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ad Show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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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상 ... 21 김도균 ... 35 노순택 ... 43 문형민 ... 57 신보슬 ...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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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쇼 LA: 패서디나에서 샌터모니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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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 앤젤레스

▪패서디나

나라: 미국

패서디나 (Pasadena)는 캘리포니아주 남서부,

지역: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 북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행정구역: 로스앤넬레스 군

샌게이브리얼 (San Gabriel) 산맥의 샌게이브리얼

설립: 1781년 9월4일

계곡에 위치한 고급 주택가로 각종 연구소, 대학,

인구 3,928,864명(2014년)

미술관등이 밀집된 미서부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이다.

인구밀도 3,198명/km2

또한 도시 전체 경관이 매우 아름다우며 미국인들이 살고

면적 1290.6 km2

싶어하는 도시로 손 꼽히는 곳이다.

웹사이트: lacity.org

패서디나는 치페와 (Chippewa) 인디안어로 ‘계곡의 정상 ("Crown of the Valley," "Key of the Valley,"

로스앙헬레스(스페인어: Los Ángeles [los

"Valley of the Valley," and "Hill of the Valley.")’

ˈaŋxeles]) 또는 로스앤젤레스(영어: Los Angeles

이라는 뜻으로 1874년 인디애나주 (Indiana)에서

[lɒs_ˈændʒəliːz],문화어: 로스엔절리스[출처 필요],

이주한 농부들이 건설한 뒤 1887년 철도가 들어서면서

음차: 나성(羅城))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남부에 위치한

부유층들이 따뜻한 캘리포니아에 정착하기 시작하여

도시로, 면적은 1290.6 평방 킬로미터이다. 2010년 미국

겨울 휴양지와 감귤류 주산지로 발달하기 시작했고,

인구조사를 기준으로 3,792 ,621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태양을 사랑하는 예술가와 보헤미안들도 이곳에 머무르기

있어 캘리포니아 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시작하여 현재의 화려한 문화 도시를 만들었다.

미국 전체에서는 뉴욕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가장

1980년대 이래 재개발계획을 추진하여 도시가 활성화

많다. 로스앤젤레스는 약 1,8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되었는데 도시는 잘 짜여진 계획 도시로 거대하고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의 중심지로, 이 대도시권은

아름다운 바로크풍 교회등, 중심지에는 멋진 건물들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크며, 세계에서 가장 큰 대도시권 중

많으며 로스앤젤레스 (Los Angeles)와 국외로 연결되는

한 곳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고속도로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패서디나 고속도로SR-

군 중 한 곳인 로스앤젤레스 군의 군청소재지이다.

110 [Pasadena Freeway (SR-110)]은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는 사람들을 앤젤레노스

첫번째 프리웨이로 1940년에 오픈하였다.

(Angelenos)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스앤젤레스는 1781년 9월 4일 스페인 총독 펠리페

인간공학, 환경, 기술, 금융 관련사업이 경제활동의

데 네베에 의해 설립되었다. 1821년 멕시코 독립 전쟁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서부의 MIT라고 불리는

일어나면서 멕시코에 편입되었다. 이후 1841년 멕시코-

캘리포니아공과대학 (Caltech: California Institute of

미국 전쟁의 결과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맺으면서

Technology)에 부속된 여러 연구소들을 중심으로 각종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지역을 미국에게

연구활동과 과학•정밀 기기 및 전자•항공기, 미사일 부품

양도했다. 로스앤젤레스는 1850년 4월 4일 지방자치제를

등의 경공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제트 추진

시작했고, 5달 후 캘리포니아 연방 자격을 획득했다.

연구소 ( Jet Propulsion Laboratory, JPL)는 대학과

천사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로스앤젤레스는

미국항공우주국 (NASA)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사업, 국제 무역, 엔터테인먼트, 문화, 미디어, 패션, 과학,

교육기관으로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California

스포츠, 기술, 교육의 중심 도시로, 세계 도시 순위 6위,

Institute of Technology)과 풀러신학교 (Fuller

세계 파워 도시 순위 13위에 올랐다. 도시에는 문화,

Theological Seminary), 디자인아트센터칼리지 (the

경제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 기업 본사들이 밀집해 있어

Art Center College of Design), 패서디나시립대학

미국 내 가장 중요한 경제 도시이다. 또한 할리우드는

(Pasadena City College), 퍼시픽오크스대학 등이

텔레비전 제작, 비디오 게임, 음악 산업에 있어 세계를

있다. 찰스 그린 (Charles Green)과 헨리 그린 (Henry

선도하고 있으며, 영화 제작 산업으로 매우 유명하다.

Green) 형제가 디자인한 갬블하우스 (Gamble House),

1932년과 1984년에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적도 있다.

노턴사이먼박물관 (Norton Simon Museum of Art), 패서디나역사박물관 (Pasadena Museum of History), 어린이박물관인 키드스페이스 (Kidspace Children’s


Museum)와 유명한 작품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는 패서디나 미술관 등이 가불만한 곳들이다. 이밖에 1890년 이래 매년마다 새해 첫날 신년행사로 열리는 전통적인 로즈 퍼레이드 ( Tournament of

Roses Parade)와 미국 서부해안과 중서부지역 대학들의 미식축구대회인 로즈볼경기 (Rose Bowl football)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또한 방송계 최대의 행사인 에미상 시상식 (Emmy Awards)이 해마다 패서디나 시립회관

(Pasadena Civic Auditorium)에서 개최된다. (출처 tp://www.lifeinus.com/Travel/269/ )

▪샌타모니카(Santa Monica)

▪ 베니스 비치 산타모니카 비치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베니스비치는 운하 (Canals), 해변, 그리고 각종 노점상, 점술인, 상점, 레스토랑, 부티끄, 거리의 공연등 각종 엔트테인먼트가 있는 오션 프런트 웍 (Ocean Front Walk)으로 유명하다. 또한 걸으며 거리의 각종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하는것이 용이하며 사람을 구경 하기에도 좋은 장소로도 그 인기를 지속하고 있다. 베니스비치의 거주지역은 초기 로스엔젤레스 지역의 예술인, 시인들의 홈으로 독특한 보헤미안 (Bohemian)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베니스비치는 거리의 예술가들, 한가로이 거리를

샌터모니카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산책하는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장소로 마술사, 곡예사,

군 서부에 위치한 해안 도시이다. 태평양을 접하고

음악가 등 전위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독특한 분위기의

있으며, 샌타모니카 만에 들어서 있다. 샌타모니카 시는

공동체로 해안에는 레스토랑과 썬글라스, 옷, 악세사리,

로스앤젤레스 시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 다시 말해,

스포츠웨어, 티셔츠 등을 파는 다양한 가게들, 롤러

패시픽 팰러세이즈 및 브렌트우드가 북쪽에, 그리고

스케이트, 자전거 대여점 등이 즐비하고 비키니 차림으로

웨스트 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 및 마 비스타가

롤러 스케이트와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젊은이들을 항상

동쪽에, 그리고 베니스 (캘리포니아)가 남쪽에 위치한다.

볼 수 있는 곳이다. 산타모니카가 보수적인 반면 이곳에는

2006년 미국 인구 조사청의 인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기발한 패션을 한 젊은이들을 볼 수 있는 등 자유분방한

샌타모니카의 인구는 약 8만 8050 명이었다. 캘리포니아

비치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주 재무국의 예측치에 따르면 2007년 인구 추정치는 9만

오션 프런트 웍(Ocean Front Walk)이라고도 불리우는

1124 명이었다.[1][2].

베니스 보드웍은 베니스 비치의 해변에 계속 이어진

샌타모니카의 이름은 서방 교회의 4대 교회학자 가운데

보행자 전용보도로 보행자와 함께 롤러 스케이트나 롤러

한 사람인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히포의

블레이드, 보드를 타는 젊은이들이 많은 것이 특징으로

모니카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히포의 모니카 축제일

이곳에는 티셔츠나 액세서리 등을 파는 노점상들도

(feast day)에 스페인 사람들이 이 지역을 처음 방문했기

가득하다. 이밖에 해변에는 배구코트, 테니스코트, 정글

때문이었다.

짐 등이 놓여 있으며 야외트레이닝장 등도 갖추고 있다.

스케이트보드나 파도타기 애호가들은, 샌타모니카의

백년전만해도 베니스 비치는 습지로 형성되어 있었지만

오션 파크 근처 지역과 베니스근처 지역을 때때로 "

타바코 밀리어네어인 재력가 Abbot Kinney에 의해

사모"(SaMo)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노스 할리우드를

1905년에 비치 리조트 타운으로 미국내의 베니스

"노호"(NoHo), 웨스트 할리우드를 "웨호"( WeHo)라고

( Venice)로 개발이 되었고 'Playland of the Pacific'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라고 명명되었다. 베니스 비치는 쇼핑과 신선한

날씨가 화창하기 때문에, 20세기 초부터

쥬스 등 먹거리와 볼거리가 가득한 활기찬 곳이며

샌타모니카 지역은 리조트 타운으로 꽤 유명해지기

다양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집들이 늘어선

시작하였다.1980년대, 특히 도심 재개발이 있은 후, 경제

운하 (Canals)는 이태리의 베니스 ( Venice)를 모델로

붐이 일어났는데, 지역의 일자리가 크게 늘어났으며,

만들어졌다. (http://www.lifeinus.com/Travel/113)

관광수입도 급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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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간: 2015. 11.24. ~ 12 .02 . 장소: Los Angeles, 미국 기획: 신보슬 참여자:

• 참여작가 : 권오상, 김도균, 노순택, 문형민 • 참여 큐레이터 : 임대식, 황희승 • 촬영감독 : 김형주 주최 : 토탈미술관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 . 스케쥴 11월24일 (화) 여행자 보험 @ 공항

OZ 202 출국

11월24일 (화) 오전 8시40분 입국 (임대식 큐레이터 입국심사 문제) 오전 11시 임대식 큐레이터 입국 오후 01시 자동차 렌트 (코리아 타운) 오후 06시30분 Welcoming party @ Art Always

• LA 코리아타운 미국 내 한인 인구가 2000년을 전후해 큰 폭으로 늘어나면서, 미국의 대도시에는 코리아타운(Korea

Town)이라고 부를만한 곳들이 여기저기에 형성되게

“보신탕을 빼놓고는 한국에 있는 건 다 있다”고 할

Forest, Jackson Lake

저녁 숙소에서 남은 음식 요리 대결

정도이다. 코리아타운은 일차적으로는 캘리포니아

오후 06시30분 Jina Han & Amad Morshed 집 방문.

Santa Fe Art Colony http://www.santafeartcolony.

한인들의 비즈니스 근거지 역할을 한다.

Thanks Giving Day

org/

여전히 상당한 편이다. 1992년 LA 흑인폭동에서 가장

Wrightwood https://en.wikipedia.org/wiki/

11월30일 (월)

많은 약탈과 불법적 행위들이 이뤄진 장소이기도 하지만,

Wrightwood,_California

오전 작가 인터뷰

다운타운과 베버리힐즈 등과 인접해 있는 등 LA의

Jackson Lake https://en.wikipedia.org/wiki/

오후 01시 Susan Baik 미팅

노른자위 지역이어서 교통이 편리한 등 여러모로 이점이

Jackson_Lake

오후 04시 ~ 05시 큐레이터 인터뷰

그러나 코리아타운 일대에서 거주하는 한인들의 숫자도

많다.

위상을 자랑한다.

LA 코리아타운은 동쪽으로 LA 다운타운을, 서쪽으로는 베벌리힐스 (Beverly Hills)와 센트리시티 등과 접하고 있다. 코리아 타운은 행정적 차원에서는 동서남북으로 경계가 대략 정해져 있으나, 한인의 유입과 비즈니스의 확장으로 실제적으로 그보다 크게 수백 스퀘어블록에 걸쳐 있다고 봐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코리아타운의 핵심을 꼽으라면 동서로 달리는 슈퍼 블록의 축인 윌셔 블러버드( Wilshire Bl.) 와 올림픽 블러버드( W. Olympic Bl)를 빼놓을 수 없다. 윌셔 블러버드에는 사무용 빌딩이, 올림픽 블러버드에는 각종 소매점들이 주로 진을 치고 있다. 코리아타운은 서울에 있는 그 모든 것이 있다고 할 만큼 한국적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우스개 소리로

오후 08시30분 저녁

흐름이 두드러지고 있다. 하나는 코리아타운 일원에서

11월27일 (금)

오후 09시 자동차 반납

히스패닉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오후 12시 점심@딤섬하우스

오후 10시 공항도착

서서히 도시 재개발이 한편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후 01시~ 09시 the last book shop, Grand

이 같은 변화로 인해 코리아타운은 ‘부활하는 도심 속의

Central Market. Bradbury Building (Brad Runner

12월01일 (화)

도시’ 같은 이미지와 60 ~70년대의 낡은 도시 이미지, 둘

building), WACO 장난감가게

OZ 203 오전 00시 50분 출국

독립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만큼 미주 한인들에게는

The Last Bookshop http://lastbookstorela.com/

12월02일 (수)

이민 역사의 출발점과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또

Grand Central Market http://www.

오전 06시 50분 인천공항 도착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고루 흩어져 사는

grandcentralmarket.com/

한인들이 꼭 비즈니스가 아니더라도 자주 찾게 되는

The Bradbury Building https://en.wikipedia.org/

구심점 역할을 감당해내고 있다.

wiki/Bradbury_Building

다를 갖고 있다. 코리아타운은 과거 일제시대 미주 한인

또 최근에는 서울과 LA를 오가는 한인 숫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서울의 한 부분일 정도로 한국과 유행이나

11월28일 (토)

시대 흐름이 동조화하는 경향이 있다. 또 미국 내 K-pop

오전 11시 Getty Center

이나 한국 음식 등 한국 문화, 즉 ‘K 컬처’ 확산의

오후 01시 EAMES HOUSE

전진기지로써도 주목 받고 있다.

오후 03시 점심@Malibu Seafood 오후 04시 LACMA

됐다. 이들 가운데 LA 코리아타운은 압도적으로 그 규모가 크고, 또 Korea Town의 원조로써 손색없는

오후 07시 숙소 출발

2000년대에 들어선 이후로는 코리아타운에 두 가지

오후 07시 Network Party

11월25일 (수)

: Jennifer Rad Ochs, Jina Han, Ahmad Morshed,

오후12시 점심식사@

Joohung Lee, Jamie 외

오후2시~ 6시 Walt Disney Concert Hall, The Broad

Museum, MOCA, MOCA Chinatown

Getty Center http://www.getty.edu/

! 자동차 타이어 펑크

EAMES House http://eamesfoundation.org/

오후 9시 저녁@ 일식집 Japanes Village Plaza Mall

eames-house-history/ LACMA(Los Angeles Country Museum) http://

Walt Disney Concert Hall http://www.laphil.com/

www.lacma.org/

The Broad Museum http://www.thebroad.org/

Malibu Safood Fresh Fish Karket & Patio Café

Japanese Village Plaza http://www.yelp.com/biz/

http://www.yelp.com/biz/malibu-seafood-fresh-

japanese-village-plaza-los-angeles

fish-market-and-patio-cafe-malibu

MOCA http://www.moca.org/

11월29일 (일) 11월26일 (목)

오후 01시 Santa Fe Art colony: Jina Han, Laurel

오후 12시 Joshua Tree, Wrightwood, National

Paley, Cherone 스튜디오 방문

3. 숙소 11/24 -27 8307 Grand View Drive, Los Angeles, CA 90046, USA 11/27-12/01 Ocean Front Walk, Venice, CA 90291,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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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상

권오상 권오상은 홍익대학교 및 동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했다. 권오상은 ‘조각’의 주요 개념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왔다. 그의 대표적인 작업인 <데오도란트 타입

(Deodorant Type)>시리즈는 스티로폼과 같은 가벼운 재료로 형태를 조각하고 사진을 조각의 표면에 덧입히는 작업으로, ‘사진 조각’과 ‘가벼운 조각’ 두 개의 축을 세우며 한국 현대 조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개인전

<Sculpture>(두산갤러리, 서울, 2011), <Adore>(안도 파인아츠, 베를린, 독일, 2011), <OSANG

GWON>(아라리오 갤러리 청담, 서울, 2012), <Structure>(페리지갤러리, 서울, 2014), <New Structure>(백아트, LA, 미국, 2015) 등 다수의 개인전 및 단체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싱가폴미술관(Singapore Art Museum)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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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권오상입니다. 저는 조각가고요.

당시 월간미술 젊은 작가들 특집에 소개되는

게 아니니까. 근데 모든 사람이 새로운 거, 창작을

수가 없어요. 자연스럽게 계속 할 수도 있고 변할

이번 로드쇼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그런 작가들이었어요. 그렇게 소개되고 유명한

하는 사람들이 창작에 대한 갈망도 있고. 남의

수도 있는 키워드라고 생각을 하는데... 어쨌든

작가들이었는데 지금은 작업 안하시거든요.

눈 때문에 새로운 걸 하려고 하잖아요. 근데 그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새로운 걸 계속 해야 한다는

아까 김도균 작가님께도 말씀드렸는데 죄송하지만,

근데 어쨌든... 작업실에 불이 나서 디프레스

사람이 그거면, 그 사람이 그런 수준이거나 맨날

강박에 빠진다거나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저도 나름 전시 같은 거 찾아본답시고 다니긴

된 다음에 많이 깨달았죠. 데미지를 입었을때

그런 생각만 하는 사람이면 그냥 그거 하면 돼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는데 시간이 날 때 가니까 권 작가님 개인전을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작가들이. 불이 났는데

잘 하는 거.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본 적은 없어요. 항상 인터넷으로 보고. 거짓말의

저는 안타까웠던 게, 자신의 출세작을 다시

자연스럽게 뭐가 나오면 할 수 있어도. 그리고 이런

새로운 거라고 해도 남들이 해 놓은 케이스가 많긴

거짓말 단체전 할 때 본 것 밖에 없어가지고...

카피해서 그렸어요. 그분들이. 근데 내가 만약에 그

게 있어요. 사진 조각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가 작고

해요.

제가 공부를 한답시고 했으나 뭘 모르는 애한테

선생님이었다 하더라도 똑같은 작품이 그려지지도

커뮤니티 자체가 작기 때문에 제가 대학교 3학년

설명을 하는 것처럼 해주시면 좋을 것 같고. 아까

않을뿐더러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맛도 알았을

때 사진 조각을 처음 만들었는데 그게 체 1년이

관객들은 한국 작가들에게 좀 더 냉정하기 때문에

김도균 작가하고도 그런 얘기 했었거든요. 저는

거예요. 그리고 그동안 주목받았던 작품은 다

되기 전에 “너 아직도 그거 하냐?” 는 얘기를

외국작가들이 평생 해놓은 작품을 보여주면 아,

필름일 때부터 영화 촬영을 하고 어쨌든 카메라를

불타고. 뭔가 자기 처지가 비관적이고. 겹치면서

들었어요. 왜 똑같은 걸 반복하느냐, 복제죠?

이 사람은 평생 이걸 했어..라고 추켜세울 수

쓰는 거에 대서 물어봤기 때문에 그냥 LA에 대한

작업을 그만두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그러던 사람이 3년이 지나잖아요? “나는 네가 그걸

있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평생 이거만 했어? 이런

얘기도 얘기지만 작업하는 방식이나 이런 거에

들더라고요.

계속 해서 좋아.”이런 얘기를 해요. 그리고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이우환이다, 그러면

시리즈가 나왔는데 그건 모르고 사진 조각만 계속

외국에서는 대단하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하냐는 사람들도 있고. 새로운 시리즈가 나왔기

생 점만 찍었다. 별로야. 이렇게 되죠. 뭐가 좋다

때문에 그걸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는데, 하고

나쁘다는 모르겠어요.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 될

예전에 이명선씨가 일민에서 개인전 하기 직접에

싶은 얘기는 뭐냐면 내가 1년은 하든 30년을 하든

것 같아요.

불이 났었나봐요. 불 난 잔해를 싹 다 미술관으로

남들은 관심도 없어요.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끌고 들어온 걸 본 적이 있어요. 개인전 준비하다가

거.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거

작업 방식이 궁금해요. 처음에 작업을 하게 된

때도 조그만 엽서에 ‘조각가 권오상’ 이렇게 써서

불이 났으니까. 그게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당시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계기는 인터뷰에서도 듣긴 했는데

데뷔를 했었고, 근데 조각가에 대한 로망 자체가

제 생각에는 불 났으면 포트폴리오는 있으니까,

이 작업 자체를 끌고 오지 않았나 생각을 하고

다음 작업을 해도 됐을텐데 그러셨더라고요.

대해서도 궁금한 게 있어요. 제가 평론하는 사람도 아니고. 공통점이 있다면 만드는 거? 그래서 그런

되게 중요한 얘기 같아요.

것들 몇 가지 물어보고 그러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죠. 불이 나면 어쩔 수가 없잖아요.

근데 자기 소개를 정확하게 조각가라고...

네 조각가라고 한 지는 오래됐어요. 데뷔할

있어요. 제가 미술을 시작한 게 화실에서 그림을

그렇죠. 그런 것도 있고. 그리고 일단 한국

근데 그게 결국에는 새로운 작업을 만들고 그런 생각을 저도 하는데 내가 잘하는 방법이

싶다는 열망같은 게 있었던 것 같고. 그리고 지금도

있는데 혹시 내 그릇이 조금 더 넓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모든 작업이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안

않을까 실험을...

쓰면서 편하고 쉽고 간단히 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그리면서 시작한 게 아니라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그게 어려운 것 같아요. 이게 중요한 키워드라고

월간미술 전에 개간미술이 있었어요. 개간미술을

생각되는 게 자기복제?에 대한 약간 드라마틱한

그거는 할 수 있죠. 실험을 해야죠. 근데

두 개 정도 보니까 월간미술이 됐는데 월간미술을

상황을 얘기해 주는 것 같아요. 그런데 불이 안

이런 건 있어요. 자기가 지겨워서 관둘 수도 있고,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할 수

구독하고 미술을 하게 됐어요. 중학생 때 음악 많이

나도 찾아 올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시장의 부름이 없어서 관둘 수도 있어요. 무슨

있을까 생각을 많이 하죠. 그래서 이제 재료적인

말이냐면 조각인 경우. 내가 이런 스타일이 좋아서

부분이 발전이 된다든가 방법적인 부분이 발전이 된다든가. 하는 것 같아요.

듣잖아요. 벽에다가 락스타 붙여놓고 그러는데

어쨌든 제 생각에는 힘들면 자기복제를 해도

저는 월간미술 보면서 거기 나오는 작가들을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계속 좋아하는 작업을

계속 만들어요. 근데 조금 팔리거나 전시가 되면

락스타처럼 뭐랄까, 느끼고 동경했던 것 같아요.

계속 하는 것도 자기복제일 수 있고. 아니면

소비잖아요? 소비가 되면 계속 할 수밖에 없어요.

배웠던 선생님들이 다 현역작가들이었고 그게

대중이 원하는 걸 계속 해도 자기복제일 수 있는데

근데 아무도 원하지 않고 다음 작업을 할 수 있는

멋있었던 것 같아요. 조각가는 아니고 화가였는데

근데 그게 자기 게 아니진 않거든요? 누굴 따라한

요건을 만들어주지 못하면 내가 하고 싶어도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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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맞춰져 있어요. 천성이 아주 부지런한 타입이

인터뷰에서는 무거운 게 싫어가지고 그렇죠. 무거운 게 싫어가지고 라고 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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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지만 딱 그것만은 아니고 이게 어느 정도

조각에서도 그렇고 동양 조각에서도 그렇고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 사회에. 근데

인사미술공간이 생겨서 거기서 개인전을 하게

규모가 커져도 일정 무게 이상 나가지 않으면

조그만 캐비넷을 열면 삼존불. 이런 게 들어가

그게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랬던 것

되고. 그때는 경쟁해서 개인전 하기가 쉽지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일단 바로 옆에

있는 상자들이 있어요. 불상이 있거나 예수

같고 IMF가 터지면서 유학 갔던 사람들이 다

않았어요. 그러다가 2003년이 됐는데 국제

굴러다니는 재료였고. 첨엔 막 테이프 붙여가지고

그리스도 상이 있는. 그런 걸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들어왔거든요. 미국, 파리, 독일 다 들어오니까

갤러리에서 젊은 작가들을 데리고 그룹전을

만들었거든요. 아무것도 없이 종이가 서있는

강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런 건 차차 만들어도

서울이 세계 미술의 작은 격전지 같은 느낌이

했어요. 그때는 제가 플랫이라는 작품이 나왔었고.

듯한. 초기작들은 그래요. 부모님들은 손가락만한

될 것 같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고. 그 안에

됐어요. 그리고 어린 애들은 어린 애들대로 졸업도

그때 어떤 일이 있었냐면, IMF이후에 6년 만에

알루미늄 쫄대가 들어있었고. 안에 폼 같은

대표적인 작품들을 미니어처로 만들어서 넣는

안했는데 미술관에서 전시 하게 되고. 그리고 그때

국제 갤러리가 연 한국 젊은 작가의 전시였어요.

게 채워진 게 이제 2001년부터. 코팅이 된 게

게 목적이었는데 생각해보니까 그것보다 훨씬

생긴 게 대안공간이었어요. 제가 데뷔를 대안공간

IMF직전에 최정화씨의 개인전 이후로 한국

2003년이었던 것 같고.

더 간단한 방법이 제 작업에 나와 있기 때문에

루프에서 했는데 거기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

작가는 취급을 안 했어요. 어떻게 보면 의미 있는

응용해서 만들 게 된 거죠.

출신이 모여서 만들었던 대안공간이었고 홍대

전시였고. 혹시 상업 갤러리에서 작품을 팔 수

앞에 있어서 왔다 갔다하다가 친구들이 거기서

있을까 생각을 해 본 거죠. 그리고 그때 디렉터들이

저는 약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처음에 봤을 때 쿨하다... 대답도 쿨하고 작업도 쿨하다고. 그게

플랫 작업도 되게 흥미롭게 봤는데 조각의

전시를 하게 해달라 해서 저는 거기 껴서 전시를

젊은 디렉터들이었고. 그러면서 국제갤러리랑

말은 가볍기 위해서라고 말 하셨지만. 미술픔은

정의라고 하면 독립할 수 있냐 없냐... 그게

하게 됐고. 루프의 세 번째 전시였어요. 그래서

1년 일하다가 아라리오 갤러리가 영국에서

약간 육중한 권위? 무게는 권위랑 이어지는 면이

작가님의 정의이고.

거기서 제 작업을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고 그때

작품을 많이 샀다, 독일에서 작품을 샀다, 해서

사진 조각이 나왔었고. 그래서 이제 알려지게

알려지게 됐는데 그냥 뭐 그런가보다 하다가, 같이

됐죠.

일하자는 얘기를 해서 들어가게 됐죠. 전속으로

있으니까.

그렇죠. 뭐든지 혼자 설 수 있으면 조각이 될

그래서 작업이 구체적인 면을 띄고 있어요.

수 있고. 종이장도 누워있으면 2d인데 세워 놓으면

플랫 작업들도 실제 사물들이 등장해서 서있든가.

3d가 되는 거니까. 이것도 조각이다, 생각을

조각을 하더라도 자동차가나 오토바이, 아주

한거죠.

계약을 하게 되고 작업실을 준다고 해서 작업실을 그때 나왔던 게 돌맹이...?

쓰게 됐고. 그리고 이제 한국미술의 호황 같은

아니요. 그때는 쌍둥이에 대한 280장의

구체적인 사물들이 놓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게 생겼던 것 같아요. 그리고 갤러리에서 같이

그게 사실은 의미기 빠져있다든가 서로 연관돼서

하여튼 그게 되게 직관적이고 쿨한 면이

진술서. 학교 안에서 하는 전시라든가 학교 밖에

일하고 싶은 작가들이 다 아라리오로 가버리니까

이상한 조합이 된다든가 이러면서 작품이 가지고

있어가지고 그런 걸 물어보고 싶은 건 있어요. 저는

조그만 갤러리에서 한 적이 있었고 살 빠에서 저희

우리도 전속을 해야하지 않을까 해서 pkm에도

있는 의미는 모호해지는 그런 작업이었으면

귓동냥으로 듣는 건데 미술 쪽 필드를 거의 모르기

과 전시가 있었고.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번

전속이 생기고 국제에도 생기고 현대에도 생기고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왜냐면 굉장히 형태를

때문에 소속작가라는 것도 다른 작가 친구들한테

전시를 하게 되면서 확 알려지게 됐던 것 같아요.

가나에도 생기고.. 어떻게 보면 다양한 종류의 전속

가진 조각들이기 때문에.

얼핏 얼핏 듣고. 그렇게 기회가 왔던 건 어떤

이런 저런 인터뷰도 많이 하게 되고 미디어도

제도가 많이 생기게 됐죠. 전속을 한 건 제가 거의

계기로...?

많이 노출이 됐어요. 그러던 와중에 그때는

처음이었죠.

가방 되게 재밌던데요?

저 같은 경우에는 99년에 데뷔했고 IMF

이건 컨셉 자체는, 플랫 작업을 이런 식으로

이전에 한국에 저희 또래보다 조금 나이 많은

미술품이라는 것을 팔 수 있을지 없을 지에 대한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어요.

나이에 비해 근현대사의 격변기를...

했어요. 제 도록을 이렇게 설 수 있게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유학 자유화가 돼서 굉장히 많이 유학을

이건 간단한 종이장이라도 혼자 설 수 있으면

갔었어요. 그게 저보다 세,네살 많은 정도. 제

조각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이건 어떻게 보면

또래들도 많이 갔는데. 저는 IMF가 터지고 졸업을

간단한 조각이죠. 간단한 조각의 모음인데

하게 됐는데, 99년 쯤 되니까 다음 세기에는

조차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좋은 미술을 하고

했어요. 그래서 청년 작가전하면 40대 작가들이

가방자체가. 제가 만들었던 거의 모든 작업이

엄청난 일들이 벌어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멋진 조각을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하는 거예요.

오려져 있어요. 원래 만들고 싶었던 건, 서양

뉴 밀레니엄에 걸맞는 새로운 작가들을 뽑자는

같아요. 그렇게 대학원에 가게 되고. 2001년에

36

운이 좋았죠. 제가 25살에 데뷔를 했는데 저는 원래 안 팔리는 건 줄 알았어요.

당시는 뭐가 있었냐면 대가 뒤에서 자기의 순서가 오길 기다리는 40대 작가들을 청년 작가라고

그런 게 아니라 팔린 다 안 팔린다의 개념

37


그땐 40대 정도에 데뷔를 한 건가요?

전속 작가로 하면 장단점은?

네. 40대 정도면 자기 돈 내서 개인전을 몇

장단점이 있죠. 저는 단점이 많은 거라고

번 하고 좀 알려진. 제가 중학교 때부터 월간 미술

사람들이 생각을 하는데

봤다고 했잖아요? 정보가 좀 빨랐던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고. 왜냐면 미술은 공공적인

사람은 집에 정원을 지어놓고 그림을 그리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렇기

사람이잖아요? 그냥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때문에 기금을 받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굉장히 가정적이었대요. 로댕 같은

자랑스럽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경우도 부유하게 성에서 작업을 하면서 자랐고.

누가 글을 쓰는 사람인지. 누가 지금 활동하는

미술을 밖에서 본 사람들은 판타지가 있거든요.

문화를 위해서, 세계문화유산을 만들기 위해서

미켈란젤로나 다빈치도 도망다니던 시절이

작가인지. 이런 걸 좀 잘 알았던 것 같고.

독고다이...이런 판타지가 있는데. 저도 이제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왜 나를 도와주지 않지?

있었지만 항상 저택에서 스폰을 받으면서... 좋은

없지만 4, 5년 전만 해도...

이런 생각을 했었죠. 내가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생활을 하면서 좋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굉장히

일이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많아요. 반 고흐나 고갱이나 로트렉 같은 사람이

오히려 저는 어렸을 때 국제전이라든가...

그런 부분은 되게 영리한 거라고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해봤으니까. 이런 게 있었어요. 대안 공간 루프

그렇죠. 현장정보. 영업정보라고 할 수도 있고.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그것만 생각이 나는데...

그게 제가 외부에서 봤던 거랑 약간 차이가

포트폴리오가 아트선재 포트폴리오였어요.

있는 것 같아요. 미술관은 중요한 일을 하고. 제가

너무 억울해서 잘 모르는 사람의 전기를 보는 게

예를들면 공장미술제 때 이영철 선생님을 처음

그럼 아트선재 포트폴리오는 국제전이거든요.

좋아하는 존 버거 소설에도 나오는 건데, 아무도

제 취미인데. 미켈란젤로는 도제 시스템을 가지고

만났는데 내가 이영철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스물여섯인데 전 세계를 여행을 하면서 그룹전을

주문하지 않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작업인데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그 많은 양의 돌 조각을

노력은 한 적 없지만 이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하는 거예요. 신나는 일이기도 하고 멋진

당대에 인정을 받거나 뭔가가 되면 당혹감 같은 게

혼자 할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그 비슷한 시기에

시작을 하는 거죠. 무슨 비엔날레를 하고 어떤 글을

일이잖아요? 근데 그 일을 하다보니까 행정적인

들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미켈란젤로를 벽화 그리게 만든 그 화가는 죽이는

썼고, 그 글 중에 어떤 게 좋고 어떤 게 나쁜지

처리 같은 게 굉장히 문제였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그런 정보가 좀 있는 거죠. 학생들이 보통 계원

핸드폰을 받으면서 일어나서 핸드폰을 끊으면서

선생님이 나를 보재, 이러면 누군데? 하고 마는

잠을 자요. 계속 전화통을 붙잡고 있고. 이메일로

건데 실물을 보게 돼서 더 즐겁다. 이런 생각을

일을 하고. 제가 어떻게 보면 핸드폰과 이메일을

화가>라는 소설에 나오는 글인데 화가가

하고 열심히 하게 된다거나. 근데 뭐 어쨌든 작품을

업무적으로 쓰는 첫 세대인 것 같은데 행정처리가

행방불명이 되요. 개인전이 대박이 났는데.

그건 맞다고 생각해요. 문화 예술 자체가 가지고

되게 좋아했는데 나중에 마음에 안 들어가지고...

너무 많다보니까 작업을 할 시간이 없어요.

거기까지가 일기인데, 한두 마디 아포리즘처럼

있는 권위가 있기 때문에 감독이라고 하면 다...

그렇게 됐어요. 결국 정보는 상관이 없는....

그러다보니까 누군가가 빨리 내 행정 처리를

적어놓는 글인데 그런 내용이 있고. 소설 내용이

그런 억울함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런 면에서

재밌는 게 행방불명이 되기 전에 개인전이 대박이

좋았고. 작품을 보관할 곳이 없어요. 작업실을

나요. 노동자들을 거칠게 그리고 그랬던 그림인데,

하는 작품인데 자기가 혼자 그린 것처럼 연출하는

작은데 열망은 항상 큰 걸 만들고 싶고. 작품이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게 아니냐, 이슈가 있다가

사람들이 많아요. 스텝들이 나오지 않게 작업실을

상황이 있었는데. 지금은 착하지만. 그땐 맘에 안

어디론가 빠져야 작품을 만들 수가 있는데 그런

행방불명이 되는데. 이 사람이 대박 난 개인전을

찍고.

들면 중간에 작품을 빼왔어요. 제가. 그런 일들이

것도 문제였고. 작업실도 없고. 내 작업을 유지를

간신히 큐레이터에게 사바사바해서 간신히

있었고. 초기에는.

하기 위해서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어요. 그리고

치렀는데 거기 못 들어간 거야. 근데 난 그 심정이

제 생각에도 뭔가를 쫌 하는 작가 중에서 전속이

이해가 되는 지점이 있거든요.

실제로 부딪히면은... 부딪히면 할 수 없죠. 작품을 다 들어내는

모범생은 아니었네요.

아닌 작가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착하죠. 그럴 필요가 없고. 사람들이

왜 나를 안 데려가지? 이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잘해주고. 그게 좋은 게 아니더라고요. 성격

회랑의 어떤 부분을 그렸는데 자기가 안 그렸대요. 존 버거가 쓴 글에 나와요?

다 스텝들이 그렸다고 하더라고요. 환상이 너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세요.

그리고 화가 중에는 누가 봐도 같이 그려야

영화로도 나오죠. 까미유 끌로델... 아주 쉬운 예로 많아요. 우리나라 작가들도.

저는 그런 소설이나 글들이 작가를 왜곡시킨다고 생각을 해요.

저는 전속 작가 부분은 잘 모르니까 장단점이 있을

했어요.

더럽다고만 소문나지.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제가 의외라고 생각했다기 너무 판타지?

그건 월간미술의 영향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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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과거에 놀랐던 거는 이 분 작업이 다음이

네. 퍼센티지로 따지다 하더라도 모네 같은

궁금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에르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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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보를 하신 걸 보고.... 정확하게 기억이 안

네 그런 게 있어요. 저는 그게 재밌는 지점이고 그

나는데

아이러니가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고

펜디? 아, 콜라보 할 때 원칙이 있는데 제가

데오드란트, 플랫, the sculpture 그리고

따라하다가, 백 아트랑도 일을 하기 때문에

지금 new structure 라는 게 나왔어요.

다이렉트로 포트폴리오가 꽂혀요. 그래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콜라보를 했을 때 에르메스 백을 만들었으면

이게 작업의 시작이 오타쿠 적인 게 있기

좋겠어요. 근데 모든 업체에서 원하는 건 내

때문에

작품으로 뭔가를. 자기네 물건이 안 나와도 좋은데

우린 권오상이라는 작가랑 작업을 하는데 넌 도록 보고 알았어요. 보통 데오드란트 쪽으로

왜 비슷하게 하면서 컨텍을 하느냐고 하면,

콜라보가 돼죠?

권오상 작가가 있기 때문에 내 작품도 좋아할 것 같아서 컨택을 했다. 이런 얘기를 한 대요.

데오드란트로 콜라보가 많이 되고 최근에는

돈을 줄테니 작업을 만들어 다오. 그랬어요. 그건 에르메스가 안 나와도 돼. 근데 네 작품이

그건 누가 잘못했다, 잘했다의 문제가 아니어서

데오드란트로 콜라보를 많이 했기 때문에 신작으로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좋은거죠. 근데 처음에는 뭔가 협업이

하자는 말이 많아요. 그래서 지금 new structure

죄의식이라는 건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거고.

로 많이 하고 있어요.

너무 황당하니까 이젠. 저번에는 미국 애인데

나왔으면 좋겠어. 대신 신작이야. 이런 게 있어요.

들어오면 그건 광고의 수단이었어요. 첫 협업은

그럼 제가 제 작품을 만들거든요. 근데 워낙에

일본의 긴자에 오파크라는 백화점이 있는데 그

저는. 물건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백화점 크리스마스 광고를 제 작품으로 하는 거

등장을 하게 되죠. 그래서 그것들이 등장을 하게

였어요.

되죠. 근데 제가 정말 원하는 건 실물. 쓸 수 있는 거. 그리고 에르메스가 아니라 펜디였는데 펜디랑

광고를 가지고 작업을 하는 거 였어요?

만들었던 건 조각을 만들었어요. 그냥 좌대 위에 제

제 페이스북이랑 인스타그램을 팔로우 하면서 그쪽에서 요구하는 건가요?

좋아요 누르고 가끔 댓글을 달아요. 난 네가 하는

요구하는 경우도 있고. 근데 저는 제가 유도를

작업은 다 좋아. 화가인데 첫 개인전에 페인팅도

많이 해요. 데오드란트 타입을 많이 노출 시키지

있고, 람보르기니를 나무로 만든 게 있어요. 실제

않기 위해서. 다른 쪽 콜라보를 많이 유도해요.

크기로 제가 했던 거랑 똑 같은 모델을. 그리고

시즌 광고 같은 거 였는데 크리스마스 때,

오토바이에다가 흰 락카칠을 해서 마네킹을

물건들이 얽혀있는 조각을 만들고 펜디의 쇼장에

그냥 어떤 여자가 있으면 되는 거 였어요. 여자를

저도 그게 궁금한 게 다른 쪽 작가들도 자기가

태웠는데 마네킹에 사진을 붙였어요. 그런 작가도

갖다 놓고 전시를 했어요. 그냥 핸드백 들고 있는

사진 조각으로 만들면 되는 거 였어요. 그래서

끝나고 새로운 걸 해서 이전 껄 하기가 싫어

있어요.

거는 전혀 관계 없는 제 작품 중에 하나였고.

그걸 백화점 위에 전광판에 띄우는. 작품을 찍은

죽겠는데 이전 걸 돈 때문에 계속 해야 하는?

사진을 띄우는 프로젝트 였는데, 작품을 만들어 그렇게 저도 알고 있었는데 기억이...

저는 중간에 싫었던 때가 있었을 수도 있어요.

그건 오마쥬...?

달라고 이태리에서 모델 보내주고. 일본에서

근데 제가 멍청하다면 관둬야 돼요. 이걸. 근데

스텝들 들어오고 그때는 어쨌든 제 작품이었어요.

생각보다 멍청하지 않기 때문에 끌고 가는 거고.

초기에 얽기 설기 사진으로 조각을 따라하는

일본에서 그룹전을 한 직후였고 광고를 하는 게

무슨 뜻이냐면 돈을 벌고 안 벌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도 있고. 근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지경에

그래서 콜라보 관련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목적이었고 실제로 광고하는 게 목적일 돈 밖에

미술사에 정확하게 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이르렀어요. 그리고 몇 년 전만 해도 블로그의

있었거든요. 아까 말한 예술적 판타지가 있는

안 줬어요. 그리고 작업실의 규모가 커진 이후에는

문제로 봤을 때 사진 조각이 굉장히 유리해요.

시대였어요. 블로그는 오타쿠들이 분석을 하는 거

사람에겐 배신감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게, 작가님

아르바이트에요. 한 번씩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리고 얘가 뭘 해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거든요. 그러면 그런 사람이 99년에 사진조각을

데뷔 할 때가 제가 학교 다닐 때 였으니까...

셈이죠. 예를 들어 킨이라고 하면 어쨌든 그걸

근데 얘를 관두면 안된다고 생각을 해요.

시작했고 미국의 누구는 2007년에 시작을 했다.

연결되죠. 가방도 들고 있고 하니까.

아니, 에르메스랑 콜라보를 하다니

그렇다고 생각을 해야죠. 한국에도 아주

해서 작품도 많이 알려지고 그건 작품을 소장하면

배신잔데...? 이런

돈도 많이 받으니까 그걸 받으면 1,2년 작업실을 운영하는 데 문제가 없게.

혁오처럼?

그 얘라는 게 데오드란트 작업인가요?.

많아요. 근데 지금은 지나가다가 멋있으면 사진

네. 왜냐면 카피 작업이 전 세계에 굉장히

찍고 태그 달고 끝이에요. 누가 원작자인지 관심이

많아지고 있거든요. 그건 그만큼 제가 알려졌어요.

없어요. 저도 사진을 제가 찍지 않고 구글링해서

작가님 보면 데오드란트하고 플랫하고 그 다음에

그래서 그건 그냥 태그를 붙여요. 이번에 졸업을

만들기도 하잖아요.

이름이 좀 복잡해서...

했고 태그 붙여서 권오상. 영국 애들이. 많아요.

그만큼 문화예술 쪽에 흥미있는 학생들의 특징이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많이 알려지면...

그게 어떻게 어떻게 다르고 분석을 하는 애들이

그리고 프랑스의 기성작가는 제 것을 조그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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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편하게 생각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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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점이 자리가 완벽하게 잡혀 계신 상태여서... 근데 작가의 직업 자체가 촛불과 같아서 언제 꺼질지 모르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왜냐면 아주

관객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런 케이스도 재밌긴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다행이 이혼도 하고. 다행이

하거든요. 아까 전시도 그런 게 더 눈이 갔어요.

면허도 취소되고. 병에 걸리고 자살하고. 원하는

관객들이 지겨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바꿔준다고

일본 사진 작가가 자기 엄마 찍은...

건 아니지만 솔깃하잖아요? 그런데 본인은 얼마나

생각을 하면 되요.

저는 조각들 보느라 못 봤어요.

메이저에 있던 작가들도 신상의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그냥 사라지는 경우가 너무 많거든요.

저는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평탄하고 행복한 삶은 방금 말씀하신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사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저의 미션이라고

한국작가 같은 경우는 첫째로 생계가 곤란해서

엄마가 죽고 난 다음에 유품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생각을 하고 그러면 후배들한테 좋을 거라고

그러는 경우가 많을 테고. 생계 때문에 불씨가 꺼질

그런 게 재밌더라고요. 개인의 드라마든 뭐든 그런

생각해요. 작업을 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구나.

확률이 제일 높아요. 생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걸 가지고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계시잖아요? 그게

그런 작가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더 흥미로울 때도 있긴 있고. 잘 만든 걸 떠나서

저는 어려운 것 같아요. 빨리 끝내야 되니까. 내년

영향을 받아서 사진 조각이 발전하고 반발로 조각.

작가라는 게 이래서 힘들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드라마가 보이면 흥미로운. 그러면 오래 못 할 것

계획이 어떻게 되세요?

조각은 인터넷의 이미지를 보고 만들었어요. 얘

하게 되고.

같다는 생각은 들고. 그렇진 않고. 잘 모르겠다. 근데 드라마

일종의 서비스 직업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지루하지? 바꿔줄게. 이런 건 있어요. 사진 조각이 큰 맥을 유지하고 플랫이 나왔는데 플랫의

내년에 아라리오 개인전이 상해하고

때문에 요즘 하는 사진 조각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서울에서 있을 거예요. 6월에 서울에서 있고,

모아서 하거든요. 그리고 플랫을 전시를 안하냐고

아까 맨 처음에 했던 얘기가 생각이 나는데. 계속

거리를 만드려면 드라마 적인 상황에서 자랐던

11월에 상해에서 있는데 중간에 뉴욕에서 조그만

그랬는데 그게 작년부터 크게 뻥튀기 돼서 칼 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람이 유리하겠죠. 근데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은

갤러리에서 하나 있을 것 같고. new structure

조각처럼 나오거든요? 그게 뉴 스트럭쳐에요.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죠. 그게 고흐 같은

로 서울에서 할 것 같고요. 상해에서는 또 다른

서 있는 작업이 칼 더의 stabile 이라는 작업이

같아요. 작품을 계속 하기 위해서는 돈도

사람들이 얘기가 되잖아요. 병도 있었고 귀도 한

조각품이 나올 것 같아요.

있어요. 그게 공공 조각 같은 데서 많이 쓰였던

있어야겠지만, 아무 생각 없을 때는 그냥

번 자르고. 그런 우리가 생각하는 건 천재적인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뭐든.

드라마를 위한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는 거고.

저는 데오드란트에서 더 플랫 넘어간 것도 점프가

칼 더의 어떤 작업에는 판이 다섯 개로 구성이

근데 본인이 그게 아니면... 서울에서 태어나서

되게 많았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sculpture는

되어 있고 그 다섯 개의 판은 이렇게 구성되어

저는 그 얘기를 바꿔서 후배들한테 그렇게

자라고 예고나오고 대학 나오고... 이러면 너무

모르겠지만 점프가 되게 많았다고 생각이 돼서.

붙어있다고 하면, 뼈대는 똑같이 유지를 하면서

얘기하거든요. 작업에만 집중해라.

평범하잖아요? 예술하는 사람으로. 양친 다

내가 처음에 데오드란트를 봤을때는 지향하는

플랫에 나왔던 이미지들을 넣는 거예요. 그러면

살아계시고. 때가 돼서 결혼도 하고. 그러면

게 뭐다,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놀란 게 있어서.

선조의 뼈대를 가져다가 새로운 걸 만들었다고

보거든요. 아트 스쿨 나온 사람들을 고민들이

드라마가 성립이 안 되거든요? 그럼 그냥 해야죠.

더 플랫에서 지향하는 게 무엇을 것이다 또 한 번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만들었고.

많기 때문에, 그리고 테이스티가 하도 높기 때문에

그걸 배제하고. 거기까지는 작가로서 드라마의

놀랐던 게 있어서 그럼 상해에서 하는 거는...

다시 스컬프쳐가 브론즈를 써서 해보면 어떨까

자기가 만든 거에 만족을 못해요. 일단. 그게 제일

운은 없는 거니까. 근데 저는 드라마가 없는 작가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저는 제가 만든 작업에 진짜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작가 본인이기

대략적인 거는 브론즈 작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만족을 해요. 계속 들여다 보는 경우가 많아요.

때문에.

고전적인 걸 아주 현대적으로 하는 작업을 하고

계속 하려면 생각이 많이 않아야 될 것

그리고 미래의 작품의 원천은 전작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기준이 너무 높아가지고 작업을

건데 그런 데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예를 들어

해서 아님, 더 단단한 재료를 쓰면 어떨까 연구

상해에서 하는 건 아주 구체적이진 않는데

중이에요.

있는데 그건 결과적으로는 사진 조각하고 다르지

조각이라는 거에 대해 제가 너무 모르지만 입체냐

못해.. 눈이 조금 낮아야 겠네. 그럼 작업을 계속 할

그렇게 얘기하는 케이스 있잖아요? 너무 착한 거

않을 거예요. 재료는 완전히 다르지만. 사진 조각과

평면이냐 그 개념밖에 모르지만. 그 개념은 아닌 것

수 있겠네요.

같아.

플랫과 뉴 스트럭쳐와 다 비슷하다고 생각을

같아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건.

연예인들의 가십을 얘기하고 예술하는 그게 어쨌든 직업으로서?

하거든요 저는.

제가 생각하는 조각은 일단 무엇이든 조각이

사람이라고 봐 주는 이유는 뭐랄까, 그러길

직업으로서 작가를 유지 할 수 있겠죠.

바라는 거 잖아요? 우리가 보고 있는 특정 인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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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이것도 조각이 될 수 저는 그 세 개가 되게 다른데요?

있고 그 중에서도 얘는 되게 잘생겼잖아요?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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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들은 조각을 하잖아요. 길이 남을 인물을

연결이 안되면서 자기가 경험했던 경험치를

조각을 하는데. 길이 남을 디. 자인이라고 생각을

바탕으로 잠깐 딴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본인이

하거든요? 얘를 디자인 하는 거예요.

잠깐 엉뚱한 생각을 하면 그게 감상법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얘는 비어있어야

모든 지 조각이 될 수 있다는 건 모든지 조각의

한다고 생각을 하고. 그게 현대 미술의 기능이라고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생각을 해요. 설악산을 보면서 설악산의 풍경은

그렇죠. 그리고 이 물체 자체도 조각이 될 수

무슨 의미가 있지? 이렇게 생각 안 하잖아요. 저는

있죠. 이 카메라도 되게 근사하잖아요?

현대미술 감상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추상을 보는 것도 있고. 제가 생각하는 감상법이라고

근데 뭐든지 조각이 될 수 있으면 나는 무엇을

생각을 해요. 그럼 아무 근심걱정이 사라지겠죠.

조각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남지 않나요?

물론 반대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럴 때는 아무거나 막. 타이밍일 수도 있고. 저도 잘 모르겠는데 이게 꼭 비싼 물건만 갖다

각자 관람하는 사람이든 만드는 사람이든 자기

놓는 건 아니거든요?

기준이 있으니까. 저는 모든 기준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LA는 어때요?

비싸다는 말의 여러 가지 의미가... 가치가 있는?

LA는 날씨가 좋고. 우리가 좀 바쁘네요. 원래 LA는 일주일이면 할 일이 없어야 마땅한

가치가 없어도 되는데 작가의 취향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요. 그 물건은 작업실에 있는 경우가

도시인데 우리는 시간에 쫓겨가지고. 너무 늦게

많고. 작업실에 있는 물건들을 덩어리를 구성할 때,

일어났어. 그게 원래 스타일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사진 조각이지만 덩어리가 많이 붙어 있잖아요?

라크마에서도 제대로 못보고 게티에서도 제대로

이런 건 어떻게 시작을 하냐면 자, 붙여봅시다.

못보고. 미술을 보는 게 목적이지만 어쨌든 LA는

이러면서 시작을 해요. 만들어 놓은 덩어리는

날씨는 좋은 것 같네요.

있는데. 조각에서는 흙으로 덩어리를 붙이는 모델링이라는 게 있어요. 그 덩어리를 만들 때 이런 걸 붙였다가 저런 걸 붙였다가 깍아내고 다시 얇은 걸 붙였다가 두꺼운 걸 붙였다가 이런 걸 보면서 형태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거든요. 그런거랑 가까워요. 이만한 덩어리가 필요한데 아 이거.

직관에 따른 형태적 미에 대한 덩어리. 매스의 크기에 가깝지. 이 도자기를 보면 사람들은 이럴 거예요. 이 도자기는 청나라 도자기인가? 무슨 의미지? 새가 있네? 근데 그걸 좋아해요.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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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균 KDK 김도균은 서울예술대학 사진과 졸업,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 마이스터쉴러와 아카데미브리프에서

김도균

수학했다. 평범한 건축물의 인공성에 주목한 <A> 시리즈에서부터 <SF>시리즈에 이르는 김도균의 작업에는 일관되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다. 우선 그가 선택하는 피사체가 주로 건축물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상상력이 발휘되는 건축물을 선택한 후 가장 스펙터클하고 초현실적인 글을 포착하여 화면을 구성한다. 그렇게 선택된 건축물은 각기 그것들의 고유성을 읽고 가상의 색면 이미지로 재탄생 된다. 김도균은 사진은 단순히 건축물 본연의 미학적 효과를 노린 건축 사진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시각적, 신체적, 물리적, 심리적인 반응의 복합체이기를 바라고 있다.

<p>(2015, 페리지갤러리, 서울), <KDK b.ios.lu.sf. w.>(2014, 신세계 백화점본관 아트월, 서울), <Space Odyssey>(2013, KAIST경영대학SUPEX, 서울), <b>(2012 , 갤러리2 , 서울),<Facility Skins>(2011 , Michael Schultz, 베를린, 독일) 등 다수의 개인전을 했으며, 안도파인아츠, 삼성미술관 플라토,갤러리플래닛, 백남준아트센터, 광주시립미술관, 성곡미술관, 금호미술관 등 많은 기획전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IKB Deutsche Industriebank, UBS, 삼성미술관 리움, 마리오보타 컬렉션,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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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자기소개부터 해주셔야 합니다.

가방 같은 경우에는 우주여행을 간다. 이랬을때

아니에요. 필름을 사용해서 찍게 되죠.

다 스페이스에 대한 작업이었어요. 들어가기도

거기에 들고 갈 수 있을 법한 상상을 한 거죠.

저는 사진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하고 나오기도 하고. 사물까지 들어가기도 하고.

김도균이고요. 사진을 전공했지만 사진의 쓰임에

화성에서 샘플 채취를 하고 그런 느낌에. 겉보기에

구애를 받지 않고 다양한 매체로 사용하는

우주 공간에서 필요할 법한, 그런 것들은 한거고.

김도균이라고 합니다.

마침 내용 중에 달 같이 생긴 건물을 찍은 이런

디벨로프 하는 데 오천원 정도 들고. 한 장에

작가님 처음 뵈었을때 인상은, 토탈에서 스크리닝

작업들을 넣고. USB같은 것도. 큐레이터들한테

만원 정도 드는 거죠. 저는 이걸 한 20년 정도

프로그램 할 때. 사람 찍지 않는 이유가 있다. 해서

가방 얘기를 좀 해볼게요. 자기소개랑... 솔직히

이 가방이 전달 될 텐데 저에 대해 하나씩 뽑아

찍다보니까 테스트 안해도 될 정도의 그런 건

그 선정 이유가 궁금한 게 있어요.

제가 미술계 외부의 사람으로서 전시를 본다고는

가라고. 이 안에는 저에 대한 내용들이 있고.

생겼거든요. 처음부터 뭐를 찍어야 겠다 기힉을

하지만 아주 자주 보지는 못하기 때문에 작가님

하나씩 가져가게 하는 컨셉으로 만들었죠.

하고 찍기 때문에. 노출 같은 것도 노출계로

사진을 배우게 됐는데 저를 가르쳤던 형이

개인전을 보지는 못했거든요. 저는 도록이랑

저는 우주여행? SF관련 된 컨셉으로 이 가방을

먼저 재고 제 감이 있어서. 무브먼트 카메라이긴

고향이 강원도 도계 탄광촌이에요. 입시를

인터넷으로 보고 <거짓말의 거짓말>에서 뵙고

만들었어요.

하나 필드용으로 나온 카메라여서, 그렇게 심한

하면서 포트폴리오를 만들게 되잖아요. 그때

무브먼트는 안 하고요.

그 형의 영향으로 탄광촌에 가게 됐죠. 그 전에

그랬었으니까. 포트폴리오 가방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좀 설명을 해주시면...

필름 비싸잖아요?

인앤아웃을 이렇게 하고 있죠.

한 장에 오천원 꼴 하죠. 근데 그걸 찍고

사진을 잘못 배웠어요. 제가 재수하면서

중대 시험 보느라고 도시, 이런 것도 찍었는데

인터뷰를 많이 해보셨겠지만 저는 이런 질문들을

제가 스페이스에 관한 작업을 많이 하거든요.

하고 싶었어요. 저는 영화 카메라를 다루는

생각보다 세팅이 헤비하지 않아서 놀랐던 적이

떨어지고. 서울예대를 가기 위해 탄광촌을 갔는데

그래서 스페이스 작업의 일환으로 이 수트케이스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른 미술가들하고

있어요.

탄광촌에 광부, 광부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혼자

가방을 포트폴리오 가방으로 만들라고 했을 때,

쓰는 카메라가 어떤 종류인지 얘기할 기회가 별로

저는 제 시리즈 중에 SF시리즈라는 게 있거든요?

없지 않나요? 쓰시는 카메라가 어떤 건지, LA에

찍을 순 없지만 다른 대형 카메라에 비해선 세팅이

불편했어요. 입시용으로 어떤 사진가가 되고

SF시리즈의 일환으로 내가 우주여행을 한다는

갖고 오신 것도 있잖아요? 좀 보여주시면 좋을 것

용이하죠.

싶냐고 하면 사회의 대변인이 되고 싶다고 이런

상상으로 가방을 만들었어요.

같아요.

20년째 제 친구인데요. 군대 갔다가 복학 Science Fiction 의 약자인가요? Science Fiction으로 시작을 했죠. 그 작업은 처음에 일상적인 공간에서 미래의 공간이 어떨지

멘트를 해야 되는 상황이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나는 밝게 살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하고 나서 저랑 같이 작업을 하고 있는 제 친구.

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살짝 놀란 지점도

싶고. 메디슨 카운티스의 다리 같은 소설을 보면

96년이니까 거의 20년이 돼가죠? 독일제 린호프

있고, 물어보고 싶은 지점도 있었어요. 저도 필름을

짚차에 늙은 개랑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고 이런

테크니카라는 카메라에요.

공부할 때 포지티브 하루에 한 장을 찍어오는

장면이 있고. 또 하나는 빨간 스포츠카에 미녀들

그런 수업을 했었는데 피사체 선정 방식이 어떻게

태우고 이런 극단적인 장면이 있는데, 뭘 선택할래?

되는지. 노순택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서사가

스스로한테 물어봤을 때 빨간 스포츠카에 이쁜

보이니까 딱 알겠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여자 태우고 가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한 거예요.

어떻게 구매를 하시게 되었는지...

공간을 만들었었고. 영화에서. 저는 2003년부터

남은 미망인들. 그런 분들을 찍는 데 굉장히

작가님 사진을 봤을 때 스튜디오에서 찍은 느낌이

상상해보자. 이런. 사실 스탠리 큐브릭 영화 보면서 시작을 했었거든요. 60년대 스탠리 큐브릭은 그런

디지털카메라나 DSLR에 비해서 민첩하게

원래 핫셀블라드를 샀는데, 새 거 인데도 자꾸

시작을 했었는데 과연 2100년 이럴 때는 어떤

고장이 나는 거예요. 셔터가 자꾸 감기고. 그래서

공간에 살고 있을까? 이렇게 SF로 시작을

바꿔달라고 했는데 산 데서, 새 거 같은 중고가

스페이스에요. 저는 스페이스가 주요 키워드라면

사람들을 대변하려면 그 사람들의 삶을 살아야

했다가 나중에는 Space Faction이라는 단어를

있으니까 그걸 볼래? 해서 이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 안에서, 공간이라 하면 우주도 있을 수 있고.

되고 그러지 않나 생각을 한거죠. 그때 이후로

만들었어요. 어떤 거는 컴퓨터로 매뉴플레이션도

가격은 핫셀보다 좀 비쌌었으니까 대신 이걸로

모서리도 공간일 수 있고. 건물의 외관이 공간일

사람을 피사체로 작업을 한 경우는 손에 꼽는 것

하고 어떤 거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도 해서

가져가겠다고 해서 그때부터 친구가 됐죠. 이건

수도 있고. 이런 여러 가지가 있는데 스페이스라는

같아요. 그런 선입견이 생겨버려서 두려웠어요. 그

관객들이 헷갈려하는 이런 것도 재밌었고. 그런 SF

작업할 때 무조건 트라이포드에 올려놓고 하게

키워드를 가지고 되게 다양하게 작업을 해나가고

사건이 저를 닫게 해서, 사람을 찍어야 한다면 그

시리즈인데 그런 맥락을 같이 해서 이 포트폴리오

되죠. 뒤에 보는 것도 뷰파인더 통해서. 디지털

있어요. 지금까진 2년에 한번씩 새 작업을 했는데

사람하고 100퍼센트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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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무슨 탄광촌에..좀 오버인 것 같다. 내가 그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전체적인 맥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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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르렀던 것 같아요.

100퍼센트 뭔가 소통이 되어야 한다 생각을 하게

좋아해줘도 뭐.

재밌던데요? 어떻게 이렇게 갔을까...

된 것 같아요.

사람들이 많이 얘기를 하는 게 lu가 Line작가님이 작업용이 아니게 찍는 사진이 뭔지

이게 좀 실례되는 얘기일수도 있는데 설치되어

up이라는 뜻인데 ktat같은 경우에는 프로젝트로

저도 항상 고통스러운 게, 다큐멘터리를 할 때...

궁금했어요. 핸드폰 사진이라든지... 권오상 작가나

있을 때가 되게 좋더라고요.

한거라 좀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픽토그램

분명히 좋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이런 작가들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작가님은

이해 못하는 선에서 이 사람은 행동하고 이 사람은

작업용이랑 구분이 된 게 있을 거란 추측이 들

하기 때문에 이게 어떻게 걸려질 것인지 어떻게

사진을 찍어서 작업을 한 거여서 제 꺼라고만 할

그렇게 감정을 느끼고. 나는 왜 그렇게 감정을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어서

프레이밍이 될 것인지 그것도 굉장히 많이 생각을

수는 없는데. 라인업 같은 경우는 제가 생각했을

하고 작업을 하고 있어요.

때는 맥락이 많은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다른

느끼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런 것들이

피사체로는 작업용하고 아닌 거하고 구분이

저는 그 부분까지도 작업의 일부라고 생각을

같은 경우는 다른 작가가 디자인 한 걸 저는

컨트롤이 안 되니깐. 할 때 마다 상처받는 것들이

되죠. 예를 들면 사람. 핸드폰으로는 사람을

생기는 것 같아요.

찍어요. 근데 그건 사람은 아닌 거죠. 근데 저는

노순택 작가님 같은 케이스에 비해서 되게

다 그랬어요. 저는 스페이스에 대한 작업을 하고

수평 수직에 대한 강박이 있어요. 그래서 항상

설치되었을때 에너지가 확 생긴다는 말은

있다고 했잖아요? 어떨 때는 카메라로 공간을

좋아하거든요. 학교에서 수업을 할 때도 내가

맞추고, 맘에 안 드는 사진은 거기에 안 맞는

바꿔말하면, 화이트 큐브 안에서만 생명력이

담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내가 건축가?

좋아하는 작가다, 나를 대리만족을 해주고, 내가

사진이에요. 핸드폰으로 찍을 때도 그런 건 있는 것

있다는 얘기 아닐까요?

크리에이터의 입장이 되어서 블록을 쌓고 공간을

할 수 없는 것들을 이 사람이 해주기 때문에. 나는

같아요.

저도 작업적으로는 노순택 작가

내가 잘 할 수 있는 거 잘 하자. 이렇게 편하게

사람들이 봤을 때는 갑자기 왜? 갑자기 왜 컬러풀?

그건 아니에요. 꼭 화이트 큐브 말고도 어떤.

만들고 이런 역할을 한 번 해본 거예요. 컨테이너로

지금 이 방이라든지. 여러 가지 경험을 해봤거든요.

공간을 쌓아서 만들어 보자. 이런 취지에서 작업을

생각을 하고 있고. 더 나이가 들면? 아직까지 그런

제 친구도 그런 친구가 있었고 저도 한 때 그런

현장에 Site-specific 된 작업을 해봤는데 그럴

했는데. 스마트폰에 라인업이라는 게임을 하면서

생각이 확실히 들지는 않는데 사람이 내 작업의

적이 있었는데 제가 들었던 건 영화를 수평 수직을

때마다 그 부분들이 되게 재밌어요. 그래서 꼭

시작했던 작업인데 그게 나는 되게 재밌었는데

피사체가 될지는 모르겠어요. 만약에 지금 내가

맞춰서 찍었는데 영화가 그렇게 재미가 없더라는...

화이트 큐브만은 아닌 것 같아요. 러프한 공간도

욕을 많이 먹었죠. 되게 아이러니 한 게 그

사람을 피사체로 사용을 한다면 스페이스로

그래서 궁금한 건 그런 게 있었어요. 영화에서

괜찮고. 이런 공간도 괜찮고.

작업으로 돈을 제일 많이 벌었어요. 어떤 기업에서

접근을 하겠지, 포트레잇 이런 건 아닐 것 같아요.

좋은 촬영이란 뭔가. 이게 사진하는 분들에게도

스페이스에 집착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 친 누나가 건축을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자기네 관련해서 만들어 달라는 것도 있었고.

똑같이 해당 될 것 같아서. 근데 그때 제가 느낀

설치되었을 때 인트로가 느껴지고 아웃트로가

것은 수평 수직만 맞는다고 좋은 건 아니다.

느껴지고 이런 게 명백하게 다가오는 지점이

저는 노순택 작가님이 여기 계셔서 그런

알록달록 하니까...

있어가지고. 그런 부분은 큐레이터와?

색깔 다 빠진 건 후보정으로?

르 꼬르뷔지에, 발터 그로피우스 이런 사람들의

게 아니라 전에도 얘기했죠? 노순택 작가가 할

책들을 누나 때문에 접했던 것 같아요. 뭔지

수 있는 게 있고.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고. 수평

미술관, 갤러리면 갤러리. 이렇게 같이 얘기를

한건데 진짜 그렇게 쌓여 있는 거예요. 저도 흰색은

모르고 봤죠. 그러다가 독일로 유학을 가서

수직은 제가 훨씬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기도 하죠. 처음부터 같이 협의 되는 건 아닌

처음 봤는데, 각각 회사로 가면 색이 도정이 되는데

20년대 모더니즘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 예를 들면

예술이라는 게 어떤 메시지가 있어야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난 이런 공간에서 이런 걸 해보고 싶다고

갓 만들어져서 베이직 페인트만 칠해져 있는.

바우하우스 학교나, 르 꼬르뷔지에가 지어놓은

것 같거든요. 저는. 그 이전에 미적인 것도 충분히

얘기를 하고... 공간에서도 얘기를 하고 협의를

납품되기 전에 컨테이너가 있었어요.

기숙사나 이런 것들을 보고 내가 막 감동을 받고

예술을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거고. 저는 제가

해서...

있는 거예요. 전율이 오고. 왜 그럴까 생각을

수평 수직을 맞추는 거에 있어서 내용이나 이유는

하다가 모듈화 되고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들이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전체적인 걸 이번에 인터뷰하려고 맥락 없이

너무 제 스타일 인 거예요. 이게 내가 좋아하는

잘 할 수 있는 걸 잘 하면 이게 남을 위해서 하는

봤었던 건데 이렇게 시기적으로 쫙 봤는데 lu

건가보다. 그때부터 찾아가고 공부하다 보니까

건 아니지만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을 거고. 안

시리즈하고 ktat 시리즈가 이질적이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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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부산 신선대부두에 가서 촬영을

일단은 제가 먼저 하고 그 다음에 미술관이면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게 ios랑 라인업이...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는 얘기는 안 들어보셨어요? 저는 사진으로 추구하려고 하는 게 한마디로 단언할 순 없으나, 압축 할 순 없으나, 형식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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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거예요. 처음에 ios, images of speed 이

둘이서 뭔가를 끌어내는? 그런 작업을 할 것

작업은 독일에 가서 한국하고 풍경적으로 달라진,

같아요.

이런 거에 대한 작업이었는데 지금의 모습하고 봤을 땐 되게 달라요. 처음에 사람 냄새가 난다고

재밌겠는데요? 오히려 작가님이 안 하셨던

말씀을 하셨지만.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것들이지 않나요?

들어요. 과도기죠. 이제 넘어왔고. 아까 형식미를

그렇게 될지 아니게 될지. 돌아가면 12월

얘기 했는데 독일 가기 전에도 제가 좋아하던

3일날 결정을 하기로 했거든요. 지금 현재

작가들은 다 사람냄새가 안나는 작업들인 거예요.

작가하고 결정해 놓은 거는, 그 작가는 72cm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독일의 그런 게

아래로만 작업을 하겠다. 나는 그 위로 할 지

좋아서 갔었던 것 같은데. 결국 저는 제 작업에서

아래로 할지...

감성적인 면이 앞으로는 더 나올 것 같거든요.

LA는 어때요?

제가 아무리 독일을 쫓아가도 저는 한국 사람이고

처음 미국 서부 쪽에 왔는데, 유럽에 오랫동안

동양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가지고 있는 게 안 나올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겉으로는 피 한 방울

살던 거에 비하면 처음에는 굉장히 싫었어요.

안 나올 것 같고, 조금만 들춰보면 서정적이고

낯설기도 하고. 굉장히 퍼져 있어서 시각적으로

감성적인 것들로 작업을 하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낯설었거든요.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그

있어요.

느낌이라는 게, 여기서 살려면 재밌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니셜 순 작업 전시도 뭔가 더 인간적이지 않고... 서울가면 추가적인 걸 찍으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작업을 통해서 지금은 철저히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좀

제 작업실로 한번 오세요.

여리기도 하고. 뭔가 카메라 매커니즘에 대해 더 질문을 하고 그래서 제가 다른 작가들 보다 작가님 아이폰이

싶었어요. 개인적으로. 사진학과 정통파여서.

궁금했던 게 독일 스파이 같은 느낌?

노순택 선생님은 정치외교학과잖아요.

이중적인 그런 걸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에 얘기해 내가 노순택 홍보대사야.

내년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그런 것들은 나중에 작업실에 가서 얘기하고요.

내년 초에 2월에 2인전이 있어요. 다른 매체를

사용하시는 렌즈나 이런 것들. 미술쪽에서 잘 안

하고 있는 분하고. 그 다음에는 딱히 없는 데요.

물어보지 않아요? 잘 안 물어보는데 되게 의외인 게 아마 제가

2인전에는 p시리즈 말고 다른 걸로?

장비가 제일 없을 걸요? 이 세 분 중에 제일 없을

그렇죠. 이번에 전시하는 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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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 노순택 노순택은 대학에서 정치학을,대학원에서 사진학을 공부하다 멈췄다. 교수신문과 오마이뉴스 기자를 거쳐 다큐멘터리 웹진 이미지프레스(imagepress. net) 편집장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무크 <이미지프레스> 기획위원을 맡고 있다. 그의 주요 작업은 분단에 관한 현재적 기록이다. 한국전쟁의 과거 흔적뿐만 아니라, 거기서 파생되어 나온 현재의 사건들과 정황을 눈여겨보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폭력의 문제가 반세기전의 전쟁과 무관하지 않음을 필름에 담고자 한다. <좋은, 살인>(2010,

KT&G상상마당, 서울), <성실한 실성>(2010, 고은사진미술관, 부산), < 망각기계>(2012 , 학고재갤러리, 서울), <실성한 성실>(2012 , 동강사진박물관, 영월), <어부바>>(2013, 류가헌, 서울)등 개인전과 <Real DMZ project - from the

North>>(2013, 아트선재센터, 서울), <에르메스 미술상

3인전>(2013년, 아틀리에 에르메 스, 서울)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림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코리아나미술관, 518기념재단, 평화박물관, 한국미술은행, 독일 F.C. Gundlach

Collection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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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 쓴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얘기를...

그게 언어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 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죠.

지금 술이 너무 취해서 얼굴이 너무 빨개져서

기분 나쁘시겠다...

지금 하시는 일이 사진 작가... 처음 사진 찍었던 게 개인적으로 좀 궁금해요.

그렇긴 하지만 거기서 주민등록증의 발급 유무를 따지는 자리는 아니니까. 그 자리가.

모든 분들이 하셨는데 소개를...

얘기하자면 긴데...

언어의 도움을 받아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네. 저는 제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죠. 한국에서 모든 것들이 순탄하게 흘러가느냐를 살펴보면 한국도, 말로는 통하는지

이름 기억 안 나세요? 이름은 기억나죠. 이름은 노순택입니다.

그리고요? 이곳저곳 싸돌아다니는 일을 하고 있고요. 뭔가를 주으러 다닙니다.

복면을 쓰시니까 제가 자꾸 질문은 기억나십니까?

하물며 한국에서도 그러는데 외국에서 봉착하면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우리나라에서

그래서 어쩌면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간 거긴

그걸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나. 물론 어느 정도는

아무런 신분증이 없을 때 유일하게 발급받을

하지만 그러한 관심사가 어느 정도 반영이

시간이. 어느 정도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수 있는 게 주민등록증이거든요. 다른 신분증은

되어서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생각을 하고요. 또

는 있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 벗어나기 까지의

또 다른 신분증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하나는 그러한 세상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아니면

과정이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쉽지 않겠다.

여권을 만드려면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하는

객관적으로 보여준다고 여겨지는 사진이라는

것이고 운전면허증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고.

매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그리고

운전면허증도 마찬가지로 여권 같은 게 있어야

그 매체가, 그동안에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럴

해요.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거라고 여겼던 지점이 아니라는 걸 알고 한편으론

그런데 둘 다 잃어버리면 주민등록증을 발급

배신감을 느끼고 매체에 대해서. 실망이랄까요?

받아야겠죠. 사회를 살아가면서 내가 나라는 것을

근데 실망과 동시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이건

증명해야할 순간이 많이 있으니까.

착한 매체는 아니야.

신분증이라는 게 어떤 경우에는 도움이 될 수

그럼 그게 맨 처음에 얘기한 국가의 통제에 대한

그러니까 매력 있다?

있겠지만, 예를 들어 여권을 잃어버려서 재발급을

대항? 저항? 때문에 안 받은 거에 대한 한계 지점...

일이에요. 바라보면서 생각도 하고 유달리 눈에 그럼 여권으로 증명을 해야 하나요?

옵니다. 주워 올 수 없는 것들은 사진으로 찍고.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나를 둘러싼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관심이 있었어요.

있으니까.

들어오는 것들. 그런 것들을 가급적이면 주워

것 같아요. 여권을 잃어버리면 어떡하죠? 그래서 항상 여권하고 운전 면허증을

네, 저는 주민등록증은 없지만 여권은

이것저것 주으러 다니고 바라보는 게

길면 패스... 복면 쓰고 오래 계시면 불편하시니까.

모르겠지만 그게 순탄치 않은 경우가 많으니까.

선생님 주민등록증도 없었죠?

사실을 밝혀주세요. 이런 식으로 하고 싶어서...

자꾸 달라붙죠. 복면이 익숙해지는 게 쉽지 않은

그렇죠 어차피 외국에 나가서는 그 나라의

아니면 글로 묘사하고.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LA는 어떠셨어요?

받아야 한다. 그러면 신분증의 도움을 받아야

LA의 첫인상은 (2‘17“) 이었습니다. LA

만약 너무나 정직하고 착한 매체였다면

그렇죠. 그건 근본적으로 모든 타협이 없이

그렇게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러진 않았을 거라고

겠죠. 근데 외국에 나가서 제일 중요한 물건이

살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상징적으로

이에 10년 산 사람도 저렇게 걸리는 구나. 내가

여권이니까 그거 있으면 된다고 생각을 하고요.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열손가락 지문 채취를

아니라서 참 다행이다. 공항에서 걸렸을 때 제가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은 이유는 국가가 개인의

거부한 것이지 주민등록자체가 무용하다든지,

스트로그를 사용하시잖아요. 사용하시는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건, 미국은 처음이고

삶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반발감이 있어서

주민등록증을 받지 않았으니 또 다른 신분증도

스트로그나 성능? 이런 걸 알려주시면...

영어를 잘하지도 못해서 제가 그런 상황에

안 만들었던 건데 외국을 드나들때는 또 협조를

필요 없다든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죠. 다만

인공조명을 매번 쓰는 건 아니에요.

빠지면 굉장히 난감했을 것 같아요. 내가 왜

할 수밖에 없죠. 들어가는 게 목적이니까. 그럴

주민등록증 일체 갱신 사업이 취했던 형식에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가 빛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당신들한테 붙잡혀 있어야 하느냐 항의하는

때마다 아이러니를 느끼기도 해요. 출입국 심사를

문제 제기는 하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하다못해

대부분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빛이죠. 날씨가

것부터 시작해서 그 사람들이 묻는 질문에 대해서

받으면서 엉뚱하게 왜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작가, 예술가 이런 사람이 거기에 저항하기에

흐리다, 쨍쨍하다. 실내가 어둡다, 실내가 밝다.

해명하거나 설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겠구나.

않았느냐 질문을 받거든요. 그럴때는 냉소적으로

쉬운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을 해요. 비교적 다른

누군가가 역광에 서 있다, 누군가가 순광에 서

내가 당신들한테 해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어떻게

얘기하죠. 심사나 하시라고.

사람들에 비해서 행정적인 제재랄지 협조에

있다. 사진이 관찰의 매체라고 생각을 해요. 물론

대해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관찰에 더 많이 기반을 두지 않는 사진의 방식도

증명하지? 내가 나라는 걸 어떻게 증명해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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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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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데. 제가 찍는 사진은 관찰, 대상, 빛 이런

그런 것도 될 수 있죠. 내가 여기서 찍고

더군다가 이런 작업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찰도

것도 그렇게 즐거워하지도 않아요. 물론 만나면

게 제일 중요하죠. 그걸 수동적으로 받아드리는

있다는 걸 굳이 알려 준다기 보다는 결과적으로

포하되겠지만 기본적으로 먼저 타자를 바라보는

최선을 다 하려고 하죠. 기본적으로 타인이 나한테

경우도 많은데 능동적으로, 사실 빛만이 아니라

알게 되는 것이긴 하겠죠. 아, 덥다. 이 복면을

일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관계를 해야 하잖아요?

불친절한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저 스스로

어떤 프라임 워크라든지 어떤 순간을 취할 것인지

쓰게 된 경위라고 하자면 그런거죠. 국가라는 것이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타인의 한계라면

친절하려고 하죠. 양보할 수 있는 거면 양보를

이런 것도 사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거 거든요.

구성원들의 얼굴을 알고 싶어 하는데, 그냥 얼굴이

내맘대로 되지 않는 다는 거죠. 근데 그것은 타인의

하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고 상대방이 그걸

근데 빛이라고 해서 그렇지 말라는 법은 없고. 저

알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얼굴이 무슨 행동을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아요. 타인이 타인인거죠.

원한다면 물론 그러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항상

같은 경우는 그걸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

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거죠. 근데 단지 알고 싶은

만약 타인이 내맘대로 된다면 내가 굳이 타인에

그걸 원해서 하느냐. 저는 그런 갈등들을 피하기

작업을 많이 했는데 사실 양으로 치면 그렇지 않은

게 아니라, 이 사람이 국가에 어떤 반대되는 행동을

대한 작업을 왜 하며 거기에 무슨 매력을 느낄

위해서 회피하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작업이 훨씬 많죠. 그런 걸 적극적으로 하다 보니까

하는지 그걸 알아두고 캡쳐하고 그걸 가지고

수 있겠어요. 사실은 그래서 타인에 관한 작업을

나중에 이것이 인계점을 넘어가면 폭발해 버린다고

항상 플래쉬를 쓴다든지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사법적인 제재를 가지려고 하는 그런 움직임이

하면서 타인에 대해서 스트레스 받고 타인의

해야하나. 성격적으로 좋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

플래쉬를 적극적으로 쓰는 이유는, 제가 봤던

있는 상황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누굴 해하고

마음을 짐작하면서 힘들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같아요. 근데 다만, 상대방이 내 작업의 대상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하고 내가 오해를 하기도 하고.

해야 할까요? 그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보호하는 방면으로 복면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걸

거기서 지치지 않는 방법이란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분들한테는 더더욱 예의를 갖추고 싶죠.

현장에 가보면 현장 자체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마치 테러리즘처럼 국가가 그걸 처벌하겠다고

거기서 지친다, 내지는 심리적인 힘겨움. 그런

사람으로서 예의라기보다는 작업으로서 예의를

세계에서 늘상 일어나는 일이기도 한데 굉장히

이야기를 하고 있고. 거기에 대한 하나의 재밌는

것들을 벗어날 수 있는 작업은 없는 것 같아요.

갖추고 싶어요. 그분이 뭘 믿고 저한테 얼굴을

낯설게 느껴지기도 해요. 현실 속에서 발견한

반발이라고 할까요? 그런다하기에 저도. LA

초현실? 현실이 드러내는 비현실? 그런 순간들을

에서라도. 사막에서 주운 빵 봉지라도 뒤집어

단도직입적으로 선생님한테 딱 묻고 싶었던 질문은

당장 뭔가를 알려야 하는 분들이거든요. 예를 들면

제가 느꼈던 비현실적인 장면으로 재구성이라고

쓰는... 하나의 연대로써. 물론 예술이라는 것은

그거였어요. 계속 사진을 찍을 것인가 묻고 싶었던

대추리, 용산, 강정마을.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해야 할까요. 재현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때론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전시키는 역할도 있다고

게, 요즘에 든 생각은 지친다라는 게 과정에서

약자이고 자신의 처지를 누군가에게 호소하고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게 인공조명인

생각을 해요. 한편으론 개별자들을 하나하나

온다고 한다면 다큐멘터리나 영상작업을 했을 때

싶은. 그러나 매스미디어. 강한 힘을 가진 것들은

라이팅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더 배가 되더라고요.

연대를 시켜주는 역할도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거기서 조금이라도 리액션이 있으면. 돈을 받는

그분들의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고. 그러니까 저

아무도 연출하지 않은 장면인데 마치 정교하게

부분들도 소홀히 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복면을

게 아니라 내가 이걸 했으니까 뭔가가 왔다는 게

같은 어중이떠중이 사진가, 작은 매체들의 기자들.

연출해 놓은. 심지어 빛까지. 그래서 연극의 한

쓰게 됐습니다.

생기면서 다음으로 가고 그러는데. 너무 이게...

이런 사람들한테 얘기를 끊임없이 들려주. 그

나는 영향을 주는 게 없고. 그런 게 반복이 되면

사람들은 당연히 내 얘기를 잘 전달해 줄 거야.

계속 작업을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경제적으로

내 얘기를 세상에 알려서 내 고통을 조금이라도

힘들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드니까... 혹시

줄여 줄 거란 믿음이 있잖아요. 그 역할은 잘

선생님도 비슷하게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는지가

하든 못 하든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제가 매체와 같이 일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죽이기 위해서 복면을 �다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회의 현장이랄까요? 현실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것들을 중계해주는 거라고 여겨지는데. 그런

장면 같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걸 만드는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빛을 좀 더 적극적으로

많이 덥나요?

사용하게 됐죠.

벗겠습니다. 이게 기름종이에요.

찍게 하고 허락해 주시겠어요. 그런 분들은 지금

저는 되게 궁금했던 게 다큐멘터리 찍을 때 빨간

완전 공기가 차단되어 있어서 너무 더워서... 방금

불 들어오는 걸 끄고 찍거든요. 내가 찍고 있는지

말씀하신 거에서 연계해서 질문 드리고 싶은 거죠.

안 찍고 있는지 상대방을 굳이 속인다는 개념보다

제가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 작업 계속 하면

작업으로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을거다라는

할까요. 긴급한 길거리 전시를 같이 만든다든지.

빨간 불이 들어와 있으면 아무래도 상대가 더

솔직히 저도 그렇고. 약간 지치거든요. 지치지 않는

믿음을 가졌던 적도 있었겠지만 비교적 그런

포스터, 찌라시, 누군가의 구명활동. 이런 것들이

긴장하게 되고. 근데 약간 선생님이 스트로그를

원동력, 혹은 지치고 계신 건지.

것들을 빨리 체념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사실

제 본 작업이 아닐텐데, 그런 것들을 외면하면서

사람들을 그렇게 믿지도 않고 사람들을 만나는

작업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더

쓰는 방식은 내가 여기서 너를 찍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지치지 않고 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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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안 할 수는 없겠죠. 저는 제

이유 중 하나이고. 때로는 긴급한 연대라고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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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주의자라서가 아니라. 더 약았기 때문이죠.

포지션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활동가로서의 좌표? 저널리스트로서의 좌표? 이런 것들이

작가들한테 특별히 물어볼 수 없는 거라서.

좋은 사람일거야. 내지는 나는 아무것도 한 게

모르겠어요. 저도 사람이 닳아서 그런 것

없네. 반성. 저는 이런 계몽이나 교훈이라든가

그럼 그 약은 걸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아까

제가 작가로서의 좌표를 유지하는 것에 굉장히

같기도 한데. 저는 사실 근본주의자는 아니거든요.

이런 걸 던져주고 싶지는 않아요. 작업에서. 그냥

본 작업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거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최종적으로 과정에

굉장히 타협주의자고요. 개량주의자고. 예전에는

이게 뭐지? 에를 들어 김형주 감독께서 느꼈던

구분점이 있나요?

담겨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런

그런 생각도 한 적 있죠. 평택 대추리에 대한

불편함을 그 자리에서 와인을 먹던 관객도 느꼈을

상황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랄지 그런

작업을 한 적 있는데 그걸 근사한 공간에 걸고.

수도 있어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거

이어서 대답하자면 저는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사람들과 오래 만나다보니까 인간적으로

제 개인전 같은 경우에는 오프닝을 나름대로

뭔가 이상하다. 그러면서 똑같은 질문을 작가한테

대단한 희망이랄지 이런 걸 갖고 있지는 않지만. 저

친해지거나 그 친구들도 저한테 더 요구하는

통제를 할 수 있잖아요. 요청을 한다든가. 근데

던지고 싶었을 지도 모르죠. 너는 왜 이딴 걸 여기

사람을 긴급하게 연대하기 위해서 라기 보단 정말

것들이 있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왜 작가인데

기획전에서는 제가 어떻게 해요. 케이터링을

갖고 왔니. 왜 내 맘을 불편하게 하니. 그렇지만

내가 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이러고 있을까... 내가 활동가인가? 그랬는데

어떻게 하라든가. 예를 들어 얄읏한 공 앞에서

이 벽이 불편하지 않은 것들의 전유공간인가? 어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활동하고 있을 땐

사람들이 즐겁게 와인을 마신다든가 예쁘다든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관객도 그렇게 생각할

활동가고. 글을 쓰고 있을 때는 저널리스트이고.

이런 얘기를 하면 한편으론 그걸 또 관찰하죠.

것이고 저 역시도 저 스스로에게 물어봤죠.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뭔가를 하고 있을 때는

그러나 그걸 바라보면서 와인을 먹는 사람들이

저는 다른 것들을, 많은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싶어요. 미디어를 통해서 충분히 알릴 수 있는

속된 말로 작가고. 근데 이런 작업이 그런 과정을

실제로 문제가 벌어졌을 때 어떤 생각을 갖고

많은 것들에 관심이 있어요. 동물에 관한 것이,

상황이거든요. 제가 다루는 사건들은. 근데 저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이

있을까에 대해선 생각을 하지만. 지금 그 자리에서

식물에 관한 것이건 그런 것에 관심이 많아서

매체에서 기자 생활을 해봤지만 미디어가 모든

있었기에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해요. 왜냐면

그 사람이 와인을 먹으면서 본 다는 걸 제가

때로는 생각이 깊어지면 작업을 하기도 하는데

것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이나 아닐뿐더러

저 스스로 그런 알리바이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비난할 건 아니거든요. 저는 저 개인적으론 한동안

아무래도 발표의 공간이 생기면 주된 작업을

제가 보고 싶은 건 더더욱 안보여주거든요.

더 보여주고 싶은 대로 보여줄 수 있고 그런 게

불편했었죠.

전시를 하게 되죠. 특별히 찍어서 동물에 관한

그런 상황에서 공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나

아닐까.

명확한 구분점은 없죠. 아까 말씀하신 질문에

어떤 걸 하고 싶으세요? 그냥 그런 게 끌려요. 그런 현장을 보고

비공식적으로 보여주는 것들. 아니면 상황에

전시니까 동물에 대한 작업을 내달라고 하지 저는 관객의 입장에서 봤을 땐 되게 이상하게

않는 이상. 전시를 기획하는 측면에서도 보다

보였어요.

알려져 있는 측면에서 부탁을 하기 마련이고. 저도

정점이 있다면 그 정점의 전과 후를 같이 보고

그런 부분도 물어보고 싶었어요. 물어보기 무례한

싶은데 미디어는 그런 것들을 보여주지 않죠.

질문일 수도 있지만 포지션에 대한 거. 제가 베니스

대부분 사건의 정점을 보여주니까. 그런 관점에서

갔을 때도 옆에서 말했었거든요. 이렇게 다 같이

논바닥에서 험하게 활동도 같이 하고 그러면서

내보이겠죠. 그러면서 나는 이런 작업도 있는데.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들과 보여주지 않는 것들.

밥 먹는 거 안 어울리시는 것 같다...그래서 굳이

사진도 찍고. 그러다가 이런 분들의 삶과는 굉장히

나의 갈등을 다룬 작업은 길바닥 빨래줄 전시는

그 상황에서 유달리 내 시선을 더 끄는 것들. 그런

작업하는 이유가 무어냐고 여쭤봤을 때 선생님이

무관해 보이는 공간에다가 펼쳐 보이는 그런

어울리지만 이런 전시는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까

것들을 보고 싶어요.

예쁜 거 좋아해요. 그랬어요...

것들에서 오는 괴리감을 아마 더 견디기 힘들어서

나는 그동안 찍은 꽃사진을 여기 걸어야 겠다.

같이 찌라시를 더 열심히 만든다든지. 언론 기고를

굉장히 유치한 문제이지만 그게 당사자가 되면

거에 대한 생각과 추구가 있죠. 그것이 사회의

열심히 해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금 더

유치하지가 않더라고요. 왜냐면 남의 사랑들은 다

첨예한 갈등을 다룰 수 없다는 그런 편견이야말로

느낌표? 마침표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유치하잖아요. 그렇지만 당사자의 사랑은 힘겹고

편견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오히려 작업 자체에서는 느낌표를 보여주고 싶지

애절하잖아요. 그것처럼 이게 저의 고민일때는

않아요. 작업이 드러날 때는. 늙은 농부들이 여기서

간단치 않은 고민이죠. 그리고 그런 고민이 완전히

당연히 미적인 거, 역으로 추한 거 이런 그 보고 싶은 욕망이 계속 작업 할 수 있게 해주는 그렇죠. 저는 제 욕망에 충실한 것이겠죠. 그걸 대의명분으로 포장할 일이 전혀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대의명분으로 포장하고 싶지

나라는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가. 대추리의

만약 너에게 선택을 하라고 하면 그런 작업을

않고 다만 제 작업을 표혀하는 방법에서 제가

그런데 환경과 화이트 큐브가 연결되는 지점은

넘어져서 엎드려 울고 있어. 너무 마음 아프다.

사라지진 않아요. 예를 들어 베니스든, LA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최종적으론 작가의

궁금하긴 해요. 어떻게 연결되는가. 다른

내지는 이 국가는 나빠. 내지는 이 걸 찍은 작가는

공간이동? 현장이동에 대한 간격이 큰 거 같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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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요.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에도 그런 얘기가

일을 진행 할 땐 우선순위를 둘 수 없는

있는거죠. 이런 것들이 거리에서 빨랫줄에서 속된

제가 흥미롭게 본 케이스가 있는데

나와요. 연평도에서 전투식량 받아먹으면서 덜덜

거고요. 빨리 진행 할 수 있는 걸 먼저 하는 거고요.

말로 좌파적인 공간에서 빨갱이들의 공간에서만

첨바왐바라는 노래 그룹이 있어요. 영국에서

떨면서 작업하다가 순간 공간이동해서 말레이시아

작업을 할 땐 작업 자체와 작업을 발표하는 일은

전시되어야 하느냐.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상을 받았는데 시상하는 사람이 부총리였나

호텔에서 워크샵하고. 그러면서 연평도 소식

또 다른 계획을 수립하는 일이라서 자꾸자꾸

오히려 아주 비정치적이라고 생각되는 공간에서

노동부장관인가 그런데 상을 받으러 나가서 얼음

계속 궁금해서 리서치를 하고. 그럴 때 이런

미뤄두는 일이기도 해요. 미루고 싶기도하고.

전시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바가지를 뒤집어 씌웠대요. 당신이 노동자들의

공간이동. 심리이동이라는 게 뭘까. 그게 한편으론

작년에는 제가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전시들이,

흥미롭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있긴 하죠. 한편으론

단체전이 아니라 개인전 정도의 에너지가

저는 이상하다고 생각은 안 하는데 어려운 건

있는데 당신을 지지했던 리버풀 노동자들이

미안한 마음이랄까, 그런 것들이 들기도 하고.

들어가야하는 전시가 연달아 벌어졌기 때문에

연분홍 치마가 sjm 문화재단이라는 곳에서

처한 상황을 돌이켜 봐라.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예를 들면 에르메스 미술상 전시도 그러거니와

다큐멘터리 제작 지원으로 1억 5천 정도 지원을

저는 굉장히 다양한 차원의 과정에서 발언이

그건 책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두꺼운 책을

받았단 말이에요. 근데 그 재단이 인권탄압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첫 번째는 첨바왐바가 상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한참 걸릴거라고

되게 유명한 그런 데였고. 근데 누군가는 그냥 잘

거절하고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죠. 그렇다고 그

일 인거죠.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포지션이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전시가 확정 되면서

만들면 된다고. 했는데. 근데 저는 그것 자체가

메시지가 나쁜거냐. 메시지의 파급력이 작은 거냐

활동하는 것, 글을 쓰는 저널리즘에 관한 것,

전시에 맞춰서 만들어야 하는 절박함이 생겼죠.

거절했어야 한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할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을 해요.

하나는 작가인데. 나머지 후자 두 개는 계획할

반년은 전시를 준비한다고 핫식스로 맨날 새벽까지

복잡한 문제인 것 같아요. 쉽지 않은 문제긴 한 것

그리고 상을 받으러 시상식 까진 간 거죠. 가서

수도 있고 예견할 수도 있는 일인데 맨 처음에

일을 하고. 그랬고. 작년에는 어쩌다가 보니까

같아요. 제도 안에서 제도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그걸 엎은 거고. 저는 솔직히 그걸 아무 것도 없이

언급한거는 전혀 예상하거나 예견할 수 없는

올해의 작가상 전시 때문에. 거긴 공간적으로

항상 오는 문제인 것 같은데

수상 소감으로 얘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일이기 때문에 근데 그런 일이 차지하는 비중

더 큰 전시였기 때문에 제가 의도할 수 없는

내지는 시간적인 비중이 굉장히 커요. 그래서

전시잖아요.

내년도 계획 한번만 말씀 해주세요. 내년 계획은... 글쎄요. 제가 계획 할 수 없는

엉뚱한 일에만 종일 매달리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표를 받아서 정치의 입문을 하고 승승장구 하고

그렇죠. 근데 저는 바깥 영역에서 비판적인

그것이 훨씬 더 강력한 방식으로도 할 수 있었을

생각을 갖고 있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거라고 생각 하거든요. 여러 가지 과정 속에서

안으로 들어가기를 때론 거절하고. 근데 모든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 있는데 어떤 순간을 내가

근데 그게 엉뚱한 일은 아니지만, 뭐라고 해야

이건 제 생각은 아닌데 제 지인이 에르메스에

사람이 그래야만 하는 가를 봤을 땐 또 그렇지

취할 것인가. 그건 저마다 다를 것 같아요. 예를

할까요. 긴급하게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 일이랄지,

너무 안 어울린다는 얘기를... 가서 보니까 연평도

않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 안에서 들어가서 자기

들면 거기선 전혀 내색을 안 하고 상금을 가지고

예를 들어 강정마을 투쟁이 삼천일을 넘어가면서

얘기를 하고 있고. 상을 받으시면 에르메스

나름에 목소리를 냈을 때 참 소중한 사람이라는

노동에 대한 강력한 노래를 발표할 수도 있었을

백서를 만들게 되는데 그런 일은 갑작스럽게

명품백을 받는 건가 아니러니하면서 웃겼다고 얘길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런 걸 생각해보면 야, 너는

거고. 그 생각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 언급은

요청이 되거든요. 그런 것들은... 시간 없이 일을

해줘서. 근데 이게 아까 얘기하고 맞는 지점이...

저기서 그러면서. 그런 말은 누구라도 하겠다.

가능하지만 저는 그 선택에 대한 격려와 인정이

그렇진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 공간일수록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한편으론, 자본은

발언하지 않았을 때 안락하고 편안할 수 있다는

굉장히 쿨하구나. 그런 것도 느꼈어요. 오히려

걸 누구보다 잘 알텐데. 물론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정치적으로 조금은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활동가들이 가장 많은 탄압을 받고 그러지만 안

공간들일수록 탄압에 대한 예상? 들을 할 수밖에

쪽 에서 연대를 하는 사람들이 그냥 장식으로

없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더 조심을 하고.

요청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시간적인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노순택이 에르메스를 해?

긴급함을 알고 있으니까 그런 일에 확 매달리게 되는 경우가 있죠. 지금은 노동자의 집이라고 하는 앵벌이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LA오기 전까지는

왜 거절을 안했냐는 얘기는...

거기에 온종일 매달렸어요. 그런 일들은 늘상 있을

그런 얘기는 듣지 않았고 상을 줬는데 거절을

것 같고. 계획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계획을 덜

하는 것도 웃기죠. 저는 그런 선택을 할 수도

그런 발언을 하느냐, 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걱정을 하고. 그런데 오히려 이 에르메스란 공간은

잡고 싶은 게 제 마음이에요.

있다고 생각해요. 존중받을 수 있는 선택이고.

않거든요.

그냥 하고 싶은 데로 하라고. 다만 전시를 어떻게 할지만 사전에 통지를 해주면. 일정 맞춰주고.

근데 저에게 그 일단 노미네이트가 돼서 인터뷰를 우선순위가 있다고 볼 순 없는 거군요.

할 수 있겠냐고 했을 때 아까와 비슷한 고민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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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으로 하는 발언이라도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정치적인 문제를 다룬다고 할지라도 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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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하게 반응하거나 그걸 표출하거나 그런 것들은

몸에 배어있기도 하고. 상업 영화 하면서 모든

당사자들이 많이 오셨어요. 저같은 경우는 전시를

들어주는 사진을 많이 보셨을 텐데 이 사람이 편을

없었어요.

게 세팅되면서 찍는 것도 몸에 배어 있지만.

보러오는 가족, 지인 이런 분들은 대부분 연락을

들어주는 건지 석연찮은 사진들을 국립미술관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찍혀지는 결과물도

하고 오시는데 알아서 조용히 보고 가세요. 물론

작가가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건 처음이었다고

중요하겠지만...퍼포머스로써 그런 걸. 제가

보면 좋겠지만 연락이 온다고 전시장 쪼르르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더군다나 자기가 찍혀있거나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 표정과 선생님의 표정은

가서 설명해주고 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자기가 아는 사람들이 찍혀있는 거예요. 그래서

되게 다르거든요.

걸리고 힘들어요. 감정노동이거든요. 상대방이

그 경험들에 대해서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얘기를

나를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기도 하는게 쉽지

하는데 이 경험 자체는 기뻤거나 슬펐거나를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자본이 쿨하다는 게 그게 더 비관적인 생각일수도 있죠.

싸우기 힘든 상대랑 싸우는 데 상대가 멋있기까지

그리고 그 이듬해에 국립현대에서 전시를

한 거야. 싸움도 잘하고 잘생기고 돈도 많고.

했는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최첨단 명품

않아요. 그래서 그런 만남은 가급적 회피했지만

떠나서 뭔가를 던저준다고 생각을 하긴 했죠.

에티켓도 있고. 내년 계획을 물어보다가 그렇게

브랜드에서 운영하는 상에서 노미네이트 되어서

찍혀있는 당사자들에게는 꼭 연락을 하시라고,

생각할 바를. 저 자신에게도. 그 당사자에게도.

됐네요.

전시를 하고 그 이듬해에 국가가 운영하는

제가 다 설명을 해드리겠다고. 그래서 한번은

정점의 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상 전시를 하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같이 활동하는 인권

분들의 작업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을

게 자본권력과 정치권력이 직접적으로 운영하는

운동가들하고 같이 전시를 보러 오셨어요. 그

담고 있는 작업들이었고. 제 작업이 상대적으로

공간에서 자본과 정치가 직접적으로 다루지

전시를 하는 동안에 가장 소중한 관객이었고.

첫 번째 특성은 쉽다. 사진이 쉽잖아요. 기계

지금 당장에 가깝고. 첨예하게 뭔가가 부딪히고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하는 것, 나름 저 스스로는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이 있었죠. 그분들은 아직도

의존적이고 요즘에는 아이폰이 다 알아서 해주는

있는 문제들을 다룬거라서 다른 지점에 시선을

그것에 대해서 날카롭게 전시를 보여주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거리에 있기도 하고 설령

세상이고. 잘 못 찍은 것도 보정이 되고. 그래서

끌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오히려 좋았어요. 강남에

싶었지만 한편으론 내 작업이 그만큼 순치가 돼서

그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살아오면서

내일부터 소설가가 될래. 화가가 될래. 조각

한복판에서 이런 곳에서 하니까. 다른 공간에서

너 따위 정도는 수용할 수 있어... 이런 생각도

가장 아팠던 순간. 그런 순간중에 하나였던 거

같은 경우는 언감생심 꿈도 못꾸는데 내일부터

했으면 다른 제재, 그런 게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했고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곳이 너 정도는

거든요. 근데 그런 순간들이 누군가가 관람하는

사진가가 될래, 사진 좀 찍어봐야 겠어. 그런

에르메스에서 이런 걸 하니까 오히려 압박을 가할

수용할 수 있다고 해서 나는 수용되어버렸네. 저

근사한 공간에 소위 작품으로 걸려있는 걸 볼 때

결심은 누구나 하는 거죠. 그리고 두 번째 특성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아무런 그런 게

사람들한테 더 이상 불편하지 않은가보다. 이런

어떤 비감 같은 게 들지 않을까. 특히 용산 참사

꼽자면 사진이 쉬운데 쉽지만은 않다는 거죠.

없더라고요.

작업을... 이미 들어가 버렸네. 이런 것보다도.

같은 경우는 가족들이 돌아가셨는데. 그분들은

어려운 것만도 아니지만 쉽지만도 않은 거예요.

저의 케이스가 또 일상화 된 케이스는 아니거든요.

괴물같이 봤을 거고. 다른 관객들은 추상화 같애,

그래서 사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해

이런 케이스가 일상화 된다면 더 좋을 수 있고.

당사자들이 봤을 때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카메라가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간에

저 역시 이런 것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하는

근데 다들 오셔서 축하해 주시고. 축하를 받기가

타자에 대한 생각을 하는 거고. 대상이 나라고

것들을 관철시키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을 해요.

선례들을 꾸준히 만들어 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민망한. 그래서 더 열심히 설명을 해드렸는데

할지라도 대상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인데 그

조금 더 정교해야 할텐데. 잘 되고 있는지는....

하고 있죠. 그리고 어쨌든 간에 그런 공간도

그게 좋건 싫건 간에 저한테는 좋았다고 말씀을

대상에 대한 파악, 맥락, 의미는 아이폰이 해주지

소중하지만 당연히 바깥에 제가 사진에 담는

하시고 고맙다고 표현을 하셨는데 그렇다고

않는 다는 거죠. 내 몫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저는 밤에 자료조사까지는 아니고 찾아 봤는데

그런 상황들이 벌어지는 시공간들과 지금 순간의

마음 한 귀퉁이에 그런 마음조차 없었을 거라고

사진이 쉽지는 않아요. 아까 뭐 스트로그를 치고

저는 선생님이 사진 찍을 때 스트로그를 쓰는

연대를 모색하는 일들도 작업을 하는 이상은.

생각을 하진 않아요. 제 전시에 오신 소중한

이런 것들을 잔기술 같은 거죠. 그런 건 특별한

것 조차도 퍼포먼스... 퍼포먼스라는 말이

여전히 소중할, 무엇이 더 소중하고 소중하지

분들이었고. 그런 마음이고 저런 마음이건 간에

감각을 같고 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없어도 몇 달

되게 이상하긴 하지만 찍혀진 결과보다 찍는

않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동등하게 소중한

그런 분들에게도 굉장히 특이한 경험이었다는

훈련하면 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버스를 탈 때

다는 게...그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저는

것 같아요. 작년에 올해의 작가상 전시할 때는

거죠. 항상 우리가 찍힌 사진들은 찌라시에서 보는

버스 뒷자석에 서 있는 문구 있잖아요. 일주일만

다큐멘터리하면서 몰래 찍는 거, 숨어서 찍는 게

굉장히 많은 공간이 담겨있는 전시였기 때문에

사진이고. 찌라시에서도 직접적으로 우리 편을

다니면 악필 교정해드립니다. 그런 것처럼. 정말

그래서 아무튼 에르메스 공간에서 다른

선생님의 퍼포먼스 적 능력이 보이는데요. 저도 그것을 하나의 퍼포먼스라고 보면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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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것 같아요. 그렇죠. 제가 사진의 두 가지 특성을 꼽으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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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한달 기술적인 테크닉을 배우면 취할 수

찾아가기 위해서 서로 정보를 나눠야 하거나 차를

없는 테크닉은 없는 것 같아요.

타야 하거나 거기서 몇날 며칠을 동숙하거나 같이 밥을 먹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니까 그리고 양쪽의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카메라 수업 나가면

오해. 시위대로부터 경찰이 아니냐는 오해를

한학기만에 모든 걸 다 알려줘서

받거나 아니면 경찰로부터 시위대 편이라는 오해를

테크닉이 해주지 못하는 것. 대상에 대한

받고. 때로는 물리적인 공격을 받기도 하니까 그럴

건 다른 것에 힘을 빌어햐 하는데 그건 책을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똑같은 일을 하는

읽는다거나 무엇을 찾아다닌 다거나 생각을

사람밖에 없거든요.

계속 해야한다든지 적지 않은 시간과 딱히 누군가가 제시해주는 방법론이라는 게 없어요.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작업의 결과가

그런 부분들이 작업이고 사진이 의미를 갖게

아니라 배신감이 들 때도 있잖아요.

되는 부분인데 그건 쉽지가 않기 때문에. 사진이

현장에 똑같이 있다고 해서 다 좋은 건

쉬우면서도 쉽지만은 않은 매체가 되는 것이죠.

아니죠.

동시대에 같이 일하는 사진 작가들 작업은 많이

저는 그래서 뭔가 딱 잘라서 국제시장 같은 영화를

보시나요?

보면 배신감이 하늘을 찔러요. 이렇게 많은 예산을

아무래도 저도 사진하는 사람이니까 사진

들여서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 영화에 이렇게

작업을 열심히 보죠. 물론 사진에만 해당하는 건

얘기를 쓰는 건 정말 책임감이 없다. 같은 판에 있다고 해서. 그럴 순 없다고

아니지만 시작적인 표현이라는 데 있어서 그리고 많은 도움을 받죠. 다른 장르의 작업을 보면서도.

당연히 생각을 하고요. 근데 저도 나이를 먹고 보수화 되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이 코딱지만한

다른 맥락의 작업들도 있는 것 같아서.

판에서. 날카롭게 의견을 표명해야 하는 상황이면

그렇죠. 그렇지만 아무래도 방법론을

당연히 그렇게 하겠죠. 그런데 사사건건 의견을

사진으로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작업을 더 유심히

표명하고 누군가를 공격하고 싶진 않아요. 차라리

보고요. 국내외 작가들 망라해서 보게 되는 것

옆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같고. 어떤 경우에는 이걸 이렇게 했어야 했을까

도모하고 같이 열심히 하는 게 훨씬 스트레스도 덜

의문을 갖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너무

받고.

대단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고. 왜 자꾸 보수화 됐다고 하세요... 오늘 인터뷰는 그 작가는 누구에요? 최근에

시간이 너무 늦어서

글쎄요. 항상 있는 감정은 아니니까. 근데 비교적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사람들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죠. 현장이라고 하는 곳은 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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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민 문형민 패서디나 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을 순수미술 전공으로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하나의 장르에 제한되어 있지 않은 문형민 작가의 작업은 서로 다른 형식 안에서 펼쳐지며 작가 고유의 작품 성향을 유지시킨다. 작가는 각각의 요소들 안에서 균형을 잘 잡아가는데, 이는 작가가 ‘형식과 내용의 모순’ 그리고 ‘블랙 유머’라는 공통의 기본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dumb

project>(서미앤투스갤러리, 서울, 2008), 갤러리쌈지 (2005), 성곡미술관(2004)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그룹전으로는 <SEMA 청년 2012 _열두 개의 방을 위한 열두 개의 이벤트>(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2), <Enormous Eyes> ( The Guild Gallery, 뭄바이, 2010), <Rosonance Green Korea - Climate Change in the Bosom of Culture>(토탈미술관, 서울, 2009), <The 3rd Nanjing Triennial>(난징, 중국, 2008), <City_Net Asia>(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7) 등에 참여하였다. 현재 경기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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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작업하는 사람이고 문형민이라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어려운 작가라는 느낌이

누군가가 나보다 더 완성도 있게 만들 수 있다면

근데 모든 전시장에 가서 추상화처럼 보이는데

있어요.

누군가를 쓰는 게 낫다고 생각을 하고. 내용적인

통계를 이용한 작업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할

면 같은 것도 표면과 내용이 모순되게 한다든가.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관객들이나 보는 사람이

왜냐면 표면만 읽고 돌아가시는 분과 작업의

들어왔을 때 내 작업 봐달라고 하는 것보다

노순택 작가님이나 김도균 작가님 같은 경우에는

내용을 읽어보면 전혀 반대의 얘기를 하고

표면적으로 완벽했을 때 한명이라도 더 쳐다 볼

착착착착 이런 게 있거든요? 근데 좀 전에

있다든가. 아니면 한 얘기를 하는 작업은 별로

거고. 표면적인 완성도가 있어야 내용이 모순으로

애기하신 것처럼 펼쳐지는 게 연대기가 구성이

안 하거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얘기를 할 수

갔을 때 더 극에서 극으로 간다고 생각을 해서.

안되는... 정리가 안되서 어렵다는 느낌이...

있다든가.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선 관심을 갖고

못 그린 추상화인데 모순으로 가는 것보다. 이건

공부를 하지만 취급을 하지 않고. 어떤 주제가

굉장히 잘 만든 추상화인데. 미니멀 아트로 했을

때마다 전부 다른 사람 개인전 같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나면 즉흥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리서치부터

때. 그 간극이 더 넓어진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예전 작업 꺼내서 한 개인전이고. 신작은 하나 정도

까지 작가들은 도록도 매 전시마다 내고 그러는데

어떤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이 문제는 어디서

그래서 표면에 신경을 굉장히 많이 써요.

밖에 없었고. 2014년에 했던 건 하나는 베를린에서

나는 그런 걸 안 하는 이유가 나는 한 작업, 한

왔고 이런 걸 파악을 하고. 리서치 페이퍼 쓰듯이

했었고 하나는 싱가폴에서 했었고. 한국에서는

작업 중요한 것 보다 여러 작업이 모였을 때 한

들어가는 게 내 작업이라. 그런 규칙도 있어요.

실질적으로 7년 째 개인전을 안 하고 있어요.

작업, 프로젝트를 만드는 게 잡지로 보면 한 기획,

어느 작가들은 어느 날 생각나면 종이에 막 써서

한 페이지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전체를 만드는

하시는데 방법이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그 방법

했지만 나는 누군가 더 잘하면 더 잘하는 사람을

것보다 모든 페이지가 다 들어갔을 때 책을 만들면

자체를 잘 하지도 못 할뿐더러... 어떤 사람들은 시

쓰고 싶은데. 실제로 손으로 하는 거에는 잘하는

이런 방향이 되겠구나를 보여주는 걸 지향을 하다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추리소설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이 너무 많아. 나는 아직 그 사람들을 쓰지

경력도 아니고 맨 초기 작업부터해서 한 개 씩

보니. 아직 책이 나올 정도의 프로젝트는 안 됐다고

나는 추리소설에 더 가깝게 움직이고 있다고...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손으로

꺼내서 걸어놓고 전시라고 하면 개인전이든

생각을 해요. 지금 보시는 분들은 과정을 보시는

쉽게 얘기하면.

만든 걸 포기한 이유가 손을 다친 이유도 있지만,

그룹전이든 방향이 있거나 의견이 있거나 이런

거니까.

합니다.

나는 오히려 쉽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딱 보니까 여기 오신 분들 개인전을 가본 적이 없어서. 개인전을 해본 적이 없어요. 7년 째 안 하고 있어.

포트폴리오에 보면 있던데요? 2015년 해리오?

그게 초반엔 몰랐는데 사람들이 개인전 할

그건 개인전이라고 하기 보다는 갤러리에서

예전 작업 꺼내서 한 건 개인전이 아니에요? 아직 회고전이라고 하기엔 나이도 아니고

뭐가 있어야 되는데 뭔가를 늘어놓는 게 전시는 아니니까. 갤러리랑도 방향 없이 진행을 한 거니까.

지금까지는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책 같은..

그걸 굳이. 창고에 있는 스튜디오 비짓 정도로

나는 알고 있죠, 근데 페이지 페이지가

완성적인 디테일에 대한 강박 같은 게 나는 강박이라고 생각 안 하는 게 아까도 얘기

가볍게 다쳤지만 피로도가 빨리 와서. 머릿속에서 제작 방식에서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제가 느낀

완성되고 샘플작업이 나오고 첫 작업이 나올

걸 얘기하면 키워드로 빡세다. 모든 작가들이

경우는 내 작업 같은 경우는 프로젝트 거든요?

빡세겠죠. 근데 제가 느껴지는 건 현대인의 노동...

그래서 액자를 어떻게 할 거냐, 바니쉬를 어떻게 할

생각하면... 오픈 스튜디오 정도로. 굳이 나는 하고

허술하게 만든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한 페이지,

컴퓨터가 해도 되는 걸 사람이 굳이 하는 바람에

거냐, 마감을 어떻게 할 거냐가 완성 된 상태에서

싶지 않았으나.

한 페이지가 복선을 까는 거거든요. 복선을 깔고

빡세진...

손이 그걸 1년이고 2년이고 하고 있다는 건 좀

있는 거죠. 다르게 가는 부분도 있지만 비슷한

의미가 없지 않나. 그러니까 디자이너가 디자인

그건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쉽게

어쨌든 개인전은 안 봤지만 정보랍시고 이렇게

부분도 있고 공통적으로 가는 부분은 꼭 있어요.

만들 수 있어요. 쉽게 만들 수 있는데, 쉬운 게

하고 모델링 다 깎고 첫 시제품 봤는데 디자이너가

모았는데 9object가 첫 작업이라고 보면

왜냐면 작업을 하는 경우에는 즉흥적으로 하는

보기가 더 좋으면 쉽게 만드는데 그게 아니란

그걸 공장에서 같이 만들고 있진 않잖아요.

경우는 없고 내가 정해놓은 룰들이 있거든요.

생각이 들었을 때는 굳이 쉽게 갈 필요가 없다고

머릿속에서도 끝나고 구현도 끝났는데 세 번째

생각하는 게 하나 있고. 또 하나는 나는 표면을

작업이 나와도 비슷한 경우와 비슷한 마감과...

보고 사람들이 내 작업을 보고 오해를 하길 바랄

만약 추상미술을 한다거나 자기가 직접 퍼포먼스를

때도 많거든. 만약에 완전 추상화처럼 보이는데

한다든가, 바디페인팅을 한다든가 직접 하는

내용을 보면 통계를 이용해서 만든 작업이라든가.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겠지만 나는 그런 작업이

개인전으로는 첫 작업인데 항상 여러 가지 작업을 펼쳐놓고 순서가 가는 대로 먼저 하기 때문에 첫 번째 개인전은 맞는데 두 번째, 세 번째

공통적인 룰이라는 게 어떤...

다 주제가 달라요. 근데 그건 동시에 진행된거고.

제작과정으로 얘기하면 나 같은 경우에는 직접 손을 대기보다 머리에서 완성 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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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니까.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작업 성향을 보면 알겠지만

작업 성향이 되게 비서사적이어서.

아까 문작가님의 한 팬분이 읽고 있는 책이 뭐냐고.. 한 텍스트에 기반해서 바이 넘버스

이 책보다 심심하면 저 책보고... 그러니까

시리즈... 단어를 색깔로 칠하는 그런 단어를 색깔로 칠한 거 맞아요. 나는 활자 중독까진 아니지만 책 읽는 걸 워낙 좋아하고 시간

좋은 일이 될수도 있고 많은 부분의 이야기를

얘기와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도 싸우잖아요.

들어 본 건 아니지만 나쁜 것만 있으면 나쁘다고

완벽한 소통을 하면 할 수 있다고 믿는데 저는 그걸

난리치고 있을 거 아니에요. 그게 좋았던 사람도

옆에서 보면, 소통, 소통한다고 되는 일인지 보는

있는데 그 퍼센티지를 내가 모르겠다는 거예요.

거죠. 그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작업이 잘 끝이 안 나는 거지. 나는 한 개에 집중을

이런 경우가 서울 시내 한복판에 걸려있는데

못해. 그리고 오래 집중을 못해. 내가 만약 한

어떻게 생각하세요가 나의 작업이고. 거기서

프로젝트롤 2년을 했다, 그러면 나는 그거 못해.

사람들은 내 작업을 보고 답을 하고. 보통은

나면 책방에 가고 사는 것도 좋아하고. 실질적으로

감상의 목적이 소통이 아닌 다른 이유는... 얘는 왜 이런 걸 했을까. 현대미술의 또 다른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감상해라. 정도가

장점은 의견을 제시하거나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을 읽는 거에 대해 생각해보면 아까도 리서치를

그래서 뭔가 김도균 작가님이나 노순택 작가님

많은데 내 생각도 있지만 물어보고 있는거지.

생각을 많이 퍼뜨리고 싶으면 아프리카 방송을

한다고 했던 것처럼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는

같은 경우는 명쾌하게 보이잖아요. 이걸 지향하고

그러니까 보는 사람은 쟤는 왜 방향을 안주지?

하든, 그래픽 디자인 광고를 하든 이런 쪽이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거든. 잘 모르니까. 그런

있고. 근데 작가님은 그러면서 이건 제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근데 내가 보내는 질문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진다고 생각해요.

경우는 조금이라도 알바보고 얘기를 해야 될

개인적으로 느낀 건데 다른 세분과는 다르게

보면 비슷해. 굉장히. 사회에서 굉장히 평범히

의견제시를 하려면. 전시장에 몇 명이나 오겠어요.

것 아니에요. 작업 중에 녹는 맥아더 장군 같은

현대미술이라는 걸 이해하는 사람이 더 즐길 수

보이는. 조금만 틀어 보면 이상한데. 맨날 신문보면

아무리 성공한 전시라도. 영화를 하든가. 근데 현대

경우도 처음보고 사람들이 정치적 이슈, 물론

있는? 그런 게 있어요.

현대미술이 어렵고 관객과 소통을 안 하고 근데

미술이 가지고 있는 장점 중 하나는 개인이 하고

그 말도 맞지만 꼭 소통을 해야 돼? 그리고 누가

내가 어떤 걸 만들어 논 거를 보여주는 거거든.

정치적 이슈도 들어간 작업이기도 하나, 또 하나

나는 아까 얘기한 작업하는 규칙 중에

많은 부분이 저기 계신 분들은 평생 미국을 두 세

하나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대 미술이 있어요.

꽃을 그려서 누가 아름답게 느끼면 그건 너무

갤러리랑 합의를 해서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번 가보거나 미국을 경험 한 게 4, 50년 전 전쟁터

기본적인. 작가는 약간 미쳐야 하고 귀 잘라야

단순한.. 그냥 아침 드라마를 보는.. 누군가는 아침

내가 내 생각을 해가지고. 판매나 이런 건 나중에

거나 이러신 분들인데. 나도 미국에 살았지만 이

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고 빈 캔버스를 갖다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 있을 거고. 누군가는

문제고 일단 생각이 먼저니까. 다른 장르, 영화나

나라를 알아? 하면 전혀 모르는 것 같고. 오히려

주면 어느 날 천재적인 작업이 나오고 그런 사람도

피디수첩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거고 현대미술이란

이런 것보다 좀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다는

반대로 미국이 잘 못하고 있는 점도 많지만 잘하고

있겠지만 동시에 만들어진 신화 일수도 있고 그런

카데고리 안에서도 다 똑같을 거 아니에요.

거. 다양한 방법을 쓸 수 있고. 다양한 시도를 할

있는 점도 많은데 어떻게 한 쪽은 무조건 잘했다고

선입견들이 살면서 많잖아요. 전라도 사람은 어떨

남의 나라에서 싸우고 있고 다른 쪽은 완전히

것이고 충청도 사람을 어떨 것이고. 맞는 경우도

근데 소통 안 하면 너무 허무하거나 외롭지 않아요?

나쁘다고 싸우고 있고. 그럼 저 강한 신념은 도대체

있지만 그런 선입견들을 좀 만 비껴서 보면 되게

나는 그런대. 네가 만든 게 내 의도대로 안 읽혀서

어디서 오는 건지. 작업은 정치적인 면을 띄고

말도 안되는 경우들이 허다하거나. 길바닥에

재밌는 것도 있지만

있지만 저는 가장 큰 이유는, 저런 맹목적인 신념이

보면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가 서울 시내에

어디서 오는 거지? 이런 거였거든요. 두가지 얘기,

붙어있는 걸 보면 사람들 그냥 지나가지만 굉장히

생각은 별로 없는 게 벌써 저자의 죽음. 이런 게

만 명이 될 수도 있고 십만명이 될수도 있고. 다

아님 세가지 얘기, 네가지 얘기를 같이 하고 있는

이상하잖아요. 그런 이상한 부분들에 대해서 조금

6,70년대 아이디어잖아. 포스트모던. 옛것 다시

개인적으로 일을 하니까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거예요. 그 동상 하나에서 벌어지는 얘기를.

틀어서 이야기를 하는거라. 그게 좋다 나쁘다

만들고. 그것도 3,40년 지나서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게 장점인데. 모든 현대미술은 왜 소통이 안

보다는 질문을 하는 거예요. 이게 좋아요, 나빠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완벽한 소통. 내가 언어에 관심을

되냐고 한다면... 왜 답을 안 하느냐 하면 안 정해도

그래서 혹시 책을 읽을 때 중간부터 읽거나 거꾸로

아니라 이런 이상한 상황이 왜 생겼고 이런 이상한

많이 갖는 건, 사람들은 그림보다 언어로 썼을 때

되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쉬운 걸 만들 필요는

읽거나 하시나요?

상황이 있는데 왜 지나가죠. 질문을 보는 사람이

더 명쾌하다고 생각...하나 내가 자꾸 글로 쓰는

없잖아요.

해야 하니까 더 헷갈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유는, 그렇게 이야기가 되면 30년 40년 산

베트남 처녀와 결혼 하세요도 누군가에겐 굉장히

부부가 왜 싸우겠냐는 거죠. 어떤 경우에는 똑같은

그런 것보다 읽다 말다 해요. 예전에는 잡으면 끝내고, 잡으면 끝내고 하려고 노력은 했었으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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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고. 왜냐면 영화만 봐도 제작사 있어야 하고 투자사있어야 하고.

문법자체만 봐도 러닝타임이라는 것도... 그리고 영화사가 100개다. 이러면 작가는

나는 애초에 내가 의도한 대로 읽힌다는

개인전은 그럼 언제 기획하세요? 일단 내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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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아니잖아. 내가 영화를 한다면 영화를 만들어 놓고

개인전 계획은 있는데 그 어떻게 할까 아직도

이게 최선을 다 했느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민 중이에요. 전시를 크게 하고 싶으면 크게하고

아이디어와 시간과 돈과. 내 컨셉에 맞는 작업이

작게 하고 싶으면 작게 하는 건데 아무리 작가라도

나왔느냐가 첫 번째고. 내가 만족할 만한 작업이

제작비 문제도 있고 갤러리 문제도 있고.

나왔느냐는 흥행은 별로 신경이 안 쓰여요. 근데 두 번째는 어떻게든 작업이 나오고 크리틱이

뭔가 생각이나 구상은 다...

나오고는 관객의 몫인데 자꾸 물어보면... 젊은

생각이나 구상은 6,7년을 놀았는데 작업을

작가들도... 어르신들이 그때는 힘들었다 이러는

구상을 안 했겠어요. 난 현대미술 하는 분,

게 아니라 각 시대에 맞는 문제와 각 시대에 맞는

순택씨나 도균씨나. 오상씨는 조각이니까 케이스가

다 다른 문제가 있을 거 아니에요. 사십대 작가가

좀 다르지만 나는 일단 몸이 꾸준히 가기 보다는

이십대 때 겪었던 문제와 지금 이십 대가 겪는

머릿속이 꾸준히 가야하는 작업이에요.

문제가 완전히 다를 거란 말이에요. 근데 그걸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건 내가 이십대를 살고 있지 않으니까. 각자의 상황에서 움직여 나가야

머릿속에서 개인전은 끝나있네요 끝나있는데 어느 게 먼저 갈까. 궤적 자체가

하는.. 각자의 특성을 가지고 전시를 만들거나

맞을까를.

그러면 되겠지만 그건 전시얘기고. 각자 어떤 작업을 하고 살아남느냐는 난 내가 무슨 말을 해줄

그것도 묻고 싶었어요. 여기서 제일 형님이시니까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요즘에 젊은 애들 전시는 잘 가시는지... 늙은 애들 전시도 잘 안가서...

나머지는 가면서...

좀 궁금하긴 했어요. 저는 미술씬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되지만 아는 몇몇 친구들을 보면 여러 가지 이슈들이 씬 안에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젊은 작가들 활동하는 거 보면 어떤 생각 하실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죠. 이걸 옆에서 이래라 말아라 하기가 특히 다른 것도 그렇겠지만 미술같은 경우에. 한국에 와서 처음 강의를 했을 때 제일 이해가 안되는 질문 중 하나가 애들이 작업을 가져와서, 이런 방식으로 작업을 할까요? 하고 물어봐요. 시작에서 누군가의 영향을 받아서 시작을 하겠다는 거잖아요. 그럼 그게 자기 작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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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슬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2007년부터 토탈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중이며,

미학과에서 “정보화시대에서의 예술과 기술:

미디어아트 보존 및 아카이브에 관한«404 Object Not

상호작용성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Found», 비디오아트 스크리닝 프로젝트 «Coffee with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박사과정 중에 있다. 1997년

Sugar», 미디어아트 페스티벌 «Digital Playground»,

미술현장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면, 지금까지 다양한

작가들의 포트폴리오를 가방형식으로 제작한 <the

형식의 전시 및 프로젝트를 기획해 왔다. 2000년

show must go on>, 국내 작가의 해외 홍보를 위한

아트센터 나비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미디어아트

영문 잡지 <K.NOTe>등과 같은 중장기 프로젝트를

분야의 전문성을 띤 큐레이터로 활동을 시작했다.

진행하면서, 한국작가의 해외 홍보, 신진작가와

2004년에는 제4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

신진기획자들간의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the room>

(«디지털 호모루덴스>) 전시팀장, 2005년 의정부

등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디지털아트페스티벌(«디지털 플레이그라운드»)

2010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Digital Playground”

큐레이터를 맡았으며, 2005년 독일 베를린의

의 베이스캠프를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로 옮겨

«트렌스미디알레(transmediale)», 런던 골드스미스의

현지 관객 및 학생들과 미디어아트 쇼케이스, 워크숍,

«창조적 진화(Creative Evolution)», 인도 델리에서의

스크리닝 프로그램, 장소특정적 설치작업 등을 아우르는

제1회 CeC&CaC 등 국내외 미디어아트 관련 학술행사

페스티벌을 진행하였다. 또한 현대미술의 다양한

및 전시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2005년 독일

소통가능성, 새로운 방식의 전시방식 등을 고민하는

뷔템베르크 쿤스트페어라인 슈트트가르트에서 개최된

신보슬은 2011년 최태윤과의 공동기획으로 뉴욕 소재

«On_Difference», 2010년 «Re-designing the

미디어아트센터인 아이빔 작가들을 초청하여 <로드쇼:

East» (독일, 인도,헝가리, 체코, 태국 공동기획), 2012년

대한민국>을 통해 국내외에서도 보기 드문 본격 트래블

“Acts of Voicing”(독일, 프랑스, 인도, 홍콩 등 10개국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전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큐레이터 공동기획)과 같은 국제전시에 공동 큐레이터로

현장에서 작가, 관객, 큐레이터와 작품이 만나는 다양한

활동하면서, 미디어아트 뿐 아니라 현대미술 전방위로

방식을 실험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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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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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쇼 기획자 신보슬입니다. 토탈 미술관

낙동강을 돌자고 해서 지율스님하고 낙동강의

본의 아니게 올해는 하다 보니까. 7번 국도는

건 다 럭셔리 버전이었던 거 같아. 그래서 얘가

내성천부터 을숙도까지를 일주일동안 여행을

내려가다가 구미를 들렸어요. 거기 박정희 생가가

1년에 국내편, 해외편. 두 개로 나가는 거지. 근데

했죠. 사실 둘째날 돼서 다신 이거 하지 말아야

있더라고. 그리고 포항을 갔더니 이명박 고향이야.

그게 내가 해외 나가겠다고 해서 나가는 게 아니라

로드쇼와 쇼 머스트 고 온에 대해서 설명의

겠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에서 온 애들이 너무

그리고 쭉 올라가다 보니까 백담사를 들렸거든요.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그게 재밌게 하면

해주시면..

이상한 애들 인거야. 배지테리언 있지. 일단 음식이

거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있었던 데. 그리고 고성에

지가 지 길을 가더라.. 이런.

다 이상한거야. 이렇게 여행을 하는 건 되게

갔더니 김일성 이승만 별장. 본의 아니게 대통령의

여행프로젝트에요. 진짜로. 바깥에서 설명하면

럭셔리인데, 한국 여행은 더 힘들거든요. 분교,

길이라는 부제가 나왔었죠. 재밌었어요. 근데. 근데

뭐해요? 라고 물어보는데 여행해요가 메인

폐교에서 자고. 매트리스 없고. 내성천부터 강을

그렇게 여행하고 다니면서 작가가, 큐레이터가 뭘

목표인 것 같아요. 어느날 딱 봤더니 백화점에서

건넜는데 한 이틀이 되니까 애들이 어제 간 강과

고민하는가. 이런 걸 듣는 프로그램 같아요. 굳이

로드쇼에 두 개가 겹쳐지진 않는데 백령도 편이

쇼핑하듯이 전시를 하고 있더라고. 제목 정하고

이 강이 뭐가 다르냐는 거야. 왜 강에 들어가야

로드쇼가 뭐냐고 말하자면.

약간 겹쳤었고 경주 때는 프랑스에서 사운드

작가 섭외하고 오프닝하고 도록 만들고 철수하고

되냐고 질문하고. 왜 와이파이 안되냐고 질문하고.

또 제목 정하고. 백화점에 가서 물건 고르듯이

한국은 그렇게 IT강국이라면서 왜 인터넷이 안

작가들을 고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큐레이터를

되냐며 성질부리고. 이건 내가 못할 짓이다. 왜냐면

접던가,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을

내가 큐레이터인데 여행사 직원 같기도 하고 잘

거 같아요. 재밌고 좋아서 하는 일은 저절로 되는

뒤샹의 프로젝트에서 시작한 거예요. 그러나

하다가 제가 진짜 티비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모르겠는 거지. 뭐 얼마나 엄청난 걸 얻겠다고.

것 같아요. 왜냐면 나는 로드쇼가 이렇게 오래

비공식적으로는 런닝맨의 알 가방이었어. 맨날

1박2일과 기타 여행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왜

그런데 딱 마지막 날 됐을 때 너무 좋았던 거지.

갈 줄 몰랐고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어.

보면서 저런 거 안 에다가 작업 넣고 큐레이터한테

우리는 하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

조금씩 나아졌던 거지. 익숙해지면서 그러면서

근데 얘가 약간 해외버전이 자연스럽게 생기면서

던져주면 좋겠다. 나도 큐레이터지만 전시장에서

그리고 내가 아는 작가들은 진짜 재밌게 여행을

마지막 날 을숙도에서 얘기를 하다가 우리 내년엔

더 재밌어 진 것 같아. 외국에서 큐레이터가 오고

작가 작업을 볼 때 꼼꼼히 안보거든요. 그리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자라고 했었던

어디 갈까? 이렇게 장기 프로젝트가 될 거라곤

작가가 와서 한국을 여행하는 것도 재밌는데

대부분 그룹전을 보게 되니까. 그 중에서 마음이

거지. 원래 시작은 뉴욕에 있는 최태윤씨랑 같이

생각을 못했던 거지. 좋은 건 작가랑 큐레이터랑

그때는 생각보다 우리가 되게 리서치도 많이

맞는 이미지를 보는 게 사실은, 우리가 인정하진

했어요. 미국에서 작가들이 오고 한국에 서

그렇게 얘기할 시간이 없다는 거? 나도 서울에서

하고 그래요. 외국애들은 질문이 많아. 예를 들어

않지만 종종 있다는 거지. 그러면 강제로 한 달

작가들이랑 큐레이터 섭외해서 무려 스무명 넘게

만나면 중간에 전화오고 이메일 체크하고 한

4대강을 질문을 하면 그걸 영어로 공부를 해야

동안 억지로 그 작가를 갖고 있으라고 하면 아무리

같이 여행을 시작했던 게 로드쇼의 시작이었죠.

시간 만나고. 일주일을 거의 풀로 같이 있으니까

돼. 단어들을 모르니까. 오히려 내부적으로 공부할

게으른 큐레이터라고 해도 도록 한 권은 읽겠지.

아무리 우리가 여행이 목적이라고 해도 그냥

좋더라고요 나중에는. 그래서 나중에 우리 내년엔

건 훨씬 더 많은 것 같은데 그게 프랑스 문화원

라는 생각이었고. 그리고 우린 사립미술관이어서

놀러가기 좀 그렇잖아. 그래서 나름 이슈를

어디가지? 이러다가 제주도에 가게 되고. 그때

같은 데 노출이 되면서 그 사람들이 볼 때 너무

예산이 없거든요. 국제 전시를 하고 싶고 국제

찾았지. 찾았던 이유가 낙동강. 4대강이 한창

강정마을 얘기 한창 있을 때 제주도, 백령도,

비용대비 효과가 좋은 거야. 전시를 하려면 최소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어도. 근데 가방을 배달하는

이슈화 될 때 작가들하고 그런 얘기를 했었거든요.

경주, 이번에 7번 국도 까지 해서 한 5년? 그렇게

2000 이상은 들여도 억대가 나가지. 사실 작업이

건 할 수 있겠는 거야. DHI비용이니까. 그래서

내 포지션을 어디에 정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

다녔던 거죠. 근데 노순택 선생님이 사실 되게

나가려면. 근데 전시장에 오는 사람만 보잖아요.

원래 처음에 시작이 이세경, 이창원, 김도균.

얘기들으면 저건 거 같고 저 얘기들으면 저건 거

중요한 요인이긴 했었어요. 일단 4대강도 노순택

근데 우린 영상도 만들고 책도 만들고 이러니까

이렇게 셋이 시작했나? 그걸로 뭐 할까 생각하던

같고. 근데 이제 미디어는 믿지 못하겠다. 그럼

선생님이 기본 가이드를 줬었고, 강정은 말할 것도

애들만 한 열 명 내보내면 사진, 영상은 이만큼의

차에 싱가폴 비엔날레 하던 차에 거기 라쌀이라는

가서 보자. 아주 심플하게 됐던 거였죠. 사실.

없고. 백령도. 너무 이게 약간 의식화된 그룹 같아

product가 나오니까 자기네들이 써먹기도 너무

미술대학인데 거기에서 되게 재밌게 본 거예요.

얼마나 무식했냐면 우리가 일주일에 4대강을 다

보이는... 운동권도 아닌데. 그래서 우리가 다른

좋고. 자기네 나라를 소개하고 싶은 거지 우리한테.

돈도 별로 안 들고. 그래서 전시를 하자. 싱가폴

돌겠다고 한거야. 그랬더니 그건 불가능하다. 그럼

데를 찾아가자. 그래서 경주부터 시작이 됐는데

좋은 데만 보여주고 싶으니까. 사실 외국에 나가는

비엔날레 기간 동안. 근데 전시를 네 개로 할 수가

큐레이터이기도 합니다.

그럼 너무 길어질 것 같은데. 로드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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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머스트 고 온 설명을 해주세요. 이번 LA는 두 개가 겹쳐진 거예요. 모든

작업하는 애들이 왔었어. 그래서 녹음하고 그런 그 로드쇼 티켓이랑 받았던 건 벌써 4, 5년전...

프로덕션 쪽으로 들어갔고. 이번에 다시 약간

그게 벌써 4, 5년 전이고 확실히 그건 있는

겹쳐진 건데. 공식적으로 쇼 머스트 고 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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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잖아. 그래서 급 작가들한테 연락을 했더니

전시는 그냥 그때 전시 도록으로 밖에 안 남는데

좋아해서 갖고 와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번에

근데 거기서 만났던 다섯 부족의 얘기는 너무

너무 좋아하면서 가방이 20개가 만들어 진거지.

쇼 머스트 고 온하고 로드쇼는 지가 알아서

같이 조인이 된거죠. 로드쇼랑.

재밌었다는 거지. 나는 인도사람이 나랑 비슷하게

그래서 22갠가 가지고 전시를 했었어요. 그것도

진화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인거죠. 일단은 내가 이

원래 전시가 목적이 아니고 로드쇼가 후반

큐레이터한테 보내고 이 큐레이터한테 보낼 때,

베니스 때 비슷한 질문을 한 것 같긴 한데, 여행이

부족이 우리랑 똑같이 생겼어요. 그리고 인도는

전시가 목적이 아닌 것처럼 쇼 머스트 고 온도

그 다음에 한 달 후에 이 큐레이터는 이 가방을

뭐냐는 걸 일단 묻고 싶은 건데, 나한테 여행은

다 소고기 안 먹는 줄 알았는데 온 동네 십자가가

전시가 목적은 아니고 큐레이터가 한 작가의

어디다 놨다는 사진을 나한테 보내주고. 그럼

많은 소비생활과 약간의 사치? 같은 게 있기

가득한 그 인도는 도대체 뭐냐며. 그런 부분들이

포트폴리오가 담긴 가방을 한 달을 가지고 있는

작가한테 메모를 보내요. 이메일로 오더라고.

때문에 그냥 이렇게 마냥 멋지다고 생각되는

작가나 큐레이터들한테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거지. 그 한 달동안 이건 침대 머리맡에 놔도 좋고

사실은 손 글씨를 원했는데 손 글씨 쓰기 싫어하는

프로젝트는 아니에요. 심정적으로. 문화적인

하거든요. 우리가 서양미술사를 해서 거기에

오피스에 놔도 좋고. 실제로 크로아티아에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그렇게 오면, 질문이 올 때도

어떤 거라든가, 미술적인 프로젝트를 떠나서.

베이스를 해서 온 현대미술 말고 그건 아무리

사무실에 놨어요. 그 가방을. 루마니아 큐레이터는

있어. 그럼 그건 작가한테 전달이 되거든. 그래서

나는 작가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기도 하고. 그런

잘해도 따라가기만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을

그걸 들고 자기 엄마네 여행 갔다 온 걸 컨셉으로

언제 어디 갔다는 걸 기록하는 것과 그 트랙킹이

지점이 있기 때문에 그걸 부정할 수도 없는 거고.

하는데, 그럼 다른 쪽을 본다고 했을 때에 여행은

우리한테 보여주기도 하고. 그래서 그 작가

쇼 머스트 고 온에선 무엇보다 중요한 거라서 어디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되게 필수적이지 않을까. 그리고 작가들을 만나면

한명은 그 큐레이터한테 인지를 시키고 싶었던

갔는지는 알아요. 근데 이런 경우가 있지. 예를

최종적으로 product가 나온다고 했으니까 그건

그런 게 있어요. 큐레이터들도 그런데 돈이 있을

거고. 그리고 그게 있어요. 작가의 작업이 좋지

들어 말레이시아에 가방을 가져갔을 때 걔네는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

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을 땐 돈이 없잖아. 이

않아서 나랑 안 맞는 건 아닐 때도 있어. 작업은

컨템포러리 아트고 우리 작가고 아무것도 모르는

좋은데 나랑 안 맞을 때가 있고, 다른 큐레이터를

데 그냥 이 프로젝트가 재밌는 거야. 막 바닷가에다

여행은 일단 일상에서 나가는 거? 그리고 나한테

놀 수 있는 직업이잖아. 우리는. 우리 엄마가

만나면 또 잘 보여질 수가 있거든요. 첫 번째는

세워놓고 자기네들끼리 영상하고 그랬는데 그런

작가와 큐레이터는 그렇게 많은 사람과 많은

너무 부럽다고. 뭐하냐 물어보면 맨날 일한다고

나한테서 시작한 방출이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

건 싫어 할 수 있는거죠. 작가에 따라서. 내 것이

환경을 많이 보는 거. 옛날에는 안 그랬을 수도

하는데 앉아서 만화책 보고 있고. 영화보러 가고

큐레이터가 아는 큐레이터 중에 그 작업을 좋아할

큐레이터 집에 가는 건 괜찮지만 길바닥에 있는건

있을 텐데 현대 미술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일

외국 나간다고 하고. 그거는 되게 중요한 지점인

사람을 추천을 하면 우리가 다시 그 사람한테

싫어. 그럴 수도 있는거지. 그런 경우들은 있었으나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요. 그리고 LA로드쇼를 하면서 딱 둘째

가방을 보내주는. 쇼 머스트 고 온은 아주 쉽게

다음부턴 안 그럴 게요. 그러면 되는 거고. 작가가

풍경을 보려면 나가는 게 낫지. 굳이 예술품을

날부터 나는 나를 놔버렸어요. 이건 내가 생각한

얘기하면 그냥 가방 배달 프로젝트?

많으면 골라골라 하면 되는 거니까. 사실 쇼

보진 않는 다는 거지. 이 얘기는 뭐냐면, 작가와

로드쇼는 아니었어요. 분명히. 사막을 갔어야

머스트 고 온은 매니지먼트 회사를 차려볼까

큐레이터는 이해의 폭이 넓어야 겠다는 생각이

하는 게 맞았어. 근데 여기는 답사 없이 온 데니까.

궁금한게 있는데 내 의견은 아닌데, 나는 쇼 머스트

생각도 했었어. 왜냐면 이게 내가 큐레이터인데

들어요. 이건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어. 책만

그리고 나는 LA가 처음이니까. 그런 부분에서

고 온 프로젝트는 되게 재밌다고 생각을 해요. 근데

김형주라는 작가 가방을 가졌어. 그리고 나는 그

보고 명상을 해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답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은.

그런 생각도 들거든요. 특정 작가 같은 경우는

가방을 다른 사람한테 토스해서 그 가방은 나한테

거니까. 내가 내적으로 쌓이는 건 다른 거니까. 꼭

가방에 들어가기 원치 않는 작가도 있을 거라고

없어. 근데 이 프로젝트가 잘 되려면 김형주의

나가야 되냐고 했을 때 할 말은 없는데. 근데 꼭

생각을 하고..

정보가 계속 나한테 와야 돼. 근데 그게 열명의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고. 사실 로드쇼가

큐레이터한테 가잖아. 그럼 할 일이 너무 많은

LA빼고는 다 시골만 다녔어요. 진짜 로드쇼는

안되겠다. 왜냐면 모두의 욕구가 달라. 근데 그

거예요. 4, 5개는 상관이 없는데 스무개 가방을

현대 미술이 없는 데를 다녀. 그러니까 이번처럼

각각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게 준비가 되어

트래킹 하다 보면 죽어. 사실 지금 멈춰 있는

예술이 훅 들어 온 적은 없었던 거지. 인도에 가서

있어. 여기는. 인도에서는 빼도 박도 못하거든.

단계에요. 그건 신진 큐레이터들하고 다시 짜볼까.

예술가를 만나고 싶었는데, 현대 미술이 없는데

실크로드에서도 마찬가지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수잔 선생님이 가방을

뭐. 물론 말도 안 되고 기타 등등이 있었지만

안 하면 되지

내 작업이 어디에 가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파악이 되죠. 왜냐면 이게 되게 재밌었던 게 내가 기획이라고 하고 주제 리서치해서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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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겼을 거라고 상상해본적이 없는데 나갈란

나한테 여행은 좀 다른 거 같아. 나한테

두 개가 맞을 때가 별로 없어. 그러면 공식적으로

로드쇼의 도시 버전에 대한 테스트? 근데 나의 지금 결론은 아니다.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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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가 충족이 안 되기 때문에 생성될 수 있는

창작자도 있겠지만 그건 케이스 바이 케이스고

그럼 로드쇼는 그 로드를 선정하는 게 제일 중요한

에너지와 생성물이 있을텐데... 그나마 차 없으면

로드쇼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네요?

어디 못 간다는...

지점이... 그러면서 동시에 묻고 싶었던 거는 직업 만족도 1위인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해서 묻고

실크로드 때는 재밌었던 게 이완 작가가 절에서 이만한 고목을 빌려가지고, 우리가

국내 작가의 개인전은 안 하는지. 국내 작가의 개인전은 내가 안 하는 게 아니고

그죠. 그러니까 한국 버전이 잘 나올 수밖에

그건 관장님의... 한 십년 쯤 됐으니까 지금 되짚어

없는거야.

생각해보면 안한다기보다 못했던 것 같아요.

싶은 거지.

방법을 몰랐어. 근데 어디선가 도끼 소리가

앞에 걸 조금 얘기하자면 인도에 처음 갔을 때

사립미술관이라는 게 많지 않은데 누군 해주고 그게 정치색이 들어가 있든 아니든..

누군 안 해주면 어쩌고, 저쩌고. 미술계가 너무

들려서 보니 수건 깔아놓고 그걸 잘라가지고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거지. 그리고 불가촉천민에

좁으니까 말이 많이 나오는 것도 싫으셨던 것 같고.

나무 젓가락 만들고 있었고. 근데 딱히 보러갈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미친 애들 아니야? 이런.

데도 없으니까 서로한테 얘기를 많이 할 수

얘넨 어느 땐데 아직도 계급사회야. 이런 얘기를

있었던. 사실 로드쇼의 핵심은 차타고 이동하는

하고 있었는데 델리에만 있던 게 아니라 차 타고

시간에 벌어지는 것 같아. 침묵이 너무 오래가면

나갔는데 정말 티비에서 본 인도가 펼쳐진 거지.

불편하잖아요? 어느 순간 가면 다 얘기를 하고

그래서 딱 내렸더니 멀티미디어 카오스더라고.

기금 받아서 움직이는 거니까. 심사 가면 그

수 있고 작업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건 개인전.

있어. 아니면 다 자든가. 내가 보는 로드쇼에는

옆에는 낙타가 있고, 여기는 소가 있고, 오토바이

얘기부터 먼저 해. 너네들은 나랏돈으로 여행가는

노순택하고 가까워진 것도 마찬가지에요. 노순택

장점인 것 같기도 해요.

빵빵 거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만지는데 깜짝

거냐고.

작가도 그때 그 독일 개인전을 같이 해봐서 그렇게

얘기나 이런 것들이 뭉쳐지기가 쉬운데 나머지는 관광이 되기 쉬운거지.

국내 작가의 개인전은 다른데서 해도 된다라는 생각도 있으셨던 것 같고. 근데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어요. 왜냐면 개인전이

오해의 소지도 쉽고 되게 오해 많이 받았죠. 그리고 심사 받아서

큐레이터한테 필요해요. 작가를 제대로 공부할

깜짝 놀라고. 머리랑 몸이랑 다르게 반응하는

LA 로드쇼는 알겠어요. 쇼머스트고온도 약간

걸 느끼면서 되게 창피하고. 바깥에서 함부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지만

얘기하는 건 아니다..는. 왜냐면 나도 그 사람들을 그렇게 보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이 그렇게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궁금하긴 한

된 것 같아. 그게 없었으면 아마 다른 관계가 일반적인 저 같은 사람들의 생각이에요.

됐을 거 같아요. 거짓말의 거짓말은 작정하고

그래서 네, 나랏돈으로 여행갑니다.

패키지를 만든 거니까 그게 맞아요. 왜냐면

얘기하거든.

외국에 한국작가를 소개하고 싶은데 내가 아무리 프로포셜만 내서 되는 게 아니야. 이게. 이거

만진다고 해서 피부병이 옮는 것도 아닌데 5분을 내가 생각하기에 여행이란 게 그런 지점이기

시장을 못 걸어다니고 그냥 차로 들어왔어.

근데 말씀하신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여기서 했던 전시야. 가 되게 중요한 거야. 여기서

때문에

근데 들어와서 내내 너무 우울했던 거지. 나는.

생각하거든요. 작가들하고 큐레이터한테. 현장을

했던 게 나가서 움직인다고 하면 트레블링하기가

이것 밖에 안되나 나는? 그런 생각도 들고. 근데

본다는 거. 저는 더욱이 배우는 게 현장 베이스가

좋은데. 모르는 사람이 날 어떻게 믿고 그걸

작업하는 작가의 상당수는 작업실에 혼자 쳐 박혀

중요하다고 배워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생각할

하냐는 말이지. 거짓말의 거짓말은 외국으로

있단거지.

수도 있고. 추가적으로 얘기를 하자면 직업만족도

돌리려고 작정을 하고 만든거라.

그게 아마 내가 생각할 때 내가 첫 인도 여행에서 느꼈던 것 때문에 계속 하는 거 같아.

아주 쉽게 얘기해서, 노순택 선생님 데려올

1위의 큐레이팅이란... 여행사 직원은 아니고.

때 미안하다고 했잖아. 김영삼 서거... 그런

그 부분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작업으로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면 거짓말의 거짓말 때도

맥락인거야. 돌면서 되는 작가들이 있다고 생각도

도망치는 거. 현실적인 거, 내 몸도 무시하고.

물어봤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본인이 알고 계신 것

되는데 분명히 그 땅 안에 있어야만 뭔가가 나오고

작업으로 도망치는 케이스 있다고 생각해요.

같아서... 백화점 쇼핑하듯이 이름 있는 작가들을

되게 좋고 경쟁력이 있어. 근데 이렇게 얘기하면

해서 패키지를 바꾸는...?

자기비하겠지만 큐레이터들의 무능과 한국

계속 피드백이 생긴다는 게. 나는 솔직히 얘기하면

그래서 일 년에 일주일이라도 빼 내는데 그냥

노순택 선생님이 동물원에서 찍은 사진은

휴양이나 이런 게 아니라 비슷한 고민을 가진

궁금하지 않거든요. 이건 얘기가 좀 다르지만.

사람들하고 같이 빠져 나오자가 메인인 것 같아요.

총체적으로 쇼 머스트 고 온은 지지하는 편이에요.

로드쇼는.

물론 창작자의 입장으로 봤을 때 껄끄러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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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외국으로 돌리려고 작정하셨어요? 한국 작가들이 되게 좋아요. 사실. 작업도

엠디. 엠디.

큐레이터들의 한계로 인해서. 우리보다 더 좋지도 않은 작업들이 훨씬 더 좋은 미술관에서 대우를

그게 약간 그래야 되나? 제가 그때 물어봤던 거

받는데. 이번에 게티센터도 일본 선배 작가와 젊은

같은데 신진작가나 그렇게 들어갈 수 없는지. 왜

작가들이 모였는데 나는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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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거든.

바뀌어서 패키징을 다시 하려고 하는 거거든.

기저에 깔린 모호한 theme은 있었어요. 3년전엔

표현도 애매하지만 다른 기획물들이 치고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싶었던

올라온다는 표현 보다는, 생겨나잖아요.

저는 거짓말의 거짓말도 좀 더 신진이 껴 있었으면

거짓말의 거짓말의 가장 좋은 결과물은 작가론이

거고. 그러면서 건축이나 그런 얘기들. 뉴타운

좋았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나왔다는 거, 물론 퀄리티는 들쑥날쑥이라고

고스트 다 그렇게 했던 건데. 전시도 마찬가지라고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거고. 로드쇼니 쇼 머스트

생각은 하기는 하는데...

생각을 하거든. 전시를 봤을 때 그 전시를 보기

고온이니 이제는 그런 거지. 전시를 더 막 할 수

전과 후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걸 하고

없는 지점들. 아무리 바같에서 전시가 좋았다고

근데 지금 바깥에다 놓고 보면 이미 신진이 많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김태동, 김진희 이런

그게 사실은 문타다스 전시보다 돈이 더 든

그건 좋은 거 같아. 어떻게 보면 나도 지금

작가들은 이미 신진이거든. 근데 내가 모르겠는

전시에요. 작가론 나가야되지, 작가 fee나가야

싶은 거지. 퍼잡스키도 문타다스도, 문타다스는

보도가 나가도 큐레이터는 알거든. 그 바닥이

건 이 친구들이 언제까지 작업을 할 지 모른다는

되지, 16명이잖아. 50만원씩만 줘도. 생각보다

내가 다시는 하나 봐라 했을 정도로 개인적인

어딘지. 그러니까 만들어 놓고 창피하지 말아야

거지. 언제 멈출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거

돈이 많이 든 전시지.

갈등지가 많았었어요. 좋아하는 작가임에도

하는데. 내가 중간에 주스 가게를 잠깐 했었어요.

불구하고 나이 들면서 고집만 세지시고.

미디어 시티 그만 두고. 되게 웃긴게 나는 인복은

밖에 할 수 없어. 그런 게 없기 때문에 자칫 바깥에 잘못 불려다니면 바람만 들수가 있어요. 그래서

어쨌든 그 전시의 가장 메리트는 패키지인데

신진이나 그런 작가들은 다른 라인으로 소개를

각각의 요소를 하찮게는 안 다뤘다는 게 제가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문타다스의 전시는 정말

했는데 벽선에 있을 때 파이낸스 센터리모델링

하는 거지. 반드시 전시로 소개를 할 필요는

봤을 때 가장 큰 장점인데, 의심이 드는 것들은

모르겠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우리의 도상을 외국의

하는 걸 했어요. 거기 지하로 내려가는 코너에

없거든. 그래서 로드쇼를 한국에서 움직일 때는

약간 있었던 게 토탈은 왜 개인전을 안 할까. 하고

인문학자 같은 미술가가 읽어야 하는 것도 나는 잘

주스가게를 해보라고 줬어요. 근데 미디어 시티

신진작가들이 들어가요. 신진 작가. 중견 작가.

문타다스 말고 퍼잡스키 전시 봤을 때 내가 느끼는

모르겠고.

접었을 때 그 생각을 했거든. 몇 십억을 써서 이게

한국 큐레이터. 그리고 외국 큐레이터. 그리고

건 약간 그런 게 있어요. 큐레이터의 야망이 보여.

운전 할 수 있는 작가. 이게 되게 팀을 꾸릴 때

작가가 보이는 것보다 전시장에 딱 들어갔을 때

나름 고민해서 하는 거거든. 그런 부분인 것

큐레이터가... 그게 좋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같아. 거짓말의 거짓말은 그거였어. 그냥. 코리안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궁금한 게

나는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고 약간...

게 너무 싫었던 거지. 그리고 미디어 아트는 특히나

컨템포러리 포토그래피 보단 낫잖아. 제목이.

있었던 거죠.

오리엔탈...문타다스는 문타다스 얘기니까. 그거는

그런 회의가 많이 드는 게 차라리 롯데월드의 놀이

별도로.

기구가 낫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접고 그런

야망은 이런 거 자꾸 바깥에다 얘기하지 그렇죠. 저는 제목과 전시가 매치가 안 된다는

말라고 그랬는데, 없는 거 같아.

있어. 나 대학교 때 써클 선배가 부동산 리테이를

나도 시작은 그거였어. 한국말, 중국말,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그 돈을 불쌍한 사람이나

일본말, 어느 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가능한가

어려운 사람한테 주면. 근데 우린 밤 새고 고생 고생해서 만들면 사람들은 1초도 안 보고... 그런

그런 전시를 하고 싶은 거죠. 나로서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주스 가게를 줘서 한 1년

전시를 보기 전과 후가 달라지는 전시. 개인전도

얘기를 많이 듣기도 했고 그렇지만 거짓말의 거짓말 온 포토그래피잖아. 그러니까 사진에 대한 건 다. 그렇지만 난 재패니즈라든지, 차이니즈 아방가르드 이런 것처럼

그런 얘기를 누가 하지 말래요? 되게 착한 얘기

마찬가지고. 그게 만약 야망이라고 하면

같은데

야망인건데. 사실은 이제 좀 있으면 큐레이터 한

미술계 선배들은 사람들은 모르는 거기

그게 앞에 붙는 게 싫었다는 거지. 어차피 패키지로

때문에 그렇게 단정짓지 말라고 하는데

나가는 거라면 그리고 불륨을, 영어로 나가는 도록은 다 개별로 쪼갰어요. 그래서 거짓말의

야망이 되게 쎄 보이는 데. 전시만 봤을 때. 그래서

거짓말은 계속 움직일 건데 작가군은 다 바뀔거야.

일부러 개인전을 안 하시나 그런 생각도 했고.

왜냐면 그 16명이 다 전시를 할 필요는 없거든.

아니야. 노순택도 하고 싶고. 장지아 할

셋이 할 수도 있고. 아까 얘기한 것처럼 괜찮은

신진이 들어올 �도 있어. 그럼 그때마다 작가군이 84

했었어요.

1년 동안 어떠셨어요?

지 이십년 되가거든. 근데 약간 고민이야. 언제까지

큐레이터가 쉽더라고. 선배들 만나거나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하게 되는 것 같아.

작가들 만나서 늦게 술자리하면 그 다음날

젊은 작가들한테 내가 자꾸 선생님이 되 가면서

컨디션이 좀 안 좋으면 늦게 가는 데 매상에 바로

거지 같은 말을 해도...

티가 나고. 그리고 사람들을 계속 응대해야 되잖아. 그리고 그런데 있는 가게는 아침에 출근하는

그래서 다른 작가들한텐 별로 물어보지 않았어요.

회사원들을 타깃으로 해야 되기 때문에 최소

때도 되게 좋았었고. 개인전을 해야 작업을 알아.

오히려 큐레이터한테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니까.

6시부터 움직여야 하는데 죽겠는 거야. 놀지도

아니면 다 쇼핑이야. 그리고 주제전을 한다고 해도

젊은 작가들이 치고 올라온다기 보다, 젊다는

못하고 지키고. 장사가 잘 되면 재밌는데. 장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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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되고 이만큼 매출이 늘었어. 이러면 신나서

같이 하는 건 되게 힘들잖아. 배낭여행 갈 때

상업적으로 성공한 사람, 몇 년 째 쥐 죽은 듯이

했겠지. 주스를 팔아서 빌딩을 살 건 아니잖아.

연인끼리 가면 다 헤어지고 돌아온다고. 그래서

있는 사람, 다 섞여 있는 거지. 이 사람들이 사십대

우리가. 그래도 재밌었던 것도 있고 재미없던

작가가 많이 겹치는 이유도 그런 것도 있어요.

초 중반에 있는 사람들이라. 가까이서 좀 보고

노순택 선생님의 내년 계획을 들어보면 내년에는

것도 있었는데 재밌었던 건, 거기를 내 맘대로

그 얘기도 들었었어. 기금 심사할 때. 작가는

그들끼리 있었을 때 어떤 상황인가도 좀 궁금했어.

전시는 안하는...

꾸몄거든요. 작업도 조그만 거 걸어놓기도 하고.

친한 사람들하고만 가냐고. 근데 친하지 않은

부러울 수도 있잖아.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그러다가 2호점도 냈어. 거기는 바비인형으로만

사람들하고 여행을 가나요. 친한 사람하고 가도

작업실도 있고 차도 있고 그러면...

가득 채우고. 그러고 놀았었는데, 그때 나갔던

싸울 판에. 그래서 오픈 소스로 큐레이터 중에

이유도 그거였거든. 전시 만드는 게 뭔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해라. 난 이렇게 하겠다.

이제 좀 있으면 출국인데 출국하면 아무 일도

김도균 작가는 이 얘기를 어디선가 했었는데

이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이 지속적으로 교체되고

근데 어떠냐는 지점은. 그 지점을 어떻게 하냐에

없었다는 듯이 흩어지겠죠. 표면적으로는.

나는 김도균 사진 좋아해요. 근데 바깥에

모두가 만족하지 않는. 여기서 나는 배울만큼

따라 다른데.

심정적으로 뭔가가 달라진다고 해도.

프로모션하기가 약한 지점이 많아. 너무 독일 사진

배우고... 뭐하는 짓인가 했는데 그렇게 있으면서

맨날 현장에서 살잖아. 강제적으로 빼내는.

안 믿어. 전에도 그랬어. 아마 노순택 선생님도 오늘의 동물원과 사막과 조쉬하트리를 좋아했을 거라고 다른 어떤 환기가 됐기를 바라는? 그리고

이게 실명 거론을 하게 될 텐데. 어제 싸우고

같기도 하고 누구나 찍을 수 있는 거기도 하고.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 1년이 나한테 되게

근데 로드 쇼 아이디어 자체가 오픈소스에요? 그럼

또 나는 좀 울고. 맨날 여행 할 때마다 반복되는.

그리고 유사한 작업들도 있고. 근데 그 안에서

중요한... 근데 그걸 집에다 얘기 안 하고 했던 거

누군 가 한 큐레이터가 있나요?

맨날 여행 할 때마다 반복되는. 문작가는 본인이

본인이 한국 사회안에서는 크게 욕심을 내지

내적으로 제일 복잡하지 않을까 싶어. 넷이고,

않고 포지셔닝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근데 아까

있어. 내가 수업 할 때마다 이걸 너네도 써도

어떻게 보면 나를 여기 부른 기관장의... 그런데 네

수잔백한테 얘기하는 거 보면서 참 자기 작업을

된다, 왜냐면 나는 내가 여행 할 수 있는 작가나

작가 중에 가장 준비가 안 되어있는. 우리가 아무도

조물조물 잘 보여주고 싶어 하는. 내 새끼 잘

기획자는 한정 될 수밖에 없잖아. 근데 이걸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만약 그것도 아니면 작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좋은 거 같아. 도균이한테는

했던 것 같아. 그때 박사를 했거든, 공식적으로

내거라고 하는 건 이상하잖아. 로드쇼라는 이름이

못하는 거고 안 하겠지? 9년 만에 다시 돌아온 LA

당장은 아니지만 이런 저런 여행들이 작업으로

미술계를 빠져나와도 쟤는 공부하고 있구나.

내 것도 아닌데. 모서리가 김도균 것이 아니듯이.

가 5년 만에 다시 돌아온 임대식처럼. 아마 뭔가

나올 거 같아. 좀 오래 기다려주면. 권오상 작가

실제로는 주스 팔고 있었고. 근데 집에서는 몰랐어.

그래서 매번 다르게 구성은 하는데 팀 짜는 게

다른 것들을 생각..하게 했길 원하는. 그랬으면

같은 경우는 처음 같이 전시하고 프로젝트도

우리 집은 그런 게 있거든. 하나를 제대로 해라.

제일 어렵긴 해요. 이번 같은 경우는 그때 잠깐

좋겠다는 생각. 그게 아마 자기도 더 남고 싶어했던

했는데 사실은 잘 몰랐을 때 되게 까칠하고 못되고

근데 딱 걸리고 나니까 아버지가 공부를 할거냐

얘기한 것처럼 내가 볼 때 다른 지점에 서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리고 노순택 작가는. 첫 미국?

그렇게 봤거든. 난 쟤랑 안 친해질 거야, 그랬는데

주스를 팔거냐. 장사를 할거냐. 나도 이걸 둘 다

40대 작가들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

그리고 임대식.

생각보다 되게 합리적인 사람이라 일하기는

열심히 하진 않았던 거 같거든. 약간 도망가서

근데 재밌는 건 이 사람들이 나랑 다른 프로젝트는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발 하나는 박사과정 가 있고

많이 했는데 전시를 같이 한 경우는 별로 없어요.

임대식 선생님하고 관련 된 얘기가 재밌어요.

사람의 얘기를 잘 들어주더라고. 근데 생각만큼

그러니까. 근데 그거 물어봐주셔서 너무 감사했지.

그 작가가 서 있는 지점도 알겠고, 어느 정도

깊지는 않은데 자기가 주민등록증 없는 이유와.

욕심이 많은. 왜냐면 학교 다닐 때부터 떴잖아.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가게는 사촌언니가

포지션을. 근데 아까 말했듯이 내가 만든 전시는

여권과 모든 게 없어졌을 때 임대식의 일이 나한테

받아서 좀 했었어. 언니는 하다가 그만 뒀지. 잘

이 사람들이 들어오기 되게 애매한 전시들인

벌어졌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팔아넘긴 걸로 알아, 언니는. 난 그냥 언니한테

거지. 그래서 유일하게 전시를 많이 한 건 노순택

주고 내가 알기로 언니는 권리금을 좀 받지 않았나.

밖에 없는 거지. 전시로 같이 가지 못하면 다른

대통령 돌아가신 게 굉장히 훌륭한 작업 소스가

원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프로젝트로 일단 가보자가 있었고. 그래서 얘기한

될 수도 있던 작가인데. 현장에 있어야 하는데

작가는 원하지 않는 것 같아요. 재밌는 얘기가

것처럼 유학을 갔다 온 사람, 갔다 오지 않은

빼낸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나는 종종 선생님이 그

작가의 판타지에 얘기하면서 자기는 건강하고,

사람. 예술을 전공한 사람, 전공하지 않은 사람.

맥락에서 나왔으면 좋겠어. 한국에 있을 때 보면

오래살고 고통 받지 않는 작가도 있다는 걸

거든요.

큐레이터가 하진 않았는데 학생이 한 적이

언제 복귀 했어요? 미술계의 복귀

1년 반 쯤 있다가? 근데 플레이를 영리하게

같이 온 작가들 어때요? 어때요라고 하면 좋아요? 고를 때...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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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고. 전시 같은 경우에. 그리고 생각보다 다른

확고하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궁금하지는 않아요. 개인적으로는 궁금한데 본인도 그걸

그리고 노순택 선생님한테는 아까 김영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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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고 싶다고...난 그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말레이잖아. 근데 그 사이에 해외손님 3명이 와야

긴밀하게 컨택을 하고 싶다. 이런 거에서 출발을

생각해. 그만큼 확고하기가 쉽지 않죠.

된다는 말이지. 미친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나오길

한거니까. 어디 딴 데 못가게 해놓고 미저리스러운

잘했다. 어쨌든. 근데 솔직히 이번에 로드쇼는

개인적인 욕구인거지.

근데 전시하고 그러면서 작업실 가고 그랬을 때 어떻게 보면 외국에 나가고 다음 레벨로

나한테 노순택하고 다른 의미에서 임대식. 괜히

그치. 난 계속 얘기하고 싶은데 전화오고 약속

올라가는 거에 가장 갈등이 많은 게 권오상인거지.

뿌듯한거는 큐레이터 한 명 살려냈다. 살려낸게

있다고 하고 세시간 보고 싶은데 한 시간 밖에 시간

사실 나는 플랫시리즈가 나온 건 다행이라고

잘한건지 못한건지 모르겠지만. 본인의 워딩을

안된다고 그러고... 그렇구나. 미저리스러운.

생각하는데. 플랫시리즈는 전 거에 비해서 이게

빌리자면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주늑 들었는데

어떻게 나갈까 되게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그

그걸 좀 풀수 있는 계기가. 나도 임대식을 봤을 때

전 준비하느라 힘들었어요. 제 수첩에는

플랫시리즈가 너무 좋았고. 그래서 같이 움직여

그동안의 공백. 싸우고 5년 안 봤다고 그랬잖아요.

나름대로의 작가론이 담겨있어요. 이건 나중에...

보자. 그리고 이 사람이 뭘 고민하고 그런게 점점

그런 시간들을 공유해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궁금해진거지. 권오상의 사진 조각은 그 전에

경험과 내가 갖고 있는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나한테 아무런 궁금증, 궁금증이 아니고 저걸 왜

좋은 방향의 시너지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아,

해야 돼? 그랬거든. 근데 초기 작업은 얽기 설기

그리고 가장 큰 수확은 로드쇼는 역시 도시는

해놨잖아. 그건 너무 좋았거든. 2D가 3D가 되려고

아니다. 로드쇼는 현대 미술이 없는 곳을 가야한다.

안간 힘을 쓰는 데 그 긴장감이. 그런 부분이 되게

내년에는 토탈이 40주년이라 안에 정리하는 데

좋았는데 이게 딱 확고하게 조각이 되고 나니까

좀 더 집중을 할 것 같고. 내년 로드쇼는 한국

별로... 관심이 없어지는 거지. 근데 이게 되게 좋은

서부전선에서 동부전선까지 DMZ가로지르기.

방향으로, 굳이 레벨 업이라고 얘기할 순 없지만

아프리카. 말레이시아. 이 세 개는 늘 있는 거니까. 그리고 내년에는 프랑스랑 하는 전시가 하나 있고.

궁금한 건... 뭐 역시 넌 잘해. 인터뷰에 못 쓰는...

그게 내가 하는 전시는 다에요. 프로젝트는. 올해에

인터뷰를 길게 했는데 마지막으로 로드쇼 총평을

비하면 안 바쁜거지. 작년엔 프로젝트 17개 했는데

하고 내년 계획을 듣고 싶네요.

그래서 끝나고 애들이 다 그만뒀잖아. 올해도 한

10개, 15개 한 것 같아요.

요번 로드쇼의 총평은 아마 일기를 쓰게 할 것 같거든요. 사실 그 전엔 내가 일기를 쓰진 않았어. 애들한테 다 쓰게 하고. 근데 이번에는 40대

좀 바쁘지 않아야 돌아볼 수 있을 텐데.

작가들이 들어온 것처럼 나와 잠시 오버랩 했던

그래서 난 오히려 나와 있으면 그런 걸 훨씬

현 큐레이터가 다시 들어오고 시작부터 여기에

더 많이 하는 것 같아. 잠도 훨씬 더 많이 자고.

있는 코디네이션하고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고

잡다한 생각도 훨씬 더 많이 하고. 그런 게 좋은

우여곡절 끝에 왔고. 이건 내 얘기도 중요할거란

거 같아. 나 때문에 나오는 거 일수도 있어. 굉장히

생각이 들어서 일기를 쓰려고 해요. 그러면 좀

이기적인 프로젝트지.

더 분명해질 거 같은데 굳이 뭐 간단하게 하자면 글쎄. LA는 넓다. 차 없이 못 나간다. 그건 있었어.

전 그렇게 생각해요. 기본적인 욕구가 그러니까.

요즘 일정이 너무 빡빡했거든요. 2주있다 나 또

내가 작가를 더 알고 싶고. 내가 더 작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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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쇼LA: 패서디나에서 샌터모니카까지

Roadshow LA: Pasadena to Santa Monica 2015.11.24 -12 .02 큐레이터 신보슬 참여자 권오상, 김도균, 노순택, 문형민, 임대식, 황희승 촬영 김형주 디자인 손혜인 기획 토탈미술관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협력

Baik Art Gallery, Art Always Special Thanks to Susan Baik, HooJung Lee, Jina Han, Ahmad Morshed, Laurel Paley, Sharon Ryan 발행인 | 노준의 (토탈미술관) 발행처 | 토탈프레스 주소 |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46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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