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의 소책자 3호) 사랑을 말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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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우러 온 당신에게 3

환우와 가족이 가슴으로 쓴 편지

사랑을 말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말들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사랑을 말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2013년 7월 15일 초판 1쇄 발행. 백천문화재단에서 발행했습니다. 강경미 외 14명의 환우와 가족들, 그리고 치유 글쓰기 안내자 박미라가 함께 쓰고, 표지 그림은 봄례가 그렸습니다. 도서출판 샨티가 기획 및 디자인, 제작 등을 총괄 진행하였습니다. 필름 출력은 한국커뮤니케이션, 인쇄는 영프린팅, 제본은 쌍용제책에서 각각 하였습니다. 이 책에 대한 저작권은 백천문화재단(T. 031-421-5145)과 도서출판 샨티(T. 02-3143-6360)에 있으므로 원고 재사용 등에 관해서는 반드시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합니다. 이 책자를 여러 환우분들과 나누고 싶은 병원 및 단체는 백천문화재단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이 책은 비매품이며, 백천문화재단의 재원과 여러분들의 후원금으로 만들어져 배포됩니다.   후원계좌: 국민은행 271201-04-152090(예금주: 백천문화재단)


환우와 가족이 가슴으로 쓴 편지

사랑을 말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환우와 환우 가족들 그리고 박미라 지음

백천문화재단


●  발간사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편지로 써보세요

어느덧 ‘사랑을 배우러 온 당신에게’ 시리즈 세 번째 책 이 여러분에게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2012년 6월《나는 날마다 나아지고 있다》를 시작으로《‘오늘 하루’라는 선 물》에 이어 세 번째 책《사랑을 말하기에 아직 늦지 않 았습니다》를 펴냈습니다. 이 소책자 시리즈는 1년에 두 차례씩 여러분께 새로운 감동을 드리고자 기획, 진행되 고 있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출간한 세 번째 책은 환우가 가족(또는 가 까운 지인)에게, 또 가족이 환우에게 쓰는 편지글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가슴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특히나 자신의 삶을 전폭적으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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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게 만드는 사건인 ‘병’을 얻었을 때는 더할 나위 없 이 그러할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혹은 후회스럽게 살아왔는지, 이 병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 스럽고 두려운지, 그럼에도 잘 이겨내고 있는 자신이 얼마 나 대견스럽고 사랑스러운지,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앞으로 무얼 하고 싶은지 등등. 그러나 자신의 병수발을 들어주며 곁을 지키는 가족 에게는 오히려 솔직하게 마음을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가 가족을 힘들게 할까봐, 혹은 표현해 본 적이 없어 어색해 서, 서운함이나 미움이 풀리지 않아서 등등의 이유로 마 음을 표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과는 달리 몸이 힘들다 보니 짜증이나 화를 내놓고 그런 자신을 책 망하며 보낸 시간도 있겠지요. 이런 일은 환자만이 아니라 간호하는 가족도 마찬가 지일 겁니다. 선의의 거짓말을 하게 되거나 약해진 모습 을 보이지 않으려고 혼자 삭이는 슬픔이나 고통도 만만 치 않았겠지요. 서로가 서로의 힘듦과 마음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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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물꼬를 트지 못해, 그러려니 짐작만 하고 넘어 가는 경우도 많았을 테고요. 여기, 환우와 또 환우 가족의 입장에서 쓴 열다섯 편의 편지글이 있습니다. 글에는 서운함과 고마움과 죄책감과 미안함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탕을 가만 들 여다보면 ‘사랑’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에 대한 기대와 자신에 대한 실망 등이 뒤엉켜 있지만, 그 역시 찬찬히 짚어보면 잘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사랑 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에 치유 글쓰기 안내자로 참여한 박미라 씨는 거 칠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맘껏 표현해 보라고 권합니다. 그 편지를 상대에게 당장 보여줄 용도로 쓰지는 말고, 우 선은 자기의 것들을 쏟아내는 차원에서 작업을 하다 보 면, 그래서 고치고 또 고치고 다듬다 보면, 불편한 감정 은 어느 정도 해소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하는 삶 의 통찰과 지혜가 올라올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편지를 쓰거나 혹은 아픈 몸(구체적으로 아픈 기관. 예를 들 어 위나 심장)에게 편지를 써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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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글들을 읽다 보면 여러분이 환우의 처지 에 있건 가족의 처지에 있건 서로에게 마음을 어떻게 표 현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아이디어를 얻게 될 듯합니 다. 또 여러분과 유사한 상황의 글을 마주하게 된다면, 한 번 더 자신의 상황을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도 있게 되겠지요. 이 책을 받아보신 환우와 가족 여러분! 여러분도 이 책 을 읽고 용기 내어 편지를 써보시길 권합니다. 보내든 보내지 않든, 진심 가득한 편지로 인해 여러분의 관계는 이전보다 더욱더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또한 편지를 쓰 는 동안 여러분 스스로의 마음에도 조금씩 치유가 일어 나리라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불현듯 찾아온 익숙하지 않은 현실이지만 그 안에서 소중한 선물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고마운 일이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환우와 가족 모두 사랑이라는 공감대 안에서 몸의 병을 좀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6개월에 한 번씩 나오는 ‘사랑을 배우러 온 당신에게’ 시리즈도 어떻게 보면 재단이 여러분께 쓰는 사랑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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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라 저희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껏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저희의 마 음도 여러분과 함께 치유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여러분께서 저 희 재단에 보내주시는 감사의 글이나 작은 후원금도 저 희에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출간될 새로운 책에 대해서도 변함없는 관심 부탁드립니다. 고 맙습니다.

2013년 6월 백천문화재단 이사장 조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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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발간사 |  4

1부  환우가 가족에게 무조건 나를 진실로 진실로 사랑할 것 |강경미  12 닮은 꼴 모자母子 |문경보  26 우리도 이제 평범한 부부처럼 살아봐요 |최진숙  39 너, 스펙 좀 더 쌓아서 가야 하지 않겠니? |허영은  48 세상에서 가장 값진 금은 바로 ‘지금’ |조미화  56 잃은 것보다는 남은 것에 감사하기 |정도현  66 우리 또 싸울까? |이명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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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가족이 환우에게`` 내 마음 안에 있는 엄마의 방 |권민희  88 지금 그대로 괜찮아 |김서린  99 우리 다만 오늘을 살아요 |김정온  106 이제 아빠가 어떤 분인지 알겠어요 |김이담, 김이환  117 아빠와 함께 맞이하고 싶은 ‘내년 봄’ |박수진  127 사랑한다는 말, 자주 못해 미안해요 |허학범  138 남은 사랑 아낌없이 드리렵니다 |박수규  147

3부  치유를 위한 편지 쓰기 사랑을 말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박미라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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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환우가 가족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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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나를 진실로 진실로 사랑할 것 \\ 강경미

강경미는 40대 중반의 여성으로, 2011년 유 방암 2기 진단을 받고 같은 해 10월 수술을 받았다. 2012년 4월까지 방사선 항암 치료 를 마쳤으며, 이후 난소 억제 주사 2년, 항호 르몬제 5년 처방을 받았다. 현재 난소 억제 주사와 항호르몬제로 치료를 받은 지 1년이 되었다.

울 엄마! 엄마에게 편지 쓰기는 처음인 것 같아. 지금까지 편지 한 번 안 썼다니 참 무심한 딸이다. 게다가 아직도 버릇 이 없어요, 마흔여섯이나 먹어서도 반말이라니. 그래도 내가 꼬박꼬박 존댓말 하면 엄마도 어색할 걸? 나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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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없는 딸 계속해도 되지, 엄마? 사실 그동안 너무 모 범적으로만 살아왔거든요. 이젠 모범생 말고 날라리로 살고 싶어. 엄마, 생각나? 나 낳았을 때 했다는 얘기 말이야. 엄마 는 날 낳고 좋아서 그랬다지? “딸이 하나라 아쉬웠는데 잘됐다! 이제 우리 경자가 외롭지 않겠네.” 딸이라서 반긴 건 고마웠는데 태어날 때부터 언니 위 주였다는 사실. 엄마가 그 얘기를 여러 번 하실 때마다 ‘난 역시 조연이었군’ 하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그러고 는 엄마가 이렇게 얘기했더라면 참 좋았겠다고 구시렁 거렸어. “얘가 딸이라 다행이다! 언니가 있으니 외롭지 않겠네.” 어쨌거나 막 세상에 나온 아기는 5남매 중의 넷째, 거 기다 둘째딸이라는 자리를 불만 없이 받아들였나봐. 엄 마가 종종 얘기해 줬잖아요. 나는 젖을 빨 때부터 온순 한 아기였다고. 젖을 떼려고 젖꼭지에 쓴 약을 발랐는데 단 한 번 빨아보고는 바로 떨어졌다고. 남동생은 쓰거나 말거나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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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뭐든지 혼자 알아서 하는 착한 딸. 작은딸은 엄마 아부지 속 한 번 안 썩히고 살았네. 그 딸이 마흔넷이나 먹어서 한꺼번에 큰 사고를 치고 말았으니…… 난데없는 유방암 환자가 되어서 말 이야. 어려서 순하게 큰 사람도 언젠가 꼭 정해진 만큼 의 말썽을 피운다더니 그 말이 꼭 맞네요. 그래도 치료 끝난 지 벌써 1년이 넘었어요. 이젠 머리카락도 많이 자 라서 환자 티가 전혀 안 나. 아직도 난소 억제 주사 1년 더 맞고 호르몬 약도 4년을 더 먹어야 하지만, 이 정도야 뭐 아무것도 아니죠. 첫 항암할 때, 긴장은 했지만 별로 겁나지는 않았어. 내가 사소한 일에는 겁이 많은데 큰일에는 오히려 대범 하다우. 유방암 환자들은 항암제 중에서 특히 빨간약을 무서워해요. 약 색깔이 빨간색이라 별명이 빨간약이야. 하필 빨간색인 게 기분 나쁜데다가 토하고 머리카락 빠 지고 온갖 부작용이 생기니까. 그런데 막상 그 약을 보 니 진한 주홍색이에요. 예쁘더라고. 내 눈에는 진홍색 스웨터 색깔 같았어요. ‘저 예쁜 스웨터가 나를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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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싸주겠지?’ 하는 생각을 했어. 항암을 좋은 마음으로 고맙게 받자고 마음먹으니 겁이 안 나데요. 무엇보다 집 에서 엄마가 따뜻한 밥을 해놓고 기다릴 걸 생각하니 마 음이 편안했어. 항암 치료하는 동안 엄마 아부지가 두 달 동안 와 계 셨잖아요. 나, 마흔다섯에 금지옥엽 외동딸이 되어보았 네. 넷째가 생전 처음 누려보는 호사였죠. 엄마는 매일 반찬을 만들고 아부지는 구석구석 집안 청소를 하시고. 새벽에 깨어보면 딸을 위해 조용조용 기도하는 목소리 가 들리고. 늙으신 부모님을 도와드리기는커녕 외려 불 러다가 고생을 시키다니,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되 었지. 그래도 온전히 나만을 위한 사랑을 받으니까 진짜 행복했어요. 엄마랑 매일 수다 떠는 것도 얼마나 재밌던지. 아침부 터 자기 전까지 우리 수다는 멈추질 않았었지. 사실 그 게 가장 중요한 일과였어. 어릴 때 이후로 엄마 아부지 랑 이렇게 가까이 지내본 적이 없었잖아. 아니 어릴 때 조차도 그러지 못했다. 늘 가게에 나가 계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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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얘기는 곧잘 아부지 흉보기로 이어지곤 했죠. 그 러면 아부지는 또 변명하느라 바쁘셨고. 난 속으로 ‘일흔 넷과 일흔아홉 살 부부도 저렇게 티격태격하는구나. 재밌 다. 큭큭’ 이랬다우. 솔직히 엄마는 여장부 스타일이고 아 부지는 자린고비 스타일이잖우. 그러니 맞지 않을 수밖에 요. 그때 엄마 얘기 듣고 처음 알았어. 신혼이었던 20대 시 절, 장사를 먼저 시작한 분도 엄마였다는 걸. 남자들만 드 나들던 건어물 산지에 혼자 가서 거뜬히 물건을 떼어 오 신 일, 엄마가 발판을 닦아놓으면 아부지가 뒤를 이어 자 리를 잡으셨다는 것, 건어물 가게, 신발 가게, 중국집, 옷가 게 모두 그랬다니, 울 엄마 진짜 멋졌어! 엄마는 작은 고추 가 맵다는 걸 확실하게 증명하는 사람이야. 나 그때, 엄마랑 그렇게 있으면서 그동안 쌓아두었던 억울했던 일들, 속 썩은 일들을 시원히 다 털어놓았어. 아마 처음이었을 거야. 이전까지는 엄마가 나 사는 데 관심이 없었거든. 평생 장남과 장녀만으로도 마음이 꽉 차 있었으니까. 그래서 아예 입 닫고 살았어요. 근데 그 때는 엄마가 마치 나를 새로 키우는 것 같았어. 나 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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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 시댁에서 하느라 엄청 고생했잖아. 그때 못 받아본 산후 조리를 다시 받는 기분이었다니까요. 엄마와 내가 이렇게 친해질 줄은 몰랐어요. 언니가 엄 마를 빼닮았고 둘이 같은 과라고 여겼거든. 그런데 엄마 얘기를 들으면서, 또 내 지난날을 얘기하면서 보니까 오 히려 내가 더 엄마를 닮았더라고. 언니는 외모를 닮았지 만 난 엄마의 근성을 닮았던 거야. 엄마도 둘째딸, 나도 둘째딸. 모녀는 둘째에서 둘째로도 이어지는 건가? 게다가 이렇게 마음을 터놓게 되리라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에요. 그동안은 친구들에게 하소연하고 위로받 고 그랬지. 그런데 엄마에게 하는 얘기는 또 다른 꿀맛 이더라고. ‘내가 늘 기대했던 자상함이 우리 엄마 속에 있었구나. 그동안 못했던 엄마 노릇을 한꺼번에 다 하시 는구나. 내가 속단했던 것보다 울 엄마는 훨씬 더 멋진 분이구나.’ 마치지 못한 숙제 같은 찜찜함, 그게 이전까지 엄마 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감정이었어. 나야 늘 뒷전이었잖 아. 엄마는 늘 그러셨지.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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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 없다고. 하지만 나도 자식을 낳아 키워보니 알겠어 요. 다섯 손가락 중에서도 더 아픈 손가락과 덜 아픈 손 가락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런 게 사람이라는 걸. 완벽 하다면 사람이 아니라 신이겠지. 엄마랑 지낸 두 달 동 안 그 미진함과 찜찜함을 마음껏 풀었어요. 해묵은 껄끄 러움이 싹 씻겨나가 버려 정말 속이 다 후련하더라. 같이 지내는 동안 가장 고마웠던 건 엄마가 끝내 그 말 을 하지 않은 거예요. “교회 가라, 하느님 믿어야 병이 낫 는다” 그런 말. 엄마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었을 텐데 그 마음을 내려놓은 게 정말 고마웠어요. 수십 년 그 말씀을 하시고도 날 배려해서 참으신 거, 정말 고마웠어요. 엄마 도 이제는 조금 인정하시는 거 같아요. 기독교 신자가 아 니어도 얼마든지 진실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지난 일은 다 잊어. 오직 너 하나만 생각해. 앞으로는 스트레스 받지 말고 너만 위해서 살아. 항암하면 너 힘 들어하는 거 어떻게 보나 그게 제일로 걱정이었다. 근데 이렇게 명랑하게 잘 지내니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우 리 딸 참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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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이렇게 말해주어서 정말 기뻤어. 내가 가장 힘들 때 버팀목이 되어주셔서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라요. 지 난 세월은 이제 다 상관없어졌어. 어쩌면 지금 날 지켜주 려고, 그동안 사랑을 저금해 두신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마흔다섯 중년의 나이에 엄마 아부지를 독차지할 수 있다니, 평생 못한 걸 해볼 수 있어 얼마나 복인지. 난 이렇게 사랑을 받고 싶었나 봐요. 인간은 결국 혼자지만, 또 결코 혼자서만 살 수는 없는 거였네. 나 그동안 겉으론 아닌 척, 씩씩한 척했지만 사실은 늘 외로웠어요. 그런데 엄마 아부지의 정성과 사랑이 내 묵은 원망을 살살 녹여버렸어. 굳이 말로 가르치지 않아도, 진실한 사랑과 관심은 사람을 저절로 깨닫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 그리고 세상을 살아갈 힘을, 고통을 견뎌낼 힘을 사 랑에게서 얻는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사람을 일으켜세 우는 건 결국 사랑이었어요. 엄마가 그걸 보여주었어요.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내가 얘기했죠? 유방암은 치료가 잘되는 편이지만 재 발과 전이도 잘되는 녀석이라고. 특히 마감 기한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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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15년 뒤에도 재발을 할 수 있다니까. 늘 재발과 전이의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하는 거래. 얼마가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남은 인생, 더 절박 하게 잘살아야겠다고 느끼고 싶었어. 언제라도 이 삶을 떠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절실하 다는 걸, 나도 빨리 깨닫고 싶었어. 나는 나를 자꾸 재촉 했지. 뭔가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그러다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무얼 해야 후회하지 않고 죽을 수 있을까? 30 년부터 시작을 해보았어요. 30년을 더 살 경우 하고 싶 은 일은? 몇 페이지를 적을 만큼 아주 많더라고. 다시 10 년을 더 살 경우로 바꿔보았지. 그러자 조금 줄어들었 어. 5년, 2년, 만약 단 하루라면? 오늘만이 전부라면 무얼 할 수 있을까? 무얼 하고 싶을까? 숨 쉬고 밥 먹고 수다 떨고 웃고 사람들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그리고 나 자신을 꼭 껴안아주기. 그 이상 무엇 을 더 할 수 있을까? 하루가 남든 30년이 남든 나는 그냥 나 자신으로 살기로 했어요. 나와 연애하면서, 나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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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사랑하면서. 그동안 내가 가장 못했던 것이 바로 그 거니까. 그냥 매일을 행복하게 살기로 한 거야. 그러고 나니 뭔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조바심 이 사라지데요. 매일매일을 어떻게 행복하게 살 것인지, 그것만 궁리하니까. 여전히 화나고 외롭고 아플 때가 있 지만 그래도 행복을 바라보려고 해요. 해를 따라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처럼 말이지. 유방암 환자가 되고 나서 선물을 여러 개 받았어.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깜짝 선물이야. 첫 번째는 눈물. 눈물을 되찾았어요. 꼭 슬퍼서도 아닌데 자주 울어요. 책을 읽다 가도 울고, 드라마를 보다가도 울고, 남편 얘기를 듣다가 도 울고. 이제는 울보가 되었네. 나 언젠가부터 잘 울지를 못했어. 정말 눈물이 터져야 할 상황인데도 눈물은 흐르 지 않았어요. 가슴은 콱 막혀 미칠 것 같은데 눈물이 나오 지 않는 거야. 내 속에서 울음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무언 가가 있었나 봐요. 이제는 그 봉인이 풀려버린 거야. 난 이 런 눈물이 너무 좋아요. 나는 이 해방이 너무너무 좋아. 속 으로 만세까지 불렀다니까. 눈물 해방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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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내 몸에 대한 사랑이야. 수술과 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느낀 건데 몸은 참 정직해요. 시시때때 로 변덕을 떠는 마음과는 다르다니까. 내 마음을 살피듯 내 몸도 세심히 살펴야 하는 거였어. 나는 그동안 몸이 하는 소리를 무시하며 살아왔거든요. 결코 몸이 마음보 다 가볍지 않은 것인데. 그래서 이제는 내 몸이 무얼 하 든 지지하고 격려해 줄 거야. 내 몸이 어디까지 갈 수 있 는지 믿고 지켜봐 줄 테야. 내 자식을 키우듯, 내 몸을 어 여삐 고이고이 키우려고 해요. 그리고 유방암은 내 인생의 숙제가 뭔지 가르쳐주었 어요. 나보다 타인에게 얽매여 사는 것, 원하지 않는데 도 타인의 요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게 평생을 두 고 해결해야 할 숙제였어. 결혼 생활 내내 스트레스에 휘둘려 살았어요. 하고 싶지 않았던 도리와 의무감에서 벗어나지를 못했고, 하고 싶지만 하지 못했던 말이 쌓여 갔어. 남들이 나를 이해해 주길,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주길 기대했지. 암이 찾아오기까지 그 기대를 놓지 못했 어요. 알고 보니 나는 남들이 내게 줄 수 없는 것들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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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어요. 나에게서 찾아야 할 것들을 남에게서 찾으려 한 거야. 사랑, 따뜻함, 관심, 친절, 예의, 위로는 내가 나에 게 주어야 할 것이었더라고. 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나를 타인의 평가에 내맡기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 것! 그게 내 병의 원인이에요. 나 자신에게 그리 했다면 남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 았을 테고, 외로움과 분노, 두려움도 없었을 테니까. 유 방암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일도 의미가 없다는 걸 알려주었어. 내 마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거부해도 괜찮다고 말이에요. 더불어 인생의 셈법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전에는 누군가에게 열 개를 주면, 필요할 때 다시 열 개를 돌려 받을 수 있을 줄 알았거든. 아니었어. 주려고 했으면 단 한 개도 돌려받을 생각을 말아야 했어요. 그래서 주는 게 아깝다면, 아예 내주지 말았어야 했고, 주고 싶을 때 주고 싶은 만큼만 주었어야 했어요. 그것이 진솔한 삶이 더라고요. 사실은 주고 싶지 않은데 착한 척 다 내어주 는 거짓, 나는 그렇게 살아왔거든. 이제는 돌려받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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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고 원망하는 짓은 그만둘 거야. 누구에게든 주고 싶 은 만큼만 주고 되돌려 받기를 기대하지 않을 거야. 다 주어도 하나도 안 준 것처럼 가벼울 수 있다면, 그때 아 낌없이 주겠어요. 어설픈 천사 흉내 그만 내고 나 자신 에게 진짜 천사가 되어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리고 더 이상 사람들을 분석하거나 판단하고 싶지 않아요.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겪어야 할 경험이 남아 있는 거려니, 뭔가 체험하고 깨닫고 싶은 것들이 있는 거 려니 생각하고 나는 내 길을 가려고요. 내가 진정 해야 할 것은 무조건 나를 진실로 진실로 사 랑하는 것, 내 안의 보물을 끊임없이 발견해 내는 것, 그 리고 날마다 자신에게 웃어주는 것. 뭐든 하고 싶은 만 큼만, 즐거운 만큼만 하는 거야. 책에 이런 말이 나오네. 어깨 힘주고 너무 ‘열’심히 살지 말라고, ‘아홉’심히만 살 라고. ‘아홉심히만’이라! 그 말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 래, 인생 그거 아홉심히만 살아보지 뭐. 그리고 남들이 그러잖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아니, 난 즐길 수 없 으면 피할래요. 매 순간을 두려움 없이 행복하게 즐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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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어요. 엄마, 이젠 걱정하지 말아요. 더 이상 과거를 후회하지 않을 거니까. 지나고 보니 삶에서 이유 없는 것, 필요 없 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살다 보면 뭐, 또다시 외 로움과 슬픔, 고통이 찾아오겠지. 어쩌면 또다시 누군가 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르고. 하지만 예전처럼 꽉 움켜쥐 고 있지는 않겠어요. 봄바람에 흩어지는 벚꽃처럼 흘려 버릴 거야. 그러고 나면 기쁨과 사랑도 찾아오겠지? 그 러면 그것에 흠뻑 취해 춤을 출 거야. 엄마, 우리 그렇게 살아요. 산다는 건 놀랍고도 아름다운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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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 꼴 모자母子 \\ 문경보

문경보는 40대 후반의 남성으로, 20세에 당 뇨병이 발병하여 현재까지 하루 세 알의 알 약과 인슐린 60단위를 맞으며 조절하고 있 다. 41세에 심근경색을 일으켜 시술을 받은 뒤 계속 통원 치료를 하고 있다. 2007년 약 물 복용 등이 문제가 되어 간경화가 발생했 고, 당뇨로 인해 눈에 이상이 생겨 세 차례 의 레이저 시술을 받았다.

어머니, 비가 오네요. 왜 비만 오면 제 마음은 차분해지고 좋아지는지 모르 겠어요. 병과 친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부쩍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 날은 눈물을 흘려도 남들이 그저 감상에 젖어서 그러나 보다 생각해 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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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아서 그런가 봐요. 눈부시게 화사하고 맑은 날, 거리 에서 우울한 표정을 짓거나 눈물 흘리는 것이 부끄러워 그런지도 모르겠고요. 2006년 여름, 거리에서 심근경색을 일으켜 쓰러지고, 보름간 두려움 속에 병원에 있었지요. 스텐트 삽입술을 잘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비록 병가를 낸 것이지만 모 처럼 집에서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지요. 하지만 저는 그 당시에 몸에 힘이 점점 빠져들고 질식할 것 같은 공 포에 늘 사로잡혀 있었어요. 특히 아침에 눈을 뜨면 주 위가 뿌연 안개에 싸인 것처럼 희미하게 보였어요. 제가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어요. 욕실에서 샤워기를 틀고 온몸을 물에 적시고 난 뒤에야 살아있음을 인정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욕실에서 “나는 살아있다!”고 울부짖으며 소리를 질렀어요. 아내는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다가 그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 곤 했지요. 며느리가 우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아내에 게 큰소리로 역정을 내셨고, 저에게도 몹시 화가 난 음성 으로 야단을 치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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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분노는 아내의 눈물보다 더 깊은 눈물이 아니었나 싶 네요. 어머니는 병든 자식을 보면서 너무 슬픈 나머지 눈 물을 흘릴 수 없었던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건강하지 못 한 몸을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준 것 같은 어미의 미안한 마음 때문에 스스로 울 자격도 없다고 여기신 거지요. 어 쩌면 어머니가 자주 말씀하시던 “못돼 처먹은 것”이란 말 씀은 당신을 향해 하신 이야기였던 것도 같네요. 어머니, 어머니가 시장에 물건을 맡겨놓으면 제가 가 서 찾아오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요. 물건 파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제 얼굴을 보면 아무 말 않고 물건을 건네 주셨어요. 그만큼 어머니와 제 얼굴이 닮았지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모든 것이 닮아가기 시작하고, 어 머니는 저에게 짜증을 잘 내기 시작했어요. 당뇨병, 심 장병, 관절염, 치질, 눈병, 위장병…… 어머니가 앓았던 병들은 15년의 간격을 두고 저에게 나타나기 시작했어 요. 규칙적이고 어김없었지요. 그저 어머니는 고혈압에 시달리고, 저는 간경화가 급속하게 진행된다는 차이뿐. 덕분에 모자간에 가장 빈번하게 나눈 대화가 “약은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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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겨먹었냐?” “병원에는 언제 가느냐?”였지요. 어머니를 참 미워하면서 사춘기를 보냈지만, 늘 아픈 어머니에게 화를 내기가 어려웠어요. 동생들에게도 본 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머니를 미워하는 마음 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고요. 그럴수 록 어머니는 점점 더 저를 엄하게 대하고 화도 자주 내 셨지요. 그래서 어머니만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는 까닭 모를 불안증을 안고 꽤 오랜 세월을 보내왔어요. 그런 데 그날, 그러니까 심근경색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날 어머니가 전화로 저에게 하신 말씀은 참 낯설었어요. “얘야,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꼭 네 딸로 태어나서 너에게 받은 효도 다 갚으마.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어미가 돼서 좋지 못한 것만 너에게 물려줬구나.” 그날도 비가 오고 바람마저 세게 불었던 것으로 기억해 요. 저는 어머니의 그 이야기를 듣고 아주 오래된 빙하가 녹아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황홀한 경험을 했어 요. 물론 미련하고 못난 아들은 어이없게도 이렇게 말을 받았지요. “엄마, 다음 세상에서도 나랑 또 만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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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다시 어머니에게 욕지거리를 한바탕 듣고 전 화기를 내려놓았지만 그날은 단잠을 잤던 기억이 납니 다. 그리고 그 다음날 뒷산을 천천히 걷다가 숨이 차서 의자에 앉았는데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오르더군요. 제 책이 출간된 날, 그때도 어머니는 몸이 아파 누워 계셨어 요. 제가 드린 책을 가만히 보다가 이렇게 혼잣말하듯이 말씀하셨죠. “우리 문 선생이 또 아픈 제자 이야기를 썼 구나. 우리 문 선생도 많이 아팠겠다. 바라만 봐야 하는 게 제일 아픈데.” 그날 어머니는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아픔’에 대해 이 야기하셨어요. 당신이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아픈 자식 을 바라봐야만 하는 어머니의 슬프고도 고운 마음을 저 는 제가 아픈 뒤에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런데요,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하고 연약하지요. 어머 니가 그렇게 화해를 요청하고 용서의 말씀을 제게 건네 줘서 마음이 평안해지긴 했는데, 아직 뭔가 부족했어요. 여전히 어머니를 생각하면 불편했고요. 어머니의 전화 때문에 저는 어머니와 사이가 더 어색해져 버렸어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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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지나서 알았어요. 어른이 된 저는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잘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감사했지만,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엄마 앞에서 벌벌 떨던 그 어린 제 마음에 새 겨진 상처는 보상받을 길이 없어져버린 거였어요. 여전 히 어머니와 비슷하게 생긴 할머니를 보면 불편한 느낌 과 피하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 그 아이를 다독일 시 간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렇지만 어떤 방법으로 그 시간 을 가져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 답답함이 몸을 더 힘겹게 만들었지만 저는 또다시 밥벌이를 위해 일을 해 야 했어요. 다시 고등학교 국어 선생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상 담실장이란 업무를 함께 하면서 바쁜 일상을 보냈어요. 꽤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저는 교단에 서서 학생들 과 생활했어요.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시간이 제일 행복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행복만큼 건 강은 더 악화되기 시작했어요. 간肝이 신호를 보내오고, 위가 경련을 일으키고, 눈에 레이저를 쏴야 하고…… 먹 는 약의 숫자도 점점 늘기 시작했어요. 걷는 것조차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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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는 나날을 보내면서 겉으로는 괜찮은 척 늘 웃음을 물고 다녔어요. 죄송해요, 어머니. 그때 사실 몸이 나은 게 아니었어요. 어쩌면 어머니도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 겠네요. 제 몸이 어떤 상태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 셨으니까요. 병든 자식이 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이 원망스럽고 가난을 물려준 어머니의 마음이 너 무 아파서 말씀을 못하셨겠지요. 그런 나날을 보내면서 저는 종종 응급실에 실려 갔지 요. 대부분의 경우 식구들에게 알리지 않았어요. 혼자 응급실에서 걸어 나오곤 했어요. 남에게 의지하는 것이 죽도록 싫어서 그랬어요. 그런데 학생 한 명이 제게 편 지를 보냈더군요. “선생님, 학교 그만두세요. 저희를 나 쁜 제자로 만들지 말아주세요. 선생님이 저희 가르치다 가 돌아가시면 저희들은 평생 미안해하면서 살 것 같아 요. 그러니까 그만하세요.” 그 누구의 권유에도 흔들리지 않던 제가 제자의 짧은 편지 한 통을 받고 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머 니가 생각한 것처럼 학교에서 쫓아낸 게 아니에요. 아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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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학교는 참 많은 배려를 해줬어요. 우습지만 몸이 아픈 덕분에 참 편한 교사 생활을 했어요. 이 말씀은 어 머니에게 꼭 드리고 싶었던 말이에요. 퇴임식을 마치고 교무실을 나설 때 저에게 편지를 건넨 제자를 만났어요. 눈물범벅이 된 채 손을 비비며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제자를 꼭 껴안았어요. 아무 이야기 하지 않고 꼭 껴안 았어요. 제자는 계속 “죄송해요”라는 말만 반복했어요. 어머니, 제가 복 받은 사람이고, 선생 노릇 잘했다는 것 아시겠죠? 저는요, 그 사랑스런 제자의 마음도 제 아 픔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어머니 가 물려준 것이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머니, 지금은 이렇게 너스레를 떨며 그때 이야기를 하지만 학교를 그만두던 그 당시는 마음이 참 착잡했어 요. 힘이 쭉 빠지기도 하고, 까닭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오 르기도 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특히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서운함을 크게 느끼기도 하고, 살아갈 날에 대한 걱정도 컸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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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지리산과 제주도를 걸었어요. 건강이 허락하는 범 위에서 천천히 아무 생각 없이 걸었어요. 배낭의 절반은 약과 주사기로 가득 차 있었고요. 제주도 어느 여관에서 묵던 첫날밤, 저는 여관 집 할머 니와 얘길 나눴어요. 꽤 오랜 시간 저의 신세타령을 들 으면서 할머니는 눈물을 계속 흘리셨죠. 그리고 이른 새 벽 길 떠나는 저에게 빙떡 한 보따리와 생수 한 통을 주 면서 말씀하셨어요. “선생님, 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덤 벼드는 게 인생입니다. 그저 껴안고 친구하듯이 그렇게 저렇게 함께 가세요. 화나면 화내고, 화낸 게 미안하면 풀고, 그렇게 사세요. 속에 담아두지 말고 말하면서 사 세요. 그러다 보면 편안해지는 날이 옵니다. 꼭 끼니는 챙겨 드시고요.” 어머니, 왜 그 할머니 모습 속에서 어머니 모습이 보였 을까요?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그 할머니도 많은 병을 몸에 지닌 채 사는 분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 일까요? 아니면 어머니가 저를 따라다니면서 계속 염려 해 주고 계신 것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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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할머니와의 만남으로 시작된 제주 여행은 가 파도에서 끝을 맺어가고 있었습니다. 가파도 청보리밭 을 무심히 바라보며 서 있었는데 어디서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파도 분교에서 울려나오는 벨소리였어 요. 수업이 끝날 때였는지 초등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나 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제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 어요. 두 달간의 여행을 통해 학교와 잘 이별한 줄 알았 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알았죠. 학교를 보고, 학생들을 보고, 수업 종소리를 듣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저 자 신을 보고 한 걸음도 이별하지 못했음을 알았어요. 그래 서 그 할머니 말씀처럼 과거의 것들과 함께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려놓는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을 의 미한다는 깨달음도 얻었어요. 사실 병에 걸린 뒤에 저는 참 많은 것들을 원망하고 다 버리고 싶었어요. 주변 사람들도 참 많이 미웠고요. 나름 대로 열심히 살아왔고, 그리 나쁜 짓 하지 않고 살아왔는 데 왜 이런 시련이 나에게 닥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신과 운명에게도 분노의 화살을 마구 쏘아댔어요.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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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어요. 내 과거와 철저히 이별 하고 비록 아픈 몸이지만 남은 삶이라도 힘겹지 않게 살 고 싶었어요. 그래서 두 달 동안 지리산과 제주를 걸으면 서 처절하게 떠나는 작업을 했어요. 그 중에 가장 중심에 있던 사람이, 죄송하지만 어머니였어요. 가난한 집의 장 남으로 태어나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두세 배 열심히 살 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 어머니의 야단이었어요. 그래서 그것이 힘겨워 심장의 근육과 간을 굳어버리게 한 것이라 생각했어요. 눈의 시력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도 세상을 보기 싫어하는 마음 때문인 듯싶었어요. 어머니를 버릴 자신이 없는 나약한 저는 여행을 통해 어머니로부터 도망 치고 싶었습니다. 평생을 간호하다 나마저 병들어버린 내 인생이 불쌍했어요. 그 분노와 아픔이 너무 깊어서 어머 니가 진심으로 저에 대해 걱정해 주시고 이제는 부드럽게 저를 대해주셔도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 런데 두 달의 여행 끝에 내린 결론은 과거와 이별할 수 없 다는, 참 허망한 것이었어요.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저는 자꾸만 그 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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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의 말씀이 떠올랐어요. ‘화나면 화내고 화낸 게 미안하 면 풀고.’ 저는 이 말을 자꾸 되뇌었어요. 그동안 어머니 와 세상에게 화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면서 살아온 것 이 지금 이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됐어요. 과거를 껴안고 가도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을 겉으로 꺼낼 때 가능하다는 것도 알았고요. 어머니, 제주에서 돌아온 다음날, 아버지 제삿날, 내가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지 궁금하셨죠? 아니 그 전에 제사 지낼 때 했던 말 먼저 할게요. 어머니에게 고백하는 게 아니고 그만큼 힘들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전에 제사를 지낼 때는 아버지에게 엄마 빨리 데려가라 고 했어요. 늘 그랬어요. 그런데 이번 제사 때는 엄마 천 천히 데려가시라고 말했어요. 내가 그동안 엄마에게 쌓 인 것 다 풀고 난 뒤에 데려가시라고 했어요. 한 30년쯤 걸릴 것 같다고 했어요. 어머니, 아시죠? 어머니가 아프면 15년 후에 내가 아프 다는 것. 그러니까 어머니, 아니 엄마가 오래오래 살아 야 자식인 내가 오래 살 수 있다는 것. 착한 아들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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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옆에 있을 거라는 장담은 못하겠어요. 짜증내고 투덜대고 함부로 말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엄마 옆에 늘 있겠다는 약속은 드릴게요. 엄마도 그 약속 해줘요. 지 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화내고 야단치고 소리 질러도 좋아요. 늘 제 옆에 있겠다고, 건강하지 못해도 함께 있 겠다는 약속만 해줘요. 그 약속이 엄마와 나를 더 오래 세상 누리게 하는 힘이 될 거라고 저는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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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제 평범한 부부처럼 살아봐요 \\ 최진숙

최진숙은 30대 후반의 여성으로, 심장육종 암 진단을 받았다. 현재 심장에는 종양이 없 으나 폐에 전이된 채로 지내고 있다.

사랑하는 나의 달님! 나를 위해 열심히 흙집을 짓고 있는 당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펜을 듭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신은 항상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 면서 살아가고 있네요. 발병했던 4년 전부터 늘 말이에 요. 저를 위해 블로그를 열어서 희귀암인 심장암 환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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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는 것부터 시작해서 암에 좋다는 모든 것들을 배우러 다니고 함께 행동해 주고 있으니 말이에요. 급기야 지금 은 나의 최대 소망인 구들방도 지어주고 있고…… 정말 고마워요. 신혼 7개월 만에 암을 선고받고 당신께 얼마나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몰라요. 수술받고 처음 한 생각은 당신을 보내야겠다는 거였어요. 사실 마음은 당신을 꼭 붙잡고 있어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있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결국 마음에도 없는 이야 기를 하고 말았지요. 마음이 철렁했지만 당신은 오히려 내 생각 이상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어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다고 다짐했고 영원히 사랑할 거라면서 오히려 쓸데없는 생각 한다며 나를 나무라셨잖아요. 얼마나 감 사하고 뿌듯했던지. 그래서 그때 다짐했어요. 당신을 위 해서라도 꼭 살아야겠다고요. 지금껏 다섯 번의 수술과 1년 동안의 항암, 4년 동안의 투병 생활을 잘 견딜 수 있었던 의지력은 당신에게서 나 온 것 같아요. 당신은 내가 존경스럽다고 이야기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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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입니다. 항상 막내티만 내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다가 당신에게서 정말 많은 것들 을 배웠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4년 동안 힘듦 속에서도 행복하고 재밌고 즐거운 일들이 참 많았던 것 같네요. 연애도 제 대로 못하고 결혼한 우리에게 연애 기분 내라고 하늘이 시간을 주신 것처럼 우린 그렇게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고 지낼 수 있었으니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나를 위해 호텔 주방장 자리도 내려놓고 시골 로 들어와 살게 된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아요. 내게 또 다른 길을 열어 보여주고 모든 것들 을 내게 맞춰주고 제일 중요한 스트레스도 관리해 준 것 무척 감사해요. 처음 무작정 산골로 들어와 추운 황토방 민박집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잠들던 그때가 생각나네요. 바람소 리에도 무서워 잠 못 이루고 아이처럼 덜덜 떨었잖아요. 그리고 식이요법 하면서 치킨을 앞에 두고 먹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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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럽게 울었던 기억도 나요. 그때 그것도 못 참는다고 지나가듯 한 소리에 더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제는 먹고 싶을 땐 한 조각 정도 먹고 스트레스 안 받는 것이 낫다는 진리도 깨달았지요. 당신이 나를 채찍질할 때마다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아 자존심 상하고 너무나 야속하게만 생각됐는데 뒤돌아보 니 그런 것들이 지금 나를 살게 한 힘이 된 것 같아요. 나 보다 더 잘 참아내고 내게 화도 한 번 내지 않은 당신! 비 록 당신 눈치는 많이 봤지만 그 눈치 또한 저를 지탱해 준 원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제가 환자이다 보 니 하지 못하는 일과 말들이 참 많았잖아요. 시댁에도 많은 눈치를 봐야 했고, 아내로서 당신에게 너무나 모자 랐고, 친정에서 당신에게 미안해하는 모습도 보아야만 했고요. 모든 것들이 그때는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생각했 고 암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음만 자꾸 앞서갔고 그런 것 들이 모두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어요. 그런 스트레스는 주기적으로 슬럼프로 다가왔고, 지금도 사실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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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그럴 때마다 당신은 나를 나무라지 않고 토닥여주 고 지켜봐 주고 여행도 시켜주고 깜짝 이벤트도 해줬지 요. 내가 정말 시집 하나는 끝내주게 온 것 같아요. 항상 기다려주어서 고마워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은 당신을 만난 일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제일 잘못한 일도 당신을 만난 일 같아요. 당신 을 만나 지금껏 이렇게 행복하게, 기적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당신의 입장으로 보면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당 신은 지금쯤 멋진 가족과 명성을 얻었을 것 같거든요. 지금까지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바보 같지요? 또 다시 “쓸데없는 생각한다”고 말할 당신의 모습이 보 이네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 같아요. 나를 위해 기저 귀까지 갈아주고 함께 삭발도 해준 당신에게 가끔씩 힘 빠지는 이야기를 하는 나를 한 번도 화내지 않고 받아준 것 또한 무척 감사해요. 매순간 나를 위해 공부하고 어 떻게 하면 간병을 잘해줄까 고민하는 당신의 모습에 제 가 지금껏 힘을 얻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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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랬지요. 암에 걸린 아내는 둘 중 하나라고요. 병 때문에 죽는 게 아니면 남편의 무관심으로 죽는다고 요. 그래서 그런지 당신은 항상 변함없이 저를 사랑으로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아요.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서로가 맘 아파할까봐 못했던 말들도 이제는 잘 털어놓을 수 있는 우리가 되었네요. 예전엔 죽음에 대해 서로 입 밖에 내지도 않았는데 이젠 그런 말도 할 수 있는 걸 보니 우리가 많은 일들을 겪고 잘 이겨내고 있는 듯합니다. 당신 말처럼 이제는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리고 나 자신 부터 챙기려고 노력중입니다. 비록 시댁에, 친정에, 친구 들에게 당장은 욕먹을지라도 내 건강부터 찾으려고요. 너무 늦게 깨달았지요? 지금은 비록 도리를 못하는 나 쁜 사람일지라도 건강을 되찾으면 자연히 모든 것을 찾 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스트레스 안 받도록 당 신에게도 때론 소리 지르고 화를 낼지도 몰라요. 그래도 잘 받아주실 거라 믿어요. 지금 힘든 상황도 잘 이겨내 보려고 합니다. 또다시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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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말을 믿고 일어나 보려고 해요. 당신이 내게 해준 것의 반의반만 내가 노력해도 건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 해요. 당신이 냉장고 앞에 써 붙여준 “나는 건강하다!”라 는 말, 그대로 매번 외쳐보려고요. 비록 죽음이 내 앞에 오더라도 당신의 사랑으로 나는 이겨낼 겁니다. 분명히 주님은 암을 이겨내라고 당신을 제게 보내셨다고 생각해요. 그 믿음이 꼭 이루어지길 간 절히 소망합니다. 암을 얻고서 많은 것들을 깨닫고 느낍니다. 그리고 미 안한 사람들도 많이 생겼고요. 하고 싶은 일들도 더욱 많아졌답니다. 눈치 봐야 할 사람이 많아지는 나를 보 면서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만큼 내게 여유가 생긴 거라 여깁니다. 딸이 아프다고 무조건 사위 눈치 보는 친정 식구들에 게 미안하고, 할 말도 못하고 계시는 시댁 어르신께도 너 무나 죄송합니다. 그러나 제일 미안한 건 당신입니다. 달님, 이제 당신에게 조그마한 나의 바람을 적어보려 합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의 시간도 가졌음 합니다. 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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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 것에서 이젠 당신의 삶에 도 여유를 가졌으면 해요. 시댁과 친정 식구들에게도 시 간을 내어주고 가끔 다른 집처럼 식구들끼리 술도 마시 고 편안해졌으면 좋겠어요. 사실 어머님이 오실 때도, 친정 엄마가 오실 때도 저는 가시방석일 때가 많거든요. 조금만 더 웃고 조금만 더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때론 친구 들과 나가서 회포도 풀고 들어오고. 여느 평범한 집처럼 나는 그런 당신에게 바가지도 긁고…… 그렇게 살고 싶 답니다. 우리 그렇게 환자가 사는 집이 아닌 그냥 평범한 부부 가 사는 집처럼 살아봐요. 그리고 이왕이면 당신의 마음 을 표현하면서 지냈으면 해요. 내가 바라는 점이 많아지 는 걸 보니 점점 더 건강해지고 있나 봅니다. 달님! 내가 흘려서 하는 모든 말들도 머리에 적어두었 다가 순간순간 꺼내어 행동해 줄 때 당신에게서 존경스 러움을 느낍니다. 정말 감사해요. 별이가 더욱 노력할게요. 더욱 기운 낼게요. 4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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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월이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해준 것 같네요. 평범 하게 살았다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 같아요. 나를 위 해 희생하고 버팀목이 되어준 것 또한 고맙습니다. 나를 단단하게 해주고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어 감사합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우리 오늘처럼만, 딱 지금처럼만 행복 하게 살아요. 장난으로 늘 하는 말이지만 지금처럼만 나한테 잘해 주세요. 나중에 꼭 똑같이 보답해 드릴게요. 그런 날이 꼭 올 거라 믿고 그땐 우리 지금을 추억하며 웃어요. 항 상 모자라면서 당당한 당신의 아내를 믿어보세요. 사랑합니다. 반짝이는 당신만의 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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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스펙 좀 더 쌓아서 가야 하지 않겠니? \\ 허영은

허영은은 50대 중반의 여성으로, 2010년 11월 유방암 3기 진단을 받고 수술 후 투병 중이다. 전절제 후 동시 복원 수술을 받았 고, 항암치료 8회, 방사선 치료 25회를 받았 다. 서울에서 시골로 거처를 옮겨 지내는 중 인데 수술한 왼쪽 팔의 부종으로 인해 생활 의 불편을 겪고 있다.

효선 언니! 어제 오랜만에 언니와 통화를 했네요. 굳이 ‘오랜만’이라는 말을 붙이는 까닭을 언니도 눈치 채셨죠? 최근에 걸려온 언니 전화를 제가 두 번씩이나 묵살한 때 문입니다. 왜 그랬냐며, 이제 나랑 인연 끊을 작정이냐 며 어제 제게 화를 조금 내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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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선 언니, 비록 제 친언니는 아니지만 제 오랜 친구인 명희의 언니, 먼 이국땅에 살고 있는 명희 대신 친피붙 이보다 더 살가운 정으로 수십 년 동안 제 언니 노릇을 해주신 언니의 전화를 그전 같았으면 제가 어찌 감히 안 받을 수 있었겠어요. 암환자가 되고 보니 그렇더군요, 모든 것이 암 이전과 이후로 달라지더라고요. 이 대목에서 또 금세 눈시울이 더워지는 것도 달라진 것 중의 하나이고, 암환자가 되기 전의, 때로는 무료했던 일상이 사무치도록 간절해지는 것도,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절망감과 무력감에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어지는 것도. 이전에 즐겨 듣던 음악도 그 감흥이 전과 같지 않고 그렇게나 좋아했던 책읽기도 시들해지고 항상 꿈꾸어 왔던 여행에 대한 욕구도 사라 져버렸답니다. 그러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 가 무척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워서 뜨거운 눈물이 솟 아오르기도 한답니다. 다시 노래가 들리고, 예쁘고 아름 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어딘가 가고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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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보고 싶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기도 하고…… 마치 조울증 환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조증과 울증이 교차한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 길이와 농도에 있어서는 확연히 ‘울증’이 우 세지요. 요 며칠간이 바로 그런 때였답니다. 아무 의욕도, 아무 즐거움도, 심지어는 질기게 계속되던 남편을 향한 분노와 미움마저 심드렁해지고 언니 전화조차도 받기 싫 어지는, 아니 받을 수가 없는 상태로 며칠을 보냈답니다. 언니, 2년 전 유방암이라는 정기 검진 결과를 통보받 고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언니한테 알렸던 거 기억하죠? 근무 시간중임에도 허겁지겁 제게 달려와서 걱정과 놀 람을 속으로 감추고 웃으면서 하신 말이 지금도 가끔 생 각납니다. “영은아, 나는 네가 알코올성 치매로 이 세상 하직할 줄 알았는데 유방암이라니 그나마 다행이다.” 평소에도 독설에 가까운 조언을 잘 해주는 언니의 그 말 에 저 또한 화는커녕 웃음으로 수긍을 했었지요. 서울에 서 직장 생활 하면서 자주 폭음을 하던 저를 걱정하고 나 무라시던 언니로선 어쩌면 당연한 핀잔을 하신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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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생각나는 언니의 어록 중 하나. 병원 치료 대신 나 도 그냥 산으로 들어가서 자연 치유법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있다고 했더니 언니 왈, “얘, 너는 산으로 들 어가면 암으로 죽는 게 아니라 굶어죽을 걸?” 요리 실력 이 젬병인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저의 무모함을 지적하 는 고차원의 개그였죠. 그뿐인가요? 처음 검사했을 때는 유방암 2기로 림프절 전이는 안 된 상태라고 알고 있었는데, 막상 수술을 하고 보니 병기가 3기에다 림프절까지 전이가 되었다는 결과 를 받아들고는 마치 낙제 성적표를 받은 것 같은 참담한 기분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언니가 그러셨죠. “그래도 네 가 여태껏 살아온 꼬락서니에 비해선 후한 점수잖아? 낙 제했으니 재수강할 일만 남았네 뭐” 하시던 언니의 수준 높은 위로의 말씀. 그동안 언니와 함께한 세월이 참 끈끈하게 이어져왔 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집니다. 언니가 독신인 탓도 있어 서겠지만 저는 물론이고 우리 아이들한테도 친이모 못 지않은 관심과 사랑을 부어주셨어요. 삶에 미숙한 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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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가르치고 독려해 주신 언니 덕분에 비틀걸음으로 나마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 암이라는 복병을 맞 아 주저앉고 말았을 때 언니는 저런 독한 말들로 저를 일으켜주셨지요. 언니! 저를 일으켜 세워주던 언니의 그 힘 있는 조언이 지금 저한테 다시 절실하답니다. 제가 암에 걸렸다는 소 식을 접한 주변 사람들이 처음에 쏟아 부어주었던, 그야말 로 물심양면의 사랑과 관심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옅어 짐에 비례해서 점점 더 또렷이 부각되는 남편의 무심함! 또한 그런 남편을 두고 원래 그런 성격의 사람이려니 무 심코 넘어가지지 못하는 저의 예민함이 서로 부딪혀 삐걱 거리며 보냈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암환자 아내를 둔 남편이 어쩜 저럴 수가 있을까 싶도 록 무심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는 또 어쩌 면 그토록 다정하고 배려심이 많은지. 현미밥을 먹기 싫 어서 따로 흰쌀밥을 해먹는 건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내가 먹으려고 준비해 놓은 유기농 식품이나 선물로 들 어온 건강 보조 식품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해 버리질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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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는 힘들고 지쳐서 내 방에 널브러져 있는데 자기는 글 쓰고 그림 그리며 창작 활동에 몰입하다가도 누군가 무슨 일이 생겨 도움을 요청하면 아픈 마누라는 아랑곳 없이 득달같이 달려나가서 하루 종일 소식이 없기도 하 고. 많이 주저하다가 겨우 용기를 내서, 나 죽으면 화장 해서 수목장이나 자연장을 해달라는 말을 해도, 왜 쓸데 없이 그런 말을 하느냐는 사양(?)의 말도 없이 그대로 묵 묵부답인 남편. 이건 뭐 암과의 투쟁이 아니라 남편과의 전투가 아닌 가 싶은 나날들을 지나는 중에 압권이었던 건, “내가 스 트레스받고 재발해서 죽으면 바로 당신 때문인 줄 알 아!!”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패악을 부렸던 일이랍니다. ‘이러다 내가 미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고 ‘정말 내가 죽고 나면 저 말이 남편한테 얼마나 큰 상처로 남 을까’ 하는 생각에 또 마음이 아파오기도 하고요. 사실 지금 언니에게 쓰고 있는 이 편지글을 처음에는 남편 강 서방에게 쓰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 들려주고 싶었던 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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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봇물처럼 터져 나오더군요. 그런데 하나같이 강 서 방을 향한 분노와 원망과 미움과 서운함 일색이더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남편 흉보는 독한 얘기들로 채워질 것 같았어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언니한테 편지를 쓰 기로 했어요. 효선 언니! 그러니까 언니가 저 대신 강 서방한테 말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옛날부터 언니를 어려워하면서 도 언니 말은 잘 들었잖아요? 언니가 충고한다고 해서 긴 세월 동안 굳어져버린 성격이 단숨에 변화될 리야 없 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든가 아니면 변해야겠다 는 생각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현명한 언니가 잘 아 실 테지만 이거 한 가지는 빠뜨리지 말고 꼭 좀 전해주 세요. 제가 죽지 않고 이렇게라도 살아있어서 함께 있는 게 좋지 않느냐고! 그게 좋으면 좋다는 표현을 좀 하고 살라고! 그리고 저한테도 한 번 더 들려주세요. 왜 제가 재발할 까봐 무섭고 죽음이 두려워서 언니한테 하소연할라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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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날리던 돌직구 있잖아요? “허영은, 참 뻔뻔하기 도 하다! 너 지금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서기엔 너무 염치 없다고 생각하지 않니? 좀 더 예쁘게, 좀 더 열심히 살아 서, 스펙 좀 더 쌓아서 가야 되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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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값진 금은 바로‘지금’ \\ 조미화

조미화는 50대 초반의 여성으로, 2009년 유방암 진단 후 2회의 수술을 받았다. 그 후 항암 치료 8회, 방사선 치료 33회를 거쳤으 며, 현재는 호르몬 치료중이다. 6개월에 한 번씩 정기 검사중이며, 현재까지는 재발이 나 전이 소견이 없는 상태이다.

사랑하는 엄마! 내가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별로 당황하거나 놀라지도 않았어. 당연히 초기일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 감에 사로잡혀 암수술을 그저 종기 떼어내는 정도로 아주 가볍게 생각했으니까. 다만 난 내가 받은 암 진단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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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줄까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섰지 뭐 야. 일찍 남편을 보내고 20여 년이 넘도록 믿고 의지할 가 족이라곤 이 못난 딸자식 하나밖에 없이 살아온 엄마에게 딸의 암 진단은 청천벽력이란 말로도 부족했을 듯싶어. 진단받은 다음날부터 난 매일 아침 엄마 방에 들어가 엄 마가 밤새 무사(?)한지 확인할 정도였으니까. 첫 수술 일주일 후에 나온 조직 검사 결과 절단면에서 암세포가 발견돼 다시 2차 수술로 전절제 수술이 불가피 하다는 소리를 주치의로부터 들을 때, 난 그 자리에 엄마 가 없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스러웠어. 나 홀로 꼬박 하 얗게 지샌 그날 밤은 아마 내 평생에 가장 길고 슬픈 밤 이었을 거야. 입원해 있으면서 엄마가 내 머리를 감겨줄 때, 내 평생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울먹이며 엄마한테 물어봤었지. “난 엄마의 딸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 좋을 때가 많았는데, 엄마는 나를 딸로 키우면서 과연 행복했 던 순간이 있었어?” 이때가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는 절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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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물어본 내 질문에 평소 표현에 서툴기만 하던 엄마가 의외의 대답을 했지. “어릴 적엔 많이 귀여웠고, 네 가 공부를 잘해준 것만으로도 엄마는 아주 좋았어. 난 늘 네가 자랑스러웠단다.” 그때 난 늘 무뚝뚝하기만 했던 엄 마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는 걸 난생 처음 안 거야. 우리 집안엔 묘한 징크스가 있어서 숫자가 겹치는 해 에 꼭 초상이 나곤 했지. 1977년엔 외할아버지가, 1988 년엔 아버지가, 1999년엔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2011 년엔 과연 누가 죽을 것인지가 늘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내가 2009년에 암 진단을 받았으니, 그땐 내가 2011년에 죽을 거란 묘한 긴장감에 휩싸였어. 인터넷 검색으로 유방암 5년 생존율이 평균 50퍼센트 란 걸 알았기에, 수술 후 퇴원한 다음에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국민연금공단에 전화해서 사망시 유족에게 지 급될 유족 연금이 얼마인지를 문의한 것이었어. 휴면 은 행 계좌를 정리하고 보험 증권까지 정리하고 나니 참 내 인생이 허망하단 생각이 들면서, 만일 내가 이대로 죽게 된다면 하고 생각하니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바로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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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어. 내가 이대로 허망하게 죽어 사라진다는 건 내가 엄마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짓이란 생각에 살 아남기 위해선 못할 게 없다는 결심이 굳건해졌지. 엄마는 내가 암에 걸린 이유가 혹시 엄마가 나한테 좋 지 않은 음식을 해줬기 때문이 아닐까 하며 몹시 자책했 었어. 하지만 아직까지 암의 원인이 명백하게 밝혀진 게 없고, 재발이나 전이를 예방하는 방법 역시 불확실할 뿐 이야. 법정 스님이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 최동원 선수 나 장효조 선수가 체력이나 정신력이 부족해서, 스티브 잡스가 돈이 없어서 암을 극복하지 못한 건 아니잖아. 암에 걸렸다는 건 마치 길을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 어진 것처럼 운이 조금 나쁜 것뿐이지, 누군가가 나한테 어떤 잘못을 하거나 혹은 내가 뭘 잘못한 결과가 절대 아니야. 다른 가족들이나 친지들은 내 병기가 3기로 높게 나왔 다는 소리를 듣고, 사색이 돼 날 걱정했지만 난 조금도 위축되고 싶지 않았어. 나는 내 맘속으로부터 내 병과 당당하게 맞서고 싶었고, 그런 내 맘을 특히 엄마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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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몰라. 엄마는 병원에서 다른 환자들과 희희낙락 수다 떨며 즐겁게 지내고, 전혀 위축되지 않는 나의 명랑한 모습에 많이 놀라워했지. 엄 마의 생각 속에 이 딸은 늘 소심한 새침데기라 다른 환 자들과 말 한 마디도 섞지 않고, 예상 외로 높은 병기 땜 에 속앓이를 하며 징징댈 거라고 짐작했을 테지만, 오랜 사회 생활을 경험한 이 딸은 엄마의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 내가 늘 말해온 거지만 엄마가 집에서 보는 내 모습이 나의 전부는 아니거든. 항암 치료 전 어깨를 완전히 덮고 등까지 내려왔던 나 의 긴 생머리는 나에겐 자랑이었지만 엄마는 그 긴 머리 에 불만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 틈만 나면 엄마는 제 발 머리카락 좀 짧게 자르라고 잔소리를 하고, 단 한 번 도 나의 긴 머리를 좋게 말해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데 항암 치료를 앞둔 어느 날 나의 등 뒤에서 했던 엄마 의 혼잣말은 날 깜짝 놀라게 했어. “에고, 저 이쁜 머리카 락이 다 빠지겠구나.” 엄마가 내 긴 생머리를 예쁘게 생각한다는 걸 난 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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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동안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거야. 항암 치료 후 유증으로 길었던 머리가 뭉텅뭉텅 빠져나가고 결국 내 가 완전 빡빡머리가 되어 자리에 누워 있던 어느 날, 엄 마는 내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너를 안고 젖 먹이던 때 는 늘 이렇게 네 뒤통수를 쓰다듬었단다. 그때 이후 처 음 네 뒤통수를 이렇게 맘껏 쓰다듬어 보는 것 같네”라 고 말하며 울먹였지. 난 그때 엄마가 갓난아기인 나를 안고 젖을 먹이며 내 뒤통수를 쓰다듬는 장면을 상상하 곤 잠시 동안이나마 행복감에 젖어들 수 있었어. 내가 선잠에 빠졌던 어느 날, 엄마는 내가 완전히 잠든 걸로 생각하고, 휑해진 내 왼쪽 가슴을 쓰다듬으며 서글 피 울더군. 난 그때 잠들지 않았지만 일부러 자는 척할 수밖에 없었어. 만일 그때 내가 자는 척하지 않고 깨어 났더라면 아마 우리 두 모녀 서로 부둥켜안고 펑펑 울지 않았을까? 내가 병원에서 항암 주사를 맞고 온 뒤 항암 치료 부작 용 때문에 힘들어할 때, 엄마는 나를 혼자 집에 남겨두 고 말없이 외출하고는 했지. 난 힘겨워하는 나를 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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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외출하는 엄마를 가끔은 이해할 수 없었어. 치료가 다 끝난 뒤에야 엄마는 내가 항암 부작용으로 고통스러 워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기가 너무 힘들어서 집 밖 으로 나와 하염없이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고 말해주었 지. 항암 치료 받으면서 가장 힘든 순간에 난 이 고통에 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 사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했었어. 항암 치료 부작용을 겪는 나도 힘들었지만, 그런 나를 지켜보는 엄마는 아마 나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거야. 그래도 엄마는 내가 예상보다 항암 치료를 훨씬 잘 견뎌 내는 걸 보고 당신 딸내미가 이렇게 인내심이 강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 예전에 엄마 눈엔 늘 어린아이로 보였 을 이 딸내미가 세상살이 겪으면서 내면적으로 강해지 고 인내심도 많다는 걸 알게 된 거야. 예전에 엄마가 나 에 대해 몰랐던 것과 나도 엄마에 대해 몰랐던 것을 내 가 암 투병을 하면서 서로 알게 되었던 것 같아. 성경 말 씀에 “하느님은 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 한쪽 문을 열어 주신다”는 구절이 있듯이, 암에 걸리면서 잃어버린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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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만 암 투병 과정 속에서 새롭게 얻게 된 것도 있다 는 걸 우리 모녀는 분명히 알게 되었어. 내가 병원에서 적은 버킷리스트의 1순위가 엄마와의 해외 여행이야. 그동안 해외 여행은 늘 나 혼자서만 다 녔잖아.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 없는 엄마와 함께 여 행할 생각은 한 적이 없었어. 수술 1년이 지나 내가 엄마 한테 홍콩 여행을 같이 가자고 제안했을 때, 엄마는 해외 여행은 안 가도 된다고 단박에 거절했지만, 난 그 거절이 엄마의 진심이 아니란 걸 여행하면서 알게 되었지. 홍콩 여행 내내 엄마가 정말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진작 엄마와 여행 한 번 안 다녔을까 하며 얼 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항암 치료 후유증으로 무려 8킬로그램이나 체중이 증 가한 나는 두 달간의 피나는 노력 끝에 항암 전 체중으 로 회복할 수 있었어. 유방암 치료 후에 많은 환자들이 체중이 증가하는 증세를 보이는데 나와 같이 치료받은 환자들 가운데 내가 제일 먼저 체중 감량에 성공한 거 같아.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엄마는 내가 얼마나 의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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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지 다시 한 번 깨달았지. 8차에 걸친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까지 마친 후에 나는 암에 관한 책도 읽고 암환자 교육에도 적극 참여하 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암환자를 위한 식사 관리나 운동 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 처음에 내가 식사 관리를 해야 한다니까 엄마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식사 관리가 얼마나 어려운데 어떻게 그걸 하겠냐며 손사래 를 쳤지만, 난 이번에도 엄마의 예상을 뒤엎고 식사 관리 를 3년 6개월이 넘도록 지금까지 꾸준히 잘해왔고, 외출 할 때는 꼬박꼬박 도시락을 챙기는 부지런함을 보이곤 하지. 대장간에서 쇳덩이를 뜨거운 불에 달구어 망치로 두 드리는 과정을 반복할수록 쇠는 더욱 단단해지듯, 나도 암이라는 시련을 통해 예전보다 내적으로 훨씬 더 단련 되었고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다는 걸 느껴. 아프기 이전에는 “난 절대로 ∼는 이해 못해. 난 목에 칼 이 들어와도 ∼는 할 수 없어”라는 식으로 단언하고 타 인을 심판했었지만, 지금은 “그 입장이 되면 나도 그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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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그 상황에선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많이 유연해졌음을 느껴. 컵에 물이 반 남아 있 을 때, “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이나 남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듯이, 같은 상황이라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법이야. 난 요즘 내가 치료 잘되는 유방암에 걸린 것도 감사하 고, 수술이 가능했다는 것도 무척이나 감사해. 그리고 암이란 시련을 통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예전 보다 훨씬 너그럽고 자유로워진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 지, 그리고 엄마에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 게 된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금은 황금도 백금도 아닌 바로 ‘지금’이라던데, 우리 모녀 지금처럼 계속 건강하고 행복 하게 오래오래 함께 살아야지. 엄마, 정말 정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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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것보다는 남은 것에 감사하기 \\ 정도현

정도현은 40대 초반의 남성으로, 2005년부 터 중증의 천식과 비염, 축농증이 시작되었 으며, 폐림프절 이상과 코 관련 수술 등으로 수차례의 입원과 검사를 반복해 왔다. 특히 알레르기 질환이 심해 지금도 매일 약을 먹 어야 잠을 잘 수 있는 상황이다.

여보, 직장을 그만두고 매장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부 터 내가 아프기 시작했으니 어느 덧 8년이란 세월이 흘 렀군요. 처음에 병을 얻게 되었을 때는 취미로 하던 마 라톤도 할 수 없게 되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 한 잔 마실 수도 없게 되어, 할 수 없게 된 것들에 대한 아쉬움만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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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갔어요. 건강했을 때의 일들은 모두 추억이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많이 했고요. 건강을 잃는 것은 모든 것 을 잃는 것이란 말이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만이 아 니라 실제로 추억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비롯해 많은 것 을 잃게 된다는 뜻이란 걸 체감하면서 모든 것을 빼앗긴 기분 속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병과 싸워 이겨 내려고, 병 때문에 빼앗긴 것들을 되찾아오려고 병원도 많이 찾아다녔고 좋다고 하는 건 다 먹어보기도 했지요. 하지만 몸은 노력한 만큼 바로 좋아지지 않았고, 정기 적으로 병원을 가는 것 외에도 갑작스런 응급실 행과 입 원을 반복하며 일상에서도 환자로서 살아가는 날들이 계속되었네요. 돌이켜보면 이때가 가장 힘들었던 시간 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아질 줄 알았던 병이 1년이 지나 도 좋아지지 않으면서 평생을 환자로 살아갈 수도 있다 는 걸 받아들여야 했으니까요. 건강하게 살던 세월이 오 래여서인지 환자로서의 삶,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잃어버 리게 되는 삶을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내가 당하는 고통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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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듯이 병의 위중함을 떠나서 언제가 끝일지 모를 병 을 앓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고통이었습니다. 특히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서 혼자 깨어 있는 것은 고통이 면서 공포이기도 했지요. 기침이 심해지거나 숨쉬기가 어려워지면 정말로 위급했던 순간의 기억이 떠오르며 공포감을 느끼게 되기도 하니까요. 당신에게 힘들어하 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럴 때면 거실로 나가 있기도 했고, 증상이 오래 지속될 때는 아파트 앞의 공원까지 나 가서 몇 시간씩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으며 어서 이 고 통의 순간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지요. 기도를 하면서도 왜 하필 나에게 이러한 고통이 주어졌는지 원 망도 하고 울기도 했었네요.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몸이 아팠던 것도 힘들었지만 서 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내가 아파서 한동안 일을 못하면서 당신은 가장의 책임 을 떠안게 돼 힘들어했고, 나는 내 고통에만 빠져서 당 신을 이해하고 위로하지 못했으니까요. 서로의 입장만 생각하다 보니 다툼만 계속되었고 서로에게 상처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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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불행한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집이 안식처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원망과 갈등만이 존재하는 공간처럼 느껴 져서 갈 데도 없으면서 집을 뛰쳐나간 적도 있었을 정도 였으니까요. 믿고 결혼한 사람을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생을 믿고 살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되었던 당신도 참 힘들었겠지요. 나도 가장으로서 가족 부양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된 순간부터 내가 마치 카프카의《변신》에 나오 는 벌레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스스로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남편으로서의 존재보다 는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할 의무와 당위를 지닌 가장이 라는 존재로서 더 큰 의미가 있었다고 나 혼자 생각하며 서운함만 키워갔지요. 병 때문에 내가 이러한 상황에 처 해 있고 이러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며 병도 미워했 고 나 자신도 미워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병 때문에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고난의 시간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어 서로를 있는 그 대로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우리가 처한 상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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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조건이 갑자기 변해서 그랬던 것이지 서로에게 서로 가 소중하지 않아서 그랬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면서 병에 대한 내 태도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병이 있고 나보다 더 심한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의 바람과 기도도 바뀌어갔어요. 처음에는 다시 건강 하게 해달라고, 육신의 고통이 끝나게 해달라고만 기도 했었지요. 그러다가 내 주위에도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나만 건강하게 해달라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지 깨달으면서, 병이든 다른 고통이든 내가 처한 상 황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 게 되었어요. 내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내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아직 나에게 남아 있는 것 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병이 완치되고 상황이 좋아진 미 래가 아닌 현재, 지금 그대로의 모습에 감사하게 되었지 요. 감각 중의 하나인 후각을 잃게 되었을 때도 조금 답 답하긴 했지만 시각이나 청각이 아직 정상으로 남아 있 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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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좋겠지요.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아서 우리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건강상의 문제나 여러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려움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 아들이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입 니다.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을 살펴본다면 당신도 내가 깨달은 감사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내가 아프면서부터 우리 집에 그만큼의 그늘이 있는 것 같아 미안하네요. 작년 말에 당신도 메니에르 병에 걸려서 병원에 다닌 적이 있었지 요. 아프다고 응석도 부리고 싶었겠지만 당신은 “조금 만 아파도 이렇게 힘든데 몇 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냐?” 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지요. 늘 아픈 나 때문에 아 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을 보며 나를 이해해 준 고마움보다 미안한 마음이 훨씬 컸답니다. 내가 빨리 건강해져야 당신도 편하게 아프다고 말할 수 있고 내가 간호도 해주고 위로도 해줄 텐데 말이에요. 언젠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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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오겠지요. 돌이켜보니 미안하고도 고마운 순간들이 많이 있었네 요. 남들은 불타는 금요일이라고 들떠 있을 때도 맥주 한 잔은 고사하고 당신이 야식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면, 야 식 때문에 자다가 기침을 하거나 밤새 콧물을 심하게 흘 린 적이 있다 보니 불안해서 거절하곤 했지요. 늘 내 몸만 먼저 생각하고 흡입약과 화장지만 챙겨서 미안합니다. 아 파서 조금 쉬다가 직장을 얻고 출근하던 나를 보며 물가 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을 하던 당신의 모습도 떠오르고, 특히 겨울에 감기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기능성 내의와 양말을 사다주던 당신의 정성을 생각하니 참 많이 고맙고 도 걱정을 끼쳐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119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갔던 적도 몇 번 있었는 데 그때마다 옆에 있어줘서 고맙고 놀라게 해서 미안해 요. 마지막으로 응급실에 갔을 때부터 시작된 폐소공포 증으로 최근에는 영화관에 같이 간 적도 없네요. 여보, 이번 주말 저녁, 영화관에 같이 한번 가볼까요? 출 입문 가까운 자리로 예매하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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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또 싸울까? \\ 이 명

이명은 50대 초반의 여성으로, 마흔이 넘어 대학원에 들어갔고,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 다. 2010년 2월 암 수술과 자궁 적출 수술을 동시에 받았다. 유방암 3기, 오른팔로 전이 되어 32군데의 림프절을 떼어냈으며, 심장 에도 혹이 있다. 항암 주사 8회, 방사선 치료 28회 받았다. 현재 오른팔 부종으로 치료중 이며 박사논문 준비중이다.

당신, 기억나? 우리가 싸웠던 일 말이야. 물론 무수히 싸웠지. 결혼한 지 25년이 넘었으니 오죽 많이 싸웠을 까? 하지만 내가 아플 동안, 아니 정확히 말해서 수술 받 고 항암 치료를 받는 1년이라는 기간 동안에는 싸우지 않았어. 꽤 오랜 기간이지? 더 오래 갈 수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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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제사가 문제였어. 제사를 지내고 난 다음에 우린 소리를 질러가며 싸웠지. 2년이 흘렀는데도 당신이 유니 랑 나누던 대화가 생생하게 기억나. “정말 모르겠다. 아빠가 무얼 그렇게 잘못했니?” “아빠가 엄마에게 미리 물어봤어야지. 엄마 마음을 모 르는 거잖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거냐?” “그게 아니잖아. 지금은 엄마가 아프잖아. 아빠가 먼저 제사 지내지 말자고 했어야지.” 당신은 유니 방에 있었어. 문이 살짝 열려 있는 바람에 말소리가 들렸지. 끝까지 듣지는 않았어. 너무 피곤했거 든. 안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어. 몸이 얼 마나 무거웠는지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 어. 어디랄 것 없이 모조리 아팠고 손도 발도 저렸거든. 익숙한, 아주 익숙한 아픔이었어. 항암 치료받을 때 겪 었으니까. 두런대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잠이 들었지. 얼마나 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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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까? 뭔가 이상했어. 익숙한 저림이 아니었어. 마비되는 듯한 느낌, 그래, 그거였어. 뻑뻑한 경련이 근육마다 줄달 음치고 있었지. 근육이 오그라들고 있었어. 아프면서 뻣 뻣해지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딱딱해지는 거야. 팔을 휘저었어.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 어. 무서웠어. 이대로 있으면…… 이대로 있으면…… “유니야!” 소리를 질렀지.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아이가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어. 유니는 언제부터인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가봐. 당신도 알지? 걔는 일단 제 방 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겨도 밖을 내다보지 않잖아. 하지만 내가 아플 동안은 달랐어. 너무 아파 잠들 수 없 던 날, 아이 방문을 두들겼던 적이 있지. 한밤중, 1시 반 이었는데도 아이는 이내 문을 열고 나왔고 내가 한없이 굼뜨게 옷을 입고 운동화를 신는 동안 침착하게 기다려 주었어. 내 팔을 든든하게 붙잡아주었고 어린애보다 느 린 내 걸음에 맞추어 운동장을 돌았지. 그날도 그때처럼 재빨리 반응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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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일어날 수가 없네. 욕조에 뜨거운 물 채워주고 다 차면 엄마 욕실로 데려다줘.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아.” 유니 표정이 달라졌지. 이내 물소리가 들리고 아이는 잠시 후 돌아왔어. “뜨거운 물 받고 있어.” “엄마 일으켜줘라. 혼자 못 일어나겠어.” 유니가 팔을 내 겨드랑이에 넣었어. 질질 끌려가 화장 실 문턱을 넘었지. 옷도 벗지 않고 욕조 속으로 들어갔 어. 몸을 죄어드는 느낌이 워낙 강했거든. 다리가 안 움 직이니 다급했고 무서웠어. 뜨거운 물이 콸콸 쉼 없이 쏟아져 욕조를 채우고 있었지. 양 손을 양쪽 욕조 테두 리에 올려놓고 몸을 뒤로 기댄 다음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어. 한동안 앉아 있자니 몸이 풀리기 시작했어. ‘그렇게 제사가 중요할까? 나보다 더 중요했을까? 내가 이렇게 아픈데 제사라니.’ 아프지 않다면 제사는 문제가 아니었지. 결혼한 지 25년이 넘었잖아. 외국 살던 몇 해 빼고 한 번도 거르지 않던 제사, 환히 알고 있었어. 그러나 준비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제사는 늘 두통거 리였던 거야. 며칠 전에 미리 물김치를 담가야 하고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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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밤 혹은 당일 오전부터 식혜를 안쳐야 해. 당일 오전 에는 장을 봐야 하고 오후부터 밤중까지 음식을 준비해 야 하지. 사야 할 품목은 왜 그리 많은지. 고기만 해도 세 종류야. 산적용 누른 고기, 완자용 간 고기, 탕 끓일 고 기. 그리고 생선과 세 가지 채소들. 그뿐인가. 동태포, 김, 두부, 과자, 유과, 약과, 명태포, 곶감, 대추, 다섯 혹 은 일곱 가지 과일. 양팔이 떨어져라 들고 와도 으레 한 두 가지 빠지게 마련이었어. 계란이 없다든가 마늘이 없 다든가 해서 다시 시장에 가야만 했지. 나물을 무치고 생선을 찌고 이런저런 준비가 끝나면 부침질을 시작했어. 완자와 동태전, 그리고 호박전 들을 계란 물을 입혀 부치기 시작하면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가 는 거야. 더운 여름 불 앞에 앉아 있으면 땀이 비 오듯 흘 렀고, 추운 겨울 기름 냄새는 속을 완전히 뒤집었어. 그 러고 나면 부침개는 쳐다보기도 싫었지. 그래도 부치는 일은 다른 준비보다는 나았어. 아이들이 자라 거들어주 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좀 쉬워졌지. 밀가루만 묻히던 유 니가 언제부터인가 부침질을 시작했고 아들아이도 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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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지. 끝난 다음에 치우는 사람도 아이들이었어. 그럼에 도 여전히 고단했어. 그날 역시 예외는 아니었어. 수술한 지 1년, 항암 주 사가 끝난 지 6개월, 방사선이 끝난 지 4개월. 괜찮을 거 라고 생각했어. 항암 주사 부작용으로 발과 무릎 아래 는 저렸지만 시일이 흐르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으니 까. 그렇지만 오른쪽 가슴에는 10센티미터가 넘는 수술 흔적이 생생했고, 때로 욱신거렸어. 그뿐 아니라 겨드랑 이도 팔도 아팠어. 림프절을 32개나 떼어냈으니 그럴 밖 에. 방사선 탓에 살갗도 거뭇거뭇했지. 당신은 전날부터 “내일 제사야”라고 못을 박았지. 당 신 말투에서 제사를 못 지내게 될까봐 염려하는 뉘앙스 를 읽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그렇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 어. 평소 당신 태도로 보아 제사는 절대로 건너뛸 수 있 는 사안이 아니었거든. 당신도 알잖아? 제사는 당신이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집안일이라는 걸. 퇴근한 뒤, 당신은 오래 앉 아서 밤 껍질을 벗겼고 많은 양을 벗기느라 손가락에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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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잡혀도 불평 한 번 하지 않았어. 부탁하지 않아도 청소를 했고 병풍을 세웠고 돗자리를 깔고 가장 큰 상을 꺼내다 펴고 행주질을 하곤 했어. 제사가 끝난 후에는 물론 설거지도 했고. 당신이 내게 소홀했다는 뜻은 아니야. 입원해 있을 동 안,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아플 동안 당신은 그야말로 지극하다고 할 정도로 나를 잘 돌봐주었어. 당신은 매주 나를 끌고 가까운 산 혹은 부근 리조트에 갔지. 눈이 무 릎까지 쌓여도 그 일을 쉬지 않았어. 한창 항암 주사를 맞던 여름, 장맛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데도 주말마다 수목원에 데려가곤 했지. 우산과 우비와 돗자리와 방석, 떡과 물 그리고 시간 맞춰 먹어야 할 약과 진통제를 챙 겼고, 추워하는 나를 위해서 홑이불마저 준비했어. 나는 그저 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됐어. 사실 차를 타고 가는 일도 쉽지는 않았어. 차 뒷좌석에 누워 홑이불을 덮고 누워 있노라면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거든. 그러나 나무와 풀의 초록들, 야생화들, 새소리, 때로는 빗소리마 저 무한한 위로였기에 나 또한 열심히 따라나섰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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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10분도 걷지 못하고 주저앉을망정. 그곳, 성우리조트 기억나? 5월, 우린 오락가락하는 가 랑비를 맞으면서 옆 산에 올랐지. 연초록의 물결을 헤치 면서 걸어 오르는 동안 검은등뻐꾸기가 “홀딱벗고 홀딱 벗고” 하면서 소리쳤고, 내 몸마저 초록이 되어가는 듯했 어. 가파른 산길에서 홀아비꽃대를 발견했지. 내려오는 길에는 큰꽃으아리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비탈 길에서 까치발로 섰어. 사진을 찍었지. 그러는 동안 당 신은 덩굴식물의 줄기를 잡아주었고 우산을 씌워주었 지. 그 시간들, 그 기쁨의 시간들은 분명히 회복에 도움 이 되었을 거야. 그랬으니까, 당신의 그 마음씀씀이가 고마웠으니까, 나도 당연히 제사를 준비했던 거야. 당신이 제사를 얼마 나 소중히 여기는 줄 알고 있었으니까. 제사는 당신이 평생 가져온 마음가짐을, 평상시 태도를 보여주는 일이 었거든. 제사는 당신의 뿌리, 당신의 생각, 당신의 삶을 지탱해 온 것, 곧 부모님의 모습이었으니까. 당신이 굳 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알고 있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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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번에는 건너뛰자고 혹 은 대강 지내자고 말할 수 없었던 거야. 그날도 오후 2시쯤 슈퍼마켓에 갔어. 물건들을 사서 배달을 부탁하고 계란과 두부만 들고 돌아왔지. 동네 슈 퍼와 시장에서만(떡을 샀어) 장을 보았는데도 이미 다리 가 아프기 시작했어. 그때 깨달았어야 했는데, 시장을 봐서 힘든 거라고만 생각했던 거야. 제사만 지내고 푹 쉴 요량이었지. 이윽고 물건이 왔고 여느 때처럼 일을 시작했지. 그런데 준비를 마치고 난 다음 일어설 수가 없었어. 준 비하는 동안 내내 아프던 것이 더 심해졌던 거야. 쇠뭉 치처럼 무겁던 다리가 뻣뻣해지데. 걸을 수가 없었어. 당신이 술을 따를 때 난 앉은 채로 양손을 짚고 엉덩이 를 밀면서 안방으로 갔지. 눈물이 비어져 나오는 걸 참 으면서. 화가 나기 시작했어. 아픔이 영 가라앉지 않았던 거야. 이렇게 아픈데 꼭 제사를 지내야 하나? 사실 그 제사는 건너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 집안 청소조차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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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었거든. 외출했다 돌아오면 이불을 덮고 거기다 핫팩을 두 개씩 뒤집어써야(유니가 해주었어) 아픔이 풀렸 지. 그건 몰랐을 거야. 그래서 그랬을까? 그날, 당신은 내가 왜 화를 내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지. “제사 지내는 거 당연한 거 아 니야? 한 게 뭐 있다고 화를 내?” 그 순간 아득한 신혼, “죽어도 부모님 밥 차려드리고 죽어” 하고 돌아눕던 모습이 떠올랐어. 묵었던 서운함이 아우성쳤지. 시댁 살던 시절, 당신은 퇴근 후면 옷만 갈아입고 부모 님 방으로 가 잠들 때라야 나오곤 했잖아. 분가한 후에 는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주말마다 시댁에 갔고(끙끙 앓던 나와 아기를 두고 가버린 적도 있었어) 전화는 단 하루도 빼놓

지 않았지. 그 기억들이 제사를 고집하는 모습에 겹쳐졌 던 거야. 그 모습들은 바로 당신이었으니까.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지. 당신도 씩씩거리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걸. 우린 둘 다 화가 나서 정신없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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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욕조에 들어앉아 생각해 보니 당신은 유니하 고 의논을 했던 거야. 놀랍게도! 독불장군 당신이 딸아 이하고 의논하고 있었어. 당신이 누군가하고 의논한 일 이 몇 번이나 될까? 다른 문제도 아닌 부부 문제를? 그래 서 깨달았지. 아, 당신이 내가 했던 말을 정말로 깊이 생 각하고 있구나. 제사 문제라면, 부모님 문제라면 어느 누구의 말도 안 듣던 당신인데, 정말로 변했구나. 나도 바보였지. 언제나 남을 먼저 배려하는 그 바보 같 은 성격, 하고픈 말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대는 그 성격 때문에 암에 걸렸는데 여전히 그러고 있다니. 암은 도전 이라고, 이 병을 계기로 내 삶을 바꾸겠다던 결심은 대체 어디로 숨었던 걸까? 그래, 병 때문에 내 삶을 깊이 들여 다볼 기회를 가졌던 거야. 늘 나는 입을 다물기만 했었지. 어른이니까 남편이니 까 나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그 의사를 존중해서 따 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야. 사실 그렇게 하면 안 되었 던 거지. 내 의견을 말해야 했어. 친구들도 만나고 하고 픈 일도 해야 했는데, 나를 위해 소비한다는 것은 너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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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게 여겨졌지. 생각해 보면 부당하다고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늘 어 른들의 말씀, 당신의 의견을 따르기만 했던 거야. 결국 폭발했고 나는 병을 얻었지. 남을 배려한다고 여겼지만 그 배려는 누구에게도 좋지 않았던 거야. 두려움 때문이 었어. 착한 아내, 착한 며느리, 착한 여인이 못 될까봐, 다투게 될까봐 무서웠던 거지. 그래 난 겁쟁이였는데, 가장 나쁜 그 일을 또 되풀이하고 있었네. 누군가 중병에 걸리면 가족들은 조심스러워지지. 생 명 외에 다른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거 야. 암 진단과 수술과 긴 항암 치료를 거치면서 당신은 환자인 나보다 훨씬 더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어. 놀라 울 정도로 달라졌던 거야. 한데 치료가 끝나자 그 두려 움이 많이 느슨해졌나봐. 평상시 당신의 모습으로 돌아 왔던 거야. 하지만 그동안 난 내 삶을 돌아보았지. 가장 중요한 게 무언지 찾았던 거야. 그래서 그 싸움이 그렇 게 격렬했던 거지. 문제는 제사가 아니었어. 우리들의 생각 그 자체가 맞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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딪치는, 당신의 가치관과 내가 느낀 서운함의 충돌이었어.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추구하려던 삶이 옛 성향 때문에 표현되지 못했고 그 결과가 당신의 가치관에 부딪쳐 충돌 을 일으켰던 거야. 그래 맞아, 그 싸움 덕분에 우리 둘 다 가장 중요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던 거야. 당신이 어떻게 반응했더라? 그래, 당신은 나를 요양 원에 보냈지. 집안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염려 말라고 내 등을 떠밀었어. 사실은 요양원에 떨궈놓고 가버렸잖 아.(내가 너무 아파해서 그랬겠지만.) 일주일만 있어보라더 니 한 달로 바뀌데? 그 한 달이 1년이 넘더니, 결국은 14 개월이 되어버렸어. 14개월, 그 긴 시간 동안 오직 나만 을 위해 살았지. 처음 갖는 그 순간들은 즐거웠지만, 또 무척 외로웠고 심심하기도 했지만, 보람 있었어. 잘 걷 지도 못하던 내가 등산은 물론 달리기도 곧잘 하게 되었 으니까. 돌아와서는 제사를 지냈지.(그 일이 없었더라면 제사는 지 긋지긋해졌을지도 몰라. 아예 외면해 버렸을지도 모르고.) 언제

나처럼 상을 차리고 마지막으로 점검하는데 제사상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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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퉁이가 휑했어. 왜 그럴까? 고개를 외로 꼬는데 아들 이 말했지. “어? 떡이 없네?” 그러고 보니 식혜도 없고 생선도 없었어.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당신이 말했어. “괜찮아. 없으면 없는 대로 하지 뭐.” . . . . 여보, 우리 또 싸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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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가족이 환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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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안에 있는 엄마의 방 \\ 권민희

권민희는 30대 중반의 여성이다. 그의 어머 니는 2011년 7월, 67세 되던 해 갑작스럽게 뇌출혈이 발병해 수술을 받았고, 8개월간 재 활 병원에서 지낸 후 요양 병원에 입원했다. 현재는 경미한 반사적 반응만 있을 뿐 의식 은 없는 상태이다.

사랑하는 엄마, 명자 씨. 서울은 벌써 라일락이 피기 시작했어요. 올해는 봄을 만나는 게 참 더디게 느껴졌는데 그래도 시간이 흐르고 있네요. 월요일은 유난히 하루가 길어요. 늦은 밤 편지 를 쓰려고 자판기에 손을 올렸다가 잠시 눈을 감고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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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보았어요. 눈꺼풀이 살짝 떨리고 숨이 크게 내쉬어 지네요. 오늘 하루 애쓴 나에게 감사해요. 명자 씨도 오늘 하루 숨 쉬느라 애썼지요? 그 마음을 느껴보려고 해도 잘 느껴지지가 않아요. 지금 어떤 느낌 일지. 명자 씨의 의식은 어디쯤에 있나요? 지난주에 전 주로 익산으로 응급실 여행 다니느라 피곤했을 텐데 곤 히 잠들어 있으려나요? 그렇게 조용조용 지내는 당신, 지난 화요일 전주 대학 병원의 혼잡한 응급실 입구에 들어섰을 때 단박에 어디 있는지 찾아지더라고요. 그곳에서 제일 예뻤거든요. 여 전히 고운 명자 씨의 얼굴. 2년이 다 되어가네요, 그렇게 누워만 있은 지. 걸레도 행주처럼 빨아 쓰던 부지런한 사람이 어떻게 그 렇게 오래 누워 있을 수가 있데요? 가끔 명자 씨는 알다가 도 모르겠어요. 시골 내려가서도 곱게 화장하고 집 안팎을 청소하던 당신, 그 부지런한 손을 한참 잡고 있었어요. 따 뜻하고 폭신했어요. 왜 따뜻하고 폭신한 느낌을 떠올리는데 눈물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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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그래요, 명자 씨 손은 별로 폭신하지 않았거든요. 바 지런해서 좀체 붓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명자 씨만큼 바 지런하지 못한 나는 늘 잔소리를 듣곤 했죠. 이제 그 잔 소리조차도 그리워요. 그날 병원을 나와 서울 가는 버 스에서 이제 명자 씨랑 이별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조금 담담해진 거 섭섭해 말아요. 신작로가 생기기 전, 정읍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은 자 갈길에 모래 바람 날리는 길이었죠. 큰 자갈이라도 만 날라치면 쿵쿵 몸이 함께 튀어오르던 네 살 무렵의 버스 여행길이 떠오르네요. 부모님이 헤어지면서 할머니 집 으로 보내진 어린 남매, 정민이 오빠와 나를 처음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나요? 나는 명자 씨를 언제 어떻게 처음 봤는지 기억이 없어 요. 아마 내가 다섯 살 무렵이었을 테죠? 그때 명자 씨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와 우리를 만나러 왔었죠. 할머니께서는 새로 엄마가 온다고 했어요. ‘새 로? 엄마?’ 엄마라는 말을 한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만났던 새로운 엄마, 나는 명자 씨가 마음에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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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콧날과 쌍꺼풀진 큰 눈, 하얀 피부까지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 같았어요. 버스만 타면 멀미를 해서 잠들곤 했는데 그런 나를 폭 안아주던 젖가슴이 참 푸근했어요. 그러고 보니 겨울이었던 것 같아요. 시골에서 먼지 공 주처럼 지내던 나만 먼저 데리고 도회지 안양으로 이사 와 예쁜 옷을 사 입혀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시계 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새엄마, 명자 씨는 어린 시절 내게 여 신이었어요. 공주님이 된 것만 같던 몇 달이 지나 정읍 할머니 집에 남아 있던 정민이 오빠도 올라와 네 식구가 안양에서 처음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내 질투가 시작된 것 같아요. 아들인 오빠를 더 예뻐한다고 늘 샘을 부렸 죠. 돌아보면 오빠랑 명자 씨는 찰떡궁합이었어요.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어찌나 부럽던지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술을 과하게 먹고, 명 자 씨를 때리고 큰소리를 지르는 날은 참 힘들었어요. 그런 날이 반복되면서 명자 씨는 바깥으로 나가 동네 친 구들과 시간을 보내곤 했죠. 학교에서 돌아오면 명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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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늘 보이지 않았어요. 텅 빈 집에 들어가는 게 싫어서 어둑해질 때까지 동네를 몇 바퀴고 도는 날이 많아지면 서 내 가슴에 허전함이 쌓이고, 그럴수록 명자 씨가 미워 졌어요. 한데 그렇게 아버지랑 푸닥거리가 있고 나면 명자 씨 가 입버릇처럼 내뱉던 “난 떠나겠다”는 말이 무서워 마 음껏 미워하지도 못했네요. 난 엄마가 필요했거든요. 외 롭고 혼란스러운 날들이었죠. 사춘기가 되면서 명자 씨를 무시하기 시작했던 것 같 아요. 마음 깊이 사과할게요. 당신이 글씨도 잘 못 쓰고, 공부하는 내용도 잘 알지 못한다고 마음으로 비아냥댔 던 거 미안해요. 철없이 헛똑똑이 노릇했던 막내딸내미 는 부부 사이가 뭔지도 몰랐죠. 푸닥거리하면서 왜 같이 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이해는커녕 당신의 삶을 늘 무시하기 일쑤였어요. 참고서 산다고 거짓말하고 친구들하고 맛있는 거 사 먹으러 간 적도 있어요. 늘 돈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명 자 씨가 정말 싫었어요. 입버릇처럼 말하던 “네 엄마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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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아서 못생기고 고집통머리가 세다”고 하는 말은 얼마 나 섭섭했는지 몰라요. 그렇게도 미워하고, 무시하고, 섭섭한 줄만 알았는데 20년을 넘게 함께 살며 명자 씨 음식 맛에 길들여진 나 는 스무 살 넘어 친엄마를 만나 정을 섞을 수가 없었어 요. 입맛이며 살림살이며 너무나 다른 두 엄마를 만나는 게 어찌나 혼돈스럽고 어렵던지, 20대의 내 방황은 거기 서 비롯되었죠. 결핍, 사랑을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 모르는 두 엄마에게 서 나는 그저 사랑을 받고 싶었어요. 명자 씨의 가슴속이 늘 춥고 가난했고,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구나 하고 알 게 된 건 시간이 오래 흐른 후였어요. 그리고 당신이 최선 을 다해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는 것도 당신이 병원에 누워 있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죠. 미움도 원망도 사랑 의 다른 이름임을 알게 해준 명자 씨, 고마워요. 8년 전 정민이 오빠가 갑작스레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 고, 이제 어린 시절과는 거꾸로 명자 씨 내외가 정읍으로 귀향을 했죠. 그리고 어느 날, 전셋집을 얻어 혼자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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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네 집에 왔다가 며칠 편히 쉬다 가려는데 우연히 마주 친 주인집 아저씨가 명자 씨보고 누구냐고 물어 “민희 엄마예요”라고 하니까 아저씨가 엄마 얼굴이 아니라고 해서 당황했던 날 기억하나요? 친엄마랑 교류하는 거 이야기해 주지 그랬냐고 크게 섭 섭해했던 당신. 그때는 친엄마랑 명자 씨 사이에서 여전 히 혼돈스러워 그랬어요. 그래도 그렇게 말해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그때 처음으로 명자 씨도 살아온 이 야기를 꺼냈죠. 자식이 셋이 있다고. 남편이 바람나서 같 이 못 살고 나왔다고. 그 삶이 서글퍼서 당신이 집으로 돌 아가고 난 뒤 혼자 방에 앉아 한참 울었어요. 처음으로 당 신을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죠. 이태 전 여름, 큰외삼촌 49제에 참석하러 올라온 길에 나를 보고 가겠다고 전화로 들려준 목소리가 명자 씨의 마지막 목소리였어요. 다음날 외숙모에게 걸려온 전화. “엄마가 죽을지 모른다. 의식을 잃고 뇌출혈로 쓰러졌 다.” 명자 씨를 수술실로 들여보내기 위해서는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서울에서 인천까지 택시를 타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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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동의서에 사인을 할 때까지도 몰 랐어요. 명자 씨와 꼭 닮은 남자가 곁에 있다는 것을. 명 자 씨의 막내아들이라고 하더군요. 정말 잘생긴 오빠가 눈앞에 있더라고요. 이렇게 잘생긴 자식들이 있으니 얼 마나 든든해요? 정민이 오빠가 스물아홉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명자 씨가 너무나 슬퍼해서 늘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오빠 기일이었네요. 찾아 챙기지 않 으면 이렇게 잊어버리기 일쑤예요. 명자 씨는 늘 기억했 는데 말이죠. 내 것밖에 모르고 남 챙길 줄 모르는 막내 딸 ‘꼼지’는 오늘도 깜박했네요. 오빠 생일은 애쓰지 않 아도 기억이 나는데, 8년이 지나도 기일은 제대로 못 챙 기겠어요. 그런 내가 명자 씨 가고 나면 명자 씨 기일이 나 잘 챙길지 모르겠네요. 잘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죠? 명자 씨는 먹을 복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편지를 쓰다 보니 정민이 오빠도 생각할 수 있었네요. 고마워 요, 명자 씨. 명자 씨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고 곁에서 간병하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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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를 보니 두 사람이 얼마나 애틋하게 살아왔는지 새 삼 알게 되었어요. 한동안 명자 씨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아 눈물이 났는데 얼마 전 꿈에 명자 씨 목소리를 들 었어요. 간드러지게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 아직도 생생 해요. 노래를 잘하는 여자와 춤을 덩실덩실 추는 남자, 두 사람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어요. 병원 생활 고달프 겠지만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지내는 모습이 내겐 감동 이에요. 일흔의 나이지만 여전히 순수하고 유머를 간직 한 아버지, 아버지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서로의 상 처를 지켜보고 안아주고 30년을 함께한 두 분 모습이 이 제서야 보이네요. 나도 그런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요. 명자 씨도 그러길 바라죠? 입버릇처럼 손주 안아보고 싶 다고 하던 소원 들어드리지 못해 미안해요. 벌써 새벽이 깊었어요. 종일 몸이 굳고 힘들었는데, 실 컷 울고 나니 개운하네요. 학창 시절 벼락치기 공부하느 라 늦게까지 있으면, 불 끄고 자라던 명자 씨의 음성이 떠오르네요. 명자 씨는 제게 늘 그런 존재였던 것 같아 요. 괜스레 굳어 있으면 풀어주는. 당신이 있어 잘 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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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어요. 그리고 지난해 사업을 시작해 그토록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신 덕분이에요. 명자 씨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제가 삶을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일뿐이었거든 요. 당장이라도 의식이 돌아와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 아 희망을 놓지 못했던 시간들, 하지만 세상에는 뜻대 로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요. 병실에서 간병했던 아버 지도 그런 순리를 배우는 시간이었겠죠? 두 분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지금 이 시간이 주어져 다행이에요. 참 어렵게 느껴지던 편지였어요. 이 편지를 쓰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눈을 부릅뜨느라 한참이 걸렸어 요. 이제 마치려고 해요. 부디 마음 편히 놓고 푹 쉬세 요. 여행하는 거 좋아하셨잖아요? 이제 명자 씨가 아주 먼 여행 해도 ‘가지 마라’고 붙잡지 않을게요. 명자 씨를 통해 강인한 생명 에너지를 만나요. 그리고 한 순간도 삶을 허투루 살 수 없구나 정신이 들어요. 긴 병원 생활 힘들 텐데 잘 견디는 명자 씨가 존경스러워 요. 마음 여린 가족들, 마음 준비시키느라 애쓰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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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기도 하고요. 시간이 이만큼 지나야 간신히 준비가 되 니까요. 고마워요. 이렇게 이름을 부르니까 어때요 엄마? 저는 왠지 친숙 하고 좋은데요.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내 마음 안에 있 는 엄마의 방을 구석구석 만나본 것 같아요. 여전히 정 갈한 방 안, 나도 그렇게 하루하루 한 생 한 생 정성껏 살 게요. 지금 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엄마의 마음 잊 지 않을게요.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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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대로 괜찮아 \\ 김서린

김서린은 40대 초반의 여성이다. 그의 동생 은 우울증 증세로 정신병원에 두 번 입원해 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친정집에서 지내며 약을 복용하고 있다.

내 동생 아린이에게, 원고 청탁을 받고 어떤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라 못 쓰겠다고 거절할까도 생각하다가, 그간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얘기를 솔직하게 하고 홀가분하게 털어버리고 싶 은 마음에 네가 읽을지 안 읽을지 모르는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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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네가 마흔 살이니 참 오래된 얘기구나…… 네가 재수하던 무렵 찾아온 우울증 때문에 구석방에서 하루 종일 울면서 지내던 때가 말이다. 걱정이 된 엄마가 너 와 다투다가 욕설과 폭력이 오가고, 그럴 때마다 나는 너 무 무섭고 두렵고 힘들었단다. 친할아버지가 정신 분열 이셨고 친고모할머니도 정신 병원에서 돌아가신 병력이 있는 우리 집안에서 너에게까지 우울증이 찾아오니 여 간 무서운 게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의사 소통이 안 되는 네가 어두운 얼굴빛 으로 이웃집에 욕설을 퍼붓고, 옥상에 올라가 돌을 굴리 고, 추운 겨울날 양말도 신지 않은 채 나가서 며칠 만에 들어오는 걸 보며 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당시 엔 우울증이란 말을 지금처럼 예사로 쓰던 때가 아니라 너의 병을 부끄럽게 여기기만 했지 사람들과 얘기를 나 누거나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단다. 별 문제 없이 지내 던 집안이 하루아침에 황폐해져서 집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기만 했어. 그렇지만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사람들과 웃으면서 지냈고. 그렇게 집에서의 나와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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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 내가 달라 그 사이에서 나도 많이 힘들었단다. 어찌어찌해서 네가 사람을 사귀고 결혼을 한 뒤에야 엄마도 네가 아팠었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들과 하게 되 고, 나도 비로소 친한 친구 몇 명에게 털어놓으며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어. 그리고 나도 결혼을 하게 되었지. 하지만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로 이혼을 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너는 상태가 더 심해져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 게 되었지. 난 그 당시 아이를 키우느라 힘겹기도 했지 만, 네가 아프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도 몰랐고, 또 아이에겐 좋은 것만 주고 싶다는 마음에 네가 입원한 병원에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다. 지금 생 각하면 참 미안한 일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땐 약을 먹어서인지 의사 소통이 가능했지만, 퇴원한 후엔 약을 먹느냐 안 먹느냐로 또 엄 마와 늘 싸웠지. 약을 먹지 않으면 얼굴빛부터 검게 변 하고 불안해하는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나도 무 서웠었다. 한번은 엄마가 끓여놓은 육개장을 먹었는데 맛이 씁쓸하고 잠이 쏟아지길래 이상하다고 했더니,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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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널 다그쳐 네가 육개장 안에 며칠분의 약을 쏟아버 렸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부턴 엄마 집에서 음식을 먹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단다. 널 돌보는 일이 힘에 부친 엄마는 아빠를 몰아붙이며 스 트레스를 풀고, 엄마 얘기만 들은 나도 같이 엄마 편을 들 었지. 은퇴 후 외로운데다 존재감마저 잃어버린 아빠가 힘겨울 거란 생각은 못했어. 아빠는 늘 강하고 단단하게 그 자리에 계실 줄만 알았지. 그러다 엄마가 친구들 모임 에 간 날 아빠가 널 추행했다며 벌벌 떨며 찾아온 네 앞에 서 난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단다. 내겐 늘 자상하고 언 제나 날 자랑스럽게 여겨주시던 아빠마저 내가 아는 사람 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려서 난 아빠를 잃어버린 것 같아 죽고만 싶었단다. 너도 내가 알던 밝고 귀엽던 동 생이 아니란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아빠마저 그러 니 정말 딱 죽고 싶더라. 그나마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 각에 정신 차리고 살려고 발버둥 쳤어. 결국 아빠마저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뒤 남동생들과 아빠를 요양원에 모시자는 얘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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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굳은 얼굴로 안 된다고 단칼에 거부하면서 보름 만 에 아빠를 퇴원시키셨지. 같은 집에서 너랑 아빠를 같이 돌보겠다고, 약을 먹으면 아빠 행동이 어눌해진다며 약 도 못 먹게 하시면서. 그 사실을 알고 난 그동안 버티고 있던 신경줄마저 끊어져버리는 것 같았단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무섭고 두려웠단다. 약을 먹고 분별력이 없어진 너를 아빠와 같은 집에 두겠다니, 널 낫 게 하겠다는 건지 아닌지 난 엄마가 미워서 어떻게 할 줄 몰랐단다. 결국엔 자식보다 남편을 택했다는 생각이 들 고 엄마에게 버려졌다는 생각마저 들면서 엄마에 대한 분 노가 하늘을 찌르더구나. 그러면서 엄마가 외출이라도 할 라 치면 네가 우리 집에 와 있게 해야 한다며 나더러 친정 집 근처에서 이사도 가지 말라고 하는 엄마가 난 너무 미 웠단다. 자식보다 남편을 더 위하고 내 가정과 아이는 안 중에도 없는 엄마가 미워서 결국 친정집에서 멀리 이사를 하게 되었지. 엄마 아빠는 얼굴도 보기 싫어서 전화도 안 받고 집에 찾아와도 못 들어오게 했단다. 이제 생각해 보면 그때 비로소 내가 엄마 아빠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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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신 돌아가시면 내가 이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널 돌봐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내 아이를 얼른 키워 독립시키고 널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날 짓눌러 어깨가 늘 무거웠는데 이사한 후에야 내 가정 이 눈에 들어왔단다. 그제야 내가 신랑을 손님처럼 여기 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이도 한 명만 낳은 이유도 알게 되었단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널 돌볼 사 람이 나라는 생각에 아이가 두 명이면 힘들어질까봐 하 나만 낳은 거였지. 이사 후에 나도 살고 아이도 살리려고 심리학 서적도 읽고 교회도 다니고 비폭력 대화도 공부했어. 그러면서 내가 널 꼭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 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몇 년은 가볍고 홀가 분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어. 그런데 이상하지, 근 20 년 널 돌보고 널 낫게 하는 것이 나의 사는 이유였는데 그걸 내려놓으니 내가 살 이유가 없어진 듯 허전하고 공 허한 마음이 드는 거야. 그러면서 그동안 너만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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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아팠다는 걸 이제 알았단다. 아니 지금도 아프단다. 널 만나는 것이 두렵고 부담스러웠는데, 그게 네가 아파 서였다고만 생각했는데, 실은 나도 아파서였다는 것을 이제 알겠어. 나 역시 아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까, 네가 아 픈 것도 또 아빠가 아픈 것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변한 모습의 너도 내 동생이고 아픈 아빠도 나의 아빠라 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구나. 모두 아팠 고, 그러니 이해할 수 있다고, 용납할 수 있겠다고. 내 삶을 찾은 것 같았는데 갑자기 허전하고 공허한 마 음이 드는 내 자신도 그냥 내 모습이라고 그렇게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모습도 있는 그 대로의 나이듯이, 너의 모습, 아빠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의 너이고 아빠라고 받아들일 수 있고. 지금 그대로 괜 찮다고, 그동안 애썼다고, 뭘 어떻게 하지 않아도 된다 고,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토닥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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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다만 오늘을 살아요 \\ 김정온

김정온은 50대 중반의 여성이다. 남편은 2006년 편도암 4기 진단을 받았고, 2011 년 6월 호흡 곤란으로 기구의 도움으로 호 흡하고, 경장 영양식을 위 경관으로 주입해 식사하고 있다. 근 2년 동안 누워서 생활하 고 있다. 2013년 봄부터 조금씩 산행을 하 며, 진통제 패치를 붙이고 진통제를 복용하 면서 통증을 조절하고 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우리 아이 둘 낳고 맞벌이로 바쁘고 빠듯이 살며 시시콜콜한 일로 자주 싸웠지요. 직 장일 하랴 육아와 살림 하랴 힘들고 서툴러 당신에게 도 와달라 요구가 많았지요. 바쁜 당신도 이런 요구들이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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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 부담스러웠을 거예요. 서로 이야기할 시간도 없으니 이래저래 원망과 서운함만 커졌을 거구요. 불만이 커지면 여지없이 부부 싸움을 했지요. 그래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싸우는 모습 안 보이려 는 공통점은 있었어요. 그래서 자제를 많이 했지만 갈등 이 깊어지면 결국 싸우곤 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런 싸움이 속내를 털어놓을 기회가 되어 더 큰 문제로 번지지 않고 잘살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당신이 암 진단을 받고 나서 나는 당신을 배려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지면서 하고 싶은 말을 잘 안 하 게 됐어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속으로 삭이며 지냈죠. 그래서 오늘은 편지로나마 당신에게 다 하지 못 한 이야기를 해보려구요. 항상 축구와 마라톤으로 건강을 챙기던 당신에게 7년 전 암이란 병이 찾아왔어요. 그때 암 선고를 받던 순간 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해요. 당신은 허탈하게 웃고, 나 는 숨을 쉴 수 없었죠. 갑자기 덜렁 다른 세상으로 내동 댕이쳐진 듯했어요. 그 상황에서 내가 당신 앞에서 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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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현실을 고스란히 인정하는 것이 될 것 같아 참고 또 참았어요. 그러다가 당신이 안 보이는 곳에 가서는 어쩌 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지요. 신이 있다면 나와 당신에게 이럴 수는 없다고 원망도 많 이 했지요. 그러다가 두렵고 무서워지면 신께 다시 기도 를 하곤 했어요. “하나님, 아직은 이 사람 데려가면 안 됩 니다.” 아직은 아니라고, 무조건 지금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러다가도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불행이 찾아온 건 아닌지, 당신이 제발 술 좀 그만 마셨으면 좋겠다고 매일 매일 기원해서 이리 된 건 아닌지 모든 것이 다 내 탓으 로 바뀌더군요. 시간이 갈수록 죄책감이 커지고, 암으로 당신이 떠난다는 걸 상상하니 그 미래 또한 두려움과 공 포로 다가왔어요. 조금 더 일찍 건강에 신경 쓰며 살았 더라면, 좀 더 빨리 암을 발견하고 치료했더라면…… 이 미 지나가 버린 수많은 일들이 후회스럽고 괴로웠어요. 한동안은 길을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이고, 나만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느껴졌 지요. 아주 가끔씩은 할 수만 있다면 내 운명을 피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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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우리 아 이들을 보면 죽을 수도 떠날 수도 없더군요. 그때 큰애 는 중학교 1학년, 작은애는 초등학교 5학년이니 그 아이 들을 두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싶더군요. 아이들에게 아빠가 암이라는 이야기를 최대한 충격이 덜 가게 조심스럽게 전했는데, 큰애는 어디서 봤는지 암 도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 너무 걱정 말라고 하고, 작은 애도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해서 우리가 함께 웃었잖아요. 아이들보다 내가 더 겁에 질려 있었지요. 암에 대한 공포와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힘 들어하고 있었어요. 당신을 두고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 하고 있었으니, 내가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어요. 그래서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어요. 지금 이 순간에 집 중하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희망을 갖자. 겨우 마음을 다스리며 당신 치료를 위해 공부하고 몸을 잘 관리하면서 한 5년 동안 잘 지냈지요. 그러나 그런 판단도 나만의 주관적인 것이었어요. 당 신은 계속 암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고,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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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하고 예민해지면서 몸 관리도 먹을거리도 더 신경 을 곤두세웠지요. 그러고는 날더러 치유 과정에 주체적 이지 못하다고 매번 불평을 했지요. 당신에게 집중해서 치료하려고 애쓰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요. 돈을 주고 쓰는 간병인하고 차이가 없다고요. 정말 그때 는 무척 서운했어요. 난 몸이 부서져라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결국 당신 병이 깊어져 입으로는 물 한 방울 못 넘기고 호흡도 힘들어져 기관지 절개로 호흡을 해야 했지요. 정 말 내가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죽을 만큼 힘들었던 방사선 치료를 겨우 끝내고 기쁜 마 음으로 퇴원해서 가족들과 파티를 하겠다고 손수 시장 도 가고 고기도 굽고 준비하다가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출혈로 119를 불렀던 순간, 그 후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헤맬 때도,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치료 동의서 보호자란에 피 묻고 떨리는 손을 흔들리지 않게 부여잡고 하는 사인밖에 없더군요. 항상 당신 코앞에서 최선을 다해 간병했다고 자신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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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당신이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 멍하니 대기실에 앉 아 하루 두 번 면회를 기다리게 되었을 때 실감했어요. 난 당신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할 수 없음을…… 많은 시 간을 함께하며 당신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건 어디까지 나 내 자신의 죄책감을 상쇄하려는 이기적인 노력이었 어요. 그런 일들을 겪고 나니 솔직해지고 되레 마음이 단순해졌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당신 곁에 있 어주는 것이다’라고요. 중환자실에서 담당 의사가 불러 마음의 준비를 하라 고 하면서 내게 묻더군요. 당신이 죽음에 대해 어떤 생 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즈음 우리가 병실에서 필담 나누 던 것을 보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나는 정말 황망해하 며 “우리는 한 번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라 고 대답했어요. 어떻게 그 심각한 상태에서도 우리는 당 신이 살아날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암 병동에서 하루에도 몇 명씩 심각한 상황이 되고 주검으로 실려 나가는 것을 보면서 다음은 우리 차례가 아닐까 무서웠는데, 아마 그런 순간을 인정하기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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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의사는 계속해서 심각성을 강조했어요. “환자 분은 큰 출혈이 세 번째고, 또 그런 상황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출혈로 인해 심장에 무리가 생기고 혈압도 너무 낮아서 살아날 가망이 없습니다”라고요. 당신을 보낼 준 비를 하라며 마지막으로 가족을 모두 부르라고…… 그 순간 내가 당신을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지 실감했 어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당신을 흔들어 깨워서 내가 대체 어찌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어 요. 겨우 아이들에게 전화하고 당신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면서 “아직은 당신을 데려갈 때가 아니라고, 더 시간을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때는 정말 당신을 잃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일주일 만에 중환자실을 나올 수 있었지요. 당신을 만질 수 있 고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니 정말 감사했어요. 그 런데 당신이 필담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회복돼 이야기 를 나누게 되면서 그런 내 기쁨도 주관적인 것이었음을 알게 됐지요. 당신은 통증이 극에 달해 ‘이제 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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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을 때, 아주 잠깐이었지만, 지금까지 세상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평안함과 가벼움을 느꼈다고 했지 요. 순간이었지만 그 느낌이 강렬했는데, 다시 중환자실 에서 정신이 돌아온 자신을 보고 살아났다는 안도감보 다는 지독한 통증과 고통을 다시 견뎌야 할 현실이 너무 나 싫었다고. 내가 당신을 다시 만나 얻는 기쁨보다 당 신이 순간순간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 더 큰 일이구나 느 껴졌어요. 지금까지도 통증은 당신을 힘들고 지치게 하네요. 퇴 원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기력은 조금씩 회 복되지만, 여전히 긴급한 상황이 발생할까봐 긴장을 풀 지 못하고 있지요. 당신 표정이나 몸 상태가 어떤지 모 든 촉각을 집중하고 살피지만, 직접 묻고 확인하지 않으 면 자동적으로 내 주관적 기대치에 맞춰 당신의 몸 상태 를 판단하게 돼요. 투병 기간이 길어지면서 빨리 회복되 었으면 하는 욕구와 바람이 크니까 그렇겠지만, 내가 당 신이 아닌 이상 당신의 고통을 당신만큼 알고 느낄 수 없다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지금 당신의 몸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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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기분에 있는 그대로 대응하려고요. 그래도 혹시 내가 당신 상태를 멋대로 해석하고 앞서가면 다시 정신 차리 게 알려줘요. 내가 당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보, 오늘 하루도 당신 잘 지낼 수 있게 곁에 있을게요.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지난 시간, 비록 당신이 병으로 인해 잃은 것도 많지만 그 과정이 우리를 달라지게 한 것도 많 아요.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했잖아요. 서로를 더 많이 알게 되는 행운도 얻었고, 당신이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는 시간도 됐지요. 특히 그 어떤 때보다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해했지요. 누구한 테나 이런 기회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아직도 당 신이 치르고 있는 고통이 크지만…… 여보, 긴 겨울이 거짓말처럼 지나가고 겹겹이 쌓였던 눈 은 자취도 없어졌어요. 지난겨울, 두려움 속에 첫 산행을 시작하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산에 오르는 기쁨을 준 당신이 고맙고 자랑스러워요. 우리 무리하지 말고 마음이 내키면 오늘도 산에 갑시다. 몸이 힘들어 움직이기 싫으 면 하루 종일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까요? 아니면 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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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으로 이런저런 것들 검색을 할까요? 요즘 세상에 황당 하고 웃기는 일들도 많잖아요. 요즘 유럽 축구에 빠져 있 는 당신이 보기 좋아요. 아직 석션기로 기관지 가래를 빼 고 위로 경장영양식을 먹고 있지만 산에 오를 정도로 강 한 의지를 보이는 당신이 정말 멋있고 훌륭해요. 우리, 내일 일은 알려고도 말고, 미리 걱정도 하지 말 고, 다만 오늘을 살아요. 아, 그래도 비가 오는지 안 오는 지 일기예보는 봐야겠네요. 이렇게 살다 보면 어느 날 이 생의 마지막이 와도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이 최고로 고통스러웠을 때 짧게 경험했던 그 온전 한 평안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선물이라면 그것도 축복 일 것 같아요.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지만 그 순서는 누 가 먼저 일지는 모르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가 먼저 가게 될 수도 있잖아요. 이건 당신이 없이 혼자 살 아낼 자신이 없어 만든 나의 새로운 바람이지만, 그렇게 되면 나를 당신과 같이 다니던 산길 근처 나무 밑에 뿌 려줘요. 당신이랑 걷던 그 산길의 들꽃과 나무들이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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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준 선물에 대한 작은 보답이 되고 싶어요. 사실 당신이 중환자실에서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서 로의 마지막 마무리에 대한 이야기를 미처 하지 못한 걸 후회했어요. 그런데 아직도 당신과 죽음 후 마무리를 말 하기는 어렵네요. 차라리 내가 먼저 죽는다 생각하니 이 야기하기가 편하군요. 여보, 지금 이 순간도 당신과 같 이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어서 고맙고, 당신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줘서 감사해요. 가끔 당신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건 이해해 줘요. 내가 당신이 아니라서 그래요. 나도 당신이 서운하게 하면 그때그때 솔직하게 이야기할 거예요. 당신이 내 옆에 살아서 따듯한 살결을 만질 수 있고 숨 결을 느낄 수 있게 해줘서 정말 감사하고 고마워요. 오 늘밤 좋은 꿈 꾸고 편안하게 자요. 그리고 내일 날씨가 좋고 몸이 괜찮으면 산에 가서 나무와 풀이 어떻게 변했 는지 함께 봐요.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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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빠가 어떤 분인지 알겠어요 \\ 김이담 김이환

김이담, 김이환은 앞에 편지를 쓴 김정온 님 의 딸과 아들로 현재 20대 초중반의 남매이 다. 2006년 편도암 4기 진단을 받고 지금 까지 투병중인 아버지에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편지를 썼다. 김이 담의 편지는 2012년 1월 아버지의 생일날 병원에서 생일 파티를 하면서 선물로 준비 한 편지의 내용이다.

아빠, 아빠한테 편지를 쓰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요. 어렸을 적 빼고는 편지를 쓴 적이 거의 없잖아요. 일 단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이제 아빠가 53세인가? 나도 올해 드디어 성년이 됐어요. 진짜 시간 빠르네요. 아빠가 아픈 지도 6년 정도가 되어가는 것 같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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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그 전엔 많이 놀러 다니고는 했는데…… 가족이 다 같이 기차 타고 순천 여행도 가고 온천 여행도 가고 겨 울 바다도 보러 가고…… 아직도 전부 다 기억이 날 정 도로 정말 즐겁고 좋았어요. 특히 망상해수욕장은 다시 한 번 꼭 가고 싶어요. 아빠가 건강해지면 우리 가족 다 같이 꼭 다시 한 번 가요! 그러고 보니까 삼촌들과도 캠핑 많이 다녔네요. 바비 큐도 해 먹고, 계곡에서 놀기도 하고. 그런데 우리 가족 끼리만 캠핑을 간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걸까? 아빠 건강해지면 그때쯤 내가 운전 면허 따 서 직접 운전할 테니까 함께 캠핑 가요. 아빠랑 가고 싶 은 곳 엄청 많아요. 아빠, 아직 비행기 한 번도 못 타봤죠? 제주도도 못 가 보고. 고등학교 수학 여행 때 한라산 갔다 왔는데 정말 멋있었어. 그런 산은 다음에라도 꼭 다시 가고 싶었어 요. 제주도 갔다 오면 엄마랑 아빠랑 단 둘이 해외 여행 도 시켜드릴게요. 아파서 구경 못하고 경험 못한 만큼 많이! 엄마랑 아빠의 서포터는 내가 할게요. 엄마랑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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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가 20년 동안 아무런 대가 없이 내 든든한 지지자였으 니까. 그러니까 이 딸만 믿으세요! 그리고 좋은 축구화도 한 켤레 사드릴게요. 다시 축구 회 나가야지! 그리고 주말마다 나랑 등산 가요. 계절마 다 설악산이나 지리산 종주 여행도 가고! 아빠 딸내미가 학교에서 공연하는데, 한 번쯤은 보러 와야지! 내가 제일 좋은 자리로 예약해 놓을게요. 진짜진짜 멋진 무대 만들 거예요. 또 이건 비밀 계획이었는데 내가 학교 졸업하고 취직해서 받는 첫 월급으로 우리 가족 모두 최고급 한식 당 가서 맛있는 밥 먹자! 내가 쏠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 지 아빠가 맛있는 음식 다 먹을 수 있도록 회복해야 돼 요. 아직 2년 정도 남았으니까 충분히 회복하고도 남을 거예요. 아빠랑 같이 할 거 진짜 많다! 같이 하고 싶은 거 더 많았는데…… 그건 나중에 다시 차근차근 생각해요, 아빠 상태가 좀 회복되면. 사실 아빠한테 예전부터 편지 쓰려고 했는데 못 썼어 요. 부끄럽고 어색했거든요. 중학교 2학년 때 아빠가 처 음 아프다고 했을 때는 별로 걱정을 안 했어요. 아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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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강한 사람이었거든요, 내 마음속의 아빠는. 암 같은 건 별거 아닌,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아빠였 고, 그리고 그때까진 아빠가 병 때문에 아픈 걸 한 번도 못 봤으니까. 그러다가 아빠가 처음 쓰러졌던 날 있잖아요, 병원 복 도에서. 그때는 정말 놀랐어요. 아직도 그때가 잊혀지 지 않아요. 그리고 깨달았죠. ‘내가 아빠를 강하다고 믿 고 싶었구나, 아빠가 아프다는 걸 내가 회피하고 있었구 나’라고. 티는 별로 안 냈지만 진짜 놀랐어요. 그리고 좀 슬펐어. 아빠가 강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래서 그때 아 빠가 쓰러졌다고 간호사 언니한테 말하러 가서 엄청 울 었어요. 그냥 그때는 너무 무서웠어. 아빠가 내가 생각 하는 것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이…… 그래도 아빠는 정 신력이 강하니까, 아빠가 다시 좋아져서 놀러 다니고 맛 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아픈 건 잠깐일 거라는 믿음은 절대 안 버렸어요. 그런데 이번에 아빠가 중환자실에 있었을 때, 그때는 그 믿음이 조금 흔들렸어요. 그리고 아빠랑 같이 지내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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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시간이 너무나 짧게만 느껴져 참 슬펐어. 아직 나는 스무 살밖에 안 됐는데, 아직 아빠랑 못한 일도 많고 하 고 싶은 일도 많은데…… 싸우기엔 아까운 시간들이었 는데 왜 그렇게 자주 싸웠나 하는 생각도 들고, 산에도 자주 가고 여행도 더 자주 갈 걸 하고 엄청 후회했는데, 그래도 마음 한켠에서는 아빠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 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리고 아빠는 다시 회복했잖아! 아빠는 천하무적은 아니지만 끈기랑 정신력은 누구보 다도 강하잖아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요! 그리고 회복해서 나랑 술도 마셔야지. 많이는 못 마셔도 복분자 주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대학 들어가면서 아빠 한테 술을 배워야지 했는데, 아빠가 좋아하던 술 마시면 서 깊은 이야기도 나누고, 비오면 부침개 부쳐서 막걸리 도 먹고 싶었는데, 대학 생활하면서 먼저 배워서 너무 슬 펐어. 완쾌하면 한 잔 해요! 정말 우리 가족이 다 같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 그 러니까 아빠! 조금만 더 기운내서 이 모든 것 다 해요! 우 리 가족 모두 다 같이! 아빠는 혼자가 아니니까! 엄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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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이환이랑 같이 있는 거니까! 그래야지 내가 아빠한 테 마음껏 선물도 드리고 같이 놀러도 다니잖아. 아빠, 다시 한 번 생신 축하드려요. 또 사랑해요! 하늘만큼 땅 만큼 우주만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요!

P.S. 아빠, 너무 기운이 안 나고 지치면 미래 일기를 써 봐요. 뭘 하고 싶은지, 언제 하고 싶은지 이왕이면 구체 적으로. 소망 리스트 일기를 쓰는 거지! 바라고 바라고 바라면 항상 이루어지니까! 아빠를 제일 사랑하는 그리고 항상 믿는 딸 이담 올림.

아버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편지를 쓰는 게 매우 어색하고 긴장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 했어요. 이제껏 글을 써왔지만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는 그다지 써본 적이 없고, 더욱이 가족에게는 써본 적이 없는데 말이죠. 자주 만나지만 가장 적게 대화를 나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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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망설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저는 그다지 좋은 아들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릴 적부터 애들이랑 잘 어울리지 못하고 공부도 운동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었잖아요. 아버 지가 바라는 아들로서 자라지 못한다는 생각에 상심했 던 적도 많았습니다. 그때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불만도 많고 짜증도 났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난 후부터 아 버지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꼈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매일 같이 장난치듯 저희를 깨우던 목소리예요. 토요일과 일 요일이면 저희를 산에 데려가느라 옆구리를 간질이며 깨우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럼 우린 매일 짜증을 내면서 안 가겠다고 징징거리곤 했죠. 어째서 이때의 기억이 떠 오를까요? 아마도 그건 그때가 아버지가 가장 건강했던 때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솔직히 전 중학생 때까지 아버지의 병에 대해 관심이 없었어요. 제게 아버진 그저 귀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많았고, 가끔 화를 내실 때면 괜히 화풀이를 하고 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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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생각도 했었죠. 저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을 공포나 두려움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항암제가 얼 마나 독하고 고통스러운지, 그것을 참아내는 것이 얼마 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없었죠. 왜냐면 아버진 언제나 그 것을 감추고 있었으니까요.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을 하고 집이 텅 비게 되었을 때 저는 도리어 기뻐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 집에서 함께 놀거나 밤새 게임을 하기도 했죠. 그 와중에도 병마와 싸 우고 계셨을 아버지와 어머니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것 같아요. 정말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집이 비는 날이 많아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 어질수록 모든 것이 시들해졌습니다. 학교 끝나고 돌아 오면 텅 비어 있는 집에서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서 생각했습니다. 약품 냄새로 가득한 병실에 누워 계실 아버지와 그 옆에서 제대로 눕지도 못한 채 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 하지만 그저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릴 적엔 전 아버지를 그다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 아버진 매일 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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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해서 들어오셨고, 엄하게 꾸짖는 모습에선 주눅이 들 곤 했습니다. 그리고 흔히들 느끼는 세대 차이도 느끼면 서 아버지완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죠. 무엇보다 저는 아버지처럼 운동도 공부도 잘하는 게 하 나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생각도 아버지가 앰뷸런스에 실려 갔을 때부터 달라졌습니다. 단순히 아버지가 죽을 고비를 겪 는 걸 보면서 생긴 변화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정신이 혼미해 계실 때, 아버질 찾아온 수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저는 아버지가 부러웠습니다. 많 은 사람들이 아버지 곁에 있다가 가시는 모습을 보니 내 가 보고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훌륭한 인간 관계를 가졌다 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끔찍한 통증과 죽을 고 비 속에서도 언제나 힘을 잃지 않고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며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나라면 저런 고 통에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요.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병원 사람들은 아버지를 불사 신이라고 부른다면서요. 어지간한 사람들도 지쳐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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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만한 고통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나신다 며 병원 직원들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이전부터 해왔던 말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아버지의 말을 잘 듣진 않았지만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이야길 잊은 적은 없었어요. 솔직히 아버지께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드리곤 했기에 편지를 쓰는 것을 망설였습니다. 지금 대학도 붙지 못하고 매일 걱정되는 모습만 보여드린 것 같아서 미안해요. 아버지 가 말했던 이야길 실천하곤 있지만 정작 이룬 것은 변변 치 않은 것 같아서 이러한 이야길 하는 게 전부 형식적 으로 느껴질까 걱정도 되고요. 평소에도 별로 이야길 하지 않지만 그것이 단순히 사 이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지금 은 비록 말도 잘 안 듣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지만 언젠가 아버지가 말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아들 이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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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맞이하고 싶은‘내년 봄’ \\ 박수진

박수진은 40대 중반의 여성이다. 아버지는 전립선암으로 수술 후 1년 만에 재발·전이 되었고, 그 뒤 4년 가량 항암 치료를 받았 다. 현재는 합병증으로 피부 괴사가 일어나 고 있는 상태이며, 이를 치료하기 위해 피부 이식 수술을 7회 정도 진행하였다.

아빠! 오늘 수고하셨죠? 합병증으로 입원한 지도 한 달 이 훌쩍 넘었고, 오늘로 수술도 여섯 번째네요. 수술 잘 마쳤는지, 아빠는 어떤지 물어보려고 전화했더니 엄마 는 연신 “괜찮아. 걱정하지 마. 괜찮아”를 고장 난 녹음기 처럼 반복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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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반복되는 “괜찮아”를 들으면서, 우리가 언제부 터인가 모두 불안해하고 있구나, 그리고 정말 괜찮거나 괜찮지 않거나와는 상관없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가족 을 안심시키기 위한 단어로 ‘괜찮아’를 사용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괜찮을 테지,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지, 괜찮았으면 좋 겠다는 마음이 그렇게 표현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 서도, 우리 모두 아빠와의 이별을 두려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좋지 않은 상황이 우리에게 온다고 해도 우리 는 마음의 준비 같은 건 할 수 없는 거구나 하는 것도 새 삼 깨닫게 돼요. 아빠! 요즘은 세상의 찬란하게 예쁜 것들도 그 찬란함 의 폭만큼 슬퍼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 다. 아침 출근길에 핀 진달래를 보면서, ‘아, 아빠가 내년 에 이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내년에 이 아름다운 풍경 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아빠는 뜨거운 여름 볕을 다시 한 번 맞이할 수 있을까? 가을은 또…… 겨울은 또…… 이 봄볕은 또…… 이 소나기는 또…… 이 바람은 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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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생각이 나도 몰래 들어요. 봄이 와도, 봄이 가도, 여름 이 와도, 여름이 가도…… 그 모든 것들이 다 아빠와 함 께 내 마음으로 들어와서 내 심장을 툭툭 건드리며 애를 태웁니다. 생각해 보면 어떤 계절도 아빠와 헤어질 만한 계절은 없습니다. 먼 훗날 아빠와 헤어지는 시간이 봄이라면 눈 부신 봄볕에, 여름이라면 끝없는 빗줄기에, 가을이라면 스산한 바람에, 겨울이라면 살을 에는 추위에 서럽게 서 럽게 울며 아빠를 기억하게 되겠지요. 애타는 마음을 진정하려고 조용히 앉아 눈을 감으면 저절로 기도가 솟구칩니다. 처음 아빠가 암이라는 사실 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제발 5년만이요’ 하다가, 수술 1년 후 재발하고 전이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제발 3년 만이요’ 하다가, 이제는 ‘제발 사계절 한 번씩만 충실히 함께 느끼고 누리게 해주시고, 봄을 한 번만 더 맞이하게 해주세요’ 하는 말로 그 기한이 짧아지는 만큼 더 간절해 지고 있습니다. 아빠! 어쩌다 이 일이 우리에게 왔을까요! 어쩌다 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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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녀석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 게 되었을까요! 아빠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 로 병원 복도에 앉아서 “왜 나야? ”라고 조용히 내뱉던 말이 저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 가슴 아프게 들렸 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는 병원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서다 가 저와 손끝이 스쳤을 때, 아빠는 제가 아빠의 손을 잡 으려는 줄 알고 제 손을 꼭 쥐고는 그 이후 하루 종일 제 손을 잡고 검사를 받으러 다녔지요. 아빠가 암이라는 진 단을 받은 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 중 제가 기억하 는 가장 가슴 먹먹한 시간이 바로 그때입니다. 당황하셨을 테고, 놀라셨을 테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 르셨을 테고, 두렵기도 했겠지요. 그러다 보니 사실은 손끝이 우연히 스쳤을 뿐인데도 그 손을 꼭 잡고 저를 의지하기 시작한 것이겠지요. 그때 아빠의 손을 잡고 걸 으면서 제가 했던 말도 오늘 엄마의 말처럼 “괜찮아. 걱 정하지 마”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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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씩씩하게 뛰어다니면서 진료 과정을 확인하고 검사를 진행하는 동안 저는 아빠가 제 손을 잡던 그 찰 나의 순간이 준 만 가지도 넘을 감정과 생각으로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아, 그래, 이제 내가 보호자구나. 지금까지는 아빠가 나의 든든한 산이고 나의 안식처였 지만, 이제는 내가 아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구나. 그렇게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나인데, 여태껏 한 없이 아빠에게 기대고만 있었구나’ 하는 생각들이 내 머 리와 가슴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저 역시 두려웠나 봅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아빠가 없는 이 세상도,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는 아빠를 지킬 시간들도 모두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날 우연히 들은 노래에 저는 그만 통곡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라는 그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었어요. “너 는 내 꿈이다, 미래다.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라. 슬퍼 마 라, 인생은 아름답다. 누려라, 너는 내 행복이다.” 아, 그 때의 제 마음을 표현하기엔 글이라는 방법이 너무 작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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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 어떤 아버지들보다 최선을 다해 가정을 지키고, 자 녀를 키워낸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남들이 보기에는 한 없이 부족한 저를 노래의 가사처럼 늘 격려해 주시고 자 랑스러워해 주셨던 아버지, 가족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런 삶을 사셨던 아버지. 그날 그 밤보다 더 길었던 밤 이 저의 삶에 있었을까요? 아빠! 사람은 누구나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보고 싶은 대 로 보나 봅니다. 처음 아빠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도 저는 그저 ‘수술만 잘되면 돼’라고 생각했습니다. 1년 후 재발했다는 판정을 받고 전이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항암 치료만 잘하면 돼’라고 생각했습니다. 병원의 말에 의하면 그 독한 항암을 3주에 한 번씩 4년 이 넘도록 받으면서 후유증 없이 생존한 분이 그리 많지 않다는데, 머리가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달덩이처럼 붓는 아빠의 얼굴을 보면서도 늘 어제처럼, 그제처럼 아빠는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다리가 썩고 염증이 커지고 골프공만한 살을 떼어내고 피부 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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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는 일들이 반복되는 이 와중에도 저는 그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세뇌로 살아가는 듯합니다. 아마도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그 시간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누군들 그 시간을 차분히 받아들일 수 있 겠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쩌면 더 솔직하게 는, 그런 걱정들보다 제 개인의 삶을 더 우선적으로 사느 라 모른 척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없이 죄송하다는 것이 이런 거겠지요. 저에게 주어 졌던 그 기적 같은 시간들을 제가 그렇게 허비하지 말았 어야 했는데, 선물로 주어진 시간들을 매일 거저 얻는 숨 인 양 생각했었나 봅니다. 아빠가 암이라고, 그러니 지 금까지 나누지 못했던 마음, 더하지 못했던 사랑, 앞으로 는 할 수도 없을 표현을 더 많이 하고 충분히 하라고 저 에게 선물로 주신 시간들인데, 저는 그 몇 년의 시간을 ‘설마 올해겠어? 아직은 아니겠지’라며 제 삶을 살기에만 급급했네요. 아빠의 삶이 지금까지처럼 하염없이 저를 기다려주는 삶이기만을 원했네요. 아빠, 제가 그런 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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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네요. 최근 몇 년 동안 아빠를 만났던 시간들을 떠올려봅니다. 처음에 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하는 동 안 인천에서 대구까지 일주일에도 몇 번씩 오갈 때,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썩 괜찮은 딸 노릇하는 척하느라 분주 하기만 했던 것 같아요. 수술 부위가 아물지 않는 바람에 일주일을 더 입원해 있어야 하셨을 때, 저는 인천에 돌아 오는 버스 시간에 맞추느라 정신없이 병실을 나오다가 아 빠랑 눈이 마주쳤었죠. 아마 제가 인지할 수 있는 시간 안 에서는 아빠의 눈물을 처음 봤던 것 같아요. 그 이후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 집에 들르면 “차 막 힌다. 얼른 가라”던 말이 “오늘 가게?”로 바뀌고, 그러고 는 배웅의 시간이 길어지고, 근래에는 서로 울지 않으려 고 먼 곳을 보면서 목소리로만 인사하게 되었죠. 그러고 보니 아주 어렸을 때는 야근하고 돌아오는 아 빠를 제가 기다리고, 한동안 아빠의 직장 문제로 떨어져 살았을 때는 아빠가 오시는 주말을 제가 기다렸는데, 제 가 크고 나서는 수업 마치고 늦게 돌아오는 저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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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친구들이랑 노느라 늦는 저를 아빠가 기다리 고, 멀리 시집간 탓에 친정에 자주 들르지 못하는 저를 아빠가 기다리고, 지금은 언제 들를지 모르는 저를 병실 에서 또 아빠가 기다리게 되었네요. 아빠와 함께한 마흔네 해를 그렇게 서로 기다리는 삶 으로 보낸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아빠 곁에서 살려고 애썼을 텐데, 모든 게 후회가 되고 모든 게 죄송한 날들입니다. 아빠! 우리가 함께 느끼고 목소리를 나누고 부은 눈으 로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괜찮아 걱정하지 마”를 서로에 게 전할 시간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앞으로 여름이 오면 시원한 소나기가 내리고, 햇볕은 생명들을 더 크고 단단히 키워내겠죠. 가을의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 겨울의 소복한 눈을 우리는 다시 함께 맞이하고 즐길 수 있을까요? 그런데 아빠! 저는 이제 다른 생각을 하려구요. 여태까 지 ‘설마, 아직은……’이라며 애써 외면하였던 시간에 대 한 후회나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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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지금,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구요. 어차피 우리에게 온 이 시 간이 아니었더라면, 결혼식장에서 남편에서 손을 넘겨 주시며 제 손을 꼭 쥐고 파르르 떨던 아빠의 손길의 의 미도, 평생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유쾌한 아빠의 웃음 도, 이 나이가 되고 아빠의 보호자가 되고서야 알아버린 우리를 위한 평생의 헌신도 나는 제대로 알 수 없었겠지 요. 그래서 저는 감사하며, 오늘 바로 이 시간을 충분히 표현하며 살려구요. 아빠! 세상에 태어나서 제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 지만 저에게 기적같이 주어진 최고의 은혜가 있다면 그 건 바로 아빠의 딸로 태어난 것입니다. 저는 그것만으로 도 충분합니다. 아빠! 이 세상에서 만나서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가족으로 살게 되어 감사합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딸이지만 아빠의 보호자로 살아가는 기회를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어려운 항 암의 시간들, 수술의 시간들을 기쁜 얼굴로 참고 이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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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계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빠! 아빠와 내년 봄의 따뜻한 봄볕을 함께 맞이하고 싶습니다. 부디 우리에게 조금만 더 머물러주세요. 사랑 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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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말, 자주 못해 미안해요 \\ 허학범

허학범은 40대 초반의 남성이다. 어머니는 50대 초반에 발병한 당뇨병과 60대 후반에 생긴 만성신부전, 지체장애로 인해 9년여 동안 주 3회 이상 투석과 잦은 입원 치료를 받았고, 아버지의 케어로 휠체어를 이용하 여 생활하다가 2013년 1월 세상을 떴다.

엄마가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싶으 면 아버지가 약주를 드신 때입니다. 새로운 이야긴 아니 에요. 같은 시기, 같은 등장 인물들이 출연하거든요. 아 버지가 스무 살 때이니, 1956년. 바로 아래 동생은 열여 덟, 셋째는 열 살, 막내는 네 살. 아버진 막내동생을 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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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라” 달래면서 못내 당신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을 이야기하십니다. 이 스토리의 마지막 부분은 늘 그로부터 2년 후 엄마 가 그 집에 시집오는 장면이네요. 지금 생각하니 왜 엄 마는 그런 집으로 시집오셨나 싶어요.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남편에 시아버지, 남동생 셋까지 다 챙기고 거두셨 으니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까요? 거기에 누나들만 넷 을 낳고 아들인 저를 낳기까지 혼자서 또 얼마나 속이 썩으셨을까요? 그렇게 아버지는 엄마 얘길 하고 싶으신 걸 텐데, 엄마 지금 계신 곳은 어때요? 좋은 곳이겠죠? 눈물도 아픔도 없는 그런 곳 맞지요? 밝고 당당하던 생전의 모습으로 이제는 맘껏 뛰어다닐 수 있는 그런 곳일 거라 믿어요. 어려서는 누나들이 많은 게 힘들기도 했는데, 형제들 이 많다는 게 이래서 좋구나 했던 건 엄마의 잦은 입원 이 시작된 뒤부터였어요. 병원비며 간병비까지 이 모든 걸 저 혼자서 감당해 내기가 쉽지 않아서 누나들이 원망 스럽기도 했는데, 나중에 누나들이 똑같이 감당하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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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해줘서 큰 힘이 되었답니다. 엄마는 늘 궁금해 하셨죠. 병원비를 누가 얼마나 부담 했는지. 그런 이야기를 엄마에게 일일이 할 수는 없었 어요. 그런 얘기가 엄마를 힘들게 할 수 있으니까요. 이 해해 주실 거죠? 하지만 엄마에게 좀 섭섭한 때도 있었 어요. 경제적 사정이 좋지 못했던 저에게 좀 너무하셨 던 때가 있었거든요. 엄마의 무릎 수술을 계획하고 날까 지 잡았었잖아요? 그런데 당뇨에 이어 만성신부전으로 오랫동안 병원에 계시는 동안 엄마의 기운이 많이 약해 져 마취와 수술이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며 수술이 취소되고 다시 수술 일정을 잡지 못한 일로 엄마가 많이 서운해 하셨죠. 그때 차근차근 이해하실 수 있도록 말씀 드리지 못한 건 죄송하지만, 정말 그땐 엄마가 얼마나 야 속했는지 몰라요. 그때 장기간 입원비만도 무릎 수술시 생각했던 비용만큼 들었어요. 그래도 8년이라는 긴 시간을 걷지도 뛰지도 못하고 살 아야 했던 엄마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해요. 하지만 더 마음이 힘들고 괴로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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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엄마가 떠나는 길을 배웅해 드리지 못한 것이에요. 그 전날 밤 일어나고 싶어 해서 일으켜드리고 여느 때처 럼 잘 주무시라고 인사하던 참에 사이다가 마시고 싶다 하셨는데 복수가 많이 차 있어 제가 안 된다고 했죠. 그 랬는데 다음날 아침 그렇게 인사도 없이 떠나실 줄은 몰 랐어요. 왜 그렇게 황망히 가셨는지 시간이 흐른 뒤 엄마를 만 나면 꼭 물어보고 싶어요. 엄마에게 못다 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고 미뤘던 얘기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때서 야 깨달았어요.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을 볼 때마다, 특 히 사이다를 볼 때는 더 많이 엄마 생각이 나요. 짠 음식 이 엄마에겐 독이 된다는 생각에 그렇게 잔소리를 많이 했던 건데…… 엄마도 참 힘드셨을 거예요. 먹고 싶은 걸 참아야 했고, 그때마다 저와 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어 야 했으니까요 둘째누나 가게가 새로운 곳으로 이사했을 때였죠. 엄 마를 휠체어로 모시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을 때 다른 것 보다 먼저 저와 엄마의 시선이 닿았던 곳은 손님들께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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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하려고 차려놓은 음식들이었죠. 저는 어떻게든 엄마 의 시선에서 빨리 음식이 멀어지게 해야겠다는 생각으 로 인사만 바삐 나눈 후 곧 엄마를 모시고 나왔죠. 그때 많이 섭섭하셨죠? 아버지도 그때의 일이 못내 안타까우 셨는지 엄마에게 그때 드시고 싶어 하던 음식을 나중에 해주셨다는 얘길 들었어요. 엄마, 우리 집 사는 모양을 아는 다른 사람들은 제가 늦도록 결혼하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사는 걸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이해한다는 듯 말을 하기도 했 죠. 저 역시도 엄마와 아버지를 선한 마음으로 모실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는 않았어요. 거기에 함께 신앙 을 이야기하고 나눌 수 있기까지 바랐으니 사람 찾기가 더 어려울 수밖에요. 내게 눈이 높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사실 엄마 때문에 힘든 척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핑계였어요. 제가 소극적인 성격이고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인 자기 합리화가 많은 까닭이 더 컸어요. 이제 엄마처럼 밝고 당당한 사람으로 살면서 좋은 사람 만나게 도와주세요. 그러면 엄마도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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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시겠죠? 엄마, 우리 5남매를 위해 늘 기도해 주셔서 정말 감사 드려요. 그래도 엄마가 기도해 주셔서 큰누나도 아픔을 이겨내며 잘 버틸 수 있었고, 정말 귀한 효녀여서 엄마가 먼저 가신 후에 엄마 곁으로 갔잖아요. 아픔 없는 곳에 서 두 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계시리라 생각하면, 한편으론 섭섭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두 분이 참 부럽다 싶기도 해요. 엄마, 요즘에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라디오로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가 꼭 엄마의 얘기 인 것 같아서 감정이 차오르곤 해요. 결국은 그것을 막 지 못하고 실컷 쏟아내고 맙니다. 사회복지사라는 직업 때문에 외향적인 성격이 되어가는구나 싶어도, 아직은 사람들 앞에서 저를 잘 드러내지 못하고 이렇게 혼자 차 안에서 울어요. 그래서인지 저 혼자 있는,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는 자동차 안이 엄마를 그리며 마음껏 울 수 있는 저만의 공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땐 보고 싶은 엄마가 문득 제 차 뒤에 앉아 계신다는 생각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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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해요. 작고 아담한 자동차지만 엄마는 늘 아들이 운전해 주 는 이 차가 가장 든든하고 편하고 최고로 좋은 차라고 말씀해 주셨죠. 다시 한 번 엄마를 제 차에 모실 수만 있 다면, 그렇게도 가고 싶어 하셨던 부산에 가고 싶어요. 엄마가 한 번도 못 타본 KTX로 모실까, 비행기로 모실까 고민도 해보았는데, 그래도 엄마가 쉬고 싶을 땐 얼마든 지 휴게소에 들러 쉴 수 있게 제가 직접 엄마를 모시고 가는 방법이 좋겠다 생각했죠. 시간이 많이 지나서 옛날 우리가 살던 때와는 크게 변했 지만, 그래도 골목골목을 다니다 보면 옛 느낌이 되살아나 곤 한답니다. 즐겨 가셨던 자갈치시장이며 건너편 국제시 장과 깡통시장에 들러 휠체어 탄 엄마 손에 돈을 쥐어드 리고, 사람들과 큰소리로 얘기도 나누고 물건 값도 흥정하 는 엄마를 뒤에서 아무 말 없이 밀어드리고 싶어요. 엄마, 아버지는 다행히 잘 계세요. 엄마와 영영 헤어지 던 날 아침, 제가 너무 많이 울고 힘들어해서 그런 저 때 문에도 더 의연히 자리를 지키셨죠. 나중에야 빈소 한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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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울고 계신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지금은 집안의 살 림이며 음식, 그 밖에 모든 일을 아버지가 하고 계세요. 엄마가 아버지께 많은 걸 알려주셔서 지금은 김치도 잘 담그고 국도 아주 잘 끓이세요. 이따금 제가 레시피를 보고 만든 반찬은 제 입맛에만 맞는지 아버진 잘 안 드 시더라구요. 그래도 저는 계속 하려고요. 엄마, 저도 엄마의 아들인지라 짜게 드시던 엄마의 식 습관을 많이 따라가네요. 많이 조심해야겠죠? 저 이제 헬스장에서 이따금씩 개인 지도도 받으면서 운동 시작 했어요. 필요 없는 살도 빼고 몸을 건강하게 만들려고 요.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해 주신 엄마의 아들로서 꼭 해 야 할 일 중 하나가 그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잘 지켜 봐 주시고 도와주세요. 누군가를 아끼고 생각하며 사랑한다는 걸 꼭 말을 해야 만 아는 건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말을 해서 더 분명 히 알게 되고 또 확실히 믿게 된다는 걸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됐어요. 가족들 간에 사랑한다는 말, 어린아이일 때 만 하는 말이 아니었어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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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자주 해야 하는 말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안 것 같아요. 3년 전이었나요? 화이트데이에 말없이 엄마 옆에 놓고 간 사탕 병을 보고 엄마가 저에게 말씀하셨죠. “엄마, 사랑해?” 아기같이 환하고 밝던 엄마의 미소를 저는 아직도 기 억합니다. 무뚝뚝한 아들은 뭐라고 대답도 못하고 애써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요. 그게 지금 너무 후회가 되네요. 엄마가 들을 수 있게 큰 목소리로 “사랑해요”라 고 말하지 못한 게 말예요. 온 우주에 담긴 엄마의 숨결을 느끼고 엄마의 말씀을 먹고 엄마의 기운을 마시며 살아가는 아들이 엄마에게 이제야 말해요. 들어주세요. “사랑해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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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사랑 아낌없이 드리렵니다 \\ 박수규

박수규는 50대 후반의 여성이다. 그의 시어 머니는 84세에 노인성 뇌졸중으로 두 달 간 치료를 받았다. 현재 청력을 거의 상실하여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며 인지 능력도 저하된 상태이다.

어머니께. “어머니∼ 어, 머, 니∼” 아, 얼마나 더 힘주어 불러야 제 말이 들리시려나요? 오늘도 저는 눈앞이 캄캄해지도 록 답답한 가슴으로 당신을 불러봅니다. 아니, 힘없이 쳐진 당신의 어깨를 붙잡고 마주앉아 갖은 인상을 써가 며 당신께 말을 걸어봅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은 묵묵부답이네요. 이제는 귀도 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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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도 더 멀어버린 어머니.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앉 아 계신 뒷모습이 너무도 슬프고 쓸쓸해서 당신 눈길보다 더 멀리 허공을 바라보는 제 마음을 어머니는 아시나요? 따사로운 햇살이 대지를 간질이고 새싹들은 깨어나 일 제히 생명의 노래를 부르던 지난 어느 봄날, 당신은 갑자 기 휭 하니 어지럼증을 느끼며 모로 누우셨지요. 하필이 면 그날이 봄바람을 맞자고 어머니 댁으로 떠났던 날이었 어요. 놀란 저희는 어머니를 모시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렸고, 그렇게 기약 없는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노인성 뇌졸중, 그것은 우리에게 지난한 싸움을 알리 는 신호탄이었어요. 저는 날마다 어머니께 물과 약과 밥 을 먹여드려야 했고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지요. 그렇게 보낸 힘든 날들이 어느새 두 달이 넘어가네요. 그래서요, 어머니! 저는 이제껏 한 번도 써보지 않았 던, 아니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이 편지를 당신 께 쓰려 합니다. 당신과 함께 살아온 그 길고 긴 지난날 이야기들을 어떻게 필설로 다할 수가 있겠어요. 몇 날이 가고 몇 년이 가고, 살아온 세월만큼의 시간이 다시 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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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다 해도 제 가슴속 얘기들을 당신께 어찌 다 들려드릴 수 있겠어요. 제 가슴이 이러할진대 어머니, 당신의 가 슴속엔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까요? 아카시아 꽃향기가 천지에 진동하던 제 나이 스물일 곱의 어느 5월, 당신은 저의 시어머니가 되셨지요. 한없 이 기쁘고 신성하고 사랑과 행복만이 가득할 줄 알았던 결혼이란 것이 철없는 어느 숙맥의 희망가였음을 알아 차리는 데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조부모님을 비롯하여 쉰 명이 넘는 일가친척을 섬겨 야 하는 당신과 저는 무지막지하게 일 많은 대종가의 종 부였지요. 한 달이 멀다하고 다가오는 기제사에 명절과 집안의 온갖 대소사를 챙기다 보면 일에 묻혀 1년이 휙 지나가곤 했어요. 할머님과 아버님의 생신, 그리고 두 번의 제사와 설까지 들어 있는 춥고 추웠던 그 겨울날의 이야기를 저는 지금도 눈물 없이는 기억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곰처럼 묵묵히 일만 하셨지요. 어느 날 제가 물었습니다. “어머니, 화나고 속상하지 않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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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육부 생긴 사람은 다 같은 법이여.” 그때부터 저는 늘 생각했지요. 도대체 어머니의 오장 육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너무나도 가부장적인 남편과 엄초시하 시부모님 밑에서 말 한 마디 못하고 살아오신 어머니, 박봉의 공무원 아내로 숱한 이사와 가난을 숙명 처럼 여기고 몸으로 버텨오신 어머니, 그 혹독한 시집살 이에 쉰도 안 되어 청력을 상실하신 어머니, 그리하여 그 만 ‘아다다’가 되신 우리 어머니. 그런 당신의 삶이 제 눈에는 동정과 존경은커녕 한없 이 우매하고 모순되게만 보였습니다. 당신을 깊이 들여 다볼수록 미련하고 고지식하여 도무지 그때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저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무시하 고 또 무시했지요. 당신의 무지 앞에 분노하고 절망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죽어도 당 신 같은 삶은 절대로 대물림하지 않겠다며 회한의 날들 을 보냈습니다. 그 회한은 어머니의 침묵만큼이나 깊고 깊어서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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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었지요. 제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유랑의 길을 가게 된다 해도 이제 그만 결혼 생활을 파기해 버리고 싶었으니까요. 그리하여 저는 이 모순된 제도와 관습과 불평등으로부터,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마냥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아버님께 부당하게도 심한 꾸지람을 듣 고 뒤뜰에 나가 서럽게 울던 날, 어머니는 말씀하셨지 요. “얘야, 종부는 죄가 많아서 된 게 아니고 하늘이 낸 사람이란다.” 하지만 어머니! 종부, 그 이름은 제겐 맞지 않는 옷이었 고 멍에였습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고정 관 념을 가진 시어른들 앞에서 저는 속으로 ‘암탉이 울면 알 을 낳는다’며 반항했어요. 무조건 참고 순종하며 유순해야 하는 게 종부의 미덕이라는 지엄하신 아버님의 교훈 앞에 낡은 틀과 성차별은 깨어 부숴야 할 제도라며 각을 세웠 지요. 그리하여 저는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고 “딸들아, 일 어나라”고 외치며 여성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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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고 한탄하며 좌절하고 분노하며 보낸 그런 시간들 이었어요. 그땐 한없이 조바심이 났었고, 제 청춘은 덧 없이 흘러가고 있었으며, 세월은 저를 기다려주지 않았 어요. 봄이 와도 음산했고, 고목이라도 끌어안고 통곡하 고 싶을 만큼 응어리진 가슴이었으며, 풀잎이라도 어루 만지며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이제 와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당신 을 바라보니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시대와의 불화 였고, 허약한 순진성이었으며, 오만한 저의 자존심이었 어요. 당신이 아들을 결혼시키던 그 나이가 된 지금에 와서야 당신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한없 이 자애롭고 온화하고 넉넉한 가슴을 가진 이 시대의 진 정한 어머니였다는 것을요. 그 깊고 깊은 침묵은 가족에 대한 더없는 사랑이었다는 것을 말예요. 어머니! 당신은 평생을 살아오시며 남한테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 없고, 단 한 번도 저를 나무라거나 제게 언짢 은 표정 짓지 않으셨어요. 언제나 좋은 것을 제게 쥐어 주고 세상 누구보다 저를 믿어주셨어요. 세상이 작고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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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것없고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에 진정한 삶의 의미와 보석 같은 인생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저는 당신한테서 배웠습니다. “행복이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자신을 기쁘게 생각하 는 것”이라고 한, 나카야마 요우코의 말처럼요. 어머니! 지금 창밖엔 비가 오고 있어요. 인생의 늦은 저녁에 내리는 비는 어떤 느낌일까요? 산천초목은 저 비를 맞고 나날이 푸르러 가겠지만 당신의 심신은 꺼져 가는 모닥불을 닮았네요. 이제는 너무 깊은 병을 얻어 더 깊은 침묵 속에 잠기신 어머니! 사랑은 결코 말로 하 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한다는 것을 당신은 제게 가 르쳐주셨어요. 영국 시인 테니슨은 말했지요, “속고, 속 이고…… 그리고 죽는다.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재이고 먼지인 것을.” 어머니! 언젠가 우리에게 영원한 이별이 찾아온다 해 도 슬프긴 하겠지만 저는 아무 후회 없이 아쉬움 없이 어머니와 작별하고 싶어요. 그러기에 저는 제게 남은 사 랑을 아낌없이 어머니께 돌려드리렵니다. 그리고 또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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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가 제가 시어머니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제게 하셨던 것처럼 저도 그렇게 제 며늘아이를 사랑하겠습니다. 강물이 흘러가듯 흘러가 버린 어머니의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제 가슴 깊이 간직하며 오래오래 어머 니의 사랑을 얘기하렵니다. 어머니! 모처럼의 편지가 자꾸자꾸 길어지려 하네요. 당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계세요. 부디 안 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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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치유를 위한 편지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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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 박미라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심신통합치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그동안 치유하는 글쓰기, 명상 여행 등의 프로그램을 이끌었 고 현재는 융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개인 상 담을 하고 있다.《천만번 괜찮아》 《치유하 는 글쓰기》를 썼다.

저는 꽤 오래 전에 부모님과 사별했습니다. 아버지는 제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는 스물다섯 살에 떠나셨지 요. 아버지는 급성간염이었고 어머니는 직장암으로 시 작해 암의 전 과정을 거친 뒤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1년 반 동안 다른 모든 생활을 접고 어머니의 병간호에 매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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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는데, 그때 목격한 질병과 죽음의 과정은 너무 충격적 이었고 그 경험이 오래 그리고 깊게 저의 삶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최근 저 역시 전이된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받고 휴지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환 자의 가족으로, 그리고 환자로 두 측면의 삶을 모두 살게 된 셈입니다. 이 글은 이처럼 환자로서, 그 가족으로서, 그리고 치유 하는 글쓰기 안내자로서의 삶을 모두 살아낸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환우와 가족들이 서로에게 쓰는 편지가 사실은 얼마나 뜨겁고 아름다운 이야기인지, 그것 이 얼마나 치유적인지, 그리고 어떻게 쓰면 더 도움이 될 지 등에 대한 얘기를 이 책에 보태고자 합니다.

편지 쓰기는 정말 중요한 치유의 도구입니다.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를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편지 쓰는 이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고 해소해 줍니다. 전자의 역할은 ‘소통’이고 후자의 역할은 ‘발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통과 발설은 모두 마음을 치유하는 데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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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치유를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편지 쓰기’는 첫 번 째 글쓰기입니다. 가장 절절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대상 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글쓰기 를 두려워하는 이들도 편지글은 비교적 쉽게 쓸 수 있고, 절절한 감정을 느끼게 한 대상에게 쓰는 편지라면 더더 욱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지지요.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엔 절절한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질병의 고통을 경험하는 환우와 그의 가족들이 안고 있 는 사연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게다가 환우의 병이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 다. 과거에 하지 못하고 미뤄둔 이야기들도 많겠지만, 병을 얻으면서 경험하게 된, 놀라고 화나고 두렵고 서럽 고 고통스러운 사연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아무도 모 르게 돌아누워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게 한 사연, 한밤중 혼자 잠에서 깨어 망연한 심정으로 서성이게 만든 그 많 은 사연들…… 이처럼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 운 사연을 누군가에게 보내서 조금이라도 그와 나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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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편지 쓰기는 그래서 환우와 그 가족들에게 참 좋은 치 유의 도구가 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털어놓고 싶은 속내, 나누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모두 편지지에 담아 보세요. 일단 글로 옮기기만 해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 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실제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담은 글쓰기가 심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이 많은 연구 보고서로 발표되었답니다.

어떻게 쓸까?―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이 세상의 많은 문제가 인간 관계에서 만들어지지만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문제가 더 깊어집니다. 일찌감 치 자신의 진심을 차분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면, 잠시만 이라도 숨을 가다듬고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면, 오해는 줄어들고 마음의 고통 또한 적어졌겠지요. 편지 가 그 역할을 대신해 줄 수 있습니다. 혼자서 차분하게 마음을 글로 옮기고, 또 그것을 읽어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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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글이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라 한번 씌어져 상대에게 읽히고 나면 바꿀 수가 없습니다. 상대가 그 즉시 해명할 수도 없습 니다. 글로 모든 오해를 다 해소하려면 상당한 문장력이 필요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 다.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려다 더 큰 오해, 더 강한 불만만 쌓일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을 진 실하게 표현했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 의 진실이 상대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상대에게 보낼 편지는 오래 다듬는 과정이 필요 합니다. 나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이야기에도 상대는 의 외로 서운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문투나 사용된 단어 몇 개에 마음이 상해버릴 수도 있지요. 그렇게 되면 정작 하 고 싶었던 얘기는 상대에게 가 닿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내 얘기가 의도하지 않게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 는 않은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강조하고 있 는지 염두에 두면서 문장을 고치고 또 고쳐보세요.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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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좀더 완곡하게, 어떤 것은 더 강조해서, 그러나 감 정적인 이야기는 좀 더 가라앉혀서 쓰는 겁니다. 그렇게 글을 완성하는 데 며칠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것은 그렇게 고쳐 쓰면서 내 감정도 조금 씩 가라앉는다는 겁니다. 글을 쓰면서 이미 많은 감정을 해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대를 원망했던 것 중에서 내 마음이 원인이었던 것들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과거에, 반복해서 관계를 단절하는 한 친구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너의 행동이 나를 얼마나 화나게 했는지 주절주절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 다 보니 뭔가 통찰이 왔습니다. 친구에게 내는 화라고 하기엔 좀 과한 감정이 느껴진 것이지요. 그리고 그 친 구와의 일 이전에 이미 제 안에 관계 단절에 대한 오랜 상처가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상실감이 어느새 분노로 변해 똬리를 틀고 있었던 거지요. 부모에게 ‘왜 당신들 맘대로 떠나버린 거야? 내 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당신들을 잃기 싫어서 얼마나 몸 부림쳤는데……’ 하는 외침이 있었던 거예요. 그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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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고하는 친구에게 투사되어 과도한 분노의 감정 을 느끼게 된 겁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소통이란 본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소통이라는 단어는 아마도 불통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우리가 희구하게 된 희망 사항인지도 모릅니다. 너와 나 는 원래 하나가 아닌 둘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 나면서 너와 나로 분리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반대편에 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 세상은 만물이 다 분리되어 있으며, 우리는 평생 그 사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공부를 하게 됩니다. 너와 나는 하나가 아니며,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완전히 이해 하기 어렵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는 사실을 받아 들이는 일은 참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소통의 환상을 포기하는 일이지요. 인간의 절대 고독이 바로 거 기서 생겨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 면서 소통을 시도한다면 소통의 내용이 많이 달라질 것 입니다. 우리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에게 완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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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통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 낯선 사람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화가 나지는 않지요. 우리가 이해와 소통을 고집하는 대상은 부부, 부모자식, 절친한 친구 같은 가까 운 사람들입니다. 가까이 살았으므로 나에 대해 많은 것 을 알 거라고 믿게 됩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내 마음이 네 마 음일 거라고, 나 역시 네 마음을 다 안다고 제멋대로 판 단하고 해석한 것이지요. 나와 너의 심리적 경계선을 잃 어버린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동일시의 한 측면 이지요. 그런데 사실 너무 가까워도 상대가 제대로 보 이지 않습니다. 반백년을 같이 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 존재가 부부란 말이 있듯이요. 그러니 편지지를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해보세요. ‘우 리는 피차 잘 알지 못해.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의 착각이야. 게다가 우리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어 서 거의 매번 낯설음에 놀라고 있어.’ 이렇게 전제한 뒤 편지를 쓴다면 상대에게 건네는 말이 조금 더 조심스러 워질 겁니다. 자신의 마음을 설명할 때 좀 더 친절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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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니다. 왜 내 생각과 다르냐고 원망하는 일도 적어지겠 지요. 편지를 읽은 상대의 반응이 내 기대와 달라도 크 게 실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타자란 내 기대와 는 상관없는 존재이니까요. 이처럼 상대를 고려하면서 쓴 편지로 작은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 기쁨은 무척 커집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소통의 기쁨을 누 리게 되는 것이지요.

어떻게 쓸까?―부치지 않는 편지 그러나 치유를 목적으로 쓰는 편지는 대부분 ‘부치지 않는 편지’입니다. 상대를 향해 썼지만 그 전에 글쓴이의 감정에 충실한 편지, 글쓴이를 위해 존재하는 편지입니 다. 감당하기 힘든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발설해서 해소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상대가 읽기 에는 부적절하지요. 또 상대에게 보낼 것을 전제한다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어렵겠지요. 일단 편지지를 펼쳐놓고 글에 대해 미리 어떤 구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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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가야 합니다. 글을 쓰 는 순간 밀려오는 생각과 감정을 모두 글로 옮기는 것입 니다. 편지 쓰기는 상대에게 말을 건네는 형식이기 때문 에 구어체가 좋고, 구어체 문장은 대부분 간략하고 쉬운 말로 쓰게 됩니다. 진솔한 마음은 미사여구나 문학적 수 사보다는 쉬운 말들에서 잘 표현되지요. 일관된 논리 따 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그리 일관되지 않 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다 보면 점점 글의 내용에 몰입해 기억나지 않 던 과거의 생각, 감정도 올라오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의식이 느슨하게 되면서 무의식의 내용들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좋은 현상이니 그대로 다 받아 적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사회적인 가면을 쓰고 웃 는 얼굴로 원만하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만큼, 무의식에 는 억눌린 감정들이 쌓이게 됩니다. 그 감정들이 이렇게 수런거립니다. ‘무섭고 두려워.’ ‘너무 외로워.’ ‘화가 나. 얼마나 미운지 몰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걸 글쓰기 형식으로 드러내 내면의 긴장감을 낮추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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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글쓰기의 목적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치유하는 글 쓰기를 무의식적 글쓰기라고도 부릅니다. 견디기 힘든 마음의 고통을 가지고 있다면 밤마다 그 에게 편지를 써보세요. 그날 느낀 마음의 짐을 그날 모 두 글로 옮기고 잠든 뒤 또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는 겁 니다. 그렇게 해서 내 마음의 고통이 어느 정도라도 해 소된다면 굳이 소통을 고집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실제로 심리학자들은, 상대로 인해 생겼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마음의 고통이 우리 자신의 마음에 존재하는 렌 즈에 비쳐진 일그러진 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충고합니 다. 심리학적 용어로 그것은 일종의 ‘투사’입니다. 예를 들어 내 안에 나를 혹독하게 대하는 또 다른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비정하게 대한다고 생각하게 됩니 다. 이때 내 마음을 투사한 상대에게 나는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하는데, 하나는 그에게 죽도록 헌신하는 것이고, 또 다르게는 그를 지나치게 비정하게 보면서 끝 없이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런 존재가 없 다면 나는, 나를 괴롭히라는 상대의 요구에 말려들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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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것이며, 상대의 비정함을 과장해서 보지도 않게 될 것 입니다. 또 내 안에 두려움에 떠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한없이 가여워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두려움 이 크지 않다면 상대가 의외로 강하고 의연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요.

어떻게 쓸까?―나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하여 결국 우리가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내 아내, 내 남편, 금쪽같은 내 자식에게 쓰는 편지는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아내, 남편, 자식에게 보내 는 편지입니다. 현실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힘을 잃 었는데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살아 나를 옥죄고 있는 존재, 내게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라고 강요하는 존재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들에게, 내가 그동안 당신들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고 실컷 하소 연하세요. 그리고 이제는 나를 놓아달라고, 색안경을 벗 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달라고, 나를 온전히 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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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더 이상 당신들에 대한 생각으로 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고 말입니다. 하 소연이 충분하면 저절로 그들로부터 벗어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환우와 가족이 가슴으로 나누는 편지 신체적인 고통, 죽음의 두려움을 안고 사는 환우와 그 가족들이 경험하는 생각과 감정은 특별할 수밖에 없습 니다. 두 가지 모두 가장 절박한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 입니다. 병에 대해 알게 되면서 환우와 가족들은 충격에 휩싸이게 되고, 각종 치료와 통증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경험하며, 죽음의 그림자로 인해 늘 극도로 불안한 마음입니다. 아픈 가족이 완전히 건강해지면 그 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다 털어놔야지, 하는 심정으로 꾹 꾹 눌러 담은 이야기도 이제 한계치에 다다라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많이 지쳐 있습니다. 먼저 질병을 안고 있는 환우의 경우엔 지나온 삶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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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총체적으로 뒤돌아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 병 의 원인을 지난 시절의 불화나 고통에서 찾으려고 하고 그 대상을 원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부모가, 혹은 배우자가 나를 고통에 빠뜨렸고 그것 때문에 내가 병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 간의 인식과 기억에 많은 착오와 착각이 있다는 것은 수 많은 연구에서 밝혀졌으므로 환우의 기억이 반드시 사 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의 진위를 가리는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느끼는 원망, 노여움, 서 러움 등은 사실입니다. 그 감정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감 정과 과거 기억을 모두 편지로 써보세요. 매일 일기 쓰 듯 말하고 싶은 모든 이에게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부 치지 않을 편지가 될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말고 절실하게 써보세요. 그러다 보면 불편한 감정은 어 느 정도 해소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하는 삶의 통 찰과 지혜가 올라올 수도 있답니다. 만약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회한이 든다면 자기 자신 에게 편지를 써보세요. 지금의 나에게 쓰거나, 인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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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어느 특정 시절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겁니다. 두려움에 떨던 일곱 살의 나, 방황하던 스 무 살의 나,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던 30대의 나에게 말 이에요. 지금 병을 앓고 있는 신체의 특정 부위에 편지를 써도 좋습니다. 나의 위장, 대장, 간, 가슴, 자궁에게 말이지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나름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요. 그들에게 말을 걸어보는 겁니다. 그들이 지금 얼마나 힘들어할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위로해 주고, 그리 고 지난날 돌보지 않고 함부로 했던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 그 중에서도 불편하고 불행했 던 자기 자신과 계속해서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지요. 나 자신과 하는 화해든 주변 사람들과의 화해든 화해하는 것 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서로를 연결시키는 것이고 연결되 어 순환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우의 가족도 아주 복잡한 감정에 시달리게 됩니다. 상대에 대한 안쓰러움, 연민, 두려움도 있지만 평소에도 나를 힘들게 하더니 끝내 아프기까지 해서 나를 고통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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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게 하나 하는 원망도 있고, 불행한 가족의 가족원이 되 었다는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죄책감 이 클 것입니다. 그의 병이 나로 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는 마음, 그에게 충실하지 못했다는 마음, 나 혼자 살아 남는다는 마음, 아픈 그로부터 여전히 도망치고 싶어 하 는 마음을 발견하면서 깊은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모든 사실을 편지로 써보세요. 결국 그 고백은 나 자신 에게 하는 고백 성사가 될 것이며, 나는 나의 그림자를 인정하고 용서해서 가벼워진 마음으로 내일을 살게 될 것입니다. 특히 가족 중에 희생적인 성격의 소유자나 죄책감이 많은 가족원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늘 아픈 가족을 주인 공으로 삼기 때문에 더 많이 지치게 됩니다. 아픈 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배려하느라 자신을 최대한 배경 으로 밀어내 소외시킵니다. ‘넌 지금 힘들 자격이 없어’ 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족원은 결 국 환자만큼 병들어 갑니다. 환자와 자신의 경계선이 무 너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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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와 가족이 경계선을 명확히 하는 일은 중요합니 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이고, 가족은 또 정상인으로 일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족이 환자로부터 거리감 을 두고 건강을 유지해야 환자도 안심하고 그들에게 의 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기적이라는 자책감은 접어 두고 각자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만약 아픈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책의 내용이 지 나치다면 그걸 알아채고 내용을 조금씩 바꿔보세요. 사 실 환우나 가족이나 모두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 겁니다. 힘에 부쳐 부족했던 것은 또 인간의 한계이며, 알고 보 면 어쩔 수 없는 이유가 다 있답니다. 그러니 조금 더 의 연하고 당당하게, 잘못은 받아들이지만 자신의 입장과 이해도 내세우는 겁니다. 그렇게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진답니다. 그런데 환우와 가족이 서로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저 는 개인적으로, 사랑과 사과와 용서의 편지를 쓰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인생의 가장 절박한 순간에 우리가 해 야 할 일은 사랑의 확인이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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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부치지 않는 편지로 또는 말로 직접 표현하고, 사랑의 마음은 편지로 써서 보내는 것입니다. 많이 수정하고 다 듬었다 해도 부정적인 내용의 편지는 절박한 상황에 선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이 될 수 있으니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편지글이 가진 고정성 때문에 더 더욱 그렇습니다. 자꾸 떠오르는 미안한 마음, 지금까지 미뤄두고 있는 용서의 내용을 찬찬히 적어 가족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들도 상관없습니다. “자꾸 짜증내서 미 안해. 짜증을 내고 나면 늘 후회의 마음이 밀려오는데도 힘들면 참을 수가 없어져. 당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해 서 미안해. 당신이 아프다는 게 두려워서 그랬어. 당신 에게 무심한 게 아니야……”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 이 얼마나 고마운지, 자랑스러운지, 내게 중요한 사람인 지,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얘기를 편지에 쓰세요.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그 얘기, 사랑한 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답니다. 평생 가 슴에 남을 안타까운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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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편지 부치는 편지든 부치지 않는 편지든 편지 내용의 당사 자가 아닌 사람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은 의미 있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한 다른 이들에게 그 편 지가 위로가 될 수도 있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면 글 을 쓴 사람도 지지와 위로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치유 글쓰기에서 공감 역시 굉장히 중요한 요소지요. 다른 이 들의 이야기를 통해 경험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도 중 요합니다. 경험과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은 더 이상 사소한 일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환우와 환우 가족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편지를 쓰고 낭독하는 모임을 만들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 모임에는 편지를 주고받을 가족들도 함께할 수 있는데 고백의 내 용이 너무 솔직해서 누군가 상처를 입었다 해도 끈질기 게 하다 보면 집단의 역동이 결국 그것을 치유해 줄 것 입니다. 사실 편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편지 쓰는 이가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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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화내고 원망하는 내용일 때조차 사랑이 뿌리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원망하고 미워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그 믿음 을 마음 깊이 인식한다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소 통도 아름답습니다.

편지 쓰기를 통해 마음 치유를 시도하는 이들을 위한 팁 ◎  글을 잘 써야 한다고 감시하고 평가하는 검열관을 자신의 마음에서 내보내고 자유롭게 생각나는 대로 쓸 것. ◎  글을 쓸 때 자신의 감정과 함께 그 감정을 만들었던 구체적 인 사건도 함께 기록할 것. 사건은 직면하고 감정은 해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  쓰고 나면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낯설게 다시 읽어보 고 그 느낌을 정리해 볼 것. ◎  내용을 심화시키고 싶다면 한 통의 편지에 한 주제씩 담아 쓰도록 시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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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우러 온 당신에게 첫 번째 책

나는 날마다 나아지고 있다 병을 바라보는 관점, 긍정적인 마음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 는지, 아픈 몸으로 마음의 평화는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등 먼저 아파본 사람들이 병을 통해 깨닫고 발견한 인생의 선 물들을 담아놓았다. (2012년 6월 출간) 석창우, 순진, 기자영, 이임선, 장현갑, 풀라, 능행, 김안나, 김상운 지음

사랑을 배우러 온 당신에게 두 번째 책

‘오늘 하루’라는 선물 이현주 목사와 정목 스님이, 병으로 인한 육체적·심리적 고통, 경제적 어려움, 관계의 어려움 등 환우와 가족들의 진솔한 고 민을 듣고, 때론 따뜻하게 때론 단호한 목소리로 위로와 용기, 지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013년 1월 출간) 이현주 목사, 정목 스님, 그리고 환우들 지음

‘사랑을 배우러 온 당신에게’ 시리즈를 신청하실 때 신청하게 된 사연 을 남겨주세요. 본인이든, 지인이든, 지금 현재 앓고 있는 병과 마음 의 상태 또는 이 책을 알게 된 경로 등 다양한 의견을 적어주시면 됩 니다. 또는 시리즈 중 기존에 읽어본 책자가 있다면 그에 대한 느낌이 나 좋았던 점, 개선이 필요한 점도 함께 적어주세요. 새로운 책을 기 획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백천문화재단 홈페이지 : http://www.bccf.or.kr 트위터 @healingbccf


지금 바로, 편지지에 당신 마음을 적어보세요. 미움과 원망의 마음조차도 실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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