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봄 Ⅰ Vol.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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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9금 ~ 5. 10토 “해마다 봄이 오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라고 이 땅 어머님들의 봄 교훈을 우리에게 들려주던 조병화 시인, 그분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한 제11회 조병화 시 축제에 그대를 초대합니다.
조제 병 11 화회 시 축 제
제7회 꿈나무 시낭송대회
조병화 인물 소묘 展 : 고독한 혼과 혼의 대화
조병화 시인이 독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노래해 온 꿈과 사랑의 시정신을 선양하고 나아가 문학적 역량을 지닌 안성시 관내 초등학생들이 시낭송과 친숙해지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펼치는 시낭송 경연 한마당.
조병화 시인이 만났던 사람들, 그들의 얼굴과 추억을 모은 기획 전시
◉ 일시 : 2014.
◉ 장소 : 조병화문학관
5. 9(금)
◉ 전시기간 : 2014. ◉ 전시개막 : 2014.
5.10 ~ 2014. 10. 31 5. 10(토)
◉ 장소 : 조병화문학관
조병화의 문학세계 III 제24회 편운문학상 시상식 편운 조병화 시인의 문학에 대한 순수한 뜻에 따라 제정된 상으로 한국시의 새 지평을 연 시인과 문학평론가에게 매년 시상. ◉ 일시 : 2014.
5. 10(토)
조병화 시인의 시에 나타난 철학성이 현대인의 삶과 어떤 관계에 놓이는지를 탐구하고 시인들과 문학평론가들의 육성을 통하여 조병화 시의 현대적인 의의를 되짚어 보는 자리.
◉ 장소 : 조병화문학관
2014. 5. 10(토) 안성, 조병화문학관
제9회 편운 시 백일장
안성 시 읽는 날
조병화 시인의 문학적 업적과 시혼을 이어 나갈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예고하는 글 잔치.
안성문인협회 회원들과 함께 시를 낭송하며 봄의 정취를 느끼는 시낭송회.
◉ 일시 : 2014.
◉ 일시 : 2014.
5. 10(토)
◉ 장소 : 조병화문학관
주 최 안성시, 조병화문학관
5. 10(토)
◉ 장소 : 조병화문학관
후 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시인협회,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한국문학관협회, 안성문화원, 한국예총 안성시지부 한국문인협회 안성시지부,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문 의 조병화문학관 t. 02-762-0658 E-mail. poetcho@naver.com
조병화 인물 소묘 展고독한 혼과 혼의 대화 영혼의 본향으로부터 와서 이승의 타향에 고독한 나그네로 살다간 조병화 시인. 그는 살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펜으로 그렸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한 표정의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얼굴 하나하나에서 그는 고독한 영혼을 만나고, 그 고독한 영혼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또 생존의 애수를 확인하는, 고독한 혼과 혼의 대화를 해 왔던 것입니다. 그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하여 안성시에서 제정한 ‘조병화 주간’을 맞이하여, 그가 그림으로 담아낸 인간의 혼, 인물소묘들을 라일락 향기 은은한 난실리 조병화 문학관에서 여러분께 공개합니다. 전시기간
2014. 5.10 ~ 2014. 10. 31
전시개막
2014. 5.10토
장
조병화문학관
소
2014 봄Ⅰ Vol. 17
08
Contents
25
29
04
28
노변의 꽃들
아버님의 은인들ㆍ조진형
06
33
꿈은 자신을 지키는 무기ㆍ유자효
여행을 앞두고
08
34
신중신 시인 편ㆍ박덕규
그 해 여름의 아이ㆍ 박민정
14
38
편운재 나무를 생각하며ㆍ김유신
혜화동로터리와 플라타너스와 시인과·이대원
16
40
조병화론
충북문화기행 화보
공존의 시학ㆍ조영숙
42
조병화 시와 그림
꿈의 향기
시인의 육성을 듣다
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19
조병화를 추억한다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Ⅱ
소설로 그리는 조병화 시
명사가 만난 조병화
꿈의 글마당
편운문학상 시터
2013 가을 충북 문화기행을 다녀와서ㆍ주기영
제13회 시부문 본상·우이시회
46
23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Ⅰ
당신이 주신 눈물 다 쓰곤
한 장의 사진
제4차 세계시인대회 개회사를 낭독하는 조병화 대회장
24
시인의 수필
명동에서 만난 사람들ㆍ조병화
표지Ⅰ제자·그림 조병화
2014 봄Ⅰ Vol. 17
38
등록번호 서울 사02178 발행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발행인 박철원 편집인 조진형 편집주간 김삼주 편집위원 김종회 박덕규 박주택 홍용희 편집장 박 준 주소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05 (우)110-530 전화 (02) 762-0658 팩스 (02) 3673-0436 홈페이지 www.poetcho.com 이메일 poetcho@naver.com 디자인 디자인 연 플러스 (02) 2273-8916 인쇄 예작만들기 발행일 2014년 3월 1일 『꿈』은 잡지윤리실천강령을 준수합니다.
조병화의 시와 그림 노변의 꽃들
2014 + Spring
4
+
5
꿈의 향기 꿈은 자신을 지키는 무기 유자효
꿈은 자신을 지키는 무기 _유 자 효
전쟁의 쓰레기들이 밀려와 쌓이던 항구에서 소년은 성장했습니다.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항구에는 화재가 잦았고 가장 규모가 컸던 역전 대화재 때 소년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청과물 회사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영토가 줄어드는 왕국처럼 소년의 아버지는 땅을 떼어 팔아가며 재 기에 몸부림쳤고 생계는 어머니의 몫이 되었습니다. 젊은 어머니는 집에 하숙 손님들을 받았습니 다. 집은 불시에 들이닥치는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되었고 어머니는 자주 붙들려가서 즉심을 받고 구 류를 살고 오곤 했었지요. 가뜩이나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았던 소년에게 세상은 무서운 곳이었습 니다.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았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싸움을 벌이던 곳, 어린 자식들을 끌어안고 살 기 위해 몸부림치던 어머니를 훼방하고 끌고 가던 곳. 세상은 그런 곳이었지요. 소년은 겁이 많은 아이로 자라갔습니다. 성격은 내향적으로 형성돼갔지요. 그러던 소년에게서 문학적 소양이 발견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소년의 담임선생님이 실습을 나온 교생 선생님들에게 ‘저 아이는 자라서 문학가가 될 거야’라고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그 예언을 입증하 기라도 하듯 소년의 문학적 재능이 밖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뽑혀 도 단위 대회에 나갔고 거기에서 상을 받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중학교 입학부터 시험을 치러야했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소년의 수상은 일과성 사건으로 넘어가고 중학교 입시에서 소년은 그 도시에 서 제일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소년의 문학적 재능은 3학년 때 있었던 교내 백일장에서 다시 드러났습니 다. 장원을 한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소년은 그 지역에서는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동일계 고등 학교에 운 좋게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소년이 진학한 고등학교는 부산 경남 일원의 수재들이 모여든 영재 학교이기도 했었지만 학생들 의 적성 교육을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교과 외 특별활동을 의무적으로 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년은 자연스레 문예반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그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대외 활동을 장려하고 있 었습니다. 야구반은 야구대회에, 배구반은 배구대회에 나가는 것처럼 미술반은 사생대회에, 합창 반은 합창대회에 나가서 타교생들과 겨루는 것이었습니다.
2014 + Spring
문예반은 백일장에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상급생들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 어있는 진해의 군항제 백일장에 나갔습니다. 고등부 글 제목은 ‘소묘’였는데 고등학교에 갓 입학 한 소년이 덜컥 장원을 한 것입니다. 다음 달 있었던 마산문화제 때도 백일장 장원을 해서 교내 벽 보에 ‘또 장원!’이라는 게시가 나붙자 학교에서는 유명 인사가 돼버렸습니다. 글짓기에 재미를 붙 인 소년은 ‘학원’ 잡지 같은 곳에 투고도 하고, 전국 규모의 대회에 나가기도 하면서 고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 소년에게 꿈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 꿈은 문인이 되는 것이었습니 다. 소년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글쓰기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일은 모두 그 뒷전 이 되었습니다. 소년은 청년이 되고 대학 시절에 등단 절차를 끝냈습니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병석에 눕고 어 머니는 끝내 돌아가셨지요. 동생 다섯과 빚을 유산으로 받은 청년의 고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방 송사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고 아내와 둘이서 삶과의 피나는 격투를 벌이기 2, 30년. 청년은 장년 이 되었습니다. 방송 언론인으로서의 경력은 쌓아갔지만 문인으로서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장 년기였습니다. 그의 직장 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정치적 격변기에 보냈던 정치부 기자 생활, 동유럽이 붕괴되기 직전에 보냈던 파리 특파원 생활, 한국 방송 구조 개편에 따라 이적한 방송사에서의 갈등 과 좌절.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때로는 성취를, 때로는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남자에게 직장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인생 전체의 무게와도 맞먹습니다. 직장 생활에서 실패하 면 인생에 실패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직장에서 좌절한 사람이 실제 병이나 사고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봅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그만큼 큰 좌절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이 직장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남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직장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 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지향해온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지금 잘 하지는 못한다 해도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문학적 생애였습니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그 어떤 좌절도 그를 결코 절망에 빠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그것은 그를 지켜주는 무기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살아왔던 세월의 무게가 빛나는 은색으로 변해 그의 머리를 덮었습니다. 예순 다섯 고개를 넘으면서 발견된 선천성 심혈관 질환은 그를 수술 대에 눕히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그의 삶을 더욱 성숙시켜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직도 그는 꿈을 꿉니다.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꿈. 많은 사람들의 한 생과도 맞먹는 60년 동 안 변하지 않고 간직해온 꿈. 그것은 바로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유 자 효 시인, 방송인. 1947년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1972년 『시조문학』에 「혼례」를 발표하며 등단. 시선집 ‘성스러운 뼈’ ‘아버지의 힘’과 시조선 집 ‘데이트’가 있음. 편운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구상선생기념사업회장, 지용회장.
6
+
7
시인의 육성을 듣다 신중신 시인 편 박덕규
_박 덕 규
신중신 시인, 소설가. 1941년 경남 거창 출생.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등단. 시집 『투창』, 『카프카의 집』, 『아름다운 날들』 및 시선집 『지상의 작은 등불』 등. 장편소설 『까리아인』, 『사할린은 눈물도 믿지 않는다』, 그 밖에 산문집 『하나와 다른 하나』 등 다수.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협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2014 + Spring
박덕규(이하 박)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이렇게 시간
신 제 고향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읍촌입니다. 동해, 서
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인터뷰는 선생님의 작품 활동
해, 남해에서의 거리가 모두 비슷한 내륙 산간지방이었지요.
과 시 세계를 중심으로 조명해보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민망스럽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바다를 본 적이 없
1962년 제4회 사상계 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등단하신 이후 시
습니다. 보통은 수학여행 같은 걸로 바다 구경도 하고 타지 경
력 50년을 넘겨 지금까지 700편 가까이 시를 발표하셨습니
험도 해보는 건데 내게는 그런 일도 없었습니다. 고교를 마치
다. 신작시집은 7권을 내시고 이제 제8권째를 준비하고 계신
고 대학 진학은 꿈도 꿀 형편이 아니라 집안에 박혀 있을 때였
걸로 압니다. 요즘 추세에 비추면 다작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
죠. 추석을 앞두고 대도시 부산을 구경할 기회가 왔어요. 내외
렇다고 과작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작
종간인 사촌이 자기 형이 있는 부산에 가 있게 되면서 나를 초
품 세계를 일별하면 변화의 폭이 크지 않고 전체적으로 일관
청한 거지요. 지금은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였지만, 그때는 비
된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또 장편소
포장도로로 장장 열한 시간 만에 닿았지요. 부산에 닿은 그날
설 대작도 몇 편 발간하셨고, 독서일기를 비롯한 산문집도 여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한반도 사상 가장 무자비한 태
러 권 내셨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런 행적에 비해 문학적 생애
풍인 사라호가 그 밤을 할퀴고 있었습니다. 1959년 9월의 일
면에서 굴곡도 없고 변화도 적은 편입니다. 개인적인 점을 말
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다의 위대함을 본 것은 그 다음날이
하면 제가 수십년 보아온 선생님 모습도 거의 변함이 없어 보
었습니다. 나는 부지런한 사촌에 이끌려 태풍이 지나간, 황폐
입니다. 선생님은 경남 거창의 읍촌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하
해진 골목길을 지나서 바다로 나갔어요. 그동안 거창에서 나
셨는데요, 우선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고 자라 산만 보고 살아왔던 제게 그 바다는 굉장히 압도적이 었지요. 어제 그렇게까지 난폭하던 바다는 새색시처럼 얌전
신중신(이하 신) 나는 참 재능이 없는 사람입니다. 공부가
해져 있었어요. 광대함에도 놀라고 그 변화에도 놀랐습니다.
뛰어난 것도 아니고 운동도 할 줄 모르고, 또 가난했습니다. 글에 대한 흥미는 이미 중학교 1학년 때 느꼈지요. 소월 시가
박 성인이 돼서야 바다를 구경할 정도로 산골에 살았고, 대
마음에 와 닿았고, 흉내도 내게 했습니다. 소설도 많이 읽었고
학 갈 형편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문예창작과에 입학을 하게
요. 고등학교까지 시인으로는 김용호, 이설주, 서정주 이런 분
되었는지요? 요즘도 문학을 꿈꾸는 고교생 문학도들 중에 문
들의 시집을 찾아 많이 읽었지요. 그러나 백일장 같은 걸 경
예창작과라는 개념을 모르는 이가 수두룩한데요.
험할 수 없는 군이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동국대 영문과 출신의 최응태 선생님이 영어 교사로 계셨어요. 이분이 문예
신 졸업하고 대학을 못가고 거창 집에서 두문불출할 때였
반을 맡으셨는데 시를 잘 쓴다고 저를 칭찬해 주셨지요. 그
습니다. 그런데 후배 하나가 진주에서 열리는 영남예술제에
게 나도 시를 써도 되는구나 하는 자긍심을 준 첫 사건입니
나를 데리고 갔어요. 제10회였는데 영남예술제가 그해부터
다. 그 선생님 덕으로 내가 문학에 눈을 뜨게 되지 않았나 생
개천예술제로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 백일장이 있었습
각합니다. 군의 교육주간 행사로 백일장이 열리는데 가서 차
니다. 나는 고교생이 아니니 고등부에 나갈 수도 없었고, 대학
상을 한 적이 있었어요. 나는 문학을 통해 소위 자존이란 걸
생도 아니니 대학생부에 나갈 수도 없었어요. 그런데 보니 대
느끼게 되었던 거죠.
학생부가 따로 나뉘어져 있지 않고 대학생과 일반인을 함께 해서 대학일반부가 있더군요. 저는 이를테면 일반인이었던 거죠. 그 대학일반부에서 제가 장원을 차지한 거예요. 거기 온
박 선생님 고향은 정말 ‘깡촌’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예나 지
친구들 소개로 저에게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장학생의 길이
금이나 살림이 넉넉하지 않고 또 성격도 진취적이거나 하지 않
열린 것입니다. 그게 나와 시를 운명처럼 엮어준 사건입니다.
는 시골 사람은 그곳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쓴 산문을 보니 선생님이 얼마나 시골 사람이었나를 알려주는 장 면이 있더군요. 바로 바다를 처음 본 때의 이야기입니다.
박 서라벌 문예창작과 하면, 소설가 김동리 선생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시 쪽에도 당대 대가들이 강의를 하신 것으로 8+9
시인의 육성을 듣다 신중신 시인 편 박덕규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문학도들에게 장학 혜택을 준 걸로 유
청준 등 한국문학의 대명사들의 등용문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명하고요. 한 기에 수십명씩 등단자가 나온 걸로 전무후무한
수 있지요. 물론 황석영, 최인호는 따로 신춘문예 당선을 하
기록을 세운 학과로 알려져 있습니다.
는 이력도 있지만요. ‘사상계’는 또 선우휘, 손창섭, 이호철, 김 승옥, 이청준 등의 출세작들을 주목한 동인문학상으로 유명
신 이름 대면 모두 아는 문사들이 득시글거릴 때였지요. 저
했고요. 그런데, 저 유명한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 이 지면에
는 시에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시를 지도한 분은 서정주 선생
실렸고 이로부터 1970년 제3공화국 시절 잡지 폐간의 철퇴를
과 김구용 선생이셨어요. 2년 졸업할 때까지 그분들의 가르침
맞습니다. 선생님이 이런 ‘사상계’ 신인상 출신이라는 것이 저
을 받았습니다. 특히 저한테는 김구용 선생의 말씀이 지금도
로서는 좀 신기합니다.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선생은 한학에 뛰어나신 분인데 의외 로 서양 시문학에 정통하셨어요. 특히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
신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 연애를 했습니
대한 설명이 놀라웠죠. 우리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
다. 그러나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에 실연을 하고 실의에 빠
니다. 늘 하시던 말씀이 ‘남의 아류가 되지 말고 자신의 독창
져 방학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가을, 양문길
성과 고유성을 살려라’, ‘시류나 유행에 편승하지 마라.’ 였습
과 미아리에서 자취를 할 때였죠. 그 무렵 김원두를 필두로
니다. 이런 말씀들이 나에게는 아주 큰 영향을 주었지요. 어쩌
김용성, 김원일 등과 친구가 돼 있었어요. 그런 친구들과 문
면 제 문학적 인생이 어떤 부류에 소속되지 않게 된 것은 김구
학의 밤에서 낭송할 시를 준비했습니다. 엎드려서 두 시간
용 선생 영향도 있다고 봐요. 어떨 때는 선생님은 나를 왜 이
만에 시를 한 편 썼습니다. 여름날 깨어진 사랑에 대해서이
렇게 고립된 인간으로 만드셨나 원망을 한 적도 있을 정도입
지요. 그 시가 등단작인 「내 이렇게 살다가」입니다. 졸업하
니다. 그만큼 영향이 큰 분이죠.
고나서 이 시를 다른 시들과 함께 『사상계』에 응모했어요. 고향 집에 가 있는데 등기우편으로 당선 통지가 왔어요. 대
박 1962년 『사상계』로 등단하셨습니다. 사상계는 종합 시
학 1학년 때 쓴 그 시가 심사위원들이 보기에는 쓴 사람의
사잡지였지만 문학 방면에도 최고 수준을 유지했지요. 신인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노숙하다가도 청순한 부분이
상도 등단제도로 으뜸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현대문학’
있었던 거죠. 특히 조지훈 선생은 심사평에서 그 시를 군계
과 ‘자유문학’이 신인추천제를 운영하는 주요 잡지였지만 ‘사
일학라고 평을 해 주셨어요. 이 시를 지금도 기억해 주는 사
상계’는 이보다 윗길이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시보다는 소설
람이 있어서 감개에 젖곤 하지요.
쪽에서 더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는데, 황석영, 최인호, 이
2014 + Spring
박 1960년대 우리나라 시는 지금에 비해 관념어 사용이 빈
박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몇 년 하신 걸로 알고 있
번하고 실제로 시 세계도 관념을 추구하는 경향이 아주 강합
습니다. 출판 경력도 꽤 있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사실 제가
니다. 시는 어떤 대상에 대해 표현하기 마련인데요, 1960년대
선생님을 만난 건 그 이후 소위 전업시인일 때가 아닌가 싶
시의 대상은 관념화된 언어 자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봅
습니다.
니다. 시인이 자기가 택한 언어에 스스로 갇히는 경향 또한 여 기서 자주 나타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생님 시에도 그런
신 삼중당 출판사에서 10년여를 근무했었지요. 그때 삼중
경향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비교적 그런 시류에 대해 일정한
당문고 500권을 주로 내가 추진하고, 계약했습니다. 삼중당
거리를 두고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관념어 쓰임도 비교적
에서 근무하며 한국 문단, 문인들을 많이 알게 됐지요. 그 후
덜하고 시어도 쉽습니다.
에 현암사에서 일 년 정도 근무하고는 지금까지 전업 작가로 지속적으로 시를 써오고 있어요. 돌이켜보면 1972년 첫 시집
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중심부에 들어가는 것을 천성적
을 내고 난 뒤 45년 이상을 중간 2~3년 빼고 거의 매년 어김
으로 꺼리는 경향이 있어요. 문학은 근본적으로 혼자 하는 거
없이 20편 안팎을 발표했어요. 7년마다 시집을 내 왔고요. 사
지만 서로 연대를 하며 발전해 나갈 수 있지요. 하지만 나는
실 작년에 시집을 냈어야 했는데, 요즘은 시집을 낼 만한 곳
주로 혼자서 해왔습니다. 당시 내 또래로 ‘60년대’라는 동인
이 거의 없어요.
의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거기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선배 시 인으로 청록파 같은 분들도 계시고 목월 선생한테는 개인적
박 흔히 하는 말로 선생님은 시류를 따르지 않은 독자적인
으로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시의 경향은 박두진 쪽에 더 가까
시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신작시집 형태로 낸
웠다고 할 수도 있겠고요. 다른 작품들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일곱 권의 시집이 각각 나름의 의미를 지니면서 또한 전체적
그런 작품이나 또는 그런 작품을 쓰는 작가들로부터 멀리 떨
으로 어떤 연속성이 느껴지는데요, 상대적으로 그 개성과 흐
어져서 혼자 고군분투하는 편이지요. 예를 들어 ‘삶’이란 말은
름은 우리 시단에서 없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한 당대적 유
1970년대 이전에는 잘 쓰이지 않던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행이나 첨단에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세계를 보였다
널리 유행해 너도 나도 그걸 쓰니까 그것에 대한 거부반응으
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강한 개성이 아니요, 그렇다고 세태적
로 한동안 시에 ‘삶’이란 말을 안 썼어요. 세상이 굴러가는 방
흐름에 반응하지도 않은, 강바닥을 소리 없이 흐르는 물줄기
향대로 굴러가고 싶지 않았다고 할까요.
같은 그런 세계를 형성했다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10 + 11
시인의 육성을 듣다 신중신 시인 편 박덕규
한편으로 동서고금의 문학작품을 많이 읽기로 소문난 분입니
쓴 것이 개인적으로 하나의 도약이었습니다. 여행과 관련한
다. 독서일기라 할 수 있는 책도 몇 권 내셨고요. 또한 여행을
시도 여러 편 있는데, 인도를 다녀와 쓴 「갠지스 강의 추억」
많이 다니시고 그 체험을 인상깊은 시로 남기기도 하셨지요.
같은 시들이 기억에 남네요. 그리고 국내에서라면 ‘임진강 시 편’들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듭니다. 이런 시들은 현장
신 책을 많이 읽었고 지금도 많이 읽는 편입니다. 새 책도
을 보지 않으면 쓰기가 어려워요.
읽지만 전에 읽은 것을 또 읽기도 합니다. 김동리, 황순원 소 설을 최근 몇 번을 다시 읽으며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히 보고
박 선생님의 시는 변화가 심하지 않고 일관된 흐름으로 지
있습니다. 내가 읽은 소설 500편을 어떤 내용인지 알기 쉽게
속되는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살아가는 동안 각 시대
감상문 형식으로 써서 책을 낸 적도 있지요. 제가 혼자 동시대
마다 특별히 관심을 두는 대상이 있기는 할 텐데요.
의 어떤 부류에 속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간 것도 어쩌면 다독을 한 덕분인지도 모르겠네요. 여행은 사실
신 나는 소재의 다양성을 중요시합니다. 내 시의 표현 기법
경제적인 능력과 관련이 있어서 많이 다닐 수 있는 형편은 못
과 시각적 특성은 각 시편들이 비슷하게 가더라도 소재는 시
되지요. 예전에 문예진흥원에서 지원하는 해외 작가파견 프
간이 지나감에 따라 계속 달라졌어요. 1972년도에 『고전과 생
로그램에 선정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대상지가 러시아였습
모래의 고뇌』라는 첫 시집을 내고 30대 초반 열정이 넘칠 때
니다. 모스크바, 생페테르부르크 등에서 하바로스크까지. 정
5년 동안 쓴 시들을 모아 낸 것이 두 번째 시집인 『투창』입니
말 열심히 취재했습니다. 그 여행을 바탕으로 작품을 써야 했
다. 이것이 내 시집들 중 우리 사회상에 대해서 가장 집중적으
는데 그게 시로 잘 풀리지 않더군요. 연해주를 거쳐 시베리아
로 쓰인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극적인 시대상황을 서정
대평원으로 거주지를 옮겨간 고려인들의 도저한 유민사는 시
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형기 등 당대 평자들에게 평가
로 담기가 어려웠어요. 제가 소설에 손을 댄 이유도 바로 거기
도 좀 받았지요. 1980년대는 1970년대와 비교해서 상대적으
에 있습니다. 저는 러시아에서 돌아와 고려인들의 이주사를
로 조용하게 갔다고 할까. 『낮은 목소리』, 『바이칼 호에 와서』
소설로 썼지요. 그것이 전3권의 『까리아인』입니다. 시는 짧은
로 이어지다가 1990년대 『카프카의 집』에서부터 기교를 중
호흡과 집중이 있어야 하는 반면, 소설은 긴 호흡과 치밀한 구
시하기 시작합니다. 내 시가 조금 달라지는 시기였지요. 관념
상이 필요하지요. 저는 평생 시만 써왔는데, 이 『까리아인』을
을 어떻게 서정적으로 표현할까 고민하는 때로 이어졌어요.
2014 + Spring
았을 작품들을 몇 개 남깁니다. 그런 것들을 볼 때 나는 소설 은 안 쓰는 것이 맞다 봐요. 나는 소설보다 수필을 많이 써 왔 습니다. 360편 정도. 전업 시인으로 생활하다 보니까, 자연히 연재도 많이 하게 되고 또 산문을 쓰는 것에도 즐거움을 느끼 게 되었지요. 그동안 시, 소설, 수필, 아동문학, 전기 등 문학 전 장르에 걸쳐 많은 글을 썼는데, 그것에 대해 자부심까진 아 니지만 스스로는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 오늘 인터뷰하는 이곳은 조병화 선생의 혜화동 자택입
니다. 조병화 선생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떠올려보지요. 신 나는 조병화 선생을 늦게 안 편이지요. 늦게 알았지만 조
병화 선생이 나를 참 좋게 생각해 주셨어요. 아까도 말씀드렸 박 선생님 삶에서 종교도 빼놓을 수 없을 텐데요. 1995년
지만 삼중당에 있을 때, 선생님의 시집 『때로 때때로』출판 계
선생님과 함께 인도 답사를 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캘커타에
약 차 뵈었어요. 해설을 이성부 시인이 쓰고 내가 연보를 작성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죽음을 기다리는 집’이 있는데, 거기
했는데, 내가 자세하게 연보를 작성한 것을 마음에 들어하셨
갔을 때 선생님께서 테레사 수녀의 발에 입을 맞추던 일이 생
어요. 그때부터 친근하게 잘 대해주셨지요. 한번은 정진규 시
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어요.
인이 파이프를 물고 있기에 그걸 나도 피워보자 하고 뺏어 물 었더니, 단상에 계시던 조병화 선생이 절 보시고 ‘파이프 물고
신 그랬지요, 존경의 뜻으로. 저는 카톨릭에 대한 글도 많이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언제 한번 경희
썼어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이하여 가톨릭 성인 103위
대 연구실로 오라고 하셔서 가보니까 선물로 받은 파이프를
의 전기를 책으로 낸 적도 있습니다.
제게 주셨지요. 참 인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박 앞으로의 계획과 하시고 싶은 일을 말씀해 주시지요.
박 선생님, 오랫동안 인터뷰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앞
으로도 건강하셔서 오랫동안 좋은 시들을 많이 써 주시고, 좋 신 시집은 내가 이번 봄에 두세 편을 더 보태서 내고 싶습
니다만, 6개월 동안 고민하는데도 그 두세 편이 잘 안 써지네
아하시는 여행과 독서도 많이 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요. 그리고 곧 2월 말에 고향 거창의 후원으로 집필한 동화책 이 나올 것입니다.
신 감사합니다.
박 소설을 집필하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신 글쎄요, 나이가 많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어느 문호도 나
이 일흔 넘어서 좋은 작품을 쓰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빼어난 작품으로만 남을 수도 있었던 작가들이 말년에 안 썼으면 좋
박덕규 시인ㆍ소설가ㆍ문학평론가. 1958년 경북 안동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0년 『시운동』에 시 「비 오는 날」발표, 등단. 1982년 『중앙일보』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 시집 『꿈꾸는 보초』, 소설집 『포구에서 온 편지』, 평론집 『사랑을 노래하라』 등 간행. 편운문학상 수상. 현재 단국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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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편운재 나무를 생각하며 김유신
편운재 나무를 생각하며 _김 유 신
1986년 4월 5일 조병화문학관 자귀나무기념식수를 하며
편운 조병화 선생님은 정말로 꽃과 나무를 사랑하셨다. 꽁
3시가 되었을까 요란한 전화벨소리로 잠을 깨우시더니 “유신
꽁 얼은 동장군을 비집고 이른 봄을 알리는 청지기와 같은 목
아 너 이놈아! 우죽을 말끔히 치우지도 않고 그따위를 일이라
련꽃이나 살구나무 매화꽃, 라일락, 개나리, 영산홍같이 화사
고 하였느냐” 불호령으로 나의 변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한 꽃들을 사랑하셨다.
버리셨다. 참으로 어안이 벙벙하였다. 어둠이 내린 늦저녁까
선생님은 편운재 나무를 자연 그대로 두고자 하셨다. 가지
지 일을 하였으나 일당으로 시키는 일꾼들에게 어쩌라는 것
에 전지가 필요한 나무에도 솎아내야 할 칼과 톱질을 몹시 싫
인지, 곧 나도 전화를 걸어 “선생님, 참나무 베어내는 도급이
어하셨다. 그런 연유로 고향에서 시를 쓰고 꽃과 나무를 가꾸
아닌 것을 어쩌란 말씀 인가요?” 하는 내말을 다 듣기도 전에
며 살아가는 나에게 편운재의 전반적인 나무에 대해 여러 가
뚝 끊어 버리시고 만 일이라든가, 이렇게 나는 때때로 날씨
지 부탁이 많으셨지만 과감하게 나무를 손보려면 선생님을
로 비유한다면 기후 변화가 많은 사랑을 선생님께 받아왔다.
설득하는데 많은 애를 먹게 되고 긴 설명이 필요하였다. 편운
송전호수가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본채 하얀 건물 옆을 비
재에 심어진 나무들은 나와는 일일이 사연이 깊다.
껴 선생님의 제자에게 설계와 시공까지 맡겨 집필실을 짓다
편운재는 문화예술의 고장인 안성의 큰 자랑이다. 세모에
가 그 제자가 도망쳐 버리는 속앓이 깊은 사연 속에 새 건물
가족들과 찾는다든가 봄부터 찾게 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을 우여곡절 끝에 지으시고 언젠가 이른 새벽에 전화로 담쟁
것은 “살은 죽으면 썩는다”는 뜻의 선생님 어머니의 어록을
이를 구하여 올려달라는 말씀에 선생님께서 유럽식 멋을 내
흰 대리석 벽에 새겨 넣은 하얀 건물이다. 옛날에는 뒷산에 난
기 위해서 그러시는구나 싶어 “담쟁이보다 능소화도 좋습니
초가 많이 자생하였다 하여 “난실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마을
다.” 하였더니 “아 글쎄 담쟁이로 올려달라고 하는데 말이 많
입구에 “꿈”이라는 삼각 깃발이 휘날리는 것이 멀리에서도 바
다” 시며 짜증을 내시었다. 내 입장으로는 좋은 나무를 심어드
라보이는 편운재. 그 하얀 집은 내게는 너무나 인상 깊어 지금
리고 싶은 마음에 벽에 담쟁이와 능소화를 함께 올려 드렸더
까지도 늘 꿈의 둥지와 같이 떠오른다.
니 나중에 어느 여성잡지에 능소화 꽃이 핀 사진을 보시고 담
편운재 본채인 하얀 집은 외국여행을 많이 하신 선생님의 안목으로 집안 구조가 특수하게 꾸며진 아름다운 집이고 그
쟁이보다 더 좋은 점을 비로소 느끼시며 “유신아 너의 능소화 작품이 최고다” 며 좋아 하시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서쪽 벽 가까이 노송이 있다. 아마 어머님 시대 이전부터 자랐
선생님은 다혈질적으로 호령도 하시지만 속내는 제자이거
을 듯싶은 노송나무 곁에는 큰 참나무가 있는데 그 참나무로
나 고향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보다 마음이 약하시고 사랑이
인하여 소나무가 고사 할 지경이라서 선생님을 우여곡절 끝
많으신 분이었다. 내게는 아마 고향 한참 후배라 때로는 이놈
에 설득하여 참나무를 베어내기로 결정하였다. 지금처럼 장
아 저놈아 말씀도 하시었지만 그러면서도 편운재에 나무 심
비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서 일꾼들을 데리고 높은 참나무
을 일이며 고향의 이런저런 이야기하시기를 좋아 하셨다. 혜
에 올라가 톱으로 어렵사리 늦저녁까지 베어내었다. 허나 주
화동 선생님사무실을 자주 찾아다닐 무렵에 혜화동 골목에
인이 없는 현장에는 오해가 뒤 따르는지라 다음다음날 새벽
유명하다는 칼국수를 사주시며 “야 ! 내가 고향 유신이라서
2014 + Spring
1986년 4월 5일 편운재에서
1986년 한국시인협회 야유회에서
칼국수 사는 거여” 라고 하셨다. 고향 후배라서 칼국수라도
욕심을 내시기에 선생님 그림 값이 비싸지만 저도 오랫동안
사 주시는구나하는 고향 사랑을 느끼며 이것저것 서운한 마
땀 흘려 기른 나무이니 그림 한 점 주시면 안 되겠느냐는 제안
음을 느끼다가도 그래도 나는 선생님께 칼국수 대접을 받은
에 흔쾌히 “해일”이라는 서귀포 앞 섬 배경에 해일이 몰려오
고향 후배임을 자위한 적도 있다.
는 전시회에 전시하셨던 유화를 주셨다. 내 호주머니 사정으
이어령 문화관광장관 무렵에 지원을 받아 편운문학관 건물
로는 도저히 구입 할 수가 없었는데 나무와의 거래로 소장을
을 세우실 때, 편운문학상을 받은 수상자들에게 기념식수를
하게 되었다. 그런 나를 아시고 시화집이며, 구정 때에는 꼭
하기를 권하시고 나에게 무엇을 심었으면 좋겠느냐고 상의
안성 편운재에서 구정을 보내시는 선생님께 세배를 가면 그
하라고 말씀하셨다. 편운문학상 수상자 시인들은 의례히 유
림을 그려 주시거나 세모의 휘호를 허허 즐거운 웃음을 지으
신에게 부탁하라는 말씀으로 기념식수는 모두 내게 부탁하여
시며 써 주시곤 하셨다.
심게 되었다. 귀한 채집목, 소나무, 홍산사, 모과, 고려영산홍
한 때 정책상으로 이미 오래전에 지어진 편운재에도, 고향
등등 고루 화사한 꽃을 보시며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기 위하
에 다시 터 잡으신 나의 스승이신 혜산 박두진 선생님의 허름
여 신경 써 가며 심었으나 뒷산이 높아서 그런지 비가 내리면
한 집필실에도 별장세라는 거금을 내라는 황당한 일이 있었
문학관 건물 뜰에는 건수가 흘러서 나무들이 뿌리를 잘 내리
다. 나는 발 벗고 나서서 관청이며 여론몰이로 이리 저리 뛰
지 못하였다. 선생님 돌아가신 후에 며느님과 잔디 뜰도 비탈
어다니며 안성은 문화 예술의 고장이니 고향 안성을 빛나게
진 지면을 평면으로 넓게 내리고 보령 각돌로 쌓고 허영자 선
하시는 두 분의 큰 어른께 별장 아닌 집필실로 면세의 선례를
생님 기념식수인 소나무도 다시 옮겨 심었다. 편운재 본채 앞
남기도록 하였다. 그 후로 안성에 정착하는 예술인들에게는
을 영산홍 군락지로 하였고 오르는 계단 등 선생님 생전에 못
집필실 작업실로 많은 혜택이 이어져 지금까지 예술인들 정
한 부분을 과감하게 손을 보았다.
착에 특혜를 주어 안성이 예술의 고장으로 거듭 나게 되었다.
나는 조병화 선생님 시를 몹시 좋아한다. 이해하기 쉽도록
선생님께서 마지막 입원하시기 직전 편운재에 내려오신다
일상생활 철학이 있는 시편 마다 자연에 대한 관찰이 깊이 담
는 전화 말씀에 대기 하고 있던 나를 데리고 앞서가신 어머님
겨져 있어서이다. 선생님의 그림 역시 시인의 섬세한 시상이
과 사모님의 묘소에서 “내가 못 할 일 많았소.” 라며 성묘를 끝
아니면 그릴 수가 없는 표표함이 담겨진 화풍을 나는 또 좋
내시고 집필실로 돌아서시며 뒤따르는 내게 “그동안 내게 서
아 한다.
운했던일이 많았지? 다 풀게나.” 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안성 편운재 앞뜰에서 내려다보이는 미루나무에 까치집, 안개 속의 포플러 가로수, 송전호수에 내린 노을, 구름, 산모
후에 곧 병원에 입원하시고 고향 안성에서 마지막 선생님의 부음을 접하였다.
롱이 길, 뒷산에서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핀 들꽃들. 그 많은
“선생님, 그곳에서도 선생님의 이상향인 꿈의 깃발을 올리
선생님의 그림 작품 중에서 편운재 앞 전경이 내게 더 인상
고 계시겠지요. 아름다운 꽃이 피고 진귀한 나무가 우거지고
이 깊은 것은 나 역시 고향이 아름답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이름 모를 새 높이 날으는 그 하늘 높이.”
아버지의 혈통으로 봐서 공예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소질이 없어 시를 택한 나로서는 조병화 선생님 그림을 유난 히 좋아 했다. 한 번은 우리 청류재 행사 때에 오시더니 나무
김유신 시인. 1944년 안성출생. 1975년 『현대시학』에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 데 뷔. 시집 『봄의 층계』외 9권 출간. 1994년 경기도문화상, 경기도문학대상, 안성 문화상 등을 수상. 안성예총화장 한국문협 윤리위원, 펜클럽이사, 자문위원 등 을 역임. 현 청류재문학관(문인자료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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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론 공존의 시학 조영숙
_조 영 숙
사랑의 시인, 고독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조병화 시인은
천형처럼 안고 살아간다. 천형인 고독은 ‘일상성’, ‘지속성’, ‘
그의 시작을 통해 인간 조건으로서 고독과 허무에 대한 탐색
반복성’을 띠기에 그 어떤 존재도 살아 있는 한 그것에서 벗어
을 지속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고독은 어디에서 오는가? 매
날 도리가 없다. 그러기에 조병화 시인은 고독을 숙명처럼 받
순간 타자와 함께 존재하면서도 인간은 왜 완전히 혼자라는
아들임으로써 고독과 친화하는 세계를 보여 준다. 평생을 동
생각에 끊임없이 사로잡혀야 하는가 하는 현존재의 문제를
반하는 고독을 우주의 비밀, 우주의 원리로서 터득하여 고독
시인은 시 작업을 통해 스스로에게 또는 독자에게 던진다. 조
을 통한 견고한 사상의 집을 짓기에 이른다.
병화 시에서 고독은 시간성과 함께 한다. 반복되는 일상을 통 해 세월과 함께 지속되는 것이기에 누구나 단독자로서 고독
(가) 겨울 혜화동은/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 간다 //하늘
이라는 숙명을 숨 쉬듯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존재
에 높이 솟은 가지 가지 /플라타나스는 굵은 세월 //떠
자체가 고독이기에 고독은 로빈슨 크루소의 경우처럼 격리되
나는 거 /머무는 거 //겨울 혜화동은 하얀 눈 속에서 /
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의식 내용물을 타인에게 전
마냥 깊이, 생각 속으로 가라앉아간다 //아, 바람에 매달
달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다. 고독은 존재자들이
린 열매 /하나. — 「겨울 혜화동」전문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존재조건의 본질을 고독으 로 규정함으로써 조병화의 시에 드러난 고독은 운명애적 양 상을 띠고 있다. 누구나 모두가 놓여날 수 없는 외로움이기에
(나) 나의 가슴은 첩첩이 쌓인 /눈보라 속의 깊은 밀림이
고독은 천벌과도 같으며 운명의 표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올시다.//밀림 속에 갇혀서 나올 줄을 모르는 /작은 소리
단독자로 태어나 단독자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생의 보편 적 원리에 대한 뼈저린 자각이 시 곳곳에 노정되어 있다. 존재 의 뿌리를 뒤흔드는 죽음에 대한 불안, 공포감을 시적 자아는
//멀리 당신을 부르는 냉랭한 소리 /가슴 벽에 부딪쳐 되 돌아 오는 소리 — 「나의 가슴은」부분
한시도 놓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 의식 속에서 삶과 죽음 은 한 몸이다. 삶은 죽음을 품고 죽음은 삶을 품는 것으로 인
(다) 밤이 무서워 술을 마신다 /어둠이 무서워 술을 마신
식되므로 시적 자아는 일회적 삶을 살 뿐이다. 프로이트가 그
다 /혼자가 무서워 술을 마신다 //밤을 혼자 남는다는 건
랬듯이 시인은 모든 인간 또는 모든 사물현상의 궁극적 의미
천벌이다 /밤을 혼자 새운다는 건 천벌이다 /밤을 같이하
를 죽음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본능으로 귀결시킨다. 그럼
는 이 없는 건 천벌이다 //깊은 밤 /캄캄이 쌓인 이 혼자
에도 살아 있는 존거로 작용하는 갈망과 기다림을 노래한 시
— 「밤이 무서워」부분
편들도 고독과 죽음의 문제와 교호 작용을 하는 것으로 나타 난다. 시간성 속에서 유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기본
위 시편들에서 눈과 밤은 고독이라는 상황을 감각화하는
적 시튜아시옹으로서 고독과 죽음의식 그리고 그것이 필연적
시어들로 등장한다. 한겨울에 첩첩이 쌓여 가는 눈은 존재자
으로 몰고 오는 허무의 정서가 시 곳곳에서 단독자의 의식으
가 머물러 있는 처소를 밖의 세계로부터 차단시키는 구실을
로 표출되고 있다. 조병화 시에 나타난 모든 존재자는 그것이
한다. 깊이 가라앉는 혜화동이나 깊은 밀림 등과 같은 표현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든 벌레의 모습을 하고 있든 혼자라는
서 알 수 있듯이 눈은 외로움의 두께, 외로움의 깊이를 감각
존재 양식을 띠고 있다. 단독자 또는 혼자로서 존재는 고독을
적으로 표상하고 있다. 다른 존재와의 연대를 상실한 채 고립
2014 + Spring
된 상황 속에서 눈을 맞으며 바람에 매달려 있는 ‘열매 하나’
위 시에는 일상을 통한 존재론적 성찰이 담겨 있다. 특별히
는 인간의 조건을 투영하고 있다. 복수성을 거부하는 단자로
새로운 사건의 전환이 없는 한 대개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세
서의 홀로서기. 홀로서기의 사건, 이것은 현재이다. 현재는 자
월을 보내게 된다. 모두가 인정하는 객관적 사실로서 인생이
기에서 출발한다. ‘바람에 매달린 열매 하나’는 단독자로서 자
일상을 통해 왕복과 반복을 거듭한다. 삶은 한 번 태어나면 죽
기에서 출발하는 존재자의 존재 양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첩
어야 하고 삶을 유지하려면 밥을 먹어야 하고 흔히 병이 들어
첩이 쌓인 눈보라 속의 ‘깊은 밀림’ 또한 존재자의 고독한 존
아프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싸우기도 하고 서로
재 양식을 드러낸다. 나를 부르는 타자의 목소리 또는 타자를
돕기도 하는 누구나 다 같이 시인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로서
부르는 나의 목소리는 가슴 벽에 부딪혀 냉랭히 되돌아갈 뿐
의 일상이 누구에게나 전개되는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절대적으로 혼자라는 밀림 속에서 존재는 현존을 확인할 수
서도 “가쁜 건/ 외로운 세월”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시인은 외
밖에 없다. 시 (다)에서처럼 ‘밤’은 절대고독에 가위눌린 시적
로움과의 긴장관계를 잃지 않는다.
자아의 자의식을 투영하는 시어다. 어둠은 단독자라는 존재
지속성과 반복성, 일상성으로서의 고독에서 자유로울 수
의 처지를 절감하게 하는 정황으로 제시된다. 깊은 어둠에 겹
있는 인간은 없다. 시간성과 함께 하는 숙명적인 외로움 앞에
겹이 쌓인 단독자는 어둠에 대한 공포, 천벌과도 같은 고독에
서 예외적인 존재는 없다. ‘저기도’, ‘여기도’ 외로운 사람. 도
대한 공포를 감추지 못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천형
처에 외로운 사람들이 널려 있어 외로운 일상을 반복하며 살
과도 같은 고독에 대한 두려움을 망각하기 위해 시적 자아는
아간다. 누구나 모두가 외로운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존
술을 마신다. 그러나 술은 감각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켜 고독
재자와 존재 작업 사이의 뗄 수 없는 통합으로서의 고독이며,
에 대한 공포에서 잠시 놓여나게 할 뿐 근본적으로 인간을 구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외로움이 아니라 존재 그 자
원하지는 못한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억압에서 벗어날 수
체인 외로움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일상
있는 길은 우선은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 실체를 있는
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외로움의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보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화자는 고독을 인간이기 때문에
편적인 삶의 원리로서 작용하는 고독의 실체를 인정하고 받
짊어져야 하는 매우 뼈저린 삶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
아들이면서 시적 자아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
임으로써 고독을 승화시키는 길로 나아간다. 고독을 보편적
다. 고독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기도 하고 생각의 깊이를 얻어
인 인간 조건 중의 하나로 수용함으로써 실존의 불안에서 벗
사상의 집을 짓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어나거나 또는 그것과 친화하는 세계로 나아간다. 눈 내리는 길에 /산 도는 길에 /읍내 가는 길에 /장길에 / 딸이 보내준 파이플 피워 물고/혜화동 로타리 8시 20분/
들길에 /인기척 없는 길에 /먼, 먼 너의 창가에 /방에 /방
통근 버스를 집어 타고 /서울을 동으로 빠지면 /고개 넘
안에 //생각 속에서 /송년은 /고독하다 //나무는 제 자리
어서 /눈부신 햇살 /하루가 시작된다 //나의 인생은 나의
자리 /한 치, 두 치 /서너 치 /키우고 떨어져 내린 /잎새들
작품 /하루도 쉬지 않고 살아가지만 /매일을 왕복하는 /이
을 생각하며 /먼 산 너머 /봄소식
반복 /반복하면서 실로 가쁜 건 /외로운 세월이다 //저기
— 「깊은 혼자 속에서」전문
도 외로운 사람 /저기도 외로운 사람 /여기도 외로운 사람 — 「딸이 보내준 파이프를 피워 물고」부분
위 시에서 표현된 길은 시적 자아의 내면을 향해 나 있다. 16 + 17
조병화론 공존의 시학 조영숙
눈 내리는 길이나 산 또는 길이나 읍내 가는 길이나 장길이나
노래한다. 비어 있기도 하고 가득 차 있기도 한 고독이라는 초
들길이나 방 안으로, 자의식의 방으로 이른다. 자신에게로 돌
소를 지키기 위해 시적 자아는 사색을 한다. 견고한 고독 속에
아가는 길은 적막하나 깊은 깨달음의 흔적이 배어 있다. 자신
서 인간과 자연을 이해하고 그 근본을 노래하는 시인의 임무
을 괴롭히는 자의식이 아니라 정신의 깊이를 가다듬는, 자기
를 다하기 위하여 깊이 사색하는 것이다.
자신을 키워 주는 고독이 형상화 되어 있다. 혼자이기에 생각 은 깊고 송년이라는 주변 정황은 고요하다. 외부 세계와 차단
지구에서 /세상에서 //온 인간 천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된 단독자의 불안감이나 공포감은 정신의 성숙을 통해 차분
면 //인간이어서 /사람이어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받아
히 가라앉았거나 무화되어 있다. 적막 속에서 나무는 봄소식
야 할 일이라면 //지구에서 /세상에서 //인간이여 /쓸쓸한
을 키운다. 시인이 표현한 바대로 순수한 고독을 당해 자기 생
자여 //혼자서 있을 것을 /혼자서 있을 것을 — 「공존의 이유・7」전문
명과 같이 있게 되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고독은 나의 양식/나의 방 /나의 우주 /나의 초원 //벌레 소리 그리워 /등을 켠다.
인간의 연대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철학 의 방식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 우리의 본질적인 인간성이라
— 「고독」부분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다른 모 든 사람들 속에서도 똑같이 현존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구
나의 사상은/고독한 산장/바람 부는 곳에서도 /삼십 리 밖
의 사회. 문화적 환경이 대격변기에 있고 전통적인 제도와 행
이다 //벌레가 울면 가을이고 /산이 열리면 봄이다 //창을
동양식이 붕괴되는 시기에 개체들은 세계와의 불화감에 휩싸
열면 오로지 한결 같은 하늘 /가득한 /내일 /계단을 찾아
여 단절감, 혼자라는 인식을 더 강하게 갖기 마련이다. 그럴
서 /마음은 바쁘다 //구름이 지나는 자리 /마냥 허적한 /
경우에 인간은 역사와 제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원하기 마
충만 /초소를 지키기 위하여 사색을 한다
련이다. 위의 시편에서 나오는 표현대로 지구에서 세상에서
— 「편운제」부분
인간이어서 사람이어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혼자라는 것밖에 없는 상황에서 간절한 게 있다면 인간의 연대성, 서로의 공통
고독은 시적 자아의 ‘양식’, ‘방’, ‘우주’의 의미를 지닌다. 존
적 인간성에 대한 인식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
재원리인 고독이 자의식의 차원에서 우주의 원리로 의미가
에 공존의 이유가 놓여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시적 화자를 통해
확산된다. 절대 고독 속에 놓여 있던 화자는 고독을 통해 생의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기에 혼자서 죽는 존재이기에 연대해야
이치를 깨닫고 자연과 교감하는 세계로 나아간다. 모든 존재
함을, 공존해야 함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황폐한 인간들의
는 고독하다는 대전제 아래 인간과 자연이 화해를 하며 만나
고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홀로이면서도 함께 하는 길
게 된다. 화자는 ‘벌레 소리 그리워 등을 켜는’ 행위를 통해 자
이라고 시인은 「공존의 이유」 연작 시편 도처에서 역설한다. ‘
연과의 생명적 교감을 시도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교감하
함께’라는 의식을 통한 도덕적 의무를 주장하고 있는 이 연작
게 하는 매개체는 생명 가진 존재의 고독이다. 모든 만물이 고
시편들은 전언적인 성격이 강해 감정의 과잉과 직설화법적인
독하기에 오히려 일체감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단독자로
표현들을 자주 내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감각화, 형상화로
서 생명의 본성에 대한 이해는 조병화 시의 철학적, 사상적 토
획득되는 시성과 철학성이 연대하기는 어렵다는 아이러니를
대가 된다. 고독은 감성의 차원을 넘어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
드러내는 부분이다.
는 사상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시적 화자는 고독으로 깊은 산 장을 짓는다. 견고한 고독의 처소에 머물러 “벌레가 울면 가 을”, “산이 열리면 봄”이라는 자연의 시간을 체감하기도 한다.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구별되지 않는 합일과 충만을 2014 + Spring
조영숙 시인.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어국문과 졸업. 경희대 문학박사. 2009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저서로 『조병화 시 연구』, 시집 『백년전쟁』 등이 있음. 가천 대 명예교수.
편운문학상 시터 제 13회 시부문 본상 우이시회
시의 선언 시는 소중한 삶의 노래이며, 자연의 신비에 대한 찬미이며, 또한 우리가 꿈꾸는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표상이다.
시는 인간의 감성과 지성, 예지와 의지가 빚어낸 영롱한 언어의 결정체- 맑은 영혼의 집이다.
시는 우리들의 위안이며, 구원이며, 친구며, 스승이다.
보라, 시가 가는 곳에 세상이 얼마나 밝고 따스해지는가? 거친 마음은 부드럽게 순화되고, 삭막한 거리는 문득 향훈에 젖는다.
시에 대한 새로운 모색과 끊임없는 연찬으로 시의 지평을 넓히고 그 심도를 깊이는 일은 시인들이 맡아야 할 몫이며 또한 사명이다.
사단법인 우리시진흥회에서는 오늘의 한국시를 반성하며 시의 위의를 지키고 한국시의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시의 길’을 설정하고 건강한 시운동을 선언한다.
첫째, 시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긍정적인 글이기를 지향한다. 둘째, 시가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예술이기를 희구한다. 셋째, 고매한 시 정신을 향수・계발토록 한다. 넷째,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멋과 운치의 시를 소중히 한다. 다섯째, 감동성 회복을 위한 다양한 모색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끝으로, 이 혼탁한 시대에 맑은 시인으로 살아감을 자랑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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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제 13회 시부문 본상 우이시회
우이동 시인들의 술 술[酒]은 술(術)인가 보다 그 유혹이 시 같고 그 시가 술(術) 같더니 살아서 술 한잔 입에 대지 않던 사람도 죽어서는 제상(祭床)에 술이 오른다
이생진의 술은 빈 잔 속에 바다만 채우고 있는 술 임보의 술은 풍류가락 장단에 저절로 신명하는 술
* 이생진·채희문·홍해리·임보의 순서로 짜 놓은 이
홍해리의 술은 난초잎이 덩더꿍 황새춤을 추는 술
합작시의 주제는 술이다. 우리 <우이동 시인들>의 술이다.
채희문의 술은 받는 잔마다 감사기도로 넘치는 술
우리 네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만난다. 우리 모임의 좌상 인 이생진 시인의 술은 병아리 오줌만큼이 정량이다. 술과 술자리는 즐거워하면서도 자신의 주량을 고수한다. 그러나
술술술술 우이동은 춤을 추는 술바단가 만날 때면 한잔한잔 꿈을 꾸는 술풍륜가 한잔 술에 북이 울어 신명나는 술춤인가 시도 기도 삶도 기도 절절한 술기돈가 우리들의 우이동은 시나란가 술나란가
기분이 날 때는 막걸리 한 되는 거뜬히 비우는 건강 제일주 의형이다. 채희문 시인의 술은 끝이 없다. 독일산 철제 위장 을 갖고 있는지 아무리 마셔도 끄떡하지 않는다. 다음날 새 벽이면 비 온 뒤의 보리밭처럼 싱싱하니 일어나 산책길에 나선다. 참으로 놀랍고 부럽기 짝이 없다. 그는 술을 아끼 고 인정을 아끼면서 매일 마셔대는 계속적·연속적 음주 신봉형이다. 임보 시인의 술은 노래요 춤이다. 그대로 풍류 요 시이다. 북이 울고 징이 운다.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 만이면서 혼자서도 꼭 반주를 즐기는 유유자적형이다. 홍
시수헌(詩壽軒) 다락방에 모인 시인들 세상에 얽힌 한(恨)들 오죽하랴만 온종일 말술에도 끄떡도 않고 투정도 주정도 다 뭉갠 채 인수봉(仁壽峰) 볼기 치며 웃고만 가네.
해리는 안 마실 때는 안 마시다가도 일단 발동이 걸리면 폭 음·난음하며 술을 즐기는 제멋대로형이다. 술은 가장 정 교하고 순수한 음식으로 우리 마음의 영양제요, 고독한 우 리들의 가슴에 모닥불을 피워 훈훈히 데워 주는 국이요 밥 이다. 이제 우이동의 술과 술자리는 마시는 격조·품격· 스타일·주량을 따져 마시면서 생활을 지키고 몸도 가누 는 분수 있는 애주가의 투명한 자리가 되어야 하리라. 술 마 신 다음날 아침의 담백한 북어국이나 된장국·콩나물국이 나 얼큰한 육개장국물로 주독을 풀어 속을 다스리고 저녁 녘 술시(戌時)가 되면 다시 한잔 술로 지상에 귀양 온 신선 이 되어 뽀얗게 살찐 인수봉의 볼기를 친다. 술이 먼저 우리 들을 안다. 우리들의 속을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들은 어쩔 수가 없다. 마실 수밖에.
2014 + Spring
우이동牛耳洞 귀를 닦으라 한다 산은 언어요 소리요 침묵이니 귀를 닦으라 한다.
洗耳泉 素貴泉 목을 적시고 道詵寺 仁壽峯 오르는 고개 방울새 오리나무 구름허릿바람,
우이동을 떠난다면, 난 소중한 것 다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전해, 길거리를 서성거리겠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더 생각나 젯상의 촛불처럼 울고 있겠지.
언제나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너를 좀 더 가까이 불러놓고 네 말문 열리기를 기다리다 지칠 바에야 내가 먼저 다가서서 말을 걸어볼꺼나.
백운대 바람소리 마음 비우고
* 이 합작시는 사전에 아무 약속 없이 5행 이내로 써 낸
세이천 약숫물로 귀를 씻었다
다음, 이생진, 임보, 채희문, 신갑선, 홍해리 순서로 짜 이
인수봉 새벽녘의 사내맛이야 동해바다 푸르른 파도나 알리 태평양 깊은 굴속 굴헝이 알리.
룬 것이다. <우이동 시인들> 동인지의 한 특징이기도 한 이 합작시는 25집까지 계속되었다. 5명의 동인 중 신갑선 시 인은 초기에 6집까지 참여하다 그만두고 이후 4명이서 25 집(1999)까지 이어오다, 『牛耳詩』를 만들면서 잠정적으로 쉬고 있다. 2007년 1월호부터 『牛耳詩』를 『우리詩』로 개 제하여 계속 발간되고 있다. 현재는 사단법인 우리詩진흥 회에서 월간 『우리詩』 를 발간하고 도서출판 <움>을 운영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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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제 13회 시부문 본상 우이시회
북한산 내가 오르고 싶은 곳은 북한산 그곳에 오르면 결국 하늘까지 가게 된다 북한산에서 하늘까지는 우리집에서 북한산까지보다 훨씬 가까운 길이니까, 거기 반평으로 하늘을 펼쳐놓고 한 두어 시간쯤 기다리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바위조차도 생명을 얻어 혜안이 트이고 막혔던 귀도 뚫리리. 마음이 가난한 자는 산의 말씀으로 살라 하고 나무의 말없음과 바위의 무거움 배우라 한다 맑은 물소리, 바람소리 배불리 먹으라 한다. 그리하여 나무가 되고 바위가되고 산이 되어 하늘을 이면 내게서도 물괴 바람소리가 날까 오늘도 문을 나서면 너를 올려다보고
* 이번 합작시는 사전에 제목과 순서를 정하여 먼저 쓴 것 을 이어받아 한 편의 작품으로 전개시킨 것으로 이생진, 신 갑선, 채희문, 홍해리, 임보의 순서로 이룬 것이다.
집에 들며 또 한번 바라보노니, 우이시회 1986년 북한산 밑 우이동 인근에 살고 있던 이생진, 임보, 신갑선,
산이여, 사랑이여, 북한산이여,
채희문, 홍해리 시인이 동인회 <우이동시인들> 결성. 1987년 동
우리들 혼을 푸는 크나큰 말씀,
는데, 그것이 <우이시회>의 효시가 됨. 1995년 월간시지 「우이시」
등이 휘도록 山川草木 지고 가는
인지 「우이동」 제1집을 간행하고 기념으로 시낭송회를 갖게 되었 를 발간. 2007년 1월 모임의 명칭을 <우리시회>로 바꾸고 잡지의 제호도 「우리시」로 개제. 2007년 4월 사단법인 <우리시진흥회>로
그대에게 아침 저녁 길을 물으며
정식인가 취득. 매달 마지막 토요일 <우리시낭송회>개최. 월간시
못난 詩人 다섯 시늉하며 따라가네.
주관. 편운문학상 수상.
2014 + Spring
지 「우리시」 발간. 매년 4월 삼각산 시화제, 10월 삼각산 단풍시제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Ⅰ 당신이 주신 눈물 다 쓰곤
당신이 주신 눈물 다 쓰곤
조병화
당신이 주신 눈물 다 쓰곤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이 주신 눈물 다 흘리곤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이 주신 눈물 다 말리곤 돌아가겠습니다 제 몸에서 당신이 주신 눈물, 그 흔적 말짱히 가시거든 돌아가겠습니다 구름을 보아도, 하늘을 보아도 노상 비켜서서 먼 산을 보아도 노을을 보아도 흐르는 개울, 나부끼는 풀바람을 보아도 작은 벌레, 찌 찌 눈을 보아도 혼자 나오는 눈물 당신이 주신 눈물 철없이 흘리는 눈물 죄송합니다 한 번도 짙은 내 말 써보지 못하고 한 번도 짙은 내 얼굴 가지지 못하고
당신이 가장 최근에 울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슬픈 영 화를 보셨습니까? 아니면 애정하던 이와 먼 이별을 하
한 번도 짙은 내 자리 세워보지 못하고
셨습니까? 남몰래 눈물을 훔치셨습니까? 아니면 시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나를 사는
원하리만큼 큰 울음을 터트리셨습니까? 생각해보면 “
나의 해와 달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라는 말처럼 무지(無知)
아직 남아 있는 눈물
가득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남자는, 아니 사람은 많이 울어야 합니다. 슬픈 일을 제대로 슬퍼할 줄 아는 사람
당신이 주신 눈물 다 쓰거든 가겠습니다
만이 기쁜 일들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
당신이 주신 눈물 다 흘리거든 가겠습니다
습니다. 조병화 시인은 눈물이 많았습니다. 꼭 겉으로
당신이 주신 눈물 다 마르거든 가겠습니다
는 아니더라도 고독에 쌓여 속으로 울어야 하는 날이
제 몸에서
많았던 그였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 눈물조차 어머
당신이 주신 눈물, 그 흔적
니가 주신 소중한 유산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수많
말짱히 가시거든 가겠습니다 당신 곁으로 -제21집 《어머니》에서
았던 울음을 이제 다 그치고 맑은 눈으로 어머니께 돌 아간 시인이 유독 그리운 요즘입니다.
박 준 1983년 서울 출생.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다. 제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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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수필 명동에서 만난 사람들
명동에서 만난 사람들
김광주ㆍ이봉구ㆍ박인환ㆍ이진섭 박기원ㆍ김수영ㆍ유 호ㆍ조영암 임긍재ㆍ이명온ㆍ이해랑ㆍ이인범 윤용하ㆍ한노단ㆍ김영주ㆍ이순재 박연희ㆍ최정희ㆍ박계주ㆍ안수길 이헌구ㆍ김광섭ㆍ양주동ㆍ이하윤 이무영ㆍ오영진ㆍ유치진ㆍ김광수 전봉초ㆍ김관수ㆍ박기준ㆍ김영주 김환기ㆍ도상봉ㆍ윤영자ㆍ김진수 최요안ㆍ박화목ㆍ장수철ㆍ서항석 변영로ㆍ장덕조ㆍ조지훈ㆍ천경자 이마동ㆍ이종우ㆍ오종식ㆍ오소백 조흔파ㆍ이순재
지금이나 옛날이나 나는 세상을 떠서 살아오는 것 같다. 가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이 그렇
장 심각하게 자기가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를 생각하면서도
게도 심각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생각함에 지나간 먼지들
끝판에 가선 언젠가는 버리고 떠날 이 세상을, 하면서 자기가
같기만 하다. 바람에 휩쓸려 간.
꿈꾸고 있는 또 다른 세상으로 머리를 돌리는 수가 많았다. 현 실과 꿈, 그것을 살아가면서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그 꿈을, 생 존의 등대처럼 밝히며 살아오곤 했다.
나는 긴 세월을 물리화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실험실을 잃고, 연구실을 잃어서 도저히 그 꿈, 물리화학의 길 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시작한 나의 시의 길. 그것
이렇게 나는 내가 살고 싶은 꿈을 더듬어 살아오는 편에 오
은 한마디로 꿈의 좌절이었다.
히려 인생의 비중이 컸기 때문에 현실을 단단히 밟고 살아오 면서도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착이 희미했었다. 때문에
이러한 꿈의 좌절로 인해서 쏟아져 나온 나의 상처진 정신
이렇게 세월을 많이 보낸 이러한 자리에서 내가 살아온 그 현
의 배설물들, 그 무수한 시들이 『버리고 싶은 유산(1949. 7)』,
실들을 기억하기엔 너무나 아리송한 것들이 많다.
『하루만의 위안(1950. 4)』, 『패각의 침실(1952. 8. 부산)』, 『인 간고도(1954. 3)』, 『사랑이 가기 전에(1955. 11)』, 이렇게 스
2014 + Spring
하고 있었다. 한 때 뒤늦게 생겼다 없어진 <포엠>이나 <은성> 이 비교적 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물론 공초 오상순 선 생이 진을 치고 있던 <청동> 다방도 있었고, 영화인들의 단골 이었던 <은지>다방도 있었고, 음악을 좋아하던 문인들이 모 이던 <돌체>다방도 있었다. 작고한 이진섭의 단골은 비교적 이 다방이었다. 명동시절 우리들은 초기엔 <모나리사>에 모였었다. 그러 1954년 윤고종, 조병화, 노천명, 이진섭, 조애실, 박계주
나 문인들이 모이는 곳은 영업이 안된다고 해서, 그곳에서 쫓 겨난 뒤엔 마침 그때 개업을 시작한 <동방문화살롱>으로 대
스로 스스로의 존재의 숙소를 만들며, 떠나며, 고독한 연대에
거 이동을 했다. 차를 마시지도, 팔아주지도 않기 때문에 장사
고독한 생존을 이어왔다.
가 안된다는 건 뻔한 노릇이었다. 돈없이 온종일 자리만 차지 하고 있으니까 미움을 받을 수밖에. 레지나 카운터에 앉아 있
이 무렵, 나의 정신의 위안처는 명동이었다. 다방이었다.
는 종업원들은 그렇게 온종일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있는 문
술집이었다. 생리적으로 마음 맞는 벗이었다. 그 밤들이었다.
인들을 <석고상>이라고 했다. 실로 석고상들은 슬펐다. 돈도
<라포엠>, <모나리사>, <동방문화살롱>, 이런 찻집 이름들이
없고, 원고료도 들어오지 않고, 그저 차를 사는 친구들을 기다
기억나며, <향원>, <나이야가라>, <뉴나이야가라>, <봉 소아>,
리고 있을 뿐이었다.
<블랙 스톤>, <카리레오> 이런 단골로 다니던 밥집, 술집, 바 (양주집)들이 기억나며, 무수한, 실로 무수한 작은 동동주집,
<동방문화살롱>,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차를 안
빈대떡집 들이 머리에 가득히 떠오른다. <은성>이라는 술집
마시고 온종일 앉아 있어도 마음이 편안했다. 문인들, 예술인
은 비교적 늦게 생긴 집이며, <명천옥>은 내가 잘 안 가던 술 집이었기 때문에 내가 언급할 곳은 못된다. 그때도 파들이 있었다. 그룹들이 있었다. 문인협회파, 자유 문인협회파, 평안도파, 함경도파, 경상도파, 호남파, 펜클럽파 이러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 친소관계를 가지고 그들이 끼리 끼리 모이는 다방, 술집들이 따로따로 분포되어 있었다. 문인협회파에 가까운 그룹들은 경상도파, 호남파, 경기도 충청도 문인들이었고, 자유문인협회파에 가까운 그룹들은 함 경도파, 평안도파, 펜클럽파 주로 이북 월남문인들이 많았다. 이러한 것들은 이데올로기보다는 개인 개인의 생리적인 것 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든다. 다방 <갈채>와 술집 <명천옥>은 문인협회파의 단골이었고, <모나리사>, <동방문화살롱>들은 자유문인협회파들의 단골 이었다. 이들의 술집은 일정한 곳이 없었고, 여러 곳에 산재 1955년 명동 밤거리에서, 좌로부터 최영해 정비석 조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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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수필 명동에서 만난 사람들
들을 위해서 개업을 한 곳이였으니까. 말하자면 문인, 예술인 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문화사업의 하나로 시작을 했다고 하 니까. 주인 김 사장은 2, 3층 빌딩의 주인이며 2층은 사무실 겸 사진보도의 제작실로 사용을 하고, 1층은 완전히 문인, 예술 인들을 위한 휴식공간인 그 다방이었다. 그러니까 다방은 완 전히 수입 계산을 떠난 봉사, 그 문화사업이라 했다. 참으로 많은 문인, 예술인들이 제 집 사랑방처럼 출입을 했다. 우선 나는 김광주씨(소설가, 당시 경향신문 문화부장)의
1955년 전국고교 백일장 심사위원들 좌로부터 이헌구, 모윤숙, 양주동,
1956년 명동에서 이봉구, 조병화, 천경자
명동가족의 한사람으로 매일 이곳에서 사는 냄새를 맡았었
인들에게 고급한 일본식당에서 근사하게 대접해 주곤 했다.
다. 이봉구(소설), 박인환(시인), 이진섭(방송작가), 박기원(
물론 돈은 서교장이 담당했다. 위에 열거한 명단에서 빠진 문
소설, 이진섭씨 부인), 김수영(시인), 유호(소설, 방송작가),
인, 예술가들도 많을 것이다. 거진 장안의 문인, 예술가, 그
조영암(시인), 임긍재(평론), 이명온(수필), 이해랑(연극, 예
리고 언론인들이 수시로 출입을 했었으니까. 오종식씨(당시
술원회원), 이인범(성악), 윤용하(작곡), 한노단(극작가), 김
경향신문 편집국장), 오소백씨(당시 어느 신문인가의 사회부
영주(삽화가), 이순재(삽화가), 이러한 김광주씨를 중심한 문
장), 조흔파(소설, 당시 경기여고 교사) 곰곰이 생각하면 끊임
인, 예술가들과, 박연희(소설, 예술원회원), 최정희(소설), 박
없이 이어져 나오는 이름들, 참으로 어지럽던 시절을 함꼐 생
계주(소설), 안수길(소설), 이헌구(평론), 김광섭(시인), 양주
존을 나누던 그리운 얼굴들이 아닌가.
동(시인, 학자), 이하윤(시인), 이무영(소설), 때때로 오영진( 극작가), 유치진(극작가), 그리고 김광수(첼로), 전봉초(첼로,
그 시절은 제대로 집필실 같은 걸 가지고 있었던 문인들이
예술원회원, 예총 회장), 김관수(연극), 박기준(평론, 외국문
거의 없었다. 때문에 다방이 집필실이요, 응접실이요, 원고와
학), 김영주(서양화), 김환기(서양화), 도상봉(서양화), 윤영
고료를 서로 교환하는 곳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이러한 광경
자(조각), 김진수(희곡), 최요안(방송작가), 박화목(시인), 장
이 벌어졌었다. 우리들의 보스였던 김광주씨는 거의 그 청탁
수철(시인), 서항석(희곡), 변영로(시인), 장덕조(소설), 조지
원고를 다방에서 집필을 했었다. 수필이고, 소설이고, 연재소
훈(시인), 천경자(동양화), 이마동(서양화), 이종우(서양화)
설이고, 할 것 없이. 김영주씨, 이순재씨도 소설의 삽화들을
실로 무수한 얼굴들이 안개 같은 기억을 뚫고 솟아오른다. 이
다방에서 그리곤 했다. 각자 각자 전화들도 집에 가지고 있지
마동 씨는 당시 보성고등학교 교감이어서 늘 서명원 교장과
못했던 시절이어서 이렇게 다방이나 술집은 모든 생활의 연
같이 토요일 저녁마다 나타나 우리들 싸구려 술을 마시는 문
락처 구실을 해주었었다.
2014 + Spring
그러니까 우리들 동방문화살롱을 중 심해서 명동대학촌을 출입하던 문인, 예 술인들은 요새말로 명동대학교 동방문 화살롱 캠퍼스의 인사들이었다. <갈채> 캠퍼스의 인사들, <명천옥> 캠 퍼스의 인사들, 그리고 기타 소수 다방 캠퍼스의 인사들, 대한민국의 문인, 예술 가 처놓고 이곳 명동대학촌을 출입 안한 인사들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문학청년시절을, 문 1956년 아서원에서 열린 『사랑이 가기전에』 출판기념회에서, 좌로부터 최영해, XXX, 한하운, 조병화
학장년시절을 보내면서, 인생의 깊은 철 학을, 문학을, 향기 높은 예술을 습득했
근방에 있었던 작은 술집, 큰 술집들이 거진 돈들이 달랑달
던 것이다. 벗들에 엉겨서, 생활에 엉겨서, 그 생존의 현장에
랑하는 문인, 예술가들로 우글거렸다. 그리고 그곳에 가득히
엉겨서. 지금 명동은 변했다. 상품의 거리로, 돈의 거리로, 살
차 있었던 대화들은 문학이요, 음악이요, 그림이요, 연극이요,
벌한 실존 그 경제의 거리로.
예술들이었다. 정치나, 경제, 잡스러운 세속적인 말들은 들은 일이 없었다. 다방이 그러했고, 술집이 그러했고, 말하자면 어 디나 문학과 예술의 세미나 장소 같았다. 이렇게 보면 그 시
이 글을 마침에, 실로 그리운 것들은 네 돈, 내 돈 할 것 없이 서로 엉겨서 술집에서 지내던 어제들이다.
절의 명동은 하나의 예술가 인생의 대학촌이었다. 실로 활기 찬 대학촌이었다.
1957년 명동시절 좌로부터 유호,조경희,조병화,김광주,이해랑,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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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를 추억한다 아버님의 은인들 조진형
아버님의 은인들 _조 진 형
김기림 시인
지난해 본지 가을호에 아버님에 대한 회고담을 싣고 나서
이 책에서 아버님은 300명이 넘는 지인들을 나열하셨고 편
저는 어떻게 아버님이 그처럼 후회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을
의상 다시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셨습니다. 김기림 씨와 그 주
까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아버님의 끈질긴 노력,
변, 김소운 씨와 그 주변, 김광주 씨와 그 주변, 조지훈 씨와 그
투철한 인생관, 근면하고 성실한 면모, 휴머니즘에 기초한 인
주변, 최영해 씨와 그 주변, 이해랑 씨와 그 주변, 모윤숙 씨와
간성, 타고난 천재성 등 아버님이 갖고 계신 장점이 많이 작용
그 주변, 낭만 시절과 그 주변, 행화촌 그리고 무교동 골목이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버님이 살아오신 주변
그 분류의 내용입니다.
환경도 무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은 1996년에 출판된 아버님의 산문집 『떠
저는 이 책을 토대로 아버님이 회상하신 몇 분에 대한 얘기 를 추려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난 세월 떠난 사람』의 서문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문에
김기림 시인은 아버님이 경성사범학교에 교유로 계셨을 때
서 아버님은 다음과 같이 많은 은인들에게 고마움을 글로 남
처음 만났습니다. 이때 아버님은 물리・화학을 연구하겠다는
기셨습니다.
학문의 꿈이 열악한 실험기구와 실험실 미비 등으로 암담해 지고 더욱이 이미 오래전 남이 해 놓은 것을 말로 전하며 월급
사람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실로 많은 것을 만나게 되는 거
을 타는 직업인으로 전락해가는 것에 좌절을 느꼈습니다. 또
다. 바람을, 구름을, 문학을, 인간을, 그리고 숙명을 만나면서 살
한 불안한 시국을 맞이하여 길을 잃고 방황하시던 때였습니
아가는 거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만나는 거다. 사람
다. 다행이도 경성사범학교, 동경고등사범학교 시절 때 틈틈
이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것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으랴.
이 읽었던 많은 시들이 바탕이 되어 마음의 위안 삼아 시를 쓰
나는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아왔던 거다. 훌륭한 선배
시기 시작했습니다.
를, 멋진 동료를, 막역한 벗을, 성실한 후배를 만나 교유하면서, 술을 마시면서, 시를 쓰면서 세월을 보내왔던 거다. 동경에서, 해
이러한 꿈의 좌절에서 실로 쓸쓸해서, 고독해서, 외로워서, 걷
방된 서울의 거리에서, 부산의 피난지에서, 전쟁 뒤의 황폐하기
잡을 수 없는 낙오감에서, 그 포기에서, 시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만 했던 명동에서.
그러다가 어떻게 되어서 편석촌(김기림)과 만나게 되었다. 같
그 많은 벗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나의 삶과 나의 문학은 더 넓
은 학교에 매일 같이 출근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도 어
어지고, 더 깊어지고, 더 풍요로워졌던 거다. 참으로 고마운 일
떻게 편석촌이 나의 시편들을 읽었는지는 모른다. 하여간 그렇게
이 아닐 수 없다.
되어서 그와는 시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위에서
2014 + Spring
말했듯이 그가 그렇게 큰 시인인지는 몰랐다.
에게 몽둥이로 맞아 자택 앞 골목길에서 작고를 하시게 되었
충신동에 있는 이층집 그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았다. 처음 방
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중학교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때가
문한 그의 서재, 양서로 가득 찬 그의 서가를 보고 나는 과연 대
1947년 9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1949년 2월 7일 서
단한 사람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문학하는 사람의
울고등학교 물리 선생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됩니다. 이
방이로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때 김기림 시인이 시집을 내자고 하여 장만영 시인이 사장으
투명한 목소리, 인자한 얼굴, 예지가 흐르는 동작, 깔끔한 모
로 계시던 산호장에서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출판했
습, 빈틈없는 생각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정돈되어 흐르는
습니다. 1949년 7월에 책이 출판되자 장만영 시인이 가까운
순간순간, 번쩍이는 위트, 농담, 조심스러운 말의 경제, 어제와
문인들을 소집하여 출판기념회를 열어 주셨고 그 자리에는
오늘 그리고 내일을 폭넓게 이어놓고 있는 깊은 존재의 공간, 자
편석촌, 김광균, 양병식, 이봉구, 김경린 등 여러 문인들이 참
기통제.
석했습니다. 그 후로 많은 문인들을 소개 받아 교류를 하기 시
이러한 분위기를 그는 나에게 주었다. 그리고 내가 동경고사
작하셨는데 주로 명동에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당시
에서 물리화학을 전공한 것을 매우 존경해주었다. 그는 술에 약
자주 만나시던 분은 주로 김기림 시인을 중심으로 한 도시파
했다. 맥주 두 컵이면 얼굴이 벌개 지면서 말의 속도가 빨라졌
시인들이었습니다.
었다.
동맹은 좌익이었고, 협회는 우익이었고, 여기도 저기도 가
그의 문학에 관한 지식, 나에겐 바다와 같이 느껴졌었다.
담하지 않았던 것이 소수 지성의 도시파 들이었습니다. 이 당
그 후 나는 서슴지 않고 쓸쓸할 땐 쓸쓸한 시를 가지고 그와
시에 자주 만나시던 문인들은 김기림, 장만영, 박인환, 박목
만나곤 했었다. 그의 시집 『태양의 풍속』, 『기상도』 도 그 무렵
월, 이헌구, 이하윤, 서정주, 황순원, 홍효민, 김광균, 조지훈,
에 읽었었다.
박두진, 박기준, 최태응, 조연현, 이봉구, 이한직, 이진섭, 황순 원, 김광주 등 참으로 많은 문인들을 만나셨고 물리학자에서
그러던 아버님은 은사였던 신기범 선생이 서북청년학생들
시인으로의 탈바꿈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이 봉구, 박인환 시인과는 거의 매일같이 명동에서 만났습니다. 아버님과 더없이 가까이 지내던 김소운 시인은 피난길에 오른 부산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자주 가던 광복동에 있는 금 강다방 건너편에 있던 토스트집에서 김광주 씨의 소개 덕분 이었습니다. 굵은 로이드 안경에 턱에 가꾼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굵직굵직한 골격과 붉은색 감도는 얼굴, 그리고 재치 있는 화술, 문학에 대한 박식한 이야기, 그 광범한 경험세계, 나에겐 신천 지를 만난 거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무서운 자존심・결벽 성・정열・근면, 소지품에 대한 고급성, 돈에 대한 호탕성, 그리 고 온몸에 가득히 흐르고 있는 멋과 낭만과 휴머니즘. 싫은 사람하곤 먼 거리를 두고 자유스러운 자기공간을 유지하 고 있는 생활태도, 과연 시인 김소운은 강한 의지의 인간이로구 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김소운을 알게 된 건 먼저 책이었다. 동경 유학시절이 었다. 그 유명한 암파문고에 끼어 있던 『조선동요선(1933)』
1961년 12월 호수그릴에서 열린 『밤의 이야기』 출판기념식에서 김소운과
과 『조선민요선(1933)』, 그리고 『조선시집(상・중, 1943)』, 그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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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를 추억한다 아버님의 은인들 조진형
1964년 김소운 선생 귀국 기념좌담회, 좌로부터 조병화, 김소운, 김광주
것이 나를 먼저 놀라게 했다. 조선에도 <이러한 시인이 있었나?>
다. 참으로 나에겐 고마운 문단의 대선배요, 그 안내자요, 그 보
하는 존경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거꾸로 우리 동요・민요・
호자요, 그 격려자요, 그 선생이요, 그 의지자였다.
근대시를 일본어로 읽기 시작했던 거다. 고향에 깔린 그 아름다
문단뿐만 아니라 실로 인생에 있어서 큰 시범자였다. 그 대
운 정신의 흐름을 일본어를 통해서 처음으로 접했던 거다, 얼마
담한 인생관에 있어서, 그 중국 대륙적인 기풍에 있어서, 그 곧
나 모순된 나의 성장기였던가.
은 기질에 있어서, 그 견고한 정의감에 있어서, 그 굳은 의리감
그 김소운을 피난지 부산에서 처음 대면했고, 매일 밤을 술
에 있어서, 그 거대한 서민적 체취에 있어서, 나는 김광주 선생
로 같이 지내게 되었다. 문학에 젖어서, 인간에 젖어서, 산다는
의 가장 가까운 주변에 있으면서 실로 큰 인간, 그걸 많이 배웠
그 어두운 낭만에 젖어서, 김광주・이진섭・한노단・이해랑・
던 거다. <중략>
이인범・이명온, 때론 이한직, 때론 조영암, 때론 임긍재, 때론
박인환은 나를 만날 때마다 ‘넌 왜 김광주 씨를 만나면 그렇
윤용하, 서로 뒤섞여서 거의 매일 국제시장의 술집을 돌며 객지,
게 즐거우냐?’ 시기 비슷이 말을 하곤 했다. 그건 아무런 거리낌
그 나그네살이를 견디어 내고 있었다.
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담이고 농담이고, 무슨 말이고 서슴없 이 말할 수 있는 하늘같은 마음을 김광주 씨는 나에게 주는 분이
김광주씨에 대해서는 아버님은 다음과 같이 회생하셨습 니다.
었기 때문이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주변에 모여드 는 모든 분에게 그렇게 너그럽게 대해주는 분이었다. 더구나 경 향신문 문화부 부장으로 있었으니까 향상 주변엔 많은 문화인들
이런 글을 쓸 때 늘 고민하는 건 호칭 문제다. 적당한 말이 없
이 득실거렸다.
다. 나에게 있어선 김광주라는 사람은 김광주 선생이지, 김광주
「보리밭」으로 지금은 불멸의 작곡가가 된 윤용하 씨를 비롯
씨도 안 되는 말이고, 그냥 김광주라고는 더욱 할 수 없는 문단의
해서, 이해랑 씨를 중심해서 신협단원들, 그리고 한노단・이진
은인이다. 그러나 문장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섭・이봉구・박인환・김수영・유호・김영주(화가, 삽화가)・
표현하면서 <김광주 씨와 그 주변>, 이렇게 글을 써 내리기로 한
이순재(화가, 삽화가)・이명온・조경희・이인병・조애실・조
2014 + Spring
영암・박연희, 실로 거의 매일 밤을 한 가족처럼 만나 차를 마시 고, 술을 마시고, 술과 고독과 우정에 취해서 서울 수복 후의 부 스러진 명동을 살았던 거다. 이해랑씨의 말대로 그것은 하나의 <호적이 없는 가족들>이었다. 호적이 없는 가족들, 가족 이상으 로 가족처럼 인생을 같이 살던 실로 가난한 시절의 즐겁고 풍요 로운 가족들이었다. 그 호주가 김광주 씨였다. 돈들이 없어도 김광주 씨를 만나면 술을 마시게 되었다. 한 번도 돈 없는 내색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냥 술집으로 들어가는 거다. 그리고 만취가 되는 거다. 그리고 외상을 긋는 거다. 그리고 그 이튿날이 되는 거다. <반 되만 더> 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 말은 돈이 떨어져도, 통행금지시간이 거 지반 다 되어도, 술자리에서 일어서질 않고 ‘우리 반 되만 더 마시 자’ 하여 주모보고 하는 말이 ‘반 되만 더, 반 되만 더……’ 김광주 씨가 버릇처럼 하던 말이 명동 일대에 퍼진 거다. 끝까지 반 되만 더 마시자는 아쉬운 밤을 매일매일 술과 정과 고독과 방황으로 조지훈 시인 (사진: 지훈문학관 제공)
보냈던 거다. 그 씁쓸하던 폐허의 시절을 명동에서.
아버님은 조지훈 시인를 통해 많은 대학 교수들과도 가까 이 지내셨습니다. 다음은 조지훈 시인에 대한 회상입니다.
조지훈 씨도 문인들하고만 얼려 다니는 게 아니라 학자・교수 들하고 얼려 다니는 수가 많았다. 그 단골손님이 황학수씨였다. 술이 들어가면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고 나중에 고함소리로 변한 다. 노래도 나온다. 독일어도 나온다. 하나도 악의가 없는 그 천 진난만한 학생 기분, 아 지금도 그 청춘들이 그립다. 어느 술집에서나 술에 취해 들어갈수록 입에서 큰 소리로 터져 나오는 그 철학, 그 문학, 그 예술, 그 인생, 그 노래, 그 뜨거운 생 명에 주석의 모든 친구들은 도취해 들어가곤 했다. 조지훈도, 이한직도, 조영암도, 이하윤도, 이헌구도, 이명온 여사도, 조경희 여사도, 조애실 여사도, 때론 양주동 박사도, 김광섭 시인도, 때론 김광주・김환기・박연희・한노단・이봉 구・이해랑・윤용하・이진섭・유호・박인환도, 때론 이인범・ 전봉초・김광수도. 이러한 장면이 저녁마다, 밤마다, 명동 구석구석 술집마다 벌 어졌던 1950년대의 한국 예술가들의 황금시대, 지금도 꺼지지 않는 먼 추억의 등불들이다. 돈은 없었어도. 실로 그것은 술집이 아니라, 고급한 예술 토론장이었다. 그 세 미나 장소였다, 그리고 외로운 존재들의 생존의 아지트들이었 다. 문인들・화가들・연극인들・영화인들, 모두가 함께 모이던 그 명동, 그 술집들, 지금은 그 자리들이 모두 신발가게, 아니
1960년 덕수궁에서 김광주와
면 옷가게, 아니면 화장품가게, 아니면 증권회사들로 우글거리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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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를 추억한다 아버님의 은인들 조진형
고 있다. 돈으로.
어느 날 저녁, 1959년이 다 저물어 들던 12월 어두컴컴한 종
어느 날이었던가, 추운 겨울밤, 습관처럼, 버릇처럼, 으레 하
로길, 광화문우체국 옆을 슬슬 한잔 술에 취해서 다시 한잔하려
는 거처럼, 본능처럼, 통행금지시간 임박해서 조지훈씨가 대문
고 술친구를 찾아 걷고 있을 때, ‘병화, 너 됐어.’ 하는 소리에 뒤
짝을 차며 ‘대부!’ ‘대부!’ 큰소리로 문을 열라는 것이었다. 조지훈
돌아보았더니 박연희 씨였다. 박연희 씨는 그때 동아일보 문화부
씨의 집은 내가 있는 혜화동 로터리를 돌아 성북동 고개를 넘어
에 문화담당기자로 있었다. 지금은 예술원 회원이지만.
서 있었다. 나의 집은 수복 후 줄곧 혜화동 로터리 107번지에 있 었기 때문에 그가 지나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중략>
‘무어가 됐단 말이오?’ 하고 가던 길을 멈추고 서 있었다. 너무 나 큰소리들이 오고 갔기 때문에 길 가던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
조지훈씨는 그 통근시간을 나의 집에서 보내곤 했다. 통금시
다보고 지나갔다. ‘너 자유문학상을 타게 됐어.’ 라는 뜻이었다.
간이 아슬아슬하게 나의 집에 도착한다. 한두 시간 머문다. 순경
지금 방금 소식이 들어와 기사를 써 놓고 나왔다는 거다. 기뻤다.
나리들이 다 사라질 무렵 다시 길로 나와 성북동 고개를 넘어 집
내가 타다니. 그 길로 우린 명동 단골술집으로 직행을 했다. 거기
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엔 이미 조지훈 시인이 와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이번엔
나는 그를 위해서 안주 없이도 마실 수 있는 술, 양주를 늘 준
대부라 하지 않고 ‘병화, 넌 아예 상 같은 거 탈 생각 하지 말어.
비해두곤 했다. 아무리 술에 취해서 우리 집에 도달해도 들어오
넌 돈에 궁색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말을 던지면서 좌석을 만들
자마자 ‘술 가져와.’ 이것이 첫 말이었다.
어 주는 거다. ‘돈, 돈 같은 거 다 가져가고 상장만 주어도 좋겠소.’
그는 사실 호걸이었다. 호주가였다. 아주 섬세한 호걸, 호주가
나도 말을 던지면서 박연희 씨와 같이 자릴 잡았다. 실은 조지훈
였다. 나를 보고 그는 주석에서 <대부, 대부>라고 했다. 그도 한
시인은 그때 이 자유문학상의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이었고, 나
양 조 씨이고 항렬이 하나 내가 높다는 거다. 그러나 조지훈 씨
에게 그 수상자 결정을 먼저 알리려고 이 술집에 와 있었던 거다.
는 1920년생이고, 경북 영양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1921년생
그러니까 적극 수상자로 나를 민 것이 분명했다. 참으로 고마웠
이고 경기도 안성 사람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나와
다. 그는 그렇게 정직하고, 강직하고, 고집이 세고, 정의로운 성
같이 술을 마실 때는 <대부, 대부> 이렇게 경상도 선비답게 말해
품의 시인이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상을 주어야 한다는 동정적
주어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인 표가 왔다 갔다 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니까 상을 줄 필
문학에 있어서 대가요, 대선배요, 한국문단에 큰 기둥이 아닌가.
요가 없고, 빈곤하기 때문에 상을 주어야 한다는 식의 수상자 결
문단 데뷔만 하더라도 나보다 한 10년을 앞선 사람이다. 그리고
정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러한 상의 결정은 그제나 이제나 그릇
이미 해방 후부터 문단의 지도급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정평 있
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상은 상이다. 그 작품이다. 그 작품의 우수
는 시인이었다.
성이다. 그렇지 않은가. <중간 생략>
아세아자유문학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세아재단이 한국 문
사실 그렇다. 상은 돈이 아니라 하나의 명예로운 인정이 아닌
인들을 위해서 마련한 대금의 문학상이었다. 그 당시엔 가장 권
가. 상장 그것이 소중한 것이며 자기를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
위 있는 빛나는 문학상이었다. <중략>
는 위안인 것이다. 그날 밤 어떻게나 서로 술을 마셨는지 장안이
이 상은 한 사람, 혹은 세 사람, 혹은 네 사람, 심지어는 다섯
모두 우리들의 세상 같았다.
사람까지 동시에 받고 있었다. 이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가. 그 만큼 이 상을 타려고 하는 경쟁자들이 많았던 것을 말하고 있는
이상과 같이 김기림, 김광주, 김소운, 조지훈 시인 등과 아
거다. 그 경쟁! 지금도 그렇지만 상을 놓고 얼마나 치열한 경쟁이
버님의 끈끈한 만남의 과정을 소개해 드렸지만 아직도 아버
있는 건가. 작품, 그 실력만으로 상이 수상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
님과 좋은 인연을 맺은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중에서도 또
인가. 그러나 그게 그렇게 잘 되지 않기 때문에 후문이 두려울 때
몇분을 가려 다음호에 다시 소개의 글을 이어갈까 합니다.
가 있는 거다. 심지어는 심사원이 자기 표를 넣었다는 후문도 있 을 정도로. 하도 시끄러워져서 아세아재단은 제7회로 이 빛나던 문학상제도를 걷어버렸다. 참으로 창피한 노릇이었고 우리들 문 인들을 위해서 애석한 일이기도 했다. 2014 + Spring
조진형 1946년 출생. 조병화 시인의 장남. 전 위스콘신대, 세종대 교수. 현재 조병화 문학관 관장.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Ⅱ 여행을 앞두고
여행을 앞두고
조병화
여행을 앞두고 갈 곳을 생각하며 떠날 날짜와 시간을 살피며 서류와 여비를 챙기며 여권과 통과증을 재확인하며 미리 서두는 것이 나의 버릇이었나 이번 여행은 하도 먼 곳이어서 지도에도 없는 곳이어서 갔다 돌아온 사람도 없는 곳이어서 갔다 돌아올 수 없는 곳이어서 혼자 가는 곳이어서 이곳에 빠트린 것은 없나, 꼭, 갖고 갈 것은 없나, 아, 그날이 가까이 올수록 이 마음.
여든의 나이에 시인은 「여행을 앞두고」라는 시를 적 었습니다. 매사 모든 일에 그랬던 것처럼 조병화 시인 은 여행을 떠나는 일에도 언제나 철두철미한 모습이 었습니다. 출발 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고 여행지에서 도 기품을 흐트러트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위 의 시에서 시인이 준비하는 여행은 지금까지의 여행 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여행지는 ‘지도에 없는 곳’이
-제52집 《남은 세월의 이삭》에서
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시는 죽음이라는 먼 여행 을 준비하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이 떠 날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는 노 시인의 마음, 복잡하고 도 어쩐지 미련이 남는 그 마음. 시의 행간마다 시인이 가졌던 주저함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주저함에서 가장 인간적인 시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박 준 1983년 서울 출생.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다. 제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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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그리는 조병화 시 그 해 여름의 아이 박민정
주점 조병화
일체의 수속이 싫어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그럴 때마다 가슴을 뚫고 드는
그러한 수속조차 이미 나에겐 권태로워
우울을 견디지 못해
우울이 흐린 날처럼 고이면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눈 내리는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나는 먼저 아버지가 된 일을 후회해 본다
산다는 것이 권태로운 일이 아니라 수속을 해야할 내가 있어
필요 이상의 예절을 지켜야할
그 많은 우울이 흐린 날처럼 고이면
아무런 죄도 나에겐 없는데
글 한자 꼼짝하기 싫어
살아간다는 것이 지극히 우울해진다
눈 내리는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한때 이 거리가 화려한 꽃밭으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가 된 그 일이 마침내 어쩔 수 없는 내 여생과 같이.
그러나 이력서를 쓰기 싫은 그날이 있어 부터 이 거리의 회화를 나는 잊었다
2014 + Spring
소설로 그리는 조병화 시 그 해 여름의 아이 박민정
그해 여름의 아이 _박 민 정
“중학생 딸아이가 내게 한마디 하더라고.” 옆에 앉은 중년 남자가 묻지도 않은 내용을 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그의 가족사 따위는 궁 금하지 않았다. 나는 종이컵에 그려진 나무와 꽃 따위의 그림을 관찰했다. 언젠가 본 부활절 달걀에 그려진 그림처럼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곧 정액이 담길 종이컵이었다. 모든 것이 조 악했다. 무슨 일이든 충격이 지나가면 짜증이 밀려오는 건 당연한 수순 같았다. 수술을 한 날 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병원의 풍경이 상세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더러운 곳이었단 말인가. 기분은 더욱 더러웠다. 찍찍 소리내며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간호사들은 만사 귀찮다 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의사는 내게 화장실에 가서 정액을 받아오라고 했다. 나는 당신이라면 그게 가능하겠느냐 고 묻고 싶었다. 야한 사진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화장실에서 무턱대고 받아오라는 거였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틀어올린 게으른 간호사가 잡아주면 차라리 나을 듯도 싶었다. 병원에 내 또래의 젊은 남자는 없었다. 정관수술 후 검사를 받으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배가 툭 튀어나온 아저씨들이었다. 차례대로 준비를 하며 화장실 앞에 멍청이들 같이 대기하고 있 었다. 나도 의사가 졸업한 대학의 동문회에서 마련해줬다고 적힌 나무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 다렸다. 종이컵을 구겨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이런 걸 할 때는 가족회의를 해서 딸들 의견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거야. 조그만 입으 로 쫑알거리는 데 어찌나 귀엽던지. 딸내미 다 키웠나봐. 그래도 지가 알아? 딸딸이 아빠의 마 음을. 애가 또 생겼는데 아들도 아니면 지가 책임질 건가. 빠듯한 살림에 셋 이상 낳으면 우리 가정에도, 국가에도 반하는 일이라는 걸 중학생인 지가 아느냐는 말이지.”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자세하게도 지껄이고 있었다. 내가 반응이 없자 그는 조금 멋 쩍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행히 곧장 딸딸이 아빠가 자위를 할 차례가 왔고 그는 냅다 화 장실로 달려갔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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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그리는 조병화 시 그 해 여름의 아이 박민정
많이도 왔다. 정말.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저씨들이 하나둘 화장실에서 나올 때마다 나는 종이컵에 시선 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고등학교 시절, 뒷산에 무성한 밤나무가 다닥다닥 붙어 앉은 소년 들의 심기를 늘 불편하게 만들던 기억이 떠올랐다. 화장실 타일은 더욱 지저분했다. 그걸 보면서 자위를 하려니 새삼 비참했다. 나는 어쩔 수 없 이 그녀를 생각했다. 이게 뭔 거지같은 상황인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던 모습을 잊기 위해 이 를 갈았는데, 허름한 비뇨기과 화장실에서 종이컵을 들이댄 채로 그녀를 다시 불러와야 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녀를 생각했다. 다른 모든 걸 집어치우고 그녀의 몸과 내게 안기던 그 모습만을 떠올리려 애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내 눈앞에서 숨을 헐떡였다. 매번 같 은 초라한 반지하방과 낡은 이불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이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새로 웠다. 그녀가 흥분할 때면 그녀의 가슴 위로 땀방울이 확 솟아올랐다. 나는 네가 그렇다는 걸 알고 있지.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녀는 부끄러워했다. 나는 모든 걸 알아. 네가 정확히 언제 흥 분하는지, 네 성기의 생김새가 어떠한지 전부. 지금 당장 그려볼 수도 있어. 불과 한 달 전 실재한 장면이었다. 거기서 멈췄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 장면이 거기서 멈춘 채 영원했다면. 나는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했다. 종이컵 안에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수 태의 고통을 안겨주지 않을 깨끗한 정액을 보며 나는 눈물을 닦았다. 여전히 대기중인 아저씨 들이 눈두덩이 벌겋게 익은 채 나오는 나를 의아한 듯 쳐다봤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었다. 그 방이 있는 동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리 라 나는 다짐했다. 그녀와 함께 살 때는 월세를 내느라 늘 허덕여야 했다. 떠나오고 나니 모든 게 부질없었다. 나는 그녀가 그 방의 보증금을 잘 챙겨나갔기를 바랐다. 무전여행을 다녀온 듯 나는 부모의 집에 얌전하게 돌아왔다. 부모는 집을 떠난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도 않았다. 내 방의 모든 물건이 그대로 있었다. 억지로 읽어야 했던 전공서적들이 그저 반가웠다. 다른 친구들처럼 번듯한 직장에 취 직을 하고. 스탠드 불빛 아래서 밤새 인생 계획을 했다. 이제 연애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고 생 각했다.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따위는 절대 발생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게 사랑과 연애 와 결혼은 일직선상에 있는 일이었다. 앞으로의 인생 계획에 결혼이라는 항목은 절대 존재하 지 않을 거였다.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와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 엄청난 일을 계획까지 해서 차근차근 수행해내는 사람들이 세상의 대부분 이라는 것이 나는 무서웠다. 집에 돌아온 다음날 나는 곧장 비뇨기과를 찾아 정관수술을 했다. “아이를 데리고 부모님 집으로 가자.” 내 품에 안긴 그녀는 내내 말이 없었다. 나 역시 혼란스러웠지만 차분하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내내 부모의 도움도 받지 않고 둘 이 아등바등 사느라 고생이었지만, 아이가 생겨버린 마당에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잠 시 친구 집에 있겠다며 나간 아들이 일년 만에 아이를 안고 돌아온다면 부모는 몹시 놀랄 것 이었다. 그래도 내쫓아버릴 사람들은 아니었다. 어머니와 그녀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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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얼른 학교를 마쳐야겠다고 다짐했다. 자리를 잡은 후에는 남들처럼 아이를 키우며 살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고 막연하게나마 그런 삶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이를 갖다버리기 전까지는. 쓰레기통. 방을 뛰쳐나온 나는 계속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나는 동네를 쏘다니며 쓰레기통 의 뚜껑을 전부 열어봤다. 아이가 음식물로 뒤범벅되어 있는 건 아닐까. 깨진 소주병 사이에 있 는 건 아닐까. 죽은 쥐새끼랑 같이 뒹구는 건 아닐까. 벌써 쓰레기 더미에 실려 멀리멀리 가버 린 걸까. 아이는 이미 죽어버린 걸까. 미쳐버릴 것 같았다. 대체 내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정처없이 걸었다. 걷지 않으면 방으로 가는 즉시 그녀와 나 모두를 죽여버릴 것 같 았다. 그 길로 나는 부모의 집에 돌아왔다. 그녀도 나도 죽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쓰레기통. 아이가 아니라서 갖다 버렸어. 그녀가 나에게서 미래를 봤다면 그런 행동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나는 아이처럼 서 럽게 엉엉 울었다. 결국 내가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천장에 푸르게 번지던 곰팡이를 생각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밥상으로 기어올라오던 개미들을 생각했다. 비가 올 때마 다 한가득 물이 들이치던 현관을 생각했다. 땀을 흘리며 쓰레받기로 물을 퍼내던 그녀의 모습 을 생각했다. 쉬지 않고 퍼내도 계속 들이치는 물을 보고 공포에 질린 그녀가 울던 것을 생각 했다. 그 바람에 그녀가 아끼던 구두를 전부 내다버려야 했던 걸 생각했다. 내 곁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더러운 반지하방에 처박혀 있어야만 했던 그녀를 나는 생각했다. 내 아이를 가졌다는 게 그토록 충격이었을까. 분명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마지막 말, 쓰레기통이라는 한 단어가 날카롭게 벼려진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왜 젊은 사람이 벌써 가족계획에 나선 거요?” 의사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물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는 대신 질문했다. “선생님. 정말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이 확실합니까?” 수술은 금방 끝났다. 병원을 나오자 햇빛 한 줄기가 강하게 눈을 찔렀다. 나는 전부 잊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 순간조차 이미 잊고 있었다.
박민정 소설가. 1985년 서울 출생.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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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가 만난 조병화 혜화동로타리와 플라타너스와 시인과 이대원
혜화동로타리와 플라타너스와 시인과
_이 대 원
1986년 10월 4일 표화랑_ 조병화 유화전, 좌로부터 유호, 조병화, 이대원
내가 1936년에 혜화동으로 이사 올 때 로터리 근처에 심
그는 나와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나이
어졌던 플라타너스가 어언 50년에 가까운 연륜을 쌓아서 이
가 같다. 부인이 다 같이 의사들이다. 또 둘 다 대학에서 전공
젠 구라파의 가로수 못지않게 당당하다. 아마 시내에서는 효
한 분야와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직종이 같다. 그리고 혜화
자동 근처의 가로수와 함께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임에 틀
동에 오래 살고 있고, 우리와 함께 늙은 플라타너스 나무를 다
림없으리라. 나는 46년 동안이 혜화동 로터리의 플라타너스
같이 좋아한다.
밑을 지나다녔다.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그래서 많은 일들을 생각게 한다.
아침 출근길에 나는 가끔 그가 늘 베레모에 책가방을 끼고 파이프를 물고 로터리 플라타너스 밑에서 차를 기다리는 모
시인 조병화와 알게 된 것도 벌써 20년이 훨씬 넘었다. 아마
습을 보곤 한다. 눈이 마주치면 그저 서로 손을 들고 인사할
처음 조 시인을 소개 받은 것은 수화 김환기 화백한테서 라고
뿐이다. 하지만 아무 대화가 없을망정 우리 둘은 무언중에 서
기억한다. 수화가 성북동에 살던 무렵 명동에서 한 잔 하고 함
로가 느끼는 일체감을 전달받게 마련이다.
께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가끔 조 시인(수화가 즐겨 불렀던)의
이제 혜화동에도 지하철이 연결되게 되었다. 로터리에서
문을 두드렸었다. 그도 수화를 퍽 좋아했다. 그래서 우린 자주
종로 5가에 이르는 큰 가로수는 서울의 명물이 되었다. 옛 서
명동에서 마주치곤 했다.
울 문리대 자리에는 그동안 미술회관이 새로 섰고 이제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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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도 새로 아담하게 마련되어 내주에 국제 연극제가 개
넓은 씨(氏)의 정신세계에서 비춰 오르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막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동안 혜화동 로터리 주변에는 여
풍요한 광선에서 우리의 잠자는 미의식을 깨워날 수 있으리
러 개의 화랑도 눈에 뜨이게 되었다. 이제 바야흐로 혜화동은
라 믿는 것이다.
문화센터의 지역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조 교수나 나나 혜화동에 오랫동안 살아온 보람 같은 것마저 느낀다. 크게 자란 가로수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조교수의 내 그림에 대한 이 같은 평이 호의적이건 아니건 24년 전에 이미 그는 그림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음
조 교수는 그동안 많은 시집을 내놓았다. 그는 또한 그림에
을 알 수 있다. 그는 많은 자작시집 속에 직접 그림을 그려 넣
도 남달리 높은 안목과 견식을 가져왔다. 1957년 6월에 나는
고 있다. 가는 펜으로 여행 중 순간순간을 포착하여 그린 스케
첫 번째 개인전을 가졌었다. 그는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이
치는 경쾌하고도 유머러스하며 말할 수 없이 소박한 공간을
형, 그림은 아름다워”라고 나 자신보다도 즐거워하며 청하지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해왔다. 근래에 와서 파스텔 또는 유
도 않았는데 다음과 같은 단평을 신문지상에 써주었다.(그 당
화로 제작한 소품들은, 넘쳐흐르는 시정(詩情)과 섬세한 붓의
시만 해도 전문적으로 미술평을 하는 분이 많지 않았던 것으
효과적인 구사로 인해서 시・화의 아름다운 일체감을 보여주
로 기억한다.)
고 있다. 내가 요사이 그를 만날 때마다 왜 남의 영역을 침범 하느냐고 항의조로 말하면, 그는 그 독특한 미소로서 그림을
“신비로운 색감—이대원 개인전” —근래에 드물게 보는 아
그리고 싶어 못 참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시보다 그림이 더
주 쑥 빠진 세련된 아름다움이다. 신비스러울 정도로 청아한
좋아지니 어떻게 하느냐는 답변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렇
화심에 우아한 마치엘이다. 탁하지 않은 색깔들이 제각기 제
다면 내가 실직(失職)하게 되었군.”하고 웃으며 말하지 않을
자리에서 각기 고유한 광선을 안에서 밖으로 풍기고 있다. 색
수 없다. 아마도 그는 그림을 그리도록 태어난 모양이다. 오랜
이 광이라는 것을 나는 발견한다. 《오월의 비봉(碑峯)》 《북한
세월에 걸쳐 시를 써오는 동안 그의 시상(詩想)은 점차 시각
문경(北漢文景)》 《도봉산(道峯山)》 《도봉추경(道峯秋景)》
화(視覺化)되어 왔음이 분명하고, 그 어쩔 수 없는 그 무엇이
《산(山)》 이러한 작품들 속에 꼭꼭 깊이 박혀있는 색과 색군
그림으로 형상화된 것이라고 나는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
(色群)들을 발견할 때 그 아름다움과 조화(調和)와 통일성
이제, 우리 둘이 서로 많은 닮은 점을 지니면서 어언 60을
(統一性)에 조형(造型)의 기쁨을 금할 수가 없다. 화면이 주
함께 맞게 되니 더욱 감회가 깊다. 해마다 가지를 잘리면서도
는 여유 있는 공간과 노블한 감각은 또한 우리들의 생활감정
무럭무럭 자라온 혜화동의 플라타너스의 가지가지 같이 우리
을 풍부히 해주고 있다. 우선 이 화가는 일체의 회화적(繪畵
두 사람의 삶도 많은 고초의 역정(歷程)이었다. 나목(裸木)이
的)인 잡음을 부정하고 오로지 ‘아름다움’에 대한 영원한 준
된 플라타너스의 가지를 볼 때마다 나는 그 나무들과 우리가
봉자(遵奉者)다. 때문에 이즘이니 이스트니 형식적(形式的)
서로 많이 닮은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인 혹은 편의적(便宜的)인 카테고리 속에 이 화가를 매장하 기엔 너무나도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세밀한 터치와 깊은 관
혜화동에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 둘은 플라타너스를 우리
찰과 재생적(再生的)인 색깔의 배치가 무리가 없는 구도(構
의 친구로 함께 해온 것을 새삼 행복하게 느낀다. 머지않아 맞
圖)와 능숙한 미의 농도(濃度)는 완전히 독립된 풍부하고도
이할 신록(新綠)의 계절이 오면 우리의 또 하나의 벗, 플라타
여유 있는 씨(氏)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깊고
너스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감을 다시금 던져주겠지…….
이대원 화가. 1921년 경기도 파주 출생.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 1957년 동화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국내 첫 상설화 랑인 반도화랑을 운영했다. 홍익대학교 총창, 한국박물관협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 국내 외 개인전 20여 회 개최. 199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1995년 금관문화훈장 수훈. 2005년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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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문화 기행
충북 문화 기행
2013.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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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보의 집- 단체사진 2. 운보의집 조각공원- 공상진, 곽재숙, 황현숙, Philip Iglauer 3. 운보미술관- 박철원, 문창욱, 김성경 2014 + Spring
4. 운보미술관공상진, 조진형, 김용정, Mrs.박철원, 박철원, 문창욱 5. 정지용문학관- 신중신, 허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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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지용문학관- 단체사진
4.육영수여사 생가- 연당사랑
2. 정지용문학관- 주기영, 김용정
5. Mrs.윤진석, 김용정, 김무현, Mrs.곽명규, 김유항, Mrs.주기영, 곽명규
3. 주요한시인의 사진 앞에서, 아드님인 주동설과 박철원 회장
6. 육영수여사의 여고시절 모습과 유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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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글마당 2013 가을 충북 문화기행을 다녀와서 주기영
_주 기 영
2013년 10월의 마지막 하루를 남겨놓은 가을날, 편운 조병화 선생님을 흠모하고 그분께서 일구신 문학의 세계, 시의 세계를 사랑하는 서른일곱분의 동호인들이 전세버스를 이용, 우리 나라의 내륙지방인 충청북도 일원으로 문화기행을 다녀왔다.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주최로 매년 가을 문화와 예술 그리고 문학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뜻 깊은 연례행사이다. 조진형 조병화문학관 관장, 박철원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장, 김용정 사무국장 그리고 원 로 여류시인이신 허영자 선생님의 인도로 문학을 사랑한다는 닮은 점 하나를 함께 지닌 제제 다사, 각계의 명사들이 운보의 집, 정지용문학관, 육영수 여사 생가를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연례적으로 떠나는 문학기행이지만 이번에 찾아가는 곳은 평소 가보고는 싶어도 쉽게 가지 지를 않던 명소들이어서 한결 기대되는 바도 컸다. 집결지인 도곡역에는 일찍부터 우리가 타 고 갈 투어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열기가 대단하여 이른 아침인데도 좌석은 벌써 거의 만 석이 되어 있었다. 가로의 느티나무 잎들이 진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바람에 휘날리는 만추, 가을은 결실의 계 절이라지만 또한 사람이 그립고 인정에 파묻히고 싶은 짝짓기의 계절(cuffing season)이라 2014 + Spring
고도 한다. 어느 철엔들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친구가 그립지 않을까만 가을바람이 일어 쇠 잔한 입새들의 조락이 시작되면 설레는 마음은 검푸른 가을 하늘 높은 곳으로 날아오른다. 어딘가로 떠나보고 싶어 은근히 마음이 부풀어오던 차에 충북 청원과 옥천으로 떠난 이번 의 문화기행은 모처럼 바쁜 일상과 세상사로부터의 탈출이었고 인생의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하는 하루 동안의 알뜰한 심신 힐링을 겸한 나들이였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조병화 선생님의 시에 김성태 선생님께서 곡을 붙인 ‘추억’이 라는 노래가 조용히 흘러나온다.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를 가슴으로 따라 불러보니 오늘만은 마치 모두가 미지의 세계로 떠 나는 시인이라도 된 느낌이다. 시인이 어디 따로 있으랴. 사람은 누구나 다 인생이라는 한편의 긴 시를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인데. 가을에 지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울긋불긋한 노란 은행잎과 빨간 단풍의 산과 들을 바라보 며 만추의 정취에 흠뻑 젖은 채 잠시 상념에 빠져드는 동안 중부내륙을 달려온 버스는 어느새 한가로운 야산자락에 자리 잡은 운보의 집 주차장에 우리를 안착시켜주었다. 사실감이 넘치는 비구상에 진한 색채, 동양화에 서양화를 접목한 듯한 기법을 사용하여 이 땅에서 살아온 인물, 또 거기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 생활과 민속, 그리고 산과 들을 사 실적으로 그린 그의 작품세계는 청록산수 또는 바보산수라고도 불리지만 굳이 표현한다면 그 저 한국화라는 명칭이 알맞을 듯싶기도 하다. 어린 시절 장티푸스를 앓다가 청신경이 마비되어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던 그는 운명과 절망을 뛰어넘어 오직 불타는 열정 하나로 폭풍노도와 같이 창작의 세계로 질주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운보는 또한 많은 성화들을 남겼는데 마침 ‘예수의 생애’라는 테마로 특별 전을 하고 있어 예수의 일대기를 한국 고유의 복식을 한 한국적 스타일로 형상화한 작품들이 었다. 이곳 청원군 내수면 형동리는 원래 운보의 어머님의 고향이다. 어려서 농아가 된 그를 끝까 지 부축하고 갈 길을 열어준 분이 바로 그의 어머님이었다. 여성은 약할 수 있지만 모성은 예 외 없이 강한 법이니 운보에게 있어 어머님은 그의 예술의 등대이고 고향이기도 한 것이다. 진남포 출신으로 일본유학까지 하여 미술공부를 하고 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던 우향 박래 현 여사는 운보의 부인이자 또한 제2의 어머니랄 수도 있다. 잘 듣지를 못하는 남편을 위해 희 생을 자청했던 우향(雨鄕), 비의 고향이라는 의미가 무언가를 말해주는 듯도 하다. 옹색하지 않을 만큼 여유 있는 공간, 알맞은 높이의 3만여 평 터전에는 운보의 집, 미술관, 조각공원, 분재공원, 수석공원 등이 많은 정성과 노력과 재화를 들여 완벽하게 가꾸어져 있는 데 주인공은 하늘나라로 갔건만 많은 후세 사람들이 찾아와 감상하며 안목을 키우고 힐링의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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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글마당 2013 가을 충북 문화기행을 다녀와서 주기영
이득을 누리는 것이니 고난의 길을 간 예술가의 일생에 후인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감사와 경 의를 표함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운보의 집 가장 높은 언덕에는 운보와 우향의 묘소가 잘 가꾸어져 있는데 멀리 꽃잎처럼 포 개진 안산들이 이곳을 감싸고 있어 참으로 평화로운 안식처라는 느낌을 받았다. 옥천(沃川)은 기름진 냇물이란 뜻이니 농사가 잘되고 사람 살기가 좋은 곳으로 일찍이 우암 송시열 선생 등의 많은 인물들이 태어난 곳이다. 충북이지만 전에는 여기서 대전으로 기차통 학을 할 만큼 대전 생활권에 속했었다. 다음 방문지는 정지용 시인의 생가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헤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시절의 가난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즘 젊은이들조차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는 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 빈부라는 것도 상대적일진대 그 시절엔 겨울을 날 쌀 댓 가마와 땔나무 몇 짐만 있어도 결코 가난한 집이 아니었다. 넓은 들과 실개천 그리고 황소 한 마리야 말로 그들의 삶 을 붙여나가는 전 재산이었다. 적금이니 주식이니 하는 말들을 들어보지도 못했던 그 시절이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얼마나 한심스러웠는지 모를 일이다. 요즘의 젊은이들이 ‘향수’에 서린 지난날의 한숨과 애환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 을까. 역사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며 미래를 개척해나갈 우리의 힘의 원천이고 잠재력이다. 문 학작품은 간접경험을 통하여 인생과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기도 하다. 부친이 한의원을 하여 대문은 항시 열려 있었다는 지용 생가는 좁은 산협이 아니고 너른 들 판 가운데 위치해 있다. 집 바로 오른쪽으로는 개천이 흐르고 지금은 많이 도시화가 되었지만 저쪽 어딘가에서 놋쇠방울소리와 함께 헤설픈 황소울음 소리가 들려올 듯도 하다. 시인은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의 도시샤대학 영문과까지 다닐 수 있었으니 집안은 결코 적 빈한 것은 아니었고 또한 교편생활을 하고 신문사의 주필을 역임한 것으로 미루어 경제적 어 려움만은 크게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어지는데 농업사회였던 그 당시의 향토의 정서를 너무 나 잘 표현했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는 노래가 유행하기 이전에도 그가 작사한 ‘고향’이라는 노래가 있음 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가 멜로디는 그대로인 채 가사만 박화목 작시의 ‘꽃피는 봄 사월 돌아 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너머’ 로 시작되는 노래로 불려지던 때가 있었다. 둘 다 버리기 아까 운 너무 좋은 노랫말들이지만 정지용 시인의 생애가 순탄치 않았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지금 은 생가도 복원되고 생가 옆 문학관도 잘 갖추어졌으니 천만 다행이다. 2014 + Spring
문학관 초입에는 밀납 인형으로 된 정지용 시인이 방문객을 맞고 있는데 그 옆에 앉아 기념 사진 찍기가 좋았으며 문학관 내부도 시인의 생애와 작품을 연대순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가 지런히 정돈되어 있어 시인의 일대기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옥천성당이 역사적 기념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가톨릭이 성했음을 알 수 있 는데 정지용 시인도 부친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또한 대학에서 서구의 영문학을 공부하여 근대시 최초의 이미지스트이자 모더니스트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인의 생 가를 나와 긴 돌다리 하나를 건넌 다음 지척에 있는 육영수 여사의 생가로 향했다. 정지용 시 인과 육영수 여사는 두 분 다 이곳 죽향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옥천읍 교동리에 자리 잡아 교동집이라 불려온 99간의 품위가 넘치는 저택은 조선 중기인 1600 년대부터 김, 송, 민의 삼정승이 차례로 살던 집이라 하여 삼정승 집이라고도 하던 것을 1918 년 육영수 여사의 부친께서 사들였는데 이 집에서 처음 태어나신 분이 육영수 여사였 다고 한다. 한 때 육영수 여사께서는 옥천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적도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어 느 고을이든지 향교는 가장 좋은 위치에 세워졌고 그 일대를 교동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의 옥 천향교도 생가에서 멀지 않게 자리를 잡고 있다. 가옥구조는 본채 아래채 위채 사랑채 사당 등이 독립적으로 배치되었으며 충청도 지역의 전형적인 양반가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당시의 생활양식을 아주 잘 엿볼 수가 있다. 이곳의 주산인 마성산에서 흘러내린 산자락 아래 아늑하게 펼쳐진 넓은 울안은 보기만 해도 평화로 운 기분이다. 저 건너 앞산은 아미산이라 하는데 풍수적으로도 아주 좋은 안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 다. 이런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며 과연 훌륭한 명당 터에서 훌 륭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말이 헛되지 않음을 알 것 같았다. 감탄과 흥분으로 충북지역에 보존되어 있는 명소들을 둘러보는 동안 늦가을의 저녁 햇살은 어느덧 서산마루에 걸려 숨박꼭질을 하고 있다. 오늘 하루 뜻 깊었던 견문들을 가슴에 간직한 채 아쉬운 발길을 돌려 서울로 향했다. (2013. 10. 30)
주기영 수필가, 교육자. 1946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대전고등학교와 서 울 동성고등학교 등에서 37년간 봉직함. 황조근정훈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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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 제4차 세계시인대회 개회사를 낭독하는 조병화 대회장
1979 . 7. 2. 롯데호텔
제4차 세계시인대회 개회사를 낭독하는 조병화 대회장
1950년대는 외국 여행이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개인 적인 외화 사용은 허용이 안 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조병화 시인은 주로 P.E.N. 대회 에 참가하며 외국여행을 하였습니다. 첫 해외여행은 1957년 동경에서 열린 국제 P.E.N. 대회였습니다. 그 후에는 거의 매년 해외여행을 하였고 대만의 종정문(鍾鼎文) 시인과 가까워져 세계시인대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조병화 시인은 미국 Baltimore에서 열린 제3차 세계시인대회에서 제4차 세계시인대회를 서울로 유치하고 대회장을 맡아 열심히 준비한 끝에 무난히 대회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국 내 다른 시인 들과 별로 교류가 없었던 때라 걱정을 하였지만, 다행히도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많은 시인들이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고 세계 시인들과 도 친교를 맺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시인들이 한국이라는 우물을 벗어나 세계로 나 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014 + Spring
1979 . 7. 2. 워커힐호텔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에 꿈을 담아주신 분들입니다. (2013년 1월 1일 - 12월 31일)
Ⅰ편운 회원Ⅰ 강대신·강은모·김성기·김수문·김영관·김영수·김용정·김유항·노정익·박규원·박철원·신용극·윤세영 · 윤지원·이인학 이재후·이종호·장현수·장홍선·전찬민·조수남·조 양·조진형·허영자·황상현·황영기·영화기업(주) Ⅰ꿈 회원Ⅰ 강창희·강태흥·공상진·김광규·김대규·김두식·김만헌·김명락·김삼주·김상현·김유성·김종성·김진환·문충성·배호원 서준희·신창재·신철우·유종해·이금기·이병규·이세웅·이수철·이삼윤·이삼일·이철화·이희수·장부웅·정주영·조윤원 지성하·최재성·한영란 정원기업·(주)서한사·(주)퓨쳐워즈·(주)에스텍퍼스트·(주)한농화성·(주)한미글로벌건축사사무소 Ⅰ사랑 회원Ⅰ 강우영·고은봉·곽명규·김동엽·김용건·김종교·문영목·박병근·박순화·박진성·서경석·서재원·안창모·이규호·이영민 정분순·조성걸·차진도·하영탁·서울고 16회 동문회 Ⅰ멋 회원Ⅰ 강일철·고연수·고정순·고희수·권광중·권오재·김가현·김광영·김길수·김명인·김순미·김용담·김용환·김유선·김진석 김홍섭·김희옥·문창욱·민용식·박근준·박덕규·박동환·박민규·박종원·박진영·박태흥·신유은·안유화·오정환·유자효 윤영선·윤진석·이명규·이병근·이상근·이성열·이숙자·이순재·이순희·이종휘·이창우·이태길·이홍섭·이희자·임두영 임명수·임서영·장기학·조건식·조 범·조성홍·주기영·최일화·최재영·한군섭·한선희·한중진·허형만·황선도 Ⅰ법인 회원Ⅰ (재)KPX문화재단·(재)일신문화재단·문봉장학회·동양콘크리트(주)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임원진 명예회장
김영수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 이사장
회
장
박철원
(주)에스텍시스템 회장
부 회 장
허영자
시인ㆍ성신여대 명예교수
감
황상현
법부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사
귀하를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원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편운 조병화 시인은 인간의 숙명적 본질인 고독과 허무에 맞서 반세기에 걸친
김종성
(재)선교재단 상임이사
시작활동을 전개했던 우리 대표시인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김양수
문학평론가
성실성으로 후학들을 교육한 교육자이자 160여 권의 저서를 남긴 문인이자 10
성춘복
시인
여 회의 미술개인전을 연 미술가이기도 합니다.
신봉승
작가ㆍ예술원 회원
강대신
정원산업 회장
김삼주
시인ㆍ경원대 교수
김유항
인하대학 화학과 명예교수
김재홍
경희대 명예교수
김종회
문학평론가ㆍ경희대 교수
고
이
문
사
그분의 제자들은 교육계와 문단에서 이 땅의 문학을 일구어 나가는 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은 물론 법조계와 기업계 등 각 분야에서도 정치・경제・ 사회・발전을 위해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의 많은 독자들은 현 대적 삶 속에서도 그분의 시를 통해 위안을 받고 꿈과 사랑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에 본인을 비롯한 몇몇 제자들이 모여 2006년 10월 사단법인을 설립했습니
노정익
전 현대상선 사장
다. 저희 법인에서는 기존에 유족들이 운영해 오던 편운문학상과 경기도 안성에
박규원
(주)델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위치한 조병화문학관 사업을 지원하고 나아가 한국 시문학 발전에 기여 할 수 있
신용극
유로통상 회장
는 여러 사업을 펴나갈 예정입니다.
송미숙
소야인터내셔널 대표이사
오호수
전 증권업협회 회장
이병규
문화일보 사장
이완섭
(주)세이프라인 회장
이재후
김앤장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조진형
조병화문학관 관장
황영기
법무법인 세종 고문
귀하께서도 저희의 뜻에 동참하셔서 이 뜻 깊은 기념사업을 함께 이루어 주시 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
후원 회원으로 모십니다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는 편운 조병화 시인의 꿈과 인간 사랑의 시 정신을 드높이고 한국 시문학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데 뜻을 함께 하는 여러분을 후원회원으로 모십니다. 뜨거운 성원 있으시기를 고대합니다.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원가입 신청 및 약정서
자택
전화
직장
FAX :
휴대전화 개인 회원
주민등록번호:
우편 FAX 발송용
(남 / 여)
이름
E-mail : 자택
직장 절
주소 CMS 매월납부
1만원(멋회원)
2만원(사랑회원)
3만원(꿈회원)
10만원(편운회원)
직접입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원
취
후원종류
선
후원금 CMS(Cash Management Service) 자동이체 동의서 CMS는 금융결제원과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가 계약을 맺고 자동이체 출금을 의뢰하는 납부방식입니다. CMS 자동이체를 신청하시면 희원님이 직접 은행에 가시는 번거로움 없이 매달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납부할 수 있으며 출금 수수료가 들지 않습니다.
예금주 이름
예금주 주민등록번호
출금 은행
계좌번호
이체 금액
월 ______________원
출금일 선택
10일
25일
홈페이지 http://www.poetcho.com 에서도 회원가입을 하실 수 있습니다.
위 사항과 같이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를 후원할 것을 약속하며, 귀 사업회의 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2014년
월
일
후 원 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인)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2길 6(105번지)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110-530) 전화. 02-762-0658 팩스. 02-3673-0436 Email. poetch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