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꿈(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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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봄 Ⅰ Vol.15

片雲 조병화 시인 10주기 추모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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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봄Ⅰ Vol. 15

Contents

03 꿈의 향기_ 박철원

34 사진으로 보는 생애 2

58 사진으로 보는 생애 3

04 사진으로 보는 생애 1

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글

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시

36 김재홍

60 허영자

조병화 명사들의 추모시

38 오세영

61 김종철

06 황금찬

39 김광규

62 차한수

08 이어령

40 김대규

63 허형만

10 성춘복

41 유종호

64 고영조

11 장석주

42 이가림

65 이상호

43 천병태

66 박찬일

조병화, 명사들의 기억

44 김상현

67 임 보

12 황은성

45 박윤우

68 이인평

13 이호철

46 신중신

69 이재무

14 박희진

47 유자효

70 유재영

16 신봉승

48 나태주

71 윤 효

18 김정옥

49 이숭원

72 최명란

19 김종규

50 김삼주

73 권달웅

20 김수용

51 조예린

74 이제니

22 성찬경

52 장경렬

75 문충성

23 이인학

53 유성호

24 장윤우

54 김종회

26 백승일

55 김수복

28 신달자

56 윤석산

79 후원회원 안내

30 이길원

57 조강석

80 회원가입 신청서 및 약정서

76 사진으로 보는 생애 4

32 정종명

표지Ⅰ제자·그림_조병화

2013 봄Ⅰ Vol. 15

등록번호 서울 사02178 발행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발행인 박철원 편집인 조진형 편집주간 김삼주 편집위원 김종회 박덕규 박주택 홍용희 편집장 박 준 주소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05 (우)110-530 전화 (02) 762-0658 팩스 (02) 3673-0436 홈페이지 www.poetcho.com 이메일 poetcho@naver.com 디자인 GNA Communications (02) 395-2782 인쇄 예작만들기 발행일 2013년 3월 1일 『꿈』은 잡지윤리실천강령을 준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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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향기

시인을 기억하는 사회 2013년 새봄이 찾아왔습니다. 올해는 국내적으로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으 로 새로운 정부가 시작된 해이고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차원(次元)에서는 故 편운 조병화 시인의 10주기를 맞는 해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희 기념사업회에서는 총 6권의 『조병화 시 전집』을 간행하며, 편운 선생님 의 업적을 기리는 시화전, 출판기념회 등 추모행사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또한 2013 년 『꿈』 봄호는 편운 선생님의 10주기인 3월 8일을 앞두고 “조병화 시인 추모 특집”으 로 꾸몄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편운 선생님을 기리고 존경하는 여러 명 사·문인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고 지금 정히 남았습니다. 그 마음들의 일면을 이번 봄 호에 담아둡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문화·예술을 도외시하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만 우리나라 가 한 단계 더 성숙된 모습으로 성장하려면, 우리 청소년의 인성 교육을 위한, 문화· 예술 교육이 대폭 보완되어야 할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 구성원 모두 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성숙된 시민으로 변모하였으면 합니다. 아울러 다양한 지층 으로 남은 그간 우리 문화를 빛낸 예술가들과 그들의 업적을 기억하는 일도 병행되어 야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가 이 사회 조직의 일원(一員)으로 “문 화·예술·사랑” 운동에 앞장서야겠으며 그 출발이 조병화 시인의 10주기 행사를 기해 시작된다면 이것은 시기적으로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편운 선생님이 떠나신지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그 분의 문학과 예술의 혼은 여 전히 우리들 곁에 남아 오롯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 회는 이러한 국가와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신적 요체인 조병화 시인을 길이길이 기념하 고 선양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2013년 3월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장

박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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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생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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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5년 미동보통학교 6학년, 최초의 독사진. 2. 1935년 미동보통학교 6학년, 서울 육상 대회 1600m 릴레이 부문에서 우승을 하고. 3. 1937년 경성사범학교 럭비부 시절. 4. 1943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시절. 5. 1945년 9월 13일 태고사에서 올린 결혼식. 6. 1948년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재직 시절. 7. 1947년 11월. 아들 진형의 돌잔치를 맞아 시인이 손수 만든 초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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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950년 5월 인천시립박물관에서. 9. 1952년 7월 부산 광복동 녹원다방에서 열린 『패각의 침실』 출판기념회. 김원규 당시 서울고 교장, 이하윤, 안수길, 손소희, 김내성, 오상순 등과 함께. 10. 1952년 부인이 운영하던 부산 송도의원에서. 11. 1952년 어머니와 함께. 12. 1954년 왼쪽부터 윤고종, 조병화, 노천명, 이진섭, 조애실, 박계주와 함께. 13. 1955년 명동 밤거리에서. 왼쪽부터 최영해, 정비석과 함께.


조병화, 명사들의 추모시

외로운 여행 길

황금찬 시인.

조병화 시인이

혜화동을 지켜왔다.

고향을 떠난 지 10년이다. 내가 조병화 시인을

그때 혜화동 시인들이

자주 만나게 된 것은

자주 들리곤 했던

대략 1954년경이다.

다방이 있었다.

혜화동에 있는

바로 ‘보헤미안’이다.

동성고등학교에 교사가 되면서부터였다.

그때 여류시인들도 자주 들리곤 했는데

조병화 시인은

허영자 시인과

혜화동에서

홍금자 시인이 있었다.

생활했다. 그러니 혜화동 시인이다.

그 어느 해였던가 조병화 시인이 움직이던

그때를 전후하여

세계시인대회가

혜화동의 자리한

서울에서 열리게 되었다.

시인들의

많은 시인들이 참석해주었다.

이름을 기록해본다. 그것이 시작이 되어 혜화동의 시인들

시인대회는 많은 나라로 번져 나갔다.

조병화, 조지훈, 박목월, 김종문, 정한모, 김구용,

일본 및 태국뿐만 아니라

장 호, 송 욱, 성춘복,

인도로까지 문을 열었다.

이생진, 윤강로, 박희진

한국 시인들은 세계시인대회에서

이런 시인들이

거의 빠지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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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의 시인대회는

조병화 시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 이오니아해의 섬에서 열렸다.

“6·25전쟁이 끝나고 경제력이

그 대회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약해져서 힘들 것 같습니다.”

프랑스에서 시 낭독을 하게 되었다.

회장이 웃으면서

한국 시인 몇 명과 프랑스 시인 몇 명이

그러면 한국 시를 그대로 보내주세요,

시 낭송을 한 것이다.

우리가 불어로 번역해서 읽으렵니다.

이 모임에 프랑스 펜클럽 회장이

한국 시는 최고의 현대시입니다.

참석해 주었다. 한국 시인들은 우리말로 낭송하고

조병화 시인이

영어로 번역된 시는 또 다른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란다.

낭송하기로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장소는 한국문화원이었다.

그러나 시인들은 저 하늘나라에

펜클럽 회장이 조병화 시인을 찾아왔다.

시인들만 모이는 곳이 또 따로 있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우리들은 그곳에서 다시 만날 것을 다시 약속합니다.

한국 현대시는 지금의 현대시를 능가합니다.

시인들의 세계는 아름다운 세계일 것입니다.

헌데 그런 시를 우리들은 읽을 수가 없습니다.

조병화 시인이여 안녕히-

번역이 되지 않아서 입니다. 가능하면 한국에서 불어 번역을 좀 해주십시오.

2002년 2월 11일 진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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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명사들의 추모시

꼭대기에 올라야 날 수 있는 무당벌레의 시학 -조병화 선생 10주기를 추모하는 시론

윤이 나는 빨간 바탕 혹은 주황색 바탕에 크레용으로 칠한 것 같이 까맣고 동그란 점 화려한 옷을 입었다. 그래서 우리는 무당벌레라 하고 서양 사람들은 아시아의 숙녀 딱정벌레*라고 부르는가보다. 하지만 원색으로 너풀대는 무당 옷을 생각하기 전에 농장 속에 개켜둔 누나의 나들이옷을 보기 전에 생각해보자. 칙칙하고 단조한 무당벌레의 애벌레 모습 나무줄기나 어느 이파리 뒤 조용한 곳을 찾아 자신의 몸을 녹이고 있는 깜깜한 번데기의 꿈 보아라. 음산한 집에서 어둠을 비집고 나오는 변신의 기적 구겨진 날개가 펴지면서 차츰 윤택이 나고 제 색깔을 찾는 아. 거짓말처럼 아롱진 무당벌레의 딱딱한 앞날개 그리고 그 속에 감춰진 또 하나의 다른 안쪽 날개의 비밀 대체로 시인은 무당벌레를 닮아 많이 잠자고 꿈꾸고 그러다가 어느 날 앞날개 뒷날개를 얻어 무당 옷 같은 혹은 아시아 숙녀의 깜짝 놀랄 색깔과 땡땡이 점을 얻는다. 그리고 맨 아래 땅바닥에서부터 차츰 위로 기어오르다가 하늘과 맞닿은 식물 줄기의 꼭짓점에 이르면 비로소 난다. 무당벌레와 시인은 세상을 사는 습관이 같아서 진딧물처럼 한곳에 붙어살지 않는다. 곤충학자와 시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아주 다른 세상에서 살지만 이때만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2013 + Spring

이어령 문학평론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전 문화부장관.


그것이 풀이든 나무이든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꼭짓점에 이르면 허공에 맞닿은 그 순수한 꼭대기의 경계선을 발견하지 않으면 결코 날개를 펴고 날지 않는다. 정점에 이르지 않고서는 무당벌레와 시인은 그냥 기어 다닐 뿐 딱딱한 날개 속에 숨겨둔 날개를 펴지 않는다. 조병화 시인은 어느 눈부신 날 우리 몰래 날 수 있는 그 꼭짓점에 이르러 그리고 감춰둔 속 날개를 펴고 우리가 사는 곳과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보지 않았는가. 그가 피우던 파이프에서 오르던 보랏빛 연기 조금씩 색깔이 변하면서 허공의 어느 정점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을 지금 시인의 딱딱한 날개에 찍힌 땡땡이 검은 동그란 점만 세고 있지만 기다리자. 우리도 언젠가는 무당벌레가 날아간 그 꼭짓점을 보게 될 것이다.

*영어로는 무당벌레를 Asian lady beetl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학명으로는 Harmonia axyridis

1971년 7월. 경복궁 예술원 앞에서. 필자와 백철 문학평론가, 최정희 소설가, 그리고 조병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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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명사들의 추모시

선생님의 꿈으로

성춘복 시인.

서울의 남산에서 또 혜화동에서 선생님의 꿈을 저는 펴보고 있습니다 열정이었던 한 시인의 꿈을 사랑이었던 한 시인의 꿈을 여정이었던 한 숙(宿)의 꿈을 오늘은 제 꿈으로 엮고 있습니다 늘 이승이라 믿었던 그 꿈으로 이제는 저승에 둔 선생의 꿈으로 아드님과 며느님 그리고 따님과 문우들과 제자들과 후배들과 더불어 그 꿈을 다시 이승으로 이끌어와서 오늘은 잔치를 펴고 있습니다 안성 땅 난실리의 편운재와 청와헌을 서울 혜화동의 집필실과 문학관을 이승과 저승에 긴 다리를 놓고 캄캄하게 살아온 일흔과 여든의 내력 쓸쓸과 정나미와 아쉬움들 엮어 노잣돈으로 늘 셈하는 그런 버릇입니다 이승에서 다하지 못한 시간을 잊고 저승에서 챙기지 못한 독려를 쌓아 오늘과 내일, 또 낮과 밤으로 나누지 않고 외로움과 헤어지는 연습을 해가면서 손을 나누어도 석별치 않는 작별의 아름다움 그 모두를 지금 배우며 우리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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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마다 편운재에는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안성 난실리 편운재에는 봄마다 영산홍이 피고

선생님, 잘 계시지요?

뜰의 모과나무는 가을마다 탐스런 열매를 맺지만

선생님 계신 곳에도 모란과 작약이 피고

편운재 주인은 여기에 없습니다.

가을에는 석류도 빨갛게 익어가는지요? 햇볕 좋은 새봄에 안성 난실리 편운재에 오셔서

낭만과 파이프와 모자를 사랑했던 시인,

영산홍 꽃 위로 벌과 나비들 잉잉대는 광경도 둘러

그보다는 사람 그 자체,

보시고

고독이라는 실존 그 자체를 고요하게 품었던 시인,

나이 어린 것들이 애써서 세상을

올해가 조병화 선생님 가신 지

얼마나 싱그럽게 만드는지도 한번쯤 봐주세요.

10년이라는 걸 알고 놀랐습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시고 못한 것은 못했다고 야단도 쳐주세요.

열 번 봄이 오고 열 번 가을이 가는 동안

그리운 선생님, 새봄에는

우리는 밥 먹고 싸우고 새끼들을 키우고

얼굴 한번 보여주세요.

사업은 번창 했다가 엎어지고, 그 사이 옷에 달린 단추 두어 개가 떨어지고 옷에 구멍이 나기도 했습니다. 세월은 왜 이리 빠른가요? 그 사이 계집애들은 애기 엄마가 되고 그 사이 사내애들은 애기 아빠가 되었습니다. 고독을 잃은 사람들에게 고독을 찾아주던 시인은 아주 멀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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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명사들의 기억

안성이 낳은 계관시인

황은성 안성시장.

“고향은 사람을 낳고 사람은 고향을 빛낸다.” 꿈의 깃발이 나부끼는 문화마을 난실리 를 지날 때마다 편운 선생의 시 구절을 떠올립니다. 이 명쾌한 한마디 아포리즘 속에서 선생께서 살아온 인생 역정이 묻어나고, 또 한편으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의 진실이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농촌 마을 난실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남달리 빼어 난 두뇌와 성실성으로 당신을 낳은 이 안성을 빛낸 큰 어른이 되셨습니다. 대학의 교수 와 학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길러내셨고, 50여 권의 시집을 비롯한 160여 권의 저술을 통하여 이 땅의 문화 창달에 기여하셨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화가로서 수차례 개인전을 열고, 우리나라 럭비 스포츠가 정착하는 데 도 선생의 힘은 매우 컸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선생의 기여는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렵지만 계 관시인이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그것을 상징적으로 말해 줍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선 생의 시집이 번역 출간되고 선생이 세계 각국을 다니며 세계시인대회를 통하여 한국 시 를 세계에 알릴 때, 이 대회는 선생을 계관시인으로 추대했으며, 마침내 선생은 대한민 국을, 안성을, 난실리를 빛낸 고향의 사람으로 우리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선생께서 영면하신 지 벌써 10년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선생은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외로운 현대인의 실존적 모습, 허무와 고독으로서의 인간 존재 가 꿈과 사랑으로 자아의 완성에 이르는 생의 아름다움을 쉬운 낭만의 언어로 우리에 게 노래해 주신 선생의 시에서 우리는 위안을 받고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선생처럼 고 향을 빛내는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 선생이 계셨기에 국가에서 지정한 문화마을 난실 리, 선생의 혼이 살아 있는 난실리, 이곳을 우리는 자랑으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리고 한층 더 아름답게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선생의 시 정신이 지상에 널리 퍼져나가 도록, 고향을 빛내는 자랑스러운 후손들이 안성에 이어질 수 있는 문화의 시정을 펼쳐 나갈 것을 선생의 영전 앞에서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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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 조병화 선생의 10주기를 맞으며

이호철 소설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벌써 선생이 가신지 10주기인가. 새삼 사람의 일생이

고 한다. 그 학교에 1등으로 입학한 사람은 평안도 정주

라는 것이 허망하다는 것이 절감 된다. 내가 조 선생을 처

에서 올라온 선우휘였다. 그러나 졸업을 할 때에 선우휘

음 뵈었던 것은 1958년쯤으로 기억 된다. 본시 나는 1955

는 불령(不逞) 학생으로 찍히고 말았다. 퇴학 감이었지만

년 『문학예술』을 통해 작단에 첫 데뷔를 하여, 초기에는

학교 측에서도 선우휘의 우수한 성적을 고려해 졸업장을

그 잡지를 주관하셨던 오영진, 박남수, 원응서 선생들,

받게 했다고 했다. 바로 그런 덕에 조 선생은 1등으로 졸

그리고 역시 같은 서북쪽 출신이던 장준하 선생 주관의

업을 하면서, 동경고등사범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고

『사상계』 잡지에 단편들을 많이 발표했다. 그 무렵의 대

하던 것이었다.

표적인 두 문학단체 중의 하나였던 <한국문협> 소속 회원

그리고 그 뒤, 내가 1992년에 예술원 회원으로 뽑힌 뒤

으로 주로 명동의 ‘문예살롱’ 다방이나 ‘갈채’ 다방에 많

에는 예술원 회의에서도 자주 만나 뵈었고, 회의를 마치

이 드나들었었다.

고 돌아올 때도 더러는 선생의 자동차에 편승, 선생의 이

그리하여 <자유문협> 쪽에 속해 있으면서 그 당시 시인

런 저런 회고담들도 수없이 많이 들었었다. 그리고 언젠

이산, 김광섭 선생이 주관했던 <자유문학사>가 있었던 광

가는 무슨 일이었던지는 지금 기억이 없지만, 혜화동의

화문 쪽의 선배 문인들과는 조금 거리를 두고 있었다. 편

자택에 꼭두새벽에 찾아 가 선생의 도장 하나를 받기도

운 선생도 그런 속의 한 분이었었다. 하지만 내 소설을 처

했었다. 그런 때도 다른 사람 같았으면 와락 짜증을 부렸

음 추천 했던 황순원 선생은 그 때 서울 고등학교에 계셨

겠지만 조 선생은 불초 별 소리 없이 친근하게 나를 맞

는데, 편운 선생도 바로 그 학교에 같이 계셔서 처음부터

아 주셨다.

무척 익숙한 느낌이긴 했었다. 더구나 그 두 분께서는 뒤

그렇게 두 문학단체가 재통합되었던 뒤에 조 선생은

에는 경희대학교에도 같이 교수로 재직해 있어, 조 선생

김동리 선생에 이어, <한국문협>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

은 나에게 있어 문학 단체라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남 달

었지만, 나라는 사람은 원체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었

리 친근한 느낌이었다.

던 것이어서 그런 쪽의 복잡했던 실제 정황은 뜬소문 같

그렇게 1958년쯤에 처음 조 선생을 만났던 것은 바로

은 것으로만 더러 들었던 터이었다. 다만 경희대학 출신

필동의 ‘한국의 집’으로 기억 되는 데, 그때도 무슨 공식

의 시인 조태일 형이 편운문학상을 받았을 때 선생이 화

행사 자리였다. 선생께서는 첫 대면에 유난히 반가워해

안하게 웃으시던 모습은 지금도 역력히 기억이 된다. 그

주시며 말씀도 많으셨다. 원체 매사에 들어 활달한 성격

렇게 1990년대에 들어서는 예술원 회장까지 역임하셨다.

이었던 것은 이미 알고는 있었고, 더구나 수학 선생이면

한 때 는 이종환 선생과 함께 부인이 의사였었다는 소리

서 시를 쓰시고, 뿐만 아니라 한 때는 럭비 선수이기도 했

도 문단 소식 비슷하게 거론되기도 했었다. 조 선생의 서

었다는 소리도 미리부터 알고는 있었다. 선생이 나를 대

거 뒤에도 언젠가 어느 기관의 부탁으로 안성 유댁으로

하는 품은 과남할 정도로 뜨거워서 나는 첫 만남임에도

찾아 갔던 일도 있었다. 끝으로 우리 내자가 편운의 스케

별별 소리들까지 서슴없이 털어 놓던 것이었다. 그 중의

치 그림을 무척 좋아해서 선생의 살아생전에 그걸 하나

한 가지는 지금까지도 선연하게 기억이 되살아난다.

얻어 오라고 한적이 있었는데, 그걸 얻지 못한 일이 지금

본시 조 선생은 전국에서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경성

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범학교 출신이었는데, 소설가 선우휘 씨와는 동기였다 12 + 13


조병화, 명사들의 기억

편운 선생과 나

박희진 시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올해가 벌써 편운 선생이 작고하신지 10주기가 되는

바람과 먼지 사이

해이다. 하여 나에게 추모의 글을 써달라는 청탁이 왔다.

그 속에서도

내가 그에 맞는 적임자는 못되지만, 집필자들 중 한 사람

늘 싱글벙글 웃는 얼굴

으로는 낄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기꺼이 쓰기로 했다.

늘 물오른 봄의 피부와

편운 선생과 나만이 아는 사실, 일화 같은 것이 없지

노고지리의 피를

않다. 그것은 나의 제4시집 『빛과 어둠의 사이』(1976)와

지니고 있음이여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책의 표지화는 김창열 화백의 물

그는 그걸 더욱

방울 그림이고, 그것을 넘기면 바로 조병화 선생이 펜으

이글이글 태우면서

로 그린 나의 프로필이 나온다. 당시 선생은 나뿐만 아니

사방에 흩뜨리며

고 마음이 내키면 주변의 시인들 얼굴을 펜으로 그려 선

위세 좋게 거닐다가

물하곤 했다. 단체 여행하는 버스 같은 곳에서, 그러니까

먼지와 바람 사이

본인에겐 예고도 없이 거의 순식간에 그려내는 것이었

존재의 숙소

다. 그 데생 솜씨가 참으로 대단했다. 선을 덧그리는 경

벗들을 만나면

우는 없었고 아주 단번에 대상의 본질이나 특징을 명확

그 위안의 뜨거운 눈물 같은

하게 잡아냈다. 나를 그려 주신 프로필에는 1974년 10월

술잔을 나누지만

27일자가 명기되어 있어 근 40년 전 소작임을 알 수 있거

마침내 다다른

니와 얼굴 전면에 3행으로 달필로 적힌 내용도 인상적이

비인 방 안의 고독을 씹을 때엔

었다. “항상 먼 곳에 고향을 둔/ 『빛과 어둠의 사이』의 詩

장미의 뿌리

人/ 朴 兄의 모습”

파이프 통해

그런데 이 데생엔 눈이 그려져 있지 않다. 그래 그 점을

그는 뿜어 낸다

말씀드렸더니, 조 선생은 웃으면서 “눈은 어려워. 잘못 그

쉴새 없이

렸다간 그림 전체를 망치게 되거든”하고 답하셨다. 나는

푸, 푸,

동감했다. 참으로 명답이 아닐 수 없다고. 그리고 또 하나

푸,

『빛과 어둠의 사이』에는 「趙炳華」라는 졸시도 한 편 실려

푸……

있다. 여기 그 전문을 옮겨 보자.

아름답게 아름답게 노을진 조각구름

2013 + Spring


시인 조병화 하면 떠오르는 것이 베레모와 파이프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셈이다. 게다가 ‘늘 싱글벙글 웃는 얼굴’ 나는 그것을 ‘늘 물오른 봄의 피부와 노고지리의 피 를 지니고 있음이여’ 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그가 심신 건강을 누구보다도 잘 지키고 있 는 놀라운 분이라는, 즉 자기관리의 명수랄까 삶의 달인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는 젊 었을 때 일본의 명문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 화학을 전공한 분이다. 그런 두뇌 명 석한 이공학도가 현대시론 교수로서 나중엔 학장, 대학원장, 부총장 등의 중책을 역임 했고 문인으로서도 한국시협 회장, 문협 이사장, 예술원 원장 등 요직을 두루 거뜬히 해 냈다. 세계시인대회 계관시인의 영예도 누렸다. 그가 생전에 간행한 시집만도 무려 50 권이 넘는다. 이제 얘기는 다시 나의 제4시집 『빛과 어둠의 사이』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하루는 뜻밖에 조병화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웬 일이세요?” “아주 좋은 일야. 박 형 이 이번에 『빛과 어둠의 사이』로 제11회 월탄문학상을 받게 되었다구. 오후에 시간이 되면 경희대학교로 놀러와요.” 나로서는 정말 뜻밖의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때까지 상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나다. 더러 『현대문학』 신인상 후보로는 올랐 던 모양인데, 끝내 주어지지 않는 걸 보아 도시 내겐 상복이 없는 것이려니 하였던 게 사 실이다. 나는 사뭇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며 교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진심으로 수상 을 축하해요!” 하면서 조 선생은 내게 조니워커 한 병을 내밀었다. “상은 받아 두는 게 좋아. 말하자면 비로소 사회적 공인을 받는 셈이니까” 그의 정감어린 목소리와 함께 너 그럽고도 따뜻한 악수를 나는 길이 잊을 수 없으리라.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시단의 거목이었던 조병화 선생님! 당신이 별세한지 벌써 십 년이 지나가다니요.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착하고 좋은 것이 사랑 또는 시 쓰는 일 일진대, 저승에 가서도 계속 그 일을 갈고 닦을 수가 있는 것인지요? 편운 선생님, 지금 거기서도 시 쓰고 계십니까? 대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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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명사들의 기억

봉승아, 시집 나왔다

신봉승 극작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인연은 아름답지만 무상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살아있는 시간이 서로 다르고, 헤어 지는 시간이 또 다른 것이 만감을 교차하게 하는 까닭이다. 만날 때의 인연이 소중한 것 처럼 헤어질 때의 인연도 간절하기 그지없을 때가 많다. 편운 조병화 선생님이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은 “봉승아, 아무래도 올해를 못 넘길 것 같다.”였다. 만나 뵙는 자리에서라면 손이라도 덥석 잡아 볼 일이지만, 전화 통으로 울 려온 마지막 목소리여서 속수무책으로 눈물만 쏟고 말았던 기억이 10년이 지나도록 생 생하기만 하다. 편운 조병화 선생님과의 인연은 내가 강릉사범학교 졸업반이던 1952년에 시 작품으 로 처음 맺어진 이래, 중앙대학교와 경희대학교의 교수와 학생으로 또 문단의 선배와 후 배로, 선생님의 말년에는 예술원의 회장과 회원으로, 또 단정하게 술을 마신다하여 이 름 붙여진 원로 예술원 회원들의 모임, ‘수요회’의 멤버로까지 이어졌다. 오랫동안 나눈 정분 때문에 서로가 마음에 묻어주어야 할 내밀한 일까지 격의 없이 나누게 되어 선생 님이 이승을 떠나신 지금도 나만이 간직해야할 사연이 있을 정도다. 내가 대학생일 때, 편운 선생님은 교정에서나 강의실에서나, 혹은 길가에서라도 나를 불러 세우고는 “봉승아, 이리와라 시집 나왔다.” 하시면서 초록색 잉크가 흘러나오는 금 장의 파커 만년필로 손수 서명을 해 주시곤 하였는데, 그때 선생님 만년필에서 흘러나 오는 초록빛 잉크가 내게는 너무도 아름답고 환상적이었다. 시선집 『여숙』을 주실 때의 기억은 지금도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역시 느닷없이 나 를 불러 세우고 초록색 잉크로 서명을 하시는 데, “辛承奉에게”라고 적으신다. 내가 아 차 하는 순간 편운 선생님은 교정부호 S로 “承奉”을 “奉承”으로 바꾸어 읽게 하시고, 지 난밤에 마신 술이 덜 깼다는 뜻으로 작취미성(昨醉未醒)이라 적으신 다음에야 “허허허, 이 만하면 됐냐?”하시며 너털웃음으로 얼버무렸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거나, 편운 선생님의 만년필에서 흘러나오는 초록색 잉크가 어찌나 멋있고 환상적이었던지 그날 이후 나도 모든 원고지의 칸을 초록빛 잉크로 메우게 되었다. 아 는 바와 같이 시나리오나 TV드라마는 원고지의 소모량이 다른 장르에 비해 엄청나게 많다. 얼추 13만여 장의 원고지를 모두 초록빛 잉크로 메우게 되면서 우연찮게도 초록 색 빈 잉크병이 무려 2백여 개나 모아지게 되었고, 그 모든 것이 편운 선생님과의 인연 에서 비롯되었다는 기사가 여러 언론에 소개되었다. 그런 소식에 접하신 편운 선생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고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시곤 하였다. “봉승아, 너는 나의 청춘이다.” 뿐만이 아니다. 선생님은 누가 듣거나 말거나 언제나 2013 + Spring


나를 ‘봉승아’라고 불렀다. 심지어 편운 선생님이 예술원 회장이실 때는 나도 당당한 예 술원 회원인데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야 봉승아’라고 부르시어 다른 회원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어느 때던가 나도 응석을 부리듯 투정을 한 때도 있었다. “선생님, 저도 이젠 일흔이 넘었어요.” 그때마다 선생님은 “너는 여든이 넘어도 ‘봉승’이다.”하시면서 너털웃음을 웃으시곤 하셨다. 그 티 없이 맑은 편운 선생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시처 럼 들릴 때가 있다. 편운 선생님을 이승에서 떠내 보낼 때의 서운하고 황당한 심회는 정말로 가늠할 길이 없었는데, 벌써 10년 세월이 흘렀다면 선생님과의 띠 동갑인 나도 이젠 편운 선생님 떠 나가실 때의 나이가 된 셈이다. “봉승아, 나 여기 있다.” 그렇다. 푸른 하늘을 떠가는 조각구름에서 울리나오는 편운 선생님의 목소리가 날로 생생해지는 요즘이다.

1950년대 후반 강릉에서. 조병화 선생님, 박고석 화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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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명사들의 기억

편운片雲 조병화 선생님을 생각하며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50년대 초반 부산 피난 시절이었다. 한국 전쟁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중부전선에서 교착 상태를 보이고 있을 무렵 나는 대학생이었다. 구덕산 기슭 에 자리 잡은 가건물에서 강의를 듣다가 광복동 로터리에 나아가 이곳저곳 다방을 헤 매며 다녔다. 오상중, 박인희, 홍사중, 이일 등과 어울려서 <구도동인(構圖同人)>이라는 문학동인을 만들어 건방을 떨고 다녔다. 그때 누가 제의를 했는지, 누가 연고가 있었는 지, 또는 친분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집으로 찾아가 뵌 것이다. 선생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우리가 건방을 떠는 것도 너그러이 봐주셨다. 문단의 선배로서 어설픈 문학청년들을 너그러이 내려다 보셨기보다는 선생님 자신도 젊은이처럼 허물없이 대해 주셨다. 어둡고 우울한 피난 시절, 젊음을 상실하지 않는 낭 만적 선생님을 뵌 것은 당시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다. 서울로 환도한 이후,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나는 동숭동, 대학로 등에서 때때로 선 생님을 뵈었다. 파이프를 피워 문 선생님은 여전히 젊음이 넘치고 낭만적이셨다. 선생님 은 시화전을 열기도 하셨다. 선생이 그린 그림은 선생의 시에 못지않게 아름답다고 생각 했다. 우리 시대의 멋을 아는 최후의 낭만적 예술가라는 생각을 해봤다. 선생께서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이시던 시절 예술원 회원이 된 나는 선생님을 자주 뵈 올 수 있었는데 선생님은 여전히 파이프를 입에 문 모습이었다. 여전히 낭만적인 노 시 인(老詩人), 그러나 선생님에게는 언제 그런 면이 있었던가 하고 의문이 들 만큼 외로 움의 그늘도 종종 엿보였다. 언제인가 선생님은 “혼자서 길을 가는 거다. 혼자서 살아가 는 거다. 혼자서 죽는 거다.” 라는 구절이 담긴 엽서를 보내주시기도 했다. 선생님은 수 많은 벗과 후학들과 같이 시인(詩人)의 길을 걸어왔지만 결국은 마지막에 혼자서 길을 걷는 것으로, 혼자서 살다가 죽는 것으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편운(片雲) 조병화 선생은 결코 혼자서 떠나신 것이 아니다. 많은 벗들과 후학들이 선생이 가신 시인(詩人) 의 길을 오늘도 이렇게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2013 + Spring

김정옥 연극 연출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해마다 봄이 되면, 그리운 기억! 조병화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나신지 10년, 나는 경기도 안성 조병화문학관을 찾아서야 과거 선생과 나눴던 옛 정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삼성출판박물관 관장.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며느리가 생가와 문학관을 잘 가꾸고 있는 것을 보면 선 생은 참으로 행복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을 꺼내보게 된다. 이럴 때면 사람의 정이라는 게 참으로

작고하시기 전 어느 해인가 장소는 정확히 기억나지

하염없기도 또 부질없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께 죄

않지만 조 선생과 필자 그리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

송할 따름이다. 조 선생은 시인으로 학자로 또 화가로 삼

로 청출어람을 실현하고 있는 조 선생의 애제자 신봉승

절(三絶)을 겸비한 우리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였다.

선생과 함께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조 선생은 어느

너른 양산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납작한 베레모와 멋스러

정도 분위기가 오르자 시인으로서 또 예술가로서 살아온

운 파이프 담배는 선생의 트레이드마크로 때로는 시인보

진한 삶의 여정을 실타래처럼 하나하나 풀어 놓기 시작

다는 화가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하셨다. 출판인으로 문인의 궤적이 늘 궁금했던 필자의

2011년에는 조병화문학관에서 조 선생이 대만을 여행

입장에서는 참으로 흥미로운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하며 남긴 스케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나는 그 스케치

런저런 얘기는 선생의 넉넉한 인품을 충분히 느낄 수 있

작품들을 보면서 시어의 또 다른 조형 체계로서 자유분

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신 군(신봉승) 자네는 어떤

방했던 선생의 예술적 감수성을 잘 대변하고 있음을 느꼈

가?”, “신 군 자네는 요새 무얼 쓰고 있지?”, “신 군 자네

다. 또한 선생의 유화 작품에서 드러나는 세련미와 색감,

라면 이럴 땐 어떻게 하겠는가?”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

자유분방한 필치는 선생의 풍부한 예술 세계를 드러내고

던 사제지간의 자애로운 대화였다. 이런 것이 따뜻한 정

있다. 선생은 럭비 선수로서도 또 대학 럭비 팀의 지도자

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필자는 지금도 그 대화를 잊을

로도 활약한 바 있는 다재다능한 전인적 지성인의 삶을

수가 없다.

살아오신 분으로 우리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왔다.

지극한 효성으로 선생의 유지를 계승해 나가고 있는

어제와 오늘, 촉촉한 겨울비가 내렸다. 비는 질투와 시

아들 부부 그리고 여러 제자들의 변함없는 사랑은 선생

기, 오만과 편견, 독선과 아집으로 감싸져 있던 우리들의

의 낭만적인 생애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에게 기억

마음을 녹이고 번민으로 얼룩진 대지를 씻긴다. 그리고

되고 있다. 이제 「해마다 봄이 되면」에서 선생이 어머님

이맘때면 사람들은 새로운 봄을 생각하게 된다. “해마다

과 나눴던 봄의 희망을 남은 우리가 잘 실천해 나아갔으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

면 한다. 조 선생도 그토록 그리워했던 어머님 곁에서 우

라”로 시작되는 조 선생의 시 「해마다 봄이 되면」은 이 시

리의 성과들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

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심경을 참으로 잘 대변했다는 생

해 본다. 조병화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나신지 10년, 선생이

각이 든다.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봄이 반갑기만 하다.

그리운 또 다른 이유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선생은 참으로 효성이 지극한 분이셨다. 부모님의 묘 소를 고향집 뒤뜰에 모시고 지극정성으로 돌보셨으며, 그 것도 부족해 시어를 통해 어머님을 한결같이 그리곤 하셨 다. 선생이 떠나신지 10년, 이제 그 유업이 이어져 아들과 18 + 19


조병화, 명사들의 기억

혜화동 옥잠화

편운 선생님. 2013년 1월 1일 서울에는 눈이 내렸습니다. 잠두산(누에의 머리를 닮은 데에서 유래된 남산의 옛 호칭) 산허리가 온통 눈으로 덮여 거대한 한 마리 누에가 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올 겨울은 혹한이 계속되어 어제도 영하 16도까지 내려갔습니 다. 선생님 댁 담 모퉁이 혜화동 옥잠화가 얼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선생님과 사모님 이 안 계셔도 그 하얀 꽃이 올 여름에도 예쁘게 피어야할 텐데요. 선생님이 저희를 버리고 떠나신지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확실한 이 세상 에도 죽음과 삶의 두 갈래 길은 확실히 있어 그사이 36명의 예술원 회원이 저희와 유명 을 달리했습니다.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차범석 선생도 권옥연 화백도 떠나셨습니다. 애 석하고 허무하지만 누가 그 길을 막겠습니까. “우주는 뒷덜미만 환하다. 기상청은 흐림/ 구름사이로 쏟아지는 빛 속에는/ 태양이 아닌, 몇 억 광년쯤 떨어진 곳의 소식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2013년 『조선일 보』 신춘문예 당선시는 경희대 국문과 학생이 쓴 것입니다. 삶의 구체성을 통한 사유,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과 밀도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선생님 허무하다는 말을 지우겠 습니다. 선생님의 씨앗은 이렇게 도처에서 싹트고 꽃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를 읽으면서 선생님을 늘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선생님의 고향 난실리에서 머지않은 곳에 저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향 시인 편운 선생님과 박두진 시인을 자랑스러운 예술인으로 존경했습니다. 선생님은 짙은 여 송연 향기를 뿜으며 파이프 담배를 즐기셨지요. 그러면서 예술은 고독이라고 단언하셨 어요. 그리고 그 마도로스 파이프를 제게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 그것을 바라보며 고독 을 생각합니다. 지난 가을 미리내 성지에 고독한 친구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선생님 기념관이 바라다 보였으며, 참나무 숲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참 평화로웠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는 18대 대통령을 선출하느라 두 패로 갈라져 어지간히 싸웠습니 다. 결과는 여성 당선자가 청와대의 새 주인이 되었으며 민생정치를 내걸고 국민 대통 합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패배한 쪽에서 선뜻 손을 내밀지 않고 영남과 호남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있습니다. 남북이 맞서고 여야가 물어뜯고 있으니 이건 이조시대의 사 색당쟁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네 한심한 정치 DNA를 다시 봅니다. 선거 때는 표를 의식해서 국회의원들은 감 언이설을 늘어놓았습니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 정치를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끝나고 나니 나 몰라라 옛 모습으로 돌아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해를 넘겨 국가 예산을 2013 + Spring

김수용 영화감독. 대한민국예술원 33대 회장. 전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의결을 했습니다. 게다가 342조 원이란 막대한 혈세를 호텔 밀실에서 계수조정을 했습 니다. 그리고 자기 지역구 민원 예산만 챙긴 예산위원들은 중남미, 아프리카 외유를 떠 났는데 그 이름 중에 우리 고향 의원도 끼어 있었습니다. 한국 정치는 아직 부끄러운 수 준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너를 보면 내 청춘을 보는 것 같다고 선생님께서 아끼시던 신 봉승 선생이 이번에 재미있는 정치 소설을 써 화제입니다. 세종대왕을 대한민국 대통령 으로 삼고 이조의 뛰어난 청백리 재상들로 조각을 해서 지상에서 제일 행복한 나라를 꾸민 것입니다. 과연 예인다운 발상입니다. 지난번 노벨문학상은 중국의 모옌(莫言)이 수상했는데 그의 소설을 읽고 감동을 받 았습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빈곤과 차별로 고통 받으며 소학교도 못나온 그가 해양군 문화부 소속 작가가 되어 중국 농촌의 현실을 그려내는 독특한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전 세계의 독자를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문학이 이룩한 업적은 빛날 것이며 선생님이 남기신 문학적 업적 또한 영원할 것입니다. 김남조 선생의 근작시 「서 녘」을 끝으로 적어 봅니다. 편운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사람아 아무려면 어때 (……) 이별이면 어때 해와 달이 따로 가면 어때 못 만나면 어때 한가지 서녘으로 서녘으로 잠기는 걸

1997년 5월 금곡에서 열린 예술원 야유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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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명사들의 기억

영원과 자유

성찬경 시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조병화 선생과 나와는 겉으로는 특별히 친밀하다고 말

는 다행스럽게 여기던 차였다. 나는 그저 “예” 하고 답하

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다가 만나게 되

는 것 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선생님은 내가 도

면 선생님은 늘 소탈하면서도 따뜻하게 나를 대해주셨

저히 따를 수 없는 덕목을 갖추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

다. 선생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정성이 깃들어 있는 것을

다. 첫째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부지런함이다. 그냥 부지

느낄 수 있었다.

런함이라 하기보다는 예술적 부지런함이라고 해야 할까.

나 역시 선생님을 격의 없이 대하면서도 결례가 되는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이 부지런함만큼 소중한 자산은 없

일이 없도록 항상 마음을 썼다. 말을 아끼면서도 내가 하

다. 그런데 대부분의 예술가는 부지런함과는 정반대인

는 말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았던 것은 물론이다. 조병화

‘나태’와 친하다. 좀 더 분명히 표현하자면 나태의 쾌락에

선생과 나와의 이런 정도의 인연과 교류를 나는 대단히

빠져드는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작품’이 태어나기도 전에

소중한 것으로 여겼다. 일에 늘 쫓기면서 사는, 이 바쁜 세

연기처럼 시간 속에 사라진다. 나는 평생을 통해 이제 겨

상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이런 정도 이상으로 복잡하

우 10권의 시집을 냈건만 조병화 선생은 50권이 넘는 시

게 얽힐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보다 더 친밀하

집을 생산해냈다. 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스케치 북을

게 되면, 역시 인간끼리의 관계인지라 어느 한편에서 요

가지고 다니시며 스케치를 하고 그것을 여러 차례의 전람

새 말로 ‘오버’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고, 그 결과 서로 서

회로 이었다. 예술가로서의 타고난 부지런함이다.

운하게 여기게 된다면 좋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또 한 가지의 덕목은, 방금 말한 덕목과 관련이 있는

실제로 내가 선생님께 실수를 하여 선생님은 나를 꾸

것이지만, 선생님의 철저한 시간관념이다. 무슨 행사 때

짖으신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곧 잊었다. 그래

도 꼭 미리 와서 기다리신다. 시간을 어겨서 남에게 폐를

서 선생님과 나와의 관계는 물에 물탄 듯 별 탈 없이 이

끼치는 일은 절대 없다. 이것이 선생님의 ‘신사도’의 뼈

어졌다. ‘인생감의기(人生感意氣)’라 했던가! “성형 참 시

대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가 기억하고 있는 사

잘 써! 이번에 나온 시 잘 봤어. 아무나 그렇게 못 쓰지!”

실이다. 선생님은 선천적으로 마음의 ‘그릇’이 큰 분이셨

“……” 선생은 대개 이런 식의 간략한 말투로 나의 시 작

다. 그리하여 한 번 떠나고 난 다음에는 선생님만한 인

업을 평가, 격려해 주셨다. 내가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물을 문단에서 찾기란 쉽지가 않다. 선생님의 카리스마

선출됐을 때, 조 선생님이 나를 강력하게 천거해주셨다는

의 비밀을 이제 와서 다 헤아리려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

것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 나에게 이 말을 전한 사람은 또,

이 아닌가 싶다.

“조 시인과 성 시인이 그런 관계인 줄을 몰랐어.” “……” 이런 말을 덧붙였다.

생전의 선생님의 모습을 회상하고 기억하다보니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

내가 예술원 회원에 선출됐을 때 제일 먼저 축하전화

각 속에 산다.” 라는 선생님의 시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를 주신 분도 조병화 선생이었다. 그리고 그 후 선생님을

선생님은 지금 ‘하늘’에 계시다. 나는 아직도 풀의 그늘에

만났을 때, “어때요, 예술원에 들어와서 소속감이 생기니

서 살고 있다. 선생님 가신지 벌써 10년이 흘렀는가. 그렇

좋지요!” 정말 그러하였다. 70대에 들어서서 인생이 허전

더라도 생각의 기억 속에 하늘과 지상이 연계되어 있다.

하게 느껴질 무렵 ‘예술원’이란 활동무대를 얻은 것을 나

선생님을 기억하며 영원한 안식과 자유를 빈다.

2013 + Spring


미조리의 정종

이인학 서울고등학교 제자.

어느 해인가 편운 선생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과 함께 난실리로 가고 있었다. 비가 온 다음이라 길이 온

말을 건네셨다. “쉰아홉 살을 무난히 편안히 아무 탈 없이

통 진흙탕이었다. 어느 길에서인가 차가 진흙에 빠져 바

보낼 수 있을까? 하긴 내가 마흔 아홉 살을 넘길 때 불길

퀴가 헛돌기만 했다. 할 수 없이 선생님께서는 직접 구두

한 엄포(?)를 놓은 한 지인이 있었지만 별일 없이 지나가

를 벗고 맨발로 후배 동문과 함께 차를 밀어주셨다. 그런

긴 했다. 이 좋아하는 술을 즐기면서 십 년이 흘러 오늘이

웃지 못 할 우여곡절 끝에 처음 보는 선생님의 고향집에

왔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열심히 하면서 말이다.” 그

도착했다. 나는 벌어진 눈앞 풍경에 ‘아’ 하는 탄성을 절로

리고는 선생님은 “정종 대포 두 잔 더!”를 외치셨다. 지금

내뱉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과 선생님께서 즐겨 화폭

도 술을 즐기다보면 가끔 조병화 선생님과 함께 했던 술

에 담으시는 풍경 그대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외로이 서

자리의 모습이 생각난다. 주로 일식 요리를 전문으로 하

있는 나무와 몇 마리의 까마귀, 아스라이 굽은 시골길 너

던 ‘미조리’라는 음식점에서의 일이다. 안주라고는 타코

머 꿈만 같은 조용하고 포근한 기운이 특히 좋았다.

(삶은 문어) 몇 쪽과 생미역이 전부인 소박한 술상이었지

집 안에는 그동안 선생님께서 남긴 작품과 추억이 담

만 유난히 신선하고 담백한 맛을 자랑하는 집. 내가 선생

긴 물건들을 보존하고 진열해 두고 계셨다. 돌아오는 길

님을 모시고 담소를 나누며 술을 즐기던 곳이다.

에는 빠질 수 없는 술자리를 경희대 근처 한정식집에서

선생님과 나는 우리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다. 홀수 잔

가졌다. 푸짐한 음식과 좋은 술로 실컷 마셨다. 설계를 전

으로 끝내는 것은 되도록 지키며 마셔왔다. ‘학인아’는 선

공한 동문 후배는 술에는 젬병이라 선생님과 나를 우직

생님께서 부르는 나의 애칭이다. ‘인학’이 보다는 훨씬 부

하게 지키던 기억도 난다. 선생님은 천하가 인정하는 애

드럽게 느껴진다. “학인이 오늘 한 잔씩만 더 마시면 아홉

주가 시인이시다. 별명도 술통이 아니었던가. 항상 젊음

잔째다. 기분이 좋고 취기도 좀 올랐다.” 늘 선생과 술을

과 인기가 뒤따랐고 내내 멋스러운 모습이었다. 선생님은

마실 때면 스승님이 아니라 아버지 같기도 하고 형님 같

나 ‘학인이’를 특별히 잘 대해 주셨고 언제든 무슨 일이 있

기도 하고 말벗과 같이 편안히 대해 주시는 선생님이 늘

으시면 나를 불러 주셨다.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지금도 나는 선생님과 함께 한 시간을 늘 그리워한다.

조병화 선생님은 정말 술을 사랑하시고 즐기셨다. 헤

선생님과 특별했던 관계도 또 늘 같이한 술들도……. 내

어져 뒷모습을 바라볼 때면 멋을 풍기며 걸음을 옮기셨

가 선생님의 사랑을 어찌 잊겠는가. 선생님께서 떠나신

다. 그날도 인생 곡절의 많은 이야기, 동경사범고등학교

지 10주기. 선생님의 자리는 비어있지만 그 많은 유산은

시절 일본 전국 대표 럭비 선수로서 활약하며 세계를 누

시인 조병화의 정을 안고 아쉬워하며, 즐겨 마시던 술로

볐던 일, 세계시인대회에 참석한 잊지 못할 재미있는 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편운문학상 운영위원으로 선

야기를 나누며 술을 즐겼다. 선생님의 아홉수를 잊고 말

생님의 업적을 기리는 소중한 일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이다.

꿈과 사랑과 낭만의 시인 조병화. 선생님의 영원한 안식

1970년도 중반쯤의 일화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조그

을 이 지면을 빌려 비는 바이다.

마한 브리샤 자동차를 운전해 선생님을 모시고 후배 동문 22 + 23


조병화, 명사들의 기억

문학과 미술의 길을 밝혀주신 잊지 못할 은사님 어린 시절, 내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욕심 같아서는 누대(累代)에 남는 ‘위대 한 문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피폐(疲斃)해진 피난지, 부산의 한 바 닷가에 가건물로 지어진 서울고 교정에서 나는 내 꿈을 펼치기는커녕 빈궁한 삶을 영 위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휴전에 반대하는 군중이 광복동과 시내 거리를 누빌 때도 나 는 그 어린 나이에 함께 그 속에서 휩쓸려 다녔다. 10대 소년의 낭만과 뜻은 날로 꺾여 가고 결국 휴전 후 서울 모교로 복귀했다. 그마저도 강당, 도서관 등 구석진 곳으로 밀 려나 배워야했다. 서대문과 신문로 등하굣길을 오가는 길에 드나들던 헌책방은 나의 몇 안 되는 즐거 움이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실컷 책을 읽고 싶었다. 그 시절 신 문로 경희궁 교정에서 뵐 수 있었던 젊고 활기차던 수학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그 분 이 바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은사이자 은인, 조병화 시인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 진학 과 진로와 문학에 대한 열망 등으로 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 고민 끝에 용기를 내서 교 직원실로 찾아뵌 조병화 선생님은 여러모로 내가 청한 지도와 안내를 귀찮아하지 않으 시고 매번 잘 받아주셨다. 열악한 현실에서도 작품을 써내 『학원』, 『소년』, 『새벗』 잡지와 다른 소년지, 신문에 도 닥치는 대로 응모했다. 이 무렵, 경복고등학교 동급생인 송명호 등 4인이 마음을 합 해 학생 시집을 펴내기로 작정하고 원고를 들고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4인 부락>으로 이름을 정해주시고 머리글까지 얹어주셨다. 발문은 돌아가신 김규동 시인 이 써 주셨다. 이 四人의 시의 벌판엔 아직 봄이 이른 계절입니다. 벌판에 뿌려진 무수한 시의 씨앗이 이제 돌아올 봄을 위하여 제 각기 몸차림을 하고 있으며 그 몸가짐들이 어딘가 굳세게 뻗어나갈 힘과 기다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씨 뿌려진 이 시의 벌판, 한계(限界)도 없고, 인적(人跡)도 없고 그대로 자유인의 시 세계를 향하 여 청춘의 창공(蒼空)을 바라다보고 있는 이 四人의 개척인들은 혼탁의 도시에 서 빠져나와 이제 개척지(開拓地)에서 미래의 희망에 꽉 차 서있는 첫 모습을 이 동인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四人의 벌판 곁에서 이제 다가올 봄날의 꽃 송이들과 가을의 열매들을 위하여 -조병화, 「새로운 시의 벌판 <四人部落>을 위하여」 부분.

2013 + Spring

장윤우 시인. 화가. 성신여대 명예교수.


1955년 1월 1일에 평문사 간행으로 처음 상재된 학생 시집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14권 이상의 시집과 산문집들이 내 앞에 있다. 물론 재학 당시에 황동규, 마종기, 갈천문 이 문예반에 있었으며 후에 김광규, 최인호 후배들이 뒤를 이었다. 이 시기 에피소드도 하나 생각난다. 조병화 선생님은 학창시절부터 훌륭한 럭비선수 였기에 서울고교에 럭비부를 신설하시고 약체(弱體) 선수들을 단련하여 서울시 대항전 에 출전, 우승기를 거머쥐고 오셨다. 전교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뤄진 수상식에서 당시 김원규 교장 선생님은 치사(致辭) 도중 난데없이 “그래도 우리는 운동보다는 영어 와 수학을 잘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운동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주변에서는 서울 중·고교를 ‘서울 영·수학관’이라고 비아냥하는 터였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진학 성 과가 매우 뛰어나서 나와 동급반에서도 훗날 저명한 인사가 많이 배출 되었다. 이수성 전 총리, 경상현, 박유철 전 장관과 김용준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해 각 대학의 총장과 군 장성들도 허다했다. 이후 나는 결국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며 문학 의 뜻을 이어갔으며 대학 강단에서 미술 전공 교수의 신분으로 50년여 활동을 해왔다. 조병화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일러주신 수학보다도 수업 외 시간에 몸소 지도해주신 문학과 예술, 인생과 낭만 등의 도정(道程)을 체득한 나 역시 77세의 나이에 접어들었 다. 1981년 5월에는 조 선생님의 회갑(回甲)을 맞아 기념 문집에 제자로서 글을 올려드 리는 기회도 얻었다. 나의 멘토, 조병화 은사님에 향한 열정으로 쓴 「이마를 가로 긋는 주름살 그 깊은 곳」이 바로 그것이다. 이후 문단 행사에서 또 대학 강의의 일환으로 찾아뵈었던 안성 난실리에서 나는 간혹 선생님을 뵈며 평소 소홀했던 제자로서의 후회를 씻고 파이프에 퍼지는 체온(體溫)을 느꼈다. 돈암동에 위치하던 직장에 다니느라 1970년대부터 매일 같이 지나야 했던 혜 화동 로터리에서 선생님을 마주할 때면 “장윤우, 자네는 러시아 백작이야, 콧수염이 멋 있네.” 하시며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저를 키워준 당신 은 제정(帝政) 러시아 황제이십니다.” 하는 말을 삼켰다. 『꿈』과 조병화문학관의 여러 사업들은 해가 갈수록 그리워지는 편운 선생님에 대한 마음을 따듯하게 위로해 준다. 우리 시대의 로맨티스트 조병화 시인. 10주년 추모의 해 를 맞아 당신을 추억하고 있는 우리들을 멀리 한 조각 구름으로 떠다니며 지켜보실 우 리들의 은사님. 문단과 교단에서 그리고 미술의 길에서 조병화 선생님을 뒤따라 걸으 며 그 넓은 품을 되새기노라면 갑자기 가슴속으로 뜨겁게 흘러들어오는 정회(情懷)에 새삼 눈물이 난다. 24 + 25


조병화, 명사들의 기억

우리들의 감독님

백승일 럭비인. 전 상명대 교수.

조병화 님. 저희들 곁을 떠나신지 어느새 10년이 되었습니다. 뵙고 싶습니다. 정녕 그 립습니다. 조용히 불러보지만 대답은 없으십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님은 변하지 않고, 잊히지 않고 아니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들 가슴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계신 진정한 저희들의 사표(師表)입니다. 님에 대한 호칭은 살아오신 열정적이고 화려 하며 영광스러운 족적을 드러내듯 아주 많고 다양합니다. 시인, 교수, 화가, 러거(럭비 선수), 문과대학장 등등 열거하자면 지면이 모자라겠지만 저는 그때, 그 시절 그랬던 것 처럼 ‘감독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감독님과 저의 인연은 경희대학교 문과대 교수이자 럭비부 감독을 맡으셨던 60년대 초에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럭비부 주장이었습니다. 까마득히 지나간 그 시절에는 4·19와 5·16이 있었고, 경기가 벌어지곤 했던 동대문운동장 앞으로 전차가 다녔고, 보릿고개란 말도 들리던 시대였습니다. 자동차는 극히 드물었고 여러모로 궁핍한 시절 이었습니다. 스포츠의 국제 교류도 걸음마 단계여서 비인기 종목이었던 럭비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낭보가 날아 들어왔습니다. 1960년대 초 그러니까 1961 년과 1962년 여름, 경향신문사의 초청으로 자유중국 대표팀인 ‘기륭(基隆)’팀과의 친 선경기에서 한국의 대표팀으로 선발된 경희대 럭비팀이 2만여 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 운데 경기에 나선 것입니다. 4차전에서 24대 0이라는 압도적인 우세로 경기를 마무리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이야 지구촌 시대, 세계화 시대라 해서 인천국제공항을 사랑채 드나들 듯 하지만, 60년대 초의 국제적 교류란, 꿈속의 신기루 같은 것이어서, 낯선 외국 선수들과 경기를 치른 저는 지금까지도 그날의 감격이 도무지 지워지질 않습니다. 아무튼 경희대 럭비는 60년대를 통째로 엮어 대한민국 전역을 활보하면서 럭비인의 굳건한 기상을 떨쳤습니 다. 나아가서는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을 깨끗하게 평정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중 심에는 감독님의 투철한 럭비 사랑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전국대학춘계리그전에서도 우승하여 전국대학을 제패(制覇)하던 바로 그날 저녁, 감독님께서 명동의 어느 밥집에서 저에게 칼국수를 사주시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야, 백승일 주장, 많이 먹어라, 너희들 정말로 열심히 뛰었다.”고 치하( 致賀)하시면서 둘러매고 계시던 목도리를 그 자리에서 풀어 제 목에 걸어 주시는 것이 었습니다. 그 목도리는 지금 간 곳 모르겠지만, “이거 내가 아끼던 거다.” 하는 감독님의 굵직한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들려옵니다. 감독님,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볼 수 없습니다. 불러보지만 대답은 없으십니다. 하지 2013 + Spring


만 저희들 후학의 마음속에 깊이 담아주시던 럭비 정신은 이렇듯 옹골차게 우리를 길러 주셨습니다. 감독님, 지금도 그라운드에서의 가르침이 생생하게 들립니다. 대학 럭비의 다크호스인 우리들에게 감독님은 항상 강조하였죠, “야, 럭비처럼 섬세한 운동일수록 기초과정이 중요한 거야.” 하시며 대학 최강팀인 우리에게 패스, 킥, 그리고 스크럼부터 철저히 지도하였던 것입니다. “너희들 럭비라는 것이 우격다짐, 힘 가지고 하는 것이 아 니야, 럭비라는 신사적 운동은 스크럼, 패스, 킥, 팀웍부터 아주 정확하게 해야 된다. 마 치 농구처럼 섬세하게 말이야. 그래야만 경기 전체가 살아나는 거야.” 기본기를 잘 익히 고 스크럼, 패스, 킥을 잘 하라는 그 평범한 럭비 지도의 원칙이 바로 제 삶의 올바른 지 표가 되었음이 고희에 이르러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독님. 귓속에 맴도는, 그리고 마음속에 자리 잡은 샘물처럼 우리들의 가슴을 구석구 석 적셔주는 그 가르침을 다시금 되새깁니다. 잊지 못할 감독님, 참 고맙습니다.

1960년대 초 경희대학교와 대만 기륭팀의 친선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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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명사들의 기억

조병화 선생님을 생각한다 2000년 4월 28일 오후 7시 예술의 전당 문화사랑방 4층에서 팔순 잔치가 있었다. 잔 치보다는 시 낭송회라고 해야 옳았다. 그때만 해도 선생님은 건강하셨고 유머가 넘치셨 고 우아했고 티 없는 시인이셨다. 선생님은 그렇게 우리들의 행사에 늘 계시는 분으로 영원히 계시는 분으로 나는 생 각하고 있었다. 조병화 선생님이 안 계시는 시간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 다. 그런데 팔순 이후 몇 년 되지 않아 그분은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것은 적어도 나에 겐 예비적인 상상도 없던 터였다. 우리는 이 시대의 멋진 그리고 아름다운 시인 하나 를 잃었다. 물론 선생님이 계시지 않아도 우리나라 시단은 잘 돌아갔다. 시인들은 밝고 명랑하게 자신의 시에 좀 더 힘을 보태며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아닌지 모른다. 어느 행사 나 나는 이상하게도 선생님의 빈자리가 보였다. 선생님이 계시면 이런 말씀을 하시겠다 는 생각도 했다. 많은 시인들은 그 빈틈을 느끼셨을 것이다. 조병화 선생님은 다른 사람이었다. 많은 시인들에게 가슴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 시인 이라는 것을 그래서 어쩌면 시인들은 우울했는지 모른다. 술을 먹고 취기를 먹고 욕을 먹으며 그렇게 그리움을 삼켰는지 몰랐다. 나는 가끔 어느 시인들의 행사에서 시인들이 너무 늙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나 이가 아니라 마음으로 늙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조병화 선생님처럼 영원히 시 인 동자인, 아이 같은 순수한 시인들이 사라진 까닭일까. 시간이 가는 만큼 그만큼 더 그 리운 분이 조병화 선생님이시다. 혜화동을 거닐다가 선생님이 가시는 일식집을 가노라면 그립다 참 그립다. 어느 날 가 을 나는 대학로를 걷고 있었다. 혼자였다. 2시가 지나고 나는 점심을 걸렀다. 마침 나는 조병화 선생님이 가시던 일식집을 생각해 냈다. 그래 거기다. 나는 조금 길을 돌아 그 집 에 들어섰다. 이상하게 약속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식당 안을 둘러 보고 메뉴판을 들 여다보면서 선생님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분의 웃음소리가 목 소리가 그 공간 안에 가득히 퍼졌다. 나는 혼자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득 더 그리웠다. 팔순잔치처럼 선생님을 모시고 많은 시인들이 한번 모인다면 얼마나 좋으랴 나는 지금 심한 감기로 앓지만 달려가 그분을 위한 시낭송을 다시 하고 싶어진다. “잘 했어.” 그 환한 웃음으로 한마디 하시는 그것으로 충분한 시인. 화낼 때 화내시고 웃을 때 웃으시는 선생님이 참 그립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들 모두 흐르지만 돌에 걸리 2013 + Spring

신달자 시인. 한국시인협회 회장.


듯, 물이 한 번 더 크게 파도치듯 흐르는 어느 순간 탁 걸리며 그리운 사람이 있다. 생전 선생님은 자신의 시에 대한 애착이 두드러진 나머지 화를 내시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때 로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안 그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선생님 잘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 시인이 시에 대해 그렇 게 다부진 생각을 하는 것을 나는 좀 배우고 싶어지는 것이다. 더러는 선생님의 고독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세상에 고독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던가. 어쩌면 누구보다 선생님은 고독하셨고 아팠고 홀로 울먹거리며 사셨는지 모른다. 아무 도 알아주지 않는 이해 받지 못하는 고독을 안고 선생님은 고요히 돌아가셨다. 죄송하 고 미안하다 살아 계실 때 좀 더 잘 이해하고 “선생님 사랑합니다.” 그렇게 말해야 했다 고 생각하고 있다. 조병화 선생님. 그립습니다. 그립습니다. 고독한 시단의 모든 행사에, 또 제가 회장하 면서 겨우겨우 이끌어 가는 한국시인협회에도 가끔 들러주세요.

1995년 5월 대천 바닷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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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명사들의 기억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내가 조병화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월간 『주부생활』 편집기자로 재직 하던 1974년 무렵이다. 선생님은 주요 필자이셨다.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니 원고 청탁도 직접 만나 서 하고, 원고가 완성되면 직접 방문하여 원고를 수령하던 시기이다. 자연 필자와 기자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시절이었다. 댁으로 방문하면 선생님은 늘 파이프를 물고 계셨다. 고구마 굽는 냄새를 풍기는 파이프 향기는 부드럽게 방안을 어슬렁거렸다. 파이프를 문 선생님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져 보였다. 그 모습 과 향이 너무 멋지게 느껴져 파이프를 사 흉내를 내 보기도 했었다. 그런 저런 인연으로 선생님과 나는 종종 만나게 되었다. 주부생활 재직 중 나는 「명 시의 고향」 이라는 칼럼을 만들어 당대 유명한 시인들의 대표 시와 함께 시인의 고향을 취재해 화보로 담는 작업을 했던 일이 있었다. 모윤숙, 서정주, 양명문, 박두진, 박목월, 박남수 등등. 당시 유명했던 시인들을 거의 망라해 취재한 일이 있었다. 그 무렵 선생님은 ‘고향 가는 길’이란 부제를 달아 「오산 인터체인지」라는 시를 발표 하셨다. 당시 고속도로가 생긴 직후이다. 나는 그 시를 주제로 선생님의 안성 고향집과 그 주변을 취재하기로 했다.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오산 인터체인지」 부분

시처럼 오산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동쪽으로 40리 쯤 가면 송전 저수지가 나오고 저 수지를 지나면 용인군과 안성군의 군계가 되는 마을 입구에 큰 느티나무를 만날 수 있 었다. 한양 조씨가 대대로 살아왔고, 24대 손인 조병화 시인이 8살까지 살던 마을이다. 경기도 안성군 난실리. 그 당시는 30여 호 가량의 작은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변 했는지 모르겠다. 마을의 모습은 아늑했다. 선생님은 유독 고향을 사랑하셨다. 시를 왜 쓰느냐는 나의 어설픈 질문에 선생님은 “인생에 대한 좌절과 고독 속에서 나 2013 + Spring

이길원 시인.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장.


를 찾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나는 당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인생은 고향을 찾아가는 시간적인 나그네”라 하며 그런 마음으로 고향 의 장재(長才)봉 아래 어머니를 위한 산막 편운재(片雲齋)를 세웠다고 하셨다. 어머니 는 “살은 죽으면 썩는다.” 라고 하시면서 살아 있을 때 무엇이든 열심히 하라 하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편운재 머릿돌에 그 말씀을 새겨 놓았다고 하시는 게다. 그리곤 주말이 면 서울을 떠나 마을 사람들과 텁텁한 막걸리의 인정을 즐기며 시상에 잠길 수 있는 고 향의 산막으로 가신다고 하 셨다. “시에서 리듬을 거부해서는 안 되지요. 외재율이든 내재율이든 리듬이 흘러야 하지 요. 그리고 공감을 주지 못하는 시는 생각해보아야 하지요.” 시 공부를 하는 내게 진한 가르침도 주셨다. 선생님이 일흔이 되셨을 때다. 선생님을 모시고 술을 마실 기회가 있 었다. 마침 옆 자리에 앉게 되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이다.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이 군. 죽는 게 두려울 건 없는 데, 죽는 순간을 어떻게 넘길까 두렵네. 죽는 바로 그 순간을…… 어떻게 넘기지?” 그때 는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어 가만히 있었지만, 선생님의 표정에서 죽음에 대한 경외감 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던 때의 나이가 되었다. 새삼 그 말씀이 생각난 다. 지금 나도 같은 생각을 하며 그 말씀하시던 선생님의 두려움을 떠 올린다. 죽는다는 건 긴 잠을 자듯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아무 것도 모를 터이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숨 막히는 죽음의 순간을 어찌 넘길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내게도 있다. 선생님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떠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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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명사들의 기억

편운 선생님, 이젠 용서해 주십시오 편운 선생님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저절로 얼굴이 더워진다. 말할 수 없이 부끄럽고 송구스런 무례를 저지른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편운 선생님께서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으로 계시던 1990년 5월로 기억한다. 현대문학사 주관으로 문인 30여 명이 마산으로 문학기행을 간 적이 있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김종철 시인 이 자꾸 부추기는 바람에 이튿날 아침식사 자리에서도 술잔을 주고받는 분위기가 이어 졌다. 그 바람에 나는 술기운이 조금 거나해진 상태로 마산 산호공원 ‘시의 거리’로 올 라가야 했다. 산호공원 중턱으로 접어들었을까. 여남은 발짝 떨어진 언덕 비탈에 앉아 스케치를 하 고 있는 까만 베레모의 편운 선생님이 눈에 띄었다. 선생님은 아마도 거기서 아득히 내 다보이는 합포만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 합포만은 내가 보기에도 정말 기가 막히게 시적(詩的)으로 아름다웠다. ‘마산에 태어나 성장하면서 시인이 못 된다면 그건 지극히 비정상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의 동시에 시인이면 멋진 시를 지어야지, 그림은 왜 그리느냐, 뭐 이런 생각도 번쩍 스쳐갔던 걸로 안다. 내 입에 서 정말 생뚱맞은 말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선생님, 거기서 혼자 뭐 하십니까. 그림도 잘 못 그리면서…… 스케치 그만 하시고 그 만 내려오십시오.” 편운 선생님은 스케치하던 손길을 멈추고 잠시 나를 내려다보시더니 슬며시 일어서서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 “그럴까.” 싱긋 웃으시며 비 탈을 쭈르르 미끄럼을 타듯이 내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정상의 충혼탑을 향해 스적스적 걸어갔다. 지금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그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신중신 시인이 아닌가 싶지만 그것도 짐작일 뿐이다. 내 곁으 로 바싹 다가선 그가 물었다. “정 형.” “네?” “조병화 선생님하고 친해?” “아니요.” 편운 선생님은 시인이고, 나는 소설가이다. 편운 선생님은 경희대 교수를 지내셨지 만, 나는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했다. 나이로 따지더라도 편운 선생님은 우리 아버지 보다 세 살이나 위였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편운 선생님이 이사장으로 계시는 한국문 인협회를 일 년에 한두 번 어쩌다 드나들거나 말거나 할 정도였다. 또 나와 편운 선생님 은 개인적으로 차 한 잔 마신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와 편운 선생님은 친하다고 말할 사이가 결코 아니었다. “오늘 운 좋은 줄 알어.” “왜요?” “아까 정 형이 조병화 선생님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 는지 알기나 해?” “……?” “나는 오늘 정 형이 작살나는 줄 알았어. 내가 아는 조병화 선 생님은 그런 무례한 망발을 듣고 어물어물 넘어가실 분이 아니야. 노발대발 호통을 치시 2013 + Spring

정종명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고, 그래도 속이 안 풀려 혼자 비행기 타고 먼저 서울로 올라가실 분이거든. 알아?” 오잉? 술기운이 싹 가시면서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내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어떡하지? 뒤를 돌아다보니까 편운 선생님은 다른 문인들과 어울려 비탈길을 쉬엄쉬엄 올라오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무릎을 꿇고 정중히 사과를 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공연히 선생님의 부아만 돋우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잠시 망 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사과는 서울 올라가서 나중에 하기로 하고, 무조건 일단 피 하자.’ 마음먹고 그때부터 나는 되도록 선생님의 눈에 안 띄려고 문학기행 내내 요리조 리 피해다녔다. 헤롱헤롱 떠들지도 못하고. 마산의 이광석 시인께서 2012년 11월에 펴 낸 『마산문화 마산정신』 86쪽에 보면 그때 우리 일행이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 실려 있 다. 박상천·이상호·이우걸·유만상·이광복·이광석·감태준·이은방·김월준· 김계덕·김정웅·김초혜·구효서·김선주·정목일·이원규·오하룡·박문재·신 중신 등 아는 문인이 여럿 눈에 띄는데, 뒷줄 중앙에 까만 베레모의 편운 선생님도 물론 함께 찍힌 사진이다. 얼마 전에 최은하 시인께서 한국문인협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사 무실로 들어선 선생님께서 까만 베레모를 쓰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깜짝 놀란 눈길로 “ 조병화 선생님인 줄 알았네.” 그러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편운 선생님께서 그때 나의 그 생뚱맞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망발을 어째서 모른 척 용서해 주셨을까? 내 가슴에 오래오래 묻어 온 의문이다. 지금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실 벽에는 역대 이사장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중에서 까만 베레모를 쓰신 편운 조병 화 선생님은, 그때 산호공원 비탈에서 “그럴까.” 그러시며 보여 주었던 싱긋 웃는 모습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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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생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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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5년 서울고등학교 문예반 학생들과 함께. 둘째 줄 오른쪽에서 4번째가 마종기, 5번째가 황동규. 2. 1956년 1월 8일 아서원에서 열린 제5시집 『사랑이 가기전에』 출판기념회. 3. 1956년 명동에서, 왼쪽부터 이봉구, 조병화, 천경자. 4. 1957년 대한 럭비축구협회 이사 시절. 5. 1959년 조재호 교장으로부터 서울고등학교 재직 10년 근속상을 받고. 6. 1960년 1월 19일 아세아 자유문학상 수상기념. 왼쪽부터 조병기(둘째 형), 조병선(큰형), 장남 진형, 부인 김준, 어머니, 둘째 형수 및 친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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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61년 12월 11일 호수그릴에서 제9시집 『밤의 이야기』 출판기념회. 어머니, 황순원과 함께. 8. 1963년 4월 준공된 묘막 편운재에서. 9. 1972년 4월 경희대학교 럭비부 단기를 만들고 조영식 총장과 함께. 10. 1973년 10월 22일 제1회 유화 개인전에서. 홍종인, 김영배 부인, 김동리와 함께. 11. 1974년 4월 20일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하고. 12. 1974년 12월 28일 중국문화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를 받고.


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글

조각구름과의 동행

“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 바다기슭을 걷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인천 송도 해 변을 모시고 거닐던 추억,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라 읊조리며 혜화동 로터리, 대학로를 함께 거닐던 또 다른 시간의 갈피들이 새록새록 떠 오른다. 날이 가고 해가 가도 편운 선생님과의 아름다웠던 인연과 추억은 내 가슴 속에서 꽃 을 피우고 香을 더해 가기만 한다. 편운 선생님은 대략 세 가지 소중한 인연과 추억으로 내게 다가온다. 첫째는 그분이 나의 모교인 서울사대부고, 서울대 사범대학의 모태인 경성사범학교 를 졸업한 대선배님이시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정신의 고향인 학창의 선후배라는 운명 적 인연이 있었기에 그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오가게 되고 정이 깊어 지게 된 연유가 그것이다. 두 번째는 문학, 문단의 인연이다. 시라는 정신의 본적지, 마음의 고향이 같다는 그것, 청소년 시절 내가 그분 시의 애독자로 만났지만 자라서는 지근거리의 평론가와 시인으 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했다. 더구나 제1회 편운문학상 수상자로서 그분의 권 유와 주선에 따라 그분의 집필실 부근인 혜화동으로 『시와시학』 사무실을 옮기고, 대학 로 주변을 오가며 영혼의 교감을 확대하고 심화해 감으로써 서로 평생 동지로 지냈다는 것은 내게 잊지 못할 소중한 생의 추억이자 자산이 아닐 수 없으리라. 세 번째는 그분은 20여 년 오래 정들었던 경희대 국문과에서, 나는 나대로 오래 머물 리라 다짐했던 충북대 국어과에서 1981년 봄 같은 시기에 인하대 문과대로 전입해 들어 와서 그분은 학장으로 나는 국문과 학과장으로서 그야말로 한솥밥을 먹으며 온갖 애환 과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침내 혼자서 그분의 정년퇴임기념문집 『조병 화의 문학세계』를 만들어 떠나시는 그분에게 헌정 위로했던 사연, 그리고 운명의 장난 이랄까 나도 다시 인하대 국문과를 떠나 거꾸로 그분이 떠나오셨던 그분의 오랜 고향인 경희대 국문과로 옮겨가게 되었으니 이 또한 무슨 인연인가. 그분의 뒤를 따라 25년간 경희대 국문과로 직장을 옮겨 내 삶의 터전, 마음의 고향 삼아 국문과 학과장과 문리대 학장 등을 역임하는 등 여러 인연으로 겹치니 이 어찌 보통의 사이라 하겠는가? 아니다! 또 많이 있지만 한두 가지만 더! 그분은 내게 「김재홍 교수」라는 제목의 시 를 한편 써 주시고, 우리 어머니가 작고하셨을 때 헌시를 직접 짓고 붓글씨로 쓰셔서 묘 소에 손수 시비를 세워주신 일이다. 물론 그분이 마지막 경희의료원에서 임종하실 무렵 자주 찾아뵈면서 영결식 때 내가 조사를 읊은 것도 내겐 잊을 수 없는 아프고 슬프지만 2013 + Spring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제1회 평론 본상 수상


아름다운 체험으로 떠오르곤 한다. 무엇보다도 지금도 그분과 나는 앞으로도 정신의 동지, 영혼의 도반으로서 내 삶이 계속되는 한 나는 그분과 동행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분의 아호 편운(片雲), 즉 조각구름에 압축적으로 암시돼 있다. 조각구름이란 무엇이던가. 그것은 크고 거창한 떼구름, 뭉게구름이 아니라 푸른 하늘 을 홀로 작게 떠 흐르다가 이윽고 자취도 없이 사라져가는 무명의 것이기에 절대 고독, 절대 허무를 표상한다. 그러기에 그분은 평생을 ‘시는 영혼의 화석’이라 말씀하시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편운문학상을 제정하고 시를 통한 불멸과 영생을 꿈꾸다가 이 세상 ‘어머님 심부름을 마치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 편운은 조각구름이기에 구속되지 않고 어디론가 끊임없이 떠나가는 평등인 의 혼, 자유인의 정신을 상징한다. 보헤미안으로서 새롭고 낯선 정신을 찾아서 한평생 떠돌던 평등인이며 자유인, 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편운의 본모습인 것이다. 그러 기에 선생님의 시 가운데 내가 발굴해 내고 지금도 어디에 가나 애송하며 세상에 퍼뜨 리고 있는 시 「해인사」는 오늘도 내 가슴에 깊은 울림과 향기를 더해 주며 은은하게 자 라고 있다. 큰 절이나 작은 절이나 믿음은 하나 큰집에 사나 작은 집에 사나 인간은 하나 - 「해인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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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글

편운 선생님께

오세영 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제2회 평론 본상 수상

선생님 그 날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뵌 것이 어언 1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무상하다 는 말이 옛말이 아닙니다. 며느님과 함께 찾아뵈었을 때 비록 의식은 이미 혼미하신 상 태였어도 제가 ‘선생님’하고 부르자 알아들으신 듯 감은 눈자위에 가벼운 미소를 흘리 시던 정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가셨지만 선생님은 항상 제 곁에 계신 것 같습니다. 그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 호탕하 신 목소리, 잘 어울리던 패션, 멋진 파이프와 둥근 모자 아니 그보다도 선생님이 남기신 그 주옥같은 시편들이 제 머리엔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떤 서양 시인이 가 장 불행한 사람은 잊혀진 사람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에겐가,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요. 사람들 가운데는 살아 있어도 잊혀진, 그래서 그가 과연 지금도 살아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처럼 우리들의 기억 속에, 가슴속에, 눈동자 속에 생생히 살아 쉬는 선생님을 어떻게 돌아가신 분이라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육체는 가셨어도 선생님께 서는 진정 여전히 저희 곁에서 저희를 지켜보시고, 격려해주시고, 또 이끌어주고 계십 니다. 오늘도 저는 운전 중에 우연히 여러 가수들이 부른, ‘봄날은 간다’라는 가요를 듣다가 문득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즐겨 부르시던, 선생님의 소위 십팔번이 아니었던 가요. 언제인가 선생님께서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하실 적의 일입니다. 그해 인사동의 어느 음식점에서 송년회를 겸한 밤 모임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이 노래를 부르시다가 1 절만 부르시는 것만으로는 어째 성에 차지 않으셨는지 수첩에 적힌 가사를 꺼내 보며 끝까지 2절과 3절을 연달아 부르시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선생님은 참석자들로부터 우레 같은 박수를 받으셨지요. 영원히 잊힐 수 없는 멋쟁이 시인, 영원히 잊힐 수 없는 아름다운 이름 편운 선생님, 삼가 명복을 빕니다. 사랑합니다. 2013년 1월 20일 오세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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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히터 운트 말러

김광규 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제4회 시 본상 수상

한국문화를 사랑했던 독일 친구가 시인이며 화가(Dichter und Maler)인 손님이 한 분 오신다고 우리 내외도 만찬에 초대했다. 주한 독일문화원 페트라 마투셰의 집을 찾 아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조병화 선생님이 거기에 와 계셨던 것이다. 1970년대 중 반, 내가 독일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대학 졸업 후 정신없이 바쁜 20대 후반 30대 초반을 보내고, 겨우 대학에 자리를 잡은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조병화 시인 의 소식을 가끔 신문에서만 보았을 뿐, 거의 십 년 가까이 만나지 못했었다. 조 선생님 은 그러나 옛 모습 그대로였다. “He was my student.” 주인이 아니라 손님인 조 선생님이 나를 페트라에게 소개해서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조 선생님과 페트라는 영어로, 페트라와 우리 내외는 독일어로, 우리와 조 선생님은 한국어로 소통하는 이 3개 국어 모임은 밤늦게까지 즐거운 분위기 였다. 조 선생님은 위스키를, 페트라는 화이트 와인을, 우리는 레드 와인을 마셨다. 페트 라가 준비한 퓨전 요리도 다채로웠다. 시금치와 표고버섯과 무나물, 생선전, 불고기, 이 탈리아식 마늘빵, 그리고 식후에는 유럽산 치즈와 코냑이 나왔다. 조병화 시인은 그 무렵 미도파, 신세계, 신문회관 화랑에서 몇 차례 유화 전시회를 열 어서 화가로서의 면모를 각인 시켰고, 또한 대만의 타이페이, 인도 마드라스, 미국 볼티 모어 등지에서 개최된 아시아 시인 대회와 세계시인대회에 참석하여 국제적 시인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조 시인의 호방한 화제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의 문학현장을 넘나들었다. “외국 문학인들과 사귀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새로운 자극을 얻게 됩니다. 좁은 한국만을 호흡하는 게 아니라, 온 세계 넓은 존재를 호흡하는 겁니다. 한국 문학이 앞으로 세계와 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거지요.”라는 그의 발언에 우리는 모두 공감 했다. 뒤이어 조 시인은 페트라에게 유화를 한 점 선물로 기증했다. 벽 한가운데 그림을 걸어놓고, 조 시인의 시와 그림을 위하여 우리는 축배를 들었고, 이 때 조 시인이 페트라 를 덥석 껴안아서 또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조병화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새 십년, 페트라는 그동안 정년퇴직하여 독일 의 뮌헨에서 살고 있고, 우리 내외도 이제는 동시대 문화 현장에서 좀 멀어진 느낌이다. 하지만 암회색으로 바래가는 기억의 저편에 군데군데 별처럼 빛나는 부분들이 더러 있 다. 시인이며 화가(Dichter und Maler) 조병화 선생님과 해후했던 그날의 기억도 내게 는 지금까지 환하게 빛나는 순간으로 아름답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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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글

그리운 선생님께

김대규 시인. 제4회 시 본상 수상

선생님! 참으로 오랜만에, 그러니까 꼭 10년만에 불러보는 호칭입니다. 그 10년만의 추모의 글을 이렇듯 편지로 씁니다. 선생님께서 받아 보실리야 물론 없 겠지만, 그 옛날 ‘혜화동 107번지’로 무작정 편지를 보내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 선생 님께서 살아계신 듯한 환상으로나마 마음의 위안을 받고자 함에서 입니다. 사실 저만큼 선생님의 각별하신 사랑을 받은 후학도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기 만 하고, 한 줌의 보은도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지만, 선생님은 저의 인생과 문학에 있 어 유일·영원한 멘토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선생님께서 유명을 달리 하셨을 때, 제가 맞게 된 정신적 공황은 실로 엄 청난 것이었습니다. 한동안은 책도 읽히지 않고 시작(詩作)도 할 수 없는 ‘영혼의 금단’ 현상을 심히 앓았습니다. 지금도 불현듯 ‘시(詩)의 고아’처럼 선생님이 그리울 때가 많 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의 작품 가운데서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와 「꿈의 귀향」 그 리고 「여종(旅終)」이라는 2행시를 되뇌어 보곤 합니다. ‘죽음’에 대한 시는 시인의 사후 에 더욱 의미가 배가 되나 봅니다. 선생님! 대학 시절에 처음 만나 뵈웠을 때,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네 자신만의 길을 가라”고 일 러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저는 저만의 시의 나라에서 ‘홀로 견디는 법’을 깨우 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를 선생님께서는 ‘시의 서부인’이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무나 보여줄 수 없는 이상적인 시인의 전형인 ‘시와 삶과 사람’이 삼 위일체를 이룬 풍요로운 인생을 사셨습니다. 이는 한국문학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어머니 앞에 가 계시지만 저도 얼마 있으면 선생님 앞으로 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선생님, 사랑합니다. 2013. 2. 15 김대규 올림

2013 + Spring


레바논의 백향목

유종호 문학평론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제5회 평론 본상 수상

조병화 선생을 처음 뵌 것이 언제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제3시집 『패각의 침실』을 환 도 직후 반 폐허가 된 서울 고서점에서 입수하였는데 그 기억처럼 또렷하지가 않다. 초 등학교 5학년에 해방을 맞았는데 그때 담임선생이 이종환 선생이시다. 뒷날 이종환 선 생과 조병화 선생이 경성사범 동기생임을 알게 되었다. 고향 충북에서 줄곧 교육계에 계셨던 이 선생과 조 선생은 더러 만나보는 사이셨다. 수안보 온천을 조 선생이 찾는 경 우가 가끔 있었고 그게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사범학교 동기생 친구의 제자라 더욱 그러셨겠지만 조 선생은 나를 편히 대해주셨다. 본시 친화력이 강한 분이시지만 서름서름함이 없으셨다. 선생의 작품에 「내일 어느 자 리에서」란 것이 있다. “어느 평론가에게”란 부제가 달려있는 신랄한 작품이다. “너의 지 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철면피한/ 시골 자객의 녹 슬은 송곳이라는 것을/ 알기 위하여 서도/ 부디 오래 살아 주게.” 선생이 겪으셨던 감정을 경험한 시인작가들은 많을 것이 다. 그러나 이렇게 작품에서 직설적으로 토로한 경우는 거의 없다. 궁금해서 여기 나오는 평론가가 누구냐고 여쭈어 보았다. 조 선생은 뭐 일반론으로 읽으면 되지 않느냐며 피하셨다. 그럴수록 궁금증은 더해갔다. 독설로 호가 난 이의 이 름을 대면서 그냐고 물었다. 그제야 선생은 사실은 아무개라며 실토하셨다. 그런 소탈 함 때문에 조 선생 삶의 몇 가지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 수 있었다. 선생은 위선과 허식 을 모르는 그런 분이셨다. 나의 말은 가난하되 너를 위하여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너의 ‘영혼의 집’을 지으리 - 「레바논의 백향목」부분

조 선생은 작품량이 많아서 오히려 손해를 보는 시인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조 선 생 시는 “인간고도(人間孤島)”를 위해 우리의 백향목으로 지은 ‘영혼의 집’이다. 시와 그 림을 사랑하고 삶과 술을 즐기고 젊은 날엔 럭비선수였던 선생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무실 줄 알았다. 가신지 벌써 10년이나 되었으니 삶이란 제2시집에 나오듯 “하루만의 위안”으로 알고 살아야 할 것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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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글

오래된 기억의 삽화

내가 편운(片雲) 조병화 선생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 공주에서 열린 한 국시인협회 모임에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술타령을 밤새 실컷 하고 난 다음날 무슨 무 슨 제목의 주제 발표가 이어지는 세미나장에 멀거니 앉아있었는데, 그때 편운 선생께서 나도 모르게 얼굴 스케치를 해가지고 “이 시인, 데생 어때?” 하면서 불쑥 건네주시는 것 이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올챙이 시인이었고(지금도 물론 어린 개구리 시인에 머물러 있지만) 새까만 후배 시인으로서 겨우 편운 선생께 인사를 드린 정도였었는데, 그렇듯 난데없이 얼굴 데생을 받고 보니 뭔가 기분이 좋으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게다가 “내 가 좋아하는 詩人 李嘉林” 이라는 글씨까지 겉들인 걸 보고 황송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시인이 샘이 좀 난 듯 “선생님, 제 얼굴은 안 그려주 세요?”하고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즉각 “얼굴 같은 얼굴이나 그 리지 아무 얼굴이나 그리나!”하고, 유머러스하게 대꾸를 하시는 것이었다. 이렇듯 선생께서는 자신의 눈에 비친 인간과 사물을, 아주 날렵한 속도감으로 정확하 게 포착하여 그려내는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선생의 데생 실력은 화가가 되려고 했던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손끝에 익힌 능란한 것으로, 5회에 걸친 개인전을 통해서 당당히 자신만의 아름다운 시적 조형세계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한 미술평론가가 선생의 회화세계를 본격적으로 논한 「팔방미인 조병화의 회화세계 70년」(이규일, Art in Culture, 2004. 5)에 기대어 살펴볼 때, 시와 그림이라는 두 장르에 있어서 두루 눈부 신 천재성을 발휘하고 있는 장 콕토에 비견할 만하다 할 것이다. 스케치용 만년필로 그려주신 탓에 희미하게 바래버린 데생을 보고 있노라니, 40여 년 전의 인간적 온기와 낭만적 멋이 철철 넘치시던 선생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금 방이라도 “오늘 저녁에 별일 없으면, ‘대유’에 가서 한잔 할까” 하고 내 어깨를 툭 치실 것만 같다.

2013 + Spring

이가림 시인. 인하대 명예교수. 제6회 시 본상 수상


편운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

천병태 시인. 제8회 시 시인상 수상

2002년 여름날이었다. 모처럼 서울을 놀러간 나는 혜화동 로터리의 선생님 사무실에 서 선생님과 상봉했다. 많아야 일 년에 한두 번 뵙는 것이 전부였지만 모처럼 뵙는 선생 님께서는 많이 쇠약해진 몸 상태에도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으시고 더운 날씨 에 올라오느라고 고생했다는 말씀과 함께 내 등을 토닥거려 주셨다. 언제나 아버지 같 은 모습 그대로. 선생님의 사무실은 참 쓸쓸해보였다. 짐짓 눈치를 채신 선생님께서는 “책이랑 그런 것들은 삼주에게 주었고 버릴 것들은 버렸더니 사무실이 좀 이상하지?” 아, 이분이 가 실 준비를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선생님을 가까이 모신 것은 10여 년에 불과했다. 차범석 선생님이 진도에 오셔서 불려나갔더니 선생님 이 계셨다. 국악인들과 함께 홍주를 마시고 잠자리에 드시는 자리에서 내 시집 『나배 도 소식』을 드렸다. 그 후 내가 선생님을 찾아뵙기도 하고 선생님께서는 혼자 진도에 내려오시기도 했다. 명예진도군민 1호로 모셨고 향토문화회관 뜰에 선생님의 시비 ‘나도 이곳에서 살고 싶 어라’를 제막하기도 했다. 선생님을 모시고 대학로의 일식집으로 갔다. 평소에 즐겨 다 니시는 곳이다. 선생님은 한 잔, 나는 석 잔를 마셨다. 내 제자 혜순이도 합세하여 선생 님이 책에 직접 사인을 해주셨다. 밖에 나오니 하오의 햇살이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나 는 순간 휘청거렸다. 술 때문이었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로타리 쪽으로 걸어 올라 가시는 선생님의 뒷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선생님과의 마지막이었다. “천 군, 서울에 올라오면 서울의 시인들 만나지 말고 일이나 보고 내려가게. 거기서 좋 은 생각을 하며 살아.” 그 마지막 말씀에 담긴 깊은 뜻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2001년 진도군수로부터 명예 진도 군민증을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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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글

편운 선생님의 “꿈”

김상현 시인. 제10회 시 신인상 수상

최근 극장가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뮤지컬 영화

을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바친다.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판틴’이 딸 ‘ 코제트’를 위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머리칼과

생시에 조병화 선생님은

어금니를 팔고 몸까지 팔게 되는 절망적인 환경에서 “I

동네 꼬맹이들 만나면

Dreamed a Dream”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할머니 고쟁이 호랑에서 곶감 꺼내주듯

노랫말을 우리말로 옮기면 “나 흘러간 시간에 꿈을 꾸

“꿈”이라고 써서 손에 쥐어 주었다네.

었네. 희망은 높았고, 삶은 가치가 있었을 때, 난 사랑이

간혹 시인들이 찾아오면

절대 안 죽을 거라 꿈꾸었네. (⋯⋯) 난 꿈을 꾸었네. 내

엿장수 맛배기 주듯

삶이 지금 지옥 같은 상황에서 정말 달라지기를, 그것이

“꿈”을 쬐끔 떼어주었다네

어떻게 보이던가는 지금 너무 많이 달라졌네. 이제 삶이

조각구름으로 승천하신 선생님은

내가 꾸었던 그 꿈을 없애 버렸네.” 이다. 그녀에게는 가

지금은 하늘 도화지에다

난과 역경보다 꿈을 잃어버렸다는 절망이 비극이었다.

“꿈”이라고 쓰시며 혼자 놀기도 하신다네.

시인 칼릴지브란은 “나는 꿈과 소망이 없는 자들 사 이에서 군주가 되느니 실현시킬 포부를 지닌 미천한 자 들 사이에서 꿈을 꾸는 사람이 되는 쪽을 선택하겠다.” 고 말했다. 꿈은 인간을 살 수 있게 하는 에너지이자 존재의 이유 다. 꿈이 없는 사람의 삶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으며, 꿈이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는 어둠의 질곡일 뿐이다. 올해로 편운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지 10주기가 되었다. 선생님께서 생전에 내게 주신 책들을 보면서 아 버지처럼 자상하고 따뜻하셨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선 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꿈”은 그리움과 사랑, 그리고 미지 의 세계를 향한 열정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스스로 성취 해 내신 훌륭한 스승이셨다. 물질의 풍요가 정신의 결핍 을 가져오는 오늘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꿈”은 우리 의 소중한 양식이자 희망이 되고 있다. 특히 선생님의 큰 가르침으로 인해 이 땅의 많은 시인들이 자신들의 꿈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시집, 시화집, 에세이집의 첫 쪽에 항상 “꿈”이라는 글을 써주셨는데 오늘은 선생님 2013 + Spring

- 「편운 선생님의 “꿈”」전문


혜화동 일번지, 그 오래된 의자의 깊이

박윤우 문학평론가. 서경대 교수. 제11회 평론 우수상 수상

<시와 시학사> 주간이셨던 김재홍 선생님과 함께 혜화동 이층 사무실로 편운 선생님 을 찾아뵌 것은 세기를 마무리할 무렵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서가의 책들과 오래된 가구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늘어서 있는 액자와 그림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대낮의 화창한 햇살조차 그림자 지도록 만들었다. 그 공간 속에서 나는 편운 선 생님께 들은 당신의 시관이나 평론가로서 내게 주신 격려의 말씀을, 멈춘 시간의 역사 저편으로 흘려보낸 채 즉석에서 그려주시는 1호짜리 조그마한 스케치 하나를 소중하 게 받아 넣을 뿐이었다. 그때 굳이 그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의 그림자 너머에서 내가 새삼 본 것이 있다면, 그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편운 선생님의 파이프 담배 향내가 아니라, 그가 그렇게 향기를 흘리면서 깊숙이 앉아 계시던 오래된 회전 의자였다. 아니, 의자가 아니라 그 의자에 앉 아 있는 시인의 초상이었다고 해야 보다 옳은 말일 것이다. 그 의자야말로 우리에게 너 무도 익숙했던 그의 시 「의자」가 탄생한 ‘장소’이며, 그렇게 아무도 넘어보지 못했던 세 대론과 소통의 미학을 너무도 선구적으로 만인에게 공표한 그 시적 사유의 ‘고갱이’였 음에랴! 그렇게 세월은 흘러 이제 어언 듯 편운 선생님께서 그 자리를 후배 세대들에게 내어 주신 지도 10년이 지났다. 이번에 시인으로서 편운 선생님의 전 생애를 돌아보는 시전 집 간행을 옆에서 지키면서 난 새삼 다시 한 번 그의 시편에 깊숙이 녹아 있던 이 시대 의 화두인 소통론으로서의 시관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너무도 흔한 ‘선견 지명’이란 수사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는, 그의 직관은 이 처절한 시절에 너그럽고 도 인자한 미소로 치유의 언어를 쏟아내지 않았던가!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며 나는 새삼 10년도 지난 과거, 편운문학상 수상식 자리에서 들은 “애정 어린 비평”이라는 언급의 의미를 갱신한다. 난 이제 시인의 편에 서지 않고 독자의 편에 설 것임을. 그것이 진정 사랑의 시적 실천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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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글

일면의 댄디즘

신중신 시인. 제12회 시 본상 수상

시인·예술가가 멋을 부리거나 고상한 품으로 치장하는 측면으로서의 댄디즘은 오 늘날의 감각으로선 너볏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속된 사회나 관습에 대한 예술 가로서의 자존심을 드러내는 방법으로의 댄디즘은 시대 감각을 뛰어넘어 이 분야에 몸 담고 있는 구성원으로 간직해 나가야 할 한 자세임직 하다. 편운 선생의 초상은 그런 면 에서 우리의 기억에 자리한다. 그중 외면으로 실감되는 건 차림에 있어서 목 언저리로 일별되는 맵시이며(예컨대 넥타이를 매지 않은데서 오는), 파이프 담배의 제격이며(멋쟁이 마도로스 아니고선 드 물게 눈에 띄는), 그리고 대화에 있어 듣기 좋은 낮은 톤과 은근함(경기도 태생다운 누 긋한 말씨)이 이의 근사치다. 신 형이 파이프 피우는 걸 봤어.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멋을 알아야지.” 시인협회의 지방 나들이 세미나 장에서 옆자리의 정진규 시인이 피는 파이프 담배 냄새가 좋게 느껴진 탓에, 나도 피워보자며 넘겨받아서는 몇 모금 뻐끔거린 게 단상의 편운 선생 눈에 띄었던가 보다. 엉뚱한 계기로 선생님의 관심을 사게 된 셈이다. 시인 이 파이프를 무는 게 그럴싸해 보인다거나, 시인이라면 파이프쯤 물 줄 아는 멋을 부릴 만하다는 뜻을 넘어서는, 그보다 따뜻한 관심 표명에 더 무게가 실리는 대목이랄 수 있 겠다. 편운 선생 본성의 발로인 자상함, 따스한 정의 드러냄, 결대로의 언행은 어느 일순 또 는 일과성으로 그치는 그런 덕목이 아니다. 얼마 후 선생님께서 경희대 교수실로 한번 들려달라는 기별이 있어 찾아뵈었더니, 해외를 다녀온 중앙대 임 총장한테서 인사치레 로 받은 거라는 부언과 함께 파이프 한 개와 파이프 담배 한 통을 건네주었다. 1992년 가을이 깊어갈 무렵, 문인들이 무슨 행사 끝에 직지사를 비롯해 영남 일원을 들리는 기회가 있어 나는 멋을 부려 본답시고 파이프를 챙겨서는 망중한의 한때, 선생 님과 나란히 파이프를 피워 문 적이 있다. 이날 잠깐 동안이지만 편운 선생께서 풍기는 인간적 향기와 목소리를 가까이서 접한 건 즐거운 일이었다. 내 빛바랜 추억 속의 이 한 장면이 댄디즘에 근사(近似)했을까 만은 말이다.

2013 + Spring


편운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

유자효 시인. 제12회 시 본상 수상

편운 조병화 선생님은 서울사대의 전신인 경성사범을 나오셨으니 내게는 대학 선배 가 된다. 까마득한 대선배이신 편운 선생님을 나는 아쉽게도 그의 만년에 이르러서야 뵙게 되었다. 2002년, 편운 선생님은 제12회 편운문학상 본상을 신중신 시인과 나에게 주셨다. 그 해 겨울, 대학로. 선생님께서 자주 다니시던 일식집에서 김재홍 교수와 함께 선생님을 뵈었다. 점심 반주로 시작한 정종을 꽤 마셨다. 그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시가 좋아.” 그때까지 나는 선배 시인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날 이 후 선생님의 그 말씀은 내게 빛나는 훈장으로 남았다. 선생님께서는 그 뒤 혜화동 서재 로 찾아뵈었을 때도 그 말씀을 한 번 더 하셨다. 그리고는 덧붙이시기를 “시가 시원시 원해.” 무척 건강하셔서 백수는 능히 하실 것으로 보였던 선생님께서 편찮으시다는 말이 들 렸다. 김재홍 교수와 함께 혜화동으로 찾아뵙더니 선생님께서는 평소처럼 서재에 나와 계셨다. 김 교수와 함께 선생님을 남산의 하얏트 호텔 일식당으로 모셨다.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드시고 싶은 것을 주문하시라고 했다. 평소 식사를 잘 하셨는데 그날은 몇 개 시키지 않으셨다. 조금 드시고는 연신 “고맙다”고 말씀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선생님을 댁으로 모셔드리고 나는 다시 회사 일에 빠져 있었는데 “입원하셨다”는 말 이 들렸다. 며칠 뒤에 병원으로 찾아 갔더니 선생님께서는 중환자실에 계셨다. 면회도 못하고 돌아서면서 설악산 백담사의 만해 축전에 참가했다가 나의 차에 선생님을 모시 고 서울로 돌아오던 추억과 사모님이 편찮으셨을 때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요즘도 나는 내 문학에 대한 회의가 떠오를 때면 선생님께서 달아주신 훈장을 쓰다듬 는다. “나는 네 시가 좋아. 시원시원해” 그럴 때면 다시 힘을 얻는다. 다정다감하셨던 편운 선생님. 오늘 선생님이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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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글

혜화동입니다

내가 편운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60년대 초, 공주에서 공주사범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공주사범학교는 초등학교 선생을 길러내는 학교였는데 나는 그 학교를 다 니면서 선생될 공부는 안 하고 시인될 공부만 하고 있었다. 물론 책으로써였다. 편운 선 생의 시는 시집으로서가 아니라 『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라는 시 해설집으로 처음 읽 었다. 그 책은 그 시절 드물게 모조지로 만들어진 책인데 그 안에 아주 많은 시들이 편 운 선생의 유려한 산문과 함께 실려 있었다. 단박에 그 시세계가 좋았다. 하나의 끌림 같은 현상이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발령을 받지 못하고 방황하며 떠돈 적이 있었다. 서울 에서 몇 달 서성인 적이 있었다. 그 때 명동에서 <무하문화사>를 차리고 있던 문둥이 시 인 한하운 선생을 만나러 다니기도 했고 공덕동의 미당 서정주 선생을 뵈러 가기도 했 는데 내친걸음 몇 분 더 만나보고 싶은 시인들이 있었다. 박목월 선생, 고은 시인과 함 께 조병화 선생이었다. 박목월 선생 댁으로 전화 걸었더니 서울서 그러지 말고 시집이 나 몇 권 사가지고 시골집으로 돌아가 공부하며 교사 발령을 기다리란 말씀이었고, 고 은 시인은 한번 선학원에 놀러오라 말씀했다. 그리고 편운 선생 댁에서는 집안일을 하는 것 같은 여인네가 전화를 받았는데 조심스 런 말투로 “선생님은 지금 외국 여행 중이라 부재 중”이라는 전언이었다. 아, 외국 여행! 그것이 1963년 5월 어느 날. 그것은 그 시절 꿈만 같은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 는 서점에서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란 선생의 시집을 보았다. “혜화동입니다.” 나직 하게 전화를 받던 그 여인네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외국 여행 중이라던 편운 선생 은 지금 어느 나라를 여행하고 계실까? 길거리 공중전화 박스에 동전을 넣고 두리번거 리며 전화를 걸던 떠꺼머리 열아홉 살짜리 시인 지망생 나태주는 또 어디에 있는 걸까? 모두가 그립고 안타까운 마음일 따름이다.

2013 + Spring

나태주 시인. 공주문화원장. 제14회 시 본상 수상


꿈을 심어준 엽서

이숭원 문학평론가. 서울여대 교수. 제14회 평론 본상 수상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가에 『고독한 하이웨이』(성문각, 1968. 11)가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하드커버에 깔끔한 장정으로 멋을 낸 아름다운 시집이었다. 페이지를 열면 시인 이 그린 수채화와 펜화가 있고 다시 한 장을 넘기면 파이프를 들고 베레모를 쓴 시인의 사진이 있었다. 당시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인데 일찍이 세계여행을 한 시인은 ‘하이웨이’라는 멋진 단어를 써서 제목을 삼았다. 중학교 2학년 말 겨울방학 때 나는 그 시집을 읽었다. 시는 어렵지 않아서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사춘기 시절이었던 만큼 사 랑과 이별의 시가 가슴에 와 닿았다. 특히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와 「누락」이 가슴을 때 렸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는데, 제15시집 『가을은 남은 거에』 (성문각, 1966)에 수록된 「누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 어디쯤 홀로 누락 이 되어 가는 한 생명이 있다”로 시작되는 그 시는 어린 내 가슴을 묘하게 울렸다. 얼마 후 극작가 유호가 쓴 텔레비전 드라마에 그 시가 주인공의 입을 통해 낭송되는 것을 보 고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문학비평을 하는 교수가 되어 편운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 내 마음을 흔들었던 시의 주인공은 정년퇴직을 하시고 혜화동 집필실에서 글을 쓰 고 계셨다. 김재홍 선배와 더불어 선생님을 모시고 일식집에서 정종을 들었다. 일본 유 학 시절과 해방 후의 일화를 말씀하시면서 감정이 격해지셨는지 눈물을 비치기도 하셨 다. 노 시인의 추억을 들으며 20년 전에 읽었던 그 시가 떠올랐음은 물론이다. 1993년 에 나온 평론집 『현대시와 삶의 지평』을 보내드렸더니 ‘꿈’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엽서에 답신을 써서 보내주셨다. 더욱 정진하여 평론가로 대성하라는 말씀이 적혀 있었 다. 간단한 글귀지만 ‘꿈’이라는 단어의 연쇄작용으로 나에게는 큰 감동을 일으켰다. 정 말로 일급의 평론가가 되어야겠다는 꿈이 일어나는 듯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그 이듬해 14회 편운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상을 받으며 선생님께서 당부하신 그 꿈이 여전히 꿈으로만 남은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로부터 또 10년이 흘렀는데 부끄러움은 여전하다. 나이 육십 을 앞두고 그래도 이렇게 꿈을 유지하게 된 것은 선생님의 그 엽서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다시 저릿하고 새삼 옷깃이 여며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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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글

운명적 만남

우리는 늘 만남 속에서 산다. 이웃을 만나고, 직장 동료를 만나고, 낯선 사람을 만나면 서 하루를 보낸다. 그런 만남이야 말 몇 마디나 눈짓을 나누는 정도로 끝나지만, 한편으 로 만남은 우리에게 깊이 생각하고 갈 길을 결정해야 하는 운명적 결단의 순간을 요구 하기도 한다. 내 나이 서른으로 접어들던 해 봄 인하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경칩 무렵의 쌀쌀한 바람을 헤집고 용현 고개를 넘어 문과대학 학장실을 찾아가 편운 선생님 을 처음 뵌 것은 그러한 운명적 만남이었다. 교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향받이 연구실 겸 집무실, 강의실 하나를 통째로 꾸민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느껴 보는 분위기에 압도되고 말았다. 벽면을 가 득 채운 책들과 휘호, 그림, 방 가운데 넓은 탁자에 놓인 벼루와 서진과 가지런히 걸린 붓들, 그리고 그 옆으로 커다란 이젤과 캔버스와 팔레트와 수북이 쌓인 유화물감들과 붓통, 책상 위의 사전들과 원고지와 몇 개의 원고 묶음들……. 눈앞을 가로막는 광경도 광경이지만, 더욱 나를 압도하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풍기는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나 를 감싸는, 난생 처음 느껴 보는 매혹적인 향기였다. 창문 쪽으로 비켜 놓인 책상에서 편운 선생님은 원고를 정리하시다가, 연구실이 약간 울리는 듯한 호탕한 목소리로 나를 맞아 주셨다. 그리고 방 가운데 놓인 탁자로 자리를 옮겨 앉아 나의 대학원 과정 연구 계획을 들으셨다. 나의 얘기가 진행되는 동안 묵묵히 듣고만 계시던 편운 선생님은 짧고도 명확하게 “시를 공부해, 동화는 응용분야니까 그 기초가 되는 문학 이론이 필요하거든. 특히 시적 상상력과 방법론 없이 환상의 세계를 제대로 알 수 없으니까.” 인사를 받으실 때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굵고도 맑으면서 약간 울리는 듯한 목소리, 나에게 분명한 믿음으로 울려오는 그 몇 마디는 연구실의 압 도적인 향기와 함께 결국 나를 시 연구와 창작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날 이후 한 달쯤 뒤, 나는 선생님의 추천에 힘입어 인하사대 부속중학교로 자리를 옮기고 선생님과 가까운 거리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페스탈로치의 『은자의 황혼』이나 루소의 『에밀』을 가슴에 품고 낙도의 교사로 살겠다던 꿈은 그렇게 묻혀서 이따금씩 먼 북소리처럼 울려오기도 하지만, 끝내 나는 시 연구와 시 창작이라는, 편운 선생님과의 운명적 만남의 울타리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날 그 연구실의 향기와 목소리를 늘 느껴보면서 나의 연구실도 나의 생도들에게 그러하기를 소망하면서.

2013 + Spring

김삼주 시인. 가천대 교수. 제14회 특별상 수상


곰탕 이야기

조예린 시인. 제14회 시 신인상 수상

20여 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하마, ‘봄날’이었을 게다. 혜화동 『시와 시학』으로 김재홍 선생님을 문득 뵈러 간 때는 정오가 가까운 무렵이었 다. 선약이 되었던 터였을까? 그야 나의 군번으로서는 측량할 수 없는 영역이고, 아무래 도 은사인 김재홍 교수께서 문단에 낯가림이 심하고 혼자 오만하기만 한 애송이 나를 위 해 대가 노(老) 시인과의 점심 식사 자리에 은근슬쩍 끼워 넣어주신 것 같다. 여하지간, 그렇게 난 조병화 선생님과 김재홍 선생님, 이렇게 두 거인 앞에서 달랑 나 하나를 들고 꼼짝없이 앉게 되었다. 기억하기론 조병화 선생님은 미식가였다. 간단한 식사를 하시더 라도 반드시 그 메뉴에서만큼은 제대로 하는 식당에서만 식사하셨다. 그 날도 조병화 선생님께서 제시하신 식당으로 들어섰다. 곰탕집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내 시(詩) 이야기인가, 내 성품 이야기인가가 은사의 입말을 통해 포 장 진열되었다. 정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만한 입술을 더 굳게 오므리고 한 마 디 말씀도 보태지 못했다. 노 시인은 고개를 자주 주억거리셨다. 노 시인의 눈은 또한, 빙글빙글, 건성건성, 웃고 계셨다. 긍휼로 가득한, 우직한, 두둔의 소리들을 늘 그렇게 들어오셨을 터였다. 곰탕이 들어왔다. 웬일인지 노 시인은 나의 태도를 예의주시하셨다. 예민한 내가 그 사실 앞에서 당황했다. ‘나를 어떻게 하라는 걸까?’ 곰탕 그릇을 앞에 놓고 쩔쩔 매는 나 를 보시고 김재홍 선생님이 나름대로 판단하시고 빈 그릇에 곰탕을 들어내 주셨다. “들 어봐, 이 집이 혜화동에서 유명한 집이야.” 이윽고, 노 시인이 힘 있게 한 마디 나무라셨 다. “음식을 대하고 그러면 쓰겠나,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거 아니야?” 아무 말 못하고 그저 옹기에 담긴 썰어 논 대파를 한 숟갈 가득 퍼 담았다가, 반 숟갈 쯤 더 퍼 담는데, 문득, “아아~, 양이 적은 거구나아~.” 김재홍 선생님은 그제야 안심이 되셨는지 허, 허, 허, 무마성 너털웃음을 터뜨리시고 난 더운 곰탕 그릇에 얼굴을 박은 채 조각 파 한 낱이 붙어 남지 않도록 먹고, 먹고, 또, 먹었던 것이다. 하마 20여 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어쩌면, 늦은 ‘가을날’이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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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글

큰 영혼을 가진 조병화 선생님 1980년대 초, 안성 난실리에 있는 조병화 선생님의 편운재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당 시 인하대학교 인문대 학장이셨던 선생님께서 몇몇 교수들을 초청하셔서 함께 갔던 것 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추억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진에는 당시 대학의 동료 교수 몇 분과 제가 편운재 현관 앞 돌계단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활짝 웃음을 띤 채 서 있습니다. 저 역시 사진 안에 있지만, 30여 년의 세월 저편에서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선생님께서 사진 밖에 있는 지금의 저를 바라보고 계신 것만 같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저는 얼마 전 편운재를 다시 찾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편운재는 옛 모습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돌계단도 변함 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돌계단에 서서 웃음을 머금은 채 저를 바라보고 계신 선생님 의 모습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의 90%는 영혼이고 10%는 육체”라 말씀하 시던 선생님께서, “머지않아 99%가 영혼이 되고 1%가 육체로 되”리라 말씀하시던 선 생님께서, 이제 “100%가 영혼으로 0%가 육체로” 되셔서 제 육체의 눈에는 보이지 않 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100%”의 “영혼”이 되신 선생님께서 저를 바라보고 계시리라는 것을. 그런 선생님의 영혼 앞에 서서 저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영혼의 100%는 그리움 이며 그리움의 100%는 당신을 생각하는 그 사랑이다.” 이처럼 영혼의 크기와 그리움의 크기와 사랑의 크기를 하나의 경이로운 등식으로 만 드셨던 선생님께서는 정말로 영혼도 크고 그리움도 크고 사랑도 큰 분이셨습니다. 선생 님께서 저희 곁을 떠나신 지 1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짐은 그 때 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커다란 그리움과 커다란 사랑을 지닌 선생님의 커다란 영혼이 아직 저희 마음 안에 살아 계심을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되새기며, 저는 비록 게으른 육체와 굼뜬 영혼의 소유자 이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흉내내어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입니다. ‘제가 지닌 영혼의 100%는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며, 제 그리움의 100%는 선생님을 생각하는 그 사랑 입니다.’

2013 + Spring

장경렬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제15회 평론 본상


편운 시학의 자취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제17회 평론 본상 수상

제 기억 속에는 조병화 선생님의 편모(片貌)가 얼마 남아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술원 에서 역대 예술원 회원의 작품 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여 펴내는 작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가 선생님의 시세계를 맡았던 일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그때 선생님 의 혜화동 집필실에 들러 선생님으로부터 썩 귀한 자료들을 건네받았습니다. 저는 그때 서야 비로소 가장 가까이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다른 하 나는 그 인연으로 제가 2002년에 나온 평론집을 보내드렸을 때, 선생님께서 매우 정갈 한 필치가 담긴 엽서 한 장을 보내주셨던 기억입니다. ‘꿈’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예쁜 엽 서였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선생님께서 작고하시고 나서 2007년, 제가 외람되게도 선생 님 이름으로 제정된 편운문학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모두가 저와 편운 선생님 사이 에 있었던 찰나적 삽화일 것입니다. 이렇게 사제 관계나 문단 선후배 사이로 오랫동안 교유해오신 분들에 비하면 선생님에 대한 제 기억의 육체는 퍽 빈약할 뿐입니다. 하지만 편운 시편에 대한 기억은 그리 가난하지 않습니다.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나 「차창」, 「의자」, 「공존의 이유」 같은 인지도 높은 시편은 지금도 제 기억 속에 강렬하게 깃 들여 있습니다. 『貝殼의 寢室』(1952) 서문에 나오는 “식민지의 등대”라는 표현도 선연 합니다. 선생님의 지속적 화두였던 사랑, 위안, 어머니, 고향, 보헤미안, 고독, 허무 등도 여전히 아름답게 번져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편운 시학의 중심은 아마도 인생에 대 한 성찰과 그에 대한 위안으로 모아질 것입니다. 삶에 대해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 의미 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셨던 선생님은, 평이한 상징과 비유가 깃들인 담담한 어조 를 통해 삶의 고독과 무상 그리고 머물 수 없는 근원적 유랑 의식을 노래하셨습니다. 그 것이 선생님의 그 숱한 여행 시편으로 육화되었던 것이겠지요. 그러면서도 대상에 탐닉 하는 감상 과잉의 시세계를 경계하시면서, 선생님은 차분한 관찰자로서의 목소리를 통 해 존재론적 고독과 자기 위안의 과정을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셨습니다. 또한 선생님이 택한 시적 대상은 역사적 상상력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이 겪는 일상과 내면의 감각에서 발원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삶에 대한 외경에 근거를 둔 존재론적 고독과 그 고독을 견 디며 자기 위안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구조를 일관되게 취했던 까닭일 것입니다. 어느새 10주기를 맞아 저는 이러한 편운 시학의 자취를 통해 선생님에 대한 격정적 추모 대신 선생님과의 차분한 만남의 시간을 가져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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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글

세월을 넘어선 시 세계와 인품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다더니, 편운 선생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가신 지가 벌써 10년 이 흘렀습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이 시간의 상거(相距) 속에,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선생 님을 생각해 보니 그 외경과 그리움의 정이 조금도 변한 바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 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말석에서나마 선생님의 기념사업에 지속적으로 참 여해 왔고 당신의 새 전집 발간에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생님의 시 세계와 품성이 10년 세월을 넘어서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수범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시는 쉽고 부드럽습니다. 지적인 수준을 가진 어휘도 선생님의 시에 편입 되면 범상한 생활어가 되고 맙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건전한 상식을 중요하게 생각하 셨던 만큼, 시 또한 일반적 독자들이 모두 수긍하고 감응할 만한 필설로 일관했습니다. 그와 같은 시적 태도가 일생을 두고 축적되어, 선생님의 세계는 조촐하면서도 품위 있 고 소박하면서도 화려한 새로운 경계를 개척했습니다. 1백 년을 넘긴 한국 현대문학사 에서 오직 한 사람, 평이한 삶의 차원에서 핍진한 언어의 진실을 적출함으로써 유례없 는 시의 경지,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시의 ‘강역(疆域)’을 일구어낸 시인이 바로 편운 선 생님, 당신이셨습니다. 그러한 시적 형상력의 바탕에는, 그러한 현상을 가능하게 한 선생님의 ‘생활’이 있었 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중반, 선생님은 누구보다 먼저 출근하여 문리과 대학 학장실의 불을 밝히셨고, 거기서 책을 읽거나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누구보다 엄중히 약속과 시간을 지키셨고 어떤 사태에 이르든 판단과 호오가 분명하 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앞에서는 토론이 필요 없었습니다. 누가 그처럼 인생을 단호 하고 결기 있게, 신념과 방향성을 가지고 살 수 있을지, 지금도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 렵습니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그 많은 시편과 에세이들, 그리고 그림들을 통하여 우리는 내내 선생님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며 그리고 가르침을 얻으며 살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유명 (幽明)을 달리하신 지 10주기에 이르러, 다시금 두 손 모아 명목(暝目)하며 꼭 한 말씀 만 더 드립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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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제18회 평론 본상 수상


편운 선생님의 귀환

김수복 시인. 단국대 교수. 제19회 시 본상 수상

조병화 선생은 스스로 정한 원칙과 규율을 실천하는 분이었다. 90년대 초반 한국문인 협회 이사장으로 재직 시 ‘미주문인협회’의 세미나에 함께 참석한 적이 있었다. 선생은 해외 여행에서도 솔선수범하여 철저히 시간약속을 지키셨다. 모든 심포지엄 여행에서 항상 첫 번째로 승차해 약속 시간을 어기고 늦게 오는 사람들을 질책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계실 때 간사로서 협회 운영을 도와드릴 때도 마찬가지 였다. 매사에 약속 시간 30분 전에 와 계시곤 했다. 선생은 늘 절대 고독과 절대 허무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계셨다. 내 기억 속에는 항 상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영롱하다. 파이프 담배 속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인생 을 비워내는 듯 했다. 나는 조병화 선생의 「오산 인터체인지」를 읽을 때마다 운명의 순응을 예비하는 일 상적 삶과 작별하고, 존재의 근원적 장소인 ‘원숙’의 공간으로 귀환하려는 의식을 느낀 다. 이는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귀향’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지닌 ‘시인’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는 본질적인 사유의 회상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인의 모습이 기도 하다. 선생은 “인간은 누구나 두 개의 고향을 갖고 있는 거다. 하나는 자연의 지역적인 고향 이며, 다른 하나는 영혼의 정신적인 고향이다. 나의 자연의 지역적인 고향은 경기도 양 성면 난실리이다. (⋯⋯) 그러나 나의 영원한 정신적인 고향은 아직도 묘연하다. 시와 그림의 길이 나의 고향에로 가는 길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얼마만큼 더 가야 하는지 나 머지 40리 목숨, 영원무변이다.” 라고 했다. 선생은 육체의 방랑으로부터 정신의 귀환으로, 그리고 스스로에의 귀의로, 자신의 인 생을 충실히 완수하기 위하여 존재론적 순응 의식을 시화해왔다. “詩는 나에게 있어서 그 생명이며, 그 모험이며, 그 방랑이며, 그 질서이며, 그 歸依이 며, 그 종교이며, 그 길, 닿지 않는 그 향수 그것”이라고 한 선생의 시적화두가 나에게는 큰 시의 지침이 되곤 한다. 나는 난실리 조병화문학관을 갈 때마다 ‘어머님, 이제 심부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하는 시적 영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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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글

한 시인으로 또는 한 어른 으로서의 여유로운 삶

윤석산 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제19회 시 본상 수상

편운 조병화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뵙게 된 것은 한국

주의자이냐?”며 야단을 치셨다. 그만큼 편운 선생님께서

시인협회에서 활동을 하면서부터이다. 선생님께서는 당

는 당신의 시에 관한 한 어떤 부분도 양보를 하지 않으셨

시 시협의 회장 일을 맡아 보셨고, 나는 총무간사의 일을

던 분이다. 비록 모든 것은 허허 웃으며 “그래 그렇게 해”

보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선생님을 자주 뵐 기회가 있

라고 말씀을 하시지만.

었다. 회장, 사무국장, 총무간사 이렇듯 3인이 만나야 하 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강원도 춘천으로 한국시인협회 세미나를 갔었을 때다. 춘천의 세종호텔의 커피숍으로 당시 강원도지사가 찾아

선생님께서는 세상이 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멋쟁이셨

왔다. 그 도지사는 정치적으로도 이름이 있던 사람이었

다. 베레모에 파이프를 물고, 일반 넥타이보다는 나비넥

다. 우리는 밖에 계신 편운 선생님께 도지사가 왔다고 연

타이나 옷깃이 위로 올라오는 옷을 즐겨 입으시는, 말 그

락을 드렸다. 우리의 연락을 들은 선생님께서는 짐짓 잘

대로 스타일리스트셨다. 늘 안면에 웃음을 띠시고, “어 그

못들은 척하며, “어! 누가 왔다고?”하며 천천히 커피숍으

게 좋아, 그럼 그렇게 하지.”하시면 마음 좋은 할아버지마

로 발을 옮기셨다.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보듯이 천천히

냥 우리가 하는 일에 늘 동의를 하시곤 했다.

발걸음을 옮기셨다. 이런 편운 선생님의 모습을 보다 못

그때는 이러한 선생님의 모습이 어떤 의미를 지닌 지

한 도지사가 뛰어나와 “선생님 저 도지사입니다.”하며 인

를 잘 몰랐다. 다만 마음이 좋으셔서 젊은 사람들 하자는

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편운 선생님은 이렇듯 한 시인으

데로 하시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우리도

로서의 자부심과 함께 한 시대의 어른으로 마음의 여유로

나이가 들어가고 나니, 이러한 선생님의 모습이 다름 아

움을 지니시고 사셨던 분이다.

닌 ‘어른으로서의 모습’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정말 한 어 른으로서 젊은이들에게 보이셨던 그 여유로움을 우리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선생님과는 기억에 남는 두 일화가 있다. 하나는 이렇 듯 늘 여유를 지니시는 선생님이 후배 시인을 엄하게 야 단을 치시는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위 공무원에게 보이셨던 여유로우며 또 당당했던 모습이다. 오래 전 대전 유성으로 한국시인협회 세미나를 갔을 때였다. 유성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다음 일정을 기다리 며 한담을 할 때였다. 여러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선생 님께서 지방의 한 시인을 오라고 부르더니 다짜고짜 야 단을 치시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인 즉 그 시인이 선생님 의 시를 어느 잡지에 이야기하면서 ‘감상적 낭만주의’라 고 평을 했다는 것이다. 편운 선생님께서는 “내가 왜 감상 2013 + Spring


음덕의 회고(?)

조강석 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제19회 평론 우수상 수상

사실 필자는 처음 편운 선생에 대한 추모와 회고의 글을 청탁받았을 때 적잖이 당황했 었다. 필자가 비평가로서 문단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5년 이후이다. 또한, 편운 선생이 살아 계실 적에 선생의 강의를 들을 기회도 없었다. 물론, 우리 세대의 많은 분들과 마찬 가지로 편운 선생의 시를 읽으며 청년이 되었고 선생의 시를 통해 익힌 감성이 시 평론 가로서의 감식안에 영향을 미쳤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면을 통한 일일 뿐,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편운 선생과의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편운 선생의 음덕을 두 번 입었다. 그러니 말의 새로운 용법을 창안하 시는 편운 선생의 방식을 따라 이 회고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보자면 음덕의 회고가 될 것인데 그 역시 희한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어쩌랴, 편운 선생님과의 인연은 틀림없 이 음덕에 대한 회고를 통해 상기될 법한 성격의 것임을. 필자의 작은 재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9년 필자는 편운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바 있 다. 그것이 신인 평론가에게 큰 격려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가 하면 필자 의 개인적 이력 역시 편운 선생과 묘한 인연이 있다. 필자는 경희중학교와 경희고등학 교를 졸업했으니 편운 선생이 봉직했던 경희학원에서 ‘잔뼈가 굵었으며’(경희학원 졸 업가의 일부이다), 대학과 대학원은 다른 곳에서 마쳤으나 2011년에 편운선생의 공덕 이 쌓인 인하대학교에 인문한국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선생의 음덕을 입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인연은 사전의 일로 사후를 그르치기도 하는 법이다. 그러나 어떤 인연은 사후의 일이 사전의 일의 원인이 되는 방식으로 시간의 역전으로 맺어지는 법도 있기 마련이다. 음덕에 대한 회고라는 모순적인 말이 모순이 아닌 까닭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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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생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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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6년 6월 27일 Baltimore에서 열린 제3차 세계시인대회에서 수상한 계관시인패와 월계관. 2. 1976년 10월 29일. 월탄 박종화 선생 댁에서. 왼쪽부터 최근덕, 조연현, 박종화, 김팔봉, 모윤숙, 곽종원, 조병화. 3. 1978년 7월 편운재에서 갖은 한국시인협회 야유회. 김종삼, 박재삼, 전봉건 등과 함께. 4. 1980년 7월 31일 경희대학교 학장실에서 손자, 손녀와 함께. 5. 1981년 3월 4일 인하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취임식에서 ‘꿈’기를 들고. 6. 1982년 3월 17일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를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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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86년 10월 고향 난실리에 만든 ‘꿈의 정거장’에서. 8. 1987년 1월 21일 예술원 모임인 수요회에서 김종필, 김동리 등과 함께. 9. 1990년 5월 고희 기념으로 갖은 벽제 연(淵) 미술관 초대 제8회 유화 개인전. 10. 1991년 3월 어머니 묘소 앞에 있는 「해마다 봄이 되면」 시비 앞에서. 11. 1991년 5월 2일 제1회 편운문학상 시상식. 김재홍, 조태일, 신창호와 함께. 12. 1995년 9월 금혼식에서.


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시

혜화동 편운(片雲) 선생

혜화동 로타리 2층 찻집 손님이 창문 밖을 내다보며 말한다 “저기 베레모 하나가 가는군” 찻집 건너편 혜화동 성당 신부님이 문을 나서다 말고 말한다 “저기 시인 한 분 가시는군” 혜화동 로타리 작은 빵집 손님이 창문 밖을 내다보며 말한다 “저기 파이프 하나가 가는군” 빵집 건너 혜화동 성당 햇빛 속에 십자가가 빛난다 “저기 맑은 영혼 한 분 가시는군”

2013 + Spring

허영자 시인. 성신여대 명예교수. 제2회 시 본상 수상


책상 모퉁이 새겨진 기도

김종철 시인. 문학수첩 대표. 제3회 시 본상 수상

늦은 나이, 조그만 출판사 하나 차린 나는 이른 아침 책상 모퉁이에서 기도한다. 남들 볼세라 무릎 꿇은 괘종시계 추처럼 두 손 모우면 그때마다 불청객처럼 문 두드리는 한통 전화. 어이, 종처리 하느님보다 먼저 응답하며 내 아침 기도의 불평을 틀어막은 편운. 저녁 대포 한잔하세나 이보다 더한 세상 응답 또 있을까 문득 당신을 그리면 내가 더 그리워지는 그 책상 모퉁이. 때때로 마음 쓸쓸하면 우리는 정종 대포로 데워진 혜화동 당신을 기다려 본다 한 잔, 또 한 잔 흔들리면 ‘봄날은 간다’ 십팔번 한 곡조 뽑고 갱상도 첫발음 조심하라는 산사(山史)도 촛병화하고 우리는 안다 이 풍진 세상 목로주점에서 돌아앉은 당신의 파이프 합석한 우리만 모른 채하는구나 바람 불고 또 날이 가면 이승에서 다 같이 갑장 된 우리 시의 화석으로 남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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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시

조각구름 바람 되어

조각구름 바람 되어 돌아보는 따뜻한 눈빛 1985년의 오산 인터체인지 돌아 편운재 뒷뜰 잔디밭에 모인 얼굴 김재홍 허영자 정숙희 김삼주 홍희표 박의상 김창수 이기형 이기윤 박재승 김성옥 차한수 바람의 기억 다듬어 나무 심고 둘러앉아 권하는 막걸리 사발을 떠 가는 조각구름 보리밭 길게 누운 난실리 봄볕이 어깨에 앉으면 파이프의 파란 연기에 지워지는 오후 새싹이 돋아나는 언덕을 거니는 조각구름 조각구름 바람 되어 비늘 같은 시간 흔들며 떠 가는 조각구름

2013 + Spring

차한수 시인. 동아대 명예교수. 제3회 평론 우수상 수상


그리움

허형만 시인. 목포대 명예교수. 제4회 시 우수상 수상

나의 서재에는 스승님의 사진이 붙어 있다 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연두색 연기와 함께 ‘꿈’이라고 써주신 조그만 접시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육십 년대 중반, 그 질컥거리던 흑석동 골목길처럼 한 시대가 질컥거리고 젊음이 푹푹 빠지던 강의실은 C.D.루이스의 시론과 파이프가 잘 어울렸다 시의 고열에 끙끙 앓는 나의 붉은 눈빛을 알아채신 스승은 수업이 끝나는 대로 교수휴게실로 데리고 가 따끈한 차를 앞에 두고 낮은 목소리로 개인지도를 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스승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으며 짜릿짜릿한 촉수를 느끼곤 했다 난생 처음 혜화동 언덕길을 함께 걸었다 난생 처음 난실리 정원을 함께 걸었다 한국시협 여행길에서 곁에 두셨다 어쩌다 해외 여행길에서도 곁에 두셨다 그러나 나는 하늘같은 스승에게서 멀리 있었고 살아 계실 때에나 돌아가신 뒤에도 나는 차마 그림자도 밟지 못한 외톨이였다 열외였다 지금도 어쩌다 생각나 혜화동 언덕길을 오르면서 스승님 계셨던 그곳을 우러러볼 뿐, 시가 써지지 않는 날이면 서재의 사진만 우러러볼 뿐, ‘꿈’이라고 써주진 조그만 접시만 쓰다듬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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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시

공항에서

고영조 시인. 제6회 시 우수상 수상

-1991. 7 돈황 여행길에서

미니스커트의 태국 스튜어디스들이 담배를 꼬나문 라운지에서 조병화 시인은 베레모로 얼굴을 가리고 아침 잠에 빠져 있다 손에 쥔 파이프는 꺼져 있었다 고희의 긴 여행길에서 흔들리지 않고 백두산에 올라 가슴을 쓸어내리던 老 詩人 작은 가방 하나로도 그는 스무 편의 詩를 쓰고 백편의 꿈을 담아왔다 아마도 저 꿈속에서 병화야아…… 부르는 아득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따라 난실리의 들판을 내닫고 있으리.

2013 + Spring


편운이여, 금강의 노래여

이상호 시인. 한양대 교수. 제11회 시 본상 수상

문득 편운 생각에 젖는다 도무지 시가 되지 않는 캄캄한 밤에는, 한 조각 구름으로 곡절 많은 세상을 날마다 편편이 읊어내던 그의 무한 자유의 시혼이 그리워진다. 한 조각 구름배로 저어가면 어느 하늘엔들 닿지 못할까 그 작고도 큰 꿈에 부풀어 한때 소풍 나온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어머니 심부름 마치고 돌아갈 아이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거운 짐 훌훌 떨쳐 버리고 바라보는 세상 무엇이든 오롯한 시로 빚어내던 그 끝없는 설계 능력이 참으로 부러워진다. 누가 뭐래도 시는 노래이고 노래는 많은 이가 부를수록 아름다운 것임을 일찍이 남 먼저 일깨워 삶처럼 시를 읊고 시처럼 삶을 살아 갈수록 노래 잦아드는 사막에 단비를 내려 장강을 이룬 그 노래, 흐를수록 더욱 마르지 않고 금빛 찬란할 아! 편운이여, 금강(金剛)의 노래여 오늘 나는 하염없이 그 노래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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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시

구름 한 조각 - 편운이라는 이름의 열차

박찬일 시인. 추계예술대 교수. 제12회 시 우수상 수상

구름 한 조각이 세계를 삼키는 거─그 잔잔한 포식 꿈만이 아니라, 구름 한 점이 포식자라는 거 구름 한 점에 노출시키며 평생 사셨죠? A를 A로 대응하는 방식, 그 잔잔한 방식으로 일러주셨지요? 그런 거야─그런 거라니깐 무덤 한 평이 세계를 삼키는 방식, 그런 거야─그런 거라니까 그 잔잔한 방식─A를 A로 대응하는 방식 평생을 사셨단 걸 이제 알게 됐단 말씀 올려다봤을 땐 구름 한 점 남기지 않는 방식 나를 따르라!─아니었겠어요? 구름 좇아가는 연습, 느을─ 구름 좇아가는 연습 그 잔잔한 방식, 그가 그의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편운이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했어요, 편운이 모습을 드러냈단다. 구름 한 점이라는 이름의 열차에 올라-올라-타라, 그 말씀 강월도 시인을 그 말년에 거뒀단다, 그 소식 나중에 들었어요 목선 한 척─휘발유 한 통─소주 한 되─장작 몇 단, 충분하느냐? 조태일 시인이 그 세상 떠나기 전 그 혜화동 로터리클럽에서 말하더군요, ─충분하지 않느냐?─그 말씀 들으러 왔더군요. 많이 삼키셨어요, 구름 한 점에 들어가지 않을 게 뭐 있겠어요. 구름 한 점이 오지 않을 리 있겠어요? 포식자라는 거, 편운이라는 이름의 열차 타본 사람은 알지요. 다 안대요

시작메모 사라지는 것이 영원히 계속된다; 사라지는 것이 사라진다·사라지는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 최후의 멜로디─우주音. 사라지는 것이 포식자니까, 사라지 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 포식자의 포식자니까 사라지는 것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포식자의 포식자니까. 초월자가, 사라지는 것이 사라지는 것·사라지는 것이 사라지지 않은 것, 이것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2013 + Spring


片雲齋의 주인

임보 시인. 전 충북대 교수. 우이시회 명예회장. 제13회 시 본상 수상(우이시회)

혜화동 로터리 언덕에 자리한

어머니를

편운재는

신앙으로 섬기던

무더기 무더기로 쌓인

정직한 무신론자

책들이 창문까지 가려

떠도는 구름처럼

낮에도 어둑어둑했다

유유자적하던 이

더듬더듬 들어서면

지금도 버스를 타고

베레모에 두툼한 안경을 낀

혜화동을 지날 때면

노 시인이

차창 너머로 어른어른

낡은 의자에 앉아

한 조각 구름이

마도로스 파이프로

스쳐지나가곤 한다.

푸른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때로는 두툼한 만년필을 쥐고 금박의 선이 박힌 원고지에 詩를 심기도 하고 때로는 이국의 거리를 담은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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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시

봄처럼 부지런한 로맨티시스트 모자. 파이프. 겨울, 커피와 꿈. 기억 속에서 그가 자작나무 숲을 걸어가고 있다 그의 사인처럼 바람을 흐르는 한 줄기 담배 연기. ‘봄처럼 부지런’한 로맨티시스트의 시편들을 안고 그의 회상이 흐른다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 ‘난실리’에 봄은 다시 오고 한 조각 구름 아래 산자락을 업은 ‘편운재(片雲齋)’ 뜨락을 그가 걷고 있다 그의 미소가 아지랑이로 번지는 사랑의 꿈처럼 그가 걷고 있다

2013 + Spring

이인평 시인. 우이시회 회원. 제13회 시 본상 수상(우이시회)


구름들

이재무 시인. 제15회 시 우수상 수상

맑은 하늘 한가로이 떠있는 구름들을 봅니다 양이었다가 사슴이었다가 송아지였다가 물고기였다가 넝쿨 장미 백합 나비 등속으로 형상을 바꾸어가는 구름들 보며 저것은 필경 선생님께서 하늘의 문자로 쓰신 시라고 여겨 천천히 살펴 읽어봅니다 꿈, 자유, 몽상, 방랑의 시인이었던 선생님은 생전의 버릇으로 우주 이곳저곳을 여전히 두루 기행 중이겠지요 그렇게 간절히 그리시던 어머니 대동하시고서요 삐뚜름히 모자를 쓰고 빈 파이프를 입에 물고 이승의 문턱에 척 한 발 걸치시고는 슬쩍 내려다 본 인간 세상 사는 꼴 예나 지금이나 하도나 어수선해서 혀 끌끌 차시는 선생님 근심어린 얼굴 하얀 구름들 사이로 살짝 비췄다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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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시

시인의 모자

30년 전 봄비에 젖던 혜화동 보르살리노 지금은 고향 난실리 영혼은 100% 육체는 0% 그 위에 종달새 종달새 위에 조각구름 보르살리노 나무 옷걸이 저 고요의 무게 누구를 기다리시나 다시 10년 주인 없는 보르살리노

2013 + Spring

유재영 시인. 동학사 대표. 제16회 시 본상 수상


난실리에 가면

윤효 시인. 교사. 제16회 시 우수상 수상

심부름 마치고 돌아온 아이에게 어머니가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곳이 어디이더냐? 구름이더이다, 하늘의 구름. 아이고, 내 새끼. 심부름 다 마치고 돌아온 아이에게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찔한 곳은 어디이더냐? 가슴이더이다, 사람의 가슴. 아이고, 내 새끼. 안성 난실리에 가면 오늘도 들린다. 오냐, 내 새끼, 아프게도 참 잘 살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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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시

그렇다면

최명란 시인. 제18회 시 우수상 수상

-당신과 우리 사이

여기서 바라보이는 곳은 지상밖에 없어요 독사 사마귀 여우 세모난 얼굴은 모두 무서워 당신을 건널 땐 징검다리를 이용해요 안부는 같은 세상에서만 가능한가요? 그렇다면 갈라놓은 두 세상은 실패작 양쪽에 걸쳐진 일출과 일몰은 잠시 낮에는 어둠이 없고 밤에는 빛이 없어요 아내의 목소리보다 더 날카로운 사진 속 사람들이 달려나와 천상의 사람들을 흔들어 깨워요 당신 거기 있는 거 맞아요?

2013 + Spring


대춘부

권달웅 시인. 제21회 시 본상 수상

해마다 봄이 오면 혜화동 로타리 빨간 우체통이 받을 사람 없는 수백 통 편지를 보낸다 해마다 봄비 내리면 봄비소리를 따라온 난실리 청와헌 부근 논물 개구리들이 자욱이 와글거린다 해마다 봄이 오면 바바리 코트에 베레모를 쓰고 긴 파이프 담배를 문 그 분이 꽃을 흔들고 온다 릴케 보들레르 헤세 럭비 시 그림 어머니 시 추억 청춘 철학 위안 종교 사랑 그림 꿈 그들은 모두 멀리 떠나 있다 해마다 목련이 피면 먼 산 너머 흘러오는 조각구름이 목련 꽃잎처럼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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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수상자 추모시

숨어서 우는 노래

이제니 시인. 제21회 시 우수상 수상

빈 공원에

홀로 숨어서 우는 노래

빈 의자 하나

숨어서 울며 기도하는 입으로

모자를 쓰고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

파이프를 물고

헤어지는 연습을 합니다

바람처럼 흐르는

저쪽 저 멀리서 저 혼자 오는

구름처럼 떠도는

저쪽 저 멀리로 저 혼자 가는

잠깐 빌려 앉는 겁니다

어제처럼 오늘 다시 빈 공원에

다시 돌려 두고 갈 겁니다

빈 의자 하나로 놓여 있는 풍경

해는 지고

꽃은 피고 나무는 자라고 계절은 피어나

새는 가고

아롱아롱 숨어서 우는 노래로 다시 돌아오는

자리에서 자리로 건너갈 때 고요에서 더 큰 고요로 머무를 때 잎은 떨어지고 그림자는 사라지고 순간순간이 영원처럼 이어질 때 눈 감고 꾸는 꿈이 눈 뜨고 꾸는 꿈으로 나아갈 때

2013 + Spring

* 숨어서 우는 노래: 조병화 시인의 시 제목


한 장 꿈을

문충성 시인. 제주대 명예교수. 제22회 시 본상 수상

어른 어른

소한 지난

선생님 특유의 그

제주 섬

파이프 담배 내음

이 겨울 밤 휘몰아치는

이 세상 갈 만한 곳은 다 가보셨다는

눈보라 속에서 선생님

그래서

순수 고독

인간살이 다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듯싶은

하얗게

그 잔잔한 미소 눈에 선해옵니다

아직 저는

어느새

순수 허무

10년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제 꿈속에서

귀 모으면

한 장 꿈을 다 꾸지 못 했습니다

망각 속에서 들려오는 아! 그 은빛 목소리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 편운재 건너 청와헌에서 들으시던 그 개구리 황홀한 보랏빛 울음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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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생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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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6년 10월 19일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하고. 2. 1997년 6월 금관문화훈장 수상 기념으로 세운 비석. 3. 1998년 6월 사후에 제막될 「꿈의 귀향」 시비 앞에서. 4. 2000년 혜화동 104번지 자택. 5. 2003년 3월 8일 故 조병화 시인의 빈소. 6. 2003년 4월 25일 열린 「꿈의 귀향」 시비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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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07년 3월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창립총회. 8. 2012년 제22회 편운문학상 시상식. 9. 조병화문학관에서 열린 꿈나무 시낭송 대회. 10. 안성 난실리에 나부끼는 ‘꿈’ 깃발. 11. 조병화 시인의 묘소. 12. 조병화문학관 기획 전시장 전경.


조병화 시 전집 조병화 시인의 꿈 사랑 멋, 고독과 허무를 넘어선 그가 펼치는 문학의 향연. 독자친화적인 시 세계를 통해 시와 삶이 조화롭게 조우하는 시의 현장. 쉽고도 깊이 있는 조병화 시의 향기와 사유의 깊이를 만나다.

전 6권/ 조병화문집간행위원회/ 국학자료원 ISBN 978-89-279-0213~3(set)/ 전권 550,000원

문의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tel. 02-762-0658 e-mail: poetcho@naver.com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에 꿈을 담아 주신 분들입니다 (2012년 1월 1일 - 12월 31일 후원 현황) Ⅰ편운 회원Ⅰ 김영수ㆍ김용정ㆍ박철원ㆍ신용극ㆍ조성환ㆍ조진형 Ⅰ꿈 회원Ⅰ (사)양지회ㆍ김광규ㆍ김은규ㆍ김정일ㆍ문충성ㆍ박순화ㆍ박종규ㆍ이금기ㆍ이일ㆍ이철화ㆍ장부일ㆍ최병철ㆍ홍성호 Ⅰ사랑 회원Ⅰ 곽명규ㆍ김삼주ㆍ김소원ㆍ노대래ㆍ박병근ㆍ소현구ㆍ안창모ㆍ이규호ㆍ이재복ㆍ정분순ㆍ조성걸ㆍ차진도 Ⅰ멋 회원Ⅰ 강일철ㆍ강태흥ㆍ고경호ㆍ고연수ㆍ고정순ㆍ공상진ㆍ권규인ㆍ권오재ㆍ김가현ㆍ김광영ㆍ김명인ㆍ김서봉ㆍ김석진ㆍ김성경 김종안ㆍ김진석ㆍ김희옥ㆍ노완규ㆍ문창욱ㆍ민용식ㆍ박규원ㆍ박대현ㆍ박덕규ㆍ박동환ㆍ박민규ㆍ박진성ㆍ박진영ㆍ박철언 박태흥ㆍ배홍규ㆍ서석인ㆍ손순자ㆍ신동욱ㆍ신유은ㆍ안광명ㆍ안유화ㆍ유범준ㆍ유자효ㆍ유종해ㆍ유태전ㆍ윤영선ㆍ윤진석 윤춘호ㆍ이명규ㆍ이성열ㆍ이순재ㆍ이용기ㆍ이찬석ㆍ이창우ㆍ이혜숙ㆍ이홍섭ㆍ임동승ㆍ임두영ㆍ임서영ㆍ장기학ㆍ정태경 조건식ㆍ조명범ㆍ조병수ㆍ조장우ㆍ주기영ㆍ주동설ㆍ최승범ㆍ하미혜ㆍ한광석ㆍ한군섭ㆍ한중진ㆍ한진해ㆍ황선도ㆍ황일운 황태선 Ⅰ기업 회원Ⅰ JW홀딩스ㆍ㈜델타엔지니어링ㆍ영화기업㈜ㆍ정원기업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임원진

귀하를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원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명예회장

김영수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 이사장

회장

박철원

(주)에스텍시스템 회장

부회장

허영자

시인ㆍ성신여대 명예교수

시작활동을 전개했던 우리 대표시인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감사

황상현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성실성으로 후학들을 교육한 교육자이자 160여 권의 저서를 남긴 문인이자 10여

김종성

(재)선교재단 상임이사

회의 미술개인전을 연 미술가이기도 합니다.

고문

김양수

문학평론가

성춘복

시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은 물론 법조계와 기업계 등 각 분야에서도 정치ㆍ경제ㆍ사

신봉승

극작가ㆍ예술원 회원

회ㆍ발전을 위해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의 많은 독자들은 현대

이사

강대신

정원산업 회장

적 삶 속에서도 그분의 시를 통해 위안을 받고 꿈과 사랑을 키우고 있습니다.

김삼주

시인ㆍ가천대 교수

김유항

인하대 명예교수

다. 저희 법인에서는 기존에 유족들이 운영해 오던 편운문학상과 경기도 안성에

김재홍

문학평론가ㆍ경희대 교수

위치한 조병화문학관 사업을 지원하고 나아가 한국 시문학 발전에 기여 할 수 있

김종회

문학평론가ㆍ경희대 교수

는 여러 사업을 펴나갈 예정입니다.

노정익

전 현대상선 사장

박규원

㈜델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신용극

유로통상 회장

송미숙

소야인터내셔널 대표이사

오호수

전 증권업협회 회장

이병규

문화일보 사장

이완섭

(주)세이프라인 회장

이재후

김앤장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조진형

조병화문학관 관장

황영기

법무법인 세종 고문

편운 조병화 시인은 인간의 숙명적 본질인 고독과 허무에 맞서 반세기에 걸친

그분의 제자들은 교육계와 문단에서 이 땅의 문학을 일구어 나가는 데 선도적

이에 본인을 비롯한 몇몇 제자들이 모여 2006년 10월 사단법인을 설립했습니

귀하께서도 저희의 뜻에 동참하셔서 이 뜻 깊은 기념사업을 함께 이루어 주시 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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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Cho ByungHwa Foundation

회원가입신청서 및 약정서 이름

(남 / 여)

전화

자택

주민등록번호:

FAX :

직장

휴대전화

E-mail :

자택

우편 Fax 발송용

개인 회원 직장

주소

2만원(사랑회원) 3만원(꿈회원) 직접입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원

1만원(멋회원) 10만원(편운회원)

CMS 매월납부

후원종류

후원금 CMS(Cash Management Service) 자동이체 동의서 선

CMS는 금융결제원과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가 계약을 맺고 자동이체 출금을 의뢰하는 납부방식 입니다. CMS 자동이체를 신청하시면 희원님이 직접 은행에 가시는 번거로움 없이 매달 정기적 으로 후원금을 납부할 수 있으며 출금 수수료가 들지 않습니다.

예금주 이름

예금주 주민등록번호

출금 은행

계좌번호

이체 금액

월 ______________원

출금일 선택

10일

25일

위 사항과 같이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를 후원할 것을 약속하며, 귀 사업회의 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2013년

후 원 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인)

조병화문학관 홈페이지 http://www.poetcho.com 에서도 회원가입을 하실 수 있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05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110-530) 전화. 02-762-0658 팩스. 02-3673-0436 Email. poetch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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