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CMC
행동규범 Action Plan Story 당선작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당선작
차례
행동규범 Action Plan Story 당선작
대상
생명의 신비(서울성모병원 신경계중환자실) / 006
우수상
여기는 행복충전소입니다(의정부성모병원 신생아중환자실 김서희) / 010 서른 통의 편지(여의도성모병원 외래간호팀 외래 Unit 김선영) / 015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곳(서울성모병원 20층 1병동 이선주) / 020 사랑이 돋아나는 비결(서울성모병원 특수계간호팀 신생아중환자실 Unit) / 026 아름다운 동행(대방동성당 가정전문간호사 박미자) / 030
장려상
질병이 아닌 사람을 돌보다(부천성모병원 재활의학팀 김낙현) / 035 구멍 난 양말(여의도성모병원 8층동 Unit 이행선) / 039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새까만 사랑(서울성모병원 핵의학팀 이명희) / 044 결국 사랑의 사명이었네(서울성모병원 수술실 진종임) / 048 영성간호(서울성모병원 111 Unit 방유경) / 056 가벼운 생명은 없습니다. 그리고 늦지 않았습니다(서울성모병원 재활의학팀 박병선) / 060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여의도성모병원 외래간호팀 외래 Unit 오경주) / 065 211병동의 ‘하하호호’(서울성모병원 211병동 우미란) / 069 중환자실 간호사의 일상을 돌아보다(성바오로병원 특수간호팀 김지해) / 074 희망이 넘치는 병원, 서울성모병원 HOPER(서울성모병원 고객행복팀 박미주) / 079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당선작
대상
25년 만에 찾은 희망의 길(부천성모병원 전진탁) / 087
우수상
첫발을 함께 내딛어 준 고마운 CMC(여의도성모병원 한수진) / 092 바담, 바야르마 엄마의 편지(부천성모병원 바담과 바야르마의 엄마) / 097
장려상
70대 나이에 찾은 새 인생(서울성모병원 홍승민) / 102 가정방문간호 서비스에 감사하며(서울성모병원 탁용준) / 107 살고픈 나누는 삶, 베푸는 삶(서울성모병원 김순자) / 111 희망의 문을 열어 보세요(서울성모병원 황규희) / 115 세 번의 소아 중환자실행을 이겨낸 의지(서울성모병원 윤재영) / 120
Action Plan Story 대상
생명의 신비 서울성모병원 신경계중환자실
추운 계절이 되면 더욱 바빠지는 신경계중환자실의 평범한 2015년 12월 어 느 날!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책임 간호사가 상기되고 다급한 목소리로 “선 생님, 어쩌면 좋아요…….” 하면서 당황스런 모습으로 다가왔다. 중환자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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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UM을 맡고 있는 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큰 문제가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모르게 우리 간호사들이 잘못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었으면 좋겠 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고를 받았다.
치료 중에 알게 된 그녀의 임신 사실… 그리고 생명의 신비!! 보고 내용은 간질중첩증(Status Epilepticus)이라는 병명으로 무의식 상태 로 우리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가 임신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환 자의 상태는 중환자실 입실 시부터 인공호흡기를 달 정도로 위급했고, 침대가 들썩거릴 정도의 심한 경련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상태라 이를 멈추기 위 해 우리 의료진은 치료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안 즉시 산부인과 협진이 이루어졌다. 태아의 상태를 확인한 결과 초음파상으로 태아는 18주 정도로 추정되었고 태아의 움직임과 심박수 모두 정상이라고 하였다. 생명의 신비!! 참으로 경이롭다!!!
평탄하지 않았던 그녀의 삶 의료진은 환자의 어머니를 불러 상황 설명을 하였고 어머니는 딸의 현재 임 신 사실을 듣고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며 딸에 대한 원망과 한탄으로 노여움 을 표출하였다. 이후 한참 동안 감정에 복받쳐 울다가 고개를 떨구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 날 면회 시간에도 어머니는 혼자 오셨다. 그리고는 담당 간호사를 데리 고 조용한 곳으로 가 환자의 임신 사실을 가끔 찾아오는 가족에게는 알리지 말 아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환자의 불우한 성장기, 순탄
Action Plan Story ∙ 7
하지 않았던 결혼생활, 아이가 태어나도 키울 여건이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하며 조심스럽게 뱃속의 아기를 지워 달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 가 가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생명을 인위적으로 해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며, 가톨릭 기관으로서 임신 중절은 병원의 방침과 우리가 실천하는 영성에 어긋 나는 일임을 말씀 드리자 어머니는 다른 병원으로 환자를 옮기겠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고 해결 방안 모색!!! 우리는 여러 차례 환자 어머니와 면담의 시간을 가졌고, 산부인과 박○○ 교수님과 상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어머니는 면담 때마다 연신 눈물을 닦아 내며 딸의 인생과 뱃속의 손주 인생 등을 결정하기에는 너무 힘든 며칠을 보 냈다. 그러나 산부인과 교수님께서 의식이 없는 딸의 뱃속에서 건강하게 자라 고 있는 아이의 상태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고, 이런 아이를 낳아야 하는 이유 에 대하여 차분히 설명하셨다. 차후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도 움을 받을 수 있는 센터 등을 소개해 드리겠다는 설명까지 덧붙여 주셨다. 신부님과 수녀님은 어머니에게 힘이 되고자 번갈아 방문하셔서 좋은 말씀 과 환자를 위한 기도를 해 주셨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의 생각에 서서히 변화 가 왔고 어머니는 담당 간호사 손을 붙들고 딸이 안전하게 아기를 낳을 수 있 도록 끝까지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하셨다.
이제 안전한 아기, 그리고 우리의 마음가짐 분만하기로 결정한 이후 환자의 의식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정말 신기한 것 은 환자의 경련 증상이 없어진 것과 뱃속의 아기가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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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상태 체크를 위해 태아 심음을 들을 때마다 입을 벌리며 애처롭게 우 는 환자의 모습을 보았다. 간호사들의 마음도 기쁨과 애처로움이 같이 뒤섞인 감정이 되어 그녀를 위로했고 더욱 성심껏 간호하였다. 침상 목욕을 하는 동 안 환자의 손을 배에 얹어 주면서 아기와 교감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자세 변 경도 더 자주 해 주며 불편함이 없는지 수시로 확인하였다. 그럴 때마다 환자 는 눈물을 보였지만 점차 평온한 상태를 되찾곤 하였다. 모든 상태가 회복되어 환자는 일반 병실로 안전하게 전실하였고, 퇴원한 지 3개월째 되던 어느 날 환자의 안위를 묻는 전화를 했더니 아이도 산모도 건강 한 상태이고 2월 말쯤 출산을 예정하고 있다고 한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료인은 한순간 한순간 참 많은 결정을 해야 한다. 그 결정이 때로는 잘한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잘못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판단과 생각이 없어도 될 정도로 규정이나 지침이 잘 되어 있 어 그것에 따르면 되기도 한다.
우리 부서는 이 환자를 통해 ‘생명을 존중하는 세계적인 첨단의료’라는 CMC 비전을 글자로만 보았지 마음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면에서 참 부족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생 각으로 판단하고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Action Plan Story ∙ 9
Action Plan Story 우수상
여기는 행복충전소입니다 빨간 묵주 의정부성모병원 신생아중환자실 김서희
나른한 오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벌써 낙엽이 지고 있구나 하는 생 각을 해 봅니다. 저에게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저를 바라보는 풍경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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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마른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아 있고, 어느 날 은 무성한 초록 잎이 풍성하게 그늘을 만들고 있으며, 또 어느 날은 곱디고운 색색의 잎으로 치장하고 도도한 자태를 취하다가, 어느 날은 세상의 모든 근 심을 씻어 주듯 은빛 색으로……. 저를 항상 행복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그 런 풍경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익숙하게 저를 바라보는 그 풍경이 가끔씩 저의 옆구리 를 꾹꾹 찌르면서 말을 건네옵니다. “요즈음은 어떠니?”
나의 행복 충전소, 신생아 중환자실 저는 의정부성모병원 신생아실과 신생아중환자실에서 22년째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저는 처음의 그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환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며칠 동안을 휴가를 받고 집에 있자면 고물고물 거리는 그 예쁜 아 기들이 보고 싶어서 그냥 일이 있는 것처럼 그들을 보러 가곤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나왔느냐는 주위의 말에 “그냥 볼일이 있어서…….”라고 대답합니다. 신생아중환자실을 한 바퀴 돌면서 “녀석들 많이 똘똘해졌네.”라 고 중얼거리며 저 스스로가 행복을 가득 충전 받고 집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저의 행복충전소는 의정부성모병원 신생아중환자실입니다. 예쁜 그들이 있는 곳, 아기 천사들이 잠시 힘겨워서 세상에 나가기 위해 준비를 하는 그곳. 우리의 손길로 가득 충전되어 세상의 품으로 당당하게 나가는 아기들이 있는 곳입니다.
성모님, 주님 사랑 아기들에게 전해 주소서 가슴을 한없이 졸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히 세상으로 나가는 아기들도
Action Plan Story ∙ 11
있지만, 아직 준비가 덜 되어서 다시 주님 품으로 돌아가는 아기들도 있습니다. 언제인가부터 저에게는 한 가지 습관이 생겼습니다. 야외 주차장에 차를 세 우고 걸어서 병원의 언덕배기를 오르다 보면 언제나 아기 예수님을 안고 저를 바라보며 맞이해 주시는 성모님을 만납니다. 저는 주문을 외듯 웅얼거리기 시 작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아가들을 만지는 제 손길로 주님 사랑 전하게 허락하시고, 아가들이 오늘 하루도 평안 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언제나 저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저는 항상 출근을 하면서 웅얼거립니 다. 이렇게 저를 반갑게 마중 나와 주시는 성모님을 통해 아기들을 만납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신자로서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미사 시간에 눈 물이 나고, 고해소에 들어가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목소리가 떨리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부족한 저에게 주 님은 언제나 저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지난 가을에 보여 주셨습니다.
빨간 묵주, 그리고 기적 2014년 11월 어느 날, 혼자 집에서 뒹굴뒹굴 하다가 혹시나 해서 신생아중 환자실로 전화를 해 보았습니다. 신생아중환자실은 인근 병원에서 출생한 아 기가 호흡 곤란으로 전원을 와서 처치를 하느라 바쁘고 초긴장 상태라고 하였 습니다. 앞뒤 생각 없이 전화를 끊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원 언덕을 헐떡이며 올라오는 저를 성모님께서 오늘도 변함없이 맞이해 주셨습니다. 주문처럼 기 도문을 웅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병원 현관을 들어서면서 엘리베이터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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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다 말고 저도 모르게 작은 모퉁이에 있는 성물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많은 성물 중에 유독 빨간색의 작은 묵주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빨간 묵주 하 나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며 3층 신생아중환자실로 올라갔습니다. 중환 아기들이 많아서인지 여기저기 분주함 속에 기기들의 알람 소리가 울 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인공호흡기와 많은 기구들, 약물에 의지하며 힘겨워하 는 그 녀석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담당의 선생님이 지친 얼굴로 저를 보자 마자 산소 농도가 계속 떨어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며 푸념 섞인 목소리로 걱정을 했습니다. 아기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습니다. 짐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힘들어 보여서 마음이 무겁고 아팠습니다. 아기 의 다리를 만지면서 “많이 힘들지, 많이 힘들었겠다.”라고 하면서 소독한 빨간 묵주를 아기의 오른쪽 발목에 채워 주었습니다. 그 순간 눈앞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처음 아기를 보았을 때 산소 농도가 30%로 모니터에 보였었는데, 40%, 50%, 60%…… 100%까지……. 어느새 100%로 회복이 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의료진 이 노력한 이후 절묘한 타이밍일 수도 있었지만 너무나 당황스러웠고, 내가 정 말 내 의지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물이 났습 니다. 아기가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내가 이곳에 와서 다행이라고, 저와 함께 주 님이 이곳에서 아기와 함께하셨다고,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이후 아기의 보육기 주변에는 빨간 묵주와 외할머니가 주신 성물이 묵묵히 아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인공호흡기를 떼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호흡기를 떼고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아기가 에너지 를 가득 충전 받고 2015년 1월 무사히 엄마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벌써 일 년이 되어 가는 일이지만, 저는 아직도 일 년 전 그 날을 기억하면 빨간 묵주가
Action Plan Story ∙ 13
눈앞에 생생히 보이는 듯합니다. 저는 이곳 신생아중환자실이 정말 좋습니다. 이곳에 있는 아기들이 정말 좋 습니다. 바빠도 행복하고, 아기들을 바라볼 수 있어서 더욱 행복합니다. 우는 아기 달래 줄 수 있어서 행복하고……, 한 마디로 내가 이곳에 있어서 행복합 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곳에서 아기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행 복합니다. 오늘도 출근길에 언덕배기를 오르며 저를 맞이해 주시는 성모님을 바라보 며 저도 모르게 웅얼거립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언제나 아기들과 함께여서 행복합니다.
여기는 의정부성모병원 신생아중환자실 행복충전소입니다.
2016년 1월 18일, 신생아중환자실에서 김서희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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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우수상
서른 통의 편지 여의도성모병원 외래간호팀 외래 Unit 김선영
“저기…… 전에 12층에 근무하지 않으셨어요?” 예약증을 내밀며 놀란 표정을 지으시는 어르신이 낯설지가 않다. 어디서 봤 는데…… 어디서 봤지? 내 머릿속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그분의 어
Action Plan Story ∙ 15
머님이시구나, 이럴 수가……. “어머, 어머님! ○○○ 님의 어머님 맞죠? 정말 오랜만이에요.” 반가움과 놀라움에 벌써부터 내 눈에 눈물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15년 전, 부끄러운 기억을 떠올리다 “잘 지내셨어요?” 우린 반가움에 서로 손을 부여잡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후, 아들을 보낸 병원에 차마 고개도 돌리지 못 했다 하셨다. 그러다 15년이 지난 오늘에야 오실 수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님의 눈은 예전처럼 슬픔은 없어 보였다. ‘그분이 저 밝디밝은 하늘로 떠나신 지 벌써 15년이 넘었나 보구나.’ 내가 그분을 만난 건 내과병동에서 근무하던 시절, 입사 8년 차 정도 되었을 때인 것 같다. 일도 익숙해지고 후배들도 많아져 자만심은 높아지고, 밀려드는 일들로 나는 점점 까칠해져 가고 있었다. 위암 말기, 여러 장기로 암이 전이되어 항암 치료를 주기적으로 받으러 오 는 젊은 남자 환자가 있었다. 늘 말도 없고 불평도 없어, 있는 듯 없는 듯한 환 자였다. 점심도 못 먹고 정신없이 헉헉거리며 일하던 어느 날 항암제가 다 들 어가 그 환자의 수액 줄에 피가 역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벌써 여러 번 이었다. 바빠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나는 급기야 화를 내고 말았다. “환자분! 어제도 주사액이 다 들어가 피가 역류되어 다음엔 꼭 호출해 달라 고 부탁드렸는데, 오늘도 말씀 안 하시면 어떡해요? 저희는 바빠서 다 들어갔 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 없어요.” 내 책망에 환자분은 금세 얼굴이 붉어지더니 티 없는 말투로 미안하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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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다. 일이 좀 정리가 되었을 때 내가 좀 심했나 하는 생각에 그 착한 환자에게 가서 죄송하다는 말을 할까 망설이던 차에 간호사실로 걸어오는 그분과 시선 이 마주쳤다. 수줍게 웃으며 내게 빵과 커피를 내미셨다. “사실은 주사액이 다 들어간 거 알았는데요, 너무 바쁘게 일하시니 차마 말 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일을 더 만든 것 같네요. 점심도 못 드신 것 같 은데 이거 드세요.” 그분의 배려 깃든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나를 부끄럽고 창피하게 만들었는 지 모른다. 그 젊은 환자분의 따뜻한 마음결이 나의 자만심과 오만함을 일순 간 꺾어 주었고, 내가 얼마나 형식적인 간호를 해왔나 하는 반성으로 나를 이 끌었다.
환자를 마음으로 보게 되다 돌봄을 받아야 할 중한 환자로부터 오히려 위로를 받게 되니 진정 간호가 무언지, 좋은 간호사는 어떤 간호사인지 등등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병실에 들어서면 전에는 환자가 내 일로만 보였고 환자의 말 한마디가 나를 더 붙들 까 봐 얼른 도망치듯 병실을 나왔는데 그 이후 수액을 관찰하면서도 환자의 얼굴 표정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내 눈길이 닿는 환자에게는 한마디라도 건네려는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제 한창 피가 펄펄 끓는 서른 살, 선하디선한 분에게 왜 신은 말기 암이라 는 잔혹한 형벌을 내리셨는지……. 어머님 앞에서는 웃음을 보이지만, 구석에 서 몰래 통증과 고통의 절정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짠하게 내 마음을 저려 왔다. 겉으로는 웃음을 보이는 아들이 사실은 아파도 엄살 한번 하지 않고 속 으로 끙끙 앓고 있는 걸 아는 어머님의 눈빛은 너무나 애처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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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진단을 받은 후 맨 처음 아들이 한 일은 사랑하는 약혼녀와 파혼을 한 일 이라 하셨다. 정말 너무나 사랑했던 여자라 지금도 마음속으로 많이 울고 있 을 거라 말씀하시던 어머님의 눈은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 는 아들이 말기 암이니……. 그 어머니의 심정은 얼마나 처절할까?
그분이 남긴 편지 선물 10차의 항암 치료를 마치고 퇴원하신 며칠 후 그분의 정성 어린 편지를 받 았다. 집에서 요양 중이라고, 너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지금처럼 늘 환하게 웃는 간호사가 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편지지 안에서 온몸의 통증을 참아 가며 겨우겨우 글을 썼을 그분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분이 퇴원하고 석 달쯤, 기온이 뚝 떨어진 시월 어느 날, 그분의 어머니로부터 며칠 전 아들의 장례를 치렀다는, 목이 멘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다. 아들은 머나먼 하늘로 떠나기 전 개봉 날짜가 일 년 씩 더해지는 30통의 편 지를 남겼다고 한다. 꼭 그 날짜에 편지를 읽어 달라는 부탁과 함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그 가녀린 어머님은 정말 살 아 숨쉴 수 있을까? 살아도 죽은 생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때는 걱정 이 크게 일었다. 그러나 오늘 어머님의 얼굴은 놀랍게도 평화로워 보였다. 어머님은 해마다 아들의 기일에 편지를 읽었고, 아들이 남기고 간 30통의 편지 중 지금까지 15통을 읽었다고 하셨다. 그분은 자기가 죽은 후 혼자 깊은 슬픔을 안고 살아가실 어머니를 위해 해마다 사랑과 격려, 위안을 듬뿍 담은 편지를 선물하고 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미리 삶을 정리하면서 편지를 써 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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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간호사가 되어 주세요 아들이 쓴 편지의 마지막 줄은 항상 같은 내용이라 하셨다. 30통의 편지를 다 읽어 달라는 절절한 부탁의 말이었다고……. 어머님은 그 부탁의 글이 자 신의 심장을 심하게 흔들었고 그래서 꿋꿋하게 살 수 있었다고, 자신의 살아 가는 힘이 되었다고 하셨다. 아울러 아홉 번째 편지에는 고통스러운 병원 생 활이었지만 항상 밝게 웃는 간호사들이 있어 힘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많은 암 환자들,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간호사는 늘 만난다. 그 환자를 마 지막으로 지키는 건 환자의 가족, 그리고 간호사들이다. 환자들은 세상 수많은 타인 중 가까이 있는 간호사를 가장 믿으며 삶을 의지한다. 얼마나 따뜻하고 정겨운 눈길로 그분들을 바라봐야 하는지……. 간호사의 음성이 잔잔한 메아 리가 되어 힘들어하는 환자들 가슴속으로 스며들고, 따뜻한 눈빛이 힘을 안겨 준다.
늘 환하게 웃는 간호사가 되어 달라는 그분의 당부를 가슴에 품고, 환자들 로 북적거리는 안과 외래에서 오늘도 나는 환자분들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어 머니이고, 지지자며, 친구가 되면서 나의 삶을 수놓는다.
Action Plan Story ∙ 19
Action Plan Story 우수상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곳 서울성모병원 20층 1병동 이선주
2003년, 저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나 생각이 드는 파릇파릇한 꿈이 있었던 그때. 신규 간호사로 조혈모세포 이식병동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첫발을 디뎠습니다. 그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제가 처음 본 그 광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꽁꽁 마스크를 끼고 보호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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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비닐(부스) 안에서 힘없이 누워 있는 환자들의 모습. 순간 제가 이곳에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겁이 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멈추지 않는 눈 물이 흘렀었습니다. 13년이 지난 지금, 저의 발걸음은 힘찹니다. 지나온 시간 동안 제가 그곳에 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고, 또 할 수 있다는 것 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이 탄생하는 우리 병동 제가 일하는 곳은 조혈모세포 이식병동입니다. 성인혈액종양 환자들이, 사 랑하는 가족, 형제 또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환자에게 자신의 골수를 기증 하는 공여자로부터 건강한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기 위해 입원하여 새로운 생 명으로 탄생하는 축복받은 병동입니다. 축복. 그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비록 힘든 시간을 견뎌야 하지만 환자 에게 골수를 주는 공여자가 있다는 것이 축복이고, 의학 기술의 발달로 조혈모 세포를 이식받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고, 우리나라 최고, 아니 동양에서도 최 고의 수준이라고 하는 저희 조혈모세포 이식병동에서 이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고, 치료를 받는 환자들을 위해 미션과 사명을 가진 직원과 성직자 들이 기도를 하는 가톨릭병원이라는 것이 축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지내온 시간을 통해 느낀 것이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환자들에게 기쁨만 있는 곳은 아닙니다. 조혈모세포 이식 을 위해 고용량의 항암 치료와 방사선 조사 등으로 기존의 골수를 파괴하는 고된 치료 과정을 견디어야 하고, 면역 상태가 극도로 저하되어 면역 기능이 회복되기까지의 기간 동안은 치명적인 감염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많은 규
Action Plan Story ∙ 21
제와 시설, 고위험 치료 등을 다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혈모세포 이식병동은 축복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입원한 환자들에게는 힘든 전처치와 합병증 그리고 예후에 대한 불안, 고독감 등을 혼자서 극복해야 하는 감옥 같은 곳이기도 합니다. 어떤 환자분이 퇴원하기 전에 “내가 베트남 참전용사인데 전쟁보다 더 힘 든 곳이 이곳이었어.”라고 말했던 것은 환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환자들은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불 안, 우울감을 호소합니다. 때로는 본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가장 가까 이에서 그들을 돌보는 간호사에게 투사를 하여 저희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기 도 합니다. 물론 이해해야 하고 사랑으로 보듬어야 하지만 우리는 아직 어리 고, 이제 부모님의 품에서 벗어나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쉽 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희도 환자분들을 통해 배웁니다.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를 말입니다.
우리의 위로가 필요한 환자들 특히 기억이 나는 환자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임신 중 급성 림프구성 백혈 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임신 중이었지만 항암 치료가 더 우선이었기에 암 치 료를 시작하였고, 치료 중에 7개월 된 아기를 잃게 되었습니다. 환자분이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아픔을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고 통일 것입니다. 이식을 위해 입원한 환자분은 매우 비협조적이었고 말이 없었으며, 날이 갈 수록 감정의 변화가 심해졌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씩 엉엉 우는 모습을 보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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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모든 간호사들은 마음을 열지 않는 그분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따뜻한 위로의 말조차 건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불안이 극에 달하는 이식 하루 전날, 제가 그분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저 역 시 그 환자의 병실에 들어가기가 두려웠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 환자분 을 맡게 된 것이 싫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영세를 받은 지 갓 1년밖에 안 되는 저였지만 그 순간 저절로 기도가 나왔 습니다. 그리고 환자 인수인계를 하기 전 아침, 병동에서 하루를 여는 기도를 할 때도 저는 누구보다 간절하게 두 눈을 감았던 것 같습니다.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 환자 병실에 들어갔습니다. 처치 중 환자가 눈을 감 고 있어 ‘오늘도 대화를 거부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처치를 하던 중, 감고 있는 환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연스레 하던 일을 중단하고 환자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잡아 드렸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망설이다 “많은 생각들이 드시죠? 모든 상황들이 괴로우시죠?”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환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하염없이 눈 물만 흘리셨습니다. 환자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 손을 잡아 드리며 많은 대화 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이분이 위로를 받고 싶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동 안 환자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제 마음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단지 두 손을 잡고 있었을 뿐인데 환자의 감정은 가라앉는 듯 보였습니다. 조혈모세포 이식이 시작되고 저는 이식 전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치유의 은총이신 주님. 새 삶을 시작하려는 환자분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이제 그간의 힘들었던 여정을 내려놓고 앞으로 희망만 보게 하시고, 사랑하는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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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내가 치유를 받다 한 구절 한 구절이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을 울려 목이 메고 눈물이 차올랐습 니다. 겨우 기도문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저도 환자도 담당 간호사도 토끼 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목실에 연락하여 저희 담당 수녀님께 방문해 주실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저는 아직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 익숙하지 않지만, 수 녀님께서 방문하시면 환자분들의 마음이 안정이 되고 저희도 다가가는 것이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입니다. 조혈모세포 이식 후에도 그분은 제 가슴속에 남았습니다. 저는 담당 환자가 아니더라도 근무 하는 날에는 환자 병실에 꼭 한 번씩 들러 안부를 여쭙곤 했 습니다. 이식을 마쳤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저희 병동 간호사들의 기도와 작은 관심 때문인지 환자분은 조금씩 밝아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병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먼저 아는 척도 해 주었습니다. 별다른 합병증 없이 무사히 퇴원을 하던 날 머쓱한 표정으로 저에게 다가와 그날 손잡아 주어 고맙다고 했을 때 제 마음속 깊은 곳에 형용할 수 없는 울림 이 있었습니다. 저는 간호사로서 그분에게 돌봄을 제공하였다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제가 그분을 통해 감동과 치유를 받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환자에게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함께하고 있었음을 느낀 귀 한 경험이었습니다.
이제는 병동에서 경력 간호사인 제가 후배들에게 자신 있게 말해 줄 수 있 는 것이 있습니다. 병원의 미션을 잘 실천할 때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보호 하고 사랑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상투적인 소리라고 말할지 도 모르지만 제가 지내온 시간 동안 느낀 것이기 때문에 저는 저의 말에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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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습니다. 아직은 부족한 것이 많지만 저는 어느새 CMC인이 되어 있습니 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는 CMC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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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우수상
사랑이 돋아나는 비결 서울성모병원 특수계간호팀 신생아중환자실 Unit
서울성모병원 신생아중환자실에는 ‘사랑이 돋아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 래서 그런지 서울성모병원 신생아중환자실과 신생아실 간호사들은 다 예쁘고 착합니다. 채용 시 얼굴을 보거나 심성을 테스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기와 함께 생활하며 근무를 하다 보면 천사인 아기들이 간호사들에게 사랑하는 법 과 착해지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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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간호사들은 아기들에게 늘 미안합니다. 늘 바빠서 더 많이 잘해주지 못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안아 주거나 놀아 줄 아기가 거의 없습니 다. 대부분 아기들이 삶과 죽음 속에서 가녀린 몸으로 겨우 숨을 쉬고 있기 때 문에 예쁘다, 사랑한다는 말을 걸 여유도 없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중환자실에 서 일하면서, 간호사들은 아픈 아기들이 좋아지지 않으면 아기들 모습에 스스 로 상처를 입게 됩니다.
육아 일기로 커진 사랑 어느 날 15년 차 된 간호사가 하트 모양의 수첩 5권을 사 왔습니다. 아기들 에게 일기처럼 편지를 써 보고 싶어 병동 회비로 사 온 거라고 하였습니다. 자 발적인 마음이 기특하여 입원한 지 2주가 넘은 아기들에게 편지 형태의 일기 를 써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날 있었던 일도 쓰고 응원의 글도 쓰고 말입니다. 남들이 보면 ‘바쁘다며 무슨 편지?’ 하는 맘이 들겠지만, 간호사들은 짬짬이 편지처럼 응원의 글도 일기로 쓰고 희망도 써 내려갔습니다. 핸드폰으로 ○톡 이나 메시지로 간단하게 마음을 전하는 SNS 세상이 된 요즘 시대에 일기를 편지 형식으로 쓰는 일은 참 야릇한 경험입니다. 아기에게 ‘사랑한다, 예쁘다, 힘내라.’ 등등, 응원의 글과 사랑의 글을 일기에 쓰다 보면 점점 아기가 더 예 쁘게 보이고 아기에게 진심 어린 애정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몇 시간의 이념 교육보다 효과가 더 큰 것 같습니다. 아기를 소 중한 한 생명으로 보고 아기를 개인 인격체로 대하는 ‘기본’이 생기게 되었습 니다. 사실 임상에서 진단명이나 호실로 환자를 많이 부르곤 합니다. 같은 병 이라도 다 다른 아기인데 “4번 베드 외과 아기”, “격리실에 기흉 아기”, “416g 꼬맹이 아기” 등등으로 말이죠. 하지만 다이어리를 쓰며 아기 이름을 적다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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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아기 이름을 부르게 되고, 또 아기에게 특별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아기 들에 대한 사랑이 커질수록 업무는 덜 힘들었습니다. 다이어리는 집에 갈 때 아기의 엄마가 가져가는데, 집에 가서 읽고 나선 감 사하다고 메시지 보내 주는 분이 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아기와 엄마가 고생 했던 일들이 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아기가 사랑을 많이 받은 것 같다고, 잘 때 계속 배시시 웃는다고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태 어나서 폐동맥 고혈압을 동반한 미숙아로 인공호흡기를 오래 달고 대동맥관 결찰 수술도 했던 쌍둥이 엄마의 감사 메시지였습니다.
아기가 남긴 일기장 하지만 그 일기장 때문에 고민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한 아기가 사망하였 는데 엄마에게 상처가 될까 걱정한 간호사가 일기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데 다음 날 엄마가 일기장과 아기를 같이 묻어 주고 싶다고 가지러 오셨습니 다. 엄마는 면회 오시며 일기장을 가끔 읽어 보셨고, 그곳에 아기에게 글을 쓰 곤 하셨습니다. 주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쓴 아 기를 사랑한다는 내용의 글들은 아기를 잃은 엄마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는 것 이었습니다. 집에 가서 일기를 다 읽은 어머님은 아기가 오랜 기간 병원에서 여러 번의 수술을 받으며 힘든 날들을 보냈지만, 그동안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알게 되었다며 감사하다고, 일기를 읽으며 많이 우셨고 감정 정리가 많이 되 셨다고 장문의 편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편지를 읽으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엄마는 아기를 잃고 깊은 슬픔 중에도 상처를 받은 의료진들을 걱정하고 이렇 게 위로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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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전하며 시작되는 사랑 사실 잘 커서 좋게 회복되어 집에 돌아가는 수많은 아기들은 옆에 가서 격 려와 희망을 이야기해 주기가 더 쉽습니다. 보기만 해도 귀엽고 방글방글 웃 으며 눈 맞추는 그 아기들은 우리에게 희망과 행복을 줍니다. 하지만 죽음을 맞아 아기와 이별하는 부모님, 상태가 점점 나빠져 죽음이 예견되는 아기들은 말을 걸고 위로해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랑은 마음을 전하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힘드시죠? 저도 힘듭니다. 함 께 잘 이겨내 보자고요.”라며 등을 토닥이거나, 아기를 잃은 부모님을 안고 저도 아기에게 미안하다고 함께 울어 주는 일, 일기장에 사랑한다고, 힘내라고 글을 쓰는 일 등은 우리가 임상에서 실천하는 사랑이고 치유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이 돋아나는 비결, 그것은 마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바쁜 와중에도 아기들에게 사랑을 적어가는 간호사들을 응원하며 글을 마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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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우수상
아름다운 동행 대방동성당 가정전문간호사 박미자
2015년 8월 30일, 노크 소리가 조용하게 들려 “들어오세요.” 했더니 “아빠 에 관해 상의 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라며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30대 주부가 가정간호사실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다.
주님이 내게 보내신 자녀 처음에는 주저주저하더니 현재 상황에 대하여 조용하게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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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가족은 1남 3녀입니다. 부모님이 계시는데, 세 딸은 모두 출가하였고 오빠는 지적 장애가 있으며 부모님과 함께 삽니다. 온 가족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데, 2014년 아빠는 어느 수녀원에 봉사 가셨다가 은행나무에서 떨어져 서 경추 손상으로 3개월간 중환자실에서 치료 받으시다가 경제적으로 너무 어 려워 퇴원하셨습니다. 노인 요양병원으로 옮겨 8개월간 요양병원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비싼 병원비 때문에 요양병원에서 요양원으로 옮기려는데 아버님 을 받아 줄 곳도 없거니와 월 60만 원 정도의 병원비도 낼 형편이 못 되어 간 호사님과 상의하고 싶어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렇게 ○○○ 형제님의 따님은 그동안 아빠가 다치게 된 경위와, 치료를 어떻게 받아 왔는지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환자 상태는 전신 마비로 삼킬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코에서 위까지 튜브(비 위관)를 넣어 경관 유동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으며, 기관절개관이 없이는 숨 을 쉴 수가 없어서 기관절개관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었다. 소변을 스스로 볼 수 없어서 소변 줄을 하고 있었으며, 거기다가 전신 마비 상태이다 보니 스스 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형편으로 누워만 생활하여 여러 군데 욕창이 있었다. 등 쪽에는 피부 알레르기로 물집이 생겨서 가려움증으로 심한 고통을 표현하는데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형상이었다. 양팔은 완전히 꺾여 있었으 며 방광결석으로 매일 방광 세척을 해야 도뇨관으로 소변이 겨우 흘러나오는 상황이었다. 따님은, “저희 형편이 이렇다 보니 이제 더 이상 병원에 입원을 시킬 수가 없어요. 병원비 월 20만 원 이하 되는 곳을 간호사님이 소개해 주시거나, 아니 면 간호사님이 저희 아빠를 돌봐 주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어요.”라며 눈물지었다.
Action Plan Story ∙ 31
주님, 저희와 함께하소서 이웃 사람들로부터 “교회까지 다니는데 어찌하여 아빠를 저 모양새로 둡니 까? 당신들이 믿는 하느님은 어디에 있기에 남편을 저렇게 둔단 말이에요?” 하는 소리를 듣고부터는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하는 모습만 보아도 흉보는 소 리를 하는 것 같아 외출도 못 하고 있다고 하였다. “아! 이 또한 주님이 나에게 보낸 주님의 자녀이구나! 주님 도와주소서. 신 경외과중환자실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집에서 돌볼 수 있도록 주님이 저 와 함께하여 주시고 제게 지혜를 주소서.” 먼저 주님께 나와 함께해 주시도록 간절히 마음 모아 기도를 드렸다. 보호자에게 병원 중환자실처럼 집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고, 가 정간호사가 간호 계획을 세우면 그에 따르도록 하였다. 환자의 방에는 현재 환자 상태에 맞추어 갖추어야 할 장비들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전신 마비 환 자를 간호하기에 적합한 침대를 준비하도록 하고, 기관절개관을 가지고 있었 기에 간호사가 가지고 있는 흡인기를 제공하여 필요시 바로바로 흡인을 하게 하였다. 욕창 진행 예방을 위해 공기 침대를, 실내 공기 정화를 위해 공기청정 기를 준비하는 등 환자를 간호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음 날 퇴원시켰다.
실오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환자의 의식은 명료하나 객담이 너무 많아 계속 흡인을 해야 하는데, 간호 할 배우자가 너무 연세가 높아 감당이 되지 않았다. 전신 마비이다 보니 스스 로 자세 변경을 전혀 할 수 없어 욕창은 점점 진행되고 있었다. 유치 도뇨관은 자주 막히고, 흡인을 못 하여 환자는 고통스러워하였으며, 비위관 튜브는 자주 막혀 한밤중에도 전화가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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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 39℃ 이상 올라서 병원을 가야 하는데 배우자는 돈이 없어 “입원은 하 지 않겠다.”라며 “이대로 집에서 간호하다가 보내겠다.”라고 하신다. 나는 마 음을 다잡고 이 환우를 최선을 다해 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나의 온 정성을 다하여 실오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하나씩 해결하며 간호하자.” 라고 결심하였다. 먼저 감염 위험성을 설명하고 폐렴에 걸리게 되면 바로 임종으로 이어질 수 도 있음을 거듭 설명하였다. 흡인 및 체위 변경의 필요성에 대하여 최선을 다 해 교육하고 유치 도뇨관과 비위관은 막히지 않도록 수시로 체크하도록 하였 으며, 필요시 밤중에라도 부르면 언제든지 가겠으니 환자에게 변화가 생기면 곧바로 전화하도록 당부했다. 연로하신 배우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전화하고 방문을 요청하였으며, 그때마다 전화로 해결할 수 있 는 것들은 전화로 해결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은 방문하여 방광 세척을 하는 등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
주님의 은총으로 삶을 되찾은 가족 그 결과 2개월 후 환자는 안정을 찾았고, 월 2회 정도만 방문을 해도 문제없 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주간호 제공자가 연세가 많아 환자를 돌볼 능력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노인장기요양보험에서 등급을 받을 수 있도록 신청해 주 었고, 2등급을 받아 요양 보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여 연로하신 주간호 제공자인 배우자를 하루 몇 시간이라도 쉬게 하려 했으나, 배우자는 월 16만 원 정도의 여유가 없어 간호가 힘들어도 본인이 감당하겠다며 거절하였다. 가정간호 비용이라도 도움을 드리고자 병원 성모자선회에 도움을 청하였 다. 다행히 성모자선회의 도움을 받아 가정간호 비용 전액을 혜택받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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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또한 환자 상태가 나빠져 가정의학과 교수님께 요청하여 왕진을 하여 상태에 맞는 처방을 받을 수 있었고, 가정간호센터 팀장 수녀님도 오시어 격 려까지 해 주시니 환자분은 “많은 병원에서 버림받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과분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라며 감사하였다. 지금은 환자의 기분도 좋아지 고, 상태도 훨씬 더 좋아져서 환자나 가족들 모두 기쁘게 생활하고 있다.
“주님! 감사합니다. ○○○ 형제님을 제가 돌볼 수 있게 해 주시어 정말 감 사드립니다. 부디 앞으로도 온 가족이 맘 편히 아빠를 집에서 돌볼 수 있도록 하여, 남은 여정을 가족들과 함께 동행할 수 있는 은총을 내려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2016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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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질병이 아닌 사람을 돌보다 영등포 요셉의원 물리치료실 봉사
부천성모병원 재활의학팀 김낙현
작년 메르스로 모든 내원객의 체열을 재고 수시로 소독을 하는 등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요셉의원입니다.” 전화를 주신 분은 요셉의원 봉사 담당자인데, 그곳 물리치료실에 봉사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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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었다. 기존에 치료 봉사를 나가고 있는 곳이 있어서 사 실 좀 망설였지만 “요셉의원에는 상주하는 물리치료사가 없어서 물리치료실 은 봉사자로만 운영이 됩니다. 꼭 참여해 주세요.”라는 담당자분의 말씀에 함 께하기로 하였다.
‘있어 줘서’ 고마운 요셉의원 영등포에 위치한 요셉의원은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부설 무료자선병원이 다. 요셉의원에서 우리의 역할은 병원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물리치료였는데, 처음 복지 병원을 방문했을 때는 병원을 보면서 “어이쿠, 아직도 이런 곳이 있 구나!”라고 생각했다. 영등포역 인근 좁은 골목에 위치한 병원은 처음 방문하 는 사람은 찾기도 쉽지 않은 허름한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무튼, 병원의 초라한 모습에 처음엔 조금은 당황하고 실망을 했다. 우리가 물리치료 봉사를 한 곳은 서너 평 남짓 되어 보이는 공간인데, 한방 봉사와 물리치료 봉사가 함께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이윽고 50~60대로 보이 는 첫 번째 남자 환자분이 들어오셨고, 이어서 또 다른 남자분도 들어오셨다. 등과 허리가 몹시도 굽어 보이는 분들이었는데, 처음 보는 우리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해 주셨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어디가 많이 불편하세요?”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땅기는 게 온몸이 성한 데가 없습니다…….” 사실 요셉의원의 물리치료기구는 다른 병원에서는 거의 사용하지도 않는 아주 오래된 장비인 데다가, 그 종류도 두세 가지가 고작이어서 환자분에게 적용할 수 있는 장비가 마땅치는 않았다. “어르신, 허리에다가 찜질해 드리고, 전기치료도 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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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물 핫팩 하나와 통증치료 기계를 허리에다가 적용하고 30여 분이 흐 르고 나니 전기치료가 끝났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환자분을 그냥 보내기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 저희가 허리 좀 봐 드리고 운동도 가르쳐 드릴 테니 집에서 열심히 운동해 보셔요.” 환자의 허리 근육을 손으로 풀어 드리고 간단한 수기치료를 해 드린 후, 평 상시에 할 수 있는 요통 운동도 가르쳐 드렸더니 환자분의 얼굴에 너무도 환 한 미소가 입가 가득히 번지기 시작하였다. "병원에 다니기 쉽지 않으시죠?” “예, 그래도 요셉의원이 있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이런 데가 없으면 아파도 병원에도 쉽게 못 갔을 텐데……. 너무 감사합니다.” 환자분이 마음속 깊이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듯하였다.
‘질병’이 아닌 ‘사람’을 돌보다 요셉의원에서 만난 환자분들은 우리가 병원에서 만나오던 환자들과는 왠지 모를 다른 느낌과 감정을 우리가 느끼게 해 주었다. 행색은 누추하였지만 우리 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 같아서 이분들에게는 우리의 작은 도움 이 정말 크게 느껴지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어르신, 오늘 가르쳐 드린 운동 틈틈이 열심히 하셔요.” 이렇게 이 환자분과 치료를 끝내려고 하는데 환자분이 우리의 두 손을 꼭 잡으시고는, “이렇게 치료도 해 주고 운동도 가르쳐 주니 참 고맙습니다.”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시는데, 그 마음에서 진심이 느껴지니 마음이 참 뭉클하고 보람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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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환자는 그저 그냥 몸이 불편한 사람이었다. 돌아보면 우리는 그냥 일상에서 행하는 일을 하였고, 마주치는 환자는 환자가 아니라 그냥 ‘질환’이 자 ‘병’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요셉의원 봉사를 통해서 우리는 작지만 큰 깨달 음을 얻은 것 같다. ‘질환’이 아닌 ‘사람’을 돌보며 치료해야 한다는 것,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작은 도움과 말 한마디가 어떤 이에게는 세상 무엇보다도 큰 위로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천성모병원 재활의학팀은 2015년에 이어 올해도 요셉의원을 매달 방문 하여 ‘사람 돌봄’ 봉사를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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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구멍 난 양말 여의도성모병원 8층동 Unit 이행선
차가운 겨울바람을 뒤로 한 채 출근길에 몸을 옮겨 본다. 추운 바람이 몸속 을 스며들지 못하도록 한껏 옷깃을 여민 채 그곳으로 향한다. 아마 작년 이맘때였지. 내가 근무하는 병동의 과 특성상 겨울이면 뇌출혈 환자들이 많이 입원을 한다. 작년 겨울에도 여느 다른 겨울과 마찬가지로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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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혈 환자들로 병실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 보호자와의 만남 뇌출혈 환자들은 연세도 많을뿐더러 몸에 한 가지 이상의 관을 가지고 있 다. 한 개면 적을 거고 보통 서너 개의 관을 가지고 있다. 중환자실 치료를 마치고 병실로 나온 환자들의 가족들은 근심 어린 걱정으 로 눈물과 고된 몸을 이끌고 환자들을 본다. 보통의 경우 간병인을 쓰는 경우 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여의치 못한 경우에는 보호자들이 간병을 하는데 말처 럼 쉽지가 않다. 식사도 관을 통해서 줘야 하지, 힘이 빠져 잘 움직이지 않는 환자의 몸을 이리저리 시간 맞춰 돌려줘야지, 가래를 뽑아야지, 휠체어도 하루 에 3번 이상 태워야지……. 말이 내 가족을 간병하는 것이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우리도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작년 추운 어느 날. 중환자실에서 중년의 남자 환자가 병실로 나온 날이었 다. 직접 보호자가 간병을 한다고 해서 이것저것 주의할 점과 각종 관에 대해 설명하고 가래 뽑는 법, 경장영양 하는 방법을 간호사들이 가르쳐 주었다. 보 호자가 잘 협조 되지 않는 눈치였다. 왜 아니겠는가? 내 남편이, 사랑스런 아 빠가 어느 순간 아기가 되어 버렸으니……. 누군가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큰 아기의 모습을 하고 나만 바라보고 있으니 얼마나 겁이 나고 무 섭겠는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들을 고된 몸을 이끌고 끝이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을 하려니……. “왠지 못 하실 것 같아요. 전혀 배우려는 의지가 안 보여요. 어떡하죠?” 후배 간호사가 난감해하며 와서 묻는다. “어쩌겠어? 적응될 때까지 옆에서 봐 주면서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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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쩍은 웃음을 띠면서 서로 씨익 웃어 보였다. 중간중간 다시 환자에게 필 요한 것들을 가르쳐 주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즈음이었을 까. 우리 병동에는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가 간병하는 할머니 한 분과, 매 시간 마다 체위 변경을 해야 하는 환자가 3명이나 있었다. 고된 하루의 연속이었다. 다른 환자들은 체위 변경을 하고 나면 보호자들이 고생했다고 하였지만 유 독 이 환자의 보호자는 체위 변경을 해도 마음에 안 든다며 다시 해달라고 하 기 일쑤였다. 밤에 3명의 체위 변경을 하고 나면 온몸에 땀이 비가 오듯 쏟아 졌다. 몸의 고됨도 힘들었지만, 하고도 돌아오는 질책이 못내 아쉬웠다. “우리 환자 가래 좀 뽑아 줘요. 나는 도저히 못 하겠어요.” “대변 봐서 그러는데…… 체위 변경 다시 해 줘요.” 짜증 가득 섞인 목소리로 후배 간호사에게 보호자가 언성 높여서 말하고 있 었다. 병실에 가고 한참을 지나 후배 간호사가 볼멘 목소리로, “선생님, 어쩌면 저래요? 저희가 다하는데……. 한 번을 고맙다는 말을 안 하죠? 체위 변경도 같이 안 하고 옆에서만 지켜보기만 하고, 마음에 안 든다고 매번 그러고…… 어휴 정말.” 잔뜩 서운해하며 글썽거리는 후배를 다독이며, 어쩌겠느냐는 말밖에 해 줄 수가 없었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다 그래, 한번 해 보자. 라운딩 갈 때마다 일부러 먼저 가래도 뽑아 드리고, 어 머니한테 친근하게 아버님 참 잘생겼다고, 아버님 손이 참 일 많이 한 분이라 고 하면서 먼저 이야기하고, 휠체어 태워서 산책시켜 드리는 등 모든 간호사 들이 조금씩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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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도 우리의 맘을 알았던 것일까? 처음부터 많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렇게 변해 갔다. 먼저 인사도 하고, 웃음기 없던 얼굴에 조금씩 생기도 돌기 시작했다. 어쩌면 외로웠는지 도, 낯선 병원 생활에 오롯이 혼자라는 느낌, 그것이었는지도……. 어느 순간 물어보지 않아도 아버님의 젊은 시절에 대해 말씀해 주시고, 고맙다며 간호사 들을 다독여 주시기 시작하였다. “저 양반이 젊어서 공무원을 했지. 일밖에 모르던 양반인데……. 자기한테 는 십 원짜리도 아까워서 안 쓰고, 으이구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자 식들도 다 선생, 의사 만들어 놓고……. 안됐지, 나라도 옆에서 챙겨 주고 했어 야 하는데……. 그게 내가 한이 되더라고, 영감한테 못 해 준 거……, 아이고. 우리 애들이 바빠서 못 오는 거야. 간병인도 엄마 생각해서 쓰라고 하는데, 내 가 안 쓰는 거야. 다 착해, 착해…….” 처음으로 먼저 이야기해 주시고, 못내 자주 오지 않는 자식들 욕먹을까 봐 얼른 마무리하셨다. 점점 간호사들과도 가까워지고, 환자에 관련된 일도 많이 하려고 하셨다. 그런 노력에도 폐렴이 와서, 중환자실로 갔다가 내과 병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병동에서도 그 환자 보호자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려오곤 했 다. 처음의 생각이 나곤 했다. 보호자가 병동에 올라와서 종종 다시 여기에 오 고 싶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괜히 울컥해짐을 느꼈다.
마음의 선물을 받다 시간이 흘러 폐렴도 많이 호전되어 요양병원으로 퇴원도 하고, 점점 기억에 서 잊혀 갈 때쯤 다른 보호자와 함께 병동으로 찾아오셨다. 지나가는 길에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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렀다면서, 다른 보호자가 음료수를 줬는데, 자기는 아무것도 못 가져왔다며 미 안하다고, 그렇게 울면서……. 다른 병원 가 보니 알겠더라며……. 그 말이 얼 마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어 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가신 줄 알았는데 조금 뒤 검은 비닐봉지를 스테 이션에 던지듯 놓고 사라지셨다. 고마웠다며, 별거 아니라며. 간호사들은 검은 비닐봉지 속에 있는 양말들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고생 많이 한 후배 간호사들은 두 개씩, 앞으로도 열심히 뛰어 달라고 주고, 나머지 는 한 켤레씩 가졌다. 비록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시장에서 파는 양말 꾸러미 였지만 우리에겐 백화점에서 산 값비싼 양말보다 더없이 소중했다. 마음으로 정말, 마음의 선물이었으니까. 한 번, 두 번 신고 양말은 금방 구멍이 나 버렸다. 친정어머니가 세탁기에 양말을 넣으면서 “야야, 이거 구멍 났네. 이제 버려야겠다.”라며 버리려고 하 면 “아냐, 아직 더 신을 수 있어. 안 버릴 거야, 절대 버리지 마, 절대로.”라며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빨랫줄에 구멍 난 양말이 살포시 흩날린다. 가끔 힘들고, 몸이 녹초가 되어 버린 날이면 작년 이 겨울을 생각한다. 한없이 작고 볼품없이 침대에 누워 이 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분과, 겉으 로 강한 척했지만 한없이 여린 어머니를……. 힘들다고 투정만 했던 그 날을 반성해 본다. 작지만 마음이 가득했던 그 양말을 추운 겨울에 덧신어 본다. 어딘가 따뜻 해짐을 느낀다. 오늘도 열심히 달려 보자!
Action Plan Story ∙ 43
Action Plan Story 장려상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새까만 사랑 서울성모병원 핵의학팀 이명희
바람이 차디찬 날입니다. 저기 추위를 이기며 어깨춤 올리고 삼삼오오 모여 드는 팀원들 모습이 보입니다. 둘둘 말아 올린 목도리 위로 눈만 올빼미처럼 내민 서로의 모습을 보며 한참을 웃었습니다. 말끔히 차려입은 출퇴근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평소와 다른 서로의 모습은 오늘 우리와 함께할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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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 선생님이 도착하기 전까지 실컷 웃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어 줄 것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조카들 어릴 적 모습을 함께 추억해 보기도 하고, 삼촌들 손 에 이끌려 쑥스럽게 맞대어진 등 뒤에서 녀석들 훌쩍 자란 키를 멋쩍게 자랑 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들이 낯설지 않게 우리는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서 울성모병원 핵의학팀 가족입니다.
웬 연탄 봉사? 오늘은 지난 일 년 동안 십시일반 모은 금액으로 3,000장의 연탄을 구룡마 을 열다섯 가구에 전달하기로 한 날입니다. 처음 모금운동을 할 때에는 그리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연말이라 전에 없던 약속들이 잦아 지면서 하루를 할애할 생각에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요. 다만 매 년 사회사업팀을 통해 지속적으로 해 오던 자원봉사의 연속으로 병원이 몸담 고 있는 지역 사회를 팀원 전체가 합심하여 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자는 의견 에 동참을 했을 뿐, 나 자신이 주체가 되는 신바람 나는 일이 될 줄 짐작 못 했 습니다. 물적 ․ 인적 자원봉사의 첫걸음은 생각처럼 쉬운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일정 이 다가오기 전 여러 차례 모임을 나누며 대상 선정은 어떻게 할 것인지, 무엇 을 나눌 것인지, 물량 준비뿐만 아니라 대상자들에게 접근하는 방법까지 세심 하게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특히 대상자들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가장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여러 환경의 환자를 응대하다 보니 자칫 대상자들에게 연중 ․ 연말 행사처럼 보일 우려를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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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지역사회 봉사단체 ‘능인선원’과 연결이 되어 가까운 구룡마을에 행 정적 문제로 인해 관내 기관에서 최소의 지원 혜택도 받기 어려운 가구가 있 다는 것을 알았고, 복지 사각지대의 열다섯 가구를 선정하여 계획된 일정을 실행에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부담스러워할 수 있는 대상자들을 고려해 빈 시간대에 방문 일정을 정하는 최소한의 배려도 잊지 않았습니다. 배려라 하기는 좀 그렇군요. 수다가 삶의 소소한 즐거움인 우리 팀원들의 입 에 지퍼를 채우는 것은 좀 무리수가 있는 고난도의 작업이니 저희가 배려를 받은 셈이지요. 대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은 것처럼 시끌벅적 소란스러움이 우 리 팀의 유일한 단점이거든요.
연탄 한 장마다에 담은 사랑 그래서 오늘 하루 우리는 연탄을 실어 나르는 연탄 배달부입니다. 연탄 한 장에 600원, 하루 4장을 갈아야 그나마 춥지 않게 겨울을 날 수 있다고 합니 다. 가늘고 구불구불한 골목에 길게 줄 서 콧물, 눈물 훔쳐 가며 한 장 한 장 건 네받은 까만 사랑, 나 어릴 적엔 말이야…… 라며 연탄에 엮인 경험담을 이야 기하는 선배들의 한마디에 웃음 터트리며, 정말요? 그래요? 열심히 들어주는 최고의 경청자 후배님들, 그렇게 우리가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새까만 사랑은 팀원들 서로에게 지워지지 않을 정말 진하고 새까만 사랑으로 전해졌고, 그리 고 그 자그맣고 추운 창고에 한 장 한 장 쌓아 올려졌습니다. 울퉁불퉁한 연탄 창고가 얼마나 예쁘고 아늑하게 보이는지 아세요? 생각보 다 조금 더 열악한 환경을 직접 대하니 당황스럽긴 했지만, 오늘 함께한 모두 는 나와 우리는 모두 별다를 것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 겨울 엔 추위가 오기 전 더 일찍 이곳을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 막 생겨납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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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언제 말려서 쓰나? 한겨울 오기 전 미리 넣어 바짝 말려 쓰게 해 주어야 겠다.’ 이런 생각이 주저리주저리 떠오르는 것이지요. 참 예쁘지 않으신가요? 우리의 끊이지 않는 수다 속에는 ‘멀리서 행복을 찾을 필요 없네요. 너무 행 복하려고,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냥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지금 행복하잖아요?’ 이런 마음이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봉사를 하러 나선 것 이 아니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나선 것이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게 되 었고, 또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대하지 않던 곳에서 서로의 마음에 자리 한 ‘행복의 씨’를 발견한 것이지요. 그 ‘행복의 씨’를 가지고 흥얼거리며 발걸 음을 옮깁니다. 하루 또 하루 병원에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행복의 씨’를 뿌립 니다. “고객님께서는 방금 치유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우리 병원 지하 5층에 쓰여 있는 글귀입니다. 핵의학팀의 모든 가족은 매일 아침 출근하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행복의 씨’로 일궈진 행복의 밭에 치유의 씨를 받으러 옵니다. 뚜벅뚜벅 랄랄랄라~~ 행복의 밭에서 치유의 씨를 받겠습니다.
Action Plan Story ∙ 47
Action Plan Story 장려상
결국 사랑의 사명이었네 서울성모병원 수술실 진종임
모바일(Mobile), ‘움직일 수 있는’이라는 뜻으로, 이동성을 가진 것들을 총칭하 는 말. 맑은 하늘 이름 모를 어느 지점에 있는 투명 햇살의 따뜻함보다는 엄마 품 에 안긴 듯한 포근함이 우리의 마음을 스며드는 5월의 어느 날, 나무들의 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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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이 절정에 이른 것같이 나의 내면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들렀던 강남의 대 형 서점에서 한 책의 제목이 나의 시선과 발길을 멈추게 했다. ‘안드로이드 앱 개발’, ‘아이폰 앱 개발’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판사별, 저자별로 분류된 책들 의 공간 속에서 말이다. ‘모바일 앱 개발’, 나와 눈 맞춤을 한 이것과 마주한 순간 나의 고요한 내면 의 바다가 갑자기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거센 물줄기가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힘으로 솟구쳤다. 그 힘은 갈라진 바다의 틈 사이에서 또 다른 파도를 생 성해 냈는데, 마치 어머니가 사준 고까신을 처음 신어보는 어린아이의 일렁이 는 마음처럼 누군가를 스스럼없이 미소 짓게 하는 설렘의 파도였다. 이 순간 느낀 강한 힘으로 나는 추호의 의심 없이 지금 내가 본 이것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나의 뇌리까지 기분 좋게 만든 그 설렘으로 꼭 해낼 것 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운명(Destiny),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 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이르는 말. 어쩌면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이 누군가의 마음속에 운명의 불 씨를 지펴 우리의 내면을 환히 밝히고 나 자신조차도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하루라는 신의 선물을 충실히 살아가는 가운데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면서 결국엔 나도 모르는 힘에 끌리어 내 안의 굳은 다짐을 하게 됨으로써 말이다. 나는 그렇게 나의 마음의 주름 속에 숨겨져 있어 차마 알지 못 했던 그것과 운명처럼 조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운명은 까마득하 여 볼 수 없었던 나의 앞길을 밝혀 주었고, 안개처럼 자욱하여 희미했던 나의 발자국을 드러나게 해 주었다.
Action Plan Story ∙ 49
지식(Knowledge),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해 알게 된 명확 한 인식이나 이해. 수술실 간호사인 나는 수술에 직접 참여하여 집도의가 호명하는 기구를 특 유한 나의 낮은 어조로 다시금 부름으로써 그 순간 사용하는 기구 및 장비를 배워 이해한다. 또한 기회가 없어 잘 접해 보지 않은 수술에 우여곡절로 들어 가게 될 때는 수술 매뉴얼이나 동료와의 대화를 통해 중요한 특이 사항 몇 가 지를 인지한 후 수술에 들어가 몸으로 업무에 대한 지식을 쌓는다. 매일 총 30 개의 수술실의 수술상에는 각기 다른 임상과, 집도의 그리고 수술실 간호사들 이 함께 펼치는 대향연이 벌어진다. 올해 5년 차의 수술실 간호사인 나는 모든 과는 아니지만 여러 임상과를 배 운 경험과 3교대 근무로 매일 참여하는 수술과와 수술명이 다르다. 일주일에 신경외과, 흉부외과, 산부인과, 외과 등 각기 다른 4~5개의 다른 임상과와 집 도의의 수술에 참여하고, 수술의 일정 패턴은 익혔어도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 면 ‘지금 이 순간에는 이렇게 했었나?’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 교수님은 장(Intestine)을 자르고, 봉합하실 때 다른 니들 홀더(Needle holder, 니들을 잡는 수술 기구)를 사용했던 것 같은데, 이건가, 저건가?’ 하면 서 내 머릿속의 기억을 세차게 두들기고 또 두들겨 본다. 이마와 미간에 삼자 주름을 애써 만들며 온갖 인상을 찌푸려도 보지만 매번 역부족이다. 그때 나 의 부족함을 탓하기보다는 괜히 영화 속 제목인 내 머릿속의 지우개를 떠올려 본다. 집도의들은 매번 똑같은 수술을 하지만 여러 임상과를 접하는 수술실 간호 사들에게는 세부적인 내용 하나하나까지 기억하기에는 많은 노력과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우리들은 수술에 참여하고 난 뒤, 수술 간호노트나 수술 매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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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을 직접 만들어 컴퓨터에 보관하는 식 등의 방법으로 습득한 업무 지식을 쌓고 있다. 구획된 곳에서 임상과별로 다른 수술이 진행되고, 해당 수술팀 이외의 사람 은 출입이 제한된 공간인 수술실, 그럼 갑자기 수술 물품, 수술 과정 등의 수술 과 관련된 업무 정보가 바뀌면 지금 이 수술에 참여한 사람만 알게 되는 것인 가? 그럼 이후에 이 수술이 다른 수술방에서 진행될 경우에는 어떡해야 할까?
공유(Sharing), 두 사람 이상이 한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 공유는 두 사람 이상이 하나의 무언가를 두고서 함께 소유하기 위하여 만남 을 가지는 일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그 무언가는 각양각색 이 될 수 있다. 수술실 간호사들에겐 수술 환자와 관련된 업무 지식이 그 만남 의 무언가가 된다. 이전처럼 수술 중 어떠한 사항이 변경될 경우, 우리는 각자 가 만든 노트에 기록하고 이것을 다른 동료들에게 보여 주거나, 수술실 내 화 이트보드, 웹 커뮤니티 등을 통해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여 내 곁에 있는 동료 들을 만나고, 수술 환자들 곁에 머무른다. 설령 소원한 관계의 동료라 할지라도 업무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즉, 수술실 간호사들 간의 지식 공유는 곁에 있는 동료들 을 대면하게 해 주고, 수술대 위의 긴장된 얼굴의 환자가 품는 치료와 회복의 간절한 바람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렇듯, 수술실 간호사들의 업무 지식 공유는 너와 나의 눈 맞춤의 기회를 주고, 억지로 캐낸 이타적 마음이 아 닌 천연 그대로의 마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 는 수술실 간호사들만의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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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끌리다(Be driven), 사람, 단체, 사물, 현상 따위를 인도하여 어떤 방향으 로 나가게 하다. 나의 마음속에는 항상 무엇인가가 있어 왔다. 그리고 그것을 늘 희망처럼 바라보고 살았다. 대학부터 2014년 봄 대학원 진학을 하기 전까지는 ‘대학원 진학’이었고, 지난 5월 강남의 대형 서점에서 나의 살아 있는 모든 감촉을 세 운 경험 이후부터는 ‘모바일 앱 개발’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짓고, 삶의 무게가 짓누른다고 생각될 때는 바라봄의 법칙처럼 마음속의 무엇인가를 바 라보고 또 바라본다. 그러면 곧 마음이 평안해짐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오른 손의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논문은 주제만 잘 정하면 80%는 완성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논문 시작 전부터 주제를 잡느라 엄청 골머리를 앓는데 나 또한 열외일 수 없 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들처럼 괜스레 머리를 부여잡는 동작을 취하기보다 는 내 마음의 그 무엇인가에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모바일 앱 개발’, 처음 마 주할 때의 그 강한 힘에 나의 열정을 더하여 꼭 해내겠다는 다짐을 했고, 또한 이것이 앞으로 내가 써야 할 논문의 주제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꼭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사명인 것 같았다.
간호 업무 지식 공유(Nursing work Knowledge sharing), 업무 지식에 관 해 사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타인과 공유하여 사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 우리는 서로 만져지고, 느껴지는 것들을 늘 그리워하고 갈망하면서 살아가 고 있다. 그래서 수술실에서 우리들은 마스크와 모자로 가려진 채 눈만 빼꼼 히 드러난 모양이지만 그 자그마한 눈으로 수만 가지의 모양을 만들면서 누군 가를 향해 눈짓하고, ‘뚜뚜뚜’ 하는 심박동 소리와 기구와 장비의 소리만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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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실을 감싸는 동안에도 쉴 새 없이 내 앞에 놓인 기구들로 손짓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료를 부르는 그 끊임없는 눈짓과 손짓은 업무와 관련된 지식을 말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각자가 가진 지식은 모든 간호사들이 알 수 있도록 공유되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에게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모두 내어 맡긴 채 우리 앞에 누워 있는 환자를 위해서이다. 총 30개의 수술실, 각기 다른 임상과, 임상과별로 각기 다른 집도의, 100명 이 넘는 수술실 간호사……. ‘그래 바로 이것이야. 수술실 간호사들의 지식 공 유를 원활히 할 수 있는 모바일 앱을 개발하자.’ 강남 한복판의 대형 서점에서 느꼈던 추상적 이끌림이 실존적 명제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수술실 간호사 간의 지식 공유 활성화를 위한 모바일 앱 개발’이라는 주제 를 정하고 관련 문헌을 고찰하여 지도 교수님께 조언을 구했고, 이를 주제로 강의 시간에 발표도 여러 번 했다. ‘모바일 앱 개발’을 선생님이 과연 하실 수 있나요?’, ‘참신하다’, ‘정말 업무에 적용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정 보 보안의 문제’ 등 다양한 긍정과 부정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 바일 앱 개발’을 하겠다는 나의 열정은 간절한 기도로 하늘에 상달 되었고, 주 변의 수많은 천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술실 간호사의 지식 공유 실 태와 영향 요인’이라는 주제가 석사 논문의 최종 주제로 결정되었다. 간호학 분야에서 지식 공유 관련 연구는 매우 미흡한 실정이었고, 수술실 간호사를 대상으로 한 지식 공유에 관한 선행 연구가 전무하기 때문에 곧바로 ‘모바일 앱 개발’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이때, 나는 참 신기한 경험을 했다. 버스 정류소에서 집에 가는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학원 수업을 같이 들었던 한 선생님을 만났고, 그때 우 연히 나의 논문의 주제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 선생님이 최근에 수술실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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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를 대상으로 한 논문을 보았는데 거기서 수술실 간호사의 정보 공유 부족 문제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선정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수술실 간호사의 정보 공유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고, 이에 대 한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한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벼락 맞 은 듯이 놀랐다. 그리고 순간의 갑작스러운 흥분으로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렸 다. 또한 지도 교수님께서 나의 열성을 아시고 다른 대학에서 간호정보학을 주전공으로 하시는 교수님께 나의 사정을 말씀 드리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원을 붙여서 도움을 주겠다는 응답을 나에게 전해주셨다. 감사하 다는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극한의 엑스터시(Ecstacy)의 순간이었 다. 즉, ‘모바일 앱 개발’은 내가 이곳에 존재해야 하는 지상명령으로 나의 마 음 판에서 지울 수 없는 그 무엇인 것이었다. 작년 5월부터 시작된 모바일 앱 개발의 만남과 지식 공유 논문의 여정, 이 길을 달려오는 내내 내가 아는 것은 모바일 앱을 개발해야 한다는 나의 사명 과 수술실 간호사들 간의 지식 공유는 잘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 두 가지 명제 뿐이었다. 그리고 일이 끝난 뒤 도서관에 앉아 컴퓨터 속에 저장된 수많은 논 문들과 함께했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르는 답답한 순간, 이 길이 맞는 줄 알고 갔다가 다시 되돌아온 순간, 설문조사를 위해 의뢰한 병원에서의 수차례 의 거절 등 어느 것 하나 그냥 되는 법이 없었지만, 어느새 논문은 결론을 향해 나아갔고 고찰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연구의 결론이 모 바일 앱 개발로 연결될 수 있는 방향으로 도출되었고, 고찰에 추후 연구 방향 으로 제언할 수 있었다. 2015년 11월, 지식 공유 논문이 갓 태어난 아이의 힘찬 울음처럼 세상 밖으 로 나와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곳에 서서 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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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호흡을 먼저 가다듬어 본다. 감사, 사명, 은혜란 단어들이 내 마음속을 맴돌 면서 내가 받은 이 사명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을 굳게 다짐하여 본다. 그리 고 행복이란, 내가 필요로 하는 그 무언가로 채워 잠깐의 허기를 달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필요로 하는 그 무언가를 위해 내가 가진 것과 상대방이 가진 것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그 필요를 채우는 것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는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사랑을 준다고도 한다. 이렇듯 우리 의 삶은 주고받는 삶인데, 나를 포함하여 그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궁극적인 그 무언가는 나를 꿈꾸게 한 모바일 앱 개발을 넘어선 바로 ‘그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액자라는 것은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뭔가 특별한 일 이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죠.” (박웅현, <책은 도끼 다> 中에서)
내 마음속의 액자는 무색 배경이라 더욱 도드라지는 ‘모바일 앱 개발’, 이것 으로 나의 환자들과 나의 동료들을 위해 사랑의 소명을 실천하는 행복한 간호 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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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영성간호 서울성모병원 111 Unit 방유경
저는 소아청소년과에 근무하는 평범한 간호사입니다. 간호사가 싫어 한눈 도 팔아 보았지만 뼛속까지 ‘간호사’가 깊이 밴 탓에 오래 벗어나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UM 선생님의 권유로 영성간 호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엔 근무 시간의 연장으로 조금 더 일찍 출근 하고, 또 1주일마다 과제를 작성하고 제출하는 것이 짜증도 나고 싫었지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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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한 주 시간이 가면서 나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게 되는 마음의 여 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이 변할까 세례도 받았습니다. 미흡하고 아직 익숙지 않지만, 그리 스도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새기며 간호사로서의 마음가짐을 새로이 다잡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왜 달라졌을까? 그러던 중 한 아이가 제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그 아이는 오랫동안 전신성 홍반성 낭창(이하 SLE)라는 면역 질환으로 자 주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습니다. 처음에 만났던 4~5년 전에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아이가 착하고 대견하고 안쓰러워 말 한마디 더 건네며 병실에 들어갔 을 때 한 번 더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11 세 소녀는 저의 행동에 어떠한 답을 하진 않았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아이의 증상이 심해지고 여러 가지 합병증이 오면서 제가 알던 순한 아이가 아닌 얼 굴에 짜증과 화가 가득한 아이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협조적이던 보호자 또한 아이가 힘들어하는 만큼 저희에게 까다롭게 요구 하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아이를 알던 모든 간호사들이 당황하였고, 아이 는 입원이 길어지면서 점점 간호하기 힘든 어려운 환자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를 처음부터 봐 왔던 저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아파도 아프다 말 한마디 못했던 아이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울고 심지어 욕까지 할까 안 타까웠습니다. 보호자인 아이의 어머니 또한 오랜 병원 생활과 변한 자신의 딸 때문에 지쳤는지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하고 간호사들에게 폭언을 하는 등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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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치료해 줄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하면 다친 마음을 안아 줄 수 있을까?’
영성 간호로 아이와 通하다 그때 영성간호가 생각났습니다. 처음에는 소리 지를 때 옆에서 아무 말없이 손만 잡아 주었습니다. 소리를 다 지르고 나면 손을 놓고 제자리로 돌아와 근 무를 하였고, 다시 소리를 지르고 아파하면 곁으로 갔습니다. 다음엔 아파할 때마다 곧 아픔이 지나갈 것이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홀리 네임’이었던 ‘이 또한 지나가리.’를 속으로 외웠습니다. 그리고 출근하면 항상 찾아가 안위를 살폈고, 어머니가 하시는 모든 말씀에 귀 기울여 주었습니다. 폭언을 하면 속이 풀리실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어 드렸고, 궁금한 사 항에 대해선 여기저기 알아보아 답변해 드렸습니다. 그러던 사이에 아이가 아프게 된 원인이 발견되었고, 시술하고 약물 치료하 면서 증상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웃음도 찾고 말도 하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어느 날, 아이의 어머니께서 “우리 아이 가 선생님이 제일 좋대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어떤 고백보다 황홀한 고 백이었습니다. 진심은 통한다는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제 진심이, 제 마음이 그 아이에게 통했다니 말입니다. 솔직히 힘든 시간이었지만 보람된 시간이기 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UM 선생님의 분만 휴가로 업무 대행을 하게 되어, 매일매일 민원이 발생하 지 않을까, 큰 의료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을까 살얼음 위를 걷는 마음으로 보 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출근길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쉬는 날 전화벨만 울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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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라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출근을 하면 익숙지 않은 업무로 인 해 동료들에게 피해가 갈까 조바심내며, ‘왜 나의 능력은 이 정도밖에 안 될 까?’ 하느님께 원망도 해 보았습니다. 혼자 고민하고 있을 때 UM 선생님을 대신하는 제가 얼마나 힘들지 걱정이 된다며 동료 간호사들이 저를 위해 기도를 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은 “선생님,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며 계속 말하였는데 저는 그 소리를 듣지 못 했습니다. 이제까지 업무 대행이 혼자만의 부담이라고 생각한 제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동료들과 함께하자고 생각하면서부터 마 음이 편해지고 출근길이 가벼워졌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동료들과 함께 병동 의 평화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우리의 진심이 통하였는지 UM 선 생님이 안 계신 3개월이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또한, 선생님 업무의 어려운 점 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영성간호를 잘 몰랐습니다. 영성간호는 막연한 개념의 이해하기 어려 운 것이라 실천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영성간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방법이며 결코 어려운 게 아니며, 환자와 보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일하는 동료와 서로 신뢰를 쌓으며 지지해 주는 것에서부 터 시작됨을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병원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간호사는 주사만 놓는 사람이 아닌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진정한 의미의 ‘백 의의 천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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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가벼운 생명은 없습니다. 그리고 늦지 않았습니다 서울성모병원 재활의학팀 박병선
저는 소아 재활을 담당하고 있는 12년 차 치료사입니다. 신생아중환자실 인 큐베이터의 1~2Kg 미만 미숙아들을 비롯해 생후 1년 남짓까지의 발달 지연 아이들의 치료를 주로 맡고 있습니다. 여러 임상 분야가 그렇지만 소아 재활은 의료진을 포함하여 주변 모두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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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미숙아로 출생하였어도 조기에 발달치료가 종료되 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지속적인 발달 지연으로 치료가 길어지는 경우도 있습 니다. 이 경우 아이도 힘들겠지만 하루에 많은 부분을 양육과 치료에 집중해야 하는 아빠, 엄마들이 지쳐 가고, 때로는 ‘장애’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불안해하 거나, 심지어 가족 간 불화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간혹 보게 되면 저 의 마음도 무거워지곤 합니다. 그래서 치료 전 좀 더 쉽고 정확하게 치료 내용 을 설명하고 부모님의 마음에 지지가 될 수 있도록 제가 가진 치료 지식의 정 리뿐만 아니라 기도와 명상을 통해 그분들의 마음을 조절하려 하고 있습니다.
조금 늦는 아기들 제가 12년간 아이들을 치료해 오며 보호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있다면 “우리 애가 걸을 수 있을까요?”입니다.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한다는 것은 힘들 수 있지만, 지속적인 치료와 아빠, 엄마를 포함한 아이를 돌봐 주시 는 분들의 사랑과 관심이 있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답을 해 드립니다. 이 유는 재활치료는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이 걸릴 수도 있고, 무엇보다 가정에서 아이에게 치료실로부터 배운 자세와 운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의 상태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서 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보호자나, 치료가 장기화됨으로 인해 심적으로 지 쳐 가는 분들에게 정서적 지지를 해 드리는 것도 정성된 치료와 함께 중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 재태 기간 26주 만에 960g으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신생아중환자실 로 치료를 가기 전 차트를 살펴봤는데 저산소성 허혈성 뇌증, 기관지폐이형성 증, 호흡곤란 증후군, 뇌파 이상 등등 검사 상의 이상 소견이 페이지를 가득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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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모자랄 만큼이어서 환아 상태가 좋지 못할 것임을 예상하였습니다. 역시 나 불안정한 근육의 긴장도와 호흡을 위한 치료를 진행하고는 있는 동안에도 수차례씩 아기의 혈중 산소포화도를 모니터 하는 기계의 경고음이 울려 여러 번 진땀을 빼야 하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아기는 3개월에 가까운 시간을 인큐베이터에서 지내고 나서야 퇴원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외래를 통해 산소 공급을 해 주는 장치와 모니터 기기 를 가지고 치료를 시작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이마저도 필요 없을 만큼 호흡 상태는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아기들과 비교해 현저히 신체 발달 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자 조금 늦는 아기일 거라고 생각하던 엄마 의 걱정과 불안도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또 한 가지 는 재활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다른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던 부분이었 습니다. 처음부터 문제가 심각한 아이인데 재활치료를 열심히 한다고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겠느냐며 치료에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할머니와 아빠 의 모습을 첫 외래 치료 날 보며 엄마가 겪을 가정에서의 어려움을 예상했지 만, 실제 치료 기간이 길어지며 이런 심적 어려움이 더욱 커졌던 것 같습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던 것은 정성된 치료와 아기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 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아빠나 할머니에게도 선천적인 뇌 손상이 있지 만 반복적인 치료적 자세 및 운동을 통해 이를 최소화하고 추가적인 기능을 이끌어 낼 수 있음을 설명해 드리고 가정에서도 적극적으로 재활이 이뤄질 수 있도록 격려하려 했지만, 이미 더 이상의 기대를 포기하고 내원조차 거부하는 분들에게 이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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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매번의 치료를 엄마에게 설명하고 글로 써서 전달했으며 기능이 호전 된 부분과 집에서 이뤄져야 하는 치료 내용은 핸드폰 영상을 통해 엄마의 이해 를 도왔고, 할머니, 아빠에게도 전달하여 치료에 동참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이렇게 몇 달 동안 치료실과 엄마의 노력 덕분일까 조금씩 아이가 변화를 보이 기 시작하였습니다. 팔과 다리에 신체 무게의 지지점을 만들어 주려 치료를 진 행한 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기어가기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한 균형 감각이지만 어느 정도 양팔을 지지해 앉아 있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신체 이동과 앉아 있음으로 시야가 넓어지며 기능의 선택이 다양 해져서일까? 치료 중 울거나 토하기까지 하며 힘들어하던 아이의 성향도 많은 호전을 보였으며, 치료 초반에는 저만 보면 찡그리거나 울음을 터뜨리던 녀석 이 저를 보고 웃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변화가 아빠를 움직였는지 몇 달 만에 내원을 한 아빠가 “지금도 늦지 않았을까요?” 하고 물었고 저는 재차 늦 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치료 내용과 앞으로의 치료 계획 및 목표 수준을 설명해 드렸더니 전보다 진지하게 경청하는 달라진 모습을 보 이셨습니다. 이후에도 직장 일로 바쁘지만 중간중간 짬을 내어 내원하여 치료 내용을 상담하기도 하고, 본인이 집에서 진행한 치료 운동을 촬영하여 방법이 맞는지 치료실을 통해 확인하는 아빠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엄마와 아 빠의 지지 속에 아이는 점차 신체 균형도 향상되며 또 다른 기능을 끌어내기 위해 치료실과 함께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아 재활치료의 시작은 아기와의 적절한 ‘눈 마주침’입니다. 이는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13:16).”라는 성경 구절처럼 공감과 정서적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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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치료의 과정 속에서 어떤 생명도 소중히 여겨야 하며, 여기에는 너무 늦음은 없음을 사랑스런 아이의 주변 모든 분들에 게 알려드리는 것 또한 마음의 ‘눈 마주침’을 통한 영적 지지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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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여의도성모병원 외래간호팀 외래 Unit 오경주
‘빠빠빠빠바, 빠빠빠빠바.’ 휴대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피곤한 하루, 퇴근 후에 저녁 식사를 하고 나른하게 쉬고 있는데 어쩐지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내시경 검사실에 근무하면서 당직 인 달에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전화벨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날도 당직이었는데 왜 이런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13개월 된 아기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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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건전지를 삼켜서 시급히 꺼내야 하는 촌각을 다투는 응급 상황이었다. 주 섬주섬 보이는 옷을 입고, 병원을 향해 가는 내내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걸 바닥에 둬서 애가 집어먹게 한 거야?’ 하면서 분노하다가, ‘사고 나지 않고 무사히 잘 빼내야 할 텐데…….’ 하는 걱정과 ‘아이 엄마는 어떤 마 음일까?’ 하는 애처로움으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병원에 도착했다.
엄마의 마음으로 내시경과 필요할 것 같은 온갖 기구를 준비하는 동안 아빠가 아기를 안고 당황한 모습으로 엄마와 같이 들어왔다. 13개월 된 아기는 이미 응급실에서 주사와 여러 검사를 하느라 얼마나 울어댔는지 얼굴은 빨갛게 되어서 지쳐 울 지도 못하고 울음 끝에 헐떡이고 있었다. 엄마는 아이 묶는 띠를 그대로 한 채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머리는 산발을 하고 넋이 나가 있고, 그나마 아빠가 아 이를 안고 멍한 얼굴로 의료진의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수은 건전지는 신속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위벽에 구멍이 나거나 괴사(썩는 것)를 일으킬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독성에 많이 노출되어 뇌 질환 등의 심각한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 내용의 설명을 들은 부모의 심정은 어 떨까? 그리고 얼마나 자책하고 있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부모 앞에서 영문 을 모르는 아기는 눈물이 그렁그렁 한 눈으로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고, 나는 그런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강해질 수밖에 없고, 엄 마와 아기에게 용기를 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정신 차리시고 저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아기의 부모와 한마음이 되고 있었다. 내시경을 위해서 아기가 혼자 눕지 못해 엄마가 뒤에서 아기를 안고 누워 검사를 진행한다. 아기와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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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 시트로 덮고 내시경을 위한 자세를 준비하면서 그때부터 나는 간절하게 계속 기도를 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그렇게 모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어린 아기 한테 더 이상의 시련을 주시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아기와 엄마를 위해서 무 사히 잘 꺼낼 수 있도록 함께하여 주세요.’ 당직인 응급 상황에서 의사 선생님 한 분과 간호사인 나와 둘이 최소의 인 원으로 검사를 진행한다. 무엇보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되지 않도록 안전하게 하는 게 중요했으므로 수면 내시경을 못한 상태로 검사는 시작되었다. 아기는 몸부림치며 사정없이 울어대고 내시경 진입은 쉽지 않았다. 아기 보랴, 기구 준비하랴, 모니터 보랴, “어머니, 지금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기를 잘 잡아 주세요.” 하면서 용기도 줘야 하는 진땀 나는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아가, 미 안해, 미안해.”, “아가, 조금만, 조금만 참아.”를 되뇌고 있는데 위 속에 있는 수은 건전지가 보였다. 의사 선생님과 조심히 한마음이 되어 잘 꺼내 부모에게 보여 주니 그제야 엄마는 울음을 터트렸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물, 콧물이 범벅된 고생 한 아기를 보니 잘 견뎌 준 아기가 대견하고 기특하여 엄마의 마음으로 얼굴 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었다.
주님의 마음이 이런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선선한 바람과 안도감으로 너무나 상쾌했다. 며칠 후 아기와 엄마가 검사를 위해 검사실을 방문해서 나를 보고, “저 언니다. 그때 밤에 우리랑 같이 고생했던 그 언니!” 하면서 아는 체를 했다. 비교적 용모 단 정(?)한 나의 모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날은 집에서 쉬다가 부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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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 나오느라 꾀죄죄한 모습이었을 텐데 알아봐 주니 부끄럽기도 하고 뿌듯하 기도 했다. “저 알아보시겠어요? 그때는 화장 지워서 잘 못 알아볼 텐데……. 그때랑 지금은 완전히 다르잖아요.” 하면서 농담도 했다. 당직 때 응급 환자가 발생해서 전화를 받으면 긴장한다. 그리고 사람인지라 귀찮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사람의 생명이 달려 있을지 모른다는,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한다는 사명감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감사한다. 주님이 나를 이렇 게 좋은 일에 써 주셔서……. 나는 발바닥 신자이다. 주일에 성당에 겨우겨우 다니면서 신자랍시고 면을 세우고 있고, 필요하고 아쉬울 때만 열심히 기도한다. 하지만 주님은 어려운 이웃의 모습으로 나에게 올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들에게 조금이 나마 힘이나 위안이 된다면 바라기만 하고 받기만 하는 염치없는 사람이 되지 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방송으로 나오는 아침 기도, 저녁 기도 를 귀 기울이고 되새기고 있었고,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이제는 그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있었다. 정말 예수님을 본받아 정성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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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211병동의 ‘하하호호’ 서울성모병원 211병동 우미란
우리 211병동은 환자에게 형식상의 영적간호 제공이 아닌 마음으로 전달될 수 있는 영적 간호 돌봄을 실천해 보자는 취지에서, 병동 영성위원회팀 위원 들은 한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통해 목표 수준을 정해 놓고 달성 성과에 따른 적용 사례를 발표하고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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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간호를 위한 탐방 먼저 병동의 특성을 살리며 환자에게 직접 다가가는 영적간호가 무엇이 있 을지에 대해 간호사들과 의견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종교가 있는 간호사들의 의견은 적극적인 반면에 아직 종교가 없는 간호사들은 영적인 부분에 대해 소 극적이었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근무 전 조회 시 수간호사 선생님과 함께 특별히 외국인 환자를 위한 기도를 하고 매일 미사 복음을 읽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으며, 새 영세자들을 위해 분기별 성당 탐방을 하였습니다. 명동성당을 시작으로 약현성당과 가회동성당을 방문하여 미사를 함께 드리 며 순교자들의 희생과 정신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또한 추가적으로 간호부 주 관 SCLP 과정을 통해 환자에게 진정으로 베푸는 영적간호에 대해 배우고 깊 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소극적이던 간호사들도 매번 영성 모임 시 적 극적인 의견을 제출하고 먼저 환자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11병동에서의 영적간호 211병동은 VIP 병동으로 중동 환자와 여러 과의 국내 입원 환자들이 함께 재원하고 있습니다. 혈액암 환자들뿐만 아니라 고형암 환자들이 많은 병동이 다 보니 여러 가지 처치가 시행되고 있으며, 그중에 가장 불안한 시기가 언제 일지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가장 불안할 것이라 생각되는 ‘수술’, ‘항암’, ‘이 식’, ‘골수조직 검사 전’ 이 4가지에 대해 병동 간호사들이 좋은 내용을 취합하 여 기도문을 완성하여 제공하고 있으며, 중동 환자들의 잦은 입원으로 국제진 료팀의 협조를 구해 아랍어로 된 기도문을 만들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중동 환자들의 대부분이 혈액암으로, 긴 시간 병과 힘든 싸움을 하는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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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타국에서 치료를 받는 그분들의 외로운 심정은 말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갔습니 다. 같은 종교의 신은 아니더라도 영적인 믿음은 어느 곳이나 동일하다고 생 각했습니다. 수술실로 이동하기 전 아랍어로 기도해 드리면 중동 환자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와 동일하게 “인샬라.”를 외치며 눈물을 보이고 감사함 을 표현하였습니다. 매번 기도 제공을 하기 전엔 기도를 원하는지 물어보는 과정에서 뭔가 쑥스 러움이 생기지만 환자의 감사 표현에 자신도 모르게 진심으로 수술 및 검사가 잘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게 되었습니다. 수술 및 검사 다음 날에도 “많이 힘드 셨죠? 고생 많으셨어요!”라며 손을 잡아 드리고, “힘내세요. 빠른 회복을 위해 기도해 드리고 싶어요. 기도해 드려도 될까요?”라고 물으며 데이 번, 이브닝 번 간호사가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해 드렸습니다. 처음엔 바쁘다는 핑계로, 쑥스럽다는 핑계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래서 조금 강제성을 가지고 기도 시행 유무를 조사하고, 하지 않았으면 함께 가서 기도를 하고 그 느낌과 기도문을 영성 일지로 작성하면서 이제는 조금 더 손쉽게 환자에게 다가가 웃으면서 기도를 해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하호호’ 영적간호 또한, 영적 돌봄 제공 환자들 중 영적 돌봄이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은 환자 를 대상으로 격월로 한 명을 선정하여 ‘하하호호(Hand/Happy/Holy/Hope, 사랑이 넘치는 안전한 손길로/행복과 즐거움을 선사하고/은총과 정성이 가득 한 거룩한 마음 다해/밝고 따뜻한 희망을 채웁니다)’에 준하는 사랑과 기쁨을 전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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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호호’ 영적 사례로 우리에게 지금도 가슴 깊숙이 품고 있는 중동 환아 가 있습니다. 중뇌와 연수 사이의 중추신경 조직에 종양이 생겨 전체적인 종 양 절제술과 수두증으로 왼쪽 안면 마비와 안구편위로 여러 차례 항암 치료와 동종이식에 따른 지속적인 검사와 시술 등으로 보호자와 환아가 오랜 병원 생 활에 많이 지쳐 힘들어했었습니다. 항상 환아와 보호자를 보면 우리는 뭉클함 에 눈물을 글썽거렸고 장기간 병원 생활에 가족과 같은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환아에게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상의하여 기본적인 돌봄부터 제공하였 습니다. 환아도 병실이 답답한지 병동 및 바깥 라운딩을 좋아했습니다. 걷지 못해 발 역할을 대신하던 유모차를 타고 다닐 때마다 모든 간호사들이 안아 주며 손도 잡아 주고 따뜻한 말도 해 줬으며, 밝은 표정으로 인사 및 눈 맞춤을 해 줬습니다. 환아가 웃을 때는 저희도 함께 기뻐해 줬으며, 치료 과정에 대해 적 극적으로 보호자에게 설명해 주고 긍정적인 말도 해 주었습니다. 또한, 환아만 을 위한 ‘하하호호’ 패널을 제작하여 사진과 회복을 위한 응원의 메시지를 적 어 제공하였습니다. 보호자의 요구대로 병실 입구에 패널을 전시해 놓고 의료진이 환아에 대해 많은 사랑을 쏟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이후 보호자는 치료에 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매번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치료받는 과정 동안 환아가 회복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영적 돌봄을 제공했지만 오랜 투병 끝에 환아는 가족들의 품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호자들은 마지막까지 환아 에게 쏟았던 사랑에 대해 감사함을 전달하며 환자들을 생각하는 의료진의 마 음이 지금과 같이 변치 않길 바란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예전 에 느껴 보지 못했던 뭉클함과 함께 간호사로서의 자긍심과 직업에 대한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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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간호사의 지문을 남겨 가며 회복을 원하는 메시지를 적어 액자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성경 구절, 좋은 글 들을 환자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영성간호에 대한 연구 중 의학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영성간호로 인해 환자가 좋아졌다는 연구 결과를 들은 바 있어 3교대 근무를 시작하기 전 육체 적 ․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들이 인내와 병마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갖 고,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도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간단하게 기도 후 인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2015년은 CMC의 일원으로, 병동 간호사로서 환자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 행복한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CMC 이념과 행동 규범, 행동 강령을 전 직 원들이 함께 공유하고 실천하여 함께 나누는 소중한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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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중환자실 간호사의 일상을 돌아보다 성바오로병원 특수간호팀 김지해
중환자실에서 근무한 지 올 3월이면 일 년이 된다. 지난 20년 동안 일반 병 동에서만 근무를 해 왔기에 중환자실은 기회가 된다면 꼭 근무해 보고 싶었던 곳이다. 막상 와 보니 이곳에서 근무를 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많은 후회를 했 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얼마나 살뜰히 보살 피는지, 정말 후배들이지만 매 순간 존경심마저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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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의 ‘우리’, 간호사 때로는 환자들이 쏟아 내는 거친 언행에도 표정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정성껏 보살피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간혹 간호를 하다 보면 섬망이나 치매를 가진 환자들로 인해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사명감을 가지고 간호를 하는 간호사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상처 받고 힘들 법도 할 텐데 그냥 “괜찮아요.” 하면서 씩 한 번 웃어 보인다. 그리곤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 로 돌아가 성심껏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한다. 진료를 보자고 해도 괜찮다며 손 을 내젓는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픈 적이 한두 번 이 아니다. 아무래도 중환자실이다 보니 긴박한 상황이 종종 발생하기 마련이기에 긴 장감을 늦출 수 없고 환자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촉 각을 세우고 일을 한다. 촌각을 다투는 긴박한 상황들도 부지기수이기에 식사 를 거르는 일이 식사를 하는 날보다 많다. 그저 물 한 잔 들이키면 그날은 그나 마 다행인 것이다. 응급실에서 긴박하게 응급 처치를 하고 중환자실에 입실한 환자들을 대할 때면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특히, 젊은 사람들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들도 한 가정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일 것이다. 더군다나 인공호흡기라도 적 용하게 되는 경우에는 가족들은 더욱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간호사 이기에 가족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정 서적 지지에 많은 시간을 쓰려고 한다. 가족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 정이기에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거듭 건네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어렵게 돌 린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 가끔씩 눈물이 맺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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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의 마음, 그리고 우리의 고민 환자들을 간호할 때 이런저런 윤리적 갈등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중 하 나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기구들인 인공호흡기와 삽관한 튜브 등을 자신도 모르게 빼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기에 억제대라는 것을 적용하게 된다. 물론 보호자에게 억제대 적용에 대한 사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받지만, 외관상 보기에 썩 좋아 보이는 모습은 아니다. 두 손과 두 발을 부드러운 천으 로 된 끈으로 묶게 되는데, 때론 과도한 적용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 다. 시간이 허락되는 경우는 간혹 환자 곁에서 잠시 억제대를 풀어 주고 손을 잡아 주기도 한다. 얼마나 답답할까……. 그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고 싶은 마음 에서다. 기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나, 고령 또는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 경우는 적극적인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정답은 없지만 많 은 아쉬움을 남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든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지 사회사업팀과 원무팀 담당자를 찾는다. 큰 비용은 아니지만 병원비 지원을 받게 되는 경우에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짐을 느낀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 환 자들은 재원 담당자에게 부탁을 해서 추후 이곳에서 퇴원 후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체계를 적극 이용하여 환자들을 도와주려고 간호사들과 함께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한다. 일을 하면서 보람 있는 또 한 가지는 의식이 있는 환자들이 중환자실에서 퇴실할 때 잘 돌봐 주어서 고맙다며 인사할 때이다. 이럴 때면 간호사들의 입 가에 미소가 번진다. 환자들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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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 밖에서도 나누는 사랑 힘든 3교대를 하면서도 한 달에 한 번 공릉사회복지관으로 도시락 나눔 봉 사를 2년간 이어오고 있다. 간호사와 함께 방문한 그곳은 생소하기도 하고 다 소 낯설기도 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많은 봉사자들로 가득했고, 그들의 얼굴엔 즐거움이 넘쳐났다. 역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이 행복한 게 맞 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참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오래간만에 뵙는 어르신들에게 밝은 표정들로 그간의 안무도 여쭤보고 가벼운 농담도 건넨다. 우리도 본격적인 봉사에 앞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듣고 바 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도시락을 싣고 인근에 있는 아파트 앞에 승합차를 멈추었다. 숙련된 팀 리더의 오더에 따라 동과 호수가 메모된 메모지를 들고 아파트 곳곳을 돌기 시작했다. 도시락을 전해 주고만 오는 것이 아니라 어제 배달된 빈 도시락도 함께 수거해야 한다. 때론 안에 혼자 머물고 있는 어르신 들의 인기척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고 돌아올 수 있었다. 또다시 차를 타고 복지관으로 돌아와서 수거된 도시락을 설거지했다. 세상 에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양의 도시락을 설거지해 본 일은 처음일 것이다. 뜨 거운 물로 하다 보니 얼굴은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마음만은 행복 했다. 설거지가 끝난 후에는 점심 식사를 하러 온 어르신들을 맞이했다. 거동 이 불편한 분들은 출구가 가까운 쪽으로 안내를 했고, 따뜻한 물 한 잔을 올린 후 식판에 밥과 국, 반찬들을 정성껏 담아 올려 드렸다. 식사하는 분들에게 다 가가 더 필요한 게 없는지 확인하고, 식사가 끝난 분들의 식판을 받아 뒷정리 를 해 주었다. 그 때 만난 나이 지긋한 어르신 한 분이 식사를 하다 말고 내게 이런 말씀을 하는 게 아닌가! “나 불쌍해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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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얼굴이 화끈해지면서 순간 내가 저분께 무슨 결례라도 한 게 없는지 생각했다. “어르신,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하자 어르신은 “응, 이런 데 와서 밥 얻어 먹으니까…….” 그래서 난 “별말씀을 다 하세요.”라고 하긴 했지만, 자꾸 신경 이 쓰이고 마음이 아팠다. 점차 독거 노인이 늘고 수명이 연장되면서 사회의 지원 체계가 탄탄하게 운영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가톨릭 의료기관에 근무하면서도 가톨릭 의료기관의 이념을 깊게 이해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소통의 창’ 강사를 하게 되면서 우리 가톨릭 의료기관의 이념과 핵심 가치를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작은 노력 들을 하고자 한다. 아직은 미약하고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그리스도 정신을 이 어갈 수 있도록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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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Plan Story 장려상
희망이 넘치는 병원, 서울성모병원 HOPER 서울성모병원 고객행복팀 박미주
고객행복팀에서는 전 교직원 대상 CS(Customer Satisfaction) 교육을 시행 합니다. 언젠가 교육 중 ‘오늘 하루 동료로부터, 혹은 환자들로부터 들은 기억 에 남는 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어느 부서 직원이 “하루 종 일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 그저 일만 했다.”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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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이렇게 아무런 소통 없이 지내는 이 공간이, 어떻게 마음까지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HOPER’의 탄생 고민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서로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공유하고 몇 명만이라도 먼저 시작한다면 나비 효과와 같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작은 날갯짓이 큰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고객행복팀에서는 ‘고객에게, 서로에게 희망이 되는 사람, HOPER’를 정립하여 모든 교직원들이 함께 실천하기로 하였습니다. ‘HOPER’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행하는 사람들을 지 칭하기도 합니다.
• H(Help) 업무 협조가 잘 되는 사람 • O(Obey feedback rules) 피드백을 잘하는 사람 • P(Positive communication) 긍정적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 • E(Experience) 긍정 경험을 제공하는 사람 • R(Respect) 상호 존중을 잘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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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HOPER 각각에는 우리 직원들이 매월 실천할 행동 지침을 담아, 포 스터를 제작하여 각 부서에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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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부서에서는 아래의 ‘Step’에 따라 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에 각 부서에서 총 260여 명이 HOPER로 선정되어 활동하며 HOPER 커뮤니티를 통해 약 430건의 활동에 대한 사례를 공유하였습니다.
5월의 HOPER 캠페인 5월은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를 시 작으로 HOPER 캠페인이 시작되었습 니다.
[HOPER 명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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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HOPER 활동을 시작하며 직원들은 ‘처음’이었기에 어려움은 있었지 만, 이 작은 활동을 통해 ‘사랑의 마음을 담아 심리 ․ 사회 ․ 영적 치유의 참 인 술을 펼치는 전인 치료’를 직접 몸으로 실천하는 발걸음을 떼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커뮤니티에 게시한 직원들의 활동 사례 일부입니다. “처음 HOPER 명찰을 받았을 때 이 작은 명찰의 무게는 엄청났습니다. 다 른 사람의 일을 살피기 전에 나의 일을 하기에 바빴기 때문에 인사하는 것도, 먼저 서로 도와주겠다고 선뜻 나서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초록색 명찰을 착용한 분들을 보며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힘이 되었고, 그 명찰만으 로도 서로 보며 웃게 되었습니다. 인사하려고 마음먹으니 밝은 얼굴을 지어야 가능했고, 도와주겠다고 마음먹으니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어떤 환자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베트남 전쟁에도 참가한 사람인데, 이곳(병동)에서 갇혀 지내는 시간 이 전쟁보다 더 힘들었어. 몸도 힘들었지만,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갇혀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 그래도 이렇게 생각해 주는 간호사님들이 있어서 그거 하나는 참 좋았네. 고마웠어요, 간호사님들.” 환자들이 저희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시는 것 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도움을 주고 나면 그 후에 더 크게 돌려받는다 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게 실질적인 도움이든, 마음이든……. 다른 부 서원들이 바쁠 때 도움을 주면 제가 바쁠 때 다시 도움을 받고, 서로서로 도움 을 주고 감사 인사를 받으면 뿌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과 ‘도움’의 개념이 혼동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결국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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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와 동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했다면 그 자체로 중요한 게 아닐까요? 아 직도 도움을 청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환자들이 있는 만큼 앞으로도 먼저 다가 가 손을 내미는 병동이 되도록 이끌겠습니다.
6월의 HOPER 캠페인 이어서 6월은 메르스로 인해 특히 모두 가 예민하고 불안해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래서 적절한 시기와 내용으로 피드백을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상대방의 시간 을 소중히 생각합니다.’라고 행동 강령을 정하고 함께 실천하였습니다. 병원을 방문하는 내원객의 수는 줄었지 만, 이 시기의 감정 상태를 고려하고 상대 방의 입장에서 그분들이 할애하는 시간에 대해 생각하며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입장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기 시간 안내를 위해 1~2 분 더 말씀드리면서 시간 내는 것을 어쩔 때는 참 하기 힘들다 생각하며 상대 방을 돌아보지 못하고 무한정 대기하게 했던 것 같아요. 조금 더 따뜻한 관심 을 갖고 설명하고 이해하는 직원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어요.” 각 부서에서는 내부 ․ 외부 고객들의 ‘시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며 귀를 기울이고, 구체적이고 빠른 피드백을 드리기 위해 노력했던 한 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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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HOPER 캠페인 7월에는 ‘긍정적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 이라는 행동 강령에 따라 실천하였습니다. 한 병동에서는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몇 가지 세웠는데, 첫 번째가 ‘부서원 간에 인사 시에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 주고받 기’였습니다. 특히 신입 직원들에게 따뜻 한 긍정의 말 한마디 더해 주기를 실천하 였습니다. “처음에 낯설게 인사하던 신규들이 시 간이 지나면서 안도감과 미소를 띠는 모습 을 보며, 또 이 낯설던 새로운 직장에서의 처음 제 모습을 생각하며 더 따뜻하게 대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실천 사항은 병동 재원 환자들에 대한 ‘공감과 긍정의 정서적 지지 해 주기’였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직원들은 “7월은 메르스로 인해 병동 재원 환자분들의 면회가 제한적이었습니다. 그 래서 더 정서적 지지가 필요한 상황이었죠. 지나가며 마주치는 환자분들에게 눈을 마주치며 인사하고, 긍정적인 말해주기를 하면서 ‘어디 불편한 곳은 없 으세요? 많이 힘드실 텐데 잘 버티고 계세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라는 지지 를 해 드렸습니다. 이 작은 말 한마디에 환자분들은 ‘그 HOPER가 친절한 사람들에게 주는 배 지 같은 거예요? 고마워요. 그 말을 들으니 더 힘이 나는 것 같고 조금 덜 불안 해지네요.’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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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PER란 이름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지만 힘이 난다는 말에 반대로 제가 더 힘이 나고 더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처음 HOPER를 시작할 때는 무거운 짐과 같았지만, 실천에 옮기다 보니 제가 일을 더욱 즐겁게 해 나갈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8월, 9월의 HOPER 캠페인 8월에는 ‘배려를 통해 긍정 경험을 나누겠습니다.’, 9월에는 ‘정확한 존칭과 호칭을 사용하겠습니다.’를 이어 실천하였습니다. HOPER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4,000여 명의 교직원 모두가 짧은 시간 안에 HOPER로 몰입할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도 한 발 한 발, 한 명의 직원에서 또 다른 직원으로 이어지며 한 해 한 해 성장하는 HOPER의 조직 문화가 스며들 어 환우와 직원 서로 간에 ‘희망’이 되기를 기도하며 2016년에도 이어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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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대상
25년 만에 찾은 희망의 길 부천성모병원 전진탁
저는 지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이 저를 어디까지 데리고 갈지 저는 모 릅니다. 살면서 많은 길을 걸어 보았지만 지금 제가 가고 있는 이 길, 그러니까 굉장히 낯설고 조금은 어색한 그런 길을 ‘희망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걷고 있으니까요. 거의 25년을 일반인이 걸어가는 길이 아닌 알코올 의존자의 길을 걸어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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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반년이 조금 넘게 걸어온 이 길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또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고 걷고 있습니다. 이 길만이 의지도 희망도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이 길 위에서라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이를 안주 삼아 술 에 빠져 있던 저에게 손을 내밀어 준 본당 빈첸시오 회장님의 손을 잡고 두려 운 마음으로 찾아간 곳이 부천 성모병원 사회사업팀이었습니다. 자포자기하 는 마음으로 상담하면서 사회사업팀 선생님께서 알코올의존치료센터 입원을 권유하셨지만 전 술을 마시지 않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술에 젖어 살아온 시 간이 훨씬 더 많았던 저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사회사업팀 선생님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저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의도 하지 않게 부천 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시작 은 불안하고 기대도 희망도 크지 않았지만, 그 아주 조그마한 희망의 발걸음 이 지금의 저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수도 없이 정신병원 폐쇄 병동 입 · 퇴원을 반복하면서 저는 스스로 인간 이기를 포기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저에게 일어났습니다. 사회사 업팀 선생님과 함께 방문한 알코올의존치료센터의 문을 여는 순간 따뜻하게 맞아 주시는 수녀님들과 동료 선생님들……, 그리고 우리만의 천국을 연상 하게 하는 센터의 분위기에 저는 그동안 ‘포기하고 살았던 인간’이라는 단어 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수녀님과의 짧은 면담 후 내일부터 나오라는 말씀에 아무 생각 없이 그러겠다고 말한 그 한마디 이후, 저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 겼습니다. 예전보다 말수도 많아지고 웃음도 많아지고 가족마저도 가까이하기 꺼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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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주위에서 인정받지 못 했던 제가 변했습니다. 그때의 그 한마디는 내 생애에서 가장 값어치 있고 내 입에서 나온 말 중에 가장 보석 같은 한마디 가 되었습니다. 무심코 방문한 부천성모병원 사회사업팀 선생님의 권유가 아 니었다면 저 스스로는 상상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사회사업팀 선생님을 만났을 때 저는 치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랜 음주 때문에 만성 치주염으로 대부분 치아가 부식되어 잇몸으로 겨우 죽 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몸 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 영양 상태가 좋지 않 아 한 걸음 떼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사회사업팀 선생님은 무엇보다 저의 건강 상태를 매우 걱정해 주셨습니다. 도움받을 방법을 찾아 주셨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치과 치료 를 받게 되어 틀니도 맞추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에게서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멀리 해외에서까지 모금에 참여해 주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 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다가온 커다란 변화와 축복의 삶의 빛이 지금까지의 제가 아닌 또 다른 나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세상을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사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살아가는 방법이 술과 정신병원과 여관뿐인 줄 알 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생기고, 명상을 하고, 사람들 과 즐겁게 대화하고,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과 어울려 점심을 먹고, 그리고 저 녁에 잠이 들기 전에 하루 일을 반성하면서 마무리하는 생활을 제가 하리라고 는 7개월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술로 인한 정신병원으로의 입 · 퇴원이 생활의 전 부였던 저에게 걸을 힘과 그리고 걷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부천성모병원 사회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89
사업팀 선생님들, 알코올의존치료센터의 수녀님들께 무엇으로 표현하며, 무 슨 말씀을 드려야 감사한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아직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매일 센터에 나와 나무를 가꾸고 센터 선생님들이 식사하신 후 빈 그릇을 닦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저는 지금 가는 이 길이 좋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무식하게 살아왔 는데 또 한 번 단주(斷酒)를 위해 무식하게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지금 걷는 이 길이 쉽지 않기에 여러 가지 배워가며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간의 익숙했던 삶의 태도를 바꾸려는 철저함도 있어야 하고 스스로 계획 한 작은 일들을 실천하려는 노력도 있어야 하며, 저 자신을 누구보다 더 잘 알 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잘 살펴보면서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야 한다 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교만과 나태함과 그리고 아직은 금단 증상까지 저를 찾아 괴롭히지 만, 너무 많은 것을 받았기에 그것들을 주신 하느님과 수녀님들, 사회사업팀 선생님들 그리고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오늘 이 하루도 힘차게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가는 이 길이 저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모르지만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길이 좋으니까요. 걷다가 힘들면 쉬었다 가고, 무언가 얻으 면 주위에 나눠주고, 무엇에 걸려 넘어지면 일어나서, 빠르지는 않지만 소중하 게 발견한 이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이렇게 성실하게 걷다 보면 저의 소중한 하루를 행복한 마음으로 보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저의 하루를 말입니다. 술로 지냈던 25년, 이제는 새로운 길을 향해 조심스레 한 발씩 내디디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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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이 길을 향해 응원해 주시는 많은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리면서 기쁘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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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우수상
첫발을 함께 내딛어 준 고마운 CMC 여의도성모병원 한수진
“우리 돈보스코는 정말 예쁠 거야, 그리고 제일 똑똑할 거야.” 우리는 아기의 이름보다 세례명을 먼저 지어 놓고 가족이 함께 기도하며 다 섯째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2015년 8월 17일. 그토록 보고 싶던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기를 보러 신 생아실에 내려갔을 때 주치의 선생님이 “확실한 건 아니지만, 우리 부부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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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많고 아기의 외관상 문제가 있어 보이니 염색체 검사를 해보는 게 좋겠 다.”라고 했습니다. 전날 저녁 남편이 핸드폰으로 아기의 모습을 찍어다 보여 주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꽤 나이가 든 영감이 눈을 꼭 감고 있는 것 같아 너무나 낯설어 순간 다운증후군이 아닌가 싶었지만, 정기 진찰 때 건강하다 했었기에 크게 괘념하진 않았습니다. 소아청소년과 교수님은 그동안의 연륜 으로 다운증후군일 것이라는 데 비중을 두고 그런 아이들에게 흔히 발생하는 증상들 위주로 여러 검사를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처음엔 우리 아기가 다운 증후군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의료진들에게 하나도 고 맙지 않았고 점점 화만 났었습니다. 교수님의 확신이 빗나가길 바랐었지요. 퇴원 후 심장 질환이 있던 아기는 2주 후 정기 진찰 때 몸무게도 줄어 있었 고 황달도 더 심해져 있었습니다. 같은 날 다운증후군 확진도 받게 되었습니 다. 아기가 우리의 죄를 대신 보속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아기가 앞으로 감당 해야 할 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났습니다. 하지만 내 아이가 다운증후군인 것이 내가 져야 할 십자가라면 불평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감사 함으로 받고 싶었습니다. 정상아이이길 바랐었지만, 막상 다운증후군 확진을 받게 되자 하느님께서 저에게 천사를 보내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고, 덕분에 예수님과 성모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기랑 떨어져야 하는 것, 아기를 안아 줄 수도 없고 아기에게 그 어 떤 터치도 해 줄 수 없는 거리에 아기를 놔두고 나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 무 이상하고 힘들었습니다. 이것에 비할 건 아니지만, 예수님을 무덤에 묻고 돌아가실 때의 성모님의 마음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묵상 하며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엔 아기의 심장에 작은 구멍이 하나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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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힐 수도 있다 했는데 다시 보니 방실 중격 결손(AVSD)과 판막에 이상이 있 어 병원을 옮겨 수술까지 하게 될 수 있다 했습니다. 아기에게 될수록 빨리 세 례를 주고 싶었습니다. 세례에 앞서 고해성사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원목 실로 신부님을 찾아갔는데 마침 출타 중이셔서 수녀님과 면담을 하게 되었습 니다. 그런데 얼마 후 수녀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병원 사회사업팀에 전화를 해보 시라면서. 정말 놀랐습니다. 내가 자책과 죄책감으로 눈물 흘리며 죄를 고백할 때 가끔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수녀님께선 내 생활의 고충까지 읽고 계셨구 나! 우리 아기가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하느님의 뜻을 찬미하고 감사를 드리고 그분의 뜻을 신뢰하려고 애쓰면서도 그 어린 것의 가슴을 열고 심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에 제 마음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가 있었고, 다운증후군 관련 책자에서 다운증후군 아이들에게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는 무서운 질병들에 대한 언급을 읽으며 너무 무섭고, 마음이 아프고…… 다 내 죄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아기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사람에게서 이렇게 많 은 눈물이 흐를 수 있나 싶을 만큼 눈물은 멈추는 것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습 니다. 그런데 수녀님과의 면담 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건강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더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기가 여의도성모병원을 퇴원하는 날 아침, 사회사업팀에서 연락을 주시고 생명의 고귀함에 대해 나누시고 “이제 시작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병원비를 계산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번 일로 병원을 오기 전에는 “이제 병원은 하나의 사업이고 의사도 장사꾼이야. 어쩔 수 없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몸 소 겪어 보진 않았지만, 병원은 인정이란 것은 통하지 않는, 그래서 가난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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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은 제대로 치료도 못 받는 곳인 줄 알았습니다. 자선 병원을 제외하고선 말 이죠. 그런데 병원비를 병원에서 해결하게 되다니요? 그 놀라운 일이 여의도와 서울성모병원 두 곳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대학병원의 의사에 대한 선입견이 무의식중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무척 권위적이고 불친절하고 냉정하고…… 등등. 그런데 CMC에서 만난 교수님들과 의료진은 저의 그런 잘못된 편견과 선입견을 완 전히 녹여 주셨습니다. 환우의 진료와 치료는 전문적으로 하시면서 환우나 그 가족을 대할 땐 너무나 친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이가 다운증후군이 된 것에 부모가 어떤 인자를 제공했는지에 대한 이런저런 자책 성 질문에 마치 인생의 선배 같은 모습으로, 때론 학부모의 모습으로 당신의 개인사까지 언급하시며 찬찬히 들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기까 지 하셨습니다. 또 수술을 위해 병원을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겨 첫 진료를 받던 날의 기억, 그 감동은 앞으로도 저 자신과 우리 아기를 위해 계속 상기하고 싶은 것입니 다. 교수님께서 아기의 가슴 상태를 보기 위해 진료대 위에 누워 있는 아기의 옷을 얼마나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로 펼치시는지……. 사람의 손 같지 않아 저는 숨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습니다. 교수님에 비하면 나는 그동안 내 아이들에게 얼마나 거칠었던가? 태어나서 제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에게서 도 볼 수 없던 모습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사람을 대하 듯, 마치 실제로 아기 예수님을 대하듯 너무도 찬찬히 진찰하시는 모습에 존 경심이 절로 솟아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두 병원에서 나는 잘한 게 하나도 없는데 혼나기는커녕 너무 좋은 선물을 받고 있는 것 같은 황송한 느낌을 얼마나 받았는지 모릅니다. 누군가에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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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한 집에서 애를 다섯을 낳고, 그것도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고 피하고 싶은 사실로 비춰질지 모르나 하느님께선 우리에게 CMC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와 고통을 함께하시는 예수님, 자비와 도움을 베 푸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을 만나는 엄청난 축복의 기회였습니다. 이 지면을 빌 려 그동안 수고하고 애써 주신 모든 교수님과 의료진, 후원자님들께 감사드리 고 모두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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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우수상
바담, 바야르마 엄마의 편지 부천성모병원 바담과 바야르마의 엄마
안녕하세요? 저는 바담, 바야르마의 엄마 통갈락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두 딸을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몽골에서 한국으로 와 두 딸에게 수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가족들에 게는 기적입니다. 몽골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두 딸이 수술을 할 수 있도록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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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분이 애써 주셨는데, 먼저 몽골 다르항시 톨가 의장님과 부천시의회 의장 님 덕분으로 한국의 부천성모병원에 와서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받을 수 있었 습니다. 어려서부터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두 딸들을 볼 때면 나의 잘못인 것 같 아 항상 마음이 아팠습니다. 몇 년 전 몽골에 왔던 독일 의사들이 수술을 해서 나을 수 있지만 수술 비용이 아주 비싸다고만 했습니다. 수술을 해 주고 싶었 지만, 게르에서 목축을 하며 지내는 저희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무작정 몽골 다르항시 의장님을 찾아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 고 사정을 했습니다. 마침 한국의 부천시 의장님이 저희 도시를 방문하였고, 톨가 의장님의 부탁 을 받은 부천시 의장님이 부천성모병원에 도움을 청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부 천성모병원에서는 흔쾌히 저희를 치료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두 딸 을 모두 말입니다! 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사전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처음 의뢰 드린 둘째 딸 바야르마뿐만 아니라 첫째 바담도 청각 장애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한 명이라 도 치료가 되면 좋겠다는 심정이었고, 두 명은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는데 부천성모병원에서는 두 명 모두가 치료가 필요한 상황을 알았는데 어떻게 한 명에게만 치료해 줄 수 있겠느냐며 두 딸을 모두 치료해 줄 테니 같이 한국으 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정말 큰 결정을 해 주신 부천성 모병원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저희는 1월 20일에 한국의 부천성모병원으로 와서 여러 검사를 거쳐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몽골에서 청력 검사를 해 보긴 하였지만 이렇게 자세한 검사를 받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검사를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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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왼쪽, 둘째는 오른쪽 청력이 10% 정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 니다. 그리곤 아주 좋은 보청기도 선물해 주셨습니다. 아이들이 보청기를 착용 하니 바로 뒤에서 이름을 부르면 뒤돌아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동안 아무 리 불러도 대답 없던 아이들인데……. 자기 이름을 듣고 뒤돌아봤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저는 그저 감사의 눈물만 흘릴 뿐이었습니다. 기대와 설렘도 있었지만, 막상 1월 22일 수술 날이 되니 마음이 힘들었습니 다. 둘째 딸 바야르마를 이른 아침에 수술실로 들여보내고 병실로 돌아오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고 오후 2시가 넘어 서야 수술이 끝났습니다. 연이어 첫째 딸 바담이 수술실로 들어가고 수술이 끝날 때까지 하루 종일 제 마음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병실로 돌아온 바야르마가 이야기하는 우리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조용히 하라고 하는 모습 을 보면서 또 한 번 기적의 순간을 맛보았습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벌써부터 몽골에서는 아이들이 들을 수 있느냐며 계속 연락이 오고 있습니 다. 우리 가족들에게는 이제 희망이 생겼습니다. 손짓과 몸짓으로 이야기하던 우리 모녀가 같이 웃으며 대화 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 몽골에 돌아가서 우리 딸들이 언어치료를 계속 받을 수 있도록 우리 가족들은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면 멀지않은 미래에 서재현 교수님께서 말씀 하신 것처럼 장애인 학교에 다니는 우리 딸들이 일반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딸들에게 수술을 잘해 주신 서재현 교수님과 옆에서 많은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 덕분에 기적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습니다. 비싼 수술을 두 딸이 모두 잘 받을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 부천시의회와 부 천성모병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을 통해 가능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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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2016년 1월 20일부터 29일까지 몽골 자매 바담, 바야마르 2명이 본원 이비인후과에 입원하여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받음. * 전체 치료비 약 1억여만 원 (국제 수가 기준)에 대해 외부 후원과 병원 자선 기금을 통해 전체 지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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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담의 감사 편지
안녕하세요? 저는 바담입니다. 인공와우 수술을 받으러 한국에 왔습니다. 그리고 수술 잘 받고 내일 몽골 에 돌아갑니다. 수술이 잘 되었고 몽골에 돌아가서 말하는 것을 배우고,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저를 도와주신 의장님과 수술해 주신 의사 선생님, 도와주신 병원의 모든 분들, 다른 분들에게도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커서 재봉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돈 많이 벌고 여행도 하면서 행 복하게 사는 것이 제 꿈입니다. 저와 제 동생을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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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장려상
70대 나이에 찾은 새 인생 서울성모병원 홍승민
저는 안양시에 거주하는 70대 초반의 노인입니다. 기초생활 수급권자이고 독거노인으로 주민 센터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외롭 고 쓸쓸한 저의 집을 한 번씩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이 있습니다. 바로 방문간 호사입니다. 간호사가 집에 오면 혈압과 혈당을 체크해 주고 식생활 문제, 건 강 상태 등을 관리해 줍니다. 정말로 감사하고 큰 의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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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월 서울성모병원에서 심장인공판막 수술을 하고 7일간 입원 치료 를 받고 퇴원한 지금은 집 가까이에 있는 안양 ○○병원에 다니면서 심장 이 상 유무를 검진하며 처방받은 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하면서 별 탈 없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수기를 쓰게 된 것은 제 형편으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크고 힘든 이 수술을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에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돈 한 푼 없는 제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 성공적인 수술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감격 과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제가 심장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3년여 전의 일이었습니다. 건강 검 진이나 감기 치료를 하기 위해 동네 내과 의원 몇 군데를 다녔는데, 가는 곳마 다 심장에 이상이 있으니 빨리 큰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안양 ○○병원 순환기 내과에서 진료를 받았습니다. 심 장의 승모관기형으로 피를 정상적으로 보내지 못해 방치를 하게 되면 위험할 수 있으니 빨리 수술을 해야 하며, 수술은 큰 병원에 가야 가능하다는 청천벽 력 같은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가슴이 미어지고 답답해지면서 절망감마저 드 는 것이었습니다. 초음파 검사비도 없는 저는 그래 죽으면 죽는 거지라는 생 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무거운 물건을 들지 못하거나 격한 동작을 할 수 없었지만, 숨이 차게 빠르게 걷거나 언덕과 계단을 오르는 것을 제외하고 는 별다른 증상이 없어 통증이 있을 때 진통제를 구입하여 먹으면서 그럭저럭 3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방문간호사가 혈당 검사를 해 보곤 혈당 수치가 410으로 매 우 위험하니 병원에 가 보자고 했습니다. 결국 ○○병원 내분비내과에서 당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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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분비내과 의사 선생님도 심장 상태가 좋지 않으니 순환기내과 진료를 꼭 봐야 한다면서 전화로 협진을 요청해 주시고는 순환기내과 과장님을 찾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장님은 저의 모든 진료 기 록을 살피시고는 3년 전과 똑같은 진단과 함께 수술을 권하셨습니다. 전 저의 형편으로는 수술을 못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과장님께서는 3차 병원에서 지 원금을 받아 수술이 가능한지 알아보겠다고 하시더니 며칠 후 서울성모병원 흉부외과 강준규 교수님께 진료 서류를 준비해서 찾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전 놀랍고 의아스러워 멍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말 될 수 있는 것일까? 돈 몇십만 원도 없는데…….
초음파 CD와 의뢰서, 진료 기록을 들고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1시간이 넘 는 거리의 서울성모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원이 어찌나 크고 깨끗하고 으리으 리한지 꼭 촌놈이 서울 온 것처럼 놀랍고 기가 죽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심 혈관센터를 물어물어 찾아가 40분을 기다려 강준규 교수님 앞에 죄인처럼 앉 아 인사를 건넸고, 교수님은 얼어 있는 저에게 편안한 얼굴로 입원과 수술 일 정을 잡아 주셨습니다. 큰 병원이라 그런지 교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신뢰가 느껴졌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분이 신처럼 보였습니다. 교수님의 안내로 사회사업팀 윤나리 상담사를 찾았습니다. 지나온 저의 과 거와 현재 형편에 대한 질문에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상담사의 친 절하고 따뜻한 말이 저로 하여금 모든 것을 털어놓게 해 주었습니다. 상담 내 내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저를 이끌어 주시어 감싸 주는 듯 따뜻한 엄마의 품처럼 푸근했습니다. 상담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절로 “주님, 감 사합니다. 제가 이런 큰 병원에 어떻게 오겠습니까? 절망만 하고 지내던 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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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입원 당일 몇 가지 물품을 챙겨 지인도 없이 혼자 병원에 도착하니 서글픈 마음에 결혼도 못하고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고는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수술하기 위해 필요한 보증인 2명은 다행히도 시골에 계신 누님과 친구가 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병실 침대에 누워 보니 겁도 나고 두려워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는데 천사의 얼굴로 나타난 간호사가 찾아오면서 검사가 시작되었습 니다. 이곳의 간호사님들은 미모만큼 마음도 예뻤습니다. 친절하고 일 처리도 전문가다워 몸을 맡겨도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도 깔끔하고 맛이 있어 수 급자가 아닌 귀한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는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수술 당일 겁먹고 있는 저를 편안함으로 인도하던 병원 직원분들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수술 후 눈을 뜨고 중환자실에 누워서 수술이 끝났구나, 죽지는 않았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가슴을 열어 심장을 수술하는데 의학 기 술이 얼마나 좋아졌으면 수술 여섯 시간 동안 그야말로 아무것도 몰랐고 모든 게 정지되어 감각도 생각도 없이 있었지만 이렇게 살아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 습니다. 이런 큰 수술은 처음이라 수술 후 관리가 서툰 저에게 간호사는 몇 번이 나 친절하게 교육시켜 주었습니다. 수술 3일 후 교수님께서 진료를 하시면서 “퇴원해도 되며 지속적인 약 복용과 운동을 한다면 건강하게 사실 수 있으니 염 려하지 마세요.”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가슴 한가운데 이렇게 큰 상처가 있는 데도 퇴원이 가능하다니……. 손가락에 찔린 가시도 통증도 그렇게나 아픈데, 이렇게 큰 상처가 통증도 없다니……, 큰 병원이라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강준규 교수님, 사회사업팀 윤나리 상담사님, 여러 간호사님들의 도움으로 이 큰 수술을 받고, 남들은 60대가 제2의 인생이라고 하지만 저는 70대에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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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운 인생을 시작하였습니다. 동굴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보이는 한 줄기 빛 이 길을 찾아 주듯, 나를 이끌어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 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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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장려상
가정방문간호 서비스에 감사하며 서울성모병원 탁용준
세상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는 이야기 중에서, 최고의 의료인을 표현할 때 ‘심의(心醫)’라고 이야기합니다. ‘심의’의 뜻을 찾아보면, ‘아픈 사람의 마 음을 편하게 하며 위로와 사랑으로 의술을 베푸는 의사’라고 쓰여 있습니다. 어디 의사뿐이겠습니까? 사랑을 베푸는 모든 의료인이 다 ‘심의’입니다. 저는 꽤 오래전, 그러니까 제 나이 29세에 수영장에서 다이빙 사고로 경추 4번, 5번 골절이라는 중상을 입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107
어 중증 장애인이 된 지 27년째인 사지 마비 장애인입니다. 당시 저는 결혼한 지 8개월 된 신혼이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오랜 시간 현대 의술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 옛날 처음 다쳤던 시기에 치료와 재활을 위하여 재활 병원에서 1년간 입원 치료를 하였습니다. 그 재활 병원에서 퇴원할 시기쯤 행하여지는 프로그램에 서 환자의 상태와 미래에 대한 의학적인 의견과 상태를 알려주는 패밀리미팅 이라는 것이 있었는데(당시 환자들은 자조 섞인 농담으로 사형 선고일이라고 하였음.), 이때 주치의와 물리 · 작업 치료사, 간호사, 사회사업실 등 여러 스태 프가 모인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나의 몸 상태에 대한 진단 발표에서 경추 손 상 전신 마비인 저의 남아 있는 수명, 즉 기대 여명이 향후 13년 정도 된다는 판정을 받았었는데, 세월이 흘러 벌써 그 두 배가 넘는 27년을 살았다는 생각 에 만감이 교차합니다. 의학적으로 사지 마비 판정을 받아 평생 휠체어로 이동을 해야 하며, 수동 휠체어를 탈 시에는 전혀 혼자 밀지 못하여 늘 보호자가 이동을 도왔으며, 우 리나라에 전동 휠체어가 수입된 후 현재는 전동 휠체어로 일상생활을 영위하 며 이동과 활동을 하는 상태입니다. 다친 후 초기에는 척수 손상 합병증인 배뇨, 배변 장애 때문에 방광염이 자 주 발생하여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병원에 가서 진료 예약을 하 고 또 기다림, 그리고 처방…… 등등 통원치료하기가 너무나 힘든 삶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우리나라 대학 병원에서 가정방문간호 서비스가 생기고, 정기적 으로 숙련된 간호사 선생님께서 집으로 방문하여 기본적으로는 혈압과 당뇨 등을 점검해 주시며 척수 손상 환자의 고질적인 문제인 욕창과 염증 등을 관 리해 주십니다. 척수 손상 후 발생하는 대표적 합병증인 욕창과 방광염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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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치료받는 것이 가족들과 환자 본인에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환우 와 가족에게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지 마비 장애 상태로 오랜 시간이 되어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늘 합병 증으로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저와 아내, 그리고 가족들을 괴롭힌 방 광염이 최대한 발생하지 않도록 몇 년 전에는 배꼽 밑 방광 위치 부분을 뚫는 도뇨관 삽입 수술(Suprapubic Indwelling Catheter)을 받았습니다. 예전 같으 면 정기적으로 대학 병원급인 큰 병원에 가서 여러 절차 등의 수속 후에 도뇨 관 교체 시술을 받아야 했지만, 가정방문 간호사 선생님께서 집을 방문할 수 있게 된 후에는 정기적인 폴리 카테터 교체와 욕창 합병증 치료 등으로 편리 한 의료 혜택을 받게 되어, 환자 본인과 돌보는 가족들의 삶의 질과 시간 모든 것이 편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돌봐주는 아내와 가족들이 조금이 나마 힘들지 않게 됨으로써 크게 기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사지 마비란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어깨 부분을 조금 움직일 수 있어 손목에 붓을 묶어서 그림 작업을 하고 있는 화가입니다. 다친 후부터 그 림 작업을 시작하여 현재는 30년 가까이 되는 경력으로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 동하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이 미술 작업을 마음 편히 하기까지는 가정방문 간호사 제도가 저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 글로써 다 표현할 수 없 습니다. 몸이 아픈 장애인으로서 본인의 괴로움과 가족의 수고와 마음 아픔이 집으로 방문하여 치료와 시술을 해 주시는 의료 혜택과 배려 덕분에 줄어드는 만큼, 그에 비례하여 집안에는 행복과 평강이 생겨납니다. 많은 병원과 의료인들에게 감사하지만 특히 몸이 불편한 장애인과 만성질 환 환우 분들을 치료하고 돌보아 주는 재활의학과와 가정의학과 모든 분들에 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또한, 가정방문 의료 활동을 시행하는 서울성모병원과,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109
가정방문 간호를 담당해 주는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잊을 수가 없습 니다. 가정방문 간호사 선생님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이제는 가족처럼 서 로 아픔을 걱정도 해 주고, 좋은 일에 함께 기뻐해 주는, 그 누구보다 다정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가정방문간호 서비스는 병원 입장에 서는 영리가 발생하는 부분이 아니지만 사회 봉사활동의 차원에서 약자들을 위하여 제공되는 서비스라고 알고 있습니다. 서울성모병원의 그리스도의 사 랑을 전하고 나누는 높은 뜻 안에서 헌신, 그리고 봉사로 활동하고 사역하는 모든 일에 주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가장 약한 존재인, 집에 누워 있는 와상 환자들과 장애 인들에게 은혜와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서울성모병원의 가정방문간호 서비스 에 여러 번 칭찬을 해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의 가정방문 간호 사 선생님께서는 방문 시 대문을 열고 들어오신 후 사랑이 담긴 목소리로 “이 집의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천사가 방문한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중증 장애인들은 욕창과 염증에 노출된 시간이 많을수록 급격한 사망 또는 몸이 힘들어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고, 또 겪어서 알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방문을 하여 적절한 시기에 점검과 치료를 해 주는 가정방문간호 서비스가 지속되기를 바라며, 천사의 병원인 서울성모병원과 가정방문 간호팀 권명숙 간호사 선생님께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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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장려상
살고픈 나누는 삶, 베푸는 삶 서울성모병원 김순자
저는 2014년 11월 3일, 12시간에 걸친 난소암 수술을 서울성모병원에서 받 았습니다. 증상을 못 느껴 배에 복수가 많이 찬 후에야 병원을 가게 되었는데, 난소암 3기라는 위험한 상태로 이미 간에도 두 군데나 전이가 되었다고 했습 니다. 그 후 항암 치료 아홉 번을 마치고 3개월 관해기를 두었고, CT와 피검사 에서 안 좋다고 다시 약을 바꾸어 4주에 한 번씩 2번의 항암 치료를 하던 중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111
종양 지수가 800으로 계속 올라가서 다시 CT를 찍었는데 간과 비장에 전이가 되어 또 수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수술로 간 두 군데 부분을 절제하고 비장, 담낭을 완전 절제하였으며, 췌장 20%, 횡경막, 대망, 임파선, 림프절을 잘라냈습니다. 1년에 개복 수술을 2번 이나 하였고, 항암 치료로 지친 몸과 장기 절제에 대한 합병증과 수술 후유증 의 우려 등으로 수술 부위의 아픔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해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래서 다른 병원에 가지 않고 성당과 성모님이 계시는 서울성모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신부님도 계시고 수녀님도 계 셔서 마음이 편안했고, 기도할 수 있어 좋고 기도 받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암 병동 산부인과는 마가렛 수녀님께서 병동도 교수님들과 함께 회진도 하시 고, 무엇보다 병원에 상주해 계셔서 더욱 좋았습니다. 뭔가 병동 간호사 데스 크는 안정감이 있고 친절했습니다. 퇴원하고 집에서 지내던 중에 신부님께서 병자 봉성체를 오셨습니다. 포이동성당 안에 있는 가정간호사 선생님을 보내 주신다고 했습니다. 서울성모병원의 가정간호 전문간호사로 포이동성당에 파 견되어 계시는 김정은 선생님을 만난 것은 저에게 더없는 행운이었습니다. 전 아이 셋을 혼자 키우고 있는 기초수급 대상자이면서 한 부모 가정의 가 장입니다. 24살, 23살의 대학생인 두 아들과 고 2가 된 딸아이와 함께 영구임 대아파트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수술하고 배를 쫙 펴지도 못하고 너무 힘들 때 선생님께서 방문하시어 수술 부위 소독도 해 주시고 혈압, 당뇨도 체크해 주시며 어찌나 자상하게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말씀을 해 주시는지 천사 같았습니다. 또 서울성모병원의 간호사 선생님들이 입고 있는 그린색 니트를 입고 계셨기 때문에 더욱 친근감이 들었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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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하고 외롭고 두렵기도 했던 마음이 백만 대군을 얻은 것처럼 편안하고 든든해졌습니다. 아이들은 다 학교 가고 아르바이트 가고 항상 혼자 있어 가 끔씩은 무섭기도 한데 선생님은 항상 제 손을 다정하게 잡아 주시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 주시고 나을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주십니다. 방문을 마치고 가시기 전에는 항상 기도로 마음의 평정을 찾아 주십니다. 바쁘실 텐데도 전화도 자주 걸어 근황도 체크해 주십니다. 수술 후, 항암 후 제 스스로 음식을 못 만들면 선생님께서 성당 봉사자분들께 부탁하셔서 여러 가 지 반찬을 만들어 배달도 해 주십니다. 한번은 진짜 냉장고에 먹을 반찬이 하 나도 없었는데 선생님께서 방문해 주시고 간 저녁에 성당 다니시는 분이 각종 나물 반찬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제가 항암으로 백혈구 수치가 자꾸 떨어지니 단백질을 먹어야 된다면서 닭발을 푹 고아서 가지고 오셨어요. 어떤 분에게 부탁해서 만들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정말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났습니 다. 친정엄마한테서도 한 번 못 얻어먹어 본 몸에 좋다는 음식을 선생님께서 수소문하셔서 만들어 오신 것입니다. 그냥 가정방문 간호하고 가시면 선생님 임무는 끝나실 거 같은데, 집에 오 시면 설거지도 해 주려고 하고 항암 차 입원하는 것도 늘 챙기십니다. 방문할 가정도 많고 병원에 교육도 받으러 다니시고 바쁘다고 하시지만, 그러나 항상 웃으면서 응대해 주십니다. 저를 위해 애써 주시는 훌륭한 의사, 간호사 선생님이 계신 서울성모병원과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아낌없는 관심과 나눔을 베풀어 주시는 포이동성당 구요비 욥 신부님, 성당 교우님들과 더불어 가정간호사 김정은 선생님이 계시 니까 암을 치료하고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서울성모병원은 저에겐 생명의 은인입니다. 처음 수술비 800만 원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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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금을 사회사업팀에서 지원해 주셨고 두 번째 수술비 330만 원도 다른 재단 과 연결하여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정간호 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셔서 의료 지원비 30만 원도 받았습니다. 감사하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 릅니다. 서울성모병원은 저에게 삶의 의지를 심어 주는 고맙고도 고마운 병원입니 다. 서울성모병원의 가정간호 제도는 정말 저같이 소외되고 외롭고 힘든 병과 싸워야 하는 환자 입장에서 정말, 정말 좋은 고마운 제도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죽으려야 죽을 수가 없습니다.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서울성모병원에 고개 숙여 감사드리고, 김정은 가정간호사 선생님 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이 계셔서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또한, 포이동성당 주임신부님 이하 여러 교우님들도 정말 고맙습니다. 꼭 병을 이겨내어 저 또한 제가 받은 것 이상으로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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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장려상
희망의 문을 열어 보세요 서울성모병원 황규희
어제와 오늘 MRI 촬영이 있었다. 오는 2월 15일 종양내과와 방사선과의 외 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딸 ○○이가 예전처럼 건강하기를 바라는 모든 분들 의 사랑하는 마음을 믿고 어떤 검사 결과가 나오더라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리라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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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6월, 콧물로 시작되어 코에 생긴 종양을 양성인 줄 알고 일부 만 떼어 조직 검사를 하니 횡문근육종이라는 암 판정이 나왔다. 종양 부위를 다시 수술을 해야만 했다. 급한 마음에 이곳저곳 암 치료 관련 전문가를 인터 넷으로 샅샅이 찾아보았다. 이비인후과 수술의 최고의 명의라는 김○○ 교수 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나는 언니가 다니는 병원의 소개로 서울성모병원 암 센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수술하기 위해 진행한 pet-ct 결과 양쪽 유방에 전이된 암세포가 너무 많아 유방 관련 수술을 할 수가 없어 종양내과 강진형 교수님의 항암 치료가 시작 되었다. 말 그대로 항암 치료 부작용은 무서울 정도로 아이를 망가뜨렸다. 머 리는 이틀 만에 모두 빠지고 온몸이 헐고 너무 아파 진통제를 달고 살아야만 했다. 진통제 과다 투여로 간호사님들의 걱정과 우려 속에서 6개월 동안 3차 의 항암 치료가 진행되었다. 그와 같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치료해 주신 강 교수님을 비롯한 의료진의 노고에 힘입어 우리 아이는 다행히 수술하지 않고 건강하게 퇴원할 수 있었다. 그 후 우리 아이는 이웃 환자들 사이에 치료에 성공한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그들에게 치료만 잘 받으면 살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우리 딸아이는 방송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훌륭한 PD가 되는 것 이 꿈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10kg을 감량하고, 영국 유학을 위한 준비로 경제적인 것을 해결하기 위해 1차 워킹을 하기로 했다. 토 익 준비를 하여 두 달 만에 800점 이상의 점수가 나왔다. 강 교수님은 우리 딸 아이를 대할 때마다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것이 어떤 치료제보다 좋은 치료 효과가 있다고 여겨 마음속으로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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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작년 7월 하느님은 우리 아이를 너무 사랑하신 것인 지, 워킹을 갈 수 없도록 또다시 아픔을 주셨다. 이번 검사에만 합격하면 영국 도 갈 수 있다 하셨는데 심장에 무려 6cm가 넘는 암 덩어리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무서운 암세포는 단 하나밖에 없는 딸의 생명마저 빼앗으려고 끈질기 게 쫓아왔다. 나는 하느님께 내 딸을 살려 달라 애원했다. 어떻게 살려야 할까……. 지난 번 치료 때 가족들의 지원을 모두 받아 더 이상 도움을 요청할 데도 없어 너무 나 막막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도 살릴 수가 없는 상황에서는 용기를 내야만 했다. 이곳저곳 도와줄 곳을 알아보았지만 그래도 개인 사업을 하는 조건 때문에 우리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지푸라 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마지막 찾아간 곳이 복지 회관이다. 그간 내가 봉 사해 왔던 복지 회관의 부장님이 서울성모병원 사회사업팀을 찾아가 상담해 보라고 했다. 서울성모병원 사회사업팀 희망의 문을 떨리는 심정으로 두드렸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힘껏 문을 열었다. 환한 웃음과 함께 나를 반겨 주시는 선생님들 을 보는 순간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많을 텐데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내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상담 선생님은 나를 상담실로 안내하였고, 곧 상담이 시작 되었다. 1차 횡문근육종인 암 치료에 이어 심장을 둘러싼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항암 치료와 수술, 방사선 등의 치료를 해야 한다는 상황 설명을 들 었다. 선생님께서는 현대 정몽구재단의 온드림 어린이 사업에 대해 설명해 주 시며 지원이 가능하다고, 입원 전까지 서류를 갖추어 제출하라고 하셨다. 나오 는 길에 만난 알고 지내던 수녀님께 온드림 어린이 희망의료지원 사업에 대해 말씀드리자 수녀님은 걱정스럽게 내가 여러 명의 어린이를 추천했지만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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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락되었으니 너무 기대는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다시 눈앞이 캄 캄했다. 다시 담당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다행히, “만 20세까지인데 성인은 별 로 없어 가능하다.”라고 하시며 빨리 서류를 준비해 오라고 하셨다. 서류를 준 비하는 과정에서도 어려워하는 나에게 친절하게 안내해 주신 담당 선생님의 배려로 서류를 잘 제출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입원을 하였고 감사하게도 정몽 구재단의 지원이 확정되어 치료가 시작되었다. 입원 첫날 회진 오신 종양내과 강진형 선생님은 나를 상담실로 불렀다. 의사 선생님들이 보호자를 부를 때는 가망 없을 때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기적적으로 살아서 퇴원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쉽지 않으니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또다시 눈앞이 캄캄했다. 항암 치료가 다시 시작되었다. 다행히 식사도 너무 잘하고 머리도 바로 안 빠지고 컨디션도 너무 좋은 것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몇 번이고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하루는 휠체어를 태우고 운동을 시키는데 벌떡 일어나더니 나보고 휠체어 에 앉아 보라는 것이다. 힘들게 간병하는 엄마를 위해 휠체어를 태워 준다는 것이다. 난 창피하기도 하고 아픈 아이가 잘못될까 몇 번이고 거절하였지만 아이는 기어이 날 휠체어에 태웠고,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들로부터 부러워하 는 눈길을 받으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백마보다 멋지고 비행기보다 더 빠른 휠 체어 여행을 하였다. 그때 카메라에 담긴 휠체어 태워 주는 아이와 나의 얼굴 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얼굴이었다. 2번의 항암 치료에 힘입어 수술이 가능할 정도로 암세포는 줄어들었고, 흉 부외과의 협진으로 수술에 들어갔다. 심장에 둘러싸인 암세포를 떼어내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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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술은 뼈를 자르고 가슴을 벌려야만 하는 아주 큰 수술이었다. 침착한 모 습으로 수술실에 들어가는 딸의 모습은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수술 후 수술방 간호사님은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많이 걸어야 한다고 하였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소리치는 딸아이를 부축하며 악착같이 걸음을 걷게 하는 간호사가 어느 순간 너무나 원망스러웠지만, 차츰 회복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힘들지만 함께 이겨내 주신 흉부외과 수술 간호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다. 방사선 치료 1달 후 CT 결과 방사선과, 종양내과, 흉부외과 주치의 선생님 들께서는 치료가 잘 되었다며 다음 진료 날짜를 예약해 주셨다. 우리 아이는 요즘 복지 회관에서 베이커리 수업을 하며 힐링하고 있다. 아이가 만든 빵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행복해했고, 그들을 바라보는 딸도 행복해했다. 모두의 행복함을 위해 사회사업팀 문을 열어 주신 현대 정몽구재단의 온드 림 어린이 사업 관계자 여러분과 서울성모병원 의료진을 비롯한 사회사업팀 실무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또 희망을 갖고 어렵게 투병하는 다른 환자들에게도 희망의 문은 열릴 것이라 확신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119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장려상
세 번의 소아 중환자실행을 이겨낸 의지 서울성모병원 윤재영
“이번에는 가망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가 병동으로 가려는 의지가 대단하더군요. 어린 게 스스로 병을 이겨내려는 굳은 의지 때문인지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어요. 조금만 더 힘을 내 봅시다.” 일주일간 자리를 비우고 돌아와 멍하니 9층 소아중환자실 휴게실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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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제게 담당 교수가 다가와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는 사실 이 수기를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쓰지 않으려 했습니다. 아 이의 생명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비인 내가 아 무것도 안 해서는 안 되겠다 싶더군요. 제 아이가 완쾌되었을 때 또 하나의 추 억거리를 만들어 줄 필요가 있어서입니다. 우리 아들은 반드시 나을 수 있기 때문이죠. 환자 본인도 낫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데 부모인 내가 뭐라도 해 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아이는 재생불량성 빈혈 환우입니다. 작년 6월 확진을 받았습니다. 어 려서부터 잦은 질병으로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했지만, 이 같은 병을 갖게 될 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첫 입원 날짜는 메르스가 한참 전국을 휩쓸던 6월 2일이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지는 몰라도 어린이 병동 1인실에서 약 한 달간 입원했습니다. 퇴원하 니 메르스는 어느 정도 소멸됐다는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최초 병원비는 약 250만 원이 산출됐습니다. 당시에는 11층 어린이 병동에 있어서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병이 혈액질환으로 여러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어느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상태였죠. 이후 열흘간 잠시 퇴원했다가 고열이 발생돼 다시 병원을 찾았는데, 생소하 고도 난감한 단어 ‘소아암 병동’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아이의 본격적인 투병 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재생불량성 빈혈 특성상 혈소판이 급속히 감소되는 관계로 바로 병동 격리 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면서 조혈모세포 공여자를 찾기에 급급했습니다. 검사 비용, 골수채취 비용 등 골수 이식에 필요한 비용이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마 침 친구 중에 서울아산병원에서 림프성 백혈병에 걸린 자신의 아이를 치료한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121
친구가 있어 그 친구를 통해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이란 곳을 알게 됐습니다. 백혈병어린이재단 심사 기준도 기준이지만 속히 이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되 는 상태가 우리 아이에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혈소판이 급격히 떨어지면 서 안구 흰자의 실핏줄에 출혈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출혈이 더 진행되 면 뇌출혈로 갈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겁니다. 심사 날짜는 한 달에 두 번밖에 없으니 초조해지기 시작하더군요. 아이의 상 태는 나빠지고 있고, 골수 공여자도 나타났는데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 나……. 그 고민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지옥행을 맛봤습니다. 다행히 이식 며칠 전 재단에서 심사가 났고, 공여자께서 이왕이면 서둘러 진행 하자는 제의를 해서 9월 22일 성공적으로 조혈모세포를 이식받게 됐습니다. 우리 아이와 저희 부부는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습니다. 이식만 받으면 곧 집 으로 갈 것을 기대했죠. 그런데, 그런데 이식 후부터가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식 후 열흘이 지나 피부에 숙주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하더군요. 그 정도 숙주 반응은 누구나 나타나는 거라 들어서 가벼이 여 기면서 코웃음을 쳤지요. 1인실을 나와 다인실로 옮긴 후부터 아이에게는 의 료진도 아무도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식편대숙주로 설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일명 장숙주라고 하더군요. 처음 에는 간단히 넘어갈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 도록 나아지지는 않고, 설사량은 많아지고, 출혈이 생기면서 고열이 시작됐습 니다. 황달 수치는 16을 넘어 손쓸 수 없는 28까지 오르고, 간 수치, 혈액 수치 모두가 최악으로 치닫게 됐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백혈병어린이재단에서 지원받은 이식비에 여유가 있어 치료비는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1월 어느 날 고열이 시작되더니 해열제를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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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열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결국, 경련이 발생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중환자 실로 옮기게 됐습니다. 중환자실로 옮기기 며칠 전 담당 교수가 아비인 제게 “황달이 20을 넘기면 손쓸 수 없습니다. 위험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 했던 기억이 순간 들더군요. 이것이 두 번째 지옥을 보게 된 것이죠. 우리 아이의 첫 번째 중환자실 생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첫날 자 식이 그 위독한 상태임에도 너무 피곤한 나머지 저와 아내는 휴게실에서 쪽잠 을 자고 있어서 몰랐는데, 아이에게 ‘코드블루’ 상황이 발생했다 하더군요. 아 마 저희 부부가 깨어 있었더라면 미치지 않았을까요. 그 고비를 넘겨서인지 약 열흘간 중환자실에서 회복을 보였고, 다시 병동으 로 오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며칠 후 새벽에 두 번째 경련을 일으켜 또다시 중환자실 신세를 지게 됩니다. 장숙주로 인한 복통, 고열, 그리고 설사 가 또 한 번의 위기를 아이에게 가져다 준 것이지요. 지옥도 단련이 됐을까요? 이쯤 되니 좀 무덤덤해지더군요. 두 번의 중환자실 치료는 예상치 못한 치료비 상승을 가져왔습니다. 백혈병 재단에서의 지원금은 모두 소진됐고, 이후의 치료비를 걱정하게 됐죠. 이때 병 원 내 사회사업가의 도움으로 소아암협회를 소개받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얼 마의 치료비를 후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병원비는 한시름 놓게 됐습니다. 두 번째 중환자실 치료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나흘이었죠. 좀 더 좋아진 상태로 병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약 한 달을 잘 지내나 싶었는데, 1월 마지막 월요일 새벽 복수가 예상치 못 하게 급격히 차오르더니 모든 장기를 누르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심장 박동수는 190을 넘나들고, 백혈구, 중성구 수치는 바닥을 치고, 혈액 내 염증 수치는 29를 찍더니 결국 세 번째 중환자실 행이 결정됐습니다.
자선활동 수혜자 수기 ∙ 123
하늘이 무너지더군요. ‘이제는 방법이 없는 건가!’ 하는 별의별 생각이 머릿 속에 가득 찼습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불안한 생각이 틈을 타기 시작하 더군요. 하늘에게 빌었습니다. 아비인 나를 데려가 달라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의 힘’, ‘말의 능력’. 네, 저는 이렇게 주문 을 되뇌었습니다. “우리 아이는 살 수 있다. 우리 아이는 나을 수 있다.”라 고……. 잠시라도 나쁜 생각이 침투하려고 하면 또 이렇게 주문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면회를 가서 아이에게도 알려줬습니다. “○○아, 너는 할 수 있어. 알지? 그러니까 ‘나는 나을 수 있다. 나는 살 수 있다.’를 하루에 세 번씩만 외 쳐 봐. 말의 힘이 너를 나을 수 있게 할 거야.”
제 아들은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도 위중한 상태이지만 어린 아 들은 살고자 하는 의지와 신념이 있어, 이렇게 담당 교수에게도 놀라움을 선 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 ○○이와 저희 가족에게 희망을 주십시오. 그리고 세 번째 중환 자실도 박차고 나갈 수 있도록 다 같이 기도와 염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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