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 타다오 악어들의 잔근육 Editor 서한영교
나는 정규교육과정을 밟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에게 쉽게 빠진다.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거나 혹은 전공과목이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는 발칙한 시선과 깡따구 하나로 그 바닥을 헤 쳐나오면서 그들에게는 남들이 없는 잔근육들이 잔뜩 붙어있기 때문이다. 눈빛도 다르다. 영화를 배운적 없는 김기덕 감독이 좋고, 철학을 전공했지만 영화를 하는 박찬욱 감독이 좋다. 그들의 영화 에는 정규교육과정의 냄새가 잘 나지 않는다. 당연히 지켜야 할 것도, 존경해야 할 전통도 없기 때문 이다. 건축가 안도 타다오 역시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다. 대학 문턱에도 가 본적 없던 사람이 다. 그런 그가 일본을 대표하는 국보급 건축가로 자리잡고 예일 대학교, 콜럼비아 대학교, 하버드 대 학의 초빙교수로 1997년에는 보수적으로 유명한 도쿄대학의 공학부 건축학과 교수로 초비되기도 하였다. 건축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퓰리쳐 상까지.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안도 타다오는 1941년 일본 오사카 변두리에서
복싱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을 때 쯤 당시 일본
태어났다. 출가한 어머니 덕분에 외할머니 집에
권투계의 대스타와 스파링을 한 번 하고 난 뒤 "
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가 자란 시타마치는 온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저렇게까지 발전할 수
갖 제작소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철공소, 판유리
없을 것라는 엄혹한 현실"을 뼈져리게 느낀 뒤
공장, 바둑돌 공장 등등. 그의 집 건너편에는 바
권투를 그만두었다. 권투로 먹고 살아 갈 수 있
로 목공소가 있었는데 안도가 학교를 마치고 나
을 줄 알았던 소년 안도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면 곧장 뛰어가던 곳이었다. 안도는 "나무 냄새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
속에서 뭔가를 만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
면 나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었다고 회고한다. 안도 타다오는 공업고등학교
전통 건축물이 좋아서 종종 보러 다니면서 느꼈
로 진학하고 2학년 때부터 복싱을 시작한다. 권
던 공간-체험 속에서 느낀 행복했음을 알아차린
투를 시작한지 한 달만에 프로테스트를 통과하
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선택하려고 할 때 온갖
고 파이트 머니를 받아가며 생활했다. 심지어 태
고민 속에 빠져있는 것들 보다 자신의 체험을 통
국 방콕으로까지 원정경기를 갈 정도였다. 프로
해 몸으로 알아차린 온갖 느낌들을 따라가는 것
이 나을 때가 많다. 안도 타다오 역시 그러했다.
학으로 성공한 건축가이며 기성 체제와 싸우며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과 학습의 기초가 부족한
길을 만들어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탓에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 그는 독학을 하기
더 빠져들기 시작한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
시작한다. 흔히들 독학이라고 하면 자유롭고 느
고 생각 했을까.
긋하게 공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 렇지 않다. 안도는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을
전 세계를 떠도는 건축여행
어떻게 배울 것인가"를 찾는 점이었다. 그는 건 축학과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를 잔뜩 사서 읽어
단게겐조의 도쿄토의 청사
보지만 "책의 절반 정도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왜 그런 것이 필요한지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 다. 계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는 건축을 공부해나갔다. 그렇게 건축을 향해서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을 때 안도는 집으로 가는 길에 우연 히 오사카 도톰보리 헌책방에서 한 권의 책을 만 난다. 바로 '르 꼬르뷔제의 작품집'이었다. 헌책 방에서 별 생각 없이 집어 든 그 책에서 안도는 눈을 뗄 수 없었다. 헌책이라고 해도 제법 비싼 가격에 그는 그 책을 헌책방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두고 매일 매일 팔리지는 않았을까 걱 정스러워 하다 한 달 만에 그 책을 손에 넣는다. 가끔씩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책, 영화, 사람, 말, 문장 같은 것들을 만나게 된다. 그 것들은 항상 뜨겁다. '바로 이거야'라고 느낀 순간 온 몸이 화 들짝 깨어나는 체험을 하곤 한다. 안도는 "헌책 방에서 구입한 르 꼬르뷔제 작품집을 보면서 그
건축을 하고 싶다면 잘 짜여진 커리큘럼을 가지
미스터리한 힘에 완전히 압도 되었"고 이후 르
고 있는 학교, 아카데미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
꼬르뷔제의 도면과 드로잉을 수도 없이 베끼면
만 그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바로 건축 여행이
서 그의 모든 도판을 기억해버릴 정도로 갈고 닦
다. 그가 22살이 되던 해 그는 일본 일주에 나선
았다.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이해할 수 없었지
다. 오사카, 시코구, 규슈, 히로시마, 도호쿠, 훗
만 끊임없이 번역본을 구해서 읽어나간다. 식비
카이도 등지를 돌아다니면 건축여행을 떠났다.
를 줄여서라도 해외도서, 해외잡지 따위들을 닥
일본 근대건축의 전설인 단게 겐조의 건축을 돌
치는 대로 사서 읽어나가면서 건축에 더욱더 빠
아보면서 그는 엄청난 감동을 느끼며 여행한다.
져들기 시작하였다. 안도는 르 꼬르뷔제 역시 독
여행을 떠나는 자는 대게 느낄 준비가 된 이들이
다. 무언가를 강렬하게 느끼고 싶어 안달난 이들
언어로 아는 것과 실제 체험으로 아는 것은 같은
이다. 뭔가 다르고, 낯설고, 새로운 어떤 체험을
지식이라도 그 깊이가 전혀 다르다. 첫 해외여행
통해 성장하려고 하는 이들이다. 안도 역시 그러
에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지평선과 수평선을 보
했다. 그는 일본 건축여행을 마치고 유럽건축여
았다. 지구의 모습을 온 몸으로 느끼는 감동"이
행을 곧장 준비한다. 그는 유럽건축이 가지고 있
었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온 뒤 4년 동
는 강렬함을 맛보고 싶었다. 그는 딸랑 60만엔
안 돈만 모이면 건축여행을 떠나 세계를 돌아다
을 들고 모스크바에서 핀란드, 프랑스, 스위스,
니며 온 몸으로 건축을 익혀나갔다. 미국, 아프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지를 돌아보았다. 7
리카, 아시아, 유럽 등지를 여행하며 건축공부에
개월 남짓한 여정이었다. 그는 로마 시대의 판테
매진한다.
온 부터 바르셀로나의 가우디의 건축물까지 보
안도 타다오는 7년간의 여행을 통해서 다른 건
고 걷고 보고 또 걸었다. 특히 안도는 만나본 적
축학도들이 책상 위에 앉아 있을 때 그는 온 몸
도 없는 스승 르 꼬르뷔제의 모든 건축물들을 느
으로 건축을 이해한 것이다. 몸으로 익힌 그의
끼기 위해 부지런히 다녔다. 안도는 르 꼬르뷔제
건축에 대한 감각은 그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갔
를 만나고 싶어 그의 아틀리에들을 열심히 찾아
다. 그는 7년간의 여행과 독학을 마치고 건축사
다니며 그의 그림자라도 볼 수 있을까 찾아 다
무소를 연다. 이름도 없고, 학력도, 실력도 검증
녔지만 르 꼬르뷔제는 안도가 도착하기 몇 주전
이 되지 않은 신출내기 건축가 안도 타다오는 2
에 사망하였다. 그는 여행을 통해서 "추상적인
년 동안 그 어떤 작업 의뢰가 들어오지 않았다.
가우디의 건축물
그 기간 동안 공모전이나 습작을 주로 작업하곤 했다. 그는 도쿄에서 아방가르드 예술들과 교류 하기도 하고 1960년대 말에 일본 전공투 투쟁 을 목도하면서 사회적 문제에도 눈 뜨기 시작한 다. 공해, 도시문제, 개발 이데올로기, 환경 파 괴, 경제지상주의에 대한 사회적 의식을 키워나 갔다. 그는 아무런 작업 의뢰도 들어오지 않는 자신의 건축 사무실에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그의 뜨거운 가슴에 맴도는 문장 하나.
"남 흉내는 내지 마라! 새로운 걸 해라!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라!"
문제의 데뷔작 만에 스미요시 나가야 주택 사무실을 열고 난 뒤 조금씩 일을 하나씩 하나 씩 맡아가면서 4년 만에 스미요시 나가야 주택 을 설계하게 된다. 소형 주택 '스미요시 나가야'
주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중
는 목조 건물이 줄지어 있는 빽빽한 골목, 그야
정으로 들어오는 자연의 그 냉혹함까지 받아들
말로 한 뼘이라고 표현할 만큼 조그만 땅 뿐이었
이고 일상생활의 멋"이라고 보았다. 이 건축물
다. 그는 이 작은 목조주택을 자신만의 노출 콘
은 일본건축계에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기존의
크리트 기법으로 가꾸었다. 좁은 건물의 3분의
건축학계의 문법으로는 안도의 공간 해석능력
1 정도를 할애하였다. 이 중정을 통해야지만 방
이 너무나도 엉뚱하고 건축가 중심의 공간이라
에서 거실로 나갈 수 있었다. 비가 오면 우산을
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에 있어 주거란 "자연
써야했다. 안도 타다오는 '주거란 무엇인가'라는
의 일부로 존재하는 생활"이었다. 그래서 안도
문제 앞에서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생활'을
의 주거 공간은 조금은 현대생활에 길들여진 우
주거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안도 타다오는 자신
리에게는 불편하다. 그의 건축물은 살기가 힘들
의 책에 '상식적으로 보자면 그 넓지도 않은 집
다, 생활이 불편하다, 겨울에 춥다, 비가 잘 샌다
에서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정은 얼마나 낭비적
등등의 비판들이 줄을 선다. 이러한 불편한 건축
인 공간’인지에 대해서 고백하면서 "중정이라는
물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안도 타다오는 "건물에
자연적 공백이야말로 좁은 집안에 무한한 소우
서 평온함을 느낄 때 사람들은 에너지를 잃는다
고 생각"한다며 자신은 공간을 건축할 때 "아로
하게 된 것이다. 그의 건축물들은 곳곳에서 주목
새겨진 악의가 바로 내가 노리는 것"이라고 뻔뻔
받았고 온갖 건축상들을 휩쓸었다.
하게도 말한다. 공간을 디자인 할 때 '불편함'을
정규교육과정을 통하지 않고 독서와 여행, 체험
통해서 삶과 일상을 사색하고 그 것에서 기쁨을
을 통해서 그가 늘 들고 있던 "주거란 무엇인가"
느낄 수 있도록 한다. 그의 건축물들을 보면 자
라는 질문과 "건축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
연과의 어울려짐을 중시하고, 공간을 비워냄으
문에 그는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똘기
로써 삶의 의미를 사유해 볼 수 있는 공간을 만
있는 대답을 데뷔작을 통해서 건낸 것이다. 온
들어 놓는다. 그가 만들어낸 공간의 구성은 낯설
몸으로 익히는 공부, 강렬한 체험으로 자신의 결
고 불편하면서도 그 건축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
을 만들어나간 안도는 그렇게 세상에 자신을 보
람들로 부터 무언가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을 만
여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차가운 콘크리트 안으
들어낸다. 그러다 보니 정신성과 공간-체험을 그
로 그 무엇보다 뜨거운 질문들로 가득하다. 그는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안도의 건축물들. 지금에
이렇게 말한다. "독학으로 건축가가 되었다는
들어서야 그의 탁월한 공간 해석능력에 대한 무
나의 이력을 듣고 화려한 성공 스토리를 기대하
한한 신뢰와 존경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안도의
는 사람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폐쇄적이
데뷔작품은 일본 건축학회장상을 받으며 건축
고 보수적인 일본사회에서 아무런 뒷배도 없고
계의 뜨거운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건축에 대한
혼자 건축가로 일했으니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살
고집 하나로 복서에서 건축가로 화려하게 데뷔
아왔을 리가 없다. 여하튼 매사 처음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고, 뭔가를 시작해도 대개는 실패로 끝났다.....나의 이력에서 뭔가를 찾아낸다면 아마 그 것은 뛰어난 예술가적 자질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가혹한 현실에 직면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강 인하게 살아남으려고 분투하는 완강함 일 것이다.....행복은 몰입의 시간 속에 충실한 삶에 있다고 본다."
로즈가든 1976 일본은 당시 엄청난 산업화의 물결과 전통과 옛
리트 기법을 포기하고 옛 방식인 벽돌을 사용하였
것은 근대화라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모조리 파
다. 그리고 주변 동네에 어울릴 수 있게 건물을 높
괴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댔다. 옛 도시의 풍경
게 짓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개발-건축계에서는
은 무너져내렸다. 이에 안도의 첫 번째 상업 건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개발-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축물인 '로즈 가든'을 짓기 시작했다. 로즈가든
것은 많은 효율성이었다. 가능하면 높이 짓고 세
이 지어진 곳은 고베의 기타노마치에 위치한 곳
련되고 멋있게 지어야 하고, 많은 상점들이 들어
으로 메이지시대때부터 외국인 밀집지역으로 이
올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안도의 방식은
용되던 곳이었다. 이 곳도 마구잡이식 개발의 폭
달랐다. 여전히 비효율적인 커다란 중정을 만들고
력이 휘몰아치면서 오래된 역사의 흔적을 '개발'
촌스러운 벽돌로 마감하였으며, 마을과 어울릴 수
이라는 이름으로 지워나가고 있었다. 안도는 자
있는 높이로 로즈 가든을 완성했다. 전통과 옛 것
신의 건축이 그 파괴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고 보
의 파괴를 맛보던 고베의 주민들은 안도에게 손을
았다. 그는 자신만의 트레이드 마크인 노출 콘크
들어주었다.
로즈가든
빛의 교회 1989
나무 박물관1993-1994
50평 남짓한 아담한 교회. 교회 재건축을 위해
식목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은 건물로 만들어
신자들이 정성껏 귀한 돈을 모았다. 하지만 그
진 나무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의 큰 특징은 박
돈으로는 건축비로는 터무니 없이 모자랐다. 안
물관 내부에 있지 않다. 바로 박물관의 외부에
도는 교회 건축을 진심으로 바라는 건축주와 신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기나긴 길에 들어선
자들을 만나면서 덜컥 이 교회를 설계하기 시작
나무들은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 부터 충분히 눈
한다. 그는 1년간의 설계 끝에 교회 정면 벽에
으로 나무를 익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계되었
십자형 창으로 빛의 십자가가 부각되도록 하는
다. 건축 자체가 건축물 내부에만 있는 것이 아
설계를 하였다. 그는 인간의 정신에 호소하는 엄
니라 건축을 둘러싼 주변 환경과 풍경들 속에 함
숙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냈다. 종교가 없
께 어우러졌을 때에만 건축의 참된 모습을 보여
는 이들도 이 곳의 빛의 십자가를 보면 숙연해지
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로코하우스
지니어스 로싸이
이 건축물은 아파트이다. 산의 경사를 그대로 살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은 한국에도 있다. 제주도
려서 아파트를 지었다. 아파트이지만 거의 개인
에만 3개가 있다.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공
주택에 사는 것처럼 널찍한 마당과 탁 트인 시야
간이 한국에도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그 중
까지 확보하고 있는 아파트이다. 게다가 이 아
하나인 지니어스 로싸이는 미디어 갤러리로 활
파트의 중간쯤에 공공 수영장이 있는데 이 곳에
용되고 있다. 갤러리로 들어가는 길로 들어가면
서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수영을 할 수 있기도 하
빠른 걸음으로 지나갈 수 없게 만드는 명상의 공
다. 산의 경사를 따라 들어선 아파트는 기존의
간이 나온다. 지니어스 로싸이를 둘러싼 벽면 위
아파트 단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안도의 공간을
로 제주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고 성산 일출봉
배치하려고 할 때 비워냄과 공공성의 공간 체험
을 액자에 걸어 놓은 것 같은 안도 특유의 빈 공
은 그 어느 아파트에서도 느끼지 못하는 공간을
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만들어냈다.
제주의 풍경을 안도가 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