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대한민국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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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대한민국을 묻다.

김연식 지음

the road


목차

프롤로그

chapter1 사람을 부르는 길, 대한민국 chapter2 시간이 정지해 있는 길, 대한민국 chapter3 생각과 함께 하는 길, 대한민국 chapter4 시간이 흐르는 길, 대한민국 chapter5 사람에게 대한민국의 길을 묻다.

에필로그


길.......

노란 숲 속에 두 갈래로 갈라진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 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먼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 할 것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 The Road not Taken-


프롤로그

프로스트 시의 원제가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인 것을 보면 자신이 걸어 온 길보다는 걷지 않았던 길에 대한 미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에 나오는 길은 바로 인생의 길이다. 인간은 동시에 두 길을 갈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인생에 대한 고민과 인간이기에 갖는 한계가 생겨난다. 하지만 이 시인은 자신이 걸어 온 길에서 수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수많은 일들을 지나치고 또 겪으며 걸어왔다는 단순한 진리를 간 과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은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 길 위에 다양한 사람들이나 자연을 만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 아닌 기대를 갖게 된다. 그러나 그 곳에는 보이는 것만이 아닌 수많 은 질문과 대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길을 따라 걸어가던지 선택의 의미는 작을 수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 역시 수많은 길을 통해 흘러왔으며 또 그렇게 흘러 갈 것이 다. “ 대한민국은 어떤 곳이냐?” 라는 큰 질문을 누군가가 우리에게 물어 왔을 때 우리는 어떤 대답을 명쾌하게 할 수 있을까?

그 길에서 찾을 수 있는 작은, 하지만 현명한 대답을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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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 사람을 부르는 길, 대한민국

고구려의 2대 유리왕은 자신이 사랑하는 부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채 혼자 돌아오면 서 자신의 슬픈 마음을 ‘황조가’(1)라는 노래로 부른다. 그러나 백제 30대 왕인 무왕은 선화 공주의 마음을 얻고자 머리를 깎고 스님으로 변장한 채 국경을 넘는다. 또한 그녀 의 마음을 얻고자 ‘서동요’(2)를 만들어 퍼뜨림으로써 공주 스스로 두 사람의 만남이 운 명이었음을 깨닫게 하여서 결혼에 성공한다. 이 두 사람의 모습으로 한국인의 성격을 표현한다면 엉뚱한 비유가 될 수 있을지도 모 르지만 과거 우리 민족의 사상에서 임에 대한 사랑, 부모님에 대한 효도, 나라에 대한 충성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국인이 가지는 가치관을 이해 하기는 힘들다. 타인 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는 것은 사랑의 진정한 뜻을 저버리는 것이므로 스스로 자신 의 감정을 누르고 상대방의 편안함을 배려하는 모습은 그 후 고려시대의 고려가요 ‘가시 리’(3), ‘청산별곡’(4)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무왕과 같은 적극적 모습 또한 ‘서경별곡’(5)에 함께 존재 되어 진다. 이런 개인의 사랑은 임금에 대한 충성, 우국지정의 모습이 조선시대 정철의 가사 작품 인 ‘사미인곡’(6), ‘속미인곡’(7)을 통해 확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반면에 지배계층에 눌려 살아야 했던 백성들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시나 노래로써 극복해 나가기도한다. 즉 지배계층의 수탈을 신분이라는 이유만으로 당해야만 하는 백성들의 이야기나 유교적 가 치관으로 인해 억눌려 살아야 했던 여성들의 대표적인 시집살이의 모습이 다양한 비유 와 풍자로써 스스로의 삶 속에서 때로는 이겨나가고 때로는 체념하면서 씩씩하게 자신 들의 길을 따라서 나아간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길은 신분에 따라 나누어지기도 하고, 함께 공유하기도 하면서 각자 의 길을 따라 나아간다. 이러한 모습은 격동의 근현대를 지나고 민중과 아픔을 나누면서 김수영의 ‘풀’(8)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9) 등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으 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김현승 ‘플라타너스‘(10)등과 같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길 속에서 보이지 않는 동반자의 따뜻함을 노래하기도 했다. 또한 윤동주의 ’새로운 길‘(11) 처럼 그들은 올바른 길을 찾아 유치환의 ’생명의 서‘(12)에서처럼 자신들의 진실된 모습 과 만나기를 위해 강한 의지로 이겨가고자 했다. 이처럼 문학작품 속에서 작가들은 길에 대한 이야기를 잊지 않고 끊임없이 노래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 땅에 만들어진 많은 길을 지나간 우리 조상의 이야기이며 계속 만나 고 헤어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그 길 위에서 스쳐가는 수많은 자연과의 대화 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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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조가’(1)

펄펄나는 꾀꼬리는 암수 서로 날건만은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서동요’(2) ‘가시리’(3),

선화공주니믄 남 몰래 정을 통하고

맛둥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 잡사와 두어리마나는 선하면 아니올세라......... 설온 님을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다시오소서........

‘청산별곡’(4)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니러 우니노라........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조롱곳 누로기 잡사와니 내 엇디 하리잇고. ‘서경별곡’(5). ......여히므론 질삼뵈 버리시고 괴시란데 우러곰 좃니나이다........ ‘사미인곡’(6), .....찰하리싀어디여 범나비 되오리다 곳나모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아니다가 향 므틴 날애로 님의 오새 올므리라..... ‘속미인곡’(7)

......각시님 달이야카니와 구즌 비나 되소서.

‘풀’(8)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타는 목마름으로’((9) ........숨죽여 흐느끼며 네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플라타너스‘(10).....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곳이다. ’새로운 길‘(11)......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생명의 서‘(12)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회한없는 백골로 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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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 시간이 정지해 있는 길 대한민국에서 과거의 모습을 보존해 온 곳은 많다. 특히 지방 자치제도가 시행되고 각 지역마다 자신들에게 남겨진 조상의 흔적을 지키고자 노력하면서 전국적으로 그 모습을 재현 시킨 곳도 많다. 여기서는 개인의 삶을 볼 수 있는 전통 한옥마을과 동북아시아라 는 같은 문화권에 있지만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대한민국만의 특색이 살아있는 궁궐을 소개 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마을이나 궁궐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에 속해있는 하나의 존재로서 그 안에서 조화를 이루러내는 삶을 엿볼 수 있다.

1. 한옥마을 1) 전주 한옥 마을 전주시 풍남동과 교동 일대에 걸쳐 700여 채의 한옥으로 이루어진 전주 한옥마을은 1977년 한옥마을보존지구로 지정되어 우리 전통의 가옥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한옥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1930년대로,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가 생 기면서 전주부성이 허물어지자 서문 밖 천민 거주지역에 모여 살던 일본인들이 성 안으 로 들어와 상권을 형성하여 세력이 커지자 이에 대한 반발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 옥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한옥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오목대에 올라 한옥마을 전경을 굽어보면 회색의 빌딩과 적산 가옥이 둘러싼 가운데에 팔작지붕에 검은 기와가 멋스러운 한옥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현재 한옥 마을 안에 위치한 한옥생활체험관에서는 하룻밤 묵으며 다양한 전통체험 프 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고, 전주 향교의 부속건물인 양사재와 조선의 마지막 황손이 머물 고 있는 승광재가 같이 자리한 설예원, 전통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세헌, 넓은 마당이 인상적인 동락원에서도 한옥 체험 숙박이 가능하다. 다양한 테마의 공방들이 있어 볼거 리도 많고 전통 찻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 전주시 문화관광 http://tour.jeonju.go.kr/ 전북 전주시 완산구 노송광장로 10길 (서노송동) / 대표전화 063) 222-1000 / 팩스 063) 281-5000 2) 남산 한옥 마을 서울의 상징인 남산은 옛 이름을 목멱산이라고 하였으며, 도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남산으로 불리어 왔다. 남산은 그 자연의 경치가 아름다워 우리의 조상들이 골짜기마다 정자를 짓고 자연의 순리에 시·화로 화답하는 풍류생활을 하던 곳으로서 각종 놀이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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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생활을 위하여 수려한 경관을 찾는 선남선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 곳 남산골 전통정원 내에는 그 동안 훼손되었던 지형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남산의 자연식생인 전통 수종을 심었으며, 계곡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였고, 또 한 정자·연못 등을 복원하여 전통양식의 정원으로 꾸몄다. 정원의 북동쪽 7,934㎡ 대지 에는 시내에 산재해 있던 서울시 민속자료 한옥 5채를 이전, 복원하고 이 한옥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분성격에 걸 맞는 가구 등을 배치하여 선조들의 삶을 재조명 하였으며, 전통 공예관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관광 상품을 항상 전시·판매하 고 있다. 정원의 서쪽에는 물이 예스럽게 계곡을 흐르도록 하였고, 주변에는 고풍의 정자를 지어 선조들이 유유자적하였던 남산 기슭의 옛 정취를 한껏 느끼도록 하였다. 전통정원 남쪽 에는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을 1994년 11월 29일 지하 15m 지점 에 매설하였다. 보신각종 모형의 타임캡슐 안에는 서울의 도시모습, 시민생활과 사회문 화를 대표하는 각종 문물 600점을 수장함으로써 현 시대의 사회상이 400년 이후인 2394년 11월 29일에 후손들에게 공개될 것이다.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2가 84-1 남산골한옥마을(전통정원)관리사무소 hanokmaeul.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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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의 고궁 1)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1395년에 세운 왕궁입니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라는 신하가 중국 시집인 「시경」에 나오는 '군자의 만 년 빛나는 복을 빈다'는 뜻이 담긴 경복이라는 시구를 따서 지은 것입니다.

2) 창경궁 창경궁은 1418년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 그 시작이다.

3) 운현궁 운현궁은 현재 보이는 외관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초라하나 그 속에 숨겨진 역사성만 은 어느 전통가옥보다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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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적멸보궁. 사자암으로부터 약20여분이면 오를 수 있는 오대산 적멸보궁은 우리나라 5대 적멸보 궁 중 하나이다.

5)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6) 고려궁터 고려궁터는 지금으로부터 760여년전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왕조가 강화 도로 피난했을 당시 임금이 거쳐하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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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538년(성왕 16) 웅진(熊津)에서 이곳으로 천도한 때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8) 종묘건축 종묘건축은 간단해 보일만큼 간결한 형식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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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3 생각과 함께하는 길 대한민국 조선시대는 가치관의 차이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많은 혼란을 겪었다. 즉 정치적 소용돌 이로 인해 수많은 소신 있는 학자들이 유배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양부 터 먼 유배지까지의 심리적이고 물질적인 거리감과 자신의 이상을 펼치지 못하는 현실 에 대해 비판하지만도 않았고, 자신의 삶을 좌절로 흘려보내지도 않았다. 즉 그들은 자 신의 삶을 자연에 맡겨 새로운 삶을 이루어 내기도 하였으며, 끊임없이 임금을 기다리며 우국충정의 불씨를 끄지 않기도 했다. 또한 백성에게 더욱더 다가가는 방법을 통해 백성 이 처한 현실에서 좀 더 나아지기 위해 현실적인 방법을 끊임없이 찾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윤선도, 정철, 정약용을 통해 그들이 걸어갔던 유배의 길속에서 그들의 생 각과 만나고자한다.

1.고산 윤선도의 자연친화적인 삶, 보길도 보길도 윤선도 원림은 대한민국의 명승 제34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조선시대의 문신, 시인, 학자 윤선도가 여생을 보낸 곳이다.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양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 선도(1589년 ~1671년)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제주로 향하던 중 이곳의 절경에 매료되 어 머물게 되었으며, (어부사시가)등 주옥같은 한시를 이곳에서 창작하였다. 낙서재는 고 산 윤선도가 조그마한 세 채의 기와집을 동쪽과 서쪽, 그리고 중앙에 각각 짓고서 주자 학을 연구하는 곳이다. 낙서재 바로 건너 산 중턱 절벽 바위 위에는 동척석실이라는 한 칸짜리 집의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주변의 석문, 석천, 석폭석대도 장관이다.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있는 세연정은 정자의 중앙에 세연지, 동편에 호광루, 남쪽에 낙기, 서편 에는 동화각과 칠암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현재 전남 보길도 중리 은모래해변 방풍림을 지나 섬 끝자락 백도리까지 발을 옮기면, 우암이 시문을 썼다는 '글씐바위'가 있다. 보길도는 우암보다 고산 윤선도의 안마당이었 다. 우암의 탄핵을 받아 윤선도가 유배간 땅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우암 역시 말년에 제 주도로 유배 가다가 이곳에 들러 시쳇말로 '입이 웬수다(一言胡大罪: 말 한 마디가 무슨 큰 죄라고)'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역사 속 라이벌이었던 윤선도와 우암은 저마다 남인 과 서인의 거두로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고 각자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러나 비록 주자학이 주희의 몸으로 남아있기는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의 의견이 엇갈렸다. 화양계당과 암서재 사이의 계곡물을 금사담이라 부르는데, 그다지 폭이 넓지 않아 개구 리헤엄이라도 칠 줄 안다면 헤엄 쳐서 건너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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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군지정의 송강 정철, 창평 야심만만한 정치가, 우리 문학사 최고의 시인, 수많은 정적을 제거해 버린 매파의 우두 머리, 당대 인격자들과 평생 우의를 다진 최고 엘리트, 이렇듯 송강 정철을 정의하는 것 은 많다. 송강 정철은 다양한 작품을 창작한 문호지만 대부분 가사, 시조, 한시로 대표 되는 시문학에 작품이 집중되어 있어서 ‘송강문학’ 하면 곧바로 시문학을 떠올리게 된 다. 그러나 그는 본격적인 문학론을 전개하였다거나 도덕적인 관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문예 미학적 지침을 모색하지는 않았다. 송강정철은 어린 시절은 을사사화에 연류된 아버지의 귀향으로 인해 생활의 안정은 물 론 공부 할 기회마저 잃게 되었다. 16살 때 그의 아버지는 구양에서 풀려나자마자 할아 버지 묘소가 있는 전남 창평으로 이주 자연에 묻혀 사는 삶을 선택한다. 그의 가족의 이 주는 어린 정철에게는 김인후, 송순과 같은 스승 아래에서 학문을 닦을 수 있는 기회이 기도 했지만 당시 유명한 시인인 함석천에게 시를 사사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의 관직 생활은 청렴결백과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다시 수많은 어려움과 맞부딪치게 되어서 다시 창평으로 돌아오게 된다. 정철은 사림정치의 기수로서 청년 군주 선조와 일찍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 것은 그가 늘 정치 현실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주로 소수파의 입 장에 처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군왕 선조에 의지하는 바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선 조에 대한 그의 충성과 헌신은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통해 볼 수 있으며 그의 연군지 정은 매우 격정적이다. 정철은 국문학사에서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자는 계함(季涵), 호 는 송강(松江) 칩암거사(蟄菴居士)이다. . 문집으로 (송강집) 7책과 (송강가사) 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 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 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특히 그의 생각을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것은 ‘관동별곡’이다. 정철은 1580년(선조 13) 1월 강원도관찰사로 제수되어 원주에 부임했는데 3월에 관동팔경과 내금강·외금강·해금 강을 유람하고 이를 지었다. 내용은 크게 4단으로 나뉜다. 1단은 부임하여 원주로 가는 길, 2단은 만폭동·금강대등 내금강의 풍치, 3단은 외금강·해금강과 동해안을 읊었고, 4 단은 작가가 신선이 된 것으로 비유하여 자신의 풍류를 노래했다. 대구법과 감탄사를 적 절히 구사했으며 효과적으로 생략법을 사용, 박력있고 화려한 문체로써 작가의 풍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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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능란하고 화려하게 읊은 국토예찬으로 김만중이 ‘동방의 이소(離騷)’라고 한 것을 비롯, 후세에 두고두고 칭송되었다. ‘관동별곡’에 투영된 정철의 심상지도

<관동별곡>의 여정

****심상 지도(mental map) 개인의 공간에 대한 인지 상태를 자유롭게 표현한 지도이다. 이는 실제 측량에 의해 제 작된 지도와는 달리 각자의 경험과 판단, 지적 수준 등에 의해 결정된 지역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일한 지역에 거주한다 할지라도 학생과 성인의 출입 장소와 이동 빈도가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만약 지역에 대한 이런 이미지를 마을 지도로 표현 할 경우 학생들은 학교와 문구점, 슈퍼마켓, 공원 등을, 성인의 경우는 직장, 주차장,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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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실, 시장, 식당, 주유소 등으로 상이한 지도가 작성될 것이다. 지리학자들은 개인의 심상 지도와 자신의 일상생활에 관련된 주변 공간 중에서 어떤 것을 중요시하는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오고 있다. 이러한 조사방법으로는 설문지법을 통하여 특정 지역이나 랜드마크를 가려고 할 경우 이동하는 경로를 약도로 작성하게 하 거나, 제한시간 내에 특정 지역의 지도를 그리게 하는 방법, 그리고 특정 지역 내에 많 은 지명을 제시하거나 대표적인 건물을 그리게 하는 방법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심상 지도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용하다. 예를 들어, 소득 계층에 따라 심상 지도로 표현하는 공간 영역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리고 고소득층일수록 특정 지역의 위치와 교 통로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심상 지도는 다양한 부문에서 활용할 수 있다. 특정 지역에 대한 입지를 선택할 경우에 는 각각의 시설물들이 대중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가 가능 하다. 그리고 기존의 공간에 대하여 어떤 점을 보완하여 활용도를 높일지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특히, 소득 계층에 따른 공간 인식의 차이를 사회적 또는 복지 차원에서 어떻게 보완해나가야 할지에 대한 개선 방안도 담고 있다.

3.백성들의 삶에 대한 해결방안을 보여준 다산 정약용, 강진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재교육을 받았고 특히 시 부분에서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15세에 서울 홍씨 집안에 장가들은 서울로 이사를 갔고, 그 덕분에 16세에 처음 으로 성호 이익의 저서들을 읽고 실학사상에 눈을 떴다. 이를 통해 16세라는 이른 나이 에 자신의 학문의 방향을 잡았고 이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아서 조선시대 실학의 집 대성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또한 정약용은 생전에 수많은 시를 지었다. 어려서부터 시를 많이 지었고, 젊은 시절의 많은 시가 경치를 보고 읊은 시지만 그 안에는 정약용의 사상과 의지와 기개가 들어있 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 다산초당은 그가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곳은 그가 가장 오랜 기간 (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 이다. 다산초당에 오르면 다산초당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인 다산 4경이 있다. 조적한 유배생활의 정취가 서려있는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은 나라와 백성을 위 하는 다신 실학이 구상되던 도량이요 산실이다 다산초당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 기슭에 위치해있다. 그 곳에 올라가는 길은 나무에서 나오는 뿔부리가 계단을 만들어주면서 수백 년 된 소 나무 뿌리들이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뿌리의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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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제일 먼저

다산초당 서암을 만나게 되고, 서암 바로위에는

다산 정약용이 머물렀던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초당에서 정약용은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에 몰두 하였다.10년 동안 다산 학당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하 였다. 초당을 가꾸는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 고,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씨집안의 산정은 다산노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초부라고 칭하게 되었다. 산초당 뒤편에는 바위에 정석이라는 글귀가 있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 은 다산초당의 제 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 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즉 다산 정약용선생님의 얼이 가장 많이 묻어난 곳이기도 하다. 훗날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은 자신의 관속에 <목민심서>를 함께 담기를 원했다고 할 정도로 다산의 학문은 시대와 지역을 포용하는 사상임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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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시간이 흐르는 길 대한민국 대한민국을 방문한 관광객 등이 한번쯤 돌아보고 싶은 장소로 꼽히는 곳에 아직도 변 함이 없는 인사동이 있다. 또한 요즘의 새로운 문화 아이콘을 보고 싶다면 인사동은 2% 부족한 장소라는 것도 부인 할 수 없다. 과거와 현재가의 조화가 조심스럽게 공존하는 인사동과 대한민국의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힘든 새로운 문화가 있는 홍대거리를 중심으 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미래에 다가 올 대한민국의 길을 보고자 한다.

1.인사동 골동품 상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 북쪽으로는 관훈동 동쪽으로는 낙원동 남쪽으로는 종로2가, 적선동, 서쪽으로는 공평동 과 접해 있다. 조선 초기에 한성부 중부 관인방과 견평방에 속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당시 행정구역 개편 때는 원동, 승동, 대사동, 이문동, 향정동(, 수전동 등이 인사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사동, 이문동, 향정동, 수전동, 승동, 원동 등의 각 일부가 통합되어 인사동이 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출장소 제도 신설로 경성부 북부출장 소 인사동이 되었다가 1915년 6월 경성부 인사동이 되었다. 1936년 4월 동명이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됨에 따라 인사정이 되었으며, 1943년 4월 구제(區制) 실시로 종로구 인 사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이 동(洞)으로 바뀔 때 인사동 이 되었다. 법정동인 인사동은 행정동인 종로1·2·3·4가동 관할 하에 있다. 인사란 지명 은 관인방과 대사동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댓절골, 향우물골, 이문동, 원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댓절골은 큰 사찰인 원각사 가, 향우물골은 우물 옆에 향나무가, 이문동은 순화궁의 이문이 있었다는 데 명칭이 연 유한다. 149번지는 중종반정 때의 정국공신 구수영이 살던 곳으로, 조선 후기에 김흥근 의 소유였다가 헌종의 후궁 경빈이씨의 순화궁이 되었다. 3·1운동 당시 33인이 모인 태화관이 있었으나 재개발사업으로 헐리고 12층의 태화빌딩 이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 말부터 골동품상가가 밀집되어 있으며, 축제로는 관훈동과 함께 1988년부터 해마다 '관훈·인사동 전통문화의 마을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종교기관 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승동교회가 있다. 주요기업으로는 성신양회공업(주)의 본사 가 있다. 인사동은 도심 속에서 낡지만 귀중한 전통의 물건들이 교류되는 소중한 공간이다. 인사 동에는 큰 대로를 중심으로 사이사이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 이 미로 속에는 화 랑, 전통공예점, 고미술점,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카페 등이 밀집되어 있다. 특히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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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가게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멋으로 젊은이들은 물론 중년층에게까지 매우 인기가 많다. 그 중에서도 화랑은 인사동의 맥을 이어온 중심이다. 이곳에는 100여개의 화랑이 밀집되어 있는데 한국화에서 판화, 조각전까지 다양한 전 시회를 감상할 수 있다. 대표적인 화랑으로는 민중미술의 중심역할을 했던 학고재, 재능 있는 작가들의 터전이 되었던 가나화랑, 가나아트센터 등이 있다. 만약 인사동의 유명한 화랑만을 골라서 편하게 구경하고 싶다면 미술관 순화버스 를 이용해보자. 저렴한 가격 으로 유명 화랑 10여 곳을 둘러볼 수 있다. 화랑과 함께 인사동 거리를 메우고 있는 것은 바로 전통 찻집과 음식점이다. 처음에는 찾기가 힘들지만, 산책하듯이 천천히 골목골목을 둘러보면 매우 재미있다. 그 중에서 대 표적인 명소를 꼽는다면 전통찻집 귀천이 있다. 귀천은 고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 운영하 는 전통찻집으로 내부는 매우 작지만 당시 시인의 책과 사진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이 곳은 모과차가 가장 향기가 좋아 인기인데, 지금도 가끔 유명 인사들이 다녀가는 곳이 다. 인사동은 매주 토/일요일마다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어 시민과 함께 하는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날은 기존 가게는 물론 거리에는 전통공연과 전시는 물론 엿장수, 사 주와 궁합을 보는 할아버지가 함께 한다. 이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이들은 바로 각국에 서 몰려든 외국인들이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기 위해 찾아든 외국인 관광객들은 전통 가게에서 고물건을 보거나 고미술을 산다. 그리고 거리에 있는 엿을 사고 전통 파전을 먹는다. 도심에서 느끼는 전통의 멋에 빠진 외국인들의 모습도 많이 볼 수 있다. 인사동관광정보센터 http://www.insainfo.or.kr

2. 홍대의 젊은 문화 1990년대 초반 특색있는 카페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홍대앞 문화"는 1990년대 중반 드 럭, 블루 데블, 재머스등의 라이브 클럽이 생겨나고, 크라잉 넛, 델리 스파이스, 황신혜 밴드등의 인디 밴드들이 활동하면서, "홍대앞"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홍익대학 교 정문에서 극동방송국 사이의 거리에는 다양한 술집과 펑크 락과 테크노 음악을 전문 적으로 연주하는 라이브 클럽들이 모여있으며,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거리로도 불리었다 젊은이들이 즐기는 음악과 춤, 자유분방한 대화와 사교가 공존하는 클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를 일컫는다. 청년 하위문화의 범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이는 클럽이란 장 소가 주로 젊은이들의 활동 영역이기 때문이다. 국내의 경우 특히 홍대 앞 카페 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된 클럽과 그 안에서 공유되는 언더그라운드 인디문화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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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국내 클럽 문화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되었다. 실력 있는 DJ와 힙합 아티스 트들과 래퍼 MC, 클럽 분위기를 돋우고 즉흥 퍼포먼스를 펼치는 비보이들은 클럽 문화 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이들의 공연과 함께 맥주나 칵테일을 마시며 즐기는 데서 클럽 문화는 시작되었다. 홍대 앞 클럽 문화는 1994년 ‘드럭(DRUG)’이라는 클럽이 홍대 앞에 생기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90년대의 홍대 클럽 문화가 마니아적 성격이 강했다면, 2000년대 홍대 클럽 문화는 대 중 문화 속에 자리 잡은 청년문화라고 할 수 있다. 클럽 문화가 자리 잡기까지는 언론매 체의 영향도 컸다. 케이블 TV방송인 M.net의〈슈퍼 바이브 파티〉라는 프로그램은 수많 은 스타들을 내세워 대중문화의 음지로 인식되던 클럽을 대중의 눈앞으로 끌어내는 데 일조했다. 서울시가 발간한 관광 안내책자에는 홍대가 '서울의 10대 명소'로 명시되어 있다. 그만큼 '홍대 앞'이라는 명칭은 비단 어떤 한 대학 상권의 개념을 뛰어넘어 동시대인들 의 취향과 합의가 자연스레 빚어 낸 하나의 문화권이자 문화 현상으로서의 의미가 강하 다. 클럽 문화는 2000년 3월 시작된 소위 '클럽데이'를 필두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클럽문화협회에 소속된 14개의 클럽을 위주로 매달 마지막 금요일에 열리는 '클럽데이' 는티켓 하나로 밤새도록 원하는 클럽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행사이다. 초기 1000 명 미만이었던 클러버(클럽 문화 마니아)는 현자 10,000여명을 훌쩍 넘어섰고 최근에는 홍대 클럽문화의 원조격인 라이브 클럽들을 중심으로 '라이브데이'를 신설해 이 역시 좋 은 호응을 얻고 있다. 홍대 앞 클럽의 문화는 기존의 나이트 문화와는 많은 차이점을 드 러낸다. 소위 '부킹'과 '웨이터'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음흉함은 이곳에 없다. 그들이 추 구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간의 벽이 조금 낮아지고 사회적인 용인의 폭이 조금은 더 넓 어지는 그 편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이며 그 안에서 억압된 개성을 다소간 분출하고 리 듬에 몸을 실어 잠시나마 세상의 중심이 되는 시간을 갖고자 열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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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곳은 한국 클럽의 독특한 문화가 숨어있기도 하다. 한국의 클럽문화는 젊은이 들이 중심이 되어 젊은이들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외국의 경우 우리나라와 같이 20대들만의 공간이 아닌 함께 즐기는 문화인반면에 한국에서만큼은 젊은이들을 위한, 젊은 사람들의 문화가 되어버렸다. 이 부분은, 한국사회에 문화 소위 말해 " 나이 값 좀 해라 " 이런 사회적 현상 때문 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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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사람에게 길을 묻다. 우리의 길에서는 사람을 만난다. 그들에게는 답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저 우리의 곁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대한민국은 작은 나라이다. 지구본에서조차 찾기 위해서는 근처에 있는 다른 국가를 기 준으로 찾는 것이 빠른 국가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수많은 작은 거인들이 살고 있다. 작은 거인들은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며 서서히 커다란 거인의 어깨에 올 라서고 있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넓지만, 그들에게는 좁아서 더 멀리 보기를 원한다. 마지막으로 길을 통한 여행에서는 작은 거인들의 모습과 아직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어두운 모습을 돌아보면서 대한민국의 종착지점을 보고자 한다.

1. 2014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2014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국인들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그들은 특정분야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적대시 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해 맞서 이 겨나가고 있다. 아직 그들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고 그들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 유엔사무총장 반기문

반기문(대한민국, 재임 2007~)은 1944년 대한민국 충북 음성의 농촌마을에서 태어났 다. 그는 고등학교 때 에세이 경시대회에서 수상함으로써 미국을 방문해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잠시 만난 경험을 계기로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70년 외교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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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갔고, 1991년에는 외교부 유엔과장이 되었다. 2004년 대한민국의 외교부장관에 올 랐으며, 2006년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시아에 돌아갈 차례였던 당시 사무총장직을 놓고 인도 출신의 샤시 타루르와 경쟁하였다. 결국 수차례 예비투표 를 거쳐 최종 후보로 결정되었고, 총회의 표결을 거쳐 제8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기후변화, 핵확산 방지, 8가지 새천년개발목표 달성 등을 안정적으로 수행해오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코피 아난과 같은 적극적 정치가 스타일은 아니지만, 중국과 미 국 등의 강대국 사이에서 기후 문제 등 민감한 이슈들을 노련하게 협상해왔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11년 6월에 2012년 1월부터 시작하는 두 번째 임기의 연임 추천 결의안에 대해 안보리의 만장일치와 지역그룹 전원이 서명한 가운데, 총회에서 192개 회원국의 박수로 통과되었다. 그는 연임수락연설에서 인류가 어느 국가도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지적했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책임감과 무게를 통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피겨 스케이트 선수 김연아

한국 사상 최초 국제 대회 우승 피겨 100년 역사상 최초 올포디움(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3위 내에 입상) 피겨 여자 싱글 최초 그랜드슬램 달성 시니어 데뷔 이후 모든 대회에서 쇼트, 프리 중 하나는 1위 세계신기록 11차례 수립 최연소 유니세프 친선대사, 평창올림픽 집행위원 임명 피겨 여자 싱글 최초 총합 200점 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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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그룹CEO 이건희 1984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맹호장

1986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청룡장

1991년

IOC 올림픽훈장

1993년

문화부장관 감사패

1994년

한국무역학회 무역인대상

1996년

한국능률협회 선정 ‘최고의 경영자상’

200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4년

홍콩 디자인경영자상 초대 수상

2004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3등급) 훈장

*가수 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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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싱글 차트 1위, 미국 아이튠즈 뮤비 1위, 미국 빌보드 소셜차트 1위, 국내 3사 가요프로 1위 -소녀시대의 노래 gee가 3년에 걸쳐 완성한 조회수 8500만건을 단 52일 만에 1억건 돌파 -유투브 역사상 1억 조회 돌파기간 역대 5위를 기록 -빌보드 종합차트 64위에 진입!(원더걸스는 76위까지 올림) -2012MTV 시상식 참석 -저스틴 비버의 소속사와 매니지먼트 계약 -미국 한 프로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말춤을 가르쳤고 그 방송이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함

2. 한식의 세계화 최근 들어 우리 사회 전반에서 한식의 세계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는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동안은 간과되어 왔던 중요한 과제이다. 특히 일식이나 태국 음식 이 거침없이 세계 시장을 개척해나가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한식’은 우리가 늘 먹는 음식이지만, 우리 문화의 전반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음식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식의 가치를 새롭게 되살리고 발전시키는 일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대변혁을 시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작정의 당계가 아니라 한식 세계화에 대한 구상과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함 으로써, 한식을 세계화할 수 있고, 한식이 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어야한다.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 한식 문화를 업그 레이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식당 주인, 호텔 사장, 비즈니스맨, 주부들, 그리고 식 당을 찾는 고객 모두가 참여하고 한식을 사랑하고 가꿔야 한다. 한식은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는 음식이다. 이제는 외국의 어지간한 도시에 가도 한식당 한두 군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선인들이 물려준 소중한 노하우를 바탕 으로 21세기에 맞는 우리 음식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나가야 한다. 새로운 음식을 개발 하고 새로운 스타일의 인테리어도 선보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실험 정신 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을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화를 위한 모든 것을 갖췄다. 음식을 사랑하는 민족성, 우수한 음식, 다양 한 실험을 해볼 수 있는 식당 문화가 그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 는 우리의 음식 문화를 새롭게 창조해나가야 한다. 즉 한국인의 관점에서 한식에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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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관점에서 한식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한다.

우리가 늘 보던 음식 잡채 갈비찜 떡볶이 김밥 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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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새롭게 보는 음식

---- 여러 가지 퓨전음식

3. 세월호사건과 촛불시위 대한민국에서는 세계인이 깜짝 놀라서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세월호 사건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배의 책임자 이야기를 믿고 있다가 어이없이 죽었다. 몇 시간 후에 어린아이는 고아가 되었고 많은 부모들은 아이를 먼저 보내야하는 상황에 부딪쳤다. 교사들의 부모는 자식이 죽어도 그 슬픔을 죄스러워 표현하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생업을 뒤로 한 채 작은 도움이 되고자 전국적으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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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길로 나와서 마지막 한 사람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나라처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나 교사들은 당연히 배 밑으로 내려가서 마지막을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현실을 마주했고 객실 승무원은 마지막까지 승객 옆에 있었다. 죽은 여교사의 아버지가 학생들 부모에게 자식이 지키지 못한 것을 사과했고 살아나온 교사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나무에 목을 매고, 죽어가는 자식과 끝까지 같이 있어준 교사들의 책임감과 사랑에 대해 부모들은 감사했다. 우리가 가야하는 길에서 우리가 얻어야하는 질문의 해답은 결코 좋은 일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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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인간은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 않 는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많은 이름의 변화를 가지고 변화해 왔지만 그 땅에 살았던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주어지는 데로 때로는 순응과 체념을 통해, 때로는 비판과 저항을 통해 역사의 수레바퀴를 열심히 돌리며 살아 왔다.

마치 역사는 한 사람의 영웅이 바꾸어 갔던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어 왔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대한민국을 소개하는 글을 조금은 이런 사람들의 눈으로 이해하고 보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녹아있는 문학 작품을 통해 좀 더 가깝게 다가서길 바랐는데, 짧은 문학적 지식의 벽을 체감하고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걸어온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 볼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 그 길을 걸으며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거인과 만날 수 있었다. 우리의 작은 거인들은 커다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 끊임없이 높고 넓은 세상을 향해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어디이며 그 곳의 끝에는 무엇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세상에 길이 여러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그것은 결국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 고, 가보지 못한 길이 무엇인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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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아침 두 갈래의 길에는 똑같이 밟은 흔적이 없는 낙엽이 쌓여 있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해 한 길을 남겨 두었습니다.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내가 다시 돌아 올 것을 의심하면서,

그리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참고도서 1. 손에 잡히는 교과서 문학 2. 흐르는 강물처럼

미래엔

파울로 코엘료

3. This is Korea

최정화외

Hollyn

4. 전주 한옥마을

이병천외

대원사

5. 북촌 한옥 마을

이에나마 유코

6 .송강 정철 연구

김갑기 반도 출판사

7.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

함규진

민속원 한국학술정보

8. http://chosun.feedsport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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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포구청 논술지원비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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