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참된 예언자들은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자들이다 James Connolly
제
임스 코널리(1868.6.5 ~ 1916.5.12)는 아 일랜드 공화주의자이며 사회주의 지도자였으 며, 생디칼리즘과 IWW(세계산업노동자조합) 과 맥을 같이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카 우게이트에서 아일랜드 태생 부모에게 태어났다. 그 는 11살에 생계를 위해 학교를 그만 두었으며, 평생 선도적인 맑스 이론가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또한 스콜틀랜드와 미국 정치에서 역활을 했다.
어린시절 코널리는 1868년 에딘버러에서 아일랜드 이민자 슬 럼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아일랜드, 모나간 에서 스코틀랜드로 이사를 해서, 아일랜드 게토(빈민 가)의 카우게이트에 정착했으며, 그 지역에 수 천명 의 아일랜드 사람들이 살았다. 그는 “작은 아일랜드”로 알려진 에딘버러의 카우 게이트 지역인, 성 페트릭 로마 카톨릭 교구에서 태 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노동자였다. 그는 지역의 카톨릭 초등학교에서 10살 정도까지 교육을 받았다. 그는 곧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하는 직업에 서 일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는 그의 형 존 과 마찬가지로 영국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14살에 영국 군대에 신청을 했다, 그의 형이 했던것 처럼, 나이를 속이고 그의 이름을 레이드로 올렸다. 그는 로열 스코트랜드 연대의 2대대로 아일 랜드에서 토지전쟁으로 알려진 농촌지역에서 불안한
기간 동안 거의 7년간 복무했다. 그는 이후 토지 이 슈에 개입하게 된다. 그는 그의 전 삶에 지속된 영국군대에 대한 깊은 증 오심을 키웠다. 그는 그의 부대(연대)가 인도로 배치 될 것이라고 들었을 때, 그는 퇴역했다. 코널리는 인도로 가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 었다; 릴리 레이놀즈라는 여인 때문이였다. 릴리는 그가 퇴역한 후 제임스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이사 가서 1890년 4월에 결혼했다. 그들은 에딘버러에서 정착해다. 그곳에서, 코널리는 스코틀랜드 사회주의 연맹에 몸 담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양해야 할 어린 가족들 때문에, 그들을 먹여살릴 길이 필요했다. 그는 짧게 1895년 구두수선 가게를 세웠다, 그러 나 그의 구두수선 기술이 좋이 않아서 몇 달 후 실 패했다. 그는 그 당시 사회주의 운동에 너무나 활동 적이어서, 그 자신의 일보다 이것(운동)을 우선시 했
사회주의 운동 시작
그
는 스코틀랜드 사회주의 연 맹의 간사가 되었다. 그 당 시 그의 형 존은 간사였다; 존이 하루 8시간을 지지하는 집회에 서 연설을 한 후, 에딘버러 코퍼레 이션에서 직장을 잃었다, 그래서 형 이 직장을 찾는 동안, 제임스가 간 사직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코널 리는 키어 하디가 1893년 만든 독 립노동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의 어느 시점에, 그는 중립적인 국제언어 에스페란토의 사 용을 옹호하고 연구했습니다. 1892년 그는 스코틀랜드 사회주 의 연맹에 참여를 하고, 1895년부 터 간사로 활동했다. 그의 셋째 딸 이 태어난지 2달, 주당 1파운드의 임금을 주는 직업인, 풀타임 간사를 듀블린 사회주의 클럽이 찾고 있다 는 말이 코널리에게 들렸습니다. 코 널리와 그의 가족은 듀블린으로 이 사를 했다, 그곳에서 그 역을 맡았 다. 그의 선동으로, 클럽은 재빨리 아일랜드 사회주의 공화당(ISRP)로 발전했다. 아일랜드 사회주의 공화당 은 많은 역사학자에 의해 아일랜드 사회주의와 공화주의의 초창기 역사 에서 중추적인 중요성의 한 부분으 로 여겨진다. 영국에서 사회주의로 써 활동을 하는 동안, 코널리는 신 문 더쇼셜리스트의 창립편집자였으 며 1903년 사회민주동맹에서 분리 된 사회주의노동당의 창립자 중에 있었다. 코널리는 보어전쟁에 반대하 는 듀블린 저항에서 고니와 그리피 스에 합려했다. 경제적 필요성(궁핍) 과 ISRP의 발전에 대한 실망의 복 합적인 것이 그가 1903년 9월 미 국으로 이민가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아무런 계획도 없 이. 미국에서 있는 동안 그는 1906 년 미국사회주의노동당, 1909년은 미국사회당 그리고 세계산업노동자조 합의 구성원이였다, 그리고 1907년 뉴욕에서 아일랜드 사회주의 동맹
을 설립했다. 그는 1910년 책 “ 아일랜드 역사에서 노동”의 한 장 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장의 제목은 “공포의 장: 다니엘 오’코넬과 노 동자계급”이였으며, 60년전 카톨릭 해방의 성취자를 비난하는 것이였다.
* Maud Gonne (1866.12.21 ~ 1953.4.27) : 영국태생의 아일랜드 혁명가이자 여성참정론자. * Arthur Griffith(1872. 3. 31 1922. 8. 12) : 아일랜드 정치인 이자 작가이며, 정당 신페인을 설립 하고 이끌었다. 그는 1922년 1월 부터 8월까지 아일랜드 하원의 의 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21년 앵 글로-아일랜드 조약을 안들었던 런 던에서의 협상에서 아일랜드 대표의 의장이였다.
1910
년 아일랜드로 돌아오 자, 그는 아일랜드 운 송 및 일반노동조합에서 친구 생디 칼리스트 제임스 라르킨의 오른팔 이였다. 그는 듀블린 구의회에 우드 키 지역에 두 번 출마했지만 낙선 했다. 그의 이름,과 가족의 이름은, 1911년 아일랜드 인구조사에 나타 나고 - 그의 직업은 “사회당의 전 국 조직가”로 등재된다. 1913년 에, 공장폐쇄에 대항하여, 그는, 전 영국 장교, 잭 화이트와 함께 아일 랜드 시민군(ICA)를 구성했으며, 무 장하고 잘 훈련된 노동자 단체로 목 적은 노동자들과 파업자들을 보호하 는 것이였다, 특히 듀블린 시 경찰 의 잦은 잔인한 행동으로 부터. 시 민군은 기껏해야 250명 정도의 숫 자였짐나, 그들의 목표는 곧 독립적 인 그리고 사회주의 아일랜드 국가 의 설립이 되었다. 그는 또한 1912 년 아일랜드 노동당을 아일랜드 노 동조합 당대회의 정치적 날개로써 설립했다 그리고 전국위원의 한 구 성원 이였다. 이 시기에 그는 벨파 스트에서 위니프레드 카니를 만났다, 그녀는 그의 비서가 되었고 이후 부 활절봉기 기간에 그를 수행했다.
부활절 봉기
코
널리는 아일랜드 의용군의 지도부에 냉담했다. 그는 그 들을 너무 부르주아라고 여 겼으며 아일랜드의 경제적 독립에 는 관심이 없었다. 1916년에, 그들 은 영국에 대항한 자세만 취할뿐 결 정적인 행동을 할 의지가 없다고 생 각하고, 그는 필요하다면 대영제국에 ICA를 파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음 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행동을 취하 도록 선동했다. 이것이 아일랜드 공 화주의 형제단의 구성원들을 놀라게 했고, 형제단은 이미 의용군을 침투 시켰으며 그 해에 반란에 대한 계 획을 세웠었다. 그러한 과격한 행동 에서 대화로 코널리를 끌어낼려고, IRB 지도자들은, 톰 클라크와 페트 릭 피어스를 포함해서, 협상이 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코널리 를 만났다. 만남중, IRB와 ICA는 그해 부활정에 함께 행동하기로 합 의했다.
1916년 4월 24일 부활절봉기가 발 생하자, 코널리는 듀블린 여단의 사 령관이였다. 듀블린 여단이 봉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때문에, 그 는 사실상 최고사령관이였다. 코널리의 지도력은 부활절봉기에서 가공할 만한 것이였다. 마이클 콜린 은 코널리에 대해 그는 “ 지옥 끝 까지 그를 따랐을 것이라고”말했 다. 항복이후, 그는 다른 죄수에게 말 했다; “걱정마라. 포고문에 서명한 우리들이 총살당할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자유롭게 될 것이다.”
죽음 코널리는 실제로 감옥에 있지 않았 으며, 듀블린 캐슬에 국가소유의 아 파트의 (지금은 코널리방이라 불리 는)방에 있었다, 듀블린 캐슬은 전쟁 에서 돌아오는 군대를 위한 응급치 료소로 바뀌었다. 코널리는 봉기동안 그의 편을 위해 부대에 총을 쏜 죄로 사형을 받았 다. 1916년 5월 12일 그는 군 응 급차로 킬메이넘왕립병원으로 끌려갔 다, 킬메이넘 감옥소의 길을 가로질 러, 감옥소에서 그는 처형됐다. 그 의 부인이 함께했고, 여론을 물어봤 고, 그는 “내가 아일랜드인이라는 것을 그들 모두 잊어버릴 것이다” 라고 말했다. 코널리는 총상에서 너무 심하게 상 처를 입어서(의사가 이미 말하길 하 루나 이틀 이상 살수 없다고, 그러 나 처형명령은 내려왔고) 그는 저격 부대 앞에 서있을 수 조차 없었다; 그는 들것에 실려 감옥 마당으로 옮 겨졌다. 그의 사죄와 마지막 의식 이 카푸친회 수도사 신부 알로이시 우스 트레버스에 의해 주관됐다. 그 를 총살한 군인들에게 기도를 요구 하고, 그는 말했다: “그들의 생각 에 따라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겠다.”라고 말
했다. 다른 이들이 처형당한 똑같은 자리로 옮겨지지 않고, 처형 마당의 끝터머리에서, 그는 의자에 묶혀 총 살당했다.
회주의자로써 그의 유산은 다양한 좌파와 좌파-공화주의 그룹에 의해 주장되며, 그는 그가 세운 노동당과 관련된다.
그의 몸(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관 도 없이 공동묘지에 묻혔다. 반란 지도자들의 처형은 반란 기간 동안 지지를 보내지 않았던 대다수 아일 랜드인의 분노하게했다. 가장 논란 을 일으킨 것은 코널리의 처형이였 다. 역사가들은 그들의 행동과 함께, 코널리와 비슷한 반란의 처형방식을 그들의 희망과 목표에 대한 대중이 인식하게 만들고 그들이 목숨을 걸 고 싸웠던 운동에 대한 지지를 모으 는 요인이였다는 것을 지적했다.
코널리는 세계1차대전을 노골적으 로 반대한 제2인터내셔널의 몇 않되 는 유럽의 회원중에 있었다. 이것은 유럽 대부분의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화합되지 않았다.
처형은 심지어 영국에서도 잘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미국으로부터 원 치않는 관심을 이끌어 냈다, 그것( 관심)은 영국이 유럽에서 전쟁을 일 으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애스퀴스, 총리,는 더 이상의 처형은 일으나서 않된다고 명령했다; 로저 케이스먼트 는 아직 재판을 받지 않았으므로 예 외였다.
가족 제임스 코널리는 그의 아내 릴리와 여러명의 아이들에 의해 살아남았다, 그들중 노라는 성인으로써 아일랜드공화주의 운동내에서 선전가로 영향 력있는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로디 는 그의 아버지의 정치를 이어나갔 다. 이후, 둘다 (아일랜드 의회)오럭 쌔스 의원이 되었다. 코널리의 딸중 한 명은 모나는 1903년 13살에 죽 었다, 그때 그녀는 숙모를 위해 빨 래를 하는 동안에 분신자살했다. 제임스 코널리가 처형된지 3개월 그 의 아내는 8월 15일 카토릴교회로 들어갔다.
유산 아일랜드에서 코널리의 유산은 주로 공화주의 운동에 기여한 것이다; 사
그는 급진 세계산업노동자노동조합 에 참가했으며 영향도 받았다, 그리 고 사회주의를 생산에 대한 산업노 동조합의 통제로써 마음에 그렸다. 또한 그는 세계산업노동자노동조합을 미국의 사회주의 노동당과 미국사회 당과 같이 봉건 사회주의 그룹을 함 께 묶는 자신들의 정당을 구성하는 것을 꿈꾸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독 립 아일랜드를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꿈꿨다. 그의 혁명적 노동조합주의 와 생디칼리즘에 관한 사상과 개념 은 노동자공화국에 대한 그의 이미 지가 풀뿌리 사회주의 또는 국가의 하나인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다. 그의 생애동안 그는 생디칼리즘 의 지지자였으며 레오니즘의 마르크 스학파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그 위해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러시아 혁명과 레오니즘의 출현 1년 전에 죽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코널리의 사상 은 존 맥클리과 같은 사회주의자 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맥클린 은, 그와 같이, 좌파의 사상을 스 코틀랜드 노동자공화주의 정당을 구 성할 때 민족주의 사상과 결합했
Statue of James Connolly in Dublin 코널리 연합, 아일랜드의 단결과 독 립을 선전하는 영국조직,은 코널리의 이름을 땃다.
듀
블린에 제임스 코널리의 동 상이 있는데, SIPTU노동조 합의 사무실 자유의 홀 밖 에. 코널리의 또 다른 동상은 IWW 와 UE의 시카고 지부의 사무실 근 처, 노동조합 공원에 서있다. 1972년 딕 카베트 쇼 인터뷰에서, 존 레논은 제임스 코널리는 그의 노
래, ‘여자는 이 세상의 검둥이’에 대한 영감이였다고 말했다. 레논은 노래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영감을 설명하면서 ‘여성은 노예의 노예이 다”는 코널리의 말을 인용했다. 코널리 역은 듀블린의 두 개의 주요 한 역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브랜즈 타운 코널리 병원은 그의 명예를 기 리며 이름을 지었다. 2002년, BBC 텔레비젼에서, 영국 민이 투표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에, 코널리가 64번째를 기록 했다. 1968년, 아일랜드 그룹, 울프톤즈는 “제임스 코널리”라는 싱글을 발 표했다, 아일랜드 차트에 15위 기록 했다. 밴드 블랙47은 코널리에 대한 노래를 짓고 연주했는데, 그들의 앨 범 ‘자유의 불’에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