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덕지게 어깨동무 2013 가을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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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3 정답과 해설

김선주

↘ 가로지르기

4 부정선거가 밝혀져야 하는 이유

박중기

8 한 장의 사진 ‼ 제언

25주기를 준비하자

9 환준에게 보낸다 12 25년 전 그곳에 묻은 것은

억울한 죽음의 사연만이 아니었다

차일환 김성희

↔ 어깨걸기

15 우리 괴산으로 이사했어요

우지영

↓ 후벼파기 80년대를 돌아보며 2014년을 묻는다

26 ‘강제징집·녹화사업’을 통해 보는 냉전질서와 국가폭력 박현주 44 80년대 의문사 사건을 요약하며

편집위원회

§ 기고

70 과거를 극복해야 역사가 바로 선다

신명철

∇ 만나요

82 청동소녀가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이원근

√ 기획

기본소득을 말하다

95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소득을 허하라

편집위원회

99 이건희 회장도, 배짱이도 줘야 하나

편집위원회

103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인터뷰)

신성호

∽ 구르기

114 아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은 엄마들에게

김기수

118 뭐 하나라도 내가 더해야 평안해

박응진

♬ 놀기

122 음악으로 떠나는 여행

박성용

⌘ 함께하기

124 2013년 소사

신명철

= 털어놓기

128 회원동정 + 페북동정

편집위원회

130 몸이 움직이니 마음이 따라 움직였다

사무국

132 2014년 이내창기념사업회 정기총회

사무국

134 마음을 함께하니 당당해졌다

사무국



여는 글

정답과 해설 김선주

아들이 시험 공부할 때, 뭐 아들까지 들먹일 필요 없이, 초중고 를 통 털어 벼락치기 공부하기에 가장 친철했던 교재, <정답과 해 설>. 엄마는 문제집을 사오자마자 <정답과 해설>을 절대로 버리 지 않고 어딘가에 감춰 두셨다. (버리면 간단했을 텐데……. 하지 만 버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내가 엄마가 되고는 바로 알게 되었 다) 나는 그걸 찾아야만 했다.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서면 좀 똑똑해질 거라고 믿었지만, 갈수록 오리무중이라 <정답과 해설>이 참 그립다! 세상살이에 쪼들려 버 둥대고 있는 모양새가 고딩 둘째 아들보다 더 어설프고 당당하지 못 한 것 같다. 차갑지만 따뜻했던 천막 안에서 <정답과 해설>을 찾았다. 흑석 동 청소노동자 어머니들. 당분간 그 분들이 나의 <정답과 해설> 이다. 2013년 가을 · 겨울호를 해를 넘겨 2월에야 보내게 되었다. 회원 들에게 죄송하다는 인사 전한다. 끈덕지게 어깨동무를 내보자고 시 작했는데 네 번 만에 휘청거린다. 그래도 끈덕지게 가겠다고 다짐 한다. 흑석동 청소노동자 어머니처럼.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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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선거가 밝혀져야 하는 이유 박중기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총독 아베노부유 키(安部信行)가 1945년 9월 12일, 일본

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 베노부유끼>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 패전하고 조선총독부의 모든 업무를 미 점령군에게 인계한 후 일본으로 떠나

이미 오래 전에 알려진 이 낡은 문건을

면서 직원들 앞에서 했다는 마지막 연설문

지금 새삼스럽게 끄집어낸 소이는 무엇 때

이다.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겠으나 이임사

문인가. 64년 한일회담 반대로 학원과 정

의 한 부분이 아닌가 한다.

계가 소용돌이치고 있을 무렵, 친구가 자 취방에 돌아와 종이 쪽지에 베껴 쓴 이 글

일본은 졌다. 그러나 조선이 승리한 것

을 나에게 보이며 묘한 표정을 짓던 기억

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이 제 정신을

때문이다. 그 친구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

차리고 찬란하고 웅대했던 옛 조선의 영

만 물리학을 전공하면서도 우리가 안고 있

광을 되찾으려면 향후 100년이라는 세월

던 시대의 모순들에 대하여는 지극히 섬

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 국민

세한 부분까지 파고드는 진지한 친구였

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사관

다. 당시 그는 4·19 공간에서 당시 그의 사

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인들

정으로 나와 같이 행동하지 못함을 몹시

은 서로 이간질하고 헐뜯으며 노예적인 삶

미안해하던 친구였다. 지금도 나의 뇌리에

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 쪽지 글을 접하

찬란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 일본 식민

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내게는 충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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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이었다. 그럼에도 패자의 악담 정도로

전범재판 같은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

대수롭지 않게 얼버무려 넘겨버렸는데 위

이다. 이전에는 대개 패전국의 배상금으

선적인 나의 태도와 무지(?)에 얼마나 실

로 전후 처리가 매듭지어졌는데, 이 재판

망을 했을까 하는 자책감이 지금까지 지

에서는 인도에 반하는 죄를 처단해야 한

워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는 새로운 개념이 수립된 것이다. 그에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일

따라 전쟁 수행자는 물론, 각국의 전쟁 협

본 식민주의의 때를 벗지 못한 채 민주주

력자에 대한 재판과 처형도 동시에 이루어

의라는 옷만 갈아 입은 꼴이라는 생각을

졌다. 그만큼 인류가 새로운 사회로 가고

지우지 못하고 산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나치나 일본 군

서 다 어른이랄 수는 없는 것처럼 나라도

국주의자들처럼 비인도적 행위를 범하는

그 민족의 자존과 자주적 입장과 주체를

세력이 다시는 발호하지 않도록 처단해야

가다듬은 후에 우방과 대등한 입장에서

한다는 것이 인류사의 방향이고 이 재판

선린하는 관계가 이루어졌을 때 독립국가

의 정신인 것이다.

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해방된 지 69년, 선거를 치르고,

독일 나치하의 프랑스는 4년 남짓한 짧

헌법을 만들고 비록 분단국가라 할지라도

은 점령기간에 부역자 4만 수천 명이 처

나라를 세운 게 66년이 되었다. 그런데 되

형되고, 20여만 명에게 실형과 공민권 박

돌아보면 나라를 만들고 대통령과 국회

탈, 중노동형 등으로 숙청 정리해 오늘의

의원을 뽑기 위해 치른 선거가 부지기수

프랑스를 있게 했다. 덴마크만 해도 1만

였다. 그 많은 비용과 공력을 들여 치러

명이 넘었다. 우리의 경우, 프랑스 레지스

온 선거 가운데 제대로 된 선거는 1992

탕스와는 다르지만 40여 년간을 줄기차게

년 14대 대통령 선거부터가 아닌가 한다.

국내외에서 투쟁을 멈추지 않았었다. 조

1950년 5.30 선거와 1960년 4·19에 의한

국을 찾기 위해서는 생명도 초개처럼 여

6.29 선거를 제하고는 정도의 차이는 있

겼던 그 투사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

을지라도 모두가 부정선거였다고 보아 무

는데, 아니 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방할 것이다.

부터 냉대와 살인적인 가난이 그를 기다 리고 있었고, 종당에는 결국 친일파들의

여기에는 친일 청산을 우리 손으로 하지

빨갱이몰이에 생을 마감하는 치떨리는 일

못한 우리의 약점과 결함이 있었다. 2차대

들이 이 땅에서는 태연하게 일어나고 있었

전 후의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나 도쿄

다. 백범 살해와 동시에 이 땅의 보수는 종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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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지르기

언을 고했고,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친일

에 등록했다 934명, 안했다 328명(당시

파와 그 잔당들이 오늘을 재단하고 있다.

에는 등록제였음)’이었다. 그런데 934명 가운데 ‘자발적으로 내가 했다, 선거를 하

정도가 아니면 무리가 생기고 무리가 지

고 싶어서, 5.10선거가 좋다고 보기 때문

속되면 부정은 따르게 마련이다. 이승만

에, 지지하기 때문에 했다’는 답은 84명밖

은 술수에 능한 야심가이다. 그의 행적은

에 안 되고 나머지는 강제적으로 등록했

많은 자료나 저술에서 밝혀져 있으니 여

다는 거다(서중석,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기서 새삼스럽게 논할 이유는 없을 것이 다. 이승만은 인종만 한국인일 뿐 미국인

이것이 대한민국 건국의 선거풍경이다.

이다. 구체적으로는 미 합중국의 동양인

그리고 부정선거의 효시이기도 한데, 앞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일찍이 상해 임

에 적은 두 번의 선거를 제하고는 노태우

시정부 때 이승만과 정한경이 미국 앞으

때까지 부정선거로 나라를 꾸려왔다는 이

로 한국위임통치 청원서를 낸 일이 탄로

야기가 된다. 유신과 전두환은 국민들의

가 나서 신채호로부터 호된 질책을 들은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던지 아예 체육

바 있었는데(성토문이 남아 있음) “이완용

관에서 저들끼리 선거를 해치우기도 했다.

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려 했다.”는 일화들이 남아 있을 정도다.

무례한 비민주적 망동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 87년 6·10 민주항쟁이고, 그 속에 담 긴 뜻은 민주와 민족 자주와 평화이다. 이

그런 그가 대권을 잡아야겠는데 전국적

자리에 오기까지의 고통과 시련을 양으로

인 단정반대 운동이 일어나고 2월 7일에

측정할 수 없고, 질로 계량할 수 없다. 수

는 전국적인 구국투쟁이, 4월 3일에는 제

없는 열사들의 희생이 민주제단에 바쳐졌

주도에서 반대시위가 일어났다. 5월 10일

고, 불구는 지금도 음지에서 신음하고 있

선거를 코 앞에 두고, 모두가 평화롭고 자

다. 어두운 시절 가해자 없는 의문사의 영

유스러운 축제 분위기에서 치러져야 할 선

혼은 천당도 극락도 아닌 중음신(中陰身)

거가 혼란과 불안으로 유권자를 협박 위

으로 방황하는 기막힌 일을 당하고도 속

협한다는 여론들이 번지는 가운데 투표가

절없이 우리는 방관자로 전락했으니 그 죄

이루어졌다. 이보다 앞서 4월 12일에 ‘한

가 크다.

국여론학회’에서 실시한 ‘통행인’ 1,262명 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는데, ‘선거인

여기에 다시 선거부정의 소리가 들린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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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챙긴 공정 선거인데 또 피의 주술

해서라도 부정선거는 밝혀져야 하지 않겠

을 외는가. 아베노부유키의 저주가 저주

는가.

가 안 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저 극락도 지 옥도 아닌 허공에서 헤매는 중음신을 위

2014. 1. 28 박중기

헌쇠 80년 헌쇠 박중기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11월 9일(음력 10월 7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51년 경남고등학교 재학시절 부산지역 고교생 사회과학써클 암장(岩漿)을 결성하면서 민족민주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혁명 당시에는 암장 동지들과 민민청과 민자통에서 활 동하였다. 그는 5.16쿠데타로 운신의 폭이 좁아졌으나, 민족민주운동에 대한 꿈을 접지 않고 있던 중, 1964년 인민혁명당사건으로 구 속이 되고 말았다. 1974년에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중정에 연행되었다가 무혐의로 나왔지만, 이 사건으로 암장 동지 이수병을 비 롯해 8인의 동지들을 잃고 만다. 하지만 그는 먼저 간 동지들의 가족들과 함께 하고, 살아남은 동지들과 함께 민족민주운동에 헌신하였 다. 그는 현재 4.9통일평화재단 이사, 민족민주열사 · 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명예의장, 통일뉴스 후원회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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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

1989년 10월 7일, 망월동을 타넘는 바람이 세찼다. 전 날 흑석교정에서 치러진 전대협장에는 일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였고, 이천 명이 검은 각목을 들었다.

50여 일간의 사인진상규명투쟁, 그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울지마, 지치면 안돼, 끝까지 싸우자는 말들. 만장이 가슴 속에서 흩날린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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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준에게 보낸다 차일환

가을을 끝낸 들판이 언제이냐고 벌써 산골에는 관광이다 잔치 다 하면서 일 년 동안에 있어 농사일 이외에 마을 단위 공동체 일 을 처리하기에 분주하다. 미루어두었던 마을회의도 해야 하고 대 동회 준비다 보조사업 결산이다 하면서 농민들의 사랑방 모임이 많은 시간이 돌아왔다. 자네 전화를 받고 한마디로 가슴이 먹먹하다는 것, 아마 이 느 낌이 딱 맞을 것이다. 25년. 참 빠른 듯하면서도 하루하루 차분 하게 추모사업회는 지난 시간을 지내왔다고 본다. 추사가 만들 어지고 나서 나는 농촌 생활을 계속할 수뿐이 없었음에도 시간 이 흐를수록 내가 추사에게 다가가는 동력이 떨어질수록, 추사 의 활동반경과 사업 범위와 도덕성들은 날로 증폭되는 듯한 느낌 을 먼발치에서 볼 때 가슴 벅참도 많았다네. 각종 단체의 발전과 퇴보, 변질 속에서 우리 추사는 그 어느 단체들보다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본다. 그러나 환준아 우 리의 축배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왔을 때만이 들 수 있는 것 아닌가. 지난 10년 동안의 민주정부 속에서도 이루지 못했는 데 앞으로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먹먹해진다. 세상이 미친 듯하 고 뒤죽박죽되어 똥오줌 분간 못 하는 시절이 당분간 지속될 것 같은데…….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지내야 될까. 저녁 장작불 넣고 소주잔을 놓고 추사를 생각하니 많은 얼굴이 스쳐 지나가 는데, 그 중에서도 갑자기 딱 하면서 미소를 짓고 많이 본 듯한 얼굴이 강하게 들어오는데, 그것이 누군지 아는가. 바로 고 서원 의 아들 강이라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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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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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지난 25년을 생각해 보라는데 왜 서강이의 미소가 떠오르는 것인가. 그것은 아 마 이루지 못한 당대의 책임을 다하라는 눈빛처럼 생각된다. 부끄럽다. 잘 지키지는 못할 것 같지만 추사 세울 때 초심으로 돌아가, 핑계를 대 피하지 않고 참 여를 해봐야겠다고, 하면서 소주잔을 기울인다. 산골에서 산 지가 20여 년을 넘어간다. 삶의 가치관과 수많은 약속들이 흔들리고 깨 어졌지만 이내창추모사업회의 아름다운 약속의 동행은 계속해 보자 환준아! 낼부터 추위가 몰려온다는데 가족들과 더불어 건강에 유념하길 바라며. 잘 지내게. 영양에서 2013. 12. 10 일환

차일환_ 80년에 입학했다. 민중미술단체 ‘가는패’를 결성해 활동하였고, 1989년에 <민족해방운동사>를 제작해 평양에 슬라이드를 보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귀농해, 경북 영양에서 농민운동가, 농민화가로 살고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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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

25년 전 그곳에 묻은 것은 억울한 죽음의 사연만이 아니었다 김성희

연말 인사도 드릴 겸 내창 형네 맏형인 이래석 형님과 통화할 기 회가 있었다. 서원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전화는 당연히 그가 했 을 텐데……. 2014년 봄, 광주 망월동에 있는 내창이 형 묘를 경 기도 이천에 새로 조성하는 민주공원으로 이장하게 된다. 지난 여름 망월동 참배가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1989년, 그 일을 당 할 무렵 형님은 사십대 중반이었다. 이제 일흔이 넘으셨다. 당뇨 때문에 운동을 꾸준히 하며 관리하고 있지만 그걸 빼면 별고 없 이 잘 지내고 계신다 하셨다. 망월동에 있는 묘를 열고 이장할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어 지럽다. 25년 전 그곳에 묻은 것은 억울하게 죽은 그의 시신만은 아니었다. 우리들의 청춘, 젊은이다운 분방함, 그날 이후 화인처 럼 새겨진 분노, 한창 자라나던 꿈…….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인 생 전체를 묻은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가 활동을 시작한 지 25년이 흘렀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도 세상도 그저 나이만 늘린 것은 아니다. 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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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겹고 가슴 아픈 일도 많았다. 정권이 몇 번 바뀌었고, 국가기 구가 설립돼 의문사 사건에 대한 조사도 진행되었다. 정부는 그 의 죽음이 민주화운동과 연관돼 있다는 점을 인정했고,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일부 보상도 했다. 물론 여전히 형을 살해한 공권력과 하수인들로부터 결정적인 자백을 받아내 지는 못했다. 이내창기념사업회는 그동안 대단한 일들을 해왔다. 한두 사람 의 공이 아니라 그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던 사람들이 세월이 흘러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하는 울분을 희석시키지 못 하고 꾸준히 힘을 모았다. 수십 년 째 회비를 자동이체하고, 필 요할 때면 성금을 모으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출범시키는 과정에서, 또한 10주기, 20주기에 자료집을 펴내고 토론회를 열 었다. 우리 사건뿐만 아니라 이제는 기댈 데가 없어진 다른 의문 사 사건의 부모님들까지 인터뷰하고 그 가슴 아픈 사연들을 기록 으로 남기기도 했다. 88학번 정원옥이 1989년으로부터 지금까 지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품어온 결과 우리나라에 유래가 없는 의문사 사건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한 것도 놀랍다. 다른 열사들의 기념사업회들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지만, 이내창기념 사업회는 우리들이 아니었으면 해낼 수 없는 일들을 많이 했다. 기왕에 잘 해온 일들은 일단 접어두고 걱정을 몇 가지 적어보 자. 앞으로도 지금 정도의 결속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그 많던 동문, 회원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면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회원 다수 는 이미 중년의 ‘어르신’들이 되었다. 그런데, 20대 학생운동 하 던 무렵의 관성과 문화가 우리 안에 여전해서 조금 갸웃할 때가 있다. 모임 운영이 좀 더 어른스러워졌으면 싶다. 기념사업회 운 영에 대해서는 좀 더 공식적인 기구답게 회의도 정식화하고 모임 운영에 대한 보고도 좀 더 자상했으면 싶다. 매월 회비를 내는 회 원들께만이라도 꼭 반년마다 내는 소식지 《어깨동무》를 통해서 만이 아니라 카톡이나 페북, 이메일을 통해서 조금 더 자주, 한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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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

달에 한 번쯤은 친절한 보고와 안내를 해서 모임을 운영하는 사 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지 가늠할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 물론 성가신 일이겠지만 말이다. 연락이 끊긴 1989년 당시 총학생회 집행부 등 당시 다양한 정 파에 흩어져 있던 동문들, 가족처럼 지내던 선배 동문들에게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과거사위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의 경과와 가족들의 근황, 우리가 벌여온 일들에 대해 매월, 이메일이나 쪽지라도 전하고, 또 그들의 안부도 서로 묻고 전하 면서 힘든 사연 기쁜 소식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이천으 로 묘를 이장할 때는 그동안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었던 회원들도 함께 하면 좋겠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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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괴산으로 이사했어요 우지영

김태호, 우지영, 김림...... 세 가족이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충북 괴산으로 ‘이사 했다’. 김태호의 부모님까지 3대가 산다. 이웃에는 장성백·최현주 가족과 이제성 · 김은희 가족이 있다. 지난해 12월 31일 이삿짐을 싸고 푼 우지영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는 이사 가기 직전에 쓴 것이어서 시차가 있지만, 원문 그대로 싣기로 하고 내용을 바꾸지 않았다. -편집자 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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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지난해 초 기념사업회 신년회 토크쇼에서 괴산으로 이사갈 계 획이 있다고 밝혔었죠? 그래요. 저희 괴산으로 이사했어요~ 아니 정확히는 이사중이에요~ 부모님과 남편은 5월에 이사를 했고, 저랑 아들 림은 12월 말 에 이사할 계획이에요. 림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라 학년을 마치고 가고 싶다고 해서 겨울방학하고 바로 내려가기로 했어요. 올 한 해 내내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어떻게 내려갈 생각을 했어?”, “무슨 농사 지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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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학교는?”, “너 일은?”...... 이 질문에 대답하다 보니 우린 아직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서 ‘귀농’했다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귀촌’도 아니고, 그러다 새로운 대답을 찾았죠. 그냥 “괴산으로 이사했어요”라고요. 오래전에 귀농해서 사는 선배한테 물었어요. “어떻게 하면 가능해요?” 그 선배는 “도시에 미련을 버리면 돼”라고 대답했는데 20년 가까이 그 미련을 버리 기가 힘들더라구요. 저희 부부는 처음 결혼할 때 10년 살고 ‘귀농’해서 살자는 약속을 했었죠. 그런데 빡빡한 도시의 일상을 살다 보니 까마득히 잊고 살았죠. 그러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괴산에서 정착하기 시작한 동문들이 사는 것을 보면서 다 시 이전의 약속을 떠올리며 고민하기 시작했죠. 우리 어깨동무 가족들도 다들 한 번 생각해 봤을 거예요. 그쵸? 저희 가족도 자주 괴산에 놀러가면서 점점 고민이 깊어졌죠. 이 도시를 벗어나는 방법을요.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은, 림이의 중학교 교육 때문이었어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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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지금은 그냥 평범한 학교와 몇 개의 학원을 다니는 도시 학생 이에요. 하루는 길을 가다 지나가는 학원버스를 보고 림이가 “엄마, 나 는 저 버스는 절대 타고 싶지 않아.” 라고 얘기하는데 지금은 걸어서 다닐 수 있는 학교 주변의 학 원만 다니지만 중학교를 가면 그런 학원버스를 안 태울 자신이 없었어요. 학원 버스를 안 태우고 앞으로 더 치열해진다는 중학교 교육을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고민이었어요. 더구나 림이는 학교 교육과정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많은 아 이라 좀 더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10대를 보내게 해주고 싶 었죠. 그래서 도시에 있는 학교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어요. 2014년부터 림이가 다닐 괴산의 우리동네 중학교에는 같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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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 친구가 모두 7명이래요. 2명 정도 더 전학을 올 계획이 있다네요. 전교생이 30여명이 에요. 환상이죠. 처음엔 림이도 괴산으로 내려오는 걸 싫어했어요. 오랜 친구 들하고 헤어지는 게 가장 큰 문제였죠. 그래서 여름에 지금 반 친구 몇 명과 괴산집에서 캠핑하며 림 이가 다닐 중학교 구경도 하고 맘껏 놀게 했더니 시골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던 친구들은 시골에 대한 이미지도 바뀌고 친구들 과 헤어진다는 걱정도 좀 줄어들었죠. 이번 기말고사 시험 보고 두 번째로 친구들과 괴산 캠핑을 앞 두고 있어요. 경쟁이 치열했다는 소문이 있네요. 두 번째는 남편 직업의 변화 때문이었죠. 학교를 졸업하고 18년 동안 한 회사를 충실히 다녔던 남편. 열심히 솔선수범하는 사원에서 노조간부로, 다시 현장으로 돌 아가 노조일을 한 빨간줄 때문에 오랜 기간 말단 과장님으로 꿋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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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꿋이 일했죠. 그러다 성실함을 인정해 준 상사 덕분에 관리자가 되면서 3년 동안 우리 가족은 아빠 얼굴 보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어요. 그러는 사이에 고혈압에 약간의 당뇨 증세까지 얻게 되었죠. 그리고 본인의 가치관과 너무나 다른 회사의 비전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어요. 남편은 점점 그냥 가족을 위한 경제적 수단으로 회사를 다니는 것 같아 작년부터 회 사를 그만두는 것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죠. 저도 남편이 쉬는 것에 동의를 했구요. 저만 해도 학교 졸업 후 네 번 직장을 바꾸면서 중간중간 쉬었는데 남편에게도 휴식 이 필요한 거 같았어요. 매년 중, 후반에 내려오는 구조조정 칼바람에도 잘 버티며, 작년 말에는 또 안정적 인 인사이동이 있어서 한 3년은 조용히 지내겠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우리의 계획을 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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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 앞당겨 주었어요. 회사에서 관리자인 남편에게 정리해고자 명단을 올리길 원했 고, 남편은 “남의 목에 칼대는 일은 못하겠더라”며 사표를 던지 고 나왔죠. 덕분에 ‘로또가 돼서 그만 뒀다’, ‘다른 곳으로 미리 준비 다 하고 이직했다’느니 최근에는 ‘다시 복귀했다’는 등 무성한 소 문을 남겼죠. 주저주저하던 도시생활에 대한 미련을 쉽게 떨쳐버리게 되었 죠. 남편은 자립경제를 해야 한다며 일단 자급자족 생활의 기본틀 을 만들고 싶다고 했죠. 우린 거기에 기꺼이 합의를 보며 괴산으로 성큼 다가섰죠. 세 번째는, 가족이 다 같이 모여살기 위해서 도시를 떠날 수 있었어요. 시부모님 두 분 다 지병이 있으시고 연세가 많으셔서 저희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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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가까이에서 돌봐드려야 하는데 림이가 어릴 때는 거의 매주 본가에 갔었는데 점점 그 횟수가 줄어들어 두 달에 한두 번 정도 가게 되었죠. 그래서 함께 사는 것에 대해 몇 년 전부터 고민하게 되었는데 이 도시에서는 주택문 제가 쉽지 않더라구요. 도시를 떠나면서는 너무나 쉽게 해결이 되었죠. 이제 림이도, 그 외계인도 무서워한다는 중학생이 되는데 중학생이 되는 림이에게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생활은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점점 핵가족으로 가는 도시 에서 벗어나면서 저희 가족은 대가족의 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괴산에 먼저 정착한 지인들 덕에 쉽게 좋은 집을 얻게 돼 이사는 생각보다 빨리 이루 어졌어요. 우리 가족은 귀농학교를 다니며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농사에 대해 공부를 하지도 않았어요. 농사 시작 시기 끝 무렵에 이사를 해서 마땅히 땅을 얻지 못해 올해 는 농사를 시작하지도 못했어요. 가족 모두가 새로운 생활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 여유를 가지기로 했 죠. 가족이 함께 나누는 일을 찾으며, 마당 텃밭에서 나는 작은 생산물로도 식탁에 큰 기쁨을 느끼고, 동네 이웃들과 소소한 즐거움을 나누며 살고 싶어요. 저희 가족은 도시 생활을 하면서 생긴 문제의 해결책을 찾다보니 괴산으로 터전을 옮 기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제 그 바뀐 터전 위에 조금씩 천천히 생활을 바꾸며 적 응하며 살아가려고 해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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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매일 출근하는 일이 아니라서 서울을 오가며 일은 계속 할 거구요. 괴산 집에다 조그맣게 작업실을 꾸며 자리가 잡히면 다시 우리옷 만드는 일도 시작 해볼까 해요. 올 한 해 괴산과 안양을 왔다갔다하며 느낀 것은 괴산으로 이사하기 정말 잘했다는 것. 안양집도 관악산 등산로 아래라 공기가 좋음에도 불구하고 괴산에서 올라오면 숨이 턱 막히더라구요. 너무나 좋은 자연을 맘껏 누릴 수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무엇보다 우리 가족이 함께 꿈꾸는 꿈이 많아졌다는 게 너무 좋더라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2014년에 괴산에서 적응하며 사는 이야기 또 전할게요. 2013년 12월 11일 우지영 씀.

우지영_ 1970년에 태어나 중앙대에서 의류학를 공부했다. 생활한복회사 <여럿이함께>, <질경이> 등에서 일했고, 지금은 EBS방송국 '딩 동댕유치원' 등 방송 프로그램과 연극 등에 필요한 의류 소품 제작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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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를 돌아보며 2014년을 묻는다 »» ‘강제징집 · 녹화사업’을 통해 보는 냉전질서와 국가폭력

- 박현주

»» 80년대 의문사 사건을 요약하며

- 편집위원회

서울의 봄, 6월항쟁, 노동자대투쟁, 통일의 꽃. 가

첩으로 조작되어 목숨을 빼앗기면서도 굴복하지 않

슴이 뛰나요. 이 단어를 읽으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고 유신을 뚫어낸 선배들의 투쟁이, 6월항쟁은 전두

박정희 유신통치를 견뎌낸 수많은 학생, 시민들이 거

환 군부정권의 폭압 속에서 목숨을 던진 항쟁과 의

리로 뛰쳐나와 민주주의를 외치던 서울의 봄. 넥타

문의 죽음을 밑바탕으로 가능했습니다. 운동은 투

이 부대라고 불리는 소위 사무직 노동자들이 거리

옥을 각오해야 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

로 나섰고, 이한열의 죽음으로 백만 명이 시청광장

니다. 그리고 그 길로 무수히 걸어갔습니다.

을 가득 메웠던 민주주의의 함성. 근육질 노동자의

언젠가부터 기억하지 않으려 합니다. 오랜 시간을 고

장엄한 대오, 거칠 것 없었던 대투쟁. 60년 ‘가자 북

통으로 차곡차곡 채워서 결국 독재의 담장을 넘을

으러, 오라 남으로’ 이후 하나의 조국을 이루자는 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지워지고, 영광의 날들만 남아

물나는 진군.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남발되다 못해 진부

기억이 또렷합니다. 그런데 현대사의 새로운 장을 써

한 계급성의 표현으로 전락해 버린 386(어느 날부

내려간 그 현장과 항쟁 사이에 무수한 절망과 좌절,

터는 486으로 업그레이드되어 불린다)이란 단어처

국가폭력에 의한 고통의 날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럼 우리 모두가 후줄근해졌습니다. 386은 소위 명

사실은 잘 드러나지 않는 듯합니다. 서울의 봄은 간

망가 대열에 선 자들을 위한 훈장이 아닙니다. 그 시


절을 살아낼 수 있게 목숨을 걸고 바친 자들의 목

‘어두운 죽음의 시대 내 친구는 굵은 눈물 붉은 피 흘

숨값입니다.

리며 역사가 부른다.’ 지난 여름 최우혁 추모비 제막

80년대에는 동년배의 30%도 대학에 가지 못했는

식에서 그의 벗들이 불렀습니다. 그가 살아서 즐겨

데, 386이라는 호칭을 입에들 달고 살았습니다. 그

부르던 노래라고. 80년대를 보낸 사람이나, 80년대

래도 이 오만방자한 엘리트들을 다 받아안아줬습니

를 역사로 배우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80년대는 과

다. 왜냐하면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친구는 멀리 갔어도 없

어려워 나서지는 못해도, 그래도 배운 놈들이 기득

다 해도 그 눈동자는 별빛 속에 빛납니다.

권을 버렸다는 것을 존중한 것입니다.

현대사를 관통하는 냉전 질서와 국가폭력을 ‘강제

80년대에는 거리에 나온 시민들의 박수소리와 격려

징집과 녹화사업’을 통해서 고찰해 본 논문을 통해

의 함성이 한여름 아스팔트만큼 뜨거웠습니다. 투쟁

서 과거청산의 역사적 의미와 과제를 되새겨 볼 수

의 시절이었고, 앞서서 나가는 자에 대해 존경과 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보조해서 80년대 주요

중이 가득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 시절, 그 공간에

의문사 사건을 요약 정리했으니 참조하면 도움이 될

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고, 지금은 무엇을 지키고 있

듯합니다.

는지, 한번쯤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후벼파기

‘강제징집·녹화사업’을 통해 보는 냉전질서와 국가폭력 박현주

Ⅰ. 들어가며 - 식민유제와 냉전질서가 낳은 국가폭력 ‘의문사’ 올해로 정전 60주년을 맞는 한국전쟁은 이미 과거의 일이고 역사가 되었 다. 하지만 이 전쟁이 드리운 어두운 그늘은 여전히 한반도를 과거에 묶어두 려 한다. 전쟁은 식민지배 질서 청산 과제를 단번에 집어삼켜 이를 먼 훗날로 유예시켰다. 뿐만 아니라, 절멸의 톱질전쟁을 체험하며 생겨난 집단기억을 자 양분 삼은 폭력적 대결 구도, 즉 두 이념과 두 체제 중 오직 한쪽에만 속할 것 을 강요하는 냉전 질서가 이후 한반도 남북 양쪽에서 근본 질서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국가를 만든다고 하였듯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두 전쟁국가를 탄생 시켰고, 한반도 남쪽에 자리잡은 반공국가 대한민국은 분단된 반쪽 국가로서 의 정통성을 이 전쟁을 통해 형성하였다. ‘열전’으로 ‘냉전시대’를 연 한국에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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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국가폭력의 뿌리는 식민지 국가에 있었다. 일제 하 천황을 위한 성스러운 전쟁에서 신민으 로서의 역할을 거부하는 불령선 인(不逞鮮人)들을 ‘내부의 적’으 로 삼아 박멸한 식민지 무단통 치로부터 국가폭력을 식민잔재 로 물려받은 것이다. 이러한 국가폭력의 유산은 1945년에서 1953년까지 사 실상의 내전과 이어진 참혹한 열전 아래서 ‘내부의 적’을 만들어내 그 적과 전 면전을 벌이는 방식으로 실체를 갖추었다. 역대 독재정권은 자신들의 정통성 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여 국가폭력 아 래 쓰러뜨렸다. 역사적으로 경찰과 군대, 그리고 정보기관이 국가폭력의 중 요한 장치들이었다. 식민지 유산과 국민들의 전쟁 체험에 기반하여 작동하는 ‘전쟁의 정치’는 반 대 의견을 가진 국민들과 경쟁세력을 마치 적을 타도하듯 무력과 폭력을 통 해 억압해 왔다. 이에 더하여 한국에서 국가폭력을 정당화한 것은 식민지 경 험과 민족국가 건설의 좌절로 인해 생겨난, 국가 자체를 절대화하는 담론이었 다. 국가가 판단의 기준이 되고, 개인은 단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만 위치 지 워졌다. 국익은 개인의 이해, 집단의 이해를 초월한 절대성을 부여받았고, 이 러한 국가주의는 국가의 신비화된 허상을 정당화하여 국가폭력을 문제 삼지 못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개발독재 시기의 ‘국민’ 정체성은 국민동원체제였던 식민지 유산이 강화·개편된 것이었다. 이러한 집단 규범을 벗어나면 타자화되 어 국가폭력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타국민에 대한 전쟁에서 ‘비국민’에 대한 전쟁으로의 이전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국가주의는 생각의 차이도, 개성의 차 이도, 사상의 차이도 애초부터 공존이 불가능한 사고체계였다. 비상계엄 · 위수령 · 긴급조치로 통치가 이루어지고 국가폭력이 일상화되 었던 유신체제가 붕괴한 이후에도 군부는 여전히 권위주의 통치를 지속하 려 하였고, 이것이 시민의 저항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1980년 광주학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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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살이라는 비극을 빚었다. 쿠데타와 광주학살, 이 두 가지 극단적인 폭력 을 발판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부는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반공’과 ‘안보’의 논리로 응답하였다. 역대 정권에서 권력 유지의 핵심적인 도구였던 정보기관들의 기능이 전면적으로 확대되었다. 정당성 기반이 취약한 전두환 정권은 각종 정보사찰기구가 동원된 보다 치 밀한 탄압에 더하여 최소한의 인권조차 무시하는 폭력적 방식도 서슴지 않았 다. 이 같은 상황은 ‘의문사’1)를 5공화국의 정치와 인권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 해 주는 역사적 단어로 만들었다. 특히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은 강력한 저항 의 근거지였던 만큼, 정권의 강화된 탄압 속에 희생이 컸다. 정권은 시위과정 에서 연행되거나 적극적인 민주화운동 참여자로 지목된 학생들을 군에 강제 징집하였고, 그런 방식으로 강제징집된 학생들은 감시의 굴레에 갇혀 동료들 에 대한 정보수집 및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았다. 이른바 ‘녹화사업’이다. 그리 고 녹화사업 와중에 다수의 ‘의문사’가 발생하였다. 일제 식민지배, 전쟁과 학살, 군사독재를 거치는 동안 몇 차례의 과거청산 시도가 좌초되는 경험을 했던 한국 사회는 그만큼 청산되어야 할 누적된 과 제들을 안고 민주주의 이행기에 들어섰다. 이 글은 그 중, ‘의문사’의 한 유형 을 만들어낸 국가폭력을 다룬다. 즉 1980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 시 민을 군홧발로 짓밟고 들어선 전두환 정권 초반, 가장 저항이 거셌던 학생운 동을 무력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실행된 ‘강제징집 · 녹화사업’에 주목하여, 냉 전질서 아래서 ‘안보’가 어떻게 악용되는지 확인하고, 프락치공작으로 젊은이 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녹화사업을 실행 가능하게 했던 한국사회 냉전질서 의 특성을 살펴본다.

1) 의문사는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했다고 믿을 만한 의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에 의해 은폐 · 조작되어 자 살이나 사고사 혹은 실종으로 발표된 죽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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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분단의 군사대결선 ‘전방’에서의 죽음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살해로 18년 장기독재 가 막을 내린 1979년은 유신체 제에 대한 반발이 폭발적으로 터 져 나오던 시점이었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체제는 무너졌지 만, 억압적 통치체제에 억눌려 왔던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거기서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권력 공백기 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박정희 암살 사건을 수사한다는 명분을 걸고 계엄사 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12·12군사반란을 주도하여 권력의 실세 로 등장하였고, 이어 1980년 5·17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시민들의 민주화 열 망을 무력으로 짓밟았다. 그리고 ‘국보위’2)를 설치하여 입법 · 행정 · 사법 3 권을 장악한 데 이어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됨으로써 신군부의3) 집 권을 완료하였다. 이처럼 집권과정에서 정통성을 결여한 신군부는 시민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억압적 국가기구들을 동원하였다. 특히 군부대의 사찰 · 감찰 업무를 관 장하던 국군보안사령부의 역할이 강화되어, 보안사는 요원들을 대학가에 상 주시켜 정보를 수집하였다. 중앙정보부가 개편 · 강화된 국가안전기획부는 민 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사찰을 강화하였다. 안기부와 보안사라는 정보수사기 관들을 정권안보를 위한 억압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특히 안기부가 소집 권 2) 1980. 5. 31. 전두환이 광주항쟁을 진압한 직후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의장은 최규하 대통령이었지만 실 질적 권한은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있었다. 각 부처 장관들은 대통령을 제쳐놓고 전두환에게 보고했다. 전두환 이 정권을 잡기 위해 만든 국보위는 그 자체가 위헌적·위법적 기관이었다. 국보위는 밀실에서 헌법 개정 작업을 하면서 부패·비리 정치인 척결을 명분으로 반대 정치세력들을 제거하였다. 4만 명 가까이를 ‘삼청교육대’에 보내고, 언론 통·폐 합과 폐간을 강행하였다. 8월에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전두환을 11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총투표 자 2525명 가운데 2524명 찬성, 무효 1표). 10월에 국민투표로 제5공화국 헌법이 발효되면서 국회가 해산되고 국회를 대신해 입법기능을 담당할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발족했다. 확대·개편된 것이 국보위였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81명 전원을 전두환이 임명하였다. 3) 1979. 12. 12.~1981. 2. 기간을 ‘신군부 집권 시기’로 보고, 전두환이 신헌법에 의해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는 1981. 3. 3. 이후부터 ‘5공화국 정권’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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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한을 갖고 정권 내 핵심적 권력통제기구 역할을 하게 되는 ‘관계기관대책회 의’가 설치되어, 이후 공작정치와 민주화운동 탄압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학생운동은 ‘서울의 봄’4) 무산과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이 가져다 준 패배감 에서 벗어나 점차 전열을 정비하고 학살정권의 부도덕함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 투쟁에 나섰다. 이 저항 주체들을 통제하고자 정권이 선택한 것은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이라는 ‘학원판 사상전향제도’였다. 시위로 구속 혹 은 제적된 수많은 학생들이 녹화사업 대상자가 되었다. 군사독재 정권의 억압 적 통치체제 구축을 위해 마련된 이 기획은 수많은 젊은 양심들의 육체적·정 신적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1982년 11월, 성균관대 2학 년 이윤성이 ‘군부독재 타도’, ‘광주항쟁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는 시위에 참여 하였다가, ‘백골단’이라 불리는 사복 체포조에게 붙잡혀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되어 사흘 만에 전 격적으로 입대가 이루어졌다. 학 생운동 가담자를 분리시키기 위 해 시위 참여 학생을 경찰에 연 행한 상태에서 바로 군부대에 입 영시키는 강제징집의 전형적 형 태였다. 경기도 연천 철책 지역에 배치된 이윤성은 다음해 전역을 열흘 앞둔 날, 205보안부대 테니스장 심판대에 목을 맨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4) 박정희 사망으로 유신체제가 붕괴한 1979. 10. 26.부터 광주항쟁이 진압된1980. 5. 17사이를 일컫는 말로, 1968년 체 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표현이다. 10·26 이후 긴급조치가 해제되어 개헌 논의가 가능해졌고, 긴급조치 에 의해 처벌받은 재야 인사들이 복권되었다. 유신 체제가 끝나고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시민들의 기대가 커갔다.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을 위해 1980. 5. 20. 국회를 열어 논의하기로 여야가 합의하고, 시민사회 원로들이 유신헌 법 폐지 및 민주적 선거를 요구하는 가운데,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 일정 제시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청하는 대규모 대학생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5. 17.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5. 20.으로 예정된 임시국회를 무산시 켰다. 5. 17.에 단행된 조치에 항거한 광주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됨으로써,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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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마 전 이윤성과 마찬가지로 강제징집되어 전방에 배치되었던 연세대생 정성희가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다음달에 고려대생 김두황, 7월에 한양대생 한영현, 8월에는 동국대생 최온순의 죽음 소식이, 그리고 연말에는 서울대생 한희철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시위하다 군에 끌려간 학생들이 프락치 공작 강요를 받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각각의 죽음에 대한 헌 병수사 결과는 ‘군복무 염증’, ‘불우한 가정사 비관’, ‘사회현실 비관’에 따른 자살로 발표되었다. 이윤성의 경우 헌병대가 발표한 수사결과는, 불온삐라와 책자를 소지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어 205보안부대에 연행되어 월북기도 혐의 로 조사를 받던 중 목을 맨 주검으로 발견되었으며 월북 혐의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 고민하다가 자살하였다는 것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다 입대한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이 끌려간 전방부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진상을 밝히고 학 생들의 사인을 재조사하라는 목소리가 높아가면서, 1984년 3월 국회 국정 감사에서 강제징집된 대학생 6인의 죽음에 대해 진상을 밝히라는 야당의 요 구가 있었다. 국방부는 “강제징집을 한 사실이 없고, 녹화사업은 모르는 일 이며, 사망원인은 안전사고다”라고 답변했다. 아예 모르쇠로 잡아뗀 것이다.

Ⅲ. 죽음을 부르는 강제징집 · 녹화사업 ⑴ 강제징집 · 녹화사업의 배경과 실상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은 군사대결 중인 분단된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을 배 경으로 전두환 정권이 반공이데올로기와 군대라는 통제 시스템을 활용하여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장치였다. 한국의 역대 정권은 학생운동 참여자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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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들에 대한 탄압수단으로 병역의무를 악용하였다.5) 강제징집은 이미 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지도휴학제’6)와 함께 실시되었고, ‘서울의 봄’에 폐지되었 다가 1980년 계엄상황에서 부활한 것이었다. 이 시기 강제징집은 안기부·보안 사·치안본부·문교부·병무청 등 관련기관들의 총체적 공모 아래 시행7)되었다 는 게 특징이고, ‘학원대책회의’가 상시적으로 운영되었다. 강제징집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따라실행되었는데, 보안사에서 펴낸 <5공전사(5共前史)>는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후 신군부의 학생운동 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학생운동은 불순배후세력의 조종에 의해 대학간 연합, 전국 확산은 물론 고교생이 가세하였고, 노조 및 불량배들이 학생운동에 가세하여 민중봉기를 획책하고 있었으며, 점자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계급투쟁의 성격으로 발전하 고 있다. 이러한 정치 · 경제 · 사회적 혼란상태를 주시하던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장군은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다가는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놓이게 되 리라고 판단했다. 심지어 국보위에서 ‘학원정상화 방안’을 논의한 요지라는 게 “학원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 모든 소요 및 혼란의 근원은 학원… 학원 소요는 북괴의 위협보다 더 큰 위협”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저항운동을 근원적으로 뿌리 뽑겠다는 인식을 가진 이 시기 강제징집이 ‘녹화사업’이라는 반인권적 사상개 조 기획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반정부 학생

5)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정권퇴진운동으로 확대되자 시위 주동학생들을 퇴학시킨 후 군에 징집하였고, 1969 년 삼선개헌 반대시위, 1972년 이후 유신반대운동, 1975년 이후 긴급조치 반대시위에 이르기까지 학생운동 가담자들 을 징집하였다. 6) 박정희 정권 말기에 실시되었다가 1980년 복권·복학 조치로 폐지된 사실상의 강제휴학제도인데, 1980년 5월 3일 전 두환(합수본부장)이 계엄사령부에 ‘학원소요 문제점 및 대책 강구’를 지시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국보위를 설 치하여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후 1980년 7월 15일 부활시키고 소요 관련 제적생의 재입학을 금지시켰다. 지도휴학제는 형식상 각 대학의 학생담당 부처 또는 지도교수가 학생에게 휴학을 권유하는 제도이나, 실제로는 휴학할 수밖에 없는 조 건을 내세웠기 때문에 휴학 강요라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으로 휴학을 하게 되는 학생은 바로 군입대 영장이 나오기 때문 에 군에 입대해야 했는데, 이것이 지도휴학제의 목적이었다. 7) 치안본부가 학생운동 관련자로 판단한 전원에 대해, 문교부와 각 대학이 지도휴학제에 의거하여 학적변동 처리하여 이를 병무청에 통보하고, 검찰과 법원은 구속된 학생들을 기소유예나 선고유예로 석방하여 이들이 강제징집되도록 협조 하였고, 병무청이 신체조건과 연령 등 법적 절차와 요건을 무시하고 징집하면, 국방부와 군에서는 이들을 최전방에 우선 배치하고 별도 관리하는 구조로 진행되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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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확대와 이에 따라 6백 명에 이르는 강제징집자들의 급격한 증가, 이들 로 인한 군내 반정부 사조의 확산, 그리고 전역이 임박한 백여 명의 강제징집 자들이 다시 학생운동에 가담할 것에 대한 우려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녹화 사업 또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추진된다. 보안사는 강제징집자들과 정상입대자 중 학생운동 전력자들을 ‘좌경오염 방지’ 명목 하에, 1단계로 학생운동 활동사항과 조직체계 등을 조사하는 ‘심 사(審査)’, 2단계로 대상자의 생각과 이념을 바꾸도록 하는 ‘순화(純化)’, 3단 계로 ‘순화’된 것으로 판단되는 병사들에게 출신 대학교의 학원첩보를 수집 해 오도록 하는 ‘활용(活用)’, 즉 프락치공작을 진행하였다. 이렇게 심사-순 화-활용의 3단계를 거친 녹화사업 피해자들이 총 1,129명이었다. 녹화사업 은 대통령 지시8)에 따라 1982년 9월 최경조 보안사 대공처장 지휘 아래 입안 되었고, 대공처 산하에 ‘대좌경의식화과’로 불리다 나중에 호칭을 심사과로 변경한 전담부서가 설치되어 실행되었다. 최경조 대공처장은 이를 신념이라 고 밝혔다. 당시 녹화사업을 잘하면 나라 안정이 최소 5년은 간다고 생각했다. 나의 신 념이었다…. 그게 내 철학이고 내 시국관이었다. 내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지 탄받아야 하겠지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내 가 그 자리에 간다면 또 할 것이다.9) 의문사를 당한 6인 중 3인을 비롯하여 다수의 ‘녹화사업’ 대상자가 배치되 었던 5사단10)의 사례를 보면 녹화사업이 집행된 실상이 보인다. 우선 강제징 집되어 5사단에 배치되었다가 사망한 이윤성이 2대독자, 정성희가 입영연령 에 미달하는 만19세 이하로 현역입영 대상이 아니었던 사실은, 징집과정의 불 법성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준다. 문서와 진술을 통해 확인된 5사단의 녹화 8) 1981년 4월 2일 “소요 관련 학생들을 전방부대에 입영 조치하라”는 대통령의 구두 지시를 국방부장관이 메모하여 국 방차관 등을 거쳐 병무청장에게 전달하였다는 기록, 1981년 12월 3일 위 ‘특별조치 방침’을 청와대에 ‘구두 보고’하였다 는 관련문서 등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와 승인 사실이 확인되었다. 9) 2006년 국방부 진상규명위원회 참고인 면담 시 최경조의 진술. 10) 정성희(연세대, 82. 7. 23. 사망), 이윤성(83. 5. 4. 사망), 한희철(83. 12. 11. 사망) 등 세 명의 사망사고를 비롯하여 각종 사고가 많이 발생하였던 5사단에 강제징집과 관련되어 배치된 인원은 총 96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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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실행 과정을 단순화하면 아래와 같다. 일단 강제징집자가 배치되면, 사단보안부대는 ‘특수학변자 보호카드’를 작 성하고 동향관찰을 실시한다. 심사가 시작되면, 대상자들은 대학에 입학하 여 군에 입대하기까지의 과정을 십여 차례 반복적으로 수정을 강요당하며 진술서를 작성한다. 작성과정에서 서클활동이나 학생운동과 관련된 선후배 명단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되고 이로 인해 동료를 배신해야 하는 고통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가혹행위가 빈번하고, ‘반성문’과 “지난날의 불충하던 과거를 철저히 청산하고… 반공대열에 앞장서서 장병을 선도한다”는 요지의 ‘서약서’가 강요된다. 사단보안부대가 <심사결과보고서>를 작성하여 사령부 에 보고하면, 심사과는 필요시 심사자를 소환하여 학원정보 수집 등의 프락 치공작 임무를 부여한다. 이러한 프락치공작 관련한 추 진실적, 접촉결과, 첩보내용 등 이 담긴 문서인 <활용계획 보고 서>, <활용결과 보고서>에 다 양한 활용사례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휴가를 주어 학내 동향을 수집하게 하고, 지역의 사회과학 서점의 동향 파악을 요구하여 보고 받고, 전역한 후에도 심사과에서 접촉하 여 동향 파악을 요구하는가 하면, 광주, 대구, 부산 등 일부 지역에서는 대상 자의 소속부대 및 보안사 심사과와 연계하여 지역 보안부대가 직접 프락치공 작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강제징집되어 사망한 6인 중 한영현은 동료들의 이름을 밝힌 뒤 자책감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었고, 한희철은 보안사에 끌려가 폭행을 당한 뒤 “고문에 못 이겨 동료들을 팔았다”, “이 유언은 보안사령부에 빼앗기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 담긴 유서와 편지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녹화사업은 모르는 일”이라 고 잡아뗀 국방부의 국회 답변 이면에, 불법적인 감금과 고문수사에 의해 생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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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공포와 좌절감, 죄책감으로 젊은 양심들이 죽음으로 내몰린 프락치공작 이 있었다.

⑵ 인간 내면에 대한 침탈 -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력

군대는 특수한 환경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성인 남성에게 의무로 주어진 징 병제 자체가 본인이 원치 않아도 일정 기간 신체적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는 명령지휘체계 아래 놓이게 되는 강제적인 제도이다. 더구나 군부가 통치하던 1980년대 초반, 군에 강제징집된 학생들에게 보안사의 호출은 그 자체로 공 포였는데, 이미 보안사의 프락치공작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력 앞에서 비겁해지는 나약한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만 증폭되었 다. <1981. 3. 13 강제징집자> 스스로를 방어할 수단이 전혀 없는 상태로, 국가가 폭력을 가하면서 자 신의 양심을 팔라고 강요…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시절… <1981. 4. 11. 강제징집자> 반성을 강요받았을 때 저항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고, 외부의 압력에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하였다는 모멸감이 제대 후에도 지속… 동료를 팔았 다는 죄책감으로 시달렸고… <1982. 6. 22 강제징집자>

녹화사업 과정에서 정신적 불안에 시달려… 학원동향 파악을 위해 특별 휴가를 나왔을 때도 동료들의 활동을 보고하고 고발해야 한다는 지시 때 문에 양심의 압박을 받았다. <1983. 8. 31 강제징집자> 강압적인 조사와 죄인 취급… 프락치 활동을 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 절망감… 삶의 선택과 의지는 완전히 박탈당한 채 올가미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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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 계속된 군 생활이었다. <1983. 3. 18 강제징집자> 녹화사업은 동료에 대한 배반뿐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도록 강요하는 야 만적인 작태였다. 녹화사업에 폭력과 협박과 회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말 려들어…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 <1983. 9. 1 강제징집자> 보안사의 억압과 폭력으로 자신을 속이고 동료를 고발… 인간성 파괴행 위가 무엇보다도 저주스럽다. 그들이 행한 행위는 고문과 폭력을 뛰어 넘 는 잔학한 인간말살 행위였다. < 1981. 5. 6. 강제징집자> 속박된 상태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강요된 '자백'과 '반성'과 '프락치활동' 은 피해자들에게 자살을 떠올리게 할 만큼의 고통이었다. 강제징집된 6인의 죽음은 이런 배경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잇따른 죽음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짐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1984년 9월 강제징집을 중단하고 12월 에는 녹화사업 전담부서를 없앤다는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이후 1990년 보 안사에서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으로, 녹화사업이라는 명칭은 없 어졌어도 운동권 출신자들을 이용한 프락치공작이 민주화 이행기에도 계속 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은 그 자체로 비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발상이었고, 신체의 자유도, 양심과 사상의 자유도 짓밟은 반인륜적 기획이었다. 피해자 들을 신체적·정신적 고통 속에 몰아넣고 결국 6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강제징 집·녹화사업은 냉전 질서 아래서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대치하면 서 반공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내면화한 분단국가였기에 실행 가능했던 국가 폭력이었다. 머릿속 붉은색을 푸른색으로 바꾸어 ‘사상 개조’를 하겠다며 정 부 부처들의 총체적 공모를 통해 실행된 ‘녹화사업’은, 국가가 나서서 개개인 의 양심의 목소리를 부정하게 하고 그들의 인격적 존엄을 모독하고 가치를 짓 밟음으로써, 인간의 내면을 침탈한 국가의 테러행위였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 여 지금껏 그 어떤 사과도, 처벌도, 책임지려는 주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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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한국의 과거청산 ⑴ 민주화 이행기 의문사진상규명운동

5공화국의 폭정과 민주화운 동 세력 간의 대결은 더욱 팽팽 해져 갔고, 그 과정에서 경찰 · 안기부 · 보안사에 쫓기던 학생 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일 들이 이어졌다. 노동운동과 빈 민운동이 성장하고 저항이 확산 됨에 따라 억압기구의 공작이 강화되고 의문의 죽음이 더 늘어가면서 과거 박 정희 정권 아래서 발생한 정치적 의문사들을 포함, 유가족들이 한데 모여 의 문사진상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의문사의 진상을 밝히는 투쟁은 그 자체로 헌법과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민주화운동이었다. 국가기관이 저지른 범 죄행위의 진실을 밝히고 살해와 은폐·조작을 실행한 폭압기구를 조사하라고 외치며 1987년 6월민주항쟁을 거치는 사이, 유가족들은 민주화운동 일선 에 섰다. 1988년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하고 5공화국 비리와 광주민주화운 동 진상조사를 위한 청문회정국이 열리면서, 의문사진상규명운동도 본격화 되었다. 그러나 길은 멀고 험했다. 1987년 이후 민주화 이행기는 민주주의를 진척시 키느냐 아니면 지배질서가 재구축되느냐를 둘러싼 기나긴 갈등과 대결의 시기 여서, 기존 지배질서를 온존하려는 세력과 저항세력 사이에 긴 싸움을 예고하 고 있었다.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의 일시적 퇴장이 이루어진 뒤에도 다수의 의 문사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주화 이행국면에 서도 과거의 공안기구를 동원한 통제체제가 일관되게 존재함을 말하는 것으 로, 이는 1989년 공안정국 하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제한적으로 후퇴했던 억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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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적 국가기구가 다시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전 면에 나서 공안정국을 주도하였다. 각 국가기관 공안부서의 정책개입이 강화 되고, 상설기구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되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유지 의 실질적 도구였던 억압적 법률, 공안기관과 그 관행들이 존속되고 있었다. 국가보안법이 온존한 가운데, 공안기관들은 폭력 행사를 보장받았고, 언론 은 국가폭력의 정당성을 홍보하였다. 1989년 도래한 공안정국 아래서 국가폭력은 두 학생운동 지도자 이철규와 이내창의 의문사로 나타났다. 억압적 국가기구의 계획적인 살해 및 은폐가 의 심되는 사건들이었다. 이철규는 광주의 조선대학교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 원장으로 1989년 4월에 창간호를 내고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 배되었다가, 다음달 경찰의 검문을 받던 중 실종되어 그로부터 일주일 후 광 주 청옥동 수원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학생 회장 이내창은 7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과 8.15범 민족대회를 추진하며 통일운동에 매진하던 중 8월 15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전라남도 거문도 앞바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조직화된 학생운동 차원 의 대응으로, 이철규 사건에는 국정조사권이 발동되고 이내창 사건은 공식 재 조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내창 사건은 거문도행 여객선에 안기부 인천분실 직원이 함께 승선한 사실이 확인되기도 하였으나, 정보기관의 장벽을 끝내 넘 지 못하였다. 이렇듯 죽음의 진상에 다가서지 못한 채로, 공권력이 행사되었 다고 의심되는 죽음의 행렬은 그치지 않았다.

⑵ 과거청산의 제도화와 이행기 과제

1998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으로 헌정사상 최초로 야당에 의한 정권교 체가 이루어지고, 유가족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 위원회’(의문사위원회)가 출범하여 권위주의 시기 공권력의 개입 의혹이 있는 88건의 의문사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보기관의 장벽은 국가기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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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를 통한 조사 앞에서도 높기만 했다. 예컨대, 강제징집·녹화사업 조사에 시 종일관 저항한 국군기무사령부(과거 보안사)의 경우, 자료제출 거부에, 폐기 한 문서목록을 확인하겠다는 위원회의 실지조사마저 거부하였다. 녹화사업 담당부서였던 심사과 과장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를 모두 소각했다고 밝히고 잠적하였다. 의문사위원회는 조사권 제약과 기무사를 비롯한 정보기 관의 저항 사이에서, 의문의 죽음들에 대한 진실의 일부만을 확인한 채 3년 간의 활동을 종료하였다. 국가기구를 통한 과거청산 활동이 과거 국가범죄를 기획하고 수행했던 억압 기구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 현실은 한국사회가 실현해야 할 이행기 정의의 과제를 보여준다. 김대중 정부에 이은 2기 민주정부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힘입어11) 과거 국가폭력을 주도한 국정원 · 국방부 · 경찰에 자 체 과거사 규명 기구들이 설치되었다. 한국의 과거청산에서 보인 독특한 양상 으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의혹사건에 대해 국가기관 스스로 진실규명을 하 지 않을 경우 외부의 비판 속에 강제로 진상조사가 진행될 가능성이 대두됨에 따라 기관들이 이를 수용한 것이었다. 물론 출범 자체에 차질이 빚어지기도 하는 등 그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 으나,12) 3개 기관 모두 민관합동위원회를 구성하여 과거 국가공권력의 불법 성과 인권침해 등 국가범죄행위를 어느 정도 밝혀냈다. 예컨대, 국방부 ‘과거 사진실규명위원회’는 조사대상 1호 사건으로 ‘강제징집 · 녹화사업’을 택하였 다.13) 과거 독재정권 아래서 시민을 억압하고 인권을 유린했던 국가공권력이 과거를 반성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 11) 과거청산을 국정운영 방침으로 정한 참여정부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인권침해와 불법행위 의 진상을 규명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고백해야 할 일이 있으면 기관이 먼저 용기 있게 밝히고 새 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였다. 12)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출범 과정은 다른 기관들의 실상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과거청산 의지에 따라, 국방장관이 “국민이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외부인사, 유가족, NGO 대표를 참여시켜 진상규명을 실시할 것”을 국방부 간부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러나 장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국방부 실무부서는 외부인사 영입 없 이 국군기무사령부와 국방부 내에 특별팀을 꾸려 녹화사업과 실미도 사건 조사에 자체적으로 착수했다. 국방부장관이 “ 과거사 진상조사 관련, 국방부가 소극적으로 임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적극 추진하도록” 재차 강조함으로써 위 원회 발족이 가능할 수 있었다. 13) ①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 김대중 납치사건 등 7대 의혹 사건과 언론·간첩 등 6개 분야 선정 하여 조사 ②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 보도연맹원 학살의혹사건 등 개별사건 8개와 불법선거 개입의혹 등 포괄적 조사대상사건 3개 조사 ③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 강제징집·녹화사업 등 8건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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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에도 불구하고, 각 위원회가 법적 근거를 갖지 않은 임의기구라는 점은 조 사권 등에서 근본적인 제약 요인이었다. 3개 기관의 개혁과제를 담은 각 위원 회의 권고안이 단 한 건도 처리되지 않은 사실은 정보수사기관의 민주화가 아 직은 요원함을 말해 준다. 조사권의 부재와 기관 내부의 저항은 3개 국가기관 의 공통적인 한계로 작용하였다. 더구나 정권교체와 함께 이들 기관의 과거청 산의 의미는 무시되고 말았다. ‘국제이행기정의센터International Center for Transitional Justice’ 는 이행기 정의에 이르기 위한 접근법들 가운데 여러 정부가 주로 채택한 사항 으로, ① 국가폭력을 행사한 중요 인물들에 대한 사법적 조사 ② 재발 방지와 침해 구제를 하도록 권고할 국가기구를 통한 조사와 보고서 발간 ③ 물질적 보상과 공식 사과가 포함된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승인 ④ 인권 침해 구제 를 위한 여성의 평등권 보장과 성폭력에 대한 불처벌 방지 ⑤ 군 · 경찰 · 사법 부 및 관련 국가기구들의 억압기구로서의 관행을 바꾸도록 촉진 ⑥ 재발을 방 지할 보루로서 희생자들에 대한 사회의 기억을 보존하고 과거 인권침해에 대 한 도덕적 자각을 일깨워 줄 박물관과 기념관 설치를 든다. 하지만 대규모 인 권침해로 점철된 과거를 다루는 유일한 공식은 없다고 단언한다. 모든 이행기 정의 접근법은 보편적 인권에 대한 근원적 믿음에 기반해 있지만, 궁극적으로 각 사회는 반드시 자신만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는 1945년 해방, 1953년 종전으로, 그리고 1960년, 1980년 에 각각 4·19혁명과 ‘서울의 봄’으로 정치적 변화들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살해, 실종, 고문, 체포, 구금당하면서 국가폭력 의 희생자가 되었다. 한국의 과거청산은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 이행기 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고, 과거청산의 제도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이행기에 들어서고도 십 년이 더 지난 김대중 정부에서였다. ‘의문사위원회’ 를 위시하여 진상규명, 명예회복, 피해보상을 각각의 중심과제로 하는 위원 회들이 사안별로 설치되면서 이른바 ‘위원회 전성기’를 열었다. 2005년 설립 된 포괄적 과거청산을 위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10년 활 동을 종료함으로써, 그간의 10여 년에 걸친 제도적 과거청산이 일단락된 것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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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시점을 특징 짓는다고 볼 수 있다. ‘탈식민 · 탈독재 · 탈냉전의 복합적 과 제’의 해결과정으로 비사법적 진실위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과거청산 의 제도화 과정은 비우호적 정권의 재집권과 사회로부터의 전폭적 지지가 결 여된 가운데 현재 동력을 상실한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한국의 청산과제는 고립된 우리만의 역사가 아니라 세계사 속에 편입되어 상호작용 을 하면서 생겨난 산물이라는 인식, 또 한편으로는 과거청산이 복잡한 정치사 회적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인식을 분명히 할 때, 그 간의 과거청산 과정에 대한 성찰적 평가 및 실현되어야 할 이행기 과제 도출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간의 과거청산운동과 제도화 과정이 일단락된 지금 이 그 적기라 할 수 있다.

Ⅴ. 냉전을 넘어서기 위하여

강제징집되어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지 30년, 과거 국가가 저지른 범죄 로 처벌받거나 사과하는 가해자가 없는 현실 앞에서 유가족들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망 당시, 자식의 ‘월북기도혐의’에 따른 연좌제 공포 때문에 군 수사기관의 협박 속에서 자살임을 시인하는 각서를 쓰고 침묵해야 했던 이윤 성의 아버지는 모든 사업을 포기한 채 충격 속에 백혈병을 얻어 사망하고, 어 머니는 수차례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동생 사망 후 안기부와 보안사에 수차례 불려가 ‘명백한 자살이니 떠들고 다니지 말라’는 협박에 시달린 한영 현의 형이나, 생계를 제쳐두고 진상규명에 나서 경제적 곤란을 겪은 한희철의 아버지 등 의문사 유가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뿐 아니라 의문사가 지닌 사 회적 책임까지 감당하며 살아야 했다. 공권력의 방해에 맞선 진상규명 활동 과정에서 겪은 사회적 고립, ‘불순분자’ · ‘문제가정’이라는 오명, 신체적 · 정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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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 질환, 경제적 어려움, 다른 가족 구성원의 희생으로 이어진 유가족들의 고통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온전히 공유되지 못한 채 그들의 가슴속에 분노와 절망감으로 머물러 있다.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는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경험 했는가에 따라 달라지며 그 과거 경험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고 한다. 서구는 냉전을 ‘오랜 평화’ 로 경험했지만, 3세계의 다수 국 가가 이를 폭력의 시대이자 열전 으로 겪었다. 냉전이 어떤 이들에게는 전쟁이라는 은유적 아이디어로, 다른 이들에게는 엄청난 폭력의 현실로 경험된 것이다. 권헌익은 <또 하나의 냉전 >에서, “냉전의 세계가 실은 죽음의 세계”였다며, 우리가 “냉전이라는 현혹 적인 이름 아래 20세기 후반부에 활개 쳤던 국가폭력의 힘에 스러져간 삶을 기억하고 애도”하려 애쓰고, “그런 비참한 삶과 그들의 썩어 가는 유해의 역사 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냉전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거라 말한다. 36년간 내전을 치르며 20만 명이 살해 · 실종되고 그 희생자의 80퍼센트 이상이 마야인이었던 과테말라의 역사규명위원회가 참혹한 내전의 원인으로 인종차별과 냉전이라는 정황을 함께 다루고, 냉전시대 반공을 국가안보정책 의 기조로 삼은 점, 특히 국가폭력에 미국이 직간접적 역할을 한 점을 지적(보 고서 <Memory of Silence>)한 것은 적절하고 의미심장하다. 현재 진행 중 인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은 크메르루주 통치 44개월간 집단이주 · 고문 · 학살로 170만 명이 사망했다는 국가범죄 청산작업이다. 과거는 잊고 싶을 뿐이라며 차라리 덮어두자는 의견이 상당할 만큼 캄보디아인들은 극심 한 충격 속에 살아 왔다.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폭력도 승리했다”14)는 베트남인들은 또 어떠한가? 이들이

14) <전쟁의 슬픔>, 바오 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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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은 ‘냉전시대’가 어찌 ‘상상의 전쟁’, ‘비유적 전쟁’으로서의 냉전 개념과 동 일선상에 놓일 수 있겠는가? 한반도를 유린한 한국전쟁은 정전 60년이 지났지만 과거이면서 동시에 현 재적이다. 그러나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그 이상으로 거슬러올라 현실 속에 살아있다. 머릿속 생각의 색깔을 바꾸겠다는, 녹화사업의 사상개조 발상의 뿌리는 식민지 유산에 있다.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에 따라 사상범들을 ‘완 전전향/준전향/비전향’으로 구분 · 감시한 일제의 사상전향제도가, 해방 후 이승만 정부에서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유신체제 하 감옥의 비전향 장기수들에 대한 ‘전향공작’ 과정의 고문으로 계승되었다. 녹화사업을 가능 하게 한 힘은, 이러한 역사 속에 있다. 그리고 그 부끄러운 전통은 세계 최장 기수 김선명(1995년 석방 당시 43년 10개월 구금)을 우리에게 남겼다. 전향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십 년을 가둔 야만의 세월이 갔다고 해서, 그것을 가 능케 한 질서도 함께 갔다 할 수 있을까?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게 된다"(George Santayana)고 하였다.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고, 양심의 자유를 빼앗긴 젊은 영혼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야만의 기억을 되살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분단 질서 아래 국가보안법이 온존해 있건만, 이제 과거가 ‘낡은 기억’으 로 간주되고 시민사회가 망각과의 투쟁을 벌여야 하는 한국사회가 탈냉전으 로 나아가는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박현주_ 서울대 철학과를 다녔다. 80년대 노동운동을 했고, 2000년 이후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는 성공회대 대학원에서 과거청산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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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의문사 사건 요약1) 편집위원회

의문사는 미제 사건이 아니다. 단순한 의문의 죽음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 이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을 폭력으로 제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 사건이다. 따라서 의문사 사건의 사인과 가해 유무를 떠나서 국가의 범죄행위 로 인해 사망했다고 의혹을 받고 있으며, 이를 은폐·조작하려다 실패해 사회 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던 사건들이다. 광주항쟁 이후 패배감을 딛고 일어서 독재정권에 맞서 저항의 포문을 연 학 생운동 진영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고, 노동운동이 성장하면서 노동 자 의문사 사건도 늘어나게 되었다. 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강제징집 과 녹화사업을 통해 학생운동을 말살시키려 했던 시도는 수많은 군 의문사를 발생시켰다. 6인 열사로 통칭되는 김두황 · 이윤성 · 최온순 · 정성희 · 한영현 · 한희철이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의 대표적 희생자이다. 이후 학생운동이 조직화되고 변혁 지향이 강화되면서 정권에 위협이 되자 소위 민추위 사건 등 반국가단체 조작 과정에서 학생운동권의 희생자가 발생 했다. 수배 중이던 우종원이 철로변에서 사체로 발견되었고, 김성수가 부산 바다 수중에서 시멘트를 매단 채 숨져 있었다. 의문의 죽음을 딛고 저항세력은 크게 성장했다.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 투쟁, 대선 과정에서 저항세력은 사회의 주동력이 되었고, 국가권력을 크게 긴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군과 사회에서 의문사 사건이 증가되었다. 대선 투쟁 과정에서 사망한 사건, 군의 대선 개입과 이를 거부하 다 발생한 의문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저항세력 의 중심이 이동하면서 노동 의문사 사건이 증가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80년 1) 특집이 ‘80년대를 돌아보며 2014를 묻는다’이기 때문에 70년대 사건(장준하, 최종길 사건 등)과 90년대 사건(문승필, 김준배 등)을 빼고 80년대 사건 일부만 정리했다. 다음 기회에 설명의 자리를 갖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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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초반 구로, 부천, 부평 등 노동운동이 괄목한 성장을 한 곳에서 노동사건 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는데,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민주노조 건 설 투쟁은 많은 노동자의 희생을 불러왔다. 80년대 말은 통일운동의 시기이고, 통일운동을 주도했던 학생운동권의 피 해가 발생했다. 89년 5월 광주 수원지에서 조선대 이철규가, 거문도에서 중 앙대 총학생회장 이내창이 사체로 떠올랐다. 이후 90년대로 넘어가면서 한진 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사망했고, 학생운동의 희생 또한 계속되었다. 2001년에 설치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 접수된 사건은 총 85건이 나, 모든 사건을 다루기에는 지면의 한계가 있어, 70년대와 90년대 사건은 제 외하고 80년대 사건 중에서 일부2)를 정리한다. 이 사건 외에도 수많은 학생 · 노동 사건, 군 의문사 사건 등이 있으며, 불심검문을 거부하다 폭행을 당해 행 려병자로 버려졌다 사망한 김상원, 사체마저 병원에 실습용으로 사용된 문영 수 등 시민의 권리를 빼앗기고 죽음에까지 이른 사건들도 있다. 사망연도별 의문사 사건 현황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14(1)

55(3)

16(2)

*1기 의문사위 접수 85건을 기준으로 함

직업별 의문사 사건 현황 학생사건

군인(전투경찰)사건

노동사건

20

26

11

기타

*노동 사건은 생산직 노동자, 노점상, 운전수를 포함함

사망원인별 의문사 사건 현황(수사결과상) 추락사

익사

옥중사망

총기사

소사

10

4

9

11

3

의사(목맴)

음독사

폭행(상해)치사

교통사고

행불

10

5

4

4

5

*이 외 20건은 질식사, 뇌출혈, 열사병 등 다양함

2) 사건은 기준 없이 임의로 선정했다. 의문사 유족의 투쟁이 수십 년째 이어져 오고, 국가기구에서 10여 년 동안 조사가 이루어져 왔으나, 객관적으로 정리된 자료는 없는 상태라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만 정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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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집, 녹화사업 그리고 군 의문사 3) 8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니다 군에 입대하게 되면 예외 없이 관찰 대상이 되고, 학생운 동 경력이 의심되면 주목받게 된다. 하물며 시위 과정에서 군에 강제로 끌려온 경우는 반국가적 범죄자로 군대라는 감옥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군에 들어가는 친구에게 살아서 돌아오라고 할 정도로 폭압의 시절이었고, 그들은 입소와 함 께 감시와 사상 전향의 대상이 되었다. 군 의문사를 강집과 일반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 의미할 수 있다.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감시와 통제, 사상전향의 대상이었다.

김두황

김두황은 고려대 80학번으로 광주 5·18을 경험하고 학내 써클 〈현대철학회〉와 제일교회 대학생부 세미나팀에서 활동하다가 이른 바 3·7사건으로 성북경찰서에 연행된 후, 강제징집되었다. 경찰 존 안자료 〈학원사태주동자성향분석〉에 의하면 고려대 지하 조직 〈81 통일체〉와 관련한 활동을 근거로 강제징집되었는데 김두황이 강제 징집된 1983년의 경우에만 358명에 대한 강제징집을 실시하였다. 김두황은 부대 생활 중에도 보안대의 항상적인 감시와 동향 관찰 에 시달렸다. 대학을 다니다 강제징집되었기 때문에 소속대 부대원 들과 갈등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갈등관계에서 전입 신 병이었던 김두황은 항상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김두황은 보안사의 녹화사업을 받으며, 3일간 서울에 나가서 운 동권 동료들 명단을 강요받기도 했다. 당시에는 경찰과 보안사 등 정 보기관에서 고려대 운동조직 특히 〈현대철학회〉에 대한 집요한 수 3) 개별 의문사 사건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료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를 중심으로 요약한 것이다. 국가기구의 조사 결과 가 유족의 의혹을 해결하지 못한 경우에는 반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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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벌였고, 운동권에 회자되던 팜플렛 〈아방과 타방〉 문건 수사 와 관련한 광범한 수사가 진행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두황에 대 한 강도 높은 녹화사업이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의문사위원회에서는 판단했지만 확정하지는 못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서 김두황의 유서가 조작되었음 이 드러났고, 사망일과 장소가 변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또 한 진상을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다. 보안사가 김두황에게 어떤 심적 인 압박을 가했거나 보안사의 녹화사업 과정에서 김두황이 사망하 자 이를 은폐하기 위해 현장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실체적 진실을 밝히지 못해 진상규명 불능 판정을 내렸다.

이윤성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이윤성은 성균관대학교 역사철학계열에 입학했다. 82년 11월 3일 시위에 참가했다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되 었다. 당시 경찰은 시위 가담 학생을 A~D등급으로 구분해 처리했 는데, 이윤성이 〈인문과학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는 것이 밝혀져 시위주동자급인 A등급으로 분류되어 구속 아니면 군입대라는 양 자택일을 강요당하였다. 3대 독자에 시력이 나빠 군 입대 대상이 아 니었으나, 신체검사도 없이 강제로 입대하였다. 이윤성은 전방 철 책 근무하면서 소대생활에서 모범적으로 적응했으며 소대장, 선임 하사, 후견인, 고참 등의 끊임없는 감시와 관찰 속에서도 활기를 잃 지 않지 않고 군대생활을 했다. 하지만 수차례의 보안대 면담과 조 사 그리고 프락치 활동 강요 등 보안사로부터 끊임없는 시달림을 받 다가 전역 10여 일 앞두고 녹화사업을 받기 위해 205보안부대에 연행되었다. 1983년 4월 30일부터 5월 3일까지 보안사의 지시에 따라 녹화사 업의 일환으로 이윤성을 소환하여 사실상 운동권 활동 전반에 관 한 진술을 강요했다. 이윤성은 이 보안부대의 조사를 받으면서 자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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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학생운동 가담 사실과 운동권 동료들의 활동 사항 등을 일체 부인하며 불법적인 연행,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 조사 과정 에서 심리적 갈등과 강압적인 조사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견디지 못 하여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상황에 있었다. 5월 3일 오전 3시경에 심사실에 대기중이던 이윤성이 테니스장 코트에 목을 맨 사체로 발견되었다. 이후 보안대와 헌병대는 사체 발견 시각을 오전 6시로 조작했고, 보안대는 사체 발견 지점도 조 작하려 했으나 헌병대의 반대로 이를 이루지 못했다. 이후 불온비 라를 소지하고 있다가 발견되어 보안대 조사를 받은 것으로 사건 을 조작했다. 보안대에서 강압적인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사망했지만, 자타살 의 유무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다만 자살이라 해도 위법한 공권력 의 행사에 의해 사망에 이르렀기 때문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서 인정을 받았다.

최온순

최온순은 동국대학교 재학 시절 〈흥사단 아카데미〉라는 지하 서 클에 가입하여 사회과학 서적을 공부하면서 의식화학습을 하였고, 81년도와 82년도에는 여러 교내 집회, 시위에 참여하는 등 사회문 제 해결을 위한 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81년 8월에는 최 온순을 포함한 15명이 아카데미 서클 활동 때문에 중부경찰서에서 조사 받고 훈방되기도 했다. ‘1983년 3월 29일 시위’ 준비를 동료 들과 하다가 적발되어, 중부경찰서에서 조사 받고 경찰이 권유하는 입대지원서를 쓴 다음, 3월 29일 춘천 103보충대로 입대하여, 15 사단 신병교육대를 거쳐 39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로 배치되었다. 입대 전에 학생운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중대장, 소대장, 인사계, 선 임하사, 분대장, 대대 보안부관 등으로부터 무슨 언동을 하는지, 책과 소포를 받는지, 누구로부터 어떤 편지를 받는지 등 동향 관찰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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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면담을 받았다. 83년 8월 14일 군에서 집으로 급위독이라는 전보를 보내와 가족 들이 급히 부대로 가보니 새벽 4시께 숨을 거둔 뒤였으며 시체는 영 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헌병대에서 나온 자가 자살이라고 통보하 여 이에 가족은 자살할 리가 없다는 확신을 갖고 강력히 항의, 영 안실의 사체를 1주일간이나 지키며 재수사 및 진상규명을 요구하였 다. 이에 군수사대는 재수사를 하였고, 그 결과 고참병과의 말다툼 끝에 피살되었다는 수정통보를 얻어냈다. 마침내 최온순은 자살이 라는 오명을 벗고 대전 국군묘지에 안장이 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최온순이 녹화사업을 받았다는 진술 을 확보해, 사망의 원인이 단순 사고사가 아닌, 녹화사업의 과정에 서 강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사인과의 인과관계는 밝혀내 지 못했다.

정성희

정성희는 1981년 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에 입학하여 〈흥사단아 카데미〉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1년 9월 30일 탈춤공 연 이후 시위, 10월 말경의 문무대 시위, 11월 25일의 양경희, 백혜 연이 주동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1월 25일 시위 참가, 시위에서 연행되는 학우를 구하려다 정성희도 연행되어 11월 28일 강제징집되었다. 자대에 배치되어 생활을 하면서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으나 차츰 적응하면서 부대원들을 리드하고 재능을 발휘하여 부대원들 을 즐겁게 해주기도 하였고 학교의 동료, 부모, 여동생 등에게 편지 도 자주 하였고, 편지도 많이 받았다. 정성희의 입대배경이 전입 시부터 지휘계통과 보안부대를 통해 알 려졌었고, 정성희 스스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여 부대원 거의가 정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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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의 입대배경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지휘계통과 보안대에서는 정성희를 지속적으로 관찰하였고, 동향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 여 상부로 보고를 하면서 직접 호출을 하여 면담을 하기도 하였다. 정성희가 첫 휴가를 다녀오기 전까지는 활발하게 생활하였으나 휴가 복귀 이후 행동에 변화가 있었고, 그 시기에 같이 강제징집되 었던 인접 연대의 친구가 서신 검열에 결려 구속되는 일이 있었고, 보안대에서의 직접면담이 있었다. 전입 시에 입대와 관련된 배경이 통보가 되고 관찰을 하여 보고 를 하라는 지휘계통의 수직적인 관찰과 보안부대에서 지휘관, 분대 장, 동료들을 통한 감시의 체계를 구축하여 정성희의 일거수일투족 을 감시하였다. 이러한 감시는 정성희가 군 생활을 하면서 사소한 주위의 농담에 도 걱정을 하고 부모, 형제, 동료들과 주고받는 편지마저도 마음놓 고 쓰지 못할 만큼 위축 되게 하였다. 1982년 7월 22일 철책 초소에서 실습 대학생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밤 12시경 소총실탄을 스스로 발사하여 사망하였다. 강 제징집, 녹화사업으로 인한 첫 번째 희생자인 정성희의 사망소식을 들은 가족들이 23일 오후 5시경 연천 모식당에 도착하여 사망 통 보한 군인을 접견한 후 병참모부에 다시 가 “근조 고 정성희”의 현수 막과 빈소를 목격하였다. 군당국에서는 사고 현장이 최전방 민간인 통제구역인 이유로 현지 답사는 불가능하므로 간단한 도면 설명으 로 그쳐 정성희가 사망한 현장에는 부모가 가지 못하였고,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상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못했다. 헌병대에서는 추정하였던 것처럼 자살로 결론을 냈고, 이후의 조사에서도 소대 내의 부조리관계나 보안대 등의 관련사항에 대해 조사하는데 소극 적이었고 수사결과에 대해 유족에게 재차 통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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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현

한영현은 1981년 한양대학교 정밀기계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한영현은 학교 내 동아리인 〈민속문화연구회〉(일명 ‘탈반’)에 가입하였으며 이어 대학 동아리들의 연합 조직인 〈전국대 학생탈반연합〉(일명 ‘연탈’)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학생들간의 세미 나를 통해 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 제점들을 토론하였으며 학내외의 여러 집회에 참석하는 등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1982년 이후에는 동아리 후 배들의 세미나를 조직하고 이끌어가기도 하였고, 부천에서 노동자 대상의 야학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런 적극적인 활동의 결과 한영현은 성동경찰서에 문제학생으로 특별관리대상이 되었다. 성동경찰서의 「특별동향 관리기록카드」, 「1983년 한양대학교문제학생 현황」 등에 의하면, 한영현은 A급(주 동자급) 문제학생으로 선정, 관리되고 있었다. 한영현은 1983년 2월 중순 처음 성동경찰서 학원반에 의해 검거 되어 정보과에서 2, 3일간 의식화 과정, 활동내용 등에 대해 조사 받았다. 이때 석방된 이후에도 성동경찰서에서는 계속 한영현과 접 촉하여 유인물 배포 경위나 한양대 운동권의 동향을 조사하였던 것 으로 판단되며, 한영현이 입대한 이후에도 성동서의 수사관들이 한 영현의 부대로 찾아가 조사를 하기도 하였다. 한영현은 1983년 4월 2일 청량리경찰서에서 징병검사절차 없이 강제징집되어 춘천 103보충대를 거쳐 육군 ○사단 신병교육대로 전 입하였다. 이후 한영현은 보안사 요원이 계속 감시하는 가운데 학생 운동권에 대한 동향 파악과 정보 수집을 강요당하였다. 한편 성동 경찰서의 형사들도 휴가기간 중 거의 매일 한영현을 만났는데, 그때 마다 보안사 요원들이 동행하였다. 남산 아스토리아 호텔로 끌려가 1주일간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한영현은 자신의 진술로 많은 동료와 선후배들이 연행되었다고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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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보안사의 프락치 활동 강요에 절 망감과 갈등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휴가가 끝나고 귀대 한 한영현은 대대거점방어훈련에 참가하였는데, 훈련 마지막 날인 1983년 7월 2일 오전 9시 42분경 분대원들이 아침식사를 마치고 부대 복귀 명령을 기다리며 텐트 내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중 텐트에 서 10m가량 떨어진 벙커 내에서 입 부위에 총상을 입고 탄환이 두 개골을 관통하여 정수리가 파열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부대에서는 한영현이 타인의 총기로 사망한 것을 조작하기 위해 한영현의 총기를 가져와 허공에 1발을 쏘고 총기를 사체 옆에 놓았 으며, 사체 곁에 명찰이 떨어져 있는 이유도 설명하지 못했다. 또 유 족에서 유품을 인도하지도 않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녹화사업과 프락치 공작 대상자로 한양대 학내 운동권의 조직과 학생 동향에 대한 정보 입수 지시를 받았으며, 보안사의 강압적인 수사와 함께 프락치 공작으로 인하여 심각한 갈등과 정신적 부담을 이기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한희철

한희철은 1978년 12월 국립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에 근무하다 1979년 3월 철도장학생으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 설계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1979년 5월경 ‘가톨릭학생회’에 가 입하여 활동하면서부터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게 되었 다. 1980년 〈성남 YMCA〉가 창립되자 한희철은 지역의 청년학생 들과 함께 청년 모임인 〈탄천클럽〉의 조직과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이후 노동자의 권익보호와 민주주의의 실천을 위한 운동에 적극적 으로 참가하였다. 한희철은 노동자 야학인 〈샘터교양교실〉에서 교 사로 활동하였고, 1981년에는 〈성남지역 대학생 연합회〉 결성을 주 도하고 세미나 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성남 수진동 성당의 〈만남 의 집〉에서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한희철은 헌병 소령으로 전역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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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권유로 대학 4학년 2학기를 휴학하고 1982년 12월 1일 자원 입대하였다. 그는 1983년 1월 5일부터 육군 제○사단 본부대 부관 행정병으로 근무하였으며, 전역 이후 노동사목 신부로서 활동 할 생각으로 충실히 부대생활을 하였다. 제5사단본부 부관 참모부에서 근무하다가 1983년 10월 14일 보 름간의 1차 정기휴가를 받아 바쁜 일정을 보내던 중 수배 중인 운동 권 학생들이 도피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도와주 려고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친구에게 신규 주민등록증을 발급해 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자신이 쓰고, 귀대하였다. 편지를 가지고 있 던 수배 학생이 수사기관에 검거되어, 한희철은 12월 6일 부대 근 무 중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었다. 한희철은 보안사 분실에서 12월 5일부터 12월 8일까지 감금된 채, 입대 전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였던 동료들에 대한 진술을 강요 받았다. 폭행과 고문을 당하던 한희철은 자해를 하면서 버티다 결 국 보안사의 요구대로 진술서를 작성하였고, 12월 10일 소속 부대 로 복귀하였다. 부대에서 동료와 조직을 털어놓은 것에 자책하던 한희철은 「유 서」와 「성남 YMCA총무에게 드리는 글」을 작성하고, 경계호에서 근무 중 총상으로 사망하였다. 군은 보안사에서의 고문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이를 묵살했고, 사체를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검안서 를 작성하는 듯 지극히 형식적인 조사에 그쳤다. 의문사진상규명위 원회에서는 위법한 공권력의 사망으로 인정하였으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폭행 등의 혐의로 고발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김용권

김용권은 1983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여 경영대학 학 회, 본부에 등록된 동아리 〈세계문화연구회〉, 지하동아리인 〈사회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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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연구회〉 등에 들어 활동을 하였다. 학술 세미나, 각종집회, 농 촌활동, 목동 철거반대투쟁, 구로공단 노동자 지원투쟁, 신한민주 당사 점거투쟁 등에 참여하면서 10일 간의 구류를 살기도 하는 등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김용권은 당시 운동과 집안의 어려움 사이에서 매우 고민을 하다 가 주위 동료들의 권유와 장남으로서 집안의 기대 · 책임감으로 군 입대를 결심하고, 1985년 3월 3학년으로 휴학을 하였고, 4월경 카 투사에 지원하여 5월 시험을 통과하여 10월 논산훈련소에 입대하 였다. 김용권의 군 생활 중 보직변경에 대한 청탁을 위해 김용권과 어머 니는 208보안부대에 근무하는 모씨를 만났고, 이 과정에서 김용권 이 운동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용권은 의정부지역이나 다 른 지역의 보안부대에 불려다니며 보고를 해야 하는 처지라는 하소 연을 동료들에게 했으며, 1986년 8월 3일 김용권이 208보안부대 를 방문하였을 때 보안사 요원이 김용권에게 프락치 활동을 제의하 였고, 김용권이 거절하자 요원이 다른 사람을 시켜 김용권을 발가 벗긴 채 7시간 동안 구타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진술을 의문 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확보했으나, 당시 보안사 요원이 신경성 우 울증 전환장애를 앓고 있어 사실관계의 확실한 입증은 이루어지 지 못했다. 김용권은 1987년 2월 20일 오전 10시 50분경 자신의 막사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김용권의 목은 탁자 위의 전기스탠드 끝으로 이층침대 난간에 매달려 있었고 얼굴은 침대 쪽을 향해 있 었으며, 하체는 꿇어앉은 모양이었다. 한편 영등포에 살고 있던 김용권의 어머니인 박명선 씨는 그날 오전 10시경 부대로부터 김용권이 없어졌으니 급히 부대로 와보라 는 연락을 받고 부대로 갔다. 박명선 씨가 부대에 도착한 시간은 오 후 1시경이었으며 이때 아들 김용권의 시체가 막사에서 발견된 사 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시체에 대한 검사는 이미 끝난 상태였으 며 시체는 이미 병원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마침 스낵바에 있던 인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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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가 현장의 모습을 설명해 주었으며 그에 따르면 김용권은 자 살했다는 것이었다. 유가족은 NCC 고문폭력 대책위에 진정을 접수하여 김용권의 사 인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대통령, 국방부, 한미연합사, 국민 고충처리위원회 등에 다른 의문사 유가족들과 진정을 하였고, 전 국 대학가와 재야단체들에 김용권이 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는 중 에 치사를 당해 사체를 내무반에 매었다는 김용권 어머니의 주장이 퍼져 사령부 차원에서 경위조사를 하였다고 한다. 보안사령부 3처 수사단에서 1개 과에 김용권 사건을 전담하도록 지시하였고, 지시 를 받은 과에서는 외부세력과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 유가족의 집 에 대해 감시하였고, 병원의 진료기록 확보와 사건과 관련된 사람 들을 접촉하여, 김용권의 사인이 자살이라는 확답을 얻어내는 일 을 하였다. 용산구청에 상주하는 보안사령부 직원이 용산구청 도 시행정국 국장직에 있는 진정인의 당질을 통해 조기장례를 종용하 기도 하였다.

허원근

1980년 광주항쟁 당시 허원근은 광주 대동고에 재학 중이었고,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하다 사망한 전영진이라는 친구를 두고 있었 다. 허원근의 아버지는 자식이 광주지역으로 진학을 하면 학생운동 에 물들 것을 염려하여 부산 수산대로 보냈다. 1983년 육군에 입 대하고 그로부터 약 1년 후인 1984년 4월 2일 군대에서 사망했다. 1984년 4월 2일 오후 1시 20분쯤 강원도 화천군 육군 7사단 GOP 철책근무지 전방소대 폐유류고 뒤에서 가슴에 2발, 머리에 1발의 M16 총상을 입고 변사체로 발견됐다. 당시 7사단 헌병대는 허원근 일병이 처음에는 오른쪽 가슴, 두 번 째는 왼쪽 가슴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으며 마지막에는 오른쪽 눈썹 에 밀착해 사격, '두개골 파열로 인해 사망한 것'이라고 허원근의 죽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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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자살로 결론 내렸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부대 상관의 총에 맞 고 죽었다는 타살 의혹을 계속 제기했고 마침내 의문사진상규명위 원회에서 타살임이 밝혀졌다. 철책 야간 근무 중에 중대의 간부들이 근무 규정을 어기고 술을 마신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는데, 술에 취한 간부가 허원근에게 폭력을 행사하다 총을 발사하게 되었다. 우발적인 상황에서 허원근 이 한발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져야 할 중대 간부들은 정 확히 사망을 확인하지 않은 채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구호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책임만을 면하기 위해서 자살로 위장하였으며, 사망하지도 않은 허원근의 사체에 두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 더욱이 대대장은 이런 사실을 알고도 조작 · 은폐를 군 보안대 주재관 또한 대대장, 중대장과 공모하여 사건의 조작 · 은폐 에 가담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당혹스러워진 국방부는 8 월 28일 군검찰과 헌병대 24명으로 특별진상조사단(이하, 특조단, 단장 정수성)을 꾸려 재조사에 나섰다. 그 후 약 한 달 후인 11월 28 일 특조단은 허원근 일병이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10여 년 간 자살과 타살의 진실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2013년 12월 22일 서울고법 민사9부(부장판사 강민구)는 "M16 소총으로 흉부에 2발, 머리에 1발을 쏴 자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며 "같은 총상으로 자살한 사례가 있다"고 덧붙이며 허 원근 일병 사건을 자살로 결론지었다. 현재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정연관

정연관은 83년 포항 성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이 운영하는 표 구사 일을 도와주다가 독립하여 대구 계명대학교 정문 앞에서 선물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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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를 직접 운영하다가 86년 5월 27일에 입대하였다. 정연관은 원 만하고 활달한 성격이어서 대인관계가 좋았으며 특히 고참들과 잘 어울리는 등 평범하게 군 생활을 하였는데, 대선을 앞두고 여당후 보 당선을 위한 교육을 노골적으로 실시했으며, 또한 중대원들과의 개인면담을 통해 지지성향을 파악하고는 여당을 지지하도록 유도했 다. 대선 투표일에는 기표용지를 기호 1번(여당)이 올라오도록 접어 주어 1번을 찍도록 유도하거나, 투표용지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기 표를 하게 하거나, 기표한 투표용지를 확인하는 등 노골적으로 부 정선거를 벌였다. 대선 투표일 저녁에 야당에 투표한 병사가 있는 것이 확인되자 직 접 확인에 나섰고, 야당 후보에 투표한 금속수리반원의 정연관 등 10명을 기상시켜 침상에 정렬하게 하여 구타를 하고 발로 밟았다. 정연관이 뒤로 넘어지면서 관물대에 머리를 부딪쳐 희생병원으로 후송했으나 도착 전에 사망하였다. 군은 부재자투표와 관련한 사고를 은폐하려 했으나, 중대원들에 의해 외부로 소문이 나, 평민당에 제보가 되었고 천주교인권위에서 도 진상규명에 적극 참여했다. 유족은 당시 대통령선거 부재자투표 에서 야당을 찍었기 때문에 발생한 사고로 판단하고 포항보안대에 서 유족의 가택을 감시하는 가운데 서울로 올라와 ‘군 부재자투표 와 관련하여 죽음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기자회견을 하며 사 건의 진상을 밝히려 노력하였다.

최우혁

최우혁은 1984년 3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하 였고, 〈경제법학연구회〉라는 동아리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경 제법학연구회〉는 사회과학 세미나를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한편,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아리였다. 최우혁은 〈경제법학연구회〉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민주화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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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하는 학내외의 집회와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최우 혁은 1984년 ‘파쇼악법 개정 국민대회’, ‘청계피복노조 합법투쟁쟁 취운동’, ‘레이건 방한 반대 및 반미 시위’, 1985년 ‘총선반대 연세 대 집회’, ‘5·1 노동절 기념집회’, 1986년 ‘5·3 인천투쟁’, ‘광주민중 항쟁기념집회’ 등 중요한 민주화 집회와 시위에 계속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우혁은 경찰에 연행되어 구류처분을 받기도 하였고, 최 루탄에 맞아 큰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노동현장 활동을 하는 등 노동현장으로 이전 준비를 하던 중 자식의 안위를 염려하는 부모님의 강력한 권고에 군입대를 하였다. 최우혁은 전입 당시 경비소대에서 근무하다가 1987년 7월 2일 정 보과 서기병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최우혁은 안경을 쓰고 있어 위 병근무자로 적합하지 않고 학력이 높아 경비소대에서 정보과의 행 정병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보병은 그 업무 의 성격상 신원조사를 거쳐 적격판정을 받아야 근무할 수 있고, 비 밀취급인가를 받아야 상황실 근무를 설 수 있었다. 따라서 최우혁 도 1987년 8월 5일 2급 비밀취급인가를 취득하였다. 최우혁과 같 은 동향관찰 대상자에게 비밀취급인가가 나온 것은 여전히 의문으 로 남는다. 야간근무를 마친 최우혁은 내무반으로 돌아왔다가 야간작업을 하러 나간 후에 쓰레기 소각장에서 불길이 일어난 것을 발견하였는 데, 사람이 불에 타는 모습을 발견하고 근무병이 급히 달려가 최우 혁의 몸에 붙은 불을 껐다. 사건 발생 이후 군은 형식적인 수사로 서둘러 종결시켰다. 사건 현장 주변에 변색된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었으나, 수사관들은 이를 확인하지 않았으며, 분신에 사용된 휘발유를 담았던 간장통에 대 해 지문채취도 실시하지 않았다. 또 최우혁의 소지품 중 수첩이 훼 손되었으나 이 부분도 수사하지 않았으며, 헌병대 수사 이전에 보안 반장이 사무실과 내무반을 뒤져 최우혁의 책상 안에 있던 월간지를 가져가는 등 유가족에게 의혹을 살 만한 일들이 많이 발생되었다. 또한 최우혁의 학생운동 전력에 비추어 보안대의 관찰 여부가 집중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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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수사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수사는 진행되지 않아 의혹을 남기게 되었다. 유족은 단순한 개인적 고민에 의한 분신자살로 규정지은 군수사 기관의 발표를 불신하고, 군수사기관, 국방부, 국회, 대통령 등 관 련기관에 지속적인 진상규명요청을 하면서 유가협 등에서 지속적 인 활동을 해 왔다. 2004년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최우혁이 보안대의 관찰, 공작 및 군내의 가혹행위 등에 최후의 항거수단인 분신을 통하여 자신의 몸을 산화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최우혁의 어머니는 학생운동으로 인해 피해를 당할까 군에 보낸 자신을 자책하다 뇌일혈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한강에 투신해 사망하였다. 최우혁의 아버지는 사망 이후 지금까지 도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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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의 성장과 의문사 1980년대 학생운동은 한국사회 변혁의 주체이자 중심이었다. 과학적 이론으로 무장 한 학생운동 세력은 가장 위험했고, 군과 경찰을 동원한 탄압에도 전국으로 번져나갔 다. 저항세력의 싹을 자르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동원했다. 당시 학생운동 조직은 반국 가단체였고, 통일운동은 체제 전복 운동이었다.

우종원

서울대 운동권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던 우종원은 1983년 9월 ~11월경까지, ‘전두환 정권의 출범과정에서의 정당성 결여’, ‘국민 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 등을 기재한 유인물을 제작하여 서울 시내 일원에 배포하였고, 1984년 10월~1985년 1월경까지 민 추위 산하 홍보위에서 학외유인물책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85년 8월 중순경, 3주간의 훈련을 위해 집에 와 있던 중 삼민투 관련으로 수배된 사실을 알고 26일에 집에서 나왔으며, 그 이후 변사체로 발견되기까지 집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27일 형사 들이 집을 찾아왔고, 9월 27일에는 중앙일보에 발표된 삼민투 관련 용의자 수배명단에 이름이 게재되었다. 10월 12일 대구 시경 소속 형사가 집에 찾아와 어머니를 만나, “종원이는 아까운 학생이다. 삼 민투에 가담하여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다 신세 망쳤다. 빨리 자수 시켜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 6시 고향에 거주하는 백부로부터 우종원 동지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우종원 사체는 1985년 10월 12일 오전 10시 35분경 충북 영동 군 황간면 서송원리에 있는 경부선 하행선 철로변 콩밭(서울 기점 222.5km 지점)에서 선로원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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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체로 발견되기 전날 사고 현장을 지나간 열차표를 소지하고 있 었고, 사체의 상태(여러곳에 찰과상이 있고 옷이 찢어진 점, 머리 부 분에 상처와 출혈이 있었던 점)나 발견 현장의 상태(혁대버클이 떨 어진 채 발견된 점, 자갈에 물체가 떨어진 흔적이 있는 점)가 열차 추 락에 의한 사고로 보이나, 메모지에 적혀 있는 주민등록번호의 필적 이 우종원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타살 또는 추락사 여부를 확정할 수 없었다.

김성수

김성수는 대학에 입학한 후 지리학과의 〈철학인의 모임〉에 가입 하고, 또한 총연극회 활동을 하면서 4·19 기념 집회, 5·3인천 집회 에 참여하고, 정부 비판적인 연극에 출연하였으며, 전방입소 반대 도서관 철야농성 후 다음날 귀가하기 위하여 학교를 나서다가 연행 이 되었고, 또 한번은 1986. 6.경 명동성당 이영희 교수의 ‘한반도 와 핵’ 강연회 집회에 참여하여 유인물을 소지하고 있다가 경찰서에 연행이 된 후 훈방되기도 하였다. 86년 6월 18일 자취방으로 걸려온 정체불명의 사람의 전화를 받 고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되었고, 그 후 3일이 지난 6월 21일 부산 송도 앞바다 방파제 앞 수심 17m 지점에서 스쿠버다이버 최영봉씨 에 의해 바위틈에 세개의 시멘트 덩어리를 달고 눕혀져 있는 것을 발 견, 22일 경찰에 의해 인양되었다. 경찰은 성적 불량에 의한 비관자살로 처리해 버렸으나, 1학년 1학 기도 끝내지 않은 그가 성적을 비관할 리 없으며, 서울에서 부산까 지 갈 이유가 없고, 두부에 정교하게 가격당한 상처가 있는 점, 안 기부가 사건의 전반에 개입하고 있는 점 등은 여전히 의혹으로 남 아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국가기구에서는 그의 죽음의 진 상을 밝혀내지 못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당시 매달 려 있던 콘크리트 덩어리는 직접 물에 가지고 들어가기는 매우 어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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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사망 또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타의에 의해 수장되었을 개연성이 상당하다고 밝혀졌다.

이철규

이철규는 1982년 조선대학교 〈기독교학생회〉 동아리 활동을 하 였고 1984년에는 〈조선대학교 민주 자주화 추진위원회〉를 결성하 여 학원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85년에는 〈반외세반독재투 쟁위원회〉를 결성하여 활동한 혐의로 구속되었고 1987년 사면복 권된 이후 조선대의 비민주적 학사행정에 대항해 〈민족대학을 건설 하기 위한 추진위〉 부위원장을 맡으며 초인적인 힘을 보여줬다. 함 께 농성하는 후배들에게 눈물겨운 자상함과 공권력의 침탈에 맞서 싸우며 끝내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조선대학교 학생으로서 1989년 4월 14일 조선대 〈민주조선〉과 관련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를 받고 도피 중 5월 3일 광 주 제4수원지 상류를 가로지르는 청암교 삼거리에서 불심검문을 받 고 산 속으로 도주했으나,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5월 10일에 변사 체로 발견되었다. 이후 국가기구 조사에서 안기부 광주지부가 〈민주조선〉의 이적 성을 조사하고 있었고, 망원 등을 동원해 이철규의 동향을 주시하 고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했으며, 익사 전 가해 가능성을 제시한 법 의학적 감정을 확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문 또는 손상을 입은 후 타살되었을 개연성이 높으나, 이철규가 사망 전에 다른 기관원들에 의해 검거, 타살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고, 제3의 기관원 또는 제보에 대한 조사가 미진하여 진실규명 불능으로 판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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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

이내창은 86년 중앙대 예술대학 조소학과에 입학, 87년에 〈새 김〉 동아리 회장을, 88년도에는 조소학과 학생회장으로서 학과내 에 〈민족미술연구회〉 동아리를 창설했다. 88년 서울지역미술대학 연합건설준비위원회(서미연 건준위)에 중앙대 대표로 참가하였고, 88년 여름 방학중에서 〈청년미술대학여름한마당〉 행사를 안성캠 퍼스에서 개최하였다. 89년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 된 이내창은 8월 15 일 전민련 주최의 ‘민족해방절 기념식’에 참석 예정이었으나, 8월 14 일 학교에 찾아온 남녀 2인과 동행해 학교를 나간 후 다음날 거문도 유림해수욕장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 경찰은 실족익사로 결론 내렸으나, 안기부 직원이 동행한 사 실이 밝혀지면서 89년 통일운동을 잠재우려 공작 과정에서 타살되 었다는 의혹이 증폭되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 회는 이내창 사건은 1989. 7. 1. 북한 평양에서 개최된 제14회 세 계청년학생축전을 맞이하여 전대협 대표 임수경양 방북, 민미련의 〈민족해방운동사〉 대형걸개그림 11폭 반출(슬라이드로 담아 평양 축전에 출품) 사건으로 정부 공안기관과 운동권세력과의 긴장관계 가 조성된 시기에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가 동 사건에 대하여 북괴 지 령에 의한 국내 거점 간첩단의 소행으로 입증하고 이를 점점 높아만 가는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의 기류를 통제하고 국민 여론을 호도 하고자 기획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술운동 출신의 중앙대 (안성) 총학생회장의 사망사건이라고 판단하였다. 중앙대(안성) 총학생회장인 이내창을 민미련과 전대협의 중요 연 결 고리로 삼고 내사 공작하는 과정에서 이내창이 사망했을 개연성 이 높지만 국가정보원의 비협조로 관련자 신원확보와 이내창에 대 한 가해 과정을 정확히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소 수 위원은 이내창이 국가안전기획부의 내사공작과정에서 기관원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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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기관의 망원으로 추정되는 자들로부터 유인 또는 납치되어 거문 도에 내려갔으며, 선실 내 및 거문도에서 감시를 받은 사실이 있고, 유림해수욕장까지 함께 간 동행인이 안전기획부 직원임이 사실로 드러났으며, 외력을 당한 후 익사하였다고 보기에 충분하므로 본 건 에서 국가 공권력이 의문사한 자를 위해하는 과정을 명백히 밝히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위법한 공권력의 직 · 간접적인 행사에 의한 사 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노동운동과 의문사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노동운동은 중소기업 중심이었고,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해도 일반 형사사건 으로 취급해 미제사건으로 종결해 버렸다. 노동운동의 성장과 폭발력이 의문사한 노동 자의 수를 증가시킨 것은 학생운동과 마찬가지이다. 저항세력에 대한 국가폭력은 동일 하다. 노동 의문사 사건은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오범근

오범근은 산재 이후 호봉도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야간 경비근무 중 옥상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다 힘을 지탱하지 못하고 떨어져 골수염으로 무릎뼈를 깎는 수술을 하는 등 노동력을 상실하였으 며, 산재노동자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자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부인 또한 생활비를 보태려고 대원전기에서 쓰레기를 수거하 다 결핵에 걸리는 등 어려움이 겹쳤지만 항상 웃음과 자상함을 잃 지 않았으며 극진한 효성으로 주위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이웃과 동료들은 말한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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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1988년 3월 7일 “사직강요, 해고 위협, 어용노조 물러가 라”, “25% 임금인상, 학자금, 가족수당 쟁취하자”는 요구를 내걸 고 파업농성을 벌이던 노동자들이 구사대의 잔인한 폭력으로 해산 되자 10일 새벽 회사로 출근해 같이 근무하는 수위들을 만나 폭력 해산의 부당함을 얘기하고 있는데 회사측의 호출을 받고, 항의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4층 관리자실로 올라갔다가 음독으로 병원에 옮겨졌다. 파업농성에 적극적으로 지지표명을 해온 오범근은 의문 의 죽음으로 이날 10시 20분경에 사망했다. 오범근이 대책회의 중인 전무이사실에서 자살을 했다고 하는 발 표는 상식에 어긋나고, 경찰에서 술에 취한 채 쓰러진 것을 병원에 옮겼으나 곧 사망했다는 허위 보고를 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사건 은 묻히고 말았다. 3월 20일 새벽 5시 30분 오범근의 시신은 400 여명의 전경이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병원에서 고향으로 옮겨졌다.

신호수

신호수는 전남 여수 돌산 출신으로 1984. 4. 방위병으로 입대하 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에 있는 72사단 200연대 2대대 8중대에서 근무하다가 1985. 6. 제대하였다. 제대 후 인천에 있는 LPG가스 배달업체인 연안가스에 입사하여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위 사무실 내에 있는 쪽방에서 생활하였다. 1986. 6. 11. 14:00경 신호수는 방위로 근무할 당시 북한 불온선전물을 자취방에 보관한 것에 대해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서울 서부경찰서 대공과 소속 경찰관들 의해 연행되었다. 이후 신호수는 같은 해 6. 19. 10:30경 여수시 돌산 읍 평사리 소재 대미산 중턱에 있는 굴속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 서부경찰 서는 포상휴가를 목적으로 북한 볼온선전물을 보관해 온 신호수를 무리하게 공작수사로 확대하여 약 9개월간 내사를 진행하면서 긴 급체포 사유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장없이 체포, 연행해서 불법적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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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강압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의해 사망 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서부경찰서 수사관들은 영장없이 연행되어 있는 동안 구타 등 가혹행위를 하였으며, 정식절차에 의해 조사하 지 않았고, 사후적으로 각종 수사서류를 변조하여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는 등의 위법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 초기 변사사 건을 담당하였던 여수경찰서 역시 신호수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단 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이 충분함에도 현장에 대한 감식과 주 변 탐문수사를 하지 않는 등 초동수사를 부실하게 진행하여 사건 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큰 장애를 초래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서 부경찰서 수사관들이 장흥공작을 통하여 신호수를 간첩으로 조작 하는 과정에서 가혹행위 등으로 인해 신호수가 사망에 이르자 이를 자살로 위장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정경식

정경식은 1984. 경남 창원시 소재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 입 사하여 2공장 대형가공조에서 선반공으로 근무하였다. 정경식은 1985. 5.경 산재사고로 인해 창원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던 중 같은 회사 노동조합 활동가 김효영을 알게 된 이후 소위 민주노조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87. 5. 대우중공업 노동조합 대의원선거와 지 부장선거에서 정경식은 민주노조를 지향하는 후보의 당선을 위해 활동하던 중 같은 해 5. 28. 20:40경 회사 측 후보를 지지하던 이 동석과 시비가 붙는 폭행사건이 발생하였고, 1987. 6. 8. 09:00경 정경식은 이동석과 폭행사건의 합의를 위해 회사에서 외출한 후 실 종되었다. 이후 정경식은 1988. 3. 2. 경남 창원시 소재 불모산에 서 발생한 산불을 진화하던 중 실종 9개월 만에 유골로 발견되었다. 정경식이 근무하였던 대우중공업(주)은 국가방위산업체로서 기 관원들의 출입이 많고, 오랜 기간 노동조합 활동이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당시 정경식은 민주노조를 지향하는 조합원들과 함께 대의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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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및 지부장 선거를 치렀으며, 회사 등의 방해로 선거결과가 왜곡 되자 회사측 어용 조합원과 다툼이 생기면서 폭행사건에 연루된 것 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도 불구 하고 정경식의 실종 당일 행적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못했고, 정경 식의 사망 경위도 확인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의문사진상규명위원 회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사건 당시 창원경찰서와 마산지방 검찰청의 변사사건 수사결과와는 달리 정경식이 현장에서 사망하 지 않았을 가능성은 상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창원경찰서 경 찰들은 실종 및 사망경위를 확인할 수 있는 행적수사를 하지 않았 을 뿐만 아니라 참고인 조사를 비롯한 그 외 수사에 있어서도 신뢰 성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또한 정경식의 유골이 발견된 후에도 당시 수사기관에서는 정경식이 자살한 것으로 단정하고, 그 외 타살 혐 의점과 유기 가능성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음으로서 변사사건 수 사 역시 수사의 기본을 지키지 않은 채 상당히 소홀하게 이루어졌 음도 확인되었다.

박창수

박창수는 1987년 7월경부터 시작된 한진중공업(전 대한조선공 사) 노조의 민주화 운동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였고, 1990년 9월경 노조 위원장에 당선된 이후에도 노동조건 개선 및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에 의하여 노동조합 활동을 한편 전노협,대기업 연대회의 등 연 대활동을 통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87. 6 · 29 선언으로 사회 각 분야에 민주화 열풍이 불면서 노 동계에도 종전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노조원들의 이익이 직접적으 로 반영되는 노조를 건설하자는 소위 ‘노조 민주화 운동’이 일기 시 작하였고, 이후 위와 같이 민주화된 노조가 정부 및 사측과 연대 투쟁하기 위해 그 연대를 강화하는 조직으로 1990. 1.경 전노협, 1990. 12.경 대기업 연대회의를 각 결성하였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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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위와 같은 노동계의 민주화 열기 및 연대 조직 결성에 대해 관계기 관은 이들의 단체 행동 및 연대 파업 등을 우려하기 시작하였고, 특 히 중소기업이 중심이었던 전노협과 달리 대기업 노조들이 연대하 기 위해 대기업 연대회의를 결성하자, 그 규모와 영향력을 우려하여 이를 와해하려 하였다. 전노협 · 대기업 연대회의 핵심 사업장이었던 한진 중공업 노조에 대해 당시 안기부 부산지부 요원은 노조 간부들 및 박창수를 지속적 으로 만나면서 탈퇴를 종용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박창수 구속 이 후 노조측의 노조 운영에 있어 어려움 및 구속에 따른 심적 부담을 이용하여 그의 탈퇴를 종용하였다. 91년 2월초 구속되어 서울구치 소에 수감된 박창수는 5월 4일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 원하였고, 5월 6일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병원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박창수가 극도로 불안해 했고, 안 기부 부산지부 직원이 안양병원에까지 박창수를 찾아긴 사실이 확 인되었지만, 목격자를 찾지 못하고, 양심선언을 확보하지 못했다. 당시 정부는 병원에 백골단을 투입해 영안실 벽을 깨부수고 강제 로 시신을 탈취해 강제부검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부검결과도 발 표하지 않았다.

박태순

박태순은 1985년 한국신학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후 학내 비 합법언더서클(일명 F3)에 가입해 독재정권퇴진, 광주민주화운동진 상규명 등을 위한 집회, 시위 등 학생운동에 참여하였고, 1986년 경 휴학한 뒤 수원지역 노동운동 조직(일명 복씨조직)에 가입하면서 같은 지역 영세사업장에 생산직 노동자로 위장취업하였다. 박태순은 1989. 5. 20. 같은 학교 동기, 후배이자 수원지역 노동 운동 활동가인 이창연, 조영삼, 백철우와 함께 '이철규사인진상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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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 공안합수부해체'를 요구하면서 수원지방검찰청을 점거농성하 였다. 이 일로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부산교 도소에서 복역한 후 1990. 11. 13. 만기출소 하였다. 출소한 이후에도 박태순은 수원지역 노동현장에 형 박영순 등의 명의로 다시 위장취업하여 활동하던 중 보충역으로 편입되어 입영 영장이 나와 있었으나 계속해서 영장수취를 거부하고 있었다. 박태순과 같은 사건으로 복역한 이창연은 출소 후 1991. 4.경 52 사단 212연대에 방위병으로 입대하였다. 서울기무부대는 이창연을 '마파람A급대상자'로 선정하여 기초내사활동을 하던 중 박태순 등 수원지역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명단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광범 위한 내사를 진행하였다. 박태순은 1992. 8. 29. 경기도 부천시 소재 수영기계에 근무하 던 중 퇴근하던 길에 행방불명되었다. 2001. 2.경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박태순이 행방불명된 당일 21:55경 서울시 금천구 소재 시흥역에서 서울발 광주행 무궁화호 열차와 충돌, 현장에서 사망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당시 변사사건 을 담당한 서울남부경찰서는 박태순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채 행 려사망자로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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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극복해야 역사가 바로 선다* 신명철

어찌 보면 깜짝 놀랄 만한 일입니다. 2013년 내내 종북몰이로 각을 세우는 마당에 과거사법이 네 개나 발의되었으니, 이게 웬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대 선 전에야 후보들이 너나없이 손을 내밀었지만, 그게 그때뿐이죠. 허망한 바 람이란 것쯤은 내남없이 잘 압니다. 우려가 현실이 되어 절망의 긴 겨울을 보 냈지만, 서슬 퍼런 권력의 날은 바람 잦은 날 허수아비 풍선만 같습니다. 그런 데 암울한 2013년 한 해를 보내고 맞는 송구영신의 시간에 과거청산의 뜨거 운 기운을 느끼게 되는 것은 무슨 현상일까요. 과거사법은 2012년 12월 18일 이낙연 의원이 대표 발의한 ‘한국전쟁 전후 과거사기본법’과 이재오 의원과 진선미 의원이 각기 대표 발의한 ‘진화위법 개 정안’, 그리고 유기홍 의원이 대표 발의한 ‘장준하 등 특별법’이 있습니다. 이 들 법안은 내용상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크게 보면 과거사법으로 통칭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 법안의 발의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18대 국회에서 법안이 발 의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요. 2012년부터 2년의 과정을 복기해 보면, 확연해집니다. 우여곡절을 겪고, 수많은 사연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지만, 압 * 이 원고는 민족문제연구소 · 포럼 진실과정의 · 「역사와 책임」 6호(2013.12)에 실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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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면 거의 유일한 경로를 거칩니다. 몇 차례 조직 개편과 성격의 변화를 거 치지만 ‘역사정의실천연대 과거사특위(이하 과거사특위)’를 통해서 조직과 내 용, 사업이 모두 만들어지고 구체화되어서 마침내 실현됩니다. 2년 동안 쉼 없 이 달려온 집단적 노고의 결과입니다. 그 결정체가 과거사법 입법 발의인 것 이죠.

2012년에서 2013년까지의 행보 2012년에서 2013년까지의 과 정을 간략하게 압축하면 총선과 대선이라는 계기를 중심으로 하 는 사업과 과거사특위를 중심으 로 한 조직 강화와 법안 준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굳이 구분하 자면 지속성과 계기로 나눌 수 있다는 정도의 기준입니다. 2012년의 출발은 암울함 그 자체였습니다. 과거청산 운동은 세상의 관심 밖이었고, 이 과제를 자신의 삶에 내재한 사람도 찾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 래도 불씨가 살아 모임이 만들어지고, 사업을 내오게 되었습니다. 그 첫 대외 사업이 총선을 대비한 야권에 대한 공약 이행 요구입니다. 참여연대 등 시민 사회단체들과 연대하여 <2012총선유권자네트워크>를 출범시켰고, 과거청 산 과제를 반드시 실현해야 할 30대 정책 과제에 포함시켜 공약해설집에 수 록될 수 있었습니다. 총선 사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면서 ‘과거사연석회의’를 구성할 수 있었고, 토 론회 · 전문가 간담회 등을 통해 내용을 채워갔습니다. 이 조직은 ‘과거사특 위’로 확대 강화되었습니다. 과거사특위에는 유족, 피해자단체, 활동가, 연구 자, 법률가, 전직 조사관, 국회의원실 등 관련 단위들이 조직적 · 개별적으로 결합했습니다. 과거청산 운동에 참여한 개인과 단체를 망라한 실질적인 연대 조직으로 과거청산 운동을 주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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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후는 법안을 준비하고 발의할 수 있도록 대중사업과 국회 사업을 하는 2 년의 과정입니다. 우여곡절도 겪었고, 내부 진통도 있었지만 민변 과거사위 의 자문을 받아 과거사법 기초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기초안을 가지 고 토론회도 개최하고 지역별 유가족 간담회도 열어 의견을 모으기도 했습니 다. 이 과정에서 과거사특위는 ‘장준하암살의혹규명국민대책위(이하 장준하 대책위)’ 활동에도 기여합니다. 법의학 감정 실무 등에 직접 참여한 것입니다. 대선이 가까워 오자 입법 준비에 활력이 생겼습니다. 정치권의 관심도 커졌 고요. 하지만 과거사특위는 가슴 아픈 결정을 합니다. 현재 수준으로는 대선 전에 발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한 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은 더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대선 하루 전에 이낙연 의원이 법안을 발의했고, 과거사특위는 유족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 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온 2012년은 절망의 늪 속에서 마무리합니다. 다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냈겠지만, 과거청산 운동도 굴곡진 세월만큼이나 쉽지 않은 겨 울이었습니다. 그래도 추슬러야 했습니다. 과거청산의 의지가 전혀 없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과거사기본법)가 현실을 일깨워 주었 고, 한국전쟁 유족회의 통합 소식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이 시기에 장준하 선생 법의학 감정이 완성되었고, 마침내 대국민보고대회 를 통해 타살임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장준하 선생 겨레장을 국민적 성원 속에 치를 수 있었습니다. 과거사특위가 노력한 연대사업의 성과이기도 합니 다. 이후 과거사특위는 조직 개편 논의에 들어갔고, 과거사법 개정안 준비에 전 력을 다했습니다. 소위 진보 진영에서 하나의 모법답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법안을 올려놓고, 보수 진영의 방해와 왜곡을 막으면서 최선의 법 안이 통과되도록 하자는 생각입니다. 여름이 지나면서 진선미 의원실의 적극 적인 동참과 전문가들의 참여로 과거사특위의 진화위법 개정안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의미 있는 변수가 생겼습니다. 이재오 의원이 과거청산 운동에 적극적 참여 의사를 밝힌 것입니다. 긴급조치 사건의 재심을 통한 무죄판결 등이 동력이 되었겠지만, 이 모든 것이 과거청산운동의 성과이기도 합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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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1일에 진선미 의원이 개정안을 발의했고, 11월 15일에 이재오 의원도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장준하대책위도 여름부터 ‘장준하별법제정시민행동’으로 조직을 개편해 특 별법 제정에 박차를 가했고, 마침내 12월에 ‘장준하특별법’을 발의할 수 있었 습니다. 장준하특별법이 한국전쟁 전후 희생자를 조사 범위에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과거사특위와 함께 과거청산 과제를 해결하기로 뜻을 모았기 때문에 추후 법안 심의 과정에서는 큰 합의가 가능할 것으로 믿습니다. 이제 모두 네 개의 과거사법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심의를 거치게 되었습니 다. 꺼져가던 과거청산의 불씨를 되살렸고, 현실화시켰습니다. 다시 과거청산 의 큰 길에 섰습니다. 90년대 말 의문사 유가족의 투쟁으로 시작된 과거청산 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해방 이후 모든 인권침해사건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질 때까지 과거청산운동은 쉼 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이제 10여 년의 국가기구 활동의 성과와 한계를 토대로 완 전한 과거청산을 위해 한 발 크게 내딛었습니다. 과거청산운동의 제2기가 시 작되었습니다.

완전한 과거청산이 가능할까 지난 2년간의 과거청산운동은 입법 과제의 실현이라는 제도화 투쟁에 집중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회에 자주 드나들면서, 법이 통과되면 뭔가 해결되 는 듯이 보입니다. 스스로도 왠지 제도화되는 느낌입니다. 입법을 통한 제도 적 과거청산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과거청산의 최종 목적지가 이곳은 아닙니 다. 보다 원대하고 머나먼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노정에 입법과 국가기구 설 치가 존재합니다. 완전한 과거청산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국 가가 설치한 국가기구로부터 재조사를 통해 과거 범죄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 는 것이 가장 우선이겠죠. 이를 통해 유족을 포함한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 고, 배 · 보상을 하며, 과거의 범죄행위에 따른 피해와 이후 은폐 · 왜곡 과정 에서 발생한 트라우마 등을 치유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재발 방지를 위한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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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가의 노력이 다각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국가의 반성과 변화와 함께 사회적 반성과 합의 또한 과거청산의 해결 과정 입니다. 국민 모두가 과거 사건의 실체와 배경에 대해서 깨우치고, 피해자들 을 함께 위로하고, 영령들을 추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과거청산은 그 구체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국민들의 의식 이 바뀔 때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법률이 재정비될 것이고, 과거사에 대한 연구가 광범위하게 이 루어질 것입니다. 역사학자, 사회학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과거의 잘 못된 역사와 국가폭력,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겠죠. 그 학 문적 성과가 쌓여서 대한민국의 과거청산 모델이 집적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국가폭력의 진상규명과 반성, 사회적 합의와 학술적 연구성과가 쌓이면 완 전한 과거청산이 이루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직도 과정입니다. 진상규명 을 통한 과거 사건의 재정리와 연구 분석을 통한 이론적 정립 등의 성과는 문 화예술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다양한 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연극, 영화, 회 화, 조각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 속에서 보다 풍부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교육입니다. 과거청산의 모든 내용이 교육에 반영되어 잘못된 과거를 깨닫고, 어떻게 이를 극복했는지, 이 과정에서 민주 주의가 어떻게 완성되어 갔는지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가 온전 히 몸에 밴 시민으로 성장해 나가게 됩니다. 과거청산운동이 계속되고, 완성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더 많 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와 끊 임없이 대화하고 잊지 않아야 오늘을 제대로 살고, 미래를 만들어가기 때문 입니다. 암울하기만 한 지금으로서는 지나치게 큰 그림처럼 보일 것입니다. 뜬구름 잡기 식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는 어느 순간 엄청난 변화를 일 으키잖아요. 봉건제가 무너질 거라고 당시 사람들이 생각이나 했겠어요. 지 구가 둥근지 어찌 깨우쳤습니까. 가까이로는 일본강점기에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잖아요. 과거청산도 그 끝이 있고, 민주주의도 반드시 실현되 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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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 누가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과거청산은 유족의 민 원을 해결하는 것도, 유족 개인 의 해원도 아니어야 합니다. 국 가의 선의에 의해 재심을 하고, 재판단하는 것일 수도 없습니 다. 다른 한편으로 과거청산 과 정을 통해 의식의 전환 또는 세 상 이치의 깨달음을 성과라 하는 것도 지나치게 종교적입니다. 주체의 변화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과거청산은 완전한 민주주의 실현 과정이고, ‘역사바로세 우기’의 일환입니다. 그 가장 최전선에 과거청산이 있습니다. 과거를 극복하지 않고 역사가 바로 세워질 수 있을까요. 어림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눈으로 보 고 몸으로 겪는 현실이 바로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 때문입니다. 그럼 이 ‘ 역사바로세우기’인 과거청산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요. 모든 변화 발전은 주체의 강화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이를 확장해서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마침내 국민적 동의를 얻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입 니다. 과거청산운동도 동일한 과정과 내용을 가질 것이라 봅니다. 과거 역사를 토대로 현실을 살아가면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시민 전체 가 공유할 수 있고 시민이 참여하는 과거청산운동으로 확장되어야 과제를 해 결하고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장을 만들고 계기를 만드는 것이 활동 가와 지식인의 역할이겠죠. 길을 닦아주는 사람들입니다. 그 단위가 과거사특위입니다. 모두가 지쳐 있을 때 과거청산의 과제를 내려 놓지 않고, 끊임없이 문제제기하고, 가능성을 내오려 노력하는 조직 단위입 니다. 과거사특위에는 완전한 과거청산의 경로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단위 또는 부문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습니다. 이를 강화해 내야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강화할까요. 가장 먼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덕목은 소중 함에 대한 인식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자산을 소중하게 여길 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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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과거청산운동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다 바친 활동 가가 우리의 힘이고 자산입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 의문사 · 인권 침해 사건 등을 학문적 진로로 잡은 연구자, 영화 <변호인>의 또 다른 송강 호인 법률가들도 우리의 힘입니다. 그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지원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체를 강화하는 경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선의를 가진 양심적인 활동가 또는 연구자가 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들이 과거청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다음으로 확장성이 중요합니다. 확장성에는 과거청산의 범위와 국민적 공감 의 형성 두 측면이 있습니다. 먼저 과거청산 범위에 있어서의 확장성 문제입니 다. 이는 평등권 시각에서의 접근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과거청산 과제는 정치적 사건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과거 정 치적 탄압의 결과 학살과 의문사를 비롯한 불행한 사건이 쌓여왔기 때문입니 다. 국가폭력에 의한 사건들은 국가에 저항하는 힘을 차단하기 위해 벌인 범 죄인 것이죠. 이러한 사건들은 지난 10여 년 동안 국가기구에 의한 조사를 통 해 진상규명되고 배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국가에 적극적으로 저항하 다 국가폭력에 희생된 정치적 사건의 범위를 넘어설 때가 되었습니다. 타의에 의해 시민의 권리를 빼앗기고, 국가 또는 국가가 위탁한 권력에 의해 인권이 침해된 사건들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형제복지원 사건 같은 것입니 다. 10여 년 동안 531명이 사망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납치, 격리, 폭력에 시 달린 인권침해의 실상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유형의 사건도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인권침해 사건으로 과거청산의 과제로 받아서 해결해야 합니다. 이 는 생명권과 평등권을 존중하는 헌법에 기초합니다. 국민적 공감대의 형성은 전술적 측면 또는 홍보활동으로 국한해서 사고하 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평등권을 가장 근본이 되는 과거청산운동의 철 학으로 갖지 않으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워집니다. 전술적으로 활 용하려 해도 잘 안 되거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 대중사업이라는 측면을 지극히 기능적으로 사고해서이기도 합니다. 대선 전 과거청산의 과제가 국민적 관심사가 된 것은 장준하 선생과 인혁당 사건 때문입니다. 장준하 묘소 이장 과정에서 유골에 함몰골절이 드러나면서 국민 모두가 경악했습니다. 수도 없이 발생하는 타살사건에도 불구하고 장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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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선생의 유골 감식 결과에 국민들이 놀라고 분노한 이유는 장준하 선생의 삶과 철학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준하국대위의 사업기조도 장준하 선생의 뜻을 받들고, 이를 실현한다는 철학의 관철이기 때문에, 국대위의 능력과 사업수완과는 상관없이 국민적 성원을 얻을 수 있 었습니다. 재심을 통해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국가 배상까지 한 인 혁당 재건위 사건을 대통령 후보가 두 개의 판결 운운하는 것을 보면서 유신 의 망령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과거를 극복하지 못하면 어떤 후과가 나타나는지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응합니다.

과거청산을 위한 2014년 핵심 과제 과거청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체를 강화하고, 범위를 확장해서 국민과 함께 해결해 나간다는 명제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방 도는 어떻게 될까요. 어떤 경로를 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순서로 어 느 길을 거쳐야 하는지 알아야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날 문제는 무엇이 있고, 왜곡되어 있거나 오해가 있는 것은 무엇인지 짚어 보겠습니다.

과거사법 통과를 위해 제도적 청산이라고 하는 입법을 통한 국가기구에서의 조사는 근본적인 한 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기구를 통해서 완전한 과거청산이 이루어지 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의문사위원회로부터 시작해 이미 10여 년이 넘 는 실패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뼈저리게 실감하고 눈 물 흘리며 절망했는데, 국가에 허황된 기대를 갖겠습니까.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 국가 체제 속에서 사는 한 국가의 역할에 의존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족하고 모자란 줄 뻔히 알면서도 국가기 구를 만드는 데 목을 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더 많은 어려움과 한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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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계를 깔고 있습니다. 입법 활동이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과거사 입법 투쟁을 하면서 국회에 드나들었습니다. 의원실에 아쉬운 소리 도 하고, 때로는 호통을 치기도 했습니다. 1인시위도 하면서 목소리를 높이지 만, 선언을 통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담판을 지어서 상대를 꺾을 수 도 없습니다. 입법 과정은 지난한 설득과 인내를 동반합니다. 결국 국회의원의 법안 검토와 수정을 거치고 당의 의견을 반영해서 법안이 다듬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내용이 크게 바뀌기도 하고, 심하게 왜곡되기도 합니다. 지난 2005년 진화위법안 논의 때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이 조사 범위에 들어가게 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국회의원의 생각과 우리의 생 각이 일치하지 않을 때 그들의 요구를 우리가 막을 방도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 다. 이것이 입법 활동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2005년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고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 다수였는데도 한 나라당에 끌려 다니다가 상처투성이 진화위법을 만들었던 기억이 뚜렷합니 다. 그때라고 진정성이 부족했나요. 유족과 단체의 결의가 모자랐나요. 우 리가 아무리 올바르고 정당하더라도, 칼을 잡은 손은 멀고도 악착같습니다. 하물며 우익세력이 총궐기해 군복 입는 노인들이 거품을 무는 시절에 제대 로 된 과거청산이 누구의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마음이 전해질까요. 이제 현 정권에서 과거사법이 통과되기를 바라는 것인지 아닌지 분명히 해 야 합니다. 네 개의 법안을 통합 심의하면서 조율이 될 텐데, 어느 선까지 양 보할 수 있는지 속을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목소리만 높인다고 받아줄 사람 도 없습니다. 아니면 현 정권에서는 과거사법의 훼손이 분명하니, 민주정부를 세울 때까지 법 통과를 미루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어떤 길을 갈 것인지 선택하고, 그 길을 어찌 달려갈지 결정해야 합니다. 결정해야 구체적인 전술 이 나오고,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과거청산 운동의 동력과 오해 두 해에 걸친 숨 가쁘게 보낸 시간은 우여곡절을 거친 만큼 소중한 자산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력, 주체의 확인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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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모두가 절망했을 때, 과거청산이 기억에서 멀어졌을 때 이를 놓지 않 고 희망의 싹을 틔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과거청산 활동가 또는 전 문가라 칭할 수 있겠습니다. 국가가 직접 조사기구를 꾸려서 제도적 청산 활 동을 한 지도 10여 년이 넘었지만, 과거청산에 자신의 삶을 건 사람도, 전문 가라고 인정할 만한 사람도 극소수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분명해집니다. 독재정권 시절 자식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겠다는 의문사 유족들은 모든 투쟁의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내 자식의 죽음을 잊지 말라는 처절한 몸부림 이었습니다. 하지만 의문사위원회가 생기고 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늘 유족이 전면에 서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고립을 자초한 측면도 있습니다. 유족을 앞장 세우다 보니 과거청산운동 진영의 확장에는 소홀하 기도 했습니다. 결국 국가기구에서 일할 사람도, 시민단체에서 국가기구를 견제할 사람도 부족하고, 실력도 턱없이 모자랍니다. 유족이 과거청산의 당사자이지만, 과 거청산 과제의 해결이 유족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유족과 활동가, 지 식인, 더 많은 이들이 함께 손을 맞잡고 가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국가기구의 설치와 진입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준비가 전무하 다시피 합니다. 아마도 국가기구에서 일을 하는 것에 대한 터부 또는 왜곡이 존재해서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간혹 가다 국가기구에 들어갈 사람이 라는, 때로는 직장을 구하려 한다는 등의 비아냥거림이 오고가기도 합니다. 이런 언어들은 우리 스스로를 갉아먹습니다. 직장을 구하는 것이 나쁜 일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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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니기도 하지만, 국가기구가 안정된 직장도 아닙니다. 40이 넘은 사람에게 2~4년이 한도인 계약직이 과연 얼마나 매력적일까 싶습니다. 국가기구에 들어갈 사람을 적극적으로 구하고 당당하게 그 자격 요건을 따 져야 합니다. 의문사위원회부터 진화위까지 10여 년이 넘게 국가기구에서 조 사를 했는데, 언제까지 초보자들이 겪는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할까요. 과거 청산 과제를 숙지하고, 학습하고, 경험도 많은 전문가가 우리에게 정말 중요 한 자산이고, 필요합니다. 국가기구는 국가폭력의 당사자인 국가가 만든 기구입니다. 그래서 주도권 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아무리 훌륭한 공무원이 파견되어서 나 와도 국가에 복무하기 때문에 국가의 요구와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습니 다. 그런 데도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낭만적입니다. 국가기구에서 진상을 규명 하고, 과거청산의 과제를 실현할 사람을 구하는 일은 시급하고도 지난한 과 제입니다. 1년, 2년 안에 원하는 사람을 구하고 채울 수도 없습니다. 실력을 갖추려 면 몇 년을 준비해도 부족합니다. 과거청산을 연구한 학자, 법지식으로 무장 한 법률가, 성실하고 진지한 시민단체 활동가,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고 허점 을 잡아낼 수 있는 사회 경험이 풍부한 조사관, 홍보와 대협 등의 전문가, 실 로 무한합니다. 사람도 필요하지만 국가기구의 역할과 위상을 제대로 세우고 견인할 수 있 는 진보 진영의 실질적인 연대 단위도 필요합니다. 이름뿐인 연대 조직은 이제 그만입니다. 전국의 단체가 이름을 올려놓기만 하는 연대 조직이 아니라 실제 움직이는 연대 조직의 구성은 지금 당장 준비를 시작해도 빠르지 않습니다.

결론을 대신해서 그 사이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의문사 유족이 투쟁할 당시에는 백발 이 성성한 노인들이 길바닥에서 농성하고, 엄동설한에 국회 앞에서 1인 시위 를 하는 것에 여야를 떠나 국회의원도 안쓰러워했고, 시민들도 마음 아파했 습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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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다릅니다. 보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진영과 진보 진영의 대립 이상 이 아닙니다.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고 해서 국회에 출입하는 사람의 마 음을 흔들 수 없습니다. 어버이연합이 보수 진영의 행동대가 된 시점에서 유 족을 앞세워 유족만의 싸움만으로 끌고가서는 곤란합니다. 투쟁 전술로도 효 과가 별로 없습니다. 유족의 삶과 피해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알려내고, 국민들에게 호소하면서, 민주화된 사회에서 존중받고 대접받아야 하는 분들로 유족의 위치를 제대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씩 경험을 하다보면 내용 을 풍부하게 채워갈 수 있습니다. 이를 준비하는 것도 유족을 중심에 세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과거의 극복 없이는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없습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 으면 완전한 과거청산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은 범죄와 은폐 · 왜 곡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우리 아이가 살아야 할 조국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요. 아이가 역사를 올바르게 배우고,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와 화해 를 이룬 사회에서 자랄 수 있어야겠죠. 지금 그 실타래를 풀고 있습니다. 완전한 과거청산의 길이 아주 멀리 있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비가 올 때까지 쉬지 않는 기우제는 비를 불러온다고 하듯이, 오늘의 과거청산 운동이 그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하고, 우리의 자산을 소중히 아끼고 키워나가야겠습니다. 오늘 과거청산에 나선 사람들에게 전선은 국회이고, 과거사법입니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는 과거사특위가 있습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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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소녀가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소녀상 제작 및 완성 모습

인터뷰/글

이원근

사진제공

김서경, 김운성

발꿈치 들린 발은 불안하고 위태롭다.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등이 굽었다. 대사관을 마주한 채 소녀가 앉아 있다. 수요일이면 할머니들이 비둘기떼처럼 주위로 몰려든다. 나이 어린 진 짜 소녀들도 와서 함께 고함치고 노래를 부른다. 그럴 때면 모두 다 소녀가 된다. 소녀는 짧은 단발에 동글납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옷차림만 아니라면, 주위의 중고생 소녀들과 하등 다를 바 가 없다. 맨발에 주먹을 쥔 채 단호하고 엄중하다. 소녀는, 1992년 1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시작된 그날로부터 꼭 천 회째가 되던 날, 2011년 12월 14일 그곳에 홀로 가 앉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부터 기적처럼, 청동소녀가 웃고 떠들기 시 작했다. 소녀에게 숨을 불어 넣어준 사람, 김운성 · 김서경(조소84) 회원을 서울 무교동에서 만났다.


· · 숨가쁘게 달려온 한 해다. 각광도 많이 받은

· · 올해 작품 활동을 따져보자. 무엇 무엇이 있

해였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가.

는가.

작업 중이다. 노는 것도 작업이니까. 여

8월에 성동구 금남시장 로터리에 <김구

러 사람 만나고, 조직하고, 여튼 작업 준

기념비>를 세웠다. 선생께서 학원을 세

비 중이다.

우고 아이들을 돌보고 문화교육사업을 펼 치셨는데 그걸 기리는 거였다. 11월에는

· ·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

2003년 금속노조 충남지부 세원테크지

<일본군 위안부와 조선의 소녀들> 전시

회 투쟁 도중 사망한 이현중, 이해남 열사

중이다. 서울시립미술관과 고양시를 돌

기념비를 세웠다. 이현중 열사는 폭행으

았고, 12월에 통영에서 전시가 이어진

로 돌아가셨고, 이해남 열사는 분신하셨

다. 김서경이 기획위원장으로 참여하고

다. 또 그 이전 3월에는 서대문형무소 안

있다. 전시라는 게 뚝딱 한 번에 되는 게

에 <유관순 열사상>을 세웠다. 기모노

아니니까, 거의 1년여 전부터 준비하고

를 입고 있어 논란이 된 그 작품이다. 나

계속 진행 중이라고 보면 된다.

는 수감복 그대로를 입는 게 맞다고 봤다.

· · 단체전인가.

1949년 백범 김구 선생은 서울 성동구 금호동 일대에서

12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해 210점의 작품

전쟁 피해 아동구호를 위한 교육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을 내놓고 함께 한다. 전시 요청이 오면 통영 외 다른 지역도 갈 것이다. 아마 전 국을 순회하지 않을까 싶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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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쟁 재난 아동 교육기관인 ‘ 백범학원’이었다. 기념비는 이를 기리고자 성동구의 지원 으로 세웠다.


만나요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앞 전차

· · 앞서 얘기한 것처럼 조형물 의뢰는 많이 오 는가.

주로 시민단체에서 오고, 또 몇몇 지방자 치단체에서도 오고 한다. 그렇게 많지는 않다. · · 서울역사박물관 앞 전차 속 인물들이 아주

다. 전차 밖 모정과 전차 안 중학생, 셋의 표정이 익살스럽 다. 전차 속 중학생 이름은 김경보. 바로 김서경과 김운성 의 아들 이름이다. 이렇게 스토리를 넣음으로써 조형물에 생명을 불어넣곤 한다.

독특하고 재미있다.

2009년에 세웠다. 역사박물관에 별 생 각 없이 어떤 어르신을 따라갔다가 회의 에 참석하게 됐고, 회의 막바지에 “누구 신지 모르겠지만, 한마디 하시죠” 해서 안을 낸 게 덜컥 된 거다. “그때 있었을 법한 얘기를 하나, 풍경을 하나 넣어 보면 어떨까요”라고 한 거였는데 그게 곧바로 작품이 됐다. 학교에 늦은 학생이 헐레벌떡 도시락을 집에 두고 왔다. 뒤 늦게 엄마와 동생이 챙겨 들고 달려와 보니 전차는 이미 출 발한 상태다. 손을 휘저어 보지만 야속하게도 전차는 떠난

· · 최근 10년간 작품 활동을 돌이켜볼까.

아하, 모르겠다. 어떤 게 있었을까. 서대 문형무소 사형장 바로 앞에 <과거, 오늘 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인혁당 관련자들 을 기리는 작품을 만들어 세웠고, 효순이 미선이 작품도 있고. 또 정읍 시민단체와 함께 무명 동학농민군위령탑을 동학100 주년 기념으로 해서 세웠는데 요즘 들어 블로거들 사이에서 새삼 주목받곤 한다. 전북 정읍시 고부면에 세워진 <무명 동학농민군위령탑> 은 주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졌다. 이 마을(주산마을)은 혁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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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혁명을 모의

다. 여러 안이 나왔고, 결국 소녀상으로

한 역사적인 장소다. 중앙 주탑에는 죽창을 든 농민군이,

결정된 거다.

그 주위 32기 보조탑에는 각각 괭이 · 낫 · 쇠스랑 같은 농 기구 무기들과 이름 없이 스러져간 농민군의 얼굴을 도드 라지게 새겼다.

· · <평화의 소녀상>으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작업하게 된 것인가.

할머니들의 수요시위 1000회가 다가오 고 있었다. 19년간 천 회라니, 무언가 하 고 싶었다. 의뢰가 온 게 아니라 내발로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을 찾 아갔다.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여쭈었 다. 조각가이니 조각상을 만들겠다고 했 다. 아마 기념비석을 세울 줄 알았을 것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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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대 할머니와 소녀상이라니. 너무나 배 반적이라 슬픔이 묻어 나온다. 결정에 어려움 은 없었나.

어찌 쉬웠겠나. 반대가 심했다. 비석을 세우자는 의견이 정답처럼 이미 나와 있 었다. 정대협 할머니들 안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사무국장과 대표가 이를 잘 정리 해줬다. 설득이 꽤 오래 필요한 일이었는 데 할머니들께서 정말 민주적으로 합의를 내주셨다. 논의과정 자체가 간단치 않았 지만 아름다웠다. 오로지 할머니들의 힘 이었다.


만나요

· · 제작기간은 얼마나 걸렸나.

다고 하던가. 구청은 아마 대사관 반대편

아이디어부터 시작해 6개월 정도 걸렸

인도에 조그마한 비석을 세우는 줄 알았

다. 이런 작업이란 게, 사실 실제 만드는

을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그냥 처벌을 받

작업기간보다 조율 그 자체가 오래 걸리

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작업했다.

는 법이다. “할머니 끌려가실 때 소녀 아 니었냐? 그래야 공감이 생긴다. 공감이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03년 효순이 미선이

생겨야 또 이해가 되고, 위치 자체도 일

사망 1주년 때 범대위가 세종로 교보빌딩 앞에 <촛불기념

본대사관 앞이니까” 설득에 설득이 이어 졌다. · · 일본대사관 앞이라 구청, 시청 등 관할기관 의 반대는 없었나.

직접적인 관할은 종로구청이다. 관계기 관이 수시로 모여 회의를 벌였다고 들었 다. 그런데 막을 수 있는 법적 조항이 없

비>를 세운 바 있다. 종로구청은 이 기념비를 도로법 40 조와 54조를 들어 "불법 축조물"로 규정하고 자진 철거를 요청했고, 그 후 신원불상의 사람들에 의해 세 동강 나는 테러를 겪다가, 이듬해 구청 측에 의해 전격 철거되었다.

· · 처음 소녀상 뉴스를 보고, 이거 외교마찰로 번지겠다고 생각했다. 또 싸움이 오래 갈 거라 고 봤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이유는 뭘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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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물이라는 게 한번 설치하면 철거가 쉽지 않다. 무거워서가 아니라 이미 자리 를 잡았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에 서도 많이 소개됐고. 심지어 설치하는 날 에도, 오전 7시에 설치하는데 그 이전부 터 일본 취재진이 많이 와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진기자들은 생전 처음 봤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철거를 하면 어찌 어찌 싸워야겠다는 계획도 세워놨지만, 워낙 반응이 뜨거워서 그리 되지 않을 것 으로 봤다. · ·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바닥에 잘 고정해 놓 았나.

인도 보도블록을 커팅기로 잘라 깊숙이

자는 할머니’ 같은 것이 바로 소흔이가 낸

시멘트를 붓고 그 위에 박은 것이다. 장정

아이디어다.

여럿이 모여 작정한다면야 뽑을 수 있겠 지만 어차피 경찰들이 지켜주고 있지 않

· · 작업은 어땠나? 반향이 클 것이라는 기대

은가.

는 했나.

예상은 했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상 · ·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딸 얼굴을 모델로

상도 해 봤다. 소녀상을 세운 날이 12월

삼았다는 소문이다.

14일 아침이었는데, 며칠 있으면 크리스

그건 오보다. 입체조각을 하려면 아무래

마스니까 빨간색 고깔모자를 씌우면 어떨

도 모델이 필요한데, 몸은 우리 딸(김소

까 하는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

흔, 14세)을 모델로 했으나 얼굴은 그 시

다음날 목도리와 털모자를 이미 사람들이

대 보편적 얼굴을 바탕 삼은 것이다. 대신

매어주고 있었다. 작가로서 그보다 더한

딸이 작품 중간중간 아이디어를 제법 많

영광이 없다. 다들 조각을 대상화하는데,

이 냈다. 몸은 소녀인데 ‘뒤로 비친 그림

소녀상은 그 자체로 이미 살아 있는 듯 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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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요

기고 있었으니까. 그 이후부터 지금의 소

어 말할 수 없다. 특별한 사건이나 이슈

녀상이 됐다.

같은 건 기억에 없다. 아마 있다고 해도 잊었을 거다. 아주 오래 전 일이다.

나는 수요시위에 참석하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한 가지 의 구심이 들곤 하였다. 왜 저 할머니들은 저렇게 반듯하고 단 정하신가. 윤기 나는 흰 머리를 가지런히 넘기고 온유한 미 소를 띤 채 조용하지만 준엄하게 일본과 자기 정부를 꾸짖 곤 하였다. 간혹 슬픔이 북받쳐 올라도 안으로 삼키고 삼 켜서 낮게 흐느꼈다. 마치 노년의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할머니들이 아닌가. 그런 할머니들의 현재에 비 추어보면 정말 소녀상이야 말로 저들의 소녀적 모습 그대

· · 89년에 결혼했나.

89년 11월에 했다. 그때 명철형, 성수 형, 우리 포함해서…… 그 해에 많이들 결 혼했다. 원래 더 일찍 하려고 했는데 내창 씨를 보내고 하느라고 늦어졌다. 운성 씨 제대 전에 내창 씨가 죽었고…… 그랬다.

로가 아닐까, 하는.

· · 결혼하자마자 어땠나, 생활은. · · 둘은 어떻게 만났나. 낯간지럽겠다. 어떻게

서울에서 미술학원을 열었다. 꼬박 3년

시작한 건가.

입시미술을 했다. 생활 자체가 혼돈이었

(김서경) 기억하고 싶지 않다. 인생 최대

다. 몸도 안 좋아졌고. 입시생 아이들과

실수다. 2학년 때인가, 85년에 눈이 턱

그렇게 씨름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게

맞았나 보다.

몹시 싫었다. 그래서 여주로 훌쩍 떠났 다. 그때부터 백수였다. 여주에서 한 9년

· · 어떻게.

살았나. 여주로 가면서 외환위기가 터졌

(잠시 주저하다가 김서경) 그냥 스며들듯

다. 우리 집이 정말 버스가 하루 딱 네다 섯 번밖에 안 오는 그런 오지였는데…….

이 정이 들어서. 딱히 언제부터라고 꼬집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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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살이를 청산하고 다시 서울 은평구로 왔다가 재개발돼서 그것마저 쫓겨났다. · · 여주살이는 어땠나. 얘기해달라.

(김운성) 지역에 뿌리박기 위해 많이 애썼 는데 아무래도 여의치 않았다. (김서경) 같이 살았는데 생각이 참 다르 다. 뿌리박을 수 있었는데 정이 떨어져서 나온 게 있었다. 아이디어만 쏙 빼먹는 사 람들이 많았다. 특히 공무원들이 그랬다. 그때 실망 많이 했다. 정도 떨어졌고. (김운성) 기억나는 건, 그리고 좋았던 건 아들 경보가 다니던 학교가 폐교 위기였 는데, ‘작은학교 살리기’ 운동을 통해 살 려낸 것. 그것은 참 좋았다. 한 달에 한 번 학부모들을 무조건 교사화하고 개별모임

딸 소흔, 아들 경보와 함께 오랜만에 가족사진을 찍었다.

기도 했다. 1990년생인 아들 김경보에 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경보가 여덟 살 즈음에 여주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때마침 TV에 나오는 만화주제가를 경보가 신나서 따라 부르는 것 이었다. 경보는 너무나 들떠 따라 부르는데 한글자막을 못 읽어서, ‘아버버버버버~ 우버버버버~’ 하던 기억이 새롭 다. 그런 경보가 대안학교를 거쳐, 시민단체 인턴, 이탈리

을 정말 많이 했다. 거기에 선생님들도 함

아 요리사 등을 하다 지금은 대안교육대학 협동조합 일을

께 해주면서 요즘 대안교육에서 하는 것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들을 많이 실현했다. 이 학교가 폐교 위기 에 있었다가 나중에 살아났다. 부모들이

· · 지금 사는 곳은.

자발적 재능기부를 해주면서 좋아진 거

지금도 시골에서 함께 작업하며 살고 있

다. 부모들이 학교 안에서 아이들이 어떻

다. 여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경기도 일

게 생활하는지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산 동구 지영동인데 외진 곳이라 오지나

주효했다고 본다. 한 달에 한두 번 하던

다름없다. 2층 집에 산다. 1층에서 일어

학부모 수업이 나중엔 일주일에 두세 번

나 밥 먹고, 2층으로 올라가 작업하고 뭐

으로 늘었다. 심지어 어떤 아버지는 아이

그런 삶이다. (인터넷 다음지도에 주소를

들과 함께 과학수업을 하면서 차를 한 대

찍어보니 정말 주변에 그 어떤 생활정보

만들기도 했다. 그 차를 털털털 타고 다니

도 표시되지 않았다. 그냥 산이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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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요

· · 어떤가. 서로의 장단점을 말해달라. 이것만

· · 작업은 서로 나눠 하는가. 공동작업이라는

은 배워야겠다, 이런 거라든지.

게 실상 한쪽에 무게가 실리기 마련인데 어떤

(김운성) 김서경의 장점? 장점이 너무 많

편인가. 전문분야가 따로 있는가.

아서 난감하다. (한동안 침묵)

우리는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 정리가 되

(김서경) 할말 없다는 거냐.

는 분위기다. 그런 점에서 호흡이 잘 맞

(김운성) 이런 거다. 장단점이 함께 붙어

는다. 조형은 김서경이 강하고, 알겠지만

있는 것. 음식을 하면 아주 잘 해. 그런데

난 여러 ‘잡일’에 강하다.

안 하는 거. 뭐 이런 거다. 그리고 한 번 붙잡으면 끝까지 가는 거. 끈질기게 끝장

· · 내창이형을 추억해 보자. 같은 과 후배 이내

보는 거.

창은 어땠나.

(김서경) 어…… 이 사람은 작가가 아니라

입학하던 해 그러니까 신입생이던 1986

‘잡가’다. 운성씨는 조각가 이전에 조직

년에 만났다. 술버릇은 진상이었다. 에

가다. 관계 속에서 사람들을 꾸리고, 네

취, 하고 재채기를 하고 나면 그 다음엔

트워크로 묶어내고 그들과 조합하는 걸 참 잘도 한다. 아이디어도 많고…… 스스

취한 거였다. 일종의 신호였다. 취하면

로도 아이디어 뱅크라고 말한다. 나는 또

나 다 그랬지만. 87년인가 “그런 술버릇

그걸 만들어낼 수 있고.

은 좀 고쳐라” 했더니 그 다음에 같은 모

(김운성) 왜 내 얘길 하다가 끝에 자기 얘

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의지가 대

길 붙이나.

단한 사람이었다.

남한테 시비 걸고 그랬다. 하긴 그때 누구

(김서경) 기획력이 좋고, 기획에 마땅한 적합한 사람을 잘도 섭외한다. 사람 보는

· · 세속적 질문해도 되겠나. 어떤가 작품은 잘

눈이 좋다고 해야 하나. 참여하고 있는 단

팔리는가.

체가 정리하고 또 정리했는데도 아직도

(김서경) 잘 팔리는 편이다, 운성씨보다

30여 개에 달한다.

는. 화랑이라는 데가 임대를 하게 되면 큐 레이터와 작품 값을 50대 50으로 나누는

김운성은 민미협(민족미술인협회) 사무처장을 2007년부

구조다. 정말 괜찮은 데가 70대 30인데

터 3년간 했다. 현재는 민미협 이사다.

그런 곳은 몇 군데 없다. 작가가 판매하든 화랑이 팔든 같다. 재료비가 들어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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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그렇게 화랑과 나누게 되면 작품 값

· · 앞으로 계획은.

이 턱없이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래도 97

1월 중순에 소녀상2가 나온다. 거제시에

년 이전에는 제법 잘 팔렸다. 자신있게 여

들어간다.

주로 간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97년 이 후엔 미술품을 잘 안 산다.

· · 이렇게 되면 전국 방방곡곡에 소녀상이 세 워지는 건가.

· · 고가인가? 얼마인가?

내 작품이 사람들이 공감하는 작품이 많 았고 그래서 투자 가치가 아니라 마음을 주고 산다는 차원에서 아직까지는 그럭저 럭 팔리는 편이다. 12개월 할부로도 사간 다. 100만 원이면 그걸 한번에 못 주니 까. 12개월 할부로 사는 거다. · · 세속적 질문 계속 이어진다. 최고가는 얼마 였나. 그냥 궁금하다.

내 작품은 크기가 조그마하니깐 값도 크 게 안 나간다. 350만 원 정도에 판 게 아 마 평생의 최고가였을 것이다. 몇 개월 작 업한 걸 따지면 비싼 거라 할 수 없지 않 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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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잘 모르겠다.


만나요

(거제시소녀상)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평화의 소녀상 그 두 번째가 경남 거제시 문화예술회관에 설치돼 지난 1월17일 제막식을 가졌 다. 이번 소녀상은 자유와 평화의 상징인 새를 감싼 채 한복치마를 휘날리며 서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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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지난해 7월 <평화의 소녀상>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립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그날 LA 총영사는 공원 대신 야구장을 택함으로써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해를 넘겨 올해 1월, 일본정부와 극우 일본 인들, 일부 험악한 미국인들 12만 명이 백악관청원사이트에 소녀상을 철거해달라고 서명함으로써 또다시 소 녀는 논란의 중심에 서있다. 소녀상은 소녀일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평화롭지 못하다.

지난 11일 1박2일 일정으로 충남 서산, 보령 등지를 다녀오지 않았다면 이 글은 여기서 맺어졌을 것이다. 그 러나 가는 길에 안면도를 들렀고, 계획에 없던 자연휴양림을 걸어 올랐으며, 거기서 탐방로 우측에 자리잡은 시인 채광석 시비를 우연히 보게 됐던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낯익은 이름 둘을 발견하고야 말았으니. 시비 제작 김운성, 김서경.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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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말하다 »»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소득을 허하라

- 편집위원회

»» 이건희 회장도, 베짱이도 줘야 하나

- 편집위원회

»»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 강남훈 / 인터뷰 신성호


기본소득을 말하다 1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소득을 허하라 편집위원회

지난 11월 4일 스위스 기본소득네트워크는 기본소득을 헌법에 명시하자는 국민제안을 13만 명에게 서명 받아 연방의회에 제출했다. 그 안에는 18세 이 상 성인은 월 2,500스위스프랑(약 300만 원), 청소년 및 노인은 성인의 약 4 분의 1 수준을 기본소득으로 보장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연방의회는 2년 내에 국민투표를 실시할 계획이다.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매달 공 돈을 준다니 눈이 부릅떠지는데, 낯선 이것이 당최 무엇이고 어떻게 나왔고 누 가 주장하는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졌다.

- 현물보다 현금으로 지급하는 소득 (기존 복지영역에서 현물 소득 있는 것으로 간주) - 일회적 급여가 아닌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 - 국가만이 아니라 다양한 정치 공동체 단위로도 지급할 수 있는 소득 - 세금을 통한 재분배나 자원 분배를 재원으로 하는 소득 - 정치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지급하는 소득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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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개인을 단위로 모두에게 균등하게 지급하는 소득 - 자산 심사 없이 지급하는 소득 -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를 묻지 않고 지급하는 소득 기본소득 운동을 주도하는 핵심 인물인 벨기에 루뱅가톨릭대학 필립 반 빠 레이스 교수가 기본소득 특징을 8가지로 풀어놓았다. 한마디로 묻지도 따지 지도 않고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매달 일정 금액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 일정 금액은 인간답게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이다. 대부분 국가 의 헌법이 인간다운 생존을 보장하고 있고, 대한민국 헌법도 예외는 아니다.

제10조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 기본적 인권의 보장 인간은 존엄성을 지키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이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고 대한민국 헌법은 못박고 있다. 조건이나 자격을 제한하거나 차별하고 있지 않다.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정부로부터 존엄성과 행복을 누리는데 필요한 재원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기본소득 물꼬가 터지다 16세기 초 태어난 기본소득은 70,80년대 북서유럽에서 눈에 띄게 성장하 였다. 1986년 9월 유럽 각국에서 따로 활동하던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처음 으로 벨기에 루뱅에 모여 손을 잡았다. 이를 계기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가 탄생했고,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유럽 밖으로 확산되면서 2004년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로 거듭났다. 우리나라는 2009년 6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출범하며 강남훈 한신대 교수를 대표로 선출했다. 2010년 기본소득국제학술대회를 열었고, 기본소 득지구네트워크의 일원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스위스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을 실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2013년 4월 5만 명이 서명한 최저소득 보장에 대한 국민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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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의가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졌고, 유럽연합에서는 ‘무조건적 기본소득 보장 을 위한 유럽시민 이니셔티브’가 2014년 1월까지 100만 명에게 서명을 받으려 는 캠페인에 들어갔다. 아프리카 남서부 지역 나미비아에서는 오미타라 지역 60세 미만 주민 930명에게 월 100나미비아달러(약 1만5천 원)을 지급하는 실험을 실시했다. 미국 알래스카주는 석유에 부과한 세금을 재원으로 1982 년부터 기본소득과 유사한 영구기금배당을 지급하고 있다. 기본소득을 법으로 명문화한 나라도 있다. 2004년 1월 룰라 브라질 대통령 이 상 · 하원에서 통과된 ‘시민기본소득법’에 서명하였다. 기본소득 지급 대상 에 자국에 5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도 포함시킬 정도로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재원 마련 방안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아 ‘실행되지 않는 법률’로 묵히고 있다. 다행히 2003년부터 실시된 ‘보우싸 파밀리아’ 제도가 기본소득의 불씨 를 지피고 있다. 이 제도는 2009년도 현재 1인당 월 소득 140레알(약 9만5천 원) 미만인 모든 가구를 대상으로 기본 · 아동 · 청년수당 등을 지급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지역만큼이나 폭넓은 계층과 연령대로부터 박수를 받고 있다. 진보적인 좌파는 물론, 보수적인 우파 일부도 찬성하고 있다. 보수적인 역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70명 가운데 10명 이상이 지지하고 있다. 우파 지지자 들은 대부분 기본소득의 효율성을 높게 평가한다. 2013년 11월 3일자 뉴욕타임즈는 “연금프로그램을 통해 기본소득이 제공 된다고 하면, 현재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복지 혜택을 받으려고 정부 기관들 을 돌아다니는 대신 하나의 경로를 통해 돈을 효율적으로 받을 수 있다. 따라 서 자유주의자들은 여러 공공기관이 쓸모 없게 되어 정부 규모가 작아질 것 으로 기대한다”고 보도했다.

복지 평등의 시대로 간다 효율성만으로 기본소득을 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기본소득은 복지 패러다임 자체를 바꾼다. 우리나라 복지는 97퍼센트가 주는 사람이고 받는 사람은 고작 3퍼센트에 불과하다. 강남훈 대표와 곽노완 기본소득네트워크 학술위원장(서울시립대 교수)이 짠 기본소득 모델에 따르면, 90퍼센트 이상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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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이 자신이 낸 세금보다 많이 돌려받는다. 기존 복지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 회적 배려였다면, 기본소득은 다 함께 누릴 수 있는 복지 평등의 시대로 인도 한다. 뿐만 아니라 기본소득은 응달에서 떨고 있는 경제에도 볕을 드리운다. 기 본소득이 든든한 뒷배가 돼준 마당에 허리띠를 졸라맬 이유가 사라진다. 곳 간에 쌓아놓는 일부를 빼면 소득 대부분은 소비되어 내수 시장이 활기를 띠 게 된다. 고질적인 병폐로 꼽혀온 교육 문제도 기본소득이 특효약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저마다 특단 처방을 내렸지만 병폐의 본질인 학력차에 따른 임금구조 는 방치되어 병은 날로 깊어졌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미래의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는데 대학을 가려고 아등바등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특별한 분야의 전문가나 연구자가 되려는 사람만 대학 문을 두들길 것이요, 그렇지 않은 사 람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창의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 것이다. 부모 는 두 어깨를 짓누르던 사교육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경제와 교육뿐만 아니라 정치, 환경 등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병폐가 기본소득을 통해 완화되거나 치유될 수 있다. 이를 두고 자본주의 안 에서 자본주의를 개선시킬 뿐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능력 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세상으로 나가는 노둣돌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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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말하다 2

이건희 회장도, 베짱이도 줘야 하나 편집위원회

더불어 사는 세상을 지양하는 산봉우리들을 오늘도 많은 이들이 고통을 감 내하며 기꺼이 오르고 있다. 21세기 들어 흑사병처럼 창궐한 신자유주의로 인해 대다수 인민의 삶이 갈수록 피폐해지면서 기본소득의 봉우리를 오르는 발길이 부쩍 늘고 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나. 이 봉우리에 대한 다 양한 의문이 메아리로 울리고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를 짚어본다.

부자에게 줘야 하는가 명품 가방을 들고 벤츠를 타고 다니는 이들에게도 매달 꼬박꼬박 기본소득 을 줘야 하는가. 기본소득론자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부자나 가난한 이나 행복한 생존에 필요한 조건은 동일하게 충족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 는 어떠한 검증도 반대한다. 기존 복지정책은 자격 조건을 까다롭게 따진다. 기초생활수급자임을 스스 로 증명해야 하는 저소득층은 복잡한 서류와 절차를 밟으며 모멸감과 수치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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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을 느낀다고 한다. 기초생활수급자와 천 원짜리 한 장만도 못한 차이로 인해 차상위계층은 냉골에 방치된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무조건 지급을 대원칙으로 삼았다. 이건희 회장도 예외는 아니 다. 다만, 자산과 소득에 따른 합당한 세금이 요구된다.

일하지 않는 자도 줘야 하는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 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노동은 신성불가침 영역이다. 그런데 일 하지도 않을 뿐더러 일할 의사도 없는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줘 야 하는가. 20세기 이후 기계 성능과 기술력이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생산 공정과 조직이 최적화되었다. 생산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며 고용 없는 성장을 거듭했다. 그동안 정부는 3차 산업인 서비스 업종에 기대어 일자리를 늘리려 안간힘을 써왔지만 그도 한계에 부딪쳤다. IT기술 혁신의 쓰나미가 서비스업종마저 덮치고 있다. 서비스업 종사자 가운데 택배기사나 할인점 캐셔는 친척보다 더 자주 만나는 이웃이다. 그만큼 고용 효과가 높은데,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그 자리가 사라질 전망이다. 세계 최대 온라인 소매업체인 아마존은 무인택배가 가능한 소형 무인헬기 ‘옥토콥 터’를 2015년까지 개발할 예정이고, 구글도 무인자동차와 로봇 기술을 결합한 자동화 택배 시스템을 개발중인 것으로 알려졌 다. 미국 유통업계는 쇼핑카트에 담긴 상품을 한꺼번에 계산하 는 ‘RFID’ 칩을 설치하여 무인계산대에서 소비자가 직접 계산하 는 시험을 하고 있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그나마도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싸구려 일자리인 비정규직만 늘어가고 있다. 대부분 자영업 자는 자기 인건비마저 못 건지며 허덕이고 있다. 이 지경인데 어 찌 일 하지 않는다고, 일할 의욕이 없다고 ‘기본소득’에서 배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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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하나. 일에 대한 고정관념도 바뀌어야 한다. 흔히 일 하면 자연과 관 계되는 산업노동 즉, 대가가 지불이 되는 ‘오래된 일’을 떠올린다. 돈이 되지 않는 ‘새로운 일’은 외면받아 왔다. 구멍 난 타이어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는데, 오래된 일의 운 전대만 잡고 있다가는 사고가 난다. 독일의 대표적인 기본소득론자 괴츠 베르네(유럽 전역 1500개 이상 점포를 가진 잡화 연쇄점 ‘데엠’ 창업자)는 “소득이 보장된 다는 것은 시민을 생존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로 인해 그 는 우선 자기 자신을 위해 뭔가 의미 있을 일을, 그리고 사회에 뭔가 유용한 것을 행하는 데 필요한 자유재량의 의지를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평소 하고 싶었던 악기를 연주하거나 유 기농 농사를 짓거나 봉사활동에 스스로 나서게 된다. 타자에 의 해 결정되는 삶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새로 운 일’은 얼마든지 존재해 왔고 생겨나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 들이 기본소득에 만족하지 않고 경제적 풍요로움을 쫓아 오래된 일자리를 지킬 것이다.

모두에게 나눌 재원은 있는가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충분히 지급할 수 있을 만큼 재원이 있 는가. 기본소득론자들 간에 방법론에 대한 다양한 이견이 주장 되지만, 재원은 충분하다는데 입을 모은다. 직접세나 간접세를 올리거나 국유자산을 활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논의되고 있 다. 강남훈 대표는 그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법을 예로 들었다. “북유럽 복지선진국들은 기존 복지예산 조정만으로도 기본소 득을 당장 실시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북유럽 수준으로 조세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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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담률을 올리면 기본 소득 지급이 가능하다.” 북유럽의 총 조세부담률(세금, 연금 부담금)은 50% 안팎이 고, 우라나라는 그 절반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총 조세부담률을 북유럽 수준으로 올려 차액인 25%를 기본소득 재원으로 활용 하면, 2013년도 국민총생산 1300조 원 기준으로 국민 1인당 연 간 600만 원(월 50만 원)을 지급할 수 있다. 우리나라 기본소득 운동은 옷깃을 여미고 막 베이스 캠프를 나 선 상태다.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에는 거친 눈보라와 빙벽, 그 리고 크레바스가 기다리고 있다. 이번 특집을 계기로 기념사업회 안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의 온도가 올라가길 기대한다. 본 문에서 언급된 내용은 물론, 지면 사정상 미처 다루지 못한 수많 은 쟁점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크레바스를 넘는 사다리가 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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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말하다_인터뷰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강남훈 대표 인터뷰 신성호

극단적인 소득의 양극화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심화될수록 무상복지 논 쟁은 더욱더 뜨거워질 전망이며, 그 한복판에는 기본소득 제도가 있다. 2011년 오세훈 시장을 낙마시킨 무상급식과 2012년 박근혜 후보의 대선 공약이었던 노 인연금 20만 원에 이어 향후 복지논쟁의 화두는 기본소득이 될 것인가? 2014 년 활발한 활동을 예고하고 있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강남훈 대표는 이 물 음에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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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신성호(이하 신) ‘기본소득네트워크’라는 단체를 결성하게 된 계

기나 주요 활동은 무엇인가요? 강남훈(이하 강) ‘기본소득네트워크’는 2009년도에 결성이 되었

어요. 기본소득 제도에 관심이 있었던 곽노완 교수, 금민 선생과 함께 진보운동의 과제와 관련한 학술토론을 진행하던 중에, 민 주노총의 이수광 선생이 기본소득 운동을 구체적으로 진행하자 고 하여 의기투합을 한 게 ‘기본소득네트워크’가 된 거죠. ‘기본소득네트워크’는 기존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라는 국제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조직의 형태로 구성이 되었고, 2010 년도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총회에서 17번째 국가 가맹조직 으로 가입, 승인이 되었어요. 정식 명칭은 ‘기본소득한국네트워 크’이지만 국내에서는 보통 ‘기본소득네트워크’라고 부르고 있고 요. 이제 활동한 지 4년 정도 된 거 같은데, 주로 연구 활동 속에서 기본소득의 한국형 모델을 만들고 기본소득과 관련된 국내의 여 러 가지 쟁점들을 정리해 내는 작업들을 해 왔어요. 그런데 내년 부터는 기본소득 운동이 좀 더 다양해질 것 같아요. 지난해 하반기부터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과 ‘말과활’의 홍세 화 선생이 기본소득 운동을 함께 전개해 나가자고 했거든요. 그 래서 ‘녹색평론’ 격월간지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계속 기본소 득과 관련된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고요. 좀 더 나아가서 ‘녹색평 론’의 독자들, 그리고 협동조합 ‘말과활’의 조합원들과 함께 기본 소득에 동의하는 여러 단체들을 조직화하여 가칭 ‘기본소득공 동행동’이라는 조직을 구성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기 본소득공동행동’이라는 연대조직에서 기본소득과 관련된 대중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지요. 신

대중운동이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들을 말씀

하시는 건가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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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논의단계라서 구체적으로 정리한 건 아니지만, 예

를 든다면 기본소득 소식지 발간이나 지역 순회강연, 지역별 네 트워크 구성을 통한 캠페인이나 서명운동과 같은 것들이 가능하 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2017년 대선 전에 2016년에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에서 주최하는 국제학술대회를 한국에서 유치하여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고, 2017년 대선후보들에게 정책제안의 형 태와 같은 것들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고요. 신

그러면 ‘기본소득네크워크’는 현재 회원이나 조직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나요? 강

‘기본소득네트워크’ 회원들은 그동안 ‘기본소득네트워

크’ 카페를 통해서 활동을 하였고, 700여 명의 카페 회원이 ‘기 본소득네트워크’ 회원이라고 보시면 되요. 최근에 ‘기본소득네 트워크’ 사이트를 만들었는데, 이제는 카페에서 홈페이지로 활 동 공간을 바꾸어가고 있는 중이고요. 회원은 ‘기본소득네트워크’의 사업이나 가치에 동의하고 결격사 유만 없으면 되고요. 20만 원의 평생회비를 내는 회원들은 자동 운영위원으로 위촉이 돼요. 이렇게 위촉된 운영위원들에게 대표 를 비롯한 피선거권이 주어지고요. 현재는 제가 ‘기본소득네트 워크’의 대표이고 금민 선생이 운영위원장, 곽노완 교수가 학술 위원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어요. 신

단체의 활동이 최근에 활발해지고 있는 것 같고, 기본소

득이라는 개념도 국내에서는 올해부터 논의가 활성화되는 것 같 은데 그 이유가 있을까요? 강

그건 아무래도 올해 10월 스위스가 기본소득에 대한 국

민투표를 한다는 내용의 언론기사들이 많이 노출이 되면서 그렇 게 되었어요. 스위스 기사 이후에 신문사들이나 언론의 인터뷰 도 많이 늘었고요. 그리고 외국 선진국의 모델에 대한 우리나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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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국민들의 우호적인 선입견도 많이 작용을 한 것 같고요. 표면적으로는 그렇고요. 좀 더 분석을 한다면 2009년 경기도 김 상곤 교육감이 무상급식 교육정책을 펼치면서 국내에서 본격적 으로 기본소득 논의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요. 그 당시 논쟁이 되었던 건 ‘이건희 손자에게 무상급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었어요. 김상곤 교육감은 새누리당이 장악한 경기도 의회 에서 초등학생의 30%만 무상급식을 하는 조건으로 예산 승인 을 받았는데, 이를 5학년, 6학년 전체 학생에게 무상급식을 하 게 돼요. 전체 학년의 30%에게만 제공할 무상급식을 5, 6학년 으로 제한을 하여 전체 무상급식으로 바꿔 버린 거지요. 그렇게 하니까 저학년 학부모들이 저학년에게도 무상급식을 실 시하기를 원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2010년 지방선거에서 새 누리당이 예상 외로 부진한 성적표를 받게 돼요. 그 여파가 오세 훈 전 시장의 무상급식 논쟁으로 이어지고 서울시장의 낙마라는 초유의 상황까지 만들게 되었죠. 그리고 작년 대선에서는 무상보 육, 기초노령연금으로까지 보편적 복지에 대한 영역이 넓어지는 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 아동기본소득, 노인기본소득의 개념이기 때문에 이제는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고 대중들에게도 인식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선거운동 후반기에 기초연금으로 모든 노 인들에게 20만 원씩 지급한다고 하였고, 이는 박근혜 후보가 대 통령으로 당선되는데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보는 게 중론이에 요. 그런데 올해 박근혜 정부에서는 예산 부족이라는 이유로 공 약 이행을 하지 못했어요. 이는 2017년 대선에 다시 쟁점이 될 수밖에 없고요. 기본소득은 국내에서의 보편적 복지 논쟁과 맞 물려서 주요 쟁점으로 부각이 될 거예요. 이미 기존에 대중들이 피부로 실감할 수 있는 정책들이 있는 것 이고, 스위스라는 서구 선진국에서 검토를 한다고 하니까, 기본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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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이라는 잘 들어보지 못했던 단어, 개념에도 쉽게 접근이 가 능해진 거죠. 신

우리나라는 기존의 복지재원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세금이 올라갈 수밖에 없고, 그 러면 국민들의 저항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건 제도의 도입을 어 렵게 하는 게 아닌가요? 강

당연히 국민들의 저항이 있는데요. 그건 전체 국민들의

저항이라기보다는 가진 자들의 저항이에요. 세율을 25%에서 50%로 올린다고 해도 수입 자체가 적은 일반 국민들은 세금 더 내는 것보다 기본소득으로 받는 금액이 더 크기 때문에 반대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그런데 수입이 많은 부유층들은 당연히 기본소득으로 받는 것보다 세금으로 내는 게 훨씬 더 많기 때문 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문제는 정치권과 재벌, 그리고 언론과 학계 등이 모두 가진 자들의 이익을 더 많이 대변하고 있 어서 쉽게 도입이 되지 않고 있는 거예요. 신

일반 국민들에게 세금보다 기본소득으로 받는 게 더 많

다는 것을 알려야 저항이 적을 것 같은데 가능할까요? 강

맞아요. 그 부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건 최근에 무

상급식과 기초노령연금 등으로 어느 정도 검증도 되었고요. 국 민들은 4만 원씩 내는 무상급식의 문제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 하면서 정치권에 자연스럽게 압박이 되었어요. 무상급식에 반대 하던 새누리당이 2000년 지자체 선거에서 일정 정도의 타격이 있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작년 대선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이 막 판에 모든 노인들에게 20만 원씩 지급한다고 공약을 전면에 내 세우게 되었던 거죠. 그 반대의 예는 노무현 정부에서 종부세를 추진하면서 종부세로 걷은 세금을 지자체의 세원으로 하고 지자체에서는 그 세금 모 두를 복지에만 지출하기로 결정을 한 후에 종부세를 밀어붙였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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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요. 언론에서는 세금 폭탄이라고 난리가 나고 지지율이 뚝 떨어 졌죠. 그러니까 정작 그 세금으로 지원을 받은 저소득계층은 그 러한 내용을 하나도 몰랐던 거예요. 세금을 올려서 정권이 위태 로워진 사례라서 정치권에서는 세금 올리는 것에는 확실한 트라 우마가 생긴 사례라고도 할 수가 있죠. 그런데 만약에 노무현 정 부에서 종부세로 추가로 걷었던 세금 3조 원을 무상급식을 추진 하는 데 드는 재원 3조원으로 충당하도록 하겠다고 했다면 아마 도 그 당시 노무현 정부가 그렇게 욕을 먹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본소득 제도를 추진하면서 추가로 필요한 재원 때문에 세금 인상은 불가피한데, 이를 국민들이 추가로 내 는 세금 이상으로 국민들에게 모두 돌아간다는 것을 제대로 알 리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고 봐요. 그리고 아동이나 노인과 같은 일부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전 국민의 개개인에게 해당이 되는 문 제라서 광범위하게 논의가 될 수밖에 없고, 이를 기존의 보수 언 론에서 맹공격을 한다고 해도 눈가리고 아웅이 될 가능성이 많 다고 보는 거죠. 기본소득은 여론의 주도층이 되는 중산층에게도 당장의 가계수 입이 플러스가 되는 제도이기 때문에 종부세와 같이 지속적으로 언론의 맹공을 받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 죠. 예전의 한나라당이 뉴타운 건설 등의 공약으로 중산층의 지 지를 얻고 선거에서 승리를 했던 사례를 보더라도 충분히 가능성 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오히려 문제는 기본소득이 도입이 되면 엄청난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정치권과 재벌, 학계, 보수 언론 등 기존의 기득권 세력들이 에요. 국회에서 입법 발의를 통하여 진행을 해야 하는데 기득권 층이 꽉 막고 있으니 한 발짝 나아가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거죠. 신

이런 좋은 제도가 우리보다 먼저 알려진 선진국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든 건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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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알래스카에서 기본소득 제도가 운영이 되고 있

고, 미국에서는 닉슨 대통령 시절에 법안이 국회에 상정이 되었 다가 부결이 되고 나서는 그 이후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휩쓸면 서 더 이상 진척이 되지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일부 나라에서 아 동수당, 노인수당 등으로 일부 진행이 되는 정도이고요. 이게 어느 나라에서나 대중은 좋아하는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당연히 반기지를 않아요. 독일에서도 녹색당의 평당원은 80%가 지지를 하는데도 상층부에서 반대해서 정강정책으로는 들어가 지를 않아요. 독일은 유럽 전역에 지점을 가진 데엠이라는 편의 점 체인의 괴츠 베르너 회장이 2005년부터 방송에 나와서 적극 주장하면서 국민들의 90%는 기본소득이 뭔지 알고 70%는 지 지해요. 돈도 있고 할 수 있다. 이게 국민정서인데 정치인들에게 서 법안이 통과가 안 되요. 독일의 좌파들과 노동세력들은 노동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 에 그래요. 그러니 보수 우파, 진보 좌파들의 주류들이 모두 반 대하는 제도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리고 이게 기본소득의 도입 자체가 기본적으로 권력지형을 바꾸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기존 의 정치인들이 쉽게 수용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게 가장 어려운 문 제가 되고 있어요. 오랜 시간 보좌관으로 있다가 선거에 나가야 하는 정치 지망생이 나, 실제로 낙선하고 나면 보수가 없는 정치인들에게도 기업에게 돈을 받지 않고 정치를 하려면 기본소득은 절실한 제도인데 말이 죠. 소신 있는 정치인이 기업에게서 돈을 받지 않고 정치를 하려 면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종자돈이 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기본소득 제도의 홍보는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에서 시작 은 하지만 정치,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포섭이 굉장히 중요하게 돼요. 미국에서 실제 닉슨 대통령 시절에 법안 발의까지 갈 수 있었던 실질적인 동력은 마틴 루터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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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킹 목사의 기본소득 운동에서 탄력을 받았거든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D.C.로 향한 행진은 흑인들을 법적으로 제도적으 로 차별받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그걸 하고 나서 보니까 법적 으로 동등해졌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흑인들과 백 인들이 한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권리는 됐는데 그 식당에 갈 돈 이 흑인에게는 없다. 결국 실질적인 평등이 되려면 기본소득 보 장이 되어야 한다고 두 번째 캠페인을 해요. 그러다 암살을 당했 지요. 정치인들이 거기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법안 발의까지 이 어졌는데 부결이 된 거지요. 기본소득의 역사로 보면 가장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많은 분들이 기본소 득 제도를 지지하고 열성으로 운동을 하셔야 정치권도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신

기본소득이라는 제도가 단순한 복지정책이라기보다는

조금만 깊이 생각을 해 보면 인문, 사회, 철학, 경제를 아우르면 서 전반적인 사회의 지형을 바꿀 수도 있는 제도라는 생각이 들 어요.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최근에 바람이 불고 있는 인문학 바 람과도 연계해서 운동을 전개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 시는지요? 강

네 맞아요. 지금 그쪽으로 여러 가지 준비를 좀 하고 있

는데, 얘기를 하다보면 작가, 예술가들이 기본소득 제도를 상당 히 좋아해요. 그래서 문학, 철학 등과 함께 인문학 강좌의 한 꼭 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는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고, 국 가사회주의도 시장사회주의도 모두 실패를 했어요. 그러면 또 다른 경제모델이 필요하다는 거죠. 이제 새로운 사회의 경제모델 은 협동조합 플러스 기본소득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협동조합 을 주요 기업의 모델로 하여 자유롭게 이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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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국가는 기본소득 제도를 기본으로 하여 과세를 강하게 하 는 거죠. 모든 재산의 50%를 국유화하지만 계획하거나 관리하 지 않는다. 국유화한 재산은 모두 기본소득의 재원으로만 활용 한다. 이러한 모델을 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가 현재 주장을 하 고 있어요. 이러한 기본소득 제도로 인하여 모든 국민들이 원하 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구조, 극심한 경쟁에서 조금은 자 유로워질 수 있는 모델이어야 한다고 보는 거예요. 이러한 논의를 이 자리에서 자세하게 얘기하기는 힘들겠지만, 향 후 인문학 쪽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논의가 있을 거라 고 보고 있어요. 신

말씀을 듣다보니까 앞으로 준비하고 진행해야 할 것들

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은데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강

저희 네트워크는 기본적으로 연구 모임이고 운동가 단

체가 아니에요. 그래서 지난해부터 김종철 선생의 ‘녹색평론’과 홍세화 선생의 ‘말과활’과 함께 ‘기본소득공동행동’이라는 운동 체를 만들어서 기본소득 운동으로 적극적으로 전개하자고 하였 고요. 아마도 올해에는 정식 운동단체로 발기인 대회를 하고 구 체적인 운동을 펼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기본소득네트워크에서는 연구가 주요 활동이기 때문에 대중 세미나가 아니라 기본소득에 대해서 공부하고 강연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소양을 갖춘 사람들을 대상으로 12번 세미나를 할 계획이에요. 가급적이면 예술가나 작가들을 포함해서 대중들에 게 어필할 수 있는 사람들이 12번 세미나를 듣고 공부하여, 다시 대중들에게 강연하고 세미나 등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해서 광범위 하게 조직화를 해나갈 수 있도록 할 예정이에요. 신

기존의 진보적인 단체들이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이루

기 위해서 이 기본소득이라는 제도를 수용하고 적절히 활용할 수 가 있겠어요.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굉장히 큰 힘으로 정치권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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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에 압력을 행사할 수가 있을 것 같고요. 강

기존의 진보적인 단체들이 기본소득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념을 일부 깨뜨려 야 가능한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저희가 그동안 몇 차례 논의들 을 해보면 오히려 진보정당이나 진보단체들이 더 경직되어 있는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이나 일반 시민단체 가 더 수용이 쉬었어요. 신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기본소득 제도의 현실 사회에 있

어서의 파급력을 보았을 때, 꼭 진보진영이 아니더라도 먼저 정 책 연대를 할 수 있는 진영은 어느 곳이라도 연대를 하는 것이 필 요할 것 같아요. 강

기본소득 제도가 실제로 상당히 거대한 제도이며, 정책

이라서 그 파급효과는 전 사회적으로 전 영역에 미친다고 봐야 해요. 그래서 실제로 전체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있는 조 직들과 연대가 가능한 거죠. 그리고 이미 무상급식과 노인연금 에서 보았듯이 선거 때마다 핵심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고 봐요. 신

현재 시행하고 있는 무상급식과 아동수당, 노인연금이

기본소득의 한 유형으로서 우리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제도가 기 본소득이라고 명명을 하는 게 운동을 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어떠세요? 강

그래서 최근에 제가 글을 쓸 때는 ‘기본소득을 최초로

공약으로 내건 대통령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다’라고 쓰고 있어 요. 그리고는 이제는 기본소득을 전면적으로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죠. 그렇게 캠페인을 하면 일반 국민들이 너무 어렵 게 생각하거나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는 기존에 연구 중심의 활동을 하였기에 국민들에게 알리는 작업들이 미진했다면, 대신에 쟁점이 될 만한 부분들에 대하여 설득력 있는 근거자료와 논거는 준비를 착실히 해 놓았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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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그러니까 이제는 운동의 중심이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을 중 심으로 진행되어야 될 거예요. 그리고 그런 단체들이 많이 결합 해서 알려내야 할 거고요. 이내창기념사업회에서도 회원들에게 많이 알려주셨으면 좋겠고요. 주변의 진보단체들에게도 많이 알 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신

네 저희도 함께 노력하도록 하고요. 추후에 저희 단체에

서 모임이 있을 때, 다시 한 번 모실 수 있도록 할게요. 감사합니 다. (인터뷰 내용 중에 기본 소득을 말하다 1, 2에서 다룬 내용은 일부 삭제를 하였음을 밝 힙니다. )

“19세기 노예제 폐지, 20세기 보통선거권 쟁취에 버금가는 21세기 세계사적 과제로 기본소득 쟁취를 들고 나온 사람들 이 있다. 기본소득을, 세계적 금융 위기를 통해 충분히 그 마각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를 철저히 종식할 뿐만 아 니라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 는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있다.”<2010년 1월 27일, 서울, 기본소득 서울 선언 Basic Income Seoul Declaration>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에 참여하기 회원 : 네트워크의 사업 및 가치에 동의하며 결격사유가 없는 자는 누구나 회원 이 될 수 있습니다. 평생회원 : 20만 원 이상의 평생회비를 납부한 자는 네트워크의 평생회원이 될 수 있으며, 대표 및 운영위원의 피선거권을 가집니다. 회비 납부 계좌 : 농협 317-0005-9714-81 기본소득네트워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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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은 엄마들에게 “딸로 태어난 엄마는 죽어도 모르는 남자아이 교육법”

김기수

어때요? 위 제목만 봐도 아들 가진 엄마들이라면 궁금하고 알고 싶지 않을 까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지면으로 기념사업회 회원들에게 인사드립니다. 저는 요즘 6~13세 남자아이만 가르치는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픈한 지 7개월째 들어가네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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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전혀 관계없는 제가 남자아이들 가르치는 미술학원을 운영한다니 조금 이 상한가요? 원래 (지금도 그 직함으로 활동하고 있 지만) 저의 직업은 (사)한국소상공인마케 팅협회 회장과 92 신성호와 함께 운영하 였던 ㈜네오누리콤의 대표였죠. 그러다 여러가지 계기로 성호와 상의 끝 에 ㈜네오누리콤은 더 잘할 수 있는 성호 에게 맡기고, 제가 교육하고 컨설팅 해주 었던 “자라다”라는 미술학원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프랜차이즈 미술학원 자라다 대표가 저 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지만 항상 고객과 의 직접적인 접촉이 일어나는 마케팅을 진행하고 싶었고, 확실한 차별화로 작지만 건실한 업체라는 생각에 같이 하게 되었네요. 사실 처음에는 미술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뛰어들기가 겁도 나 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마케팅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기에 용기 를 내서 시작을 했습니다. 처음 3개월간 교육을 받으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하였고 그 과 정에서 성호와 영희의 도움을 많이 받았네요.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고객 세분화와 고객 니즈 파악 등 기본적인 마케팅 분석과 실 질적인 마케팅 몇 가지를 진행하며 고객을 모으다 보니 기대 이 상의 좋은 성과가 나왔습니다. 자랑 좀 하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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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2달만에 성향파악수업이라 불리 는 샘플수업을 200여 명 진행하였고, 정 규등록은 90여 명에 이르렀네요. 이제 오 픈한지 6개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운영에 대한 노하우가 쌓이면서 안정 되가고 있 습니다. 원생도 늘어나고 시스템도 잡혀가고 잘 진행되고 있어 좋지만 그것보다도 더 좋고 보람이 있는 것은 수업을 받으면서 아이들 의 변화 모습들입니다. 호기심이 많아 산만하기까지 한 친구가 1시간 30분 동안 집중하며 한 가지에 몰 두하는 변화, 자기주도 성향이 강해서 주 변과 항상 부딪치는 친구가 주변 친구들과 관계를 개선하는 변 화, 소극적이고 차분한 성향의 친구가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의 변화 등등 이런 아이들의 변화를 지켜보고 어머님들의 감사인사 를 받다 보면 어느새 무엇보다 소중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이 제 저도 절반은 교육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나 봅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것은 항상 어렵고 위험하지만 목표, 열정, 의지를 가지고 준비만 잘 한다면 그것들을 감내할 그 이상의 즐거움과 성취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본사의 마케팅까지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이제 본사의 가맹점도 많이 늘어나고 시스템도 점점 체계 를 잡아가고 있네요. 아마도 내년 3, 4월이면 그간 못 뵌 선배님들과 후배들을 좀 여 유롭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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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네이버에서 파주맘이란 카페에서 “자라다”로 검색해 보시면 그간 제가 진행 했던 내용들과 저희 학원에 대한 50여 개 의 후기들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언제든 일산이나 파주 쪽에 오실 일이 있으실 때는 미리 연락 주시고 한번 들러 주세요. 토요일도 오픈하니 시간이 되면 아들과 함께 오셔서 성향파 악수업 받아보시면 아들과 부모에게 조금 도움이 될 수 있을 겁 니다. 나이 44세에 낮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있는 새로운 비전 을 만들어가고 있는 저에게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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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나라도 내가 더해야 평안해” 4년차 아빠의 육아일기

박응진

월드컵 조추첨보다 더 떨리는 유치원 입학추첨을 하러 다니고 있는 시우 아 빠 박응진입니다. 죽음의 조를 피한 대한민국처럼 저도 다행히 한두 곳이 당 첨돼 합격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비슷한 처지에 계신 분들도 좋은 결과 있었기를 바랍니다. 시우가 태어나고 나서 써본 적이 없는 육아일기를 어깨동무에 적으라고 하 니 참 부끄럽고 조금 오글거리기도 합니다. 두세 명을 키우시는 분들이 더 애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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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많이 쓰시고 이야기거리도 많으실 테지 만, 나름의 경험이 저에게는 유일한 일인 지라 몇 가지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피소드 1

2010년 5월 경. 우리

부부는 태어난 지 세 달이 지난 시우를 키 우느라 초보 부모로서 서툰 시기를 보내 고 있었다. 그 날 아침 난 생선구이에 밥을 먹고 출근했는데, 시우가 잠을 푹 못 자고 자주 깨는 편이라 낮에는 아내에게 전화 대신에 문자만 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하루 종일 답장이 없었다. ‘오늘도 많이 힘들었겠네' 하는 생각으 로 퇴근해서 들어간 집에는 생선냄새가 가득했다. 식탁과 주방 싱크대는 겨우 서너 발자욱 거리인데 그걸 가져다 놓지 못할 정도 였다니....... 식탁 위에 있던, 아침에 내가 먹다 남긴 생선 접시 를 한참 쳐다보며 ‘내가 출근하면 남은 한 마리로 아침을 먹겠지’ 하고 생각했던 내가 틀렸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동안에는 설 거지하고, 청소하고, 일찍 들어오고, 눈치보고 했었는데, 이제 더 무얼 해야 하는 걸까. ‘뭐라도 더 하긴 해야겠다.’

에피소드 2

그리고 두 달쯤 지난 7월 경. 아이를 목욕시키

는 일은 보통 아빠들이 하게 된다. 엄마들이 아기 목욕까지 시키게 되면 잘 할 수야 있겠지만 체 력적으로 힘들어서 병나고 아프기 쉽다. 그때 집에 아기 욕조가 있었지만 세면대에서 씻기는 게 훨씬 더 편했다. 욕조는 목욕하 고 나면 물때를 닦아야 하고 물도 많이 받아야 되니 수도세도 더 나올 거고 쭈그리고 씻기자니 내 허리가 아프고....... 이렇게 많 은 핑계를 대고 난 세면대에서 아이를 씻겼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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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세면대에서 목욕을 하는데 시우가 앵~ 하고 울기 시작했다. 온수로 세면대에 물을 받았더니 수도꼭지 한쪽이 뜨거워져 있었는데 거기에 손을 데 고는 뜨겁다고 울고 있는 아들. 그러고도 손을 떼지도 않고 있었다. 자기가 왜 아픈지도 모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냥 생명이구나’ 했다. 손을 떼어 주며 든 생각. ‘정말 보살핌이 많이 필요하다.’

에피소드 3

2010년 여름. 시우를 안방에 재워놓고 문을 살포시 닫고 우

리 부부는 밥을 먹으려고 한다. 이 시간은 항상 조심스럽다. 애가 깨면 밥이고 뭐고 다 끝이다. 뭐든지 소리 안 나게 천천히 살살해야 한다. 그래서 상 차리는 일도 오래 걸린다. 반찬도 꺼냈고 밥도 펐고 수저도 준비 했다. 의자도 조심히 들어서 옮기고 이제 밥 먹을 시간이다. ‘응애~~’ 아, 이런...... 시우가 운다. 밀폐용기 뚜껑 여는 소리에 깬 것이 다. 정말 너무한다 아들.......

난 꽤 오랫동안 밀폐용기 뚜껑을 소리없이 여는 습관을 가지고 살았다.

에피소드 4

2013년 5월. 맞벌이 하는 경우, 육아와 살림에 지친 아내를

쉬게 할 수 있는 건, 아이 없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 생각 한다. 물론 집이 아닌 밖에서! 집에서 쉬라고 하면 묵혔던 집안일을 하지, 남 편 생각처럼 TV보며 뒹굴지 못한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지난 5월 어느 주말. 그날도 도시락을 싸서 시우를 데리고 버스를 탔다. 몇 정거장만 가면 구리 정 각사가 나오는데 망우리 쪽으로 올라가서 용마산, 아차산으로 갈 수 있다. 좀 올라가다가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중간쯤에 있는 안내도를 보더니 “아빠 어디까지 가는 거야?”라고 묻는다. “어 우리가 지금 저기서부터 올라와 서 여기까지 왔는데 산 맨 위에는 저기야.” 꼭대기까지 가고 싶다는 아들을 데리고 걱정스레 걷고 있다 보니 온 만큼 만 더 가면 정상이었다. 한 번 가보자는 마음을 먹고 안아주지 않고 힘들 때는 쉬었다 가자고 하면 서 결국 용마산 정상에 도착. 1개에 1500원이나 하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앉아 있는데 다른 어른들의 칭찬과 격려에 기분이 좋았나 보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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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두어 번 더 갔었다. 갈 때마 다 정상에 가기 전 계단에서는 “아빠~ 여 기서 아저씨가 쵸콜릿 줬었지~~” 하면 서....... 2013년 겨울, 며칠 전부터 시우가 밤에 자기 전에 달력에 엑스표를 하고 있다. '이 제 몇 밤 자면 돼?' 하면서 산타할아버지 를 기다리는 시우. 폴리 장난감을 갖고 싶다고 기도한다. 없는 캐릭터 없이 다 해줬는데 뭐가 또 남 았는지....... ㅠㅠ 일단 내일은 크리스마스 트리부터 꺼내 만들어야겠다. 트리 밑에 놓여 있던 선물 상자의 기억은 마흔을 앞둔 내 머리 속에도 생생하니까.

마치며

둘이 살던 가정에 아기가 생긴다는 건 말할 것도

없는 축복입니다. 그 축복으로 시작되는 육아. 흔히들 전쟁이라 는 말을 붙이고는 하는데요. 저 또한 겪어 보니 그 정도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듯 합니다. 그런데 겨우 4년 지나고 돌아보니....... 그저 실실 웃음만 납니 다. 왜 그랬을까....... 그게 뭐라고 내가 그렇게 했을까 하는 생

각만 납니다. 아빠들, 뭐라도 하나 더 하세요~ 그래야 편안하고 평안합니 다.^^

박응진_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액세서리 사업체를 운영 중이다. 남성미를 발산할 수 있는 목걸이가 주된 수출품목이다. 2008년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항상 현재에 만족하는 삶을 살자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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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떠나는 여행 박성용

정선 송천 따라 걸었던 아득한 길 브람스 ‘교향곡 제4번’

민둥산역으로 이름이 바뀐 증산역에서 비 둘기호 열차로 갈아타고 정선선 종점인 구 절리역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오후였다. 낡은 역사를 빠져나오자 쇠락한 탄광촌이 늦가을 햇살에 졸고 있었다. 제법 반반한 집이나 단층 건물마다 ‘옥’자가 들어간 술 집 간판들이 달려 있었다. 술집 상호들은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색은 바랐지 만 돈과 여자, 남정네들이 넘쳐났던 탄광촌의 영화를 잊지 못한 채 겨우 자 리만 지키고 있었다. 구절리를 벗어나는 동안 적막했다. 지나가는 차도 없고 사람들도 거의 보지 못했다. 뚜벅뚜벅 다가오는 혹독한 겨울을 버티기 위해 지붕 낮은 집들은 옆구리에 시래기만 매달고 잔뜩 웅크렸다. 버스가 다니지 않아 노추산 아래 마을인 종량동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1시 간이 조금 넘는 거리였다. 폐광지대와 오장폭포를 지나는 이 길은 전에도 그 랬지만 걸을 때마다 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막막한 심정이 들었다. 친구 와 나는 종량동의 유일한 농가이자 민박집에서 며칠 묵으면서 술도 마시고 바람도 쐬면서 잠시나마 사바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우리는 말은 안 했 지만 서로의 마음에 어떤 번민이 들끓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콧 구멍에 강원도 산골바람 좀 넣어주러 갈까?”라는 뜬금없는 제의에 그는 단박 에 맞장구를 친 것이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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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오셨수?” 민박집 주인은 늦가을 산골에 불쑥 나타난 우리를 의아스러운 눈길로 훑어봤다. 행락 철이 지난 평일에, 그것도 시커먼 사내 둘이 산골로 여행을 다닌다면 나 같아도 한번쯤 의심했을 터. 과자, 음료수, 술 등을 파는 점방을 겸한 민박집은 시골집 그대로였다. 방 하나를 잡고 여장을 푼 친구와 나는 술상부터 봐달라고 했다. 술이 몇 순 돌자 주인 은 경계를 풀고 합석했다. 탤런트 권해효 씨가 종종 놀러온다고 자랑하는 주인은 그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라고 했다. 이 오지에 스며들듯 온다는 그가 색다르게 보였다. 민박 집 앞에는 송천이 흘렀다. 아우라지로 흘러가는 송천은 맑고 투명했다. 주인은 이 하 천에서 잡은 민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였다. 이틀을 머물고 떠나기로 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어느 길을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강릉 으로 가기로 했다. 송천 물길을 따라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로 이어지는 길은 좁은 비 포장길이었다. “조금만 가면 된다”는 주인의 말을 믿고 떠난 여정은 눈이 부시도록 아 름다운 풍광과 오지 특유의 아득한 분위기에 취해 힘든 줄 몰랐는데, 나중엔 가도 가 도 끝이 안 보여 지치기 시작했다. 짧은 늦가을 해가 떨어지기 직전, 다행히 배추 트럭 을 얻어 타고 대기리의 어느 마을회관에서 감자전과 막걸리로 허기를 달래고 하룻밤을 잤다. 당시 민박집 한 채밖에 없었던 종량동은 지금 펜션이 10여 채가 들어섰고, 길도 포장되어 자동차로 40분이면 강릉까지 간다고 한다. 단풍 끝물과 계곡,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비포장길을 생각하면 브람스 교향곡 제4번 이 떠오른다. 쓸쓸한 만추의 정서와 맞닿아 있는 이 음악은 대표적인 가을음악이기도 하다. 특히 떨어지는 낙엽을 닮은 1악장 서두 선율과 바람이 텅 빈 대지를 훑고 가뭇없 이 사라지는 듯한 2악장의 서정적인 현악기 울림은 빛의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존 바비롤리 경과 빈 필의 음반이 수묵담채화 같은 연주를 들려준다. 표지 재 킷 사진처럼 담백한 연주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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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님을 알 때, 더 단단해졌다

2013년 소사 허원근 사건 국가손해배상 항소심 무죄 판결 서울고법은 8월 22일 허원근 사건을 자살로 판정하고, 형식적인

수사로 인한 유족의 피해를 인정해 일부 국가의 손해배상 결정을 내렸다. 지난 5월 28일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법학관 모 의법정에서 캠퍼스 열린 법정을 열어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기울 이는가 했는데, 국방부 특조단의 자살 결정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는 판결을 하면서 큰 공분을 일으켰다.

타살의 양심고백을 받은 의문사위원회의 조사는 유도심문이고, 총을 세 번 이상 쏘고 죽은 사례가 외국에도

있으므로 허원근이 타살되었다고 볼 수 없고, 사건이 30년이 지났는데도 다른 양심선언이 없으니 타살일 수 없다는 궤변으로 일관했다.

노동운동가 박태순 유고시집 <가야할 길은 먼데> 노동운동을 하던 중 의문사한 박태순(사망 당시 26살)의 유고 시

집이 발간되었다. 고교 시절부터 써온 시 70편을 모은 <가야 할 길

은 먼데>(우리교육검둥소 펴냄)는 8월 25일 21주기 추모제에서 유족께 헌정되었다.

1966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박씨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

니며 문예부 활동을 했고 1985년 한신대 철학과에 입학한 뒤 학 생운동을 하다가 중퇴한 뒤 수원 지역 공장을 중심으로 노동운동 에 뛰어들었다. 1989년에는 학생운동을 하다 의문사한 이철규,

이내창 열사의 사인 규명을 요구하며 수원지방검찰청 점거 농성

을 벌이다 1년6개월 동안 복역했다. 1992년 8월 29일 공장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실종됐고 9년이 지난 2001년이 되어서야 의

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에서 그가 그날 시흥역에서 무궁화호 열차에 치여 두부파열로 사망했다는 사 실이 확인됐다.

“하다못해 꽃 한 송이 조금 들고 울어 줄 친구라도/ 다른 동지들을 찾기 위해 왔다 들러 줄 것이다/ 와서 동지 가를 목청껏 불러주면/ 더없이 고마울 것이다”라는 내용의 <마석 모란공원에 가 보지는 못했다>라는 시를 죽 기 1년 전에 남긴 그는 현재 마석 모란공원에 잠들어 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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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혁 열사 추모비 제막식 최우혁 열사 추모비는 교내 인문대 5동과 중앙도서관 사이 최우 혁 추모수 앞에 세워졌다. 홍성담 화백이 추모비를 도안했고 열 사의 동기인 황인욱·안혜경 씨가 추모글과 추모글씨를 썼다. 최 우혁 열사 기념사업회(회장 김치하)와 서울대 서양사학과동문회 는 9월 7일 11시에 유가협 어른들과 100여 명의 서울대 동문 등 이 참가한 가운데 조촐하고 진지한 제막행사를 열었다.

최우혁 열사는 1984년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된 뒤 군 입대를 했으나 보안사 사 찰 대상으로 낙인찍혀 가혹행위 등을 당한 끝에 87년 의문의 사망을 했다. 그 충격으로 실명을 한 어머니도

91년 한강에 투신자살해 비극의 가족사를 남겼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5년 최씨의 죽음을 ‘공권력 에 의한 사망’으로 공식 인정했고 서울대는 2008년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과거사법 개정안 토론회 9월 27일 여의도 이룸센터 누리홀에서 ‘진실을 향한 여정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과거사기본법 개정안 토론회가 열

렸다. 진선미 의원, 서기호 의원, 포럼진실과정의 주최로 열린 토 론회에서 김민철(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우리사회 과거 청산 성과와 과제’, 신명철(이내창기념사업회) ‘개정안 논의 경과

와 주요 내용’ 발제가 있었다. 토론에서는 장완익(변호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거청산위원회) ‘개정 안에 대한 법률적 검토’, 노용석(부산외대 교수) ‘개정안과 유해발굴 등 후속조치’, 김재완(방송통신대 교수) ‘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본 인권침해사건에 대한 국가의 조치’, 정석희(한국전쟁유족회 상임대표) ‘과거사법에 대한 국회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며’를 발표하였고, 여러 의견과 토론이 이어졌다.

장준하특별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 민주당진상조사위, 역사정의실천연대, 유기홍 의원실 공동주최

로 10월 2일 한국화재보험 1층 강당에서 장준하특별법 공청회

가 열렸다. 부제 ‘내 죽음의 배후를 밝혀라’처럼 장준하특별법은 1945년 이후 의문사를 비롯한 모든 인권침해사건을 4년간 조사 를 하는 국가기구를 설치하는 내용이다.

1부는 김동춘 교수의 ‘과거사 청산의 과제와 해결방안’ 발제에 이어, 이상희 변호사,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실장, 최광준 교수

가 토론에 참가했다. 2부에는 조영선 변호사의 ‘장준하 특별법 과 과거사 관련 법안들에 대한 이해’ 발제와 김희수 변호사, 안경

호 49재단 사무국장, 박용현 한국전쟁유족회 운영위원장의 토 론이 있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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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기

2013 과거청산 포럼 11월 20일 ‘독일 사례로 본 한국의 과거청산’의 토론회가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독일대사관, 이재오 의원, 진선미 의원이 공동 주최했는데, 지난 9월에 독일의

초청으로 독일의 과거청산의 과정과 시설 등을 돌아보고 나서, 그 경험을 한국의 과거 청산에 접목하고자 한 후속 사업의 일환이다.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대사가 독일의 과거청산의 성과와 한계를 인사말을 대신해 풀 어 주었고, 안병욱 전 진실화해위원장이 ‘한국의 과거청산 전망과 과제’ 기조강연이

있었다. 이어서 이재승 건국대 교수가 ‘독일의 과거청산’이라는 제목으로 독일의 과 거청산 사례를 통해 한국의 과거청산과 과제를 비교 설명하였고, 오수성 전남대 명예 교수의 ‘국가폭력 트라우마, 그 치유 방안’의 발표가 있었다.

독일의 과거사 모델에서 배우고, 국가폭력의 본질과 피해자 치유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충실한 내용으로 한국전쟁 유족 등 200여 명이 대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형제복지원 사건 대책위 발족 11월 22일 장경선 방통대 교수, 전규찬 영화감독, ‘발바닥’ 등 장애인운동 단체와 인권 단체가 수년간 진상규명 활동을 해오다 마침내 19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발족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에 고아와 장애인 등 4천여 명이

수용돼 감금, 강제노역, 폭행 등을 당한 사건이다. 1987년 수감자 1명이 숨지고 35명 이 집단 탈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수용 시설 자격으로 해마 다 20억 원 가량 국고를 지원받았으나 ‘묻지마 감금’에 살인과 암매장까지 서슴지 않 았다고 피해자들이 증언해 왔다.

이들은 진상조사를 통한 피해자 구제와 국가의 사과·배상 등을 촉구하는 특별법 제

정을 위한 시민 입법청원 운동, 피해자 증언 채록 및 트라우마 치유 활동 등을 할 계획 이라고 한다. 그동안 피해자 한종선이 직접 쓴 <살아남은 아이들>이 있고, 10월에 형 제복지원 사건 자료집 <한국의 홀로코스트!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말한다>가 발 간되었다.

2013 과거청산 간담회 11월 27일 한국전쟁전국유족회, 역사정의실천연대가 유족과 활동가, 연구자 등을 초 대해 간담회를 열었다. 2013년 한국전쟁 희생자, 의문사 유족과 관련 단체의 중심 사

업이었던 과거사법 입법 과제가 일단락되면서 그간의 경과를 설명하고, 향후 과제를 논의하면서 결의를 다지는 자리이다. 안병욱 교수, 이석태 변호사를 비롯해 유족과 단 체 활동가 등 50여 명이 참석해서 경과보고 형식의 발제를 듣고 진지한 토론을 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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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합동 추모제 2013 전국합동추모제가 11월 30일(토) 오후1시, 서울시청 서소문 별관 후생관 강당 에서 엄숙히 봉행되었다.

이날 추모제에는 10월과 11월에 ‘진실화해기본법 개정 법률안’에 대해 각각 입법 발

의를 한 진선미(민주당) 국회의원, 이재오(새누리당)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안병욱 전 진실화해위원장, 강정구 전 범국민위 공동대표, 그 외 많은 활동가와 그리고 양용해 상임대표의장 등 전국 각 지역에서 올라온 유족 250여 명이 참석하였다.

추모제를 마치고 유족들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서울광장을 한바퀴 도는 만장행렬 을 하였는데, 이 행진을 통해 서울 시민들에게 유족들의 아픔을 공유하고 전달하려 는 의도였다고 한다.

추모제 단상 2013년 하반기에는 추모제에 많이 참석하지 못했다. 이유가 없 지는 않지만 죄송한 마음이다. 하지만 두루 살피는 일이 쉽지만 은 않다. 탓하기에는 세월이 너무 흘렀고, 나이가 지긋해졌다. 늙은 부모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지만, 소멸해 가는 것이 자연스 럽기도 하다. 장준하 38주기 추모제에는 여전히 사람이 가득하다. 겨레장을 치른 지 얼마 안됐고, 암살의혹 규명에서 특 별법 제정으로 싸움이 옮아 가면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8월 25일에는 박태순 추사의 시집 헌정식이 있었고, 최우혁은 추모비 제막식이 있어 묘소참배는 가족끼리만 하기로 했다. 10.26 최종길 교수 40주기 였는데, 올해도 가족만 참여하는 조촐한 추모제가 치러졌다. 50주기에나 신경 쓰자고 유족이 맑게 전한다. 서울대 교수, 대한민국 민법을 세운 법학의 스승, 인천이 낳은 3대 수재 중 한 사람, 의문사 1호로 의문사위에 서 타살 규명, 국가 손해배상 결정 등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궤적을 그었지만, 40년을 거의 가족끼리만 추모제를 지냈다. 최교수를 추모하는 사람이 많으니 성대하고 거창할 것 같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가족이 겪고 인내해 온 세월과 세상의 시선은 너무도 다르다. 재야대통령으로 칭송받았던 장준 하 선생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3월 겨레장을 치르며 시청 앞 분향소에 다녀간 분이 만여 명이 넘지 만, 장준하기념사업회가 상근자 활동비도 없이 20여 년이 넘게 버텨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 평 남짓한 지하 골방에서 지금은 4층으로 옮겨 그나마 위안이 된다. 우리가 보는 것이, 믿는 것이 허상일 수도 있다. 직시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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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동정 + 페북동정

은진이네(문창과 00학번) 사과농사 이야기 2013년 8월에 페이스북 덜컥 가입하면서 알려진 은진이네 사과농장 ㅋ 11월에 처음으로 발송했다고 하네요. 앞으로 많은 주문 부탁드립니다.

주문 손전화(010-4705 4036) 우체국택배로 발송됩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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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이네 사과농장, 사과현 농장은 국립 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친환경 저농약 인 증(인증번호: 제16-12-4-60호)을 받은 농가입니다. 친환경 유기농자재인 ‘석회 보르도액’ 방제를 하여 화학농약의 사용 을 줄였습니다. 그리고 수확 2달 전에 방 제를 마쳐 잔류농약이 검출되지 않습니 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잔류농약 검사 에서 매번 적합판정을 받았고, 기준치 이 하로도 검출된 성분은 없습니다. 안심하 고 껍질째 드시면 됩니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풀을 키워 땅에 유기물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착 색제, 비대제, 영양제를 쓰지 않았습니 다. 오직 나무가 바람과 햇빛과 물로만 키 운 사과입니다. 사과현 농장의 사과는 당도와 산도가 적 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올해 표본 삼아 재본 당도는 14브릭스 이하로 나오 지 않았고, 평균 16브릭스 정도입니다. 당도가 높으나 새콤한 맛도 있고, 과즙이 많고 아삭하여 많이 드실 경우 달아서 속 이 살짝 아릴 수도 있습니다. 저희가 자른 사과들 대부분엔 꿀이 들어 있었는데, 이 꿀은 높은 일교차로 인해 생긴 것으로 시 간이 지나면서 점점 과육 속으로 스며들 지만 당도의 변화는 없습니다. 사과는 냉장보관하면 더 달고 아삭하게 드실 수 있습니다. 밀봉하지 마시고 냉장 고 채소칸에서 보관해 주세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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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움직이니 마음이 따라 움직였다 정리

사무국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및 책임자처벌 범국민대회 참가 7월~12월

2013년 내내 국정원의 대선개입과 관련하여 정국이 시끄 러웠습니다.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불통 박근혜 정부’는 우리에게 1년 내 내 촛불을 들게 하였고요. 박근혜 정부는 2014년에도 ‘불 통’ 컨셉(?)을 고집할 계획이라고 하니, 울 회원들도 2014 년 운동화 끈 동여매고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국정원 이슈 시국선언 및 광고비 모금

8월 7일

흑석동 민주동문회와 함께 8월 7일 수요일 한겨레신문 2 면 하단 통광고로 시국선언 신문광고를 진행했습니다. 광 고비 총 2백만 원 중에서 저희와 흑석동이 각각 백만 원을 모금하여 지출하였고요. 저희 회원들 중에서 동참하신 분들은 강지우, 김산환, 김 성희, 김현숙, 백기욱, 서병훈, 성백술, 송은진, 신성호, 우유섭, 원순재, 장순철, 정성중, 정순호, 조종국, 진현 관, 홍미숙으로 총 17명이 함께 하였습니다.

내창이형 8·15 기제 그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여름에 15명의 회원들이 함께 했습니다. 정원옥, 이상재 회원은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 범국민대회

움을 달래며 아침에 흑석동에서 광주로 출발하는 회원들 을 배웅해 주기도 하였고요. 광주에서는 전남 추모연대 사무국장과 최덕수 열사 어머 님이 귀중한 시간을 내어 내창이형을 함께 만날 수 있었습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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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2014년에는 민주화공원으로 이장을 하게 되어 8월 15일 광주의 햇살이 남다르게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운영위원회 회의 진행 12월 26일 4.9통일평화재단에서 2013년 사업보고와 2014년 사무 국장 선임, 전국민주동문회연합회 참여의 건으로 하반기 운영위원회를 진행하였습니다.

어깨동무 소식지 발간 7월, 2014년 2월 2013년 어깨동무 소식지를 상반기 7월에 발행하였고, 하 반기는 14년 2월에 발행 예정입니다. 2012년에 비해서 발행 시기가 한 달씩 늦어지고 있는데, 편집위원들에게 격려와 응원의 한마디씩 부탁드릴게요.^^

내창이형 8.15 기제

이내창기념사업회 장기프로젝트 기획모임 진행 7월~12월 백기욱, 서병훈, 신성호, 이상재, 정성중 이상 5명이 7월 부터 모임을 시작하여 12월까지 총 6번의 모임을 진행하 였습니다.

시국선언광고

눈에 확 들어오는 기획안을 마련하지는 못했지만, 기념사 업회의 현 상황과 조건 그리고 이내창기념사업회의 존재 의의 등을 짚어 본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기획모임의 결과는 신년 총회에서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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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이내창기념사업회 정기총회

2014년 이내창기념사업회 정기총회가 2014년 1월 18일 오후 3시 서울 화동 정독도서관 제 1세미나실에서 10여 명의 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이날 총회에서는 2013년 사 업보고와 2014년 사무국장 선출 및 승인, 2014년 사업계획 승인, 2014년 운영위원 승인, 기타 안건 토의 등의 순서로 이뤄졌으며 2014년 신임 사무국장으로 경영89 이주현 회원을 만장일치로 선출하였습니다. 자리를 옮겨 정독도서관 대식당에서 내창이형 이장(광주 망 월묘역->이천 민주화공원) 관련 문제를 집중 토의하여 역시 만장일치로 이장준비위원장 으로 신명철(문창81) 회원을 추대하였습니다. 이후 종로 백부장집에서 닭한마리탕을 앞에 놓고 허심탄회한 신년회를 가졌습니다. 오히려 뒷풀이에 회원들이 많이 참가하여 막판에는 20여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2014년 사업계획 이내창열사이천민주공원이장위원회(가칭) 1. 개요

- 현재의 광주 망월동에서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이천민주공원)으로의 내창이 형 이장 관련 사업 을 전체적으로 관장한다.

- 8.15 기제 참여인원이 줄어든 상황에서 올해 내창이 형이 망월동에서 이천민주공원으로 가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한다.

- 가족의 이장(개장, 안장)과 이천민주공원의 공식적인 개장행사와 연계하여 기념사업회의 자체 프 로그램을 준비한다.

2. 일정

- 4월 3일-4일 망월동 개장

- 4월 6일 이천민주공원 안장

- 6월 7일(예정) 이천민주공원 개장식

3.구성

- 위원장, 준비위원(집행부, 운영위원), 간사 (별첨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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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내창의 후배다(가칭) - 흑석은 물론이고 안성캠퍼스에서도 후배들이 추모비로만 이내창을 만날 뿐 이내창 선배의 죽음의 의 미는 잊혀지고 있다.

- 이내창의 정신인 민주, 인권, 평화, 통일, 평등(복지)을 지향하는 활동을 하는 후배들을 지원하고 장기 적으로 기념사업회와 후배들의 연결고리를 찾는다.

- 학생회, 동아리, 소모임 등 안성, 흑석 각 1곳과 연계하여 사업비(프로젝트)에 사용하는 조건으로 100 만 원씩(총 200만 원) 후원한다.

회원사업 - 현재 기념사업회의 인적구성과 사업이 내창이 형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추모사업으로 제한되어 있다. 참여인원도 학생운동 당시 특정 정파의 인적네트워크에 한정되어 있는 실정이다.

- 회원 250여명이며 회비는 약 45명이 월 60~70만원을 납부하고 있다. 회원 증대와 회비 증액에 대한 필요성이 있는가?

- 회원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기념사업회의 활동을 공유하고 회원 간의 소통을 위한 방식과 공간을 정비한다. (운영위원회의 별도 논의 필요)

1. 회원 소통의 장(방식) 정비 (밴드, 카페, 페이스북, 문자, 통화 등), 2. 소식지(끈덕지게 어깨동무) 3. 장기 프로젝트 사업(별첨)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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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함께하니 당당해졌다 월

구분

출금

입금

회비

648,640

시국선언광고모금 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회비

8월

1,080,000 50,000

20,300

한겨레 광고비

1,000,000

백기욱 문자비

85,000

사무국장문자비용

200,000

815 기제 지원

800,000

어깨동무 인쇄비

90,000

소식지발송비

588,270

소계

3,833,570

8월잔액

9월

김기수 최호식 델리후레쉬 고재영 박희성 강혜연 이남영 곽현희 신명철 정보영 이태경 1,728,640

김성희 박지훈 김현동 이주현

25,011,707

이상재 구은경 김학진 노병진

이자

203

추모연대회비

5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300

소계

70,300

이영은 우유섭 조형준 자동이체 신성호 김산환 백기욱 정순호

659,223 25,600,630 608,530

김현숙 홍미숙 김형구 박응식 정원옥 김산환 강동길 고철주 황광원 원순재 서병훈 김태호

근조기

25,000

내창-안녕

추모연대회비

5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300

추모연대 cms

박태순열사부친부의금

100,000

소계

195,300

10월잔액

이혁승 노민옥 608,530 26,013,860

회비

538,760

추모연대회비

5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300

소계

70,300

11월잔액

538,760 26,482,320

회비

658,740

이자

2,162

이자세금 12월

김용수 구혜영 박철민 조환준

659,020

회비

11월

박성훈 권향숙 이동희 이민진

회비

9월잔액

10월

cms

1,000,000

원고료

내 마음이 편해지는 길

310

추모연대회비

5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300

소계

70,610

12월잔액

660,902

여기에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보태 주세요. 자동이체 및 후원 계좌입니다.

국민 0250 - 1036 - 8426 추모사업회 (정원옥) 지난호 자동이체자 명단 : 황광우 ▷ 황광원 으로 정정합니다.

27,072,612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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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또 하나의 약속’ (Another Family)이다. 12세 이상 볼 수 있는 영화로, 박철민(경영 85) 회원이 원톱 주연을 맡아 우리에 게는 더욱 각별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평범한 한 가족과 그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다룬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고 황유미씨와 그 아버지의 사연을 스크린에 옮겼다. 삼성에 대한 기록이 빠질 리 없으니 주인공은 어쩌면 삼성일 것이다. 개봉 전 예매율은 놀랍게도 1위. 그러나 <부러진 화살>과 <도가니>, <변호인>의 전례에서 보듯 이들도 300개 이상의 개봉관을 잡았다던데, 삼성은 역시 또 다 른 하이퀄리티 공포인가, 스크린 100여 개에서만 달랑 개봉했다 해서 시끌시 끌하다. 불과 얼마 전 일이다. 삼성의 대학총장 추천제에 며칠 간 온 나라가 들썩거렸던 것이. 한낱 사기업의 직원 채용에 이토록 반응할 정도라니. 열 살짜리 초등학생이 취업을 걱정하고, 대학은 몇 장의 추천장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목을 매달며, 마흔만 넘으면 어 느새 구조조정 대상자가 되는 이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화살’도, ‘도가니’도 ‘국가폭력’도 아닌, 밥줄과 자본인지 모 른다. 하여, 자신이 없다. 이 글이 회원들 손에 닿을 때쯤이면 이 영화는 어쩌면 개봉관 수가 더 줄었거나, 참담하게도 멀티플렉 스 바깥에서 웅성거릴지도 모르겠다. 자본과 외압의 횡포에 또 다시 스러질 것인가. 약속은 지켜낼 수 있을 건가.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 영화를 오랜기간 상영 관에 붙잡아둘 때 이 사회는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인가. 자못 심각해진다. 그리고 제목으로 연상되는, 또 하나의 약속. 1989년 광주 망월동에서 만장을 흩뿌리며 우리가 굳게 맺었던 다짐은 과연 어느 서랍에 있는지, 우리들 가슴팍에다 대고 한 번쯤 두드려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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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들어요. 하나, 2014년 봄 · 여름호 편집위원 되기

둘, 기고하기

자주 안 모입니다. 회의는 짧게, 뒤풀이 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일은 찾아서 하 고, 할 수 있는 만큼 합니다. 느릿느릿 갑니다. 끈덕지게 함께 갈 열의와 책임 감이면 충분합니다.

어떤 형식과 내용의 글이라도 좋습니다. 나누고 싶은 생각,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보 내주세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확 인하고 싶습니다. 회원 자녀의 기고에는 소정의 원고료가 지급됩니다.


l 찍은 날

2014년 2월 14일

l 펴낸 날

2014년 2월 14일

l 펴낸 이

강내희

l 펴낸 곳

이내창 기념사업회

l 연락처

사무국장 이주현 010-3207-8113

cafe.daum.net/19890815

김선주, 서병훈, 장순철, 조환준, 김경주, 이원근, 정원옥, 백기욱, 신성호, 김지훈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인터뷰를 허락해주신 강남 훈 님과 원고를 보내주신 박중기, 박현주 님께 감사드립니다. 장 성백과 노용헌이 표지사진을 포함해 1989년부터 지금까지의 여 러 사진을 찾아주었습니다. 제호와 마침로고는 김경주가 캘리그 래피로 디자인하였고 편집은 강지우가 수고해주었습니다. 인쇄 는 상지사, 발송은 신성호가 하였습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는 naechang.kr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최근 <묻지말고응답해라의 혈중앙> 밴드가 생겨 이 자리를 빌어 홍보합니다. 페이스북 담벼 락의 사진과 글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회원들과 바쁜 시간을 쪼 개어 원고를 보내 준 회원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소식지에 많 은 관심과 의견을 주신 운영위원 및 모든 회원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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