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â… Vol. 20
www.poetcho.com1
2016Ⅰ Vol.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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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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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와 그림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Ⅱ
기러기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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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향기
제11회 편운시백일장
백화난만인가 춘추전국인가ㆍ윤석산
심사평ㆍ입상작ㆍ입상소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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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육성을 듣다
꿈의 글마당
권달웅 시인 편ㆍ이정화
편운 아래서 인문학과 놀자ㆍ조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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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Ⅰ
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소년에게
선생님 영전에ㆍ이재복
18
38
조병화론
조병화를 추억한다
‘꽃보다 아름다운 그대’를 위한 연가ㆍ박윤우
조병화 은사님과 이자율ㆍ성백관
20
40
제26회 편운문학상
가을문화산책
심사평·수상소감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광주문화산책ㆍ주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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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명사가 만난 조병화
혜화동 풍경전
주붕(酒朋)들의 친구ㆍ이해창
JCC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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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편운문학상 시터
제16회 수상자ㆍ유재영, 윤효
한 장의 사진
1990년대 편운재에서
표지Ⅰ제자·그림_ 조병화
2016Ⅰ Vol.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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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서울 사02178 발행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발행인 박철원 편집인 조진형 편집주간 김삼주 편집위원 김종회 박덕규 박주택 홍용희 편집장 장우덕 주소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2길 6(혜화동 105) (우)03076 전화 (02) 762-0658 팩스 (02) 3673-0436 홈페이지 www.poetcho.com 이메일 poetcho@naver.com 디자인 편집전문회사 꿈과놀다 (02) 2277-3986 인쇄 예작만들기 발행일 2016년 9월 1일 『꿈』은 잡지윤리실천강령을 준수합니다.
화보 2015 가을 광주 문화산책·제10차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정기총회
2015 가을 광주 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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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원백자자료관 앞에서 팔당전망대 앞에서 서울고 16회 회원들 남한산성 행궁에서 만해기념관에서 윤진석 회원 내외
2016
2015년 11월 4일(수) 경기도 광주 분원백자자료관, 얼굴박물관, 남한산성 행궁, 만해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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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박물관에서 김정옥 관장 내외와 함께 소리마을 전주 한정식집에서 점심식사 최종고 선생의 시 낭송 만해기념관 전보삼 관장의 해설을 들으며
제10차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정기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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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총회가 개최된 서울 유일의 한옥 혜화동주민센터 총회에 입장하는 허영자 부회장과 장혜원 회원 조병화 시인을 기리며 묵념 이희자 회원과 김지형 수필가
2016년 3월 8일(화) 혜화동자치회관 2층 혜화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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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에 사인하는 박철원 회장과 김삼주 이사, 김영은 학예사 총외에 참석한 회원들 회의를 진행하는 김종회 이사 편운과 시영의 집에서 왼쪽부터 공상진, 김유항, 민용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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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제13회 조병화시축제·제26회 편운문학상 시상식
제13회 조병화시축제
01 안성시 교육장상을 수상한 미곡초 5학년 정윤홍 어린이와 조병화문학관 김용정 대표 03 비밀의 시화, 꽃과 사랑 전시 개막식 테이프 컷팅 05 ‘꽃보다 아름다운 그대를 향한 연가’ 특별 강연을 하는 박윤우 교수 07 박희헌 안성문협 부지부장의 ‘남남1’ 시 낭송
2016
2016년 5월 7일~9일 안성 난실리 조병화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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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02 제9회 꿈나무 시 낭송대회에 참가한 어린이들과 함께 04 전시를 관람하는 김삼주 교수, 김학용 의원, 조우형 노인회장, 김지만 선생 06 편운 시 백일장 수상자들, 심사위원들과 단체사진 08 톡톡플러스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의 기타 연주
제26회 편운문학상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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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 사회를 맡은 박준 시인 시부문 수상자 장석주 시인과 박철원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장 송재학 시인의 축사 서울고 출신 정준순, 이명국, 맹형철 성악가의 축하 중창 공연
2016년 5월 7일(토) 안성 난실리 조병화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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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도 편운문학상 운영위원장의 인사말씀 평론부문 수상자 강정구 교수와 조진형 조병화문학관 관장 황은성 안성시장의 축사 안성문협 김순희 수석 부지부장의 축하 시 낭송 수상자들과 내빈들의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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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시와 그림 기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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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향기 백화난만인가 춘추전국인가 윤석산
백화난만인가 춘추전국인가 _尹 錫 山
우리 민족이 ‘시’라는 문학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의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이 문인들이 쓴 한시라는 점을 보아도 이는 알 수가 있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오늘 우리나라는 참으로 많은 시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이에 걸맞게도 많은 문학지 가 창간이 되고, 또 발매되고 있다. 문학지의 역사는 아주 길다. 처음의 문학지는 동인지 형태를 띠고 나왔다. 몇 몇 문인들이 모여 자신들의 작품을 모아 실은, 잡지 형태의 동인지들이 어쩌면 문학지의 시작이었는지 모 른다. 멀게는 조선조 후기 4대 문장가로 일컫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이서구 등이 쓴 글을 중국 의 저명한 문장가로부터 서문을 받아 묶어낸 『사가집(四家集)』에서 우리나라의 동인지, 혹은 문학지의 시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네 사람들은 그 신분이 높지를 못해서 아무리 좋 은 시를 써도 사대부들이 알아주지를 않아, 당시 내로라하는 중국의 대문장가로부터 평가가 담긴 서문을 받으므로, 자신들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입증했고, 또 이를 묶어 책으로 냄으로 오 늘까지 그 명성이 전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깝게는 일제강점기 시절, 3・1 독립운동 이후, 일제로부터 다소 허여된 언 론의 자유로 인하여 많은 동인지, 문예지 등이 등장하던 1920년대, 식민지의 젊은이들은 문학 에의 열정으로 이들 문예지들을 창간하고 또 이끌어갔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문학의 바 탕을 이룩하였다. 또한 1950년대 전쟁이 끝나고 황폐해진 거리에는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변변한 직업도 없 이 떠돌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명동 어느 다방에 앉아 하루 종일 커피나 한 잔 시켜놓고 앉아 있는 문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자장면 한 그릇도 먹지 못하고 종일 종로에서 명 동으로, 다시 명동에서 소공동으로 배회하던 예술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시절에 문학잡지가 하나 창간이 되었다. 창간을 한 사람은 문인도 아니었다. 다 만 이 척박한 땅에 문학이라는 예술을 뿌리 내리게 하여, 식민지 36년과 이내 일어난 6・25 전 쟁으로 인하여 황폐해진 사람들의 가슴에 따뜻한 시와 소설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로 보아도, 문학지는 문학을 통해 자신들의 진정한 삶을 이야기하 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열정에 의하여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 도 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은 문학에의 열정이 오늘의 수많은 문학지를 세상에 내놓았 2016
고, 그래서 마치 문학지 천국과 같이 되고 있음이 오늘 문학판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 이 많은 문학지들을 바라보며, 한 쪽으로는 우려를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 다. 과연 이 많고도 많은, 그래서 문인들조차도 그 문학지가 얼마나 있는지, 그 이름이 생소한 문학지가 계속 나오고 있는 현실에 관하여, 과연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는 일인가 생각하는 사 람들도 없지 않아 있다. 문학지를 창간하여 진정 좋은 신인들을 배출하고, 편집과 기획을 엄중하게 해서 문단을 선 도하는 문학지 또한 많이 있다. 그런가 하면, 진정으로 문학을 아끼는 사람이 투자 아닌 투자 를 해서 이 땅에 보람 있는 일을 하고자 실력 있는 문인을 앞세워 문학지를 이끄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문학지들과는 다르게, 문학지를 창간하여 운영을 하면서 자격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문인들을 배출하고, 심지어는 배출된 문인들을 끌어 모아 그 문학지를 중심으 로 사단을 만들고, 자신들의 아성을 쌓는 모습 또한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문단에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 일종의 문단 권력이라는 말이 그 말이다. ‘권력’ 이라는 말은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인데, 문학 등의 예술에도 이러한 말이 아 무러한 스스럼없이 쓰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현상 때문이리라. 엄밀하게 말해서 ‘권위’와 ‘권력’은 다르다. 과거 우리의 선배들은 아무러한 현실적인 권력 이 없어도, 문학 하나만을 가지고 그 권위를 지켰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오늘 횡횡되고 있 는 권력은 문학 외적인 것으로 부정적이며 나아가 문학적 횡포가 될 수 있는 위험성마저 지 니고 있다. 오늘 우리 문단에서 일고 있는 이와 같은 현상은 문학이라는 꽃들이 서로 어울리며 피어 있는 백화난만(百花爛漫)인가, 아니면 서로 쟁패를 해가며 권력을 쥐기 위한, 어지러이 난립 한 춘추전국(春秋戰國)의 모습인가.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면서 진정 문학에의 모습을 보였 던 조선조 후기 사대가들의 모습이나, 1920년대, 또는 1950년대의 그 순수한 열정이 다시 살 아나는 문학지에의 순수한 백화난만의 시대가 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비단 어느 한 사람만 은 아니리라.
윤석산(尹錫山)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197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나는 지금 운전 중』 등 다수. 19회 편운 문학상 본상 등 다수 수상.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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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육성을 듣다 권달웅 시인 편ㆍ이정화
수묵화처럼 수수하고 고요한 서정시
대담 _ 이 정 화
권달웅 경북 봉화 출생. 한양대 대학원 졸업. 1975년 박목월에 의해 『심상』으로 등단. 시집 『염소 똥은 고요하다』외 8권. 편운문학상, 최계락문학상, 펜문학상 수상 2016
이정화(이하 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무더위에 어떻게 지내
십니까? 요즘 근황이 어떠신지요?
저는 난해하고 길어서 도저히 암송할 수 없는 시들보다 이런 시들이 더 좋은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권달웅(이하 권) 건강에 많이 신경을 써요. 아침저녁 한강
이 지금 인터뷰를 진행하는 곳은 이름이 바뀌었지만 조병
을 매일 두 시간 정도 걷고, 고향에 내려가서 한동안 보내기도
화 선생님께서 즐겨 찾으셨던 혜화동로터리의 까페입니다.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목
선생님께서는 편운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셨는데요, 편운 선
마름에서 발생한다고 하지요. 이 목마름의 공간을 채우기 위
생님에 대한 추억담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하여 산책도 하고, 고향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해요. 나이 탓인
권 선생님은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칭찬을 많이 해 주
지 불면증에 어지럼증이 겹쳐 힘드네요, 그런데 지금은 건강
셨어요. 구수하고, 남 헐뜯는 얘기 안하시고……. 선생님의 고
이 조금 나아진 편이예요.
향인 안성에는 유명한 시인들이 많지요. 조병화 선생님을 비
이 고향에 다녀오셨다고 하셨는데요. 고향에서 어떠한 시
를 생각하셨는지요. 또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요?
롯해 박두진 선생님, 정진규 선생님, 한광구 시인, 김유신 시 인……. 한번은 안성에서 김유신 시인 첫 시집 『칼과 씨앗』 출
권 시골에 가서 두어 달 있었지요. 내 시를 이해하는 입장
판기념회가 있었어요. 그 자리에 선생님이 오셔서 축사를 해
의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내 시는 음미해서 읽으면 평범하고
주셨는데, 시와 삶이 일치된 좋은 시라고 하시면서 평설을 아
순수한 것들 속에 어떤 삶의 깊이가 들어있다, 라고들 이야기
주 잘 썼다고 칭찬하셨어요. 실상은 그 시집 평설을 제가 썼거
합니다. 내 시의 바탕은 어릴 때 자라난 고향에서의 모든 대
든요. 조병화 선생님의 시는 이해하기가 쉽고 우수와 고독이
상들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야생화나, 작은 벌레들같은 자
서려 있어서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지요. 저도 선생님의 시 ‘하
연이지요. 요즘 의식하는 것은 옛날에 내가 자연과 함께 경험
루만의 위안’ 은 강연이 있을 때면 자주 암송합니다.
했던 것들을 생각하고, 소위 문명화된 도시 속에 살면서 내가 뭘 하며 살았는가하는 생각들을 합니다. 자연은 영원히 변함
하루만의 위안
이 없는데, 인간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으니까 나는 뭘 하고 살 았는가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요. 내 시의 주된 배경은 자연이
잊어 버려야만 한다
지만 시를 쓸 때는 문명이 주는 인위성과 자연이 주는 순수성,
진정 잊어 버려야만 한다
그 두 가지를 생각하며 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좋은 시를 써야 하는데 나이 탓인지 잘 안되요.(웃음)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이 어서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등단하신지도 오
래 되었지요? 근래에는 어떤 시집을 발간하셨나요? 권 등단한 지도 벌써 40년이 지났네요. 작년에 시집 『염소
그 사람으로 잊어 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똥은 고요하다』를 발간했어요. 지금까지 9권의 시집과 3권
나도 또 하나
의 시선집을 발간했지요. 4.5년을 주기로 시집을 발간한 셈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 대며
인데, 꾸준히 시를 쓴 결과 보다는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한 아
밀려가야만 한다
쉬움이 남네요.
눈을 감으면
이 선생님의 최근에 나온 시선집 『흔들바위의 명상』에는
나태주 선생님이 삽화를 예쁘게 그려주셨어요. 권 밥북이라는 출판사에서 기획시선집을 펴내는데 나태주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선생이 첫 번째로, 제가 두 번째로 시선집을 펴냈지요. 나태주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 날이 온다
선생의 시는 참 좋습니다. 그의 시 「풀꽃」은 많은 독자들이 애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송하며 암송하고 있지요. 또 조병화 선생님의 시들도 많은 독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자들이 암송을 하고 있고 아직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12 + 13
시인의 육성을 듣다 권달웅 시인 편ㆍ이정화
잊어 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 버려야만 한다. 이 ‘하루만의 위안’을 다 암송하시네요. 권 천천히 낭송하면 더 분위기가 있는데.(웃음) 선생님의
시 「밤의 이야기」도 좋습니다. ‘묵은 역사처럼 밤이 내리면/나 의 밤은 가라앉은 잠수함처럼 고요하다’라는 이미지가 참 좋 지요. 조 선생님께서 경희대에 계실 무렵에 발표하신 시의 한 구절은 그야말로 명언처럼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낙엽은 낙 엽끼리 모여 산다’, 대학생들은 가을이 되면 그 구절을 읊조 리고 다녔지요. 조병화 선생님의 시들은 언제 읽어도 좋습니 다. 선생님은 생활 속에서 시를 쓰셨던 분이었습니다. 선생님 이 늘 말씀하셨던 것, 시는 나의 철학이다. 그림은 나의 위안 이다. 어머님은 나의 종교다, 라는 유명한 말씀처럼 생활 속에 서 늘 시를 쓰셨지요. 또 선생님은 굉장히 고독하셨던 분이에 요. 시로써 인간의 본질인 삶의 고독과 우수를 노래하셨지요. 또 럭비를 하셨잖아요. 시인으로써 운동을 그렇게 하신 것도
결여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응축과 감각적 이미지가 생명
대단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선생님 작고 10주기 때 추모시를
인 시는 그래서 서정성을 바탕에 두면서 사상이나 의미를 표
썼던 기억이 납니다. 혜화동로타리의 빨간 우체통을 떠올리
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순한 자연을 노래한다고 해서 서
며 썼지요. 10주기 추모특집으로 꾸며진 2013년도 『꿈』지 봄
정시가 아니라, 그런 자연을 통해서 오늘날 내 삶을 정의해 볼
호에 작품이 실렸지요.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서정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유
이 유성호 교수님은 선생님을 ‘서정의 적자(嫡子)’다. 라고
성호 선생께서 저를 서정의 적자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내 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선생님께선 지속적으로 서정시를 써
가 단순한 서정이 아니라 서정 속에 현대의 삶이 숨겨져 있기
오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제 시를 칭찬만 하
권 요즈음은 서정시를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어린아
이들을 보면 행동이 꾸밈이 없고 순수하지 않습니까? 시 속 에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함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시들은 너
는 것 같습니다만. 이 시의 생명을 응축과 감각적 이미지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조금 더 말씀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무 수사의 기법 쪽으로만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정
권 이미지는 사물을 감각화해서 나타내는 건데, 누구나 자
은 시의 원형질이며 시의 밑바탕이라고 생각해요. 등단 이후
기의 경험 속에 과거에 본 것이라든지 들은 것 만져본 것이 있
지금까지 저는 지속적으로 서정시를 써왔지요. 시는 내면과
잖아요. 그것들을 어떻게 이미지로 표현해서 호소를 하는가,
사물의 등가적 유추에 의해 창조해낸 것이라고 생각해요. 서
만약 호소를 해서 읽는 사람이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을 공감이
정은 산소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이면서 그 시를 맑고 산
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의 현대시는 그런 공감성이 부족하다,
뜻하게 하여주지요. 달빛처럼 은은히 비치면서, 그 시를 은근
다시 말하면 서정이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서정은 모든 시
하고 아름답게 하여주는 서정은 시의 감성과 감각을 선명하
의 밑바탕이 되고 원형이 되고 그 시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
게 해줘요. 현대시는 관념과 화려한 수사를 앞세워 간결미가
인데, 서정이 없는 관념적인 시들이 있지요. 실상 관념적인 시
2016
를 남기기 쉬운 반면,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시상을 전개할 수 있어요. 그러나 후자는 비정적인 관점으로 보아 감정적 오류 를 거부하는 반면,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시상을 전개할 요소 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대상을 현실과 어떻게 연결하여 알레 고리화하고 창조적 직관으로 보느냐에 따라 시의 성패가 좌 우되지요. 이 시의 성패를 가늠하는 것이 대상에 대한 인식이군요. 창
조적 직관이라 하셨는데, 창조적 직관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권 인간이 인식하는 직관은 수많은 경험과 순간의 정감적
교감에 의해서 창출되지요. 시의 직관은 시각에 포착된 쾌락 을 새롭게 재구성하여, 내면적 미감으로 응축하여 표상해요. 창조적 직관을 유발하는 본령적인 요소는 사물이 지닌 본질 적 요소와, 내면이 지각하는 감각적 요소의 교접에 의하여 형 성되어요. 이러한 직관은 단순한 정감을 초월하여 내면에 축 적된 사회현상으로 확대되고, 더 많은 것을 인식하도록 유도 는 쓰기 쉬워요. 내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을 관념어들을 사용하
해요. 이것이 창조적 직관이에요.
여 어떠한 대상에 빗대지 않고 기술하듯이 쓰니까, 자신의 내
이 사물의 본질과 내면의 소통이 중요하군요. 서정시를 쓰
면과 사물의 등가적 유추에 의해 쓰는 서정시 한 편이 그런 관
는 선생님의 입장에서 보는 미래파에 대한 견해는 어떠십니
념적인 시들보다 쓰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까?
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단순한 서정시 같지만 천천히
권 요즈음 문학잡지에는 난삽한 수사와 관념을 앞세운 소
음미하여 알고 보면 내면의 깊이가 있는 시들. 읽기에는 쉬
통불가능한 시들이 적잖게 발표되고 있어요. 시 한편이 20행
워보여도 오랫동안 마음을 울리는 시들을 쓰기가 어렵지요.
30행인 시가 많아요. 미래파 시인들은 새로운 시 형태를 구축
권 조금 더 예기해보면 예를 들어 김광균 시인의 시 「외인
하기 위해 기존의 전통적 표현세계나 서정을 부정하는 경향
촌」에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
이 있어요. 강열한 자의식의 분열, 다양한 상상력의 확대, 형
소리’ 라는. 내가 과거에 새벽기도를 가다 아침의 신선한 맑
태파괴적인 시에 대해 옹호하지요. 그러나 전통과 현대를 접
은 공기 속에서 경건하게 들리는 교회당의 종소리를 들은 경
합하는 시의 미의식은 요즈음의 불가해한 시의 흐름을 성찰
험이 있다고 합시다. 또 어느 날 혜화동로터리를 지나가다 무
하게 하고 보다 새로운 형태의 시를 추구하는 길이 될 수 있
더운 낮에 분수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
어요. 혹자들은 ‘서정은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서정을 아무리
면 이 분수와 종소리를 어떻게 매치시킬 것이며 이를 통해 어
노래해도 옛날의 시들을 답습하는 것이지 새로운 시를 쓸 수
떠한 정서와 생각을 호소할 것인가. 이것에 대한 고민. 그것이
있는가, 라고 말이죠. 하지만 세계의 명시들, 독자의 가슴을
바로 시의 감각적 이미지이며 응축입니다.
울리며 오랫동안 남는 시들은 다 서정을 밑바탕으로 한 시들
이 선생님은 시를 쓸 때 대상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하며,
시점을 어디에 둡니까?
입니다. 이제 젊은 시인들도 서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불가해한 시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권 사물을 인식하는 시선은 크게 두 범주로 볼 수 있어
이 불가해한 시를 성찰하기 위해서는 전통과 현대를 접합
요. 하나는 대상이 그 존재를 위해 어떤 것에 의존하는 시선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현대문명에서 시의 효능은 어디에 있
이고, 또 하나는 대상이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시선
다고 보십니까?
이지요. 전자는 인간적인 관점으로 대상을 보아 감정적 오류
권 시는 우리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해요. 그러나 14 + 15
시인의 육성을 듣다 권달웅 시인 편ㆍ이정화
정신적인 도움을 주고 있지요. 시는 인간의 마음속에 아름다
위해서예요. 나의 시는 삶의 근원적인 물음에서 출발하여 그
운 정서와 맑은 정신을 불어넣어줘요. 인간은 화려한 문명 속
에 대한 답을 아주 작고 약한 것에서 찾아요. 작고 약한 것도
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외딴 산골에 가 하룻밤 머물고 싶어 하
우주의 소중한 생명체이기 때문이에요. 나는 시를 쓸 때 기교
는 본능이 있어요.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 잠시라도 맑은 자연
나 현란한 수사보다는 감각적 이미지와 보편적 정서에 비중
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해요. 삶의 현실이 부정적이고 그 현실
을 두어요. 그래서 나는 수묵화처럼 수수하고 고요한 서정시
에 순응하지 못할 때일수록 인간은 이상과 그리움의 세계를
를 지속적으로 쓰고 있어요.
동경하지요. 이런 내면적 목마름을 충족해주는 것이 시의 효 능이에요.
이 선생님의 시관을 소중하게 들었습니다. 긴 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서정시를 쓰시는 선생님의 시관을 좀 더 듣고 싶습니다. 권 나의 시는 어릴 때부터 접해온 오지 산골의 맑은 자연환
경이 배경이 되고 있어요. 그것은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과 이 어져 있어요. 나는 문명의 인위성과 자연의 순수성, 이 상반된 두 개의 연민 속에서 시를 써요. 문명에 의해 사라져버린 것 들에 대한 그리움과 문명에 길든 인간의 삶을 정화하기 위해 서정시를 써요.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희로애락의 내면을 구 체적 사물과 유추하여 나의 내면의 갈등과 비애를 해소하기
2016. 8. 4 혜화동로터리 Cafe de L.Bean
이정화 경남 부산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수학. 2013년 『심상』, 2014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6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Ⅰ 소년에게
소년에게
조병화
너는 무엇보다도 먼저 죽음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는 네게 죽음이 와서 이제 가자, 하는 말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노력한 만큼 밝은 곳으로 갈 것이 아닌가 어둡고, 캄캄하고, 보이지 않는 우주 죽어서 혼자 가는 길 어떻게 떠날 것인가 때로, 때때로, 생각해 볼 일이 아니겠는가. (1985. 9. 6) -제29집 《해가 뜨고 해가 지고》에서
“죽음을 알아야 한다”고 시인이 이야기합니다. 이야 기의 대상은 소년입니다. 삶과 생명의 에너지로 가득 한 소년에게 “죽음을 알아야 한다”고 시인이 이야기하 는 까닭은, 죽음이라는 것이 삶의 반대편에 자리하는 게 아니라 삶과 늘 함께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 다. 해서 언제인가 맞이할 죽음을 생각하고 인정하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을 존중하고 긍정하는 일이 될 것입 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생명의 차원은 물론 탄생과 죽 음이 존재하는 관계와 사랑의 세계에서도 이 간단한 이치는 통할 것입니다.
박준 시인. 1983년 서울 출생.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다. 제 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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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론 ‘꽃보다 아름다운 그대’를 위한 연가 박윤우
‘꽃보다 아름다운 그대’를 위한 연가 _박 윤 우
1. ‘꽃’에 대한 사유, 혹은 서정의 관습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언명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의 굴곡과 사태의 복잡미묘함에 대한 인식적 해결 혹은 해명을 위해 자의적인 언어의 지시적 본성을 ‘인간’의 이름으로 한껏 활용(이용)해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언어학개론>의 제1과 제1 장에 이미 밝혀져 있는 자명한 사실이 세상의 삼라만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적 지배 욕구를 충족시 키기 위한 의도된 기획인 한, 시인은 불가피하게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현대시 100년사의 흐름 속에 명멸한 셀 수 없이 많은 시적 창작물 중 하필 ‘꽃’의 이름으로 쓰인 작품이 가장 많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이유를 흔히는 아름다움과 사랑을 노래하 는 일을 ‘서정’의 본원적 임무로 여겨왔던 낭만주의 시대를 지배한 원론적 관점에서 찾을 수도 있 겠고, 은유와 상징, 이미지를 통한 관념의 은폐성과 감각의 형상성을 시적 글쓰기의 목적으로 생 각하는 작가적 입장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기실 그 관습은 의미를 발견하고 새롭게 창조해내 기에 턱없이 부족한 언어의 감옥을 탈출하려는 시인의 지난하고도 힘겨운 고통의 몸부림이 빚어 낸 또 하나의 감옥이었다면 조금은 과한 말일는지... 그런 의미에서 ‘꽃’이라는 낱말의 내포와 외연은 그 무수한 차이성과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언 제나 내 자신이 그가 되고자 하는, 아니 그를 내 안에 가둬두고자 하는 소위 ‘동일성의 시학’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심지어 ‘이름’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의도를 구현하고자 한 김춘수 시인의 저 고유한 ‘꽃의 담론’에서조차 ‘기리우는’ 대상으로서 숭앙되었다는 사실에서 확 인할 수 있다. 편운 조병화 시인은 이미 그의 시전집의 간행을 통해 확인되었듯이, 평생의 시작업을 일관하여 어쩌면 이러한 언어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모습을 솔선해 보여주고자 한 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 다. 그에게 궁극적인 시적 대상은 세상의 삼라만상이라기보다는 그가 함께 하고자 하는, 그가 마 주하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로 발굴, 정리된 시편들은 연작과 시화의 성격을 지닌 채 일종의 기획된 의도와 함께 쓰인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시인의 여느 창작과정보다 더 선명하게 시적 담론과 시적 진술의 진정 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그만의 고유한 ‘사랑 학’이, 그리고 그 휴머니즘에의 끈질긴 지향이 만들어낸 담백하고도 찬연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2016
2. 사랑의 독백이 머무는 자리 <비밀의 시화>라는 제호로 묶인 새 시편들은 “꽃 그림 한 폭에 애절히 그리운 마음 한 자락씩 담 아 만든 시화들”이라는 간행사의 설명처럼 조병화 시인의 초기시에 잘 나타난 전형적인 사랑의 서 정을 읊조린 시편들임에 틀림없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책자에 수록된 28편이 모두 별다른 제목이 없는 채 쓰인 것이라는 점과, 대부분의 작품들이(꽃의 스케치를 포함하여) 모두 쓴 날짜를 정확히 기록한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시기가 1958년 2월부터 봄에 이르는 짧은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도 고려의 대상이 된다. 물론 책자의 해제에서처럼, 그리고 그 스스로의 자전적 술회에 따라 시인이 이 시기 겪었던 사 랑의 열병을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며, 흔히 논자들에 의해 평가되는 ‘절대고독’과 ‘허무’의 사유를 다시 언급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나, 그와 같은 일반론적 평가를 이 새로운 <노트의 기록물>에 기 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부치지 못한 편지’와도 같은 것이 며, ‘비밀일기’에 해당하는 것일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조병화 시인에게 ‘고독’이란 결코 그 자신 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이미 그것을 인간의 성정에 편재한 것으로서 현실화할 수 있 는 그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왕의 평가에서 인정된 것처럼 조병화 시인의 시에 가장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당신” 혹은 “그대”와 같은 2인칭의 지시어는 이미 그의 시작 초기부터 확고한 그만의 고유한 자장 을 지닌 채 사용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러기에 그의 시에 서는 화자의 내면적 독백조차 ‘당신’을 향한 소통과 대화의 담론이 된다.
당신을 위하여 이 세상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싶어졌읍니다 당신을 위하여 이 세상 아름다운 노래를 냄기고 싶어졌읍니다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 「당신을 위하여」 부분
『비밀의 시화, 꽃과 사랑展』 p.39
애당초 우리는 그것이 아니었읍니다 그저 서로 옆자리 있었던 것입니다
애당초부터 우리는 그것이 아니었읍니다 시작도 마지막도 없는 것이었읍니다 “⋯⋯” 애당초부터 있는 날 그날까지 외롭지 않기 위하여 당신을 뜨겁게 아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 「애당초 우리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분 『비밀의 시화, 꽃과 사랑展』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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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론 ‘꽃보다 아름다운 그대’를 위한 연가 박윤우
위의 인용에서 보듯 시인에게 ‘당신’은 그저 옆자리에 함께 있는 ‘벗’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의 시 에 고유한 서간체의 문장은 결국 주체의 내면에 대한 개인적 표출의 목적으로서보다는 누군가 그 주체가 마음을 주는 또 다른 주체에게 자신을 전달하고자 하는 소통의지의 표현도구이며, 동시에 대화적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상호교감과 상호주체성의 인식을 가능케한다. 그것이 천생의 ‘고독’ 을 치유할 수 있는 시적 방법론이며, 아울러 그 치유의 방법론은 ‘당신’을 향한 이타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자의식의 심연 속에 유페된 상상력이 아니라 만인을 향한 휴머니즘의 발로로서의 진 정한 대화적 상상력으로 구현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3. 시적 사유의 자유와 현실성 – 대상성의 초극 조병화 시인에게 자연적 대상은 매우 독특한 존재로 나타난다. 흔히 ‘물아일체’의 경지로 표현 되는 주체와 대상의 조화 내지 합일의 정신을 우리 서정시의 전통적 사고방식이자 상상력이라 한 다면, 그는 최소한 대상을 인간의 자의적 인식과 관념의 내부로 무자비하게 가두어버리는 폭력적 사유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한 점에서 근본적으로 리얼리스트이며, 다른 한편으로 과도한 낭만적 세계관이 지배한 근대시의 정체된 대상인식을 ‘낭만’의 이름으로 벗어나고자 한 점에서 보면 모더 니스트, 혹은 포스트 모더니스트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꽃 한 포기의 스케치에 시 한 편을 꼬박꼬박 적어내면서도 그의 ‘시의 꽃밭’에는 꽃이 없다. 아니 꽃에 대한 언급조차가 없다. ‘어머니’를 노래하며 붓꽃을 그리고(14; 도록 22p), 아이리스를 스케 치한다(16; 도록 27p). 모성과 육친애를 그저 그리 진솔하게 풀어놓은 그에게 꽃의 형상은 결코 그 만의 특별한 은유적 심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위적 대상이 아니다. 이 꽃들은 마치 소월의 언급 처럼 그저 ‘거기 그렇게’ 있기에 아름다울 따름이며, 아니면 그만의 존재가치를 알아주는 누군가 에 의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만의 존재가치’란 꽃으로 하여금 스스로 아 름답게 피어나도록 두는 일과 통하며, 시인은 단지 그 ‘자체발광’으로 인해 시인의 넘쳐흐르는 ‘그 리움’과 ‘사랑’의 감정을 또한 시인 스스로의 언어로 써내려갈 수 있게끔 한 것이다.
15. 어제는 내가 견딜수없이 쓸쓸했읍니다 어제는 내가 견딜수없이 불상했읍니다
당신과 그렇게 헤여져서 긴 담모통이 나무 아래로 구름다리 아래로 축축히 봄이 배오는 밤을 걷고 있었읍니다
나는 지금 어딜 걷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았읍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았읍니다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생을 견디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2016
- 「15. 어제는 내가 견딜 수 없이 쓸쓸했습니다」 전문 『비밀의 시화, 꽃과 사랑展』 p.24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가랑닢이 지고 젖은 시간 깔깔한 시간 다하지 못하고 쓸쓸히 스스로가 스스로의 생명을 걷을 그날까지 하나의 숨은 믿음아래 가느다란히 지켜옴이 있음을 고마운 당신이 있어
- 「22. 나에게 사랑함에 있어 부족함이 있음은」 부분 『비밀의 시화, 꽃과 사랑展』 p.29
위의 시에서 보듯 반복과 변형에 익숙한 시인의 시적 언어는 그의 사유를 지속적이며 연속성을 지닌 통찰의 언어로 강화시키며, 그 내적 독백의 언어 역시 궁극적으로 ‘당신’을 향해 열려 있음으 로 인해 그 모든 아름다움과 가치로움의 형상은 ‘고마운 당신’의 것이 된다. 이 사유의 지속성과 확 장성이야말로 관념의 굴레에 갇히는 대상성을 초극할 수 있는 근원적 힘으로 작용하는 바, 이처럼 조병화 시인의 새 작품들은 아마도 그의 초기시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시적 사유의 공간을 가장 완 벽하고도 확고하게 구축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4. 다시 대화적 상상력, 그 소통에의 의지에 대하여 조병화 시인의 이번 발굴 작품들은 새삼스레 시인이 평생 일관되게 견지해온 창작적 메시지를 보다 선명하게 각인시켜주기에 충분하다. “대화가 없으면 시인은 이 지상에 살아 있을 의미를 잃 어버리게 되는 것이다.”라는 이 평가적 단언은 한편으로 그의 시가 추구한 존재의 고독에 대한 성 찰과정이 ‘대화의 목마름’을 결과하였음을 해명해주기도 하지만, 이 갈망과 끝없는 그리움에의 지 향은 기실 조병화 시인의 시로 하여금 서정시의 관념세계를 과감히 뚫고 나와 인간의 삶이 지닌 현실성과 일상성에 대한 자각을 보편적 정서로 승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 하도록 한 근본 동력은 시인의 대화적 상상력이 지닌 자유와 소통에의 의지였음을 다시금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병화 시인은 처음부터 고독의 한복판에서 고독과 벗하였기에 스스로 고독으 로부터 탈출하고 그것을 초극할 수 있는 성찰과 사유의 공간을 언어로 진술해나가고 있었던 것인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시인의 독백과 대화는 오히려 이 도저한 대중의 시대에 서정의 언어가 그 들에게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선물이 될 수 있다. 가장 진솔하고 가장 현실적인 시인의 반성적 사 색과 대화적 소통의지는 그들로 하여금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배반의 역설 혹은 진리를 잉 태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윤우 1960년 서울 출생. 서울사대 국어교육과 졸업 및 서울대 인문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1년 <시와 시학> 평론부문 신인상 에 추천되어 등단. 현재 서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 저서로 『한국현대시와비판정신』, 『서정시와 대화적 상상력』 등이 있으며, 제11회 편운문학상 우수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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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편운문학상 심사평 시 부문ㆍ평론 부문
제26회 편운문학상 심사평 -시 부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사무실에 서 열린 제26회 편운문학상 본심 (2016. 3. 11)
제 26회 편운문학상 심시위원들은 예심을 거쳐 엄선된 네 권의 시집에 대해 각자 미리 충분 히 검토할 시간을 가진 후 수상자를 결정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네 권의 시집 모두 원숙 에 이른 시적 경지를 유감없이 펼쳐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수상작으로 선정될 만한 충분한 이 유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중에서 한 권을 고르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았음은 두말 할 필 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골라야만 했다. 심사위원들은 작품성을 최우선 고려 사항으로 여기 면서도 선별을 위해 조금 더 안팎의 사정을 헤아려가며 보다 세심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했다. 그 결과 장석주 시인의 『일요일의 나쁜 날씨』가 우선적으로 당선작으로 검토되었으며 최종적 으로 모든 심사위원들의 동의를 얻어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장석주 시인의 시력에 대해서는 새삼 설명이 불필요할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이번 시집에서 그가 새롭게 도달한 높이에 주목했다. 한국의 현대시가 어떤 국면에서는 정서적 공감에, 어떤 국면에서는 현실의 인력에, 또 다른 국면에서는 기하학적 운산에 차례로 이끌렸던 역사를 지 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만약 어떤 원숙함이 현대시의 그런 이력을 새로운 생성의 용광로로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풋풋함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하 겠다. 감수성과 지성의 통합이라는 귀하고 드문 사례를 장석주 시인의 『일요일의 나쁜 날씨』 를 통해 얻게 되었다는 것에 심사위원들은 동의했다. “저 여름 자두나무는 밤의 至高 속에서/ 검정을 찢고 검정의 창공으로 솟구쳐 날아오르려는가?”(「저 여름 자두나무」)라고 장석주 시 인은 물었다. 대지와 창공의 매개로서의 자두나무는 중음(重陰) 속에서 새로운 생성을 모색하 는 시의 메타 이미지로서 일품이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박태일(장), 김기택, 조강석(글)
2016
제26회 편운문학상 심사평 -평론 부문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올라온 비평집은 세 권이었다. 세 권의 비평집은 제각기 비평의 방법 과 방향에 있어 고유한 장점들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노작들이다. 현대시와 비평의 전개에 대 한 반성적 성찰,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에 기반하여 한 시인의 시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망하는 사유, 그리고 새로운 문학 이념을 제시하는 독창적 시학 등을 한 자리에서 검토할 수 있게 된 것은 동시대 시비평의 다채로움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성찬에 가깝다는 데 심사위원들은 우선 동의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논의를 통해 심사위원들은 통시성과 더불어 공시성을 획득하고 있 는 비평집을 최종적으로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강정구의 『산란하는 현실들』은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수렴과 확산을 거듭하는 사 유로 가득 차 있다. 우선 통시적으로 이 비평집은 1970년대 창비세대 비평의 성패에 대한 성찰 을 담고 있음과 동시에 최근의 실험적 시인들의 새로운 성취를 조망하고 그 의의를 설명하는 글까지 포괄하고 있다. 나아가 공간적으로는 남과 북의 문학이 각자의 방식으로 역사를 전유 해온 양상에까지 성찰이 미치고 있다. 여기 묶인 글들이 가히 통시적이며 공시적인 사유의 한 모범이 되고 있다는 데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동시대 비평의 시계(視界)가 보 다 활달하게 넓어지기를 희망하며 심사위원들은 『산란하는 현실들』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심사위원 : 박태일(장), 김기택, 조강석(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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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편운문학상 수상소감 시 부문 본상 장석주
관 뚜껑을 박는 장의사의 못질보다 못한 쓸모를 가진 시를 마흔 해 넘게 붙들고 있는 걸 가문의 영광으로 자랑삼을 수는 없습니다. 관에 못을 박는 일에는 더할 나 위없이 또렷한 현실적 쓸모가 있습니다만 시 쓰기는 쓸모가 모호하고 가치를 가늠 하기 어려운 일이죠. 도무지 써먹을 데가 없더라는 것이죠. 시를 읽고 쓰는 일이란 이토록 덧없고 하염없는 짓입니다만 마뜩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그나마 기쁨을 일 구는 것이기에 그걸 쉬이 놓지 못했겠지요. 감히 말하건대 제 미욱함이 뼛속까지 깊어서 전망 없는 소규모 자영업 같은 이 시쓰기를 평생 놓지 못하게 될 듯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시집을 새로 낼 때마다 이게 끝이겠거니 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절벽』을 낼 때 처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자꾸 나이가 들어가니 기력이 쇠해지기 때문일 것이고, 시 쓰기의 보람과 기쁨이 점점 더 미약해지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장석주 ● 1955년 충청남도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사)한국시인협회 이사 겸 사무총장, (사)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 감사, KBS 1TV「TV-책을 말하다」 자문위원, 조선일보 「이달의 책」 선정위원 역임.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학교 등에서 강의. 현재 월간 『현대시』 편집위원, 동아일보 「이달의 시집」 선정위원, 『월간중앙』에 「인류의 등대를 찾아서」를 연재 중. 저서로 『철학자의 사물들』, 『일상의 인문학』, 『일요일의 인문학』, 『동물원과 유토피아』, 『장소의 탄생』등 다수. 애지문학상, 질마재문학상, 동북아 역사재단 독도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
데 또 불가피하게 조금씩 밀려나오는 내면의 약동들이 있고, 그것과 견딜 수 없는 새벽이 만나 돌연 생기는 불꽃들이 모호한 기쁨 속에서 시의 형태를 취하곤 합니다. 바닥에 떨군 곡식 낱알을 한 톨 한 톨 줍듯 새벽에 끼적인 것들을 모으다 보니 어느 덧 두 어권의 시집이 더 나왔어요. 그러니까 『일요일과 나쁜 날씨』는 생산을 그쳤다 고 생각한 모태에 뒤늦게 들어선 애기인 셈입니다. 물론 늦둥이라고 산고(産苦)가 조금도 덜 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다른 시집에 견줘 더 많은 망설임과 고투(苦鬪) 가 들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일요일과 나쁜 날씨』를 쓸 무렵 자두나무, 야만인, 일요일이라는 것 에 꽂혀 그것을 화두로 붙들고 매달렸어요. 왜 그것들이었는지 짚이는 바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 필연성에 대해 명석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시 한 편 한 편을 쓴 뒤 손에서 완전히 놓는데 적어도 스무 번 서른 번씩 손이 가곤 했습니다. 한 편 한 편이 독립적 빛과 의미를 갖되 시집 안에서 낱낱의 시들이 유기적 질서를 이루 며 건축적 구조를 갖기를 바랬어요. 어떤 시는 지붕이 되고, 어떤 시는 대들보가 되 고, 어떤 시는 벽이 되고, 어떤 시는 문과 창문이 되고, 어떤 시는 마루가 되었습니다. 태안 신두리 사구(砂丘)를 걷던 3월 하순 금요일 늦은 오후 박이도 선생님이 전 화로 ‘편운문학상’ 수상이 결정되었다고 통보를 하셨습니다. 저는 해가 바다로 빠져 드는 일몰 광경에 눈길을 주고 얼굴에 모랫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전화를 끊자마자 두 팔을 번쩍 하늘로 들어올렸습니다. 일행이 제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더군요. 이 보잘것없는 소출로 ‘편운문학상’을 받게 되어 염치없지만 기쁨은 순수한 것이어서 그렇게 솟구쳤던 거지요. 돌이켜 보면, 조병화 선생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에 시가 당선할 때 저를 뽑으셨고, 저는 안성 편운재에서 세 해 동안 주말마다 후학 들에게 시를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인연의 끝에 이런 좋은 일도 있구나, 했습 니다. 편운문학상의 역대 수상자 명단 말미에 이 미욱한 자의 이름 석 자를 올리게 된 것은 오로지 심사를 하신 박태일, 김기택, 조강석 세 선생님 덕분입니다. 모든 분 들께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립니다. 2016년 어느 봄날, 장석주 적습니다.
2016
제26회 편운문학상 수상소감 평론 부문 본상 강정구
수상소감을 작품보다 뒤늦게 써본 것은 이번이 겨우 처음입니다. 저는 2004년과 2012년 각각 평론과 시로 등단했었는데, 그 당시에 본래 신인은 마치 출사표처럼 수상소감을 공모의 투고 전에 써놓는 것으로 알았고, 또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만 큼 이번의 편운문학상은, 제가 전혀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낯설고 당혹스럽게 온 급보입니다. 급보란, 어느 정도 반쯤 얼굴을 가린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분명한 표정을 짓고 당사자의 삶에 도달해 있는 것이라고 생 각됩니다. 저는, 그 동안 제게 다가온 무운(無運)과 비보(悲報), 고단한 일상을 그렇 게 맞이했습니다. 제게 오는 것을 온몸으로 부딪치기는 했지만, 많은 경우에 제 한 계나 운명으로 알고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일희일비하지 않 강정구 ● 1970년 강원도 춘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평론 「세상을 떠도는 목어들-차창룡의 시세계」와 시 「경마공원」을 발표하면서 평론과 시 활동 시작. 현재 계간 『예술가』 기획의원. 저서로「신경림 시의 서사성 연구」, 『문학과 서정의 이면』,『신경림과 민족문학 다시 읽기』, 『한국 근현대 문학의 민족 표상』, 『다문화시대의 민족문학』 등이 있으며, 계간 『문학수첩』 제2회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계간 『예술가』 신인문학상 시 부문 등을 수상.
는다는 삶의 좌우명이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제 생애에 잠깐 비친 햇살과 그 햇살로 인해 피어나는 기쁨들, 그리 고 그 빛과 소리가 난만하게 어우러지는 이 편운문학상이라는 봄날이 내심 아주 기쁘지만은, 이 역시도 일희일비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제 생에서 제가 아직 미 처 그리지 못했던 소망의 분명한 표정을 상상해보고, 덤덤하게 열심히 제 길을 걷 겠습니다. 마치 편운 선생님께서 일생에 160여 권의 저서를 묵묵히 이루어내셨듯이, 저 는 이 상을 결실이 아니라 새로운 씨앗으로 여기고 다시 씨앗을 뿌리는 자가, 그리 고 우리 한국문학사의 닫힌 민족 담론을 열어놓는 자가 되는 데에 힘쓰겠습니다. 이 자리를 하늘에서 만들어주신 편운 선생님께, 그리고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와 운영위원회와 심사위원님들께, 마지막으로 제가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것을 축 하해주시는 지인분들 한분 한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정말, 제가 잘 사용하지 않는, 드물게 은유의 표현으로밖에는 저를 설명하기 힘든 날입니다. 다시 한번 감 사드립니다. 2016. 3. 봄날 오후에 강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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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조병화문학관 특별전시
2016. 9. 20TUE - 11. 20SUN
2015
집 한 채를 전시하여 공개합니다. 궁궐도, 사원도, 아흔아홉 칸 고래등 같은 기와집도 아닌, 작 고 초라한 시인의 집 한 채를 보여드립니다. 이름 하여 ‘편운재(片雲齋)’입니다. 이 집은 조병화 시 인이 당신 어머님이 작고하신 다음해, 그러니까 1963년 한식날 기공해서 1964년에 준공한 어머님 의 묘막(墓幕)이었습니다. 효심이 지극했던 조병화 시인은 돌아가신 어머님을 가까이서 모시기 위 해 이 집을 짓고 출입문 옆 벽에는 ‘살은 죽으면 썩는다’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돌에 새겨 넣었습니 다. 시인의 말씀대로 이 집은 “당신을 지키옵는 창문/밤이면 밝히는 등피/낮이면 여는 창문/한가 로이 당신과 같이하는 이 자리/당신을 위하여 당신 곁에/당신을 수시로 뵐 수 있는 자리 골라서/돌 모아” 세운 어머님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은 말 그대로의 묘막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집에서 시인은 어머님을 기리면서, 한 편으로는 인생과 역사와 조국에 대한 사색을 펴 나갔습니다. 어머님의 영혼만이 곁에 있고, 대화를 나눌 그 누구도 없는 고독 속에서 시인은 그렇게 생철학을 가다듬어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 생이란 허무와 고독의 존재이고, 그 고독을 사랑으로 위안 받으며, 나아가 꿈으로써 역사에 집을 지 어 영원의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처럼 이 집은 시인에게 “바람 속에 잠시 마련한 의짓간/구름 덮고 누워 눈 감으면/시는 영원을 보는 나의 창”이 되어 참으로 많은 시를, 그 림을, 서예작품을 창작했던 곳입니다. 또한 이 집은 작품 창작의 사이사이에 문인들의 사랑방 구실도 했습니다. 이헌구, 김광주, 이봉 구, 유호, 박연희, 양명문, 오영수, 안수길 등등 이 땅의 현대문학을 이룩해 나간 시인, 소설가, 극작 가 등이 이곳을 찾아 마음을 쉬고 새 작품의 영감을 받아간 곳이기도 합니다. 그 수를 헤아리기는 쉽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문필가들이 다녀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배 문인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제자들이 이곳을 찾아 조병화 시인의 예술혼에 접하면서 감화를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편운재는 오래고 낡은 초라한 한 채 집이지만, 시인의 어머니와 시인, 그리고 수많은 예술인들 의 얼이 담겨 있는 한 결코 초라한 집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경기도와 안성시의 도움 을 받아 허물어져 가는 이 집을 수리하고 위에 말씀드린 세 부분에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하여 전시 했습니다. 이 전시회가 많은 분들에게 맑은 기쁨이 되고 마음의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6년 9월 조병화문학관 관장 조 진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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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가 만난 조병화 주붕(酒朋)들의 친구 이해창(李海暢)
주붕(酒朋)들의 친구 _이해창
“오래간만이야, 목소리도 잊어버리겠어!” 하고 전화가 걸려온다. 오랫동안 적조하였던 친구의 근황을 물어오는 낯익은 목소리이다. 시인(詩人)으로서 학자(學 者)로서 화가(畵家)로서 분망한 나날의 생활을 보내면서도 친구를 잊지 않고 친히 여기고 귀중히 할 줄 아는 습성을 보여주는 조시인(趙詩人)의 우정은 남다른 특이한 것이 있다. 조시인은 친구를 사귀고 교우(交友)하는데 있어 가져야 할 상우천고(尙友千古)의 정신을 일찍 부터 체득하고 실천하여 생활화하고 있는 것이다. 조시인과 나와의 교우관계는 40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있다. 40년 이란 세월은 짧은 세월은 아니다. 나는 그동안 조시인의 교우관계를 내 눈으로 보고 듣고 직접 경험하고 지내왔다. 그의 교우관계는 다방면이고 다양하다. 학자(學者), 문인(文人), 예술인(藝術人), 스포츠맨들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다. 두루 알리어져 있는 바와 같이 조시인은 문인이고 학자이며 젊어서 럭비선수로서도 관록을 보여준 바도 있던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재사이다. 말하자면 지능적 재 질을 겸비한 스포츠맨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교우관계에 있어서도 투철한 스포츠맨쉽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는 것만 같 다. 그리고 그는 항상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스포츠맨쉽을 찬미(讚美)하는 것을 나는 몇 번이고 듣 고 보곤 하였다. 조시인은 자신의 고향인 안성군 난실리의 아늑한 산기슭에 어머님의 묘막(墓幕)으로 아담한 별 장을 건립(建立)하고 이름지어 ‘편운재(片雲齋)’라고 하였다. 이 별장 ‘편운재’는 조시인의 시집에 서도 찾아볼 수 있는 낯익은 이름이다. 조시인이 별장을 건립할 때 겪은 고심담(苦心談)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는 부유한 위치에 있는 시인은 결코 아니다. 이 별장을 건립하기 위하여 많은 세 월을 보냈다. 자금이 넉넉지 못하여 원고료와 연구비와 같은 봉급 이외의 수입금을 한푼두푼 모 아서 건립을 보게 된 것이어서 건축공사도 한꺼번에 완성하여 준공을 보게 된 것이 아니다. 먼저 우물을 파고 자금이 딸리어 쉬었다가 기초공사를 하고 다시 자금을 만들어 공사를 계속하여 부엌 을 만들고 헛간을 만들고 내부장치를 하고 가구 집기 같은 것을 장만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 러 해를 보낸 것이다. 그동안 별장에 딸려 있는 임야(林野)를 경작하여 과수를 재배하고 봄 여름 가울 겨울 계절마 다 성장하는 과수를 돌보아주기 위하여 비료를 주고 전제(剪除) 작업을 하기 위하여 왔다갔다 하는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조시인이 수 목(樹木)을 위하여 별장을 위하여 배려하는 마음가짐에서 고향을 사랑하는 애향정신(愛鄕精神) 을 엿볼 수 있다. 이 별장 ‘편운재’는 조시인과 교우관계를 가진 분들의 휴식처가 되어지기도 하는 곳이다. 직장 동료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초대를 받아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도 하는 곳이다. 나도 몇 번이고 2016
1979년 2월 15~22일 예화랑 초대 제1회 시화 개인전에서 왼쪽부터 신홍, 조병화, 이해창, 이재후
초대를 받고 놀러간 경험이 있다. 이 별장 앞에는 맑은 물이 진위천(振威川)으로 흐르는 내(川)가 있다. 몇해전 여름방학에 이곳 에서 천렵을 하던 기억이 아직도 살아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유창돈(劉昌惇) 교수와 한노단(韓路 檀) 교수, 그리고 지리학자 박노식(朴魯植) 교수와 조시인과 나, 이렇게 다섯 친구가 찌는 듯한 더 운 날씨에도 아랑곳 없이 어린아이들처럼 붕어, 미꾸라지, 뱀장어와 같은 물고기를 잡아 진미로 운 찌개요리를 만들어 술잔을 들며 밤이 가는 줄을 모르고 잡담에 꽃을 피우곤 하였다. 조시인은 친구를 사랑하듯이 술을 즐기는 편이다. 호(豪)주가나 음(飮)주가는 아니고 애(愛)주가이다. 그 래서 주붕(酒朋)들이 많다. 조시인이 술을 즐기는 것도 친구를 사귀며 존중히 여기는 타고난 습성 에서 친구들이나 제자들을 만날 때 한두 잔의 술을 나누며 담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조시인은 그동안에 30여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대표작을 출판할 때마다 출판기념회를 갖기 도 한다. 이 출판기념회에 모여드는 인사들만 보더라도 조시인의 교우관계를 짐작할 수가 있다. 언 제나 회장에는 예술 문화 관계 인사는 물론 각 방면의 많은 인사들이 모여들고 각계 각층에서 보내 오는 축하화환이 즐비하게 진열되곤 한다. 조시인은 화가로서도 일가를 이룬다고 앞서 언급한 바도 있지만 그의 그림 또한 독특한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이나 화제(畵題)도 그의 시만큼 어울리고 아름답고 그 솜씨도 기발한 착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화중유시 시중유화(畵中有詩 詩中有畵)”라는 말은 흔히들 조시인의 그림과 시를 평하여 하는 말이다. 그림속에 시와 같은 아취(雅趣)가 들어 있고 시 속에 실경(實景)이 똑똑 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조시인은 서울에서 다섯 번이나 개인전을 갖고 호평(好評)을 받았 다. 그리고 작년 겨울에는 미국 뉴욕에서도 개인전을 갖고 극찬(極讚)을 받았다. 그는 해외 각지에 친구들이 많고 폭넓은 교우관계를 가지고 있다. 국제적인 시인인 것이다. -『편운 조병화 시인』회갑 기념 문집 (1982. 5. 25 정음사)에서 발췌.
이해창 신문학자(新聞學者), 언론인, 교육자. 호는 우범(牛凡). 1916년 서울 출생. 1987년 별세. 일본 죠치대 신문학과를 졸업, 『조선신 문』, 『매일신보』, 기자, 『한성일보』의 체육부장 등을 역임. 1947년 저널리즘 전문잡지 『신문평론』을 창간. 1949년부터 8년 동안 서울고등학교의 독일어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독일 유학을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신문학과 교수를 지내며 교육과 연구에 전념. 한 국 언론학의 초창기 역사를 만들어간 언론학 1세대의 대표적인 학자로 한국언론사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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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제 16회 시부문 본상 수상자 유재영
시인 유재영
도미회를 잘 한다는 대학로 2층 초밥집 石井
김재홍, 김종철, 유재영 늦게 도착한 유자효와 이숭원 후래자 3배를 나누는 동안
베레모를 벗어 놓고 선생이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
그 시간 지구에서 <패각> 하나 달랑 들고 외로운 시인이 왔다고 밤새 웅성대는 별이 있었다
*패각 ; 조병화 시집 『貝殼의 침실』
2016
누리장나무 아래에서의 한 때 유재영
어린 장지뱀이 갓버섯 펴지는 모습에 놀라 달아나고 변성기 막 끝낸 수꿩이 낮은 봉분 너머에서 몇 번인가 울었다 갑자기 초 롱꽃이 왁자한 것을 보아 이는 필시 두눈박이 쌍살벌이란 놈이 들어간 것임에 분명하다 착하게 엎드린 퇴적암을 사이에 두고 개암들이 실하다 올해는 해걸이 나무에도 열매가 많이 달리려 나 보다 주인 없는 유혈목이 허물이 죄 많은 세상을 향해 날아 가는 시간, 멀리 보이는 인간의 집 한 채 쓸쓸하다
유재영 1948년 충남 천안 출생. 1973년 시 박목월, 시조 이태극 선생 추 천으로 등단. 중학교 국정교과서에 작품 <둑방길>이 수록. 현재 도 서출판 동학사 대표. 시집 『한 방울의 피』, 『지상의 중심이 되어』, 『고욤꽃 떨어지는 소리』 등. 이호우 문학상, 중앙일보 시조대상, 편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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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제16회 시부문 우수상 수상자 윤효
못 윤효
가슴에 굵은 못을 박고 사는 사람들이 생애가 저물어가 도록 그 못을 차마 뽑아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거기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시작노트 글이 곧 사람이다. 바라든지 바라지 않든지, 글 속에는 그 글을 쓴 사람의 모든 것이 담긴다. 글감에 대한 생각 사이사 이 쓰는 이의 숨결까지 담긴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속내까
봄 편지
지도 고스란히 담긴다. 그래서 글을 보면, 글투를 보면 그 사 람의 안팎 풍경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시에는 나의 전존
윤효
재가 담긴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속 속들이 담긴다. 내가 쓰는 시의 꼴이 그러한 것은 순전히 내 자신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물푸레 이파리 한 잎 동봉합니다.
나에게 시는 무엇인가. 날마다 부대끼고 스러지는 삶의 그늘 위에 가까스로 흘러드는 한 줄기 빛이 시라고 나는 믿 는다. 번다하고 남루한 일상 속에서 이따금 어떤 충일감이
사발에 띄워 머리맡에 두시기 바랍니다.
찾아들 때가 있다. 이런 정황과 자주 마주서는 것은 아니지 만 이러한 때야말로 내 전존재가 가장 치열하면서도 가장 순 도 높은 상태로 한껏 고양된다. 이러한 충일감이 내게 붓을
그대 그리워하는 마음 아직도 그 물빛입니다.
들라고 부추긴다. 이 부추김은, 이 부추김의 산물인 나의 시 는 결국 내 스스로의 존재 증명인 셈이다. 나아가 내 스스로 가 내 가난한 영혼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한 셈이다.
푸르스레 번져가는 그 물빛입니다. 윤효 본명은 창식(昶植). 1956년 충남 논산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 학과 졸업. 1984년 『현대문학』추천. 작은詩앗・채송화 동인. 서울 오산중학교 교장 역임. 시집 『물결』, 『얼음새꽃』, 『햇살방석』 등. 편운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수상.
2016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Ⅱ 추억
추억
조병화
오래간만에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어느 다방에서 그러니까, 그것이 밀다원이었던가 아니면, 마로니에 다방이었던가, 에서 희미한 추억에 어리어리 말려 커피를 청하고 있노라니까 선득 다가서는 낯설은 맑은 한 소녀 “선생님, 추억이라는 시, 언제 쓰셨어요?” 이렇게 물어오는 티없는 소리 순간, 나는 그것이 어느 추억이던가 하는 생각에 아, 나는 항상 추억 속에 살고 있는데, 하면서 “수시로”
「추억」이라는 작품을 언제 쓰셨냐고 천진하게 묻는
이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대답을 했습니다.
한 소녀나 그 질문에 “수시로”라고 답하는 시인이나 참 맑기도 맑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추억은 만들어지
내 인생, 어느 오후
는 과거의 시간보다 되뇌고 회상하는 현재의 시간에
유리창 밖엔
방점이 찍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상 추억 속
매서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생전 조병화 시인은 「추억」이
(1991. 1. 18)
라는 제목의 시를 여러 편 발표했습니다. 가곡으로도 불려져 많은 사랑을 받는 동명의 시, “잊어버리자고/
-제36집 《낙타의 울음소리》에서
바다기슭을 걸어가는 날이/하루/이틀/사흘”로 시작 해 “여름 가고/가을 가고/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 진 겨울 이 바다에”라는 문장을 지나 다시 “잊어버리 자고/바다기슭을 걸어가는 날이/하루/이틀/사흘”로 끝을 맺는 시 한편도 함께 추억해봅니다.
박준 시인. 1983년 서울 출생.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다. 제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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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편운 시 백일장 심사평
제11회 편운 시 백일장 심사평
본심 심사 중인 허영자, 박이도, 박주택 심사위원(2016. 5. 8 청와헌)
제11회 편운 시 백일장 시제
제11회 편운시백일장에는 총 73명의 응모자들이 인터넷으로 작품을 제출하였다. 예심을 거쳐 그중 50명을 추려 5월 8일 조 병화문학관에서 본심을 실시했다. 예비 심사는 박준 시인이 고생을 했고, 본심 심사는 박이도 시인, 허영자 시인, 박주택 시인이 심사를 진행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20~30년 전부터 백일장이라는 제도가 대학에서부터 시작이 되어 다양한 기관에서 개최되고 있다. 여러 백일장들이 많이 열리다 보니 단순히 시 쓰기의 기술적인 복제 현상이 백일장에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학생이, 다른 좋은 연주자의 곡들을 공부하지 않고 자기가 잘 할 수는 한 곡만 내내 연습하여 콩쿠르에 나간다면 결코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할 것이다. 시를 쓰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우선 기성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은 후에, 자기 나름대로의 느 낌을 갖고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를 분별할 수 있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본심에서 제시된 시제는 ‘오월’과 ‘그림자’였다. 앞서 말했듯 시를 쓸 때는 자기 나름대로의 발상과 포착이 중요한 것 인데, 제출된 시들을 봤을 때 대개는 기술적으로 고만고만한 수준이 많았고, 발상 자체가 신선한 작품들이 적어 아쉬움을 남겼 다. 수상작을 선정할 때 기술적인 화려함 보단 독창적인 발상과 선명하고 읽기 쉬운 작품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음을 밝힌다. 장원의 영예를 차지한 노은희씨의 「그림자」는 깔끔하고 정리된 호흡을 통해 자기 나름대로의 발상을 잘 전개시켜나간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 앞으로의 건필을 기대하며 심사위원들은 노은희씨의 작품을 장원으로 결정하였다. 차상과 차하, 장려상으로 뽑힌 작품들도 열심히 좋은 시인들의 시들을 읽었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가능성이 기대되는 작품들 이었다. 수상한 모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 박이도(위원장), 허영자, 박주택 2016
제11회 편운 시 백일장 장원작ㆍ입상소감
그림자
노은희
엄마는 할머니의 그림자 뇌수막염을 앓는 할머니 식탁에 앉아 먹이고 거울 앞에서 머리를 손질하고 토닥토닥 단잠을 재우는 고루한 일상의 반복 한 때, 할머니도 엄마의 든든한 그림자였노라며 냄새 나는 기저귀를 빨아도 이유 없이 응석을 부려도 때론 짐승 마냥 웅크리고 앉아 독기를 뿜어도 다둑다둑 넓은 품 속에 꼬옥 안아 주신다
장원 노은희 수상자의 시낭송
입상소감 장원을 수상한 작품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시 속의 주인공입니다. 그런 사 랑하는 할머니께서 지난 지난 6월 10일 소천하셨습니다. 무남독녀 당신의 중한 여식의 막내딸을 많이 예뻐해 주셨던 분입니다. 안타깝게도 뇌수막염 을 앓고 계신 할머니께서는 유언 한 마디 없이 주무시며 고요히 가족의 곁
지난 먼 옛날 얘기를 쉴 새 없이 조잘조잘 한 쌍의 정다운 사랑 앵무가 되어 추억의 앨범에서 짐짓 느슨하게 사뭇 행복하다
을 떠나셨습니다.
엄마와 딸 사이는 마중도 배웅도 필요치 않은 서로의 완벽한 애정의 그림자
니다. 정기적으로 메일을 보내주시는데 제목이 <저승으로부터의 심부름>이
지난 세월 속에서 할머니가 안 계신 적이 없어서 도통 할머니의 부재가 실감나지 않습니다. 할머니께는 못나고 부족한 손녀가 늘 일등이었는데 인 연을 만나 자식을 낳고 기르며 할머니를 자꾸 뒷전으로 밀려나게 해서 뒤늦 게 죄스럽습니다. 낙심해 있던 제게 14일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의 메일 한통이 도착했습 었습니다. 시인은 어머니의 심부름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으며 “너는 저 세 상에 내려가서 네가 하고 싶은 모든 꿈을 다 이루고 오너라.”라고 어머니께 서 말씀하셨다며 가슴 절절한 시를 전송해 주셨습니다. 위로가 되면서 저절
오늘도 엄마는 버거운 그림자 묵묵히 지고 걷는다 언젠가는 나도 당신의 둥근 그림자가 되어 생의 끝자락에 초대 될 때 당신의 헌신에 대해 증명도 반증도 요구치 않으리 엄마께서 내게 가슴으로 가르치셨듯 마음으로 세월을 이고 함께 걸으리 먼 훗날, 내가 당신의 제일 튼튼한 그림자가 되리
로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습니다. 허나 아이를 기르다보니 글 쓰는 시 간을 갖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한없이 주저앉아 울고 싶은 순간에 맘껏 흐 트러지지 못하고 챙겨 먹일 자식 걱정에 서둘러 일상으로 복귀합니다. 가슴 시린 날에도 슬픔의 먹먹함을 딛고 일어서려 하는 건 어린 것을 향한 사랑 의 힘입니다. 할머니의 빈소를 지키고 앉아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할머니께서도 분 명 믿음직한 사위를 앞서 보내고 여식에게 딸린 두 어린 것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요. 대책 없이 서러운 순간에도 어린 핏줄들을 버팀돌 삼아 인내하며 버텨주신 생일 것입니다. 제가 당신 생에 용기요, 희망인 순간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조금의 위로 가 됩니다. 따뜻한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신 고귀한 사랑 가슴에 곱게 수놓으렵 니다. 부족한 작품이지만 진심이 머무는 시를 할머니의 영정에 마지막 선물로 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조병화 시인의 순수 허무, 순수 고독! 그 본질의 빛
백일장 수상자 장원 차상 차하 장려
노은희 (학원 강사, 경기도 남양주시) 방재호 (영화감독, 서울시) 유명훈 (대학생, 경기도 남양주시) 강세진 (대학생, 경기도 성남시), 김성근 (중학교 교사, 충남 당진시) 박재범 (대학생, 경기도 시흥시), 이건우 (대학생, 서울시) 이은영 (대학생, 충남 천안시)
나는 가치가 편운 시 백일장을 통해서 더욱 널리 알려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예심과 본심의 심사위원선생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편운 시 백 일장은 문청들에게 멋진 도전의 장입니다. 저 또한 지난해에는 예심 탈락자였 습니다. 열심히 쓰고 노력하여 일궈낸 결과라 저에겐 더욱 뜻 깊은 수상입니 다. 조병화 시인의 시심을 배워 게으름 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글 쓰겠습니다. 지면을 빌어 제게 시를 가르쳐 주신 숭의여자대학의 전기철 교수님과 단국 대학교 김수복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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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글마당 편운 아래서 인문학과 놀자ㆍ조혜영
편운 아래서 인문학과 놀자 _조혜영
저희센터는 그동안 몇몇의 외부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이번 조병화문학관의 인문학 프로그램처 럼 많은 회기와 잘 구성된 내용으로 아이들에게 제공된 적은 없었습니다. 특히 지역아동센터와 같 이 특수한 상황을 갖고 있는 곳에서 일회성이나 이벤트로 잠깐 기획되는 프로그램들은 아이들에 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것과 달리 이번 <편운 아래서 인문학과 놀자> 프로그램은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절실하던 저희에게 와준 커다란 선물 보따리였 습니다. 거기에 갤러리를 방문하고 체험하며 연극 구경을 하고 조병화 시인이 사셨던 서울 혜화동 집에 초대해 주시고 대학로 예술의 거리를 산책하는 기회 등 세세한 프로그램들을 준비하신 문학 관 관계자님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난 1년 동안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조병화 시인과 저 자 신이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조잘거리면서 장재봉 뒷동산을 오르고 어느 날엔 손가락에 가족그 림을 그려오고 혹은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오고 또 어느 날에는 아이들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세계 가 들어 있는지를 저희에게 알려 준 시문학 교실이 없었다면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을 여유롭고 행복한 광경들 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저희 센터 아이들이 선택을 받았지만 다음번에는 서울에서도 진행하시 고 전국 어느 곳으로도 이 프로그램을 갖고 학교, 청소년 센터 혹은 쉼터 등 필요로 하는 곳에 많이 진행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인문학 프로그램의 성공 결과로 말씀드리자면 아이들 대부분이 자기 마음을 쉽게 글로 표현하는 능력이 생겼고 서로 부드럽게 대하며 센터가 지난해보다 눈에 띄 게 더 가족적으로 변해서 마치 화목한 가족 구성원처럼 생활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저희 아이들 모두 선생님들 그리고 손주처럼 항상 웃음을 보여주시며 아이들을 사랑 해주신 김용 정 조병화문학관 대표님을 잊지 못할 것이며 아이들 삶에 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또 이러한 일들이 조병화 시인께서 이루어 놓으신 업적을 더욱 빛내신 것임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조병화문학관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조혜영 경기도 안성 난실리 출생. 안성여고, 인도 PUNE대학원, 강남사회복지대학원 졸업. 전 활기찬 가정 봉사원 파견센터 대표. 현 기원정사 회주. 톡톡 플러스 지역아동센터 센터장 2016
정윤홍, 미곡초 4학년
황윤성, 미곡초 유치부
조대희, 미곡초 2학년
정우정, 미곡초 6학년
홍연진, 미곡초 4학년
최재원, 미곡초 5학년
황은빈, 미곡초 유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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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글마당 편운 아래서 인문학과 놀자ㆍ조혜영
2016
2015.09.01 개강식을 마치고
2015. 09.25 내가 생각하는 나무사람 그려보기 정윤홍 정우정
2015.10.21 낙엽을 날리며
2015. 10.21 체험학습 자연미술 점찍고 선잇기를 마치고
2015. 10. 28 시쓰기를 지도하는 안미옥선생님
2016.01.05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2016.01.05 조병화시인 서울 혜화동 집을 방문하고
2016. 01.19 인상 깊었던 일 시로 쓰기
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이재복
선생님 영전에 _이재복
부끄럽게도 이렇게 늦게 겨우 선생님께 몇자 올리는 무심함을 꾸짖어 주십 시오. 선생님과 헤어진지 엊그제 같은데 어언 13년이나 되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계신 그곳에서도 꿈, 사랑, 멋을 찾아 시를 쓰시고, 고독, 허무를 벗 삼아 그림도 그리시는지요. 아마도 그리 하실거라고 믿겠습니다. 2002년 9월 24일, 조금은 쌀쌀한 가을날 저녁 편운재 침실에서 선생님을 부 축하며, 아! 선생님 기운이 너무 없으시구나, 거동도 불편하시고 말씀도 조금 어눌하시고 , ‘아, 이게 아닌데’ 하면서 아픈 마음이 뭉클하였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도 채 안되어 선생님은 저희들 곁을 홀연히 떠나시었습니다. 그날 뵈온 것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2003년 3월 9일 선생님 빈소에서 안병욱 선생님이 “나보다 한 살 아랜데… 그래도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멋있게 살았지”라 하셨습니다. 안선생님 말씀 이 맞으십니까, 멋있게 사셨나요, 고독하게 사셨는지요? 꿈, 사랑, 멋과 고독, 허무는 다 일가친척이 아닐까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하기 도 합니다, 선생님. “버려서는 안 될 것 까지 버리며 왔습니다.”라 하셨고, “두고 가는 것을 배우 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을 가끔 생각해 봅 니다. 선생님, 아무쪼록 맑은 사랑, 따뜻한 사랑, 끊임없는 사랑, 외로운 사랑의 힘 으로 더 큰 복과 낙을 누리시며 부디 편안히 계시옵소서. 어느 훗날 그곳에서 선생님 뵙고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눌 것을 다짐하면서, 2016년 1월 13일 제법 눈발이 날리는 날 80을 바라보는 재복이가 삼가 올립 니다.
1972. 5. 30, 12시, 종로예식장 조병화 시인이 자필로 쓴 이재복 선생 결혼 축의금 봉투
이재복 기업인. 1938년 출생. 서울고등학교(8회) 와 서울대학교 졸업, 동양시멘트(주) 사장, 부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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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를 추억한다 조병화 은사님과 이자율 성백관
조병화 은사님과 이자율 _성백관
때는 한불종합금융(주) 투신부장으로 근무하던 때 (1980년대 중반 약 30년 전) 당시 인하대학교 부총장으로 근무하시던 조병화 선생님 을 부총장실에서 뵙게 되었다. 당시 한불종합금융(주)는 한불합작 Merchant Bank로써 한국측의 KAL과 불란서의 3대은행중의 하나인 Societe Generale 은행이 50:50으로 합작한 종합금융 기관이었다. (현재는 IMF 이후 몇 년이 지나 불란서측이 철수함으로써 매리츠증권에 인수 합병 되었다.) KAL은 인하대학교 재단의 주축이었고 그룹 총수이신 조중훈 회장과 조병화 선생님이 연배가 비슷하시고 친분이 두터우신 사이로 한진그 룹 사가의 가사를 조 선생님이 작사하시어 매월 그룹 간부회의 때 그 사가를 합창 했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대학교 재단 운영자금을 맡아 관리하기 위해 인하대학교를 방문 할 때마다 선생님을 찾아가 뵙게 되었다. 그 당시 부총장실은 상당히 넓었는데, 한구석에는 그림 도구와 작품들이 놓여 있어 “아니, 선생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그림을 그리셨어요.” 했더니 취미로 오래 그리셨다고 하시면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시며 작품들을 펼쳐 보여 주셨는데 내 부족한 안목에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 렀다고 생각됐다.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선생님_ 너희 회사에 돈을 맡기면 이자를 얼마큼 주냐? 제자_ 은행보다 훨씬 높고 기간을 설정하지 않고 보통예금 거래를 하실 수 있습니다. 선생님_ 그럼 은행 정기 예금 이자율보다 평균 얼마큼 더 주는데? 제자_
저희는 맡기신 투자금을 이자율이 높은 채권 (국채, 지방채, 기타 공공채, 보증사채 등)에 투자하여 거기서 발생되는 이자와 수시 로 회수되는 원금을 계속적으로 재투자하여 수익을 발생하는 구조이지만, 은행은 대출이자수입과 연계하여 예금이자를 고정해 서 주기 때문에 제한을 받는 구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은행은 예치기간, 즉 6개월, 1년, 2년 등 예금약정에 따라 이자를 주지 만 저희는 수시로 입금출금이 가능하면서 투자기간에 은행이자율보다 훨씬 높게 드리고 있습니다.
선생님_ 그럼 시험적으로 너희 회사에 맡겨보고 은행이자와 비교하면 즉시 알 수 있겠구나. 너희 2년 선배 6회 XXX가 있는 XX은행에 맡 긴 돈의 일부를 찾아야 되겠는데 그 선배가 펄쩍 뛸 터인데 어쩌지……. 제자_
돈 거래에 있어서는 이자율 차이에 따라 이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 거래 회사나 개인들이 처음에는 은 행보다 많이 주고 수시로 입출금이 가능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기한의 제한이 없이 은행이자보다 높게 이자를(투자수익) 주니까 만족하고 거래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제가 과거에 근무했던 XX은행의 퇴직 임원 몇 분을 거래 유치하여 지금 만족스럽 게 거래하고 계십니다.
2015
그리하여 선생님 개인 돈을 맡기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시험적으로 거래 했다가 이자율이 은행보다 훨씬 높고 수시 입출이 가능한 것을 체 험 하시고 그 액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속으로 선생님이 당대 수재들만 입학하는 경성사범학교 졸업 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로 진학, 3학년 때 해방으로 인해 졸업을 중단하실 때까지 수학하셨으니 오죽 하시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불란서 출장을 가게 되어 신고 안하고 자리를 비울 때 혹시 전화하시면 곤란할 것 같아 선생님께 신고하려고 방문했다.
선생님_ 야! 잘됐다. 귀국할 때 내가 즐겨 피우는 파이프 담배 XX상표 한 통 사가지고 와라. 제자_
예, 알겠습니다.
속으로 ‘돈도 있으시면서 파이프 담배값은 왜 안주실까? 안주시면 사다드릴 때 값을 받아? 안되지……,’ 라고 생각했다. 그 후 인하대학교를 떠나신 후에도 돈 거래가 자주 발생하여 회사도 직접 방문하시어 자주 뵈올 기회가 많았다. 내 방에 들어오셔서 파이 프 담배 연기를 피우시면 어찌나 그 향이 구수하고 좋은지, 선생님의 털털하고 인간적인 매력을 잊을 수가 없다. 가끔 새벽녘에 집으로 전화 하시어, “야 내가 오늘 X시에 네 방으로 갈 거니까. 그 시간에 자리 뜨지 말라고…….” 이처럼 새벽바람에 전화를 주시어 깜짝 놀랄 때도 많았다. 하루는 적지 않은 돈을 인출 하시면서 자기앞 수표 2~3백만 원 단위로 여러 장을 준비하게 하시기에,
제자_
선생님,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인출금액이 크신데, 어데 집을 옮기세요?
선생님_ 아냐! 나는 알다시피 마누라가 산부인과 병원 수입으로 생활하니까 월급 받아 생활비로 쓰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대포값하고 모 두 예금할 수 있고, 또 시집 판권과 고료 등을 합쳐 돈을 모아 너한테 맡겨 돈을 모은 것이다. 그런데 시를 쓰겠다는 신진 시인들이 하나같이 돈이 없는 가난뱅이야! 선배 문인의 한사람으로써 후배를 이끌고 키우려면 많진 않지만 돈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도 모 임이 있어 나누어주려고 돈을 찾는 것이다. (후일 편운문학상 제정) 제자_
선생님, 그런 좋은 일을 하시고자 이자율을 따지시고 알뜰히 모으셨던 것을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선생님은 학창시절(경성사범) 에는 럭비 선수로 활약하셨고 우리를 가르칠 때는 ‘시’ 문학이 아닌 수학을 가르치셨으며 약주를 즐기셔서 학생들이 “술통”이란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선생님_ 야! 안성고향에 집터를 늘여 문학관을 지으려는데 돈을 더 모아야지……. 다 지으면, 8회 동창들과 놀러 와라.
내 방에 선생님이 오시면 여비서가 커피를 대접하는데 맛있게 드시고 가끔 미국에 있는 손자 얘기를 하면서 손자 학비를 찾기도 하셨다. “부총장님은 감사님께 ‘야’, ‘너’라고 하시는데 듣기가 좀…….”라고 비서가 한마디 한다. “아냐, 그 말씀이 얼마나 사제지간의 허물없는 친밀한 표현이니…….” 지금도 생각하면 베레모와 파이프 담배 연기 참 멋있게 어울리셨다. 그 컬컬하시고 구수한 목소리, 후진을 아끼고 키우시는 훌륭한 모습, 여간해서는 내세우지 않으시는 깊은 배려. 우리들은 훌륭하신 은사들을 모셨던 행운아가 아닌가 싶다.
성백관 서울고등학교 8회 졸업, 전 한불종합금융 감사와 상무를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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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문화 산책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광주 문화산책 주기영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광주문화산책 _주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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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분원백자자료관이라고도 한다. 분원초등학교의 구교사인
A host, of golden daffodils;
옛 건물을 개조하여 박물관을 만들었다. 그 아래로 넓은 운동
Beside the lake, beneath the trees,
장과 학교의 신관 건물이 자리를 잡았고 운동장 가에는 관요
Fluttering and dancing in the breeze.
(官窯)책임자들의 선정비가 일렬로 서있다. 원래는 분원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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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터 전체가 다 번조소 터였다고 한다.
The waves beside them danced; but they
박물관 안에는 절제미 넘치는 전통적인 순수한 백자는 물
Out-did the sparkling waves in the glee:
론이고 임진왜란 이후 새로운 혁신의 면모를 보인 청화백자
A poet could not but be gay,
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고급 도자기들은 주
In such a jocund company:
로 궁중용으로 많이 납품이 되고 귀족 상류층이나 새로운 소 비계층인 중인들의 수요까지도 충족시켰다고 한다. 한강수
낭만주의의 선언자 그리고 호반시인이었던 William Wordsworth의 Daffodils가 잔잔하게 낭송되는 문화 산책
의 뱃길 따라 한양으로의 이송이 손쉬웠던 것도 이곳의 지리 적 장점이었다.
의 버스는 서울 근교 광주시 남종면의 팔당 호반으로 청명한
통일신라가 대략 1000년, 고구려와 백제가 각각 700년씩
가을 길을 달린다.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주최 2015 가을 문
이고 고려는 정확히 474년이다. 조선왕조 518년이란 기간은
화 산책에 나선 참가자들의 가슴에는 가을 호수를 닮은 시심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그저 보통이지만 세계사적으로 볼 때는
(詩心)의 물결이 곱게 일었다. 시(詩)는 일언이폐지(一言以
아주 긴 기간 지속된 왕조이다. 하나의 도읍에서 단일왕조의
蔽之)하고 사무사(思無邪)라 하지 않든가? 오늘 하루는 모
집권으로는 더욱 그렇다. 신성로마제국이나 오스만터키 제국
든 일상의 사사로움을 벗어나보자.
또는 에스파냐 왕국은 제법 길긴 했지만 단일 왕조에 의한 단
먼저 닿은 곳은 남종면 분원리로 분원(分院)은 원래 사옹
일 집권체제는 아니었다.
원 광주분원이라는 관명(官名)이었으나 세월이 흘러 이곳 백
성리학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조선에서도 사색당파와 예송
자마을을 부르는 지명이 되었다. 분원 박물관에 걸려 있는 이
논쟁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한편에서는 도공들에 의해 보름
곳의 산수를 소재로 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眞景山水)처럼
달 같은 백자 달 항아리가 곱게 구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이곳은 참 아름다운 고장이다.
어느 명품 도자기보다도 예술적 미학적 가치가 높고 가히 우
분원에 가을이 깊었다. 나무가 잘 자라는 곳은 가을 단풍도 아름다운 법이다. 울창한 수목이 도자기를 굽는 번조소(燔造
주철학을 담아내어 최고의 경지에 이른 명작 조선백자는 조 선 500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所)의 첫 번째 입지조건이다. 땔나무를 풍부히 조달할 수 있
새 생명을 품은 만삭의 아내를 연상케 하는 백자 항아리,
어야 하기 때문이다. 번조소는 10년 정도 주변의 나무를 잘라
그 소박하고도 그윽한 텅 빔은 오히려 천지인(天地人)의 세
서 쓰다가 소진이 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계가 꽉 차고도 남아도는 느낌을 준다. 완전한 구형(球型)이
계단과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면 바로 분원 도자기박물관이 2016
아닌 도공의 마음가는대로인 불완전함의 미학이 더욱 아름
답다. 새 생명을 잉태한 조선시대의 현숙한 어머니가 조금은
먼저 차단할 경우는 남한산성을 택하곤 했다. 평소에도 많은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 그 불균형의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다.
주민들이 살아갈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되고 우물이 많아 물
가을도 깊은 분원백자자료관을 뒤로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걱정이 적으니 큰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데다가 한강을 이용
팔당 전망대에 올랐다. 경기도 수자원본부 건물로 아름다운
한 비상물자 조달도 편리하여 장기간 버티기에는 가장 적합
팔당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같이 드넓은 호수에 소내(牛
한 요새이다.
川)섬이 앞에 있고 저 멀리로는 예봉산과 운길산 그리고 능내
청군의 침공으로 인조가 이곳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버티었
의 다산유적지까지 눈길이 미치는 곳이다. 운길산 수종사의
지만 역부족으로 45일 만에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 홍타이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듯도 하다.
지에게 치욕적인 삼배(궤)구고두(三拜(跪)九叩頭)의 예를 올
북한강 남한강 경안천의 물을 막아 바다 같이 드넓은 호수
리고야 말았다.
가 된 팔당호는 수도 서울 천만 시민의 젖줄이자 마음의 안식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이곳 남한산성이야말로
처이다. 여기서 가까운 능내는 실학의 거인 다산의 고향이고
국가안보가 무엇인가를 생생히 보여주는 훌륭한 교육장이라
부근의 천진암은 최초의 천주교 발상지이기도 하다.
생각된다. 일행은 행궁의 옛 건물 마루에 앉아 최종고(서울대
이어서 연극연출가 김정옥 선생이 평생을 공들여 이루어 놓은 얼굴박물관을 관람했다. 돌사람(石人), 목각, 도자인형,
학교 명예교수) 시인의 자작시 낭송을 감상하고 만해기념관 을 관람한 뒤 귀로에 올랐다. (2015. 11. 4)
초상화, 무속화, 와당 등 온갖 유형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고 그로부터 우리 민족의 어떤 정체성(Identity)까지 찾아낼 수 있다. 관석헌(觀石軒)이라 이름 지은 한옥이 인상적이다. 원래의 이름은 장춘실(長春室)이고 시인 김영랑의 고향 강진으로부 터 옮겨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고유한 유산을 이토록 보존해 나가는 김정옥 선생과 사모님께 대한 무한한 존경심 마저 들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남한산성이다. 성벽을 따라 한바 퀴 종주를 한다면 더욱 좋겠지만 이번에는 산성내의 행궁을 중심으로 해설을 들으면서 역사적 유산들을 알아보았다. 남
남한산성 행궁 정문인 한남루
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한양성을 보조하며 비상시에 대 비한 요충으로 그 안에 행궁을 두었고 병자호란 때는 실제로 인조임금이 몽진하여 버티던 요새이다. 고려조나 조선조나 북에서 오랑캐가 침범할 때면 제일 먼 저 강화도로의 임시천도를 계획하지만 적군이 강화도 길을
얼굴박물관 관석헌
주기영 수필가, 교육자. 1946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대전고등학교와 서울 동성고등학교 등에서 37년간 봉직함. 저서로 수필집 “봄은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등이 있음. 황조근정훈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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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CC미술관 특별기획전 혜화동 풍경
JCC미술관 특별기획전
혜화동 풍경 조병화 한무숙 장욱진 이대원
惠化洞 風景 글_ JCC미술관
혜화동은 날마다 밤마다 떠났다간 돌아오고 돌아왔다간 떠나는 나의 터미널…… 조병화 시인이 1981년 발표한 연작시(連作詩) ‘혜화동 풍경’의 한 구절입니다. 이 시구(詩句)와 같이 혜화동은 사람들이 떠 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터미널과 같습니다. 성곽 마을인 명륜·혜화권역에 위치한 혜화동은 먼 과거에는 성균관 유생들 이 모여 살던 반촌을 중심으로, 가까운 과거인 근현대 문화 형성기에는 학원과 대학을 중심으로 한 청년 문화의 발원지였습니 다. 그리고 혜화동이 품은 이러한 장소성은 고스란히 오늘날로 이어져 문학과 미술, 음악, 연극에 이르는 문화예술의 중심지 로 자리하게 됐습니다. JCC미술관은 2016년 첫 전시로 지난 5월 10일 혜화동에 대해 생각해보는 <혜화동풍경惠化洞風景>전을 개최하였습니다. ‘무엇이 이 작은 동네를 유구한 시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했을까요?’ <혜화동풍경>전은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로 채 워져 있었습니다. 골목길을 재현한 전시장에서는 혜화동, 그중에서도 로터리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들과 지금의 혜화동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혜화동에 관한 많은 시(詩)와 에피소드를 남긴 시인 조병화와 한국인의 정 체성과 역사의식을 치밀하게 담아낸 소설가 한무숙, 명륜동 자택인 관어당과 동양서림을 오갔을 화가 장욱진, 70년 넘는 세월 을 혜화동의 터줏대감으로 살았던 화가 이대원 그리고 혜화동에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을 통해, 혜화동이 품은 문화예 술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정표 매일 아침 그 자리, 혜화동 로터리 혜화동 로터리는 날마다 분주합니다. 혜화로, 창경궁로, 대학로 그리고 동소문로가 만나는 이곳 로터리에서는 큰 도로를 따 라 들어온 차량들이 교통도(交通島)를 중심으로 분주하게 한 방향을 향해 움직입니다. 동서남북… 흘러들어온 방향과는 무관 하게 로터리의 차량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만 돌다가 각자의 목적지에 맞는 출구를 찾아서 빠져나갑니다. 한때는 전차가, 또 2016
1층 첫 번째 이정표- 매일 아침 그 자리, 혜화동 로터리
2층 두 번째 이정표- 하늘의 주소 조병화, 한무숙
한때는 분수가 놓이고 그 위를 고가(高架)가 지나가던 혜화동 로터리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표정이었지만 사람들이 들고나는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매일 아침 그 자리, 혜화동 로터리에는 많은 사람이 일상을 시작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리 고 시간을 거슬러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오갔을까요? 돌고 도는 혜화동 로터리는 마치 타임머신과 같습니다.
두 번째 이정표 하늘의 주소: 조병화, 한무숙 혜화동 풍경의 두 번째 이정표에서는 시인 조병화와 소설가 한무숙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주소, 혜화동 107번지에 50여 년을 살았던 조병화는 혜화동에 관한 많은 시(詩)와 에피소드를 남겼습니다. 매일 아침 8시 15분, 로터리에서 통근 버스 를 타고 혜화동을 떠난 시인은 늦은 시간 술이 거나하게 취해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밤 12시, 로터리에 위치 한 시인의 집 현관문은 통금 시간에 갇힌 많은 예술가의 두드림으로 언제나 열려 있었습니다. 밤을 새우는 예술가들의 흥취는 로터리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위치한 고즈넉한 한옥으로 이어졌습니다. 소설가 한무숙의 집 입니다. 명륜동1가 33-100번지에 살았던 한무숙은 1953년부터 40년을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네모난 하늘을 받쳐 든 한무숙의 집은 고향을 떠나 고학하던 많은 문학청년이 찾아와 숙식을 해결하던 문단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습니다. ‘생활은 평범하게, 사 고는 비범하게’라는 신념으로 가정생활에 충실하면서도 예술가들과 교류를 마다하지 않았던 한무숙은 이곳에서 한국인의 정 체성과 역사의식을 담은 많은 소설을 남겼습니다.
2층 한무숙 소설가의 작품
2층 조병화 시인과 한무숙 소설가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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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글 우수상
3층 세 번째 이정표- 공동탕(共同湯) 혜화동에서 만난 사람들
세 번째 이정표 공동탕(共同湯): 혜화동에서 만난 사람들 지금의 혜화초등학교 맞은편에는 대중목욕탕이 있었습니다. 조병화의 표현대로, 동네 사람들의 공동탕(共同湯)이었던 이 곳은 어느덧 세월의 흐름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혜화동 사람들이 몸을 담그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을 공동탕은 없 어졌지만 세 번째 이정표에서는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이웃, 혜화동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화가 장욱진의 부 인인 이순경 여사가 운영하던 동양서림은 주인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건재합니다. 호떡집에서 시작해 중국음식점으로 3대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금문(金門)은 로터리의 또 다른 명소임을 자처합니다. 또한 혜화동 우체국을 끼고 걸어 들어가면 나오는 문화이용원의 이발사 할아버지는 60년 넘게 혜화동 사람들의 머리를 다듬어주고 있습니다. 창작 연극의 산실인 혜화동 1번지 와 연우소극장 앞은 연극인들의 실험 정신으로 활기가 넘칩니다. 1968년 문을 연 혜화초등학교 근처의 보성문구사는 예나 지 금이나 학생들로 북적입니다. 로터리 주변의 파출소와 유서 깊은 혜화성당 그리고 근현대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장면 가옥은 혜화동의 유구한 역사를 대변합니다. 그리고 발랄하게 오가는 인근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지금의 혜화동을 살아 숨 쉬게 하 는 또 하나의 역사입니다.
네 번째 이정표 시간의 숙소(宿所): 장욱진, 이대원 명륜동2가 22-2번지, 두 팔을 벌리면 닿을 듯한 좁은 골목길에 유일한 이층집이 있었습니다. 장난감처럼 작은 이층집에는 그보다 더 작은 창문이 있고요. 그 창을 들여다보면 구부정한 등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장욱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꼬 방 같은 화실에 화가가 없다면 혜화동 로터리 주변을 둘러보세요. 술에 얼큰하게 취해 고개를 숙이고 가는 깡마른 준노인을 만 난다면 그가 바로 장욱진입니다. 혜화파출소에서도 선생만은 예사로 봐줄 정도로 유명한 애주가였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몇 날 며칠 식음을 전폐하며 작업하던 열정의 천재 화가였습니다. 장욱진의 화실이었던 명륜동 관어당(觀魚堂)은 세상의 변화 속 으로 사라졌지만 관어당이 남긴 예술은 영원할 것입니다. 화가 이대원의 아틀리에는 혜화동 15-50번지에 있었습니다. 파주에서 살다가 열다섯 살이 되던 1935년 혜화동으로 이사 온 화가는 2005년 작고할 때까지 무려 70년을 혜화동과 파주를 오가며 지냈습니다. 중학생 때 이사 온 집에서 대학생이 되고, 가 장이 되고, 화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된 이대원은 70년 넘는 혜화동살이를 엮어 「혜화동 70년」이란 책을 출간했습니다. 한 화 2016
4층 네 번째 이정표- 시간의 숙소(宿所) 장욱진, 이대원
가가 자라고 결혼하고 생을 마감한 이곳 혜화동은 그의 삶과 예술이 그대로 숨 쉬는 곳입니다. JCC미술관 특별기획전 <혜화동풍경>은 ‘매일 아침 그 자리, 혜화동 로터리’에서 출발하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인 조병화와 소 설가 한무숙의 ‘하늘의 주소’를 거쳐, 지금의 혜화동을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을 만나는 ‘공동탕’ 지나 다시 장욱진, 이대원 두 화가가 머물던 ‘시간의 숙소’를 다녀올 수 있었던 짧고도 긴 여행이었습니다. 혜화동은 광복 전후 문학과 미술, 음악, 연극 등 다 양한 문화예술인이 오가던 곳으로, 근현대 문화 형성기에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고 예술혼을 다지던 장소입니다. 이러한 혜화 동 길, 그중에서 로터리를 중심으로 생활하던 조병화, 한무숙, 장욱진, 이대원과 같은 한 세대의 예술가들의 작품과 자료는 혜 화동 곳곳에 숨어 있는 문화예술의 정취를 전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당대를 살고 있는 혜화동 이웃들의 잔잔한 이야기를 시작 으로 우리 각자의 동네가 품은 오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4층 이대원 화백의 전시실
4층 장욱진 화백의 전시실
2016. 5. 10 전시 개막식에서 왼쪽부터, 한무숙문학관 김호기 관장, JCC아트센터 김정화 센터장, 한무숙문학관 김호기 관장 부인, 조병화문학관 김용정 대표, 경운박물관 장경수 관장, JCC아트센터 안순모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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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 1990년대 편운재에서
1990년대 편운재에서
‘조각구름의 집' 편운재는 안성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 조병화가 어머니 진종 여사의 묘막으 로 지은 집입니다. 1964년에 준공한 편운재 벽에는 조 시인이 일생동안 마음 깊이 새겼던 어 머니의 말씀 “살은 죽으면 썩는다”가 새겨져 있습니다. 생에 대한 무한한 성실성을 강조한 이 말씀에 따라 조 시인은 이곳 편운재에서 고독과 싸우며 예술혼을 쏟아냈습니다. 계관시인 조 병화가 53권의 시집과 100여권의 저술 그리고 수많은 그림과 서예품 등을 창작한, 고독과 허 무의 예술혼을 불태운 곳이 바로 ‘편운재’인 것입니다. 또한 이곳은 조병화 시인의 벗과 친지 들이 심신을 쉬면서 창작의 정신을 다듬은 곳으로, 조 시인과 동시대를 호흡하였던 당대의 문 인들의 향기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조병화문학관에서는 2016년 9월 20일부터, 편운재 의 예술혼을 기리고 아울러 예술가의 꿈을 키우는 후학들에게 그 혼을 전하고자 <편운재 예 술혼>전시회를 엽니다.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편운재를 조병화 시인이 생활하였던 그 당시 의 모습으로 재현하여 공개하오니 오셔서 편운재의 역사와 숨결, 조병화 시인의 생생한 체취 를 느끼시기 바랍니다.
2016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에 꿈을 담아주신 분들입니다 (2016년 8월 30일 후원현황)
Ⅰ편운 회원Ⅰ 강대신ㆍ강은모ㆍ강호문ㆍ경응수ㆍ권오륭ㆍ권은영ㆍ김동명ㆍ김병학ㆍ김상선ㆍ김성기ㆍ김성부ㆍ김성중ㆍ김수문ㆍ김여옥ㆍ김연호ㆍ김영관 김영수ㆍ김용건ㆍ김용정ㆍ김용화ㆍ김우형ㆍ김유항ㆍ김윤숭ㆍ김주만ㆍ김진겸ㆍ노정익ㆍ독고윤ㆍ마종기ㆍ민복기ㆍ박규원ㆍ박대영ㆍ박대지 박원규ㆍ박주원ㆍ박철원ㆍ설영기ㆍ신용극ㆍ신창재ㆍ심재석ㆍ안중진ㆍ양규모ㆍ양숭문ㆍ오정규ㆍ오호수ㆍ유태연ㆍ유 현ㆍ윤동한ㆍ윤석민 윤석현ㆍ윤세영ㆍ윤영선ㆍ윤용암ㆍ윤일중ㆍ윤정자ㆍ윤지원ㆍ윤희정ㆍ이경하ㆍ이규형ㆍ이기남ㆍ이동건ㆍ이병규ㆍ이상림ㆍ이상복ㆍ이수빈 이원복ㆍ이인학ㆍ이일향ㆍ이재후ㆍ이정혜ㆍ이종호(중외제약)ㆍ이종호(삼호개발)ㆍ이춘배ㆍ이항주ㆍ이현구ㆍ일양테라ㆍ임건우ㆍ장철수 장현수ㆍ장홍선ㆍ전기석ㆍ전원태ㆍ전찬민ㆍ전형근ㆍ정도환ㆍ정동수ㆍ정몽원ㆍ정성환ㆍ정용선ㆍ정윤표ㆍ조성인ㆍ조성호ㆍ조성환ㆍ조수남 조 양ㆍ조영숙ㆍ조진완ㆍ조진형ㆍ조창환ㆍ지연숙ㆍ차성규ㆍ최경애ㆍ최은아ㆍ한효택ㆍ허영자ㆍ현정원ㆍ호종일ㆍ홍성호ㆍ황병주ㆍ황상현 황영기 Ⅰ꿈 회원Ⅰ 강창희ㆍ구자훈ㆍ김광규ㆍ김대규ㆍ김병성ㆍ김삼주ㆍ김용란ㆍ김은규ㆍ김정일ㆍ김종성ㆍ김종회ㆍ문충성ㆍ박승언ㆍ박종규ㆍ우제상ㆍ원정수 이동수ㆍ이세웅ㆍ이철화ㆍ장부웅ㆍ장부일ㆍ정인용ㆍ황선자ㆍ허형만ㆍ금암실업㈜ㆍ금조기업㈜ㆍ㈜오리곤테크 Ⅰ사랑 회원Ⅰ 곽명규ㆍ권광중ㆍ김동기ㆍ김용건ㆍ김종교ㆍ김종안ㆍ박병근ㆍ서경석ㆍ안창모ㆍ유태전ㆍ이규호ㆍ정분순ㆍ조성걸ㆍ조현국ㆍ차진도ㆍ최영규 한중진 Ⅰ멋 회원Ⅰ 강태흥ㆍ고연수ㆍ고정순ㆍ고희수ㆍ공상진ㆍ곽재숙ㆍ김가현ㆍ김광영ㆍ김길수ㆍ김명인ㆍ김서봉ㆍ김석진ㆍ김순미ㆍ김용규ㆍ김진석ㆍ김헌출 김홍섭ㆍ노완규ㆍ문창욱ㆍ민용식ㆍ민찬홍ㆍ박근준ㆍ박덕규ㆍ박민규ㆍ배동인ㆍ송충석ㆍ오정환ㆍ유자효ㆍ유종해ㆍ윤진석ㆍ이근수ㆍ이명규 이병근ㆍ이성열ㆍ이숙자ㆍ이순재ㆍ이용기ㆍ이재복ㆍ이태길ㆍ이필곤ㆍ이한나ㆍ이혜숙ㆍ이홍섭ㆍ이희자ㆍ임동승ㆍ임두영ㆍ장혜원ㆍ조건식 조 범ㆍ조병수ㆍ조성익ㆍ조성홍ㆍ조장우ㆍ주기영ㆍ주동설ㆍ최일화ㆍ한국희ㆍ한선희ㆍ황경묵ㆍ황선도ㆍ황태선ㆍ황현숙 Ⅰ법인 / 기업 / 단체 회원Ⅰ (재)KPX문화재단ㆍ(재)김현문화재단ㆍ(재)대신송촌문화재단ㆍ(재)일신문화재단ㆍ(재)조은문화재단ㆍ(재)종근당고촌재단ㆍ대협철강(주) 동양콘크리트산업(주)ㆍ리인터내셔널특허법률사무소ㆍ문봉장학회ㆍ삼호개발(주)ㆍ조선내화(주)ㆍ(주)까사미아ㆍ(주)동아일렉콤 (주)리홈쿠첸ㆍ(주)바우하우스ㆍ(주)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ㆍ(주)아주광학ㆍ(주)에이스라이프ㆍ(주)진양이앤씨ㆍ(주)트래콘건설ㆍ홈플러스(주)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임원진 명예회장 회 장 부 회 장 감 사 고 문 이 사
김영수 박철원 허영자 황상현 김종성 김양수 성춘복 강대신 김삼주 김유항 김종회 노정익 박규원 신용극 송미숙 윤영선 이경하 이병규 이상복 이재후 조진형 황영기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 이사장 (주)에스텍시스템 회장 시인ㆍ성신여대 명예교수 법무법인 세종 고문변호사 (재)선교재단 상임이사 문학평론가 시인 정원산업 회장 시인ㆍ 가천대 교수 인하대학 화학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ㆍ경희대 교수 전 현대상선 사장 (주)델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유로통상 회장 소야인터내셔널 대표이사 삼정KPMG 부회장 JW홀딩스 회장 문화일보 사장 서강대학교 로스쿨 원장 김앤장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조병화문학관 관장 금융투자협회 회장
귀하를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원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편운 조병화 시인은 인간의 숙명적 본질인 고독과 허무에 맞서 반세기에 걸친 시작 활동을 전개했던 우리 대표시인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성실성 으로 후학들을 교육한 교육자이자 160여 권의 저서를 남긴 문인이자 10여 회의 미술 개인전을 연 미술가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교육계와 문단에서 이 땅의 문학을 일구어 나가는 데 선도적 역할 을 수행하고 있음은 물론 법조계와 기업계 등 각 분야에서도 정치・경제・사회・발 전을 위해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의 많은 독자들은 현대적 삶 속에 서도 그분의 시를 통해 위안을 받고 꿈과 사랑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에 본인을 비롯한 몇몇 제자들이 모여 2006년 10월 사단법인을 설립했습니다. 저희 법인에서는 기존에 유족들이 운영해 오던 편운문학상과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조병화문학관 사업을 지원하고 나아가 한국 시문학 발전에 기여 할 수 있는 여러 사 업을 펴나갈 예정입니다. 귀하께서도 저희의 뜻에 동참하셔서 이 뜻 깊은 기념사업을 함께 이루어 주시길 간 곡히 부탁드립니다.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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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Cho ByungHwa Foundation
회원가입신청서 및 약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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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 여)
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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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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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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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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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금 CMS(Cash Management Service) 자동이체 동의서 CMS는 금융결제원과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가 계약을 맺고 자동이체 출금을 의뢰하는 납부방식 입니다. CMS 자동이체를 신청하시면 희원님이 직접 은행에 가시는 번거로움 없이 매달 정기적 으로 후원금을 납부할 수 있으며 출금 수수료가 들지 않습니다. 개인 예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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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항과 같이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를 후원할 것을 약속하며, 귀 사업회의 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년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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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문학관 홈페이지 http://www.poetcho.com 에서도 회원가입을 하실 수 있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2길 6(혜화동 105) (우) 03076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전화. 02-762-0658 팩스. 02-3673-0436 Email. poetch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