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가톨릭중앙의료원 핵심가치실천공모전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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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Catholic Medical Center

핵심가치실천공모전 핵심가치실천 수기 당선작 자선수혜자 수기 당선작


핵심가치실천공모전 핵심가치실천 수기 당선작

Contents


[대상]

너를 응원할게, 마음을 다해! / 양희

[우수상]

모두가 함께 사랑으로 키운 꿈나무 / 임지숙 마음의 소리를 틀어주는 DJ / 백준규 우리는 당신의 가족입니다 / 이희진 당신은 ‘연명의료’를 하시겠습니까? / 김귀연 함께하는 우리 / 김진숙

[장려상]

부정적 시선보단 따뜻한 미소를 / 강슬기 짧은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곳, 영아일시보호소 의료봉사 / 박병선 고맙습니다 / 박예지 지금은 녹음 중 / 온지희 나의 작은 깨달음 / 염다미 환자 우선의 전인치료를 몸소 실천하는 우리 / 최민지 성바오로에서 받은 은총 / 차선경 아름다운 마무리 - 동행 / 홍석진 공감과 진심이 가진 놀라운 힘 / 장안우 죽음의 과정을 함께하는 방사선치료 24시 / 노시원


대상

너를 응원할게, 마음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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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희 (서울성모병원 111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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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태어난 지 2~3일 된 아이들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아이들이 있는 소아청소년과 병동입니다. 폐렴이나 장염으로 입원하여 짧게 입원하고 가 는 환아부터 오랜 시간 투병을 하는 환아들까지 다양한 환아들이 있는 곳입 니다. ○○ 환아가 저희병동에 방문을 한 것은 2018년 초였습니다. 2007년 급 성 림프구 백혈병 진단으로 이식을 받은 후 2009년 이식편대숙주반응이 온 몸에 발생하여 긴 시간 동안 투병을 하고 있는 환아였습니다. 팔 다리의 피부 가 벗겨지고 경화증이 진행이 되어 스스로 병실에서 화장실까지 걸어갈 수 도, 숟가락을 잡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벗겨지는 상처에는 진물이 나오면 서 감염관리가 되지 않아 매일 온몸을 칭칭 감는 드레싱을 하며 고통을 느끼 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를 보았을 때 간호사들은 손이 많이 가는 환자가 왔다고 생각 하며 많이 부담스러워했습니다. 그러면서 “20세가 넘었는데 왜 소아청소년 과에 왔지?”라며 투덜대기도 하였습니다. 매일매일 커튼을 치고 엄마와 단둘이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를 간호 하는 것은 많은 부담이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간호사들은 처치를 하면서 ○○에게 관심을 보여주었고 하루하루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의 어려움 에 대해 마음 아파했습니다. 환아는 정서적으로 그리움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또한 11년 동 안의 긴 투병생활로 활동이 제한되어 있었고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했으며 실제 보호자의 도움 없이는 개인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차피 걸어다니지도 못하는데 차라리 다리가 없 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소독도 매일 할 필요도 없고 통증도 없고 오히려 편 할 것 같다.”라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서의 영성 간호팀에서는 손이 많이 가는 ○○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간호 사들에게 ○○의 상황에 대해 서로 나눔을 하였고 ○○의 이식 전 건강한 모 습을 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리고 간호사들이 ‘○○ 지지하기 프로젝트’ 를 실시하였습니다. 매일 근무 시작 전 환아를 위한 기도를 하면서 하루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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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하였고, 간호사들 각자가 환아를 위한 영성간호를 수행하였습니다.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환아를 위해 밖에 날씨가 변하고 있음을, 밖에 꽃이 피고 있음을 알려주었고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카네이션을 몰래 준비해서 자신을 위해 간호하고 있는 부모님에서 꽃을 드리면서 감사를 표현하도록 했 습니다. 그리고 처치를 하면서 환아가 “죽어버리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간호사들이 매일 아침 ○○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가 많은 사 랑과 지지를 받고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힘들어하는 ○○와 부모님을 위해 간호사와 의사가 함께 응원 메시지를 담은 동영상을 만들어서 깜짝 선 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가끔 차 한 잔을 드리며 보호자도 잠깐 의 쉼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 지지하기 프로젝트’를 하나하나 해나가가면서 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겨울에 입원을 왔던 ○○는 따뜻한 봄에 퇴원을 하게 되었습 니다. 마지막으로 일상 속에서 함께 기억하면서 힘을 낼 수 있도록 머그컵에 ○○가 조혈모이식을 받고 집에 가서 축하파티를 했던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담아 선물을 하였습니다. 간호사들은 ○○를 간호하면서 환아가 점점 기쁨을 느끼고 힘을 얻어가는 것에 보람을 느꼈고 함께 힘을 얻어 갔습니다. 퇴원을 하면서 보호자께서 간호사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주고 가시면서 한 명 한 명 안아주고 가셨습니다. 111병동 선생님들께…… 저희 모자 2018년 5월 31일 퇴원을 명 받았습니다! 충성!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선생님들께서 베풀어주신 크고 귀한 사랑 작은 가슴에 가득 담아 갑니다. 정성 어린 손길로 치료해주시고 간호해 주셔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렇게 무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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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 던 최고의 선물…… 동영상…… 보석 같은 잊지 못할 추억 만들기…… 감동.


저희 가족에게 잠시나마 마음의 용기와 향기를 심어 주심에 감사드리며 그 따 뜻한 마음에 가슴 벅차 눈이 시리도록 울어 보았습니다. 더 좋은 날이 꼭 있으 리라 믿으며 하루하루 감사함으로 이겨 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많이 사랑합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와 함께 퇴원하셨습니다. ○○ 환아는 2018년 병원에 입원했던 환아 중 간호사들 마음속에 기억되 는 아이 중 하나입니다. 4개월 동안 간호사들은 바쁜 업무 속에서 잠깐의 인 사와 격려의 말, 관심이 환자들에게 힘이 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 고 이것의 힘을 느꼈습니다. 업무 현장 속에서 간호사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가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치 있는 일을 주심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의 작은 손길이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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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모두가 함께 사랑으로 키운 꿈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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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숙 (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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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겸이(가명. 온화하고 겸손하게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는 이혼 한 부모의 자녀로 한창 엄마아빠의 사랑을 먹고 자랄 때인 100일 때부터 할 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에는 일용노무자 아빠와 잠시 동 거를 하면서 고시촌, 찜질방을 전전하며 일정한 주거 공간 없이 학교생활을 했다고 한다. 지속적인 학교생활이 어려워져 초등학교 2학년 말부터 할머니 와 다시 생활하게 됐는데, 할머니는 재활용품 수거로 일상생활을 근근이 이 어가고 있었으며, 이후로 아빠의 소식도 두절되었고 그렇게 조손가정으로 어 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너저분하게 쌓여있는 재활용품들 사이에 있는 반지하 주거공간. 매달 생활 비와 월세를 걱정하는 작은 방이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안정된 주거생활로 가 까스로 또래 친구들과 함께 초등학교 생활을 계속 할 수 있었다. 그 무렵 할 머니와 함께 영세를 받게 되었고, 주위 사람들과 지역사회의 도움으로 조손 가정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었다. 하지만 중학생 사춘기가 되면서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인하여 친구들로부터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고 자존감이 떨 어져 할머니와의 관계도 악화됐을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는 관 심과 우려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등 힘든 상황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온겸이네를 알게 되었다. 가정간호 봉사자로 활동하던 할 머니의 대모님이 고혈압, 무릎 관절염 등으로 고생하시는 할머니를 위하여 가정간호를 신청하셨다. 그 당시 온겸이는 남달리 반듯한 외모를 갖고 있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소녀였다. 나와 주위 사람들은 온겸이가 상처받기 쉬운 여린 사슴 같은 느낌이 들어 가슴이 저렸다. 혹여 반듯한 외모 때문에 냉혹한 사회의 유혹에 휩쓸려 잘못되고 비뚤어진 길로 빠질까 하는 우려가 컸다. 하지만 온겸이네는 가정환경, 경제적인 문제, 할머니의 건강상태, 온겸이 의 어린 감수성 등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동시에 겪고 있는 상황이라 제대로 된 지원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고민 끝에 이들을 돕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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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한두 사람의 관심만으로는 부족하고 여럿이 조금씩 다방면에서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혼자보다는 성당 공동체, 이웃사회, 복지시설의 도움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 성당 수녀님과 보좌신부님, 청소년 담당 교사들에게 청소년 관련 모 임과 프로그램에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서 또래친구들과 자연스런 관계형 성을 하도록 도움을 청했다. 또 이웃에 살고 있는 한 자매님께서는 학교생활 이외 일상 사회생활에도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관심과 정성을 지속적으로 보 여 주며, 조손의 세대 차이를 메워 주고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역할까지 흔쾌히 담당해 주셨다. 또한 할머니 몰래 매달 용돈을 주시며 친구들과의 원 만한 관계형성에 도움이 되도록 배려도 해 주셨다. 또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3년에 걸쳐 주민센터와 주택공사를 찾아가서 노력한 결과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되고 임대주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할머니는 무료로 무릎 수술을 받을 수 있었으며 내가 근무하고 있는 서울성모병원 성모자선회비에 서 난방비와 생활비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연계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온겸이가 무탈하게 힘든 고비를 잘 넘길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하 며 모두들 노력과 정성을 보탰다. 다행히 많은 어려움을 하나씩 하나씩 힘겹게 이겨내는 모습을 곁에서 가슴 조이며 지켜보며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하신 할머니의 바람대로 온겸이는 무 탈하게 위태로운 사춘기를 잘 넘기고 본인이 원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한 봉사자님은 성당 밀알 장학회에 장학금 신청을 하며 기뻐해 줬고, 나는 입학 기념으로 강북구청 교육지원과에서 주관하는 디딤예금통장 개설을 도 와주었다.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월 6만원(구청에서 3만원 지원, 3만원은 개 인 입금) 적금으로 3년 후 졸업해서 종잣돈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다행히 월 3만원 적금액도 성당 한 자매님의 도움으로 2회 분납금부터 2018년 11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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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30개월을 완납을 해 주셨다. 올해가 온겸이를 처음 만난 지 6년째가 되는 해다.


온겸이가 J대학에 입학 예정이다. 일찌감치 11월에 대입 수시전형에 합격 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내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줬으며 할머니와 신부님, 수녀님, 대모님, 이웃 자매님들 모두 한 시름 놓게 됐다. 비바람 치는 거칠고 척박한 환경에서 많은 유혹과 어려움을 다 견디고 피어난 꽃봉오리기 에 더욱 대견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꿋꿋하고 당당한 사회의 한 일원으로 온화하고 겸손한 향기를 풍기는 꽃으로 피길 바란다. 하느님의 사 랑을 체험하도록 도와주신 많은 사람들에게서 받은 관심과 기도와 사랑을 늘 생각하며 이제 더 넓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소중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되길 기도한다. 오랫동안 여럿이 조금씩 도움을 주셨고 그 도움을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연결한 결과 보람 있는 성과를 이뤘다는 생각에 가슴 뿌듯하고 하느님 울타 리 안에서 봉사할 수 있다는 것에 또한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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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마음의 소리를 틀어주는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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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준규 (서울성모병원 방사선종양학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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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선종양학과에 오시는 환우분들은 오랜 병원 생활과 잦은 치료로 인해 대부분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있는 분들입니다. 병원에서 근무 중인 선생님들도 내가 일하는 곳 외에 처음 가는 진료실이 나 치료실은 어색하고 긴장되기 마련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병원이란 곳이 달갑거나 반가울 수는 없을 터. 특히나 방사선종양학과에 오신 분들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곳이 제가 일하는 곳인 모의치료실입니다. 방사선 발생장치에 생기는 과부하로 인해 치료실의 온도를 항상 낮게 유지 하여야 되고, 여러 가지 신체 고정 장치를 제작하여야 하는 낯선 환경은 환자 분들의 긴장감을 배로 증가시킵니다. 아무리 따뜻한 말과 관심도 처음 접하 는 병원의 환경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과의 특성상 환자분들이 항상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여야 하는데 긴장한 탓 에 환자분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갑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익숙해지실 때 쯤엔 모의치료실과 자세가 달라져 치료시간이 오래 걸리곤 합니다. 환자분들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 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결론은 분위기였습니다. “음악은 불안을 해소해준다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음악은 치유를 돕 는다.” ”인간은 음악을 통해 자신의 정서를 나타내기 때문에 음악을 듣거나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 음악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인 간들은 여러 형태의 음악을 통해 자신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표출하게 되므로 음악을 통해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 상태를 조화롭게 해 여러 가지 질병 들을 치유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위의 말들처럼 음악은 우리에게 신체적, 심리적,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들 게 합니다. 처음 가게 되는 낯선 어딘가에 가게 되었을 때 제가 편안함을 느 꼈던 장소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니 시끄럽지 않고 차분한, 조용하고 잔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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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과 클래식이 나오고 있었음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이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분들에게 안정감을 드릴 수 있는 ‘DJ’가 되어보도록 해 보았습니다. 음악의 효과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모의치료실로 들어가기 싫다며 엄마 품 에 안겨 울기 바쁜 5살 환아는 치료실 내에 틀어놓은 ‘미니특공대X’ 노래를 듣자마자 놀란 토끼 눈을 하며 뭐에 홀린 듯이 제 발로 치료실로 걸어 들어옵 니다. 고정 용구를 제작하며 미니특공대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니 연신 싱글벙글하며 모의 치료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자세 확인을 위한 사진 촬영을 할 때는 V자도 그려주고는 해맑게 웃으며 나갔습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르신들도 음악이 나오니까 훨씬 마음이 편안하다며 때로는 신청곡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이제는 세대별 인기 순위도 외울 정 도로 꽤 괜찮은 DJ가 되었습니다. 다만, 위에도 말했듯이 치료 중에 움직이 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가끔 손가락과 발가락으로 리듬을 타시는 분들 덕 분에 말씀드려야 할 주의 사항이 하나 늘어나긴 했지만 그 정도쯤은 일도 아 니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호불호는 첫 인상에 의해 거의 결정된다고 생각합니 다. 따라서 길지 않은 시간, 별것 아닌 노력이지만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는 환 자에게 줄 수 있는 심리적 안정감과 더 나아가 우리 과와 우리 기관에 갖게 될 긍정적인 이미지까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느 병원들이 그러하듯 한 순간의 실수, 작은 오차도 줄여야 하는 곳이고 잠깐도 쉬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여야 하기에 비교적 딱딱한 분위기를 유지해 야 함은 어쩔 수 없을 터. 허나 환자에게도 그런 딱딱함을 느끼게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가끔 점심시간에 로비에서 연주회를 할 때 보면 환자, 보호자, 교직원 할 것 없이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가던 길을 멈추고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을 보았 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생전 처음 듣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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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며 소화가 더 잘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이처럼 병원 구석구석 곳곳에서 노력하시는 모든 분들의 작은 실천이 환자분들에게는 큰 힘과 용기 가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아직 마음의 상처도 치유되지 않은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항상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하고 고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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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우리는 당신의 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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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진 (여의도성모병원 인공신장실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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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인공신장실 이희진 간호사입니다.”, “우리 환자가 오늘 신경 과에서 처방 받은 약을 먹었는데 어지럽다고 하네요.” 오늘도 여전히 누구인 지 밝히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홍○○님의 남편이다. 홍○○ 님은 10년 가까이 혈액투석 중인 환자인데 투석보다도 혈압 조절 이 쉽지 않은 분이다. 180이상 높았던 수축기 혈압도 적은 용량의 혈압약 복 용으로 뚝 떨어지거나, 혈압이 계속 떨어져서 복용하고 있는 여러 가지 혈압 약 중 하나만 중단하여도 갑자기 혈압이 상승하면서 두통으로 응급실을 자주 방문하는 분이다. 그리고 투석실이 아닌 타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드시고 어 지럽다거나 힘들다고 호소하면 홍○○ 님 남편은 투석을 하는 날이나 안 하 는 날이나 언제든지 투석실로 전화해서 약 처방에 대한 불만을 말하며 해결 해 줄 것을 요구하곤 하셨다. 홍○○ 님은 감기나 변비, 어지러움증 등 모든 증상을 본인이 직접 이야기 하지 않고 남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홍○○ 님께 불편한 증 상이나 필요한 약들을 편하게 직접 말씀해 달라고 부탁드리기도 하고, 매 투 석시마다 불편감이나 힘든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였다. 그럼에도 홍○○ 님은 여전히 남편이 모든 것을 대신하게 하셨다. 투석 환자들은 소변이 안 나오기에 투석 간 체중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중요한 만큼 체중 조절하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한다. 홍○○ 님이나 남편은 특히 이 체중관리에 민감해서 혈압조절을 위해 체중을 조절하거나 혈압약을 추가하거나 감량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면 왜 그래야 하는지 따지거나 화를 낼 때가 많았다. 그리고 체중조절을 위해 중요한 한 가지, 바로 식사관리인데 이것 또한 환 자들에게는 어렵고 어려운 숙제이다. 그래서 투석실 간호사들은 많은 시간을 들여 식사관리에 대해 교육을 한다. 홍○○ 님은 식사조절을 제대로 못해서 혈액검사 결과가 좋지 않았고 간호사들은 식사요법에 관해 다른 환자들보다 더 공을 들여 교육을 해주었다. 그러기를 1년 이상하니 검사결과는 차츰 좋 아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날카롭고 예민하던 그분의 남편이 나의 설명에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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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시더니 어느 날은 “처음 몇 년 동안은 잘 몰랐는데 우리 와이프를 위해 열심히 교육해 주고, 먼저 불편한 것도 확인해서 해결해주고, 검사결과도 좋 아지고…… 이 선생님 정말 고마워요.” 하시는 거였다. 다른 환자들보다 예민한 반응과 따지는 듯한 말투를 보였던 홍○○ 님 남 편의 진심어린 말씀에 나는 힘이 났고 투석실 간호사로서 보람을 느꼈다. 그 렇게 홍○○ 님과 남편분과 나는 조금씩 정이 들며 믿음을 쌓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홍○○ 님 남편이 내게 상담을 요청하셨다. 손바닥에 붉은 반점이 생겼다 없어지고, 요즘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는 일단 신장내과 진료를 빨리 보도록 안내하였으나 남편분은 환자 걱정에 진료를 미루다 폐렴 증상을 보여 입원을 하게 되었다. 늘 곁에서 살뜰하게 돌봐주던 남편이 입원하고, 상태까지 나빠지자 홍○○ 님은 많이 힘들어하며 더욱 예민해지고 불안해하셨다. 홍○○ 님은 투석하는 도중 자주 변을 보셨는데 그 모든 걸 남편분이 치워주곤 했었다. 남편 없이 혼자 온 첫날 홍○○ 님은 식은땀을 흘리며 안절부절하여 “홍○○ 님, 어디 불편하세요? 혹시 대변보고 싶으면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 희가 도와드릴게요.” 하고 말씀드렸다. 변을 본 후에는 수치심이 느껴지지 않 도록 커튼을 치고 반 시트로 가린 후 조심히 치워드렸다. 홍○○ 님의 남편분은 일주일 정도면 퇴원하실 줄 알았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뇌경색까지 오고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가게 되었다. “보호 자분은 반드시 이겨내고 훌훌 털고 일어나실 거예요. 우리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해요. 저도 보호자분을 위해 기도 많이 할게요.” 나는 홍○○ 님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위로해주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출근할 때마다 인공신장실 복도 앞의 하느님께 오늘도 투석을 위해 오신 환자분들이 평안하 시도록 기도하곤 했는데 그 즈음에는 홍○○ 님 남편의 회복을 위한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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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로 이실 하고 난후 나는 인공신장실 UM선생님과 함께 그분을 찾아뵈었다. 항상 건강한 모습을 뵙다가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계신 그분의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눈을 맞추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그분의 손을 꼭 잡고 말씀드렸다. “홍○○ 님은 걱정하시지 마세요. 저희가 가족이니 잘 돌봐 드릴게요. 보호자분 얼른 일어나셔서 꼭 다시 투석실로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분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로부터 3일 후 그분은 주님의 곁으로 떠나셨다. 우리 투석실 간호사들은 장례식장을 찾아가 그분의 마지막을 배웅하며 고인과 남은 가족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길 간절히 기도드렸다. ‘이○○ 님, 병마와 싸우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홍○○ 님은 이제 가족 인 저희가 사랑으로 돌봐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주님 곁에서 편히 쉬세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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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당신은 ‘연명의료’를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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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연 (여의도성모병원 응급간호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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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곤란 환자입니다. 신고는 전신쇠약으로 들어왔는데, 저희 도착 당시 산소포화도는 76%였고 산소를 고농도로 드려도 산소포화도가 오르지 않습 니다.” 119 구급대 대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모시고 온 환자 분은 가쁜 호흡을 내 뱉는 가슴 흉곽이 잘 보일 정도로, 마른 체형의 의식이 없는 92세 남자 환자 분이었다. 응급실 내 가장 중증도가 높은 환자에게 배정되는 침상으로 안내 후 환자 분의 활력징후를 확인하였다. 환자에게 적용한 모니터상의 산소포화 도는 72%, 최고 농도의 산소를 적용하였지만 수치는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 았다. “기관 내 삽관 준비해주세요.” 환자의 상태를 확인한 응급의학과 의사가 외쳤다. 기관 내 삽관을 위한 물 품을 준비하며,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환자의 현재 상태 및 응급처치에 대해 설명 후 기관 내 삽관에 대한 동의서를 받으려는 순간, 멈칫 하는 보호자분의 모습이 보였다. ‘인공호흡기’라는 말에 보호자분은 쉽게 결 정을 내릴 수 없다며, 다른 가족분들과 상의하겠다고 대기실로 자리를 떴다. 보호자분의 결정 지연이 응급처치를 중단시키는 것만 같아 답답한 마음이 들 었다. 그 순간 모니터상의 산소포화도의 앞자리 숫자는 ‘6’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 보호자의 결정을 기다리며 마음 졸이던 순간, 가슴을 부여잡으며 흉통을 호소하는 40대의 남자 환자가 이송되어 왔다. 응급처치를 위해 의료진들은 40대 남자 환자에게 달려갔고, 그토록 기다리던 보호자분께서 달려와 다급 히 물어보셨다. “인공호흡기를 달면, 남은 생은 식물인간처럼 보내는 건가요? …… 지금 인공호흡기를 달지 않는다면, 바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제서야 보호자분들에게 ‘인공호흡기’라는 말이 어떻게 와 닿았을지 깨닫 게 되었다. 지금 보호자분의 곁에 있는 의료진은 내가 유일했고, 나의 설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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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분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 환자분의 임종을 결정지을 것만 같았다. ‘인공호흡기’를 적용하는 것은 자발호흡이 힘든 환자분을 돕기 위한 것이며, 환자분의 증세에 따라 기관 내 삽관을 제거하는 경우도 있음을 설명했다. 92 세의 환자분을 보며 기관 내 삽관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는 않았지만, 모든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고 보호자분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보호자의 결정이 내려졌다. 기관 내 삽관에 동의한 것이다. 보호자의 동의 와 함께 준비해 두었던 기관 내 삽관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드디어 연결된 92세 남자 환자의 기관내관을 통해 많은 양의 가래를 뽑아내고, 인공호흡기 를 적용하니 산소포화도는 빠르게 90%까지 오르고 있었다. 환자분의 증상 과 결과에 맞는 해당과의 진료와 검사를 시행하면서 하룻밤을 보냈고, 처음 내원하였을 때를 생각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해진 환자분의 모 습을 보며 퇴근하였다. 다음 날 나이트 근무를 위해 출근하여 담당 구역의 라운딩을 돌고 있었다. 환자분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인사하는 순간, 앉아서 식사를 하고 계시는 고 령의 환자분이 낯익어 보였다. 의무기록을 확인한 후에야 낯익은 환자분이 어제 기관 내 삽관을 하고 인공호흡기를 적용했던 환자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공호흡기는커녕 산소를 가장 낮은 농도로 적용하고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지난 밤 보던 환자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극명하게 달 라 있었다. 환자분은 내가 퇴근하고 다시 출근하는 채 하루가 되지 않은 시간 에 빠른 속도로 증세가 완화되었다. 검사 결과상 수치가 좋아지고, 의식까지 명료해져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기관내관이 없어도 될 만큼 자발호흡이 가 능해진 것이다.

22 기록을 확인하고 나니, 다시 한 번 뵙고 싶었다. 환자분께 인사를 건네 보 았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세요?” “내가 귀가 잘 안들려서…… 그런데 다괜찮아요. 지금은 아주 편해요.” 어제는 눈을 뜨고 계시는 모습조차 보지 못하고 퇴근했는데, 지금은 대화 를 하며 웃는 모습을 보이시는 환자분을 보니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순간 환자분의 식사를 챙겨주시며 옆자리에 앉아 계시는 보호자분의 모습이 보였다. 그저 모든 ‘가능성’이라는 생각으로 보호자분께 드렸던 말이 정말 현 실로 이루어졌다. 그날 밤도 무사히 환자분의 상태는 점차 호전되어 처음 결정되었던 중환자 실이 아닌, 일반 병실로 입원을 갈 수 있었다. 환자분을 두 번째로 뵈었던 그 날 밤에, 보호자분께서 들려주신 얘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인공호흡기’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나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가 없었다고, 하지만 재차 설명을 들어보니 환자분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고 하셨다. 환 자분께서는 평소에 그 연배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매일 산책을 다니 셨고, 호흡기 질환이 있으셨지만 갑자기 증세가 악화되어 하룻밤 만에 세상 을 떠나시게 되면 편히 못 가실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다.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기결정을 존중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연명의료 결정법’이 작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연명의료 결 정법’은 모든 환자는 자신이 앓고 있는 상병의 상태와 예후 및 시행될 의료행 위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음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 이는 환자의 의 사결정 능력이 결여되었을 경우, 보호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임종이 다 가온 상황에서 환자 및 보호자가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지지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죽음이 존엄하다는 것을 알게 될수록 인간은 성숙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다. ‘성숙하고 역량있는 전문인력’이 되기 위해 하루하루 성심껏 간호하며 환 자분들의 곁을 지키는 성숙한 지지자가 될 날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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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함께하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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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서울성모병원 121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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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18년 9월에 정형외과 병동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정형외과는 목숨이 걸린 수술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자 수술하는 곳입니다. 그렇 기에 중환이 비교적 적고 수술 전과 후의 간호가 주로 이루어지는 과라는 생 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긴 시 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정형외과에는 9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수술을 받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60~70세가 어린 편이며 평균 4~5개의 기저질환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이 대 부분입니다. 그들은 회복 시 가족들의 돌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 든 환자가 가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 정형외과에서의 약 5개월 간의 근 무 기간은 그런 환자들을 돌보는 병동의 20대 간호사들의 열과 성의를 보고 느끼는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하여 현재 입원해 계신 어떠한 환자분의 이야기를 전 하고자 합니다. 그 환자는 돌봄이 필요하나 가족의 도움은 받지 못하고 홀로 남겨진 괴팍한 성향의 환자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안쓰러움을 느끼게 했던 그 환자분을 중심으로 우리 부서 간호사들의 연민 어린 간호와 자부심까지 들게 했던 사회사업팀의 활약을 풀어 나가고 싶습니다. 만남, 손 많이 가는 환자 12-113 이○○, 정형외과 상피모양 육종. 환자와의 첫 만남은 12월 19일이었습니다. 보호자가 필요한데 연락이 닿 지 않는 상황 속에서, 수술부위의 삼출물이 많아 자주 시트를 갈아줘야 하고 요구 사항이 많은 환자라는 정보 정도를 듣고 병실 라운딩을 갔습니다. 병실 에 도착하니 시트는 엉망으로 풀어헤쳐져 냄새가 진동하고, 침상 주변은 여 기저기 던져진 휴지로 가득했습니다. 인사말을 건넸지만 그는 혀암을 앓아 앞니 2개를 제외하고는 이가 없어 발음이 부정확했습니다. 그는 거의 매일 통증으로 10분 간격으로 진통제를 원한다며 콜 벨을 눌렀 습니다. 약제를 투여한 후에도 약 효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지속적으로 콜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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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눌러 담당 간호사가 “왜 자꾸 콜 벨을 누르세요?”라고 묻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아프다는 거 알려주려고.”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 대화로 환자의 관심을 향한 욕구를 알 수 있었고 안쓰러움을 느꼈습니다. 또 한 담당간호사를 많이 어렵게 하는 환자임을 인계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병동 생활 시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인해 의사소통이 어려워 자신의 뜻이 전 달되지 않자 소리를 지르거나 간호사에게 비속어를 쏟고, 온갖 잡다한 생활 관련 요구사항이 많다는 이야기 또한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제가 라운딩 시에는 요구사항을 밝히지 않았으나 주로 evening, night 근무 시 간호사 콜을 많이 했습니다. 식사도 거르고 바쁘게 일하는 우 리 부서 간호사들은 그 환자의 물 떠다 달라는 사소한 요구까지 맞추려 노력 했습니다. 사용하는 물통도 간호사가 나눠준 것이었습니다. 기저귀를 이용하는 환자가 대변을 보았을 때 갈고 닦아주고, 하루에도 여러 번 침대 시트를 교환해주는 등 콜 벨이 눌릴 때마다 가서 얼굴을 마주하고 불편 해결을 도와주던 우리 부서 간호사들을 칭찬합니다. 20대의 젊은 간호사들에게는 회음부 가 다 보이는 남자환자의 대변을 치우고 닦아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 합니다. 또한 환자 주변 청결을 위해 사원들은 매일 환자 침상을 닦고 시트 교환과 정리를 수시로 행했으며, 대건 사원은 병상 바닥 청소 및 쓰레기 분리수거를 할 수 있도록 침대 옆에 비닐을 달아놓고 매일 비닐을 교체하였습니다. 121 병동 근무자 모두 본인의 위치에서 환자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회사업팀 연결되다! 그 환자는 자가 간호가 불가능하고 위생 상태가 상당히 불량했기에 보호자 에게 환자 옆에 있어 주기를 요청하려 연락을 해 보았지만 꾸준히 연락이 닿 지 않았습니다. 그 환자는 가족의 경제적 도움과 돌봄 없이 방치된 상태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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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 예로 움직임이 어려운 환자기에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 중 기저귀가 다 떨어졌을 때, 물품 구입비용이 없다고 하여 다른 병동에서 퇴원시 두고 간 기저귀를 구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심란한 상황 속에서 사회사업팀의 도움은 환자에게 한 줄기 빛과 같 았을 것입니다. 사회사업팀의 경제적 도움은 그의 병원비에 대한 걱정을 없 애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사회사업팀의 면담 결과지를 통해 우리 부서원들은 보호자인 아들은 생활이 어려워 아버지를 간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환자 본인은 반지하 방에서 독거 중이며 진료비도 막연히 주민센터 의 긴급복지의료비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입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사업팀의 인도적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 했습니다. 뜻밖의 장애 사회사업팀의 담당자가 보호자에게 병원비 지원 가능성을 알리고 필요한 서류를 여러 번 요청하였으나 보호자인 아들은 번번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병원의 지원 확정이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서류만 준비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아들에 환자 본인도 속상해하는 나날이 2주째 지속 되고 있었습니다. 의료진이 보호자에게 연락을 취해 보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필요한 서류는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사회사업팀의 담당자분과 여러 번 통화를 하던 중, 병원의 지원에 필요한 서류가 주민등록등본과 수급자 증명서임을 알게 되어 1월 10 일, 1층의 비즈니스룸으로 환자를 휠체어로 모시고 가 서류 발급을 시도했습 니다. 이 서류만 준비되면 병원비 부담이 없어지고 간병사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희망은 환자분의 지문 인식이 불 가능했던 탓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힘겨웠던 세월 탓인지 지문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질 않아 서류 발급이 불가능했습니다. 환자분과 함께 병실로 돌아오 던 그 시간이 참 길고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환자분의 얼굴에는 실망과 아드님에 대한 속상함이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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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면 감천이요~ 서류가 구비되지 않아 병원비 및 간병인을 구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던 사회사업팀 선생님께서는 마지막 방법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마지막 방법 이란 병원이름의 공문을 작성해서 동사무소에서 필요한 서류를 요청하여 발 급받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공문을 발송할 수 있도록 환자의 어려움을 헤 아려 주신 보직자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후 사회사업팀 담당자 분께서 병원의 지원이 확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셨습니다. 1월 17일 저녁에 드디어 환자를 돌볼 수 있는 간병사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병 원 지원 확정을 병동의 간호사들에게 알렸을 때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했 습니다. 병원의 지원과 간병사가 붙은 이후, 환자분의 밝고 청결해진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간병사가 온 후 위생상태가 좋아졌고 통증으로 인한 콜 벨 횟수도 많이 줄었습니다. 환자분의 밝고 깨끗해진 모습에 웃음이 저절로 나 왔습니다. 편해진 마음이 환자분의 아픔을 덜어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의 숙제 아직은 수술 부위 상처가 낫지 않아 항생제 치료 및 상처 소독을 하고 있지 만, 염증 상태를 보여주는 수치와 상처 분비물도 감소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 다. 재원 일수가 55일을 넘기고 있는데, 이번 구정도 병동에서 보내야 할 듯 합니다. 현재는 염증 치료를 위한 항생제 치료로 입맛이 없어 식사를 잘 못하 고 있고, 영양공급이 부족해서 상처가 낫지 않아 의료진도 상처 회복을 위해 노력 중입니다. 이 환자분과의 대면을 통해 알게 된 가족 기능이 감소된 현실이 가슴을 답 답하게 누릅니다. 하지만 다른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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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병원에는 요구도와 중증도 모두 높은 환자를 돌보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환자를 연민 어린 마음으로 돌보는 간호사들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환자를 돕는 사회사업팀의 노력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두의 협력이 있기에 따뜻한 의료 혜택 아래 ‘환자우선의 전인치료’라는 영성이 구현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다 같이 현장에서 CMC 영성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고 뿌듯하고 자랑스러 운 마음을 내보이고 싶어 없는 글재주이지만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우리 간 호사들도 과도한 업무에 소진되었다고만 느끼지 말고, 도움을 줄 수 있음에 감사하는 나날로 가득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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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부정적 시선보단 따뜻한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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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슬기 (여의도성모병원 분만병동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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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의도성모병원 분만병동Unit의 11년차 간호사입니다. 2012년 부 서 이동한 이래로 지금까지 분만실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서당개도 3년 이면 풍월을 읊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저도 나름대 로 분만실에서 풍월을 읊조릴 수 있는 간호사라 확신하였습니다. 분만실 문 을 열고 들어오는 산모와 남편의 표정만 봐도 ‘아! 저분은 자궁문이 요 정도 열렸고, 곧 분만하겠구나……’ 내지 ‘저분은 첫 번째 분만이라 부부가 많이 상기되었구나.’ 등등. 그리고 산모와 보호자의 말과 제스처만 보아도 그들의 요구 내지 심리상태를 알고 컨트롤할 수 있는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런 저에 게도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부류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외국인 산모 중 에서도 사회사업팀 지원을 받는 산모입니다. 개인적 사유 또는 경제적, 정치적 이유로 자국을 떠나 한국으로 망명한 난 민, 불법 체류자, 외국인 노동자 등이 대부분인 외국인 부부들에게는 하느님 의 축복으로 아이가 생겨도 병원에 갈 돈이 없어 맘 놓고 아이를 낳기 힘든 실정입니다. 이에 여의도성모병원 사회사업팀은 외국인산모들의 산전 진료 와 분만시 의료비 지원을 통해 외국인 부부의 출산을 돕고 있습니다. 처음 이런 사연으로 지원을 받는 외국인 산모를 보고 마음으론 이해는 되 는데 머리로는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상황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분만진통 으로 힘든 건 이해가 되지만 온 병실에 다 들리도록 소리를 지르는 산모, 주 사 또는 내진 등의 행위를 할 때마다 의료진의 머리를 잡거나 때리려고 하는 산모, 산모만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가족 모두가 와서 산모 식사뿐 만 아니라 가족 식사까지 요구하는 보호자들도 있습니다. 또 다인실을 이용 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양식에 따라 면회객이 우르르 몰려와 아픈 산모를 위 해 노래를 불러대 다른 산모들의 항의를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려운 사람이니깐 이해하고 도와야 한다.’라는 마음보다는 ‘도움 받는 처지 면서 정말 너무하네!’라는 분노감이 앞섰습니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배울 노력이라도 해야지 무조건 모국어로만 대화 하고, 못 알아들어서 답답해하고…… 그럴 거면 왜 여기 오는 거야?’ 이런 분 노는 외국인 산모를 응대할 때마다 더 커졌습니다. 한 개를 주면 두 개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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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당당히 요구하는 외국인 산모가 보기 싫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물며 외국 인 산모 한 명 때문에 한국인 산모 여러 명에게 항의를 들었기에 그때마다 사 회사업팀에 연락하여 하소연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문화와 생활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여야 하 고, 병원이 그들에게 무조건 주는 입장도 아니라 오히려 받는 입장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사회사업팀은 대답하였습니다. 세상에나! 우 리가 도대체 그들에게 뭘 받는다는 건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 지만 이런 제 생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틀린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 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필리핀 산모의 제왕절개술 후 드레싱을 보조하는데 산모가 겸연쩍어하면서 말을 꺼냈습니다. 말의 요지는 “진통으로 힘들어했을 때 소란 피워서 정말 미안했다. 그러나 가장 미안한 것은 한국말을 못해서 의 료진을 힘들게 한 게 가장 미안하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순간 드레싱을 하던 전공의와 저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산모는 원래 자연분만 을 시도하였고, 자궁문이 다 열렸지만 아이가 내려오질 않았을 뿐더러 태아 심음이 떨어져 태아상태가 위험해졌기에 응급 제왕절개술을 한 상황이었습 니다. 자궁문이 다 열린 후 진통으로 힘들어하던 산모에게 아이가 잘 안 내려 온다, 힘 좀 잘 주라고 다그치던 저의 모습, 지쳐서 울고 있는 산모에게 심리 적 지지보단 응급상황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술준비에 급급했던 저의 모습이 문득 생각이 났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은 가장 낮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고 하였는데 어쩌면 저는 그동안 외국인 산모를 그릇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외면했던 것이 바로 예수님을 외면했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근무 시작 시 마다 치유자로서의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체현하여 질병으로 고통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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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보살피자고 다짐하면서도 정작 분만진통으로 고통받는 외국인산모 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입장을 바꾸어 ‘내가 저 외국인 산모였다면 어땠을까?’란 생각도


하였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먼 타국으로 가서 힘들게 하루하루를 사는 와중에 임신을 해서 몸도 힘들고, 경제활동도 못해서 가족에게 더 짐이 되는 미안한 마음도 큰데, 가까스로 지원을 받아 아기를 낳으러 왔더니 의료진과 다른 산모들에게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면 너무 나 서럽겠구나……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도 당장 밖에 나갈 교통비조차 없기 때문에 집에만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더 한국어를 못해서 아주 간단한 내 뜻조차도 정확히 주장할 수 없다면 더 절망적일 것입니다. 제가 외국인 산 모였다면 그런 시선들이 싫어 병원조차도 못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엄마’이기 때문에 뱃속에 아기를 지키기 위하여 주변의 그릇된 시선과 애로 사항을 견뎌내면서 타국에서 출산을 하려는 용기를 오히려 제가 배워야 한다 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장 낮은 자를 섬겼던 갈릴리의 예수님처럼 저도 외국인 산모들을 통해 진정한 섬김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부정적인 곁눈질보단 따뜻한 미소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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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짧은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곳, 영아일시보호소 의료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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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선 (서울성모병원 재활의학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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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일시보호소는 기아, 미아, 미혼모 및 결손가정 아이들이 짧게는 3개월 에서 길게는 1년간 잠시 머무르게 되는, 말 그대로 일시보호소입니다. 이 기 간 동안 입양이 되거나 더러는 친부모님의 곁으로 가기도 하며 일정기간 이 후에는 보육시설로 가게 됩니다. 저는 재활의학과에서 신체가 불편한 아기들이 정상적인 발달을 할 수 있도 록 도와주는 소아물리치료사입니다. 5년 전 본원 사랑실천봉사단을 통해 영 아일시보호소에서 아기들 수유하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봉사활동을 갔다가 개월 수에 비해 현저히 발달이 느리거나 장애가 예측되는 아기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병원에서 치료 시 보게 되는 아기들이지만 그곳에서 만난 아기들에게 느껴지는 뭔지 모를 힘에 이끌려 소장님과의 면담을 통해 치료봉 사를 제안 드리게 되었고 그렇게 정기적인 방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치료봉사 중 알게 된 미혼모 그리고 ○○의 아픈 사연 ○○을 만난 건 작년 이맘때쯤이었습니다. 7개월이라는 월령에 비해 왜소 한 몸통과 짧은 팔다리, 유난히 커 보이는 머리둘레는 한눈에 보기에도 ‘연골 무형성증’이란 선천성기형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였습니다. 인지발달에 맞춰 가지 못하는 신체능력으로 보통 짜증을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은 유난히 크고 까만 눈동자로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반가운양 호기심어린 미 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치료봉사를 마치고 보호소를 나가기 전 ○○이 양팔을 모아 고개를 들 수 있도록 타월을 이용해 임시보조기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전히 고개를 높 이 들지는 못했지만 좀 더 수월하게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고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바라보고 있었는데 소장님이 ‘엄마가 보면 좋아 하겠네’라며 웃으시며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의 아기들은 대부분 유기되어 부모가 누구인지 정확한 생년월일 및 태 어날 때 의료기록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은 어떤 사정인지 엄마 에 의해 이곳에 맡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기간 중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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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되어 새로운 부모님을 찾게 되면 다행인데 ○○처럼 장애를 가진 아기 들은 입양될 가능성이 더 낮아 다른 시설로 가거나 해외로 입양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을 두고 갈 수밖에 없는 엄마를 생각하니 잠시 발이 떨 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3주가 지나 다시 보호소를 찾았고 집에서 타월에 바느질과 단추를 이용해 만든 팔 지지대를 ○○의 양 어깨 밑에 넣어봤는데 다행이도 몸에 맞 아 좀 더 고개를 바닥에서 들어 올려 주변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역시 그 날도 ○○은 저의 작은 선물에 대한 답례(?)라도 하듯 방긋방긋 웃어 주었습 니다. 연골무형성증 아기들은 연골이 없어 팔다리에 지지점을 자발적으로 만 들기 어렵고 이로 인해 몸통 주변근육이 제대로 발달되지 못해 신체발달이 느려질 뿐 아니라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신체기능을 배우게 됩니다. 저는 팔 과 다리를 이용해 본인의 머리를 가눌 수 있도록 치료를 했고 ○○을 돌보시 는 선생님에게도 방법을 알려드리고 혹시 엄마가 오시면 보실 수 있도록 치 료 시 ○○이 보였던 반응을 핸드폰영상과 함께 운동방법을 적은 메모도 남 겨 놓았습니다. 이후 다시 방문하였을 때 혹시 엄마가 ○○의 모습을 보셨을까 기대하며 가장 먼저 선생님께 물어봤지만 돌아온 건 오시지 않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하지만 방문 시마다 알려드렸던 치료운동을 열심히 ○○에게 적용해 주신 돌 봄이 선생님들 덕에 ○○은 이전에 비해 적은 도움으로도 어느 정도 고개를 들어 올렸고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뒤집기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올바른 신체의 지지점을 통해 몸통을 들거나 회전할 수 있도록 치료하고 선 생님들께 방법을 교육하고 혹시라도 엄마가 보시게 될까 하는 마음에 영상과 메모를 계속해서 남겨 놓았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다시 정기봉사를 가기 3일 전 여느 때처럼 보호소에 방문을 미리 알리기 위해 전화를 드렸는데 전화를 받은 선생님은 수화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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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치료선생님! ○○이 혼자 머리를 들어 뒤집기를 했어요, 그리고 엄마도 보시고 기뻐했고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남은 3 일을 어린 시절 소풍 기다리듯 보내고 드디어 다시 보호소를 찾았습니다. ○


○은 고개를 들어 저를 보며 여전히 웃어 보였고 주변에서 잘했다고 박수를 치는 돌봄이 선생님과 자원봉사자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몸을 돌려 뒤 집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기쁜 소식은 ○○이 아직 시간이 더 있어야겠지만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혼모였던 엄마가 심신이 약해진 후 방임되다시피 한 것이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였는데 최근 ○○의 모습을 본 엄마가 아기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순간 시간이 지난 어 느 날 차근차근 ○○과의 삶을 위해 노력해 온 엄마가 아기와 함께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벅찬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 들어 올린 것은 희망이었습니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의 일상이지만 이곳 영아일시 보호소에서는 만남도 헤어짐도 가슴 아픈 일인 것 같습니다. ○○을 포함하 여 이곳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아기들이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주 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기를 희망합니다. ○○이 들어 올린 것은 어쩌면 고개만이 아닌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 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 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언)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과 엄 마에게 주님이 늘 함께 하심을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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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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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지 (성바오로병원 내과중환자실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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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생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공존하는 공간인 중환자실. 중환자실 12년 차 간호사로서 수많은 환자, 보호자들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지만 잊혀지지 않는 환자가 있다. 폐질환을 앓고 있던 환자를 만나게 된 건 여느 다른 중환자와 다르지 않았 다. 유난히 마른 체구에 자발 호흡이 힘들어 기관 삽관을 하고 인공호흡기 치 료를 유지한 상태. 처음 겪어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기관 삽관 튜브를 제거 해보고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애처롭다.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켜주기 위해 하고, 진정제를 투여하고 환자의 안전을 위해 손목 보호대를 적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진정제가 투여됨에도 불구하고 몸부림을 치는 환자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불편한 것은 없는지, 조금만 참고 치료를 받아 폐 상태가 안정되면 기관 삽관 튜브를 제거할 수 있다고 눈을 맞추고 반복적으로 말씀드리는 것 밖에는 없었다.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폐는 점점 회복이 어려 워졌고 기관 삽관 유지일이 점차 길어 졌다. 결국 환자는 기관 절개술을 시행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관에 삽입된 튜브와 인공호흡기 등 중환 자실 환경에 익숙해지셨는지 손목 보호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의료 장비를 제거하지 않고 치료에 협조적이었고 간호사들을 바라보며 웃어주시 는 날들이 점차 생기기 시작했다. “짝짝짝” 이 소리는 기관 절개술을 한 이후 환자분이 터득한 간호사를 부 르는 박수 소리이다. 기관 절개술을 한 상태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환자 와 보호자가 고심 끝에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숨이 차거나, 가래를 뽑고 싶 을 때, 손뼉을 치며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도 기발한 아이디어라며 웃으며 환 자분이 원하는 것을 해드렸다. 생각 외로 환자의 중환자실 재원 기간이 길어 지고 있었고, 출근할 때면 무의식적으로 환자분의 침상 쪽을 바라보며 눈인 사를 하는 것이 간호사들의 일상이 되었다. 환자분의 상태는 어는 정도 안정이 되었지만 결국 인공호흡기 도움 없이는 호흡이 어려워 이동형 인공호흡기를 유지한 채 일반병실로 가셨다. 비록 인 공호흡기를 유지했지만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기에 환자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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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도 의료진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웃으며 병실로 가시게 되었고 중환자실 간호사들도 다시는 중환자실에서 뵙지 않기를 바란다며 환한 웃음으로 화답 했다. 그 이후, 생애 6개월이라는 시간들을 호흡곤란으로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 갔고 마지막 시간들은 중환자실에서 보내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환자분의 “짝짝짝” 손뼉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호흡곤란으로 인해 모든 것 을 놓아버린 듯, 팔다리만 겨우 움직이곤 했다. 유달리 효심이 깊었던 아들, 딸의 기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점점 더 삶의 의지가 없는 듯 인공호흡기가 불어넣어 주는 호흡에만 의지하고 있 었다. 가족들의 정성과 기도가 통했을까. 환자는 꽤 오랜 시간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우리와 함께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환자와 동고동 락 했던 시간 동안, 중환자실 간호사들도 환자를 위해 정성들여 병상 Diary 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환자에게 힘이 되길 바라는 정성스러운 글들을 적으 며 회복되기를 기도했다. 환자분이 노환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정확하게 읽지 못하셨기에 잘 그리지 못하는 솜씨로 그림을 그려가며 우리의 마음을 표현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아주 오래간만에 환자의 담당 간호사가 되었다. 밤 근무라 조용히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고, 환자분도 토막잠을 자다 깨며 의료 진들의 모습을 눈으로 바라보는 고즈넉한 밤이었다. 아침이 되어 따뜻하게 데워진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 발을 닦아드리고 기관 절개술 부위를 정성들 여 소독해드렸다. 보통 아침 시간은 회진 준비 및 업무 인수인계 준비 등으로 인해 정신없이 바쁘기에 일반적으로 세안만 해드리기에도 벅찰 정도로 마음 에 여유가 없다. 하지만 그날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사소한 나의 병원 생활에 대해 이야기해드렸다. 유달리 환자분의 얼굴이 건조한 것 같아 로션을 꺼내 꼼꼼히 발라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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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환자분이 힘을 모아 “고마워”라고 나를 바라보 며 오물오물 이야기한다. 그런 환자의 마음을 나는 금세 알아차렸다. “에이, 얼굴, 손, 발 닦아 드린 거밖에 없는데…….”라고 말씀드렸지만, 나에게 행복


감이 밀려왔다. 바로 환자가 나에게 준 행복이라는 선물이다. 환자의 손뼉 소 리 이후 고개 젓는 모습 외에 다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환자분이 나 에게 건넨 “고마워”라는 표현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그날, 나는 여태 느껴보 지 못한 가슴 벅찬 감사함과 행복감을 느끼며 퇴근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평안히 주님의 곁으로 가셨다. 가래를 뽑아 주면 숨쉬기 편안해 하던 환자의 모습, “짝짝짝” 손뼉을 치며 우리를 부르던 모습, “고마워”라는 표현해주던 입모양, 긴 입원 기간 동안 단 하루도 면회를 거르지 않던 가족 들, 항상 단정한 모습으로 할아버지의 손발을 마사지하던 아들, 의료진에게 도 항상 정중하게 인사하는 가족의 모습이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다 보니 바쁜 업무에 치여 수동적으로 간호행위를 수 행할 때가 많았고, 환자와 보호자들의 많은 사연들을 일일이 들어드리지 못 할 때가 많다. “고마워”라는 한마디에 감동하고 행복했듯이, 나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눈빛이 환자와 보호자에게 희망과 감동이 되길 바라며 기도한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은 늘 우리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고,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역사 속으로 사라질 성바오로병원과 곧 개원할 은평성모병원의 모든 환자들의 마음에 치유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깃들기를, 정신 적, 육체적 치유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아직은 비록 미약한 가톨릭인이지 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환우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간호사가 될 수 있기를 다 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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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지금은 녹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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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지희 (여의도성모병원 외래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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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추위가 막 시작된 11월, 갑작스럽게 춥고 쌀쌀해진 날씨 때문인지 외래 접수에는 예약환자도 초진환자도 모두 진료대기가 길어져 한참 정신없 고 복잡한 오후였다. 진료 지연으로 환자분들에게 안내를 하던 내게 낯익은 얼굴의 어르신 한 분이 진료카드를 내민다. “네…… 안녕하세요~ 에고, 예약시간보다 40분이나 빨리 오셨네요. 진료 가 지연되고 있어서 예약시간보다 빨리 보시기는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대 기 부탁드립니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 듯 보이는 아버님은 쭈뼛쭈뼛 내 옆에 서 계셨지만 나는 진료를 마치고 나온 다른 환자분들을 안내하고 또 전화를 받으며 분주 했고, 잠시 머물러 계셨던 아버님은 복도 대기 의자에 앉아 진료 순서를 기다 리셨다. “○○○ 님, 아버님~ 안쪽 의자에서 대기 부탁드립니다. 이제 다음번에 들어가실 순서에요” 하며 어르신을 불렀을 때 환자분은 내게 핸드폰을 스윽 내밀었다.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나에게 주시는 어르신의 행동에 좀 당황스러웠지 만, 종종 물어보시는 예약문자에 대한 문의겠거니 생각하며 “네~ 예약문자가 안 갔나요? 카○○톡 말고 문자로 받으시는 것 해드려요?” 하고 물어보는 내 게 어르신은 “어? 뭐라고? 내가 귀가 잘 안 들려…….” 하시며 오히려 내게 질문이 아닌 대답을 들으시려는 듯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신다. 순간 이건 무슨 상황이가 싶기도 하고, 또 한참 바쁜 업무 중에 귀도 잘 안 들리시는 어르신과 오늘은 무슨 실랑이를 버리게 되려나 하는 마음에 아무 런 말씀도 시작하지 않으신 어르신이 그냥 버겁게 느껴졌다. 어르신의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던 순간 마침 전화가 왔다. 나는 얼른 핸드 폰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모르는 척 내 일을 시작했다. 다시 핸드폰을 주시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귀가 어두우신 어른신의 통화내용은 들 으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변 모든 사람과 내게도 들려왔다. “어…… 병원에 왔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니까…… 내가 여기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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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테 물어보려던 참이었어…… 걱정하지 말어…… 그래, 그래…….” ‘뭘 물어보신다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있던 내게 통화를 마친 어르신이 다가왔다. “이거…… 내 핸드폰으로 녹음을 좀 하고 싶은데, 이거 녹음기 트는 것 좀 해줘요…….” “네? 아버님 핸드폰 녹음이요? 아니…… 왜요? 뭘 녹음하시는데요?” “아니, 우리 딸이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손주 녀석이 감기가 걸렸는데 글 쎄 딸아이가 애한테 감기가 옮았나봐…… 독감인지…… 며칠을 앓더라 고……. 그런데 오늘 내가 진료 보러 오는데 한사코 따라 온다잖어…… 지 몸 도 성치 않은데, 내가 귀가 잘 안 들리니까 교수님이 뭐라 하시는지 잘 못 듣 는다고. 무슨 내가 지 앤가…… 참내, 딸아이가 자꾸만 따라와야 한다기에 내 가 걱정 말라고, 교수님 얘기도 잘 듣고 가고 또 그렇게 걱정되면 내가 교수 님 얘기하는 거 녹음해가겠다고 했어…… 근데 녹음은 해도 되는 거지?” 기계치인 내게는 좀 어려운 숙제 같은 녹음기능을, 이리저리 한참을 뒤져 찾아냈다. 그리고 진료실에 계신 교수님께 간단히 상황을 말씀드리고 녹음을 원하신다고 전달해 드렸다. 그렇게 아버님이 진료실에 들어가시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같이 왔던 보호 자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료 후 오늘 하셔야 하는 일도, 다음 검사에 대한 안내도 그 따님이 다 듣고 아버지에게 설명을 하셨던 것 같다. 진료실에서 나 온 어르신의 녹음기는 꺼져 있었다. “녹음은 잘하셨어요?” “네…… 아이고 고마워요~ 선생님이 말씀을 딱 해줘서 그런가…… 글세, 허허…… 교수님께서 여기 녹음기에 딱 대고 다 얘기를 해주시는 거야…… 정말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네.” 진료 후 설명은 말과 함께 따로 큰 글씨로 순서를 적어 설명해 드렸고 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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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여러 번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며 외래 진료를 마치시고 귀가하셨다. 겨울이 한걸음 더 깊숙이 다가온 12월, 귀가 어두우셨던 아버님은 다음 진


료일에 보호자, 따님과 같이 진료를 오셨다. 주변 사람의 말소리를 잘 못 들 으셔서 늘 신경이 쓰이고, 안전에도 문제가 있을 것 같아 늘 걱정이라는 말과 함께 지난달 녹음에 대한 감사인사를 하며 덕분에 너무 안심이 되었다는 말 씀을 하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 “다 하느님 믿으시는 분들이라서 그런가 봐요…….” 생각지도 못한 보호자분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깊이 자리를 잡는다. 어르 신의 무언의 신호를 바쁘다는 핑계로 조금은 미뤄두었던 나 자신이 참 부끄 러웠고, 또 내가 드린 것보다 정말로 더 큰 축복의 말씀으로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따뜻한 인사말이 너무 감사했다. 내가 있는 이곳이 병원이고 또 작은 선 교지이며, 바로 이곳에 많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과 직원들, 그리고 나와 함 께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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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나의 작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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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다미 (여의도성모병원 7층 서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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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의도성모병원 호흡기내과에 근무하고 있는 1년차 간호사입니다. 저희 부서는 내과 중의 내과라고 불리는 호흡기내과인 만큼 중증도도 높고 응급상황도 많으며 중환자도 많이 있습니다. 처음 부서를 배치받았을 때 주변에서 응급상황이 많이 발생할 것이다, 많 이 힘들 것이다 등 다양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근무해보니 응급 상황에 놓인 환자는 선생님들의 빠른 대처로 중환자실로 가서 집중치료를 받 게 되고, 저에게 더 힘든 상황은 DNR(Do Not Resuscitate: 심폐소생술 거 부)을 받은 환자를 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들은 대부분 의식도 없고 언제 사망할지 모르는, 저에게는 시한폭탄과 같은 환자들이었습니다. 입사 후 교육기간에는 환자들이 임종을 맞이하면 묵 념의 시간을 가지거나 조용히 속으로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독립 후 바쁜 업무 속에서 임종환자가 생기면 당장의 내 업무가 급해 기도를 하거 나 보호자와 애도의 시간을 가질 여유도 없고, 업무가 늘어나는 것에 지쳐 포 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환자분을 간호하며 저에게는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환자 는 산소 공급량을 최대치로 하고, 수시로 가래를 제거해도 산소포화도가 유 지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곧 임종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보호자들도 마음 의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제공 되는 기관지 확장제 패치를 붙이자 보호자는 “이것도 마지막 패치가 되겠네. 그동안 애썼어요 선생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실상 보호자도 24시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을 한 것입니다. 저는 호스피스와 관련된 교육에서 배웠던 기억을 되살려 보호자분에게 환 자분이 다 듣고 계신다고 설명해 드리고 마지막까지 편안하게 해드리도록 최 선을 다하자고 말씀드리며 보호자의 마음을 위로해 드렸습니다. 저 또한 오 래 지켜보았던 환자여서 그런지 마음이 더 끌리고 한 번이라도 더 가서 환자 상태를 살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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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다음날부터 환자의 상태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 습니다. 끝없이 떨어지던 산소포화도는 다시 정상수치를 되찾았고, 더 이상 산소를 공급하지 않아도 원래처럼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보호자 와 환자의 집에 딱 한 번만 가보고 싶다는 소원대로 이분들은 퇴원을 할 수 있었고, 저는 이 환자를 간호하며 ‘예견된 마지막은 없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나 스스로가 마지막 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저의 업무를 한 번 더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곧 사망할 환자라고 포기하거나,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환자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든 그 상황에 맞게 최선의 간호를 제공해야 하며 그것이 ‘환자우선의 전인치료’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입사할 때 배운 CMC 핵심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임종을 앞둔 환자일지 라도 최선을 다해 호흡을 조금이나마 원활하게 도와주고, 시트와 옷이 젖었 으면 즉시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는 등 사소한 일일지라도 최선을 다하고 저 의 마음을 다해 간호하였습니다. 환자 및 보호자들이 상태가 좋아져서 퇴원 하면서 “선생님 덕분에 좋아져서 퇴원합니다. 감사해요.” 혹은 임종을 맞이 한 보호자분이 “선생님이 열심히 해주신 덕분에 마지막까지 마음이 편안하네 요.”라며 감사의 말씀을 해주셨고 제 마음은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얼마 전 퇴근길에 5층 성당에 들러 저의 마음에 남아있는 돌아가신 환자들 과 또 병동에 있는 고통받는 환자와 보호자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 져보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환자를 접하더라도 전처럼 힘들게 느껴지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간호를 하자”라는 생 각을 하게 됩니다. CMC의 핵심가치인 생명존중과 의료선교, 환자우선의 전인치료, 윤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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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한 창의적인 연구, 성숙하고 역량있는 전문인력 양성, 상호신뢰와 윤리 경영 중 신규 간호사인 제가 항상 마음속에 품고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가치는 ‘환자우선의 전인치료’입니다. 저는 오늘도 업무에 능숙해 지도록 노


력하고 있으며, 내실 있는 CMC인으로서 저의 간호업무 속에서 핵심가치들 을 잘 실천해 나가는 간호사가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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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환자 우선의 전인치료를 몸소 실천하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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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지 (성바오로병원 내과중환자실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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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작년 2월에 입사하여 곧 1년을 바라보는 내과중환자실의 신규 간호사입니 다. 저의 첫 부서인 내과중환자실이란 곳은 하루에도 몇 번씩 환자들의 생사가 넘나 드는 곳입니다. 무의식인 환자들,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숨을 쉬고 있는 환자들 등 중증의 환자들을 간호한다는 것은 신규 간호사인 저에게는 심리적으로 부담이 큰 업무입니다. 그렇기에 저의 작은 실수가 환자에게 큰 위험이 될 수도 있다는 선배들 의 조언을 항상 머릿속에 되뇌며 긴장감을 가지고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내과질환은 만성질환이라 증상이 완화되면 퇴원했다가 또 악화가 되는 질 환이기에 재입원을 하는 낯익은 환자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중 저에게 정 말 기억에 남는 환자가 한 분 있습니다. 지금 봐도, 그 환자분과 함께 찍은 사 진을 볼 때면 저절로 저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그날의 작은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여 많은 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근무를 하던 어느 날, 응급실에서 환자가 입실할 거라 는 연락을 받고 침상 준비를 끝마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신규 간호사인 저 는 새로운 환자를 담당하기에 앞서, ‘입실할 환자가 중증도가 높은 환자일 까?’라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아직 저는 업무가 미숙한 간호사이기 때문입 니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전산에서 입실할 환자의 과거력을 먼저 살펴보며, 환자 를 미리 파악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신○○’이라는 환자의 이름을 보게 되었 습니다. 순간 ‘어, 이 환자분? 몇 달 전에 상태가 호전되어 일반병실로 가셨 었는데, 상태가 더 악화되어 다시 입원하게 되었나…….’라는 걱정 반, 반가 움 반으로 환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몇 분 후, 내과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환자분 오셨습니다.”라는 응급실 직원의 목소리와 함께 빠른 발걸음으로 문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신○○ 님! 어떻게 또 다시 오셨어요. 저희 기억나세요?” 하였더니 함박 웃음을 지으시며 “당연하지~ 보고 싶어서 또 다시 온 거야!”라며 장난을 치 며 반가워하시는 환자분의 모습을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습니다. 이 환자 는 신대체요법 치료를 받기 위해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로 치료적 특성상 자리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기계에서 알람이 울려, 기계의 오작동은 물론 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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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투석을 하는 데 문제가 발생되기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환자는 좁은 침 대에서 하루 24시간을 불편하게 침상에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호사들에게 오히려 따뜻한 한 마디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모습에 저는 오히려 에너지를 받아 즐거운 마음으로 환자를 간호할 수 있었습니다. 2시간마다 자세 변경을 위해 환자에게 다가가 ”불편하진 않으세 요?”라고 물어보면 항상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선생님이 더 힘들지~ 난 힘들 지 않아. 아이고, 무거워서 미안해…….“라고 하시며 오히려 간호사들에게 힘을 주셨던 환자분의 미소가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이 납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우연히 신○○ 님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 고 중환자실에서 미역국도 못 드시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못 보내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환자분을 위해 깜짝 생일파티를 준비하면 좋을 것 같아 동료들과 함께 생일파티를 계획했습니다. 짧은 시간에 분주하게 케 이크도 준비하고 고깔모자 등 소소한 물품들을 준비하여 파티를 하려는 순간 을 중환자실 인터폰이, ‘딩동’ 하는 소리에 잠시 멈추고 인터폰으로 달려갔습 니다. “감사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전 신○○님 보호자(아들) 인데요, 아버님 안경을 가지고와서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드라마 같은 순 간이었습니다. 밖으로 나가 보호자분(아들)을 응대하며 환자분이 생일이라 생일파티를 준 비했으니 함께 하시자며 안내 후 보호자를 내과중환자실 안으로 모셨습니다.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 동료들과, 보호자분, 환자 모두가 고깔모자를 쓰고 생 일 축하 노래를 함께 부르며 축하해드렸습니다. “내가 병원에서 생일을 맞아 보긴 처음인데, 정말 기분이 좋아! 감사합니다.”라며 환자분이 말씀하시며 행 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니 정말 뿌듯했고,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내과중환자 실에서 근무를 하며 작은 환자의 사랑 실천이 뜻밖에 누리게 된 감동적인 순 간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게 매우 뜻 깊었습니다. 그저 중환자실에서 생일을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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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 환자분에게 심리적, 육체적으로 중환자실 안에서의 생활에 조금이라도 기쁨을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하게 된 것인데, 많은 것을 일깨워준 소중한 기억이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가톨릭인으로서 가톨릭중앙의료원의 핵심가치 중의 하 나인 ‘환자 우선의 전인치료’에 대해 몸소 느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앞으 로도 핵심가치의 중요성을 마음속 깊이 담아 중환자를 간호하며, 환자의 고 충을 이해하며 배려하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다고 다짐해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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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성바오로에서 받은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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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경 (성바오로병원 중앙공급실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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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바오로병원 20차 차선경이라고 합니다. 2019년 3월, 병원이 은평 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청량리 성바오로병원을 이전하며 이곳에서의 다사다 난했던 추억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바오로병원에서 함께하셨던 선생님들과 동료들, 귀하신 환자분들의 모 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려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서로 부딪치고 얽히 는 가운데 지나온 시간 시간들이 때론 고통스럽기도 했고, 때론 힘겨운 날들 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 다 귀하고 그립고 소중한 추억의 시간 들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소중하고 귀한 시간들을 너무도 값없이 보내버린 생각에 마음이 괜스레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새 은평성모병원으로 가는 길에는 저의 모두 아름다운 마음으로 후회하지 않을 섬김으로 환자를 대하고 일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성바오로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축복이고 감사인지, 그리고 수 녀님들과 동료들이 베풀어주신 따뜻함을 나누고자 합니다. 2016년 6월 9일 남편이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지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의정부성모병원 중 환자실에 입원하게 된 남편의 모습은 말 그대로 식물인간이었습니다. ‘뇌출 혈 부위가 호흡중추신경 쪽’이라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정신 을 잃을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출혈 부위’가 흡수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 며, 고비를 넘기더라도 예후가 좋지 않다는 말씀에 세상이 다 무너지는 듯했 습니다. 당시 저는 임신 중이었고, 출산을 100여 일 정도 앞두고 있어서 아 기와 저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후로 저에게는 출퇴근, 그리고 남편의 간병까지 강행군의 삶이 시작되 었습니다. 임신으로 몸이 무거운 가운데 직장생활, 간병으로 인해 정신과 몸 은 스트레스로 지칠 대로 지쳐갔고 피로가 산적해 가기만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유증으로 급기야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2016년 7월 12일 근무 중 갑자기 양수가 흘러나왔습니다. 성바오로병원에는 신생아 중환자실이 없어 저는 급히 의정부성모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양수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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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 제왕절개를 통해 아이를 꺼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위험하다고 하여 그날 밤 수술을 통해 7개월밖에 안 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7kg으로 태어난 아기는 엄마의 얼굴도 못 본 채 인큐베이터에 들어갔습니다. 아직 장 기가 다 성장하지 못한 아기는 몹시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뇌출혈 3기에 자가호흡을 못하여 산소호흡기를 달고, 우유를 빨지 못하여 주삿바늘로 영양분과 약을 섭취하고, 피가 모자라 몇 번의 수혈을 받기도 하 였습니다. 하물며 면회 때 저의 눈앞에서 제 아기가 창백해지며 늘어져 응급 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가 불쌍하고 안쓰러워 마음이 슬픔으로 무너 져 내리기도 했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시는지 주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남들은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이 저에게 성난 파도처럼 다가왔습니 다. 그 고통과 시련의 무게는 지금껏 제가 살면서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더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더 불평과 원망이 컸습니다. ‘주님! 너무하십니다. 정말 너무 하십니다.’ 하지만 저의 원망과 불평을 받 아주시는 주님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끊임없이 떼를 쓰고 보채는 제 원망을 잠잠히 받아 주시는 주님을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아픔도 즐거움도 다 지나가리라!’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안정과 평 안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내 깊은 곳으로부터 복받쳐 오르는 회 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모두가 나로 시작된 잘못이며, 섬기고 사랑하며 살지 못한 나의 죄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없는 눈물과 죄스러움이 나를 무릎 끓게 하였습니다. 눈물의 회개와 기도 이후, 남편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신마비로 인 해 말도 못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던 남편이 기적처럼 움직이기 시작하 였습니다. 그리고 술과 담배로 찌들어 있던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딸 ○○이가 하루하루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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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호흡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퇴원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병원에 가면 기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두가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제 가족의 소식을 들은 병원 식구들이 전화나 문자를 통해 기도와 위로, 응 원의 메시지 등을 보내주시며 저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성바오로병원 식구들 의 격려와 기도로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재활치료를 시작하며 점점 좋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물질적인 어려움이 찾아오기도 하였습니다. 남편이 퇴원을 할 즈음 치료비가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남편이 뇌수술을 하지 않아 중증혜택도 해당 이 안 되고 실비보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바오로병원에 근무하고 있었기 에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어느 날 외래팀 선생님이 찾아오셔서 외래간호팀에서 많은 선생님들이 기 도와 자율적인 모금을 해주셨다며 봉투를 주셨습니다. 너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 무척 당황스러웠고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그 동안 많이 부족한 저를 지금까지 이끌어주시고 챙겨주셨는데 받기만 하는 것 같아 죄송스러웠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으며 좋은 사람들이 저의 옆에 있었던 사 실을 모르고 앞만 보고 나만 생각하며 근무했던 지난날들의 저의 모습을 생각하니 한없이 부끄럽고 창피했으며 미안하고 감사함에 마음에 무거워 졌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성바오로병원에서의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보니 힘들었던 지난날들을 같이 기도해주시고 걱정해주시며 제가 지금까지 일할 수 있게 도 와주시고 격려해주신 수녀님과 팀장님들 그리고 여러 선생님들이 한 분 한 분 생각이 나고, 보고 싶어 눈물이 났습니다. 늦었지만 부족한 글로 이제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다시 한 번 감사인 사를 드립니다. 제가 받은 이 사랑을 가슴속에 소중히 담아 은평성모병원에 가서도 잊지 않고 많은 분들과 나누겠습니다.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더욱 작은 것에 감사 하며, 평생 감사하는 마음으로 삶을 살겠습니다. 이제는 행복해서 감사한 것 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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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며 저의 예쁜 늦둥이 여러분께 받은 사랑으로 항상 밝게 키우며 웃으면서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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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아름다운 마무리-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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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진 (성바오로병원 외과중환자실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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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일이 되면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멋지게 남을 하나의 역사 가 사라지게 된다. 가톨릭대학교 성바오로병원의 유구한 역사는 사라지지만 그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2018년 외과중환자실은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사 업계획을 갖고 그 어느 해보다도 알찬 한해를 보낸 것 같다. 부제가 ‘동행’임 은, 늘 함께했고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할 지역사회의 환자 및 보호자 그리고 우리의 팀원들이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될 큰 프로젝트라고 감히 생각해 서 붙인 거창한 제목이다. 그 어느 해보다도 아쉽고 모든 것이 소중한 한해였던 것 같다. 더욱 감사하 며 살았고 우리의 손때가 묻은 작은 것들이 특별하게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그 감사함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 부서는 따뜻한 봄과 햇살 속에서 감사나무 를 심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초라한 가지만 앙상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열매를 맺고 가을이 되어서는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지금도 외과중환자실 입구 에 크게 자란 감사나무를 보며 모든 이들의 따뜻함을 느끼고 잠시 행복해하 는 우리의 모습을 보곤 한다.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일상을 공유하기로 하였다. 우리의 출근 모습 부터 업무에 임하는 모습, 희로애락을 모두 담은 작은 동영상을 만들었다. 동 영상 발표회(?)는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고 싶다는 작은 욕심에 가까운 야외에서 하기로 하였다. 출근길 전철역, 잠시 들리는 커피숍, 병원 입구, 계 단, 탈의실, 우리의 업무 공간,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하나의 화면 으로 생생하게 보이며 여기저기서 크게 웃는 소리가 커지며 우리는 또 하나 의 추억을 완성하였다. 성바오로병원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사업에 환자 및 보호자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 우리의 고객이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므로 그들을 위한 무 언가를 하고 싶었다. 우리는 늘 그렇게 생각한다. 이별이 아니라고, 또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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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라고……. 환자나 보호자에게 이별 선물이 아닌 감사함의 선물을 하고 싶었다. 작은 보답이지만 보호자에게 중환자실의 무서운 담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은 먼저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중환자실 면회시간을 이용하여 걱정과 눈물로 가득 찬 보호자들을 편안하게 맞이하기로 하였다. 비록 12첩 반상은 아니지만 각종 음료수와 스 낵을 준비하고 간단한 혈압측정 및 건강상담을 해드리기로 하였다. 매주 금요일을 지정하여 보호자들에게 작은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하였던 일은 오히려 우리에게 힐링이 되고 말았다. 보호자의 감사와 웃음이 바로 우 리를 웃게 만든 것이다. 우리는 그 웃음을 잊지 않고 은평성모병원에서도 최 선을 다해 간호를 하리라 다짐한다. 환자들에게는 2017년부터 꾸준히 해온 감사노트를 전하고 있다. 작은 노 트의 큰 힘을 알기에 모두들 아름답게 써주고 있음에 감사한다. 그 큰 힘은 크리스마스에 우리에게 잊지 못할 성탄선물로 찾아왔다. 성바오로병원 개원 최초의 신장이식을 2018년에 성공적으로 시행하였는데 환자분이 성탄을 맞 이하여 케이크와 작은 선물을 직접 갖고 중환자실을 방문하신 것이다. 모든 간호사가 기쁨과 환호로 환자를 맞이하고 함께 성탄을 축하하며 잊지 못할 시간을 함께하였다. 이제 성바오로병원 외과중환자실은 마지막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다. 외과 중환자실은 1년 동안 우리의 삶을 계속 카메라에 담고 있다. 수시로 셔터를 누르며 하나의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또 잊지 않기 위해, 가슴에 남 기기 위해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소중한 자료를 앨범으로 만들어 팀원들 에게 선물하고자 한다. 구성이, 포즈가, 각도가 엉망이라도 우리에게는 최고 의 선물이고 훌륭한 사진작가들 이었다. 업무로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지만 행복했고 가슴이 뜨겁게 살았던 우리의 성바오 로병원 외과중환자실의 마무리는 이렇게 아름답게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러나 이 건 끝이 아닌 시작을 위한 일임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열정과 삶이 고스란히 은평성모병원에 뿌리내리며 환자와 팀원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그 마음을 갖고 동행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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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공감과 진심이 가진 놀라운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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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우 (서울성모병원 70U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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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대상자는 타병원에서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이 의심되어, 고열 및 극 심한 전신무력감으로 입원하게 된 57세 혈액내과 여자 환자분이시다. 입원 당시 원인 파악을 위해 찍었던 CT상에서 결핵이 의심되어 내가 근무하는 70 병동 음압병실에 오시게 됐다. 여러 검사 결과 골수형성이상증후군과 폐색전 및 결핵 확진 진단결과가 나왔다. 항암요법 진행이 시급했지만, 결핵으로 인해 격리 종료 후 항암요법 을 시작하기로 했다. 따라서 이 환자의 치료 목표는 결핵약제의 지속적인 복 용을 통한 전염력 소실과 항암요법을 시행하도록 컨디션을 회복시키는 것이 었다. 결핵약은 2주 동안 꾸준히 복용해야 전염력이 소실되며 6개월 동안 지속 적으로 장기복용해야 약제 내성이 생기지 않아 초기 결핵약제 복용시 꾸준한 약제복용의 중요성에 대해 교육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격리병실 입실 후 극심한 고립감 및 우울감을 호소하여 밥도 잘 먹지 않고, 약제 복용 도 거부한다는 인계를 받았다. 인계를 듣고 음압병실에 들어가서 환자에게 약제 복용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려던 찰나, 갑자기 환자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엉엉 울기 시작 했다. “저 좀 제발 여기서 내보내주세요. 창문도 열리지 않고 이중문으로 닫혀져 있어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이 좁은 공간에서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 건가요? 새장에 갇힌 느낌이에요. 저 정말 미칠 것만 같아요. 저 죽을병에 걸 린 거 다 알아요. 어차피 언젠가는 죽는데 제가 여기서 이렇게 갇혀서 죽어가 야 하는 건가요? 입맛도 없고, 잠도 안 오고, 저 그냥 죽고 싶어요. 죽고 싶은 데 약이 무슨 소용이에요. 안 먹으면 그만이지…….” 격리병동 특성상 보호자 1인이 상주하게 되어 있으나, 보호자가 아무도 없는 것 을 보고 환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손을 잡으며 물었다. “환자분 보호자분은 안 계시나요?” 남편과 별거 중이며 자녀들은 중고등학생으로 미성년자에 조선족이었 던 환자는 상주 보호자가 없었다. 혹시나 모를 자살 위험성으로 환자가 소지한 과도를 수거하고 간호인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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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화면에 자살 위험성이 있으니 자주 간호, 순회할 것을 표시하고 다음 근무 간호사에게도 인계 때마다 간호순회의 중요성에 대해 꼭 강조하여 전달할 것 을 설명했다. 환자의 치료적 불이행이 격리로 인한 극심한 고립감 및 우울감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담당 의사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정신과 협진이 필요하 다고 전달하였고, 정신과 협진 후 항우울제 및 수면제가 추가되었다. 약제 치료도 중요하지만 환자에게 공감과 진심을 담은 정서적 지지가 더 중요할 것이라 생각되어 간호처치 때마다 손을 잡아주고 환자의 얘기를 경청 해주었다. 이에 환자는 “간호사님, 남편이고 자식이고 다 필요 없어요. 내가 전염병에 걸렸다니까 자식들도 주말이면 올 법도 한데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 요.”라고 하며 또 다시 울먹거리며 말했다. “환자분이 약을 2주 동안 꾸준히 드셔야지 전염력이 없어져서 가족분들도 안심하고 더 자주 오실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데 가끔 남편도 밉고, 아이들한테 서운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환자분 마음속으 로는 가족이 가장 보고 싶고, 소중하실 거예요. 항혈전제 약도 정말 꾸준히 드셔야지 더 건강해지셔서 아이들을 계속 보지요.”라고 얘기하니 환자가 눈 물을 흘리면서 “맞아요. 남편은 모르겠지만 내가 죽으면 아이들이 너무 불쌍 해요.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약을 잘 먹어야겠네요. 그리고 여기 있으면 세상 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어서 더 죽고 싶었는데, 간호사님이 제 얘기 들어주고 말동무 되어주셔서 이제 좀 마음에 응어리가 풀리고 살 것만 같아요.”라고 흐 느껴 울었다. 울고 있는 환자를 조용히 안아주고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환자의 안정된 정서를 유지하고자 인계 시마다 영성간호를 적극 권유하도 록 하였다. 맞춤 기도문 낭송 및 Aroma oil을 이용한 손 마사지, 좋은 글귀 읽어주기 등을 통해 환자의 고립감과 우울감을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환자의 정서가 안정되면서 삶에 대한 의지가 조금씩 생기면서 치료적 불이행이 줄어 들었다. 식사도 예전보다 많이 섭취하고 좁은 격리병실 내에서 일어나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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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려는 모습도 보였다. 환자의 치료적 불이행이 없어지고 약제 복용을 꾸준히 지키고 있을 즈음, 골수형성이상증후군으로 인해 면역력이 저하되어 호중구수가 500미만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호중구 수가 500개/L 이하로 저하 시 양압격리를 하지 만 결핵으로 인한 음압격리가 우선으로 백혈구 증강촉진제를 투여하여 호중 구 수치를 올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환자는 blast cell(미분화세포) 이 발견되어 백혈구 증강촉진제를 투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최대 한 호중구수 감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을 차단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고 판단했다. 지속해서 복용하던 약제 중에 호중구 감소에 영향을 미칠 약제가 있는지 찾던 중 결핵약제인 리포덱스정과 고열로 복용했던 아세트아미노펜정이 호 중구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최근 연구 결과가 있었으며, 리포덱스정은 식약 처에서 경고한 이력이 있었다. 위의 사항에 대해 담당 의사에게 직접 보고하 고 해당약제를 투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후 급격히 감소하던 호중구 수 가 더딘 속도로 떨어졌다. 치료적 불이행을 하여 약제복용을 거부하던 환자 가 결핵약을 복용하지 않았던 일수를 뺀 2주 복용을 무사히 채우고 결핵격리 가 해제되었다. 해제되기 며칠 전 환자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병원에 있으면서 내 얘기 에 공감해주면서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느낌을 받은 게 처음인거 같아요.” 이 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환자분 얘기를 듣고 같은 엄마이자, 아내이 자, 여자이자, 아파봤던 사람으로서 너무 공감이 돼서 진심으로 말씀드린 거 예요.”라고 말이다. 공감과 진심의 힘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그때, 누군가가 팔을 뻗어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그 누군가의 추락을 멈추게 해줄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가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다 같다. 우리는 함께 아파함으로써 위로받고 강해진다.’라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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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죽음의 과정을 함께하는 방사선치료 2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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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원 (서울성모병원 방사선종양학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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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4:30 알람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어김없이 알람이 울립니다. 졸린 눈으로 핸드폰 알람을 끕니다. ‘5분만 더 자고 싶다.’ 이내 핸드폰을 두 손으로 공손히 잡고 5분 알람을 맞춘 후 다시 잠이 듭니 다. 마치 시간이 이동한 것처럼 또 알람이 울립니다. ‘일어나는 것이 이렇게 전쟁 같아서야……’ 결국 04:30에 시작한 알람은 05:00까지 이어집니다. 2. 05:00 출근 준비 샤워를 하며 출근 준비를 합니다. 밥을 먹을지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합니 다. 매일 반복되는 고민이지만 답은 하나. 한 달 넘게 똑같이 입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료를 한잔 허겁지겁 입에 털어넣은 다음 대문 밖을 나섭니다. 칠흑같은 어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어둠은 다 다르나 겨울의 어 둠은 특히 더 어둡고 깜깜합니다. 30분간 버스를 타러 걸어가면 잠이 바로 깹니다. 3. 06:00 출근 지하 1층으로 내려오면 소파에서 쪽잠을 주무시는 보호자분들을 봅니다. ‘이 분들의 피곤에 비해 나의 피곤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반성하자.’ 응급실 보호자분들이 잠잘 곳이 없어 지하 소파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보호자분들의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한 번 더 힘을 내 과로 걸어갑니다. 방사선종양학과 간판이 보입니다. ‘21101***’ 사번을 입력하고 전등을 모두 켜는 순간 죽어있던 종양학과의 생기가 살아납니다. 장비를 켜고 치료 를 준비합니다. ’오늘도 저희 방사선종양학과에서 방사선치료를 받으시는 모든 환우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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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해 기도합니다. 무서운 방사선치료를 위해 2~3달 넘게 항상 저희 과를 방문하시는 암환우분들의 정확한 치료를 위해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겠습니 다. 파이팅!!‘ 장비를 준비하고, 제 마음도 치료를 위해 준비합니다. 일어날 때의 피곤함 은 어디로 사라지고 이내 긴장감 있게 치료를 준비합니다. 나의 집중도가 환 자의 치료 결과를 좌우한다. 명심하고 또 명심합니다. 4. 07:00~12:00 오전치료 일반치료, 특수치료로 나눠지는 방사선치료. 일반치료는 5분 만에 치료가 끝나기 때문에 환우들이 오히려 저희에게 장난삼아 농담도 건냅니다. “선생님 이 추운 치료실에서 매일 근무하세요? 감기 안 걸려요?” “하하, 방사선치료 장비가 고장 없이 잘 작동하려면 이정도 온도는 유지해 야 합니다.” 일반치료를 하고 나가는 환우와 이야기하면 마치 친구처럼 동네 이웃주민 처럼 친해지고 웃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유방암환우들은 예방적으로 방사 선치료를 진행하셔서 오히려 활기기 넘치는 경우가 많으셔서 치료하는 직원 을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아 항상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대부분 오전은 일반 환자 위주로 치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종종 병동환 자, 특수치료 환자도 치료하지만 대부분 일반치료를 하기 때문에 오전의 치 료는 계절로 표현하면 봄과 같습니다. 웃음꽃이 피어나고 새로운 희망이 피 어나는 그런 일반 치료입니다. 5. 13:00~24:00 오후치료 오후는 특수치료와 병동치료가 주를 이룹니다. 휠체어를 타고 오는 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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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워 의식이 없는 환우, 통증 때문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환우. 입사 초 이분들이 재발하고 다시 방사선종양학과를 방문하셨을 때 정신적으


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첫 치료 마지막 날 웃으면서 “이제 완치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건강하세요!!”라고 인사드린 환우가 몇 달이 지나고 의식 없이 침대로 치료받으러 내려오시고, 통증 때문에 저희를 원수를 보듯 째려보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분들을 처음에는 무서워하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마음은 너무 아픈데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들어 정신적으로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재작년인가요? 대림특강을 들으면서 ‘죽음의 과정을 함께한다’는 주제로 신부님께서 강의를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특강에서 영상을 하나 보여주셨습니다. 마라토너가 마지막 결승점에서 힘이 다 빠져 걸어가고 기어 가는데 옆에 코치진과 러닝메이트가 함께 결승점 끝까지 옆에서 응원하고 파 이팅해주는 영상이었습니다. 이 영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입사초의 슬럼프를 신부님의 대림특강을 들으 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때 신부님의 특강을 듣고 특수치료, 병동치료를 할 때마다 그 분들의 눈을 마주치며 손을 잡습니다. 의식이 없으셔서 말씀은 드리지 못하지만 항상 기도합니다. ‘제가 환우분의 죽음의 과정에서 가족보다 더 따뜻하게 치료해드리겠습 니다.’ 방사선 치료의 목적은 완치와 통증완화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림특강을 통해 틍증완화를 목적으로 하는 병동치료에서의 정신적인 힘듦을 극복할 수 있었고 이런 마음은 보호자분들에게도 전해지셨는지 치료가 끝나고 나오면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를 받습니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말처럼 통증이 있는 환우들도 방사선치료를 받 으면서 점점 웃음을 찾고 으레 농담도 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며 방사선종양 학팀의 방사선사로 일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신부 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방사선종양학팀 일원이라는 것에 큰 감사를 느낍 니다. 호스피스 병동의 목적은 방사선치료 통증완화 치료 목적과 같습니다. 통증을 줄 이고 남은 시간을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으로 바꾸려는 목적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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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그 죽음 앞에 두려워하며 가족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 면 너무 슬프고 안타까울 것입니다. 그 소중한 시간을 방사선사로서 함께할 수 있음 에 항상 감사합니다. 6. 24:00 퇴근 연장까지 끝난 시간은 벌써 하루가 지났습니다. 내일도 4시에 일어나야 하 지만 일반 치료, 특수치료, 병동치료를 받는 환우들의 웃는 모습을 기억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또 다시 칠흑 같은 어둠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비록 햇빛을 받지 못하는 지 하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 어둠이 환우들의 봄을 위한 또 다른 씨앗이라는 것 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환우들이 육체적으로 아프 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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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가치실천공모전 자선수혜자 수기 당선작

Contents


[대상]

되찾은 우리 가족의 평범한 일상 / 김○경

[우수상]

마지막 입원 / 반○남 나에게도 일어난 기적 / TRAN ○○○ HUYEN

[장려상]

세 번의 특별한 인연 / 김○원 류마티스 내과 김○○ 교수님 / 원○자 나의 육체적, 정신적 삶을 치유하다 / 박○○라 주님의 사랑은 나를 긍정으로 이끌었습니다 / 장○익 생명의 길 / 김○열


대상

되찾은 우리 가족의 평범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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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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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 때 한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는 다리에 왜 이렇게 멍이 많아?” 그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점점 딸의 다리에 눈이 갔 다. 휴대폰 사진을 찾아보니 반바지를 입은 딸의 다리에 멍이 눈에 띄게 늘어 있었다. 얼마 후 남편과 딸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피검사 후 딸의 혈소판 수치가 너무 낮아 위험한 수치라 입원을 했고 수치는 오르지 않았다. 원인을 찾지 못 하자 서울성모병원 정 교수님 이름 앞으로 의뢰서를 써주셨다. 사실 우리 딸 은 태어날 때부터 두 개의 신장이 하나로 뭉쳐져 있었다. 교수님의 첫 진료 때 차분한 어조로 검사를 진행하자 하셨고 염두에 두었던 질병이 있었는데 그것이 적중했다. 병명은 ‘판코니빈혈’. 우리나라에서는 연간 2명 정도 발생 하는 희귀난치성질환이며 최종 치료방법은 조혈모세포이식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서울의 유명한 다른 병원을 찾아 똑같은 검사를 진행했다. 역시나 결과는 같았다. 다시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고 서울 성모병원으로 병원을 택했다. 선택에 있어 정 교수님의 마지막 말이 가장 결 정적이었다. “앞으로 저한테 오시면 됩니다.” 이 말 한마디였다. 그 후로 몇 개월간 교수님은 딸의 상태를 봐주셨고 섣불리 골수검사를 권 하진 않으셨다. 혈액수치가 점점 떨어질 즈음, 교수님께서 이식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고 우리 부부도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마음을 먹었 다. 과연 우리 딸과 일치하는 공여자가 있을지가 가장 걱정이었다. 하지만 교 수님은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고 코디네이터 선생님은 우리 부 부의 쏟아지는 질문에도 끝까지 성의 있게 답변해주셨다. 가톨릭조혈모세포은행 기증 희망자를 통틀어 우리 딸과 일치하는 사람은 7명. 하지만 중요한 것은 최종적인 기증 의사였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무려 3명이나 선뜻 기증해준다고 하셨고, 그분들 중에 선택할 수 있는 행운까지 찾아왔다. ‘하늘의 축복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축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딸의 담당 교수님께서 직접 병원 내 사회사업팀에 의뢰해주 셔서 다행히 후원 단체로부터 치료비 또한 후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입원 날, 딸은 20층 소아병동에 입원했다. 간호사분들은 모두 반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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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맞이해주셨고 치료에 관해 친절하고 정확하게 설명해주셨다. 또한 ‘어린 이학교’라는 공간이 있었는데 학업을 이어가기도 했고 여러 자원봉사자들의 알차고 재미있는 수업들로 늘 따뜻하고 즐거움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아직 병원이 낯선 딸에게 그곳은 긴장도 풀 수 있고 나와 같은 아픔을 함께하는 아 이와 엄마들 모두가 서로를 위해 힘이 되어주었다. 드디어 딸의 이식 날이 다 가와 1인 무균실로 옮기면서 어린이학교는 회복이 되면 다시 찾기로 했다. 이식 당일 오후 공여자분의 조혈모세포가 잘 전달되어 이식을 진행하게 되 었다. 진행하기 전에 간호사분들의 기도가 시작이 되었는데 남편은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 후로 딸은 치료를 잘 받았고 선생님들의 적절 하고 숙련된 치료로 인해 한 달 이상의 병원생활을 큰 어려움 없이 견디고 퇴 원할 수 있었다. 딸이 퇴원하기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간호사분들께 서 매일 환자의 혈액검사를 위해 카테터에서 혈액을 채취해 가시는데 새벽에 는 보호자나 환자들이 깨지 않도록 굉장히 조심스럽게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 고 가신다. 그때 딸이 소변이 너무 급했는지 잠에 깨어 일어났고(소변을 소변 통에 받아야 함) 그 소리에 나도 깨어 일어나려고 했던 찰나 간호사 선생님이 딸에게 “쉿! 엄마 깨니까 선생님이 소변 받아줄게. ○○야 퇴원 축하해. 이제 다시는 20층에 오면 안 돼. 알았지?”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딸과의 대화에 나는 가만히 자는 척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딸은 현재 이식 1년 4개월인 후에도 높은 생착률로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딸은 아직도 가끔 20층 병동 얘기를 하며 궁금해한다. 모두가 한마음이었 던 사람들, 환자를 가족같이 대해주었던 의료진, 관계자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 가족은 평범한 일상을 재회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 도돌이표 같은 일상이 그저 지루하고 특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 가 무사히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감사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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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서울성모병원에서 받은 그 감사함을 딸의 건강한 모습으로 보답 드 리고 싶다. 올해 3월, 딸은 그토록 가고 싶었던 초등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우수상

마지막 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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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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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아이와 검사를 위해 마지막 입원을 하였다. 11층 병실에 올 라가니 아주 많은 생각에 화장실을 가도 눈물이 나고 매점을 가도 눈물이 나 고 가는 곳곳마다 힘들었던 시절 생각이 나서 조금은 힘이 들기도 했다. 2007년 6월 20일 골수이식 수술을 한 후 두어 번의 입원을 제외 하고는 늘 외래치료를 해왔기 때문에 10여 년 만에 입원이었다. 병실에 들어가니 20년의 투병생활이 파노라마처럼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태어나 한 달 만에 심장이 멎은 아이는 화장터를 알아볼 만큼 의학적으로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심장이 멎고 한 달 반 정도의 중환자실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다 첫 번째 기적을 만들었다. 기관 삽관을 제거하고 일시적으로 멎은 줄 알았던 심장은 수혈을 받아야만 정상적으로 뛰었다. 병명을 찾지 못 하여 2달여를 검사만 했다. 그 작은 몸에 바늘을 꽂고 고통스러워하던 아이 의 모습…….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잊은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더욱 또 렷이 기억이 났다. 많은 검사를 한 후 내려진 병명은 순적혈구형성부전증이라는 처음 듣는, 이름도 생소한 병이었기에 나는 손바닥에 병명을 늘 지워지지 않는 볼펜으로 적어 다녔다. 아이는 몸에서 적혈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병으로 주기적으로 수혈로서 적혈구를 보충해주어야 했다. 치료약도 치료방법도 없는 희귀 병…… 난 너무도 절망적이었다. 처음 4년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왜?’라는 단어로 울부짖었다. 그 사 이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희귀질환이라서 병원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적 은 재산도 순식간에 없어지고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남편은 급기야 집을 나 가고 말았다. 두 아이와 남겨진 나는 하루하루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아이에게 수혈을 해줄 돈을 벌기 위해 나는 아이들을 집안에 가둬두고 식 당에 일을 하러 나갔다. 식당에서 점심시간을 끝내고 아이들의 늦은 점심을 챙겨주러 집에 돌아오면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은 냉장고에 있는 케첩,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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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즈 등을 먹고 배가 아프다고 울기도 했다. 속상한 마음에 아이들을 때려주 고 같이 부둥켜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아이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당장 먹 고사는 문제가 시급했기에 하루하루를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


아이가 9살이 되던 해 수혈 부작용으로 인해 간경화가 시작이 되었고 교수 님께서 골수이식 수술을 권하셨다. 하지만 수술 성공률은 0.5%밖에 되지 않 는다고 하셨다. 결정을 하라고 하시는 교수님께 난 두 달 동안은 답변을 드리 지 못하고 고민을 하다 수녀님을 찾아가 의논을 했다. 몸무게가 38kg이 될 정도로 고통 속에 고민을 했지만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간신히 수녀님 의 도움으로 수술을 결정하고 나니 엄청난 수술비에 또 발목이 잡혔다. 처음 엔 감당할 수 없어 수술을 포기했었다. 우리의 사정을 들으신 교수님께서 사회사업팀을 연결해 주셨고 사회사업 팀 선생님의 도움으로 골수은행에 등록을 하고 나니 감사하게도 형제간의 이 식처럼 적합한 골수 공여자를 여러 명 찾을 수 있었다. 사회사업팀 선생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지독한 항암 치료를 견디고 아 이는 0.5%의 성공률이었던 2번째 기적을 만들었다. 물론 이식 부작용으로 아주 오랜 시간, 아니 지금까지 고생을 하는 것도 있 지만 우리는 너무나 큰 고통을 겪었기에 지금의 생활은 너무나 행복하고 즐 겁게 보내고 있다. 중학교에 갔을 무렵 아이의 신장이 140cm 저신장장애라는 진단을 받았 다. 교수님께서 치료를 해도 160cm를 넘는 건 기적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이는 4년여의 치료 기간을 지나면서 160cm라는 3번째 기적을 만들었지 만 치료를 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60cm가 넘으니 성장호르몬 주사가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치료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돼 버렸다. 기초 생활 수급 비를 받고 농사일도 도와주고 받는 일당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었다. 염치없지만 나는 다시 사회사업팀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언제나 격려와 용기로 함께 고민해 주시고 울어주 시던 선생님……. 우린 또 사회사업팀의 도움으로 남은 치료를 할 수 있게 되 었다. 아이에게 꼭 필요했던 성장호르몬 치료를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사업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기초생활 수급자로 살면서 늘 죄인처럼 나 자신도 모르게 자신감도 없어지 고 고개가 숙여지지만 우리의 아픈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시는 선생님들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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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에 나는 아이의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사회사업팀으로 자랑을 하러 갔다. 언제나 우리의 사정을 알아주시고 도움 주셨던 우리에게 마중물을 아낌없이 부어주셨던 사회사업팀 선생님, 살아갈 희망을 잃고 너무 버거워 생명의 끈 을 놓고 싶을 때 마다 함께해주셨던 선생님들…… 우리 가족에겐 후원금이 아닌 우리 세 가족에게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을 주셨기에 너무나 감사함을 표 현할 수가 없다. 아이의 건강을 치료해 주셨던 정○○ 교수님도……. 혼자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아이는 21살이 되 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살아옴을 알기에 아이는 공부도 곧 잘하여 마이 스터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다.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 대학교도 아이 스스로 학비를 벌어가게 되었지만 난 너무도 아이가 자랑스럽다. 이렇게 우 리 곁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일 들…… 언제나 등 뒤에서 응원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던 이름 모를 고마우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입원 기간 동안 나는 잊고 있었던 고마움에 눈물이 많이 났다. 이제 성인된 아이……. 이렇게 자기 인생을 멋지게 꾸려나갈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 었다. 모두의 도움으로 받은 은혜를 갚으며 살겠다는 다짐을 하는 아이의 모 습이 대견했다. 나 또한 사회복지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받은 은혜를 앞으로는 우리가 걸어온 것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나누며 베풀고 살고 싶다. 아이의 치료를 마무리하면서 너무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고 자랑도 하고 싶 었고 칭찬도 받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되어 글로나마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됨이 너무나 기쁘다. 아직 남성호르몬 주사와 신장 치료가 남아 있지만 이젠 우리 힘으로 열심 히 고마움 잊지 않고 살려고 한다. 이제는 우리가 또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 있도록,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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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희망을 드리고 싶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다. “고맙습니다.”


우수상

나에게도 일어난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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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 ○○○ HUY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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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봄은 참으로 상쾌했다. 등에서 불이 나고 숨 쉬기도 힘들었던 여름, 물이 줄줄 흐르는 지하방에서 보낸 시간들이 다소 힘들다 느껴졌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감사뿐이었다. 나의 고향은 베트남 응에 안(Nghệ An)이다. 도시와는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로 바다가 가까운 곳이다. 우리 가족은 가톨릭을 믿는다. 나는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면서 시부모님과 두 아이를 양육하였다. 열심히 일하였다. 그 러나 아이들이 학교 입학할 나이가 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돈을 벌어야겠 다는 마음이 언제나 나를 괴롭혔다. 엄마의 손길이 너무나 필요할 딸(6세)과 아들(2세)을 뒤로 하고 2017년 11월 관광비자(3개월 유효)로 입국하였다. 입국에 소요된 비용 1,300만 원은 고스란히 베트남에 빚으로 남아있다. 불안감 속에 간신히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밤낮없이 부지런히 일을 해 돈을 벌어야만 했다. 공장에서의 일은 고되기도 하였지만 베트남에 남아 있는 가 족들을 생각하는 기쁨이 더 컸다. 그런데 어느 날 몸에 이상 증세가 느껴졌다. 임신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라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나는 이주노동자이다. 한국말도 모른다. 건강보험도 없다. 임신 사실을 사장님이 알게 되면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성당에 가기만 하면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가톨릭 신자이니 아기를 낙태 할 수도 없었다. 아기를 낳으려니 병원비도 너무나 무서웠다. 그러나 무엇보 다도 어렵게 얻은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문제가 나를 몹시 괴롭혔다. 어느 날 성당에 앉아 울고 있는데 수녀님 한 분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아주 었다. 나는 울면서 뱃속의 아기를 가리켰다. 수녀님은 대충 알아들으신 듯 걱 정하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하였다. 다음날 한국말을 잘 하는 베트남 자매님 이 나와 수녀님 사이를 통역해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처음으로 병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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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곳을 가보게 되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상담과 서류심사를 통해 부천성모병원에서 진


행하고 있는 Pre-Mom Care 대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이젠 돈 걱정 없이 초음파를 하고 의사 선생님도 만날 수 있었다. 한국말 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저를 위해 이주민센터 수녀님은 항상 동행해 주셨다. 차츰 배가 불러오면서 가까스로 얻은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다. 나는 허리 통증과 하혈 등으로 입·퇴원을 반복하였고, 6월 25일 제왕절개술을 통해 건 강한 아들을 출산하였다. 병원에서는 이주노동자인 나에게 건강보험수가를 적용해 주었다고 한다. 프리맘 케어 대상자로 선정된 이후 산전 검사비와 입원비, 예쁜 아기용품까 지 마련해주었다. 수술 후 수유 관리가 안 되어 옷이 흥건하게 젖어 있던 나 를 보신 사회사업팀 수녀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셨는지 유축기까지 손 수 챙겨주셨다. 나는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였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아기의 얼굴이 노랗 게 되어 부천성모병원을 찾았고, 황달로 신생아중환자실 입원치료를 받게 되었다. 계산서를 들고 다니는 수녀님 너머로 살짝 살짝 보이는 계산서는 내 머릿속을 어지 럽게 했다. 제왕절개 수술비와 아기의 진료비는 CMC 요셉기금으로 지원해주셨다 는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불법이라는 불안감? 누구에게 자신을 쉽게 알릴 수도 없는 막막함이다. 말 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는 답답함.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 그냥 나 는 바보처럼 웃기만 한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이다. 철저하게 외롭고 변두리에 서 있는 나에게 성당에 가는 일은 기쁨 그 자체 였다. 성당에 앉아 있으면 엄마의 품처럼 편안했다. 하느님은 한국말만 알아 들으시는 게 아니었다. 베트남어도 알아들으시고 이주노동자의 마음도 알아 들으시고 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마음도 알아들으시고 여러 명 의 천사들을 보내시어 아주 많은 것을 친절하게 모두 해결해주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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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올 때 임신을 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새 생명을 주 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이런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하느님도 잊어버리 고 돈만 사랑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로서 피난살이를 하면서도 하느님의 존재를 그분께 대한 감사를 잊어본 적 이 없다. 망연자실 성당에 앉아 울고 또 울었던 나! 그러나 지금은 엄마를 보고 방긋 방긋 웃는 귀여운 아기와 함께 하느님을 부르고 있다. 몸을 추스르고 다시 직 장을 구했다. 나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나 를 기다리는 가족들에게도 돈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엄마의 애달픈 마음을 아는지 엄마 품을 떨어져 있는 아기는 울거나 보채지도 않는다. 나는 돈을 많이 벌어 빚을 갚을 것이고 베트남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살 것 이다. 내가 혈혈단신 말도 안 통하는 타국의 피난살이에 지쳐 울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을 만나 꿈과 같은 길을 걸어온 것에 끝없는 감 사를 드리며, 나도 부족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 글을 통해 나를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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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세 번의 특별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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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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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모병원과는 오랜 인연이 있는 올해 42세 된 환우입니다. 1998년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의정부성모병원에서 가장 먼저 치료를 받게 되었고, 지난 2008년 동일 질병 재발로 인해 현 치료 병원인 서울성모병원에서 조혈 모세포이식을 받았습니다. 또 한 번의 인연이 남았네요. 작년, 2018년 6월엔 유방암 진단을 받아 현 재 표준치료인 수술, 항암,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현재 호르몬 약 병행 중입 니다. 그러고 보니 제 인생의 반인 20년을 넘는 시간을 성모병원과 인연을 맺었으니 좀 더 좋은 친밀한 표현인 ‘특별한 인연’이라 일컬어도 될는지 요……. ^^ 매 10년마다 받고 싶진 않지만, 선물인 듯 안겨주는 다름 아닌 ‘암’이라는 선물…… 그간 절망의 마음을 다 놓지 못했음에도 역시나 이번에도 손님처럼 세 번째 암이 찾아왔습니다. 수기라고 하니 처음엔 어떤 내용으로 적어 내려가야 할지 막막함뿐이었는 데, 돌이켜보니 많은 의료진분들과 간호사님을 비롯한 관계자분들이 가장 먼 저 머릿속에 떠올려집니다. 처음 진단 받고 치료 종결 10년 만에 재발된 환자로 다시 찾아뵈었던 혈액 내과 박○○ 교수님…… 오랜 세월에도 저를 기억해주시며, 다시 한 번 치료 해보시겠다고 기운을 북돋아주셔서, 이식 담당 교수님께 바뀌는 시점까지 배 려 깊은 말씀과 더불어, 십만 명당 몇 명뿐이라는 낮은 확률이 왜 다시금 나 에게 재발이라는 무시무시한 화살로 돌아와 현실이 되었는지 여러 혼란함과 힘겨움이었던 제게, 늘 괜찮을 거라는 긍정의 말씀을 표현해주실 때마다 큰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어 치료받는 데 많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나중에 안 사 실이지만, 저의 보호자에게는 30% 생존가능성과 3주 이내의 사망가능성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번도 제게 절망의 끝을 말씀하시진 않으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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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사소한 배려가 깃든 말씀이 쾌유의 원동력이 되 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지난 치료에서 한 번의 완치 경험을 토대로, 흔히 말하는 몇 퍼센트라는 확


률의 가능성은 나에게 해당하지 않으며, 0%, 즉 100% 생존할 수 있다고 생 각하며,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을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무사히 두 번째도 기적적으로 완치하는 데 큰 도움을 주셨던 박○○ 교수님과의 기억이 오래도 록 간직되어 찾아뵙고 다시 인사를 드리고 싶지만, 현재 정년퇴직을 하셔서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또 다른 기억 하나……. 가장 고통스럽고 힘겨웠던 기억은 조혈모세포이식 흔히 말하는 골수이식할 때의 전 처치 과정에서의 치료인 항암이었습니다. 심한 구내염으로 마약성 패치를 붙이고도 보름여 동안 식사를 하지 못하는 등, 어지러움과 고열, 구토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 여길 만큼 그때의 경험이 가장 생생하고 고통의 악몽처럼 떠오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주사제를 투여받고 밤새 부작용으로 잠 한숨 이루지 못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시도 쉴 시간 없이 줄곧 제 옆에서 혈압과 산소포화도 체크와 이뇨제 약물 로 인해 한두 번도 아닌 수십 번에 달하는 소변을 손수 양을 기록하며 밤부터 새벽 내내 제 곁을 지키며 괜찮아지실 거라며 손을 잡아주시며 자리를 뜨지 않았던 이식병동의 이름 모를 간호사님……. 그때는 제 고통만 보였기에 그 상황에만 치우쳐 있다보니 노고의 감사함을 불행히도 당연스럽게 느꼈던 제 자신에게 고개가 숙여집니다. 봉사의 마음이 아니면 아무나 행할 수 없었던 언행들이 뇌리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저를 기억하실 수 없겠지만 정말 정말 뒤늦게나마 감사함을 이제나마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끝인 줄 알았던 제 투병이 작년에 2차암인 유방암을 진단받아 또다시 시작 되었고, 절대 마음과 머리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세 번째의 암은 눈앞의 현실이고 다시금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었고 저는 이미 암환자로의 삶에 놓여져 있습니다. 요즘 세 명 중 한 명이 암으로 사망할 수 있다는 여러 정보들…… 그 가능성을 왜 저는 세 번이나 해당되어야 했을까요? 너무 슬프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종양, 유방외과의 치료과에서 전 병력 때문에 현재도 추적관찰 중인 혈액내과에 협진하여 치료 가능 여부에 대해 진료를 받게 되었는데, 큰 상심을 하던 저에게 전해졌던 김○○ 교수님이 뜻밖의 한마디를 전해주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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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 말씀은 “이식한 지 10년이 되어가니 일반인처럼 치료받으면 되고, 백혈병 치료의 10분의 1 힘들다…… 유방암은 치료가 잘 되는 암이니 잘 치 료받고 다시 건강하게 보자.” 오랫동안 뵈었지만 절실했던 저에게 단비 같은 말 씀이셨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이번의 여러 차례의 항암과 서른세 번의 방사선을 받 을 때 조금은 힘겨워질 때마다 해주신 말씀을 떠올리며 이겨내려 했습니다. 아니, 지금 현재도 이겨내는 중입니다. 말처럼 이루어진다는 긍정의 말이 있듯이 거짓말 처럼 어느 새 큰 부작용 하나 없이 표준치료 종결을 맞이했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나서는 병에 대한 부정을 갖다가 나중에서야 인정하고 수용 하고 받아들인다고 하는데, 저를 포함한 보통 환자분들은 의료진의 말씀, 표 정 하나에 희망을 갖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가령 “좋아질 것이다”, “좋다” 이런 긍정의 단어 하나에 완치의 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됨은 분명하다고 느껴집니다. 투병 기간이 20년이 넘다보니, 보험 없이 치료받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 고, 그러다 보니 누적된 투병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사회사업팀의 도움의 손 길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적잖은 자존심이라는 게 남아 있어서인지 제 상황을 밝힌다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현재는 퇴사하신 것으 로 알지만 한 직원분이 세심하게 마음 써주셔서 저의 주변 여건을 묵묵히 듣 고 지원에 노력을 해주셨던 그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랜 연륜의 삶을 산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굴곡진 삶을 살다보니 이제 는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사람이 감정이든, 어려운 현실에 마주하게 되면 처음엔 절망의 나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저 또한 그런 상황 의 반복에 의지마저 꺾인 적이 있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악조건의 여 건을 잘 이용하면 마치 인생의 마일리지 쌓듯 적절히 이용할 수 있고,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분명 극도의 어려운 과정일 것입니다. 흔 한 말로 바닥을 치는 삶을 살면 더 떨어질 곳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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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를 하면 절망이 되지만, 반대로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어떻게든 해결해 갈 마음과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견뎌보기라도 해볼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후자의 맞는 삶을 살고 싶고, 쉽진 않지만 그런 멋진 삶을 꿈꾸며


노력 중입니다. 이제는 심리적으로도 안정의 길로 들어서 치료를 할 수 있음 에, 쓸 수 있는 약이 있음에 매사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생각의 전환을 하기 시작하니 예전보다 많은 행복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때때로 무너지고, 평범하지 못한 남들과의 다른 삶에 이질감도 있지만 또 한 번 완치하겠다는 의욕과 집념에 집중하다보면 어느 새 한 발치 목표에 가까워져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완치로 가는 희망의 길에 여러 도움을 주시는 수백 명, 수천 명 이상을 상 대하시는 의료진분들을 포함한 성모병원 관계자분들…… 일일이 다 나열하 지 못하지만 뒤에서 애쓰시는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이 기회를 빌려 감사의 마음으로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사명감이나 다른 이를 위한 봉사의 뜻이 없다면 결 코 이룰 수 없는 일들이라 여겨집니다.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게 기회를 주신 점 정 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의 마음을 이렇게나마 표현하고자 써내려갔는데 너무 두서없는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읽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고, 암을 앓고 있는 현재의 저와 같은 상황의 환우분들과, 묵묵히 도와주시는 모든 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행 복하시길 기원하며 부족한 글을 마칠까 합니다. “세 번이나 살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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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류마티스 내과 김○○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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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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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새 김○○ 교수님과의 인연이 12년째 되어가고 있습니다, 처음 루푸 스(면역계의 이상으로 온몸에 염증이 생기는 만성 자가면역질환) 진단을 받 았을 때 책 한 권 주시면서 집에 가서 읽어보시고 젊은 여자가 이토록 무식하 게 참는 여자가 요즘 어디 있냐고 하시면서 당장 입원하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입원을 하여 검사를 하며 약을 주시면 그토록 죽을 것 같은 통증이 사라 지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일주일 만에 퇴원을 하였고 교수님 만나러 가는 날은 너무 즐겁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갈 때마다 교수님께서는 환자를 안정되게 하셨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의 가정에 문제가 생겨서 크나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교 수님께 고민을 말씀드리고 저는 엉엉 울었습니다. 실컷 울다가 제가 “교수님 저 너무 외롭습니다.” 했더니 누구나 인간은 외로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 는 그다음 아무 말도 못하고 실컷 울었고 교수님은 지칠 때까지 지켜만 보셨 습니다. 아픈 게 죄는 아니지만 가족한테 미안하고 고맙잖아 하셨는데 옳으 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다음부터 저는 미안하고 고마운 것 두 가지만 갖고 살 기로 다짐을 하니 마음이 홀가분하고 좋았습니다. 다음 병원 예약을 하고 병원 문을 나섰습니다. 예약일에 갔더니 간호사 선 생님께서 원○○ 환자 오시면 친절하게 잘해드리라고 하셨답니다. 예상치 못 했던 교수님께 의지하며 좋은 말씀 항상 들어가며 세월은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병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수님이 서울성모병 원으로 가시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시간도 더 많이 걸릴 것이고 사업 실패로 인해서 힘들었던 나는 교통비도 더 지출이 될 것이고 병원비도 걱정이 되고 여러 가지로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무조건 나를 따라오라 고 하셨습니다. 생각할 여지없이 “예” 하고 뒤돌아서는 저에게 이름을 부르 시며 명함 한 장을 주셨습니다. 많이 아플 때 연락하라고. “감히 제가 교수님 명함을 어떻게 받습니까? 안 받겠습니다.” 했더니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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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면 어쩔 수 없잖아, 참지 말고 연락하시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명함을 받 았습니다. 또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응급실은 절대 오지 마세 요. …… 너무 아파서 응급실 오는 건데 더 아프고 고통스럽고 더 힘들면 안 되잖아요.” 하셨어요. 기가 막힌 교수님 말씀에 정말 이런 교수님이 또 계실까 하면서 진한 감동 이 밀려 왔습니다. “너무 죽을 만큼 힘들면 어떡하지요?” 말씀 드렸더니 “일반 문자는 돈 나 가고 ○톡은 돈 안 들고, ○톡으로 전화하시면 제가 입원장 드릴게요. 직접 못 오실 때는 가족을 보내세요.” 너무 고맙고 감사하고 미안해서 할 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나에게 어 떻게 신(神) 같은 교수님이 나에게 오셨을까 하며 진짜 많이 울었습니다. 응급실 올 기회가 무지 많았지만 응급실 생각은 아주 생각하지 않고 살았 습니다. 어느 날 약 타러 예약 시간에 왔는데 여기는 병원비가 많이 비싸다 하시며 교수님 핸드폰으로 직접 전화번호를 찾으셔서 간단히 “제가 환자 한 분 보내 드리니 상담 좀 잘 해주세요” 하시며 끊으시고 저에게 경제적으로 많이 힘든 분들을 상담해주고 환자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는 곳이니 전화번호를 건네주 시며 통화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로 통화해서 지금까지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 이런 진정한 의사 있습니까? 한 명도 없습니다. 병원비 아껴서 고기 끊어 사다가 식구들과 함께 먹으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입원 생활하게 되 면 꼭 질문하십니다. 불편함은 없는지, 잠은 잘 자는지. 환자 한 사람 한 사람 에게 따뜻한 미소와 겸손하심에 환자들은 교수님을 매일 매일 애타게들 기다 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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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지독한 통증을 견디고 견디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2일 만 에 정신을 차리고 교수님을 만나 뵙는데 깜짝 놀라시며 바로 입원하라고 하 셔서 입원하여 검사를 해보니 턱을 30바늘 꿰맸고 고관절 3개가 금이 갔습


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넘어졌는데 이렇게 많이 다쳤느냐고 하시면서 손을 꼭 잡아 주시며 진작 입원시켰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병원비 부담에 제가 걱정할까 봐서인지 사회사업팀에 편지를 보내셨다고 하셨고, 사회사업팀 이○ ○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항상 늘 힘들 때나 좋을 때나 기쁠 때나 함께하시는 김○○ 교수님. 언제나 환자들에게 마음을 편하게 열어주시니 환자들은 그저 행복할 뿐이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인 고통 두 가지가 교수님의 정성과 사랑으로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외로운 사람, 다친 사람, 상처받은 사람들의 우선적으 로 마음을 열게 하시어 토닥토닥 해주시고 언제나 손잡아 주십니다. 요즘은 정이 메마르고 나밖에 모르는 인색한 세상 누군가를 칭찬해줄 줄 모르고 누군가를 헐뜯고 이웃이 없는 세상에서 진정하고 믿음이 있는 따뜻 한 의사 김○○ 교수님. 함께하시는 세상이 진정한 감동이고 아름다운 세상 입니다. 환자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여러 가지로 서울성모병원장까지 하실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갖추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파이팅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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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9년이 시작된 지 엊그제 같은데 20일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여 환자로 류마티스 내과 루푸스 진단을 받은 지 12년째 되는 환자입니다.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긴 지는 5년 되었고 사회사업팀을 알게 되고 지원받 기 시작한 건 3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담당 교수님께서 사회사업팀으로 편 지를 보내시어 이○○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사업이 성장해서 아주 잘나가다가 실패를 하여 병원을 자주 다녀야 하는 나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병원비 걱정에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고 그러던 어 느 날 사회사업팀 이○○ 선생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사회사업팀 이○○입니다. 김○○ 교수님께서 편지를 보내 시어 입원 중이신 것 같은데 잠깐 뵐 수 있을까요?” 하시더니 13층 휴게실에 서 처음 만났습니다. 환한 미소에 말솜씨가 차분하시고 아름다우신 분과 2시간 정도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깊은 저의 사정을 누구에게 쉽게 이야기 하지 못했던, 가 슴깊이 품었던 이야기를 진심으로 제 마음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끊지 않으시고 끝까지 들어주시는 모습에 마음이 후련하고 푸근함 을 느꼈습니다. 제 이야기를 다 들어주시더니 제가 의료비 신청자가 되는지 일단은 알아보 고 서류를 문자로 보내드릴 테니 챙기시어 넣어보자고 하시고 내려갔습니다. 입원하는 동안 며칠 뒤에 저는 식구들에게 서류를 챙기어 가져오라고 해서 6층에서 다시 이○○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꼼꼼하게 설명해주시고, 환자가 어려움 없이 설명을 어찌나 차분하게 대해주시던지 따뜻하고 진한 감동을 받 았습니다. 선생님은 “일단 서류를 넣어보고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하셨고 저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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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님께 부담 없이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했습니다. 제가 이 야기를 하는 내내 가끔씩 살며시 웃기만 하셨고 어떨 때는 슬픈 사슴눈처럼 촉촉한 눈시울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냥 왠지 모르게 편안한 마음과 설움


에 실컷 울기도 했습니다. 끝까지 들어주는 선생님의 그 모습을 머리에서 지 울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마무리되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입원실로 올라왔습 니다. 일주일 뒤 이○○ 선생님께서 지원 대상이 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커튼을 치고 착잡한 눈물을 촉촉이 흘러내렸습 니다. 요즘 다들 살기 힘들고 나밖에 모르고 인색한 세상에 따뜻한 분들이 계 시구나 하면서 치료 잘 받아서 건강을 되찾아 나도 누군가의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입원할 때마다 병원비 걱정은 덜게 되었고 자신 감을 갖게 되었지요. 편안한 마음으로 치료를 잘 받고 있고 지원해주시는 분 들과 사회사업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름다운 따뜻한 세상 에 살고 있을을 감사드리며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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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나의 육체적, 정신적 삶을 치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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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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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입니다. 겨울은 몸과 마음이 아프고 힘든 이들에게 따뜻함으로 토닥! 토닥! 위로하고 사랑을 나눠야 하는 사랑의 계절이기도 하지요. 그 계절을 살 고 있는 제 가슴에도 작은 사랑의 불씨가 피워지길 소망합니다. 저는 28살 때 사고로 인해 척수장애인의 삶을 24년째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 순간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고통스런 삶의 길목을 어 떻게 지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니 눈을 떴고 저녁에 해가 졌 으니 눈을 감았습니다. 사고로 수술은 했지만 재활치료를 전혀 받지 못하고 병원에서 퇴원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채 창살 없는 감옥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장애에 대한 정보도 알 수 없었고, 가정간호란 의료 서비스가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른 채 사각지대에 살고 있었 습니다. 비참한 삶이었지요.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들어 갔지만 내 감정을 표 출할 탈출구가 없었으니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 세월을 10년 보냈고 저의 보호자셨던 어머니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 셨습니다. 형제들이 있었지만 저는 고아가 된 셈이지요. 이젠 홀로서기를 할 때라고 생각할 즈음 언니를 통해 알게 된 수녀님으로부터 서울성모병원에서 운영하는 가정간호 의료지원 서비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으 로 직접 방문해서 환자를 치료해 주신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엔 듣고도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럴 정도로 저는 세상 모든 것들과 차단 된 벽 안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 억울했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식구들 을 원망도 했습니다. 이런 좋은 제도(가정간호)가 있었는데 왜 알아볼 생각도 안하고 그저 애물단지 취급만 했을까요? 눈물 나게 슬펐고 아팠습니다. 그렇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감사했습니다. 가정간호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셔서 여기저기 생긴 욕창 치료 도 해주시고 때론 저의 고독하고 칠흑 같은 앞이 보이지 않아 방황의 끝에 매 달려 있는 제 삶을 위로해 주시고 한줄기 빛 같은 인도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저의 육체적 상처와 더불어 정신적 상처까지 치유해주셨던 겁니다. 수호천사 였습니다. 그런 귀한 만남을 가지면서 저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장애 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더 심한 아픔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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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았으며 제가 감사해야 할 부분들이 참 많 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가정간호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전 모든 걸 포기한 채 식물인간처럼 살았을 겁니다. 저에겐 몸에 생긴 상처 치료도 중요했지만 정신적 치료 또한 얼마나 절실 한지 가정간호 선생님을 통해 알았고 배웠으며 그분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 받았습니다. 10년의 감옥 같은 삶을 마치고 지금 이 순간까지 저는 수호천사 이자 저의 주치의 선생님(가정간호) 덕분에 하루하루 건강하게 잘 보내고 있 습니다. 독립해서 혼자의 삶을 살고 있지만 외롭지 않게 지냅니다. 지금 저를 돌봐주고 계시는 가정간호 선생님은 유난히 밝고 따뜻한 분이라 서 일주일에 한 번의 만남을 행복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고 환한 미소로 머물다 가시는 그 시간은 토닥! 토닥! 엄마의 마음약이 필요한 저에겐 선물 같은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정신적, 육체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가정간호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낭만화가 탁○○’ 님께 서툴지만 그림도 배우고 있습니다. 탁○○ 님의 동화 같은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았던 어린 시절로 잠시나마 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잊고 지냈던 나의 아름다운 감성들이 꿈결처럼 부드럽게 춤을 춥니다. 행복한 순간입니다. 그 러고 보니 제가 사랑을 참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지금 어 디선가 예전의 나처럼 살고 있는 안타까운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 면 가슴이 답답하고 아픕니다. 의료지원 사각지대에 살면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많은 홍보가 되어 치료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수혜자로서 많은 의료 혜택을 받고 있다는 걸 알면 알수록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깊어 만 갑니다. 라디오를 듣다 보면 DJ께서 “오늘 하루는 선물입니다. 오늘 하루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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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예요.”라는 멘트를 합니다. 그래요. 오늘 하루는 선물이고 당신(우리)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 특히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의료


지원과 가정 간호 돌봄 서비스가 아름답고 따뜻한 선물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삶의 질과 행복지수가 한층 높아질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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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주님의 사랑은 나를 긍정으로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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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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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어느 날 저녁, 당시 18개월 된 딸을 안고 저녁밥을 먹으려던 저 는 저를 찾아온 낯선 사람들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경찰들의 지독 한 강압수사에 견디지 못하고 어느 미제사건의 범인으로 만들어져 복역하던 중 20○○년 만기출소하여 사회에 복귀했습니다. 저의 기막힌 사연은 여러 프로그램들을 통해 방송되었습니다. 교도소에 있을 당시부터 왼쪽 어깨가 아팠는데 그 안에서는 MRI 촬영을 할 기회가 없어서 못하고 있다가 출소 후에 해보았더니 왼쪽 어깨 회전근계 가 파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15척 담 안에서 생활하면서 기어코 살아서 사회에 복귀하여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일념으로 너무 무리하 게 운동한 탓이었습니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 만 같았습니다. 청춘을 15척 담 안에 묻고 나온 나에게 수술비를 감당할 돈 이 없었습니다. 출소할 때 교도소에서 출역을 나가서 벌어서 모은 돈 1,300 만 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출소한 다음 딸이 시집가게 되니 그 돈을 모두 써버렸습니다. 그건 딸에게 연필 한 자루 사주지 못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제일 큰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수술비를 마련하는 일이 참 막막했습니다. 일해서 수술비를 마련하면 된다 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비참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징병검사에서 시신경위축(양)으로 병역을 면제 받았습니다. 당시 제 시력은 양안 0.01이었습니다. 지금도 시각장애 1급이어서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가 없고,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글도 지인이 저의 말을 그대 로 컴퓨터에 옮겨적고 있습니다. 마침 재심전문 변호사님을 만나 재심을 신청하고 있는 중이어서 서울에 올 라올 일이 많았습니다. 서울로 다니는 돈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인 의 소개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에서 운영하는 ‘빛의 사람 들’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내가 어깨가 아파서 통증클리닉 주사에 의지하여 산다는 것을 알게 된 교 정사목위원회 신부님들과 직원분들이 서울성모병원 사회사업팀에 연계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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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셔서 지인과 함께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살뜰한 사회사업팀 선생님들의 도움과 정형외과 이○○ 교수님의 집도로 2018년 봄에 수술하고 퇴원했습 니다. 퇴원하면서 사회사업팀에서 들으니 일면식도 없는 어느 후원자분이 제 병 원비를 대신 갚아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비는 해결됐으나 저 또한 이 크나큰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퇴원 후 서울성모병원으로 통원치료를 다니면서도 진료를 봐주시는 이○ ○ 교수님과 간호사님이 TV에서 저의 사연을 보셨다면서 항상 공감해주시 고 따뜻한 마음으로 웃음을 주시니 진료를 다녀오면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 습니다. 수술 후 MRI를 찍으러 가야 되는 날에는 함께 동행할 사람이 없어서 저 혼 자 가게 되었습니다. 시력이 안 좋다 보니 항상 조심한다고 하면서도 MRI 촬 영실에 있는 탈의실 열쇠 번호를 잃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더듬거리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께서 오셔서 괜찮다 면서 친절하게 탈의실 문을 열어주셔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습니다. 경찰의 강압수사로 하루아침에 범죄자가 되어서 오랜 세월을 15척 담 안 에서 보낸 저에게 세상은 정말 더럽기만 했습니다. 그런 제가 교정사목위원 회가 마련해준 숙소와 서울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세상의 은혜와 사 랑을 알게 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주님의 사랑은 저 를 긍정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출소한 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옳은 삶이 무엇인지, 어떠한 인성 을 가져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를 잘못 만나 누명을 쓰고 가정이 파탄되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제 주변의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주님의 사랑 으로 가득 채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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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제 늦었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 또한 기해생입니 다. 하지만 늦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변호사님께서 진행하시는 저의 재심기일이 정해지면 저의 진실은 꼭 밝혀집니다.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는 한 진실은 꼭 밝혀지리라 믿습니다. 그러면 저도 떳떳한 사 회인의 일원으로서 뜻있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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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생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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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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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와 센터장 교수님, 그리고 제가 알코올 센터에서 치료받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항상 옆에서 도와주신 많은 수녀님 들(꼭 일일이 열거하고 싶습니다. 마리타 수녀님, 벤자민 수녀님, 다니엘라 수녀님, 그라시아 수녀님, 지혜 수녀님, 하상수녀님, 루디빈 수녀님, 이냐시 아 수녀님, 앙리 수녀님, 아나니아 수녀님. 사비나 수녀님, 레나 수녀님). 감히 나의 생명을 구해주신 분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고, 생명의 은인이 라고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2006년 겨울, 심한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당시 알코올의존치료센터를 찾 았을 때 저는 몸과 마음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습니다. 정신과 폐쇄병원 을 수도 없이 입, 퇴원을 반복하면서 제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는 가족에게는 원한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의료진은 한낱 장사치로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는 폐쇄병원과는 분명히 달랐습 니다. 다른 병원 치료진과는 다르게 수녀님들께서 교육하시는 모습에서 저는 수없이 많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저와 같은 중독자들은 늘 술에 취해 있어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기본적인 역할을 하지 못해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지도 못하고, 사회로 부터도 고립되어 있어 외롭고 육체적 건강도 잃어서 힘이 듭니다. 그래서 알코올중독 환자들 은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곳도 없습니다. 그러 기에 적어도 제가 알코올의존치료센터에서 교육을 받기 전에는 저는 한낱 술 주정꾼에 불과했고,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를 센터 수녀님들께서는 그 어떤 편견도 갖지 않고 아픈 상 처들을 보듬어주셨고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며, 약물치료와 센터 프로그 램을 통하여 단주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돌보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가족으로부터도 무시당하던 저를 수녀님들께서는 돌아가신 저의 어머님처럼 저를 걱정해주 셨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갖게 해주셨습니다. 하루는 한 수녀님께서 알코올센터 교육을 마치고 외부 강의를 다녀오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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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힘들어 코피를 흘리면서도 입원 환자를 걱정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수녀님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예쁜 수도복을 입고 기도만 하는 수녀님’을 생각했었지만 알코올의존치료센터에서 만난 수녀님들은 달랐습니 다. 교육받고 있는 알코올중독 환자들이 혹시나 재발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걱정하시고 우리들의 회복에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든 구하기 위해 여기저 기 발로 뛰기도 하셨으며, 또 하찮은 우리들을 위해 수없이 기도하시는 모습 을 보았습니다. 알코올중독은 마음의 병이고, 뇌질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독환자는 항 상 마음이 갈팡질팡하고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기에 중독 환자들과 함께 생 활하면서 교수님과 수녀님들이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교육 후에도 무수히 많이 재발을 하여 가족들과 교수님, 센터 수녀님 들의 마음을 아프고 힘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3년간의 단주생활을 유 지할 수 있는 것은 부천성모병원에 알코올의존치료센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매번 재발하여 술에 취해 있어도 알코올센터로 연락하여 한 번만 더 도와달 라고, 살려달라고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또 다시 술을 마실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알코올센터의 교수님과 수녀님들 은 매번 속는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 믿으며 내치지 않고 받아주셨습니다. 그 러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저는 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를 매주 목요일마다 방문합 니다. 2년간의 후속교육도 무사히 마쳤지만 후속교육에 참여하는 목요일이 면 현재까지 아침 명상에 참석하여 알코올 중독 환자들과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중독자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이고 어떻게 세상을 사는 것이 높으신 분의 뜻인지를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주생활을 하면서 세례를 받았고 견진성사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이 시 간을 통하여 제가 높으신 분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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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기도 합니다. 알코올치료센터 수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단주생활도 수도생활과 비슷 하다고. 단주생활과 수도생활을 비교를 할 수 없겠지만 그만큼 똑같이 힘들


고 외롭기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요즘 저는 매일 매일 기적과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맑은 정신 으로 아침에 일어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늘 내 마음대 로 살 수 있다고 하여 여러 사람들을 힘들게 하였으나, 내가 세상에서 내 마 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또 내가 할 수 있 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도 할 줄 아는 사 람이 되었습니다. 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에 와서 단주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음 을, 매일 매일 나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음을, 감사함을 느낄 수 있음을, 하느 님을 알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저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신 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의 모든 치료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 자 선 수 혜 자 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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