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본 13번째: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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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본 프로젝트 열세 번째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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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누나 이소영 일요일 아침 11시. 눈을 뜨자마자 옆을 더듬거려 휴대폰을 보았을 때 시각은 8시가 조금 넘었었다. 그렇지만 아무 런 계획이 없는 일요일에 일찍 눈을 뜨는 건 억울한 기분이다. 휴대폰을 휘휘 넘겨보다 다시 옆 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뒤, 이불에서 한참을 밍기적 밍기적 거리다 보니 세 시간이 훌 쩍 달려갔다. 더 이상 침대 위에서 할 일이 없겠다 싶은 때에 주방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탁탁탁탁, 투그덕- 턱턱 툭. “현우야” 누나가 문을 덜컥 열고 들어왔다. “그만 자고 일어나서 밥 먹으러 와.” 나긋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는 다시 휙 사라졌다. ‘누나가 웬일이지. 이렇듯 일찍 일어나 밥을 차릴 위인이 아닌데.’ 오늘은 누나가 고마우면서도 놀라운 하루의 시작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 나는 온 몸의 감각을 살려내기 위해 기지개를 폈다. 두 다리와 양팔에 힘을 잔뜩 주고 쭈욱 당겨내면서 이불 속에서 쭈글쭈글해있던 내 몸을 힘껏 펴냈다. “하아” 힘을 툭 풀고 허리를 일으켜 세운 뒤 부엌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직도 다리는 더 많은 잠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식탁에는 세 개의 반찬들과 따끈한 밥이 지어져 있었다. 멸치볶음, 김치, 계란스크램블(참고로 누나는 달걀프라이를 온전한 모양으로 만들 줄 모른다. 아마 이것도 프라이를 시도하다 으깨져서 스크램블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가운데 하얀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는 된장찌개가 뚝배기에 담겨 위엄있게 식탁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엇, 이거 누나가 만든 거야?” 뚝배기를 가리키며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요즈음 우리 남 매의 아침식사는 늘 우유에 말아먹는 콘프레이크였다. 차가운 우유만 넘기다가 정말 오랜만에 따 끈한 국물을 마실 생각에 흥이 절로 났다. “응. 너 든든하게 먹으라구. 야 얼른 먹어봐. 다 식겠다.” 나는 누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누나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숟가락 으로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는 된장국물을 담아 후후 불어 입으로 넣었다. “어때? 맛있지? TV보고 백종원씨가 하라는 대로 했는데!” 백종원씨가 이렇게 하라고 했을 리 없다. 내 생각에 누나는 된장찌개에 너무 욕심을 부렸다.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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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락이 두 움큼이나 들어가면서 된장찌개는 소금물로 소금국을 끓여낸 것만큼이나 짰다. 순간 미 간이 찌푸려질 뻔 했으나 얼른 밥을 가득 넣어 내 혀가 이 맛을 지울 수 있도록 했다. 누나의 요 리가 쉽게 지워지는 맛은 아니지만, 나는 이제 요령이 생겼다. “나 먹으라고 한거야? 누나도 얼른 먹어봐.” “아냐, 난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 야.” 누나가 머리를 묶은 고무줄을 풀며 말했다. 그리고 오른쪽 앞부분의 옆머리를 잡으며 내게 말했 다. “여기만 좀 짧은 것 보여? 사실 머리를 안 묶고 국이 잘 끓고 있나 살펴보다 머리에 불이 붙 었지 뭐야. 바로 머리를 뗐는데도 이 만큼이나 상했어. 정말 꼬불꼬불해졌다구. 하아, 속상해. 상 한 머리 한 번 볼래?” 누나는 화장실로 달려가더니 한 움큼의 머리카락을 손에 담아 왔다. 머리카락이 아닌 것 같았다. 정말 ‘꼬불꼬불’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푸하하하. 폭탄 맞았네!” 처참해진 머리카락과 누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니 웃음이 펑 터져 나왔다. “푸하하. 그래, 내가 폭탄 맞아가며 만든 찌개야. 그러니까 다 먹어야 해!” 나는 그 날 소금된장찌개의 여파로 하루 종일 갈증을 호소했다. 그리고 누나는 하루 종일 거울 을 보며 가위로 머리를 가다듬었다. 나는 앞으로 누나의 예쁜 머리와, 나의 소중한 혀를 위해 요리는 안 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누나,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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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된장국 다이나믹 듀오

“잠깐만 기다려. 밥 먹어야지” “아냐 휴게소에서 먹고 왔어. 호두과자랑 핫도그랑. 그러니 좀 있다 차려줘. 배불러서 들어갈 자 리도 없어.” 듣는 둥 마는 둥 냉장고로 다가가는 어머니. 일단 밑반찬을 꺼낸다. 고소한 깨국물에 담긴 고사 리, 고구마 줄기. 입을 깔끔하게 씻어주는 고추잎. 단촐하게 간장에만 푹 절여 담긴 고추는 흐물 흐물 하지만 단단한 아삭함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먹음직스러운 갓김치. 달달하게 볶은 뒤 깨 를 듬뿍 뿌린 멸치볶음. 맛깔나게 생긴 조개젓엔 청량 고추가 송송 썰어져 얹혀있다. 갓 썰어서 버무렸을 때 더 맛있는 무채는 어느새 들큰하니 익어있고, 삶은 브로콜리 옆엔 요즘 같은 날씨에 달아오르는 내 볼처럼 빨간 고추장이 단촐하게 놓인다. 이게 기본 반찬이다. 그리고는 어머니는 찌개에 불을 당기고는 고기를 볶는다. 그 옆 큰 솥엔 사과를 갈아 푹 재워 미 리 맛있게 익혀놓은 돼지 갈비도 담겨 있다. 역시나 불이 올라간다. “이걸 어떻게 다 먹으라고... 나 진짜 배부르다니깐. 그러니까 제발 좀...” 어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지글지글 굽는 소고기는 지난 설에 사돈댁에서 보낸 것이다. 냉 동실에 얼려 놓고는 한 번도 먹지 않던 고기를 굳이 이제야 꺼내서 굽는다. “자 일단 이거부터 먹어” 꽃게탕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푸르딩딩한 젊음을 뽐내던 애호박이 죽마냥 축 늘어져 있지만 국물과 함께 떠 먹으면 딱 좋은 완숙함을 갖고 있다. 게는 뭐 말할 것도 없이 한 입 배어 물면 달달한 살과 함께 푹 배인 국물이 아찔하게 입을 채운다. 돼지 갈비도 다 익었다. 한 입 깨무니 역시나 깊은 맛이 배어 나온다. “아 참 닭도리탕을 해줄 걸 그랬나. 너 그거 좋아하잖아” “소 돼지도 모자라서 닭까지 먹이려고? 그러다 내 고지혈증 걸리겠수” 방금 구운 소고기가 나온다. 소는 바싹 익히면 안 된다고. 난 회식 때마다 자주 먹으니 아버지랑 둘이 실컷 드시라고 신신당부 했는데도 70넘은 노인네는 좀처럼 말을 들으시질 않는다. ‘난 소보 다 돼지가 맛있다’며 한사코 한 점도 거들지 않는다. 그리고는 또 다른 사돈댁에서 들어온 보리굴 비를 꺼내 놓는다. 그것도 보아하니 받은 뒤에 한 점도 손대지 않고 아꼈다가 내놓은 모양새다. 4


“아 그러고보니 너 된장국 좋아하지 금방 끓여줄게” “아니 꽃게탕이 있는데 또 국물요리를 왜 해? 그냥 와서 같이 먹어요” 이미 듣지도 않고 잘 손질된 아욱을 냉동실에서 꺼낸다. 네모 반듯한 두부를 더 반듯하게 자르고 된장을 곱게 갠 뒤 손가락만한 굵은 멸치를 넣어 팔팔 끓여낸다. 국물 냄새가 구수하게 퍼질 때 쯤 아욱을 한소쿰 넣어 더 끓인다. 송송 썰은 고추와 파를 조금 더 넣고 된장국을 내어 온다. 배가 불러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다던 나는 이미 제삿밥처럼 쌓인 밥 한 공기를 비운 상태가 돼 버렸는데. 그래도 저 된장국 냄새 때문에 밥을 반 공기만 더 달라고 굽신대는 처지가 된다. “난 잘 먹고 다니니까 두 분이서 고기 좀 먹으라고요. 난 이 된장국 하나면 돼” 참치 뱃살을 먹고 투플러스 한우 등심을 먹어도 얼굴에 그만한 기름기를 가진 사람들과 먹는 저 녁보다는 이 된장국 하나가 나를 가뿐하게 만들어 준다. 뭐랄까 내가 좀 더 열심히 살아야 겠구 나 하는 갑작스런 다짐을 하게 해주는 음식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젖을 떼고 밥이란 걸 먹기 시작할 때부터 흰 죽을 개어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던 그 심정으로 나에게 밥을 먹인다. 이것은 어머니의 기쁨이자 보람이다. 내가 목을 못 가눌 때 정 성스럽게 내 머리를 받히던 자연스런 습관처럼. 이 밥을 앞으로 몇 번 더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갑자기 목이 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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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에 대한 짧은 기록 망고청바지 #1. 엄마께서 문어숙회 무침을 해주셨다. 2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해주신 맛이랑 똑같아 서 “엄마! 외할머니가 해주신 거랑 비슷해!”라고 했더니, “당연하지, 내가 딸인데”라고 하셨다. “그럼 나도 엄마한테 요리 배워야겠다. 나중에 동생들한테 해주게!!” 이랬더니... 엄마께서 하시는 말... “맛을 따지는 건 우리 집에서 너밖에 없어.”.... 생각해보니, 우리 가족 중에 맛을 찾는 이는 나밖에 없다. #먹는 즐거움을 모르는 가족들과 살면 나만 살찐다. #2. 가끔 아주 가끔 요리가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아니, 요리가 하고 싶은 것 보다는 내가 한 요 리를 누가 와구와구 맛있게 먹어주면서, 맛있다고 해주는 말을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요즘 그 타 깃은 바로 12살 차이나는 막내 동생! 다행스럽게도 막내 동생은 내 요리를 좋아한다. 아마 새로 운 음식 하는 것을 즐기는 내가 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은 피곤해서 요리를 잘 못하는 데, 그래도 종종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는 막내 동생이 있어서 강제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 #요리는 즐겁지만, 뒷정리는 귀찮아. #3. 올 해 목표에는 다이어트가 없었다. 매번 실패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다이어트를 해야겠다 는 생각이 들어서 6월부터 8월까지 매우 혹독한 다이어트를 해서 지금까지 유지 중이다. 인생 최 저 몸무게, 야호!!! 아무튼 다이어트 하는 동안, 배불리 3끼는 먹었지만, 한식으로만 먹었기에 밀 가루가 주식이 나로서는 매우 힘들었다. 그 때 나를 행복하게 해준 요리 프로들. 1. 신동엽, 성시경의 오늘 뭐 먹지(O’live) 2. 냉장고를 부탁해(JTBC) 3. 옛날 O’live show(O’live) 4. 집밥 백선생(tvN) 좋은 정보도 많이 얻고, 늘 나의 채워지지 않는 다이어트로 인한 식욕을 채워주던 방송들. 이제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었으니, facebook에 올라오는 짧은 요리 동영상으로도 충분하다. #그동안 즐거웠어. 쿡방, 먹방. #4.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시피 엄마가 갓 만들어주신 따끈한 음식의 레시피들. 도저히 따라할 수가 없음. #내가 하면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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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국 미역국 '이번 겨울에도 한파가 몰아칠 예정입니다. 전국의 수험생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는 오늘, 사상 최저기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구구 우리학생들 고생하겠구만.. 우리아들은 작년에 수능을 치뤄서 다행이지..." 조그만 분식집 식당주인 아주머니는 선반위에 놓인를 TV를 보며 한마디 던진다. 아침 7시 찌뿌둥한 어깨를 손으로 주무르며 주방 불을 키고 가스는 잘들어오는지 가스불을 켜보 고, 김치와 단무지 같은 밑반찬들이 잘 자리하고 있나 확인해본다. 어제 문닫기 전에 이미 확인했 지만 십수년간 음식점을 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 첫 손님이 오기전에 밑반찬으로 내올 계란말이를 준비해야겠다' 손때 묻은 후라이팬을 집어 솜씨좋게 둘둘 식용유를 두어바퀴 돌리고 잠시 생각에 빠진다. '오늘이 수능이랬는데 작년에 우리아들이 꽤나 고생했지.. 지금은 방구석에서 자빠져 잠이나 자겠 네. 비타민 준건 잘챙겨먹나몰라' 수능을 예상보다 잘본 아들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해서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 자취를 하는 자식을 둔 어머니의 마음은 누구나 똑같을 것이다. 밥은 제때 챙겨먹는지 변변찮은 친구놈들을 만나서 술이나 퍼마시고 다니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매일매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세상 대부분 자취하는 자식들은 이런 부모님의 속을 도통 모른채 망나니처럼 1학년을 보낼 것이 다. '딸랑' 두꺼운 패딩이 회색 후드를 입은 남학생이 들어온다. "김밥 두줄 포장해주세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표정과 추운 날씨탓에 새빨개진 볼. 거뭇거뭇한 수염은 그를 좀더 애처롭게 보이게한다. 그는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 주머니를 휘적대더니 한 손에 잡히는 노트를 꺼내 한장 한장 넘겨가며 중얼거린다. '우리 아들도 수능 보기전에 저런 노트 가지고 다녔었는데.. ' 그녀는 꼭 자기 아들 또래 같이 생 겼다고 생각하며 아들을 떠올린다. 도시락도 안챙겨줬나 하며 속으로 학생의 어머니를 나무란다. 그녀는 학생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큼지막한 김을 꺼내고 갓지은 뜨끈한 밥을 한주걱 얹으며 따뜻 한 음식을 만들어간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노트를 보며 중얼대는 학생을 보고 작년 수능날을 떠올린다. 아들이 어찌나 긴장하던지 얼굴이 샛노래졌다. 그날은 오전에 가게를 쉬고 남편과 함께 아들을 시험장에 데려다주었다. 꼭잡은 손을 놓아주고 '아들 화이팅!' 하며 수험장으로 떠나보낸게 소를 도축장으로 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단지 아들이 그저 최선을 다해 시험을 치길 바랄뿐이였는데 아들을 보니 안쓰러웠다. 그리고 김밥 두줄을 기다리며 앞에 있는 학생을 바라보니 그날에 아들의 얼굴과 겹쳐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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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시험장에 가면 얼마나 외로울꼬.. 김밥만 먹으면 차가울텐데' 식당 한편에 팔팔 끓는 된장국앞으로 간 그녀는 정성스레 국자로 보온병에다 뜨끈한 국물을 담아 낸다. "학생 다 됐어. 이건 수능 끝나고 돌려주고 날도 추운데 몸 따듯하게 하고 시험 치르렴." 소박하 게 말을 건넨 한마디에 노트를 보던 학생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다. "아니 .. 아주머니 감사드려요.." 추위에 벌게졌던 볼의 붉으스레한 것이 눈 쪽으로 옮겨간듯 학생 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감사하다는 학생을 보니 그녀는 괜히 마음이 찡해져 괜히 웃어낼 뿐이였다. 그녀의 미소는 세상 모든 학생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였다. 수능 한파를 녹이는 따스함이 가득한 어머니의 사랑. 여느 음식점에서 흔한 국거리로 차갑게 남은 잔 반으로 홀대받는 된장국이지만 그 학생에겐 따듯한 관심과 사랑의 징표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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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 ­ 요리 이진한 [우리 금요일에 만날래요?] 수정은 고민 끝에 문자를 보냈다. 처음에는 싸준 음식 잘 먹었다고 썼지만 그건 왠지 영훈을 놀 리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더욱이 문자를 보내려는 시점도 그 날로부터 3일이 지나 지금 그렇게 보냈다간 ‘이제야 먹은 건가?’ 하는 오해를 살 것 같았다. 매사에 계산적이고 깔끔한, 그래서 기계 같다는 소리를 달고 사는 수정에게 아주 작은 오해의 여지도 없어야 했다. 그것이 그녀를 만나는 모든 이에게 그녀의 쿨함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수정의 평판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 물론 매사에 계산적이고 깔끔한, 그래 서 기계 같은 여자라는 소리를 듣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쿨함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있었다. 오 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그녀는 움직이는 계산기에 더 가깝다. 들어온 만큼 내보내야 하고, 또 내보 낸 만큼 들여보내야 한다. 그것이 금전적 경우이건 무형의 노력이건 상관없다. [금요일이요? 금요일엔 제가 특강이 있어서...] 수정은 일단 문자가 왔다는 것에 안도한다. 내가 보낸 만큼 상대방도 문자를 보내야 밑진 기분 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대책 없이 본인의 사정만을 이야기하는 영훈이 괘씸하다. 에프터 아 닌 에프터를 보냈으면 그에 맞는 태도를 보여야 할 텐데 이 남자는 섬세함이 조금 부족한 것 같 다. [수정 씨는 낮엔 직장에 계신 거죠? 저번처럼 일요일 낮에 뵈면 어떨까요?] 이제 막 불쾌해진 수정에게 민망한 문자다. 그래도 내가 싫진 않은가봐. 어떻게 해서든 만나려고 하는 걸 보니 ­ 조금은 성급한 생각을 하며 수정은 다시 한 번 주말을 희생해야 하나 고민한다. [영훈 씨 시험 준비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일요일에 봐도 괜찮아요?] [네? 아... 네 괜찮아요.] 조금은 당황한 것 같은 문체. 그래도 빠른 대답이 만족스럽다. 수정은 본인의 문자를 확인하며 실수할 만한 단어는 없었으니 본인 탓은 아니겠거니 여긴다. 그러고는 일요일에 뭘 할까 생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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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무래도 수험생 영훈은 돈도, 여유도 없어 보였다. 게다가 저번엔 얻어먹기도 했으니 이번엔 수정 차례여야만 했다. [그럼 이번에 미술관 가지 않을래요? 오르세 전시회 하거든요~ 표도 있고요.] [네! 알겠습니다. 일요일에 뵙겠습니다!] [그런 거 안 좋아하시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좋아합니다!!] [네~ 그럼 일요일에 봐요 ^^] [네! 좋은 밤 되세요!] 수정은 분명 주도권을 잡았다. 그녀의 결정에 따라 무엇이든 하겠다는 영훈을 보면서 그가 본인 에게 빠졌음을 자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정은 한 가지가 불쾌했다. 그것은 문자메시지의 개수. 영훈에게 하나의 문자를 더 받은 것이 언젠가 갚아야 할 부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감정은 주말이 다가오고 더 커졌다. 유독 한가했던 토요일 어느 순간, 수정이 영훈에 게 받은 글라스락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 발견이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돌려주면 그만이 었으니까. 하지만 글라스락에 아무것도 채우지 않고 영훈에게 돌려준다는 것은 수정의 인생관에 있어 큰 죄를 저지르는 것과 같았다. 안 그래도 문자메시지 하나까지 빚지고 있는데 더 이상 부 채를 늘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 마음이 들자 바로 메뉴를 고민해야 했다. 그 글라스락에 무엇을 넣어야 하나. 어차피 점심 때를 끼고 있는 약속이라 음식을 싸가도 문제될 건 없다. 다만 어떤 재료를 얼마만큼, 그리고 어 느 정도의 정성을 쏟을 것인가가 포인트다. 글라스락의 움직임은 이번 한 번으로 마무리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철저한 계산이 필요하다. 일단 그녀가 받은 음식은 스테이크, 통감자, 구운 야채 등등. 단가가 싸지는 않다. 하지만 그녀 는 직접 요리를 할 거니까 정성이라는 노동의 가치가 더해진다. 게다가 수정은 요리를 잘 하지도 못한다. 오죽 못했으면 월요일 회사에서 글라스락을 열자마자 ‘그거 사온거지?’ 라는 말을 들었을 까. 그러니 그녀의 정성은 더욱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수정은 먼저 감자를 골랐다. 감자를 먹었으니 감자를 내는 게 맞다. 하지만 레스토랑의 그 감자 를 만들려면 오븐이 필요했다. 그래서 수정은 그냥 삶기로 했다. 맛있는 삶은 감자 요리 ­ 라고 검색하니 으깬 감자요리가 나왔다. 쉬웠다. 다음은 김밥을 검색했다. 어려웠다. 그냥 사는 게 나 은 음식이다. 무엇에 설렌 건지 김밥을 생각한 본인이 창피했다. 스테이크는 구운 닭가슴살로 대신할 것이다. 원가에 차이가 있지만 스테이크를 담으면 글라스락 10


에 피가 고일 것 같아 망설여진다. 수정의 품위에 걸맞으려면 음식도 보기 좋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따로 만든 소스와 구운 야채를 곁들일 것이다. 닭가슴살만 먹으면 퍽퍽하니까 같이 먹을 수 있는 파프리카와 양파, 버섯 등이 필요했다. 수정은 그렇게 준비한 재료를 요리했다. 생각한 것보다 양이 많아 남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영훈의 글라스락에 신기할 정도로 딱 담겨 기분이 좋았다. 수정은 또 보온병에 그녀가 즐겨 마시 는 차를 담았다. 카모마일 차 ­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강한 향에 머리가 아프기도 하지만 어떻게 봐도 꽃을 마신다는 느낌이 들어 좋아하는 차다. 그렇게 일련의 준비를 마친 수정은 이제 곧 집을 나선다. 문을 닫고 휴대폰을 확인한다. 날씨가 맑단다. 수정은 이상하게 오늘 하루가 기대된다. 조금은 의무적으로 에프터를 잡고, 또 분명 강박 관념에 요리를 한 것인데도 수정의 그 날 하루는 무척이나 상쾌하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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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밥 휘핑크림

예전에는 당연하던 것, 집 밥 늦게까지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면 베란다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 밥 먹으라는 소리에 못이기는 척, 현관문을 열고나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들로 이루어진 한상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생도 다같이 둘러 앉아서 먹는 밥이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졌던 그 시간이 이제는 추억이 되버린 시간 머리가 자라고 사회인이 되더니 회사 야근에, 친구 약속에, 밥은 외식에.. 가족끼리 둘러앉아 먹던 그 집 밥이 그리워질 때 어머니의 집밥 만드는 게 쉽지만 않다는 걸 깨달을 때, 퇴근하면서 어머니께 전화나 한 통화 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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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잘하고싶어요 싱숭생숭

01. 우리의 요리실력 너는 매운 음식을 먹지 못했다. 우리는 사실 그점부터 맞지 않았다. 너는 매운 음식을 먹지 않아도 늘 뜨거운 남자였고, 나는 마 음속 깊이 너의 따뜻한 사랑이 필요한 차가운 여자였다. 항상 뜨거운 너는, 내가 매운 음식을 요 리해주면 더 날카롭게 변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도, 제일 잘하는 요리도, 매운 떡볶이였다. 너를 위해 덜맵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 마음은 늘 서늘하고 외로워서 뜨겁고 매운 것들이 필요 했다. 가끔 너또한 내 취향의 요리를 해주지 않는다며 변명도 했었다. 하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너에 게 맞는 요리를 해주지 않았고, 내 취향만 말했다는 것을. 그리고 취향을 바꿔주기를 강요했다는 것을. 우리는 갈림길에서 서로에게 맞는 소스를 찾지 못했고, 배려없는 각자 취향의 요리들만 만 들었다. 그날 내가 너를 위해서 달콤한 요리들을 내어주었다면 우리는 좀더 오래갈 수 있었을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간을 갖은 적이 있을까. 나는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 하지만 너와의 시행착오를 통해 내 요리실력은 늘어났다. 그리고, 요 리를 좀더 배워볼테다. 적당한 간의 맛있는 요리를 배우려 한다. .. 그런데 참, 너도 요리 엄청 못했어. 그건 너도 반성해.

02. 당신을 위해서 나는 지금 당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어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그려왔는데도 지금은 서늘하네요. 멀리서 보았을 때는 넓고 평평해 보였는데, 실제 내가 누워있는 이 곳은 도망갈 곳도 보이지 않 는 불편한 공간이었어요.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나는 오늘 당신의 활력이 될거에요. 차디찬 칼날이 나를 가르는 순간이 오기까지 당신의 수고스러움을 알아요. 나를 발견해 주셨고 정갈히 씻겨주셨습니다. 당신이 나와 친구들을 좋아하여 한박스 가득 사왔을 때부터 이순간을 기 다렸어요. 끝나는 그 찰나가 짧을지라도 나는 아쉬워하지 않겠습니다. 아마도 지금 이순간, 당신을 위해서. 당신의 요리재료가 드리는 글. 13


요리를 할 시간 Rabih 일인 비효율의 시대. 혼자사는 가구가 늘어나면서 혼자 밥먹고 술먹고, 뭐든지 필요한것들은 각자 가 사는 시대. 덕분에 우리는 더이상 눈치보느라 내가 먹기 싫은 것을 먹을 필요도 없고 필요한 것은 내 전용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좁은 집은 단지 내 이름표가 붙은 중국 제 잡동사니로 가득 차고, 누구 하나 만날 일 없는 날의 식사는 혜자 엄마나 종원 아빠 혹은 우 리 이쁜 혜리가 싸주는 도시락 3종을 돌려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이러려고 혼자 사 나 자괴감 들고 괴롭다. 내가 샌프란시스코 베리 아저씨네 집에서 잠깐 머물던 당시, 가장 만족 했던 것은 아저씨의 요리 였다. 매일 오후 5시면 부엌엔 주황색 등이 켜지고 도마에는 칼날이 부딪히고 이내 돌아가는 오 븐 소리는 거실을 따뜻하게 달궜다. 6시 30분이 되면 마침내 기다리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 오고 우리 네 식구는 식탁에 둘러 앉아 푸짐한 저녁을 나눠 먹었다. 그 집에서 나누었던 따스한 저녁 식사시간이 없었다면 내가 그 타지 생활을 기분 좋게 회상할 수 있었을까. 주 5일도 아니고 매일 저녁 2시간을 밥 한끼를 위해 소비한다는 것은 내게 납득하기 어려운 시간 의 낭비였다. 식사 준비에 쓰는 10분도 아까워서 도시락이나 배달 음식을 시켜먹던 나는 아저씨 가 요리에 대해 애착을 갖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저씨는 젊을때 부터 요리를 즐겨 했는데 남자가 가지기 가장 좋은 취미는 요리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내가 아무리 그렇게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 러봐야 요리를 하지 않으면 다 쓸데 없으며, 요리를 하면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사람을 집에 초대 할 수 있고 침대는 늘 네 곁에 있다는 그의 이야기에 다같이 즐거워 하며 은근히 설득당했던 기 억이 있다. 요즘의 나는 부쩍 자주 집에서 요리를 한다. 베리 아저씨의 주장 때문은 아니지만 비슷한이유가 은연중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강변하자면, 내가 고기를 끊으면서 요리가 시작되었다. 메이드 인 차이나 만큼이나 집요하게 파고든 요즘 육식위주의 식탁에서, 스스로 식재료를 가지고 조리하 지 않는 이상 한 톨의 고기 조각도 허락하지 않는건 매우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요리에 대한 나 의 게으름이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나는 늘 거의 한 가지 음식만 해먹는다. 파스타가 생각보다 만들기 간편하다는 점, 그리고 만들고 나서 보기에도 그럴싸하고 맛도 좋아서 파스타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 알리오올리오가 재료도 적게 들어가고 맛도 내 취향에 잘 맞 았다. 아마 알리오올리오의 기름맛을 보면서, 채식이 기름진 생활과 거리가 먼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더구나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었기에 알리오올리오의 심심한 맛에는 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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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듬뿍듬뿍 넣어 간을 했다. 치즈도 계속 먹다보니 입맛이 까다로워져 스틱 치즈를 사다가 강판 에 갈아 넣어 먹는 맛이 가장 좋다. 알리오올리오는 마늘과 오일이라는 뜻이다. 그런만큼 마늘이 매우 중요한데 여기서 일인 가구의 문제점이 발생한다. 내가 경험으로 체득한 알리오올리오 일인분에 적당한 마늘의 양은 다섯에서 여섯 알이다. 헌데 마트에 포장해서 파는 깐마늘은 이보다 훨씬 많다. 이중 일부를 해먹고 남겨두 면 며칠 안가서 변색이 되고 그러고 나면 먹기 싫어진다. 그래서 내가 이용하는 방법은 차라리 안 깐 마늘이 담긴 소형 빨간 망으로 하나 산다. 그러면 대략 50알 이상이 들어있는데 안 깐 마 늘은 그대로 두어도 오래오래 보관할 수 있다. 직접 손질해야 하는 약간의 번거로움이 있지만 일 회용 용기 사용을 줄여 쓰레기도 줄이는 추가적인 장점이 있다. 요리를 하다보면 식재료를 직접 보고 고르면서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신선한지 확인하 고 또 무엇무엇이 들어갔는지 알게 된다. 이로써 내가 지금 먹고 있는 것의 정체를 더 명확히 알 게 된다. 이게 무척 당연해야 할 것 같지만, 요즘 우리의 식생활은 그냥 식당에서 내어주는 대로, 공장에서 포장되어진 대로 내가 먹는 것의 정체에 대해 잘 모른채 이것을 생산한 기업에 대한 무 한한 신뢰로 섭취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땅과 하늘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지 고 있었다면 지금의 우리 세대는 기업들의 도덕성에 대해 대단한 신뢰감을 가지고 있는게 틀림없 다. 우리는 사실상 우리 엄마로 부터 오는게 아니라 우리가 먹는것으로 부터 온다. 더구나 태어난지 30년도 넘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오래전에 나는 매일저녁 치킨을 시켜먹으며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정된 원자들이 돌고 돌아 모든 것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떠올 릴 때, 내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 중 닭으로 부터 유래한 것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 걸까. 비록 내 몸은 지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을지라도 대부분의 원자들은 불과 얼마전까지 닭의 형태를 하고 있었구나 생각하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차라리 그것이 콩이나 배추, 감자에서 왔다고 하면 땅에 대한 신뢰감으로 대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리를 하며 나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결국 어 디로 가게 될 것인지, 그것들은 결코 무시할 대상은 아니다. 내가 나에게 조금더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요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베리 아저씨는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신 분이었고 매일 새벽 3시 반에 일어날 만큼 부지런한 분이었지만 요리에 쓰는 시간을 아까워 하지 않으셨다. 내가 먹는 것이 나를 구성한다는 점을 상기 할 때 요리는 사실 음식이 아닌 나를 만드 는 과정에 더 가깝다고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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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샌드위치와 유부초밥 구황작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자신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요리다. 재료를 고르고 씻고 다듬고 준비하고 정 말 요리만큼 손이 많이가고 세상 번거로운게 없다고 내내 생각해 왔다. 가끔은 내가 해준 요리가 먹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너에게 나는 그런거 못해 라고 딱 잘라 말하 곤 했었다. 그러다 문득 정말 갑자기 너를 위해 요리를 해주고 싶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기억나 지 않는다. 친한 옆에 커플이 정성껏 예쁘게 만든 도시락이 부러워 보였는지, 엄마가 만들어준 샌 드위치가 생각보다 쉽게 생각되었는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서프라이즈로 너와 놀러가기로 한 날 에 맞춰 도시락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엄마가 만들때 가끔 도와드렸던 감자 샌드위치와 유부초밥이 내 첫번째 도시락 메인 메뉴다.

<감자 샌드위치> 1. 감자 3개와 계란 3개를 삶는다. 2. 양파 반개, 사과 반개를 잘게 다진다. 3. 삶아진 감자와 계란 껍질을 벗기고 모두 으깬다. 4. 으깬 감자와 계란에 다진 양파, 사과를 넣고 마요네즈와 함께 버무린다. 5. 소금, 설탕으로 간을하고 잘 안 버무려지면 우유도 살짝 넣는다. 6. 식빵 한쪽 면에는 딸기쨈을 바로 다른 한쪽면에는 완성된 감자계란 샐러드를 바르면 끝!!

<유부초밥> 1. 맛있게 밥을 한다.(이미 집에 만들어진 밥 주로 사용) 2. 시중에 파는 유부초밥 만들기 순서에 따라 식초물과 양념, 밥을 버무린다. 3. 2개로 밥을 나눠 한 쪽에는 기름을 쫙 뺀 캔참치를 넣고 다른 한쪽에는 멸치볶음을 넣은 후 밥을 버무린다. 4. 준비된 유부에 한주먹씩 밥을 넣어주고 모양을 잡아주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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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느라 난장판이 된 주방을 보며 언제치우나 한숨이 나오긴 하지만 일단 도시락통에 준비된 음식을 예쁘게 담아 너와의 소풍을 준비했다. 계획대로 내가 준비해간 요리에 너는 무척이나 해 맑은 표정으로 기뻐했고 양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거의 4인분에 가까운 요리를 너는 하나도 남기 지 않고 맛있게 다 먹어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뻐보였다. 내가 해준 음식을 양 볼에 가득 오물거리며 맛있다고 엄지를 척 내밀어주는 너의 모습에 아침부터 분주하게 재료를 씻고 뜨거운 물에 손을 데일뻔하며 감자를 건져내고 양 손에 하나가득 양념 범벅이 되어 짜증을 내며 밥을 버 무리던 것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왜 요리를 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맛있 게 먹는 너의 모습을 보기위해. 너의 그 행복한 모습을 보려고 난 요리를 한거였구나. 근데 그 모습에 내가 더 행복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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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품격 Fin. A

AM 11:59 또 시작이다. 주방에서는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기름이 팬 위에서 달궈지는 소리, 물방울 이 튀는 소리, 그리고 콧노래. 이유도 모른 채 지하 살이를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의 창궐로 우리는 중형 아파트 크기의 지하벙커로 피신했다. 벙커 밖에 남은 사람들은 일 주일 내로 감염되었으며 그 보다 더 빠른 시일 내에 사망하였다. 백신을 만들어 보기도 전에 손 쓸 수 없을 만큼 퍼져버린 바이러스는 우리를 이곳에 가두었고, 다시는 두 뺨에 바람이 닿을 수 없게 만들었다. 처음은 20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로 만든 이 상자는 8명 을 위한 공간이었고 때문에 먹을 것이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였다. 식 사량을 반의반으로 줄여가며 8명을 위해 준비된 음식들을 균형 있게 나누어 먹으며 버텼다. 서로 가 서로의 의지가 되어주면서 하루하루를 버티었다. 식사도 하루에 한 끼로 정해두었다. 식사시간은 PM 12:34. 1부터 4까지 연속된 숫자가 일렬로 나열되는 시간, 다음에 5라는 숫자가 올 것만 같은 그래서 우리의 미래도 올 것이라 믿었던 시간 이었다. 그땐 희망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셀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단단한 매듭으로 연결되어있던 각자의 희망의 끈은 풀려 따로 나풀대기 시작했으며, 그 중 얇은 끈들은 하나 둘 끊어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량창고와 냉동창고는 텅 비어버렸다. 물과 약간의 조미료, 썩어 문드러진 이파리들뿐이었다. 지옥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점차 굶주려 갔으며 사람들의 얼굴 에는 핏기가 사라졌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죽는 사람도 생겼으며 이 상황에 절망한 나머지 스 스로 죽는 사람도 생겼다. 시체가 생겨도 철로 둘러싸인 우린 묻어줄 수 있는 땅이 없었기에 부 패됨을 막고자 비어버린 냉동고에 그들을 안치했다. 어느 날 식탁위에 잘 요리된 스테이크가 올라왔다. 눈이 돌았다. 배고픔에 이성을 놓아버리기 직전이라 손바닥만 한 고기를 썰지도 않고 허겁지겁 먹었다. 한 덩이를 다 해치우고 나서야 그날 요리당번이었던 상현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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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어 진짜.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처음이야. 이 고기는 어디서 났어? 이 작은 지하 에 우리가 몰랐던 창고가 또 있었나봐?” “그들이야.” 상현은 칼로 모양 좋게 썬 고기를 포크로 찍어 우아하게 입으로 가져가며 표정 하나 없는 얼굴 로 가볍게 말했다. “그들이라니?” “그들이라고 하면 그들밖에 더 있어 이 작은 지하에.” 위에서부터 식도까지 모든 것들이 쥐어짜지고 입으로 쏟아져 나왔다. 내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빨 자국이 선명히 찍힌 고기 덩어리와 짙은 녹색의 쓸개즙이 바닥에서 뒹굴었다. 나도 함께 뒹굴 었다. 속을 완전히 비워내기 위해 손가락을 위까지 넣어 보려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속만큼 머 리가 쓰렸다. 잠들기 전 상현에게 물었다. “왜 그랬어?” “뭐가?” “알잖아. 무슨 말인지.” “살려고 그러는 거야. 살려고. 산 사람이라도 살려고.” “아무리 상황이 이렇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써 최소한은 지키고 살아야 하잖아. 인간이길 포기한 거니? 제발 우리 짐승은 되지 말자” “야! 박정욱! 너만 인간이냐? 너만 인간이냐고?” 상현과의 한바탕 언쟁이 있었지만 그날 이후로 어김없이 식탁에는 단백질 요리가 올랐으며 식탁 에서 오고가는 말들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무거운 공기를 함께 아주 조용 히 나누어 먹었다. 나를 비롯한 몇 명은 그 무거운 식탁을 거부했다. 보기에는 너무나 맛깔스럽게 요리된 그들이 따박따박 식탁위에 오르는 것도 매스꺼웠다. 우리는 ‘식탁의 사람들’과 ‘식탁 외 사람들’로 나뉘었다. 하루는 따져 물었다. 꼭 그렇게 해야겠 냐고. 그들을 식재료 취급을 해야겠냐고. 그러면 ‘식탁의 사람’들은 인간으로써 품격을 나름대로 지키는 것이라고 답했다. “인간과 동물은 생각보다 많은 차이가 없어. 그래서 자칫하면 동물로 떨어지게 되지. 우리가 지 금 여기서 지킬 수 있는 동물과의 차이점이 뭔 줄 아니?” “.....” “바로 요리야. 인간은 먹을 때 먹더라도 그냥 먹지 않아. 요리를 해먹지. 요리를 해먹는다는 것 은 인간이 가진 특권이자 품격이라고. 그래서 지옥에서 식사를 하더라도 우리는 요리를 해먹어야 겠어.” “…….짐승이나 동족을 먹는다고!!” 19


“그래서 더욱 요리를 해 먹어야해!! 짐승이 요리하는 거 본적 있어? 까놓고 말해 살생을 하자는 것이 아니잖아. 생명이 다했으면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라고.” 어차피 끝을 향해 달려가는 열차에 탑승한 이상 그 종착점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재료가 무엇 이 되었든 요리를 해서 먹는 것이 마지막까지 인간답게 짐승보다 우월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라 믿는 이들이었다. ‘식탁 외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죽음이라는 결말이 뻔히 보이지만 살아있던 죽었던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지 않는 것이 마지막으로 지킬 수 있는 인간의 품격이었 다. “누나는 인간도 아니야.” “그럼 너는 인간이야? 지금 네 꼴을 봐. 인간의 모습인지!” “꼴은 병신 같지만 난 마지막 죽을 때까지 인간다움을 지킬 거야.” “인간다움이 뭔데? 어차피 너나 나나 종착역은 똑같아. 죽음이라고. 종착역에 도착할 시간이 얼 마 남지 않았어. 너처럼 살다가는 도착하기도 전에 추락하고 말거야. 정신 바짝 차리고 잘 생각해 봐.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것인지.” “추락은 ‘식탁의 사람들’이 했지. 태어나길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끝까지 인간은 아니라고. 인간 다움을 지켜야지만 인간답게 갈 수 있는 거야! 요리하는 것이 동물과 차이점이라고? 그걸 말이라 고 하는 거야? 누나는 짐승이 된 이상 인간의 탈이라도 쓰고 싶은 것뿐이라고!” 정해놓은 식사 시간이 임박하면 늘 주방에서는 요리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현기증을 일으 켰다. 하지만 누군가는 침고이게 하는 소리였다. 눈에 띄게 두 집단의 모습은 달라졌다. ‘식탁의 사람들’은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혈색이 좋아지면서 인간의 모습을 찾았지만 ‘식탁 외 사람들’은 눈 아래가 한없이 꺼지고 앙상하게 말라버린 팔다리가 떨리는 모습은 말라비틀어진 고목 같았다. 지금 내 곁에는 지호가 죽어가고 있다. 지호는 너무 오래 굶어 빛을 잃은 지 오래다. 너무나 괴 롭다. 지호가 죽어가는 것도 괴롭지만 지호도 저 식탁위에 오를까봐 겁이 난다. 인간다움을 지키 겠다고 큰 소리 쳤지만 지금 당장 지호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조차 알지 못하겠다. 지호를 지켜 주는 방법은 방치하여 썩게 두거나, 화장해서 재만 남게 하는 길 뿐인데 좁은 지하 공간에서는 모두 불가능하다. 최소한 지호를 지키려면 내가 ‘식탁의 사람들’보다 오래 살아야하는데 그마저도 불가능할 것 같다. PM 12:12. ‘식탁의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그들’이 식탁에 오른 지 수 일째 되는 오늘, 이제 식탁 위에는 대화가 돌아왔으며 옅은 웃음이 조금씩 피어났다. 바라보는 식탁의 풍경은 눈부시게 끔찍하다. 그리고 맛있는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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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음식이만들고싶어졌어 Good Together

어색한 자리가 싫어 여러 번 고민하고 나간 모임에서 호탕하게 웃는 너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다시 음식이 만들고 싶어졌어 화려하고 자극적인 음식 말고 멋지지만 왠지 불편한 그런 음식 말고 담백하고 깔끔하지만 고소하고 몸에 좋은, 씹을수록 달콤한 음식들로 소박하고 깨끗한 접시에 담아 너와 저녁을 함께 먹고 싶어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된장찌개와 너가 좋아할 것 같은 묵은지 조림을 맛나게 지은 하얀 쌀밥 위에 올려 들기름에 알맞게 구운 두부와 가지와 맛나게 먹을 거야 처음엔 어색해 테이블 위에 손이 부딪치고 반쯤 먹고 나면 젓가락이 아닌 손가락으로 김치를 찢어 밥 위에 올려주고 밥을 다 먹고 나면 우리는 편안하게 앉아 농담을 하겠지 오늘 저녁 시간 괜찮아? 그렇게 예쁘게 웃지만 말고, 우리 집 가서 밥 먹자. 너도 분명 좋아 할거야, 내가 널 위해 차린 그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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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가 있는 풍경 김마리 비가 내리고 있다. 집에 돌아온 은영은, 불을 켜 집 안에 가득 차있는 어두움을 몰아낸다. 천천 히 주방으로 걸어가 김치를 찾는다. 김치찌개를 할까 김치전을 할까 망설이다가 두부김치를 내어 낸다. 뽀얀 두부를 물에 살짝 데치고 날것의 배추김치를 옆에 가만히 두면, 완성 된다. 간편하다. 솔솔 졸음이 온다. 일요일 아침.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책을 읽는다. 때는 대학입학시험을 마치고, 사회로 나갈 것인지, 잠깐 더 학생의 삶에 머무를지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이다. 방바닥은 더없이 따뜻하고 손에는 달고 상 큼한 귤이 먹기 좋게 벗겨져 들려있다. 활짝 열린 은영의 방문을 타고 어머니의 요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요리하는 내음도 함께 묻어있다. 톡톡톡톡.. 도마 위를 가르는 소리는 깍둑썰기, 어슷썰기, 반달썰기, 얄팍썰기… 식재료 모양 내 는 소리... 모두 다 각자만의 소리를 안고 있다. 보글보글 김치찌개가 끓고있다. “은철아, 은영아 밥먹어라~” 하던 일을 모두 재쳐두고, 벌떡 일어서서 식탁에 나와 앉는다. “엄마~ 밥이 아직 없잖아요~” 오빠의 투덜거림에 엄마는, 은영에게 눈길을 보낸다. 은영 역시 바로 밥이 차려져 있지 않은 것 이 불만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지못해 일어나 밥솥에서 김을 빼고, 가지런하게, 지평선과 평행을 유지하고 있는 밥 알들이 떡 지지 말라고 요리조리 공기를 넣어준다. 그리고 수북하게 공 기에 밥을 담는다. 오빠가 싫어하는 콩을 오빠 밥 바닥에 가득 깔아놓으며 속으로 히죽거려본다. 대학생이나 됐으면서 밥투정은.. 그러면서도 은영 역시 누군가 차려준 밥상을 홀딱 먹고 싶은 마 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밥상이 그립다. 온전한 밥상을 은영 스스로에게 차려 주는 것은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 일이었다. 재료를 씻어 다듬고, 완성될 음식에 맞는 조리법 으로 새로이 반찬을 만들어낸다. 반찬 하나만으로는 온전한 식탁이 아닌 한국인의 식탁. 정성을 다해 반찬을 서너개 만들고 나면 녹초가 된다. 해 둔 지 오래된 반찬과 이제 막 해 낸 것. 그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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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차이를 아는지. 밥도 채 푸지 않고 은영과 오빠를 불렀던 어머니의 마음을 그제서야 이해하 게 되었다. 이번 주말에는 엄마에게 맛있는 밥을 지어드려야겠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해물탕은 어떻게 끓여 야 하는 걸까? 퇴근하고 인터넷 블로그를 좀 뒤져봐야겠다. 지글지글.. 촤아~ 손바닥만한 프라이팬을 예열한 후, 기름을 두른다. 그리고, 능숙하지만 조심스럽게 계란 한알을 톡, 까서 올린다. 촤르륵 지그르지그르... 반투명의 계란 흰자가 엷게 희게 올라온다. 노른자 역시 날것의 색감을 자랑하다가 이내 나 익었소 하는 색으로 변하고... 노릇노릇하게 계란프라이 하나 가 완성된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잡곡밥에 김이 이내 가라 앉는다. 얼린 밥을 녹였을 때의 한계인가. 오늘 같은 날, 어머니의 요리가 간절히 생각난다. 한끼 식사를 위해서 이렇게도 분주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제 손으로 모두 지어먹기 전까지 영철은 미처 알지 못했다. 방금 한 밥과 반찬이 그동안 너무도 당연했는데, 그런 당연한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새삼스레 느끼는 영철. 식당에 들어간다. 메뉴판을 쓱 둘러보고, 손쉽게 메뉴를 선택한다. 식탁 앞에 앉아서 가만히 노 닥거리고 있으면, 이내 몇 첩 반상이 나온다. 당연하듯. 당연하듯 차려진 밥상을 바라보며 어머니 의 요리를 또 한번 떠올린다. 어머니는 바깥 음식을 유난히 싫어하셨다. 손수 자신이 모든 것을 해 내셨다. 자신이 고생하는 줄 알면서도, 밖에서 얼마나 음식을 막 만들지 걱정이 되신다며, 매 일, 아침밥을 새벽같이 지어내셨다. 이번 주말에는, 바깥음식을 아무리 싫어하셔도, 어머니께 맛있는 요리를 대접해야겠다. 깔끔하고 정갈한 한식당 연락처가 어디 있었더라.... 따수운 밥을 입안 가득 넣고 오물거리는 자식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바라보는 것만으 로도 배가 부르다는 것이 그래서 나온 말일까. 식구들의 밥상을 차리다 보면, 내 배 주린줄도 몰 랐다. 출근이며 등교며 한차례 전쟁을 치르고 나면, 그제서야 몰려오는 피로와 허기를 누르고 바 삐 출근준비를 했다. 콩나물시루보다 비좁은 버스를 타고 두어시간. 일터에 갔다. 워킹맘. 저녁에 는 아이들이 스스로 저녁을 챙겨먹어야 했고, 엄마로서 함께해주지 못하는 시간들에 대한 안타까 움과 미안함이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독립하고 난 지금도 여전히 새벽 네시면 눈을 뜨게 된다. 고된 가사노동은 소일거리 수준이 되었다. 남편이 빨래며 청소도 곧잘 도와주는 요즘이라 육체적 23


으로는 한결 편안해졌다. 분주함과 수고로움은 덜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참 좋았다는 마음이 든다. 따뜻했다. 눈이 부셨다. 주말에 아이들이 온다고 한다. 은철이가 좋아하는 불고기와 은영이가 좋아하는 미역국을 끓여야 겠다. 오랜만에 장을 보러 마트에 간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설렌다. 남편은 또 질투를 할 것 같 다. 자기 자식이기도 하면서 웬 질투심을 그리 내보이는지... 낙지 한마리로 그이의 마음은 달래 주면 되겠지~ 오랜만에 온기가 가득 찬 식탁이 되겠구나. 나 조금 행복하네. 참 잘 살았다. 내 인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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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보기 휘파람 아담한 접시에 정갈하게 담긴 나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와 잘 익은 쌀밥. 모처럼 공들여 만 든 소박한 밥상에 괜스레 뿌듯하다. 손수 만든 집 밥을 어디한번 먹어볼까 하고 한 술 뜨는데 고 개가 갸우뚱 돌아간다. 찌개는 조금 짜고 나물은 싱겁다. 오늘도 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엄마도, 요리 잘하는 내 친구도, 티비에 나오는 요리사도 소금과 설탕, 고춧가루, 간장 등의 양념 을 적당히 넣어가며 간을 맞추라고 한다. 친절하게 몇 티스푼, 종이컵 몇 개 분량 나아가서는 정 확한 그램 수까지 알려주는 곳도 있지만 그것을 1인분의 양에 맞게 또는 내가 가진 재료의 양에 맞게 나누어 계량하자니 그냥 사먹고 말겠다. 중간중간 간을 봐가면서 싱거우면 소금 또는 간장을 혹은 재료에 따라 설탕을, 짜면 물이나 물이 많이 나오는 채소를 넣으라는 것도 이론일 뿐이다. 소심한 나는 물이 끓기 시작할 때부터 간을 보느라 국물을 열 숟가락은 먹는다. 어 너무 싱겁네, 간장 한 번, 소금 한 번. 깊은 맛이 안 나는 데? 연두를 넣어볼까. 또 한 번 후루룩. 고춧가루를 더 넣어? 에이 넣어보자. 요리가 완성될 쯤이 면 내 혓바닥은 데여서 얼얼하고 이게 짠건지 싱거운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또 한 번의 실패작 이 완성된다. 이런 오랜 실패의 경험을 통해 나에게 각인된 ‘간보기’의 이미지는 정성과 기다림, 적당함이다. 나는 요리의 모든 과정 가운데 간보기에 가장 정성을 쏟는다. 혀 끝에 감각을 집중시켜 입에 머 금고 찬찬히 굴려보면서 싱거운지 짠지 고민한다. 양념이 재료에 배여 간이 조화를 이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자꾸 뚜껑을 열어 맛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무엇보다도 요리가 어려운 나 같은 이들에게 악명 높은 ‘적당히’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너무 짜지도, 너무 싱겁지도 않게. 기타 를 튜닝하는 튜너처럼 요리에도 짠 정도를 알려주는 요리튜닝기가 있으면 좋을텐데. 요리의 핵심인 중요하고도 어려운 이 ‘간보기’가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땐 왜 부정적으로 쓰이는 지 간보기에 매번 실패하는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모든 관계에서의 ‘간보기’란 본질적으로 다른 ‘상 대방’과 ‘나’라는 재료가 한데 어울려 하나의 맛있는 요리가 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과정인데. 어쩌면 ‘사람을 간본다.’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는 건 우리가 정성껏, 적당히, 기다리면서 간 볼 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는 짠 맛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싱거움을 즐기는 데, 나의 입맛을 강요하는 것처럼 짜증나는 일도 없는 것처럼. 내 입맛에만 맞추어 간을 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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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본 두 번째 프로젝트 연작소설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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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릉-그르릉—그르르르릉-----‘ 연식이 있는 듯한 차 엔진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내가 지금 가고 있다고 손짓이라도 하듯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저 멀리서 흔들린다. 일단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 에 이 깊은 산속을 빠져나가야 한다. 하지만 문득 저기 다가오는 차는 아까 날 버리고 갔던 자가 아닐까, 다시금 나의 상태를 확인하러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간다. 아 아니 다. 일단 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지금 저 차가 나를 구해 줄 거라는 직감이 든다. 허겁지겁 가파른 산을 네발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낙엽이든 가녀린 나뭇가지든 디딜 수 있는 모든것들을 죄다 비벼 재끼며 비탈을 뛰어간다. 이미 빨갛게 범벅이 된 손이지만 정현의 머리 속 엔 그런 고통 따윈 느낄 여유가 없었다. 난 지금 저 차를 잡아야만 한다. 도로면 위에 삼각형 표 지판이 보인다. 손을 뻗어 표지판 파이프를 잡아채며 도로 밖으로 몸을 던진다. ‘끼---이-------익—!‘ 불빛에 눈이 잠시 멀었지만, 여성으로 추정되는 운전자의 모습에 약간의 안심을 한다. 직감이 맞 았다. 내가 아는 사람….수진이다. 수진…인가? "수진아!! 수진아 문 좀 열어봐! 수진이 너 맞지?" 살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소름이 돋는다. 여기서 수진을 만나다니…그러고 보니 이 길, 이 산이 익숙하다. 다시 한번 정현의 머릿속에 수연의 얼굴이 지나간다. 그녀를 고향집으로 데려다 줄 때 오갔던 길이다. 아니 그보다 지금 내 앞의 여자는 수연의 언니가 아닌가. 내가 처한 상황을 만들 어낸 유력한 용의자 수연의 언니라면, 지금 이 순간 난 수진도 믿어선 안 된다. 자기 눈앞에 있 는 내가 믿기지 않는 다는 듯한 저 표정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머리가 아파온다. 난 지금 내 직감에게 배신을 당한 것 인가. “정현이…? 정현이야?” 그녀의 표정은 이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정현은 이 차로 달려든 것을 후회할 겨를이 없었다. ‘도망쳐야되.’ 뒷걸음질을 치다 뒤를 돌아본다. 다시 올라온 비탈을 내려다본다. 어디로 도망쳐야 된단 말인가. 정현은 다시 몸을 그 위험한 비탈에 맡긴다. 몇 번을 구르더라도 살수만 있다면 무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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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숨이 더 가빠온다. 날 부르는 수진의 목소리가 커져간다. 수진 은 수연과 다르게 온순하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 였는데…이런 잔인한 일을 같이 꾸몄을리 없다. 하지만 누굴 믿어야 한단 말인가.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 속 억울함과 두려움에 정현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된 체 구르고 또 뛰었다. 수진…아니 수연이과의 기억이 정현의 뇌 속을 뒤엉키게 만들고 있었다. 수진을 처음 봤을 때는 말로는 잘 표현해내지 못하는 그녀일지라도 뭔가 정현, 자신과는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꼈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그녀에게는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어쩌면 정현은 수연보다 수진을 먼저 여자로 느꼈을지 모른다. 이성적 호감으로 수진에게 다가갔지만 정 현의 손은 어느새 수연의 손을 잡고 있었다. 지금 이순간 활발한 그녀의 모습이 그를 놀리듯 정 현의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뛰었을까… 그의 눈앞에는 상상이 아닌 진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8 지금 나는, 수연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수진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가. 아니 왜 도망치고 있는 거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충실할 뿐. 살면서 이토록 삶에 대해 갈망해 본 적이 있었던 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의 모습은 진짜 사람인가 내 두려움이 가져오는 환영인

가. 숨이 턱 밑에 차오른다. 블랙아웃 ‘여긴 어디지?’ 가까스로 눈을 뜬 정현은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이곳을, 눈동자를 굴려 찬찬히 관찰한다. 어딘 지 모르게 익숙하다. 그리고 익숙한 향기. 마음이 편해진다. 얼마만의 아늑함인지. “정신이 좀 드니?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아까는 왜 그렇게 뛰었던 거야? 무슨 일이야 정현 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이 사진은 왜 네가 가지고 있어?” ‘이 사람은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이 분명하다. 아니, 나를 아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 지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음에도 묘하게 상기되어 있는 얼굴을 하고 있 는 이 여자는, 대체 누구 일까. 너무나도 익숙한 그러면서도 낯선 그녀의 음성에서 뒤죽박죽 엉켜 있는 감정의 실타래가 느껴진다. 무슨 질문이라도 하고 싶은데,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 자꾸만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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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긴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정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또 다시 정신을 잃은 정현의 앞에서 수진은 황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수진은 일 년에 십여일 정도 한국에 머물곤 하지만 혹은 그마저도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고향집 근처에 자신만의 세상을 숨겨두었다. 가족도 친구도 모르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여. 언제든지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루 낮 시간의 대부분을 자신의 삶이 아닌, 자본주의 사회가 잘 굴러가는 데, 자본가의 주머니를 불리는 데 쓰는 삶으로부터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호수가 있고 수풀이 우거져 사람들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 옛날부터 이쪽 지역은 사람의 접근 이 금지되어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빨강머리 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이층집에 작은 텃밭 이 딸려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한 환경. 새로운 삶으로의 탈출에 최적화 되어 있는 곳이다. 이 곳에 정현을 들일 줄이야. 간소하면서도 조화로운 삶이 수진에게 주어질것만 같은 희망이 희미하게 피 어 오른다. 처음 의식을 잃었을 때와는 달리, 한층 편안한 얼굴을 하고 고르게 들숨과 날숨을 들이 내쉬는 정현을 바라보며, 수연과 정현의 만남이 온 세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던 그 시절의 자신이 떠올 라서 수진은 다시금 쓸쓸해진다. 바로잡고 싶다. 정현의 세상에서 수연이 없었던 시간으로. 수진 과 정현만이 있었던 시간 속으로. 사진. 수진과 수연, 주영과 정현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다. 10년 전 그 날을 어찌 잊을 수 있으리. 수진은 수연과 정현의 반짝임을 바라보는 주영의 눈빛에 서, 수연이 정현과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마다 멍든 가슴을 가만히 내려보고만 있는 자신이 보 였다. 자신의 눈빛을 하고 있는 주영이 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행복함을 말하고 있는 사진 속 얼굴과는 다르게. 영수증. 카드번호 뒷자리 1111, 아… 다른 부분은 정현이 너무나도 꼭 쥐고 있었던 탓인지 피와 땀과 흙이 뒤섞여 본래의 정보 를 읽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일은 수연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수연이 지금의 제부를 만나던 시절,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골드카드를 제부가 가지고 있는데, 그 골드카 드의 끝자리가 1111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제부와 잘 살고 있는 줄로 알았는데 정현이 아직도 수연의 삶에 연결되어있다니, 대체 무슨 이 유로? 주영의 얼굴이 든 사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주영은, 자신의 얼 29


굴이 들어있는 사진을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런 주영이 비록 수진과 수연, 정현의 얼굴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사진을 우리 셋 중 한 사람이 가지고 있게 놔뒀을 리 없다. 세상 천진하게 잠든 정현이 피투성이가 될만한 일이 주영과도 관련 있는 것인가? 대체, 내가 없 는 사이에 이 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정현은, 분명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는데, 돌연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수연으로 착각 했을지도 모른다. 수연은 왜 정현을 죽이려고 했을까. 죽이려고 한 것은 과연 맞을까.

그게 아니

라면 정현이 저토록 엉망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이 될까. 그가 두려워하는 것 은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정현이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이기는 했어도 대체로 냉철하고 이성 적이었고, 두려움에 잠식될 정도로 나약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았다. “나야… 정현이 죽었어… “ 수연이 정현을 죽이려고 했었는지, 수연에게 정현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수연이 어떻게 움 직일지 알아내야 했다. 그래야 정현을 지켜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수연이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면, 만우절 농담처럼 그렇게 웃어 넘길 요량이었다. “언니? 무슨 소리야? 언니?” 자신에게서 나온 목소리가 이토록 날카로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수화기를 잡고 있던, 수연 의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분명 정현은 몇 시간 전에 안전…하게 그저 산길에 버려졌을 뿐일 텐 데..! “나도.. 잘.. 잘 모르겠어.. 고향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흑흑 .. 흐으윽…. “ “언니, 무슨 이야기야? 언니가 거기에 왜 있어? 아. 아.. 귀국했다고 했지, 집에 들른다고 했었 지… 그런데 정현이 왜 죽어, 어떤 모습인데? 부..분명 멀쩡했을텐데. 아.. 아..아… 멀쩡했었어. 며칠 전에 길에서 스치듯 만났었거든.” ”언니? 언니, 어떻게 죽었는데? 응응?” 어떻게 죽었느냐 묻는 것이 상식적으로 우선 나올 질문인가. 아니, 이미 수진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상식을 벗어난 것들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정현의 팔목에 있던 자상을 떠올렸다. “칼에 네 번 정도 찔린 것 같아.. 흑흑, 내 차 앞으로 쓰러져서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흑흑 30


흑,, 그러려고 했는데… 내 차가 서있던 곳이.. 낭떠러지 바로 옆이어서,,, 내가 너무 놀라서… 정 현이 떨어졌어… 정현이 사라졌어… 어디있는지 모르겠어… 내가 내가 죽인거야… 내가 죽였나 봐.. 흑흑흑 아아악 끅끅….” 뚝. 뚜 뚜 뚜 뚜 뚜 수진은 전화를 끊었다. 수연이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면 이런 미친 소리에,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이야기의 허점을 곧 파악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었다.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왜 하필 언니가..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수연은 온몸에 힘이 풀렸다. 전화기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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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휘핑크림 이소영 다이나믹듀오 망고청바지 미역국 이진한 구황작물 Rabih 싱숭생숭 Fin.A Good Together 김마리 휘파람

판 실제본 프로젝트

획 실제본 프로젝트

집 변미라

발행일 2016년 12월 4일 Copyright ⓒ 실제본 프로젝트 all rights reserved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프로젝트 참여자 모두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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