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풍경 그리고 박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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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하늘은, 멀리서 온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초가을 따가운 햇볕에 목을 씻고 내가 하늘을 마신다. 목말라 자꾸 마신다. 마신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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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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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티어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 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너머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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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밭에 누워
바람에 쓸려가는 밤하늘 구름 사이 저렇게도 파릇한 별들의 뿌림이여 누워서 반듯이 바라보는 내 바로 가슴 내 바로 심장 바로 눈동자에 맞닿는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그 삼빡이는 물기어림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려 하지만 무심하게 혼자 누워 바라만 보려 하지만 오래오래 잊어버렸던 어린적의 옛날 소년쩍 그 먼 별들의 되살아옴이여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고 있으면 글썽거려 가슴에 와 솟구치는 시름 외로움일지 서러움일지 분간없는 시름 죽음일지 이별일지 알 수 없는 시름 쓸쓸함도 몸부림도 흐느낌도 채 아닌 가장 안의 다시 솟는 가슴 맑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울고 싶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소리지름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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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사랑 앞에
말씀이 뜨거이 동공에 불꽃튀는 당신을 마주해 앉으리까 라보니여 발톱과 손가락과 심장에 상채기진 피 흐른 골짜기의 조용한 오열 스스로 아물리리까 이 상처를 라보니여. 조롱의 짐승소리도 이제는 노래 절벽에 거꾸러 짐도 이제는 율동 당신의 불꽃만을 목구멍에 삼킨다면 당신의 채찍만을 등빠대에 받는다면 피눈물이 화려한 고기 비늘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발광이 황홀한 안식이 아니라까 라보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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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공화국
가을 하늘 트이듯 그곳에도 저렇게 얼마든지 짙푸르게 하늘이 높아 있고 따사롭고 싱그러이 소리내어 사락사락 햇볕이 쏟아지고 능금들이 자꾸 익고 꽃목들 흔들리고 벌이 와서 작업하고 바람결 슬슬 슬슬 금빛 바람 와서 불면 우리들이 이룩하는 시의 공화국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라도 좋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하늘로 스스로의 하늘을 스스로가 이게 하면 진실로 그것 눈부시게 찬란한 시인의 나라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에라도 좋다. 새푸르고 싱싱한 그 바다 ---지즐대는 파도소리 파도로써 돌리운 먼 또는 가까운 알맞은 어디쯤의 시인들의 나라 공화국의 시민들은 시인들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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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오늘도 또 내일도 어제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안다. 가난하고 수줍은 수정처럼 고독한 갈대처럼 무력한 어쩌면 아무래도 이 세상엔 잘못 온 것 같은 외따로운 학처럼 외따로운 사슴처럼 시인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안다. 실로 사자처럼 방만하고 양처럼 겸허한 커다란 걸 마음하며 적은 것에 주저하고 이글이글 분화처럼 끓으면서 호수처럼 잠잠한 서슬이 시퍼렇게 서리어린 비수, 비수처럼 차면서도 꽃잎처럼 보드라운 우뢰를 간직하며 풀잎처럼 때로 떠는, 시인은 그러면서 오롯하고 당당한 미를 잡은 사제처럼 미의 구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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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아름다움 자유와 평화와의 영원한 성취에의 타오르는 갈모자, 그것들을 위해서 눈물로 흐느끼는 그것들을 위해서 피와 땀을 짜내는 또 그것들을 위해서 투쟁하고 패배하고 추방되어 가는 아 현실 일체의 구속에서 날아나며 날아나며 자유하고자 하는 시인은 영원한 한 부족의 아나키스트들이다. 그 가난하나 다정하고 외로우나 자랑에 찬 시인들이 모인 나란 시의 공화국 아 달처럼 동그란 공화국의 시인들은 녹색 모잘 쓰자. 초록빛에 빨간 꼭지 시인들이 모여 쓰는 시인들의 모자에는 새털처럼 아름다운 빨간 꼭질 달자. 그리고 , 또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얼마든지 휘날리면 하늘이 와 펄럭이는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그렇다 비둘기,....... 너도 나도 가슴에선 하얀 비둘기 20
푸륵 푸륵 가슴에선 비둘기를 날리자. 꾸륵 , 구 , 구 , 구 , 꾸륵! 너도 나도 어깨 위엔 비둘기를 앉히자. 힘있게 따뜻하게, 어깨들을 겯고 가면 풍겨오는 꽃바람결, 우리들이 부른 노랜 스러지지 않는다. 시인들의 공화국은 아름다운 나라다. 눈물과 외로움과 사랑으로 얽혀진 희생과 기도와 동경으로 갈리어진 시인들의 나라는 따뜻하고 밝다. 시인이자 농부가 농사를 한다. 시인이자 건축가가 건축을 한다. 시인이자 직조공이 직조를 한다. 시인이자 공업가가 공업을 맡고, 시인이자 원정, 시인이자 목축가, 시인이자 어부들이, 고기 잡고 마소 치고, 꽃도 심고, 길도 닦고, 시인이자 음악가, 시인이자 화가들이, 조각가들이, 시인들이 모여 사는 시의 나라 살림을, 무엇이고 서로 맡고 서로 도와 한다. 시인들과 같이 사는, 시인들의 아가씨는 눈이 맑은 아가씨, 시인들의 아가씨도 시인이 된다. 시인들의 손자들도 시인이 된다. 21
아, 아름답고 부지런한 대대로의 자손들은 공화국의 시민, 시인들의 공화국은 멸망하지 않는다. 눈물과 고독, 쓰라림과 아픔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아는,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억누름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착취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도둑질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횡령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증수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미워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시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위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배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아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모가 없다.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당파싸움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피흘림과 살인, 시인들의 나라에는 학살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강제수용소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공포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집없는 아이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굶주림이 없다. 22
시인들의 나라에는 헐벗음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거짓말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란이 없다. 그리하여 아, 절대의 평화, 절대의 평등, 절대의 자유와 절대의 사랑. 사랑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리고, 사랑으로 이웃을 이웃들을 받드는, 시인들의 나라는 시인들의 비원 오랜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어쩌면, 이 세상엘 시인들은 잘 못내려 온 것일까? 어디나 이 세상은 시의 나라가 아니다. 아무데도 이 땅위엔 시인들의 나라일 곳이 없다. 눈물과 고독과 쓰라림과 아픔, 사랑과 번민과 기다림과 기도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아는, 시인들의 이룩하는 시인 공화국, 이 땅위는 어디나 시인들의 나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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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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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갈대가 날리는 노래다. 별과 별에 가 닿아라. 지혜는 가라앉아 뿌리 밑에 침묵하고 언어는 이슬 방울, 사상은 계절풍, 믿음은 업고業苦 사랑은 피 흘림, 영원 - 너에의 손짓은 하얀 꽃 갈대꽃 잎에는 피가 묻어 스스로 갈긴 칼에 선혈이 뛰어 흘러 갈대가 부르짖는 갈대의 절규다. 해와 달 해와 달 뜬 하늘에 가 닿아라. 바람이 잠자는, 스스로 침묵하면 갈대는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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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고독
당신을 언제나 우러러 뵈옵지만 당신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인자하신 음성에 접하지만 당신의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서 너무 멀리에 계셨다가 너무너무 어떤 때는 가까이에 계십니다. 당신이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고 할 때 나는 나를 더욱 알 수 없고 당신이 나를 모른다고 하실 때 비로소 조금은 나를 압니다. 이 세상 모두가 참으로 당신의 것 당신이 계실 때만 비로소 뜻이 있고 내가 나일 때는 뜻이 없음은 당신이 당신이신 당신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서만 나를 찾고 나에게서 당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당신 때문에 사실은 울고 나 때문에 당신이 우시는 것을 압니다. 천지에 나만 남아 나 혼자임을 알 때 그때 나는 나의 나를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도 나는 나를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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