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CMC 이념실천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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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CMC

핵심가치실천공모전 (舊 이념실천공모전)

행동규범 Action Plan Story 당선작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당선작


행동규범 Action Plan Story 당선작 대상

삶을 노래한다는 것 (최우성・성바오로병원 정보지원팀) / 06

우수상

아름다운 동반자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 병동 호스피스완화의료팀) / 10 아주작은기부 (류귀복・서울성모병원치과팀) / 14 꿈꾸는소년, 네르구이 (정득남・서울성모병원대외협력팀) / 17 모든것을선으로이끄시는하느님 (최복순・서울성모병원가정간호센터) / 22 가톨릭대학교의정부성모병원간호부공감간호실현을위한활동들 / 25


장려상

희망의 씨앗 (서울성모병원 162Unit) / 29 사랑의 나무 (백준규・서울성모병원 방사선 종양학팀) / 35 중증외상환자더살리기위한권역응급의료센터생명수호의실천 (의정부성모병원응급업무팀) / 38 사랑의 예술 (조순화・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센터) / 43 Heart가 이어준 7년간의 소중한 인연 (허선미・서울성모병원 17층1병동) / 46 내일을 위한 삶, 내 일이 이끄는 삶을 살자 (서현미・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 / 50 행동규범Action Plan Story (김가연・서울성모병원 111Unit) / 54 효도하는 마음으로 (강슬기・여의도성모병원 분만병동) / 57 이른둥이 이야기 (안명희・NICU) / 61 처음과 지금, 어느덧 (이준희・부천성모병원 영상의학팀) / 64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당선작 대상

기적을이루어준성모병원 (이가을어머니이미경・서울성모병원) / 68

우수상

제2의 인생을 설계하며 (전덕호・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 / 76

포기하지 않은 한 희망은 살아있다 (나재우 보호자 함미경・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센터) / 80


장려상

새 삶을 살게 해주신 가정간호사님! (박일만・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센터) / 85 그날도몹시추운겨울이었다 (김용수・서울성모병원가정간호센터) / 88 다시사는人生 (양경자・서울성모병원가정간호센터) / 92 깊은감사드리며 (김영순・여의도성모병원사회사업팀) / 95 여의도성모병원자선수기공모 (중국동포김길남・여의도성모병원) / 97


Action Plan Story 대상

삶을 노래한다는 것 성바오로병원 | 정보지원팀 | 최우성

“안녕하세요. 딸이 나가라고 해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제 딸이 성바오로병원에서 태어났는데 참 예뻤어요. 신생아실에서도 너무 예쁜 아이라고 했었죠. 그런데 어릴 때 뇌수막염에 걸려서 청 각을 잃었습니다. 입원도 많이 했고요.” 이곳저곳에서 “아이고, 쯧쯧. 얼마나 맘이 아플까?” 등등 혀 차는 소리가 들립니다. 환자와 보 호자들이 앉아있는 강당에는 고단했을 엄마의 삶에 안타까워하는 마음들이 소리 없이 스며들었 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씩씩하고 예쁜데요. 지금 태권도 선수랍니다. 장애인 아시안게임에 나갈 준비 6∙


를 하고 있는데, 감기가 심해서 입원했습니다. 오늘 부를 노래는 ‘만남’입니다. 딸과의 소중한 인 연을 맺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부르겠습니다. 딸아이가 노래를 좋아해서 수화를 하면서 부 를게요.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수화를 하며 불렀습니다. 노래를 하는 도중에도 손으로 하트 를 만들어 연신 관객석으로 보냅니다. 시선을 따라가니, 심사위원을 맡은 제 뒤쪽에 딸이 앉아 있 습니다. 중학생으로 보였습니다. 큰 눈에 콧날이 오뚝하고 귀여운 얼굴이었습니다. 여느 평범한 여중생 처럼 스마트 폰을 정신없이 만지작거리는 얼굴에 그늘이 전혀 없어서, 청각 상실로 말도 잘 못 할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엄마의 노래가 시작되자, 등 뒤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렸습 니다. 수화에 맞추어 “어~ 어~ 으~ 으~”하며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 졌습니다. 2013년 12월 24일 성탄 기념 환우 노래자랑에서 엄마는 1등 상을 받았습니다. 함께 심사를 하 던 간호부장 수녀님께서 상품을 전달하며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사회자가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마이크를 건네자, 잠시 망설이던 어머니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습니다. 수화로 통역을 하 지 않았으니 아마도 딸은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사랑하는 OO야! 네가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해서 엄마는 내 귀라도 주고 싶고, 내 입이라 도 주고 싶지만 그렇게 못해서 미안하고 너무 마음 아프다. 그래서 널 위해 기도한다. 네가 행복하 면 좋겠어. 사랑한다. OO야” 사회사업 팀에서 주관하는 환자 노래자랑에 참석할 때마다 먹먹한 감동을 받곤 합니다. TV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가창력, 전달력 등 여러 기준으로 노래 잘하는 사람을 선별합니다. 재미를 높 이려고 사연을 캐내거나,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인 상황 설정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병 원의 노래자랑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환자 한 분 한 분이 저마다 책 한 권의 사연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6년째 장기입원 중인 환자의 부인은 “마음이 답답해서 나왔다.”며 부르고, 제 몸 하나 간수 못 해 낳아주신 어머님께 죄송하다는 중년의 아저씨가, 구성진 목소리로 부르는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를 듣고 있으면, 아침부터 콧잔등이 시큰해지며 소주 한 잔이 생각납니다. 노래를 통 해 표현된 그분들의 사연, 삶의 회한과 통증이 듣는 이들의 마음을 때로는 애잔하게 때로는 촉촉 하게 적셔주었습니다. 환자 위로 콘서트, 호스피스병동 공연 등 10년 넘게 노래봉사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호 스피스 병동 공연입니다. 임종을 준비하는 환자를 보면서 죽음의 모습이 두렵고, 노래를 부르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아파 와서 몇 년 동안 서글픈 노래를 불러댔습니다. 바보 같았습니다. 무심한 마

Action Plan Story ∙ 7


음까지는 아니어도 이제는 유쾌한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손에 잡힐 듯한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분들이 알려주는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삶의 마지막은 축제여야 한다는 뒤늦 은 깨달음 덕분입니다. 죽음은 결국 기억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임종이 가까워져 의식이 없어도 귀는 마지막까 지 살아있는 인체의 감각기관이라고 합니다. 생의 끝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기억하기를 바라며 노 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고 기쁨입니다. 비록 의료인은 아니지만 부족한 재능이나마 치유의 현장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톨릭 병원에서 근무하기에 가능한 특권이라고 생각 합니다. “선물도 주고, 속 시원하게 노래도 부르고 참 좋은 병원이에요.” “아유, 그 엄마 마음이 짠하네요. 얼마나 힘들까!” 청각장애 딸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어머니의 믿음과 모두가 안타까워하며 박수쳐주는 모 습들, 행사가 끝나고 환자와 보호자들이 병원을 칭찬하는 대화를 들으며, 가톨릭 병원의 존재 이 유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첨단 의학기술과 최신 건물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고통받는 이웃들과 치유 가 필요한 이들에게 가톨릭 병원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심이 담긴 시선, 다정한 말을 건네는 것, 지나온 삶의 실수에 대해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입가 에 떠오르는 미소, 한 사람을 위한 노래, 쾌유를 위한 기도, 지치고 어려울 때 우리를 다시 일어서 게 하는 것은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마음입니다. 아파 본 사람들은 그 말을 진심으로 이해합니다. 원목 신부님께서 미사 강론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라고…. 질병이라는 예상치 못한 생의 장애물이 우리 삶에 위기를 불러올 때, 그때 부르는 노래는 우리를 하느님을 믿는 길로 초대합니다. 어쩌면 삶을 노래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며, 사 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절망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런 뜻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을 극복한 이야기로도 가득 차 있다.’고 말한 사람은 듣 지 못하고, 앞을 보지도 못하는 중증중복장애를 지닌 헬렌 켈러였습니다. 가톨릭 병원이 구성원들 의 마음이 모아져 고통을 극복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고,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치유의 사명을 널 리 증거하는 병원이 되기를 기도로 청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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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 9


Action Plan Story 우수상

아름다운 동반자 서울성모병원 | 호스피스완화의료 병동 | 호스피스완화의료팀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나아”

강인한 말투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의 얼굴에 절망감이 가득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분의 첫 모습. 그동안 말로 표현하기 힘든 통증에 환자와 보호자는 지쳐있었고 그 고통은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환자는 그저 빨리 죽을 수 있는 길만 찾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곳은 통증을 전문적으로 조절하는 곳이에요. 아프시지 않도록 저희가 최 선을 다할 거예요.” 진통제를 투여하며 간호사는 환자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어루만졌고, 진통제를 맞은 후 얼마 지 나지 않아 환자는 지친 모습으로 잠이 들었다. “이렇게 잠든 모습 너무 오랜만이에요.” 환자가 안정을 취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딸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딸을 조용히 상 담실로 모시고 가서 안정시킨 후 환자에 대한 이야기들을 함께 공유하기 위해서 사회복지사에게 10 ∙


면담을 의뢰하여 그들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담았다. 그분의 곁에는 항상 남편이 함께 했는데, 남편의 모습 역시 매우 초조해 보이고 안정적이지 않 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초등학교 교사인 딸만이 분주하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하나둘씩 챙기는 모습이었고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은 안타까웠다. 다행히 며칠이 지난 뒤 환자의 증상은 안정이 되었고, 우리에게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여기 와서 많이 좋아졌어요. 단풍이 들었네.” 크고 뚜렷한 눈망울로 창밖을 내다보던 환자가 미소를 머금으며 대화를 건넸다. “그렇죠? 날이 좀 따뜻할 때 가족과 함께 산책 나갈까요?” 갑자기 환자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잘해줘. 여기에서 일하는 간호사, 의사, 봉사자 모두 나에게 너무 잘해줘. 내가 뭐라 고.”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늘 어깨에 부담을 짊어지고 베풀기만 하던 환자는 갑자기 베풂을 받는 것 이 쑥스러운 듯 말하였다. “어머님이 통증이 좋아지셔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저희는 행복해요. 이제는 저희 와 함께 하실 거니 무엇이든 함께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들은 환자의 얼굴에 그렇게 환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그 순간 처음 보았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과 어우러져 그때의 그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가톨릭 병원으로서, 이념과 행동규범을 실천하는 병동으로서 환자와 가족을 내 가족처럼 여기 고 돌보는 것을 우리는 의식해서가 아닌 그들과의 살아있는 경험으로 실천한다. 그런 진심은 어 느 순간 환자에게 통하고 조금씩 마음은 열리기 시작한다. 그분도 처음엔 고통스러워서, 그다음은 받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우리의 돌봄을 어색해했지만 어느 순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환자에겐 끊어내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다. 정신지체장애인 둘째 딸 때문인데, 늘 둘째 딸 걱정 에 한순간도 편한 마음으로, 안정된 표정으로 앉아있지를 못했다. 그 짐을 큰딸이 고스란히 짊어 지고 있었고, 조금 자유로운 남편은 환자가 걱정하는 만큼 둘째 딸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환자는 죽어서도 그 부분이 걱정이라는 말을 하였다. 우리는 큰딸의 소진, 불안정한 지지체계, 환자의 불안을 조절하기 위해 ‘팀 회의’를 통해 호스피 스팀원이 계획을 세워 접근할 팀 모임 대상자로 선정하였다. 환자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 줄 수 는 없지만, 환자의 아픔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팀이 함께 협조하여 도와드리는 것을 실천하고자 함이었다. 환자와의 밀착된 관계 유지를 위해 그분과 관계 형성을 잘할 수 있는 봉사자가 따로 접 근하자, 환자는 그 봉사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맡겼으며 발 마사지, 목욕, 산책 등을 통해 더 많 이 웃는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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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자가 병실에 방문할 때를 기다리기도 하고, 함께 성가를 부르고 트로트를 부르면 손뼉을 치며 따라 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녀님의 기도로 하느님을 알게 되고 “마리아”로 대세를 받는 가 장 아름답고 귀한 시간도 맞이하였다. 가톨릭병원에 근무하면서 하느님을 알게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매우 값진 일이다. 또한, 죽음을 접하는 호스피스완화의료에서 하느님 의 뜻을 실천하고 이념을 따르는 가장 중요한 일일 수 있다. 마리아님은 대세를 받은 후 단 한 번도 묵주를 손에서 놓은 일이 없다. 힘이 들어 기도는 스스 로 할 수 없어도 그저 묵주를 쥐고 하느님, 성모님을 외치면 이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말했고 가 끔 성당에 휠체어를 타고 모셔다 드리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겠다고 하시고 경당 내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우시기도 하셨다. “이렇게 미천한 발을 정성스럽게 닦아주고 나를 존중해주고 태어나서 내가 이런 대접을 받고 죽을지는 몰랐어.” 하고 흐느끼시더니 “나 언젠가 좋아지면 병원 밖을 산책하고 싶어”라며 어렵 게 소망을 꺼내놓았다. 우리는 그런 환자의 소망을 담아 딸과 함께 의미 있는 말기 생애 지원프로그램을 계획했고, UM, 복지사, 팀장 수녀님, 봉사자가 모여 가장 환자에게 의미 있을 수 있는 것을 고민하였다. “환자가 지체장애인인 둘째 딸 걱정에 마음을 놓지 못해요. 근데 둘째 딸이 노인복지관에서 커 피를 내리는 바리스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 앞에서 그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어 떨까요? 환자도 딸의 그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고 마음이 놓이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들은 딸이 갑자기 소리 내어 울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왜 그 생각을 한 번도 못 했을까요. 어머니가 얼마나 대견해 할까요.” 딸의 눈물은 우리의 활동에 희망을 주었고 우리가 준비한 날이 왔다. 하지만 환자의 상태는 좋 지 않았고 따님이 외출할 때 입으시라고 사다 주신 티셔츠를 입다 이내 다시 벗고 힘없이 눕기를 반복하다 결국 외출은 못 하고 대신 옹기 뜰에서 우리가 준비한 프로그램으로 환자의 마음을 달 래드리기로 했다. 힘이 드셨는지 눈을 지그시 감던 환자분은 둘째 딸이 커피를 내리러 앞으로 나가자 갑자기 눈 을 번쩍 뜨시더니 큰 눈망울을 번쩍이며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딸의 모습을 바라보셨다. 정신지체인 둘째 딸은 늘 혼자 서성이거나 혼잣말을 하고 웅크려 있는 모습만 보여주었는데, 커피를 내리던 그 순간은 어느 프로 못지않은 자신감과 당당함이 있었다. 우리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그 모습에 환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때로는 야무진 표정으로 커피 잔을 가리키며 가져다 주기를 요구하는 등 어느 누가 그녀를 장애인으로 보지 않을 정도의 자신감을 그녀는 어 머니 앞에서 보여주었다. “혼자서도 잘할 거야. 뭘 그리 걱정해” 남편은 힘 있는 목소리로 환자를 바라보며 어깨를 다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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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그날, 어머니로서 안타까운 딸을 지켜줄 수 없다는 미안함으로 아픈 중에도 마음 놓고 아프 다 말할 수 없었던 환자의 아픔이 긴 시간 감동스런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환자에게 의미를 찾아줄 수 있음에 행복했고 그날 이후, 환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 이 떨어지고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의 고통스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환자의 마지막 얼굴은 천사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환자의 몸을 구석구석 귀하게 닦아드리고 좋은 향 맡으며 하느님 곁에 가시라고 아로마 오일을 두 딸과 함께 발라주며 기도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도록 하였다. 둘째 딸이 얼굴을 비비자 환자가 마치 미소를 머금은 듯 입꼬리가 올라가던 그 아름다운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전에 아산병원에서 전원한 환자의 딸이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산병원 교 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다른 곳으로 환자를 보냈으면 마음이 아팠을 텐데,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에 보내는 내 마음은 편하다. 그곳에선 환자를 귀하게 여기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내가 나의 환자들을 보내며 많이 경험했다.”라고 우리를 찾아온 절박한 상황의 환자와 가족, 그 보호자가 의사가 우리를 신뢰하고 믿었듯 우리는 가톨릭병원으로서 그리 스도의 정신과 이념을 실천하는 본보기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이 현장에서 우리는 늘 경험하며 소중히 여기고 한 순간도 이념과 행동규범에 어긋남 없이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도 가톨릭중앙 의료원 이념실천의 본보기로서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묵묵히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의 신념은 곧 가톨릭중앙의료원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Action Plan Story ∙ 13


Action Plan Story 우수상

아주 작은 기부 서울성모병원 | 치과팀 | 류귀복

일 근무시간 7시간(자택근무 포함), 출·퇴근 시간 자율, 5년 근속 시 2주 가족여행, 10년 근속 시 2달 유급휴가, 매 자녀 출산 시 출산지원금 1,000만 원에 육아휴직 2년 제공, 매일 점심 식사 는 호텔 주방장 출신의 쉐프가 준비하며 회사 건물에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 수영장이 연중무휴 로 직원과 직원 가족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회사를 보며 우리는 신의 직장이라고 합니다. 이런 신의 직장과 비교하면 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근무조건은 열악하기만 합니다. 물 한 모금 마실 시간 없이 화장실도 참아가며 점심은 5분 만에 뚝딱 해결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은 사표 내고 떠나야겠다는 잘못된 발상에 충분한 이유가 될 것 같았던 철없던 어느 날, 문득 아버님의 반 강제적인 압박에 못 이겨 월급의 10%를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면서 내고 있는 기부금이 점점 아깝다는 생각이 들 었고, 그 후 아버님 모르게 기부를 중단했습니다. 14 ∙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지난 후 아버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셨고, 그동안 내지 않았던 1년 치 기부금을 내지 않으면 더 이상의 재정적인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며 집에서도 나가라는 강력한 협박에 못 이겨 2010년 3월 눈물을 머금고 밀렸던 1년 치 기부금을 한꺼번에 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TV에서 “기부를 하면 할수록 더 여유가 넘치고 행복하다.”는 사연이 나오면 믿지 않았던 저에게도 작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를 쉬지 않고 사표 내고 떠날 궁리만 했던 출 근길이 놀랍게도 기부를 하면서부터 즐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의 일이 보람되게 느껴졌으며, 하루하루 기부금이 쌓여갈수록 퇴사를 해야겠다는 생 각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내가 10%의 기부금을 내고 있기 때문에 이 직장에 다닐 수 있구나!’란 생각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기부금이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분명 사표를 냈을 것이 고, 지금쯤 다른 직장을 찾아 헤매고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월급의 10%를 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10%의 기부 덕분에 90%의 월급을 가져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 으며 그때부터 기부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인간은 1년여의 세월이 지나고 나니 또다시 현실에 불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서서히 매너리즘에 빠져가던 어느 날 우연히 병원에 비치된 기부 신청서를 보게 되었고, 월 1만 원의 소액 기부를 내가 일하는 병원에 해보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내가 병 원 일이 싫어질 때마다 기부금액을 5천 원씩 더 올려야겠다.’라는 다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6개월의 시간 동안 정확히 2번 퇴사 충동을 느꼈고, 월급 공제 금액은 월 1만 원에서 2 만 원으로 올랐으며 1년 후에는 2만 5천 원이 되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올라가는 기부금 액은 살짝 부담으로 다가와 어느덧 年 400만 원 정도의 기부금이 아까워서인지 다행히도 더는 퇴 사 충동은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병원생활이 행복해지면서 아쉽게도 기부금의 액수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 눔을 통해 더 큰 기부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에 동료 직원들에게 제가 느낀 기부의 즐거움, 기부를 통해 받는 행복을 설명하면서 월 1만 원의 작은 기부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3년이란 기간 동안 20여 명 정도의 치과 팀 직원들에게 기부에 함께 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았고, 감사하게도 그중 10명이 작지만 아름다운 기부에 동참할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입사한지 얼 마 되지 않은 신입 치과위생사 선생님에게 오랜만에 기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보았습니다. 월급 이 자동공제이기 때문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 겨를조차 없으며 병원과 환자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니 선뜻 1만 원 기부를 허락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작은 기부에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 고 며칠 후 우연히 “CMC 이념실천 공모전” 모집 글을 읽게 되었고, 치과 팀원 절반이 아니라 CMC 전 직원의 절반이 월 1만 원의 기부를 하게 되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부끄럽지만, 기부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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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짧은 수기를 작성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작은 기부”가 진행된 지난 3년여의 시간 동안 치과 팀원들 각자의 1만 원의 기부금이 모 여서 260만 원이란 적지 않은 금액이 되었고, 이 금액은 만 7세의 형성저하성 우심증후군 환자를 포함한 7명 환자분의 치료비에 조금씩 보탬이 되었습니다. 물론 개인의 소중한 시간과 본인의 정신적, 육체적인 희생을 아끼지 않고 봉사활동에 적극 참 여 하시는 존경받기에 아깝지 않은 많은 분과 비교하면 부족한 소액기부 활동이지만 모이면 모일 수록 더 큰 나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기부에 동참해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다고 생각됩 니다. 10명의 치과 팀원들이 이루었던 작은 나눔의 기적들을 CMC 전 직원이 함께 한다면 우리가 꿈 꾸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에 한 발 더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희의 작은 도움을 받으 신 어느 환자분의 진정어린 감사의 글을 끝으로 “아주 작은 기부”에 관한 부족한 이야기를 마치 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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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우수상

꿈꾸는 소년, 네르구이 서울성모병원 | 대외협력팀 | 정득남

“코로 숨을 쉬는 것”이 꿈인 사람이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코로 숨을 쉬고, 이를 일상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이 코가 없어서 태어난 순간부터 입으로만 숨을 쉬어야 했던, 코로 숨을 쉬는 느낌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던 몽골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네르구이”, 몽골어로 “무명”이라는 뜻입니다. 2007년 몽골의 한 마을에서 코 가 없는 채로 태어난 이 아기를 보고 놀란 몽골 의사들은 갓 출산한 산모에게 아기를 포기하고 싶 지 않은지 물어보았습니다. 산모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아기를 키워보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Action Plan Story ∙ 17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호흡곤란 증세로 울란바토르의 응급실로 보내졌고, 아직 이름조차 짓기 전이라 환자명은 “무명”이라고 붙여졌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기는 곧 퇴원을 하였지만 계속 “무 명”, 즉 “네르구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네르구이의 부모님은 아이가 태어난 이후 입을 닫은 채 깊이 잠들어 숨 쉬지 못할까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자본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아이에게 가축 표식 용도로 사용되는 플라스틱 조각을 입 에 물리고, 자는 동안 숨을 계속 쉬고 있는지 지켜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네르구이의 부모님은 아 들이 평범하게 살기만을 기도했지만, 외모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주변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따가운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 할까 봐 유치원에도 보내지 못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줄기 빛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한국 서울성모병원에서 네르구이를 치료해 주겠다 고 했습니다. 의료시설이 잘 갖추어지지 않고, 사람의 인적조차 드문 몽골 시골 외곽지역에서 가 축을 기르며 근근이 살던 네르구이의 가족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월드비전의 정기 후원을 받 던 상황이었는데, 월드비전이 “Medical Korea 나눔 의료사업”에 네르구이를 추천하였습니다. “Medical Korea 나눔 의료사업”은 한국의 뛰어난 의료수준을 전 세계에 알리고 한국 의료의 이 미지 제고를 위해 2011년도부터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며, 현재까지는 의료기 관에서 환아를 추천하고 진료비를 지원하면 진흥원이 항공료 및 체재비를 제공하는 식으로 진행되 었는데, 네르구이의 경우에는 2013년 2월 한국보건산업진흥원, 한국국제의료협회, 월드비전 간 나눔 의료사업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 체결 후, 월드비전이 사업에 추천한 첫 환아였습니다. 네르구이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서울성모병원 대외협력팀은 성형외과, 사회사업 팀과 수술 가능 여부 및 치료 예산 등에 대해 상의하였고, 병원은 네르구이의 자선 진료를 결정하였습니다. 2013년 4월, 네르구이는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처음 입원하던 날, 네르구이는 큰 병원 건물로 들어오기 싫다며 병원 1층 회전문에서부터 엉엉 울었습니다. 간신히 달래서 입원실로 이 동을 한 후에도, 처음으로 입어보는 환자복이 싫다며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갑작스럽 게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낯설었는지 엄마 품에만 안겨서 한동안 다른 사람들과 눈도 마 주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네르구이가 입국 한 바로 다음날, 네르구이는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2013년 Medical Korea 글 로벌 헬스케어 유공 포상 및 기념행사에 초청되어 홍보대사인 탤런트 송중기와 함께 무대 위에 섰지만, 사회자가 한국에 도착한 소감 등을 질문하자 단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 내려왔습니다. 작은 소년에게 힘겨운 며칠이 지났습니다. 서울성모병원에서는 성형외과 이종원 교수를 필두 로 이비인후과 (선동일 교수, 김성원 교수), 소아청소년과, 신경외과, 안과, 치과 등 여러 임상과가 협진 하여 네르구이에 대한 정밀검사를 진행했습니다. 의료진의 설명을 들으면서 네르구이의 어머니는 네르구이가 6살까지 살아있었던 것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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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네르구이처럼 선천적으로 코가 없는 케이스는 지난 2000년부터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 30건 정도밖에 보고된 적이 없고, 그 중 대부분 환아들이 1세가 되기 전 사망했다고 했습니다. 협진 팀은 이렇게 희귀한 케이스의 수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치밀한 치료 계획을 세웠습니다. 수차례의 수술이 계획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수술이 기적적으로 성공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4월 17일에는 네르구이의 이마에 조직 확장기를 삽입하고 주기적 으로 식염수를 투입하여 외비를 만들기 위한 피부를 확보하였습니다. 7월 3일에는 이 조직 확장 기를 제거하고, 비공을 만든 후 네르구이의 이마에서 늘어난 피부와 갈비뼈, 연골을 이용하여 코 뼈대와 콧방울 날개를 만드는 등 고난이도의 수술이 진행되었습니다. 정밀검진 중 발견된 잠복고 환의 치료를 위해 비뇨기과적 수술까지 진행되었으며, 총 20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습니다. 이 수술 후 네르구이는 드디어 코를 이용한 자가 호흡이 가능해졌고, 8월 7일에는 새로 만들어 진 비강 통로의 협착 방지를 위하여 특수 스텐트 삽입술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스텐트는 포스텍 기계공학과 조동우 교수팀이 병원으로부터 제공된 CT 이미지를 받아 3D 프린팅 기술로 제작되 었고, 이는 3D 프린팅 기술이 국내 최초로 임상에 적용된 사례였습니다. 이 수술 후 네르구는 약 3개월 동안 더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 경과를 지켜보았고, 11월 25일 모든 치료를 마친 후 무사히 몽골로 돌아갔습니다. 1억 원이 넘는 치료비는 모두 서울성모병원이 부담했습니다. 약 8개월 동안 네르구이는 서울성모병원에서 다시 태어났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이 번 나눔 의료사업을 통하여 서울성모병원은 우수한 첨단 의료기술을 바탕으로 환아의 육체적인 고통을 치유함은 물론, 모든 교직원의 아낌없는 관심과 사랑을 통해 네르구이의 마음의 병까지 치유했습니다. 선천적인 기형으로 어린 나이에 큰 고통을 받은 네르구이는 서울성모병원에서의 치료를 통하 여 다시 태어났습니다. 물론 가장 큰 변화는 코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입을 벌린 채로 잠 을 자지 않아도 되었고, 궁금했던 꽃향기도 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네르구이는 점점 더 활발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낯을 가렸지만, 조금씩 친절한 한국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주변에서는 긴 입원생활과 어린 나이에 견뎌야 하는 큰 수술에 아이가 지칠까 걱정을 많이 했지만, 오히려 네르 구이는 더 씩씩해졌습니다. 병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다른 환우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살갑게 눈 웃음을 지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휴게실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까르르 웃음꽃도 피웠습 니다. 아픈 주사도 꾹 참고 어머니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의젓한 소년이 되었습니다. 네르구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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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병실에 입원했던 환자들은 퇴원한 후에도 종종 병원에 들러 네르구이에게 장난감을 선물하 며 안부를 물었습니다. 퇴원 전 병원에서 마련해 준 퇴원 기념식에서는 “안녕하세요. 네르구이입니다, 여섯 살입니다. 감사합니다.”라며 큰소리로 한국말로 본인 소개를 하여 박수를 받았습니다. 4월 메디컬 코리아 행사 중, 자신감 없이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오던 네르구이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 아보아도 없었습니다. 네르구이의 어머니는 “네르구이가 도대체 사람들이 나를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냐고 물어보았 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몽골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언제 가느냐고 하더니 이제는 가족 들이 한국에 오면 안 되느냐고 한다. 몽골에서는 사람들 시선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아 남들한테 보여주지도 못하는 아이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한국에 와서 모든 분이 예뻐해 주시고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네르구이에게는 새로운 꿈도 생겼습니다. 몽골에 돌아가면 평범한 아이들처럼 학교에서 공부 를 열심히 하여 꼭 성형외과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른이 되면 자기처럼 아픔이 있는 아 이들을 고쳐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치료 과정을 잘 이겨낸 네르구이가 앞으로도 건강한 생활을 하고 항상 서울성모병원과 대한민국을 기억해 주었으면 합니다. 또한, 한국에서 받은 사랑을 거름으로 본인의 꿈을 멋지게 이루어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래서 본인이 받은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 ∙


2013.4.9 서울성모병원에 도착 후 첫 진료 (우측: 서울성모병원 성형외과 이종원 교수)

2013.9.5 최종 수술 후

2013.11.19 퇴원 기념식에서 코로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있는 네르구이 (중앙)

Action Plan Story ∙ 21


Action Plan Story 우수상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서울성모병원 | 가정간호센터 | 최복순

우면산 산사태로 많은 재산과 인명 피해가 일어났던 2011년 벌써 3년 전 그 날!

우면산 바로 밑 아파트에 살던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정전으로 뉴스도 듣지 못한 채 오늘 첫 방 문해야 하는 완화의학과 환자의 상태가 위급하여 통증 완화 주사와 수액을 가지러 병원에 가야 하기에 차를 몰고 나섰는데 도로에는 물이 범람하고 가는 곳마다 막혀서 겨우 우면산 터널 진입 하는 곳까지 갔는데 산사태로 터널 통과를 못 하고 다른 길로 우회했지만, 산에서 쓸려 내려온 나 무와 돌들로 길이 모두 막혀 있었다. 겨우 이쪽저쪽 돌고 돌아서 2시간 30분 만에 병원에 도착하니 모두들 깜짝 놀라며 우면산 산사 태로 지금 난리라고 알려줘서 그때서야 사태를 파악했으나 내 머리에는 빨리 환자한테 가야 한다 는 생각밖에 없었다. 말기 암 환자로 아무것도 못 먹고 통증이 매우 심하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기다릴까 싶어서 수 액과 통증 완화제를 갖고 하느님께서 인도하는 길로 가야지 하며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우면동 형촌 마을 입구까지 올 수 있었다. 그 마을은 생태공원을 조성한 저수지 둑이 터져서 마을길이 완전히 큰 물줄기가 쓸려 내려와서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는 형편이라 평소에 알던 다른 길로 마을에 들어가니 지키고 있던 경찰들 이 깜짝 놀라며 “이렇게 작은 차로 큰일 나려고 여기까지 어떻게 왔느냐”고 하면서도 환자 때문 에 꼭 가야 한다고 하니까 차는 두고 함께 데려다 주겠다고 해서 빗속에 물에 빠져가며 환자 집에 도착하였다. 마당과 지하실까지 흙탕물이 가득 찬 곳에 환자는 통증으로 온몸이 땀에 젖어 사색이 되어 있 고 보호자는 환자를 데리고 병원에도 갈 수 없고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기진맥진하고 있다가 생 각지도 못한 가정간호사의 방문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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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고 함께 기도를 마친 어느 날 “어려서 유아 세례를 받았는데 부모 님의 이혼으로 신앙생활을 못 하다가 배우자의 신앙으로 개신교에 다녔는데 이제는 내 본향으로 가고 싶다.”고 하였다. 수녀님과 교적을 찾기 시작하여 드디어 야고보 로렌조라는 교적을 찾았으 나 개신교인 배우자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극 정성으로 배우자와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가톨릭에 대하여 이해를 하게 되었고 수녀님 방문으로 교리를 받았는데 얼마 지나 지 않아 아주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 신부님께서 때가 되었으니 모든 것 해드리자고 하시어 한 날에 첫 영성체 병자 성사, 관면 혼인 성사를 받고 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행복해하다가 아주 편안하게 하늘로 떠난 후에 장례미사도 은혜롭게 치르고 헤어졌던 생모와도 만나서 화해하고 어느 것 하나 맺힌 것 없이 남 기고 떠나야 하는 가족들에게는 “꼭 세례 받아서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과 “내 생애 마 지막 동행으로 가정간호사 만나게 해주신 하느님께 너무나 감사드린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배우자와 딸은 예비자 입교하여 세례 받고 견진 받고 딸은 꼭 가정간호사를 대모로 하고 싶다 고 해서 모녀가 되었다. 지금은 학교 일로 바빠서 못 하지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겠다고 약속 했고 배우자는 구역장으로 공동체 일원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그 여름 우면산 다른 골짜기에서는 무허가 비닐하우스에 살며 가정간호를 받던 또 다른 한 분! 마리아님이 순식간에 산에서 쏟아지는 산사태로 흔적도 없이 쓸려 내려갔다. 실종신고를 해야 하는데 사진조차 없어 난감한데, 참으로 공교롭게도 일주일 전에 서초구 간호 사회에서 가정간호 받는 분들에게 지원금이 나왔었다. 여름에 지친 분들에게 영양 보충을 시켜드 리고 싶어서 삼계탕과 과일, 두유 등 사 가지고 방문하여 갖다 드리면서 나중에 사진을 보내면 좋 겠다고 해서 속으로 “꼭 이렇게 인증 샷을 제출해야 되나!”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 지 하라는 대로 해야지 하면서 할머니께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죄송스럽게 말씀드렸는데 의외로 아주 반가워하시면서 그렇잖아도 얼마 전에 간호사가 사다 준 새 옷 입고 함께 찍고 싶었다고 하 시면서 반색을 해서 여러 장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었다. 시신은 쓸려 내려가다가 다리에 걸린 비닐 더미와 세간 속에 손상 없이 편한 모습으로 발견되 어 고이 모시고 어느 고마운 분이 수의를 제공하여 잘 치르게 되었다. 교우들이 마리아 할머니 돌 아가시기 전에 “삼계탕 드셔서 훨훨 힘 안 들이고 하늘나라 가셨을 거야. 저렇게 환하게 웃는 영 정사진만 봐도 행복하게 고통 없이 가셨을거야’ 라고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하시는 일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가정간호를 하면서 이 일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쓰시면서 그분이 하시는 일이라는 생각 을 하게 됩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오늘도 하루를 공짜로 주신 하느님께 감사기도 드리고 오늘 만날 환자분들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세상 어떤 일이 이렇게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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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아픈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감히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도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겠지요.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의 도구가 되어 그분의 발과 손, 눈 마음이 되고 싶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가톨릭중앙의료원 모 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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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우수상

가톨릭대학교 의정부성모병원 간호부 공감간호 실현을 위한 활동들

가톨릭대학교 의정부성모병원 간호부(간호부장 임 성자)는 공감간호 실현이라는 vision을 가 지고 공감간호 조직문화를 형성하고 정착하며 확산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들을 중장기 계획 을 세워 실행에 옮기고 있다. 그 일환으로 공감 나눔 문화 확산을 위해 꾸준히 이념실천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병동 계 간호 2팀에서 2006년부터 실행하고 있는 의정부시에 위치한 의정부공업고등학교 결식학생 돕기이다. 가정환경이 어렵거나 결손가정의 자녀 중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부서원들 의 정성으로 모은 돈으로 급식비를 지원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3명에게 급식비를 지원하는 것으로 시작하였고 이 소식이 다른 직원들에게 전해져 Action Plan Story ∙ 25


2007년부터 급식비 지원이 확대되어 2013년까지 8년 동안 총 2천8백여 만 원의 금액을 급식비 로 지원하였다. 8년 동안 사업을 진행하면서 간호사들뿐만 아니라 병원과 학교와의 유대관계가 돈독해져서 2008년에는 학교로부터 감사패 표창을 받았고 교장 선생님의 초대로 간호부장님과 UM들이 학교 를 방문해 학부모 대표를 만나고 학교의 여러 가지 시설들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2012년과 2013년 연말에는 선생님들과 학생, 학부모님들이 병원을 방문하여 환자, 보호자들 을 대상으로 댄스, 노래, 마술쇼, 비트박스 등 풋풋하고 열정적인 공연을 하기도 했다. 공연도 하 면서 학생들이 직접 만든 쿠키와 음료를 가져와 환자, 보호자들에게 대접하고 학생들이 만든 양 초, 비누 공예품을 전시하고 바리스타를 꿈꾸는 동아리 학생들이 커피 머신을 준비해 환자, 보호 자, 원내 직원들에게 향기로운 커피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간혹 실수를 하고 미숙하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학생들의 공연은 환자, 보호자들에게 기분 좋은 활기를 주었고 소액이지만 기부금을 내고 있는 간호사들에게는 뿌듯한 보람을 가질 수 있는 기회 가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 후배들의 공연을 도와주기 위해 본원을 방문하는 경우도 있어 어려운 시 기에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든든하게 잘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색다른 감동을 주었다. 또한, 공감간호 실현을 위한 목표로 공감 체험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환자 체험과 병원 내 타부서 체험을 통해 공감 체험을 활성화하였다. 환자뿐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도 행복 할 수 있도록 SCLP(영적 돌봄 리더십 프로그램)를 도입하여 스트레스가 많은 간호사에게 자기 돌봄과 영적 돌봄을 도울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외래계 간호 팀에서는 분과별로 작은 피정을 운영하여 부서 간의 내부 커뮤니케이션을 활 성화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지고 있으며 신입 직원들에게 가톨릭 정신 과 이념을 교육하여 신자 배가 활동 및 조직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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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2006년부터 꾸준히 실행하고 있는 환자와 보호자 동행 안내는 병원을 내원하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낯선 병원 환경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질병에 대해 불안한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가 족 같은 마음으로 설명하며 동행하여 검사실과 진료실 등으로 안내하는 활동이다. 보호자 없이 내원하는 어르신, 환자의 고통으로 맘이 급한 보호자 이런 분들은 바로 눈앞의 제 증명창구도 외래검사실도 낯설기만 하여 동행 안내는 언제나 근무할 때보다도 바쁜 시간을 보낸 다. 이런 동행 안내를 통해 직원들은 환자 입장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져 업무 시 환자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특수계 간호 팀에서는 부서에서 공감간호를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UCC로 제작하여 발표하고 롤플레잉을 하는 시간을 갖고 공감간호에 대해 점검하고 부서 간의 이해를 돕는 기회를 마련하였 다. 병동계 간호 1팀에서는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작성하여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생 각해보는 시간을 갖고, 대화할 때 상대방을 평가한다든지 자신만의 생각으로 해석하지 않고 관찰 과 느낌으로 듣기와 말하기, 대화 시 손잡기, 존칭어 사용하기 내용으로 만든 공감 대화 체크리스 트를 작성하여 자신의 대화 습관을 점검하고 습관화하여 공감표현이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공감 체험 확산을 위해 경력 간호사 모임에서는 해피바이러스 활동을 하였는데 연초에 실시한 경력 간호사 (가이드엔젤 & 프리셉터) 워크숍을 통해 매달 수행할 내용을 자발적으로 도출하고 각자 부서에서 실행한 후 네이버 밴드를 통해 인증 사진과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해피바이러스 활동 내용에는 부서원들 안아주기, 부서 막내 간호사와 공연 보고 식사하기, 후 배 간호사를 위해 티타임 준비하기, 스승의 날에 UM에게 라운딩 페이퍼로 감사하기, 부서원 칭찬 하기 등등이며 훈훈한 모습들을 밴드를 통해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신입 간호사가 배치되어 12개월 정도에는 환자 체험활동을 하는데, 호흡기 치료 체험, 입 Action Plan Story ∙ 27


과 코에 흡인해보기, 차가운 소독약 닿는 느낌 경험, 수술대에 올라가 누워보기, 부목을 대보고 목 발로 걷기, 휠체어 타보기 등등 부서마다 환자 특성에 맞게 구성된 환자 체험활동을 하여 환자를 이해하고 환자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 경력 간호사들은 타부서 체험을 통해 타부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체험을 하고 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환자를 체험하고 타부서를 체험하고 공감한 내용을 수기로 모아 선정된 수 기는 전시를 통해 공유하고 있고 책자로도 발간되었으며 공감간호 문화로 확산해 나가고 있다. 이런 노력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실행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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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희망의 씨앗 서울성모병원 | 162Unit

환자의 영적 상태가 환자의 치료 과정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24시간 환자의 곁에서 돌 봄을 실천하는 간호사들은 환자를 간호하는 과정에서 영적 돌봄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경 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울성모병원 간호 1팀은 영성위원회 모임을 통해 영성간호 활성화와 표준화를 위한 실 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영성간호를 접하였을 땐 접근법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시작하여야 할지 의문점 가득한 채 로 출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이 있었지만, 간호 1팀 영성위원회 모임에 참석하여 1 팀 안에 다른 병동의 영성간호 활동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며 영성간호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Action Plan Story ∙ 29


그리고 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던 계기는 서울성모병원에서 2009년부터 시작된 영적 돌 봄 리더십 프로그램(SCLP) 참여입니다. 영적 돌봄 리더십 프로그램을 통해 환자를 위한 영성간 호와 더불어 간호사 자신의 영적 요구를 채워가고 치유받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재도 영적 돌봄 리더십 프로그램의 병동 간호사들의 참여는 매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간호 1팀의 영성간호 위원회 활동과 영적 돌봄 리더십 프로그램 등 기관에서 제공해 준 활동을 통 해 어렵게만 느껴졌던 영성간호를 보다 쉽게 접근하고 이해하게 되었고 영성 활동의 밑거름이 되 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밑거름을 바탕으로 병동에서는 환자 우선의 전인치료를 위한 영성간호 활 동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활동은 환자와 간호사를 위한 기도입니다. 환자와 간호사를 위한 기도문을 만들어 매 근무 전 간호사들이 모두 함께 기도를 하고 CMC인 을 위한 행동규범을 낭독합니다. 하루하루의 허락된 삶을 축복으로 소중히 여기고 감사한 마음으 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며 병마와 싸우고 있는 환자들을 위해, 그들을 간호하는 간호사들이 힘듦 속에서도 환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환자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간호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기도 후에는 항상 CMC인을 위한 행동규범을 함께 낭독하고 근무를 시 작합니다. 근무 시작 전 이러한 시간을 통해 마음을 가다듬고 정리할 수 있었고 근무 시 육체적으로, 정신 적으로 힘듦이 있을 시에도 근무 전 기도했던 그 순간의 그 마음을 생각하며 항상 웃으며 미소를 잃지 않고 진정 환자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간호할 수 있었습니다. 근무 전 CMC인을 위한 행동규범을 낭독하며 나는 어떤 CMC인이었는지, 어떤 CMC인이 되어 야 할지 생각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우리는 기관의 변화만을 바래왔 던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이 기관을 위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으 며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CMC인을 위한 행동규범을 마음에 새기고 마음에 새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마음에 새 긴 것을 바탕으로 근무 시 진정한 CMC인이 되기 위해 CMC인을 위한 행동규범을 실천해 나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활동은 ‘거룩한 이름 부르기’입니다. ‘거룩한 이름 부르기’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영적 돌봄 리더십 프로그램(SCLP) 과정에 참여하 면서입니다. 병동 간호사들이 점차적으로 영적 돌봄 리더십 프로그램(SCLP) 과정에 참여하고 있 30 ∙


지만, 아직 병동 간호사 전체가 영적 돌봄 리더십 프로그램(SCLP) 과정에 참여한 것은 아니기 때 문에 ‘거룩한 이름 부르기’를 모르는 간호사들에게도 ‘거룩한 이름 부르기’를 알리고, 함께 하고자 우리 병동은 간호사마다 각자 거룩한 이름을 정하도록 하였습니다. 각자의 거룩한 이름을 개인 사물함 안쪽에 부착하여 출근, 퇴근 시에 거룩한 이름을 지속적으 로 인지하고 부르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우리 간호사들은 근무하며 순간순간, 일상생활에서도 순간순간 자연스럽게 거룩한 이름을 부 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근무 시에는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환자를 간호하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환자를 위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 해 간호하며 거룩한 이름을 불렀습니다. 또한, 순간순간 거룩 한 이름을 부르며 생각한 것은 환자를 위한 기도를 미루지 않고 순간순간 짧게나마 거룩한 이름 을 부르듯이 환자를 위한 기도를 하자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평소 환자를 간호하며 ‘오늘은 OOO님을 위해 기도해야지.’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퇴근 후에는 잊어버리거나 기도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기도를 길게는 못 하지만, 마음을 다해 진심으 로 그 순간 환자를 위해 기도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여 간호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거룩한 이름을 부르듯이 환자를 위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환자를 위하는 마음 그대로를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는 환자를 위한 기도였지만 기도를 통해 우리들 자신도 치유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바쁘 고 힘든 업무지만 자신과 가족을 위한 기도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하며 더 큰 보람을 느끼고 치유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거룩한 이름 부르기’는 우리 병동 간호사들의 일상에 서 빠질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었고 항상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환자를 위한 시간, 우리 자신을 위 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활동은 수술 전, 후 기도입니다. 수술실로 이동하기 전 담당 간호사가 수술 전 기도문을 통해 기도를 하고, 수술 후 1일째 담당 간호사가 수술 후 기도문을 통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항상 똑같이 반복하여 수술 전 간호, 수술 후 간호를 하며 환자 개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근무를 하며 환자의 마음으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니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게 된 다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서 얼마나 큰 사건일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간호사들은 수술 전, 후 진심을 담아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큰 감정의 기복 없이 담담해 보이던 환자도 수술 전 기도가 시작되면 어느새 눈에는 눈 물이 가득 고여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다며 수술 잘 받고 오겠다는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작은 기도에 감사하는 환자들에게 마음의 선물을 받은듯하여 도리어 더 큰 감사함을 느낍니다. 수술 후에도 잊지 않고 병문안 온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수술 전에 기도해 준 간호사라고 하면서 참 고 Action Plan Story ∙ 31


마운 분이라고 소개해 줄 때면 큰 보람을 느끼고 간호사가 된 것에 감사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환자에게 짧은 시간의 기도를 한 것이지만, 환자들은 더 큰 행복과 보람을 우 리들에게 돌려주며 간호사로서 계속 근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줍니다. 우리들도 환자들이 더 큰 사랑을, 진심을,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계속해서 영성간호를 발전시켜 나가도록 노력할 것 입니다.

네 번째는 영적 돌봄입니다. 우리 병동 간호사들은 영적 돌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환자에게 영적 돌봄을 실천하고 있습 니다. 처음엔 바쁜 업무 속에서 영적 돌봄을 한다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해야 한다는 의무감 에서 형식적으로 수동적으로 시작되었지만 한 번, 두 번, 조금씩, 천천히 영적 돌봄을 실천해 나가 며 환자들의 변화를 경험하고 모두 진심을 다해 영적 돌봄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두 명의 환자에 대한 영적 돌봄 체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사례입니다. 직장암을 진단받은 39세 여자 환자로 수술과 항암치료를 반복하면서 치료 를 받았지만, 질환이 진행되면서 통증 조절을 위해 입원하였고 입원 기간 중 환자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심폐 소생술 포기(DNR) 요청서를 작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어 갈수록 환자의 통증도, 보호자들의 정신적 고통도 더해 갔습니다. 환 자의 나이도 젊은 편이었고 자녀도 어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컸습니다. 우리 병동의 모든 간호사들은 이 환자를 위한 영적 돌봄 활동을 하였고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환 자와 보호자를 이해하고 간호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결국, 돌아가셨지만, 정성을 다하여 임종 간호를 하였고 그 당시 근무하던 간호사들이 임종기도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가족과 함께 환자의 곁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게 환자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생각지도 못했던 보호자가 병동에 방문하였습니다. 임종 환자의 보호자였던 배우자였습니다. 그동안 고마웠다며 작은 선물과 편지를 남겼고 그 편 지엔 아내의 마지막을 함께 해주어 고맙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많이 힘들었 을 그 마음이 느껴지며 자신과 남은 가족들도 모두 많이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텐데 그 힘듦 속에서 도 우리를 잊지 않고 생각해 주었다는 것만으로 큰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두 번째 사례입니다. 대장암으로 진단받고 암 치료의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지만, 환자와 보호자의 바람과는 달리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3~4개월 동안 증상 완화를 위해 입. 퇴원을 반복 하면서 임종의 순간이 다가온 환자였습니다. 환자는 독실한 믿음이 있었고 질환을 견디어 내고자 하는 바람과 의지가 강하여 보통 그 상태 32 ∙


의 환자라면 움직이는 것과 고통이 심했을 터인데도 포기하지 않고 견디었습니다. 하지만 질환이 진행되면서 여러 신체적 문제들이 생기며 하루하루 통증은 커져갔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순간이 왔습니다. 상태 악화로 타 병동으로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병실을 방문하니 아들과 딸이 환자의 옆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환자는 거칠게 호흡하며 안정되어 보이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누워 있었고 의학적으로 무언가를 더하여 편안하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냥 환자의 곁을 지키며 기 도하며 함께 하는 것이 최선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성경책 읽기와 기도를 하던 환자의 일상 모습을 생각하며 수녀님과 함께 간호사, 보호자는 환자의 편안함을 구하는 자비의 기도를 함께 하였습니 다. 기도를 마치며 정말 기도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처럼 환자의 모습과 숨소리가 안정되 어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후 환자는 기도 안에서 아들, 딸과 함께 하루의 시간을 보내고 임종 을 맞이하였습니다. 고형암 병동으로 치료를 받던 중 임종하는 것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는 부분 중의 하나였습니다. 피할 수는 없지만, 치료를 시작하고 임종까지 최대한 마음의 힘이 되어 드리고 병원에 어쩔 수 없이 치료만을 위해 오는 곳이 아닌 병원에 오면 희망을 꿈꾸고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지속적으 로 영적 돌봄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영적 돌봄의 시작은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것으로 시작했지만, 영적 돌봄을 실천할수록 간호사 로서, 한 개인으로서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더 큰 사랑을 되돌려 받고 치유 받는 시간이 되었습니 다. 그런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감사함을 느낍니다. 이러한 162병동 영성간호 활동의 시작은 어렵게만 느껴졌고 어떻게 해야 할지 의문점 가득한 물음표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영성간호라 하면 종교적인 행사 중 하나로 여겨지고 종교가 다 르거나 없는 간호사는 어떻게 영성간호를 해야 할지, 종교가 다르거나 없는 환자에게 영성간호 활동을 했을 때 어떻게 받아들일지 등 시작하기 어렵게만 느껴지고 수동적인 활동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영성간호가 어떤 것인지 기관을 통해 지속적으로 배우고 느끼며 영성간호 활동은 종교 적인 관점에서만 실천하고 느끼는 것이 아닌 누구나 실천하고 느낄 수 있는 활동이라는 것을 알 게 되고 보다 적극적으로 환자에게 다가가 영성간호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의 영성간호는 느낌표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영성간호 활동을 실천하며 환자들 의 변화되는 모습에 의료진 역시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감사한 시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영성간호 활동으로 환자들에게 서울성모병원이 희망과 행복의 씨앗이 될 수 있도록 계 속해서 영성간호 활동을 하고 환자들의 곁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162병동이 되겠습니다.

Action Plan Story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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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사랑의 나무 서울성모병원 | 방사선 종양학팀 | 백준규

‘여보 사랑해! 긍정의 힘으로 가족의 사랑으로 우리의 역경을 이겨 나가자고요’ ‘딸들이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엄마 사랑해요’ ‘지금 힘든 거 잘 참고 이겨내자 여보 사랑해 나보다 더 사랑해’

나무가 자랍니다. 해가 들지 않고 물 한 방울 머금지 못해도 사랑의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납니 다. 사랑의 나무에는 환우 분들 혹은 보호자분들의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긴 열매들이 달려있습니 다. 그들의 간절함과 바람을 담은 나무를 짊어진 채 우리는 항상 최선을 다합니다. 삐뚤빼뚤한 글 씨로 가득 담은 어린아이의 작은 소망도, 또박또박 눌러 쓴 할머님의 소중한 바람도 모두가 소중 Action Plan Story ∙ 35


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서울성모병원 방사선종양학과 사랑의 나무는 꿈을 키워갑니다. 서울성모병원 방사선종양학과에서 사랑의 나무를 키우기 시작한 지 어느덧 1년…. 환우 분들뿐 만 아니라 직원들도 많은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낯설고 두려웠을 나와 내 가족의 첫 방사선치료. 여기저기 과 내부를 둘러보다 사랑의 나무를 발견합니다. “용기 내! 힘내! 포기하지 마!”라고 쓰여 있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의 글을 읽고, 부끄럽지만 포기하고 싶었던 나약해진 마음을 질책하며 다시 힘을 내는 환우도 있었고, 다른 환우의 보호자 가 쓴 글에서 뜻 모를 동질감을 느끼며 눈시울을 붉히던 보호자분들도 있었으며, 내 가족은 아니 지만 여기 오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사랑의 나무에 관한 가장 큰 기억은, 씩씩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항상 밝고 유쾌한 환우 분을 치료했을 때였습니다. 늘 집에서 손수 요리한 간식을 가져다주시며 별거 아니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시는 너무나 도 따뜻한 아주머니이셨기에 제가 오히려 힘을 받게 되는 분이었습니다. 매일과 같은 어느 날, 평 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껴 이유를 물었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며 치료를 받기 위해 특수 제작된 베개에 누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밝던 분의 눈에서 별안간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그칠 줄 모르며 흐르는 눈물은 우리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진정하시라며 가져다 드린 휴지를 모두 적시 고 나서야 어렵게 말문을 여셨습니다. 치료를 기다리며 밖에 있는 사랑의 나무를 하나하나 읽던 중 따님이 적어 놓은 내용을 보았고, 불현듯 엄마 없는 세상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딸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 눈물을 쏟아 내셨다고 하셨습니다.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될지 모르겠지만, 따님 생각해서 더 열심히 치료받으셔야 된다는 말에 죄송하다며 꼭 그러시겠다고 다시 웃음을 되찾으시는 아주머니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 었습니다.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웠고 그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에서 이제는 멍든 가 슴과 상처만이 남아있을 환우 분들께 사랑의 나무가 줄 수 있는 감동과 의미는 무한하다고 느꼈 습니다. 방사선종양학과를 찾는 모든 환우 분들은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아버지일 것이며 세상 가장 사랑하는 남편일 것이고, 본인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아들일 것이며, 누군 가에게는 세상 가장 위대한 어머니일 것이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며, 늘 고생만 시켜 미 안한 아내일 것입니다. 밤새 병상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마음속으로 대답 없는 작은 기도뿐이었을 그분들에게 용기 내 어 하고 싶었던 말들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치료를 기다리는 동 안에도 지루하게 반복되는 TV만을 바라보시던 환우 분들이 한 걸음 더 움직이시며 사랑의 나무 를 둘러보시는 일이 잦아졌고, 삭막하기만 했던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꿔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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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 또한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의 나무를 보게 됩니다. 우두커니 자리 잡고 있는 사랑의 나 무를 바라보며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소중하실 환우 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단 다짐을 하고 또 하게 됩니다. 땅속이 아닌 마음에서 자라는 방사선종양학과 사랑의 나무는 저마다의 추억을 간직 한 채 오늘도 내일도 환우 분들의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Action Plan Story ∙ 37


Action Plan Story 장려상

중증외상환자 더 살리기 위한 권역응급의료센터 생명수호의 실천 의정부성모병원 | 응급업무팀

응급센터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 보면 안타까운 상황이 많이 발생됩니다. 그중 다발성 중증외 상 환자가 그런 경우입니다. 경기 북부 지역은 유난히 사고가 많아 자동차 보험도 잘 안 들어 주 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의정부 성모병원은 이 지역에서 크게 사고 난 환자를 돌봐줄 수 있는 유일 한 대학병원입니다. 응급센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고로 다쳐오면 대학병원의 특성상 어떤 임 상과도 입원 장을 주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응급센터에 장시간 체류하게 되고 어떤 경우는 환자의 활력 증후가 불안정함에도 각 임상과 주 치의는 보호자에게 그 과의 환자가 아니라는 설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보호자는 병원이 이상하 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나에게 그런 설명을 하느냐고. 병원에서 정리하여 입원시켜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울먹이다 나중에는 큰 소리로 울분을 토해냅니다. 2010년 보건복지부에서 중증 외상 특성화 센터 사업 공모가 났습니다. 의정부성모병원은 이 38 ∙


사업을 공모 후 유치에 성공하였고 그 후 우리나라 최초로 외상 외과를 신설, 중증 외상 당직체계 를 구축하여 유지하면서 이런 안타까운 사연은 해결이 되었습니다. 외상 외과 전문 팀이 365일 24시간 운영이 되고 한 달에 한 번은 중증외상 환자를 담당하는 교 수님들과 전공의, 전담간호사, 행정직원까지 집담회를 통해 중증 외상 환자 치료의 질 향상을 위 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지역주민과 밀착된 모습을 보이며 권역 응급의료센터는 발전하고 권역 외 상센터 유치를 향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중증외상 환자의 신속한 응급진료와 처치로 환자뿐 아 니라 그들의 가족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있으며 이러한 우리들의 노력이 예수 그리스도 사랑을 우 리 안에 체현하는 모습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다음은 중증외상 환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응급센터와 센터 중환자실을 통하여 전달하였던 노력과 사연을 소개합니다.

★ 응급센터 중증 외상 환자가 발생하면 병원 전 단계의 적절한 응급처치 및 빠른 이송, 병원 도착 후 골든 타임 안의 신속한 외상진료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환자의 생존 및 예후에 많은 영향을 미치 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권역 내 소방서 및 유관기관과 핫라인을 개설하여 신속한 이송체계 를 구축하였습니다. 외상 외과 교수님과 전담 간호사는 환자의 생존율 향상을 위해 경기 북부의 소방과 연계하여 헬기에 탑승하며 환자를 이송, 병원 전 단계에서도 최상의 환자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매월 권역 내 소방 구급대원 현장 방문 간담회를 하고 지역 응급실 방문하여 중증 외상 환자의 이송체계에 대한 홍보와 교육을 시행하여 지역 응급의료 네트워크를 구축해 지금은 중증 외상 환자는 의정부 성모병원으로 거의 이송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119 소방 구급대원들을 대상으로 10여 차례 전문화 교육 프로그램을 원내에서 운영하여 현장 에서의 응급 외상 처치 등을 실습과 함께 교육했으며 대량 재난에 대비한 훈련 등을 여러 차례 진 행하여 예방 가능 사망률을 낮추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중증외상 환자의 유치를 위한 병원 전 활동에 이어 병원에 도착한 환자를 혼신을 다해 살렸던 소중한 기억이 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던 11월의 어느 날 ‘따 르릉~’ 외상 환자가 응급실에 왔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제발 대박 환자가 아니기를 바라며 우리 외상 외과 팀은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팀이 도착하 기 5분 전에 응급실에 이송되어 왔다는 환자의 상태는 느낌이 좋지가 않았습니다. 이송 시부터 구 Action Plan Story ∙ 39


급대원들이 고농도의 산소를 투여하며 왔다고 했는데, 몸은 새파랗게 변해 있었고, 숨을 쉴 수가 없다며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물류창고에서 일을 하다가 4m 높이 정도에서 떨 어져서 발생한 외상 환자였습니다. 맨 처음 초음파로 가슴과 배 안을 신속하게 검사했습니다. 초기 판단으로 배 안의 상태는 나쁘 지 않았지만, 가슴을 확인했을 땐 외상성 기흉과 혈흉을 의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환자가 외상 을 입을 때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폐를 찔러 폐가 쪼그라들고 폐 안에 피가 차는 것입니다. 당장 흉관 삽관을 시행하지 않으면 환자가 죽을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환자는 죽을 것 같다 며 소리를 치고 매우 요동하며, 괴로워했고 치료 과정에 전혀 협조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외상전담간호사는 환자를 끌어안듯 힘으로 잡았고 한쪽에서 외상 외과 교수님은 빠른 판단과 능 숙한 기술로 흉관 삽관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응급의학과에서는 환자의 기도를 유지하기 위해 기관 삽관을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순식간에 달려들어 빠른 처치를 시행하였고, 오른쪽 폐에 흉관이 삽입되어지고 흉관이 가슴을 뚫음과 동시 에 ‘피히~~’하고 바람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환자의 안색이 드라마틱하게 편안하게 바뀌 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10분~20분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삽관된 흉관에서는 가슴에 고여 있던 피가 850cc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환자가 숨을 쉴 수 있고 편안해하자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었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환자가 어느 부분을 다쳤는지 알아볼 차례입니다. 환자는 바로 CT실로 옮겨졌 고, 머리, 가슴, 배 골반 촬영을 했습니다. 예상대로 환자는 뇌출혈과 얼굴뼈 골절, 갈비뼈 골절과 혈흉, 기흉 등의 중증 외상을 입었습니다. 따라서 바로 입원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환자 도착과 동시에 입원 병상을 마련하고 스탠바이 하고 있던 중환자실과 연락하여, 응급실 도착 1시간 40분 만에 중환자실로 입원했습니다. 응급의학과와 응급실 간호사, 외상 외과, CT실, 중환자실까지 모 두가 하나가 되어 협조하지 않는 이상 이런 중증외상 환자를 1시간 40분 만에 응급처치 후 집중 치료를 위한 입원이 가능할까 생각해 봅니다.

★ 센터중환자실 우리의 인생에서 절대 놓칠 수 없는 골든타임은 언제일까요? 2013년 11월 추운 겨울 어느 날, 이곳은 중증외상 환자분들의 생명 수호천사들이 일하고 있는 응급센터 중환자실입니다. 센터 중환자실에는 이십여 명의 중환자들이 의료진의 도움을 받으며 치료하고 생사의 갈림길 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주렁주렁 수액 나무와 가늘고 긴 튜브에 의지하여 힘겹게 숨 쉬는 40 ∙


그분들의 생명 하나하나는 누군가에게 절실하고 소중하고 없어서는 안 될 희망, 버팀목이 되어줄 존재일 것입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저는 늘 환자 한 명 한 명의 골든타임을 보고, 생명의 존엄성 과 동시에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고 또 느끼고 있습니다. 일하다가 지하 창고에서 4m 아래로 추락한 김 00 님, 검사 결과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 폐 에 심각한 좌상과 출혈, 기흉, 뇌출혈까지 생겨 중증외상 환자로 응급센터를 통해 응급센터 중환 자실로 입원하였습니다. 김00 님은 구축된 중증 외상진료 시스템에 의해 원내 대기하던 외상 전담팀이 신속한 검사와 함께 즉시 처치를 시행한 후 뇌출혈과 폐 손상으로 집중치료를 위해 중환자실로 입원하였습니다. 오른쪽 가슴에 삽입된 흉관과 기도유지를 위한 튜브, 그리고 응급 수혈을 위한 중심정맥관이 있었습니다. 의식이 있었던 환자에게는 튜브를 스스로 제거할 수 있는 위험이 있어 억제대까지 적용하였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까?’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속으로 마법의 주문을 외 웠습니다. 꼭 건강해지셔서 지금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아닌 웃는 얼굴로 다시 뵐 수 있도록 기도 하였습니다. 의식은 희미하게 있지만, 입안에 있는 튜브와 말 못할 답답함 그리고 통증과 고통 속에 환자는 정신없이 몸을 뒤척이고 벌떡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불안해하는 환자를 안정시키기 위해 설명하 고 주치의 처방에 따라 안정제 약물까지 투여하였고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헐떡이는 환자의 호흡 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호흡기 치료와 시간에 맞춰 흡입도 하고, 출혈에 대한 응급 수혈과 예방적 항생제 치료도 진행되었습니다. 그런 중증외상 환자를 응급센터에서부터 당황하고 정신없었던 상황 속에서 가장 무섭고 두려 움을 느낄 사람은 바로 옆에 늘 함께였던 가족일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중환자실 밖에서 난간 에 기대어 흐느껴 울고 있는 딸과 부인을 가까스로 위로하고 입원 안내와 환자 면회를 도와드렸 습니다. 환자도 너무 힘들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 또한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고 아플까? 내 가족이라면, 내 아빠라면 나 또한 가슴이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 하나뿐인 아버지를 위해 딸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진심으로 담아 손 편지에 적어 나에게 주었고, 환자의 의식이 깨어나면 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딸의 손 편지를 읽어줄 기회가 생겼고, 오후 면회시간이 되기 전, 아버지를 위한 딸의 간절한 마음의 기도를 들려드렸습 니다. “사랑하는 아빠… 빨리 일어나세요. 빨리 일어나서 건강한 모습 보여주세요.” 그 순간 딸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눈물을 흘리셨고, 오후 면회시간이 되어서는 늘 슬픔 속 에 잠겨있던 가족들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보였습니다. 폐 손상과 뇌출혈은 무섭고 두려움이었 지만, 이 두려움을 싸우고 이겨내며 드디어 일반 병실까지 갈 수 있을 만큼의 컨디션으로 회복되

Action Plan Story ∙ 41


었습니다. 흐릿했던 의식도 점차 또렷해지고, 인공호흡기에 의지했던 호흡도 안정화되었습니다. 그렇게 일반 병실로 이실 하셨고, 일반 병실에서 집으로 퇴원하기 전, 중환자실까지 오셔서 “살려줘서 정 말 고맙다”며 그동안 중환자실에서 어려웠던 순간순간들이 기억나시는지 기쁨의 눈물과 함께 감 사의 인사를 전해주셨습니다. 이 말은 가장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또 가장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습니다. 내 마법의 주문이 효과를 발휘했던 날 살려주셔서 고맙다고 하셨지만, 오히려 난 “살아주셔서 포기하지 않 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동반하는 중환자실에서의 긴박함과 응 급상황, 긴장감은 언제나 있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보람과 기쁨을 느낄 때가 정말 행복해지는 순 간입니다.

오늘도 그 행복한 순간을 느끼기 위해서 고통에서 힘겨워하는 환자분들의 생명 수호를 위해 기 도하며 소명을 다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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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사랑의 예술 서울성모병원 | 가정간호센터 | 조순화

저는 신내동 본당에서 가정간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87세 할머니는 첫 방문 때 삶이 얼마 남 지 않아 보였고 앙상하게 야윈 모습으로 눈을 감고 말씀도 못 하고 치매로 인지가 떨어져 사람도 못 알아보고, 미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계셨습니다. 그러나 소변 줄을 교환할 때 유일하게 움직이 는 오른손으로 아래를 가리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수치심과 긴장으로 힘을 줘서 소변 줄이 빠져 나와 간신히 교체하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부터 방문을 가면 미소를 띠며 혼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어디 갔다 왔느냐?” 고 하 시기도 하며 묻는 말에도 반응하셨습니다. 보호자인 막내아들이 “돌아가실 것처럼 상태가 나빠 눈도 뜨지 않고 숨을 몰아쉬곤 했는데 간 호사님만 오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짝하며 눈을 뜨고 반응을 하신다.”며 본인은 몇 년을 돌봤 는데 서운할 정도로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시고 반응도 잘 안 하시는데 서운하기도 하며 이상하 Action Plan Story ∙ 43


다고 하셨습니다. 신앙 안에서 뭔가 느끼는 것 같은 말을 몇 번 하셨습니다. 보호자인 아들이 1년 전 세례를 받고 할머니는 대세를 받으셨습니다. 새 신자인 그분들에게 신 앙의 선배로서 모범이 되어야 했고 더 많이 사랑해야 함을 느꼈습니다. 소변줄을 교환할 때는 최소 부위만 남기고 이불로 덮어드리고 알아들을지는 잘 모르지만 다정 하게 말을 건네 수치심을 덜 느끼게 하였고, 팔을 주무르면서 긴장을 풀어 드렸습니다. 방문할 때 는 할머니 이름을 부르며 손으로 푹 꺼진 양 볼을 만지며 반갑게 인사를 하면 미동도 없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다 금방 눈이 초롱초롱 빛이 나곤 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시작기도를 바치고 치료가 끝난 후에는 진심을 담아 “고생하셨어요. 많이 아팠지 요? 죄송해요.” 그러면 통증으로 지친 얼굴이었지만 괜찮다는 듯이 인자하게 바라보셨습니다. 할 머니를 뵈러 가기 전에 성령께 지혜를 청하고, “예수님 제 손을 통해 소변 줄을 아프지 않게 넣어 주시고, 욕창을 치료하시어 살이 빠르게 차오를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청했습니다. 실제로 임 종을 앞둔 분의 욕창이 많은 차도를 보였습니다. 어느 날 손자 손녀가 ‘욕창이 호전되면 입교를 하겠다.’고 말했다며 들떠서 말씀하셨습니다. 어 떻게 하면 아름답고 소중한 임종을 맞이하게 도와드릴 수 있을까? 구역 반장의 도움이 없어서 성 당의 레지오 단원을 방문하게 하여 기도와 임종 후 준비를 도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봉성체 때 는 정성껏 돌보는 아드님 이야기를 들려드리며 사랑의 예술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할머니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며, 사후 시신 을 만지는 것이 처음이었지만, 두려움과 무서움을 없애주시고 사랑만 하게 해달라고 청하며, 임종 교육받은 것을 기억하며 바로 출발하였습니다. 소변줄을 빼고 얼굴과 회음부를 닦아드리고 항문을 닦으려 하는데 대변이 나와 있어서 닦았는 데도 또 나오고 또 나와 장갑을 여러 번 바꿔 끼면서 깨끗하게 닦아드렸습니다. 엉덩이의 욕창을 예쁜 모습으로 보내드리고 싶어서 깨끗한 거즈로 다시 예쁘게 붙여 드렸고 모 든 구멍은 탈지면으로 막아드리고 입을 벌리고 계셔서 가지고 간 턱받이를 사용하여 입을 다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늦게 도착한 가족들이 할머니를 보고 무서움을 느끼지 않게 보호자와 함께 새 옷을 갈아입히고 하얀 인조 홑이불을 덮어드리고 하얀 조화 한 송이와 묵주를 가슴에 놓아드 리고 임종 기도를 함께 바쳐드렸습니다. 근무 중 시간을 쪼개서 연도를 바칠 수 있었고 출근하여 환자 방문 전에 영전에 인사를 드렸고, 할머니와의 추억을 생각하며 장례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저를 아주 소중한 사람 대하듯하였고, 평소에 저를 관찰하는 태도를 보인 성당 자매가 수습하는 과정을 지켜본 후 호의 적인 표정으로 정말 고생 많이 하신다고 하며 진심 어린 사랑의 표현을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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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사무실을 방문하여 2명의 자녀가 ‘장례식 및 모든 과정을 보고 입교했다.’며 벅찬 얼굴로 은총과 축복을 받은 것 같다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느님 백배의 사랑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Action Plan Story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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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가 이어준 7년간의 소중한 인연 서울성모병원 | 17층1병동 | 허선미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성모병원 17층 1병동 위암 병동에서 근무하는 허 선미입니다. 제가 중환 자실에서 암 병동으로 부서 이동하여 수간호사로 근무한지도 2년이 다 되어가네요. 병동에서 정 신없이 암 환자분들과 우리 간호사들과 씨름하다 보면 내가 중환자실 간호사였던 적이 있었나 싶 게 먼 옛날같이 희미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이럴 때마다 어김없이 제 핸드폰에서 경쾌한 카톡 음 과 함께 한 사람의 이름이 뜹니다.

“이형*님께서 쿠키런에 초대하셨습니다. 함께 달려요.”

제가 답장을 잘 안 해도 열심히 꾸준히 저를 초대해 주시는 분. 그분의 이름을 볼 때마다 제 가 슴속 한쪽부터 따뜻해지면서 가슴 전체가 먹먹해집니다. 제가 심장계 중환자실 간호사였다는 사 46 ∙


실을 상기시키고 자부심을 갖게 해주시는 그분이 또 저를 부르시네요. 이형*님은 구 강남성모병원에서 심장이식(heart transplantation)을 받으시고 외래를 방문하시 면서 현재까지 건강하게 생활하시는 45세 순환기내과 남자 환자분이십니다. 2007년 6월 22일 악화되는 심부전으로 인해 38세의 젊은 가장은 여러 종류의 심장 수축 보조 약물에 의지한 채 희 망도 없이 심장계 중환자실에 누워계셨습니다. 하얗고 마른 얼굴에 숨이 차서 잠시도 눕지 못하 고 말을 제대로 할 수도 없는 상태였지요. 너무 힘드시니까 중환자실 간호사들에게 짜증도 많이 내서 간호사들이 환자를 지켜보면서 힘들어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살 수 있는 방법은 심장이식뿐이라는데, 그 당시 강남성모병원에서는 1995년 첫 심장이식 환 자가 이식 일주일 후 사망하여 근 8년간 심장이식을 시도하지 않고 있었기에 강남성모병원 재원 환자분들은 심장이식의 성공 희망은 없다고 중환자실 간호사인 저조차도 생각했던 때입니다. 또 한, 환자분은 의정부에서도 버스로 1시간 이상 더 들어가는 포천 시골에 살고 계시면서 보호자인 부인 혼자 경제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시골 어린이집 선생님인 부인의 벌이로는 도저히 몇 천만 원이 드는 심장 이식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제 남편의 모습과 투영되어 지켜보면 서 참 많이도 제 마음이 힘들었던 환자분이었지요. 환자분이 근 한 달 간을 힘겹게 중환자실 생활을 하시던 중 심장이식을 할 수 있다는 소식이 들 렸습니다. 17세 남자 donor가 발생하였던 겁니다. 죽어가는 한 생명이 새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 바로 하느님의 기적인데, 그 새 삶의 주인공이 이형*님이 된다는 것은 기적 중에서도 가장 높 은 수준의 기적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 환자의 수술 계획부터 수술 후 회복까지의 과정 들이 7년이 지난 지금도 제 머릿속에서 한편의 파노라마로 생생히 지나가는 것은 아마도 그 모든 과정들이 기적의 연속이었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그분과 저와의 소중 한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2007년 2월 기관에서 좋은 기회를 주셔서 6주간 미국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나름 그 연수 를 위해 임신 중에도 어학 공부를 하며 근 3년간을 공들여 준비해 제 전공을 살려 미국 내 가장 유 명한 심장전문병원 3곳에서 연수를 마쳤는데 6주간의 미국 연수 마지막 날 밤 샌프란시스코 팔로 알토에 위치한 스탠포드 대학병원에서 갑작스럽게 심장이식수술을 직접 견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식수술은 밤에 시작했고 저의 정기견학 시간이 끝났음에도 저는 고집을 피워 견학에 참여했 습니다. 70세 심부전 노인 환자의 농구공만 한 심장이 꺼내지고, 그 반도 안 되는 크기의 20세 남 성 심장이 70세 노인에게 연결되어 다시 살아나는 생생한 느낌, 이식된 심장을 만졌을 때의 느낌, 수술 전 수술실과 중환자실 담당 간호사들이 수술 받는 환자를 방문하여 설명하고 안아주고 걱정 말라고 위로해 주는 모습, 수술 후 방문한 환자가 첫 번째 깨어났을 때 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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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모든 수술과 회복 과정은 저에게는 흥분과 감동의 연속이었으며, 나도 심장이식수술에 참여하는 저런 의료인이 되고 싶다는 갈망과 스탠포드 심장이식 팀에 대한 경이로움에 잠을 이루 지 못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심장이식 수술의 흥분을 뒤로 한 채 2007년 3월 말 귀국길에 오르면서 저는 제 인생에서 심장 이식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4개월 후 저희 병원에서 심장이식을 시도한다는 겁니다. heart donor가 생기자 이식에 참여할 순환기내과, 흉부외과 교수님, 전담 의 사들, 심장계 중환자실 수간호사 선생님, 중환자실 간호사들 모두 중환자실에 모여 로드맵을 그려 가며 흥분 속에 회의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제가 4개월 전 어렵게 미국에서 심장이식 수술의 일련 과정을 견학할 수 있었던 것이 하 느님이 예비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제가 수술 직후 이형*님을 간호해야겠다는 사명 감이 들었습니다. 이런 제 마음을 아셨는지 수간호사 선생님께서도 저를 불러 “허 선생이 수술 후 환자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저는 당연히 제가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2007년 7월 25일 밤 10시 환자는 심장이식 수혜자로서 모든 검사를 마치고 수술을 위해 9층 병실에서 대기하고 계셨습니다. 다음날 오전 수술실에서 나오는 환자분을 받아야 하는 저는 7월 25일 저녁에 퇴근을 해야 했으나 그냥 집으로 가서 쉴 수가 없었습니다.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수 술 전 환자분을 뵙고 싶다는 열망이 올라왔습니다. 7월 25일 밤 10시 30분 저는 환자분을 찾아 9 층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환자분과 보호자(아내)는 중환자실 간호사님이 올라오셨다며 제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저는 눈물이 나서 고개를 들 수 없는데 환자분이 담담히 이야기하셨습니다.

“심장 이식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수술 후 환자의 담당 간호사이고 수술 후 환자분이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 니다. 모든 준비 과정 중에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고,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단잠 주무세요. 중환자실에서 처음 눈을 뜨시면 저를 보시게 될 거예요.” 하고 말하고 두 분을 안아드렸습니다. 그리고 병실을 나와 복도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30분 후 환자분은 수술실로 들어가셨습니다. 다음날 오전 8시 환자분은 무사히 수술을 끝내시고 중환자실로 나와 오후 4시경 마취에서 깨어 나 저를 알아보셨고 힘겹게 제 손을 꼭 쥐셨습니다. 나중에 환자분 말씀이 그때 제가 천사로 보였 다고 하시네요. 그 이후 환자분은 의료진의 노심초사와는 다르게 일사천리로 회복하셔서 퇴원하셨습니다. 퇴 원하시면서 수술 후 열이 나거나 감기 증상이 있거나 몸이 좀 이상하면 언제든지 저에게 연락하 시라고 했더니 환자분과 보호자가 무수히 저에게 전화로 문의를 하셨고 몇 년 후 제가 수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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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어 부서 이동을 했는데도 자주 저를 찾아오셔서 인사를 하셨습니다. 가끔 부부싸움 상담까 지 해드린 적도 있었네요. 환자분은 퇴원 후 매번 시행되는 반복되는 심장조직 검사에도 잘 견디 시어 2012년 7월에는 이식에 참여했던 의료진들과 함께 생존 5주년 기념 파티도 조촐하게 하셨 습니다. 벌써 7년 전 일이네요. heart(심장)가 이어준 소중한 인연. 최근에 얼굴을 못 본 지 일 년이 넘 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카톡으로 본인의 안부를 알려주시는 따뜻한 분. 7년간의 소중한 인연을 주신 그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건강하셔요. 이형*님.

Action Plan Story ∙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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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한 삶, 내 일이 이끄는 삶을 살자 서울성모병원 | 호스피스병동 | 서현미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비참한 죽음이 될 수도 있고, 마지막 나날 들이 좋았다고 회상하며 맞는 '바람직한 죽음'이 될 수도 있다. 만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 존엄하게 죽기를 바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은 물론 의료진으로부터도 깊은 존경을 받으며 죽을 수 있다면 그 순간에 더 바 랄 게 있을까?! 오랫동안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로 임상에 있으면서 ‘항상 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아프면 꼭 호스피스 케어를 받게 해줘야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정말 가 까운 분들이 말기 암 진단을 받고 호스피스로 와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가족들에게 자신 있게 모든 치료를 포기하고 오시라는 말을 하기는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50 ∙


저에게도 작년에 이런 선택의 순간이 두 번 찾아왔습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일찍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방학 때마다 저는 외갓집에서 삼촌, 이모 들과 같이 지낼 때가 많았습니다. 당연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저에게 엄마, 아빠 같은 존재였 습니다. 그러던 외할아버지께서 전립선암 말기 진단을 받으시고 항암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하였 으나 여러 장기로 전이가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평소 매일 운동과 등산을 거르지 않고 식단 조절도 잘하실 만큼 건강을 잘 챙기시던 할아버지였기에 당연히 우리 할아버지는 잘 극복할 수 있을 거야. 막연히 할아버지를 믿고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병원에서 항암요법과 방사선요법을 받으시고 급격한 체력 저하로 침상에서만 지내시다가 요양병원과 집으로 입. 퇴원을 반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멀리 있다는 핑계로 자 주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부모님을 통해 간간이 소식만 듣고 지내다가 외할아버지의 병세가 급격 히 나빠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부모님의 이야기만 들어봤을 때 제 가족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왜 아직까지 호스피스에 모시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것인데 막상 너무 가까운 가족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자 덜컥 겁부터 나고 자신 있게 호스피스 병동으로 모시자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식을 듣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요양병원 중환자실에 계시고 임종이 임박하였다는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 걸음에 달려갔을 때에는 외할아버지는 이미 의식이 없고 경구섭취가 불가능하여 비위관 삽입으 로 경관 영향을 받고 있었고, 섬망으로 억제대까지 되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평소에 너무나 깔끔하고 인자하신 할아버지의 모습만 보다가 수액과 경관 영양에만 의지하여 힘없이 숨만 쉬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참담한 모습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습니다. 내가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가족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하는 뒤늦은 후회와 자괴감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할아버지가 임종하셨다는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 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슬픔도 컸지만, 저를 더욱 괴롭혔던 것은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해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이 나에게 온다면 그때는 절대로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선택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저에게 또다시 기적 같은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친척 중 유일하게 자주 만나고 연락하는 사촌 언니가 있었는데 결혼 후 몇 년 만에 어렵게 임신을 한 상태에서 우연히 흑 색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임신 상태가 아니었다면 당연히 당장 항암치료를 시작하였겠으나 어렵게 얻는 아이이고 스스 로 내 자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엄마의 마음이 더 컸던지라 사촌 언니는 가족 모두에게 암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혼자서 몇 달을 버텨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병세가 더욱 진행되어 가족들이 모두 알게 되었고 급하게 출산을 하고 항암요법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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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했지만 이미 치료시기를 놓친 터라 수차례 항암요법과 방사선 치료에도 불구하고 진행을 더 막 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도 더 이상 치료방법이 없고 호스피스를 알아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뒤늦은 연락에 많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당장 떠 오르는 생각은 내가 사촌 언니에게 지금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또 남겨질 큰어 머니와 형부, 지금은 저의 조카인 하민이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하고 언니를 잘 보내 줄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이었습니다. 우선 아직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큰어머니에게 현재 상황을 최대한 담담하게 설명해 드리고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으니 최대한 언니가 행복한 순간만을 기억하도록 정리할 시간을 주자고 설 득했습니다. 그리고 지방으로 내려와 지낼 수 있는 호스피스병동과 시설을 알아봐 주고 다행히 친분이 있는 선생님이 계셔서 바로 호스피스 병동으로 입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호스 피스 간호사들과 의료진의 정성으로 며칠 만에 증상이 안정되었고 한 번쯤은 퇴원할 수도 있겠다 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역시 여기로 오기를 잘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언니는 약 3주 동안 입원해 있었고 입원 동안 목욕, 마사지, 가족들과 정원 산책도 자주 했었다고 합니다. 형부도 직장을 그만두고 사촌 언니를 지극히 간호하였고 언니가 의식을 잃기 며칠 전에는 큰어머니께 " 이제는 갈 때가 된 것 같다. 아무 걱정 없이 갈 수 있게 된 거 같아 마음이 너무 편해졌다."는 말을 했었다고 합니다.

곁에서 이 과정을 모두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사촌 언니의 임종 소식을 듣고 내려갔을 때 큰아버지, 큰어머니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입원해 있는 동안 그동안 하지 못 했던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서로를 걱정하고 의지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52 ∙


열심히 간호한 환자와 보호자들을 떠나보내드려야 할 때마다 겪는 허탈감도 있고, 더 최선을 다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아쉬움과 화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가족 곁에서 행복 한 시간을 보내고 임종한 우리 가족들을 떠올리며 내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병동의 모든 환자도 가족들 곁에서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오늘도 다 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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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규범 Action Plan Story 서울성모병원 | 111Unit | 김가연

2010년 입사하여 지난 4년간의 나의 간호사의 길을 돌아보면 난 많은 보호자와 환아들을 만나 면서 다른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 느끼지 못하는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일을 해왔습니다. 그중 작 년 한 해는 병동에서 제가 행한 영성간호 덕분에 바쁜 업무와 일상 속에서도 내가 누군가에게 위 로와 기쁨이 되어 줄 수 있는 직업을 가진 것이 자랑스러운 한 해가 되었습니다. 4월부터 시작된 나의 영성 간호 이야기는 유난히 예쁘고 나를 잘 따라주었던 한 여자아이에 대 한 것입니다. 이식 편대 숙주 병과 Kostmann's syndrome으로 이제 막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아 이는 변화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많이 우울해하고 힘들어했습니다. 근본적인 질병의 치료를 해주진 못하지만 난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아이가 입 원해 있는 동안 30분 더 일찍 출근하여 아이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고 예뻐지고 싶어 하는 아이에 게 위로가 되고자 매니큐어, 핀 등 작은 선물을 주며 친숙한 느낌을 표현했습니다. 처음에는 내성 54 ∙


적이고 잘 웃지 않았던 아이가 저와 함께 이야기하고, 서로의 마음을 공감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 있음으로써 차츰 밝아지고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작은 선물과 말 한마디였습니다. 이 작은 것이 아이가 웃을 수 있는 희 망이 되었다는 보호자 말에 나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많이 감사했습니다. 처음 시작은 부족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영성간호를 통하여 웃고 행복해하는 환아들과 보호자들의 모습 속에서 나 또한 간호사로서의 사명을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작게나마 실 천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 더 보람되고 행복했습니다. 두 번째 만난 나의 영성 간호 대상자는 환아의 어머니였습니다. 환아가 기관 식도 누공의 질환 을 가져 endoscopic ballooning을 몇 차례 시행하기 위해 잦은 입원을 해야 했으며 환아의 어머 니는 베트남인 이였습니다. 원활하지 못한 의사소통과 입원 환경, 잦은 수술로 인하여 많이 불안 해하고 힘들어하셨습니다. 서로 언어와 모습과 생활이 다른 사람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 베트남 어로 손 편지를 써주고 짤막한 인사를 건네며 친근감을 표현하여 보호자의 불안감이 완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비록 말이 원활하게 통하진 않았지만 보호자는 말뿐만 아니라 눈 마주침 과 표정까지도 간호사의 영향을 받고 기뻐하고 감사함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의 작은 말 한마디와 행동이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도 기쁘게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간호 사로서의 저를 더 겸손하게 만들어주었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다른 국가의 문화와 가치관 등 을 이해할 수 있는 감사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후 변화하는 나의 영성간호를 시작으로 병동 부서원 전체가 한 달에 한 명씩 영성 간호 대상 자를 정하고 기도문을 제공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변화해 갔습니다. 바쁜 업무와 일상 속에서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설렘과 기쁨을 함께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시 간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나의 영성 이야기의 주인공은 선천적으로 cleft & palate와 small bowel obstruction 을 진단받은 여자 환아로 아주 예뻤던 아기였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입으로 섭취하지 못하고 관 을 삽입하여 먹어야 하는 아이와 매번 비위관과 주사기를 들고 먹여 줘야 하는 보호자에게 할 수 있는 영성간호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옷걸이와 테이프를 이용하여 비위관 걸대를 만들 어 제공해주었습니다. 보호자는 한결 수월해져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하였고 나 또한 보호자의 힘든 점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만든 시간들이 결코 아깝지 않은 귀중한 시간이 되었음을 느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 디, 행동 하나로 시작된 나의 영성간호가 보호자와 환아의 힘들고 불편했던 점까지 이해하고 느 낄 수 있게 되어 나 또한 놀랍기도 하고 가슴 한쪽이 뭉클해질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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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간호를 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부담감도 있고 하기 싫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감정 들은 정말 잠깐뿐, 또다시 나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웃고 행복해하는 환아들과 보호자들을 보 면서 간호사의 길이 쉽진 않지만 그만큼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 될 수 있어 뿌듯했 습니다. 나의 영성간호의 마지막이었던 대상자는 현재 이 땅에 없습니다. 아무런 표현을 하지 못하고 인공 기도를 통해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하루에 두세 번 경련을 일으키면서 병과 싸우고 있는 아 이를 위해 병동에 있는 말씀 사탕을 이용해 나무를 만들어 환아에게 읽어주면서 하나님의 은총이 아이에게 전해지길 기도했습니다. 아이의 컨디션이 좋아지지 않아 중환자실로 내려가면서 보호자는 너무 감사하다고 “다시 곧 올 라올게요.”라고 웃으며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내가 제공했던 아이에게 준 기도문과 아이의 이름으로 만든 말씀카드를 챙기기 위해 다시 오셨다는 보호자의 말에 난 너무나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이가 아프지만, 힘을 내라고 내가 준 말씀카드를 읽어줘야 한다는 보호자의 말에 난 눈물이 났고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비록 아이는 하늘나라로 떠났지만, 아이의 보호자들 은 많은 사랑받고 가서 다행이라고 감사해하셨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영성간호를 하다 보니 많이 힘들고 지친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많이 아파 하고 힘들어하는 환아들과 보호자들을 보면서 난 더 힘을 내야 했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 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실천하는 간호사의 사명을 지키고 싶었습 니다. 영성간호를 통하여 진정한 공감과 교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하나의 소통의 장을 이룰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습니다. 글을 쓸 수 있었던 기회와 시간을 주신 UM 선생님과 우리 부서원들 에게 감사하고 서울성모병원 직원임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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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효도하는 마음으로 여의도성모병원 | 분만병동 | 강슬기

저는 여의도성모병원 분만병동 unit의 간호사이자 올해 29살이 되는 호랑이띠 미혼 여자입니다. 분만병동에는 주로 분만 후 산후조리를 위한 산모도 계시지만, 조산기로 절대 안정 치료를 위 해 입원하신 산모들도 계십니다. 특히 후자의 산모들이 더 많은데요, 처음 분만병동 간호사로서 일을 시작하였을 때 그들을 보면서 당황하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녔습니다.

“간호사님 똑바로 누우니깐 배가 더 뭉쳐요. 저 혹시 문제 있는 건가요?” “간호사님 시계 소리가 너무 거슬려요. 시계 좀 치워주세요.” “선생님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우울해요. 블라인드 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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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이며 출산 경력이 없는 저에게는 이러한 산모들의 부탁과 의견들은 매우 황당하기 그지없 었습니다. ‘아니, 조산기 때문에 그냥 누워서 먹고 자는 사람들이 무슨 부탁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간호 사가 호구인 줄 아나…?’ 마음속으로는 항상 씩씩거렸지만 산모들은 저희의 ‘고객님’이기 때문에 순전히 ‘고객이 왕’이라 는 마인드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산모들의 자잘 한 심부름을 하면서 제 입은 점점 오리처럼 삐죽이 나와 있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24주에 양수가 파막되어 소변 줄을 끼고 침상에서 절대안정을 하던 산모가 저에게 ‘물 떠 달라’, ‘선반에 있는 책 좀 꺼내 달라’, ‘침대 시트를 바꿔 달라’는 부탁을 십 분 내에 연이어 시켜댔고, 저는 속으로 소위 ‘성질을 죽이며’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볼멘소리를 하며 언제나 그렇듯이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엄마, 요즘 임산부들 개념을 상실했나 봐! 글쎄, 누워있다고 나를 종 부려 먹듯이 시키는 것 있 지? 팔을 좀만 닿으면 될 거리에 있는 것도 집어달라고 콜벨 하고, 시계 초침 소리도 시끄럽다고 콜벨 하고… 조산이 무슨 벼슬인가.” 저희 엄마는 항상 저의 편이었고, 제가 종종 분만병동에서 힘든 일을 겪고 하소연을 하면 ‘돈 벌기가 쉽지 않지?’ 라든지 ‘아휴 고생이다.’ 이런 말씀 위주로 하셨기에 이번에도 저를 위로해 주 겠거니 내심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제가 이런 말을 꺼내자마자 정색을 하며 무섭게 화를 내셨습니다. “너는 간호사라는 게 산모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짐짝으로 보느냐? 내 눈엔 네가 더 개념을 말 아먹어도 단단히 말아먹었다!!” 갑자기 어퍼컷을 훅하고 맞은 듯한 충격으로 저는 엄마와 정신없이 말싸움을 버렸고 그렇게 시 간이 흘러 우연찮게 엄마의 이야기를 이모를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저희 엄마 또한 저를 뱃속에 가지고 약 30주가 되었을 무렵 조산기가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 다. 당시 엄마는 시댁을 도와 식당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자주 배가 뭉치기에 태동인 줄 아셨습니다. 그렇게 석연치 않게 생각하며 일을 하던 중 갑작스러운 하혈로 병원에 가니 의사선생님께서 조산 기가 있다며 당장 입원을 하라고 지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저희 엄마는 시댁의 눈치와 지금 일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출산 후 병원비를 벌지 못한다는 일념 하나에 사로잡혀 입원을 거절하 였다고 합니다. 의사선생님은 단호하게 당장 입원을 하지 않는 경우 조산이 된다고 주의를 주셨지만 저희 엄마 는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안정하겠다고 둘러대며 입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후 엄마는 마음 같아 서는 당장 쉬고 싶었지만, 시댁의 눈치와 눈앞에 당장 닥쳐있는 일거리에 한겨울에도 고무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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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찬물에 설거지를 하고, 수백 포기의 배추를 김장하는 일들을 하셨답니다. 결국, 고된 시집살 이에 계속 하혈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는 의지로 35주까지 끌어 저를 낳으셨습니다. 다행히 출생 당시 아기는 건강하여 생각보다 병원에 오래 있지는 않았지만, 그 후 제가 4살이 되던 해까지 말을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책임이 엄마인 자신이 임신 당시 배 속의 아기를 만 삭까지 지키지 못한 벌이라 생각하며 하루하루 남몰래 울면서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연 속에서 미숙아 출신의 제가 오히려 조산기로 치료받고 있는 임산부들을 흉보고, 욕하는 것 자체가 엄마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괘씸하게 생각이 들었기에 저에게 화를 내셨던 것이 었습니다. 결국, 저의 탄생 비화를 알게 된 후 엄마에게 겸연쩍게 ‘진작 말하지 그랬어?’ 운을 띄우니 엄마 는 쿨하게 ‘옛날엔 다들 그랬어. 그게 뭔 대수냐?’라고 넘어갔고, 이 일을 계기로 저는 저의 고객 들이자 한때 짐짝이었던 조산기 있는 산모들을 새로운 시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의료진에게 까다롭게 했던 말과 사소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가끔 센티 해져 눈물 을 흘리고 있던 임산부들이 사실은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위하여 보이지 않는 장벽을 극복하려 고 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크리스마스에도 연말에도 항상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임산부들을 바라보며 ' 우리 엄마도 저랬을까? 저 엄마들의 아기들은 나중에 엄마들이 자기를 위해 이렇게 헌신했다는 사실을 알까? ‘라는 깊은 생각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모성애!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옛 명언처럼 자식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기꺼 이 희생할 수 있는 게 어머니라는 사실에서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 아직 아기를 가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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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없기에 ‘만약 내가 아기를 갖는다면 과연 저 임산부들처럼 용감해질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 이 섞인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분만병동이라는 곳이 그저 아픈 사람이 쉬었다 가는 곳이 아닌 여자가 진정한 어머니로 거듭나기 위해 강해지는 곳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분만병동의 간호사는 그 들이 강한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신체적 치료와 간호뿐만 아닌 곧 만나게 될 아기에 대한 희망과 당신도 진정한 엄마가 될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멘토이자, 코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 습니다.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간호사이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뱃속의 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엄마를 생각하며 저도 분만병동의 예비 엄마들을 위하여 효도하는 마음으로 멘토 겸 코치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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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이른둥이 이야기 NICU | 안명희

신생아실… 이곳은 많은 사연들을 가진 이들이 오고 가는 곳 중 하나이다.

아기 하나가 너무 간절한 이들도 있고, 태어나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키우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상반된 부모들을 보면서 참 아기들은 부모를 선택한 게 아닌데 정말 부모에 따 라 너무 다른 운명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다. 그렇 지만 이곳에 근무하는 우리는 안타까운 현실은 받아들이고 그 상황대로 아기를 도우려고 노력하 며 또 복된 가정에 축복받으며 태어난 아기들이 불행히도 아파서 입원하게 되었을 때 그 부모들 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주고 희망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생아실 입구에 들어서면 ‘이른둥이 이야기’라는 알록달록한 게시판 하나를 볼 수 있다. 이곳은 신생아실에 오래 입원해야 하는 이른둥이들 즉 미숙아들의 부모들이 아기들을 위한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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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를 적어서 걸어두는 곳이다. 하나하나가 사랑이 넘치고 마음이 짠해지는 희망의 메시지들이 다. 걸어두었던 메모는 아기가 퇴원할 때 부모들이 가져가기도 하고 그냥 계속 게시해 두기도 한 다. 오래된 것도 있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아기 것도 있었는데 버리기가 아쉬워 그냥 다른 미숙 아 부모님들도 보고 적을 수 있도록 계속 게시해두었다. 이것이 누군가의 슬픔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2013년 여름의 어느 날 저녁 언제나 그랬듯 분만실에서 아기가 한 명 태어났다. 아기는 다행히 아무 문제없는 건강한 아기였다. 여느 때와 같이 난 아빠에게 아기 상태를 설명하고 입원 안내서 를 주며 이것저것 설명을 했다. 설명하고 내가 자료를 정리하는 동안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는 듯 한 아빠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저~ 여기 있는 메모지 떼어가도 될까요?” 나는 남이 쓴 메모지는 왜 떼어가려는 건가? 이상해서 “왜 그러시지요?”라고 여쭈어보았다. 그 순간 커다란 덩치를 가진 아빠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눈물을 훔치는 것이 아닌가. 난 너무 당황 하여 잠시 동안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빠가 힘들게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재작년에 여기서 아기를 낳았는데 너무 빨리 낳아서 결국은 사망했거든요. 그때 아기 힘내라고 적어두었던 메모가 아직 붙어있어서. 보니까 갑자기….” 아빠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 였다. “어머나, 그러셨구나…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어요? 물론 떼어 가셔도 되요. 저희는 부모님이 쓰신 거라 함부로 버리지 못하고 붙여 놓는다는 게 죄송해요. 안 좋은 일 다시 생각나게 해드렸네 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이렇게 건강한 아기 얻으셔서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내 마음도 짠해졌다. 사망한 아기 것은 떼어냈어야 했나, 이런저런 생각이 그 순간에 머리에 가득했다. 아빠는 아니라며 괜찮다며 메모를 조심히 떼어 지갑에 넣어가셨다. 나는 아빠가 가고 자동문이 닫힐 때까지 그냥 들어올 수가 없어 아빠의 뒷모습이 문 뒤로 사라진 뒤에야 신생아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아빠가 간 뒤에도 마음이 계속 짠했다. 저녁 면회시간에 엄마와 아빠가 아기 면회를 위해 다른 가족들과 신생아실에 다시 방문했다. 면회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그렇게 환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렇게 힘들게 귀하 게 만난 아이니 말이다. 면회시켜주는 내 마음도 너무 좋아서 “아기 너무 예쁘네요. 너무 축하드 려요.”라고 창 너머로 계속 이야기해주었다. 창 너머의 엄마, 아빠의 마음이 나에게도 모두 느껴 지는 듯했다. 신생아실에서 근무한 긴 시간 동안 나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모유 수유가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아이들이 아프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는 일인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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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좀 더 보호자들의 마음에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신생아실에서는 매년 엄마, 아빠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미숙아들을 위해 희망을 주고 격려를 해주고자 많은 활동들을 해왔다. 아기의 사진과 함께 아기들의 소소한 이벤트들이 담겨진 미숙아 일기, 미숙아들의 백일 축하파티, 아기들의 상태에 대한 정규적인 문자발송, 인계 시간 아기들을 위한 기도, 미숙아들의 퇴원 전 수유 연습 등 많은 활동들을 통해 아기들과 보호자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마음을 느끼고자 하였다. 그리고 면회시간에는 되도록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보호자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하고 아기 상태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격려해주고 희망을 주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우리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올해는 어떠한 활동들로 아기들, 보호자들과 교감을 나눌지 기대 된다.

신생아실에서 태어난 모든 아기들이 하느님의 은총 아래 언제나 행복하고 건강하길 오늘도 간 절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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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처음과 지금, 어느덧 부천성모병원 | 영상의학팀 | 이준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평안하십니까?

우리 CMC인들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그간 봉사의 삶, 나눔의 삶을 생활하고 있 음에 감사드립니다. 이념 실천공모전을 처음 맞이했을 때 ‘몇몇 글 잘 쓰는 사람과 비디오 촬영 잘 하는 사람들이 매년 이념이나 특이성에 맞추어 자랑하는구나!’라고 생각하여 무관심 속에 살아왔 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저희 팀의 기특한 모습을 알리고자 몇 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가톨릭대학교 부천성모병원의 영상의학팀은 1990년도부터 지금까지 봉사와 나눔의 삶을 살 고, 앞으로도 변함없으리라 생각이 되어서 이렇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본원에 입사한 지도 이십 년이나 되었고, 제 직장은 그보다도 이전부터 나눔, 봉사의 사랑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용문 희망의 집 봉사 차를 타고 자연을 벗 삼아 가다 보면 마음이 설렌다. 한참을 가서 산 중턱에 있는 희망의 집에 가서야 봉사를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의 몇몇 결핵 환자들이 보일 때마다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영양 섭취가 중요하고 많은 일들을 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무언가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 는 생각에 어린 마음에도 기쁨이 앞섰다. 지금은 용문에 가면 결핵 환자가 그때만큼 많지는 않지만, 그때 앓고 있던 환자분이 지금은 그 쪽에서 결핵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수녀님과 함께 반갑게 맞아 주곤 한다. 이렇게 세월을 지내 고 보니 내가 누구를 위해 봉사했다기보다는 나의 작은 역할로 기쁨을 배우지 않았나! 하는 생각 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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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림원 봉사 부천에는 지적장애가 있는 장애우들을 위한 혜림원이라는 곳이 있다. 처음 이곳에 목욕봉사를 갔을 때는 초겨울(가을)이었다. 웃풍이 있는 것 같았다. 나라도 그곳에서 옷을 벗고 목욕하기 싫 을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 목욕하는 날이므로 건너뛸 수가 없다고 한다. 욕실의 바닥은 타일이라서 여간 찬 것이 아니었다. 두발로 걷는 이도 있지만, 네발로 기는 이도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어떻게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낯익지 않은 사람이 장애우들의 몸 구석구석을 잘 닦아주어야 하는데 언어도 통하지 않고, 장 애우의 거친 행동에 덜컥 겁까지 났다. “이러다 다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마저 든다. 나름 따듯 하게 하려고 바닥에 타월을 깔고 따듯한 물을 뿌리고 그들을 눕혀 몸을 닦아본다. 물을 뿌리고 거 품을 내고 급하게 여러 명을 닦았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목욕의 도사가 된 듯. 땀도 흥건하고 힘도 들고 뿌듯했다. 그들은 목욕 전과 후의 모습이 달라 보였다. “아~~이런 실수를 가장 중요한 곳을 닦아야죠.”라고 한마디 한 다. 낯부끄러워서 깨끗이 못 해주었다. 못내 미안한 마음이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우리 팀은 한 주에 한 번씩 그들을 찾아갔다. 습진이 생기도록 여러 명을 닦았다. 마치 구두 닦듯이 정신없이. 그렇게 정신없이 닦는 중에 행여나 혹여나 그들이 아플까. 추울까 걱정을 하며 서두른다. 이렇게 우리 팀은 물 조, 이동 조, 목욕 조, 옷 입히기 조 등으로 나누어 서로 도와 가며 목욕을 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회를 거듭해 갈수록 부담감이 사라졌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우리에게 몸을 맡기고 친해져서 그런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병원에 혜림원의 *범이가 왔다. 그곳에서는 나에게 웃지 않는 놈이 웬일로 나에게 눈 미소를 보낸다. *범이도 우리를 반가워하는 것 같다. 그들의 애정표현이라고 하는 행동들이 나에 게는 가시방석 같았다. 아니 무섭고 두렵기까지 했다. 이렇게 타의로 인한 봉사가 거듭될수록 장 애우와 우리들은 벗으로 태어나는 것 같다. 그들을 동정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우리 주변의 형제로 여겨지고 우리의 행동이 자연스러워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들은 특별히 대해 주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벗처럼 자연스럽게 대해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까? 우리 아이들이 장애우를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게 교육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혜림원에서 내가 얻은 것이 아닌가. 되돌아본다.

엠마우스 봉사 지금은 사라진 노인 요양원으로 무의탁 노인을 모시는 곳이었습니다. Action Plan Story ∙ 65


변함없이 목욕봉사와 노력봉사를 하게 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저만 기다리는 할머니 와 할아버지라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모르게 부담이 되고 한편으로는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내가 그분들의 자녀를 닮았나! 왜 좋을까 등 기타 등 등의 잡생각을 하게 되었죠. 레크리에이션, 게임, 노래 등을 하며 친해진 할배, 할매(할아버지, 할머니의 친근 표현) 우리들 의 노랫가락에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시며 잘한다. 예쁘다 해주시던 할매, 할배…. 93세의 할머니께서 89세의 할머니에게 “넌 젊으니까 춤도 잘 춘다.” 하시며 시샘하듯 장난말 을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나면 웃음 짓게 한다. 그분들의 주변들이 사라지고 다시 그 자리가 채워지고 그분들도 사라지고, 그렇게 그분들과도 헤어짐이 못내 허탈과 허무하다. 허나 이를 통해 서 우리의 삶을 다시금 돌아보기도 합니다. 바람결에 생각나고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이 됩니다. 할매~ 할배~ 잘 지내시죠? 사랑합니다.

고강동 복지관 식사 봉사 가끔은 병원이나 팀에서 가는 봉사가 부담스럽기도 하다. 정작 나의 부모를 위해서는 해 드리 는 것이 없는데 내가 무어라고 복지관 봉사를 가는 걸까? 이렇게 시작된 어르신들을 위한 밥 봉사 가 4년을 넘어가고 있다. 각자의 휴가를 내고 가는 식사 봉사! 소외되고 외로운 어르신들이 너무 많이 계심을 느꼈다. TV 뉴스에서나 접해보는 어르신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외로움. 그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아침 9 시부터 줄을 서시고. 이렇게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를 갈 때마다 부모님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오늘도 횡단보도를 지나는 어르신들이 남 같지 않다. 검사 오시는 어르신들께도 한 번 더 신경 을 써야지. 간만에 부모님께 안부 전화라도 해야겠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다시금 돌 아보고, 서로의 감흥을 나누어 봅니다. 어느덧 우리에게 봉사는 선택이 아니라 사명. 아니 우리의 일상으로 다가온다. 지금은 용문 희망의 집, 도창리 포도밭 봉사와 고강동 식사 봉사, 이동진료 등으로 넓어져 가고, 믿음에서도 한층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팀원들의 성숙되어가는 모습과 나눔의 삶이 우리에 게 있어서 행복의 삶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처음에는 단출하게 몇 명으로 시작했던 저희의 삶이 어느덧 2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47명의 인원으로 봉사를 하며 성숙해가고 있는 영상의학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동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봉사 하러 갈까요? 66 ∙


별첨

**진 : 봉사활동이라는 이름의 시간들이 삭막한 삶에 지쳐있던 제가 더 위로받고, 격려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이** : 그간 영혼 없이 다녔지만, 동료들과 어울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게 참 의미 있는 것 같습 니다. **수 : 작은 나눔을 통하여 삶에 있어서 채워짐을 배웁니다. **희 : 제가 그분들의 상황이라도 그분들은 저를 도와주시리라 생각돼요.

Action Plan Story ∙ 67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대상

기적을 이루어준 성모병원 서울성모병원 | 이가을 어머니 이미경

“엄마, 나 몇 살까지 살 수 있어?” “응, 70살.”

70살까지만 살아도 좋겠다는 내 생각에 그렇게 대답해주었지요. “그래? 오래 사네!” 몇 번을 반복하며 묻고 또 묻고 같은 질문을 하고 또 하고 잠 못 이루고 뜬눈으로 지새운 날이 얼마였던가! 조혈모세포를 이식한 사진을 보여주며 “가을아, 이식 성공했어. 여기 봐, 증거 사진이 있잖아.” 성모병원에서 이식하던 날 세분 간호사 선생님께서 오셔서 축하해주고 즉석 사진을 찍어주고 기 도도 해주시는데 그 즉석 사진 한 장을 늘 곁에 두고 있었거든요. “성공했어? 와! 쩔어!” 크게 소 리치며 박수치고 서지도 못하는 아이가 새벽녘 내가 잠시 잠들었을 때 무슨 힘으로 섰는지 침대 68 ∙


에서 내려와서는 우두커니 서 있고 엄마를 놀라게 하더니 “가을아, 왜 그러고 서 있어?” 하니 “응, 오줌 싸려고.” 평소 오줌통에 오줌을 받았던 생각으로 아마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나 봅니다. 다음날 오후 3시쯤 “엄마, 나 심심해. 뭐라도 하고 싶어.” “저기 젤리데코 가져다주세요. 하고 싶어요.” “아직은 안돼요, 손이 많이 떨려서 라인을 그릴 수가 없을걸” “싫어요, 무조건 주세요.” 하며 평 소에 잘 우기지도 않던 가을이가 떼를 쓰듯 막무가내였습니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 지만, 호응을 안 해주면 안 될 것 같아 간이 식탁에 젤리데코를 펼치고 난 라인을 그리고 가을이 는 공백을 메우는 식으로 젤리데코를 시작한 지 10여 분쯤 지났을까? 가을이가 갑자기 몸을 비비 꼬더니 입이 돌아가고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고 흰 자만 보이더니 몸이 뒤로 넘어가며 부르르 떨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일어난 상황 이어서 호출 벨도 손에 닿지 않 고 난 뒤로 넘어가는 아이를 안고 “안 돼! 가을아, 이러지마.” 악 악 어떡해! “간호사님, 간호사 님!” 소리를 질러대며 심하게 경련을 하고 있는 가을이를 위에서 안고 누르며 흰 자만 보이는 눈 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오열을 토하고 있었어요. 잠시 후 간호사 선생님이 달려왔고 산소 호흡기를 꼽아놓고 경련이 가라앉는 주사를 놓으시더 니 “어머니 이러시면 안 돼요.” “안정을 취하게 기다려주세요.” 하셨다. 경련하는 것을 처음 본 거라서 놀랍기도 하고 순간 금방 죽을 것만 같은 생각에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 우리 가을이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아직은 안돼요’ 믿음도 제일 좋았던 가을이 가 찬양단에서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공부는 또 얼마나 잘했는지요. 특별히 학원을 보내지 않았어도 반에서 5등 안에 드는 우등생이었고 운동도 합기도 1단을 딸 정도로 건강했고 인라인도 잘 타고 피아노도 플루트도 도의장상을 타 올만큼 잘했고 서예도 우수하게 잘해 한글날 경시대회에서 상을 타오고, 한자도 3급을 땄고, 교내에서는 봉사단체에도 가입을 해서 열심히 봉 사도 하는 착한 아이예요. 수학은 또 얼마나 좋아하고 잘했는지 장래희망이 수학교사가 꿈이었던 아이예요. 무엇보다 믿음이 좋아서 시험기간에도 단 한 번도 교회에 빠지지 않았고 엘프레이즈 찬양단 활 동을 열심히 하며 점심은 교회에서 먹고 교회 옆 시립도서관에서 밤 11시가 되도록 공부하며 모 범을 보였던 아이예요. 새벽에 기도를 간다며 선생님과 약속했다며 캄캄한 아침 겁도 없이 집을 나서던 믿음이 좋은 아이,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던 가을이에요. 이건 너무 가혹하잖아요. 그렇게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렇게 경련은 6시간마다 반복하며 5번의 경련이 있었습니다. 경 련이 멈추고 가을이는 눈의 초점이 사라졌고 미소를 잃었습니다.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아빠와 의사선생님, 간호사 선생님들을 기억하지 못했죠. 지난 7개월간의 모든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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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 힘들었던 골수 척수 검사를 잃어버렸습니다. 한편으로는 감사했지요. 아픈 기억은 없어져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이 사람들은 다 누구야?” 하며 친구목록을 다 지워버리고 흥미 없다 며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TV도 보기 싫다, 켜지 마라. 소리도 싫고 연예인들 가수들도 다 싫고 불 빛도 싫다며 안대를 쓰고 잠이 안 온다며 “엄마 놀아줘, 엄마 나 심심해.” 끝도 없이 쏟아지는 같 은 질문에 대답해주는 나. 그래도 함께 있어 행복하고 감사하며 지낸 날들…. 교수님 회진 오셨을 때 “가을아, 100-7이 뭐냐?” “97이요.” 알았다 하시며 가시는데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여전히 97이라고 대답하는 가을이…. 얼마나 아팠으면 그 모든 기억을 다 지워버렸을까. 수학을 그렇게도 잘하는 가을이가 초등학교 1학년 생도 다 아는 그런 뺄셈을 모르다니.. 가슴이 아프고 아렸지만 우리는 감사했지요. 살아있 음에 살 수 있다는 기대감에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뿐이었어요. 소변줄을 꼽고 열은 40도를 오르내리며 혈압도 180-120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전해질 수치 며 갖가지 수치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중심을 잡지 못해 서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고 설사를 하루 스무 번도 넘게 하다 보니 욕창이 생겼습니다. 젤 걱정인 것은 갑자기 돌발행동을 하며 침대에서 막무가내 내려오려고 하고 넘어져서 무릎이 깨져 엄마를 놀라게 하는 등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하여 엄마가 밥 먹을 틈조차 주지 않는 것이 었습니다. 잠 잘 때도 그 좁은 침상에서 난 거꾸로 누워서 아이의 다리를 안고 조금이라도 움직이 려 하면 순간 일어나 가을이의 이상행동을 살피며 ‘하나님, 가을이를 살려주세요. 하며 찬양과 말 씀을 늘 틀어두었습니다. 이른 아침 회진 돌 시간도 아닌데 교수님께서 갑자기 찾아오셔서 “가을이 괜찮니?” “내가 누구 냐?” “네, 조빈 교수님이요” 걱정돼서 일부러 찾아오신 겁니다. 가을이가 교수님을 알아보고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바라 봅니다. “그래 100-7이 뭐냐?”, “네 93이요”, “그래, 그럼 거기서 또 7을 빼 봐라.” “음. 음 86이요.” “그래 알았다, 한 숟갈이라도 먹어라, 약으로라도 먹어라.” 교수님의 자상하고 따뜻한 그 말씀이 가을이에게 큰 충격이었나 봅니다. 아침밥이 나왔는데 어 제까지 한술도 못 뜨던 아이가 갑자기 “엄마 나 밥 주세요. 먹을래요. 교수님이 약으로 먹으래요.” 그날부터 한 수저 두 수저씩 밥을 먹기 시작했어요. 두 달 정도가 되던 날에 이젠 5인실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아침 일찍 가을이를 끌어안고 이식 후 처음으로 샤워를 시키러 욕실에 들어가 아기 변기를 놓고 앉혀 씻기는데 뼈만 남아 아프기 전 48킬로 나가던 가을이가 35킬로 밖에 안 나가는 것을 보며 피부 숙주로 온몸이 새카맣게 된 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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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씻기며 그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온몸에 허물이 벗겨지고 있었습니다. 환골탈태라더니 이식 하면 정말 뼛속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더니 손톱 발톱도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태어난 날 2013년 7월 23일이 가을이의 두 번째 생일인거죠. 그렇게 5인실로 안고 한발 한발 옮기면서 창가에 자리를 잡고 한 달 보름을 지내는 동안 “엄마, 나 심심해, 엄마 놀아줘”를 반복했고 그런 가을이를 아기 다루듯 하나하나 챙기고 대답해주고 놀 아주고 아이클레이로 뭔가를 만들고 싶다기에 함께 노는데 “엄마 나 교수님들과 간호사 선생님들 께 뭔가를 해 드리고 싶어” 하며 그 떨리는 손으로 장미 잎을 하나하나 만들고 장미꽃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분홍색 만들고 싶은 색은 모두 혼합하여 여러 다양한 색깔들로 만들어 진 장미꽃이 가을이의 손끝 감각도 살려주는 좋은 장난감이었죠. 손끝 발끝이 저려서 감각도 무 뎌졌고 심심하던 차에 무언가 해보려는 의지가 기특해서 만들고 또 만들어 무려 200송이 넘게 만 들어 화분에 담아 교수님께도 드리고 간호사 선생님께도 드리고 교회 담임선생님께도 보내드렸 더니 기특해하며 좋아하셨습니다. 여전히 열은 37.8도로 떨어지지 않고 혈압도 130 정도를 유지하며 재활치료도 병행하고 있다 가 가을이가 집에 가기를 소원하여 퇴원을 시켜달라고 했지요. “일단 나가보자, 나가서 상황이 안 좋으면 다시 들어오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걷지도 못하는 가을이를 안고 전주 집을 향했습니다. 가을이는 마냥 좋아했죠. 꿈만 같았던 퇴원이라는 사실과 집으로 올 수 있다는 행복감에 집으로 오던 그날부터 열이 내 리고 조금씩 회복이 되기 시작했어요. 자리를 깔고 누워 대소변을 받아내며 기저귀를 차고 버스 에 오르고 병원까지는 휠체어로 이동하고 또 외래 갔다가 내려오고를 반복하며 그 후로 입원은 다시 하지 않고 외래로만 쭉 3개월을 다니면서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교수님 재활치료는 어떻게 할까요?” 교수님 : “재활보다 운동을 해야지, 마사지시켜주고.” 교수님 생각이 맞았습니다. 열심히 방 안에서 누워서라도 운동하고 움직이고 마사지를 해주고 외래로 걸어 다닌 결과 더 많이 좋아져서 계단을 오르내리지는 못하지만 평 길은 서서히 걸어 다 닐 수 있게 되고 몰라보게 좋아졌어요. 백혈병 진단을 받고 치료해온 지 어느덧 일 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생각해보면 지난 일 년 이 꿈만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고등학교 입학의 꿈을 꾸며 고등학교 배 정받고 기뻐서 뛰며 가고 싶었던 학교에 배정되었다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교복이 예쁜 학교, 집에서 가깝고 공학이 아닌 여고라서 정말 좋아했던 가을이. 같은 학교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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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던 친구들 몇몇이 함께 가게 되었다고 저희들끼리 전화 통화하며 좋아서 방방 뛰던 꿈 많은 여 고 입학생이었던 가을이. 이젠 다 의미 없어요. 살 수만 있다면 다 사치로 느껴집니다. 중학교 졸업여행을 다녀와서 다리가 심하게 아프다고 하기에 그저 ‘성장통이려니, 하루 종일 걸어 다녀서 다리가 아픈 것일 거야.’라며 가볍게 생각하며 버티던 중 딸아이가 이건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라는 말을 하며 울길래 정형외과를 찾아갔더랬지요. 사진을 찍고 진찰을 했는데 별다른 이상이 안 보여 그냥 약만 먹으며 또 일주일을 버티던 중에 심한 고열이 나서 전주 예수병원 응급실에 가게 됐는데 혈액검사를 하더니 백혈병이 의심된다고 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대학병원에서 림프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입원하여 일주일을 치료받던 중 필라델피 아라는 염색체가 발견되어 지방에서는 예후가 좋지 않으니 서울 성모병원에 조빈 교수님을 찾아 가라면서 소견서와 함께 편지 한 장을 써주셨습니다. “교수님, 우리 아이 그냥 교수님이 맡아서 치료해주시면 안 되나요?” “집에서도 가깝고 여러 가지 형편상 교수님께 맡기고 싶은데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 하나만 생각하세요.” “지금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지 제가 지금까지 필라델피아는 3명을 봤는데 모두 놓쳤습니다. 서울에 가면 그래도 경험이 많이 있는 교수님들이 보시고 서울에 큰 병원에서 치료하는 게 가을이에게는 최선입니다.” “제 자식이라도 보내겠습니다.” 하셨던 전북대 황평한 교수님! 지나고 보니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때 단호하게 말씀해주시고 자식처럼 안타깝게 여기며 진정으로 걱정해주시던 교수님의 탁월하신 선택이 우리 아이를 살리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앰뷸런스를 타고 성모병원 응급실에 와서 이틀을 지낸 후 19층에 입원하게 되었 고 이틀 후 다시 20층 BMT 무균병동으로 입원하여 바로 관해를 시작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지방과 확연하게 다른 무균실 병동, 청결하고 깔끔한 병원 시설과 친절한 선생님 들 정말 모두가 하나같이 친절하고 다정하고 편안한 느낌의 그 모든 것이 부모들의 마음을 안심 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정말 서울로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과 와보니 백혈병으로 유명한 병원 인 것을 알았고 지방에선 몇 명 있을까 말까 하는 필라델피아라는 최고 위험군이 이곳에 와보니 다수 치료를 받고 있어서 더 안심이 되었습니다. 교수님 회진하실 때도 모두 함께 선택 교수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 돌아보시고 일일이 한 사람씩 차트 보시며 환아들을 치료해주셨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교수님들의 아이 사 랑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습니다. 많이 아파해하는 아이들을 보면 한참을 바라보시며 위안해주셨고 아이들 이야기는 다 들어주 시며 안심시키는 모습에서 의사와 환자가 아닌 따뜻한 할아버지의 마음마저 느껴졌습니다. 교수 님과 간호사님들 명찰에 환아들이 붙여준 수많은 스티커들에서, 진료실에 붙어있는 ‘치료해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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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감사합니다.’라는 편지에서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관해하면서 심심하다며 젤리데코도 해보고 그림도 그려보다가 컴퓨터도 하고 그러다가 항암 약이 들어가면 토해서 먹지 못하고 우울해하며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렸어’ ‘왜 하필 나야! 하나님 도 너무하셔 난 예수도 잘 믿었는데….’이럴 땐 그저 ‘가을아 미안하다.’ ‘엄마가 잘못했다. 널 아 프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수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엄마 나 졸업식만이라도 가면 안 돼요? 친구들이 보고 싶은데….” “중학교 마지막 추억인데 꼭 가고 싶어요.” 하며 조르다가 그 다음 날 심하게 토하고 기운이 없어 누워있기를 며칠 반복하 더니 결국 포기하며 “그래! 나 졸업식 안 가도 돼, 그까짓 졸업식이 문제야? 사는 게 문제지.” 이 러면서 오히려 엄마를 위로하는 가을이. ‘아이 앞에서만큼은 울지 말자. 아픈 아이도 있는데 엄마가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되지.’ 하며 더 욱 강해지기를 마음먹은 나. 그날부터 귀를 열어 여러 엄마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기 시작하며 정보도 얻고 서로에게 위안이 돼 주며 서로 힘내라고 응원도 해주고 함께 배선실에서 밥을 먹으 며 내 아이가 아닌 우리의 아이로 서로서로 보호자가 되어 주기도 하고 서로에게 기도하는 마음 으로 병원생활을 해오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많은 엄마와의 인연이 생겼습니다. 아이가 아프지 않으면 절대로 경험해 볼 수도 없는 많은 일들, 많은 사람들, 서울 강남 한복판 에 서 있는 나, 지금의 내 모습, 화장품 영업을 하며 마사지를 해왔던 내가 화장을 하지 않으면 절 대로 밖을 나서지도 않았고 늘 공주패션으로만 살던 내가, 운동화에 등산바지에, 달랑 티 한 장 입 고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누가 봐도 그저 불쌍한 중년 여자인 내가 부끄럽지도 창피하지도 않게 거리를 거닐고 있다니.. 환경이 무섭게 나를 바꿔 놓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강한 엄마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엄마들끼리 웃으며 말하는 고속터미널 패션이 되 어버렸죠. ‘그래도 어떠하리. 내 아이만 나을 수 있다면, 다시 건강해질 수만 있다면, 난 괜찮아‘ ’ 그리고 공부가 무슨 대수야 건강만 해지면 평생이라도 내 곁에 두고 살면 되지.’ 지금은 그런 생각 뿐입니다. 때때로 20층에서는 병원학교에서 환아들을 위해서 생일파티도 열어줍니다. 입원한 아이들이 모두 모여 생일을 축하해주고 식당에서 멸균 처리한 맛있는 음식들과 교수님, 수녀님, 간호사 선 생님들과 생일 축하파티를 하는 이색적인 풍경에서 이곳이 병원인지 어느 단체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가슴 벅찬 일들도 있고, 어려운 형편에 자녀까지 아프게 되어 생활이 어려운 가정에는 6층 사회복지 팀에서 지원처를 알선해주고 도움도 주시는데 백혈병 어린이재단에서는 병원 근처에 아파트를 마련해주고 지방에서 오는 환아들이 숙식을 할 수 있도록 제공해주셔서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병원비 외에 부대비용이 더 들어가다 보니 쉼터가 있으므로 외래 다니면서 그 큰 비용을 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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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게 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고 감사한지요. 또 소원 들어주기 단체에서 아이들 소원 도 들어주는 특별한 이벤트에 초대되어지기도 합니다. 아픈 아이가 있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는 것을, 그리고 성모병원이 얼마 나 좋은 병원 인지도, 병원이 그저 무섭고 근엄하고 딱딱한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도, 아직은 따뜻 한 분이 세상에 많다는 것도, 조혈모세포를 공여해주신 얼굴도 모르는 그분께도 정말 감사를 드 리며 이 나라에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인가를…. 성모병원에 오게 되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수없이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치료도 하루하루 감당하며 희망을 가지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관해를 거쳐 공고요법 고용량 아라, 고용량 엠티엑스…. 때론 입원하여 치료하고 때론 2박 3일을 외래로 와도 교수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사했죠. ‘그래, 운동하라고 그러시는 거야’ 병원 안에만 있으면 회복도 느리고 하니 밖에서 운동하며 입 맛도 살리고 활력도 주며, 그 많은 아이들을 보아 오셨으니 오죽이나 잘 알고 처방하실까. 기나긴 경력에서 나오는 교수님들의 해안이 아닐까요? 그건 정말 최고였습니다. 엄마들의 염려와는 반대 로 아이들의 치료 효과도 훨씬 컸습니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꿈으로만 보였던 현실이 지금 내 앞에 있습니다. 우리 가을이가 해냈고 의료진이 해냈고 밤낮으로 보살핀 간호사 선생님들의 덕입니다. 호출 벨만 누르면 언제든 달려와 주는 간호사 선생님, 매 시간마다 혈압 체크며 따뜻한 말 한마디. “가을아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잘하잖아.” 다들 천사 같은 목소리에 천사 같은 마음씨, 아이들을 위한 사랑이 바탕에 깔려있는 엔젤님들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언제든 달려가면 따로 준비된 응급실 병동, 20층의 무균병동에 늘 환한 미소로 반겨주시는 간 호사 선생님들 19층 간호사님들, 수간호사 선생님, 외래로 갈 때면 3층에서 채혈하시는 선생님들, 반겨주시는 최선희 수간호사 선생님과 BMT 간호사 선생님들.. 따뜻하게 웃어주시는 교수님, 혈 액은행에서 동일 유전자 찾아주시는 코디님들, 자세히 설명해주시는 외래간호사 선생님, 수녀님 들, 이송 사원님들, 청소하시는 여사님들 한 분, 한 분 모두 감사합니다. 6층 사회사업 팀에도 감사를 전하고 싶어요. 오십 년을 살아오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장 많이 갖게 해준 성모병원에 감사드립니다. 병원이 아닌 내 집처럼 편안한 성모병원 최고입니다. 굿 닥터를 촬영한 병원이기도 하지만 굿 닥터에서 처럼 정말로 의사 선생님들의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사랑으로 가득하다는 걸 전 진심으로 느껴요. 교수님들 사랑합니다. 성모병원 임직원님들 모두 사랑합니다. 아직도 완치 판정을 받을 때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지만 우리는 늘 희망을 가지고 성모 병원으로 외래를 갑니다. 잘 먹고 운동 잘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지금 이렇게 서서 걸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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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기억도 서서히 돌아오고 있고 웃음도 되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혈병으로 인해 많은 좋 은 사람과 넓은 세상과 좋은 의료진과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매일매일 감사하는 하루를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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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우수상

제2의 인생을 설계하며 부천성모병원 | 알코올의존치료센터 | 전덕호

저는 술로 인해 수많은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술로 인해 망가졌던 저의 육체와 정신을 감싸주 고 본정신으로 일깨워 주신 위대하신 신과 애써주신 부천성모병원 알코올 의존치료센터와 교육 을 주도하신 수녀님들, 강사 선생님들, 선, 후배 교육 선생님들과 끝까지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 았던 저희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군 생활 때부터 시작된 저의 음주 문제는 2남 1녀를 둔 가장이 된 후에도 계속되어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음주 장소도 고급화되어 씀씀이는 헤퍼지고 여자와 도박에까지 손을 대게 되었습니 다. 그때부터 저의 거만과 오만은 시작되었고 가까이하던 지인들마저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습니 다. 저에게 충고하는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생각하고 미워하는 나쁜 버릇도 동반했고 급기야 그 어렵다던 IMF도 무사히 넘기며 운영하던 사업채마저 부도를 맞게 되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그동안 일구어놓은 상가건물도 정리하고 다시 76 ∙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일어나려고 하였지만, 알코올중독이라는 병은 쉽게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 니다. 그야말로 술 때문에 쫄딱 망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빚 독촉이 시작되었고 은행에서 신용불 량 대상자까지 되어 금융계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한 저는 세상을 비관하며 모두 남의 탓으로만 생각하는 완전한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술에 인생의 발목이 잡힌 저는 급기야 음주운전으로 벌금 700만 원에 면허취소… 사형선고와 도 같았습니다. 음주 취소가 된 저는 운전을 하지 못한다는 핑계로 24시간을 술과 함께 보냈고 식 사라도 하라는 아내의 말은 듣지도 않고 동네 슈퍼에서 외상을 하고 아내의 지갑과 아이들의 저 금통에도 손을 대는 파렴치한 도둑이 되어있었습니다. 건강은 나빠지고 이러한 저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고통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생활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날들을 지내며 세상을 원망하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가고 있었고, 가족 간의 불신과 갈등은 깊어져 자식들과 서로 헤어지는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습 니다. 보다 못한 아내의 권유로 부천성모병원 알코올 의존치료센터를 방문하게 되었지만 상담해주시 는 수녀님 말씀도 건성으로만 들릴 뿐 마음에 와 닿지 못했고 아내의 부탁에 마지못해 며칠만 다 녀보기로 약속을 했고 월요일부터 도시락을 준비하여 첫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치료 첫날 신기하게도 저의 심경에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술을 마시던 지난날의 불 안함, 초조함, 식은땀이 줄줄 흐르던 몸 상태가 편안해지며 왠지 포근하고 감싸 안아주는 듯한 편 안한 느낌이 그동안의 힘들었던 고민과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듯 숙연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첫날을 그렇게 몽롱한 상태에서 보내고 다음날은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인적이 드문 원미산 외 곽 길을 택해 센터로 향하면서 술을 마시며 세상을 원망하고 탓하던 때와는 달리 세상의 온갖 자 연과 사물이 저에게 힘을 주는 듯 찌들은 저의 몸을 환하게 비춰 주었고 그 정취에 취해 몸도 마 음도 가볍게 센터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사물을 자세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밝아짐과 모든 사물이 주는 신비스러움, 처음으로 살 아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며 30년 만에 처음으로 웃음 지어 볼 수 있었던 시간들에 저 스스로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센터 생활은 저와 제 가족에게는 즐거움과 희망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고 부드러우면서도 엄숙한 수녀님들의 지도력과 평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최고의 치료진이라는 생각에 우리나 라에서도 알코올중독 치료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놀라움과 믿음은 더욱 깊어졌고 저와 우리 가족은 조금씩 회복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손이 떨려서 펜을 들지 못했던 제가 글을 쓸 수가 있게 된 것 또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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뚤비뚤 글씨는 엉망이었지만 손의 떨림이 없어져서 너무 기뻤고 그날부터 하루 생활점검과 매일 일기를 정성껏 쓰면서 부정적인 생각에 익숙해졌던 저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가족에게 주었던 고통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며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 고 하루를 접었습니다. 좋은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저를 대신하여 아내가 식당 일을 하니 가장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센터 수녀님들께서 저의 사정을 아시고 병원 사회사업 팀 을 통해 치료비를 지원해주시고 때마다 쌀이며, 김장을 챙겨주셔서 죄송하면서도 감사하는 마음 으로 아직은 저의 힘이 부족하므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수녀님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마 음의 부담 또한 내려놓으며 오직 단주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센터에서의 하루 일과는 아침체조를 시작으로 명상시간과 정독, 토론, 마임, 영상, 기체조, 미술 치료, 경험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강사 선생님들과 수녀님들이 준비하여 다양하게 이루어져 쉽 게 따라갈 수 있었고 그중에서도 저는 명상시간이 제일 좋았습니다.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로 마무 리하고 나면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 들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하는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이 너무 맛있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서로서로 위로 하며 걱정해 주는 온정의 마음에 감사함을 느끼는 너무도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교육 8주 동안 내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술의 유혹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생활에 너무도 만연한 음 주문화는 마치 저를 시험대에 오르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듯 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제 자신의 힘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종교는 없지 만 알코올 의존치료센터를 통해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고 그 이후로도 위험한 일 이 많았지만 슬기롭게 피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수녀님들과 센터의 도움이 너무 많았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의 일상생활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이 너무 좋아졌고 바깥일을 하 는 아내를 대신하여 평소에 하지 않았던 집안일을 도우며 생활하니 너무도 많이 달라져 전에 저 를 알던 사람들이 보면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 의 술 문제로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이 주말이면 모두 모여서 서투른 솜씨지만 요리도 하고 희 망의 대화도 나누며 웃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제가 다시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고 본정신을 찾을 수 있도록 일깨워주신 가톨릭대 학교 부천성모병원 알코올 의존치료센터에 감사드립니다. 수녀님들의 보살핌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세상은 악만이 존재하는 줄 알았던 저에게 천사 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아직 미흡하고 부족한 마음을 수양하면서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 적으로 바꾸고 제가 받았던 도움들을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치료 과정 8주간이 지난 지금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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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센터에 나가 이제 치료를 시작하는 분들을 위해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두웠던 지난날을 거울삼아 앞으로도 단주는 계속할 것이며 앞으로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열 심히 살 것을 약속드리며 음주로 고생하시는 분들께 미약하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은 진실 된 마 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용기와 희망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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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우수상

포기하지 않은 한 희망은 살아있다 서울성모병원 | 가정간호센터 | 나재우 보호자 함미경

4년 전…. ‘따르릉~ 따르릉~’ “갑자기 한쪽 다리에 마비가 온다. 나 좀 살려주라.”는 다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오 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였습니다. 빨리 병원에 가 보라고 한 후 다음날 병원을 찾았습니다. 저는 이 전화가 제 운명을 바꾸어 놓을 줄이야 그때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당시 엄마를 여의고 매일 엄마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고 슬픔에 잠겨 있던 때였습니다. 그 후 ‘다발성 경화증’이란 병명을 받고 하반신 마비로 누워있는 환자의 보호자이며 친구입니다. 저는 이 사연을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지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영화 한 편으로도 부족하고 글을 써도 표현하기 힘든 많은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벌써 햇수로 5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있네요. 갑자기 한쪽 다리에 마비가 오고 해서 혈액 검사부 터 안 해 본 것 없이 다 해 보았으나 무슨 원인인지 병원에서는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 재검사를 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일 근접하게 ‘다발성 경화증’이란 병명을 진단받 고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80 ∙


참! 환자가 먹는 약도 정말 너무 많았습니다. ‘스테로이드’란 알약을 28알, 진통제, 또 다른 약 을 합치니 한 번 복용하는 약이 40알까지 되었습니다. 약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퇴원 후 집에서 생활하는 데 지옥이 따로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환자는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과 칼로 살을 베어내는 아픔의 ‘통증’이 10시간에서 20시간 씩 계속되었으며 이 ‘통증’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한쪽 다리를 끌면서 현관문을 열고 ‘나 죽는다.’고 하면서 기어 나가며 자기를 좀 죽여 달라면서 울면서 간절히 청하기도 했습니다. 난 이런 사람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게 너무 미웠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난 이 친구에게 ‘같이 죽자.’라고도 하면서 어떻게 표현할 수도 없는 그런 시간을 1년을 보냈습니다. 그 통증이 끝나는 무렵 다른 한쪽 다리까지 마 비가 되어 목에서부터 발끝까지 하반신 마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난 후 친구는 장애인 판정을 받았고 이후 이 친구는 거의 희망을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삶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전 이런 친구를 버릴 수 없어 지금까지 옆에 있어 주었습니다. 너무 누워 생활을 하다 보니 욕창이 생겼습니다. 저는 저희 엄마가 병원에 계실 때 욕창이란 걸 알았기에 그 환부를 깨끗이 말려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나아져 가는 무렵 옆집에 사시 는 막달리나 자매님이 옥수동 성당 가정간호사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분이 이영희 간호사님이십니다. 이후로 인연이 되어 지금도 꾸준히 저희를 돌봐 주심에 감사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환부를 소독 받고 치료받는 과정에 이 친구가 갑자기 오한이 오기 시작하여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병원 의사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면서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병원 입원실의 많 은 사람들 속에서 대소변을 다 봐야 하는 그런 모든 것이 이 친구에겐 정말 힘든 일이었기에 지체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환자의 욕창이 얼마나 심했던지 살 속으로 파고들어 아니 속에서 썩어가 고 있다고 의사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7차례에 거쳐 수술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힘들 게 수술을 하고 한 달 보름을 병원에서 보내고 다시 퇴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1년이 지났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이 친구에게 수술받은 부위에서 다시 조그마 한 흉터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또 오환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서 다시 살이 썩 어 들어간다고 해서 수술 일정을 잡았습니다. 긁어내고 소독하고를 4번 반복한 후 수술을 하였습 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저희 친정아버지까지 몸이 편찮으셨지만, 아버지를 돌볼 수가 없 어서 가까운 요양병원에 모셔두고, 이 친구를 돌보면서 짬을 내어 아버지께 면회 가곤 했습니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셨지만 건강한 분이셨는데 이 친구가 마지막 수술하는 날 전화 한 통이 걸려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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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요양병원 측에서는 친정아버지께서 좀 이상하니 오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 수술 중인 환자가 있어 결과를 보고 조금 있다가 가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은 후 이 친구가 나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수술자 명단에서 ‘회복 중’이라고 안내되었습니다. 운명의 장난일까요? 이 친구가 수술실에서 나오는 시간에 저에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아버 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전화였습니다. 저는 아직 마취도 덜 깬 상태인 친구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 다고 말하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저는 그 당시 누구에게도 이런 상황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말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상황에 가정간호사 언니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여 “언니~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해 야 해요?” 하면서 울기만 했습니다. 왜 나에게는 이런 시련과 슬픔만 안겨주는 건지 세상이 미웠 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제가 그렇게 급박하게 전화를 했는데도 간호사 언니는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면 서 장례에 관한 모든 절차를 처리해 주시고 계셨습니다. 일단 아버지 시신을 금호동의 장례식장 으로 모셨고, 장례식장 비용을 싸게 해 주시는 것부터 시작해 정신이 없는 저에게 찾아오는 조문 객을 위한 음식도 손수 간호사님이 준비하여 대접하였고 아버지 장례식 날까지 엄마처럼 일을 돌 봐주셔서 용미리 제1 묘지에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무사히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습니다. 병원에 있는 친구는 장례를 치르는 동안 같은 입원실 옆에 있는 분께 잠시 부탁하고 부랴부랴 장례를 치 렀습니다. 아버지 장례를 모시는 동안 정말이지 이 친구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 인들 저에게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때는 한없이 미웠습니다. 하지만 장 례를 치른 후 내 발길은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슬픔도 잠시 저에게는 그런 시간마저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짜 엄마 같으신 간호사 언니가 옆에 안 계셨으면 저도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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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활에 힘들어하고 있을 즈음 저는 도움을 주신 신부님과 연령 회장님, 본당 신자 분들에 게 보답하고자 교리 공부를 하면서 신자가 되기를 마음먹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가정간호사 언니는 여기저기 저희 이야기를 알려서 너무도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각종 국가의 복지 서비스 혜택뿐 아니라 서울성모병원의 성모 자선회비 등 많은 경제적 도움으로 우리에겐 희 망이 되었습니다. 또한, 세례를 받기 전 저는 수녀님께 큰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선물이었습니다. 초 신 자인 저에게 손을 내밀어 주셨고 저의 마음을 알아주셨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스테파니아’라고 합니다. 물론 이 친구도 신자이며 세례명은 ‘스테파노’입니다. 저의 대모님은 가정간호사입니다. 성당에서는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저에게 일거리도 주셨습 니다. 저는 모든 분들께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친정아버지께서 건강하실 때에 제 이름으로 300만 원 정도 되는 기계를 사셨는데 이를 갚으라 고 채권자들이 죽일 듯이 협박을 하여 그때는 정말 산 너머 산이구나! 나는 왜 이럴까? 죽고 싶다 는 말이 절로 나왔고 나 하나가 죽으면 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고 죽을 생각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때도 본당 신부님과 가정간호사 언니께 조심스럽게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도와주셔서 일단 해결되어 현재는 희망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2년을 지내면서 작년에 다시 이 친구가 수술 을 두 차례를 하고는 지금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지만 저는 문득 생각을 합니다. 아니 생각보다 주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딱 현재 위치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대로만이라도 있을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문득 어느 날 신부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살 거냐고?” 물론 이 말씀의 뜻을 잘 압니다. 이 친구와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친구라는 것뿐, 아무 사 이도 아니지만, 저마저 이 친구를 버리면 이 친구는 죽을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버릴 수가 없습니 다. 물론 힘도 들고 스트레스도 쌓이지만, 저로 인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저는 끝까지 이 친구를 지켜 줄 것입니다. 5년이란 시간 동안 많이 힘들고 고통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후회를 해 본 적도 그런 마음을 가 진 적도 없습니다. 옆에서 저를 도와주시는 천사 같으신 가정간호사님과 성당의 도움이 있었기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앞으로도 저는 이 친구를 위해 같이 생활해 나갈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친구에게 손발 이 되어줄 것입니다. 지금도 대소변은 다 받아주지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받았던 사 랑을 이 친구에게 전해 주라는 메시지라는 것을 전 느낍니다. 그 느낌 아니까요. 저는 자기 전 가끔 이렇게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주님! 우리 스테파노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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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게 해주세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욕심도 안 낼게요. 조금씩 주님의 은총을 내려 주셔요.”라고 요. 여기까지 제가 이 친구를 떠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느님이 맺어 준 사랑의 고리와도 같은 친 구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힘들 때 힘이 되어준 옥수동성당 신부님, 수녀님, 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사 언니와 성모 자선회 회원님들의 무한한 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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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장려상

새 삶을 살게 해주신 가정간호사님! 서울성모병원 | 가정간호센터 | 박일만

목포해양대학을 나와 일등 항해사로 외항선을 탔던 시절.. 좀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욕심에 밀수 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오니 그동안 꼬박꼬박 한 푼도 쓰지 않고 송 금한 모든 재산과 아이들을 데리고 아내가 잠적하였습니다. 미친 듯이 백방을 찾아다녔으나 행방이 묘연하여 배신감과 자포자기로 매일 술독에 빠져서 알 코올중독자로 살던 중 2002년 여름 장마 때 그날도 만취되어 양재천에 불어난 물에 잉어 떼가 올 라왔다고 하여 구경나갔다가 다리에서 떨어져 우측 대퇴골 복잡골절로 서울의료원에서 골절된 뼈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았으나 입원기간에도 몰래 술을 사다 먹으며 말썽을 부려 상처가 아 물지 않은 채 강제 퇴원 당하여 원망과 슬픔으로 모든 사람들과 단절한 후 집에서 혼자 상처 치료 를 하던 중에 우연히 보건소 직원에게 알려져서 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사와 연결되어 주 2회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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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 치료와 욕창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루도 술을 안 먹고는 살 수 없었던 상태라 간호사 방문하는 날도 만취 상태로 전동차에 탄 채 아파트 놀이터에 잠들어 있으면 도저히 집안으로 옮길 수 없기에 차 안에 준비하고 다니던 돗자 리를 바닥에 깔고 사람들 도움으로 눕힌 후에 치료를 해주곤 한 적이 수도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받은 냉대와 무성의한 의료진에 대한 불신으로 처음에는 ‘저 간호사도 친절함이 얼마 나 가나 두고 보자’ 하는 심산이었는데 한해 두 해 날이 가도 변함없이 상처치료만이 아니라 혈압 관리 해주고, 신장까지 나빠졌는데 혈액검사뿐만 아니라 의사선생님까지 왕진 오셔서 진찰해 주 시고 투약과 영양관리로 음식도 사다 주고 집안 정리는 성당 레지오단원이 맡아주고 주 1회 목욕 봉사 하는 형제님까지 와 주는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정성을 다해 인격적으로 대해 주는 것에 차라리 빨리 죽고 싶다는 마음으로 세상 모든 것과 단절했던 캄캄한 마음에 한 줄기 빛이 점 점 커져서 밝아지며 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방문이 끝날 때는 기도로 마치는 간호사에게 어느 날 어렸을 때 화순 어느 성당에서 할머 니 손에 이끌려 모이세 라는 이름으로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너무나 반가워하면 서 교적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찾을 길 없어서 특별히 신부님, 수녀님 배려로 봉사자가 방문하여 6 개월 동안 주 1회 교리 공부를 마치고 신부님께 찰고 받은 후에 보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보례도 신부님께서 별도로 혼자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저 같은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해 주시는지 감정이 메마를 때로 메말라 있던 못난 인간이 그 날은 눈물이 펑펑 쏟아져서 마음에 쌓이고 쌓여 큰 산을 이루었던 미움과 원망이 한꺼번에 무 너져 내려서 날아갈 듯이 홀가분해졌습니다. 오래전에 죽었던 박일 만은 2013년 모이세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제 겨우 한 살 이지만 매일매일이 축복임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저를 보면 죽었나 하면 또 살아 있고 매해 그렇게 놀란다고 하면서 벌써 죽을 목 숨이 간호사가 시도 때도 없이 치료해주고 옷 갖다 입히고 고기에 과일에 약에 주사에 그렇게 정 성을 쏟아서 그 덕에 사는 거라고 하는데 참말입니다. 워낙 표현할 줄 모르는 저 인지라 어쩌다 용기를 내서 속에 항상 담고 있던 고맙단 말을 하면 저에게 감사할 필요 없고 하느님과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병원에 감사하라는 말을 듣고 저 도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도무지 제가 할 일이 없었습니다. 몸이 점점 나빠지고 골절 부위에 철심이 피부 밖으로 돌출되어 피부 손상이 아주 심하여 서울 의료원에 다시 입원을 하여 세밀히 검사받았으나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10년을 이 상 태로 유지한 것도 참 놀라울 뿐이라고 하면서 가정간호사가 잘 돌보아 준 것 같으니 계속 그분한 테 치료받으라고 하면서 3일 만에 퇴원을 하라고 해서 집으로 돌아와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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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전동차도 탈 수가 없고 집안에만 있으면서 월 1회 봉성체가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습 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저를 찾아오시어 저와 한 몸을 이룬다니 이런 놀라운 일이 세상에 어떻 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부님 수녀님이 번갈아 오시는데 제 손을 꼭 잡아 주시고 머리에 안수 주시는 그분들의 손길 이 너무나 고맙고 황송합니다. 이제는 죽어도 원이 없고 얼마 전 딸아이들과도 연락이 되었고 모 두 화해했습니다.

매달 봉성체를 하면서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모셨는데 날이 갈수록 무딘 제 마음에도 이건 아니지 예수님 모시는 귀한 몸에 술로 찌들게 해서는 안 되겠다 생각되어 봉성체 하는 날 하 루만 안 먹던 술을 끊게 되었어요. 도저히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졌어요. 하루도 안 먹으면 안절 부절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제가 벌써 3개월째 술을 안 마시게 되었습니다. 몸도 좋아진 것 같고 가정간호사도 좋아졌다고 세상에 이런 일이 기적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왜 진즉 이렇게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나 후회가 됐습니다. 그래서 술값 절약된 것을 우리 성당 교육관 신축 기금으로 매달 봉헌하기로 약정하고 통장까지 만들었답니다. 이런 모든 일이 가톨릭중앙의료원의 이념 실천 사업으로 베푸신 혜택으로 절망하던 한 인간이 새 삶을 얻었습니다. 저는 얼마 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미련도 없고 욕심도 없습니다. 저와 같은 분들이 혹시 어디에 또 있다면 제 얘기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가정간호사님 의 권유에 용기를 냈습니다. 미흡한 제 얘기를 들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다시 한 번 더 CMC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 의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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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장려상

그날도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서울성모병원 | 가정간호센터 | 김용수

20여 년 전이었다. 돌배기 첫 아이가 고물고물 걸음을 막 뗄 무렵 달콤한 신혼의 주인은 따로 있는 듯 우리에겐 방황뿐이었다. 오직 고향 자연의 순환 속에서 내 꿈의 가지를 펼치고 싶은 마음 뿐 이었다. 그날도 역시 술에 찌들어 늦은 귀가였다. 기다렸다는 듯 흐트러진 날 살포시 안아 주었다. 소리 없이 흐른 아내의 눈물은 내 하얀 와이셔츠를 적시고 가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서울 살이 마침 표를 찍는 자국이었다. 뜻밖이었다.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만 없었단다. 고마웠 다. 빚을 대신 갚아준 기분이었다. 아침 일찍 서둘렀지만, 고향 초입에 다다르자 어스름은 앞산에서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먼 길을 달려온 낯선 차가 집 앞에서 가쁜 숨을 고르느라 그르렁 그르렁 거려도 개가 사납게 짖어대 88 ∙


는데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어머니가 ‘어머니 저희들 왔어요.’ 며느리가 소리를 치자 신발 앞뒤를 더듬거리다가 짝짝이 신발을 끌며 달려 나오셨다. 눈에 넣 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그리도 보고파 하시던 손자 받아 안고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 하시던 어머 니 언뜻 짐칸에 실린 이삿짐을 보는 순간 적잖이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니가 서둘러 차려주신 저녁 밥상의 냉잇국 향기는 어릴 적 동심을 적시던 봄날의 풍경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그날 밤 우리의 뜻을 소상히 말씀 드렸으나 유달리 자식 사랑이 깊던 어머님 의 모습은 그날만은 아니었고 당장 ‘서울로 돌아가라’시며 으름장을 놓고 벽을 보며 애간장을 태 우셨다, 시골엔 자식이 서울 산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고 자랑거리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자식 이긴 부모는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터진 봄꽃 소리 맑은 교회 종소리 울리던 그 새벽녘 만삭인 아내의 치마폭에서도 청아한 둘째 아이 울음도 합창으로 톡톡 터져 나왔다. 가문의 경사였을까? 매듭 풀린 실타래처럼 하는 일마다 잘 풀려갔다. 햇병아리 두 녀석이 어머 니가 어미 닭인 양 종일토록 졸졸 따라다녔다. ‘구구구 구구구’ 노랑 감꽃 떨어지던 어머니의 4월 의 노래는 행복의 향기였다. 그러나 단란하고 평온했던 가정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집안의 변고는 그해 벼 누룸이 짙 어져 가던 그해 가을이었다. 밭일을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좁은 길모퉁이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오토바이 를 피하려다 그만 논으로 구르는 끔찍한 사고에 휩쓸리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내 희 미한 눈동자에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 꽃구름뿐이었고 내 사지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뒤집힌 경 운기 바퀴는 딱정벌레처럼 허공에 노를 젓듯 허우적거리고 신음하는 엔진 소리에 놀란 거대한 소 나무도 시퍼렇게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전남대학병원 응급실이었다. 가난이란 큰 벽도 그곳에서 처음 경험했다. 검사 결과 경추 5번 6번 신경의 손상은 경미하여 수술하면 곧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하였 으나 문제는 큰 수술비였다. 지금처럼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있는 시절이 아닌 터라 나처럼 가난 뱅이는 수술은커녕 문전박대 쫓겨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의 충격에 어머니는 서둘러 홀연히 떠나셨다. 자식 살리고자 오직 한마음으로 주님 찾아 먼 하늘길 떠나는 어머님의 모습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내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던 어머니마저 잃었을 때 내 마음은 무너져 내리고 아내는 미친 듯 울부짖고 검은 바람결에 몸부림쳤다. 서울에 사는 누님이 우리를 급히 불러올렸다. 없이 살아도 곁에 형제가 있고 없는 사람이 벌어 먹고 살기는 그래도 서울이 낫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달려온 바로 그곳은 왕십리 산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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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처럼 거미줄처럼 얼키설키 골목길은 진눈깨비로 질척이고 낮과 밤이 없는 지하방이었다. 천장의 뿌연 백열등은 해와 달이었다. 어느 날 주인 할머니가 지하 계단을 내려왔다. “새댁 집에 있수? 동사무소에서 전화 왔는데 전할 말 있으니 사회과로 지금 와 달라는군.” 입담이 구수한 할머닌 문도 열기도 전에 당신 할 말만 남기고서 계단에 발걸음 소리만 남긴 채 총총히 사라지셨다. 사회과에 다녀온 아내는 ‘서초구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됐다’며 아이처럼 폴짝 폴짝 뛰며 기뻐했다. 그렇게 환하게 웃는 아내의 얼굴은 실로 오랜만이다. 이사하던 첫날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방황의 종지부를 찍는 것 같아 감회가 깊었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주님께서 맺어준 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사 최복순 선생님은 우리에겐 새 희망의 끈이었다. 형제나 다름없는 분이시다. 집안에 온갖 걱정까지 임의 몫으로 챙기시고 한 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최복순 님의 사랑 으로 메워 가는 어느 날이었다. 설이 코앞이면 언제나 고기와 사골을 사 오셨지요. 그러나 먹지 않았다. 아니 먹을 수가 없었다. 오래전 전남 조선대학병원에 욕창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다. 수술을 하고 아침 회진 시간이었다. 수술 부위를 보시던 선생님이 새살이 빨리 차려면 환자가 잘 먹어야 한다고 하자. 아내는 누운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그날 밤이었다. 모두가 잠든 밤 누가 들을세라 쉬쉬하며 “어서 먹어”라고 재촉했다. 사골국물 이었다. 빈 주머니만 차고 있던 아내는 급기야 다른 보호자가 끓여 놓은 사골 국에 손을 댔던 것 이다. 남편을 살리는 일이라면 못할 게 없다는 서슬이 시퍼런 눈빛이었다. 나의 잘못으로 순진한 아내를 도둑으로 내몬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고 무너져 내렸다. 사골 국을 먹으며 몸서리든 그날의 기억을 다시 먹는 것 같아 지금도 사골국은 절대 먹지 않는 다는 나의 금기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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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이르도록 사랑 주심에 채석장에서 막 따낸 돌 끝처럼 날이 선 내 마음은 이내 조약돌이 되어 세상을 긍정으로 발아 볼 수 있는 마음의 시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흉한 내 모습을 보면 재 수가 달아날 듯 멀찍이 피해 걷던 사람들이 이젠 먼저 다가와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모성은 강하지만 사랑은 위대하다. 쉰이 넘는 이 나이에 이 글을 쓰면서 가슴 절절히 되뇌어 본다. 빛이 닿지 않는 그 먼 곳까지 살펴주신 서울성모병원 많은 가족 여러분의 사랑은 실로 위대한 사랑입니다. 많은 환우들은 지금도 고픈 사랑의 결핍을 임들의 사랑으로 채워가며 하루하루를 살 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나 또한 임들이 주신 사랑 귀히 여기며 늘 새것처럼 세상을 사랑하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먼저 병자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고쳐주신 마음을 가톨릭중 앙의료원에서 실천하시어 이렇게 좋은 제도로 우리들을 도와주시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마 운 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밖에 없기에 오늘도 쉼 없이 묵주 알을 돌리며 기도 합니다. 고맙습 니다. 가톨릭중앙의료원 모든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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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장려상

다시 사는 人生 서울성모병원 | 가정간호센터 | 양경자

매주 일요일이면 저는 지하철을 타고 제부가 운영하는 원당 OO 교회까지 다녀오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점심을 만들며 손녀딸과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죠. 손녀 딸아이가 피아노 치 는 것을 옆에서 구경도 하며 손녀딸이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보며 일상의 나날을 보 내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몇 년이 지났을까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너무 아파 걷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형외과를 찾아 물리치료와 무릎에 주사를 맞기 시작했지만, 차도가 보이지 않았 고 의사선생님께서는 더 이상 이런 식의 진료로는 나아지기 어렵다고 하시며 저에게 큰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시간을 주체할 수 없으니 빨리 받는 편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2005년 목동에 있는 힘찬병원에서 왼쪽은 인공관절, 오른쪽은 레이저 수술을 받고 난 뒤 오랜 시간이 흘러 걷기 시작할 때쯤 이번에는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92 ∙


2007년 같은 병원에서 허리 수술을 받았고, 다시 돈이 없었던 저는 남동생에게 도움을 요청했 고 미안함과 저 자신의 모습에 한스러움을 느끼며 이불 속에서 남몰래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2009년에 몸이 이상하게 아파와 산부인과를 찾았습니다. 초음 파검사로 암초기 진단을 받고, 큰 충격에 실어증에 걸린 사람마냥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삶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큰 봉투에 옷 정리를 하기 시작했고 몇 봉투나 버린 줄도 모를 정도로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 날 병원에서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였고 수술 을 하고 나니 몸이 날아갈 듯 시원하였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2012년 허리를 펴지 못하고 걷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또 다른 병 원에서 허리 수술을 받았습니다. 또다시 남동생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저는 ‘빨리 낫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빨리 데려가 주세요.’라는 인생의 마지막을 위해 기 도드렸습니다. ‘과연 이 몸으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기운도 없고 드러누워만 있으며 하루하루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2013년 초 대상포진에 걸려 다시 병원을 찾았고 그 이후 자꾸 기운이 없어 누워만 있게 되다 보니 어느덧 누워서 변을 보게 되는 신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행히 한동안은 보건소 간호사께 서 방문하여 몇 달을 그런 신세로 지냈지만, 어느 날 또 욕창이 생겼습니다. 손을 댈 수 없을 정도 로 엉덩이의 거의 전부가 고름이 차고 피부가 괴사 되었다고 합니다. 보건소에서 치료가 더 이상 불가피하다고 했지만 저는 이렇다 할 말도 못하고 의식도 점점 가 물가물해져 갔습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보건소에서 서울성모병원으로 연락을 취 해서 가정간호 선생님이 방문해주셔서 욕창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혼자 살며 워낙 그동안 못 먹어 영양 상태도 나쁘고 스스로 자세 변경도 어려운 상태인지라 가 정간호 선생님이 정성을 다하여 욕창 치료를 해주고 여러 가지 배려를 해주어 생활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고 가지만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 팀장 수녀님께서는 먼저 영양이 회복되고 기운을 차릴 때까지 만이라 도 수발이 필요하다며 무료로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을 수소문하여 성가복지병원이라는 무료병원 에 입원을 하게 연계해 주셨습니다. 성가복지병원에 입원하여 하루 세 끼 식사를 하여 영양 상태가 회복되니 기운을 조금씩 차릴 수 있었고, 하루에 두 번씩의 치료를 받는 도중 잠깐씩 돌아오는 기억에 제가 살아있다는 사실만 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저는 빠른 회복 속도를 보였고 욕창이 거의 치료되어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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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해서는 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사님이 매주 2번씩 방문하여 욕창 치료를 해 주어 현재는 완 치 단계에 이르러 워커를 짚고 밖에도 나가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양실조로 눕 게 되고 걷지도 못하고 자세 변경도 혼자 할 수 없게 되어 욕창이 생기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이라 고는 없을 때 천사가 제게 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를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밥을 못 먹고 어지러워 힘들 때 서울성모병원에서 성모자선 회비를 보내 주시고 먹는 영양제인 뉴 케어를 먹을 수 있도록 사서 주기도 하여 그것을 먹고 기운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상처치료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담아 마음까지 치료해 주시는 가정간호사님을 보고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몇 번이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나중에 회복되면 다 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더욱 은혜로운 일은 옆집에 사시는 현재 대모님의 도움으로 고척 성당의 반장님과 연결이 되어 교리 봉사자께서 직접 집으로 오셔서 교리교육도 시켜주시며 하루하루 주님의 은혜를 몸소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결국 저는 2013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감격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매일 기도하며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 니다. 성가복지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연계해주신 서울성모병원 팀장 수녀님께 감사드리며 지 금까지 욕창 치료를 해주시고 있는 가정간호사(디냐)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성가복지병원 수녀님, 선생님들, 간호사님들, 학사님 여러 봉사자 분들, 항상 다시 사는 마음으 로 기도드리며 살겠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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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장려상

깊은 감사드리며 여의도성모병원 | 사회사업팀 | 김영순

셋째 딸을 수녀로 보내놓고 성모상 앞에 기도와 함께 지내는 세월이 많았습니다. 시골에서의 생활이 고된 생활이었기에 남은 것은 병밖에 없더군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아끼며 생활해왔습니다. 하지만 허리의 통증과 함께 두 다리의 저림 형상이 나타난 겁니다. 그리 하여 기댈 곳으로 성모상 계신 곳을 찾게 되었답니다. 정형외과 김기원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의 행운이었지요. 첫 번째 수술은 성공적이었지요. 교수님의 자상함과 인자함 덕분에 차도가 너무 좋아 시골로 퇴원하여 생활했답니다. 텃밭에 야채도 심고 고추도 몇 그루 심어서 양념할 정도로 또 일을 시작했지요. 이러다 넘어지 고 말았답니다. 완전 하반신마비 문어다리가 돼버렸지요. 눈물로 다시 찾은 여의도성모병원. 김기 원 교수님께서 힘을 주셨지요. 수술을 마치고 나왔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다리를 보고 기뻤 답니다. 매일 관심으로 보살펴주시는 김기원 교수님과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퇴원한 후 집으로 돌 아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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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좋은 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처음에는 좋았지만, 워낙 허리가 좋지 않고 일을 하다 보니 운 동부족과 함께 또 다리가 마비가 온 겁니다. 눈물과 함께 병원으로 다시 입원하게 되었지요. 이번 엔 병원비가 문제가 되더군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는 데다 있던 돈을 몽땅 두 번의 수술로 다 쓰고 남은 것은 빈 통장뿐…. 한숨과 함께 두 다리를 보고 있는데 김기원 교수님께서 사회사업팀을 소개시켜주셨습니다. 환 하게 빛이 밝아오는 느낌이었답니다. 다시 입원 수술 날짜가 잡히고 희망을 가졌지요. 사회사업팀 에서 오셔서 용기도 주시고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드디어 수술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요번엔 못 쓸 줄 알았던 두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순간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고 있는데 사회사업팀 담당자이신 분이 오셔서 고생하셨다고 힘을 주 시더군요. 너무 상냥하신 말씀에 더욱더 힘이 생겼답니다. 나에게도 관심 있는 분들이 있구나 하 는 마음에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봅니다. 요즘 재활치료에 전념하고 있답니다. 너무 힘든 재활치료로 땀이 비 오듯하고 두 다리가 후들 거리곤 하지만 문어 다리 때 생각을 하고 나에게 희망을 주신 사회사업팀을 생각하며 이것도 행 복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걸어서 나갈 수 있도록 열심히 재활 치료할 것을 다짐하며 저를 도와주신 분들께 고개 숙여 다 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두 다리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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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장려상

여의도 성모병원 자선수기 공모 여의도성모병원 | 중국동포 김길남

저는 중국 교포입니다. 지금은 직장암 투병 중입니다. 사실 암이라고 진단을 받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중국에 있는 아내도 당뇨병으로 인한 오래 투병으로 인해 지금은 당뇨 종합 증세를 보이고 있 는 형편이라 저까지 수술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경제적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눈앞이 캄캄해 지고 삶을 포기하고픈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인규 교수님께서는 병원 내에 불우 이웃을 도와주는 사회사업팀이 있다며 지원을 요청해 보라고 알려주고 직접 연계까지 해주었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사회사업팀을 찾아갔을 때 너무나 따뜻이 대해주시고 사랑으로 감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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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직원분들이 한없이 고마웠고 수술비 지원을 진행해 보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자그마한 삶의 희망을 품게 되었으며, ‘이 세상이 이렇게 고맙고 좋은 분들이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수술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회사업팀의 담당 책임자의 얘기를 들었을 때 그 심정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고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으며,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눈물 이 펑펑 쏟아져 내렸습니다. 사실 여의도성모병원이 아니었다면 더 나아가 사회사업팀의 꾸준한 사랑과 지원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치료기간 병원 내의 선생님들, 간호사님들, 모든 직원분들 너무나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감사하 고 고맙습니다. 이 은혜 영원히 소중히 간직할 것이며, 앞으로 어려운 불우 이웃 돕기에 적극 동참 할 것을 결심합니다. 여의도성모병원 영원히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내 마음 속에 영원히 지지 않는 위대한 병원 으로 간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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