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자선수혜자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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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Catholic Medical Center

핵심가치실천공모전 자선수혜자 수기 당선작


핵심가치실천공모전 자선수혜자 수기 당선작

Contents


[대상]

되찾은 우리 가족의 평범한 일상 / 김○경

[우수상]

마지막 입원 / 반○남 나에게도 일어난 기적 / TRAN ○○○ HUYEN

[장려상]

세 번의 특별한 인연 / 김○원 류마티스 내과 김○○ 교수님 / 원○자 나의 육체적, 정신적 삶을 치유하다 / 박○○라 주님의 사랑은 나를 긍정으로 이끌었습니다 / 장○익 생명의 길 / 김○열


대상

되찾은 우리 가족의 평범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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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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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 때 한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는 다리에 왜 이렇게 멍이 많아?” 그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점점 딸의 다리에 눈이 갔 다. 휴대폰 사진을 찾아보니 반바지를 입은 딸의 다리에 멍이 눈에 띄게 늘어 있었다. 얼마 후 남편과 딸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피검사 후 딸의 혈소판 수치가 너무 낮아 위험한 수치라 입원을 했고 수치는 오르지 않았다. 원인을 찾지 못 하자 서울성모병원 정 교수님 이름 앞으로 의뢰서를 써주셨다. 사실 우리 딸 은 태어날 때부터 두 개의 신장이 하나로 뭉쳐져 있었다. 교수님의 첫 진료 때 차분한 어조로 검사를 진행하자 하셨고 염두에 두었던 질병이 있었는데 그것이 적중했다. 병명은 ‘판코니빈혈’. 우리나라에서는 연간 2명 정도 발생 하는 희귀난치성질환이며 최종 치료방법은 조혈모세포이식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서울의 유명한 다른 병원을 찾아 똑같은 검사를 진행했다. 역시나 결과는 같았다. 다시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고 서울 성모병원으로 병원을 택했다. 선택에 있어 정 교수님의 마지막 말이 가장 결 정적이었다. “앞으로 저한테 오시면 됩니다.” 이 말 한마디였다. 그 후로 몇 개월간 교수님은 딸의 상태를 봐주셨고 섣불리 골수검사를 권 하진 않으셨다. 혈액수치가 점점 떨어질 즈음, 교수님께서 이식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고 우리 부부도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마음을 먹었 다. 과연 우리 딸과 일치하는 공여자가 있을지가 가장 걱정이었다. 하지만 교 수님은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고 코디네이터 선생님은 우리 부 부의 쏟아지는 질문에도 끝까지 성의 있게 답변해주셨다. 가톨릭조혈모세포은행 기증 희망자를 통틀어 우리 딸과 일치하는 사람은 7명. 하지만 중요한 것은 최종적인 기증 의사였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무려 3명이나 선뜻 기증해준다고 하셨고, 그분들 중에 선택할 수 있는 행운까지 찾아왔다. ‘하늘의 축복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축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딸의 담당 교수님께서 직접 병원 내 사회사업팀에 의뢰해주 셔서 다행히 후원 단체로부터 치료비 또한 후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입원 날, 딸은 20층 소아병동에 입원했다. 간호사분들은 모두 반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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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맞이해주셨고 치료에 관해 친절하고 정확하게 설명해주셨다. 또한 ‘어린 이학교’라는 공간이 있었는데 학업을 이어가기도 했고 여러 자원봉사자들의 알차고 재미있는 수업들로 늘 따뜻하고 즐거움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아직 병원이 낯선 딸에게 그곳은 긴장도 풀 수 있고 나와 같은 아픔을 함께하는 아 이와 엄마들 모두가 서로를 위해 힘이 되어주었다. 드디어 딸의 이식 날이 다 가와 1인 무균실로 옮기면서 어린이학교는 회복이 되면 다시 찾기로 했다. 이식 당일 오후 공여자분의 조혈모세포가 잘 전달되어 이식을 진행하게 되 었다. 진행하기 전에 간호사분들의 기도가 시작이 되었는데 남편은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 후로 딸은 치료를 잘 받았고 선생님들의 적절 하고 숙련된 치료로 인해 한 달 이상의 병원생활을 큰 어려움 없이 견디고 퇴 원할 수 있었다. 딸이 퇴원하기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간호사분들께 서 매일 환자의 혈액검사를 위해 카테터에서 혈액을 채취해 가시는데 새벽에 는 보호자나 환자들이 깨지 않도록 굉장히 조심스럽게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 고 가신다. 그때 딸이 소변이 너무 급했는지 잠에 깨어 일어났고(소변을 소변 통에 받아야 함) 그 소리에 나도 깨어 일어나려고 했던 찰나 간호사 선생님이 딸에게 “쉿! 엄마 깨니까 선생님이 소변 받아줄게. ○○야 퇴원 축하해. 이제 다시는 20층에 오면 안 돼. 알았지?”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딸과의 대화에 나는 가만히 자는 척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딸은 현재 이식 1년 4개월인 후에도 높은 생착률로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딸은 아직도 가끔 20층 병동 얘기를 하며 궁금해한다. 모두가 한마음이었 던 사람들, 환자를 가족같이 대해주었던 의료진, 관계자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 가족은 평범한 일상을 재회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 도돌이표 같은 일상이 그저 지루하고 특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 가 무사히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감사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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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서울성모병원에서 받은 그 감사함을 딸의 건강한 모습으로 보답 드 리고 싶다. 올해 3월, 딸은 그토록 가고 싶었던 초등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우수상

마지막 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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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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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아이와 검사를 위해 마지막 입원을 하였다. 11층 병실에 올 라가니 아주 많은 생각에 화장실을 가도 눈물이 나고 매점을 가도 눈물이 나 고 가는 곳곳마다 힘들었던 시절 생각이 나서 조금은 힘이 들기도 했다. 2007년 6월 20일 골수이식 수술을 한 후 두어 번의 입원을 제외 하고는 늘 외래치료를 해왔기 때문에 10여 년 만에 입원이었다. 병실에 들어가니 20년의 투병생활이 파노라마처럼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태어나 한 달 만에 심장이 멎은 아이는 화장터를 알아볼 만큼 의학적으로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심장이 멎고 한 달 반 정도의 중환자실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다 첫 번째 기적을 만들었다. 기관 삽관을 제거하고 일시적으로 멎은 줄 알았던 심장은 수혈을 받아야만 정상적으로 뛰었다. 병명을 찾지 못 하여 2달여를 검사만 했다. 그 작은 몸에 바늘을 꽂고 고통스러워하던 아이 의 모습…….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잊은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더욱 또 렷이 기억이 났다. 많은 검사를 한 후 내려진 병명은 순적혈구형성부전증이라는 처음 듣는, 이름도 생소한 병이었기에 나는 손바닥에 병명을 늘 지워지지 않는 볼펜으로 적어 다녔다. 아이는 몸에서 적혈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병으로 주기적으로 수혈로서 적혈구를 보충해주어야 했다. 치료약도 치료방법도 없는 희귀 병…… 난 너무도 절망적이었다. 처음 4년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왜?’라는 단어로 울부짖었다. 그 사 이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희귀질환이라서 병원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적 은 재산도 순식간에 없어지고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남편은 급기야 집을 나 가고 말았다. 두 아이와 남겨진 나는 하루하루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아이에게 수혈을 해줄 돈을 벌기 위해 나는 아이들을 집안에 가둬두고 식 당에 일을 하러 나갔다. 식당에서 점심시간을 끝내고 아이들의 늦은 점심을 챙겨주러 집에 돌아오면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은 냉장고에 있는 케첩,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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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즈 등을 먹고 배가 아프다고 울기도 했다. 속상한 마음에 아이들을 때려주 고 같이 부둥켜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아이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당장 먹 고사는 문제가 시급했기에 하루하루를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


아이가 9살이 되던 해 수혈 부작용으로 인해 간경화가 시작이 되었고 교수 님께서 골수이식 수술을 권하셨다. 하지만 수술 성공률은 0.5%밖에 되지 않 는다고 하셨다. 결정을 하라고 하시는 교수님께 난 두 달 동안은 답변을 드리 지 못하고 고민을 하다 수녀님을 찾아가 의논을 했다. 몸무게가 38kg이 될 정도로 고통 속에 고민을 했지만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간신히 수녀님 의 도움으로 수술을 결정하고 나니 엄청난 수술비에 또 발목이 잡혔다. 처음 엔 감당할 수 없어 수술을 포기했었다. 우리의 사정을 들으신 교수님께서 사회사업팀을 연결해 주셨고 사회사업 팀 선생님의 도움으로 골수은행에 등록을 하고 나니 감사하게도 형제간의 이 식처럼 적합한 골수 공여자를 여러 명 찾을 수 있었다. 사회사업팀 선생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지독한 항암 치료를 견디고 아 이는 0.5%의 성공률이었던 2번째 기적을 만들었다. 물론 이식 부작용으로 아주 오랜 시간, 아니 지금까지 고생을 하는 것도 있 지만 우리는 너무나 큰 고통을 겪었기에 지금의 생활은 너무나 행복하고 즐 겁게 보내고 있다. 중학교에 갔을 무렵 아이의 신장이 140cm 저신장장애라는 진단을 받았 다. 교수님께서 치료를 해도 160cm를 넘는 건 기적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이는 4년여의 치료 기간을 지나면서 160cm라는 3번째 기적을 만들었지 만 치료를 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60cm가 넘으니 성장호르몬 주사가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치료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돼 버렸다. 기초 생활 수급 비를 받고 농사일도 도와주고 받는 일당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었다. 염치없지만 나는 다시 사회사업팀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언제나 격려와 용기로 함께 고민해 주시고 울어주 시던 선생님……. 우린 또 사회사업팀의 도움으로 남은 치료를 할 수 있게 되 었다. 아이에게 꼭 필요했던 성장호르몬 치료를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사업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기초생활 수급자로 살면서 늘 죄인처럼 나 자신도 모르게 자신감도 없어지 고 고개가 숙여지지만 우리의 아픈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시는 선생님들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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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에 나는 아이의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사회사업팀으로 자랑을 하러 갔다. 언제나 우리의 사정을 알아주시고 도움 주셨던 우리에게 마중물을 아낌없이 부어주셨던 사회사업팀 선생님, 살아갈 희망을 잃고 너무 버거워 생명의 끈 을 놓고 싶을 때 마다 함께해주셨던 선생님들…… 우리 가족에겐 후원금이 아닌 우리 세 가족에게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을 주셨기에 너무나 감사함을 표 현할 수가 없다. 아이의 건강을 치료해 주셨던 정○○ 교수님도……. 혼자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아이는 21살이 되 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살아옴을 알기에 아이는 공부도 곧 잘하여 마이 스터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다.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 대학교도 아이 스스로 학비를 벌어가게 되었지만 난 너무도 아이가 자랑스럽다. 이렇게 우 리 곁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일 들…… 언제나 등 뒤에서 응원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던 이름 모를 고마우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입원 기간 동안 나는 잊고 있었던 고마움에 눈물이 많이 났다. 이제 성인된 아이……. 이렇게 자기 인생을 멋지게 꾸려나갈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 었다. 모두의 도움으로 받은 은혜를 갚으며 살겠다는 다짐을 하는 아이의 모 습이 대견했다. 나 또한 사회복지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받은 은혜를 앞으로는 우리가 걸어온 것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나누며 베풀고 살고 싶다. 아이의 치료를 마무리하면서 너무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고 자랑도 하고 싶 었고 칭찬도 받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되어 글로나마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됨이 너무나 기쁘다. 아직 남성호르몬 주사와 신장 치료가 남아 있지만 이젠 우리 힘으로 열심 히 고마움 잊지 않고 살려고 한다. 이제는 우리가 또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 있도록,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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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희망을 드리고 싶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다. “고맙습니다.”


우수상

나에게도 일어난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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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 ○○○ HUY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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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봄은 참으로 상쾌했다. 등에서 불이 나고 숨 쉬기도 힘들었던 여름, 물이 줄줄 흐르는 지하방에서 보낸 시간들이 다소 힘들다 느껴졌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감사뿐이었다. 나의 고향은 베트남 응에 안(Nghệ An)이다. 도시와는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로 바다가 가까운 곳이다. 우리 가족은 가톨릭을 믿는다. 나는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면서 시부모님과 두 아이를 양육하였다. 열심히 일하였다. 그 러나 아이들이 학교 입학할 나이가 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돈을 벌어야겠 다는 마음이 언제나 나를 괴롭혔다. 엄마의 손길이 너무나 필요할 딸(6세)과 아들(2세)을 뒤로 하고 2017년 11월 관광비자(3개월 유효)로 입국하였다. 입국에 소요된 비용 1,300만 원은 고스란히 베트남에 빚으로 남아있다. 불안감 속에 간신히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밤낮없이 부지런히 일을 해 돈을 벌어야만 했다. 공장에서의 일은 고되기도 하였지만 베트남에 남아 있는 가 족들을 생각하는 기쁨이 더 컸다. 그런데 어느 날 몸에 이상 증세가 느껴졌다. 임신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라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나는 이주노동자이다. 한국말도 모른다. 건강보험도 없다. 임신 사실을 사장님이 알게 되면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성당에 가기만 하면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가톨릭 신자이니 아기를 낙태 할 수도 없었다. 아기를 낳으려니 병원비도 너무나 무서웠다. 그러나 무엇보 다도 어렵게 얻은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문제가 나를 몹시 괴롭혔다. 어느 날 성당에 앉아 울고 있는데 수녀님 한 분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아주 었다. 나는 울면서 뱃속의 아기를 가리켰다. 수녀님은 대충 알아들으신 듯 걱 정하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하였다. 다음날 한국말을 잘 하는 베트남 자매님 이 나와 수녀님 사이를 통역해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처음으로 병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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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곳을 가보게 되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상담과 서류심사를 통해 부천성모병원에서 진


행하고 있는 Pre-Mom Care 대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이젠 돈 걱정 없이 초음파를 하고 의사 선생님도 만날 수 있었다. 한국말 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저를 위해 이주민센터 수녀님은 항상 동행해 주셨다. 차츰 배가 불러오면서 가까스로 얻은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다. 나는 허리 통증과 하혈 등으로 입·퇴원을 반복하였고, 6월 25일 제왕절개술을 통해 건 강한 아들을 출산하였다. 병원에서는 이주노동자인 나에게 건강보험수가를 적용해 주었다고 한다. 프리맘 케어 대상자로 선정된 이후 산전 검사비와 입원비, 예쁜 아기용품까 지 마련해주었다. 수술 후 수유 관리가 안 되어 옷이 흥건하게 젖어 있던 나 를 보신 사회사업팀 수녀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셨는지 유축기까지 손 수 챙겨주셨다. 나는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였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아기의 얼굴이 노랗 게 되어 부천성모병원을 찾았고, 황달로 신생아중환자실 입원치료를 받게 되었다. 계산서를 들고 다니는 수녀님 너머로 살짝 살짝 보이는 계산서는 내 머릿속을 어지 럽게 했다. 제왕절개 수술비와 아기의 진료비는 CMC 요셉기금으로 지원해주셨다 는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불법이라는 불안감? 누구에게 자신을 쉽게 알릴 수도 없는 막막함이다. 말 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는 답답함.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 그냥 나 는 바보처럼 웃기만 한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이다. 철저하게 외롭고 변두리에 서 있는 나에게 성당에 가는 일은 기쁨 그 자체 였다. 성당에 앉아 있으면 엄마의 품처럼 편안했다. 하느님은 한국말만 알아 들으시는 게 아니었다. 베트남어도 알아들으시고 이주노동자의 마음도 알아 들으시고 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마음도 알아들으시고 여러 명 의 천사들을 보내시어 아주 많은 것을 친절하게 모두 해결해주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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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올 때 임신을 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새 생명을 주 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이런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하느님도 잊어버리 고 돈만 사랑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로서 피난살이를 하면서도 하느님의 존재를 그분께 대한 감사를 잊어본 적 이 없다. 망연자실 성당에 앉아 울고 또 울었던 나! 그러나 지금은 엄마를 보고 방긋 방긋 웃는 귀여운 아기와 함께 하느님을 부르고 있다. 몸을 추스르고 다시 직 장을 구했다. 나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나 를 기다리는 가족들에게도 돈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엄마의 애달픈 마음을 아는지 엄마 품을 떨어져 있는 아기는 울거나 보채지도 않는다. 나는 돈을 많이 벌어 빚을 갚을 것이고 베트남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살 것 이다. 내가 혈혈단신 말도 안 통하는 타국의 피난살이에 지쳐 울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을 만나 꿈과 같은 길을 걸어온 것에 끝없는 감 사를 드리며, 나도 부족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 글을 통해 나를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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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세 번의 특별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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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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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모병원과는 오랜 인연이 있는 올해 42세 된 환우입니다. 1998년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의정부성모병원에서 가장 먼저 치료를 받게 되었고, 지난 2008년 동일 질병 재발로 인해 현 치료 병원인 서울성모병원에서 조혈 모세포이식을 받았습니다. 또 한 번의 인연이 남았네요. 작년, 2018년 6월엔 유방암 진단을 받아 현 재 표준치료인 수술, 항암,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현재 호르몬 약 병행 중입 니다. 그러고 보니 제 인생의 반인 20년을 넘는 시간을 성모병원과 인연을 맺었으니 좀 더 좋은 친밀한 표현인 ‘특별한 인연’이라 일컬어도 될는지 요……. ^^ 매 10년마다 받고 싶진 않지만, 선물인 듯 안겨주는 다름 아닌 ‘암’이라는 선물…… 그간 절망의 마음을 다 놓지 못했음에도 역시나 이번에도 손님처럼 세 번째 암이 찾아왔습니다. 수기라고 하니 처음엔 어떤 내용으로 적어 내려가야 할지 막막함뿐이었는 데, 돌이켜보니 많은 의료진분들과 간호사님을 비롯한 관계자분들이 가장 먼 저 머릿속에 떠올려집니다. 처음 진단 받고 치료 종결 10년 만에 재발된 환자로 다시 찾아뵈었던 혈액 내과 박○○ 교수님…… 오랜 세월에도 저를 기억해주시며, 다시 한 번 치료 해보시겠다고 기운을 북돋아주셔서, 이식 담당 교수님께 바뀌는 시점까지 배 려 깊은 말씀과 더불어, 십만 명당 몇 명뿐이라는 낮은 확률이 왜 다시금 나 에게 재발이라는 무시무시한 화살로 돌아와 현실이 되었는지 여러 혼란함과 힘겨움이었던 제게, 늘 괜찮을 거라는 긍정의 말씀을 표현해주실 때마다 큰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어 치료받는 데 많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나중에 안 사 실이지만, 저의 보호자에게는 30% 생존가능성과 3주 이내의 사망가능성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번도 제게 절망의 끝을 말씀하시진 않으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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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사소한 배려가 깃든 말씀이 쾌유의 원동력이 되 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지난 치료에서 한 번의 완치 경험을 토대로, 흔히 말하는 몇 퍼센트라는 확


률의 가능성은 나에게 해당하지 않으며, 0%, 즉 100% 생존할 수 있다고 생 각하며,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을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무사히 두 번째도 기적적으로 완치하는 데 큰 도움을 주셨던 박○○ 교수님과의 기억이 오래도 록 간직되어 찾아뵙고 다시 인사를 드리고 싶지만, 현재 정년퇴직을 하셔서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또 다른 기억 하나……. 가장 고통스럽고 힘겨웠던 기억은 조혈모세포이식 흔히 말하는 골수이식할 때의 전 처치 과정에서의 치료인 항암이었습니다. 심한 구내염으로 마약성 패치를 붙이고도 보름여 동안 식사를 하지 못하는 등, 어지러움과 고열, 구토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 여길 만큼 그때의 경험이 가장 생생하고 고통의 악몽처럼 떠오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주사제를 투여받고 밤새 부작용으로 잠 한숨 이루지 못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시도 쉴 시간 없이 줄곧 제 옆에서 혈압과 산소포화도 체크와 이뇨제 약물 로 인해 한두 번도 아닌 수십 번에 달하는 소변을 손수 양을 기록하며 밤부터 새벽 내내 제 곁을 지키며 괜찮아지실 거라며 손을 잡아주시며 자리를 뜨지 않았던 이식병동의 이름 모를 간호사님……. 그때는 제 고통만 보였기에 그 상황에만 치우쳐 있다보니 노고의 감사함을 불행히도 당연스럽게 느꼈던 제 자신에게 고개가 숙여집니다. 봉사의 마음이 아니면 아무나 행할 수 없었던 언행들이 뇌리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저를 기억하실 수 없겠지만 정말 정말 뒤늦게나마 감사함을 이제나마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끝인 줄 알았던 제 투병이 작년에 2차암인 유방암을 진단받아 또다시 시작 되었고, 절대 마음과 머리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세 번째의 암은 눈앞의 현실이고 다시금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었고 저는 이미 암환자로의 삶에 놓여져 있습니다. 요즘 세 명 중 한 명이 암으로 사망할 수 있다는 여러 정보들…… 그 가능성을 왜 저는 세 번이나 해당되어야 했을까요? 너무 슬프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종양, 유방외과의 치료과에서 전 병력 때문에 현재도 추적관찰 중인 혈액내과에 협진하여 치료 가능 여부에 대해 진료를 받게 되었는데, 큰 상심을 하던 저에게 전해졌던 김○○ 교수님이 뜻밖의 한마디를 전해주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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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 말씀은 “이식한 지 10년이 되어가니 일반인처럼 치료받으면 되고, 백혈병 치료의 10분의 1 힘들다…… 유방암은 치료가 잘 되는 암이니 잘 치 료받고 다시 건강하게 보자.” 오랫동안 뵈었지만 절실했던 저에게 단비 같은 말 씀이셨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이번의 여러 차례의 항암과 서른세 번의 방사선을 받 을 때 조금은 힘겨워질 때마다 해주신 말씀을 떠올리며 이겨내려 했습니다. 아니, 지금 현재도 이겨내는 중입니다. 말처럼 이루어진다는 긍정의 말이 있듯이 거짓말 처럼 어느 새 큰 부작용 하나 없이 표준치료 종결을 맞이했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나서는 병에 대한 부정을 갖다가 나중에서야 인정하고 수용 하고 받아들인다고 하는데, 저를 포함한 보통 환자분들은 의료진의 말씀, 표 정 하나에 희망을 갖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가령 “좋아질 것이다”, “좋다” 이런 긍정의 단어 하나에 완치의 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됨은 분명하다고 느껴집니다. 투병 기간이 20년이 넘다보니, 보험 없이 치료받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 고, 그러다 보니 누적된 투병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사회사업팀의 도움의 손 길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적잖은 자존심이라는 게 남아 있어서인지 제 상황을 밝힌다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현재는 퇴사하신 것으 로 알지만 한 직원분이 세심하게 마음 써주셔서 저의 주변 여건을 묵묵히 듣 고 지원에 노력을 해주셨던 그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랜 연륜의 삶을 산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굴곡진 삶을 살다보니 이제 는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사람이 감정이든, 어려운 현실에 마주하게 되면 처음엔 절망의 나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저 또한 그런 상황 의 반복에 의지마저 꺾인 적이 있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악조건의 여 건을 잘 이용하면 마치 인생의 마일리지 쌓듯 적절히 이용할 수 있고,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분명 극도의 어려운 과정일 것입니다. 흔 한 말로 바닥을 치는 삶을 살면 더 떨어질 곳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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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를 하면 절망이 되지만, 반대로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어떻게든 해결해 갈 마음과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견뎌보기라도 해볼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후자의 맞는 삶을 살고 싶고, 쉽진 않지만 그런 멋진 삶을 꿈꾸며


노력 중입니다. 이제는 심리적으로도 안정의 길로 들어서 치료를 할 수 있음 에, 쓸 수 있는 약이 있음에 매사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생각의 전환을 하기 시작하니 예전보다 많은 행복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때때로 무너지고, 평범하지 못한 남들과의 다른 삶에 이질감도 있지만 또 한 번 완치하겠다는 의욕과 집념에 집중하다보면 어느 새 한 발치 목표에 가까워져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완치로 가는 희망의 길에 여러 도움을 주시는 수백 명, 수천 명 이상을 상 대하시는 의료진분들을 포함한 성모병원 관계자분들…… 일일이 다 나열하 지 못하지만 뒤에서 애쓰시는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이 기회를 빌려 감사의 마음으로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사명감이나 다른 이를 위한 봉사의 뜻이 없다면 결 코 이룰 수 없는 일들이라 여겨집니다.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게 기회를 주신 점 정 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의 마음을 이렇게나마 표현하고자 써내려갔는데 너무 두서없는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읽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고, 암을 앓고 있는 현재의 저와 같은 상황의 환우분들과, 묵묵히 도와주시는 모든 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행 복하시길 기원하며 부족한 글을 마칠까 합니다. “세 번이나 살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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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류마티스 내과 김○○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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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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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새 김○○ 교수님과의 인연이 12년째 되어가고 있습니다, 처음 루푸 스(면역계의 이상으로 온몸에 염증이 생기는 만성 자가면역질환) 진단을 받 았을 때 책 한 권 주시면서 집에 가서 읽어보시고 젊은 여자가 이토록 무식하 게 참는 여자가 요즘 어디 있냐고 하시면서 당장 입원하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입원을 하여 검사를 하며 약을 주시면 그토록 죽을 것 같은 통증이 사라 지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일주일 만에 퇴원을 하였고 교수님 만나러 가는 날은 너무 즐겁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갈 때마다 교수님께서는 환자를 안정되게 하셨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의 가정에 문제가 생겨서 크나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교 수님께 고민을 말씀드리고 저는 엉엉 울었습니다. 실컷 울다가 제가 “교수님 저 너무 외롭습니다.” 했더니 누구나 인간은 외로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 는 그다음 아무 말도 못하고 실컷 울었고 교수님은 지칠 때까지 지켜만 보셨 습니다. 아픈 게 죄는 아니지만 가족한테 미안하고 고맙잖아 하셨는데 옳으 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다음부터 저는 미안하고 고마운 것 두 가지만 갖고 살 기로 다짐을 하니 마음이 홀가분하고 좋았습니다. 다음 병원 예약을 하고 병원 문을 나섰습니다. 예약일에 갔더니 간호사 선 생님께서 원○○ 환자 오시면 친절하게 잘해드리라고 하셨답니다. 예상치 못 했던 교수님께 의지하며 좋은 말씀 항상 들어가며 세월은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병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수님이 서울성모병 원으로 가시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시간도 더 많이 걸릴 것이고 사업 실패로 인해서 힘들었던 나는 교통비도 더 지출이 될 것이고 병원비도 걱정이 되고 여러 가지로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무조건 나를 따라오라 고 하셨습니다. 생각할 여지없이 “예” 하고 뒤돌아서는 저에게 이름을 부르 시며 명함 한 장을 주셨습니다. 많이 아플 때 연락하라고. “감히 제가 교수님 명함을 어떻게 받습니까? 안 받겠습니다.” 했더니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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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면 어쩔 수 없잖아, 참지 말고 연락하시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명함을 받 았습니다. 또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응급실은 절대 오지 마세 요. …… 너무 아파서 응급실 오는 건데 더 아프고 고통스럽고 더 힘들면 안 되잖아요.” 하셨어요. 기가 막힌 교수님 말씀에 정말 이런 교수님이 또 계실까 하면서 진한 감동 이 밀려 왔습니다. “너무 죽을 만큼 힘들면 어떡하지요?” 말씀 드렸더니 “일반 문자는 돈 나 가고 ○톡은 돈 안 들고, ○톡으로 전화하시면 제가 입원장 드릴게요. 직접 못 오실 때는 가족을 보내세요.” 너무 고맙고 감사하고 미안해서 할 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나에게 어 떻게 신(神) 같은 교수님이 나에게 오셨을까 하며 진짜 많이 울었습니다. 응급실 올 기회가 무지 많았지만 응급실 생각은 아주 생각하지 않고 살았 습니다. 어느 날 약 타러 예약 시간에 왔는데 여기는 병원비가 많이 비싸다 하시며 교수님 핸드폰으로 직접 전화번호를 찾으셔서 간단히 “제가 환자 한 분 보내 드리니 상담 좀 잘 해주세요” 하시며 끊으시고 저에게 경제적으로 많이 힘든 분들을 상담해주고 환자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는 곳이니 전화번호를 건네주 시며 통화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로 통화해서 지금까지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 이런 진정한 의사 있습니까? 한 명도 없습니다. 병원비 아껴서 고기 끊어 사다가 식구들과 함께 먹으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입원 생활하게 되 면 꼭 질문하십니다. 불편함은 없는지, 잠은 잘 자는지. 환자 한 사람 한 사람 에게 따뜻한 미소와 겸손하심에 환자들은 교수님을 매일 매일 애타게들 기다 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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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지독한 통증을 견디고 견디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2일 만 에 정신을 차리고 교수님을 만나 뵙는데 깜짝 놀라시며 바로 입원하라고 하 셔서 입원하여 검사를 해보니 턱을 30바늘 꿰맸고 고관절 3개가 금이 갔습


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넘어졌는데 이렇게 많이 다쳤느냐고 하시면서 손을 꼭 잡아 주시며 진작 입원시켰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병원비 부담에 제가 걱정할까 봐서인지 사회사업팀에 편지를 보내셨다고 하셨고, 사회사업팀 이○ ○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항상 늘 힘들 때나 좋을 때나 기쁠 때나 함께하시는 김○○ 교수님. 언제나 환자들에게 마음을 편하게 열어주시니 환자들은 그저 행복할 뿐이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인 고통 두 가지가 교수님의 정성과 사랑으로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외로운 사람, 다친 사람, 상처받은 사람들의 우선적으 로 마음을 열게 하시어 토닥토닥 해주시고 언제나 손잡아 주십니다. 요즘은 정이 메마르고 나밖에 모르는 인색한 세상 누군가를 칭찬해줄 줄 모르고 누군가를 헐뜯고 이웃이 없는 세상에서 진정하고 믿음이 있는 따뜻 한 의사 김○○ 교수님. 함께하시는 세상이 진정한 감동이고 아름다운 세상 입니다. 환자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여러 가지로 서울성모병원장까지 하실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갖추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파이팅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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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9년이 시작된 지 엊그제 같은데 20일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여 환자로 류마티스 내과 루푸스 진단을 받은 지 12년째 되는 환자입니다.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긴 지는 5년 되었고 사회사업팀을 알게 되고 지원받 기 시작한 건 3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담당 교수님께서 사회사업팀으로 편 지를 보내시어 이○○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사업이 성장해서 아주 잘나가다가 실패를 하여 병원을 자주 다녀야 하는 나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병원비 걱정에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고 그러던 어 느 날 사회사업팀 이○○ 선생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사회사업팀 이○○입니다. 김○○ 교수님께서 편지를 보내 시어 입원 중이신 것 같은데 잠깐 뵐 수 있을까요?” 하시더니 13층 휴게실에 서 처음 만났습니다. 환한 미소에 말솜씨가 차분하시고 아름다우신 분과 2시간 정도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깊은 저의 사정을 누구에게 쉽게 이야기 하지 못했던, 가 슴깊이 품었던 이야기를 진심으로 제 마음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끊지 않으시고 끝까지 들어주시는 모습에 마음이 후련하고 푸근함 을 느꼈습니다. 제 이야기를 다 들어주시더니 제가 의료비 신청자가 되는지 일단은 알아보 고 서류를 문자로 보내드릴 테니 챙기시어 넣어보자고 하시고 내려갔습니다. 입원하는 동안 며칠 뒤에 저는 식구들에게 서류를 챙기어 가져오라고 해서 6층에서 다시 이○○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꼼꼼하게 설명해주시고, 환자가 어려움 없이 설명을 어찌나 차분하게 대해주시던지 따뜻하고 진한 감동을 받 았습니다. 선생님은 “일단 서류를 넣어보고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하셨고 저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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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님께 부담 없이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했습니다. 제가 이 야기를 하는 내내 가끔씩 살며시 웃기만 하셨고 어떨 때는 슬픈 사슴눈처럼 촉촉한 눈시울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냥 왠지 모르게 편안한 마음과 설움


에 실컷 울기도 했습니다. 끝까지 들어주는 선생님의 그 모습을 머리에서 지 울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마무리되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입원실로 올라왔습 니다. 일주일 뒤 이○○ 선생님께서 지원 대상이 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커튼을 치고 착잡한 눈물을 촉촉이 흘러내렸습 니다. 요즘 다들 살기 힘들고 나밖에 모르고 인색한 세상에 따뜻한 분들이 계 시구나 하면서 치료 잘 받아서 건강을 되찾아 나도 누군가의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입원할 때마다 병원비 걱정은 덜게 되었고 자신 감을 갖게 되었지요. 편안한 마음으로 치료를 잘 받고 있고 지원해주시는 분 들과 사회사업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름다운 따뜻한 세상 에 살고 있을을 감사드리며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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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나의 육체적, 정신적 삶을 치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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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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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입니다. 겨울은 몸과 마음이 아프고 힘든 이들에게 따뜻함으로 토닥! 토닥! 위로하고 사랑을 나눠야 하는 사랑의 계절이기도 하지요. 그 계절을 살 고 있는 제 가슴에도 작은 사랑의 불씨가 피워지길 소망합니다. 저는 28살 때 사고로 인해 척수장애인의 삶을 24년째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 순간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고통스런 삶의 길목을 어 떻게 지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니 눈을 떴고 저녁에 해가 졌 으니 눈을 감았습니다. 사고로 수술은 했지만 재활치료를 전혀 받지 못하고 병원에서 퇴원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채 창살 없는 감옥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장애에 대한 정보도 알 수 없었고, 가정간호란 의료 서비스가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른 채 사각지대에 살고 있었 습니다. 비참한 삶이었지요.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들어 갔지만 내 감정을 표 출할 탈출구가 없었으니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 세월을 10년 보냈고 저의 보호자셨던 어머니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 셨습니다. 형제들이 있었지만 저는 고아가 된 셈이지요. 이젠 홀로서기를 할 때라고 생각할 즈음 언니를 통해 알게 된 수녀님으로부터 서울성모병원에서 운영하는 가정간호 의료지원 서비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으 로 직접 방문해서 환자를 치료해 주신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엔 듣고도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럴 정도로 저는 세상 모든 것들과 차단 된 벽 안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 억울했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식구들 을 원망도 했습니다. 이런 좋은 제도(가정간호)가 있었는데 왜 알아볼 생각도 안하고 그저 애물단지 취급만 했을까요? 눈물 나게 슬펐고 아팠습니다. 그렇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감사했습니다. 가정간호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셔서 여기저기 생긴 욕창 치료 도 해주시고 때론 저의 고독하고 칠흑 같은 앞이 보이지 않아 방황의 끝에 매 달려 있는 제 삶을 위로해 주시고 한줄기 빛 같은 인도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저의 육체적 상처와 더불어 정신적 상처까지 치유해주셨던 겁니다. 수호천사 였습니다. 그런 귀한 만남을 가지면서 저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장애 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더 심한 아픔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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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았으며 제가 감사해야 할 부분들이 참 많 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가정간호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전 모든 걸 포기한 채 식물인간처럼 살았을 겁니다. 저에겐 몸에 생긴 상처 치료도 중요했지만 정신적 치료 또한 얼마나 절실 한지 가정간호 선생님을 통해 알았고 배웠으며 그분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 받았습니다. 10년의 감옥 같은 삶을 마치고 지금 이 순간까지 저는 수호천사 이자 저의 주치의 선생님(가정간호) 덕분에 하루하루 건강하게 잘 보내고 있 습니다. 독립해서 혼자의 삶을 살고 있지만 외롭지 않게 지냅니다. 지금 저를 돌봐주고 계시는 가정간호 선생님은 유난히 밝고 따뜻한 분이라 서 일주일에 한 번의 만남을 행복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고 환한 미소로 머물다 가시는 그 시간은 토닥! 토닥! 엄마의 마음약이 필요한 저에겐 선물 같은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정신적, 육체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가정간호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낭만화가 탁○○’ 님께 서툴지만 그림도 배우고 있습니다. 탁○○ 님의 동화 같은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았던 어린 시절로 잠시나마 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잊고 지냈던 나의 아름다운 감성들이 꿈결처럼 부드럽게 춤을 춥니다. 행복한 순간입니다. 그 러고 보니 제가 사랑을 참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지금 어 디선가 예전의 나처럼 살고 있는 안타까운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 면 가슴이 답답하고 아픕니다. 의료지원 사각지대에 살면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많은 홍보가 되어 치료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수혜자로서 많은 의료 혜택을 받고 있다는 걸 알면 알수록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깊어 만 갑니다. 라디오를 듣다 보면 DJ께서 “오늘 하루는 선물입니다. 오늘 하루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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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예요.”라는 멘트를 합니다. 그래요. 오늘 하루는 선물이고 당신(우리)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 특히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의료


지원과 가정 간호 돌봄 서비스가 아름답고 따뜻한 선물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삶의 질과 행복지수가 한층 높아질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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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주님의 사랑은 나를 긍정으로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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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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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어느 날 저녁, 당시 18개월 된 딸을 안고 저녁밥을 먹으려던 저 는 저를 찾아온 낯선 사람들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경찰들의 지독 한 강압수사에 견디지 못하고 어느 미제사건의 범인으로 만들어져 복역하던 중 20○○년 만기출소하여 사회에 복귀했습니다. 저의 기막힌 사연은 여러 프로그램들을 통해 방송되었습니다. 교도소에 있을 당시부터 왼쪽 어깨가 아팠는데 그 안에서는 MRI 촬영을 할 기회가 없어서 못하고 있다가 출소 후에 해보았더니 왼쪽 어깨 회전근계 가 파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15척 담 안에서 생활하면서 기어코 살아서 사회에 복귀하여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일념으로 너무 무리하 게 운동한 탓이었습니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 만 같았습니다. 청춘을 15척 담 안에 묻고 나온 나에게 수술비를 감당할 돈 이 없었습니다. 출소할 때 교도소에서 출역을 나가서 벌어서 모은 돈 1,300 만 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출소한 다음 딸이 시집가게 되니 그 돈을 모두 써버렸습니다. 그건 딸에게 연필 한 자루 사주지 못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제일 큰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수술비를 마련하는 일이 참 막막했습니다. 일해서 수술비를 마련하면 된다 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비참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징병검사에서 시신경위축(양)으로 병역을 면제 받았습니다. 당시 제 시력은 양안 0.01이었습니다. 지금도 시각장애 1급이어서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가 없고,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글도 지인이 저의 말을 그대 로 컴퓨터에 옮겨적고 있습니다. 마침 재심전문 변호사님을 만나 재심을 신청하고 있는 중이어서 서울에 올 라올 일이 많았습니다. 서울로 다니는 돈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인 의 소개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에서 운영하는 ‘빛의 사람 들’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내가 어깨가 아파서 통증클리닉 주사에 의지하여 산다는 것을 알게 된 교 정사목위원회 신부님들과 직원분들이 서울성모병원 사회사업팀에 연계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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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셔서 지인과 함께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살뜰한 사회사업팀 선생님들의 도움과 정형외과 이○○ 교수님의 집도로 2018년 봄에 수술하고 퇴원했습 니다. 퇴원하면서 사회사업팀에서 들으니 일면식도 없는 어느 후원자분이 제 병 원비를 대신 갚아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비는 해결됐으나 저 또한 이 크나큰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퇴원 후 서울성모병원으로 통원치료를 다니면서도 진료를 봐주시는 이○ ○ 교수님과 간호사님이 TV에서 저의 사연을 보셨다면서 항상 공감해주시 고 따뜻한 마음으로 웃음을 주시니 진료를 다녀오면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 습니다. 수술 후 MRI를 찍으러 가야 되는 날에는 함께 동행할 사람이 없어서 저 혼 자 가게 되었습니다. 시력이 안 좋다 보니 항상 조심한다고 하면서도 MRI 촬 영실에 있는 탈의실 열쇠 번호를 잃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더듬거리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께서 오셔서 괜찮다 면서 친절하게 탈의실 문을 열어주셔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습니다. 경찰의 강압수사로 하루아침에 범죄자가 되어서 오랜 세월을 15척 담 안 에서 보낸 저에게 세상은 정말 더럽기만 했습니다. 그런 제가 교정사목위원 회가 마련해준 숙소와 서울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세상의 은혜와 사 랑을 알게 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주님의 사랑은 저 를 긍정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출소한 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옳은 삶이 무엇인지, 어떠한 인성 을 가져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를 잘못 만나 누명을 쓰고 가정이 파탄되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제 주변의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주님의 사랑 으로 가득 채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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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제 늦었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 또한 기해생입니 다. 하지만 늦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변호사님께서 진행하시는 저의 재심기일이 정해지면 저의 진실은 꼭 밝혀집니다.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는 한 진실은 꼭 밝혀지리라 믿습니다. 그러면 저도 떳떳한 사 회인의 일원으로서 뜻있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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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생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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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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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와 센터장 교수님, 그리고 제가 알코올 센터에서 치료받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항상 옆에서 도와주신 많은 수녀님 들(꼭 일일이 열거하고 싶습니다. 마리타 수녀님, 벤자민 수녀님, 다니엘라 수녀님, 그라시아 수녀님, 지혜 수녀님, 하상수녀님, 루디빈 수녀님, 이냐시 아 수녀님, 앙리 수녀님, 아나니아 수녀님. 사비나 수녀님, 레나 수녀님). 감히 나의 생명을 구해주신 분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고, 생명의 은인이 라고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2006년 겨울, 심한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당시 알코올의존치료센터를 찾 았을 때 저는 몸과 마음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습니다. 정신과 폐쇄병원 을 수도 없이 입, 퇴원을 반복하면서 제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는 가족에게는 원한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의료진은 한낱 장사치로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는 폐쇄병원과는 분명히 달랐습 니다. 다른 병원 치료진과는 다르게 수녀님들께서 교육하시는 모습에서 저는 수없이 많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저와 같은 중독자들은 늘 술에 취해 있어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기본적인 역할을 하지 못해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지도 못하고, 사회로 부터도 고립되어 있어 외롭고 육체적 건강도 잃어서 힘이 듭니다. 그래서 알코올중독 환자들 은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곳도 없습니다. 그러 기에 적어도 제가 알코올의존치료센터에서 교육을 받기 전에는 저는 한낱 술 주정꾼에 불과했고,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를 센터 수녀님들께서는 그 어떤 편견도 갖지 않고 아픈 상 처들을 보듬어주셨고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며, 약물치료와 센터 프로그 램을 통하여 단주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돌보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가족으로부터도 무시당하던 저를 수녀님들께서는 돌아가신 저의 어머님처럼 저를 걱정해주 셨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갖게 해주셨습니다. 하루는 한 수녀님께서 알코올센터 교육을 마치고 외부 강의를 다녀오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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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힘들어 코피를 흘리면서도 입원 환자를 걱정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수녀님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예쁜 수도복을 입고 기도만 하는 수녀님’을 생각했었지만 알코올의존치료센터에서 만난 수녀님들은 달랐습니 다. 교육받고 있는 알코올중독 환자들이 혹시나 재발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걱정하시고 우리들의 회복에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든 구하기 위해 여기저 기 발로 뛰기도 하셨으며, 또 하찮은 우리들을 위해 수없이 기도하시는 모습 을 보았습니다. 알코올중독은 마음의 병이고, 뇌질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독환자는 항 상 마음이 갈팡질팡하고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기에 중독 환자들과 함께 생 활하면서 교수님과 수녀님들이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교육 후에도 무수히 많이 재발을 하여 가족들과 교수님, 센터 수녀님 들의 마음을 아프고 힘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3년간의 단주생활을 유 지할 수 있는 것은 부천성모병원에 알코올의존치료센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매번 재발하여 술에 취해 있어도 알코올센터로 연락하여 한 번만 더 도와달 라고, 살려달라고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또 다시 술을 마실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알코올센터의 교수님과 수녀님들 은 매번 속는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 믿으며 내치지 않고 받아주셨습니다. 그 러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저는 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를 매주 목요일마다 방문합 니다. 2년간의 후속교육도 무사히 마쳤지만 후속교육에 참여하는 목요일이 면 현재까지 아침 명상에 참석하여 알코올 중독 환자들과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중독자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이고 어떻게 세상을 사는 것이 높으신 분의 뜻인지를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주생활을 하면서 세례를 받았고 견진성사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이 시 간을 통하여 제가 높으신 분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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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기도 합니다. 알코올치료센터 수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단주생활도 수도생활과 비슷 하다고. 단주생활과 수도생활을 비교를 할 수 없겠지만 그만큼 똑같이 힘들


고 외롭기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요즘 저는 매일 매일 기적과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맑은 정신 으로 아침에 일어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늘 내 마음대 로 살 수 있다고 하여 여러 사람들을 힘들게 하였으나, 내가 세상에서 내 마 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또 내가 할 수 있 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도 할 줄 아는 사 람이 되었습니다. 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에 와서 단주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음 을, 매일 매일 나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음을, 감사함을 느낄 수 있음을, 하느 님을 알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저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신 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의 모든 치료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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