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o Trail of JEJU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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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ㆍ오조 지질트레일 Jeju Global Geopark

화산, 바다와 사람을 만나 해양문화를 품다

Jeju Global Geopark 화산, 바다와 사람을 만나 해양문화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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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바다와 사람을 만나 해양문화를 품다

화산, 바다와 사람을 만나 해양문화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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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성산일출봉이 내내 따라다닌다!” 14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마을, 성산리 16 가장 먼저 햇살 닿는 마을, 오조리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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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01 불의 기억

성산일출봉

성산일출봉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26 자연과 세월이 빚어낸 위대한 합작품 28 세계자연유산으로서의 성산일출봉 30 독특한 환경과 다양한 식생 32 그 바다 속도 특별하다 34 동화로 만나는 설화 / 설문대할망과 성산일출봉 36 성산일출봉에 삼별초군이 주둔했었다? 38 동화로 만나는 설화 / 성산일출봉과 김통정 40 조선시대의 성산일출봉 42 ‘탐라십경도’ 속 성산일출봉 44 탐라순력도 속에 담긴 성산일출봉 46 영주10경 속 성산일출봉의 해돋이 48 송구영신의 대축제, 성산일출제 5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굼부리’ 목장 52 일기예보를 해주는 삶의 나침반 54 돌로 만든 배? 56 성산일출봉이 품은 참나리 이야기 58 신성한 기암, ‘등경돌’ 60

진지동굴

아픔의 역사현장, 일제진지동굴 62

해안

일출봉과 한 몸이었던 해안 64

터진목

이름만 남은 ‘터진목’ 66 성산성 돌들을 날라다 터진목을 막아 68

4.3 유적지

터진목과 4.3이야기 70 성산지역 주민학살을 거부한 문형순 서장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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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02 물의 추억

내수면

호수가 된 바다, 내수면 78 양어장의 추억, ‘장정의보’와 ‘정도정보’ 80 오조리 양어장 82 철새들의 천국 84 화산섬의 기록, 튜물러스 86 열악한 환경에서 피어난 해안가 풀포기들 88 ‘돌과 바람의 섬’의 농업을 지켜온 밭담 90

오조포구

잔잔한 호수 속 쌍월을 안고 있는 오조포구 92

족지물

제주사람들의 생명수 길어내던 물통들 94

식산봉

식산봉은 국내 최대 황근 자생지 96 동화로 만나는 설화 / ‘식산’이 된 바우오름? 98 동화로 만나는 설화 / 바우오름의 슬픈 사랑 100 이 바위산에 사는 식물들 102

식산봉 주변

동화로 만나는 설화 / 여기에 설문대의 오줌길이?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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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밭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즐기는 조개잡이 106

성산갑문

20년 만에 재가동된 성산갑문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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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03 바람의 길 마을 입구

저마다 내력을 품은 성산리 포구들 114 원조 성산포항, 수매밋 116

성산항

무역과 신문화의 관문, 성산항 118 굴곡의 제주역사 함께해온 성산항 120

바람언덕

삶 한가득 바람을 안고... 122

해녀의 길

제주여성의 아이콘, 해녀 124 ‘이엿사나 이엿사~’ 힘내던 성산포 해녀노래 126

성산마을제단

민간신앙으로 하나 되는 성산사람들 128 ‘바람의 신’ 모시는 영등굿 130

이생진 시비

성산포에서만 해가 뜨는 이유는... 132

오정개

천연방파제를 앞세운 포구, 오정개 134 오정개가 품고 있는 동물골격화석 136

우뭇개

성산해녀들의 보금자리, 우뭇개 138

우뭇개 동산

해안마을도 비껴갈 수 없었던 4.3의 회오리 140 밭농사용 거름으로 쓰던 생조와 풍조 142

성산일출봉 주차장

성산·오조 마을의 싱싱한 맛, 3회 / 자리물회, 한치물회, 해삼물회 144 착착 감기는 맛, 성산·오조 마을의 5죽 / 깅이죽, 뭉게죽, 전복죽, 옥돔죽, 조개죽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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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트레일

제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152

여행정보

숙소ㆍ식당 158

▲ 오조리 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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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 한눈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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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 STOP

버스정류장

화장실

뷰포인트

카페

쉼터

주차장

횡단보도

지오액티비티

지오푸드

임시코스

정식코스

※성산항ㆍ우도 이야기에서 테우리동산 부근 해안길은 정비중이므로 9월까지는 임시코스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화산쇄설물 방출

탄도성 낙하

화산쇄설성 퇴적층 화쇄난류

코스거리: 8.3km(성산일출봉 트레킹포함 1.2km) 소요시간: 3시간 30분 ~ 4시간(성산일출봉 트레킹 포함)

정방향

역방 식산봉

용천수,‘족지물’

성산항•우도 해설포인트

시인 이생진 詩碑 거리

오정개

4.1km

5.5km

6.5km

6.8km

2.4km

1.6km

1.1km

300m

3.3km

7.1km

튜물러스•밭담 해설포인트 철새도래지 해설포인트

터진목•4.3 유적지

1.2km

시작/도착

용천수,‘족지물’

일제 동굴진지유적지

정방향 역방향 성산 오조 지질트레일코스는 양방향코스입니다. 성산항•우도 해설포인트

시인 이생진 詩碑 거리

5.5km

식산봉 식산봉

오정개

6.5km

6.8km 7.1km

1.6km

포인트 철새도래지 해설포인트

1.1km

300m

터진목•4.3 유적지

일제 동굴진지유적지

시작/도착

1.2km 성산일출봉 등반시 1.2km추가

용천수,‘족지물’ 용천수,‘족지물’

3.3km 3.8km

역방

성산항•우도 해설포인트 시인 이생진 詩碑 거리 성산항•우도 해설포인트 시인 이생진 詩碑 거리

오정개 오정개

4.1km 3km

5.5km 1.6km

6.5km 600m

6.8km 300m

2.4km 4.7km

1.6km 5.5km

1.1km 6km

300m 6.8m

튜물러스•밭담 해설포인트 철새도래지 해설포인트 튜물러스•밭담 해설포인트 철새도래지 해설포인트

터진목•4.3 유적지 터진목•4.3 유적지

1.2km 1.2km 7.1km 시작/도착 7.1km 시작/도착 성산일출봉 등반시 성산일출봉 등반시 1.2km추가 1.2km추가

일제 동굴진지유적지 일제 동굴진지유적지

성산 오조 지질트레일코스는 양방향코스입니다.

일코스는 양방향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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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k

성산일출봉 등반시 1.2km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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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수,‘족지물’

3.


체크 포인트

CHECK LIST 지질트레일 이용안내

리본 파랑과 분홍으로 이루어진 리본으로 돌담, 전봇대, 나뭇가지 곳곳에 매달려 있습니다.

방향 표시기 헷갈리는 길목마다 방향표시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해설판 주요 포인트마다 해설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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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CK POINT 지질마을 해설사와 동행하기 마을 주민이 직접 전해주는 지리와 역사, 문화 게다가 생생한 지역뉴스까지 트레일의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 드립니다. ▶ 신청방법 : 홈페이지(www.jejugeopark.com)에 해설사 신청 Click! ※ 해설사 신청은 유료 프로그램 입니다.

자외선 차단은 필수! 그늘이 거의 없으니 반드시 자외선 차단제와 모자 또는 양산을 준비해주세요. 마을 골목길에서는 쉿!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모두 즐거운 트레일이 될 수 있도록 골목길에서는 조용히 걸어주세요. 철새도래지에서는 쉿! 제주를 찾아온 새들이 편안히 쉴 수 있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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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물 그리고 바람의 하모니”

화산, 바다와 사람을 만나 해양문화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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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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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성산일출봉이 내내 따라다닌다!”

제주도 서귀포시 동쪽에 자리한 성산읍은 성산리, 오조리, 시흥리, 고성리, 신량리, 수산1·2리, 온평리, 난산리, 신산리, 삼달1·2리, 신풍리, 신천리 등 14개의 행정리에 30여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산· 오조 지질트레일” 코스는 성산읍이 품은 마을가운데 성산일출봉을 끼고 있는 성산리와, 성산일출봉이 넌지시 바라보이는 마을 오조리에 걸쳐 이 어집니다. 성산일출봉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 입니다. 일출봉 아래 주차장에서 시작과 끝을 맺게 되는 트레일 코스의 길이는 8.3㎞, 보통걸음으로 걷는다면 두 시간 정도 걸립니다. 트레일은 찬찬히 둘러보고 살펴 보며 걸어야 제 맛이니 시간은 넉넉하게 잡아두는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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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는 주차장에서 일출봉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으로 출발하면 왼쪽으로 들어와 끝을 맺게 되고, 왼쪽으로 출발하면 그 반대가 됩니다. 이 책에서는 오른쪽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지질트레일’이라 쓰인 진분홍 색과 감청색 리본이 곳곳에서 길을 안내할 것입니다. 그늘이 거의 없으니 자외선 차단제와 모자 또는 양산을 준비하는게 좋겠습니다. 비 날씨가 염려되면 우산과 우비도 챙기기 바랍니다. 이 코스의 테마는 ‘불과 물 그리고 바람의 하모니’입니다. 그 안에서 ‘불의 기억’과 ‘물의 추억’ 그리고 ‘바람의 길’로 이어지며 지질과 해양 문화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낼 것입니다. 이 코스를 걷는 내내 성산 일출봉이 마치 지켜주는 것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런 성산일출봉과 간간이 눈을 맞추며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나보기 바랍니다. 14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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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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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산리는 성산반도에 자리한 마을입니다. 반도(半島)는 삼 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한 면은 뭍에 이어진 땅을 일컫는 것이지요. 성산일출봉과 그 아래 펼쳐진 자락으로 이루어진 성산반도는 해류 작용으로 생겨난 모래언덕에 의해 가느다랗 게 제주본섬과 이어져 있습니다. 성산리는‘섬이면서 섬이 아 닌 곳에 자리한 마을’ 인 셈이지요.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1800년대 초반인 것으로 추정된 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꽤 깊어 보입니다. 탐라 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곽지리식 적갈색토기 조각 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탐라시대로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외적을 방어하는 전략기지로 자주 활용되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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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이 마을에서 변함없이 유명한 것은 성산일출봉 입니다. 영주십경 중 제1경, 해 뜨는 오름으로 이미 잘 알려진 성산일출봉은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고 세계지질공원 명소가 되면서 그 이름을 더욱 드날리고 있습니다. 성산일출봉 덕분에 자연 유산 마을이 된 성산리는 제주의 7개 자연 유산 마을 가운데 면적은 가장 작지만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곳입니다. 성산일출봉뿐만 아니라 해상교통의 요충지 로 꼽히는 성산항이 있어 늘 활기가 넘치는 이 마을에는 840여 가구에 1,900여 명의 주민들이 농업과 수산업 그리고 관광업 등에 종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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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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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햇살 닿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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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리는 성산 앞바다 일출봉 건너에서 떠오른 해가 햇살 을 펴면 가장 먼저 와 닿는 마을이며 성산일출봉에서 서쪽으로 900m 거리에 자리해 있습니다. 성산일출봉이 넌지시 바라보이고 황근자생지로 알려진 오름 식산봉이 널따란 내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늘 평화롭 고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마을이지요. 오조리 지역에는 1500년대 이전부터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고 전해집니다. 옛 문헌자료에 의하면 당시 ‘오조포연대’가 설치돼 있었고, 따라서 연대 운영과 관련된 사람들이 거주 하는 마을이 들어서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후의 문헌기록 가운데 “생선을 파는 가게 수십 호가 있는데 겨울과 봄에와 살고 여름에 떠나간다. (김상헌 ≪남사록≫, 1601~1602년)” 거나, “지금은 저절로 한 마을을 이뤄 겨울에 왔다가 여름에 돌아가는 일은 없다.(이원진 ≪탐라지≫, 1653년)”는 등의 기록이 오조리의 옛날을 상상해보게 합니다. 그런가하면 오래 전부터 배를 잘 짓는 목수들이 많아 온갖 선박들을 제조 했던 곳이기도 했고, 해녀들이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작업하는 ‘뱃물질’이 유난히 활발한 마을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성산읍 14개 행정리 가운데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마을, 오조리에는 460여 가구에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22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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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01

불의 기억

성산일출봉 진지동굴 해안 터진목 4.3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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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STORY 01 _ 불의 기억 화산쇄설물 방출

탄도성 낙하

화산쇄설성 퇴적층 화쇄난류

▲섯시형 응회구의 모식도(손영관,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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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7~5천 년 전쯤의 어느 날, 제주섬 동쪽 해안 인근 바닷물이 부글 부글 끓더니 펑펑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성산일출봉의 탄생, 곧 수성 화산활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뜨거운 마그마가 지표면을 향해 올라오다가 지하수나 바닷물, 호수 등 물을 만나면 물이 끓게 되면서 강력한 폭발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수성화산활동 입니다. 수성화산활동으로 생겨난 화산지형으로는 ‘응회구(凝灰丘)’와 ‘응회환(凝灰環)’이 있습니다. 마그마와 만나는 물의 양이 마그마보다 많으면, 화구에서 터져 나온 화산재와 암석 등 화산분출물은 축축하게 젖은 채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가 천천히 떨어지면서 쌓이는데, 그 경사가 가팔라집니다. 이런 화산지형을 ‘응회구’라고 부릅니다. ‘화산재 언덕’이라는 뜻이 지요. 반면에 마그마와 물의 양이 비슷하면 화산분출물들이 뜨거운 화산가스나 수증기와 뒤섞여 수평으로 사방팔방 퍼지면서 땅 위 를 빠르게 흐르다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쌓이게 됩니다. 이런 화산지형은 ‘응회환’이라 부릅니다. ‘완만한 화산재 언덕’을 뜻하는 것이지요. 성산일출봉은 전형적인 응회구입니다. 대개의 응회구는 주로 한 차례의 분출에 의해서 생깁니다. 그런데 성산일출봉에서는 분출이 크게 세 단계에 걸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성산일출봉 동쪽에 자리 한 작은 바위섬 ‘새끼청산’ 부근을 중심으로 화산이 처음으로 분출 돼 성산일출봉의 하부를 형성하고, 서쪽에서 다시 화산이 분출돼 성산 일출봉의 중간부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2차 화산분출구 바로 서쪽에서 마지막으로 화산이 분출하면서, 지금의 성산일출봉 상층부가 형성됐다고 하는군요. 26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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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세월이 빚어낸 위대한 합작품 STORY 01 _ 불의 기억

차례의 화산 분출을 마친 성산일출봉은 처음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 화산이 분출했던 시기는 7~5천 년 전, 당시는 석기시대였고 제주섬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 폭발할 때의 모습은 물론 갓 빚어졌을 때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 광경이었을까요? 또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요? 그 경이로 우면서도 두려운 장면을 지켜보면서, 세상을 만들어내는 위대하고도 불가 사의한 존재를 떠올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제주섬을 창조한 것으로 전해지는 거대한 여신 설문대 설화에서 성산지역이 유난히 많이 거론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어쨌거나 성산일출봉의 태초 모습은 알 길이 없지만, 바다 속에서 태어난 이 오름은 태어나자마자 숙명적으로 파도와 바람을 만날 수밖에 없었고, 파도와 바람에게 제 살을 내주어야 했을 겁니다. 그렇게 수천 년이 지나는 긴 세월동안 성산일출봉의 화산재 층이 깎여나갔습니다. 그러나 파도와 바람은 참 절묘하게도 이 응회구의 내부구조를 볼 수 있도록 절벽을 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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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냈으면서도 분화구는 고스란히 남겨두었습니다. 덕분에 오늘날의 성산 일출봉은 웅장한 왕관 모양을 하게 된 것이지요. 높이가 182m인 이 오름의 분화구는 지름이 600m나 되고, 넓이는 13만 ㎡, 화구 바닥의 깊이는 90m에 이릅니다. 분화구만 남은 오름, 분화구로만 이루어진 오름이라할 만하지요. 분화구 주변에는 아흔아홉봉이라 일컬어지는 거대하고 날카로운 기암들이 둘러서서 장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커다란 왕관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가하면 기암들은 금방이라도 출정할 듯 기개넘치는 장군들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하고,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것 같은 동물들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기암들에게는 등경돌, 장군석, 초관바위, 곰바위, 독수리바위, 거북바위 등 바로 해당 모습이 떠오르는 이름이 붙기 도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만나고 있는 성산일출봉은 불과 물이 만들고 파도와 바람이 빚어낸, 자연과 세월의 위대한 합작품인 셈입니다. 28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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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자연유산으로서의 성산일출봉 STORY 01 _ 불의 기억

성 산일출봉은 경관적 가치와 더불어 지질학적 가치가 높아 2007년 6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수려한 경관으로 예로부터 이름나 있었고, 지금도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으니 그 경관적 가치야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오름이 지닌 지질학적 가치는 어떤 것일까요? 성산일출봉은 제주섬이 지닌 360여 개의 오름 가운데 유일하게 바다 속에서 분출한 수성화산체로 응회구의 탄생 과정은 물론, 오랜 세월속에 침식 돼가는 과정까지 보여주는 세계적인 지형입니다. 성산일출봉을 포함한 성산반도 일대는 화산지질의 구조는 물론이고, 파도에 의한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퇴적암층을 단면으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어서 지질학계에서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지요. 성산일출봉의 아랫부분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 오름의 지질학적 가치 를 제대로 맛볼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깎이느라 지표에 직접 드러나 있는 노두(露頭, outcrop)가 응회구의 지질 구조와 퇴적층의 구조는 물론 다양한 퇴적물들의 종류를 아낌없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오름의 노두에서는 화산쇄설물 퇴적층, 얕은 바다 속에서 화산쇄설물이 파도에 씻기며 퇴적되었음을 보여주는 사층리, 화산이 분출할 때에 터져 나오는 용암의 조각인 화산력(火山礫), 화산재와 화산력이 떨어지며 만들어진 지층, 화산탄이 응회암에 떨어져 층리를 아래로 오목한 주머니 모양으로 변형시킨 탄낭구조 등이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많은 물이 마그마와 섞일 때, 습기를 머금어 끈끈한 상태인 화산재는 콩알처럼 뭉치기도 하고 화산력의 표면에 달라붙기도 합니다. 이렇게 만들 어진 화산력을 부가화산력(附加火山礫, accretionary lapilli)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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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복화산력(被覆火山礫, armoured lapilli)이라 하는데,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화산재와 화산력이 낙하해 만들어진 지층과 탄낭의 높이, 얕은 바다 속에서 화산 쇄설물이 파도에 씻기며 퇴적됐음을 보여주는 사층리 등이 성산일출 봉이 화산활동을 할 때의 바다 높이가 현재의 바다 높이와 같고, 얕은 바다 속에서 분출했으며 화산체의 대부분이 해수면 위에서 쌓였음을 알려주고 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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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환경과 다양한 식생 STORY 01 _ 불의 기억

성산일출봉 주변은 기온의 변화가 완만하고 해륙풍이 자주 발생하며 주위 바다에 안개 끼는 날이 많은 해양성 기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연평균 기온은 제주시보다 1.1℃, 서귀포시보다 0.5℃가 높은 16.4℃입니다. 연강수량도 제주 전역의 평균 1,500㎜보다 높은 1,840㎜입니다. 이처럼 성산일출봉은 해양에 위치한데다 지형적 조건도 특수해서 그에 따른 식물상과 식생도 다양 합니다. 성산일출봉에서 가장 특별한 식물로 꼽히는 것은 환경부 보호야생식물로 지정돼있는 풍란입니다. 암벽지대 허리께에 부분부분 모여서 딱 붙어 자생 하고 있다는군요. 풍란 말고도 부처손, 돌토끼고사리, 해녀콩, 갯금불초 등의 특별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분화구 안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식물은 참억새입니다. 그 안에 쑥, 계요등, 인동덩굴, 수영, 무릇, 맥문동 등이 섞여 자라고 있고, 가장자리 안팎에는 찔레나무, 상산, 산뽕나무, 해송, 우묵사스레피 등의 나무 종류와 딱지꽃, 왕모시풀 등의 풀 종류도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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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의 암벽지대는 거의 수직으로 깎아질러 있어서 식물이 별로 자 라지 않을 것 같지만, 이곳이야말로 자랑할 만한 식생지대라고 합니다. 송악, 담쟁이덩굴, 마삭줄, 갯기름나물, 우묵사스레피, 돈나무, 사철나무, 보리밥나무, 밀사초, 사철쭉, 참억새, 왕모시풀, 참나리, 감국, 해국, 털머위, 부처손, 땅채송화, 담쟁이덩굴, 애기모람, 풍란 등등의 다양한 식물들이 이 암벽지대에서 조사되었다는군요. 그런가하면 주차장에서 등산로 초입까지 펼쳐진 초지에서는, 가장 넓은 면적 을 차지하고 있는 잔디는 물론 벌노랑이, 갯무, 토끼풀 등을 만날 수 있고, 바닷가 쪽으로 가면 참억새를 비롯해 순비기나무, 갯메꽃, 갯금불초, 번행초, 살갈퀴, 점나도나물, 솜방망이, 갯쑥부쟁이, 갯쇠보리, 돌가시나무, 밀사초, 사철쭉, 털머위, 감국, 갯방풍 등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등산로 계단이 시작 되는 곳에서부터 정상까지 가는 길에서는 해송, 사철나무, 까마귀쪽나무, 천선과나무, 좀굴거리, 후박나무, 상산, 거문딸기, 찔레꽃, 팔손이, 멍석딸기, 쇠무릎, 짚신나물, 큰뱀무, 왕모시풀, 맥문동, 담쟁이덩굴, 무릇, 인동덩굴, 송악, 까마귀베개, 노박덩굴, 칡덩굴 등을 만나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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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 속도 특별하다 STORY 01 _ 불의 기억

제주바다는 지리적으로 온대 및 아열대 기후에 속하고, 수심 100m 내외의 대륙붕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겨울철에도 수온이 비교적 따뜻하고 각종 플랑크톤이 풍부해 어류들의 산란장이며 월동장이 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해류가 교차되는 지역이기도 해서 다양한 해양생물이 분포 해 서식하고 있습니다. 제주바다가‘해양생물의 보고’라 일 컬어지는 이유입니다. 특히 성산일출봉 주변 바다 속에는 매우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할 뿐만아니라, 산호 군락이 잘 발달해있어 매우 화려 한 수중경관을 자랑합니다. 또한 성산일출봉 주변 바다는 차가운 해수가 아래에서 위로 표층 해수를 제치고 올라오는 용승(湧昇)구역이어서 더욱 풍요로운 해양 생태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식물플랑크톤이 풍부해 그것을 먹이로 삼는 동물 플랑크톤도 풍부하고 동시에 이를 먹이로 삼는 어류들도 다양하게 서식하는 것이지요. ‘다금바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자바리, 붉바리 등의 대형 어류는 물론 돌돔, 황놀래기, 어렝놀래기, 자리돔, 파랑돔, 줄도화돔, 전갱이, 멸치, 망상어, 쥐치, 청복, 가시복, 복섬 등 난류성 온대종과 아열대성 어종들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런가하면 미역, 모자반, 감태, 우뭇가사리, 청각 등의 해조류가 풍성한 바다 숲을 이루고 있어 이들 해조류를 먹이로 삼는 전복, 소라, 고동류, 오분자기 등의 패류도 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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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서식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풍성한 바다밭과 오염되지 않은 청정해역임을 자랑할 만하지요.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이곳이 우리나라 해양생물의 대표적인 특성을 보존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산 신속(新屬) 및 신종(新種) 해조류의 원산지 라는 점입니다. 녹조류 24종, 갈조류 37종, 홍조류 66종 등 한국의 해조 상을 대표할 수 있는 총 127종의 해조류가 생육하는 것으로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발견된 ‘제주분홍풀’은 신속·신종 홍조식물로, ‘제주나룻말’은 신종 홍조식물로 기록됐지요. 또한 많은 한국산 미기록종 등 총 177종의 해산동물이 생육하는 것으로 밝혀지는 등 우리나라 해양생물 분포의 특성을 구명하는 매우 중요한 구역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34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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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로 만나는 설화 STORY 01 _ 불의 기억

설문대할망과 성산일출봉

아주 먼 옛날, 몹시 크고 아름다운 여신 설문대가 있었습니다. 제주에서는 여신을‘할망’이라고 불렀습니다. 설문대는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셋째 딸로 호기심이 많은 할망이었어요. 하늘나라에서의 생활이 심심해진 설문 대할망은 어느 날,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급하게 나오느라 입은 옷 그대로 하늘나라를 떠나오게 되었지요. 평화롭지만 밋밋한 바다에 내려선 설문대할망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 다운 섬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치마폭에 흙을 퍼 나르기 시작합니다. 몇 번이고 흙을 날라다 조물조물 만져 은하수에 닿을 듯 높은 한라산을 만들고, 갖가지 모양으로 360여 개나 되는 오름들을 만드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점점 아름답게 만들어지는 섬의 모습에 하루하루가 즐거웠 습니다. “흠~. 내가 만들고 있지만 정말 아름답구나. 좀 쉬었다 할까?” 막상 쉬려고 하니 여기저기 낡아 구멍이 난데다 몹시 더러워진 치마가 눈에 밟혔습니다. “어허, 한 벌밖에 없는데 엉망이 돼버렸군.” 설문대할망은 빨래를 시작했습니다. 키가 얼마나 컸던지 한 쪽 발은 우도를, 다른 한 쪽 발은 한라산에 딛었고, 치마는 또 얼마나 넓었던지 바닷물에 빨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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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빨리 섬을 완성하고 싶은 설문대할망의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낮에는 섬을 만들고, 밤에는 성산일출봉 분화구를 바느질 바구니 삼고, 등경돌 위에 등잔불을 올려놓아 낡은 치마를 기웠습니다. 그런데 등경돌이 너무 낮아 바위 하나를 더 얹어 높였습니다. 밤낮으로 일하느라 지친 설문대할망 앞에 어느 날, 할망만큼이나 허우대가 큰 설문대 하르방이 나타났습니다. 제주에서는‘남신’을‘하르방’이라 불 렀답니다. “아이쿠 깜짝이야, 누구세요?” “평생 설문대할망을 위해 물고기를 잡아드릴테니 같이 삽시다.” 설문대할망은 설문대하르방의 제안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외롭기도 했지만 날마다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아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해서 설문대할망과 설문대하르방은 부부가 되었고, 오백 명이나 되는 아들을 낳고 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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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에 삼별초군이 주둔했었다? STORY 01 _ 불의 기억

성산일출봉 주변에 마을보다 먼저 들어선 것은 방어시설이었습니다. 이곳에 처음으로 방어시설이 들어선 것은 고려시대라는 이야기도 있고, 이와 관련해 성산일출봉의 산발치에 축성했다고 전해오는 토성의 흔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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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이야기의 근거가 확실치 않고, 성의 구조나 윤곽이 뚜렷하지 않아 토성의 존재도 확실치 않은 실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가 ‘대물림된 기억’이라면, 더구나 그와 관련된 지명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으니, 그 전설을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어 보입니다. 어쨌든 마을 어른들이 전하는, 매우 흥미로운‘성산일출봉과 김통정 이야 기’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몽골족의 원나라와 화친한 고려에 반기를 든 삼별초는 진도에서 일전을 벌였지만 패전합니다. 삼별초의 잔여군병과 500여 척의 군선으로 진도를 탈출한 김통정은 지금의 다도해에서 고려 관군을 따돌린 후 제주섬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여몽연합군을 방어하기 위해 섬의 동쪽과 서쪽에 토성을 구축합니다. 동쪽을 중심으로 성산에 구축한 것이 수산성, 서쪽을 중심으로 애월에 구축한 것이 항파두성입니다. 토성을 쌓은 것은 석성을 쌓는 것 보다 쉽고 시간이 덜 걸렸기 때문이겠지요. 이때 성산에 구축한 것이‘수산성(首山 城)’입니다. 수산이란 수령의 산, 곧 일출봉을 말합니다. 일출봉을 원점으로 반원을 그리듯 그 기슭의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빙 에둘 러 토성을 쌓았다는 것이지요. 또 해안봉쇄를 목적으로 석성인 환해 장성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일출봉 아래에 용당(龍堂)을 지어 집전궁으로 삼고, 그 앞 해안가를 자연 방파제로 이용해 어전개 곧 지금의 오정개를 만들고, 일출봉 남쪽 아래 엄호하기 쉬운 비밀포구를 장수 지휘소 전용으로 이용했습니다. 지금도‘수메밋’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수메 아래’ , 곧‘수령의 산 아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수산성에 자리를 잡고 보니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토성 안쪽에는 샘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샘이 있는 자리를 찾아 우물을 팠는데, 그 물이 바로‘장수물’입니다. 지금은 마을 한 복판에 있는 ‘장수물’은‘토성안’에서 직선거리로 2백여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38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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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로 만나는 설화 STORY 01 _ 불의 기억

성산일출봉과 김통정

성산일출봉 주변에 마을이 들어서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파도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릴 뿐 사람의 소리라고는 전혀 없는 이곳이 어느 날 들썩 거리기 시작합니다. 바다 너머에서 500척이나 되는 많은 배들이 성산일출봉 해안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에는 삼별초군이 가득 타고 있었고, 김통정 장군이 지휘를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성산일출봉 해안에 닿은 배에서 삼별초군들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군인들이라 절도가 있었지만 모두 지쳐 있었습니다. 진도에서 고려군과 한 바탕 전쟁을 치렀는데, 그만 지는 바람에 도망치듯 이곳으로 온 잔군 들이었던 것이지요. 성산일출봉 해안에 내린 김통정 장군은 깎아지른 듯 서있는 절벽의 바위를 탁탁 차면서 순식간에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분화구를 한 바퀴 돌아보고 가장 높은 바위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내려와 부하들 앞에 섰습니다. “이곳은 하늘이 내린 방어성이다. 이곳에 진을 치자. 쉽게 작업할 수 있는 흙으로 내성부터 빠르게 쌓도록 하라!” “넷! 장군!” 삼별초군은 일출봉 아래 토성을 쌓고, 해안에는 돌성을 쌓아 둘렀습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고려군과 몽골군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김통정 장군이 본대로 일출봉은 천연의 요새였지만 딱 한 가지 없는 게 있었습니다. 토성 안에 샘이 없었던 것이지요. 삼별초군들은 토성 밖 주변을 헤매며 샘물을 찾아냈습니다. 훗날 샘물 주변에 마을이 들었고 마을사람들은 그 샘물을‘장수물’이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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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통정 장군은 성산일출봉 분화구 안에 집을 짓고 홀로 살며 수시로 절벽 을 오르내렸습니다. 여신 설문대가 등잔을 올려놓았던 바위인 등경돌 아래에 앉아 혹 적들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바다를 감시하기도 하고, 몸과 마을을 단련하기 위해 바위 위로 뛰어오르기도 했습니다. 어찌나 열심히 단련했는지, 바위 중간에 발자국이 패이기도 했습니다. 김통정 장군의 놀라운 능력은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날아다니며 성안을 넘나들기도 하고, 축지법을 써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다니며 군대를 통솔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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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성산일출봉 STORY 01 _ 불의 기억

조선시대의 성산일출봉은, 봉수가 설치되고 성이 구축되 고 군대가 주둔하는 등 방어를 위한 전략기지로서의 역사를 겪습니다. 그 역사를 조선의 여러 문헌 기록을 통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조선 초기 제주도에는 제주, 정의, 대정 등 3읍성이 축조 되고, 9군데에 진성이 축조돼 방호소가 설치됐으며 22 군데의 봉수가 구축됐었습니다. 그 9군데의 방호소 가운데 한 곳이 성산포에서 가까운 수산촌에 설치돼 있었습니다. 수산에 진성을 쌓고 성안에 방호소를 설치한 것은 1439년 (세종 21년), 이즈음 성산 일출봉에 봉수대도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성산봉수’는 북서쪽으로는 지미 봉수 와, 남서 쪽으로는 수산봉수와 교신했다는군요. 1597년(선조 30) 일출봉 아래에 성산성이 구축됩니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이경록 제주목사가 이곳에 석성을 쌓아 방호소를 설치한 것입니다. 성산을 왜병 침략의 가장 중요한 방어처로 여겼던 것이지요. 이경록은 부친상 소식을 듣고도 제주목사로 머물며 성산성을 쌓았는데, 끝내 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성산성은“길이 끝나는 곳에 가로로 산 밑을 끊어 석성을 쌓았으니 길이는 2천 자(600여m)나 될 만하고 높이는 9자(2.7m)인데 그 안에 수만 명을 들일만” 했다니, 그 규모가 짐작됩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본지(本地)를 버려두고 산성에 전력할 경우 왜적이 본지로 들어와 차지한다면 주인이 도리어 객이 되는 수가 있으니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해, 결국 1599년 성윤문 제주목사가 성산성의 병력을 옮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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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성안 북서쪽 기슭에는 진해당(鎭海堂)이라는 집이 있었습니다. 방호소 는 옮겼지만, 1601년 가을에 제주안무사가 와서 이곳에 묵었던 걸 보면 이때에도 진을 폐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외성의 진은 1628년(인조 6년) 에 폐지됐습니다. 1651년 제주목사로 온 이원진이 분화구 안에 산물 등 수백 그루의 귤나무를 심어 과원을 만듭니다. 이 과원을 성산에 있는 과원이라는 데서 보통‘성 산과원’이라 했고, 성산 위 분화구에 있는 과원이라는 데서‘상요(上凹) 과원’이라고도 했습니다. 성산일출봉 분화구 안에 자리했던 이 과원은 100 여 년 동안 운영되다가 18세기 후반에 폐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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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십경도’속 성산일출봉 STORY 01 _ 불의 기억

조선시대, 제주를 대표할 만한 경승지와 경관을 선정하고 시적인 이름을 붙이기를 즐겼던 선조들이 있었습니다. 조선 숙종 때인 1694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익태는 조천관(朝 天館) 별방소(別防所) 성산(城山) 서귀소(西歸所) 백록담(白鹿潭) 영곡(靈谷) 천지연(天池淵) 산방(山房) 명월소(明月所) 취병담(翠屛潭) 을 제주의 10경으로 꼽았었고, 1702년에 제주 목사로 내려온 이형상은 한라채운(漢拏彩雲) 화북재경(禾北霽景) 김녕촌수(金寧村樹) 평대저연 (坪垈渚烟) 어등만범(魚燈晩帆) 우도서애(牛島曙靄) 조천춘랑(朝天春浪) 세화상월(細花霜月)을 제주의 8경으로 선정했으며, 조선 헌종 때인 1841 년에 제주목사로 왔던 이원조는 영구상화(瀛邱賞花) 정방관폭(正房觀瀑) 귤림상과(橘林霜顆) 녹담설경(鹿潭雪景) 성산출일(城山出日) 사봉낙조 (紗峯落照) 대수목마(大藪牧馬) 산포조어(山浦釣魚) 산방굴사(山房窟寺) 영실기암(靈室奇巖)을 제주의 10경으로 선정했었습니다. 그 가운데 이익태가 꼽은 10경 속의‘성산’에 대한 내용이 흥미를 끕니 다. 이익태는 1694년 제주에 목사로 부임한 이후 제주도를 두루 다녔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경치가 가장 뛰어난 열 곳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그 열 곳을 화가에게 그리게 하여 병풍으로 제작한 <탐라십경도>를 남겼습니다. 병풍에 그려진 성산을 비롯한 제주의 10경 그림 저마다의 상단에는 해당 지역의 설명이 수록돼 있고, 당시의 실경을 표현했을 그림 속에는 지명까지 세밀하게 표기돼 있습니다. 바다에는 떠오르는 태양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끕니다.‘성산일출’은 그 때도 이미 유명했던 모양입니다. 일출봉은 울창한 수목을 두른 암벽이 깎아지른 듯 솟아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등산로에 잔도(棧道)와 각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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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刻橋)가 설치돼 있는 모습이 표현돼 있습니다. 각교(刻橋)는‘깎아 만든 다리’를 뜻하는데, 성산을 오르는 길이 험난하므로 암반에다 계단을 새겨 만든 듯합니다. 분화구 안에 있는 과원도 표시돼 있습니다. 이경록 목사 재임(1592~1599) 때 쌓았던 석성도 그려져 있는데, <탐라십경도> 를 제작했던 시기에는 이미 폐지된 때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부 허물어져 있는 성벽이 그려져 있습니다. 성산일출봉이 제주본섬과 가느다랗게 연결 돼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도 흥미를 끕니다. 그 가느다랗게 이어진 부분 에는‘병구(甁口)’라고 표기돼 있습니다. 병의 목처럼 생긴 곳이라는 뜻 이지요.

탐라십 경도 1경 조천 관 2경 별방 소 3경 성산 4경 서귀 소 5경 백록 담

6경 영 곡 7경 천 지연 8경 산 방 9경 명 월소 10경 취병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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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속에 담긴 성산일출봉 STORY 01 _ 불의 기억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는

1702(숙종28)년 제주목사 겸 제주

병마수군 절제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제주에서 순력을 비롯한 행사 내용을 제주목 소속 화공(畵工) 김남길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하 고 간략한 설명을 붙여 제작한 기록화첩입니다. 18세기 제주의 방어시설과 행정시찰 보고서이자 생활상을 기록한 생활보고서로 제주도의 역사연구 에 더할 수 없이 귀중한 가치를 지닌 자료이지요.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지방관의 순력을 기록한 유일한 화첩으로 국가문화재 보물 제652-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화첩은 제주도 지도 1면, 순력 등 행사장면 39면, 제주도를 떠나는 장면 1면, 화기(畵記) 2면 등 모두 43면으로 이루어져 있습 니다. 행사 장면을 그린 39면 가운데, 순력장면이 22면으로 가장 많습니다. 이형상 목사가 제주를 순력한 것은 1702년 음력 10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입니다. 1702년 7월 13일 성산일출봉에서 해 뜨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인‘성산관일(城山觀日)’은 이 화첩에서 개별적인 장소를 그 린 몇 안 되는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림은 300여 년 전의 성산일출봉 일대 모습을 비교적 소상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출봉은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졌으며 절벽 사이사이에 울창한 나무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산 밑에서 정상까지는 각교(刻橋)가 가파르게 놓여있고, 정상의 동쪽 끝에 봉수대인 성산망이 보입니다. 성산망에서 이형상 목사가 바다에서 붉은 빛으로 떠오르는 일출을 구경하는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산발치 북쪽에는 현재의 수마포구 위쪽 언덕으로부터 오정개의 언덕까지 석성이 둘러져있고, 성 밖에는 봉천수가 있습니다. 그런 데 민가는 전혀 없습니다. 당시까지에도 마을이 형성돼 있지 않았 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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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상 목사가 남긴 ≪남환박물≫이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 사는 마을이 수십 리 밖에 멀리 떨어져 있으니 눈 아래 시끄럽거나 더러운 땅의 모습이 없다. 이 땅이 너무 궁벽한 곳에 치우쳐 있으므로 왜구가 우리 땅을 침략할 때는 반드시 이곳에 숨는다. 1597년에 백성들을 모두 모아 성산에서 살 계획을 세우고 또 서쪽 기슭에 진해당을 지었다. 그러나 물이 없고 토지가 없으며 이치상 살아나갈 수 없으므로 지금은 모두 철파하였고 다만 그 터만 남아있다.”성산에 마을을 만들 계획을 세웠 지만 식수원과 경작지가 없어 실패했다는 것이지요. 이곳에 마을이 들어선 시기는 그 후 100년이 지난 180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46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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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10경 속 성산일출봉의 해돋이 STORY 01 _ 불의 기억

예 나 지금이나 해 뜨는 오름으로 유명한 성산일출봉.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오름에서 바라보는 해돋이 장면의 장관이 유명한 것이지요.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보는 해돋이 장면을 두고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영주10경의 제1경’이라는 말일 겁니다. 영주10경, 곧‘제주에서 경관이 뛰어난 열 곳’을 선정해 시로 읊은 인물은 조선 말기 제주의 한학자였던 매계 이한우(1818~1881)입니다. 영주10경은 열 곳의 경관 저마다에 뜻이 담겨있지만, 배열해놓은 순서에도 뜻이 담겨있습니다. 제일 먼저‘성산출일(城山出日)’ 그 다음에‘사봉 낙조 (紗峯落照)’를 놓아 하루를 말하고, 다음으로‘영구춘화(瀛丘春花 )’‘정방 하폭(正房夏瀑)’ ‘귤림추색(橘林秋色)’ ‘녹담만설(鹿潭晩雪)’등 사계절을 두어 한 해를 이야기했습니다. 그 다음 변함이 없는 모습의 바위인‘영실 기암(靈室奇巖)’과 영원의 진리를 추구하는‘산방굴사(山房窟寺)’로 이어 진 다음‘산포조어(山浦釣魚)’와‘고수목마(古藪牧馬)’를 보는 것으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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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계로 돌아옵니다. 이후 이한우는 용연의 밤 뱃놀이 풍경인‘용연 야범(龍淵夜帆)’과 서귀포진성 위에서 노인성을 보는‘서진 노성(西鎭老 星)’을 더해 영주12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영주10경 또는 영주12경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시가 바로 성산의 해돋이 장면인 것이지요. 제목이‘성산출일(城山出日)’로 되어 있는 그 시를 음미 해보기 바랍니다.

산립동두불야성(山立東頭不夜城) 동쪽 머리에 서있는 산이 불야성 같더니 부상효색사음청(扶桑曉色乍陰晴) 해 뜨는 곳 새벽빛 잠깐에 어둠이 걷히네. 운홍해상삼간동(雲紅海上三竿動) 바다 위 붉은 구름 해를 따라 걷히니 연취인간구점생(煙翠人間九點生) 사람 하는 마을에 푸른 연기 솟는다. 용홀천문개촉안(龍忽天門開燭眼) 하늘 문에는 문득 용이 눈을 부릅뜨고 계선도수송금성(鷄先桃峀送金聲) 복사꽃 골짜기에서 닭 우는 소리 들리네. 일륜완전승황도(一輪宛轉升黃道) 둥근 해가 높이 솟아오르니 만국건곤앙대명(萬國乾坤仰大明) 온 세상 나라들이 밝음을 우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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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의 대축제, 성산일출제 STORY 01 _ 불의 기억

계절에 따라 수많은 축제가 펼쳐지는 제주에서 관광객은 물론 도민들 에게도 인기와 호평을 받고 있는‘성산일출제’ . 1994년에 시작되어 매해 12월 31일부터 다음해 1월 1일까지 치러지는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축제 이름 그대로‘성산에서 맞이하는 일출’ , 곧 해 뜨는 광경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 새해맞이 축제에 도민과 관광객을 초대하는 해당 사이트의 성산일출에 대한 소개말입니다. “신이 빚어 놓은 듯한 성산일출봉의 일출은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에도 새겨져 있을 정도로 장엄합니다. 송구영신의 특별한 추억과 황금빛 바다 성산 일출의 경이로움과 더불어 제주 관광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엄한 해돋이 장관을 보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제주의 날씨는 변덕스럽고, 더구나 성산일출제가 열리는 한겨울의 날씨는 더욱 변덕스럽고 맑은 날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져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뜻깊고 잊지 못할 뜻 깊은 송구영신의 시간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한겨울에 진행되기 때문에 날씨 상황에 따라 행사내용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성산일출제는 거리행렬, 일출 기원 해맞이행사, 불꽃놀이, 모닥불 점화행사, 추위 대왕 선발대회, 일출봉 등정, 올레시인의 노래, 해맞이 축하공연, 새해 메시지 전달,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레이저 아트쇼, 지질 트레일 체험, 지역 한마당축제 및 일출 페스티벌, 지역 문화동아리 및 초어공연, 달집태우기, 금줄커팅, 전통혼례 체험, 지역특산물 시식회, 감귤요리 만들기, 소망우체국 운영, 야광페이스페인팅, 빙떡 만들어 먹기, 떡국 나눔 행사 등등으로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특히 새해 알림과 동시에 터지는 불꽃놀이는 화산섬 제주와 잘 어울리는 프로그램으로 꼽힙니다.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불꽃이 솟아올라 연달아 터지는 장면은 마치 화산 이 폭발하는 듯해 감탄과 환호의 시간을 선사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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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굼부리’ 목장 STORY 01 _ 불의 기억

천혜의 말 사육지로 일컬어지는 제주섬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말까지 대규모 국마장(國馬場)이 운영됐었습니다. 성산일출봉 남쪽 아래에 남아있는‘수메밋’이라는 지명은 김통정과 관련 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수마포(受馬浦)’ 곧‘말을 실어 나르던 포구’ 였던데서 유래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포구를 통해 조선 시절 정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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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의 국마장에서 생산해낸 말들을 반출했다고도하고, 고려 시절에 몽골이 제주의 두 수산평에 목장을 조성하고 방목할 말들을 들여 온 포구였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성산마을에서의 말 방목은 1970년대 중반까지도 이 어졌다고 합니다. 일출봉이 관광지로 개발되고 말수요도 없 어지자 마을주민들은 더 이상 말을 사육하지 않게 되었다 는군요. 성산마을의 말 방목 터는 일출봉 정상의‘굼부리’ 곧 분화 구 안의 드넓은 초원지대와, 마을의 북쪽에 넓고 높게 자리 한 지대인‘테우리동산’ 이었습니다. 일출봉 분화구 안이 방목지였다면, 일출봉의 그 가파른 절벽 을 말들이 어떻게 오르내렸을까요? 의외로 매우 잘 올라갔 을 뿐만 아니라, 분화구 안에서 꼴을 베어 등에 실어 주어도 잘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방목 시기에 물은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분화구 안 서쪽에 샘이 있다고 합니다.‘생이물’이라 부르던 이 샘은 언제나 큰 밥사발만한 크기인 채로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아 말들과 그 말들을 돌보는 테우리들이 번갈아 마셨다는군요. 이처럼 한때 성산일출봉 분화구는, 천연의 초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작지만 절대로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암으로 이루어진 천연울타리를 두르고 있는, 어쩌 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안전한 방목장이었습니다. 52 /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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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예보를 해주는 삶의 나침반 STORY 01 _ 불의 기억

“청 산에 좀진 우남 끼면 가물 징조다.” 성산마을에 전해지는 속담입니다.‘청산(靑山)’은 성산(城山)의 또 다른 이름,‘좀진 우남’은‘촘촘한 안개’를 일컫는 제주토박이말입니다. 성산일출봉이 안개를 두르고 있으면 날이 가물 것이라는 뜻이지요. 이렇듯 성산일출봉은 날씨를 예보해주는 산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사람 들은 이른 아침 성산일출봉의 기운부터 살폈습니다. 그에 따라 그날의 날씨 를 알아채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을 가늠하기 위해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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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반농반어로 삶을 이어온 여느 마을들도 마찬가지 지만, 특히 경작 지가 적어 바다에 삶을 기대온 성산마을 주민들에게 그날그날의 날씨는 참 중요했습니다. 날씨에 민감한 농작물은 경작지가 적으니 더 신경을 써야했고, 많 은 시간을 바다에서 보내야 하는 주민들에게 궂은 날씨는 목숨을 담보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가장 먼저 맞이한 일출봉이 마을의 어둠을 걷어낸 이른 아침, 주민들은 이 일기예보관이 알려주는 기운에 따라 그날의 날씨를 미리 헤아리고 하루일과를 설계 했습니다. 덕분에 때맞추어 바다에서 고기 잡고 물질하고, 밭에서 농작물을 살펴 거둬들이며 사시사철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듯 성산일출봉은 마을주민들에게 하루일과의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어선은 물론 큰 선박들까지 성산 앞 바다를 항해하는 모든 배들에게 진짜 나침반 구실을 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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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만든 배? STORY 01 _ 불의 기억

성산일출봉은 제 이름처럼 높은 성(城)처럼 보이기도 하고, 거대한 왕관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박 중인 배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이 오름이 배를 닮았기에 전해지는 설화가 흥미롭습니다. 옛날 중국에 조공하던 시절, 중국에서 몇 달 안에 돌배를 만들어 들이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세상에 돌로 배를 지으라니요? 설사 짓는다 해도 물에 띄울 수 없을테니 참 난감한 노릇이지요. 그러나 당시로서는 강대국이 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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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뿌리칠 수도 없는 입장이니, 대신 들이 팔도강산을 누비며 돌배를 지을만한 사람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특히 탐라에 와서는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만 합니다. 그 시절보다 더 옛날부터 탐라사람들은 배를 잘 짓고 부리기로 소문나 있었으니까요. 탐라를 찾은 대신들이 섬을 돌며 배를 잘 짓는 목수들을 많이 찾아 냈습니다. 그러나‘돌배’라는 말에 목수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젓고 맙니다. 돌배를 들이라는 기한은 점점 다가오고, 대신들의 근심은 돌배보다 더 무거워져갔습니다. 그러다 섬 동쪽으로 간 한 대신이 성산을 보더니 무릎을 탁치며“옳거니, 바로 이거야!”를 외칩니다. 산세가 영락없이 배의 형태였기 때문이지요. 그것도 종선까지 딸린 거대한 배였습니다.‘새끼청산’이 종선의 형체를,‘성산일출봉이’ 거대한 배의 형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대신은 부리나케 조정으로 달려가 이렇게 아룁니다. “탐라에서 돌배를 지어 매두었습니다. 중국한테 직접 와서 닻을 드리워 타고 가라고 하십시오. 아마 닻 드리우기가 어려워 돌배 조공은 무마될 겁니다.”결국 배의 형체를 닮은 성산일출봉 덕분 에 난감한 돌배 사건이 해결됐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가하면 배를 닮은 성산일출봉이 마을 어부들에게는 위로의 대상이 돼주곤 했다고 합니다. 배를 타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 해서 매번 풍성한 성과를 거둘 수는 없는 법, 겨우 몇 마리 낚았거나 어쩌면 빈 배로 돌아 가야 하는 날도 있게 마련이지요. 풀죽은 뱃머리를 돌려 마을 포구를 향해 가는 길, 불현 듯 눈에 들어오는 일출봉은 뒤집힌 배의 형상을 하고 위로를 건넨다고 합니다. 마치“오늘 그 배가 나처럼 뒤집힌 배가 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니 다행”이라는 듯 말이지요. 그렇게 ‘오늘도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깨달음으로 빈 배의 허전함을 달래며 내일의 만선을 희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56 /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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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이 품은 참나리 이야기 STORY 01 _ 불의 기억

너나 할 것 없이 먹을 게 귀해 배가 참 많이 고프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직 보리가 여물지 않았는데 식량이 다 떨어진 봄철을‘보릿고개’라 부 르던 시절이 그랬고, 공출이 하도 심해 집에 겉보리 한 종지도 남아 나질 않았던 일제강점기 말기의 숱한 날들이 그랬습니다. 그 시절 성산일출봉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암벽이며 분화구 돌 틈에 품은 구황식물들을 내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마을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 하는 것은‘참나리’입니다.‘나리’는 오래된 우리말 식물이름이라고 합니다. 허공을 나는 나비처럼 나래 짓을 하면서 날고 있는 듯, 나비를 부르는 그런 꽃이‘나리’라는 것이지요. 그런 나리 종류 가운데‘진짜 나리’라는 뜻을 지닌 것이‘참나리’인데, 이는 예부터 일부러 재배할 만큼 유용한 자원식물이었다는 의미한다는군요. 참나리는 뿌리와 함께 비늘줄기가 땅속에 묻혀 있는 지중식물입니다. 어린 순은 따다가 데쳐서 나물로 먹고, 꽃잎은 덖어서 차로 마시고, 흔히 뿌리로 알고 있는 비늘줄기는 캐다가 밥을 지어먹거나 약재로 사용해 왔지요. 한약명은 백합(白蛤), 비늘줄기가 하얀 조개처럼 생겼다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바로 이 비늘줄기 밑에서 뿌리가 나옵니다. 참나리는 돌 틈이나 바위틈에 박혀서 삽니다. 그러나 그 돌과 바위가 자주 움직이는 곳에서는 절대로 살지 않는다는군요. 비록 영양분이 부족하고 때로는 매우 건조 할지라도 반드시 안정된 틈바구니에서만 산다고 합니다.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성산일출봉, 이 바위산을 타고 더구나 돌 틈과 바위틈에 박혀 사는 참나리를 캐어 나르기가 쉽지는 않았을텐데, 주로 여성들이 그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캐어 나른 참나리‘비늘줄기’는 푹 삶아 떫은맛을 우려내고 먹으면 단맛이 돌았고, 통통한 갑으로 이루진 알이 실해서 배가 든든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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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리의 비늘줄기에는 비타민C, 녹말, 알칼로이드 등 우리 몸에 좋은 영양소가 많이 들어있어서 위장을 보호하고 호흡기관을 활성화시켜 준 다니, 한방에서 약재로 쓰여 온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것들을 길러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성산일출봉의 온기와 마을사람들의 지혜가 새삼 놀랍습니다. 58 /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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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기암, ‘등경돌’ STORY 01 _ 불의 기억

성 산일출봉 꼭대기로 올라가는 중간에 서있는 기암을 일컫습니다. 등잔 걸이 같은 돌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이 등경돌이라는 이름에는 설문 대의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거대한 여신 설문대가 제주섬을 창조할 때, 낮에는 치마폭에다 흙을 퍼 날라 섬을 만들고 밤에는 이 바위 위에 등잔을 올려놓고 흙을 나르느라 헤어진 치마폭을 바느질했는데, 높이가 낮아서 작은 바위를 하나 더 얹어 현재의 모양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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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하면 이 기암에는 김통정 장군의 전설도 깃들어 있습 니다. 고려시대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성산에 성을 쌓고 지킬 때, 이 바위 아래에 앉아 바다를 응시했다고 전해집니다. 바위 중간에 큰 발자국 모양이 패여 있는데, 이는 김통정 장군이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때때로 바위 위로 뛰어오르곤 했기 때문이라는군요. 이 김통정 장군이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성산마을에는 이 바위 앞을 지날 때 절을 네 번씩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두 번의 절은 설문대 할망에 대한 것이고, 또 두 번의 절은 김통정 장군에 대한 것입니다. 반드시 절을 해야 하며 어길 때에는 돌에 걸려 넘어진다고 하는군요. 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징경돌 바로 아래에는 꼭 자리를 펼만 한 공터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주민들이 제를 지내던 자리였 다고 합니다. 제의 목적은 마을의 번영과 가족의 안녕, 특히 먼 곳으로 출향한 자녀들의 무사안녕을 빌었는데 전쟁터에 나간 젊은이들도 김통정 장군의 정기를 받은 이 바위의 수호로 무사 히 돌아왔다는군요. 오백장군을 낳았다는 설문대 할망의 신통력 때문이었을까요? 등경돌은 자식을 낳게 해주십사 기원하는 기자석(祈子石) 역 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경우에 특별한 제의는 없었지만 시루떡과 술, 생선 등 제물을 준비하고 꼭두새벽에 남모르게 정성을 들여야 했다고 전해집니다. 60 /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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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역사현장, 일제동굴진지 STORY 01 _ 불의 기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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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동굴진지 유적지

출발 도착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제는 일본 본토 사수의 최후 보루로 제주도를 설정하고 섬 전체를 요새화했습니다. 7만5천여 명에 이르는 일본군 대병 력이 진주하고 제주 전역에 수많은 군사시설이 구축되는 등, 제주도는 하나의 거대한 전쟁기지를 방불케 했었습니다. 일본군은 연합군과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기 위해 제주 전역에 수많은 동굴 진지를 구축했는데, 일출봉 해안가에 뚫어진 동굴진지 역시 바로 그때의 흔적입니다. 당시 일본군이 구사한 특공작전은 항공특공과 해상특공, 모두 비행기나 고속정 등에 폭탄을 실은 채 함정에 돌진하는 자살공격이었습니다. 당시 일출봉은 일본해군의 자살특공기지였고, 이곳의 동굴진지는 폭약을 실은 특공소형선을 감춰놓기 위한 비밀기지였습니다. 일제는 해안가의 동굴진지 구축을 위해 다른 지방 특히 전남지방 광산노동자 들을 강제로 동원했습니다. 일출봉에는 1945년 1월 전남 광양 광산의 광부들이 3차례에 걸쳐 8백명 이상이 동원됐다고 합니다. 동굴진지 공사는 구멍을 뚫고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어 폭파시킨 뒤 곡괭이로 다듬는 방식 으로 이루어졌는데 6개월 만에 끝마쳤다는군요. 그리고 도로를 뽑고 굴착 과정에서 나온 돌멩이 등을 손수레에 실어 나르는 작업에는 성산 주민들이 동원되어 고초를 겪었다고 합니다. 일출봉 해안에서 확인된 동굴진지는 콘크리트 벙커형으로 구축된 2곳, 입구가 세 군데인 갱도 1곳, 직선형으로 뚫린 갱도 15곳 등 모두 18곳입니다. 총 길이가 514m로 제주도 내 특공기지 가운데 가장 긴 규모라는군요. 특히 입구가 세 군데인 갱도의 길이는 125m에 이른다고 합니다. 동굴진지는 일제의 침략상을 보여주는 아픔의 역사현장입니다. 이곳 ‘제주 일출 봉해안 일제동굴진지’는 2006년 12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 311호로 지정됐습니다. 62 /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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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봉과 한 몸이었던 해안 STORY 01 _ 불의 기억

동 굴진지가

뚫려있는 해안은 남쪽으로‘수메밋’과‘너른

모살’ 그리고‘광치기’해변으로 이어집니다. 이들 해변은 수성 화산분출로 이루어진 일출봉 응회구의 언저리가 바닷물과 빗 물 등에 의해 깎이고 흐르면서 주변 일대로 옮겨지고 쌓여져 이루어진 것입니다. 원래 일출봉과 한 몸이었는데, 파도, 바람, 비 등의 자연 현상과 세월에 의해 일출봉을 먼발치에서 바라 보는 지형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이곳 해변에서 바라보이는 일출봉의 모습은 유난히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애틋한 그리움 같은게 느껴집니다. 이들 해변은 마을사람들 생업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일출봉과 가까운‘수메밋’ 해변은 제주토박이들이‘ ’이라 일컫는 모자 반 어장이었습니다.‘너른모살’은 넓은 모래밭으로 이루어진 해변입니다. 이곳은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멸치를 잡았던 후릿 그물 어장이었습니다. ‘광치기’해변은, 제주올레 1코스의 끝점이자 2코스의 시작점으 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곳이지요. 이 해변은 또 하나의 일출 명소로 곱히고 있는 곳이기 합니다. 성산일출봉에 오르면 해돋 이만 볼 수 있지만, 이 곳에서는 일출봉과 해돋이를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광치기 해안의 백미는 썰물 때 드러나는 속살 풍경입니다. 모래도 아니고 그렇다고 돌도 아닌 퇴적층이 드넓게 펼쳐지면서 짙푸른 바다빛과 어우러져‘원시의 바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섭지코지와 일출봉 사이의 해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젊은 해양성퇴적층으로 밝혀진 신양리층이 분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썰물 때에만 드러나는 신양리층은 해안선을 따라 폭 50m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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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데, 연체동물화석을 포함해 얕은 바다에만 있는 다양한 해양생물화석들을 품고 있다는군요. 그런데 ‘광치기’라는 이름은 무슨 뜻일까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집 니다. 지형과 해류 방향 때문인지, 이곳에 서면 파도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 날이 거칠면 그 소리가 더욱 커져 멀리에서도 쾅쾅 울리기 때문 에‘쾅치기’였다가‘광치기’가 됐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참 애달픈 사연입니다. 고기잡이에 나선 많은 어부들이 바다에 빠져 죽으면 그 시신이 해류의 영향 때문에 이 해변으로 떠밀려오곤 했다 고 합니다. 이런 시신을 발견한 성산주민들이 관을 짜서 장례의식을 치러 줬다는데서‘관치기’라 부르다가‘광치기’가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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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남은 ‘터진목’ STORY 01 _ 불의 기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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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도착

터진목ㆍ4.3 유적지 해설포인트

일출봉에서 남쪽으로 4㎞쯤 떨어진 곳에‘섭지코지’가 있습니다. 섭지코지는 현무암질 용암대지 위에 모래언덕들이 형성돼 있는 반도형 해안지형입니다. 이곳의 모래언덕을 이루고 있는 사구층은 섭지코지로 부터 신양리 마을을 거쳐 성산일출봉까지 이어져 있습니다.‘터진목’이라 부르던, 성산 반도를 섬인 듯 섬이 아닌 곳으로 만든 가느다란 모래톱 길 목이 바로 이 사구층이 만들어낸 육계사주(陸繫砂洲, connecting bar, tombolo)입니다. 본디 성산리는 제주본섬에 딸린 작은 섬이었습니다. 그러나 늘 고립된 섬이었던 것은 아니고, 썰물 때면 드러나는 가느다란 모래톱이 본섬과 이어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물때에 따라 본섬으로 가는 길목이 바닷물 로 터지곤 했던 곳이라 해서‘터진 길목’ 곧‘터진목’이라 불렀던 것이지 요. 썰물 때 터진목의 모래톱이 가느다랗게 드러나면, 주민들은 그때를 이용해 마을 안팎을 오갈 수 있었습니다. 급한 일이 생겼는데 밀물 때라 터진목에 바닷물이 찰랑거리면 뗏목을 이용해 오가거나, 그도 여의치 않 으면 어쩔 수 없이 허리께에 차는 바닷물 속을 걸어 다녀야 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사람이 드나들기에 불편하고 경작할 만한 땅은 협소한 데다 일출봉 은 너무 가파른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성산반도에 마을이 늦게 들어선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마을이 이루어진 뒤로도 오랫동안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물때에 맞추어 터진목을 오가며 그냥 섬 속의 섬마을에서 살아왔습니다. 터진목에 연륙공사가 이루어진 것은 일제 강점기 때의 일입니다. 그 뒤로 몇 번의 공사를 더 거치고 난 지금은 넓은 도로가 그 자리를 단단하게 잇고 있어, 터진목은 이제 이름만 남은 곳 이 됐습니다. 66 /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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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성 돌들을 날라다 터진목을 막아 STORY 01 _ 불의 기억

성 산반도와 제주본섬을 잇는 터진목 토목공사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말에 일제의 강행으로 시작됐습니다. 일제는 왜 이곳에 연륙공사를 강행했던 것일까요? 성산반도에서 본디‘성산포’라 불렀던 가장 큰 천연포구는 일출봉 남쪽 해안을 끼고 타원형으로 휘어 도는 해안선에 자리한‘수매밋’ 곧 수마 포구였습니다. 성산포는 지리적으로 일본과 아주 가까워 일제가 고기잡이 선단의 정박지이자 제주에서 공출한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항구 로 활용했었습니다. 그런데 제주본섬으로 오가는 유일한 길이었던 ‘터진목’은 썰물 때에만 드러나는 아스라한 모래톱뿐이었으니, 수 시로 드나들 수 있는 든든한 길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러나 터진목을 중심으로 한 연륙공사는 시작부터 험난했다고 합니다. 낮에 매립해두면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바다속으로 쓸 려버리곤 했기 때문입니다. 터진목을 넘나드는 유난히 드센 바람 과 힘찬 밀물에 흙과 나무로 이루어진 매립재가 견디지를 못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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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립하기가 무섭게 바닷물에 자꾸만 쓸려가 버리는 바람에 고전하던 연륙 공사는 돌을 매립재로 활용하면서 진척을 보기 시작합니 다. 그 돌이 바로 일출봉 아래에 쌓여있던 성산성의 돌들이었습니다. 마을주민들이 동원되어 성산성의 돌들을 등 짐으로 지고 터진목으로 날랐습니다. 커다란 바윗돌들은 소와 말을 동원하고도 모자라 주민들이 다 달려들어 겨우 날랐다고 합니다. 일출봉 아래에 성산성이 구축된 것 은 임진왜란의 발발로 시국이 한창 어지럽고 불안한 시기였던 1597년의 일입니다. 당시 성산지역을 일본왜군의 침략에 대비한 중요 한 방어처로 인식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왜군을 방어할 목적으로 축성된 이 성담이 일제강점기에 단행된 연륙공사로 사 라지고 말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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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진목과 4·3 이야기 STORY 01 _ 불의 기억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4·3은 그 배경도 원인도 과정도 복잡해서 한 마디로 잘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는‘제주4·3사건’에 대해“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 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희생당한 사람은 2만5천~3만 명, 이 사건으로 제주도 내 거의 모든 마을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성산지역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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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도착

터진목ㆍ4.3 유적지 해설포인트

지금의 성산리는 오조리에서의 갑문다리 길이나 고성리에서의 터진목 길을 이용해 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4·3 당시의 성산리는 터진목 길 만 막아버리면 오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터진목은 민보단 등 주민들이 유일하게 보초를 서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성산마을은 1948년 4·3 발발 초기에 무장대의 지서습격이 한 번 있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고, 그 이후로도 무장대로부터 이렇다 할 기습을 당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서청’ , 곧 서북청년단 특별중대의 무자비한 폭력은 계속 이어졌 습니다. 당시 성산주민들은 서청에게 잡혀온 성산지역 사람들이 날마다 고문 받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치를 떨어야만 했습니다. 서청 특별중대는 잡아온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 하다가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이‘터진목’하고‘우뭇개 동산’이었습니다. 특히 터진목은 성산지역 4·3 사건 전체 희생자 450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200여 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한 곳입니다. 그 뒤 62년의 세월이 지난 2010년 11월 5일에 이르 러서야 당시 억울하게 희생당한 성산지역 445명의 넋을 위로하는‘성산읍 4·3희생자 위령비 제막식 및 추모위령제’가 치러졌습니다. 이곳 터진목 4·3유적지를 돌아보며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다시는 일어 나지 말아야할 비극의 역사가 건네는 교훈에 마음을 기울이는 시간을 가져 보기 바랍니다. 70 /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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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지역 주민학살을 거부한 문형순 서장 STORY 01 _ 불의 기억

4·3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의 희생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초토화 작전이 진행됐던 기간입니다.‘초토화(焦土化)’ , 글자 그대로 마을과 농사터를 모두 불태워버리는 것이지요. 제주섬에서 자행된 초토화 작전은 1948년 10월 1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한 학살로 변해갔고, 수많은 마을이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특히 그 해 12월 부터 이듬해 1949년 2월까지 제주도민들은 엄청난 희생을 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49년 1월 11일 성산지서가 성산포경찰서로 승격되고, 문형순 서장이 부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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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군은‘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검거 하는, 이른바‘예비검속’을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작합니다. 제주에서는 4·3과 관련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비 검속으로 구금됐습 니다. 경찰은 이들 예비검속자들의 명부를 작성해 개인별로 D·C·B·A 등급으로 분류했습니다. 그 가운데 D와 C급 대상자들은 대부분 총살되고 맙니다. 1950년 8월 30일,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는 총살집행한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보고’ 하라는 공문을 받습니다. 그러나 문형순 서장은‘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 (不移行)’이라며 계엄사령부의 총살 명령을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당시 제주도 전역에서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도민은 1천여 명에 이릅니다. 성산지역의 예비검속자들이 6명을 제외하고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당한 명령을 거부했던 문형순 서장의‘의로운 결단’ 덕분이었습니다. 이렇듯 문형순 서장은 성산포경찰서 관내 주민들의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 앞서 모슬포경찰지서장으로 서장으로 있을 때에는 억울하 게 끌려가 희생당할 뻔했던 주민 100여 명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공을 기리는 공덕비가 대정읍 상모리에 세워져 있습니다. 문형순 서장은 이북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활동했던 독립 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4·3 당시 50대였던 그는‘기운이 장사였고 배짱 있고 남자다운 멋진 사람’이었으며‘당시 경찰 중에서는 군대에 맞설 수 있는 드문 사람이었기 때문에 별명이 문도깨비였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4·3평화공원 전시관에서는 그를 가리켜‘대량학살이라는 광풍 속에서도 무고한 희생을 막으려 온몸을 던졌던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 니다. 72 /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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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기록하세요..

STORY 01 _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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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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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추억

내수면 오조포구 족지물 식산봉 식산봉 주변 모래밭 성산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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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가 된 바다, 내수면 STORY 02 _ 물의 추억

터진목을 지나면 바로 펼쳐지는 널따란 수면이 가슴을 탁 트이게도 해 주고 차분히 가라앉혀 주기도 합니다.‘물’의 힘이지요. 커다란 호수가 돼버린 이 내수면은 본디 바다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내수면의 동쪽 뭍은 성산리에, 서쪽 뭍은 오조리에 닿아있지만, 동남쪽의 터진목은 1920년대까지만 해도 모래톱 너머로 바닷물이 물때 따라 넘나 들곤 했고, 북쪽은 1980년대까지도 바다로 트여있었습니다. 터진목이 막아 지고 갑문다리가 놓이면서 갇히다시피 한 바다가 내수면이 된 것이지요. 이곳이 바다였던 시절에는 성산리가 섬으로 고립됐었는데, 터진목과 갑문 다리가 본섬과 이어지면서부터는 바다가 내수면으로 고립됐습니다. 성산리를 뭍으로 풀어주는 대신 바다가 호수로 고립된 셈이지요. 내수면 입장에서는, 마을을 바라볼 때는 뿌듯하고, 바다를 바라볼 때는 서운하고 그리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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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이 광활한 내수면이 그저 잠잠 할 수만은 없겠지요. 1900년대 초에는 돌담으로 보를 쌓은‘장정의보’와‘정도정보’ 등 제주 최초의 양어장 이 들어서기도 했고, 그것을 근간으로 1960년대에는 8만여 평의‘오조양어장’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성산 해양관광지구 개발과 맞물려 갑문 이 설치되고 해양 레크리에이션장 조성이 계획되기도 했 지만 백지화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2014년에 20여년 만에 갑문을 작동시켜 전국체전의 카누경기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던 이 곳 내수면은 이를 계기로 새로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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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어장의 추억, ‘장정의보’와 ‘정도정보’ STORY 02 _ 물의 추억

이곳 내수면에는‘장정의보’와‘정도정보’라 부르는 곳이 있습니다. 둘 다 내수면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쌓은 둑을 일컫는 것입니다. 고기를 가둬잡아 기르기 위해 만든, 제주 최초의 양어장인 셈입니다. 내수면 서쪽으로 기다랗게 갈라놓은 돌담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장정 의보’입니다. 정의군수를 지낸 장용견(1869~1928)이 쌓아 만든 보(堡) 라는 뜻이지요. 장정의보는 1907년에 사업을 착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 습니다.‘정도정보’는 정도정이라는 사람이, 원형을 이룬 후미진 내수면에 일자 형으로 도(渡)를 내어 만든 양어장입니다. 이들 둑을 쌓아 만든 양어장은 수문에 대나무발 그물을 설치해서 밀물 때에 들어온 물고기를 나가지 못하게 해서 잡았다고 합니다. 엄격히 말하면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어류를 가두어잡는 어로시설이지만, 안에서 기를 수도 있기 때문에 양어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곳은 갯지렁이가 많이 서식하고, 파래에 붙어 자라는 물벼룩과 새우가 많아 숭어와 장어의 먹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두 양어장에서는 겨울이면 팔뚝만한 숭어가, 여름이면 어른 키만 하게 자란 장어들이 부글거렸다는 군요. 음력 2월부터 4월 사이에 어린 숭어가 집중적으로 들어왔는데, 이들을 따라 어린 방어, 꽁치, 감성돔, 벵에돔도 들어왔다고 합니다. 어린 감성돔, 꽁치, 벵에돔은 맥이 빠져 행동이 굼떠지는 동짓달과 섣달에 그물로 쉽게 잡았고, 어린 숭어는 25㎝쯤 자라는 섣달에 그물로 잡았다고 합니다. 이들 양어장의 조성은 바다고기의 단순한 채집을 넘어 길러 비축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습니다. 더불어 이곳 내수면에 보를 설치한 정도정과 장용견은‘기르는 어업’의 제주 창시자이며 선구자로 꼽힙니다. 이 두 양어장이 계기가 되어 고성리 동남의 기수지대 갈대밭에도 숭어를 기르는 보를 쌓았다고 합니다. 장정의보와 정도정보가 기르는 어업의 본보 기이자 전진기지의 역할도 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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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리 양어장 STORY 02 _ 물의 추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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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0월, 1백여 년 전의 ‘정도정보’를 근간으로 ‘ 오 조리 양어장’공사가 시작됩니다. 오조리 청년회와 부녀회 가 주축이 되어 5·16 직후 시작된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대규모 마을양어장을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그즈음 성산일출 봉을 찾았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20만원의 하사금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변변한 장비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주민들이 맨손으로 식산 봉의 흙과 돌을 나르고, 해안가에 산재한 무거운 돌을 꺼내 날라다 둑을 쌓고 외벽을 쌓았는데, 공사 내내 발을 찧거나 허 리를 다치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조리 양어장은 1967년에 완공됐습니다. 길이 182m에 높이 4.5m의 둑이 쌓이고 수문 2개소를 갖춘 26만㎡ 규모의 양어장 이 주민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것입니다. 보리 흉작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던 1964년을 빼면, 이 오조리 양어장 건설에 만4년의 시간과 연인원 2천 500여 명이 동원됐다고 합니다. 돌담을 쌓는 방식으로 둑과 석축을 만들어 조성한 오조리 양식장은 오랫동안 옛 방식대로 자연산 숭어와 장어, 우럭 등을 키워왔습니다. 바다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는 어류 숭어의 습성에 맞춰 밀물 때는 수문을 열었다가 썰물 때 수문을 닫아 고기를 가두어길렀던 것이지요. 예전처럼 대규모는 아니지만 지금도 옛 방식으로 자연산 숭어 등을 키우고 있는 이곳 양식장은 앞으로 다른 고급 어종들도 양식 할 계획이라니 머지않아 펄떡펄떡 활기 넘치는 풍경을 기대 하게 합니다. 82 /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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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들의 천국 STORY 02 _ 물의 추억

제주도는 지리적 위치가 철새들의 이동 경로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 한 서식지가 분포하고 인위적인 간섭이 적은 곳입니다. 현재 제주에서 관찰되고 기록된 조류는 380여 종, 우리나라의 전체 조류 500여 종의 70%를 훌쩍 넘습니다. 철새들 에게 제주는 최적의 번식지이자 월동지요 중간 기착지가 되고 있으니, 철새들의 천국이라 일컬을 만하지요. 제주에서도 대표적인 철새도래지로 꼽히는 성산포만 습지는 특히 철새들의 겨울나기에 알맞은 곳입니다. 더불어 이 일대는 매년 겨울철이 되면 조류 연구가, 생태 사진가, 탐조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성산포 철새도래지에는 매년 수백에서 수천 개체가 찾아듭니다. 종류도 너무 많아 일일이 소개하기가 버겁습니다. 한두 번 들어봤음직한 이름만이라도 열거해 볼까요? 괭이갈매기·재갈매기·붉은부리갈매기 등의 갈매기류, 청둥오리·흰뺨검둥오리·원앙 등의 오리류, 왜가리·백로·흑로· 해오라기 등의 백로류, 아비·희색머리아비 등의 아비류, 논병아리· 검은목논병아리·뿔논병아리 등의 논병아리류, 민물가마우지·쇠가마우지 등의 가마우지류, 꼬마물떼새·알락도요 등의 도요물떼새류,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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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도착

철새 도래지

저어새·큰고니·큰기러기·물수리·매·황조롱이 같은 희귀철새들이 있습니다. 특히 저어새를 만날 수 있는 건 행운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2천 개체만이 생존할 정도로 멸종위기에 처한 희귀한 녀석이기 때문입니다. 제주에는 매년 20여 개체가 성산포만에 찾아온다는군요. 저어새는 주로 남북한 서해안 무인도나 중국 일부 지역에서 번식하고, 제주도를 비롯해 일본 큐슈, 대만, 홍콩, 중국 남부지역에서 겨울을 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저어새의 번식지이자 월동지를 지니고 있는 유일한 국가인 셈이지요. 제주도는 저어새의 번식지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월동지이면서 중간 기착지이기 때문에 저어새의 이동경로를 추적하거나 월동생태를 연구 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지역으로 꼽힙니다.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코스는 희귀새를 비롯한 온갖 철새들을 쉬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특히 이곳 내수면을 찾아든 철새들의 모습은 널따란 수면과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동양화 같은 풍경을 선사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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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섬의 기록, 튜물러스 STORY 02 _ 물의 추억

제주 해안가 곳곳은 이 섬이 화산섬임을 말해주는 흔적들로 가득합니다. 육지 끝자락에서 다시 바다로 뒤틀리며 스며드는 시커먼 암반들로 해안가가 뒤덮여 있기 일쑤지요. 제각각 모양을 달리하는 크고 작은 바위덩어리들이 제멋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갑문 안쪽으로 성산리와 오조리 를 잇는 해안에서도 이러한 지형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내수면 가장자리 곳곳에 자리한‘튜물 러스(tumulus)’입니다. 보통 암반이라고 하면 사방 물샐 틈 없이 딴딴한 것을 연상하겠지만, 튜물러스는 마치 작은 동굴마냥 속이 텅 비어있거나 여기저기 틈새가 이어진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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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믈러스ㆍ밭담 해설포인트

어느 날 화산이 폭발하고 1300℃가 넘는 용암이 흘러내리다 장애물을 만납니다. 그러면 용암은 굳은 표면을 밀어 올리거나, 굳은 표면속에 갇혀 있던 가스가 팽창하면서 균열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러면 속이 반쯤 비어버린 모양이 생겨나기도 하고 여러 갈래의 V자형 틈이 생겨나게 됩니다. 튜물러스는 이처럼 앞선 용암류의 표면이 차가운 대기에 의하여 굳기 시작한 이후에도 그 하부에서 천천히 흐르던 용암의 압력이 위로 치오르면서 완만한 구릉형태로 만든 것입니다. 이미 굳어진 용암류의 표면은 깨지기 쉽기 때문에 부풀어 오른 중심부는 종종 갈라지게 되지요. 이러한 균열은 일반적으로 튜물러스의 길이 방향으로 이어지게 되고 양 옆으로는 보다 적고 불규칙적인 균열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용암은 주로 이런 균열을 통해 밖으로 스미어 나오게 되며, 때때로 속의 용암이 완전히 배출되어 속이 빈 채로 남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용암지형은 중산간지대 곶자왈에서 다양하게 발견됩니다. 흐르던 용암의 양쪽 가장자리가 찬 공기와 만나면서 빨리 굳어져 만들어진 ‘용암제방’ , 흐르는 용암이 나무를 감싼 후 굳어지고 나무는 풍화되어 겉모양만 남아있는‘용암수형’ , 점성이 큰 마그마가 지표로 올라와 굳어져서 마치 종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용암돔’ , 그리고 눈사람처럼 준고체 상태의 암괴들이 구르면서 반복적으로 들러붙은 나이테 모양의 ‘부기용암구’ 등 특이한 지질 구조들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지요. 이처럼 제주섬은 산, 들, 바닷가 할 것 없이 온통 화산 분출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흔적들은, 돌 많고 바람 잘 날 없는 이 땅에서 삶을 일궈내야 했던 제주 선인들의 애환의 기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땅의 특성 과 그 땅에서의 삶의 모습은 떼려야 뗄 수 없나 봅니다. 86 /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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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환경에서 피어난 해안가 풀포기들 STORY 02 _ 물의 추억

바닷가에 다다르면 저마다 ‘와~’하고 탄성을 먼저 내지르곤 합니다. 드넓은 바다와 넘실대는 파도가 가져다주는 장쾌함 탓 이겠지요. 하여 바닷가 주변에 숨어 지내는 자그마한 식생에는 눈을 주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을 조금만 가까운 곳으로 돌 려보면 지천에 다양한 생명들이 숨 쉬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산리와 오조리를 잇는 해안에서도 이 같은 염습지(鹽濕地; salt marsh) 식생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염습지는 매일 또는 자주 염수나 반염수(半鹽水)가 넘쳐흐르며 무성한 풀이나 사초·등심초 같은 풀과 유사한 식물로 덮여 있는, 배수가 잘 되지 않는 평탄한 저지대를 이릅니다. 염습지는 흔히 사주(砂洲)와 해변 안쪽, 강어귀나 삼각주의 낮은 해안지대를 따라 나타납니다. 해안 염습지는 종종 내륙으로 수㎞씩 확장되고 조수활동에 의해 다양한 변화를 겪습니다. 이곳에서 자라는 염생식물은 바닷가에서 사는 식물들 가운데 염분 에 특별히 잘 견디는 식물로 소금에 의해 생기는 삼투압에 저항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닷가의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 오랜 세월 적응해왔지요. 자신의 세포 속에 소금기가 축적되어도 살 수 있도록 하는게 적응의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세포 속에 소금기가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세포 안의 삼투압 값이 높아 주변 에서 물을 더욱 효율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겁니다. 염생식물은 계절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데, 가을에 나뭇잎이 알록 달록하게 단풍이 드는 것과 비슷하지요. 이런 단풍현상이 꼭 가을에만 일어나지 않는게 염생식물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땅채송화나 퉁퉁마디(함초)와 같이 잎과 줄기가 통통하게 생긴 것 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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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생식물로는 갯쑥부쟁이, 갯완두, 암대극, 갯까치수영, 방석나물, 천문동, 사철쑥, 갯질경이, 털머위 등 다양합니다. 이들 가운데는 어린잎이나 전부 를 식용하기도 하고 우리 몸의 병을 다스리는 약재로도 다양하게 쓰입니다. 성산과 오조 염습지에서는 올방개, 남방개, 송이고랭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수심이 깊은 곳에선 갈대가 조금 나타나며,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곳에는 천일사초, 수심이 얕고 건조한 곳에선 모세달도 무리지어 자랍니다. 염습지나 갯벌은 열대우림에 비해 5배나 많은 탄소를 저장한다고 합니다. 이 블루카본(blue carbon)의 흡수는 얕은 바다에서 바다 전체의 절반이 이루어집니다. 염습지와 염생식물의 보존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기후변화의 파고 최전선에 놓여있는 이들 염생식물은 이 땅의 건강성을 가늠하는 척도인 셈이지요. 해안가 한 구석에 돋아난 풀 한 포기가 더욱 소중해지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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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바람의 섬’의 농업을 지켜온 밭담 STORY 02 _ 물의 추억

돌의 나라, 바람의 땅, 화산섬의 척박한 토양을 지닌 제주섬에서 농사를 짓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려 밭을 조금만 일궈도 여지없이 돌이 숱하게 튀어나옵니다. 화산섬의 화산 회토 토양은 찰기가 없고 가벼워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쉽사리 날려버리고, 큰비라도 올라치면 낮은 곳으로 쓸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이 섬에서는 밭에 드러나는 돌과 척박한 토양을 어떻게 갈무리하느냐 하는 것이 농사의 관건이었습니다. 제주 선인들은 밭을 일구다 나온 돌을 한편에 쌓아두었습니다. 이를‘머들’이라 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이런 주변 돌들 을 밭 가장자리로 옮겨 쌓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거친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농작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의당 수확도 나아졌겠지요. 그래서 점차 밭담은 제주섬 밭농업지대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대략 22,000㎞가 넘는다는 제주의 밭담은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꾸불꾸불 이어진 밭담의 모양새가 마치 흑룡을 닮았다고 하여‘흑룡만리’라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마소의 농경지 침입을 막기 위해 쌓기도 하고, 밭 경계의 표지로 쌓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주의 농군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밭담이 연신 불어대는 바람을 갈무리하여 농작물을 보호하고, 토양의 비산을 막아준다는 것을. 그래서 이 섬에서도 농사가 가능했다는 것을. 2014년 FAO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한 제주밭담은 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큰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고 버텨왔습 니다. 구멍 숭숭 뚫린 밭담은 거센 바람을 약화시킬뿐 아니라, 이용한 돌들의 아귀를 서로 맞물려 쌓았기에 쉽사리 무너지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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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믈러스ㆍ밭담 해설포인트

성산리와 오조리 같은 해안마을에서는 반농반어의 생업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니 그 규모는 작을망정 밭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강한 해풍을 막기 위해 밭담을 더 높이 쌓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제주밭담의 모습은 제주사람들의 지혜와 강인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내기 위한 지혜의 소산이 밭담입니다. 또한, 밭담의 돌들 서로가 옹골차게 맞물려 있는 모습은 서로 도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제주공동체 삶의 여정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노란 유채꽃이며 하얀 눈과 어우러져 그려내는 밭담의 그림 같은 풍경에는 그렇게 제주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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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호수 속 쌍월을 안고 있는 오조포구 STORY 02 _ 물의 추억

오조리(吾照里)는 예로부터 일출봉에 해가 뜨면 제일 먼저 ‘햇빛이 비치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햇빛 이 찬란히 비치는 내수면에 오조포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산갑문 안쪽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 오조포구는 당머리와 ‘쌍월’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갑문다리가 놓인데다 뒤로는 식산봉이 북풍을 막아 수면을 고요히 잠재우고 있어 포구 앞바다는 마치 호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호수에 해와 달 이 제각각 잠겨드는 것이지요. 50여만 평의 오조만을 끼고 살짝 도드라진‘쌍월’에서는 보 름달이라도 뜨는 날이면 일출봉 발밑 오조만 수면 가득 비춰 지는 또 하나의 월출 장관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이곳 오조포구에는 조선시대에 수전소(水戰所)가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1416년(태종 16년) 이웃마을인 고성리에 정의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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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봉

식산봉, 쌍월 이야기

출발 도착

이 들어서면서 오조리에는 수전소가 설치돼 관리와 군인들이 많이 거주했 습니다. 성산포와 마주한 포구인‘오조포’는 한 때 마을 이름으로 불렸고, 조선술에 능한 목수들이 상주해 다양한 선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해안마을에선 잊혔거나 사용한 적도 없는‘적판’ ,‘쌈판’ 등 옛 선박명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지금 포구 앞 내수면은 커다란 양어장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정의군수가 ‘장정이보’를 쌓아 양어장을 만들었을 만큼 오랜 시간을 오조마을 주민들과 함께해온 곳입니다. 내수면에 몇 개의 둑을 더 쌓아 양어장을 조성했기에 오조포구 앞 내수면은 전체가 양어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조포구는 작고 아담해 왠지 친숙한 느낌을 줍니다. 식산봉을 뒤로 하고 있어 느끼게 되는 아늑함과 주변에서 바람 따라 일렁이는 갈대들, 작은 어선들 몇 척과 조수의 밀고 남에 드러나는 갯벌,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 위에서 노닐고 있는 물새들이 어우러져 그려내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합니다. 이제 오조리는 동부일주도로를 낀 마을 중에서도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가 됐습니다. 지척에 소섬이 누워 있고, 성산포와 일출봉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아담한 식산봉과 푸른 바다가 함께 어우러져 있어 오조포구는 말 그대로 ‘산도 좋고 바다도 좋은 곳’ 입니다. 게다가 한적한 편이어서 호젓하게 낭만과 정취를 즐기려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 할 수 있 습니다. 92 /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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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람들의 생명수 길어내던 물통들 STORY 02 _ 물의 추억

화산섬인 제주에서 물은 매우 귀한 것이었습니다. 강수량이 많 아도 완만한 지형경사를 타고 바다로 흘러가 버리거나 토양의 투수성이 높아 쉽게 스며들어 버리기 때문에 때를 가릴 것 없이 물과의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그 싸움에서 한숨 돌릴 수 있게 해주던 것이 땅속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며 빗물이 고여 가두어진 봉천수입니다. 주민들은 이를‘물통’이라 부릅니다. 제주 전역에 912개의 물통이 있다고 합니다. 오조리에는 물통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제주에서 네 번째로 용천 수가 풍부한 마을로 12개가 있지요. 진모살물, 수전, 주근디물, 엉물, 샛통물, 얼피물 등. 과거 식수는 물론이고 빨래와 목욕 등 일상생활에 두루 사용 했으며 소와 말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이들 물통들은 마을의 공동재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깨끗이 관리하는 게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음용하는 물통은 특히 그랬고, 허드렛일은 물이 흘러내리는 아랫녘에서 했습니다. 오조양어장을 끼고서는‘주근디물’과‘족지물’ ,‘재성물’ ,‘엉물’ 등의 샘이 솟습니다. 식산봉 서북쪽에 위치한‘재성물’은 과거 목욕탕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 샘에는 2~3분도 들어가 있지 못할 정도로 차고 싱싱한 물이 솟았지만 보를 쌓으면서 차츰 변질되어버렸다고 합니다. 더구나 오조리의 샘물에는 소금기가 있어서 음료수로는 부적당한 곳도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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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봉

출발 도착

용천수, ‘족지물’

1970년대 초중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농어촌 지역에도 공동수도를 시작으로 가구마다 수도가 들어오면서 물통은 그 쓰임새가 점차 시들해졌습니다. 지금은 ‘족지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해안쪽으로 빠져나오다 보면 대나무와 동백나무 등이 들어차 있는 둔덕 아래로 작은 돌들을 쌓아 둘러쳐놓은 물통이 ‘족지물’입니다. 근래 주로 목욕용으로 사용했던 족지물은 그 위쪽이 여자탕, 아래쪽은 남자탕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맨 위쪽은 채소를 씻기도 하고 음용수로도 사용했습니다.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주변에 조성된 동네이름도‘족지동네’ 입니다. 예전과 같이 이용이 많진 않지만 여름철 피서지로 지역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지요. 그 옛날 제주사람들은 동네 물통에서 물 한 허벅 길어오는 것이 첫 일과 였습니다. 가뭄이라도 들라치면 중산간 마을에서는 해안가 용천수 물통을 찾아 먼 길을 다녀야 했습니다. 어쩌다 마을 어귀에서 만나게 되는 물통에 서도 세월의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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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봉은 국내 최대 황근 자생지 STORY 02 _ 물의 추억

성산일출봉과 마주한 식산봉은 해발 60여m의 작은 오름으로 바다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작다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닙니다. 식산봉은 그 주변과 어우러져 뽐내는 아름다운 경치로‘성산10경’의 하나로 꼽 힙니다. 식산봉(食山峰)이라는 한자말을 낳은 전설과 함께하는 곳이며, 염습지에서만 자라는 희귀식물인 황근의 국내 최대 규모 자생 군락지이 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맥문동, 청미래덩굴, 율초 등 많은 약초들이 군락을 이루어 곳곳 에 분포하어 있습니다. 또한, 칠면박나무, 참식나무, 까마귀쪽나무, 돈나무, 송악, 자금우, 광나무, 마삭줄 등 자생 상록활엽수림이 넓게 분포하는 등 108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기도 하지요. 식산봉으로 다가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목책을 둘러 보호하고 있는 황근입니다. 무궁화의 일종인 황근은 1~2m의 키에 잎은 원형 또는 넓은 달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7~8월에 노란색 꽃이 하나씩 잎겨드랑이에 피고 가을에 열매가 익습니다. 신기하게도 종자가 염분에 잘 견디도록 적응해왔고 가벼워서 해류를 따라 물에 떠다닐 수 있는데, 그렇게 떠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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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봉

식산봉, 쌍월 이야기

출발 도착

파도를 만나 육지에 뿌리를 내리는 특성 때문에‘갯부용(갯아욱)’이라고 도 불립니다. 바닷가에서 서식하는 특이한 황근. 무궁화와 비슷하게 생겨서 예부터 노랑 무궁화라는 뜻의 이름을 갖게 된 황근은 햇볕을 좋아해서 음지에선 꽃을 틔우지 않습니다. 연노랑색으로 피어서 꽃이 질 무렵이면 차츰 붉은색 으로 변하며, 가을이면 낙엽을 떨구지요. 그 분포지역이 얼마 안되고 개체 수가 적기 때문에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 산림청 지정 희귀 및 멸종위기식물 보존 우선순위 93위에 각각 등재되었고, 식산봉 황근 자생지와 상록활엽수림은 1995년부터도 지정문화재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꽃이 예쁘고 단풍도 들기 때문에 관상용으로 애호가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황근 자생지 복원 노력이 이어져왔지요. 1980년대 농촌진흥원에서 황근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식산봉 황근 가지를 가져다 증식했습니다. 이후 여미지 식물원에서는 서귀포시 법환동 해안의 황근 자생지를 복원하기 위한 사업을 펼치기도 했으며, 근래에는 환경부 산하 국립생물자원관에서 증식한 황근을 서귀포시 표선면 해안도로변에 식재하기도 했습니다. 식산봉처럼 바닷가의 식생 환경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흔들리기 쉽습니다. 때문에 이를 잘 살피는 것은 우리네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헤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활짝 핀 노란 황근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 삶터가 씩씩하게 숨 쉬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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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로 만나는 설화 STORY 02 _ 물의 추억

‘식산’이 된 바우오름

일출봉에서 뜨는 해가 가장 먼저 햇살을 보내는 마을, 그래서 늘 따뜻하고 평화로웠던 이 마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다 멀리에서 일본 해적인 왜구들이 쳐들어와 마을을 들쑤셔놓곤 했기 때문 입니다. 이 마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왜구들은 툭하면 쳐들어와 이 마을 저 마을 들쑤시고 다니며 곡식을 털어가고 해산물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왜구에 맞서다 크게 다치기도 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 도 했습니다. 이 마을에는 온통 큰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바우오름이라 부르는 산이 하나 있었습니다. 높지는 않지만 꼭대기에 올라가면 바다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왜구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는 조방장은 수시로 이 바우오름 위에 올라 바다를 감시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어김없이 이 마을을 들른 조방장은 바우오름 쪽으로 향하다가 “옳거니!”하며 무릎을 탁 칩니다. “아, 그동안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문득 바라본 바우오름의 모습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조방장 은 당장 마을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지금부터 짚이고 풀단이고 가리지 말고 낟가리란 낟가리는 모두 거두어 바우오름을 덮읍시다.” 마을사람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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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뭔 말이요? 그렇잖아도 왜구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그러니 하는 말입니다. 왜구들이 멀리서 보면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착각할 것이고, 병사들이 엄청 많은 줄 알고 달아나버리지 않겠습니까?” “옳거니! 거 아주 좋은 생각이요. 어여들 서둘러 낟가리를 걷어옵시다.” 마을사람들은 너도 나도 집으로 밭으로 달려가 짚단이며 풀단이며 낟가리란 낟가리는 모두 가져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날며칠 부지런히 날라다 오름의 바위 들을 낟가리로 빼곡하게 덮고 행여 바람에 날아갈 새라 꽁꽁 얽어맸습니다. 그렇게 이엉으로 덮은 바우오름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군량 미더미였습니다. 그 뒤로 왜구들의 침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우오름을 산더미로 쌓인 군량미로 본 왜구들이 지레 겁을 먹고 멀리 달아나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로부터 바우오름은 먹을 식(食)자가 들어간‘식산(食山)’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붙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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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로 만나는 설화 STORY 02 _ 물의 추억

바우오름의 슬픈 사랑

식산봉, 곧 바우오름은 그 생김새가 아름다운 여인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몹시 슬퍼하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참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 집니다. 옛날, 이 마을에는 사는 옥녀라는 처녀와 부씨 총각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둘은 신분 차이가 있어 남몰래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옥녀는 양반집 딸이었고, 부씨 총각은 대장장이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은 맺어질 수 없는 처지에 속상해 하며 서로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옥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에서 권력께나 부리는 조방장이었지요. 옥녀를 탐낸 조방장은 이리저리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옥녀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음을 알게 됐지요. 신분 차이를 빌미 로 옥녀의 마음을 잡아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부씨 총각에 대한 옥녀의 마음이 깊어진다는 걸 느꼈습니다. 질투에 눈이 어두워진 조방장은 부씨 총각을 잡아다가 없는 죄를 씌워 목을 매달아 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부씨 총각의 시신을 바닷가에 내다버리고 말았지요. 부씨 총각이 사라졌으니 옥녀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으리라 믿은 조방장은 갖은 수를 썼지만 옥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조방장에게 모질게 시달린 뒤 놓여난 옥녀는 정신없이 바닷가로 달려갔습니다. 누군가 옥녀에게 조방장 일행이 부씨 총각을 질질 끌고 바닷가로 가더라고 귀띔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옥녀는 목이 터져라 부씨 총각을 부르며 찾아 헤매다 동쪽 끝 바닷가에 누워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살아있으리라 믿었는데, 싸늘한 시신이 돼있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졸린 채…. 옥녀는 시신을 부둥켜안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옥녀의 모습이 얼마나 가련했던지 하늘도 울고 바다도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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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는 울고 또 울다가 점점 굳어져갔고, 마침내 바위산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바위산이 바로 바우오름, 곧 지금의 식산봉입니다. 부씨 총각의 시신 역시 돌무더기로 굳어버렸는데, 바우오름 동쪽 바닷가에 있는‘장시머들’ 이 그것입니다. 바우오름 중턱의 바위는 원한에 찬 옥녀의 눈이라고 합니다. 이 바위가 마을에 비치게 되면 좋지 않다고 해서 나무를 심어 가려버렸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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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위산에 사는 식물들 STORY 02 _ 물의 추억

우리나라에서 멸종위기 종인 황근의 최대 자생지인 식산봉에는 다양한 식물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해송, 왕대나무, 동백마무, 까마귀쪽나무, 후박 나무, 생달나무와 같은 상록교목을 비롯하여 50과 91종 108종이 서식하고 있답니다. 제주와 거문도에만 분포한다는 상록덩굴인 후추(바람등칡)도 자생하고 있어 식물 학적으로 보존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식산봉의 자연식생은 오래전부터 훼손되어 수십 년 전에 곰솔을 심었는데 지금은 오름을 덮을 정도로 큰 숲을 이루었습니다. 곰솔과 함께 자생하는 잡목들을 제거하지 않아 10m가 넘는 상록활엽수들도 공존하고 있습니다. 식산봉 난대림 하층에는 천남성, 송악, 자금우 등 전형적인 난대림 표 식종이 일부 출현하고 그 서식지가 점차 넓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까지 난대성 수목의 다양성은 빈약합니다. 멍석딸기, 쇠무릎 등 양지성 초본식물이 번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난대림 천이 초기단계로 볼 수 있답니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참나무과 식물을 한 본도 찾아볼 수 없 답니다. 이는 간혹 난대림에서 멀리 떨어진 섬의 식생 천이과정에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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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현상입니다. 식산봉은 섬은 아니지만 가까이에 난대림이 없고 민가와 경작지로 격리되어 참나무과 식물의 유입이 제한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인듯 합니다. 이처럼 식산봉의 난대림은 여러면 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산포를 기점으로 일출봉, 우도, 섭지코지 등 주변 지역의 자연식생이 대부분 훼손되어 과거의 자연식생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식산봉은, 비록 곰솔 조림지에서 시작되긴 했지만, 난대림으로의 천이 과정과 제주 동부해안지대 난대림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조림지에서도 자연림으로 복원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오름만 하더라도 산림녹화사업을 전개하면서 대부분 인공조림이 이루어졌는데 오히려 이질적인 경관을 만들어냈 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식산봉에서는 곰솔 숲이 성장하면서 해풍을 막아 습도를 높여주며 그늘을 제공하여 음지성 난대 수종의 발아와 성장을 촉진해온 것입니다. 특히, 곰솔은 숲에 다시 후계를 만들지 못하는 양수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식산봉에 식재된 곰솔은 자연도태 되고 음수인 난대식물로 완전히 대치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난대림이 복원되는 것이지요. 만약 이런 현상이 현실화된다면 여타 삼나무 인공조림지에도 이 같은 방식을 적용하여 제주의 산림이 천연 난대림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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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로 만나는 설화 STORY 02 _ 물의 추억

여기에 설문대할망의 오줌길이?

제주섬을 만든 설문대할망은 어느 날 한라산 백록담에 걸터앉아 성산 일출봉을 바라보았습니다. “해가 뜨니 섬이 더욱 아름다워!” 할망은 자신의 솜씨에 스스로 감탄했습니다. 막 떠오른 붉은 햇살에 할망의 얼굴은 더욱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던 할망은 문득 생각난 듯 혼잣말을 했습니다. “섬을 하나 더 만들어 볼까? 빨래하기 좋게 편편하고 아담한 모양으로 말이야. 그러면 한라산을 짚고 서서 발로 밟지 않아도 되겠지?” 이번에는 좀 다른 방법으로 섬을 만들고 싶었던 할망은 식산봉과 일출봉 두 오름에 저마다 한 쪽 발씩 디디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우렁찬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할망이 오줌을 누기 시작한 것이지요. 거대한 신이 누는 오줌인지라, 오줌줄기가 얼마나 거세고 그 양은 또 얼마나 많은지 식산봉과 일출봉 사이의 땅덩이가 파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다 깊은 곳이 파이고 암석들은 깨지고 떨어져 나갔습니다. 온 세상이 천둥소리로 뒤엉키는 듯 했습니다. 바다 속의 물고기들이 떼지어 이동하고 큰 돌고래 까지 가쁜 숨을 내쉬며 요동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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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바다가 잠잠해지더니 성산일출봉과 식산봉 뒤로 아름다운 무지개가 떠올 랐습니다. 오줌줄기로 파여 떨어진 넓적한 땅덩어리 하나가 동쪽으로 밀려나가더니 바다 한가운데 멈추었습니다. 지금 우도라고 부르는 섬이 생겨난 것이지요. 드디어 할망의 빨래판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뒤로 할망은 한라산 백록담에 걸터앉아 성산일출봉 분화구를 빨래 바구니로 삼고, 자신의 오줌길로 생겨난 우도를 빨래판 삼아 빨래를 하게 되었습니다. 멀리 아름답게 펼쳐진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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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즐기는 조개잡이 STORY 02 _ 물의 추억

화산섬 제주의 해안은 현무암의 암석해안이 대부분이며, 바람과 조류 에 의해 운반된 화산재나 모래 등 풍성(風成)퇴적물로 이루어진 현생 해빈 퇴적물 해변이 일부 지역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산일출봉 주변과 같이 수성화산체가 자리하고 있고 그와 관련된 해식작용으로 해안단구와 사구 (砂丘; sand dune)가 발달된 역동적인 해안지형을 보여주는 곳은 드뭅니다. 일출봉 주변의 사구층은 섭지코지, 성산반도와 육지를 잇는 육계사주와 종달리 지미봉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산리 해안에는‘너른모살 (넓은 모래)’과 같은 지명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이 사구층은 제주 동북부 지역인 김녕을 중심으로 내륙 깊숙이 침입한 대규모 사구층과 그 형성 시기나 성인이 같은 퇴적층입니다. 오조에서 성산으로 향하다 갑문 초입에 이르면 내수면 쪽으로 하얀 속살을 드러 낸 모래사장이 나옵니다. 쪽빛 물빛에 물들어 모래도 은빛입니다. 썰물 때면 수만 평의 광활한 모래벌이 드러납니다. 청정한 해안에 모래 벌이 만들어졌으니 조개류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 마련되는 것은 당연 하겠지요. 그래서 오조포구 앞 모래벌에서는 조개잡이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체험어장으로 지정돼 있는데, 보통 음력 보름과 그믐날 3일 전후 오후 3시, 계절로 본다면 이른 여름에서 9월초까지가 조개가 가장 많이 잡히는 때입니다. 이곳은 가족이 함께 물놀이도 즐기고 조개잡이 체험도 할 수 있어 꽤나 이름이 나 있습니다. 아이들을 이곳 모래벌에 풀어놓으면 몇 시간을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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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뛰어다닙니다. 모래를 헤집어 조개도 잡고 우연히 발견한 바다생물의 이름도 알아가며 생태학습을 겸하기도 합니다. 이 지역에 조개가 많이 나는 것은‘조갱이머 들’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조갱이’는 조개를,‘머들’은 돌무더기를 이 릅니다. 고성에서 성산리로 들어오는 길목 인‘터진목’ 북쪽 바닷가 일대에 있던‘머들’ 을‘조겡이머들’ 또는‘오겡이머들’이라 합니 다. 조개 등 다섯 가지 해산물이 많이 났던 곳 이라는데서 연유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 바닷 가의 지형지세가 마치 까마귀 머리와 같고 또 실제로 까마귀 떼가 먹을 것을 찾아 자주 날아 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성산·오조 내수면은 담수와 바닷물이 만나 는 해안모래밭, 철새도래지, 갈대 자생지 등 빼어난 자연경관과 생태환경을 갖춘 곳입니다. 주변 경관도 둘러보고 조개잡이 체험도 함께 즐긴다면 더할 나위 없는 여행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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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재가동된 성산갑문 STORY 02 _ 물의 추억

성산리와 오조리 사이는 바다였습니다. 이를 갑문다리로 연결했지요. 이 다리의 성산리 쪽 지경을 큰(한) 입구(도)라는 의미의‘한돌목’이라 했 는데, 지금은 갑문다리라 부르는 이가 많습니다. 이 갑문은 1994년 성산 해양관광지구 개발의 일환으로 내수면에서 뱃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설치 한 것입니다. 갑문이란 바닷물의 흐름과 높이를 일정하게 조절하는 시설물인데, 성산갑문 은 설치된 뒤 운영하지 않고 다리 역할만 해왔습니다. 시운전 이후 20년 동안 단 한 번도 가동하지 않아 갑문은 녹슬어가는 애물단지로 신세였지요. 이 갑문 때문에 바닷물이 제대로 순환되지 않아 수질이 나빠지고 심지어 조개가 많이 잡히는‘통발알’의 생태환경을 파괴한다고 지적되기도 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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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런데 2014년 9월 25일 갑문이 20년 만에 가동됐습니다. 이날 갑문 26개가 닫히면서 내수면은 바다호수로 변했습니다. 전국체전을 앞두고 내수면을 카누경기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였지요. 녹슨 철판 갑문 2기와 수문 24기를 교체하고 발전기를 정비하여 갑문을 가동했습니다. 내수면을 카누·카약 등의 금메달 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경기장으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이 내수면은 160만㎡입니다. 수위를 조절하는 갑문 둑은 길이 160.6m, 폭 12m의 규모죠. 상단에는 왕복 2차로 교량이 설치돼 있고요. 만조 때 갑문과 수문을 닫아 내수면에 바닷물을 채우면 평균 2m의 수심을 확보할 수 있답니다. 때문에 경치가 수려한 이곳 내수면을 카누 등 수상경기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아 경기를 치를 수 있고, 국제규격의 코스를 갖추면 국제경기장이나 전지훈련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답니다. 오조리쪽 성산갑문 초입은 성산일출봉이 가장 잘 보이는 전망 포인트입니다.‘옹달샘’이라고 작게 이름 붙인 분홍색 커피판매 점이 늘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껏 가까워진 일출봉을 눈앞에 두고 바다 향기를 맡으며 즐기는 커피 맛은 그 판매대 모양새가 별난 만큼이나 그럴싸합니다. 이곳에서 내수면 쪽을 바 라보면 식산봉이 보이고 가까이로는 모래벌이 눈에 들어옵니다. 여름철 바닷물이 빠지면 조개잡이 체험을 하는 곳이죠. 성산갑문을 지나면 과거 제주세관 성산출장소가 자리하고 있던 터가 나옵니다. 표석이 자그맣게 놓여 있는데, 성산항 일대가 일찍부터 무역이 성행했던 곳임을 알려주는 이정표인 셈이죠. 성산갑문이 다시 가동되면서 내수면이 수상경기장으로 변한 만큼, 앞으로 이 일대는 무역업과 스포츠 산업이 우위를 놓고 서로 경쟁 하는 무대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108 /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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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기록하세요..

STORY 02 _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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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03

바람의 길

마을 입구 성산항 바람언덕 해녀의 길 성산마을제단 이생진 시비 오정개 우뭇개 우뭇개 동산 성산일출봉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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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내력을 품은 성산리 포구들 STORY 03 _ 바람의 길

성산리는 포구가 먼저 열린 뒤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독특한 이력을 가 지고 있습니다. 성산포(城山浦)라는 옛 이름이 말해주듯, 성산일출봉을 정동향에 두고 육지를 에워싸고 있는 바닷가 전부가 포구인 마을입니다. 성산리와 고성리의 경계점인 터진목 입구 광치기에 바싹 붙어 있는‘수 매밋’에서 출발하여 해안을 따라 성산일출봉을 한 바퀴를 돌고 다시 그 자리에 돌아오면 저절로 성산리가 천혜의 자연포구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수매밋, 윤선자리, 푸른채킷, 통밭알, 용철이개, 용당알(옷덕), 오정개, 거꿈 베기, 우뭇개 등 포구들은 다 저마다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수매밋’ 일대는 성산리 자연포구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큽니다. 해저와 갯가가 부드러운 사암과 모래벌이어서 포구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 습니다. 이 포구는‘수마포’ 라고도 했지요. 조선시대에 성산리 인근에서 기른 말들을 조정에 바칠 때 이 포구를 이용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역사적으로 성산포가 밖으로 크게 드러나게 된 계기는 고려말기 삼별초 잔 당인 김통정부대의 상륙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합니다. 삼별초 잔군이 제주 섬으로 피신하여 여몽연합군에 항거할 때 김통정 장군은 애월읍 고성리에 성을 쌓아 진지를 구축할 때까지 천연요새 성산일출봉을 기점으로 수매밋 일대를 요새로 삼아 삼별초 잔군을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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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매밋에서 고대사를 읽는다면‘윤선자리’에서부터‘우뭇개’에 이르 는 포구들 에서는 제주섬의 근현대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와 일본 등지로 사람과 문물이 활발하게 들고나던 통로가 바로 이 포구들입니다. 윤선자리는 당시 제주도민의 일본 이민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초창기 여객선으로 큰 수레바퀴를 단군대환(君大丸)이 드나들어 붙 여진 이름입니다. 지금 우도 도항선이나 육지를 오가는 카페리들 그리고 성산항과 1980 년대에 갑문이 생기기 이전까지 육지며 제주시와 주변 마을들에 특산 물을 보급하던 전초기지나 다름없던‘통밭알’ 등 포구들은 제주섬 전역에 물자를 도맡아 공급하던 물산 집하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듯 성산리의 크고 작은 자연포구들은 저마다 제주섬의 역사와 함께해 왔습니다. 한두 개의 돛대를 세운 목선에서부터 제주 선인들 의 뛰어난 조선 술을 자랑하던, 세 개의 돛을 올리고 달리는 선박인 ‘삼대받이’들이 즐비하던 포구의 옛 모습을 떠올려보면 국제무역항 으로 자리 잡은 오늘날 성산포의 연원을 가늠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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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성산포항, 수매밋 STORY 03 _ 바람의 길

지금의 성산항이 만들어지기 이전 오랜 옛날부터 성산포항이라 부르던 곳이 있습니다. 바로‘수매밋’ 입니다. 인근 지역에서 길러낸 말들을 반도부로 실어 나르던 포구여서‘수마포’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일출봉 이 휘돌아 나가고 서편으로 섭지코지까지 이어지는 잘 발달된 해안선이 타원형으로 광활한 바다를 감싸 안고 있는 이 포구는 훌륭한 천연항입 니다. 그래서 육지부와의 교류는 물론, 일본이나 중국 선적의 선박들도 드나들었던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제주를 연결하는 화객선들이 취항했던 항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폭풍우가 몰아칠 때의 내항은 태평양으로부터 몰아치는 거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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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일출 봉만으로 막아주기에는 그 면적이 너무 넓었습니다. 그래서 태풍 소식이 전해질 때면 온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다시피해 파도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선박들을 끌어올리기도 했습니다. 폭풍우로 인한 선박의 안전한 피항처로는 성산포와 오조리 사이 내륙 깊숙이 펼쳐진 내해인‘통밭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썰물 때에는 이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출어 때에도 꼼짝없이 발이 묶이는 등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성산포 주민들에게 방파제 시설은 매우 간절한 것이었지요. 그 숙원사업이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지게 됩니다. 정부 예산 안에 반영돼 지원이 확정됐던 것이지요. 주민들은 의당 수매밋에 방파제 시설이 들어서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는 미·소 양국을 주축으로 하는 동서냉전시대인데다 6·25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었던 때여서 수매밋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군사용 임시항만으로 이용한다는 ‘항만통제규제항’으로 묶어 있었습니다. 이 또한 수매밋이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포구 였음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우도를 앞에 두고 있는 마을 의 북면을 이용한 지금의 성산항 동편에 선박들을 임시 대피할 수 있도록 방파제를 쌓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성산항을 탄생시킨 첫 걸음이 되었습니다. 만약 수메밋에 방파제 시설이 들어서고 지금과 같이 성산항으로 개발됐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겁니다. 바닷가에 우뚝 서 있는 성산일출봉의 장관을 바라보기에 앞서 화물선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성산항을 먼저 대해야 했을 테지요. 한가로이 관광을 즐기는 인파들 과 섞이기에 앞서 여객선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먼저 만나야 했을 겁니다. 하여 성산일출봉의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라져보였을지도 모릅니다.‘원조 성산포항’이라 해야 할 수매밋은 옛 명성을 곱씹 으며 일출봉 아랫녘에 있는 듯 없는 듯 자리하고 있습니다. 116 /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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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과 신문화의 관문, 성산항 STORY 03 _ 바람의 길

성산리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마을입니다. 오로지 조수 간만에 의하여 고성리로 통하는 마을 입구가 열리고 닫히는 자연수문만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터진목을 이으면서 비로소 온전한 연륙이 이루어 졌지요. 게다가 성산리는 땅이 비좁고 척박한데다 해풍이 심하 여 농업보다는 수산업이 주를 이루어왔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 기부터 성산리에 통조림공장 옥도제조공장 소주공장 양조장 단추공장 등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원료 동력 노동력 소비시장 등 여러 면에서 공업이 발달하기에 불충 분한 환경이었지만 일본과의 교류에 적합한 항구를 지녔기 때문에 일찍이 제조업이 성행했던 것이지요. 통조림공장에서는 성산포와 주변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소라 전복 성게와 같은 해산물을 가공했는데, 노동인력 7명으로 규모 는 작았다고 합니다. 화학연료인 옥도(요오드) 제조 공장에서는 우뭇가사리 등 해조류를 화학적으로 분해해 의약품 원료를 추출했습니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옥도 원료 채집이 자국에서 어려워진 일본이 제주도로 눈을 돌려 제조공장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제조업의 도입과 항만으로서의 입지는 자연스럽게 무역 의 발달을 낳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제주에서는 성산항이 국제 무역항의 시발지인 셈이지요. 이에 1908년에는 세관 성산 포감 시소가 설치되기도 합니다. 성산포에는 크고 작은 포구가 많아 어떤 바람이 불어도 배를 댈 수 있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덕분에 전남 강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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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성산 항

성산항ㆍ우도 이야기 출발 도착

출발한, 독을 실은 목선에서부터 심지어 일본의 고등어잡이 배들도 제집 드나들듯 오갔습니다. 광복 후에는 일본산 알루미늄 그릇이 제주산 건미역 우뭇가사리 등과 구상무역으로 바로 들어왔고, 마른 전복이며 해삼 등 제주산 건어물을 주로 취급하는 무역상들은 홍콩 등지를 오갈 때도 이들 포구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성산포는 1912년부터 이미 어항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1922 년 제주~목포·부산, 1935년 제주~일본, 1938년 성산~우도 등 뱃길이 다양하게 열렸습니다. 1966년에는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됩니다. 요새 성산항에서 주로 취급하는 화물은 모래, 감귤 등 지역농산물, 일본으로 수출되는 활어와 전복 등 수산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요. 이외에도 비료 기계류 식품류가 간헐적으로 들어 옵니다. 이처럼 사람과 문물이 들고나는 성산포는 제주도에서 외부의 신문물이 가장 먼저 보급되는 관문 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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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의 제주역사 함께해온 성산항 STORY 03 _ 바람의 길

성산항은 제주 동부지역 연안 화물 처리와 연안 어업기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인근 성산일출봉과 우도 등 해양관광에 적합한 입지 여서 관광항으로서의 개발 잠재력도 뛰어난 편이지요. 연안 화물과 수산물 유통을 원활히 하고 여객의 해상교통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1968년 1월 연안항으로 지정된 성산항은 예로부터 일본과 교류해온 대외 요충지입니다. 성산포는 일명‘명포’라 했는데 교통편이 전혀 없다가 1900년에 소기선이 처음 나타나면서 해상교통이 시작되었지요. 성산항을 중심으로 정기항로가 개설된 것은 1922년의 일입니다. 제주성산회사가 건립되어 100톤급 기선이 제주와 목포·부산 항로를 잇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항내 수심이 낮아 종선을 타고 드나들어야 했지요. 1923년부터 제주와 시모노세키·오사카를 잇는 아마사키기선과 군대환 (君代丸)이 취항했고, 한때‘우리 배’ 순길환과 복목환이 운항되기도 했 습니다. 한편, 1953년 당시 제주도에는 해방 이후 하나의 항만도 건설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에도 당국에서는 국고보조를 받아 큰 어항을 신설하려 했고, 그 예정지로 성산 포항을 비롯한 8개소를 선정했습니다. 그래서 1956년부터 항만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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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산포~서귀포 여객 항로는 1963년 1척이 취항한 이후 1972년 에는 2척이 교차운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89년 카페리선이 취항하고 1991년에는 카페리선 복수 운항체계를 갖추었습니다. 2002년 성산~통영 간 카페리 여객선이 취항했고 다시 2005년에 성산~통영 간 여객선이 운항을 재개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항로는 운영 적자로 많은 어려움을 겪 었습니다. 2010년에는 성산항과 전남 장흥 간 쾌속 여객선이 운항되면서 관광활성화 의 기폭제가 되고 있습니다. 수도권, 대구, 경북 지역의 뱃길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고 제주의 동쪽 관문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 확충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산항은 본래의 기능인 물류와 함께 주변 성산일출봉과 우도와의 연계된 관광 기능이 가미된 복합기능을 수행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산항은 어업전진기지로서 국제교역과 해양관광, 해산물어획의 중심지로 입지를 굳히고 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생계를 잇기 어려운 제주 사람들이 일본으로 돈 벌러 떠나는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성산항은 제주의 발전상과 함께해온 곳이면서 제주인들의 한 서린 세월을 지켜본 항구이기도 합니다. 120 /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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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한가득 바람을 안고... STORY 03 _ 바람의 길

제주말은 짧습니다. 제주초가는 낮습니다. 제주의 나무들은 한쪽으로 쏠려있습니다. 이 모두가 바람 때문입니다.“강 봥 왕 릅써!”타지 사람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수 없는 말을 제주사람들은 사용합니다. “가서 보고 와서 말씀하십시오.”라는 말을 그렇게 짧게 합니다. 그것도 강하고 날카롭게 들립니다. 바람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람에 말이 죄다 날아가 버리고“강 봥 왕…”만 남았다는 것이죠. 늘 불어대는 거센 바람 에 적응한 결과물이 제주말인 셈입니다. 끊임없이 불어대는 제주섬의 바람은 제주만의 독특한 생활문화를 낳았 습니다. 제주초가는 한반도 지역의 그것과 달리 지붕의 용마름이 없이 나지막하게 짓습니다. 지붕 전체를 집줄을 이용해 바둑판 모양으로 꽁꽁 얽어매기까지 합니다. 초가 전면에는‘풍채’라는 독특한 바람막이 시설 을 합니다. 제주섬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돌담과 밭담도 바람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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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섬 어느 곳을 가건 바람을 맞는 나무들은 한 쪽 방향으로 쏠려있기 일쑤입니다. 키 작은 나무 들은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을 향해 납작 엎드려 있습니다. 일출봉 주변 해안언덕에 둥지를 튼 크고 작은 나무들은 모두 바람이 시키는 대로 몸을 한쪽 으로 뉘이고 있습니다. 이렇듯 제주섬에서는 사람이건 식물이건 할 것 없이 모두 이 바람과 끊을 수 없는 연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에서도 살아내야 했기에 바람 모양새를 세세히 가늠하고 이리저리 대처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조리만 하더라도 바람의 이름은 다양합니다. 샛 름(동풍), 갈 름(서풍), 마 름(남풍), 하늬 름 (북풍), 을진풍(동남풍), 도깽이주제(회오리바람), 궁근새·궁근샛 름(오랫동안 세게 부는 바람), 지름·지름샛 름(여러 날 동안 약하게 부는 바람), 겁선새(파도가 갑자기 일어나면서 샛 름이 불어 오는 것), 놀(북풍 또는 태풍).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에 따른 이름만 있는 게 아니라, 그 강도나 불어 오는 기간에 따라서도 각기 다른 이름이 붙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의 성질을 알아야 제대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오조리에서는 특히 서풍인 갈 름의 피해를 두려워합니다. 이 바람에 어부들의 피해가 컸기 때문입니다. 과거 어느 해에는 바다에 나갔던 24명의 어부가 갈 름을 만나 한꺼번에 사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바람은 제주섬의 삶과 한 몸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여 제주 에서는 ‘바람의 신, 영등’을 모십니다. 삶의 안녕이 그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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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성의 아이콘, 해녀 STORY 03 _ 바람의 길

녀,

수라고도 부르는 제주해녀는 큰 파도의 흐름에 자기의 몸을 맡

기고 숨을 참으며 15m나 되는 물속에서 1분 이상 물질을 합니다. 가히 초인적이라 할 만하지요. 물속에서 자신의 몸이 적당한 수압과 산소의 양을 감지하고 수면까지의 거리를 가늠하여 잠수시간을 조절해야 하는 해녀들의 물질실력은 어린 시절부터 익히며 몸에 밴 체험의 결과입니다. 여자아이가 10세쯤 되면 물가에서 헤엄을 배우고 16세가 되면 잠수기술과 어장의 지형을 익혀 해녀가 됩니다. 해녀는 능력별로 상중하가 있어서 3040세 이상이 되면 암초와 같은 지형물의 특성을 터득하고 해산물의 생태에 따라 서식처도 거의 알게 됩 니다. 해녀들의 작업 시기는 보통 물때에 의해 결정됩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조수간만의 차가 적을 때 주로 물질을 합니다. 그리고 조수나 바람의 방향을 살펴서 물질할 곳도 결정합니다. 다른 지방으로 나가‘출가 물질’도 하곤 했지요. 경남·경북·전남·전북 지역은 물론, 대마도나 블라 디보스토크까지 17-30세 가량의 상군 해녀들이 출가물질을 다녔습니다. 제주 해안마을이 다 그렇듯이 성산리나 오조리 해녀들도 물질과 밭농사를 겸해야 했습니다. 특히 성산리는 터가 비좁아 일용할 채소나마 붙일 텃밭도 없을 정도이니 그야말로 열악한 삶터였지요. 이처럼 바다가 유일한 자원이다 보니 해녀들의 물질은 집안 살림과 지역경제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바다가 살림에 그토록 중요했기 때문에 바다밭을 두고 마을 사이에 다툼 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 갑문이 설치되어 있는‘한돌목’의‘한도여’ 에서는 질 좋은 미역이 나왔기 때문에 이곳을 두고 오조리와 성산리 해녀들 간에 다툼이 벌어지곤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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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들의 강인함은 해녀항일운동에서도 나타납니다. 1920년대 중반 무렵 일제의 수탈이 본격화되면서 해녀어업조합의 횡포가 극심해졌습 니다. 이에 해녀회는 관제조합을 분쇄하기로 결의하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 1932년 1월에는 성산과 구좌 해녀 1천여 명이 격렬하게 투쟁하여 요구조건을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현재 5천여 명의 해녀 중 60~70대가 75%로 대부분 고령이고 40대 미만 의 해녀가 200여 명에 불과합니다. 머지않아 ‘제주여성의 아이콘’과도 같 은 해녀는 박물관에서나 그 흔적을 찾아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여 제주 여성의 강인한 삶을 상징하는 해녀와 그 문화의 보존은 매우 소중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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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엿사나 이엿사~’ 힘내던 성산포 해녀노래 STORY 03 _ 바람의 길

성산 지역에는 생업활동을 기반으로 한 노동요가 풍부하게 전승 되고 있습니다. 농업과 어업, 목축업을 병행했던 만큼 밭농사와 관련한 ‘밧 리는소리’ , ‘검질매는소리’ , 목축과 관련한 ‘ 쉬모는 소리’와 함께 어업과 관련한 ‘터위 젓는 소리’ , ‘갈치낚는소리’등이 남아 있지요. 육체노동의 고달픔을 잊고 힘을 보태려는 자연스런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성산포에서는 해녀들의 물질이 왕성했습니다. 이들은 가까운 바다에서의‘ 물질’ 뿐만 아니라, 경상·전라·강원 도나 러시아 블라디 보스토크까지‘출가물질’도 했지요. 해녀 수가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들이 물질을 하면서 부르던 노래만큼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해녀들이 직접 노를 저어가며 부르는 노래도 있고, 어려운 신세를 한탄 하는 노래도 있습니다.‘물질소리’는 중산간 마을에서도 전승되고 있는데, 이는 각 마을 소유의 바다밭이 있어 중산간 마을 여성들도 물질 을 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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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들의 노래 첫머리는 주로‘이엿사나 이엿사’와 같이 시작 되고 한 대목이 끝날 때마다 이를 다시 반복하곤 합니다. 벅찬 노동에 맞서 힘을 내기 위한 소리겠지요. 이엿사나 이엿사/ 요 뇔 젓엉 어딜 가리/ 진도야 바당 한 골로 가자// 우리야 부모 날 날 적에/ 해천영업 시킬려고 날났던가/쳐라 배겨라 잘도 간다/ 이여도사나 잘잘 가네/(……) 우리 어멍 날 잘 적에/ 어느 바당 메역국 먹언/ 해년마다 날 울리던고/ 쳐라 배겨라 잘도 간다//(……)

많은 마을에서‘해녀항쟁가’가 전승되고 있는 것도 특이합니다. 그 노래 몇 소절만 되뇌어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해녀 들의 절절한 마음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우리는 제주도의 가이없는 해녀들/ 비참한 살렴살이 세상이어라/ 치운날 더운날 비가오는 날에도/ 저바다에 물들에 시달리는 몸// 아침일찍 집을떠나 황혼이면 돌아와/ 우는아이 젖먹이며 저녁밥짓나/ 하루종일 애썼으나 번 것이 기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도 안오네// 이른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코/ 온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고/ 파도세고 무서운 바다를 건너서/ 기울산 대마도로 돈벌이 가네// 배움에 주린 해녀 들어가는 곳마다/ 왜놈덜이 착취해간 설피뒈여서/ 우리들의 파와땀을 착취하여 가는다/ 가이없는 우리해녀 어디로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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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신앙으로 하나 되는 성산사람들 STORY 03 _ 바람의 길

제주의 민간신앙은 무속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영향력이 다소 줄어 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굳건하게 전승되고 있습니다. 한 마을에서도 남성들이 주관하는 유교식 제의인 포제와 심방이 주도하는 무속 제의인 당굿 등 상이한 신앙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마을에는 민간신앙 유적으로 마을수호신이 좌정해 있는 포제단과 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포제는 마을에 따라 마을제, 포제, 이사제, 동사제 등 다양하게 불립니다. 당 이름 또한 그 내력에 따라 다양하지요. 성산리 마을 동쪽 속칭‘용당’에 마련된 포제단은 돌담을 직사각형으로 둘러 제장을 만들었습니다. 제단 북쪽에 대리석 제단 2개가 놓여 있는데, 다른 마을과 달리 성산리 포제는 포신제와 용신제를 동시에 올리기 때문입니다. 본단에는 마을 주신인‘포신’을 모시고, 별단에는 풍어와 어민의 안녕을 지 켜주는‘용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 포제는 음력설이 지나고 첫 정일(丁 日)이나 해일(亥日) 자시(子時)에 지냅니다. 제일을 정해 놓았다가 마을에 초상이나 궂은 일이 생기면 다음으로 미뤄지기도 합니다. 제관은 각 문중 원로들이 모여 문중별로 1명씩 선정했는데, 최근에는 이장이 주축이 되어 결정한다고 합니다. 제관은 모두 성이 달라야 하며, 같은 성이라도 본이 다르면 가능합니다. 또한, 제관은 모두 15인으로 구성되는데 별단에 제를 지내는 별헌관과 별축이 별도로 선정되기에 다른 마을보다 보통 2명 이상 많 지요. 제관은 제일 3일 전 한적한 곳에 마련한 제청에 입제합니다. 이들은 3일 동안 개인적인 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마을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으로 임하게 되지요. 입제 후 3일간은 일종의 마을잔치 기간인데, 주민들은 제청 밖에 천막을 치고 민속놀이를 즐기며 화합을 다지기도 합니다. 제물은 본단과 별단에 희생물인 돼지 각 한 마리씩을 준비합니다. 해산물을 더불어 올리는 것도 성산리 포제의 특이한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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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리 본향당은 수산리‘올래 루’에 있습니다. 주변 4개 마을 주민들과 같이 다니지요. 본향당이 마을 안에 없는 것은 성산리가 비교적 늦게 열린 마을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매해 음력 1월2일이면 부녀자들은 본향당을 찾아 신년과세를 올리고 행운을 빕니다. 당집에서는 매인심방이 새해 행운을 빌어줍니다. 본향당 외에도 출산·육아를 돌보는 삼승할망과 선주·해녀들을 보호하는 돈지 일뤠할망도 모셔집니다. 이렇듯 성산마을은 민간신앙을 통해 마을의 안녕과 주민 들의 행운을 기원하며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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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신’ 모시는 영등굿 STORY 03 _ 바람의 길

제주에는 음력 2월‘영등달’이면 바람의 신‘영등할망’이 찾아옵니다. 음력 초하루에 찾아와 보름날에 섬을 떠납니다. 그래서 제주사람들은 영등할망을 맞이하는 ‘영등환영제’와 떠나보내는 ‘영등송별제’를 지냅니다. 영등신은 제주 전역과 바다를 돌며 곡물의 씨앗과 미역·전복·소라 등 해산물의 씨를 뿌려 농업과 어업에 풍요를 준 뒤 돌아갑니다. 영등신이 찾아온 기간 동안은 신이 강림하는 성스런 시기로 여겨 제주사람들은 어로 나 농사일에 나서지 않습니다. 근래 들어 농촌마을에서는 영등굿이 자취를 감추고 해안마을에서만 치러지고 있지요. 영등굿을 치르는 기간에 날씨가 맑으면 옷 벗은 영등이, 비가 오면 우장 쓴 영등이, 추우면 옷을 치레한 영등이 왔다고 했습니다. 날씨가 맑으면 딸을, 궂으면 며느리를 데리고 들어왔다고도 하는데, 이것으로 일 년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던 것이지요. 영등굿 기간에는 금기사항도 많았습니다. 빨래를 밖에 널면 옷에 벌레가 생기고, 농사를 지으면 흉작을 면치 못하고, 장을 담그면 구더기가 생긴 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 보말이나 소라 같은 해산물을 잡으면 속이 텅 비어 있는데, 이는 영등이 모두 먹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기간에는 해산물도 잡지 않습니다. 성산리에서도 어촌계 주관으로 음력 2월 15일에 어민과 해녀들의 안전과 어업 채취물의 풍요를 비는 영등굿을 펼쳐 영등신을 송별합니다. 오조리에서도 치러지지요. 예전에는 마을사람들 전체가 참여하여 심방을 청해 7일 동안 굿을 해왔으나 근래에는 많이 축소되어 하루에 행해지고 있습니다. 영등굿의 제장은 방위를 보아 정하기 때문에 해마다 바뀌지만 꼭 바닷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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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해서 제의를 행합니다. 요즘은‘오정개’에 있는 잠수편이시설에서 치러 지며, 해녀들과 선주 부인들을 비롯한 마을 부녀자들이 참석합니다. 굿은 초감제, 본향듦, 요왕맞이, 마을도액막음, 씨드림, 배방선, 도진 순으로 진행됩니다. 이 가운데 씨드림은 해산물의 씨를 뿌리고 신받음이라 하여 그 풍흉을 점치는 것입니다. 배방선은 짚이나 널빤지로 작은 배를 만들어 제물을 실어서 영등신을 전송하는 제차입니다. 이러한 제차 중에 ‘지드림(지아룀, 지쌈)’을 통해 용신과 조상신에게 소원을 빌기도 합니다. ‘바람의 나라’인 제주섬에서 바람의 신을 모시는 것은 어쩌면 지당한 일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바람이 부드럽고 따스해지면 해안마을의 삶도 한결 편안해지고 나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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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포에서만 해가 뜨는 이유는... STORY 03 _ 바람의 길

성산포의 바다는 짙은 푸른빛이 감돕니다. 그 바다 너머로 해가 떠오르면 장관이 연출되지요. 성산일출봉의 해돋이가 그토록 이름 나 있는 것은 바로 드넓은 성산 바다의 짙푸름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와 섬과 고독을 노래한 시인이 있습니다.‘그리운 바다 성산포’의 시인 이생진입니다. 19편의 시가 새겨져 있는 그의 시비가 올레코스를 끼고 일출봉 북쪽 오정개 언덕에 조성되어 방문객들을 맞고 있습니다. 4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성산포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1980년대 가수 윤설희가 이생진의 시를 낭송한 음반은 지금 40~50대 사람들에겐 매우 애잔하면서도 아름다운 문화적 추억으로 자리해 있습니다. 시인은“성산포에 가거든 이 시집을 가지고 가십시오. 이 시집의 고향은 성산포랍니다. 일출봉에서 우도 쪽을 바라보며 시집을 펴면 시집 속에 든 활자들이 모두 바다로 뛰어들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시집에서 시를 읽지 않고 바다에서 시를 읽을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이 시집의 시를 읽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시를 읽는 것입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왜 사람들은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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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생진 詩비 거리 출발 도착

아침 여섯시/ 어느 동쪽에도/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을 필거야/ 아침 여섯시/ 태양은 수만 개/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을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 ,‘서귀포 칠십리길’ 등 제주를 자주 노래 한 시인 이생진은‘섬 시인’ 으로 통합니다. 충남 서산이 고향인 그는 어려서부터 외딴 섬을 좋아해 유인도, 무인도 가리지 않고 찾다 보니 그의 발길이 닿은 섬이 천 곳이 넘는다고 합니다. 특히, 제주도는 젊은 날 군생활을 했던 모슬포를 비롯하여 제주 어느 한 곳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랍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성산포를 다 보지 못했다고 시인은 이야기 합니다. 난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 삼백 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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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방파제를 앞세운 포구, 오정개 STORY 03 _ 바람의 길

성산일출봉 바로 동쪽과 동북쪽 일대의 개를 일찍이‘위양개’라 부르고 한자 차용표기로 渭陽浦(위양포)로 표기했습니다. 이곳은 지금‘오정개’와‘우뭇개’라 하는 곳이지요. 이 일대는 19세기 말까지 옛 지도에 위양포로 표기하다가 일제강점기 초반 부터 성산 바로 남쪽에 있는 개를 성산포라 했습니다. 이 성산포는 지금‘수메밋(수멧개·수마포)’ 일대를 이릅니다. 그런데 지금 은 성산리와 오조리 사이의 개를 막아서 부두를 만들고 항구를 만들어서 성산항이라 하는데, 이곳이 성산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일제강점기까지는 이 성산항 어귀와 그 안쪽을‘오졸개’라 하여 오조포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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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개 출발 도착

성산일출봉 북쪽에 연해서 우뭇개가 있고 그 다음 포구를‘오정개’라 합 니다.‘거꿈베기’와‘구젱이머들코지’ 사이 후미진 곳에 있는 포구입니다. 안쪽을‘안오정개’라 하고, 바깥쪽을‘베낏오정개’라 합니다.‘안오정개’가 크기 때문에‘큰오정개’라고도 하고,‘베낏오정개’는‘ 은오정개’라고도 하지요. 오정개는 성산리 중심지에서 정오 방향에 있는 개라는 데서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오정’은‘옷·읒(바다가마우지)’과 관련된 말로 보기도 합니다. ‘가마우지’는‘가마오디>가마오지’의 과정을 거쳐서 변한 말인데, 이‘오디>오지’ 와 관련된 것이 제주어‘옺>옷’ 으로 보는 것이지요. 우뭇개 북쪽 바닷가와 오정개 사이에‘곰 렝이’와‘옷덕’ ,‘거끔베기’ 등이 있습니다. 곰 렝이는 곰(고래)이 들어와서 노는 렝이(자그마한 밭)라는 데서 붙인 것이라 하기도 하고, (경계)이 되는 돌렝이라는 데서 붙인 것이라고도 합니다. 오정개 오른쪽에는 동쪽 바다로 뻗어나간 덕(바위언덕)이 있는데 이를‘옷 덕’이라 합니다. 오리새끼들이 많이 날아와 앉아서 노는‘덕’ 이라는데서 붙여진 이름인데‘큰옷덕’과‘작은옷덕’이 있습니다. 오정개는 옷덕이라는 큰 바위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포구로서 더욱 안성 맞춤이었습니다. 이‘옷덕’이 자리하고 있어 옛 문헌에는 이곳을‘암포(巖浦)’ 라고 적고 있기도 합니다. 오정개는 수심도 얕고 바닥도‘빌레’로 이루어져 있지만, 옷덕이라는 천연방파제가 있기에 포구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오정개 언덕에서는 해녀들이 잡아 올린 소라, 해삼 등 해산물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성산일출봉의 장관과 아담한 오정개가 어우러지는 풍경 속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해녀들의 입담과 함께 즐겨보는 것도 이곳의 매력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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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개가 품고 있는 동물골격화석 STORY 03 _ 바람의 길

성산일출봉은 바다 속에서 터져 솟아오른 화산체입니다.‘하늘이 내린 최고 의 걸작품’이라는 일출봉은 왕관처럼 분화구를 에워싸고 있는 99봉의 기묘한 모양새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풍수상으로 제주의 미래에 밝은 기운을 안겨주는 상징의 하나랍니다. 일출봉은 제주도 동부 해안선의 성산반도를 구성하고 있는 화산체로서 분화 구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런 만큼 그 주변 지대도 그만큼이나 독특한 지형과 지질을 지니고 있을게 분명합니다. 7~5천년 전에 생겨났다니 당시 원지형이나 생물상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일출봉 형성 당시 수백 미터 높이의 분수처럼 솟구친 화산재와 화산력들이 화구 주변에 한 겹씩 쌓이며 다른 화산에서는 보기 어려운 뚜렷한 층리를 만들 었고, 시간을 두고 그 주변에 독특한 지질을 만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일출봉의 북동쪽 기슭에는 두 개의 자연포구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우뭇개’와‘오정개’라고 하지요. 그 지질상을 살피다가 동물골격 화석을 발견 한 곳이기도 합니다. 우뭇개는 일출봉 응회암의 부스러기로 이루어진 검은 모래사장이며 오정개는 붉은 송이층이 드러나 있습니다. 오정개 앞 해안에는 분화구 주변에서 형성 되는 타원형의 공급암맥(feeder dike)이 바다 속에 만들어져 있습니다. 오정개 주변에 분포되어 있는 송이층과 용암류를 유출시킨 분화구와 관련 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화산분화구는 일출봉 북측 기슭으로 지금 야외 음악당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오정개 해안 북쪽으로는 용암으로 형성된 해안단애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이 용암류 단위 사이에는 20cm 두께의 스코리아 퇴적층이 끼워져 있고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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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층에서 새 골격과 사슴이빨 화석이 나왔습니다. 단성화산으로부터 용암이 유출되면서 당시 이 곳에 살고 있던 새와 사슴을 품어버렸던 것이지요. 이 동물골격화석의 산출은 제주도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앞으로 용암에 대한 연대가 세세히 밝혀진다면 화산활동과 수반되어 최소 수천~수만 년 전 당시의 동물상과 환경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산항으로 이어지는 이곳 해안가 언덕에는 가을이 되면 지천으로 갯쑥 부쟁이 가 피어나 장관을 이룹니다. 제주 해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이곳 지형과 지질의 연원으로 미루어 그 아름다움은 아주 오래 전 사람의 발길 이 닿기 전부터 어렵사리 빚어져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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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해녀들의 보금자리, 우뭇개 STORY 03 _ 바람의 길

성산일출봉으로 올라가는 왼쪽 어귀 바닷가에‘우뭇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우묵개’라고도 합니다. 우묵하게 패인 곳에 자리 잡을 개라 는 데서‘우묵개’라 했다고도 하고, 우(우무, 우뭇가사리)가 많이 났던 개 여서‘우믯개·우뭇개’라고 했다고도 합니다. 우뭇개는 바다가 깊숙이 들어와 조수간만의 차가 적고 해초와 해산물이 많아 바다 어장 상태가 좋은 곳입니다.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바다 어장의 명칭들도 다양한데, 곰들레기, 창곰, 갯도, 옷덕(오전개), 용당, 용촐리 (용꼬리), 푸는체개 등이 있습니다. 제주 고유어를 이용하여 바다의 신인 ‘용왕’과 관련되거나 유사 지형관련 명칭들을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출봉으로 상징되는 성산해녀들의 활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열성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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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에 참여하는 해녀는 90여 명이며, 물질은 조금에서 여덟 물까지 9일간 합니다. 천초와 톳과 같은 해조류는 공동으로 작업하고 수익금도 동일하게 나누지요. 우뭇개 양식장에서는 오분자기와 전복 종패를 10만 미가량 기릅니다. 주 산란기인 7-8월 중 오분자기 채취 금지기간을 설정 하고 있으며, 휴식년제, 금어기와 자원보호구역 지정으로 3년 동안은 채취를 금하고 있습니다. 양식장 작업에는 일 년에 몇 차례 작업하지 않는데 80명의 해녀들이 작업하고, 일반 물질에서는 오분자기·전복·문어· 해삼·보말을 잡아서 상인에게 팔아 똑같이 배당합니다. 한해에 다섯 차례만 작업하여 어장을 관리합니다. 우뭇개에서 소라 등을 잡을 때는 개인 배를 빌려서 먼 바다로 나가 물질을 하는데 수입에 따라서 개인별로 뱃삯을 지불한다고 합니다. 우뭇개 위를‘우뭇개동산’이라 부르는데, 이곳은 4·3사건 당시 오조리 주민 30여 명이 소위‘다이너마이트 사건’으로 집단 총살 당하는 일이 발생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2007년에 첫 선을 보인‘해녀물질공연’도 우뭇개에서 펼쳐집 니다. 해산물 판매수익을 높이고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우뭇개 해안에서 어촌계 소속 해녀 100명이 10조로 나뉘어 하루 두 차례, 오후 1시30분과 3시에 각각 한 시간 동안 물질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우뭇개 해녀의 집’은 해녀들이 잡은 해산물을 파는 식당 겸 직판 장입니다. 1987년부터 한 조에 7~13명씩 전체 10조로 운영하고 있는데, 전복죽, 소라, 전복구이, 홍삼, 문어, 멍게 등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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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마을도 비껴갈 수 없었던 4·3의 회오리 STORY 03 _ 바람의 길

4·3사건은 제주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입니다. 제주섬 전체가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지금도 그 상흔이 크게 남아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희생돼야 했고, 평화롭기만 하던 제주 공동체는 산산조각이 났지요. 4·3 발발 이후 제주도민들은 수십년 동안‘빨갱이’라는 오명에다 연좌제에 의한 고통마저 겪어 야 했습니다. 성산리 지역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서북청년단 특별 중대는 성산초등학교 건물에 주둔하면서 숙식을 해결했고, 붙잡아온 주민들을 수감하고 취조하던 곳은 초등학교 담장 너머에 있던 감자창고였습니다. 학교 담장을 허물고 출입했던 것이지요. 매일 같이 고문에 못이겨 질러대는 비명 소리와 형장으로 끌려나가는 주민들의 모습을 목격했던 이들은 이곳을 떠올리면 어김없이 치를 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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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진목ㆍ4.3 유적지 해설포인트

일제 말기 194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산리는 물때에 따라 다른 마을로 통하는 외길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습니다. 즉, 고성리에서 성산일출봉 으로 이어지는‘터진목’의 좁은 길만 막아버리면 오갈 수 없는 곳이었습 니다. ‘터진목’은 4·3 당시 민보단이나 특공대 주민들이 유일하게 보초를 서던 곳이기도 했지요. 해안마을인데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성산리에는 4·3 발발 초기에 한 번 지서 습격이 있었으나 인명피해는 없었고, 그 이후로도 무장대로부터 이렇다 할 기습을 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서청 특별중대의 무자비한 폭력은 성산면과 인근 구좌면 주민들 에게 치떨리는 악몽의 연속이었습니다. 잡혀가 온갖 고문과 곤욕을 치르 는가 하면, 한번 잡혀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근지역 주민들이 서청특별중대 에 끌려와 고문 취조를 당하다가 총살되던 곳이‘터진목’과‘우뭇개’ 였습니다. 그 가운데 1949년 1월 2일 오조리 주민 30여 명이 소위‘다이너마이트 사건’으로 집단 총살 당했던 곳도‘우뭇개’ 였습니다. 해방이 되자 일본군들이 버리고 간 다이너 마이트는 고기잡이용으로 많이 쓰였습니다. 또 1948년 겨울부터 각 마을마다 민보단을 꾸려 자체 경비를 강화하면서 그 다이너마이트를 마을 경비용으로 준비하여 마을 초소마다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다이너마이트가 빌미가 되어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것입니다. 다이너마이트가 무장대와 연관되었다는 웃지 못할 이유에서 였습니다. 성산일출봉의 장관을 양쪽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인‘터진목’과‘우뭇개’ . 그곳에선 제주의 한 서린 세월도 함께 묻어납니다. 140 /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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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농사용 거름으로 쓰던 생조와 풍조 STORY 03 _ 바람의 길

제주

해안마을에서는 바다풀을 밭농사용 거름으로 사용해왔습니다.

바다풀 가운데서도 바닷물 속에서 자라는 것을 생조(生藻), 파도를 타고 해변으로 밀려오는 것을 풍조(風藻)라 부르기도 합니다. 1970년대 초 화학비료가 많이 보급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생조와 풍조의 채취는 왕성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성산리에는 수매밋, 오정개, 우뭇개, 통밧알 등 크게 네 개의 동네가 있 는데, 동네마다 바다풀 채취구역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출봉 서쪽에는‘ 무새끼’라는 해변이 있는데, 이곳의 바다풀 채취권은 마을 이장에게만 주었습니다. 마을 합의로 이루어진 이장의 보수인 셈이지요. 풍조 채취기가 되면 동네마다 풍조를 돌아볼 사람인‘소임’을 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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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풍조가 밀려오면 소임은 그 양과 이를 채취할 인원을 가늠합니다. 대개 한 집에서 한 사람 정도였지요. 채취한 풍조 는 그 자리에서 나누는데 소임은 한 깃(묶음)을 더 받았습니다. 생조는 계절에 따라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음력 3-4월에 따는 ‘실겡이’와‘ 듬북’ 등을‘봄듬북’ , 그리고 음력 6월에 따는 ‘고지기’를‘여름듬북’이라고 했습니다.‘봄듬북’은 동네별로 해당 바다밭에서 날을 정해 채취했는데, 이를‘허채’라 했습 니다.‘테우’를 타고‘줄아시’로‘실겡이’를 베어내는데, 이는 대부분 남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실겡이’ 줄기와 잎에는‘늬끼’ 라는 바다 벌레가 붙어있어 쏘이 면 고통이 컸기에 해녀들 대신 남정네들이 맡아했지요. 이웃끼리 동아리를 이루어 동시에 채취했는데 동아리마다 세 척의 테우가 필요했습니다. 한 척이 실겡이를 베어내면 두 척은 번갈아가며 실겡이를‘공젱이’로 건져 올려 뭍으로 나 릅니다. 실겡이를 베어내는 테우에는 세 사람이 탑니다. 한 사람은 노를 젓고, 두 사람은 줄아시 양쪽 끝에 20발 길이의 줄을 묶어 물속에 드리우고 테우 앞부분 양 옆에 서서, 서로 줄을 놓았다 당겼다하는 동작을 맞춰가며 실겡이를 베어나 갑니다. 줄아시에 잘린 실겡이는 저절로 물 위로 떠오릅니다. 나머지 두 척의 테우에 오른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노를 젓고 다른 이는 물 위에 뜬 실겡이를 공젱이로 끌어당겨 테우에 싣습니다. 갯가에 이른 실겡이는 주로 아낙네들이 편편한 곳 까지 지게로 지어 나르고, 말리고 나서 서로 나눠가졌습니다. ‘여름듬북’인 고지기는 해녀들이 자유롭게 채취하여 말렸다가 밭에 거름으로 사용했습니다. 지금은 해안가로 떠밀려온 바다 풀이 처치 곤란이지만, 어려웠던 시절 제주의 해안마을에선 밭 농사에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자원이었던 셈입니다. 142 /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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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오조 마을의 싱싱한 맛, 3회 STORY 03 _ 바람의 길

/ 자리물회, 한치물회, 해삼물회

성 산·오조

지질트레일에서 꼭 맛봐야 할 세 가지

물회가 있습니다. 바다향이 가득한 자리물회, 한치물회, 해삼물회가 그것이지요. 이 셋을 일컬어 싱싱한 바다 음식을 대표하는 3회(膾)라 할 만합니다. 물회는 가늘게 썬 해물을 생된장에 버무려 찬물을 부 어 만든 것인데, 요즘은 새콤달콤한 고추장에 버무려 만들기도 합니다. ‘자리’는‘자리돔’을 일컫는 것으로 암초가 많은 가까운 바다에 사는 붙박이 어종 가운데 하나입니다. 5월에서 8월 사이가 제철이지요. 재래된장맛과 뼈째 씹 히는 쫄깃한 식감에 식초의 톡 쏘는 새콤한 맛이 어우 러진 자리물회는 먹을수록 당기는 감칠맛이 일품이지요. 버릴 것 없이 다 먹는 생선이기에 물회를 만들 때는 대가 리를 곱게 다져 넣어 구수한 맛을 내기도 합니다. 한여름 밤, 이 일대의 앞바다는 한치어장으로 변합니다. 집어등 을 켠 한치잡이 배들이 불야성을 이룬 풍경 또한 아름답습니다. 오징어에 비해 다리가 짧은 한 치(3cm) 정도여서, 또는 한겨울 추운 바다에서도 잡힌다고 해서, 이름 붙었다는‘한치’는 담백하고 깔끔한 물회 맛이 일 품입니다. 싱싱한 해삼물회도 꼭 맛보야 합니다. 해삼 중에서도 붉은빛 나는 홍삼을 얇게 썰어 고추장, 된장, 식초 등 갖은 양념에 버무리고 오이와 미나리 등 신선한 채소를 더해 만듭니다. 씹을수록 배어 나는 독특한 향과 꼬들꼬들한 식감이 정말 별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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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도착

오조리 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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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착 감기는 맛, 성산·오조 마을의 5죽 STORY 03 _ 바람의 길

/ 깅이죽, 뭉게죽, 전복죽, 옥돔죽, 조개죽

성 산·오조 지질트레일에서 꼭 맛봐야 할 다섯 가지 죽이 있습니다. 역시 바다향이 가득한 깅이죽, 뭉게죽, 전복죽, 옥돔죽, 조개죽이 그것 입니다. 이 해물죽들은 보양식을 대표하는 5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깅이’는 게를 일컫는 제주토박이 말입니다. 참 예쁜 이름이지요. 제주 바닷가에는 주로 작은 깅이들이 많이 삽니다. 썰물 때 해안가 돌 밑에서 쉽게 잡을 수 있지요. 봄과 여름에 많이 잡히는데, 암녹색이며 등딱지 길이는 3㎝쯤 됩니다. 깅이죽은 두꺼운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불린 쌀을 볶다가 곱게 갈아놓은 깅이를 부어 센 불에서 한소끔 끓인 다음, 약한 불에서 나무주걱으로 저으면서 서서히 끓여 냅니다. 고소하고 깊 은 맛이 일품인‘깅이죽’은 그 색마저 맛있는 분홍빛입니다. ‘뭉게’는 문어를 일컫는 제주토박이 말입니다.‘물꾸럭’이라고도 하지 요. 제주에서 잡히는 문어는 시커먼 돌문어입니다. 뭉게죽의 맛있는 비밀은 돌절구에 있습니다. 돌절구에 찧어서 끓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맛에서 아주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합니다. 문어는 고단백, 저열량, 저지방에 콜레스 테롤을 억제해주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지요. 제주 전복죽은 내장을 함께 넣어 쑤는 게 특징입니다. 전복은 감태를 비롯한 여러 해초를 먹고 내장에 저장해둔다지요. 그 내장 속에 지용성 비타민과 무기질, 오메가3, 지방산 등이 풍부하다고 합니다. 내장을 넣은 덕에 이곳의 전복죽은 보양식이 될 뿐만 아니라 진한 연두빛으로 입맛을 돋우어줍니다. ‘옥돔죽’은‘생선죽’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생선 중의 생선으로 가장 고급 으로 치는 것이 옥돔이니까요. 제주토박이들은 옥돔만을 생선으로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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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도착

오조리 마을회관

다른 바닷고기는 고유의 이름으로 부른답니다. 옥돔은 겨울과 봄 사이에 가장 많이 잡히는데, 비교적 먼 바다로 나가 낚시를 던져 잡습니다. 옥돔잡이는 그 만큼 어렵고 위험이 따르는 뱃일입니다. 썰물 때면 내수면 쪽으로 드러나는 수만 평의 광활한 모래밭에는 수많은 조개류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조개잡이 체험어장으로 지정 될 정도이니, 싱싱한 조갯 살의 풍미가 가득한 조개죽을 맛보지 않을 수 없겠지요. 이들 해물죽은 관절염과 신경통에 시달리던 해녀들이 보양식으로 해먹고 기운을 차리곤 했다고 합니다. 맛도 일품이지만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생명의 죽’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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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기록하세요..

STORY 03 _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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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제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제주는‘제주도 지질공원’ 과‘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도‘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되어 제주 천혜자연의 가치를 더욱 높이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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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화산섬으로써 뛰어난 경관뿐만 아니라 약 180만 년 전부터 1천 년 전까 지의 화산활동의 흔적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있어 학술적으로도 연구가치가 매우 높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섬 전체가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되 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경관이 아름다운 한라산ㆍ만장굴ㆍ성산일출봉ㆍ서귀포 층ㆍ천지연폭포ㆍ중문대포주상절리대ㆍ산방산ㆍ용머리해안ㆍ수월봉 등의 9곳 이 핵심지질명소로 지정되어 세계지질공원 네트워크(GGN)에 가입되었다. 아울러 2014년 3월, 우도·비양도·선흘곶자왈이 핵심지질명소로 추가돼 총 12 곳으로 늘어나게 됐다.

제주 UNESCO 세계지질공원 핵심지질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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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핵심 지질명소 제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1. 한라산 _ 제주의 중심 1950m 높이의 남한 최고봉, 한라산은 제주의 화산 활동과 더불어 성장한 화산체로 순상화산의 정상에 성질이 다른 두 종류의 용암으로 이루어진 분화구가 놓여 있는 복합화산체이며, 그 독특한 지형·지질이 이루는 생태계 또한 특이하다. 고도에 따라 한대·온대·난대 등 식물의 수직분포가 뚜렷하고, 90여 종이나 되는 다양한 특산식물을 품고 있기도 하 다. 특히 세계 최대 규모의 구상나무 숲과 극지고산식물의 다양성은 세계 적으로 보기 드문가치를 자랑한다. 2. 만장굴 _ 용암이 흐른 거대한 길 총 길이가 약 7.4㎞에 달하는 만장굴은 부분적으로 다층구조를 지니는 용암동굴로, 주 통로는 폭이 18m, 높이가 23m에 이르는 세계적인 규모의 동굴이다. 특히 지구상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굴 내부의 형태와 지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만장굴은 동굴 중간 부분의 천장이 함몰되어 3개의 입구가 형성되어 있는데, 현재 일반인이 출입할 수 있는 입구는 제2입구이며, 1㎞만 탐방이 가능하다. 3. 성산일출봉 _ 물·불·바람의 하모니 높이 180m의 성산일출봉은 약 5천 년 전 얕은 바다에서 지하의 뜨거운 마그 마와 물이 만나 격렬하게 반응 하면서 분출된 화산재가 쌓여 형성되었다. 본래는 육지와 떨어진 섬이었으나 파도에 의해 침식된 퇴적물들이 해안으로 밀려들어와 쌓이면서 일출봉과 제주도를 이어 놓았다. 이곳의 해 뜨는 장면 은 영주십경 중 첫 번째로 꼽히며, 성산일출제에는 새해의 첫 해돋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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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문대포주상절리 _ 바다에 두른 용암 병풍 주상절리대는 서귀포시 중문동에서 대포동에 이르는 해안을 따라 약 2㎞ 에 걸쳐 있다. 기둥형태의 주상절리는 뜨거운 용암이 식으면서 부피가 줄어 수직으로 쪼개짐이 발생하여 만들어지는데, 대체로 5~6각형의 기둥형태로 만들어진다. 특히 이곳 주상절리는 중문의 옛 이름인‘지삿개’를 따서‘지 삿개 주상절리’라고도 부른다. 제주도에는 이 곳 외에도 예래동 해안가, 안덕계곡, 천제연폭포, 산방산 등에서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다.

5. 천지연폭포 _ 세월 따라 상류 쪽으로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서귀포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천지연폭포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연못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높이 22m의 기암절벽 아래로 하얀물기둥을 이루며 떨어지는 폭포수의 웅장함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대표적인 폭포로 손꼽 기에 부족함이 없다. 폭포에는 천연기념물인 무태장어와 담팔수 나무를 비롯, 구실잣밤나무, 송엽란, 산유자나무 등 각종 희귀식물이 분포되어있다.

6. 서귀포층 _ 100만 년의 기록 서귀포층은 천지연폭포 입구에서 서쪽 해안가 절벽을 따라 약 1.5km에 걸쳐 드러나 있다. 서귀포층은 약 180만 년 전 지하에서 상승한 마그마가 물과 만나 격렬하게 반응하여 화구 주변에 화산분출물이 쌓이고, 파도에 의해 깎이고, 다시 분출물이 쌓이기를 반복하면서 생긴 약 100m 두께의 지층으로, 제주도 지하에 넓게 깔려 있는데, 일부가 솟아올라 있어 땅 위에 서 관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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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7. 산방산 _ 80만 년을 품은 거대 용암돔 산방산은 해발 395m의 거대한 조면암질 용암돔으로 약 80만 년 전에 형성되 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희귀한 화산지형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낸 웅장한 지형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8. 용머리해안 _ 80만 년 전 탄생의 흔적 산방산 아래쪽에 자리 잡은 용머리해안은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로 들어가는 자세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머리는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체로 한라산과 용암대지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일어난 수성화산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응회환이다. 9. 수월봉 _ 세계 지질학자들이 꿈에 그리는 세계 최고의 화산학 로드 제주도 서부지역 고산리에 위치한 수월봉은 높이 77m의 작은 언덕형태의 오름으로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수월봉은 약 18,000년 전 지하에서 상승하던 마그마가 물을 만나 강력하게 폭발하며 뿜어져 나온 화산재들이 쌓이면서 형성된 응회환의 일부로, 이곳에 새긴 지층구조는 수월봉의 화산활동은 물론 전 세계 응회환의 분출과 퇴적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지질학적 가치가 매우 크다. 수월봉에는 현재 3가지의 지질트레일 코스(수월봉 엉알길, 당산봉 트레일, 차귀도 트레일)가 있으며, 시간대에 따라서 마을주민에 의한 지질해설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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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우도 _ 누운 소의 모습 우도는 제주도의 79개 부속도서 중 제일 큰 섬이나 제주시에 속하는 4읍 3 면 중에는 가장 작은 면이다. 소가 드러누웠거나 머리를 내민 모습과 같다고 하여 우도라 이름 지었다. 우도 해안에 발달하는 해빈으로는 우도 홍조 단괴 해빈과 하고수동 해빈 및 검멀레 해빈이 대표적이다.

11. 비양도 _ 협재 해수욕장 앞 그림 같은 섬 비양도는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유인도 705 개 중 394번째로 큰 섬이다. 섬 중앙 해발 114.4m의 비양봉을 제외한 대부 분의 지역은 해발 약 30m 이하의 완만한 경사를 갖는 용암순상지가 넓게 발 달해 있다.

12. 선흘곶자왈 _ 희귀식물의 보고 선흘곶자왈은 원래 동백나무가 많다 하여 동백동산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나 동백나무 외에도 다양한 희귀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2011년 3월 14일에는 국내에서 15번째로 0.56㎢ 면적이 람사르보호습지에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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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

식당ㆍ숙소

성산리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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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식당

784-2397

성산칼국수맛집

784-7567

국풍반점

782-6103

성산포뚝배기

784-4826

전라도식당

782-7877

성산호텔

782-5775

돌산식당

783-2021

성산흑돼지두루치기

782-9295

돌하르방뚝배기식당

784-6888

수마포국수

782-5504

런던아이음식백화점

782-8580

신계군덕산식당

782-4694

전망좋은횟집

784-1568

한라식당

782-1196

명원가든

784-1900

해녀식당갯마을

784-5755

제주고가네식당

784-5559

우리봉식당

782-0032

삼다식당

782-4841

우선식당

784-1996

삼대국수회관

784-8844

일조가든

782-8882

서울훈이네식당

784-9345

일출봉거북식당

784-0994

선미식당

782-4811

해뜨는식당

782-3380

제주칼국수

783-2929

현대식당

782-3143

성산거평갈비

782-5766

호랑이해장국

783-7604

청운식당

782-3912

해오름식당

782-2256

성산분식

782-3530

청진동뚝배기

782-1666

성산수산식당

782-7693

성산은하식당

782-5862

충남식당

782-4566

성산진미식당

783-2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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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리 숙소

오조리 식당

일출봉관광호텔

782-8801

리오고기국수

783-3822

일출봉민박

782-9766

청솔가든

784-5522

만나민박

783-0777

보물섬민박

782-4814

성문장모텔

784-0345

성산게스트하우스

784-5777

성산비치호텔

784-1000

성산일출봉게스트하우스

784-6434

초롱민박

782-4589

쏠레민박

784-1668

용궁민박

782-2397

그리운바다성산포민박

783-0788

헤라호텔

782-1661

해맞이민박

782-3200

해비치게스트하우스

784-0864

오조리 숙소 썬시티게스트하우스

782-7890

해와바다인터넷민박

784-8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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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기록하세요..

지질트레일_ Me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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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州 말로 좋수다

제주여행의 시작, 제주관광공사면세점 제주관광공사 지정면세점은 제주관광이 중심지, 중문관광단지 제주국제컨벤션센터 1층에 위치하여 여유로운 시간에 관광과 쇼핑을 동시에 즐기실 수 있습니다. 이용문의 064. 780. 7700

중문관광단지 제주국제컨벤션센터 1F. 이용시간 10:00~20:00 ※ 제주관광 통합 마케팅 재원 마련을 위해 제주관광공사 면세점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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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제주관광공사 기획·편집 제주관광공사 융복합사업처 집필 문소연, 김지택, 김정희 도움을 주신 분들 강만생(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지질트레일 추진위원회) 오문필(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지질트레일 추진위원회) 박찬식(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지질트레일 추진위원회) 고정군(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지질트레일 추진위원회) 강순석(사)제주지질연구소 강경용 성산리장, 정영기 前 성산리장, 홍근수 오조리장 전용문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ㆍ한라산 연구원 디자인 디자인플레이

「이 책은 농림축산식품부, 대통령직속 지역발전위원회가 주관하는 UNESCO 세계지질공원 핵심마을 활성사업」의 일환으로 제주관광공사에서 제작하였습니다.

본 책의 저작권은 제주관광공사에 있습니다. 저작권자의 동의 없이 지도를 포함한 모든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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