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의 소책자 1호) 나는 날마다 나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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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우러 온 당신에게 1

아픔이 나에게 말해준 것들

나는 날마다 나아지고 있다 석창우 순진 기자영 이임선 장현갑 풀라 능행 김안나 김상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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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나아지고 있다 2012년 6월 20일 초판 1쇄 발행. 2012년 9월 17일 초판 2쇄 발행. 백천문화재단 발행. 석창우, 순진, 기자영, 이임선, 장현갑, 풀라, 능행, 김안나, 김상운이 쓰고, 도서출판 샨티가 기획 및 디자인, 제작 등 총괄 진행하였습니다. 표지 그림은 봄례가 그리고, 필름 출력은 한국커뮤니케이션, 인쇄는 영프린팅, 제본은 쌍용제책에서 하였습니다. 이 책에 대한 저작권은 백천문화재단(T.031-426-0337)과 도서출판 샨티(T.02-31436360)에 있으므로 원고 재사용 등에 관해서는 반드시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합니다. 이 책자를 여러 환우분들과 나누고 싶은 병원 및 단체는 백천문화재단으로 연락주시 기 바랍니다. * 이 책은 비매품이며, 백천문화재단의 기금과 여러분들의 후원금으로 만들어져 무료 배포됩 니다. 후원계좌: 국민은행 271201-04-152090 (예금주: 백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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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나아지고 있다 석창우, 순진, 기자영, 이임선, 장현갑, 풀라, 능행, 김안나, 김상운 지음

백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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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사랑을 배우러 온 당신에게’ 시리즈를 발간하면서

저희 백천문화재단에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 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소망한다”는 재단의 취지에 따라, 몸의 병으로 인해 자칫 마음의 행복과 평화마저 잃기 쉬운 환우들에게 사랑과 치유의 에너지가 담긴 책자를 구입해서 무료로 배포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올해부터는 ‘마음 치유’를 주내용으로 하는 책 자를 직접 기획, 제작하여 배포하기로 하고, 도서출판 샨 티의 도움을 받아 이 시리즈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비록 작은 책자이긴 하지만, 병으로 힘들어하는 환 우들이 이 책자를 통해 힘과 위안을 얻고, 그 가족들도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더없이 감사하고 기쁘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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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발간 및 무료 보급 사업은 계속됩니다. 저희 재단에서는 앞으로도 여러 방향에서 환우들에 게 도움이 될 ‘마음 치유’ 책들을 발간할 것입니다. 나 아가 저희 재단에서는 여력이 된다면, 병으로 인한 고 통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사회의 다양한 관계들 속에 서 빚어지는 갖가지 고통’을 해소하고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자를 발간할 계획입니다. 이 책자들의 발간과 배포 사업을 통해 저희 재단도 사 랑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아픔과 치유는 결코 그 한 사람의 일일 수 만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아프면 그를 사랑하는 사람 들도 아프고, 한 사람이 치유되면 그를 사랑하는 사람 들도 치유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 니다. 저희는 이 작은 책자가 그렇게 서로를 연결해 주 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마음 치유’ 책자 들이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질 수 있도록, 또 저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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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을 지속해 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내 주십시오. 그 마음이 모일 때 커다란 사랑의 에너지가 생겨나리라 믿습니다. 내 가족, 이웃의 아픔을 돌보려 는 사랑의 마음들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더 넓은 차원 으로 이어지고 연결되기를 소망합니다.

2012년 6월 백천문화재단 이사장 조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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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고통이 지나간 자리엔 언제나 꽃이 피고

오늘도 병실에 누워 혹은 집안에 갇혀 몸의 고통과, 그로 인한 마음의 고통까지 끌어안고 힘들어하는 사람 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가족이 병으로 고통받고 있어 함께 힘들어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 책은 병으로 인해 마음까지 힘들어지지 않기를 바 라는 마음으로, 병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긍정적인 마음 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픈 몸으로 마음의 평 화는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나아가 죽음에 대한 두 려움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하루하루를 어떤 마 음으로 지내면 좋을지와 같은 내용들을 담고자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병이나 아픔은 ‘메신저’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찾아온 병이 어떤 메시지를 안고 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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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잘 들여다볼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은 지난날 지녀왔던 몸 의 습관이나 생각의 습관, 마음의 습관을 돌아볼 기회 를 얻게 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모든 것의 속 도를 늦출 수밖에 없게 되니, 그로 인해 그간 의식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더 선명하게 깨어서 바 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예전에는 당연하 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새삼 감사한 마음을 지닐 수 도 있을 것이다. 마주하는 밥 한 끼, 온몸으로 느끼는 바람 한 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 앉고 걷는 간단한 동작에 대해서조차도 말이다. 아침이면 습관처럼 눈을 뜨고, 습관처럼 밥을 먹고, 습관처럼 사람을 만나고, 습관적으로 일을 해오다가 병으로 인해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 소 습관적으로 하던 것에서 깨어나 ‘진짜 삶’을 시작할 수도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을 찾아온 병을 외면하고 밀어내려고만 하지 말고, 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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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찾아온 진짜 이유가 무언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지금 당장은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처럼 절망스럽 고 누군가가 원망스러울지 몰라도 잘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그때 인생은 입을 열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해줄 수도 있다. 우리는 개인적인 안락함과 안전으로 성공 여부를 가 늠하는 반면, 우주는 우리가 ‘얼마나 배웠는지’에 따라 우리의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고 한다. 잃은 것에만 계 속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우리는 끝내 인생이, 진 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 나 마음을 열고 보면 날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발 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죽음 직전의 큰 고통 속에 놓여본 사람의 이야기도 있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20여 년 넘게 일하 면서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많은 이들을 배웅해 온 사람의 이야기도 있고, 몸과 마음의 병으로 인해 힘 들어하는 이들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해온 사람의 경험담도 있다. 몸과 마음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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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데이터를 통해 우리가 몸 이상의 존재임을 보 여주기도 하고, 우리 안에 있는 긍정의 힘, 웃음 혹은 평화와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힘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먼저 아파본 사람들, 아픈 사람들과 오랜 시간 더불 어 지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들은 병을 어떻게 맞이했고, 어떻게 화해했으며, 어떻게 떠나보 냈는지, 혹은 더불어 지내면서도 어떻게 자신의 존엄 성과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았는지 들어보자. 그들이 발견한 인생의 선물을 함께 나눠 갖자. 그리고 혹시라 도 당신이 지금 아프다면, 혹은 아픈 사람과 함께 있다 면, 그 아픔이 가져다준 메시지, 아픔 뒤에 숨어 있는 인생의 선물이 무엇인지 관심을 기울여보자. 이 세상 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속에는, 설령 너무나 가혹해 보 이는 그런 일일지라도 돌아보면 놀랍게도 항상 ‘뜻밖 의 선물’이 숨어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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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발간사  4 여는 글  7

1. 아프지만 괜찮아 언제나 ‘지금’에서 출발해야 한다  ● 석창우  14 아파도, 괜찮다  ● 순진  32 고통이 지나간 자리엔 언제나 꽃이 피고  ● 기자영  46

2. 나에겐 힘이 있어 웃음, 나를 치유하는 힘  ● 이임선   62 명상, 죽음에서 나를 살리다  ● 장현갑  78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이 다시 시작되다  ● 풀라  92

3.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배우러 온 거야 다리를 건너가는 사람들  ● 능행  114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  ● 김안나   130 우리는 몸보다 훨씬 큰 존재다  ● 김상운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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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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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지금’ 에서 출발해야 한다

석창우

갈고리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리는 의수 화가이 다. 평범한 전기 기사였던 그는 고압 전류에 감전되 어 두 팔과 두 개의 발가락을 잃었다. 열두 번의 수술 과 약물로 인한 온갖 후유증, 환상통 등을 겪고 있지 만, 그 고통에 다른 생각이나 감정을 덧입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덤덤히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어린 아들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서 볼펜으로 공 들여 참새를 그리고 난 뒤 자신에게 그림에 대한 소 질이 있음을 발견했고, 이후 밥 먹는 시간 외의 모든 시간을 그림 그리기에 열중한 결과 ‘수묵 크로키’라 는 독특한 분야를 만들어내게까지 되었다. 각종 서예 및 미술 공모전에서 수차례 입상하였고, 서른두 번의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한 미술 활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 ‘팔이 없어도 무엇인가를 하는 아빠’가| 되고 싶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일주일쯤 의식이 없는 상 태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양손이 손목 위까지 절단된 뒤였다. 머리뼈는 골절되고 뇌출 혈이 있어 수술한 뒤라 머리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 머리 수술은 여덟 시간이 넘게 진행되어 수술실 밖에 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애타게 했다고 한다. 내 나이 서른, 둘째 종인이가 태어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였다. 1984년 10월 29일의 일이다. 한 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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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전기 관리자였던 나는 일을 하다가 2만 2,900볼 트의 전기에 감전이 된 거였다. 병원에 있으면서 나는 양손을 팔꿈치 위로 한 번 더 절단하는 수술을 해야 했고, 감전되어 떨어질 때 다친 머리도 또 한 번 수술을 했다. 아내는 “다리는 멀쩡하 니 괜찮다. 요즘은 팔이 없어도 의수가 잘 발달되어 당 신 좋아하는 낚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의외로 담담 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담 당주치의는 내가 사망할 수 있다며 가족 중 한 명은 반 드시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고 한다. 중환자실 생활은 나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 져다주었다. 거의 대부분 인공호흡기를 달고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는 환자들 틈에서 나 홀로 깨어, 지 나온 세월을 돌아보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날은 두 다리가 멀 쩡한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전기를 관 리하다 보면 언제라도 감전 사고가 있을 수 있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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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2만 2,900볼트에 감전되면 죽을 확률이 무척 높은 사고였다. 그런데 다리까지 멀쩡해 걸어다닐 수도 있 다지 않은가. 중환자실에서는 바로 조금 전까지 의사 와 얘기하다가도 느닷없이 죽는 환자도 있고, 또 갑자 기 의사들이 모여들어 전기 충격기로 심장을 자극하는 중에 생을 마감하는 환자도 여럿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니 삶과 죽음 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 달 뒤, 중환자실에서 입원실로 옮겨졌다. 병실에 온 뒤로도 왼쪽 네 번째 발가락과 다섯 번째 발가락 절 단 수술을 비롯해 모두 열두 번의 수술을 해야 했다. 전기 감전으로 인해 3도 화상을 입은 왼쪽 겨드랑이는 새살이 돋아날 수 있게 매일 죽은 살을 핀셋으로 조금 씩 뜯어냈는데 피도 많이 났고 정말 힘들었다. 계속 뜯 다 보니 뼈까지 드러났고, 겨드랑이 신경을 건드렸는 지 너무 아파 내가 먼저 원한 적이 없던 진통제(통증이 심해 모르핀 같은 마약류 진통제를 맞아야 했다)를 그때는 몇

번이나 놓아달라고 했을 정도다. 입원한 지 4개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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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났을 때부터는 걸음마 연습도 다시 해야 했다. 그 후 불면증으로도 몇 달 고생을 했고, 약을 많이 먹어 얼굴에 지루성 피부염이 생겼는데 손이 없으니 가려워도 긁을 수가 없었다. 아내의 손을 빌려보았지 만 가려움증이 너무 심해 별 소용이 없었다. 나중엔 거 칠거칠한 병원의 벽에 얼굴을 비벼대기도 했다. 그러 나 얼굴에서 진물과 피만 나왔지 그 지독한 가려움증 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때는 정말 손이 없는 것이 한이 되었다. 그러나 이내 ‘사람이 있으면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의 정리를 하고 이 문제로 더 괴로워하 지 않기로 했다. 가려움증은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 는데(물론 당시 입원해 있을 때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이것 역시 내 일상 속에 나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 받아들 이고 나니 마음만은 편하다. 이렇게 일 년 반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을 했는 데, 혼자서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니 답답했다. 그리 고 병원에서처럼 아내도 더 이상 내게만 매달려 있을 수 없었다. 살림도 해야 하고 아이들도 돌봐야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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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내가 돌 지난 아들과 나 를 두고 잠깐 외출을 하게 되었다. 혼자 있다 보니 내 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 는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숨 쉬고 걸어다니고 말하 고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 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살 된 아들은 겨우 걸음마를 하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소파로 올라가더니 소파 뒤로 꼬꾸라져서 버둥거리며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나 내 가 팔이 없으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꺼내줄 줄 알았던 아빠가 구해주지 않으니까 아이는 더 소리 높 여 울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동물의 세계〉 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사자가 자기 새끼를 물어 옮기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나도 어미 사자처럼 아들 의 옷을 물어 들어 올리니 아들이 들려나왔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늘려가야겠다 고 생각했다. ‘양팔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빠’가 아니라 ‘팔이 없어도 무엇인가를 하는 아빠’가 되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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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처음에는 갈고리에 숟가락이나 포크를 끼워 밥 먹는 연습을 했다. 가족들 없이 혼자 집에 있을 때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고무줄 바지를 입고 화장실 갔다 오는 것도 혼자 있을 때 익혔고, 목이 마를 때 콜라 병 따는 것도 혼자 있을 때 익혔다. 어느 날은 맥주가 먹 고 싶어 두 발로 병을 붙들고 머리를 굴려가며 애를 썼 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찌어찌하여 병을 벽 모서 리에 두 발로 결박하고 겨우 뚜껑을 땄다. 이미 맥주는 미지근히 식어버렸지만 그 맛은 꿀맛이었다.

|| 온몸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들을 늘려가던 어느 날, 아들 종인이가 그림을 그려달라며 연습장과 펜을 가져왔다. 아들이 부탁을 하자 기분이 좋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 했다. 한나절 동안 공들여 참새 한 마리를 그렸다. 나 의 첫 작품인 셈이다. 이 그림을 본 처형이 손 있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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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다 더 잘 그린다면서 그림 배우기를 권했다. 아내 도 자기가 경제 활동을 할 테니 걱정 말고 그림을 배우 라 하여 화실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양손이 없으니 다들 가르치기 어렵다고 거절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여러 가지 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먹만 사용하는 사군자였는데, 마침 처제가 효봉 여태명 선생으로부터 서예를 배웠다면서 추천해 주었다. 그분 역시 힘들 거라고 하셨지만, “포기할 때까 지만 가르쳐달라”고 사정해서 서예를 시작하게 되었다. 붓대에 구멍을 뚫어 갈고리를 끼워 연습했다. 서예 학원에서 팔이 없는 사람이 서예를 한다고 하니 모두 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구경하곤 했는데, 처음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으나 한편으로는 그들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겠단 생각이 들었고,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그런 시선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덕에 지 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시연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해 낼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싶다. 나는 팔꿈치 위를 절단했기 때문에 손목 관절도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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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치 관절도 없어 그림을 그리려면 온몸을 써야 했다. 그러다 보니 서서 작업을 해야 했는데 하루 종일 허리 를 굽혀 습작을 하는 것이 힘들었는지 몸살에 코피까 지 터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모든 것을 할 수 없다”에 서 “할 수 있는 것도 있다”는 기쁨에 그런 것쯤은 문제 가 되지 않았다. 집에서는 죽을 뻔한 사람 살려놓았더 니 서예 하다가 죽으려 하냐며 그만하라고 했지만, 나 는 재미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몸살과 코피 쏟기를 자꾸 반복하다 보니 몸도 적응이 되고, 서예도 나름 자 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밥 먹는 것 외에는 연습에만 매달렸다. 아니 식사보 다 붓을 선택한 횟수가 훨씬 많았다. 의수의 갈고리에 포크를 끼우는 각도와 붓을 끼우는 각도가 각기 달라 매번 각도를 조절해 가며 끼워야 했다. 그 시간이 아까 워 언제 어디서든 붓을 끼우기 쉬운 각도로 의수의 갈 고리를 고정했다. 그 뒤로 식사는 늘 내 오른편에 앉은 사람에게 부탁했다. 나는 인터넷 카페를 운영중인데, 그곳에 ‘석창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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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기 전 알아야 할 상식들’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어 쩌다 팔이 없는 화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 과 함께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려두었다.

“…… 식사 때마다 갈고리의 각도를 조정해야 하는 불편이 있어 앞으로는 의수로 밥 먹는 것 포기하고 ‘내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내 손이다’라고 선언을 하 고, 지금까지 여러 손들이 잘 도와줘서 기분 좋게 이용 하고 있다. (중략) 양손이 없는 내가 의수로 그림을 그 리니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일상을 비롯해 모든 일을 다 나 혼자 처리하는 줄 알고 있다. 간혹 이 러한 사전 정보나 지식이 없는 분들은 당황하기도 한 다. (중략) 집 안에 있을 때는 전화가 오면 발로 잡아 전화 통화도 하고, 컴퓨터는 갈고리로 독수리 타법을 연마하여 이메일도 주고받고 블로그나 카페, 홈페이지 도 관리하며, 네이트온에서 채팅도 하고, 의수에 붓을 끼워 서예도 하고 그림도 그린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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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못하는 것을 살펴보면, 아침에 일어나면 옷을 나 혼자 못 입으며, 세수도 못하고, 밥도 혼자 못 먹고, 화장실 가서도 혼자 뒤처리를 못한다. 외출할 때 버스 는 이용하지 못하고(빠른 출발과 손잡이를 잡지 못해서), 지 하철도 예전 종이 티켓일 때는 의수로 잡아 개표를 했으 나 카드로 바뀌고 나서는 혼자 이용하지 못해 주로 택시 를 타거나 자원 봉사하시는 분들의 차량을 이용한다. 외출하면 핸드폰도 혼자 못 받았지만 최근에는 블루 투스를 구입하여 혼자 전화를 잘 받는다. 지갑에서 돈 도 못 빼내고 대부분의 승용차 문도 못 열고 못 닫는 다. 어떻게 된 것인지 밥 먹을 때 뜨거운 국물이나 매 운 것을 먹으면 콧물이 나오는데 이 역시 혼자 처리 못 해서 도우미가 처리해 줘야 한다. 외출을 하고 싶어도 옆에 사람이 없으면 옷을 못 입 어 나가지 못하고, 외출 후 돌아오면 옷을 벗겨줘야 혼 자 간단한 것이라도 할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으로 평상시 소변보기 편하게 아랫도리 속내의를 입지 않는 다. 그리고 평소 집안에서는 간소한 복장을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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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을 하려 해도 옷을 못 입어서 외출을 못한다. 심장병인 변이성 협심증이 오기 전에는 가끔 옷을 입혀주면 혼자 외출도 했지만, 지금은 협심증 증세가 나타날 때 내가 비상조치를 못하기에 꼭 도우미와 같 이 가라고 집사람이 명해서 그렇게 하도록 한다. 석창우와 식사 시간을 중심으로 약속했다가 약속을 파기하면 석창우는 그 식사를 혼자 못해 굶는다. 평소 혼자 있을 때는 내가 입으로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두지 만 누군가 올 사람이 있으면 준비를 하지 않기 때문이 다. 약속 어기기를 즐겨하는 분과 약속이 있을 때는 종 일 굶을 때도 있는데, 약속 잘 어기는 것을 알아도 ‘이 번에는 지키겠지’ 하고 기다리며 또 약속을 어겨도 그 냥 내 업이려니 하고 수용한다. 물론 집사람에게 확인 전화 오면 무조건 잘 먹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양팔 절단된 곳의 환상통 치료와, 약물 과 다로 인해 생긴 얼굴과 머리의 지루성 피부 가려움증 을 치료하고 있다. 얼굴에 가려움증을 치료하면서 팩 으로 마사지도 하는데 가려움증만 치료되는 것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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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얼굴 피부도 깨끗하게 좋아져서 고민이다. 수염을 기른 이유가 나이를 몇 살 더 많아 보이려고 한 것이다. 석창우에 대한 이러한 사정들을 이해하고 조우한다 면 서로가 많은 이해와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이상 끝.”

내가 세상에 나와서 활동을 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를 감추고서는 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 인지를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그 전에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 으면 안 된다.

||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하다 나는 계속해서 효봉 여태명 선생을 비롯해 김태정 선생, 김영자 선생 등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예술 이론 부터 누드 크로키까지 다양하게 공부를 했다. 누드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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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를 배울 때 나는 모델의 포즈에서 삼라만상을 보 았고, 이것을 서예에 도입하여 일필휘지로 작업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것이 지금 ‘수묵 크로 키’라고 불러주는 나만의 작업 스타일이 되었다. 먹물 에 붓을 적시고, 하얀 화선지 위에서 숨을 멈춘 찰나의 순간,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살아 꿈틀거리는 한 생명 체를 만든다. 나는 작업을 마치고 나면 마치 기氣가 빠 져 달아나버린 것처럼 흐물흐물해지는데, 그때의 기분 이 참 좋다. 내 안의 텅 빈 곳에 새 기운이 들어오기 전 의 어떤 편안함 같은 게 느껴져서이다. 나는 서예에 입문한 지 3년 만에 전북서예대전에 입 선하게 되었고, 대한민국현대서예대전 등에서 15회 입 선, 특선,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한번 불붙기 시작한 예술에 대한 열정은 나날이 더해져 갔 다. 개인전도 열게 되고,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내 작 품이 실리기도 했다. 그림을 시작하고 나서 이렇게 좋 은 일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2008년, 중국 베이징에 갔다가 새벽에 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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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일이 생겼다. 이제 죽는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모기 소리만 하게 “당신 없으면 못 살아” 하는 아내의 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심폐소 생술로 경우 의식을 되찾은 것이다. 변이성 협심증이 었다. 나중엔 C형 간염까지 생겨 일주일에 한 번씩 일 년간 인터페론 주사를 맞기도 했다. 이 주사의 후유증 으로 불면증, 입맛 감퇴에 화가 잘 나고 변비와 설사, 독감 유사 증세로 발열, 오한, 전신 근육통이 왔다. 백 혈구 감소로 면역력도 약해지고 빈혈에 가려움증, 전 신 탈모까지 생겼다. 한 사흘은 앓아누워 있고 한 사흘 은 또 아무렇지 않는 생활이 반복되었는데, 누워 있으 면서는 괜찮은 사흘 동안 뭘 할지 궁리하는 것이 재미 있었다. 그 중의 하나로, 인터페론 주사를 맞는 도중인 2010년 10월,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해 7미 터 20센티미터의 화선지에 아이돌그룹 멤버들을 그리 다가 너무 힘이 들어 포기할 뻔하기도 했다. 여러 고비들을 넘기고 온갖 병을 안고 살아가긴 하 지만,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해외 전시, 220여 회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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룹전, 81회의 시연을 하는 등 나는 오늘도 화선지 위에 서 춤을 추는 것만큼은 멈추지 않고 있다. “사고 이전의 30년보다 사고 후 삶이 더 재밌다”고 말하는 내게, 사람들은 그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어떻 게 그렇게 수월히 넘겼느냐고 종종 묻곤 한다. 나는 현 실의 어려움들을 자면서 꿈을 꾸는 동안 해소했던 것 같다. 현실에서는 팔이 없지만 꿈속에서는 팔이 있으 니까. 그런데 사고 후 12년 동안 줄곧 꿔왔던 꿈을, 화 선지에 나의 내면을 완전히 표현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꾸지 않게 되었다. 또 어린 내 아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이 단순한 생각을 즐겁게 했던 것도 어려움을 잘 이겨낼 수 있는 데 큰 몫을 했다. 무엇보다 가족들의 헌신적인 배려와 주변의 자원 봉사자들의 도움이 컸다. 돌이켜보면 고통에 다른 어떤 감정들을 덧대지 않았 던 것도 나에겐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팔이 없고 발가 락이 없다는 그 사실은 충분히 고통스럽고 불편한 일 이지만, 거기에 분노나 원망, 슬픔, 미안함 같은 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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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감정들을 덧대었다면 아마 나는 내 안에 갇혀 영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혹은 하지 않아 도 될 일과 끝내 포기해서는 안 될 일, 다른 사람들에 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는 방법 등에 대해 잘 생각 하고, 그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나를 좀 더 편안하게 살아가게 했다. 언젠가 효봉 선생이 “단점이 장점으로 승화하면 다 른 사람들이 못 따라온다. 남들처럼 손목이나 손가락 의 기교를 못 쓰니 마음에서 우러난 순수한 선이 나오 는 거다. 그게 완전히 장점이 되니까 이제는 아무도 쉽 게 못 따라온다. 다른 사람들이 팔을 잘라서 하지 않는 이상은 안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 말을 이해 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렇다. 처음에는 단점일 지 몰라도 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내 장점이 될 수 있다. 단점이 장점이 되면 그 힘은 몇십 배가 된다. 발가락 두 개가 없는 내 발도 단점이라면 단점이지 만, 난 그것을 내 작품의 완성을 뜻하는 낙관으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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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다. 의수를 쓰다 보니 낙관을 찍어본 적이 없어 그 점이 아쉬웠는데, 발가락 두 개 없는 발이야말로 누 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확실한 나만의 낙관이 아닌가. 엄지발가락에 다홍빛 패티큐어도 칠했는데, 내 나름 낙관을 예쁘게 장식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필요 없다. 언제나 지금 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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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도, 괜찮다

순진

순진順眞은 자신이 선생님으로 모시는 분이 ‘진실 을 따르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붙여주신 이름이고, 부모님께서 붙여주신 이름은 김수진이다. 20년이 넘 도록 원인을 알 수 없는 발목 통증에 시달렸지만, 돌 아보면 통증이 삶의 가장 큰 은총이자 선물이었고, 어쩌면 세상에 오기 전부터 통증이라는 도구로 삶을 배워나가겠다고 계획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적고 있 다. 대학에서 영화 만들기를 공부했고, 여러 해 동안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썼으며, 학교에서 아이들과 영화 수업을 해왔다. 인생의 마법과 기적을 믿고, 여 행과 이야기, 친구를 아주 좋아한다. 세상이 따뜻해 지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삶으로 빚어내는 꿈을 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산티아고 순례기를 적은《순 진한 걸음》이 있다.


|| 순진, 너는 이 다리가 부끄럽니? 나는 아홉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오 른쪽 발목에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을 앓고 있다. 한 방, 양방, 대체의학을 통틀어 온갖 검사를 해보아도 그 동안은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얼마 전에야 나는 최근 밝혀지고 있는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이라는 질환 이 내 증상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것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신체의 일부분 혹은 온몸에 극심한 통증이 지속되는 병인데, 뇌신경에 오류가 생 겨 우리 몸의 감각과 통증을 구분하지 못한 뇌가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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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통증’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어딘가에 살짝만 닿아도, 바람이 살갗을 스치기만 해도, 온도가 너무 높거나 낮아도, 스트레스를 받아도, 때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지러지는 통증이 찾아온 다. 진통제가 듣지 않는 경우도 많아 뜬눈으로 밤을 새 우는 일도 부지기수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병 의 원인을 알 수 없고 아픈 부위가 드러나 보이지도 않 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내 통증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마약성 진통제를 맞고도 통증을 감당 하지 못해 심장이 두 번이나 멎었지만 꾀병이라고 오 해받은 경우도 있었다. 맨정신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몸의 아픔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마음의 고통까지 홀로 겪어내야 하는 것이 이 병이었다. 어린 시절엔 이 통증이 내 삶과 마찬가지로 어른들 의 문제였지 내 문제가 아니었다. 내 삶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통증에 대해 서도 그랬다. 하지만 어느 날 이 통증이 온전히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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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며 나의 책임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왔다. 중학생이 되어 전학한 학교에서는 체육복이 반바지 였다. 통증 때문에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다니느라 내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에 비해 형편없이 가늘어져 있었고, 한창 예민한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치마나 반 바지를 입지 않았다. 체육 시간 전날 밤을 뜬눈으로 새 우며 나는 처음으로 내 통증과 한쪽이 더 가는 다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친구들이 놀리고 따돌 릴까봐 두려웠고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 었다. 그제야 나는 내 다리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 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순진, 너는 이 다리가 부끄럽니?” “응, 조금.”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친구들이 놀릴까봐. 남들이랑 다르잖아.” “친구들이 놀리면 그게 너에게 그렇게 큰일이야?” “…… 아니. 생각해 보니 별로 큰일은 아니야. 그 애 들은 이만큼 아파보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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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내일 친구들이 너를 놀리고 못살게 군다 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너희 눈엔 조금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 다리 덕 분에 나는 걸을 수 있고 서 있을 수도 있어. 너희가 뭐 라 하건 나한테는 소중한 다리야!’ 이렇게 당당하게 말 해줄래.” “그래, 좋아! 그럼 된 거야.” 다음날 나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반바지 체육복 차림으로 운동장에 나섰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은 한 쪽 다리가 가늘다는 것보다는 내 다리가 너무 하얗다 는 것에 더 놀라워했다. 누구도 나를 놀리지 않았다. 갑상선 항진증을 앓는 친구, 선천성 면역질환을 앓는 친구와 함께 체육 시간이면 늘 벤치를 지켜야 했지만, 우리는 금세 친해졌고 서로의 아픔을 배려하는 법도 알게 되었다. 이 일로 나는 삶에서 내가 감당하고 책 임져야 할 것에 대해 깊이 자각하게 되었고, 내 아픔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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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감한 영혼들 나의 통증은 또한 분노에 아주 민감했다. 화를 내면 심장과 배에서 점화된 커다란 불덩이가 척추를 타고 다리로 내려가 발목에서 ‘꽝!’ 하고 폭발했다. 화는 다 른 사람을 공격하기 전에 내 몸에 치명적인 발작을 일 으켰다. 분노가 통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무렵 나는 명상을 통해 이 문제의 해답을 찾아 보기로 했다. 하지만 걸핏하면 버럭대는 다혈질 가족 내력을 고스 란히 물려받은 나에게 분노를 다스리는 것은 결코 쉬 운 일이 아니었다. 강연을 듣고, 책을 읽고, 요가와 명 상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 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분노 의 대물림을 끊어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분 노하는 혈통 속에 태어나 일생 동안 분노하다가 다시 분노하는 자손을 남기고 어쩌면 이 끝없는 분노 속에 서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운명이 아닐까 하는 절망감 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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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누군가 나에게 내 통증이 ‘스티그마타stigmata(성흔)’이며

내가 조상들로부터 ‘선택받은 자손’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스티그마타란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 하던 당시의 상처가 누군가의 몸에 물리적으로 똑같 이 나타나는 것을 뜻하는 말이지만, 나는 이 말을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기로 결심한 사람의 상처를 뜻하는 비유로 이해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쩌면 나의 통증이 우리 가족 대 대로 이어 내려오는 상처와 고통과 분노를 내가 대신 앓기로 선택한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내가 정 말 이 상처와 분노의 대물림을 끝낼 수 있는 자손인지 도 몰랐다. 그리고 통증을 치유하기 위해 내가 했던 결 정과 행동들―느낌을 솔직하게 말하기, 내게 상처 준 가족을 이해하고 용서하기, 사랑한다고 말하기 등―이 가족 안에서 실제로 치유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 통증 을 치유하는 일로 나는 우리 가족의 과거와 현재와 미 래를 동시에 치유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확장하니 내 통증에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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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떤 부분을 정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 같 았다. 오랜 시간 암을 앓던 벗의 통증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그 고통이 그녀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나를 대신해서, 그녀의 가족들과 이 사회와 온 지구를 대신해 앓으면서 자신의 몸으로 이 모든 걸 정 화하고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통증은 이 모두를 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아 픈 사람들은 이런 역할을 자처한 용감한 영혼들인지도 몰랐다. 그러자 나는 내 통증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것이기도 하며,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것이 내게 그렇게까지 대단하고 심각한 문제는 아니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통증을 통해 나는 다른 아픈 사 람들과, 세상과,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고, 아픔 때문에 고립되었다는 느낌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오랜 실패와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연습 끝에 비로소 내 안에서 분노가 점화되는 순간과 그 분 노가 몸을 타고 움직여가는 길을 관찰할 힘이 생기자 놀랍게도 분노는 내가 바라보는 그 순간 사라졌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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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자 분노로 인해 통증이 생기는 일이 훨씬 줄었고, 동 시에 분노 자체가 줄어들면서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 다. 당연하게 화를 내는 대신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에 게 솔직하게 말하는 법을 배웠고, 누군가를 화나게 했 을 땐 곧장 미안하다고 말하고 잘못에 책임지는 법도 배웠다. 정색하고 화를 내는 것보단 한바탕 웃어넘기 는 것이 때로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 된다는 것도 알 게 되었다. 통증은 이처럼 나에게 아주 훌륭한 스승이자 좋은 지표였다.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받을 때, 과로할 때, 음식을 잘못 먹었거나 휴식이 충분하지 않을 때면 언 제나 통증이 ‘이제 너 자신을 돌봐야 해’ 하고 신호를 보내주었다. 그 신호를 무시할 때면 꼼짝없이 누워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친절하게 마련해 주기도 했다. 통 증을 몸이 나에게 보내주는 신호라고 받아들이기 시 작하자 통증에 대한 내 태도도 달라졌다. 벗어나야 하 고 없애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니 통증 이 올 때에도 한결 편안해지고 통증과 함께 지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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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연스러워졌다. 희한하게도 통증을 싫어하지 않게 된 이후에 통증이 훨씬 가벼워졌다. 참으로 묘한 순환 이었다. 몇 년 전 나는 이 통증과 함께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 고의 길’을 걸었다. 이 길을 걷는 동안 통증과 나는 많 은 대화를 나눴다. 내 안에는 아직도 통증으로 상징되 는 분노, 불만, 슬픔 따위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들 은 통증과 마찬가지로 벗어나야 하고 없애야 할 것들 이 아니라 내가 안아주어야 할 것들이었다. 나는 이 모 든 것들의 엄마였다. 이 모두는 내가 낳은 것들이었고, 내가 돌보고 사랑해 주어야 할 아이들이었다. 길을 걷는 동안 나는 날마다 울면서, 소리치면서, 때 로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면서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밝 은 데로 끄집어내 볕을 쬐어주었고 미안하다고, 용서 해 달라고, 고맙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순간 나는 통증뿐만 아니라 내 삶 전체를 끌어안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좋은 것은 움켜잡고 나쁜 것은 밀 쳐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삶’이라는 것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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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경험하기 위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더 나 아가 삶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 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떤 이름표를 붙이느 냐에 따라서 그것들은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 기도 하는 것이었다.

|| 통증, 나의 스승이자 아이,| 그리고 연인 얼마 전 문득 이 통증과 나도 언젠가 이별할 때가 오 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겹던 고3 시절이 그랬고, 뙤 약볕 아래 눈앞이 노래지도록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그랬듯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아름다움으로만 남 게 될 것이다. 이 삶에서 몸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 통 증과 함께 경험한 모든 것이 특별하고 소중한 추억으 로 변할 날이 어쩌면 내 짐작보다 멀지 않았는지도 모 른다. 그러자 그동안 내가 이 통증에게 잘해준 것이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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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고 나 자신을 존중하고 보살 피는 법을 가르쳐준 통증이 고맙긴 했지만 그것이 사 랑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온 존재 를 다해 이 통증을 사랑하는 실험을 해볼 때라는 생각 이 들었다.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함께 지내 는 동안만큼은 후회 없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통증을 끌어안고 볼을 부비며 반가운 연인을 맞이하듯 통증을 사랑해 보는 것도 멋진 경험이 될 것이다. 그동안 통증 은 나의 스승이면서 아이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통증 의 연인이 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나는 이제 통증이 내 삶의 가장 큰 은총이자 선물이 었다고 말할 수 있다. 통증이 없었더라면 나 자신에 대 한 수많은 것들과 나를 돌볼 수 있는 힘을, 그리고 내 삶과 세상에서 어둠이라 느껴지는 것까지 끌어안는 법 을 결코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아픔이 나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키가 크거나 손이 작 거나 안경을 쓰는 것처럼 하나의 특징에 불과한 것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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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픈 나를 안쓰럽게 여기고 사랑할수록 다른 사람의 아픈 구석도 밉지 않아 보이고 세상의 아픈 구 석도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아픔을 통해서 나는 나 를 알게 되고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고 세상을 향해 나 를 열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세상에 오기 전부터 통증 이라는 도구로 삶을 배워나가겠다고 계획한 것일지도 모른다. 통증은 내 삶의 초점을 저기 바깥 어딘가가 아 니라 내면으로 향하도록 안내해 주었다. 통증이 있어 서 약하고 아픈 사람들과 더 깊이 마음을 나눌 수 있었 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커다란 그림을 이루는 작은 퍼 즐 조각처럼 나를 이리로 데려오기 위한 과정은 아니 었을까? 내 삶엔 어둠뿐이라고 느껴지던 시절에 나는 평생 을 지병으로 힘들게 살았던 니체에게서 위안을 얻었 다. 그는 “아픔은 선택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암과 함께 지내면서도 사람이 얼마나 맑 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던 나의 벗은 통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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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올 때마다 이렇게 되뇌곤 했다. “이것 또한 지나가 리라.” 여전히 나에겐 통증이 있다. 하지만 이 통증도 언젠 가 끝이 난다. 그리고 나는 통증 때문에 불행하지 않기 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기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다. 통증이 있어도 나는 웃을 수 있었다. 통증이 있어도 나는 살아갈 수 있었다. 통증이 있어도 나는 괜 찮았다. 통증은 불운도 아니고 내 인생의 저주도 아니 었다. 내 삶은 통증으로 인해 잘못되지 않았다. 오히려 통증으로 인해 내 삶은 축복받았다고 나는 감히 말하 겠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내가 믿으면 그것이 바 로 진실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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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지나간 자리엔 언제나 꽃이 피고

기자영

1990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후 6년 동안 개원의로 지냈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마음 공부의 길로 들어섰다. 2000년 암 진단을 받고 한쪽 골반과 다리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 뒤로 진 도 귀성마을에서 살면서 명상 공동체를 위한 ‘자연의 집’을 짓고, 인터넷 다음Daum에 카페를 열어 많은 사 람들과 성장의 즐거움을 나누기도 했으며, 자신의 일 기를 모아《내 인생의 좋은 날》이라는 책을 펴내기 도 했다. 그러나 책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을 벗고 진정한 자유의 상태가 되었다. 이 글은 그가 쓴 《내 인생의 좋은 날》에서 옮겨온 것이다.


||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행복하다니!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한 뒤 서울에서 진도로 와 산 것이 벌써 9년이 되어간다. 그 시간이 찰나 같기 도 하고 수십 년, 아니 수백 년같이 아득하게 느껴지기 도 한다. 그동안 내 몸은 죽음의 고비를 두 번 넘어왔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머리만 살아있어도 돼”라며 일어나 주기를 청했다. 몸의 기능은 조금씩 약해졌지만, 그래 도 세상에 남아 만나고, 나누며, 사랑할 수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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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그러한 소망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암 진단을 받기 전, 나는 미국에 있었다. 그곳에 있 으면서 나는 암 환자들을 여럿 만났다. 그들과 대화하 고, 몸을 마사지해 주고, 운동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에게 나는 진정으로 도움이 되 어드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이 겪는 고통이 무엇 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그 고통을 나눌 수 있 다면 좋겠다는 기도를 자주 올리곤 했다. 어쩌면 그 기 도가 이루어진 것일까? 어느덧 나는, 알 수 없었던 그 들의 구체적인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 과 나는 하나가 된 것이다. 그것에 감사하다. 말기 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종양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다. 큰 근육과 신경이 지나는 곳 이다 보니 통증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몸은 야위어 뼈와 가죽만 남아 앙상해졌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 니 낮에 누워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누워서 커다 란 유리창을 가득 채운 하늘을 바라보며 지냈다.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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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투명하고, 구름은 시시각각 다른 모양의 그림을 그 려주었다. 그렇게 누워 구름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했 다. 그렇다, 행복했다! 문득 놀라웠다. 내가 행복하다니! 많은 일들을 계획 하고 진행하고 성취하고 실망하고 다시 시작하는 일련 의 과정을 겪는 동안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손을 놓고 지내는 지금 행복하다 니.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존재는 그대로가 행복이었다. 전이된 종양으로 인해 골반의 절반을 쪼개어낸 후, 다리가 한 쪽뿐인 내 몸은 활동 영역이 매우 좁아졌다.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졌다. 대신에 불필 요한 움직임이 줄어든 것 같다. 덕분에 많은 것을 놓게 되었고, 마음은 고요해졌다. 몸에는 갖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때로는 편안했다가 도 때로는 매우 아프고 약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때마 다 배움을 얻게 된다. 이제는 몸에 극심한 변화가 있을 때, 그 뒤에 어떤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즐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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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마저 하게 된다. 바람에 한껏 몸을 맡기고 춤추는 나무처럼, 모든 상황과 흐름에 심신을 맡긴다.

|| 초라한 얼굴, 지루한 일상 뒤에| 숨어 있는 사랑 치료를 위해 진도를 떠나 서울로 향할 때는 일주일 정도 지내다가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언제나 그 렇듯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삼 주를 지내고 진도로 돌아가려던 참에 나는 발을 헛디뎌서 심하게 넘어지고 말았다. 며칠 동안 조심해서 거의 다 나았다 싶었는데, 다시 한 번 넘어져서 허리를 가누기가 어려워졌다. 그 리하여 지난 9년간 늘 함께 붙어 다니며 나를 돌보아 주었던 고모와 나는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모는 내 고향집인 청주에 나를 바래다주고 혼자서 진도로 갔다. 진도 집엔 많은 일들이 고모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집 주변에 우거진 풀들과 주렁주렁 달려 있을 콩들, 쌓여 있을 먼지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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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요양소에 계시는 친척 할머니 한 분이 마음으 로 간절히 고모를 부르고 있었다. 나에겐 청주에서 어머니와 동생 부부, 조카들과 함 께 지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긴 셈이다. 하지만 고 모가 곁에 없으니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친 허리 때문에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느라, 몸은 더욱 굳어지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데, 내 몸의 형편을 잘 아는 사 람이 없는데다가 온 가족이 저마다 분주하니 마사지를 부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몸이 아파서 견디기 힘들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내 몸에 손을 얹고는 한 숨을 쉬셨다. 좀 만져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어머니는 그저 만지작거리시며 혀를 차고 계실 뿐이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야속했다. 그러자 통증은 더욱더 심해지 고, 급기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아이처럼 엉엉 울고 나자 오히려 몸도 마음도 맑아진 느낌이 들었다. 옆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는 엉거주춤 일어나며 밭은 기침을 하셨다. 그런데 그 기침소리가 범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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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어디 아프세요?” 하는 내 물음에, 어머니는 얼마 전에 뒤로 넘어졌다고, 병원에서 검사를 해본 결과 별 다른 이상은 없는데 왜 이리 가슴팍이 아픈지 모르겠 다고 털어놓으시는 거였다.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 느냐며 나는 어머니의 가슴을 여기저기 눌러보았다. 가슴 한가운데와 늑골 몇 군데를 눌렀을 때, 어머니는 소스라치며 아파하셨다. 나는 파동 검사기를 어머니의 손목과 발목에 연결하 고 서둘러 검사를 해보았다. 그렇게 극성을 부리던 내 몸의 통증은 어느 새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어 머니의 몸을 검사해 본 결과, 역시 늑골과 늑막의 통증 이 심했다. 파동기를 작동시켜 놓고는 바로 눕지도 못 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누우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런 몸을 가지고 밥상을 차려 들고 왔다 갔다 하셨구 나, 그런 통증을 참으시며 자잘한 심부름을 다 해주셨 구나, 내 몸을 힘주어 마사지해 주지 못해서 한숨을 내 쉬고 계셨구나, 하는 생각이 주르륵 지나갔다. 내 손은 어느덧 어머니의 가슴팍을 쓰다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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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와 원망이라는 장막에 가려져 있던 내 사랑이 얼굴을 맑게 내밀고 나와 어머니의 사랑을 맞이하고 있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서울에서 지내던 지난 한 달 동안 고모와 있었던 일 들이 떠올랐다. 그때 고모는 많은 시간 침울해 있었다. 그런 고모를 볼 때마다 내 마음도 어두워졌다. 고모는 점점 더 많은 일들을 잊어버렸고, 피곤해했고, 표정도 침울했다. 무엇보다도 나를 바라보는 눈길과 나를 도 와주는 태도가 싸늘했다. 나는 되도록 부탁을 적게 하 려 했고, 한편으로는 고모가 자유롭게 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 방도가 없을까 하고 궁리했다. 때때로 슬픔과 외로움으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고모는 나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모든 것을 고모가 다 해줄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혼자 하려고 애쓰는지, 그러면 고모가 네 곁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혼자서 다 해보아라 하는 마음 으로 점차 도와주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 말 뜻밖의 이야기였다. 고모의 속마음은 내가 짐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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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모는 나를 오해하고 있었다. 불편한 몸으 로 자주 화장실에 가고, 한번 들어가면 일을 다 마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 나 를 고모는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누워서 용변을 보아 도 고모가 잘 치워줄 수 있는데, 지나치게 무리를 하며 유난스럽게 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고모 에게 내 몸의 사정을 말해주었다. 수술로 골반 반쪽이 없어지는 바람에 내 몸의 구조 는 상당히 많이 달라졌고, 괄약근은 그 기능을 점차로 잃게 되었다. 그래서 똑바로 앉은 자세로 용변을 보아 야 하고, 물로 부드럽게 씻어야 상처가 덧나지 않는다. 그것은 척추에 무리가 가는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는 일이다. 내 설명을 들은 고모는 그것으로 오해를 풀고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품었던 오해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러고 보니 고모에게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 고 싶은 마음이, 내게는 고모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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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에도 우린 서 로의 사랑을 마주보고 있었다. 늘 이런 식이다. 그리고 돌아보면 오래 전부터, 아니 인생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놀이를 반복해 왔던 것 이다. 사랑은 매일 만나는 초라한 얼굴들과 지루한 일상 뒤에 감쪽같이 숨어 있었고, 그래도 늘 숨어 있는 사랑을 찾아내곤 했는데, 인생이 바로 사랑의 숨바꼭질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 고통이 지나간 자리엔| 언제나 꽃이 피고 삶은 무엇이며, 왜 사는 것일까라는 풀리지 않는 물 음을 껴안고 있었던 어린 시절부터, 이상과 현실의 괴 리에 갈등하고 힘겨워하던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내 눈 은 외부 세상을 향해 있었고, 늘 비판하고 분노했다. 어지러운 이십대를 지나 삼십대에 접어들면서, 내가 가진 비판의 눈이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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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었고, 오히려 내가 나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었다 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식하게 되었다. 열심히 살긴 살 았는데, 치열하게 고민도 했는데, 막상 나는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또한 내가 어떤 존재인 지도 몰랐다. 그러한 인식을 하게 되면서 나는 나 자신 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요함 속에서 ‘텅 비어 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돌아가 쉴 곳이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이나 고뇌 가 끝나지는 않았다. 여전히 자유와 평화는 멀었다. 그 곳이 끝은 아닌데, 어떻게 해야 더 나아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버렸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 그것은 오히려 내 앞에 나타난 새로운 문이요 희망이었다. 육체는 내가 아님을 이미 자각했고, 육체의 죽음이 새로운 탄생임을 알았어도, 몸이 점차 기울어가고 죽음을 지척에 두고 있다고 여 겨졌을 때의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곳에서 만난 두려움을 나는 대면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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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그러나 똑같은 두려움을 안고 있던 환우들을 만나고 서로를 격려하다 보니 어느덧 마음은 기쁨으로 환해졌다. 벗들은 의연했다. 너무도 의젓하게 잘 준비 하고 다른 차원으로 건너간 벗들은 한 사람씩 차례로 내 마음으로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되었다. 죽음이 내 안 으로 들어와 평안하고 다정한 삶이 되었다. 두려움은 나도 모르는 새에 사라져갔다. 새로운 길은 홀로 가는 길이 아니라 함께 걷는 길이었다. 몸이 아프고 불편해지면서 그런 상태로 마음 공부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도처에서 명상을 위해서는 건강한 육체가 기본 조건이라고 말하고 있었 다. 그래서 똑바로 앉을 수 없고, 심지어 똑바로 누울 수도 없으며, 자주 통증이 찾아오는 상황에서도 명상 을 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세웠는데, 그것은 주어 지는 상황은 무엇이든 적극 받아들이되, 거기에 판단 을 덧붙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 원칙은 아주 유효한 것이어서, 통증이 왔을 때에는 오직 순간의 통증만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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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면 되었고, 그것이 내 마음의 밑바닥까지 흔들어놓 지는 못했다. 통증을 느끼는 순간에도 그것이 곧 지나 갈 것이라는 생각이 햇살처럼 틈을 비집고 들어와 비 춰주곤 했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것은 지나갔다. 그러 고 나면 폭풍우 지난 후의 평화를 느낄 수가 있었다. 상황은 늘 예기치 않게 찾아왔으므로, 나는 어떤 것 도 계획하거나 맘대로 만들어낼 수 없었다. 다만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느 순간 나는 내 자신이 가장 낮은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 러자 벗들의 친절과 기도와 헌신이 낮은 데로 흘러와 서 나를 이루는 생명이 되었다. 매 순간 그것을 경험하 고 목격했다. 모든 것이 와서 내가 되었기에 나는 모든 것이 되었다.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어지는 모든 상황 자체가 마음 공부를 위한 조건 임도 알게 되었다. 특별한 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 고, 특별한 스승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인생 에서 주어지는 모든 조건들을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마음의 눈으로 응시하면, 그것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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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라는 선물을 살포시 내놓는다. 내 마음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그 눈이 바로 참된 나의 스승인 것이다. 지독한 통증과 함께한 나날들 속에 어찌 평정함만 있었을까? 하지만 지난 일기들을 살펴보니 그 속에는 잔잔한 즐거움과 평화, 통찰과 기쁨이 드러나 있었다. 고통이라는 뿌리와 줄기에서 피어난 꽃봉오리였다. 고 통은 항상 지나가는 것이었고, 그것이 지나간 자리엔 언제나 꽃이 피었다. 나의 눈은 어느덧 작은 자아에서 빠져나와 모든 자 아들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나의 눈으로 보기에 이 작은 자아는 창가에 놓아둔 화분에 심긴 아주 작은 들 꽃이다. 지나가는 새와 벌과 나비와 구름과 바람, 아이 들과 어른들이 들꽃을 들여다본다. 들꽃은 그들의 눈 속에서 자기의 모습을 본다. 그들은 들꽃을 보며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는 참된 자아를 느낀다. 찾았다! 그것 은 사랑이다. 한때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꿈꾸었던 작은 자아는 어쩐 일인지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충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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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힘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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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나를 치유하는 힘

이임선

서울대학교병원 간호사이자 웃음 임상 치료사이 다. 그 자신이 교통사고 후 우울증으로 2박 3일의 짧 은 웃음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웃음의 재발견으로 그의 삶이 달라졌다. 그 소중한 경험을 함께하고 싶 어 웃음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임상 경험을 쌓았다. 2005년, 유방암 환자 8명과 함께 처음 시작된 서울 대 웃음치료교실은 이듬해 웃음 클리닉으로 개설되 었다. 웃음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와 폭넓은 임상 경 험을 가지고 있는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 고의 웃음 치료사이다. KBS〈생로병사의 비밀〉, EBS 〈다큐 맞수〉,〈김미화의 U〉등 인기 프로그램에서 웃 음 치료를 소개하였고, 서울대, 건국대, 명지대, 각 지 역 보건소 등에서 환자와 학생, 일반인을 대상으로 활발한 강의를 하고 있다. 지은 책에《웃음, 나를 치 유하는 힘》이 있다.


|| 웃음 치료를 만나다 내가 웃음 치료를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인 2004년이었다. 2월 어느 날, 싸락눈이 내리긴 했으나 개 운산 뒷길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운전에는 별 어 려움이 없었다. 별 탈 없이 산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는 데, 15톤 트럭이 내 차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만 들 이받고 말았다. 15톤 트럭에 깔리는 대형 사고였다. 천만다행으로 머리에 피가 나거나 다리의 살점이 떨 어져나가거나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 이 후 알 수 없는 허리 통증과 목 통증이 지속되었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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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 견딜 수 없는 것은 신발을 신을 때나 스타킹을 신을 때 고개를 숙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찌릿찌릿한 손발 저림이었다. CT나 MRI에도 나타나지 않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진단명은 결국 골병에 가까운 신경병으로 처리되었다. 정신과를 제외한 여러 과를 다녔지만 경 과엔 차도가 없었고, 서서히 삶이 지치고 직장 생활도 힘들어지고 있었다. 평소 늘 건강했기에 간호사로 일하면서도 몸이 불편 한 사람들의 고통을 제대로 헤아려주지 못했던 나 자 신을 비로소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교통사고 이후 에 내가 잃어버린 것이 ‘웃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 다. 내 표정이 앞에 앉아 있는 수많은 암환자의 얼굴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다. 몸이 아프거나 고민거 리가 있어서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가장 먼저 사라지 는 것이 웃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어떻게 해서라도 웃음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해 7월 말, 웃음 치료 연수 과정에 등록해 1박 2일 동안 억지로 웃고 오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웃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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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어색하고 웃음에도 돈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쓴 웃음이 나왔지만, 의도된 웃음을 따라 밤새워 웃고 나 니 놀랍게도 허리 통증, 특히 목 부위의 통증이 덜 느 껴졌다. 강직성 척수염을 앓았던 노먼 커즌즈의 말대로 웃음은 만병통치약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처음에는 의구심이 많았다. ‘설마 웃음 때문만 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한바탕 웃고 나서부터 좋아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정말이지 웃고 나 면 허리와 목의 통증도, 손발 저림도 그리고 짜증스러 움도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난 확인하고 싶었다. 웃음의 의미와 웃음의 효과를! 그리하여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유방암 환자를 대상 으로 웃음 치료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역시나 놀랍 게도 12주 과정의 웃음 치료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이 면 하나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웃고 있는 그 순 간만큼은 절대로 암세포가 자신의 몸을 공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랑받은 세포만이 암세포를 공격할 수 있 는 힘을 갖는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항암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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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선 치료를 받고 나면 골수가 억제되어 백혈구와 혈소판 수치가 뚝뚝 떨어진다. 때문에 항암제를 필요 로 할 때에도 제때 맞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기는데, 많 은 사람들이 웃음 치료 교실에 다니고부터 그런 일이 줄어들었다. 몸 상태뿐만 아니라 면역력도 증가하여 백혈구 수치가 어느 정도 정상 수치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웃음 치료는 입소문을 타게 되었고, 참여자는 수십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지금은 암정보교육센터 에서 정식 프로그램으로 구축되어 매주 금요일 오후에 실시하고 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속담대로 웃으면 정말 복이 온 다. 건강만큼 큰 복이 어디 있으랴. 실제로 웃음 치료 가 끝날 때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정말 건강해졌 어요”, 그리고 “웃다 보니 무척 행복해요”라고 말한다. 건강을 뜻하는 헬스health와 행복을 뜻하는 해피happy의 어원이 바로 고대 그리스 어의 ‘웃다hele’에서 파생된 것 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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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우리가 ‘신新건강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웃음 을 잃지 않고 항상 밝게 웃으며 살아야 한다. 웃음을 잃어버리면 신건강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 서 말하는 신건강인이란 자신의 잠재 능력을 발휘하면 서 죽을 때까지 아무런 질병 없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 을 의미한다. 몸은 건강하지만 웃을 일이 전혀 없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반대로 지금의 삶이 그런대로 행복하다고 하지만, 내 마음대로 내 발로 다닐 수 없을 만큼 건강이 나빠져 있다면 어찌 웃음이 나오며 건강 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웃음은 성공한 사람만이 가지는 특권이 아니라, 오히 려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도, 행복한 사람이 갖는 특권도 역시 웃음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웃음을 선택하는 사람 만이 행복해지고 건강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에게 웃음은 환자들에게 치료적 의미로 다가가기 시작했고, 나의 웃음 기법도 환자들에게 맞는 맞춤형 근력 강화 웃음 기법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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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웃음 친구 웃음 치료를 받은 수많은 사람 중에 가장 멋진 우리 친정아버지를 소개하고 싶다. 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약 12년 전에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지금도 옆구리에 인공 항문을 달고 계 신다. 그동안 병원에서 의사가 하라는 모든 검사와 치 료를 목숨을 다해 받았다. 완치라는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다섯 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병원에 오지만, 번번 이 백혈구 수치가 낮아서 제때에 주사를 맞지 못했고, 그때마다 암 세포가 쑥쑥 자랄까봐 받은 스트레스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사투를 벌여 기적처럼 5년이 지나고 7년째 되던 해였다. 인공 항문을 없애고 원래 있던 항문을 복 원하는 수술을 받을 예정이었다. 수술 전 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엑스레이 촬영을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 다. 수술을 취소하고 응급 CT를 찍었다. 폐암이었다. 폐암! 절망적인 암이었는데도 아버지는 마치 큰 바위 와도 같이 흔들림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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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수술을 받기로 한 날 아버지도 걱정이 되었는지 한 숨만 가득 내쉬었다.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또 웃 음 임상 치료사인 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시간이 가고, 수술이 잘되기만을 바랐다. 아버지께서 수술을 받던 그날, 그 시간에도 나는 몇 년째 이끌어오던 웃음 치료 교실을 진행해야 했다. 그 런데 그날만큼은 도무지 웃음 치료를 진행할 수가 없 어서 참석하신 분들께 솔직하게 고백을 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지금 이 시각 저의 아버지가 수술대 위에 누워 갈비뼈를 자르고 있습니다. 오늘만 큼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웃음 치료를 이끌어주셨 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한 분이 일어나서 앞으로 나왔다. 그분은 인후 두암에서 시작해 암이 폐 일곱 군데로 전이되어 두 번 이나 한강 고수부지에서 죽으려고 했던 분이었다. 그 분이 ‘웃음’을 만나 이렇게 오늘 웃음 치료를 대신하겠 노라 자청한 것이다. 그분은 수십 차례의 방사선 치료 로 인해 연조직인 침샘이 사라져 2∼3분마다 뿌려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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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침이 아니면 말을 하기도 힘들어하던 사람이었다. “웃음을 만난 지 일 년 만에 침샘이 살아나고 밥맛도 생겨 정말 새 삶을 살고 있어요.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나왔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며 그분은 암 환자들을 대 상으로 웃음 치료를 이끌어주었다. 이후 그분은 친정아버지의 웃음 친구가 되었고, 아 버지의 웃음보를 52일 만에 확실하게 열어주었다. 덕 분에 아버지는 왼쪽 폐 절반을 다 잘라내고도 아무런 합병증 없이 퇴원을 했다. 그리고 그분은 서울에서, 친 정아버지는 시골에서 저녁마다 5분씩 전화로 웃음 보 약을 다려 서로 주고받았다. 전화비가 부담스러울까봐 서로를 위하는 마음에 하루는 아버지가 먼저, 또 하루 는 서울에서 먼저, 형님 아우하면서 두 사람은 웃음을 붙잡고 웃음의 힘으로 암을 이겨내고 있었다.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서서히 커짐과 동시에 아버지 의 폐 건강도 점점 좋아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분 이 새로운 임상약인 항암제 투여를 받게 되면서 더 이 상 서로 웃음을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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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나눈 3년이 가장 건강하고 행복했다고 말씀하 시던 그분의 건강한 웃음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었 고, 아버지도 웃음 친구를 잃고는 더 이상 웃을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불안하고 걱정스런 날들이 흘러가던 2011년 5월 어느 날, 아버지가 “내가 엎드리면 숨이 차다”고 하더니 이틀 만에 응급실로 실려 오셨다. 검사 결과, 심장을 싸고 있는 심낭에까지 암세포가 침범하는 바람 에 구멍이 나서 그쪽으로 피가 조금씩 조금씩 고인 것 이라고 했다. 무려 1,300cc의 피를 뽑아내고서야 숨이 라는 것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웃음을 잃어버린 3년간, 아버지의 암세포는 폐를 타 고 전이되어 심장을 싸고 있는 막까지 뚫고 들어온 거 였다. 치료를 서둘러 하려 했지만, 이미 너무도 먼 곳 까지 전이가 일어난 상태에다 기력도 없으니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집 근처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기로 의견을 모았다. 즉 돌아가실 때까지 숨이 차는 것만 방 지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새로 옮긴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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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에서도 또다시 항암제 투여가 시작되었다. 힘든 시 간이 조금씩 조금씩 더 빨라져 왔다. 한숨보다 더 깊은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온 가족이 동시에 웃음을 잃고 걱정으로 지낼 수밖에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에도 매주 금요일이면 나는 즐거운 마음으 로 암환자 웃음 치료를 했다. 암환자의 자존감을 높이 는 웃음 기법 중 칭찬하기 웃음과 사자 웃음, 황제펭귄 웃음을 하고 내려오는데, 갑자기 아버지의 웃음 치료 를 내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아버지 도 예전처럼 좋아질 거라는 강한 믿음이 왔다. 바로 휴 대전화로 아버지께 웃음 치료를 해보자고 했더니, “너 나 많이 웃고 건강해라”라고 말씀하셨다. 다음날 또 전화를 해서 아버지께 1분만 크게 웃자고 했더니 “지금 숨이 차서 못한다”, 또 다음날은 “힘이 없 어 못한다” “화장실 가야 한다” 등등 계속 핑계를 대기 만 했다. 보름째 되던 날도 아버지는 “지금 밥상 들어 온다”며 웃지 않으려 했다. 이때 “아버지, 밥상이 들어 온다, 아하하하! 하고 한 번만 웃어보세요” 하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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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드렸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작은 목소리로 “밥상 들 어온다, 아하하하!” 하시는 게 아닌가? 이렇게 우습고 어설프게 아버지의 웃음은 다시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웃음보가 다시 열린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세상에 서 가장 멋진 웃음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었다.

|| 아버지의 웃음 리스트 나는 매일 저녁 7시가 되면 아버지께 전화로 칭찬 웃 음을 전해드리곤 했다. “암을 이겨낸 우리 아버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마음 에 드시면 크게 웃으면 됩니다. 아하하하!” “아버지는 하동군 옥종면에서 제일 잘생긴 것 아시 죠? 아하하하.” 다음날에는 “딸을 여섯 명이나 낳았으니 대단하십니다.” “활을 잘 쏘시는 아버지, 대단하십니다.” “인내심이 많으신 아버지, 훌륭합니다.” “성격이 좋아 짜증도 안 내시는 아버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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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성이 좋아서 아무거나 잘 드셔서 좋습니다.” 이렇게 매일 칭찬거리를 찾아 전화로 말씀드렸다. 나중엔 언니 동생들에게도 아버지를 칭찬하고 싶은 말 을 내게 보내달라고 해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 누어갔다. 오래 전에 아버지가 건강한 몸으로 우리를 키우실 때 행복했던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언니 동생 들이 보내준 소박하고 아름답고 재밌는 칭찬 리스트를 가지고 전화하던 날 아버지는 크게 웃으면서, “기분이 좋다” “너희가 그렇게 생각해 주니 정말 행복하다”고 말씀을 해주셨다. 아들 딸 잘 키워주신 것, 부지런히 사신 것, 아프면서 도 잘 웃어주시는 것, 다른 식구가 힘들어할까봐 내색 안 하시는 것, 남의 마음 잘 헤아리시는 것, 즐겨하던 술과 담배를 한방에 끊으신 것, 아파도 잘 참으신 것, 남에게 싫은 소리 안 하시는 것, 남을 원망하지 않는 것, 남 손해 안 끼치는 것, 정직하게 사신 것, 농사 잘 지으시는 것 등 정말 자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 7남매가 아버지의 칭찬거리를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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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개나 만들게 되었고, 100여 개의 칭찬으로 천일야 화를 하듯 매일 저녁 아버지와 칭찬 웃음을 나누었다. 아버지의 칭찬 리스트를 공유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 누면서 우리 형제자매는 아버지의 삶이 무척 아름답 고 훌륭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아버지 자신도 그 동안의 삶이 헛되지 않은 자랑스러운 삶이었음을 느끼 면서 비로소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내게 된 것이다. 요즘은 아버지께서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면서 웃곤 하신다. “나는 남에게 싫은 소리 안 하고 살았다, 아하하하!” “나는 남 원망하지 않고 살았다, 아하하하!” “나는 내 몸에 좋으라고 개구리나 물고기를 함부로 잡아먹은 적이 없다!” 이런 식으로 당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나만 칭찬하지 말고 너희 엄마도 칭찬해 보라”고 하면 서 엄마 건강도 함께 챙기신다. 많이도 변하셨다. 웃음 치료 이후 아버지는 매우 긍정적으로 바뀌었 고, 삶에 대한 자신감만 생긴 것이 아니라 스스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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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마음도 표현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분이면서도 워낙 무뚝뚝한 분이라 아버 지한테 애교 한 번 부려보지 못한 언니 동생들도 이제 는 아버지가 달라졌다며, 너의 웃음이 아버지껜 보약 이며 엔도르핀이고 항암제라고, 앞으로도 아버지께 자 주 웃음 전화를 드려달라고 말한다. 매일매일 칭찬할 것이 있어서 전화하는 시간이 기다 려지고, 또 아버지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 시간 이 정말 행복하고 감사하다. 웃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웃음을 제대로 맛보고 나면 웃음이야말로 어떤 진통제보다도, 소화제보다도, 피로 회복제보다도 좋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웃을 일이 없어서 웃음이 잘 나오지도 않고, 억지웃음이 별 의미 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소리 내어 크게 온몸으로 웃다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된다. 딸들 이 보내주는 웃음 칭찬에 유쾌한 웃음을 웃게 된 우리 아버지야말로 그 산 증인이다. 웃음소리를 내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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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한테서는 한숨소리와 신음소리가 사라졌다. 아 픔이 사라진 것이다. 아버지는 암을 진단받기 전보다 암을 치료하는 동안 더욱 많은 웃음을 찾았다. 아버지는 이제 “생각해 보면 웃음의 힘이 암보다 더 센가 보다” 하며, “웃음이 아니 었으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웃음 덕분에 이렇게 건강하게 웃고 다닐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전 화를 드릴 때마다 아버지가 먼저 “오늘도 큰소리로 많 이 웃었다”고 들려주신다. 감사하다. 정말로 감사하다. 칠순이 넘은 친정아버 지의 웃음소리를 매일 들을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 한가? 그리고 그 멋진 웃음을 보내주는 아버지는 또 얼 마나 멋지신가! 왜 살아가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사랑하기 때문이라 고 말하고 싶다. 사랑 때문이다. 가족에게 사랑이란,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주는 것이 아닐까?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아버지께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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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죽음에서 나를 살리다

장현갑

서울대 심리학과 및 영남대 심리학과 교수를 지 냈고, 현재 마인드플러스 스트레스대처연구소 소장 으로 있으면서 심신 의학에 기초한 명상 치유와 치료 요가 수련을 교육하고 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두 번의 위기 상황에서 명상의 도움을 크게 얻었고, 그 후로 명상을 삶의 중심에 두게 되었다. 세계 인명사 전인《마르퀴즈 후즈 후Marquis Who’s Who》의 5개 분야 에 9년 연속 등재된 바 있고, 2009년에는 미국인명협 회ABI로부터 ‘2009 Man of The Year 50인’으로 선정 되기도 했다. 존 카밧진과 허버트 벤슨 등 마음과 뇌 의 관계를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의 글을 꾸준히 번역 했고,《마음 vs 뇌》 《스트레스는 나의 힘》등 여러 권 의 책을 썼다.


|| 죽음에서 살아난 두 번의 경험 나는 지금도 새벽 다섯시 반이면 일어나 한 시간 정 도 명상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저녁에는 가벼운 요가와 운동으로 하루 동안 긴장되었던 몸과 마음의 근육을 풀고 이완된 상태에서 하루를 정리한다. 낮에 도 명상을 지도하고 있으니 내 삶에서 명상은 잠시도 떼어놓을 수 없는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상이 내 삶의 중심이 된 데에는 내 인생을 뒤흔든 두 번의 사건이 큰 역할을 했다. 두 번 모두 죽음의 문 턱까지 다녀온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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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더웠던 1995년 여름, 당시 나는 영남대 심 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학생처장 보직을 맡았는데, 마침 학생 시위가 극렬한 때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다. 2년의 임기가 끝났을 때는 스트레스로 이가 다 덜컥거렸고 진작부터 좋지 않던 심장도 더 나빠져 있었다. 이때도 나는 틈만 나면 명상이나 기도, 참선, 호 흡, 만트라, 위파사나 등을 수행하면서 스트레스에서 벗 어나고자 했다.《반야심경》도 천 번이나 사경寫經했다. 그러던 때 마침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개최한 ‘항일 독 립 운동의 루트 탐방’ 여행에 동참할 기회가 주어졌다. 삼복더위 속에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오지들에 퍼져 있 는 독립 운동 사적지들을 찾아다녔다. 특급 호텔이라 고는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고장이 나 있고, 침대는 용 수철이 튀어 올라와 있었다. 수돗물도 나오지 않았다. 하루는 노천에서 강의를 듣는데 갑자기 극심한 가슴 통증이 몰려왔다. 안 그래도 순환기 계통이 좋지 않아 늘 혈압이 높고 심장도 약해져 있던 상황이었는데, 힘 든 여정으로 인해 협심증이 돌발한 것이다. 순식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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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장면이 주르륵 흘러갔다. 문득, 이게 죽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외국이었고, 의사의 도움이라곤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 머리에 떠오른 것이 ‘호흡’이 었다. 평소 단전호흡을 수련해 온 덕이었다. 필사적으 로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두려움이 사라 지고 차츰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숨쉬기도 편해졌다. 그렇게 위기가 지나갔다. 그 후에도 간헐적으로 심한 가슴 통증이 왔지만 매번 단전호흡을 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그때 생각한 것이 있었다. ‘내가 만약 죽지 않 고 살아난다면, 내가 할 일은 바로 명상이다.’ 불교 집안에서 자라 절에 가서 독송하고 염불하고 참선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봐왔고, 박사 학위를 준비 할 때나 교수가 된 뒤로도 계속해서 스트레스가 몸의 질병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는 심신心身 관계 연구에 몰두해 온 나는, 이를 계기로 불교 명상을 직접적인 체 험을 통해 더욱 깊이 공부해 보고 싶어졌다. 연구년을 맞은 1997년, 나는 인연이 있는 절에 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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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 단기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절 측으로부터 허락 도 받았다. 그러나 갑자기 절에 사정이 생겨 계획이 어 긋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시기에 나에게는 다른 식의 경험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렇게밖엔 달리 말할 도리가 없다. 이 어긋남에서 내 인생의 가장 아프 고 힘들었던 두 번째 사건이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단기 출가가 무산된 실망감에 나는, 세계적인 심리 학자 게리 슈왈츠 박사가 있는 미국 애리조나 대학에 서 연구할 기회를 청했다. 바로 초청장이 왔고 나는 그 곳에서 명상 수행과 함께 명상의 심장병 적용에 대한 연구도 하고, ‘마음챙김 명상 프로그램’에 관한 책을 번 역하기도 했다. 그해 6월 말, 여름방학을 맞아 아내와 셋째딸, 그리 고 군에서 갓 제대한 아들이 애리조나로 나를 보러 왔 다. 네 식구는 자동차를 빌려 미국을 남북으로 가르는 긴 여행에 나섰다. 흩어져 있던 가족이 먼 이국에서 만 나 함께 떠나는 즐거운 여행이었다. 6월의 맑은 하늘, 반짝이는 나뭇잎들, 상큼한 공기…… 모든 것이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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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그 순간, 바로 그 사고가 났다. 앞에서 오던 차와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다. 아내와 딸이 내 눈앞에서 세 상을 떠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두 다리가 차에 깔린 상태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구조대가 도 착해 쇠뭉치를 들어 올릴 때까지 꼬박 한 시간 동안 뼈 가 으스러진 채 견뎌야 했다. 아들도 다리를 다쳤다. 현지 텔레비전 방송에 보도될 만큼 큰 사고였다. 부서진 다리로, 아내와 딸의 유해를 안고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꼬박 넉 달 동안 나는 꼼짝도 못하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몸의 통증도 힘들었지만, 마 음속의 슬픔과 고통은 더 견디기 어려웠다. 자포자기하 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남은 아이들을 어쩌나 싶어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몸부림 속에서 내 손에 집힌 책이 있었다. 조안 보리 센코 박사가 쓴《마음이 지닌 치유의 힘》. 그때 여행 짐 속에 들어 있었고, 사고 현장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한국으로 나와 함께 돌아와 병원 침대까지 따라온 책 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수호천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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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나를 지켜봐 준 아주 특별한 책이었다. 병상에서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보리센코 박사는 이 책에서 고통은 단순한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아 나아 갈 때 엄청난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는, 나아가 고통이 곧 성장의 촉진제이자 치료제가 될 수 있다는 놀라운 메시지를 내게 들려주고 있었다.

|| 고통 속에 치유의 힘이 있다 치료를 하는 동안 나는 고통을 잊거나 물리치려고 하는 대신, 불교의 관법灌法이나 위파사나 명상에서 하 는 것처럼 고통이 어떻게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났다 가 사라지는지 가만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을 아무 판단 없이 응시하면서 내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나에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고통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가만히 관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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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느낌이 들면 ‘내가 지금 슬퍼하고 있구나’ 하고 알 아차리면서 그 느낌과 생각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 다. 고통과 싸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슬프 다는 느낌, 괴롭다는 생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자 내 안에 힘이 생기고 생각도 긍정적으로 바뀌더군요. 그때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어요. 반드시 일어나 걷게 된다고 말이죠. 그러나 처음부터 무리한 목표를 세웠던 건 아닙니다. 두 다리를 다 못 쓰고 누워 있을 때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휠체어만 탈 수 있 기를 바랐고, 일어나 앉게 되면서는 보조기를 이용해 서라도 서기만 하자고 했죠. 서게 되자 한 걸음만 떼어 놓을 수 있기를 바랐고, 걸음을 떼어놓게 되면서는 목 발을 짚고 걸을 수 있기를 염원했어요. 마침내 양쪽에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자 이젠 목발 하나만 짚고 걸을 수 있기를 바랐고, 나중엔 지팡이만 짚고 걸을 수 있기를 바랐지요. 그게 일 년 안에 다 이뤄졌어요.” 멀쩡히 걸어다닐 뿐 아니라 지금 이 나이에도 몇 시 간이고 강단에 선 채 강의하는 내 모습을 보고 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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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고를 당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 람들에게 나는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곤 했다. 한동안 목 발을 짚고 학교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강의실에서 만난 동료나 학생들에게는 “고통이 곧 의미야”라는 말을 즐 겨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 아 자신의 아픈 경험을 책으로 쓴 빅터 프랭클도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진정으로 가 치 있게 만들어준다고 강조한 바 있다. 내게 그런 고통 이 없었다면, 고통에 집착하고 끌려다니기만 했다면, 고통을 안겨준 상황이나 사람을 원망하고 내 운명을 비관하는 데서 그쳤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고통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역시 명상 덕 분이었다. 나는 오직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기 로 다짐하고 그대로 했을 뿐이다. 바로 이와 같은 위파 사나 수련법을 응용하여 환자 치료에 접목시킨 것이 존 카밧진의 ‘마음챙김 명상 프로그램’인데, 나는 내 자 신의 경험이 있었기에 퇴원한 뒤 바로 ‘한국형 마음챙 김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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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포도로 내 마음을 알아차린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나는 건포도 서너 알을 나눠주고 전에 한 번도 그 포도알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호기심을 갖고 관찰하라고 시킨다. “건포도 한 알을 골라 손가락으로 촉감을 느껴보세 요. 뒤집어도 보고, 빛에 비춰도 보고, 귀에도 갖다 대 보고, 손가락으로 문질러도 보세요. 모든 감각을 총동 원해 보는 겁니다. 마음속에 지루하다거나 시시하다거 나 조급한 생각이 드는지 살펴보세요. 마음속에 일어 나는 모든 생각과 판단을 알아차리고, 다시 그 생각을 내려놓고 건포도로 의식을 되돌립니다. 건포도 냄새를 맡아보세요. 냄새를 맡고 느낄 뿐, 그 에 관해 상상 속의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지어낸 이야 기 속으로 끌려가지 마세요. 다시 건포도를 입 가까이 가져갑니다. 입 안에 넣지는 말고, 입에 침이 고이는 지, 혀가 움직이는지 봅니다. 가능한 한 주의 깊게 입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피세요. 이제 입을 벌리고 건포도를 넣습니다. 씹기 전 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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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느낌을 살펴보세요. 건포도를 혀 위로 움직여도 봅니다. 혀끝에 닿는 감촉, 침과 혀의 반응에 집중합니 다. 어떤 생각이나 이야기가 떠오르더라도 붙들지 말 고 그냥 놓아 보내세요. 이제 건포도를 천천히 씹어봅 니다. 처음 깨무는 순간을 느껴보세요. 맛이 어떻습니 까? 달콤한가요? 부드럽습니까? 씹을수록 맛이 변하나 요? 삼켜봅니다. 삼킨 뒤에도 맛이 남아 있는지, 모든 감각을 느끼면서 그 맛에 집중합니다. 나머지 두 알도 그런 식으로 마음을 집중해서 천천히 느껴보고 씹어서 삼킵니다.” 이것이 바로 건포도 명상이다. 이 명상을 하다 보면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얼마나 건성으로 먹어왔는지 알 수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기계적인 행위만 있을 뿐 우리 마음은 다른 곳을 헤매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러니 음식의 맛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음식을 먹는 그 순간에 ‘그곳’에 없었다. 간단해 보이는 이 건포도 명상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내 마음이 ‘지 금 여기’에 머물도록 훈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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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스러운 과거로, 불안한 미래로 쫓겨 다니는 것 이 아니라 밥 먹을 때 밥을 먹고, 걸을 때는 내 걸음걸 이와 제대로 만나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정성껏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 ‘진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체험의 질이 달라질 뿐 아니라 그 일에 집중하는 힘도 따라서 커질 수밖에 없다. 마음의 근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흩어진 마음을 ‘지금 여기’로 불러오는 데는 이러한 방법뿐 아니라 기도문이나 만트라, 호흡 등에 집중하 는 명상도 있다. 걸으면서, 잠들기 전에, 교통 신호를 기다릴 때 언제든 편하게 할 수 있는 명상법이다. 불교에서 진언眞言이라고도 하는 만트라를 예로 들 어보자. 한 가지 만트라를 정해서 마음속으로 되풀이 해서 외면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만트라는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에 맞는 것으로 고르는 것이 좋 다. 그러면 쉽게 이완 상태로 이끌어줄 뿐 아니라 효과 도 더욱 커진다. 예컨대 불교도 같으면 ‘관세음보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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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무아미타불’ 같은 만트라가 있고, 기독교도라면 주기도문이나 성경의 한 구절을 만트라로 삼을 수 있 다. 종교와 상관없이 ‘평화’ ‘사랑’ ‘건강’ 같은 단어를 고 를 수도 있다. 이완된 자세에서 이런 단어를 들숨과 날 숨에 맞추어 천천히 읊조리는 것이 만트라 명상이다. 만 약 ‘관세음보살’을 만트라로 택했다면, 숨을 들이쉬면서 ‘관세음……’ 하고, 내쉬면서 ‘보살……’ 하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는 않을 것이 다. 사람이 하루에 6만 가지 생각을 한다는 실험 보고 가 있을 정도로 우리의 마음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 는다. 그럴 때는 우선 그런 생각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가 사라지는 것을 아무런 판단 없이 관찰하며 그 생각 이 흘러가도록 둔다. 그러곤 다시 호흡과 만트라로 되 돌아온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생각들이 단지 마음이 빚어낸 상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되고, 걱정이나 동요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마음챙김 명상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틱낫한 스 님은 몸이 아프거나 화가 나거나 우울할 때 우리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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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할 일은 통증이나 분노를 몰아내거나 억누르는 것 이 아니라 그것을 돌봐주고 껴안아줄 다른 에너지를 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화가 날 때는 마음 을 모아 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하라고 한다. “(숨을 들 이쉬면서) 나의 오랜 친구인 분노야, (숨을 내쉬면서) 나는 네가 거기 있는 줄 안다. (숨을 들이쉬면서) 내가 지금 (숨을 내쉬면서) 너를 돌보고 있다.” 그렇게 말하 는 순간 치유의 에너지가 분노와 같은 부정의 에너지 를 돌봐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치유의 만트라는 병 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옛 선사들은 몸에 병이 들어오면 마음을 활짝 열어 병을 내보냈다고 한다. 마음을 활짝 여는 일,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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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난 곳에서 길이 다시 시작되다

풀라

한국에서 태어나 동서양의 문학을 폭넓게 공부 했으며, 오쇼 코뮨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오쇼 라즈니쉬의 제자가 되어 마 디얀 프라 풀라Ma Dhyan Prafulla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그 후 10여 년간 인 도와 유럽 등지를 여행하며 개인의 성장과 각성을 위 한 명상과 각종 세라피를 경험했다. 현재 명상 서적 번역, ‘가족세우기’와 ‘몸에게 말 걸기’ ‘구르지예프 무 브먼트’ 등 다양한 치유 워크숍을 이끌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내면 치유 작업을 하고 있다. 옮긴 책에《가족세우기》《조직세 우기》《가족세우기를 통한 교실 혁명》《놀라운 사람 들과의 만남》등이 있다.


|| 명상을 하면 질병에서 자유로워질까? 덜컥덜컥 흔들리는 기차 안. 로마에서 230킬로미터 떨어진 산악 도시 시에나에서 진행된 일주일 간의 워 크숍에 참여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번 워크숍은 아주 어린 시절, 그러니까 세 살이 되기 전에 형성된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서 계발된 감정 치유 요 법을 배우는 것으로, 한국에서 온 나를 비롯해 쉰 명이 넘는 사람들이 유럽과 세계 전역에서 모여들었다. “명상을 하게 되면 질병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벌써 몇 년째 여러 가지 치유 워크숍에도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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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명상도 하고 있는데, 왠지 불운이 내게서 떠나질 않는 것 같아.” 워크숍을 통해 새로운 경험과 이해를 한 보따리 싸 들고 돌아가는 길, 로마의 중앙역까지 동행을 하게 된 나폴리 출신의 라하르가 오른쪽 무릎 위에 얌전히 놓 인 자신의 오른손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틀 전 춤을 추다가 넘어져 손목을 다쳤다. 두 해 전에도 넘어져 오른쪽 발목 골절상을 입었던 그녀는 “그나마 몸의 한 부분을 못 쓰게 되어야만 어쩔 수 없이 몸에게 쉴 틈을 주게 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질병이나 우리가 불운이라고 부르는 일들이 악재가 아니라 ‘진짜 자기 삶을 살게 하는 출발점’ 역할 을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바깥으로 향해 있던 삶이 ‘나’에게로 방향 전환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겠냐는 말이야.”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라하르는 아직은 문제의 손잡이를 놓고 싶지 않다는 듯 지난 몇 년간 자신을 찾 아왔던 불운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뭔가 그럴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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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을 받을 때까지 좀 더 버티고야 말겠다는 듯 불운 이 문을 두드릴 때마다 자신이 거쳐야 했던 고통의 터 널과 절망감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 암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다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자니 몇 년 전 서울에서 진행된 ‘가족세우기 워크숍’을 통해 알게 된 한 중년 여 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 역시 라하르처럼 갑작 스럽게 찾아든 불운을 향해 두 주먹을 움켜쥔 채 탈출 구를 찾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처음 대면한 자리 에서 그녀는 자기한테 불운이 어떻게 찾아왔는지 길게 설명했다. “제 친구 중에 제법 이름이 알려진 암 전문의가 있어 요. 그 친구는 하루에 200명 정도의 암 환자들을 만나 는데, 개중에는 이제 막 암 진단을 받은 사람도 있고, 한창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도 있고, 회복기 환자 도 있다고 해요. 처음 암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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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충격에 사로잡혀 억울함을 호소한대요. 자기가 누구 때문에 암에 걸렸는지 운운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고요. 그러면서 남은 시간을 암보다 더 큰 불행 속에서 살아간다는 거죠. 결국 몸이 암으로 고통받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까지 불치의 병으로 채워 넣고 만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내 면이 불치병에 걸려 있는 한 온전한 치유는 불가능하 다는 게 의사인 제 친구의 주장이었어요. 처음 그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 았죠. 무한정으로 펼쳐져 있다고 여겼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유통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우유처럼 곧 폐기 처분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불안과 원망 속에서 그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만다는 걸까? 나 라면 남은 시간을 그 어느 때보다 더 값지게 쓸 텐데, 하고 싶었지만 늘 미루기만 했던 일들을 하면서 1분을 한 시간처럼 쓸 텐데 말이에요. 그러다가 제가 덜컥 암에 걸리면서 친구의 말이 무 슨 뜻인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아니 온몸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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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된 거예요.” 20대 중반, 아버지와의 불화로 집을 나온 후 그녀는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만 했다. 그러나 늘 일 년도 채 못 돼 직장을 뛰쳐나오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유는 언제나 직속 상사와의 갈등이었다. 권위적인 남자 상 사들이 보여주는 부당함―그녀의 시각에서 보기에― 에 직면할 때마다 분노가 폭발했고, 결국 상사가 그녀 를 밀어내거나 그녀 스스로 회사를 뛰쳐나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사업도 몇 차례 해보았지만 매번 동업자 와의 갈등으로 투자액보다 몇 배나 불어난 빚만 떠안 은 채 원점으로 돌아오곤 했다. 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커갈수록 배를 움켜쥐고 뒹구는 횟수도 늘어났다. 그 때마다 일만 잘 풀리면 배 아픈 것도 저절로 해결되리라 믿으며 그녀는 자신의 문제로부터 등을 돌려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하루에 200명의 암환자를 만 난다는 의사 친구의 200번째 환자가 되고 말았다. 항 암 치료 권유를 받았을 때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뜨거 운 분노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제일 먼저 머릿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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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른 사람은 아버지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더 커졌고, 이 모든 악운이 아버지 탓이라 는 생각뿐 다른 생각이 들어설 여유가 없었다. “지금 저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 그리고 저와 아버지 의 관계가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둔 엄마에 대한 원 망으로 가슴이 타버릴 것 같아요. 친구의 진료실을 나 온 뒤 지금까지 분노로 아침을 맞고 원망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어요. 친구는 치료에 좀 더 전념해야 한다 고 말하지만 그게 되질 않아요. 어쩌면 이러다 얼마 남 았는지 알 수도 없는 제 생명의 유통 기한을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지난 수 년 동안 만났던 모든 남자 상사들 을 저주하는 데 쓰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지만, 마치 덫 에 걸린 새처럼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가족세우기 기법(개인의 심리적·신체적 문제, 대인 관계의 어려움, 가족 간의 갈등 등 다양한 원인을 치유하는 심리 치료 기법이다.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의 역할을 할 대리인을 세운 뒤 그들이 보여주는 몸짓이나 동작의 변화를 통해 문제의 원인을 밝혀내게 된다. 때론 ‘질병’이나 ‘건강’ ‘죽음’처럼 무형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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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하는 대리인을 세우기도 한다)을 이용하여 우리는 치

유의 첫 단계로 그녀와 질병을 상징하는 대리인을 세 워보았다. 다른 곳을 바라보는 질병의 대리인과는 달 리 그녀의 대리인은 질병의 대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두 팔을 벌린 채 질병을 향해 걸어갔 고, 그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대 리인들의 움직임에 따라 새로운 국면이 펼쳐질 때마다 자리에 앉아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그녀의 입에 서 탄성과 눈물이 번갈아 터져나왔다. “저의 대리인이 질병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 성큼성 큼 다가서는 모습을 보고 순간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처음으로 제가 처해 있는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병에 걸린 이 상황을 내심 기뻐하고 있더라는 거예요. 이제부터 부모님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마음껏 터뜨리 면서 ‘인생은 불공평해!’라는 노래를 목청껏 불러도 된 다는, 마치 허가증이라도 발급받은 것처럼 질병을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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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더라는 거죠. 무의식 안에서는 이 암이라는 죽 음의 전령을 반기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평생 삶 이 아닌 죽음을 향해 살고 있었던 거예요. 암의 옷자락 을 놓지 않으려는 제 대리인을 보면서 처음으로 제 가 슴 깊은 곳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올랐어요.” 이 첫 번째 만남 이후 그녀는 치료에 전념하게 되었 다. 그리고 ‘몸의 질병 이전에 내면에 쌓인 감정적 독 소를 제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나의 제안도 받 아들였다. 고된 치료 과정이 끝나갈 무렵 그녀는 마음 의 치유나 수행에 관련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해보 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인연이 닿았던 건 묵언과 참선 의 세계였다. 그러나 그녀에겐 너무도 힘든 과정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지 켜보기만 하라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한 번에 서너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데 익숙한 몸을 꼼짝없이 한 자 리에 묶어두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고통은 마치 창고 대방출이라도 된 것처럼 끝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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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져 나오는 생각, 생각,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었 다. 생각이 과거로 가면 거대한 분노의 불길과 원망의 파도가 덮쳐왔고, 미래로 가면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 은 두려움과 압박감으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몸은 수백 개의 바늘에 찔린 것마냥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질 러댔다. “남들은 침묵을 통해 내면의 고요함을 얻었다는데 저는 마치 수천 대의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교차로 한 가운데 버려져 있는 것 같았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분 노의 감정은 더 커졌고, 당장이라도 저 자신을 죽여버 리고 싶을 정도로 큰 고통에 꽁꽁 묶여 조금씩 미쳐가 는 것 같았어요. 결국 사흘째 되는 날 그곳을 뛰쳐나오 고 말았죠.”

|| 몸과 마음, 감정이라는 세 마리의 말 두 번째로 그녀를 만난 건 광주에서 있었던 ‘동적動的 명상’ 워크숍에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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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있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더라고 말하는 그녀 의 두 눈에는 변화에 대한 열망 못지않게 두려움의 어 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시작에 앞서 나 는 뭔가 변화하기를 바랄 때 우리가 ‘몸에서부터 시작 해야 하는 이유’와 왜 동적 명상이라는 게 필요한지 설 명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몸, 그리고 감정과 단절된 채 단지 머리로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세요. 우 리는 얼마나 많은 생각 속에 갇혀서 살고 있습니까? 부 정적인 생각 혹은 긍정적인 생각이라는 두 개의 꼭지 점 사이에 갇혀 있는 까닭에 에너지의 대부분이 머리 (마음)에서 소비되고 있는 상황이지요. 끊임없이 과거

로, 미래로 배회하는 마음은 단 한 순간도 현재에 머물 러 있지를 못합니다. 삶의 모든 일을 머리로 마음으로 접근하는 바람에 몸과 감정의 상태를 느낄 겨를도 없 고, 그런 능력도 계발되지 못한 상태이고요. 몸과 감정 이 해야 할 일조차도 몽땅 마음으로 다 하고 있으니 몸 과 감정은 피폐해지고 마음만 비대해져 있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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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몸과 마음과 감정, 이 셋이 일체가 되지 않고는 삶의 행복이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동적 명상이란 몸과 마음 그리고 감정이 한 팀을 이 루어 조화롭게 역할을 분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명 상법입니다. 몸과 마음, 감정이 분리되어 따로 놀 땐 마치 방향이 다른 세 마리의 말에 묶인 마차처럼 삶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려고 하겠지요. 그렇게 되 면 각자 날뛰는 말 때문에 마차가 앞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그 자리에서 우왕좌왕하거나 말들이 제 풀에 지 쳐 쓰러지거나 아니면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겁니다. 그 러나 이 셋이 하나로 뭉쳐 모두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면, 목적지까지 거침없이 달려갈 수 있지 않 겠어요? 마치 한 마리의 말이 된 것처럼 조화로운 상태 를 이뤄서 말이죠.” 여러 가지 동적 명상법들 중에서도 그녀는 특히 다 이내믹 명상을 좋아했다.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이 명 상은 모두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단계 한 단계 거치면서 그녀는 ‘자기 자신과의 지독한 만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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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했다. 나중에 그녀는 이 경험이 자신에게는 ‘일생 일대의 도전’이었노라고 내게 들려주었다. 첫 번째 단계, 호흡. 깊고 빠르게, 특정한 리듬이 형 성되지 않도록 불규칙하게 코로만 숨을 내쉰다. “처음 10분 동안 입술을 닫은 채 코로 숨을 내쉬라 고 했는데, 불과 네댓 번 숨을 내쉬고 나자 머리가 터 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어요. 숨을 깊게 쉰다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 줄 그때 처음 알았어요. 결국 몇 분 못 버티고 주저앉고 말았죠. 그 순간 차라리 죽는 게 더 쉽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알아챘지요. ‘아, 내가 이처럼 쉽게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구나. 내 게 죽음은 어려운 선택이 아니구나. 오히려 생명이 훨 씬 더 어려운 선택이구나.’ 주저앉고 일어나고 다시 주저앉았다 일어나고…… 몇 번이나 그렇게 포기와 시도를 반복했는지 몰라요. 단 10분이었는데도 그동안 내 삶을 지배해 오던 포기 와 회피라는 삶의 태도와 정면으로 밀고 당기는 줄다 리기를 벌인 듯한 기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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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단계, 정화 혹은 카타르시스. 내면에 억압된 감정들을 모두 분출해 낸다. 이 단계에서 그녀는 ‘빗장을 열고 나온 분노라는 이 름의 짐승’과 맞닥뜨렸다. 한 번도 제 소리를 내본 적 없는 이 억압된 ‘짐승’은 통제 불능으로 날뛰기 시작했 다. 이처럼 거대한 분노가 자기 내면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이 짐승은 누군가를 향 해 쉴 새 없이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대면서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세 번째 단계,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 제자 리에서 점프를 한다. 매번 착지를 할 때마다 ‘후’ 소리 를 크게 낸다. 앞선 단계에서 분출된 모든 에너지를 내 면으로 모아들인다. “들어올린 팔의 통증이 커지면서 다시금 포기하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더군요. 그냥 여태까지처럼 살아도 되지 않을까?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삶을 바꿀 필요가 있는 걸까? 아니, 이런다고 삶이 바뀌기나 할까? 두 팔 을 들어올릴 힘조차 없는 내가 무슨 재주로 인생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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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생각이 한번 똬리를 틀자, 마음은 계속해서 그녀에 게 포기와 회피라는 달콤한 카드를 펼쳐놓기 시작했 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에서는 이미 생명에 대한 욕구 가 자라고 있었고, 이 욕구를 외면한다면 이제 더 이상 생명을 선택할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더 이상은 길 없는 막다른 골목에 갇혀 살고 싶지 않았어요. 한 번에 한 뼘 정도밖에 내딛지 못하더라도 멈추고 싶지 않았어요. 길이 없으면 내가 만들어서라 도 계속 나아가고 싶었어요.” 한 번 뛰고 두 번 쉬기를 반복하면서 그녀는 깊은 수 면 상태에 빠져 있던 몸을 깨워나갔다. 몸속의 수분이 모두 땀이 되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 었다. 설사 이러다 죽는다 하더라도 넋 놓고 앉아서 죽 음을 맞이하기보다는 단 한 순간만이라도 삶이 절정을 맛보는 경험을 하면서 죽음을 맞고 싶다는 강한 욕망 이 그녀를 계속 뛰도록 만들었다. “스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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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후! 후!” 소리를 내며 점프를 하던 수십 명이 모두 멈춰 섰다. 네 번째 단계, 정지. 동작이 멈춘 것처럼 감정도, 사념도 모두 정지했다. 그 순간, 온몸을 태워버릴 것 같던 분노는 어디로 갔는 지 찾을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회피하기를 끝없이 유 혹하던 마음의 소음도 멈췄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 해 본 적 없는 편안함과 침묵이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 “그때 갑자기 뱃속에서 따뜻한 기운이 가슴까지 차 오르는 걸 느꼈어요. 그러더니 체온보다 더 뜨거운 눈 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어요. 뭐랄까? 체력 의 극한까지 저를 몰고 가던 움직임이 멎는 순간, 모든 부정적인 감정과 마음의 소란이 동시에 멈추면서 몸과 마음 그리고 감정의 차원 저 너머에 있던 환희심과 마 침내 만났다고나 해야 할까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에 나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상태’ 같은 걸 경험했어요. 막다른 골목에 서서 고통스러워하던 내 앞에 새로운 길이 펼쳐지는 것 같았죠. 길이 끝난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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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새로운 길이 시작되었다고 할까요? 적어도 내가 쏟 아낸 땀방울의 수만큼 길이 새로 열린 듯한 느낌? 나는 마침내 그동안 내게 감춰져 있던 삶의 비밀을 열 열쇠 하나를 찾아냈던 거예요.” 삶의 비밀을 열 수 있는 열쇠. “아, 매순간을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마치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전체적으로 뛰 어들면 되겠구나. 2단계를 염려하느라 1단계를 희생시 키는 게 아니라, 1단계를 후회하느라 2단계를 낭비하 는 게 아니라 한 번에 한 걸음씩만, 전체적으로 내딛으 면 되겠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다섯 번째 단계, 축제. 나는 지금도 다섯 번째 단계에서 환희에 차서 춤을 추던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땀에 젖은 얼굴은 말갛게 개어 있었고, 박자에 맞춰 사뿐거리는 몸은 마 치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가 벼우면서도 힘이 있었다. 살포시 올라간 입 꼬리에서 는 불안이나 걱정, 두려움이 싹 걷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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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그녀는 평생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있다. 아침마다 다이내믹 명상과 함 께 하루를 시작하고 틈나는 대로 춤을 춘다. 최근 들어 서는 좌선坐禪도 다시 하고 있다. 다이내믹 명상을 시 작한 뒤부터 침묵 속에서의 좌선은 더 이상 고통의 시 간이 아니었다. 몸을 이용한 움직임은 긴장을 내려놓 는 데 최고였고, 잘 길들여진 세 마리의 말은 그녀의 침묵을 깊게 해주었다.

|| 진짜 자기 삶을 살게 하는 출발점 “여기 로마로 오기 전 날, 그녀와 통화를 했어. 그녀 가 그러더군. 어쩌면 암 선고를 받던 그날부터 비로소 진짜 삶을 살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다고. 더 이상 아 무것도 움켜쥘 게 없다고 여겼던 순간에, 여기가 내 인 생의 종착지라고 여겼던 순간에, 몸과 마음이 산산이 부서진 그 순간에, 비로소 죽음이 아닌 생명을 살기 시 작한 것 같다고 말이야. 그날 이후 그녀는 일 년에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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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생일잔치를 한대. 첫 번째 생일은 엄마의 몸을 빌려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날이고, 두 번째 생일은 자기가 비로소 ‘나’로 살기 시작한 그날이고.” 그때까지 미동 한 번 없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 던 라하르의 입술 사이로 가벼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린아이를 품듯 제 오른손을 감싼 라하르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어둠 속을 응시했다. “이번에 정차할 곳은 로마 중앙역입니다.” 안내 방송 과 동시에 기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나는 다친 오른손 을 꼭 껴안은 라하르와 포옹을 한 뒤 여행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라하르는 앞으로 세 시간 더 이 기차를 타고 나폴리까지 어둠 속을 달려가야 했다. 그녀의 두 눈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달려가고 있 는 이 길 끝에도 환희의 빛으로 가득한 출구가 기다리 고 있을 것 같다고. 눈물이 살짝 맺힌 그녀의 두 눈은 막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그것처럼 열정과 설렘 의 빛이 역력했다. “그라씨에,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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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벌써 몇 겹이나 되는 어둠의 커튼을 드리운 지 오래지만, 중앙역은 한겨울에 새봄을 맞이하기라도 한 것처럼 생명의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한결 가벼 워진 걸음으로 대낮처럼 환한 불빛이 너울대는 출구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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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사랑을 배우러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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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가는 사람들

능행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선고받은 사람들이 마지막 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15년 넘게 해온 비구니 스님. 천여 명이 넘는 죽음을 배웅하면서 그 는 사람들에게 잘 먹고 잘사는 법이 아니라 잘 죽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한다. 불교계 최초의 독립형 호스피스 정토마을을 세워 봉사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호 스피스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과 함께 정토마을에서 수용할 수 없었던 더 많은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울 산 언양에 완화 의료 전문 병원인 자제병원을 준비하 고 있다. 지은 책으로《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 지는 않게》 《이 순간》 《불교임상기도집》등이 있다.


|| 찰나 멸, 찰나 생 사이에서| 너와 내가 만났으니 햇살이 따스하고 바람 없이 맑은 날씨 덕분인지 환 자들이 정토마을 잔디마당에서 골프 연습을 하고 산책 을 한다. 몇몇은 점심상에 올리기 위해 산나물을 뜯기 도 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아있는 것 자체가 참 고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을 몇 달여 앞두고 있 지만 서로 공을 주워서 건네며 우정을 나누고 웃어주 는 넉넉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내 앞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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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데, 환우 한 분이 웃으면서 “스님, 제가 가고 나면 보려고 그러세요?” 한다. 죽음…… 죽음의 순간은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죽음은 늘 우리 모두의 곁에 있다. 그런 죽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이 있다면 ‘공평함’과 ‘정직 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보다 많이 야위었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사십대 초반의 거사가 뜰에 핀 진달래를 따서 입에 넣으며 “스 님, 제가 내년에 이 진달래가 필 때에는 아마도 이 세 상에 없을 거예요” 그런다. 환자들을 대하면서부터 흔 하게 들어온 말이다. 그래, 그는 없을 것이다. 잘 떠날 수 있기를 그도, 나도 기도할 뿐이다. 아프고 병들어 누워 있으면 자신의 존재는 사람들로 부터 점점 잊히게 마련이다. 때로 그것은 너무나 큰 고 통이다. 인간이 사회적으로나 가족 안에서 자신의 역 할과 관계가 무력해질 때 그 슬픔과 상실감은 무너져 내리는 육체의 아픔보다 더 크다. 그저 살아서 숨 쉬고 있을 뿐 존재의 의미는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죽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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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은 육체 자체의 사멸뿐 아니라 자신의 역할과 관 계가 상실되어 가는 것을 스스로 지켜보는 일이다. 자 신 말고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무수한 감정과 경험 의 회오리 속에 홀로 놓이는 일이다. 텅 빈 가슴에 파 고드는 외로움, 그 두려움 속에 홀로 있게 될 밤을 사 람들은 진정 알고 있을까? 그간 호스피스 일을 하면서 어느새 천여 명이 넘는 이들의 죽음을 배웅해 왔다. 죽어가는 이들의 마지막 삶에 동행하는 이 수행적 삶은 죽음에 대한 의문과 한 스님의 유언에서 시작됐다. “죽음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이렇게 고통 속에 죽어가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나는 소록도와 꽃동네 등 삶과 죽음 이 굽이치는 수행처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곁에서 수행과 봉사를 통한 깨달음을 구했다. 그리고 1997년 어느 날, 폐암으로 죽음의 기로에 선 한 스님을 배웅하는 길에 “호스피스가 수행이 될 터이 니 꼭 이 분야를 불교계에 정착시켜 달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것을 내가 정진해야 할 과제로 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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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먹게 되었다. 그 비구 스님은 평생을 선방에서 수 행해 오신 분이었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 몸 누일 곳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타종교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죽 음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비구 스님은 내게 그렇게 유언을 남겼다. 스님들이 편히 죽 을 수 있는 병원 하나 지어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나의 마음 중심에 그 스님의 유언이 자리 잡게 되면 서 나는 좀 더 구체적인 중생제도의 도구로서 호스피 스 활동에 나서게 되었고, 결국 그것이 내 삶이 되었 다. 그 후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환자들을 위 해 보금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일념에서 정토마을을 만 들었고 종교를 초월해 호스피스 수행을 펼쳤다. “죽음이란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것이며, 삶 자체에 존재하는 순리이다. 이를 고통이라 여기거나 두려워하 지 않고 담담하고 용기 있게 수용해 나아가는 것이 중 요하다”라는 통찰을 얻기까지는 십 년 세월이 걸렸다. 나는 지금도 종종 정토마을의 뜰 앞, 작은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늘 지니고 다니는 물음을 던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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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있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던가?” “생명이 태어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던가?” 탄생은 죽음의 씨앗이기도 하거늘, 우리는 늘 죽음 을 저 멀리 있는 것이라 여기는 것 같다. 생사가 둘이 아니라고 한 옛날 큰스님들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호스피스 일을 할수록 생사가 둘이 아님을 절감한다. 순간순간 죽음 속에 삶이 존재하고, 삶 속에 죽음이 담겨 있다는 걸 깨닫는다. 철로의 양쪽 레일을 달리는 기차처럼 삶과 죽음은 매 순간 함께 달려간다. 매 순간 죽고 태어나는데 어떻게 함부로 살 수 있겠 는가? 찰나 멸, 찰나 생 사이에서 너와 내가 만났으니 이 얼마나 고귀한 인연인가?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순 간이 천 년인 양 살면서 가슴 벅차게 사랑하는 것밖에 없다. 그 순간의 한 점이 모여 수십 점, 수백 점에 이르 고, 우리 인생이 그려지는 것이다. 온전한 삶이 있어야 온전한 죽음이 있으며, 죽음은 또 다른 삶을 위한 희망 의 통로이기에 매 순간 곁에 있는 인연에 감사하고 ‘이 순간’의 기적을 누리며 온전히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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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서 반드시, 그리고| 바르게 알아야 할 과제 어느 골수암 환자가 투병중에 실낱같은 목숨을 붙잡 고 죽음 앞에서 기도한 글이 생각난다. ‘어머니의 아들, 자식들의 애비가 죽음 앞에서’라는 제목을 단 기도였다.

“부처님! 저는 제 입으로 병명을 말하기가 두렵습니 다. 가슴이 떨리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숨쉬기조차 힘 이 듭니다. 병원 검사 결과를 저는 지금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 병명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제 영혼이 황량한 들판에 홀로 뒹구는 낙엽 같습니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에 혼자 버려진 것 같 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아직 저의 존재가 더 필요합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부처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통스러워하는 저를 지켜보는 가족들 가슴에 눈물이 흘러내리지만, 제 앞에서는 참으려고 무던히도 애쓰는 것 같습니다. 저도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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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부처님, 당신의 한량없으신 자비와 사랑으로 이 질병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잡아주시고 흔들리는 이 마음에 강직함과 의지를 불어 넣어 주소서. 싫습니다, 아직은. 제가 죽기에는 너무 젊지 않습니 까? 부처님, 저의 육신이 병으로 무너져 내리는 이 비 참한 모습을 차마 거울에 비추어본다는 것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세상 앞에 당당하던 내가 이제는 육체와 영혼의 초 라함만 남고 옛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 없네요.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수없이 듣고 그 뜻을 알아차렸던 제 자신이었지만 이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 살려달라 고 매달릴 기력조차도 없습니다. 의지하옵는 자애로우신 부처님, 인연을 따라 생겨났다 인연이 다 하면 흩어지는 것 이 진리라고 누가 말하더이다. 저는 아직 그 진리를 잘 모르겠습니다. 오직 참혹한 고통중에도 살고 싶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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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만 간절하니 어찌합니까? 부처님, 당신께서 나의 육 신에 깃든 이 질병을 치료하여 주옵소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제 손을 꼭 잡아주시오며 살려만 주옵소서. 욕 심 없이 살겠습니다. 좋은 일 하며 살겠습니다. 저는 늙으신 어머니의 외아들입니다. 저는 어린 새 끼들의 애비입니다. 부디 저를 지켜주옵소서. 살고 싶 습니다, 부처님, 살아야 합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준비 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주시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 소서. 꼭 그리하셔야 합니다. 부처님!”

이 거사님의 간곡한 기도는 아마 이러한 상황에 있 는 환자나 가족들에게는 더욱 공감이 되는 내용일 것 이다. 준비 없는 죽음, 그리고 늘 생각으로만, 논리로 만 알고 있는 죽음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죽음 앞에 직면하는 순간 그 괴리감과 거부감은 말할 수 없 이 클 것이다. 그 느낌은 환자로 하여금 삶에 대한 강 한 집착을 일게 하며, 그 가족들도 강한 집착과 분리감 때문에 정신적 공황 상태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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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망각 하고 살아가다가 죽음이 숨통을 조여올 때에야 비로소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헐떡이며 살아온 텅 빈 자 신의 삶 앞에 죽음의 폭풍우가 순식간에 휘몰아치면 그제야 후회와 아쉬움에 절망하기도 한다. 인생에서 반드시, 그리고 바르게 알아야 할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에 있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며, 어떤 죽음이어야 하는지 스스로 결정하고 조금씩 구체화해 나아갈 필요 가 있다. 죽음 이후 다음 여정 또한 지금의 삶에서 준 비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돌이켜보면 지난 15년간 배웅한 많은 이들의 죽음 가운데 여유롭고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스 무 명이 채 안 되는 것 같다. 그 가운데 평생 화장실 청 소와 바느질로 자식을 키운 칠십대 할머니가 있다. 그 분은 아름다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 이 있었는지 손 흔들고 편안하게 가셨다. 지켜보던 가 족들과 함께 손 흔들어 작별을 하는데 그 모습이 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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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기까지 했다. 또 한 명은 위암 3기 환자였던 사십대 남자인데, 치 료비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어할까봐 별다른 치료를 하 지 않고 마지막을 보내러 정토마을에 온 사람이었다. 그는 수능을 앞둔 고3 딸을 늘 전화로 응원했다. “우리 딸 파이팅! 우리 딸 잘할 수 있어! 아빠는 잘 있 으니까 수능 끝나고 보자.” 수능 당일 그는 사력을 다해 전화기를 붙잡았다. “우리 딸 오늘 힘내야 돼? 아빠는 괜찮으니까 수능 끝나면 바로 내려와.” 내색하지 않고 딸을 응원한 그는 시험이 끝나갈 무 렵 “스님, 제가 할 일은 이제 다 끝났네요”라는 말을 남 기고 눈을 감았다. 자식 사랑의 마음으로 책임을 다했 기 때문인지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죽음은 결코 모든 것의 끝이 아니다. 죽음이라는 통 로를 통해 인간은 우주 속의 또 한 생명으로 탄생하기 에, 임종의 현장은 곧 또 다른 탄생을 준비하는 간이역 인 셈이다. 태어나는 아기를 기쁜 마음으로 손꼽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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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듯, 임종의 현장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희망으로 맞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기가 엄마 뱃속 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려면 엄마의 자궁을 지나야 하 듯이 죽음이라는 터널을 지나 새로운 세상과 대면하는 것임을 안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면들 을 조금은 털어낼 수 있으리라. 떠나는 사람, 떠나보내는 사람들은 인연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저 죽으면 인연 따라서 어디론가 가 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인연을 따라 서라…… 그래, 어떤 인연을 따라서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 인연을 따른다는 건 내가 과거 생부터 해왔던 일들에 대해, 만나고 헤어진 모든 관계들에 대해 죽음 이후 다음 생이 이어질 때까지 또 그 이후의 생에서 받 는 과보까지 수용하겠다는 태도가 아닌가. 정말 우리 의 마지막과 다음 생이 과연 자신이 지은 인과의 원인 을 따라가도 괜찮은지 환자들에게 다시 물어본다. 아 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이 물음이 지 닌 특별함이다. 그래서 인연 따라 가겠다는 말에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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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함을 더하라고 권하기도 한다. 또한 지금의 의식 상태로는 더 나은 다음 생을 기약 할 수 없다면, 살면서 지은 선하지 못한 행동과 말, 의 도들에 대해 참회하기를 권한다. 더 나은 삶을 원한다 면 나의 삶 안에서 불선업들이 정화되어야만 죽음을 통해 다시 재생하는 과정에서 더 나은 생을 얻을 수 있 겠다 싶어서다. 그리고 다음 생에 어떤 모습으로, 무엇 을 위한 존재로 태어나고 싶은지 구체적인 계획과 확 실한 이미지를 떠올려보는 시간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스님, 사는 게 너무 바빠서 눈(雪)이 이렇게 아름다 운 줄 한 번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스님, 음식을 삼킬 수 있다는 사실이 이처럼 큰 행 복이고 기쁨인 줄 몰랐습니다.” “스님, 육신의 고통보다도 꾸역꾸역 치미는 그리움 이 가장 고통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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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만 많으면 뭐든 다 되는 세상인 줄 알았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누운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사람의 몸을 입고 한 생을 살면서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와 경험이 주어졌는가 생각하게 된다. 물론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내 몸이 건강하든 비록 병 이 들어 아프든 혹은 죽음의 문턱 앞에 놓여 있든 우리 는 아직 선택할 기회가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 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잘 웃고 크게 웃고 사는 사람 이 죽을 때도 웃으며 간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모으 고 움켜쥐고 소리 지르고 싸우고 미워하는 것을 선택 할 수도 있지만, 나누고 베풀고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 을 선택할 수도 있다. 화내는 대신 웃음을 선택할 수 있고, 후회가 아닌 참회를 선택할 수 있으며, 불평 대 신 감사를, 짜증 대신 기도를,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 택할 수 있다.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잘 들 여다보면 그 안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도 더 선 명하게 보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제대로 선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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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할 힘도 얻게 될 것이다.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살게 하는 것일까? 화들짝 피었다 떨어지는 꽃잎처럼, 풀잎에 맺혀 있는 이슬처럼, 바람 앞에 떨고 있는 낙엽처럼, 그렇게 잠깐 머물다 그렇게 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을 알아차리는 이 몇이나 될까? 텅 빈 허공 속을 뛰어다니며 모으고 움켜쥐고 소리 지르고 싸우고 미워하지만 이 세상 모두 환영幻影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이 몇이나 될까?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죽음을 향해 질주하다가 어느 날 문득 허공에 새털처럼 떨어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 몇이나 될까?

나는 오늘도 죽음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을 새긴다.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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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를 일깨우는 부처님의 말씀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비구들이여, 또 만일 네 가지 법을 깨닫지 못하면 곧 나고 죽음에 떠돌면서 다섯 길을 돌아다닐 것이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성인의 계율, 성인의 삼매, 성인의 지혜, 성인의 해탈이니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법을 깨닫지 못하면 위의 네 가지 법(생·노·병· 사)을 받을 것이다. 나나 너희는 이 성인의 네 가지 법

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고 죽는 뿌리를 끊고 다시는 후 생 몸을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지금 여래의 몸은 쇠하고 늙었다. 마땅히 이 쇠하는 갚음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마땅히 이 나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며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 는 영원히 고요한 열반을 구하고 은애恩愛의 헤어짐에 있어서 덧없는 변이란 것을 늘 생각하도록 하라. 비구 ( 증일아함》 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2-35,〈사취품〉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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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

김안나

마리아의 작은자매회에서 24년째 몸담고 있는 수녀이다. 호스피스를 전문으로 하는 수도회에 입회 하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어느 날의 일이 큰 계기가 되었다. 등굣길에서부터 학교에 도착하기까지 세 건 의 죽음을 접하게 된 것이다. 아침나절에 연속된 세 사건을 접한 뒤, 전엔 생각해 보지 않았던 ‘죽음’이 화 두가 되었다. 그래서 일반인들을 위해 실시한 ‘호스피 스 교육’ 1기생으로 참여하며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 는 일’과 인연을 맺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89년 수도회에 입회한 뒤 대부분을 호스피스 일에 몸담은 채 보냈다. 호스피스를 하는 동료 수녀들과 함께《죽 이는 수녀들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 전쟁 속에 있을지,| 평화와 함께 있을지…… 아버지가 당뇨성 질환으로 발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입원하신 지 두 달이 넘었다. 상처가 뼈 근처까지 가면 서 패혈증이 되어 위험한 상태였는데, 생명은 아니더 라도 호전되지 않으면 발을 절단해야 한다고 했다. 아 버지의 당뇨도, 상처도 큰 호전이 없는 상태에서 시간 은 가고, 입원비와 치료비는 어느 정도일지 걱정이 되 었다. 시집간 자식, 직장 다니는 아들, 수녀원에서 지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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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밖에 할 수 없는 딸, 어머니는 자식 중 누구와도 맘 편히 의논할 수 없어 답답해하다가 덜컥 꾸려오던 가 게를 처분하겠다고 했다. 앞으로 얼마가 들어갈지 모 르는 병원비 때문에 목돈을 마련해 두려는 것 같았다. 입원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가족들은 점점 예민해졌 고, 작은 일로도 서로 섭섭해 하고 갈등이 생기기 시작 했다. 어머니는 맏이인 큰언니에게 심정적으로 의지하 고 싶어했지만, 언니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 때문에 괴로워했고, 자격지심 때문인지 어머니의 한마디에도 서러워했다. 오빠는 옮 긴 지 얼마 안 된 직장에 적응하느라 힘들어 했고 병원 비를 부담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에 속상해 했다. 각 자의 연민에 빠져 모두 예민해졌다. 그러다보니 누군 가 섭섭한 말을 하면 화를 내거나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우기도 했다. 아버지의 투병은 가족들 모두에게 전쟁터 같은 상황 을 안겨줬다. 우리 가족에게는 천문학적인 병원비, 그 리고 간병의 힘듦, 나을 수 있을까에 대한 희망이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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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면서 아버지뿐 아니라 가족들도 서서히 지쳐가 고 있었다. 수녀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와 주말 에 가서 모두를 쉬게 하고 혼자서 간병을 하는 것 외에 는 없었다.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미안함에 눌려 어머 니에게도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깜깜한 터널 속에서 보이지 않는 희망을 말하기도 지쳐 우리 가족은 서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버지만 아픈 것이 아니고 그 병으로 인해 가족들 전부 마음이 아픈 사람이 되어갔다. 치료 문제로 의견이 분분해지 면서,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하느라 갈등의 골만 더 깊어져갔다. 그러다 보니 병원에만 갔다 오면 너무 나 지쳤다. 우리 가족이야말로 약하고 불행하고 화목 하지 못한, 정말 최악의 가족 같아 보였다. 속상한 마음에 성당에 가서 기도를 드리며 물었다. “병은 왜 생겼나요? 이렇게 서로 싸우면서 상처투성 이가 되면 아버지가 퇴원해도 가족들은 서로 보고 싶 어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이대로 저희 가족을 버리실 건 가요? 이대로라면 제가 수도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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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저라도 아버지 간병을 하면서 지내야 하는 건 아닌 가요?” 아무런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상처 입고 지친 나와 우리 가족을 외면하시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주님, 도와주세요! 제발!” 그러면서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문득 제자들 의 배신과 군중들의 비난 속에 돌아가신 그분의 모습 이 보였다. 못 박힌, 그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 부활하 신 모습도 보였다. 그 상처를 지닌 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이곳에 평화가 있기를”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깊은 어둠과 서로 할퀴고 상처 내는 가족들의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였 다. 우리 가족이 느끼는 고통과 갈등 속에서도 우린 평 화를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아플지라도 희망은 언 제나 옆에 있다. 그것을 발견할 힘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이렇게 가끔 잊는다.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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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사랑하기에 때론 갈등하지만 그 갈등 속에서도 우 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큰 희망과 평화를 얻을 수 있 는 존재들이다. 다시 기도를 드린다. “평화가 나와 함께하기를!”

|| 상실 뒤에 오는 깨달음 그렇게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건강을 되찾았지만 지 난해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 뒤에 살펴보니 어머니는 스스로 모든 옷가지 등 소유품을 다 정리해 두셨고, 함께 산 오빠와 다소 불편했던 관계 도 용서와 화해로 마무리하고 가셨다고 한다. 잃고 나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예전엔 부모님이 불러도 우리 형제들은 모두 이런저런 핑계로 가지 않 았는데, 며칠 전엔 “나 힘들다”는 아버지의 말이 떨어 지기 무섭게 네 형제자매가 달려가 아버지를 모시고 강화도에 가 재롱을 피웠다. 죽음을 통해 뭐가 더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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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뭐가 덜 중요한지 분명히 알게 된 까닭이다. 왜 잃고 나서야 무엇을 잃었는지를 알게 되는 걸까? 건강을 잃고 나면 건강이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알 게 되고, 화목을 잃고 나면 화목함의 귀함을 진심으로 알게 된다. 늘상 하는, 먹고 자고 싸고 걷고 얘기하고 하는 그 모든 일들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 오다가, 아니 의식조차 하지 않고 살다가 그것을 할 수 없게 되 면, 그때서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하고 기적 같은 일인지를 느끼게 된다. 산책을 하는 것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아 마도 혼자서는 걸을 수 없는 환자들, 그 기능을 잠시든 영원히든 잃은 사람들일 것이다. 며칠 전, 너무 많이 아팠다. 10분을 못 자고 아파서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일주일을 앓았다. 감기는 보통 약을 먹고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지곤 했는데 이번 엔 도대체 10분을 잘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온몸은 두 들겨 맞은 것 같고, 열은 떨어지지 않고, 너무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기 힘들어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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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편안한 곳이 없는지 찾기도 했다. 지난 20여 년간 호스피스 수녀로 살아오면서 많은 환자들과 더불어 살았음에도 난 때론 지속적으로 같은 곳이 아프다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는 환자를 보면 약간 짜증이 나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통증도 있는데 좀 참으면 안 되는 걸까? 그 정도 약을 먹으면 괜찮을 때도 된 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돌아보면 난 사실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이다. 삶과 죽 음의 문턱을 넘나들거나 암과 같은 심한 통증을 호소 하는 분들에 비하면 정말 ‘새 발의 피’다. 그럼에도, 그 나마의 경험이 환자분들을 대하는 내 자세를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편안히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아침에 고통 없이 눈을 뜬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겪어야 알게 되는 것들, 잃어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 다. 상실 뒤에 오는 깨달음이다! 값을 진하게 치른 만큼 그만큼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 세상살이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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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에겐 한 가지 경험을 교훈삼 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지혜도 있다. 때론 다른 사 람의 경험을 내 경험삼아 배울 수도 있고, 미리 마음으 로나마 준비할 수도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내가 오랜 세월 호스피스 현장에서 만난 분들을 통해, 또 아버지 의 병 간호 때 가족들과 겪었던 아픔과 어머니의 죽음 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충실하고 행 복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살 때 언제 올지 모르는 고 통과 한계 상황에서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스 스로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버리고 떠나기’ 연습을 제안 하곤 한다. ‘버리고 떠나기’는 정말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어디에 에너지를 쏟으며 살아가야 할 지를 정리하는 데 꽤 도움이 된다. 우선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열 가지 를 쪽지에 하나씩 적는다. 가족이나 연인과 같은 사람 이든 휴식이나 건강, 웃음과 같은 비물질적인 것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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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나 자동차 같은 물건이든 하고 있는 일이나 명예 든 뭐든 상관없다. 이것 없이는 내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 것 열 가지를 적는 것이다. 자, 그 열 가지를 지니고 이제부터 배를 타고 먼 바 다로 항해를 떠난다. 가는 도중 우리는 비바람과 폭풍 우를 만난다. 그 열 가지를 다 쥐고 갈 수가 없는 상황 이다. 하나는 버려야 한다. 이때 열 가지 중 무엇을 가 장 먼저 버릴 것인가? 그렇게 여행이 계속되면서 결국 우리 손에는 마지막 한 장의 쪽지만이 남게 된다. 이 작업을 하며 “무엇이 마지막까지 남았나요? 그리고 가장 처음에 버린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어떤 분은 이 작업을 하며 “열 개 모두 나에겐 무척 이나 소중한 것들이다”라며 처음 한 장을 선택해서 버 리는 것조차 몹시 힘들어했다. 고심 끝에 자신이 하 고 있는 ‘일’을 버렸는데, 그 다음부터는 도저히 버릴 게 없다며 아예 쪽지를 뒤집어놓고 잡히는 대로 한 장 씩 버리는 분도 있었다. 이분이 적은 것은 “종교,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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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 앞으로의 거처, 매일 만나는 사람, 참여하고 있 는 모임” 등이었다. 그렇게 짚이는 대로 버리다가 마지 막에 남은 것이 ‘가족’이었는데,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래도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모습이 기억 난다. 이 작업을 하다 보면 사람들한테서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다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건강이나 휴식, 가 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까지 포기해 가며 에너지를 온 통 그곳에 쏟지만, ‘버리고 떠나기’ 여행에서 가장 먼저 버리는 것 역시 대부분 물질이라는 점이다. 돈이나 땅, 소중하게 생각하는 전자 제품, 추억이 있는 노트 등은 아깝고 소중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 혹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수는 아니라는 생각에 큰 갈등 없이 버 리는 것이다. 맨 마지막까지 고민하는 것은 대부분 가 족과 친구이다. 어떤 이는 가족을 버릴 수 없다며 자기 자신을 먼저 버리기도 한다. 이 작업은 자신에게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다 시금 생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내가 현재 가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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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과 내 일상이 대단히 특별하지는 않아도 참 소중 하다”는 것을 알게 만든다. 어디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 지를 쏟을 것인가? “육신은 초벌구이한 옹기처럼 부서지기 쉽고 마음은 종잡을 수 없어라. 그래도 사람은 자주 오늘 일을 내일 로 미루는구나. 죽음이 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데” 라고 옛날 인도의 한 수행자가 노래한 것처럼 우리는 언제 하늘이 부르실지 모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 일이 늘 있을 것 같아도 언젠가는 마지막이 될 하루가 온다. 오늘을 그날처럼 여기며 산다면 인생은 더 풍요 롭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몸이 건강하다고 여유를 부릴 것도, 몸이 아프 다고 두려워할 일도 아니다. 각자가 소중하다고 생각 하는 그것에 사랑을 보내고, 표현할 수 있는 ‘지금’이라 는 시간은, 적어도 살아있는 우리 모두에게는 공평하 게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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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몸보다 훨씬 큰 존재다

김상운

26년간 MBC 보도국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기 자이다. 국제부, 경제부, 정치부 등을 거쳐 뉴스 앵커, 워싱턴 특파원, 국제전문기자, 국제부장 등을 지냈으 며, 지난 10년간 해외 시사 프로인〈지구촌 리포트〉 를 맡고 있다. 한국외대 동시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기자 생활중 미 보스턴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과 커 뮤니케이션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 자신 고 통스러웠고, 그러자 자신의 몸에도 이상이 왔다. 신 이 고통을 만들어놓았다면 그것을 꺼버리는 장치도 만들어놓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과 함께 심리 치료 와 정신 세계, 명상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이 공부하고 경험한 내용을 담아《왓칭》과《마음을 비 우면 얻어지는 것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 외에도 《아버지도 천재는 아니었다》《건강상식사전》등 다 양한 저서가 있다.


|| 나는 팔다리, 머리로 조립된 존재인가? 당신이 진리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고 상상해 보자. 길을 묻고 물어 드디어 히말라야 산중의 한 바위 동굴 에 이른다. 큼지막한 돌멩이를 들어 문을 두드리니 동 굴 안에서 은은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누구신지요?” “저는 ○○○라고 합니다.” “○○○이라는 이름이 당신입니까?” 가만히 생각해 본다. 이름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고, 설사 이름이 없다 해서 ‘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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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이 나는 아니다. “문을 열어주세요. 제가 누군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몸이 당신입니까?” 당신은 잠시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팔이 나인가?’ 아니다. 팔이 없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럼 심장이 나인가?’ 역시 아니다. 인공 심장을 이식받아도 나는 나이다. ‘그럼 두뇌가 나인가?’ 역시 아니다. 두뇌 가 반쪽인 사람도 있으니까. 몸뚱이의 어느 부분도 진 정한 ‘나’는 아니다. 그래서 당신은 엉겁결에 이렇게 대 답한다. “저는 제 몸 전체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나’가 아닌 것들을 조립해 놓는다고 ‘나’가 되나요?” 듣고 보니 그렇다. 팔, 다리, 심장, 두뇌 등 몸의 어느 부분도 따로 떼어놓고 보면 분명히 ‘나’가 아니다. ‘나’가 아닌 것들을 조립해 놓는다고 ‘나’가 될 리 없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동굴 속의 목소리가 다시 말한다. “당신의 몸에서 당신이 ‘나’가 아니라고 했던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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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떼어내 보시지요. 팔, 다리, 심장, 두뇌 다 떼어 내 보세요. 뭐가 남나요?”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나’는 텅 비어 있지 않은가. 당 신이 ‘나’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육신이 알고 보니 허상 아닌가. 육신이 허상이라면 나는 쭉정이라는 말인가? 만일 쭉정이가 아니라면 텅 빈 내 몸을 채우고 있는 것 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스위스의 자연요법 연구가 보겔Alfred Vogel 박사는 잎사 귀 두 개를 따서 실험 보조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 잎 사귀들을 집으로 가져가서 한 잎사귀에겐 애정을 듬뿍 주게. 사랑스러운 말도 해주고 노래도 불러주게. 다른 잎사귀에겐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고. 하지 만 어느 잎사귀든 만지거나 물을 주면 안 되네.” 한 달이 지난 뒤 보겔은 두 잎사귀를 비교해 보았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잎사귀는 말라서 썩어가고 있었 다. 반면 사랑스러운 말과 노래를 들으며 지낸 잎사귀 는 여전히 싱싱했다. 한 달이 더 지났다. 방치된 잎사귀는 완전히 죽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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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다른 잎사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영양분이 완전히 끊겨도 사랑만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잎사귀 속에는 사랑만으로 생존 할 수 있는 ‘뭔가’가 존재하는 게 틀림없다. 이 뭔가는 무엇일까? 그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잎사귀의 상단을 잘라냈 다. 잘라낸 부분은 흙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에너지장 촬영기인 키를리안 카메라로 찍어보면 잘린 부분엔 여 전히 선명한 에너지장이 남아 있는 게 뚜렷하게 보인 다. 나뭇잎의 형체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이것이 잎사귀의 영체다. 모든 만물의 영체는 사랑 덩어리이며, 음식이 아닌 사랑을 양식으로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을 받은 잎사귀가 오 랫동안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도 역시 두 가지 신체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물질적 신체인 육신, 즉 컴퓨터로 치면 하드웨어다. 육 신은 음식물로만 살아간다. 다른 하나는 정신적 신체 인 영체, 즉 소프트웨어다. 영체는 우리 몸에 들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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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영혼을 의미한다. 영체는 사랑으로 살아간다. 하지 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육신을 우리의 모든 것인 줄 알 고 산다. 육신은 껍데기다. 수명이 다 되면 사라진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은 사흘이면 아주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물질로 분해되고 만다. 분해되기 전의 육신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일리노이 의대의 해부학 교수인 몬슨Harry Monsen 박사 에 따르면 체중이 70킬로그램인 사람의 육신을 분리하 면 우선 비누 일곱 개 정도의 지방 덩어리가 나온다고 한다. 또 석회 12킬로그램, 성냥 2,200개비 분량의 인燐, 길이 2.5센티미터의 못에 해당하는 철, 한 숟가락 분 량의 유황, 비철금속 30그램 등도 나온다. 이 물질들을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6천 원어치에 불과하다. 이 물 질들은 시간이 지나 더 단순한 물질로 분해되고, 결국 에는 한 줌의 흙으로 변해 대지에서 빌려왔던 물질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게 된다. 돈으로 따지면 단 한 푼어 치도 안 된다. 정말 한 푼어치의 값도 안 되는 흙 한 줌 이 나의 모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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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이유 전신마취를 경험해 본 적 있는가? 전신마취를 하면 의식이 완전히 마비되기 때문에 바깥세상을 까맣게 잊 게 된다.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그 어떤 것도 기억할 수 없을 뿐더러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다. 의식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 신마취 상태에서 완전한 죽음을 경험하는 환자들의 사 례가 종종 있다. 만일 영혼이 두뇌의 일부라면 두뇌 기능이 마비되는 전신마취중에는 당연히 영혼도 마비되어야 한다. 하지 만 미국 임사체험연구재단이 전신마취 상태에서 임사 체험한 사람들을 조사해 봤더니 그 중 83퍼센트가 “평 소보다 말짱한 마음으로 하늘나라를 여행했다”고 대답 했다고 한다. 전신이 마취된 상태에서 영혼은 거꾸로 몸을 벗어나 영계를 여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혼이 두뇌와는 별도의 존재임을 말해주는 증거다. 역시 미국 임사체험연구재단의 롱Jeffrey Long 박사가 임 사 체험자 61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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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센트인 287명이 죽음 속에서 지상의 일을 생생하게 목 격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이 이들이 한 이야기의 진위 여 부를 확인해 본 결과 97.6퍼센트인 280명의 증언 내용이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신경과학자 에클레스 경Sir John Eccles은

“영혼은 두뇌와 완전히 별개의 존재다. 우리는

물질 세계에서는 몸과 두뇌를 가진 물질적 존재이다. 하지만 육신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 고 말한다. 양자물리학자인 울프F. A. Wolf 박사도 “오감 으로는 분명히 인지할 수 없지만 영혼이 존재한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육신은 기껏해야 100년 남짓 살다가 사라진다. 일시 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은 원래가 참이 아닌 헛것이다. 하지만 영혼은 수억 년 수조 년 영겁을 산 다. 따라서 영혼의 눈으로 보면 육신은 ‘진정한 나’가 아니다. 육신은 단지 지구라는 무대에서 펼치는 인생 연극에 쓰고 다시 되돌려주는 소품에 불과한 것이다. 영혼이 존재함을 알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들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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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2004년 2월, 어둠이 깔린 주택가 뒷골목에서 한 이 십대 여성이 피살된 채 발견됐다. 아무런 단서도 없었 다. 그런데 며칠 뒤 한 삼십대 남자가 인근의 중국집에 찾아와 음식을 먹고 난 뒤 종업원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서 한 여자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맞 나요?” “네,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왜 물으시죠?” 그 남자는 2∼3분 정도 서성이다가 뒷골목으로 사라 졌다. 경찰은 그가 범행 현장을 다시 찾은 범인이라고 판단하고, 중국집 종업원에게 최면을 걸어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기억해 내게 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정확 한 몽타주를 만들었고, 2년여 간의 추적 끝에 범인은 덜미를 잡혔다. MBC, SBS 등에도 방영됐던 실제 사건 이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아무도 없는 부잣집에 도둑이 들어와 침실에 있는 귀중품을 털어 달아났다. 유일한 목격자는 침실에 있던 선인장뿐이었 다. 경찰은 선인장 표면에 거짓말탐지기의 일종인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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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감지기를 붙여놓고는 용의자들을 한 명씩 선인장과 대면시켰다. 그런데 선인장이 한 용의자를 대면하는 순간 피부감지기의 그래프가 비상이 걸린 듯 엄청나게 치솟았다. 수사관은 그 용의자를 집중 추궁한 끝에 범 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눈으로 정확히 보지 못하고, 따라서 두뇌가 기억하 지 못하는 것을 최면 상태에서 또렷이 기억해 내는 것 도 놀랍지만, 눈도 없고 귀도 없는 선인장은 또 어떻게 이런 반응을 보일까? 대답은 자명하다. 사람에게 영혼 이 있는 것처럼 선인장에도 나름의 영체가 있기 때문 이다. 만물이 마찬가지다. 만물이 우리의 일거수일투 족을 낱낱이 지켜보고 기록한다. 당신은 궁금할 것이 다. “도대체 영체는 왜 모든 일들을 낱낱이 기록해 두 는 거지?” 이유는 바로 영혼의 양심을 위해서다. 영혼은 자신 의 잘잘못을 빠짐없이 기록해 뒀다가 반드시 빚을 갚 는다. 이번 삶을 살면서 남에게 상처를 주고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는다면 다음 삶에서는 스스로 상처를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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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이다. 상처의 깊이를 스스로 체험하고 뉘우치기 위 해서다. 우리는 인생이 단 한 번으로 끝날 거라 생각하 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영혼의 여행Journey of Souls》이란 책으로 널리 알려진 뉴턴Michael Newton 박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최면으로 치 료하면서 그들로부터 영혼 세계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정교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성을 해치 거나 학대한 남성은 다음 생에서 여성으로 다시 태어 납니다. 자신이 여성에게 가했던 고통을 스스로 느껴 보고 깨닫도록 하는 거죠. 강제가 아닙니다. 가해자의 영혼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 그렇게 환생을 선 택하는 겁니다.” 단죄가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 배움을 선택한다는 뜻 이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육신 을 벗은 영혼들은 바로 신의 마음 조각들이다. 늘 사 랑, 자비, 연민, 평화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어떻게 단죄, 보복 등의 감정을 품고 지상에 내려올 수 있겠는 가? 각자의 영혼은 자신의 과오를 되돌아보고 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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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한 아픔을 스스로 느껴보고자 한다. 모든 상처가 낱 낱이 기록되는 것은 바로 이를 위해서다. 그렇다면 인 생이 돌고 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인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제임스는 여섯 살 난 평범한 소년이다. 그런데 이 소 년은 두 살 때부터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불타고 있어요! 빠져나올 수 없어요! 일본 군 기지에 폭격하러 가다가 방공포에 맞았어요. 포탄 이 전투기 엔진에 맞아버렸어요.” 처음에 부모는 아이가 꿈속에서 상상해 내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겨우 두 살의 아이가 아무도 가르쳐주 지 않은 전쟁 용어를 익숙하게 말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 애는 전생을 기억하는지도 몰라.” 얘기를 전해들 은 외할머니가 말했다. 아이의 엄마는 말도 안 되는 얘 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 정으로 전생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했다. 전문가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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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게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내도록 했다. 그러자 악몽을 꾸는 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 또래의 어린이들은 전생을 잘 기억하죠. 그에 반 해 어른이 되면 틀에 짜인 사고방식에 젖어 전생의 기 억을 까먹게 되죠.” 영혼은 원래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기 직전 전생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지만, 간혹 덜 지워지는 경우가 있다는 전문가의 설명이었다. 제임스의 아버지는 연구 직에 근무하는 탐구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아 들이 기억하는 것이 정말 사실인지 궁금했다. “제임스, 추락 당한 전투기 이름이 뭐지?” “코세어Corair 전투기였어요. 항모에 착륙할 때 전투 기 바퀴에 구멍이 나는 일이 참 많았어요.” “항모 이름은 뭐였는데?” “나토마.” “그럼 전투가 벌어진 곳은?” “태평양의 이오지마 섬이었어요.” 아버지는 인터넷을 이용해 군사 기록을 뒤지고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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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들을 찾아다니며 사실을 확 인해 보았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아들의 말이 역사적 사실에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태평양에 있 던 미국 전투기 조종사들은 실제로 코세어 전투기를 몰았었다. 또 이오지마 섬 전투에 ‘나토마 베이’라는 항 모가 참가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제임스, 그때 네 이름은 뭐였지?” “제임스. 지금과 똑같았어요.” 아이의 아버지는 당시 이오지마 전투에서 전사했던 유일한 조종사가 제임스 허스튼James Huston이었음을 알 아냈다. 전생은 미신이라고만 생각했던 제임스의 아버 지는 아들이 정말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고 믿게 됐다. “전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제임스가 어떻게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일들을 기억해 내겠습니까?” 아이의 부모는 전사한 전투기 조종사의 여동생을 찾 아 편지도 썼다. 그녀도 제임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 고서는 모든 것을 믿게 됐다. “이 아이가 전사했던 오빠의 환생임이 틀림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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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알고 있던 일들을 훤히 알고 있는 걸요.” 제임스의 이야기는 실제로 미국 ABC TV의 인기 뉴 스 프로그램〈프라임타임〉에 상세히 소개되었다. 과연 제임스의 사례는 특별한 이야기에 불과할까? 버지니아 대학의 스티븐슨Ian Stevenson 교수는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3천여 명의 사람들을 엄격한 검증 기 준을 적용해 조사했다. 그 중 한 쌍둥이 형제는 어렸을 때 아무도 알 수 없는 언어로 서로 대화를 했다. “거참, 옹알이 한번 특이하게 하는군.” 하지만 3년이 지나도 똑같은 말투로 계속 옹알거리 자 부모는 뭔가 이상하다고 판단했다. 언어학자들은 그들의 대화를 녹음해 들어보고 혀를 내둘렀다. “이건 고대 아랍어인 아람어야. 예수 시대에 쓰던 아 람어.” 워낙 오래 전에 쓰이던 언어라 현대 아랍 사람들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었다. 사실 윤회는 거의 모든 종교에서 언급한다. 불교, 힌 두교, 도교, 신도 등 아시아 종교는 물론, 아프리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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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토착 종교들도 윤회를 믿는다. 기독교의 성경에도 원래 환생에 관한 언급이 있었지만 325년 로 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환생에 관한 구절들을 모조 리 삭제해 버렸다.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선언 한 최초의 황제였던 그가, 인간이 환생을 거듭하며 스 스로 영혼을 갈고 닦는다면 교회의 권위가 약화될 거 라 여겨 윤회 구절을 삭제했다고 보는 분석이 지배적 이다. 급기야 553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제2차 콘스 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윤회를 이단 사상으로 규정했다. 과학계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생을 인정하지 않았 다. 하지만 양자물리학 실험은 절대영도에서도, 완전 진공 상태에서도 영혼이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해 냈다. 영혼은 영생한다는 얘기다. 자연히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조물주는 수만 년 수억 년 영생하는 영혼을 왜 만들 었을까? 단 한 번의 인생을 살라고 영구불멸의 영혼을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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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겁을 사는 영혼의| 큰 눈으로 바라보면 인생이 고통으로 가득한 것은 ‘나’가 누군지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인생은 돌고 돈다. 우리는 육신이라는 옷을 입고 잠시 지구에 내려와 연극을 하고 있을 따름 이다. 고통도, 고통을 겪는 육신 자체도 인생 연기를 위한 소품이다. 인생이라는 무대에 올라서는 등장인물 도 역시 모두 나를 위해 연기하는 소품이기는 마찬가 지다. 이 사실을 상기하는 순간 눈앞에 닥친 고통의 목 적을 이해하고 감사히 받아들이게 된다. 모든 고통은 우리가 육신이라는 겉모습으로 지구에 내려오기 전 우리 영혼이 스스로 설계해 놓은 것이다. 내가 ‘나쁜 일’이라고 꼬리표를 다는 모든 일들이 사실 은 영적 성장을 위한 배움의 기회이다. 나와 마주치는 ‘나쁜 사람들’도 죄다 스승이다. 이 세상에는 ‘나쁜 일’ ‘나쁜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일도, 사람도 없다. 영겁을 사는 영혼의 큰 눈으로 나의 뒷모습을 바라 보자. 나는 어떤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고 있는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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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의 내 모습은 어떤가? 세월이 훌쩍 흘러 나의 장례식장이다. 가족들의 표 정은 어떤가? 아이들의 표정은? 그들은 나의 죽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그들에게 어떤 흔 적을 남겼는가? 나는 그들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가하 진 않았는가? 사소한 일로 화를 내지는 않았는가? 나 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사랑했는가? 장례식이 끝나고 10년이 더 흘렀다. 내가 살던 집은 그대로 있는가? 지금은 누가 살고 있는가? 집안 구석 구석에 남겨놓은 나의 흔적은 무엇인가? 나는 많은 사 랑의 흔적을 남겨놓았는가? 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가? 그들은 어떤 표정으로 살아가는가? 만일 내가 다시 되살아난다면 그들에게 무슨 말을 꼭 하고 싶은가? 100년이 더 지났다. 내 육신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는가? 내가 품었던 분노, 증오, 좌절, 슬픔 등 온갖 감정들은 어찌됐는가? 내가 그토록 아끼던 물건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모든 집착이 바람처럼 사라진다. 마음이 텅 비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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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평화가 밀려온다. 참된 기쁨이다. 참된 기쁨은 바 깥에서 오지 않는다. 쌓아놓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권 력이 아무리 강해도, 친구들이 아무리 많아도 이것들 이 참된 기쁨이 되진 않는다. 참된 기쁨은 사랑 가득한 영혼에서 흘러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무게에 짓 눌린 때는 영혼에 기대야 한다. 꿈이 이뤄지지 않는가? 인생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 는가? 마음이 늘 불안한가? 그럴 땐 이 질문을 던져보 라. “나는 나를 텅 비웠는가?”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는 생각, 될 대로 되라는 생각…… 마음속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몽땅 비워내라. 의지도 비워내라. 텅 빈 마음이 나의 영혼이다. 영혼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신비로운 존재다. 이 신비한 눈 길을 느끼는 순간 세상살이로 얼룩진 모든 고통과 상 처는 저절로 씻겨나갈 것이고, 내가 맡은 배역을 감사 히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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