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indness Simplified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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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첫 번째 남자에 대하여


마침내 파란 불이 켜졌고, 차들은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차가 똑같이 빨리 출발하지는 못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중간 차선의 선두에 있는 차가 멈춰서 있었다. 기계적인 고장이 발생한 것 같았다. 새로 길을 건너려고 모여든 보행자들은 멈춰선 차의 유리창 너머로 운전자가 두 팔을 휘젓는 것을 보고 있다. 뒤쪽에 늘어선 차들은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려대고 있다. 뒤쪽의 운전자들 가운데 일부는 벌써 차에서 내려, 멈춰선 차를 교통의 흐름에 방해되지 않는 장소로 밀고 갈 태세다. 그들은 닫힌 창문을 사납게 두드려댄다. 안에 있던 남자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뭐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입의 움직임으로 보건대, 어떤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다. 한 마디가 아니라 세 마디다. 누가 마침내 그 문을 열었을 때, 그 말은 확인된다.


눈이 안 보여.


눈이 안 보여, 눈이 안 보여.


남자는 절망감에 젖어 되풀이해 소리쳤고, 사람들은 그가 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남자가 죽었다고 주장하는 눈은 그의 눈에 고인 눈물 때문에 훨씬 더 맑게 빛나고 있었다.


눈이 먼 남자는 애원했다, 누가 날 좀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주위에 있던 여자는 구급차를 불러 그 남자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눈이 먼 남자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필요 없습니다, 누가 우리 집 앞까지만 데려다주면 됩니다, 그렇게만 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차는 어떻게 하고,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열쇠가 꽂혀 있잖아, 차는 인도에 갖다 세워 놓으면 돼. 세 번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내가 차를 몰고 저 사람을 집에 데려다주면 되잖아. 여기저기서 그것이 옳은 것 같다고 찬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먼 남자는 누가 팔을 잡는 것을 느꼈다. 오시오, 날 따라오시오, 세 번째 목소리가 그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이 먼 남자를 앞좌석에 태우고, 안전띠를 매 주었다. 안 보여, 안 보여, 눈이 먼 남자는 계속 훌쩍거리며 중얼댔다. 집이 어디요,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물었다. 눈이 먼 남자는 들은 체 만 체 두 손을 눈으로 가져가며 휘저었다. 마치 안개 속이나 우유로 가득한 바닷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말을 이었다, 눈이 멀면 검게 보인다고 하던데. 하지만 모든 게 하얗게 보이는걸요.


눈이 먼 남자는 그제야 더듬거리며 주소를 이야기해 주고 나서 말을 이었다, 이거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오늘 아침에 내가 집을 나설 때 이런 무시무시한 일이 생길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눈이 먼 남자는 시간이 꽤 지났다고 느꼈음에도 차가 계속 멈춰서 있자 어리둥절했다. 왜 움직이지 않는 겁니까, 눈이 먼 남자가 물었다. 빨간 불이오,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대답했다. 이제 눈이 먼 남자는 신호등이 빨간 불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눈이 먼 남자는 밖을 볼 수 없었다.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백색이 모든 것을 덮고 있었다. 남자는 집에 와 있는 것을 알았다.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어 보기만 하면 이것이 어떤 가구이고 어떤 물건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물건이 해체되어, 남과 북이 없고, 위와 아래도 없는 이상한 영역으로 들어와 버린 것 같았다. 장님들이 살아가는 어둠이라는 것은 단순히 빛의 부재일 따름이며, 우리가 실명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와 사물의 외양을 덮고 있는 어떤 것일 뿐, 그 뒤에는 모든 것이 말짱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지금 빠져든 백색의 상태는 너무 환하고, 너무 전면적이어서, 색깔만이 아니라 사물과 존재 자체를 흡수해 버렸다. 아니, 삼켜 버렸다. 그래서 훨씬 더 안 보였다.




눈이 먼 남자는 벽을 더듬거리며 응접실 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꽃병을 바닥에 떨어뜨려 기어이 박살내고 말았다. 그는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살피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맨질맨질한 바닥 위로 물이 넓게 퍼져 있었다. 그는 유리 꽃병이 깨진 것은 생각도 않고 꽃들을 주워모으려다가, 길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손가락을 찔리고 말았다. 고통을 느끼는 순간, 무력감 때문에 애들처럼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내 아파트 한가운데서 백색의 실명 상태에 빠져 어쩔 줄 모르다니. 그는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고, 여전히 손은 꽃을 쥔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소파로 간 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친 손가락 감쌌다. 잠깐의 순간에 탈진한 듯한 느낌을 받은 남자는 몸의 자포자기 때문에 피로가 몰라왔다. 논리적으로만 따지자면 모든 신경이 바짝 긴장해 있어야 하는 고뇌나 절망의 순간에 몸은 오히려 이런 식으로 포기를 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진짜 피로라기보다는 나른함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마치 진짜 피로만큼 묵직하게 몸을 눌렀다.


남자는 곧 계속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꿈도 꾸었다. 눈을 뜰 때마다 그가 알고 있는 대로의 모든 형태와 색깔이 변함없이 확고하게 그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마음 편한 확실성 밑에서, 불확실성이


쏟아내는 음울하고 괴로운 잔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것은 기만적인 꿈인지도 몰라. 너는 조만간 이 꿈을 떠나야만 하고, 그때가 되면 어떤 현실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의 아내가 귀가한 뒤 병원에 가려고 나섰을 때가 되어서야 그를 집까지 데려다준 선한 사마리아인이 차를 훔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택시를 탄 두 사람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어쩌다 나한테 이런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나일까.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이면. 택시가 멈출 때마다 차량들의 시끄러운 소음이 들렸다. 마치 누가 크고 괴상한 목소리로 악을 쓰는 것 같았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입니다, 선생님, 나는 안경도 쓰지 않습니다, 가족에서는 물론 친척 중에서도 눈먼 사람도 없습니다, 당뇨도 없고, 혈관이나 뇌세포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말을 마치자 의사는 조금 생각하더니 입을열고 검사를 시작하자고 말했다. 쌍안경이 달린 기계를 올렸다 내렸다 하더니 조정 손잡이를 조금씩 돌리며 검사를 시작했다. 각막에서도, 공막에서도, 홍채에서도, 망막에서도, 수정체에서도, 황반에서도, 시신경에서도, 다른 어떤 곳에서도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다.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요,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좀더 자세하게 검사와 분석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남자가 물었다. 그럼 내가 받아야 할 치료 같은 게 있습니까. 다시 의사가 말했다. 지금은 어떤 것도 처방하고 싶지 않군요, 어둠 속에서 더듬는 꼴이 될까 봐 그렇습니다.


그날 밤 눈이 먼 남자는 장님이 된 꿈을 꾸었다.



격리라는 명목으로 당국에서 눈먼 자들을 감금한 폐정신병원. 안과 의사도,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도, 그의 아내도, 그리고 그의 차를 훔친 도둑도 모두 이곳에 있다. 이곳에서는 폭력이 정당화된다. 정부가 보여 준 폭력, 정치인들이 대안을 선택하는 무능력함, 수용된 실명인들의 비윤리적인 모습. 질서와 규칙이 필요하지만 눈이 먼 사람들에게는 그것조차 위험한 상황에 노출된다.





격리 수용소에서 빠져나와 안전한 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이전보다 편안한 상태처럼 보였다. 때마침 내리는 비에 몸을 씻고, 깨끗한 여분의 옷으로 갈아입었으며, 모두가 둘러앉아 대화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음식 찾기가 점점 힘들어진다고, 어쩌면 도시를 떠나 시골에 가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적어도 그곳에서 얻게 되는 음식은 몸에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두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다. 그날 저녁에는 식사를 하지 않았다. 아침이었다. 이른 시간부터 노인이 책을 읽어 주고 있었지만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집에서 멀리 떠나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라고 생각했고, 이따금씩 집에 들러 살펴봐야 할 것 같았고, 이런 이유로 남자는 잠을 뒤척인 상태였다. 눈앞에 눈부시게 하얗다는 것도 그가 깨어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 잠을 잘 때만 어두워질 텐데, 사실 그것도 확실치는 않다. 누구도 잠을 자는 동시에 깨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남자가 마침내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했다고 느꼈을 때, 갑자기 눈꺼풀 안쪽이 어두워졌다. 내가 다시 잠이 들었구나, 그는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그는 잠이 들지 않았다. 순간 그의 영혼에 커다란 공포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하나의 실명에서 다른 실명으로 옮겨갔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빛의 실명 상태에서 살았는데, 이제 어둠의 실명 상태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공포로 인해 그는 몸을 떨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의 아내가 물었다. 그는 눈을 뜨지 않고 멍청하게 대답했다, 눈이 멀었어. 마치 그것이 새로운 소식이라는 듯이. 모든 게 어둡게 보여, 난 내가 잠이 든 줄 알았어, 하지만 아니야, 난 깨어 있어. 하지만 그의 아내는 핀트가 어긋난 대답만 늘여 놓았다. 그는 순간 화가 치밀어 심한 말을 한마디하려고 눈을 떴고, 그 순간 앞을 보았다. 그는 소리쳤다. 눈이 보여. 그가 처음으로 외친 소리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에서 나왔으나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그 횟수가 점점 더 늘어감에 따라 확신은 점점 강력해졌다. 눈이 보여, 눈이 보여. 그는 미친 듯이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의사를 향해 말했다. 보입니다, 눈이 보입니다, 의사 선생님.


그는 의사를 그렇게 불렀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그들의 입에서 사라졌던 호칭이었다. 그러자 의사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감히 말로는 하지 못하던 것을 이야기했다, 이 실명 상태도 끝이 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시력을 회복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 변화가 눈에서만 일어난 것인지, 뇌에서도 뭔가를 느낀 것인지.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 그리고 첫 번째로 시력을 되찾은 남자는 간단히 대답했다, 기다려야 하오. 그리고 아내에게 내일 집에 갑시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안 보이는데, 그녀가 대답했다. 상관없어, 내가 안내할 테니까. 그 자리에서 자기 귀로 직접 그 말을 들은 사람들만이 그런 간단한 말에도 보호나 권위 같은 감정들이 들어갔다는 것을 실감했을 것이다.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시간의 경험은 우리에게 실명한 사람들은 없고 실명 상태만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감정적 이상화, 무인도에서의 거짓된 조화 상태는 끝난 것이다.


한경대학교 디자인학과 2017년도 2학기 박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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