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 한인 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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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이 태평양을 건너서 캐나다의 퀘벡 땅으로 이주해온 지도 벌써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인구도 크게 늘어서 지금은 5 천 7 백 여명의 이민자와 유학생 등 약 7 천여 명의 동포들이 광역 몬트리올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초기의 동포들은 이민생활의 엄청난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1960-70 년대에는 현지 주택시장 상황을 몰라서 사기도 당했습니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불어를 배워야 하는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1980 년대에 퀘벡의 독립운동이 확산될 때는 앞날이 캄캄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거리에서, 혹은 사업장에서 인종차별도 당했습니다. 특히 힘들었던 것은 생계기반의 구축이었습니다. 취직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자영업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으나 자본금도 없었습니다. 현지 사정에 어두운 그들이 자영업을 한다는 것은 ‘그림의 떡’ 과 같았습니다. 따라서 많은 동포들이 편의점과 꽃가게, 식당 등의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럽게도 그들은 그 많은 어려움을 모두 극복해 냈으며 퀘벡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했습니다. 이같은 <성공적인 정착>의 뒷전에는 피땀 어린 노력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들의 자녀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당당하게 퀘벡사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퀘벡 한민족 공동체가 밝은 앞날을 기약할 수 있게 된 것은 몬트리올 한인회를 비롯한 동포단체들의 역할이 컸기 때문입니다. 실업인 협회는 경제생활에, 노년회는 노후생활에, 예술단체는 문화생활에, 스포츠 단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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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민 건강에, 그리고 종교단체는 신앙생활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몬트리올 한인회는 지난 46 년간 수많은 행사를 개최해서 동포들의 향수와 외로움을 달래 주었고 친목을 도모했습니다.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이런 업적들을 정리해서 대내외와 후대에게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따라 1978 년 9 월에 제 1 대 편찬위원회(위원장 박동열, 편찬위원 김달수 안윤대 이희재, 자료조사원: 노승석 배희경)가 구성되어 이주 20 년사의 초안을 작성했고, 2006-7 년도에는 제 2 대 편찬위원회(위원장 이희재, 편찬위원: 김영권 전기병 정기채 임성숙 홍승남, 자문위원: 유봉성 정희수)가 30 년 공백기간 동안의 자료수집 활동을 펼쳤으나 이희재 위원장의 타계로 출판되지 못했습니다. 현 편찬 위원회는 2008 년 1 월에 구성된 제 3 대 편찬위원회로서, 이주사 편찬용 자료를 제공한 19 개 몬트리올 동포단체의 단체장과 이 자료들을 정리해서 서술한 14 명의 실무위원, 그리고 편집과 디자인, 인쇄, 배포 등 제반작업들을 담당한 집행위원 등 총 33 명의 편찬위원들로 구성되어 꼬박 4 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본인은 본 이주사가 소중한 역사기록 자료가 되기를 바라며, 그동안 본 이주사의 편찬을 위해 수고하신 모든 편찬위원들과 성원을 보내주신 몬트리올 동포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이주사 출판자금 전액을 지원해주신 대한민국 재외동포재단과 지속적인 관심 속에 격려와 축하를 보내주신 주 몬트리올 총영사관에 특별한 감사를 드립니다. 2011 년 12 월 퀘벡 한인 이주사 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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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장 정 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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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사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의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몬트리올을 중심으로 한인들이 퀘벡 주에 정착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공동체의 이주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며 반갑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퀘벡 한인 이주사의 발간은 퀘벡 한민족 공동체가 성장, 발전하여 건실한 커뮤니티로 자리잡았음을 입증하는 사례가 될 것입니다. 금번 이주사 발간을 계기로 그동안 우리 동포사회가 걸어온 길을 정리하고 보존하며, 나아가 이를 미래 세대에게 전달함으로써 한민족사회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새롭게 퀘벡 주에 정착하는 우리 한민족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안내서로도 활용되기를 기대합니다. 정희수 편찬위원장을 비롯하여 금번 이주사 발간을 위해 노력하신 여러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합니다. 다시 한번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의 발간을 축하하며, 우리 동포사회의 무궁한 발전과 모든 분들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 몬트리올 총영사 겸 주 ICAO 대사 김 종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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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사

Forte de plusieurs milliers de membres, la communauté coréenne de Montréal est active et sa contribution au développement de Montréal est à souligner. Un ouvrage comme celui-ci nous permet de mieux connaître son histoire et ses réalisations. Je suis convaincu que nous serons nombreux à vouloir prendre connaissance de ces « Cinquante ans de la vie des Coréens au Québec ». C’est un ouvrage important pour nos concitoyens d’origine coréenne puisqu’il commémore le 50e anniversaire de leur installation ici. Il l’est tout autant pour l’ensemble des Montréalais puisqu’il met en lumière une partie de notre histoire collective. Je sais que M. Joseph H. Chung, le président du Comité de rédaction, a à cœur l’épanouissement de ses concitoyens d’origine coréenne et leur intégration harmonieuse au sein de notre collectivité. Je tiens à le remercier ainsi que ses collaborateurs de nous permettre de mieux connaître des gens qui ont pris racine dans ce terreau québécois et l’ont enrichi de leur culture. Gérald Tremblay Maire de Montré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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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후기 (Epilogue)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시원 섭섭하다’ 라는 표현을 쓸 때가 많이 있다. 애매한 표현이지만 어렵고 힘든 고비를 넘겼을 때 이보다 더 솔직한 표현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한 마음의 다른 한 켠에는 풀지 못한 의문도 있다. “무엇을 위하여, 왜 그 많은 고민을 했나?” 어쩌다가 편찬위원이 되어 4 년 내내 자문자답했지만 아직도 답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도 있다. 이 책으로 인해 퀘벡 한민족의 50 년 발자취가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과 동포사회의 문제점과 과제들을 정리하려고 시도했다는 것, 그리고 후세를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뿌듯함이 그것이다. 역사서의 통념을 넘어 거론된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과제에 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몬트리올 동포들은 동포사회가 가진 문제점들에 대하여 이미 잘 알고 있다. 2006 년 봄 넉달동안 미래기획 기고문을 통해서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신문지상에 공개한 우리 공동체의 문제점과 과제들을 편찬위원회가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편집하여 수록했다. 하여튼 편찬사업을 무사히 끝내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 오늘의 수고가 훗날 편찬위원들을 힘들게 할 지언정 그동안 우리가 쏟은 시간과 흘린 땀이 퀘벡 한민족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면 한 줌 흙이 된 후에라도 흐믓하겠다. 2011 년 겨울의 문턱에서 퀘벡 한인 이주사 편찬위원회 집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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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과‘한민족’ ‘한인(韓人)’, ‘교민(僑民)’, ‘동포(同胞), ‘교포(僑胞)’ 이런 용어들은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한민족(韓民族) 사람을 주로 지칭하는 말이다. 이민사회에서 우리는 이런 용어들을 별로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각 용어의 사전적 의미와 법적 정의도 다를 뿐더러 이제는 현실적으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할 때가 왔다. 사실 대부분의 이민자는 이 용어들이 갖는 의미의 차이뿐만 아니라 자신의 국적변화조차도 잊고 살아 간다. 외국국적을 취득한 사람도 정서적으로는 한국인처럼 사는 곳이 이민사회고 참정권이 인정되는 거주국의 선거보다 투표권이 없는 모국의 선거에 더 관심을 갖고 매달리는 곳도 이민사회이다 보니, ‘한인(韓人, Korean, 한국인으로서 특히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사람)’과 ‘교민(僑民, Korean,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국민)’이란 것이 법적으로는 재외한국인(영주권자, 유학생, 주재원 등)에 한하여 적용되는 용어임도 간과하고 산다. ‘캐나다 한인사회’와 ‘퀘벡 교민사회’라는 표현은 ‘캐나다와 퀘벡 주에 사는 한국국민들의 사회’라는 뜻이다. 즉, 캐나다 시민권을 취득함에 따라 자동적으로 한국국적이 말소된 이민자(한국계 캐나다인)들이 주축인 이민사회의 현실과는 거리감이 있는 표현이다. 잘못 선택된 용어의 반복적인 사용은 현지사회와의 괴리를 낳고 이민사회를 정체와 고립으로 몰고 간다. 반면에 다른 용어 ‘동포(同胞)’는 한인(또는 교민)뿐만 아니라 한국계 캐나다 시민권자(과거에 한국국적을 보유하였던 자와 그 직계비속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국적을 불문하고 한민족의 혈통을 지닌 자로서 외국에서 거주하는 자)도 포함하는 큰 그릇이다. 또한 동포의 한자 ‘同(한가지 동)’과 ‘胞(태보 포)’는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 흩어져서 사는 한민족들(overseas Korean groups)을 하나로 결집시킨 거대한 혈연 공동체를 연상하게 한다. 모국 정부가 750 만 해외동포 중심기구의 명칭을 ‘재외동포재단’으로 정한 것도 이런 까닭으로 보인다. ‘한민족(韓民族, Korean)’은 한국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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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며 공동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아시아계 민족을 일컫는 말로서 국적기준을 초월한 개념이다. 즉, 국적기준이나 법적정의, 사전적 구분, 외교적 분쟁우려 등을 떠나서 이민사회의 정서를 그대로 담을 수 있는 가장 큰 그릇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한민족’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 이전의 ‘동포(同胞)’라는 개념에서 발전된 것이다. ‘교포(僑胞)’는 외국에 나가 사는 동포라는 뜻을 가진 동포와 유사한 용어이기는 하지만 한자 ‘僑(우거할 교)’가 가진 의미 때문에 ‘타국에 임시로 산다, 빌붙어 산다’라는 부정적인 인상을 줄 수가 있다. 한편 현실도 많이 변했다. 퀘벡의 한민족사회는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계 캐나다인(1 세, 1.5 세, 2 세, 입양아 등 캐나다 시민권자)과 한인(영주권자 1 세와 1.5 세, 취업비자 소지자, 유학생, 주재원 등 한국국적을 보유한 교민), 그리고 중국 연변 등지에서 온 극소수의 조선족 등 국적의 구분없이 약 7 천명의 한민족 사람들이 모여 사는 큰 혈연공동체로 성장했다. 그 사이에 모국 대한민국은 전세계 한민족의 역량을 한 곳으로 결집시키는 글로벌 한민족 네트워크(global Korean network)를 만들어 가고 있다. 해당 거주국들과의 외교적인 마찰을 고려해서 단일기구(재외동포재단)가 추진하고 있을 뿐 모국의 비전은 사실상 국적기준과 영토적 제한을 넘었고 민족개념의 거대한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지구상 어느 곳에서든 한국말을 하고 한국 전통문화를 보전하며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을 모두 포용하게 될 광활한 사이버 세상은 광개토대왕 이후 가장 넓은 한민족사회를 구현할 것으로 기대된다. 결론적으로, 한인(한국국민)들과 캐나다 시민권자(한국계 캐나다국민)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 2 세와 3 세가 성장하는 우리의 퀘벡 한민족 언어/문화 공동체에 현실적으로 적합한 표현은 ‘동포, 동포사회, 한민족사회, 한민족 공동체’다. 그러므로 그동안 우리가 관용적으로 혼용해 온 ‘한인, 교민, 교포, 한인사회, 교민사회, 교포사회’ 라는 표현을 본 이주사에서는 최대한 배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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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들어가며… 이곳 캐나다 중부 지역에 위치한 퀘벡(Quebec) 땅에 한민족의 첫 발자국이 남겨진 것은 1950 년대 전후였다. 당시에는 퀘벡 시에 있는 라발 (Laval) 대학을 비롯해서 퀘벡 주 내의 대학으로 유학을 온 몇몇 한인 학생들이 동포의 전부였다. 이후 의사와 교수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하나씩 둘씩 늘어났지만 본격적으로 동포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캐나다의 이민법이 전면적으로 개정된 1967 년부터 였다. 그 후 동포의 수가 꾸준하게 증가해서 2011 년 현재는 약 7 천여 명의 한민족 동포들이 몬트리올 광역지역에 모여 살고 있다. 그들의 이민 동기는 매우 다양하다. 유학을 왔다가 눌러앉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족의 초청으로 온 사람, 1960-80 년대의 정치적 사유로 한국을 떠나 온 사람, 남미등 타 지역을 경유해서 들어 온 사람, 경제적인 이유로 타주에서 옮겨 온 사람, 자녀교육 문제로 온 사람, 노후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온 사람,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찾아서 왔다는 사람 등등… 그러나 이민동기가 무엇이었든 도착한 순간부터 그들은 엄청난 벽에 부딪혔다. 언어의 장벽을 넘는 것이 그 첫 번째 과제였다. 한국에서 10 년 이상 영어를 배웠어도 캐나다에서 자유롭게 의사 소통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퀘벡 주의 공식언어는 불어다. 두 번째로 낯선 생활환경을 극복해야 했다. 주택구입, 각종 증명서, 자동차, 자녀학교, 병원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부족의 곤란도 이겨내야 했다. 퀘벡에 아무리 인종차별이 적다고 해도 그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이곳 생활에 적응해 가야 했다. 다음으로 다가온 난제는 취업과 사업이었다. 생활비 조달의 문제는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커다란 어려움이었다. 퀘벡의 한민족들은 이 같은 어려움을 잘 극복했다. 물론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초조함과 좌절감을 느끼고 심지어는 이 땅을 떠난 사람도 많았지만, 이주 반세기를 지나면서 이제 어느 정도는 언어의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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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장벽도 극복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도 장만했다. 특히 그들의 자녀들이 매우 잘해서 기업인, 변호사, 엔지니어, 예술가, 의사, 약사,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회계사, 교수, 군인, 경찰 등등으로 성장했다. 현지정부에게도 인정받는 퀘벡사회 속의 한민족 공동체가 되었다. 그동안 많은 고생을 했지만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해서 지금은 이민생활의 보람을 즐기며 살아 가고 있다. 본 이주사는 퀘벡 동포들의 이 같은 일상과 애환을 기록한 역사서이자 정보서이며 홍보서다. 이주사를 편찬하는 첫 번째 목적은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과정과 발전사실을 정리하는 것이다. 이 책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이민 선배들이 남긴 삶의 흔적들을 담은 역사서다. 두 번째는 선대의 생활정보와 과제, 시행착오, 그리고 삶의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후대에 전하는 것이다. 이 책은 후대가 동일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선대의 극복지혜를 담은 정보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동포들이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퀘벡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사실을 대내외에 알리는 홍보서다. 특히 어디서나 근면한 우리 동포들이 이 땅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바는 크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치부와 환부는 다르다. 아픈 곳을 감추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역사서의 통념을 깨고 2011 년 퀘벡 한민족 사회가 당면한 문제점과 과제, 시행착오, 교훈을 본 이주사에 포함하는 것은 우리의 환부를 널리 알리고 치유법을 구하고자 함이다. 우리의 모국 대한민국은 불과 반세기 만에 전쟁의 폐허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퀘벡의 한민족 공동체 역시 반세기 동안 많은 발전을 했다. 다시 반세기가 흘러서 우리의 3 세와 4 세가 장성할 즈음이면 퀘벡 한민족도 120 년 역사를 가진 중국계처럼 퀘벡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분야에서 영향력을 갖는 주류 공동체의 반열에 오를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지금부터 다시 반세기는 너무 길다. 50 년을 기다리지 않고 2 세의 시대쯤으로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편찬위는 지난 4 년 동안 출판을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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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준비하면서 이 점을 고민하며 연구했고 퀘벡동포사회 각계 각층 인사들의 중지를 모아 여기에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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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차 례

발간사(편찬위원장) --- 1 축사(총영사 겸 ICAO 대사) --- 3 축사(몬트리올 시장) --- 4

편집후기 ---(Epilogue)--- 5 ‘한인’ 과 ‘한민족’ --- 6 들어가며 ---(Prologue)--- 8

제 1 부: 새 삶의 터전, QUEBEC !

1 장: 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평등한 나라, 미래의 나라 --- 16 2 장: 퀘벡 주는 최초의 캐나다 --- 26 3 장: 새 보금자리, 몬트리올!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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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제 2 부: 퀘벡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4 장: 한인의 유입과 공동체의 형성 --- 53 5 장: 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 72 6 장: 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과 발전 --- 98

제 3 부: 퀘벡 한민족의 생활

7 장: 몬트리올 한인회의 활동 --- 155 8 장: 경제활동 --- 197 9 장: 교육생활 --- 221 10 장: 노후생활 --- 233 11 장: 신앙생활 --- 252 12 장: 문화예술활동 --- 277 13 장: 스포츠활동 --- 298 14 장: 언론활동 --- 310 15 장: 기타 친목단체 활동 --- 321 16 장: 대한민국 정부기관 및 유관단체 ---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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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제 4 부: 퀘벡 한민족사회의 과제와 전망

17 장: 이민 공동체의 꿈 --- 336 18 장: 퀘벡 한민족사회의 과제 --- 342 19 장: 퀘벡 한민족사회의 미래 전망 --- 353

부 록: 부록 1: 퀘벡 한인 이주사 편찬위원회의 구성 --- 358 부록 2: 제 1 대 편찬위원장 발간사 --- 360 부록 3: 제 2 대 편찬위원장 발간 준비의 변 --- 362 부록 4: 퀘벡 한민족사회 주요 3 단체장 --- 366 부록 5: 이주사 편찬사업의 애로사항 --- 369 부록 6: 이주사 서술 참고자료 목록 --- 373 부록 7: 이주사 불어판 (요약: Sommaire français) --- 375 부록 8: 이주사 영어판 (요약: English Summary) ---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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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평등한 나라, 미래의 나라

제1부 새 삶의 터전, QUEBEC !

대한민국 재외동포 재단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1 년 현재 전 세계에는 약 750 백만 명의 한민족 동포들이 흩어져서 살고 있다고 한다. 아시아 대륙에 370 만 명, 북미에 240 만 명, 그리고 유럽에 65 만 명 등 본국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많은 동포들이 해외에 나와서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7 백 5 십만 명이나 되는 한민족 동포들이 삶의 보금자리를 해외 각지로 옮긴 까닭은 다양하다. 전쟁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로, 자녀 교육을 위해서, 혹은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찾아서…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면 퀘벡 한민족은 왜 하필이면 지구 반대편 캐나다, 그것도 불어를 주언어로 사용하는 퀘벡 땅에 와서 살고 있는가? 먼 훗날 후대 한국계 캐나다인들이 ‘이민 초기의 선조 한인들’이라고 부를 현재의 이민 1 세들이 퀘벡 땅에 뿌리를 내리기로 결정한 까닭과 정착과정에서 겪은 희노애락(喜怒哀樂) 삶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이들이 캐나다의 퀘벡 땅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제 1 부에서 캐나다와 퀘벡 주에 대한 소개를 간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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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평등한 나라, 미래의 나라

< 캐나다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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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제1장


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평등한 나라, 미래의 나라

제1장 캐나다는 기회의 미래의 나라

나라,

평등한

나라,

2010 년 현재 캐나다에는 약 25 만 명의 한민족 동포들이 살고 있으며 앞으로 계속 증가할 전망이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다른 이민 정착지들을 제쳐두고 그들이 캐나다를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로 선택한 이유는 ‘그들에게 있어서 캐나다는 가장 살기 좋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1.1

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캐나다는 기회의 나라다. 기회란 이민자 및 그의 가족이 각자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며, 동시에 이러한 가능성의 동등한 분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의상 디자이너가 되기를 원하고 그 실현 가능성이 법적으로 허용된다고 할 때 이러한 가능성이 모든 사람에게 부여되려면 관련 법을 의무적으로 적용하는 행정기관이 있어야 하고 이를 집행하는 공정하고 도덕적인 공무원이 수반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기회가 존재하려면 선택의 범위가 넓어야 한다. 즉 학업, 직업, 문화생활, 사회활동, 종교, 스포츠 등등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이같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야 하며 동시에 선택한 결과에 대한 만족을 허락하는 환경도 조성되어야 한다. 캐나다는 이러한 기회를 제공하는 나라다. 인종, 종교, 피부색, 성별, 빈부격차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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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평등한 나라, 미래의 나라

캐나다 인권보장의 핵심인데 캐나다는 연방정부와 주정부 모두 인권보장을 법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퀘벡 주에는 인권 및 자유헌장을 관리하는 <인권, 자유 및 청소년 보호 위원회>가 있으며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위반하는 사건을 전문으로 다루는 법정이 있다. 동시에 주정부, 시청, 학교, 병원 등 주요 기관에는 인권 감시원(Ombudsman)이 있어서 항상 인권침해 여부를 감시하며 필요 시 인권법원에 고소할 수 있다. 즉, 캐나다는 각자가 원하는 기회를 법적, 행정적으로 철저하게 보장해 주는 나라다. 캐나다가 자국민들에게 제공하는 기회의 범위는 폭 넓고 다양하다. 그중에서 거주, 교육, 직업, 문화 선택의 기회는 캐나다가 보장하는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기회들이다.

캐나다의 모든 주에서 이민자를 환영한다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그렇듯이 캐나다도 ‘거주와 이전의 기회’를 철저하게 보장한다. 때문에 퀘벡이나 어떤 특정 주의 프로그램에 의해 이민을 왔을지라도 이민 조건이 해지된 후에는 캐나다 내의 어떤 지역든 자유롭게 옮겨가서 살 수 있다. 캐나다에는 지역별 연고주의 혹은 차별주의가 전무하다. 서부 사람이 동부에 왔다고 해서 차별 대우를 받지 않는다. 캐나다는 어느 주에 가든 이민자를 환영한다. 이민자 없이는 인구 증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면적은 1,000 만 km2 로 대한민국 국토의 100 배이며 해안선의 길이는 34 만 km 다. 캐나다에서는 주(state)를 자치주 (province)라고 한다. 캐나다에는 10 개의 자치주와 3 개의 준주가 있다. 준주 행정부는 자치주의 정부보다는 자주성이 다소 제한적이며 연방 정부의 지시를 더 많이 받는다. 캐나다의 자치주 및 준주마다 자연환경, 천연자원, 역사, 사회제도, 문화생활, 산업구조, 기후 등이 다르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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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평등한 나라, 미래의 나라

10 개의 자치주는 동부의 뉴펀들랜드 & 래브라도(Newfoundland & Labrador) 주,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Prince Eduard Island) 주, 노바스코샤(Nova Scotia) 주, 뉴브런즈윅(New Brunswick) 주, 중부의 퀘벡(Quebec)주 및 온타리오(Ontario) 주, 서부의 매니토바(Manitoba) 주, 서스캐처원(Saskatchewan) 주, 앨버타(Alberta) 주 및 브리티시 콜럼비아(British Columbia) 주가 있다. 3 개 준주는 노스웨스트 테리토리(North West Territories), 유콘(Youkon) 및 누나부트(Nunavut – 이누이트(에스키모) 족) 영토를 말한다.

캐나다에서는 누구나 양질의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진다

캐나다의 교육제도는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공평하고 실속적이고 저렴하다. 뿐만 아니라 캐나다에서는 거주자 누구나 ‘양질의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진다. 교육운영은 각 주정부의 고유한 권한이다. 주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통상 6 세부터 고등학교 교육까지가 연방정부의 지침에 따라 의무교육이다. 한국의 교육제도와 비교해서 캐나다 교육제도의 특이한 점은 고비용의 ‘입시학원 제도가 없다’라는 것이다. 이는 캐나다의 공공 교육제도가 거의 완벽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민자들, 특히 한국계나 중국계 이민자들이 늘어나면서 근래 대도시에 하나씩 둘씩 학원 간판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이런 현상은 아시아계 민족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제한적인 현상일 뿐이며 전체 캐나다 사회가 입시학원 제도를 인정하고 아이들을 그곳에 보내지는 않는다. 한국의 3 분의 1 도 안 되는 교육과목도 많다고 생각하는 캐나다 사회에서 입시학원은 상상할 수도 없다. 캐나다에는 48 개의 거대한 종합대학이 있다. 예산의 60%-70% 는 주정부에서 부담한다. 이들 종합대학의 학생수는 평균 2 만 명 정도로 거대하다. 실제로 예산 측면에서 본다면 모두 공립이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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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평등한 나라, 미래의 나라

종합대학은 주별로 공평하게 분산되어 있어서 모든 캐나다 시민이 공평한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한다. 캐나다의 대학은 예외 없이 믿을 만하다. 물론 몬트리올의 매길(McGill) 대학, 토론토의 토론토(Toronto) 대학, 밴쿠버의 BC 대학 등을 이른바 명문대학이라고 꼽을 수는 있겠으나 이들 대학들을 졸업했다고 해서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특별한 배려를 받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배우고 쌓은 실력이다. 캐나다에서 대학을 졸업하기란 아주 어렵다. 어느 대학에서건 실력을 쌓지 못하면 졸업장을 주지 않는다. 대학 졸업장은 그 분야에서 그 사람의 능력을 사회적으로 인정해주는 증명서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교육제도의 주요 장점은 ‘높은 교육수준, 산업발전을 위한 전문 인적자원의 배출, 고등교육의 민주화 및 평등화’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교육제도 덕분에 캐나다는 소모적이고 비 생산적인 사회 계층화로 인한 지도층의 횡포가 없다. 다른 나라의 교육제도와 비교해 볼 때 이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또한 캐나다에서 어떤 사람의 평가는 교육수준 혹은 출신학교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그래서 캐나다에는 미국이나 한국 같은 학벌주의와 연고주의가 없다. 캐나다에서는 성실성, 정직성, 이웃에 대한 존경심 등이 그 사람에 대한 중요한 평가기준이 된다.

캐나다에는 직업 차별이 없다

캐나다는 ‘직업선택’에도 무한한 기회를 제공한다. 학벌주의가 없듯이 직업 차별주의도 없는 것이 캐나다라는 나라다. 국가경제 개발에는 무수한 종류의 전문인재가 요구되므로 학위보다는 해당기술, 근무태도, 성실성 등 실제적 기준에 따라 정하고 보상해 준다는 것이 캐나다 직업구조의 기본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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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평등한 나라, 미래의 나라

몇 년 전 직업별 일평생 소득의 현 가치를 비교한 어떤 통계자료에 의하면, 수도공 및 전기공의 일년 소득이 대학교수의 연봉보다 15% 정도 높았다. 이는 캐나다에서는 ‘학벌보다는 경제적인 생산성에 따라 소득이 결정된다’라는 사실로 주목받는 자료다. 실제로 캐나다의 거리에 나가보면 상호와 전화번호(또는 웹 사이트 주소)가 적힌 차량을 엄청 많이 볼 수 있다. 대부분이 극소규모의 일인(혹은 가족)회사들이다. 전기공, 배관공, 가구/페인트/창문/부엌 수리전문, 냉동 기술자…등등 자영업자인 그들은 그럴듯한 명문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과 비교해서 결코 덜 행복하지 않다. 일 년에 몇 주씩 해외로 휴가도 가고 인생을 즐기며 행복하게 산다. 즉 직업의 종류에 상관없이 각자에게 허락된 기회를 잘 활용하는 사람에게 캐나다는 최상의 나라인 것이다.

캐나다는 여러 가지 문화가 복합된 나라다

캐나다는 이민자들이 각자 출신국의 문화를 선택하고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 주는 나라다. 캐나다의 문화를 모자이크(Mosaic) 문화라고 부른다. 미국의 이민전략을 ‘완전히 녹여서 적응-혼합시키는 용광로(Melting Pot) 형태’라고 한다면 캐나다의 이민전략은 ‘여러 가지 문화 조각들을 모아서 한 폭의 큰 그림을 만들어 내는 모자이크(Mosaic)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캐나다의 이민전략은 바로 복합문화 촉진정책으로 연결된다. 복합문화의 의미는 ‘이민 공동체들이 각기 출신국가의 고유문화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캐나다 본래의 문화 및 타 공동체들의 문화와 조화를 이루어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캐나다 의 신(新) 문화를 정립한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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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평등한 나라, 미래의 나라

요약하면, 캐나다는 이민자들에게 모든 분야에서 무한한 기회를 보장하는 나라다.

1.2 캐나다는 평등한 나라

의식주가 보장되고 물리적, 정신적으로 안정된 환경 속에서 살 수 있으며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한다. 의식주가 보장된다는 의미는 ‘생활유지에 필요한 소득이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캐나다는 세계에서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다. 2005 년도에 캐나다의 GDP(9790 억 US$)는 세계 9 위였다. 어느 나라의 ‘경제수준’을 검토할 때 이처럼 GDP 의 규모를 주로 본다. 그러나 그 나라 국민들의 ‘삶의 질’에 관해서 논할 때는 그 GDP 로 인한 이익이 어느 정도로 공평하게 전국민에게 분배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즉, 어떤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인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데는 ‘소득분배의 평등성’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소득분배의 평등성을 보여주는 통계치를 ‘지니 (Gini)계수’라고 한다. 지니 계수가 적을수록 소득분배가 평등하다. 즉 지니 계수가 적을수록 모든 국민이 잘 산다는 것이다. 10 대 경제강국들의 평균 지니 계수는 0.34 이며 캐나다의 지니 계수는 이보다 낮은 0.31 이다. 이는 캐나다가 부자 나라일 뿐만 아니라 ‘빈부의 격차가 매우 적고 골고루 잘 사는 나라’라는 뜻을 담고 있다. 캐나다의 소득분배가 이같이 평등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국가가 복지정책을 조심스럽고 철저하게 펼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국가는 고용인이 피고용인에게 근로시간 당 지불해야 하는 최저 임금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어떤 피고용자가 실직을 하면 실직 보험제도를 적용하여 근무기간 및 보험금 납입액에 따라 실직수당을 지불하고 재취업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재교육을 지원한다. 또한 연간 소득액이 최저 생활수준(주에 따라 2 만 5 천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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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평등한 나라, 미래의 나라

달러에서 3 만 달러)에 미달되면 복지소득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하여 생활 보조금을 지불한다. 18 세 미만의 자녀에게는 매달 자녀 수당을 지불하여 양육에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은퇴후에는 캐나다 연방정부가 주는 2 개의 은퇴소득 (연방정부 퇴직금 Pension funds 과 노후 소득 보장금 Old Age Income Security) 수혜를 받는다. 연방정부 퇴직금은 퇴직금고에 기여를 해야 하지만 노후 소득 보장금에는 그러한 기여 조건이 없다(이민자의 경우 18 세 이후 캐나다에서 최소 10 년을 거주해야만 노후 소득 보장금의 수혜대상이 된다). 이에 따라 기타 소득이 없는 캐나다의 노년부부는 연간 약 2 만 5 천 달러를 받는다. 퀘벡 연금금고에 기여하고 은퇴한 퀘벡 주민은 연방정부가 주는 노후 소득 보장금외에도 퀘벡 주정부가 주는 연금도 받는다. 그 외에도 다양한 소득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 이러한 소득 지원 프로그램들 덕분에 캐나다의 모든 저소득 국민은 최소 수준의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 대신 캐나다 주민은 많은 세금을 부담한다. GDP 대비 평균 과세율은 42%로서 미국의 33 % 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캐나다 소득 분배제도의 핵심적 파급 효과는 상대적인 빈곤감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모든 국민의 생활 수준은 비슷해서 중산층의 경우에 매월 5,000 달러 정도를 소비하는 반면 서민층은 4,000 달러 정도를 소비한다. 별반 차이가 없는 소비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상대적 빈곤이 비교적 없다는 것은 폭력이 별로 없다는 의미, 즉 사회적인 안정 요인이 될 수 있다. 잘 산다는 것은 물리적 및 심리적 불안이 없는 삶을 의미한다. 미국에 비해 캐나다에서는 교통사고가 덜 심하다. 2003 년도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인구 10 만 명당 교통사고 부상자 수는 미국의 경우 704 명, 캐나다의 경우는 불과 509 명이었다. 캐나다의 교통사고 위험은 미국보다 32% 덜 심각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구 10 만 명당 범죄 건수는 뉴질랜드(11,152), 핀란드(10,243), 그리고 영국(9,767) 인 반면에 캐나다는 불과 8,042 였다. 이 자료가 의미하는 것은 캐나다가 여타 선진국가보다 육체적 심리적으로 비교적 안전한 나라라는 것이다. 캐나다인들은 이러한 특혜를 누리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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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평등한 나라, 미래의 나라

1.3

캐나다는 미래의 나라

경제학자들이 어떤 나라의 미래성(장래성, 발전 가능성)을 평가할 때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지수를 참고한다. 그 나라의 1) 자유, 평화, 민주주의 보장 정도, 2) 사회 청결성, 3) 환경 친화적 개발 철학, 4) 인적 자원의 개발, 5) 기업 친화적 경제적 환경, 6) 지구촌화 수준 등이 그것이다. 캐나다의 자유지수 (Index of Liberty)는 159 개국 중 3 위, 언론자유 지수 (Index of the Freedom of Press)는 180 개국 중 13 위, 평화지수(Index of Global Peace)는 140 개국 중 11 위, 민주주의 지수(Index of Democracy)는 167 개국 중 11 위, 비 부패지수(index of Corruption Index) 는 180 개국 중 9 위, 환경지속 지수(Index of Environmental Sustainability)는 111 개국 중 6 위, 인적자원 개발 지수(Index of Human Resource Development)는 180 개국 중 14 위, 국제적 경쟁력 지수 (Index of International Competitiveness)는 55 개국 중 8 위, 경제적 자유지수(Index of Economic Freedom)는 157 개국 중 7 위, 은행제도의 건전성 지수(Index of the Soundness of Banks)는 134 개국 중 1 위다. 이와 같이 캐나다는 미래가 밝은 나라다. 한편, 어떤 나라의 잠재적 개발능력은 그 나라가 보유한 생산요소의 양과 질, 그리고 경제활동 환경을 보고 판단한다. 생산요소란 노동력과 자본의 풍부성을 말하는데 특히 그 나라에 매장된 천연자원의 양과 질을 말한다. 캐나다는 수준 높은 인적 자원과 생산 및 경영기술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무한한 천연자원을 가진 나라다. 캐나다에는 100 만 여 개의 호수와 4 대 호수가 있다. 인류가 극복해야 할 문제 중의 하나가 사용 가능한 수자원이다. 또한 캐나다의 엄청난 모래석유 매장량 때문에 사람들은 캐나다를 사우디 아라비아 다음의 세계 제 2 위 석유매장 국가라고 부른다. 즉 무한한 수자원과 모래석유, 천연가스, 그리고 끝없는 산림과 거대한 곡창을 갖춘 나라가 캐나다라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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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평등한 나라, 미래의 나라

캐나다는 이같이 무한한 천연자원과 함께 현대식 산업구조를 구비한 세계 유일의 나라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캐나다는 기회의 나라, 평등의 나라, 미래의 나라, 안전한 나라, 복 받은 나라...참으로 살기 좋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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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제2장


퀘벡 주는 최초의 캐나다

제2장 퀘벡 주는 최초의 캐나다 퀘벡 주는 캐나다 건국의 주춧돌이 된 중요한 주로서 캐나다의 중심 공동체이자 역사적인 사회개혁과 경제기적을 일으킨 저력 있는 사회이며 이민자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불어 문화권 지역이다. 지구상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를 영어권 나라라고 알고 있지만 250 년 전에는 불어권 나라(뉴 프랑스)였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퀘벡 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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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주는 최초의 캐나다

2.1 퀘벡 주는 최초의 캐나다

뉴 프랑스의 탄생

캐나다의 역사는 1534 년에 프랑스의 쟈끄 까르띠에(Jacques Cartier) 경이 지금의 퀘벡 동부 지역인 가스뻬(Gaspé) 반도에 상륙하여 십자가를 설치하고 “프랑스 왕 만세” 를 외치면서 시작됐다. 까르띠에 경은 퀘벡 시를 비롯해서 몬트리올 지역까지 탐사하고 개척을 시도했으나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후 1603 년에 또 다른 프랑스 귀족 사뮈엘 드 샹쁠랭(Samuel de Champlain)경이 왔고, 1608 년에 그가 퀘벡 성을 축성함으로써 캐나다(뉴 프랑스 New France)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608 년부터 1760 년까지 원주민과의 전쟁 및 북미 식민지 영토 장악을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뉴 프랑스가 모피 교역의 중심지로 크게 성장하자, 영국은 1758 년에 30 척의 군함과 3 만 명의 병력으로 뉴 프랑스의 수도인 퀘벡 시를 공격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1 만 5 천 명의 병력으로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1760 년에 퀘벡 성이 함락되었고 다음 해에는 몬트리올 성도 백기를 듦으로써 캐나다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763 년의 빠리조약으로 승리를 확정한 영국은 1774 년에 퀘벡법 (The Quebec Act)을 채택하여 프랑스인의 권리를 박탈했다. 교역권은 영국인이 독점했고 불어는 공식언어의 자격을 상실했다. 빠리조약 후 프랑스 귀족의 대부분은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러나 당시 영국인의 수는 잔류한 프랑스인의 절반도 안 되었고 만약 프랑스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 같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프랑스인 사회의 대표집단으로 가톨릭 교회를 선택했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당시 뉴 프랑스 사회에서 행정력과 지도력을 제대로 갖춘 집단은 가톨릭 교회가 유일했다. 영국 정부는 불어 사용, 프랑스 문화보전 및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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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주는 최초의 캐나다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가로 가톨릭 교회가 뉴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영국 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도록 유도할 것을 제의했고 가톨릭 측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퀘벡 사회는 가톨릭 교회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이 상황은 1960 년대까지 350 년 동안 지속되었다. 1776 년, 치열한 내전 끝에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독립을 거부하고 영국 왕을 지지하는 왕권주의자 3 만 여명이 미국에서 캐나다로 이주했다. 이들의 정착지로 지금의 온타리오 주 지역이 정해졌다. 극단적 영국계였던 이들이 현 온타리오 주민의 선조가 되었고, 과거 프랑스 왕의 국민이었던 뉴 프랑스 주민들의 이웃에 살게 되었다.

캐나다의 건국

1791 년에 이른바 영토법 (Constitutional Act)이 채택되어 캐나다는 북부 캐나다(Upper Canada) 와 남부 캐나다(Lower Canada) 로 나뉘어졌다. 남부 캐나다가 지금의 퀘벡 주에 해당한다. 남북 캐나다는 각각 의회를 구성하였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이때 퀘벡 주는 프랑스 문화의 보전, 프랑스어 사용 등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영국 정부의 지배는 여전했으며, 선거 시 영국인의 당선을 위해 부정 부패를 서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퀘벡에서는 1834 년부터 1837 년에 걸쳐 루이 빠삐노 (Louis Papineau) 가 주도한 이른바 애국자 반란 (Revolt of the Patriots) 이 일어나 퀘벡 독립 문제로까지 발전되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 캐나다 체제는 남부 캐나다인의 반란과 미국의 침략 우려, 그리고 북부 캐나다의 엄청난 국채 때문에 1840 년에 다시 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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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제로 복귀했다. 1849 년부터는 북부 캐나다, 남부 캐나다뿐만 아니라 동부에 있는 영국 식민지 (Nova Scotia, New Brunswick)를 통합하여 ‘거대한 나라를 건국해야 한다’라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드디어 1867 년 7 월 1 일에 캐나다 왕국 (Dominion of Canada)이 탄생했다. 이로써 226 년(1534-1763)에 걸친 프랑스 식민지 체제와 104 년(1763-1867)간의 영국 식민지 체제에서 벗어나 캐나다라는 거대한 나라가 탄생하게 되었다. 건국 시 캐나다는 4 개 주 (온타리오, 퀘벡,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로 구성되었다. 이후 매니토바 주는 1870 년,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는 1871 년,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주는 1873 년, 앨버타 주와 서스캐처원 주는 1905 년에 각각 캐나다에 합류했다. 뉴펀들랜드 & 래브라도 주는 제 2 차 대전 후 1949 년에 캐나다의 일부가 되었다. 캐나다 건국의 법적 토대는 영국 북미법(British North American Act)이다. 헌법에 따라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한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연방정부는 국방, 치안, 외교, 금융, 우편 등 극소수의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나머지 모든 권한은 주정부에게 주어졌다. 특히 공교육, 공공 보건, 사회 서비스, 천연자원 개발 등은 모두 주정부의 고유 권한이었다. 그러나 제 1 차 및 제 2 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상당 부분의 주정부 권한이 연방정부로 이양되기도 했다. 캐나다가 건국될 당시 영국계 캐나다와 프랑스계 캐나다(퀘벡) 간에 이익 타협이 있었다. 이 같은 타협에 따라 영어와 불어가 함께 연방정부 기관의 공식언어가 되었다. 이후 1960 년대에 뉴브런즈윅 주와 온타리오 주가 각 주의 공식언어로 불어를 추가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퀘벡 주에서는 불어만이 유일한 공식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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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주는 최초의 캐나다

2.2 퀘벡 주의 사회개혁 및 경제기적

이와 같이 퀘벡이 캐나다의 시작이었고 캐나다를 거대한 나라로 발전시킨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주임에도 불구하고 1960 년대 퀘벡 주의 사회 및 경제개발 수준은 캐나다에서 가장 낙후된 수준이었다. 당시 퀘벡 주의 개인소득은 온타리오 주의 73% 정도였다. 퀘벡 인구의 30% 이상이 병원비를 내지 못하는 지경이었고 대학 진학은 극소수만이 할 수 있었다. 빈곤층을 위한 사회보장 제도는 전무하여 가톨릭 교회의 자선사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퀘벡 주를 이같이 낙후시킨 주된 원인은 두 가지였다.

어둠의 시대

첫째 원인은 ‘퀘벡 정치인들의 부패와 무능’이었다. 1940 년대부터 퀘벡 주는 모리스 뒤쁠레시 (Maurice Duplessis) 수상이 이끄는 위니옹 나씨오날(Union Nationale) 당이 지배했다. 극단 보수당인 이 정당은 매우 부패했으며 무능한 정당이었다. 뒤쁠레시 정권은 언론자유를 박탈했고 노조의 결성을 가로 막았으며 안정적인 사회유지를 핑계로 사회적, 경제적 발전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억압정책을 펼쳤다. 둘째 원인은 ‘가톨릭 교회의 시대착오적인 행태’였다. 가톨릭 교회는 1608 년부터 1960 년대까지 퀘벡 주의 실질적인 정부기능을 수행하면서 보수적인 성향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런 극단 보수주의는 350 년 동안 퀘벡의 경제사회 발전을 가로막은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더욱이 20 세기 중반에는 극도로 부패하고 무능한 뒤쁠레시 정부와 손잡고 퀘벡을 캐나다에서 가장 낙후된 주로 만드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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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차 대전 후 국제적 개방화 및 세계화로 인해 타지역 및 타국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불어권 퀘벡인은 억압적 현실을 거부하고 반발하며 개혁을 외치기 시작했다. 지식인, 예술가, 특히 영향력 있는 가톨릭 사제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앞장섰다. 라발대학의 조르쥬 앙리 레벡(George Henri Levesque) 신부와 제라르 디옹(Gerard Dion) 신부, 그리고 루이 오닐(Louis O’Neil) 등이 개혁에 앞장섰다. 전 캐나다 수상 삐에르 엘리옷 트뤼도 (Pierre Eliotte Trudeau )도 큰 역할을 했다.

조용한 혁명 (Quiet Revolution)

퀘벡의 역사는 이를 ‘조용한 혁명’으로 부른다. 조용한 혁명은 퀘벡 주민들이 갈망하던 자유, 사회정의, 경제개발, 인간의 존엄회복 등을 추구하기 위해 전개된 사회적, 경제적 개혁운동이다. 개혁운동의 결과는 퀘벡의 지배세력을 영어권에서 불어권으로 바꾸어 놓았다. 1960 년의 총선에서 쟝 르사쥬(Jean Lesage)가 뒤쁠레시를 패퇴시킨 후 직장에서 불어 사용이 의무화되었다. 1970 년에는 FLQ(퀘벡 독립운동을 위한 무장단체)의 영국 외교관 납치 및 퀘벡 건설부 장관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선라이프(Sun Life)를 비롯한 많은 영어권 기업이 퀘벡 주를 떠났다. 이때 한국 대기업의 캐나다 지사들도 토론토등 타주로 옮겨갔고 불어권 기업인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영어권 기업들을 인수했다. 조용한 혁명의 첫 번째 결과는 ‘교회와 정치의 분리’였다. 1960 년에 정권을 수립한 자유당은 제일 먼저 그때까지 가톨릭 교회가 수행해왔던 모든 행정 기능들을 퀘벡 정부로 회수했다. 1964 년에 교육부를 창설하여 교육기능을 교회에서 정부로 이관시켰고, 가톨릭 교회가 자선사업 형태로 운영하던 병원과 고아원 등 의료/보건 서비스와 사회 복지 서비스 일체도 1969 년까지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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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주는 최초의 캐나다

정부로 환원시켰다. 이로써 350 년에 걸친 가톨릭 교회의 오랜 정치개입이 막을 내렸다. 두 번째 결과는 ‘교육개혁’인데 그 중점은 세젭제도(CEGEP 전문대학) 실시와 퀘벡 주립대의 설립이었다. 이로써 고등학교 졸업 후 세젭으로 진학하는 학생은 2 년 후에 대학으로 진학하거나, 혹은 3 년 후에 취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젭제도는 지금도 퀘벡 산업화 및 경제개발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배출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편, 퀘벡 주립대(l’Université du Québec)는 퀘벡 주의 각 지역에 분교를 두도록 했다. 이로써 퀘벡 주 내의 지방 학생들도 저렴한 비용으로 대학 교육을 받게 되었고 이는 각 지역을 균형적으로 개발하는 효과를 유발시켰다. 가톨릭 교회로부터 교육기능을 이관받은 교육부가 이루어낸 커다란 성과였다. 조용한 혁명의 세 번째 결과는 ‘퀘벡 경제의 기적’을 이룬 것이다. 1960 년대 이전 퀘벡의 경제체제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까지 퀘벡은 노동 집약적인 산업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에 따라 근로자들은 낮은 임금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빈약한 금융제도 때문에 필요한 사업자금은 영어권 캐나다 및 미국에서 비싼 이자로 조달해야 했다. 또한 그때까지 대학 등의 고등교육 제도는 의사, 변호사 및 사제의 육성을 중점으로 하는 이른바 고전교육 (course cacique) 중심이었던 까닭에 산업이 필요로 하는 근로자를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연자원이 무한하였지만 필요한 자본과 개발기술 부족으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반면에 자동차 산업 등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조를 가진 온타리오 주는 당시 전후 경제부흥의 혜택을 철저하게 누리며 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 년에 집권한 퀘벡 자유당 정부는 정부주도 하의 경제개발계획을 구상하고 집행했다. 그 계획은 1960 년부터 1990 년까지 30 년간 계속되었다. 정부는 철광, 농업, 에너지, 산림, 금융산업 등을 관할하는 정부산하 공사를 설립해 이들 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의 양성과 기술개발을 도모하고 소요자금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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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주는 최초의 캐나다

퀘벡 경제개발 전략의 성과는 파격적이었다. 온타리오 주의 소득과 퀘벡 주의 주민 소득 격차는 1960 년의 27%에서 1990 년에는 5% 이내로 줄어들었다. 퀘벡 주의 낮은 주택 가격 및 생활비를 감안하면 실제소득 격차는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퀘벡 근로자의 생산성은 캐나다 평균 생산성을 앞질렀고 실직자 비율도 온타리오 주의 실직자 비율과 유사한 정도로 감소했다. 봉바르디에(Bombardier)사를 비롯한 불어권 다국적 거대기업을 많이 탄생시킨 것은 이 경제개발 전략의 주요 성과였다. 퀘벡 주의 산업구조가 노동 집약적 구조에서 지식 집약적 구조로 전환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실로 엄청난 퀘벡 경제의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2.3 퀘벡 주는 캐나다 경제의 중심 공동체

캐나다는 퀘벡을 시작으로 건국됐고 캐나다의 정치, 경제, 사회복지 등 모든 정책에는 항상 퀘벡 주의 주장이 크게 반영된다. 또한 퀘벡 주는 10 개 주 중에서 가장 넓고 캐나다 전체 인구의 4 분의 1 을 차지하며 온타리오 주와 더불어 캐나다의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다. 2009 년도에 퀘벡 주의 총생산량은 2,657 억 달러를 기록했는데 이는 온타리오 주에 이어 2 위의 경제규모다. <표 2-1> 캐나다의 주별 인구 및 GDP 주

2010 년 인구 (1000 명)

면적 (평방킬로)

1 인당 GDP$ (2008 년도)

GDP 지수

CANADA

34,108

9,093,507

48,013

100

N. L.

509

373,872

36,653

76

P.E.I

142

5,660

33,333

69

Nova Scotia

942

53,338

36,341

76

N. Brunswick

751

71,450

36,653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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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주는 최초의 캐나다

Québec

7,907

1,365,128

39,057

81

Ontario

13,210

967,741

45,194

94

Manitoba

1,235

553,556

42,346

88

Saskatchewan

1,045

591,670

64,534

133

Alberta

3,720

642,317

81,188

169

B. C.

4,530

925,186

45,103

94

Northwest T.

44

1,183,085

114,398

238

Yukon T.

34

474,391

58,429

121

Nunavut

33

1,936,113

48,133

100

N.L.: Newfoundland and Labrador

P.E.I.: Prince Edward Island

B.C.: British Columbia

2.4 퀘벡 주는 이민자를 필요로 하는 땅

퀘벡 주는 이민자 없이는 미래가 불투명한 곳이다. 불어권 퀘벡 주민의 극히 낮은 출산율 때문에 생산활동을 위한 인력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퀘벡 주의 자연적 인구증가율은 0 %에 가깝다. 퀘벡 인구증가의 66%가 이민자들로 채워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프랑스계 불어권 퀘벡 주민의 수가 매년 현격하게 줄어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추세대로라면 10 년 내로 퀘벡 인구증가는 전적으로 새로운 이민자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퀘벡 주는 매년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1967 년에 캐나다 연방정부가 이민법을 개정한 후 퀘벡 주정부는 불어권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들어 연방정부와 이민정책에 관한 수 차례의 협상을 했다. 이에 따라 연방정부는 영주권 발급과 캐나다 시민권 부여, 그리고 망명자의 자격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고 퀘벡 주정부는 이민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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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주는 최초의 캐나다

이에 따라 퀘벡 주 이민 희망자들은 그들의 캐나다 영주 신청서(Application for permanent residence within Canada)가 연방정부(Citizenship and Immigration Canada)의 심사를 통과한 후에는 반드시 퀘벡 주 이민국에 CSQ(Certificat de Sélection du Québec)발급을 신청하고 인터뷰에 응해야 한다.

2.5 퀘벡 주는 불어 문화권

영어권 바다 가운데 작은 불어 섬, 퀘벡 !

2011 년 현재 퀘벡 주의 인구는 약 800 만 명이며 이중 70% 정도가 프랑스계의 불어권 주민이다. 영어를 선호하는 이민자들은 대부분 몬트리올 같은 대도시에 집중적으로 모여 산다. 그러나 조금만 도시 외곽으로 나가면 완전히 불어만을 사용하는 ‘뉴 프랑스 땅’임을 실감하게 된다. 1763 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귀족들은 모두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프랑스계의 평민들은 그대로 남아서 시골로 들어가 살았기 때문이다. 현재 북미에서 영어권 인구는 약 3 억 명이다. 즉 퀘벡이라는 불어 문화권은 거대한 영어권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이다. 따라서 불어권 정치인들이 이끌어가는 퀘벡 정부는 프랑스 정부의 협력을 받아 ‘북미의 불어 문화권’을 사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전체 이민자 중 불어권 국가(아이티, 베트남, 북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지역)에서 오는 이민자의 비중이 10 년 전의 51%에서 2008 년에는 57%로 늘어났다. 불어문화권 사수를 외치는 퀘벡 정부가 불어를 말하는 나라의 이민자들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등 아시아권 이민자들이 높은 학력과 기술은 물론 자본력도 갖추고 있음을 퀘벡 정부도 잘 안다. 그렇지만 기술이나 자본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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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주는 최초의 캐나다

‘불어를 말한다’는 것이 퀘벡 이민관들에게는 더 중요한 가산 포인트다. 그러나 불어를 잘 못하는 이민자들을 위하여 퀘벡 정부는 그들이 생활 불어를 습득할 수 있는 무료 교육환경을 마련하고 그 교육시설의 운영자금을 지원한다. 뿐만 아니라 이민자들이 불어를 배우는 동안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자녀양육 보조금도 준다. 또한 신규 이민자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빠나(PANA)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이민자들을 퀘벡 불어 문화권에 안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퀘벡의 독립운동과 독립 가능성

1867 년 건국 후의 캐나다 역사는 불어권 캐나다 (French Canada)와 영어권 캐나다(English Canada) 간의 갈등 및 타협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불어권 캐나다를 대표하는 프랑스계 퀘벡 주민은 수 차례에 걸쳐 독립을 주장했다. 독립 운동은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캐나다 연방 안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 더 큰 자주성을 확보하자는 온건파로 나뉜다. 그러나 과격파 독립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프랑스계 퀘벡인은 퀘벡 민족주의자(Nationalists)에 속한다. 퀘벡 독립 지지자들이 독립을 합리화하는 근거는 퀘벡 주가 연방의 다른 주들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불어 문화권이라는 점과 퀘벡 주가 가진 막대한 천연자원이면 당장 독립을 한다고 해도 하나의 국가로서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과거 프랑스와 영국간의 전쟁을 항상 잊지 않고 사는 프랑스계 퀘벡 주민들의 반 영국 정서가 그 저변에 깔려 있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1980-90 년대에 퀘벡 정부는 영어권 캐나다 연방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주민투표를 두 차례 실시했다. 투표는 진지하게 진행되었으며 이민자들은 초조하게 결과를 지켜보았다. 1980 년에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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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주는 최초의 캐나다

연합-부-자주국가(Sovereinty-Association) 설립을 놓고 실시했던 제 1 차 주민 투표 결과는 독립 반대표가 많았다. 그러나 1994 년에 실시된 제 2 차 주민투표에서는 1% 이내의 근소한 차이로 독립이 부결되었다. 이를 두고 쟈끄 빠리조 (Jaques Parizeau) 당시 퀘벡 주 수상은 이민자 때문에 근소한 차이로 독립에 실패했다는 발언을 해서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지금도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는데 그러나 독립은 점점 더 불가능해 질 것이 분명하다. 이유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어권 젊은세대조차도 퀘벡의 독립을 더 이상 심각한 과제로 생각하지 않으며, 중국 등 아시아계를 포함해서 독립을 반대하는 영어권 국가의 이민자들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퀘벡 주를 특수 공동체 (Distinct Society)로 인정받고 아울러 퀘벡 주의 정치적, 정책적 자주성을 확대하고자 하는 퀘벡 민족주의는 계속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요약하면, 최초의 캐나다(뉴 프랑스)였던 퀘벡 주는 20 세기 중반에 위대한 사회개혁, 교육개혁 및 경제기적을 이룩했으며 지금은 캐나다 경제에 크게 기여하는 불어권 사회다. 또한 퀘벡 주는 이민자들을 계속적으로 필요로 할 것이며, 비록 독립은 물 건너갔으나 프랑스계 퀘벡인들의 민족주의는 불어와 함께 퀘벡 땅에 계속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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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제3장


새 보금자리, 몬트리올 !

제3장 새 보금자리, 몬트리올 !

몬트리올의 본래 이름은 ‘Ville-Marie(성모의 시)’ 였고, 현재의 이름은 중세 불어의 Mont Réal(Mount Royal in English)에서 따왔다. 몬트리올에서는 해가 남쪽(?)에서 뜬다고 한다. 몬트리올 광역시를 가로 질러 흐르는 생-로랑 강을 중심으로 큰 산이 있는 윗쪽을 북쪽으로 부르다 보니 남쪽이 해가 뜨는 방향이 된 것이다. 이런 광역 몬트리올은 뉴욕, 보스턴 및 토론토에서 1 시간 내외의 항공거리에 있고 유럽의 중심지역을 5 시간 이내로 갈 수 있는 전략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는 커다란 섬(면적 4,259km2 )이다. 2011 년 캐나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몬트리올 시를 포함한 광역 몬트리올 지역안에는 약 400 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이는 퀘벡 주의 최대도시이며 캐나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라는 의미다. 광역 몬트리올의 강북지역(Laval)과 강남지역(South Shore/Rive-Sud)도 같은 생활권임을 감안하면 120 여개 민족 약 5 백만명 이 모여사는 거대한 다민족 생활 공동체가 이 지역에 형성되어 있다. 이중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민족은 프랑스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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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보금자리, 몬트리올 !

전체 인구의 약 56%는 2 개 이상의 언어(불어, 영어, 모국어)를 구사하며 약 67%는 불어를 약 16%는 영어를 집에서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이 몬트리올 시를 중심 생활권으로 형성된 이 지역은 여섯 가구중에서 네 가구가 불어를, 한 가구는 영어를, 나머지 한 가구는 다른 언어(모국어)를 쓰는 프랑스의 파리(Paris) 다음으로 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밀집해서 사는 지역이다. 영어권 주민들은 온타리오 주와 접경지역인 서쪽에 많이 거주한다. 또한 몬트리올은 캐나다에서 네 번째로 많은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대도시로서 캐나다의 정치 경제적 중심도시이고 이민자가 취업이나 사업을 하기에 좋은 도시다. 더군다나 영어와 불어는 물론 노력 여하에 따라 여러 가지 언어를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언어의 도시이고, 최상의 조건을 갖춘 교육의 도시이며, ‘북미의 파리’라 불릴 만큼 유럽의 낭만이 살아 숨쉬는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다.

<몬트리올 야경>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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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보금자리, 몬트리올 !

3.1

몬트리올의 역사

1535 년에 프랑스 귀족 쟈끄 까르띠에(Jacques Cartier)경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몬트리올 지역(the village of Hochelega)에 첫발을 디딘 이후 사뮈엘 드 샹쁠랭(Samuel de Champlain)경 이 1605 년에 현재의 올드 몬트리올에 모피 교역 본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로꾸와(Iroquois)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큰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642 년에 이르러 빌마리(A mission named ‘Ville Marie/City of Mary’ was built in 1642 as part of a project to create a French colonial empire) 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모피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1760 년의 영국의 식민지가 될 때까지 Ville Marie 는 북미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후 190 년이 지난 1832 년에 ‘몬트리올 시’로 공식적으로 등록되었다. 이후 몬트리올 시는 라쉰느 수로 (Lachine Canal)를 개발하고 상품교역을 더욱 활성화하였다. 1844 년부터 1849 년까지 몬트리올은 캐나다(United Province of Canada)의 수도였다. 1867 년 건국 이후 대륙철도가 건설되었고 산업화 및 도시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몬트리올은 눈부신 성장을 했으며 캐나다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몬트리올 시의 인구는 1801 년에 9,000 명, 1911 년에 467,986 명, 1951 년에 1,036,542 명, 1971 년에 1,214,532 명, 그리고 1991 년에는 1,017,666 로 증가했다. 1950 년대의 생-로랑(St-Laurence)강 확장사업, 1967 년의 세계 박람회 (Expo), 1976 년의 하계 올림픽은 몬트리올을 눈부시게 성장시켰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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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보금자리, 몬트리올 !

몬트리올의 경제성장은 고층건물 건설로 이어졌다. 1931 년에는 지금의 선라이프(Sunlife) 건물이 완성되었고 1962-64 년 기간에는 뚜르 드 부르스(Tour de bourse,증권 거래소), 쁠라스 빌마리 (Place Ville Marie), CIBC 건물, CIL 건물이 건설되었다. 1992 년 (몬트리올 시 설립 350 주년 기념 해)에는 1000 de la Gauchetiere 와 1250 Rene Levesque 가로에 초고층 건물들이 들어섰다. 또한 몬트리올은 빠른 속도로 지구촌화되어 현재 International Air Trasportation Association IATA), International Council of Graphic Design Association (ICOGRADA), International Bureau for Children’s Rights (IBCR), International for the Prevention of Crimes (ICPC)등 다수의 국제 연합 기구가 몬트리올에 상주하고 있다.

3.2 몬트리올의 매력

몬트리올의 매력은 ‘탁월한 교육제도, 안정적인 산업구조, 높은 생활의 질, 그리고 저렴한 생활비’ 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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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보금자리, 몬트리올 !

탁월한 교육제도

몬트리올의 첫 번째 매력은 훌륭한 교육제도를 갖춘 ‘세계 최고의 언어 교육장’이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는 영어권 나라로 한국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캐나다 정부기관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불어 두 가지다. 물론 토론토나 밴쿠버 등 캐나다의 다른 주와 도시에서는 주로 영어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퀘벡 주에서는 불어만을 공식언어로 인정한다. 비록 몬트리올의 서쪽지역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주민들도 많이 살지만 그래도 몬트리올은 ‘불어권 도시’라고 부름에 무리가 없다. 불어권 몬트리올의 중심가에 서면 수많은 언어가 들린다. 몬트리올에는 백여 개의 이민 민족들이 모여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여러 가지 언어를 습득할 수가 있다. 영어와 불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 중국어, 이탈리아어 등 한국어를 비롯해서 3-6 개의 언어를 자유롭게 말하는 한국계 이민자의 자녀를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이곳 몬트리올이다. 아마도 언어교육 기회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또한 퀘벡 주의 교육비는 타주의 그것에 비해 훨씬 싸다. 우선 유치원부터 세젭 까지 공립학교를 다닐 경우 퀘벡 정부가 모든 교육비를 부담한다. 또한 몬트리올에 있는 대학들의 등록금은 타주에 비해 40%나 저렴하다. 예를 들어 2011 년 현재 퀘벡 거주자 학생이 몬트리올의 불어권 사립대학을 다닐 경우 1 년 등록금은 약 2,000-3,500 달러다(한국 사립대학의 약 30% 수준). 이러한 이유로 2006 년 현재 몬트리올에는 100 여 국가에서 온 약 1 만 5 천명의 유학생들이 있다. 물론 유학생의 경우 학비는 거주자의 그것에 비해 훨씬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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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주에는 세젭(CEGEP)제도가 있다. 퀘벡 교육제도의 장점 중 하나인 세젭은 전공에 따라 2-3 년간을 공부하며 졸업 후에는 두 가지 진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가 있다. 하나는 졸업 후에 대학으로 진학하여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기회와 다른 하나는 취업을 하는 것이다. 이 제도는 어쩌면 1980-90 년대 한국의 전문학교 제도와 비슷할 수도 있다. 퀘벡의 산업체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 인력을 배출하는 세젭은 수천 개의 기술교육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학생들은 각자의 재능과 적성에 맞는 전공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훌륭한 프로그램의 혜택을 만끽할 수 있다. 세젭이 인기 있는 이유는 퀘벡 주에서는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존경받고 여유 있는 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으며 직업에 대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퀘벡

주에는

많은

대학이

있다.

몬트리올

시에는

몬트리올(Montreal)대학, 콩코디아(Concordia)대학, 매길(McGill)대학 및 퀘벡 주립대의 몬트리올 분교가 있다. 퀘벡 주립대는 퀘벡영토(170 만 km2)안에 9 개 지방 분교가 있다. 비숍(Bishop), 콩코디아 및 매길 대학은 영어권 대학이며 몬트리올대학, 퀘벡 주립대학, 라발(Laval)대학 및 셔브루크(Sherbrooke)대학은 불어권 대학이다. 이들 대학들은 대규모의 종합대학으로 평균 2 만 명 이상의 학생이 등록되어 있다. 매길대학은 1821 년, 몬트리올대학은 1878 년에 설립 되었다. 콩코디아대학은 1974 년에 당시 조지 윌리엄 경(Sir George William)대학과 로욜라대학(Loyola College)를 합치면서 거대한 대학으로 출범했다. 라발대학은 1663 년에 프랑수와 라발(François Laval)주교가 설립한 북미 몬트리올에는 거대한 4 개 종합대학 외에 H.E.C.(몬트리올대 산하), 퀘벡대에 속하는 nationale d’administration publique:ENAP)

최초의 대학이다. 경영학으로 유명한 행정대학원 (Ecole 등 수많은 고등교육

시설이 있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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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보금자리, 몬트리올 !

안정적인 산업구조

몬트리올의 두 번째 매력은 ‘안정적인 산업구조’를 가진 도시라는 것이다. 몬트리올은 경제 주기변동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높은 부가가치 산업구조를 가진 도시다. 이는 낯선 이국 땅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생계 해결에 도움을 주는 산업구조다. 이미 오래전 노동 집약적 산업구조에서 자본 집약적 산업구조로 바뀐 세계경제는 21 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시 지식 집약적 산업구조로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온타리오 주의 산업구조는 자동차 위주의 산업구조이며 아직까지 자본 집약적인 구조다. 이러한 산업구조는 쉽사리 세계경제 주기변동(경제의 불황 호황의 연속)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몬트리올의 산업구조는 첨단산업과 지식산업이 병존하는 지식 집약적 산업구조다. 즉 첨단산업인 캐나다 항공산업의 60%가 몬트리올 지역에 있다. 항공산업의 2008 년도 매출액은 120 억 달러였다. 봉바르디에(Bombardier), 벨 헬리콥터(Bell Helicopter), 텍스트론트(Textront)사가 대표적인 항공회사다. 또 다른 첨단산업인 지상교통 차량사업에는 Bombardier, Paccar, Nova Buseemdmfl 회사가 연 72 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며 3 만 5 천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한편 몬트리올은 북미지역 컴퓨터 게임 제작의 중심지이다. 수많은 지식산업체들이 애니메이션 게임과 소프트웨어(Auto Desk Media, Entertainment Tooa Boon), 그리고 영화를 제작한다. 몬트리올에는 다국적 유전공학 기업도 있다. 이는 북미에서 8 번째로 큰 유전공학 센터이다. Astrazzenneca, Bistol-Myers Squibb, Johnson&Johnson, Pfizer 등 수많은 연구소에서 3 만 2 천명의 고급 인력이 근무하는 곳이 몬트리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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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보금자리, 몬트리올 !

또한 몬트리올의 주요산업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약 10 만 명이 종사하는 IT 산업이다. 캐나다 IT 산업의 52%가 몬트리올에 있으며 캐나다 IT 산업투자의 62%가 몬트리올에서 이루어진다. 몬트리올 광역시에는 수많은 IT Zone 과 IT Building 들이 있다. 시 정부는 이들 지역에 입주한 업체들에게 세제혜택 등 온갖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그밖에 관광업도 퀘벡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통계에 의하면 33 만 명이 현재 이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세계영화 축제와 국제 불꽃놀이도 관광산업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외에도 세계 과학기술 축제 (EUREKA Festival) 는 전세계의 과학자들이 큰 관심을 갖는 지식행사다. 이와 같이 몬트리올의 산업구조는 불황과 호황을 반복하는 세계경제의 주기적 변동에 영향을 덜 받는 안정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퀘벡 주의 안정된 경제는 이민 초기에 경제적으로 불안한 이민자들이 생계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2007 년부터 불안한 모습을 보인 미국 경제 위기의 여파가 온타리오 주를 강타했을 때도 퀘벡 주의 경제가 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이 같은 산업구조의 덕택이다.

높은 생활의 질

몬트리올의 세 번째 매력은 ‘높은 생활의 질’이다. 몬트리올에는 3 개의 공공 비치(beach)가 있어서 여름에는 수영을 즐길 수 있다. 또한 몬트리올 근교에 있는 수십 개의 골프장은 언제라도 전화 한 통만으로 저렴하게 골프를 즐길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 회원권이 수천-수억 원이나 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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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보금자리, 몬트리올 !

조건이다. 몬트리올 시의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몽루와이얄(Mt. Royal)산에는 여름공원이 있으며 겨울에는 같은 장소에서 스키를 즐길 수 있다. 몬트리올의 범죄율은 북미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도심에는 대학교, 대규모 백화점 병원 및 아파트 건물이 있다. 세계에서 유명한 지하 도로는 30 km 나 되며 그 안에는 쇼핑센터, 2 개 대학교, 호텔, 200 개의 식당 및 1,700 개의 상점, 37 개의 영화관 및 두 개의 기차역이 연결되어 있다. 매일 50 만 명이 지하 도로를 이용한다. 몬트리올에는 125 개의 이민 공동체가 공존하고 있다. 몬트리올 시정부 및 퀘벡 주정부는 이민 공동체간의 화합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매년 개최한다. 정부는 매년 2 월을 흑인의 달 (Mois de noirs)로 지정하고 퀘벡사회 발전에 대한 흑인들의 기여를 격려하고 축하한다. 여름에는 중국 이민 공동체에서 용선 대회(Boat Race)를 하는데 시당국이 직접 참여한다. 매년 여름 두 달 동안 몬트리올 시가 주최하는 대규모 문화행사인 ‘세계와 만나는 주말(Weekend du monde)’은 각국의 고유문화를 퀘벡 사회에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모든 이민 공동체에게 제공한다. 한편 퀘벡 주정부는 매년 10 월 첫 번째 주를 ‘복합문화 주간(Intercultural Week)’으로 지정하고 이민 공동체들과 문화행사를 공동 개최한다. 매년 몬트리올에서 개최되는 국제 재즈 축제 (International Jazz Festival)에는 400 개의 프로그램에 50 여 만 명이 참여한다. 유머축제(Just for Laugh)에도 2 천여 명이 출연하며 역시 50 만 명의 관람객이 전 세계에서 몬트리올로 모여든다. 불어권 뮤지컬 (Franco Follies: French Musical)행사는 1,200 명의 아티스트가 출연하여 70 여 개의 실내 공연과 180 개의 실외 연주회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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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보금자리, 몬트리올 !

몬트리올에 사는 사람들은 이 모든 문화행사를 가까이에서 손쉽게 즐길 수 있다. 일년 내내 이어지는 문화축제와 함께 높은 생활의 질을 만끽하며 사는 곳, 그곳이 바로 몬트리올이다.

저렴한 생활비

이민자의 입장에서 볼 때 생활비가 저렴한 것은 몬트리올 정착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캐나다의 타 대도시에 비해 몬트리올의 생활비는 아주 저렴하다. 생활비의 가장 큰 부분은 주거비인데 주거비 부담 정도는 자가 가구인 경우와 임차 가구인 경우로 나누어 판단할 수 있다. 집을 소유한 자가가구의 경우는 가구별 연간소득 대비 주택가격의 비율, 그리고 임차가구의 경우는 월 소득 대비 월세 비율을 보고 주거비 부담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 <표 3-1> 캐나다 주요 도시 별 주택구입 부담 (2001 년) 지역

가구소득($)

주택가격($)

소득대비 가격배수

1. 기존 이민자 가구 Toronto

84,016

251,528

3.00

Vancouver

70,196

285,910

4.07

Montreal

68,016

125,744

1.84

2. 신규 이민자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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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보금자리, 몬트리올 !

Toronto

64,570

251,528

3.89

Vancouver

48,678

285,910

5.87

Montreal

61,445

125,744

2.04

<표 3-1>은 한민족 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밴쿠버, 토론토와 몬트리올에서 주택을 구입할 경우에 자금부담 정도를 비교한 것이다. 2001 년도에 몬트리올에 거주한 이민자 가구는 밴쿠버나 토론토의 이민자 가구에 비해 주택구입 부담이 훨씬 적었다. 기존 이민자 가구의 경우 몬트리올의 주택가격이 연간 소득의 불과 1.84 배인 대신에 토론토의 경우는 3 배, 밴쿠버의 경우는 4.07 배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몬트리올의 주택은 소득을 감안할 때 밴쿠버보다 두 배 정도 저렴하다는 것이다. 신규 이민자 가구의 경우도 몬트리올의 이민자 가구는 연간 소득의 2 배만 지불하면 주택구입이 가능한 반면에 밴쿠버에 정착한 이민자의 경우는 6 년치 연봉을 몽땅 투자해야만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런 주거비의 격차는 2008 년도에도 여전했다. 2008 년도에 몬트리올의 가구당 총 지출은 밴쿠버 거주자 가구별 지출액의 85%인 반면에 몬트리올의 평균 주택가격($258,041)은 밴쿠버 평균 주택가격($593,767)의 69%에 불과했다. 토론토 거주 가구와 비교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총 지출 75% vs. 주택가격 63%). 즉 캐나다의 타 대도시에 비해 몬트리올 거주 가구의 소득은 낮으나 주택가격은 더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한편 2008 년의 평균 월세는 밴쿠버($1,124), 토론토($1,095), 몬트리올 ($659)로 조사되었다. 몬트리올의 월세가 밴쿠버나 토론토보다 40% 정도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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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보금자리, 몬트리올 !

이민 자금이 넉넉하지 못한 독립 이민자들이 몬트리올에 둥지를 트는 또 다른 이유인 것이다. 다수 언어 교육의 기회와 내 집 마련이 용이한 곳 몬트리올! 새 보금자리를 찾는 젊은 이민자들에게 매력 있는 도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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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제2부 퀘벡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10 년이 바람같이 스쳐가고

어느 새 커서 멀리 사는 아이가 찾아올 때 민들레 만개한 산책길을 걷다가 “ Bonjour ! ” 마주친 이웃에게 자연스레 인사하는 아내를 볼 때 한국방문 일주일도 되기전에 집이 그립고 서둘러 돌아오는 창밖으로 몬트리올이 반가울 때

그동안 이기고 넘겨온 시간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이젠 여기가 고향이구나…

살며시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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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제4장


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제4장 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세계에서 세 번째로 넓은 땅을 지녔으면서도 인구는 3 천 5 백만 명 정도에 불과해 아직도 개발의 여지가 큰 자원국의 입장에서 세계 각지로부터 계속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는 캐나다에 한국인이 정식 이민자로서 본격적으로 이주해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은 1970 년대 초반이다. 물론 그 전에도 한인 동포들이 퀘벡 땅에 거주했고 특히 세계적 규모의 몬트리올 무역 박람회가 열렸던 1967 년을 전후해서는 수백명의 한인들이 몬트리올에 살았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전문직 취업인과 유학생, 그리고 상사 주재원 등 일시 체류자 신분의 한국인이었다. 사실 1967 년 이전에는 캐나다의 이민법 자체가 아시아인들에게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한인들의 정식 입이민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이민 수속을 밟아 이주해온 사람들보다는 유학생으로 또는 결혼 초청을 받거나 혹은 관광비자를 얻어서 퀘벡 주에 들어 온 동포들이 대부분이었다. 퀘벡 땅에 한민족 공동체가 탄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5 년 전인 1965 년의 일이다. 당시 퀘벡 주의 동포 수는 약 300 명이었고 한민족 공동체의 탄생 과정에는 재 캐나다 한국 대사관이 관여했다. 2 년 후인 1967 년 캐나다 정부가 이민법을 개정하였고 아시아 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같은 해 몬트리올에서 개최되었던 세계 무역박람회(Expo: 1967.4.28 - 1967.10.5)는 한국계 입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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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본격화의 촉매 역할을 했다. 몬트리올 세계 무역 박람회에는 한국정부의 경제발전 촉진을 위한 수출진흥 정책의 일환으로 대한무역진흥공사 (KOTRA) 무역관이 설치되었으며 한국기업들이 박람회에 대거 참여함으로써 상사 주재원이 퀘벡 거주 동포인구의 급증에 기여했다. 이민문호 개방후 44 년 동안 캐나다의 이민정책은 여러 차례 바뀌었고 이에 따라 한국계 입이민의 유형도 다양하게 변화했다. 즉, 개방후 1980 년대 초반까지 약 15 년 동안은 취업 이민자와 가족 이민자들이 퀘벡 동포사회 인구의 증가에 크게 기여했고 1980 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는 기업(사업)투자 이민자들과 전문인력 이민자들이 이민 유형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에 제 4 장에는 초창기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탄생과 이후 반세기 동안 동포사회의 인구변화 과정에 관해 기록한다.

4.1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탄생

퀘벡 땅을 밟은 최초의 한인은 김형기 씨로 전해진다. 그는 1949 년에 유학 차 몬트리올에 잠시 머물렀으며 이후 뉴브런즈윅 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5 년 후인 1954 년에 정희수 박사가 퀘벡 주에 왔다. 정 박사는 라발 대학에 유학했으며 토론토 대학을 거쳐 1972 년에 퀘벡 주립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임용되었고 지금도 몬트리올에 거주중인 퀘벡 땅에서 가장 오래 산 한민족 동포다. 정영선(메리) 여사는 캐나다 시민권을 획득한 최초의 우리 동포로 알려져 있다. 1993 년 발간된 장윤천 교장의 몬트리올 교민편람에는 정 여사가 1955 년에 퀘벡 주로 이민왔고 1957 년 4 월 17 일에 한인 최초로 캐나다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 년 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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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년에는 김광만 씨와 이상만 씨가 매길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몬트리올로 이주해왔다. 또한 초창기 이민자들 중에는 이백화 여사도 있다. 이 여사는 결혼 초청으로 입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입국 연도 등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렇게 해서 1959 년도에는 몬트리올에 동포 수가 10-20 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동포 친목회도 이때부터 조직되어 김광만 씨가 최초의 회장직을 맡은 이래 1964 년 말까지 계속 수고했다. 1960 년대에 접어들어 동포 수가 대폭적으로 늘어나 1965 년 초에는 퀘벡 거주 동포의 수가 300 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1965 년 1 월 10 일에는 한인연합교회(로이심 목사)가 창립예배를 열어 캐나다 최초의 동포 종교단체도 탄생했다. 이에 따라 오타와 주재 한국 대사관(김용식 2 대 캐나다 대사 겸 UN 대사)에서도 당시 캐나다 내에서 가장 많은 동포들이 모여 살고 있는 몬트리올에 정식으로 한인회를 조직할 것을 권유했다. 이를 계기로 그때까지 친목회 형태로 존재해 오던 모임을 강화하여 한인회가 정식으로 발족되었으며 초대 회장으로 박한웅 씨가 피선되었다(1965.2.21). 퀘벡 한민족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같은 해 8 월 캐나다에 한국 대사관이 공식 창설되었고 백선엽 씨가 3 대 대사로 부임했으며 초대 KOTRA 무역관장에는 유병일 씨가 임명되었다(1966.1.28). 1967 년 봄 세계 무역박람회가 5 개월의 일정으로 시작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특사(최두선)를 엑스포에 파견하여 참여한 한국 기업들과 동포들을 격려했는데 그 무렵 정메리 여사가 동포 최초로 무역업을 시작했다(1967.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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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4.2 한국계 이민의 유입

1970 년 이전 퀘벡의 동포들 중에는 대학교수, 의사, 엔지니어 등 전문직종 종사자가 많았다. 1967 년 여름에는 원예가 양재홍 씨가 몬트리올 시립 식물원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최봉암 씨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그리고 정재만 씨는 퀘벡에어에서 근무했다. 같은 해에 정희수 박사는 캐나다 연방정부의 주택 자문이 되었고 1972 년에는 퀘벡 주립대학의 정교수로 부임했으며 1974 년에는 연방정부의 경제 자문에 임명되었다. 김처중 씨는 1974 년에 선박 검사관이 되었다. 오기송 박사는 콩코디아 대학에서(1968) 정치학 강의를, 그리고 정영섭 박사는 몬트리올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1970). 황필준 박사는 치과(1968)를, 이숙경 씨는 소아과(1974)를 개업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이들 대부분의 신분(Civil Status)은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이기보다는 전문직종 취업인, 유학생 등의 일시 체류자 성격이었으므로 이들을 정식 이민자로 간주함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캐나다 연방의 이민법이 개정되어 아시아계에게도 이민 문호가 열린 1967 년 이후에 정식 이민 수속 절차를 거쳐서 1970 년을 전후해서 입국한 동포들을 ‘한국계 퀘벡 이민의 초기 세대’라고 말 할 수 있다.

첫 번째 이민 유형 – 취업이민

1978 년도에 몬트리올 한인회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154 가구 중에서 89.6%인 138 가구가 1968 년 이후에 입국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취업이민 (또는 가족 이민자)들이었으며 이민문호 개방의 물결을 타고 입국한 첫 번째 유형의 한국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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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취업이민자들이었다. 이들로 인해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규모가 급격하게 팽창되었다. 한인회의 모임이나 동포사회에 나타나지 않았던 동포들도 상당수 있었다는 몇몇 노인들의 증언을 감안하면 1970 년대 후반 당시 퀘벡에 거주했던 동포들의 수는 약 1 천여 명 (220 – 270 세대)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캐나다 연방 이민정책 변화의 수혜자들 중에는 서독에서 광업 분야에 종사했던 동포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취업이민으로 입국해서 대부분 식료품점 분야에서 열심히 일했다. 당시 동포들은 주 90~110 시간, 연중 무휴의 고된 일을 감내했다. 동포들의 이 같은 근면함을 현지기업들이 인정했고 당시 대표적인 식품연쇄점이었던 뻬렛 데이리(Perrette Dairy)는 자사가 운영하던 몬트리올 지역의 200 여 개 점포 중 30% 이상을 한국계 이민자들이 관리하게 했다. 윤인희 씨와 윤우영 씨가 그 대표적인 동포들로서 그들은 장기간 착실하게 뻬렛에서 근무했으며 본사의 인정을 받아 이후 동포들이 뻬렛의 매장 관리자로 진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표 4-1> 퀘벡 거주 한국계 이민자의 입국 연도 분포 이민년도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6

1967

1968

가구수

1

0

0

2

0

3

2

2

6

4

비율%

0.6

0

0

1.3

0

2

1.3

1.3

3.9

2.6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2

6

9

10

19

24

33

10

7

4

154

7.8

3.9

5.8

6.5

12.3

15.6

21.4

6.5

4.5

2.6

99.9

자료: 몬트리올 한인회 (1978 년도 설문조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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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당시 퀘벡 주 최대도시인 몬트리올 이외의 지역에 거주한 동포들은 극소수였으며 퀘벡 시에 6-7 가구와 셔브루크에 2 가구 정도가 살았다. <표 4-1>을 보면 1978 년 78.9%에 해당하는 123 세대가 1967 년에서 1975 년 사이의 9 년 동안에 이주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세대수가 이주해온 것은 1975 년도의 33 세대로 21.4%이며 그 다음이 1974 년도의 24 세대로 15.6%이다. 1975 년을 정점으로 해서 절정을 이루었던 입국자 수는 1976 년으로 접어들면서 6.5%(10 명)로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1977 년에 4.5%(7 명), 1978 년에는 2.6%(4 명)로 계속 내리막길을 달렸다.

두 번째 이민 유형 – 투자 이민

이민법 개정에 따라 봇물이 터지듯 밀려들었던 가족초청 이민자들과 취업 이민자들의 입이민 열기는 10 여 년 만에 식었고 이후 몇 년 동안은 동포인구 유입의 소강기였다.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2 차 팽창기는 1980 년대 중반에 찾아왔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88 올림픽 유치, 그리고 캐나다 연방 및 퀘벡의 이민정책 변화는 한국으로부터 기업투자 이민자들의 대거 유입을 촉진시켰다. 이들 투자 이민자들은 일정액 이상의 사업자금을 가지고 입국해야 했으며 퀘벡 주 안에서 수년 내에 사업을 시작하고 고용을 창출해야만 하는 조건부 영주권을 받았다. 이들은 가지고 온 자금을 바탕으로 소매 유통업과 요식업 등에 진출했고 퀘벡 한인 실업인 협회를 만들어서 공동이익을 도모했다. 1990 년대에 동포 경영 편의점(Dépanneur)의 수는 200 여 개에 달했다. 두 번째 유형의 한국계 투자 이민자들이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경제기반을 이룩한 것이다. 1993 년 7 월 몬트리올 한인회가 발간한 정보서(퀘벡 이민생활에 필요한 정보 - 정희수/임성숙 공저)는 당시 퀘벡 주에 거주했던 동포들의 수를 약 3 천 명(1992 년도 정부통계자료 인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투자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인해 15 년 만에 퀘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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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한민족 공동체의 규모가 3 배로 증가한 것이다. 당시 설문응답자의 60%가 1986 년 이후에 이주했다고 답했고 그중에 55%가 투자 이민자였으며 가족초청 이민자는 21%, 나머지는 단독 이민자(14%) 및 기타(10%)였다. 투자 이민자들의 대거 유입 사실은 2001 년도 퀘벡 정부의 통계 자료에도 잘 나타나 있다. <표 4-2>를 살펴보면 2001 년도 퀘벡 거주 한국계 이민자 1 세 및 1.5 세(총 3,130 명)중에서 84.7%(2650 명)가 1981 년 이후에 퀘벡에 입국했다. 이들의 대다수는 1988 년 한국 올림픽 직전인 1986 년 이후 약 10 년 사이에 태평양을 건너온 투자 이민자들이었다. 투자 이민자들의 입이민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표 4-2 > 퀘벡 거주 동포의 분포 1. 한국계 이민자(1 세 및 1.5 세)

단위(명)

1971 년 이전 이민자

85

1971-1980 년 이민자

395

1981-1990 년 이민자

1,300

1991-1995 년 이민자

570

1996-2001 년 이민자

780

한국계 이민자 소계

3,130

2. 캐나다 출생자

840

3. 비상주 동포

490

퀘벡 주 거주 동포수 합계

4,479

자료: 퀘벡 이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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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세 번째 이민 유형 – 전문인력 이민 (독립 이민)

아래의 정부 통계자료들은 1996 년 이후 퀘벡에 유입된 한국계 이민자 수를 연도별로 나타내고 있다. 이들 중에는 투자 이민자도 있지만 전문인력 이민자들이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2000 년대의 퀘벡 동포사회의 주요 구성원은 이들 세 번째 유형의 전문인력 이민자들이었고 그들의 주도로 한민족 동포 공동체가 발전되고 있다. <표 4-3> 퀘벡 주 한국계 이민 추이 CSQ 발급연도

한국계 이민자 수

1996

334

1997

554

1998

663

1999

983

2000

715

2001

646

2002

565

2003

246

2004

234

2005

272

2006

329

2007

177

2008

204

자료: 퀘벡 이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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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한국에서 다양한 직장경력을 쌓았거나 혹은 첨단분야의 기술이 있으며 자본과 사업경험이 있는 이들은 정착 초기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첫째(취업)와 둘째(투자) 유형의 선배 이민자들과는 달리 불어를 먼저 배우고 현지사회를 조심스럽게 파악한 후에 사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편의점, 야채가게, 식당, 화원, 세탁소 등에 한정되었던 종래 동포사회의 업종을 다양, 다각화 시켰다. 또한 대부분이 젊은 30-40 대인 전문인력 이민자들은 타 민족사회와도 다방면으로 교류하면서 퀘벡 주류사회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4.3 퀘벡 동포인구의 변화와 인구증가 저해요인

아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1 년 퀘벡 주 거주 한국계 정식 이민자는 약 6 천 5 백 명이며 이들 중 87%인 약 5 천 7 백 명이 몬트리올에 거주하고 있다. (유학생, 취업비자 발급자 등 일시 체류자들을 모두 포함할 경우 2011 년 말 현재 몬트리올의 한인 동포 수는 7 천명 이상으로 추정됨) 퀘벡 주의 인구가 캐나다 전체인구의 4 분의 1 임을 감안할 때 타주 대비 퀘벡 거주 동포의 숫자는 매우 적다. 이는 한국인들에게 퀘벡이 캐나다의 타주에 비해 이민 정착지로서의 선호도가 낮기 때문이다. 선호도가 낮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이주공사와 이민 답사 가이드 15 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 설문조사(2006 년도 몬트리올 한인회) 결과는 아래와 같다. 왜 한국인들이 이민 정착지로서 퀘벡을 기피하는가? (복수응답) 1) 불어사용 지역이다 (15 명중 15 명) 2) 독립 가능성이 있다 (15 명중 13 명) 3) 사업하기가 어렵다 (15 명중 10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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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4) 날씨가 춥다 (15 명중 7 명)

<표 4-4 > 캐나다 지역별 한국계 이민자 수 지역

2001

2006

2011

2017

Canada

92.3

127.7

161.8

202.4

Quebec

4.0

5.3

6.5

8.0

Ontario

51.4

69.6

87.2

108.6

Alberta

6.9

10.0

13.0

16.4

B.C.

27.0

39.8

51.4

64.9

Montreal

3.4

4.6

5.7

7.0

Toronto

41.1

55.0

68.6

84.4

Vancouver

25.4

35.9

45.8

57.4

Calgary

3.6

5.7

7.7

9.8

Edmonton

2.3

2.9

3.6

4.4

자료: 퀘벡 이민부 (단위 1000 명)

반면에 ‘왜 한국인들이 이민 정착지로서 퀘벡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자녀들에게 영어 외에 다른 언어(불어, 스페인어 등)를 교육시키기 위해서…(15 중 15 명)’ 다음으로 ‘낭만과 예술의 도시인 몬트리올이 좋아서…(15 명중 12 명)’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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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표 4-5> 한국계 이민자 CSQ 발급추이

자료: 퀘벡 이민부

<표 4-5> 에서 보다시피 CSQ(퀘벡 주 거주 허가증)를 발급받은 한인의 수는 1990 년대 후반에 크게 증가하다가 1999 년을 정점으로 급격하게 하락했다. 이 같은 입이민 감소 추세는 퀘벡 주 동포 수의 증가를 가로막는 원인이다. 왜 한국계 이민 희망자들에 대한 퀘벡 정부의 거주 허가증 발급이 줄어들고 있는가? 이는 까다로와진 캐나다 이민정책의 변화 탓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퀘벡 땅에서 잠시동안 살다가 타주로 떠나는 한인 출이민자의 수가 많은 것을 퀘벡 이민부가 주시하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아래 <표 4-6>을 살펴보면 CSQ 를 발급받고 퀘벡 주에 초기 정착한 동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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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중에서 42%가 5 년 내에 퀘벡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표 4-6> 한국계 이민자 유출율 CSQ 발급자 수 (2001-2006)

2,292 명

2006 년 퀘벡 주의 이론적 동포 수

2001 년 동포 수(3,980 명) + CSQ 발급자(2,292 명)=6,272 명

2006 년 퀘벡 주의 실질 동포 수

5,300 명

동기간 퀘벡 주를 떠난 한국계 이민자 수

972 명

한국계 이민자

972 명 / 2,292 명 x 100% = 42%

유출율 자료: 퀘벡 이민부

4.4 퀘벡 동포인구의 증가 전망

퀘벡 동포인구의 증가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엇갈린 전망을 할 수가 있다. 하나는 퀘벡 정부의 시각에 근거한 낙관적인 전망이며, 대별되는 다른 하나는 근래에 발생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이민 관련 변수들에 근거한 비관적인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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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퀘벡 이민부의 통계 자료에 근거한 낙관적 전망

<표 4-4>와 <표 4-7>을 보면 높은 유출율에도 불구하고 퀘벡 주의 동포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퀘벡 정부는 퀘벡 주의 동포 거주자 수가 매년 약 5%씩 증가할 것을 예상하고 있다. 캐나다 내부에서의 동포인구 이동도 예상할 수 있다. 비록 현재까지는 퀘벡 주내로의 유입인구보다 타 주로의 유출인구가 많지만 토론토나 밴쿠버와 비교해서 생활비와 주거비의 격차가 계속 벌어진다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퀘벡 주로 이사오는 동포가 증가할 수 있다. 한편 한국경제가 발전하고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해외 유학생들이 늘어나고 글로벌 시대에 다중언어 구사의 필요성을 느끼는 부모들이 언어 연수를 위해서 자녀들을 북미의 파리인 몬트리올로 보낼 수도 있다.

<표 4-7> 지역별 한국계 이민자 증가율 (2011 년 이후는 추정치) 증가율(%)

2001-2006

2006-2011

2011-2017

Canada

38.0

26.8

25.9

Quebec

29.3

22.6

23.1

Ontario

35.4

25.3

24.1

Alberta

44.9

30.0

26.2

B.C.

47.4

29.1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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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Montreal

35.3

23.9

22.8

Toronto

34.1

24.7

23.0

Vancouver

41.3

27.6

25.3

Calgary

58.3

35.1

27.3

Edmonton

26.1

24.1

22.2

자료: 퀘벡 이민부

따라서 유학생을 포함한 퀘벡 주의 한민족 동포수는 2020 년 이전에 1 만 명을 돌파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만일 시간이 퀘벡의 정치적 불안요인을 제거한다면 인구증가 전망은 더 밝아질 수도 있다.

경제상황에 근거한 비관적 전망

‘이민’의 흐름은 경제상황에 따라 그 방향이 좌우된다. 물론 자녀교육이나 정치적 망명, 전쟁 등 여타 사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국가간의 인구이동은 경제적인 사유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의 외교백서에 따르면 2010 년에 해외이주를 신고한 한국민의 수는 899 명에 불과했다. 한국민의 해외이민은 한국정부가 연도별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62 년(386 명) 이후 꾸준하게 증가하다가 1976 년(4 만 6533 명)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돌아섰다. 1970-1980 년대에 이민자가 가장 많았던 이유는 한국동란 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60 년대를 겪은 동포들 중에서 살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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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찾아 기회 땅 선진국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유의 해외 이주자 수는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고 한국이 경제적으로 부흥하면서 줄어들었다가 IMF 외환위기를 맞아 다시 늘었다. 그러나 한국은 경제위기를 무사히 넘겼고 이제는 세계 10 위권의 경제강국으로 도약했다. 이에 따라 2000 년대 초에 연간 1 만 명 수준을 유지하던 이민자수가 2010 년에는 1,000 명 이하로 급격하게 곤두박질했다. 2003 년(9509 명)부터 2010 년(899 명) 까지 불과 8 년 사이에 90%가 감소한 것이다. 한국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전쟁위협도 사라진다면 앞으로 해외이주를 신고하는 한인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 수도 있다. 2010 년 해외이주 신고자 899 명중에서 퀘벡을 이민정착지로 선택한 사람은 별로 없다. 따라서 2010 년에 퀘벡에 도착한 한인은 유학생과 그 부모들, 그리고 취업비자를 받고 들어 온 사람이 대부분이다. 반면에 타주로의 유출을 억제할 구체적인 대안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만일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현재 5 천 7 백명인 몬트리올의 동포 거주자 수는 2025 년이 되기 전에 4 천명 이하로 줄어들고, 유학생 등 단기 체류자 수는 2 천명 선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지난 10 여 년간 지속적으로 강화된 캐나다의 이민정책과 근래 들어 미주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역이민(逆移民) 조짐도 비관적 전망에 일조하고 있다.

4.5 역이민 (Back to Korea)

2010 년에 한국정부에 영주귀국을 신고한 역이민자는 4 천 31 명이다. 이들 중에 절반 정도가 미국에 살던 동포들이며 그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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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63%는 1970-1980 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갔던 70-80 대의 노인들이다. 이처럼 역이민자들의 대부분은 자녀교육을 마치고 이제는 고국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소위 ‘노후 U-TURN 귀향형’ 이다. 그 다음의 역이민 사유로는 한국 내 취업(17%), 국외생활 부적응(8.8%), 신병치료(4.9%), 이혼(3.2%) 등이 있다. 사실 역이민 현상은 1990 년대에도 있었다. 1990 년 중반에 영주귀국자의 수는 매년 5 천 명 선이었고 IMF 경제위기 직전인 1996 년에는 최고 5,436 명을 기록했다. 어쩌면 이민 붐이 한창이던 30-40 년 전에 떠난 사람들의 일시적인 귀향현상일 수도 있다. 따라서 4 천명 수준인 지금 ‘역이민 바람이 분다’고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계 이민사회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민 1 세들 중에서 한국 내 취업을 사유로 영주 귀국하는 사람들과 국외생활 부적응 사유로 역이민하는 사람들이다. 역이민자 네 명중 한 명(25.8%)에 해당하는 이들의 상당수는 현지사회에서 마땅한 직업이나 사업을 찾지 못해서 할 수 없이 돌아갈 것을 결심한 사람들이다. 사실 생계를 목적으로 한국행을 결심하는 이민자들은 이 보다 훨씬 더 많을 수 있다. 굳이 영주권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역이민이 아니더라도 선거권을 제외하면 주민등록증이나 다름없는 ‘재외동포 국내 거소 신고증’을 발급받고 한국 내에서 쉽게 취업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소 신고증을 소지한 한국 내 취업자들 중 상당수가 미국과 캐나다의 시민권자(혹은 영주권자)다. 몬트리올에서도 이런 방법으로 한국 내 기업에 취업한 동포자녀가 여러 명 있다. 하지만 이들이 한국기업에 잘 적응하고 문화차이와 역이민자에 대한 편견을 잘 극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타 민족사회가 오래전에 이미 겪은 적응과정과 이주역사를 뒤쫓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대계나 이탈리아계도 이 같은 과정을 겪고 현재와 같이 튼튼한 공동체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반세기에 불과한 퀘벡 동포사회의 연약한 경제기반이 수백 년 된 타 민족사회의 그것처럼 갑자기 튼튼하고 크고 넓어질 수는 없다. 우리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먹고 살기 어려워서 기회의 땅으로 떠났던 1970 년대와 반대로 생계유지가 어려워서 ‘2010 년대 기회의 땅, 한국’으로 돌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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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이민자가 증가하는 것을 보고 남의 일처럼 무심할 수 없는 것이 이민선배의 심정이고 책임이다. 먼저 와서 이미 현지사회에 적응한 선배 이민자들이 동포사회의 공동경제 기반강화에 힘쓰고 후배 이민자들을 배려함으로써 생계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역이민을 고민하는 이민 1 세들이 늘어나지 않기를 기대한다. 자녀의 교육비 절감을 위해 계획되었던 역이민과 노후 귀향형 역이민은 신경 쓸 것 없다. 그러나 보장 없는 모험임에도 불구하고 돌아가기를 결심한 생계유지형 역이민과 ‘그래도 떠날 수 있어서 좋겠다’ 며 떠난 자의 결단을 부러워하는 또 다른 부적응자에 대하여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느껴야 할 때다.

4.6 인구증가를 위한 도전과제

2000 년대에 접어들면서 몬트리올 동포사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 여러 가지의 꿈과 계획을 가진 새로운 얼굴들이 유입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이민자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몬트리올에서 미래를 계획하고 성취하며 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다. 캐나다 이민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한 정착지 선호도 설문조사(2006 년도 한인회)에서는 ‘사업하기가 어렵다’ 는 것이 퀘벡 정착을 기피하는 세 번째 이유로 꼽혔었다. 그러나 퀘벡에 정착한 지 수년 내에 그것은 퀘벡을 떠나는 첫 번째 이유로 부상한다. 소위 ‘먹거리’가 없어서 퀘벡 땅을 떠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퀘벡의 정치적 불안요인(독립 가능성)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어쩌면 정치적 불안요인보다 휠씬 더 현실적이고 중요한 퀘벡 동포 인구증가 억제의 요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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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유입과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

2010 년 현재 퀘벡에는 중대형 동포기업이 없다. 거의 대부분의 한민족 동포들이 소규모 자영업종(Self Employee)에 종사하고 있다. 간혹 제법 큰 규모의 식료품점이나 식당, 버거킹, 모텔 등을 경영하는 동포도 있으나 이 역시 대규모 동포기업이라고 보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퀘벡에 유입되는 동포 중에는 중소기업 창업의 꿈을 안고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한 경험이 있거나 경영 중인 동포들이고 기업 창업 계획서를 이민 신청서에 첨부해서 입국 비자를 받았다. 그들 중에서 주방용품 생산 사업을 추진하다가 3 년 만에 꿈을 접고 타주로 이주하는 새 이민자를 만나서 퀘벡을 떠나는 사유를 물었다. 그는 “현지사회 인맥과 다른 한국기업이 없고 사업정보와 동포경제 인프라도 많이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타주 유출과 역이민의 첫 번째 책임은 당사자에게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로 선택했던 퀘벡사회와 한민족사회도 그 책임을 함께 느껴야 한다. ‘현지사회 인맥과 사업정보의 부족’, ‘취약한 동포경제 인프라’ 문제는 개인의 능력을 넘어선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공동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는 8 장(경제생활)과 18 장(퀘벡 한민족사회의 과제)에서 다시 거론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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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제5장


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제5장 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이민자에 따라서 다소 다르게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현지사회의 생활에 잘 적응해서 타민족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이 이민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함에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가 전혀 다른 이국의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것과 언어와 습관, 그리고 가치관이 판이한 민족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다. 현지사회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실망하고 때로는 이민 온 것을 후회도 하지만 결국은 모두 극복해 내고 어느 새 장성한 아이들을 바라다 보며 이민 온 보람을 느끼는 ‘개척자의 삶’이 이민생활이다. 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은 현지사회에 적응해 가는 ‘사회화 과정’ 속에 잘 담겨 있다. 물론 이민자의 연령과 경제능력, 언어능력, 가족상황 등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대부분의 한국계 이민자들이 퀘벡에서 겪는 현지사회 적응과정은 아래의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착해서 생계기반을 구축하고 가정생활이 안정되기까지는 평균 3-5 년이 소요되며, 사업이 자리잡히고 자녀가 성장해서 한시름 놓기까지 다시 5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 과정중에 현지사회에 적응하고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생활에 쫒겨 바쁜 이민자들이 현지사회에 눈을 돌리는 것은 한시름 놓은 이후라고 봄이 옳고 그나마도 현지사회에 관심이 있는 소수에 불과하다. 지금부터 이민 8 년 차 박 씨가 퀘벡 도착에서부터 생계기반을 강화하기까지의 사회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새 이민자들에게는 정착생활에 유용한 정보가 되게 하고 후세에게는 선배들의 고충과 애환, 그리고 보람을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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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공항도착

정착

(약 3-5 년)

자녀학교

생계기반

가족관계

선택

구축

조정

(약 5-10 년)

자녀 취업

생계기반

가정생활

강화

정착

퀘벡사회 적응과 참여

<그림 5-1> 한국계 이민가구의 현지사회 적응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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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5.1 첫째 관문: 초기정착과 언어습득

초기 정착의 어려움

용산에서 전자부품 사업을 하다가 2003 년에 이민을 온 40 대 중반의 박 씨는 이민 비행기를 타기 전날 밤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설레임 반과 두려움 반으로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거리다가 지구 반대편으로 오는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가장으로서 느끼는 책임감 때문일 수도 있었겠으나 몬트리올이 가까워 올수록 짓누르는 부담과 두려움을 가족들에게 애써 감추었다고 고백한다. 그로부터 8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조그마한 편의점을 운영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초기 정착과정에서 겪은 고생을 생각하면 그 누구에게도 이민을 선뜻 권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아이들의 학교 선택에서부터 집 계약, 자동차 임대, 의료보험카드 신청, 면허증 교환, 가게 계약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수많은 순간마다 겪은 어려움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똑같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새 이민자는 박 씨와 비슷한 정착과제에 부닥치게 된다. 주거문제를 비롯해서 생활에 필요한 운전면허증, 사회보험증(Social Insurance Card), 의료보험증 (Medical Insurance Card), 자녀의 학교선택, 은행계좌 개설 및 기타 서류준비 등이 이민초기의 중요정착과제에 해당한다. 이중 크고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이 주거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현지 주택시장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고 언어가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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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주거문제를 혼자 결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민초기에 젊은 이민자들은 임대주택을 선호한다. 그러나 현지 주택시장이나 임대주택법에 대한 지식이 취약한 상태에서 임대횡포의 희생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나친 보증금을 요구하거나 임대계약이 끝나기도 전에 이사를 강요받는 경우도 있고 비현실적으로 높은 임대료와 인종차별 횡포의 희생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정착문제는 혼자서 해결하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이나 정착지원 전문단체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퀘벡 주에는 이민부에서 운영하는 이민정착 지원센터가 많이 있다. 최근에는 이민관이 공항에 상주하며 이민자를 도와주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장벽 때문에 동양계 이민자는 큰 혜택을 받지 못한다. 물론 미리 온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 경우에는 그들의 도움을 받지만, 박 씨를 비롯한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방법은 이민 공동체 내에 있는 단체(특히 종교단체나 한인회)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이들 단체의 연락처는 몬트리올 한인회의 웹 사이트(www.montrealkorean.com) 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인회의 웹사이트에서는 생활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한인회관 사무처에서는 정착 안내 서비스를 하고 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불어 공부’

박 씨 같은 새 이민자가 몬트리올에 도착한 후 퀘벡 주의 공식언어인 불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인회관 사무처를 찾아가서 상담을 받아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몬트리올 한인회관에서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퀘벡 정부가 운영하는 정규 불어학교 초, 중, 고급반이 온종일 열린다. 학생은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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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불어구사 능력에 따라 원하는 시간을 선택해서 수강할 수 있다. 이 같은 정규 불어학교 외에도 한인회관에는 영주권자는 물론이고 일시 체류자(취업비자 소지자, 유학생 및 부모 등)도 수강할 수 있는 문화강좌 불어반과 영어반, 중국어반, 컴퓨터반 등 각종 언어/교양/취미반이 있다. 또한 한글 도서관이 늘 개방되어 있으며 자녀들과 외국인을 위한 한글학교도 운영되고 있다.

5.2 둘째 관문: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는 학교선택

자녀의 학교선택은 신중하게

퀘벡 주에서는 1977 년 제정된 불어헌장에 따라 영어권 국가에서 교육을 받지 않은 부모에게서 출생한 자녀의 영어공립학교 입학을 불허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에서 갓 이민 온 아이들이 퀘벡의 초, 중, 고등 공립학교에 입학을 원할 경우에는 불어공립학교에만 입학이 가능하다. 또한 이 경우 반드시 부모가 거주하는 구역 내에 있는 공립학교에 입학해야 하므로 최초 주거지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간의 선택도 박 씨가 신중해야 할 문제다. 공립 초, 중, 고등학교는 학비가 거의 없는 반면에 학급당 학생 수가 많은 관계로 학생 개개인에 대한 선생님들의 관심과 교육시간 할당이 사립학교에 비해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학생 수가 많은 공립학교에서는 미래의 사회에서 협력자가 될 수 있는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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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향후 퀘벡 사회생활에 중요한 인맥형성 (Networking)을 폭넓게 할 수 있다. 반면에 사립학교에 다닐 경우에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이 우월한 퀘벡의 가정에서 자란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보다 양질의 교육과 선생님들의 관심 속에 대부분 무사히 상급학교에 진학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퀘벡의 학교에도 공립과 사립의 장점과 단점이 있다고 보면 된다.

학교생활의 어려움

학교를 선택한 후에도 자녀의 학교생활에 더 세심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불어(혹은 영어)가 곤란한 부모일수록 자녀의 학교에 자주 가지 않는다. 그러나 통역을 대동해서라도 선생님과 자주 대화하는 용기를 내야 한다. 대부분의 퀘벡 학교에서는 매년 수차례 부모와 교사 간에 대화의 시간(Parent & Teacher Meeting)을 갖는데 성공적인 자녀교육을 위해 이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표 5-1> 한국계 학부모의 학부모-교사 회의 참석도 부(%)

모(%)

조부모(%)

참석 빈 자주 참여

25.7

17.5

6.7

가끔 참여

45.9

46.3

20.0

참여 안 함 28.4 36.3 73.4 자료: 퀘벡 이민생활 정보, 정희수/임성숙 공저(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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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자녀들이 퀘벡의 학교에 입학하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제일 큰 어려움은 역시 언어의 문제다. 한마디 말도 알아 들을 수 없는데 외모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앉아서 당황하는 아이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다행히도 퀘벡 주의 불어학교에는 불어를 쓰지 않는 나라에서 온 학생들을 위한 환영학급(Classe d’accueil, Welcome class)이 있다. 예를 들어 불어가 자유로운 퀘벡 학생들과 불어를 생전 처음 접하는 갓 이민 온 한국계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수학 시험을 치른다고 하자. 한국 학생들에게 어려운 것은 정작 풀어야 할 수학문제가 아니라 ‘그 수학문제 위에 있는 불어’다. 그렇지만 갓 이민 와서 환영학급에 들어간 대부분의 한국계 학생들은 몇 달 내에 우수한 성적으로 정규반으로 옮겨간다. 불어로 쓰여진 수학문제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고 6 개월 내로 불어 대화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똑똑한 한민족의 아이들이므로 입학초기에 겪는 언어소통의 어려움은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박 씨도 그의 자녀를 환영학급에 넣었다. 다음으로 박 씨의 자녀가 겪는 것은 대인관계의 어려움이다. <표 5-1>과 같은 설문조사 자료에 따르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한국계 이민자 자녀 중 30% 정도가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아이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하다고 답했다. 언어소통이 좀 된다고 해서 자녀의 학교생활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의미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문화 충격’ 속에서 학교생활을 한다. 따라서 박 씨는 그의 자녀가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불어권/영어권 아이들과 함께하는 학교 내의 공동생활보다는 방과 후 같은 한국 태생의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다른 문화권에서 이민 온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등 문화충격을 완화시켜주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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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표 5-2> 한국계 자녀들이 느끼는 교내생활 고충지수 (응답자:155 명) 고충형태

고등학교(%)

전문학교 이상(%)

언어장벽

54.7

46.0

영어권 학생과의 관계

27.9

8.3

불어권 학생과의 관계

34.9

15.5

기타 민족 학생과의 관계

23.9

8.3

교사와의 관계

40.5

15.3

자료: 상동

교내활동은 인맥형성을 위해 좋은 기회

한국계 이민자녀들의 학교공동활동 참여도는 매우 낮다. 대신에 그들은 교회 등 종교단체의 활동에 많이 참여한다. 특히 CEGEP 및 대학교 학생들의 경우가 더 그렇다. 그러나 교내 공동생활은 인맥형성을 위해 좋은 기회다. 학창시절의 인맥은 향후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 학교측이 학생들에게 과외활동을 권장하고 그룹 프로젝트를 자주 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박사학위 취득 후에 대학교 교수가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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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과정에서 대학 시절 쌓은 인맥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어떤 한국계 퀘벡대학 교수는 전한다. 학교에서 A+ 받았다고 해서 퀘벡사회에서도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녀의 학교 친구들을 집으로 자주 초청하는 등 학교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마련해 주는 것이 좋다. 부모의 꾸준한 관심과 사랑 속에 시간이 흐르면서 자녀의 대인관계도 좋아진다. 어느 새 한국 유학생과 대화하는 것보다 피부색이 다른 학교 친구를 만나는 것을 선호하는 자녀를 보게 된다.

<표 5-3> 퀘벡 한민족 이민자녀의 교내활동 참여도 (응답자:146 명) 교내 활동

고등학교(%)

세젭/대학교(%)

스포츠 활동

33.7

18.0

문화 활동

16.5

11.5

사회 활동 자료: 상동

20.0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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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5.3 셋째 관문: 이민의 성패를 좌우하는 생계기반 구축

초기 이민자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생계기반을 조성하는 일이다. 또한 사업이나 취업 등 생계기반을 결정하는 일은 이민생활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할 수도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이에 퀘벡 이민부는 생계기반을 결정하기 전에 반드시 퀘벡의 직업변화 추세와 능력에 맞는 분야에 관한 조사를 하고 재교육의 필요성도 검토해서 기술학교나 대학으로의 편입도 고려할 것을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권한다.

퀘벡 동포의 직업변화 추세

이민 반세기를 지나면서 퀘벡 동포들의 직업분포에도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1993 년도의 직업조사 결과를 보면 74.4 %가 자영업주라고 밝혔다. 취업해서 현지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나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의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당시 조사된 기업의 유형을 분석해 보면 응답자 75 명 중 58.9%가 편의점(데파노), 5.3%가 꽃집, 6.7%가 구둣방, 4%가 세탁소, 사진관 2.7%, 1.3%가 식당, 나머지 21.3%가 기타 사업이었다. 그러나 2006 년도의 통계자료(표 5-4)를 보면 1990 년대 후반 이후 퀘벡 동포들의 직업이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990 년대 중반 이후 젊은 독립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자영업의 종류가 매우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캐나다 이민 문호가 개방된 직후인 1970-80 년대에 이주한 이민자들의 자녀(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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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1.5 세) 및 퀘벡 태생의 자녀(이민 2 세)들이 현지 회사에 취업하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표 5-4> 퀘벡 동포의 직업변화 추세 직 업

여(%)

남(%)

평균(%)

2001

2006

2001

2006

2001

2006

경영자

26.5

15.1

29.5

28.1

28.0

21.6

금융/행정

11.1

13.9

13.2

10.8

12.2

12.4

자연과학 응용과학

6.3

4.2

13.2

10.8

9.8

7.5

보건

3.2

0.0

3.2

0.0

3.2

0.0

사회과학 교사 공무원

7.4

13.9

9.5

12.4

8.5

13.2

예능 스포츠

3.2

10.0

6.4

3.2

4.8

6.6

판매 서비스

37.0

35.9

24.2

23.8

30.6

29.9

교통/장비

0.0

1.2

0.0

7.0

0.0

4.1

제조/기술

2.6

1.5

3.7

4.3

3.2

2.9

기 타

2.6

4.2

3.7

2.2

3.2

3.2

응답자(명)

945

1295

950

925

1895

2220

자료 출처:퀘벡 이민부 (MICC,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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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취업률의 증가는 자영업 비율의 감소를 의미하며 이는 다시 경영직 비율의 감소(28.0%  21.6%)로 이어진다. 또한 자연과학 및 응용과학 분야의 직업은 다소 줄어든 반면에(9.8%  7.5%) 사회과학 분야 및 교사와 공무원의 비율은 급증했다(8.5%  13.2%). 이는 퀘벡 동포 1 세들이 자연과학과 관련된 직업보다는 사회과학 분야, 특히 교사나 공무원을 자녀들의 안정된 직업으로 선호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사회과학과 관련된 직업이 급증한 현상은 1.5 세 및 2 세들이 언어장벽 문제가 다소 덜 심한 자연과학 분야를 선호한다라는 전체 이민사회의 보편적인 견해에서 벗어나는 다소 놀라운 현상이다.

사전 취업준비

캐나다의 로열은행(RBC)이 아시아계 이민자 6 백여 명을 대상으로 2011 년도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이들 이민 1 세 중 절반 이상이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혹은 전문분야가 아닌)일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출신국가에서 하지 않았던 분야에서 일하고 있거나 출신국가에서 했던 일보다 못한 일을 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직업 불만의 책임을 캐나다 정부와 퀘벡 정부에만 물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서는 말한다. 즉 이민 오기 전에 캐나다의 취업시장을 면밀하게 분석해서 자신의 기술과 능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을 사전에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영어나 불어를 못하는 사람에게 ‘입국 전에 퀘벡 취업시장을 조사하라’는 조언은 사실 현실성이 없다. 거의 불가능한 조언에 가깝다. 불어를 못하는 한국계 새 이민자가 그것도 한국에서 어떻게 퀘벡의 취업시장을 조사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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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이민자에게 있어서 현지 언어인 장벽이고 언어장벽은 곧 취업장벽이다.

불어는

거대한

제 3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몬트리올은 북미의 유럽 같은 관광, 예술의 도시이면서 첨단산업과 지식산업이 함께 있는 곳이다. 한국에서 항공, 철도차량, 유전, IT, 컴퓨터 게임 분야의 경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언어능력만 보강하면 분명히 일자리가 있다. 한국에서 아무리 첨단/지식 분야의 훌륭한 경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언어(불어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영어 대화는 자연스러울 정도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몬트리올의 취업시장은 바늘구멍이다.

취업을 위한 ‘재교육’

생계유지 수단으로 자영업이 아닌 취업을 선호하는 한국계 이민자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은 취업을 위한 ‘재교육을 받아라’ 일 수도 있다. 근래 들어 40 대 후반 이민자 중에 기술교육을 받고 취업한 사람이 있다. 한국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컴퓨터 분야에서 일하다가 이민을 왔는데 불어를 2 년 배운 후에 기술학교(Adult School)에 입학해서 1 년 반 동안 냉동기술을 교육받았다. 졸업 후 기술학교에서 취업을 알선해주었음은 물론이다. 퀘벡에 이민 와서 그가 택했던 생계유지 방안은 편의점이었다. 그러나 2 년 만에 편의점을 팔고 그 돈으로 아담한 개인주택을 마련한 뒤에 성인학교(Adult School)에 등록했다. 2 년을 기다린 후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아담한 매장도 냈고 주중에는 냉동회사에 다닌다. 생계기반은 물론이고 노후의 경제생활도 보장이 된 셈이다. 이주사 편찬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취업으로 고민하는 후배 이민자들에게 자신처럼 재교육을 받아 보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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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영어 교육청이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emsb.qc.ca)에서는 회계, 전기, 목공직 등 다양한 코스의 재교육 프로그램을 안내하고 있다. 성인학교에 입학한 학생에게는 교육을 받는 동안에 생활 보조금도 지급된다. 직업 차별이 없는 퀘벡에서 전문분야의 기술 자격증은 가족의 생계를 확실하게 보장한다. 대학에 다시 가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 영주권자인 경우 퀘벡 주의 대학 등록금은 비싸지 않다는 것을 3 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한편, 취업시장에는 아시아계나 흑인계 같은 가시적 소수민족에 대한 인종차별이 있다. 퀘벡에서 회사에 취직하려면 직장 내에서 겪는 이런 인종차별도 각오해야 한다.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 테레사 교수는 온주 정부에 제출한 연구 보고서에서 “이민 1 세와 1.5 세가 취업시장에서 경험하는 인종차별을 2 세 일부(특히 가시적 소수민족 출신)도 경험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사업 선택 시 고려사항

4 인 가족의 생계기반으로 박 씨는 소매업(편의점)을 선택했다. 입국 초기에 박 씨는 한국 용산의 전자상가에서 전자부품 판매사업을 하던 경험을 살려서 도매업(부품 수입 후 재판매)을 고려했다. 그러나 중국계 기업들과의 가격 경쟁력을 조사해 본 결과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6 년 전 박 씨가 편의점을 구입할 때 ‘성장 가능성을 상세히 검토해보고 사라’는 조언을 이민 세월이 지긋한 어떤 사람한테 받았다. 사실 비즈니스를 계약하거나 창업하면서 성장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용산에서 전자부품 사업을 했던 박 씨에게는 더욱 당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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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편의점 경험이 전혀 없었던 이민 초기였기에 그 조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음을 박 씨는 몇 년이 지난 후에 깨달았다. 작년부터 박 씨는 그의 편의점을 ‘수익성 높고 성장 가능성도 많은 사업장(Shop in Shop)’으로 서서히 변화시켜 가고 있다. 2 천 평방 피트(약 70 평)인 편의점을 고전적인 분위기로 깨끗하게 단장한 박 씨는 주력인 식료품 섹션 외에 선물 섹션, DVD/CD/GAME, 잡지 섹션, 화분 섹션, 패스트푸드 섹션 등을 아담하게 꾸며놓아 특히 주말이면 자녀들과 함께 찾는 고객들로 분주하다. 박 씨의 다음 계획은 매장의 지하 약 50 평을 종합놀이 공간으로 만들어서 상호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박 씨는 현재의 사업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비록 용산의 전자부품 매장보다 매출이나 규모도 작고 정규직원도 없는 가족 사업체지만 스트레스가 거의 없고 가족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에 크게 만족하고 산다. 하지만 퀘벡 한민족 이민사회에서 자신의 사업에 만족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다. 따라서 새 이민자들이 사업을 검토할 때는 성장 가능성과 함께 ‘사업 만족도’ 역시 중요한 결정요소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퀘벡 한민족 사회의 산업구조 변화

퀘벡 이민부에 따르면 2000 년대 초 퀘벡 한민족 사회의 산업구조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가장 뚜렷하게 변화한 산업은 소매산업(응답자의 37.7%  27.7%)과 숙박/식당산업(응답자의 10.8%  16.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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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2000 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계 이민자가 경영하는 편의점(데파노)과 야채가게, 꽃집 등은 현격하게 줄어드는 반면 한식당과 일식당, 샌드위치샵 등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말하고 있다. 박 씨와 같이 가족의 생계수단으로 개인사업을 검토 중인 새 이민자에게는 2001-2006 기간 동안 일어난 산업구조 변화에 관한 정보가 좋은 참고가 될 수 있겠다. 한편 동기간(2001-2006)중에 몬트리올의 한민족 영주권자의 수는 35.3% (약 3,400 명  약 4,600 명) 증가했다. 식당 수의 증가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증가율은 곧 둔화될 전망이다(2006-2011 기간 중 23.9% 증가, 2011-2017 기간 중 22.8% 증가 예상, 퀘벡 이민부). 동포들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업종을 고려 중인 이민자들은 동포 인구 증가율을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2001 년부터 2006 년까지 5 년 동안 퀘벡 한민족 공동체는 타민족 공동체에 비해 산업의 다양화 및 다각화에 다소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진출하는 것이 한민족 공동체의 향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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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5-5> 퀘벡 한민족 사회의 산업구조 변화 산 업

여(%)

남(%)

평균(%)

2001

2006

2001

2006

2001

2006

제조

8.5

4.6

8.9

8.4

8.4

6.1

도매

0.0

1.9

0.0

5.4

0.0

3.4

소매

40.2

29.0

35.3

25.9

37.7

27.7

정보 문화

3.2

2.3

4.7

2.7

3.7

2.5

금융 보험

5.3

13.5

7.4

13.0

6.1

13.3

교육

4.8

9.3

2.4

7.6

6.3

8.8

보건

4.2

9.3

4.2

1.6

4.2

6.1

예술 오락

2.1

2.3

3.7

2.2

2.9

2.3

숙박 식당

11.6

17.8

9.5

14.1

10.8

16.2

공공행정

3.2

2.3

3.2

3.2

3.2

2.7

기타 서비스

5.8

6.2

4.7

7.6

5.5

6.8

기타산업

11.1

1.5

11.1

8.1

11.1

4.3

응답자 수(명)

945

1295

950

925

1895

2220

자료 출처: 퀘벡 이민부 (MICC,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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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넷째 관문:

행복한 이민생활을 위한 가정생활의 정착

반세기가 흐르면서 퀘벡 동포사회에는 새로운 가족관계와 가정생활 형태가 정착되고 있다. 그러나 이민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간의 가족관계는 한국에서와는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이민가정에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변했고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하는 자녀와 부모간의 상호이해가 좀 더 필요해졌다.

남편과 부인의 역할 변화 및 비중의 조정

박 씨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이민 오기전 한국에서 그의 아내는 남편이 용산매장에 있는 동안 집에서 살림만 했다. 박 씨는 아침 6 시경에 일어나 교통 지옥 속에 출근해서 거의 매일 12 시를 넘겨서 만취해 들어왔고 아내는 아이들이 잠든 아파트를 TV 앞에서 지켰다. 그러나 지금 박 씨는 아침 7 시에 일어나 1 시간 동안 산책을 한 후 뒤뜰에서 가족과 식사를 한다. 그리고 10 분 운전 거리의 사업장에 9 시까지 가서 저녁 8 시가 되면 어김없이 집에 돌아온다. 이민 온 이후로 박 씨의 일상생활이 매우 규칙적이고 건강하며 가정적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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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씨 아내의 일상도 바뀌었다. 그녀는 한국에서와는 달리 남편의 사업장에 매일 나간다. 남편이 출근한 후에 인터넷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는 등 개인시간을 가지다가 12 시가 되면 남편의 점심을 준비해서 자신의 자동차를 타고 편의점에 간다. 남편이 식사를 하는 동안 그녀는 남편의 사업장 일을 돕는다. 3-4 시간 후에 집에 돌아와서 주방일과 청소, 세탁, 쇼핑 등 주부로서의 일을 하다 보면 박 씨가 퇴근한다. 즉, 박 씨의 이민가정에서 아내의 역할이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요즘은 한국에서도 맞벌이 부부가 많지만 그렇지 않았던 박 씨 가정의 경우에는 커다란 변화다. 그런데 이같이 부부의 역할이 갑자기 조정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민가정도 있다. 1993 년도에 조사된 가족관계 설문에 응답한 81 명 가운데에는 남편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부인이 다섯 명 중에 한 명꼴로 있어서 주목을 끌었다. 이는 한국에서는 남편이 밖에 나가서 하는 일을 몰랐던 부인이 지금은 매장에서 함께 일하면서 남편의 부정적인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반면에 남편의 부인에 대한 평가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었다. 남편에 대한 부인의 부정적인 평가는 이민가정 생활의 안정적인 정착을 크게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세대갈등의 해법은 상호 가치관의 ‘존중과 이해’

행복한 이민 가정생활의 정착을 위해 중요시해야 할 가족관계 중 다른 하나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다. 두 세대 간에 서로 다른 주장이 대립될 때 우리는 흔히 ‘세대차이가 있다’라고 한다. 특히 부모세대와 자녀세대 간에 의견이나 가치관의 차이가 부정적으로 발전하면 ‘부모-자녀 간의 세대갈등’이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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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자녀 간의 세대갈등은 물론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도 있다. 하지만 이민사회의 세대갈등은 좀 다르고 다소 복잡하다. 1993 년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퀘벡 동포 이민사회에서 한국계 자녀가 느끼는 부모와의 관계는 별로 긍정적이지 못하다.

<표 5-6> 자녀의 시각에서 본 부모와 자녀의 관계 (응답자:145 명)

부모와 관계가 좋다 부모가 자녀를 이해한다

고등학교 자녀(%)

세젭이상(%)

53.1

41.9

40.9

42.4

자료: 퀘벡 이민생활 정보, 정희수/임성숙 공저(1993)

청소년들의 생애주기는 부모와의 관계 측면에서 본다면 3 단계 중에서 제 2 단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유아 단계, 자신들의 자주성을 찾는 사춘기 단계, 그리고 성인 단계가 바로 이러한 단계다.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단계는 사춘기 이전 단계이며 자녀들은 부모들의 가치관 속에서 살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부모와의 갈등이 별로 없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자녀가 20 세를 넘는 성인이 된 단계에서는 부모와의 갈등이 해소되거나 아니면 갈등이 잠재된 상태에서 외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문제는 제 2 단계인 사춘기 단계다. 사춘기 단계는 자녀가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정체성, 즉 자아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기간이다. 자녀들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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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확립은 두 개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는 부모의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녀는 언어표현 및 행동으로 부모의 가치관을 거부하려고 한다. 또 하나는 연령이 유사한 친구들의 가치관을 모방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부모의 가치관보다는 친구들의 가치관이 더 중요하게 보인다. 결과적으로 자녀는 부모와의 문화적인 거리를 더 두고 친구들의 가치관에 더 가까이 가고자 한다. 사춘기 단계의 자녀-부모 갈등은 자녀의 성장과정에서 불가피하다. 이 갈등은 결국 부모의 가치관과 자녀의 가치관 사이의 격차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가치관 차이가 클수록 갈등은 더 심해진다. 문제는 이민 부모-자녀 간의 갈등이 비 이민 부모-자녀 갈등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에 있다. 그 이유는 자녀들의 성장과정에서 오는 갈등뿐만 아니라 이민에 기인한 문화적 갈등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즉 이민 부모-자녀 갈등은 자녀들의 성장 갈등과 부모들의 현지문화 갈등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지만 사춘기의 자녀-부모 갈등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성인이 됨에 따라 잠잠해진다. 사춘기 단계는 부모자녀관계를 성숙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갈등 해소를 통해 부모와 자식 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민 부모-자녀 갈등이 해소되지 않을 경우 부모-자녀 관계의 정상화는 물론 어려워지고 자녀가 탈선할 가능성도 있다. 이민사회에서의 자녀탈선은 한국에서의 그것에 비해 더 위험할 수 있다. 행복한 가정생활에 금이 가고 이민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세대간의 갈등에 관한 연구자료 (Lee Jee Souk, Intergenerational Conflicts, Ethnic Identity and Their Influence on Problem behavior Among Korean-American Adolescents, 2004)는 동포 이민자녀들 시각에 비친 부모들의 가치관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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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이민 자녀의 시각에 비친 한국계 부모의 가치관 -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본다

-

자녀는 무조건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부모들은 자녀들을 자신들의 소유물로 여긴다

-

자녀의 학업 및 직업 선택을 부모가 하려고 한다

-

자녀는 가족 공동체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부모의 가치관은 북미의 가치관과 정반대다. 퀘벡을 포함한 북미에서 가족에 대한 가치관의 핵심은 ‘개개인’이지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아니다. 북미인들은 ‘개개인이 행복해야 가족도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복지 극대화가 공동체 복지의 최대화라고 본다. 그런데 한국계 이민 부모의 생각(가치관)은 ‘가족의 복지를 최대화하면 개인의 복지도 향상된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계 부모는 ‘가족이 잘되어야 개인도 잘된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소 심각성의 차이는 있지만 북미 문화권에서 성장한 이민 자녀 1.5 세와 2 세들은 한국의 그 또래들도 겪는 성장 갈등 외에도 그들의 가정에서 1 세 부모와 이같은 문화 갈등도 견디고 산다. 문화적 갈등이 심한 이민가정에서는 심각한 세대갈등이 빚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민 부모-자녀 간의 세대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사실 이민 부모와 자녀 간의 가치관 격차를 완전히 해소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도 박 씨는 이 문제를 잘 극복했다. 박 씨와 그의 가족이 가치관의 격차를 해소한 방법은 실천은 어려웠지만 간단했다. 박 씨와 그의 아내는 아이들의 퀘벡 가치관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의 한국적인 가치관을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지난 6 년 동안 이렇게 상대 세대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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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노력한 결과 지금은 자녀들과 크게 의견 충돌을 일으키거나 갈등을 겪는 일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퀘벡의 이민 자녀들은 북미의 가치관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퀘벡의 교육제도 안에서 교육받음으로써 퀘벡과 북미의 문화를 접하게 되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이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이 점을 이해하고 가치관의 차이로 고민하는 자녀를 감싸 안아야 한다. 한편, 이민 자녀가 명심해야 할 것들은 부모의 가치관을 진심으로 존중해드리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더불어 가시적 소수인종으로서 통합적인 정체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제 7 장 참조).

한국계 캐나다인으로서의 ‘통합 정체성’

퀘벡의 백인들(오랜 이주역사를 가진 프랑스계와 영국계, 혹은 유대계 퀘벡인을 지칭함)은 유색민족을 완전한 퀘벡 사회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퀘벡 이민사회에 인종차별이 있다는 의미다. 따지고 보면 자신들도 조금 먼저 이주해 온 이민자(혹은 정복자) 신분이면서도 마치 퀘벡 땅의 원래 주인행세를 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보호막을 친다. 동포 2 세, 3 세가 아무리 퀘벡문화에 완벽하게 적응하더라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이 백인들의 눈에 비치는 것은 그저 노란색 피부를 가진 동양인뿐이다. 따라서 자신이 한민족의 후손임을 잊고 살다가, 또는 어쩌면 자신의 뿌리는 기억하고 살다가 이같은 인종차별을 당할 경우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없으면 정체성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자신은 캐나다인, 퀘벡인이라고 늘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이런 차별을 당할 경우에 ‘나는 자랑스런 한민족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이 든든하게 받쳐주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치가 흔들리고 혼돈에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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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반대로 동포 2 세, 3 세가 한국에 갔을 때도 비슷한 혼란을 겪을 수 있다. 비록 자신이 한국말을 하는 한민족이기는 하지만 한국문화 속에서 생활하는 ‘한국 사람들과 다르다’라는 것을 느낄 때 정신적인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한국과 퀘벡 양쪽에서 이런 충격을 받는 최악의 경우 자녀들은 설 곳도, 갈 곳도, 기댈 곳도 없고 소속감도 못 느끼는 암담한 순간을 맞을 수가 있다. 이때 통합적인 정체성이 그들에게 커다란 버팀목이 될 수 있다. ‘나는 한국계 캐나다인이다’라는 통합 정체성을 갖추고 양쪽 자긍심에 의지하면서 이민사회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교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설문조사 결과 불행하게도 이민 자녀들이 느끼는 한국에 대한 평가는 별로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동안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알려진 한국 지도층의 부패, 심각한 빈부격차, 개인의 개성을 억제하는 사회풍토, 부모와 교사들의 권위주의 등은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라고 부모가 그들에게 말해 주기에는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 요소다. 반면에 대한민국이 이룬 경제 기적과 세계 제일의 교육열, 가족의 끈끈한 연대감, 효도,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 친구와의 깊은 우정, 특히 근래에 동남아를 넘어 유럽까지 (어쩌면 이미 퀘벡에도) 진출한 한류 문화 등은 우리 자녀들이 뿌듯해하고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한 모국의 소중한 가치이다. 부모가 직접 한민족 공동체와 퀘벡 현지사회에 참여하면서 자녀에게 이런 사실을 직접 알려주는 것도 세대갈등을 예방하고 인종차별 충격에 대비하는 좋은 교육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식 생활 습관부터 먼저 바꾸는 게 좋다. 퀘벡사회의 공동생활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자세로는 자녀들로부터 존중받기 어렵고 자녀와의 갈등 해소도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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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충과 보람

5.5 퀘벡사회 적응과 참여

현지사회화, 다시 말해서 퀘벡사회에 적응한다는 것은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을 유지하면서 퀘벡사회 생활에 필요한 통합 정체성을 갖추고 소외감 없이 동등한 퀘벡인(캐나다인)으로서 행복한 삶을 당당하게 즐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화에는 책임도 따른다. 즉 한국계 퀘벡인으로서 퀘벡사회에서 행복을 누리고 당당하게 살아가려면 퀘벡사회에 참여해서 사회적인 책임도 함께 나누어 져야 한다. 물론 이민초기에 현지사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낯선 땅에 와서 정착하기 위해서는 생계를 위해 극복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5 년이 지나가고 어쩌면 10 년 세월이 지나서 자녀들이 성장하고 생계기반도 어느 정도 잡히고 생활의 여유가 생길 즈음이면 눈을 들어 내 가정이 속해 있는 한민족 공동체와 그 너머에 있는 현지 퀘벡사회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약 7 천 명이 거주하는 2010 년대의 퀘벡 한민족 사회에는 이미 많은 가구가 성공적으로 정착해서 잘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많은 1 세 이민자들이 현지사회에 참여하기를 꺼려하고 한국인과 한국계 캐나다(퀘벡)인 사이에 그어진 선을 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현지사회화 과정에 의하면 정착단계에 진입해서 자녀교육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가정생활과 생계기반이 안정되면 적응단계에 들어서는 것이 다음 순서다. 일단 퀘벡사회에 적응하기 시작하면 현지사회에서 발생하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일상에 관심을 갖게 되고 현지 신문이나 방송을 보게 되고 결국은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참여는 사회적 책임을 나누어 짊어지는 것이 되고 책임은 퀘벡인으로서의 자긍심과 또 다른 정체성을 낳는다. 드디어 퀘벡사회의 일부분인 한국계 캐나다(퀘벡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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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회의 설립과 발전 제6장


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과 발전

제6장 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과 발전

몬트리올 한인회는 퀘벡 주에 한민족 동포의 발자취가 남겨지기 시작한 이후 몇 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몬트리올 동포사회에 전해지는 오랜 기록들과 인터뷰 자료 등을 토대로 현 한인회의 모체인 한인 친목모임의 결성과 한인회로의 재편, 사단법인체로의 등록, 친목활동의 강화와 변화의 진통, 그리고 퀘벡 현지사회로의 진출 노력으로 이어지는 몬트리올 한인회 발전의 역사를 정리하여 제 6 장에 기록한다. 또한 상이한 가치관들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7 천 여명 한민족의 공동체를 발전시키고자 몸부림쳤던 2010 년대 퀘벡 동포사회의 모습도 함께 담아 후세들에게 전하니 훗날에 유익한 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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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과 발전

6.1

몬트리올 한인회의 발전단계

제 1 단계(태동기: 1949–1964 년)는 퀘벡 주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이 한인 친목회의 성격을 띤 작은 모임을 자율적으로 결성해서 운영하던 기간이다. 제 2 단계(초창기: 1965–1975 년)는 캐나다에 한국 대사관이 설치된 직후 거주국 내에 한민족 동포단체를 육성시키려는 모국정부의 재외동포정책과 권유에 따라 기존의 친목회를 한인회로 개편하고 한국계 이민자들의 구심점으로 부상한 퀘벡 한민족사회 초기의 10 년간이다. 제 3 단계(공식 출범기: 1976–1978 년)는 1976 년 6 월 11 일 퀘벡 정부에 사단법인 소수민족단체로 공식 등록한 몬트리올 한인회가 한인회의 내부조직을 정비한 후에 교육, 청소년, 경제, 문화, 스포츠 등 공동체 각 분야의 사회기반조직을 세우려고 노력했던 3 년 동안의 중요한 기간이다. 제 4 단계(성장기: 1979–2004 년)는 다양한 이민세대들의 중심에서 동포들 간의 친목강화에 주력해 온 25 년의 긴 기간이다. 몬트리올 한인회가 친목중심으로 운영된 이 세월 동안 퀘벡 동포사회의 인구가 여섯 배로 증가했고, 성장한 1.5 세 자녀들이 현지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우리와 경쟁하던 타 민족사회는 눈 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제 5 단계(도약기: 2005–2008 년)는 한인회를 진보적으로 혁신시키기 위한 진통을 겪으면서 한인회관을 대폭 확장하고 사무처와 한글 도서관을 신설했으며 연간 살림규모가 20 만 달러에 육박하는 한인회로 도약시킨 4 년 동안의 변화와 혁신기간이다. 제 6 단계(소강기: 2009 년– )는 도약기 이후 혁신을 멈추고 사무처를 중심으로 정체성 보전사업과 교육사업 등 다시 친목중심의 사업에 치중하고 있는 현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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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과 발전

6.2

초창기(1965-1975)의 한인회

지금으로부터 약 60 년 전인 1950 년대 몬트리올 지역에는 20 명 안팎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사이에 향수를 달래기 위한 ‘한인친목회’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초대 회장으로 김광만 씨가 선출되었다. 그 후 1964 년까지 계속 김광만 씨가 회장직을 맡아 야유회와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어 한인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회칙을 제정하여 친목회의 기반을 다졌다. 퀘벡 땅에 한민족 동포사회가 태동한 것이다 그러던 중 1965 년 초 오타와 주재 한국대사관으로부터 한인회 조직에 대한 권유를 받았고 이를 수용하여 한인친목회를 ‘한인회’로 재편하고 1965 년 2 월 21 일 초대 한인회(1965.2 – 1966.1)의 회장에 박한웅 씨를 추대했다. 박회장은 1 년간 한인회를 이끌었으며 당시 동포사회의 인구는 300 여명이었다. 다음 해인 1966 년 2 월에는 김광만 씨가 2 대 한인회(1966.2 – 1967.1)의 회장으로 추대 되었다. 이찬훈 씨가 총무로서 회장을 도와 수고한 2 대 한인회의 중점 사업은 새로 온 이주자들을 안내하는 일이었다. 이 밖에 처음으로 한인주소록을 만들어 배부했고 봄과 가을에 야유회를 개최했다. 영화도 두 차례 상영하여 고국으로 달리는 마음을 달랬고 크리스마스 파티도 열었다. 세계 무역박람회와 관련한 활동도 많이 했다. 재정은 한인회비(2 달러)와 기타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충당했다. 1967 년 2 월에 김해연 씨가 3 대 한인회(1967.2 – ? )의 회장에 추대되었고 남용욱 씨가 총무로 수고했다. 당시의 행사는 야유회와 영화감상, 크리스마스 파티였으며 새 주소록도 발간했다. 한인회의 재정은 기부금과 찬조금, 대사관 보조비로 충당했으며 한인회비는 징수하지 않았다. 이 당시 동포 가구수는 약 60 세대였으며 이들 중 거의 과반수가 의사로서 몬트리올 시민의 건강관리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불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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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과 발전

대한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능력 있는 의사들이 여러 명 타주로 이주했다. 이 즈음 몬트리올에서는 세계 무역박람회(EXPO, 1967.4.28 – 1967.10.5)가 열렸다. 3 대 한인회의 임기가 종료되었으나 차기회장 후보가 없었고 1969 년 6 월경에야 비로소 4 대 한인회(1969.6 – 1970.5)의 회장으로 한근석 씨가 추대되었다. 한 회장은 10 개월간 재임했으며 거의 연례행사처럼 되어 있던 야유회와 영화감상, 크리스마스 파티를 개최했다. 약 2 년간의 소강기를 지난 한인회는 1970 년 6 월 오기송 콩코디아 대학 교수를 5 대 한인회(1970.6 - 1971.5)의 회장으로 영입하여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오 회장은 1 년 후인 1971 년 6 월에는 6 대 한인회(1971.6 - 1972.5)의 회장으로 재선되었다. 오 회장은 임원진을 대폭 강화하여 도수홍(총무)외에 강희성(문화), 안기석(친교), 김영애(부녀), 문정자(재정) 씨를 영입하여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오 회장은 공사유별, 책임완수, 수입지출 공개를 운영지침으로 삼았으며, 친목강화와 복지향상, 한국-캐나다 문화교류 등을 주요사업 목적으로 설정해 추진했다. 재임 2 년 동안 오 회장과 임원들은 다양한 행사를 펼쳤으며 그들이 남긴 업적은 이후 동포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주요 업적은 1) 일곱 차례에 걸친 한인회보 발간 2) 한인회원 의견 조사 3) 의료봉사 활동 등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그들은 그때까지 이어오던 연례행사들 외에 8.15 기념행사, 양재 배우기 모임, 탁구 시합 등을 추가로 개최했다. 당시 황필준 박사를 중심으로 몇 명의 의사들이 매주 토요일마다 동포들을 치료하는 의료 봉사활동을 벌인 것은 특기할 일이다. 7 대 한인회(1972.6 – 1973.11)의 회장에는 남용욱 씨가 추대되었고 당시 임원으로는 안기석(총무), 이득애(부녀), 최선옥(재무), 염정호(섭외) 씨 등이 수고했다. 남 회장과 임원들은 연례행사(8.15 기념행사, 크리스마스 파티, 야유회, 영화감상)외에 회원명단을 발행했다. 7 대의 주요 업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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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과 발전

동포 체육활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운동경기를 자주 개최했으며 한인회에 운동기구들을 마련했음을 들 수 있다. 당시 재정 상황은 1 년 예산이 $1,700 이었고 남 회장단은 이를 대사관 보조금 (250 불), 광고비 (200 불), 찬조비 (300 불) 등으로 충당했다. 7 대의 임기 중에 대우실업 출장소가 몬트리올에 개설(1973.3.5) 되었다. 다음 대인 8 대 한인회(1973.11 – 1974.6)는 5, 6, 7 대에 걸쳐 3 년 동안 임원으로 수고한 안기석 씨가 이어받아 7 개월간 활동을 펼쳤으나 당시의 활동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9 대 한인회(1974.6 – 1975.5)의 회장으로는 정세봉 씨가 수고했다. 박종구 씨가 총무를 맡았고 이사는 김광만, 윤린희, 김해연, 오기송, 안기석, 최봉암, 정용섭, 이종화 씨 등이었다. 9 대 한인회가 주관한 행사로는 연례적인 8.15 행사를 비롯 야유회, 영화감상, 송년회와 동포명단 및 회보 발행 등이 있었다. 9 대 한인회 임기 중의 특기사항으로는 육영수 여사 추도회를 개최함과 아울러 대통령 저격 사건의 범인과 그 배후 관계자 수사에 일본 정부가 적극 협력할 것을 촉구하는 ‘촉구문’을 작성, 전달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이즈음의 동포세대 수는 약 250 세대였고 동포인구는 약 850 명에 달했다. 이는 1967 년에 캐나다의 이민법이 개정됨에 따라 아시아인들에게도 이민문호가 열렸고 이에 따라 가족초청 이민자들과 취업 이민자들이 1970 년부터 대거 유입된 까닭이다.

6.3

공식 출범기(1976-1978)의 한인회

퀘벡 한민족 동포들의 이주 역사가 이미 25 년이나 흘렀고 교수,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를 비롯한 1 천여 명의 동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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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땅에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70 대 중반까지 몬트리올 동포사회와 현지정부 간의 공식적인 대화 창구는 없었다. 10 대와 11 대 한인회 시대를 <공식 출범기>로 구분하는 까닭은 10 대에서 한인회를 퀘벡 정부에 공식적으로 등록하여 대내외적인 위상을 갖추었고, 11 대에서는 동포사회의 내부에 다방면의 사회기반조직을 설립하고 육영사업과 대외교류사업을 펼치는 등 동포사회의 성장을 위한 발판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두 시대의 역사적인 사건들로 인해 한인회는 비로소 현지정부와 타 민족 단체들의 공식 대화 상대가 되었고 퀘벡 땅에 동포들이 존재함을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었음을 후세들은 기억해야 한다. 10 대 한인회(1975.6 - 1976.9)의 회장은 윤세중 씨가 맡았다. 그런데 이 윤 회장 시대는 앞서 밝혔듯이 우리 한인회 역사상 커다란 의미를 지닌 시대였다. 1966 년 1 대 박한웅 회장 시대에 몬트리올 동포사회가 모국 정부와 연결되어 친목모임을 한인회로 개편함으로써 그 위상을 높여 동포사회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면, 10 대 윤 회장 시대는 그 한인회를 사단법인체로 퀘벡 정부에 공식적으로 등록(1976 년 6 월 11 일, 퀘벡 주 회사법 제 3 부 Libro C-614 Folio 49)시킴으로써 비로소 한인회가 현지 퀘벡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는 공식단체로 발전하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이 쾌거로 인해 퀘벡 정부로부터 보조금도 받게 되었으며 제 3 단계의 동포사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당시 윤 회장과 함께 수고한 임원진은 염홍(총무), 김종명(재무), 염정호(섭외), 박효섭(서무), 이종형(부녀), 정관성(문화), 윤오장(체육), 최익상(청년), 조성권(학생) 씨였다. 각종 연례행사도 성대하게 치른 윤 회장과 임원들의 당시 활동 중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는 제 21 회 몬트리올 올림픽 경기에 출전한 모국 선수단을 응원하고 지원했음을 들 수 있다. 별로 많지도 않은 동포 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응원단을 동원하고 언어 소통이 어려운 선수들을 통역하고 경기장에 안내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올림픽 열기와 함께 체육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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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하여 다양한 체육 활동을 하였으며 한인 골프회에 트로피를 증정하기도 했다. 당시 양정모 선수가 한국 올림픽 참가 역사상 처음으로 레슬링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애국가에 맞추어 게양되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응원 나온 동포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한국 선수단은 이 밖에도 유도 부문에서 은메달 하나와 권투에서 동메달을 확보하는 등 한국 올림픽 역사상 가장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갔다. 10 대 임기 중에 한전 캐나다 사무소(1976.4.3)와 선경물산 출장소(1976.5.1)가 몬트리올에 개설되었다. 올림픽 열기를 지나 1976 년 10 월 23 일의 총회에서는 이제까지 회장선거에서 볼 수 없었던 자천, 타천 후보 3 인이 경합한 끝에 박동열 예비역 해병 준장이 11 대 한인회(1976.10 1978.8)의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윤 회장 당시의 회칙 개정으로 임기가 2 년으로 늘어난 후 첫 회장으로 선출된 박동열 씨는 앞서의 역대 회장들이 이룩해 놓은 사업들을 보다 성공적으로 성취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11 대 임원진으로는 총무에 고봉주 씨, 섭외에는 안윤대 씨 등이 수고했다. 당시 박동렬 회장과 임원들이 이룩한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1) 육영사업의 추진 2) 학생회 등 동포사회기반의 구축 3) 대외교류사업의 시작 4) 퀘벡 한인 이주사의 편찬 추진 등을 꼽을 수 있다. 1977 년 말경부터 한인회에서 준비해오던 한글학교 설립은 이를 독립적 위치에서 지원할 육영재단을 1978 년 4 월 5 일에 발족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육영재단(이사장 유병일, 부이사장 황필준/오정희)은 정영섭 박사를 초대 교장, 그리고 안윤대 씨를 부교장에 임명하여 준비 작업을 벌인 끝에 1978 년 9 월 16 일 토요일 오후 2 시 드디어 몬트리올 한글학교(the korean language school)의 문을 열었다. 이날 개교식에 참석한 수많은 동포들은 몬트리올 한글학교의 밝은 앞날을 축복하였고 후세 육성을 위한 몬트리올 한인회의 노력에도 큰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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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박 회장은 1977 년 2 월 학생회를 조직하는 등 동포 후세들의 육영사업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심혈을 기울였다(초대 학생회장 배신우, 회원 22 명). 1978 년 6 월에는 연방정부로부터 4 천 달러의 재정지원을 받고 퀘벡 한인 이주사를 서술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는 비록 출판되지는 못했지만 프로젝트 추진중에 문헌적으로 귀중한 다량의 자료들을 발굴했고, 태동기부터 당시까지의 한민족 이주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음으로써 33 년후에 발간된 본 이주사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동년 8 월에는 중국민족사회가 개최하는 Moon Festival(8.24-8.26)에 참가하여 한복과 한국 고전무용의 아름다움을 선보여 커다란 갈채를 받았고 한민족사회가 타 민족사회와 만나는 대외교류활동의 역사적인 첫 장을 열었다. 이밖에 연례행사로 개최한 1976 년의 송년 파티에는 400 여명의 회원이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1977 년 3.1 절 기념식을 겸한 영화의 밤에는 300 여명의 교포가 모여 선열들의 애국운동사를 되새겨 보기도 했다. 이후 네 차례(어머니날 기념, 6.25 기념, 8.15 광복절 기념, 노년회 창립 기념)에 걸친 영화 상영은 당시 동포들이 향수를 달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77 년 6 월에는 캐나다 오픈 탁구 선수권대회에 참가한 한국 주니어 대표들이 선전했다. 당시 주니어부는 한국이 완전 석권하고 일반부에서도 메달을 휩쓰는 탁구 한국을 과시해서 동포들의 사기를 크게 북돋아 주었다. 이외에 어머니 날 기념 파티도 가져 어머니들에게 기념품을 증정했고 광복절 기념 축구대회와 바둑대회도 여는 등 박 회장 시대는 교육, 문화, 체육, 대외교류 등 각 분야에 골고루 관심을 갖고 동포사회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많이 노력한 한민족 역사상 중요한 시대였다. 박 회장은 1978 년 9 월 24 일 12 대 한인회장 윤오장에게 업무를 인계했다. 11 대 임기 중의 특기사항으로는 르네 레벡의 퀘벡 수상 당선(1976.11.13)과 윤오장 씨의 몬트리올 지구 태권도 협회 창설(1977.12.17)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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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성장기(1979-2004)의 한인회

캐나다의 이민법 개정으로 인해 규모가 대폭적으로 확장되었고 또한 그 대표단체인 한인회를 퀘벡 정부에 사단법인체로 등록한 몬트리올 동포사회는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성장기에 진입하게 된다. 이후 25 년 동안 동포 수는 여섯 배로 늘었고(1978 년 약 1 천명  2004 년 약 6 천명, 유학생 등 일시 체류자 포함) 한인회관의 건립 운동을 추진할 만큼 동포사회의 경제규모도 크게 팽창했다. 물론 그 성장의 중심에는 한인회가 있었고 열네 명 한인 회장들과 수많은 임원들의 노력이 있었다. 성장기 25 년 동안 한인회는 새로운 땅에 터전을 마련하려는 다양한 이민세대들의 정착을 돕고 그들간의 화합과 친목강화에 주력했다. 밖으로는 이웃 민족사회들과 교류하고 정부의 행사에 참여하는 등 전체 퀘벡 사회의 구성원이 되려는 노력도 펼쳤다(동양문화의 밤, 7 개국 축구대회, 캐나다 데이, 한국주간 행사). 그러나 이 기간중에 동포사회의 규모가 여섯 배로 팽창했음에도 불구하고 2000 년대 한인회의 행사와 사업에 참여하는 동포의 수는 오히려 줄어 들었고 참여율은 극도로 나빠졌다(참여율: 1970 년대 50-60%, 2000 년대 3-5%). 이에 따라 1980 년대에 40 대였던 같은 사람이 2000 년대에는 60 대가 되어 앉았을 뿐 한인회 총회장에서 새로운 얼굴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는 25 년이란 긴 세월을 한인회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동안 동포들(특히 자녀세대와 새로 유입된 동포들)의 기대치는 크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몬트리올 한인회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기대치(또는 가치관)의 차이는 신구세대 간의 갈등을 초래했고 차세대(자녀세대와 새 이민자 등의 신세대)들이 한인회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2000 년대로 접어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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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과 발전

‘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목적(존재이유)과 사업내용이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12 대 한인회(1978.9 – 1979. ?)의 회장은 10 대에서 체육부장으로 활약한 윤오장 태권도 관장이 맡았다. 그러나 12 대의 기록은 몬트리올 한인회에 남아 있지 않다. 13 대 한인회(1980.1 – 1981.12)의 회장은 9 대에서 총무로 수고한 박종구 씨가 이어 받았다. 박 회장 당시 함께 수고한 임원들은 고윤주(총무), 이영태(회계), 백준수(문화), 양재운(섭외), 심홍섭(청년), 최선희(부녀), 윤재욱(학생) 씨였고 2 년간 삼일절, 광복절, 야유회, 경로잔치, 영화감상, 송년 파티 등의 연례행사들을 무사히 치른 후 임기를 마쳤다. 많은 동포들이 연례행사에 참석하여 과거 모국에서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들을 기념하고 되새기는 동시에 상호 친목을 도모하고 사업정보를 교환했다. 당시 발간된 1980-81 년도 주소록에는 180 세대 765 명의 동포들이 몬트리올 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박 회장 시대에 동포사회에서는 종교활동이 유난히 많았는데 1981 년 3 월에는 장로교가, 그리고 같은 해 11 월에는 순복음교회가 창립 예배를 가졌다. 이밖에 13 대의 임기 중에 몬트리올 총영사관이 설치되었고(1980.8.15, 김창훈 총영사) 레벡 정권이 실시한 퀘벡 독립 1 차 국민투표에서 56.2%의 반대로 퀘벡 독립이 부결되었다(1980). 14 대 한인회(1982.1 – 1983.12)의 회장에는 정희수 퀘벡 주립 대학교 교수가 추대되었다. 당시의 임원으로는 총무에 안용현 씨, 서무에 홍성희 씨, 재무에 오인석 씨, 문화에 김정길 씨, 부녀에 정영선 씨가 수고했다. 정 회장은 김해연 박사 등 역대회장 9 인과 장윤천 전 노년회장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14 대의 주요업적은 연례행사(3.1 절, 6.25, 광복절 및 개천절 기념행사, 송년회)외에 정착 지원사업, 주류사회 진출사업, 그리고 한인회 소식지 발간사업 등으로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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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대의 정착지원 사업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추진되었다. 첫째는 한인회가 직접 나서서 새 이민자들의 초기정착을 돕는 방법이다. 즉 새 이민자들이 퀘벡에 도착해서 겪는 제반 문제(의료 보험카드 만들기, 취업, 사업 선정, 자녀들의 학교선택, 주택구입 등등)들을 임원들이 직접 나서서 도왔다. 특히 동포들이 법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정 회장과 임원들이 직접 파출소나 해당 기관에 가서 문제의 해결을 도왔다. 둘째는 퀘벡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아서 동포들의 현지사회 적응을 돕는 방법이다. 이에 따라 정 회장은 적응지원 사업계획서를 퀘벡 이민부에 제출해서 지원금을 받았고 그 자금으로 2 년 동안 다양한 주제(경제, 사회, 교육, 세대간 관계 등등)의 세미나를 열어서 새 이민자들에게 정착에 유용한 정보들을 제공했다. 그 중에서 부모와 자녀 간의 세대차를 극복하는 방안에 대한 세미나에서는 매우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토론자로서는 고 방용성 노년회장, 고 장윤천 노년회장 및 배한국 목사가 초대되었다. 토론 중에 한 청년이 갑자기 일어서서 영어로 “제발 부모님들은 우리가 하는 일에 간섭 마세요!” 라고 소리쳤고 이 말을 들은 어떤 토론자가 “예끼 이놈!” 하고 고함을 쳐서 좌중이 한바탕 웃기도 했다. 당시는 세대간 문제도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 토론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또한 동포 문제에 대한 세미나 혹은 토론회에 목회자들이 적극 참석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동포사회가 주류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전략으로 타민족과의 공동 문화행사도 지속되었다. 1982 년 5 월 29 일에는 제 4 차 동양문화의 밤을 마련하고 일본과 중국, 베트남, 라오스, 필리핀, 그리고 캄보디아 민족들을 초청해서 함께 공연을 펼쳤다. 동 행사의 준비위원회는 정희수 회장을 위원장으로 하여 황필준, 최봉암, 조병철, 김영길, 박종수, 정메리, 김춘희 씨 등으로 구성되었다. 동 행사의 프로그램은 참가한 나라들이 자신들의 전통음악과 무용을 같은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구성되었고 일곱 나라의 민족들이 함께 어울린 뜻 깊은 밤이 되었다. 동년 10 월에는 한국 국립무용단의 몬트리올 순회공연이 있었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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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는 몬트리올 한인 소식지도 발간했다. 1982 년 4 월에 발간된 제 1 호에는 ‘1982 년 한인회 사업계획(정희수)’ ‘3.1 절 기념행사소식’ ‘아시아의 밤 행사일정’ ‘퀘벡 경제 전망(정희수)’ ‘퀘벡 정치 전망(정희수)’ ‘학생들이 느낀 이민 생활(배신우)’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이희재)’ ‘ 생활의 지혜 (김춘희)’ 등 다양한 기사가 게재되었다.

<1983.9 월 KAL 기 격추 만행을 규탄하는 동포들>

한편 14 대 임기 중 특기사항으로는 북한동포 구제를 위한 천만 명 서명운동에 동포사회가 참여했고(1982.6) 전두환 대통령이 몬트리올을 방문했으며(1982.8) 구 소련에 의한 KAL 기 격추 참사가 발생했다(1983.9.1). 앵커리지를 경유하여 서울로 향하던 뉴욕 발 대한항공 007 편이 소련 요격기의 공격을 받고 사할린 섬 서쪽에 추락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에 정 회장은 동포들과 함께 오타와의 소련 대사관 앞에서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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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천인 공로할 만행을 규탄했다. 수많은 동포들이 한마음이 되어 소련의 악행을 규탄하고 국제사회에 참극의 규명을 호소하는 궐기대회를 열었다. 15 대 한인회(1984.1–1985.12)의 회장에는 노형철 씨가 추대되어 2 년간 활동했다. 노 회장을 도와 15 대 한인회의 살림을 이끌어간 임원은 오인석 총무를 비롯해서 이영태, 남용직, 홍수길, 최계수, 노재일 씨였다. 15 대는 3.1 절, 6.25, 광복절 및 개천절 기념행사, 야유회, 송년회 외에 한국 국립무용단을 초청하여 공연했다.

<한국 국립무용단원들과 15 대 임원들>

특히 오인석 총무의 수고가 많았다고 당시를 회고한 노형철 회장이 후대 한인회장들에게 남긴 말은 “어른을 공경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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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어른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노인들, 3 대가 모여 사는 아름다운 몬트리올 동포사회를 만들어 가세요” 였다. 당시 몬트리올에는 무역관과 더불어 한전 캐나다 사무소와 (주) 대우, (주) 선경의 몬트리올 지사가 있었다. 1984 년 봄에는 노인들을 경로행사도 많이 개최했다.

모시고

로키

산맥

관광

<로키 산맥 관광에 나선 노인들과 15 대 임원들>

16 대 한인회(1986.2 – 1988.1)의 회장에는 최계수 씨가 추대되었고 총무부장에 서백수, 재무부장에 양재훈, 체육부장에 임승덕, 문화부장에 박용섭, 섭외부장에 서광훈, 부녀부장에 이채화, 청년부장에 이기영 씨가 수고했다. 16 대가 임기를 마친 후인 1988 년 2 월 18 일 소식지 <모래알, 발행인 장윤천>에 게재된 ‘최계수 제 16 대 몬트리올 한인회장 칭송자자’라는 기사를 참고해서 16 대의 주요업적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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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대 한인회는 집행부 임원과 이사진이 인화단결하여 성취도를 높인 시대였다. 이사회와 협력 하에 한인회의 회칙을 개정하여 부회장제를 신설하고 선거관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공문발송만 27 회에 달할 정도로 영사관을 비롯해서 동포사회 단체들과 협조하고 임기 내내 훌륭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최계수 회장의 16 대는 그동안 단절됐던 주소록을 면밀하게 제작하여 동포가정에 배부했다. 또한 매해 빠짐없이 3.1 절 기념행사와 하기 야유회, 8.15 경축식과 성대한 체육대회, 가을 단풍놀이, 경로잔치를 개최했고 대규모의 송년 파티도 했다. 또한 영사관과 긴밀한 연락 하에 시중의 극장을 빌려서 한국영화 3 편을 상영하고 동포들이 관람토록 해서 고국으로 향하는 향수를 달래주기도 했다. 최 회장의 재임 중 동포사회에는 권총강도 사건이 유난히 많았다. 식품점을 운영하던 김일환 씨(1986.11.28)와 채영석 씨(1987.1.28)가 잇달아 피살되는 등 동포들의 피해가 잦아지자 한인회 주관으로 단체장 회의 (1987.1.31)를 열어 피해 방지대책을 강구했고 권총강도를 체포해 줄 것을 정부에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 결과 한달 후 권총강도가 잡혔고 체포 경관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한편 최계수 회장은 동포 후세들을 육성하기 위한 장학회를 창설하고 솔선해서 2 천 달러를 쾌척하는 등 많은 사재를 들여 동포사회에 봉사했다. 임기 말에 최 회장이 17 대로 넘겨준 이월금은 $7,867.27 이었다. 17 대 한인회(1988.2–1989.12)의 회장은 유동훈 씨가 이어받았다. 부회장에는 변문환 씨, 총무부장에 오예한 씨, 섭외에 조용휘 씨, 재무에 김영환 씨, 서무에 이계호 씨, 문화에 김성환 씨, 봉사에 김두환 씨, 체육에 홍성준 씨, 부녀에 강옥정 씨, 그리고 상담역으로 김석길, 홍순유, 최춘희 씨가 수고했다. 유동훈 회장은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동포사회의 각 단체장들과 유공자들을 한자리에 초청해서 한인회의 발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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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한 의견을 들었다. 3.1 절 기념식을 치른 후에는 특선 한국영화 <비련의 홍살문>을 상영했다. 동양문화 협회(Association des Cultures Orientales Inc)와 협조하여 아시아 6 개국(한국,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이 참여하는 동양문화의 밤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했고(1988.5.7) 그해 7 월에는 동양 7 개국 축구대회도 주최했다. 한인회 명부(주소록)를 발간했으며 광복절 체육대회와 송년 파티를 열어 동포사회의 화합과 친선을 도모했다. 그러나 17 대 유동훈 회장과 임원들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최초로 몬트리올 한인회의 사무공간을 마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65 년에 설립된 이래 1988 년 봄까지 23 년 동안 몬트리올 한인회는 책상을 놓을 만한 작은 사무공간조차 갖지 못했다. 한인회장들의 집이 한인회의 사무실이었고 동포 식당을 돌며 회의를 하고 업무를 보아 오던 형편이었다. 과거에 실협회장을 역임한 바 있던 유 회장은 당시 퀘벡 실협의 회장이던 노재일 씨의 협조를 얻어서 실협 사무실 안에 한인회의 사무공간을 마련하였다(1988.6.4, 주소: 2425 Grand Blvd, Suite 14-15, N.D.G. Montreal). 17 대가 떠돌이 몬트리올 한인회를 한곳에 정착시킨 것이다. 이날의 리셉션에는 30 여명의 동포들이 축하 화분과 사무집기를 들고 와서 유 회장의 노력에 감사했고 2 천여 달러를 한인회 운영비로 기부한 기록이 남아있다. 비록 실협과 공유하는 공간이었지만 처음으로 한인회의 사무공간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을 기쁘게 했다. 1988 회계연도 정기총회 보고서에 따르면 17 대의 1 년 살림 규모는 약 2 만 달러였다(수입 $21,070.27, 지출 $19,415.30). 유동훈 회장의 임기 중 본국에서는 88 서울 올림픽이 이에 전 세계 동포들이 한마음이 되어 추진한 본국 후원사업에 동참하기 위하여 몬트리올에도 ‘88 서울 후원회(회장 방용성)’가 결성되었다. 동 후원회는 이후 활동하였고 1994 년 11 월 잔여 활동자금($2,975.24)을 장학금으로 전달하고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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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렸다. 올림픽 올림픽 6 년간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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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대 한인회(1990.1–1990.9)의 회장에는 박용섭 씨가 추대되었다. 한인회장 취임 후 박 회장의 첫 행사는 경로잔치였다. 충효사상과 더불어 동양윤리의 근간을 이루는 경로사상을 젊은이들에게 고취시키려는 취지에서 개최한 행사였다. 구 천주교 성당 건물에서 열린 이날 경로잔치는 세배와 노래에 이어 떡국으로 식사를 했고 윷놀이 대회를 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3.1 절 기념식을 치른 후인 5 월에는 심장병 어린이 돕기 자선 연예인 공연을 했다. 17 대의 업적을 계승한 18 대가 1990 년 6 월에 드디어 몬트리올 한인회만의 ‘독립 사무실’을 마련했다(2425 Grand Blvd, Suite 3, N.D.G. Montreal). 17 대부터 실협과 공유했던 공간을 옮겨 같은 건물 2 층 3 호에 몬트리올 한인회만의 사무실을 갖추고 새로운 활동의 장을 연 것이다. 몬트리올 한인회의 현 대표 전화번호(514-481-6661)도 이때 생겼다. 이에 따라 한인회장이 바뀔 때 마다 한인회의 연락처가 바뀌어 현지정부나 타민족들과의 연락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더 이상 없어졌다. 이는 2 년 전 17 대가 처음으로 한인회 사무공간을 마련한 것과 함께 몬트리올 한인회 발전사에 커다란 의미로 남는 쾌거였다. 한인회관의 건립을 소망하는 몬트리올 동포들의 숙원을 풀기 위한 첫 걸음이 17 대와 18 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임기 8 개월째를 지나던 어느 날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국제경기에 참가하는 북한 태권도 선수단을 박용섭 회장이 공항에 나가서 영접한 일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박 회장은 “민족애 차원에서 북한 선수단을 영접했다”라고 주장했으나 6.25 참전세대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모친의 위독 소식을 접한 박 회장은 한인회장직을 사퇴하고 본국으로 향했다. 몇 달 후 돌아온 박 회장은 수습 대책위원회(위원장 유동훈)에게 한인회의 업무를 인계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광주 송원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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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년 3 월 25 일 박용섭 회장과 유동훈 위원장이 서명한 인수인계서에는 당시 한인회의 3 개 일반계좌에 총 잔고 $18,800.01 의 자금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계좌 5151-0026: $5,723.64, 계좌 5122-0103: $4,023.47, 계좌 5122-0104: $9,052.90). 이 자금중에는 박 회장의 고문이었던 정희수 퀘벡 주립대 교수는 1990 년 여름 퀘벡 정부로부터 유치한 1 만 3 천 달러가 포함되어 있었다. 문화행사와 정착지원용으로 받은 이 정부 보조금이 18 대의 사퇴로 집행되지 못했다. 수습대책 위원회에게 인계된 이 정부 보조금은 ‘한인회관 건립 적립금’으로 용도가 바뀌어 19 대에게 이월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희수 고문은 자신이 유치한 이 보조금(적립금)을 먼 훗날 용도는 다르지만 직접 한인회를 위해 집행하게 된다. 20 년 긴 세월을 거쳐 전해진 이 보조금에 이자까지 붙은 회관건립 적립금이 2007 년 초 특별대책 위원회(위원장 정희수)에 의해 한인회관의 대대적인 보수 확장 공사에 요긴하게 사용된 것이다. 국제전화 인터뷰에서 박 회장은 20 년 전 상황을 회고하며 후세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당시 나는 한인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몬트리올 한인회를 변화시키려고 했으나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북한 태권도 선수단 환영 사건은 핑계였고 변화를 거부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선수단 환영 건은 나를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사람들이 한인회를 둘러싸고 있는 한 몬트리올 한인회에 발전은 없다. 노인은 노년회로, 청년은 청년회로, 그리고 한인회는 장년들에게 맡겨야 한다. 나이별로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몬트리올의 일부 노인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몬트리올 한인회의 슬픈 현실이고 장애물이다.” 박용섭 회장이 사퇴한 몇 달 후 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유동훈, 1991.12.16-1991.9.15)가 구성되었고 이후 약 9 개월 동안 한인회를 이끌었다. 위원회는 수차례 걸쳐 차기 한인회장 입후보 등록 공고를 낸 끝에 드디어 1991 년 9 월 15 일 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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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에서 19 대 한인회장단을 선출하고 그 임무를 종료했다. 동 기간 중 대책위원회는 3.1 절 기념식과 광복절 행사 등 연례행사들을 치렀다. 19 대의 재무 기록에 의하면 수습대책위원회가 19 대에게 인계한 3 개 계좌의 총액은 $14,232.81 이었다(운영계좌 $4,930.90, 적립계좌 S/C/A $3,762.62 + S/C/A 5,539.29). 1991 년 9 월에 열린 정기총회에서 동포들은 서백수 씨를 19 대 한인회(1991.9-1993.9)의 회장으로 추대했다. 서백수 회장을 도와 19 대를 이끌어간 임원은 부회장에 신영현 씨와 최춘희 씨(최초의 여성 부회장), 총무부장에 계명홍 씨, 서무부장에 김진배 씨, 홍보부장에 명성재 씨, 재무부장에 황규택 씨, 체육부장에 김덕구 씨, 문화부장에 김수해 씨, 섭외부장에 김창익 씨, 청소년부장에 조익환 씨였다. 서회장은 퀘벡 주립대학 교수 정희수 박사를 18 대에 이어 19 대의 고문으로 다시 위촉했다. 당시의 사무장은 강경원 씨였다. 임기 2 년 동안 60 여건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해치운 19 대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1) 한인회 사무실의 이전 2) 정부 불어 교육의 시작 3) 정착지원 사업의 추진 등을 들 수 있다. 서백수 회장은 출범 후 첫 행사로 18 대가 마련한 Grand Blvd 203 호 사무실에 한인회의 나무 현판을 걸었다. 이날 현판식에 참석한 동포들은 한인회의 사무공간이 비좁다는 서 회장의 의견에 공감했다. 이에 따라 개천절 기념식을 끝낸 후 서 회장은 순복음교회 측과 새로운 한인회 사무실의 임차에 관한 협의를 진행했고 1991 년 11 월 30 일 몬트리올 한인회를 현재의 주소지로 이전했다(3480 Décarie Montréal). 이듬해 봄에는 한인회의 출입문인 별관 입구의 벽면에 동판을 박았다. 공간(약 35 평, 방 4 개)은 2007 년 초 한인종합회관으로 개보수 확장 개관(약 동안 한인회의 행정 사무실과 불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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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복음교회 건물 좌측 당시 19 대가 마련한 특별대책위원회에 의해 120 평)되기까지 15 년 강의실로써 요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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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이 확보되자 서 회장은 ‘뭉쳐서 하나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두 팔을 걷었다. 우선 동포사회의 기관장 및 단체장들을 한인회로 초청해서 동포사회의 발전 방안에 관한 회의를 수차례 열었다. 이 자리에는 노년회, 실협, 교회 등 주요 동포단체의 장은 물론이고 영사와 현대 자동차 공장장, 언론사 등 30 여명이 참석하여 ‘동포사회 각 단체 간의 상호 협조체제 구축과 화합 방안’에 관하여 진지하게 논의했다. 이에 한 언론사가 1990 년도 공항영접 사건, 소위 <박용섭 18 대 회장의 북한 태권도 선수단 환영>사건의 요지를 설명했고 정관성 씨는 “북한 선수들이 캐나다에 오면 사상을 초월해서 한민족의 핏줄로 맞아 접대하는 것은 동포사회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닌가?”라고 제안했다. 참석한 모든 단체장들이 이 제안에 동의했고 ‘단지 정치 선전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을 제외하고 오로지 스포츠 정신에 입각하여 이북사람이 왔을 때 한인회는 민족주의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따듯하게 대해 준다’라는 향후 한인회의 방침을 결정하여 후세들을 위한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한인회가 문화단체로 정부에 등록되어야 하며 한인회 산하에 아동 및 성인 교육을 위한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라는 의견도 함께 남겼다. 서백수 회장의 19 대는 그야말로 대단한 활동을 했다. 17 대와 18 대가 사무실 없는 한인회의 설움을 풀었다면 19 대는 보금자리를 꾸린 직후 먹이감을 찾아 나선 굶주린 승냥이 마냥 일감들을 찾았다. 1991-92 회계년도 결산서에 따르면 당시 19 대의 살림 규모는 수입 $85,449.56, 지출$84,620.36 차기 이월금 $829.20 이었다. 이 같은 큰 살림 규모는 19 대가 수많은 활동을 했음을 반증한다. 1992 년 11 월 정기총회에 제출된 19 대의 업적보고서에 따르면 1992 년 한 해 동안 19 대는 8 개의 계승사업과 12 개의 신설사업을 비롯해서 수십 개의 사업들을 치렀다. 뭉쳐서 하나된 임원들의 팀워크와 서 회장의 강력한 추진력이 이를 가능케 했다. 각 교회로부터 추천된 임원들의 노고로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에는 600 명 이상의 동포들이 참가했으며 연말 파티도 대성황을 이루는 등 결집력이 돋보인 시대였다. 임기 두 번째 해인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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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년도의 살림 규모는 약 4 만 달러 규모(수입 $43,983 지출 $39,191)였다. 활동이 다소 주춤했지만 7 개국 동양문화의 밤(1992.10.17)과 개천절, 경로잔치, 골프대회, 광복절 행사 등을 개최했고 세미나, 시민권 공동 신청, 이민 생활 정보서 발간 등을 했다. 19 대 이사회(이사장 양승팔)도 크게 한 몫을 했다. 양승팔 이사장은 한인회 정관을 개정하고 각종 규정(이사회 운영규정, 회계규정, 문서규정)을 제정하는 등 많은 일을 추진해서 서 회장의 집행부를 도왔다. 편찬위원회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19 대 이사회는 지금까지의 몬트리올 한인회 역사상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이사회였다. 또한 퀘벡 주의 비영리 단체 조직법이 정한 이사회의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수행했으며 서 회장의 집행부와 합심하여 19 대의 화려한 업적을 쌓았다. 19 대 활동의 자금원은 한인회비와 동포들의 기부금 외에도 각종 정부 보조금($23,900), 태평양 연구재단의 앙케이트 보조금($9,000), 주소록 광고비($19,500)등 다양했다. 정희수 고문도 1991.12.14 일의 정치 세미나를 시작으로 경제, 정착, 교육, 청소년, 주택 등에 관한 10 여 차례의 세미나를 개최하고 퀘벡 정부 지원금을 유치해서 19 대의 재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92 년도와 1993 년도의 정기총회 자료에 의하면 19 대는 수습 대책위(위원장 유동훈)로부터 3 개 계좌 $14,232.81 를 이월받아 2 년간 12 만불 규모의 큰 살림을 했고 총액 17,247.41 달러를 20 대로 이월시켰다(운영계좌: $6,140.98, 회관적립 2 개 계좌: S/C/A $7,492.39 + S/C/A $3,614.04, 1993.9.30). 한편 사무실 임대료 마련을 위해 고민하던 서 회장에게 정부 불어학교 유치 프로젝트는 오랜 가뭄 중에 만난 단비와도 같았다. 이를 조언한 임성숙 퀘벡 주립대 강사의 집요한 노력으로 마침내 한 개의 불어 학급을 유치하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때부터 퀘벡 정부로부터 지급되는 정부 불어교육 지원금은 한인회비, 기부금과 함께 한인회의 3 대 운영자금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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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대의 임기 말엽에는 <퀘벡 이민 생활에 필요한 정보서>가 출간되었는데 퀘벡 주립대학의 정희수 교수와 임성숙 강사가 공동 집필했다. 이를 위해 1992 년 8 월부터 수개월간 대대적인 설문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이민 생활 정보 책자는 아시아 태평양 연구재단으로부터 앙케이트 보조금을 받아서 1 년간의 준비 끝에 1993 년 7 월 발간되었고 발간비용을 제외한 잔여자금 전액은 19 대 한인회의 운영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19 대는 1993 년 3 월 이사회에서 한인회관 건립추진 규정을 확정했으며 동년 8 월 한인회관 건립 추진위원들을 선출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이 수많은 활동을 펼친 19 대의 임기 중에는 몇 가지 사건도 있었다. 1993 년 광복절 체육대회 때 발생한 유아 성추행 사건, LA 폭동 구호성금 증발 사건, 한인신문 및 토론토 한국일보와의 논쟁 등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했다. 구호성금 증발 사건은 갑작스런 흑인들의 폭동으로 피해를 입은 LA 한국동포들을 돕고자 한인회를 중심으로 모금된 동포들의 성금이 한 언론사가 현지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사건이다. 당시 동포들이 모금한 구호성금은 $12,364.08(1992. 6.4 발표기준: 한인회 접수액 5,632,08, 2 개 언론사 접수액 $5,922.50, 7 개 모금함 모금액 $701.46)을 넘었다. 이 사건은 그후 두 언론사 간의 고소 사건으로 발전했고 한인회도 곤란을 당했으며 몬트리올 동포사회를 매우 소란스럽게 했다. 21 대(회장 조한주)의 회계 결산서를 보면 1996 년 말경 법원으로부터 LA 성금 건으로 $1,000 이 한인회에 입금된 기록이 있다. 올바른 이주사 편찬을 위한 인터뷰에서 서백수 당시를 회고하며 후대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겼다.

회장은

“개인적인 감정과 지연, 학연 등을 배제하고 공정한 보도를 해서 동포 화합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 동포 언론사의 우선적 임무다” 이렇듯 혼란스런 동포사회를 안정시키고자 노년층이 나섰고, 그들이 추대한 20 대 한인회(1993.10–1994.7)의 회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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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소식>지의 발행인 임종률 씨의 친형인 임종성 씨였다. 20 대의 임원은 부회장에 박종선 씨와 백희자 씨, 그리고 강이환 총무, 우정철 재무, 명성재 홍보, 박병선 섭외, 김형문 서무, 임성숙 청소년, 그리고 고문에는 정영섭 박사, 정희수 박사, 황필준 박사였다. 20 대의 주요활동으로는 송년의 밤, 신년 하례식, 한인회보 발간, 주소록 발간, 청장년들과의 좌담, 교육 세미나, 캐나다 데이 행사 참여 등이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아시아 7 개국간 문화교류의 장이었던 동양문화의 밤과 동양 7 개국 축구대회는 이 무렵부터 자취를 감추게 된다. 출범 후 몇 달 동안 20 대는 동포사회를 안정시키며 차분하게 업무를 추진했다. 그러나 주소록 발간에 참조하기 위해 19 대의 회계자료를 살피던 우정철 재무가 양심선언을 하고 <한인소식>지가 이를 신문지상에 공개함에 따라 몇 달간 잠잠했던 동포사회는 더욱 시끄러워 졌다. 악화일로의 동포여론을 수습하기 위하여 임시 이사회(20 대 이사장 김현수, 1994. 3.26)가 특별조사 위원회의 구성을 결의하고 조사위원(홍순유, 이태용, 황현호 외 1 인)을 위촉했으나 조사에 관한 전권 위임을 요구하는 위원들과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에 이사회가 직접 조사하여 임시총회에 보고한 결과는 “19 대의 재무집행에 부정이 없었다”였다. 결국 박종선 부회장과 강이환 총무가 사표를 냈고 임시총회에서 임종성 회장과 김현수 이사장이 사임함으로써 20 대의 힘겨운 여정이 열 달 만에 끝났다(1994.7.23). 20 대 한인회는 임기 중 약 3 만 5 천 달러 지출규모의 살림을 했고 $526.77 을 한인회 운영자금으로 차기 이월시켰다. 노년층이 다시 나섰고 이후 난국수습을 위해 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그해 10 월 29 일 다시 열린 임시총회에서 21 대가 출범할 때까지 약 3 개월간 한인회를 운영했다(1994.8 – 1994.10, 위원: 김병옥, 조병철, 엄재성, 황필준, 김용상 외 6 인). 이 기간 동안 수습대책 위원회는 LA 구호성금 문제, 19 대의 회계조사 결과, 임종성 20 대 회장의 사임 등에 관하여 <한인소식>과 지면 공방을 벌였고 ‘동포 여러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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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는 말씀’이란 장문의 글을 타 동포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다. 불미스런 사건이 연속되었던 1993-1994 년의 동포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로 인해 몬트리올 한인회의 위상은 크게 실추되었으며 한인회에 대한 동포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1994 년 광복절 기념행사를 치르는 등 3 개월간 한인회를 운영한 수습대책위는 -$1,172.00(운영계좌잔고 $7,945.85, 미지급금 $9,118.51)의 한인회 살림(부채)을 21 대에게 넘겼다. 21 대 한인회(1994.11 – 1996.10)의 회장에는 조한주 씨가 추대되었다. 이같이 힘든 상황 속에서 ‘빚’만 남은 배의 선장이 된 조 회장은 난파 직전의 한인회를 구하고자 젊은 일꾼들로 21 대의 임원진을 구성했다. 자신도 40 대인 조 회장은 18 대 한인회에서 임원으로 일했던 경험과 인맥을 토대로 한인회를 패기 있게 이끌어 나갔다. 조 회장의 상처 치유 노력을 동포들이 지지했고 기부금으로 성원했다. 95 회계년도 정기총회 기록에 따르면 21 대의 임원으로는 부회장에 이경호와 임성숙 씨, 총무부장에 명성재 씨, 재무부장에 이재욱 씨, 문화부장에 박병선 씨, 청년부장에 최종우 씨, 그리고 사무장에 권형주 씨가 수고했다. 21 대의 주요업적으로는 1) 시민권 단체 신청 2) 노인 민원업무 3) 정착지원 정보 세미나 및 복합문화 정책 참여 4) 한인회보 발행 등이 있다. 남성 부회장 이경호 씨는 각종 행사와 회의를 도맡아 추진하는 등 맹활약했고 임성숙 여성 부회장은 불어학교와 정착 세미나 등 주정부와 관련된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각종 세미나에서는 중요한 정착정보를 새 이민자들에게 제공했으며 2 개 학급으로 늘어난 정부 불어학교는 한인회의 자금운영에도 큰 기여를 했다. 박병선 섭외부장은 시민권 단체신청을 처음으로 시도해서 50 여명의 동포들이 편리하게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도록 했다. 조한주 회장의 21 대는 또한 노년복지 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노인연금 신청 및 수령 지원활동이 그 대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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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이동과 불어가 불편한 노인들을 임원들의 차에 태워 모시고 다니면서 노년연금을 신청할 수 있도록 도왔다. 시민권 단체신청 사업과 노인연금 수령지원 사업은 많은 동포들 특히 노년층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던 성공적인 사업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캐나다 데이 행사에 참가했고 NDG 문화센터가 주관하는 문화교류 행사에 참여했다. 캐나다 데이는 모자이크 문화를 표방하는 캐나다의 국경일을 맞아 소수민족들이 각자의 문화를 들고 나와 경축하고 상호 교류하도록 캐나다 연방정부가 마련하는 자리이다. 몬트리올 한인회는 전통농악대를 앞장세우고 도심을 행진했으며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퀘벡 사회에 알렸다. 이 밖에도 조한주 회장과 그의 임원들이 치른 행사로는 연례행사(정월 대보름 민속잔치, 3.1 절 기념식, 광복절 체육대회, 연말 파티, 골프대회 등)외에 한인회보 발간(12 회), 각종 세미나(6 회), 동포 2 세와 대화의 장(주제: 세계 속의 교포 2 세의 역할), 볼링대회 등이 있다. 임기말(1996.10.31) 결산서에 따르면 96 회계연도 한인회의 살림 규모는 수입 $36,091.73 지출 34,571.88 차기 이월금 $1,519.85 였고 임기 2 년 동안의 총 살림 규모는 약 7 만 달러였다. 별도계정인 회관건축 적립금의 잔고는 $12,771.67(이자 포함)였다. 인터뷰에서 조한주 회장은 후배 한인회장단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향후 몬트리올 한인회는 한인회관 건립사업, 노년복지 사업, 그리고 정체성 보존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기 바란다” 1996 년 10 월말로 21 대의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후임자가 없었다. 이사회가 곧 운영위원회(위원장 김재홍)를 구성하였고 이후 5 개월(1996.12.14-1997.5.17) 동안 운영위원회는 신년하례식, 3.1 절 기념식, 청년 취업 세미나, 동계 및 춘계 불어강좌 등의 업무를 집행했다. 동 운영위원회는 그해 5 월 17 일 임시총회를 열어 운영위원장직을 수행해 오던 김재홍 씨를 22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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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회장으로 추대하고 해산되었다. 동 기간 중 수입은 $20,682, 지출은 $12,879, 차기 이월금은 $7,803.29 였다. 운영위원장으로써 약 5 개월간 한인회장직을 대행해 오던 김재홍 씨가 22 대 한인회(1997.5 – 1998.11)의 회장으로 정식 취임했다. 임기 중 22 대는 신년하례, 3.1 절, 광복절, 개천절, 송년의 밤 등의 연례행사와 세미나, 시민권 공동신청 사업을 했다. 22 대의 대외활동으로는 아시아 태평양 연구재단의 지원금($2,625)을 받고 한국주간(1997.11.24-11.28)에 참여한 기록이 있다. 이 한국 주간 중에 한인회가 주관하여 미술 전시회(미술협회), 한국 전통무용 공연(이채화 무용단), 어린이 합창(한인학교), 어머니 합창(허향원), 태권도 시범(윤오장), 한국가곡 공연(김무장)등을 했고 퀘벡 경제, 교육, 한국 음악 등 각종 세미나도 개최했다. 1998 년 12 월 12 일 정기총회에 보고된 22 대의 결산 자료에 따르면 22 대의 임기 19 개월 동안 한인회의 살림 규모는 약 5 만 달러였고 $3,062.65 를 23 대로 이월시켰다. 한편 별도계정은 18 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한인회관 건립 적립금 $13,362.39(National Bank 1 년 정기예금, 연 5% 이자포함)에 더하여 곽성문 조의금 예치 계정 $4,990.00 (Canada Trust 2 년 정기예금, 이자 연 5%, 원금 예치일: 2000.9.18)이 새로 생겨 2 개가 되었다. 22 대의 임기 중 본국에서는 IMF 금융위기(1997.11.21, 김영삼 정부)가 발생했고 이 여파로 몬트리올 외환은행 지점(19891998.6)이 폐쇄되었다. 몬트리올에서는 몬트리올 한인 청년회의소가 회원 부족을 이유로 해체되었다. 25-40 세 사이의 동포들이 중심이 되어 1991 년에 창설된 JC 는 그 동안 장년층 한인회와 청소년 단체들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담당해 왔으나 회원 부족을 사유로 6 년 만에 사라지는 아쉬움을 남겼다(19911997.6). 이는 한인회의 노령화를 가속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동포사회의 허리가 단절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또 다른 청년단체인 한인 청년회(회장 안정윤)와 동포 학생회들의 활동은 활발했다. 특히 이들은 ‘북한동포 구호 사랑 나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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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을 여는 등 이데올로기를 넘어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동포들에게 따듯한 민족애를 나누는 행사들을 개최해서 어른들의 얼굴을 뜨겁게 했다. 1998 년 12 월 정기총회에서 유동훈 씨가 23 대 한인회(1998.12 – 2000.12)의 회장으로 다시 추대되었다. 23 대의 임원은 부회장에 이동준 씨와 강옥정 씨, 총무부장에 김윤장(훗날 사임 후 이봉섭 서무가 겸임), 서무에 이봉섭, 섭외에 김대은, 체육에 김철호, 문화에 박정만, 봉사에 권형주 씨였고, 그리고 사무장으로는 김한나 씨가 수고했다. 23 대는 연례행사들 (신년하례, 3.1 절, 광복절, 송년회)을 치렀고 한인회보 발간, 주소록 발간, 청년 농구대회, 한인회장배 골프대회, 시민권 단체신청 등을 했으며 특별히 골프대회와 송년 파티에 전력 집중한 기록이 남아 있다. 2000 년 2 월에는 한인회관 건립사업(Korea House Project)의 추진을 위한 단체장 회의를 열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광복절 기념행사장에서 만세 삼창하는 동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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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대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는 예원학교 고전무용단의 몬트리올 공연이 있었다. 23 대는 김대중 대통령의 캐나다 방문을 기념하여 열린 이 공연의 준비에 총력을 쏟았고 1999 년 6 월 23 일 쁠라스 데자르에서 성황리에 공연이 끝났다. 그러나 이후 23 대 한인회와 총영사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한인회와 실협이 공동 주최하고 총영사관이 후원한 이 행사의 결산서를 총영사관이 발표하고 동포들을 치하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후 유회장이 평통위원직을 사임했고 광복절 행사에 총영사관을 배제시키는 등 관계가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2000 년 12 월 15 일 정기총회에 보고된 결산자료에 의하면 23 대는 2 년 동안 약 5 만 3 천불 규모의 살림을 했고 차기 이월금은 $5,008.83 였다. 1998.12.27 일 연방정부로부터 받은 소수민족 단체 재정 보조금 $7,000 은 한인회 운영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1999 년과 2000 년 2 년 동안 한인회가 대외적으로 활동한 기록은 없다. 1990 년대 초반 이후 자취를 감춘 <동양문화의 밤>과 <동양 7 개국 축구대회>, <캐나다 데이>에 이어 <한국 주간> 행사도 사라졌다. 23 대의 임기 중 본국에서는 현대 그룹의 주도로 남북한 간의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금강산 관광사업, 평화 대축제 등). 24 대 한인회(2000.12-2002.10)의 회장에는 김덕휘 씨가 추대되었다. 김 회장은 1975 년 토론토에서 이주해 온 초기 이민세대로서 몬트리올 사회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출범하면서 임원들에게 강조한 것이 “끝까지 함께 간다. 중간에 그만둘 사람은 지금 그만둬라”고 할 정도로 인화 단결과 유종의 미를 중시한 회장이기도 했다. 결국 24 대 한인회의 임원들은 끝까지 함께했다. 당시 김 회장과 함께 수고한 임원들은 부회장에 송재언, 이채화 씨를 비롯해서 총무 이진용, 재무 김병호, 기획 남용우, 체육 윤재수, 봉사부장에 김학창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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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7-8 년 전에 동포사회에서 발생했던 일련의 불미스런 사건들에 연루되어 곤두박질한 한인회의 신뢰를 만회하고 위상을 강화하는 것을 중점 과제로 설정한 김 회장은 출범하자마자 먼저 조찬 기도회를 열었다. 당시 조찬 기도회에는 종파를 초월한 많은 동포들이 참여하여 동포사회의 화합과 상처 치유를 기도했고 24 대 한인회의 앞날을 격려해 주었다. 24 대의 주요 업적은 1) 새 이민자 정착지원 사업 2) 사회봉사 활동 3) 불어학교 확대로 정리된다. 한인회의 신뢰 회복을 위해 김학창 봉사부장이 주도한 사회봉사 활동은 동포들이 입었던 마음의 상처를 많이 달래 주었고 실추되었던 한인회의 위상을 만회하는 데 기여했다. 행사와 사업의 기획을 담당했던 남용우 기획부장이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새 이민자 정착사업은 정착에 필요한 각종 정보 세미나의 개최는 물론이고 매우 세심한 서비스를 새 이민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동포들의 호평을 받았다. 예를 들면 새 이민자가 올 경우 공항에 마중을 나갔고 거주지를 알선했으며 운전면허와 자녀학교 선택을 조언하는 등 새 이민자가 초기정착에 필요한 전반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당시 이민 2 년 차였던 남 부장은 자신 같은 새 이민자들이 퀘벡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타주로 떠나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고 ‘한인 순수 투자자들의 퀘벡 주 진출 및 정착 유도를 위한 아이디어’를 내어 퀘벡 정부 관계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이진용 총무부장은 연례행사를 주도했고 윤재수 체육부장등과 더불어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를 성대하게 치러 냈다. 24 대는 광복절 체육대회를 동포사회의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로 선정해 연초부터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남녀노소가 참여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종목의 경기들과 어린이 사생대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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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기념 체육대회에서 달리는 400M 계주 주자들>

문화 활동으로는 국립합창단의 순회공연을 유치했으며 김동길 교수의 강연회를 열었다. 또한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고 한인회의 운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자선음악회(2001.4.7)를 개최했고 NDG 커뮤니티 센터가 주관한 NDG 다민족 복합문화축제(2002.5.18, Lower Canada College>에 200 여명의 동포들을 이끌고 참가하여 2,000 여명의 NDG 주민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2001 년 5 월에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캐나다 총연합회와 협력하여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정정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한편 이때부터 몬트리올 한인회가 운영하는 정부 불어학교의 학급수가 3 개로 늘어나게 된다. 정부 불어학교는 19 대 한인회(회장 서백수) 시절 정희수 교수와 임성숙 씨에 의해 1 개 학급이 유치된 후 21 대 한인회(회장 조한주)때 2 개 학급으로 증설된 바 있다. 한인회의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애쓴 24 대의 노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24 대의 2002 년 한해 살림 규모는 총수입 $31,285.50, 총지출 $36,249.58 이었고 미 입금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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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보조금 $6,000 을 감안하면 장부 상의 차기 이월금은 $1,035.92 였다. 별도 계정은 건축 적립금 계정 $14,911.61(이자포함)과 조의금 예치 계정 $5,972.23(이자 포함)이었다. 24 대의 임기중 특기사항으로 2001 년 9 월 11 일에는 미국에서 대규모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 붕괴와 미국 국방부 펜타곤 건물 피격으로 3 천여 명이 사망함). 이후 국가 안보를 사유로 캐나다 연방 이민법이 점차 강화되어 이민 문호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2002 년에는 고국에서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렸다. 한국이 4 강까지 진출했던 당시 월드컵의 열기는 몬트리올에서도 매우 뜨거웠다. 한국이 16 강에 오르고 다시 8 강에 오르자 퍼레이드를 펼치자는 동포들의 성화가 빗발쳤다. 그러나 김 회장은 퍼레이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참고 또 참았고 드디어 4 강! 한꺼번에 터뜨린 퍼레이드에는 동포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그날 퍼레이드가 열렸던 셰르브룩 길은 붉은 빛 일색이었고 서울 한복판 같았으며 그들이 외치는 함성은 태평양을 건너 잠실에 닿을 만큼 컸다. 예산 집행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강조했던 김덕휘 회장이 인터뷰 말미에서 후배 한인회장들에게 남긴 말은 “광복절 행사의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몬트리올 동포사회의 확장을 위해 노력해 달라”였다. 25 대 한인회(2002.11 – 2004.9)의 회장은 24 대에서 여성 부회장으로 수고한 이채화 씨가 이어받았다. 24 대의 임기가 종료된 후에도 한동안 차기 선장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던 한인회호를 우선 붙들어 세운 이채화 씨는 부회장에 정기채 씨와 전기병 씨(총무 겸임), 기획부장에 임명규 씨, 봉사부장에 노연 씨, 재무부장에 최광성 씨, 홍보부장에 김홍래 씨, 문화부장에 김남식 씨, 섭외부장에 박정만 씨, 그리고 학생부장에 노토비 씨를 임명했다. 애당초 부회장으로 섭외했던 황규택 씨가 사의를 표하고 이사장 선출에 차질을 빗는 등 25 대의 출항은 순조롭지 못했다. 그러나 이 같은 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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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도 이 회장은 2003 년도의 사업 계획을 세우고 차분하게 임기 첫해의 업무를 시작해 나갔다. 한인회 역사상 최초의 여성회장인 이채화 회장이 이끄는 25 대가 2 년간 중점적으로 추진한 일은 몬트리올 동포사회에 봉사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과 한인회관의 건립을 추진한 것이었다. 사회봉사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하여 이 회장은 일선에 드러나지 않고 동포사회를 위해 노력한 숨은 봉사자들을 찾아내어 한인상을 수여했다. 첫 한인상은 광복절 기념행사(2004. 8.14, 한국의 날)에서 김삼철 씨, 김학창 씨, 유동진 씨에게 수여되었다. 한인회장이 수상자를 독단적으로 결정했다는 여론도 일각에서 있었으나 이사회나 총회에서 공개적으로 결정할 경우에는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더라도 만약 수상 후보자의 일부 단점이 부각될 경우 공로가 희석되는 단점이 있을 수 있다는 이 회장의 주장을 지지하는 동포들도 많았다. 이외에도 이 회장은 사회봉사 활동 자원봉사단을 구성하여 각종 육아/교육/취업 정보를 동포들에게 제공하고 노년 회원들의 생활을 보조하는 활동을 펼치려고 했으나 재정 등의 여건이 허용되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채화 회장의 임기 두 번째 해인 2004 년은 한인회관 건립기금 모금 운동에 25 대의 총력을 기울인 한 해였다. 이 회장은 먼저 한인회관 건립추진 위원회부터 구성했다. 이후 이 회장은 이 사업을 동포 숙원사업으로 칭하고 전 동포 벽돌쌓기 참여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노무현 대통령에게 편지를 발송하는 등 총영사관을 경유하여 본국 정부에도 협조를 요청했다(40 만불 지원요청). 그러나 결국 재외동포재단으로부터는 지원자금이 오지 않았다. 추대 2 주 만에 초대 위원장직을 사임한 유봉성 씨의 뒤를 이어 위원장직을 승계한 이 회장은 기구를 정비하고 강력하게 모금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회장의 추진력은 매우 집요했고 강력했다. 이 회장의 모금 활동은 공연과 바자회로 나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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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되었다. 한국의 유명 장애인 피아니스트 이희아 양의 특별자선 콘서트(2004.3.13), 한국의 색동회가 주관하는 심청전의 캐나다 순회공연(2004.8.9), 몬트리올 여성합창단 자선공연(2004.11.20)등을 유치해서 동포들의 성금을 모았다. 또한 이 회장은 2 회에 걸친 바자회와 한인회장배 골프대회를 통해서도 건립기금을 모금했다. 이채화 회장은 한인회 산하에 별도의 비영리 단체인 CCCQ(퀘벡 한국문화 센터, Centre Culturel Coréen du Quebec, 2004. 7.23)를 설립하고 회관건립을 위해 그간 모인 각종 기금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이로써 2004 년 12 월 현재 한인회관 건립기금 총액은 3 개 계좌 55,443.30 달러가 되었다(18 대 이후 전해 내려온 적립금 $15,477.22 + 22 대 때 생긴 곽성문 조의금 $6,142.56 + 25 대 모금액 $33,823.52) 25 대는 이밖에 연례적인 행사들을 치렀고 복합문화 교류행사로는 NDG 커뮤니티 센터가 주최하는 문화행사에 참여해서 한국문화 공연을 주관했다. 2003 년 6 월에는 한국국립 교향악단의 몬트리올 순회공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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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끝내면서 이채화 회장은 임기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25 대 한인회는 몬트리올 동포들간의 친목과 화합을 도모하고 현지인과의 유대를 강화하며 지역 발전에 공헌하는 생활 속의 한인회가 되려고 노력했다” 26 대가 정부에 보고한 25 대의 2004 년 한해 살림 규모는 총수입 $55,062 총지출 $39,070 이었고 장부 상의 차기 이월금은 $2,848 이었다.

6.5

도약기(2005-2008 년)의 한인회

“고인 물이 썩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듯 긴 세월을 정체 속에 흘러온 동포사회가 발전하려면 먼저 한인회가 변화해야 한다” 이것은 2006 년 1 월 한카타임즈에 실렸던 이희재 박사(제 2 대 퀘벡 한인 이주사 편찬 위원장)의 신년 인사글 중 일부다. 2000 년대로 접어들면서 30-40 대 독립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이 같은 변화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 즈음 한인회의 회장단이 그것을 경청했고 이후 몬트리올 한인회의 도약이 시작되었다. 동포들의 소리를 경청한 결과는 한인회관이 3 천 6 백 평방피트로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고 젊은세대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 곳에 가득하게 했다. 또한 사무처 중심의 운영체제가 도입되어 중요사업을 지속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연간 살림 규모가 10 만 달러를 넘어 20 만 달러에 근접하는 대도약의 시대도 열었다. 한인회의 변화를 바라는 동포들의 목소리가 도약의 기반을 만들었고 그 기반 위에 든든한 대들보가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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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약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몬트리올 한인회는 대도약이 시작된 26 대 이후 지금까지도 변혁의 진통을 겪고 있다. 이에 진보적 대변화가 시작된 2005 년 이후 4 년간을 ‘몬트리올 한인회의 도약기’로 칭하고, 당시에 ‘좀 특별났던 십 여명’이 다른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서 일구어 낸 귀한 업적들을 이주사에 기록하여 훗날에 후세들이 한인회의 발전을 위해 유용토록한다. 26 대 한인회(2004.12 - 2006.10)의 회장에는 염동준 씨가 추대되었다. 정희수 박사와 임성숙 교수가 염 회장의 특별고문으로 위촉되었으며, 임원으로는 부회장에 이진용 씨와 윤재희 씨, 총무부장에 육순붕 씨, 문화부장에 한광수 씨와 조영옥 씨 부부, 교민지원부장에는 안효상 씨, 그리고 재무와 홍보를 담당하는 기획실장으로 김영권 씨가 임명되어 26 대 한인회를 이끌었다. 25 대부터 일해 온 사무장 김명원 씨와 새롭게 합류한 사무장 김은영 씨는 박봉조차 반납해 가며 엄청난 업무량을 감당해냈다. 염동준 회장의 26 대는 몬트리올 동포사회를 크게 일깨우고 퀘벡 주류사회로 한걸음 도약시킨 변혁의 시대로 이주사에 기록된다. 용병술과 화술이 남달리 뛰어났던 염 회장과 그의 비전을 믿고 미친듯이 활약한 일곱 명의 임원들과 고문, 그리고 임원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밤낮없이 일한 사무장들이 동포사회에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일으켰다. 그들의 외침은 잠자는 다른 동포들을 흔들어 깨웠고 동포사회가 변화해야 할 시기임을 깨닫게 했다. 그러나 동포들의 호응과 함께 일각에서 반발도 있었다. 물론 우리끼리만의 울타리를 넘어서 동포사회를 퀘벡 현지사회 속으로 이끌어 가려는 26 대의 노력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동포들의 수가 훨씬 더 많았지만 ‘한국계 캐나다(퀘벡)인’이 아닌 ‘퀘벡 속의 한국인’으로 고립된 삶을 고집하는 수구보수층 동포들도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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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대는 그들이 ‘이사’ 온 사람이 아닌 ‘이민’ 온 사람임을 인식시키려 애썼고 그들의 후손이 이 땅의 주인이 되기를 바랐다. 이웃 민족사회와 교류하고 현지정부와의 관계를 강화해서 인맥(네트워크)을 형성하고 동포 후손들이 퀘벡 사회에 진출하는 데 힘이 되는 1 세들이 되자고 호소했다. 대한민국을 고국으로 가진 한국계 캐나다인으로서 사회와 문화, 그리고 정치적인 행동 패턴을 바꾸어 가자고 설득했다. 그래서 우리도 더 이상 외부인이 아닌 ‘이 땅의 주인이 되자’라고 26 대 임원들은 외쳤다. 실제로 염동준 회장과 그의 임원들은 몬트리올 한인회의 반세기 역사상 가장 많은 활동을 펼쳤다. 그 활동의 성격은 매우 진보적이었고 사업의 내용중에는 민족대표단체로서의 역할(정체성 보존과 대외교류)이 분명하게 담겨져 있었다. 26 대는 연례적으로 치러오던 행사들 외에 2 년 동안 70 여 개의 사업과 행사를 치러냈다. 행사나 사업이 기획되면 즉시 프로젝트 팀(TFT)이 형성되어 준비에 돌입했다. 염 회장 자신도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어 팀장으로부터 역할을 부여받았으며 모든 팀원들은 팀장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임원들은 자신이 속한 팀원으로서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함과 동시에 각자가 담당한 책무도 진행했다. 그 결과 2005 년 한해 동안에만 46 개라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횟수의 행사와 사업이 가능했다. 거의 매주 사업 또는 행사를 치른 것이다. 일부 동포들이 염 회장에게 “26 대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하면 누가 차기 한인회장을 하려고 하겠느냐?” 라고 농담할 정도였다. 염동준 회장과 임원, 그리고 사무장들이 2 년 동안 추진한 수많은 사업들을 그룹별로 분류해 정리하면 26 대의 주요업적은 1) 타민족과의 문화교류 사업 2) 사회, 문화, 정치 측면에서 퀘벡 사회 참여 활동 3) 복합문화 및 정착지원 사업 4) 차세대 육성사업 5) 동포사회의 미래기획 사업 6) 컬러판 주소록 발간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인회의 살림 규모도 크게 증가하여 한인회 설립 41 년 만에 처음으로 연간 수입규모 10 만불 시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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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었다(정부에 보고된 2005 년도 결산자료 기준: 수입 $104,922, 지출 $83,684). 지출항목을 살펴보면 26 대가 얼마나 의욕적인 사업을 펼쳤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데 지출총액 중 63%가 행사 및 사업용 지출이었고 사무장의 인건비는 겨우 13%에 불과했다. 주요 수입항목은 사업수익 40%($40,412), 기부금 25%($25,248), 그리고 불어학교 보조금 16%(15,960)순 이었다. 당시 정기총회에 자료에 따르면 2 년 동안 26 대의 총 살림 규모는 약 16 만 달러였고 차기 이월금은 $2,848.23 이었다. 별도계정은 건축 적립금 $15,979.88(Mutual Fund, 이자포함), 곽성문 조의금 $6,303.76(Term Deposit, 이자포함), 벽돌쌓기 기금 $36,920.77 (CCCQ, 26 대 모금액 $3,470 및 이자 포함)등 3 개 계좌에 총 $59,204.41 였다. 염동준 회장은 <문화회장>으로도 불린다. 그는 임기 내내 문화행사를 개최해서 동포들을 즐겁게 했고, 과거 수년간 주춤했던 대외 문화교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26 대 문화사업의 중추는 단연코 부부 문화부장 한광수 씨와 조영옥 씨였다.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 ‘가람 무용단’을 이끌었던 이들 부부 임원은 수많은 문화행사를 연출, 지도하고 때로는 직접 참여도 했는데, 한인회가 주관한 두 차례의 퀘벡 국경일 축제(Fête Nationale du Québec), 몬트리올 시청이 주최하고 19 개 소수민족이 참여한 복합문화 세계축제(Les Week-Ends du Monde), 중국 한인회 축제(Moon Festival), 전통 궁중악극 황진이 공연, 오타와 문화행사 참여, 매길대 한국문화의 밤 연출 등을 그들의 대표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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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ête Nationale du Québec 축제, 2005.6.24>

물론 중국민족사회가 매년 개최하는 신년문화행사 (performing arts ‘SHEN YUN’)와는 그 규모와 조직력을 비교할 수 없겠으나 당시 두 민족사회의 규모 차이(한국동포수 6 천 여명, 중국동포수 15 만 여명)를 감안할 때, 이 두 임원이 추진한 문화교류 활동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당시 이들은 개인적으로 엄청난 양의 한국전통의복과 전통악기들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 소장품들이 한인회의 수많은 전통문화행사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2 년 후 이들 부부가 미국 텍사스로 이주함에 따라 몬트리올 동포 자력으로 대규모 한국전통 문화행사를 개최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들은 보물이었고 그들이 몬트리올에 산다는 것은 동포사회의 축복이었으나 동포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정희수 특별고문이 추진한 복합문화 프로젝트에는 우리 동포는 물론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소수민족들이 동참했고 퀘벡 정부로부터 $15,000 의 사업자금을 지원받아 한인회의 재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복합문화 사업의 주제는 경제, 역사, 진학, 취업, 인종차별, 이민정착 등 매우 다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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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년 7 월 7 일 한인회가 주최한 영화제에 영화 <하류인생> 상영권을 기부하고 극장 대관료를 대납하는 등 26 대가 심혈을 기울인 주류사회 진출사업의 첫 장을 제공한 이미정 영화감독의 기여는 특기할 만한 일이다.

<주류사회 진출운동의 첫 장이 된 영화제 ‘하류인생’> 2005 년 말에는 컬러판 주소록을 발간 배포했는데 육순붕 총무와 김은영 사무장의 노고가 컸다. 윤재희 부회장은 타민족 업체들로부터 많은 광고를 수주해서 주소록 발간 사업수익에 크게 기여했다. 안효상 부장은 Fête Nationale du Québec 을 유치했고, 이진용 부회장은 신년하례, 3.1 절, 광복절 체육대회, 송년회 등 연례행사를 진두지휘하고 홍승남 씨와 함께 복합문화 세계축제 행사의 사회를 보았다. 그가 의욕적으로 준비한 2005 년 송년회에는 폭설에도 불구하고 338 명의 동포들이 참석했다. 한편 한인회관의 건립과 관련한 사업으로 26 대는 25 대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건립기금 모금 활동을 지속하는 한편, 몬트리올 시 정부로부터 시 소유의 건물을 무상으로 임대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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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 복합문화 회관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대안으로 개발하고 병행하여 추진했다 (26 대의 벽돌쌓기 기금 모금액 $3,470).

<몬트리올 시청을 방문한 26 대 한인회> 이를 위해 염 회장단은 2005 년 8 월초 몬트리올 시청을 방문해서 트랑블레(Tremblay) 시장과의 면담을 신청했으며, 관련 책임자인 마르셀 트랑블레 씨를 만나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복합문화회관 무상임대 방법에 관한 조언을 받았다. 이 밖에도 26 대는 정치참여 활동 (몬트리올 시청 방문, 트랑블레 몬트리올 시장 선거 지원, 연방 자유당 후원 등), 타민족과의 교류 활동(중국 및 인도네시아 한인회의 각종행사 참여) 열린 음악회, 영화제, 인도네시아 쓰나미 재해 모금, 일본의 역사왜곡 항의시위, 진학진로 간담회, 신규 이민자 세미나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2005 년 5 월 열린 음악회에는 로마에서 날아온 수십 명의 한인 성악가들이 참여했으며, 그해 3 월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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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어졌던 일본의 역사왜곡 항의 시위 때는 수백 명의 동포들과 함께 머리띠를 두르고 북과 꽹과리를 울려가며 그들의 만행을 성토했다. 9 월의 진학진로 간담회에는 일곱 명의 동포 차세대 유망주(장은혜 의대생, 류아람 법대생, 서정권 육군대위, 김유하 RCMP 경찰관, 필립박 변호사, 김영지 CA, 김재훈 약사)들이 참여하여 50 여명의 후배들에게 꿈을 심어 주었고 학부모들의 수많은 질문 공세를 받았다. 동포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연구하고 이에 따른 주요사업들을 기획해서 염 회장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김영권 기획실장이 가장 열정을 쏟아 부은 사업은 차세대 육성사업(코코모 사업)과 동포사회의 미래 청사진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동포인사들의 중지를 모아 몬트리올 동포사회의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하여 그는 <몬트리올 동포사회 미래기획 시리즈>를 기획했고 2006 년 1 월부터 7 월까지 4 개월간 매주 동포신문에 인사들의 기고문을 게재함으로써 동포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계몽했다. 당시 미래기획 시리즈(주제: 몬트리올 동포사회의 당면과제와 선택)의 기고자로는 90 대의 오기송 박사를 비롯 이희재 박사, 정희수 박사, 정재호 박사, 이광규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박준수 씨, 박재영 박사, 김유대 변호사, 권해룡 부총영사, 김광오 목사 등(기고순) 학계, 정계, 법조계, 종교계의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26 대가 임기를 마친 후에도 차기 회장 후보자가 나타나지 않자 한달 후의 총회에서 특별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006 년 10 월 말에 열린 한인회의 정기총회는 정희수 당시 노년회장, 이재욱 당시 실협회장, 그리고 26 대의 임기 종료 후 한인회에 잔류 중이던 김영권 전 26 대 기획실장을 특위의 3 인 위원으로 임명했다. 41 년 한인회 역사상 소위 대책위원회(수습위,운영위 포함)는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번 존재했다. 그러나 26 대와 27 대 사이에서 약 5 개월간 활동했던 특별대책위원회(2006.112007.3, 위원장 정희수, 이하 특위)는 말 그대로 ‘좀 특별난 위원회’였다. 당시까지의 관례대로라면 이들 위원 3 인의 임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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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회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차기 회장을 물색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특위는 일반적인 관례를 깨고 다섯 달의 짧은 기간 동안 몬트리올 한인회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출범 한 달 후인 2006 년 12 월 초 특위는 퀘벡 정부로부터 불어학교 교육환경 개선명령을 받았다. 당시 한인회는 19 대 이후 약 35 평의 공간을 순복음교회에서 임차해서 정부불어 수업을 유치해 오고 있었다. 몬트리올 한인회가 정부 불어학교를 운영하는 대가로 퀘벡 정부로부터 받는 불어학교 운영지원금(연간 약 1 만 2 천 달러)은 당시 한인회의 생명줄과도 같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정부의 지적 사항은 수업환경을 비롯해서 비상구, 화장실, 행정 서비스 개선 등 총체적인 것이었고 만일 개선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때는 한인회의 정부 불어학교를 폐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기간도 촉박해서 한 달 내인 2007 년 1 월 8 일 불어학교 겨울학기 개강 이전까지 시설개선 명령을 모두 이행해야만 했다. 만일 지원금이 끊긴다면 한인회가 재정적으로 치명타를 입고 폐쇄될 위기까지 몰릴 수도 있는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런 경황 중에서 사무실을 사무처로 승격시키고 초대 사무총장이 된 김영권 특위위원은 설명회를 열어 이 같은 위기상황을 동포들에게 알리고 자원 봉사자들을 모아 곧 바로 개보수 확장 공사에 착수했다.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연말연초와 주말은 물론이었고 개강이 임박했던 신년 초에는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공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막상 공사를 시작해보니 노후된 건물인 탓에 공사 범위가 확대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른 공사비용도 크게 증가했다. 특위는 총 공사비($40,279.83)를 조달하기 위해서 한글 도서관 건립기금 ($13,052.00)을 모금했으며 나머지는 김 총장이 사비를 차입해서 충당했다(이 차입금은 후일 건립기금 계좌에서 지출, 모두 상환되었다). 김 총장은 16 명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직접 75 일간의 대공사를 강행한 끝에 드디어 2007 년 3 월 3 일 한인종합회관을 개관했다. 이날 개관식에는 캐나다 연방과 퀘벡 주에서 4 명의 현직장관을 비롯한 6 명의 국회의원들과 타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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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들, 그리고 수많은 동포들이 참석하여 몬트리올 한인회와 동포사회의 앞날을 축하해 주었다.

몬트리올 한인종합회관의 현판이 걸리는 순간 그 추운 겨울을 더운 땀으로 녹였던 자원봉사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참석한 정부 고위인사들의 통역과 안내는 정치인의 푸른 꿈을 품은 20 여명의 코코모(KoCoMo: Korean Community of Montreal) 청년회원들과 차세대 유망주들이 완벽하게 소화해 냈고, 청년회원 중 한 명은 이 기회를 통해 연방정부 기관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후 한인회관에는 그동안의 숙원이었던 사무처가 신설되었고 산뜻하게 단장된 사무환경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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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회관 개관식> 연방 국회의원, 정희수 위원장, 이창규 10 대 노년회장

특위의 사무장으로써 실명 직전까지 가며 고생했던 이장규 씨는 훗날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추위와 먼지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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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는 자원봉사자들을 오른쪽 눈으로 바라보면서 왼쪽 눈 아픈 것을 잊었었다”.

<도서관내부를 돌아보며 축하의 인사를 전하는 각국 소수민족 대표들>

그해 여름 퀘벡 정부는 불어학급의 추가 유치를 요청해왔고 불어학급 수가 종래의 3 개에서 11 개로 대폭 늘어났다. 풍전등화의 위기가 전화위복의 기회로 할용된 것이다. 한편 당시 몬트리올 한인회와 함께 시설개선 명령을 받고도 이행하지 않은 이웃 NDG 의 Le centre multi-ethnique(당시 13 개 불어학급 운영)는 6 개월후 폐쇄되었다. 몬트리올 한인종합회관의 개관은 당시 혹독했던 몬트리올의 겨울을 녹였던 16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이룩한 거룩한 업적이었다. 특위와 자원봉사자들이 벼랑 끝에 섰던 몬트리올 한인회를 구해낸 것이다. 폐쇄 직전에서 최고등급으로 혁신된 교육환경은 정부불어 담당관과 강사, 그리고 학생들에게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절대절명의 불어학교 폐쇄위기를 한인회를 혁신시키는 기회로 역전시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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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위위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은 “공산당이 한인회를 장악하고 이상하게 끌고 간다”라는 어이없는 모함과 시기, 질투를 받았고 봉사의욕을 잃은 이들 중 대부분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인회를 떠나갔다. 당시 특위위원들을 도와 몬트리올 한민족 역사를 빛낸 열여섯 자원봉사자들은 ‘이장규, 최경택, 장건순, 맹정기, 봉운선, 이영호, 정문성, 정찬영, 정찬휘, 윤상진, 김민수, 이재홍, 맹성재, 김동천, 이강중, 박희균 씨’다. 또한 긴 공사 기간 내내 그들에게 따듯한 점심 식사를 제공했던 순복음교회 여선교회 성도들의 수고도 한민족 역사에 함께 기록한다. 한편, 한인회관의 대공사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개관준비와 함께 김 총장이 머리 아프게 고민한 것은 몬트리올 동포사회의 실질적인 중심기능을 한인회관에 부여하는 방법이었다. 그의 고민은 한인회관에 첨단 정보통신기술(Home PBX System)을 도입하고 동포업체들을 입주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정보통신분야의 전문가였던 김 총장은 이를 위하여 2007 년 2 월 인터넷 서비스 공급업체(ISP)를 선정하고 한인회관의 전화와 인터넷을 통합시켰다. 지금은 인터넷 전화가 가정마다 보급되었고 통신, 압축, VOD, AOD 등 첨단기술의 발전으로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결정이었다. 이로써 전세계 어디서든지 몬트리올 한인회관의 전화번호만 누르면 동포사회의 단체와 업체, 그리고 나아가서는 동포들의 가정과 쉽게 연결되어 저렴하게 통화할 수 있는 동포사회의 첨단 인터넷 대표전화 시스템이 마련되었다. 이어서 한인회관에 다섯 개의 동포 업체를 입주시켜서 동포들이 회관을 자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해 냈고 더불어 한인회관의 운영재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해 겨울 다섯 달 동안 특위가 이룬 주요업적은 1) 한인회관 개보수 확장 공사 2) 사무처 신설 3) 한글 도서관의 설립 4) 한인회 중장기 발전계획의 수립이다. 특위의 살림 규모는 약 7 만 8 천 달러였다(수입 $29,325.28, 지출 $77,798.12 회관 확장 공사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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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위가 75 일간에 걸친 한인회관 대공사를 한창 진행 중이던 2007 년 1 월경 몬트리올 동포사회의 일각에서 노재일 씨를 차기 한인회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2007 년 3 월 3 일 한인회관의 개관식을 끝낸 직후 특위(위원장 정희수, 당시 노년회장)는 몬트리올 한인회의 임시총회를 개최했다(2007.3.31). 그날 총회에서는 한인회관 개보수 확장 공사 중 발생한 부채 전액을 한인회관 건립기금에서 지출할 것을 결의한 후에 27 대 한인회(2007.4 - 2008.10)의 회장에 노재일 씨, 그리고 부회장으로 김영권 씨와 백순희 씨를 선출했다. 노재일 회장은 정희수 박사를 특별고문에 위촉했고 총무부장에 방성섭 씨, 재무부장에 김상렬 씨, 그리고 봉사부장에 이영구 씨를 27 대의 임원으로 임명했다. 유급 사무장으로는 정기채, 고희승, 남궁민, 이정현 씨 등이 수고했다. 27 대 한인회의 주요업적으로는 1) 한인회 운영재정의 확대 2) 사무처 중심 운영체제의 확립 3) 차세대 육성사업의 추진 4) 정착지원 사업의 추진 5) 주류사회 교류 활동 등을 꼽을 수 있다. 특위기간 중의 회계 감사 및 공사 차입금 상환 건을 선결하고 임기를 시작한 27 대는 이후 다방면에서 의욕적인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노 회장은 출범 직후 열린 확대 임원회의의 결정에 따라 김영권 부회장을 다시 사무총장에 겸임시켰다. 이후 노재일 회장은 한인회의 운영체제를 종래의 임원 중심에서 사무처 중심으로 바꾸고 연례행사(신년하례, 삼일절, 광복절, 송년회)와 정착지원 사업, 복합문화 사업, 그리고 차세대 육성사업 등을 단계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방성섭 총무부장 등 임원들과 사무장들이 한마음이 되어 준비한 광복절 체육대회와 송년의 밤 행사는 수많은 동포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정희수 특별고문은 26 대에 이어 27 대에서도 각종 특강 및 세미나(퀘벡 경제, 세대갈등 해결 방안, 직장 성공 전략, 부동산 투자 전략 등)를 추진하고 퀘벡 정부로부터 $12,000 의 사업자금을 지원받았으며, 대형버스를 빌려서 신규 이민자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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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투자유치 희망지역 (퀘벡 시, 셔브루크 방문하는 등 활발한 정착지원 활동을 펼쳤다.

시)을

직접

2007 년 6 월, 김영권 사무총장의 예상대로 NDG 의 다른 불어학교(Le centre multi-ethnique)가 폐쇄되었고 몬트리올 한인회에 불어학급을 증설하겠다는 소식을 퀘벡 정부가 전달해 왔다. 그때 까지도 운영자금을 걱정하던 노 회장에게 이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기쁜 소식이었다. 임성숙 고문이 나서서 퀘벡 정부와 협상끝에 불어학급을 11 개로 계약했다. 이에 따라 약 7 만 5 천 달러(2006 년 지원금 $12,800)로 대폭 늘어 난 불어학교 지원금을 받게 된 한인회의 재정 운영능력은 총 10 만 달러를 웃돌게 되었고 사무처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2008 년 10 월 22 일 정기총회에 보고된 27 대 한인회의 2007-08 회계년도(2007.10.1-2008.9.30) 살림 규모는 수입 $124,696.72, 지출 $116,287.83, 차기 이월금 $8,408.89 으로 이때부터 한인회의 한해 지출규모가 10 만 달러를 넘어서게 되었다. 주요수입 내역은 교육사업 수익금 $47,009.48(37.7%, 정부 불어 $42,883.08, 정부 영어 $2,195.00, 문화강좌 $1,931.40) 한인회관 유휴공간 임대사업 수익금 $19,643.75(15.8%)이었고 주요지출 내역은 사무처의 사무장 인건비 $34,921.90(30.0%) 회관 임차비 $21,650.00(18.6%)였다. 즉 27 대는 교육사업 수익금으로 사무처를 운영하고 사무처가 중심이 되어 한인회의 각종 사업과 행사를 실행했다. ‘한인회장을 하려면 2-3 만 달러를 써야 하고 임기 동안 회장을 위해 고생할 6-8 명의 임원이 있어야 한다’라는 당시까지 동포사회의 일반적 통념이 반세기 만에 바뀐 것이다. 사무처를 책임지게 된 김 총장은 사무장으로 정기채 씨와 고희승 씨를 영입하고 생산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한인회관 사무처 운영체제를 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무처 주간회의 제도를 신설하여 사무장들의 업무효율을 높였고 기업식 경영개념을 도입시키려고 노력했다. 또한 사무처는 안으로 한글 도서관을 안정화시키고 밖으로는 코코모 봉사대를 운영하는 등 차세대 육성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20 여명의 청소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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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된 코코모 봉사대는 한인회관 확장공사 및 개관식 통역, 한글도서 수집활동, 세계장애인대회 통역, U-20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한국선수단 및 동포응원단 지원, 그리고 한인회의 각종 행사를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 U-20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응원장면>

노 회장의 27 대가 추진한 정착지원 사업으로는 문화강좌의 개설을 비롯해서 정부 영어학교의 유치, 정착정보 특강 및 세미나 개최 등이 있었다. 김 총장은 ‘강사들에게는 나눔의 기쁨을, 수강생들에게는 배움의 기쁨을 주자’라는 취지로 문화강좌를 기획했고, 2007 년 5 월부터 11 월까지 약 7 개월간 500 여명의 동포 수강생들이 참여하는 대성공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당시 코코모 문화강좌의 강사로는 박희균/윤기찬(불어), 황성희/김은영(영어), 박효숙(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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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천(컴퓨터), 최경원(퀼트), 서영수(서예), 정화자(미술) 씨 등이 크게 수고했다. 코코모 문화강좌는 귀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이민 와서 아까운 재능을 묻어둔 동포들을 위해 한인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문화강좌 퀼트반 학생들이 제작중인 초대형 태극기>

또한 27 대는 주류사회 교류활동으로 퀘벡 주간 문화행사를 한인회관에서 개최했다. 정기채 사무장을 중심으로 사무처가 기획한 이 행사에 이스라엘 민족을 초청하여 한국 전통무용과 이스라엘 민속무용을 공연하는 등 문화교류 활동을 했고 코코모 문화강좌 강사들의 지원을 받아 작품전시회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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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과 발전

< 퀘벡주간 문화행사에서 손지혜 씨와 퀘벡 할머니>

한편, 26 대에 이어 지속적으로 추진된 복합문화/주류사회 교류사업은 퀘벡 주정부 장관들을 한인회관 개관식에 대거 참여시키고 몬트리올 한인회가 퀘벡 국회에 초청되는 결과를 낳았다. 퀘벡 국회의장의 초청을 받아 50 명의 동포들과 함께 방문한 퀘벡 국회에서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부를 때는 그 자리의 모든 동포들이 눈시울을 붉혔고, 퀘벡 탄생 400 주년 기념식에서는 한국 동란에 참전한 퀘벡 용사들에게 감사의 마음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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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국회의사당에 초대되어 퀘벡 국회의장, 퀘벡당 당수 등 퀘벡 정치인들과 자리한 몬트리올 동포대표 50 인 (200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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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이은 모함성 조작사건(공산당의 한인회 장악 음모설과 노년층 비하성 인터넷 댓글 사건)들의 진위를 분별하지 못한 몇몇 노년회원들이 김영권 사무총장의 퇴출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이를 악용한 외부세력이 한인회의 행사를 보이콧하는 등 노재일 회장에게 조직적인 압력을 가함으로써 결국 2008 년 3 월 8 일 김 총장이 개인사정을 구실로 사임했다. 그가 26 대 기획실장 시절과 특위위원 시절, 그리고 27 대 부회장 겸 사무총장 시절에 동포사회의 인사들과 함께 수립해서 추진해오던 몬트리올 동포사회 발전 프로젝트는 열한 가지였다(청사진 개발, 차세대 육성, 사무처 신설, 한글도서관 설립, 문화강좌 개설, 정착센터 설립, 정보센터 설립, 청년상공회의소 설립, 문화원 설립, 체육회 설립, 복지관 설립). 그러나 프로젝트들의 중심에 있던 김 총장이 사임함으로써 그중 시작도 하지 못한 여섯 가지 프로젝트와 몬트리올 한인회관을 NDG 지역의 복합문화와 교육, 그리고 청년활동의 중심지로 부상시키려던 그의 꿈은 역사 속에 묻혔고 그때까지 활발하게 추진되어 오던 차세대 육성사업(일명 코코모 사업)도 중단되었으며 함께 일하던 젊은이들도 사라졌다.

6.6

소강기(2009 년- )의 한인회

27 대의 임기가 종료되고 차기 회장후보로 여러 사람이 거론되었으나 결국 이춘홍 씨가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28 대 한인회(2008.11 – 2010.10)의 회장이 되었다. 28 대의 임원은 이 회장을 포함해서 남성 부회장 정장호 씨와 여성 부회장 송인령 씨 세 명이 전부였다. 이에 따라 임원들이 분주하게 활동하며 각종 행사를 추진하던 과거와는 달리 28 대는 사무처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다. 남궁민, 권남수, 이정현, 류소은, 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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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과 발전

씨 등 다섯 명의 사무장들이 연이어 풀 타임 또는 파트 타임으로 근무하면서 모든 업무를 수행했다. 한인회관 확장 3 년째인 2010 년에 접어들면서 한인회가 운영하는 정부 불어학교는 11 개 반에 모두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수강 신청자가 흘러 넘쳤고 이에 따라 약 8 만 달러에 달하는 불어학교 지원금을 받았다. 이는 1965 년에 몬트리올 한인회가 설립된 이래 45 년 역사상 최대규모의 정부지원금이었다. 2007 년에 특위가 한인회관을 확장하지 않았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엄청난 정부지원금 혜택을 2008 년도부터 매년 받게 된 것이다. 덕분에 이 회장은 이 자금으로 사무처 사무장들의 월급을 주고 한인회관 임대료를 냈으며 전대 회장단과는 달리 운영자금에 관한 큰 걱정없이 한인회장의 임기를 채웠다. 2010 년 11 월 20 일 정기총회에 보고된 28 대 한인회의 2009-10 회계년도 살림 규모는 수입 $134,791 지출 $120,446 이었다. 한편, 사무처가 27 대 이후 지속사업으로 추진한 문화강좌에는 한글반을 비롯해서 중국어반 등 언어강좌가 강화되었고 많은 외국인들도 참여했다. 2010 년 한해 16,202 달러의 수입을 기록한 문화강좌는 한인회의 재정에도 크게 기여하는 문화사업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문화강좌의 강사로 수고한 사람들은 박희균(불어), 김은영(영어), 권남수(한글), 김민선(중국어), 김동천(컴퓨터), 이강중(컴퓨터), 서영수(서예) 씨 등이었다. 김동천 이사가 직접 개발하고 운영까지 담당한 새로운 한인회 웹 사이트는 한인회 소식과 함께 다양한 생활정보들을 동포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28 대의 주요업적은 한인회 산하에 한글학교(다민족 언어 및 문화학교, 초대교장 임성숙 교수)를 운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임시총회를 열었고 정관을 개정하여 한글교육을 한인회의 사업목적에 추가했다. 그러나 28 대의 사업 보고서에는 대외교류활동 등 현지사회화 지원사업에 관한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다. 동 보고서를 살펴보면 28 대는 신년하례, 삼일절, 광복절, 송년회, 골프대회 같은 친목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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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과 발전

연례행사에 다시 치중한 흔적이 있다. 즉, 퀘벡 현지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숨 가쁘게 달려왔던 전대들과 비교할 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우리 민족끼리’의 우물속 2 년이었다. 한편 28 대 이춘홍 회장의 임기중에는 ‘이사경선’ 사건과 ‘29 대 한인 회장단 선거연기’ 사건 등 시끄러운 사건들이 정기총회가 열릴 때마다 발생했다. 이사경선 사건은 2008 년 11 월 22 일 한인회 정기총회장에서 원로들을 비롯한 많은 동포들이 28 대 선관위의 이사선거 진행상에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며 격렬하게 항의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30-40 대 젊은세대의 참여를 가로막고 몬트리올 한인회의 혁신을 중단시키는 뼈 아픈 계기가 되었다 (http://www.montrealkorean.com 2008 년 정기총회 동영상 참조).

몬트리올

한인회

사이트

또한 2 년 후인 2010 년 11 월 20 일 총회에서는 한인 회장단 선거가 연기되는 역사상 초유의 소란이 발생했다. 동 웹 사이트에서 2010 년 정기총회의 동영상을 살펴보면, 29 대 선거관리위원회는 “세 가지 이유로 공정하고 합법적인 선거를 진행할 수 없다”라며 당일 선거를 연기시키고 있다. 세 가지 이유는 <1. 투표장에서 폭력발생 2. 신문의 투표시간 오보 3. 정장호 후보 측 여성 부회장 사퇴> 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동영상에는 29 대 선관위가 선거연기를 선언하고 퇴장한 후에도 일부 동포들이 남아서 선관위의 연기결정을 번복시키려고 애쓰는 장면과 선관위가 총회장에 다시 들어오지 않자 다른 선거관리조직을 구성하고 그 조직이 29 대 한인회장을 선출하고 있는 장면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한인회의 정관이 부여한 이날의 총회는 몬트리올 선거관리위원회의 권한과 역할을 존중하지 않았고 금권배포와 폭력을 묵인했으며 선거관리규정에 명시된 입후보자의 등록요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여성 부회장 입후보자가 사퇴함)에서 선거를 강행한 비민주적인 총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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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활동

제3부 퀘벡 한민족의 생활

현지사회화(Transformation into Mainstream Society), 즉 퀘벡사회에 적응한다는 것은 이민자 개개인이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타 민족계와 사회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가진 한국계 캐나다(퀘벡)인으로서 퀘벡사회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이민자들이 추구하는 이민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이같은 목표의 달성을 돕기 위하여 과거 반세기 동안 동포사회의 여러 단체들이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한인회와 노년회, 실업인 협회, 문화예술 단체, 스포츠 단체, 종교 단체 등 동포사회 내의 단체들이 펼쳐 온 현지사회화 지원활동을 여기 제 3 부에 기록함으로써 2010 년대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생활상을 후대에게 알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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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회의 활동 제7장


몬트리올 한인회의 활동

제7장 몬트리올 한인회의 활동

과거 반세기 동안 몬트리올 한인회가 펼쳐온 사업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민족의 정체성을 보전하는 사업(친목/기념행사 포함)’과 ‘다른 민족사회들과 교류하는 사업(주류사회 진출활동)’이다. 28 개 대 45 년동안 펼쳐진 한인회의 수많은 사업들을 이 두 가지 유형별로 분류하면 90% 이상이 첫번째 유형에 속하고 그중 대부분이 친목강화를 목적으로 펼쳐진 연례활동들이었다. 이는 2010 년대의 몬트리올 한인회가 ‘정체(停滯)와 고립’이라는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제 7 장에는 이 두가지 유형의 사업내용에 관하여 기록한다. 또한 후대가 이를 거울로 삼아 이민 민족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옳바른 방향 설정에 참고하고 그 중심단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2011 년의 몬트리올 한인회가 직면해 있는 문제점들과 극복해야 할 과제들을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분석하여 본 장의 말미에 기록한다.

7.1 한민족 정체성 보전사업

모국을 떠나 낯선 땅에 정착한 이민자들에게 있어서 가치관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이민자가 현지 주류사회의 일부분이 되려면 현지 사회생활에 적응해야 하고, 적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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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활동

위해서는 때문이다.

현지사회의

일반적인

가치관을

수용해야

하기

이민자들에게 발생하는 가치관의 변화(Acculturation)는 통상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본래의 가치관을 포기하고 이민 현지의 가치관만을 받아들이는 흡수형 (Assimilation)과 반대로 이민 현지의 가치관을 포기하고 본래 가치관만을 유지하는 분리형 (Separation), 그리고 두 가치관을 모두 포기하는 한계형 (Marginalization), 마지막으로 두 가치관을 조화롭게 결합시키는 통합형 (Integration)이 그것들이다. 이중에서 흡수형은 민족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고 분리형은 현지사회에서 생존이 불가능하며 한계화형은 현지사회의 낙오자가 될 위험성이 다분하다. 따라서 이민생활에 가장 적합한 유형은 통합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동포 이민자가 퀘벡(캐나다)사회에 적응해서 주류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한국적인 가치관의 일부분과 현지 퀘벡 가치관의 일부분을 결합시켜서 통합적인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다. 과거 45 년 동안 몬트리올 한인회가 펼쳐온 한민족 정체성 보전사업은 이민자들(특히 중장년층 이상)의 한국적인 가치관을 보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정체성 보전사업은 다시 친목행사 (신년하례, 윷놀이, 송년회, 야유회, 각종 스포츠 대회)와 기념행사 (삼일절, 6.25, 광복절, 개천절), 문화행사 (각종 공연 및 전시회, 영화상영), 교육사업(한글학교, 한글 도서관, 문화강좌) 등으로 세분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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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활동

친목행사

이민 1 세들의 생활은 고독한 삶이다. 주변에 동포들이 많이 있어도 이민자의 외로움은 극복되지 않는다. 고독은 우정으로 해소될 수 있다. 우정은 기쁜 것과 힘든 것, 자랑스런 것과 감추고 싶은 것들을 서로 나눌 때 생긴다. 이웃의 기쁜 일과 자랑스런 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힘들고 감추고 싶은 일을 함께 걱정해 줄 때 가슴으로 느껴지는 것이 우정이다. 그러나 이민사회에서 참다운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이민사회에서 고독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조직화된 단체이다. 실제로 많은 단체들이 이민자들의 고독의 극복에 도움을 준다. 종교와 문화예술, 스포츠, 그리고 동창회, 향우회 등 수많은 단체에서 친목활동을 통해 그들의 고독감을 해소시킨다. 그중에서 특히 종교단체의 역할은 막중하다. 그런데 이들 종교단체에 참석하는 사람만이 고독감 해소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은 문제다. 즉 종교단체가 유발하는 연대감과 친근감은 같은 단체에 속한 성도(또는 신자)에 한정되어 있다. 이런 현실에서 종교와 관계없이 이민 1 세들의 고독감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단체는 한인회뿐이다. 지난 동안 몬트리올 한인회가 동포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주요행사들로는 신년 하례식, 윷놀이, 야유회, 골프대회, 등을 꼽을 수 있다.

해결에 45 년 개최한 송년회

[신년하례식] 오래 전 조선시대의 궁중에서는 설날에 임금님이 천지일월(天地日月) 앞에 경건하게 절을 올렸다. 이를 기곡축년(祈穀祝年)의 의식이라고 한다. 이날 신하들은 임금에게 세배를 하고 서민은 장유(丈幼) 사이에 인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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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활동

나누었다. 이런 의례들은 지난날에 대한 감사와 장래에 대한 희망의 뜻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은 세배나 하례라면 하나의 사교적인 의례가 되고 말았지만 그 기원은 사뭇 윤리적인 행사였다. 연초에 나누는 인사말을 덕담(德談)이라고도 한다. 덕담은 단순히 인사치레만은 아니다. 우리 조상들은 서로 사람을 보내 전갈로 덕담을 교환하기도 하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신년사나 연두사 등이 덕담이랄 수도 있다. 한국계 이민사회에서 신년하례식은 동포들간의 친목뿐만 아니라 한국의 유교문화와 효도의 전통, 나아가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한인회가 주관하는 이 행사에는 매년 100-200 여명의 동포들이 모여서 상호 세배하고 덕담을 나눈다. 1992 년까지는 경로잔치라는 이름으로 신년하례행사를 했고 행사 후에는 식사와 윷놀이를 즐겼다. 2011 년 현재 윷놀이 대회는 노년회의 연초행사로 이관되어 열리고 있다.

[야유회] 야유회는 퀘벡 한민족사회의 태동기인 1960 년대 초부터 개최되던 동포들의 야외행사였다. 초기에는 동포수가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포들이 함께 인근의 공원으로 소풍을 겸해 자주 나갔다. 1965 년에 한인회가 설립된 후에는 한인회가 주최하여 봄과 가을에 야유회나 단풍놀이, 때로는 멀리 로키 산맥으로 관광도 갔다. 한인회가 20 여 년을 지속해온 이 행사는 1987 년 이후 중단되었고 현재는 노년회의 계절행사(봄 소풍, 여름 야유회, 가을 단풍놀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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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 송년회(또는 송년파티, 연말파티)는 1965 년 몬트리올 한인회가 창립된 이래 매년 빠짐없이 개최해 온 최장수 친목행사다. 이 행사는 현재 한인회와 실업인 협회가 번갈아가며 주최한다. 매년 150-300 명 사이의 동포들이 참석하여 다사 다난했던 한 해를 돌아보고 지친 몸과 마음들을 서로 위로한다. 동포사회에 공로가 큰 사람을 표창도 하고 공연을 즐기며 함께 식사한다. 식후에 동포들은 노래와 춤 솜씨를 뽐내기도 한다. 참석하는 사람은 주로 중년 이상 노년층이지만 종교나 세대를 떠나 함께 춤추고 마시며 어울릴 수 있는 친목행사다.

기념행사

몬트리올 한인회가 동포들의 정체성 함양을 위하여 그동안 개최해온 기념행사로는 삼일절, 6.25 동란, 광복절, 개천절 행사가 있다. 그러나 6.25 동란 추모행사는 근래 들어 6.25 참전 동지회로 이관되었고 개천절 행사는 총영사관이 주최하는 행사로 바뀌었다.

[삼일절 기념식] 3·1 운동은 민족자결주의와 10 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제 강점 하의 한국인들이 1919 년 3 월 1 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간디의 비폭력주의 불복종 운동과 중화민국의 5.4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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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삼일절은 3·1 독립운동을 기념하여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이자 공휴일이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1946 년 3 월 1 일 제 27 회 기념식을 시초로 삼일절을 국가 경축일로 지정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매년 기념행사를 주최하여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와 애도의 묵념을 올리며 민족정신을 되새긴다. 3 부 요인은 물론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며 나라의 광복을 위해 싸우다 순국한 선열들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은 따로 파고다 공원에 모여 그날의 깊은 뜻을 되새기는 의식을 거행한다. 이 날에는 전국 관공서 및 각 가정에서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게양한다. 몬트리올 동포사회에서 삼일절 기념행사는 1977 년 (11 대 한인회, 박동렬) 이래 한인회가 주관해온 범 동포 기념행사다. 이민사회에서 삼일절 행사는 일본제국의 가혹한 식민지 시대를 후손들에게 알리고 모국에 대한 애국심을 강화한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동포사회의 친목강화에도 크게 기여한다. 이 행사에는 매년 50-100 명 정도의 주로 1 세대 노년층 동포들과 몬트리올 주재 모국 총영사가 참석한다.

[광복절 기념식] 광복절은 삼일절, 제헌절, 개천절과 함께 대한민국의 4 대 국경일이다. 광복(光復)은 문자 그대로는 ‘빛을 되찾음’을 의미하고 국권을 되찾았다는 뜻으로 쓰인다. 한민족이면 누구나 경축하는 8.15 광복절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1945 년 8 월 15 일 제 2 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하여 항복함으로써 한반도가 일제의 강점기에서 해방된 날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3 년간 미군정을 거쳐 1948 년 8 월 15 일 우리 민족만의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을 수립한 날을 기념하는 의미를 함께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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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동포사회에서 광복절 기념식은 우리의 1.5 세 또는 2 세들에게 그들의 뿌리인 한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겪은 수난사를 알리고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하고자 1970 년 5 대 한인회(회장 오기송)가 시작한 기념행사다. 이 행사는 두 번째로 역사가 깊은 한인회의 친목행사이기도 하며 매년 가장 많은 동포들이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다.

문화행사

몬트리올 한인회가 동포들의 정체성 함양을 위해 실시해온 대표적인 문화행사로는 영화감상과 국립 예술단(합창, 무용 등) 초청공연, 각종 음악회 등이 있다. 이중 영화감상은 19701980 년대에 동포들에게 크게 인기가 있었던 정서 프로그램이었다.

[영화감상] 영화감상은 1966 년 2 대 한인회(회장 김광만) 이후 22 년 동안 매년 연례행사처럼 지속되었다. 동포들은 어머니 날, 삼일절, 광복절 등 기념식 행사 후에 상영될 특선영화에 가슴이 설렜고 영화를 통해 고국의 소식(대한뉴스)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향수를 달랬다. 그러던 중 1980 년대 중반무렵 비디오가 동포사회에 공급됨에 따라 오랫동안 동포들의 정서 프로그램이었던 영화감상 행사는 더 이상 동포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고 마침내 1988 년 17 대 한인회(회장 유동훈)때 상영된 영화 <비련의 홍살문>을 끝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5 년 26 대 한인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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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동준)때 한때 부활되어 시내의 <하류인생>이라는 영화를 상영한 바 있다.

극장을

빌려서

교육사업

1976 년 6 월 11 일 몬트리올 한인회가 사단 법인체로 퀘벡정부에 공식 등록될 당시의 정관과 설립 인가서에 의하면 한인회는 몬트리올 동포들 간의 ‘상호협력 및 권익옹호’ 외에 후손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교육’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몬트리올 한인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꾸준히 관련사업들을 펼쳐왔다. 또한 2000 년대에 와서는 몬트리올 한인회관 내에 한글 도서관을 설립해서 수천 권의 한글 책을 비치하고 자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침은 물론 한글 책을 통한 한민족 정체성 보전활동을 펼치고 있다.

[육영재단] 동포사회에 전해 내려오는 기록들과 몇몇 원로 동포들의 증언에 의하면 몬트리올 한인회가 공식 등록된 다음 해인 1977 년 봄 무렵 11 대 한인회(회장 박동렬)의 이사회는 정관에 명시된 대로 한민족 후세들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사업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에 따라 같은 해 가을이 저물어 갈 즈음에는 동포사회내에 한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계획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사회를 수차례 열었고 동포사회의 원로 및 단체장들과 긴밀하게 협력했다. 진지한 연구와 토론 끝에 이사회는 ‘독립적인 위치에서 한글학교를 지원할 별도의 단체를 만드는 것이 낫다’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에 독립적인 육영재단(The Korean Educational Foundation of Montreal)을 만들어서 후세 교육을 전담시키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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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회에서 추천한 인사들로 구성된 육영재단 이사회는 1978 년 4 월 5 일 재단의 창립총회를 열었고 초대 이사장으로 유병일 씨, 두 명의 부이사장으로 오정희 씨와 황필준 씨를 각각 선출했다. 몬트리올에 거주하는 동포 자녀들에게 모국어를 교육시키는 이외에 캐나다의 복합문화와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융화시키기 위한 문화 및 육영사업을 함께 추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마침내 육영재단이 발족된 것이다. 창립총회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한글학교 설립 프로젝트를 추진한 육영재단 이사회는 별도의 전담반을 구성하여 교사모집과 교실확보 등 현안문제들을 해결하도록 했다. 설립 당시 육영재단의 사무실 주소는 1010 St-Catherine St West. #312 Montreal QC. H3B 1G1 였다. 그러나 몇 년후에 동 육영재단은 자취를 감추었고 몬트리올 한인회의 정관에서 ‘한글교육’ 조항도 사라졌다. 한인회가 퀘벡정부에 공식적으로 등록되던 1976 년 당시의 불어판 설립 허가서와 영문정관에는 분명하게 있는 한글교육에 관한 사업조항이 1993 년에 개정된 한글정관에는 없다. 언제, 그리고 누구의 주도로 이 교육조항이 삭제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로부터 20 여년이 흘러 육영재단의 존재마저 가물 가물 잊혀져 갈 무렵이던 2007 년말 몬트리올 동포사회의 일각에서는 한인회의 교육사업을 회복시키려는 운동이 일었다. 30 여년전 선배 한인들이 후세 교육사업에 쏟았던 열정이 육영재단을 탄생시켰던 역사적 사실이 한인회의 웹 사이트를 통해서 동포들에게 알려졌고, 결국 2009 년 5 월에 개최된 28 대 한인회 임시총회의 결정에 의해서 한글교육에 관한 사업조항이 정관에 부활되었다(제 5 조 한인회의 사업). 이후 2010 년부터 몬트리올 한인회는 산하에 ‘다민족 언어 및 문화학교(Multiethnic School of Languages and Cultures)’를 열고 후세들과 현지인들에게 한글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민사회에서 한글교육은 한국말을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은 한국말은 물론이고 한국 전체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후손들에게 한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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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알려주어야 하고 한국의 전통과 문화도 가르쳐야 하며 자녀들의 가슴에 모국을 사랑하는 마음도 심어 주어야 한다. 또한 한민족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참여의식을 함께 심어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세계 대부분의 동포사회에서 한인회 혹은 한인회와 긴밀하게 연관된 공립단체가 후세들의 한글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글도서관] 몬트리올 한글도서관은 2006 년말과 2007 년초 사이에 특별대책위원회의 김영권 초대 한인회 사무총장이 설립한 한민족 뿌리보전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몬트리올의 동포들은 물론 모국에서도 출판사와 도서 기증자, 해운회사, 그리고 수집 봉사자들이 참여했다. 당시 수많은 동포들이 13,000 여 달러의 한글도서관 설립기금과 1 만여 권의 한글도서를 들고 공사현장을 찾아 왔다. 특히 호돌이 비디오는 소장 중이던 한글도서 2 천 5 백여 권을 몽땅 기증했다. 또한 손지혜 씨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몬트리올에 한글도서 보내기 운동을 벌여 모국에서 3 천여 권의 신간 어린이 도서를 모으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국의 독지가 최상준씨는 자신의 공장 한켠을 비우고 기증자들이 보내오는 도서들을 보관했고 조양해운과 신세계용역(대표 김창익)이 그 도서들을 몬트리올까지 무료로 운송했으며 몬트리올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나서서 통관을 돕는 등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한글도서관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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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글 도서관 내부 2007. 3> 이후 권남수 사무장과 이경화씨등 십 여명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으로 5 개월 동안 분류작업을 끝낸 한글도서관이 2007 년 여름 마침내 몬트리올 동포들에게 공개되었다. 무지개 빛 천장과 핑크색 벽, 꽃내음 가득한 커튼과 갈색마루, 그리고 따듯한 등불…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그 공간에 정성으로 만든 책상과 한글 책들로 가득 찬 스물 두 개의 책장이 들어선 아담한 도서관이 드디어 몬트리올 동포사회에 생긴 것이다. 개관후 매일 10-20 여명씩의 동포들이 찾아와 한글 책들을 빌려 갔으며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도서관을 찾는 젊은 엄마들의 발걸음이 하루하루 늘어갔다. 이 꿈의 공간은 현재 작품 전시실과 문화강좌 교실 등의 다목적 공간으로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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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도서관 설립자 김영권 사무총장과 이장규 씨>

[문화강좌] ‘강사들에게는 나눔의 기쁨을, 수강생들에게는 배움의 혜택을 주자’라는 취지로 27 대 한인회의 김영권 사무총장이 기획한 코코모 문화강좌는 2007 년 5 월부터 11 월까지 약 7 개월간 400 여명의 수강생들이 참여하는 대성공을 이루었으며 한인회의 재정수입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후 코코모 문화강좌는 한인회 문화강좌로 이름을 바꾸고 사무처의 주요사업으로 2011 년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의 취지와는 달리 점차 언어강좌로 변질되어가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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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코코모 문화강좌 수강생 모집 광고문, 2007.4>

7.2 타 민족사회와의 교류사업

가시적 소수민족(Visible minority, 유색민족)이 현지사회에서 성공하려면 그 민족 공동체가 전체 이민사회에 좋은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현지사회에서 소수민족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교육수준과 직업, 인격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이미지도 중요하게 참고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프로파일링(Profiling)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공동체가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 평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며 그 반대라면 평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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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즉 어떤 공동체의 좋은 인상은 그 공동체 구성원의 현지사회 진출에 큰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소수민족의 이미지를 좌우하는가? 첫 번째 평가기준은 ‘그 소수민족 공동체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전체사회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다. 물론 전체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높을수록 그 소수민족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고 호의적이다. 퀘벡의 한민족 공동체는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유는 한민족은 매우 근면하며 실업자가 거의 없어서 실업수당이나 복지수당 등 재정적인 부담을 정부에 덜 주기 떄문이다. 또 다른 평가기준은 ‘현지사회의 행사 참여도’이다. 현재 퀘벡의 주류사회를 이끌고 퀘벡 땅의 주인이라고 자칭하는 프랑스계 퀘벡인들은 이 점에 매우 민감하다. 그들은 1763 년 후 247 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로서 지배를 받아 왔다는 피해의식과 열등감, 불안감이 늘 잠재해 있는 민족이다. 프랑스계 퀘벡인들은 그 아픈 과거를 자신들의 후손에게 명심하라고 말하며 다른 민족들에게도 알리고 지지를 받고 싶어한다. 따라서 그들이 개최하는 공동행사에 소수민족이 참여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 공동체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는다. 지난 반세기 동안 몬트리올 한인회는 한민족 정체성 보전사업을 펼치는 한편 한민족 공동체를 퀘벡 주류사회로 이끌고 나아가기 위한 대외문화교류 사업을 활발하게 펼쳐왔다. 그동안 몬트리올 한인회가 펼쳐온 타 민족사회와의 교류사업(일명 주류사회 진출사업)은 ‘스포츠를 통한 교류사업’과 ‘문화를 통한 교류사업’으로 대별될 수 있다.

스포츠를 통한 교류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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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7 개국 축구대회는 스포츠를 통한 대표적인 교류활동으로서 아시아의 6 개국(중국, 일본, 라오스,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을 초청하여 한인회가 주최했다. 1980 년대와 1990 년대 초까지 수차례에 걸쳐서 개최된 이 대회는 동양문화협회(Association des Cultures Orientales Inc)가 긴밀하게 협조했다.

문화를 통한 교류사업

문화행사는 말과 생김새가 다른 타 민족들과 교류하고, 소통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과거 반세기 동안 퀘벡 한민족사회에서 문화를 통한 외부사회와의 대화시도가 지속되어 왔다. 1980-90 년대의 동양문화의 밤, 캐나다 데이와 한국주간행사, 그리고 2000 년대 중반의 생-쟝 바띠스뜨 축제, Weekend du Monde 축제 등은 몬트리올 한인회가 직접 주관 또는 참여한 대표적인 문화교류행사라고 할 수 있다. 1990 년대 후반부터 2000 년대 중반까지는 한인회가 주최한 대규모 문화교류행사에 관한 기록이 없다. 이유는 혼란스러웠던 1990 년대 중반이후 동포사회의 내부 결속을 위한 골프대회(23 대)와 월드컵 축구응원(24 대), 그리고 벽돌 쌓기(25 대) 등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반면에 26 대(회장 염동준)의 2 년 동안은 한인회 45 년 역사상 문화교류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기간으로 기록된다. 물론 문화에 대한 염 회장의 관심과 애정도 남달랐지만 당시의 한인회에는 한광수 씨와 조영옥 씨라는 ‘특별난 커플’ 문화부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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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이민부 및 연방 정부, 몬트리올 시청, 그리고 아시아 태평양 연구재단 등 현지 정부기관들과의 네트워크를 복원하고 대외교류사업 자금을 지원받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복합문화정책을 표방하는 퀘벡 주이기 때문에 매년 이들 기관들이 민족 공동체에 접촉을 시도해 온다. 26 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활용했다.

[동양문화의 밤] 1982 년 5 월 29 일에는 제 4 차 동양문화의 밤을 마련하여 일본, 중국, 베트남, 라오스, 필리핀, 캄보디아 등을 초청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동양문화의 밤 준비 위원회는 정희수 14 대 한인 회장을 위원장으로 하여 황필준, 최봉암, 조병철, 김영길, 박종수, 정메리, 김춘희 씨 등으로 구성되었다. 동 행사의 프로그램은 각국의 전통음악 및 무용공연이었고 수백 명이 참석한 뜻깊은 행사가 되었다. 이 행사 역시 동양문화 협회(Association des Cultures Orientales Inc)와 긴밀하게 협조하여 개최되었으며 아시아 태평양 연구재단의 자금지원을 받았다. 이 행사와 관련한 기록은 1988 년(17 대 회장 유동훈)과 1992 년(19 대 회장 서백수)의 한인회 행사 자료철에도 있다. 그러나 1992 년 이후에 이 행사가 개최되었다는 기록은 발견할 수가 없다. 한인회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993 년 무렵부터 시작된 동포사회의 혼란기를 지나는 동안에 동양문화의 밤 행사는 동양 7 개국 축구대회와 함께 자취를 감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생-쟝 바띠스뜨 축제] 퀘벡 주는 근본적으로 가톨릭 사회다. 불어권 퀘벡인의 90% 이상이 영세를 받은 신자들이다. 그러나 정규적으로 미사에 참석하는 인구는 20%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퀘벡에서는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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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단체를 보호하는 성인(Saint)이 있다. 퀘벡 땅을 보호한다고 프랑스계 퀘벡인들이 믿는 성인이 바로 생-쟝 바띠스뜨 (St-Jean Baptist 세례자 요한)다. 이 성인을 추앙하는 조직이 생-쟝 바띠스뜨 회(Society of St-Jean Baptist)이며 이 조직은 매년 6 월 24 일을 전후해서 퀘벡의 주요도시에서 대규모 축제를 벌인다. 또한 생-쟝 바띠스뜨회는 퀘벡 주의 자주권을 주장하고 퀘벡 언어 및 문화의 정체성을 보전한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진 정치적인 단체다. 생-쟝 바띠스뜨 축제는 퀘벡의 과거를 돌이켜 보게 하고 현실을 인식시키며 미래를 그리는 불어권 퀘벡인들의 중요한 행사다. 이 축제 기간 중에는 화려한 시가 퍼레이드와 음악회, 연극공연 등이 퀘벡 주 전역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 공동체들은 생-쟝 바띠스뜨 축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 축제를 개최하는 그들도 그런 사실을 안다. 그래서 2005 년에 몬트리올 한인회가 그들의 생-쟝 바띠스뜨 축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참가신청을 했을 때 한편 의아해하면서도 반가워했고 약 9 천 달러의 행사자금까지 지원한 것이다. 불어권 퀘벡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아시아계 공동체의 참여는 그 공동체가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지향하는 퀘벡사회 건설에 동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관하는 행사에 한인회가 참여한 목적은 달랐다. 그들이 원하는 불어권 세력확장에 동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어권 민족사회와의 교류가 목적이었다. 2005 년 6 월 24 일 몬트리올 동포들의 밀집 거주지역인 NDG 지역의 한 공원에서 퀘벡 국경일(Fête National du Québec)을 축하하고 한국문화도 소개하는 행사가 열렸다. 행사자금을 지원하는 그들의 요청대로 퀘벡 국경일 축하 순서를 간단하게 마치고 공원에 있는 참전비에 헌화한 후에 조선시대 왕의 행렬, 한국전통 혼례식, 사물놀이, 한국전통놀이, 태권도, 한국요리 등을 공원에 모여든 NDG 주민들에게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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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쟝 바띠스뜨에 참여한 NDP 당수 잭 레이튼 씨>

이 행사에는 한민족 공동체의 많은 단체들이 참여했다. 연방 신민당의 당수 잭 레이튼 씨도 참석하여 한민족 공동체의 퀘벡 현지사회 참여를 환영했다. 한인회가 퀘벡의 경축일 행사에 참여하는 까닭을 그날 그 공원에 모였던 대부분의 동포들이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겠지만 한민족 공동체에 대한 좋은 인상을 그 자리에 구경 나온 일천여 명의 타 민족사람들과 불어권 퀘벡인들에게 심어준 행사였음은 분명했다.

[한국주간행사] 아시아 태평양 연구재단은 1997 년에도 지원금을 주고 몬트리올 한인회가 아시아 문화행사에 참여토록 했다. 22 대 한인회(회장 김재홍)은 이를 대규모의 한국주간(1997.11.2411.28) 행사로 기획했고 미술 전시회(미술협회), 한국 전통무용 공연(이채화 무용단), 어린이 합창(한글학교),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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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허향원), 태권도 시범(윤오장), 한국가곡 공연(김무장), 그리고 각종 세미나를 개최했다. 그러나 2000 년을 전후해서 이 행사 역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복합문화축제] 26 대 한인회(회장 염동준) 시절인 2005 년 8 월 13 일과 14 일에는 복합문화 교류행사를 두 장소에서 연속 개최했다. 이는 ‘동양문화의 밤’과 ‘한국주간행사’가 중단된 이후 오랜만에 재개된 다민족 문화교류행사에 참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1 천여 명의 동포들과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계 퀘벡인들이 메켄지-킹(McKenzie King) 공원에 운집한 첫날에는 야외 문화행사와 체육대회가 함께 열렸다. 간단한 광복절 기념행사 후에 가설무대 위에서는 한국에서 초청한 국악 예술단의 전통무용공연이 있었고 인도네시아의 전통 춤 공연도 있었다. 이어서 200 여명의 청소년들이 참여한 전통궁중행차가 시연되었다. 공원 잔디밭에서는 한국음식 바자회와 베트남 및 인도네시아의 생활문화용품 바자회가 온종일 열렸다. 다음날인 8 월 14 일 저녁에는 몬트리올 시내에 있는 임페리얼 극장 (Imperial Theater)에서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계 4 개 이민민족들이 참여한 ‘복합문화의 밤’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행사시작 2 시간 전부터 몰려든 인파로 주변에 교통경찰이 배치되었고 1 천 2 백 명을 수용하는 극장의 좌석이 모자라 서서 관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행사 1 부에서는 한인회장 인사와 총영사의 축사, 제랄드 트랑블레 (Gerald Tremblay) 몬트리올 시장의 축사가 끝난 후에 베트남의 전통악기가 연주되었고 인도네시아는 발리 춤을, 그리고 중국은 전통연극을 공연했다. 이날 축사에서 트랑블레 몬트리올 시장은 몬트리올 한인회가 타 아시아 민족들을 초대해 복합문화 행사를 한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2 부는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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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인 한국의 차례였다. 한국여성 국극협회 서라벌 국악 예술단의 ‘황진이’ 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장내는 조용했고 끝나자 여기 저기서 환성이 터졌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공연 후 1 층 로비에서는 4 개국 민족 공동체의 임원들이 모여서 간단한 한식 뷔페를 즐기며 공동체간 교류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 대화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틀 낮과 밤을 아시아 4 개국이 함께 한 이 복합문화 축제는 26 대 한인회 임원들의 숨은 능력과 팀워크가 만들어낸 행사였다. 황진이 공연의 연출은 과거 가람 무용단의 감독이었던 한광수 문화부장이 연출했고 그의 부인이자 같은 문화부장인 무용가 조영옥씨는 무대에 직접 올라가 공연에 참여했다. 불어와 영어, 한국어로 진행된 1, 2 부의 사회는 퀘벡 TV 앵커인 정미령 (Natalie)과 한인회의 안효상 부장이 공동으로 보았다. 또한 1 부와 2 부 사이의 휴식시간에는 대형광고들이 무대화면에 비쳐졌는데 이것은 한국 및 중국업체들과 약 7 천 달러의 광고비 계약을 체결하고 김영권 기획실장이 직접 제작한 컴퓨터 광고 애니메이션 작품이었다. 이날의 복합문화축제는 ‘민족대표단체인 한인회의 회장은 대외적인 감각과 비전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교훈을 남겼다. 비전을 가진 사람 주변에 인재가 모인다. 동포사회에는 다양한 능력을 가진 인재들이 많다. 리더는 그런 인재들을 찾아내서 그들이 가진 능력을 동포사회의 발전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세계문화축제(Weekend du Monde/Weekend of the World)] 매년 여름 몬트리올 시는 세계문화축제를 개최한다. 1967 년 세계 박람회가 열렸던 쟝-드라뽀 공원 내에 상설 공연무대를 마련하고 이민 공동체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들고 나와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기회와 공간을 제공한다. 이는 ‘재즈축제’와 함께 여름 내내 수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주말 문화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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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26 대 회장 염동준)는 2006 년에 개최된 제 2 회 축제에 참여했다. 2006 년 3 월에 참가 신청서를 낸 후 45 월 두 달 동안 시청의 행사주관 부서가 소집하는 회의에 매주 참석해서 16 개 다른 민족들과 함께 축제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2006 년 7 월 16 일은 한인회가 배정받은 ‘아시아 문화의 날’이었다. 축제 준비팀은 공연의 테마를 ‘북의 대합주’로 정하고 중국과 인도네시아, 베트남을 초청했다. 아시아의 문화를 우렁찬 북 소리에 실어서 퀘벡 땅에 퍼져 나가게 한다라는 취지였다. 26 대는 이 공연을 생-쟝 바띠스뜨 축제(2005.6.24)와 복합문화축제(2005.8.13-14) 다음의 후속 복합문화 교류사업으로 추진했고 김영권 기획실장이 프로그램 기획을, 그리고 한광수 문화부장이 연출을 맡았다. 프로그램과 포스터가 만들어졌고 2 주 전부터는 라디오 방송과 현지신문 Journal de Montréal 이 공연을 홍보했다. 한 부장은 두 달 동안 노년회 농악대를 교육시켰고 본인도 직접 공연에 참가해서 대북을 우렁차게 두드렸다. 공연테마에 맞추어 인도네시아도 자신들의 전통 Bali Drum 들을 오타와에서 수송해왔다. 중국도 전통 북을 두드렸고 경극을 통해 아시아의 문화를 타 민족들에게 알리는데 동참했다.

<Les Week-Ends du Monde 축제 20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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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주관으로 아시아 4 개국이 협력해서 준비한 공연 프로그램은 1 부(Welcome to World Festival), 2 부(Harmony of Asian Cultures), 3 부(Modern Korean Culture Night) 로 나뉘어 12 시간 동안 무대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진용 부회장과 한인방송 VOKO 의 홍승남 씨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단상에 올라 사회를 보았다. 농악대를 앞세워 입장한 한국의 공연은 조선시대의 전통복장을 갖춘 200 여명이 참가한 왕의 행차(Route Play, Nong Ak & Dynasty Parade)로 이어졌다. 다음으로 살풀이 부채춤(Korean Traditional Dance, Salpuri), 해동검도 시범(Thaw Swordsmanship Demonstration), 대북춤(Korean Giant Drum Dance), 한국 전통 혼례식(Korean Traditional Wedding Demonstration), 연합 합창단의 가곡, Korean Rock(K-Major Group) 등이 중국, 인도네시아의 공연들과 조화를 이루며 펼쳐졌다. 인도네시아(회장 Bambang)는 Youth Balinese Dance, 전통 우산춤(Tari Payung Parasol Dance), Javanese Music 을 공연했고, 중국은 Chinese Waist Drum Dancing, 중국전통경극(Chinese Traditional Opera)을 공연해서 관중들의 갈채를 받았다. 이외에도 공연장 곳곳의 잔디밭에 한국 전통놀이 시연장(Korean Traditional Plays, Instruments of Korean Music)이 설치되었고 한국 음식을 만들고 맛보는 장소(Experience making Korean Food, Tasting Asian Food)도 마련됐다. 어린 관람객들을 위해서는 Children Sketch Contest 와 Face Painting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한국궁중의상을 입고 사진 찍는(Taking Picture with Korean Costume) 백인들도 눈에 많이 띠었다. 참으로 뿌듯한 하루였다. 한민족이란 것이 자랑스러웠고 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을 이끌고 유럽, 남미, 아프리카 등 다른 민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 큰 행사를 치렀다는 자부심에 가슴 벅찼던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27 대와 28 대 한인회는 이 축제에 참가하지 않았다. 매년 여름이면 현지 방송매체에서 ‘Weekend du Monde au Park Jean-Drapeau! , Let’s go to Park JeanDrapeau!’ 를 외치건만 신경 써서 듣는 한인회 관계자가 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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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듯 2006 년 그 여름 이후 몬트리올 한인회의 모습은 쟝드라뽀 공원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7.3 한인회의 기타 사업

이민자들의 현지사회 적응을 돕기 위하여 한인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 중에는 ‘한인회만이 할 수 있는 역할’과 ‘한인회가 주관하면 좋을 역할’이 있다. 앞에서 언급된 ‘한민족 정체성 보전사업’ 과 ‘타 민족사회와의 교류사업’ 은 민족 대표단체인 한인회만이 할 수 있는 사업이다. 반면에 다른 동포단체가 주관할 수도 있지만 한인회가 하면 그 효과가 더 클만한 사업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상대적으로 비중 큰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정착지원 사업’ 과 ‘차세대 육성사업’ 에 관하여 본 항에 기록한다.

한인회관 건립추진 사업

몬트리올 한인회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그동안 많은 회장단들이 한인회관의 건립을 추진하려고 노력했던 흔적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주사 편찬 위원회가 그 흔적들을 추적해서 조사한 결과 한인회관 건립기금의 원천은 1991 년 18 대 박용섭 회장 때의 퀘벡정부 보조금이었고, 건립기금이 본격적으로 적립되기 시작한 시점은 1991 년 수습 대책위 유동훈 위원장 때, 회관건립추진 규정을 처음으로 만든 것은 1993 년 19 대 서백수 회장 때, 그리고 대대적인 모금을 실시해서 가장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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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금(벽돌 쌓기 $33,823.52)을 모은 것은 2004 년 25 대 이채화 회장 때인 것으로 밝혀졌다. 1991 년 3 월 25 일 박용섭 18 대 한인회장과 유동훈 수습대책위원장이 서명한 인수 인계서를 보면, 당시 한인회의 3 개 계좌에는 $18,800.01 의 총 잔고가 있었다. 이것은 한인회 운영자금($5,723.64)과 나머지는 18 대 한인회의 고문이었던 정희수 퀘벡 주립대 교수가 퀘벡정부에서 유치한 사업 보조금이었다. 북한 태권도 선수단을 공항에서 영접한 사건으로 박 회장이 사퇴한 후에 이 자금이 그대로 수습대책위원회에 인계된 것이다. 이후 유동훈 위원장은 두 개의 건립기금 계좌를 만들어서 이 자금 중 일부를 적립시켰다(S/C/A $5,539.29 + S/C/A $3,762.62). 이 계좌들은 19 대 서백수 회장 때에 다소 변동(S/C/A $7,492.39 + S/C/A $3,614.04, 1993.9.30)이 있었으나, 20 대와 21 대를 지나면서 하나의 계좌로 통합되었고(Mutual Fund, $12,771.67) 적립원금에 이자와 이익 배당금이 계속 붙어서 26 대의 2006 년 말에는 $15,979.88 으로 불어났다. 이렇게 적립된 동 계좌의 건립기금은 2007 년 초 특별대책위원회(위원장 정희수)가 한인회관을 대폭적으로 확장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건립기금의 원천을 만든 사람이 사용한 꼴이 된 것이다. 한인회관 건립기금 계좌 중 두 번째 계좌는 2000 년 22 대(회장 김재홍) 때 만들어졌다. 김 회장의 재임 중에 발생한 곽성문 씨 일가족 사건의 조의금으로 동포들이 모은 $4,990.00 을 TD CANADA TRUST 에 정기예금으로 예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예치금은 23 대와 24 대를 지나면서 건립기금으로 전환되었다. 세 번째 계좌는 2004 년 25 대 때 만들어진 벽돌 쌓기 기금 계좌다. 25 대 회장 이채화 씨는 임기 두 번째 해였던 2004 년을 뜨겁게 달구며 각종 모금행사를 통해 $33,823.52 라는 거금을 모았다. 이 회장은 이 자금을 한인회 산하 별도법인 CCCQ(Centre Culturel Coreen du Québec)의 계좌에 넣어 관리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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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2007 년 초 한인회관이 대폭적으로 개보수 확장되면서 막대한 공사자금이 소요되었고, 2007 년 3 월 31 일 임시총회에서 그 공사비($40,279.82)와 한인회 운영 결손금($6,054.25)을 한인회관 건립기금에서 지출할 것을 결의함에 따라 2008 년 27 대의 임기 말에 건립기금의 잔고는 $13,797.89(CCCQ 계좌)가 되었다. 비록 회관신축을 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었으나, 1991 년 이래 동포들이 합심해서 15 년 동안 모아 온 건립기금 중의 상당부분이 풍전등화에 직면했었던 몬트리올 한인회를 구하고 한인회의 역사를 바꾸는 일에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한인회관의 개보수 확장 개관

특별대책 위원회(위원장 노년회장 정희수, 위원 한인회 사무총장 김영권, 위원 실협회장 이재욱)가 구성된 지 한 달 후인 2006 년 12 월 초, 몬트리올 한인회는 퀘벡 정부로부터 불어학교 교육환경 개선명령을 받았다. 정부의 지적 사항은 수업환경을 비롯해서 비상구, 화장실, 행정 서비스 개선 등 총체적인 것이었고 만일 개선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때는 한인회의 정부 불어학교를 폐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한인회의 생명줄과도 같았던 정부 불어학교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달 내로 모든 지적 사항을 해결하고 검사를 받아야 했다. 이에 특위는 설명회를 열어 이 같은 위기상황을 알렸고 자원 봉사자들을 모아 곧 바로 개보수 확장 공사에 착수했다.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연말연초와 주말은 물론이었고 개강이 임박했던 신년 초에는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공사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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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명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75 일간의 대공사를 강행한 끝에 드디어 2007 년 3 월 3 일 한인종합회관을 개관했다. 오전 11 시부터 오후 3 시까지 계속된 이날 개관식에는 캐나다 연방과 퀘벡 주에서 4 명의 현직장관을 비롯한 6 명의 국회의원들과 총영사관 대표, 퀘벡 이민부 대표, 타민족 대표들, 그리고 동포사회의 단체장들과 수많은 동포들이 참석하여 몬트리올 한인회와 동포사회의 앞날을 축하해 주었다.

박희균 씨가 사회를 본 1 부에서는 정희수 위원장의 인사에 이어 현직 장관들의 축사가 있었고 김영권 위원이 회관공사의 경과보고와 한인회관의 운영계획을 발표했다. 2 부 순서로는 개관 축하 연주회와 회관 현판식 및 제막식이 있었고 미술 전시회, 한국전통 다도 시연회, 세계 각국의 화폐 전시회 등의 다채로운 축하행사가 회관 내에서 열렸다. 이날 개관식에 참석한 연방 국회의원 마시노 빠체띠 씨는 정희수 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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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장에게 캐나다 시민헌장을 개관축하 선물로 전달하기도 했다. 몬트리올 한인회관 개보수 확장 공사의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첫째로, 정부지원 불어강좌가 3 개 반에서 11 반으로 증설되어 퀘벡 정부의 연간 보조금이 $12,800 에서 약 $8 만 달러로 대폭 증가되었다. 둘째로 몬트리올 한인회가 퀘벡사회에 널리 알려졌고 이미지가 크게 향상되었으며 위상이 높아졌다. 개관식에 참석한 현직 장관과 국회의원, 타 민족대표들이 한민족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칭찬하며 돌아갔다. 또한 11 개 불어반의 학생들 중 80% 이상이 타 민족이다. 그들이 그들의 공동체가 아닌 한민족 공동체의 한인회관으로 불어를 배우러 온다는 자체가 한인회의 위상향상을 의미한다. 셋째로 늘어난 공간에서 한글도서관, 노년대학, 한글학교, 문화강좌 등 다양한 서비스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한인회관의 확장 개관은 몬트리올 한인회의 도약기를 열었고 퀘벡 한민족사회의 역사적인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정착지원사업

퀘벡 주류사회에 진출하려면 퀘벡의 역사와 경제, 그리고 사회제도에 관해서 잘 알아야 하며 특히 불어권 퀘벡인에 대하여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이유로 그동안 몬트리올 한인회는 동포들에게 이에 관한 정보들을 제공하려고 부단하게 노력해왔다. 이런 노력은 2000 년대에 들어와서 더 활발해졌다. 당시 퀘벡 이민부는 백여 개에 달하는 퀘벡 거주 이민 공동체들의 고유 가치관을 통합형 가치관으로 변화시키고 그들의 문화를 상호 조화시켜서 복합문화로 만들기 위해 ‘PARCI’라는 이민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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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아울러 이민부는 동 프로그램의 추진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고 주관단체에게 자금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몬트리올 한인회는 이런 정부의 정책을 간파했고 정희수 고문의 주도로 프로그램을 기획, 정부 지원금을 유치해서 동포들을 위한 정착지원사업을 아래와 같이 펼쳤다.

<표 7-1> 2006 년도 정착지원사업(PARCI, 26 대) 제목

일자

강사

퀘벡 경제현황 및 문제점

3.10

UQAM, Pierre Fortin 교수

퀘벡 경제발전 추이

3.31

UQAM, Pierre Fortin 교수

퀘벡 경제전망

4 .7

UQAM, Pierre Fortin 교수

Quiet Revolution

4 .22

UQAM, 정희수 교수

퀘벡 독립 전망

4 .29

UQAM, 정희수 교수

퀘벡인의 정체성

5.6

UQAM, 정희수 교수

이민자 취업 전략

5.16

Sherbrooke 시 방문 (이민투자 검토)

6.9

UQAM, 정희수 교수

Québec 시 방문 (이민투자 검토)

9.8

UQAM, 정희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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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E,

Dr.Did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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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CI 정착지원 프로그램 목적은 이민자들에게 퀘벡의 역사와 경제, 사회제도를 홍보하는 데 있다. 몬트리올 한인회는 2006 년부터 2008 년까지 3 년간 총 3 만 6 천 달러의 지원금을 받았고 수십 개의 세미나 및 특강을 동포들에게 제공했다. 26 대와 27 대 한인회의 특별고문이었던 정희수 박사는 3 년 동안 매년 퀘벡정부에 PARCI 사업 계획서를 내서 자금을 지원받았고 특강 교수들을 섭외했으며 경제와 역사 등 일부 특강은 본인이 직접 진행함으로써 한인회가 강사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했다. 이중 퀘벡 주립대의 삐에르 포르땡(Pierre Fortin) 교수는 캐나다에서 손꼽히는 경제학자로서 연방과 퀘벡정부의 경제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거물급 인사였다. <표 7-2> 2007 년도 정착지원사업(PARCI, 27 대) 일자

강사

퀘벡경제의 장단점

4.28

UQAM, 정희수 교수

진학전략 및 학교적응

6.2

교육부 C.Sarat/K.Larkin

퀘벡의 법 제도

6.28

퀘벡 변호사 협회 G. Legault 변호사

퀘벡의 주택제도 및 이민지원

7.30

UQAM, 정희수 교수

인종차별 및 대응책

8.2

A.Benrhazai 박사

세대관계 개선 방안

9.30

몬트리올대 임성숙 교수

복합문화

10.10

정희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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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7-3> 2008 년도 정착지원사업(PARCI, 27 대) 일자

강사

노인주택 및 임대차법 활용

5.31

UQAM, 정희수 교수

이민자 취업 및 진급 전략

7.30

CIMOI,

이민자녀들의 학업 성공 비결

10.15

퀘벡 교육부 Larkin

퀘벡 근대사

10.25

UQAM, 정희수 교수

퀘벡 국가주의와 독립

11.8

Concordia 대 Guy Lachapelle 교수

복합문화의 주

10.4

UQAM, 정희수 교수

M. Kachani

차세대 육성사업

차세대 기술, 차세대 메모리, 차세대 컴퓨터…등 ‘차세대(차세대, next generation)’라는 말은 ‘미래’의 의미를 담고 있는 희망적인 용어다. 이민사회에서 ‘차세대’는 이민 1 세대의 자녀세대인 ‘1.5 세대(한국 출생)와 2 세대(캐나다 출생)’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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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년대로 접어 들면서 동포사회에서는 이 ‘차세대’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특히 몇몇 동포들을 중심으로 차세대 육성 움직임이 일면서 그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한인 학생회] 박동렬 11 대 한인회장은 한민족 후세들의 육영사업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심혈을 기울였다. CEGEP 이상 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한민족 학생들을 모아 만든 학생회는 1977 년 2 월 26 일에 발족되었다. 초대회장에 배신우 군, 2 대 회장에 홍성희 양으로 이어진 한인 학생회는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협조를 통해 자질을 향상시키고 공동권익을 추구하는 데 역점을 두고 활동했다. 초기회원은 50 여명이었다. 그러나 무관심에서 오는 참여의식 결여와 다른 생활환경에서 자란 성격과 흥미의 차이 등으로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난항을 겪기도 했다. 발족 초기에 그들은 좌담회와 음악 감상회 등의 모임을 통해 정서를 함양했고 학습정보를 교환했으며 각종 스포츠 게임을 열어 상호 친목과 체력 강화에도 힘 썼다. 특히 한-카 학생 간의 친선을 꾀하기 위한 사업을 개최해서 퀘벡사회 생활에 적응해 갈 수 있는 인맥과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한인 청년회] 한인 청년회의 전신은 한인 학생회다. 발족 후 13 년간 활동한 학생회는 초기 회원들이 성장하여 회원 연령층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1990 년부터 한인 청년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8 년(청년회장 안정윤)에 이들은 ‘북한동포 구호 사랑 나누기 찻집’을 여는 등 이데올로기를 넘어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동포들에게 따듯한 민족애를 나누는 행사들을 개최했다. 한인 청년회는 이외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쉽게도 전해 내려오는 활동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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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모(Korian Community of Montreal)] 코코모(KoCoMo)는 2005 년 6 월 26 대 한인회의 김영권 기획실장이 조직한 1.5 세와 2 세 중심의 차세대 단체다. 코코모는 ‘자랑스런 한민족의 후예로써 그 뿌리를 기억하고 긍지를 드높이며 한민족 공동체에 기여하고 퀘벡사회에 참여한다’ 라는 취지 아래 활동했다. 김 실장은 2000 년을 전후해서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이는 한인 청년회와 한인 학생회를 코코모를 통해 부활시키려고 노력했고, 코코모 활동을 통해서 차세대들간에 친해지고 자연스럽게 인맥(networking)을 형성함으로써 선배들이 후배들의 진학과 진로, 그리고 장차 현지사회진출에 도움주기를 바랬다.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2007 년 여름 무렵 코코모 봉사대(대장: 김영권, 부대장: 박희균, 윤기찬, 이강중, 이기성)의 대원 수만도 120 여 명에 달했고 몬트리올은 물론 오타와에도 몇 명의 코코모 회원이 있었다. 그 해에 코코모는 한인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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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활동

확장공사 및 개관식 통역, 한글도서 수집활동, 문화강좌 강사, 세계 장애인 대회 통역, U-20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한국선수단 및 동포응원단 지원, 그리고 한인회의 각종 행사를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2008 년 3 월 코코모를 주도하던 김 총장이 분별없는 일각의 모함을 받아 사임함으로써 코코모의 활동은 3 년 만에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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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몬트리올 한인회의 과제

이미 제 6 장에서 각 회장단별로 그 업적을 높이 평가한 바와 같이 몬트리올 한인회의 역대 회장과 임원들은 한인회와 동포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 반세기 동안의 업적을 6 장과 7 장에 나누어 기록하면서 아쉬움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아쉬웠던 것은 ‘시대의 변화와 새로 유입된 동포들의 요구를 적절하게 수용하지 못한 한인회의 역할’ 이었다. 이것은 앞으로의 한인회가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다. 향후에 후세들이 퀘벡 한민족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옳바른 방향 설정에 참고하고 공동체의 중심단체로서 한인회가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2006 년 여름에 동포인사들의 중지를 모아 지상에 공개한 몬트리올 한인회의 당면과제들을 여기에 기록한다.

친목사업 중심에서 탈피하는 것

몬트리올 한인회가 동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한인회가 가질 수 있는 역량의 대부분을 ‘친목사업’에 쏟았기 때문이다. 생업에 바쁜 임원 몇 명과 파트타임 사무장 한 명이 가용 인력의 전부였던 지난 40 여 년 동안 몬트리올 한인회는 송년회와 체육대회 등 친목성 연례행사에 매년 총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변화해 가는 동포들의 요구를 수용할 짬과 여력이 없었고 동포들은 그런 한인회를 외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초창기였던 197080 년대에는 친목사업이 한인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적합한 사업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2010 년대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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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목사업을 핵심사업으로 끌고 온 것이 문제였다. 1990 년대 이후 급격하게 변화된 신세대 동포들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한 몬트리올 한인회의 ‘반쪽 역할’이 동포들의 무관심을 자초했다. 기록에 의하면, 총 동포 수가 1 천명 전후였던 197080 년대에는 인구의 약 30%인 300 여 명의 동포들이 기념행사나 송년회 등 한인회의 친목성 연례행사에 꼬박 꼬박 참석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포 수 7 천여 명을 헤아리는 지금은 약 1% 정도의 동포(그것도 주로 60 대 이상 노년층)만이 같은 행사에 참석한다. 이는 구심점의 행사에 동포들의 참여율이 ‘30 분의 1’로 줄었다는 뜻인데 격세지감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큰 격차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 보아도 연례행사에 청소년들과 30-40 대 젊은이들은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몇 명의 젊은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들은 사무처 직원이거나 자원봉사자들이다. 노년층이 모여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광복만세를 부르고 연말잔치를 연다. 그러나 젊은세대들의 반응은 이같이 냉담한 것이 2010 년대 퀘벡 한민족사회의 현실이다. 이런 행사들은 노인들만 참석하는 노년회의 행사가 된지 이미 오래지만 그것만이 한인회의 주된 역할인 것으로 생각하고 흘려보낸 세월이 큰 격차를 양산했다. 따라서 이 긴 세월을 ‘정체(停滯)기간’이라고 한다. 26 대와 27 대에 활발했던 대외교류사업이 28 대로 들어서면서 다시 중단되고 소강상태가 된 것은 한인회가 친목사업 중심체로 회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경우 차세대들이 완전히 한인회를 외면하고 한민족사회가 현지사회로부터 고립되며 홀로 표류하는 민족공동체로 낙오될 위험성이 높다. 따라서 한민족의 정체(正體)성을 보전하기 위한 친목사업과 전체 이민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대외교류사업 즉, 양대사업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병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몬트리올 한인회가 다시 정체(停滯)상태로 돌아가는 길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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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관심(關 心 , attention)’이라 함은 마음이 끌려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한인회에 ‘마음이 끌리는’ 정도는 되어야 한인회비도 내고 한인회의 행사에 참여한다고 볼 때 2011 년 현재 몬트리올 한인회에 관심 있는 동포의 수는 동포인구의 3% 미만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관심 경제학(Attention Economy)’의 저자 토머스 데이븐포트 교수는 “정보가 흘러넘치는 이 시대에 가장 희귀한 자원은 ‘관심’이다” 라고 했다. 학창시절 우리는 생산의 3 대 요소에 관하여 배웠다. 그러나 지식산업 시대인 요즘은 <토지, 자본, 노동, 그리고 ‘관심’>이 생산의 4 대 요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관심’은 개인사업이나 단체사업의 성공여부를 좌우한다. 특히 한인회와 같이 동포의 참여가 존립을 좌우하는 비영리 단체일수록 ‘관심’의 영향력은 더 크다. ‘관심’은 원하는 것, 흥미로운 것, 좋아하는 것, 필요한 것, 이해득실에 관련된 것에 쏠리게 마련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몬트리올 한인회에 대한 동포들의 ‘무관심’은 그들이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이 거기에 없기 때문이다. 동포들이 원하는 서비스는 계층마다 다양하다. 예를 들어서 노년계층이 원하는 서비스는 소득부족의 해소, 노인주택의 구입, 건강유지, 고독감의 해소 등과 관련된 것이다. 장년층은 정착이나 생계기반의 구축에 흥미를 가지며 1.5 세나 2 세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학업과 진로, 취직과 관련된 정보제공 서비스다. 또한 시대에 따라서도 변한다. 1970-80 년대 초창기 동포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정착지원 서비스와 고독감을 해소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인회는 향수를 달래주는 영화상영이나 공연, 야유회, 각종 기념행사, 크리스마스 파티 등의 친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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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를 동포들에게 제공했고 이런 친목행사들을 원하고 좋아한 동포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1990 년대가 지나고 2000 년대가 도래하면서 동포들은 새로운 서비스를 요구하게 되었다. 미디어와 통신기술의 발달은 고국에 대한 향수를 잊게 했고, 이미 생계기반을 확보한 가장들은 사업확장과 부가가치가 더 높은 산업으로의 진출을 위한 지원을 원하게 되었으며, 학업을 마친 자녀들은 현지사회 진입에 필요한 정보 서비스를 원하게 되었다. 새로 온 투자 이민자와 독립 이민자들은 무역, 전기, 전자, IT, 환경, 항공, 그래픽 디자인 등 첨단산업과 지식산업 분야의 취업정보나 창업정보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사회기반구조가 취약한 몬트리올 한민족사회와 인적/경제적으로 열악한 몬트리올 한인회는 빠르게 변화하는 신세대 동포들의 계층별 서비스 욕구를 감당할 능력이 부족했거나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결국 이들이 97%의 무관심층을 형성했다. 즉, 몬트리올 한인회의 중요한 과제중 하나는 시대적으로 변화하는 동포들의 요구가 적절하게 반영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인재들이 모이게 하는 것

근면함과 강한 승부욕 등 한민족의 전통적인 특성과 좁디 좁은 이민관문을 통과한 개개인의 능력을 감안할 때 이주역사 반세기를 지난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현 발전상태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에 있다. 중심단체인 몬트리올 한인회에 젊은인재들이 모이지 않고 이에 따라 그들의 우수한 능력을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활용할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중요한 원인이다. 만약 그들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했더라면 퀘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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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사회와 한인회는 지금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발전을 했을 것이다. 세대교체는 전세계의 한인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현상이다. 세대교체에 성공한 다른 지역의 한인회들은 한인회의 운영체제를 개선해서 젊은세대가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먼저 조성했다. 이같은 운영체제의 보완이 현재의 몬트리올 한인회에도 요구된다. 운영체제(서비스 공급체제)에 문제가 있는 단체에 인재들이 모이지 않고, 그들의 우수한 능력을 결집시키지 못한 단체는 시대에 낙후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밖에 없으며, 이에 실망한 동포들은 그 단체에 등을 돌린다. 젊은인재들을 모으기 위해서 몬트리올 한인회가 보완해야 할 것은 ‘거버넌스(Governance)’다. ‘거버넌스(Governance)’란 어떤 조직의 의사결정체제를 의미한다. 거버넌스의 구성요소는 ‘의사결정구조와 의사결정자, 그리고 의사결정 메커니즘’ 이며 이 구성요소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의사결정구조가 부실하면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게 되고 제 아무리 우수한 의사결정구조와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구비했어도 의사결정자의 자질이 부족하면 올 바르게 결정된 의사도 그 실천과정에서 잘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76 년 6 월 11 일 퀘벡 정부가 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을 승인한 서류를 살펴 보면 한인회는 총회와 운영위원회(Conseil d’administration)로 된 2 단계 의사결정구조를 갖도록 되어 있다. 동 운영위원회(현재의 이사회)는 18 명의 운영이사(윤세중, 김광만, 김종찬, 김하연, 남용욱, 박토마스, 박종구, 배한국, 안기석, 오정희, 유태류, 이영민, 정영섭, 최봉암, 홍정표, 황필준, 이희재, 전관병)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승인서에는 ‘퀘벡 주의 회사 조직법 제 3 부(Loi des companies, 3e partie)에 의거해서 몬트리올 한인회의 설립을 인가한다’ 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그러나 현재 몬트리올 한인회의 실제 의사결정구조는 3 단계(총회이사회집행부)로 되어있다. 즉, 퀘벡정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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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되어 있는 의사결정구조와 실질적인 의사결정구조가 다른 ‘이중적인 거버넌스’를 가지고 있다. 현재 몬트리올 한인회를 사실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집행부다. 한글 정관상 집행부의 상위 의결조직인 이사회는 수십년 동안 사실상 집행부를 ‘보조’하는 ‘감독기구’ 역할을 해 왔다. 기록을 통해 설립 이후 36 년 동안 이사회의 역할을 살펴보면 19 대 이사회(이사장 양승팔) 외에는 이사회들의 활동 흔적이 별로 없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대부분의 이사회가 집행부와 총회 사이에서 ‘통과의례’ 형식만 갖추었을 뿐 퀘벡 법이 이사회에 부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집행부와 이사회 사이에는 마찰의 가능성이 항시 존재했다. 그때 마다 한인회 운영에 곤란을 겪었음은 물론이고 구심점에 대한 동포들의 실망과 참여이탈을 초래하기도 했다. 또한 한인회의 정관을 보면 이사회와 총회의 기능 중 많은 부분이 중복된다. 이는 타 민족 이민사회와의 경쟁에 뒤져서 가뜩이나 갈 길이 바쁜 몬트리올 한인회의 현 상황에서 볼 때 동일한 안건을 두 번 심의하는 비생산적이고 형식적인 절차다. 한편 한인회관이 확장된 2007 년 이후 대부분의 한인회 업무는 사무처가 처리하고 있다. 집행부 임원들이 주도해 왔던 2007 년 이전과 비교하면 한인회의 운영형태가 완전히 바뀌었다. 28 대(회장 이춘홍)는 회장과 부회장 두 명외에는 다른 임원이 아예 없었던 ‘초 미니 집행부’였다. 위의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집행부와 이사회를 합쳐서 의사결정구조를 현실적으로 개선할 때가 되었다. 2007 년 이후 기능을 상실한 ‘집행부를 폐쇄’하고 퀘벡의 다른 비영리 단체들처럼 ‘이사회가 실무기능을 수행’할 때가 되었다. 현재 정관상 부여되어 있는 이사회의 ‘심의와 의결기능은 총회로’ 이관하고 ‘감사기능은 감사위원회로’ 넘긴후 본연의 실무기능을 되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총회에서 선출된 (실무)이사들이 한인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이사들의 담당 프로젝트를 사무처가 행정적으로 지원하며 한민족 공동체의 대표는 이사들중에서 선출된 이사장(=한인회장)이 감당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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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몬트리올 한인회는 설립 당시 퀘벡법이 인가한 두 단계 의사결정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며 ‘이중적 거버넌스’에서 벗어나서 타 민족사회와의 업무상 교류를 혼선없이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인회의 체중이 줄어서 타 민족사회와의 경쟁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고 <일하는 이사회>에 젊은 인재들이 모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집행부의 폐쇄와 이사회의 실무기능 복귀는 미래 지향적이고 발전적인 몬트리올 한인회 세대교체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몬트리올 한인회는 거버넌스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의사결정자’의 자질에도 보완해야 할 점을 가지고 있다. “공동체의 리더(지도자)는 언어능력, 전문지식, 업무에 대한 성실성, 대인관계에서의 정직성, 임무에 대한 충실성 등이 구비되어야 한다”라고 퀘벡 법에 명시되어 있다. 공동체의 지도자는 오직 해당 공동체의 공익을 위한 언행 및 결정을 해야 한다. 현지 법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이익 마찰(Conflict of Interest)이다. 봉사정신이 투철해야 함은 물론이고 명예욕이나 권력, 이권 등의 부정한 동기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안 된다. 특정인의 이익을 대변해서는 안 된다.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허수아비를 그 자리에 앉히려고 애써서도 안 된다. 손쉬운 연례행사 몇 개 치루고는 임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리더는 없어야 한다. 한인회장의 자리는 아무나 쉬었다가 갈 수 있는 ‘공원의 빈 의자’가 아니다. 7 천명 동포의 소중한 2 년을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다. 자격을 제대로 갖춘 한인회장이 없으면 차라리 ‘빈 의자 그대로’ 두는 편이 훨씬 낫다. 거버넌스의 마지막 구성요소인 ‘의사결정 메커니즘’ 에도 여러 가지 개선할 부분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비민주적인 의사결정이 몬트리올 한인회에서 종종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중요한 의사결정일수록 동포사회에 공지하고 토론과 여론수렴을 충분하게 거쳐야 한다. 예를 들어서 이사회나 총회의 중요한 보고사항과 결정사항은 그 내용을 한인회 웹 사이트나 동포신문에 일정기간 사전공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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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회의 활동

가능한 한 많은 동포들의 의견이 결정에 반영되도록 조치해야 한다. 또한 민족 공동체 지도자로서의 어떤 ‘비전제시’ 나 ‘정견발표’ 한마디 없이 ‘동의요! 재청이요!’ 하면서 만장일치로 한인회장을 추대하는 위험한 관례는 사라져야 한다. 이는 비민주적인 의사결정일 뿐만 아니라 무능하고 부적절한 지도자를 뽑는 결과를 초래한다. 비민주적인 총회에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북미의 가치관을 가진 젊은인재들이 참석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결론적으로, 올바른 비전을 가진 리더와 인재들이 모여서 중장기 발전계획을 세우고 한인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면서 동포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때 신세대들의 참여가 회복되며 몬트리올 한인회를 퀘벡 한민족의 구심점으로서 존중하고 합심해서 퀘벡 주류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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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활동 제8장


경제활동

제8장 경제활동

경제활동은 이민생활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활동이다. 경제활동이란 생계에 필요한 소득을 확보하는 제반활동으로써 취업을 해서 피고용인이 되어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보상을 받는 ‘취업’ 유형과 경영자가 되어 스스로 사업수익을 확보하는 ‘사업’ 유형이 있다. 물론 각 유형마다 장단점이 있다. 취업은 고용주가 원하는 조건 (학력, 경력, 팀웍등)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과 해고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에 기업 책임자로써의 막중한 책임은 없다. 사업은 사업자금을 조성해야 한다는 부담과 경영 리스크라는 단점이 있으나 해고 당할 위험은 없다. 이민 경제생활의 성공여부는 위와 같은 두 가지 유형의 소득기회를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각 유형의 소득 규모는 인맥, 언어구사 능력, 사업기획 능력, 마케팅 능력, 조직운영 능력, 자본금, 교육수준, 한국에서의 직업, 한국 자격증 인정여부 등의 다양한 변수에 따라 결정된다. 제 8 장에서는 퀘벡 한인 실업인 협회의 역사와 활동에 관하여 서술한 후에 한국계를 비롯한 대표적인 몇개 이민 공동체의 경제활동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 보겠다. 그런 다음에 퀘벡 한민족의 경제가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원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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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사회경제의 구조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함께 연구해 보고자 한다.

8.1 퀘벡 한인 실업인 협회

퀘벡 한인 실업인 협회(이하 퀘벡 실협)는 퀘벡 한민족 공동체내의 자영업 종사자들이 회원으로 참여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동포경제단체다. 퀘벡 실협은 1980 년 2 월 3 일 김재원, 유동훈, 조병철, 홍순호, 홍순유, 노형욱, 전관병, 백기순, 최계수, 김용상, 백기화, 백기섭 등 12 명의 발기인으로 설립되었다. 조병철 초대회장(1980), 홍순유 2-3 대 회장(1981– 1983), 유동훈 4 대 회장(1984-1985)이 실협의 초기기반을 닦았다. 제 5 대(1986) 김강기 회장에 이르러 퀘벡 한인 실협은 퀘벡 주정부에 법인체(Association des commerces coréens du Québec)로 등록하고 KBA(Korean Business Association of Quebec)라는 명칭을 회원간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CIQ 를 통해 공동구매가 가능해짐으로써 회원의 이익 창출에 기여했다. 이어 6 대(1987) 이현종 회장이 만든 튼튼한 기반을 바탕으로 7 대(1988–1989) 노재일 회장이 체계화된 리베이트 및 기타 소득을 개발해서 20 만 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조성했다. 그 후 8 대(1990-1991) 이길수 회장이 협동조합을 이용한 공동구매를 활발하게 추진함으로써 퀘벡 한인 실협의 전성기를 맞았다. 9 대(19921993)는 오인석 회장이 수고했다. 제 10 대(1994–1995) 김웅식 회장은 협회의 범위를 대폭 확대시켰다. 김 회장 임기중 실협의 회원수는 총 305 명 이었다. 펩시콜라와 몰슨/라바트 맥주 회사와의 리베이트 계약을 체결했고 와인, 초콜릿 및 기타 식료품 품목에 대해 공동구매를 위한 기초조사를 실시했다. 또한 6200 Notre-Dame West 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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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면적 6300 제곱피트의 건물로 협동조합을 이전했고 불법담배 퇴진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리베이트 사업으로 험티덤티사의 리베이트를 8%에서 13%로 개선했고 프리토레이사의 리베이트도 2%에서 5%로 인상시켰다. 11 대 회장 입후보자가 제때 나타나지 않아서 김웅식 회장이 1 년을 더 유임했다. 이 기간에 협동조합이 도소매를 겸할 수 있는 허가를 취득하고자 실협 자체 건물을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제 11 대(1997-1998) 정선모 회장 시절은 대형업소의 영업시간이 연장됨과 동시에 경기침체로 인해 힘겨운 나날이 이어졌다. 강력한 불어 사용 정책으로 인해 신규이민 수가 감소되었으며 회원 모집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공동구매 확대 및 회원 홍보로 매출 증가, 와인 판매 확대, 자체 건물을 위한 시장조사 및 협동조합 도소매화 등을 추진했다. 험티덤티 칩스사의 리베이트는 10-12%로 하향 조정되었지만 NAYA 사의 물과 음료수, 네슬레사의 초콜릿에 대한 계약도 체결되었다. 회원을 상대로 소매업 마케팅에 대한 세미나 (Concordia 대학 김정구 박사) 및 의사결정에 대한 세미나 (McGill 대학 최병희 박사) 도 개최했다. 대외적으로는 제 4 차 캐나다 실협인 회의를 주관하여 전국 6 개의 실협과 17 개 공급업체가 참여하였다. 제 12 대(1999-2000) 김수용 회장 시절은 경영의 내실화에 주력했다. 매주 아바쿠스 신문에 실협소식을 게재하고 공동구매를 촉진 시켰다. 특히 소자본으로 운영이 가능하고 회전이 빠른 상품을 개발하여 회원의 이익을 증대 시켰다. 제 13-14 대(2001-2003) 이춘홍 회장 시절에는 신규 리베이트 상품을 물색하여 메이플립스 칩에 대한 리베이트를 추가했고 크리스피 커넬사의 땅콩제품 판매 리베이트를 증대시켰다. 또 임페리얼 담배회사로부터 매년 1,800 달러의 광고비 및 협회행사 보조비를 받게 되었다. 대외적인 행사로 캐나다 실협(UKBA) 총회를 몬트리올에서 개최했다. 제 15 대(2004-2005) 여동현 회장 시절에는 소매업의 체인화에 관한 정부 등록을 마쳤다. 14 대 회장 때 시작한 로고 및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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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도 했다. ONE BILL 체제의 미흡으로 프리토레이(FritoLay)사의 리베이트가 일방적으로 중단됨으로써 재정상의 문제가 야기되었다. 여 회장의 임기가 끝나고 후임자가 없자 비상 대책위(위원장 염동준)가 2006 년 한해를 이끌었다. 퀘벡 실협의 자금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염려한 염 위원장은 후임 회장이 나설 때 까지 자금을 동결시키고 협회의 재정적 안정을 도모했다. 제 16 대(2007-2008) 이재욱 회장 시절에는 2008 년 5 월 31 일부터 시행된 담배 전시 금지법이 발효됨에 따라 담배전시에 대한 대안을 개발하여 회원들에게 안내했고 전화카드 사업등으로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였다. 회원업소의 수는 약 200 개 였다. 제 17 대(2009-2010) 유동진 회장 시절은 친목 겸 네트워킹 사업, 교육 사업, 회원 복지 사업, 협회 조직 강화 등 실협 사업의 다양성이 강화됐다. 17 대는 다양한 교육 행사를 개최했다. 2009 년 6 월에는 회원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한 설문조사를 했고 동년 7 월에는 사업 분야별 간담회를 개최했다. 특별히 요식업 분과를 설립해 식당 업계의 경영혁신을 도모하려고 했다. 2009 년 10 월에는 좌담회 및 식품 위생교육 행사를 개최하여 회원들의 식품취급 허가증 취득에 도움을 제공했다. 식품 위생교육 행사는 6 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2009 년 10 월 19 일, 공급업체와 회원들 간의 관계를 개선해 회원들의 수익증대를 촉진하기 위해 마련한 공급업체와의 컨퍼런스에는 Canada Trust, Nestle Cream, Orange Maison, Multimarqaue, Agropur, Alarm Co., Old Dutch, ,Imperical Tabacco 등 다수의 공급업체와 변호사 등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2009 년부터 2010 년 초에 걸쳐 업종별 분과를 마련함으로써 업종 특유의 문제 파악 및 해결에 도움을 주었다. 17 대의 가장 큰 행사는 2010 년 4 월 16 일의 Trade Show 였다. 22 여 개의 공급업체가 참가하여 신규상품을 소개하며 원가인하와 회원들의 수익증대 방안을 구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친목 겸 네트워킹 행사로는 2009 년 6 월 3 일, 2010 년 6 월, 2010 년 9 월 27 일에 협회장배 골프대회를 개최하여 회원 간의 친목 도모에 기여했다. 또한 회원 복지향상 사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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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환으로 2009 년 9 월 25 일 한양대학교 의과대학과 검사비용 할인 MOU 를 체결했다. 이를 통해 몬트리올 실협 회원 및 가족이 한양대 의과 대학에서 검진을 받을 경우 비용의 20% 할인 혜택을 받게 됐다. 현재 몬트리올 실협은 중학교, 고등학교 및 대학생을 수혜자로 하는 장학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학업 성적, 공공 봉사 및 예체능 특기 등을 고려하여 수혜자를 선발한다. 한편 2008 년에 담배전시 금지법이 채택된 후 미성년자에 대한 담배 판매 관련 함정수사가 일어나 부당한 벌금이나 판매정지 처분이 내려지자 실협은 이에 관하여 법적 조언을 제공하였고 빈번하게 발생하는 도둑질을 예방하기 위해 인터넷 홈페이지에 도둑들의 범죄를 녹화한 영상을 게시하는 등 다양한 정보와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퀘벡 한인 실협의 전성기는 1980 년대 중반이후 약 20 년간이었다. 2000 년대로 들어서면서 퀘벡 실협은 하강기를 맡고 있다. 2004 년도에 프리토레이사의 리베이트가 갑자기 중단된 것이 하강기점이 될 수도 있지만 퀘벡 실협이 내리막 길을 가게 된 주요 원인은 ‘시대의 변화에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실협의 초창기 관계자는 전한다. 2000 년대 말 17 대가 젊은 임원들을 영입해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편의점에 한정되었던 회원의 범위를 전체 동포업소로 다시 확대하는 등 노력했지만 하강대세로부터 퀘벡 실협을 구출하지는 못했다. 2011 년 현재 총 267 개 동포회원 사업장을 업종별로 구분하면 편의점(dépanneur) 등 소매 유통업이 57.3%(153)로 가장 많고 요식업이 19.9%(53), 화원 7.5%(20), 기타 업종 15.3%(41)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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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활동

8.2 경제활동 유형의 변화

어떤 이민 공동체를 막론하고 이민자들의 경제활동 유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 이민자들의 경제사정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연령이나 가족사정등 주변환경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이같은 경제활동 유형의 변화에는 네가지 모형이 있다. 피고용인피고용인 모형과 피고용인자영업 모형, 자영업피고용인 모형, 그리고 자영업자영업 모형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피고용인피고용인’ 모형은 피고용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승진(Promotion)이라는 변화는 있겠으나 피고용인으로 남는다. 즉 굳이 생계수단을 자영업으로 변경하지 않아도 피고용 상태에서 만족스러운 경제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경우다. 대부분의 서유럽 민족계 공동체들이 이 모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은 인종과 언어의 장벽이 높지 않으므로 전문분야에서 피고용인으로 근무하면서 휴가도 자주 가고 인생을 즐기며 산다. 그렇다고 해서 서유럽계 공동체에 자영업이 없다는 것은 아니며 다만 유색민족에 비해 자영업의 필요성을 적게 느낀다는 의미다. 두번째 ‘피고용인자영업’ 모형은 피고용인으로 근무하다가 자영업으로 생계수단을 변경는 경우다. 이 유형은 언어장벽이 어느 정도 낮거나 혹은 현지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소지한 사람들이 피고용인 생활을 하다가 자금을 마련해 자영업으로 가는 경우에 해당한다. 중국계(광산취업식당 경영주), 일본계(어업/농업 노동자어업/농업 기업주), 이탈리아계(철도취업 건설회사 경영주), 필리핀인계(가정부 소매업 경영주) 공동체의 경제활동 변화가 이 모형에 속한다. 초기의 한국계 이민자(광산취업 및 페렛 종업원소매점 경영주)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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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자영업피고용인’ 모형은 자영업에 종사하다가 피고용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가면서 자영업(그 규모에 관계 없이)을 하다가 피고용인이 되는 경우는 어느 공동체를 막론하고 그리 흔하지 않다. 파산의 경우가 이에 해당 될 수 있으며 경영의 책임이 무거워서 스스로 피고용인의 길을 선택한 경우도 있을 수는 있겠다. 네번째 ‘자영업자영업’ 모형은 이민 초기부터 사업(창업 또는 사업장 매입)을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는 경우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업규모에 변화가 발생할 수는 있겠으나 자영업을 경제활동 유형으로 계속 유지하는 모형을 말 한다. 한국계(소매점 경영)와 유태계(대기업 경영), 그리고 중국(홍콩)계 공동체가 이 모형에 해당한다. 이민 역사 300 년인 유태계와 50 년인 한국계 공동체의 역사와 경제규모를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겠다. 그러나 유능한 민족들로 구성된 두 공동체 모두 주로 투자 이민자들로 인해 확장되고 발전되었다라는 유사성을 놓고 볼 때 지난 반세기 동안 퀘벡 동포사회 경제활동의 내용과 결과에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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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타민족의 경제활동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경제활동을 이해하고 그 발전방향에 관해 생각해 보기 위하여 먼저 타민족 공동체의 형성과정과 경제생활에 관하여 잠시 엿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다.

중국계 공동체

중국인은 1880 년대에 캐나다로 이민 와서 주로 광산 혹은 캐나다 태평양 철도회사 Canadian Pacific Railway 에서 일했다. 당시에는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제도화되어 있었는데 중국인은 본토 캐나다인이 피하는 저임금의 최저급 직업에 종사하면서 온갖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같은 차별대우를 피하기 위해서는 자영업이 최선의 생계 해결책이었다. 이에 따라 1921 년 경 부터 중국계 공동체에는 식당, 세탁소, 편의점 등의 소매업종에 종사자가 늘어 나게 되었다. 특히 식당업이 중국계 인구 증가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중국계 이민자들의 인구는 계속 증가하여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업(식품, 학원, 이발소, 여행사, 은행, 의류상점 등등)이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중국 공동체의 경제기반은 더욱 탄탄해 졌다. 그들의 1.5 세 및 2 세 자녀들은 변호사, 의사, 회계사 등 전문직으로 진출했고 이들에 의하여 중국계 이민사회의 발전기반과 주류사회 진출의 교두보가 마련되었다. 1986 년도에 중국계 캐나다인의 42% 가 경영/전문/사무직에 종사했고 소매업 및 식당 경영자가 52% 로 조사되었다. 그때 까지도 중국 이민사회 경제의 핵심은 여전히 자영업이었지만 고소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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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중국계 캐나다인들이 1980 년대에 많이 늘어났다. 한편 1980 년대에 투자이민이 허용됨으로써 막대한 중국자본이 캐나다로 유입되었다. 1987 년에는 2,500 명의 중국인(주로 홍콩계)이 25 억 $ (1 인당 100 만 달러)를 가지고 이민하여 2,500 명의 고용을 창출했다. 1987-2000 년 사이에는 11,000 명의 중국인이 143 억 달러를 유입했으며, 48,000 개의 고용을 창출했다. 중국인은 긴 세월에 걸친 이민 생활을 하면서 교육, 캐나다에 대한 지식, 캐나다 내에서의 경제활동 경험, 인맥구축, 중국과의 연계성 등등 이른바 사회 자본(Social Capital)을 축적했다. 캐나다의 중국인은 누적된 사회자본과 자본금에 힘입어 대규모의 기업을 설립했다. 예를 들어 대만의 The President Asian Enterprise 는 B.C 주에 있는 President Canada Syndicated Inc. 와 합작으로 대규모 쇼핑센터를 개발했고 The Pacific Place Development 사는 80 헥타르의 막대한 부지 (전 Expo 부지)에 대규모의 복합 부동산 단지를 개발했다. 이러한 투자는 엄청난 고용창출 효과를 냈고 많은 중국인이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게 했다.

일본계 공동체

일본인도 중국인과 비슷한 시기인 19 세기 후반에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일본인들은 광부 및 철도 노동자로서도 일했지만 주로 프레이저 강 지역에서 어업 및 농업을 통해 생계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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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도 중국인과 같이 인종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B.C 주 사범학교를 졸업해도 교사로 채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어업관련 기업주가 되어 생계기반을 넓혔고 1919 년에는 B.C 주 어업의 50%를 차지했다. 이 사업은 일본과의 생선, 특히 연어 수출사업으로 연계되었다. 일본인의 성공은 B.C 주의 기존 백인 어업 기업들의 불만으로 이어져 1941 년에 일본인의 어업면허 수가 15%로 급감하고 말았다. 어업이 힘들어지자 그들은 산림업으로 진출하여 1918 년에는 약 12,000 명의 일본인이 목재 공장에서 일했다. 동시에 프레이저 계곡과 오카나간 지역에서 농사를 시작했는데 특히 양계장 운영과 딸기 재배에 집중했다. 일본인들은 1930 년대의 대공황으로 인해 지가가 폭락하는 기회를 이용해 막대한 면적의 농지를 매입했고 1934 년에는 B.C 주 딸기 총 생산량의 85%를 차지했다. 이들 사업은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풍부한 취업 기회를 제공했고 이들의 후손들은 캐나다에서 고등교육을 받아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으로 진출했다. 일본인들은 소매업에도 종사했다. 편의점, 타바지(담배/잡지 판매소), 세탁소, 미용실 등을 매입해 생계기반을 마련했다. 당시 동양인의 수가 적은 까닭에 백인 동네에서 소매업을 하다 보니 백인 경쟁자의 반발로 일본인의 소매업 면허 수를 줄이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제 2 차 대전 후 인종차별이 금지되면서 일본인은 주류사회에 대거 진출했다. 1986 년도에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의 35% 가 경영자 및 전문직 종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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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계 공동체

유태계 이민자들의 경제적 성공은 널리 알려져 있다. 유태인은 18 세기 초에 캐나다로 이민 왔는데 서유럽 출신 유태 상인들이 주류였다. 그들은 자본과 상업기술을 이용해 대규모 기업을 창업했다. 에제키엘 솔로몬 및 제이콥 프랭크사가 좋은 예다. 1850 년대에는 유럽의 중산층 유태인들이 와서 몬트리올 경제 개발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로우 캐나다 유니언 뱅크 Union Bank of Low Canada 를 설립한 제이콥 헨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편 1900 년대에 접어 들어서는 동유럽에서 노동자 유태인도 다수 이주해 왔다. 몬트리올의 유태인 노동자는 유태인 소유의 의류공장에서 일했고 1916-17 년에는 대규모 파업이 발생해 유태인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유태인 휴일에 유급휴가를 준다는 것과 당시 몬트리올 사회의 반 유태인 정서를 들어 유태인 노동자는 유태인 고용주를 선호했다. 연방정부 통계자료에 의하면 1931 년도에 유태인의 직업분포는 유통업(36%), 제조업(30%), 사무원(10%) 도소매업(18%) 순이었다. 유태계 공동체는 성공했다. 1986 년 현재 유태인의 실업률은 6% (영국계 8%), 사무직(White Color Job)은 56% (영국계 43%), 대학 졸업률은 43% (영국계 19%) 였다. 당시 Bronfmann, Belzberg 등 유태계 공동체의 수많은 대기업이 부동산을 비롯해서 몬트리올 경제의 핵심을 지배하고 있었다. 연구자료에 의하면 그들의 성공 비결은 높은 교육수준, 교육을 강조하는 문화, 수직이 아닌 수평적인 종교관, 이성과 지성을 중시하는 중산층적 가치관 등이라고 한다. 현재 프랑스계와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모든면에서 퀘벡 주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공동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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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계 공동체

필리핀 민족은 한민족과 비슷한 1960 년대부터 캐나다에 이민 오기 시작했다. 1960 년대는 주로 의료인력 (의사, 치과의사, 특히 간호원)이 왔다. 1970 년대에는 사무원, 건설분야 노동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1980 년대와 1990 년대에는 가정부 등 서비스 분야의 근로자가 이민을 왔다. 1990 년대에는 캐나다 전체 가정부의 절반이 필리핀인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필리핀 가정부의 상당수는 대졸자들이었으며 이들중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인과 결혼하고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여 캐나다 사회에 대거 진출했다. 필리핀계 공동체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필리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업소들의 수가 급증했다. 이에 따라 송금업, 융자업, 보험업, 여행사, 비디오 가게, 꽃가게 등의 다양한 소매업이 발달 되었다. 2011 년 현재 필리핀계 퀘벡(캐나다)인들은 타 아시아 민족과는 달리 퀘벡 주 현지의 정치적, 사회적 및 문화적 공동생활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탈리아계 공동체

이탈리아인들은 19 세기 후반에 캐나다로 이민오기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인 이민자의 75%가 농부였고 나머지는 기능공이었다. 농업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그들은 철도 공사장의 노동자로 생계기반을 마련했다. 이 소문을 듣고 캐나다 이민 희망자가 급증해 취업알선 사업 (Padroni)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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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했다. 1904 년에는 무려 1 만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CPR 철도에서 근무할 정도였다. 그때 부터 축적된 건설업 관련 경험을 토대로 많은 건설회사가 설립되었고 지금은 퀘벡 건설업계를 이탈리아 공동체가 주도하고 있다. 몬트리올의 이탈리아인 인구는 50 만 명이 넘으며 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생로랑 St-Laurent 강 북부에는 이탈리아 타운(Little Italia)이 있다. 1946-1963 년 기간에는 무려 32 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이들의 대부분(76%)은 비숙련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인의 기업에서 일했고 그중 일부는 저축한 자금과 가족, 친척, 친구 및 이탈리아 은행의 자금으로 다양한 자영업, 특히 식당업을 하게 되었다. 1960 년도의 자영업 유형을 보면 건설업 (130 개사), 식품사업 (400 개), 편의점 (250 개), 피자리아/식당(120 개), 그 외에도 의류, 보험, 여행사, 신발, 가구점, 미용실, 인쇄 등의 자영업이 있었다. 또한 당시 이탈리아 병원(Santo Maria Cabrini)도 있었고, 36 개의 엔지니어링/건축회사, 20 개의 변호사/공증인 사무실, 8 개의 회계법인, 4 개의 약국 등이 있었다. 1970-1986 기간중 이탈리아인 경영자의 비율은 7%에서 17%, 사무직은 31%에서 41%로 증가한 반면에 노동자의 비율은 60%에서 40%로 감소되었다. 한편 자가주택 소유율은 86% (캐나다 평균 70%)였고, 평균소득은 $ 14,844 (캐나다 $15,693)로서 캐나다 평균치의 95% 에 달했다. 현재 이탈리아 공동체는 완전 현지사회화했으며 퀘벡 주류사회의 일원으로써 퀘벡 주의 경제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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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계 공동체

베트남인은 퀘벡 주에서 가장 성공한 소수민족 중의 하나지만 그들의 이민사회는 완전히 양분되어 있다. 1975 년 전에 이민 온 베트남인은 주로 의사, 변호사, 간호원, 회계사, 치과의사 등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불어로 교육받은 전문직 종사자였다. 이들은 당시 이 분야의 전문직이 부족한 퀘벡 주에서 대환영을 받았고 별 어려움 없이 퀘벡 주류사회로 진출했다. 이들의 후손은 퀘벡에서 고등교육을 받아 정계, 학계 및 경제 분야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퀘벡 주정부의 주요 부서에도 많이 진출했다. 특히 퀘벡 이민부에는 베트남 출신 고위 공무원이 많다. 그러나 1973 년 월남의 패망이후 난민의 자격으로 캐나다에 온 베트남인들은 비전문직 근로자들로써 퀘벡 경제 각 분야에서 피고용인으로 근무하다가 자금을 마련하여 자영업을 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업종은 편의점과 식당이지만 인구가 많다 보니 대규모 기업도 등장했다. 7-11 이라는 편의점 체인을 필두로 가구 공장, 베트남 간장 공장, 보석상, 보험사, 전자제품 판매점, 주유소 등을 경영함으로써 베트남계 공동체의 현지사회화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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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퀘벡 한민족의 경제활동

개척기의 경제활동

퀘벡 이민부의 자료에 의하면 1975 년 이전에 공식적으로 몬트리올로 이민 온 동포는 불과 175 명이었다. 1970 년대 초는 가족이민과 취업이민이 주류였고 투자이민은 아직 허용되지 않던 시기였다. 당시 동포 이민자들의 상당부분은 자영사업에 필요한 자본금이 부족하여 일자리를 찾았으나 언어장벽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다. 다행히도 몇몇 사람이 뻬렛(Perette)이라는 체인 편의점에 종업원으로 고용되어 동포들의 편의점 시대를 열었다. 한민족의 근면성이 널리 알려지자 많은 동포들이 뻬렛의 헬퍼 혹은 지배인으로 채용되었다. 편의점 근무는 새벽에 달을 보며 출근해 밤 늦게 달을 보며 귀가하는 중노동 중의 중노동이었으나 초창기 동포 이민자들은 이처럼 고된 일을 묵묵히 해냈다. 이는 초창기 중국계 이민자들이 광산에서 고생하는 모습이나 일본계 이민자들이 어업 현장과 딸기 밭에서 땀 흘리는 모습, 그리고 이탈리아계가 철도 공사장에서 갱목을 나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공동체 개척기 이민자들의 수고와 희생에 대하여 후세들이 감사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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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경제활동

1980 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계 공동체의 경제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캐나다 연방의 이민정책 변화는 한국으로부터 기업투자 이민자들을 대거 유입시켰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무렵 퀘벡에 유입된 중국자본 규모 보다는 작았지만 사업 투자금이 속속 퀘벡 동포사회에 유입되었다. 1990 년대 중반 이후 독립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경제구조가 다변화되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도 퀘벡의 동포경제는 이들 투자 이민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한국계 공동체의 경제활동 유형의 변화는 자영업이 지속된 모형(자영업자영업)으로 본다. 투자 이민자들은 수십만불의 사업자금을 가지고 입국해서 수년 내에 사업을 시작하고 두 명 이상의 고용을 창출해야 하는 조건부 영주권을 받고 들어왔다. 이들은 가지고 온 사업자금을 바탕으로 소매 유통업(데파노)과 요식업(식당) 분야에 진출했고 실업인 협회를 만들어서 공동이익을 도모했다. 투자 이민자들은 대부분 자기자본으로 사업체를 설립했고 상품주문과 회계, 판매, 사업장 관리등 종합적인 업무를 가족들과 협력해서 처리한다. 중요사항에 관한 의사결정은 주로 배우자간에 상의해서 하는데 부인의 의사가 많이 반영되는 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포들이 자신들의 현 사업에 만족하지 못한다. 이는 크게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타 유색민족과 비교할 때 사업을 잘 경영한다는 평가를 받는 동포들이 자신의 현사업에 만족을 하지 못하며 더구나 98%가 자녀들에게는 자신의 사업을 절대로 물려주지 않겠다고 답했다는 것은 매우 놀랄만한 사실이다(표 8-1). 왜 그럴까? 왜 만족을 못하면서도 그대로 유지하며 사는 걸까? 왜 자신의 자녀가 부모의 사업을 승계하는 것을 싫어 할까?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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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이 동포들이 종사하는 업종은 쉬운 업종이 아니다. 또한 전통적으로 한민족 부모들은 자녀가 전문직종에 종사하기를 바란다. 이민와서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자신의 자녀가 소위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직업을 갖게 되면 어깨가 으쓱해지기 마련이다. 과거에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민족이라서 그렇다고도 하지만 자녀에게 힘들고 영세한 사업장을 물려주기 싫은 부모의 마음이 엿 보인다.

영세한 동포 사업체

그러나 자신의 사업에 대한 만족도가 낮은 것은 좀 다른 이야기일 수 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동포 자영업 응답자중 73%가 이민 오기전과 비교해 ‘수준 낮는 일’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는 2011 년도에 RBC 은행이 중국계와 남아시아계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32% 보다 휠씬 높은 불만족도다.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람은 더 많았다. 현재 실협 회원중 대부분인 77%(206/267)가 편의점이나 식당을 경영한다. 앞의 조사결과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지 좋아서 편의점이나 식당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게 한다. 캐나다 이민비자를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상당한 재력이 있었거나 퀘벡 주가 권장하는 업종의 대기업에 근무한 경력이 있었거나 또는 직접 기업을 경영했던 전직 경영주였거나... 등등 하여간 꽤 능력있고 재력이 있어야 겨우 이민 신청서를 낼 자격이 주어지고 그후 5 년이나 걸리는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좁은문’이 이민행 공항출구였다. 이런 자긍심으로 이민 비행기를 탄 사람들이 이민오기 전에 점심시간이면 이용하던 지하 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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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나 길 건너 해장국집 주인처럼 현재 살고 있다면 어찌 자신의 사업에 만족한다고 설문지에 답할 수가 있겠는가? 만일 편의점 주인이 아니라 편의점 체인 사장이고 식당 주인이 아니라 크고 번듯한 식당을 몇개 가진 요식업 경영주라면 어떨까? 자신의 사업체에 만족해 하고 자녀에게 승계시키기 위해서 경영학을 공부하라고 하지 않을까? 따라서 사업의 종류와 규모는 만족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표 8-1> 현 사업에 대한 향후 계획 향후계획

남 성

여 성

찬 성

반 대

찬 성

반 대

사업확대

35.8

64.2

28.4

71.6

자녀승계

4.5

95.5

1.4

98.6

자료: 몬트리올 한인회, 1993

(응답자 수: 66 명)

사실 유사한 모형으로 발전중인 유태계와 중국(홍콩)계 이민자들의 기업규모와 비교해 볼 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세한 것이 한국계 자영업체의 규모다. 유태계의 경제규모를 대기업이라고 한다면 중국계는 중기업, 한국계는 구멍가게 규모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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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퀘벡 한민족 경제의 전망과 대책

퀘벡 한민족 경제부흥의 장애요소

이민 역사가 짧아서 일까? 그렇다면 시간이 가면 동포가 경영하는 편의점이 중소기업 규모로 커질까? 사업자금이 부족해서 일까? 아니면 동포들의 경영능력이 유태인이나 중국인들만 못해서 일까? 혹시 동포들이 구멍가게 수준의 소규모 사업장을 선호해서는 아닐까? 아니다. 대부분의 우리 동포들은 많은 자금을 가지고 입국하고 있으며 세계 어느 민족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는 사업능력과 근면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현재 퀘벡 동포경제의 수준은 동포들의 능력과 비교해서 매우 낮게 형성되어 있으며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동포 사업장들의 사업내용과 규모는 개선되고 확장될 필요가 있다. 본 장의 서두에서 언급하기를 퀘벡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현지언어를 잘 구사해야 하고 사업기획 능력과 마케팅/영업 능력, 조직관리/운영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자본금은 물론이고 인맥과 적절한 교육수준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들 항목별로 한민족 자영업소들의 실태를 조사해 보면 동포경제의 수준이 실제능력보다 낮게 형성된 원인이 밝혀지고 개선을 위한 대안이 도출될 가능성도 있겠다. 첫째로 한국계 이민자의 현지언어 구사 능력 46.5%(2001 년, 퀘벡 이민부 조사)는 중국계에 비해서 다소 높다. 그러나 1.5 세도 포함시킨 결과로 보여지는 이 자료에서 동포 두명중 한명만이 현지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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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장벽이 동포 자영업체의 장애요소라고 판단된다.

영세성에

크게

기여한

둘째로 기업경영 능력, 즉 동포 자영업주의 사업기획 능력과 마케팅 능력, 그리고 종업원 관리능력이 어느 정도인가 인데 이를 평가할 만한 근거자료는 마땅치 않다. 그러나 한국계 이민자는 모두 까다로운 이민심사 절차를 통해 선별된 능력이 검증된 사람들이라는 점과 주변 동포 자영업소들의 경영능력을 객관적으로 살펴 보았을 때 기업경영 능력이 부족해서 그들의 자영업체가 영세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소규모 편의점이나 식당을 경영하는 능력과 연간 매출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회사의 사업을 기획하고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고 수십수백명의 직원들을 관리하는 능력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현재 소규모 기업 경영자들중에도 충분한 잠재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며 근래의 투자 이민자나 독립 이민자들중에는 한국에서 이미 그 정도 기업의 경영자였던 사람도 많이 있다. 퀘벡 한민족 경제를 부흥시키자는 뜻이 모아질 때 이들이 나설 것이며 그들의 재능과 경력은 동포기업의 리더로써 값지게 쓰여질 수 있다고 본다. 셋째로 자본금의 규모는 절대적인 장애요소가 될 수 있다. 제 아무리 탁월한 기업경영 능력과 언어구사 능력, 그리고 좋은 아이템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사업확장에 필요한 자기자본이나 혹은 은행자금(Project Financing) 동원능력이 없으면 헛 일이다. 한국과 비교해서 예금이자가 거의 없는 까닭에 대출이자가 매우 낮은 퀘벡의 은행 시스템은 큰 자금이 필요한 기업에게는 대출이자 부담을 덜어 준다. 유태계와 프랑스계, 이탈리아계 기업들은 이런 은행 시스템의 장점을 잘 이용해서 소위 ‘은행돈’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 넷째로 현지 인맥이 거의 전무한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지구상 어느 곳에서나 인맥은 중요한 사업성공 요소다. 그런데 1 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남겨두고 이민 온 사람이다.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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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맥도 한국에 남겨두고 왔다. 한국과 무역업을 하는 자영업주인 경우에는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아무런 연고도 인맥도 없는 퀘벡의 맨땅에서 소규모 자영업을 수십명의 직원을 거느린 중소기업 규모로 확장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섯째로 한국계 이민자들의 교육수준은 매우 높다. 퀘벡에 거주하는 전체 동포중에서 대졸자의 비율은 37.4%로서 남미의 15.3%, 서인도의 12.2%와 크게 비교된다. 더군다나 근래에 유입되는 독립 이민자들은 거의 모두가 대졸이상의 고학력자들이다. 요약하면, 2010 년대의 퀘벡 동포경제 수준이 실제능력보다 낮게 형성되어 있고 동포기업들의 규모가 영세한 까닭은 ‘언어구사 능력의 부족, 소자본(은행자금 활용기회 결여), 그리고 백지에 가까운 현지 인맥’ 등이 주된 장애요소라고 말 할 수 있다.

어찌하면 좋은가?

퀘벡 한민족 경제의 현실태를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 혹은 그것에 관해 관심조차 두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자신을 믿고 이민을 온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잠 못 이루는 밤을 경험하지는 않았더라도 자신의 자녀가 타 민족의 자녀들과 경쟁하며 살아가야 하는 미래가 걱정된다면 현재 동포사회의 경제실태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직시해서 영세한 원인을 찾고 그 대책을 강구하는 것은 현 세대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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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라 온 한국에는 농업협동조합이라는 것이 있고 어협과 임협도 있으며 노량진 수산시장에는 상가 번영회라는 것도 있다. 업종별 중소기업들이 모인 연합회도 있을 것이며 대기업들의 전경련도 있고 상공 회의소라는 것도 있다. 각자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기에 존재하는 단체이고 기관들이다. 어떤 나라의 경제활동조직은 그 나라 국가경제의 규모에 관계없이 비슷하다. 이민 공동체의 경제활동조직은 국가조직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민역사 120 년인 중국계나 일본계, 300 년에 가까운 유태계 공동체의 경제활동조직은 대기업 모임, 중소기업 모임, 상공 회의소, 경제 연구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연히 저절로 생긴 경제조직이 아니며 시간과 아픔과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면 그들과 같은 이민사회속에서 경쟁하며 사는 한민족 공동체의 경제활동조직은 어떤가? 과거 30 년 동안 퀘벡의 동포경제를 이끌어 온 퀘벡 한인 실업인 협회만이 유일한 경제활동조직으로 존재할 뿐이다. 소규모 사업체를 가진 협회원들의 친목과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실협의 존재이유이며 회원들의 이익에 큰 기여를 해 온 것이 사실이고 앞으로도 그 역할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퀘벡의 동포경제가 언제까지 소규모 사업체들에만 의존할 것인가? 10 년이 가고 다시 20 년이 지나서 우리의 1.5 세와 2 세들이 장성했을 때 부모세대로써 그들에게 물려줄 공동체의 경제기반이 이대로 좋은가? 과거 한국에서 기업경영 경력을 가진 동포들의 능력과 가치를 이대로 소규모 사업장에 묻어 둘 것인가? 앞으로 유입될 1 세들중에는 대기업 경영주의 꿈을 안고 공항에 내리는 후배들이 분명히 있을텐데 이민선배로써의 책임은 무엇인가? 모든 이민자 각자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소매상 협회(혹은 소규모 사업장들의 협동조합)격인 현재의 실협외에 중기업과 대기업의 꿈을 가진 미래의 경영자들을 돕기 위한 경제단체가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이탈리아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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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청년 상공회의소 처럼 경제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정부의 협력하에 본국자금과 은행자금을 끌어 들이고 공동체의 기업규모 확대 및 경제기반 강화를 도모할 시점이다. 이런 능력을 가진 인재들을 발굴하고 힘을 모아 주어야 할 때가 오고 있다. 중국계나 일본계 공동체가 120 년만에 이룬 경제부흥을 다시 반세기후가 아닌 20-30 년 이내에 우리의 1.5 세와 2 세 세대가 누리도록 시간을 앞 당기기 위해서는 이 시대를 사는 1 세들 모두가 지혜를 모아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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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생활 제9장


교육생활

제9장 교육생활

이민사회의 교육생활은 한국에서의 그것보다 더 다양할 수 있다. 자녀의 학교교육과 부모들을 위한 성인교육외에도 한민족으로써의 정체성 교육을 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퀘벡 주에는 이민 1 세들의 정착을 돕기 위한 현지언어 및 기술 교육제도가 잘 발달해 있다. 또한 몬트리올 한인회관에는 교양강좌와 노년대학이 개설되어 있다. 교양강좌는 제 7 장에, 노년대학은 제 10 장에, 그리고 자녀의 학교생활과 부모의 책임에 관한 내용은 제 5 장에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제 9 장에는 퀘벡의 정규 교육제도 소개와 한민족 공동체의 청소년 정체성 교육활동(한글, 한국문화등)에 관하여 기록한다.

9.1 퀘벡 주의 교육제도

<그림 9-1>과 같이 퀘벡 주의 교육제도는 초등교육 과정(유치원 및 초등학교), 중고등교육 과정, 전문교육 과정, 그리고 대학교육 과정의 4 단계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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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생활

통상적으로 네살 때 유치원에 가서 2 년 동안 다니다가 여섯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6 년의 초등교육 과정을 마친다. 퀘벡 초등교육의 기본목적은 중고등교육 과정 진학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개성을 개발시키며 사회생활의 원칙과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봉사하는 마음과 참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이것이 캐나다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두번째 단계는 중고등 교육과정이다. 이 과정은 중학교 3 년과 고등학교 2 년을 묶어서 5 년 동안 교육하는데 수강과목의 종류와 수강완료 여부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5 년의 학술적 정규과목을 수강하고 중고등학교 졸업장(SSD: Secondary School Diploma, 불어로 DES, 한국의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그룹이 있다. 이들은 졸업후에 대부분 전문학교(CEGEP)로 진학한다. 다른 그룹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려는 그룹인데 이들은 3 학년때 부터 전문기술 과목들을 수강하고 전문교육 졸업장(DVS: Diploma of Vocational Studies, 불어로 DEP, 한국의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는다. 전문기술 과목은 21 개 기술분야에 약 300 여 개로 폭 넓게 구성되어 있고 학생들은 자기가 선호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수강할 수 있다. 이 과정의 목적은 퀘벡 경제가 필요로 하는 준 숙련 기술인력을 양성하는 데 있다.

<그림 9-1> 퀘벡 주의 교육제도 초등교육 과정 유치원 초등학교 1Y

2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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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Y

2Y

3Y

4Y

5Y

6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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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 교육 과정 중학교 1Y

고등학교

2Y

3Y

4Y

5Y

중고등학교 졸업장 (SSD: Secondary School Diploma) 중고등학교 전문교육 졸업장 (DVS: Diploma of Vocational Studies ) 중고등학교 전문교육 증명서 (AVE: Attestation of Vocational Education)

전문교육 과정 전문학교 (CEGEP) 1Y

2Y

3Y

전문대 졸업장(DCS) 취득후 대학 진학

전문대 졸업장(DCS) 취득후 취업 혹은 대학 진학

대학교육 과정

1Y

2Y

3Y

대학교 4Y 5Y

6Y

7Y

8Y

학사: BA 석사: MA 박사: Ph.D.

통상적으로 네살 때 유치원에 가서 2 년 동안 다니다가 여섯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6 년의 초등교육 과정을 마친다. 퀘벡 초등교육의 기본목적은 중고등 교육과정 진학에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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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개성을 개발시키며 사회생활의 원칙과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봉사하는 마음과 참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이것이 캐나다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두번째 단계는 중고등 교육 과정이다. 이 과정은 중학교 3 년과 고등학교 2 년을 묶어서 5 년 동안 교육하는데 수강과목의 종류와 수강완료 여부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5 년의 학술적 정규과목을 수강하고 중고등학교 졸업장(SSD: Secondary School Diploma, 불어로 DES, 한국의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그룹이 있다. 이들은 졸업후에 대부분 전문학교(CEGEP)로 진학한다. 다른 그룹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려는 그룹인데 이들은 3 학년때 부터 전문기술 과목들을 수강하고 전문교육 졸업장(DVS: Diploma of Vocational Studies, 불어로 DEP, 한국의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는다. 전문기술 과목은 21 개 기술분야에 약 300 여 개로 폭 넓게 구성되어 있고 학생들은 자기가 선호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수강할 수 있다. 이 과정의 목적은 퀘벡 경제가 필요로 하는 준 숙련 기술인력을 양성하는 데 있다. <퀘벡 중고등학교의 전문기술 교육분야: 행정학, 경영학, 건재, 기계, 보건, 토목 및 광산, 항공, 건축, 산림, 기계관리, 미장, 식품학, 설계, 인쇄, 금속, 교통, 응용미술, 전자, 방직기술 등> 반면에 졸업장(Diploma) 대신 전문교육 증명서(AVE: Attestation of Vocational Education)를 받는 그룹도 있다. 이 그룹은 중고등학교 5 년 교육과목중 일부분만을 수강하고 기술교육 쎈터가 발급하는 기술자격 증명서를 받게 된다. 세번째 단계는 전문교육 과정이다. 캐나다에서는 퀘벡 주에만 있는 이 전문학교(CEGEP: Collège de l’éducation Générale et Professionnelle, College of General and Professional Education) 과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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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분야에 따라 2 년 또는 3 년이 소요된다. 즉 2 년 과정을 끝내고 대학으로 진학하는 전공분야가 있고 2 년 동안 일반 과목을 배운 후에 다시 한해 동안 전문기술 과목을 더 수강하고 취업 또는 진학을 결정하는 3 년 짜리 전공분야가 있다. 이 과정을 마치면 전문대학 졸업장(DCS: Diploma of College Studies, DEC: Diplôme d’études collégiales)을 받는다. CEGEP 교육의 목적은 숙련된 전문기술 인력을 육성하는 것이다. 네번째 단계는 대학교육 과정이다. 퀘벡 주에는 대학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영어권 대학으로는 McGill, Concordia, Bishop 대학이 있으며 불어권 대학으로는 Montreal , Laval , 그리고 퀘벡 주립 대학(UQAM)을 꼽을 수 있다. 각 대학의 교육 과정은 학사 과정 3 년, 석사 과정 2 -3 년, 박사과정 3 년으로 되어 있다.

9.2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자녀교육 활동

캐나다에서 오래 살아서 나름대로 현지의 주류사회에 적응을 했다고 하더라도 소수민족은 언제나 소수민족이다. 따라서 한국계 캐나다(퀘벡)인으로서의 통합 정체성이 확고하지 못할 때 한민족의 자긍심은 물론이고 자신의 존재가치와 존귀함 마저 잃게 될 수 있다. 또한 모국의 언어를 말하고 문화를 안다는 것은 향후 취업을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이 때문에 한민족 동포자녀들이 한글과 한국문화를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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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자녀의 한글교육 활동

퀘벡 한민족 동포사회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집에서 한국말을 쓰도록 권장하고 직접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집에서 한글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에는 교재등 여러가지로 부족한 면이 있을 수 있다. 간혹 집에서 영어 또는 불어만을 쓸 것을 강조하는 부모도 있으나 이 경우 부모의 현지언어 구사능력이 충분하지 못하면 부모-자녀간에 의사소통이 어려워지고 세대갈등으로 발전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자녀의 한글교육은 한글교육기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몬트리올 한인회의 다민족 언어 및 문화학교를 비롯해서 몬트리올 한인학교와 각 종교단체의 주일 한글학교 등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곳이 퀘벡 한민족 동포사회 내에 여러군데 있다.

[한인회의 다민족 언어 및 문화학교] 2010 년 10 월 몬트리올 한인회(28 대 회장 이춘홍)는 산하 교육기관으로 다민족 언어 및 문화학교(Multiethnic School of Languages and Cultures)를 퀘벡 주정부에 등록했다. 이 학교는 같은 해 11 월에 개교했으며 초등부와 중등부로 나뉘어 한글을 가르친다. 현지 언어인 영어나 불어에 익숙한 자녀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할 경우 사용언어의 선택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현지언어 사용이 효율적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다민족 언어 및 문화 학교에서는 이런 일반적 인식에서 벗어나 한국어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이 학교는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서로 잘 표현하도록 다양한 교습활동을 고안해 실시하고 있다. 특히 문법교육 위주의 프로그램에서 탈피하고 아이들에게 익숙한 동영상 시청각 자료를 수업교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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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행하여 사용한다. “이같은 방법은 한국어 및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한 학생들의 빠른 이해와 깊은 사고를 도모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라고 학교 관계자는 말한다.

[종교단체의 한글학교] 몬트리올 한민족 동포사회에서 자녀들의 한글교육 역사는 이민역사와 큰 차이가 없다.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한민족으로서는 당연한 이야기다. 1969 년 1 월 26 일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에서는 첫 주일학교가 문을 열었고 그때부터 퀘벡 한민족사회에 한글교육의 역사가 시작 되었다. 초창기의 교사(반사)로는 김순애, 정영순, 김현준씨가 수고했다. 그러다가 1978 년 2 월 5 일 현지정부에 한글학교로 공식등록하고 민족교육의 터전으로 도약했다. 정대해 박사와 유정순 교장의 뒤를 이어서 정세봉, 이원우, 장근희 교사가 수고했고, 그후 지속적으로 발전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0 년대 초 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어 교육에 대한 종교단체의 역할이 컸다. 당시에는 교회마다 재외동포재단으로부터 매년 한글학교의 운영을 위한 지원금을 받았다. 이 지원금 덕분에 이민오기 전에 한국에서 한글교사였던 신자들이 나서서 자녀들에게 체계적인 한글교육을 제공할 수가 있었다. 당시 교회들은 한글교육뿐만 아니라 아동 및 청소년 예배를 한국어로 봄으로써 자녀들의 한국어 실력을 향상 시켰다. 그런데 1990 년대 후반에 교회가 더 늘어나서 교회의 재정수입이 줄어들었고 총영사관을 통해 받던 재외동포재단의 지원금 마저 끊기면서 교회들의 한글교육 활동이 주춤해 졌다. 재정이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도 2011 년 현재 주말 한글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종교단체는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외에도 한인성당, 감리교회, 사랑교회, 서광교회, 온누리 교회, 호산나 교회, 한인교회 등이 있다.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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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단체의 주일학교들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알찬 프로그램을 가지고 자녀들에게 한글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몬트리올 한인감리교회 한글학교는 미취학 아동부터 초등학교 아동까지 캐나다로 삶의 터전이 옮겨진 아이들에게 한글을 교육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돕고 더불어 교회 안에서 언어로 인해 신앙생활 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특히 이 학교에서는 수준별로 교재를 갖추고 아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한글을 배울수 있도록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매월 첫째 주와 마지막 주에는 영상과 특별활동으로 지루하지 않게 학습을 하고 있다. 또한 몬트리올 서광교회는 한글영재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학교는 한글을 통해 아이들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뉴욕 서광교회 영재학교의 교육과정과 교재를 캐나다 상황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동포자녀의 한국문화 활동

2010 년대 퀘벡의 한민족 동포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문화생활을 즐기며 살고 있다(제 12 장 문화예술 생활). 그러나 그들의 자녀인 1.5 세나 2 세들에게 한국문화를 교육시킬 수 있는 환경은 매우 열악한 실정이다. 현재 퀘벡의 한민족 공동체내에서 한국문화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은 없다. 물론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홍보하는 한국 문화원도 없다. 다행히 고속의 통신기술과 이미지 압축기술이 발달한 인터넷 혁명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화상(VOD)과 음성(AOD) 매체를 통해 한국의 생활문화를 보고 배우는 동포 청소년들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인터넷 영상을 통해서 한민족의 자긍심을 가슴에 담고 정체성을 키워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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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이다. 특히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는 한류열풍이 몬트리올에 까지 미침에 따라 한국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늘었다. 2009 년부터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최신 한국가요를 섞은 Dance Festival 성격의 K-POP 공연(한류우드, East 2 West 등)들이 몬트리올 도심의 문화공간에서 종종 열린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공연은 한민족 동포 1.5 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고 중국계등 다양한 민족 수백명의 청소년들이 함께 즐기며 열광한다. 또한 매년 봄이면 몬트리올 도심의 매길대학 캠퍼스에서 ‘한국 문화의 밤’ 행사가 열린다. 10 여년전에 시작된 이 한국문화 행사는 김명희 교수의 지도로 매길대 한국 학생회가 주관하며 한민족 학생은 물론 타 민족 학생들도 참여해서 한국노래를 부르고 전통춤을 추며 걸쭉한 마당극을 펼치기도 한다. 관람석에서는 수백명의 학생들이 갈채를 보내고 공연후에는 한국음식도 함께 즐긴다. 몬트리올 총영사관이 이 행사를 매년 후원하고 있으며 몬트리올 한인회도 회장단에 따라 관심을 갖는다.

9.3 차세대 교육을 위한 공동체의 과제

다문화 가정의 자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

이민 역사가 계속될 수록 한민족의 가정이 다민족, 다문화 가정으로 바뀔 것이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인데 반해 준비는 미흡한 편이다. 다문화 가정에서 자라는 2 세, 3 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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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교육시킬 수 있는 적절한 프로그램과 교재, 교수법 등을 개발해야 할 때다. 이를 위하여 공동체내에서 한글교육을 담당하는 각 기관들의 상호협조가 절실하다. 아울러 한국의 관련기관(문화체육 관광부, 국립 국어원, 재외동포재단, 한국어 세계화 재단 등)과도 상의해서 해외 각지의 현실이 반영된 한국어 교재가 개발되도록 협력해야 한다.

청소년 문화활동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과 지원

주로 CEGEP 및 대학교에 다니는 1.5 세 동포자녀들로 구성된 위의 한류문화 공연팀은 6 개월전부터 행사를 기획하고 방과후에 연습을 한다. 그러나 입장티켓을 판매해도 행사자금은 항상 부족하다. 연습장과 공연장 대여료만 해도 수천 달러가 소요되기 때문에 학생들 주머니 사정으로는 크게 무리다. 그래서 어른들을 바라다 보지만 관심을 갖는 1 세들이 별로 없다. 한편 공연에 과도한 시간을 소모함으로써 학업에 지장을 받는 학생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한국문화 활동을 존중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염려하고 도움주는 어른들의 관심과 지원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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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생활

한국문화 교육공간의 필요성

가끔 모국에서 예술단체가 방문하고 매년 한국 영화제가 열리며 합창단과 무용단이 있기는 하지만 자녀들에게 제대로 한국문화를 교육시키기에는 부족하다. 더군다나 문화는 무용이나 음악등 예술분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음식문화, 의복문화, 주거문화, 스포츠 문화등 인간의 삶 자체가 문화이며 그 생활문화는 항상 발전하고 변하는 것이고 보면 한국의 옛 생활과 근래의 생활 모습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한국문화 공간이 예술의 도시 몬트리올의 동포사회에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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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제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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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장 노후생활

의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수명이 크게 연장된 요즘은 ‘예순이 불혹’이라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참으로 좋은 세상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60 세가 넘으면 ‘노인’이라는 소리를 주위에서 듣게 된다. 평균수명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인이 될 것이고 노후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노후생활은 보람있는 생활이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좋은 직장을 갖고 평화스러운 부부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인생의 보람을 느낀다. 어린 손자손녀가 재롱 피우는 것을 보면 위안을 받기도 한다. 또한 인생 후배들이 가끔 안부를 전할 때는 고맙고 흐믓할 때도 있다. 노후생활은 문제도 많은 생활이다. 현직에서 은퇴를 하는 순간 현역시절에 누리던 권위와 존경, 명예가 사라지므로 허탈감과 함께 사회에서 버림받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한편 노년기는 인생을 청산하는 시기다. 현역 때에 소중하게 생각한 것들이 무의미하게 보인다. 또한 그 동안 피땀 흘리면서 이민 공동체를 세웠는데 후손들이 크게 인정하지 않는 듯하여 섭섭할 때도 있다. 고독과 건강악화라는 문제도 뒤 따른다. 특히 치매에 걸려 자녀들을 고생시키지는 않을까 염려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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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제 10 장에서는 2010 년대 퀘벡 한민족사회에서 노년들의 일상과 노후생활의 문제점, 그리고 노년회의 활동과 과제에 관해 기록한다.

10.1 노년층의 생활

몬트리올의 노년들은 가족생활에 기여하고 여가활동도 즐기고 공동체 행사에 참여도 하면서 노후생활을 한다.

손자손녀 돌보기

한민족 공동체에서 노인의 중요한 역할중 하나가 가정에서 손자손녀를 돌보는 일이다. 손자손녀를 유치원 혹은 초등학교에 등하교 시킨다거나 숙제를 돌 봐주고 한국말을 가르치기도 한다. 노인들의 이러한 역할은 사업에 바쁜 1 세 자녀들을 돕고 손자손녀의 정체성 유지등 이민가정의 안정적인 생활유지에 크게 기여한다.

가족사업 참여

이민사회의 노인들은 가족사업을 도와주는 일을 많이 한다. 한인의 대다수가 운영하는 편의점과 식당, 꽃집, 야채과일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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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상점은 노동 집약적인 업종이다. 종업원을 고용하기도 하지만 비용을 절약하기 위하여 가족 모두가 도와서 사업장을 운영하는 가구가 많다. 노인들의 협조는 Family Business 에 큰 힘이되고 노인들에게 소일거리도 제공한다.

여가 활동

날씨가 따듯해지는 5 월 부터 10 월까지 노인들의 대표적인 여가활동이 골프다. 70-80 대의 노년부부가 골프잔디를 함께 걷는 모습은 골프가 대중화된 퀘벡의 골프장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다. 또한 노년들의 취미와 교양생활을 위해서 한인회관에는 노년대학이 있다. 노년대학에서 그들은 농악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훌륭한 강사를 초빙해서 특강과 건강 세미나도 듣고, 노래와 연극에도 직접 참여한다. 한편 노년회에서는 철마다 이들을 모시고 봄 나들이, 여름 소풍, 가을 단풍놀이를 간다.

공동체의 행사 참여

몬트리올 한인사회의 대표단체인 한인회는 신년 하례식, 삼일절 행사, 광복절 행사, 연말파티 등 다양한 정체성 보전활동을 한다. 이 때가 되면 노년들은 한복 두루마기 또는 정장을 곱게 차려 입고 한인회관에 간다. 그러나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60 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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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청소년들은 학업 때문에, 그리고 장년들은 생계활동 때문에 바쁘다 보니 이 같은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노년층 뿐이라고 한인회는 해명한다. 여하튼 이런 저런 이유로 2010 년대 몬트리올 한인회의 행사들은 노인들의 참여로 유지되고 있으며 한인회 총회의 참석자도 대부분 노인들이다. 이는 몬트리올 한인회가 풀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한국 전통 가치관 보전 활동

한국전통 가치관의 보전을 위해 노인들이 하루에 몇 시간을 소비한다고 꼭 집어 말 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노인들은 한국의 유교적 사회질서를 많이 강조한다. 가정에서의 적당한 유교 교육은 어린 자녀들이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한국전통 가치관을 복합적으로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유교질서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간혹 가족내의 부모-자녀 관계뿐만 아니라 한인사회 단체내의 인간관계도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공동체내의 단체간 관계마저도 수직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은 1980 년대 이전에 이민 온 지식층 노인들에게서 특히 심하게 나타난다. 유교적인 사회질서 존중사상을 기반으로 한 이러한 가치관은 수평적인 사회관계를 중요시 하는 퀘벡 땅에서 세대간의 갈등을 유발시키지 않을 수 없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북미의 자유 가치관과 프랑스의 낭만적 가치관속에 성장하는 청소년들에게 전통적 수직 가치관을 너무 강요하다 보면 노년세대와 거리를 두게 되고 나아가 한인 공동체내의 심각한 세대갈등으로 발전할 수도 있으며 젊은이들이 공동체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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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활동에 참여하지 않아서 결국은 몬트리올 한인회가 노령화된다. 이는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에 이롭지 못함은 물론이고 잘못하면 한민족사회 전체를 퇴보시키는 위험한 행동이 될 수 있다.

10.2 노후생활의 문제

노후생활의 문제는 심리적 문제, 경제적 문제, 노년주택 구입난, 건강문제, 대인관계 문제, 현지사회와의 관계 문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심리적인 불안

노후생활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이며 살아온 인생을 정리하는 단계이다. 노인들의 공통된 심리적 자세는 인생에 대한 실망감이다. 인간으로서 모든 부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고 살던 솔로몬 왕도 인생은 “헛되고 헛되다 라고” 평가했다. 노후생활의 대부분은 현직에서 은퇴한 생활이다. 은퇴는 소득의 단절, 명예와 권력의 중단, 직장동료와의 이별, 가족내에서의 권위상실 등을 의미한다. 현역에 있을 때는 썸바디(Somebody)였지만 은퇴하면 노바디(Nobody)가 되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노후생활은 현역생활과는 전혀 다른 생활이며 때로는 불가피한 변화를 받아 들이기가 어렵다. 노후생활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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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자신과의 관계다. 이 문제는 존재론적 문제, 철학적 문제 및 신학적 문제다.

경제적인 어려움

현역에서 은퇴하면 소득이 감소되게 마련이다. 직장 퇴직금, 개인 퇴직금, 누적된 저축금 등 개인자금과 연방 노후생활 보장연금(Old Age Security), 퀘벡 연금 (Quebec Pension Plan), 추가소득 보조금, 배후자 보조금, 미망인 보조금, 주택수리 보조금 등 다양한 정부지원 프로그램이 몬트리올 노인들의 소득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래표에서 보듯이 노인들의 상당수가 부족한 소득으로 살고 있으며 응답자의 80%가 정부의 노년생활 지원금을 받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는 대다수 노인들이 정부 지원금을 신청하는 방법을 모를 뿐더러 설사 안다고 해도 언어의 장벽 때문에 포기하는 노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노인들에게 정부 지원금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지원금을 신청서 작성을 대행해 주는 등의 노년층 생활지원 대책의 마련이 시급하다.

<표 10-1> 한국계 노년세대의 소득 만족도 비 율(%) 내 소득이 부족하다

44.0

적당하다

32.0

충분하다

24.0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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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표 10-2> 정부지원금 수혜 난이도 비율(%) 받기가 매우 어렵다

65.0

어렵다

15.4

쉽다

19.2

자료: 한인들의 퀘벡사회 통합, 퀘벡 이민부, 1992,정희수

주거의 문제

어디나 마찬가지로 자녀와 함께 기거하는 노인외에 단독가구를 구성하고 사는 노인들이 몬트리올에도 많이 있다. 오래전 한인회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이들 단독가구 노인들의 대부분은 임대주택에 살고 나머지 28% 의 노인들만이 정부가 운영하는 사회주택에 거주한다. 정부지원 사회주택의 공급이 중단된 지 오래이기 때문에 지금은 그 나마도 노인주택에 입주하기가 더 힘들어 졌다.

건강의 문제

몬트리올 노년층의 건강상태는 대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퀘벡 주에는 다양한 공공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많이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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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있다. 그러나 역시 한국계 노인들은 언어소통 문제와 정보의 부족으로 수혜 받기가 어려운 것이다.

<표 10-3> 한국계 노인들의 건강 상태 비율(%) 건강상태가 나쁘다

29.4

보통이다

8.8

양호하다

61.8

자료: 상동

<표 10-4> 노인들이 느끼는 의료 서비스 수혜 용이성 비율(%) 매우 어렵다

33.3

어렵다

20.2

쉽다

46.7

자료: 상동

고독의 문제

동 조사에서 몬트리올 노년층의 약 60%는 고독문제가 심각하지 않다고 답했다. 노인들은 가족이나 친구관계, 운동,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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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오락, 또는 종교생활에서 고독의 해소방법을 찾는다고 한다. 가족들의 대부분이 노인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있으며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잘 이해한다고 말했다. 운동, 오락, 친목활동등 여가활동이 좋은 해소방법이지만 기회가 충분하지 않다고 절반이상의 노인들이 응답했다.

<표 10-5> 한국계 노인들이 느끼는 고독의 심각성 비율 (%) 매우 심각하다

23.1

심각하다

15.4

심각하지 않다

61.5

자료: 상동 <표 10-6> 노인들이 느끼는 여가활동 기회의 충분성 비율 (%) 부족하다

23.5

보통이다

34.6

충분하다

41.2

자료: 상동

현지사회 적응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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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노후생활

몬트리올 노인들의 약 80%가 퀘벡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느끼지만 캐나다와 퀘벡에 대한 소속감은 장년보다 높다. 노인들의 61% 가 캐나다 (장년 남자: 37%), 노인들의 41%가 퀘벡 (장년 남자 18.3%) 에 소속감을 느낀다. 즉 노인들은 현지사회 적응은 힘들지라도 이곳 캐나다 퀘벡에 이민 온 것을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표 10-7> 노인들이 느끼는 퀘벡사회 적응의 용이성 비율(%) 어렵다

46.2

보통이다

34.6

쉽다

19.2

자료: 상동 <표 10-8> 한국계 퀘벡노인들의 느끼는 사회 소속감 비율(%) –복수선택 한국 소속감을 느낀다

68.3

캐나다 소속감을 느낀다

60.9

퀘벡사회 소속감을 느낀다

40.9

자료: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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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10.3 몬트리올 노년회

몬트리올 대한 노년회는 1978 년에 설립되었고 초대 회장에는 장윤천씨가 선출되었다. 그후 19 명의 노년회장들이 노후생활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 왔다. 노년회의 운영은 임원이 책임진다. 임원은 1 명의 회장, 2 명의 부회장, 이사 약간 명 및 2 명의 감사로 구성된다. 노년회의 주요사업은 노년회보 발간, 노년대학 운영, 고정행사, 교양 세미나 및 간담회, 회원생일 축하잔치, 회원동정, 입원회원 위문, 경조사 참석 등이다. 노년회는 1978 년에 장윤천 회장이 매우 어려운 여건 하에서 창립하였고 방용성 (2 대, 4 대, 5 대) 회장, 정세봉 회장 (3 대), 박동열 회장 (6 대), 정의남 회장 (7 대) 및 조상훈 회장 (8 대)이 헌신적 노력으로 노년회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제 9 대(1992-1993) 김병옥 회장단이 처음으로 골프 친목회를 구체화하여 임기 동안 수 차례 골프대회를 주최했다. 제 10 대(1994-1995) 이창규 회장단 시절에는 원래 10 대 회장으로 선출된 유근용 회장이 사임하는 이유로 이창규 회장이 계획된 행사를 다 시행하지는 못했으나 한인회가 주최하는 행사 (신년하례식, 3.1 절 행사, 8.15 행사) 와 삼계절 야유회는 계속 시행했다. 이창규 회장 임기가 종료된 후에도 회장 후보자가 없었다. 이에 방용성 전 회장( 1979, 1982-1983, 1984-1985)이 다시 11 대 회장으로 취임했으나, 취임 6 개월 후에 사임하였고 후임으로 유근용 회장이 12 대(1996-1997) 회장이 되었다. 제 13 대 와 제 14 대(1998-1999, 2000-2001) 는 조병철 회장단이 맡았다. 조 회장은 노인의료 보험 세미나, 노인 연금 세미나, 노인 건강-CLSC 세미나, 이민 및 법률 세미나, 유언장 및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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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상속세 세미나, 치아 건강 간담회 등 다양한 교양 세미나를 개최했다. 제 15 대(2002-2003)는 전관병씨가 맡았다. 전 회장은 퀘벡 회사법 제 3 부에 따라 노년회를 비영리 단체로 등록했다. 2002 년 3 월 20 일에 신청하여 동년 6 월 12 일에 등록 통지를 받았다. 또한 전 회장단은 노년회가를 만들었다. “대한 노년회 노래(작사 유정순, 작곡 김남식): 남산에 버금가는 몽레알 산에 한가람 뒤로하고 생로랑 만나 우리가 뿌리내린 새 희망의 터, 할 일 많은 이 땅에서 힘차게 사세. 꽃을 피웁시다. 노래 합시다. 대한 노년회, 후세에 본이 되는 대한 노년회, 우리의 자랑, 우리의 긍지, 몽레알 대한 노년회. 우리의 희망, 영원하리 대한 노년회” 제 16 대(2004-2005) 유봉성 회장단의 큰 업적은 농악대의 창단이었다. 농악대는 한인회 문화행사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때 노년회원 사진을 붙인 주소록도 작성했다. 제 17 대(20062007) 정희수 회장단은 다양한 세미나를 개최했고, 복합문화 행사와 생-쟝 바띠스뜨 축제, 그리고 몬트리올 시가 주관하는 Weekend du monde(세계의 주말) 행사 등 몬트리올 시와 퀘벡 주정부가 주관하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제 18 대(20082009) 이영민 회장단은 노년대학 및 노년회보를 통해 서양요리와 요리법을 가르치면서 회원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했다. 제 19 대(2010-2011) 김광오 회장단은 유언장 및 장례식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노년회보

노년회의 매우 중요한 사업중의 하나가 노년회보를 발간하는 일이다. 이전에도 간단한 노년회 소식지가 있었지만, 체계화된 ‘노년회보’는 김병옥 9 대 회장단이 1992 년에 창간하여 2011 년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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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1 월 현재 187 호가 발간되고 있다. 명칭은 ‘노년회보’로 시작하여 유지하다가 유봉성 회장 시절에 ‘청송’으로 바뀌었고 김광오 회장 (2010-1011) 때에 다시 “노년회보”로 이름이 회복되었다. 어느 회장단을 막론하고 노년회보의 공통된 내용은 ‘노년회 고정행사에 대한 정보, 노후생활의 지혜에 대한 정보, 건강에 대한 정보, 회원 동정에 대한 정보, 생일축하 메시지, 기타 정보 등으로 구성된다. 조병철 회장때의 노년회보에는 노인들이 병원에 가서 사용할 영어단어를 규칙적으로 소개한 것이 주목된다. laxative (변비약), bedpan/urinal(소변기), dislocation of bone (뼈가 어긋났음), diarrhea (설사), nausea (메스꺼움), bowel movement (대변), ulcer in mouth (입안이 헐다), hot flashes (몸이 더운 것), itch (가려움), convulsion (경련을 함), swollen glands (임파선이 부어 오르다), palpitation (심장이 두근거림), shortness of breath (숨이 가쁨), rapid heart beat (심장이 가쁨), excessive phlegm (지나친 가래), hearing loss(귀가 잘 안 들린다), hoarseness (목소리가 쉼) 등등 영어 단어를 실어서 크게 도움을 주었다. 유봉성 회장때는 이데올로기에 관한 내용이 청송(노년회보)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노정권의 국가파괴’ ‘북한간부가 보내온 편지’등이 그것인데 노년회보에는 걸맞지 않는 내용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노년대학

노년대학의 시초는 9 대 김병옥 회장단이 시작한 ‘노년학교’ 다. 9 대는 이 학교에서 노년회원들에게 영어공부를 가르쳤다. 이 대학이 꾸준하게 발전하여 지금은 회원들의 교양교육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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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친목촉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노년학교를 노년대학으로 개칭했다.

15

전관병

회장시절

2007 년 노년대학 종업식 이모저모(남녀 합창)

2007 년 노년대학 종업식 이모저모(단체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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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농악대

농악대는 몬트리올 노년대학의 큰 자랑거리다. 사실 농악대는 9 대 김병옥 회장때도 있었으며 다양한 행사에 참여한 바 있다. 그러나 16 대 유봉성 회장때에 크게 확대되고 체계화 되었다. 당시 26 대 한인회(회장 염동준)의 문화부장은 한광수씨였는데 그는 한국에서 유명했던 전통 예술인이었다. 많은 노년회원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한 부장과 그의 부인이자 동료 문화부장이었던 조영옥씨의 지도로 농악대가 전성기를 맞이 했었다.

농악대는 한인회가 주최하는 8.15 행사 및 기타 행사, 노년회가 조직하는 행사 (사계절 나들이 행사), 그리고 현지인과 타 소수민족이 함께 하는 문화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행사에 참여한 농악대원들의 정열적인 헌신 덕분에 우리 민족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는데, 유봉성 회장 및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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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신지식 공연에 신지식 공연도

회원의 공헌이 특별히 주목된다. 유봉성 회장은 농악대 직접 참가할 뿐만 아니라 악기구입에 크게 기여했고 회원은 악기 및 전통의상을 철저히 관리해서 잦은 원만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

노년회관 건립기금 모금활동

제 9 대의 임기말 김병옥 회장은 노년회관 건립을 위한 기금명목으로 약 $15,000 을 은행에 예치했다. 다음 회장단들도 꾸준히 저축하여 온 결과 2011 년 1 월 현재 노년회관 건축기금은 약 $58,000 에 달한다. 노년회는 2011 년 2 월 19 일 임시총회에서 노인정 마련 추진 위원회(위원장 전관병)를 발족시켰다.

10.4 몬트리올 대한 노년회의 도전

지난 33 년 동안 노인복지는 물론 교민 공동체 발전에 크게 기여해 온 몬트리올 대한 노년회는 ‘회원수 감소’라는 문제에 봉착해있다. 노환으로 인한 사망과 자녀를 따라 회원들이 타 지역으로 이주해 간 까닭도 있지만 60 대 이상의 젊은 노년층이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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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노년회원임을 거부하고 회원등록을 하지 않는 것이 노년 회원수가 늘지않는 더 심각한 사유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반세기 동안 동포사회의 인구가 20 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고, 대부분의 이민초기 1 세들이 60 대 이상 고령층으로 접어 들었으며, 전체 평균연령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노년회원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는 것은 사망이나 이사 등 자연적인 원인보다는 ‘노년회 가입기피’라는 인위적인 원인이 더 크다라고 단언함을 부정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몬트리올의 젊은 노년(60 대 장년층)들이 왜 대한 노년회에 등록하기를 꺼려 할까? 자신이 노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탓도 있겠지만 노년회에 들어가서 ‘애 취급’ 받기 싫은 것이 보다 현실적인 이유라고 어느 60 대 젊은 노년은 말한다. 또한 30-50 대 청장년 세대와의 대화노력이 부족한 것도 대한 노년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사유들중의 하나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대한 노년회의 도전과제는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노년회원의 자격이 된 젊은 노년층이 한인회의 일선에서 은퇴하고 노년회로 들어오도록 먼저 노년회의 내부 분위기를 쇄신한다. 이를 위해 노년회 내부에서부터 ‘가치관’을 변화시킨다. 즉 70 대 이상 노년층의 유교적이고 보수주의적인 현재의 가치관은 그대로 유지하되 50-60 대 장년층의 진보적인 가치관도 노년회 내부에서 함께 허용하는 다소 융통성 있고 현실적인 가치관으로 바꿔간다. 둘째, 대한 노년회의 회원들이 노년회 정회원 겸 ‘한인회의 준회원’으로서 몬트리올 한인회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후원은 하지만 한인회의 총회장에서 투표권이나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동포사회의 30-50 대 청장년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분위기를 한인회 내부에 조성함으로써 한인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2030 대 신세대들과 노년세대간의 거리감도 해소한다. 이를 위하여 한인회가 정관(제 7 조 회원과 자격)을 개정할 수 있도록 협력한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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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생활

셋째, 이렇게 해서 늘어난 노년회원들의 복지향상에만 집중함으로써 건강과 교양, 취미와 오락 등 다양한 노후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동포사회의 어른세대로서 청장년세대와 미래세대의 귀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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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제11장


신앙생활

제 11 장 신앙생활

이민생활이란 근본적으로 외로운 삶이다. 이민 현지에 도착한 순간부터 일평생 수많은 난점을 극복해야 한다. 별다른 동포 공동체가 없었던 초창기의 이민자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단체를 조직하여 신앙적 필요뿐만 아니라 이민정착문제도 해결하고자 했다. 제 11 장에는 퀘벡 주의 종교적 배경과 한인교회의 탄생 과정, 초창기 이민교회의 역할, 선교활동, 한인 성당의 역사, 그리고 이민사회 종교단체로서의 역할과 과제에 관해 기록한다.

11.1 퀘벡 주의 종교적 배경과 변화

퀘벡 주의 종교적 배경은 가톨릭이다. 2007 년도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퀘벡 주 총인구의 83%가 가톨릭이며 개신교 신도는 5%에 불과하다. 물론 성당에 나가는 인구는 극소수지만 가톨릭은 퀘벡사회의 근간이다. 1608 년에 사뮈엘 드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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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샹쁠랭(Samuel de Champlain)경이 퀘벡 성을 구축하고 캐나다(뉴 프랑스 New France)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퀘벡 주는 가톨릭 지역이 되었다. 특히 1763 년 영국과 프랑스간에 체결된 빠리조약 후에는 가톨릭 교회가 퀘벡사회 전반에 걸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1960 년대에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350 년간 퀘벡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비록 혁명으로 인해 가톨릭 교회의 정치, 경제적 세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아직도 가톨릭은 학교와 병원 등 퀘벡사회 전반에 걸쳐서 든든한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2007 년 현재 퀘벡 주에는 약 1 천 개의 개신교회와 35 만 7 천명의 신자가 있다. 이중 불어권 교회는 432 개, 영어권 교회는 350 개, 소수민족 교회는 210 개가 있다. 1995-2002 기간 신자수 증감률을 보면 불어권 교회는 8%가 증가했고 영어권 교회는 12%가 감소했으나 소수민족 교회는 92% 나 크게 증가했다. 이민자가 증가함에 따라 퀘벡 주 개신교회의 미래는 점차 소수민족 교회에 의존해 가고 있다. 동 조사자료에 의하면 퀘벡 주의 신앙생활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1970 년대 이후 급증한 이민자들로 인하여 퀘벡 문화의 지구촌화와 퀘벡 종교의 다원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퀘벡 현지인들의 종교유형 선택 범위가 확대되었다. 또한 개인구원에 중점을 둔 재래식 기독교 신학의 영향은 계속 떨어지고 있으며 특히 지성인들은 해방신학 및 뉴 에이지 운동에 참여하여 개인구원뿐만 아니라 사회구원을 주장하는 신학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예배에 참석하는 동기를 묻는 질문에 영적인 참석한다고 답한 사람은 겨우 21%에 불과했다. 예배나 참석하는 주된 동기는 개인 계발, 즉 세속적인 대인관계였으며 연령과 관계 없이 일상생활과 연계되는 선호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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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로 미사에 이유와 목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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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표 11-1> 종교 유형별 예배 참석 동기(%) 종교 유형

세속적동기

대인관계

영적동기

기타

전체

56

22

21

1

100

퀘벡외 가톨릭

63

16

21

<1

100

퀘벡 가톨릭

48

21

26

5

100

주류 개신교

49

31

19

1

100

보수 개신교

52

23

25

<1

100

비 기독교

70

23

7

<1

100

자료: Reginald W. Bibby (2007)

11.2 최초의 한인교회

퀘벡 주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한인교회는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이며 북미 한인교회의 역사를 반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 년대 초반 몬트리올에 거주하는 한민족 동포의 숫자는 수십명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백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동포들은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혹은 언어가 통하는 예배를 위해 이른바 ‘아파트 교회’를 세워 가정예배를 시작했다. 로이심 목사, 김억일 장로 및 김득보 장로가 구심점이 되어 가정을 돌며 신앙생활의 기초를 다지다가 1965 년 1 월 둘째 주에 The First Presbyterian Church 지하실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최초의 한인교회로 정식 출범했다. 당시의 교회는 개신교의 종파를 초월했음은 물론이고 개신교와 가톨릭의 구별조차도 없는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유일한 종교단체였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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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캐나다의 이민법이 개정된 후인 1970 년경부터 한국계 이민자들이 급증함에 따라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의 신자 수가 급증했다. 언어장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신규 이민자들을 위해 이미 정착한 교인들이 많은 도움을 베풀었고 1971 년에는 부활절을 맞아 몽 루와이얄 산에서 산상예배도 드렸다. 2010 년 현재 14 개 개신교 교회가 합동으로 드리는 부활절 산상예배의 시작이었다. 1960 년대 초에 시작된 ‘조용한 혁명’이 1980 년대에는 ‘퀘벡독립운동’으로 발전되면서 영어권 주민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극도로 약화되자 수백 개의 영어권 기업이 몬트리올을 떠났고 상당수의 한인들도 타주로 이주했다. 이에 따라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는 교인수가 300 여명에서 200 여명으로 극감했고 교인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재정적, 심리적, 사회적 타격을 입었다. 그러다가 1980 년대 후반 이후에 투자 이민자들이 몰려옴에 따라 교인수가 다시 증가하여 위기를 극복했다. 다시 시간이 흐르자 교리와 교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교인들이 하나 둘 갈라져 나가서 다른 종교단체를 세웠다. 3 년 사이에 세 개의 신앙 그룹이 분리되자 그동안 정립된 연합교회 내의 조직과 교인간의 연대감, 그리고 교우들의 사기 및 재정에 큰 타격이 왔다. 그러나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는 이 과정에서 직면한 제반문제들도 현명하게 잘 극복했고 분가한 교회들을 모아서 교회협의회를 구성토록 하는 등 최초의 한인교회로서 맏형 역할을 잘 감당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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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연합교회 신도들과 배한국 목사, 1994.1.3>

2010 년 현재 몬트리올의 한인 개신교는 감리교회, 로고스교회, 사랑장로교회, 새생명장로교회, 서광교회, 순복음교회, 은혜성결교회, 제자교회, 참빛장로교회, 침례교회, 한인교회, 한인연합교회, 한인장로교회, 호산나교회 등 14 개의 개신교회와 외항선교회가 있다. 몬트리올 한인 개신교회들은 목회자 교회 협의회를 중심으로 매년 공동 부흥회를 마련하며 복음전파와 목회자 간 친목 및 협조를 도모하고 있다.

11.3 퀘벡 한인 개신교회의 선교활동

몬트리올 한인 개신교회는 필리핀, 서 아프리카 불어권 지역 및 퀘벡 원주민 선교활동에 주력하고 있으며 2008 년에는 아프리카 선교사 다수를 초대하여 선교 부흥회를 개최한 바 있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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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이란 이곳에 먼저 살던 사람이란 뜻으로 캐나다 정부에선 Aboriginal People 이라고 부른다. 원주민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 종교에 따라서 다시 인디언(원주민), 메티스(Metis), 이누이트(에스키모)로 구분된다. 1970 년대부터 사용된 First Nation 이란 용어의 근원은 찾을 수 없고 단지 북미주에 처음 살았던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캐나다의 정부에 등록된 원주민 언어는 18 개지만 각 마을마다 방언의 차이가 심해 같은 언어권이라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동부의 믹맥 원주민은 백인들과 화합하여 지내고 있으며 중남부의 모호크와 크리족은 흰 피부의 금발을 가진 사람들이 내륙지방의 원주민들보다 많다.

1997 년 김동승 선교사와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 토론토 큰빛교회가 연합하여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만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목적을 두고 사랑의 군병들(agape army) 17 명을 원주민들에게 파송함으로써 퀘벡 내 원주민 선교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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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에서는 선교의 대상을 기전도 종족, 미전도 종족, 오전도 종족, 폐전도 종족으로 분류하는데 원주민들은 오전도 종족으로 본다. 오(誤)전도 종족은 복음을 들었으나 변형된 – 개신교측 기준으로는 ‘잘못된’ - 복음이 전해진 경우로 대부분의 원주민 선교가 이 카테고리에 속해 있다. 알공킨 족은 가톨릭, 크리족은 정교회가 처음 들어갔으며 선교단체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몬트리올의 개신교회들은 1997 년부터 13 년간 계속된 원주민 선교사업이 다음과 같은 사유로 인해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첫째, 원주민들은 백인 선교사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백인의 민족적, 문화적 우월감을 갖고 선교활동을 했고 원주민의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무시했다. 특히 백인 문화를 강요한 점과 선교사들의 비도덕적 행위 등이 원주민들로 하여금 백인 선교활동에 등을 돌리게 했다. 이 점을 동포 선교단체들이 잘 활용했고 성공적인 선교사유가 되었다. 둘째, 원주민 인디언들은 한국인과 인종적으로 유사하다. 셋째, 원주민과 친해지면서 기독교 사랑을 몸으로 베풀었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 줌으로써 신뢰를 확보했다. 넷째, 퀘벡문화를 잘 아는 동포 1.5 세 전도사가 원주민 출신 여성 목사와 함께 사역했다. 다섯째, 언어장벽이 없는 젊은 청소년들이 선교사역에 참여했다. 한편 몬트리올 한인교회 협의회에서는 2008 년 10 월 2 일부터 5 일까지 3 박 4 일간 불어권 아프리카 선교대회를 개최하였다. 선교대회에는 서부아프리카 11 개국의 29 개 지역의 선교사 44 명과 한국의 불어권 선교회 회장과 프랑스 선교사 등 총 47 명의 선교사들이 초청된 가운데 약 600 명의 신자들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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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몬트리올 한인 성당 몬트리올 한인 성당은 공식 명칭이 La Mission Catholique Sts-Martyrs-Coréens(한국 순교 성인 천주교회)로 몬트리올 대교구에 속하고 있으며 1979 년 11 월 몬트리올 교구청에 의하여 정식 인가를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당 창립 이후 몇 차례에 걸친 성전 이전 끝에 2011 년 현재 2461 StJacques, Montreal 에 위치한 前 Ste-Cunégonde 성전에 자리하고 있다. 몬트리올 한인 성당은 2011 년 현재 성기택(베드로) 본당신부 외 300 여 가구 규모의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몬트리올 한인 천주교인들의 모임인 신우회가 태동된 것은 한인 성당이 정식 인가를 받기 약 3 년 전인 1976 년 10 월이었다. 당시 미사집전 신부는 Joseph Amyot 였으며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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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yot 신부가 본당신부로 있던 430 Ste-Catherine East, Montreal 에 위치한 루르드 성모 성당에서 주로 미사가 거행되었다. 이듬해인 1977 년 4 월부터는 Labrecque 신부가 미사집전을 담당하였고 동년 6 월에는 서인석 신부 집전 하에 영세식이 거행되었다. 1977 년 7 월에 회보인 신우회 월보 1 호가 발간되었고 이 월보는 7 월 3 일 미사가 Daveluy Ville 에서 고종옥(마태오) 신부 집전 하에 봉헌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동년 8 월에 발간된 신우회 월보 2 호는 8 월 12 일에 고종옥 신부의 “예수 없는 십자가” 출판 기념회가 열렸음을 말하고 미사 장소는 일본회관, 미사집전은 Labrecque 신부가 담당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후 미사 장소는 1978 년 8 월 3880 Côté-des-Neiges, Montreal 에 위치한 Marianopolis College(당시)로 이전하기 전까지 일본회관을 자주 사용하게 된다. 신우회 회보는 7 호까지 발간되다가 1977 년 12 월, 본당주보의 전신격인 “모래알”이 발간되었고 지도신부가 JeanLouis Pelessier 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1978 년 4 월 30 일자 “모래알”은 초기 천주교 교우들의 모임이 체계화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조직체계의 내용을 보면, 회장 이영민, 부인회장 정마리아 및 신우회 임원진에 정영섭, 박동렬, 정마리아, 이세영, 김광만, 고상훈이었다. 점차 체계화되어 가던 몬트리올 한인 천주교 공동체가 드디어 몬트리올 교구청에 의하여 한인 천주교회로 인정받았음을 Jean-Louis Pelessier 신부명의로 1979 년 9 월 2 일 공고되었다. 몬트리올 한인 성당은 이후 여러 어려운 시기를 거쳐 오늘의 성당으로 발전하였다. 1979 년 8 월 본당 공식 설립 당시 사용되던 미사 장소는 3880 Côté-des-Neiges, Montreal 에 위치한 Marianopolis College(당시)였다. 가톨릭 재단에 의하여 운영되던 학교의 강당을 빌려 몬트리올 한인 천주교인들이 모여 미사를 봉헌하였다. 한인 성당의 정식 성전 사용의 시작은 7070 Sommerled, Montreal 에 위치한 Ste-Catherine de Sienne 성전으로 이전한 1984 년 6 월의 일이었다. 2 년 반 동안 그곳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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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사용하다 한인 성당은 1987 년 1 월 5765 St-Jacques, Montreal 의 St-Raymond 성전으로 이전하였고, 다시 2 년 반 뒤인 1989 년 7 월 668 rue de Courcelle, Montreal 의 SteElisabeth 성전으로 이전하여 14 년 동안 그곳을 사용하였다. 성전 건물의 전반적인 노후화로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해지자 한인 성당은 성기택 본당신부 및 정영섭 사목회장의 주도로 몬트리올 교구청을 통하여 새 성전 자리를 물색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2003 년 6 월 2461 St-Jacques, Montreal 의 前 Ste-Cunégonde 성전으로 이전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전 이전을 위한 보수공사 및 단장에는 강이환, 이우겸 등 많은 봉사자들과 김 데레시다 수녀 및 장 루시아 수녀의 수고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 Ste-Cunégonde 성전은 성녀 구네군다를 기려 건축된 것으로 1904 년 화재로 전소되었던 것이 1906 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축되었다. 건축설계는 당시 명망 있는 퀘벡인 건축가인 J.O. Marchand 에 의한 것으로 외부는 화강암으로 축조되었고 건물 위로는 똑같은 모양의 두 개의 종탑이 있다. 이오니아식으로 벽 기둥이 반은 묻히고 반은 밖으로 나오게 만든 정문과 정문 위의 장미꽃 모양의 큰 유리창은 이 성전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98 피트(29.9M)의 높은 천정은 기둥 없이 되어 있고, 내부장식은 거대한 크기의 성녀 구네군다 천정화 및 스테인드 글라스 등 화려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예술적 및 역사적 가치로 인하여 퀘벡 주정부는 이 성전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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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성전> 1979 년 11 월 몬트리올 한인 성당이 정식으로 인가되면서 Jean-Louis Pelessier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고, 1982 년 11 월에는 김용호(요한) 신부가 최초의 한인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84 년 6 월까지 본당신부 직을 수행하였다.

< Pelessier 신부 > < 김용호 신부와 백안젤루스 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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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10 월부터는 몬시뇰 Neil Willard 신부가 본당신부 직을 맡게 되었고 주일미사는 주로 Gillian Pellerain 신부가 집전하였다. 그러다가 1985 년 12 월 부산교구 소속의 김기홍(베르나르도) 신부가 본당신부로 부임하게 되었다.

< 김기홍 신부 >

김기홍 신부의 본당신부 재직 기간중인 1990 년 11 월 본당 최초로 수녀원이 개설되어 부산 올리베따노 분도 수녀회로부터 김 헨리카, 최 발도로메아 수녀가 부임하여 최초의 본당수녀로 활동하게 되었다. 수녀원 개설 전에는, 한국에서 오랜 선교활동을 했던 Bernadette Grondin 수녀가 본당 초기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김기홍 신부 재직 기간 동안 한인 투자 이민자들의 급격한 증가와 더불어 성당 교우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나게 된다. 아울러 이 시기에 한인 성당의 재정 상황도 많이 향상되었다. 1991 년 7 월 몬트리올 본당신부로 새로 부임하였다. 안식년 기간 동안 전주교구 고종옥 신부는 1 년 동안의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교구 소속이던 고종옥 신부가 1996 년 7 월 고종옥 본당신부 소속 안복진 신부가 부임하였고 안식년 기간 후 1998 년 8 월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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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할 때까지 본당신부 직을 수행하였다. 고종옥 신부는 몬트리올 초기 이민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고종옥 신부는 프랑스 낭시 신학대학에서 1963 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그 해 몬트리올 교구에 소속되어 몬트리올 Roy 길에 있는 StLouis de France 성당 보좌신부로 부임하여 퀘벡 주민들을 사목하였다. 당시 몬트리올 거주 한인규모는 70 명 정도였고 그 중 천주교인은 10 명 정도였다. 고종옥 신부는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몬트리올 한인들과도 관계를 갖고 한인들이 겪는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몬트리올 교구와 토론토 교구와의 합의에 따라 1969 년 토론토에 파견되며 한인 교포사목을 시작하였다. 고종옥 신부는 1982 년부터 미국 LA 와 산호세에서 한인 교포사목을 하였고 북한 선교사업도 착수하여 한인 사제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후 몬트리올로부터 한인신부의 필요요청이 있자 1991 년 7 월 몬트리올 한인 성당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한편 1990 년 11 월 한인 성당에 파견되었던 부산 올리베따노 분도 수녀회는 2000 년 4 월까지 상주하였고 그 이듬해인 2001 년 3 월 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로부터 최 루시아, 조 다윗 수녀가 본당수녀로 다시 파견되어 2011 년 2 월까지 유지되었다. 1998 년 8 월 은퇴한 고종옥 신부 후임으로 본당신부로 부임한 성기택 신부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몬트리올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퀘벡주에서 서품된 최초의 한국인 사제가 되었으며 현재 몬트리올 교구 사제이다. 처음에는 퀘벡인들을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다가 1998 년에 한인 성당 본당신부로 부임하였고 2011 년 현재까지 본당에서 가장 오래 사목하고 있으며 몬트리올 교구에 속하는 소수민족 교회 중에서 가장 많은 영세자를 배출하는 등 모범 성당으로 꼽히게 만든 신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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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옥 신부와 성기택 신부 > 몬트리올 한인 성당은 창립이래로 줄곧 비 신자들을 찾아 소정의 교리를 이수시킨 후 세례를 행하는 선교활동을 주요 과업으로 삼아왔다. 본당신부 및 본당수녀의 교리지도를 통하여 소정의 과정을 이수시킨 후 부활절 또는 성탄절에 맞추어 영세식을 행하여 왔다. 한인 성당이 정식 인가 받기 전인 1977 년 Labrecque 신부 주례 하에 아동 영세식이, 그 이듬해 서인석 신부 주례로 거행된 성인 영세식이 한인 천주교 공동체 최초의 영세식으로 기록되고 있다. 1980 년 Jean-Louis Pelessier 본당신부 집전하의 영세식 이후 1 년에 한차례 내지 두 차례는 영세식이 있어 왔다. 영세식을 통하여 새 신자가 되는 인원수는 연평균 20 명에서 60 명이었다. 새 신자들은 몬트리올에 새로 이민 온 경우가 대부분으로서 본당은 새 영세자 및 새 전입자들을 위하여 사목회에 이민사목부를 두고 또 본당 구역 조직을 통하여 새 이민자들의 적응에 적극 나서고 있다. 선교활동에서 한인 성당이 몬트리올 내 어느 소수민족, 어느 성당보다도 활발하였음은 몬트리올 교구 내에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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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성당은 해마다 연말이 되면 주위의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활동을 적극 펼쳐왔다. 한인 성당 소속 교인들로부터 식품위주의 재활용품들을 수집하고, 본당예산 상당액을 더하여 어려운 이웃에 온정의 손길을 펼치는 것은 성당 창립이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활동이었다. 특히 근래에는 불우이웃돕기의 대상으로 성당 주위에 거주하고 있는 어려운 형편의 이웃을 일일이 찾아 물품을 전달하기도 하고, 물품 전체를 이웃 서양 성당에 보내어 불우한 퀘벡 사람들을 돕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으며 부활절에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있다. 아울러 본당 성가대는 해마다 연말이면 몬트리올 내 양로원과 병원 등 불우이웃을 찾아 위문공연과 함께 위문품을 전달해 오는 사업을 한인 성당 설립초기부터 수행하고 있다. 2002 년 7 월 캐나다에서 거행되어 교황 요한 바오로 2 세 교황이 참석하였던 세계 청년대회(World Youth Day)는 한인 성당이 맞았던 큰 행사로 기억될 것이다. 토론토에서 거행되는 본 대회에 앞서 외국에서부터 몬트리올을 방문한 순례자들(주로 청년들) 일정 인원을 한인 성당에서 맡아 숙식과 안전을 책임지는 행사였다. 당시 미국 등지로부터 온 남녀 30 여명을 한인성당 교우들이 나누어 민박으로 일주일 간 받아들였고 곧이어 본당소속 청년들 30 여명이 이들 순례자들과 함께 성기택 신부, 한 모이세 수녀, 장 루시아 수녀 및 이경석 총무의 인솔로, 세계 도처에서부터 온 백만명 청년들이 펼치는 토론토 세계청년대회에 일주일 간 참여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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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청년대회 > 현재의 성전으로 이전한 직후인 2003 년 9 월에 새 성전을 축성하는 공식 이전미사가 몬트리올 교구 Anthony Mancini 주교 집전 하에 거행되었다. 2004 년 9 월에는 한인 성당 창립 25 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기념미사는 몬트리올 교구장인 Jean-Claude Turcotte 추기경이 집전하였는데 본당에 교구장이 처음으로 방문하는 자리였다. 추기경은 기념미사를 통하여 한인성당이 25 년간 성장을 거듭하여 퀘벡 내 소수민족 중에 모범을 이루었음을 치하하였고, 아울러 25 주년 기념책자발간 및 기념품 증정이 있었으며 기념공연 등에 내외의 많은 하객들이 참석하여 몬트리올 한인 가톨릭 공동체를 축하하였다. 2006 년 10 월에는 한인 성당이 차지하여 사용하고 있는 前 Ste-Cunégonde 성전의 성전건립 100 주년 기념행사가 한인 성당의 주관 하에 거행되었다. 기념미사는 몬트리올 교구의 소수민족 담당 Michel Parent 몬시뇰이 집전하였고, 과거 이 성전에서 영세를 받았거나 결혼을 한 퀘벡인 신자들이 다수 참석하여 감사와 축하를 함께 나누었다. 또한 성전 100 주년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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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책자를 발간하여 지난 역사를 기림으로써 현지인들은 물론 교구청으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100 여년전 퀘벡 사람들이 건립하였고 또 퀘벡주민들이 모여 미사를 봉헌하던 이 성전은 2003 년 6 월부터 한인 가톨릭 공동체가 독자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성전의 규모와 수려함은 전 세계 한인 성당 성전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2008 년 6 월에는 퀘벡시티에서 제 49 차 세계성체대회가 거행되어 본당 신자 다수가 참여하였고, 한국에서도 한국대표단의 단장으로 현 인천교구장인 최기산 주교와 전 마산교구장 박정일 주교를 비롯하여 약 60 명의 신자들이 참가하였다. 몬트리올 한인 성당에서의 미사실황이 캐나다 전역에 방송된 적이 있었다. 1996 년 6 월 미사에 참여한 교우들 대다수가 한복차림이었고 당시 고종옥 본당신부도 갓과 도포차림으로 미사를 집전하여, 전통 복장과 국악이 어우러진 한 시간 분의 미사실황이 Radio Canada/CBC TV 에 방송되었고 이어 캐나다 전역에 재방송되어 한국식 미사와 음악을 아낌없이 캐네디언들에게 선보였다. 그 외에 한인 성당이 현지 매스컴에 소개된 것은 2002 년에 불어잡지인 Univers 11 월~12 월호에 2 페이지에 걸쳐 성당 사진과 본당신부, 수녀, 사목회장이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본당에 관한 소개가 있었다. 2007 년 9 월에는 Vox 방송 채널 9 의 Parole et Vie 에, 같은 해 11 월에는 RDI (TV) 불어방송의 Buchard & Taylor Commission 의 Reasonable Accomodation 에 교구청의 소수민족대표로 본당의 정영섭 정인희 부부가 출연하여 발표하기도 하였다. 2008 년 4 월에는 TVA 방송을 통하여 본당 사목활동 소개와 더불어 본당신부 및 신자들의 인터뷰 내용이 소개되었다. 몬트리올 한가운데 위치한 Mont-Royal 산 Notre-Damedes-Neiges 묘지구역에 한인 성당이 일정 지역을 일괄 구입하여 신자들에게 공급하기 시작한 것은 김기홍 본당신부 시절이었다. 당시 20 기 규모로 시작된 것이 200 기까지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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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되어 명실공히 한인 가톨릭 공동체 전용묘지로 만든 것은 현 성기택 본당신부 때인 2003 년 3 월부터였다. 일괄 구입된 전용 묘지를 갖게 됨에 따라 개인별로 구입가격이 저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살아서 같이 동고동락하던 이들과 죽어서 같이 묻히고, 살아 있는 이들은 함께 묘지를 참배할 수 있게 되었다. 2007 년 10 월에는 한인 천주교인 전용묘지임을 알리는 성당묘비를 여러 교인들의 협조를 받아 설치하여 제막식을 가졌다. 캐네디언 및 한인 6.25 참전동지회를 위한 기념미사가 1997 년 6 월 몬트리올 한인성당에서, 역시 참전용사인 고종옥 신부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이 행사는 이듬해인 1998 년부터 성기택 신부 집전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 행사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 숫자가 줄어드는 참전 노병들이 모여 근황을 서로 확인하는 자리로 사용되어 왔다. 현재 성기택 신부는 퀘벡의 6.25 참전동지회 55 Unit 의 군목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참전동지회 기념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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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을 대표하는 조직으로서는, 본당신부의 제반 사목활동에 협조하고 있는 사목회와 본당 재정 및 재산관리를 담당하는 재정위원회가 있다. 그 외의 제 단체들은 사목회에 속하게 된다. 사목회는 어느 한인 성당에서도 존재하는 조직으로 통상 성당 내 최상위 조직이다. 사목회장은 본당을 대표하는 신자로 간주된다. 사목회는 회장, 부회장, 총무 및 여러 개의 부서로 구성되고 사목회장은 본당신부의 사목방침에 따라 부서장 및 차장들(사목위원이라 칭함)을 지휘하게 된다. 사목회에 어느 부서를 두는가는 본당신부의 재량이며 사목위원들의 임기는 2 년인 경우가 보통이다. 몬트리올 한인성당의 역대 사목회장은 노형옥, 박동렬, 박병길, 성영기, 조병철, 정선모, 이길수, 최준호, 유근수, 정영섭, 김평집(현재)이다. 영문으로 Wardens Committee 라 부르는 재정위원회는 퀘벡에 존재하는 독특한 제도이다. 재정위원(Warden)은 재정 및 재산에 관하여 본당을 대표하고 몬트리올 대주교 또는 그의 대행자에 의하여 임명되며 3 년의 임기에 재선까지만 가능하다. 한인성당 창립 직후부터 현재까지 존재해오는 조직이다. 신자들의 신심활동을 강화하는 피정들은 본당 사목회 주최로 해마다 두 차례씩 사순절, 대림절을 맞아 많은 신부, 수도자들에 의하여 전 신자들을 대상으로 거행되어 왔다. 대표적으로는 1984 년에 있었던 첫 성령세미나 및 2004 년과 2005 년의 박바오로 선교사 초청 전 신자 재교육 및 대림절 피정과 더불어 김웅렬 신부와 황창연 신부, 이승구 신부 등의 특별피정이 있었다. 본당 신심단체인 레지오 마리애는 1983 년 2 월 창조주의 모후가 창단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샛별의 모후가 창단되었고 규모가 커지면서 현재 사도들의 모후, 자비의 모후, 희망의 모후 및 평화의 모후 등 6 개의 쁘레시디움을 거느리고 있다. 1993 년 5 월 레지오 마리애의 상급 평의회인 꾸리아가 박기순을 초대 단장으로 하여 창단되었다. 또한 성서공부, 성시간 기도, 성령기도회와 평화의 모후 기도 모임이 매주 정기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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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안살림을 담당하는 성모회는 성인 여성신자들이면 자동 회원이 되며 핵심 활동단체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성모회는 1978 년 구성된 부인회(회장:정마리아)가 그 효시를 이루고 이후 윤정숙, 박정숙, 김인희, 구자영, 장민자, 전태숙, 박문자, 김덕자, 이정옥, 김혜숙, 김성진, 백은희, 박기순, 이지혜, 고정희(현재)가 성모회장직을 수행하였다. 샛별 회지(1,2 호)를 발간하기도 했으며 해마다 거행되는 바자회 및 주일 미사 후 친교를 담당하고 본당 제반 행사에 적극 협력하고 있다. 성가대는 한인 성당 창립시부터 있어 왔으며 초대 성가대장은 김현수였고 1980 년 루르드 성모 성당의 초청으로 외부공연을 한 것은 본당 역사상 최초의 외부 활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1986 년 11 월에는 몬트리올 교구 150 주년 기념행사에 본당 성가대가 참가하는 등 탁월한 기량의 명성을 널리 퍼뜨려 왔다. 해마다 병원, 양로원 등을 방문하여 위문공연을 펼치는 등 불우이웃을 위한 자선행위에도 모범을 보여왔다. 2 세들의 신앙 및 제반 교육을 담당하는 주일학교는 1978 년 4 월 한인 가톨릭 공동체 조직화시 시작되었으며 반편성을 하는 등 공식적인 주일학교의 시작은 1980 년 2 월이었다. 수녀회 파견 이후 본당수녀가 교사들을 지도하며 주일학교를 담당하게 되었으며 자모회가 구성되어 주일학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한 미사는 그동안 여러 퀘벡인 신부들이 집전하여 왔고 특히 과거 한국에서 오랜 세월 선교활동을 하여 한국어에도 익숙한 퀘벡 프란치스칸 수도회 소속 André Comtois(공) 신부 및 George Morin(명) 신부는 몬트리올 한인 성당과 오랫동안 밀접한 관련을 맺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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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불교 단체

광역 몬트리올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불교신자는 약 120 명으로 총 한인 인구의 2% 미만이지만 활발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매월 첫 번째, 세 번째 주에 법회를 열고 불경 공부도 한다. 불교 법우회가 있으며 2003 년 5 월 15 일에는 관음정사가 발족되었다.

11.6 외항 선교회

외항 선교회는 1950 년부터 크리스천 개혁교회에 의해 선원센터 (Sailors Center) 형식으로 운영되다가 1986 년에 문서실, 비디오실, 컴퓨터실 등 다양한 시설이 구비된 몬트리올 선원센터로 조직화되고 체계화되었다. 매년 1 만 5 천명에 이르는 세계 각국, 특히 한국 및 중국 출신의 선원이 센터를 방문한다. 이 센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선원의 기독교 개종 및 신앙의 강화다. 목회자는 예배 인도, 신앙 상담, 선원의 이동, 장거리 전화 사용, 체불임금 해결, 병원 안내 등 선원들이 직접 집행하기 힘든 일을 도와준다. 1988 년부터는 한국에서 파견되는 청년 선교단과 온타리오 주 한인교회 목회자들의 방문 및 선교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외항선교의 특이한 점은 외항센터 내에 진료소가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선원들은 육체적으로 고난을 당하여도 하소연할 기회가 별로 없다. 해고당할 우려 때문에 몸이 아파도 쉽게 아프다고 말을 못한다. 김광오 목사는 Seafarers Mission Health Clinic 을 창설하여 언어적, 시간적 제약이 많은 선원들에게 양방과 한방 치료를 모두 제공하고 있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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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종교단체의 사회적 책임

반세기의 역사를 가진 퀘벡 한민족 공동체는 정착단계(Settlement Stage)를 지나서 적응단계(Adaptation Stage)와 주류사회 진출단계(integration Stage)로 접어들고 있다. 2000 년대에 들어서면서 몬트리올 한인회는 동포들의 현지사회화와 한민족 공동체의 주류사회 진출을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와 보조를 맞추어 이민사회 종교단체의 역할과 사회적인 책임도 변화되고 강화되어야 한다. 이민사회 내에서 종교단체의 역할은 영적생활로의 인도, 초기 이민자의 정착지원, 이민 가정생활 지원, 자녀교육 지원, 그리고 현지사회화 지원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동안 동포 종교단체들은 영적생활 인도와 정착지원 등의 역할을 잘 수행해왔다. 이제는 동포들의 현지사회화를 돕는 일에 한인회와 함께 나서야 할 때다. 한국계 이민자들의 현지사회화를 돕는 일을 한인회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역부족이다. 사실 몬트리올 동포사회에서 종교단체들의 영향력은 한인회나 노년회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인 영향력이 큰 만큼 사회적인 책임도 크게 느껴야 한다. 한국에 있는 종교단체가 아닌 이민사회의 종교단체로서 사회적인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종교단체들은 신도들을 이끌고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전체 동포사회로 나와야 하며 다시 동포사회를 넘어 퀘벡사회로 그들을 인도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고인 물처럼 정체되어 썩어가는 몬트리올 동포사회에 샘물이 되어야 한다. 한편 몬트리올의 교회들은 소규모 영세화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는 교회분열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새 이민자의 증가 수에 비해 교회 수가 많다는 것과 새 이민자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1.5 세 및 2 세들이 현지교회로 옮겨간다는 것 등도 주요원인이 될 수 있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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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나 토론토 등 다른 지역의 동포사회와 마찬가지로 몬트리올 동포사회에도 교회분열의 진통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 때마다 신자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고 교회를 멀리하는 사람도 늘었으며 분열된 교회는 영세화의 내리막 길을 걸었다. 6 년 전에는 ‘철 없는 목동과 방황하는 양 떼’라는 글이 교민사회의 신문에 게재될 정도로 몬트리올 개신교회의 분열위기가 심각하기도 했다. 몬트리올 한민족사회의 확장속도가 다시 늦어지고 있다는 것도 교회 영세화의 중요한 이유다. 2000 년을 전후해서는 한 해에 약 천여 명의 동포 신규 이민자가 몬트리올에 왔는데 2008 년에는 불과 122 명만이 퀘벡에 정착했다. 캐나다 이민정책이 바뀌었고 입국비자 받기가 더 어려워졌다. 반면에 퀘벡 주에 거주하던 동포들이 타주로 이주하는 비율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퀘벡정부 자료에 의하면 몬트리올에 정착한 동포 이민자들이 5 년 이상 퀘벡 주에 거주하는 비율은 28%에 불과하다. 이는 25 개 주요 소수민족의 체류율 70% 이상과 비교할 때 엄청난 유출이다. 그나마 유학생들이 늘어나서 교회의 좌석을 채우고 있으나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특정 교회로 몰리고 있으며 젊은 층의 신자가 없어서 고민하는 교회가 많다. 더 큰 문제는 CEGEP 이나 대학에 입학한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다니던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다. 수직적, 권위적, 한국적 사고방식에 입각한 부모들의 신앙유형과 생활가치관이 퀘벡 주에서 태어났거나 청소년기를 보낸 신세대들의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970 년대와 1980 년대에 이민 온 대부분의 이민 1 세들은 한국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퀘벡 현지의 문화와 가치관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퀘벡의 수평적 문화 속에서 교육받은 자녀들은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하는 즉시 부모 손에 이끌려 다니던 교회까지 떠나기도 한다. 그들은 다른 민족계의 교회에 나가게 되는데 이들중에는 이단 여부가 불분명한 곳도 있어서 우리 자녀들의 건전한 신앙을 해칠 우려마저 있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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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몬트리올 한민족사회의 종교단체들은 한국계 이민자들의 영적생활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초기의 이민자들에게 있어서는 교회생활이 곧 이민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의 영세화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교회는 교회의 존립에만 더 전전긍긍하게 될 것이고 이민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은 뒷전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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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생활 제12장


문화예술생활

제 12 장 문화예술생활

문화예술생활은 이민생활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 이민생활에서 절대 필요한 생활은 물리적 생활, 영적 생활 및 지성적 생활이다. 문화예술생활은 지성적 생활의 핵심이다. 한편 이민생활 속의 문화예술생활은 모국의 가치관을 보전함으로써 정확한 정체성 개발 및 유지에도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는 문화예술활동을 통해 한국의 문화를 현지사회에 소개함으로 한국 및 한국인의 위상을 제고할 수 있다. 문화예술활동은 무한하게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제 12 장에서는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미술, 무용, 문학 및 음악활동 등 문화예술생활에 관하여 기록한다.

12.1 몬트리올 한국민속 무용협회

무용교사 출신의 이채화 씨가 퀘벡으로 이민 온 후 동포자녀들에게 한국무용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동포사회의 문화행사에서 전통무용을 공연하게 되었다. 1970 년대만 해도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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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용이 몬트리올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문화행사를 통해 한국무용을 현지사회에 소개하게 된 것은 매우 의미있는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1979 년부터는 몬트리올 한인학교가 무용단을 만들어 현재까지 차세대 한국 전통무용 교육에 매진하고 있다. 특히 1999 년에는 한인학교를 졸업한 무용수들이 모여 캐나다의 다양한 문화권 속에서 뛰어난 한국전통무용의 우수성을 알리고 서양무용과 한국무용과의 접목으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고자 한국민속 무용협회를 설립하여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한인 무용단은 무용팀과 악기팀으로 나눠져 있으며 부채춤, 살풀이, 탈춤 등 전통무용부터 북춤, 농악, 사물놀이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악기반으로 나뉘어 있다. 현재 기초반부터 고급반까지 편성되어 있으며 초등부, 중등부 및 성인반이 있다. 무용단 창립 무렵에는 20 여명의 단원이 있었으나 현재는 그 숫자가 줄어 5-6 명의 단원이 있으며 단장, 부단장 및 안무가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 외 학부형 모임이 활발하며 단체 유지는 자체 운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몬트리올 한인 무용단은 1978 년 몬트리올 세계 어린이 축제 (C.W.F) 공연에 참가함으로써 최초로 한국무용을 몬트리올에 알리게 되었고 그해 12 월 몬트리올 한인회 정부지원금 모금을 위한 공연에도 참석하여 한인회의 발전을 위해 협력하였으며 1979 년 2 월에는 한인학교 무용단원들이 몬트리올 웨스트 아일랜드 민속공연에 참가했다. 특히 1980 년대와 1990 년대를 걸쳐서 한인무용단의 활동은 더욱 왕성해졌는데 1985 년 5 월에는 N.D.G 민속행사공연에 참여했고 1987 년 7 월 아시아인의 문화축제인 “동양문화의 밤”에서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1997 년에는 몬트리올 Asian Heritage Festival 에 초청되어 캐나다 사회에 한국무용의 아름다움을 소개했으며 1999 년 11 월에는 몬트리올 세계 기능 올림픽 폐막식에 초청되어 동포들에게 한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기도 했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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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년 9 월에는 몬트리올-부산시 자매결연 기념공연을 했으며, 같은 해 11 월에는 암환자를 위한 “Dance for Life”에 참여하여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도 협력했다. 2007 년에는 한국의 국제민간항공기구 상임이사국 선출 기념행사에 참여하는 등 초창기보다 줄어든 단원수에도 불구하고 한국예술을 알리는 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해왔다. 또한 지난 30 여 년간 수많은 동포행사에 참여하여 공연해왔고 다양한 동포단체 공연에도 찬조 출연하는 등 몬트리올 동포사회에도 한국무용을 꾸준히 소개해왔다. 몬트리올 한인 무용단은 현재 전통 무용의상 및 악기 구입비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재정적인 후원이 절실히 필요한 형편이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차세대 무용을 배우는 학생들의 경우 한국무용을 커리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전문인으로서의 포부를 가지기보다는 취미반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운 실정이다. 따라서 연습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생기는 등 공연준비에 애로사항이 많다. 한편 한국민속무용협회에는 전문 무용수들이 모이는 만큼 좀 더 진지한 분위기이며 앞으로 더 많은 전문 한인 무용수들을 발굴 지원해가야 하며 순수 한국무용뿐 아니라 서양과 한국무용과의 접목으로 독특한 분위기의 새로운 무용세계의 재창조에 힘쓸 것이다. 또한 몬트리올 한국무용의 발전을 위해서는 전통무용 교육을 담당할 지도자 양성이 시급하며 이는 차세대 한국무용 인구를 늘려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몬트리올 한인무용단] 창립자

이채화 1978 년

단장

이채화 1978-현재

안무가

이채화 1978-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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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송현주 2003-2006

안무가

이채화 2007-현재

부단장

조수현, 박혜경 2010-현재

[몬트리올 한인무용단 공연내용] 1978 년 5 월 몬트리올 세계 어린이 축제 참석, 12 월 몬트리올 한인회 기금모금 공연 1979 년 2 월 몬트리올 웨스트 아일랜드 민속공연제 참석 1985 년 5 월 몬트리올 N.D.G 민속행사 공연 1987 년 7 월 동양문화협회 주최 ‘동양 문화의 밤’ 공연, 12 월 몬트리올 한인회 기금모금 공연 1988 년 6 월 88 서울올림픽 몬트리올 후원회 행사 공연 1989 년 12 월 토론토 캐나다 한인학교 협의회 행사 공연 1990 년 5 월 퀘벡 소수민족축제공연, 6 월 가톨릭 이민후원회 (C.S.I.M)Visa-vie 행사 공연, 7 월 ‘동양 문화의 밤’ 공연 1991 년 8 월 몬트리올 한인회 8.15 광복절 행사 공연 1992 년 2 월 파인아트 뮤지엄주최 ‘발렌타인데이’ 특별공연, 7 월 캐나다의 날 125 주년 기념 국제민속무용 공연참가 1993 년 11 월 몬트리올 한인학교 창립 15 주년 기념공연 1994 년 8 월 몬트리올 한인회 8.15 광복절 기념행사 공연 1995 년 6 월 오타와 캐나다 태권도협회 행사공연, 7 월 캐나다의 날 행사 참여, 12 월 몬트리올 Convalescent 병원환자 크리스마스 위문공연 1996 년 9 월 Terrebonne 시 Theatre de verdure show 공연 1997 년 3 월 매길대학교 ‘한국의 밤’ 행사 공연, 4 월 몬트리올 ‘Asian Heritage Festival’공연, 11 월 Canada 아세아 태평양의 해 ‘한국주간 행사’공연 1998 년 11 월 퀘벡 아시아 입양아 협회 초청공연, 1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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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학교 20 주년 기념행사 공연, 12 월 퀘벡 한인 실업인 협회 연말잔치 공연 [몬트리올 한국민속 무용협회 공연내용] 1999 년: 5 월 La Prairie 국제선교대회 공연, 5 월 몬트리올 ‘Asian Heritage Festival’공연, 7 월 Asian culture association 공연, 10 월 추석제 무용공연, 11 월 몬트리올 세계 기능 올림픽 폐막식 초청공연, 12 월 한인회 송년의 밤 공연 2000 년: 2 월 매길대학교 한국어과 행사 공연, 5 월 오타와 ‘한국의 밤 2000’ 초청공연, 9 월 몬트리올-부산시 자매결연기념 공연, 11 월 암환자를 위한 ‘Dance for Life’ 자선공연 2001 년: 3 월 매길대학교 한국어과 행사 공연, 5 월 몬트리올 N.D.G 복합문화 축제 공연, 8 월 오타와 ‘한국의 날’ Super Ex2001 초청공연 2004 년: 6 월 한국, 중국, 베트남 공동문화제 초청공연, 10 월 세계 빌딩관리협회 한국의 밤 공연 (한인회관 건립기금 모금) 2006 년: 12 월 실업인 협회 송년의 밤 행사공연 2007 년: 10 월 국제민간항공기구 한국 상임이사국 선출기념 공연

12.2 퀘벡한인 미술협회

1978 년경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몇몇이 모여 정규적인 모임을 갖다가 1983 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그동안 그려온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한인연합교회 지하강당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제 1 기 회장단 시기에 퀘벡 한인 미술협회(Association des Artistes Coréens du Québec)의 기반이 닦였고 10 여 년이 지나는 사이 몬트리올 이민자 수의 증가로 인해 전문 미술인들이 많이 영입되면서 연례전이 점점 전문성을 띠게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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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1990 년대로 접어들면서 미술협회는 동포들 사이에서 더욱 인지도가 높아졌고 총영사관, 한인회 등 전시회 후원도 늘어갔다. 그후 미술협회는 2003 년 미술협회 데뷔 20 주년 기념 전시회를 개최했고 현재 협회 창립 후 30 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꾸준히 활동 중이다. 회원간의 정보교환, 현지 화단의 진출 및 활동을 도모함을 주목적으로 하는 퀘벡한인 미술협회는 동포들이 예술활동을 좀 더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문화적 교량의 역할로서 동포들에게 문화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힘쓰고 있다. 또한 현지인들에게는 한민족 예술인들의 작품을 알림으로써 한국-캐나다 친선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퀘벡 한인 미술협회] 년도

회장

1기

1978-1989

장윤천

2기

1990-1992

최예태

3기

1993-2004

정화자

4기

2005-2010

이현주

협회의 구성은 회장, 총무, 이사진으로 구성된 미술협회의 회원들은 주로 퀘벡 주에 거주하는 회화, 조각, 멀티미디어를 포함한 미술 분야 전공자이며 거기에 준하는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미술인들이다. 1970 년대 말 5-6 명의 회원으로 시작되었다가 최근에는 10-15 명으로 회원수가 늘었다. 운영은 자체경비로 이루어지며 전시 때마다 미술애호가들로 구성된 이사진의 후원도 받고 행사 성격에 따라 총영사관, 한인회 및 실업인협회에서도 지원을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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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한인 미술협회는 지난 30 여 년 동안 22 차례 연례전을 열어왔는데 그중 주목할 만한 행사로 1993 년 오카에서 개최한 제 10 회 전시회가 있다. 1990 년 일어났던 원주민과 캐나다군과의 대립사태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카의 Galerie Cultiv’Art 에서는 오카를 떠난 관광객들을 되찾고자 이색적인 전시회를 기획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미술협회를 초청한 전시회였다. 추상화와 정물화로 이루어진 동포화가들의 우수한 작품들이 선보였고 현지 언론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2003 년 5 월 몬트리올 델타호텔에서 열린 제 20 회 전시회는 1983 년 협회 데뷔전 이후 20 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인 동시에 한국-캐나다 외교 40 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열렸다. 이번 행사를 통해 협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회원들 간의 유대감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동포들은 동포작가들의 예술세계를 감상하며 한민족으로서의 자부심과 한민족 공동체 의식을 확인했다. 또한 한국미술의 우수성을 여러 현지 캐나다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계기이자 미술협회가 민간 외교사절단 역할을 담당했던 행사라는 의미가 있다. 2004 년 2 월 라고라 드 라 당스 (L’Agora de la Danse)에서 열린 제 21 회 연례전은 ‘Movement’라는 주제로 제작한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회로 동포 무용가가 맡고 있는 무용단의 공연이 있는 동안 미술전시회가 열렸다. 이는 그림과 춤이 한자리에 어우러진 독특한 기획으로 동포들과 현지인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2007 년 3 월에 열린 제 22 회 연례전은 한인회관 개관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과거의 것을 모아 새로운 세계를 연다’라는 주제 하에 평면회화 중심의 미술작품과 비디오 아트가 함께 선보였다. 기념행사에 참석한 퀘벡 정치인들 및 많은 동포들에게 동포예술가들의 작품을 보여 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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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몬트리올 문학회

1998 년 9 월 19 일에 시작된 몬트리올 문학회는 북미주에서 이민문학을 정립해나가는 일과 문학을 통하여 한민족의 얼을 살리고, 글 쓰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동호인 간의 아름다운 관계를 갖고 서로의 문학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만든 단체다. 더 나아가 한국-캐나다 복합문화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주요 사업내용으로는 동인지 발간, 청소년 우리말 글짓기 대회(백일장), 작품모집을 통하여 신인발굴, 시화전 등이 있다. 문학회는 회장, 총무, 회계, 일반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10 년 현재 회원 10 여명이 있다. 단체운영은 자체경비로 이루어진다. 문학회는 한 달에 한 번 회원들간의 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2007 년부터는 책 읽기 모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주요활동으로 2002 년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만든 동인지 ‘몬트리올 문학’ 출판 (한국-캐나다타임즈)이 있고, 2002 년 11 월 첫 번째 시화전을 한인회관에서 개최하여 동포들에게 문학을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2004 년 1 월에서 몬트리올 시내에 위치한 카페 비엔에서 두 번째 시화전을 가졌고 동포들만 즐길 수 있던 한민족 문학의 영역본을 준비하여 현지 캐나다인들에게 우리 문학을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 외 우리말 글짓기인 백일장 행사를 개최하여 동포 2 세들에게 우리 문학을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특히 문학회 회원 각자들의 활발한 문학활동이 주목할 만한데 2005 년 영역시집 ‘Shantytown and The Buddha’ (유병찬 역, 신세림출판사 2003) 와 수필집 ‘풀타임마더’ (유희영저, 신세림출판사 2004)이 출판되었고 출판기념식이 한인회관에서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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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렸으며 수익금 전액이 한인회에 기부되는 등 문학회의 동포사회 발전을 위한 노력이 엿보였다. 특히 영역시집 ‘Shantytown and The Buddha’는 2005 년 5 월 몬트리올 웨스트 마운트 도서관에서 소장된 이후 2010 년 퀘벡대학 도서관에서도 소장 요청을 받는 등 한국문학에 관한 현지사회의 관심도를 알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문학을 현지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2008 년 1 월에는 창간 10 주년 기념행사로 불문학과 교수(강충권)를 초빙하여 ‘글쓰기의 경향들’이란 주제로 불문학과 한국 수필, 시, 소설 등의 흐름을 배우는 시간을 가지며 회원들이 문학지식을 얻는 시간을 가졌다. 문학회 회원들의 활동 사항을 보면 현 문학회 회장(유희영)은 동방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고 그 외 다수의 문학회 회원들은 토론토 및 몬트리올 동포신문에 문학 및 영화 칼럼을 쓰고 있는 등 여러 방면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쏟아내며 동포들에게 문학을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생활터전에서 각자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회원들이 모이기 쉽지 않지만 정규적인 만남과 토론을 통하여 문학지식을 교류하며 자기발전의 기회를 갖도록 동기부여를 해주고 있으며 두 차례의 시화전을 통하여 회원간의 결속을 다지고 동포들과의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는 회원들의 작품과 함께 김소월, 정지용, 윤동주, 천상병 등 한국 시인들의 주옥 같은 시들을 영문으로 번역하는 Gift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유병찬교수, McGill 대)이 있다. [몬트리올 문학회] 1 기 회장

이희재

2 기 회장

유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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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몬트리올 한인 여성 합창단

몬트리올 한인 여성 합창단(Montreal Korean Women’s Choir)은 2000 년 7 월 6 일 7 명의 여성들이 모여 첫 모임을 갖고 2000 년 7 월 27 일부터 창단 인원 12 명의 합창단원으로 출발했다. 초기에는 몇몇 한민족 여성들이 조용히 주위의 어려운 분들을 방문해 위로도 하고 노래도 하면서 봉사해 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노래 실력도 키우고 단체의 발전을 생각해 정기공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성기독교인들로 특히 찬양을 좋아하는 단원들이 아름다운 단합과 사랑의 교제를 음악으로 승화하며 더 나아가서 몬트리올 지역사회와 캐나다의 외롭고 그늘진 곳을 방문하여 음악으로 봉사하기로 한 것이 창단의 취지와 목적이었다. 성가곡으로 현지인들에게 복음전파에 노력하고 각국의 민요, 가곡, 건전가요를 영어, 불어, 이태리어, 라틴어, 한국말로 필요한 장소에 따라 곡을 선정해서 노래함으로써 불우한 이웃에게 다가가고 있다. 한인 여성 합창단은 2010 년 7 월 현재 22 명의 단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로 성장한 자녀를 둔 주부들이다. 소프라노, 메조 소프라노, 알토 3 부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회장, 지휘자, 반주자 및 일반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원진은 2 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정기 총회를 통해 교체된다. 모든 모임과 행사는 봉사 (양로원이나 병원 방문 때 선물 준비, 차량 봉사, 식사와 간식, 포스터 제작, 단원들 의상 제작, 악보 제작, 섭외 등등)와 회원들의 자비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콘서트 때에는 단원들의 자녀들은 악기 팀(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바순)을 이루고 사회나 안내, 프로그램, 포스터 제작에 도움을 주고 있다. 몬트리올 한인 여성 합창단은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우선 현지사회의 외로운 이웃들을 위한 봉사 활동으로는 Dorval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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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yer 양로원 위로 방문, St-Anne’s hospital 원호 병원의 참전용사들 위로 공연 등이 있으며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2001 년에는 남아프리카 에이즈 환자를 돕기 위한 NDG 복합문화 행사에 참여했고 최근 캐나다 유방암센터 IRCM 연구기금을 위한 행사 등 지역사회를 돕기 위한 행사에 여러 차례 참여하는 등 한민족으로서 현지사회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의미 있는 일들을 하고 있다. 한편 한민족 공동체 발전에도 도움을 주고 있는데 2004 년 11 월 한인회관 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행사에 참여했으며 삼일절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음악의 힘으로 동포사회의 화합을 도모해 오고 있다. 2001 년부터 정기적으로 해 온 St-Anne’s Hospital 6.25 참전용사를 위한 공연은 2010 년이면 제 11 회 연주회를 맞이하는데 대한민국을 위해 젊은 인생을 바친 캐나다 참전용사들에게 한인여성합창단의 공연은 한국정부를 대표해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맘을 전하고 위로하는 것으로 큰 보람과 의미를 가진다.

[몬트리올 한인 여성합창단] 회기

회기년도

지휘자

반주자

단 장

1기

2000-2001

인애자

장근희

인정민

2기

2002-2003

김안나

장근희

정정순

3회

2004-2005

김안나

장근희

김영애

4회

2006-2007

김안나

장근희

이현숙

5회

2008-2009

김안나

박천실

장근희

6회

2010-2011

김안나

박천실

박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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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2002 년 캐나다 유명 합창단 L’emsemble Vocal Dorval 과의 공동 콘서트를 여는 등 다양한 음악행사도 해오고 있다. 특히 2004 년부터는 2 년에 한 번씩 정기 콘서트를 열어 독창, 중창, 합창, 악기연주 등 다양한 공연내용을 선보임으로써 보다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이 정기공연 준비를 하면서 연습시간도 늘려 회원들에게는 음악실력을 쌓는 기회가 되었으며 동포들에게는 문화활동을 더욱 자주 즐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합창단이 외부 재정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큰 어려움 없이 지난 10 여 년간 공연을 활발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원 각자의 투철한 봉사정신과 가족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들이 성장한 자녀를 둔 상태라 시간,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더욱 활발한 단체활동이 가능했다. 한편 현재 활동 중인 회원의 대부분이 창단멤버들이어서 앞으로 세대교체에 대비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있다. 기존의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계속하면서 동포들을 위한 정기콘서트도 계속 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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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몬트리올 선교 합창단

몬트리올 선교 합창단은 몬트리올 교회협의회 주최로 매 2 년마다 실시되는 부활절 연합 성가제를 계기로 2001 년 8 월 6 일 창단멤버(김웅식, 김창익, 류충근, 박광수, 염동준, 이영배, 최유식)들이 모여 준비모임을 가지고 9 월 10 일 정관을 확정하며 창단되었다. 찬양을 통한 기독교 선교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더불어 음악으로 한국문화를 주류사회에 알리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찬송가뿐만 아니라 한국가곡도 레퍼토리에 넣어 공연하는 등 한국음악 알리기에 노력하였으나 2005 년 후반기부터 선교를 위한 공연에 더욱 초점을 두고 활동 중이다. 2 년 임기의 단장을 중심으로 지휘자, 반주자, 일반단원들로 구성되며 자체경비로 운영되지만 정기공연 시 교회와 동포단체들의 후원과 일반동포들의 스폰서도 받고 있다. 선교합창단 활동 초기에는 선교와 동시에 현지사회에 한국문화 알리기 활동을 활발히 했다. 2002 년 11 월 3 일 몬트리올 대학 음악강당에서 열린 제 1 회 공연은 1200 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성황리에 마쳤으며 2004 년 제 3 회 정기연주회에서는 몬트리올 총영사관의 협조로 민간항공기구 회원 및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을 초청하여 아름다운 한국음악을 들려주었다. 이는 차후 대한민국이 민간항공기구 이사국으로 선출되는 데 문화사절단으로서 도움을 주었다. 이후에는 기독교 선교와 동시에 한국음악을 이곳 캐나다인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콘서트를 열었다. 이런 선교합창단의 초기의 활동들은 한국문화를 현지인들에게 알림으로써 동포들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지게 해주었고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들도 음악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는 등 한민족 공동체를 음악으로 화합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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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년 이후 선교합창단은 선교에 더 초점을 두며 활동을 해오고 있는데 2005 년에 제 4 회 정기 연주회 겸 성탄축하 찬양의 밤 공연을 했고 2007 년에 제 5 회 정기공연을 원주민 선교를 위한 목적으로 콩코디아 음악강당에서 가진 후 2008 년 9 월에는 아프리카 불어 문화권을 위한 아프리카 선교대회를 앞두고 다른 교회 합창단과 같이 연주회를 개최했다. 2009 년 1 월에는 성 요셉 성당에서 열린 캐나다 기독교 공동 기도회 행사에 참여하여 몬트리올 내의 다른 교회 찬양단과 함께 공연했다. 같은 해 11 월에는 글로벌 미션 컨퍼런스의 일정에 참석하여 한국 고유의상을 입고 성가곡을 선보였다. 선교합창단은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만든 종교음악 단체라는 의의가 있는데 여러 교회 신도들로 이루어진 단원들이 화합하여 함께 찬양하고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동포들에게 아름다운 찬송가와 가곡을 전해주고 있다.

[몬트리올 선교 합창단] 초대

2001-2003

김웅식

제 2-3 대

2003-2005

염동준

제4대

2005-2006

손신실

제5대

2006-2007

김웅식

제6대

2007-

임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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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몬트리올 코랄 청년 합창단

2008 년 3 월 17 일 교회음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전도와 찬양사역을 중심으로 차세대 사회의 일꾼으로 또한 교회의 봉사자로 성장하기를 소망하는 몬트리올의 한민족 청년들이 모여 시작된 비영리 단체이다. 교회 음악이 갖는 진정한 의미의 연주와 합창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일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코랄 청년 합창단은 지휘자, 회장, 부회장 및 일반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세젭과 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과 한민족 청년들이며 공연 시 20-25 명의 회원이 참석하고 있다. 단원들의 소속 교회에서 주로 후원을 받는 상황이며 공연 시 일반 동포들의 스폰서도 받고 있다. 이 합창단은 2008 년 11 월에 몬트리올 은혜성결교회에서 선교와 불우한 이웃, 장학금 기금 모금을 위한 제 1 회 콘서트를 가졌다. 2009 년 5 월에 몬트리올 한인 연합교회에서 몬트리올 코랄 청년합창단의 두 번째 공연이 열렸다. 젊은 동포 기독교인들이 준비한 공연을 동포 모두가 격려해 주는 분위기에서 두 차례의 공연은 성공리에 개최되었다. 또한 1.5 세 및 2 세들로 이루어진 동포 청년합창단이 당당히 동포 음악단체로 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공연 준비과정을 통해 다른 교회 청년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동포청년간의 유대감도 강화되었다. 2009 년 12 월 ‘Salle Pierre Mercure’에서 이웃돕기와 장학기금 모금을 위한 제 3 회 정기공연을 가졌다. 코랄 청년합창단은 이날 공연에서 몬트리올 캐네디언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헨델의 대표적 오라토리오 '메시아(Messiah)'를 공연하며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특히 이 헨델 메시아 공연은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로도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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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뿐만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는 몬트리올인 모두가 관람할 수 있었으며 한민족의 음악성을 이곳 현지인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대부분의 동포음악단체들이 1 세 중심으로 구성되고 활동되는 데 반해 코랄합창단은 1.5 세 2 세를 포함한 동포 차세대 음악단체로서 그 중요성이 있다. 특히 동포 차세대의 한민족 공동체에 대한 관심도가 낮아지고 있는 추세를 볼 때 코랄합창단은 주목할 만한 단체이다.

[몬트리올 코랄 청년합창단] 창립자

2008

허향원

지휘자

2008-2009

허향원

회장

2008-2010

김우진

12.7 극단명: 사람들

현지 연극을 가르치고 있던 캐나다인이 1999 년 한국인 단원을 모집하기 시작했으며 외국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공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극단 <사람들>은 동포사회의 문화 저변확대가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동포들이 연극활동에 참여하고 연극 공연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극단 “사람들”은 최초의 한민족 극단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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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년 가을에 제 1 회 공연을 안톤 체홉의 유쾌한 코믹극 ‘The Bear’로 막을 올렸다. 영어로 된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매길대 한국학생들이 무대장치를 맡았으며 캐나다인 총감독의 지휘하에 동포단원들이 무대에서 열띤 공연을 펼쳤다. 한국을 사랑하는 현지인이 한민족 동포을 위해 시작한 연극단체로서 더욱 의미가 있는데 비록 제 1 회 공연으로 끝났지만 캐나다인, 동포 1 세, 동포 2 세 다같이 단결하여 준비한 공연으로 동포들에게 기억된다.

[극단 사람들] 총감독, 후원

Todd Stones

연출

전기병

12.8 극단명: 연극사랑

극단 연극사랑은 이민 오기전부터 연극배우 겸 연출자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조미경씨를 중심으로 평소 연극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이 창단멤버(조미경, 조은경, 이진용, 배철호, 전기병, 김명희, 이상길, 정연형, 최선미, 조혜정, 최세영)로 모여서 2009 년 7 월에 창단되었다. 2009 년 9 월 11 일과 12 일 몬트리올 대학 소극장(Centre d'Essai)에서 몬트리올 첫 공연 ‘아비’가 진행됐다. 후원회와 단원들이 힘을 모아 공연에 필요한 재정과 스폰서 조달에 적극 나섰으며 동포단체 및 업소에서의 후원을 받았다. 공연 전부터 티켓이 매진되는 등 동포들의 기대 속에 두 번의 공연이 있었다. ‘아비’는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가족극으로서 개성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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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재미와 가족애를 재발견하도록 해주었다. 특히 부모와 함께 관람 온 동포 2 세들이 동포연극단에 관심을 보였다. 한편 ‘아비’가 공연되는 동안 불어로 자막이 나감으로써 현지인들도 한국연극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연극을 통해 한국어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장려하기 위해 동포 2 세들의 연극 참여 기회를 마련할 계획도 있다.

12.9 기타 예술 단체

시네-아지

시네-아지 (Cine-Asie Film Institute, 대표 이미정)는 캐나다내의 아시아계 캐나다 영화인들의 작품을 개발, 지원하는 예술단체이다. 1996 년에 설립된 시네-아지는 여러 몬트리올 기관들과의 협조 하에 영화, 영상 비디오 관련 제작, 기획을 진행하는 순수 영화예술 단체로 자체 투자와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비영리 법인이다. 캐나다 유일의 한국영화 및 아시아 영화 연구 단체로 알려진 시네-아지(Cine-Asie)는 한국영화 및 아시아 영화를 통해 한국과 아시아 문화의 이해를 돕고 있다.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국영화 특별 회고전을 개최하였으며 임권택, 유현목, 신상옥, 홍상수 감독전 등 수차에 걸쳐 한국영화를 통한 한국문화 보급에 앞장서왔다. 2007 년 9 월에는 오타와 한국문화 홍보관의 후원을 받아 아시아의 뉴웨이브(누벨-바그) 감독으로 대두되는 <홍상수 전>을 몬트리올 시네마테크 께베꾸와즈 상영관에서 개최해 수준 높은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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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를 현지 영화인, 영화관련 전문인과 영화과 학생들에게 과시하였다. 현재 캐나다 전역의 영화인과 한국, 중국, 일본 영화를 대상으로 열릴 한국-캐나다 공동제작 컨퍼런스를 준비 중이며 몬트리올 시청 (Ville de Montreal)과 캐나다 영화 관련기관, 한국영화 기관들과의 협력으로 준비 중이기도 하다. 동시에 제 3 회 캐나다 아시아 영화인 비디오 포트레이트 축제 (National Video Portrait)를 준비 중에 있다.

판타지아 국제 영화제

1996 년 여름에 시작된 판타지아 국제 영화제(대표 Pierre Corbeil)는 북미에서 제일 큰 장르 영화제로 성장했다. 매년 7 월 몬트리올 시내에서 약 3 주간 열리고 있으며 세계 각국의 공포, 액션, SF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초청된다. 특히 판타지아 국제 영화제 초창기부터 한국어 프로그램이 따로 있을 정도로 판타지아 영화제에서의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는데 특히 2010 년 영화제에서는 ‘한국영화전’ 코너가 특별히 마련되는 등 캐나다 내 한국영화 보급에 선두자 역할을 해오고 있다. 2010 년 한국영화전에서는 50 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를 디지털로 복원해 고 김기영감독의 ‘하녀’를 비롯하여 노근리 사건을 다룬 ‘작은 연못’ 및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등 한국영화가 무려 15 편이나 선보였으며 한국영화 관람객이 1 만 명을 넘는 기록도 남겼다. 한편 2009 년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가 감독상 및 작품상을 동시에 수상한 데 이어 2010 년에는 이해준 감독의 영화 ‘김씨 표류기’가 심사위원 특별상을,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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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처럼’이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영화의 우수성이 판타지아 영화제를 통해 입증되었다. 일본이나 중국영화에 비해 다소 덜 알려져 있던 한국영화의 세계가 지난 15 년간 판타지아 국제 영화제를 통해 이곳 몬트리올 사회에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한국영화를 통한 한민족사회와 한국문화를 이곳 캐나다에 홍보하는 기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한민족 동포들에게는 한국영화 감상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었다. 오래전에 고국을 떠난 동포들에게 영화 속에 담긴 한국의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고국에 대한 향수도 달랠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동포 2 세들은 재미있는 한국영화를 접하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및 한국영화예술에 대한 자랑스러움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이미정 씨와 Pierre Corbeil 씨는 한민족 공동체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2005 년 7 월 7 일 26 대 몬트리올 한인회가 주최한 영화제에 영화 <하류인생> 상영권을 기부하고 극장 대관료를 대납하는 등 당시 한인회가 심혈을 기울인 주류사회 진출사업의 첫 장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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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활동 제13장


스포츠 활동

제 13 장 스포츠 활동

인간이 사는 여느 나라 여느 사회를 막론하고 스포츠를 즐기지 않는 곳은 없다. 스포츠는 지구상에서 가장 훌륭한 친목의 수단이다. 인간은 스포츠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느끼며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진다.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어깨동무한 채 응원도 하고 어떤 때는 얼싸 안고 기쁨의 눈물도 함께 흘린다. 스포츠는 훌륭한 보약인 것이다. 몬트리올 동포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50 여 년 전 퀘벡 땅에 한국인들이 첫 발자국을 남긴 이래 지금까지 동포사회에는 체육행사가 끊이지 않았다. 크게는 광복절 체육행사에서부터 작게는 단둘이 마주 앉아 즐기는 바둑모임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일 스포츠와 함께 살다시피 했다. 동포사회의 역사는 스포츠의 역사라고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스포츠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퀘벡 동포들의 절친한 친구였다. 이에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계 이민자들의 고독과 향수를 달래 주었고 동포상호 간의 친목도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포츠 중에서 동포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던 몇 가지를 여기 13 장에 기록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렇듯 지난 반세기 동안 몬트리올 동포사회에 큰 힘과 위안이 되었던 스포츠 활동이 2000 년대로 접어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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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직면해 있다. 각 종목 협회들이 하나씩 둘씩 자취를 감추더니 지금은 제대로 운영중인 스포츠 협회가 거의 없다. 이에 2005 년에 한인회(26 대 회장 염동준)가 나서서 몬트리올 한인 체육회를 결성하고 각 협회들을 체육회 산하로 모아 동포사회의 체육활동을 체계화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기획했다. 그러나 ‘한인회가 동포단체들을 장악하려 한다’며 수직적 관념에 사로잡힌 보수일각에서 이를 반대했고 결성작업을 방해했다. 당시 26 대 한인회는 두 차례에 걸쳐 발기인 모임을 열었으나 초대 회장과 임원들을 선출하지 못했고 결국 몬트리올 한인 체육회의 결성은 무산됐다.

13.1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

기록에는 동포체육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던 11 대 한인회(회장 박동렬)가 1977 년과 1978 년 8 월에 광복절 기념 축구대회를 개최한 사실이 남아 있다. 또한 13 대 한인회(회장 박종구)때도 광복절 기념행사 후에 체육대회를 열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러다가 16 대 한인회(회장 최계수)에 이르러 전 동포들이 함께 경축하고 즐기는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로 대폭적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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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년 8 월 날씨도 화창한 토요일 라살 앙그리뇽 몰 근처의 공원에 수많은 동포들이 모였다. 16 대 한인회는 남녀노소가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체육대회를 기획했고 축구시합, 어린이 과자 따먹기, 어린이 사생대회, 단체대항 400 미터 릴레이, 줄다리기, 배구시합, 족구, 여성피구, 어린이 축구, 노래자랑, 경품권 추첨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날 체육대회를 주관했던 16 대 체육부장 임승덕 씨는 “그렇게 많은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인 적이 그때까지 없었다”라고 감회에 젖어 당시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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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 2007.8 >

광복절 기념식은 우리의 1.5 세 또는 2 세들에게 그들의 뿌리인 한민족이 겪은 수난의 일제시대를 알리고 암울했던 과거 36 년을 거울 삼아 미래를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하고자 매년 8 월 15 일을 전후로 개최해 온 범 동포행사다. 그러나 1970 년 8 월 5 대 한인회(회장 오기송)가 처음으로 기념식을 개최한 이래 15 년 동안은 수십 명의 동포들이 모여서 치르는 조촐한 행사였다. 그러다가 1986 년 이후에는 각 교회들을 중심으로 많은 동포들이 참가하는 행사로 발전했고 이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체육대회와 함께 열려 동포사회의 화합과 친선을 도모하는 가장 큰 동포행사로 자리매김했다. 한인회가 동시에 주관하는 두 행사의 시너지 효과는 매년 가장 많은 동포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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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골프

교수와 의사 등 전문직종의 동포 취업자들이 대부분이었던 1950-60 년대가 지나가고 캐나다 연방이민법의 개정(1967 년)에 따라 취업이민 또는 가족 초청이민 등 정식 이민자들이 몬트리올 동포사회에 유입되면서 골프 동호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한인 골프회가 발족되었고(1973 년) 투자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던 1980 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회원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후 발전을 거듭해 온 골프회는 힘들고 지친 이민생활 속에서 동포 간의 친목과 화합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동포들의 골프 실력도 그동안 많이 향상되어 1980 년대 초반까지는 그로스 우승실력이 82~85 타 정도였으나 그 후로는 70 타점 대를 쳐야만 우승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발전했다. 노인과 여성들도 골프인구의 증가에 한몫을 하여 1998 년에는 몬트리올 여성 골프회가 발족되었고 시니어 골프회도 꾸준히 활동해 오고 있다. 협회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동호인 그룹도 많이 생겼다. 수요 골프회, 월요 골프회 등 요일 별로 이름을 만들고 매주 모이는 동호회가 있는가 하면 종교단체 동호회가 있고 동문회 골프모임도 생겼다. 또한 1996 년에는 칠성회라는 70 대 이상 노년들의 골프모임이 결성되었고 골프장 멤버끼리 만든 ‘매사모’라는 골프모임조차 생겨났다. 한편 골프는 몬트리올 동포들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타 지역대회에 참가하여 수 차례 좋은 성적을 냈음은 물론이고 토론토와 오타와 지역 동포들과 친선대회도 많이 열었다. 또한 1990 년대에는 동양 4 개국(한국, 일본, 중국, 베트남) 골프대회를 다년간 개최해서 동양 7 개국 축구대회와 함께 타민족 사회와의 스포츠 교류활동에도 한몫을 했다. 동포사회의 수많은 골프모임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모임은 단연코 한인 골프회다. 한인 골프회는 회장과 경기이사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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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임원과 몬트리올에 거주하는 한인 골프 동호인들로 구성되며 매년 대회를 연다. 몬트리올 한인 골프회의 역대회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최봉암(73 년), 김해연(74 년), 박동렬(75-76), (황필준 77-78), 김홍식(79-80), 오영(81-82), 전관병(83-84), 도수홍(85-86), 방명웅(87-88), 이영민(89-90), 김 겸(91-92), 이기영(93-94), 조영환(95-96), 유동훈(97-98), 윤광빈(99-00), 김철규(01-02), 이봉섭(03-04), 유동훈(05-06), 박영식(07-08), 2009 년부터 현재까지는 회장이 없다. 그러나 몬트리올 한인 골프회에는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가 있다. 대회 참가자 수가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성기였던 1990 년대에는 골프대회 참가인원이 보통 100 여명이 넘었다. 그러나 2000 년대에는 골프대회 참가자 수가 평균 약 60~70 명 정도로 줄었다. 동포사회의 규모가 1990 년대와 비교해 3 배나 늘어난 것(2 천명 6 천명)을 감안할 때 골프대회의 참가자 수가 반대로 감소한 것(100 명 60 명)은 골프 동호인들이 주목해야 할 점이다. 물론 타지역 이주자나 본국 역이민자가 늘어난 것도 사유가 되긴 하겠으나 더 큰 이유는 새로 온 이민자들이 큰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5 년에 왔다는 어떤 이민자는 자신은 큰 대회보다는 교회의 골프대회나 지인들간의 골프 소모임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런 큰 대회는 이민 온 지 오래된 몇몇 사람들만의 잔치’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PGA 와 LPGA 에서 한국선수들의 선전과 더불어 몬트리올에도 골프인구는 계속 늘어나는데 대회 참가자 수는 줄어드는 기현상, 2010 년대의 한인 골프 동호인들이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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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축구

각종 체육대회의 하이라이트는 축구임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축구는 대표적인 대중 스포츠인 것이다. 몬트리올 동포사회에서 축구단이 생긴 것은 1977 년의 일이다. 여가 선용을 통해 체력을 향상시킨다는 목적 아래 몬트리올 축구단이 1977 년 6 월 26 일에 창설되었다. 이 축구단의 멤버들은 매주 일요일 오후가 되면 West Hill High School 구장에 모였고 함께 뛰며 땀을 흘렸다. 창설 당시 단원은 정 단원 15 명이었고 장년 1 개 팀과 학생 1 개 팀 등 2 개 팀으로 구성되었다. 몬트리올 축구단의 단장은 한인연합교회 최선옥 장로였고 감독은 과거에 한국공군 축구팀의 주전 선수생활을 했던 김석구 씨가 맡아 축구단 운영에 큰 활력소 역할을 했다. 1978 년 9 월에는 학생 축구단이 토론토 원정에 나서 그동안 닦아온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푸른 잔디 구장에 유니폼을 산뜻하게 차려 입고 학생과 장년 40 여명이 뛰고 있는 모습은 자칫 이민생활에서 갖기 쉬운 스트레스 해소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체력단련이라는 목표아래 열심히 뛰었던 몬트리올 축구단은 학생 팀을 육성하고 지원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를 위한 방안 강구에 전력하기도 했으나 재정적인 뒷받침이 어려워 고심한 흔적이 남아있다. 한편연합교회 20 년사와 몬트리얼 한인일력(1983 년 장윤천 저)에는 1979 년 7 월 15 일 연합교회 주관으로 축구대회가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고 1981 년 8 월 23 일에는 토론토와 친선 축구대회를 가졌던 기록도 전해진다. 그러나 몬트리올 동포사회에서 축구활동이 본격적으로 활발해진 것은 1991 년 9 월 동양 7 개국 축구대회를 계기로 퀘벡한인 축구협회가 창설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축구협회는 약 30~40 명 정도의 일반동포들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었으며 매주 일요일 조기축구 모임을 가졌고 청년부, 노년부, 어린이부로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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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어 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축구가 동포들의 체력향상에 기여했음은 물론이고 각종 축구대회의 개최는 동포사회의 단합에도 지대한 효과를 가져왔다. 성당과 각 교회들이 축구팀을 만들어서 친선경기를 자주했으며 청소년들에게도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쳤다. 매년 한인회가 주최하는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축구경기다.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의 축구경기 장면, 2007.8>

1993 년 당시 퀘벡에 있었던 현대자동차 브로몽 공장의 근로자들과 친선축구 시합을 통해서 민족의 동질성을 느끼기도 했으며 토론토 지역의 축구대회에 참가하여 2 회 준우승을 하기도 했다. 또한 축구는 당시의 큰 문화행사였던 동양문화의 밤과 함께 타민족 사회와의 교류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국은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 일본 등 동양의 7 개 소수민족들이 참가한 축구대회에서 수 차례 우승했고 아시아의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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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끼리 우애를 돈독히 했다. 본국에서 2002 년 월드컵이 열렸을 때는 몬트리올 동포들과 유학생들이 붉은 유니폼을 입고 태극기를 든 채 몬트리올 시내 중심가를 누비며 축구 불모지 퀘벡 땅에 축구 열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축구협회는 재정난을 많이 겪었다. 정부나 다른 단체의 재정지원 없이 임원과 선수들의 자비로 협회를 운영해야 하는 까닭에 협회 창설 이후 10 여 년 동안 힘든 운영을 해왔으며 그나마도 2000 년부터는 축구협회를 유지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협회는 없어졌어도 청년들을 중심으로 코리안 리그(MKFL)는 2010 년 현재도 열리고 있으며 광복절 기념 축구대회 등의 동포행사에도 많은 협조를 하고 있다. 퀘벡한인 축구협회의 초대회장은 임승덕 씨였고 2 대는 김덕휘 씨, 그리고 3 대는 윤재수 씨가 맡아 2-5 년씩 수고했다. 2010 년 현재 몬트리올 한인 축구협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13.4 배구

몬트리올 동포사회에 배구협회는 아직 결성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루한 겨울이 오면 배구대회를 곧잘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몬트리올 동포사회의 스포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993 년 겨울에도 배구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한얼신문의 후원으로 임승덕 씨 등 몇 명의 동포들이 ST-HENRI 체육관에서 개최한 제 1 회 배구대회는 10 개의 동포팀이 참가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후 LA 폭동 성금 증발사건과 관련된 한얼 신문사가 없어지면서 이 배구대회는 불행하게도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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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테니스

1980 년대부터 테니스 협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으나 전 동포를 참여대상으로 크게 개최하는 테니스 대회는 없이 동호회 규모 정도로 모여서 활동하고 있다.

13.6 야구

바쁜 일상 생활 속에서 스포츠 취미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운동하고 건강을 유지하며 친하게 지내는 것은 성공적인 이민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몬트리올에 야구단이 처음으로 창설된 것은 2003 년이다. 야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으나 야구단이 없어서 활동을 못하던 동포들 중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2003 년 5 월에 몬트리올 ‘거북이(Turtles) 야구단’이 창설되었다. 초대 회장은 최우근 씨가 맡았다. 이후 한인감리교회와 사랑교회에도 야구 동호회가 생겼다. ‘3 대가 함께 같은 운동장에서 같이 야구하는 그날까지…’를 목표로 활동을 시작한 거북이 야구단에는 종교,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지루한 겨울이 지나고 몬트리올의 봄이 시작되는 4 월말이 되면 약 30 여명 정도의 단원들이 모여 시즌개막 경기를 갖는다. 이후 10 월말까지 이들은 매주 금요일에 열리는 정기모임을 기다리며 일주일을 보낸다. 2010 년도 거북이 야구단의 주요행사로는 감리교회 및 사랑교회 야구단과 친선경기를 포함해서 8.15 체육대회 참가, 박동수 야구교실(전 롯데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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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활동

자이언트 투수) 개최, 그리고 회원가족 초청 단합대회와 송년의 밤, 골든 글로브 시상식 등이 있었다.

13.7 바둑

정신 스포츠인 바둑은 바쁜 이민 생활 속에서 잠시 틈을 내어 상호 교제할 수 있는 좋은 스포츠다. 초기의 바둑 모임은 한인연합 교회의 바둑 동호인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했다. 이후 바둑을 두는 동포들이 많이 늘었으나 특별히 정한 장소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1996 년에야 비로소 바둑회 전용 장소인 기원이 마련되었다. 바둑회 창설자 장윤천 씨가 초대회장을 역임한 바둑회는 중국 일본 등 타 민족들과 친선대회도 열었고 동포들간의 바둑대회도 여러 번 개최했다. 1977 년 9 월에는 한인회(회장 박동렬)가 주최하는 바둑대회가 열렸고 1982 년 10 월에는 노장회에서도 바둑대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2000 년대 중반부터는 바둑 동호인 감소와 재정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근래부터는 아예 활동이 중단된 상태이다. 현재 바둑회에 등록된 회원은 30 여명이지만 등록하지 않은 동포들까지 계산하면 약 100 여명의 바둑 동호인들이 몬트리올 동포사회에 있을 것으로 바둑회 관계자는 추정한다. 몬트리올 한인 바둑회를 이끌어 온 임원은 초대회장 장윤천, 2 대 전관병, 3 대 박종선, 4 대 임승덕, 5 대 김광노, 6 대 염정호, 7 대 김윤기, 8 대 염대호, 9 대 강춘술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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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장 언론활동

캐나다에는 300 여 개의 이른바 민족언론 매체(Ethnic Media)가 있다. 현지언어에 대한 장벽 때문에 민족언론 매체들은 어느 민족사회를 막론하고 이민생활에 필수적인 정보원이다. 대부분의 이들 민족언론 매체들은 대체적으로 모국에 대한 정보와 현지사회에 대한 정보, 국제뉴스, 동포사회 뉴스, 이민정착에 필요한 정보, 그리고 현지사회 진출에 필요한 정보 등을 싣는 데 민족언론의 유용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이러한 정보를 통해 이민자들은 지적인 생활에 도움을 받는다. 둘째, 모국과의 정서적 연결을 유지할 수 있다. 셋째, 이민자들의 정체성 형성 및 개발에 도움을 준다. 넷째, 자녀의 학업선택, 주택문제를 포함한 정착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준다. 다섯째, 창업 및 기업 매매에 대한 정보를 통해 생계기반 구축에 도움을 준다. 여섯째, 현지사회에 관한 정보제공을 통해 현지사회 진출의 어려움 극복에 기여한다. 일곱 번째, 민족언론 매체를 통해 다양한 동포단체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끝으로 민족언론은 동포간의 화합에 기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민족언론 매체는 이민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상업목적으로 설립되거나 혹은 정보의 신뢰도가 부진하거나 혹은 동포사회 내 일부 세력의 이익만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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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하는 매체는 오히려 이민생활의 안정성과 발전에 해가 될 수 있다.

14.1 몬트리올의 한인신문

1976 년 이전에는 몬트리올에 한글언론 매체가 없었다. 당시는 조선일보 혹은 중앙일보를 포함한 모국의 신문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들 신문을 받아보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됨으로써 뉴스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몬트리올 최초의 한글언론 매체는 1982 년 4 월에 제 1 호로 발행된 ‘몬트리올 한인소식’ 지다. 이 소식지는 당시 제 14 대 한인회장 정희수 박사의 취임과 함께 한인회 기관지적 성격으로 탄생했다. 발행목적으로 (1) 한인회 운영사항의 공지, (2) 동포사회의 발전도모, (3) 한-캐나다 문화교류, (4) 한국전통문화의 보전 등을 표방했다. 한인회의 기관지로서 14 대 한인회가 창간한 몬트리올 한인소식지는 2 회까지 발행되었고 그 후 제 20 대 한인회가 제호를 ‘한인회보’로 바꾸어 1994 년 3 월 11 일 다시 1 호를 발행한 기록이 남아있다. 주간 ‘모래알’ 지는 장윤천 씨에 의하여 1985 년 8 월 15 일 제 1 호가 발행되었다. 발행인은 희수 (77 세) 를 맞이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신문을 제작하면서 동포사회의 모래알 같이 사소한 소식이라도 일일이 동포들에게 알리겠다는 뜻과 몬트리올의 불어발음을 변용해 제호를 정했다고 한다. 1990 년에는 서울 KBS2 방송국 국제 방송에서 송출하는 단파방송을 수신 녹취하여 동 시간대 모국의 뉴스를 전하는 신속성을 보였다. 2001 년까지 16 년의 수명을 기록했다. (A3 용지 반절 4 면 발행)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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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소식’ 은 한국일보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안재만 씨에 의해 1988 년 5 월 27 일 창간되었다. 그러나 안재만 씨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1990 년부터는 임종율 씨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 신문은 최초로 광고를 유료화했으며 1997 년 종간되었다. (A3 용지 반절 8 면 발행) ‘한얼신문’ (발행인: 양현일)은 1990 년 11 월 17 일에 발행되며 처음으로 타블로이드 판으로 제작되어 신문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넓은 지면에 많은 뉴스와 읽을 거리를 제공했다. LA 폭동 기사를 다루면서 성금모금 문제가 발생해 1995 년 자진 폐간했다. (타블로이드 20 면 발행) ‘퀘벡 한인소식’ (발행인: 이동준)은 1995 년 4 월 8 일 창간호를 발행했다. 그 당시 한인소식과 한얼신문과의 분쟁의 와중에서 중립을 표방해 제작되었으나 지면을 무리하게 늘리는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1 년 정도 유지하다가 포기했다. (A3 용지 반절 20 면 발행). ‘아바쿠스’ 는 처음 신영대 씨를 비롯해 4 인이 컴퓨터 동호인 명의로 1996 년에 창간했으며, 현 “코리언 뉴스위크”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A3 용지 반절 4 면 발행) ‘저널포럼’ (발행인 박관수)은 1998 년 7 월 11 일 창간되었으며 첫 창간호는 당시 몬트리올 시장인 삐에르 부르끄 Pierre Bourque 씨와 당시 퀘벡 자유당 당수인 쟝 샤레 Jean Charest 씨의 창간 축하 메시지를 싣고 타블로이드판 32 면의 거대한 지면으로 발행되었으나 4 개월간 17 호를 마지막으로 자진 폐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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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코리언 뉴스위크

우여곡절끝에 2011 년 현재 한카 타임즈(Hancatimes) 주간지와 코리안 뉴스위크(Korean Newsweek) 주간지가 공존하여 한민족 공동체의 발전을 상징하는 한글언론 매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코리언 뉴스위크 주간지(발행인: 신영대) 는 1996 년 2 월에 창간하였다. 몬트리올 동포사회에 신문이나 기타 매체가 없었던 당시에 동포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현재 본 주간지는 몬트리올 지역뿐만 아니라 오타와 지역도 배부함으로써 양 도시 간의 간접 커뮤니케이션에 기여한다. 발간 부수는 2000 여부의 컬러 타블로이드 규격이다. 창간 당시 레터 사이즈로 8 페이지에 불과했던 아바쿠스는 2002 년 10 월 타블로이드 규격으로 거듭 나며 <코리안 뉴스위크>로 개명되었다. 2009 년 5 월부터 오타와 지국을 설치하고 오타와 소식을 함께 전하고 있다. 2011 년 현재 제 3 대 신지연 지국장이 오타와 지면 4 면을 담당하며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총 24 면, 고정 칼럼 7 개, 캐나다-몬트리얼 소식부터 한국, 국제소식, 그리고 건강과 스포츠 등 다양한 장르와 동포사회와 관련한 각종 소식을 게재하고 있는 코리안 뉴스위크는 몬트리얼 현지사회의 가장 중요 이슈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므로써 외국어가 자유롭지 못한 동포들에게 현지사회의 실정을 알리는 것을 언론매체의 중요한 역할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코리언 뉴스위크는 몬트리얼 총영사관의 공지사항을 동포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임무로 생각하고 있으며 아울러 하루하루 바쁜 이민생활 속에서 행복한 소식에 기뻐하고 슬픈 소식에 함께 눈물을 나누는 동포언론 매체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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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한카타임즈

한카타임즈의 모태는 1998 년 5 월 15 일 창간된 격주 정보지 ‘세계여행’ 이다. 당시 세계여행은 캐나다 여행정보와 스포츠 레저등의 생활정보를 몬트리올 동포들에게 전달하는 매체였다. 동포들의 관심과 성원에 힘입어 약 1 년 후에 ‘세계여행’은 한카타임즈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매거진 스타일의 주간지로 2003 년까지 발행되었다. 최대 36 면까지 발행된 매거진 스타일의 신문에 고정칼럼의 필진들이 합류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 부터다. 2003 년 NDG 지역에 사무실을 마련한 한카타임즈는 2004 년 1 월 몬트리올의 첫 컬러판 타블로이드 신문을 발간하면서 한 차례 도약기를 맞게 된다. 이 최초의 타블로이드 신문이 채택한 컬러판 4 면 및 흑백판 24 면의 신문형태는 이후에도 큰 변화 없이 계속 유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11 년 현재 한카타임즈의 발행부수는 2000 부다. 한카타임즈의 편집의도는 동포들의 행복한 삶(Happy Life)을 돕는 것이다. 몬트리올 동포들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간접체험의 장을 마련하여 윤택한 이민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이민자의 불이익이 최소화되도록 현지법률과 제도를 비롯한 각종 유익한 정보들을 끊임없이 제공하며 동포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동포사업을 직간접으로 지원할 수 있는 각계 전문가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는 목표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한카타임즈는 한국에서 개최된 세계 재외동포 언론인 협회가 주관하는 컨퍼런스에 참가하여 국제한인 언론 네트워크 구축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몬트리올 동포사회에서 한카타임즈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각별하다. 한카타임즈가 11 년째 운영해 오고 있는 신문사 홈페이지인 한카닷컴(hanca.com) 은 한국으로 치면 ‘다음’이나 ‘네이트’, ‘네이버’와 같은 포털사이트에 해당한다. 이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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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카닷컴은 현재 몬트리올 동포들이 많이 이용하는 웹사이트가 되었다. 동포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뉴스와 부동산, 교육 등 전문 지식을 접하고 또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등 이민생활의 유익한 공간이 되고 있다. 한편 1998 년 창간후 13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스포츠 칼럼, 건강칼럼, 문화컬럼 등 전문가 칼럼은 한카타임즈의 얼굴로 자리를 잡았다. 최선미의 ‘눈에 띄는 사람’ 이영민의 ‘세계여행기’와 식당/요리 소개’ 임승덕의 ‘골프이야기’ 손지혜의 ‘캐나다 이야기’ 김광오의 ‘한방이야기’ 이정생의 ‘영화 이야기’ 이수경의 ‘알록달록 문화세상’ 포로리의 ‘돋보기로 본 경제’ 정희수 교수의 ‘부동산을 배우자’ ‘퀘벡 역사 알기’ ‘퀘벡공동체 발전사 2001-2005’ ‘비영리 단체법’ ‘인터넷 법’ 강선규의 ‘법 알기’ 변은숙의 ‘함께 읽고 싶은 시’ Matt 교수의 ‘크로스 단어 맞추기’ GOES 의 ‘영어 배우기’ 등이 인기리에 연재되어 동포들의 큰 관심과 호응을 얻었다. 그 외에 몬트리올 동포소식, 몬트리올과 퀘벡을 비롯한 캐나다 소식의 번역판, 국내소식 등을 통하여 시사언론에 대한 동포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도 했다. 2011 년에 들어서면서 한카타임즈는 또다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먼저 메이플 학생 기자단의 ‘COLLEGE BEHIND’ 칼럼을 새로 기획하여 젊은 층에 지면을 할애하기 시작했으며 박희균의 ‘촌철살인’ 불어칼럼을 통해서 몬트리올 한국계 이민사회가 퀘벡주류사회로 향하는 길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 입양아 협회 스토리를 통하여 중요한 사회이슈에 대한 동포들의 관심과 성찰도 촉구할 예정이다. 나아가 퀘벡 정부와 각 기관 및 퀘벡 관련 기획기사를 정례화 하는 등 퀘벡의 한국계 동포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언론으로서의 거듭날 수 있도록 고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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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VOKO

동포 라디오 방송인 보코(Voice of Korea)는 홍승남 프로듀서가 콩코디아 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재학시절 CKUT 커뮤너티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턴 활동을 하면서 아이티, 브라질, 아랍 등 여러 소수민족 단체들이 라디오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현지에 알리는 것을 보고 설립을 구상하게 되었다. 1999 년 겨울, 한민족 라디오 방송을 위한 아이디어가 구상되었고 2000 년 1 월, 몬트리올 한민족의 문화, 예술활동을 소개하고 한국의 소식을 전하는 데모방송 테이프 제출 후 CKUT 90.3 FM 방송국 신규 프로그램 심사에 통과함으로써 퀘벡 주 최초의 한민족 라디오 방송의 꿈이 현실화되었다. 2000 년 5 월부터 보코의 정규 방송이 시작되어 매주 화요일 오후 2 시부터 30 분 동안 영어로만 진행되었으나 2000 년 8 월에 한국어 사용과 방송시간 연장을 승인받아 매주 화요일 영어와 한국어 이중언어 방송을 1 시간씩 진행해왔다. 방송 시작 2-3 년 후부터 영어 방송과 당시 한류의 영향으로 동포청년들과 다른 아시아권 학생 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어 2005 년 8 월에 보코방송, 스포츠팀, 불어회화 동아리, 영화 동아리 등 한국인은 물론 다른 아시아권 또는 아시아 문화에 관심 있는 현지인들까지도 즐길 수 있는 비영리 단체 네오아지(NeoAsie)가 설립됐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보코 라디오 방송이 네오아지의 주 활동이며 방송에 참여하는 동포청년 회원들이 주회원을 이루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보코방송 회원들은 100% 취재비용 등 자체경비를 충당하기 영화상영회, 기금모금 파티 등 병행하고 있다. 방송 초창기에는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자원봉사자이며 사무용품과 위해 음식바자회, 의류바자회, 보코 후원기금 모금운동을 동포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317


언론활동

받은 적도 있으나 무엇보다 몇몇 동포들의 꾸준한 기부와 따뜻한 격려가 지난 10 여 년간 보코가 존재해 오는 데 큰 힘이 되고 있다. 후원 모금운동 참여나 방송 웹사이트 방문자 층을 분석해보면 관심 있는 현지인, 방송 일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주변인(동포 1.5 및 2 세), 한민족 방송을 지원하는 1 세들이 주요 청취자들이다. 1 부 순서(2:00-2:30PM) 에는 흘러간 한국가요와 함께 한국뉴스, 인터뷰 및 동포행사 취재, 한국문화, 한국어와 한국음식 등 주로 정보, 문화를 알리는 내용이며, 2 부 순서에는 (2:30-3:00 PM) 최신가요와 함께 연예계뉴스, 한국음악 및 한국영화소식, 볼 만한 몬트리올 행사안내 등 젊은 층이 공감하는 오락적인 내용으로 구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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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활동

보코방송은 동포사회와 캐나다사회를 연결시키는 문화적 고리로서 한민족 동포들의 입지를 굳히고 캐나다의 복합문화주의에 이바지하고 있으나 학생 자원봉사자들은 학업과 방송을 병행하기에 어려움이 많고 졸업과 취업 등으로 방송활동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는 실정이며 동포단체나 정부단체가 꾸준한 지원보다는 일시적으로 소정의 후원금을 주는 형편이기 때문에 방송과 동시에 후원기금 모금운동을 펼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동포들의 관심과 한국정부의 지원이 계속된다면 보코 방송은 방송의 질을 더욱 향상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며 현지인과 교류하는 퀘벡 주 유일의 한민족 방송으로 더욱 성장할 것이다.

14.5 퀘벡 한민족 언론매체의 역할

퀘벡 한민족 언론의 역사는 30 년이 되었다. 1982 년에 14 대 몬트리올 한인회가 기관지인 ‘몬트리올 한인소식’을 발간한 이래 10 여개의 한글신문과 한국어 방송이 부침하며 퀘벡 한민족사회의 여론을 이끌어 왔다. 2011 년 현재 동포 수 7 천명인 몬트리올에는 두 개의 한글판 주간신문과 한개의 한국어 방송채널이 있다. 그러나 이들 언론매체들의 재정상태는 열악해서 유지하기에도 벅찬실정에 있고 이는 이민사회 언론의 참된 역할수행에 커다란 결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재력있는 독지가의 지분참여나 새로운 언론매체의 등장, 또는 한인회 기관지의 복간을 기대할 수도 있겠으나 지난 십수년간 동포사회 발전에 기여해 온 이들 세 매체가 책임있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동포들이 성원하고 지원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이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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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활동

동포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일에 언론매체가 앞장서던 시대는 한참 지났다. 2010 년대 이민사회 언론매체의 진정한 역할은 동포들의 현지사회화를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정착, 교육, 복지, 건강등 이민생활에 필요한 정보는 물론이고 한국소식과 함께 현지사회소식 및 타 동포사회의 동정도 동포들에게 자주 전달해야 한다. 또한 동포들을 계몽하고 독려하는 어려운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 현재 몬트리올에서 발행되고 있는 한글판 신문들을 보면 현지사회 소식을 맨 앞장에 싣고 있고 그중 한 신문은 소위 <독설 칼럼>들을 통해 동포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동포들이 현지사회에 관심갖고 참여하도록 돕는 큰 역할을 한다. 이민사회는 낯설고 칠흙같은 망망대해의 한복판을 지나가는 한척의 배와 같다. 이주역사 반세기를 지나는 몬트리올 한민족 동포사회는 긴 항해 끝에 항구를 찾는 이민선박과도 같다. 동포들은 승객이고 한인회 봉사자는 선원이며 한인회장은 선장에 견줄 수 있다. 선장이 아무리 유능해도 항로가 불투명하면 승객들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갈 수 없다. 어두운 바닷길을 안내해서 배가 항구에 잘 도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등대의 역할이다. 이민사회의 언론매체는 그런 ‘등대’와 같다. 퀘벡 한민족 사회가 주류사회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도록 등대로서의 책임있는 역할이 기대된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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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친목단체활동 제15장


기타 친목단체활동

제 15 장 기타 친목단체활동

제 15 장에는 몬트리올 동포사회의 친목단체 중에서 6.25 참전 전우회와 이북 5 도민회에 관하여 기록한다.

15.1 몬트리올 참전 전우회

몬트리올 동포사회 내에는 다양한 친목모임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모임이 6.25 참전 전우회다. 참전 전우회는 1982 년 6.25 참전 동지회로 출발하였다. 회원 상호간에 상부상조하고 친목을 강화하며 조국의 안보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참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나아가 몬트리올 동포사회의 융화단결에 이바지하고, 한국-캐나다 6.25 참전용사간의 친선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2009-2010 년도 기간 중 몬트리올 6.25 발행하고 보훈병원을 방문했으며 6.25 캐나다 현충일 행사에 참여 했다. 또한 여름 야유회, 가을 사과 따기, 대보름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참전 동지회는 회보를 한국전쟁 기념행사와 회원간 친목행사로써 윷놀이 행사를 했고 322


기타 친목단체활동

신년하례식, 광복절, 삼일절 등 한인회의 기념행사에 적극 참여했다. 2010 년 현재 18 명의 회원이 생존해 있고 역대 임원명단은 아래와 같다. 대수

임기

회장

부회장

1

1982-1983

백기순

조달형

2

1983-1984

박동열

이한구

3

1984-1985

전관병

유근국

4

1985-1987

김홍식

백기화

5

1987-1989

백기화

정승화

6

1989-1991

조달형

조병철

정의남

7

1991-1993

조병철

백기섭

정의남

8

1993-1995

백기섭

엄재성

윤세중

9

1995-1998

엄재성

박종호

전관병

10

1998-1999

박종호

홍순호

윤세중

11

2000-2001

홍순호

이태성

12

2002-2003

이태성

정승화

13

2004-2005

정승화

이택우

14

2006-2007

차영석

이택우

15

2008-2008

김재원

이석우

16

2009-2009

이석우

17

2009-2010

김병옥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감사

김기혁

박종호 엄재성

이창규

황광연 323


기타 친목단체활동

6.26 참전 전우회의 사업 중 특히 주목할 것은 6.25 참전수기 집필사업이다. 참전수기에는 8 명의 6.25 참전 경험담이 수록되어 있다. 6.25 참전수기 머리말의 일부분을 소개한다. “몬트리올에 사는 18 명의 참전용사 중에서 8 명이 겪은 6.25 한국 전쟁 참전수기를 책으로 발간하게 되었다. 이는 참전한 것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당시 겪었던 사실 그대로를 기억을 더듬어서 기록한 것이다. 비록 문학적인 가치는 없지만 우리의 후손들이 한국전쟁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록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에 비견(比肩)하고 있음은 우리 나라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고 국가를 수호한 참전용사들의 피와 눈물이 기초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 전우들은 국가안보에 만전을 기하고 국토방위를 튼튼히 할 것을 외치는 바이다” 참전수기는 ‘전투로 부상 입은 참전용사(김대위)’ ‘Punch Bowl 의 휴전(김병옥)’ ‘잊혀져간 산하(박종호)’ ‘전투를 마치고 후방 근무의 평안(이석우)’ ‘늦깎이 장교생활(이창규)’ ‘학도병으로 참전한 용사(이태성)’ ‘내가 겪은 6.25 한국전쟁(전관병)’ ‘572 고지의 무공훈장(황광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뷰 말미에서 김병옥 17 대 고유문화를 바탕으로 캐나다 사회에 단체간에 협동단결하여 동포사회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회장은 “대한민국의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잘 이끌어 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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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친목단체활동

15.2 이북 5 도민 연합회

몬트리올 이북 5 도민 연합회는 1989 년 3 월 15 일 설립되었다. 초기의 창립멤버들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월남한 1 세대들로 구성되었다. 초대회장 정의남, 조상훈, 최광태, 여춘성, 김광노, 조동호, 황필준, 백기화, 백기섭, 임종성, 유정권, 김재홍 씨 등이 초기회원이다.

잃어버린 고향과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을 생각하면서 다른 실향가족들이 함께 모여 통일을 기다린다는 취지로 발족된 이북 5 도민회의 입회자격은 이북을 고향으로 둔 실향민 1 세대와 그들의 후손들이다. 이북 5 도민회의 주요행사로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대통령기 이북도민 체육대회 참가를 비롯해서 골프대회, 야유회, 망향제, 송년회 등이 있다. 임기

회장

부회장

1989-1993

정의남

김재홍

1994-2002

김재홍

2003

최계수

조용휘

장승엽

2004

임종성

조용휘

이봉섭

2005-2006

조용휘

장승엽

김현석

2007-2008

조용휘

장승엽

이기원

2009-2010

조한주

황장환

정준모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사무총장

총무

이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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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기관 및 유관단체 제16장


대한민국 정부기관 및 유관단체

제 16 장 대한민국 정부기관 및 유관단체

제 16 장에는 주 몬트리올 대한민국 총영사관과 민주평화통일 자문 위원회, 세계 한민족 여성 네트워크 몬트리올 지부, 그리고 700 백만 해외동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모국 재외동포재단의 퀘벡 한민족사회 지원활동에 관하여 기록한다.

16.1 주 몬트리올 대한민국 총영사관

몬트리올은 세계 85 개국의 영사관(명예 영사관 48 개 포함)과 국제민간항공기구(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가 있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입지를 가진 국제도시다. 주 몬트리올 대한민국 총영사관은 1980 년 7 월 27 일에 개설되었고 1993 년 8 월부터 ICAO 대표 기능을 겸직하고 있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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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기관 및 유관단체

성명

부임 일자

초대 총영사

김창훈

1980.08.05

제 2 대 총영사

이종업

1984.07.08

제 3 대 총영사

라원찬

1987.04.15

제 4 대 총영사

최성홍

1990.02 01

제 5 대 총영사

김영섭

1992.08.25

제 6 대 총영사

양태규

1994.09.16

제 7 대 총영사

김종록

1997.04.15

제 8 대 총영사

이상태

1998.06.03

제 9 대 총영사 겸

ICAO 대사

최종무

2001.02.16

제 10 대 총영사 겸

ICAO 대사

이수택

2003.09.17

제 11 대 총영사 겸

ICAO 대사

신길수

2006.09.26

제 12 대 총영사 겸

ICAO 대사

김종훈

2009.03.02

대한민국은 2001 년 10 월의 제 33 차 ICAO 총회에서 이사국이 되었고 2007 년 9 월 36 차 총회까지 그 위치를 유지했다. 주 몬트리올 총영사관은 뉴펀랜드 래브라도 주와 노바스코시아 주에 각각 1 명씩의 명예영사를 두고 있으며 대한민국 항공산업의 발달뿐만 아니라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2011 년 현재 주 몬트리올 총영사관이 관할하는 지역은 캐나다 중부의 퀘벡 주를 비롯하여 동부의 노바스코시아, 뉴브룬즈윅, 뉴펀랜드 래브라도 및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런드 주 등 5 개 주이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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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기관 및 유관단체

퀘벡 이민부의 자료에 따르면 주 몬트리올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관할하는 캐나다 5 개주에는 2011 년 현재 약 7 천 5 백여명의 한국계 이민자들이 살고 있다. 이중 대부분인 5,700 여명이 몬트리올에 거주하고 있으며 퀘벡 주의 기타지역에 약 9 백여 명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천여 명은 북부지역의 중요도시인 노바스코시아 주의 할리팩스와 뉴브룬즈윅의 프레데릭튼, 뉴펀랜드 래브라도 주의 세인트존, 그리고 PEI 주의 샬럿타운에 살고 있다. 주 몬트리올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주요활동 중의 하나는 관할지역 내 한민족 공동체들의 발전을 돕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인회와 노년회 등 동포사회의 단체들은 매년 한국의 재외동포재단에 사업 신청서를 내고 지원금을 받는다. 신청서는 반드시 관할지역 총영사관을 경유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몬트리올 총영사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몬트리올 동포사회의 단체들은 총영사관의 이 같은 협조를 높이 평가한다. 또한 총영사관은 한민족사회의 주요행사를 후원할 뿐만 아니라 개천절 행사를 직접 개최함으로써 한민족의 정체성 함양에도 기여하고 있다. 또한 2000 년 이전에 이민 온 동포들은 퀘벡의 운전면허를 취득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퀘벡 주를 시작으로 지금은 총영사관의 관할 주에서 현지 운전면허의 취득이 매우 수월해졌다. 총영사관이 관할 주와 운전면허 상호인정 약정서를 체결했기 때문이다. 본 이주사 발간의 촉매 역할을 한 것도 몬트리올 총영사관이다. 2005 년 가을무렵 제 10 대 이수택 총영사 겸 ICAO 대사는 이희재 박사(2 대 편찬 위원장)에게 이주사 편찬사업을 제안했다. 물론 이희재 박사는 이를 흔쾌하게 수락했다. 1978 년 당시 작성되었으나 출판하지 못한 채 초고 원본을 간직해 오고 있던 중이었던 1 대 편찬위원 이 박사로서는 이수택 총영사의 제안이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초대 위원장(박동렬 11 대 한인회장)의 유지를 실천할 수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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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기관 및 유관단체

있음을 기뻐한 이 박사는 한인회와 상의해서 곧 바로 2 대 편찬 위원회의 구성작업에 착수했다. 염동준 26 대 한인회장은 당시 기획실장이었던 김영권씨를 편찬위원으로 추천했고 문학협회의 회원인 전기병씨와 홍승남씨를 이 박사가 합류시켜서 4 명의 편찬위원으로 제 2 대 편찬 위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병을 앓고 있었던 이 박사는 불행하게도 출판사업을 완성하지 못했고 초고 원본을 비롯한 관련자료들을 김영권 편찬위원에게 승계했으며 정희수 박사에게 3 대 위원장직과 후일을 당부하고 2007 년 가을 타계했다. 이수택 총영사는 재외동포재단을 직접 방문하는등 출판자금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고 그 결과 동 재단으로 부터 세차례에 걸쳐서 충분한 자금이 편찬 위원회에 전달되었다. 한편 근래 들어 총영사관은 ‘퀘벡 주 개항 (저자: 주 몬트리올 총영사관 겸 ICAO 대표부, 2011)’ 이라는 112 쪽의 책자를 발간했다. 제 12 대 김종훈 총영사 겸 ICAO 대사는 이 책자가 신규 이민자뿐만 아니라 기존 이민자들의 생활에도 필요한 자료라고 밝혔다. 소책자 ‘퀘벡 주 개항’ 은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첫장에서는 퀘벡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퀘벡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 경찰, 사법제도 등), 둘째 장에서는 이민자들의 입국 전 준비사항과 퀘벡 도착 및 초기정착 정보, 주거지 결정에 필요한 정보, 퀘벡 내의 구직활동과 근로환경, 퀘벡 교육제도, 금융활동 및 재산관리, 퀘벡의 교통수단, 셋째 장에는 퀘벡의 생활환경, 산업환경, 여행정보, 교육기관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어 넷째 장에는 주요 영사민원 상담사례 (여권, 국적, 가족관계등록, 사증, 병역, 공증 등),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이민자에게 유용한 웹사이트 및 연락처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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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기관 및 유관단체

16.2 세계 한민족 여성 네트워크

2001 년 여성부 출범을 기념하면서 시작된 세계 한민족 여성 네트워크 Korean Women's International Network (KOWIN 코윈)는 한국내외 여성들간의 교류 및 연대를 강화하고, 전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민족 여성의 인적자원 개발과 활용에 목적을 두고 있다. 한편 몬트리올 코윈 지부의 활동목적은 1. 몬트리올 동포여성간의 네트워크을 구축하고 서로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며, 2. 여성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통해 동포여성들의 삶을 향샹시키고자 노력하며, 3. 여성들이 동포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화합의 한민족 커뮤니티를 형성하는데 이바지 하는 것이다. 전문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구성회원인 세계 한민족 여성 네트워크와는 조금 달리 몬트리올 지부는 몬트리올 지역에 거주하는 18 세 이상 동포여성이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 2005 년 7 월에 서울에서 개최된 제 5 회 세계 한민족 여성 네트워크에 홍승남씨가 몬트리올 여성으로 처음으로 참석했으며 캐나다에 돌아온 후 다른 지역 코윈 (오타와, 켈거리, 에드먼튼)과 네크워크를 형성했다. 2005 년 12 월에 한명숙 당시 열린 우리당 위원이 몬트리올을 방문했을때 캐나다 코윈 회원들을 오찬에 초청했었다. 당시 오타와에 있던 코윈 캐나다 선임관 최정수씨와 오타와 코윈 회원들이 오찬에 참석했고 몬트리올에서는 홍승남씨등 14 명의 동포여성이 참석했다. 그 모임을 계기로 몬트리올 코윈 지부가 발족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2006 년 3 월에 정식으로 회장(이채화)과 부회장(김명희)등 임원진(총무 홍승남, 섭외 전기병, 홍보 최선미)이 구성 되었다. 몬트리올 코윈의 활동사항을 살펴보면, 제 1 기 몬트리올 코윈은 몬트리올에 코윈을 알리고 회원수를 늘리는데 주력하며 회원상호간의 유대강화를 위한 친목 활동을 했다. 또한 회원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몬트리올 교민들과 함께 나눌 수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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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기관 및 유관단체

있도록 세미나를 개최했다. 2006 년 6 월 몬트리올 회원 모집을 위한 첫 모임을 열었으며 20 여명이 신규회원으로 가입했다. 2007 년 6 월에는 몬트리올 여성 네트워크를 위한 가든파티를 열어서 회원을 더 모집했다. 2010 년 4 월 현재 몬트리올 코윈의 회원수는 45 명인데 이들은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직업 여성들과 일반 주부들이다. 몬트리올 코윈은 그동안 많은 세미나를 개최해서 회원 및 일반교민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대표적인 세미나로는, 건강 세미나(강사: 건강 관리사 이선화, 2006.9.25), 미용 및 꽃꽂이 세미나(강사: 두레 미용실 원장 박경숙, 한인회 꽃꽂이 강사 박효숙, 2007.9.11), 대학진학 세미다 (강사: 김명희 매길대 전임강사, 2008.2.16), 연방정부 취업 세미나 (강사: 연방정부 공무원 박옥경 박사, 2009.6.13) 등이 있다. 한편 코윈의 활동에는 애로사항도 많다. 첫째로 회원모집의 어려움이다. 이는 코윈에 대한 교민들의 인식부족 때문이다. 둘째는 재정의 궁핍이다. 정부의 지원없이 회비와 기부금, 그리고 임원진 자비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재정적으로 힘들다. 셋째는 몬트리올에서는 세계 한민족 여성 네트워크의 근본취지에 부합되는 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래 세계 네트워크는 전문여성들간의 네트워크다. 그러나 인구가 적은 몬트리올에서 전문여성인력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회원모집이 어렵다. 또한 코윈은 몬트리올 지역 특성에 맞고 한인회와 실협 등 기존의 다른 동포단체들과 차별화된 목적과 역할을 개발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몬트리올 최초의 동포여성단체인 몬트리올 코윈은 꾸준하게 성장해 나갈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경쟁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네트워크 확장은 필수다. 동포사회 구성원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발전은 곧 동포사회 전체의 발전을 의미한다. 캐나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동포여성단체인 몬트리올 코윈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는 특히 1 세대 뿐만 아니라 2 세 회원 모집에 더욱 중점을 두어 세대간 동포여성들의 교류증진도 기여할 수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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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기관 및 유관단체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여성단체로써 동포여성의 사회 참여도를 높일 수 있는 동기부여를 개발하고, 일반 교민들에게 유용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여성이 한민족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16.3 민주평화통일 자문 위원회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회(민주평통)는 한국국민의 통일의지와 역량을 결집하여 평화통일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1981 년 6 월 5 일에 범국민적 통일운동 기구로 설립된 대통령 직속의 자문회의다. 제 11 기 까지는 토론토 지회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제 12 기 부터 몬트리올 지회가 설립 되었다. 12-13 기(2005.7.12009.6.30, 송재언)의 행사는 통일 간담회 및 평화통일에 대한 교민의견 수렴회 개최, 평통회의 참석등 이었고, 14 기(2009.7.12011.6.30, 김용상)는 통일 간담회와 북한 인권문제 세미나 개최, 그리고 평통회보 발간이었다.

16.4 재외동포재단

재외동포재단은 한국에 있다. 비록 퀘벡사회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재외동포재단은 위에 언급된 어느 정부기관 못지 않게 한민족 이민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해외동포 지원기구다. 이 재단은 지난 십수년 동안 전세계의 한민족 사회에 매년 수백억원씩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오고 있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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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기관 및 유관단체

이곳 몬트리올에도 재외동포재단의 지원금 수혜를 받은 동포단체는 많이 있다. 그동안 몬트리올 한인회는 한민족 정체성 보전사업과 차세대 육성사업 등의 명목으로 3 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비록 지원금의 규모와 상세한 사용내역이 동포사회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동포사회의 다른 단체들도 재외동포재단으로부터 지난 10 여 년동안 많은 지원금을 수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 퀘벡 이주사의 편찬작업도 재외동포재단의 자금지원으로 이루어졌음을 앞에서 이미 밝힌 바가 있다. 재외동포재단은 전세계 750 만 해외동포들의 민족 정체성 유지와 권익신장 노력을 돕고 한민족의 역량을 결집해서 모국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취지하에 1997 년 10 월 설립된 단일기구로써 해외동포와 관련된 제반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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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공동체의 꿈

제4 부 퀘벡 한민족사회의 과제와 전망

제 26 대 몬트리올 한인회의 회장 염동준은 퀘벡 한민족 공동체가 가진 문제점들을 동포들에게 알리고 함께 그 해법을 찾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했다. 이에 따라 김영권 기획실장이 한민족사회의 미래기획 시리즈를 기획하였고 각계 각층 인사들의 지혜를 모아서 기고문에 담았다(2006.4 월-2006.7 월, 한카타임즈에 매주 게재, www.montrealkorean.com 참고). 이민세대와 연령층, 직업, 신분상태를 고려해서 총 열 명의 기고자가 선정되었다.

기고자(10 명): 오기송 박사, 이희재 박사, 정희수 박사, 정재호 박사, 이광규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박준수 씨, 박재영 박사, 김유대 변호사, 권해룡 부총영사, 김광오 목사 (기고 순) 연령분포: 20 대 1, 30 대 2, 40 대 2, 60 대 1, 70 대 3, 90 대 1 명 세대분포: 이민 1 세대 6, 이민 1.5 세대 2, 기타 2 명 신분상태: 시민권자 6, 영주권자 2, 기타 2 명 직업분포: 학자 4, 변호사 1, 자영 1, 언론 1, 종교 1, 정치 2

열 개의 기고문은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밝은 미래를 갈망하는 기고자들의 열정이 담긴 소중한 자료다. 당 편찬위원회는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고 공동체의 발전에 유용하게 활용되도록 하기 위하여 기고문의 중요 내용을 발췌하고 진보적인 관점에서 편집하여 제 4 부(17 장-서론, 18 장-본론, 19 장-결론)에 수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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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공동체의 꿈 제17장


이민 공동체의 꿈

제 17 장 이민 공동체의 꿈 (서론)

이민 공동체의 꿈은 그 민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바램이 모여서 형성된 혈연 집합체의 희망이며 동시에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함께 노력해야 할 공동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것은 ‘영향력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적으로 영향력이 큰 민족 공동체가 되어 구성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보다 나은 삶을 영위토록 돕는 것, 그것은 퀘벡사회를 이루고 있는 백여 개의 모든 민족 공동체들이 지향하는 꿈이다.

현지사회의 ‘벽’과 공동체의 ‘영향력’

민족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이민 1 세는 훌륭한 교육제도 안에서 자녀를 교육시키고 성공시킨 후에 자신의 안정적인 노후를 즐기기 위해서 캐나다에 온다. 이를 성취하기 위하여 이민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한 험한 일도 마다 않고 휴일도 없이 달리고 또 달려간다. 다행히 대부분의 자녀들은 좋은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사업도 그 즈음이면 안정상태에 들어간다. 물론 캐나다에서 노후생활은 안전하게 보장된다. 그러나 학업을 마친 자녀들이 희망하는 분야에서 능력에 맞는 직업을 갖는 것은 부모들의 생각만큼 용이하지가 않다.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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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공동체의 꿈

현지사회의 ‘두터운 벽(인맥, networking)’ 때문인데 문턱에서 실패하고 좌절하는 자녀들이 많이 있다. 캐나다와 퀘벡 주의 공공기관이나 금융기관, 병원, 학교, 그리고 일반회사 등의 공개 채용률은 한국의 그것보다 현격하게 낮다. 예를 들어서 Hydro Quebéc 이나 Loto Quebéc 같은 공기업에 입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잘 퇴사하지도 않지만 설령 빈 자리가 난다고 해도 채용공고가 나가기도 전에 이미 기존 사원들의 친구나 친척들로 채워진다. 이 처럼 퀘벡사회(특히 퀘벡 주를 이끌어 가는 주류사회)는 각 분야에 포진한 인맥으로 구축한 자신들만의 영역 안으로 타 민족이 진입하는 것을 좀 처럼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다. 동포자녀들의 이 같은 좌절은 이미 십여 년전부터 시작되었으나 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직접 겪지를 못했으니 공감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1990 년대 이후 급증한 1 세들의 자녀가 현지사회에 진출을 시도하는 2000 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이 문제에 공감하는 목소리가 동포사회에 높아지고 있다. 자녀의 좌절은 1 세의 꿈이 무산되는 것과도 같다. 이민 온 목적이 흔들리고 실패한 이민을 생각하게도 한다. 자녀를 캐나다의 학교에 보내고 졸업할 때 까지 뒷 바라지하는 것으로 부모의 책임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서야 공감한다. 자녀를 좌절하게 만드는 퀘벡 현지사회의 ‘두터운 벽을 넘도록 도와주는 것’도 1 세 부모들의 몫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자녀들을 좌절케하는 그 ‘두터운 벽’을 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민족 공동체’다. 하지만 현지사회에 영향력이 없는 민족 공동체는 그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이민 민족들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퀘벡사회에서 그들의 공동체가 영향력 있는 민족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영향력’이란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서 특정사회를 지배하는 힘’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영향력이 큰 민족 공동체에는 정치와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똑똑해서 일 수도 있겠으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두터운 인맥의 벽을 감안할 때 온전히 개개인의 능력만 가지고 그 지위에 올랐다고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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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이민 민족 공동체가 전체 이민사회 내에서 갖는 ‘영향력의 크기’는 그 공동체의 역사나 규모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혹은 공동체의 인구가 갑자기 늘어난다고 해서 전체 이민사회 내에서 그 민족 공동체의 영향력이 저절로 커진다고 볼 수 는 없다. 퀘벡 이민사회 내에서 프랑스계나 유태계 혹은 이탈리아계 민족 공동체가 갖는 ‘사회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다’라는 의미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도 상대적으로 컸다’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영향력 확대를 위한 타 공동체들의 노력

이탈리아계 외에도 유태계와 프랑스계의 ‘400 년 막강한 영향력 아성’에 도전하고 있는 신흥세력이 있다. 그 세력은 이민 역사 120 년에 불과한 중국민족 공동체다. 하지만 19 세기 말에 처음으로 캐나다 땅을 밟은 중국민족 공동체가 오늘에 이르기 까지는 120 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걸렸다. 광산과 철도 공사장에서 첫 이민생활을 시작한 그들에게는 수 많은 난관과 과제가 있었고 그것들을 잘 극복했다. 이후 그들은 그들 공동체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해 오고 있었다. 그 결과 2000 년대 초반부터 퀘벡 이민사회 내에서 중국민족 공동체의 영향력이 급상승하고 있다. 중국본토가 개방됨에 따라 해외로 쏟아져 나온 신세대 중국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공동체의 규모가 급팽창했고 그들이 영향력 확대를 주도하고 있다. 그 예로써 매년 초에 어김없이 개최되는 신년문화행사(Moon Festival, Shen Yun 등)를 들 수 있다. 이 거대한 중국문화행사에는 항상 퀘벡사회의 주요인사들과 이웃 민족 공동체의 대표들이 초청되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중국문화에 감탄하고 중국민족 공동체의 영향력과 위상을 높여주며 돌아간다. 또한 그들은 아동병원 암기금 모금 등 수많은 사회공익사업과 봉사활동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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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주관하고 당선이 유력한 정치인들의 후원사업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는 기존 지배구조의 인맥을 뚫기 위한 훌륭한 전략이다. ‘인맥은 인맥으로 뚫는다.’ 그들은 주류사회 인사들과의 인맥을 만드는 방법으로 문화행사와 후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 결과는 초대형 중국문화센터의 건립을 위한 시정부의 지원을 이끌어 냈고 중국청년 상공 회의소의 주도하에 강남 Brossard 지역에 대형 아시아 음식문화센터를 탄생시켰으며 중국계 연방의원과 시의원들의 배출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퀘벡의 정치와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대외 위상이 크게 높아졌으며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이제 중국민족 공동체는 가시적 소수민족(visible minority, 유색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계, 유태계, 이탈리아계 등과 함께 퀘벡 주류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민 민족 공동체가 되었다.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실태

퀘벡 한민족은 1950 년대 중반부터 퀘벡 땅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고 이제 막 반세기를 지나고 있다. 중국민족 공동체와 비교하면 역사는 절반 정도고 인구의 규모는 약 4%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공동체다. 현재 우리 한민족 공동체의 사회적 영향력은 아직 보잘 것 없다. 어쩌면 중국인들이 흘려 보낸 세월만큼 우리도 보내고 그들이 겪은 만큼 우리도 겪으면 우리도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앞으로 70 년을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지 않은가? 70 년후에는 우리 공동체의 영향력도 그렇게 커진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자녀들의 좌절을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70 년의 세월을 조금이라도 앞 당기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 민족 공동체의 실태와 과제, 그리고 해법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합심해서 <조금이라도 더 영향력 있는 민족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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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공동체의 꿈

것> 그것이 바로 자녀들이 두터운 벽을 넘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고 부모세대로서 책임있는 행동이며 이민자 개개인의 꿈을 이루는 길이다.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잘 해 왔다. 그러나 제 3 부에서 지적한 것처럼 동포끼리의 단합과 화합, 친목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울타리 안에서 반세기를 보낸 까닭에 2000 년대의 동포사회가 다양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이 난관들은 결국 공동체 전체의 과제를 양산했고 우리의 공동체가 영향력 있는 민족 공동체로 성장해 가는 길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고 있다. 제 18 장 본론에서 이 난관과 과제에 관하여 자세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동포여! 지금부터라도 두 팔을 걷어 부치고 이 장애물들을 함께 치워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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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한민족사회의 과제 제18장


퀘벡 한민족사회의 과제

제 18 장 퀘벡 한민족사회의 과제 (본론)

2006 년 봄 넉 달동안 미래기획 기고문을 통해서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신문지상에 공개한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난관과 과제를 진보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편집하여 본 장에 수록한다. 이는 역사서의 통념에서 벗어나는 모험이겠으나 당 편찬위원회의 과감한 결정이 우리 민족 공동체의 영향력을 키우고 밝은 미래를 앞 당기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독자의 연령층과 가치관, 신분상태에 따라서 제시된 과제나 해법에 대한 공감도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래의 과제들이 자녀세대에게 미칠 영향을 염려하는 부모세대의 마음으로 본 장을 접한다면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생각을 바꾸자 THINK-TANK 를 만들자 동포에게 묻자 청사진을 만들자 사회기반조직을 혁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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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한민족사회의 과제

생각을 바꾸자

사는 곳을 옮기는 것을 이사(移徙, moving)라하고 태어난 나라를 떠나서 다른 나라의 영토로 옮겨가 사는 것을 이민(移民, immigration)이라고 한다. ‘이민은 이사보다 좀 더 먼 외국으로 주소지를 옮겨서 사는 것’으로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민의 현실은 그렇게 쉽지도 단순하지도 않을뿐더러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더 용이하지 않다. 십수 년동안 서울에 살던 사람이 귀향(歸鄕, 역이사)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향에 생활기반이 남아 있거나 새롭게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물며 수십 년간 외국에 살던 사람이 귀국(歸國, 역이민)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생활기반 외에도 문화적 역충격 등 극복해야 할 것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 분명하다. 이민과 역이민은 둘 다 모두 극히 어려운 일이다. 오기도 어렵지만 돌아간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에 가깝다. 캐나다의 백성이 되어서 캐나다 땅에 생활기반을 새로 만들고 캐나다 사회에 적응해서 살겠다는 어려운 결심을 하고 이민을 왔으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인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을 왔으면서도 ‘이사 온 사람’ 처럼 사는 동포들이 주변에 많다. 현지사회와 한민족 공동체의 미래에는 별로 관심없고 머리와 마음은 늘 한국에 있으며 몸만 퀘벡 땅에 산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과거에 산다’는 것이다. 1970 년대 이주자는 유신시대에, 1980 년대 이주자는 88 올림픽 시대에, 그리고 2000 년대 이주자는 월드컵 시대에 얽매어 산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틀에 스스로를 결박하고 자기 폐쇄의 길을 가기 마련이다. 자연히 현지사회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왕년에 한국에서는…” 을 외치며 늘 과거에 살게 된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공적인 이민은 과거생활 탈피에서 시작된다. 언젠가는 돌아갈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평소 이사 온 사람처럼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공동체의 꿈이나 영향력 따위는 관심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에 뼈를 묻을 사람과 자신은 노후에 귀향(back to Korea/return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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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ration)하더라도 자녀들을 퀘벡 땅에 남겨둘 사람은 반드시 이민 온 사람의 생각과 생활태도를 갖고 살아가야 한다. ‘이민 온 사람의 생각’은 ‘출가(出家)한 자식’같아야 한다. 우리의 모국은 분명코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삶을 보장하고 권리를 보호해 주며 의지할 나라는 캐나다다. 예를 들어서, 어떤 시민권자가 모국 방문중에 혹시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찾아가야 할 곳은 캐나다 대사관이다. 그러므로 태어난 나라와 앞으로 살아갈 나라는 다르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 결혼한 자식이 양쪽 부모를 생각하듯이 ‘대한민국과 캐나다’ 두 나라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모국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출가하여 캐나다의 퀘벡 땅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선택했다. 이 땅에 적응해서 잘 살면서 출가한 자식의 심정으로 모국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또한 ‘이민 온 사람의 생활태도’는 캐나다와 퀘벡 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등 현지사회의 각 분야에서 발생하는 소식에 더 관심을 갖고 사회활동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한국의 차기 대권을 잡느냐 아니냐 보다는 퀘벡사회가 선택했던 Jack Layton 의 사후에 캐나다 정치구도의 변화에 관하여 더 관심갖는 이민자가 되어야 한다. 동포 하나 하나가 현지사회의 각 분야에 관심두고 때로는 직접 참여할 때에 비로소 동포사회가 영향력 큰 민족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고 주류사회(主流社會, main stream)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동포들의 생각과 생활태도를 이민 온 사람의 그것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 동포사회에게 주어진 첫 번째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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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TANK’를 만들자

동포사회에 첫 번째 과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 다음으로 젊은 인재들로 구성된 Think-Tank 를 만드는 것이 두 번째 과제다. Think-Tank 는 참신한 젊은이들이 주도하도록 기성세대가 양해하는 것이 생산적이다. 기성세대의 시각에서는 인생경험이 많이 부족한 젊은 세대에게 큰 일을 맡기는 것이 불안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발전의 원동력은 젊은 세대의 참신한 아이디어와 열정, 그리고 강한 추진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30-40 대 지도자와 20 대 기업총수들이 즐비한 요즘 세상에서 우리 젊은 세대들의 능력을 믿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앞날은 암울해 진다. 한민족의 해외이민 역사가 길어지면서 세대교체 요구가 전세계 각지의 한민족사회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것처럼 퀘벡 한민족사회도 이제는 젊은이들에게 한민족 공동체의 미래를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동포에게 묻자

캐나다 시민권자와 재외한국민(영주권자, 취업비자 소지자, 그리고 유학생과 그 가족) 등 약 7 천여 명으로 구성된 2011 년 퀘벡 주 광역 몬트리올의 한민족 공동체에는 교회와 성당, 사찰 등 20 여 개의 종교단체가 있다. 각 종교단체에 등록된 신자들의 수를 합산해 보면 동포 세 가정중에서 한 가정이 신앙생활을 하며 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중에는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또한 한민족의 신앙활동은 타 민족의 그것보다 훨씬 활발한 것으로 퀘벡사회에 알려져 있다. 따라서 퀘벡 한민족에게 공동체 의식이 없다거나 참여의식이 부족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몬트리올 한인회 등 공동체 내의 비영리 동포단체들을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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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한민족사회의 과제

동포들이 외면하는 이유는 그 단체들이 하는 일에 별로 흥미가 없을뿐더러 자신의 손익과도 무관하기 때문이라고 봄이 더 타당하다. 예를 들어서, 제 7 장에서 언급했듯이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대표단체인 몬트리올 한인회가 봉착한 가장 큰 난관은 ‘동포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리더쉽과 비전의 부재가 이 같은 난관을 만나게 된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 역사자료들을 살펴보면 그 보다는 ‘한인회가 자초한 결과’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동포들이 무엇을 원하고 어디에 관심을 두는 지를 파악하는 것은 동포사회를 이끌어 가는 대표단체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반세기가 흐르도록 몬트리올 한인회는 한인회가 하는 일에 관하여 동포들에게 제대로 물어 본 적이 없다. 배가 고픈지 어디가 아픈지 추운지 더운지 매운지 짠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몇몇 사람들의 의지대로 한인회를 46 년 동안 이끌어 오다 보니 쫒아오던 동포들이 하나 둘 사라졌고 지금은 인구 7 천여 명중 대략 3%만이 한인회의 사업에 관심을 갖고 0.5%(30-40 명)의 고령층 동포가 참여하는 총회에서 동포사회의 미래가 걸린 중요대사를 결정한다. 한인회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이렇게 자초해서 만들어 졌다. 다시 말해서 몬트리올 한인회와 퀘벡 실협 등 동포사회의 주요단체들이 직면한 가장 큰 난관인 ‘무관심’은 동포들에게 물어보면 해결되는 간단한 것이다. 따라서 ‘설문조사’ 즉, 동포들에게 묻는 것이 세 번째 과제다. 설문조사의 목적에 따라서 조사대상 동포의 계층은 여러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동포사회의 단체들이 동포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와 관심사업의 개발을 목적으로 동포계층을 분류하자면 새로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 기반이 잡힌 사람들,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 은퇴한 사람들, 가사에 종사하는 여성들, 노년층, 장년층, 대학생 및 청년층, 초중고 학생 등의 다양한 그룹으로 세분할 수 있다. 다음으로 각 계층별 분포를 파악하고 그룹별로 흥미와 관심이 있는 서비스와 사업에 관한 조사항목을 정한다. 취합된 설문은 적합한 통계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분석하고 건강하고 발전적인 의견들을 수렴한다.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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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Tank 가 설문내용의 선정과 조사, 분석 등 설문조사 전 과정을 기획하고 이끌어 간다. 계층별 의견수렴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각 동포계층의 주요 관심사와 요구사항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민족 공동체 참여를 유발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특히 청소년들과 자주 대화하고 젊은 세대의 의견을 관심사업의 개발에 많이 반영해야 한다. 미래는 그들의 것이고 그들의 참여 없는 민족 구심점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청사진을 만들자

퀘벡 한민족사회의 역사는 반세기를 지나고 있다. 어려운 정착단계를 무사히 넘어서 적응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제 자손대대로 이어질 성숙하고 안정된 미래를 맞이 하기 위하여 30 년 대계를 세워야 할 시점이다. Think-Tank 가 주축되어 퀘벡 한민족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동포 각 계층의 바램을 분석해서 미래 청사진을 개발하는 것이 네번째 과제다.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청사진에는 모국의 해외동포정책과 캐나다 연방정부 및 퀘벡 주정부의 이민정책을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모국 재외동포재단의 글로벌 코리아(global Korea) 프로젝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국경 없는 인터넷상에 국내외 한민족이 통합된 거대한 공간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는 영토확장을 위한 무력전쟁, 국가 경제력 확장을 위한 무역전쟁, 오일전쟁, 그리고 다음으로 예상되는 ‘인력자원 전쟁’에 대비한 미래 지향적인 백년대계라고 평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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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기반조직을 혁신하자

일반적으로 사회기반구조(Infrastructure)란 도로와 상하수도, 전기시설 등의 사회적 기반시설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 장에서 언급하는 사회기반조직이란 정치, 경제, 문화예술, 스포츠, 교육, 복지, 정착 등 동포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여러 분야에서 분야별 중심역할을 하는 소위 ‘기둥조직’을 말한다. 이 기둥조직들을 혁신하는 다섯 번째 과제는 위의 어느 과제보다도 어렵고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철저한 계획이 요구된다. 현재 퀘벡 한민족 공동체의 사회기반은 총체적으로 취약하다. 먼저 경제분야의 기반을 살펴보면, 유태계가 금융과 부동산을 그들의 경제기반으로 삼고 있고 건설업과 요식업이 이탈리아계의 경제 근간인 반면에 한국계의 그것은 소규모 유통 서비스업이다. 1970 년대 중반 페렛의 종업원에서 출발한 동포사회의 경제는 1980 년대에 편의점과 과일야채 판매점, 꽃집, 식당등 소매 유통업과 요식업 분야로 확대, 발전되었고 그것이 1990 년대를 지나면서 퀘벡 한민족사회의 경제기반으로 굳어져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2000 년대 초반부터 대거 유입된 본토 중국인들이 한민족 동포들의 사업장을 매입하면서 유통업 중심의 경제기반이 많이 약화되었다. 이것을 동포업종이 다양, 다각화될 기회라고 말할 수는 있겠으나 강력한 동포경제기반의 시작이라고 보기에는 특별히 부각되는 대체업종이나 중심기업이 없다. 문화예술 분야는, 중국민족사회가 Moon Festival 과 Shen Yun 행사를 내세워 그들의 문화적 기반을 강화하고 일본민족사회가 문화원 전시행사를 통해 자국문화의 우수성과 공동체의 조직력을 홍보해 오고 있는 데 반해서 우리 동포사회에는 대외적으로 내세울 만한 문화예술행사 하나가 없다. 합창단이나 연극공연, 혹은 전시회 정도가 고작인데 그 역시 동포사회의 내부행사일 뿐이다. 따라서 퀘벡 한민족사회의 대외문화활동과 문화예술기반 역시 매우 빈약하다고 말 할 수 있다. 또한 동포단체가 퀘벡 현지사회의 단체들과 공식적으로 함께하는 사회참여활동은 거의 없고 정치기반은 아예 없다. 근래 들어 코윈(KOWIN)이 한국계 상원의원(연아 마틴)과 연결해서 차세대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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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한민족사회의 과제

정치 지망생들의 꿈을 키워주고 있는 정도다. 이렇듯 반세기를 맞은 퀘벡 한민족 동포사회의 사회기반은 전반적으로 빈약하다. 그러나 앞으로 각 사회기반 분야의 중심에서 ‘기둥조직’들이 든든하게 자리잡고 제 역할을 다 한다면 퀘벡 한민족사회의 사회기반은 얼마든지 다시 강화될 수 있다. 현재 퀘벡 한민족 동포사회에 존재하는 각 사회기반 분야별 기둥조직을 꼽는다면 공동체의 대표조직인 ‘몬트리올 한인회’와 경제분야의 ‘퀘벡 실협’, 노년복지 분야의 ‘대한 노년회’ 세 개에 불과하다. 비록 한인회는 3% 미만의 극소수 동포만이 참여하는 명목상의 민족대표 조직이 되었고, 사실상 소규모 자영업종 지원조직인 실협은 하강세이며, 노년회는 60 대 젊은 노년들의 가입회피로 회원감소를 고민하고 있지만 그래도 지난 수십 년을 모진 풍랑 속에 견뎌 온 거대한 배 처럼 퀘벡 동포사회 기반의 버팀목이었다. 조금만 ‘수리’하면 훌륭한 모습으로 다시 굳건하게 설 기둥조직들임에 분명하다. 한인회를 혁신시키는 방법과 동포경제 부흥대책은 제 7 장과 제 8 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 밖에 문화예술과 스포츠, 교육, 종교 등 기타 사회기반 분야에도 튼튼한 기둥조직을 세우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Think-Tank 가 구축하는 미래 청사진 속에는 사회기반 기둥조직들의 신설 및 혁신에 관한 계획도 포함된다. 예를 들면, 민족 공동체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문화교류사업은 동포들이 직접주체가 된 ‘한국 문화원(또는 문화쎈터)’을 설립해서 추진하는 방법이 검토될 수 있다. 또한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상공 회의소’를 설립해서 본국 등 외부의 자금과 인력을 유치하고 현지정부와 함께 지역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방안도 포함될 수 있다. 중국민족사회가 추진하는 이런 공동사업을 한민족사회가 못할 이유는 없다. 특히 상공 회의소의 설립은 시급하다. 몬트리올에 정착해서 4-5 년쯤 공부하며 쉬다가 타주로 떠나는 유능한 새 이민자들을 종종 본다. 이들이 타주로 떠나지 않고 퀘벡 한민족사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제기반을 강화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러나 구시대적 가치관과 불신이 지배하는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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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한민족사회의 과제

몬트리올 동포사회의 여러가지 여건상 외부의 도움없이 동포경제를 자력으로 혁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퀘벡 동포사회의 경제를 신속하게 부흥시킬 수 있는 방법중의 하나는 ‘외부수혈’이다. 한국이나 타주의 한국기업 또는 개인으로부터 자금과 기술, 인력 등의 지원을 받아서 중소기업(또는 대기업 지사)들을 설립하고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970-80 년대의 몬트리올에는 한국의 대기업 지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언어법 제정이후 퀘벡의 모든 회사에서 불어사용이 의무화되었고 FLQ(퀘벡 독립운동 무장단체)의 영국 외교관 납치와 건설장관 암살등 사회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독립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영어권 기업들과 함께 대부분의 한국기업이 타주로 떠난 것을 우리는 뼈 아프게 기억한다. 만일 그 기업들이 몬트리올에 계속 상주했더라면 퀘벡의 동포경제는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그러나 아쉬워한들 그 기업들이 제발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경제분야의 사회기반을 혁신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직접 나서서 지사들을 유치하거나 창업하는 것이다. 다행히 몬트리올은 지식 집약형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고 이들 산업(항공, 차량, 유전, 영화, 게임, IT 등)은 한국의 대기업에게 매우 흥미있는 분야다. 더우기 근래에 오는 독립 이민자들은 이 분야의 경력자들이 많이 있다. 상공 회의소를 중심으로 젊은 두뇌들을 모으고 이 점을 잘 활용한다면 충분히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경제기반이 약한 사회에서는 생계유지가 곤란하다. 퀘벡의 추운 날씨나 불어 사용권, 독립 가능성 등 지역적인 특수성보다 새 이민자를 불안하게 하고 다른 곳으로 떠날 마음을 먹게 하는 것은 ‘가족의 생계문제’다. 제 아무리 몬트리올이 아름다운 도시고 퀘벡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들 가족의 생계가 불안한 곳에 머물 똥 배짱 가진 가장은 없다. 물론 퀘벡 주의 경제는 튼튼하다. 그러나 낯선 땅에 와서 사는 동포들, 특히 새로 온 이민자들에게는 든든한 민족경제기반이 많이 아쉽다. 과거 선배 이민자들이 30 년전에 이룩한 지금의 경제기반이 약하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그냥 있을 수만은 없다. 이제는 상공 회의소를 중심으로 2000 년대에 온 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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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한민족사회의 과제

사람들이 나서서 새롭고 강력한 동포경제기반을 만들고 이끌어 가야 할 때다. 한편, 점차 고사목(枯死木, dead tree)이 되어가고 있는 현재의 몬트리올 한인회는 새로운 대표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감한 수술이 필요하다. 출범이후 46 년의 시간이 흘러 사회환경이 변하고 세대가 바뀌었음에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역할을 고집하고 있는 한인회가 이대로 고사목이 된다면 퀘벡 한민족의 구심점이 없어진다. 그러나 만일 재정과 인력, 기획능력, 언어구사능력, 추진력, 리더쉽 등 모든면에서 부족한 몬트리올 한인회를 연령별로 세 개의 조직(장년회와 청년회 신설)으로 나누고 역할을 분담시키는 처방을 한다면 죽어가는 한 개의 고목기둥이 생기있는 세 개의 새로운 기둥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장년회(50-60 대)가 친목 및 기념행사를 포함한 한민족 정체성 보전사업을 맡고 대표조직인 한인회(30-40 대)가 대외교류사업과 정착지원사업을 담당하며 차세대 육성사업은 청년회(30 대 이하)가 추진하는 방안이 노령화(老齡化)와 공동화(空洞化)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한인회를 살리기 위한 현실적인 처방일 수 있다. 사무처는 한인회관(또는 한민족회관)에 속한 별도의 행정조직으로 독립해서 한글 도서관 운영과 교육사업(한글학교, 불어학교, 문화강좌 등), 그리고 회관의 관리업무를 담당하고 한인회, 노년회, 장년회, 청년회 등 각 세대별 중심조직의 사무행정 업무를 지원하며 활동공간을 제공한다. 한인회장, 노년회장, 장년회장, 청년회장, 그리고 사무총장이 참여하는 회관운영 위원회를 발족시킨다면 더 효과적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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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한민족사회의 미래 전망 제19장


퀘벡 한민족사회의 미래 전망

제 19 장 퀘벡 한민족사회의 미래 전망

앞으로 20 년 후 또는 50 년 후에 퀘벡 한민족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2010 년대의 우리 공동체가 안고 있는 과제들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와 반대로 그것들을 공감하고 합심해서 해결해 나갈 경우에 대한 예측은 가능하다. 특히 민족경제 기반의 강화, 즉 한민족 동포들의 생계문제에 대한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해법이 강구되지 않을 경우에는 해가 거듭될수록 퀘벡 땅에 들어 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사람이 점점 더 많게 될 수 있다. <표 4-6>에 나타난 한인 유출율(42%)과 2000 년 이후 평균 CSQ 발급 수(2001-2008 년 사이 연 평균 334 명)를 근거로 해서 2020 년의 몬트리올 한민족 거주자 수를 전망하면 약 4 천 8 백명 선이다. 이는 2011 년 현재의 5 천 7 백여 명에서 15%가 줄어든 것이다. 더군다나 모국에서 해외이민 수요가 완전히 사라지고 반대로 역이민이 증가하는 최악의 경우에는 4 천명 이하로의 급감도 예상할 수 있다. 이때가 되면 주변에서 새로 이민 왔다는 사람은 찾아 보기가 어렵게 되고 교회에서는 떠난 사람의 빈 자리를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이같은 와중에 민족 구심점 몬트리올 한인회는 젊은 세대의 불참이 지속되면서 회원의 노령화와 공동화(空洞化)가 가속되어 결국은 고사목(枯死木, dead tree)이 된다. 현실을 잊은 사람들이 쌓는 울타리는 점점 높아만 가고 그 속에서 한민족 동포사회는 정체와 퇴보를 지속한다. 지금보다 한층 더 중국인 취급을 받게 될 것이고 동포들은 점차 한민족의 존재와 정체성을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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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한민족사회의 미래 전망

중국민족사회에 흡수된다. 높은 시나리오다.

비관적이지만 이대로라면 꽤 가능성

반면에 동포들이 과제에 공감하고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경우에 후세들의 미래는 밝다. 상공 회의소를 중심으로 동포사회의 경제기반이 강화되면 중소기업 경영의 꿈을 가진 새 이민자들이 유입된다. 이에 따라 전문직에 종사하는 동포들이 늘어나서 지식 집약적인 직업구조로 바뀌고 동포들이 경영하는 자영업종도 더욱 다양화되고 다각화된다. 떠나는 사람은 당연히 줄어들고 반대로 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생활비와 주거비가 저렴한 퀘벡으로 이주해 온다. 이에 따라 10 년 후에 유학생을 포함한 퀘벡 한민족사회의 인구가 드디어 1 만명 선을 돌파한다. 물론 동포들의 소득과 복지수준도 꾸준히 향상된다. 한편 동포들의 의견을 묻고 그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인회에는 젊은 세대의 참여가 늘어난다. 회관에는 노년과 장년,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한민족사회의 중요대사를 논의하고 한글 도서관에는 청소년들이 가득하다. 선배들의 지도로 2 세와 3 세 후배들이 육성되고 퀘벡사회의 중요한 위치에 진출해서 능력을 높이 평가를 받고 한민족사회를 이끌어 간다. 내부 과제들을 해결해 가는 동시에 밖으로는 문화교류와 공익사업, 정치참여 등 대외활동을 꾸준하게 전개함에 따라 퀘벡사회 내에서 우리 민족 공동체의 위상이 서서히 높아지고 영향력이 커진다. 20-30 년후! 지금의 1.5 세와 2 세들이 장년이 되고 동포사회의 주역이 될 즈음 마침내 꿈이 이루어 진다. -끝-

모든 계획에는 항상 꿈이 있다 그 꿈이 지속될 수 있다면 언젠가는 현실이 된다 - 쟝 모네(Jean Monnet:1888-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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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한인 이주사 부록 부록1~6


부록

부록

MY FRIENDS, LOVE IS BETTER THAN ANGER. HOPE IS BETTER THAN FEAR. OPTIMISM IS BETTER THAN DESPAIR.

SO LET US BE LOVING, HOPEFUL AND OPTIMISTIC. AND WE’LL CHANGE THE WORLD.

-Jack Layton(1950-2011), former NDP l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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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부록 1. 퀘벡 한인 이주사 편찬위원회의 구성

편찬위원회의 조직과 역할

퀘벡 한인 이주사 편찬위원회는 몬트리올 동포사회의 19 개 단체(단체장/일반편찬위원)와 14 명의 실무편찬위원으로 구성된 독립기구다. 일반편찬위원은 각 단체들의 설립이래 현재까지 활동자료들을 조사하고 수집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실무편찬위원은 일반편찬위원들이 수집한 자료들을 취합해서 기초자료로 활용하고 인터뷰 등 추가자료를 확보해서 각자가 담당한 분야(Chapter)를 책임지고 서술한다. 실무편찬위원은 편찬위원장이 위촉한다. 집행부는 실무편찬위원들이 서술한 자료를 교정과 편집하고 서론과 편집후기, 제 4 부, 부록 등을 작성해서 이주사의 형태를 갖추며, 출판사를 섭외하고 출판재정을 관리하는 등 편집, 인쇄, 배포활동에 관한 제반업무를 수행한다. 집행부는 위원장, 부위원장, 총무, 재무, 섭외 등 5 인 위원으로 구성하며 실무편찬위원중에서 편찬위원장이 위촉한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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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퀘벡 한인 이주사 편찬위원회 편찬위원 명단

1. 일반편찬위원 (19 개 동포단체): 몬트리올 한인회, 대한 노년회, 퀘벡 한인 실업인 협회, 6.25 참전 동지회, 칠성회, 평통 몬트리올 지부, 세계한인 여성 네트워크, 이북 5 도민 연합회, 골프회, 미술협회, 문학협회, 민속 무용협회, 여성 합창단, 교회 협의회, 한인 성당, 선교 합창단, 코리안 뉴스위크, 한카타임즈, VOKO Radio (무순)

2.실무편찬위원 (14 명): 김동천, 김민식, 김영권, 박희균, 손지혜, 신영대, 이강중, 임성숙, 임승덕, 장영용, 전기병, 정기채, 정희수, 홍승남

3. 집행부 (5 명): 편찬 위원장 정희수, 부위원장 김영권, 총무위원 박희균, 재무위원 손지혜, 섭외위원 김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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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부록 2. 제 1 대 편찬 위원장 발간사

무릇 인간이 모여 사는 곳이면 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어느 한 시대의 사회상이나 문화정도를 기록해 놓은 것이 한 시대의 역사요 사회상을 현출해 내는 수단으로 되어왔기 때문이다. 광활한 북미주 한 모퉁이에 한국이민들이 닻을 내리고 정착하기 시작한지도 어언 20 여 년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이민 한 세대를 30 년으로 잡을 수 있다면 우리 이민사회에도 일 세대로부터 2 세대로 넘어가는 중간단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20 여 년 이라는 연륜 속에서도 나이테만 늘어났을 뿐 외롭고 괴로웠던 초창기 이민의 실상이나 어려움을 가늠할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구축해 오고 우리들의 땀과 노력에 의해 이룩되어지고 있는 퀘벡 주의 한인 이주사를 엮을 필요성이 고조되어 가고 있던 차에 다행히도 연방정부의 재정지원을 얻어 이 같은 기록을 집대성하게 된데 대해 관계기관에 깊은 사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소책자를 펴냄에 있어 설문과 인터뷰에 바쁜 시간을 할애해 주신 동포 여러분께 지상을 통해 거듭 감사를 드린다. 퀘벡주 한인 이주사가 엮어지기까지는 여러 사람들의 헌신적인 협조와 노력이 한데 뭉뚱그려져 결실된 것임을 지적하고 싶으며 기획에서 조사, 집필, 편집에 이르는 과정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다만 이 이주사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완벽한 내용을 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사과 드리며 앞으로 추고를 통해 내용을 보완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도한 새로운 자료 발굴에 계속 노력한다면 보다 충실한 내용으로 살쪄 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작은 결실이 관계기관이나 학계 또는 일반 이용자들에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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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이르기까지 보다 유용하게 활용 될 것을 기대하면서 발간사를 대신한다.

1978 년 9 월 몬트리얼 한인회 11 대 회장 박동열

주) 위의 발간사는 제 1 대 편찬위원회가 작성한 이주 20 년사 초고중에서 발췌한 것임.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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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부록 3. 제 2 대 편찬 위원장 발간 준비의 변

한(韓)민족의 Exodus! 한민족의 대 이동이다. 한국 역사 이래 이와 같은 민족 대이동은 근세에 들어와 유발된 역사적인 유인(誘因)과 내재적인 유인들로 인해 촉발된 것 으로 분석 된다. 본국 인구의 8 분의 1 이 넘는 재외동포를 헤아리게 되었다는 것은 미래에 있어 경쟁력으로 발돋움하여 국가 발전에도 지렛대 역활을 감당 할 수 있는 역량으로 성장해 갈수 있기에 매우 값진 국가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새로운 터전으로의 이주 ! 인간은 태생이래 욕구의 하나이기도 한 보다 나은 환경과 땅으로의 발돋움은 현세에 이르러 더욱 박차를 가 하게 되였다. Toronto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노 삼열 박사는 “이민은 모국에서 수 세대에 걸쳐 자연스럽게 살아 온 사회적 자원(Social Resources)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자녀의 성장에 막대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모든 사회적 끈을 잘라 버리고 아무런 Network 가 없는 새 환경에 데려다 떨어트려 놓는 것“이라고 정의 했다. 이와 같이 낯설고 물 설은 타국으로의 근대 이전의 이주는 통계의 부재로 확인 할 길이 없으나 근세에 들어 와 1863 년 Russia 령 “포시에트”항으로 농민 13 세대가 떠난 것이 첫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미국과 멕시코에서 1 세기가 넘는 한인 이주 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Canada 특히 Quebec 주의 이민은 50 여년 안팎으로 추단 할 수 있을 뿐이다. 1863 년 이래 142 년 만에 전 세계 176 개국으로 퍼져 나간 한민족은 7 백 50 만 명에 달해 남. 북한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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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인구의 10% 정도가 외국에서 뿌리 내리고 살고 있다는 사실은 장차 민족적 내지는 국가 자산으로 활용 될 수 있는 잠재력이 거대한 것임을 예시 해 주고 있다. 해외 이주는 Zero Game 이다. 기득권이나 사회적 배경, 또는 개개인의 경력 까지도 잊혀진 상태에서 다시 처음(Zero)부터 시작해야 하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변화에는 상응하는 고통과 저항이 따르게 마련이다. 19 세기 말이나 8.15 해방 이전의 이민은 자의적이라기보다 국가 정세와 국운에 떠밀려 어쩔 수없이 떠나야 했던 한 시대가 낳은 부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60 년대 이후의 해외이주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자발적인 의사 결정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점이 다르다. 현대적 의미의 해외이주는 첫째, 더 좋은 삶의 질을 추구하며 넓은 세계로 나가 살아 보겠다는 기본 욕구의 발로에서 시작 되였다는 점. 둘째, 정치적인 소신을 굽히기 싫은 사람들이 조국을 버리는 심정으로 떠나는 경우. 셋째, 2 세에게 보다 낳은 교육의 기회를 주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교육 환경을 개선해 보겠다는 당찬 이유로 떠나는 사람. 넷째, 잘 살아 보겠다는 경제 여건 향상을 위해 떠나는 이주 등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 결정 되는 것으로 분석 된다. 가난에 떠밀려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섰던 만주나 연해주 이주민 과는 또 다른 의미의 해외이주, 특히 해외이주의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는 훈련되지 않은 40 대의 이민은 상이한 문화적인 충격이나 사회적 관습, 그리고 현지언어 구사능력 등 많은 제약요인이라는 걸림돌이 가로 놓여 있어 이 같은 난제들을 소화해 내고 어떻게 적응 해 가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려 진다. 사회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사회에서 후발주자로서 뛰어 들어 정착하는 일에 어찌 난관이 없겠는가? 해외이주란 험난한 길이 예견되는 삶이다. 모든 면에 있어 질서가 잡혀있는 사회의 틈을 비집고 파고들어 새로운 삶을 일구어 나가야 하는 과정에서 부수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감수해야 함은 후발주자로서 당연히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라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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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식물 가운데 옮겨심기에 제일 어려움을 겪는 수종(樹種)의 하나가 재래종 한국 소나무이다. 30 년 내지 40 년 생 소나무를 이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 년쯤 전부터 뿌리 부분의 땅을 직경 1 미터 정도 넓이로 파고 잔뿌리부터 잘라 내야하며 그 주위를 새끼나 마대로 감아 주어 새로운 뿌리가 내릴 수 있도록 돌보아 줘야 한다. 그런 다음 두 번째 해에는 밑둥의 큰 뿌리를 차단해 줌으로서 그 뿌리의 흡입력 없이도 살아남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보완 작업을 해 주는 것이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와 같은 준비과정을 거쳐야 비로서 목적한 장소로 옮겨 심을 수 있게 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고사목으로 변해 옮겨 심는 일이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하물며 30 대 후반부터 40 대 초반의 이민층을 고려할 때 어찌 소나무를 옮겨 심는 일 보다 수월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나라에 정착하던 이민생활에는 유형무형의 사회적인 압력과 난제들이 산적해 있게 마련이다. 주거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자녀들의 학교문제, 일자리 구하는 일, 주위 환경적응 문제 등 살아남기 위한 전면전을 펼쳐 나갈 수밖에 없는 필연의 난제들로 힘겨운 기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주 후 최초로 부딪히는 현지언어의 문제는 무엇보다 우선해서 해결해야 하는 중대과제다 상이한 사회적 관습이나 관행,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충격과 유색인으로 겪어야 하는 인종차별 등을 최소화하고 흡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부디치게 되는 현지사회의 실정과 실상들이 자신의 주관과 상당한 괴리현상을 들어 낼 때 겪어야 하는 정서적인 충격은 자칫 이주의 꿈을 좌절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민생활은 단절로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패러다임 (Paradigm)을 찾아 나서는 험난한 길임을 자각하고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으면 실의에 빠지게 되고 극단적인 행동까지도 서슴치 않게 하는 생활이다. 배전의 땀과 노력을 기우려야 하며 부단한 열정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노력과 성실하게 쌓아 올리는 일상생활을 통해 삶에 대한 Know how 가 축적 될 때 동포사회가 활력을 찾게 되고 현지사회에서 인정받게 되는 성공적인 이민생활이 약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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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이민선배들이 흘려야만 했던 땀과 노력의 발자취를 더듬어 50 년의 세월을 재정립해 가는 진정한 의미가 있다. 한민족 세계 이주사 속의 카나다 이민, 특히 Quebec 주 라는 우리들 생활 근거지인 이곳의 이주 실상을 기록으로 남길 필요성이 제기 된지 오래이나 이번에 주 몬트리올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제안으로 역사적 순간이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이주사 출판자금을 지원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이수택 총영사님께 감사드린다.

2005 년 개천절을 맞아 준비하다.

퀘벡 한인 이주사 편찬위원회 돌샘 이 희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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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4. 퀘벡 한민족 사회 역대 주요 3 단체장

초대 노년회장 장윤천

9 대 노년회장 김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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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 노년회장 방용성

8 대 노년회장 조상훈

10 대 노년회장 이창규

13 대 노년회장 조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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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5 대 노년회장 전관병

16 대 노년회장 유봉성

17 대 노년회장 정희수

18 대 노년회장 이영민

5 대 한인회장 오기송

10 대 한인회장 윤세중

16 대 한인회장 최계수

17 대 한인회장 유동훈

19 대 한인회장 서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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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대 한인회장 조한주

23 대 한인회장 김재홍

24 대 한인회장 김덕휘

25 대 한인회장 이채화

26 대 한인회장 염동준

27 대 한인회장 노재일

28 대 한인회장 이춘홍

5 대 실협회장 김강기

10 대 실협회장 김웅식

12 대 실협회장 김수용

16 대 실협회장 이재욱

17 대 실협회장 유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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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부록 5. 이주사 편찬사업 참고사항

이민 공동체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특히 한민족 동포사회의 이주사를 편찬하는 일은 더욱 그렇다. 퀘벡 동포사회의 이주사도 그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시작한지 33 년만에야 출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타 지역의 동포역사 편찬사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당 편찬위원회의 경험담을 여기에 남긴다.

자주성 유지의 어려움

이주사 편찬작업의 난관은 편찬위원회를 조직할 때부터 시작된다. 편찬위원은 각 단체의 장을 포함해서 한인회, 노년회, 실협, 언론, 문학, 스포츠, 교육 등 각 분야에서 동포사회를 위해 봉사한 경험이 많은 인사들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 편찬위원회의 구성원 명단을 발표하면 위촉된 특정 편찬위원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자신은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위원이 되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불만들은 무시하는 것이 좋다.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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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사 편찬위원회는 동포사회의 대표단체인 한인회의 산하조직으로 구성되어 활동하는 것이 이론상 이상적이다. 그러나 이주사 편찬사업은 몇 년에 걸친 대작업이다. 편찬사업을 추진하는 도중에 편찬사업 자체나 편찬위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신임 한인회장이 취임하면 편찬작업이 중단되거나 편찬위원회가 아예 해체되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따라서 이주사 편찬사업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서는 동포사회의 어떤 단체와도 무관한 독립적인 위치와 확실한 위상을 갖춘 편찬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료 수집의 난관

동포사회의 역사를 편찬하는 대사업에 대부분의 동포들은 매우 잘 협조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집단도 있고 발 벗고 나서서 방해하는 세력도 있을 수 있다. 그들이 편찬사업을 방해하는 방법은 매우 치졸하다.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개인이나 업소, 또는 단체들이 편찬사업에 협조하지 않도록 직간접적인 압력을 가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방법이다. 이 경우 편찬위원회는 큰 곤란을 겪고 편찬일정에도 큰 차질을 가져온다. 다른 방법은 편찬위원회를 직접 압박하는 것이다. 편찬용 기초자료의 협조를 거부함은 물론이고 편찬위원회가 임의로 서술할 경우에는 법적인 조치를 하겠다는 협박성 편지를 보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동포사회에 이미 공개 또는 발간된 자신들에 관한 자료들을 토대로 서술하거나 편집하는 것도 역시 용인하지 않는다. 이들이 편찬사업을 방해하는 동기는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시기와 질투다. 다음으로는 자신들에 관한 기록을 자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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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에 맞게 잘 써 달라는 것이고, 평소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편찬위원이 됐다는 불만도 중요사유에 포함된다.

이주사의 내용에 대한 압력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은 이주사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이주사 는 두 가지 방법으로 서술해 나갈 수 있다. 동포사회에서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술해 가는 방법과 주요 동포단체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는 방법이 그것이다. 개인의 성공담이 중심이 될 경우에는 성공한 이들의 지혜와 경험이 타 동포들에게 좋은 정보와 귀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누구의 성공담을 기록하느냐’ 와 ‘이민생활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란을 발생시킨다. 이에 반해서 주요 교민단체를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면 이런 논란에 휘말리지 않는다. 현지사회에서 이민 공동체를 평가할 때 몇몇 개인의 성공보다는 공동체의 활동내용을 더 중요하게 본다는 것도 이 방법을 택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이주사 편찬위원회가 구성되면 여기저기에서 연락이 들어온다. 이주사를 자신의 이야기 중심으로 서술하라는 압력성 청탁이다. 물론 거절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편찬위원들은 많은 곤욕을 치른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르신의 훌륭한 성공담을 자서전으로 내세요” 라고 부드럽게 권해야 한다. 이외에도 이주사의 내용에 관하여 타 편찬위원회에게 권고할 것이 있다. 그것은 ‘기록’과 함께 ‘정보’도 이주사에 담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역사서에는 지나간 과거의 기록들만을 담는다. 그러나 이민사회의 발전사인 이주사에는 미래의 동포사회 발전에 도움될 수 있는 현 시대의 정보도 함께 수록하는 것이 후세들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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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예산과 인력의 부족

출판예산은 충분하게 잡아야 한다. 이주사의 양이 예상보다 많을 수 있고 일정이 길어질 수도 있으며 인쇄부수에도 변동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금운동은 가급적이면 피하는 것이 좋다. 모금에 기여한 사람들이 이주사 편찬사업에 간섭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지정부나 모국의 재외동포재단, 혹은 기타 공익단체에 예산지원을 의뢰할 수 있고 편찬위가 자체 조달(광고게재, 바자회, 옥션 등)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도 있다. 하여튼 독립적인 위치에서 편찬사업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수십 개월 동안 편찬실무에 종사할 의지가 확실한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 아무리 충분한 예산이 확보되었어도 허울뿐인 조직이라면 와해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어떠한 외풍이나 난관에도 견디면서 출판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강한 책임감과 후세에 대한 의무감을 갖춘 인력을 확보해야만 편찬사업이 성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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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6. 퀘벡한인 이주사 편찬 참고자료 목록

1. 몬트리올 한인 일력 (장윤천) 2. 몬트리올 교민 편람 (장윤천) 3. 퀘벡 한인 이주 20년사 초고(박동열) 4. 퀘벡 이민생활에 필요한 정보(정희수/임성숙) 5. 카나다 이민정책과 절차(오타와 한인회) 6. 카나다의 한인 이민사 목차 7. 몬트리올 한인성당 발전사 (한인성당) 8. 교민 체육대회 (임승덕) 9. 몬트리올 한인 골프회 (임승덕) 10. 퀘벡 한인 축구협회 (임승덕) 퀘벡 한인 이주 50 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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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몬트리올 바둑회 (임승덕) 12. 몬트리올 여성 합창단 13. VOKO 14. 교회사 (김대영) 15. 몬트리올 한인 연합교회사 (이희재) 16. 퀘벡 한인 미술협회 17. 몬트리올 외항 선교회 18. 몬트리올 대한 노년회 19. 몬트리올 문학회 20. 매길대 한국학 21. 세계 한민족 네트워크 22. 몬트리올 한인학교 무용단 23. 몬트리올 한국민속 무용협회 24. 불교 법우회 25. 퀘벡 한인 이주사 발간 준비의 변 26. 퀘벡 실업인 협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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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7. 퀘벡 한인 이주사 불어판 (요약)

50-années de l’histoire d’immigration des coréens au Québec

L’Introduction

La rédaction de l’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vise à trois objectifs. Le premier est de léguer aux futures générations des gens d’origine coréenne la sagesse de vivre au Québec.

Le second objectif est de

sensibiliser le peuple québécois aux efforts de la communauté coréenne de s’intégrer et de contribuer au développement économique, social et culturel de la société québécoise. Enfin, le troisième objectif est de donner des renseignements utiles aux immigrants d’origine coréenne qui veulent venir s’établir au Québec. Il y a grosso modo deux façons d’aborder l’histoire d’immigration. On peut d’abord écrire les histoires des individus qui auraient réussi au Québec sue le plan professionnel. Ou encore on peut concentrer sur les activités des divers organismes à l’intérieur de la communauté. Nous avons choisi la seconde approche, car la vitalité et le progrès de la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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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7. 퀘벡 한인 이주사 불어판 (요약)

communauté dépendent avant tout de l’effort de divers organismes qui représentent l’intérêt collectif. L’ouvrage se compose de quatre parties. La première présente le Canada, le Québec et la ville de Montréal, alors que la deuxième explique le processus de la formation et l’organisation de l’Association coréenne de Grand Montréal (ACGM). La troisième partie qui est la partie la plus longue s’intéresse aux diverses activités des membres de la communauté et au rôle qu’ont joué les organismes. Enfin, la quatrième partie offre une synthèse de l’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et démontre des leçons qu’on peut en tirer; elle discute aussi les perspectives d’avenir de la communauté. Nous remercions le gouvernement coréen qui a eu la bonté de financer une partie des coûts, le consul général de la Corée à Montréal pour son aide technique et morale et Monsieur le Maire de la Ville de Montréal pour son message d’encouragement et la coopération de la ville de Montré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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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7. 퀘벡 한인 이주사 불어판 (요약)

La Première Partie: Pourquoi Canada, Québec et Montréal?

Cette partie comporte trois chapitres. Au Chapitre 1, on analyse les caractéristiques du Canada qui favorisent l’immigration. Pour bien des immigrants d’origine coréenne, le Canada est un pays qui offre des opportunités illimitées sur le plan économique, sur le plan d’éducation et sur bien d’autres plans. Le canada est un pays qui assure une haute qualité de vie. Le Canada offre l’environnement naturel d’une beauté et de grands potentiels, le régime de bien-être socioéconomique équitable, la protection des droits de l’homme mise en application réelle, l’absence relative des crimes et beaucoup d’autres éléments de la qualité de vie. De plus, le canada est un pays de l’avenir. La population va continuer à augmenter; la grande partie de ses ressources naturelles est à peine touchée; il commande un grand respect du monde entier; il se dote d’une population généreuse, compétente et travaillante; il est une société équitable.

Au Chapitre 2, on explique l’attrait du Québec. Le Canada français que représente le Québec est le fondateur du Canada. Avec l’Ontario, le Québec forme le centre de gravité économique du Canada. Le Québec est une collectivité qui a accompli la Révolution tranquille et le miracle économique durant la période 1960-1990. Les immigrants d’origine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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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7. 퀘벡 한인 이주사 불어판 (요약)

coréenne apprécient le dynamisme du Québec. Le Québec attache une très grande importance à l’immigration non seulement pour des raisons économiques mais aussi pour ders raisons politiques. Le Québec a tenté de se donner souveraineté-association. Cette tentative du Québec représente son désir de s’affirmer davantage au sein du Canada. Enfin le Québec est une région qui a envoyé le Van Doo (Royal 22e Régiment) lors de la Guerre de Corée. La Corée est toujours reconnaissante envers le Québec.

Au Chapitre 3, on discute les avantages qu’offre Montréal aux immigrants. D’abord, Montréal est un Paris en Amérique du Nord et offre un environnement socioculturel euro-américain qu’on ne peut trouver nulle part ailleurs. Montréal se dote de quatre grandes universités et une série de CEGEP qui permettent des opportunités infinies d’éducation. Le coût de vie est le plus bas parmi les grandes villes nordaméricaines. Surtout le coût de logement propriétaire est à peine moitié de celui qu’on trouve à Vancouver. Montréal est le centre mondial de l’industrie aérospatiale, de l’industrie pharmaceutique, de l’industrie biotechnique, de l’industrie d’animation et d’autres industries de haute technologie. Tout ceci signifie des opportunités d’emplois bien rémunérés. Enfin, Montréal est une ville des immigrants qui comptent pour le quart de la population de la ville. À Montréal, les immigrants peuvent conserver leurs identités ethniques et, en même temps, développer une nouvelle identité basée sur l’inter-culturalisme.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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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7. 퀘벡 한인 이주사 불어판 (요약)

La Deuxième Partie : La formation et l’organisation de la Communauté coréenne

La deuxième partie comporte également trois chapitres et retrace le processus de la formation de la communauté coréenne à Montréal.

Au Chapitre 4, on explique les vagues des immigrants d’origine coréenne depuis les années 1960. La personne qui est arrivée premier au Québec est Professeur Joseph H. Chung qui est venu en 1954 à Québec pour étudier à la Faculté des sciences sociales de l’Université Laval sous la direction du Père George Henri Levesque. Depuis, un petit nombre de Coréens est venu à Montréal pour travailler comme médecin, ingénieurs et employés des compagnies. Depuis les années 1970, grâce à la modification de la loi canadienne d’immigration permettant l’entrée des gens non-Européens, il y a eu trois vagues des immigrants d’origine coréenne : les immigrants d’employés, ceux d’homme d’affaires, et ceux des professionnels. La population de Québécois et de Québécoises d’origine coréenne est d’environ 7,000 personnes en 2010. Il importe de noter qu’environ 20,000 Coréens et Coréennes seraient venus au Québec. Cependant, 13,000 auraient quitté le Québec. Bref, le taux de rétention est très bas.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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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iqu’il en soit, il est à espérer que d’ici 2015, la population d’origine coréenne atteindra au moins 10,000.

Le Chapitre 5 discute la difficulté typique de l’intégration des immigrants quelle que soit l’origine ethnique. Ces difficultés varient en fonction de stade de l’évolution de la communauté. D’une manière générale, le processus de l’évolution d’une communauté d’immigrants comporte les stades suivants : le stade de l’établissement, le stade de l’adaptation, le stade de la stabilité et enfin le stade de l’intégration. Le stade de l’établissement se caractérise par la recherche de logement, l’inscription scolaire des enfants, l’obtention de toute sorte de permis et surtout la recherche d’emploi ou des affaires. Ce stade est le plus difficile, car, dans bien des cas, surtout le cas des immigrants venants de pays non-francophones, la barrière linguistique est très élevée. Les nouveaux arrivés ne sont pas au courant des lois, des coutumes et des règles de comportement des Québécois. Ils ne sont pas capables de profiter des renseignements utiles pour l’établissement non seulement à cause de la barrière de langue mais aussi d’une certaine méfiance envers le gouvernement. Ce stade peut durer deux ou trois décades. Ce dont ont besoin les immigrants sont des services d’aide pour l’établissement. Le deuxième stade est celui où les enfants auraient terminé leurs études et commencent d’avoir un emploi. Les parents de la première génération ne savent pas se débrouiller en français; ils ne sont pas sensibilisés au système de valeur des Québécois. Ils s’attachent farouchement au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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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tème de valeur de leur pays d’origine. C’est à ce stade où le conflit intergénérationnel s’intensifie. Ce stade peut durer quelques décades durant lesquelles les gens de première génération rendent difficile l’adaptation de la communauté à la société québécoise. Le troisième stade est celui de stabilité. À ce stade-ci, les gens de la 1.5e génération (les gens qui sont arrivés avec leur parent) et ceux de la deuxième génération commencent à avoir leurs propres enfants. On n’a plus de barrière de langue; on est très bien au courant du système de valeur des Québécois; on est à l’aise dans le milieu socioculturel du Québec. Les gens de ce stade n’ont pas besoin d’aide de la part de la communauté. Ce dont ont besoin les gens sont leurs participations aux activités interculturelles. Le quatrième stade est celui de l’intégration et il y aura des médecins, des avocats, des comptables, des ingénieurs, des artistes, des politiciens et des hommes d’affaires importants. Bref, ce stade est celui où les immigrants ne les sont plus; ils seront devenus

Québécois et

Québécoises à part entière.

Le Chapitre 6 explique la formation de l’ACGM et son évolution. Le but de l’Association est d’aider les immigrants coréens. Le stade de l’évolution de l’Association se classifie en périodes suivantes : la période de fondation (1965-1975), la période de démarrage (1976-1978), la période de croissance (1979-2004) et enfin la période de nouveau défi (2005-). L’Association est un organisme qui représente tous les gens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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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igine coréenne qui ont au moins le statut d’immigrant reçu. Le président, les deux vice-présidents et une partie des membres du Conseil d’Administration sont élus pour deux ans à l’Assemblée annuelle. Le président actuel est le 29e président. La période de nouveau défi correspond au stade de l’adaptation et, par conséquent, les membres de la Communauté ont besoin de l’aide soutenue de la part de l’Association.

La Troisième Partie : Les Activités de membres de la Communauté et les rôles des organismes

Cette partie se compose de chapitres suivants : les activités de l’ACGM (Chapitre 7), la vie économique (Chapitre 8), la vie d’éducation (Chapitre 9), la vie des personnes âgées (Chapitre 10), la vie religieuse (Chapitre 11), la vie d’arts (Chapitre 12), la vie sportive (Chapitre 13), la vie de média (chapitre 14), la vie de fraternité (Chapitre 15), les activités des représentants du gouvernement de la Corée (Chapitre 16).

Le Chapitre 7 explique les activités de l’ACGM qui peuvent se regrouper sous les types suivants : les activités ayant pour but de conserver les traditions coréennes, les activités « fixes », les activités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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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7. 퀘벡 한인 이주사 불어판 (요약)

d’aide d’établissement, les activités d’aide pour la sensibilisation à la société québécoise, les activités de la sensibilisation du peuple québécois à la culture coréenne. Les activités pour la conservation des traditions coréennes comprennent d’activités artistiques telles que les danses et la musique traditionnelle ainsi que les cérémonies dont la parade impériales. Ces activités permettent aux immigrants d’origine coréenne de soutenir leur identité d’origine coréenne. Les activités d’aide pour l’établissement a pour objectif d’aider les nouveaux arrivés pour leur logement, l’inscription scolaire des enfants, l’obtention du permis de conduire, celle de la carte d’assurance maladie et d’autres choses nécessaires. Le gouvernement offre des services d’aide, mais la barrière de langue les empêche d’en profiter convenablement. Les activités fixes comprennent la Journée de la lutte contre l’agression japonaise en 1910 (le 1er Mars), la journée de la libération de la Corée de 35 ans du colonialisme du Japon (le 15 Août), la Journée de la commémoration de la Guerre de Corée (le 25 Juin). Les activités de la sensibilisation du peuple québécois à la culture coréenne a pour objectif d’inviter les Québécois et les Québécoises à mieux connaître les Coréens et les Coréennes. Ces activités sont par ailleurs encouragées par la politique

québécoise

d’inter-culturalisme.

Les

activités

de

la

sensibilisation des immigrants coréens aux faits québécois a pour but de faciliter l’Intégration des coréens à la société québécoise. L’Association a organisé une longue série de séminaires, des conférences et des discussions sur le Québec et sur le peuple québécois souvent en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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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aboration avec le Ministère de l’Immigration et de communautés culturelles (MICC) qui offre plusieurs programmes dont celui de PARCI.

Le Chapitre 8 porte sur la vie économique des immigrants d’origine coréenne. Le chapitre commence avec les expériences d’adaptation économique des autres communautés culturelles dont les Japonais, les Chinois, les Vietnamiens, les Italiens. Les expériences de la communauté coréenne démontrent le processus suivant de l’intégration économique. Le début de l’intégration économique des immigrants coréens était le travail comme gérant de dépanneur “Perette” dans les années 1960 et 1970. Ensuite, après avoir accumulé les expériences gestionnaires de dépanneurs et le capital nécessaire, ils ont commencé l’achat des dépanneurs. Ceci a permis les immigrants qui sont arrivés plus tard avec l’argent d’acheter facilement les dépanneurs. Si bien qu’en 1990, plus de 80% des ménages coréens à Montréal étaient propriétaires de dépanneur. Depuis ce temps, la structure d’emploi a changé quelque peu. Surtout les femmes ont réussi à trouver des emplois professionnels tels que professeurs, comptables, dentistes et d’autres professions. On constate l’accroissement du nombre d’autres types d’entreprises tels que restaurants, buanderies, fleuristes et d’autres entreprises de vente de détail. Mais la grande majorité des ménages mènent les dépanneurs.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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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7. 퀘벡 한인 이주사 불어판 (요약)

Les entreprises chez les Coréens sont des entreprises familiales et chaque membre de la famille remplit des fonctions bien définies. Le père s’occupe d’achat des marchandises et la gestion des ressources humaines; la mère s’occupe de la caisse; les grands parents s’occupent des jeunes enfants; les enfants aident, après leur école, leurs parents pour la gestion de l’entreprise. L’entreprise est en général entreprise conjointe du père et de la mère. La grande difficulté est la barrière de langue, le manque de renseignements sur les lois et la culture d’affaires au Québec et le manque de capital. Il est difficile d’avoir le crédit bancaire. Cependant, dans la majorité de cas, les Coréens ont réussi à solutionner les problèmes de survie économique, de l’éducation des enfants; ils ont réussi à mener une vie relativement tranquille de retraité. L’une des conséquences d’une signification majeure est le changement de statut familial des femmes. Grâce à leur participation totale dans l’entreprise familiale, la position des femmes coréennes et dans la communauté s’est améliorée énormément et ceci a pour résultat de faciliter l’intégration de la communauté à la société québécoise. L’organisme qui représente les entreprises coréennes est l’Association des Hommes d’Affaires Coréens du Québec. Les principales tâches de l’organisme est la promotion de la fraternité des membres, de l’achat des marchandises à rabais et la représentation des intérêts collectifs des membres. L’organisme est une entité sans but lucratif et géré par un président, un ou deux vice-présidents et un conseil d’administration élus lors de l’Assemblée générale annuelle. Le président actuel est le 18e président.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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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chapitre 9, on présente la vie d’éducation des membres. Les problèmes de l’éducation des enfants comprennent le choix de l’école primaire et secondaire d’une part et, d’autre part, la difficulté de l’intégration scolaire. Pour les parents d’immigrants coréens l’une des priorités est le choix de la localisation d’école. Au Québec, le choix de l’école primaire et secondaire public est déterminé en fonction de lieu de résidence. Dans bien des cas, ceci pose un problème difficile.

Les

parents désirent inscrire leurs enfants dans une école de bonne réputation. Or souvent, les écoles de bonne réputation sont localisées dans des quartiers où le loyer est cher. Dans bien des cas, les parents n’ont pas le moyen d’y aller à cause de loyer élevé. Un autre genre de choix est celui de l’école privée versus l’école publique. Les parents d’immigrants croient que l’école privée est la meilleure. Le problème est que l’école privée exige l’examen d’entrée et le coût cher. L’ACGM agit souvent comme conseiller pour ces choix. L’adaptation scolaire des enfants d’origine coréenne n’est pas facile. La barrière de langue, le système d’enseignement, les rapports élèveprofesseur, les rapports avec les élèves d’origine ethnique différente semblent être une montagne dure à monter pour les enfants d’immigrants. Par ailleurs, d’après une étude par Professeurs Joseph H. Chung and Seong Sook Yim en 1992, près de 30% d’enfants d’origine coréenne auraient été exposés à des situations de discrimination raciales. Ce que l’ACGM fait est d’organiser des séminaires afin de mieux connaître la nature du problème et d’en trouver des solutions.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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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autre aspect de la vie d’éducation des membres est l’enseignement de la langue coréenne. Depuis les années 1970, cet enseignement a été offert par une école de langue privée et par les églises. La maîtrise de la langue maternelle est importante pour la formation d’une identité équilibrée des descendants d’immigrants. Pour eux, il est primordial de développer une nouvelle identité basée sur l’identité « coréenne » et l’identité « québécoise ». Bref, c’est une question qui touche toute la communauté. Par conséquent, il est souhaitable que l’enseignement de la langue coréenne soit offert par l’ACGM qui représente la totalité de la communauté coréenne. Quoiqu’un peu tard, l’ACGM a fondé, en 2010, l’École multiethnique de langues et culture à l’intérieur de laquelle la langue coréenne est enseignée. L’ACGM offre également aux adultes et aux gens non-coréens la cuisine coréenne, la calligraphie, l’acuponcture, l’ordinateur, et d’autres sujets.

Le Chapitre 10 s’intéresse à la vie des personnes âgées. Il y a environ 350 personnes âgées de 65 ans et plus, soit 5% de la population coréenne à Montréal. Les problèmes de ces personnes comprennent le manque de revenu, la solitude, le problème de logement, la santé et les rapports interpersonnels. Il va de soit que c’est à chaque personne de trouver des solutions à ces problèmes. Cependant un organisme pourrait jouer un rôle. L’Association coréenne des personnes âgées de Montréal joue ce rôle. Cette Association fut fondée en 1978 et le président actuel est le 19e président.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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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lupart n’ont pas de revenu à part de pension fédérale et, dans certains cas, la prestation de la caisse de retraite du Québec. Ceci veut dire que leur revenu annuel de ménage est d’environ 15,000$-20,000$, ce qui garantie la survie physique. Quoiqu’il en soit, ils sont en général satisfaits de leur vie d’immigrants et ils apprécient la générosité du régime de bien-être social du Canada et du Québec. Ce que l’Association des personnes âgées (ACPAM) fait est l’offre des renseignements via des séminaires et le Bulletin d’Information de ACPAM sur les sources d’aide de revenu du gouvernement fédéral et celui du Québec. La gravité du problème de solitude qui est, en partie du moins, atténuée par une série d’excursion en plein air organisée par les églises coréennes à Montréal. C’est une tradition depuis quelque temps; les églises organisent ces excursions trois fois par an; ces excursions comprennent un repas à la coréenne, des chants, des danses et des spectacles dont celui de Taekwondo. Ces excursions permettent aux personnes âgées de renouer d’amitié avec d’autres membres de la communauté. L’ACPAM gère une « école » qui offre une série de cours dont la langue française ; elle offre aussi des opportunités des rencontres. Le problème de logement est grave. Il devient de plus en plus difficile de demeurer chez leurs enfants. Les logements du secteur privé coûtent trop cher. Le logement HLM est rare. C’est un problème difficile à résoudre. L’ACGM fait appel à l’Office Municipal d’Habitation de Montréal (OMHM) pour trouver des logements HLM pour ses membres. La difficulté du rapport interpersonnel se manifeste sous la forme de conflit intergénérationnel, surtout le rapport avec les 1.5e et 2e génération.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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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ci s’explique par le fait que les personnes âgées conservent le système de valeur traditionnelle de l’époque de leur départ de la Corée, alors que les jeunes ont adopté le système de valeur du Québec. L’ACPAM organise quelques séminaires afin de rapprocher les personnes âgées et les jeunes. Mais le résultat n’est pas très encourageant. Le problème de conflit intergénérationnel ne sera, probablement, jamais résolu. Ce qui est malheureux est que ce conflit crée une ambiance tendue dans la famille et même retarde l’intégration des jeunes. Toutefois, il importe de souligner que l’ACPAM contribue d’une manière tangible aux activités collectives de la communauté coréenne. Ses membres participent d’une façon soutenue aux activités sociale et culturelles de la communauté; l’équipe de musique traditionnelle de l’ACPAM participe activement aux activités interculturelles telles que, par exemple, la Fête de Saint-Jean Baptiste.

Le Chapitre 11 discute la vie religieuse des membres de la communauté coréenne. Il y a, dans la région de Montréal, une Église Catholique et 15 églises protestantes. Plus de 76% de membres de la communauté fréquentent régulièrement aux églises. Les Coréens sont très chrétiens. Il y a très peu de Bouddhistes. Les gens fréquentent l’église pour toute sorte de mobiles qui peuvent se regrouper en deux catégories : mobile religieux et mobile séculaire. La vie d’immigrants est solitaire, incertaine, instable; les immigrants ont sentiment d’insécurité; ils se sentent aliénés; ils pensent qu’ils sont traités comme citoyens de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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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xième classe. Il est normal de chercher quelques choses qui peuvent les conforter, leur donner un espoir et de force. Les gens pensent que l’église peut leur donner le confort, la force, l’encouragement et d’autres éléments de la vie spirituelle. Les gens fréquentent l’église également pour des mobiles séculaire. L’église est un endroit où l’on peut rencontrer des gens et établit un réseautage de personnes et d’information. Il est difficile de savoir l’importance relative de mobile spirituel et de mobile séculaire, mais, dans bien des cas, le mobile séculaire peut être plus important.

Bref, l’église coréenne a double fonction de satisfaire d’une part les besoins spirituels et, d’autre part, les besoins séculaires. Pour accomplir ces fonctions l’église offre une longue série d’activités : la session matinale de prière, le service pastorale de mardi soir, les services pastoraux du dimanche, l’école de dimanche pour les enfants, les services pastoraux en plein air et bien d’autre activités. Les églises protestantes réalisent les missions d’évangélisation chez les premières nations au nord du Québec et en Afrique. Elles réalisent également des projets de charité dont l’offre des repas aux pauvres à Montréal. Bref, l’Église catholique et les églises protestantes font des choses très utiles. Cependant, l’église coréenne a des lacunes aussi. D’abord, les églises protestantes sont divisées selon les dénominations en un grand nombre d’églises avec une petite taille. La taille médiane d’une église peut être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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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ménages et ceci les empêche d’entreprendre des projets d’envergure. Le deuxième problème est l’attitude des leaders de décourager les fidèles de rencontrer les membres d’autre églises, ce qui a pour conséquence de diviser la communauté et d’empêcher la solidarité au sein de la communauté. La structure de gouvernance constitue un autre problème. La structure de gouvernance est typiquement coréenne et autoritaire, ce qui a pour résultat d’inciter les jeunes à quitter l’église et parfois perdre la foi chrétienne même. Ce phénomène s’explique facilement par le fait que les pasteurs sont tous éduqués en Corée; ils ne maîtrisent pas les langues officielles du canada; ils ne sont pas intéressés aux faits canadiens et québécois. Ils sont là pour les gens de la première génération qui ne maîtrisent pas les langues et qui ne connaissent vraiment ni le Canada ni le Québec. Ce qui est important de savoir est que la vie religieuse telle qu’elle est pratiquée chez les Coréens ne favorise pas l’intégration des immigrants coréens à la société québécoise. Il se peut qu’une situation analogue trouve chez biens des communautés culturelles au Québec.

Au chapitre 12, on explique les activités artistiques et littéraires. Il y a plusieurs organismes représentant les beaux arts, la littérature, la musique, le théâtre et la danse traditionnelle. Il y a aussi le festival de cinéma. Ces organismes sont gérés la plupart du temps par une équipe gestionnaire élue d’une manière démocratique. L’association des beaux arts réalise chaque année des expositions ouvertes auxquels assistent les non-Coréens. Les organismes de musique comprennent le chœur de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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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mes, le chœur de mission chrétienne et le chœur des jeunes. L’une des activités du chœur des femmes est d’aller et donner des concerts à l’Hôpital Bellevue des anciens combattants de la Guerre de Corée. L’organisme démonstrations

représentant lors

des

les

danses

activités

traditionnelles

culturelles

donne

qu’organisent

des la

communauté coréenne et des organismes québécois. Chaque année on organise le festival de cinéma coréen auquel assiste un nombre croissant des Québécois et des Québécoises. La vie artistique et littéraire est importante, car elle permet une vie intellectuelle et émotive mieux équilibrée.

Le Chapitre 13 explique les activités sportives des membres de la communauté coréenne.

Les activités

ont le rôle de renforcer la

solidarité des membres de la communauté, de promouvoir la santé physique et morale et de développer l’esprit de concurrence. Il y a plusieurs organismes sportifs représentant le golf, le soccer, le base-ball, le Taekwondo et le tennis. Le sport le plus populaire est le golf; il y a l’association de golfeurs des jeunes, des femmes et des personnes âgées. Il y a la compétition de soccer lors de la Journée de commémoration de la libération de la Corée du Japon.

Le Chapitre 14 porte sur les organismes de média. Il y a en ce moment deux hebdomadaires de langue coréenne. Le Hancatimes se distingue par la publication des articles des contributeurs. Il s’agit d’un hebdomadaire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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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25 pages dont

au moins 30% est consacré aux articles des

contributeurs. Les sujets varient : le journal de voyage, la cuisine, l’acupuncture, la loi québécoise d’organisme sans but lucratif et bien d’autres sujets. Il est intéressant de noter que le Hancatimes a publié pendant 77 semaines l’histoire du Québec écrite par le Professeur Joseph H. Chung dans la période 2009-2010. Le Newsweek est un autre hebdomadaire et il se distingue par l’effort soutenu de donner des nouvelles québécoise. Ces deux médias écrits sont distribués gratuitement; ils vivent avec la recette des annonces classées. Il y a aussi le VOKO qui est un radio ayant pour mission de donner des nouvelles de la Corée et la musique populaire. Il donne également des nouvelles québécoises en coréen. Le VOKO fonctionne une heures par semaine. Il y avait le Télé-Corée qui donnait des nouvelles en coréen.

Au Chapitre 15, on explique l’Association des anciens combattants de la Guerre de Corée. Il y a à peine 15 survivants. Le but primaire de cet organisme est maintenir la fraternité de ses membres. Mais, elle joue un rôle intéressant de valoriser le sacrifice des Canadiens qui ont participé à la Guerre de Corée. Un autre organisme d’un intérêt particulier est l’Association des Provinces de la Corée du Nord. La Corée du Nord est pays souverain, mais dans la Constitution de la Corée du Sud, la Corée du Nord fait partie de la Corée du Sud. Par conséquent les provinces de la Corée du Nord appartiennent à la Corée du Sud. L’Association en question a pour fonction, d’une part, de sensibiliser les jeunes à la tragédie de la division du pays et, d’autre part, de promouvoir la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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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darité des membres de la communauté qui ont des parents en Corée du Nord.

Au Chapitre 16, le dernier chapitre de la troisième partie de ce livre, présente les organismes représentant le gouvernement de la Corée. Le Consul général de la Corée à Montréal s’occupe du Québec et des Maritimes. Le consul général est en même temps l’ambassadeur à l’ICAO, organisme international de l’aviation civile. L’une de ses fonctions est de représenter la Corée lors des divers évènements de la communauté. En outre, le Consulat général joue un rôle décisif dans le processus du choix de candidats pour divers prix d’honneur accordés par le gouvernement de la Corée. Il y a également le Conseil consultatif présidentiel pour l’unification de la Corée. Ses membres sont nommés par le bureau du président pour un mandat limité. Le but de cet organisme est de promouvoir l’unification de la Corée. Enfin, il y a le Korean Women International Network (KOWIN), un organisme qui fait partie du gouvernement de la Corée et se donne comme fonction de promouvoir les intérêts des femmes coréennes dans le monde ent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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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Quatrième Partie : Vision et perspective d’avenir

Cette partie comprend trois chapitres. L’objectif de cette partie est, d’une part, de faire un bilan critique de 50 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et, d’autre part, d’en tirer des leçons. La communauté coréenne est en train de passer du stade d’établissement au stade d’adaptation. Comme

on a pu constater ci-haut, les différents organismes ont

contribué aux solutions du problème d’établissement et celui du début du stade de l’adaptation. Cette partie s’intéresse aux facteurs qui rendent difficile le processus de l’adaptation. Elle examine également les perspectives d’avenir de la communauté.

Au Chapitre 17, nous discutons la vision que partagent tous les membres de la communauté coréenne. La vision est d’établir une communauté qui se caractérise par une cohésion et une solidarité parmi les membres, une prospérité qui dure, un bonheur partagé, un respect par la majorité québécoise, et une contribution majeure au progrès du Québec. Bref, la vision est de devenir une partie intégrante de la société québécoise. La vision est de devenir une communauté coréennequébécoise et non communauté corée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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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Chapitre 18, nous discutons des problématiques que doit surmonter la communauté coréenne pour la réalisation de la vision. Ces problématiques peuvent se regrouper sous les rubriques suivantes : la barrière de langue, l’indifférence de la majorité des membres de la communauté aux activités collectives, le problème de gouvernance de l’Association coréenne, la qualité des leaders de l’Association coréenne, la mentalité des certains leaders et les comportements des leaders. La grande majorité des membres de la communauté ne sont pas très intéressés aux activités collectives de la communauté, soit à cause du manque du temps, soit à cause de la pauvre qualité des services de l’Association, soit à cause du manque d’intérêt aux faits québécois. Le gouvernance de l’ACGM est également problématique. L’Association se dote de deux têtes : le président de l’Association et le président du Conseil d’administration. Les deux présidents sont élus; les deux présidents se voient accordés le pouvoir décisionnel autonome. Le président du conseil d’administration

pense que son devoir est de

surveiller le président de l’Association. Dans le passé, ce système dualiste a compromis beaucoup l’efficacité gestionnaire de l’Association. Le choix des leaders de l’ACGM est fait, en théorie, par un processus démocratique. Mais en réalité, tout le processus est souvent dominé par un groupe de pression qui considère l’Association comme lieu de jeu politique. Ce groupe n’est pas vraiment intéressé au progrès de la communauté, mais plutôt dominé par le désir de manipuler et dominer les gens. En conséquence, il arrive que le président n’ait pas les qualités requises; même s’il a les qualités requises, le groupe de pression déploie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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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 moyens douteux pour compromettre le travail du président. La mentalité des leaders constitue également un problème. Il faut noter que les leaders de l’ACGM et ceux des autres organismes sont des gens de la première génération n’ayant pas la maîtrise des langues officielles, ce qui les empêche d’apprendre les faits québécois. Ils ne sont pas intéressé vraiment à apprendre les faits québécois. La barrière de langue a une autre conséquence fâcheuse; les leaders ont une mentalité fermée et ils ne veulent pas sortir de leur ancien système de valeur. Le comportement des leaders se caractérise souvent par négativisme. Il importe de noter que la plupart de immigrants coréens avaient, en Corée avant leur émigration, une position sociale et professionnelle jouissant un certain prestige social. Ici au Québec ils pensent qu’ils sont anonymes et qu’ils sont devenus « no body », ce qui les rend frustrés. Pour eux, la position du président de l’Association signifie une ascension sociale, ce qui provoque souvent des intrigues politiques. Il arrive parfois qu'un groupe de gens plus jeunes qui maitrise bien le français et qui veut faire quelque chose pour accélérer le processus d’adaptation se présentent comme candidat au poste du président. Or lors de l’élection du président, le groupe de gens d’une mentalité fermée utilise des techniques de manipulation illégale pour que le jeune candidat ne soit pas élu. C’est un problème qui se trouve souvent dans d’autres communautés culturelles au Québec. Il faudrait que le gouvernement du Québec se dote d’un mécanisme accessible de surveillance de pratiques non-démocratiques et illégales de choix des leaders chez les communautés culturel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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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Chapitre

19, on discute les perspectives d’avenir de la

communauté coréenne. On peut envisager un scénario pessimiste et un scénario optimiste. Nous avons indiqué au chapitre précédent les problématiques de la communauté coréenne. Pour que le scénario soit positif, il faut que ces problématiques soient résolues. D’une manière plus précise, en premier lieu, il faut que l’ACGM offre des services appropriés pour le processus de l’adaptation des membres à la société québécoise. En deuxième lieu, il faut que le gouvernance soit modifiée pour qu’une plus grande efficacité gestionnaire soit assurée. En troisième lieu, il faut que les leaders soient capables de maîtriser les langues officielles, qu’ils comprennent les faits québécois et qu’ils jouent leadership pour l’adaptation de la communauté coréenne. Quatrièmement, il faut que la communauté coréenne diversifie la structure des professions et des entreprises. Il est important surtout qu’elle se dote des entreprises de taille plus grande ayant la capacité de générer plus d’emplois grâce aux fonds capitaux provenant de la Corée. Par exemple, il est approprié de songer à créer d’un véhicule d’investissement, « Investissement Corée-Québec ». Enfin, il est aussi important de créer au sein de la communauté un environnement socialement agréable, accueillant et coopérant pour que les nouveaux arrivants se sentent acceptés. Si les conditions du scénario optimiste sont satisfaites, il y aura plus de nouveaux immigrants coréens au Québec; il y aura moins de départs des 50-ans d’histoire d’immigration coréenne au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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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migrants actuels. La population coréenne au Québec pourra atteindre plus de 10,000 habitants d’ici dix ans; il y aura plus des firmes produisant des biens et des services destinés aux coréens; il ya aura plus d’avocats, de médecins et d’autres professions; il y aura une plus grande volonté de s’intégrer à la société québécoise. Toutefois, si ces conditions ne sont pas satisfaites et le scénario pessimiste se réalise, le nombre de nouveaux arrivant va diminuer; le nombre de ceux et de celles quittent le Québec va augmenter; la communauté coréenne ne sera plus vi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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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Introduction

The production of the immigration story of Koreans in Quebec is motivated by the three objectives. First, we would like to show the future generation of Korean descendents the wisdom of living in Quebec. Second, we would like to show the Quebec people how Koreans in Quebec have contributed to the socio-economic development of Quebec. Third, we would like to offer useful information about immigrant’s life in Quebec to those Koreans and others who may be interested in coming to Quebec. By and large, there are two possible approaches to the production of immigration history. One is to focus on those immigrants who have succeeded in such professions as lawyer, accountants, medical doctors, politicians, artists and other professions. The story of the professional successes of these people may be helpful in guiding the younger generation’s career orientation; it may be also an indication of the Korean community’s degree of integration at large. However, those who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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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vide the most extensive and varying services for the integration of the Korean community as whole are the leaders of various organizations representing varying sorts of service needs. We have chosen this approach. This book has four parts. The first part presents Canada, the Province of Quebec and the Montreal Region. It seems important for immigrants to know in what kind of blessed place they are living in. Furthermore, the awareness of immigrants of the social, cultural, historical, economic and natural environment in which they have the privilege of settling down is an important motivational factor of integration. The second part tells the story of the formation and the evolution of the Korean Association of Greater Montreal (KAGM). The third part discusses such various aspects of immigrant’s life as preservation of Korean tradition, religious life, cultural life, business life, elderly person’s life and so on. This part also tells how these activities are organized and how leaders manage these organizations. The last and fourth part summarizes the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and discusses any useful lessons which we can draw.

The preparation of this book has been partly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 (Overseas Koreans Foundation) and made possible by a lot of people who have provided information, time and encouragement. We would like to thank, in particular, the president of the Overseas of Koreans Foundation for its financial assistance, the Consul General of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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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in Montreal for his generosity, those who have provided information and the Mayor of Montreal, Hon. Gerard Tremblay for his encouragement.

Part One: Why Canada, Province of Quebec and Montreal?

This part comprises three chapters. In Chapter 1, we discuss the characteristics of Canada which make Canada one of the most favored by Korean immigrants. In immigrants’ eyes, Canada offers limitless opportunities in education, career and self-assertion. Canada offers high quality of life. Canada is one of the countries in the world where human right is really guaranteed. Canada is the country where the welfare regime and health insurance is the most equitable. Above all, in Canada human dignity is respected regardless of race, skin color and profession. Canada has one of the lowest crime rates among the advanced countries. Moreover, Canada is a country of future; population will increase; most of its natural resources remain to be exploited; its human resources are competent and highly motivated. Canada is the only country in the world where multiculturalism works; immigrants can preserve their original culture and develop new Canadian identity.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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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hapter 2, we explain the strong and dynamic character of the Province of Quebec. French Canada represented by Quebec was the founder of Canada. Quebec along with Ontario is Canada’s economic center of gravity. Quebec has realized, in the period of 1960-1980, the historical “Quiet Revolution” which transformed, within two decades, the Quebec society into one of the most dynamic, self-confident, globalized, future-looking and open entities. Quebec has performed an economic miracle during the period of 1960-1990 catching up the much more advanced economy of Ontario and providing a solid foundation for sustained economic development. Quebec has become, since its Quiet Revolution and its economic miracle, a leader of the francophone world. Quebec provided during the Korean War its famous Van doo regiment (Royal 22e Regiment) who fought valiantly for Korea and democracy. For Quebec, immigration is very important not only for the supply of labor force but also political considerations. Within ten years, immigration will account for the totality of its population increase. The Quebec government has a series of policies in order to facilitate the integration of immigrants. Quebec is also known for its social and political movement for its Sovereignty-Association by which the people of Quebec wanted to solidify further the position of Quebec within the Federation of 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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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hapter 3, we explain the comparative advantages of the Montreal region for immigrants. Montreal is North-American Paris outside of France providing exciting social and cultural environment seen nowhere in the world. Montreal is equipped with four great universities and a great number of highly specialized academic and professional colleges, called CEGEP. This system of higher education offers immigrants extremely flexible education and career orientation; it produces rich and varying human resources needed for globalizing and high-tech and culture-intensive industries. Montreal’s living cost is the lowest among the major urban centers in Canada. In particular, the housing price in Montreal is only 40% to 60% of housing price in Toronto and Vancouver. This is surely a plus for immigrants. Montreal has the most extended network of rental housing with rent as low as half of rents in Vancouver. Montreal is one of the leading centers of bio-tech, aerodynamics, pharmaceutical, animation and other high-tech industries, which imply job opportunities for highly trained immigrants. Immigrants in Montreal account for only 20% of its population as against 40%-50% in Toronto and Vancouver. This means that there is ample room for more immigrants in Montr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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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wo: The Formation and the Organization of the Korean Community

Part Two has also three chapters and shows how the Korea community was formed and organized.

Chapter 4 traces back the waves of Korean immigrants since 1960. The first arrival was Professor Joseph H. Chung who came in 1954 to Laval University (Faculty of Social Sciences) to study under Rev. Father George Henri Lévesque who was the spiritual leader of the Quebec Quiet Revolution. Since then, a small number of Koreans came to Montreal to work as medical doctors, engineers and company employees. However, since the amendment of Canada’s immigration law in the 70s, nonEuropean were allowed to immigrate and many Korean came. In fact, there were three major waves of Korean immigrants of different types: company employees, business immigrants, professionals. As of 2010, there were 7,000 Korean immigrants in Quebec, 98% in the Montreal region. It is to be noticed that about 20,000 Koreans came to Quebec, but 13,000 would have left for Toronto, Vancouver and elsewhere. Nevertheless, we are hopeful that by 2015, there will be at least 10,000 Korean in Quebec.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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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hapter 5, we discuss the typical difficulties of the integration of immigrants. These difficulties may be classified in function of the stages of the evolution of the immigration communities. In general, the evolution process of the immigrant community is as follows: the stage of establishment, the stage of adaptation, the stage of stability, the stage of integration. Each stage is accompanied by different set of problems. During the stage of establishment, what are urgently needed are the solution of housing problem, the choice of schools for children, the acquisition of driving license, health insurance card, opening of bank account, job finding, business choice and a long list of other things. This stage is the most difficult for non-francophone people including Koreans, because of the language barrier, lack of knowledge of Quebec institutions, laws and habits. For the community as whole, this stage may last for decades. The community must organize itself so that it can provide needed aids. The second stage is the one of the community adaptation to the Quebec society. This is the period during which the children terminate their studies and enter the job market. Even during this period, the firstgeneration parents are still unable to communicate in English or French; they are still unable to appreciate the Quebec value system; they are physically in Quebec but they psychologically remain 100% Koreans; they are not interested in knowing Quebec or Canada. This is the period during which the intergenerational conflict becomes serious. While the first-generation parents are imprisoned in the Korean traditional value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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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tem, their adult children have integrated the Quebec value system in their own identity. However, out of this intergenerational conflict emerges a new family and social environment conducive to the adaptation of the immigrant community to the Quebec society. What the leadership of the community can do is to induce the first-generation parents to be interested in and learn the Quebec value system. The community members begin to read local papers and watch TVs in English or French. They begin to think that they are becoming more Quebecers and less Koreans. The structure of businesses is becoming more diversified and the proportion of dépanneurs will decrease, but the retail business still dominates. This stage may also take a few decades. The third stage is one of stability. This is the stage during which the 1.5th and second-generation people have their own children and assume the leadership of the community. The language is no longer a barrier; the pattern of family life is becoming closer to that of Quebec family life. Increasing number of young people are becoming lawyers, accountants, educators, civil servants and other skilled job professionals. The community members are becoming more Quebecers and less Koreans. They are at ease in Quebec social and cultural environments. There will be more and more interracial and interethnic marriages. This stage can take another few decades. The final and fourth stage is the terminal stage where Korean community becomes a true Korean-Quebec community; it will be no longer a simple Korean community. There will be strong middle-class composed of highly skilled professionals and wealthy businessmen;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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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will be many university professors; there will be perhaps some local, provincial or federal politicians. Koreans are now “integrated” into the Quebec society. This stage may be attained by the third or further generations. However, this presupposes some preconditions. Koreans should continue their passion and dedication for education. Second, they should not hide behind their traditional cultural wall and reach out to the Quebec value system. Third, they should adopt a more positive perception of the Quebec society; up to now, Koreans perception of the Quebec society has been rather negative. This is obviously due to the language barriers and the resulting lack of appreciation of the Quebec society. The amazing thing is that such attitude is found even among the young people who are educated here. This may be attributable to their parents’ negative attitude toward Quebec. This must be corrected. Fourth, Koreans should be more aggressive in their penetration into the main stream of the Quebec society; nobody will come and invite them to join the mainstream of the society.

Chapter 6 explains the formation in 1965 of the Korean Association of Greater Montreal (KAGM) and its evolution. Its objective is to provide needed assistance to Korean immigrants. Its evolution has followed the following stages: the stage of its foundation (1965-1975), the stage of its take-off (1976-1978), the stage of growth (1979-2004), the stage of new challenge (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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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ssociation is registered as a non-profit organization (NPO) in accordance with the Quebec Company Law-Part Three. It is a democratically structured organization. It represents all persons of Korean origin who are landed immigrants or Canadian citizens. Its president and two vice-presidents are elected at the Annual Meeting; it has a board of directors of 15 persons two-third of whom are elected at the annual assembly. Two auditors and the Election Committee are also elected at the annual assembly. The president is the 29th president. There is a need for defi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evolution of the Korean community and that of the Association. The role of the Association is obviously to help the community to evolve from one stage of evolution to another. In 2004, the Korean community has attained the period of new challenge. By 2004, the Korean community had more or less ended the period of establishment and began to enter the period of adaptation. Here is the challenge; the period of adaptation is much more difficult than that of establishment; the community must know, understand and accept the Quebec value system. We will see in the next chapter the evolution of the Association’s activities for the second stage of the community 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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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hree: Community Life and Community Organization

This part explains how the community members conduct their collective life and how various community organizations provide needed assistance. This part has 10 chapters: Chapter 7 (activities of the KAGM), Chapter 8 (economic life), Chapter 9 (education), Chapter 10 (life of elderly persons), Chapter 11 (religious life), Chapter 12 (life of arts), Chapter 13 (sports), Chapter 14 (media), Chapter 15 (fellowship), Chapter16 (activities of the representative organization of the Korean government).

Chapter 7 explains the activities of the Korean Association of Greater Montreal (KAGM) which are grouped into the following groups: (1) those activities which are designed to preserve Korean traditions; (2) those which are “fixed”, (3) those which consist in providing aid services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arrivals; (4) those which are intended to make Koreans to know Quebec people and Quebec institutions; (5) those which aim at making the Quebec people to be interested in Korean culture. Those activities designed to preserve Korean traditions include the teaching and manifestation of Korean traditional dances, court-music,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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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eremony of imperial, martial art and other activities. These activities are proved to be effective for the first-generation people’s preservation of the original identity and the young generations’ formation of intercultural identity. For the aid activities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or recent arrivals, the Association provides information and consulting for the choice of schools for the children, the finding of housing, the acquisition of all sorts of permits and cards, the opening of bank account. Sometimes volunteers accompany the new comers in order to prevent the abuse on the part of landlord. It is true that the Ministry of Immigration and Cultural Communities provides aid services, but few Koreans are using such services partly because of the language barriers and partly because of their old habit of mistrusting civil servants. The “fixed” activities refer to those activities which are fixed annual events and which remind the Koreans of Korea’s modern history. These activities play a role in strengthening the Koreans’ determination to meet challenges to unite if needed. These activities include the 6.25(June 25th) commemoration ceremony of the Korean war of 1950, the 3.01 (March 1st) commemoration ceremony of the cruel massacre of civilians by the Japanese (1910) and the 8.15 (August 15th) commemoration ceremony for the liberation of Korea from Japanese occupation in 1945. The 8.15 activities is the largest annual event of which the main event is interchurch sport competition; this is an occasion to meet, renew old friendship and make new friends. The activities designed to make Koreans aware of the Quebec reality take several forms. The KAGM, in addition to the data bank on Quebec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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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consultation, has organized long series of conferences, seminars and debates on various aspects of the Quebec reality including its modern history (the Quiet Revolution, the Independence Movement, economic miracle), housing, pension, social welfare, laws, children’s school life, racial discrimination, human right and so on. The former president of the Association, Professor Joseph H. Chung published in a local Korean language weekly the history of Quebec from the time of Jacques Cartier to the present time. These activities seem to have induced many Koreans to change their negative perception of Quebec to a positive one.

Chapter 8 is interested in the economic activities of Koreans immigrants. The chapter examines the pattern of the economic adaptation of the first-generation people. In the case of the Japanese and the Chinese, they started as laborers in the end of the 19th century and then, owing to their savings, they could become small-sized businessmen. On the other hand, the Vietnamese started as professionals and late arrivals became small business owners. In short, in the case of the Japanese and the Chinese, the pattern was employee-employer while in the case of the Vietnamese, the pattern was a little more employeremployer than employee-employer. In the case of Koreans, the pattern was mainly employer-employer. The fact was that in the 1960s and early 1970s, Koreans worked as manager of the then dépanneurs (corner-street grocery), “Perette”, but later more than 80% of Korean households bought the grocery store. In this respect, the pattern of Koreans’ economic integration was rather different from other Asian communities.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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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recent years, the job structure of Koreans has a little progressed. However, still, the great majority of Koreans earn their living through diversified retail businesses including, in addition to grocery stores, coffee shops, sandwich shops, flower shops and so on. More and more young people take up professional jobs. Nevertheless, the self-employed business dominates. Practically all Korean business firms are family businesses and all the family members participate with distinctive roles to play. The husband manages the purchase of merchandises and the human resources; the mother does the cashier job; the grand-parents look after the little children; gown children replace their parents in week-ends. The major problems include the language barriers, lack of knowledge of Quebec laws, ignorance of Quebec business culture and, especially, the difficulty in getting funds. In the 1970 to 1980s, it was hard to get bank credits. The solution was either own savings, borrowing from friends and relatives. There were many cases of legal disputes because of money matters among family members and friends. Fortunately, the Korea Foreign Exchange Bank established a branch in Montreal and offered credit, in the 1970s and 1980s, on the basis of business worth without real-estate collateral, which facilitated somewhat the credit problem. Despite these difficulties, most of Koreans in Montreal have succeeded in educating their children without relying on welfare assistance. One of the significant outcomes of Koreans’ economic life is the radical change in women’s role. In Korea, the Korean women, before their immigration, played the passive role of bearing children and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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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ing after their husband and family. Korean women were very dependent on their husband. However, after their immigration to Quebec, these women have become more than an equal partner of their family business; in general they learned the language faster than their husband; they are doing better customer services, they are better interlocutor with their children. In short, Korean women are better suited for immigrant life. All these meant more power for women and have created, sometimes, frictions with their husband. The organization representing the Korean business people is their association which is a NPO and structured in a democratic fashion. It has one president, two vice-presidents and a board of directors. The current president is the 18th president. The Association’s functions include fellowship of members, the protection of its members’ rights and, especially, the promotion of rebates through common purchase of commodities.

In Chapter 9, we discuss the problems of child education. These problems include the choice of the primary and the secondary schools and school integration. In Quebec, the choice of the school depends on the location of residence. Korean parents are extremely concerned with the quality of school and they are eager to send their children to “good” schools. Unfortunately, if they choose an apartment situated in poor districts with poor-quality school, the parents must send their children to the poor school, which means, as far as the parents are concerned, an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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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certain future for their children. That is why most of the Korean parents wish to send their children to private school. But there is no strong scientific evidence of the superiority of private schools compared to the public schools. The problems of children school integration include the language barriers, difficulty in the relationship with fellow students and teachers and racial discrimination. A study by Joseph H. Chung and Seong Sook Yim (1992) showed that more than 30% of Korean students experienced some forms of racial discrimination at school. Another aspect of education in the Korean Community is the teaching of the Korean language. It is of utmost importance for Korean children to master the Korean language not only to develop their identity but also to communicate with their parents. Since 1978, the Korean language has been taught at a private language school. However, since 2011, the KAGM teaches the Korean language through the Multiethnic School of Languages and Cultures. Moreover, the Association offers a series of courses on such traditional Korean arts as painting, calligraphy as well as acupuncture, computer and other subjects. The Korean language course is also offered to non-Koreans; there are now four classes of twenty or more students in each class.

Chapter 10 is about the life of the elderly. There are about 350 persons of 65 or more, 5% of the Korean population in Montreal. Their problems include the lack of income, solitude, housing cost, health and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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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personal relations. Obviously, each elderly person should find the solution to these problems with the help of family members. But, the Korean Senior Citizen Association of the Greater Montreal (KSAGM) can do something. This Association was founded in 1978 and the current president is the 19th president. This organization is also structured in a democratic fashion with a president, two vice-presidents and a board of directors. Most of the elderly persons do not have additional formal income apart from the federal old age security allowance; some do receive Quebec pension funds allowance. This means that at best, their annual income would be about $15,000-$20,000 which would guarantee physical survival. However, what is interesting to observe is that they are quite satisfied with their lives and they are very grateful to Canada and Quebec. The KSAGM offers a variety of useful information through seminars and a News Bulletin about various federal and provincial aid programs for them. The solitude is a major problem for not only Korean elders but also elders in general. The problem of solitude of the seniors is partly attenuated by a series of out-door excursions which are funded and organized by churches. These out-door excursions have become a tradition; they take place in spring, summer and fall seasons. These excursions are accompanied by games, abundant Korean foods, songs, dances, Taekwondo display and chats. The KSAGM has a “school” where the members learn languages and enjoy sing-along sessions. This school plays a good part in bringing joy into the members’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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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ing problem is a serious one. Their meager income is not enough to have a decent private rental dwelling. The best option is the public rental housing, which is just not available. This is a problem; the solution is not in sight. Another major problem is the conflict with the 1.5th and the second generation. It is possible that this intergenerational conflict is observed in all immigrant communities. But, it appears more pronounced in the Korean community. The first-generation people who came in the 1970s and 1980s still cling to their old way of thinking and regard parent-children relation in a vertical and hierarchical framework and still live in the Korean value system of the time of their departure. They are not aware of the fact that the Korean value system had evolved and much more globalised and less authoritarian. They are physically here, but psychologically they are in old Korea. They are not interested in knowing Canada or Quebec; they are living in a tightly closed cultural circle. On the other hand, the young Koreans have studied in Quebec and many of them work in Quebec. They have partly adopted the Quebec way of thinking and doing. This leads inevitably to conflict with their parents. Many of them soon find out that there is no way of properly communicating with the elderly people and, as a result, they go away physically and mentally. This intergenerational conflict does not seem to have a solution; only the time will be the solution. One interesting aspect of the senior Koreans is that they are the most persistent participants in the activities of the Korean Association. This is explained by the simple fact that the Korean Association is dominated by those who represent the interest of the senior people, not those of the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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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generation. In fact, the young people never participate in the Associations activities except for the 8.15 sports event. The young people have tried to play the leadership in the Korean Association in order to meet the demand of all including the young people. But they were rejected by means of doubtful methods. This is a major problem of the Korean community in Montreal. The Toronto Korean community is doing better; the leadership of their Association is shared fairly by the elderly and the young.

Chapter 11 deals with the religious life. The Korean community in Montreal is one of most flourishing Christian communities among the cultural communities in Montreal. There is one Roman Catholic Church and 15 protestant churches. In 2006, more than 76% of Koreans go to church on a regular basis. There are a few hundred Buddhists. Koreans go to church for all sorts of reasons. These reasons may be grouped into two types: religious reasons and secular reasons. The life of immigrants is solitary, uncertain, unstable and they feel insecure; they feel alienated; they feel being treated as second class citizens. In short, the life of immigrants is tough and hard. They look for help and consolation. They think that they find it at the church; they think that the church provides security, hope, courage and comfort, in addition to salvation. The church is also a place of social gathering. There are neither places nor opportunities, apart from the church, to meet other Koreans; they are too busy earning bread and butter during the week days. So the church is the only place to get together on Sunday, where the people share information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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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experiences and where they make new friends and renew old friendship. In another word, the church plays a vital role in the life of Korean immigrants. For the satisfaction of the congregation members’ spiritual needs, the churches undertake a long series of pastoral activities: early-morning prayer sessions, Wednesday evening prayer services, Sunday services, teaching the Bible and so on. The protestant churches have been doing missionary works for the last 20 years at the first nation villages in the northern region of Quebec. These missionary works seem to have had some success not only for the evangelization but also for simple friendship. Some of first-nation youngsters would have abandoned drugs and alcohol addiction as a result of Koreans’ missionary works. These churches are also doing missionary works in Africa. On the other hand, the Korean Roman Catholic Church is active in helping the poor in Montreal. However, the Korean churches do have some shortcomings as well. The protestant churches are divided into several denominations including the Presbyterians, the Methodists, United Churches, Baptists, Full Gospel congregation and so on. As a result, given the relatively small size of Korean population, the average size of these churches is 20 to 30 households. Another problem is their exclusiveness discouraging congregation members to fraternize those of other denominations. As a result, this does not make it easy to solidify fellowship of the members of the Korean community. Another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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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blem is the alienation of the youth in the church. The Korean children come to church with their parents until the beginning of teen age, after which they abandon the church. In the eyes of the youth, the Korean church is for the first generation, by the first generation, and of the first generation. The structure of governance is very vertical, hierarchical and authoritarian. Most of the pastors are educated in Korea and they are unable to communicate either in English or French. Under such circumstances, it is perhaps more than normal that the youth leaves the church. It is to be noticed that the most effective leaders of the community are pastors. They could have induced the congregation members to be better integrated into the Quebec society. These leaders have utterly failed to play such role, partly because of their language barriers and partly because of their fear of losing their congregation members. The real challenge of the Korean churches is their long-term prospect. When the present first-generation people will be no longer here, it is likely that Korean churches will be empty. Having said all these, the Korean churches have, so far, nonetheless, played an indispensible role.

Chapter 12 deals with the artistic life of Koreans in Montreal. The artistic life is tremendously important for the immigrants for the balance between their physical life and intellectual life. The life of the firstgeneration people is harsh requiring in most cases 14 hour hard labor a day. Under such circumstance, it is easy to give up intellectual life and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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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d oneself in emotional and spiritual crisis. It is a necessity to restore self-respect and self-confidence. There are several organizations promoting fine arts, literature, music, theater, traditional dance. There are also the Korean film festivals every year. These organizations are democratically formed and governed by elected leaders. The Association of fine arts organizes every year exhibitions of members’ works in which many non-Koreans participate. There are three choirs (women, youth Christian). The women choir is famous for its excellence and its devotion to Canadian Korea-war veterans. It presents yearly a concert at the Bellevue Veterans Hospital for surviving veterans who are very moved by the gesture of the choir. The organization of traditional dances participates in various cultural events. The annual Korean film festivals are attended by many non-Korean Quebecers.

Chapter 13 explains Koreans’ sport life. The sport life is also important for immigrants. Sports play three vital roles: promotion of health, appreciation of leisure and fellowship. There are several organizations promoting sports: golf, soccer, base-ball, Taekwondo and tennis. These organizations are loosely organized but, their leaders are democratically elected. The most popular sport among Koreans is golf. There are golf clubs for women, men and seniors. Some of the golfers are almost professionals. There are annual tournaments by major associations, but in most cases, they form small groups and play together every day or once a week. The golf clubs are, perhaps, the most effective mechanism of cementing camaraderie. Most of other types of sport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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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vities take place during the 8.15 events (August 15th to celebrate the liberation of Korea from Japan)

Chapter 14 introduces media activities. The ethnic media is extremely important for immigrant life. The media play two principal roles. The primary role is to collect and diffuse information. Then, the ethnic media facilitate the awareness of the problems of the community as a whole. There are two Korean language weekly papers: The Hancatimes and the Korean Newsweek. The interesting feature of the Hancatimes is that it allocates a major portion of space (30%) to contributors’ series of articles on such subjects as travel, cuisine, acupuncture, Quebec institutions and other subjects. It has published, for 77 weeks, Quebec history written by Professor Joseph H. Chung in the period of 2009-2011. The Korean Newsweek puts focus, on the other hand, on Quebec news. The information provided by these two weekly papers may be classified into

general

information,

specific information and

educational

information. The general information covers news from Korea, Canada and Quebec. The specific information includes information on Quebec housing allowance, public housing and others which affect immediately the welfare of the people. The educational information includes the Quebec history, Quebec laws, Quebec economy and other information which expand the knowledge of the readers. There is the VOKO, an ethnic radio station, which broadcasts for two hours per week provi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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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from Korea and Korean popular music. There was also the TéléCorée which was an ethnic TV.

Chapter 15 tells the story of very special organizations. One is the Association of Korea-War Veterans and the other is the Association of North Korean provinces. There are about 15 Korean Korea-war veterans in Montreal. The objective of this association is on one hand to cultivate fellowship and, on the other hand, to remind the world of the tragedy of the war. They keep close contact with Canadian Korea-war veterans and participate together every year at the Korea-war commemoration ceremony in Ottawa. The association of north-Korean provinces sounds odd, for North Korea is an independent country. However in the constitution of South Korea, North Korea is a part of Korea. There are five governors of North Korean provinces appointed and paid by South Korea. The association is composed of those who do have family connections in the five provinces of North Korea. The role of the association is mainly fellowship and exchange of information; it is also a symbol of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Chapter 16 is the last chapter of Part Three and explains the role of the Korean government appointed organizations. The first and the most important one is the General Counsel of Korea in Montreal. The counsel general is also the ambassador to the 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ICAO). The role of the general counsel consists of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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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icipating at some of the key events of the community such as the 8.15 Korea Independence Commemoration Day. It also plays key role in the process of selecting the recipients of honorary awards from the Korean government. There is the Council of Peaceful Unification of Korea. This organization has the function of reporting to the community the progression of inter-Korea relationship and preparing the community for the eventual unification. There is also the Korea Women International Network (KOWIN) which has the mission of promoting the interests of Korean women in the world.

Part Four: Lessons and Issues

Part 4 has three chapters. Chapter 17 discusses the vision of the Korean Community, whereas Chapter 18 examines the lessons learned from the past and examines the issues that must be dealt with in the future. Chapter 19 discusses the long-term prospect of the Korean community.

In Chapter 17, It is shown that the vision of the Korean community is to succeed in the stage of adaptation in medium-term and successfully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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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 on to the final stage of integration in the long run. The Korean community has succeeded, relatively speaking, the first stage. Koreans have established a solid basis for sources of income, mainly through retail businesses; the rate of unemployment is low; there are no known criminals; there are no known welfare recipients; the children are finishing universities or colleges and getting into job market; the retired first-generation people are enjoying life playing golf, travelling and looking after their grand–children. In short, the Korean community is well established and various organizations have, as we saw above, played useful role in helping the establishment of Koreans. However, the stage of adaptation is a different game; it requires a new attitude toward Quebec; it demand honest effort on the part of the first-generation people to know and, if possible, like Quebec. The success or the failure of the adaptation stage depends primarily on each individual’s efforts, but the effectiveness of such efforts is very limited in the case of the first-generation group, because of the language barriers and the tendency to hide behind the wall of the old Korean way of thinking. The trouble is that the negative attitude of many of the firstgeneration people creates family and social environment which is not conducive to the proper attitude of their children toward Quebec. The chief lesson drawn from the 50-year immigration history is that unless there are some fundamental changes in the way of thinking and attitude of the first- generation people, it will be pretty hard to come out of the adaptation stage with success. There is no doubt that the adaptation stage requires even more aggressive aid role of the major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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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 organizations, especially the Korean Association of Greater Montreal (KAGM). The businessmen association and the seniors’ association also can and should play the role, but bulk of the responsibility must be borne by the umbrella organization, KAGM. In order that the KAGM can play its role effectively and efficiently, it must improve several aspects of its management structure and the contents of activities.

In Chapter 18, we discuss issues related to the function of the KAGM. More precisely speaking, we propose a number of recommendations for the improvement of KAGM’s leadership. First, it must change its decision making structure. According to the regulations and customs, in Canada, NPOs have a single decision making structure in the sense that the chairperson of the board of governors is responsible for the organization. In the case of Korean NPOs, they have dual system, where the president of the Association and the chairperson of the board are simultaneously elected at the annual meeting. This creates unproductive friction between the board and the president; this friction could have delayed substantially the ending of the stage of establishment; it could be a major stumbling block to the success of the stage of adaptation. Second, the Association must choose a leadership team which must have the following attributes. It must have a positive perception regarding the Quebec society. Up until now, the leadership of the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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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ociation has been composed of the first-generation people who came early and who have a negative perception of the Quebec society, because of the language barrier, which makes it difficult to know and understand the Quebec culture. Another reason for such negative perception is their fear of coming out of their cultural ghetto and losing their identity by exposing themselves into unknown value system. Whatever the reason, their negative perception of the Quebec society makes their children to have a negative attitude toward the Quebec society and the Quebec people; this will make it more difficult for them to get into the mainstream of the Quebec society. The leaders of the Association should make occasional surveys to identify the changing needs of the community. So far, most of the Association’s activities have been conceived for narrow-scoped needs of the first-generation people; the needs of such specific groups as the 1.5th and the second generation groups, women, handicapped and others have been ignored. Even the activities designed for the needs of the firstgeneration people are so limited and so narrow- scoped (commemoration ceremonies) that they are unable to help those who may wish to know Quebec culture. The groups other than the first-generation people are simply not interested and they don’t participate in the Association’s activities. The total absence of the youth group in the Association’s activities is entirely attributable to the very fact that the Association does not know their needs and, hence cannot provide the needed services. Third, the leaders of the Association must have the ability of communication effectively in English and French. Up until now, few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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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s had this ability. The leaders’ inability to communicate in French or English has very damaging effects. They cannot attend intercultural meetings so that the community is isolated from the network of information useful for immigrants. The ensuing problem is that these leaders and those who support them deploy unfair, illegal and unethical methods in order to exclude, from leadership position, those who do have the language ability and who try to provide services not only to the first-generation people but also the youth group and other groups. Such unfortunate situation is explained by the misguided motivation of many of the leaders to become leaders. They are often motivated by the wrong ambition of manipulating the community and the pleasure of dominating people. It is hoped that the government authority sensitizes cultural community leaders to the need of having proper leadership motivation and the absolute necessity of leaders’ language proficiency. Fourth, the Association should have a medium- and long-term planning. In most cases, the term of community leaders is two or three years. In most cases, the newly elected leaders begin their function with no plan; they tend to repeat the same old activities which are easy to realize; their main concern is to enjoy the respect for being “leaders”; they try not to rock the boat during their terms; they try to offend no one in the community. What is even more serious is that they ignore what the precedent leadership has done; they behave as if the community begins to exist with their terms; there is no continuity; there is no progress. To conclude, the Korean community has done relatively well to pass through the period of establishment. However, it has entered the second 50-Year Immigration History of Koreans in Que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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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od of adaptation and it is not yet ready to meet the new challenge. To meet this challenge, it should give itself proper organization and competent leadership; it should have leadership which is motivated only for the advancement of the community’s collective welfare and not for the honor, the power, the glory and the pleasure of dominating the people ; its leadership should have a more positive perception of the Quebec society; its leadership should be able to communicate effectively in French or English or both, identify the needs of various sub-groups of the community, have a medium-and long-term planning. Most of all, the community members, especially, the first -generation people should stop behaving as if they were permanent temporary guest in Quebec; they should become at least partially true Quebecers and Canadians.

In Chapter 19, we try to have an idea about the long-term prospect of the Korean community. A long-term prospect of such entity as the Korean Community is necessarily a guess work. But what we can do is to draw a picture according to scenarios. We have two scenarios: one is pessimistic scenario, the other is optimistic one. Under the pessimistic scenario, we assume that the Korean community will be unable to pass through the stage of adaptation because of the unproductive leadership, intergenerational conflict, confined life of cultural ghetto, the absence of peace and unity and many other dysfunctional elements, then, the future of the Korean community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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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eak. If this happens, few new immigrants will come; more existing immigrants will leave; the Korean community will be unviable. On the other hand, if the community members share a common vision for a prosperous and happy collectivity well integrated into the Quebec society, if the community has cohesiveness and cooperative environment, if the community leadership has language proficiency, long-term planning and positive perception of the Quebec society, if the community can attract investment funds from Korea so that the community can develop medium-sized industries and businesses, then more people will come and existing community members will stay; the Korean community will have a bright future and contribute more significantly to the welfare of Quebec and 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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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한인 이주 50 년사

펴낸이 : 퀘벡 한인 이주사 편찬위원회 (http://quebeckorean.org) 찍은곳 : 후원 : 재외동포재단, 주몬트리올 대한민국 총영사관

초판 1쇄 인쇄: 2012년 2월 초판 1쇄 발행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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