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먼 나라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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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직 먼 도 나 라

북한 박민규

4km


머릿말 공식명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면적: 120.540㎢ 인구: 23.349.859 (2008년 기준) 수도: 평양 정치체제: 사회주의 남한과의 거리 고작 4km 그러나 마음의 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북한 과연 어떤 나라일까?


차례 1. 북한 (1) 북한의 사상 (2) 북한의 실태 ① 경제 상황 ② 내부 상황

(3) 소련

2. 북한과의 사건 사고 (1) 한국전쟁 (2) 도발

3. 화해의 움직임 (1)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2) 햇볕정책 (3) 개성공단

4. 아직 먼 나라 (1) 움직임 그 후

후기


1. 북한


(1) 북한의 사상

우리나라와 북한이 갈라지게 된 이유는 바로 사상차이이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의 해방이후 소련이 미국이 우리나라를 위 아래로 나누어 북한지역은 소련이 남한지역은 미국이 들어오 게 되었다. 소련 미국은 북한과 남한에게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각각 도입 하였고 이렇게 우리나라와 북한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이 받아들인 공산주의는 칼 마르크스에 의해 창시된 이론으 로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사회제도를 의미한다. 하지만 현재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면서 현재는 소수의 국 가만이 채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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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공산주의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 (1818. 5. 5. ~ 1883. 3)

사진 출처: 네이0007420

북한의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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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의 실태 1) 경제체제

북한의 경제체제는 사회주의적 소유제도에 토대를 둔 계획경제 체제로써 생산수단이나 그로 인하여 생산되는 생산물들이 사회화 되어있어 개인이 마음대로 관리하거나 처분하는 것이 불가능하 다. 북한은 1946년에 2월 조직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개 혁에 관한 법령‘ 주요산업의 국유화 법령을 발포하며 토지 및 산업에서의 국유화를 확대시켜갔다.

북한의 경제는 중앙집권화된 경제인데 이 경제체제는 계획 수립 을 비롯한 경제적 와사결정과 경제정보가 중앙당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는 경제운용에 복잡성에 의한 문제로 중앙집권적이 경제관리 에 기술적 한계로 북한과 쿠바 이외에는 이 경제체제를 사용하는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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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제 발전과 현재 북한의 경제상황 전쟁을 거치고 완전히 남북으로 갈라지게 된 이후 초기에는 북 한은 풍족한 지하자원과 전제정치 특유의 강력한 추진력과 주변 공산국(소련, 중국 등)의 도움으로 소련이나 그 외 공산국들로부 터 선진 과학 기술을 받아오며 공업 발전을 빠르게 이루었으며 1970년대 까지는 무려 매년 10%에 이르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 여주었다.

하지만 계속된 세계와의 교류 거부와 1960년대부터 시작한 군사 력의 무리한 발전시도로 인하여 점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1990년 공산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로 인해 여러 공산국들이 무 너지며 경제는 바닥을 치게 되었고 현재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 하였다.

2010년 남북한 경제 비교표

사진 출처: 통계청 및 유엔데이터베이스

북한의 1인당 GDP(GDP설명)는 583달러(2012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의 2만 3,679달러(2012년 기준, 34위)에 비교해 1/50수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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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위라는 최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현재 북한의 경제 상태를 보여주는 사진

사진 출저: 네이버 평화문제연구소 블로그

미국 NASA에서 찍은 야경 중 한반도 부분이다. 남한은 모든 도시에 불이 들어와 있는 반면에 북한은 평야에만 약간의 불이 들어와 있고 나머지 지역들은 전부 불이 꺼져있다. 2010년 북한의 총 발전량은 237억kWh로 같은 해 남한의 총 발전량 4379억 kWh의5% 수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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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련

1922년 세워진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22,402,200 km²) 세계에서 세 번째로 인구(293,047,571명, 1991년 기준) 세계 공업 생산량의 20%를 차지하여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에 초 강대국으로 자리를 잡았었다.

소련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권을 잡은 후 적백내전에서 승리하여 1922년 12월 탄생하였다. 레닌이후 스탈린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대숙청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적들을 모두 숙청하였다.(이때 대숙청으로 인해 90만 명 에서 130만 명 정도가 숙청되었다)

그 후 완전히 독재체재도 들어간 스탈린은 혹독한 탄압과 국민 들의 희생을 대가로 단기간에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 후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에서 점점 공산국가가 생 겨나기 시작하며 소련의 세력은 점점 커져갔다. 그렇게 세력을 넓혀나간 소련은 미국과 비등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역시나 공산주의의 문제점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하였 고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1991년 8월 쿠데타가 발생하여 고르바 초프를 몰아낸다. 그 후 소련은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가 사임하며 해체되 었다. 소련의 붕괴는 북한을 비롯한 공산국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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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국기 (1980 8월 15일 ~ 1991년)

러시아 공산당 및 소비에트 연방국가의 창설자 레닌(1870. 4. 22. ~ 1924.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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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과의 사건사고


(1) 한국전쟁(6.25 전쟁) 1) 전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이 남침을 하면서 전쟁 이 시작되었다. 소련의 지원을 받고서 남한을 침공한 북한에 비하여 당시 남한 은 농번기로 인하여 많은 수의 병력들이 외박 및 외출 중이었고 변변찮은 무기조차 없어 군사의 수와 높은 무기수준을 앞세운 북 한에 순식간에 밀려버려 전쟁 후 3일 만에 부산까지 후퇴하게 되 었다. 조선민주주의

항목

대한민국

장갑차

27대

54대

전차

0대

242대

인민공화국

122mm 172문

곡사포

105mm-m 388문

76.2mm곡사포 176문

사정거리 6500m

76.2mm자주포 242문 사정거리 평균 10,000m

대전차포 박격포

120mm 590문

45mm 540문 61mm 1142문

60mm 576문

82mm 950문

81mm 384문

120mm 226문

군용기

훈련기 포함 22대

전투기 포함 170대

육군병력

9만 4947명

19만 1680명

해군병력

7715명

4700명

공국병력

1897명

2000명

총병력

10만 4559명

19만 838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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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까지 후퇴하게 되었을 당시만 하여도 남한이 가지고 있던 장비와 물자는 얼마 되지 않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군의 승리로 전쟁이 종결되는가 싶었으나 UN군이 참전하게 되면서 전 쟁의 상황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7월 5일경 UN군과 북한사이에서 처음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당시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던 미군은 상당히 질이 낮은 무기를 들고 왔고 소련제 무기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패배하 였다.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패배를 예상하고 있지 않았던 미군은 급하 게 일본에서 무기를 공수해왔으나 역시 북한군을 막기에는 역부 족이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국군과 UN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 방어선을 전개하였고 9월까지 방어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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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계속된 공격을 막아내던 국군과 UN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개시하였다. 이와 같이하여 미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 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는 9월 15일 새벽에 인천 상 륙작전을 실시하였고 그 다음날에는 인천을 함락하였다. 인천 상륙장전은 맥아더 유엔 총사령관이 전쟁 참전직후 한강에 이르러 전선을 시찰할 당시부터 구상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인천은 당시 상륙작전을 실행하려던 인천, 군산, 주문진 세 지역 가운데서 가장 멀고 깊은 곳이어서 작전을 지원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뿐만 아니라 조수 간만, 지형 등의

자연조건도

불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반대를 당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작전을 지원하는데 어려움이 많고 자연조 건의 불리한 지역이기 때문에 북한군이 제대로 된 방어를 하지 않고 있을 것이며 인천은 서울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고 북한군의 지상, 해상, 공중 수송로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 속적으로 주장하여 결국 9월 8일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내는데 성 공하였다. 그리고 맥아더의 주장대로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보급로가 끊 기고 남북으로 단절되어 버린 북한은 힘을 잃어갔고 그 후 인천에 상륙한 UN군은 9월 26일 서울에 진입하였고 9월 29 일에는 완전 수복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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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당시 미국군의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1880. 1. 24 – 1964.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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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이후 전세가 호전되면서 38선 이북에서의 작전이 가능하게 되었으나 강대국끼리의 전면적인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중국과 소련의 국경을 넘는 것은 금지하였다. 그동안 맥아더 장군은 북한에게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이 요구는 무시당한채로 중국의 참전 계획이 진행되었다. 중국의 공산당 외교부 부장, 총리 저우언라이는 9월 30일 유엔 군의 38선 돌파를 방관할 수 없다고 하였고 10월 30일에는 한국 군만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의 파병은 없을 것이나 UN군이 38 선을 넘을 경우에는 중국군이 파병할 것이라며 미국에 전달하였 다, 하지만 이 발언은 단순이 유엔의 새 결의를 막기 위한 압력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여졌고 한국군은 이미 10월 1일 38선을 넘었고 유엔군은 38선을 넘은 북진에 대해 결의를 하고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 한국의 통일 독립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한 대표단체의 협 력을 얻어 유엔주관 아래에서의 선거를 실시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할 경우 유엔군의 행동은 한반 도 어느 부분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유엔 한국 위원회의 임무를 계승하기 위해 유엔 한국통일부흥위 원회를 설치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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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이후 탄력을 받은 한국군과 UN군 은 10월 19일 평양에 도달하고 26일 국경지대인 초산에까지 이르 렀으나 북한군 섬멸 직전에 급작스레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투 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엄청난 수를 가진 중공군은 단숨에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 다. 결국 통일을 눈 앞 에 두고 국군과 UN군은 다시 후퇴할 수밖 에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1월 4일 서울 함락 1월 7일에는 수원을 빼앗겼다. 그러나 국군과 UN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반격에 나섰다. 반격에 나선 뒤 적군은 10만 명에 전사자를 내고 후퇴하기 시작 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북진은 쉽지가 않았고 치열한 전 투들을 치르면서 조금씩 북으로 진격하였다. 국군과 UN군은 반격을 시작하고 나서 2달 뒤 인 3월 14일 다시 서울을 수복하였다. 이 후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이 서로 뺏고 다시 빼앗기를 반복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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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별다른 진전없이 휴전 회담에 돌입하였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채결되며 3년 하고도 1개월간 지속된 전쟁을 끝을 보지 못 한 채로 휴전상태로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전쟁 전개 요약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발발

1950년 6월 28일

서울 함락

1950년 7월 7일

UN군 참전 결정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성공

1950년 9월 26일

서울 수복

1951년 1월 4일

1.4 후퇴 (서울 재 함락)

1951년 3월 14일

서울 재 수복

1953년 7울 27일

휴전 협정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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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피해 규모

군인

민간인

총계 52만 2604명 사망

대한

14만 9005명 전사

37만 3599명 사망

94만 408명 부상

민국

71만 783명 부상

22만 9625명 부상

43만 5468명 실종

13만 2256명 실종

30만 3212명 실종

총계189만 8480명 사상

3만 6940명 전사

미국

9만 2134명 29만

총계 13만7250명

4000명 전사 8146명 실종 및 포로 1078명 전사

영국

2674명 부상

총계 4908명

1176명 실종 및 포로 40만 6000명

북한

29만 4000명 전사

사망

22만 6000명 부상

159만 4000명

12만 명 실종 및 포로

부상 68만 명 행방불명

70만 명 사망 182만 명 부상 80만 명 실종 총계 332만 명 사상

13만 5600명 전사

소련 중국

20만 8400명 부상

총계 36만 9600명

2만 5600명 실종 및

사상

포로 315명 전사

총계 815명

500명 부상

그 외

474,000명 이상

국가

위 차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 전쟁은 양 국가 모두에게 이 득 없이 피해만 안긴 처참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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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참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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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을 도와준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 이외에도 총 54개국이 UN군으로 참전하여 함께 싸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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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의 도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북한의 도발 사례 1.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1968. 1. 23) 2.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 11. 2) 3.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1974. 8. 15) 4.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1976. 8. 18) 5.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1983. 10. 9) 6. 제 1연평해전 (1999. 6. 15) 7. 북 경비정 NLL침범, 제 2연평해전 (2002. 6. 29) 8. 천안함 피격사건 (2010. 3. 26) 9. 연평도 포격 사건 (210. 11. 23) 10. 제 3차 핵실험 감행 (2013. 2. 12)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북한은 수많은 도발을 시도하였다. 1953년 ~ 1980년 까지 발각된 무장공비의 수 만 5000명 1.7일당 1명 수준이라는 것은 발각되지 않은 무장공비의 수까지 포함하면 하루에 한명씩은 무장공비를 보내왔다는 소리이다. 남과 북이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두 나라의 협력과 공존이 필요 한데 이런 불필요한 도발을 강행하는 것은 두 나라의 통일을 어 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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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해의 움직임


남과 북이 항상 서로 싸우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 나름대로의 통일을 위한 노력도 하였고 2000년에는 비록 단일 팀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한반도기를 들고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같이 입장하기도 하였다.

(1)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남과 북은 1985년 9월부터 이산가족상봉행사를 하였는데 현재까지 제 18차 이산가족상봉행사를 하였고 제 7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행사를 하였다.

또 이산가족 상봉 외에도 금강산 관광으로 계속 교류를 하였으 나 현재는 남북관계가 악화되며 금강산 관광을 중지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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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햇볕정책 남과 북이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한 시기는 김대중 대통령 때부터 인데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실시하 였고 노무현 대통령 까지 이어졌다. 햇볕정책은 북한에 협력과 지원을 함으로써 평화적인 통일을 목 적으로 하는 정책이다. 햇볕정책은 그동안 딱딱했던 북한과의 관계를 완화시킴으로써 통일에 한 걸음 다가가려는 정책이었고 덕분에 북한과의 관계가 완화되고 남과 북의 교류가 활발해졌다는 긍정정인 면도 있으나 햇볕정책 시행당시에도 발생한 북한의 도발이나 북한의 핵실험을 막지 못했다는 문제도 있다.

古김대중 대통령

古노무현 대통령

(1926. 1. 6 ~ 2009. 8. 18) (1946. 9. 1 ~ 2009.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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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직 먼 나라


(1) 움직임 그 후 남과 북은 서로 계속 대립하면서도 서로 조금씩 교류를 해나가 는 상태이다. 이산가족 상봉이나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으로 교류를 하고 있고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임기 시절에는 햇볕정책을 통해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북한이 계속 불필요한 도발을 하면서 남북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중지되었다가 다시 재개되기를 반복하는데 위의 정책들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좋은 효과가 나는데 지금까지처럼 계속해 서 북한이 도발을 할 경우 아무리 남측에서 다가가기 위해 노력 하고 통일을 위해 힘을 쓰더라도 진전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남북 모두의 염원인 남북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히 남측만의 접근이 아닌 북측에서도 무리한 핵개발이나 도 발을 멈추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위해 힘을 써야한다.

남북측이 공동성명을 하거나 스포츠 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을 이룰 때 사용하는 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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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남과 북이 갈라지고 난 뒤로부터 벌써 60년을 훌쩍 넘겼다. 현재 지구상에 통일되지 못한 국가는 한국과 북한뿐이다. 6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남과 북은 계속해서 서로를 상처입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로인한 피해를 잊은 채 다시 그 일을 반복 해왔다. 이렇게 계속된 악순환이 통일을 위한 조그마한 노력들과 국민들의 대를 저버리고 있다. 만약 두 국가가 정말 진정된 통일을 원한다면 서로 조금씩 양보해 가며 서로를 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쓰기위해 북한으로 주제를 고른 뒤 책을 쓰는 동안 상당히 힘들었다. 상당히 민감한 문제이기에 장난으로 재미있게 쓸 수 없기에 진지 하게 쓰려다보니 상당히 읽기 불편하게 쓴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진지하게 쓴 만큼 이 책을 통해 친구들이 조금 더 북한에 대해 알게 되고 남북통일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해보았으면 좋 겠다. 나 또한 북한에 대해 쓰기위해 여러 가지 조사를 하면서 새로이 알 게 된 점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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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국전쟁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며 다시 한국전쟁을 되돌아 보며 왜 그런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하게 되었고 북한의 도발이나 남북이 서로 교류하는 과정을 찾아보면서 남북관계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루 빨리 남한과 북한의 관계가 완화되어 한민족으로써 또 한나라로써 세계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료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위키백과 통계부 및 유엔 데이터베이스 네이버 평화문제연구소 한국 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네이버 블로그(아름다운 우리나라, 아름다운 우리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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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먼 나라 – 북한 2014년 9월 10일 초판 발행인 편집 디자인 제작 박민규 펴낸곳 서울시 중구 중림동 홈페이지 http://www.hwanil.hs.kr/?c=184/192/348 이 책은 자유로운 편집이 가능합니다. 4km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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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0여 년간 이어진 총성 없는 전쟁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3년 간의 전쟁 후 이어진 휴전 3년 간의 전쟁의 처참한 기록들과 지울 수 없는 상처 그리고 지난 60년간 허무하게 지나간 시간 이 긴 시간동안 대한민국과 북한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을까?

이 책은 마포구청 논술지원비로 제작되었습니다.

정가 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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