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당선작
2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Contents 2018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대상]
따뜻한 마음으로 희망을 찾다 / 4
[우수상]
아주아주 놀랄 일 / 8 새로운 삶에 감사하며 / 12
[장려상]
아빠, 이제 꽃길만 걸어요 / 16 어느 부부가 받은 은총 / 19 사랑을 느끼고 살아갈 용기를 얻다 / 23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 27 봉쥬, 알루드! / 30 다른 누군가에게도 이 온기를 전할 수 있다면… / 33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3
2018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대상
따뜻한 마음으로 희망을 찾다 이○정
안녕하세요. 저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인 17살 소녀이자, 환자의 누나입니다. 벌써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먼저, 저희 가족을 소개해 드릴게요. 저희 가족은 게임중독으로 돈 관리 능력이 부족 한 아버지, 정신 질환으로 정신병원에 365일 중 330일 입퇴원을 반복 중인 어머니, 지적 장애와 뇌전증을 앓고 있는 첫째 남동생과 지적장애인 둘째 남동생에 저까지 총 5명입 니다. 저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동생들을 돌보며 가계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장녀이지요. 4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3년 전 어느 날, 엄마가 아프게 된 이후부터 저희 가족에게 커다란 먹구름이 몰려 왔습니다. 그 당시 갑작스럽게 쓰러진 엄마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받았지만 좀처 럼 나아지지 않아 이틀에 한 번꼴로 응급실에 가야만 했습니다. 당시 제 주위에는 아 픈 엄마를 돌볼 수 있는 가족, 친척이 없어서 제가 초등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한 채 엄마를 간병해야 했지요. 엄마는 치료받던 중에도 손발을 떨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걷지도 못한 채 심 한 두통을 느끼는 증세를 계속 보였습니다. 시간이 흘러감에도 확실한 병명은 알지 못하였고, 엄마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결국 우리 삼남매 앞에서 자살 시도 까지 했습니다. 저 또한 이 상황에 충격을 받았지만 아픈 엄마와 엄마의 자살 시도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동생들을 돌보기에 바빠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없었습니 다. 저밖에 챙길 수 있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겨우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시작된 불행이었어요. 이때부터 저는 게임중독으로 경 제관리 능력이 부족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금전관리, 엄마 간병, 동생 돌봄 등 모든 역 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역할들을 하면서 한 순간 가족들의 모든 짐이 저에게 왔 고 저는 그 짐들에 억눌려 살게 되었어요. 불안정한 생활이 반복되면서 생활비는 점점 부족해졌고, 부족한 생활비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다 보니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노력을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았고, 나아지지 않는 가정 상황과 무책임한 부모의 모습, 어지러운 집안 환경 으로 심한 우울감을 느끼며 저는 어두워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던 중 지역사회 내 사회복지사 선생님, 도움을 주고자 하는 지인분들을 만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공황장애와 다른 정신 병 진단을 받아 동네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게 되었습니다. 엄마의 자살 시도 이후 분노조절을 하지 못했던 첫째 남동생과 둘째 남동생은 정신건강증진센터 선생 님의 도움을 받아 지속적인 심리치료와 지적장애 판정을 받아 장애수당을 받게 되었 습니다. 이후에도 저는 여전히 가계를 책임지며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어려움 을 느끼고 있었지만 예전보다는 조금 상황이 나아지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조금 밝아지게 되었지요.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5
그런데 2016년 가을쯤, 첫째 남동생마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부천성모병원에 입 원하여 간질 진단을 받아 치료받게 되었습니다. 간질이 어떤 병인지는 잘 몰라 걱정 이 되었지만 약만 꾸준히 먹으면 된다는 말을 듣고 곁에서 도와주어 몇 개월 동안은 이상이 없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2017년 중반,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간 이후, 먹던 약도 효과가 없어 심한 두통과 함께 중심을 잃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증세가 반복되 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첫째 남동생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병원 입퇴원을 반복 하게 되었지요. 이러한 상황이 계속 반복되자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정확한 상태를 파 악하기 위해 추가적인 검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가계를 책임지고 있 는 저는 첫째 남동생의 검사비가 많이 나올까봐 걱정이 되어 결정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빠가 직장을 다니지 못하고 있는 상태로 생활비도 부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엄 마와 동생이 아프다 보니 솔직히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습니다. 저는 경제적 인 어려움으로 모든 상황에 화가 났고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생활비, 의료비를 벌어 야 하나 생각하였지만 아직 중학생인 저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지요. 저에게 주어진 한계로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이 비참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 가족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알게 된 의사 선생님을 통해 병원 사회 사업팀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회사업팀 선생님이 첫째 남동생을 위해 생명 존중기금을 신청해 주셔서 200만 원의 의료비를 지원받아 추가적인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검사 결과 불안장애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동생이 간질 외 에도 가정과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 상처 등으로 심한 심리적인 어려움을 느끼고 있으며, 이러한 불안정한 심리상태가 첫째 남동생이 자주 아프게 된 원인 중에 하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첫째 남동생이 워낙 착 하고 속이 깊어서 ‘싫다, 힘들다’라는 표현을 한 적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가정과 학 교에서 받은 상처를 쌓아두었나 봅니다. 그 말을 듣고 가정에서 아버지가 늘 강압적으로 자주 심부름을 시켰던 일과 저 또 한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많이 냈던 것이 떠올 6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랐습니다. 제가 가정과 학교에서 첫째 남동생을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챙겨주지 못해 서 더 아프게 된 것 같아 속상했습니다. 또 사회사업팀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지능평 가를 하여 경계성 인지기능 판정을 받게 되어 아버지의 그 간의 행동들이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병원 사회사업팀 선생님은 이후로도 심리치료가 필요한 첫째 남동생을 위해 부천 성모병원 Challengers 야구단에서 주최하는 ‘소아환우돕기 부천 야구인 Day’를 통한 후원도 알아보시고 연결해주셨습니다. 그 후원 단체로부터 약 468만 원의 치료비가 모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우리를 본 적도 없으신 분들이 이렇게 많은 돈을 줄 수 있나’라는 생각에 놀랐고, 이 돈으로 저희 삼남매가 함께 모래놀이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정말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또 사회사업팀 선생님이 치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식사비도 지원해주시고,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들도 마련해 주셨습 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병원 사회사업팀을 통해 만난 다양한 분들의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아 저 또한 마 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던 저는 그곳 에서 얻은 용기로 힘든 결정들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첫째 남동생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후원자분들의 따뜻한 마음이 저희 가족에겐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 희는 작지만 ‘희망’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정말,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7
2018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우수상
아주아주 놀랄 일 임○연
1980년에 태어나 2017년까지 작은 희망도, 기대감도, 존재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 하며 살아온 나, 죽음을 기다리던 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음에도 조금의 동 요조차 하지 않던 무던(?)했던 나, 죽지 못해 살아온 내 38년의 인생이었다. 간암일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선고에 이제 생을 마감할 수 있겠구나 하며 오히려 편 안해했던 나, 나 혼자였다면 입원하지 않고 홀로 서서히 조용히 꺼져가길 바랐던, 그 렇게 끝을 맺으려던 나였는데……. 8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시간이 흘러 잊힐 불효라면 그냥 이기적으로 나를 보낼 수 있을 테지만 평생 우리 엄마와 이제 정말 축복처럼 찾아온 새아빠에게 가슴속에 나로 인한 무덤을 만들어드 리긴 싫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입원을 했고, MRI 결과를 기다리며 홀로 장례식을 준비했고, 영정으로 쓸 사진을 찾아보고 유품을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 암 확진도 아니고 설사 암이라도 해도 바로 죽는 것도 아닌데 마치 병에 걸리길 원했다 는 듯이 열심히 마지막을 준비했다. 가족에게 짐짝이 되긴 싫었다. 나라는 존재는 없 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없애고 있었다.
이렇게 버리는 삶을 사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너무 어렵게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 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아빠와 그 모습을 너무 싫어하시는 엄마가 방에서 서로를 향해 한 사람은 칼, 한 사람은 송곳을 들고 대치하던 모습, 서로 공격은 하지 않고 위협을 하다 집안 가구가 엎어지는 것을 여러 번 봤다. 아버지는 술로 스스로를 괴롭히다 알 코올중독으로 간암에 걸려 돌아가셨다. 그런데 아빠가 돌아가신 후 다시 악몽이 시작되었다. 망나니 새아빠, 그의 포악을 다 받아주는 엄마로 인해 20대 후반까지 나는 너무 끔직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욕설과 저주는 그때 다 들어봤다. 그러다 술을 안 마시겠다며 다짐하고 살아온 십대 와 달리 20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거의 강제로 술을 마시게 됐고, 그러다 나 자신 도 중독에 이르러 건강이 위험할 정도가 되자 ‘먹고 죽지’ 하며 살아있는 나에게 스스 로 죽음을 강요하며 살았다. 그런데 우리 가족에게 햇살을 비추어주는 분이 나타났는데 그분이 지금의 새아빠 다. 그분은 우리 가족을 웃음 짓게 만들어주었다. 그런 아빠가 우리 가족을 돌보아주 신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큰딸인 내가 간경화로 쓰러져 그분을 걱정에 빠지게 했 다. 그분은 나를 위로해주고 걱정해주었는데, 그로 인해 나는 입원해서 치료받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입원을 했고 검사결과가 나왔다. 암이 아니란다. 엄마와 새아빠를 조금이라 도 웃게 해주자는 마음에 맛이 없는 치료식도 다 먹었고, 약도 잘 먹고 병원에서 하라 는 대로 생활했다. 그때에 한 수녀님께서 나에게 말을 걸어주셨다. 평소 성당에 다니 고 싶었던지라 궁금했던 점을 여쭤봤고 병원 내에 있는 성당에 가게 됐다. 평생 종교 를 가질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했는데 미사를 몇 번 드린 후 나도 모르는 눈물을 터뜨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9
리며 오열했다. 그때 이후로 ‘살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술을 끊고 싶어졌다. 그 수녀님 의 소개로 알코올센터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술을 끊게 도와준다는 얘기에 바로 그 곳을 찾아 노크했다. 센터에 계신 수녀님과 상담하는 시간 동안 계속 눈물이 쏟아졌 다. 그리고 ‘아. 이곳에 계속 오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어 기쁜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웬 날벼락! 낮병원 입원이고 교육비 등 비용이 든다고 해서 난 받을 수 없겠 구나 하며 속으로 포기했다. 나는 한때는 열심히 살아왔지만 서른 이후로는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사는 지경이어서 돈이 없었고, 우리 가족도 돈이 없었다. 또 당장에 목숨을 살려야 하는 수술비라면 모를까 무슨 염치로 내가 술을 끊게 돈 좀 빌려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진작 끊으라고 할 때 술을 끊고자 노력했다면 동정표라도 받을 수 있었지 만 건강에 돈에 신뢰까지 다 잃은 내가 도움을 청할 데라고는 없어서 교육을 포기하 려고 하는데 수녀님께서 그 마음을 아셨는지 돈 걱정 말고 술 끊고 싶으면 일단 교육 을 받아보라고 말씀을 하셔서 퇴원하자마자 알코올센터로 갔다.
센터 문을 열었을 때 수녀님들을 비롯해 모든 분들이 정말 반갑게 맞아주셔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리고 연이어 들려오는 칭찬과 격려의 세례에 놀랐다. 무척 따뜻한 느낌을 받아서 마음이 절로 편해졌고 낯을 많이 가리는 내게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 주셔서 금세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렇게 편안하게 교육을 시작했다. 어느새 맑은 정신을 찾아가며 교육에 몰두했고 엄마와 함께 가족치료도 받았다. 덕 분에 내 아픈 기억들을 이제는 아팠어도 괜찮다고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아픈 기억이 떠오르더라도 우울해지거나 술 생각이 나지 않게 되었다. 기적과 같았다. 늘 과거에 매여 슬퍼하며 현실을 회피하려고 술에 기댔던 내가 나 자신을 다독여주고 있었다. 이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평생을 10대와 20대의 괴로운 기억 속에 파묻힌 재 살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알코올센터에서 도움을 받으며 내 삶 이 180도 달라졌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내게 종교가 다시 생겼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느님께 선택 받 았다는 느낌이 들게 되었다는 것이 아주아주 놀랄 일이다. 미사를 통해 통곡하며 내 마음에 들어찼던 벅차오름과 시원함으로 자신이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내 가슴이 활 짝 열리는 기분이 들고 정신도 깨끗해지는 기분, ‘너의 죄를 사하노라’ 같은 기분은 10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정말 처음 느껴봤다. 그날 이후 신기해하며 계속 성당을 나갔고 퇴원 후에는 원미동성당에서 교리수업 도 받기 시작했다. 모태신앙(개신교)이었던 아빠가 내가 17살에 고통 속에서 숨을 거 둘 때 그와 동시에 예수님도 버렸고 그 후로 종교에 대한 거부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 는데 그런 내게 종교가 생기다니 참 희한한 일이다. 그것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아직도 나는 놀랍다. 매일 매일 선택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교육 전에는 가까스로 살아가던 나였기 때문에 겉모습도 말이 아니었다. 알코올센 터에 계신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살아는 있는데 반은 죽어있는 듯했다. 저 사 람이 8주 치료교육을 제대로 받으려나…….’ 했단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한다. ‘얼굴 진짜 좋아졌다. 인상이 바뀌었어~~’라고. 과거 에 난 아무리 웃고 있어도 그늘진 모습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젠 밝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고 있다. 이 많은 변화가 수녀님들의 방문과 기도, 상담 덕분이 다. 또 병원의 사회사업팀을 통해 자선의뢰를 하셔서 치료교육비 부담 없이 좋은 교 육을 받게 해주신 덕분이다. 그리고 내 생애에 처음으로 듣는 말도 생겨났다. “가족이 화목한 것 같아요.” 이 말은 여기 와서 난생 처음 듣는다. 알코올센터 송년회 때 딸을 잘 부탁하는 우리 엄마와 새아빠의 모습을 보고 하시는 말씀들이다. 난 혼자고 가족이란 없고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나를 걱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엄마와 새아빠 랑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웃음 짓고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고 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여 새 생명을 살아가게 해주신 부 천성모병원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세상 그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모자랄 만큼 아 름답고 따스한 이곳을 사랑한다. 앞으로도 이곳에서 얻고 배운 모든 것을 가슴속 깊 이 새기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제 인생에 꽃이 되어주신 분들과 병원에 정말정말 감사드린다.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11
2018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우수상
새로운 삶에 감사하며 유○은
저는 지적장애 3급 12살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한부모 가정의 엄마입니다. 장애 인 아들을 키우면서 살림하고 돈 벌고 매일 매일을 정신없이 보내던 2016년 가을, 동 사무소에서 건강검진을 무료로 해준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계속적인 소화불량으로 내과와 한의원에 출근 도장을 찍을 정도로 치 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급하게 먹지도, 많이 먹지도 않는데 일주일 에 한두 번은 반드시 체해서 약과 주사 또는 침을 맞아가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 12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무 자주 체한다고 느끼긴 했지만 형편상 소액의 진료비를 지출하는 것조차 저에겐 부 담이 되는 일이어서 검사를 해보자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던 터에 건강검진의뢰가 들어왔고, 저는 반갑고 기쁜 마음에 검사를 신청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을 방문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 가벼운 마음과는 달리 검사를 하나하나 진행하던 중 담석과 유방에 문제 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고,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씀에 제일 먼저 병원비가 걱정 이 되었습니다. 건강검진이 끝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동사무소 복지담당 선생님 께 말씀드렸더니 서울성모병원 내에 사회사업팀이 있으니 연락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갈급한 마음으로 사회사업팀 선생님께 문의를 드렸더니 수술비와 입원비가 모두 지 원이 된다는 말씀으로 저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평안한 마음으로 수술 준비를 하며 일상생활에 집중하며 지내던 중 건강검진 완료 후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담당 간호사 선생님께서 저의 검진 결과가 안 좋다는 내용으로 전화를 주셨습니다. 저는 이미 어디가 안 좋은지 알 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쁜 부분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제가 인지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빴습니다. 생각지 못했던 자궁과 췌장에도 종양이 발견되었다고, 조금 더 자세한 검사가 필요 하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내 소중한 몸을 그 동안 너무 돌보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내 몸에게 미안했고 잘살아보려고 애쓴 것밖에 없는데, 열심히 살았는데, 내게 왜 이 런 일이 생겼을까 싶어서 속상하고 서러워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 후 다시 찾은 서울 성모병원의 유방암센터에서 조직 검사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당장 수술은 안 해도 되 고 혹이 더 커지는지 지켜보자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또 내분비내과에서는 췌장의 혹 상태가 정확히 진단이 어렵다고 하시며 MRI를 찍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외과에서는 담낭 절제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산부인과에서는 난소 기형종으 로 왼쪽 난소를 절제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산부인과 수술과 외과 수술은 같 이 할 수 있다고 하셔서 한 번의 수술로 치료를 끝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다행이 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 휴가를 신청하고 입원을 하고 금식을 하고 수술 들어가기 전에 췌장 MRI를 찍고 담낭 절제술과 왼쪽 난소 절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산부인과의 왼쪽 난소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13
절제 수술은 수술 도중에 왼쪽 나팔관이 괴사된 것이 발견되면서 나팔관도 같이 제거 하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술이라는 것을 해보게 된 저는 의사 선생님께서 간단한 수술 이라고 하셔서 수술 후에 일어나는 일들도 모두 간단할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마취제로 인해 부작용이 있는 줄 몰랐고 그 부작용을 제가 겪게 될 줄도 몰랐습니다. 수술 후에 계속 토하기 시작하더니 수술 당일을 넘어서 새벽까지 잠도 못 자고 토했습니다. 수술 부위의 통증과 메스꺼움으로 바로 눕지도 못하고 구 부정한 자세에서 비닐봉지를 입에 대고 밤을 새웠습니다. 물 한 모금도 마신 것이 없는데 계속 메스껍고 울렁거리고 구역질만 나오는 상황이 너무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제가 너무 심하게 구역질을 하니까 진통제를 맞으면 더 심해진다고 하셔서 진통제 투여도 하지 못하고 견뎌야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죽을 것만 같았고 시간이 지나도 이 고통이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수술 당일 밤을 새우고 난 후 아침부터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면 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울렁거림과 메스꺼움이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어려 움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간호사 선생님께서 많이 걸어야 회복이 빨라진다고 열심히 걸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막상 걸어보려고 하니 열 걸음을 걷기도 쉽지 않았 습니다. 다섯 걸음 걷고 쉬고, 열 걸음 걷고 쉬고 하면서 조금씩 양을 늘렸고 어느새 까마득해 보이던 병원 복도를 한 바퀴, 두 바퀴 돌게 되었습니다.
상태가 좋아지면서 퇴원을 준비할 때쯤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췌장 MRI가 결과가 나쁘다며 수술을 한 번 더 해야 한다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직 수술 부위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수술 날짜를 잡고 고통스러웠던 수술대에 또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전 수술 때처럼 마취제 부작용으로 또다시 진통제 없이 구역질을 하며 밤을 새워 야 했습니다. 췌장 절제술은 이전 수술보다 통증이 더 심했지만 그 역시도 시간이 지 나갈수록 조금씩 좋아졌습니다.
제가 두 번의 수술을 겪으면서 느꼈던 점은 그 동안 내가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집 착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만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에 밤늦게 까지 일하던 저는 지적장애 아이가 밤에 방문을 열고 화장실에 가는 게 무서워서 방 14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에다 오줌을 싸면 애를 혼내고 때리기만 했습니다. 저는 수술 후에 아이와 함께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서 직장도 월급은 적지만 오후 6시면 퇴근하는 곳으로 옮겼 고, 조금 더 많은 시간을 아이와 함께 있어주려 하고 있습니다. 또 아이의 정서적인 부분도 채워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현재 12살인 저의 아들은 아직 오줌을 제대로 가리지 못해서 아침마다 저에게 이 불빨래를 선물로 주지만 밤에 방바닥에 오줌을 싸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재활치료 선 생님들께서도 아이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하십니다. 매일 늦은 퇴근으로 늘 화내 고 짜증 많던 저 때문에 엄마를 무서워하던 아이와 지금은 많이 친해졌습니다.
두 번의 수술이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주었고, 그 덕분에 아픈 사람들의 마 음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사랑이라는 선물을 주신 동사무소 선생님, 사회사업팀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들처럼 저도 누군 가에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아픔을 통해서 저에게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15
2018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장려상
아빠, 이제 꽃길만 걸어요 강○정
"주말에 김치 좀 가지러 아빠한테 가야겠네." 흘리듯 던진 한 마디를 기억하시고는 그 무거운 김치통을 들고 딸네 집을 아침부터 오셨었다. 아침도 못 먹고 다닐까 봐 유부초밥 몇 조각과 같이……. 그것이 아빠의 마 지막 모습이었다. 김치통을 가져다주신 날 점심 때쯤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가 좀 아프시다 고……. 그 전해에 탈장이 있으셨던 터라 바로 동네병원으로 갔지만 별다른 소견이 16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없다며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러나 복통은 계속되셨고, 엄마는 119를 불러 진료기록 이 있는 서울성모병원으로 가달라고 하셨다. 응급실에 도착한 아빠는 탈장이라는 진 단을 받으셨고 응급처치 후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집에 오신 뒤에도 구토가 계속되었 다. 이상함을 느끼고 동생이 병원으로 다시 모시고 갔고 저녁에 병원으로 가신 걸 확 인하고 잠이든 나는 새벽녘 울리는 벨소리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흐느끼며 말씀하셨다. 아빠가 의식이 없다고…….
병원에서 본 아빠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다. 간성혼수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우 리 가족은 앞으로도 자주 이럴 수 있다는 이야기에 너무 겁이 나고 무서웠다. 3일 정 도 지났을까 아빠의 의식은 돌아오셨지만 장이 마비되어 아무 기능도 할 수가 없다고 하셨다. 의료진이 장고 끝에 탈장수술을 하였지만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았던 아빠의 몸은 다시 염증이 발생하면서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하셨고 결국 병원에서 간이식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딸뿐인 우리 집에서 엄마는 절대 자식에게 받 지 않겠다 하셨고, 우리는 그럼 아빠를 돌아가시게 하느냐며 우리대로 화를 냈다.
나는 이제 4살 된 쌍둥이를 키우고 있었다. 둘째는 9월에 날을 잡아 놓은 예비신부 였다 거기에 스무 살된 막내까지……. 나도 아이를 키워보니 엄마 심정이 이해가 갔 지만 아빠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아빠가 병원에 계신 동안 길가의 핀 꽃을 보는 것조차 죄스러웠다. 내 자식 키우느라 아빠를 신경 못 썼던 것이, 아빠가 의식을 잃던 날 무거운 김치통을 들고 오셨던 것이, 그 모든 것이 나 때문인 것 같아 너무 고통스 러웠다. 장기이식센터에 등록을 하고 애타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병원비는 점점 쌓여가고 아빠의 상태는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우리 가족은 어떠한 방법도 찾지 못하고 매일을 절망 속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사회사업팀에 가서 상담을 받 아보기를 권하셨다. 간이식 수술이 워낙 큰 수술이기도 하고 우리도 아무런 정보가 없던 터라 엄마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그곳을 방문하셨다. 다행히 사업팀에서 상담을 하는 내내 엄 마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이것저것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과 금전적인 부분도 도움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17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세하게 안내해주셨다. 조금씩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몇 달 또는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던 공여자는 장기이식센터에 등록한 지 2주쯤 되었을까? 우리에게 기적처럼 와주었고 아빠는 그렇게 강남성모병원 간이식수술 1004번째 환자가 되었다. 워낙 큰 수술이라 의식을 회복하는 데 며칠이 걸릴 거라 했 던 간호사의 말과 달리 아빠 수술 후 두 시간도 안 되어 우리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셨 다. 수술 후 무균실에서 혼자 힘겨운 싸움을 하실 때에도 간호사분들의 따뜻한 배려 와 매일같이 써주시는 응원의 메시지들은 아빠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에게 너무 나 큰 힘이 되었다. 3월에 입원하셔서 6월에 퇴원하시기까지의 시간은 우리 가족에게 정말 잊을 수 없 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모든 과정에서 강남성모병원 사회사업팀과 의료진 모 두의 도움으로 아빠는 무사히 우리 곁으로 돌아오셨고, 결혼을 준비했던 동생도 아빠 의 손을 잡고 입장할 수 있었다.
건강해진 아빠는 어린이집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신다. 매일 밤 간절히 할아버지 가 나아지기를 기도했던 쌍둥이들은 이제 할아버지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올해 는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꽃길을 걷기를 기대해본다.
18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2018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장려상
어느 부부가 받은 은총 조○옥
26년 전 내 나이 46살, 남편은 조경일을 하였고 저는 터미널 매장에서 아르바이트 를 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일을 하고도 임금을 받아오지 못하는 날이 많아 가정생활은 제가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렇게 소소한 일상을 살고 있던 어느 겨울, 남편은 빙판길에서 넘어져 뇌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의정부 시립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발견이 늦어 동사 직전이었고, 혼수상태에서 토하고 열이 41도가 넘는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19
“시립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습니다. 큰 병원으로 옮기십시오.”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서울성모병원 응급실로 옮겼습니다. 각종 검사가 빠르게 진 행되었고, 검사 결과 며칠 살 수 없다는 말씀과 함께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말씀을 들 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온 가족을 다 모이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무서움 속에서 어떡해야 좋을지 몰라 발만 동 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상의할 가족도, 도움을 청할 이웃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순간 병원에 계신 성모님이 생각났습니다. 성모님 상 앞에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 하였습니다. “주님, 남편만 살려주신다면, 단 한 번만 살려주신다면, 그 어떤 것도 다할 것입니 다. 콩나물 장사라도 해서 남편을 돌보겠습니다.” 울고 또 울며 기도하였습니다. 수술을 받아야 했으나 수술 연대보증인이 필요하였 지만, 우리를 보증 서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부탁할 사람도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사이 시간은 그저 하염없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9일째 되는 날 의료 진들은 다급히 모이셨고, 선생님들도 당황해하며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저는 남편이 위독함을 감지했고, 그 순간 온몸은 뻣뻣이 굳으며 머리가 멍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 습니다.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을 무렵, ‘성당으로 가 보자, 성당 신부님께 상의드리고 도 움을 부탁하자’ 하고 저는 성당을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다급히 신부님을 찾았고, 신부님은 병원에 오셔서 병자 성사를 주셨습니다. 신부님의 성사 후 안정을 찾은 저 는 우리의 사정을 알려 도움을 청하러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지요. 서울성모병원 사회사업팀 선생님은 우리 가정의 열악함을 들으시고 안타까워하시 며 진료받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또 동사무소 사회복지과에 연결하여 우리의 어려움을 알리셨고, 우리 가족이 정부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도 안 내해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100만 원 보증금에 10만 원 월셋집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월세의 부담도 없이 아주 많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세상에 태어나 진심으로 저만을 염려해 주시는 분들의 따뜻한 사랑을 처음으로 받았 습니다. 그때 하느님의 은총은 저를 다시 살게 하였고, 앞으로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 20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낼 수 있는 힘이 솟아났습니다.
그 후 3개월이 지나 퇴원하였고, 사고 후유증으로 정신지체 2급 기질성 정신 증후 군을 얻게 되었지요. 남편을 돌보는 것도 버거웠지만,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동네 수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1년 8개월 지난 어느 날, 남편은 발이 돌아가고 한 발짝도 걸을 수 없게 되었습 니다. 병원 진료를 받은 결과 척추협착증과 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수입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서울성모병 원 사회사업팀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았고, 그 후 우리는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제가 유방암 진단을 받고, 왼쪽 가슴 완전 절제 수술을 받았 습니다. 아픈 것보다 제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편이 걱정되어 오로지 빨 리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저에게 대장암이 발견되었습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 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숨이 멎는 듯한 고통이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위협적 이었습니다. 실낱같은 용기를 내어 수술을 받고 열심히 치료도 받았습니다. 두려울수록 저는 하 느님을 찾았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한 번만 살려주신다면 주님만을 섬기며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이 원하 시는 모든 것을 다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항암치료와 수술 후 저 혼자 생활도 힘들었지만, 저는 남편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남편의 치매는 심해지면서 변이 나오는 것도 모르고 바지에 그냥 변을 봐 버렸고, 그 상태에서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묻혀 놓으면 저는 그것을 치워야 했고, 심지어 성당 미사 참석하여서 변을 그대로 해결하는 바람에 미사를 엉망으로 만드는 일도 자주 일 어나곤 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담배를 아무 곳에서 피우고 변을 베란다에 던지고 비디오 볼륨을 최대치로 올려 주민들의 끊임없는 민원으로 힘들었지만 남편은 절제되지 않고 그 고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21
통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전쟁 같은 날을 하루하루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10여 년 전부터 폐질환으로 약을 복용했어요. 정기검진 중에 대동맥이 꽈리 처럼 부풀어 난 혹이 발견되어 바로 수술하지 않으면 언제 터질지 모른다 했어요. 어 찌 이토록 힘든 일이 자주 발생하는지 가슴이 먹먹하고 온몸이 떨려 그 자리에서 주 저앉고 말았어요. 이번에도 저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용기를 주세요. 남편의 병을 고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번에도 사회사업팀 문을 두드려 담당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친절히 저희 부부를 반겨주셨고, 도와주셨어요. 감사합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되었습니다. 여러 번의 수술과 치매로 남편은 도움 없이는 변 처리도 할 수 없고 본능만 남아 이상한 비디오를 끊임없이 시청하며 온갖 욕설과 폭력으로 저를 괴롭히지만 저는 아픈 남편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을 잃고 고아로 커서 사랑을 주는 법도, 사랑을 받는 법 도, 남편의 역할도, 이웃과 소통하는 것도 모르는 그런 사람입니다. 힘이 들었지만 남편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어요. 그저 남편이 조금 나를 이해 해 주면 좋겠다 이런 마음입니다. 저희 부부는 주님의 은총을 듬뿍 받은 사람입니다.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도움을 주셔서 고비를 넘기고 주님 께서는 늘 천사를 제 곁에 보내주셨다는 것을 새삼 느껴 봅니다. 참 좋은 세상입니다.
사랑이신 주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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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장려상
사랑을 느끼고 살아갈 용기를 얻다 최○의
2017년 8월, 나는 항상 그렇듯 술에 취해 있었다. 그렇다, 나는 알콜중독자이다. 나의 잘못은 생각하지 못한 채, 술에 찌든 내 모습을 경멸하듯 쳐다보는 아내의 눈 빛이 싫어 집을 나왔다. 갈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7년째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대소변을 다 받아내고 병수발을 하면서도 불평하나 늘어놓지 않는, 우 울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가 있는 집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잠을 청하려고 하니 불면증이 심해졌고, 술 없이 잠을 잘 수가 없었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23
다. 그렇게 수면제 약 30알을 술과 함께 털어 넣었고, 의식을 잃은 채 잠이 들었다. 정 신이 들어 눈을 떴을 땐 이틀이 지나있었다. 암담하고 처참한 현실은 바뀌지 않았으 며, 살아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후회가 밀려왔다. 다시 이틀을 연달아 술을 마시던 중 불현듯 자살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곧장 주방 에서 칼을 꺼내어 손목을 그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분수처럼 끊임없이 튀는 피가 보였고,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렸으며, 경찰과 119 구급대원의 모습이 보였다. 이내 나는 희미해지는 의식을 놓아버렸다.
하얀 천장, 환자복, 어머니. 이곳은 병원이었다. 내 바보 같은 행동으로 어머니는 얼마나 놀라셨을까? 얼마나 울었는지 심하게 눈이 부어 있는 어머니는 내게 살아있 어 천만다행이라며 말을 건네고 다시 울음을 보였다.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잠시, 퇴원 후 나는 또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 공황장애, 알코올중독 진 단을 받았으며, 25일간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병원 생활을 하고 퇴원하여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만취한 상태로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주변에는 여기저기 굴러 다니는 소주병이 보였다. 그리고 만신창이인 내 모습도 보였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주치료를 위해 루카스병원에 자발로 입원했고, 병원 내 치료 및 교육 프로그램에 성실히 임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위중해지셔서 부천성모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 을 듣게 되었다. 외출이 허락된 날 아버지에게로 발걸음을 향했고, 병실에 도착하니 아버지,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심정지 로 심폐소생술을 했고 현재 중환자실에 있다고 했다. 중환자실 대기실 앞에서 어머니 는 또 울고 있었다. 나는 주치의를 만나 상담을 받았다. 아버지는 기관절개를 해야 하 는 상황이었고, 병원비에 대한 압박감에 머리가 아프고 불안감이 들어 술을 찾게 될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루카스병원으로 돌아가 약을 먹고 안정을 취했다. 일주일 후 루카스병 원 교육을 수료하고 퇴원하여 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 치료센터 입원 상담을 받았 고, 경제적 부담감으로 입원을 망설이는 내게 감사하게도 센터 내 치료자 수녀님은 24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입원비 지원을 해줄 테니 입원하여 함께 치료해보자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나는 다른 알코올치료병원과 달리 출퇴근하면서 교육을 받는 자유로운 환경 내에서 입원치료 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간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기관절개를 하고 위정맥류가 터져 지혈시술을 했고, 다행히도 건강이 호전되어 일반실로 이실했지만 병원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 다. 연로하신 어머니와 나는 주야간을 번갈아가며 아버지의 간병을 하였다. 어머니가 점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머니는 사회사업팀에 도움을 청했다고 하였고, 나 와 함께 사회복지사 선생님을 만나러 가자고 말하였다. 그렇게 사회사업팀의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암담한 상황에서 사회복지사 선생님은 최선을 다해보겠다며, 함께 노력해보자고 말하였다. 며칠 후 사 회복지사 선생님은 간병인을 무료로 구해주었고, 의료비를 지원 신청했다고 하였다. 희망이 조금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간병인은 위중하신 아버지의 간병이 힘들어 그만두었고, 지원 신청했던 것이 탈락했다고 하였다. 절망스러웠지만 사회복지사 선생님은 포기 하지 않았고 또 다른 지원 신청을 해보겠다고 하였다. 필요한 서류를 안내받아 준비 하였고,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신청 서류를 작성했다. 며칠 후 사회복지사 선생님은 국가 의료비 300만 원 지원이 결정되었다며, 함께 고 생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해주었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는데, 숨통이 트이고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병원비는 턱없이 모자랐고 남은 의료비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사회복지사 선생님은 “자, 이제 다음 지원 신청도 해볼 건데, 함께 해주실 거죠?”라고 편안한 웃음을 보이며 말 하였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따뜻한 관심이 느껴졌다. 며칠 후 사회복지사 선생님은 나의 노력과 병원 내 도움으로 270만 원이 추가 지원 결정되어 너무나 다행이라며, 마음고생이 많았을 텐데 함께 노력해줘서 감사하다며 말해주었다. 곧 아버지의 건강은 호전되어 퇴원할 수 있게 되었고, 성당 및 지인으로 부터 의료비 차액을 도움받아 무사히 아버지의 의료비를 납부하고, 요양병원으로 전 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큰 도움을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고민하여 마침내 A4용지로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25
연필꽂이를 만들어 드렸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은 “연필꽂이가 마침 없어서 불편했었 는데, 너무 감사합니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써야겠어요.”라고 말하였다. 현재까지도 교육을 받고 있어 사회복지사 선생님을 마주치곤 하는데, 매번 아버지와 어머니의 안 부, 그리고 내가 교육받는 것에 있어 어려움은 없는지 물어보곤 한다.
불과 한 달 전,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암담하고 비참한 현실에 무릎 꿇었고, 길을 점차 잃어가고 있을 때, 부천성모병원 사회사업팀의 손길은 깜깜한 어둠 속 한 줄기 빛을 내려주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부천성모병원 사회사업팀으로부터 받은, 아니 지금까지도 받고 있는 인간의 사랑 과 그 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마음들, 그 마음들을 잊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며 앞으 로 가족, 이웃, 또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사랑과 정을 나누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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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장려상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하○숙 프란치스카
찬미 예수님!
남편 유○○ 요셉의 병상을 지켜주시는 생명의 주님께서는 언제나 저희와 함께 계 십니다. 방금 가래를 뽑고 편안한 얼굴빛이 되어 잠든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님 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저는, 아내 하정숙 프란치스카입니다.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27
남편은 교사로 재직 중, 지난 2015년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 발병하여, 항암치료 와 조혈모세포 이식을 성공적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식 편대 숙주반응이 폐로 나 타나 인공호흡기에 의존하여 서울성모병원과 수원 성빈센트병원을 오가며 투병생활 을 하고 있습니다. 일정 치료 기간 중 병가 휴직을 했으나, 지금은 복귀가 불가능하여 퇴직했습니다. 숨 쉬는 것이 전부인 남편은, 지금 어린아이가 되어 제 곁에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뜻한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 땅이 보이는 창밖을 바라보고 싶은 희망을 간직하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명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믿음을 통해서만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시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저희 부부에게 천상의 만나와 같은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내어주신, 오직 주님께 의존합니다.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 남편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낯설고 두렵기도 하여, 우두망찰 두리번거리기도 합니다. 고통의 여정이 언제까지인지, 인간적인 판단이 개 입되어 나약해지면, 순간 저는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변 친지와 본당 공동 체의 헌신과 기도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중앙의료원의 실질적인 의료비와 간병비 지원으로 큰 도움을 받은 저 는 이러한 이야기를 반드시 전해야겠다는 의무가 생겼습니다. 투병 생활이 길어지자 경제적인 문제가 돌덩이처럼 저를 짓눌렀고, 학업에 집중해야 할 고2, 고3 두 아이의 뒷바라지 등 남편의 간병에 전념하기 힘든 생활의 무게가 저를 벼랑까지 밀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이 절박한 심경을 그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 이야기에 진심을 다해 들어주신 사회사업팀 직원분들의 큰 귀와 밝은 눈이 전해준 위로에 감사한 마음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한때는 구릿빛 피부에 다부진 근육을 자랑하며 테니스를 즐겨 했던 남편은 자상한 28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가장이었으며 성실하고 모범적인 교사였습니다. 든든한 아빠와 남편 그리고 활기찬 교사의 모습으로 살았던 지난 시간에서 지금은 아주 작고 연약한, 갓난아이가 되어 저희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보살핌의 손길을 한 순간도 거둘 수 없기에 성령의 온기로 덥힌 손길을 마주잡고, 서로를 보듬고 감싸주며 견디고 있습니다. 기타 선율에 맞춰 이중창을 부르던 주말 오후, 햇볕 가득한 저희 집 거실의 풍경이 꿈인 듯 아득하지만, 돌이켜 그 많은 것을 무상으로 주셨기에 누렸던 하느님 섭리에 오히려 감사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하듯 앞으로의 여정에도 주님께서 필요한 은총을 주실 거라 믿고 있으니까요.
지난 성탄 즈음에 저희 가족은 성모님을 새롭게 집에 모시고 남편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간호사의 길을 선택한 딸아이의 기특한 결 심 또한 좋은 꽃을 피울 거라 믿습니다. 남편은 입술을 동그랗게 움직이며, “기도 많 이 해주세요.”라는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저와 번갈아 간병을 도와 주고 계시는 형제님의 지극한 손길이 닿은 보살핌에 많은 의지를 하는데, 이 또한 성 령의 이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직 숨 쉬는 것이 전부인 남편의 투병생활은 하느님의 영[靈]을 증거하고 있음에, 생명의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지상의 여정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은 총 청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홀로 찬미 받으소서! 아멘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29
2018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장려상
봉쥬, 알루드! 이○희 시몬 수녀
아침 기도를 마치고 주방을 들러 아이티의 인사인 ‘볼 인사’를 나눈다. 얼마 전부터 ‘알루드 베티시아’가 새벽부터 기쁜 얼굴로 주방 일을 거들고 있다. 알루드와 인사를 나눈 후 주방을 나서는 내 발걸음이 가볍다. 사실 얼마 전까지도 걱정을 했다. 한국이라는 아주 좋은 나라에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병원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돌아온 알루드 할머니가 건강을 회복하며 30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과연 다시 아이티에 잘 적응하면서 지낼 수 있을지……. 그러나 지금은 그 걱정이 기 우였음에 감사드린다. 아이티 꽃동네 삼백 명의 식사를 삼시세끼 준비하는 주방에서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밝은 모습으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알루드 할머니는 아이티의 열악한 환경에서 치과 치료를 받은 후 감염에 의해 염증 이 치료 부위에서부터 목까지 퍼졌으나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였다. 상처 부위는 회복 되었으나, 후유증으로 피부 수축이 일어났는데, 그 결과 목을 뒤로 젖히거나 양옆으 로 돌릴 수 없어 본인도 힘들고, 지켜보는 주위의 사람들도 안타까웠다. 이를 꽃동네 수사님이 아이티를 방문하셨을 때 알게 되었고, 바로 서울성모병원 국제협력팀에 연 락을 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이티와 같은, 국제적인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가능성이 희박한 국가는 국가의 의료협력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성모병 원은 병원의 해외 홍보 등에 대한 이익보다는 가장 도움이 필요한 국가와 가족으로부 터 버림받고 소외된 한 병든 여인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알루드 할머니와 함께 통역을 위해 한국에 가게 된 나에게 서울성모병원에서의 한 달 남짓한 여정은 참 인상적이었다. 처음에 떨리는 마음으로 한국에 도착한 우리는 바로 국제협력팀 직원의 안내로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나는 통역을 돕기 위해서 한국까지 동행하였지만, 간병도 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병원과 관계된 모든 일은 국 제협력팀 직원들의 몫이었다. 매일 아침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식사 여부 등도 세 심하게 챙겨주면서 알루드 할머니가 한국에 적응하도록 많이 도와주었다. 서울성모 병원 모든 직원이 마치 든든한 가족이 되어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알루드는 성형외과 전문의에게 진료를 보고 필요한 검사를 받은 후 수술을 받았다. 허벅지 부분의 다리 살을 떼내어, 목과 가슴 부분에 피부 이식을 하여 목부위의 움직 임을 보다 편안하게 해주는 수술이었다. 8시간에 걸친 수술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까지 수많은 의료진의 손길과 기도와 정성에 힘입어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나온 알루드 할머니는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31
기침을 하고 의식을 곧 찾았다. 그뿐만 아니라 수술 부위의 회복도 빨라서 마약성 진 통제는 물론 일반 주사 진통제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 선생님 도 회복이 다른 환자들과 비교해서 빠른 편이라고 했다. 입원 생활 동안 알루드 할머니는 수술 후 불편해진 다리와 목부위 때문에 거동이 힘들었고, 나 또한 혼자서 더러워진 시트를 교체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데 수간호사 선생님이 라운딩을 하다가 보시고는 직접 침대시트를 아주 친절하게 교 체해주시고, 설명도 해주셨다. 나도 간호조무사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큰 병원의 수간호사가 조무사가 할 일을 스스럼없이 하는 모습에서 감동이 전해졌다. 이런 수간호사 선생님과 함께 일하는 다른 후배 간호사들은 진정한 마음으로 기술뿐 만 아니라 진짜 간호를 배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직원들이 환자를 배려 하는 모습에서 병원에 대한 신뢰는 더 깊어졌다. 알루드 할머니의 빠른 회복세에, 우리도 병원 관계자들도 매우 기뻐하였다. 알루드 할머니가 식사 때문에 어려움을 겪자 메뉴가 다른 식사로 준비해주셨다. 치료가 마무 리될 때쯤에는 할머니의 치아가 거의 없는 것을 아시고, 국제협력팀에서 틀니를 할 수 있는 병원에 연락해서 치과치료도 받게 해주었다. 모든 것이 알루드 할머니를 위 해 세심하게 관찰되고 진행되었음에 놀라웠다.
알루드 할머니가 아이티 꽃동네에서 가슴 부위에 피부가 썩어 육체적으로나 정신 적으로 함께 힘들어하던 죽음의 길목에서 서울성모병원 의료진의 도움으로 건강한 삶을 선물 받게 된 것을 보며, 하느님의 선교 사업으로 세워진 서울성모병원의 의료 적 기술과 베풂의 정신이 자랑스럽고 감사했다. 큰 사랑을 받은 알루드 할머니는 병원 치료 후 한국에 머무는 동안 서울역 근처 동 자동 쪽방촌(*동자동 쪽방촌에는 장애인과 홀몸노인, 버려진 여성과 아이 등 300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을 방문해 아이티 노래를 선사하고, 자신의 삶에 희망을 보여주 어 한국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본인이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전하고, 삶의 희망을 나누어줄 수 있었다. 받은 사랑에 감사하며 봉사를 통해 얻은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알루드의 삶이 마치는 순간까지 이어지기를 매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통해 나 눔을 받고 기쁘게 전하는 제2, 제3의 알루드 할머니가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32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2018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장려상
다른 누군가에게도 이 온기를 전할 수 있다면… 유○선
2012년 5월 1일, 누구도 부럽지 않던 저희 가정에 커다란 시련이 닥쳤습니다. 건강 하던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에서 병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병명은 뇌출혈……. 벼락 같은 병명에다 편마비, 인지저하, 언어장애까지……. 어느 자선수혜수기 수상작 / 33
새 저희 가족은 아빠가 그냥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어요.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일들이 저희 가족에게 닥치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편의 병수발 을 하며 지칠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생각하며, 남편을 생각하며 열심히 간 병했고, 이젠 병원 생활 6년차, 어느새 제 몸에도 하나둘씩 이상이 생겼습니다.
2017년 8월경 복부 통증이 계속되어 초음파검사를 했는데 커다란 담석이 발견됐다 며 큰 병원에서 수술을 권유받았습니다. 하지만 5년 넘게 남편의 병원비며 생활비를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제 수술비 마련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 면 그때 미루고 미뤘던 그 수술이 일을 키운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3개월 넘게 찾아오는 통증을 그때마다 진통제로 버티고 응급실에 실려가기 를 반복하다 보니, 상황은 더 심각해져 일상생활조차 힘들었습니다. 특히 암으로 발 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듣고 ‘이대로 방치하다간 정말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점점 절망적으로 변해갔습니다. 남편도, 아이들도, 가정도, 제 삶 까지도 다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러던 중 우연히 의사 선생님의 소개로 가톨릭대학교 부천성모병원 사회사업팀을 방문해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저의 집안 사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창피 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선생님께서 편안하게 이끌어주신 덕에 마음 편히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마음 편하게 집안 이야기, 저의 마음속 이야 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가볍고, 후련하 기도 하였습니다. 상담이 끝나고, 의료비지원 신청에 필요한 서류 준비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생소한 서류들이 많아서 준비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하였지만, 선생님께서 꼼꼼하 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셔서 어렵지 않게 서류 준비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도움을 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상담일자와 수술일자가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아서 입원을 한 상황에도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아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온갖 걱 정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지원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누구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지, 정말 많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34 / 2018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때마침 그때에 사회사업팀 선생님께서 의료비 지원 승인이 났다며, 아무 걱정 마시 고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 받으시라고 저를 다독여주셨습니다. 마음 불편하셨을까봐 출근하자마자 전화 드린다고, 밝은 목소리로 기쁜 소식을 전하시던 그때, 그 목소리 가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고맙고 눈물이 나는지……. 전화를 받을 당시에는 덤덤하게 괜찮은 척했지만 막상 전화를 끊고 얼마나 많이 울 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지원을 받은 110만 원이라는 금액은 어찌 보면 다른 사람들에 게는 큰 금액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수술비에 대한 걱정으로 희망과 삶을 포기할 정 도로 힘들어하던 제게는 그 무엇보다도 크게 다가왔습니다. 여러 감사한 분들의 도움 속에 저는 11월 6일, 무사히 수술을 받고 회복되어 퇴원했습니다.
사회사업팀에서는 퇴원 후에도 때마다 전화하셔서 안부를 물어주시고, 따뜻한 겨 울 보내시라고 따뜻하고 예쁜 이불 선물까지 해주셨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많은 분들의 배려와 도움으로 올겨울을 따뜻하게 잘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도 현실은 여전히 팍팍하고 살기 힘들지만, 도와주신 분들의 위로와 격려가 많은 힘이 되어 저 는 좌절하지 않고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지금은 어려울지 모르겠지 만,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받게 되면서 저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게 또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힘들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 을 주신 부천성모병원 사회사업팀 선생님들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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