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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주요뉴스 대전 지역 언론사 대표와 간담회 가져 권우동 신임 사무총장 임명 인터뷰 장사익
언론중재위원회 NEWS
제170호
Contents 03 이달의 주요뉴스
대전 지역 언론사 대표와 간담회 가져 권우동 신임 사무총장 임명
04 인터뷰
장사익
07 내 안의 인문학
불편한 진실
08 위원단상
색소폰 공감 즐겁지 않겠는가
09 신 동의보감
치매
10 직원마당
언론피해 상담업무를 담당한 지난 1년을 돌아보며
11 조정후기
피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성추행 보도, 즉각 대처했어야
12 신입직원 한마디 13 위원동정·위원회 소식 14 조정중재사례 소개 및 독자마당 언론중재위원회 NEWS
발행인 박용상 편집인 권우동 발행일 2014년 8월 1일 등록 2009년 12월 7일 서울중, 라00325 발행처 언론중재위원회(서울 중구 세종대로 124 프레스센터빌딩 15층) TEL 02-397-3114 FAX 02-397-3069 홈페이지 www.pac.or.kr 편집·디자인 (주)잉카커뮤니케이션즈 TEL 02-548-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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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주요뉴스
언론
사람 제170호
대전 지역 언론사 대표와 간담회 가져 언론중재위원회 박용상 위원장은 7월 22일 대전 지역 주요 언론사 대표와 오찬 간담회를 갖고, 대 전 지역 언론계 및 지역 현황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박 위원장은 이 날 간담회에서 언론조정중재제도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설명했으며, 초상권 침 해 관련 조정사례를 언급하면서 초상권의 범위 및 초상권을 침해하지 않는 취재 보도방법 등에 대 해서도 논의했다. 또 공직선거법에 따라 선거기사의 공정성 여부 등을 심의하기 위해 현재 위원회 내에 선거기 사심의위원회를 설치·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심의기준 등 위반 정도에 따라 사과문, 경고 인사말을 하고 있는 박용상 언론 결정문 등을 게재하도록 하고 있다고 안내했다. 대전중재부 중재위원이자 한국재난정보미디어포 중재위원장 럼 회장인 이 연 위원(선문대 언론광고학부 교 수)으로부터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살펴본 재난보도의 문제점 등에 대 해서도 의견을 들었다. 위원장 취임 후 처음으로 지역에서 가진 이번 간담회에는 양태경 대전지법 부장판사를 비롯하여 송종문 전 중앙일보 이사, 이연 선문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정교순 변호사, 조은희 목원대 광고홍보언론학과 교수 등 대전중재부 중재위원과 남상현 대전일보 대표이사, 김원식 중 도일보 회장, 이원용 충청투데이 대표이사, 곽영지 KBS대전방송 총국 장, 김창옥 대전MBC 대표이사, 이왕돈 TJB대전방송 대표이사 등 대 전 지역 주요 언론사 대표가 참석했다.
박용상 언론중재위원장(왼쪽 두 번째)이 대전 지역 언론사 대표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권우동 신임 사무총장 임명 언론중재위원회 박용상 위원장은 중재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7월 28일 권우동 영남본부장을 위원 회 신임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이 날 취임식에서 권우동 사무총장은 중책을 맡아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중재위원님들과 사 무처 직원분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위원회가 그동안 전·현직 중재위원, 사무처 선·후배의 헌신과 노력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 뤄왔다며,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 내부 역량을 한 데 모을 것을 당부했다. 아울러 조직은 상식과 합리, 공정을 바탕으로 운영돼야 한다며, 소통, 공감, 스킨십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무처의 수장이 되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취임사를 하고 있는 권우동 신임 사무총장
신임 권우동 사무총장은 1988년에 언론중재위원회에 입사하여 기획팀장, 운영본부장, 심리본 부장, 영남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권 사무총장은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으며, 위원회 창립 30주년인 지난 2011년에 위원회 발전에 공로한 기여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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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는 것, 이것이 제 노래의 의미이자 보람입니다 ”
46세의 늦은 나이로 시작한 노래의 길. 데뷔 스무 해가 된 지금 대 중들은 장사익 선생을 가리켜 ‘가장 한국적인 정서가 스며있는 목 소리’, ‘이 시대의 소리꾼’으로 표현한다. 정작 본인은 하고 싶은 일 을 하면서 살고 있어 운이 좋은 것 같다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스스로를 즐거운 사람을 더욱 행복하게 해주고, 슬픈 사람의 슬픔을 씻어주는 어릿광대라 칭하는 그를 만나 그의 음악에 대한 생각과 앞으로의 활동 계획 등을 들어보았다.
장사익 •1949년 충남 광천생 / 선린상고 졸
●● 올해로 데뷔 20주년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주년을
•1994년 장사익 소리판 “하늘가는 길” 데뷔
맞는 소회 말씀 부탁드립니다.
•1집 하늘가는 길(1995), 2집 기침(1999), 3집 허허바다(2000), 4집 꿈꾸는 세상(2003),
친구들 사이에서 노래를 제법 한다는 이유로 나이 마흔 여섯에 친
5집 사람이 그리워서(2006), 6집 꽃구경(2008), 7집 驛(2010) 출반
구들에게 등 떠밀려 데뷔한 지 벌써 20년이 됐습니다만, 젊었을 때 부터 노래라는 외길을 걸어오신 수많은 선배들에 비하면 저는 아 무것도 아닙니다. 또 가수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시행착 오와 어려움을 겪는데, 저는 남들 은퇴할 시기에 뜬금없이 나와 하 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으니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인생은 저마다의 길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자 신에게 맞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살면서 그 길을 찾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도 받으며 살고 있으니 제 인생 은 나름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 장사익 선생님의 목소리에 대해 가장 한국적인 소리이며,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해내는 소리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저도 제 목소리가 어떻게 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그리고 제 목소리가 정말 한국적인 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각 나 라별 음식마다 연상되는 특색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목소리도 저 마다의 특색을 갖고 있지요. 제 경우에는 오랜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인생을 어느 정도 체 험한 후 노래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간의 인생 경험이나 삶 의 애환 등 복합적인 감정들이 좀 더 제 목소리에 묻어나 한국적인 정서가 많이 녹아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 지난 4월 미국, 캐나다 등 북미 지역 공연을 마치셨고, 이 외에도 일본, 뉴질랜드 등 여러 차례 해외 공연을 통해 한국의 소리를 알리는 데 기여하고 계십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공연 이 있다면. 1994년도 첫 데뷔 공연이 기억에 남습니다. 비록 친구들에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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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사람
떠밀려 한 셈이지만, 1백석 규모의 소극장에 이틀 동안 8백 명의 관객
나도 없구나 하는 자괴감에 빠져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마지막이라
이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공연 다음날 ‘아, 나는 행복하구나! 이게 행복
고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보자고 했던 것이 바로 태평소 연
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데뷔 공연 당시의 감동과 감격은
주였어요. 카센터도 그만두고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자고 마음
잊을 수가 없습니다.
먹은 후로는 태평소만 생각하면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연주 실력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공연했던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도 많이 늘었지만, 사물놀이와 공연을 다니면서 연주 후 뒤풀이 때 노
한 일본인 팬이었는데,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던 그를 위해 일본을
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정말 잘한다고 했어요. 그게 인연이 돼 1994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공연 당일, 정작 그 팬은 병환이 깊어 오
‘예(藝)극장’에서 초연을 했는데, 당시 제 나이가 우리 나이로 마흔 여
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고 허탈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리
섯이었습니다.
허설이 끝나고 쉬고 있는데 친구들의 부축을 받고 공연장에 들어서는
제가 노래에 대한 욕심이 많아 젊은 시절에 무대에 섰더라면 지금
그를 보았지요. 두 시간여 남은 본 공연 전이었지만, 그 사람만을 위해
같은 노래를 부르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직장생활을 전전했던 25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 일본 팬은 본 공연까지 버텼고 뒤풀이까
년은 제 노래의 밑바탕이고 거름같은 시기였습니다.
지도 함께 했습니다. 감동적이었어요. 공연을 마치고 제가 한국으로 온 지 일주일 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 가수, 소리꾼, 국악인 등 여러 호칭으로 불리고 계십니다.
에게 있어 생애 마지막이었던 그 공연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가수이고,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소리꾼이라는 것
최근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추모 공연도 기억에 남아요.
은 국악의 명인들에게 부여하는 명칭입니다. 명창들을 통상 소리꾼이
‘찾아 가보니 찾아온 곳 없네 돌아 와보니 돌아온 곳 없네…’라는 정호
라고 부르죠. 그런 제가 언제부턴가 대중들로부터 소리꾼이라고 불려
승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허허바다’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람들
서 늘 국악하는 분들께 송구스러운 마음입니다. 오히려 제게 가수라고
에게 제 노래가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제 노
불렀다가 미안해하시는 분도 있어요. 제게 소리꾼이라고 말하는 분들
래의 의미이자 보람입니다. 그래서 노래하는 순간순간이 늘 의미 있다
은 아마도 제 목소리나 노래에 한국적인 것들이 녹아있다고 생각하셔
고 생각합니다.
서 그렇게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러한 호칭으로 불러주시는 것 에 대해 국악의 명창처럼 제대로 노래하라는 채찍질로 받아들이고 있습
●● 1994년 46세의 늦은 나이에 데뷔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니다. 농담으로 민중가수와 대중가수의 중간인 민생가수라고도 합니다.
직장생활을 할 당시 낙원동의 한 작곡가 사무실에서 노래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군 생활도 문화선전대에서 했기 때문에 노래는 계속 했었죠.
●● ‘찔레꽃’, ‘봄날은 간다’, ‘대전부르스’ 등 많은 노래가 국민들의 사
하지만 군 제대 후 현실적으로 노래에 대한 꿈을 접고 직장생활을 다시
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애착이 가는 곡이 있다면.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평탄치 않았습니다. 오일쇼크 등 경제 위기로 인
지금까지 낸 7개 음반 중 자작곡이 30곡 정도 되는데, 자전적인 이야기
해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 다니던 회사가 망한 적도 있습니다. 당시 무
를 담은 곡들로 모두 의미 있고 소중합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려 15곳이 넘는 직장을 전전했습니다.
않은 손가락이 없지요. 그래도 굳이 고른다면 저를 대중에게 알려지게
옛날 저희 고향에는 농악 놀이가 유명했는데 아버지는 장구를 잘
한 ‘찔레꽃’을 꼽고 싶습니다. 제가 카센터를 그만두고 더 이상 밑바닥
치셨습니다. 그 중 태평소를 잘 부는 아저씨가 계셨는데, 제가 그 태평
으로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에 아파트 근처에서 꽃향기
소 소리를 유난히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태평소 소리를 듣
가 났어요. 아파트 주변에 붉은 장미꽃이 가득 피어 있기에 장미꽃 향
고 자라서인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태평소 소리가 늘 그리웠어요. 힘
기인가 하고 다가갔는데, 장미 넝쿨 뒤로 처연하게 피어 있던 흰 찔레
들고 고된 직장생활을 해나가면서도 태평소에 대한 동경으로 한 국악
꽃에서 나는 향기였어요. 화려함 뒤에 갇혀졌던 그 찔레꽃이 마치 내 모
단체에 들어가 태평소와 피리, 대금 등을 배웠습니다.
습인 듯 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제 처지와 오버랩 되면서 당시 흥얼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태평소 연주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고 마
거렸던 노래가 바로 ‘찔레꽃’이었어요. 곡조가 단조롭고 노랫말이 단순
음먹은 것은 90년대 초였습니다. 당시 저는 매제가 운영하는 카센터에
함에도, 자전적인 노래로서 제 인생의 역경이 반영돼 많은 사람들의 공
서 일하고 있었는데, 20년 이상 사회생활을 하면서 제대로 한 것이 하
감을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자신도 무척 좋아하는 곡이고,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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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부르지 못하게 될 때까지 평생 불러야 할 곡인데, 요즘 그 곡 부르기가
제 곡에 의성어가 많고 판소리처럼 내레이션을 넣기도 하는 등 국악을
제일 까다롭습니다.
접목시켜 보다 입체적으로 노래를 부르려고 합니다. 10년 전만 해도 제 노래 장르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했던 대중들이 지금은 이런 제 노래
●● 유명 디자이너의 한글 문양 옷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일명 ‘장사
에 공감하고 호흡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것이 국악의 또 다
익체’라는 서체로도 유명하십니다. 평소 서예에도 관심이 많은지요.
른 대중화의 한 방식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서당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붓 글씨도 배웠고, 상고 출신이라 펜글씨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붓글씨는
●● 선생님께서 공연을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
쓰는 사람의 손 힘에 따라 획의 굵기를 달리 할 수 있고, 글씨에 여운
시지가 있다면.
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공연에서 ‘아버지’ ‘꽃구경’이라는 곡을 부르는데 그 노래를 부를 때마
쌀알에 반야심경을 새겨 기네스북에도 오르기도 했던 흑우 김대
다 관객 절반 이상이 눈물을 흘립니다. 삭막한 요즘 세상 눈물을 보이지
환 선생님이 제게 글씨를 써보라고 권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후 한글
않는 사람이 많은데, 하찮은 제 노래 하나로 사람들이 웁니다.
을 제 나름대로 흘려 쓰는 연습을 했
제 자랑이 아니라 언젠가 공연 후 관객들에게 사인을 하던 중, 제
는데, 획 긋는 것이라든지 삐침 하나
나이 또래 되는 분이 한참을 기다리다 차례가 돼 사인을 해드리려고 했
하나가 흥미 있더군요. 그래서 제 음
어요. 그런데 그 분이 “난 사인은 필요 없어. 사실 내가 오늘 아침까지
반 재킷이나 포스터의 글씨는 모두
정신병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공연보고 나서 딱 끊기로 했어. 고마
제가 썼습니다.
워.” 하시더군요. 사실 저는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불교에서 말하
한글 흘림체 쓰기 연습을 시작
는 ‘음성공양(音聲供養)’이 이런 게 아닐까요. 제 노래를 듣고 사람들이
한 지 7년 정도 지났을 때, 디자이너
마음의 위안을 얻고, 아픔이 치유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상봉 선생으로부터 패션쇼 초청장
●● 앞으로의 음악 활동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을 받았습니다. 당시 공연 때문에 못 갈 것 같아 죄송하다고 편지를 써서
앞으로도 지금처럼 소소하게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면서, 하고 싶은 노
장사익 4집 “꿈꾸는 세상” 노랫말 중
보내드린 적이 있는데, 제 글씨를 유
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어 허리 굽고 지팡이 짚고 삐걱거리면
심히 보셨던지 그것을 모티브 삼아 옷에 한글 문양을 넣으셨습니다. 해
서도 무대에 올라가서 대중들 앞에서 노래를 하는 꿈을 늘 꿉니다. 그
외에서 반응이 좋아 한국에서도 패션쇼를 했는데, 모델없이 갤러리에
저 사람들 앞에 읊조리고 서 있기만 해도 노래가 나올 것 같습니다.
서 옷 작품만으로 전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일어날 기(起)’, ‘날 생(生)’ 자를 써 기운을 북돋아주는 사람, ‘기생’으로 계속 활동하고 싶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활발한 공연 활동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는 자 리를 갖고 계시지만, 여전히 대중들은 국악이 어렵다는 인식을 갖고
●● 저희 언론중재위원회는 잘못된 언론보도로 발생된 분쟁을 당사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자간 조정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
전통이라는 것은 고유의 색을 지녀야 하므로 쉽게 대중화되기 어려울
다. 위원회에 조언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대중화되면서 그 고유의 색이 퇴색되기도 합니다. 뿐만 아
언론중재위원회는 저울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울이
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대중들의 기호나 유행, 템포를 전통 국악이 쫓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가운데 중심이 중요합니다. 저는 그 기준이
아가기도 힘들다고 봅니다. 전통 국악 자체를 무리해서 대중화시킬 필
사회 정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변해도, 어떤 외압이 있어도
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정의를 기준 삼아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분쟁을 조정하
실은 요즘 국악계가 가장 대중에게 가까워졌고, 활성화되고 있는
는 역할을 다해주시길 바랍니다.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악을 타 음악 분야와 접목시킨 퓨전 국악 팀도 많이 있습니다. 저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보편타당한 얘 기를 노래에 담아 부르면서, 국악적인 요소를 많이 차용하는 편입니다.
•진행 | 이수종 (홍보팀장) •정리 및 사진 | 박혜진 (홍보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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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인문학
언론
불편한 진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간혹 우리는 어른들 앞에서 좀 아는 척하다 이런 핀잔을 듣고는 한다. “너무 많아 알아 탈”이라고 말이다. 보통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경우에 따 라서는 ‘아는 것이 병’이 되는 경우도 있다. 지난 호에 본 인어(?)를 그린 그림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그림은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 트가 그린 <집단적 발명>(Collective Invention)(1934)이다. 그림을 보면 우리가 늘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느끼는 일이지만 익숙해 방심하다가 허를 찔 리는 그런 그림이다. 우선 보면 어? 인어를 그렸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고 있으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인어와 다르기 때 문이다. 그렇다. 상식적으로 우리에게 인어는 상반신은 여성의 모습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이다. 그런데 그림 속 인어는 반대이다. 그래서 처음 인어구 나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 인어가 그런데 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인어라고 할 수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이 ‘불편한 진실’ 때문에 불편해지면서 그림을 보는 일이 피곤해진다. 하지만 세상사람 누구도 인어를 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인어란 개념과 형태는 확정적이다. 이는 우리가 속한 사회와 집단의 약속 때문이다. 그 약속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저항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집단적 발명’이다. 발명이란 “아직까지 없던 기술이나 물건을 새로 생각하여 만들어내는”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화되고 익숙해진다. 누구도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익숙해지거나 순치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어의 존재를 인정한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바뀐 인어에 대해, 없는 것을 상상해 그린 것이라고 진실을 말하면 될 것을, 그렇게 못하고 꽁꽁 앓 게 되는 것은 그림은 ‘재현’이라는 인식 즉 그려진 것은 언제나 실재하는 것, 현존하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대개 세상에 새롭게 태어나고 만들어 지는 것들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익숙해진다. 새로운 미술만 불편할 뿐이다. 그림은 ‘재현’의 시대를 넘어 ‘표현’의 시대로 접어든다. 하지만 ‘표현’도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톨스토이에 의하면 작가가 자신이 느낀 감정을 표현을 통해 가시화하고 그 전달에 성공한 상황을 예술이라고 보았다. 그 후 우리는 예술가 또는 작가가 경험하고 느낀 것을 그대로 느끼는 것을 감 상이라고 하고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의 시대를 지나 감각적인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의미를 중시하는 상 징의 시대로 접고, 다시 표면적으로 그려진 사물 이면에 또 다른 의미가 숨어있고 이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미술 감상의 첩경이라고 생각한 알레고 리의 시대를 겪었다. 그리고 삶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거나 그리는 사실주의를 지나 지금까지의 회화의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시각적 자율성을 얻 게 되는 모더니즘의 시대로, 그리고 미니멀리즘(그림1, 2)이나 하드에지(그림3)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를 타고 결국은 아서 단토의 말처럼 ‘종말’ 에 이른다. 그는 제안한다. 기존 방식으로 이해되던 예술은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평가와 의미의 문제는 무의미하며 내러티브 즉 서 사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예술과 일상의 구분도 무의미한 무엇을 예술이라고 미술품이라고 택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의 문제라고 말이다. 사실 우리 의 삶이 변화했기 때문에 예술이 진보하고 변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세상의 주인은 나이며 세상을 보는 것도 나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우리는 여전히 재현이나 톨스토이의 시대의 눈으로 그림을 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면서 그림 보는 법은 왜 못 바꾸고 여전히 보도 듣도 못한 인어 속에 갇혀있는 것일까.
(그림1) 말레비치,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1915)
(그림2) 도날드 저드, 큰 더미 설치장면
(그림3) 엘스워스 켈리, 하드에지 스타일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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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단상
색소폰 공감 즐겁지 않겠는가
한 석 동 위원 서울제3중재부 동의대 초빙교수/전 국민일보 편집인
5년 전, 그림과 함께 색소폰에 입문한 것은 중년의 통과의례로, 고독해질 인생 2막에 대한 막연한 불안에서 출발했다. 거창하게는 순전한 심 연을 찾고 싶은 무의식이 나를 불러냈을지 모른다. 나이 들어가면서 혼자 놀 줄 아는, 혼자서도 즐길 줄 알면 장수한다는 말도 있기는 하다. 어쨌거나 생면부지, 배워볼 마음을 먹기 전까지 색소폰은 나 하고 상관없는 일이었다. 색소폰 인연 초기는 황홀했다. 스스로 내는 색소폰 소리에 턱없이 도취했고, 득음이나 한 것처럼 자주 감동했다. 모르면 용감하다더니 대중 앞에 몇 차례 서기까지 했다. 그러는 게 아님을 안 것은 1년쯤 지났을 때였다. 그것만으로는 더 잘할 수 없음에 꺾여 점차 흥미를 잃었다. 무례 경거망동들이 참으로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리고 단념까지 포함해 방황하기를 3년여. 이따금 품질향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꽤 오랜 시간을 고달프게 보냈다. 지나고 보니 그게 꼭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1년 전 쯤, 탁월한 연주실력과 레슨역량을 겸비한 선생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그것은 부실했던 경험에 대해 회한이 있었으므로 가능했 을 터이다. 과분하게도, 평범했으면 새 길을 찾지 못했을 것이라고 안위할 수 있게 됐다. 퓨전재즈 전문가인 선생님은 국내외 무대에서 정상급 명망가로 꼽힌다. 재즈를 전혀 몰랐던 나는 그를 만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무릇 음악이란 장르를 초월해 서로 접목 조화할 수 있고, 재즈 또한 별세계 음악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에 감사한다. 성가, 클래식, 팝송, 트롯가요에 재즈를 녹여 체험하는 환상은 정말이지 특별하다. 레슨은 초보단계로 되돌아갔다. 잊을 만하면 자괴감이 들고, 책 제목처럼 공부가 가장 쉬웠다는 푸념이 자주 나온다. 그럼에도 견디는 것은 어렴풋이 빛이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색소폰 연주자 칼럼에서 달인요리사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요리사는 텃밭 농사를 시작하려는 지 인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1년 동안 농사 지을 생각은 말고 거름만 줘라. 그러면 1년 뒤 뭘 심어도 잘된다.” 그랬다. 벅차지만 새로 시작된 색 소폰 레슨에 나는 불만 없이 빨려 들어갔다. 갈급함이 있었거니와 기본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에도 공짜는 없으며, 만사 심은 대로 거두게 돼 있음을 더 되뇌이게도 됐다. 색소포니스트는 청동 또는 거기에 금이나 은을 입힌 몸통에 입으로 서양갈대 조각(reed)을 진동시켜 연주를 한다. 색소폰이 목관악기의 여러 음색과 금관악기의 볼륨 있는 음량을 합쳐놓은 악기라는 배경이 그것이다. 색소폰은 벨기에 국적의 발명자 아돌프 삭스(Adolphe Sax) 에서 딴 이름이다. 프랑스가 명품 색소폰 메카로 자리잡은 것은 삭스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흔히 말하는 섹스폰 은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섹스폰을 음란전화 쯤으로 번역해야 할 지는 모르겠다). 1846년 삭스가 처음 만들고 나서 14종류였던 색소폰 은 지금 8가지로 줄었다. 그 중에 대개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4가지로 솔로 또는 크고 작은 규모의 앙상블 연주가 다양하게 펼쳐진 다. 재즈 본고장 미국으로 색소폰이 건너간 것은 1910년. 색소폰 없는 재즈를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재즈에서 색소폰은 거의 절 대적 존재로 그 장르를 이끌고 있다. 색소폰은 우리나라 남성들에게 가장 어필하는 음색의 악기로 통한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가끔 들리는 낙원상가 악기점 사장님은 불황을 못 느낀다고 했다. 취미 또는 입시를 위해 색소폰 사는 사람의 발길이 꾸준하다는 것이다. 국내 색 소폰 인구는 이미 십 수만 명을 넘었다는 데서 그 가파른 증가세를 엿볼 수 있다. 중·장년 들어 색소폰을 불면 신체 퇴행기에 해롭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은 반문한다. 건강을 위해 애써 복식호흡을 배우 기도 하는 시대에 복식호흡이 기초인 색소폰은 명약이다. 거기다 악보와 운지 익히기를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치매에 저절로 대비하게 돼 금상첨화다. 정신건강 측면의 유익을 차치하고도 그렇다. 색소폰 연주는 힘뺄 줄 알 때 일정 수준에 이르며, 그 힘을 빼는 데 10년 걸린다고 한다. 만난 끝에 입술과 손가락 힘이 빠지기 시작할 무렵 무대에 서고 싶다. 연주함으로써 혼자서도 흐뭇하고 마음을 같이하는 분들에게 기쁨이 되면 즐겁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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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동의보감
언론
치매 김 태 균 한의사
알츠하이머(Alzheimer’s)병이라고도 불리는 ‘치매’라는 질환은 어느 날 갑자기 서서히 다가온다. 대개 오래된 장기적인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 지만 순간순간 기억해야 하는 짧은 기억들을 깜박깜박 하기 시작하면서 기억력의 감퇴는 시작된다. 치매가 시작되면 갑자기 길을 못 찾기도 하고 감정이 왔다갔다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기도 한다. 여러 번 입던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얼 룩이 묻은 옷을 여전히 입기도 하고 씻지도 않은 채 한동안 지내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엄마라 아빠 라 불러도 대답도 하지 못하는 날이 찾아온다면 함께 있는 가족들에게 무척 큰 슬픔이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평소에 어르신들의 건강을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은 치매를 예방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된다. 사지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운동을 하고 특히 손가락 운 동을 많이 하면 뇌신경들이 자극을 받게 되므로 두뇌운동이 될 수 있다. 몸이 비대하여 운동을 많이 하기 힘든 분들은 침 치료를 받는 것도 좋 은 효과가 있다. 침은 몸의 기운이 잘 돌도록 할 뿐 아니라 머리를 맑게 하고 두통을 치료하며 숙면을 하게 도와주고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효 과가 있다. 기억력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옛날 사진첩을 들여다보게 해 예전에 알았던 사람들의 얼굴과 장면들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하는 것도 좋 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요즘에는 액자에 가족들의 추억의 사진들을 붙여놓은 집이 그리 많지 않지만, 예전에는 집집마다 액자에 사진 을 많이 넣어두고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사진을 구경하곤 했는데 이렇게 하는 것도 치매 예방과 치료에 좋은 방법이 된다. 치매 예방이 되는 음식을 꾸준히 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된다. 호두는 대표적인 건뇌(健腦) 식품이다. 호두는 그 생긴 모양이 사람 머리 의 뇌(腦)와 무척 닮아 있는데, 오메가3가 많이 들어 있어서 머리를 좋게 한다. 또한 면역을 증강시켜서 암을 예방하고 우울증에도 좋은 치료 효과가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치료하는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 생성을 자극하여 걱정, 근심, 번민으로 괴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기분을 좋게 하며 행복하게 만든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은 치매로 가기 쉬운데, 마음이 힘들고 괴로운 사람들은 호두를 먹으면 회복 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어르신들에게 좋지 않은 것 중에 하나가 ‘사탕’이다. 설탕을 많이 섭취할수록 당뇨를 유발하고 비만해지며 뼈를 약하게 하는데 설탕 자체는 머리를 나쁘게 하는 부작용도 발생케 한다. 설탕을 많이 먹게 되면 우울증과 치매도 유발하게 된다는 연구결과도 많이 있다. 설탕 섭 취는 가능한 줄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십년 째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는데 설탕 섭취를 좀 줄일 수 있다면 우울증도 역시 줄일 수 있다. 여름에 흔히 먹을 수 있는 보양식 중에 삼계탕과 칡냉면이 있다. 인삼과 칡은 둘 다 머리를 좋게 하는 성분이 있으며 둘 다 뇌신경의 노화를 막는 성분도 있다. 체질적으로 볼 때 인삼은 몸이 차가운 냉(冷) 체질의 사람들을 위한 약재라면, 칡은 열(熱) 체질인 사람 의 속을 시원하게 해서 더위를 물리치게 한다. 몸이 평소 차가운 분은 삼계탕을 드시고 몸이 평 소 뜨거운 분은 칡냉면을 드시면 이 더위를 거뜬하게 이기고 머리도 맑게 하며 건강을 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의학에서 원지, 석창포가 들어 있는 총명탕(聰明湯)은 두뇌를 좋게 하는 유 명한 처방이다. 그 외에도 흔히 어르신들이 드시는 보중익기탕이나 경옥고, 육미지황탕, 십전대보탕 역시 기력을 도와주면서 두뇌를 좋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9
사람
직원마당
언론피해 상담업무를 담당한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왕정민 접수상담팀
모처럼 고요한 오후, 잠잠해진 전화가 금방이라도 울릴 듯하여 시야 밖으로 내몰아본다. 공기가 조용해지자 늘 구석에서 꿈틀대는 불안이란 녀석이 한층 묵직하게 느껴졌다. 뿌리치고 달아나듯 빈 문서를 열었다. 예전부터 전화는 어쩐지 불편했다. 아는 사람이나 친구의 전화라면 반갑지만 누군지 모르는 번호가 뜨면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한다. 낯 선 번호에서 걸려오는 전화들은 사실 대부분이 스팸전화였다. 어찌됐든 미지의 타인이 거침없이 성큼 발을 들이는 느낌이 유쾌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러니 언제 어디서 울릴지 알 수 없는 상담전화의 존재가 나에게는 무거웠다. 예측가능성의 부재에서 오는 울렁거림은 종종 매우 선명하게 느껴졌다. 공포심의 농도는 야금야금 엷어져갔다. 초창기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 처음 듣는 목소리가 내뿜는 격렬한 분노와 호통은 여전히 날 주눅 들게 했다. 모르는 것투성이인 일상에서 긴장의 끈은 팽팽하게 유지되었다. 꿈속까지 따라다니는 낮의 잔상 때문에 밤의 세 계도 편하지가 않았다. 꽃 피는 계절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태양이 아스팔트를 녹일 듯 달구고 어느덧 청량한 바람이 불어올 무렵에도 제자리였다. 하루하루가 벅차서 내일을 알 수 없었다. 다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형체를 잃은 자존감이 화살처럼 깊이 침잠했다. 마음은 기대를 배반하고 얇은 유리처럼 쉽게 조각났다. 충동은 마치 풍선처럼 꾹 눌러도 다시 커졌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눈이 아릿하게 시렸다. 창틀 저편의 세계는 평화롭 게만 보여서, 바깥을 멍하니 보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어두운 날에도 해는 약속한 듯 잊지 않고 떠오른다.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캄캄한 터널에도 서서히 빛이 비쳐들기 시작했다. 이제 는 열병 같은 침체기가 불시에 찾아와도 예전보다는 좀 더 빨리 회복할 수 있게 됐다. 가족처럼 편한 친구들은 물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치운 심리 학 도서들, 사고를 내려놓고 멍하니 보낸 시간도 약이 되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려 하면 부정적인 마음을 얼른 환기시키려 의식을 움직였다. 어찌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말자. 그 사람 입장이면 나도 그랬을지 모른다고 자신을 타이른다. 감정을 도려낸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 면 현실감이 약해진다. 묘하게 낯선 풍경으로 들어온 감각에 빠지며 다른 일들을 떠올려본다. 사람 때문에 골치 아픈 일들이 많다지만 힘을 주는 존재 또한 사람이다. 저 아래 늪으로 끌려들어가는 기분에 잠길 때면 손을 내밀어주는 누군 가가 있었다. 파괴적인 음악과 달콤한 디저트의 위안이 아주 하찮게 여겨질 때에도 주변의 공감과 위로는 몸과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따뜻한 한 마디나 작은 도움과 배려가, 이해해주고 알아주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효과가 뛰어난 안정제였다. 상대방 입장 에서는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이었을지라도 단순한 나에게는 찡하게 다가왔다. 표현이 서툰 내가 이 부끄러 운 글을 쓰는 까닭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누군가에게 온기를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금요일이 저물고 있다. 대기를 채운 습기가 축축하게 달라붙지만 푸근한 기분으로, 싫어하는 여름의 한 토막이 이렇게 또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곱씹는다. 맛있는 걸 먹고 느긋하게 뒹굴 다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월요일이다. 여름의 절정에 이르는 8월이 맹렬하게 더위를 뽐내겠 지만 지난 여름보다 지치진 않을 것 같다.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왠지 그런 예감이 든다. 나 를 둘러싼 현실에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지만 처음 있던 위치보다는 조금 나아간 곳에 있지 않을까. 한 발자국 정도의 미미한 전진이라도 분명 있었으리라 믿는다. 아직 발밑의 지 면은 무르고 불안정하지만 1년간 조금은 단단해졌을 거라고, 다짐하듯 나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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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후기
언론
피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성추행 보도, 즉각 대처했어야
최 숭 민 차장 서울제6중재부 조사관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아이가 입을 상처를 생각해 보시라구요.” “죄송합니다. 제가 그 때 잘 들었어야 하는데, 감정이 앞서서….” “제가 기사 나가고 항의했을 때 기사 내렸으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커지지 않았겠죠.”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위원회 조정 심리에 출석한 신청인 대리인과 피신청인 대리인이 나눈 대화다. 사건은 이렇다. 새벽 4시. 육군 하사관이 운동부 여고생들이 자고 있는 학교 기숙사 에 몰래 들어가 돈을 훔치고, 자고 있는 여학생 한명을 추행했다. 놀란 여학생은 소리를 질 렀고, 도망치던 하사관은 운동부 코치와 같은 운동부 소속 남학생들에게 붙잡혔다. 그 날 오전. 모 통신사는 이 사건을 기사화했다. 그리고 통신사 기사를 받은 여러 매체에서도 대 동소이한 기사를 게재했다. 그런데, 학교와 학생들이 특정됐다.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 기사에 특정된 것이다. 이 지역은 고등학교가 2곳밖에 없고 운동부 기숙사가 있는 학교는 한 곳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여학생은 3명. 이 기사를 본 지역 주민들은 어느 학교인지 쉽게 알 수 있었고, 특히 같은 운동을 하는 다른 학교 학생들도 쉽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보도가 나간 후 학생들의 학부모는 통신사에 항의 전화를 했다. 빨리 기사를 삭제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해당 매체 관계자는 학부모의 거친 항의에 오히려 감정이 격해져 언성만 높아진 채 통화를 끊었다. 기사를 삭제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위원회에 조정을 신 청했다. 조정에 참석한 피신청인 대리인은 학생들의 학부모에게 사과를 했다. 위 대화가 그 내용이다. 이 보도는 위험천만한 기사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및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명시하고 있는 성범 죄 피해자의 보호 조항을 위반했다. 언론사에서는 기사를 쓰면서 해당 지역에 운동부 기숙사가 있는 학교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혀 알 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학부모의 항의가 있었다면 다시 한 번 기사를 살펴보고, 학부모의 말이 사실이라면 즉각 조치를 했어야 옳다. 심리에 참석한 피신청인 대리인은 ‘학부모 전화를 받고 바로 조치를 했어야 했는데’ 하며 후회했다. 조정에 앞서 중재위원들은 해당 기사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 해당 통신사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어 신청인에게 각각 200만원을 지급하 고 해당 매체뿐 아니라 포털에 게재된 기사도 삭제하라고 조정을 해 합의가 이뤄졌다. 다른 매체들은 해당 기사와 포털에 게재된 기사 삭제, 그리고 신청인들에 대한 사과로 조정이 이뤄졌다. 군인이 여고생 기숙사에 들어가 성추행을 한 사건은 뉴스 소재로는 가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학생이 전혀 특정되지 않 도록 해야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특정된다면 사건 자체만으로도 힘든 여고생에게 2차, 3차의 정신적 피해를 줄 수 있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 는 그 기사 때문에 몇 년 후에도 몇 십년 후에도 아픈 상처를 다시 건드려 깊은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 여고생들의 어머니도 아이들이 사회 생활을 할 때 행여나 과거 기사로 잊혔던 상처가 다시 일깨워질까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언론 보도는 오보와 실수의 위험에 항상 노출돼있다. 그래서 기사를 써서 세상에 내보이기 전에 사실 관계가 다른 부분은 없는지, 보 도로 인해 피해를 입을 사람은 없는지, 반론은 제대로 수용하고 있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그래도 세상에 나온 기사가 문제가 있다고 항의를 받으면 다시한번 살펴보고 즉각 대처를 하는 것이 독자들과 시청자들에 대한 기본이다. 이 사건 보도는 그 기본에 소홀했다. 그래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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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신입직원 한마디
강향원 (변호사)
옛말에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한양으로 보내라”했습니다. 우리 언론중재위원회는
한양 중에서도 조정과 육조가 있던 광화문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 첫 출근하던 날, 광화문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며 세 종대왕 동상 넘어 경복궁을 바라볼 때 제 가슴은 벅차올랐습니다. 한 달간 신입직원 교육을 받으면서 언론중재위원회가 국민과 언론사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신속하게 해결하고, 나아가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크게 이바지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이러한 대의와 비전 아래 사무처 선배분들께서 열심히 체제 를 정비하고 기틀을 다져오셨기에 지금의 위원회가 있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노고에 누가 되지 않는 후배가 되도록 노력하 겠습니다. 첫날의 설렘을 잊지 않겠습니다.
염아영
요즘 모든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언론중재위원회의 신입직원이 되었음에 감사, 분에 넘치는 축하와 격려를 받고 있음
에 감사, 좋은 선배님, 동료들을 만나 인연을 맺게 되었음에 감사합니다. 심지어 출퇴근 시간 버스 속에서 납작해진 제 모습에도 감사함을 느끼곤 하는 한편,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 나갈 수 있을지, 제 몫 을 충실히 해내는 좋은 직원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걱정보다는 자신감으로 새로운 삶을 당차게 마주해볼 작정입니다. 작은 찬사에 동요하지 않고, 큰 비난에 좌절하지 않겠습니 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평범하지만 단단하고도 꽉 찬 하루하루를 이곳 언론중재위원회에서 만들어나가겠습니다.
우주현
오랫동안 볼품없는 고시생 신분이었다가 얻은 첫 직장이 언론중재위원회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행운이라고 생각
합니다. 입사 경쟁률이 170:1이 넘었다고 하니 돌이켜 생각하면 한발만 삐끗했어도 떨어졌겠구나 싶어 식은땀이 흐르기도 합니다. 하지 만, 저렇게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다는 자부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한 자부심에 더하여 법학 전공자로서 헌법이 보장하는 법익들이 충돌하는 최일선에서 일하게 된 것은 좋은 기회라 생각합니다. 또한 교육기간 중에 만난 여러 직장 선배님들도 모두 좋은 분들이신 것 같아 앞으로 어떤 부서에서 일을 하게 되건 즐겁고 보람차게 업 무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 신입직원 우주현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예찬
평소 자주 걷던 세종대로를 프레스센터빌딩에서 바라보니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첩첩산중 화천에서 장교로 전역한지 단
하루 만에 빌딩 숲속을 누비니 가슴이 정말 떨렸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신문과 방송을 좋아했고 대학에서도 언론을 전공한 저는 반드시 전공을 살려 공익을 위해 일하겠다는 분명한 꿈을 그 렸습니다. 그것을 실천할 길은 여럿이었지만 4학년 때 수강한 「언론법제」에서 인지한 위원회의 사명과 역할은 제가 언론사나 타 언론 유 관기관 대신 이 곳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됐습니다. 사람과 언론을 사랑하는 제가 ‘국민과 언론을 이어주는’이란 위원회 경구처럼 국민이 언론을 신뢰하고 언론은 사회 공기의 역할을 다 하는 바람직한 보도문화 조성에 힘쓰겠습니다. 신입직원으로서 입사를 지원하며 품었던 포부와 자신감을 한껏 펼치겠습니다.
이윤정
저는 어학도입니다. 대학시절 영어를 전공했습니다. 어학도이던 제가 언론중재위원회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언론법 수업을
들을 때였습니다. 제겐 참 생소한 곳이었고, 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그 멀게만 느껴졌던 곳 의 신입직원으로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약 한달 전, 면접장에서 이런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납니다. 위원회의 역할은, ‘언론과 국민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잘 하는 것’이라 생각 한다고.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데 힘쓰겠다던 그때의 그 포부와 초심을 잃지 않겠습니다. 신중하게 한 자 한 자 자기소개서를 써 내려 가던 그 간절함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위원회와 함께 발전하고 늘 성장하는 직원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종태
2014년 7월 1일, 프레스센터로 출근하는 첫 날.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제가 출근을 위해 광화문 앞을 지나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어색하고 발에 잘 맞지 않는 구두,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렇게 언론중재위원회라는 새로 운 시작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고시생으로 몇 년을 보내고, 남들보다 뒤늦은 군 복무로 인해 은근히 마음고생이 심했던 저였지만, 전공을 살려서 어딘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소신을 결코 저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곳에 지원을 하고 전형 과정을 거치면서 ‘진정성’이라는 마음가 짐으로 간절하게 도전한 결과, 언론중재위원회가 제게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위원회의 일원으로 거창하진 않더라도 가치 있는 일을 차근차근, 묵묵히 해나가고 싶습니다. 아울러 신입직원으로서 선배님들과 좋은 관계를 통해 이곳 언론중재위원회를 더욱 더 좋은 기관으로 키워 나가고 싶습니다. 앞으로 저의 활약, 지켜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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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동정
언론
사람
COMMISSIONERS TV홈쇼핑 채널 평가 세미나에서 주제발표
‘ITU 전권회의 프리 컨퍼런스’ 토론자로 참석
방송통신위 구성 ‘시청자미디어센터 법인설립위’ 위원으로 위촉
이수영 위원(서울제4중재 부, 서강대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은 지난 7월 10 일 한국언론학회 주최로 열 린 <홈쇼핑 채널 평가와 정 책 과제> 특별세미나에 참 석해 ‘TV 홈쇼핑에 대한 이용행태 및 인식조 사’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다.
김형곤 위원(부산중재부, 동명대 방송영상학과 교수) 은 7월 11일 한국정보화진 흥원 대강당에서 한국방송 학회·한국언론학회·정 보통신정책학회 공동 주최 로 열린 <ITU 전권회의 프리 컨퍼런스>에 참석 해 ‘크로스 플랫폼 환경에서의 VOD 콘텐츠 이 용 특성’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주정민 위원(광주중재부, 전 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은 지난 7월 3일 방송통신위원 회가 시청자미디어센터 법 인화를 위해 구성한 ‘시청자 미디어센터 법인 설립위원 회’의 설립위원으로 위촉됐다.
위원회 소식
NEWS 오광건 사무총장 퇴임
2014년 여름방학 인턴십 프로그램 운영
언론중재위원회 오광건 사 무총장은 지난 7월 25일 퇴 임식을 갖고, 3년간의 임기 를 마무리했다. 오광건 전 사무총장은 퇴 임사를 통해 위원회가 명실 상부하게 준사법적 독립기 박용상 언론중재위원장이 오광건 전 사무총장에게 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은 위원회를 거쳐 간 중재위 원님들과 선후배님들의 공로라고 밝히며, 위원회에 입사한 이래 약 30년 간 위원회 생활을 큰 탈 없이 마무리하고, 사무총장 직책까지 수행할 수 있었던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7월 21일 위원회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가한 대전외고 학생들이 모의조정을 하고 있다.
7월 24일 광주지역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이 이창한 중재부장(광주지법 수석부장판사, 가운데)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조정을 위한 설득과 수사의 자료’ 8월호 발간
언론중재위원회는 지난 7 월 21일 대전을 시작으로 서울, 부산, 광주 지역에서 초중고 학생 대상 ‘2014년 도 여름방학 인턴십 프로그 램’을 실시했다. 이번 인턴십 프로그램은 언론자유와 인격권 침해, 언론중재위원회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교육을 비롯해 위원회 심리실 견학, 언론 사 및 신문박물관 견학, 모 의조정 체험 등의 과정으로 구성되며, 8월 29일까지 진 행된다.
사무처 인사
「조정을 위한 설득과 수사의 자료」(Persuasion & Rhetoric Report) 8월호(제11호) 가 1일 발간됐다. 8월호에는 「창의적 분쟁해결을 위한 조정 의 기법」 외 「설득을 위한 논쟁」, 「광고 카 피를 통해 본 수사학적 표현술–문채(文彩) 를 중심으로」 등이 게재되어 있으며, 박홍 래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장의 「분쟁의 성 공적 해결을 위한 조정절차 고찰」 기고문이
■ 8월 1일자 <승진> △2급 조준원 △3급 장성원, 최명진, 김문중 <전보> △심리본부장 권오근 △교육본부장 조남태 △운영본부장 심영진 △조사팀장 강현석 △기사심의팀장 이수종 △접수상담팀장 이미경 △수시교육팀장 여운규 △연구팀장 김주용 △홍보팀장 이진숙 △전문위원 황정근 △전문위원, 감사역 정희성 ■ 8월 18일자 <전보> △대구사무소장 류석창 △전북사무소장 장성원 △경남사무소장 김태호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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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중재사례 소개 및 독자마당
CASES 조정중재사례 소개 | 명예훼손 사례 |
노조위원장의 비위 행위에 대한 오보, 정정보도 게재
A신문은 모 기업 전 노조위원장인 신청인이 자신의 당선을 유리하게 할 목적으로 네 차례나 선거관련 규정을 개정했고, 새로운 경영자가 임명될 때마다 부정적인 내용의 설문조사와 불신임투표를 강행했으며, 전세기를 동원해 해외에서 호화 노동문화제를 개최했다고 보도했 다. 이에 대해 신청인은 선거관련 규정 개정은 후보자 출마요건과 관련 없는 내용으로 한 차례만 이루어졌으며, 자신의 재임 중 최고 경영 자가 5명이 임명되었으나 불신임투표는 1번뿐이었고, 노동문화제 당시 항공편을 구할 수 없어 부득이하게 전세기를 이용했을 뿐 그 규모 나 내용이 호화롭지 않았다며 정정보도를 청구했다. 심리결과 언론사가 정정보도를 게재할 의사를 밝혀 조정이 성립되었으며, 이후 정정 보도가 게재되었다.
| 초상권침해 사례 |
모 종교단체 신도의 음성권 침해 사례, 손해배상금 400만원 지급 결정
모 종교단체 신도였던 신청인은 B방송사의 뉴스 프로그램에서 음성변조를 조건으로 비리를 언급하는 내용의 인터뷰를 한 바 있으나, 이후 동일한 방송사의 시사프로그램에서 인터뷰 일부가 음성변조 없이 보도되어 음성권이 침해되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중재부는 양 당 사자 간 손해배상금액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동의 없이 음성을 노출한 점 등을 고려하여 손해배상금 400만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을 하였고, 양당사자가 동의하여 결정이 최종 확정되었다.
독자마당 언론중재위원회는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론 사람]을 읽고 나서 느낀 점 등을 성명, 연락처와 함께 이메일(pac_news@pac.or.kr)로 보내주세요. 의견이 채택된 분에게는 소정의 상품을 드립니다. 정미혜 _ 주민센터에서 행정도우미로 일하면서 여러 가지 홍보물 간행물들을 받아서 정리하다가 우연히 「언론 사람」이라는 책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읽다보니 알찬내용들 유익한 글들에 매료돼 항상 기다리게 되고 주위 분들께도 읽어보라고 권장하기도 합니다. 이 번 호는 ‘위원단상’ 코너의 “강물 앞에선 숨쉬기도 거룩하다”라는 김종 위원님의 글을 읽고 너무도 잔잔한 감동이 가슴을 적시었습니다. 제가 강물 을 따라 흘러가는 듯한 기분, 어린 시절 한여름 밤에 모깃불을 피워 놓고 평상에 누워서 옥수수를 쪄서 하모니카 불던 기억들….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게 해준 감동의 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무더운 여름날 모든 분들 건강하시고 행복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조용히 빌어드립니다. 최선남 _ 한 달에 한 번, 회사로 배달되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언론 사람」을 즐겨 읽는 독자입니다. 올해 초 호기심에 한 번 읽어보았던 ‘언론사 람’을 이제는 매달 챙겨 보는 애독자가 되었답니다. 이번 7월호에서는 인문학을 다룬 내용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취업준비를 하면서 오로지 스펙 쌓기에만 열중하며 점점 메말라간 감성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내 안의 인문학’, ‘위원단상’ 코너를 읽으며 인문학적 소 양을 많이 쌓아야겠다는 반성과 다짐을 해봤습니다. 「언론 사람」을 통해 언론중재위원회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도 알게 되었고, 더불어 재 미있고 유익한 정보도 얻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으로 「언론 사람」을 채워주세요. 유재범 _ 만화가 새로운 한류 콘텐츠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이원복 교수의 인터뷰 잘 보았습니다. 최근 인기를 끌 고 있는 몇몇 시사만화나 만평 중에는 특유의 촌철살인과 해학풍자로 인해 대중에게 전달되는 파급력이 헤드인 기사 못지않은 작품들이 많은데, 이런 비판 및 풍자에 대해 오랜 시절 다양한 분야에서 통찰해온 이력들을 만화를 통해 표현하는 이 교수의 입장과 생각은 어떠한지 이야기 들어보 는 기회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최근 들어 만화나 만평에 대한 당사자간 분쟁이나 법적대응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는바, 언론중재위원회 가 보다 공정한 시각으로 만화와 만평이 독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사회 공공발전 방향으로 연재될 수 있도록 그 가이드 역할을 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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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중재신청, 인터넷으로 간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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