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CMC 핵심가치실천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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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CMC

핵심가치실천공모전 행동규범 Action Plan Story 당선작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당선작


행동규범 Action Plan Story 당선작 대상

여긴주사안놓는안아픈병원이야 (김병현・서울성모병원방사선종양학팀) / 06

우수상

세희야, 우리가 더 고마워 (이명자・서울성모병원 202 Unit) / 09 우리모두마음모아 ‘하하호호’ (박명희・서울성모병원간호1팀영성위원회) / 13 내가포기하지않으면된다(형옥자・성의교정가톨릭조혈모세포은행이식조정실) / 16 반디야, 너는별처럼빛날거야 (진종임・서울성모병원수술실C Unit) / 20 따뜻한 마음, 믿음의 마음 (유영자・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 Unit) / 26


장려상

내리는 비를 막아 줄 수는 없지만 비가 오면 항상 함께 맞아 줄게 (강바람・서울성모병원 소아중환자실 Unit) / 30

소중한 인연 (권진희・여의도성모병원 8층서 Unit) / 34 어여쁜아기천사는지금쯤무얼하고있을까요? (송진・서울성모병원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 Unit) / 38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천 원 (백준규・서울성모병원 방사선종양학팀) / 42 빨리빨리(8282) 병동 간호사들의 마음 밭 가꾸기 (박민선・서울성모병원 82 Unit) / 45 네, 여기 있습니다 (김지연・서울성모병원 영양팀) / 49 공감과연민의마음을통한참간호 (장안우・서울성모병원 70 Unit) / 53 준비하는 삶과 죽음의 은총 (손미연・서울성모병원 사회사업팀) / 56 기억 저편 (박아름・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 Unit) / 59 선생님, 환자 안전 담당자이시죠? (김소연・서울성모병원 PI팀) / 62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당선작 대상

엄마를살린두번의기적 (이정숙씨딸나명주・서울성모병원사회사업팀) / 66

우수상

필리핀 소녀, 한국에서 심장과 소리를 되찾다 [걸리(Gyrlie)의 어머니 로살 리 올라밋(Rosalie Olamit) 부천성모병원 사회사업팀] / 70

모든것이하느님은총입니다(이종도님배우자정환지・서울성모병원가정간호센터) / 73


장려상

인생이 때때로 우리를 짓누를지라도… [소니(Sonny)의 배우자・의정부성모병원 사회사업팀] / 76 말기위암, 어느불법체류외국인의수기 (하우・부천성모병원사회사업팀) / 82 어느감사한 ‘님께 ’ (박시은의엄마・서울성모병원사회사업팀) / 85 하나님이찾아주신나의오른손 (와우크리스틴・부천성모병원사회사업팀) / 92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된 전화 한 통 (신덕철・서울성모병원 사회사업팀) / 95 인생을 마감하려던 마지막 순간, 죽음의 절망감에서 생명의 빛을 만나다 (조일석・부천성모병원사회사업팀) / 97


Action Plan Story 대상

여긴 주사 안 놓는 안 아픈 병원이야 서울성모병원 | 방사선종양학팀 | 김병현

소아혈액암의 일종인 소아백혈병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서울성모병원에는 한 해 동안 꽤 많은 어린이 친구들이 오고 있습니다. 어린이 친구들이 소아백혈병 때문에 항암치료, 방사선치료를 하고, 또 골수이식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 친구들은 골수검사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혈액검사들을 거친 다음에, 항암주사를 맞게 되는 데, 그 중에 일부가 온몸에 방사선치료를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주삿바늘이 오고 갔 는지 우리 어린 친구들은 흰색의 가운만 봐도 울어 버립니다. 흰색 가운 입은 교직원만 봐도 피합 니다. 나에게 또 아픈 주사를 놓으려고 하는구나 하고 무서워서 그러는가 봅니다. 그런 모습을 자 주 보게 되는 보호자 어머니들 가슴 또한 메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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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잠을 재워 제가 일하고 있는 방사선종양학과에서는 어린이 친구들의 성공적인 방사선치료를 위해 항상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공적인 방사선치료라는 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몇 가지 조건이 충 족되어야 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치료받는 방에서 아이 홀로 20분 동안 앉 은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린이 친구 대부분을 진정요법을 통해 약 을 먹여서 재워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약을 먹이고 주사를 놓아서 잠을 재우는 것도 한 번만 하는 게 아니라 하루에 두 번, 그러니까 오전 8시경에 한 번, 재우고 6시간 뒤에 또 한 번 해야 합니다. 우리 어린이 친구들 은 대부분 두려움 때문인지 신경이 예민해져서 잠을 잘 안 잡니다. 그때마다 사실 곤혹스러운 건 어머니도 그렇고 저희도 그렇습니다. 어머니들은 아이가 수면약을 먹고 쉽게 잠들 수 있게 새벽 2~3시부터 아이를 깨워 놀아 줘야 합니다. 아침을 먹이고 약을 먹일 때 피곤해진 아이가 식곤증 으로 빨리, 쉽게 잠들기를 바라면서요……. 아이가 잠을 자게 되더라도 20분 동안 방사선치료가 일사분란하게 진행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들 대부분 독한 수면약제의 부작용으로 구토를 하게 되는데, 이게 모두 진정되어야만 그제서야 잠들게 되고 앉혀진 자세에서 방사선치료가 진행되는 것이지요. 이 과정을 하루에 두 번씩, 연속해서 사흘간, 그러니까 사흘 동안 6번을 반복해야 합니 다. 사실 이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음을 느낍니다. 감정 노동의 어려움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합니다. 그래도 용감하게 치료 과정을 견뎌내는 어린이 친구, 그리고 옆에서 온 갖 역경을 참아내는 어머니를 뵐 땐 숙연해지기까지 합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이런 어려운 치료 과정을 조금이나마 개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우리 는 아이디어를 모아 보았습니다. ‘아이를 새벽부터 깨워서 잠을 재우지 않는다.’, ‘약을 먹이고 업 고 돌아다녀 본다.’, ‘약의 용량을 최대한으로 늘려 본다.’, ‘약을 바꿔 본다.’ 등……. 그러나 이 모 든 것은 옛날 동화 ‘나그네 옷을 벗게끔 하는 해님과 바람’ 이야기처럼 의료진 시선에 맞게 아이와 어머니를 강하게 몰아치는 방법이었 을 뿐 효과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 서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린이 친구 입장에서요. 바로, 너무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20분 동안 앉아서 좋아하는 만화영화 를 보게 해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Action Plan Story ∙ 7


여긴 주사 안 놓는 안 아픈 병원이야 효과는 대만족이었습니다. 진정요법을 통해 잠을 재워야만 했던 만 3~6세 어린이 친구들이 더 이상 진정제 약과 주사를 쓰지 않아도 그냥 편하게 만화영화를 보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 으니 말이죠. 어머니들 또한 무척 안심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우리 또한 마 음이 한결 가벼워졌고요. 이게 바로 진정한 환자 우선의 전인치료이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린이 친구들이 방사선치료를 받으러 올 때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긴 주사 안 놓는 안 아픈 병원이야. 만화영화 보고 놀고 가는 병원이니까 걱정 마~~”

뿌듯한 마음에 사연을 보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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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우수상

세희*야, 우리가 더 고마워 서울성모병원 | 202 Unit | 이명자

“할아버지, 미워! 저리 가! 나가 버려!”

아침부터 208호에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립니다. 오늘도 또 시작인가 봅니다. 목 소리의 주인공은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을 진단받고 치료를 받던 중 재발하여 다시 항암치료 중인 10살 김세희 환아입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세희는 아버지와 살고 있고, 병간호는 할아버지가 하고 계십니다. 평소에도 부정적이고 아이답지 않은 언행을 하며, 특히 할아버지에게 함부로 대하는 등 버릇없는 모습을 *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실명 대신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Action Plan Story ∙ 9


자주 보였습니다. 그날도 세희가 할아버지 얼굴에 발을 올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냥 두 고 볼 수 없어 “세희야, 이러면 안 되지.” 하고 엄하게 말했더니 분한 듯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되 레 할아버지께 냉큼 소리를 질러 버리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허허 멋쩍게 웃으셨습니다. 엄마도 없는 데다 아프기까지 한 손자가 그저 안쓰러우신지 할아버지는 세희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때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아이는 정말 버릇이 없구나. 아마 우리가 잘 해 주더라도 바뀌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달의 예수님, 세희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세희가 초등학교 친구들이 보낸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쩌면 이 아이의 난폭한 모습 이면에 사람들에게 관심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달의 예수님’ 대상자를 세희와 할아버지로 정하면 어떨지 부서 영성위원들과 의논 하였습니다. 마침 세희가 최근에 패혈증으로 상태가 악화되어 급성신부전으로 중환자실로 이실, 신장투석을 2차례 시행하는 등 힘든 시간을 겪고 다시 병동으로 돌아와 조금씩 회복되고 있던 중 이었기에, 세희와 할아버지의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달 의 예수님’이란, 간호1팀 영성위원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각 병동마다 매달 우리의 관심 과 사랑이 필요한 환자, 보호자, 의료진 등을 대상자로 선정하여 한 달 동안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 푸는 프로그램입니다.

세희와 할아버지를 ‘이 달의 예수님’으로 선정하고 한 달 동안 202병동 간호사 모두 세희와 할 아버지에게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았습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부서원들이 세희에게 응원의 롤 링페이퍼를 쓴 일입니다. 세희를 생각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쓰고 있자니 내가 세희에 대해서 얼 마나 많이 알고자 했으며 세희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하려고 노력했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졌 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는커녕 말이 안 통하는 아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 는 생각이 들며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고, 그 미안함에 세희에게 더욱 사랑을 주리라 다짐했습 니다. 세희가 의료진 모두에게 진정한 관심의 대상임을, 세희 곁에는 언제나 우리가 있음을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모두 세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작은 것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세희가 밥도 많이 먹었네, 너무 잘했어.”, “우리 세희는 주사도 잘 맞는구나. 너무 멋져.” 간혹 세희가 할아버지에게 버릇없이 굴 때에도 예전처럼 나무라는 대신 “우리 착한 세희가 왜 그럴 10 ∙


까?” 하며 달랬습니다. 세희 할아버지를 위해서도 “할아버지, 많이 힘드시죠? 힘내세요.”라고 말 씀드리고, 식사 후 식판을 대신 치워 드리고, 할아버지가 자리를 비우셨을 때 세희의 소변통을 대 신 비워 드리는 등 작은 정성을 보였습니다.

우리 세희가 달라졌어요 세희와 할아버지에게 간호사들의 롤링페이퍼를 건네는 날, “선생님, 이건 뭐예요?”라고 물으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웃던 세희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들이 우리 세희 생각하면 서, 치료 잘 견뎌 줘서 너무 대견하고 고맙고…… 앞으로도 힘내라고 쓴 편지야.” 세희는 활짝 웃 었고 할아버지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연거푸 말씀하시며 끝내 눈물을 보이셨습니 다. 그리고 다음 날 세희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롤링페이퍼를 꺼내어 또 읽고 또 웃고 하는 모습 에 마음이 뭉클하였습니다.

이렇게 세희와 우리가 깊게 교감한 한 달이 지나고 우리 세희가 달라졌습니다. 세희와 할아버지를 가족처럼 대한 우리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짜증스러움이 가득했던 표정 대 신 웃음이 많아지고, 의료진의 질문에 퉁명스럽게 “아닌데요, 싫은데요.”를 반복하던 말투도 부드 러워지고, 대답도 잘하고, 특히 할아버지에게 함부로 구는 태도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매일 혼자 병실에서 텔레비전만 보던 세희가 병동 또래 친구들과도 어울리고 어린이 학교 수업에도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이 이렇게 한 아이를 변화시킬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왜 더 진작 다가가서 잘해 주지 못했을까 하는 미안한 마음과 또 고마운 마음에 울컥하기 도 하였습니다.

세희야, 고마워 이렇게 우리에게 선물이 되었던 세희는 지금 우리 곁이 아닌, 할아버지 곁도 아닌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힘든 투병 속에서 우리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뒤로 한 채 끝내는 나쁜 암세포를 이겨내 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우리는 세희와 할아버지를 통해 환자의 신체적인 아픔뿐만 아니라 영적인 아픔까지 돌보는 전 인간호야말로 CMC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인 ‘환자 우선의 전인치료’의 가장 효과적이고 진정한 의미의 실천임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세희가 보여 준 변화된 모습에 오히려 저희가 큰 감동과 위로를 받고, 하느님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옆에서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Action Plan Story ∙ 11


지금도 우리는 가끔씩 세희 이야기를 하면서 미소를 짓곤 합니다. 이제는 하늘나라에 있는 세 희가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우리와 함께 나눈 시간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이제는 그곳에서 더 이상 아프거나 외롭지 않게, 기쁘고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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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우수상

우리 모두 마음 모아 ‘하하호호’ 서울성모병원 | 간호1팀 영성위원회 | 박명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오 25, 40)

간호1팀은 암환자를 돌보는 팀으로, 우리가 돌보는 환자들 중에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움 을 겪는 분이 많다. 우리는 그분들 중에 가장 어려운 이웃을 찾아 ‘이 달의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돌보기로 다짐하였다. 부서원 모두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슬로건도 만들고 영성 패널도 제작하여 간호사실 안에 붙여 놓고 서로의 영성활동을 격려하였다. ‘하하호호’ 간호1팀의 영성 슬로건이다. Action Plan Story ∙ 13


Hand, 사랑이 넘치는 안전한 손길로 Happy, 행복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Holy, 은총과 정성이 가득한 거룩한 마음을 다해 Hope, 밝고 따뜻한 희망을 채웁니다.

우리들의 예수님 우리들의 ‘예수님’이 되어 준 환자들은 청천벽력과 도 같은 암진단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환자, 항암이 힘들어 부쩍 짜증이 많아진 환아를 돌보느라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환아의 어머니, 두 번째 이식이라 걱정도 불안도 2배인 환자, 수술만 하면 금 방 퇴원할 거라 생각했는데 2달이 넘는 병원생활에 우울감과 좌절감이 심해진 환자, 가족들이 지방에 있 어 혼자 암투병을 하고 있는 환자 들이었다. 간호사들은 약과 주사가 아닌 우리들의 사랑과 정성을 모아 할 수 있는 특별한 간호를 고민했 다. 업무가 바빠 환자들의 이모저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던 간호사들은 이 달의 예 수님인 환자들의 어려움, 고민, 고통에 대해 깊이 있게 접근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다가가는 간호 사들의 마음을 느낀 환자들은 그들 내면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려주었다. 그 소중한 이야기를 통 해, 겉으로 드러난 환자들의 모습만을 보았을 때는 ‘왜?’라는 의문이 들었던 그들의 말과 행동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아픈 환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 엇인지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환자의 옛날 사진을 함께 보며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파이팅을 외쳐 주기도 했고, 담 당이 아닌데도 꼭 한 번씩 들러 “오늘은 좀 어떠세요? 제가 오늘은 담당이 아니지만 마음으로는 함께하며 응원할게요. 힘내세요!”라고 격려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환자와 주변을 세심히 살피며 작은 변화를 찾아내어 희망의 메시지와 연결시키기도 했다. “오 늘은 복도를 산책하는 걸음에 힘이 좀 더 생긴 것 같아요. 조금만 있으면 집까지 걸어가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 말에 부산이 집인 환자가 깜짝 놀라며 “집까지요? 한번 가 볼까요?”라며 호탕한 웃음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때로는 무료하고 답답한 병원의 일상에서 작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지금의 환자 모습(뼈만 앙상한 마른 몸매)과 나중의 모습(근육 빵빵 몸매)을 익살스럽게 표현하여 그려 주며, “이렇게 변화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숙제를 안겨 주기도 했다. 환자는 숙제를 받아 안 14 ∙


고 부인과 머리를 마주하고 고민하였다. “산책하자고 하면 싫다고 눈 흘기지 않기 하자!” 부인이 먼저 한 가지를 제안하자, 환자도 질세라 “그럼 오늘은 한 바퀴 돌게. 내일은 두 바퀴, 모레는 세 바퀴?” 스스로 공약을 내세우고,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이 한 번씩 안아 주기 해요.”라는 간호사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환자와 부인은 행복한 고민으로 어제는 지겨웠던 병원에서의 하루 를 오늘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보낼 수 있었다고 했다. 우리들의 예수님은 환자만이 아니었다. 답답해하는 환자를 위해 종일 휠체어를 운전하느라 쉴 틈이 없었던 부인의 곤한 잠자리를 깨우지 않기 위해 환자를 조심스럽게 휠체어에 태워 간호 스테 이션 한쪽에 모셔 두고 밤새도록 간호사들이 돌아가며 말벗을 해 드리기도 했다. 아침이 밝아올 무 렵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온 부인은 “선생님, 제가 깜빡 잠들었나 봐요. 우리 아저씨가 많이 힘들게 했죠?”라며 바쁜 간호사에게 자신의 일을 맡겼다는 생각에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기도 하였다. 우리들의 예수님인 환자와 가족들은 간호사들이 바쁜 업무 중에도 마음과 정성을 모은 작은 시 간들에, 관심들에, 그리고 손짓과 말 들에 감사해하고 희망을 찾고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고 이야 기해 주었다. 늘 혼자 눈물 흘리던 환자가 병동을 산책하며 다른 환자들과 밝게 이야기하는 모습 을 보이기도 하고, “선생님과 한참을 울고 났더니 마음이 좀 후련해졌어요. 이젠 털고 일어날게 요.”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짜증스럽게 대하 던 환자도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려고 노력하는 간호사들에게는 “선생님, 어제는 안 보이던데요.” 라며 먼저 인사를 건네주기도 했다.

‘HaHaHoHo’가 찾아준 보람 무엇보다 마음을 모아 ‘하하호호’를 시행하면서 간호사들 안에서의 가장 많은 나눔은 “힘들지 만 보람 있어요.”라는 말과 따뜻해지는 마음이었다. 우리들이 고민하고 도움을 주고자 하였지만, 환자와 가족들의 반응을 통해 우리 간호사들은 우리가 나눈 것보다 더 큰 은총을 우리 스스로가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바쁘고 힘든 업무 중에도 간호사로서의 존재 의미를 찾고 CMC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특별한 한 분을 위한 ‘이 달의 예수님’이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돌보는 환자와 가족 모두 를 이렇게 돌볼 수 있기를 희망하며 간호1팀의 ‘하하호호’는 2015년에도 계속될 것이다. ‘마음 모아 하하호호’ 활동을 하면서 간호1팀 모든 부서가 월 1회 대상자를 선정하여 부서원 모 두가 한마음으로 영성활동을 펼쳤고, 매월 각 병동의 대표 영성위원들이 모여 병동의 영성활동을 나누었다. 대상자의 특성에 맞게 매우 다양한 활동을 하여 풍성한 나눔의 시간이었지만 지면에는 대표적인 사례만을 다루었음을 밝힌다. Action Plan Story ∙ 15


Action Plan Story 우수상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성의교정 | 가톨릭조혈모세포은행 이식조정실 | 형옥자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롤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생활하고 일을 하시는지요? 저는 한 달 20~30명, 일 년에 약 300명의 기증자를 보고, 약 1,000명이 되는 기증 희망자와 통화를 합니다. 이렇게 별처 16 ∙


럼 수많은 사람, 그 중에 인연이 닿아 일 년에 약 150분 정도가 조혈모세포 기증을 하게 됩니다. 저는 비혈연 간(타인)에 조혈모세포(골수) 이식이 필요한 백혈병・혈액암 환자의 조혈모세포 이 식이 잘 이루어질 수 있게 기증자를 찾고, 설명과 설득을 하여 동의를 얻고, 원활한 조혈모세포 채 취가 가능할 수 있게 해 주는 조혈모세포 이식조정실의 형옥자 코디네이터(간호사)입니다. 환자 와 기증자가 만날 수 없는 ‘장기등이식에 관한 법률’에 의해 저희 이식조정실은 환자에게 기증자 의 조혈모세포 이식이 잘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혈모세포 이식이 필요한 백혈병・혈액암 환자의 경우 이식받지 않으시면 생존에 큰 위협이 오기에 국내에 일치자가 한두 분만 계신 환자분은 사실 저희 코디네이터가 기증해 주실 분을 찾 고, 그분을 설득하는 과정이 정말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열정이 이식만을 기다 리는 환자분과 환자 가족분을 생각하며 잘 유지되다가도 매일 같은 설명에 등록, 설득, 채취라는 반복적인 업무적 특성 때문에 지지부진해지기 마련이었습니다.

기증자를 찾아서 어느 날 혼자 사무실을 지키는데 한 아이엄마가 조정비용을 결제하러 사무실에 왔습니다. 한눈 에 보아도 수척해 보이는 젊은 엄마는 할부를 묻고 전화기 너머로 재단 지원 등을 묻던 제 또래의 아이엄마였습니다. 그렇게 그 엄마가 사무실을 나가고 나서 보니, 며칠 전 제가 내팽개쳐 둔 연락 처를 못 찾던 그 기증자, 바로 그분이 필요한 환아의 엄마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 저의 나태함과 게으름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고 그 기증자를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내에 유일하게 이 환아와 유전자가 일치하는 기증자!! 그렇게 그 기증자의 주변 및 지인, 이전 아파트 경비원분께까지 묻고 물어 결국 이 기증자분이 충북 근처의 한 고시원에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 날이 황금 같은 주말이었지만, 지금은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주말 아침부터 충북으로 서툰 운전을 해서 달려갔습니다. 고 시원을 보는 순간 제가 너무 의욕만 앞세워 달려온 게 아닌지 후회가 될 정도였습니다. 말이 고시 원이지…… 너무 외지에다가 남자들만 있는 조금은 스산하기까지 한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날 문고리를 잡고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백 번은 망설였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추격자’란 영 화가 매우 흥행을 했었는데, 그 문고리를 잡고 ‘추격자’의 하정우를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들어간 고시원의 총무님께 정황을 설명했지만, 제가 그토록 찾는 기증자분은 한 달에 한 번 들어올까 말까이며 주로 술을 드시고 가끔 막노동을 하신다고……. 그분의 방을 열어 주셨 는데 막 이사 온 방처럼 널린 옷가지며 컵라면들이 안 들어오신 지 오래 되어 보이는 방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날 그 고시원 앞에서 그 기증자분을 저녁까지 기다려 보았지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핸드폰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이 먼 길을 그냥 포기하 Action Plan Story ∙ 17


고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늦가을이었고 저녁이 되니 너무 추워서 방 앞에 메모를 남기고 왔습니다. 그러고는 거기 고시원 총무님께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연락을 드렸지만, 점점 귀찮아 하시는 눈치셨고, 잘 확인해 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삼고초려의 심정으로 그리고 그 다음 주말 저는 다시 충북에 있는 그 고시원에 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 방 앞 에 제 메모는 그대로였습니다. 그날도 헛걸음……. 다시 메모지 한 장을 더 붙이고 집에 가려고 차 운전대를 잡는데 여자의 육감이었을까요? 아니면 무모한 집착이었을까요? 발길이 너무 떨어지지 않아서 그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하루 묵고 다음 날 아침 다시 고시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제 메모지 밑에 커다란 연습장으로 메모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제 방처 럼 달려가서 읽어 보았습니다. 그분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찾아오셨는 데 미안하다. 자기도 힘든데 남을 돕는 건 상상조차 못 할 일이다. 그 모습을 본 총무님이 이제 그 만 오셔도 될 것 같다면서 하실 만큼 하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 메모지만 들고 차에 탔지만 도저히 포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마지막 메모지를 붙인 채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에 회사에 나가 환아와 환아 어머니 생각에 많이 고통스러웠지만, 제가 계속 조 금만 더 기다려 봐 달라고 희망 고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에 어렵게 병원에 전화를 했습니다. 이 기증자분은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요. 그렇게 한 열흘이 흘렀을까요? 모르 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앞자리가 충북이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 로 전화를 받았는데, 그분이었습니다. 고시원으로 와서 자세한 설명을 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순간 너무 기쁘고 정말 천장까지 폴짝폴짝 뛰었지만, 순간순간 영화 ‘추격자’가 떠오르기도 했 습니다. 그렇게 그날 밤에 달려가서 그분을 고시원에서 뵈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어쩌면 반했 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본인은 연극영화과를 나와 극단에 있다가 사고로 다리를 다쳐 잘 회복이 안 되면서 주연 자리에서 조연, 그러다가 일자리가 끊기고 자신감도 상실하면서 하루하루 술로 버티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 메모를 보고 처음에는 자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렇게 불쑥 찾아와 화가 났지만, 제가 붙여 놨던 마지막 메모, “당장 죽 을 만큼 힘드신 거 아니면 어린 환아에게 조혈모세포 기증을 도와주세요. 저도 많이 도울게요.”라 는 말에 정신이 들었다고 말을 하시더군요. 그렇게 그 기증자분은 건강검진에서 기증하기에 적합 하다는 소견까지 통과하시고 환자와 유전자가 100% 일치된 채로 건강히 기증해 주셨습니다. 물 론 환아도 이식이 잘 되어서 퇴원까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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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느낀 생명나눔의 가치 저희 조혈모세포은행에서는 매년 기증한 기증자분과 가족분들을 모시고 ‘기증자 감사의 밤’ 행 사를 하는데, 제가 그 행사의 사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너무 떨려서 식순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 었는데 오른쪽 맨 앞 테이블에 그 기증자분과, 같은 극단의 배우분들이 많이 와서 활짝 웃고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충북까지 운전대를 잡았던 제 무모함, 그리고 고시원 방문 앞 메모지, 그만 포기하시라는 고시원 총무님의 말, 그리고 충북에서 걸려온 전화, 그리고 환아의 퇴원 소 식……, 모든 게 스쳐지나갔습니다. 제가 포기하고 놓았더라면 그냥 아픈 환아, 그리고 젊은 아이 엄마, 그리고 술만 드시는 기증자…… 아무런 인연이 아니었겠죠? 그렇게 그 기증자분과 오래도록 눈을 마주쳤던 것 같습니다. 말은 하지 않아도 눈빛 속에서 기 증자분도 희망과 생명나눔의 가치를 느끼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그 수많은 환자, 기증자를 그냥 차트의 등장인물로 보지 않고 특별한 인연을 만들어, 조혈모세포 기증이라는 CMC 생명 존중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생명의 봉사자가 될 것입니다.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롤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Action Plan Story ∙ 19


Action Plan Story 우수상

반디*야, 너는 별처럼 빛날 거야 서울성모병원 | 수술실C Unit | 진종임

“4월 19일 06:30 뇌사 추정자(남/OO세/사고사) 모시러 OOO 병원으로 출발” – 장기이식센터

4월의 봄은 다른 달의 봄과 다른 2가지 의미를 가진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 하는 것들이 진정 무엇인가가 되어 그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실명 대신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20 ∙


되는 의미,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한 한 아버지가 그 자식을 버리면서까지 보여 준 그 희생적인 사 랑의 부활이라는 탄생의 의미.

눈부신 봄 햇살이 지평선 위로 비추기 전보다 먼저 일어난 19일 토요일 새벽 아침. 그날 19일은 부활절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지평선 너머 수면 위로 떠오르는 그 봄기운의 눈부 심은, 끔찍이 좋아하는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두근거림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설렘을 기다리 는 소녀처럼 4월의 봄이 주는 의미를 조금이라도 빨리 느끼기 위해 그날은 유독 일찍 눈이 떠진 듯 하다. 그날은 유독 뭔가 모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대감과 설렘 그리고 그 어떤 훈훈한 기운이 내 마음속을 가득 메웠다. 이 오묘한 느낌과 기분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이런 의문을 가졌다. 특별히 정해진 약속이 없던 날이었기에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세워 보자.’라고 다짐 하고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그 순간 나의 핸드폰에서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들려왔다. ‘누구의 연 락이지?’라는 생각과 함께 ‘혹시 그것을 알리는 연락인가?’라는 두 가지의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런데 그 이른 아침에 내 핸드폰을 울린 그 연락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 이것이 나에게 주는 무슨 뜻이 있겠지 수술실 간호사로서 근무한 지 3년이 지난 후, 일반적인 외과수술의 지원 및 신장이식, 간이식 수술을 함께할 수 있는 간호사로서의 역량이 쌓이자 ‘수술실 간호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장기 이식팀’에 소속이 되었다. 장기이식팀에 처음으로 소속되었던 2013년 11월, 그리고 그 달 3일은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특별한 날이다. 1987년 11월 3일, 세상이 주는 빛을 처음으로 본 나는 그 이후 2013년 11월 3일에 수술실 간 호사로서 장기이식팀에 소속되어 처음으로 그 팀의 일원으로 역할을 하였다. 그날이 비록 일요일 이었음에도 수혜자의 건강 상태의 갑작스런 악화로 시간을 다투어 하루라도 빨리 간이식을 받아 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예정되었던 정규 스케줄보다 빨리, 응급으로 간이식 스케줄을 잡고 시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괜한 짜증이 나는 일에도 “뭐 이런 일쯤이야.”라고 말하면서 쿨하게 넘어가는 나였지만, 내 생일 전날에 생체 간이식을 한다는 사실을 미리 통보받 고 그때만큼은 나도 모르게 “주여!”를 외치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얼굴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 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준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잃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고,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좋은 일이라는 굳은 믿음의 빛’ 2013년 11월 3일을 시작으로 그때부터 3개월의 주기로 한 달씩 장기이식팀에 소속되었다. 그 리고 그 이후에 나는 아무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모든 동료들이 알고 있는 하나의 사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Action Plan Story ∙ 21


‘종임이가 장기이식팀에 속해 있는 달은 뇌사자가 많이 발생한다.’ 이 말에 손사래를 강하게 치면서 부인하고 싶었지만, ‘정말 나 때문인가요?’라고 내 자신이 스 스로 되묻고 싶을 정도로 나는 정말 누구보다 많은 뇌사자의 수술을 맡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 상하게도 내 마음속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더욱 굳세어져 갔다.

그래, 분명 무슨 뜻이 있을 거야 Nursing Presence(간호사와 함께함)는 간호사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환자와 함께 있는 것으 로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고 내적인 힘을 강화시키는(empowering) 간호중재를 말한다. 이브닝 근무로 가는 오후 출근길, 병원 1층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로부 터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는 “1층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문을 열었다. 동시에 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는데, 그곳에는 한 번 수술방에서 만난 적이 있는 한 분이 두 손으로 제스처를 취하면서,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엄마처럼 보이는 한 어른과 얘기하고 있었다. 수술방에 있으면서 수많은 환 자들을 만나고 스쳐지나가지만, 그리고 그들을 위해 직접 수술에 참여하지만 그 환자들의 얼굴을 한 사람이라도 정확히 기억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바퀴 달린 긴 침대에 누워 수술실 침대 위로 옮겨질 때 환자의 얼굴을 보는 것이 전부인 수술실에서는 그 환자의 눈빛과 표정을 통 해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불안감의 감정만 잠시 인지할 뿐 구체적으로 그 사람의 생김새까지 기억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술방에서 딱 한 번 보았고 직접 그 수술에 참여한 것도 아닌, 그 저 그 수술을 도와주기 위한 도움자의 역할로서 그 방에 들렀던 그 순간에 만난 그 사람을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즉시 알아본 것이다. 나는 1층에서 5층으로 올라가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그 환자의 몸짓과 얼굴 전체에 퍼져 있는 환한 웃음에 매료되었다. “아아, 조금 숨 쉬기 편해졌어요.”

신경외과 방에서 갑자기 외과수술을 국소마취로 진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수술을 도와주기 위해 잠시 들렀던 한 수술방. 들어가자마자 나는 환자가 가진 풍선같이 터질 듯한 큰 배에 놀랐다. ‘아니 배가 어떻게 저렇게 팽팽하게, 높게 부를 수가 있지?’ 남산보다 더 높이 솟은 배를 보면서 단번에 임신한 여성의 배는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동안 임신한 여성의 배를 제왕절개술의 수술 을 하면서 수없이 봐 왔었지만 그보다 2배나 더 높은 그 환자의 배는 우리나라의 제일 높은 산인 백두산에 비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수술방에서는 교수님 2명, 임상강사 1명, 총 3명이 모여 그 환자가 가지고 있는 션트(shunt)를 통해 복강 내에 모인 복수를 빼내고 다시 그 복수를 혈관에 도 로 넣어 주는 시술을 하고 있었다. 1,000ml의 빈 생리식염수(normal saline)병에 계속해서 복수 는 차 갔고, 급기야는 준비된 생리식염수의 빈 병이 모자라 다른 곳에서 더 구해 와야 했다. 많은 22 ∙


양의 복수가 갑작스럽게 빠져 나온 탓에 환자는 “춥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안 춥습니다.”라 고 의식적으로 말하고는 있었지만, 거의 뼈밖에 남지 않은 사지의 무의식적인 오들오들한 떨림은 지금 매우 힘든 상태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어떤 무언가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상황이 비참하고 혹독했음에도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긍정적인 태도로 초지일관했던 그 환 자는 다른 환자들과 같이 쉽게 잊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지 만 잊을 수 있는 환자, 아니 어떻게 내 삶 속에 그렇게 불쑥불쑥 생각날 수 있을까 하고 나 자신 스스로가 놀랍게 생각할 정도로 첫 만남 이후 참 많이 내 삶 속에 생각이 난 환자. 그리고 그 만남 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환자를 2013년 4월 19일 저녁 11시에 수술방에서 환자와 의료진의 관계 로 다시 만났다. 나와 그 환자의 재회는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그 환자와 처음부터 마 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면서 ‘그 자리’를 지켰다. ‘그것’과 ‘그 자리’는 늘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내 마음속으로 받아온 ‘나를 향한 그 무언가의 뜻’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환자와의 만남이 끝난 4월 20일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한 나의 아버지의 그 사랑이 다시금 나타 나는 ‘부활절’이었다.

밤하늘을 수놓는 수억 개의 별처럼 반디를 빛나게 해 주세요 ‘반디’. 그 환자는 그가 있는 어느 곳, 어느 상황에서나 너무나도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 그 자체 만으로도 빛을 냈던 것처럼 거기에 어울리는 ‘반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반디’라 는 이름도 참 마음에 들었다. ‘반디’ 환자와의 만남은 만 3년차 간호사의, 주변의 사소한 것에 감 사함을 잃어 가는 무미건조하고 황량했던 그 사막 같은 마음에 한 줄기 빛으로 다가와 주었다. 나 는 그 ‘반디’라는 이름을 두고서 항상 기도했다. ‘반디’가 사막 같은 나의 마음에 한 줄기 오아시스 와 같은 희망의 빛을 비추어 준 것처럼, ‘반디’가 있는 어느 곳에서든 주변을 환히 비출 수 있는 빛 나는 존재가 되게 해달라고 말이다. ‘반디’는 태어나면서 장폐색으로 인한 수술을 받았고 2살 때 장간막림프관확장증이라는 병명을 진단받았다. 이 질환은 희귀난치성 중증질환으로 의사 경력이 30년 이상인 교수조차도 “말로만 듣던 환자를 처음 봤다.”라고 말할 정도로 드문 질환이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따라다닌 이 질병으로 인해 배 둘레가 120cm가 될 정도로 복수가 차고, 빼 내어도 계속 차오르는 상황이 반복된 삶을 살았다. 이런 오뚝이와 같은 모습을 계속 마주하면서 자란 ‘반디’는 본인의 모습에 자신을 잃어서 대인기피증까지 생겼고, 림프관으로 빠져나가는 심한 단백질의 유실로 인해 다리에 심한 부종이 수반되고 전신에 근육이 부실한 상태로 신장은 150c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Action Plan Story ∙ 23


소장이식 받기를 너무나도 원해요.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돈 벌면서 일하고 싶어요 장기이식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장기를 건강한 다른 사람의 장기로 대체, 이식하여 그 기능을 회복시키는 의료행위,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치료법’이다. 더 이상 생존 가능성이 없는 장기를 가진 말기 질환자들에게 ‘장기이식’은 유일한 치료법이자 그들이 부여잡고 있는 마지막 삶 의 희망이다. 장기이식은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장 아름다운 그 누군가의 선물로서 그 누군가 에게 더 이상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손에 움켜쥘 수 있는 ‘보이는 희망’인 것이다.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 삶 속에서 그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를 끊임없이 찾게 했던‘그 것’은 바로 ‘뇌사자 발생으로 인한 장기이식 업무’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그 자리’를 지키는 법을 배웠고, ‘그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도 함께 얻었다.

세상살이 참 힘들지? 네 힘으로 안 되면 하늘의 힘을 빌려 보렴 간절함.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한 상태.’ 누구나 인생의 한 순간에서 너 무나 절박한 나머지 우리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애원하는 어느 한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간절함 의 애원은 화살 있는 기도가 되어 우리 삶에 다시 돌아와 영향력을 발휘한다. 장기이식을 하면서 이식을 받는 모든 환자뿐만 아니라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에 오르는 모든 환자들은 그 누군가를 움직이게 할 정도의 간절한 꿈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반디’를 만 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간호사로서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간호는 수술 중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간절한 내적인 힘을,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돕고 있는 그 손길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 간절함에 힘을 더하는 것이었다. ‘반디’의 그 간절함은 우리를 항상 도우시는 그분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그 감동은 그분을 움직 이게 만들었다. ‘반디’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그 간절한 소망에 그분의 도우심이 합쳐져 ‘소장이식 성공’이라는 ‘부활의 기적’을 일구어 냈다. 소장이식은 이식의 특성상 이식 받기도 힘들고, 이식을 하더라도 장기의 특성상 감염 위험성이 높아 수혜자로부터의 거부 반응 및 감염으로 인한 합병증 등의 우려가 훨씬 크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반디’의 간절함과 그분의 도우심 앞에서는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그분이 손을 뻗어 당신을 도와주고 싶을 만큼 간절해지십시오 일본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いなもり かずお, Inamori Kazuo)’는 ‘왜 일하 는가’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해답을 내놓는다. ‘그분이 손을 뻗어 당신을 도와주고 싶을 만큼 열 심히 일하십시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그분이 손을 뻗어 나와 너를 도와주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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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큼의 간절함으로 그 사람과 함께하십시오.’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간호사는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든 삶의 치유자는 오로지 그분뿐이다. 우리 간호사가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일은 그 환 자가 가지는 그 간절함에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몸동작으로 그들의 간절함이 꺾이지 않도 록 끝까지 그 환자와 함께 그곳에 머물러 주는 것(Nursing presence)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치유자의 도우심으로만 일궈 낼 수 있는 ‘부활’이라는 새로운 생명력을 탄생시키는 하나의 근원이 된다. 누구보다 많은 뇌사자들, 그리고 이식을 받는 환자들과의 만남 때마다 내 마음속에 떠오른 생 각, ‘그래, 이것이 나에게 주는 무슨 뜻이 있겠지.’의 의미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즉, 이것은 내가 더 나은 간호사로 성장할 수 있는 ‘가르침’이었고, 간호사로서 가져야 하는 ‘치유에 대한 의미’, 그 리고 간호사로서 끝까지 그들과 함께 있어 주라는 ‘내 인생의 소명에 대한 음성’이었던 것이다. 2013년 4월의 봄은 다른 봄과 다른 2가지 의미를 주었다. 나에게 간호사로서 환자들과 함께 있 음으로 해서 그들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의미,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그분의 치유의 손길에 참여하는 것으로써, 환자들의 의료진이 아니라 그들의 동반자로서 영원히 함께하 고 싶다는 의미로 말이다.

Action Plan Story ∙ 25


Action Plan Story 우수상

따뜻한 마음, 믿음의 마음 서울성모병원 | 가정간호 Unit | 유영자

“낫게 해 주세요. 제발 낫게 해 주세요.”라고 나의 손을 잡고 부탁하는 모습은 계속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어르신의 딸은 성당에서 청소하는 박마리아* 씨다. 그는 혼자서 두 딸을 기르면서 친정어머니를 돌보고 있었다.

2013년 2월 20일, 그 어르신은 특별한 병력은 없었지만 거동이 불편하여 휠체어에 의지하여야 이동할 수 있었고, 거의 집에서만 생활하시는 상황이었다. 여의도성모병원에서 관절염 진단을 받 았으나 연세가 많아 특별히 병원 치료는 안 하고 1년 동안 상처가 나면 집에서 소독을 하곤 하다 *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실명 대신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26 ∙


가 염증이 악화되었다. 치료는 해야 되었지만 어르신이 병원 가는데 움직일 수도 없고, 비용 걱정 에 병원에 모시고 갈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가정간호사에게 어머니 치료를 부탁하였다. 방문 당 시 어르신의 왼쪽 복숭아뼈에 농양이 생겨서 터지면서 고름이 나왔었다. 고름 주머니가 세 군데 있었고, 전체가 빨갛게 발적되어 있었다. 그 동안 진료하던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와 적극적 치 료를 받도록 권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나는 가정간호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자신도 없었고 엄 청난 부담으로 다가왔었다.

다리 절단의 진단을 받다 급하게 본원 가정의학과에 진료를 보게 하고 가정간호 의뢰를 받아서 상처 배양검사를 하고 항 생제로 치료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매일 매일 방문하여 상처 세척 및 소독을 시행하였다. 방문 치 료 2일 후 피와 고름이 섞인 분비물이 많아지고, 고열과 통증을 심하게 호소하셨다. 여의도성모병 원으로 환자를 보냈다. 병원에서 배농술을 시행하였고 진단명은 ‘좌측골관절염’이었다. 뼈에 염증 이 생겨서 잘 낫지 않아 호전 없으면 발목 밑으로 절단해야 한다고 하였다. 배농술 후 나에게 상 처 세척 및 소독 의뢰를 하였다. 어르신은 나의 손목을 잡고, “낫게 해 주세요, 제발 낫게 해 주세 요. 죽으면 죽었지 다리를 자를 수는 없어요.” 하고 애절하게 울면서 호소하였다. 일단 환자를 의뢰 받았으니 간호 계획을 세우고 환자, 보호자에게 교육을 시켰다. 나는 열심히 상처 소독과 관리를 할 것이니, 보호자는 어르신에게 영양 공급이 잘 되도록 고단백 식이와 균형 있는 식단을 드리고, 환자는 기도 열심히 하시라고 부탁하였다. 방문할 때마다 환자는 머리를 감 고 속옷까지 갈아입고는 벽에는 대문짝만 하게 검은 글씨로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문’을 써서 붙 여 놓고 잘 볼 수 있도록 하여 이 기도문을 상처 소독 중에도 큰소리로 벽을 바라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씩이고 읽으며 기도하였다. “가난한 저를 풍요롭게 하시고 저를 안전한 피난처로 인 도하소서…….” 환자 옆 구석엔 닭백숙 끓는 냄새가 났다. 박마리아 씨가 아침에 사제관 청소하러 가기 전에 어 머니 점심에 드시도록 만들어 놓았다고 자랑하셨다. 어르신은 상처가 조금 호전되자 이런저런 집 안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본인은 나이가 차서 갈 나이지만 불쌍한 내 딸 때문에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앞으로 2~3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위는 택시 운전을 하였는데, 도박에 술에 집 식구들을 소홀히 대하다가 몇 년 전에 서울성모병원에서 위암으로 죽었다고 했다. 손녀 둘이 있 는데 큰딸은 전문대학에 다니고 작은딸은 고3이므로 돈이 많이 들어가서 박마리아 씨가 사제관 청소하고 주말에 식당에서 일을 해서 두 딸을 키우는데, 불쌍해서 눈을 감을 수가 없다고 했다. 손 녀딸들은 철이 없어서인지 멋만 부리고 엄마 일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셨다.

Action Plan Story ∙ 27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실로 마음은 상처를 낫게 해 주고 싶었지만 마음같이 분비물이 감소되거나 상처가 호전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환자는 통증이 있어 밤에 잠을 설친다고 했다. 아무리 혼신을 다하여 상처 치료에 정성을 쏟아 부어도 호전되지 않는 상처를 보고 나는 자신에 대해 실 망을 느끼고 포기할까 갈등하면서 마음 아파했다. 그러나 어르신 얼굴이 떠오르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치료에 임했다. 우연한 기회에 식당에서 동료 가정간호사들과 같이 식사 중에 이러한 상황을 이야기하다가 누 군가가 어떤 재료를 추천하면서 사용해 보라고 했다. 자기도 비슷한 상황에 이 재료를 사용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호전되지 않았기에 희망을 가지고 사무실에 급히 와서 물품을 찾아보았다. 오래 전에 다른 욕창환자가 사용하고 남은 물품이 조금 남아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다음 날 일찍 환자 집에 방문하여 환자의 상처를 세척하고 그 제품을 상처 위에 붙이면서 좋은 재료이므로 상처가 좋아질 수 있을지 기대해 본다는 말을 해 드렸다. 할 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기뻐하시면서 더 큰 소리로 기도문을 읽기 시작하였다. 다음 날 환자 집을 방문하였다. 환자에게 통증 여부를 물었더니 밤에는 통증이 없어서 잘 잤다 고 말씀하셔서 희망을 갖고 설레는 마음으로 상처 부위를 열어 보았다. 분비물이 많이 줄었고 상 처 주위의 발적도 조금 감소되어 있었다. 가슴이 벅차고 뛸 듯이 많이 기뻤다. 급하게 병원 가정간 호 사무실에 가서 그 제품을 가져와서 2~3일에 한 번씩 상처에 붙였다. 방문할 때마다 상처가 조 금씩 호전되고 있었다. 상처가 호전되어 가고 있어서 이제는 상처 치료하는 동안 움직이지 않았 던 발목 운동을 해 보고, 조금씩 몸을 움직여 보라고도 하였다. 구축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환자는 오래간만에 휠체어를 타고 운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상처 부위에 분비물이 증가되고, 어르신은 통증을 다시 호소하였다. 며칠 상처 소독 을 하였으나 분비물은 줄지 않았다. 이렇게 상처는 악화와 호전이 반복되었다. 어르신은 “여름 오 기 전에 나을 수 있을까요? 여름이 되면 더워서 상처가 안 나을 수 있으니 여름 되기 전에만 나으 면 될 텐데…….” 하고 말씀하셨다. 2014년 4월 29일, 상처 부위에 통증은 없으나 분비물이 줄지 않아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여 주치의 소견을 다시 듣고 오도록 병원으로 다시 보냈다. CT를 찍은 결과는 뼈의 염증은 좋아졌고 나오는 분비물은 고였던 분비물이 나오는 것이므로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세척하고, 붕대로 닫 아 놓지 말고 열어 놓으라고 하여 그렇게 상처 관리를 유지하였다. 골관절염은 나았다니 너무 기 뻤다. 그 이후로 2~3일에 한 번씩 방문하여 6월 말까지 상처를 세척하고 소독하였다. 4개월 동안 참 많이도 고민하고, 절망과 희망을 넘나들며 힘들게 치료하였는데 너무나 다행이다. 많이 우려했 었는데 정말 여름이 되기 전에 상처는 다 나았다. 다리를 절단해야 된다고 진단 받았었는데 치유 28 ∙


가 된 것이다. 가정전문 간호사로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찬 날이다. 그런데 상처는 나아졌지만 치료비가 문제였다. 의료급여 대상자이므로 치료비 감면 혜택을 받 지만 욕창 재료는 일정 부분을 제외하고 의료보험이 안 되어 비용이 엄청나게 나왔다. 조심스럽 게 보호자에게 치료비 일부를 비춰 보았더니 빚을 내든지 성당에서 가불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고민 끝에 가정간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성모자선회비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의뢰를 하였고 고맙게도 모두 성모자선회에서 지원해 주셨다. 치료비도 모두 해결되었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이 내용을 전해 주었다. 서울성모병원에 감사하고, 도와주신 성모자선회에 감사한다고 몇 번이고 말 씀하셨다.

기도의 힘으로 얻은 행복 비록 아직 걷지는 못하지만 휠체어에 앉아서 스스로 움직이고, 딸이 일 끝나고 집에 오면 방안 에서 반갑게 맞으신다고 한다. 어르신과 보호자가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셨다. “어르신의 기도 덕분에 어렵게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라고 그 동안 나만 생각해 왔던 말을 비로소 전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엄청난 치유 능력이 잠재되어 있고, 그것이 어 떤 계기로 자극을 받으면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에게 주어진 힘을 사용해서 되도록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기도의 힘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우 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큰 파도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 상처 치유 경과 사진

2013년 2월 22일

2013년 4월 22일

2013년 6월 20일

복숭아 뼈에 있는 농양덩어리

골관절염으로 인한 농양 배농 후 모습

상처가 치유되고 있는 모습

Action Plan Story ∙ 29


Action Plan Story 장려상

내리는 비를 막아 줄 수는 없지만 비가 오면 항상 함께 맞아 줄게 서울성모병원 | 소아중환자실 Unit | 강바람

어느 때부터인가 영성체 후 묵상을 할 때 나는 항상 누군가를 떠올리며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 다. 앞으로의 내 인생과는 상관없을 수도 있는 그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아중환자실의 희망*이 희망이는 진단명이 무려 16개인 중환자였다. 출산 전부터 배꼽탈장을 진단받았고, 세상으로 나 *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실명 대신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30 ∙


온 지 겨우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간과 장을 원위치 시키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유착과 선천성 유문협착증까지 겹쳐 지속적인 구토로 인한 폐렴과 호흡곤란이 희망이를 괴롭혔다. 이후 5차례의 수술을 견디면서 심폐소생술과 수차례의 고비를 넘겼다. 치료를 위한 온갖 기구들이 희망이의 살 을 파고들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심했을 텐데, 머리를 쓰다듬고 토닥토닥 하고 있으면 언 제 그랬냐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언제나 피가 마르게 바쁘고 지친 병원의 일상에서 점점 부정적 으로 변해 가던 나에게 희망이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심각해진 폐동맥고혈압과 정맥귀환을 막고 있는 혈전의 악화로 희망이의 얼굴은 눈조차 뜨기 힘들 만큼 퉁퉁 부어 갔다. 인 공호흡기의 압력으로 모자라 앰부배깅(ambu-bagging) 하지 않으면 산소 포화도가 유지되지 않 을 만큼 호흡곤란도 더 심해졌다. 13시간 동안 앰부배깅을 한 날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면서 나는 하느님께 기도했다. 하느님의 뜻이 희망이를 하늘로 불러들이는 것이라면 고통 없이 평온함 가운 데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희망이를 더 안타깝게 했던 것은 엄마의 부재였다. 미혼모였던 희망이 엄마는 처음에는 가끔 면회를 왔지만 희망이의 상태가 점점 위중해지자 연락이 두절되었다. 오로지 혼자 견뎌야만 하는 현실이 희망이를 더욱 궁지로 몰아갔다. 앞으로의 검사와 치료를 위한 동의서를 작성해야 하는 엄마가 사라지자 병원에서는 사회사업팀을 통해 엄마를 수소문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경찰 이 동원되었다. 이후 한참 만에 엄마가 나타났을 때 희망이의 상태는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희망 이의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원하지 않은 임신이었더라도 이렇게 매몰찰 수 있을까……. 그런데 약물치료를 시작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희망이의 상태는 좋아졌다. 인공호흡기의 도움 도 점차 줄어갔고, 목도 가누기 시작했다. 기적 같았다. 이 모든 것의 첫 순간을 엄마와 함께하였 으면 좋았을 텐데, 한편으론 마음이 아팠다. 그날은 날씨가 좋은 주말 점심이었던 것 같다. 면회 시간이 아닌데 누군가 중환자실 초인종을 눌러 내다보니 희망이 엄마였다. 희망이는 울음을 멈추 고 가만히 엄마를 바라보았다. 나는 희망이 엄마가 흐느끼면서 나지막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희망아, 엄마가 많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엄마 품에 안겨 있는 희망이를 생각하면서 또 한 번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보호자의 심리적인 지지가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느꼈고 우리는 사회사 업팀을 통해서 보호자에게 퇴원 후 희망이의 양육을 설득하고 경제적인 도움을 연계하였다. 보호 자는 직업 훈련을 받느라 면회도 자주 오지 못했다. 겨우 한 달에 한두 번, 20분 정도가 모녀에게 허락된 시간이었지만 하루하루 희망이를 향한 엄마의 사랑이 커져 가는 것을 느꼈다.

하느님이 내려 보내신 미소 천사 몇 달이 지나고 웃음 공주 희망이는 하루가 다르게 더욱 상태가 좋아지고 있었고, 소아중환자 Action Plan Story ∙ 31


실을 거쳐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명 인사가 되었다. 간호사들은 예쁜 머리핀을 사서 희망이 머 리에 꽂아 주기도 하고 라텍스 장갑을 풍선처럼 만들어 모빌 삼아 달아 주기도 했다. 엄마를 대신 하여 희망이 양말을 직접 집에 가져가 빨아오고, 땀을 많이 흘리는 희망이를 위해 작은 선풍기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하루하루 희망이의 침상에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 쌓이고 쌓여 갔다. 희망이 가 인공호흡기 없이 숨을 쉬고 기관절개관을 제거하던 때에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기뻐하였 다. 희망이와 비슷한 질환으로 입원 중이던 아가들의 보호자들에게도 희망이는 희망과 용기를 주 었다. 하느님께서 이 미소 천사를 내려 보내신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태어나서 한 번도 병원 밖을 나간 적이 없는 희망이의 첫 번째 생일이 다가올 즈음, 누가 먼저 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는 모두 희망이의 돌잔치를 준비했다. 간호사들이 사비를 모아 떡 케이크 와 선물을 샀고, 소아외과 의사 선생님들, 원목실 수녀님들이 모두 모여 돌잔치를 하였다. 주사기, 청진기, 연필, 실 등이 돌잡이로 놓였고, 그 중에 희망이가 돈을 집어 들어서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기도 하였다. 두 번째 생일은 엄마와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며, 그 동안 희망이의 사랑스런 모습을 보지 못한 엄마를 위해 희망이 사진과 희망이를 위한 글을 모아서 앨범을 만들 어 엄마에게 전달했다. 그러고서 몇 달 후, 희망이는 퇴원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해졌고, 정말 기쁘게도 희망이 엄마는 희망이와 함께 살기로 최종 결정을 하였다. 다윤이가 퇴원하던 날, 너무나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이를 앞으로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슬프기도 하였다. 소아중환자실 3번 침대는 희망이의 자리인 듯 허전함이 남았다. 그러던 중, 외래 진료를 마치고 희망이가 엄마에게 안겨 잠깐 인사를 하러 왔다. 그런데 희망이는 엄마 품에 꼬옥 안긴 채 낯을 가리며 당황스런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 보았다.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희망이의 모습에 조금은 섭섭했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병원에 서의 힘들었던 기억은 다 잊고 엄마와 행복한 일상만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이 의 엄마도 희망이를 품에 안고 등에는 이동용 산소통을 메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 고 계셨지만 표정이 참 밝아 보였다.

고마워, 희망아 소아중환자실 간호사 선생님 한 분이 어젯밤에 희망이가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꿈을 꾸었 다면서 웃으셨다. 꿈이 현실이 되기를 소망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작은 의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항상 기도한다. 그 꿈이 현실이 되게 해 달라고. 그리고 힘든 순간마다 잘 견뎌낸 희망이이기 에, 항상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셨기에, 이번에도 확신에 찬 희망을 걸어 본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희망이 생각에 또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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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비를 막아 줄 수는 없지만 비가 오면 항상 함께 맞아 줄게. 힘든 일이 있어도 기쁜 일이 있어도 함께할게. 물론 모든 걸 다 줄 수는 없지만 작은 행복에 미소 짓게 해 줄게. 무슨 일이 있어 도 너의 편이 돼 줄게. 언제까지나. 항상 마음은 함께할게. 행복해야 해. 고맙다 희망아.’

Action Plan Story ∙ 33


Action Plan Story 장려상

소중한 인연 여의도성모병원 | 8층서 Unit | 권진희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는 늘 기쁨과 슬픔이 조화롭게 뒤섞이게 되고, 그 사이에서 인연을 맺 어 가게 된다. 나 또한 20년이라는 병원 생활을 하며 누군가와 수많은 인연을 맺어 왔다. 3년 전쯤, 봄이라고 하기엔 너무 뜨거웠던 4월, 내 기억 속에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 하나 떠오른다.

말기암 그녀와의 인연 평상시 약간의 소화불량 증상이 있었지만 괜찮겠지 하며 지내다가, 통증이 심해져 병원을 찾았 다가 위암이 의심되어 정밀검사를 받기 위해 입원한 환자분이 있었다. 여러 가지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그녀에게 전해진 소식은 온 몸에 암이 전이가 되어 수술도 할 수 없다는 내용이 34 ∙


었다. 이제 막 진단을 받았는데 말기암이라니! 삼십대 중반의 젊은 여인에게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해 볼 수 있는 선택은 항암치료뿐이었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씩 입원하여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항암요법을 받으면서 오심, 구토 로 잘 먹지도 못하고 기운도 없어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녀는 입원할 때마다 밝은 표정으로 바쁘 고 힘들다며 간호사들을 걱정해 주었다. “밥도 못 먹고 일해서 어떡해요. 앉아 있을 시간도 없어 서 다리 많이 아프죠?” 하며 물이라도 먹으라며 내 손에 음료수를 매번 쥐어 주고, 간호사들 힘들 게 하면 안 된다고 웬만해서는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복도에서, 병실에서 마주 칠 때마다 수고가 많다며 격려를 해 주는 그녀의 마음이 참 고마웠다. 내가 오히려 그녀를 격려해 주 고 위로해 주어야 하는데 늘 많은 시간을 함께해 주지 못해 미안했다. 나에 대한 그녀의 배려 때 문에 나도 그녀에게 더욱 잘 해 주려 노력하게 되고, 그녀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언제나 배려가 깊고 명랑한 그녀는 그녀의 어두운 내일을 스스로 환하고 밝게 비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 었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쌓아 갔다.

그녀가 진단을 받고 다섯 달이 지나갔다. 다섯 번째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했을 때 그녀는 평소 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프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 그녀가 아프다고, 힘들다고 말할 힘조차 없어 축축한 눈빛으로 고통스러움을 표현했다. 입원한 지 하루 만에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져 갔 고 임종을 준비하기 위해 호스피스 병실로 가야 했다. 그녀는 5개월 전 이런 순간이 당연히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죽음이 자신에게 만큼은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고, 오더라도 아주 천천히 다가올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한 남편의 아내로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 어머니의 딸로서, 며느리로서 배려가 깊은 그녀가 얼마나 숨 쉬지 않고 바쁘게 달려왔을까? 남편의 아침과 아이의 간식을 챙기기에 급 급하면서 자신의 몸속에 암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정작 자신의 건강을 돌볼 여유는 없었 을 것이다. 남편의 출근 준비를 도우면서 속이 쓰렸고, 아이의 간식을 준비하면서도 배가 아팠을 텐데……. 조금만 더 병원을 일찍 찾았더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착하게 살았던 대가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상태가 악화되어 자신의 생을 마감할 준비조차 하지 못했을 그녀가 안쓰럽고 또 안쓰럽다. 다섯 살 난 그녀의 아들과 좋은 추억도 더 만들어야 하고, 자신의 남편과 아들을 누구에겐가 부탁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녀는 죽어 가고 있는 자신보다 자신 없이 살아갈 가족들 걱정을 더 많이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공황 상태에 빠져 잠시 시간을 멈추고 있었다.

Action Plan Story ∙ 35


생의 마지막…… 그리고 눈물의 대화 그녀가 호스피스 병실로 간 뒤 나는 그녀의 병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웃는 얼굴로 힘내라는 따 뜻한 격려의 말 대신 눈물을 보일까 봐 병실 밖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몇 번이나 발걸음을 돌렸다. 아니, 병실 밖에서 나도 모르게 감출 수 없는 눈물을 쏟아내며 문고리를 꼭 잡고 서 있었다. 그녀 에게 죽음이 임박함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다섯 살 난 아들이 엄마를 찾아 병원에 왔다. 엄마 만난다고 설 레며 찾아온 아이! 그러나 그 아이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엄마에게 안기는 대신 엄마가 어디 있 는지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었다. “엄마는 어디 있어? 엄마 어디 있냐고?” 다섯 살 난 아들은 눈앞의, 병색이 짙은 엄마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펑하고 가슴에 큰 구 멍이 난 것 같았다. 그녀에게 암으로 고통 받으며 죽어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다섯 살 난 아들 을 두고 혼자 다른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일 텐데……. 얼마나 살고 싶을까? 그런 엄마의 마 음은커녕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린 아들을 바로 앞에 두고 그녀가 받았을 상처가 얼마나 컸 을까? 또 한 번 눈물이 울컥 쏟아진다. 다섯 살 어린 나이에도 엄마와 헤어질 준비를 할 수 있을까?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엄마를 몰라보는 아이 탓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엄마를 위해 알아보는 척이라도 하라고 부탁이 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남편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아내와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저 아무 생각도 없이 눈에 고이는 눈물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삼십 중반의 젊은 나이에 생의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죽음에 직면 하게 되었는데,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너무 냉정하고 비인간적이다. 그래서 난 그녀의 가족들에게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런 후 며칠이 지나 그녀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신이 생겨 병실 문을 열었다. 침상에 힘없이 누워 있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모습이 여든이 넘어 돌아가신 외할머니 얼굴하고 똑 같았다. 주책없는 눈에서 또 눈물이, 또 쏟아진다. 이러니 어린 아들이 엄마를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하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나를 쳐다볼 수도,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 게 서 있었다. 좀 더 일찍 왔더라면 그녀의 웃는 얼굴을 한 번쯤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저 왔어요. 기억나세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기운 내셔야 돼요.” 그녀의 눈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나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웃음 대신, 말 대신, 눈물로 반겨 주었다. 36 ∙


“감사해요. 저를 기억해 주셔서요. 제가 기도 많이 할게요.”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사람에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감각이 청각이라고 했던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눈물은 흘릴 수 있었던 그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 누기 시작했다. 그녀와의 소중한 인연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 또 이제는 편히 쉬어야 할 때가 왔다고……. 그녀는 눈물을 멈추었다. 그것이 병실에서, 그리고 그녀의 생애에서 인연을 맺은 나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지금도 가끔 일하다가 지칠 때면 그녀의 얼굴을 떠올린다. 복도 끝에 서서 환한 태양 빛을 받으 며 힘내라고 응원해 주던 그녀의 따뜻한 미소를…….

Action Plan Story ∙ 37


Action Plan Story 장려상

어여쁜 아기 천사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요? 서울성모병원 | 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 Unit | 송진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곳에 어느 날 예쁜 아기 천사가 방문하였습니다. 태어난 지 9개월. 걷지도,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는 아기는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육 종을 진단받고 여러 차례 항암치료와 수술을 견뎌 내야만 했습니다. 마지막 수술 후 암세포는 아 기 천사의 몸을 점점 더 침범하기 시작했고, 결국 부모님은 마지막 선택으로 호스피스에 오게 되 었습니다.

우리의 아기 천사 미카엘 9개월 아기가 온다는 소식에 호스피스의 모든 직원들은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기와 38 ∙


그 가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지 복잡한 심정으 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길이 너무도 무겁고 멀었을 부모님과는 다르게, 아기 는 오자마자 소리 내며 방긋 웃어 주어 모두의 긴장을 한순간에 풀어 주었습니다. 부모님은 지쳐 보였고 긴 대화는 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며,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병동 안내를 받았습니다. 소 아과 병동과는 달리 아기를 위해 갖추어진 물건이 없어 일일이 물어보고 빌리는 일이 되풀이되자 간호사들은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부모님과 아기는 조금씩 더 지치는 듯 보였습니다. 편안한 임종을 맞이하기 위해 부모의 선택으로 이곳까지 왔는데 더 힘들게만 하는 것 같아 마음 이 무거웠습니다. 병이 진행될수록 아기는 자다 깨다를 반복하였고, 잠에서 깨면 엄마를 보고 안아 달라고 울었 으나 복부에 생긴 종양으로 인해 제대로 안아 줄 수 없어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습니다. 숨차하 고 아파하는 아기를 그저 바라만 보고 안아 줄 수 없는 미안함에, 속상함에 엄마는 그저 울기만 했고, ‘엄마’라는 단어와 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아기는 안아 주지 않는 엄마를 수차례 부르며 울기만 했습니다. 아기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바운서에 앉혀도 봤으나 팔을 뻗으며 금방 나오 려고 몸부림치는 바람에 다시 침대에 눕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아기는 아기대로 통증과 호흡곤란, 알지 못할 불안감으로 밤낮 엄마를 찾았고, 엄마는 더 이상 우는 것조 차 힘이 드는지 아기에게 짜증내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대로라면 엄마도 아기도 힘들게 호스피 스를 선택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임종을 맞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날, 병실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 병실로 들어가 보니 엄마는 밤샌 간호에 지쳐 곤히 자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아기를 유모차에 앉혀서 병실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기가 엄마를 찾으며 울어 버릴까 걱정이 되었으나 지쳐 쓰러져 잠든 어머니를 차마 깨울 수는 없어 잠시 일을 미뤄두고 아기와 함께 병동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의외로 아기는 시원한 복도가 좋았는지 혹은 흔들리는 유모차가 편안했는지 어느새 눈을 감고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다리에 감긴 붕대와 튀어나온 배가 아니라면 잠시 산책 나온 평범한 아기의 얼굴이었습니다. 이렇게 아기 천 사와 호스피스 직원들과의 가슴 벅차는 돌봄이 시작되었습니다. 점심 먹을 시간조차 없던 바쁜 시간 속에서도 간호사들은 교대로 아기의 유모차를 밀어 주며 서로의 업무를 교대해 주고, 바쁜 업무로 더 이상 산책이 불가능하자 팀장 수녀님과 원목 수녀님, UM 선생님, 봉사자님까지 모두가 마치 미리 계획했던 것처럼 한마음이 되어 아기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유모차가 흔들리지 않으면 잠에서 깨어 울어 버리는 바람에 잠시도 세워둘 수가 없어, 누가 먼 저랄 것도 없이 순번을 정하지도 않았는데 서로가 교대해 주며 아기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걱정과 다르게 아기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웃어 주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마음을 알았는지 보채거나 엄마를 찾지 않고 사람들 손에서 편안하게 산책을 즐겼습니다.

Action Plan Story ∙ 39


신기한 것은 병동을 산책하다 뜨락의 성모상 앞에 가면, 아기는 조용한 모습으로 성모상을 뚫 어지게 바라보았고 가끔 찡얼대다가도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직원들은 아기가 짜증을 부리거나, 유모차를 밀다가 다리가 아플 때는 뜨락의 성모상 앞에 유모차를 세우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하면서 마치 성모님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깊이 있는 아기의 응시에 신기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기는 부모님의 허락으로 ‘미카엘’이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축복의 순간을 맞았습니다. 간호사들은 아기를 위해 각자의 핸드폰에 오르골을 다운받아 아기가 산책할 때 틀어 주었고, 다리에 감겨 있는 붕대에 예쁜 그림을 그렸으며, 먹지 못하는 아기가 사용하는 물 스프레이 통에 예쁜 꽃과 나비를 붙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아기는 마치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지 냈던 것처럼 모두에게 자연스러운 일과가 되었고, 누구나 할 것 없이 병동에 들어서면 아기의 안 부를 물으며 아기와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그 사이 마음 놓고 아기의 누나를 돌봐 주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고단한 몸 을 잠시나마 편안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호스피스 센터의 모두가 아기와 부모에게 작지만 마음 을 다해 도움을 주었지만 사실 아기와 부모님이 우리들에게 더 큰 선물을 안겨 주었습니다. 모든 직원은 아기를 돌보면서 행복함을 느꼈습니다. 출근할 때, 퇴근할 때, 근무 중에 아기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났으며 모든 이들의 이야기 중심이 아기가 되며 센터 전체에 이야기꽃이 피었 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병동에 입원 중인 환자와 보호자들은 유모차를 타고 산책하는 아기를 보 며 안타까움도 표현하지만, 천사 같은 아기 얼굴로 인해 잠시나마 웃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곁으로 간 아기 천사 미카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 보호를 받으며 아기는 마지막을 준비했습니다. 돌도 지나 지 않아 돌복조차 입혀 주지 못해 속상해하는 부모님을 위해 센터에서 예쁜 한복을 준비했고, 아 기는 가족들과 마지막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기 천사가 임종하던 날 아침, 센터에서 준비한 한복을 입고 아기는 찡그림 없는 편안한 얼굴 로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차가워진 아기의 손을 잡고 볼에 뽀뽀를 하며, 아프지 않고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되는 하늘나라로 가라고 조용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아까웠을 아기를 멀리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님은 하염없이 울었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고맙다고, 고맙다고, 여기 오게 되어 참 다행이었다고 수차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리고 아기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가 병동으로 찾아와, 사랑하는 아기가 큰 병을 얻음으 로 인해 다정하던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지친 몸과 멀어진 마음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하루 하루를 고단하게 이어갔지만, 이곳에서 호스피스 직원들과 함께 가족으로 지내면서 서로 이해하 40 ∙


고 용서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꼬옥 잡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였 습니다. 그 부모님을 향해 저와 모든 센터 직원들 역시 아기가 함께 해 주어 행복했다고, 더 많은 것을 나누지 못해 죄송하다고 답하며, 아기가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던 행복한 순간을 이야기하였 습니다. 아기는 그렇게 작은 생명의 불씨를 끄며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들에게 환자를 사랑하는 진심 어린 마음과, 모두가 함께하는 전인 치유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직종이 함 께 모여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이곳 호스피스병동에서 저는 막 연했던 영성을 구체화하고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생명 존중이 어떤 것인지, 환자를 우선으로 하는 전인 치료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환우분들을 통해 선물 받고 있습니다. 이곳은 참 아름다운 곳 입니다.

어여쁜 우리 아기 천사 미카엘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요? 가끔씩 하늘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방긋 웃고 있을까요? 많이 보고 싶다, 아기 천사 미카엘

Action Plan Story ∙ 41


Action Plan Story 장려상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천 원 서울성모병원 | 방사선종양학팀 | 백준규

우리는 세상 가장 지독한 아픔으로 지쳐 있을 종양 환우분들의 방사선치료를 담당하는 방사선 종양학팀입니다. 차가운 바람에 마음도 차가워지던 그해 겨울……. 내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 준 그리운 할머니 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거짓말(?) 예상 가능한,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갈 때쯤, 재미있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나게 됩니다. 수많은 환우분들과 보호자들로 가득 찬 대기실에서 할머니는 늘 다른 분들을 관찰하시고, 아들의 손을 42 ∙


잡고 내원한 환우분이 대기실에 있는 날에는 치료실에 있는 우리에게 아들 자랑을 시작하십니다. “우리 아들이 무지하게 바빠. 바빠서 올 수가 없어. 병실에는 문지방 닳듯이 자주 오는디 여기 는 잘 못 와.” 아들의 손을 잡고 치료를 받으러 온 다른 할머니가 무척이나 부러우셨던지 물어보지도 않은 자 녀분의 안부를 우리에게 늘 전해 주곤 하셨습니다. 하루는 제가 할머니를 모시러 대기실에 나갔을 때 우리 할머니의 시선은 예쁜 손녀를 안고 온 할아버지에게 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할아버지 자랑을 해 주시려나 했더니 손주 자랑을 시작하십 니다. “우리 손주가 딱 저만한디, 눈이 소만 혀, 어엄청 구여워. 아주 말도 못혀.” “할머니, 손주가 몇 살인데요?” “이제 세 살이지.” “세 살인데 아직 말도 못해요? ^^” “아니 이 냥반아, 말도 못하게 귀엽다구, 껄껄껄껄.” 일주일 정도 지나자 이제는 농담도 하고 안부도 여쭈며, 매일 오시는 소녀 같은 할머니와 많이 친해지고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던 중 매일 이송 사원분과 같이 오시던 할머니는 퇴원을 하셨고 할아버지와 같이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매일 할아버지와도 인사를 나누다 보니 많이 가까워졌고, 할머니가 화장실에 가신 사이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일 같이 병실에 온다 던 아들 내외와 손주는 미국에 살고 있고, 연락도 잘 안 돼서 할머니가 어떠신지도 제대로 모른다 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소녀 같은 할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없는 얘기까지도 자랑을 하셨을까 하고 생각 을 했습니다. 할머니의 소녀 같은 환한 웃음 뒤에 가려진 외로운 마음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에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 후, 우리는 소녀 같은 할머니의 편이 되어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매일 할머니가 오시면 따뜻 한 차를 준비해서 차가운 손에 쥐어 드렸고, 할머니가 궁금해하시는 것들은 할머니의 눈높이에 맞 추어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고, 시간이 날 때면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보다 조금 더 낮은 곳에서 할머 니의 외로운 마음까지 들으려 노력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할머니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 드렸 고, 할머니의 시린 마음처럼 차가운 손도 꼭꼭 잡아 드렸습니다.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밝게 웃으시 며 다 늙어서 호강한다며 아이처럼 기뻐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병원 오는 것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 는데 이제는 빨리 오고 싶다고 하시는 할머니를 보자 제 마음이 더 기뻐지는 것 같았습니다.

Action Plan Story ∙ 43


고마움의 선물 1,700원에 담긴 커다란 마음 그렇게 어느덧 저도, 할머니도 서로 만날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치료 횟수가 늘 어나고 할머니의 건강이 회복될수록 우리가 만날 날은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모든 치료 가 끝나기 전날, 저와 할머니가 같이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드리며 “병원에는 그만 오셔도, 저 는 잊지 마세요.”라고 말씀드리자 할머니는 처음으로 먼저 손을 잡아 주시며 얼른 다 나아서 놀러 오시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게 할머니의 마지막 치료일. 처음으로 할머니의 슬픈 눈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치료 가 끝나고 나가시며 할머니는 주머니를 뒤적이셨습니다. 할머니의 손에 들려 있는 건 구겨질 대 로 구겨진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와 동전 몇 개……. “할머니 이게 뭐예요?” “내가 줄 것은 없고, 보니께 여기 젊은 사람들은 일이 많아 그런가 커피를 사발로 마셔 대드만 그려. 이거면 되겄지?” 하며 돈을 주셨습니다. 할머니는 병원 내 많은 분들이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이 돈으로 할머니 맛있는 거 사드세요. 저희는 괜찮아요.” “그르지 말고 받어. 별 거 아닌디 내가 고마워서 그려.” 내가 받지 않으면 소녀 같은 할머니는 변변치 않은 것으로 여겨 받지 않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 실 것 같아서, 고맙게 감사히 잘 쓰겠다며 할머니를 꼭 안아 드렸습니다. 저는 할머니께 다시 만날 때까지 꼭 건강하셔야 된다고 말씀드렸고, 할머니는 제게 다시 와도 꼭 여기 있으라며 신신당부 하셨습니다. 할머니가 가신 후 손을 펴 보니 내 손에 들려 있는 1,700원……. 어찌 보면 큰돈은 아니지만 저에게는 가장 따뜻하고 소중한 돈입니 다. 제게 사진을 받은 후부터 무엇을 주는 것이 좋을까 밤새 생각하 셨을 할머니입니다. 우리를 생각하며 준비하셨을 할머니 모습을 생 각하니 마음 한편이 짠해졌습니다. 저는 아직도 할머니가 제게 주신 마음을 제 캐비닛 안 작은 상자 에 넣어 보관하고 있습니다. 환우분들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출근 후 옷 을 갈아입으며 할머니가 주신 커다란 마음과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마음을 담은 관심과 진심을 담은 정성은 누군가에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적이 되어 돌아옵니다. 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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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8282) 병동 간호사들의 마음 밭 가꾸기 서울성모병원 | 82 Unit | 박민선

오늘도 전쟁입니다. 전장에 나가 있는 용사들처럼 8층 2병동 간호사들은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51병상으로 비뇨기과, 이비인후과, 성형외과의 환자분들과 평일에는 매일 10~20명 정 도의 환자분들이 퇴원을 하고, 10~20명 정도의 환자분들이 병동으로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계십 니다. 참 빠르고 바쁘게 환자분들의 진료가 진행됩니다. 사실, 수술 후 입원해서 다음 날 퇴원하는 환자분들을 포함하여 재원일수가 짧은 환자분들이 많 기 때문에 우리 간호사들은 여유가 없고, 그래서 환자분들에게 영적인 소통과 간호를 하기에는 턱 없이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과연 8층 2병동에서 영성간호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병동에서 ‘작은 것이라도 한번 실천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우리 병동에서는 Action Plan Story ∙ 45


영성위원회를 구성하고, 먼저 간호를 하는 우리 간호사들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자 하였습니다.

8층 2병동의 마음 밭 가꾸기 그래서 영성활동 1단계로 ‘마음 밭 가꾸기’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첫 번째 활동으로 우리들은 근무 시작 전 기도문을 작성하여 기도하는 것을 생활화하였습니다. “근무를 시작하며 주님이 저희와 함께하심을 기억하게 하시고, 환우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형식적으로 하던 기도이지만 기도가 거듭될수록 마음을 담아 기도하게 되었고, 이 기도를 통하 여 업무할 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업무가 집중되어 벅찰 때에도 힘을 낼 수 있었고, 환자를 위하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활동으로 ‘거룩한 이름 부르기와 환자 간호에 대한 나의 다짐 공유하기’를 하였습니다. 병동 간호사들이 모두 각자의 거룩한 이름을 생각하여 적어 보고 일상에서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 서, 그리고 환자 간호에 대한 나의 다짐을 생각하고 적어 보고 병동 간호사들과 함께 나누면서 우 리 간호사들이 하고자 하는 간호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활동을 통하여 마음이 안정되어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고 푸근하게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1주에 1회 좋은 글 을 간호사실에 게시하여 공유하였습니다. 좋은 글을 보면서 감동을 받기도 하고, 현재 생활에 감 사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간호사 자신을 위한 영성활동을 통하여 우리 간호사들은 조 금씩 더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함께 근무하고 있는 병동 간호사들에게 서로 힘이 되는 활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2014년도는 참 많은 신입 간호사들의 교육훈련으로 더욱 더 바쁘게 지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간 호사 스스로가 함께 근무하는 가운데 서로를 인정해 주고 도와주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이 필요 하다고 생각했고, 서로를 응원하고 힘이 나게 도와주는 영성활동 2단계 ‘칭찬합니다. 당신이 최고 입니다!’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병동의 간호사들에게 감사와 칭찬의 글을 적어서 모음함에 넣으면 그 달에 가장 많은 칭찬의 글을 받은 간호사에게 따뜻한 커피 쿠폰을 전달하면서 우리들만의 칭찬과 격려 이야 기들을 풍성하게 만들어 갔습니다. 항상 잘 웃는 간호사, 다른 간호사들을 잘 도와주는 간호사, 업 무를 잘 하는 간호사, 많은 신입 간호사를 교육하는 프리셉터 간호사 등……. 처음에는 ‘무엇에 대 해 칭찬해야 하지?’라고 서로의 칭찬거리를 생각하고 찾는 것에 대해 시간도 많이 걸렸지만 이제 는 일상에서 서로를 칭찬과 격려하는 것이 조금 더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 항상 좀 더 긴 장하면서 업무하게 되는 신입 간호사가 칭찬 주인공이 된 달에는 긴장감으로 잘 웃지 않던 신입 46 ∙


간호사가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힘들고 지쳐 보이는 간호사들에게는 격 려하고 위로하는 글을 적어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고 함께 있음을 느끼게 할 수 있었습니 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동안 우리 병동 간호사 모두 흐뭇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위와 같은 활동을 하면서 환자분들에게 영성 간호의 작은 실천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성 간호 의 실천 첫 번째는 ‘수술환자의 수술과 회복을 위한 기도’입니다. 8층 2병동에서는 흔하게 나이트 번 간호사 혼자서 3명의 환자분들을 동시에 첫 수술 시간에 맞추어 수술실에 갈 수 있도록 준비합 니다. 그리고 수술실로 가기 전 롱 카(long car) 위에 누운 환자분들을 위해 수술이 잘 되고 회복 을 잘 할 수 있도록 수술 전 기도를 합니다. 처음 기도할 때를 생각해 보면, 속으로는 진심으로 환 자분들의 수술이 성공적이길 바라면서도 쑥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는 등 서투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에도 환자분들은 “날 위해 기도해 주셔서 고마워요. 잘 견디고 오겠습니다.” 하고 나지막이 말씀해 주십니다. 바쁜 와중이지만 환자분들의 말씀 한 마디로 그날 의 피곤이 싹 사라져 버립니다. 처음 기도를 시작하였을 때에는 수술 전 기도문을 보고 읽었지만, 근무 시작 전 기도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술 전 기도문에 의지하지 않고 눈을 감고도 환자분 손을 잡아 주며 진심으로 수술이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영성 간호의 실천과 그 사례 영성 간호의 실천 두 번째는, 두경부암 환자분들 중 한 달에 한 번 영성 간호 대상자를 정하고 병동의 모든 간호사들이 영성 간호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8층 2병동에도 단기 수술과 함께 두경 부암으로 수술 치료를 받고 있는 두경부암 환자분들이 있습니다. 두경부암 환자분들 중 한 달에 한 번 영성 간호가 필요한 환자를 정하여 담당 간호사와 함께 병동 간호사들이 환자분과 마주칠 때 혹은 직접 찾아가서 먼저 환하게 인사를 한다든지 손을 따뜻하게 잡아 드리고, 좋은 글을 적어 서 전달하기도 하면서 영성 간호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두경부암 환자분들 중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10월의 영성 간호 활동을 소개하려 합니다. 병동 에서 152일간의 두경부암 수술과 치료를 받고 퇴원한 J 환자분의 이야기입니다. 두경부암 수술 환자분들은 대부분은 1달 정도 입원 치료를 받게 되고, 경우에 따라 그 이상의 치료 기간이 필요 하기도 합니다. 수술 후 겪게 되는 상황이 다른 질환의 환자분들보다 자존감은 낮아지고 불안감 이 많은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환자분들과 보호자분들 모두 힘든 상황입니다. 그 상황 중 하나로 두경부암 환자분들은 기관절개술을 하기 때문에 수술 후 말과 식사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글 로 적어서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간호사들은 말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보다 한참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1분 1초가 바쁜 상황에 여유가 되지 않을 때도 많이 있지만 어느 날 J 환자분이 종이 Action Plan Story ∙ 47


에 “고마워요.” 하고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가시는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였습니다. J 환자분 과 보호자분이 반복되는 재수술로 몸과 마음이 힘든 시간이었지만, 8층 2병동 간호사들은 J 환자분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며 조금 덜 고통스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호하게 되었고, 이에 응답이라도 하 듯이 마음을 열어 가는 J 환자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J 환자분이 반복되는 재수술로 우울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국의 간호사들이 참여하는 간호 사의 날 1004 Day 행사에 우리 병원 간호부에서도 병동 환우를 대상으로 차 나눔과 아로마 손 마 사지 행사를 하였습니다. 병동 이브닝 번 간호사들은 일찍 출근해서 차를 준비하고 따뜻한 물, 손 마사지할 아로마 오일과 핸드 타월도 미리 준비했습니다. J 환자분은 그 전날 혈압 측정을 하겠다 고 했더니 거절하면서 무기력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몇 시간 전 교수님과 면담을 하며 재수술 을 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것 같다고 보호자분이 조용히 알려주며 섭섭해하지 말 라고 등을 두드려 주었는데, J 환자분은 그 다음 행사날도 여전히 커튼을 치고 침대에 혼자 누워 계셨습니다. 기분이 어제와 비슷해 보여서 차를 드시지 못하는 J 환자분께 아로마 손 마사지를 권 유했습니다. 그 순간 ‘이번에도 거절하시면 어쩌지?’ 하고 내심 조마조마했지만 말없이 손을 내밀 어 주셨고 정성스럽게 마사지를 하였습니다. “시원하세요?” 하고 물으니 입꼬리를 올려 작은 미 소로 보답해 주었습니다. J 환자분은 병동에서 여러 번의 수술을 거치는 고된 시간을 견디어 내고 새해를 맞이하여 퇴원하였습니다. 병동에서 운동을 하면서도 간호사들에게 먼저 손을 흔들며 인 사를 해 주시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눈빛만 봐도 J 환자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기분이 어떠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수술 후에도 지속적인 암치료를 위해 방사선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몸 과 마음이 덜 힘들고 덜 아프게 치료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무의미하고 막연히 어렵게만 생각했던 영적 돌봄이 간호사 자신과 동료 간의 영성활동, 환자들의 영성 돌봄으로 작은 실천들이 모여모여 조금씩 자라가고 있음에 뿌듯함과 흐뭇함을 느 낍니다. 이처럼 영성 간호는 환자분과 간호사들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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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네, 여기 있습니다 서울성모병원 | 영양팀 | 김지연

누군가 나를 부를 때 유난히 자신 있게 큰 소리로 대답할 때가 있습니다. 반면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누가 부르더 라도 기쁘게 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울 때는 구약성서의 요나처럼 어디론가 숨 어 버리게 됩니다. 입사를 할 때만 해도 그랬습니다. 큰 소리로 대답할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한두 해가 지나면서 차츰 일상에 젖어들어 평범한 직장인으로서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입사 10년이 되었을 즈 음, 부모님의 딸로 지내다가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에게 엄마로 불리게 되면서 보다 충만한 사랑 의 감정을 나눌 기회가 생겼습니다. 입사를 할 때 유난히 관심이 있었던 호스피스 병동을 영양사 Action Plan Story ∙ 49


로서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했던 만큼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내가 영양사로서 살아오며 쌓아 온 모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하여 더 많은 것을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쉽지 않 다는 생각에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영양사입니다!” 애써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지만 돌아오는 것은 의식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환자의 초점 없 는 눈동자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돌아가라는 표시를 하는 차가운 표정의 보호자뿐이었습니다. ‘정말 내가 이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단 말인가!’ 적극적인 영양 지원으로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는 환자 혹은 그의 가족들을 보면서 영양사로 서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온 선물 언제쯤이었을까요. 20대의 젊고 예쁜 ‘시연*’이라는 이름의 환자가 입원을 했습니다. 이렇게 싱 그러운 젊음 가득한 환자가 말기암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각 분야 의 전문가가 모여 환자의 정서적인 지지를 통해 말기 생애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호스피스팀 모 임을 통해 그 환자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시연님은 본당에서 오랜 시간 초등부 교사로 봉사하며 지냈다고 했고, 마침 초등부 자모교사로 활동을 시작한 저로서는 큰 선배를 만 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시연님을 만나러 가면 영양적인 이야기는 뒷전으로 하고 성당에서 아이 들이 어떻게 장난을 치는지, 그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청년교사가 아닌 자모교사로서 어떻게 임하면 좋을지에 대해 자문하기도 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 웃기도 했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잔뜩 생각했다가 제가 가면 하나씩 물어보면서 퇴원하면 꼭 먹겠다며 사달라고 어린아이처럼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하는 모습을 보며, 시연님이 편안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밝고 예쁜 시연님의 얼굴이 점점 삶을 마감하는 분들의 모 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엷은 웃음조차 힘에 겨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연님과 가족들은 그 동안 호스피스 센터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많은 힘을 얻으며 죽음을 차분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원내 고객 민원을 담당하는 직원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서비스를 담당하는 부서로서 그 직원이 오셨다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민원이 접수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 런데 그날은 조금 다른 내용의 ‘고객의 소리’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영양사로서 좀처럼 받아보기 힘든 칭찬의 글이었습니다. 내가 더 큰 도움을 받은 것 같은데 이런 글을 받다니……. 미안하기도 *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실명 대신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50 ∙


하고 고맙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려 환자 정보를 확인하고는 잠시 심장 이 멎는 듯했습니다. 시연님은 바로 그날 아침에 임종하셨던 것입니다. ‘아……, 나에게 선물을 주고 가셨구나.’ 시연님은 영양사인 저뿐 아니라 호스피스 병동의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사랑의 ‘고객의 소리’를 선물하셨습니다.

더욱 커진 마음 - 사랑과 정성 삶을 마무리하는 분들과의 끊임없는 만남이 있는 호스피스는 그날 이후 제게는 더 이상 큰 부 담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하는 것이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을 알 게 되었습니다. 영양사로서의 강박을 내려놓고 마음을 열고 다가서니, “안녕하세요, 영양사입니 다.”라는 제 말에 정성이 실리는 것 같았습니다. 사랑이 더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말을 들 어 볼게요.’라는 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도 다양한 곳에서 부르심을 받습니다. 어제보다는 조금 더 사랑이 마음에 가득할 수 있도 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답합니다.

“네,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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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공감과 연민의 마음을 통한 참 간호 서울성모병원 | 70 Unit | 장안우

임상에서 간호사, 의료진으로 일하면서 환자와 진솔한 대화를 하는 시간이 몇 시간이나 될까? 나 또한 중환자실에서 일할 때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환자와는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병동으로 부서 이동 후에는 대화가 가능한 환자를 만났지만 환자나 보 호자와 라포(rapport)가 형성되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부담으로 느껴져 대화를 단절하고 간호 업무 에만 몰두하곤 했다. 하지만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공유하고 내가 늘 관심을 줬던 한 환아가 생 각난다. 외과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신규 시절부터 나와 함께한 선천성거대결장 환아.

뇌사 상태 환아와 함께한 2년 중환자실에서 6개월을 근무했던 나는 그 당시 신규 간호사라 그 환아를 직접 간호하지는 않았 Action Plan Story ∙ 53


지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라 나를 포함한 모든 중환자실 간호사들이 아이를 예뻐하고 극진히 보살폈다. 소아외과 환자인데 수술 후 병동에서 케어(care)를 받다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 아져 불행히도 저산소성 뇌손상을 입어 중환자실로 오게 됐고, 중환자실에서 케어를 받다 다제내 성균이 검출되어 나의 부서 이동과 함께 그 아이도 나와 같은 격리병동에 오게 된 것이다. 심폐소 생술이 지연된 것이 의료 소송과 맞물려 결국 그 아이는 퇴원이 보류되어 무려 2년여 동안 우리 병동에서 함께 생활을 하게 됐다. 격리병동이 문을 연 그 순간부터 함께했고, 비록 뇌사 상태이긴 하지만 몸은 어느덧 점점 자라 영아에서 유아로 커 가고 있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와 3살 차이인 어머니와는 친구처럼 사적인 이야기도 하게 되었고, 내 결혼식 선물이라며 사진관을 하시는 아이의 아빠는 결혼식 사진을 크게 인화하여 액자로 만들어 선물로 주셨다. 2년 동안 우리 병동의 결혼한 간호사들은 모두 똑같이 액자를 선물로 받았다. 또한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늘 우리에게 당신들이 드시려고 사신 과일이며 빵이며 이것저것을 나눠 주셨다. 우리도 긴 시간 동안 뇌사 상태인 아이와 함께 병원에만 있는 엄마가 안타까워 매년 크리스마스에 그들을 위한 카드와 선물을 주고 아이의 생일날에 초를 불고 노래를 불러 주었다. 밖 에서 예쁜 아이용품을 보면 눈을 말똥말똥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아이 생각에 나도 모르게 하나씩 사 서 주곤 했다. 어머니는 뇌사 전 동영상 속에서 참새처럼 조잘조잘 귀엽게 얘기하는 아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며 “이럴 때가 있었지요.”라고 슬픈 미소를 짓곤 하셨다. 격리병동이라 외출이 제 한적임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좋은데 작고 귀여운 아이가 침대에만 있는 것이 안타까워 어머니와 아이에게 바깥공기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얘야.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떠니? 오늘은 키가 더 큰 것 같아.”라고 얘기하면 아이가 마치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같았다. 어느덧 난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육아휴직에 들어가게 되어 근무 마지막 날, 오늘도 말없이 동그랗고 큰 눈만 깜빡거리는 아이에게 “선생님 다시 나올 때까지 더 건강해지고 쑥쑥 커 있어야 해.”라며 밝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던 중 간간이 아이의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 기 시작했다. 휴직 중이었지만 병동 선생님들에게 만일 아이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지거든 꼭 나 에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염려가 현실이 되었다. 내 아기가 100일이 채 안 되어 정신없이 육 아에 매진하는 찰나에 전화가 왔다. 지금 소생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으니 빨리 오라는 병동 간호사의 전화였다. 부랴부랴 차를 타고 달려갔다. 처치실에서 4개월 만에 본 아이는 내가 작별 인사를 했을 때의 작고 귀엽고 초롱초롱한 모습의 아이가 아니었다. 온몸이 탱탱 부어 손과 발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있었고, 하얗고 고운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아이는 이 미 하늘나라로 간 상태였고, 어머니는 두 눈이 눈물로 퉁퉁 부어 아이를 부여잡고 하염없이 “엄마 가 미안해.”를 외치고 계셨다. 아이를 낳고 보니 엄마의 마음이 더욱 더 와 닿고 안타까워 나 또한 옆에서 같이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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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함의 실천, 그리고 간호 커 가는 성장 속도를 뼈가 따라와 주질 못해서 여기저기 뼈에 골절이 생겨 온몸 구석구석에 금 이 가기 시작하고, 신장 기능이 저하되며 소변이 나오지 않기 시작하면서 몸도 붓기 시작했다고 한다. 말 못 하는 아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마지막 가는 길이 행여나 춥고, 무섭고 외롭지 않게 아이엄마가 갖고 있던 두꺼운 검은색 원피 스와 검은색 스타킹을 손수 입히고, 인형을 손에 쥐어 주며 임종기도를 드리고 사후 처리를 도와 드렸다. 집에 오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뜨기 시작했고, 내 아기는 방긋 웃으며 나를 맞이해 줬 다. 그때의 감정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복잡하고 이상했다. 내 눈에는 또 눈물이 맺히기 시작 했다. 함께했던 지난 2년 반 동안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아이가 살아 있을 때 매주 토요일마다 자원봉사로 온 기타 연주가의 기타 소리를 어머니와 함께 들으며 ‘이대로 시간이 멈 췄으면 좋겠다.’라고 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그 기타 반주곡을 찾아 들으며, 두 눈이 유난히 초롱초롱했던 아이의 모습을 찍어 둔 내 핸드폰 사진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 다음 날 삼일장에서 말없이 어머니와 나는 서로 앉은 채 눈물을 흘렸고, 어머니에게 “아이가 이제 좀 편안하게 쉴 수 있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라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고마워요, 선 생님.” 어머니의 눈빛을 통해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와 어머니, 그리고 내가 함께한 지난 2년 반 동안의 시간, 즉 삶의 맥락적 공유는 그 무엇보 다 내가 그들에게 진실된 공감, 연민의 마음으로 간호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마음 의 힘이 그 아이와 끝까지 함께해야 할 것만 같은 의료진으로서의 사명과 책임감을 부여해 준 것 이 아닐까 싶다. ‘바로 곁에서(up close)’ 실천하는 진실된 공감, 연민의 마음. 이것이야말로 의학 적인 것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참된 보살핌의 간호가 아닐까 싶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고 나누고 싶었던 그때의 그 마음을 지금의 환자들을 대하면서도 항상 기억하고 또 기억하려 한다.

Action Plan Story ∙ 55


Action Plan Story 장려상

준비하는 삶과 죽음의 은총 서울성모병원 | 사회사업팀 | 손미연

호스피스는 질병의 완치를 목표로 하는 곳은 아닙니다. 생명은 의술과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행복하고,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 기에 죽음과 밀접해 있는 호스피스를 떠올릴 때 부정적인 면을 보게 됩니다. 호스피스에서 근무한 지 올해로 6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처음에는 죽음이 두렵고 슬프기만 했 고, 시련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다 죽음을 맞이하는데 우리는 왜 그토록 죽음을 싫어하고 피하려고만 하는지 해가 거듭될수록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터부시되었던 문화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학습된 저도 처음에는 힘들고 어 려운 곳에서 일한다고 느꼈고, 주변의 시선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호스피스에서 죽음 을 준비하거나 맞이하는 분들과 가족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보람을 찾았습니다. 말기암 56 ∙


환자는 그 동안 어떠한 일을 하였건, 어떠한 삶을 살아왔건, 죽음 앞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 을 가지고 회개와 용서를 통해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가장 아 름다운 마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호스피스 사회복지사는 호스피스팀의 일원으로서 말기 환자들이 겪는 심리를 완화하고, 사회 적・경제적 고통을 경감시키고, 환자와 가족들이 남은 삶을 충만되게 살 수 있도록 하며, 사별 가 족의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고 극복하도록 돕습니다. 환자가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 록 하고, 환자 그리고 그 가족과 추억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지원해 주려고 살핍니다.

영성 실천의 사례 ① 의식이 소멸되어 가는 70대 여자 환자분이 있었습니다. 슬하에 결혼한 세 아들과 딸이 있었으 며, 돌봄을 맡고 있던 딸과 첫째 며느리와 상담을 하였습니다. 며느리는 오늘이 바로 자신의 남편, 즉 환자 아들의 생일이라 했습니다. 자식을 누구보다도 사 랑하는 환자분이기에 아들 생일에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미역국도 끓여 주지 못하는 심정은 아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거라며 며느리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오늘 저녁 가족들이 모여 함께하지 못 하는 환자로 인해 가족만 외부에 나가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올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환자와 가 족의 아쉬운 마음을 알기에, 함께 축하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상의하였고, 병원에 장소 를 마련해 주기로 하여 생일파티를 계획하였습니다. 며느리는 남편과 통화를 하였고, 아들은 생각 지도 못한 계획에 당장이라도 달려올 듯한 흥분된 목소리가 전화 밖으로 들렸습니다. 호스피스 팀원과 같이 장소와 케이크, 다과를 준비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사실 이 파티는 아들을 세상에 태 어나게 해 준 어머님께 감사하는 날이라는 의미도 컸습니다. 자녀들이 어머님께 드리는 감사의 편지와 꽃을 준비하도록 했고, 손수 선물을 준비할 수 없는 환자를 대신하여 며느리가 작은 선물 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환자, 가족만의 시간을 위하여 마련된 장소인 추기경보존관에, 침대째 온 환자와 그를 둘러싼 가족들이 가득했습니다. 생일 축하에 이어 ‘어버이 은혜’를 불러 드리고, 가족 한 명씩 편지를 읽 어 가며 어머니 볼에 입맞춤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모두 듣고 계신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며느리도 귀 가까이 다가가서 속삭였습니다. “어머님, 아범 멋지 게 잘 키워 줘서 고맙습니다. 저 친정에서 예쁨 못 받아서 시집왔는데 정말 저 예뻐해 주셔서 감 사했어요. 아범 잘 챙기고, 큰며느리로서 가족도 잘 챙기고, 아버님도 제가 모시고 돌볼게요. 어머 님, 걱정 내려놓으세요.” 환자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며느리가 전하는 듯했습니다. 환자는 편 안한 마음으로, 아들의 마지막 생일파티를 끝으로 하느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함께한 그 순간을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을 가족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이렇듯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돌봄을 Action Plan Story ∙ 57


실천하며, 생명 존중을 하는 곳이 바로 호스피스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진심을 나누고, 용서 를 구하며, 편안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말입니다.

영성 실천의 사례 ② 또 다른 사랑 실천으로 보람을 느낀 사별 가족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은 바 로 2년 전 떠난 고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지금은 결혼한 자녀를 둔 아빠가 된, 당시 대학생이던 아 들은 후원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50대였던 아들의 어머니는 계속되는 치료로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고,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아들 학비 걱정도 컸습니다. 학비도 각자 마련하면서 자신 을 간호하느라 휴학을 반복하던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병의 아픔보다 더 컸던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환자가 경제적 부담과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도록 호스피스 후원회 연 계를 통해 의료비 지원을 도왔습니다. 환자는 사무실 번호와 이름을 알기를 원하였고, 언제든 어 려운 마음을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알려드렸습니다. 환자는 이를 휴대폰에 저장하면서 안 심할 수 있었습니다. 환자의 아들은 어머니 휴대폰에 저장된 저의 번호를 기억했고, 언젠가는 꼭 마음으로 보답하리라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떠난 지 2년이 된 지금 예쁜 아이를 선물로 준 것 같다며, 기쁨과 감사의 마음 으로 30만 원을 호스피스 후원금으로 기부했습니다. 아직은 여력이 되지 않아 많은 돈을 기부하 진 못하지만 조금 더 여유를 찾으면 다시 후원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이 모 습을 본다면 얼마나 뿌듯해할지 생각하니 더 기쁘다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어머니를 돌본 만 큼 사별 후 일상생활도 잘 해 나가는 듯 보였습니다. 제가 큰 힘이 되었다는 환자와,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잊지 않고 연락해 준 그분의 아들을 보면서 사랑은 더 큰 사랑으로 보답하고, 베푸는 삶 은 또 다른 선행에 힘을 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한 분 한 분을 만나면서 직업적 소명으로 보람된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과, 저의 전문성과 더불어 사랑, 정성, 기도로 생명 존중을 실천할 수 있음에 행복을 느꼈습니다.

말기암 환자를 돌보면서 신앙의 힘을 믿었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손을 잡고 두 려워하지 않기를, 죄책감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회개와 화해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 망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대세를 받고 떠난 고인의 가족분들이 영세를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듯 환자, 가족들이 하느님을 알게 되고, 언제든 부르심에 응할 수 있도 록 영성 실천을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영성에 부합되는 생명 존중과 의료 선교를 호스피 스에서 몸소 행함으로써 환자 및 가족들에게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이 함께하고, 마지막까지 준비하는 죽음의 은총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58 ∙


Action Plan Story 장려상

기억 저편 서울성모병원 | 호스피스완화의료병동 Unit | 박아름

2012년 10월 1일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에 신입 간호사로 첫 근무를 시작하였습니다. 항상 “어떻게 하면 호스피스 환자와 가족들이 편안해할까?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 으로 근무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고 어렵습니다.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을 원하는 많은 말기암 환자들은 오랜 기간 입실 대기를 하 다가 우리 병동에 입원을 옵니다. 우리 병동 침상 수는 23개입니다. 대기하다가 순번이 되지 않아 입원하지 못하고 타 병원 또는 집에서 임종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근무 중에 병동으로 입원 문 의 전화가 종종 옵니다. “우리 아버지가 췌장암 말기인데요.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데 바로 입원 Action Plan Story ∙ 59


할 수 있을까요? 저희 아버지께서 호스피스 병동에 꼭 입원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먼저 받아 주시 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는 보호자분의 슬픔 어린 목소리가 전화기에 울려 퍼집니다. 그러면 전, “죄송합니다. 병실이 나면 순서대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항상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이런 전화를 받을 때면 안타깝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렇게 우리 병동에 입원 오고 싶어도 못 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입원 오신 분들 한 분 한 분 성심성의껏 간호해서 마지막 순간 편안하고 품위 있게 임종할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근무합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근무하고 있지만, 몸이 지치고 힘들 때 면 이런 생각을 잊을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진심은 그게 아닌데…… 기억이 나는 한 분이 계십니다. 연세가 있으신 간암 말기 할머니셨습니다. 어느 날 관장을 했는 데 2일 후 가족분이 불만을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 간호사분 저희 병실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힘없는 환자인데 거칠게 다루더라고요.” 저는 몸도 크고 평상시에 힘이 좋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처치할 때 저도 모르게 힘을 주다 보니 환자를 거칠게 대하는 것처럼 느끼신 것 같았습니다. 다른 간호사로부터 가족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나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나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은 건 가?’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저 때문에 상처받았을 환자와 가족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병실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1시간 동안 망설이다가 겨우 병실로 들어갔습니다. 환자와 마 주하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손만 부여잡고 있었는데 자꾸만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잘 해 드리고 싶었는데, 마음을 아프게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뭐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 괜찮아.” 하고 오히려 저를 다독여 주셨습니다.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못하 고 한동안 있다가 병실 밖으로 나왔습니다. 바로 가족이 따라 나와서 “저희가 지치고 힘들어서 선 생님을 오해했던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해 주셨고 오해가 풀렸습니다. 그 후 할머니의 담당 간호를 하는 동안, 할머니는 제가 병실에 들어가면 항상 웃는 모습으로 저 를 맞이해 주셨습니다. 임종하는 날도 제가 그분의 마지막을 함께하였는데, 가족들은 끝까지 열심 히 간호해 줘서 감사하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임종 과정에 대해 못 받아들이던 가족들 이 나중에는 저를 믿고 의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웃는 얼굴로 할머니를 보내 주셨 습니다. 저는 마음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할머니 감사해요. 마지막에 임종간호를 할 수 있게 해 주 셔서……. 저번에 정말 죄송했습니다. 이제는 편히 좋은 곳으로 가세요.’라고 말입니다.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와 가족들은 심리적으로 많이 지치고 쇠약해져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60 ∙


따뜻한 손길과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저에게 가르쳐 주었던 또 하나의 기억이 지금도 저의 마음을 아련하게 합니다.

오히려 위로를 받다 저에겐 아버지뻘이셨던 췌장암 말기 환자분. 힘들어도 내색 안 하고 많이 참는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 오늘 근무하시네요. 남편이 선생님이 가장 일도 잘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좋 다고 했어요. 항상 밝게 웃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배우자분이 말했습니다. 옆에서 아버님은 미소를 띠고 계셨습니다. 하루 종일 제가 웃으면서 일할 수 있게 만드는 ‘에너자이저’ 같은 말이었 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지 1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보호자가 환자가 이상하다며 병실 밖 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의식이 명료했던 환자분이 갑자기 의식이 떨어지면서 마지막 호흡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환자의 마지막 순간을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합니 다. 하지만 환자의 여러 질환으로 갑작스럽게 임종하는 상황도 때로 발생하곤 합니다. 전 당황스 러웠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보호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순간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보호자와 함께 펑펑 울었습니다. 많 이 힘드셨을 텐데 담당 간호사인 제가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죄송스럽고, 보호자들 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너무 짧게 드렸다는 생각에 저 자신이 너무 미웠습니다. 마 무리를 정성껏 해 드린 후, 저는 수녀님과 함께 임종기도를 하였습니다. 배우자분이 “감사했어요, 선생님. 그래도 남편이 마지막에 편안하게 임종하신 것 같아요. 우리한테 힘든 모습 보이기 싫어 서 티를 안 냈나 봐요.”라고 말하며 오히려 저를 위로했습니다. 아직도 그분이 많이 생각납니다. 제가 만약 가족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기까지는 수녀님의 기도와 의사, 간호사, 자원봉사자, 사회복지사의 다학제 적인 접근도 도움이 되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2년 4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많은 환자분을 한 분 한 분 기억하진 못하지 만, 부디 제 손길과 기도로 편안하게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지금도 부족한 면이 많지만, 앞으로도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 가족들을 생각하며 호스피스 병동이 가톨릭중앙의료원 의 영성을 실천하는 병동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여기서 근무하는 지금이 저에게는 축복이고 행복입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기도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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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선생님, 환자 안전 담당자이시죠? 서울성모병원 | PI팀 | 김소연

“선생님, 환자 안전 담당자이시죠? 저희 환자가 없어졌어요. 1시간 전에 혈압도 체크하고 상태 도 살폈는데 지금 라운딩 하다 보니까 환자가 안 계세요.”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이다. 다급한 목소리의 간호사는, 환자가 사라졌고 최근 자신의 처지를 비 관한 환자가 병원 직원 몰래 탈원하여 모처에서 자살한 사건을 알고 있다며, 이 환자도 지금의 증 상이나 진단으로 볼 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며 걱정하였다. “네, 환자분이 병동에 확실히 안 계신가요?” “그런 것 같아요. 어쩌죠?” 62 ∙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간호사의 앳된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하다. 나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 고 현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며, 되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일단, 보호자분께 전화는 걸어 보셨어요? 집에 가셨는지 확인 먼저 하시고, 그 다음은 안전관 리팀에 연락해서 CCTV를 확인해 달라고 하세요. 그래도 발견 못 할 때는 ‘코드 핑크’ 방송을 요 청하고 서초경찰서에 신고하시고요.” 가능한 한 차근차근 설명하고 더 물어볼 것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새벽 2시 10분. 이후 3시간이 흐르는 동안 잠을 청하였으나 더욱 말똥말똥해지는 정신을 어쩌지 못하고 환자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의 전화가 다시 울리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하 느님, 그 환자가 절대로 나쁜 선택을 하시지 않도록 꼭 꼭 꼭 지켜 주십시오…….” 이런 전화를 받 을 때면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꼭 쥐고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환자를 위해 기도드리게 된다.

365일, 24시간, Hot-line은 On-line 우리 병원이 2008년 획기적인 환자 안전관리 프로그램을 구축하면서 PI팀은 환자 안전사고의 보고를 활성화하고, 혁신적인 개선 활동을 실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진료 과정은 그 특성상 항 상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의료 기술과 인력으로 최고의 진료를 펼치는 우리 병 원도 환자 안전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 사고를 방지하고, 어쩔 수 없 이 사고가 발생한다면 환자에게 미치는 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며, 다시는 같은 사건이 발 생하지 않도록 개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환자 안전관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환자 안전사고 보고 Hot-line’을 만들고 위급한 환자 안 전사고를 24시간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이때부터 검은색의 작은 핸드폰은 24시간 함께하는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잠을 잘 때는 머리맡에, 외출을 하거나 휴가를 갈 때도 Hot-line 핸드폰 챙 기기를 항상 최우선으로 하게 되었고, 퇴근하면서 사무실에 두고 와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경우 도 많았다. 한동안 내가 왜 24시간, 365일을 병원일로 신경 써야 하는지, 자다가도 전화 소리에 벌떡 일어 나야 하는지 불만도 많았고, 늘 긴장 속에 살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때도 많았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불평을 하다가도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기 너머로 다급하거나 의기소침해진 목소리로 “PI팀 환자 안전 담당자이시죠?”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네, 맞아요. 말씀해 보셔요. …… 그렇군요, 교수님, 이런 상황에서는…….” 하며 온 몸에 스위치가 켜진다는 것이다. Action Plan Story ∙ 63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온 힘을 다해 설명하게 되고, 시간에 구애 없 이 바로 현장으로 달려가게 된다. 환자 한 명 한 명은 한 집안의 가장이고, 어여쁜 자녀이며, 오래 도록 함께 하고픈 부모일 것이다. 또한 환자의 가족은 우리 병원이 병을 낫게 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병원을 찾을 것임에 분명한데, 질병이 원인이 아닌 치료 과정의 오류로 사망 하거나 크게 신체적 손상을 받았다면 그 실망과 아픔이 얼마나 클까를 늘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 다. 이런 마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님을 안다. 걱정을 가득 담아 연락하는 간호사, 낙심의 목소리로 “김소연 선생, 문제가 생겼어.”라고 전화하시는 교수님,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솔선수범하여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경험할 때마다 이심전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수고 많았다, Hot-line 초기에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많이 걸려오던 Hot-line 전화가 요즘은 아주 뜸하다. Hot-line 전화 감소는 병원이 그만큼 안전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매우 긍정적인 현상으로 생각한다. 그 동 안 나와 PI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자화자찬하면서, 8년째 PI팀과 함께하여 낡을 대로 낡은 전화기에게 말하곤 한다. “너도 수고 많았다.”

새벽 2시 간호사와 통화 후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환자가 돌아왔을까, 아니면 우려한 일이 발생하여 너무 바쁜 나머지 전화를 못하는 것일까? 무척 궁금하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일 것이라 생각하며, 하느님께서 그 환자를 무사히 병원 품으로 돌려주시기를 다시 한 번 기도드린다. 출근하자마자 바로 환자가 돌아왔는지를 확인해 보았다. 환자는 울적한 마음에 몰래 병원을 나 가 집에 갔으며, 부인을 만나고 새벽에 병원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참 다행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입원하는 암환자, 특히 암의 재발로 입원하는 환자는 그 지옥 같은 항암요법과 방사선요법, 극 심한 통증을 참아야 하는 수술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생각에 극심한 공포와 불안, 우울로 극단적 으로 자살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 환자들의 마음을 조기에 발견하고 중재하는 프로그램을 빠른 시일 안에 구축해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우리 팀은 또 다시 마음이 급해진다.

우리 부서는 진료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부서는 아니지만 안전하고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시스템을 구축하고 교육하며, 진료 프로그램을 개선해야 하나를 64 ∙


늘 고민하는 부서이다. 늘 다양하고 광범위한 의견을 내고 브레인스토밍을 하지만 팀원 전체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같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선물이고, 생명이라는 선물을 소중히 관리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예수님께서 구름떼처럼 몰려든 군중 속에서도 각각의 환자를 보시고 한 명 한 명을 일으켜 세우셨듯이, 1,300명 환자 속에서 한 명 한 명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환자를 먼저 배려하고 섬기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하며, 마땅히 행하고 지켜야 할 도리를 알고 실천할 수 있도 록 돕는 것이다.

그래서 PI팀은 늘 바쁘다.

Action Plan Story ∙ 65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대상

엄마를 살린 두 번의 기적 서울성모병원 | 사회사업팀 | 이정숙씨 딸 나명주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성모병원에서 소장과 신장이식 수술을 받은 이정숙 씨 보호자 나명주입니다. 저희가 처음 외과 이○○ 교수님을 만난 건 2002년이었습니다. 소장을 거의 잘라낸 상태였기 때문에 엄마의 영양 상태는 매우 나빴었습니다. 영양제를 맞아 가며 2년 정도 지났을 무렵 엄마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영양 주사로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거죠. 병원에 서는 소장이식만이 엄마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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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기적 - 소장이식 그 당시에는 이식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무작정 하겠다고만 했습니다. 엄마만 살릴 수 있다 면 저는 뭐든지 하려고 했어요. 목숨이라도 바꾸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절박했었습니다. 이식수술 에 들어가는 비용은 생각조차 못 했었고요. 저희가 어려운 형편에 대출을 받고, 친척분들이 도와 주셔서 2천만 원 정도 준비를 했습니다. 그 돈으로 수술을 하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소장이식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어가더군요. 저희는 생체이식이어서 수술 날짜도 다 받았었고, 이미 엄마와 저는 입원까지 한 상황에서 굉장히 난감했습니다. 병원비 때문에 수술을 앞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걱정이 너무 많았었거든요. 수술의 두려움 보다 경제적인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런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름 아닌, 병원 내 사회복지과 선생님들께서 오셔서 저희의 어려움을 들어주시고는 병원에서 수술비를 지원하겠으니 걱정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믿을 수 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걱정 반, 의심 반, 그런 심정으로 수술실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소장이식수술을 마치고 퇴원할 때 금액을 보니 8,500만 원이 청구되었습니다. 저희가 예치한 2천만 원을 뺀 나머지 6,500만 원을 지원해 주셔서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6,500만 원이면 정말 큰 액수인데, 11년 전이었으니까……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대형병 원이라지만 6,500만 원이라는 금액을 지원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원의 손해를 감수하 고 사람의 생명을 살려 주셨습니다. 진정한 인간 생명 존중의 정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감사함 에 엄마와 저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애써 주신 병원 관계자 분들과 특히 사회복지과 선생님들, 그리고 이명덕 교수님 께 이 기회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다시 한 번 전합니다.

두 번째 기적 - 신장이식 이식 후 엄마는 다시 건강을 되찾아 새 삶을 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건강하게 사 셨는데 2011년 되던 해에 신장이 급속하게 안 좋아졌습니다. 만성신부전증이었습니다. 그 전에 도 신장 기능이 떨어지긴 했으나, 오랜 기간 복용한 약들로 인해 신장 기능이 완전히 망가진 것이 죠. 활동도 전혀 못 하시고, 일주일에 3번, 4시간씩 혈액투석을 받으시며 살게 되셨죠.

그렇게 몇 년 투석을 하면서 지내오다 2014년 6월, 결국 투석조차도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 습니다. 모두가 지쳐 갔습니다. 전혀 거동도 못 해 요양 등급까지 받게 되었고요. 누구보다 강한 정신력으로 버티셨던 엄마도 스스로를 포기하겠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뇌사자를 기다려 보기도 했으나, 순서가 너무 밀려 차례가 될 때까지 엄마가 버텨내기 힘들 것 같았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67


생체이식을 받는 것만이 엄마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엄마만큼이나 소중한 내 아기…… 혹여 수술이 잘못되 면 남겨진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엄마는, 나는, 우리 가족들은……. 저는 또 다시 터질 듯 한 슬픔과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없었습니다. 모든 걸 하늘에 걸고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리란 마음으로 생체이식을 결심했습니다. 물론 수중 에 저축해 둔 돈도 얼마 없었습니다. 무작정 병원 사회복지과로 찾아갔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사회복지과 선생님들께서는 저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시고, 몇 가지 방법들을 알려주셨습니 다. 그 중 하나가 재난적 의료비 지원이란 제도인데, 정부에서 일정 부분 보조해 주는 것이었습니 다. 그러나 정부에서 지원을 받더라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 나머지 금액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차○○ 선생님과 여러 번의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담을 하면서도 저희를 도와주고 싶은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몇 번의 상담을 하고 결정이 되었는데, 수술비 일부를 정부에서 보조받고, 그 나머지를 병원에서 지원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소장이식 때 한 번 도와주셔서 이번에는 어 려울 줄 알았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들을 끌어안 고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또 한 번의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 주신 거지요. 낮은 자세로 환자를 돌보고, 어려운 형편의 환우들에게 희망을 주는 병원. 서울성모병원입니다. 병원의 수술비 지원 결정에 너무 든든했습니다. 이식수술이 결정되고 날짜가 다가올수록 어머 니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지정일에 수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술일이 계속 지연되면서 입 퇴원만 여러 번……. 그때마다 병원에서 지원을 다 해 주셨습니다. 거기에 간병비까지 지원을 해 주셔서 어려움 없이 컨디션을 회복해 갔습니다.

드디어 2014년 11월 24일, 이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제가 기증자였습니다. 기증자에 게 들어가는 비용을 제외한 모든 병원비는 병원 측에서 지원해 주셨습니다. 수술 때문에 몸은 비 록 힘들긴 했지만, 돈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서인지 회복도 다른 환자들보다 더 빨랐습니다. 2~3 일 지나야 가스도 나온다고 하던데 전 바로 그 다음 날 가스가 나오더라고요. ^^ 엄마는 다른 신장이식 환자들보다 1인실에 더 오래 계셨습니다. 거동도 불편하셨고, 퇴원 앞두 고 균치료 때문에 입원 기간이 좀 길어지시게 되셨죠. 약 한 달간의 1인실 생활. 병원 측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혀 상상도 못할 일이죠. 이식 받으신 지 2달 정도 되신 저희 엄마는 회복이 무척이나 빨랐습니다. 걱정이 없으니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셨던 것이겠죠. 수술 후 살도 많이 빠지고 입병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는데, 지금은 일반인과 다름없이 생활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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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모병원 덕분에 기적을 두 번씩이나 겪은 저희 모녀입니다. 엄마와 저는 보답하는 마음으 로 더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보여 주신 서울성모병원 관계자분들과 사 회복지과 차○○ 선생님, 이하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5년 1월 25일 나명주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69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우수상

필리핀 소녀, 한국에서 심장과 소리를 되찾다 부천성모병원 | 사회사업팀 | 걸리(Gyrlie)의 어머니 로살리 올라밋(Rosalie Olamit)

이 이야기는 걸리(Gyrlie Rexie Galang Olimit)라는 아이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필리핀 케손, 카티푸난에서 2006년 1월 12일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페인트 칠하는 일을 하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이고 여동생이 있습니다. 걸리가 태어났을 때 의사 선생님은 그녀에게 선천성 심장병(congenital heart disease)이 있으며, 내반족(clubfoot)이 있고, 듣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나아짐이 없어, 우리는 필리핀 정형외과(Philippine Orthopedic Hospital)에 가서 그녀의 발을 검사받았고, 6개월이 지나자 그녀의 발 상태는 나아졌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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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심장질환을 치료하고 싶었지만 돈이 부족하여 의사에게 갈 수 없어 대안적인 한방약만 먹었 고, 심장병에 대한 걱정이 먼저여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의 치료는 생각해 보지도 못하고, 저희는 우리만의 수화를 만들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습니다.

걸리, 심장병 수술을 받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께서 저희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남편 직장 동료의 이모가 카비테에서 의사로, 걸리를 도와주도록 해 준 겁니다. 그 의사는 걸리 가 더 많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자 한국의 한국선의복지재단(Sunny Korea Welfare Foundation)과 연결해 주었습니다. 그 재단은 심장에 문제가 있는 어린아이들을 찾아 기꺼이 도 와주고자 했습니다. 재단은 걸리가 한국에 가서 첫 번째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초음파 검사(2d Echo)를 받아 그녀가 PDA(Pulmonary Hypertension)가 있다는 사실을 진단해 주었습니다. 2013년 7월 11일, 그녀는 재단의 도움을 받아 부천의 세종병원에서 첫 번째 심장수술을 받았 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걸리를 안타깝게 여긴 재단은 왜 듣지 못하는지 제대로 된 검사라도 해 보자고 하셨고, 걸리의 청력 상태를 검사하기 위해 우리를 부천 성모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걸리에게 청력을 선물한 부천성모병원 이것이 걸리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희망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걸리를 검사한 부천성모병원 서○○ 의사 선생님은 달팽이관 이식수술(cochlear implant)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수술을 받을 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천성모병원의 도움으로 2014년 5월 29일, 우리는 한 번 더 한국에서 수술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정말 꿈만 같았 습니다. 2014년 5월 30일, 부천성모병원에서 걸리의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을 하고 언어 치료를 받는 4개월 동안 평화신문 및 사회사업팀의 도움으로 진료비에 대한 걱정 없이 모든 치료 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걸리는 어린아이가 글을 배워 가고 있는 수준으로, 아직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부족한 수준이지 만 텔레비전 소리에 시끄럽다고 하고, 음악이 나오면 춤을 추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71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받은 도움과 관심, 그리고 걸리에게 주신 사랑 너무 감사합니다. 걸리의 수술을 해 주신 의사 선생님들, 그리고 부천성모병원의 스태프분들, 그리고 우리를 부천성모병원 에 연결해 주신 많은 인연들에 모두 감사드립니다. 특히 서○○ 의사 선생님은 저희를 가족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분께 신의 축복이 함께할 것입니다. 부천성모병원이 더욱 번성하여 전 세계의 아픈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기를 희망하며, 걸리가 자 라 또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여러 분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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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우수상

모든 것이 하느님 은총입니다 서울성모병원 | 가정간호센터 | 이종도님 배우자 정환지

다사다난했던 한해가 지나고 새해가 밝으니 작년 한해를 조용히 되돌아본다. 작년 해가 바뀌기 직전이었다. 2014년부터는 구청의 의료비 지원이 끊긴다는 소식에 심란해하 고 있는데, 성당 교우인 환우 가족으로부터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기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 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본당 주보에 나와 있는 가정간호 선생님께 전화를 하였고, 그렇게 서울 성모병원의 가정간호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서울성모병원 가정간호와의 인연 집사람은 2003년 12월 30일, 정확히 11년 전에 잠을 자다 새벽에 원인 불명 심정지로 식물인 간이 되었다. 소방 지구대도 집 옆에 있고, 대형병원이 바로 코앞에 있었건만 응급 처치가 늦어져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73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당시에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겪게 된 일이라, 믿기지 않고 거짓 말처럼 들렸다. 그렇게 한해 두해가 지나고 10년이 넘은 시간이 지났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모 두 넘기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건 나만의 의지만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꾸 준한 관심과 도움을 건네준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년 추위가 물러갈 즈음에, 이전에 살던 동네에서 서초구 우면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자연스 럽게 본당을 우면동으로 옮기게 되었고, 이곳에서 나는 행운의 여신을 만났다. 서울성모병원 가정 간호센터 가정전문 간호사이자 우면동 성당에서는 해설자로 활동하고 계시는 분인 최○○ 선생 님! 길지 않은 시간 보아 온 그 분의 모습은 봉사의 꽃 그 자체이다.

가정간호에 대해 막막했던 상황에 대해 상담을 하니, 서울성모병원의 성모자선회비의 혜택을 받도록 연결해 주셨다. 그 결과로 매달 4번씩 받는 가정간호를 통해 아내 병간호에 대한 든든한 조력으로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을 주었고, 또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자매님께 부탁해준 덕분에 아내의 오래된 환자복도 예쁜 꽃무늬로, 여름에는 시원한 인견을 사용하여, 봄 · 가을에는 면으로 화사하게 새 옷을 지어 주셨다. 많은 도움들에 대해서 막연한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배경에 CMC가 있다는 것을 최근 에 알게 되었다. 나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서울성모병원 교직원들로 구성 된 자선단체인데 ‘성모자선회’라고 한다. 이분들의 후원을 통해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도 움을 받았다고 하니, 그분들에게도 이러한 도움과 관심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지 충분히 짐작 된다. 식물인간 상태로 남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라고들 하지만 가정전문 간호사 선생님은 방문 때마다 의식이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처치에 대하여 설명하고 다정하게 안부를 물으며 재미있는 얘기도 해 주고 기도도 하면서 인간적으로 대하여 주시어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우리 가족이 겪은 작은 기적 남들이 보기에 답답하고 힘들어 보일 것 같은 나의 시간은 매일 매일이 행복하다. 수다 떠는 것 을 좋아하던 집사람이 11년 동안 누워 있으면서, 나에게 시원하게 호통 한 번 치지 못하고, 어떠 한 의사 표시도 하지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내 곁에서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한다.

처음 사고가 있고, 응급실에서 끊어지는 숨을 겨우 살리고 기도관, 위루관, 도뇨관을 유지하여 생명을 이어 가며 짧으면 3일, 길면 한 달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던 아내가 10년 74 ∙


넘게 이렇게 버텨 주는 것만으로 이미 나에겐 위대한 기적이다. 사고 당시 학생이었던 딸과 아들 은 둘 다 좋은 배우자들을 만나 결혼하여 각자의 가정도 이루었으니, 지금은 오히려 내가 말없는 아내에게 의지하고 큰 위로를 받는다.

내가 받았던 모든 은혜를 잊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항시 생각하며, 미약한 힘이나마 도 움을 전하며 살고 싶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CMC 교직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위의 형제님, 자매님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사랑하는 반쪽 이종도 안나! 나 전혀 힘들지 않으니까 오래오래 같이 삽시다.

안나 파이팅!

2015년 새해를 시작하며 정환지(비오)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75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장려상

인생이 때때로 우리를 짓누를지라도… 의정부성모병원 | 사회사업팀 | 소니(Sonny)의 배우자

소니(Sonny)는 본원 신장내과에 2014년 11월 26일 입원하여 말기신장병 진단으로 자가혈관을 이용한 동・정맥루 조성술 및 혈액투석 시행하였고, 2014년 12월 4일 퇴원하신 분입니다.

나는 새벽이 올 때마다, 우리의 인생에 닥쳐올 무언가에 대해 생각을 했습니다. 나에겐 의사의 정기적인 검사와 관리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악화되는 신장질환을 앓고 있는 나 의 남편 소니(Sonny)와, 아직 많은 돌봄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5살 난 아들 제이슨 잰(Joson Jan) 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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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시간에 찾아온 희망 나는 주님께서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주님께 우리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또한 나의 어린 아들도 아버지가 낫기를 열렬하게 주님에게 기도하였습니다. 나의 남편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었기에 우리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는 남편이 투석을 받아야만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혼자서 병원비, 의약품비, 그리고 남편의 질병 관리를 위해 들어가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 필 요한 이 모든 고난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 의 끝이라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투석을 위한 수술을 위해 의정부성모병원에 입원했을 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병원 직원들과 의사, 간호사의 돌봄과 지원으로 인해 우리는 희망을 찾았습니 다. 또한 우리의 친구들과 성당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친구들은 우리가 병원에 머물러야 하는 모 든 시간 동안 우리 아들 제이슨을 돌봐 주었습니다.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돈을 못 버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소니를 떠나 일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치료에 필요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의 상태가 안 좋은 경 우에도 집을 떠나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희망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주 님께 기도했고, 나는 그를 믿었으며, 그가 우리를 홀로 남겨두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삶 속에 큰 역할을 해 준 친구들, 성당분들, 병원 직원, 의사, 간호사 및 모든 사람들의 계 속된 진실한 지원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한국인도 아니며 심지어 이 나라에서 일하는 불 법 노동자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전 생애 동안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불법 노동자를 보듬어 준 주님의 축복과 의정부성모병원 내 마음속에서 너무 많은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만약 나에게 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친구들, 병원, 친절한 의사나 간호사들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랬다면 우리에겐 어떤 일들 이 일어났을까? 소니는 어찌 되었을까? 그리고 특히 아버지의 치유를 위해 신에게 기도를 중단하 지 않은 우리 아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진정으로 주님은 완벽한 타이밍에 그를 신뢰하는 이들 의 기도를 들었고,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남편은 주님께서 보낸 여러분들 덕분에 생명을 구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진실하고 엄청난 지원 덕분에 우리는 고비를 넘길 수 있었고, 모든 것의 원천이신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우리를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진정으로 의정부성모병원 직원들, 의사들, 간호사들이 우리에게 주신 무조건적인 지원과 많은 노력은 남편의 수명을 연장하게 해 주었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지닌 여러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77


전합니다. 특히 수마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준 나의 엄마와 나의 딸을 포함한 가족들과 여러분들의 친절한 행동은 보답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끝없는 지원과 열정에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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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위암, 어느 불법 체류 외국인의 수기 부천성모병원 | 사회사업팀 | 하우

오래 전부터 몸이 피곤하고, 밤마다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고, 살이 계속 빠졌습니다. 위장이 안 좋다는 생각에 김 마르코 수녀님(Sr. KIM MARCO)이 계시는 별사랑이주민센터에 가서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수녀님은 가톨릭대학교 부천성모병원에 연락해서 진료를 볼 수 있게 해 주셨고, 의 사 선생님은 당장 입원하라고 했습니다.

말기암 판정을 받다 2014년 6월 5일, 의사 선생님께서 내시경검사에서 대장에 여러 개의 혹이 발견되었다며 다시 CT, MRI, PET-CT 검사를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저에게 대장암 4기라고 하였고, 수술 날짜를 잡 82 ∙


아야 한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저는 수녀님과 사회사업팀 선생님을 통해 검사 결과를 듣고 너무 무 섭고 죽을까 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받으려면 큰돈이 필요한데, 현재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의료보험도 없을 뿐더러, 베트남에 있는 저의 가족은 4남매지만 가정형편이 모두 어려웠 습니다. 큰누나가 심부전증, 매형은 2년 전에 대장암 3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또 부모님은 당뇨병을 앓고 있어 내가 여기서 일을 해서 매달 돈을 보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고 매우 어려웠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저는 좋은 꿈을 꾸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 부모님을 챙기려 고 하였지만, 이런 제가 대장암이라니……. 제 눈앞은 깜깜해졌습니다. 병원에서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수녀님들이 희망의 말씀들을 해 주셨고, 많은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또한 제가 걱정하 는 수술비와 여러 가지 일들을 알고 사회사업팀에서는 걱정하기 말라고 하시며, 저를 도와줄 수 있는 곳에 진료비 지원 요청을 할 것이라고 약속했고, 별사랑이주민센터에서도 부족한 병원비는 후원금을 모아서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건강만 생각하고 편안하게 진료와 수술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제게……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나의 치료 일지 2014년 8월 20일, 오늘 수술하는 날이었는데,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에 제 마음 속에서 여러 가 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가족이 없는 외롭고 힘든 상황 속에서 내가 이 병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저를 다행히 마르코 수녀님과 병원 사회사업팀 선생님은 항상 저의 옆에서 위로와 안심을 주었고, 덕분에 제가 마음 편안하게 진료를 받고 암과 싸울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오늘이 제 삶에 가장 중요한 날이 되었습니다. 대장암 수술을 하기로 한 날, 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수술 당일에 저는 ‘빈센 트’라고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의 자녀로서 보호해 주시고,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고 저는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도 걱정 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저를 수녀님들과 의사 선생님들이 위로를 해 주셨고, 그 덕분에 편안하게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취를 깨고, 눈을 떠 보니 중환자실에 있었고, 의사 선생님께서 수술은 잘 됐다고 하시며 편안 하게 항암치료를 받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퇴원 후 4번째로 항암치료를 받고 다시 검사를 해 보 니 치료가 잘 되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정말 꿈만 같았고 더 열심히 나을 수 있다 믿고 기 도하고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항암치료를 하러 올 때마다 저의 몸무게가 늘면 선생님들 도 모두 같이 기뻐해 주었습니다.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83


2015년 1월 6일, 오늘 8번째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정말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장암 세 포가 거의 없어졌다고 하시며 1번 정도만 항암치료를 더 하면 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2015년 12월 9일, 9번째 항암치료이며, 마지막 항암치료입니다. 저는 치료를 받는 5개월 동안 의사 선생님의 친절함과 수녀님의 사랑과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평화신문과 한마 음한몸운동본부의 도움으로 치료비 걱정도 없이 치료를 받았고, 죽을까 걱정했던 저는 이제 대장 암 치료를 마치고 베트남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베트남의 가족들도 한국에서, 부천성모병원에서 수술도 받고 항암치료도 할 수 있었음에 너무 나도 감사드립니다. 베트남에 돌아가서도 계속 병원 진료를 하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죽을 줄 알 았던 내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베트남에 돌아갈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쁩니다. 정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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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장려상

어느 감사한 ‘님’께 서울성모병원 | 사회사업팀 | 박시은의 엄마

안녕하세요. 이번에 도움을 주신 덕분에 무사히 수술 잘 받고 결과가 좋게 퇴원하게 된 22상의 지적장애가 있는 박시은이라는 여자아이의 엄마입니다. 저희에게 이렇게 큰 도움을 주셔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도리인데 이렇게 편지로 인사를 드립니다.

심장병 수술을 받게 된 큰딸 약하게 태어나서 먹는 양도 적고, 발달도 늦어 검사 결과 지적장애로 판정을 받았지만, 저희 아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85


이는 춤과 음악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해서 누구에게나 친근함을 보이는 밝은 성격을 가진 아이 입니다. 그런데 잦은 감기로 인해 병원을 찾았다가 심장판막수술을 해야 한다기에 무척 놀랐습니다. 초 등학교부터 주기적으로 초음파검사를 받아 왔는데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 하여 마음을 푹 놓고 살다가, 수술 얘기를 들으니 눈물이 먼저 앞을 가리더라고요. 그 동안 잘 해 주지 못한 점과 혼냈 던 점이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수술은 해야 한다고 하는데 우선 수술비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수술비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물어보아도 환자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며 말씀도 안 해 주시고……. 해서 인터넷을 뒤져 보니 정말 액수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각기 다르지만 정말 큰 수술 비용이었습니다. 이번에 전문대에 들어가는 여동생이 있어서 등록금 마련에만 신경 쓰다가 큰애 일까지 겹치게 되 니 막막할 따름이었습니다. 저희 집은 22살 큰애(딸), 20살 둘째딸, 11살짜리 아들 쌍둥이, 이렇게 남편과 저 여섯 식구입 니다. 저희는 수원의 성빈센트병원에서 처음에 수술 권유를 받았는데, 나중에 서울성모병원의 소 아심장 전문의를 찾아가라고 추천해 주셔서 서울성모병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수술비 걱정을 하다 보니 사회사업부를 연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다 집안 얘기를 하고서 서류를 작성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락이 왔습니다. 어느 개인 기부자님께서 지원해 주시겠 다는 말씀에 무척 놀랐고, 감사하며, 한편으론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너무 이기적으로 살았거든 요. 한 번도 도와주지 못하고 내 생각만 하고 살아 왔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해 주 었습니다.

도와주신 ‘님’께 감사하며 오늘은 일요일 새벽입니다. 다음 주면 퇴원을 해도 된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시은이가 복이 많은 아이인가 봅니다. 감사한 ‘님’을 만나서 수술도 잘 끝내고, 집 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은혜를 갚지도 못하고 편지 한 장만 쓰려고 하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건강하게 잘 키워 서 다시는 병원에 오지 않도록 열심히 보살피겠습니다. 벌써부터 밥 먹지 않겠다고 옆에서 징징 대는 아이를 보고 있으려니 앞으로도 좀 더 힘을 내서 살아야겠습니다.

오늘은 겨울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병원 창밖을 보니 새벽인데도 바쁜 차량들이 쌩쌩 내달리고 있네요. 모두 행복을 위해서 달리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희도 앞으로 열심히 살면서 베푸는 86 ∙


법을 배우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님’께서도 늘 건강 챙기시고 감기 걸리지 않게 몸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가정에 항상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라면서 저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2015년 1월 25일 박시은 엄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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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장려상

하나님이 찾아 주신 나의 오른손 부천성모병원 | 사회사업팀 | 와우 크리스틴

샬롬! 제 이름은 와우 크리스틴입니다. 저의 나이는 14세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 이유는 저의 손이 아픈 것으로 인해 제가 인도 네시아에서 대한민국에 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 같습니다.

아픈, 부끄러운 내 오른손 저는 선천적으로 손에 통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병원에 갔 지만 병원에서 손목을 절단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차마 여자아이인 저에게 장애를 주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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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다고 생각하여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저는 계속 아픈 손을 가지고 생활하였습니다. 통 증이 익숙하기는 하지만 공부를 하거나 음식을 만들기 위해 오른손을 사용할 때면 통증이 너무 심하고, 점점 손이 부어오르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사람들에게 저의 손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손을 보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온 청년 봉사자들과 함께하는 세족례에서 손을 닦아 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 는 저의 손을 숨기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봉사자 집사님의 손에 이끌려 결국 예식에 참석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너무 창피하고 힘들었는데 그것이 저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삶을 위한 초대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저는 대한민국에 오게 되었고, 대한민국은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저의 십자가를 가볍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2015년 1월 5일, 저는 낯선 한국, 낯선 병원에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손목을 절단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나를 반겨 주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보다 무서움이 더 큰 날이었습니다. 드디 어 의사 선생님이 저에게 건넨 말은, 통증을 줄이기 위해서는 저의 마지막 손가락을 절단해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손목 절단이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지만 저는 너무 슬펐습니다. 그래서 선뜻 알겠다고 말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였습니다. 저의 꿈은 요리사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를 따라 요리를 하면서 재미있고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요리로 지금은 직접 쿠키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손가락을 절단하고 나면 그 모든 것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무척 보고 싶었 습니다. 저는 학교를 가기 위해 현재 고아원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농사를 짓고 계시는데, 수입이 많지 않아 저를 학교에 보낼 돈이 없어서 저는 현재 고아원에서 생활하고 있습 니다. 한국에 올 때 저의 법적 보호자가 고아원 책임자로 되어 있어서 사모님과 동행하여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손가락을 자른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과 상의하고 싶었습니다. 아빠와 통화하면 서 손목이 아닌 마지막 손가락 하나면 된다는 말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수술을 하라고 하셨습 니다. 저에게는 너무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저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망설이던 수술이었으나, 친절하게 설명하며 저에게 선택권을 주고 고민하게 해 주신 교 수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수술이라도 외국인이고 어린 저에게 네가 원하는 걸 생각해 보라고 하시고,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시는 교수님의 배려가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주신 내 오른손, 그리고 행복 저는 수술을 통해 새끼손가락이 없어졌지만 그 동안 겪던 통증이 많이 줄어들었고, 커다랗게 부어 있던 손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지난 1월 5일부터 있었던 모든 일에 감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93


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특별히 제가 병원에 있는 동안 의사 선생님들, 간호사분들, 그 리고 수녀님들의 도움으로 수술 받고, 회복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또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의 엄마들이 저를 많이 챙겨 주셨습니다. 퇴 원하는 날 어서 나으라며 멀리 가는 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목 베개도 선물로 받았습니다. 너무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아 저에게는 한국이 너무 좋은 곳입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기적이 이뤄지듯이 돈이 없어서 학교도 다니기 어려웠던 제가 한국에 올 수 있었고, 무료로 손까지 치료 받을 수 있게 된 상황 모두가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비록 종교 는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더욱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래 우리 는 모두 하나이구나, 그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해 주고 아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더 행복한 시 간이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에 계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사합 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와우 크리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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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된 전화 한 통 서울성모병원 | 사회사업팀 | 신덕철

2014년 4월 어느 날, 아무 희망 없이 투석하고 있는 와중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것 은 저의 인생에 있어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서울성모병원에서 신장이식을 받을 수 있다 고 연락이 온 것입니다. 10여 년 동안 신장투석을 하면서,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서울성모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있 는 기회였습니다. 연락을 받자마자, 당일로 서울성모병원에서 신장이식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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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평생 꿈이 이루어지다 5개월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자나깨나 막내아들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여러 군데 병원을 전전하며 생과 사를 넘나든 아들 모습을 보시며 대신 아파하지 못해 안 타까워하신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는 제 자신 또한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신장투석 으로 힘들어하는 아들에게 신장이식을 받게 하는 것이 어머니의 평생 꿈이셨습니다. 조금만 더 살아 계셨으면……. 아들이 신장이식을 받아 새 생명을 찾은 모습을 보며 기뻐하실 어머니 모습 을 생각하니 더욱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나니 문득 병원비가 많이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성모병원에서 800만 원의 큰돈을 지원해 주셔서 무사히 잘 끝낼 수 있었습니다. 사회사업팀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제가 받은 큰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 싶어서 시작한 활동이 있습니다. 저와 같은 환자분들께 도 움이 되고자, 한마음운동본부에 매월 2만 원씩 후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는 수녀님을 통해 해외 결식아동을 위해서 매월 1만 원씩을 후원하고 있으며, 서울성모병원에 시신 기증도 서약했습니다.

공여자의 몫까지 열심히…… 이식을 받고 나서 제 삶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수술 후, 소변이 잘 나온다는 것과 물을 맘껏 마셔도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이식 전에는 마음 편히 바깥을 자유롭게 다니지 못했지만, 이식을 받고 나서는 어디든 자유롭게 움직이며 몸도 마음도 한결 가 벼워졌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파란 하늘과 낮에 내리쬐는 햇살과 함께 지저귀는 새소리까지 모든 것이 즐겁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치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다 소중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새 생명을 주신 공여자님과 가족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공여자님을 위하여 매일 기도드 리고 있습니다. 공여자 그분의 몫까지 열심히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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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마감하려던 마지막 순간, 죽음의 절망감에서 생명의 빛을 만나다 부천성모병원 | 사회사업팀 | 조일석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왔을까?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살아온 의정부의 어느 익숙한 산을 찾아가 인생을 마감하기 위해 뛰 어 내리려던 순간, 부천성모병원 그곳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몇 년 전에 도움을 받았던 흐릿한 기억이 떠오르자 허겁지겁 산을 내려와 신호등도 무시하고 자동차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또 밟으면서 수많은 병원을 지나쳐 무작정 밀고 들어왔다. 이곳에서만큼은 내가 무언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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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마감의 결심 내가 한 가닥 실오라기를 붙잡듯이 병원에 뛰어 들어와 요구했던 것은 내 장기를 병원에 팔겠 으니 내 장기를 담보로 하여 돈을 받고자 한 것이었다. 어차피 자살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 전에 장기를 판 돈으로 밀린 빚을 갚고, 아내와 자식에게도 가장으로서 얼마의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 이다. 그 동안 많은 은행과 관공서를 찾아가 수모를 무릅쓰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발 딛고 살아갈 수가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내 한 목숨 스스로 죽으면 그만 이지만, 실의에 빠져 우울증을 겪고 있는 아내와, 등록금과 급식비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식을 생각할수록 세상에 대해 너무 억울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동안 사회에 받은 수모를 앙갚음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에 장기를 판 돈을 들고 관공서를 찾아가 “잘 먹고 잘 살 라!”라고 소리치며 돈을 뿌리고서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병원의 직원이 장기를 팔고 인 생을 끝낼 것이라는 내 얘기에 놀란 나머지 원목 수녀님에게 심각한 상황을 알려 주었고, 나는 수 녀님과 다시 면담을 하게 되었다.

내일, 희망, 그리고 부천성모병원 수녀님 앞에서도 나는 오로지 오늘, 당장, 내 장기를 살 수 있느냐고 재촉하면서 빨리 죽음으로 세상을 끝낼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수녀님은 나를 달래며 그간의 사정을 물어보았고, 나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도, 아무런 희망이 없는 절박한 상황을 쏟아놓았다. 이미 집, 자동차, 통장, 물건 등은 차압당한 지 오래이고, 은행과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은 갚을 길 없이 이자만 늘어가 더 이상 살아갈 방법이 없이 사면초과로 막혀 있던 것이다. 더욱이 아내의 우울증 은 깊어 가고 가난에 시달려 나와는 얼굴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중・고등학생인 자녀들은 등 록금과 급식비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관공서를 찾아가 연체된 의료보험료를 삭감하여 줄 것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한 채 가족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도 없는 형편이 된 상황을 격분 하며 털어놓았다.

긴 시간 함께 울고 답답해하며 내 얘기를 들어주신 수녀님은 장기 매매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어려움을 해결해 보자고 하시며 내일까지만이라도 죽는 것을 연장하고 기다려 보자고 하셨지만 나로서는 결코 내일을 희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 심정을 헤아리고 위로하며 죽음보다는 삶을 선택하기를 바라면서 힘이 되어 주겠다 는 수녀님의 진심어린 말씀을 들으며 하루를 더 기다려 보자는 오기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결코 사그라지지 않은 증오로 밤을 지내고 다음 날 병원을 찾아왔을 때, 수녀님은 너무나 반갑게 나를 98 ∙


맞아 주었다. 그날부터 수녀님은 여러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동시에 병원 사회사업팀과 함께 백방으로 나와 가족이 받을 수 있는 지원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하셨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나와 가족은 병원의 치료를 받으며, 실질적인 도움을 받고 있다. 내가 병원 입원 치료를 할 때면 병원비를, 그리고 성가자선회에서는 자녀들의 학비를 지원해 주고 있다.

이렇게 내가 죽고 싶었던 순간에 손 내밀어 준 부천성모병원은 나와 가족이 가난과 고통을 딛고 새로운 삶을 향해 달려갈 수 있게 해 준 희망의 장소이다. 나와 가족을 다시 살려 준 부천성모병원 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리며, 이 세상에서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빛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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