사님께서 진행해주셨습니다. 5·18 전문가이신 정박사님의 강의 가 마음에 와 닿았던 이유는 오랫동안 광주 피해자들의 관찰자로 그리고 행동가로 광주의 현장을 연구하시고 그 내용을 바로 우리 눈앞에 선명히 보여주셨기 때문이 었습니다. 가령, 5·18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민주항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들에게 5·18의 정신은 어떤 방식 으로 계승되고 있는가에 대한 실질적인 질문들을 던져 주셨습니다. 특별히 강의 마 지막에 넌지시 말씀하신 하나의 문제제기는 한동안 제 머리 속을 맴돌았습니다. 그 것은 최근의 세월호 문제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왜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폭력 의 범위 밖에 서 있는 일반 사람들에게 금수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 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는지에 대한 고민이 었습니다. 피해자들이 더 이상 피해자의 위치에 서있지 못하고 특별법과 그 개정안 들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일반 시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현 실, 따라서 정의의 이행을 사법적 과정으로만 제한시켜 폭력의 피해자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시민들의 부족한 공감성 등. 이는 1강에서 드러 난 관점과 상당부분 일치하면서, 과거청산 운동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하 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폭력의 범주에 살짝 빗겨서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의 문제의식과 참여의식의 확대방안은 다음세대의 과거청산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물음은 3강의 진태원 박 사님의 강의에서 조금 더 확대 되었습니다.

진태원 박사님께서는 ‘을의 민주주의’라는 정치철학적 접근으로 과거사 문제를 재조명할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여기서 을(乙)이란 사회적 약자들을 총칭하는 집합 명사로 피해자, 못 가진 자, 주변화된 자, 배제된 자, 혹은 몫 없는 이들을 의미하며,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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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민주주의란 사회적 불합리와 부정의의 피해자인 ‘을’들을 보호하고 포용하려 는 민주주의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뒤틀린 과거로부터 묵인과 부인을 강요받 은 수 없이 많은 학살과 인권유린의 피해자들 전부가 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습 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을’들의 주체적 외침인데 이는 갑이 되고 자 하는 의지에로의 외침이 아니라, 을들 스스로부터 제도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과 거의 억압을 행사한 힘과 의식에 대한 자각적 해방이 실현되도록 하는 적극적인 정 치의 참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을의 민주주의가 실현된다는 것은 이들의 고통의 문제가 사회의 주요 현안과제로 부상하고 약자로서의 낙인과 갑의 억압으로부터 해 방된 현실을 의미할 것입니다. 진 박사님은 또한 이러한 형태의 민주주의에서 유동 적 개념인 ‘을’의 다양한 집합적 목소리를 어떻게 현실 정치에 반영시킬 것인지에 대 한 고민, 곧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를 특별히 강조하셨습니다. 각기 다른 을 의 경험이 하나의 대표성으로 언표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상이성이 결코 을의 의 미와 의지의 왜곡으로 변질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을을 기억 하고 을을 계승하고 을의 관점에서 역사를 파악하고 현재의 싸움을 전개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박사님의 을의 민주주의는 제가 최근 관심하고 있었던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과 거청산 바라보기’와 깊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프란츠 파농이 제기한 흑인 해방문제나 라틴 아메리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 그리고 안병무의 민중신학이 공 유하는 ‘억눌린 자’들에 대한 해방과 자각의 측면은 우리가 왜 더욱 피해자의 관점에 서 생각해야 하고 가해자 처벌만큼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요구에 집중해야 하는지 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을의 민주주의나 탈식민주의적 과거청산 접근은 폭력의 경험 자체를 우리의 실존적 물음의 중심에 두고 이러한 폭력이 왜 일어났고 폭력의 배후에는 누가 서 있었는지를 규명해야 합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티모르, 아 일랜드 등 세계 여러나라에서 경험된 식민지배의 잔재가 구조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폭력에 기인한 가시적 폭력을 고착화시키고 정당화시킨 원흉이라는 점에서 탈식민 주의적 과거청산의 접근법은 국민 대다수인 을의 해방을 지향하는 을의 민주주의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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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맞닿아 있습니다. 이 공통분모는 결국, 다시는 같은 폭력의 경로가 구성되고 그 구조 안에서 개인의 도덕적 판단이 배제되어 학살을 저지르고 인권을 침해하는 비 극을 국민들의 의식의 해방으로 방지하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관점이 1, 2, 4강 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잠정적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4.9통일평화재단’의 안경호 국장님께서는 이전의 강의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의문사를 통해 본 과거청산 운동’라는 이름으로 제 5강을 맡아주셨습니 다. 의문사에 대한 안국장님의 강연은 무엇보다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와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이론적 차원의 논의에서 벗 어나 실질적인 차원에서 폭력적 과거를 왜 바로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민중적 그리 고 애국적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갖도록 해주었습니다. 한 나라 의 주권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국민들에게 있다는 이 간단한 문장이 성립되기까지 는 지난 수 십년간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발전시켜 온 민주열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인데, 아직도 수없이 많은 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지금까 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바로 대한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라는 점 은 왜 과거를 올바로 청산하지 않고는 미래로 나아 갈 수 없는가에 대한 명백한 근 거였습니다.

총 6번의 강의 중 네 번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한 가지 중심테마를 깊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과거청산’이라는 무겁고 불편한 주제가 어떻게 우리 역사를 치 료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통합과 화해에 기여할 수 있겠는가였습니다. 더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하겠지만, 그 핵심은 바로 폭력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각성된 주체들의 회복적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관점으로 다시 각각의 강의를 되돌아보면, 1강의 이재승교수님은 사회문화의 변혁이, 2강의 정호기 박사님은 기억과의 투쟁이, 4강 의 진태원 박사님은 ‘을’의 해방과 올바른 재현의 과정이, 그리고 5강의 안경호 국장 님은 이름 없이 희생된 민주열사들의 완전한 진실규명이 그러한 어두운 과거로부터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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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구속시켜 줄 대안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들을 나누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세미나의 확장과 발전을 위해 몇 가지 개인적인 제안을 해보려고 합니 다. 먼저 세미나 구성에 있어서 서로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했으면 하 는 바람입니다. 평일 저녁 두 시간이 비록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참여자들의 참여도 와 열정이 높았던 탓에 매 주 부족한 시간으로 아쉬워해야 했습니다. 과거청산이라 는 주제가 대체로 역사학자들과 법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의되어 온 터라 이렇게 열 린 강좌에서 비전문가들의 적극적 토론이 진행되기 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 하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제안은 한국 과거청산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 강좌도 열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이행기 정의 담론은 최근의 여러 학계에 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웃나라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동티 모르, 네팔의 경우만 해도 외국의 젊은 연구가들로부터 비교연구가 다양한 각도에 서 아주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비해, 한국의 이행기 정의 사례는 해외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내 논문에서도 타 국가 사례와 비교연구가 거의 이 루어 지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경험있는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각국의 과 거청산 담론을 전해 듣는 것은 한국에서의 논의를 확장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좋 은 길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호소입니다. 그것은 과거청 산에 대한 연구와 활동의 경로가 끊이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를 포함한 ‘다 음세대’가 민주화 운동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전 세대와 비교했을 때 과거청산에 대한 의지와 의식이 매우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 러나 이 벌어지는 세대 간 간극이 역사를 바로세우고 치료한다는 과업을 훼손시키 도록 방치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과거는 경험된 미래이기에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 지나간 과거를 마주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현재도 미래도 꿈꿀 수 없을 것입니 다. 과거청산은 실로 우리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예방적 차원의 민주주의 보존의 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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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른 얼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공부하는 연구자들의 연구 환경이 우선적으로 마련되어야 하며 간학문적 접근을 확장시킬 공간과 예산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청산 연구가들의 담론이 탁상공론이 되지 않고 균형 있는 논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현재까지 설립되어 왔던 위원회에서 활동하신 선배 조사관들과의 교류도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구 술사업이나 인권교육 등 다양한 활동에 젊은 활동가들을 참여시켜 실질적인 피해자 조사 등에 대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다음세대’의 한국사회가 우리의 불우한 과거의 잔재를 치유하여 진정 한 통합과 화해의 길을 걷는, 그래서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을 염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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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의 국악이야기

개가수 박춘재의 재담 이수정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울 장안에서 최 고의 인기를 누린 스타로 박춘재(1881 ~ 1948) 가 있었다. 박춘재는 18살 무렵에 이미 고종의 총애를 받는 어전광대가 되어 가무별감(歌舞 別監)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고 하니, 요즘 1915년 가정박람회 운동장에서 인파에 둘러싸인 박춘재 일행

으로 치면 가장 잘나가는 대세 아이돌스타쯤 되는 인물이다. 서울 태생으로 서울 경기지방

의 민요인 경서도 소리를 잘하여 어전광대가 되었으니 그 재주만으로도 서울장안을 평정할 만했지만, 대중적 인기는 ‘재담’에서 비롯됐다. 재담은 웃기는 이야기, 즉 개 그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재담 소리꾼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꼽추, 난장이, 합 죽이처럼 장애를 가졌거나 못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이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특 출난 외모나 신체조건을 개그 소재에 적극 활용한 것으로써 못생기거나 뚱뚱한 것 을 개그 소재로 삼는 요즘 세태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박춘재는 기존의 재담 소리 꾼과 다르게 꽃미모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지고 얼굴과 몸을 막 쓰면서 대박이 터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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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졌다. 얼굴 표정으로 웃기는 몸 개그를 잘하였고, 한 쪽 발에 탈을 쓰고 하는 탈놀이의 일종인 ‘발탈’ 기술 도 굉장하였다 한다. 박춘재의 공연을 봄 사람들이 너무 웃어 ‘오줌을 잘금잘금’할 정도였다고 전해진 다. 노래 잘하고 연기 잘하고 웃기는 말 잘하였으니, 개가수의 원조라고 할 수 있겠다.

박춘재는 재담의 사설을 스스로 만들어 불렀을 뿐 「무쌍신구잡가」 표지 광무대 무대에서 기생이 춤을 추고 있고 극장 안에는 만국기가 걸려 있다.

만 아니라, 「무쌍신구잡가」(1915)는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소리 가사집을 발간했다. 광대이자 가수가 자 신의 이름을 내걸고 가사집을 낸 것은 이때가 처음이

었다. 그의 재담 중 <장대장타령> <곰보타령> <장님흉내내기> <각색장사치흉내> <개 넋두리>가 유명하다. 무당을 부인으로 둔 장대장과 무당임을 감추려는 모습을 그린 장대장타령, 곰보의 얼굴 모습을 과장하여 반복하는 내용을 가진 곰보타령, 전국 팔 도 장님이 외치는 소리를 흉내 낸 장님흉내내기, 서울 장안의 여러 장사꾼들이 물건 을 팔며 외치는 소리 흉내가 그 내용이다. 이러한 재담이 인기를 끌었다고 하니 특정 상황에 대한 흉내내기, 즉 성대모사가 대중에게 먹혔나 보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나 특정 직업이나 여성에 대한 비하 시각이 거슬리지만, 비정상에 대한 비꼬기 가 웃음 포인트가 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노래들이 마냥 웃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박춘재의 노래를 한곡 살펴보자. 사설에 의인화 된 맹꽁이가 등장하 기 때문에 맹꽁이 타령이라고 부르는 곡이다.

맹꽁이타령

저 건너 신진사집 시렁위에 얹은 청둥청정미 청차좁살이냐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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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은 청둥청정미 청차좁살이냐 아니 쓸은 청둥청정미 청차좁살이냐 아랫대 맹꽁이 다섯, 웃대 맹꽁이 다섯 문안 맹꽁이 다섯, 문밖 맹꽁이 다섯 흥인지문 썩 내달아 왕십리 첫둘셋째 논에 울고 우는 맹꽁이 다섯 그리고 동수구문 두 사이에 오간수 밑에서 놀던 맹꽁이가 오륙월 장마통에 떠내려 오는 나막신짝을 잡아타고 선유하는 맹꽁이 다섯 ... 그리고 경복궁 안 연못서 울고 노는 맹꽁이가 지나간 임진년에 한을 물고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니 ... 칠월이라 백중날에 공회를 한다 모화관 반송 수양버들 가지밑에 수두룩 모여 밑에 맹꽁이가 우에 맹꽁이를 치여다보고 압다 요놈아 염치없다 너무 누르지 말아라 무겁다. 맹꽁. ...

경기지역 휘몰이잡가로 분류되는 이 노래는 볶는 타령장단으로 빠르고 경쾌하게 부른다. 서울 웃대(서촌과 광화문 일대), 아랫대(종로 을지로 일대)와 성문 안팎에 거 주하는 맹꽁이가 모여 회의를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노랫말은 ‘청중청정미’같 은 말장난을 주절주절 주워섬기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맹꽁이 들이 등장한다. 그중 경복궁 맹꽁이는 임진년 한을 품어 벙어리가 되어 울 수가 없 고, 모화관 맹꽁이는 다른 맹꽁이에 깔려서 괴롭다고 노래한다. 모화관 맹꽁이는 이 마 1896년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고 독립운동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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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하였지만 무산되었던 상황과 같은 답답한 심정을 맹 꽁이 타령에 실어 노래한 것인 듯하다.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꽉 막힌 맹꽁이로 급변 하던 사회에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의 상황을 묘사하 는데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극장무대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긁어주고 웃겨주었던 박춘재의 인기는 대단 했다. 박춘재는 우리나라에 음반이 들어왔을 때에도 박춘재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었다. 국내 첫 음반녹음은 1899년경 에디슨 방식의 왁스 실린더 유성기가 들어

왔을 때 이루어졌다. 고종 앞에서 처음 시연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어전광대 박춘재 의 소리를 녹음하고 그 자리에서 재생하였다 한다. 유성기에서 박춘재의 소리가 흘 러나오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네 혼이 반쯤 유성기 속으로 들어갔겠구나’라고 염려했다 한다. 이 왁스실린더 유성기는 내구성이 매우 약해서 조금만 힘을 주어도 깨져 버리는 탓에 아쉽게도 이날의 노랫소리는 남아있지 않다. 어전에서 첫 녹음을 한 사람이라는 사실 덕분에 박춘재는 이후 일본과 미국의 축 음기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하였다. 당시 가수 중에서 가장 많이 음반을 취입하였고 가장 많이 팔렸다. 인기가 많았으니 당연히 재출반도 많이 되어서 현재까지 남아있 는 유성기음반도 많아서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 수 있다. 수없이 들어서 닳고 닳은 우성기 음반 속에서 그의 인기를 가늠해 볼 수 있지만, 지금은 경서도소리 명 창은 찾아보기 힘들고 재담은 맥이 끊어져서 그 소리들은 음반에서만 겨우 남아있 다.

이수정_1985년 중앙대 국악과에 입학하였다. 2015년 『이왕직아악부의 조직과 활동』이라는 논문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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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으로 세상 읽기

마당극을 기억하시나요? 김경락

마당극의 기억 드라마보다 뉴스가 재미있는 시절입니다. 연일 재조사라든지 폐지라든지 하는 달 달한 뉴스들이 귀를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놓습 니다. 박근혜 시절에는 블랙리스트로 예술을 못하게 만들더니 새 정부 들어서는 달 달하고 신박한 뉴스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바람에 예술 관람하는 시민들이 줄어들 고 있답니다. 그렇다고 마냥 호시절은 아니겠지요. 더불어 민주당의 보수적 한계와 자한당의 수구들이 아직 살아있는 데다가 진보란 언제든지 싸워야 할 태생적 운명 을 지녔으니까요. 아무튼 민중들은 촛불의 힘으로 무장한 상태이고 언제든지 광장 으로 쏟아져 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게 이번 촛불집회의 커다란 성과가 아닐까 싶 습니다. 한 가지 더, 우리는 촛불의 대중적 힘에서 커다란 예술적 힘을 발견했습니다. 바 로 광장의 힘이지요. 광화문광장, 시청 앞 광장의 역할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김대중 정부시절 여의도광장이 공원으로 탈바꿈하면서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이 유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다수의 힘을 보여줄 장소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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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광화문광장과 시청 앞 광장이 남아있었습니다. 제가 만약 이명박이나 박근혜였다면 광화문광장과 시청 앞 광장부터 없앴을 겁니다. 물론 그만큼 민중의 저항이 있었을 테고 좀 더 일찍 물러났겠지요. 다들 아시겠지만 광장(廣場)은 한자입니다. 넓은 광(廣)에 마당 장(場)을 쓰지요. 넓은 마당이라는 뜻일까요? 단순히 넓고 좁음을 떠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을 광장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한자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에겐 광장을 대체할 수 있 는 마당이라는 순 우리말이 존재합니다. 이 마당이라는 순 우리말이 조선시대 사대 부들이 궁궐 같은 집에 마당을 두고 온갖 화초를 가꾸며 정신수양의 도구로 사용하 고 농경사회에서 농작물을 관리하는 공간으로만 치부되면서 그 역할과 기능이 좁아 지게 됩니다. 단순히 건축적인 개념으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당연히 좁은 공간을 칭 하는 개념으로 변질되지요. 사대부들의 마당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외부와는 단절되어 개인의 공간인 반 면 민중들의 마당은 경계가 없어 항상 열려 있고 외부와의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했 습니다. 집 앞마당에서 고개만 들면 길거리의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었고 싸리나무 담장은 높이가 거의 없어 자유로의 안과 밖을 볼 수 가 있었지요.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했습니다. 이 소통의 기능이 바로 마당의 핵심이지요. 마당에 어원은 땅에 있다고 합니다. 공간의 크기와는 관계없다는 얘기지요. 하지 만 언제부터인가 넓은 땅은 광장이라 부르게 되고 집 앞 작은 공간은 마당이라 부르 고 있습니다. 아마 사대주의의 영향이 아닐까 합니다. 정확한 건 아닙니다. 아무튼 마당은 넓이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광화문광장이나 시청 앞 광장보다는 광화문마당이나 시청앞마당이라 부르는 건 어떨까요.

마당극은 여전히 유효한가? 마당 이야기가 너무 길었습니다.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마당의 역할입니다. 어 느 때 부터인가 마당의 개념이 건축에 국한된 개념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정확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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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유는 사실 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마당은 집 앞에 작은, 바쁘고 지친 현대에 있으면 좋지만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공간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8,90년대 대학교 를 비롯한 공장, 마을회관에서는 심심치 않게 마당극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 제부터인가 마당극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마당극과 마당놀이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사실 마당극을 쉽게 볼 수 없게 된 이유는 여 러 가지가 있습니다. 당연히 창작자들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요. 변해가는 시대상황 도 무시할 수 없었고요. 그나마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잠시 반짝했다가 암흑의 9 년 동안 민족문화, 민중문화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억압과 탄압을 뚫 고 올바른 민족민중문화를 열지 못했던 창작자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겠지만 시 절이 하도 엄하다 보니 창작자들 탓만 하기도 뭐합니다. 마당은 단순히 건축학적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이며 철학적 개념입니다. 예술적 개 념이기도 하지요. 이 정치적이며 철학적이며 예술적인 개념을 하나의 양식으로 모 아 놓은 예술이 바로 마당극입니다. 넓은 마당에서 장구치고 꽹과리 치며 울고 웃고 춤추고 노래 부르며 연기하면 전부 마당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마당의 정치적, 철학적 개념의 원칙과 원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야만 마당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이것은 한때 모 방송국에서 열심히 만들어댔던 마당놀이와의 차이점이기도 합 니다. 이 마당의 정치적이며 철학적이자 예술적인 개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 은 것이 바로 지난 겨울 천만 촛불집회였습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 되시리라 믿습니다. 흔히 예술가들은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담은 예술작품을 선보일 때 대중들이 이해 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무척 고민합니다. 아무렇지 않게 작품을 선보 이는 것처럼 보여도 내심 형식과 내용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에 상당히 민감하지요. 요즘 2,30대에게 마당극이란 형식이 무척 낯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인구의 4/1이 마당을 경험했습니다. 축제를 경험했습니다. 굳이 마당의 정치적, 철 학적 예술적 개념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천만이 넘 는 인원이 마당의 정치적 철학적 개념을 이해하고 있고 예술적 경험을 완료했습니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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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다. 그냥 풀어 놓으면 됩니다. 물 만난 고기처럼 말입니다. 물론 민족, 민중문화의 구현을 위해 오로지 마당극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 지만 천만 촛불집회의 소중한 자산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마당극은 부활은 필수입 니다. 촛불집회의 예술적 계승만이 천만 관객의 뜨거운 가슴을 이어갈 수 있을 것 입니다. 조만간 많은 예술가들이 천만 촛불의 계승을 위해 마당극의 부활을 알리는 축포를 터트릴 것을 기대해 봅니다. 저 역시 매진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 다.

김경락_88년 중앙대 연극학과에 입학했다. 현재 극단 <새녘>의 대표로 활동 중이며, 배우로서의 그의 이름은 진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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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이의 <데이터사회의 인간학> 혁이의 [데이터사회의 인간학]은 다음 순서로 계속 연재됩니다. 1.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세상에서 우린 행복할 수 있을까? 2. 알파고의 이해와 활용 가능한 분야 3. 빅데이터의 이해와 분석의 예 4. 기술발전을 삶의 질로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

빅데이터에 대한 이해와 분석의 예 혁이

요즘 어딜 가나 듣는 정보통신 용어 중 하나가 빅데이터다. 그러나 그 정의를 명확 하게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정보통신업계 종사자라 할지라도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나 또한 명함에 빅데이터라는 단어가 분명하게 박혀 있지만 누군가가 빅데이터가 무 엇이냐고 물어오면 난감할 때가 많다. 게다가 그 정확한 정의가 공유되지 않은 상황 에서 “이건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나온 결과입니다”라거나 “빅데이터로 분석해봐라” 는 등의 말로 상황이 정리되곤 한다. 도대체 이 빅데이터는 뭐길래.

우선 빅데이터라는 단어의 기원은 구글의 대용량 데이터베이스의 명칭이었던 ‘빅 테이블’에서 나왔다고 보는 전문가가 많다. 구글의 ‘빅테이블’은 한동안 데이터베이 스계를 주름잡던 관계형데이터베이스의 문제점인 방대한 용량의 데이터 처리 시 성 능저하를 보완한 구글의 분산처리 데이터베이스 방식이다. 구글은 자사의 검색 엔 진에서 사용하던 이러한 데이터베이스 관리방식을 2000년대 초반 논문으로 공개했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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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를 기반으로 수많은 기술자들이 대용량 데이터베이스 처리를 위한 자신들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그중에서 ‘더그 커팅’이라는 천재적인 프로그래머는 분산처리라는 구글의 아이디 어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분산처리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 결과를 오픈소스로 전세 계 개발자에게 공개했고, 그 명칭을 ‘하둡(hadoop)’이라고 붙였다. 빅데이터에 관심 이 있다면 한번쯤은 들어본 하둡은 이렇게 탄생했다. 빅데이터 기술 측면을 이해하 기 위해서 ‘분산처리’와 ‘오픈소스’ 두 단어를 먼저 정리해보자.

먼저 분산처리는 기존의 대용량 데이터베이스가 가진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첫 번째 문제는 그동안의 데이터 처리는 하나의 장비에 의존 했다는 점이다. 똑똑하고 빠른 장비의 힘으로 데이터 처리 성능을 높여야 하니 데이 터가 많아질수록 장비는 점점 비싸지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어느 수준 이상의 데 이터 처리가 필요할 경우 서비스를 개발할 수 없거나 서비스 비용을 상회하는 이익 이 발생해야 했다. 또 이러한 장비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특히 한정된 리소스를 잘 쓸 수 있도록 데이터를 튜닝하는 전문가)가 필요했고, 이들 소수의 전문가는 점점 비 싼 인력이 되어 두 번째 문제인 유지보수 비용의 과다를 야기했다. 이를 획기적으로 해결한 것이 바로 분산처리이다. 분산처리는 성능이 떨어지는 장비들을 서로 연결 시키고 일을 나누고 결과를 합치는 프로세스를 수행함으로써 저렴한 비용으로 효율 을 높이는 있는 데이터 처리 아이디어였고, 이는 데이터 처리 비용의 획기적인 절감 을 가져오게 됐다.

오픈소스는 소프트웨어의 설계도라 할 수 있는 소스코드를 몇 가지 조건을 걸고 무상으로 온라인에 배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어떤 프로그램의 오픈소스가 있다면 손쉽게 그 프로그램을 복제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더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일부 기능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어떤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개발하는 것과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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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효율이 나오기 때문에 소프트웨어가 단시간 내 획기적으 로 발전할 수 있게 된다. 오픈소스를 개발하고 지지하는 일군의 프로그래머들은 이 러한 공유의 효과가 소프트웨어 생태계 나아가서는 인간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빅데이터 기술의 발전은 분산처리로 데이터 처리효율성이 높아진다는 아이디어 를 제공한 구글의 논문 공개, 그리고 ‘더그 커팅’의 새로운 데이터관리 프로그램인 ‘ 하둡’의 개발과 오픈소스화로 촉발되었고, 이 소스를 수많은 개발자들이 내려 받아 더 정교하고 더 많은 곳에서 쓸 수 있도록 발전시키는 연속적 행위에서 성장하였다. 이러한 기술의 선순환은 결과적으로 기존의 데이터 처리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 도로 데이터 처리의 비용을 감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져 최근의 대용량 시스템에 빠짐 없이 적용되었으며, 이른바 ‘빅데이터’가 사회 일반의 보편적 언어로 인식될 정도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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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흥행을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러한 ‘하둡’ 에코시스템이 어떻게 우리 삶에서 반영되었기에 ‘빅데이터’가 보편성을 갖게 되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2000년 중반부터 급속하게 확산된 소셜네 트워크 서비스인 페이스북을 먼저 살펴봐야겠다.

‘마크 주커버그’는 페이스북이라는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개발했고, 이 결과로 세계적 부호가 됐다. 90년대 한국에서 수많은 불륜을 야기했다던 ‘아이러브스쿨’과 동일한 아이디어가 아니냐고도 볼 수 있지만, 그와는 확연하게 다른 두 가지 포인트 가 있음을 인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첫 번째 포인트는 엄청난 서비스의 확장성에 있다. 페이스북은 하둡을 기반으로 개발됐다. 따라서 엄청난 서비스 접속자가 발생 한다 하더라도 그 데이터 처리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는 이전의 플랫폼 구 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결과 무제한적 가입과 가입자 간의 빠른 데이터 공유, 손쉬운 관계분석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단순한 게시판 형태나 상호 메시지 전달기능 이 아닌 다중설정조건, 그 조건들의 갱신, 부가적 서비스 파생이 가능할 수 있는 단 단한 기술적 토대 위에 있다.

실제로 2004년 2월 4일 학교 기숙사에서 하버드 재학생만 이용 가능한 폐쇄 사이 트로 개설된 페이스북은 2월 말 하버드 재학생 절반이 가입하였고, 3월 스탠포드, 컬럼비아, 예일 대학교에 오픈되어 개설 두 달 만에 MIT, 보스턴, 노이스턴 대학교 및 아이비리그 전체로 확장됐다. 2005년에는 고등학생의 가입이 허가되었고 2005 년 말에는 미국, 캐나다, 영국 등 7개국 2,000개 이상의 대학교 25,000개 이상의 고 등학교로 확장됐다. 그리고 2006년에는 모든 가입 조건이 배제되고 전자우편을 가 진 13세 이상의 전 세계 모든 사용자에게 개방되는 놀라운 확장 속도를 보였다. 기숙 사 방에서 개발된 후 2년 만의 일이었다. 만약 페이스북의 기간 시스템이 기존과 같 은 일반적인 데이터시스템이었다면 엄청난 사전투자와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검증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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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어야 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서비스에 대한 가치는 바닥을 치고 말았을 것이다.

페이스북 성공의 두번째 요소는 철저한 마케팅 용도의 시스템이면서 사용자에게 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도록 만든 비즈니스 모델에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페이스 북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의 대명사로 말하며 서로간의 소식을 묻고 의견을 공유하 는 시스템으로 생각하지만, 마케팅 종사자는 누구도 페이스북을 제목 그대로의 ‘소 셜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의 기능인 소식 공유 는 이 거대한 마케팅 플랫폼에서 고객서비스라는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 시스템의 많은 자원은 사용자로부터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더 많은 분석을 위해 사용되어진다.

우리가 페이스북 서비스를 이용하며 제공하는 정보들, 예를 들어 이름, 성별, 나 이, 직장, 관심사 등의 기본제공 정보와 내 인맥, 그 인맥의 접촉경로, 현재 관계, 친 밀도 등의 파생분석정보, 그리고 서비스 사용정황으로부터 추출되는 나의 행동, 몇 시에 여유가 있는지, 어떤 생활패턴을 보이는지, 거주지역과 생활반경은 어디인지 등의 정보 분석을 위해 페이스북의 시스템 자원은 소비되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 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서비스가 분리되어 있을 뿐이다.

가상의 인물 A의 사례를 통해 우린 얼마나 많은 정보를 소셜네트워크에 제공하는 지 잠시 생각해보자. A씨는 소셜서비스 가입을 위한 생일 이외의 정보는 입력하지 않았다. 개인정보보 호에 대한 염려가 있는 터라 직장, 졸업학교 등은 입력하지 않았다. 다만 그저 친한 대학친구 몇 명을 친구등록 했으며 그들의 소식이 있을 때 가끔 확인을 하는 정도로 서비스를 사용하기에 평균 사용빈도는 일주일에 2~3회 정도에 불과하다. 직접 글을 올리는 경우는 이보다도 적어 2주에 1회 정도에 그친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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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소셜네트워크 이용 빈도가 적어보이는 A씨로부터 소셜서비스가 얻을 수 있는 정 보는 어느 정도일까? 소셜서비스는 가입정보를 통해 연령과 성별을 기본적으로 알 수 있다. 또 A씨가 친구로 추가하지는 않았지만, 연락처가 소셜서비스와 자동 연동 되는 기본설정에 따라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의 연락처와 이름 등이 통계적으로 처 리된다. 서비스의 분석알고리즘은 연락처 중 가입되어 있는 회원을 찾았으며, 이 회 원정보를 기반으로 C대학을 출신학교로 표기한 유사연령대의 비율이 평균 대비 유 의적으로 높기 때문에 A씨는 C대학을 나왔을 확률이 높다고 인지했다. 또 공유되 는 연락처의 인력 중 IT종사자의 비율이 유의하게 높으므로 A씨는 IT 종사자일 가 능성 또한 높게 분석됐다. A씨가 서비스 이용형태를 분석할 알고리즘은 A씨가 휴대 폰을 통해 주로 소셜서비스를 확인하고, 그 시간대는 오후 2~3시에 집중되는 양상 임을 확인하고 이 시간대에 반복적으로 인식되는 위치는 흑석동으로 특정하고 근무 지를 흑석동으로 추론했다. 그 외의 다른 시간대의 접속 중 9시 이후의 주 접속 위치 는 상도동으로 파악되었고 그 결과로 A씨의 거주지를 상도동으로 추론하였다. A씨 가 반응하는 친구로 등록된 사람들의 분석에서 음악과 관련한 주제에 대한 피드백 이 다른 주제보다 유의하게 높아 A씨 관심은 영역은 음악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단 순히 A씨의 연락처와 기본정보, 또 빈번하지 않은 행동반응에서도 기술적으로 이러 한 분석은 어렵지 않게 수행된다. 실제 서비스의 분석 알고리즘은 필요에 따라 이보 다 훨씬 더 광범위하거나 자세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만약 페이스북이라면 15억 명 의 가입자간 관계 맺기가 다 분석되는 식이다. 시스템은 단순하게 입력 값과 행위를 분석하는 수준을 넘어 추천된 친구를 추가하는 등의 행동 반응을 계산하여 추론의 정확도를 더욱 높일 수도 있다.

그럼 이러한 분석결과는 어떻게 쓰이는가. 여러분은 거의 모든 소셜네트워크 서비 스에서 간간히 끼어 있는 광고를 보게 될 것이다. 어떤 광고는 이상하게 내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광고를 ‘개인형 맞춤 광고’라고 이야기 하는데 페이스북의 경우 분석알고리즘의 정확도가 매우 높아 광고가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정도와 광고에 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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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반응률, 또 광고주가 원하는 광고 대상을 찾는 편의성이 매우 뛰어난 플랫폼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광고주에게 받는 광고비는 플랫폼 운영비를 훨씬 뛰어넘는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사용자가 많을수록 그 가치는 더욱 높 아지게 된다. ‘마크 주커버그’의 돈을 버는 비결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었지만, 빅데이터 구성 기술과 분석의 실체는 이보다 더 극적인 경 우가 많다. 당신이 마트에서 산 상품, 대중교통의 이용형태, 멤버쉽카드의 이용은 복합적으로 분석되어 패턴화 되고 다음 행동의 예측자료로 활용되어진다. 누구가 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일은 빅데이터 일상에서 늘 있는 일이 다. 예를 들어, ‘소셜상의 글을 분석하고 어떤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어떤 뉴스가 이슈이며 구체적으로 네티즌은 이런 반응이 있다’ 정도의 흥미위주의 분석 은 실제 활용되는 빅데이터의 실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빅데이터 분석은 사실 훨 씬 더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특정하고 파악하려는 속성에서 발전하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최근 들어 여기저기에서 빅데이터라는 단어가 많이 보이는 이유는 그만큼 분석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글로벌 기업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한 일이 이제는 중소기업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되면서 발생하는 현상 에 다름이 아니다. 이런 마케팅적 노력을 돈벌이를 위한 사기적 행위로 폄하하거나, 그 자체가 불법성을 대변하는 비도덕적 행위로 치부하는 것 또한 빅데이터의 올바른 이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앞선 글과 동일한 맥락이지만 기술의 활용은 그 사회 의 수준을 반영할 뿐이다. 최근 들어 급속도로 발전되는 기술과 대비하여 사회적 공 의나 동의가 그 속도를 쫒아가지 못하는 것은 분명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계속 주의를 기울여야 할 영역은 기술발전의 속도에 따른 변화의 두려움이 아니라 그 쓰임의 방향성임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얼마 전 국정원 댓글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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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건에서 또 이전 정부의 SNS서비스 대응문건에서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는 부분이 있 음을 알아야 한다. 상업적 이용은 이윤 창출의 목적과 비즈니스 모델의 지속성이라 는 측면에서 어찌되었건 자체적 검열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 상식에서 어긋나는 정 보의 활용이나 명백한 불법은 이 상업적 구조 자체를 붕괴시킨다는 측면에서 그 부 작용이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반면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나 파시즘 적인 국가에서 기술발전이 기형적 괴물을 잉태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 대한민국이 이 구조적 모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사 실을 생각할 때 부도덕한 권력자가 이러한 현실(기술의 발전과 분석을 통한 위협식 별)을 모르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에 더욱 무섭고 끔찍해진다.

빅데이터 일을 하고 있는 난 지난겨울 촛불을 통해 얻어낸 것이 정권교체만이라고 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대통령의 탄핵보다 더 박수를 친 부분은 촛불의 결과이 면서 과정이기도 한 국정원의 국내정보기능 폐지였다. 이 내용은 우리가 표면적으 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지난겨울 촛불로 불태운 실 체는 정말 무시무시한 괴물의 씨앗일 수 있음을 어렴풋이 인식하면서 혁이라는 이름 으로 글을 쓴 이유에도 답을 하고자 한다.

우리가 알았든 몰랐던 우리는 지난겨울, 미래를 위해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 글을 마무리하며 새삼 함께 촛불을 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혁이_90년도 후반 산업정보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국내기업에서 빅데이터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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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곤의 현장들, 기록들 ❹

“통계조차 없다” - 결혼이주여성, 그리고 이주와 다문화 강곤

원래는 다른 책을 소개하려 했다. 갑자기 책이 바뀐 까닭은 마감을 앞두고 읽은 어 느 신문 기사 때문이었다. “‘우연히 살아남았다’ 외치던 베트남 이주여성도 살해당했 다”(여성신문, 2017.7.7)는 제목의 기사 내용은 이렇다.

2010년 7월 9일. 스무 살이던 베트남 여성 탓모씨는 한국에 입국한 지 7일 만에 싸늘한 주검이 됐다. 탓모씨는 그해 2월 7일 중개업체 소개로 한국인 장 모(당시 46세)씨를 만나 하루 만에 결혼을 결정하고 열흘 뒤 호치민 식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7월 1일 혼인동거비자를 받은 직후 한국에 왔다. 정 실질환을 숨기고 결혼한 남편 장씨는 어린 아내를 심하게 구타한 후 살해했 다. 이 사건 직후 결혼이주여성들은 ‘내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현실을 자각하고 억압받는 현실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탓모씨를 추모하는 기 자회견을 열고 이렇게 외쳤다. ‘나도 그 베트남 이주여성일 수 있습니다.’ 그 리고 7년이 지난 2017년 6월 2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에 따르면 탓모씨 추 모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베트남 여성 부모(31세)씨가 시아버지에게 살해당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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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했다. 10여 년 전 한국에 와 두 자녀를 낳고 기른 부씨는 미취학 자녀 두 명이 함께 있던 집안에서 시아버지가 휘두른 칼에 숨졌다.

우연히 살아남았으나 마침내 살해당한 이들 한국은 이주민의 나라다. 지금도 과거에도, 아니 시작부터 그랬다. 해방 직후 무수히 많은 동포들 이 일본과 만주에서,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서 조국으로 돌아왔다. 물론 상당수는 아직도 돌 아오지 못했거나 돌아오지 않았다. 이른바 산업화 시기에는 또 많은 이들이 독일로 미국으로 중동으 로 떠났다. 한국의 근대사는 ‘이주’를 빼고 설명할 김현미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한국에서 이주자로 살아가기』 2014

길이 없다. 하지만 한국인, 우리는 철저하게 두 가 지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그 이중 잣대는 고약하 기 이를 데 없다. 단적인 예는 ‘글로벌’과 ‘다문화’라

는 단어의 용례에서 드러난다. 가령 선진국 백인을 배우자로 둔 가정의 경우 한국사 회는 ‘글로벌 가정’이란 이름을 붙이지만 동남아인 또는 유색인종 배우자를 둔 경우 ‘다문화 가정’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미 ‘다문화’라는 말은 ‘혼혈’을 대체하는 혐오 표 현으로 오염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문화 교육이란 미명아래 결혼이주여 성을 대상으로 ‘한글 배우기’ ‘전통 차례 지내기’ ‘김장김치 담그는 법’ 등의 프로그램 이 성행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는 이러한 한국에서의 이주의 역사와 우리의 이중성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이주민이 한국에서 어떻게 사는지를 10년간의 인터뷰를 통해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한국의 다문화 담론은 선주민과 이주민의 분리와 위계를 통 해 이주민의 일방적인 동화만을 주장하며 결국 이주민을 능동적 시민이 아닌 한시 적 지원 대상으로 전락시킨다고 이야기한다. 아래는 이 책에는 등장하는 어느 베트 남 결혼중개업체의 지침서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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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생활지침서 1. 한국 생활에 빠른 시일 내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2. 한국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친정집을 도와달라거나 직업을 갖는다고 하면 안 된다. 3. 무단가출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4. 결혼하면 바로 자녀를 가져야 한다. 5. 부부 간의 성격 차이를 인정하고 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6. 한국 배우자의 현재 경제력과 생활수준을 존중해야 한다. 7. 배우자의 경제력과 생활수준 및 성격 등에 관해서 다른 배우자와 비교하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8. 한국에서 결혼한 여성이 담배를 피우면 절대로 안 된다. 9. 한국 남성은 이런 여성을 좋아한다! -- 남편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남편의 의견을 잘 따르는 여성 -- 다정한 말 한마디에 애교 있게 행동하는 여성 -- 부모와 자녀를 잘 부양하는 여성 -- 검소한 여성 --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는 여성 10. 상기의 상황을 학습할 때 노트에 메모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 학습 노트를 배우자나 가족이 혹시 보게 되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당신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조금 낯선 사람들 ‘한 사람의 이주는 한 세계의 이전’라는 말이 있다. 이주노동자에서부터 결혼이주 여성, 이주민의 자녀, 화교와 조선족, 고려인까지 이주민의 성별과 나이와 국적, 이 주민의 역할, 이주의 계기와 성격, 이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 등은 너무나 다양하 다. 출산부터 교육, 의료, 복지, 노동 등 이주의 여부를 떠나 어디에서든 한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문제들이 고스란히 연결되어 있다. 앞선 책이 한국사회에서 이주에 대한 역사적인 맥락과 그 속에서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면『우리 모두 조금 낯선 사람들』은 ‘누가 과연 100% 한국인인가?’라 는 도발적인 물음에서 출발하여 우리 안의 다양하지만 낯선 타자들을 등장시킨다. 기지촌에서 태어나 ‘혼혈’이라는 낙인 속에서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인이 아닌 삶을 사는 사람, 트랜스젠더이자 이주노조위원장을 지낸 노동운동가, 이제는 자신의 모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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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국으로 돌아간 귀환 이주노동자, 공연비자로 들어 왔다가 성매매 업소에서 탈출한 쉼터 이주여성, 한 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학교 폭력에 휘말려 추방 을 당하고만 몽골 청소년…. 일방적인 ‘우리 되기’가 아닌 진정한 공존은 어떻 게 가능한가? 무엇보다 먼저 우리와 그들, 원주민 과 이주민의 이분법을 허물고 우리 모두가 낯선 타 자들임을 인정하는 데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책은 이주여성인권포럼 『우리 모두 조금 낯선 사 람들-공존을 위한 다문화』 오월의봄, 2013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그 타자들의 들리 지 않았던, 아니 들릴까봐 애써 귀를 막고 외면했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일 것이다.

다시 맨 앞의 신문 기사로 돌아가 보자. 2015년 말 통계로 한국에 온 결혼 이민자 는 15만 명을 넘어섰고 그 중 84%가 여성이다. 2007년에는 한국 남성과 결혼한 베 트남 여성이 임신한 몸으로 갇혀 지내던 아파트 9층에서 탈출하려다 추락사했다. 같 은 해 19세 베트남 여성은 결혼한 지 2개월 만에 남편의 구타로 갈비뼈가 부러진 채 사망했다. 2008년 베트남 여성은 입국 일주일 만에 14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사망했 다. 2010년 캄보디아 여성이 보험금을 노린 남편이 먹인 수면제를 먹고 사망했고, 2011년 베트남 여성은 출산 19일 만에 남편의 칼에 찔려 사망했으며, 2014년에는 캄보디아 여성의 남편이 교통사로로 위장해 여성을 살해했다. 끝도 없다. 도대체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결혼이주여성이 살해당하는가? 위 기 사의 말미에서 허오영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는 “현재 이주여성 폭력 실태 는 물론이고 여성폭력과 살해 사건 전반에 대한 국가적 통계가 없는 상황”이라고 한 다. 얼마나 죽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한국사회는 그만큼의 관심조차 없다는 이 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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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의 축구와 노동 이야기 김용수

연재를 시작하며 문창과를 졸업했지만, 주어와 술어를 호응관계로 하는 문장을 만들어본지가 너무 나도 오래됐다. 어떤 사안을 단순화시켜 핵심을 요약한 ‘1장 보고서’나 Ctrl ‘C’(복사 하기)와 ‘V’(붙여넣기)의 변증법이 빚어낸 아무 쓸모없는 보고서만 양산해내다, 뭔가 창조적인 글쓰기를 요청받고, 쓰려니 눈앞이 깜깜할 수밖에. 중언부언, 횡설수설이 지만, 그 첫 포문을 수줍게 열었다. 연재를 하다보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근 거 없는 희망을 품어본다.

‘어깨’에 힘 쭉 빼고, 90년대를 함께 뒹군 나의 ‘동무’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 보고 싶다. 나의 벗들이 ‘어깨동무’하고 이내창기념사업회의 주역으로 우뚝 설 수 있 도록, 요즘말로 ‘마중물’ 역할,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사무직 노동자와 노동조 합 활동을 하면서 느낀 노동의 쉼표와 느낌표를 전해주고 싶다. 나는 아주 운이 좋게 도, 내 고민의 지향과 밥벌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고 ‘믿.고.있.다.’ 또, 기회가 된다면 나의 직업과 관련하여 특별한 축구세계 뒷이야기도 양념처럼 들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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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주고 싶다(글재주도 없으면서 욕심만 많다 --;;).

본격적인 연재에 앞서 ‘나’라는 존재가 이내창기념사업회에서 무명에 가깝기 때 문에, ‘90년대’에 학교 다닌 회원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 지, 왜 운영위원이 되었는지에 대해 거칠게나마 ‘설명’을 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 싶 었다. 지난 6월 16일부터 1박 3일간 ‘내창이 형과 함께 하는 거문도 답사기행’에 동 행하면서 보다 뚜렷해졌다. 오늘 ‘아름다운 패배’가 내일의 희망의 씨앗임을, 그리고 우분투! ‘이내창기념사업회’가 있기에 ‘우리’가 있음을!

아름다운 패배 습관처럼 마감 독촉을 몇 차례 받아야 그때부터 정신이 번쩍 드는 현상은 고질병 이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있지 않는 한, 완결된 글을 쓰기까지 워밍업 시간이 필요하다고 강변하고 싶다. 참으로 오랜만에 연애편지 쓰듯 ‘썼다 지웠다’를 반복 한 끝에, 이젠 더 이상 마감을 미루기도 또 담대하게 원고를 펑크 내기도 어렵게 됐 다. 이게 다 처음부터 쓰지 않겠다(못한다)고 저항하지 못한 자승자박 자업자득 아 니겠는가!

우분투!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많은 교훈과 영감을 얻는다. 실패의 기록도 성공의 환희도 쌓이게 되면 모두 역사가 된다. 탄핵과 촛불, 그리고 5월 대선을 차례로 겪으면서 다 시 한 번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깨닫게 됐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는 평범한 격 언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울림을 준 지난 반년이었다. 그러나 먼 훗날 역사는 ‘옳음’으 로 평가되더라도 개개의 현실은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좀 생뚱맞지만 그중 유 독 축구는 패배에 가혹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한국대 표팀의 실패를 생각해보라!). 축구뿐만 아니라 스포츠 경기를 하다보면 이기고 지는 일은 다반사다.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느냐가 ‘다음’의 성패를 가른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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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광저우 -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출장중. 이때 우리 대표팀은 3,4위 전에서 종료직전 2골을 몰아친 지동원의 선전으로 이란을 3-4로 꺾고 동메달을 걸었다.

웸블리구장 - 런던 출장중. 잉글랜드 축구협회에서 회의를 마치고 웸블리구장에서.

져도 잘 져야 희망의 씨앗이 된다. 이내창기념사업회 선후배들을 보면 아프리카의 반투족의 말 “우분투!”가 생각이 난다. 그 말의 속뜻은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라고 한다. 시쳇말로 ‘한사람의 열 걸 음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을 소중히 생각하며, 누가 뭐래도 우직하게 한 길을 걷는 자 세와 태도가 저 멀리 아프리카의 언어를 떠올리게 했다. 30년을 준비하는 28년은 결 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마치 ‘‘내창이형’이 있기에 ‘내’가 있다’를 내창이형 사후 28 년 동안 삶으로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져야 할 때도 잘 졌기 때문에 흩어지지 않았 고, 재빨리 다음을 준비하며 훗날을 도모하기를 28년. 그 과정을 한 마디로 요약하 자면 ‘아름다운 패배’가 아닐까 싶다. 내창이형 사인 진상이 규명되고, 책임자가 처 벌받는 그 때까지 이 ‘아름다운 패배’는 계속될 것이다. 기념사업회에서 손을 내밀었을 때 주저주저했지만 그 손길 뿌리치지 못했던 건, 먹 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잊고 지냈던 시간이 부채감으로 다가왔고, 결정적으로 ‘네 (내창이형)가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야 통일 1세대? 여기 기웃 저기 기웃 거리다 삼수 끝인 95년에 입학한 나는, 학교생활 내내 80년대 선배들에게 주눅 들어 있었다. 광복 50주년이었던 95년은 그래도 나았다. 학살자 전 두환·노태우 체포조, 5·18 특별법 제정 투쟁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어느 정도 새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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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오키나와 - 2016 여름 휴가지인 오키나와에서 가족사진. 개구쟁이 아들이 둘이다.

내기 대접을 받았는데, 96년 여름 연세대에서 열린 일명 연대‘항쟁’(‘항쟁’으로 쓰고 ‘사태’로 읽는다. 연대항쟁은 한총련이 범청학련 통일대축전과 범민족대회를 연세대 에서 치르려 하자 경찰이 학교에 들이닥쳐 5,848명이 연행되고 462명이 구속된 초유 의 사태다). 이후 선배들이 우리를 보는 시각이 싸늘해지더니, 이듬해인 97년, 한총련 출범식(프락치로 몰린 청년 이석씨가 학생들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남) 이후에 는 완전 철부지 전공투(1960년대 후반에 출현한 일본의 학생운동 세력으로, 결국 정 부와 거대언론의 협잡에 의해 노선 자체가 왜곡되게 알려지고 폭력노선이 우세하게 되며 결국 계파간의 살해, 적군파 테러리스트의 출현이라는 비참한 운동의 몰락을 맞 게 됐다) 취급을 받았다. 나름 스무 살 순정을 바쳐 내창이형 정신을 지켜내고, 학내 운동을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세대의 고립은 점점 더 깊어졌고, 생채기는 덧났다. 딱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내창기념사업회에 다시 문을 두드리는데 2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던 것도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모르겠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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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업회 운영위원 한 자리 꿰차면서 취임 (?) 일성으로 “80년대 선배와 2000년대 후배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고 보무도 당당하게 포부 를 밝혔다. 겁 없이 내뱉었지만 정말로 그 말 을 지킬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22년 전 ‘ 통일1세대’도 이제 중년이 되어 각자 삶의 현 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더러 아까운 나이 에 일찍 세상을 등진 친구도 있고, 경사보다 애 사 소식이 더 많이 들리기도 한다. 졸업장만 있 으면 ‘쉽게(?)’ 취업할 수 있었던 80년대 선배 와 달리 97년 IMF 구제금융 때문에 취업도 결 혼도 늦어진 우리 세대는 역사적으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자격지심과 열패감 이 있다.

거문도 사진 - 노용헌, 홍우림 선배와 거문도 등대 앞 에서

지킬박사와 하이드? 올해 초 로버트 프로스트의「가지 않는 길」을 외우며 폼 잡고, 쫄지 않고 사람이 적 게 간 길을 택했다. 다니던 직장에서 노조위원장이 된 것이다. ‘나로부터 결의·결사 (내창이형이 자주 썼다던 앞 구호) 노동해방 실현’이라는 대의보다는 정말 어쩌다보 니 여기까지 왔다. 입사 3년차에 노조결성 준비모임 실무를 맡았고, 1년 동안 준비 후 2005년 조합창립 깃발을 들어올렸다. 그 후 노동조합 소식지『월간 그린카드』 편 집장을 7년, 사무국장을 4년을 했다. 그러다 결국 동료들의 ‘추대’(라 쓰고 ‘떠밀려서’ 라고 읽는다)로 임기 2년의 노조위원장이 됐다. 노보를 만들 땐 낮엔 홍보국 직원, 저 녁엔 사측 비판 글을 썼고(보도자료, 회장 축사 및 연설문 작성을 주 업무로 하는 홍 보실에서 9년을 일했다), 사무국장 땐 팀장 보직도 같이 하고 있었는데, 낮엔 팀원들 과 같이 일하고, 저녁엔 귀족노조라 우리 노조를 비판한 A언론사와 2번에 걸친 언론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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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중재위 소송, 초대 노조위원장 선배의 부당해고에 맞서 해고무효소송을 제기했다( 가처분과 1심에서 승소했지만, 결국 그 선배는 한직을 전전하다 2심 판결직전 법원 의 강제조정을 통해 위로금을 받고 퇴사했다). 노조위원장이 되었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노조 전임자를 하려고 했 으나, 회사 후배들이 조합원들과 같이 일하고, 호흡하며 조합 일을 하는 것이 조합 활동에 더 유익하다는 주장을 수용하여, 여전히 하던 팀장 일도 계속하며 조합일도 ‘덤’으로 하고 있다. 이런 요상한 1인 2역이, 이 불편하고 어정쩡한 동거가 가끔 ‘자 아분열’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통제 불능, 약물중독의 ‘하이드’가 되지 않도록 이내 창기념사업회 운영위원이라는 예방주사를 맞았다. 그렇다. 나에게 있어 기념사업회 는 ‘예방주사’다. 좌우 편향을 극복하고, 좌고우면하지 않고 한 길을 걷기 위한 예방 주사다. 28년 동안 곁눈질 안하고 내창이형 사인 진상규명 투쟁과 정신계승의 한 길 만 걸어온 선배들도 있는데, 엄살과 투정은 사치가 아니겠는가! 이제 선배 세대의 짐 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어야 하고, 또한 동시에 동년배, 후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어 야 할 책임이 있음을 느낀다.

김용수_과도한 문학의 열병을 앓고 95년 문창과 입학, 재능 없음을 깨닫고 2002년도 졸업. 졸업 후 국문과 대학원에 얼쩡거 리다가 ‘고급독자’로 전격 전향 선언하고 대한축구협회에 입사하여 16년째 근무 중. 노동조합을 만들면 끝인 줄 알았으나 그 후 ‘유지’, ‘보수’가 더 힘들다는 것을 매일매일 깨달으며, 현재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이라는 ‘예방주사’를 맞고 정신 차리려고 노력하는 중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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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귀신을 보았다 ① 박인

1

열두 살이나 먹은 나는 밤이 두려웠다. 거대한 덩치로 다가오는 어둠이 무서웠다. 밤 열두시 괘종시계가 울리면 온 몸에 피비린내를 풍기며 그 사내가 왔다. 창문을 열 고 들어와서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자신은 억울하게 죽었다고 내 목을 조르는 것이 었다. 어린 내게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려는 짓은 정말 가혹했다. 식은땀에 공포 에 질려 안방으로 건너가서 엄마 옆에 누워도 귀신은 늘 나타났다. 가위에 눌리는 거 라며 엄마는 나를 달랬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다음 날 밤 사내는 새벽 한 시를 알리는 시계소리가 들릴 때까지 내 귀에 무슨 소리를 중얼거렸는데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그는 내 목을 졸랐다. 밤이면 밤마다 시뻘건 피 흘리는 사 내에게 시달리고 나면 나는 오줌을 지리곤 했다. 지독한 밤이었다. 물론 일부러 잠이 깨어 있는 날은 그가 오질 않았다. 귀신은 유리창 밖에서 어른 거리다 가버렸다. 그러면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처럼 은하수가 흐르는 꿈을 꾸었 다. 사내귀신이 날마다 찾아온 일주일 동안 나는 목을 매고 죽은 아랫집 누나가 남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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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기

긴 편지를 생각했다. 그런 날은 방바닥에 아파서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축 늘어진 누나의 하얀 발밑에 놓인 유서를 훔쳐서 몰래 읽은 벌을 이제 받는 거라 생각했다.

그날 내가 거적때기를 들추고 본 것은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열차에 목과 다리가 잘린 사람이었다. 눈을 까뒤집고 죽은 사람의 피범벅인 머리가 몸통 옆에 놓여 있었 다. 몸통은 엎어져 있고 두 손은 등 뒤로 돌려서 전깃줄에 묶여 있었다. 팅팅 부은 얼 굴 옆과 가랑이 사이에 잘린 발목들이 기역 니은자처럼 던져져 있었다. 피비린내가 났다. 가마니를 들춰보라고 내 옆구리를 찌른 계집애는 갑자기 유리창이 깨지도록 울었다.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기찻길 옆 시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산동네 개들 과 새들이 놀라서 달아났다. “너 귀신 본 적 있니. 난 매일 본다.” 작두를 타는 할아버지 귀신과 대화를 나눈다는 계집애 말은 거짓부렁일 것이다. “정말 네가 감히 무서워서 할 수 있겠어?” 동갑내기 무당집 계집애가 꼬드기는 바람에 코흘리개 몇을 밀치고 내가 나섰다. 예쁘지는 않지만 딱히 밉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게다가 애교를 너무 부려 속이 뒤집 힐 것 같았다. 어린 게 처녀처럼 너무 헤프게 웃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배고픈 내 배만이 그 아이가 가끔 굿이 끝나고 가져오는 떡이랑 사탕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연고자 시체 썩는 냄새가 일주일 넘게 기찻길 주변 언덕을 타고 산동네로 번졌 다.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출입을 하지 않았다. 계집애는 시체를 보고나서 헛 소리를 하며 울었다. 순경이 아이들을 쫓아낼 때까지 계집애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하늘을 보았다. 보기 전에 말렸어야지 이미 볼 장 다 보았거든, 나는 점심 식사로 먹 은 빵조각을 토해냈다.

기찻길에서 남자 시체를 본 날 밤부터 사내귀신이 왔다. 죽은 사내가 귀신이 되었 는지는 몰라도 우선 나는 쥐를 잡아야 했다. 내일 당장 쥐꼬리 두 개씩을 학교에 제 출해야 했다. 아직도 귀청이 얼얼했다. 계집애 울음이 귀를 때리고 있었다. 하품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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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나자 쥐새끼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제 마룻바닥 아래에 설치한 쥐덫을 생 각했다. 커다란 시궁쥐가 쥐덫에 걸려 있었다. 담임 선생님의 화가 난 얼굴이 떠올랐 다. 화가 나면 선생님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체벌을 가했다. 손바닥을 맞으면서 본 선생 얼굴은 화가 난 게 아니라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걸 참아내느라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돈 봉투나 밝히는 담임이 싫었다. 여자애들을 체벌하느 라 회초리가 부러지고 출석부마저 휘어지면 남자 아이들은 둘씩 마주보고 서로 뺨 을 때리는 시합을 했다. 정말로 세게 때리지 않으면 남아서 결승전까지 더 맞아야 했 다. 나는 부러 뺨을 때리는 아이 쪽으로 머리를 돌려 더 세게 맞고 늘 멋있게 널브러 졌다. 빨갱이보다 더 나쁜 놈들, 몽둥이가 약인 시절이었다. 머리에는 피딱지가 마를 날이 없었다. 나는 쥐덫에 갇힌 쥐를 세숫대야에 담가서 죽일 계획이었다. 그러다 내 일 아침까지 헤엄을 쳐서 살아남을 수도 있기에 그냥 마루 밑에서 굶어죽게 내버려 두었다. 저녁을 먹지 못하고 초저녁에 곯아 떨어졌다. 엄마가 깨워서 문간방으로 갔 다. 오한이 들고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열이 났다. 무서운 밤은 다시 나를 찾아왔다. 밤 열두시가 되자 심장이 쿵쾅거리고 금방이라 도 멎을 것 같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더니 피범벅이 된 사내가 내 목을 조 르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살려달라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기를 쓰다 나 는 기절했다. 기절하는 순간, 무당집 딸년을 내일 죽도록 패주리라 주먹을 쥐고 파 르르 떨었다.

아침에 엄마는 내게 쥐꼬리가 담긴 봉투를 주었다. 머리가 으스러진 쥐는 연탄재 통 아래 버려져있었다. 기찻길 옆길에서 나는 무당집 계집애를 기다렸다. 사내 시체 는 온데 간 데가 없었다. 새마을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사무소 앞을 지나 학교로 가는 길에 총을 든 군인들이 서 있었다. 계집애는 나타나지 않았다. 학급에서도 그 애는 보이지 않았다. 무당집 딸년이 매우 위독하다고 엄마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체 가 치워진 날부터 사내귀신은 내게 오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도 계집애는 보이지 않 았다.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핀 저녁 무렵, 산동네 무당집에서 굿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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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기

나는 한달음에 무당집으로 올라갔다. 문 앞에는 여자아이 운동화, 색동다식과 고수 레한 젯밥이 놓여있었다.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주저앉았 다. 웅크리고 있던 공포가 거인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원통하게 죽은 귀신이 그 애를 데려간 게 분명하다고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숫자를 불린 그 귀신들은 야수처럼 몽둥이를 들고 산동네를 집어삼킬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본명, 박인식. 2014년 소설 <소금꿈>으로 문학나무 소설신인상 수상했고, 2016년 스마트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 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는 소설 <귀신을 보았다>를 이번 호부터 연재한다. 74쪽을 참조하라.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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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남 공장장 협동조합 부적응기 박형오

협동조합 솜리커피공장 이사장

이번 생은 부적응자였다. 태어나고 삼칠일을 울기만 했다고 하니 그것도 세상에 대한 ‘부적응증’ 가운데 하나였으리라. 물론, 친할머니는 굳이 그것을 글 읽는 소리 라 여겼고 당신의 믿음 덕분인지 손자는 초중고 시절 시와 소설 따위를 즐겨 봤다. 학교와 교과서에 대한 부적응의 다른 이름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학급 문고에 꽂혀 있던 도스토옙스끼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펼쳐 읽던 순간이 어제 일처럼 기 억난다. 그것은 환한 비상구였다.

“머리랑 옷이 이게 뭐냐?” 날은 적당히 따뜻했고 잔디는 초록이었지만 비상구 밑 엔 절벽이 있었다. 신입생 시절 최고 학번 선배는 고등학교에서도 듣기 어려운 지적 을 해왔다. 근대조차 넘어서지 못한 그곳이 ‘대학’이라니! 군대에서도 사회에서도 다 르지 않았다. 강북에서도 강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혼일 때도 결혼해서도 그랬 다. 광고회사를 거쳐 회사를 운영했지만 영업과 접대, 리베이트를 할 수는 없었다. 이 세 가지 없이 광고회사 운영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서울을 떠나리 라는 예감이 엄습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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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기

유감스럽게도 갈 곳이 없었다. 고향엔 지평선만 광활(동네 이름이 광활면이다)했 고, 그 지평선에 어떠한 지분도 없었으므로. 아득하던 순간, 회사를 운영하며 취미로 다녔던 커피학원이 떠올랐고 무턱대고 브랜드부터 만들어 특허청에 등록하자. 어느 새 매장 자리를 물색하기 위해 지방의 한 중소도시를 돌아 다니고 있는 자신을 발견 하고는 아연실색했다. 익산. 작지 않은 대학과 식품 공단, 발달한 철도가 있었다. 아 는 사람이 1도 없었으므로 개업식도 없이 카페를 열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매장을 지켰다.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기꺼이 허벅지 살 같은 내일의 인생을 가불하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자기착취의 연속극이 었다. 질문처럼 흰머리가 솟았다.

이러려고 여기 왔어? 장사가 아니라 생태계를 구축하자는 생각에 주위의 도움을 받아 협동조합을 만들었다(미리 말하자면 협동은 여전히 잘 안 된다. 그래서 협동조 합인 지도 모른다). 공장-학원-매장이라는 선순환 구조가 하나의 브랜드 아래 만들 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3개의 같은 이름을 쓰는 커피숍 매장에 다른 이름의 조합원 매장 하나까지 4개의 매장이 협동조합 솜리커피공장과 함께 하고 있다. 공장에서 볶 는 원두는 조합원 뿐만 아니라 개인, 매장, 프랜차이저 브랜드, 공기업, 사기업, 학교 등에도 공급하고 있다(주문은 010-3025-0505).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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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솜리커피공장이 운영하는 카페 브랜드 솜리커피는 가맹비와 월납금을 없앴고, 과도한 인테리어 비용 부담도 줄였다(변명 같지만 인테리어 비용을 없앨 수 는 없다. 같은 브랜드를 쓴다는 것은 동일한 정체성을 갖는 의미여서 기준이 필요하 다). 대신 커피 원두의 품질은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100% 아라비카, 햇콩(뉴크롭) 만을 쓰고 볶기 전과 후 두 번 사람 손으로 결점두를 고른다. 누군가는 그러려면 브 랜드를 왜 만들었느냐고 묻는다. 네, 이러려고 했습니다만.

이 곳에 와서도 여전히 부적응 중인 셈이다. 사업에서 뿐만이 아니라 생활에서도. 시에서 주관하는 인구 토론회(인구 30만이 조금 넘는 이 작은 도시가 광주, 전주에 이어 호남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인데 현재 30만 붕괴와 축소도시의 ‘위기’에 처해 있 다)와 대형 아울렛 대책 토론회에 나가기도 하고, 도시재생을 위한 시민 모임에 실무 책임자로 참여하고, 지역 방송에도 나가기도 하지만 대개는 시와 시장과 시민이 듣 기 불편한 발언을 일삼는다. 이곳 어른들 말대로 ‘좋게좋게’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누구에게도 좋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앞으로도 부적응할 계획에 있다.

협동조합은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물질 만능의 신 자유주의 사회라는 것도. 그래서 누구나 이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뒤집어 말하면 이 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일이 사실은 가장 공포스러운 일에 다 름 아니다(김기춘과 우병우와 조윤선을 보라). ‘동일시가 아니라 낯설게 하기’ 문학 을 공부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이것 하나다. 조금 다른 꿈을 꾸고, 조금 다른 길을 걷는 일, 협동조합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닐까.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이곳 대학의 대학원 사회적경제학과에 오늘(5월 31일) 입 학 원서를 접수하고 왔다. 부적응도 배움을 필요로 하는 탓이다. 만약 여러분이 익 산에 방문하면 무려 ‘학생’과 신선하고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생 겼다는 얘기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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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민주동문회와 기념사업회가 함께 하는 모교 재학생 지원사업

제4회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중앙문화’와 ‘비와 당신’ 선정 운영위원회

올해부터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사업을 민주동문회와 함께 하게 됐다. 민주동 문회가 1백 만 원을 지원하였는데, 지원금의 규모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총 2백 만 원이다. 올해 새롭게 진행할 사업들의 재정이 넉넉지 못한 관계로 지원금 규모를 늘 리지 않기로 했다. 올해는 흑석교정과 안성교정에서 진보적 활동을 하고 있는 동아 리 6개 단체가 지원했다. 그 가운데 ‘중앙문화’와 ‘비와 당신’이 선정됐다. 두 단체의 활동을 간략히 소개한다.

‘중앙문화’는 1953년 창간된 중앙대학교 교지로서, 중앙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학 내외 민주적 담론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학문단위 구조조정,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 등 학내 문제를 비판적으로 보도하고 기록해왔다. 대학 문제 외에도 페미니 즘, 장애인권, 노동, 정치 등의 사회문제에 대한 심층 분석을 해왔다. 중앙문화 편집 실이 위치한 건물이 곧 철거될 예정이지만 중앙문화는 아직 공간을 배정받지 못한 채 학생자치를 탄압하는 학교 본부와 맞서 싸우며 교지를 발간하고 있다.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납부하는 돈으로 발간 및 운영은 하고 있지만, 편집진은 2015년부터 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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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로 일하고 있는 상황이다.

‘비와 당신’은 2013년 10월 10일에 함께 학 교에 있었지만 서로를 몰랐던, 그래서 무심했 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당신’이 함께 만나 야 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학내 비정규 직 노동자들의 권리와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실천하 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2017년에는 노동 문제에 대한 연구와 세미나를 진행하는 한편, 노동현장을 ‘직접 경험함’으로서의 연대를 실 천하고, ‘서로서로 선생님’ 교실을 열어 학생 들이 노동자들에게, 또 노동자들이 학생들에 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활동을 할 계획이다. <이내창의 후배다> 시상식 ‘비와당신’ 대표 곽진경 외 3인 / ‘중앙문화’ 편집장 김고운

또한 학내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하고, 결과를 분석해 학내에 알리려고 한다.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시상식은 4월 14일 3차 운영위원회 이후 진행됐다. ‘중 앙문화’ 편집장 김고운 후배와 ‘비와당신’ 대표 곽진경 외 3인이 참석하였다. 두 단체 에 각기 1백만 원의 지원금을 전달하였고, 두 단체의 2017년 활동은 <끈덕지게 어깨 동무> 12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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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좀 더 일찍 했어야 했던 운동!!! 회원 늘리기 운동 중간 결산 김기수

총무

회원배가운동! 이내창기념사업회(추모사업회 포함)가 결성되고부터 항상 고민되어오고 진행하 려 했고, 진행해왔던 중요한 사업이다(그전에는 정확히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기념 사업회 집행부를 해왔던 10여 년 동안은 그래왔다). 신임 사무국장의 선임 후 2월 말 운영위원회 워크숍에서 본격적인 회원배가 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정했을 때 사실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지난 회원배가에 대한 논의는 다 소 추상적이었고 구체적인 실행이 부족했던 반면, 이번 논의는 좀 더 구체적인 방 향과 방법을 제시하였기에 기존보다는 나은 결과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었지만….

사실 기념사업회 총무를 맡고 있는 나에게 회원배가는 무엇보다도 회비의 증가가 가장 크게 다가왔다(아니 거의 그게 전부였던 듯). 2월 운영위 워크숍이 끝나고 바로 본격적인 회원배가운동의 준비가 구체적으로 진행됐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나 왔으며,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좀 더 쉽게 회원가입을 유도하기 위해 구글 폼을 작 성하였고, 전화나 만남 등을 통해 회원가입을 권할 때의 요령, 진행사항 체크방법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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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아이디어를 내고 공유했다.

드디어 3월 6일 회원배가운동 스타트!!! 첫 주 회원 증가 인원 3명! 처음엔 회원가입에 대한 성과가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회원 가입을 권유하면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그동안 별 연락도 못하다가 갑자기 회원가입하려고 연락해도 될까?’ 이런 부담감들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번 두 번 회원가입을 권유하고, 그 사람들이 연락준 것에 대해 반가워하 고 고마워하는 반응들을 접하면서 이전의 생각들이 얼마나 기우에 불과했었는지 알 게 됐다. 몇몇 회원 분들은 그동안 못낸 회비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특별회비를 내 주셨다.

둘째 주 27명, 셋째 주 6명, 넷째 주 11명, 다섯째 주 12명…. 처음 기대치를 웃도는 성과들이 실제로 나오기 시작했다. 회원배가운동을 진행하 는 동안 운영위원과 집행부는 매일 개별 활동내용을 보고하고, 나는 그 내용을 집계 하여 올렸다. 매일매일 서로의 활동을 공유하면서 누구는 다이아몬드가 됐다고 하 고, 다이아몬드 되기가 쉽지 않지만 열심히 하겠다고 하고, 재미있게 진행했다. 하루하루 회원들이 늘어나고 회비가 늘어나고, 통장의 잔고가 늘어난다는 생각 에 매일 신청자 명단을 보고, 통장을 정리하면서 밤에는 잠도 안 오더라. 역시 돈은 중요하다. 생각지도 못한 성과에 ‘왜 좀 더 일찍 하지 못했을까?’하는 후회와 반성 이 된다.

이렇게 생각보다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요인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생각 해보았다. 1. 신임사무국장과 운영위원, 집행부의 2017년 사업초기 넘치는 의욕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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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2. 초반 지지부진할 시기에 놀라운 성과를 내주신 운영위원장님의 선도적 역할 3. 생각보다 훨씬 단단했던 운영위와 집행부의 팀워크 4. 적극적인 참여와 지지로 큰 힘을 보태주셨던 흑석동 민주동문회 5. 무엇보다도 기회가 없어서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항상 기념사업회에 관심과 지 지를 보내주셨던 주변의 많은 기념사업회 우호세력(?)들

마지막으로 회원배가운동을 진행하면서 든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본다. 1. 회원배가운동을 통해서 모여지는 것은 회비만이 아니라 사람이었고, 관계였 다. 2. 회원가입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보다는 반가워하고, 미안해하며,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3. 회원과 회비가 늘어나니 지출이 늘어난다(총무관점). 보다 적극적인 기념사업 회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회원증가(회비증가)-기념사업회 활동 증가-사업 내용 홍 보-주변과의 관계 확장-회원증가…’처럼 선순환구조를 좀 더 확고하게 만들어 나 가는 것이 이번 회원배가운동의 최종 목표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회원배가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회원가입에 동참해 주신 회원여러분과 그동안 회원배가운동에 힘써 주시고 앞으로도 쭈욱 힘써주실 이 내창기념사업회 운영위원과 집행부에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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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배가운동 성과 요약 : 3월 6일 ~ 5월 20일 구분

회원배가운동 전

회원배가운동 성과

현재(6월 30일)

회원수

48명

70명 증가

118명

회비(월)

645,000원

920,000원 증가

1,565,000원

특별회비

7명의 회원이 850,000원 납부

1. 2017년 3월초 회비회원 현황 (본격적인 회원배가 운동 전) CMS 신청자 현황

자동이체 신청자 현황

No

성명

은행

출금금액

미납금액

No

성명

1

장일모

국민

10,000

0

1

이예진

출금금액 10,000

2

최승현

하나

10,000

0

2

정순호

10,000 10,000

3

홍준의

하나

10,000

0

3

백기욱

4

함철

신한

10,000

0

4

송은진

5,000

5

정상길

우리

10,000

0

5

김산환

20,000

6

서정헌

국민

10,000

0

6

정성중

10,000

7

박응진

국민

10,000

0

7

박상규

10,000

8

박성용

국민

10,000

10,000

8

강동길

10,000

9

안인숙

하나

50,000

0

9

김경주

10,000

10

안명숙

외환

50,000

0

10

노용헌

10,000

11

조형준

국민

20,000

0

11

정원옥

10,000

12

우유섭

국민

10,000

0

12

전경미

10,000

13

이영은

단위농협

5,000

20,000

13

원순재

50,000

14

김학진

신한

10,000

0

14

서병훈

10,000

15

이상재

신한

10,000

10,000

15

김형구

10,000

16

이주현

우리

10,000

0

16

박응식

10,000

17

김현동

국민

20,000

0

17

강민구

30,000

자동이체 월 회비 총액 235,000

18

김성희

국민

10,000

0

19

이태경

국민

10,000

0

20

정보영

국민

10,000

0

21

신명철

외환

20,000

0

총 월 회비 총액 660,000

22

곽현희

신한

10,000

0

23

박성훈

신한

5,000

0

24

권향숙

국민

10,000

0

특별회비를 내주신 분 이혁승, 신기정, 한명옥, 조종국,

25

이남영

하나

10,000

0

26

박희성

단위농협

10,000

10,000

27

최호식

하나

10,000

0

28

조환준

국민

10,000

0

29

박철민

국민

20,000

0

30

구혜영

국민

10,000

0

31

김용수

우리

10,000

0

32

이동희

신한

20,000

0

33

김기수

신한

20,000

0

cms 월 회비 총액 425,000

이내창기념사업회

141

임현택, 변승철, 정희일


어깨걸기

2. 추가 회비회원 신청자 (회원배가 운동 후) CMS 신청자 현황 No

성명

은행

47

최영희

20,000

94

조환준

10,000

1

곽동건

10,000

48

이원혜

10,000

95

박철민

20,000

2

허동준

10,000

49

서준용

10,000

96

구혜영

10,000

3

김유승

30,000

50

오승아

10,000

97

김용수

10,000

98

이동희

20,000

4

이주연

10,000

51

이대건

10,000

5

손수지

20,000

52

이홍열

20,000

6

박광채

10,000

53

김문영

10,000

7

이화순

20,000

54

한준

10,000

8

김경욱

10,000

55

김경아

10,000

cms 월 회비 총액 1,290,000 cms 월 회비 증가 총액 865,000

9

김영호

10,000

56

박준현

10,000

10

이영미

10,000

57

강한기

10,000

11

연용호

10,000

58

한정순

10,000

12

강만진

20,000

59

김정은

10,000

13

김남섭

10,000

60

김충교

5,000

14

박소영

10,000

61

박찬일

10,000

15

신성호

20,000

62

김신철

10,000

No

성명

16

박상희

10,000

63

김일림

10,000

1

김기수

20,000

17

박인식

50,000

64

이지원

10,000

2

정순호

10,000

18

김서경

30,000

65

이원근

10,000

3

백기욱

10,000

19

김형균

10,000

66

홍미숙

20,000

4

송은진

5,000

20

권경우

10,000

67

이상재

10,000

5

김산환

20,000

21

전상삼

20,000

68

이정주

20,000

6

정성중

10,000

22

김재근

10,000

69

양은모

10,000

7

박상규

10,000

23

이예진

10,000

70

장일모

10,000

8

강동길

10,000

24

죄수연

10,000

71

최승현

10,000

9

김경주

10,000

25

박현주

10,000

72

홍준의

10,000

10

노용헌

10,000

26

백광문

10,000

73

함철

10,000

11

정원옥

10,000

27

강지우

10,000

74

정상길

10,000

12

전경미

10,000

28

고철주

10,000

75

서정헌

10,000

13

원순재

50,000

29

이차연

10,000

76

박응진

10,000

14

서병훈

10,000

30

장복례

10,000

77

안인숙

50,000

15

김형구

10,000

31

고재영

20,000

78

안명숙

50,000

16

박응식

10,000

32

이경호

20,000

79

조형준

20,000

17

강민구

30,000

33

안진걸

10,000

80

우유섭

10,000

18

전경미

10000

34

홍성일

10,000

81

이상재

10,000

19

이상길

10,000

35

정춘호

10,000

82

이주현

10,000

20

이혁승

10,000

36

연창훈

10,000

83

김현동

20,000

37

최재영

10,000

84

김성희

10,000

38

김경환

10,000

85

이태경

10,000

39

위상혁

10,000

86

정보영

10,000

40

박천삼

10,000

87

신명철

20,000

41

황광원

10,000

88

곽현희

10,000

42

최영화

10,000

89

박성훈

5,000

43

황인석

10,000

90

권향숙

10,000

44

박형오

10,000

91

이남영

10,000

45

손문진

10,000

92

박희성

10,000

46

서준혁

10,000

93

최호식

10,000

장기 미인출자 회비회원명단에서 제외

자동이체 신청자 현황 출금금액

자동이체 월 회비 총액 275,000 자동이체 월 회비 증가 총액 40,000

월 회비 수입 예상 총액 5월달 회비 수입부터 적용 1,565,000

끈덕지게 어깨동무

142


이내창기념사업회

143

끈덕지게 어깨동무

143


끈덕지게 어깨동무

144


이내창기념사업회

145


끈덕지게 어깨동무

146


이내창기념사업회

147


끈덕지게 어깨동무

148


이내창기념사업회

149


끈덕지게 어깨동무

150


혼자가 아님을 알 때, 더 단단해졌다

2017년 상반기 사업일지 2017년 이내창기념사업회 사업일지 일시

내용

1월 7일~3월 11일

매주 토요일 박근혜 촛불 퇴진행동 참여

1월 21일

1차 운영위원회 개최

2월 10일

수도권지역 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2차 총회 참석 (조환준, 정원옥, 노용헌)

2월 25일

추모연대 정기총회 참석(조환준, 노용헌)

2월 25일~26일

2차 운영위원회 및 워크숍 개최(안성 선비마을)

2월 24일~3월 2일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4차 유해발굴 주최단체 참여. 발굴 현장( 경남 진주)에 신명철, 정원옥, 고두현 참가.

3월 1일~3월 20일

의혈중앙 민주동문회와 이내창기념사업회가 함께 하는 재학생 지원사업 제4회 <우리 는 이내창의 후배다> 공모

3월 7일

‘인권재단 사람’의 공모사업 <인권프로젝트 온> 협약식 진행. 이내창기념사업회는 <의 문사진상규명운동 30년의 기록: 의문사 유가족 사진·영상 아키이브 구축>사업으로 선 정됨

3월 7일~5월 18일

회원(회비)배가운동 전개, 73명 가입함

3월 9일

<끈덕지게 어깨동무> 10호 발간

3월 9일~4월 26일

<의문사유가족 아카이브> 팀 사전교육 총8회 실시

3월 25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수상한 동행, 그리고 거짓말-故 이내창씨 죽음의 비밀” 방 영

4월 14일

3차 운영위원회 및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시상식(‘중앙문화’와 ‘비와 당신’ 선정)

4월 9일

4·9통일열사 42주기 추모제 참여 및 4.9통일평화재단 공모사업 협약식. 이내창기념사 업회는 <의문사진상규명운동 30년의 기록: 의문사 유가족 구술 아카이브 구축 및 스토 리펀딩 홍보>사업으로 선정됨

4월 20일~6월 1일

4.9통일평화재단·이내창기념사업회·자유인문캠프 공동주최 <다음세대의 과거청산> 강좌, “지연되는 정의와 역사의 반복” 총 6회 진행됨

5월 11일

<의문사유가족 아카이브>팀 ‘한울삶’ 방문

5월 19~5월 20일

<의문사유가족 아카이브> 팀, 김을선 어머니 면담 진행(경남 진동)

이내창기념사업회

151


함께하기

일시

내용

6월 10일

<2017 민족민주 학생열사·희생자 합동추모제> 및 <26회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범국민 추모제> 참여

6월 11일

마석 모란공원 묘지 정비 참여(조환준)

6월 17일~18일

내창이형과 함께 하는 거문도 답사기행(15명 참가)

6월 23일

4차 운영위원회

7월 2일

박태순 열사 이장(마석모란공원→일산 보광사) 참여

7월 4일

<진실과 정의를 향한 과거청산 결의대회> 참가

2017년 상반기 운영위원회 회의록 1차 운영위원회 / 1월 21일(토) 18:00, 4.9통일평화재단 1 신임 운영위원 위촉함 : 신명철, 홍미숙, 김경주, 노용헌, 이예진, 박응진, 김용수, 전경미 2 2017년 사업계획 검토 및 실행 방안 공유 및 논의 1) 진상규명사업 -- 과거사법 제정 운동 참여 -- 기념사업회 내 진상규명사업 역량 강화(재생산 구조 마련) -- 과거사 관련 단체 대외협력· 사회운동과의 연대 2) 기념사업(기존·일상사업) --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 2월 말~3월 진행 -- 28주기 기제 : 8월 15일 -- <끈덕지게 어깨동무>연 2회 발간 3) 신규 사업 및 30주기 준비 기념사업 -- <회원·동문·재학생과 함께 하는 거문도 답사> -- <의문사 유가족들의 삶·투쟁 담은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 <이내창기념사업회 30년사> 발간 4) 조직사업 -- 조직체제 정비 및 역할 배분(분과 책임자 선정) : 진상규명분과(연대 포함), 기념사업분과(기존사업·일상사업) -- 30주기준비분과(중장기 기념사업), 편집·홍보분과(어깨동무 발간·홍보) -- 회원배가운동 : 2월부터 본격적 시작 -- 민주동문회 운영위원회 참여 -- 재학생 단위와의 연대 방안 끈덕지게 어깨동무

152


3 기타 사업 제안 -- 페이스북·밴드(응답하라 의혈중앙) 관리 및 활성화 -- 여성회원 친화적 사업 개발: 예, “그녀들만의 1박 2일” -- 운영위원 1박 2일 워크숍 & MT (다음 운영위원회) : 신규사업 및 30주기준비 기념사업 심층토론 & 멤버십

2차 운영위원회 및 워크숍 / 2월 25일(토)~26일(일), 안성 선비마을 참석 : 서병훈, 홍우림, 조환준, 김경주, 이원근, 정원옥, 이예진, 백기욱, 김기수, 김용수, 전경미, 이혁승 지지 방문 : 황선태, 박희성, 이차연

1 의문사진규명운동 30년의 기록 : 구술·사진·영상 아카이브 구축 사업 -- 사업목적 : 의문사 사건의 중요한 증거로서 유가족들의 증언을 기 록하고, 사진·기록물들을 디지털로 수집·복원·보존하여 시민 누 구나 활용할 수 있는 아카이브를 구축함으로써 유가족들의 삶과 투쟁이 사회적으로 재평가되도록 하고,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의 전 환점이 되도록 함. -- 실무조직 : 기획 및 구술(정원옥), 영상(고두현), 자료수집(조환준), 아카이브 구축(이혁승) -- 구술팀과 영상팀에는 기념사업회 회원 및 재학생·졸업생 7명이 결 합되어 있는 상태이며, 3월~4월 구술 및 촬영을 위한 사전교육을 실시할 예정임. 5월부터 본격적인 사업 실행. -- 3~4월 사전교육 기간 동안 의문사지회 유가족을 대상으로 아카이 브에 참여할 대상 선정 및 섭외를 진행함. -- 재원 마련 방안 : 1) <인권재단 사람>, <4.9통일평화재단> 등의 공모사업 지원을 통 해 재원 마련. 2) 사업의 취지와 목적을 회원들과 공유, 회원 및 회비배가운동을 통해 재원 마련. -- 아카이브 구축 사업과 병행하여 더 많은 시민들에게 <의문사진상 규명운동 30년 기록>사업의 취지와 목적을 알리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기로 함.

2 이내창기념사업회 30년사 편찬 -- 사업목적 : 30주년을 계기로 기념사업회의 역할과 성과를 정리하여 사료로 보존하는 한편, 30주년 이후의 운동을 새롭게 모색하는 전환점을 마련함.

이내창기념사업회

153


함께하기

-- 기념사업회의 연혁이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고 우리 활동에 대한 기억이 잊어지고 있는 현실에 서 30년사를 편찬하여 사료로 보존하는 것은 필요한 사업이기는 하지만, 기념사업회의 기념사업회의 현재 역량에 맞게 30년사를 편찬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음. -- 대안으로 2019년 상반기 <끈덕지게 어깨동무> 특별판에 30년사의 내용을 담아내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함.

3 의혈과 함께 하는 거문도 답사기행

-- 사업 목적 : 30주기를 앞두고 1989년 사건 당시 사인진상규명투쟁에 참여했던 동문들과 현재 후배(재학 생)들이 열사의 사망 현장을 찾아 마지막 행적을 되짚어보고, 진상규명의 쟁점들과 투쟁 당시의 상황을 공 유하는 자리를 마련함. -- 일정 : 2017년 5월 27일~29일(토~일) 1박 2일(기상 상황에 따라 유동적) -- 여수발 거문도행 배편이 07:40, 13:40이므로 27일 오전 6시에 집결, 출발 하기로 함. -- 거문도 숙박을 원칙으로 하고 야영을 할지 민박을 할지 고민하였으나 민 막으로 결정. -- 이동수단의 결정 및 사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사전 참여 인원 확정이 필 수적임. -- 거문도 사망현장에서의 추모의식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에 대해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함. -- 실무조직으로 조환준(답사팀장), 김경주, 이원근, 박응진, 김기수가 결합하

거문도 답사 웹자보

기로 함.

3차 운영위원회 / 4월 14일(금) 19:30, 한국 YMCA 전국연맹 참석 : 서병훈, 조환준, 김경주, 노용헌, 이원근, 정원옥, 김기수, 김용수, 이혁승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선정단체, 중앙문화(김고운), 비와당신(곽진경 외 3인)

1 2017년 신규사업, “의혈과 함께하는 1박2일 거문도 답사기행” 일정 확정 -- 일시 : 2017년 6월 17일(토)~18일(일) -- 책임주체 : 서병훈 운영위원장 -- 세부프로그램 확정 및 웹자보 제작 후 본격적으로 홍보하기로

2 1/4분기 사업성과 보고 및 공유 1) 공모사업 지원 선정 -- 인권재단 사람 “인권프로젝트온”, 600만 원 지원 -- <의문사진상규명운동 30년의 기록 : 의문사유가족의 사진·영상아카이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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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통일평화재단 “일곱번째 동행”, 500만 원 지원 -- <의문사진상규명운동 30년의 기록: 의문사유가족의 구술 아카 이브 구축과 스토리펀딩 홍보> 2) 의문사 유가족 아카이브 구축 사업 경과보고 -- 3월 8일 ~ 4월 26일까지 매주 수요일마다 진행되고 있는 아카이 브 팀 사전교육이 현재까지 6회 진행되고 있음. 3) <다음세대의 과거청산> 강좌 - 지연되는 정의와 역사의 반복

아카이브 사전교육

: 4월 20일 ~ 6월 1일까지 매주 목요일 진행될 예정인 과거청산 강좌에 현재까지 20명 신청. 4) <끈덕지게 어깨동무> 10호 발간 5) 회원(회비)배가 운동 중간 집계 -- 기존회원(50명) + 신규회원(65명) = 115명 -- 기존회비(66만원) + 신규회비(78만원)

3 이내창기념사업회 의혈중앙민주동문회 공동주최, 제4회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재학생 지원 사업 시상식 -- 중앙문화(김고운), 비와당신(곽진경 외 3인)에게 각 1백만 원 시상.

4 백남기선배 기념사업은 민주동문회와 TF팀 꾸려 진행할 것을 민주동문회에 제안하기로. <기타 의견> 기념사업회 소식을 문자로 전송하는 회원 서비스를 월 1~2회 반드시 하기로 함.

4차 운영위원회 / 2017년 6월 23일(금) 19:30, 4.9통일평화재단 참석 : 신명철, 김성희, 서병훈, 김경주, 이원근, 노용헌, 이예진, 정원옥, 백기욱, 김용수, 전경미

1 28주기 기제 준비 1) 조직 및 홍보 -- 외빈 초청(장남수 유가협 회장, 강내희 기념사업회 회장, 장임원 교수, 정진후 전 정의당 국회의원, 김영 진 민주당 국회의원 등) -- 신입 회원/민주동문회/재학생 참여 독려(역할 분담) -- 문자 발송과 함께 웹자보 제작 홍보(웹자보 제작: 김경주) 2) 이동 -- 총장 면담이 6월 마지막 주에 있을 예정임. -- 백남기 농민 명예졸업장 수여 및 기념비 제작과 관련한 총장 면담에서 이내창 기제에 매년 학교 차량 지원 건 요청하기로 함.(주차증 포함) -- 차량 지원 요청 무산될 경우 카풀 조직(지역별로)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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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기

3) 기제(오전 11시) -- 진행자 : 신기정(민주동문회 부회장) -- 식순 약력 소개 : 서병훈(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유가족 인사 : 이내석 큰형님 추도사 : 외빈 초청 확정에 따라 부탁 추모의 글 : 기념사업회 회원이나 재학생 중 선정 추모의 노래 : (흑석동 노래패 누리울림 섭외) 4) 거문도답사 영상 감상 및 상반기 사업진행 보고(*순서는 유동적일 수 있음) -- 영상 : 고두현 준비 -- 방식 1) 기제 마치고 휴게실에서 점심 식사 준비하는 동안 기념관에서 영상 감상 -- 방식 2) 휴게실에 암막 커튼 설치하고 이동식 스크린으로 감상할 수 있는지 검토 -- 방식 3) 휴게실에 대형 TV 설치하고 감상 가능할지 검토 -- 영상 감상 후 상반기 사업 진행 보고(사진+간단한 설명): 정원옥 5) 기제 음식 및 점심식사 -- 기제 음식 : 큰 형수님께 확인 (이원근, 확인) -- 점심 식사 : 현지 조달 뷔페식? (정원옥, 확인) -- 농사짓는 회원에게 구매 가능한 과일이 있으면 미리 요청 (정원옥 확인) -- 그 외 : 물, 음료, 술 6) 2부 추모제 (13시 30분~15시 30분) -- 이원근의 톡투유(김제동의 톡투유를 패러디한, “주제”를 갖고 이야기 나누기) -- 패널을 따로 둘 필요는 없지만, 기타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음. -- 이예진 공동기획 7) 사진 촬영(노용헌)/영상 촬영(고두현) 8) 이천민주화운동 기념공원에 확인할 것(조환준과 정원옥) -- 휴게실에 암막커튼 설치 가능한지? -- 대형 TV설치해줄 수 있는지 문의. -- 현지 조달 출장 뷔페 있는지 문의. -- 현수막 달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사이즈 문의. -- 국화 주문할 수 있는 곳 문의. -- 인원 초과 시 야외에 천막 쳐줄 수 있는지 문의. 9) 뒤풀이가 필요하다면 흑석동에서 하는 것으로 하고 기념촬영 후 16시 해산.

2 기타 안건 1) 과거사법 제정 관련 과거청산운동 진행 상황 공유 : 신명철 -- 과거사 관련 법안 발의 상황(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개정안 등 6개 법안 발의 중)

끈덕지게 어깨동무

156


-- 7월 4일, 과거청산 결의대회 국회에서 열려. 2) 기념사업회 공간 마련 -- 민주동문회, 자유인문캠프 등 재학생 단위와 공간 마련의 필요 성에 대해 공유하고 재정 능력 등 실질적 추진이 가능한지 검 토하기로 함. 3) 총장 면담 시 가칭 <의혈열사 기념도서관> 설치에 대해 학교 측에 요청하기로.

과거청산 결의대회

-- 4·19 6인 열사, 이내창열사, 백남기 열사 등 의혈이 기억해야 할 열사들을 기리는 공간이 학교 내에 마련될 수 있도록 노력. 4) 유가협 부모님들과의 우이동 나들이 참석 및 후원 건 -- 참석은 힘들고, 후원 10만 원 지원하기로. 5) 거문도 답사 결산 보고(이원근) 유해 발굴

<그것이 알고 싶다>

모란공원 정비 사업 참가(조환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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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행동

범국민추모제


함께하기

2017년 이내창기념사업회 결산 월

수입

1월

2016년이월

지출

출금

입금 15,754,710

회비

2월

3월

673,590 정원스님 장례위원

1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유해발굴지원

200,000

회비

713,350

회비

663,490

특별회비 이혁승

100,000

특별회비 신기정

100,000

특별회비 한명옥

200,000

특별회비 조종국

100,000

특별회비 임현택

120,000

이내창의 후배다 민동지원금

4월

1,000,000 아카이브 제본비

95,000

근조기 (김혜진)

25,000

호스팅비

5,000

추모연대회비

50,000

회비

865,670

특별회비 정희일

200,000 추모연대회비

5월

49재단 강의지원

600,000

이내창의 후배다

2,000,000

이내창의 후배다 뒷풀이 지원

17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회비

1,417,930 근조기 (유수)

38,000

추모연대회의 합동추모제

100,000

어깨동무 제작비 어깨동무 편집비 (과월호 정산) 6월

50,000

1,189,178 900,000

회비

1,526,250

특별회비 변승철

150,000

이자

302 추모연대회비

50,000

정경식열사 30주기 화환

69,000

어깨동무 배송비외

474,600

유가족 식대지원

100,000

이내정형님 부의금

100,000

6,375,778

이월금

17,209,514

23,585,292

끈덕지게 어깨동무

158


수입항목

수입결산

회비

정기회비

5,860,280

특별회비

850,000

사업수입

이내창후배다 민동지원금

1,000,000

기타수입

이자

302

지출항목 사업비 연대사업

홍보비

행사

지출결산

후배다 지원

2,000,000

% 31%

아카이브 제본비

95,000

1%

추모연대회비

300,000

5%

단체경조

179,000

3%

유해발굴지원

200,000

3%

유가협 식대지원

100,000

2%

49재단 강의지원

600,000

9%

1,189,178

19%

어깨동무제작 발송비

474,600

7%

편집디자인비

900,000

14%

편집회의비

0%

어깨동무 원고료

0%

총회

0%

815기제

0% 0%

경조비

조문기 및 부의금

163,000

행사뒷풀이

170,000

3%

5,000

0%

6,375,778

100%

비품 업무추진

0% 호스팅, 도메인

수입계

이내창기념사업회

159

7,710,582

지출계

3%


나누세요 담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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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fe.daum.net/19890815 • naechang.lee@gmail.com

함께 만들어요. 하나, 2017년 다음호 편집위원 되기 자주 안 모입니다. 회의는 짧게, 뒤풀이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일은 찾아서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합니 다. 느릿느릿 갑니다. 끈덕지게 함께 갈 열의와 책임 감이면 충분합니다.

l 찍은 날

2017년 7월 28일

l 펴낸 날

2017년 8월 2일

l 펴낸 이

강내희

l 펴낸 곳

이내창기념사업회

l 연락처

사무국장 정원옥 010-2373-3387

cafe.daum.net/19890815

둘, 기고하기 어떤 형식과 내용의 글이라도 좋습니다. 나누고 싶 은 생각,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 소소한 일 상의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 음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회원 자녀의 기고에는 소 정의 원고료가 지급됩니다.

김선주, 서병훈, 조환준, 김경주, 이원근, 정원옥, 백기욱, 신성호, 강곤, 김용수, 이주연, 강지우가 힘을 합쳐 만들었습니다. 김 용수와 이주연이 편집위원으로 새롭게 합류했습니다. 김용수는 ‘축구와 노동 이야기’를, 이주연은 ‘주연이가 새 회원을 만나 요’를 연재합니다. 기대가 큽니다. 이번 호 권두칼럼은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소장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기념사업회와 맺은 인연이 지속적 연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특집 <의문사유가족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다>에 응원의 글을 보내주신 김유승 문헌정보학과 교수님, 고맙습니다. 아카이브사업단의 활동을 꼼꼼히 기록한 재학생 이찬민과 장민경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전 합니다. <다음세대의 과거청산> 강좌 후기를 보내주신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미류님, 평화학연구자 강혁민님 정말 고맙습 니다. 페이스북 담벼락의 사진과 글을 쓰도록 허락해주신 모든 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표지 사진은 백기욱, 인쇄는 상지 사, 발송은 신성호가 애써주었습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는 온라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밴드 <묻지말고 응답해라 의혈중앙>에서 근황도 나누시고, 기념사업회 소식도 공유하시기 바랍니다. 깊은 애정과 관심으로 <끈덕지게 어깨동무>를 기 다리고 애독해주시는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 걸음 더 끈덕지고 살갑게 다가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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