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본 14번째: 색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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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본 프로젝트 열네 번째 ‘색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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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색, 블랙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옷장을 열었다. 가장 안 쪽 곱게 모셔놨던 정장. 꽤 오랫동안 입지 않아 비닐 위로 뽀얀 먼지가 쌓여있다. 주연은 먼지가 묻지 않게 조심조심 옷을 꺼냈다. 손에 잡히자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이 옷을 사러 가던 그 날이 생각났다. ‘그 때 아버지의 손 도 이렇게 참 보드라웠지.’ “아~ 나도 좀 사 달라고! 애들 다 정장 입고 올 텐데... 나만 잠바에 청바지 입고 가 란 말이야?” 볼에 난 여드름처럼 온갖 신경질이 삐죽삐죽 폭발한 날이었다. 졸업식엔 꼭 정장을 입고 싶었다.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군 소리없이 공부만 해서 결국 부모님 이 원하는 대로 등록금이 싼 국립대에 당당하게 합격했으니 이 정도 심통은 부려도 된 다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사실 다른 애들이 다니는 비싼 학원 보내달라, 과외 시켜달라는 말 한 번 안 했다. 유행하는 메이커 신발, 가방은 고사하고 최신 휴대폰도 사달라고 차마 졸라 보지 못했 다. 그러니 그 6년의 보상으로 이쯤은 괜찮지 않겠느냐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당당한 떼를 쓴 것이었다. “그래 알았다 가자” 아버지가 갑자기 입을 뗐다. 옆에 있던 어머니가 놀래 소리를 질렀다. “아니 무슨 돈이 있다고 대체! 얘 이제 등록금도 내야 하는데... 당신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객기 부리지 말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 잔소리는 듣는 둥 마는 둥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역시 아빠가 최고야! 내가 봐둔 거 있거든. 어디냐면~” 그런데 아버지는 엉뚱한 곳을 향했다. 백화점이었다. ‘아니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비싼 곳이라고.’ 그런데 아버지의 발걸음은 성큼성큼... 주저함이 없었다. 마냥 신났던 주연의 마음은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고 급기야 불안하기까지 했다. ‘아빠는 잘 모르나? 말을 해줘야 겠네’ 어렵게 입을 뗐다. “아빠 여기는 유행하는 옷 파는데, 좀 가격이 비싸거든. 그러니까 정장은 어차피 거기서 거기니까 내가 아까 말한 할인매장에 가면... 내가 봐둔 거 있거든...” 그러자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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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 이제 성인이 되는데 그래도 번듯한 정장 한 벌은 있어야지. 청바지는 아무 거나 사 입어도 정장은 좋은 거 사야 돼” 앞장서 매장에 들어간 아버지는 평소와는 다 르게 한껏 들뜬 목소리로 직원을 불렀다. "여기 우리 딸 정장 살 건데 뭐가 제일 유행 하는 옷이요?" 신이 난 직원이 서너 벌을 팔에 감고 분주하게 움직이자 아버지도 덩달아 신이 난 듯 했다. "우리 딸이 얼마나 똑똑하냐면 6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니까. 그리고 얼굴은 또 얼마나 이쁜지.." '아빠...제발 그만 좀...' 화끈거리는 얼굴을 진정시키자 아버지의 옷차림이 한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등산바지는 엉덩이와 무릎 부분이 닳아서 허연 자국이 확연했다. ‘저 체크 남 방은 5년 전 엄마가 생일 선물로 사 준 거네. 잠바는...겨울이면 내내 저것만 입으셨구 나.’ 겨우 달랜 얼굴이 더 붉어졌다. 탈의실을 오갈 때마다 더 벌개졌다. 말수는 줄고 한숨은 깊어졌다. 무엇이 맘에 드는지도 모르는 사이 검정색 옷 한 벌을 결국 골라냈 다. 아버지가 웃으며 말한다. "원래 멋쟁이들이 입는 색깔이야. 검정은. 조금만 관리를 안 해도 지저분한 티가 나거든. 단정하고 깔끔하고 차분한 네 성격에 딱이다. 그리고 넌 얼굴이 뽀얘서 이런 색을 입으면 더 이뻐 보일거야. 아빠가 옷 자주 못 사주니까 너 이 옷 잘 아껴 입어야 된다. 나중에 공무원 임용 될 때 또 입어야지" 졸업식이 끝나고 대학에 간 주연은 락밴드에 들어갔다. 검정색 콜라와 커피를 마시 고 검정색 선글라스를 끼고 사회가 우리를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지 핏대 높여 목청을 높였다. 그리고 홍대에서 첫 공연을 하루 앞둔 날. 연습실을 급하게 나서 집에 도착했 다. 옷장을 열었고 옷을 꺼내 입었다. 바로 그 검은 정장을. 밖을 나서자 세상은 온통 파랬다. 유독 시퍼렇게 추운 날이었다. 곳곳은 알록달록했 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한껏 들뜬 장식들이. 주연은 곳곳에 녹색이 가득한 건물로 향 했다. 거기서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멋쟁이들에게 시뻘건 육개장을 대접해 야 했다. 어깨엔 흰 눈이 내려 앉았다. 어깨에 눈도, 주연의 눈에도 투명한 물방울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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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의 혼합 받침대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는 아니었다. 잠깐 다닌 미술학원에서는 여러 수채화의 장면을 담은 사진 중 하나를 골라 이젤 가운데 붙이고 최대한 비슷하게 그리는 연습을 하곤 했다. 같은 그림을 골라도 어떤 아이는 구도에, 어떤 아이는 스케치에, 어떤 아이 는 붓터치에 주어진 시간을 쏟았다. 스케치도, 붓터치도 내 마음대로 잘 안되어 짜증이 났던 나에게 선생님은 넌 대신 물감을 섞어 색깔을 잘 만들어낸다고 했다. 지나가는 그 한 마디에 나의 그림은 스케치북이 아닌 팔레트에 그려졌다. 어울릴 것 같은 두 가지 색깔을 섞어보는 게 먼저다. 섞은 색깔의 반을 여분으로 떼 어내고 남은 반에 이번에는 과감하게 다른 느낌의 색깔을 섞어본다. 세 번째 색깔은 붓끝으로 살짝만 찍어 떨어뜨려야지 붓을 푹 담가버리면 끝이다. 양 조절에 실패한 색 깔은 모든 색의 혼합색인 검은색에 가까워진다. 여러 가지 조합을 거쳐 마음에 쏙 드 는 색깔을 만들어냈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는 온전히 우연이었기에 다시 그와 똑같 은 색깔을 만들어내기란 불가능이었다. 색색깔의 물감이 흩뿌려진 팔레트를 물에 씻어 내면서 다시 만들 수 없을 색깔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던 것도 같다. 삶의 순간도 마치 물감을 섞는 것과 같아서, 한 번 조화를 이룬 순간을 다시 억지로 되풀이할 수 없다. 애써 기억을 되살려 그 색을 만들어내려고 해도 그 당시의 붓이 머 금은 물의 양, 물감의 양을 똑같이 만들 수 없고 조화와 부조화 그 한 끗 차이를 결정 하는 건 바로 이런 우연적 요소다. 나의 의지로 섞을 색깔을 정하고 바로 내가 섞는 행동을 했음에도. 나는 의지도 믿지만 우연도 믿는다. 나는 삶의 장면들에 입히고 싶은 색깔을 내기 위해 다양한 색의 물감을 팔레트에 올려놓는다. 장소, 좋아하는 사람들, 기분, 음악, 마 음가짐, 노력, 여행, 책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물감이 된다. 그리고 섞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까지 노력했으면 되었다. 그 색깔을 입은 순간이 빛날 지 바랠 지는 우연에 맡기 면 된다. 때로는 기대보다 아름다운 색을 띤 멋진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고, 색깔의 톤 은 비슷하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그저 그런 순간으로 남기도 한다. 욕심을 내어 너무 많은 색깔을 섞었다가 온통 거무죽죽해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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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팔레트 속에서 여러 가지 색깔을 섞었던 것처럼, 나는 지금 삶 속에서 다 양한 색깔을 섞어 내 마음에 쏙 드는 순간을 찾는 중이다. 우연에 기대어. 그리고 그 순간을 미련 없이 흘려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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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GE 감은 눈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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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혀


밤하늘을 닮은 색- 블랙 Good Together 움직이지 말아줘 눈에 담고 있으니까 작은 표정 하나하나 맘에 담고 싶으니까 꿈을 꾸는 듯한 눈부신 오늘 밤 별빛이 가득한 너의 눈을 본 순간 난 알아버렸지 지금 우리 사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해 별이 가득한 여름밤에 우린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림 모든 게 다 바래고 지워져도 간직하고 있을게

_ 조용한 여름밤, 혼자 시골길을 운전하다 이 노래를 들었다. 서울을 벗어나니 해가 진, 가로등 불빛 없는 구불구불한 길은 어두웠고, 그만큼 별은 밝았다. 생각 같아선, 길 한켠에 차를 세우고, 차위로 올라가 하늘이나 올려다보며 노래라도 부 르고 싶었지만 소심한 나는 창문을 열고 왼손을 쭉 뻗어 바람을 만져보는 걸로 만족해 야했다. 왼쪽 손끝에 툭 튀어나온 보드라운 무언가가 손가락에 툭- 닿는 순간, 나는 덜컥 네 생각이 났다. 틀림없이 보드라울 네 손을 – 그 손을 수줍게 잡을 수 있는 날이 올까. 가끔, 웃는 너를 보며 생각한다. 어쩌다 우리 둘만 남아버린

캄캄한 오늘 같은 밤, 설레고 서툰 내 마음을 알아차려주

길. 너도 같은 맘이라고 웃으며 내손을 잡아준다면, 그렇게 나도 너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다면 나는 이 깊은 밤을 닮은 블랙을 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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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하늘하늘 어릴적 우리 모두는 이러한 질문에 답해봤다.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니?' 보통 어린 이집 선생님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선생님들이 아이에게 물어본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 로 아이의 심리상태를 유추하는 건지 어디에 써먹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런 질문을 받았던 어릴적에 깜깜하게 비어있던 머릿속이 환해지며 푸르 게 채워졌다. 하늘이 그려지며 구름도 보이고 새들도 날아다녔다. 하늘에 물들어 푸르 게 된 태양와 구름에 덮여 허옇게 된 산까지... 맑아지는 기분도 들고 어쨌든 질문 받 은 그 날만큼은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최근에 나는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인지 대답해본 적이 언젠지 또 누구에게 대답했는 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좋아하는 색 같은 개인들의 취향은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연인이나 가족 사이에선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겠 지만 보통 어쩌다 알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고 직접적으로 물어보지는 않는다. 보통 다 른 사람을 소개받을 때 관심 있어 하는건 나이나 어느 구에 사는지, 학교나 직장은 어 딘지다. 물론 질문하는 사람은 관습적으로 할 말이 없어서 물어보는 것들이겠지만 이런 것들은 나에게 피로감을 준다. 수년간 같은 대답을 해왔고 또 반복하게 될 것이다. 마치 회색빛의 바다에 나를 빠 뜨리는 것 같다. 그 바닷 속에선 색감 있는 것들을 찾을 수 없고, 모두 비슷비슷하다. 질문에 대답하면서 나는 회색빛으로 채색된다. 그리고 이제 내 눈에도 질문하는 사람은 회색빛으로 보인다. 어느덧 주위를 둘러보니 회색 세상이다 최근에 하늘을 떠올려봤는데 희끗희끗 푸른색이 보일뿐 어릴 적 그렸던 시원한 하늘 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하늘을 떠올리며 벅차오르던 감정의 절반도 느끼지 못했다. 중국발 미세먼지가 푸른 하늘을 가린 지 오래되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새파랗고 새하얗기도한 하늘을 떠올리는 법을 잊은 것 같다. 하늘을 그려본 적이 너무 오랜만이 었던 것이다. 그토록 나는 내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소중한 '하늘색'을 잃어버렸다. 어릴 적 상상하던 푸른 태양과 새하얀 산을 다시 찾아보고 싶다. 나에게 관심을 가 지고 좋은 노래와 따듯한 글귀를 볼 때 떠오르는 감정과 색감을 두 손 모아 간직할 것.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색깔도 찾아줘야겠다.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며. 8


반짝반짝, 당신의 빛깔 루모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지용의 시 ‘향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이 구절이 잘 이해되지 않았었다. 특히나 파아란 하늘빛이라는 시어가.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출근을 준비하다가 이 구 절이 떠올랐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줄어들고 거의 몇 가지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 구절이 떠올랐다. 파아란 하늘빛.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았던, 화살을 함부로 쏘아도 괜찮았던, 그래서 유년 시절은 세 상이 온통 희망으로 가득찬 파아란 하늘빛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무엇이든 꿈꿀 수 있 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시간을 쓰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줄, 내 마음을 쓰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줄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지금은 무슨 빛깔일까. 아니 빛깔이 있을까. 졸업식에서 답사를 하며 이런 말을 했 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든지 우리는 빛나는 사람이 되자고. 생활에 부딪쳐 내가 가 진 빛은 다 깎아지고 마모되어 바래버린 것은 아닐지. 슬픔이 찾아온 아침이었다. 생의 의지가 가라앉은 아침이었다. 이제는 화살을 함부로 쏠 수 없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목표물을 조준하고, 때가 올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화살을 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맞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때라는 건 정말 찰나의 순간이거나, 신중하겠다는 명목 으로 주춤주춤하며 때가 때인지도 모르고 놓쳐 버리거나, 욕심을 부려 더 좋은 때를 기다리며 흘려보내기 일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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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섬주섬 화살을 꺼내고 시위를 당겨보는 시늉을 한다. 우연에 기대어도 본다. 기적을 바라기도 해보고,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의 기운이 도와준다는 허무맹랑한 말에도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 찰나가 내게 오기를. 내 안의 빛깔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 당신은 서른 넘어 시작한 그 일을 육십년 간 즐겁게 해내고 싶다고 했다. 이젠 여행을 가는 것도 모두 아까운 시간이라 고 했다. 서른넷에 처음으로 직장을 갖고 지금 하는 일로 한 달에 백만 원만 벌게 되 어도 너무 행복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런 당신이 더없이 부러웠다. 내 이름만 불러 도 벚꽃 잎이 흩날리는 거 같다던, 그럼에도 이렇게 고민 많은 나는 봄이 되어도 꽃을 보지 못할 거라던, 당신은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산책하듯이 계속 서성이다 보면 네 차례나 너의 길 같은 게 나타날 수밖에 없을 거 야. 수많은 군중 속에 너와 같은 사람들이 노란 불을 들고 여기라고 말하는 그런 때가. 노란 빛깔을 찾아, 빛깔 없는 세상에서 나를 향해 손짓하는 노란 빛깔을 찾아 조금 더 서성거려야겠다. 조금 더 산책을 이어가야겠다. 나의 빛깔을 알아준 당신을 위해, 그리고 알아 줄 당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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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 – 요리 – 색깔 이진한 미술관에 도착한 영훈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좀처럼 결정할 수 없었다. 전시 같은 걸 혹시 안 좋아하냐는 수정의 질문에 본능적으로 좋아한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영훈은 이 런 공간이 불편하다. 자고로 미술관이란 교양을 갖춘 부자들이나 오는 곳이라며 가볼 생각조차 갖지 못했던 그다. 더욱이 시간 되냐는 수정의 말에 즉각 글라스락을 돌려받 을 수 있겠다는 안도감을 느낀 영훈이 만남을 앞두고 긴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계를 바라본 영훈은 자신이 너무 빨리 왔음을 인정했다. 처음 오는 곳이었기 때문 에 길안내 앱에서 알려준 시간보다 미리 나온 탓에 적어도 삼십 분은 기다려야 했다. 안에서 기다려볼까 싶었지만 편히 앉을 만한 곳엔 이미 사람들이 많았고, 카페로 추정 되는 곳은 그냥 봐도 비싸 보였다. 어쩔 수 없지 – 조금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영훈 은 평소에 읽고자 했던 책을 꺼내 본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는 소설가의 책 이었다. 사실 이 책을 알게 된 계기도 그리 이상적이지는 않다. 얼마 전 등록한 학원 앞자리 의 예쁘장한 여학생이 쉬는 시간마다 읽고 있기에 선택한 것이었다. 한 여자와 만나기 로 한 장소에서 다른 여자가 연상되는 책을 읽고 있다니 – 영훈 스스로도 자신이 조금 배덕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수정이 도착한 시간은 정확했다. 그들이 만나기로 한 11시에서 단 일 분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 또한 대중교통으로 온 게 분명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영훈은 수정 이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일찍 오셨네요? / 아, 네. 안녕하세요. / 무슨 책 읽고 있었어요? / 아, 네. 마르케스 책이요. 놀랍기는 수정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영훈이 들고 있는 책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언젠가 어떤 영화에서 주인공이 세계 모든 나라에서 저 책의 초판본을 모으는 게 꿈이라는 말을 듣고 저 사람보다 본인이 먼저 모으겠다는 다짐까지 했을 정도다. 하지만 수정은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 책이 영훈을 과대평가하지 않을까, 또 영 11


훈에게 필요 이상의 기대감을 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였다. 둘이 가야 할 전시관은 건물 내부에서도 꽤나 걸어야 했다. 와 여기 참 넓다 – 영훈 이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에 수정은 그가 이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아무렴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공간인데 넓다고 감탄하다니. 수정은 괜히 오자고 했나 걱정하면서도 어쨌든 보고 싶은 전시에 와서 좋았다. 물론 언제라도 혼자 올 수 있었지만 말이다. 안에서는 물도 못 마셔요 – 수정은 영훈에게 표를 건네며 살짝 도도하게 말했다 – 미 술품이 손상될 수도 있어서요. 그 말을 들은 영훈은 더욱 긴장이 되어 그저 ‘아, 네.’만 연발했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자 둘은 자연스럽게 어색한 거래를 두고 붙어 다녔다. 일행임은 분명한데 도통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없는 그런 거리였다. 그렇다고 수정이 영훈에게 소홀한 것은 아니었다. 각 사조의 특징은 물론이고 작품에 대한 설명까지 작지만 편안 한 목소리로 전해주었다. 사람들이 귀에 꽂고 있는 오디오 가이드의 역할을 수정 본인 이 했던 것이다. 영훈은 그런 수정의 모습에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다. 전시관의 오렌지빛 조명 밑에서 그녀는 더욱 예쁘게 보였고, 관심사에 대한 애정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여운을 남겼다. 게다가 수정의 목소리를 더욱 잘 듣기 위해 조금씩 다가간 것 이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 최초의 어색함도 많이 사라졌다. 영훈은 그녀를 보며 그림 을 보았고, 또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림을 보았다. 그렇게 작품들을 감상하던 영훈은 어떤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살색의 천사 대 여섯에게 둘러싸인 한 여성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었다. 아련한 색감이 그림 전체를 따 뜻하게 감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심에 있는 여인의 홍조, 그 리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영훈을 매혹하고 있었다. 그림 속에는 영훈이 좋아하는 색깔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낯선 조합에 영훈은 최초로 감동을 받았다. 미술 작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감동을. 수정은 그런 영훈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 사람도 이제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겠구 나 – 수정은 본인이 정한 두 번째 만남의 장소가 단지 그녀에게만 만족감을 주지 않았 음을 직감했다. 영훈은 그렇게 본인도 모르게 수정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말았다. 12


그 그림, 윌리앙 부그로의 <포위>라는 작품이에요. 에로스에 둘러싸여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여성을 묘사한 작품이래요. 수정은 작품에 대한 짧은 해석만 말해주고 더 이상의 말을 더하지 않았다. 영훈은 수 정의 설명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저 둘은 한동안 자리에 머 물며 그림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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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과 파랑 사이 연두색 머그컵 난 보라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유난히 빨간색과 파랑색을 많이 섞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림은 가르쳐주는 사람이 좋아하는 색을 따라 그리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빨간색과 파랑색을 섞으면 보라색이 나온다.) 우선 빨간색과 파랑색이라고 한정시키기는 했지만, 빨간색과 파랑색 안에도 무수히 많은 색들이 나뉘어져있다. 이런 색들을 하나씩 섞다보면 또 무수히 많은 보라색이 나 온다.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색도 나오고, 흰색에 가까운 보라색도 나온다. 보라색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무수한 보라색을 모조리 싫어하는 건 아니다. 이 다양 한 보라색에서도 어떤 색은 좋고, 어떤 색은 별로다. 그렇다고 별로인 색이 내 그림에 또 빠지는 건 아니다. 가끔은 좋아하지 않는 색이라도 그림에 꼭 필요한 경우가 있다. 이렇게 색을 섞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색이 나의 개인적 성향을 대변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후배랑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선호하지 않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후배에게 난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라며 말을 이어갔는데, 후배가 “에이, 저번 에 컵라면 국물 엄청 먹는 거 봤는데요! 언니 좀 모순되는 식성인거 같아요. 레토르트 식품도 안 좋아한다고 하면서, 컵라면은 또 엄청 좋아하잖아요!”라고 했다. 그리고 곰 곰이 생각해보니, 후배가 한 말도 다 맞고, 내가 후배에게 나에 대해 말한 것도 다 맞 았다. 난 레토르트 식품은 싫어하지만, 컵라면이나 핫도그 등은 좋아하고, 국물은 싫어해서 평소에 국이나 찌개를 잘 먹지 않지만, 가끔 엄청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범주가 있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범주의 모든 것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또한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항상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색깔과 음식처럼 어떤 큰 범주 안에는 무수히 많은 변수들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무언가를 싫어한다거나 좋아한다는 표현을 함부로 쓰면 나처럼 모순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가끔은 싫어하더라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생긴다. 14


어렸을 때는 무언가에 분명하고 확실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멋있고, 본받고 싶 었는데,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분명하고 확실한 태도보다는 모든 것을 포용 할 수 있고 둥글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멋있어 보이고, 그렇게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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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나무위에 개구리 범칙금납부 통고서 고지번호 : 112120165006950 일시: 2016년 2월 28일 09: 49 금액: 20,000원 적용법조항: 도로교통법 제 10조 2항 위반내용: 보행자위반(육교로밑, 지하도 바로위외의 무단횡단)

엄밀히 말하자면 이면도로는 아니지만 보통 이면도로라고도 부르는 우리 동네 주택 가 근처 좁은 도로위에서 딱지를 뗐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히 건넜기에 신분증 을 요구하는 경찰 앞에서 아직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정신 못차린채 순순히 따른다. 찌 릭찌릭거리며 출력되는 고지서를 보고나서야 눈이 번쩍뜨이며 같이건넌 저 사람도 있 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고 떼를 써보지만 헛 일. 무표정한 교통경찰은 이러한 경 우엔 시간끌어봤자 귀찮아진다는 걸 잘 안다는듯 순식간에 처리하고 자리를 뜬다. 내 손에 든 고지서를 순순히 인정하기엔 떠오르는 핑계거리가 많았다. 내가 가로지 르는 길 좌우로는 횡단보도가 있었는데 두 횡단 보도 사이 거리는 100미터도 안되보였 다. 나는 평소와 같이 그 횡단보도들이 동시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길을 건넜다. 당연히 차들이 신호를 지킨다면 내가 건너는 길은 지나가는 차 한 대 없이 안 전하게 건널 수 있기때문에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쉽게 건너던 길이다. 그날 도 내 옆의 모르는 아저씨와 함께 건너던 참이었다. 또한 4차선이지만 좌우로 주차된 차들로 인해 사실상 2차선인 도로는 그나마도 설치된 많은 횡단보도때문에 차들이 빠 르게 다니지도 못했다. 지난 4년간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그 길을 건너곤 했다. 그래, 어쨌든 내가 법을 어겼으니 잘못했다고 하자. 그래도 이정도는 계도 정도로 넘 어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날 이후로 매일아침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이 일이 생각나

서 화가 치밀었다. '아니야, 경찰관들도 실적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그 경관도 사정이 있었겠지' 혹은 '그래, 더 큰일 당하기 전에 적당한 예방주사를 맞은거야' 라고 애써 침 16


착하려 시도하다가도 '에잇, 그깟 이만원, 내가 거지도 아니고 그냥 세금 몇 푼 더 내 고 말지' 혹은 '나는 왜 주말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이 깟일을 당하는거야? 그냥 늦잠 이나 잘걸' 하며 표출되지 못한 억울함에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사실 나의 무단횡단에는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가 있었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읽은 글중에 어느 일본인이 쓴 글을 인상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가 말하길 우리는 의도적 으로 무단횡단을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그 법이 옳은지를 항상 고민해보아야 하고 그것이 옳다면 의식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의 첫 걸음을 횡단보도 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 장이었다. 주택가 근처의 좁은 도로위에서 차가 오지 않는 것이 명백하다면 굳이 시간을 꼭 낭 비하며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좌우만 잘 살핀다면 오히려 신호가 바뀌자 마자 횡단보도에 뛰어드는 것 보다 안전하지 않을까? 그 일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통계적으 로도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좌우를 잘 살피고 건너기 때문에 신호만 보고 바 로 건너거나 핸드폰에 빠져 건너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사고 확률이 낮다고 이야기 한 다. 물론 이는 일본이나 유럽처럼 차보다 사람이 먼저인 국가에서나 나오는 통계일 것 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운전자의 낮은 교통의식 개선이 급선무 일지 모른다. 우리가 법을 지키는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합당하다고 우리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 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 단순히 그렇게 교육 받았고 그것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적이 없으며 다른 모든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 뿐일 수도 있다. 과거 신호를 항상 잘 지키던 내 모습을 돌아 보았을 때 그것이 더 안전해서 그랬다고 나는 감히 말 할 수 없다. 그냥 그렇게 하는게 옳다고 배워서 였거 나 단지 옆 사람들이 가만히 지키고 있으니 혼자 건너기 어려워서인 경우가 대부분이 었다. 아무래도 무리에서 혼자 튀는건 어렵기 마련이다. 이 일본인의 주장에서도 중요한 것은 횡단보도가 아니라 주어진 규칙에 대해 비판적 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바로 얼마전, 그리고 아직도 진행중인 이 역사에 남을 질서있는 대규모 집회에서 더 이상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지 않느냐는 목소리 도 일부 있었다. 물론 우리의 경우엔 아직 이르다는게 대부분의 의견이었고 나도 동의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평화가 답이 아닐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법이 무 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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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법의 처벌도 감내한 여러 위인들을 존경한다. 내 신념이 투영된 행동이 법을 위반하는 결과였기에 법칙금을 납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부에게는 납부할 세금이 없다며 납 세를 거부한 헨리데이빗 소로우가 되는 것도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나는 빨간 사람이다. 단지 그들의 맘에 들지 않기 때문에 빨간 것 일 수도 있지만, 정말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나라를 전복시킬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서 빨간 사람 일 수도 있다.

나는 오늘 아침도 빨간 불이 들어오자 도로를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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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단상

라마 리 <‘살아 있다는 거, 그것만으로도 너무 굉장해서 눈물이 흐르는 일뿐이네요….> 탁. 읽고 있던 책을 집어 던졌다. 눈물이 났다. 살아 있는 것이 굉장해서라기 보다는 살 아있음이 너무 힘겨워서, 왜 사나 왜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가볍고 시시하게 읽기 위해 기분전환용으로 -의례 그 작가의 책은 그러하였으므로- 골라든 그 책에서 삶의 의미를 억지도 덧씌우는 느낌을 받으니 짜증이 났다. 이토록 힘든 삶을, 무슨 의미로 어떤 이유로 사람들은 그렇게 묵묵히 혹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나는 왜 힘이 드나. 그건 아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며, 어떻게 살아도 불안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며, 소중 한 것들이 자꾸 사라져 가는데, 새로 소중한 것들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회사는 다니고 싶지 않으나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사 실 때문이며,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성경구절 비슷한 경문이 머릿속에 맴돌기 때문일 것이며….. 은희는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고 있다. 몇 년 째인지 모르겠다. 20대를, 그 의미를 찾느라 다 보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중등학교 시절에 답을 내었어야 하는 일이었는 데, 여전히 그 의미를 찾고 있는 자신에 제대로 된 중등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어쩐지 씁쓸해진다. 카톡이 울린다. ‘너 이지우 아니?’ ‘응, 왜?’ ‘죽었대.’ 깜짝 놀랐다. 지우는 신비스러운 얼굴을 가진 아이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진 머릿결. 옅은 갈색 눈동자, 희고 정돈된 피부에 오똑한 코 붉고 도톰한 입술. 도도 19


해 보이는 생김과는 다르게 털털하고 착한 성품. 목소리는 의외로 중성적인 일찍이 아 역배우로 활동하던 그러면서도 학교 생활은 충실했던 지우. 특별히 친하게 지내지는 않 았지만, 도시락을 같이 먹기도 하고 이런 저런 대화도 나눴던 기억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만큼 예쁘게 태어난 만큼 행복하게 살 것만 같았던 그 아이가 죽었다고 한 다. 사인은 암. 은희는 진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응, 어쩌다 그랬대?” “암이래. 나 걔랑 밥도 같이 먹었는데, 지금 실시간 검색어 1위야 대박이지.” “그러네, 아 좀 그렇다.” “나 계속 누워있었는데, 누워서 인터넷 보고 있었는데, 기사 보고 일어났잖아. 인생 참 짧다.” “잠깐만~” 은희는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휴대폰으로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본다. “그러네.. 발인까지 끝났네. 잘 살고 있을 것 같았는데, 참 그렇다. 정말 짧다. 화무십 일홍인가…” “그러니까…..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그것도 참 잘 안돼. 그치?” 조금만 힘들어도 피하고만 싶고 죽고 싶단 생각 정말 간단하게 하는데, 지우는 살고 싶었을까.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암투병이라…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인 것 같아. 걔 일이 잘 안 풀렸잖아. 스트레스 되게 받았을 것 같아” 이어지는 진경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나 요새 스트레스 엄청 받는데, 역시 건강이 최고인 거니” “이를 테면 그런 거지 뭐. 걔도 생각해보면, 참고, 담아두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아 김 민경, 조보람 같은 애들이랑 다녔잖아. 조용한 애들.” “나도 담아두는 스타일인데 무섭다~ 요즘 진짜 막 살고 있는데, 끼니도 막 거르고 어 떨 땐 막 먹고 운동도 할 땐 죽을 듯이 했다가 안 할 땐 손도 까딱 안하고, 계속 야근 하고..” “너도 알다시피 나 진짜 독했잖아 맨날 밤새고 공부하고, 근데 어느 샌가 무섭더라. 20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 들어서 겁나” 은희는 방금 전까지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경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진짜 죽음에는 겁을 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건강하게 살고 있지 않은 자기 삶의 방 식에도 걱정의 마음이 들었다. 잿빛 하늘에 눈발이 날리고 있었는데, 두텁게 보글거리 는 짙은 구름 사이를 뚫고 묘하게 새파란 하늘이 드러난다. 아는 사람의 죽음이 당장 의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은 아주 잠시뿐이다. 지금의 환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임 을 안다. 다만, 삶에 찾아오는 작은 계기들을 순간순간 꼭 붙들어 삶을 생기 있게, 열 과 성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는 다시 오지 않으며 미래는 지나가는 줄도 모르게 지나며 오직 오늘이 있을 뿐 이다. 죽을 것 같은 순간도 곧 과거가 되어 잊히게 될 것이며, 희망을 가득 실은 미래 도 현재를 통과하여 과거로 흘러갈 뿐이다.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것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응, 그래도 자꾸만 조바심이 들어, 이렇게 빠르게 청춘이 흘러갈 줄이야.. 나는 아직 도 우리가, 젊다고 생각하는데.” “그치, 젊기는 한데, 어리지는 않고, 그러면서도, 언제쯤 우리가 어른이 될 수 있을지, 몸은 어른인데, 어렸을 적에 우리 지금 나이 또래 사람들 보면, 그냥 딱 어른이다 이렇 게 생각했었는데..” “은희야, 너 점심시간 끝났다! 얼른 들어가!”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고마워~ 진경아, 힘내고! 오늘도 파이팅 하자! 우린 그 래도 살아있으니까! “ 마음속으론 TT…를 그리면서도 씩씩하게 사무실로 향하는 은희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무채색의 옷을 걸치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강이 나 초록의 외투가 아닌 검정이나 감색의 외투를 걸치는 일. 총총 걸음으로 비슷한 옷 차림을 하고 각자의 일터로 잠깐의 점심시간을 뒤로한 채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 애틋하게 느껴진다. 안아주고 싶다. 다들. 힘내요! 파이팅! 우리, 사는 동안 살아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 살지는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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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시인, 이채 점점 멀어져 가는 시간을 앞에 두고 당신은 무슨 생각에 잠기시나요 황무지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 멈추지 않고 걸어온 시간을 뒤로하고 당신은 또 무슨 꿈을 꾸시나요 날마다 정성스레 가꾸어 온 삶의 밭에 봄날의 푸른 잎과 향기의 꽃 뜨거운 눈물로 익은 보람의 열매를 기억하며 등잔 같은 당신의 겨울 밤을 위해 마음의 두 손을 모으고 아늑한 평온을 기도합니다. 당신은 지금도 당신보다 추운 누구에게 선뜻 따뜻한 아랫목을 내어주지 않던가요 당신의 마음으로 세상은 따뜻해요 얼어붙어 깨질까 두려운 12월의 유리창에 당신을 닮은 하얀 눈이 인고의 꽃으로 피어나는 계절 또 한 해의 행복을 소망하는 당신의 간절한 기도에 귀 기울이는 동안 나는 작은 물방울의 떨림으로 얼지 않는 당신의 계곡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사막에서 길어 올린 한잔의 물이 희망의 정원에 파아란 새싹을 틔울 것을 믿습니다. 허리를 휘감는 바람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묵묵히 걸어온 당신에게 은은한 위로의 차 한잔 건네며 이 한마디 꼬옥 전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한 해는 훌륭했노라’고.. 22


여성스러운 색깔 PINK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분홍색 옷을 입는 내가 많았다. 엄마에게 있어서 분홍색은 여자가 입는 옷이라는 생각이 박혀 있으셨는지 내가 말썽부리지 않고 얌전하기를 바라 셨는지 엄마가 골라준 옷을 입어야 하는 나이에는 내 옷장은 형형색색의 옷들이 많았 다. 하지만 사실 그런 옷들이 썩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키도 덩치도 큰 편이였던 나는 밝고 예쁘고 자그마한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공기놀이, 종이접기를 하기보다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고 놀이터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하는 선머슴 같은 내게 하늘하늘한 분홍색 레이스 치마는 거추장스럽 기만 했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입고 간 분홍색 니트가 하루 종일 어색했는데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뭐야 너 그 색 안 어울려.” 했던 것이 정말 이 색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색이구나 싶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 돈으로 옷을 사고 고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옷장은 무채색으로 가득 찼다. 검정색, 흰색, 회색.. 차분하고 유행안타서 (사실은 날씬해 보이는 것 같아서) 더욱 어두운 색의 옷들을 샀 고 그런 옷을 입으면 어른스럽고 성숙해진 느낌도 들곤 했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느 낌의 옷들이 늘어갔고 엄마는 항상 내 옷장을 열 때마다 맨날 똑같은 색의 옷들만 사 냐고 한마디씩 하곤 하셨다. 어쩌면 그렇게 어두운 옷 속에 나를 억누르고 얌전하고 차분한 사람인척 살아온 것 같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분홍색 하늘하늘한 블라우스가 눈에 띄었다. 촉감도 라인도 너 무 예쁘고 여성스러운 옷이었다.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며칠째 매장을 지 나가며 갖고 싶다는 마음만 커져갔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그 블라우스를 구입했고 생각보다 그 옷은 나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목선도 예쁘게 떨어지고 얼굴도 화사해 보이고 내 스스로가 사랑스럽게 보이 기까지 했다. 하루 종일 만나는 사람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예뻐보이네.”, “어머 그 색 너무 잘 어울려요.” 칭찬을 해주는 날이었다. 왜 난 지금껏 분홍색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던 것일까.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은 나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해왔는데 나도 여성스럽고 싶었고 예뻐 보이 고 싶었고 보호받고 싶은 평범한 여자구나 싶어졌다. 너에게 예뻐 보이고 싶었다. 너에게 예쁘단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분홍색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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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이꼴 꿈 곧미녀 유치원 다닐때는 딱히 좋아하는 색 없었어요. 엄마가 사다주는 색의 옷을 입고, 신발을 신으며 마냥 좋다고 룰루랄라~♬ 꿈도 없었지요. 그저 놀기만 한다면 무조건 좋아요 했던 나이였지요. ㅎㅎㅎ 초등학교 다닐때는 병아리마냥 노랑이 좋다며 입는 옷이며 물건의 색이 거의 노랑이였 어요. 그런 나를 엄마는 노랭이~ 노랭이~ 라고 놀리셨지요. 노랑색을 좋아하는 내가 이상한 가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노랭이~ 라고 놀리시는 저 분이 나를 낳아준 분이 맞으신가 생각했다. ―.,―; 그때는 노랑색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병아리 삐약삐약 거리는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 었어요. 중학교 다닐때는 칙칙하게 검정색을 좋아했지요. 예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참... 프란체스카가 여기 있었구나 생각해요. 이때는 나름의 사춘기를 거치며 엄마, 아빠께 겁 없이 행동했지요. 사촌동생의 동심을 파괴하기도 했어요. ㅠ.ㅠ 고등학교 다닐때는 정신이 좋지 않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보라색을 좋아했지요. 지금처럼 색깔에 의미를 부여하기 전이기 때문에 다행히도 정신이 이상하다는 눈총을 받지 않았지만 야간자율학습시가에 공부하기 싫어서 친구들과 교실, 도서관에서 별별 행동으로 선생님들 놀래키곤 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부끄럽네요. 대학 다닐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마냥 금색을 좋아했지요. 그래서 머리카락색을 4년 내내 금발에 가깝게 염색하며 지냈지요. 이때는 대학만 졸업 하면 취업하기 엄청 쉬울줄 알았어요. 솔직히 그래서 ‘대학 졸업하면 바로 취직하니까 엄마, 아빠께 금 몇 돈 사드려야지~’ 생각했었어요. 어리석은 생각이였지요. 직장 생활을 하는 요즘은 분홍색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여자여자이고 싶어서 물건의 색상이 거의 분홍색이 24


이에요. 옷도 분홍색으로 하고 싶지만, 차분하게 입고 다니라는 지시로 비둘기화가 되 어가고 있지요. ㅠ.ㅠ 요로코롬 쭈욱 생각하면서 써 놓고 보니!! 제가 좋아하는 색깔은 꿈처럼 참 많은 변화 를 보이더라고요. ^^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색깔은 제가 꿈꾸던 것과 비슷하구나 생각 을 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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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정해준 색을 넘어서 아바쿤다카와 [아바쿤다카와 개인전- 색, 그 끝없는 변주] 내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너무나 벅찬 순간이네요. 아무도 내가 성공할거라 말해주지 않았거든요. 아니 오히려 모두가 붓을 놓는 것이 좋겠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내 이름을 걸고 전시회를 할 수 있는 날이 와서 너무나 행복한 날이에요. 내 키가 1m 남짓했을 때 사과를 보라색으로 칠했던 적이 있어요. 선생님이 와서 묻 더군요. “카와야. 카와 그림의 사과는 썩었나봐? 왜 썩은 사과를 그렸니?” “선생님 아닌데요? 저는 아주 싱싱한 사과를 그린 거라구요.” “카와야 싱싱한 사과는 새빨간 색이란다. 카와처럼 보라색으로 그리면 다들 썩은 과 일이라 생각하고 쓰레기통에 버려버릴 거야.” 이상했어요. 분명 그날 제가 보고 있는 잘 익은 사과는 보라색이었거든요. 또 한날을 선생님이 오늘 집에 가는 버스는 노란색버스라고 일러줬어요. “카와야. 오늘은 쿠에쿠 아저씨가 아파서 못 나오셨어. 그러니 오늘만 집에 갈 때 노 란색 버스를 타렴.” “네! 노란색버스를 타고 있으면 집에 갈 수 있나요?” “그럼. 카와가 노란색만 잘 찾으면 그 버스가 평소와 다름없이 카와를 집 앞에 내려 줄거야. 꼭 노란색을 타야한다.” 수업이 끝나고 마당에 나가보니 제일 앞에 노란색 버스가 있었어요. 폴짝 뛰어 올라 타서 바깥이 잘 보이는 창가자리에 앉았어요.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 중 하나가 집 에 돌아가는 버스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큰일이 생긴거에요. 평소에 보던 집들의 모양과 다른 모양의 집들이 있는 곳을 지나갔어요. 저는 무슨 일인가 했 죠. 다만 오늘은 다른 버스를 탔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저희 집에는 가 지 않는 버스였어요. 그날 저는 학교에서 부모님이 데리러 오실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야 했어요. 제가 탔던 버스가 노란색이 아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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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진 몰랐어요. 제가 남들과 다른 색을 본다는 것을. 저는 날마다 다른 색을 보 거든요. 같은 물건이라고 해도 다음날이면 다른 색이 되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저와 똑 같이 매일 다른 색을 보는 줄만 알았어요. 하지만 키가 조금씩 자라면서 제가 특이하 다는 걸 알았어요. 전 아침에 눈뜨고 나면 어제 보라색이던 사과가 오늘은 초록색이었어요. 어제는 빨간 색이던 지붕이 흰색이 되었고요. 날마다 보이는 색이 변하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 아침 이 즐거웠어요. 늘 다른 세상을 보는 재미가 있었거든요. 내일은 또 어떤 색의 세상이 펼쳐질까 기대하며 잠자리에 드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이었어요. 색깔의 변화만으로 가 슴 울리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저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다른 색을 본다는 것이 나중에는 손가락질 받는 일이 되었어요. 그림만 그리면 사람들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바라봤어요. 말도 안 되는 그림을 그렸다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그들의 표정이 너무나 차갑게 느껴졌어요. 제 마음이 얼 어붙는 것 같았어요. <카와는 외계인 눈을 가지고 있다.> <카와는 머리가 조금 아픈 아이다.> 이런 말들이 제게는 너무 아팠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남들보다 조금 다르다는 것을 숨기고 살기로 했어요. 미술시간이면 옆의 친구에게 꼭 물어봐요. “해바라기는 무슨 색이야?” / “해바라기는 노란색이지!” “그럼 이게 노란색이야?” / “바보야. 그건 파란색이야. 오른쪽이 노란색이라구.” 이런 나날이 피곤했지만 손가락질을 덜 받을 수 있다면 감당할 수 있었어요. 그림도 반드시 하루 만에 완성시켜야 했어요. 내일이 되면 보이는 색이 또 바뀔 테니 까요. 학창 시절 내내 그렇게 그림을 그려왔어요. 한때는 그림 그리기가 제일 즐거웠는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남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사람이 되어있었어요. 그런 데 제가 물어보는 것이 반복되고 반복되다 보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제가 귀찮아 졌는지 하나 둘 멀어지기 시작했어요. 사람들 곁에 머물고 싶어서, 특이한 아이로 보이 기 싫어서 하나하나 물어봤던 것인데 오히려 모든 이들이 떠나가게 만들었어요. 제가 좋아하던 그림 그리기도 점점 싫어졌어요. 저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모든 미술도구를 집 앞에 버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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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제가 버린 미술도구를 한 아름 안고서 제 방으로 찾아오셨어요. “카와야. 엄마가 카와 미술도구를 실수로 집 앞에 내놨나보다.” “아니에요. 제가 버린거에요. 저 더 이상 그림 그리지 않을거에요.” “왜 그러니? 아빠는 카와가 그린 그림이 제일로 좋던데.” “이제 제 주위에는 색깔을 알려줄 친구가 없어요.” “카와는 왜 남에게 물어서 그림을 그리려고만 하는 거야? 남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 에게 물어서 그림을 그려도 되지 않을까?”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색을 보는걸요. 제가 보이는 색을 그리면 특이하 다고 손가락질 받는다 구요.” “그건 특이한 게 아니란다. 특별한 거지. 특별한 것은 어쩌면 축복이야. 남이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거니까.” “제가 보이는 색으로 그려도 정말 이상한 그림이라는 소리 듣지 않을까요?” “그럼. 카와가 그동안 남들과 똑같은 그림을 그리려고만 했기 때문에 이상하게 느껴 졌던 것이 아닐까? 남들과 같은 색을 보지 못하는데 같은 그림을 그리려고만 한다면 그림에서 어색함을 지울 수가 없겠지. 다른 이가 보는 색을 기준으로 그리기 보다는 카와만의 느낌으로 카와가 보는 색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매일 다른 색을 보는 게 아마 큰 장점이 될 거야.” “그래도 사람들이 계속 손가락질 하면 어쩌죠?” “처음에는 그럴 수 있지만 꾸준히 그려보자. 무엇보다 세상이 정해준 색깔보다는 네 가 보는 색깔이 더 중요하단다.” 아버지 말씀대로 저는 이제 남들과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어요. 사 과는 빨간색, 바나나는 노란색. 세상이 정해준 색깔의 틀을 깨기로 한 거예요. 어차피 제게는 사과는 빨간색으로 보이지 않으며 바나나도 노란색으로 보이지 않으니까요. 저 는 제가 보이는 색 그대로를 제가 본 느낌으로 전달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답니다. 그 후로는 꾸준히 그림을 그렸어요. 남들이 특이하다고 해도 굴하지 않고 그리기 위 해 노력했어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그림이 늘어났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지 않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동안 똑같아지려고만 했는데 애초에 불가능했던 거예 요. 그저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았던 거죠. 흉내만 내서는 나를 보여줄 수 없는데 말이 에요. 오히려 제가 가진 강점을 숨기고 죽여야만 하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어요. 이젠 누군가를 흉내 내기보다는 나만의 색을 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어요. 지금 제가 이렇게 개인전을 할 수 있는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남들과 다른 색을 본다는 것을 저만의 강점으로 사용했기 때문이에요. 28


이제 저는 그림 그리는 것이 너무 좋답니다. 사람들도 <상식을 뛰어넘은 배색>, <불 협화음의 어울림>, <낯선 세계로의 초대> 등등의 극찬을 해주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 다도 매일매일 다르게 보이는 제 그림이 너무 사랑스럽기 때문이에요. 오늘은 슬퍼 보 이는 그림이 내일을 기뻐보일지도 모르잖아요. 저는 세상이 정해준 색을 넘어선 기분이 들어요. 늘 설레는 기대감을 안고 붓을 들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합니다. 자! 그럼 이제 오늘 보이는 색깔로는 어떤 그림을 그려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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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에 대하여 르빵 35일간의 배낭여행은 꽤 다양한 색으로 기억되었다. 무이네의 화이트 샌듄과 옐로 샌듄은 나를 일본 돗토리의 또 다른 사구로 이끌었고, 시하누크빌의 청록으로 빛나던 바다에서는 며칠간의 짧지만 진득한 자유를 맛볼 수 있었다. 코롱 살롬 섬의 새하얀 모래위에서는 정말 새까맣게 타버려 한동안 동남아 사람이란 소리를 달고 살았다. 하지만 그 중 나를 가장 설레게 했던 것은 일출의 하늘이었다. 가이드북에는 일출과 일몰을 보기 좋은 장소가 나라마다 빠짐없이 적혀 있었고, 많 은 도시에 선라이즈투어 혹은 선셋투어가 있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에 큰 의미는 두 지 않았었지만 한 번쯤은 봐야겠지, 라는 생각으로 여행 4일째 되던 날 무이네에서 첫 선라이즈투어를 신청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30분 후 지프를 타고 화이트 샌듄으로 달렸다. 30여분을 달리며 바다 저 너머로 점점 밝아오는 여명이 느껴져 마음이 초조했다. 그리고 이제 일출이구 나, 싶을 때 쯤 새하얀 사구가 펼쳐졌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구를 향해 정신없이 발 걸음을 옮겼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푹푹 빠지는 모래 위를 10여 분간 걸어 사구 위에 오르는 동안 해는 이미 사막 위 지평선에 걸쳐졌고, 주위의 사람들이, 모래가, 하늘이, 불어오는 바람과 떠오르는 해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하늘은 붉어졌다, 노랗게 밝아지다, 점차 푸른색을 띄고, 떠오른 햇 빛에 광활히 펼쳐진 흰 모래가 반짝이는 것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이었다. 나는 일 출이 5시라는 것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일주일쯤 뒤 시하누크빌의 작은 섬, 코롱 섬에 도착한 날은 피곤하다는 단어가 부족 한 하루였다. 배가 출발할 때 쯤 바닥이 뚫릴 듯 폭우가 쏟아졌고, 우산도 없이 뛰어가 흠뻑 젖은 채로 배에 탔다. 도착할 때 쯤 날씨는 거짓말처럼 눈부시게 맑아져있었고, 저렴한 호스텔을 찾아 체크인을 하고 잠깐 쉬는데 바깥이 소란했다. 숙소에서 500m도 떨어지지 않은 바에서 큰 불이 났고, 소방관 한 명 없는 작은 섬에서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불을 끄다, 대피를 하다 뛰어다니며 몇 시간이 지났다. 투명하던 바닷물 대신 새 까만 재가 밀려오는 바닷가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일찍 잠자리에 누웠는데, 이번엔 숙 소의 엉성한 나무 바닥 사이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래층에서 밤늦게까지 클럽 음악을 30


틀어댔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지만, 아직 깜깜한 새벽에 다시 눈을 떴 다. 5시였다. 나는 카메라를 챙겨 뛰어나갔다. 바닷가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하늘도, 바다도 아직 검었다. 강아지 몇 마리가 주변을 맴돌았다. 몇 분쯤 기다리자 하늘 한 편이 검붉게 빛났다. 해 변에 여행자는 나 혼자였다. 구름 낀 하늘에 노을처럼 붉은 빛이 번졌다. 사람들은 벌 써 나와 그물을 펼치고 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하늘도, 바다도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 했다. 털이 흰 강아지 한 마리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회색 구름에 분홍빛이 스몄다. 사진으로 담아낼 수가 없었다. 점점 금빛으로 밝아지는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불어오는 바람과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이 모든 걸 잊지 말라고 하는 듯 했다. 해 가 구름을 뚫고 완전히 떠올랐다. 6시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6개월 남짓 지났다. 지금도 아침에 눈을 뜨고 창밖에 해가 어슴 푸레 떠오르는 것을 보면 무이네에서의, 코롱 섬에서의, 앙코르와트에서의, 때로는 밤 새 달렸던 야간버스 창밖의 일출이 떠오른다. 조금 더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난다. 또다 시 여행자가 되어, 다른 곳에서 다른 빛으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볼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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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그녀 텅 빈 날 가득히 채운 너. 너의 손이 닿은 후, 점점 너의 색으로 물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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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의 비밀 학명 수호는 그 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방은 온통 회색이었어요. 집기들을 제외하고는 벽면도 그림도 심지어 이불도 커 튼도 모두 다 회색이었죠. 게다가 통일성 없이 밝은 회색이거나 짙은 회색으로 얼룩져 있었어요.” 나는 방의 대부분이 훤히 보이는 현관이랄 것도 없는 입구에 서서 의외의 모습에 놀 라 한동안 서있었다. 낯선 전경이 조금 익숙해지자 초대 받은 손님처럼 여유롭게 손잡 이를 잡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방 전체를 휘둘러보았다. 기다란 직사각형 구조의 방은 입구에 작은 복도가 나 있었다. 복도의 벽면은 짙은 회색이 덜룩거리고 걸어놓은 그림 은 희뿌옇게 번뜩였다. 이 방은 입구에서 안으로 갈수록 짙은

회색으로 변해갔다. 두

눈의 소실점에 이르러서 회색은 정점을 찍 듯 검게 치달았다. “헉.” 나는 입구로 들여놨던 한 발을 얼떨결에 물리고 황급히 문을 닫은 뒤 그곳을 빠져나 왔다. 지금 생각하면 최대한 멀리 멀리 숨이 멎을 때까지 도망치는 것이 옳았다. “그게 시작이었어요. 저는 더 이상 그곳을 가고 싶지 않았어요.” 수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마주하던 눈을 피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불 현 그 방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 뒤에도 그 방에 갔었지요?” 나는 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이미 다 알면서도 그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자주 문을 잠그지 않고 다녔어요. 늘 다시 열고 싶은 욕망에 찼지만 한 동안은 잘 참았어요. 그러다가 그 방에서 들려온 소리 때문에 저는 다시 그곳을 가게 됐어요.” 벽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는 매우 희미해서 가다듬고 듣지 않으면 텔레비전 소리와 섞여 묻힐 뻔했다. 나는 용케 채널을 돌리는 사이 귀에 잡힌 소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 서 최대한 숨을 죽이고 귀를 벽에 가져다 댔다. 아까침에(조금전에) 자주 이곳을 들락 거리는 남자가 들어간 이후 처음 들리는 소리였다. 보통은 남자의 큰 목소리와 여자의 깔깔대는 소리가 가득 울려서 벽을 뚫고 내 귀에 꽂히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지만,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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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은 평소와 달리 너무 조용해서 궁금했던 참이었다. 잘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느라고 애를 쓰며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분명히 두 사람은 싸웠을 것이다. 여자 는 헤어지자고 했을 테고, 남자는 화가 났거나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찾아왔을 게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쓰고 들어도 내 귀에는 간간히 여자의 큰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 다. 어쩌면 그 소리는 신음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범죄가 일어났을 것이 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는 그때 경황이 없어서 신고할 생각도 못하고 바로 뛰쳐나왔어요. 문을 벌컥 열 었죠.” 수호는 자신을 원망하는 말투로, 하지만 변명하듯이 말했다. “문을 열었는데요?” 나는 주변 사람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얕은 침을 삼켰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두어 번 문을 흔들어 열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나는 문을 발로 쾅쾅 차면서 소리쳤다. 내가 계속 소리를 치자 건물 내에 있던 사람 한명이 빠꼼 내다 보며 인상을 썼다. 아랑곳 하지 않고 발길질을 해대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것에 하던 것을 멈췄다. 남자가 들어갈 때 옆방에 문이 잠긴 소리가 나질 않았었다. 그 전에 문을 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남자는 어떻게 안으로 들어간 것일까? 아니, 남자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는데 그 남자라는 확신은 어디 있는가 하는 생각에 미치자 온 몸 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정말 미친 짓을 한거예요. 하지만 그때 제 등을 밀면서 문이 열리더라고요.” 수호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슬그머니 열린 문틈에서 나오는 빛이 어두운 복도를 후볐다. 나는 열린 문을 잡고 돌아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수렁같이 음울한 분위기의 방안은 여전히 내 영혼을 빨아 들일 기세였다. 입구에는 문을 열어준 여자가 서있었다. 나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그대 로 굳어버렸다. 그녀의 몸, 정확히는 얼굴, 팔, 다리만이 회색 벽에 밀착되어 동동 떠있 었다. 머리카락은 유난히 더욱 검게 보였고 눈동자의 흰자위와 검은자위도 유난히 반뜩 였다. 내가 알던 그 여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같은 얼굴이나 너무 다른 분위기에 선뜩 선뜩하여 나는 도망치지도 못했다. -502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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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본 두 번째 프로젝트 연작소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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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주영의 기억 속에 수연의 남편 재훈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같은 대학교를 다니 고 있기는 하지만 집이 부유해서 남들이 원하는 것들을 쉽게 얻고 본인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손에 넣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영화 감독을 꿈꾸던 대학시절 수연은 영 화감독보다 영화배우에 어울릴 만큼 꽃 같은 사람이었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녀의 주변 에는 남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수연이 정현과 사귀고 있을 때에도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는 남자들은 많았고 수연이 갑자기 재훈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생각보다 놀랍지는 않았다. 그녀 곁을 맴돌던 수많은 남자 중 하나였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수 연은 남들이 모두 원하는 여자였으니까. 대학 졸업 후 주영은 제대로 된 투자자를 만나지 못해 영화 감독의 꿈은 점점 멀어 져 갔고 이렇다 할 직업 없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무렵 우연히 재훈을 만날 수 있었 다. 금융업에 나름 큰손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동기들을 통해 익히 들어왔었다. 그런 재 훈이 주영을 한 번에 알아봤을 때 조금 놀랍기도 했다. 어떻게 나를 알고 있지. 수연과 어울려 놀았던 것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는 처음부터 주영에게 호의 적이었다. 원한다면 투자금도 얼마든지 지원해 준다고. 점점 들었던 생각은 주영은 재 훈과 우연히 만난게 아니라 재훈이 먼저 그를 찾아 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재훈의 도 움을 받으며 사업 이야기도 하고 술 한잔 기울이는 시간도 점점 늘어갔고 수연과의 결 혼 생활 이야기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재훈에게서 듣게 되는 수연은 여전히 아름답 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하지만 인사치레로라도 재훈은 수연과 함께 보자는 이야기를 꺼 내지 않았다. 재훈이 말하는 수연은 항상 소중하고 완벽한 여자였지만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재훈의 소유물로 느껴졌다. 주영이 과거 수연과의 에피소드들을 말할 때에도 처음 에는 그런 일이 있었냐며 가볍게 웃어 넘기다가도 좀 더 이야기 하려 하면 조금은 인 상을 찌푸리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수연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재훈은 원래 알던 자신만만한 모습과는 좀 다르게 느껴졌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신 경이 곤두선 것처럼 보였다. 술에 거하게 취한 날 재훈은 한참을 뜸들이며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수연이 자신을 떠나려 하는 것 같다고, 그녀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정현이라는 남자가 살고 있는 것 같다고. 그녀가 떠날 것 같은 불안감과 그녀가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는 증오가 재훈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연과 결혼은 했지만 그는 아직 그녀를, 그녀의 마음을 갖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원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손에 넣었던 재훈에게 수연은 마지막까지 갖지 못하는 대상이 36


었다. 그 원인이 정현이라는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정현만 없으면 수연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훈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주영에게 접근해 온 것이었다. 대학시절 수연과 함께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나에게서 정현의 정보를 얻기 위해. 3개월 전에 수연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놀랍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조금은 예상되 기도 했다. 재훈이 주영을 찾았던 것처럼 수연도 나를 찾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있 기는 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분명 예전 같은 풋풋함과 생기는 없어졌지만 여전 히 아름다웠다.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는 그녀. 순간 주영의 머릿속에서는 조각난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정현을 이용하자! 재훈은 정현만 없다면 수연을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수연은 재훈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상관없어 하고 있다. 만 약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내가 알고 있는 정현은 그 상대가 누가 되었던 간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겐 준 만큼 되갚아 주는 것이 정현 의 철칙이었으니까. 만약 그 대상이 과거 연인인 수연이더라도 더 큰 배신감으로 느끼 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재훈의 불안과 수연의 결심과 정현의 분노가 적절히 섞인다면 내가 원하는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재훈이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다. 그녀 옆에서 더 오랜 시간 그녀를 지켜봐 온 것은 주영이었다. 어쩌면 재훈보다 더 오랜 시간 그녀를 간절하게 바래온 것도 주영이었다. 내가 아직도 수연이를 사랑한다는 것.

이건 기회다!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그녀를 차지할 기회. 내 것으로 만들 기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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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받침대 GE Good Together 하늘하늘 루모스 이진한 연두색 머그컵 나무위에 개구리 라마 리 PINK 곧미녀 아바쿤다카와 르빵 수줍은 그녀 학명

판 실제본 프로젝트

획 실제본 프로젝트

집 국정화

발행일 2016년 12월 18일 Copyright ⓒ 실제본 프로젝트 all rights reserved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프로젝트 참여자 모두의 동의를 받아 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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