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본 12번째: 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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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번째 실제본 프로젝트 <주제 : 버릇>

버릇(명사):1. 오랫동안 자꾸 반복하여 몸에 익어 버린 행동 2. 윗사람에 대하여 지켜야 할 예의


‘널 다시 만나는 것도 내 버릇인가봐’ -설레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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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야 가라 우루사 피로는 늘 버릇처럼 눈꺼풀을 하루 종일 짓눌러 눈 감으면 모든 걸 잊을 수 있게 소리없이 내려오지만

왜 늘 새벽 출근해서 야근 끝나고 회식 가야하는 대리와 경력 쌓을 곳 없어 이력서 퇴짜맞는 내 동생과 레드불 먹고 학원 셔틀 도는 내 조카와 우는 아이 안고 먹이고 재우는 어머니와 괜히 나서서 모난 돌 정 맞는 내 동료에게

늘 익숙하고 만만한 곳에 자리잡지만 그래도 떨쳐내야 한다면 한 번에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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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f1 for an End 소소 눈에 보이는 숨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것들을 떠올린다. 더플코트의 단정한 깃 따뜻해보였던, 미지근한 네 손의 체온 붉게 도드라진 혈관들 흰 자위를 더욱 희게 보이게 했던, 옷을 잘 못 입는다는 너의 말에 그런 줄은 진즉 알았다는 나의 말에 부끄럽게 꺼낸 너의 말에 멋쩍어지는 너의 몸에 희고 까만 밤들이 수없이 지나가던 날에 이슬과 처음이 수없이 지나가던 낮과 밤에 우리가 녹슬어가던 그런 날들에. 차오르는 답답함이 쌓여가던 시간들.

아직은 그리운, 너를 떠올리는 버릇. 여전히 애틋한, 너를 떠올리는 버릇. 기억속의 너만이 오토리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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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잘 지내 잔디인형 안녕? 잘 지냈어? 난 얼마 전에 글쓰기 모임에서 ‘버릇 ’ 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오라는 숙제 아닌 숙제를 받았어. 얼마 뒤 단체 톡방에는 습관과 버릇의 차이에 대한 토론이 오갔지. 그래서 나도 찾아봤다! 도대체 습관이 랑 버릇이 뭐가 다른지 말이야. 그랬더니, 영어로 번역해도 큰 차이가 없 고, 사전적 의미도 큰 차이가 없더라. 그런데, 누가 네이버 지식인에 ‘습 관과 버릇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라고 올렸고, 답변자는 큰 차이가 없 다고 말하면서, 맨 마지막에 이렇게 썼어. ‘정확한 뜻으로는 습관은 버릇 을 통틀어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식사나 수면 습관, 풍속·문화 등 넓은 관 습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버릇은 나쁜, 즉 악벽에 대해서 많이 쓰이는 말 이죠.’ 이렇게. 그러고 나서 난 네가 떠오르더라. 난 우리가 걸었던 그 짧은 길을 하루에 도 두 번씩 지나간다. 출근할 때, 퇴근할 때 이렇게 두 번 말이야. 다른 길로 가고 싶은데, 우리 집으로 가는 버스가 한 대 뿐이기도 하고, 또 그 길이 제일 빠르기도 해. 그리고 네가 가고 싶어 하던 학교는 매일 한 번 씩은 꼭 지나가. 만약 네가 그 학교에 왔더라면 우리의 관계에는 변화가 있었을까? 그리고 네가 같이 기다려주던 버스정류장에 벤치도 아직 그대로 있다! 그리고 거기도 매일 보고 있어.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문득문득 네 가 생각이 나. 내가 습관과 버릇에 관한 주제에서 왜 네가 떠올랐을까 곰곰이 생각했는데 말이야. 지식인 답변으로 보면, 더 이상 네가 없는 추억의 장소를 바라보 는 나의 행동의 변화를 설명하는 좋은 예시가 되는 것 같더라고. 그러니까, 난 예전에는 창밖의 풍경이 너와의 추억이 있는 곳에 나오기 전 부터 너를 떠올리며, 그 곳을 바라보려고 했는데, 그 후엔, 그 풍경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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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네가 떠올랐고, 또 한참이 지난 지금은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네가 생각이 났단 말이지. 이런걸 보면, 우리가 걷던 그 길을 보고, 우리가 같이 앉아서 기다리던 벤 치를 보고, 네가 가고 싶어 하던 학교를 보는 일들이 나에겐 매우 반복적 인 습관이 되었다가 버릇이 되었다가 빈도가 낮아진 습관이 되어 버린 게 아닐까? 처음 습관은, 친구로 지내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감추면서 너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습관적 행동으로 그 곳들을 바라보고 생각했 던 거라면, 버릇으로 넘어갔을 땐, 우리가 더 이상 친구도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어서 실망하고 미워한 기간일 듯 하고, 마지막엔 그냥 추억이 되 어버린 장소로 문득문득 떠오르는 거지. 더 이상 난 너의 연락을 기다리지 도, 아프지도 않거든. 이런 걸 보면, 진짜 시간이 약이란 소리가 맞나봐. 결국 습관과 버릇은, 정말 지식인 답변이 정답이라면 말이야. 사람 마음에 달린 건가봐. 이제는 내 버릇이 다시 습관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내 습관들도 조금 있으면 사라지지 않을까? 난 정말 너를 잊어 가나 봐. 행복하게 잘 지내. 나도 잘 지낼게. 이제 진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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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버릇 惠雨 1. 예상보다 한시간정도가 지나서야 겨우 술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주차해놓은 차 옆에 쭈그리고 앉아 더듬더듬 휴대폰을 꺼냈다. 010-3911-110... 숫자 하나만 누르면 되는데, 신경질적으로 종료 버튼을 누르고 무릎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 기억해내면 안 되는 번호이니까, 2. 스무 살, 6 월에 만나 스물아홉이 된 2 월에 우리는 헤어졌다. 횟수로 10 년을 만난 연인의 헤어짐은 슬플 것도, 못 견디게 힘들 것도 없 었다. 서글플 정도로. 친구들은 외로울 틈도 없이 불러냈고, 아이돌 버금가는 빡빡한 스케줄로 소개팅을 물어왔다. 토,일 주말이 되면 처음 본

서너 명의 남자와 소개팅

을 했고, 몇 번의 짧은 만남을 가졌다. 그를 그리워 할 시간도,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났다. 3. 문제는 술이었다. 술만 마시면, 옛날 버릇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술만 마시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특유의 혀 짧은 소리를, 그는 몹시 싫어했다. 격주에 한번은 회식이었으므로, 나는 술자리 중간 중간 조용한 곳을 찾아 내가 취하지 않았다는 걸 그에게 증명해야했고, 그런 전화가 서너 번쯤 이 어지면 짜증난 얼굴로 근처 편의점 혹은 카페에 어느새 나타나 앉아있었다. 누나가 위로 셋이나 있어서인지, 늦은 밤 여자 혼자 대리기사나 택시를 부 른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몇 시가 됐건, 내가 어디에 있건 툴툴거리며 나타나 집까지 바래다주고 사라지는 듬직한 그에게 나는 오랜 습관처럼 익숙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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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술이 거하게 취한 다음날 아침, 눈을 뜨면 발신목록부터 확인한다. 술이 취하면 얼굴이 심하게 빨개지지만 술이 취해 큰 사고를 친 경험은 없 다. 딱 하나의 경우만 제외하고. 헤어지고 한 첫 번째 일은 그의 흔적을 지우는 거였다. 10 년이란 시간 동 안 우리가 공유한 건 생각보다 많았다. 2L 쓰레기봉투를 몇 번 내다버리고 나서야 흔적이 지워졌다. 당연히 휴대폰번호도 지웠다. 문제는 내가 그 번호를 너무 잘 기억하고 있 다는 것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번호가 새겨졌는지, 술이 취해 머리가 마비되면 손이 시키는 대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아예 되지 않거나, 통화시간이 1 분 미만인걸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다가, 또 한편으론 부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럴거면 나한테 왜 그렇게 잘했니...

5. 올해 2 월, 그는 빌어먹을 SNS 를 통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와 나의 친구들이 누른 ‘좋아요 ’ 버튼을 타고 그의 모바일 청첩장은 나의 타임라인에 버젓이 떠 있었다. 나와 결혼하고 싶다던 서른셋, 딱 그 나이에- 촌스럽게 생긴, 어린 여자아 이와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웃음이 나왔다. 활짝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보여서 나도 마음이 편해졌다. 아 무것도 모르던, 어리고 촌스럽던 나를 아껴주고 사랑했던 그가 행복해보여 서. 신기하게 그 이후로 술버릇이 사라졌다. 술이 아무리 취해도 그의 목소리 가, 따뜻하던 웃음이 그립지 않다. 나는 이렇게 또 한 뼘 어른이 된 것 같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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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색 무취 무미 SNL 1. 나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마다 고유한 색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모습 외에 사소한 말투, 표정 등 이면을 보고 그 사람만의 색을 찾으려고 한다. 개개인의 버릇이나 습관, 특징을 알아간다는 것은 묘하게 재미있는 일이다. 사람마다 떠올리게 되면 이름 석자에 단풍잎이 서서히 물들듯이 개인 고유의 색이 떠오르게 된다. 나의 색깔은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의 일원으로 튀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자리잡혀서 일까.. 어른이 되면서 나의 버릇이나 특징은 서서히 없어져가고, 나의 색깔도 옅어져만 간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서 솔직해 질 수 없는 것, 색깔이 없어지는 것. 모두 같은 색을 띄고 있는 것. 마치 무색. 무취. 무미 같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 같다. 2. 정말로 ‘버릇’은 나쁜 단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옛날 속담 중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조상님들도 어려서 부터의 잘못된 버릇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강조할 정도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버릇이 모여 한 사람의 특징이 되고, 특징이 모여 개성으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칼에는 날카로운 부분이 있으면 둥근 부분이 있고, 사람에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듯이… 버릇도 좋은 버릇 나쁜 버릇 구분되지 않고 개인의 특징으로만 보여지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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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버리는 것들 안드레아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얼마전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던 도서이다.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의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는 저자의 단순하게 사는 방법이 담겨있다. 컬쳐쇼크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욕구를 절제하며 살아가고있는 외계인을 보는 느낌이였다. 내 방에 처음 초대받은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뭐가 많다고 한다. 맞다. 뭐가 참..많다. 이게 나의 버릇이다. 버리지못하는 버릇.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많겠지만 가장 큰이유는 그 중 '추억이 있다'는 것. 아직도 내서랍 속에는 최근 몇년간, 앞으로도 사용할 일은 없을 거같은 물건이 가득 들어있다. 갖고싶다고 겉으로 말하지 않았는데도 서프라이즈로 아빠에게 선물받은 mp3(지금은 구형이라 사용할 수 가 없다.) 초등학생 시절 사용했던 헬로키티 동전지갑(이건 거의 유물급이 되었다.) 학생시절부터 하나씩 모아두었던 특이한 연필과 지우개 처음으로 겨우 얻어낸 스마트폰 공기계 사용하지않는 필통들 작은언니가 수놓아준 반짇고리 ......등등 서랍정리를 하다보면 늘 한번 만지작거리고 다시 그 자리에 놓는 녀석들. 서랍뿐만이 아니다. 옷장에도 수납박스속에도 나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녀석들이 많이 있다. 그래도 많이 나아진것이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과자를 많이 사주는 편이 아니라서 과자상자도 귀한것이라며 그것마저 쌓아두곤 했었다. 내가 학교간 틈을 타 엄마는 그것들을 몰래 버리시거나 버리라고 잔소리를 하셨다. 하지만 안버리고 쌓아두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시절부터 사용하던 작은 미키마우스 주머니에서 부터 유치원생때 맞춘 단체손수건, 고등학생 때 절친과 함께산 덧신까지 난 지금도 여전히 10


사용중이다.

모두 구멍이 나려는 듯 너덜너덜 세월을 이겨내가고 있는

중이다. 세월의 흔적이 매일매일 얹혀질 수록 내가 버리지 못하는 이유의 비중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내 서랍과 내방안의 쌓여있는 것들을 한번 더 들여다 보게 되었다. 추억이 있는 것도 여전히 많지만 돈을 벌게 되면서 갖고싶었고 하고싶었던 취미활동들과 관련된 물건도 굉장히 많이 쌓여있었다. 그만큼 내가 얽메여 있는 것이 많다는 의미같기도 했다. 간직하는 습관은 절대 나쁜것이 아니지만 이제는 하나씩 놓아버리는 습관도 필요해 보인다. 지금의 나를 말해주는 것들로 채워져야 현재에 더 집중하는 삶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안 버리는게 아니라 못 버리고 있는 것이 맞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내 공간들과 서랍속이 많이 비워지도록 노력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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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진화 Rabih 그에게는 과도하게 의미를 찾는 버릇이 있었다. 여행, 일, 연애 모두 의미를 찾기 위한 시도였다. 어떤 대상이 갖는 의미는 그의 인생 전반에서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토록 그가 의미에 집착했던 것은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인식 때문이거나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저항 심리였다. 남자는 저 멀리 남반구의 유명한 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주변사람들은 막연히 부러워 한다.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남자의 여행을 동경하며 그의 여행기를 기대한다. 남자는 해줄 이야기가 없다. 그들이 기대하는 여행 경험은 남자에겐 없었다. 남자는 그곳에 거대한 자연을 보러 간 것도 아니었고

도시의

세련된

문화를

감상하기

위해

것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이렇다할 친구를 사귀지도 못했으며 흔히 접하기 힘든 그곳만의 특색있는 음식을 먹어본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그곳에서 배낭을 메고 산으로 강으로 일주일간을 꼬박 걸었다. 누군가에겐 평생을 꿈꾸는 유명한 트레일이었고 남자는 갖은 고생끝에 결국 완주했다. 남자는 스스로가 대견했고 자신이 남들과 무언가 다르다는 희열을 느꼈다. 그가 여행에서 가져온 것은 사진으로도 말로도 공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점에서 그는 고독하기도 했다. 남자는 회사를 그만 두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보상과 큰 스트레스 없는 업무 환경에 운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끝없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을 버틸 수 없었다. 이대로는 그럭저럭 배나 불리면서 아무일도 없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 속에서 시간의 틈사이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안락했던 공간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안함 속으로 들어서고

있는

자신의

행동에

뿌듯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벌써 무엇인가 일어난것 같았고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큰 터닝포인트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년 후 남자는 귀국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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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괜찮은 직장을 잡았다. 훗날 자신의 일탈을 남자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당시에 지불할 수 있는 모든 시간과 자원을 쏟아서 평생 간직해왔던 버킷리스트를

하나

지웠고

나의

자서전에

기록될

만한

매우

값진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남자는 여자가 좋았다. 여자의 외모가 그리 뛰어 났던 것도 그와 유난히 말이 잘 통했던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 조금은 모자란듯한 여자였지만 여자가 가진 색깔을 자신만이 유일하게 알아봐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여자가 특별하게 여겨졌고 남자는 자기 자신도 특별하게 생각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처음에 특별하게 느꼈던 것이 더이상 특별하지 않자 결국 여자와 멀어지게 되었다. 남자는 비슷한 방식의 만남을 몇 차례 반복하며 그때마다 어떤 특별함이 좋아서 그리고 그 특별함 때문에 그만두었다. 남자는 점점 슬퍼졌다. 결국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아무것도 다를 바 없다는 깨달음이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했다. 작은 것 하나를 위해 더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남자는 좋았다. 작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었고 남자가 그것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의 가치는 훨씬 커졌다. 남자는 그런 특별함에 집착했다. 그런 특별함을 남자가 하나씩 늘려 갈수록 스스로가 더욱 특별하게 여겨졌고 작았던 자존감은 점점 부풀려지는 것 같았다. 남자가 마침내 그 의미를 버리기로 결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자가 습관적으로 부여하는 의미의 근거는 낭만성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해 내는 것이다. 처음엔 미처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자기 안쪽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영원히 채울 수 없는 욕망의 근원이고 불행의 뿌리였다. 이미 수많은 세대가 반복하며 깨달아온 진리를 자신도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음을 께달았다. 그렇다고 그가 지독한 현실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순수하다고 생각되는 느낌은 포기하게 되었다. 그도 결국 세상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달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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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이게 성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앞선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랬듯 그러한 성장은 다소 때 늦은 시기에 찾아오는 것 같았다. 마치 그것을 깨닫는것이 인생의 졸업 시험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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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실을 찾아서 피로곰

복실이는 내가 어렸을 때 죽었다. 나는 복실이 머리를 잘 쓰다듬었는데, 그때마다

복실이

눈에는

나에게

없는

영롱함이

보였다.

반짝반짝.

복실이는 내가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어느날부턴가 복실이는 생기를 잃기 시작했고 아프기 시작하면서, 나는 바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복실이가 아프다는게 슬프지도 않았다. 죽은 복실이를 묻으면서 울고 있는 가족을 보았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지만 따라 울었다. 누군가를 따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린 나는 이미 알았다. 커서 배웠는데 그것은 공감이었다. 귀여운 것을 보면 머리를 쓰다듬는 습관이 생겼다. 쓰다듬는 감촉에서 복실이가

생각났다.

복실이와

닮은

아이를

찾고

있었다.

그녀들은

저마다의 매력과 장점이 있었으나, 복실이의 눈처럼 눈이 반짝거리지 못하였다. 사실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끔은 눈빛에 특이점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게 없는 의지와 용기가 눈빛에 보였다. 하지만 영롱함은 없었다. 복실이는 순수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복실이가 너를 참 많이 따랐는데, 복남아. 다른 이란성 쌍둥이와 다르게 너희는 어린 시절부터 친했어. 복실이가 건강을 너에게 모두 나누어 준거야. 너는 복실이 몫만큼 살아야 해."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 복실이를 더 사랑했다. 먼저 죽은 자식에게 더 주는 사랑이랄까. 나는 복실이보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었고, 그래서 나는 또 다른 복실이를 찾았다. 복실이에게 사랑을 돌려받고 싶은 것일까. 나는 복실이 만큼, 복실이 대신 더 사는 인생이니까. 복실이 같이 순수한 존재가 이 세상을 산다면 나와는 다르지 않을까. 어머니가 이토록 기일마다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무미건조한 나보다 어머니를 잘 위로할 수 있을까. 15


나는 공감이 어렵다. 순수하지 않은 눈망울들을 보며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따라 하기 어렵다. 그건 아마 복실이가 죽던 순간부터 였던 것 같다. 나는 복실이에게 생명을 받고 공감을 뺏겼다. 나의 순수함을 뺏겼다. 복실이와 같은 눈망울 가진 그녀를 만난다면, 아마 그때, 나는 영원히 복실이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의 감정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살아있는

복실이를

만난다면,

나는

진정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수 있을까. 나는 머리를 쓰다듬는 습관이 생겼다. 나의 복실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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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휘파람 어떤 행동을 꾸준히 21 일 동안 반복하면 습관이 된다고 했다. 나도 있어 보이는 습관 하나쯤 들여 보리라 다짐하며 21 일을 목표로 날짜를 세어 나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지 아니면 나의 본성을 완벽하게 거스르는 것이었는지 번번이 실패할 뿐이었다. 이에 반해 버릇은 벌써 단어가 주는 느낌부터 정겹다. 내가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무의식중에 생겨난 버릇들. 사전적인 의미와는 상관없이 나에게 습관이란 약간의 고상함과 내가 되고자하는 바를 나타낸다면 버릇이란 있는 그대로의

나, 꾸밈없는 나의 모습을 대표한다.

그래왔듯이 몸에 익어버렸기 때문에 하게 되는 행동들. 하나의 버릇이 생기기까지 얼마나 많이 그 행동을 되풀이했을까. 누구나 버릇 하나 쯤은 가지고 있지만 버릇이 생긴다는 건 차라리 신기한 일에 더 가깝다. 무의식적으로 그 행동을 되풀이하기란 쉽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계속 하게 되는 행동이라면 나를 꽤 잘 나타내는 지표일 것이다. 글의 주제를 받아든 다음날부터, 문득 떠오를 때마다 일상에서의 나의 버릇들을 관찰해서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찾아내기가 힘들었지만 하나 둘씩 찾아나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굉장히 사소하기도 하지만 그 시작이 언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버릇들을 곱씹다 보면 괜스레 나랑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노래를 들을 때면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 설거지는 고무장갑 없이 꼭 맨손으로 하는 것, 카페나 음식점에서 찍어주는 도장을 모으지 않는 것, 영수증을 받지 않는 것, 대화할 때 손을 많이 쓰는 것, 미리 검색하지 17


않는 것, 불편함에 적응하는 것(개선의 의지가 별로 없다), 굳이 돌아가는 것, 월급 전날의 통장 잔고는 항상 만원 미만인 것(용돈 전날도 그랬다), 발

꼼지락거리기,

다른

사람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것,

‘감사합니다.’를 말할 때 특유의 억양, 생활용품은 떨어져야지만 사는 것, 가방을 함부로 다루는 것, 먹고 난 과자 봉지는 꼭 딱지 접기, 샤워는 아침에, 에라 모르겠다는 막연한 긍정, 다른 건 잘 안치우면서도 옷 정리는 바로바로 하는 것, 빨대를 씹는 것, 눈알 굴리기. 모아놓고 보니 더 정감 간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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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대로

쓰다

보니

궤변을

늘어놓게 되었는데 창피하긴 해도 다시 쓰기는 귀찮아 마리우스 아기가 이제는 안아주지 않으면 칭얼대는 걸 멈추지 않아요. 그건 버릇을 잘못 들여서 그래. 이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인데 버릇이요? 그럼, 애들은 금방 배우고 금방 버릇이 들어. 버릇이라는 건 아주 무서운 거다. 마음먹으면 고칠 수 있기야 하겠지만 그 마음먹음 자체가 쉽지 않은 게 버릇이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신경 쓰고 행동해서 고쳤다고 마음을 놓는 순간 관성처럼 찾아오는 것이 버릇이다. 버릇이 나쁜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 아니라면 버릇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 치 않는다. 양말을 무릎까지 올려 신는 게 당신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만 의도치 않게 내 버릇으로 인해 피해를 받았고, 그래서 내 버릇이 나쁘다는 사람과는 오래 갈 수 없더라. 결국 나는

끝까지

버릇을

고수하겠다는

건데,

이걸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어릴 때부터 나는 부모님께도 존대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 어린 게 매번 혼나면서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무슨 고집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존대하는 건 거리를 둔 관계에서나 하는 거라고, 존경이 뭔지 몰랐을 테니, 여겼던 거 같다. 아빠한테 아버지라고 부르기 싫어하는 것처럼 지금도 친한 사람들에게는 존대를 19


하지 않는다. 이걸 받아들이면 계속 친한 관계가 유지가 되는 거고, 이게 안 되면 거기서 끝인 거다. 못된 버릇이다. 버릇을 고치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도 못된 버릇이다. 이 버릇없는 태도는 가끔씩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존대를 해야 할 사이에 반말을 하고 있으니 둘이 너무 친해 보이는 게 보기 거슬린다는 건데,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그 사람 너무 예의가 없다고 험담을 하니 당사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걔는 원래 버릇이 없어. 우리 원래 친해서 그래. 네가 이해해. 이렇게 수습하는 순간, 사단이 난다. 과정을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나는 친구 하나를 잃었다. 어리석은 처신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일을 모두 내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녀석이라면 일찍 잃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 버릇 때문이 아니라 원래 거기까지인 거였다고. 그래도 단 한 가지 배운 게 있다. 이렇게 관계 맺어지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는 조심할 것. 버릇으로 인해 관계가 틀어지는 데는 상대의 역할도 크다. 남의 탓으로 돌리는 어린아이 같지만, 결국 개인적인 범위의 버릇이 아니라 관계에서의 버릇은 그렇게 길들이고 길들여졌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수용한 것과 다름없다. 매번 지각하는 것. 그래 한 시간까지는 나는 괜찮아. 너를 만나는 게 더 중요해. 차 한 잔 마시고 있을게. 이런 식의 수용은 상대를 길들인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너 늦는 거 불쾌하고 나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 같아서 너랑 다시는 안 볼래. 라고 말하는 건 반칙이다. 방관하고

미리

그런

있었으면서

불만을 마지막에

드러냈다면 참다가

고칠

기회가

있었을

폭발한

거라고

모든

텐데 잘못을

상대에게 몰아붙이다니. 물론, 늦은 사람에게 잘못이 크긴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잘못의 크기가 아니라 상대적인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다. 촛불을 들 때마다 관심이 쏠리다가 기간이 길어지면 지치고, 지겹다고 말하고, 먹고 사는 것이 더 중하니 이제 그만 잊자고 말하고,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가는 버릇이 지금을 만들었다. 사람이 숱하게 죽어 나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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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이 아니니까 잠깐 동안만 슬퍼하고 마는 버릇에 결국 이렇게 되었다. 관철되지 않는다고, 반복된 좌절에 무기력만 학습한 채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암묵적으로 수용했다. 관계를 끊고 탈출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버릇은 고치기 힘들다. 아니 버릇을 고치기 힘든 게 아니라 버릇을 고치겠다고 마음먹기가 어렵다. 장기전이 될 것 같다. 버티고 버티는 게 이기는 거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버릇이 관성처럼 튀어나오지 못하게 마음을 다잡고, 다잡고 다잡을 때다. 이쪽에서 좀 더 버텨야 이기는 싸움이다. 버릇을 제대로 들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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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버릇을 삽니다. 아바쿤다카와 벌써 10 년 전 일이구만. 내가 딱 777 살 되던 해였어. 행운의 숫자라는 7 이 3 개나 내 나이에 들어섰는데 딱히 특별한 것이 없더라고. 매일이 심심해. 심심해서 좀이 쑤실 지경이었지. 그래서 스스로 특별한 생일을 만들고자 현수막을 제작하여 동네 어귀에 떡 하니 걸었지 뭔가.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이렇게 말이야. [단 하루, 여러분의 버릇을 삽니다. - 귀부인 아바쿤다카와] 생일날 눈을 따-악 떴는데, 새벽바람부터 우리 집 앞에 사람들이 우글우글 하더라고. 평소에 ‘부인 잘 지내시죠?’, ‘건강은 하시고요?’ 이런 간단한 인사도 없던 인간들이 말이야. 돈이라고 하니까 쌔까맣게 몰려 왔다네 글쎄. 얼핏 봤을 때는 온 마을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어. 긴 줄의 제일 앞에는 철물점을 운영하는 베드라가 아들 쇼즈의 손을 꼭 잡고 있었어. 베드라와 나는 작은 엔틱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으려고 했지. 그런데 베드라는 엉덩이가 의자에 닿기도 전부터 넋두리를 시작하더라고. - 아바쿤다카와 부인~ 우리 쇼즈의 버릇을 팔고 싶어요. 애가 50 인데 아직 철이 안 들어요. 글쎄. 30 버릇 800 간다고 진즉에 버릇을 고쳤어야 하는데 아직 늦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에요. - 그래 베드라. 쇼즈의 무슨 버릇을 팔고 싶은가요? - 아니 글쎄 제가 그렇게 일렀는데도 말을 안 들어요. 요녀석이. 인사를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허리를 계속 숙이면 키 안 큰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는데 말짱 꽝이에요. 사람 만날 때마다 인사를 해대니 원... 이것도 버릇이야. 나쁜 버릇. 이놈 인사 쫌 안하게 인사하는 버릇 좀 사줘요. 제발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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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아이가 인사 잘하면 예의 바르고 좋은 거지 그게 뭐 대수라고 그렇게 애타게 팔고 싶어 하는 거예요. 칭찬 받아 마땅한 아이잖아요. - 이 부인이 집에만 박혀 살더니 잘 모르시네. 요즘 인사 잘 하는 게 중요한 줄 알아요? 키 크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요. 이렇게 인사만 해대서는 사람구실이나 할 수 있겠어요? 벌써부터 걱정이라고요. 예의가 밥을 주는 시대는 아니에요. - 쯧쯧쯧 세상이 그리 많이 변했단 말이에요? 아무튼 베드라가 그리 걱정이 많으니 내가 35 억 쿵 드리지 쇼즈 버릇을 내게 팔아요. - 아이구~~~ 부인 애새끼 버릇이 뭐라고 이리 많이 주시나. 암튼 고마워요. - 쇼즈랑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내가 쫌 썼어요. 조심히 들어가요~ 이렇게 처음 산 버릇이 [쇼즈의 인사하기]였지. 자네 그거 아는가? 버릇에도 색이 있다는 거. 쇼즈에게서 산 버릇의 색은 푸른빛이었어. 깊고 깊-은 에메랄드 블루의 물방울. 그 빛을 보는 순간 다른 버릇들의 색깔이 어떨지 너무너무 궁금하더라구. 그때 밖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버릇을 사기로 마음먹었지. 정육점 쿠에쿠 놈도 왔더라고. 자존심 엄청 강한 놈인데 돈이 갖고 싶었던 건지 버릇 때문에 고생을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부인 에씨도 함께 왔었지. 분명 쿠에쿠 놈이 안 온다는 에씨를 끌고 왔을게야. 고약한 놈같으니... - 쿠에쿠 오랜만이에요. 어쩐 일인가요? 자네도 팔 버릇이 있나? 자네건 딱히 사고 싶지 않은데요. 색이 이쁘지 않을 것 같아요. - 부인! 거 말씀 조곤조곤 섭섭하게 하시네. 다행이요 나도 부인한테 팔 버릇 없수다. 대신 우리 마누라 버릇 좀 사줘요. - 자네 마누라? 에씨의 버릇이라면 살만하겠네요. 뭔가요? - 아니 이 여편네가 조금만 깊은 고민에 빠지면 단축번호 1 번을 누르는 버릇이 있어요. 손가락이 자기도 모르게 움직인다네. 글쎄. 근데 웃긴 건 뭔 줄 아슈? 단축번호 1 번이 남편인 내가 아니야. 산 건너 마을 얼굴도 모르는 여자요. 중요한 일마다 나에겐 말도 안하고 그 여자 말만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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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하니 내가 미치고 환장하겠소. 그 여편네 말 한마디에 잘 크고 있던 송아지마저 날려먹었지 뭐요. 어휴... - 호호호 거 재미나네요. 내 생전 그런 버릇은 처음이네요. 아니 그나저나 송아지면 자네 정육점의 미래 같은 아이들 아니에요? - 그러니 미칠 지경 아니오. 지 먹고 살 것들을 그년 말 한마디에 홀라당 날려버리니.원... 내 생각엔 이거 병적인 버릇이야! - 호호호. 쿠에쿠 자네가 손가락 쪽-쪽- 빨며 길거리에 나앉는 것도 재미있겠는 걸요. 그래도 당장 먹고 사는 게 걱정이라고 하니 486 억 쿵 줄게 팔아요. 송아지 사고 아내랑 공연도 보고 문화생활 좀 하고 그래요. 오늘밤은 화끈하게 알죠? - 부인 생각보다 통이 크시구먼. 허허허허. 다시 봤어. 내가 부인 고깝게 생각했는데 좋은 감정이 생기는 구려. 고맙수다. 이돈 좋은데 쓸게요. - 아니에요. 나에 대한 호감은 넣어둬요. 자네 호감은 내 바라지 않으니. [에씨의 조언구하기]는 보라색이었어. 지금 당장 구슬에 담아 목걸이로 만들고

싶은

고혹적인

색이었지.

보락색의

그녀의

버릇이

병속에서

화염처럼 타오르는 모습은 누군가를 유혹하는 팜므파탈 같더군. 우유 장사꾼 드레코 녀석은 자리에 앉자마자 울기 시작하더라고. - 부우우흐쓰..우우우인....훌쩍. 저 훌쩍. 는요..마음...훌쩍..고생이 너 훌쩍....무..훌쩍...심...했씁씁 어요.... - 드레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382 살이나 먹은 녀석이 질질 짜고 그래요. 진정하고 똑띠 다시 말 해봐요. - 훌쩍..자암...훌쩍...시만.....요. 부인...쓰으으으으~읍. 흑..... - 뚝! - 부인....저느...이 울음을 팔고 싶어요. 제 버릇은 무슨 말을 들어도 우는 거예요. 제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뭔 줄 아세요? ‘남자는 함부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 ‘남자는 평생 3 번만 운다.’ 등등 남자라면 울면 안 된다고 하네요. 말이 되요? 이제 곧 1000 세 시대가 온다는데 1000 년 동안 어떻게 3 번만 우냐고요. 이제 더 이상은 이렇게 못 살겠어요. 우는 버릇 제발 좀 사주 세요. 24


- 자네가 쫌 많이 울긴 했어요. 코흘리개 시절부터 말이죠. 그렇지만 내가 자네 버릇을 사면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 날텐데 그래도 좋다면 사겠어요. 270 억 쿵 어떤가요? 자네가 장가도 가야하고 그러니 장가 비용까지 쳐서 넣어준 거예요. - 고마워요. 부인. 이참에 참한 색싯감도 구해주면 고맙겠어요. - 예끼!! 드레코. 욕심이 과해요. 어서 가서 직접 참한 색싯감 구해봐요. [드레코의 많이 울기]는 노란색이었어. 호박보다 짙고 깊은 노란색. 꿀처럼 찐득한 그의 버릇에는 그간 드레코의 애환이 담겨 있는 듯 했지. 그날 아마 마을 사람의 9 할이 버릇을 팔고 갔을 거야.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지만 서재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산 버릇들로 가득 찼지. 작은 버릇부터 큰 버릇까지 수백 개의 버릇이 한곳에 모였어. 버릇은 사람 따라 종류 따라 색이 다양했지. 하나하나 모으는 재미가 정말 쏠쏠했다니깐. 그 날 이후로 우리 집 서재는 오색찬란. 휘황찬란했어. 난 세상에 그렇게 많은 색이 있는지 몰랐어. 눈 뜨면 그 화려함에 밀크티 한잔을 마시는 낙으로 살았지. 아직도 그 낙에 사냐고?

아.니.야.

다음 해 내 생일이 오기도 전이였지 아마. 오방색을 뽐내며 위풍당당하던 나의 버릇 컬렉션이 빛을 잃어가더라고. 버릇도 사람이라는 집이 있어야 크나봐. 집에서 강제로 쫓겨나 좁은 병에 갇힌 버릇들이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지. 시름시름 빛을 잃어가는 버릇을 보니 내가 그날 쓴 어마마마한 돈이 너무 아깝더라고. 그래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모습으로 위로받기위해 마을로 내려 가봤어. 그런데.....음....... 내가 기대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딴판이었지 뭐야. 오래간만에

사람사람마다 느껴졌어.

마을

그들이

마치

사람들이 가진

공장에서

서로

느낌이라는 찍어낸

구분이

되더라고.

예전엔

것이

있었는데

전부

똑같이

물건처럼

말이야.

마을

전체가

‘버릇없는 사람’ 만으로 가득했어. 나 재미있게 살자고 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세상을 재미없게 만들고 있었던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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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번쩍 들더군. 이대로 두면 안 되겠구나 하고 말이야. 색이 빠진 흑백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흑백무늬만 있었고 일말의 온기도 사라진 그곳에선 희망의 불씨마저 곧 꺼질 것 같았어. 그래서 결심했지. ‘버릇을 돌려주자!’ 곰곰이 생각해보니 버릇을 가진 것이 문제가 아니더라고. 인사하는 것이 친구의 조언을 듣는 것이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어떻게 사람의 흠이 되겠어. 다만 그 정도가 지나치니 힘들었던 거야. 마침 우리 집 서재에서 전시되어있는 버릇들은 시름시름하니 돌려주기에 적기라고 생각되었어. 집으로 허겁지겁 돌아온 나는 버릇들을 담은 병들의 뚜껑을 모조리 열어버렸어. 그러자 버릇들은 실타래 풀리듯 빠져나와 마을로 향했어. 마당 위로 수 백 개의 실타래가 뿌려지자 비단길을 놓은 듯 했지. 나는 그 비단길만큼 아름다운 마을이 되길 간절히 빌었다우. 3 일 뒤 찾아간 마을은 전혀 딴 마을이었어. 각자의 색감을 찾았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팍팍 도는 것이 살 부비고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지 뭐야. 그 이후로 난 마을을 순찰하며 사람들의 버릇이 지나치게 자라지

않도록

감시하는

방범대

역할을

하고

있다네.

색의

조화가

무너지지 않도록말야. 자네도

팔고

싶은

버릇이

있는가?

그렇담

다시

생각해보게.

어쩜

버릇이라는 것이 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거든. 팔아버리기 보다는 좋은 집에서 건강하게 관리해 자신만의 색을 만드는 것이 자신을 위한 길일지도 모르잖아. 지겨웠지?? 그래도 늙은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이제 다음 글들을 향해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보게나. 다음에 또 봅세. 잘 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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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 이진한 달력을 본 영훈은 한숨이 나온다. 이번 주 일요일, 평소에 신세를 많이 졌던 정석에게 억지로 받은 소개팅 날이 벌써 내일이다. 좋은 인연을 목적으로 주선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절하려면 거절할 순 있었지만, 사이에 낀 정석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 같아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기에 저렇게 힘겹게 주선을 해야 하는 걸까 – 약간은 궁금하기도,

묘하게

기분

나쁘기도

하다.

그냥

거절할까,

아님

아프다고 할까 –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영훈은 어쨌든 한 번은 나가보기로 했다. 영훈이 이 소개팅을 주저하는 것은 사실 약간은 궁상맞은 이유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벌써 두 계절이 지났건만 아직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우선 컸고, 이런 상황에서 맞이하는 만남에 쓸 돈의 아까움이 그 다음에 들었던 것이다. 대충 계산해도 그날 하루만 돈 십 만원은 깨질 요량이다. 그 금액이면 애용하는 학원 식당 식권이 서른 장인데 – 늘 쓰던 가계부 표지가 눈에 아른거려 영훈은 마음이 답답해질 지경이다. 영훈의 내적 갈등은 소개팅 당일 아침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소개받은 번호로 시답지 않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어디를 가야 본인의 체면을 세우면서도 가성비를 놓치지 않을까 고민했다. 정말 집에 일이 생겼다고 할까, 그래 이왕 이렇게 명분이 생긴 김에 오랜만에 좋은 곳엘 가자. 영훈은 마음을 굳게 먹고 습관대로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중간 크기의 텀블러 하나, 중간 크기의 글라스락 하나, 또 한 쌍의 수저 젓가락 세트, 지갑, 휴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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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장소에서

만난

상대방은

상상

이상이었다.

문자

메시지만

주고받아서 얼굴을 확인해야겠다는 차마 못했었는데 꽤나 멀쩡한 여성이 나온 것이다. 영훈은 그제야 본인이 어떤 상상을 했는지 자각했고,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낀 채로 그 상상은 절대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안녕하세요 수정 씨, 하하 이름처럼 빛이 나시네요 – 영훈은 그러나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면서 그날의 만남을 시작했다. 영훈은 본인이 고른 식당의 메뉴를 보면서 이곳의 가성비는 과장되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테이블에 다다르기 전 다른 이들의 테이블에 오른 음식과 메뉴 오른쪽에 쓰인 가격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인 조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훈은 그 불만을 애써 내색하지 않고 호방하게 주문하기 시작했다.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조금 이르지만 와인이라도 한 잔 할까요? 같은 질문을 던지며 그는 마치 이 집의 단골손님인 냥 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수정의 눈빛은 조금 차갑다. 영훈의 생각과 달리 수정 또한 그녀의 직장 상사에게 억지로 소개팅을 권유받고 나온 터라 마음이 그리 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음식이 나온 후에 영훈이 보인 태도는 보통 사람의 그것과 달라 조금 신경이 쓰였다. 영훈은 음식이 나올 때마다 그 접시를 투시하겠다는 듯 응시하였고, 그러다 식탁 위에 배치된 모든 접시들을 힐끗힐끗 봐댔다. 묘한 버릇이 있네, 저 사람 – 수정은 그런 영훈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영훈이 접시를 쳐다보는 것은 괜히 생긴 버릇이 아니었다. 부모님에게서 독립한지 근 10 년이 지나면서 그는 집에서 차려먹는 것의 번거로움을 뼛속까지 체험했던 것이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사면 한 끼 분량으로 한 번에 다 쓰지 못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 요리를 하고 난 뒤에 씻어야 할 프라이팬 설거지는 어찌나 섬세해야 했던지 거친 수세미질에 코팅이 벗겨진 팬을 쌓으면 책장 높이에 견줄 만하다. 그 외에도 상한 음식을 먹고 체한 일, 냉장고 정리를 못해 망신을 당한 일 등은 그로 하여금 요리를 포기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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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그 대안으로 영훈은 어느 식당에서건 챙길 만한 음식들을 찾았다. 그리고 소소한 반찬들을 남들 눈에 띄지 않게 글라스락에 담는 기술을 연마했다.

처음에는

반찬의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

담고

나면

서로

정신없이 섞이는 일도 벌어졌는데, 그의 기하학적 재능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하며 이젠 작은 통 하나에 나름 뷔페 스타일을 재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정이 봤던 그 눈빛은 바로 그런 일련의 계산들이 벌어진 순간이었다. 그릇

음식들이

부지런해졌다.

조금씩

구색이라도

바닥을

나누었던

보이면서 수정과의

영훈의 대화는

눈은

한층

그들의

음식

흡입력을 약화시켜 생각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남기게 했다. 특히 수정의 메인

디시는

남은

모양새마저

보기

좋아

영훈에게

도전의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영훈은 갈등했다. 최근의 세월 동안 견고해진 버릇은 이번에도 음식담기를 재촉하는데, 그 앞에 있는 수정을 보면 그래선 안 될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체면은 그의 습관에 승리하기에는 너무 나약했다. 영훈은 수정에게 그녀의 접시를 요구했고, 수정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가 음식을 옮겨 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젓가락질을 했다. 수정은 그 상황이 어이가 없어 본인도 모르게 한 소리 했다. 아니 테이크아웃 해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 그럼 일회용품을 쓰잖아요, 환경에 안 좋게. 만담의 한 장면 같은 대화에 수정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겨 영훈의 마지막 행동을 기다렸다. 영훈은 음식 포장을 완벽하게 해냈다. 뿌듯했다. 오늘 처음 만난 아가씨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다시는 잊히지 않을 것 같지만 뿌듯한 건 뿌듯했다. 영훈은 무심결에 수정을 바라봤다. 그런데 수정은 경멸의 눈빛 대신 다른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왜...요? / 그거, 제건데요? 저 주셔야죠. 너무 당당해 순수해 보이기까지 한 수정의 답변에 영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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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수정에게 글라스락을 건넸다. 속으로는 본인이 결제하는 거라고 대답하고 있었지만. 글라스락은 돌려주세요... / 그래요. 알았어요. 근데 오늘 드릴 순 없으니까 그럼 다음 주에도 만나요 우리. 묘하게 흘러가려는 대화의 흐름에 영훈의 심장이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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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5,#6 #5 헉…헉… 주영은 놀라 잠에서 깼다. 긴장이 풀리자 줄 끊어진 인형처럼 본인도 모르게 소파에 내팽겨져 잠들어버렸나 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또 그 꿈이다. 이 일을 시작한 후로 주영은 똑같은 꿈에 시달리고 있다. All I needed was the love you gave / All I needed for another day / All I ever knew / Only you / Bada, Ba dadada… Ba dadada… [타락천사]. 한때 내가 흠뻑 취했었던 그 영화의 엔딩곡. 울려선 안 되는 전화기의 벨소리. 수연이다. 전화는 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일렀건만. “여기로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 / “정현이 죽었어…” 담담하게 내뱉는 그녀의 음성에서 끝없는 절망이 보였다. “그럴 리가....없어…분명…내가” / “4 번이나 찔린 흔적이 있고.. 칼에 찔린 자국은 아니….산길에서 죽었는데 하필 최초 발견자가 우리언니야. 수년간 남처럼 살았는데 왜 이제 와서 내 인생에 끼어드냐고! 왜 지금이냐고!” 3 개월 전 수연이 찾아왔다. 나를 어떻게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첫마디에서 내가 하는 일도 알고 있는 듯 했다. “나 죽고 싶어. 도와줘. 그리고 날 죽인 사람은 남편이 되어야만 해.” 그녀는 주영이 알던 수연이 아니었다. 둘은 함께 영화감독을 꿈꾸던 시절에 만났다. 수연과 주영은 모두 왕가위의 세계에 미쳐있었기에 쉽게 가까워졌다. 영화감독이라는 미래를 그리는 그녀의 얼굴엔 언제나 화려한 꽃들이 만발하였다. 그녀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영화배우가 되겠다고 해도 믿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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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화양연화는 지나도 한참 지난 듯 했다. 결혼한 지 2 년이 다 되어가는 그녀는 남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결혼 직후부터 남편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늘 감시했으며 통제하려고 했다. 그의 울타리 안에서 그녀는 점점 시들어만 갔다. 수척해진 얼굴 생기 없는 목소리를 들으니 아는 이의 의뢰는 받지 않는다는 철칙을 깨뜨리고 작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녀에 대한 주영의 미련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계획의 출발은 그녀를 향한 남편의 살해동기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고 정현을 이용하기로 한 것은 나의 생각이었다. 왕가위에 빠져있었을 시절 수연은 남자친구라고 정현을 소개시켜주었다. 정현과 함께 하는 그녀는 더욱 활짝 피어났고 때문에 내가 그녀의 태양이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었다. 하지만 수연은 정현만은 안 된다고 했다. 수년이 흐른 지금, 그녀가 아직 마음에 정현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 동안 묻어두었던 질투와 시기가 싹트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꼭 정현이어야만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런데 지금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정현이 죽었다. 지금 정현에게는 수연을 떠올릴 수 있는 흔적들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 정현에게 묻어있는 냄새, 새겨진 상처, 그 외의 사소한 물건들까지 그 조합은 초등학교 수준의 퍼즐만 풀 수 있다면 단번에 수연이다. 경찰의 칼날은 수연을 향할 것이 분명하고 수연을 향한 칼끝은 그녀를 지나 나의 목구멍까지 치고 들어 올 것이다. 주영은 민호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너 한눈팔고 어디서 술이나 퍼 마시고 있는 거 아니지?” / “섭섭한 소리 말어 형. 지금까지도 저놈 어디 못 가게 훌륭히 감시 중이라오. 근데 저 새낀 누구야?” / “넌 몰라도 돼!” / “좋아.좋아! 누군지는 관계없지. 알려주는 않는 대신 10 만원만 더 얹어줘요. 작가님~ 부탁할게~” 32


돈만 밝히는 쓰레기 같은 놈. 창자가 뒤틀린다. 그 놈도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어쩜 이상한 낌새를 진작에 맡았어야 한다. 평소에 육감 좋기로 자부하고 있었는데 지나간 향수에 취해 코가 막혀버린 새앙쥐 꼴이 되어버렸다. 수연이 나에게 숨기는 것이 분명 있다. 계획을 시작하기 몇 일전부터 수연은 부자연스러움을 드러내곤 했다. 본인은 철저하게 숨기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으나 못 보던 휴대폰이 한 대 더 생겼으며 약속한 날짜와 시간을 어기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역시 아는 사람의 의뢰는 받는 것이 아니었는데. 젠장. 복잡한 머릿속으로 사진이 번뜩 떠올랐다. 그 사진은 찾아야만 해. 그 사진이 발견되면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만다. 완벽한 시나리오가 중간에 깨져버리니 완벽한 덫이 되었다. 이건 누굴 잡기 위한 덫이란 말인가. 나를 잡기 위한 덫이 아니라 해도 나 역시 피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화살이라고 생각하고 수연의 남편에게 쏘았던 것이 부메랑이 되어버렸다. 시퍼런 날을 세운 부메랑이 나를 향해 돌아오고 있었다. 아직은 저 멀리 있지만 곧 코앞까지 올 것이다. 서둘러야 한다.

#6 끼이익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은 수진의 차가 오른쪽으로 꺾이며 급정거했다. 수진은 너무 놀라 가슴을 한번 움켜쥐었다. 다행히 사고는 아니다. 인적이 드문 산속의 고요와 어둠이 그녀를 진정시켜주자, 그녀는 겨우 진정하여 앞을 천천히 보았다. 정말 사슴이 나타나 꼿꼿이 서있어도 이렇게 놀랍지 않을 텐데. 수진은 눈앞의 남자가 정현이란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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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만났지만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정현은 반가운지 두려운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수진의 창문을 두드렸다. 그의 표정에서 엉망이 된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평온함이 보이는 듯도 했다. "수연아!! 수연아 문 좀 열어봐! 수연이 너 맞지?" Dreams are my reality /the only real kind of real fantasy illusions are a common thing /I try to live in dreams it seems as if it's meant to be. 좋아하는 노래가 귓가에 들려온다. 수진의 정신이 끊기는 기분이다. 갑자기 어지러웠다. 지금 카페에 앉아있는 것도 같고, 차 안에 앉아있는 것도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차안 인데, 내가 수연인지 수진인지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수연과 수진은 쌍둥이 같았다. 둘은 달랐지만 또 같았다. 어린 시절엔 수연이 수진을 곧잘 따랐다. 함께 다녀야 안전하다고, 모든 습성과 행동방식을 언니로부터 배우겠다고 수연은 말했다. 자매를 잘 돌보지 않는 부모 밑에서, 수연은 거의 모든 일들을 언니에게 의지했다. 자연스레 수진은 동생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수연의 표현력이 더해져서, 수연의 모든 추억에 수진도 함께할 수 있었다. 그건 마치 꿈같기도 했는데, 수진이 직접 경험한 일들 같기도 했다.

사춘기가 되어서도 둘은 늘 그렇듯 붙어 다녔다. "수연아, 나는 가끔 우리가 샴쌍둥이로부터 분리 된게 아닌가 싶어." "무슨 시답잖은 소리야." "우리는 취향도 사고방식도 같잖아. 아마 우리는 뇌가 붙어 있었을지도 몰라. 너와 나는 영혼의 쌍둥이야." 수연은 언니의 표현에 여느 여고생처럼 자지러지게 웃었지만, 그 단어가 우스워서는 아니었다. "....영혼의 쌍둥이...." 34


수진은 가끔 착각이 들고는 했다. 거울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수연처럼 살았으면 지금처럼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수진에 비해 적극적이고 빛나는 삶을 살기 시작한 수연에게, 수진의 삶은 점점 작아져 갔다. 사실 정현은 수연보다 수진을 먼저 만났다. 그런 이유에서, 정현과 수연을 이어준 것은 수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진에게는 그게 끝이었다. 처음 만난 정현은 말주변이 없는 수진에게 친한 친구와 대화하듯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마 같은 책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수진에게 말을 건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수다스러운 남자가 이상형은 아니었는데 그의 담백한 말투와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그날, 그가 했던 말들을 잠자리 들 때까지 곱씹으며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수진에게도 그녀를 빛내줄 추억은 많았다. 하지만 수연과 정현의 연애는 수진의 마음을 늘 아프게 했다. 수연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언니에게 다하는 동생인 것도 한몫했으리라. 비참함. 동생보다 뒤늦게 본인의 마음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정현과 수연의 마음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그녀는 그 둘을 질투하게 되는 자신을 미워하며 비참함을 느꼈다. 지금 눈앞의 정현이 있고, 수진은 그 순간 수연이 되었다. 아마 늘 꿈속에서 봐왔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진의 꿈들이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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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설레多, 우루사, 소소, 잔디인형, 惠雨, SNL, 안드레아나, Rabih, 피로곰, 휘파람, 마리우스, 아바쿤다카와, 이진한

출판

실제본 프로젝트

기획

실제본 프로젝트

편집

이서녕

발행일

2016년 11월 19일

copyright Ⓒ 2016 실제본 프로젝트 all rights reserved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프로젝트 참여자 모두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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