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가을 Ⅰ Vol.18
동북아 물류 중심기지
조병화 시 전집 조병화 시인의 꿈 사랑 멋, 고독과 허무를 넘어선 그가 펼치는 문학의 향연. 독자친화적인 시 세계를 통해 시와 삶이 조화롭게 조우하는 시의 현장. 쉽고도 깊이 있는 조병화 시의 향기와 사유의 깊이를 만나다.
전 6권/ 조병화문집간행위원회/ 국학자료원 ISBN 978-89-279-0213~3(set)/ 전권 550,000원
문의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tel. 02-762-0658 e-mail: poetcho@naver.com
제24회 편운문학상 시상식 2014. 5. 10 조병화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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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을 진행하는 김종회 경희대 교수 김광규 편운문학상 운영위원장과 박태일 수상자 가족 송재학 수상자에게 상패를 전달하는 조진형 관장 심사경과를 보고하는 허영자 문학상 심사위원장 영예의 수상자, 심사위원과 내빈들 축시를 낭송하는 종로문협 강정수 사무국장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하여 추모묵념 2014 + Aut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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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가을Ⅰ Vol.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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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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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와 그림
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소망
새로운 만남에 의한 눈뜸ㆍ전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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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향기
제9회 편운 시 백일장
조병화 사백을 기리며ㆍ김양수
심사평·입상작·입상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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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육성을 듣다
꿈의 글마당
성춘복 시인 편ㆍ조병무
편운, 종로문인들의 가슴에 영원하리ㆍ채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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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론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Ⅱ
죽음의식과 삶의 언어ㆍ홍용희
열차를 놓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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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편운문학상
조병화를 추억한다
심사평·수상소감
나의 아버님 조병화 2ㆍ조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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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가 만난 조병화
전형적인 기호인(畿湖人)ㆍ선우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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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
Poetry International Rotterdam 1987에서 자작시를 낭송하는 조병화 시인
편운문학상 시터
제14회 수상자ㆍ나태주, 조예린, 이숭원
30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Ⅰ
입춘
표지Ⅰ제자·그림_ 조병화
2014 가을Ⅰ Vol. 18
등록번호 서울 사02178 발행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발행인 박철원 편집인 조진형 편집주간 김삼주 편집위원 김종회 박덕규 박주택 홍용희 편집장 장우덕 주소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2길 6(혜화동 105) (우)110-530 전화 (02) 762-0658 팩스 (02) 3673-0436 홈페이지 www.poetcho.com 이메일 poetcho@naver.com 디자인 디자인 연 플러스 (02) 2273-8916 인쇄 예작만들기 발행일 2014년 9월 1일 『꿈』은 잡지윤리실천강령을 준수합니다.
화보 조병화의 문학세계·제11회 조병화 시 축제
조병화의 문학세계
2014. 5. 10 조병화문학관 2014. 6. 14, 21 혜화동주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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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 Aut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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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엽 교수, 이형권 교수, 홍용희 교수 정세균 의원, 김영종 종로구청장, 임순만 혜화동장 종로문협 윤영석님의 시낭송을 듣는 청중들(조병화문학관) 혜화동 <편운과 시영의 집>에서 뒷풀이
2014 + Aut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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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복 교수, 박윤우 교수, 이숭원 교수 윤석산 교수, 이상호 교수, 장경렬 교수, 김종회 교수, 김삼주 교수 <하모니 만돌린 체임버> 악단의 공연 혜화동문학산책- <한무숙문학관> 관람
제11회 조병화 시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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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편운 시 백일장 수상자들과 심사위원들, 조진형 관장 제7회 꿈나무 시낭송대회에서, 미곡초등학교 이정원 양 기획전시 <조병화 인물소묘전> 테이프컷팅식 안성문협 방효필 부지부장의 ‘안성 시 읽는 날’ 시낭송
2014. 5. 9 ~ 10 조병화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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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02 시 백일장 장원 김민정 씨에게 상장을 수여하는 조진형 관장 04 <조병화 시 전집>을 부상으로 받고 기뻐하는 톡톡플러스 지역아동센터 참가자들과 효공스님, 김용정 대표 06 <조병화 인물소묘전> 전시장 전경 08 조병화문학관을 떠나는 이기호 해설사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는 조진형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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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시와 그림 소망
2014 + Aut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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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향기 조병화 사백을 기리며 김양수
조병화(趙炳華) 사백(詞伯)을 기리며 _김 양 수
조병화 선생은 1949년 첫 시집인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을 펴내면서 시인으로서의 문 학 활동을 전개하셨는데, 80세 초반에 이르러 생을 마감하실 때까지 무려 50여 년 세월 동안 시집 50여 권을 상재하시는 기록을 남기셨다. 그러니까 시인으로 등단한 이래 거의 매해 시집 한 권씩을 펴내신 셈이다. 이 기록은 비단 한국 시단만이 아니라, 세계 시사(詩史)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다. 조 선생님은 시를 집필하는 문장 수법에 있어 독특한 시어(詩語)를 조탁해내는 기존 시인들 이 해 온 관례와는 달리, 그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생활 용어들을 옆에 있는 친구와 담소 나누 듯 그대로 써내려갔다는 점을 여러 평론가들이 지적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읽는 이들로 하여 금 친근감을 들게 했다고 본다. 그러니 선생님의 시집들 분량으로 보나, 시 작품 문장 형식으로 보나, 이 분은 시집을 마치 일기 써내듯 했다고도 말할 수 있으며, 시 내용 또한 그렇듯 현실과 직면해서 보고 느낀 것을 직설적으로 옮겨놓은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초기에는 기존 시 문장에 익숙한 문인이나 일반 시 애호가들로부터 ‘조병화의 시 는 유행가 같다’고 빈정대는 소리마저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같은 조롱이 떠돌건 말건 선생 은 알기 쉬운 일반 생활어로 50년 세월을 거침없이 수월하게 써 오셨다. 곁에 있는 이들에게 허물없이 자신의 느낌을 담소하듯 펼쳐놓은 시행(詩行)을 접하면서, 그 시의 알기 쉽고 친근 한 속삭임에 은연중 이끌려 들어 거기에서 정감과 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친근감이 정감으로 번지게 된 시 줄들을 더듬어 들어가면 결국 선생이 삶을 헤쳐 나가면서 깊 숙이 체감해 오신 ‘외로움’이 형상화되어 다가오는 것이다. 곁에 있는 친구에게 끊임없이 줄줄이 속삭이는 듯한 친근감을 불러일으킨 언어들이 결국 맺힌 외로움의 뇌까림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그 외로움의 근원지이면서 동력이기도 한 생장기를 더듬어 들어가 봐야 할 것이다. 선생은 1921년 경기도 안성 양성면 난실리에서 조 두원(趙斗元) 가의 5남으로 태어났다. 이복형제가 앞에 2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내였던 시인께서 초등학교에 미쳐 입학하기 전 연로했던 부친이 작고하자, 선생의 모친은 고향인 난 실리를 등지고 시인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하여 생계를 돌보며 시인을 학교에 보냈다. 모친 혼 자 힘으로 아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고자 서울로 데리고 와서 생활비와 교육비를 버는 일에 몰 두했다. 이 모자의 생활 환경이 시인의 ‘외로움’을 키워낸 시발처였다. 시인의 어린 시절을 술 회한 수필집 『구름이 흘린 것들』이란 글을 보면, ‘어려서부터 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습니다. 2014 + Autumn
극도로 혼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 자연히 혼자 생각하고 혼자와 문답하고 혼자를 사는 것 이 즐거웠습니다. 눈이라는 작은 마음의 창을 열어놓고 세상 사람들을 많이 구경하면서 자랐 습니다. 그리고 귀라는 작은 영혼의 문을 열어놓고 실로, 멀리 들리지 않는 것까지 들으며 자 랐습니다. 신비로운 세상을 신비롭게 들으며, 보며, 혼자서, 혼자서 자랐습니다. 그러는 동안 에 나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는 것을 즐겨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쓰고 그리며 만드 는 것에 취미를 붙였습니다. … 혼자서, 혼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랬 습니다. … 이러한 혼자 속에서 나는 자랐습니다. … 이 혼자야말로 내가 혼자서 성숙한 큰 에 너지, 그 원동력이었습니다.’ 사무치는 외로움 가운데서도 조 선생께서는 모친의 지극정성으로 경성사범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가서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도 뛰어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왔다. 8·15광복을 맞아 모교인 경성사범에 몸담았다가 가장 존경하는 스 승이 정치적 좌우 이념싸움의 틈에서 곤욕을 치르는 현실을 직시하고는 그 혐오감에 분연히 그곳을 박차고 나와 인천의 제물포고등학교 전신인 인천중학교(6년제)에서 전공인 물리, 수 학 교사를 지내다가 서울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인천중학교 시절 맺어진 필자와의 인연 은 이후 선생이 타계하실 때까지 이어졌는데, 아직도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땀 흘리며 럭비 시 합에 몰두하시던 모습, 수업 시간에 칠판 한 구석에 자작시를 적어 놓고 학생들에게 소개하시 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방과 후에는 역시 고인이 되신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이경성 선 생들과 나이 어린 필자를 대동하고 대폿집 순례에 나서셨다. 선생은 교직에 연륜이 쌓이자, 경희대학 교수로, 문리과 대학장으로, 이어 인하대학교 문과 대학장으로 옮겨서 동교 부총장과 대학원장의 직무를 수행한 다음 정년퇴직하여 교직을 떠났 다. 시인으로서의 활약은 50여 권의 시집 출간과 더불어 한국문인협회 이사장과 한국시인협 회장을 지냈으며, 우리나라 문인 가운데서 국제펜클럽 행사의 명의로 가장 많은 해외여행을 즐겼으며, 세계 각국 문인들을 서울로 초청한 제4차 세계시인대회장을 맡기도 하여 우리 문학 과 문단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겨 ‘꿈’의 향기를 넘치게 했다.
김양수 문학평론가. 1933년 인천 출생. 한국문인협회 경기ㆍ인천지회장, 인천시 문화재위원, 한국예술평론가협희회장, 한국문학 평론가 협의회장, 편운문학상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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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육성을 듣다 성춘복 시인 편ㆍ조병무
대담 _ 조 병 무
성춘복 시인. 1936년 경북 상주 출생. 성균관대학교 졸업. 『현대문학』으로 등단. 을유문화사, 삼성출판사 편집국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SBS문화재단 이사 등을 역임. 월탄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국제펜문학상, 한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 저서로 시집 『오지행』 등, 수필집 『길을 가노라면』 등, 비평집 『화두와 때깔』 등이 있음.
2014 + Autumn
조병무(이하 조)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시간
성 혜화동 일대가 제가 평생 산 곳이기 때문에 편운 선생님
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인터뷰는 선생님과 편운 조병
이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집과 사무실에 머무셨을 때는 항상
화 선생님과의 지나간 여러 추억들에 대해서 말씀을 듣도록
만날 수 있었지요. 한때는 선생님과 같은 방에 책상을 놓기도
하겠습니다. 조병화 선생님의 풍모를 기억하자면, 그림도 그
했었고 선생님 사무실 문을 나서면 바로 앞에 사무실을 얻어
리시고, 파이프도 즐기시고, 항상 베레모를 쓰셨지요. 그 모
서 생활을 했었지요.
습이 저는 아직도 인상 깊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편운 선생 님의 풍모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어떤 기억을 갖고 계신지요.
조 옛날 명동은 문인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였지요, 그곳에
선 만나시지 않으셨는지요?
성춘복(이하 성) 평생 늘 같은 모습이셨어요. 베레모와 상
성 저와는 명동에서 그리 자주 만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의 주머니에 꽂은 손수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낡은 목도
그 당시 문인들이 명동 아니면 광화문 국제극장 뒤켠에 있는
리를 잘라서 만드신 것이죠. 주머니에서 뽑으면 잘린 올이 딸
술집들이라든지 찻집에 많이 출입을 했었지요. 조 선생님은
려 나왔지요. 그리고 담배를 즐기시진 않아도 늘 들고 다니셨
<낭만> 혹은 <신신>이라든지, 그쪽을 많이 이용을 하셨지요.
던 파이프, 이런 것이 편운선생님의 특징이었습니다. 저는 그
조 편운선생님께서는 김광섭, 황순원 선생님 같은 분들과
당시에 담배를 많이 피웠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파이프를 청
자주 교우를 하셨지요.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국문학가협
소하는 기구들과 담배쌈지라던가 수습하는 것들을 같이 가지
회 외에 자유문학가협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의 이야기
고 다녀야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하지만 거추장스러우셨던지
를 좀 해주십시오.
잘 갖고 다니시진 않으셨어요. 평생을 그 모습 그대로 세계를 돌아다니시며 사셨지요.
성 한국문학가협회와 자유문학가협회 두 갈래로 나뉘어 있
었던 것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한국문인협회가 탄생되었지요.
조 편운선생님께서 꽂고 다니셨던 손수건은 낡은 목도리
조병화 선생님이 광화문 일대에 자주 가셨던 이유는 오랫동
를 오려서 만들었다고 하셨는데요, 특별한 연유라도 있었던
안 서울고에서 교편을 잡으셨고, 그 다음에 경희대로 옮기셨
것일까요?
는데 그 출퇴근하시는 길목이 광화문이었어요. 그래서 주로
성 저는 그 연유를 추적하기 위해서 선생님께 계속 여쭤봤
그쪽에서 만날 수 있었던 분들이 한국문학가협회 쪽보다는
어요. 어디서 생긴 목도리인데 그렇게 잊지 못해서 노상 꽂고
자유문학가협회 쪽에 가까운 문인들이었지요. 그런 자유문
계시냐고. 제 물음에 대답을 하진 않으시고 그저 누군가에게
협 쪽 사람, 또 북쪽에서 피난 온 문인들 대다수와 교유가 있
받은 좋은 선물이었는데 그 사람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 있는
으셨습니다.
정도로만 알고 있어요. 단순히 모양만으로 늘 꽂고 다니신 것 은 아니었지요. 조 또 편운 선생님은 시간약속을 정확히 지키셨다고, 약속
시간의 15분 내지 30분 전에 먼저 나가셨다고 하는데요.
조 자유문학가협회에서 『자유문학』이라는 잡지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성 『현대문학』출간과 함께 경쟁적인 잡지로 나왔지요. 『현
대문학』보다 일찍이 폐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문단의 상
성 정확하셨죠. 조금만 늦었다 하면 무슨 사람이 그러느냐
황을 보면 그런 문예잡지가 분화되는 과정이었어요. 그러나
고 야단을 치셨지요. 시간이나 약속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더
조병화 선생님은 그런 것을 비교적 초탈해서 사람들을 만나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확실하셨습니다. 약속에 늦는 사람
고 작품 교류도 하셨습니다.
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조 철저한 생활인이셨군요.
조 조병화 선생님의 문단 교우관계를 말한다면, 주로 어떤
분들과 가까웠습니까? 성 아까 말씀드렸던 자유문학가협회 분들과, 그 이후에는
성 그렇지요, 그 당시엔 그런 분들은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세계시인대회로 인해 새로운 교유상대가 생기게 됩니다. 제
그때는 교통사정도 좋지 않았고 이십분 삼십분씩 늦는 것이
가 조병화 선생님과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졌던 것은 1979년
다반사였으니까요.
제4차 세계시인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게 되는 과정에서 조
조 편운선생님과 주로 만나셨던 장소는 어디입니까?
병화 선생께서 책임을 맡으시고, 돌아가신 김요섭 선생을 비 10 + 11
시인의 육성을 듣다 성춘복 시인 편ㆍ조병무
롯하여 김광림 시인, 김혜숙 시인과 제가 준비를 맡게 되어
딱딱한 과학 분야에서 문학적인 이야기나 멋쟁이로써의 풍모
사무실을 만들어 놓고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한 것이 계기
들이 사제 간의 우애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라
였습니다.
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제자들을 중심으로 조
조 어떤 일화에 보니까, 김광림 선생이 문학강좌를 하면서
병화 시인을 기리는 모임이 왕성하게 유지가 되고 있습니다.
조병화 선생님의 시에 대해 조금 좋지 않게 얘기를 해서 한때
조 편운선생님은 또한 경희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계시다가
서로 서먹서먹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리대학장과 교육대학원장을 역임하시고, 인하대학으로 옮
성 그런 것은 참 많았어요. 저는 그런 평들은 시에 대한 이
기셔서 부총장까지 하시며 왕성한 교육활동을 하셨습니다.
해의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쉬운 언어로 시를 쓴다고, 또 다
뿐만 아니라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및 한국시인협회, 예술원
작을 한다고 좋은 시가 아니라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회장 등 쟁쟁한 이력이 있으십니다. 조병화 선생님의 이런 이
조 편운 선생님은 서울고에서 수학 선생님을 하셨다고 했
는데, 시인으로써 수학을 가르치셨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잘 연결이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력과 활동들이야말로 우리 문학사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고 도 볼 수 있을 텐데요. 성 보통 그러한 위치가 잘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문단에 책
성 조병화 선생님의 원래 전공은 물리였습니다. 동경 수학
임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흔하지 않을 때였습니
이후 서울고에서 교편을 잡으실 때는 수학, 물리, 화학이 전공
다만, 선생님께선 포용력이 많으셨고, 또한 지인들이 많으셔
이시며 연구자였으니까 당연한 것이죠. 그러나 그 외의 생활
서 문단의 어려운 일들을 쉽게 처리하셨지요. 그래서 서로들
은 문학과 시였거든요. 옛날에는 선뜻 시인과 수학교사가 연
많이 모셔가려 했었고, 그러니 여기저기서 뒷말들이 별로 없
관이 안됐기 때문에, 많이들 신기해했습니다.
었지요.
조 당연히 문학을 가르치셨을 거라 사람들이 많이 생각하
지요. 성 지금까지도 서울고 제자들과 인연이 깊은 이유는 그런 2014 + Autumn
조 특히 편운선생님은 여행을 많이 하셨고, 여행에서 얻어
진 문학적인 소득이 대단히 많으셨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도 더불어 여행을 자주 다니셨지요?
성 수십 번 정도가 아니고 거의 평생 같이 여행을 다녔다고
인망이 두터웠지요. 그래서 조직을 만드는데 김요섭씨가 추
할까요. 출발점은 1979년의 세계시인대회를 시작하면서 지
천을 했습니다. 저와 김혜숙씨가 사무실을 지키며 진행을 했
원을 받아서 편운 선생님과 저와 김혜숙 씨와 동양 3국 여행
으면 좋겠다고 해서 준비를 하며 대회를 유치하여 제4차 세계
을 시작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를 다녔습
시인대회를 열었습니다. 그 당시에 행사에 반대하는 사람들
니다. 또 가보지 못한 새로운 나라들을 여행할 때는 서로 연
이 훼방을 놓기도 했지만 그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큰 대회
락을 하여 같이 다녔습니다. 제가 볼 때는 조병화 선생님은 방
를 성황리에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전후에 여러 나라에서
학이라든가 틈이 날 때 마음을 터놓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
열린 세계시인대회들과 비교해서도 가장 많은 나라에서 가장
는 곳이 국내보다는 해외였지 않을까 싶습니다. 떠날 때는 항
많은 시인들이 모였던 그런 큰 잔치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상 만년필에 든든하게 잉크를 채우고, 스케치북을 주머니에
조 대회가 대단히 성황을 이루었고, 저도 그때 시를 낭송한
꽂았지요. 어느 곳에서나 수도 없이 그려내던 스케치들이 생
사진을 아직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영광이지
각납니다. 저도 덩달아서 스케치와 만년필을 사 모으는 것을
요. 그러면 편운 선생님의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겠습니
그때부터 시작했지요. 그러면서 여행을 참 많이 다녔습니다.
다. 편운 선생님은 창작시집이 53권, 시선집이 28권, 시론집
조 지금도 성춘복 선생님께서는 여행도 많이 다니시고 스
이 5권, 수필집이 38권, 번역서가 26권, 화집이 5권 등, 160여
케치도 많이 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에 조병화 선생님께 영향
권의 저서가 있습니다. 특히 시집은 매년 한 권씩, 더러는 두
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권씩도 내셨던 다작의 시인이셨습니다. 그것을 좋지 않게 평
성 그렇지요. 그분이 스케치하실 때 저는 가만히 있을 수 없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작품을 그렇게 생산할 수 있다는 것
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서 풍경을 그리실 때면 저도 반대방향
은 엄청난 시적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
을 보고 스케치를 하고 그랬지요.
게 생각하시는지요.
조 두 분께서 상당히 마음이 맞으셨겠네요. 성 그렇지요. 맞지 않았다면 같이 그렇게 여러 곳을 여행
할 수는 없었겠죠. 조 한국에서 열린 제4차 세계시인대회에 대한 말씀을 더
해주십시오.
성 시집을 많이 낸다는 것은 작가의 역량입니다. 그렇게 시
들을 많이 쓸 수 있고 그것을 시집으로 묶어 독자들에게 사랑 을 돌려준 그런 시인은 조병화 선생님 말고는 없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선생님은 놀라울 정도의 다작의 시인 으로 한국문학사에 남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모든 시집이
성 3차 세계시인대회는 미국 볼티모어에서 이루어졌습니
한결같은 그분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흔한 남녀
다. 세계시인대회의 출발은 필리핀이었지요. 2차 대만, 3차
의 사랑이 아닌 정신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지요.
미국을 거쳐서 4차 대회는 한국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대회장
조병화 선생님은 평생을 고독하셨고 외로운 의식이 강했던
을 편운선생님이 맡으면 어떻겠느냐, 라는 이야기가 나왔어
섬세한 시인이었습니다. ‘사랑’이 없었으면 조병화 선생님은
요. 조병화 선생님께서는 그런 큰 대회를 치룰 수 있을 만큼
그의 시 뿐만이 아니라 그의 삶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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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육성을 듣다 성춘복 시인 편ㆍ조병무
도 선생님의 시집들을 읽을 때면 그 ‘사랑’의 철저함에 대해
나는 긴 인생을
서 놀라고 있습니다. 조 편운 선생님의 시를 보면, 근본적으로 사랑의 바탕 위에
나는 당신을 만난 것을
고독, 허무, 그리고 꿈들이 보입니다, 첫 시집인 『버리고 싶은
후회합니다
유산』을 보면 그런 감정적인 표현들이 상당히 많이 나타나 있
그리고 당신을 사랑한 것을
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집인 『하루만의 위안』이 나올 무렵
후회합니다
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세 번째
그리고 당신과 헤어진 것을
시집인 『패각의 침실』을 내셨는데요. 서문에 이런 말을 쓰셨
후회합니다
습니다. “식민지의 등대처럼 나는 내 어둠을 비친다.” 또 시집 을 보면 아기를 밴 소녀의 이야기라든지, 자살한 여인의 이
그리고
야기 등이 나옵니다. 이처럼 편운선생님은 직관적인 상황이
당신과 만난 것을 고마운 인연으로,
나 자연 속에서의 인간적 삶의 모습을 많이 그려내셨습니다.
당신과 헤어져서 잊지 못하는 것을 사랑으로,
성 그렇습니다. 1996년에 나온 제43 시집 『서로 따로 따로』
에 실린 「나는 긴 인생을」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한 번 읽어
이렇게 오래 긴 세월을 하늘의 은총으로 살고 있습니다.
보겠습니다. 인생이 그런 것처럼.
2014 + Autumn
성 여기서의 ‘사랑’은 ‘만남’과 ‘헤어짐’을 전후로 하여 놓여
다면 작품도 닮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초적인 인간
있습니다. 이렇게 잊지 못하는 ‘사랑’을 은총으로 살고 있습니
의 생리는 사랑이라고 편운 선생님께서 생각하셨듯이, 저도
다. ‘인생이 그런 것처럼’이라는 끝 행에서, ‘그런 것’은 결국
그런 생각입니다.
‘사랑’입니다. 즉 ‘내’가 곧 사랑이라는 것, 내가 ‘사랑’이므로 사랑을, 사랑만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조 선생님과 조병화 선생님과의 다른 일화랄까요, 옛날에
프랑스문화원에서 조병화 선생님께서 초대 시화전을 프랑스
조 ‘사랑’이라는 커다란 주제가 조병화 선생님의 모든 시들
화가 Reva Remy와 함께 여셨을 때 선생님이 많이 도움을 주
을 관통하고 있군요. 다른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현재 안성
셨다고 들었는데요, 그것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에는 조병화문학관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가보셨지요?
까요. 선생님께서도 지금까지 스케치를 많이 하시지요?
성 그렇습니다. 조병화 선생의 무덤과 선생님의 어머님 무
성 이 이야기는 꼭 하고 싶은데, 조병화 선생님이 스케치를
덤이 나란히 있습니다. 원래 편운재가 있었고, 그 후에 청와
그리고 계시면 옆에 동행자들이나 지인들이 와서 보다가 “선
헌이 들어섰고, 지금 문학관이 제일 나중에 생겼지요. 점점 확
생님 그림 하나 주실 수 없습니까?” 하면 그리신 걸 바로 뚝뚝
대가 되었습니다.
뜯어서 주셨단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나중에 전시도 하셔야
조 혜화동에 있던 조병화 선생님의 집필 서재를 그대로 편
할 텐데 어쩌시려고 그걸 다 뜯어 주십니까?”하고 말씀드리
운재에 옮겨 놓았는데, 선생님께서 실제로 많이 사용하셨던
니까 “그럼 또 그리면 되지”하셨어요. 저도 그걸 따라서 지금
물품들이 그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한층 의미 깊다고 할
여기 스케치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다 그려서 남에게 주었
수 있겠습니다.
지요. 지금은 반성을 합니다만, 어쨌든 조병화 선생님께서는
성 저는 우리나라 문학관 중에서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잘
우리 주위에 많은 그림을 그렇게 남기셨습니다.
보존하여 기념하는 것은 조병화문학관이 으뜸이라고 생각합
조 『서로 따로 따로』시집 뒤편에는 편운 선생님께서 스케
니다. 벌써 돌아가신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유족들이 잘 운영
치하는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비록 선생님께선 돌아가셨지
을 하여 언제나 그곳을 가면 살아생전의 조병화 선생님의 숨
만, 요즘 성춘복 선생님께서 스케치하는 모습을 보면 편운 선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생님의 모습과 판박이 같습니다. (웃음) 선생님, 오늘 선생님
조 인터뷰 전에 선생님께서는 본인의 이야기보다는 조병
을 모시고 여러 좋은 말씀을 더 듣고 싶은데 시간이 다 되었습
화 시인에 대해서 이야기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선
니다. 짧게 인터뷰를 정리하자면, 편운 선생님께서는 실로 많
생님 본인의 문학세계나 근황에 대해 아니 여쭤볼 수 없겠습
은 시들을 쓰셨고, 또한 그 시들에는 공통적으로 ‘사랑’이 기
니다. 선생님께서 작품을 쓰실 때는 어떤 것에 중점을 두시
본 근간을 이루고 있다. 또한 고독과 허무, 인간과 인간의 소
는지요?
통문제 등을 시인 자신이 치열히 삶으로 겪으며 시를 써서 우
성 주로 저도 사랑입니다. 조 선생님과 저는 세상물정 모르
리들에게 감동과 위안을 주었다, 이렇게 오늘의 인터뷰를 정
는 것, 주머니 사정이나 여행 가는 방법 등이 너무 닮았어요.
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앞으로도 좋아하시는 여행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저 혼자서라도 자주 세계를 돌아다
도 많이 다니시며, 좋은 시들도 많이 써 주시길 바랍니다. 오
녔습니다. 이런 것들은 아마 제가 조 선생님께 배웠고, 그렇
늘 인터뷰 감사합니다.
조병무 문학평론가, 시인. 1937년 출생.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동덕여대 문창과 교수 등을 역임. 현대문학상, 국제펜문학상 등 수상. 저서로 문학평 론집 『가설의 옹호』 등, 시집 『꿈 사설』 등, 수필집 『내 마음 속의 숲』 등이 있음. 현 한국문인협회 권익옹호위원장,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 문학의 집 서울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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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론 죽음의식과 삶의 언어 홍용희
죽음의식과 삶의 언어 - 조병화의 시 세계 1. 죽음과 삶의 완성
_홍 용 희
조병화의 시 세계는 이와 같이 ‘무’로서의 죽음의 직시를 통
조병화는 1949년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한 이래 53권
해 “자기를 살다 가는 것”의 가치와 의미를 터득하고 더 나아
의 창작시집과 38권의 수필집, 다수의 시론서, 번역서, 화집
가 이를 실현하면서 스스로 자기 구원을 향해 나가는 과정을
등을 간행하며 우리 시사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고 꾸준한 창
선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그의 시 세계의 주요 이미져리를 이
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 땅의 굴곡 많은 현대사를 통
루는 고독, 허무, 작별 등도 기본적으로 죽음의식에서 비롯되
과하면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삶의 원상을 깊이 있게 탐색하
는 것으로 보인다.
고 향유하고 노래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의 시적 정 서와 언어 감각은 체험적 생활에 바탕을 두면서 쉽고 친숙하
2. 죽음과 불안에의 용기
게 대중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조병화의 시적 삶은 해방 공간의 혼란과 전쟁의 폐허 속에
가 이와 같이 일생에 걸쳐 밀도 높게 자신의 본래적 삶을 추구
서 출발한다. “생존의 탁류, 혼류 속에서 나를 잃고 말았던” 해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죽음
방 직후의 혼란은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의식에서 찾아진다. 그에게 죽음 의식은 초기 시 세계부터 절
“6.25를 예언한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 꼭 일어날 것만 같은 막
실한 존재론적 인식의 대상으로 작용한다. 그의 시적 삶의 출
다른 현실의 불안”이 현실화 된 것이다. 그러나 조병화는 이러
발부터 겪게 되는 해방기의 극심한 혼란과 전쟁의 참상에 대
한 불안 속에서 불안한 현실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근원적
한 직접적인 체험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인 본래의 나를 향해 나간다. 죽음의 불안에 해당하는 “제로”
일반적으로 죽음은 종교적 절대자에 대한 의존의 계기가 된
지점에서 “내가 무엇이고, 내가 어디에 있을 사람이고, 내가
다. 종교는 죽음으로부터 영원성을 향한 구원을 강조한다. 그
어디에 있어야 하며, 내가 어디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를”
리스도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사는 천국’을 강
새롭게 탐문한다. 낯설고 섬뜩한 죽음에의 불안 앞에서 문득
조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인간은 신의 충만과 영원성에 귀
자신의 참모습을 찾고 있는 것이다. 불안의 기분이 자신을 근
의함으로써 유한적 존재자로서의 결핍으로부터 구원받는다.
원적 중심으로 이끌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정황은 하이데
이를 위해 때로 지상의 삶을 속죄의 과정으로 신에게 바치기
거의 불안에의 용기와 직접 상응한다. 하이데거에게 불안이
도 한다. 종교의 충만과 영원성은 인간의 죽음-유한성-을 죽
란 내가 진정한 현존재로 실존하도록, 다시 말해서 자신의 고
이면서 동시에 삶도 죽이는 과정을 추구한다. 그러나 조병화
유한 존재를 자각하면서 그것에 책임을 지도록 몰아가는 근
에게 죽음 의식은 절대자에 대한 귀의가 아니라 유한자로서
본 기분이다. 불안을 통해 현존재는 자신만이 떠맡아야 하고
의 삶의 존재론적 결핍의 조건을 직시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에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는 죽음을 앞 둔 불안과 고독과 허
직면하게 되며, 그러한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자신의 가능성
무 속에 있는 단독자로서의 존재성으로부터 스스로 진정한
으로 떠맡도록 처해진 존재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현존재가
자유와 구원을 성취해 나간다. 그에게 삶은 죽음을 포함하고
스스로 본래적 실존으로 다가가서 단독자가 되는 사건이 불
있으며 더 나아가 죽음을 통해 완성되어 나간다. 그는 살면서
안에의 용기이다. 특히 이러한 불안의 요소 중에 죽음은 우리
죽고 죽으면서 산다. 그에게 삶은 “자기를 자기답게 살아가는
를 위협하는 가장 섬뜩하고 낯선 힘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철학”인 것이다. 그래서 존재를 통해 무로 다가갈 수 있으며
불안에서 도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불안은 세계의 근원적
무를 통해 존재로 다가갈 수 있다.
인 개시의 계기가 된다.
2014 + Autumn
물론, 이것은 죽음을 도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할 때 가 능하다. 다음 시편은 이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용 없”다.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죽 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죽음으로 인한 불안에의 용기와 결단의 자세로 해석된다. 불안에의 용기와 결단을 통
①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네 죽음을 보고 있
과할 때 죽음이 개시하는 본래적 삶의 가치를 만날 수 있다.
습니다// 지금 너의 눈을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네, 죽
“내가 사랑하는 사람조차/ 날더러 마지막 탈피를 하라고” 쓰
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찾고 있
고 있는 것은 스스로 비본래적 삶의 굴레로부터 “마지막 탈
는가?/ 네, 죽음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피”를 위한 자기 확인과 결의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고민하고 있는가?/ 네, 죽음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 「밤의 이야기 1」부분
해방 정국과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고 온 혼란과 죽음의 불 안이 조병화의 시적 삶에서는 자신의 본래적 삶을 개시해 주 는 계기로 작동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죽음에 이르는 불
② 유달리 죽음은 날더러/ 마지막 탈피를 하라고 지근덕
안의 극점에서 어떠한 일상적 가치로도 환원될 수 없고 다른
거립디다/ 나는 그럴 때마다/ 죽음에 반항을 하여 보았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나 자신의 본래적 존재
요// 그러나 다 소용 없는 장난이었어요/ 철석 같은 사색
를 찾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과/ 반항도 운명으로 돌아가는걸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 조차/ 날더러 마지막 탈피를 하라고 합디다
3. 죽음의 선취와 본래적 삶의 구현 - 「탈피」 전문
죽음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면서도 가장 낯설다. 죽음이 존재 한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누구도 죽음을 체험한
시 ①은 “죽음”과 마주하며 “죽음”을 “보고” “생각”하고 “찾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 - 내- 존재의 총
고” “고민”하는 자세를 비장한 어조로 그리고 있다. 죽음을 선
체성은 탄생과 죽음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현존
험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추상화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있는
재를 전체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
그대로 정면에서 받아들이고 탐색하고 사유한다. 이때 그는
어야 한다. 그러나 탄생이 지나간 사실이지만 현재에도 지속
현존재성에 대해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5미
되듯이 죽음은 미래에 닥쳐올 사실이지만 현재를 지배하는
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아직-아님의 세계이다. 현재를 지배한다는 것은 죽음이 미래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밤
에 해당하지만 내가 앞질러 죽음을 선취하기 때문이다. 쉽게
의 이야기·17」)라고 스스로 감득하게 된다. 죽음의 심연에
말하면 나는 이 세계에 이미 던져져 있고 이미 미래를 앞질러
깊이 천착할 때 죽음은 단순히 삶의 종말이 아니라 현존재의
있는 존재이다. 지금 여기 있으며 나는 지금 여기를 앞질러 미
본래적 가치와 의미를 개시해주는 사건이 된다.
래를 선취한다. 죽음은 미래에 닥쳐오지만 나는 미리 앞질러
시 ②는 죽음에의 용기를 통해 자각하는 삶의 지향성을
죽음을 선취할 수 있다.
노래하고 있다. 죽음은 화자에게 “탈피”를 요구한다. 여기에
죽음으로 인한 불안에의 용기를 통과한 조병화의 시 세계
서 “탈피”는 죽음의 반대편에 놓인 삶의 일상성으로 해석된
는 ‘죽음의 선취’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미
다. “나는 그럴 때마다/ 죽음”의 요구에 “반항”을 한다. 이것
삶 속에 내재하는 죽음을 직시하고 있다.
은 일상적 삶의 관성에 대한 집착을 가리킨다. “그러나 다 소 16 + 17
조병화론 죽음의식과 삶의 언어 홍용희
수명에 한도가 있는 육체/ 안에/ 삶과 죽음을 한몸으로 동
“인간은 혼자서 죽는 것/ 인간은 혼자서 죽는 것// 생각을
거시켜/ 잠시 불을 밝히고 있는/ 이 가숙(假宿)// 작별을 하
하며/ 죽는 것을 사는/ 인간들”(「공존의 이유·1」)의 숙명에
며/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항상 떠나는 생각/ 속으로 속
서 “외로움”은 삶의 근원이고 본질이다. 그래서 “외로움”은 아
으로/ 그 오늘을 산다// 삶은 죽음을 품고/ 죽음은 삶을 키
름답고 지혜롭고 평화롭고 은혜롭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고
워/ 한 몸으로 동행을 하는 거/ 동행하다 그 몸 허물어지
유한 참모습을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로운 단
면/ 그 뿐/ 그곳에서 헤어지는 거// 육체는 사그라지며/
독자로서의 순수 고독을 지키는 것이 가장 본래적인 자아를
불은 꺼진다.
발견하고 지키는 것이 된다. 타성적인 일상성의 관계로부터 - 「인간」 부분
단절된 고독만이 자신의 본래적 자아를 구현해 주기 때문이 다. 인간의 존재론적 결핍을 회피하지 않고 이를 수용하고 긍
삶과 죽음이 대립관계가 아니라 공생관계이다. 이미 인간
정함으로써 현존재의 자기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모습이다.
의 “수명”은 죽음이 스며들어 있는 “한도” 속에 있다. 현존재 란 “삶과 죽음을 한 몸으로 동거시켜/ 잠시 불을 밝히고 있는”
4. 죽음을 향한 자유와 삶의 영원성
“가숙”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보면, “삶은 죽음을 품고/ 죽음
조병화는 죽음의 선취를 통해 본래적 삶의 구현을 추구했
은 삶을 키”우는 관계이다. 여기에서 “죽음은 삶을 키”운다는
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의식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노년으로
것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통해 삶의 참모습을 자각하고 향유
접어들수록 죽음을 향한 자유의 지평이 확대되면서 현실 속
할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아직-아님의 끝에 죽음이 있
에서의 본래적 삶의 실현 방법론이 더욱 집중적이고 구체적
지만 죽음의 선취에 의해 현존재는 이 끝을 내면화함으로써
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그의 죽음과 삶의 지
죽음은 현존재 속에 거주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향점이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시
한편, 죽음은 개별적 현존재의 문제, 곧 타인들과 구별되는
세계 전반에 관류하는 “어머니”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에게
나만의 문제이기 때문에 죽음의 선취는 고유한 자신의 존재
“어머니”는 죽음을 향한 지평을 확장시키고 동시에 삶을 향
를 살아가는 방향을 열어준다. 다시 말해, ‘죽음의 선취’를 통
한 자세를 생활 감각 속에서 일깨워 주는 존재자이다. 그의
할 때 현존재는 ‘비본래적인 실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
죽음의 의식과 생활 철학의 극점에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
신의 본래적 가능성에 직면할 수 있게 된다. ‘비본래적인 실
었던 것이다.
존’이란 고유한 자기의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의 방식으로 타인으로 존재하는 관계성 속의 일상적 삶을 가
이제 머지않아 0%로 될 나의 육체는/ 긴긴 그 순수 허무로
리킨다. 따라서 자신의 고유한 본래적 실존은 단독자로서의
생명을 마칠 것이며/ 100%로 될 나의 영혼은/ 긴 긴 그 순
외로움과 고독의 길을 가게 된다.
수 고독에 훤환 날개를 달고/ 우주 어디쯤에 계실 어머님 을 찾아서/ 비상을 할 것이려니//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이
아름다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지혜로운 것은 실로
고통에서 벗어나/ 희열로, 희열로,// “아, 나는 나의 인생
외로움이옵니다/ 평화로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은
을 성실히 다 했노라”/ 하리
혜로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 「마지막 비밀」 부분 - 「낮은 목소리·43」
2014 + Autumn
삶이 “육체”이고 죽음은 “영혼”으로 표상되고 있다. “육체” 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영혼”의 비중이 확장되고 있다. 시적
성과 등가를 이룬다. 개체적 단절이 계통적 영원성으로 이어 지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이미 죽음에 경도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그는 “100% 로 될 나의 영혼은/ 긴 긴 그 순수 고독”으로부터 해방되어 “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
우주 어디쯤에 계실 어머님”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
게 죽음은 “어머님”과의 조우이다. 그래서 죽음은 단절의 두
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
려움이 아니라 “비상”의 “희열”이다. 죽음을 향한 자유가 구가
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되는 대목이다. 그는 “어머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아, 나는 나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의 인생을 성실히 다 했노라”고 보고하고자 한다. 그에게 삶과
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
죽음은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리겠습니다 - 「의자」 전문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꿈의 귀향」)가는 과정으 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에게 “속삭이는 종교”(「어 머니」)이고 내면의 윤리이고 양심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훅
자신의 “의자”를 비워 주는 따뜻하고 긍정적인 태도가 시
떠나신 지/ 어언 수삼 년”이 지났지만, 일상 속에서도 “당신의
적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란 새로운
말씀 그 목소리// 얘, 너 뭐 그리 생각하니/ 사는 거다/ 그냥
한 낮의 시대를 열어가는 주역을 가리킨다. 그들에게 “의자”
사는 거다/ 슬픈 거, 기쁜 거/너대로/ 다 그냥 사는 거다/잠깐
를 비워주는 일련의 과정은 세대교체에 대한 능동적인 수용
이다”(「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라고 일러준다. 어머니
의 자세를 드러낸다. 특히 “아침을 몰고 오는” 미래 세대를 향
는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삶과 죽음의 성찰적 가치이다. 그
한 “그 분”, “어린 분” 등의 존칭은 세대교체의 역사에 관한 겸
의 다음과 같은 전언은 이 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허하고 따뜻한 순응의 자세를 보여준다. 자신이 의자를 비우 고 물러가면 그 “의자”는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에 의해
“살은 죽으면 썩는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 어머님
채워진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는 영원성을 획득한다. 물론 여
의 인생철학 “살은 죽으면 썩는다”라는 ‘죽음의 철학’으로
기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수용의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인생을 시작했고 이 철학대로 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
이를테면 “인간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을 갈망하고//
왔다.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소유하길 갈망하여 헤매지만”, “실로 위대한 거란 죽음만이다”(「밤의 이야기 45」)라는 인식의 전
“살은 죽으면 썩는다”라는 말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
제가 요구된다.
제와 바로 그런 까닭에 몸을 아끼지 말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 다는 명제가 동시에 내재한다. 어머님의 생활 철학이면서 죽 음의 철학이었던 이 말은 곧 나의 삶과 죽음의 철학으로 내 면화 된다. 한편, 이와 같이 어머니와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삶과 죽음 의 철학을 세대론적 순환론으로 보면, 죽음의식은 삶의 영원 18 + 19
제24회 편운문학상 심사평
제24회 편운문학상 심사평
한국 시의 공간적 확산과 미학적 심화 심사위원들은 제24회 편운문학상의 시 부문 본심 대상작인 7권의 시집과 평론 부문 본심 대 상작인 3권의 평론집을 면밀히 검토한 후 한 자리에 모여 논의를 진행했다. 우선 평론 부문 본 심에 임한 심사위원들의 의견은 수상작을 내자는 쪽과 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크게 나뉘었다. 본격적인 시 비평의 위상 및 수준에 도달한 평론집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수상작 후 보로 거론된 평론집의 비평적 특성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전체적 합의에 도달하기 어려웠다. 결국 아쉽게도 평론 부문에서 수상작을 내지 않기로 함으로써 제24회 편운문학상의 시 부문 본심 대상작이 2권으로 늘어났다. 심사위원들은 각각 시 부문 본심 대상작 7권의 시집에 대해 의견을 개진한 후, 우선순위를 정해 2권씩 추천하는 방식으로 심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김명수의 『곡옥』, 박태일의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 송재학의 『날짜들』 등 3권의 시집이 2명의 심사위원에게 추천을 받았고, 한 광구의 『나무 수도원에서』, 함민복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등 2권의 시집이 1명의 심 사위원에게 추천을 받았다. 김명수, 박태일, 송재학의 시집이 동률을 이루었으나, 박태일과 송 재학은 1순위로 2표를 얻고 김명수는 2순위로 2표를 얻었기 때문에, 박태일 시집과 송재학 시 집이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시 부문 본심 대상작이 2권으로 늘어난 까닭에 이 두 시집을 본심 공동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태일의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는 시적 무대를 몽골로 옮겨 시인의 체험과 관찰과 사유 를 담아낸다. 이 체험과 관찰과 사유는 단순히 여행이나 관광의 여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개인의 내면세계에 대한 탐사와 결부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한 사회상과 인간의 모습을 되비추는 거 울이기도 하고, 우리들 각자가 내면세계에서 경험한 고통과 망각, 슬픔과 연민을 되비추는 거 울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말의 숨결을 잘 살려서 구사해온 박태일은, 이번 시집에서 몽골의 2014 + Autumn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열린 제24회 편운문학상 본심(2014. 3. 15)
삶과 풍습과 언어를 우리말의 호흡과 리듬에 자연스럽게 용해시켜 웅숭깊은 서정을 만들어낸 다. 시원적 자연과의 일체, 어머니로 대표되는 가족에 대한 애정, 문명이 주는 고통과 상처에 대한 치유 등이 시적 공감대를 더욱 확대시키고 있다. 송재학의 『날짜들』은 시인이 추구해온 이미지에 대한 미학적 탐사가 그 역동성과 애매성의 은하계를 경유하여 사물의 외양과 본질이 합체되는 성좌(星座)에 도달한다. 이미지의 섬세하 고 복합적인 교호 작용에서 얻어지는 암시와 상징의 신비성을 보존한 채 시와 리듬과 사물 사 이의 상관관계를 천착하여 둥글고 충만한 단순성의 미학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단순성의 미 학은 사물의 외양과 성질이 사물의 본질과 일치하고, 그 사물이나 풍경 속에 시가 이미 존재 했다는 시적 각성을 포함하고 있다. 송재학은 ‘시란 수많은 풍경과 내 몸의 연대’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시인이 사물의 외양에 관심을 두는 것이야말로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라는 이번 시집의 언급은, 풍경이 몸의 연속이라는 사유를 거쳐 풍경 또한 몸의 잠재태라는 성찰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의 공간적 탐구에서 전범을 보여준 박태일 시인과 시의 미학적 성찰에서 전범을 보여준 송재학 시인은 한국 현대시의 공간적 확산과 미학적 심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판단된다. 이 두 시인에게 제24회 편운문학상 시 부문 본심의 영예가 주어진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심사위원: 허영자(장) 김영석, 박윤우, 오형엽(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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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편운문학상 수상소감 시 부문 본상 박태일
고맙고 따뜻한 봄날
박태일 ● 1954년 경남 합천 출생. 부산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미성년의 강」이 당선되며 등단. 1988년부터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 시집으로 『그리운 주막』, 『가을 악견산』, 『약쑥 개쑥』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부산시인협회상, 이주홍문학상 등을 수상.
마음이 감당 못할 크기로 부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쩔 수 없이 그냥 놓아 둘 밖 에. 시도 마냥 아픈 그대로 두기로 한 어느 때부터 조급함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럼 에도 적지 않은 세월, 시에 온몸을 바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웠다. 이십 대 청년이 사십 대가 되고 오십 대를 넘어서는 긴 세월 동안 시는 멀찌감치 나를 기다려 주었다. 시가 없었다면 이 현실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었을까. 누릿누 릿 흔들리는 주름과 앞으로 밀려 나가다 막무가내 끊어지는 시력의 절벽. 그래서 몽골은 더 멀리 나갔다 되돌아오기 위한 느낌표였다. 길을 잃어도 좋았 다. 다시는 오지 못할 듯한 거기서 남쪽으로 머리 들고 바라본 것은 늘 시였다. 아직 한 번도 쓰지 못한 시. 더 뜨겁게 더 오래 사랑해 달라고 믿어 달라고 눈빛 마구 서 성거리는 새벽이었다. 1950년대 전쟁기 편운 조병화 시인은 부산 암남 바닷가를 거닐었다. 천마산 골 짜기를 오내렸다. 영도 섬이 보이는 “하얀 패각 속에서” 소라고둥 같은 학생들과 수업을 했다. ‘여숙’ 부산에서 지낸 세 해 동안 시는 전쟁의 참혹을 많이 감싸 주었 을 것이다. ‘패각의 침실’, 시인 조병화와 부산 바다. 그 인연이 아름다운 바닷가 보리밭 두렁에 조병화 시인이 서 있다. 그 인연이 닿았을 어느 거리에 내 청소년기와 중장년기가 작은 풍선처럼 떠 있다. 먼 곳 남향, 이름 없는 이곳까지 기별을 준 편운문학상운영위원회와 심사위원께 각별한 고마움을 전해 드린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조각 구름 한 점이 나를 경기도 안성 언덕으로 안내해 주었다. 고맙고 따뜻한 봄날이다.
2014 + Autumn
제24회 편운문학상 수상소감 시 부문 본상 송재학
편운 선생님과 나의 의자
송재학 ●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대학교 졸업.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상화시인상, 이상시문학상 등을 수상.
제 시집 『날짜들』의 남루를 편운문학상 목록에 덧붙여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에 감사드립니다. 고독이라는 단어가 인간 존재의 근원이 라고 밝혀준 조병화 문학의 언저리에 제 시의 일부가 테두리처럼 속해 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은 짐작조차 하지 않았지만, 삶과 시를 친밀하게 결합한 조병화 시에 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게 제 시라고 믿는 저에게, 편운문학상의 이름을 준 인연에 대 해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조병화 선생님의 시는 1950년에 상재된 시집 『하루 만의 위 안』에 실린 「落葉끼리 모여 산다」입니다. 시인의 낙엽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충분히 저를 위로해왔습니다. 그 낙엽의 애상이 필요했던 제가 오늘 편운문학상을 받으면 서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단독자로서의 고독에 대한 인식입니다. 아마도 다른 행로이었겠지만 저 역시 편운 선생님이 추구했던 실존적 질문을 제 시 속에서 자주 반추해왔습니다. 편운 선생님이 추구했던 관념의 문제는 저의 행로이기도 합니다. 물론 편운의 문학이 예의 “따뜻한 감동과 위안”의 시편이라면 아직 저는 그 곳에 다 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기웃거리기만 할 뿐입니다. “지금 어드메쯤 /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 그분을 위하여 / 묵 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조병화 「의자」)라는 인구에 회자된 조병화 선생님의 유명한 의자는 저에게 와서 “의자라는 모래, 의자라는 책의 예감 / 하루 종일 움푹 파인 그늘에서 책만 읽는 남자! / 그러나 내 앞날이 없으리라는 불길함이 먼저 의 자에 앉아 있다” 라는 졸시 「의자를 기다린다」로 변주되었습니다. 그러한 것처럼 편운 선생님이 남기신 창작시집 53권의 영향으로 제 시집 8권의 일부가 형성되었 다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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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가 만난 조병화 전형적인 기호인(畿湖人) 선우휘
畿湖人 _ 선우 휘
조시인 병화와 나와의 교우는 열네살 때부터 서로 일본말
인 영배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 영배가 물건이었다.
로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된 셈이다. 이번 회갑을 맞는다고 하
자기는 밤새워 시험공부를 하고는 나같이 잘대로 자고 시
여 나보다 한 살 위인 것을 알았지만, 어떻든 국민학교(당시
험시간 직전까지 쩔쩔 매는 친구들을 고자세로 냉소해 보이
는 보통학교라고 했다)를 졸업한 해의 봄, 경성사범학교 보통
는 위인이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다. 병화는 처음
과 1학년생으로 만난 것이다.
공부도 잘 했지만 운동을 더 잘 했는데 그는 육상과 럭비의 선
당시 그 학교에서는 시골서 온 아이들은 모조리 기숙사에 넣고, 서울출신만은 통학을 허락했는데, 그래서 평북 정주가 고향인 나는 기숙사생이 되었고, 병화는 서울이 집이어서 통 학생이었다. 전학년 100명 중 조선아이들은 20명 미달이었던 게 아닌
수였고 보통과 5년, 연습과 2년을 거친 7년 후는 병화가 1등 으로 졸업하고 동경고사로 갔다. 나는 이미 3, 4학년 때부터 학업도 운동도 포기하고 정신적 으로 방황하다가 겨우 퇴학만은 면하고 혼자 학교장실에서 졸업장을 받았다. 꼴찌를 했기 때문이다.
가 하는데, 그러니까 각도에서 한 명 아니면 두 명 꼴 그러나
물건인 영배는 4학년 때인가 자퇴한 뒤 독학으로 검정시험
당시 경성으로 불리운 서울에서는 6, 7명이나 되었다. 그 가
에 합격하여 고공인가의 물리교사 양성소를 거쳐 이미 중등
운데서 같은 서울 출신인 김영배라는 친구와 병화가 아주 가
교사를 지내고 있었다. 다시 병화와 만난 것은 해방 후 내가
까웠다.
조선일보 사회부기자로 있다가 미국유학을 간답시고 밀선을
나는 2학년 때쯤 병화와 가까워졌는데 그것은 조선인 학생 가운데서 그와 나 둘만이 조선어연구회에 입회한 것이 계기 가 아니었던가 싶다. 당시 조선어연구회만은 다른 연구회와는 달리 조선인 학생 만이 그 회원이어서 일본인 학생이 많은 이 학교에서는 어딘 지 모르게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 같다.
탔다가 실패한 뒤의 서울거리에서이다. 다시 신문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나는 그의 권고와 소개로 인천중학교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때 교사 한구석에서 아지만 먹던 자취생활의 영양실조를 구해준 것도 병화였다. 그때 그가 짬짬이 쓴 시를 모아 출간한 것이 그의 첫 시집 이 아닌가 한다.
활기가 없다면 없다고도 할 수 있고 쓸쓸하다면 쓸쓸했지
그 후 나는 여순반란사건에 촉발되어 군대에 들어가 6.25
만 외로운 분위기 속에서 선배들도 몹시 노성(老成)해 보였
를 맞았고 정훈국 분실장으로 가 있던 평양에서 바바리를 걸
다. 그 연구회에서 가끔 내는 기관지가 『반딧불』이었다.
친 그와 만났다. 이튿날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어 색향
병화도 나도 2학년 때 그 『반딧불』에 시를 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병화의 시는 서정적인 시다운 시였지만, 나의 시는 제목부터 「이디오피아의 소년」으로서 그건 시도 아니었다. 당시, 파쇼 이탈리아가 이디오피아를 무력으로 침공했는 데, 거기 자극받아 그 전쟁에서 형을 잃은 이디오피아의 소년 이 원수 갚기를 맹세한다는 살벌한 것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병화와 가까워진 나는 자연히 병화의 친구 2014 + Autumn
평양에서 그와 술 한 잔도 못 나눈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다. 병화는 인중에서 서울중으로, 다시 경희대로 가서 문리대 학장까지 지냈다. 그동안 시집도 많이 내고 그림도 이제 아마 추어의 영역을 벗어나 어떤 경지에 이른 것 같다. 나도 어쩌다 소설을 쓰게 되어 군에 있을 때 동인문학상을 받고, 제대 후 조선일보로 복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제 그나 내가 남은 여생을 같은 문인으로 보내게 될 것은 틀
1970년대 강원도 소양호에서 경성사범학교 동기생들과. 좌로부터 남규욱, 선우휘, 김영배, 조병화
림이 없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위재(偉材) 영배는 해방 후 미군 통역을 하다가 뜻을
끝으로 병화에 대한 인물평을 하면 한마디로 그는 착한 사
품고 미국 프린스톤 대학으로 가서 물리학공부를 하여 박사
람이다. 경기도 안성 출신의 그는 역시 전형적인 기호인(畿湖
가 되었고 벨연구소를 거쳐 일본동경대와 모스크바대에도 객
人)이 아닌가 싶다. 어느 누구도 해칠 사람이 아니며, 법 없이
원교수로 간 일이 있는데 지금은 L.A의 남가주대학에서 자연
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과학연구소장을 하고 있다. 노벨물리상의 문턱까지 갔다고 하니 대단하다.
나는 그의 시집 가운데서 『어머니』라는 시집을 제일 좋아 한다. 나는 시를 잘 모르지만 병화는 좀 더 크게 평가받을 수
이 영배를 섞은 병화와 나, 세 사람의 우정이 요즘 되살아났
있는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해 그는 조금 더 고독할
다. 병화도 나도 미국에 가서 영배집에서 신세도 졌지만, 그보
것이지만, 나는 그가 왜 그 정도의 평가를 받는데(물론 상당
다 그가 근래 서울대학과의 학술교환 관계로 자주 한국에 나
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치고 있느냐의 까닭을 알고 있다.
오게 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셋이서 술을 하게 되면 미국생활 30여 년에 미국사람 다 돼 버려 매운 것 잘 못 먹고 술도 가려먹으려는 영배를 곧잘 놀려 대지만, 기분은 어느새 10대 때로 돌아간다. 병화가 회갑을 맞는다니 이번 그가 나오면 셋이서 조촐한 회갑연을 벌릴 판이다. 피차 어느덧 60고개를 넘게 되다니 망 연자실해지지만, 셋이 다 아직 직업을 갖고 있고 위도 튼튼해
그것은 그가 지내온 이제까지의 반생이 아주 순탄하기 때 문이다. 시인은 그 처지가 불행하면 불행할수록 그만큼 더 평 가받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런 평가따위……. 병화여! 앞으로 고독하지 말고 내내 순탄하고 행복하도록. 동창인 나는 부러움으로 그렇게 말하고 싶다. 회갑을 축하하며.
서 예전 같지는 않아도 마음 놓고 술잔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선우휘 소설가. 언론인. 1922년 평북 정주 출생. 1986년 타계. 1943년 경성사범 졸업. 한때 초등학교 교원으로 지내다가, 해방 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언론계에서 활 동. 1955년 《신세계》에 〈귀신(鬼神)〉으로 문단에 등장. 단편집으로 『불꽃』(1959), 『반역』(1965)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노다지 1~4』(1986)를 발간하였다. 칼럼 집으로 『한국인의 진실』(1986)이 있으며, 공저로 『日本理解への道』(日本 讀賣新聞社.1983)가 있다. 동인문학상, 고재욱 아세아언론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일 보 논설위원,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논설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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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제14회 시부문 본상 수상자 나태주
은빛 나태주
눈이 내리다 말고 달이 휘영청 밝았다
밤이 깊을수록 저수지 물은 더욱 두껍게 얼어붙어 쩡, 쩡, 저수지 중심으로 모여드는 얼음의 등 터지는 소리가 밤새도록 무서웠다
그런 밤이면 머언 골짝에서 여우 우는 소리가 들리고 하행선 밤기차를 타고 가끔 서울 친구가 찾아오곤 했다
친구는 저수지 길을 돌아서 왔다고 했다
그런 밤엔 저수지도 은빛 여우 울음소리도 은빛 사람의 마음도 분명 은빛 한가지였을 것이다.
2014 + Autumn
편운문학상 시터 제14회 시부문 본상 수상자 나태주
희망 나태주
날이 개면 시장에 가리라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힘들여 페달을 비비며
될수록 소로길을 찾아서 개울길을 따라서 흐드러진 코스모스 꽃들
시작노트
새로 피어나는 과꽃들 보며 가야지 시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한때는 꿈꾸는 일이
아는 사람을 만나면 자전거에서 내려
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극히 낭만적인 접근이다.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도움을 줄 뿐더러 세상살이의 징검다리라고 믿
기분이 좋아지면 휘파람이라도 불 것이다
나마 한때는 연구의 대상이요 공부거리라고 생각했던 시절
었던 시절도 있었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생각이다. 잠시 도 있었다. 교양과 학문적인 접근으로서의 시관(詩觀)이리 라. 이제와 더듬적거리는 마음으로 나는 생각을 고쳐 먹는
어느 집 담장 위엔가
다. 나에게 과연 시란 무엇인가? 시란 낭만도 실용도 아니고
넝쿨콩도 올라와 열렸네
교양이나 학문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구원의 한 방책 이다. 오직 한번뿐인 인생을 완성하기 위한 비밀한 오솔길이
석류도 바깥세상이 궁금한지
다. 그러므로 시는 하루하루의 삶에서 얻어지는 크고 작은
고개 내밀고 얼굴 붉혔네
깨달음의 기록이요, 생 체험의 자기 발견이어야 한다. 허지 만 이제 나의 싸움은 대부분 결판이 나 있는 형편이다. 그건 시로서든 인생으로서든 그러하다.
시장에 가서는 아내가 부탁한 반찬거리를 사리라 생선도 사고 채소도 사 가지고 오리라.
나태주 1945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충남대 교육대학원 졸업. 1971년 서 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시집, 산문집, 동화집, 선시집, 시 전 집 등 총 60여 권의 저서가 있음. 흙의 문학상, 충청남도문화상, 현 대불교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한국시인 협회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충남문인협회 회장, 공주문인협회 회 장, 충남시인협회 회장,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 등을 역임. 현 재 공주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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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제14회 시부문 신인상 수상자 조예린
眞伊의 노래 조예린 화담 선생님! 배꽃 필 즈음 천마산 박연폭포 한 번 놀러 가요 피어 터치는 보라 물안개, 머리에는 수천 개 흰 꽃을 달고 너럭바위 위에 거문고 산조를 불러 드릴게요 구곡 달빛 썰어 묵힌 이화주(梨花酒) 맑은 잔을 씻을 땐 선생님께 술대*를 넘겨 드리지요 한 송이 술에 아슴히 취해 꽃 같은 버선발 춤을 추며는 선생님은 시조 한 수 화답 주셔요 화담 선생님! 배꽃 필 즈음 천마산 박연폭포 한 번 놀러 가요 오긋한 가슴에 내 노래를 뉘 앞에 부를꼬, 거문고 여섯 줄은 빗겨 섰나니 선생님 배꽃 필 즈음! 천마산 흙길 어둡기 전에 짊어진 만공산 털래털래 개풍의 저녁답을 함께 돌아와요
2014 + Autumn
* 술대: 거문고 탈 때 쓰는 작은 막대
편운문학상 시터 제14회 시부문 신인상 수상자 조예린
겨울나무 조예린
날마다 이별하는 자들은 겨울나무에게로 가서 차가운 껍질에 귀를 댄다 심장이 얼지 않도록 물관을 틀어막은 나무가 바싹 마른 가지로 목숨을 받들고 서 있는 것을 오래 듣는다 언 귀를 문지르며 누구도 부르지 않는 노래를 부르는
시작노트
이별하는 자들 날마다
죽은 언어는 사람을 만질 수 없다. 산 것만이 그 촉수를 뻗 어 사람에게 가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비논리적인 원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설명하기 힘들지만 나는 그것을 어느 정도 경험해 보았다.
겨울나무에게로 가서
물론 그것은 영적 비밀에 가깝다.
귓바퀴에 괸 눈물을
체. 그것이 이제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것, 죽
따스히
은 것이 조금씩 가늠되기 시작한다.
붓는다
나를 통과한 언어. 그 생명의 씨로부터 분화된 ‘시’라는 개
모든 산 것들은 언제나 사람을 울게 하듯, 나를 통과하고 나간 시들은 가장 먼저 나를 울게 할 것이다. 새끼가 어미를 울게 하듯이.......
조예린 1968년 경남 통영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92 계간 <시와 시학>으로 등단. 2004 제14회 편운문학상 신인상 수상. 시집으 로 『바보당신』, 『나는 날마다 네게로 흐른다』, 『꽃같이 가라』 등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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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제 14회 평론부문 본상 수상자 이숭원
문학비평가의 길 _이숭원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를 쓰는 것은 남에게 보여
있는 일은 내가 쓰지 못하는 시에 대한 이해와 공감과 선망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진심을 절실하게 드러내기 위
상찬의 언술을 엮어내는 일이었다. 그것을 사람들은 문학비
한 것이다. 시 창작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진심이요 감
평이라 불렀다.
정의 절실성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만큼 가슴 저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문학 교수 노릇을 하면서 비평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남의 마음을 때리는 시를 쓸 수 있다. 그러면 가슴 저 밑바닥
잠시도 쉬지 않고 글 읽기와 글쓰기로 시간을 채울 수 있었다.
에서 치밀어 오르는 절실함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시가
그 결과 자신의 나태나 부패와 싸울 수 있었고, 감수성의 퇴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제대로 시를 쓰기 위해서는 가슴
보와 정신의 황폐화를 막기 위한 내 나름의 노력을 지속할 수
저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그것을 이번에는 철저하게 제
있었다. 내가 이런 노력을 기울이고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를
어하여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는 절제와 견인의 자세가 필요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시라는 창조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하다. 목이 터지게 엉엉 소리쳐 울고 싶으나 “죽어도 아니 눈
러기에 나는 시를 창작하는 시인들에게 늘 고마움을 느낀다.
물 흘리오리다”하는 가혹한 극기의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나는 시작품이 내 마음에 일으키는 파문, 그 미묘하고 다채 그러면 절실한 감정을 속으로 눌러 끝까지 입을 닥치고 있
로운 마음의 결을 충실히 복원하고자 했다. 그것만도 나에게
으면 그것이 시가 되는가? 천만의 말씀. 침묵이 어떻게 시가
는 벅찬 과업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을 논리의 탈을
되겠는가? 분출과 억제의 길항 사이에서 바르르 떠는 그 마음
뒤집어 쓴 언어로 바꾸어 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
의 어쩌지 못함을 정교한 언어로 조각해 내는 능력이 있어야
러나 그것은 힘들면서도 힘든 그만큼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시는 그러한 의식의 절정, 고
이다. 일을 마친 다음에는 시의 참맛을 음미하는 기막힌 즐거
민의 극점에서 탄생하는 예술적 창조물이다. “한발 재겨 디딜
움도 누리게 되고 새로운 생의 감각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곳조차” 없는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야 한 줄의 시가 흘
그 감성의 파문은 놀랍게도 세월의 덧없음을 이겨내는 힘도
러나온다. 시는 그토록 가혹한 관념의 열병이다.
갖게 해 준다.
그러니 시인은, 미인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절벽에 기어
그러므로 문학의 사제로 평생을 사는 것은 눈물겨운 기쁨
올라 꽃을 따서 바치는 저 신라 향가 「헌화가」의 주인공, 견우
이다. 워즈워스는 「무지개」라는 시에서 자연에 대한 경이감,
노옹의 후예들이다. 사랑의 마성에 휘감긴 존재들, 생의 매혹
거기서 오는 시적 영감이 늙은 다음에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
에 도취되어 죽음마저 잊어버린 페드라와 히폴리투스의 후
라며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가라고
예들, 악기 하나를 방패삼아 잃어버린 짝을 찾아 저승 끝판으
말했다. 나 또한 70, 80이 되어도 아름다운 시를 대하면 자기
로 여행했던 오르페우스의 후예들, 그들이 바로 시인이며 예
도 모르게 설레는 이 마음이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술가들인 것이다. 시와 시인을 이렇게 추상의 절대 위에 놓고
세상 뜨는 그날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기를 빌 뿐이다.
나자 나는 한 줄의 시구도 쓸 수 없었다. 그 다음에 내가 할 수 이숭원 195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및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6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평론 등단. 저서로는 『영랑을 만나다』, 『교과서 시 정본 해 설』, 『백석을 만나다』, 『백석 시의 심층적 탐구』, 『김기림』,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세속의 성전』, 『감성의 파문』, 『폐허 속의 축복』, 『초록의 시학을 위하여』 등이 있음. 시와 시학상,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 충남대, 한림대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2014 + Autumn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Ⅰ 입춘
입춘
조병화
이 곱은 냉수같이 바람이 분다 오랜 인내 때 묻은 사색 연애의 생리를 청산하고 바다로 하늘로 홀가분한 단념과 웃음을 배우러 가자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 중에서
꽃의 개화시기로 계산한 봄의 속도는 시속 1.2km 정 도이다. 제주에 벚꽃이 피고 보름 정도가 지나면 내가 살고 있는 서울 동네에도 벚꽃이 핀다, 제주와 서울은 직선거리로 430km 정도 떨어져 있으니 봄은 약 시속 1.2km로 푸른 바다와 흙빛 선연한 남도의 땅을 거쳐 올라오는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봄의 속도가 어린 아이의 걸음 속도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봄에 태어난 까닭인지 조병화 시인은 유독 봄에 대한 시를 많이 남겼다. 허무와 고독으로 점철된 여타의 시 편들과 달리 ‘봄’을 소재로 한 조병화 시인의 시들은 한결같이 경이로운 생명력이 넘친다. “때 묵은” 자신 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한 사람만이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다. 물론 조병화 시인은 이런 사실을 일찍이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박준 1983년 서울 출생.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다. 제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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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전규태
새로운 만남에 의한 눈뜸 _전규태
편운 선생님을 떠올릴 때면 나는 항상 외국 여행을 함께 하던 정경을 그리곤 한다. 선생 님은 세계시인대회의 직책을 열심히 맡고 계셨기 때문에 외국에서 열리는 시인대회에는 꼭 참여하셨고, 그때마다 으래 내게 참가하도록 종용하시곤 했다. 내가 외국 여행에 관한 ‘노하우’를 많이 알고 있고, 몇 나라 말을 구사할 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생님과의 첫나들이는 1981년 7월에 미국 샌프랜시스코에서 열렸던 제5차 세계시인 대회에 20여 명이나 되는 시인들과 함께 참가했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참가 인원이 많아 두 팀으로 나누었는데, 제1진은 단장인 선생님이 인솔, 먼저 떠나셨고 2진을 내가 맡아 그 이튿날 떠났는데, 우리 팀은 L시인의 외화 과다소지(그 당시에는 규제가 매우 엄 격했음) 문제로 이국이 지연되는 예견치 않았던 사고가 있었다. 무척이나 까다로운 사건이었는데, 단장님과의 긴밀한 연락과 내 재치로 원만히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런 후로부터는 되도록 단체 여행 시는 나와의 동행을 원하셨다. 샌프란시스코 단체 여행을 통해 선생님에 대해 새롭게 느낀 것은, 평소에도 누구에게나 늘 자상하고 친절하셨지만, 외국 체 류 시에는 그런 성품이 유난히도 돋보인다는 점이었다. 특히 어려움을 겪는 이에 크게 배려하고 격려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도박을 해보거나 여행을 함께 해보아야 한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나 는 선생님과 선뜻 가까워졌다. 귀국 후, 당시 내가 주제하고 있었던 계간지 「문학과 의식」에 곧 선생님 특집을 내드렸고, 이를 시선집으로 출판부 <백문사> 에서 단행본으로 상재하기도 했는데, 그때 교정지 교정을 보시면서 선생님은 “고독이란 이를 구하거나 느끼고 싶을 때보다도 오히려 예기치 않았던 돌발사건이 일어난다든가 했을 때, 그러니까 예기치 않았던 순간에 우연히도 찾아들게 마련인가보지” 라고 술회하셨고, 이어 대화와 만남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 때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 라 심기일전할 수도 있고, 그 누가 인생의 근간을 이루는가도 가르쳐주는 게 여행인 듯 싶어. 새로운 만남에 의한 눈뜸이야말 로 인생에 있어 정말 고마운 일이야”라고. 그 무렵, 그리고 그 얼마 뒤에 펴내신 선생님의 작품에서도 이런 사념의 여운이 고스란히 침윤돼 있다. 2014 + Autumn
외로움이 술술 가슴에 고여들면 벗이여 나는 당신 곁에 당신은 내 곁에 나란히 이렇게 훈훈한 생명의 둑길을 서서히 서성거린다고만 여기십시오 「외로운 내 벗이여」 부분 여보십시오 인생의 길벗이여 이 추운 겨울 한밤중 어디서 당신은 찬 여장을 깃들이고 계시는 것입니까 내 텅 빈 인생의 동굴로 돌아오십시오 「사랑이 가기 전에」 부분
내 가보 중의 가보 조병화 시인의 축서화
해외여행이 단독으로는 어려웠던 시대였던 만큼 선생님 주변에는 많은 시인들이 늘 모여들곤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늘 고 독했다. 나는 장자의 <則陽篇>을 들먹이며 “선생님은 ‘陸沈之者’이시다구요”라고 농조로 말한 적도 더러 있는데, 그때마다 선 생님은 이렇게 웃어넘기시곤 했다. “물 속에서 잠이 오는 건 의당하지 않아? 다만 그 표현이 퍽 재미있는 시적 메타포구먼” 1986년 7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렸던 제9차 세계시인대회 때에는 선생님과 나는 ‘시적 이미지(Poetic Image) 분과’ 토 론에 참가한 바 있다. 선생님과 나는 시 이외에 그림도 아울러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로 시에서 회화적인 표현을 통해 이미지를 보다 선 명히 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을 예거하며 토론에 끼어들었었다. 시각은 물론 청각, 촉각, 후각 등 감각의 복합 등이 시에서 많이 원 용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토론회가 끝날 무렵 날더러 하나의 제언을 정리해 내라고 부탁하셨다. 그 내용을 더듬어 정리 하면 ‘시라고 하는 압축된 예술에 있어서는 그 자체의 독특한 언어 사용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피렌체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리 일행은 운하와 회화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느긋한 휴식을 취했고, 선생님과 나는 해 변에서 스케치를 즐겼다. 그때 선생님이 내 옆얼굴을 소묘해주셨고, 귀국 후 내가 병상에 누워 생일을 맞았을 때, 쾌유를 빌며 보내주신 축서화는 내 가보 중의 가보이기도 하다.
전규태 문학평론가, 시조시인. 1933년 광주 출생. 연세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6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옴. 연세대 교수, 호주국립대 교수 등 을 역임. 현재 한국현대시인협회 지도위원, 격월간 <여행작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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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편운 시 백일장 심사평
시에 대한 자의식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
제9회 편운 시 백일장 심사중인 김광규, 박윤우, 이재복 심사위원(2014, 청와헌)
이번 편운 시 백일장의 시제는 ‘바다’와 ‘신록’이었다. 가장
다른 어느 작품보다 시에 대한 자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낭만적이어야 할 시제가 올 5월은 가장 어둡고 슬픈 시제가
‘갯벌’, ‘조개’, ‘숨’, ‘생명’, ‘아이’의 이미지를 아주 잘 조합해서
되었다.
표현하는 솜씨가 돋보였다. 아마 이런 시적인 문법을 잘 갈고
심사기준은 편운 조병화 시인이 「그리다 만 초상화」(1997)
다듬으면 앞으로 좋은 시를 쓰리라고 본다.
에서 밝혔듯 시의 진실성과, 언어를 다루는 감각, 자유로운 상
이어서 차상에는 배령준의 「신록」을 선정했다. 일단 시가
상력, 자신만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이미지, 감동(위안, 즐거
아주 깔끔했다. 특히 ‘녹음’, ‘신록’의 이미지와 ‘간이역’의 낡
움)을 주는 시, 강한 시상과 매력적인 시어를 중점으로 두고
은 시간성을 연결시키는 대목이 돋보였다. 차하에는 신미정
살펴보았다.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 또한 눈여겨보았다.
의 「바다」 가 뽑혔다. 제주도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대상으로
총 116명의 응모자들이 예심을 거쳐 본심에 응모된 작품은
그것을 시적으로 잘 형상화해 낸 작품이었다. 하지만 시상 자
총 39편이었다. 예심과 본심을 통틀어 본 응모자들의 면면은
체가 상투적이어서 앞으로 이 점을 잘 참고한다면 더 좋은 시
다양했다. 특히 이번 제9회 편운 시 백일장은 대학생들이 많이
를 쓰리라고 본다.
참여하였는데, 앞으로도 젊은 문학도들이 더욱 많이 참여하여 수상의 영예를 누렸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응모작품에 대한 심사는 심사위원 3인이 39편을 각각 나누 어서 먼저 13편을 뽑고, 다시 8편을 뽑고, 이 8편을 가지고 장
이들 외에 이렇게 우다빈, 이슬민, 양기훈, 조호재, 서샛별의 작품들이 장려상을 수상했다. 모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백일장에 응모에 주신 모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훗날 더 좋은 시로 만나길 바란다.
원 1편, 차상 1편, 차하 1편, 장려상 5편을 뽑았다. 그 결과 장원 에는 김민정의 「바다」가 뽑혔다. 이 작품은 분명한 시에 대한 흐름이 있었다. 이 말은 시의 문법을 알고 글을 쓴다는 것으로, 2014 + Autumn
심사위원 : 김광규(위원장), 박윤우, 이재복(글)
제9회 편운 시 백일장 입상작ㆍ입상소감
바다
김민정
여물지 않는 무릎들이 움푹 패이는 갯벌 아이들은 검은 물이 스며드는 손가락으로 빈껍데기 골라낸다 양동이에 쌓여있는 조개들 하나 둘 입을 벌려 진흙의 자음과 모음 뱉어내지만 청각을 얻지 못한 그들의 혓바닥이어서 오물거리는 전언들, 썰물에 쓸려 내려간다 뻐끔거릴 때마다 더 어두운 갯벌 속으로 장원작품을 낭송하는 김민정 수상자
들어가 버리는 말이 있다 작은 숨구멍 뚫어놓고 거품 같은 글자 부글부글 내어놓는 조개와
입상소감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조개껍데기 닦는 아이들 진흙 묻은 손가락으로 나누는
햇볕 좋은 날, 잔디 밭에 앉아 대학 동기들과 즐겁게 썼던 저의 작품이
저들의 대화는 태초의 언어
좋은 평가를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서툰 제 글을 읽어주시고, 좋은 결과
인간의 말을 배운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으나
를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을 올립니다.
갯벌 구석에서 흔들리는 자줏빛 함초 허공으로 손바닥 내밀어 짠 내음에 서투른 대화를 풀어낸다
저는 항아리 여러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하고 싶은 말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잘 숙성시킨 항아리들 중 하나를 골라, 뚜껑을 열고 꺼낸 말이 바로 ‘바다’를 시제로 쓴 작품입니다. 말을 풀어내리는 솜씨가 능숙하지 않아 힘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우고 쓰고,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소리내어 읽어보기도 하면서 많이 다듬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
소라껍데기에 진흙이 가득 차 있다
은 말을 분명하면서도 은은하게 전달하고 싶었으니까요. 그러한 노력 끝
닫혀버린 소리, 깜깜한 어둠으로 꽉 막혀
에 좋은 결과를 받게 되어 아직도 어떨떨하면서도 참으로도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만 나는 바닷물에 헹궈내어 귓가로 가져간다 잠시 목이 메여 흔들리는 목울대 발등을 찰싹이며 차오르는 파도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랫동안 꾸준히 습작을 하면 잘 쓰게 될 줄 알았는데, 쓰면 쓸수록 어 려워집니다. 이런 작품을 써도 되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더 새롭게 진실 되게 쓸 수 있는지, 고민이 늘어갑니다. 그래서 쓸 때마다 망설이게 되고, 꺼내놓았던 말들을 다시 집어넣는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고 민들을 할 때마다 행복합니다. 그 고민들 끝에 작품이 탄생하니까요.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더 행복해지는 일을 많이 하겠습니다.
어머니 자궁에 두고 나온 혀 대신
감사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고등학교 때 저에게 시를 알려주
바다의 혀를 얻은 아이들은 진흙 밖으로 나온다
신 윤한로 선생님, 김유미 선생님, 배은별 선생님, 길상호 선생님에게 정
세상에서 가장 환한 말을 뱉으며
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 분들 덕분에 더 넓고 깊은 시창
붉게 물드는 석양 아래서 다시 태어난다
작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 수님들,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많이 배우고 더욱 창작에 매 진하겠습니다. 편운 시 백일장에 지원해보라고 말씀해주신 강민희 교수 님에게 한 번 더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백일장 수상자 장원 차상 차하 장려
김민정 (대학생, 안양시) 배령준 (대학생, 부산시) 신미정 (대학원생, 대전시) 우다빈 (대학생, 고양시)ㆍ이슬민 (회사원, 서울시) 양기훈 (대학생, 수원시)ㆍ조호재 (회사원, 용인시) 서샛별 (대학생, 천안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있어주는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또한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반려견과 이 기쁨을 함께 즐기고 싶 습니다. 세월호 희생자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김민정 1994년 서울 출생. 안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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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글마당 편운, 종로문인들의 가슴에 영원하리 채인숙
편운, 종로문인들의 가슴에 영원하리 _채인숙
종로문인협회에서 실시한 다른 문학기행과 달리 안성 난실리에 있는 조병화문학관 시축제 참여 행사에는 참가 신청자가 넘쳤다. 45인승 버스에 한자리 여유도 없이 꽉 채우고도 개인 출 발하는 회원들도 있어 실제 참가자 수는 50명이 넘었다. 5월 11일 아침 8시 이른 시간에 편운재에 참석하기위해 조병화문학관에서 준비한 관광버 스로 압구정역 현대백화점 주차장에서 출발했다. 종로문협 회원들이 탄 버스가 1대 기타 참가 자들이 탄 버스가 2대 그렇게 3대의 버스가 청아하게 빛나는 아침 공기를 가르며 즐거운 여행 을 시작했다. 약간 늦게 온 회원님들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걱정은 사라지고 온화하신 조병화 선생님을 찾아간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봄에 꿈을 가져야 한다는 조병화 선생님의 말씀처럼 조병화시인 문학기념관으로 달려가는 종로문협 문인들의 벅찬 가슴에는 이미 꽃처럼 꿈이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1시간 남짓 차가 달리는 사이에 준비한 호박떡을 나누어 먹으며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눈에 담을 여유 도 없이 행사 일정에 대한 안내와 서로에 대한 안부 인사를 나누며 기행의 즐거움이랄까 눈만 마주쳐도 상대에 대한 호기심은 문인이기에 늘 풍부한 가슴이다. 종로문협은 금년 들어 한 달 에 한번은 종로문화유적답사를 해 온 터라 많은 문인들이 서로 친숙해졌고 그만큼 대화 거리 도 많고 문인협회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조병화의 문학세계Ⅲ> 심포지엄의 첫 번째인 이번 행사에 한국문인협회 종로지부가 공식 후원단체가 되어 회원들의 시낭송을 준비하여 주제 논문 발표의 딱딱하고 심각해지기 쉬운 분위기를 부드럽고 정감 있게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시낭송자를 발탁하고 적절한 조병화시인의 시를 선택하여 암송하도록 준비했다. 발탁 된 낭송가는 조병화 선생님의 시를 짧은 시간 안에 외워서 암송하도록 노력했으며 각자 소임 을 다해 나갔다. 경기도 안성 난실리에 있는 문학관에 도착하여 먼저 조병화시인 묘소에 참배 했다. “그래 잘 들 왔다. 모두 욕심을 내려놓고 좋은 글들 남기고 저 세상 오면 차 한 잔 나누세.”
크기나 규모 면에서 평범한 묘소 안에서 다정한 미소로 맞으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잔디밭을 따라 들어가니 서구적인 모습을 갖춘 디자인이 잘 된 단아한 양옥집, 조병화문학 관이 있고 마당 잔디밭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행사장이 꾸며졌다. 제법 따가운 햇볕에 테이 블 중앙에 있는 대형 양산 그늘이 반가웠다. 2014 + Autumn
시낭송을 하는 종로문협 김운향, 채인숙, 송연주 회원
악기 연주를 하는 종로문협 김숨(대금), 김주현(기타) 회원
곧 제24회 편운문학상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먼저 원로 허영자 시인님의 경과보고가 있었 다. 원래는 시인 1명과 평론가 1명, 2명의 수상자를 선정하게 되어있지만 올해는 시인만 2명이 수상하게 되었다. 평론수상자가 없으면 시인이 모두 수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수상자는 각각 상패와 상금 1천만 원을 받고 소감 발표를 했다. 수상자 소감 발표 후 수상자를 축하하는 시낭 송이 있었다. 각각 두 편씩 수상자의 시를 낭송했다. 편운문학상은 제1회 수상자 조태일(시)본상, 김재홍(시론)본상, 신창호(시) 우수상을 받은 이후 현재까지 24회째로 저명한 문단의 권위자들이 심사위원단으로 구성되어 수준 높은 많은 수상자들을 선정 배출해 왔다. 이번 24회 수상자인 박태일 시인의 ‘달래는 몽골말로 바다‘와 송재학 시인의 ’날짜들‘이라 는 시가 수상의 영예를 누렸고 심사위원은 허영자, 김영석, 박윤우, 오형엽 선생님들이었다. 심사 소감 발표와 축사에 이어 수상자 두 분의 시상을 했다. 먼저 박태일 시인의 시상이 있 은 뒤 필자가 박태일 시인의 시 ’밤기차‘를 낭송했다. 아름다운 어휘력이 잘 표현된 좋은 시였 다. 송재학 시인의 간결하고 심오한 깊이가 있는 시 ’적막‘은 종로문협 강정수 사무국장이 낭 송해서 수상자를 축하했다. 이후 잠시 쉬는 동안 문학관 안에 전시된 유품과 인물소묘전을 관람하게 되었다. 조병화 시 인이 평소 만났던 사람들을 잊지 않으려 인물의 특징을 살려 직접 소묘하신 작품들이 전시되 어 있었다. 고독한 혼과 혼의 대화라는 주제를 생각하며 작품들을 보니 만감이 교차 되었다. 남 다른 직관력으로 인물과 인생에 대한 시인의 뛰어난 감성을 시와 그림으로 나타내셨던 편운 조병화 선생님의 발자취에 다시금 고개가 숙여졌다. 2층 세미나실에서 조병화 시인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논문 발표자들의 강연이 이어졌다. 홍용희 경희대교수, 오형엽 고려대 교수, 그리고 이형권 충남대 교수가 ‘조병화 시에 나타난 실존의식과 현대적 의의’를 조병화시인의 시를 예로 들어 세부적인 논설로 강연을 했다. 20분 강연이 끝나고 다음 강연 사이에서 종로문협회원들이 준비한 조병화시인의 시를 두 명씩 낭 송해서 딱딱한 분위기를 부드럽고 감성적인 분위기로 이완시켰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절도 있 는 박덕규 교수의 사회능력이 돋보였다. 시낭송 시간에 종로문협 김옥남, 김영훈 전 회장은 함께했던 조병화 선생님의 생전의 추억 담을 이야기 해주며 직접 전수 받은 ‘추억’이라는 시로 작곡한 노래를 불러 복받치는 그리움 에 눈물 맺히는 순간도 있었다. 가치 있는 내용과 다채로운 행사로 보람된 시축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뿌듯하게 무언가 부자가 된 마음으로 빈 가슴을 가득히 채워 큰 선물보따리를 든 것처럼 풍성했다. 36 + 37
꿈의 글마당 편운, 종로문인들의 가슴에 영원하리 채인숙
‘조병화의 문학세계’를 마치고(2014. 6. 21, 혜화동주민센터)
조병화의 문학세계Ⅲ 심포지엄 2차는 혜화동주민센터에서 6월 14일 개최 되었다. 지난번 과 마찬가지로 주제 논문 20분 발표 중간에 2분씩 시낭송을 해서 참석자들이 쉬면서 사색 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종로문협회원의 시낭송가 7분이 함께했다. 논문 발표가 끝나고 이어진 <하모니 만돌린 체임버>의 만돌린 공연은 행사의 다채로움과 참여의 아름다운 모 습도 보여 주었다. 행사를 마치고 가까운 혜화동 골목길을 산책하면서 조병화 시인이 사셨던 곳을 둘러보고 한무숙 소설가의 큰 아드님 김호기님이 관장을 맡고 계신 미려한 전통 한옥의 한무숙 문학관 에 들러 한무숙 소설가와 문학관 전반에 대한 관장님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전시된 유품들 을 돌아보며 문학인의 깊은 삶과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다. 아쉽지만 1층 견학만으로 돌아서고 바로 생전 조병화 시인이 거주하였던 ‘편운과 시영의 집’을 방문했다. 종로문협 회원들과 기 타 내빈들은 조병화 선생님의 자부이신 김용정 여사님이 손수 거실에 차린 뷔페식 요리를 함 께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제3차 심포지엄은 1주일 뒤에 같은 장소에서 열렸는데 참석자가 제일 많았다. 낭송자들도 모두 준비를 잘 했고 기타와 노래, 대금 연주 등 다채롭고 흥미 있는 순서가 어우러져 진지한 주제논문 발표와 조화를 이루며 한편의 시극처럼 깊은 감동을 주었다고 참석자들은 행사가 끝 난 한참 후에도 소감을 전해왔다. 특히 조병화 선생님의 며느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조병화 시 인을 기리는 조병화문학관과 심포지엄 비롯한 여러 행사가 오랫동안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 를 알 수 있었다. 한국적인 전통과 기품을 오래도록 지켜나갈 조병화 선생님 자제 내외분께 박 수를 보내고 싶다. 조병화 선생님의 기념사업회 사무실도 들러보며 가족이나 제자들이 조병화 선생님의 유지를 지켜나가는 모습이 정말 진지하고도 훌륭하게 느껴졌다. 한 시인이 53권의 시집을 출판했다는 것은 단순히 양적인 면만 보아도 전무후무한 업적이 다. 대단한 업적을 남기시고 그 사후관리까지 준비하고 가신 조병화 선생님을 기리는 마음으 로 글을 맺는다. 종로문인협회 오병훈 회장의 말씀대로 앞으로 종로문인협회는 종로구에서 활동하시고 기 념사업회가 종로에 있는 대시인 조병화 선생님을 기념함에 있어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강정수 사무국장을 중심으로 여러 행사들을 후원할 것이다. 앞으로도 많은 문학인들의 관심을 끌어 들일 수 있는 행사가 계속되기를 빈다. 채인숙 시인, 시낭송가. 경북 상주 출생. 한국문인협회 홍보위원, 국제펜한국본부 회원, 종로문협 재무국장. 시집으로 『숨어있는 웃음』이 있음. 2014 + Autumn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Ⅱ 열차를 놓치고
열차를 놓치고
조병화
열차를 놓치고 신문 조각이 마구 휘날리는 플랫폼에서 배우처럼 고독히 멀리 떠난 우월한 기적소리를 듣고 섰다. 나는 운명을 말하지 않겠다 얼마나 아름다운 저 기적소리냐 영 반복하지 않는 시간 속에 실패를 반복하는 나의 청춘이 회한을 생리(生理)하며 오므라지는 패전국의 양민처럼 청주(淸酒)와 자연(紫煙)을 일삼아간다 어디로 가나 선하기 때문에 약한 생존의 원리 속에 살아 멀리 떠난 우월한 기적소리를 듣고 나는 불안한 연대를 향하여 팽창하는 어둠 속에 떨어져 있다 열차를 놓치고 신문 조각이 마구 휘날리는 플랫폼에서 배우처럼 고독히-
눈을 감고 가장 즐거웠던 한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때 우리의 눈앞에는 더없이 아름다웠던, 지금은 부재하
아 얼마나 아름다운 저 기적소리냐
는 인연들이 있다. 그리고 인연의 맑은 눈동자에는 나 자신의 모습이 설핏 비쳐 보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 중에서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지나온 과거가 아니라 그 과거 속에서 온전히 행복했던 나 자신의 옛 모습일지도 모 른다. 때로는 이렇게 만남보다 헤어지는 일이 아름다 울 때가 있다. 늘 함께하고 있는 인연보다 이미 헤어지 고 놓친 인연들이 더 애틋할 때가 있다. 사라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박준 1983년 서울 출생.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다. 제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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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를 추억한다 나의 아버님 조병화 조진형
나의 아버님 조병화 2
「꿈」 2014 봄 호에서는 아버님이 쓰신 『떠난세월 떠난사
나의 모교이기도 해서 매일같이 물리화학시험실 겸 준비실로 출근
람』을 토대로 아버님을 시인으로 이끌어 주신 문인들에 대
을 하며 학생들의 수업도 하고, 책도 읽고, 그런대로 전공과목인 물
해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떠난세월 떠난사
리화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중략>
람』을 토대로 아버님이 비교적 자유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게
그러던 1947년인가, 그해 봄, 야간수업을 하시고 충신동 자택
끔 환경을 만들어주신 은인들에 대해 정리를 하고자 합니다.
으로 귀가하시던 신기범 선생이 학생 테러에 맞아 절명을 하셨다.
『떠난세월 떠난사람』에서 아버님은 정년을 하시면서 그 자
나중에 알려진 결과가 우익학생의 테러, 그것도 서북학생들이라는
리까지 이끌어 준 세분의 직장 은인들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
것, 신기범 선생께서 왜 좌익학생들을 감싸주느냐, 하는 것이 그 원
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셨습니다.
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들 우익학생들에겐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었 다. 그러나 신 선생께선 어디까지나 훌륭한 교육자로서, 스승으로
첫째는 내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3학년 재학 중, 어머님이나
서, 학자로서, 양심가로서, 애국자로서 모든 학생들에게 공평한 교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동경이 매일같이 공습을 당하던
육의 사랑을 베풀어왔을 뿐이었다. 당시 갓 생겨난 사범대학 부학
1945년 봄이던가, 여름이던가 일시 귀국했을 때, 나의 모교인 경
장 자리에 계시면서.
성사범학교 은사이시던 신기범 선생의 권유로 경성사범학교 물리
아무튼 이런 일이 있고부터 나는 나의 모교에 정이 떨어져서 그
화학준비실에 그해 7월부터 근무하던 일이다. 어머님을 뵙곤 곧 동
해 9월부터 물리선생으로 오라는 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당시 6
경으로 다시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일본이 마지막 오키나와 전투
년제 인천공립중학교)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에 몰려 매일같이 공격을 당하자 관부연락선도 불통이 되어 도저히 다시 동경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2014 + Autumn
이렇게 나는 신기범 선생님의 권유로 나의 사회 출발을 나의 모 교에서부터 시작을 했던 거다. 그 아슬아슬한 시국에서.
지금 생각을 해보면 얼마나 고마운 운명의 출발이었던가, 그런 생각이 들어 참으로 고마운 은사님, 지금도 그 감사의 마음 가득 하다. 그리고 제물포고등학교에 일 년 반인가 잠시 있다가 서울고등학 교로 일자리를 옮겼다. 김원규 교장을 이곳에서 만나게 된 거다. 김 교장은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인물평이 격돌하는 교육 자였지만 나로서는 내 생애 두 번째로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은인이 아닐 수 없다. 내 마음대로 내가 활동할 수 있는 그 자유와 혜택을 나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학생들간에, 그리고 교원들 간에, 얼마나 엄격하고, 무서운 교장이었던가. 조금도 융통 성이 없는 그러한 스파르타식의 교육자, 그 교장으로 알려져 있었
김원규 교장 1904~1968
지만 나에겐 실로 눈물 많은, 인정어린, 이해성 깊은 인간, 그 은인 이었다. 1949년 2월, 학기 도중이었지만 제물포고등학교에서 길
내가 서울고등학교에서 국어작문선생까지 한 것은 순전히 유창
영의 교장과 말다툼 끝에 그 자리에서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면담
돈 교수의 권유였으며, 추천이었다. 애초 물리선생으로 나는 출발
후, 길 교장과는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동기동창으로 아주 친한
했었으나, 시집을 내는 것이 거듭되자 1955년 가을학기부터 중앙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날부터 물리선생으로 채용해 준 것
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시론 강의를 청탁받게
을 위시해서, 근 10년 동안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물리선생, 대수
되었다. 학장은 문학평론가 백철 선생이었다. 백 선생은 동경고등
선생으로, 국어작문선생으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해준 것은
사범학교의 선배였다. 학장으로 취임하자 소설론 강의를 최인욱
김 교장이었다. 지금 그러한 배짱 있는 교장이 어디 있으리. 모든
소설가에게 맡기고, 시론을 나에게 맡겼던 거다. 지금 같으면 어
거 자격증을 따지는 판에. 그리고 대학에 출강하는 것도 허락을 해
림도 없는 일이다. 지금 같으면 소설이나 시론의 경험자보다는 박
주었다. 나는 그 덕분에 1955년 가을학기부터 중앙대학교 문리과
사학위를 따지는 형편이니까, 실지보다는 형식, 그 학위가 문제되
대학에 <현대시론>이라는 강좌를 맡아 출강을 하면서 대학교수의
는 시대로 바뀌었으니까, 이러한 곳에도 현재 대학교육의 문제점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지금 그걸 생각함에 그 아득한 모험, 그 모
이 있을 것이다.
험을 도와준 김원규 교장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내 운
대학에 나가게 되니까 나에겐 책을 읽을 시간이 필요했다. 때마
명의 길을 찾게 해준 그 은인으로. 서울고등학교 시절, 참으로 많은
침 수학과에서 대수 선생이 필요했다. 그러자 수학과 주임선생이
시를 썼으며, 많은 시론을 읽었으며, 많은 시집들을 냈다. 오늘날의
수학과로 돌아서 대수를 맡으라는 것이다. 참으로 좋은 찬스라 생
나는 그곳에서 다시 탄생을 했던 거다.
각하고 김원규 교장선생에게 그 뜻을 전했다. ‘교장선생님, 대수 선 생을 했으면 합니다. 대수 선생도 비어있고 해서.’ 하자 ‘아니 조군 은 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를 전공한 게 아닌가?’ 순간 ‘네, 그렇습 니다. 그러나 백묵으로만 수업을 하니까,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학 생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는 거 같아서, 양심에 부담이 오곤 합니 다.’ 이렇게 얼결에 말을 잇자 ‘그럼, 그렇게 하지.’ 시원하게 이 말 이 떨어졌다. 실로 생각지도 않았던 거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쉽 게 해결이 되었다. 교장은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친다>는 말에 동감을 했었으리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교장이라도 그랬으리 라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대수 선생을 했다. 몇 년이 지났다. 그러자 이번엔 유창돈 교수가
1945년 9월-경성사범학교 교유 시절-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조병화
술자리에서 ‘조형, 국어작문선생 하면 어때?’ 하는 바람에 귀가 솔 40 + 41
조병화를 추억한다 나의 아버님 조병화 조진형
깃했다. 어려서 일본말로 크고, 일본인 학교에만 다녔기 때문에 우
동창회 사무총장으로 있었던 이인학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
리말 철자법도 엉망이고, 우리말도 유학생이 공부한 거 같이 서툴
습니다.
고 해서 내가 우리말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데는 이같이 좋은 찬 스가 없다고 생각해서 다음날 유창돈 국어과 주임이 하라는 대로
또한, 세계 여행을 하실 때마다 그 곳에 있는 서울고등학교 동문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말을 연습하면서 교장실로 들어갔다. 유창돈 국어과 주임이 하라
조영식 당시 경희대학교의 총장과는 서울고등학교에서 같
는 말 ‘교장선생님, 저 국어작문 교육을 했으면 합니다. 요즘 학생
이 선생으로 지내면서 알게 되었고 서울고등학교를 떠나 경
들 문장력이 약해서 자기 의사도 제대로 표현 못하는데요.’ 여기까
희대학교로 부임하시면서 돌아가실 때 까지 가까운 관계를
지 교장을 만나자마자 얼결에 쑥 토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남은 말
유지하셨습니다.
을 이어가려 할 때 먼저 교장이 ‘그래, 요즘 학생들 문장력이 형편 이 없어. 조군이 하고 싶으면 하지.’ 이렇게 이어지면서 이것도 순
1959년 4월(그땐 4월이 학기 초였다), 경희대학교 문리대 국
조롭게 해결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고등학교 시절 말기엔 국
어국문학과로 일자리를 옮겼다. 그 전년도, 그러니까 1958년부터
어작문 선생을 했다.
전임으로 오라는 것을 서울고등학교에서 만10년을 채우려고 1년
그 무렵엔 작문교육이 전연 없을 때였다. 이렇게 과목에도 없는
을 더 서울고교에 있었다. 당시 경희대학교는 아직 신흥대학의 이
것을 확, 확, 결정지어갔던 김원규 교장의 교육열, 실로 학생들에게
름으로 있었으며 청량리 밖 회기동 골짜기에 넓게 자리 잡고, 한참
필요한 것을 교육하는 것이 산교육이 아니던가.
건물들을 증축해나가고 있었다. 부임하자 조교수의 임명장을 받았
덕분에 작문선생을 하면서 국어공부도 많이 하고, 학생들의 정
다. 그 누구도 첫해는 전임강사라 했다. 그걸 보면 조영식 총장이
서·사상·생각·요구 같은 것도 글을 통해서 알고, 참으로 즐거
나에게 큰 은혜를 주었던 거다. 조 총장은 우선 출판국을 창설하라
운 시간을 보내면서 채우고 싶었던 10년을 이곳에서 채우고 오라
고 했다. 초대 출판국장의 보직을 맡았다. 교과과정이니, 학생수첩
고 약속이 되었던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로
이니, 교직원수첩이니, 하는 것부터 시작을 해서 대학화보니, 교과
자리를 옮겼다.
서니, 모든 출판물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 총장의 부탁으 로 대학 응원가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경희대학교 근무
서울고등학교에서의 10년 경험은 아버님에게는 큰 자산이
22년간, 학과장·문리대 학장·교육대학원장, 심지어는 음악대학
되었습니다. 서울고등학교 시절 술통이라는 별명으로 유난
학장도 겸직을 하기도 했다. 얼마나 그분이 나를 신용했기에 그렇
히 학생들과 친하셨던 관계로 나중에 제자들이 성공하여 많
게도 많은 일을 나에게 시켰을까. 그리고 내가 해외여행을 떠날 때
은 후원을 받아 적자에 시달리던 시인협회, 문인협회를 흑자
마다 불러서 ‘이거 술 좀 자시고 오시오.’ 하면서 적지 않은 용돈을
로 전환 시켰고 특히 대회장을 맡았던 제4회 세계시인대회
주곤 했다. 그것뿐이던가. 내가 추천하는 교수들은 무조건 ‘좋습니
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당시 서울고등학교
다.’하면서 채용해주곤 했다. 물론 그 교수들은 모두 경희대학교를 살찌게 하는 교수들이었다. 참으로 22년간의 긴 세월이 하루같이 즐겁던 경희대학교의 교 수생활, 그렇게 해준 건 오로지 조 총장의 우정 어린 사랑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문예장학생들을 키워서 우리 문단에 시인·소 설가·평론가들을 배출했던가. 한마디로 말해서 나의 경희대학교 22년간의 생활은 이러한 끊 임없는 생산(출판물·문예장학생·시인·소설가·평론가·희곡 가)과 창작(실로 많은 작품집들)의 세월이었다. 이것 역시 조영식 총장이라는 은인 때문에 이루어진 나의 운명의 성숙기이었다.
1959년 여의도 공항에서- 조영식 총장부인, 조영식 총장, 조병화, 주요섭
2014 + Autumn
아버님이 경희대학교를 떠난 것은 1981년이었습니다. 훗
날 오해는 풀렸지만 당시 학생 분규가 심했을 때 아버님은 어용교수라는 누명을 쓴 것을 참지 못하고 인하대학교로 자 리를 옮겼습니다. 그후 1986년 인하대학교에서 정년퇴임 하 셨을 때 조영식 학원장님은 다시 아버님을 경희대학교의 재 단이사로 영입해 돌아가실 때 까지 재단이사로 계셨습니다. 특히 아버님이 마지막으로 경희대학교 병원에 입원했을 때 조영식 학원장은 담당 의사들에게 특별히 부탁도 하시고 수 석 간호사로부터는 매일 직접 보고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후에는 경희대학교 영안실에 있는 강당이 좁을 것 같다며 그 앞 건물에 있는 간호사 기숙사 강당을 새로 단장 하여 영결식을 하도록 주선해주셨습니다. 이러한 배려로 많 은 문상객들을 모시고 간호원 기숙사 건물 앞에 수많은 화환 들을 나열하고 훌륭한 영결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할머님 의 태몽처럼 꽃 속에서 사시다가 꽃 속에서 영면을 하신 셈 이지요. 이렇게 신기범 은사님, 그리고 김원규 교장, 조영식 총장은 나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운명적인 은인이었다. 이 세분이 아니었더
1955년- 명동 밤 거리에서 왼쪽부터 최영해, 정비석, 조병화
라면 이렇게 고마운 정년을 맞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물리화학을 전공하던 그 꿈의 좌절로부터 시작한 자학과 방황
하셨습니다.
과 고독과 절망으로부터 구출해준 것은 시라는 큰 은혜였다. 그리 고 그 큰 은혜를 살 수 있게 해준 위의 세분이었다. 위태로웠던 나
나는 이곳에서 정음사 최영해 사장하고 인사를 나누었고, 좀 지
의 운명의 세월,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이 하나의 기적이라고만 생
나서 소설가 정비석 씨와도 인사를 나누었고, 좀 지나서 송지영 씨
각이 되며, 실로 인간의 한 생애가 이렇게도 짧은 것인가 하는 생
와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각이 들곤 한다.
이렇게 이 다방 <하루빙>은 장만영 씨와 가까운 분들이 출입을 했다.
마지막으로 아버님에 큰 영향을 끼치신 최영해씨에 대해
최영해 사장, 본인은 이 사장이라는 말을 늘 쑥스럽게 생각을 하
정리를 하겠습니다. 최영해 씨에 대한 회상은 이 책에서 두
고 있었다. 그만큼 문필가의 냄새가 짙은 지성인이며, 야인이며, 서
장에 걸쳐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만큼 아버님이 최영해 씨
민이며, 선비였다. 어느 말끝에 ‘최 사장.’ 이렇게 부르면 ‘사장이 뭐
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으셨고 또한 아버님은 최영해 씨를 존
야.’ 이렇게 수줍게 넘기곤 했다. 그러다가 ‘최 선생.’ 이렇게 부르
경 하셨습니다.
면 ‘내가 왜 당신의 선생이야.’하곤 했다. 나의 기억으론 1914년생
1953년 가을 휴전이 되고 서울고등학교가 서울로 이전하
이니까 나보다 7세 연상이라, 형이라는 존칭을 붙일 수도 있었지만
는 바람에 아버님도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그 당시 명동에
최 형, 이렇게 부르기엔 너무나 나에겐 큰 은인이었다. 그렇다고 최
는 먼저 다방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문예살롱·모나리자·
영해 씨, 이렇게 부를 수는 더구나 없었다. 그래서 평소 나는 최 선
돌체·갈채·보리수·피가로, 좀 나중에 동방문화살롱. 이와
생, 최 선생, 이렇게 비교적 무난한 존칭을 써왔지만, 이곳에 문장
는 좀 벗어나서 소공동에 장만영 씨가 <하루빙>이라는 다방
통일 상 최영해 씨, 이렇게 쓰기로 했다.
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이곳에 아버님의 유화(油
최영해 씨 주변엔 실로 많은 출판인들이 있었다. 출판계의 거물
畵) 「월미도」가 걸려 있기도 해서 하루에 한 번씩은 들르곤
급 사장이니까, 당연히 그렇다고 하지만 문인들을 비롯해서 수많 42 + 43
조병화를 추억한다 나의 아버님 조병화 조진형
은 예술계의 인사들, 교수들, 학자들이 있었다. 그렇게 모여들게끔
다. 그러나 약속한 날짜를 지키질 않았다. 다방에서 우연히 이 이
하는 다정한 인간미와 폭넓은 아량을 지닌 인격자였다. 나중에 안
야길 최영해 씨에게 말했더니, 그 원고를 가져오라는 거다. 나는
것이지만 연희전문학교 (지금의 연세대학교)의 문과시절엔 <삼사
그 무렵 지독히 고독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 시집을 빨리 출
문학: 신백수·조풍연 등> 동인이기도 했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판을 해서 정신의 환기를 하루빨리 하고 싶었다. 그 길로 나는 선
‘실은 나도 시를 쓰려고 했는데 부친 때문에 이 길로 왔소.’ 이렇게
문사 윤 사장에게로 가서 원고에 좀 손을 댈 곳이 있다고 핑계를
나에게 던진 그 말을 지금 나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부친은 한국 사
대고 그 원고를 찾아 왔다. 그리고 최영해 씨에게 전달했다. 전달
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외솔 최현배 선생이요, 조선학회 사건
되고 곧 출판이 되었다. 그것이 나의 제5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
으로 함흥 감옥에서 투옥생활을 하시다가 조국해방과 더불어 풀려
(1955. 11. 5)였다.
나신 한글학자이시다. 최영해 씨의 효도에 관해선 나의 글이 그의
쓸쓸한 11월, 깊은 가을, 깊은 저녁이었다. 책이 나왔다고 해서
성실함을 다 따를 수가 없거니와 내가 직접 들은 이야기, 목격한 이
컴컴해진 저녁 무렵 정음사 사장실로 들어섰다. 최영해 씨는 한참
야기를 여기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검인정 교과서 교정을 보고 있었다. 어두운 등불 아래서.
최영해 씨는 그렇게 효자였다. 부자지간의 그 효성과 애정은 완
내가 들어서자, ‘우리 사무적인 건 사무적으로 합시다.’ 하면서
전한 하나의 인도(人道), 바로 그것이었다. 시를 버리고 출판을 하
돈을 내놓았다. 처음 듬뿍 받는 인세였다. 제3시집 『패각의 침실』
게 된 큰 동기는 부친의 학문의 길을 직접적으로 돕고자 한 것이며,
도 부산시절의 정음사에서 출판을 했지만, 이렇지는 않았다. 나는
감옥에 계신 아버님을 이어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생계를 이어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사랑을 위한 아픈 시들이 이렇게 더러운 돈
기 위한 현실적인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렇게 생각
이 된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못 받겠다 했더니 ‘우리 사
을 하고 있었다. 효도와 생계, 그것을 위해서 최영해 씨는 시의 길
무적인 건 사무적으로 하자고 하지 않았소.’ 화가 들은 목소리였다.
을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버린 시를 그는 시인들의 시집을
나는 그게 무서워서 얼결에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갈 곳도 없
출판하는 것으로 이어갔던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시집을 많이 냈다.
고, 더욱 쓸쓸해져서 가까운 술집에 들러서 한잔 크게 쑥 들이켰다.
정음사 하면 시집, 시집하면 정음사, 이렇게 말할 정도로 많은 시인
그리고 거리로 다시 나와서 그 무렵 가장 비싸고 유행이었던 필그
들의 많은 시집들이 정음사 최영해 사장의 손으로 직접 교정이 보
림 넥타이를 세 게 샀다. 짙은 녹색으로, 하나는 최영해 씨에게, 하
아지면서 출판이 되었던 거다.
나는 장만영 씨에게, 그리고 하나는 쓸쓸한 나에게. 그리고 다시 정
나는 최영해씨의 주변사람으로 들어서면서부터 홍이섭(국사 학·연세대교수)씨·정비석씨·송지영씨·신석정시인·한하
음사 사장실로 되돌아갔다. 사원 하나 없는 텅 빈 자기 방에서 그때 까지 교정을 보고 있었다.
운(레프라시인)·김창집(초대 대한출판협회회장·민성사 대표)
나는 넥타이와 돈을 다시 내놓았다. 하나는 당신에게 드리는 기
씨·김희봉(문예서림 주인)씨·정진숙(을유문화사 사장)씨·윤
념이라고. 그리고 돈은 내가 받을 수 없다고 그러자 ‘온 제기, 돈도
영(춘조사 사장)씨 등, 이러한 많은 장안의 명사들과 사귀게 되
모르고 사랑만 했군, 자 술이나 마시러 갑시다.’ 하면서 그렇게 바
었다.
쁘게 보고 있던 교정을 다 집어치우고 내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
최영해 씨는 많은 저명한 저자들을 포섭하면서도 선비적인 청
를 한 열권 집어 들곤 캄캄한 회현동 거리로 나섰다. 사장이지만 차
탁(淸濁)의 구별이 항상 선명하게 서 있는 분이었다. 이러한 것은
도 없었다. 재동인가, 무교동인가, 그렇다. 무교동 어느 요정으로
역시 시인적인 기질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
들어섰다. 나로선 생전 처음 들어서는 소위 일류 요릿집이었다. 여
렇게 늘 생각을 했다. 한마디로 지저분한 사람은 늘 가까이하질 않
자들이 반가이 떠들어대는 걸로 보아 최영해 씨의 단골 같았다. 술
았다.
상이 들어오고, 여자가 들어오고, 술이 돌았다. ‘이 사람이 이 시집
나는 부산피난시절부터 우연히 친하게 된 여인이 있어서 너무
을 낸 쓸쓸한 시인이오.’ 하면서 가지고 갔던 시집을 풀어놓았다.
나 외롭던 나머지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겠지.’ 하면서도 나의 고백
첫 시, 첫 구절,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를 읽다가 술집 여인
처럼, 그 해후의 인연처럼, 나의 내면의 어두운 세계를 사랑의 시
네들이 나도, 나도, 하면서 순식간에 모두 가져가고 말았다. 사랑이
로, 이루어내지 못할 사랑의 고백으로, 일기처럼 연시를 쓰고 있었
가기 전에, 그 말에 홀려버린 거처럼.
다. 서울에 수복을 하고 그걸 선문사 윤경섭 사장이 출판하기로 했 2014 + Autumn
며칠이 지났다. 도장을 찍으러 오라는 거다. 인지였다. 또 며칠
이 지났다. 역시 인지였다. 또 며칠이 지났다. 이거 역시 인지였다.
최영해 씨나 나는 무슨 행사 날 같은 것을 피하는 습관이 있었
이렇게 해서 3판이 수십 일간에 나가고 또 찍고 할 때, 출판기념회
다. 특히 정월 초하룻날 같은 날, 세배꾼들이 인사를 하러 오기 때
같은걸 잘 하지 않는 최영해 씨가 ‘그게 뭔데 그렇게 바람처럼 빨리
문이다. <중략>
팔리는지, 조 형 시집으로 벌어들인 돈 나도 좀 쓰겠소, 우리 국일
이러한 거추장스러운 정월을 피해서 최영해 씨와 나는 겨울여행
관을 통 털어 빌려서 출판기념회를 합시다. 장안의 문인·예술가
을 번번이 떠났었다. 그러니까 운전기사와 최영해 씨와 나, 이렇게
들 다 초청해서, 내가 초청인이 되겠소.’ 국일관은 종로3가, 파고다
남자 셋이 먹을 걸 잔뜩 차에 싣고.
공원 건너편에 있었다. 1955년도 다 저물어가던 연말경이었던가.
어느 해이건, 12월 30일이나 31일이면 우린 서울을 떠나서 어
매우 쌀쌀한 날씨였다. 마침 찾아갔던 <국일관>은 수리중이라 휴업
느 들길, 아니면 산길, 아니면 개울가 길을 달리고 있었던 거다.
이었다. 한국적으로 하자는 것이 이렇게 되니까 하는 수 없이 중국
<중략>
집으로 가장 컸던 <아사원>으로 갔다. 날짜와 시간을 잡아서 정음 사 사장 최영해 씨 이름으로 초대장을 찍고 돌렸다. 그날 얼마나 많은 문인·예술가들이 모였던지, 참으로 황홀한 잔치였다. 경향신문사 한창우 사장 이름으로 생전 보지 못했던 어
이렇게 나는 최영해 씨를 따라다니면서 많은 지명도 높은 사람 을 만나고, 같이 술도 하면서, 많은 여행을 통해서 우리나라 구석 구석을 살펴보는 기회를 갖곤 했다. 실로 그렇게 좋은 인생 공부 가 또 있었으리.
마어마한 꽃이 들어오고, 대한럭비축구협회 이사들도 참석을 해주 었으니. 한하운 시인은 자기 친구라고 나환자촌에 있는 시인 지망
이상과 같이 두 호에 걸쳐 아버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생들도 몇몇 몰고 왔다. 온 장안을 털어 잔치를 벌이고 있는 듯한
몇 몇 분을 『떠난 세월 떠난 사람』을 바탕으로 정리를 해 보았
그날의 광경, 여기 다 그려낼 수가 없다. 그땐 어머님도, 형님들도,
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아버님을 도와주셨지만 다 거
다 계셨는데.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던지, 인생의 슬픔도, 고독도,
론을 하지 못함을 양해해주시고 이 자리를 통해 아버님에게
희열도, 희망도, 다 잊어버리고 말았던 거다.
은혜를 베풀어 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는 실로 그 수를 헤아려낼 수 없이 팔 렸다. 김동성 교수가 영역해서, 『Before Love Fades Away』라는 이름으로 출판도 했다(나중에 『Stopping By』로 개명). 신흥영화사 에서 같은 이름으로 영화로도 되었다(주연: 황해·김지미). 시집이 나갈수록 나의 부끄러움은 더해갔다. 이러다간 사랑의 시인이니, 뭐니, 실로 부끄러운 이름이라도 붙을까 하고. 1959년 7월, 나는 서독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던 제28회 국제 PEN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최영해 씨가 나를 불러냈다. ‘당신 여 비가 없을 터이니’ 하면서 그동안 한 푼도 손대지 않았던 인세를 다 내놓았다. 그땐 하는 수 없이 고마운 마음으로 다 받아버렸다. 시간 도 가고, 생각도 좀 변해져서, 그러나 그 돈이 얼마나 많았던지 여 비를 하고도 좀 남았었다. 최영해 씨는 체면치레 같은 거나 세속적인 것을 싫어했다. 가장 예절적이며 세속적인 것을 지키면서도 가장 그러한 것을 싫어하는 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성격은 그가 본디 시인의 성격 을 짙게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늘 그렇게 생각을 하 고 있었다.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격이 서 있었고, 가장 평민적이면 서도 높은 인간의 향기가 짙은 그러한 인격자였다.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위선적이며, 가면을 쓴 권위적인 인간들이었다. 44 + 45
한 장의 사진 Poetry International Rotterdam에서 자작시를 낭송하는 조병화 시인
Poetry International Rotterdam 1987에서 자작시를 낭송하는 조병화 시인 조병화 시인은 1987년 6월 1일부터 7일까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열렸던 국제시인회의 시낭독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왕복여비와 숙박비를 모두 대주는 그러한 대규모 시인 축제였습니다. 조병화 시인은 이곳에 참석하기 위하여 우선 5월 중순에 스위스 루가노에서 열렸던 국제 PEN 대회에 참석을 하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지를 성춘복 시인과 함께 기차로 여행했습니 다. 워즈워드의 연고지, 윈드미어 호반지대를 차례로 돌고, 도버 해협을 배로 건너 다시 기차로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들어갔습 니다. 시낭독회에 참석하는 동안 참으로 고마운 대접을 받았다고 조병화 시인은 술회합니다. 시낭독회에는 18개국에서 한 사 람씩 초대되어 참가했는데 하루 저녁 3~4명씩, 20분 동안 자작시를 낭독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작한지 나흘째에 조병화 시인 의 차례가 왔습니다. 물론 시들은 다 네덜란드 말로 번역 인쇄가 되어 책으로 식장 입구에서 배포되고 있었습니다. 평소 조병화 시인은 늘 낭독에는 자신이 없으셨다고 하는데, 막상 시인의 낭독이 끝나자 다른 때보다 더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낭독 한 시 중 「어느 존재」라는 시는 다음날 현지 고등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낭독해달라는 요청으로 뜻밖에 네덜란드 고교생들 앞에서 낭독하였다고 합니다. 그 시에 등장하는 ‘그저 묵묵히 홀로 스스로를 기어오르던 한 마리의 개미’처럼 조병화 시인은 평생 부지런히 꿈을 찾아 세계 곳곳과 망망한 시의 바다를 부지런히 다니셨습니다.
2014 + Autumn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에 꿈을 담아주신 분들입니다 (2014년 8월 30일 현재 회원 현황)
Ⅰ편운 회원Ⅰ 강대신ㆍ강은모ㆍ경응수ㆍ권오륭ㆍ권은영ㆍ김기수ㆍ김동기ㆍ김동명ㆍ김병학ㆍ김상선ㆍ김성기ㆍ김성중ㆍ김수문ㆍ김여옥ㆍ김연호ㆍ김영관 김영수ㆍ김용건ㆍ김용정ㆍ김용화ㆍ김우형ㆍ김유항ㆍ김윤숭ㆍ김진겸ㆍ노정익ㆍ독고윤ㆍ마종기ㆍ박규원ㆍ박원규ㆍ박주원ㆍ박철원ㆍ설영기 신봉승ㆍ신용극ㆍ안중진ㆍ양규모ㆍ양숭문ㆍ조창환ㆍ오호수ㆍ유태연ㆍ유 현ㆍ윤석민ㆍ윤석현ㆍ윤세영ㆍ윤일중ㆍ윤정자ㆍ윤지원ㆍ윤희정 이기남ㆍ이동건ㆍ이상림ㆍ이원복ㆍ이인학ㆍ이일향ㆍ이재후ㆍ이정혜ㆍ이종호(중외제약)ㆍ이종호(삼호개발)ㆍ이춘배ㆍ이항주ㆍ이현구 임건우ㆍ장철수ㆍ장현수ㆍ장홍선ㆍ전기석ㆍ전찬민ㆍ정광선ㆍ정도환ㆍ정동수ㆍ정성환ㆍ정용선ㆍ현정원ㆍ정윤표ㆍ조성인ㆍ조성호ㆍ조성환 조수남ㆍ조 양ㆍ조영숙ㆍ조진완ㆍ조진형ㆍ차성규ㆍ최경애ㆍ최은아ㆍ허영자ㆍ호종일ㆍ홍성호ㆍ황상현ㆍ황영기 (90명) Ⅰ꿈 회원Ⅰ 강창희ㆍ공상진ㆍ김광규ㆍ김대규ㆍ김두식ㆍ김만헌ㆍ김명락ㆍ김삼주ㆍ김상현ㆍ김소원ㆍ김유성ㆍ김은규ㆍ김정일ㆍ김종성ㆍ김종회ㆍ김종회 김진환ㆍ문충성ㆍ박승언ㆍ박종규ㆍ배호원ㆍ서준희ㆍ신창재ㆍ신철우ㆍ우제상ㆍ원정수ㆍ유종해ㆍ이금기ㆍ이동수ㆍ이병규ㆍ이세웅ㆍ이수철 이 윤ㆍ이 일ㆍ이철화ㆍ이희수ㆍ장부웅ㆍ방부일ㆍ정영수ㆍ정영우ㆍ정주영ㆍ정준명ㆍ조윤원ㆍ지성하ㆍ최병철ㆍ최재성ㆍ한영란 (사)양지회ㆍ㈜한미글로벌건축사사무소ㆍ㈜스틸코리아ㆍ주식회사 퓨쳐위즈ㆍ㈜에스텍퍼스트ㆍ㈜피오제이ㆍ㈜한농화성 (54명) Ⅰ사랑 회원Ⅰ 강우영ㆍ강태흥ㆍ고은봉ㆍ곽명규ㆍ김기인ㆍ김동엽ㆍ김용건ㆍ김종교ㆍ김현곤ㆍ노대래ㆍ문영목ㆍ박병근ㆍ박순화ㆍ박진성ㆍ박현호ㆍ서재원 소현구ㆍ안창모ㆍ이규호ㆍ이영민ㆍ이재복ㆍ정구호ㆍ정분순ㆍ조성걸ㆍ차진도ㆍ최명안ㆍ하영탁ㆍ서울고 16회 동문회 (28명) Ⅰ멋 회원Ⅰ 고연수ㆍ고정순ㆍ고희수ㆍ권광중ㆍ권규인ㆍ김가현ㆍ김광영ㆍ김길수ㆍ김명인ㆍ김미란ㆍ김서봉ㆍ김석진ㆍ김성경ㆍ김순미ㆍ김영남ㆍ김용규 김용담ㆍ김용환ㆍ김유선ㆍ김종안ㆍ김종환ㆍ김진석ㆍ김진성ㆍ김헌출ㆍ김현수ㆍ김홍섭ㆍ노완규ㆍ문창욱ㆍ민용식ㆍ박근준ㆍ박대현ㆍ박덕규 박동환ㆍ박민규ㆍ박종원ㆍ박철언ㆍ박태흥ㆍ배홍규ㆍ백인기ㆍ서경석ㆍ서석인ㆍ성낙현ㆍ손순자ㆍ송충석ㆍ신동성ㆍ신동욱ㆍ신유은ㆍ안광명 안유화ㆍ오정환ㆍ유범준ㆍ유자효ㆍ유태전ㆍ윤영선ㆍ윤진석ㆍ윤춘호ㆍ이근수ㆍ이명규ㆍ이문희ㆍ이민호ㆍ이병근ㆍ이상근ㆍ이성열ㆍ이숙자 이순재ㆍ이순희ㆍ이용기ㆍ이인승ㆍ이종휘ㆍ이찬석ㆍ이태길ㆍ이한나ㆍ이혜숙ㆍ이홍섭ㆍ이희자ㆍ임동승ㆍ임두영ㆍ정성화ㆍ정영기ㆍ정태경 조건식ㆍ조 범ㆍ조병수ㆍ조성홍ㆍ조장우ㆍ조해인ㆍ주기영ㆍ주동설ㆍ최승범ㆍ최일곤ㆍ최일화ㆍ최재영ㆍ하미혜ㆍ한광석ㆍ한선희ㆍ한중진 허형만ㆍ황선도ㆍ황일운ㆍ황태선ㆍ황현숙 (101명) Ⅰ법인 / 기업 / 단체 회원Ⅰ (재)KPX문화재단ㆍ동양콘크리트산업(주)ㆍ문봉장학회ㆍ(주)까사미아ㆍ(주)동아일렉콤ㆍ㈜웰빙테크ㆍ(재)일신문화재단 (7개사)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임원진 명예회장 회 장 부 회 장 감 사 고 문 이 사
김영수 박철원 허영자 황상현 김종성 김양수 성춘복 신봉승 강대신 김삼주 김유항 김재홍 김종회 노정익 박규원 신용극 송미숙 오호수 이병규 이완섭 이재후 조진형 황영기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 이사장 (주)에스텍시스템 회장 시인ㆍ성신여대 명예교수 법부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재)선교재단 상임이사 문학평론가 시인 작가ㆍ예술원 회원 정원산업 회장 시인ㆍ경원대 교수 인하대학 화학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ㆍ경희대 교수 문학평론가ㆍ경희대 교수 전 현대상선 사장 (주)델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유로통상 회장 소야인터내셔널 대표이사 전 증권업협회 회장 문화일보 사장 (주)세이프라인 회장 김앤장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조병화문학관 관장 법무법인 세종 고문
귀하를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원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편운 조병화 시인은 인간의 숙명적 본질인 고독과 허무에 맞서 반세기에 걸친 시작 활동을 전개했던 우리 대표시인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성실성 으로 후학들을 교육한 교육자이자 160여 권의 저서를 남긴 문인이자 10여 회의 미술 개인전을 연 미술가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교육계와 문단에서 이 땅의 문학을 일구어 나가는 데 선도적 역할 을 수행하고 있음은 물론 법조계와 기업계 등 각 분야에서도 정치・경제・사회・발 전을 위해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의 많은 독자들은 현대적 삶 속에 서도 그분의 시를 통해 위안을 받고 꿈과 사랑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에 본인을 비롯한 몇몇 제자들이 모여 2006년 10월 사단법인을 설립했습니다. 저희 법인에서는 기존에 유족들이 운영해 오던 편운문학상과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조병화문학관 사업을 지원하고 나아가 한국 시문학 발전에 기여 할 수 있는 여러 사 업을 펴나갈 예정입니다. 귀하께서도 저희의 뜻에 동참하셔서 이 뜻 깊은 기념사업을 함께 이루어 주시길 간 곡히 부탁드립니다.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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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Cho ByungHwa Foundation
회원가입신청서 및 약정서 이름
(남 / 여)
전화
자택
생년월일: FA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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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 자택
우편 FAX 발송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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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S 매월납부
1만원(멋회원)
2만원(사랑회원)
3만원(꿈회원)
10만원(편운회원)
직접입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원
절
후원종류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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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번호 앞6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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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금일 선택
10일
25일
위 사항과 같이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를 후원할 것을 약속하며, 귀 사업회의 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2014년
월
일
후 원 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인)
조병화문학관 홈페이지 http://www.poetcho.com 에서도 회원가입을 하실 수 있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2길 6(105번지)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110-530) 전화. 02-762-0658 팩스. 02-3673-0436 Email. poetcho@naver.com
선
CMS는 금융결제원과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가 계약을 맺고 자동이체 출금을 의뢰하는 납부방식 입니다. CMS 자동이체를 신청하시면 희원님이 직접 은행에 가시는 번거로움 없이 매달 정기적 으로 후원금을 납부할 수 있으며 출금 수수료가 들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