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본 9번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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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실제본 프로젝트


Hallstatt, Austria 2013.

내 꿈속의 동화마을

이서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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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 Disneyworld, Orlando 2014.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마법이 일어날 수 있어

이서녕 3


황홀한 계절의 순간이었고

당신이 떠올랐다.

권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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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조각 모음집

어쩌면 나

그날은 굉장히 슬픈 날이었는데,

사진에 찍힌 나도 날씨도 배경도

참 밝았다.

나를 배려해주는 네가 참 좋았다. 하지만 우리는 타이밍이 맞지 않는 사이였다.

그냥 그 사람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얼마나 설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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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친구가 아니라 귀여워

보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사진에는 찍혔는데, 너는 
 보였을까.


My Lover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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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고 싶다

밤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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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먹고 보자.

# 잘 먹겠습니다.

# 잠시 쉬어갈까?

# 한 게 뭐 있다고 또 배고프냐.

# 그래도 잘 먹겠습니다.

# 오늘의 끝에 너랑 있어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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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고 정신차려야지

# 또 먹냐고?

…..

# 그래 또 먹는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청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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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도 안 간 내가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시집살이도 아닌 처가살이를 한다.

벗어날 수 있을까?
 하...

곧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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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eror Penguin

저에요, 저라구요!

펭귄 가운데 가장 큰 황제펭 귄은 섰을 때 키가 1미터가 넘 고 몸무게도 최대 40kg 까지 나갑니다. 남극 대륙에 혹독 하고 어두운 겨울이 오면 다 른 펭귄들은 겨울을 피해 북 쪽으로 향하는데 황제펭귄은 오히려 남쪽, 즉 남극 대륙으 로 갑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서 새끼를 낳기 위해서입니다.

황제펭귄 암컷은 알을 낳으 면 먹이를 찾아 넓은 바다로 나갑니다. 남은 수컷은 얼른 알을 얼음에서 자기 발 위로 올려놓습니다. 그 다음 아랫배 쪽 알주머니에 알을 밀어 넣고 65일 동안 알 을 품고 있습니다. 혹독한 날씨에 수컷은 먹지도 못하고 체지방에 의지하여 생명 을 유지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시속 200km나 되는 속도로 몰아치는 눈보라가 속 으로 파고드는 가운데서 체온을 보존하기 위해 한데 모여서 각자 번갈아 가며 바 깥쪽으로 나가 등으로 바람을 막습니다.

이렇게 65일을 버텨 알이 부화할 때 쯤이 되면 암컷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 하게 맞춰 돌아옵니다. 서로 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펭귄 중에서 서로 구애 때 불러 줬던 노래를 부르며 암컷과 수컷은 자기 짝을 찾습니다. 암컷이 돌아오면 그제서 야 수컷은 갓 태어난 새끼를 암컷에게 넘겨준 뒤 넓은 바다로 나가 먹이를 찾게 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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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1

추운 겨울 날, 우리 집을 만났다.

회사에서 퇴근하면 다시 집으로 출근했다.

삼각 김밥을 먹으며 밤이 늦도록 페인트를 칠했다.

늘 여기저기 페인트가 튄 후줄근한 작업복을 입고 마주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연말에도 이렇다 할 근사한 데이트는 없었다.

그러다 지치면 동네 술집에서 시원한 맥주를 한잔씩 나누었다.

책장을 놓네 마네 하는, 사소한 일 때문에 저녁을 끝까지 먹지 못했다.

옷장을 너무 늦게 주문했고 매트리스를 내 마음대로 변경해서 싸웠다.

문지방을 없애고 싶어 대책 없이 부쉈지만 끝끝내 마감은 하지 못했다.

하루 빌린 작은 자동차에 조립용 가구를 잔뜩 싣고 돌아왔다.

3층까지 계단으로 가구를 옮기다가 기절할 뻔 했다.

어떤 일에 삐쳐 새침해져 있는 사이 근사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소중한 순간들이 쌓여, 진짜 우리 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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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2

더운 여름 날, 이 공간을 만났다.

말로는 다 못할 소중한 순간들이 한 장의 사진에 또 담기었다.

한 장의 사진

제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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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란 에르베 피구뉴

나는 라울 따뷔랭의 친구 에르베 피구뉴다. 아니, 완전히 다른데 피구뉴라면 나 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여, 지금 나는 라울 따뷔랭의 친구 에르베 피구 뉴다. 마을 사람들이 ‘사진’ 대신에 ‘피구뉴’라고 부를 만큼 에르베 피구뉴는 기 술적으로 완벽한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이 ‘자전거’ 대신 에 ‘따뷔랭’이라고 불릴 만큼 자전거를 완벽하게 고치는 따뷔랭이 자전거를 못 타는 것처럼, 피구뉴는 기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내지 못 하는 문제가 있었다. 문제랄 건 없지만 피구뉴에게는 문제였던 문제. 포착하고 싶었던 순간을 사진에 담고 유명해진 피구뉴가, 그건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아 주 ‘우연히’ 카메라를 떨어뜨리면서 셔터가 눌려 그 사진이 찍혔다는 사실에 자 괴감을 느꼈을 때. 마을을 떠나있는 동안 피구뉴는 아마도 사진을 찍는 일이란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라는 걸 배워오지 않았을까. 호기심을 유발하는 대상을 애정을 가지고 기록하는 일. 이 세 가지가 꼭 맞아야만 이룰 수 있는 일. 조리개 값과 셔터 스피드, 필름의 감도가 다 맞는다고 해도 피구뉴 가 원하는 사진을 찍기란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처럼 어려운 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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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호기심(또는 궁금증)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진을 찍고 싶게 하는 장면이 있다. 그건 정말 설명할 수 없지만 첫 번째 조건은 나의 호기심을 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어떤 이야 기가 상상되는 장면들을 찍고는 한다. 그 대상은 사물이 될 수도, 자연이 될 수 도,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만들어 놓은 어떤 흔적일 수도 있다. 비어 있 는 의자를 보면 나는 사진을 찍고 싶어 조바심이 난다. 빈 공간이지만 무언가로 채워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언젠가 가득 찰 것 같은 기대가 있다. 이곳에서 쉬 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누가 머물렀을까를 상상하며 프레임에 담는다. 산 책을 하는 사람이나 뭔가에 골똘히 집중하는 사람, 이색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 을 보면 실례를 무릅쓰고라도 그 순간을 포착하고 싶어진다. 이 순간은 다시 만 나기 힘든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진들은 두고두고 나의 상상력을 자극 하고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대상이 간직한 이야기가 궁금해 해답을 얻으려고 순간을 담아내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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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애정 순간이 소중한 내가, 나의 귀중한 시간과 필름 한 컷을 할애해 너의 사진을 찍 는다는 건 애정이 있어서다. 모든 것은 애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평범한 시간 속 에서 너의 행동을 관찰하는 일, 나의 시선이 너의 움직임과 표정을 따라가다가 너의 기분까지도 읽어내는 일, 너의 생각을 상상하는 일, 그리고 마침내 그런 너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까지도 애정이다. 너의 사진들을 보면 그때의 네가 기억나 기분이 좋다. 지금과는 다른. 네가 찍어준 내 사진도 그렇다.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나도 모르는 순간에 네가 포착한 나의 모습들은 사랑스러워 보인다.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 지 않지만 나는 네가 보여주는 내가 좋았다. 너는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 게 해줬다. 내가 모르는 내 표정, 몸짓, 습관들. 네가 보여준 내 모습에는 너의 애정도 담겨 있다. 어느 순간부터 너는 내 사진을 찍어주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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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기록 잊고 싶지 않아서. 기억하고 싶어서. 보관하고 싶어서. 셔터는 이런 기분으로 누 른다. 그러니까 이건 기록이다. 누군가에게는 예술이고, 기술이고, 놀이겠지만 내게 사진 찍기는 기록이다. 사진으로 인한 모든 기록은 우연히 이루어진다. 순 간의 감정, 순간의 생각, 순간의 고민, 순간의 결정, 순간의 빛을 화학물질 안에 가둬 영원히 보관하는 일. 이 모든 것들이 우연히 이루어진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냥 감겼어야 할 필름의 첫 번째 컷이 우연히도 자동차를 찍었고, 그 절반은 빛에 타들어가는 것처럼 붉은 빛을 내뿜어 마치 자동차가 붉은 빛에 쫓 기는 듯한 사진이 나온 것처럼. 피구뉴가 지금까지 좋은 사진을 찍지 못했던 것 은 우연을 기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진 찍기의 완성은 결국 ‘우연의 포착’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좋은 사진을 찍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숨결이 맞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영랑의 시처럼. 사랑을 하는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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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잦아지다 휘몰이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때리면 만갑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덕터요 떠받는 명고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지 -김영랑,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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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빛나는 무대

그 광채에 이끌려

어두운 외투를 벗고

궁극의 자유를 말하지만

내 쇠약한 정신은

빛나는 껍데기에 감춘다

그때와 꼭 같은 달빛 앞에서

나는 네게 묻는다

지금 무엇이 널 매혹하는지

달섬

드라이플라워


대참사지만 괜찮아

잘해주지 말 걸 그랬어

외장하드가 인식이 안 된다. 고화질 블루레이로 보겠다고 다운 받았던 그 수 많은 영화와 차곡차곡 모아놓은 음악이...아 맞다. 사진! 지난 16년 동안 고스란히 모 아놓았던 그 사진. 컴퓨터 하드랑 클라우드에 다 같이 저장해 놓지 않고 외장하드 에 몰아넣고 맹신했던 게 화근이다. 부랴부랴 수리점에 갔지만 복구가 불가능하 다고 했다. 그렇게 내 모든 추억이 날아갔다.

클라우드를 뒤지니 몇 장 남아있지 않다. 그마저도 아끼던 사진은 죄다 사라졌다. 그 때 불현 듯 생각났다. 아...책상에 붙이려 인화했던 사진이 있었지. 디지털은 생 각할 수 없는 아날로그의 힘이 발휘되는 순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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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인물사진이 없다. 워낙 셀카를 혐오해 몇 장 안 찍었던 사진도 모두 없어졌다. 다행히 클라우드엔 흔적이 남아있다. 싸이를 접을 때 고르고 골라 몇 장 만 건졌던 사진들. 그냥 내 나이 먹어가는 모습을 건지려 했던 것들이다. 이 것도 모두 인화했던 사진을 디카로 다시 찍어 편집했던 것들이다.

무릇 지금도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은 다 이러한 듯하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 는 것은 별 거 아닌 열차표, 지도, 콘서트 티켓, 그리고 누군가가 손으로 쓴 편 지 이런 것들이다. 카카오톡으로 보낸 선물, 문자, 이메일... 노력과 정성이 들어 간 건 알겠지만 손을 거쳐 만들어진 아날로그한 것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버리 기 도 힘들고 잊기도 힘들다.

하물며 손으로 만든 책은 어떠할까? 글은 컴퓨터로 쓰지만 애써 편집하고 인쇄 해 곱게 뽑아온 종이를 정성스럽게 접고 표지를 씌운 뒤 구멍을 내고 바느질을 해 서 촘촘하게 만든다. 나에겐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이 오늘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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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순간

열일곱

‘하나 둘 셋 김치~’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한창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며 썩 예 쁘지 않은 나의 모습을 감추려 했던 십대소녀에게 이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 이었다. 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기 위해 머리를 만지고, 하다못해 빨간색 립밤이라 도 바르고, 예쁜 표정을 짓고 사진을 찍고 나서는 다시 하나하나 뜯어보고 품평하 는 과정들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나의 못난 모습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될까봐. 그래서 괜히 사진 찍을 때가 되면 무심한 척 대충 찍고 피해버리거나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자처하기도 잦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학교에서의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들을 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버리는 그 한순간 한순간이 아쉬워서, 찰나의 순간을 담기 위해 사진기를 들었고, 또 나를 담기 시작했다. 더 넓은 세상 속에 있는 나의 모습이 좋 았고, 그 속에서 꾸밈없이 웃고 있는 모습들을 간직하고 싶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색다른 환경 속에서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 고, 무언가를 성취해보기도 잃어보기도 하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진지 하게 해 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이런 모습이 있구나 문득 느끼고 찾아가면서 흔 히들 말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진 것일까.

가끔씩 묵혀두었던 사진들을 꺼내어 스르륵 훑어본다. 사진을 찍을 때의 감정과 생각이 생생하게 다가오면서 소중한 추억들이 떠오르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한창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던 어릴 때의 나를 담은 사진들을 본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뻣뻣하게 굳어있는 모습들. 분명 그 때도 나에게 소중한 찰나의 순간들이 었는데 고스란히 담아내지 못해 아쉽다.

그리고 그 때의 나에게 미안하다. 나를 많이 아껴주지 못했던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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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기억

가타카

사진 속에 순간의 영혼이 남는다고 믿는다. 기억과 사진 속 영혼이 연결되어 지금 의 나를 형성하고 있는 느낌이다. 내 기억은 머릿속에 부유하고, 사진들도 정돈되 지 않은 채 내 상자 안에 흐트러져 있다. 또한 사진을 프레임 하나하나에 꽂는 정 성을 쏟는 대신에, 사진을 두고두고 계속해서 본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무작위로 집어내서 감상하는 의식을 갖고, 내 기억을 재배치한다. 마치 내 기억들의 주도권 을 갖는 듯하다. 그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라기보다 나는 나만의 의식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사실상 그와의 행복한 기억들이 거의 잊힌 기분이다. 사진을 봐야만 구체화되는 기억. 나의 셔터는 보통 행복한 순간에만 눌리게 되어, 사진 속 나는 늘 행복하다. 불행했던 기억들은 사진에도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

오늘도 사진을 찍는 나는 버리지 못한 기억들로 내 상자를 가득 채운다. 가끔 감 상하는 내 사진들은 인물만 다를 뿐 배경이 같아 보이기도 하다. 나는 아마 그와의 잊어버린 추억을 다시 쌓으려 노력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이에게서의 사진도 어 쩐지 그와의 기억과 닮아 있었다.

# 그녀는 나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구분해내지 못한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 상자 속 사진들 만큼 혼란스럽다. 대신 어제의 나도 오늘의 나도, 어쩐지 동등하게 사랑해주고 있 다. 우리는 매일 같은 장면 속에서 다른 기억을 만들어낸다.

# 당신이 나를 기억해 주는 것과 내가 당신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에 있어서, 사랑 의 차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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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능

아수라장

내 핸드폰 갤러리 속 몇 장의 사진들은 칼칼한 김치 같은 맛이 난다. 오래 익혀두 어야 맛이 깊어지는 김치처럼 시간이 지나고 보았을 때 진한 감동을 선사해주는 사진이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요즘 들어 무력감과 무기력증이 도졌는데 핸드폰 속 친구들과 찍은 여행사진을 보고 기운을 차렸다. 작년 여름에 갔던 일본, 친구 다섯에서 좌충우돌 유랑기를 찍 었는데 그 흔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만 있던 게스트 하우스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여행 도중 생일을 맞은 친구를 위해 40도 짜 리 사케와 맥주를 섞어 만든 폭탄주를 만들었고, 취가가 오른 그 친구를 위해 평소 그 친구가 관심있어하던 이성친구에게 연락을 하게 했다. 애석하게도 그 친구는 잘 안 풀렸지만, 당시 여행에서 우리들 모두 설레는 마음으로 통일될 수 있던 하루 였다. 그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미소지음과 동시에 친구들을 잔뜩 그리워하 게 되었다. 이와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끼게하는 사진들이 있다. 핸드폰 속이 아닌 가족 사진 첩에 있는 가족사진들. 뽀얀 피부를 가진 어린 시절을 나와 동생 그리고 지금과 너 무 다른 부모님의 모습이 나타나있다. 사진 속 아버지는 머리숱이 짱짱하셨고 몸 은 다부지셨고 어머니는 훨씬 더 뽀얗고 아름다우셨다. 안그래도 거센 세월의 풍 파인데 나로 하여금 더욱 강해진 바람과 파도가 두 분을 더욱 상하게 하셨을 것이 다. 아버지의 흰머리를 곧잘 뽑아주던 초등학교 시절 내 동생은 이제 대학생이 되었 다. 이제 흰머리를 뽑으면 아버지의 머리가 다 없어질 거라고 못 뽑겠다고 장난스 레 말했지만 그 말에 나는 눈앞이 울렁거렸다. 변해버린 당신들의 모습에 적응을 못하겠는 나 자신이 참 이기적인 것 같다. 나는 내 머릿속에 당신들을 강인한 모습 으로 그려두고 기대려고만 했다. 세월에 상한 당신들의 현재가 보일 때면 못 본척 하고 과거 속으로 그대들을 눌러버렸다. 그대들에게 기대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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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당신들을 향한 미안함과 변해버린 모습을 보고난 뒤 느끼는 커다란 먹먹함 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사진을 보고나면 두 분께 잘해드려야겠다는 막연했던 마음이 좀 더 또렷 해지게되어 두 분께 전화라도 한 통 하게 되는 것 같다. 참 좋은 사진의 기능이다. 이쯤에서 고백할게 있는데 나는 사진에 관한 독특한 버릇이 있다. 먼 훗날 내가 만든 이 책을 봤을 때 여기 적어둔 내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랄 수도 있지만 적어 보겠다. 소개팅을 할 때, 특히 잘 풀릴 경우, 그 순간들을 기억하고 싶었던 적은 누구든지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좀더 나아가 상대와 사진을 찍는다. 왜 그런 습관이 들었 는지 이해할 순 없지만 언젠가부터 그러고 있다. 맘에 드는 사람이니 내 손에 붙어 있는 핸드폰 속 갤러리에 넣어둬야한다는 무의식의 반영인건지는 모르겠다. 그런 사진들을 보며 이때 상대와 어떤 계기로 호감을 가지게 되었는지 곱씹어보 는 것 같다. 더불어 내가 무슨 말을 해서 상대방이 좋아했는지도 생각했다. 그렇게 사진을 찍은 상대방과는 대체로 잘되었다. 상대와 만나지 않을 때, 사진들을 의식 적으로 보면서 더욱 상대에게 집중해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물론 모든 사진 은 상대와 합의하에 찍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한 버릇이지만, 아니 어떻게 봐도 참 이상한 건가. 그 사진들 을 보면서 좀더 나은 연애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곤 하니 현실적인 거라 생각한다. 이렇게 나는 사진을 통해 많은 것을 남겨왔다. 친구들과의 추억, 부모님에 대한 미안하고도 고마운 감정, 예전 연인들과의 해프닝 등 쓴웃음을 짓게 하는 문제의 사진들도 있지만 대체로 아름다운 추억들이다. 앞서 말했듯 사진도 김치처럼 맛이 깊어진다고 했지 않은가 추억이 부리는 마술 로 좋았던 시절은 더 좋게, 힘들었던 시절은 미화되어 기억되니 사진을 많이 찍어 두는게 좋을 것 같다. 물론 사진찍는데에 정신팔려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 면 안될 일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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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진한

성진은 남의 집 거실에 앉아 있는 게 불편하다. 어렸을 적 친구 집에서 놀다 그 집 안 어른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뒤로 그는 남의 집에 있으면 눈치를 보게 되었 다. 좋아하던 음식을 빤히 바라봐야만 했던 기억이 생각보다 깊은 트라우마로 남 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어언 20년이 넘었다. 사실 어느 연령대를 넘어 선 뒤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고서는 남의 집에 가는 것 자체가 드물었으니 햇수를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바로 지 금,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성진이 남의 집 거실에 앉아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집 주인 경원은 성진이 성가셨다. 어쩌다 지금 일이 대형 프로젝트가 되어버려 혼 자 하고 싶었던 것을 하청 기업의 성진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경원과 성진의 생 활 방식은 정반대다. 단순히 낮과 밤이 다른 수준이 아니라 선호하는 작업 환경부 터 다르다. 경원은 창의력을 끌어내기 위해 헤비메탈을 들어야만 한다. 반대로 성 진은 시곗바늘 소리가 거슬려 자비를 들여서까지 주변 사람들의 시계를 바꿔준 다. 또 성진이 근무하고 있는 회사는 영세한 편이라 성진에게 부하가 많이 걸리는 반면 경원은 오롯이 이 일 하나에만 신경을 쓰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둘은 용케 프로젝트의 4분의 3 지점까지 뚫었다.

그런 그들에게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남은 업무의 성취를 결정지을 중요한 알 고리즘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진은 내심 회사에서 회의를 했으면 싶었지 만 갑의 관계에 있는 경원이 개인 사정을 들먹이며 본인 집에서 보자니 어쩔 수 없 이 그러겠다고 했다. 어차피 회사 가는 길에 경원의 집이 있기도 했고 업무에 소요 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 같아 비위나 맞춰주자 싶었다. 그러나 막상 남의 집 거실에 앉아 이제 막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주인을 바라보는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다.

성진은 실례인 줄 알면서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남들이 봤으면 수사하나 싶 을 정도였으니 살펴봤다는 말은 맞지 않는 표현일지 모르겠다. 경원과 어울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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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몬드리안의 작품과 형형색색의 꽃이 심어진 화분들, 그리고 실내 자전거와 아령 몇 개를 보며 성진은 내심 경원의 교양이 부러워졌다. 그러다 본인이 앉아 있 는 소파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소파 옆 탁자에는 어딘가 익숙한 사진이 있었다. 사진은 파도가 치는 바다 풍경을 절묘하게 담아냈다. 그런데 저 해안선이, 해변 주 변 건물이, 지붕 모양새가 어딘가 눈에 익었다. 성진은 본능적으로 경원에게 물었 다.

경원씨, 사진 우도에요? / 네? / 소파 옆 탁자 위에 있는 사진이요. / 아 우도 맞 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 해안선 위 가게가 저희 이모 가게에요. 건너편 집은 어 머니 고향 집이구요. 사진 찍히기 힘든 곳인데... 여긴 어쩌다 찍으셨어요? / 작년 에 제주도 여행을 갔었거든요. 그 주변에 맛집이 있다길래 찾아갔는데 문을 닫았 더라고요. 아쉬워서 사진이라도 찍고 왔어요. 그런데 성진씨 눈썰미가 뛰어나시 네요. 아무리 어머니 고향이라지만 어떻게 사진만 보고 아셨어요? / 하하... 그러 게요. 보니까 또 생각이 나네요.

성진은 사실 우도를 싫어한다. 우도는 그의 어머니를 세상에 내놓은 곳이기도 하 지만 모순적이게도 그에게서 어머니를 앗아간 곳이기도 하다.

성진의 어머니는 해녀셨다. 심한 파도나 폭풍이 몰아치지 않는 날이면 언제나 바 다에 나가 못해도 하루 여덟 시간을 보내셨다. 타고난 호흡이 길지 않아 먼 바다까 지 나가지는 못하셨지만 그래도 동네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확량을 자랑 하셨다. 성진 어머니의 손재주는 성진에겐 천만다행인 것이었다. 술을 물처럼 마 시던 아버지가 여느 날처럼 취한 어느 날 고등어 잡이 배 위에서 미끄러져 죽고 성 진과 어린 동생 셋은 어머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어머니의 해녀질은, 그리고 바다는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성진은 갑자기 일에 대한 의욕이 떨어졌다. 사진 하나에 어머니가 떠올랐고, 어머 니는 성진의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의 마지막 날을 상기시키고 야 말았다.

경원씨, 바로 진행할까요? / 그러죠.

성진의 어머니는 바다의 위험성을 겪어본 적이 있다. 그 집안 막내가 열 살쯤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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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을 무렵 수초더미가 다리를 휘어잡아 물 위로 올라오려던 그녀를 당황하게 했 던 것이다. 그때는 호미 작업 날이라 무탈하게 나올 수 있었지만 해녀들이 물숨을 먹는 흔한 사고를 겪은 셈이어서 그녀는 한동안 해녀질이 버거웠다.

수고하셨습니다. 용케 타임라인을 따라가네요. 이제 회사로 가시나요? / 그래야 겠죠. / 네 오늘 집까지 와주셔서 감사했어요. 다음 미팅 때 봐요. / 네. 다음에 뵙 겠습니다.

성진은 지금 회사에 입사하면서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려고 정성을 다했다. 바다 가 베푸는 은혜가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은혜는 언제나 생명을 담보로 요구했 다. 그리고 동생들 미래도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마냥 어부를 하겠다는데 간혹 보 이는 태풍 소식이 워낙 불안한 게 아니었다.이대로 떨어져 지내다간 제 명에 못살 겠다 싶었다.

부장님. 업무는 마쳤습니다. 그런데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연차를 써야 할 것 같 아요. 죄송합니다. / 업무는 마쳤다고? / 네. 일정대로 마무리 할 수 있겠다고 이 야기 나왔습니다. / 그래? 음... 급한 일이라고? / 네. /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박 대리한테 급한 일은 시킬 테니까 박 대리 전화 오면 응답 좀 해줘. / 네. 내일 뵙 겠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날, 성진은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제 바다에 나가지 말라 고, 그냥 서울로 올라오시라고. 성진은 바다에서 죽은 아버지를 들먹였고, 동생들 의 미래를 들먹였다. 그러나 그 모진 말에도 어머니는 한사코 집에 머무르기를 거 절하셨다.

집에 있으면 소리가 들려. 숨비소리가... 그 소리를 듣고서도 집에 있으려면 취하 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성진아. 얕은 물에만 있을 테니까 걱정 말아. 동생들은 이 참에 데려가라. 종종 전화나 하면 충분해. 이참에 니들 뒤치다꺼리 안 하고 좋지. 엄마도 독립 좀 하자.

어머니는 그 말만 남기고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모가 말하길 또 수초더미 에 다리가 걸렸다고 했다. 다만 이번에는 전복 하나가 어머니의 손에 붙들려 있었 다고 했다. 전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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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전복 하나만 건지면 우리 성진이랑 하루 종일 놀 수 있을 텐데.’

이제는 다 커버려 하루 종일 놀 수도 없는데 왜 전복을 ­ 성진은 문득 어머니가 그리워져 사진첩을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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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출판 기획 편집 발행일

이서녕, 권영은, 어쩌면 나, riA★, 청롱, 곧미녀, 이진한

밤비루, 제이양, 에르베 피구뉴, 잘해주지 말 걸 그랬어, 
 드라이플라워, 열일곱, 가타카, 아수라장, 저예요 저라구요

실제본 프로젝트

실제본 프로젝트

김지훈

2016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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