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덕지게 어깨동무 2012 가을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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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2 새롭게 백 년을 살아야 하는 이유

김선주

4 유신 반대운동의 현재적 의미

임헌영

7 제성이네 귀농 일기, 두 번째 이야기

김은희

16 어깨동무가 묻고 상하가 답하다

편집부

26 니기미(泥耆味) 세상도촬

박성용

표지 이야기

30 표지 이야기

송정근

식민의 유산, 백년의 기억

33 박정희는 현재형이다

신명철

47 박정희 정권에 빼앗긴 아버지, 남겨진 아들이 말한다

편집부

65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의한 피해자 증언

김정사

73 아빠 김기수와 엄마 박미경의 아들로 산다는 것!!

김동현

77 백 투 더 퓨처, 미래로 돌아가다.

김림

화보

80 815 기제 참가사진

편집부

83 나는 뒷북 엄마

이정남

88 ‘인간’이 보이지 않는 환경부의 구미 불산 유출대응

한숙영

94

회원 동아리 탐방

중앙극회, 맥이여~!

김지훈

103 힐링이 필요한 세상,

유혜연

109 듣거나 말거나 음반잡설

박성용

110 모던 발레 <Life is···>와 연극 <거기>

조형준

113 추억과 기록, 그리고 복수의 삼박자

김선주

어깨동무 캠프에서 잠시 쉬었다 가요

116

혼자가 아님을 알 때, 더 단단해졌다

추모단체, 추모제 소식

120 회원동정 + 페북동정 124

몸이 움직이니 마음이 따라 움직였다

127 마음을 함께하니 당당해졌다

신명철 편집부 사무국


여는 글

새롭게 백 년을 살아야 하는 이유 김선주 장준하 선생님 무덤을 다시 엽니다. 여러분이 어깨동무를 받아볼 때쯤이면 선 생님의 유골은 최첨단 의료기가 쏘는 레이저를 맞고 있을 겁니다. 아버지의 무 덤을 두 번이나 손대야 하는 아들의 심정은 오죽할까요. 지난해 여름 선생의 묘 소가 유실되어 처음 무덤을 연 이후, 그리고 이번에 암살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유골의 정밀 감식을 받기로 한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계》의 발행인, 재야의 대통령으로 칭송받던 장준하 선 생은 죽어서도 편히 쉬질 못하는군요.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이렇게 대접해도 되 는 걸까요? 분하고 억울한가요? 그런데 다 우리 잘못이지, 남 탓이 아닌 것은 분 명합니다. 우리 손으로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만들지 못했고, 독 립투사를 지켜내지도 못했고, 친일파들의 지배를 대를 이어가며 받고 있으니, 누구를 손가락질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보면서 분노합니다. 그리고 전범의 처벌에 박 수를 칩니다. 『안네의 일기』를 비롯한 많은 문학작품과 <쉰들러리스트> 같은 영화에 감동을 받습니다. 죽음을 향해 걷는 유대인들의 처절한 걸음에 눈물 흘 리고, 레지스탕스의 영웅적 활약상에 가슴 졸입니다. 그런데 시선을 안으로 돌리면 너무나도 다른 세상입니다. 김구를 비롯한 레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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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스들은 전쟁이 끝나도 고국에서 핍박을 받고 암살을 당해야 했습니다. 친일 협력자들은 처벌은커녕 권력과 부를 세습해 왔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밝히고 책 임자를 처벌해서,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쩌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아시아의 나치, 대일본제국의 전쟁터에서 총알받이가 되거나 성노예가 되어 끌려갔어도, 한국전쟁 전후로 백만 명에 가까운 시민이 전국 각지에서 학살을 당했는데도, 조국통일과 평등한 세상을 일구려다 테러 · 암살 · 고문 · 사법살인 · 의문사 · 간첩조작 · 구속 등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고 목숨을 빼앗겼는데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계에는 과거가 없습니다. 우리 의 역사인식에는 과거청산의 과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잊고, 너무 도 가볍게 너그러워집니다. 우리는 늘 선택을 하며 삽니다. 선택은 판단의 구체적인 행위이고, 판단은 결 단을 전제로 합니다. 아무리 작고 사사로운 일이라도 선택을 하려면 앞뒤 좌우 를 살피고 따지며, 가부간에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번 겨울에 우리는 어떤 선 택을 하게 될까요. 선택을 위해서 <남영동1985>를 보고 눈물을 흘려도 좋습니다. <26년>을 통해 전두환에게 증오가 생기기도 합니다. <MB의추억>을 보고는 거짓말의 향 연에 치를 떨게 됩니다. 그래요, 시간을 내서 영화를 보세요. 그리고 권해 주세요. 이런 작은 움직임이 선택을 가능하게 하겠죠. 그리고 <백년전쟁>은 꼭 보십시오. 인테넷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널리 알려 주세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우리의 역사, 그 처절한 기록을 한눈에 꿰뚫어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리고 선택해요. 새로운 백 년을 향해 함 께 어깨동무하자구요. 이번에는 친일 협력자들로부터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건 투쟁을 지켜 낼 수 있을까요? 백 년 전부터 오늘에까지 계속된 진보세력과 친일파들과의 기 나긴 투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요? 과거청산의 첫걸음을 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새로운 백 년의 시작을 알릴 수 있을까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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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반대운동의 현재적 의미 임헌영 MB정권의 김황식 현 국무총리조차도 국

고양이처럼 몰래 잠입, 주변 반경 5백미터

회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벗어난 것이라고 평

에 1천2백여 기동경찰을 배치한 채 여당만

가한 유신체제는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왔

으로 불법 통과시켰다.

다. 당시의 집권 여당 실세들도 전혀 모르게

그러고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풍년사업’이란 암호명 아래 궁정동 별실에

부정부패 비판 여론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

서 박정희와 이후락, 김정렴, 홍성철, 유혁

던 박정희는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신

인, 김성진, 신직수, 한태연, 갈봉근 등이

성한 권리를 또 도둑질해 버렸다. 통일주체

모여 만든 유신헌법은 도둑고양이처럼 야비

국민회의라는 어용기구가 장충체육관에서

하고 은밀하게 꾸며졌다.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강요한 게

5·16쿠데타 세력이 도둑고양이처럼 역사

세 번째 쿠데타였다. 당시 헌법으로는 대통

를 훔친 건 이로써 세 번째가 된다. 첫 번째

령에게 그럴 권한이 없었는데도 국민이 직

는 바로 1961년 5·16으로, 민주합헌 정권

접 선출한 국회를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탱

을 새벽의 배고픈 도둑고양이처럼 날카로운

크가 진입, 국회를 강제 해산했던 이 폭거가

발톱으로 탈취해 갔다. 두 번째는 1969년

유신시대의 서막이었다.

9월 14일 새벽 2시 27분부터 불과 6분만에

오로지 박정희의 영구집권만을 위해 날조

통과시킨 3선개헌 도둑질이다. 쿠데타 세력

해 낸 세계사에 유례없는 유신체제는 청와

은 자신이 저지른 부패와 과오가 역사의 심

대 경호실의 지배 아래 정보기관과 군대와

판대에 설 것이 두려워 장기 집권하고자 3선

경찰이 장관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모든 관

개헌안을 상정했으나 야당이 본회의장을 점

료와 전 국민을 감시하는 판옵티콘(Pan-

거, 강력히 항의하자 길 건너 별관으로 도둑

opticon) 사회의 전형이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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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상당수와 판사를 대통령이 임명

다수일지라도 정치 공학적으로는 얼마든지

했던 1인 독재 특권 시대. 정보요원이 웬만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세계

한 규모의 전 기관(정부 부처도 포함)과 학

정치사는 물론이고 한국의 현대 정치사도

교, 언론사 등등에 출입하면서 수시로 개개

증명하고도 남는다.

인을 감시, 점검하던 공포의 감시시대. 양

한국의 야당은 그 소중한 인적인 구성에

심, 학문연구, 출판, 결사, 집회 등의 자유

도 불구하고 몇몇 퇴영적인 인사들 때문에

가 완전히 유보당했던 통제의 시대. 인권이

민주화와 통일운동 투쟁 대열을 도리어 혼

란 단어가 사전에만 존재했던 연행과 감금

란시켜 사갈시 당하기도 한다. 유진산, 이

과 구속과 고문이 일상의 두려움으로 작용

철승 등 한때 야당지도급 인사들이 수구보

했던 공포의 시대.

수파로 처신하는 꼴불견은 오늘날에도 한광

학생회를 학도호국단으로 개편, 학생회

옥 같은 인물을 낳게 한다.

장을 연대장으로 하여 대대장-소대장-병사

그런 내분으로 말미암아 국민이 사월혁명

로 전교생을 편성, 수류탄던지기도 포함된

으로 손에 쥐어준 국가 통치권조차도 5·16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대학 입시에 체력장

에 탈취당하지 않았던가. 분열과 내분의 비

이 있어 공부 말고도 턱걸이 등을 연습해야

극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5·16 세력에 대

만 했던 고교생들. 매주 월요일에는 애국조

한 심판의 갈림길이었던 1963년 10월 15

회를 하며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던 시

일 대통령 선거 때는 박정희와 윤보선이 대

대. 북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박정희의 유

결, 박정희가 당선되었는데, 그건 순전히

신시대 실화다.

야권 분열로 인한 패배였다. 야권 대통령 후

유신체제는 박정희 1인을 제외하고는 누

보가 획득한 지지표의 합계는 박정희보다

구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왕

무려 70만 표를 넘었다. 단일후보만 냈다

제통치보다 더 불안한 비극적인 시대였다.

면 역사는 5·16쿠데타를 그때 심판대에 올

그런 시대가 다시 올 가능성이 있을까. 흘

렸을 것이다. 같은 해 12월 26일에 있었던

러간 물로 다시 유신의 수레바퀴를 돌릴 수

총선 역시 야권이 66%라는 다수의 득표에

는 없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기 쉽

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다수 의석은 박정희

다. 그러나 역사는 무수한 반동을 반복한

의 공화당이 차지해 버렸다. 역시 야권 분열

다. 다수냐 소수냐가 문제가 아니라 유신체

이 패배의 원인이었다.

제를 비판하며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국민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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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대선에 이어 지난 4월 총


선도 마찬가지였다. 국민들의 강력한 요구

각종 사안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마음에 안

로 겉모양은 야권 단일화를 이뤘지만 안으

들면 내치는 성격과 인격과 품격이라면 대

로는 분열이 팽배했던 결과 국민 다수의 지

통령이 되고나서 어떻게 할까.

지에도 불구하고 의석은 여당에게 빼앗기고

현재 박근혜를 열렬히 지지하는 인사들도

말았다. 그러고도 야당은 국민 앞에 납득할

그런 때를 맞으면 반드시 가슴을 치며 후회

만한 사과나 반성도 없이 대선을 앞두게 되

할 날이 올 것이다. 그 주변에서 자신의 정

었다. 시민단체와 국민들은 반유신 운동으

치철학을 펴보겠다는 야심으로 얼쩡대는 인

로 열을 올리고 있는데도 일부 야당은 구태

사들도 마찬가지 운명일 것이다. 정치는 인

의연한 당 내분으로 유권자들의 지지를 분

간의 행위이며, 그 인간이 지닌 본성은 누구

산시키고 있다. 이철승, 유진산의 부활전

도 바꿀 수 없다. 박정희인들 정치를 잘 하

인가!

고 싶었겠지만 그 인간성 자체가 일본제국

유신체제가 가능했던 것은 야당의 책임이

의 군인으로는 적격이지만 민주주의적인 지

크다. 야당이 진정 민주주의를 위하여 몸 바

도자의 품성으로는 낙제생이었기에 결국 일

쳐 투쟁에 나섰다면 과연 5·16 세력이 그토

제 치하에서 배운 독재밖에 다른 정치학을

록 오랫동안 독재통치를 할 수 있었을까? 낮

실행할 수 없었다.

엔 야당 밤엔 여당이란 말이 공공연히 나돌

박근혜가 배운 것은 아버지의 통치술이

았는데, 박정희 사망 후 실제로 차지철의 수

기 때문에 아무리 본인이 민주주의적인 인

첩에는 야당 중진의 이름이 버젓이 올라 온

간으로 변하고 싶어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

갖 비밀 사항을 수시로 보고했음이 밝혀지

래서 과거사 청산도, 사죄도 흉내는 내보지

지 않았던가.

만 그 진심은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 것으

국민들의 민주화 의식도 발전하지만 그 반대로 독재의 잔혹하고 간교한 수법 역시 더욱 교활해진다. 이 말은 곧 박정희의 근엄

로 보일뿐이다. 바로 유신 독재의 청산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일깨워준다.

한 일본 군국주의적인 독재 방법이 그의 딸 박근혜에 이르러서는 알 듯 모를 듯한 야릇 한 미소 속에 5·16의 총칼보다 더 무서운, 유신체제의 악랄한 독재통치보다 더 끔찍한 야욕이 엿보인다는 뜻이다. 인사 문제부터

임헌영_ 중앙대 국문과 겸임교수.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 등 친일청산에 애쓰고 있다. 1974년 문학인 사건,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겪기도 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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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성이네 귀농일기, 두 번째 이야기

나도 자연,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함을 배운다 김은희


어깨걸기

“야! 모를 심어야지 논을 엉망으로 만들면 어떡해? 얘들아 빨랑 나와 감기 걸려! 재들 이 정말.” 며칠이 지난 후 아이들과 새끼 우렁이를 넣어주며 여린 모에게 기도했다.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서 풍성한 쌀을 우리에게 달 라고······. 1,200평의 밭. 처음엔 무지 넓게만 생각 됐던 땅이 이것저것 심을 거리를 생각하니 결코 넓지가 않다. 감자, 옥수수, 고구마, 고추, 도라지, 더덕, 오이, 토마토, 참깨, 들깨, 땅콩, 메주콩, 서리태, 수수, 기장,

농사의 시작

녹두, 팥, 수박, 참외, 토마토, 호박, 귀하

600평의 논. 볍씨를 담가 촉을 틔워 모를 게 얻은 토종종자까지 심을 것은 아직도 많 길러 논으로 옮겨 심었다. 손으로 심을까 하 은데 이를 어쩌나? 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감이 잡히

애초에 자급을 목적으로 했기에 땅을 쪼개

지 않는다고 하여 기계를 빌어 심었다. 그래 고 쪼개 심고 싶은 것은 다 심었다. 얼마 지 도 못내 아쉬워 논의 한 귀퉁이를 남겨 동네 나지 않아 이곳에 먹거리들이 주렁주렁 열 공부방 아이들과 모심기를 했다. 지역 아이 린다고 생각을 하니 저절로 미소가 번지면 들도 논에 들어가 손으로 직접 모를 심어 본 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게 처음이라 한다. 맨발로 질척한 흙을 밟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느낌을······. 아이들은 모심는 일보다 맨발로 푹푹 빠져

풀과의 전쟁 & 풀 명상 미소가 번지고 가슴이 벅찬 것도 잠시, 온

가며 흙을 밟고 다니는 재미에 더 신났다. 물 갖 풀들이 삐쭉삐쭉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 놀이하기엔 이른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흐르 더니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다. 김매고 돌 는 도랑물에 풍덩 빠져 서로 물싸움을 하느 아보면 도로 하나 수북하고, 김매고 돌아보 라 정신이 없다. 나만 옆에서 동동거린다. 면 도로 하나 수북하고······. 아이고, 미쳐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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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겄다! 비닐 멀칭(mulching)은 농작물을 재배 할 때 흙이 마르는 것과 비료가 유실되는 것, 병충해, 잡초 따위를 막기 위해서 볏짚, 보릿짚, 비닐 등으로 땅의 표면을 덮어 주 는 일을 뜻한다. 이 작업도 하지 않았으니 오죽하랴. 그나마 지푸라기로 덮어놓은 곳 은 괜찮은데,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으니 아 쉽기만 하다. 한 번은 사방으로 망도 다 쳤고, 구석구석 점검도 다 했는데 어떻게 들어왔는지 고라 니가 콩 줄기를 싹둑싹둑 잘라먹는 것이 아 닌가? 콩뿐이 아니라 고구마 싹에 매운 고추 순까지. 도대체 어디로 들어온다 말인가?

장소로 생각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어찌

제일 먼저 심어 풀 뽑기를 포기한 감자밭 하랴. 내 눈에 띈 이상 그냥 둘 순 없지 않은 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확할 때가 되자 여 가? 자루에 담아 밭에서 머~얼리 떨어진 산 기저기 뻗은 감자 순에 온갖 풀이 뒤엉킨 감 에 놓아주었다. 자골! 시커먼 무언가가 골 사이를 움직이다

그날 밤, 나를 빤히 쳐다보던 고라니 새

멈췄다 반복한다. 조심스레 다가가서 풀을 끼들의 눈망울과 울음소리가 떠올라 마음이 들추니 지금 막 젖을 뗀 듯한 새끼 고라니 편치 않았다. 어미 고라니가 새끼들을 찾아 두 마리가 도망가지도 않고 웅크리고 앉아 헤맬 텐데······. 아직 어린데 낯선 산에 가서 사슴 같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본다. 마치 잘 살 수 있을까? 혹시 어미가 복수하려고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엄마는 외출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건 아닐까? 풀 중인데” 하는 것 같은 눈망울로.

좀 열심히 뽑을 걸. 아무쪼록 다시 밭에 내

푹신푹신한 지푸라기도 깔려 있겠다, 풀 려오지 말고 산에서 나는 것들만 먹으며 둘 이 우거져 시원한 그늘도 있겠다, 먹을 것도 이 의지해서 잘 살아라. 사방에 널려 있겠다, 사람도 자주 오지 않겠 다, 고라니가 새끼를 낳아 기르기에 최적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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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뜨거워 밭에 앉아 있을 수가 없기


어깨걸기

이 있을 때는 풀한테 얘기도 하고 그러다가 울기도 하고······. 새벽 4시 30분부터 아이들과 아침밥을 먹 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7시 30분까 지(아이들 깨우고 아침상 차리는 건 제성씨 몫!^^) 약 3시간 정도가 나를 비우고 돌아 보는 ‘풀 명상’의 시간이다. 복잡한 도시에 선 돈 주고 콘크리트 빌딩 속 명상학원(?)도 다니는데, 풀 명상!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계곡물에 풍덩! 아무리 일이 많아도 점심 먹고 3시에서 4 시까지는 일을 할 수가 없다, 뜨거워서. 그 에 새벽 4시 30분쯤부터 밭에 나가 풀을 맨 렇다고 집에 있을 수도 없다, 더워서. 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풀은 보인다.

이럴 땐 옥수수 몇 자루 삶아 책 한 권 들고

사방이 고요하다. 간혹 멀리서 개 짖는 소 한적한 계곡으로 향해야 한다. 리, 닭 우는 소리,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동네 주변에 유명한 계곡이 많아서 여름철

들린다. 이슬이 많이 내려 ‘송알송알 싸리잎 이면 관광 온 차들이 즐비하다. 그들이 지나 에 은구슬, 대롱대롱 거미줄에 옥구슬’들을 간 자리엔 쓰레기도 즐비하다. 그래서 우리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티 없이 맑은 어린 는 동네 사람들만이 아는 조용하고 깨끗한 아이가 된 듯한 평화로움이 밀려온다. 안개 곳을 찾아간다. 그 곳에서 두세 시간 정도 라도 낮게 드리운 날, 밭 한복판에 우뚝 서 발 담그고, 땡길 때는(대부분 땡긴다) 온 몸 있으면 구름 위를 걷는 신선이 된 듯한 착각 을 담그고 첨벙거리다 내려오면 세상 부러 에 빠지기도 한다.

울 것이 없다. 천진난만한(?) 내 모습을 보

아무 생각 없이 풀만 쳐다보며 밭을 매고 며 감영이 하는 말. “엄마! 그렇게 재밌어? 있노라면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기분이 막 근데, 나한테 장난 좀 그만쳐어~!” 나도 내 좋아진다. 어떤 날은 한 가지 생각에 꽂혀 가 네 살인지 마흔 살인지 헷갈린다. 나이의 시간가는 줄 모르고, 또 억울하고 속상한 일 경계가 사라진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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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도 학교에 갔다 오면 무조건 계곡물 은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세상에 일곱 마 에 풍덩 빠져 한껏 놀고 와야 하루가 갔다고 리다! 거세게 비바람이 몰아칠 때 혼자 일 생각한다. 방학 때는 하루 종일 물속에서 산 곱 마리를 낳아 뒤처리까지 말끔하게 해놓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장김치 담글 때 은 것이다. 나를 보자 반가워서 나오려 하는 쓰는 빨간 다라이를 타고 놀며 신나 하는 아 데 다리에 힘이 없는지 자꾸 주저앉는다. 겨 이들을 보면서 나도 시도해 보지만 삶의 무 우 일어서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기는데 뒤 게 탓인지, 몸무게 탓인지 균형도 안 잡히고 에선 아직도 피가 흐른다. 나도 모르게 가슴 뒤뚱뒤뚱 바로 가라앉는다. 에잇! 나, 마흔 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고인다. 내가 너무 무 살이 맞나 보다.

심했구나. 냉동실을 뒤져 이것저것 꺼내 미

이렇게 노니 점심을 아무리 든든히 먹어도 역국을 한솥 끓였다. 금세 허기가 진다. 이럴 때 찐 옥수수와 수 박을 먹으면 정말 꿀맛이다. 조금 신경 써서 준비했다 싶으면 휴대용 가스렌지에 사발면 과 김치! 물놀이 하고 먹는 사발면 맛은 정 말 글로는 표현이 안 된다. 쫌 과하게 신경 을 썼다 싶으면 ‘돼지식당’(우리 동네 유일 한 배달 치킨집, 생맥주도 배달됩니다)에서 시켜먹는 통닭과 생맥주!! 캬~ 올 여름, 맛 보신 분들 많죠? 이렇게 올 여름, 무더위도 무사히 넘겼다.

새끼들은 날이 갈수록 몰라보게 크는데 도도는 날이 갈수록 몰라보게 마른다. 일곱

우리 집은 동물농장

마리가 빨아대니 오죽하랴? 불쌍한 우리 도

작년 구월에 이사 오자마자 얻은 새끼 흰 도. 이젠 제법 컸다고 새끼들이 엄마 밥그릇 둥이 ‘도도’가 엄마가 됐다.

을 넘본다. 그럴 때마다 도도가 무섭게 으르

태풍 ‘볼라벤’ 때문에 전국이 정신없던 렁거린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것을 교 날. 비바람이 잠시 잦아든 때 어디선가 낑낑 육 중인가 보다. 대는 소리에 나가 보니 도도가 몹시 수척해 진 얼굴로 생쥐만한 새끼들을 품고 있지 않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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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우리 집 동물 식구는 모두 열한 마


어깨걸기

리다. 똥개 여덟 마리-도도와 그의 새끼들 전 웩이야. (암놈 여섯, 수놈 하나), 유일하게 족보 있

도영 : 지 새끼데 뭐 어때. 도도가 니 똥 먹

는 개(비글) 한 마리-5개월 된 방방이, 고양 었을 때가 더 웩이었거든. 이 두 마리-아롱이와 그의 새끼 호순이, 이 렇게 열한 마리, 대식구가 됐다. 도영이와 감영이가 밥도 챙겨 주고 똥도

니가 자연산 송이 맛을 알어? 우리 동네를 에워싸고 있는 산이 ‘송이산’

치우는 조건으로 키우기 시작했는데, 이미 이란다. 올해처럼 비가 잦으면 송이가 풍년 내 일이 된 지 오래다. 그래도 아이들이 저 이라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서 네들과 함께 살면서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 울을 비롯한 타 지역에서도 송이를 캐기 위 는 걸 보면 이런 귀찮음 쯤이야, 뭐~

해 사람들이 산에 오른다. 주말엔 여름 휴가 철보다 많은 차들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

감영 : 엄마! 도도가 혓바닥으로 새끼들 이름하여 송이전쟁! 목욕시켜 주고 있어. 똥꼬도 핥아먹어. 완

입찰한 개인 산은 순번까지 정해 밤낮으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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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지키면서 송이를 캐고, 나머지 사람들은 십 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맛. 방안 나라 산에 들어가 송이를 캔다. 물론 송이가 과 입안에서 한동안 송이향이 사라지질 않 흔하다고, 산에 간다고 누구나 다 송이를 캐 았다. 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산을 오르락내

제성씨가 내 생일날 자연산 송이와 궁합이

리락 내 집 드나들듯이 해온 사람만이 송이 제일 잘 맞는다는 소고기를 사다가 송이불 를 캘 수 있다.우리 같은 귀농인들은 송이를 고기를 해 놓았다. 감사한 맘으로 맛있게 먹 바로 발밑에 두고도 못 캐고, 결국 밟아버리 었다. 너무 맛있어서, 한꺼번에 먹는 것이 고도 모른다. 송이 밭은 자식한테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아까워서 조금씩 조금씩 아껴 먹었다. 그 이후로 제성씨는 틈만 나면 새벽에도

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제성 낮에도 산에 올라 송이를 따왔다. 그러더니 씨! 타고난 좋은 인간성(음하하하)으로 동네 추석 즈음, 시댁과 친정 양가에 넉넉하게 가 토박이 형님들을 몇 번 따라가더니 이게 웬 져갈 만큼의 양이 되는 것이 아닌가! 고생하 일인가? 말로만 듣던 자연산 송이를 한두 송 셨네. 누구는 송이로 이천만 원을 벌었네, 이 캐오는 것이 아닌가?

삼천만 원을 벌었네 하지만 하나도 부럽지

본인 스스로도 놀라고 대견했던지 송이를 않았다. 썰어 기름장을 찍어 먹으며 무용담을 늘어 놓는다. 형님들은 산에 가면 축지법을 쓰는 지 걷는 게 아니라 날아다닌다는 둥, 자기니 까 따라다니지 다른 사람은 엄두도 못 낸다 는 둥, 90도 각도의 능선에서 목숨 걸고 송 이를 캤다는 둥, 욕심이 없고 마음도 착한 사람한테만 송이가 보인다는 둥 어찌나 허 풍을 떠는지 한 입 베어 물고 “버섯 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양송이랑 비슷하네”라 고 어깃장을 놓았다. 그랬더니 제성씨, 니 가 자연산 송이 맛을 아냐고, 입맛이 촌스럽 다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사실, 그 맛과 향은 자연 그 자체였다. 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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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화를 했다. 볼라벤의 위력 덕분이었는지 제성씨도 별 반대 없이 내 의견을 따라주었다. 이렇게 해 서 9월 18일부터 시작한 공사가 아직도 진 행 중이다. 지금은 마을 경로당에서 온 식구 가(동물들도 포함) 생활하고 있다. 처음 계 획은 공사완료 시기가 10월 말이었는데, 지 금 상태로는 어려울 것 같다. 11월 초쯤이

새 보금자리를 틀다 “엄마! 여기 천장에서 물 떨어져요.”

면 가능할까?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면서 새 보금

“엄마! 여기두!”

자리에 대한 꿈을 꾼다. 도시에서 내 집이

올해는 유난히 비가 잦았다. 비가 올 때마

생길 때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비

다 제성씨와 나는 쓰레기통을 받쳐 놓느라

록 공간은 작지만 우리 삶의 방식과 딱 맞는

정신이 없었다. 집안에 있는 모든 쓰레기통

집을 우리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서일까?

이 다 출동을 하고도 부족해서 김치통까지.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우리 부부는 우리대로

태풍 볼라벤 때는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

새 보금자리에서 많은 추억과 사연을 만들

다. 지붕에 조각조각 이어놓은 판들이 모두

고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날아가 비가 정말 억수로 샜다. 이러다가 지 붕이 내려앉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잠을 못 잤을 정도니 말이다. 그래! 결심했어. 계속되던 제성씨와의 줄 다리기를 끊고 내 맘대로 할 거야!

자연의 위로를 받는 나도 자연이었구나 도시에 있을 땐 몰랐다. 내가 자연의 일 부이며 자연 앞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는 것을.

그 동안 제성씨는 지붕만 고치자, 나는

비가 오면 오나부다, 안 오면 안 오나부

지붕 고치고 나면 금방 다른 데가 또 망가

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내가 하루에도 몇 번

질 것이다, 그렇게 찔끔찔끔 고치는 게 돈

씩 하늘을 올려다보고 일기예보에 민감해지

이 더 많이 드니 하는 김에 왕창 고치자로 신

고, 심지어 잠들기 전 하느님께 기도까지 하

경전을 벌이고 있던 참이었다. 다음날, 나

게 되었다. ‘비 좀 내려주세요. 아니면, 비

는 동네 언니한테 소개받은 건축주한테 전

좀 그만 내려주세요’라고. 그리고 뼈저리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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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보면 든든하고 뿌듯하고, 내 스스로 대 견하기도 하면서 문득 욕심 부리지 말 걸, 아직도 내려놓을 것이 많구나 하는 자책이 들기도 한다. 한참 고개 숙여 일하다 가끔씩 고개 들어 앞산을 보면, 아!!~ 그만 꾸짖고 갈 길 가라고, 자연은 또 다 른 작품을 펼쳐 놓고 나를 위로한다. 올 농사는 큰 탈 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내년 농사는 내일부터 시작해야지. 무슨 소리냐구요? 내년 6월에 거두게 될 양파와 마늘은 10월 말에 심거든요. 혹독한 겨울을 무사히 잘 견디고 살아나야 맛난 양 느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은 고작 이것뿐이라는 것을.

파와 마늘이 된답니다. ^^ 올해보단 여러모로 조금 더 나은 내년을 기약하며, 파이팅!.

농사는 사람이 짓는 게 아니라 하늘이 짓 는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며 여름을 보냈 는데 그래도 가을이라고 거둘 것이 생기니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다. 한 알의 작은 콩알이 이렇게 많은 콩알을 품고 있었다니! 그 가뭄에도 그 장마에도 꿋 꿋하게 버텨냈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발을 동동거리며 마음 끓이고 있었구나. 사부작 사부작 내 손을 거쳐 한 편으로 쌓이는 먹거

쌀 주문 받아요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어♩♪ 아이들이 우렁이를 뿌리며 정성껏 기도한 덕분에 쌀을 넉넉히 주셨네요. 20kg, 택배비 포함해서 65,000원입니다. 주문하시면 방아를 찧습니다. 이제성, 010-2735-5337. 비싸다 생각 마시고 많은 애용 부탁드립니다.

김은희_ 93년도에 입학했다. 졸업 후 생활한복 <여럿이 함께>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충남 대전으로 내려가 마당극패 <우금치>에서 15년 동안 배우로 활동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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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묻고 상하가 답하다

소리를 통해 사람과 만난다 그럼 그것이 바로 ‘소통’

상하는 쉽사리 약속을 잡지 못했다. 매일 매일이 일이라고 했다. 아침저녁도 없어요, 지방 일도 많구요. 요즘이 일 년 중 가장 바 쁜 때예요. 약속을 여러 번 옮긴 끝에 10월 25일 서울대 교정에서 만났다. 단 과대별로 축제가 치러지고 있었다. 가을비 한차례에 내복 한 벌이 라더니, 전날 비가 쏟아지고 수은주가 곤두박질친 날이었다. 약속시간보다 십여 분 늦었는데 저기 멀리서 두두둥둥 음악소리가 들렸다, 끊겼다 하고 있었 다. 가까이 가보니 록 밴드가 딱 날씨만큼 을씨년스럽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성보컬을 포 함해 밴드는 네 명인데 무대 아래 관객은 고작 십여 명. 이들이 ‘샌드페블즈’라고 했다. 1977년 ‘나 어떡해’를 부른 그 양반들의 후예구만! 갑자기 고향의 먼 친척동생이 한껏 남루해져서 찾아 온 느낌이랄까. 이걸 축제라고나 할 수 있을지 등짝이 더욱 시려왔다. 그래도 들이붓는 듯한 조 명에 쿵쾅거리는 음악, 그리고 옹색하나마 발을 구르는 관객들이 있잖은가. 게다가 이들은 서


울대생(?)이 아닌가. 8,90년대. 공연이 끝날 무렵이면 저 멀리서 전투조의 준비가 시작되곤 했다. 귀에서 귀로, 입에 서 입으로 남학우들은 뒤로 빠져나오라는 지시가 나지막이 전해졌다. 막바지 행진가가 울려퍼 질 무렵, 얼굴을 가릴 큼지막한 손수건이 돌려지고, 바닥이 빨간 목장갑이 나눠지고, 어디선가 끊어온 쇠파이프며 각목들이 하나씩 분배되곤 했다. 그리고 담배를 하나 빼어 물면 또다시 이어 지는 행진가. 그때 공연의 2부는 늘상 가투로 이어지곤 하였는데……. 딱 이맘 때. 진입로의 은 행잎이 샛노래지던 때, 총학생회 선거가 시작되던 때, 어깨부터 시려오던 그 해의 가을들. 스멀 스멀 기억이 춥게 살아났다.

어서 상하를 찾아야지. 분명 상하는 무대 맞은편 콘솔부스에 있을 터였다. 거기 덩치가 엄청 큰 사내 한 명과 그보다 작은 체구의 사내 하나가 진지하게 서 있었다. 둘 다 상하는 아닌 듯했다. 어디 있을까, 상하는. 학창시절 그는 교내에서 키가 큰 축에 속했다. 180cm가 넘는 키. 먹성 좋아 보이는 큰 입. 악의 라고는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는 착한 얼굴. 부르면 미소를 머금고 최대한 천천히 걸어올 것 같은 선한 아이. 침착하게 또박또박 음을 연주하던 상하. 그는 늘 신디사이저 앞에서 연주하거나, 이쪽저쪽으로 그 무거운 것을 옮겨 나르거나, 혹은 선을 연결하거나 다시 선을 뽑거나 하는 곳에서만 만나는 후배였다. 먼저 덩치가 산만한 사내에게 저, 저기요, 하는데 조그마한 사내가 휙 돌아봤다. 문득 거기, 상 하였다. 상하가 저렇게 작아졌다니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익숙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상하가 어정쩡 하게 웃고 있었다. 형. 이제 여기 정리해야 되요. 치우는 것도 일이예요. 추우니까 어디 건물에라도 들어가 있어요. 한 시간쯤 족히 걸릴 거예요. 이상하(무역90)는 올해 마흔둘이다. 현재 음향 일을 하고 있다. 스스로는 육체노동을 많이 해 서 젊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다. 산하 후배인 정은진(식생92)과 결혼해 아들 정우(6세)를 두 고 있다. 공동취재

김선주, 이원근


어깨걸기

선주: 음향 일도 시즌을 타니? 그러니까 축제

선주: 그럼 그 전엔 뭐했어?

나 행사가 몰리는 성수기가 따로 있지?

상하: 그 전엔 중국에 있었어요. 인쇄공장에

상하: 네. 5월, 10월이 제일 바뻐요. 대학

서 관리직으로 있었어요.

축제가 있으니까. 그리고 올해엔 대선 60일 원근: 그럼 그 전엔 뭐했니? 난 왜 이렇게 상 전엔 행사를 하면 안 되게 선거법상 돼 있어 하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냐. 서, 그 전에 행사를 다 땡겨서 하거든요. 그 상하: 범민련 문예위원으로 있었어요. 2001 래서 요즘이 너무 바뻐요. 지자체 일이 꽤 년인가, 10년 만에 졸업했으니까. 천리마 많았는데 대선 때문에 그 시기에는 후원을 노래패로 있다가 조직사건 나서, 노래패를 해도 이름을 다 가리고 해야 되니까, 다들 이적단체로 엮어서, 이적단체 결성 · 찬양 앞당기는 바람에, 말하자면 지금이 피크예 · 고무 · 이적단체 표현물 소지 뭐 이런 거 요. 다음 주까지 꽉 차 있고. 그 담부터는 또 로다가 구속됐다가, 1심에서 집행유예로 나 놀아요. 저희는 규모가 작아서 연말에 송년 왔어요. 콘서트 이런 건 못하니까.

선주: 몇 년도야, 그 때가?

선주: 얼마나 된 거야?

상하: 97년이요. 1년 간 수배였는데 도바리

상하: 음향 일 한 거요? 한 3년요.

치면서 버티다가. 수원 쪽 대학들에 숨어 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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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더 심해지면 충청도 저쪽 뭐 이런데 계 뛰냐? 속 돌아다녔죠. 은진이가 그때 고생 많았어 상하: 일단 범민련 문예위원 접고, 먹고 살아 요. 은진이는 1차 때 안 잡혀서 괜찮았거든 야겠다, 생각하다가 노래작업 하면서 알바 요. 대신 은진이네 집에 도청하고 만날 찾아 로 미디파일 따는 걸 했거든요. 신곡이 나오 오고, 장모님 몸도 안 좋으신데 엄청 겁주 잖아요. 그럼 노래방 기기에서 나와야 할 것 고, 정말 고생 많았죠.

아니에요. 노래방 같은 데는 다 그걸 미디파

원근: 우리 쪽에선 누구누구였니.

일로 쓰니까 누군가는 그걸 컴퓨터로 하나

상하: 저랑 선희요. 경호도요.

하나 따야 되거든요. 그걸 해서 납품했죠.

선주: 상하가 90학번이야? 무역학과? 그럼

그게 다 필리핀이랑 중국으로 하청가면서,

너랑 학교 같이 다녔겠네.

그때 우리는 곡당 19만 원 줄 땐데 필리핀

원근: 그럼요. 같이 다녔죠. 상하 들어오자

사람들은 그걸 3만 원에 한다든가.

마자 1학년 3월 달에 만났을 거예요. 눈에 선주: 미디파일 따는 게 뭐야. 선하죠. 근데 아는 게 별로 없네요. 그럼 졸 상하: 곡 반주를 듣고는 컴퓨터로 똑같이 수 업하곤 뭐했어?

작업으로 연주를 따는 거예요. 컴퓨터 파일

상하: 범민련 문예위원하면서 그래도 먹고는

을 만드는 거죠. 드럼 따로, 기타 따로 베이

살아야하니까 음향회사를 하나 만들어서 그 스 따로. 뭐 이렇게. 한 음 한 음. 때 1,2년 했죠. 음향은 그때 배운 거예요. 원근: 야아아아, 그럼 넌 노래 들으면 그게 그러다가 은진이하고 결혼하고 좀 있다가 다 구분해서 들린다는 거야? 우와, 대단하 중국 갔어요.

다. 상하: 그럼요. 저랑 은진이랑 둘 다 하니까,

본격적인 음악공부는 ‘산하’에서

하루에 한 곡씩 하면 벌이가 꽤 괜찮았거든

선주: 중국 어디?

요. 살랑살랑 그거 할 땐 참 좋았는데. 만

상하: 심천에 해주라고 있어요. 거기 삼성,

날 노래 들으면서. 근데 필리핀 사람들이 그

LG 이런 게 있거든요. 거기에 납품하는 인 걸 3만 원에 하기 시작하면서 몽땅 그쪽으로 쇄회사였어요. 삼성전자 MP3 라인하고 휴 다 넘어간 거죠. 일이 삽시간에 끊겼어요. 대폰 라인에 납품하는, 설명서 같은 인쇄물 (웃음) 이요.

원근: 피아노는 언제 배웠니?

원근: 어떻게 범민련하다 갑자기 중국으로

상하: 초등학교 3학년부터 5학년까지 한 3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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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배웠나. 체르니 40번 들어가면서 그만뒀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라~진다는 것 그 뒤로 음악 관련해서는 안 하다가 그냥 노 · · · · · ·. 파주로 향하는 자동차 안이 삽시간에 래패 산하 들어가면서 다시 배웠어요.

적막해졌다. 자동차 엔진 소리, 깜빡이 넣

원근: 산하에서 널 누가 가르쳐? 내가 보기엔

는 소리, 차창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못내 부

니가 젤 잘하던데.

대끼며 노래가 온기처럼 퍼졌나갔다, 또 은

상하: 학교에선 매일 연주할 수밖에 없잖아

은히 사라졌다. 가사에 자신이 없었는지 들

요. 코드를 계속 쳐야 하니까요. 은진이도 릴 듯 말 듯 가늘고 불안한 노래가 두근두근 피아노 하나도 모르고 들어와서 배웠는 걸 이어졌다. 요 뭘.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구멍이

선주: 와, 니네 부부는 정말 음감이란 게 있

뚫리거나 쭈그러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

나보다.

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상하: 민중가요엔 악보가 따로 없으니까, 그

독자들은 이 시점에서 검색창에 김준태

때만 해도. 무조건 반주 하는 애들은 악보를 시, 이미영 곡, ‘부서지지 않으리’를 쳐 보 딸 수밖에 없었죠.

기 바란다. 그리고 끝까지 들어보길. 부디

원근: 갑자기 궁금해지네. 니가 젤 좋아하는

인내심을 갖고.

노래는 뭐니?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상하: ‘새’요. 저어 청한 하늘~로 시작하는.

그거랑 ‘그날이 오면’ 이런 거.

원근: 다시 중국 얘길 해 보자. 중국에선 어

원근: 야, 그건 너무 올드한데? 누나는 뭐

땠니?

야?

상하: 말은 안 통하지, 첨엔 너무 힘들었죠.

(김선주 회원은 운전 중이었다)

안 하던 짓이니까요. 누가 중국말을 불러주

선주: 누구, 나? 나는, 음· · · · · ·, ‘사라진다

면 그걸 그대로 한국말로 고쳐서 통째로 외

는 거’

우고 그랬어요. 첨에 배운 중국말이 “물건

상하: 그게 뭐예요? 첨 듣는 데?

여기다 두지 말고 저기다 두세요”였어요.

원근: 어. 옛날 노래야. 아주 예엣날 노래.

(중국말로 해보라고 하자 뿌양빵쩌리 빵똥

내가 1학년 때 어쩌다 듣던.

쉬~ 어쩌고 말이 나왔다.) 아무래도 회사 관리자라는 게 사람 다루는 거고 어려웠죠.

김선주 회원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그 전에는 단체나 조직, 이런 데 있다가. 적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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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하기 힘들었어요. 뭐 경제적으론 아주 좋 았죠. 갑자기 최상류층이 된 느낌이랄까. 5 성 호텔 같은데 아무 때나 쑥 들어가서 아무 렇지도 않게 커피 마시고 뭐. 제가 한국 돈 으로 200만 원 받았는데 그거면 그게 거기 선 아주 부유한 거거든요. 선주: 몇 년도야 그게? 상하: 2005년? 원근: 그럼 정우(아들)는 중국에서 낳았니? 상하: 네. 그래서 정우는 나중에 프로필 나

오게 되면 중국 해주 출생, 이렇게 나올 거 예요. 원근: 아버지 독립운동하신 줄 알겠다. 선주: 넌 고향이 어디니?

늘어나니까 기계를 더 도입하라고 해서 기

상하: 나긴 금호동에서 나고, 이사를 많이 다

계며 직원이며 한창 늘렸을 때였거든요. 직

녔어요. 다섯 살 때까지 금호동 산동네서 살 원을 100명에서 160명까지 늘려놨는데, 고, 그 담엔 수유리 살다가 난곡에서 초등학 삼성이 260만 대 분량을 하청 주겠다고 했 교 졸업하고 그 담엔 쭈욱 잠실 살았어요.

다가 나중에 80만 대 주다가 또 50만 대 주

선주: 어어? 우리 다 잠실판데. (웃음)

다가 급기야 40만 대로 확 줄이니까 회사가

상하: 그제 행사 가서 일신여상 치어리더들

못 버틴 거죠. 투자는 이미 다 해놓은 상태

만났는데 아주 반갑더라고요.

고. 거기에 뭐 사람문제 자금문제 겹치면서 이런저런 어려움 때문에 도산했어요.

야반도주하듯 중국서 들어와

선주: 그럼 회사가 그대로였다면 중국에서,

선주: 중국에선 그래 얼마나 있었던 거니?

거기 계속 있었겠네. 지금도.

상하: 만 4년쫌 안 되게요. 한 3년 10개월쯤.

상하: 아마 그랬을 거예요. 적응은 비록 못

회사가 갑작스레 망했어요. 그때 전세계 금 했지만 생활은 달콤했으니까요. 그것도 그 융위기가 닥쳤는데 한국 회사 줄줄이 도산 렇고 여기 와서 다시 뭘 해야겠다 이런 생각 될 때 같이 무너졌죠. 그 전에 삼성이 일이 은 못 먹었을 것 같아요. 새로 뭘 시작한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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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상하: 민예총 안산지역 사무국장예요. 안산

지역은 크고 잘 되어 있는 편이에요. 회비를 모아서 상근자를 둘 수 있는 형편이니까요. 선주: 그래, 한국 돌아와선 어땠니? 상하: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그냥 빈털터

리로 온 거예요. 아주 힘들었죠. 야반도주 하듯이 중국서 들어온 거니까요. 추석 때 은 는 게 하도 막막해서요. 한국에 들어와서 거

진이 한국 온 상태에서 저도 며칠 뒤 그냥 몸

래처 들어가서 한 6개월간 인쇄 쪽에 있었

만 딱 온 거예요. 그러다가 예전에 음향 일

는데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더라고요. 중국

할 때 같이 일하던 후배가 함께 하자고 해서

에서는 매뉴얼 납품하는 인쇄공장이고 규모

지금 이렇게 일 같이 하고 있어요.

가 꽤 컸었는데 여기 한국 공장은 하청업체 니까 조직 자체가 작았죠. 처음엔 품질관리

상하네 회사 파주 창고엘 갔다. 김선주 회

하라고 하더니 또 생산관리 맡기고. 또 여긴

원의 노래 때문은 아니었지만 허기를 참을

야근이 다반사잖아요. 7시 반 출근해서 밤

수 없어 중간에 수제비도 한 그릇씩 했다.

11시 퇴근하길 6개월 하니까 병이 나더라

여러 음향회사가 몇 개의 창고건물을 같이

고요. 은진이한데 야 나 이거 못하겠다 하니

쓰고 있었다. 창고는 크고 널찍하고 빼곡하

까 안 굶어죽으니까 당장 그만두라고 해서

고 엄청났다. 예전 초등학교 1,2학년 때 뜀

바로 사표 쓰고 나왔죠. 그래서 직장 알아

틀이나 매트리스를 가지러 교사 뒤편 창고

보지도 않고 그만뒀어요. 그건 고마워, 은

에 처음 들어섰을 때, 바로 그때의 느낌과

진이한테.

냄새가 났다.

원근: 나도 회사 가기 싫어서 야, 나 관둘래

그러면 원옥이가 당장 관두라고 해. 막 지가

상하: 전부 우리 것은 아니구요. 다른 렌털

더 큰 소리쳐. 그런데 담날 아침에 내가 이

하는 곳하고도 같이 쓰는 거예요. 행사규모

렇게 쭈그려 앉아서 양말 신고 있잖아? 그

에 따라서 출력 따져서 나가는 거니까요. 기

럼 지는 누워서 원근아 난 니가 참 좋아 이

본적으로는 다 똑같고, 스피커랑 앰프만 바

래. (웃음)

뀌는 거니까. 다 저희 것은 아니예요. 음향

선주: 참, 은진이는 뭐하지?

쪽은 또 한 다리 건너면 또 다 아는 데예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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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좁아놔서. 어디 업체 가서 커피 마시

감한 것 같애. 흥을 아는 사람들이라서 그

고 있으면 견적 물어오잖아요. 전화로 한참

런가.

얘기해 주고 끊잖아요. 그러면 1,2분쯤 있

원근: 신명이 있는 민족이잖아, 우리는.

다가 옆에 사람 전화로 같은 문의가 와요.

상하: 여긴 장비가 일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웃음)

장비를 많이 구입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원근: 그런데 뭐 행사 하다가 음향 잘못됐다

조절할지도 문제죠. 여긴 장비, 기술, 체력

이러면서 항의 들어오고 이런 건 없잖아?

이 다 중요해요. 육체노동을 하기 때문에.

부담은 적은 편 아닌가? 무대나 조명이나

일의 대부분이 세팅하고 걷는 거거든요. 음

다른 쪽에 비해서는.

향 하는 사람들은 서로 노가다라고 해요. 그

선주: 아닐 걸. 요즘은 다 귀가 발달해서 민

런데 사람들은 딱 그 공연만 보고 가니까 어

감할 것 같은데.

려움을 모르죠. 그냥 우두커니 서 있는 줄

상하: 절대 없는 쪽은요, 오히려 조명이에

만 알죠. 우린 공연을 봐도 공연에 집중을

요. 오늘 조명 별루였어 이런 건 없어요. 기

못해요. 공연 보는 재미는 모르죠. 그저 소

본만 해두 돼요. 그런데 음향은 아주 중요한

리만 듣죠.

게, 행사 잘 치르고 이제 끄트머리에 “마지 막으로 회장님 한 말씀 하시고 오늘 행사 모

가족과 있을 때 가장 행복

두 마치겠습니다” 이러는데 회장님 마이크

선주: 그래도 소리를 다루는 사람들이 제일

안 나와 버리는 거죠. 이래서 기획사 바뀌고

장수한대.

음향팀 돈 하나도 못 받고 아예 그 행사랑은

원근: 결국은 소리로 소통하면서 사는 사람

영원히 관둬야 되고 그런 적 다반사예요. 마

들이라 그런가.

이크 하나 때문에 다 변상해야 되고 이런 게

상하: 그렇죠. 소리로 교감하니까요.

있어요. 실제로 “시장님 말씀하십니다” 이

원근: 지난 여름에 제주도에서 몇 달 있었다

러는데 삐익삑 막 마이크 삑사리 나고. 아주

며? 좋았겠다. 세팅 풀 필요도 없고.

죽는거죠. 또 출연진이 잘못된 CD 갖고 와

상하: 한 달요. 그래도 놀러간 건 아니니까

서 틀어도 음향팀 탓하고. 노래 부르다 튀어

사실 힘들었어요. 그 뙤약볕에 해변에서.

도 음향팀 돈 못 주겠다 하고. 이런저런 어

페이스북에는 재밌는 것만 골라 올리니까

려움이 많아요, 이 바닥이.

그냥 재밌어 보이죠.

선주: 난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소리에 민

선주: 너 감성돔 엄청 먹었더라. (웃음)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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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원근: 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되니?

원근: 지금 생각난 건데, 나중에 노래패 산하

상하: 지금 시즌이, 그러니까 우리 일이 5

는 다시 한 번 뭉쳐서 공연을 해도 될 것 같

월, 9월, 10월 매출이 일 년의 60% 정도 차

더라. 25주년 공연이라든가 이런 거. 노래

지해요. 내일은 시흥에 모 중학교 축제. 모

를 너무 잘하더라. 지난 핸가, 캠프 가서 노

레는 안산여성노동자회 마라톤, 다음 주는

래하는 거 보니까 말야. 악기로 치면 목소리

경희대, 한양대 축제. 계속 이어져요. 대학

가 가장 늦게 녹스는 건가.

생 오티 기간이 내년 초에 있잖아요. 그럼

상하: 그건 형이 아주 아주 오랜만에 들어서

그때는 또 설악산 쪽에서 아주 살아요.

그래요.(웃음)

원근: 음향 일은 어떻게 계속? 상하: 크게 욕심 안 내고 자기 시간 많이 가

지면서 이대로 하고 싶어요. 전 만족해요. 지금이 좋아요. 선주: 뭐가 제일 행복한데? 상하: 정우랑 은진이랑 함께 노는 거 행복해

요. 가족이 가장 소중해요. 일 끝나면 바로 집에 들어가서 놀고 싶어요. 선주: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상하: 노래 작업을 하고 싶어요. 제가 곡 쓰

고 또 편곡해서. 은진이가 노래를 부르면 되 니까. 근데 어쩔지 모르겠어요. 제가 여태 까지 살아온 방식이란 게, 누가 뭐 필요해서 이걸 해라 그러면 또 그걸 하면서 살아온 거 니까. 하지만 지금은 제가 하고 싶은 거 해

문득 다시 교문투쟁으로 이어지던 그 집

보고 싶어요.

회의 막바지가 생각났다. “자, 일어서자 어

선주: 낼모레 내 나이가 오십이거든. 사십

깨를 걸고” “동지들 모여 함께 나가자”로 시

대 초반에는 막연하나마 어떤 모양으로 살

작되는, ‘천편’이면서 ‘일률’적인 운동가들

고 싶다, 이런 거 있잖아, 그런 생각 참 많

이 밤빠빠빠 울려 퍼지던 바로 그때. 엉덩이

이 했던 거 같아.

를 털고 일어나, 질끈 머리띠를 고쳐묶고,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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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을 때 ‘비로소’ 노 래가 완성됐다. 집으로 가는 5분여 동안 나는 닥치는 대로 노래를 불렀다. 메들리가 되든 말든 뒤죽박 죽 나오는 대로 불러 제꼈다. 반전반핵가, 동지가, 농민가, 단결투쟁가, 오월의노래 ······. 아마 학창 시절 수천 번은 족히 내 몸 쇠파이프를 탕탕 튕겨대며 힘차게 걸어 나

통을 돌아다니며 울림을 냈을 소리들이 앞

간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내 심장박동

뒤 가리지 않고, 정말 부끄러움 없이, 우후

처럼 교정에 울려퍼지던 음악도 반에 반에

죽순으로, 앞다퉈 쏟아져 나왔다. 마주 오

반 박자만큼은 좀 더 빨라지고, 서두르고 있

던 학생들이 흠칫흠칫 피해갔다.

었을 것이다. 그게 상하였다. 자정을 훌쩍 넘겨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하 차를 얻어 탔다. 집이 부천인 상 하가 나를 바래다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짐 칸엔 내일 중학교 축제 때 쓰일 음향 기기며 스피커가 한가득 실렸다. 아침 6시까지 가야 돼요. 이 일이 원래 아 침저녁이 따로 없어요. 보통 운동회는 새벽 에 가고, 축제는 오후에 출근해요. 피곤하 지 않아요. 만날 하는 일인데요, 뭘. 아파트 근처에 나를 내려주고 크게 유턴 을 해서 돌아나가려는 찰나에, 나는 그의 차 가 한쪽으로 부르릉 기우뚱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삶의 무게가 그를 이리저리 쏠 리게 한 것일까. 상하는 무대 한 켠에서, 때로는 마당 구석 자리에서 늘 그 공연을 빛나게 해주었다. 상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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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니기미(泥耆味) 세상도촬 글 사진

박성용

“바위는 침묵이다” 바위는 침묵이다. 그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인간은 산에서 숱한 희

생을 치렀다. 그러나 바위는 인색하다. 청춘을 바쳤다고, 또 목숨을 잃었다고 해서 태도를 바 꾸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발길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난 수세기 동안 인간이 높고 낮은 산에서 해 왔던 클라이밍이라는 행위는 그런 바위의 침묵을 이해 하려는 치열한 텍스트로 볼 수 있다. 그 텍스트는 사람마다 다르다. 허나 바위와 교감을 나누 고자 하는 열정은 같다. 한때 바위에 미쳤던 시절, 화강암에 붙으면 싸한 소주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가 좋아 어떤 날은 오랫동안 바위 표면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그러면 거대하고 까끌까 끌한 바위가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하게 다가왔다. 북한산 원효리지 말바위 구간에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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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날 미치게 하는 여름날 초저녁 햇살” 여름날 초저녁 햇살이 내려앉은 풍경은 볼 때마다 마

음이 설렌다. 오후 5시께부터 저녁 6시 30분 사이가 풍광이 가장 아름답다. 언덕에 서서 강물 을 바라보고 있으면 슈베르트, 슈만, 멘델스존이 남긴 동경의 세계로 가득 찬 낭만파 음악을 듣 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였다. 이런 풍광을 만나면 무작정 먼 길을 떠나고 싶어 했다. 가끔 마 루 끝에 앉아서 하늘을 보며 멍때리기를 자주 했던 초등학생 때, 머리를 깎고 입산하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가 어머니한테 “싹수가 노랗다”며 총채로 맞았던 기억이 난다. 미시령을 거쳐 서울 로 올라가는 44번 국도. 해 떨어지는 저 장엄한 소양강을 보자 순간, 마음이 달아올라 차를 세 웠다. 갈 길은 바쁜데 마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인제군 남면 38선휴게소에서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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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아흐 다롱디리 삐빠빠룰라” 야영장은 역마살 낀 떠돌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작은 텐 트를 치고 며칠 머무르면서 발바닥에 쌓인 노독을 풀고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청하면 고광대 실 아방궁이 부럽지 않다. 야영장에 황혼이 깃들면 그 쓸쓸하고도 외로운 분위기가 오히려 마 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산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바람은 땀에 젖은 이마를 어루만지고, 땅에 떨 어진 꽃잎들은 겸손한 발걸음을 일깨워 준다. 버너를 꺼내 물을 끓인 뒤 커피 한 잔을 타서 꽃 잎 쌓인 저 바위에 앉자 입에서 저절로 흥이 나왔다. 아으 다롱디리, 어긔야 어강도리 지국총어 사와, 삐빠빠룰라 쉬스 마이 베이비· · · · · ·. 그날 밤 아무도 없는 야영장에서 나는 혼자 신이 나 서 개다리춤을 췄다. 농약 같은 첫사랑을 떠올리며, 헛둘헛둘 삐빠빠룰라 쉬스 마이 베이비.

한라산 관음사 야영장에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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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묏등은 엠보싱 화장지” 잔디가 돋아나는 묏등을 보면 문득 뒤를 닦고 싶다. 둥근 모양을 잘 갖춘 묏등이 몰려 있는 고분군은 죽은 자들이 지상에 남겨 놓은 엠보싱 화장지다. 엠보싱 화장 지는 밋밋한 화장지보다 닦는 맛이 개운하다. 여독이 쌓인 나그네는 그늘에서 발을 닦고, 단체 관광 온 노인들은 주름살 속에 묻어둔 미련을 닦는다. 훈풍을 실어 나르느라 고단한 바람도 묏 등에 얼굴을 닦는다. 가끔 상상한다. 묏등이 있는 잔디밭을 통째로 뜯어 내 삶의 밑씻개로 쓰는 것을. 그러면 묏등에는 감추고 싶은 수치와 자글자글한 욕심이 콜타르처럼 둘러붙어 있을 터. 묏등은 엠보싱 화장지, 치욕이 많은 자의 머스트해브 아이템.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박성용_ 1984년에 입학했다. 월간 <아웃도어>, 월간 <캠핑>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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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야기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투표 가능하다. 정치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과 맞닿아 있다는 것 잊지 말자.

1987.12. 대구. 대통령선거 포스터 앞을 걷고 있는 행인


1995.6.23. 여의도. 첫번째 서울시장선거. 조순 후보의 선거유세를 듣고 있는 여의도의 386세대 직장인들

사진 : 송정근_ 1969년 대구 출생.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사진을 시작했다. 1995년부터 현재 까지 프래랜서 사진가로 다큐멘터리와 인물 사진을 주로 찍고 있다. 1997년 사진 웹진 ‘다큐네트’를 기획했고, 2006년부터 2년간 ‘매그넘코리아’의 스페셜 코디네이터로 20명의 매그넘 사진가와 작업했다. 주요작업으로는 ‘탄광-산업화의 언덕’, ‘전환기의 학생운동’, ‘중국 노동자의 귀향’ 등이 있다.


억 기 의 년 백 , 산 유 의 식민 말한다 들이 아 겨진 이다 지, 남 현재형 버 아 는 희 빼앗긴 회 김미화 »» 박정 권에 사 증언 정 희 광준 피해자 »» 박정 장호권, 최 건 단사 - 대담 생간첩 학 유 동포 »» 재일 사 - 김정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과거청산의 과제와 역사인식의

어 보고자 한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18년간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대통령 후보의 인식과 수

장기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본질을 보면서, 오늘을 다

준에 놀라기도 했고, 절박해지기도 했다. 우리가 살고

시 되새겨본다.

있는 현재가 박정희 망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박정희 정권의 본질과 주요 사건을 개괄적으로 훑어보

사실을 재확인하는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고, 박정희 정권에 아버지를 빼앗긴 장호권 선생과 최광

장준하 선생의 유골 공개와 인혁당 사건, 정수장학회 등

준 교수의 목소리를 통해 과거청산의 과제를 다시 한 번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단순한 사과나 용서 같은 것으

새긴다. 또 박정희 독재 치하에서 가장 그늘진 희생자들

로 끝맺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의 갈등과 대립은,

인 재일교포간첩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김정사 선생의

일제에 나라를 빼앗길 때부터 시작된 ‘독립을 원한 세

글을 옮겨 싣는다.

력’과 ‘일제에 협력한 친일세력’간의 투쟁으로부터 이

이 특집은 민주행동에서 주최한 학술대회·전시회·강좌·

어 온 기나긴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항일 레지스탕스

영화와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는 혁신세력으로, 저항운동으로 이어져 왔고, 친일파들

전시회, 금지곡 공연, 영화 <백년전쟁>, 49통일평화재

은 권력의 대를 이어가며 세습해 왔다. 그 기나긴 역사

단의 <인혁당사건 추모전시회>, 한홍구 선생의 관련

가운데 2012년 대한민국을 떠도는 유신의 망령을 되짚

강좌 등에서 내용을 구했다.


박정희는 현재형이다 신명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과거청산 과제와 역사인식의 문제가 세상 사람들의 관 심사가 되었습니다. 지난 시절의 사건들이 들추어지고, 누구의 잘못인지 새삼 따지곤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받았을 고통에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런데 정 말 궁금해졌습니다. 사람들이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까?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지나치게 평온하고 무심한 세월 앞에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6~70년대를 살아왔던 사람들도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거나 왜곡된 상태로 변질되었을 텐데, 그 시절을 살아보지 못한 젊은 친구들에게 박정희와 그 가 집권한 18년의 세월은 그저 지난 과거일 뿐이겠다 싶었습니다. 구체적인 사 실은 몰라도 보고 배우고 들은 것이 있으니 고통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생 각을 접기로 했습니다. 모르는구나, 받아들여지지가 않는구나, 가슴에 와 닿지 않는구나. 그것이 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느낌이라도 있을까, 그 공포와 죽음의 시절에 대한. 그래서 다 아는 얘기를, 조금 뻔뻔하게 서술해 보기로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 르는 이에게 이런 일이 있었단다, 말을 건네려 합니다. 교과서적인 얘기이긴 하 지만, 왠지 한 번은 짚고는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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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이런 세상 기억나나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이야기입니다. 길게 잡아도 50년 전이고요. 보릿고개 를 없애줬다는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바보가 되어야 했습니다. 비약이 심해 보이나요? 그런데 그게 사실이에요. 그 시절을 살 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조적인 말을 하기도 하고요.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으로 전 국민을 옥죄던 6~70년대에 살기 위 해서는 훌륭해서도 안 되고, 똑똑해서도 안 되고, 바른 말을 해서도 안 됐습니 다. 평범하다고 해서 안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동네에서 막걸리라도 한 잔 걸 치다 불만을 터트리기라도 하면 어디론가 끌려가 반죽음이 되어서 나오곤 했습 니다. 그래서 막걸리 반공법이라 불렸는데, 그 수가 4만이 넘는다는 말도 있습 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 수시로 벌어졌습니다. 머리가 조금 길면 길거리에서 가위질로 잘려 나갔고, 짧은 치마를 입어도 경범죄로 처벌받았습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는 글귀가 있으면 금서로 판매 중지되었고, 금지곡으로 노래를 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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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수류탄 모형을 던지는 교련이 수업이고, 학 교 · 언론사 등에 정보기관원이 상주했습니다. 그래도 살 수는 있었습니다. 물가가 매년 20% 이상 올라가고, 새마을운동으 로 포장된 시골에서 살 수 없어 수많은 사람이 서울로 몰려와 하층민을 이루어 도, 청계천 낡은 건물 다락방에서 미싱을 돌려도 하루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난한 일상의 행복조차도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주위의 불행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민주주의를 염원하거나 생각을 나누기만 해도 생명이 위험해졌습니다.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는 학자여서도 곤란합니다. 거미 줄처럼 감시망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유럽거점간첩단 사건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고, 국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최고의 민법학자가 간첩의 수괴가 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사체로 나와 야 했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독립군, 박정희 독재정권 에 맞서 재야 대통령으로 불리며 전 국민의 존경을 받던 장준하 선생이 약사봉 계 곡 절벽 아래에서 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기자, 교사, 중 소기업 회장, 대학생 등 민주인사가 인민혁명당을 다시 만들려는 간첩 세력으로 조작돼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하루아침에 간첩이 되는 일은 평범한 시민이라고 피해갈 수 없습니다. 먼 바다 로 고기잡이를 나가는 어부여도 안 됩니다. 북한에 먼 친척이라도 있으면 어느 날 갑자기 군홧발이 안방에 쳐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조국을 배우고 싶었던 재 일교포 유학생들은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레지스탕스와 꼴레보, 전쟁의 시작 바다에 나갈 일도 없고, 북한이나 일본에 먼 친인척도 없고, 나랏일에는 관심 도 없으니 안심할 수 있나요? 집안에 대학생이 없어야 하고, 누구와도 다투지 않아야 하고, 어디에서도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자식에게도 함부로 불만을 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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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비치면 곤란합니다. 너무 가난해도 위험합니다. 불순분자일 가능성이 높아지니 까요. 지나치게 과장한다고 느껴집니까? 가난해 아이들이 굶어죽고, 함부로 국민을 학살하는, 동정해마지 않는 후진국 아프리카의 독재정권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 란 생각이 드나요? 우리가 어려서 겪어온 세월인데, 우리의 부모 또는 삼촌, 형 들이 견디고 살아온 세월인데도, 짧게는 30년 길게 잡아도 50년이 채 안 되는 가까운 과거인데도 너무나도 황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이런 세상이 가 능했을까요. 역사를 돌이켜 볼까요. 굳이 두터운 역사책을 들춰보지 않아도 조금만 기억을 더듬으면 하나씩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얘기, 기억하고 있는 일 들, 책에서 봤거나 들었던 사건들입니다. 그래서 아주 낯설지만은 않을 겁니다. 을사오적인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장소가 통감부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 산의 통감부 터에 중앙정보부가 들어섰다고 하니, 왠지 우연 같지 않습니다. 젊 은 나이에 최고위직에 올랐던 엘리트 이완용에게 굳은 신념, 믿음 같은 것이 있 었겠죠. 난데없이 웬 이완용이냐고요? 박정희 독재정권, 그 처절한 삶의 근원을 알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최고의 정 적이자, 아킬레스건이었다. 장준하는 노골적으로 박정희를 반대하였고, 목숨을 건 중대한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거 사를 며칠 앞둔 일요일 약사봉으로 등산을 갔다가 17m 절 벽 아래서 사체로 발견된다. 목격자는 절벽에서 추락했다 고 하지만, 목격자의 행적에 여러 의문점이 있고, 일관된 주 장을 하지 않는 등 증언의 진실성이 의심되고, 사체에 추락 의 상처가 전혀 없이 귀 뒤쪽에 둥근 물체에 가격된 함몰 골절이 있는 등 타살의 의혹이 짙은 사 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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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승승장구하던 나치 독일은 유럽 전역을 식민지로 삼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국민을 나치의 신봉자로 개조시키려 했습니다. 나치 독일 히틀러 의 오른팔이며 대중선동의 천재였던 괴벨스의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나라에 쳐들어가면 그 나라 국민은 자동적으로 세 부류로 나뉜 다. 한쪽에는 레지스탕스들, 다른 쪽에는 꼴레보들이 있고, 그 사이에 머뭇거리 는 다수의 대중이 있다. 그 나라 국민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온갖 부가 약탈되는 것을 참고 견디게 하려면, 머뭇거리는 다수의 대중을 레지스탕스 무리에 가담하 지 않고 꼴레보들 편에 서도록 설득해야 한다.” 우리나라도 일제의 침략 앞에 세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그리고 흔들리는 민중들이 있었죠. 일본은 낡은 조선을 발전시킨다는 소위 식민 지 근대화론을 제기하며 대다수 민중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조선의 모든 것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에 맞서 조선의 레지스탕스들은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군을 조직해 일본과 맞섰습니다.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는 일제와도 싸웠지만, 친일파들을 척결 하려 했습니다. 일제의 꼴레보 친일파들은 식민지 지배가 영원할 거라며, 천황 의 신민으로 사는 것이 조선의 운명이라 믿었던 것이고요. 친일파들은 일본군이 되어 독립군을 때려잡는 데 앞장섰습니다. 한국의 레지스탕스와 일제 꼴레보들, 두 세력의 길고 긴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박정희를 아시나요 해방과 미군정, 그리고 이승만 독재정권과 4·19혁명, 그 사이에 한국전쟁도 있었고요. 이 시기에도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투쟁은 계속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구의 암살에서 보듯이 한국의 레지스탕스는 친일파에게 무너지고 맙니다. 미 군정에서 친일파들은 권력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일제 고등계 형사가 경찰 간부가 되고, 이승만 정권의 요직은 물론 군까지도 친일파들로 가득 채워졌습니 다. 반민특위의 해산으로 대표되는 친일세력 청산의 실패는 다 잘 알고 있을 겁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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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니다. 친일파들이 권세를 누리고 부를 축적하는 동안 민중해방과 조국통일을 염 원했던 독립운동세력은 암살당하고, 빨갱이로 몰려 처형당하고, 한국전쟁 때 집 단학살을 당하면서 산산이 부서집니다. 그래도 살아남은 레지스탕스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면 서 한국의 레지스탕스, 저항세력으로 세상의 전면에 나섭니다. 수많은 정치단 체·민중정당·노동조합 등이 세워지고, 통일을 향한 행보가 거침없이 전개됩니 다. 특히 대구·경북의 혁명적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너무 짧 았고, 상처는 지독히도 컸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진보세력은 철퇴를 맞습니 다. 5월 16일 탱크를 앞세워 군사반란을 꾀한 정치군인들에게 전국의 진보세력 은 일제히 검거당합니다. 경찰서 유치장이 넘쳐났습니다. 레지스탕스의 암흑기 가 시작된 것입니다. 군사반란은 형법상 사형에 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군 사정변을 일으킨 이유는 뭘까요? 4·19혁명 이후 분출된 조국통일의 열망입니 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란 구호는 바로 북에 있는 가족, 친구에게 요구 하는 것입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한국전쟁 때 열 살 남짓 되었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 남으로 내려와 북에 가족을 두었거나, 친구가 북으로 올라갔거나 했습니 다. 그만큼 절실하고 현실적인 요구였습니다. 통일이 눈앞에 가시적으로 보이 는 듯했습니다.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서울대 법대 교수를 간첩 사건과 연계시키려 고문하다 사망 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최종길이 유럽 거점 간첩단의 수괴로 간첩 혐의를 인정하고 7층 화장실에 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창문 밖으로 투신했다고 발표했 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최종길 교수는 중앙정보부 의 고문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재심을 통해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았다. 최종길 교수는 우리나라 최 초의 민법 법전을 만들고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학생처장으로 학생 시위에 온정적인 입장 을 보인 것이 정권의 눈엣가시가 되어 탄압을 받아 공작의 대상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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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가장 두려워한 자들이 바로 친일파였겠죠. 그리고 일부 군인들이었습 니다.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기간에 간신히 살아남아 권력을 잡았는데, 통일이 된다면 다시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당시 군은 하극상 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승 진이 정체되어 불만이 고조된 상태라고 합니다. 친일파 생존의 위기의식과 군의 불만, 이 두 가지 요인이 합쳐져 군사정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후 18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박정희 1인 독재 치하에서 끔찍한 세월을 보 내야 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이 참혹한 시간들을 만들어낸 박정 희는 어떤 인간일까요. 그의 꿈과 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아야만 폭력으 로 점철된 70년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1917년생인 박정희는 황군이 세상을 호령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그리 고 학교 교육을 통해 군국주의와 메이지유신의 일본 역사를 뼛속까지 깊이 받아 들였습니다. 소년 박정희는 이순신과 나폴레옹을 존경했다고 합니다. 이순신을 군인으로 존경했다면 나폴레옹은 그에게 깊은 감동을 준 인물이었다고 할 것입 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식민지 코르시카에서 태어나 프랑스 군인이 되었다 가 마침내 황제가 된 인물입니다. 군인으로 출세하고 싶은 조선의 식민지 소년 은 나폴레옹의 영웅적 출세에 감정이입을 하며 야망을 키웠을 지도 모를 일입니 다. 당시 군인은 존경의 대상이었고, 출세의 길이기도 했으니까요. 박정희의 군 인상은 풍찬노숙을 하는 초라한 독립군이 아니라, 멋진 제복에 칼을 차고 말을 타고 천황을 위해 진군하는 멋진 황군이었습니다. 품행성적이 높아 반장을 할 정도로 일제 식민지의 모범 학생이었던 박정희는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가 되어 황국신민을 육성합니다. 이 시기에 박정희는 일제 식민지 교육의 이념이 어떻게 체화되는지를 몸으로 깨우칩니다. 하지만 긴 칼을 차고 싶었던 박정희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제국의 황군이 되기 위해 만주군관 학교에 혈서와 충성을 맹세하는 편지를 써서 보내 마침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상봉공의 굳 건한 결심입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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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도 바라지 않겠습니 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만주신문≫ 1993. 3. 31,『친일인명사전』 박정희 편 참조) 이후 박정희는 일본 육사에 들어가 장교가 되었죠. 일제 식민지 시절, 교사에 서 일본군 장교로의 변신은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입니다. 만주에서 독 립군을 때려잡았느니 아니니 분분하지만, 그는 일본이 원했던 천황의 신민으로 서 최고의 모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육사 졸업식에서 식민지인이라는 신분의 불이익을 극복하고 맨앞에 설 수 있었던 것도 박정희가 얼마나 철저한 황군이었 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거쳐 1944년 마주 군 제5곤구 예하 보병8단에 배속 받은 박정희는 조선인 · 중국인 · 항일 빨치산 을 적으로 삼고 싸웠습니다. 철저히 황군이고 싶어 했고, 메이지유신의 이념과 지도자들의 삶은 본받았던 박정희는 5·16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자마자 일본으로 달려갑니다. 일급 전범

인혁당재건위 사법살인 유신반대 투쟁이 심해지자 박정희는 긴급조 치 4호를 발령하고, 전국에서 관련자 1,024 명을 연행, 조사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에 들 어간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253명이 기소되 는데,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나왔다. 하지만 박정희가 크게 화를 낸 후, 상황이 급변한다. 민청학련의 배후 조직을 세우기 위해 처음엔 일본 조총련과 연계된 사건을 만들려 했으나 파괴력이 약하자, 보다 확실한 간첩단이 필요했다. 당시 진보세력의 중심인 대구 · 경북의 혁신세력들을 검 거, 이들과 민청학련 대학생과 억지로 연결시켰고, 북한에서 남파한 간첩이 직접 당을 조직하고 교육을 시켰 다고 사건을 조작했다. 하지만 이 간첩은 남파가 아닌 북파 간첩으로 후에 밝혀졌다.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 련자는 모두 극심한 고문을 당했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상고 기각 판결을 내리자마자 다음날 새벽 8 명의 사형을 집행하였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작으로 밝혀졌고,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었고, 국가가 사과하고 손해를 배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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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수상 등 일본의 우익 정객들 앞에 선 박정희는 공손한 태 도로 고백을 합니다. “경험도 없는 우리한테는 그저 맨주먹으로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욕만 왕성 합니다. 마치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청년지사와 같은 의욕과 사명을 품 고 그분들을 모범으로 삼아 우리나라를 빈곤으로부터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려 고 합니다.” 황군 박정희의 정치적 야망은 대한민국을 일본식 병영국가로 만들어 황군식 정신 개조를 통한 근대화를 이루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스승 오노 가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를 받고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는 것 같아 기 쁘다”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소위 유신독재의 시작을 열었던 1972년 ‘10월유신’에서의 유신이 메이지유신의 유신에서 따온 말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 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메이지유신은 그 사상적 기저를 천황 절대제도의 국수주의적인 애국에 두었 다. ……메이지 혁명의 경우는 금후 우리의 혁명 수행에 많은 참조가 될 것은 부 정할 수 없기 때문에 본인은 이 방면에 앞으로의 관심을 계속하여 나갈 것이다.” (박정희.『국가와 혁명과 나』. 향문사. 1963. 참조)

박정희를 지탱시켜 준 힘은 박정희 정권에서도 친일 협력자들이 권력과 부를 장악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 습니다. 그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레지스탕스를 철저히 탄압하고, 부유하 는 민중들을 자신들, 즉 꼴레보 편으로 끌어들어야 했습니다. 박정희는 일제 식민지 시절에 배우고 체화된 천황의 사상을 그대로 실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은 정신개조 운동과 근대화, 병영화로 나타났습니다. 1930 년대 초 농촌진흥운동이 ‘새마을운동’으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애국반 이 ‘반상회’로, 일제의 모범부락이 ‘자립마을’로 이름만 바뀐 채 ‘잘 살아 보세’ 라는 노랫가락과 함께 시골 마을을 휩쓸었습니다. 일제 말 국민총력운동본부가 제정한 라디오(보건)체조, 국민복, 국민가요가 1961년 국가재건범국민운동본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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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재건체조’와 ‘신생활복’, ‘국민가요’로 부활했고요. 학교도 국가와 지도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복종하는 병영학교가 되었습니 다. 학생회는 학도호국단으로 개편되었고, 학생회장은 연대장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교련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해야 했는데, 교련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전 교생이 한 달 넘게 매일 연습을 해야 했습니다. 대학시험에 체력장이란 과목이 있었는데 ‘수류탄 던지기’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도 기억합니다. 학교에서 무엇보다 강조되었던 것은 ‘애국조회’입니다. 매주 월요일 아침 1교 시 시작 전에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교장의 훈화를 들어야 했던 애국조회를 중시한 이유는 일제 때 교사였던 박정희가 그 효과를 확실히 깨우쳤기 때문입니 다. 천황의 교육칙어가 ‘국민교육헌장’이 되었고, 일장기 대신 태극기가 게양되 면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낭독해야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을 앞세워 전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해, 길을 들이려 했습 니다. 나아가 저항세력인 레지스탕스는 그 싹을 뽑으려 했고요. 이를 위해서 만 든 것이 중앙정보부입니다. 중앙정보부는 정보기관의 이름으로 창설됐지만 실질적으로는 정권의 비밀경 찰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공산세력의 간접침략과 혁명과업 수행의 장애를 제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 공안기관에게 간첩 검거는 최고의 업적이었고, 정부는 사회를 통제하며 정치적 위기를 피해가 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었다. 7·4남북공동성명 이 후 간첩 남파가 이루어지지 않자, 직접 간첩을 생 산해냈다. 그 최대의 피해자가 납북어부와 재일 동포 모국 유학생이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이 자 자기 방어력이 부족한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1970~80년대 간첩사건이 966건에 달했는데, 그 가운데 제일동포 관련 간첩사건이 319건이나 되었다. 재일교포 간첩 사건은 반국가단체 구성원과의 회합 및 기밀누설 등의 범죄행위가 가장 많았는데, 일본에 가서 만난 사람이 조총련이거나 그의 친척이 있거나 하 면 반국가단체와의 회합이고, 그와 나눈 얘기는 기밀누설이 되었다. 이들은 불법 감금, 고문, 가족 등 지인들 에 대한 협박을 통해서 간첩으로 만들어졌고, 증거물조차 만들지 못한 경우도 허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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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국가재건최고회의법 제18조) 한다는 명목 하에 창설되었던 중앙정보부는 야당이나 반정부 세력뿐 아니라 시민사회의 전 영역에 걸쳐 사찰과 공작을 수행 하였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정규직원만 최고 8,000명까지 됐고, 직원 한 사람마다 3~5명 의 정보원을 두었다 하니 3만여 명 이상이 전국에 활개를 치고 다녔습니다. 이들 은 전 국민을 일상적으로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공작과 테러, 고문 및 조작을 일 삼았습니다. 특히 박정희의 집권이 장기화되면서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개인에 게 충성을 바치는 조직으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야당세력을 경 계하고 탄압했으며 권력 내부의 경쟁자를 거세하기도 했고, 저항세력에게는 모 든 촉수를 동원해서 뿌리부터 말살시키려 했습니다. 당시 남산에 끌려간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고통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끌려간 사람들은 직위 고하에 관계없이 무서운 고문을 당했습니다. 국회의원들조차 고 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날 정도였으니 박정희에 반대하는 저항 세력은 살아서 나오는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시나리오대로 사건이 조 작될 때까지 고문이 계속되었고, 수많은 간첩사건들이 조작되었습니다. ‘남조 선해방전략당’, ‘동백림 사건’ 등이 연이어 발표되었고, 재일교포 간첩들이 양 산되었습니다. 중앙정보부의 위력을 앞세워 박정희는 전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국민들 의 저항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전태일이 노동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하 였고, 광주대단지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학교에서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한 편,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간신히 김대중을 누르고 집권을 연장한 박정희는 자신의 신념을 완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됩니다. 오랜 야망이었던 나폴레옹 같은 황제를 꿈꾸며, 스스로 천황이 되기 위한 영구집권 계획을 실행 에 옮기게 된 것이지요. 그는 메이지유신의 이념을 이어받아 탱크를 앞세워 국 회를 해산하고 유신 쿠데타를 자행합니다. ‘10월유신’을 성공시키고, 국민의 선 거권을 박탈한 채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대의원 선거에서 그는 마침내 종신 대 통령으로 선출됩니다. 하지만 동토에도 싹이 트듯이, 완전히 사라져 없어진 줄 알았던 저항세력이 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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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기운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연일 대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르자 박정희는 당황 합니다. 공포가 먹히지 않자, 그 자체로 위협이 되었습니다. 해방 공간에서, 그 리고 4·19 혁명 이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고 떨었던 그 치욕의 시간들이 떠 올랐겠죠. 그는 저항의 배후이자 라이벌을 제거하기로 작정합니다. 그것이 김 대중 납치 사건입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실패하고 그는 김대중을 동교동 집 에 풀어주고 맙니다. 박정희에게는 이제 뭔가 확실한 대책, 보다 큰 사건이 필요해졌습니다. 가장 좋은 게 간첩사건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전후 백만 명이 학살당한 경험은 빨갱이 라면 치를 떨거나, 사람들을 공포에 빠지게 하는 최고의 약효를 자랑했습니다.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 발표하면 정국은 꽁꽁 얼어붙고, 사람들은 거리에 나오는 것조차 두려워했습니다. 최종길 교수가 이러한 정세에서 유럽거점간첩단 수괴 가 되어 목숨을 빼앗깁니다. 이 사건의 유일한 간첩이었던 김장현은 재심을 통 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간첩사건은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들이 경쟁적으로 양산했습니다. 재일교 포 간첩사건이 연이어 발표되고, 인혁당재건위 사건 8명의 사형수는 대법원 판 결 18시간만의 형 집행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납북어부, 재일교포, 조작간 첩,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간첩이 양산되었습니 다. 이 시기에 발표된 것이 악명 높은 ‘긴급조치’입니다. 긴급조치는 초헌법적 조치로 1호부터 9호까지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들 마음대로 국민 들을 잡아넣고 탄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국민들의 저항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몰린 가운데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나온 독립투사 장준하 선생이 목숨 을 건 거사를 준비합니다. 재야 대통령이라 불리던 장준하 선생은 반독재 투쟁의 선봉이자, 박정희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벌였던 백만인 서명운동 은 며칠 만에 30만 명이 서명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서명하는 것만으로도 반병 신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는데도 엄청난 폭발력이었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바로 그 거사로 인해서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하지만 죽임으로 저항의 시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언론인들, 문인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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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학생들, 노동자들이 전국 곳 곳에서 들고 일어났습니다. 작은 파도가 모이고 쌓여서 거대한 쓰 나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재 규의 총탄에 박정희는 종신 대통 령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 감합니다.

백 년의 기억, 백 년간의 투쟁 저항세력에게 박정희의 사망은 기회이기도 했지만,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해방을 맞지 못해 분단국가가 되었듯이, 민중의 힘 으로 박정희 정권을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른 독재정권을 맞아 신음 해야 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가 누구입니까? 청와대 경호실에서 차지철과 함 께 박정희를 지키며 박정희의 통치방식을 배웠던, 그리고 제2의 박정희를 꿈꿔 왔던 자들입니다. 꼴레보들은 다시 기지개를 폈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잇는 저 항세력인 레지스탕스는 또 다시 잔인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80년 광주에 서 이내창으로 이어지는 죽음과 저항의 투쟁은 백 년 전, 조국을 빼앗기고 독립 을 꿈꾸며 만주를 향했던, 일제의 심장을 향해 목숨을 던졌던 레지스탕스, 독립 투사들의 투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레지스탕스는 나치 독일에 저항하던 세력의 표어가 굳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그 의미가 퇴색되어 진보세력일 수도 있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꿈꾸는 저 항세력일 수도 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박정희 독재정권과 맞설 수 없었던 우리의 선배는 한국의 레지스탕스, 독립운동가의 후예입니다. 그리고 천 황을 꿈꾸며 영구집권을 위해 고문·테러·암살·사법살인·폭력을 자행했던 박정희 와 독재세력은 일제의 꼴레보, 친일파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독립운동가의 후예, 한국의 레지스탕스는 지금 누구일까요. 그리고 친일 꼴레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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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또 누구를 칭합니까. 애매하기도 하고, 그 경계가 희미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백 년 전 자신의 가족과 집안, 전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떠나던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찾고자 했던 조국은, 그들이 꿈꿔왔 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1945년까지 그 당시 사료를 보면 자신들을 전부 혁명 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전의 사회와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 자유로운 사회, 평등한 사회, 착취가 없는 사회, 억압이 없는 사회, 그건 민주공 화국입니다.”(영화 <백년전쟁> 서중석 교수 인터뷰 중) 색깔이 바뀌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투쟁은 계속됩니다. 2012년의 역사인식과 과거사 논쟁을 보면 언제라도 70년대로 돌아갈 수 있다 는, 아니 그보다 더 심해질 수 있고, 독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곤 합 니다. 막걸리 반공법은 더 이상 없다고 해도 국가보안법은 언제든 우리와 우리 자식들의 미래를 옭아매고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아 갈 수 있습 니다. 누가 70년대를 과거라 합니까? 그때 그 처절한 삶과 죽음의 기록을 지나간 일, 역사라 할 수 있습니까? 박정희는 죽었지만 다른 이름으로, 다른 색으로 활개를 치며 부활을 꿈꾸고 있고, 70년대를 뜨겁게 살다 돌아가신 분들의 진실은 여전 히 밝혀지지도 않고, 명예가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꼴레보와 레지스탕스, 친일파와 독립운동세력의 기나긴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그 한가운데에서 촛불이 밝혀집니다. 당신은 안전합니까? 박 정희는 현재형입니다.

신명철_ 81년에 입학했다. 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1과 팀장으로 국정원 관련 의문사를 조사하였다. 현재는 ㈜우리교육의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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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회

박정희 정권에 빼앗긴 아버지, 남겨진 아들이 말한다

장호권, 최광준

김미화(이하 김) 고맙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제가 시사프로그램을 오래 하다

보니까 즐거운 소식을 전하기보다는 사건사고 소식을 전할 때가 많아요. 사실 얘기하고 싶지 않다. 너무 힘들다. 그런 일들이 있거든요. 피하고 싶을 때, 오 늘이 바로 그런 날인 거 같아요. 사실 우리 모두 빚진 마음이 있잖아요. 이 분들 이 살아오시면서 30년 넘게 가슴 속에 가시를 품고 살아오신 분들인데, 정말 숨 쉴 때마다 움직일 때마다, 얼마나 가시에 찔리셨겠어요. 얼마나 아프셨겠어요. 그런데 오늘 용기를 낸 이유는 이 분들의 얘기를 함께 듣고, 공감하고 따뜻한 눈 길이 마주하고 그러면서 마음의 무게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를 갖고 이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오늘 세 분을 모시려 했습니다만 송산진 선생님 아들 송 철환 선생님께서 갑자기 뇌출혈로 병원에 들어가셔서 오늘은 두 분과 함께 대담 을 나누겠습니다. 최광준 교수님은 경희대 법대 교수시고, 아버님께서 서울대 법대 교수로 계실 때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게 제자들을 감쌌다는 이유로 남산에 끌려가셔서 의문사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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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셨어요. 어릴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그리고 장준하 선생님 이 야기는 너무나 잘 아시겠죠. 일제 때 대단한 활약을 하셨고 나라를 위해서 애쓰 신 장준하 선생님, 지금 뒤에 유골 발굴하셨을 때 당시 사진이 국민들의 많은 공 분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장호권 선생님께서는 현재도 진상규명을 위해서 애쓰 고 계시고요. 두 분 모셨는데, 오늘 이 토론의 제목이 “박정희 정권에 빼앗긴 아 버지, 남겨진 아들이 말한다” 이런 제목이거든요. 일단 어머님들이 어떻게 지내 시는지 여쭈어 보면서 토론을 시작해 볼까요? 장호권(이하 장) 안녕하세요. 장호권입니다. 반

갑습니다. 이렇게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감사 를 드리고요. 저희 가족과 같은, 또 옆에 계 신 최교수님 가족과 같은 이런 분 말고도 과 거 잘못된 유신 정권하에서 희생된 분들이 많 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아직도 참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죠. 다행 히, 다행히라면 뭐합니다만 그래도 저희는 그 래도 여러분들을 만나고, 저희들 속사정을 얘 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다행스러운데, 이런 자리에도 나오지 못 하고 항상 마음의 멍에를 지고 사는 다른 많은 의문사된 가족들에게 정말 뭐라 고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워가지고 다시 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일단 감사드리겠습니 다. 그리고 어머님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고 했는데, 저희 어머님이 남편을 잃었 을 때가 40대 중반이었습니다. 올해 86세가 되셨는데, 37년을 꿋꿋하게, 다시 는 이런 세상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돌아가시려고 꿋꿋하게 살아주셔서 저 희 자식들은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아직까지도 건강하지는 않지만 마음 꿋꿋하 게 살고 계십니다. 김

고맙습니다. 최광준 교수님은 어떠세요. 인사말 겸해서 어머니 건강도

좀 얘기해 주시죠.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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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준(이하 최) 감사합니다. 저도 역시 옆에 계신 장호권 선생님과 같은 심정입니

다. 지금 유신 시절에 그렇게 핍박을 당하시고 많은 어려움을 겪으신 분들이 많 이 계신데 그분들을 다 여기에 모시고 나올 수도 없었고, 또 돌아가신 분들도 계 시고, 유가족이 다 모이지도 못했고 그런 것이 어떻게 보면 많이 안타깝고 슬픈 생각도 듭니다. 저희 돌아가신 아버님이나 장준하 선생님께서 많이 알려지신 분 들이기 때문에 저희 두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 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서 희생되신 분들과 많은 유가족들과 마음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저희 어머니 여쭤봐 주셨는데 어머님께서는 오로지 아버님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만을 위해서 살아오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저희 자식들에게는 항상 밝 게 살아라, 아버님의 일은 언제가 꼭 밝혀질 일이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할 것이 없다. 이렇게 좋은 세상이 오면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다 될 것이 다. 이렇게 했었는데, 그 좋은 세상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오지 않았고, 과연 좋 은 세상이 온 것인지도 잘 모르겠는 그런 상황이 계속 이어진 거죠. 또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물론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의문사, 사망사건으로 인정이 되 긴 했습니다만 사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실체, 낱낱이 진실이 다 밝혀 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그런 것이 항상 마음이 아프시죠. 아버 님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어머님을 포함한 저희 유가족들이 생각하고 그 간 절히 바랐던 그런 방향으로 사실 진행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쉬운 점이 많 이 남습니다. 김

그러시죠. 자료를 보니까 어머니께서 37세셨더라고요. 지금 연세는 어

떻게 되시나요? 최

지금 76세, 이렇게 되셨습니다.

건강하시죠?

예,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때 당시 사진을 보니까 상당히 어렸는데,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 그때 몇 살이었습니까? 최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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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는 만 9살이었습니다.


후벼파기

어떠셨어요? 그때 느낌이

있었을까요, 아버님 부재에 관한. 최

아버님께서는 저희를 늘 친

구처럼 대해주셨어요. 너무 엄하 기만 한 아버님이 아니라 저희들하 고 같이 놀아준 아버님이었기 때문 에 저로서는 아버지가 굉장히 밝으 신 분이셨어요. 그렇게 기억합니다. 또 유머러스한 모습도 많이 기억나고, 동료 교수님들이나 저희들하고 좀 농담도 하시고 장난치고 이런 걸 좋아하신 분이었 는데, 그렇게 밝으셨던 분이 이렇게 엄청난 비극적인 상황으로 돌아가셨다는 것 이 전혀 믿기지가 않는 거죠. 그런 혼란을 어릴 때 많이 느꼈죠. 김

그러셨겠죠. 여동생이 더 어리니까 철이 없어서 무덤가에서 웃으면서

돌아다니는 사진 한 장의 꼬마, 기억에 많이 남아 있거든요. 그 여동생은 잘 지 내시나요? 최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제 여동생은 저보다도 두 살이 어렸었

기 때문에 아버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저조차도 아버님께서도 혹시 사실 어디 살아계신 건 아닐까 착각에 빠질 정도였 기 때문에 제 여동생은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 같아 요. 김

그렇죠, 그렇죠. 어린 나이에. 남편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도 상상하

기 어려운데! 장호권 선생님께서는 백만인 서명을 하고 계신데 지금 하시고 계신 서명운동에 대해서 얘기해 주세요. 장

백만인 서명운동이라는 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 백만이라

는 숫자를 제시한 것은 숫자가 아니고 상징적인 것입니다. 5·16군사쿠데타를 일 으킨 박정희로 인해 유신이 생겨났기 때문에 장준하 선생님은 국민의 권리로써 유신을 철폐하라는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죠. 그 백만인 서명운동이 끝나게 되면 박정희 유신정권도 법을 바꿔야 하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장선생님을 구속하게 됩니다. 그 이후 유신 철폐 운동을 계속하시다가 죽임을 당했기 때문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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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범국민적인 운동인 ‘백만인 암살 진상규명 서명운동’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저희가 유골을 확인하고 정부에다가 이것을 조사해 주십사 부탁했는 데 결국 회견 151이라는 숫자를 내세워 가지고 이 정권에서는 해결을 안 하겠다 는 상당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셨어요. 그래서 그러면 이젠 저희가 국민적 운동 을 일으켜서 직접 진상을 밝히겠다는 의미에서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게 되 었습니다. 김

선생님, 정권 얘기를 하셔서 궁금한 것을 하나 여쭤 보면 박근혜 후보께

서 사과의 의지를 몇 번 내비치신 걸로 보이는데, 어떻게 받아들이세요? 장

글쎄요. 2007년 경선 때, 이명박 시장과 자기네끼리 싸움을 할 때 박근

혜 씨가, 요번에도 그런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만, 사과를 하겠다 해서 저희 집을 찾아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얘기를 죽 들어보니까 사과를 하겠 다는데, 뭘 사과를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뭘 사과하겠다는 깊은 내용 없이 그냥 사과하러 왔다, 그러고 갔습니다. 그것뿐이죠. 그러고서 박근혜 씨는 자기가 사 과를 했다는 말을 합니다. 김

최교수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 겉모습보다는 사과 내용을 깊이 있

게 들어봐야 하는 게 아니냐, 이런 의견을 내시는 분도 계시던데요. 최

저는 의문사를 포함해서 과거청산과 그 문제의 해결이라는 과제를 오랫

동안 생각을 해왔습니다. 과거청산과 그 문제의 해결의 최종적인 단계는 용서와 화해에 있다는 거죠. 물론 용서와 화해로 가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가 일단 진상 을 규명할 수 있어야 했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특정이 됐어야 했죠. 그 행위가 어 떤 행위였는지 밝혀져서 진정한 사과가 있고 용서가 있어야 화해가 가능합니다. 결국은 국민의 화합으로 가야 하는데, 그 국민의 화합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의 목적이었습니다. 이런 의미가 있고, 단계가 있습니다. 지금 하버드대학 법대 학장을 하고 있는 마스다 미노우라는 분이 계십니다. 저하고도 친분이 있는데, 한국에 이런 과거청산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눈 적 이 있고요. 그런데 이 분이 <복수와 용서>라는 책을 낸 적이 있어요. 거기에서 보면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 이런 과거청산에 마지막 단계는 용서와 화해인 데, 그 전제가 되는 사과가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만, ‘불완전한 사과는 아니 한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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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것만 못하다’ 이런 말을 그 책에서 썼습니다. 그 부분을 읽고 제가 당시에도 감명 받았습니다. 사과는 이런 진정성이 있는 사과, 완전한 사과여야 하죠. 그래서 그 사과가 어떤 사과여야 할까 심각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어떤 정치인으 로서, 대통령 후보로서 지금 어떤 그런 캠페인의 일환으로 그 시점에서 하는 사 과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 사과는 불완전한 사과, 다시 말해서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김

그렇죠. 그렇게 받아들이고 계시네요. 장호권 선생님은 장준하 선생님

이 돌아가셨을 때 56세셨어요. 장

만 56살이었습니다.

그 뒤에 어떻게 지내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생각하기조차 싫은 삶이었는데, 이제 되풀이해서 힘들

었다, 일일이 하나하나 기억하긴 싫지만은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백성으로 살기 정말 힘들었다 그겁니다. 김

그래서 오랫동안 한국에 안 계셨었죠?

네. 제가 장준하 선생님, 저희 아버님께서 1975년 8월 17일날 그렇게

죽임을 당하시고 그 다음해 76년 4월 19일날 제가 밤에 테러를 당합니다. 그때 턱뼈가 다 부셔져 가지고 경희대병원에서 6개월간 뇌수술과 치료를 받으며 누워 있다가, 제가 누워 있는 동안 제가 장남입니다만 저희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죠. 살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그래 퇴원하고 나서 집안 식구들이 살아가기 위한 방편 으로 전부 헤어지기로 작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모여 있으면 먹고 살기가 힘드니 까. 여동생 둘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집을 보냅니다. 제가 별로 안 좋아했습 니다만 입을 줄여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면 창피스럽습니다만, 시집을 보내고 뿔뿔이 헤어지기 시작했죠. 모친은 제주도로 시집간 여동생 시집에 가서 기대서 살게 해드리고, 결국은 여동생 하나 남동생 하나는 미국에 들어가서 아직까지도 영주권 이런 거 못 받고 살고 있습니다. 37년 동안 우리 가족은 한 번도 자리에 못 모여 봤습니다. 이제 세상을 바꿔가지고 우리 가족도 한번 다 모여 봐야겠죠. 하여튼 고생했다는 얘기는 이제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김

예. 꼭 빨리 모이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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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감사합니다.

최교수님께서도 아버

님 돌아가시고 외국에 나가셨 어요. 장

네. 아버님 돌아가시

고, 물론 집안에 가장이 안 계 신다는 것이 가족에게 큰 슬픔 이겠지만, 아버님 당시에도 잘 알려지신 분이었는데 간첩의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저희 모두가 간첩의 가족이 되어 있고, 간첩의 자식으로 낙인이 찍혀 있어서 저희는 초등학교도 당시에 여러 번 전학을 했어야 했습니다. 거주지도 여러 번 옮겼고 친한 친구에게조차도 내 아버지가 누구다,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없잖아요. 그러 니까 그런 유년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요. 저희 어머니께서는 가능하면 저 를 외국으로 보내려고 노력을 하셨어요. 그게 처음으로 가능하게 된 게 고등학 교 졸업하고 바로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외국에 유학을 간다기 보다는 일단 국내에서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는 간첩의 가족으로 되어 있기 때 문에 빨리 해외에 나가서 이 사실을 밝히려 한 거죠. 당시에 아버님께서 아시던 외국의 지인들, 그때에는 아버님께서 독일에서 유학을 하셨고, 하버드 법대에 서 연구생활을 하셨고 그래서 돌아가셨을 당시에도 독일이나 하버드 법대 교수 님들이 저희에게 전문을 보내 주셨습니다. 위로의 전문이죠. 또 우리 정부에도 공식적인 항의도 했는데, 아무런 답변도 받을 수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 저는 연 락이 두절되어 있었고, 그래서 84년도에 처음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독일 에 가서 미국에도 그렇고 독일에 계신 분들도 그렇고 미국까지 가서 만나 뵐 수 는 없었지만 제가 등기속달로 우편물을 보냈었고, 등기속달로 우편물을 받고 답 을 받았습니다. 저로서는 어린 마음에 이제 외국에 나오면 어떻게 할 수 있지 않 을까 그런 마음이었지만 사실 외국에 나와서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 요. 그러니까 국내의 문제는 국내에서 해결이 되어야 했던 거죠. 그리고 외국에 서는 이미 아버님이 간첩일 리가 없다, 당시 정부에 의해서 그렇게 공권력에 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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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살해된 것이지 자살을 하셨을 리 없다, 이미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외국에서 어떻게 무슨 조치를 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 방법이 없는 거예 요. 그런 상황이었어요. 김

아버님도 법대 교수님이고, 교수님도 법대 교수시잖아요. 어떻게 같은

공부를 택하셨어요? 최

예, 그 부분은 이런 아버님의 비극적인 죽음과는 조금 다른 아버지와 아

들의 관계에서 생각되는 거 같아요. 아버님은 대단히 일찍 독일에서 법학 공부를 하셨습니다. 50년대 중후반 이때 공부를 하셨는데, 민법 공부를 하셨는데, 그 때는 대한민국에 아직 민법전이 없을 시절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해방이 되어서 우리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하루빨리 우리 법학을 선진 법학의 수준으로 끌 어 올려야 되겠다. 그런데 일본 법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면 독일이 나 프랑스, 서구의 선진 법학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루빨리 선 진법학을 받아들여서 일본보다 나은 법체계를 만들어야 되겠다. 이런 일념으로 유학을 가셨던 분이거든요. 법학의 선진화, 법학의 발전, 여기에 헌신하겠다고 교수가 되신 분이신데 마흔 둘에 그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으니까 너무 안타깝죠. 그 당시의 학자로서도 안타깝고, 제가 자식의 입장에서 보는 아버지, 그런 꿈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 꿈이 완전히 무산된 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또 아버지의 삶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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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본다는 게 아버지가 남기고 간 책들이 항상 저희 응접실을 다, 벽을 다 에워싸 고 있는 거예요. 저희가 이사를 다닐 때마다 제일 힘든 짐이 아버님의 책이었는 데 그 책들을 계속 보면서 독일어로 된 책들, 일본어로 된 책들, 영어로 된 책들, 제가 다 읽을 수가 없잖아요. 그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 이런 것이 제일 궁금했 었고, 어떻게 생각하면 나이브하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짐이라고도 생각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런 얘기들을 다른 분들을 통해서 많이 들었어요. 그 런데 저로서는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당연히 나는 이 길을 갔으면 좋겠다는 생 각을 가지게 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다가 보니까 아버님이 가신 길과 같은 길 이라고 할까요. 아버님이 공부하셨던 같은 대학의, 아버님이 배웠던 독일의 은 사님께 같은 법학을 배울 수 있었고요. 김

지금 다음달 10월 19일이 최종길 교수님 39주기인데, 어떠세요? 최종

길 교수님 사건과 관련해서 남은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

남은 과제는 제가 아까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아버님의 사건은 많은 사

건 중에 사실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청산의 문제는 인권침해의 문 제이고, 국가공권력에 의해서 국민의 인권이 침해된 사건들입니다. 아직도 해 결된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그 해결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해결 된 것인가라고 생각해 볼 때 참 참담한 심정인 거죠. 여기에서 우리가 지쳐 쓰러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청산, 인권의 문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해결해야 되는 과제로 인식을 해야 하고, 또 이 것을 정부의 입장에서 끝까지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상시적인 기구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과거청산이라고 해서 어느 별개의 문제가 아니 라 크게는 인권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인권의 침해는 지금 이 시점에 도 있을 수 있지만, 과거의 있었던 인권침해 사례를 우리가 조사하고 계속 그런 일의 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을 하고, 그런 문제는 지금 인권을 생각하시는 여러 분께서 같이 해주셔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김

그 시절에, 유신 시절에 국가폭력이 있었다면 많은 세월, 교수님이 중

년의 나이가 됐는데, 아홉 살의 어린 소년이 중년 남성이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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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거죠. 그렇다면 이 폭력 을 어떻게 멈추게 해야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선생님이 말씀해 주실 까요. 장

제가 최교수님 얘기를 듣다 보니까 제가 뭐라고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

는데요. 다 옳은 말씀이고, 그런데 저는 이렇게 봅니다. 과거청산 법 개정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것을 해결하려면 과거의 유신과 관련된, 그 전에 친일과 관련된 모든 제 세력들을 정리해야 된다. 그것이 정리되지 않고는 과거사 청산 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리되는 동안에 인권이라든가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라든가 그런 것을 다 찾을 수 있게 되겠죠. 가장 중요한 것 은 바로 그 인권을 유린하겠다, 대한민국 백성을 노예로 삼겠다, 소위 일본 식민 시절에 일제들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을 대한 것과 똑같이 대했던 유신 잔 재들이 정리되어야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

실제 그런데 정리가 참 어려운 것이, 친일청산 이런 거 정말 어렵잖아

요. 지금도 기득권에 있는데. 장

네, 맞습니다. 참 어렵죠. 전 그 원죄를 1945년 8월 15일 이후로 본다

면 외세에 의해서 우리가 독립을 못했다고 합니다만, 그들에 빌붙어 가지고 이 나라를 또 다른 형태의 식민지로 만들어 놓은 자들이 있었죠. 그들이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위해서 36년간 우리 국민을 몹시 괴롭혔던 친일 앞잡이들을 그대로 고용해서 중책을 맡겼죠. 제가 이전에도 말을 했습니다만, 만일 그들이 없었더 라면 그 당시 우리 광복운동을 했던 정통성 있는 지도자들께서 이들을 다 물리치 고 정통성 있는 나라를 만들었다면 아마 오늘날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서 유신에 대해서 이렇게 한스러운 얘기를 하고, 의문사를 당했다 이런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 원죄가 바로 거기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 이 탄생되었고 그러다 보니까 일제시대 때 황군이란 자가 거기에 세뇌되어서 대 한민국을 일제 때와 또 다른 식민지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 나라와 백성을 농단했 다는 사실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모양만 바꿨을 뿐이죠. 그러니 일제 식민지 생 활 36년간 대한민국 백성이 인권을 찾았습니까, 인권이 있었습니까. 똑같이 짓 을 했다는 거죠. 그래서 결국 우리가 지금 최교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법치로 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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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들이 다 정리되지 않고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번 기회에 그들이 다시 수면 위에서 이 나라 백성을 다시 식민지화 만들어 보려 는 이 길을 막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김

그러시군요. 장준하 선생님 이장을 계기로 유골 사진이 공개되면서 많

은 국민들이 빠른 시간 안에 사인진상규명이 되기를 바라는데, 아까 백만인 서 명 운동도 하고 계신다고도 말씀하셨는데, 지금 어떤 진전이 있고, 향후 어떤 계 획을 가지고 계신가요? 장

지금 장준하 선생님이, 제 선친이 37년 만에 나오셔가지고 국민적 분노

를 사신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건 장준하라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죠. 우리 최 교수님도 옆에 계십니다만 일제 잔재의 연장인 유신 그 시대에 희생당한 애국 민 주 지사들, 이런 모든 분들의 한을 풀고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기 위해서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현재 인터넷으로 서명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또 가두에서 서명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장준하 암살 의혹 대책위’ 사무 실도 내일 개소를 합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것입니다 만 그 이전에 국민들의 의지가 많은 서명으로써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는 그것과 맞물려서 전국의 서명운동 하시는 분들, 단체, 애국시민 여러분들 모 임에 가서 강연 아닌 강연으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미래 어떤 조처를 해야만이 우리가 다시는 이러한 잘못된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지 에 대해 강연을 다니고 있습니다. 김

교수님, 그동안 우리 유가족들이 많은 노력들을 하셨을 텐데요. 이렇게

오랜 세월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가요? 최

진상규명의 문제는 장호권 선생님께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만, 어떤 정

치적인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안타깝게도 어떤 정 치적인 문제인 것으로 인식이 되었던 것 같아요. 국가와 국가기관이 국민을 죽 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우리 모두가 나서서 진상규명에 발 벗고 나서야 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가해기관 이 경찰이 되었건, 가해기관이 당시 중앙정보부가 되었건, 그 경찰은 지금도 남 아 있고 그 과거의 중앙정보부는 지금도 사실 국정원으로 남아 있다는 거죠. 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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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게 되었을 때 오히려 우리 국정원은 과거의 중앙정보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발 벗고 나서서 진상을 조사하겠다, 우리는 그런 과거 와는 단절하겠다, 그런 단계에 가지 못한 거 죠. 당연히 그렇게 갔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어떤 방해를 하는 정치적인 세력이 있 었고, 또 과거의 이런 독재자들을 지지하는 세력들도 있었고, 이런 부분의 걸림돌이 있었 고 그것을 우리가 뛰어넘지 못했다고 생각합 니다. 김

장선생님 끊임없이 재조사를 요구했었잖아요. 그런데 그것과 관련해서

우리 정부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해왔는지? 장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과거의 유신정권과 이를 계승한 전두환 폭력

분자 정권, 노태우 정권. 국민적 관심보다는 정치적 술수로 정권이 바뀌어 왔습 니다.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져 오면서 많은 분들이 과거의 잘못 된 역사를 바꿔보자는 노력을 해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라는 기구가 만들어졌 습니다만, 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라는 조직 자체가 한시적이기도 했습니다만 약한 권한 때문에 좀 전에 우리 최교수님이 말씀했다시피 각 기관의 협조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죠. 또 거기까지 들어갔고 정권은 바뀌었지만, 그들도 비협조적 인 대한민국 최고 사정기관의 과거 잘못된 잔재들의 존재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갈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나는 이런 요식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했는데, 결국 그렇게 끝났습니다. 한 예로 진상규명을 위해서 조사를 하다가 2기가 끝나 고, 이러한 소위 과거의 잘못된 조사를 위하여 정치인들의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 3기를 다시 만들어서 규모는 좀 작더라도 정말 독립되고 권한 을 다 준 3기 진상규명위원회가 있어야겠다고 해서 그 당시 국회의원들과 3기를 출범시키자는 뜻을 모아 위원회를 발의하려고 국회에 올려놨습니다. 그런데 그 서류가 법사위원장이란 자의 책상 속에 들어가서 시기를 놓칩니다. 그래서 무산 이 되고 말았죠. 그런데 그 당시 법사위원장이란 자가 왜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놓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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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열쇠를 잠가 놨느냐. 바로 그 자신이 과거 잘못된 친일과 군사독재의 잔재였 기 때문입니다. 법사위원장이란 자가 통과시키기 싫었죠. 그래서 그 서류는 책 상 속에 들어가서 소위 기간을 넘기고 무산되고 맙니다. 이런 것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과거사가 제대로 규명될 수 있겠느냐. 그래서 이제는 정말 제대로 정리해 야 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발붙이지 못하고 그들이 모든 이 사회, 국가 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올바른 국민들이 이 대 한민국을 깨끗한 대한민국으로 국민 품에다 만들어 넘겨줄 배달꾼을 선택해야겠 다. 그것만이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겠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김

국가공권력에 의해서 인권침해를 당하는 일,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

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요. 오늘 방청 오신 분들 혹시 오늘 두 분께 질문 드릴 분 있으세요? 없으신가요. 다 같이 아픔을 당하신 유가족 여러분들이 오신 걸로 아는데, 아마 같은 마음으로 앉아 계시리라 생각하고요. 두 분께서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거 같아요. 그동안 못 드렸던 말씀이던지, 오 늘 오신 분들께 한말씀씩 부탁드릴까요. 장

우리 최교수님이나 유가족들은 가족을 잃고 가장을 잃고 가슴이 무척 아

프셨을 겁니다. 정말 누구도 당하지 못한 아픔을 느끼셨고. 특히 자상했고 가족 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가장을 잃어 많이 아팠을 겁니다. 저는 이해합니다. 그래 서 저희 집안에 동생들도 그랬겠지만, 저는 아픔보다 굉장히 화를 많이 가지고 살았습니다. 한과 화를 가지고 소위 복수를 해야겠다, 이런 생각까지도 가지고 살았습니다만 그것을 나이가 들면서 이것을 어떻게 좀 삭히고 나라를 제대로 된 나라를 좀 만들어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만 아직까지 다 없어진 건 아 닙니다. 이제 저희가 국민들과 과거의 잘못된 것을 바로세우겠다고 생각하고 동 참하시는 국민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사의 문제이고, 이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굉장히 중요한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이런 불행한 사태가, 이런 불행한 가족들이 나오지 않게끔 올바르게 판단을 했 으면 좋겠다,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마지막으로 이 나라는 우리의 나라다, 그들의 나라가 아니죠. 우리 손으로 우리나라를 가져옵시다, 이런 말씀을 드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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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싶습니다. 최

과거를 바로잡지 못하면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권

침해의 역사가 다시는 이 땅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바로 잡을 수 있 도록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언젠가는 진정한 사과와 진정한 화해, 용서가 있는 그런 세상이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 니다. 감사합니다. 김

오늘 못 오신 송철환 선생께서 열다섯 살 때 까까머리 중학생이 사형수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볼펜을 꼭꼭 눌러쓴 탄원서를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 편 지를 짧으니까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당시에 법정에 제출했던 탄원서입니 다.

“박대통령 각하께 눈물로 호소합니다. 각하 저는 이번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으로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은 송상진의 아들입니다. 저는 미미한 지식 으로나마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어떠한 것인지를 어느 누구 못지않게 잘 알 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저희 아버지는 과거 교직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만, 공산주의자이며 공산주의를 찬양한 적이 있다는 자가 누구입니까. 저희 들에게 건전한 민주주의 교육을 시켜주신 아버지께서 인혁당 당원으로서 공 산주의자라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저희 형이 경북고등학교에 입 학하여 입학금 때문에 걱정하던 아버지께서 친구 분께 빌린 돈을 공작금으 로 받았다니 너무 억울한 일입니다. 저는 다만 법치국가로서, 증거법정주의 로써, 어쩌면 이렇게 억울한 재판을 하였는가 하고 슬프고 억울한 마음뿐이 들지 않습니다. 대통령 각하, 이번 민청학련 사건을 잘 살피시어 바른 재판 을 열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무한히 바쁘신 줄 잘 알지만 이 인간에게나마 베푸신다면 뭐라 존경을 표현하겠습니까. 각하, 저희 아버지는 결코 그러한 인물이 아닐 겁 니다. 저희 가정에게도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면 저는 민주시민으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각하께서 어버이 은혜로 해주십시오. 바쁜 시간에 무례를 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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릅쓰고 각하께 편지를 올립니다. 1974년 11월 4일 일요일 경북 대구시 경상중학교 3학년 5반 송철환.” 예, 이런 편지입니다. 장준하 선생님, 최종길 교수님, 그리고 인혁당 재건위 사 건에 연루되었던 서도원 선생님, 도예종 선생님, 송상진 선생님, 우홍선 선생 님, 하재완 선생님, 김용원 선생님, 이수병 선생님, 여정남 선생님 그리고 많은 민주열사 여러분, 오늘 이 시간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1970년 대의 그 날이 오늘에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 아프시겠지만 오늘 나와 주 신 두 분께 큰 박수 드리며 오늘 이 자리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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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문

유신의 부활만은 막아 주십시오

생각하기 싫은 시간이 있습니다. 꿈에서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세월이 있습니다. 잊 으려 해도 생생하기만 한 잔혹한 시절이 있습니다. 부모를 독재정권에 빼앗긴 자식들 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견디며 살아왔습니다. 24시간 감시를 받는 가난한 삶이지만 꿋꿋했습니다.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을 이끌어 준 힘은 우리 부모님들 이 꿈꾸던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통을 마다하지 않은 수많은 분들의 헌신임을 잘 알 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추어진 것이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 에서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는 사실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밝혀졌습니다. 법원 에서는 국가의 잘못을 인정해 배상 판결을 내렸습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도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났습니다. 국가가 배상을 했습니다. 장준하 선생님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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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있습니다. 이미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진실을 밝히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길 또 한 험난했습니다. 사사건건 반대하고 방해했습니다.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감 추고,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을 갈등을 부추기는 집단으로 매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들이 누구입니까. 지금 정권을 잡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세력과 그 권력을 지 속시키려는 자들입니다. 과거사는 논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과거사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대사이고, 반 인권적·반인륜적 범죄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입니다. 이를 갈등을 조장하는 논란거리 정도로 치부하는 역사인식에는 참담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 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누구에게나 가족은 소중합니다. 세상 사람이 아닌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마 음도 다 같습니다. 부모 자식의 사이를 갈라놓을 생각도 없습니다. 부모를 잃는 슬픔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죽음이 개인을 넘어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장호권의 아버지만이 아닙니다. 최종길 교수가 두 자녀의 아버지만 이 아니듯, 사법살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세상을 등진 여덟 분은 우리 모두의 아버 지입니다. 그 분들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독재정권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은 한 개인의 아버지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이 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박정 희 또한 개인의 아버지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희는 사과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사과를 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재야의 대 통령으로 독재정권과 정면으로 맞섰던 장준하 선생님의 죽음의 진실이 아직도 밝혀지 지 않았는데,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데 사과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의문사진상규 명위원회에서 고문치사당한 사실이 밝혀졌고 법원에서 배상 판결까지 내렸는데도 최 종길 교수님의 무덤 앞에서 잘못을 비는 자가 없습니다. 인혁당재건위라는 사건을 조 작해서 사형 판결을 내리고, 법적 절차도 지키지 않고 다음날 새벽에 여덟 분을 서둘러 사형집행을 한 자들이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지금도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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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누가 사과를 할 때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저지른 개 인과 집단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고뇌를 했다는 사람은 사 과를 할 것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을 다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국민대 통합이 아니라, 진실규명의 길에 함께 하겠다고 나서야 합니다. 진심을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잘못을 뉘우친 사죄가 가능합니다. 비로소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됩니다. 중앙정보부 요원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최종길 교수를 묻는 묘지 앞에 선 둥근 안경 을 쓴 소년은 지금 불혹의 나이를 넘어섰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묘소가 수해로 허물어 져, 타살의 증거를 세상에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인혁당 가족의 가슴엔 오늘도 여전히 대못이 박힙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자들은 여전히 힘이 강합니다. 국가 권력을 장 악하고 있습니다. 모든 정보를 쥐고 감추기에 급급하더니 이제는 아예 왜곡하려고 합 니다. “나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라는 글을 남기고 독립군의 길을 걸으신 장준하 선생님의 뜻을 받들고자 합니다. 자식 들도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는 길을 가고자 합니다. 장준하, 최종길, 서도원, 도예종, 이 수병, 송상진, 김용원, 우홍선, 하재완, 여정남 선생님이 꿈꾸고 만들려 했던 세상, 국 민이 사랑할 수 있는 나라, 국민이 의지할 수 있는 나라, 그리고 고루 잘 살 수 있는 나 라, 그런 나라를 만들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 길은 아직도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지 않는 유신 세력의 부활을 막는 길밖에 없습니다. 저의 아버님뿐만 아니라, 박정희 독재정권과 그 세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모든 사람들의 진실이 밝혀지고, 역사를 바로세울 수 있도록 모두가 한마음 한뜻 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에 국민 여러분이 나서주시기를 간곡히 호소합니다. 9월 26일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열린 대담회 <박정희 정권에 빼앗긴 아버지, 남겨진 아들이 말한다>에서 장호권, 최광준 두 유가족이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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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한민통 관련 간첩 조작사건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의한 피해자 증언 김정사

먼저, 이러한 귀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주최 측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김정사(金整司)라고 합니다. 1955년, 재일 한국인 2세로서 일본 사이 타마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저의 부친은 일본 식민지 시대에 아홉 살에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에서 성장했습니다. 일본군의 군속으로서 세 차례나 전장에 나가게 되었고,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에서 전투에 참가했는데, 일본이 2차 대전 에서 패전하자 포로가 되었다가,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사이타마현에 서 건설업을 경영했습니다. 저는 고교 2년 때인 1972년 8월 초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일본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한국말도 몰랐고, 특히 부모님 고향인 충무 · 삼천포를 방문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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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을 때는 무척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경험한 것이 마음속에서 한국인으로 서의 민족의식을 싹트게 한 것 같습니다. 일본에 돌아가자마자 처음에는 이와나미 신서에서 발간한 김달수 선생님의 <조선사>를 읽었고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을 읽 었습니다. 당초 나의 관심은 ‘민족차별’에 있었습니다. 일본 이름으로 학교에 다닌 적도 있어서,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대단한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김지 하’ 씨와 만났습니다. 김지하 씨의 시집을 읽었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 나 훌륭한 시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시인을 형무소에 가두 는 독재 정권은 타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일본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모국 한국의 대학에 진학한 동기가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 자신의 IDENTITY를 확립하고 싶었습니다. 이로 인해 마음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한 국의 학생운동과 제휴해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데에 조력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 습니다. 당시 저는 이와나미 서점의 <세계>는 반드시 읽었고, 재일 한국인 유 학생 간첩 조직 사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국 유학을 하려 할 즈음에 저 자신이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유학하 였습니다(신변에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976년 3월 어학연수를 위해 <재외국민연구소>에 입소해 10개월 동안 한국 어를 연수하고 1976년 3월 서울대학 사회계열 법과에 입학했습니다. 신림동 하 숙에서, 광주일고 출신의 2학년 학생 두 명과 동거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고학 생으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에서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친구들이 김지하 씨의 <법정투쟁기>를 보고 싶다고 해서 일본에 돌아갔을 때 카피를 해서 가져다주기도 하였습니다. 언제인가 정사 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 선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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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여 하숙집 방에서 만나 아침까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선배는 이와나미 신서에서 나온 책 중에서 읽고 싶은 책이 있으니 가져다 달 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4월 19일 아침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하숙집 선배 가 아침 식사시간에 “정사 씨 오늘 데모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 는 긴장하면서 학교로 갔습니다. 돌연 “와” 하는 소리가 났고, 사복 경찰들이 한 명의 학생을 붙잡으려고 사방팔방에서 달려들었습니다. 그 학생은 유인물을 뿌 리면서 잡혀갔습니다. 저는 그 학생의 얼굴을 보고 놀랐습니다. 요 전 날 나의 방에서 아침까지 이 야기한 그 선배였기 때문입니다. 형사가 “줍지 마” 하고 소리쳤습니다만, 저는 선배가 뿌린 유인물을 주워 가방에 넣어서 화장실에 가서 읽어 보았습니다. 매 우 격조 높은 <구국선언문>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기 며칠 전, 한양대에 다니 고 있던 재일동포 여학생 손정자로부터 친구 유성삼 씨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전화가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걱정만 하고 있던 차에, 4월 21일 아침 “김정사라고 하는 학생이 있지요?”라며 양복 입은 사람이 하숙집에 왔습니다. 내가 밖으로 나오자 “니가 김정사야? 너, 유성삼이 알고 있지?”라고 물어보 아서 “알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이리 나와”라고 하여 바깥으로 나가니, 차가 두 대 서 있었고 그 중 한 대에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유성삼이 타고 있었 습니다. 저도 수갑을 차고 다른 차에 실려 갔습니다. 그 사람이(나중에 오계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너 북한에 몇 번 갔다 왔어?”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가 본 적 없습니다”라고 하니 “거짓말하지 마, 이 빨갱이놈” 하고 말했습니다. 육군 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에 연행된 저는 고병천 수사관이(이 이름도 나중 에 알았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오늘까지 있었던 일 모두를 써라”라고 해서 오랫동안 써서 완성했습니다. 제가 쓴 자술서를 가지고 가서 한참만에 돌아온 그 는 말했습니다. “너는 악질이다. 이것으로는 죄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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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되었습니다. 전기고문, 물고문, 그리고 엘리베이터실에도 데리고 가서 물고 문, 전기고문을 했습니다. 어느 날 고병천이 “너는 김지하를 어떻게 생각하지?”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고 수사관은 격노해서 “엎드려. 너도 민족주의자라면 한번 맞아봐라” 하 면서 곤봉으로 나의 등으로부터 허벅지까지를 마구 구타했습니다. 너무나 아픈 나머지 나중에는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정신이 희미해지게 되었습 니다. 구타당한 곳은 새카맣게 되어 일주일 이상, 변기에도 앉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저는 지금 다리에 장애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고문이 줄어든 어느 날 그가 진술서라는 것을 가져오고 이것을 베껴 쓰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쓰면서 내 자신이 말한 것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베껴 썼습니다. 다 베껴 쓰자, 거기에 서명하고 무인을 누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사실과 다 르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런가. 그렇다면, 또 할까?”라고 했습 니다. 저는 다시 고문을 당할 수는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구치소에 송치되어 독방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안심했습니다. 이것 으로 더 이상 고문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고. 구치소의 운동시간 때 김지하 씨와 스쳐 지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감동했 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어 저는 기소 사실을 모두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판사님, 저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 물고문을 받았습니다” 하고 호소했습니다만 재판장은 어떤 반응도 없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설마 재판관이 그렇게까지 무시하리라고는 생각하 지 못했습니다. 재판에서는 우리 사건보다는 ‘한민통’에 더 많은 시간이 소비되 었습니다. 한민통의 간부를 북한에 데려가서 공작금을 건네주었다고 하는 자수 간첩이 증인으로 등장하였고, 그리고 한민통 기관지의 내용을 검토하고 증거로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습니다. 2심에서는 징 역 10년이 선고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고 이 ‘한민통 재판’이 가지는 의미 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박정권이 고 김대중 씨를 합법적으로 말살하려고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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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 다. 나의 판결에 의해 처음으로 한민통에 대해 반국가단체라고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형이 확 정되어 저는 광주교도소로 이 감되어 특사의 독방에 수용되 었습니다. 어느 날 교도관이 “전향해!”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공산 주의자도 아닌데 전향하라는 것은 공산주의자가 되라고 말 하는 겁니까?”라고 물었습니 다. 교도관은 질린 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서울구치소, 광주교도소에서 많은 정치범으로부터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특히 광주교도소에서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여러분들로 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1979년 8월 15일 저와 함께 16명의 재일 한국인 정치범이 석방되었고, 12월 10일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부친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면 서 그 사건으로 인해 너무도 많은 경제적 부담을 아버지에게 지우게 된 것을 알 게 되었습니다. 1990년에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서는 사장이 되어 회사 를 경영하였습니다. 2004년 민변의 이기욱 변호사와 만나고, 나의 사건의 재 심에 관해서 협의하였고, 재심을 해보자고 마음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김정사 사건을 조사 대상으로 결정하였고, 3 명의 조사관이 일본을 방문해, 김정사 및 여러 증인으로부터 사건을 조사하였 고, 2007년 11월 ‘김정사는 간첩이 아니지만, 한민통이 반국가단체인지 여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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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발표하였 습니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 김모라고 하는 조사관이 일본을 방문해서 나와 증인 의 진술 조사를 실시했지만, 그 후 아무 연락도 없고, 2008년 새롭게 김영진 조 사관이 일본에 와서, 다시 나와 증인의 진술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11월 진실 결정 통지서가 날아왔고 ‘김정사 사건은 조작되었고, 한민통은 반국 가단체로 볼 수 없다’라고 하고, 국가에 대해서 이 사건을 재심할 것을 권고했 습니다. 저는 당초 진실화해위원회에 많은 재일 한국인 정치범이 신청을 했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렇지만 신청한 사건은 7건이었고, 조사대상으로 선정되었던 18건 중 진실규명 결정 통지서가 나온 것은 10건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신청이 적었 던 이유는 위원회의 홍보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원회 는 재일 한국인의 사건에 대해서 너무도 소극적이었습니다. 2010년 5월 저를 포함한 4명의 신청인이 진실화해위원회를 방문해 위원장 또 는 상임위원과의 면담을 요구했습니다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명춘 국장과 면 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3건밖에 진실규명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국장은 정권이 바뀌 어 위원회의 체제가 바뀌었으므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고 변명하고 있었습니 다. 그렇다면 체제가 바뀌기 전에 노력을 했는지요? 많은 시간을 소비해가며 일본에 와서 조사했으면서, 제대로 조사를 행하지 않 았기 때문은 아닌가요? 2010년 1월 저는 이기욱 변호사에게 의뢰해서 서울고등법원에 재심 재판을 신청했습니다. 2011년 5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 재판이 개시되었고, 진실화 해위원회의 보고서가 있었기 때문에 사실심리는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재판장은 곧 결심하려고 했습니다만, 한민통이 반국가단체는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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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하기 위해 이 변호사가 심리를 요청했고, 그 문제에 대해 심리공판이 진행되 었습니다. 판결에서는 김정사는 무죄가 되었습니다만 한민통에 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2010년 8월 저는 재일 한국인 정치범 여러분들과 재일 한국인 정치범의 석방 운동을 오랫동안 지원한 일본인과 함께 도쿄에 ‘NPO법인 재일한국인양심수의 재심무죄와 원상회복을 획득하는 회’를 설립했습니다. 이 회의 목적은 1970년대 · 80년대에 간첩 조작 사건에 의해서 피해자가 된 분 들의 재심 재판을 지원해 국가적 구제를 실현하는 것으로 사건으로 구속된 것에 의해 재입국 허가 기간 내에 일본에 재입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실한 법적 지 위의 원상을 회복하는 것에 있습니다. 2010년 12월 이석태 변호사를 단장으로 하는 5명의 ‘재일동포변호단’이 결 성되었습니다. 일본에 있어서는 도쿄에 저희 모임이 있고, 오사카에는 석방된 정치범이 결성한 20년의 역사가 있는 ‘재일 한국인 양심수 동우회’와 2010년에 결성된 ‘재일 한국인 양심수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회’가 있어, ‘재일동포 변호 단’과 함께 재심 재판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오늘까지 재심 무죄 확정자 가 7명, 대법원 계류 중도 포함한 재심 재판 계류 중인 사람이 8명, 재심재판 개 시 결정이 나온 사람이 3명, 재심 재판을 신청한 사람이 4명, 재심 재판 신청 준 비 중인 사람이 5명입니다. 재일동포 변호단은 우리를 위해서 자주 일본을 방문해 주었고, 10월 12일부 터 14일까지도 오사카를 방문해 피해자와 면담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호단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단기간에 경이적인 성과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재일 한국인 피해자는 160명 정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연락이 되는 사람 은 40명 미만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의 120명 정도의 사람과 연락을 해, 재심을 진행시켜 나가는 것이 남겨진 큰 과제입니다. 또 수사기관의 고문에 의한 육체적 · 정신적 후유증에 대해서도 전문적인 치유 시스템을 생각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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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생각합니다. 사건으로 인해 상실된, 일본에 있어서의 법적 지위의 회복에 관 해서는 지난 6월 일본 국회에서 여당의 국회의원이 법무부장관에게 따져 주었습 니다. 그에 대해 법무부장관은 검토하겠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본래 저희들은 1945년 9월 2일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한 한반도 출신자 및 그 자손으로서 1965년의 한일협정에 의해 협정 영주자로서 비교적 안정된 법적 지 위가 주어지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법률 개정에 의해 ‘특별 영주자’라고 하는 자 격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본을 떠나 한국에서 구속되어 재입국 허 가 기간 중에 일본에서 재입국할 수 없었다는 점으로 인해 ‘특별 영주자’ 자격을 상실하고 ‘일반 영주자’로서의 법적 지위가 주어졌습니다. 이것 때문에 일본 입국 시 지문 날인 의무, 취업 시의 고용자에 대한 보고의무 등 매우 불안정한 법적 지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자손 대까 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일본에 있어서의 법적 지위 회복의 문제는 분명하게 인권의 문제입니다. 우리 는 우리의 아이나 손자를 위해서도 ‘특별 영주자’의 자격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향후는 한국 정부와 함께 일본 정부에 대해서 교섭을 해 나가고 싶습니 다. 오늘 모임에 함께하고 계신 분을 시작해 한 사람이라도 많은 분에게 우리 재 일 한국인 피해자의 재심 무죄에 대한 이해와 또 우리의 일본에 있어서의 법적 지위 회복의 문제에 이해와 협력을 받을 수 있다면, 무엇보다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정사_ <NPO법인 재일한국인 양심수의 재심무죄와 원상회복을 쟁취하는 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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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김기수와 엄마 박미경의 아들로 산다는 것!!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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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 사면파 73대 장손으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 부모님의 아들로 산다는 것······.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인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를 생각 해보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정말 예뻐해 주셨고, 하고 싶은 건 대부분 할 수 있게 해주셨다. 가현이, 동찬이 두 동생들과 터울이 1년밖에 나지 않아서 날마다 어울려 놀았던 기억도 좋았다. 하지만 가끔은 밉기도 했었고,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때도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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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말이다. 아빠가 이내창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었을 때는 늘 함께 행사에 참여했었다. 어른 들만을 위한 모임인 것 같아 가기 싫은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어렸을 적 캠프의 추억 은 즐거운 기억으로 오래 남아 있다. 우리 부모님의 아들로서 가장 이로운 점은 학원을 안 간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즐 거운 일이 있을까?) 친구들이 학원에서 골머리 썩는 동안, 뺑뺑이 돌고 집에서 늦게까지 학원 숙제로 잠 을 못자는 동안, 나는 하고 싶은 걸 하기도 하고, 집에서 편히 쉴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고 신경을 써야 할 점도 있다. 공부의 계획, 해야 할 일들을 내가 직접 계획하고 실천해야 한다(이게 흔히 얘기하 는 자기주도 학습이겠지?). 시험 때마다 학원에서 학원생들에게 내주는 기출문제, 요약집 등등 시험공부에 필요한 것들을 나는 직접 만들어야 한다. 또 학원에서 친구 들이 어울리는 시간에 나는 집에서 혼자 지내야 한다는 것도 별로 좋지는 않다. 물론 대부분 내가 학원을 안 다니는 것을 부러워하지만, 가끔은 나도 학원에 다니고 싶다 는 생각이 든다. 아빠는 공부를 특이한(?) 방법으로 하라고 일러주신다. 어찌보면 당연한 방법인데 친구들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빠가 알려주신 방법은-내 생각이지만-가 장 어려운 방법이다. 학원과 과외는 절대 사절!! 되도록 혼자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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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다. 아빠는 내 자신에게 맞는 공부법을 찾으라 하시지만 난 아직 잘 모르겠다. 학원을 다니지 않고 혼자 공부하는 것이 정말 나에게 맞는 공부 방법일까? 혹시 학원에서 하 는 암기식 공부가 나한테 더 맞는 건 아닐까? 많은 방법을 시도해보라고 하지만 많은 방법을 찾는 것부터가 매우 부담되고 힘들다. 가끔은 정말 공부를 포기하고 싶을 때 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내 안에서 뭔가가 포기하고 싶은 감정을 억제한다. 얼른 나한 테 맞는 방법을 찾아 길을 잡고 제대로 공부도 하고 싶다. 아니다. 그것보다 공부하고 싶은 분야, 내가 좋아하는 분야가 무엇인지 그 길을 먼 저 찾는 게 먼저겠지······. 아빠가 장손이기에 우리 집 장남인 나는 당연히 장손이다. 특히 성묘는 절대 빠져 서는 안 되기 때문에 힘들기도 하다. 1년에 두 번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남해 사천으로 가야한다. 그럴 때마다 항상 곤히 자고 있는 동생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졸음이 내 몸을 짓누르곤 했다. 하지만 장남이기에, 또 장손이기에 졸음을 이겨내고 불평없 이 차에 오르곤 한다. 뭐, 남해에 가면서 휴게소에서 호두과자도 먹고 맥반석오징어 도 먹고 도착해선 성묘를 한 뒤 항상 가는 회집에서 세꼬시도 먹고 가을엔 전어도 먹 고 좋은 점도 많다. 다시 생각해보면 힘든 걸 감수하고 다녀오는 보람과 즐거움이 있 는 것도 같다. ^^;; 장남으로 불편한 점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항상 동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고, 동생들과 같은 일로 혼날 때도 항상 더 많이 혼난다. 그럴 때마다 서러울 때도 있고, 그 서러움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하지만 장남이기에 동생들이 받지 못하는 좋은 것들을 받기도 한다. 무엇을 선택할 때 나한테 우선권을 주기도 하고 할머니나 여러 친척들이 더 많은 사랑을 주는 것 같 고 당연히 용돈도 더 많이 주신다. 항상 장남이라는 막대한 지위와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으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 동 하나하나가 이런 대우를 받을만한 행동인가를 생각해보지만 내 생각에도 많이 과 분한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지위는 내가 모두 감당하긴 힘들지만 여러가지를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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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자라기

받고 노력하면 언젠간 장남이라는 지위에 맞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골똘히 생각해보면 누구나 누구의 아들로, 딸로 태어남은 선택권이 없는 일이다. 내가 우리 부모님의 아들로 산다는 것, 가현이와 동찬이의 오빠, 형으로 사는 것, 대한민국 남자로 산다는 것,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내 자신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생각이 정립되어진다면, 앞으로 내 위치에서 살아가는 것이 늘 긍정적으로, 행복한 생각으로, 바르게 만들어지지 않을 까??? 난 행복한 것 같다. 김기수, 박미경의 아들로서 산다는 것이 행복한 게 아니라, 가족과 사람과의 삶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음에 행복하다 할 수 있겠다~!!!!!

김동현_ 김기수, 박미경 회원의 3남매 중 장남이다. 경기도 일산 정발중학교 1학년으로, 책 읽기와 카톡보내기, 여행을 좋아한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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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퓨처, 미래로 돌아가다. 김림

김림

나는 영화와 역사, 우주과학에 관심이 많다.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다. 미래에 관한 SF물에 관심이 많아 주말엔 관련된 영화나 영상물을 보는 게 취미이 다. 특히 시간여행에 대한 관심이 큰 편이다. 영국 드라마 <닥터 후>와 <타임머신> 같은 영화에 관심을 가지다가 우연히 책 을 보게 되었다. 1985년도에 만들어진 <백 투 더 퓨처>다. 엄마, 아빠 또래의 어른들은 아마 중고등학생 시절 <백 투 더 퓨처>라는 영화 를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온 주인공인 배우 마이클 J. 폭스 는 당시 여학생들에게는 책받침의 단골 주인공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에 나온 스포츠카이자 타임머신인 ‘드로리안’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 로 달려 바퀴자국만 남기고 사라지는 모습이 남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198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작고 한적한 도시인 힐 밸리에는 마티 맥플라이 라는 고등학생이 있었다. 마티는 스케이트 보드와 로큰롤을 좋아하고, 친구인 비 프에게 구박을 받으며 사는 아빠와, 알코올 중독인 엄마, 그리고 백수인 형과 누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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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자라기

와 함께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마티는 괴짜 발명가인 에메트 브라운 박사와 친 하게 지냈다. 1탄에서는 어느 날 새벽 마티가 브라운 박사의 호출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느 쇼핑몰에서 브라운 박사가 스포츠카 ‘드로리안’을 개조하여 만든 타임머신을 보게 된 다. 하지만 브라운 박사가 테러범에게 총을 맞고, 그것을 본 마티는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인 1955년으로 간다. 그곳에서 과거의 자신의 엄마를 만나게 되는데, 과거의 엄마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 고, 현재의 자신의 존재가 지워질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우연찮게 과거의 아빠를 괴롭히던 친구인 비프가 과거의 엄마를 성폭행하려는 찰나, 과거의 아빠가 비 프를 한 번에 때려눕히게 되고, 마티는 과거의 브라운 박사의 도움을 받아 다시 현재 로 돌아오게 된다. 현재로 돌아와 보니,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당시 1탄은 아들과 엄마의 사랑을 다룬 부도덕한 내용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상영이 지연돼 2년 후에나 상영되었다. 마티는 2015년, 미래에도 가게 된다. 마티의 아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을 구하기도 하고, 미래의 늙은 비프가 미래에서 산 1950년대부터 2000년까지 기록된 스포츠 연 감을 주워서, 타임머신을 훔쳐 타 1955년으로 가 과거의 자신에게 스포츠 연감을 주 어서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 현재의 모든 상황들이 다 엉망으로 바뀌게 된다. 결국 3탄에서는 가장 먼 과거인 1885년으로 돌아가 결국 타임머신은 파괴되고, 조 금 있다가 어느 증기기관차가 날아오는데, 그곳에는 브라운 박사와 부인 클라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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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그들의 아이들이 내린다. 브라운 박사는 증기 기관차를 타임머신으로 개조한 것 이다. 이 영화에서 2015년의 미래의 장면이 나오는데 현재로부터 3년 밖에 남지 않았다. 2015년에는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죠스 19탄 개봉에 식당과 가게는 무인으로 운영 되고, 스케이트 보드 역시 날아다닌다. 그리고 옷은 자동건조가 되고, 사이즈도 마음대로 맞출 수 있다. 2011년에는 모 신발브랜드에서 영화에서 주인공이 신고 나오는 버튼을 누르면 불 도 켜지고, 자동으로 끈이 조절되는 신발을 실제로 개발하여 1500켤레 한정 상품으 로 판매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처럼 현재에는 생각보다 많이 실현이 되어있지 않다. 타임머신은 꼭 한 번 타보고 싶은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정말 무서운 존재인 것 같다. 과거로 돌아갔을 때 작은 변화들이 미래의 시간에 큰 변화를 만드니까······. 마지막으로, 이 영화와 같은 미래를 상상했던 어른들에게는 지금 현재가 좀 섭섭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해진 미래는 없고, 미래는 자신이 스스로 가꾸어 나가는 것이니까 미래에 대해 그 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김림_ 김태호, 우지영 회원의 아들로, 안양비산초등학교 5학년이다. 영화와 역사, 우주과학를 공부하는 것이 즐거우며 캠프에서 러시아 국가를 원어로 불러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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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15. 23주기 기제


말하지 않아도 굳은 약속을 했습니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형을 잊지 않고 찾았다. 큰형님 내외 가족분들과 동문들. 해가 갈수록 가족처럼 가까워진 듯 격 없이 대화도 오고 가지만 가슴 한 켠에 여전히 답답하고 안타까움이 있다. 실로 오랜만에 강동윤(사진 87) 동문이 왔다. 십수 년 간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정착할 계획으로. 휴가 중에 합류했다는 순철네, 내창이형이 무척 예뻐했다고 자랑하는 경근이, 광주에서 먹거리를 준비한 형균이네, 또 광주에서 이것저것 준비해준 한현우 사무처장. 모두 모두 고맙고, 수고 많았습니다. 올해 대선 잘 치러서, 또 다음을 기약합시다.



나는 뒷북 엄마 이정남

누군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냐고 묻

게 젖을 먹이려고 한밤중에 일어나다 욱신

는다면 나는 여섯 살짜리 둘째를 꼭 끌어안

거리는 허리 통증에 ‘내가 이 짓을 또 시작

고 잘 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럼 행복하지

한 거였구나’라며 온갖 저주를 퍼부었던 기

않는 순간은 언제일까. 피하고 싶은 순간,

억이 새롭다.

그것은 중학교 1학년짜리 큰아이를 깨울 때가 아닐까.

그렇게 욕하며 낳아 기른 둘째 꼬맹이가 지금 하루하루 행복을 만끽하며 무럭무럭

우리 집은 아이가 둘이다. 그것도 나이차

자라나고 있는 중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 무려 여덟 살이나 나는 딸 둘이다. 우스

먹고 싶은 것도 많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갯 말로 여자가 아이를 여럿 낳을 수 있는 이

행복한 줄 아는 아이. 자신감과 자존감이 절

유는 출산할 때 뇌세포 손상이 심해져 출산

정에 달해 있는 시기, 꼬맹이는 사진 속에서

과정의 고통을 잊기 때문이라고들 하던데,

늘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이 모습 이대로

내가 딱 그 짝이었다. 그래서인지 8년 만의

어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임신과 출산을 나름 즐겼던 것 같다. 그리고

행복하게 해줄까. 상상만 해도 흐뭇하다.

드디어, 둘째를 낳던 바로 그 날 밤, 아이에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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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큰애는 매일 매일이 어둠이다. 특히


구르기

이안이와 이록이

학교 가는 시간이 가장 어둡다. 하고 싶은

바람에 여간 어려운 게 아닌 것 같다. 그도

것 못하고, 먹고 싶은 것 맘대로 못 먹는 어

그럴 것이 시험은 교육청에서 정한 난이도

두운 사춘기 시절이 드디어 닥친 것이다. 그

에 맞춰 문제를 만들고, 따라서 당연히 어렵

나마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밝은 낯인데, 그

게 나온다. 시험 범위와 난이도를 고려해 볼

러다가도 시험이나 공부 이야기가 나오면

때 우리가 내린 결론은 학교에서 돌아온 직

또다시 검은 먹구름이 밀려온다. 하루에도

후부터 잠들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공부

여러 번 ‘저걸 학교를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

만 해야지 겨우겨우 따라갈 수 있겠구나 하

나’ 갈등의 연속이다.

는 것이었다.

사교육이라고는 영어 개인교습과 발레,

대한민국 교육에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

피아노 외에는 한 적이 없는 큰애는 중학교

는다. 그저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알아들

교육과정이 버겁고 힘들기만 한 모양이다.

을 수 있게 가르쳐주고, 시험은 아이들이 배

초등학교에서는 그나마 학습지 공부로 충분

운 것만 확인하는 수준으로 내서 아이들이

히 학업을 따라갈 수 있었는데 중학교는 선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

행학습을 하는 아이들 중심으로 진행되는

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과학에는 내가 고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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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학교 때 배운 과정이 나온다. 대단한 고등 (?)교육이다. 큰애가 5학년 때였다. 한참 영어에 관심 을 보이기에 이때다 싶어 영어캠프를 계획 했다. 처음엔 호주를 보낼까 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보내게 되었는데, 정말 그런 것에 무지했던 우리 가족은 영어 캠프도 당연히 캠프이겠거니 했다. 신나고 즐겁게 야외에 서 뛰어노는 캠프. 하지만 이 캠프의 핵심 은 영.어.였다. 제주도에서 2주간 아침 여 덟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영어만 죽어라 공부해대는 영.어.캠.프!

우리 가족은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예술중

또래 친구들과의 즐거운 여행을 기대하고

학교 입시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영어캠프

간 큰애는 첫날 밝은 목소리로 “엄마 여기

를 통해 공부가 맞지 않음에 대한 확신을 갖

기숙사가 정말 신기해!”라고 웃으며 통화했

게 된 것과 일반 중학교 공교육에 대한 불신

다. 마음이 놓였다. 그러더니 둘째 날에는 “

으로 아이에게 좀 더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

엄마, 나 그냥 집에 가면 안 돼?” 하며 울먹

내게 해주고 싶어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린다. 마음이 철렁했다. 급기야 셋째 날,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는 이것도 많이 힘

“엄마, 나 좀 살려줘, 엉엉!” 울어버렸던 우

들어 했던 것 같다.

리 아이.

39kg까지 체중을 줄여야 한다 해서

큰 시련이었던 모양이다. 그곳에서 왕따

165cm 키의 아이가 급격한 다이어트를 해

도 당하고, 공부와 자신의 궁합에 대해서

대기 시작했다. 41kg까지 줄이느라 먹을

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큰아이. 영

것도 못 먹고, 부상이 걱정돼 수련회나 물

어 외에 더 많은 것을, 몰라도 되는 것을 배

놀이도 가지 못하고, 일주일 내내 매일 4시

워 버린 아이. 집 밖에서 고생을 해서 그런

간씩 아침저녁으로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지 집에 와서 몰라보게 훌쩍 커버린 아이는

그 과정에서 나는 또 아이를 많이 몰아세

한동안 가족에게 살뜰하게 대했던 것 같다.

우고 다그치고 말았다. 가정형편과는 상관

그렇게 혹독한 5학년 겨울방학을 보내고

없이 예체능 진학을 결심한 것이다 보니 자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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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기

꾸 투자원금을 떠올리게 되었다. “엄마가

장으로 곁에 있어 주지도 못했다. 물론 돈

얼마나 어렵게 널 보내고 있는지 아니?”라

이 있어야 레슨을 받을 수 있지만, 아이는

든가 “네가 여기서 노력한 만큼 결과를 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엄마와 함께 하고 싶었

지 못하면 아마 일반 중학교에 가서 너무너

을 거다.

무 힘들게 공부해야 할 거야”라든가 “너처

지식도 돈도 다 소용없는 것이다. 그 일을

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이들이 많으니까

계기로 내가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 진

복 받은 줄 알고 열심히 해”라든가 “수업시

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차라리 무지한 부

간에 그렇게밖에 못하니?”까지 등등.

모였다면 아이 마음에 이렇게 상처는 주지

급기야 아이가 체중 조절에 실패하고 몸 무게가 다시 늘었을 때는 차마 입에 담지 못

않았을 텐데, 어설프게 잘난 엄마를 두어 애 들만 고생시키는구나, 라고 말이다.

할 말을 하고 말았다. “엄마가 너한테 해준

육아에선 나보다 한참 선배 되는 이가 어

것만큼 할머니 할아버지께 해드렸으면 효녀

느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 분 역시 아

소리 들었을 거야. 네가 날 이렇게 배신할

이에게 미술 공부를 시키려고 노력에 노력

수 있냐?”고 말이다.

을 더한 끝에 미대에 보냈으나 뒤늦게 아이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아이를 북돋아주

가 수학에 재능이 있는 걸 알게 되면서 ‘아이

어 잘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지는 못할망

는 앞에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쫒

정, 그리고 네 뒤에는 우리가 있으니 걱정하

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지 말라고 하지는 못할망정 급기야 내 욕심 을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 강연을 듣고 ‘그래, 나는 꼭 뒤에서 따 라가야지’ 했는데 정작 실제로는 그러지 못

돌이켜보면 우리 어머니는 늘 나에게 그

했다. 이론과 실제의 차이겠지. 아마 앞으

렇게 해주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기죽지 않

로도 계속 시행착오는 하게 될 것이고, 큰아

고 난 잘 할 수 있어라는 마음으로 무엇이든

이에게서 해서는 안 될 행동과 꼭 해야 할 일

지 할 수 있었는데 정작 내 자식에게는 그렇

을 배운 뒤에야 둘째에게 제대로 써먹는 뒷

게 해주지 못한 것이다.

북 자녀 교육을 하게 될 것 같다.

결국 최선을 다했지만 다른 아이들보다

이제 다이어트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우리

큰 키와 예쁜 몸매-165cm에 45kg이면 아

큰 딸은 엄마의 몸매와 비슷해졌다. 날마다

이돌 몸매 아닌가?-의 우리 큰애는 시험에

우리는 6학년 때 예쁜 딸을 돌려달라고 하소

서 낙방했다. 정작 시험 당일 나는 해외 출

연하지만 코웃음으로 답하는 사춘기 소녀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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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사태가 역전되어 흐렸다 개였다 중 학생 병으로 엄마를 위협한다. 많은 걸 바 라지도, 바래서도 안 된다는 걸 몸소 깨달은 엄마는 “오늘도 무사히!”만을 외친다. 큰아 이도 둘째처럼 매일매일 즐겁게 살 수 있기 를 바랄 뿐이다.

이정남_ 현재 일본어 동시통역사이면서 서울외대통번역대학원에 출 강 중이다. 누가 물으면 “두 아이와 철없는 남편을 키우고 있다”고 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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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보이지 않는 환경부의 구미 불산 유출대응 환경연합 미디어홍보국 부장

한숙영


사고 이튿날 환경부의 심각단계 해제로 다시 귀가한 마을주민들 이 상황이 심각해지자 또다시 대피길에 오르고 있다 ⓒ환경연합

추석을 이틀 앞두고 모두가 명절을 기다리며 들떠 있던 날 오후, 경상북도 구미 산업단지의 한 공장에서 흰 연기가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곧이어 유독가스가 인 근 마을과 공장들로 퍼져나갔고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소방대원들이 출동했다. 소방대원들이 뿌린 물에 더 많은 연기가 발생했고 인근 주민과 노동자들은 멀찌 감치 서서 사고현장을 구경하기도 대피하기도 했다. 이것이 얼마 전 세상을 떠들 썩하게 했던 구미 불산 유출사고의 시작이었다. 사고 당일 주민들은 마을 이장의 기지로 대피할 수 있었고, 산단 노동자들에게 는 구미시의 대피명령이 떨어졌다. 환경부는 사고를 경계경보에서 심각단계(화 학유해물질 유출사고위기대응 위기경보단계 중 최고단계)로 상향하고 국립환경 과학원이 사고발생 8시간 만에 현장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간이측정기로 부 실하게 측정된 불산은 사고 지점 5m 외에서 ‘불검출’이라는 결과를 얻었고, 환 경부는 현지 조사가 미처 다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심각단계를 해제했다. 이에 사고 다음날 구미시는 사고가 난 ㈜휴브글로브 반경 50m 이내 기업은 휴무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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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기

불산에 노출된 메론이 그대로 말라버렸다 ⓒ환경연합

그 외에는 정상조업을 시행하라는 공문을 산단에 내려 보냈고, 주민들에게도 귀 가를 권유했다. 이렇게 상황은 수습되는 듯 했다. 그러나 사고 발생 이틀 후에도 마을과 공단에 가득했던 매캐한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논밭 작물들 과 가로수가 바싹 말라 죽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이 트위터로 알려지고 퍼져 나가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트위터러들의 폭발적인 관심이 잊혀질 뻔 했 던 사건을 여론의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지난 10월 17일 환경연합은 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함께 구미 현장에서 진행 한 불산 농도 측정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불산은 반 감기가 짧기 때문에 토양과 물에는 미량이 남아 있었지만 불소를 잡아두고 있 었던 식물 내 농도는 매우 높았다. 시료들은 유럽연합(EU)의 가축 먹이 기준 인 30~150ppm을 크게 넘어서서 평균 2076.2ppm를 기록했고 최대 농도는 9594.1ppm까지 나타났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식물에서 측정한 불소 농도 를 토대로 사고 당시의 대기 중 불산 농도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공식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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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산에 노출된 포도밭 ⓒ환경연합

적용한 결과 8시간 노출기준 0.5ppm을 초과하는 시료가 80% 이상 되었고, 단 1초라도 노출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최대치인 3ppm을 넘어선 곳도 32%나 되었다. 또한 미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사망을 일으키거나 연구적인 건강장애 를 일으킬 수 있는 농도인 30ppm의 50% 수준에 달하는 15ppm까지 확인된 지 점도 있었다. 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현재, 부실조사와 대책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정부는 이 일대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정부합동조 사단을 꾸렸다. 조사단은 ‘괜찮다’는 결과를 발표하고 곧 해산했다. 마을로 돌아 온 주민들은 다시 대피해 아직까지 임시대피소에 머무르고 있으나 노동부의 방 관 속에 산단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특별한 대피 없이 계속하여 일하고 있다. ㈜ 휴브글로브 노동자 5명 전원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당시 별다른 유해화학물질 보 호 장구도 없이 출동했던 소방관들에게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전체 진료 나 검진을 받은 수는 1만 명을 넘어섰다. 유해화학물질을 사용하는 업체에 대한 부실한 관리와 개당 3천 원짜리 간이 측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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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발생한 (주)휴브글로벌 공장이 폐쇄되어있다. 5명의 노동자는 초기 불산에 다량 노출되어 현장에서 사망했다 ⓒ환경연합

정기의 검사결과만 가지고 주민대피령과 심각단계를 해제한 환경부는 이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국민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할 정부가 20년 전에 발 생한 낙동강 페놀사건 수준으로 낙후된 대응을 보였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이와 같은 사고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으려면 우선 책임소재를 명확히 지울 필요가 있 다. 환경부, 노동부, 구미시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유해화학물질 사용 업체들에 대한 점검과 철저한 관리가 있 어야 하며, 사고가 발생했을 때 안전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과 대 응 체계에 대한 재점검도 필요할 것이다. 한국의 관리 수준은 유통되는 화학물질 의 85%가 유해정보조차 없는 상태이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의 말처럼 이번 구미 불산 유출사고 대응에서는 ‘인간’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이 무시당하는 재난 대처와 대응을 보고서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불 신은 여전히 깊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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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발생 열흘만에 현장을 찾은 유영숙 환경부장관. 환경부의 부실한 조사와 대응이 더 큰 피해를 일으켰다 ⓒ환경연합

환경연합은 불산 유출사고와 같은 환경 산재 참사의 재발을 막기 위해 시민사회단체, 국회의원들과 함께 뜻을 모아 정보공개 사이트 ‘구미불산유출사고 리포트(report.safedu.org)’를 오픈했습니다. 보다 자세한 정보는 위 사이트와 환경연합 홈페이지(www.kfem.or.kr)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환경연합은 언제나 소통하고 있습니다 트위터(@kfem), 페이스북(www.facebook.com/kfem.foe)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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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기

회원 동아리 탐방

중독성 강한 고생을 맛보려는 청춘들을 끌어안다

중앙극회, 맥이여~! 김지훈

왼쪽부터 11기 이광호, 11기 이수원, 22기 김동민, 딴 데 보는 사람은 이번 공연에 조명을 맡은 25기 신지현, 11기 김종선, 9기 이현주

극회인, 대학로에 떴다

기로 했다.

‘중앙극회인’들이 모였다. 정식으로 말하

교수님도 나오신다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면 중앙극예술연구회 회원들이다. 우린 그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나오

냥 극회인이라고 부른다.

지는 않았고, 아쉽게도 교수님마저 감기로

얼마 전, 극회인들이 <당신은 어느 별에

나오지 못하셨다.

서 왔소>를 관람하기 위해 대학로에 모였

“맥이여~~!”

다. 졸업 후에도 공연을 보기 위해 간간히 모

건배 제의를 할 때면 교수님은 중앙극회

이곤 했지만, <당신은 어느 별에서 왔소>

의 맥이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기원하자며

는 극회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대학로 연극

늘 ‘맥이여!’를 외치곤 하셨다. 특유의 표정

으로 첫발을 내딛은 작품이라 각별한 의미

과 웃음소리를 내며 흥겨운 자리를 만들어

가 있다. 다함께 연극을 보고 뒤풀이를 하

주셨던 교수님이 새삼 그리웠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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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동아리가 생겼을 때만 해도 ‘지도교

이 흐르고 보니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는 우

수제도’가 있어서 대부분의 동아리에 지도

리들을 보면서 선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

가 궁금해진다.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고 성

가 하나 둘 사라지고 지금은 중앙극회만 유

장해 온 본인의 지난날을 돌아보지 않았을

일하게 지도교수님을 모시고 있다. 제도도

까 싶기도 하다.

없어졌고 교수님도 5년 전 퇴직하시면서 후

많은 분들과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

배교수에게 지도교수 자리를 일임하고 물러

었지만, 뒤풀이 자리는 시종 화기애애했다.

나셨다. 그런데도 극회인들이 김석준 교수

극회 동문회장인 9기 이현주 선배, 8기 이

님을 유난히 깍듯이 챙기는 것은 교수님과

혜련 선배, 그리고 간만에 김종선, 이광호,

극회가 기질적으로 너무나 잘 맞았기 때문

이수원 등 11기 선배들이 많이 나왔다. 이

일 것이다.

번 공연의 연출을 맡은 박지호 선배도 11기

중앙극예술연구회는 1983년, 새내기 대

다. 13기인 내 동기 임종석, 이제 막 결혼한

학생 셋이서 중어과 김석준 교수님을 지도

새신랑 22기 후배 김동민 그리고 동민이의

교수로 모시고 만든 동아리다. 지금까지 30

새색시가 함께 왔고, 이번 공연의 조명을 맡

기 후배가 들어왔고, 기성극단이나 방송사

은 25기 신지현도 왔다. 극작가인 8기 이준

등에서 활동하는 극회인들 중에는 인지도가

호 선배와 배우로 뛴 19기 고훈목은 불참.

있는 동문들도 제법 많으니 성공한 대학동

모임의 화두는 아무래도 막 관람하고 나

아리라고 할 수 있다. 교수님이 열심히 ‘맥

온 공연에 대한 것이다. 돈벌이가 안 되는

이여~!’를 외치며 극회를 위해 기도해 주신

연극이다 보니 대학로에는 관객이 많이 드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는 코미디나 뮤지컬이 대세다. 이런 와중

이 날도 1기 김성렬 선배가 자리를 함께

에 <당신은 어느 별에서 왔소>는 사회성을

했다. 극회 모임이 있다고 연락을 드리면 피

띤-물론 웃음 코드가 숨어있긴 하지만-다

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꼭 참석해 후배들

소 어두운 극이다. 이런 연극은 광고 받기가

에게 이런저런 조언도 해주고 옛 얘기도 들

어렵다. 그래서 이 연극 역시 순수하게 후

려주는 선배다. 선배를 처음 뵈었을 때 나는

원금으로 제작되었다. 8기 이준호 선배가

갓 스물을 넘긴 새내기였다. 그때 내 눈에는

작품을 쓰고, 9기 김재한 선배의 <타임컴

30대 초중반쯤 되었을 선배가 하늘처럼 높

퍼니>와 11기 박지호 선배의 극단 <꿈의

아 보이고 인생의 최고점처럼 보였다. 세월

동지>가 공동제작하고, 뜻있는 분들의 후

이내창기념사업회

95


구르기

원금과 배우, 스텝들의 노동력 협조로 최저

는 “혼자 힘으로 한번 해보는 거야”라고 호

예산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연

기를 부리며 이것저것 선배들이 남긴 자료

극은 극단 <꿈의동지>의 창단공연으로 의

들을 뒤적이고 찾아다니면서 기획을 배워나

미가 깊다. 그런 만큼 선배와 후배가 격없

갔다.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이리 부딪히고

이 협동하는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연출에

저리 깨지면서 내가 어쩌자고 호기를 부렸

서 막내까지 모두 나가서 포스터를 붙였다

을까 많이 후회하기도 했던 여름이었다.

고 한다. 배우 중에는 연예인으로 제법 이름

생전 처음 내 손으로 기획서라는 것도 만

이 알려진 배우도 있었는데 좋은 선례를 만

들어보았다. 기획서를 조금이라도 더 그럴

든 것 같아 흐뭇했다.

듯하게 만들면 모금이 잘 될 것 같아 외국어 대 컴퓨터실에서 시간만 나면 기획서를 수

초보 기획의 발바닥 뜨거웠던 여름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나는 혼 자 학창시절로 돌아가 있다. 나를 가장 고뇌 하게 만들었던 1996년의 여름.

정했다.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뚝딱뚝딱 뭔 가를 열심히 한 것 같기는 한데 성과가 없어 초조한 날들이었다. 그때 내가 기획했던 공연은 극회 공연치

극회에서 나는 처음으로 기획이란 걸 맡

고는 예산이 제법 들어가는 것이었다. 돈을

게 되었다. 연극하겠다고 집에도 가지 않고

만들어 와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잘해야 한

기숙사에 남았다. 가족들은 공부나 하지 정

다는 강박관념에 하루해가 짧기만 했다. 아

신 못 차리고 연극 따윌 한다고 나무랐다.

침저녁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잡지와 광고

기획보라고 후배를 한 명 붙여주긴 했었는

지를 뒤적였다. 스폰서 리스트를 뽑아 동전

데 후배는 어디로 갔는지 소식도 없었다. 나

뭉치를 들고 기숙사 공중전화에 매달려 열

1기 김성열

11기 이광호

동문회장, 성우로 활동 중인 9기 이현주

11기 이수원

끈덕지게 어깨동무

96


큼 고맙고 미안했다.

심히 전화를 걸었다. 어디서든 한번 와보라는 얘기를 들으면

5기 김근한 선배가 일본 유학을 앞두고 찾

부푼 마음을 안고 달려갔다. 어느 제약회

아와 포스터와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아이디

사에서는 열심히 나의 얘기를 들어주시더

어를 더해 주셨다. 동국대가 있는 필동 일

니 모기약을 쇼핑백에 가득 담아주셨다. 자

대를 여러 날 기웃거리며 포스터가 잘 나오

기네와 콘셉트가 맞지 않아 돌려보내긴 해

도록 도와주셨는데, 아는 사람이라 싼 가격

야겠는데 열심히 설명한 어린 학생을 그냥

에 해줬으니 식사라도 대접하라는 말에 나

돌려보내기가 미안했던 것 같다. 어느 주류

는 선배에게 화를 냈다. 그렇지 않아도 빠듯

회사는 소주 두 박스와 돈을 줬다. 동기 영

한 기획비를 어떻게 또 쪼개란 말인가? 그때

훈이와 동행하여 을지로에서 안성까지 소주

는 선배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활동비도 없

박스를 날랐다. 술만 받은 게 아니라 돈도

이 움직이는데 웃돈이 더 들어가야 한다는

받으니 날아갈 것 같았다. 유명메이커 손목

사실만 견딜 수 없이 부담스러웠다.

시계를 광고비 대신 받아서 공연이 끝나고

안성과 평택에서 공연을 올리기로 했는데

외대건물에 가판을 놓고 동기들과 팔기도

번안한 작가의 확인서명을 받아야 했다. 물

했다. 선배들은 자주 가는 가게에 소개도 시

어물어 대학로 문화진흥연구소란 곳을 찾아

켜주고 아예 광고를 따다 주기도 했다. 돈이

갔다. 그런데 이 분이 분명 약속을 하고 갔

모자라 배우들이 단체로 교통조사 아르바이

는데 대뜸 나를 밀치며 하는 말이 “당신 누

트를 하기도 했다. 꽤 많은 돈을 벌어 모두

구 마음대로 극을 올리는 거야?”라는 것이

공연을 준비하는 돈으로 썼다. 이제야 털어

었다. 학생연극이 다 연습극인데 누가 영리

놓는 얘기지만 그땐 모두에게 눈물이 날 만

목적으로 공연을 한다고 그렇게 버럭 화를

13기 임종석, 8기 이혜련

극단 꿈의동지 대표, 연출가, 배우 11기 박지호

이내창기념사업회

97

13기 임종석

연극 및 영화에서 배우로 활 동중인 22기 김동민, 방송작 가로 활동중인 11기 김종선


구르기

내셨는지 모르겠다. 당시엔 너무 당황스러

유증 삭이느라 참 힘들어했다. 세월이 흐르

워 뭐라 제대로 대답도 못 했던 것 같다. 서

고 나니 나한테 약이 되는 가장 소중한 시간

러운 마음과 공연을 못 올리게 되면 어쩌나

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마음을 짓

하는 염려가 많았는데, 무사히 공연을 올린

눌렀던 얘기를 털어놓았다.

걸 보니 어떻게 서명을 받긴 했었나 보다.

“전 그때만 생각하면 수원이 오빠가 밤새 작업하고 오토바이 타고 돌아가다가 수상무

세월이 흐르고 나니 별것도 아닌 일들 공연을 보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늘 옛 추 억이 안주거리가 된다. 종선 선배가 말한 다. “배우들은 모여서 연습하니까 힘들어도

대 근처에서 사고 났던 게 먼저 떠올라요. 눈에 난 흉터 볼 때마다 너무 안쓰럽고 왜 그 렇게 죄책감이 들던지······.” 수원 선배가 그 말을 듣고 재빨리 대답한 다.

참 재밌었는데, 혼자 활동하느라 너무 힘들

“그랬어? 그럴 필요 전혀 없어. 그때 술을

어 보이는 널 보면 돕고는 싶어도 도와줄 수

먹고 오토바이 타고 가는 걸 형들이 말렸어

가 없어서 너무 안쓰러웠어.”

야 하는데 안 말려서 그래. 그런데 그때 형

“앗! 그랬었나요? 난 혼자 낑낑대느라 누 가 날 지켜보고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땐 정말 힘들다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들이 날 데리고 성형외과를 갔더라면 좋았 을 걸 그냥 정형외과를 가서 그게 좀 아쉬 워······. 아무튼 이제 그 마음 내려놔.”

흐르고 나니 별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진다.

이럴 수가! 난 여태까지 음주 운전을 하다

그런데도 공연을 끝내고 나서 괜히 혼자 후

가 사고가 났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

이거 옛날에 예지동 이었던 것 같은데 숫자가 붙어있다. 기숙사도 좀더 증축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확인은 못해 봤다. 기숙사에서 열 심히 연극티켓 뿌리던 날이 생각난다.

기숙사 들어가는 진입로, 손으로 직접 연극홍보 현수막을 써서 저 입구에 엄청 열심히 갖다 걸었었는데 요샌 다 돈주고 제작한다. 오랜만에 갔더니 보도블럭이 깔렸다. 좀 더 깔끔하고 정돈된 느 낌. 저런 데다 너덜너덜한 수기현수막을 거는 게 지저분해 보이 긴 하겠구나

끈덕지게 어깨동무

98


었다. 참, 남자들은 참 무모하다. 아니, 청

필 오늘 같은 날, 비가 올까 하다가 11기 홍

춘이 무모한 건가? 기획으로서 배우들과 스

승민 선배가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한 채로 비

텝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지 못한 게

오는 날 스폰서를 받으러 다녔다는 이야기

늘 미안했다. 더구나 사고까지 났다는 것에

가 문득 떠올랐다. 부러진 팔로 우산을 들고

대해 자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수원 선배의

기획서를 다른 팔에 들고 방문한 모습이 너

흉터가 남은 눈두덩을 볼 때마다 무거웠던

무 안쓰러워서 광고를 내줬다는 전설이 된

마음의 짐이 16년 만에야 가벼워졌다.

이야기.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내에서 매점을 하

달라진, 그러나 변하지 않은

고 있는 선배들에게 전화했더니 두 분 모두

좋은 공연도 보고 오래간만에 극회인들과

몇 달 전부터 회사에 다니고 계신다고 한다.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나니 그동안

연락을 미리 하고 올 걸. 한동안 연락이 잘

바쁜 일정이 겹쳐 못 가본 학교가 갑자기 너

안 된다 싶었는데 생활에 변화가 있으셨구

무 궁금해졌다. 내친김에 시간을 내어 학교

나. 학교를 찾으면 늘 그 자리에 계신 선배

에 다녀왔다. 뭘 타고 갈까 생각하다 평택까

들이 있어서 참 좋았는데 이젠 그런 정겨움

지 이어진 전철을 타 봤다. 평택역에서 몇

도 느낄 수 없겠구나, 아쉬웠다.

번 버스를 타야 하나 스마트폰을 검색하다

학생회관 건물에 갔다. 극회 동아리방이

깜빡 졸았다. 눈을 뜨니 거의 다 와 가는 데

지하에서 3층으로 이사했다고만 들었지 한

비가 내린다. 비가 멈추길 바랐는데 평택에

번도 찾아보지 못했다. 사실 오래 전 언젠

가까워질수록 비가 더 거세게 온다. 휴, 하

가 가긴 갔었는데 번호키가 달려 있어서 들

옛날엔 이거 말고 손재주 많은 극회인이 나무판에 멋들어지게 중앙극예술연구회를 조각한 문패가 있었는데 학교에서 멋도 없는 문패로 통일시켜 버렸다.

이내창기념사업회

99

여전히 가반데 문패가 걸려 있는 중앙극회 동아리방, 열린 문틈으 로 풍물패 벽화가 보인다.


구르기

어가 보지 못하고 왔다. 그런데 이거, 이번

교가 학습적이거나 스펙에 도움 되는 동아

엔 학생회관 출입문부터 카드키가 되어 있

리가 아니면 거의 다 없어지는 분위기다 보

고 학생증을 대라고 씌어져 있다. 혹시나 해

니 마당극보다는 정통연극인 중앙극회만 남

서 밀어 보니 다행히 문은 열린다. 지난 10

아 있게 된 것 같다. 극회가 남아 있어 다행

월, 정기공연을 알리는 30기 송진수 후배의

이긴 하지만 동아리활동이 많이 죽은 대학

문자를 지우지 않고 있었는데, 아는 사람이

캠퍼스의 모습이 씁쓸하기만 하다.

없으니 낯선 후배에게 무조건 전화를 걸었

이사하고 처음 본 극회방은 너무도 깔끔

다. 전화를 안 받아서 문자를 남겼더니 얼마

했다. 옛날 극회방은 벽이며 바닥이며 소품

지나지 않아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들로 빼곡하니 빈틈이 없었는데, 새로운 방

극회 동아리방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극

은 벽도 바닥도 너무 깔끔해서 적응이 안 된

회방이 있다고 한 자리에 극회방이 보이지

다. 쫑파티하고 소주 한 잔씩 하고 나면 흥

않아서 어찌된 일인가 헤매고 있는데, 이

이 나서 벽에다 낙서를 하는 것이 극회인들

런! 이미 없어진 ‘가반데’ 방에서 후배가 나

의 취미생활이었는데, 너무 깨끗한 벽이라

오며 극회방이라고 소개한다. 극회방으로

손대기가 미안할 정도다. 가반데의 풍물패

바뀐 지가 몇 년일 텐데 여태 문패도 안 바꾸

그림이 입구 쪽 벽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고,

고 그대로 ‘가반데’라고 붙여 놓았다. 한 집

안쪽 벽 구석에 어설프게 중앙극회라는 글

에 사는 아저씨가 피아노과에 입학한 조카

자를 붙여 놓았다. 입구 벽에는 간이 옷걸

를 영입해서 가반데 수명을 연장시켜 보려

이가 있고 옷이 여러 벌 걸려 있다. 후배 말

고 꼼수를 부리다 실패한 일이 떠오른다. 가

이 집이 인천이라 너무 멀어서 이곳에서 살

반데도 극회에서 분가한 동아린데 요즘 학

고 있는데 일부는 자기 옷이고 일부는 소품

아직은 미흡한 극회방 영역표시

입구에서 본 극회방, 언제나 소품 등 짐이 가득한 극회방.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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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다. 옛날엔 지하방이라 그늘지고 습기

를 들려줬다. 지하 동아리방에서의 생활과

가 차서 감히 이곳에 살 생각도 못했는데 3

공연준비하던 때의 얘기를 해 줬더니 후배

층으로 옮기고 나서는 22기 동민이도 “이젠

도 신이 나서 재학생들의 요즘 상황을 이야

동아리방에 햇볕도 든다”면서 마지막 학기

기해 준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바디(신체훈

를 이 곳에서 살다 갔다. 남향도 아닌데 햇

련)와 발성 연습을 하고 있단다. 겨울 공연

볕이 들어봐야 얼마나 들었을까 싶지만 확

을 위해 열심히 준비 중이니 꼭 한 번 다시

실히 지하층과 3층은 다르긴 다르다.

와서 도움 될 만한 얘기 좀 많이 해 달란다.

처음 보는 후배는 동아리방도 보고 소극

기특한 후배에게 점심이라도 사주고 싶었는

장도 새로 리모델링했으니 보고 가라고 친

데 곧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에 아쉬

절하게 알려준다. 전용극장이 생겼냐고 물

움을 남긴 채 동아리방을 나왔다.

으니 연극과가 쓰던 소극장을 최근 수리해 서 함께 쓴다고 한다. 우리 땐 당연히 영신

청춘을 바치고 얻는 소중한 이름, 극회인

기념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지금은 영신기념

비가 날리는 교정은 변하지 않은 듯 많이

관이 노후 되어서 몇 해 전부터 후배들은 연

변했다. 새로 지은 건물도 많고 기숙사 앞은

극과 소극장에서 대부분의 공연을 올린다.

보도블록이 깔리고 버스정류장에는 비를 피

후배는 2학기에 극회에 들어왔다고 한다.

할 수 있는 정류소가 생겼다.

무대에 서보고 싶은데 학생 때가 아니면 못

입학을 해서 처음 극회방에 갔던 날, 안성

할 것 같아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

무슨 회관에서 <아일랜드>란 공연을 준비

대에 대한 설렘이 느껴지는 후배의 얼굴을

하는 선배의 공연을 도우며 선배의 자잘한

보니 옛날 생각이 나서 이런저런 옛 이야기

심부름에도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마치 내

가반데가 쓰다간 흔적이 이렇게 깔끔하게 남아 있네요

입구에서 본 극회방, 언제나 소품 등 짐이 가득한 극회방.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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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기

가 공연을 하는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1학

고, 또 끊임없이 새로운 극회인을 만들어내

년 여름 정기공연을 함께 하지 못했다. 동

는 동력이 된 것은 바로 갓 스물을 넘나드는

기들이 너무 너무 부러워서 다음 공연은 꼭

청춘에게 극회가 제공하는 사서 하는 고생

하겠다고 혼자 다짐하기도 했었다. 추운 겨

들이 아닐까? 카타르시스 넘치는, 이 중독

울 벌벌 떨면서도 워크숍 공연을 준비하느

성 강한 고생을 맛보려는 청춘들로 극회의

라 들떴던 마음, 재능 넘치는 동기 앞에 한

맥은 오늘도 끊임없이 이어져 간다.

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던 내 자신, 관객의 뜻

맥이여~!

하지 않은 칭찬과 격려에 어색해 했더니 바 로 내숭 떤다고 반응을 보내는 고등학생 관 객의 당황스런 피드백, 기획을 하면서 경험 한 많은 에피소드들······. 만만히 봤던 공연준비가 생각보다 너무 어려워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날들이 주마 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기쁠 때나 힘들 때나 선배, 동기, 후배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희 로애락을 나누었다. 솔직히 너무나 힘이 들 어서 극회와 좀 멀어져 있고 싶을 때도 있었 다. 하지만 동고동락하며 지내온 날들의 향 수에 거미줄처럼 엮여 다시금 극회란 울타 리로 돌아왔다. 지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오히려 나를 성장케 한 동력이 된 것 이 극회임을 깨닫고 나니 극회가 한없이 그 립고 소중한 곳이 되어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지금의 나를 만들고, 지금의 극회인을 만 들고, 지금의 끈끈한 극회의 인연을 만들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극회방에 기거중인 30기 12학 번 송진수 후배, 원래 예비역쯤 되는 짬밥들이 이런 생활에 익숙 하던데. 수업 들어가야 해서 점심으로 김밥 먹고 있음. 후배 보 면 점심 사주려고 했는데 나의 친절도 바쁜 스케줄 앞엔 어쩔 수 없다.

김지훈_ 95년도에 입학했다. 정순호 회원과 결혼해 아들 건화를 두고 있다. 꼬맹이 딸린 아줌마로서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고 있다. ING 생명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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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 필요한 세상, 어깨동무 캠프에서 잠시 쉬었다 가요 유혜연

덥다 더워! 어쩌면 이렇게도 더울 수가 있을까? 대한민국이 온통 후끈후끈 달 아오른 지난 여름, 우리 가족은 언제나처럼 어깨동무 여름캠프에 참가했다. 여 름캠프 일주일 전. “언니, 저희도 가요~~.” “그래, 명단에 우리가 없어서 섭섭했는데.” “언니, 근데 너무 더워서 갈 곳도 없는데 내려간 김에 며칠 더 있어도 되나요?” “그럼. 되고말고.” “감사합니다. 언니 새 집이 기대되요.” 역시 멋진 현주 언니였다. 푹푹 찌는 서울을 벗어나고픈 희망을 가득 품고 우 리 가족은 캠프가 열리는 괴산으로 날아갔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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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기

우리가 도착한 곳은 충북 괴산에서 귀농 하여 살고 있는 현주, 성백 선배와 은희, 제 성 선배 집에서 조금 떨어진 시냇가 옆의 작 고 아담한 민박용 빈집이었다. 여느 시골집 같이 넓은 앞마당에 캠핑족을 위한 텐트 두 개가 여유롭게 펼쳐져 있고, 대청마루 같 은 넓은 곳에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삼삼오 오 모여 즐거운 수다와 염색놀이가 한창이 었다. 생활한복 <여럿이함께>에서 오랫 동안 일한 지영, 은희 언니의 지도하에 쪽 빛 이불이며, 수건, 옷들이 너른 나뭇가지 에 편안히 걸려 있었다. 우리는 짐을 풀기 도 전에 트렁크에서 염색할 옷으로 미리 준 비한 옷들을 서둘러 꺼내 염색물에 풍덩 집 어넣었다. 잠시 후에 우리 주현, 정민이의 탄성이 절 로 터져 나온다. “엄마, 옷 색깔이 변했어요.” “나도 발 좀 담가볼래요.” 신기했던지 부끄럼 많은 우리 주현이도 엄마 손을 잡고 신나게 논다. 빨랫줄에 창 의적으로 매달린 각각의 천이 어떤 쪽빛 무 늬를 담고 나올지 잔뜩 기대된다. 역시 염 색 전문가 지영, 은희언니 덕분에 좋은 작 품들이 많이 나왔다. 캠프의 시작부터 마음 이 뿌듯하다. 괴산은 서울보다 한결 시원하다. 게다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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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백, 제성 선배가 부지런히 수박이며 막걸리며 옥수수를 날라다 주셔서 더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매번 함께 하는 어깨동무 식구들의 얼굴에는 맛있 는 음식들이 나올 때마다 웃음꽃이 퍼진다. 정말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조용하고 고즈넉한 명품 계곡으로 현지 코디네이터 겸 동네 이장님인 제성 선배의 안내에 따라 출 발했다. “제성아, 최고다. 어떻게 이런 좋은 장소를 찾았냐?” “이런 멋진 계곡은 처음 본다. 여긴 조용하고 멀어서 현지인들만 아는 곳 같 은데.”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 아이들은 시원한 얼음계곡의 자연산 미끄 럼틀에서 연신 엉덩방아를 찧어대며 깔깔거리고 뛰어노느라 정신이 없다. “쭈르르, 우하하! 미끄러워. 무슨 돌이 미끄럼틀 같아. 튜브로 타자! 와! 신난 다, 푸하하!” 우리 모두 어린아이들 마냥 신나게 굽이굽이 시원한 계곡에서 까르르 웃고 떠 들어 목이 쉴 정도였다. 지금도 일명 미끄럼틀 계곡을 생각하면 머릿속까지 짜 릿해지는 기분이다. 우리 모두 제대로 힐링을 했다. 감동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귀농 정착 일 년여 만에 동네 이장님이 되신 부지런한 제성 선배가 우리를 위한 복날 특별 메뉴를 준비해 줬다. “짜잔~ 따끈 따끈 후라이드 반 양념 반 치킨” 배달에 우리는 완전 진하게 감동받았다. 이창명 이 제주도에서 스킨스쿠버하며 자장면 배달시켜 먹는 것을 CF에서나 봤지, 그 토록 비밀스럽고 조용한 산 속 계곡에서 배달 치킨을 맛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 도 못했던 것이다. 배달된 치킨은 너무도 맛있었다. 정말 우리들의 식욕과 흥분 을 절정으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내리의 코지치킨보다 더 고소하고 바삭바 삭했다. 아! 또 먹고 싶다. 침 넘어가네, 꿀꺽! 계곡에서 지치도록 논 후에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성백, 제성 선배가 손수 농사 지어 수확한, 달달하고 한 알 한 알 진주보다 더 예쁜 옥수수를 신나게 먹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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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기

한 포대 가득 먹고, 모두 당장 주문에 들어간다. “한 포대는 서울로 추가 주문이요. 내가 이런 맛에 여기로 온다!” 직접 기른 옥수수, 쌀, 감자, 토마토 등을 직접 맛보고 주문할 수 있는 것이 여기 온 보 람 중의 하나다. 작년에 직접 구입해서 요리해본 주부의 입장에서 괴산에서 구매한 물품들 은 한살림 자연주의 친환경 물품보다 가격 면에서나, 품질 면에서나, 희소성 면에서나 절 대 뒤지지 않는다. 아니, 최고 점수를 주고 싶다. 다음에 오시면 꼭 주문해서 드셔 보시길. 역시 캠프하면 맛있는 저녁 만찬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삼겹살 파티를 했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숯불에 구운 고기를 별로 안 좋아해서 재영이 언니가 가져온 다른 반찬들과 같이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술과 음식, 지글지글 익는 고기와 함께 캠프 식구들은 서로의 이야기 보따리를 밤새워 풀고 힘겨웠던 상처들을 어루만진다. 민박집 앞마당에 지영, 재 영 언니네가 가져온 텐트를 쳐놓았는데,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은 쉴 새 없이 들락거리 면서 자기들만의 추억을 쌓는다. 우리 애들은 텐트 치고 자는 캠핑이 처음이라 엄청 신기 해 하고 부러워했다. “엄마, 엄청 시원하다.” “문이 지퍼로 되어 있네.” “우리도 텐트에서 자보자. 자자, 응?” 하지만 곧이어 주현이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으악, 벌레다!” 호호, 역시 우리 딸이 다. 아이들은 그렇게 풀벌레 찌르르, 개구리 개굴개굴 소리를 들으며 깊이 잠이 들고, 어 른들은 낮에 못다한 이야기 보따리를 푸느라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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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3일 동안 손수 매 끼니마다 식사를 책임진 최고의 세프님 제영 언니가 참 고생이 많으셨다. 특히 마지막 날, ‘김밥 만들기’는 아이들이 직접 김밥을 만들 면서 참 재미있어 했고, 한 끼 식사로도 든든해서 좋은 메뉴라고 생각한다. 그리 고 항상 설거지 때마다 나타나서 궂은 일을 도맡아 했던 형록이 부부는 참 인상적 이었다. 나의 유일한 동기인 형록이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든든해지는 것 같다. 마지막 날, 어깨동무 캠프만의 색다른 재미는 역시 ‘아나바다’다. 캠프 식구들 의 정이 묻은 갖가지 물건과 옷들이 주렁주렁 선물보따리처럼 나온다. 우리 캠 프의 명사회자 원근 선배의 매끄러운 진행에 TV 예능프로그램 부럽지 않게 항 상 웃음 폭탄이 터진다. 기억에 남는 물건은 제영 언니의 신랑이 동전 넣고 뽑은 것 치고는 너무 좋은 양주와 차량용품이다. 원옥 언니가 기증해 은희 언니에게 낙찰된 생활한복도 참 멋스러웠다. 우리 아이들이 어린 관계로 나는 항상 많은 옷들과 물건들을 1백~1천 원에 몽땅 쓸어 담아 1년 동안 흐뭇하게 쓴다. 빨리 경쟁자가 나타나길 바란다. 처음 만난 선주 언니, 경주 언니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음 캠프에도 꼭 오세 요. 오랜만에 만난 성호 오빠는 다음엔 꼭 가족과 함께 오세요. 이번 여름캠프 는 사무국장인 기욱이 오라버니의 꼼꼼한 준비와 원근 오라버니의 내조와 더불 어 현지의 귀농한 선배님들 덕분에 참 풍성하고 편안해서 세상 어느 힐링캠프 부 럽지 않았다. 숙소를 웬만큼 정리하고 새로 지은 현주 언니 집에서 잠시 열기를 식혔다. 사람 들을 모두 떠나 보내고 헤어짐이 아쉬운 우리 식구와 지영 언니네는 하룻밤 더 괴 산에 묵기로 했다. 현주 언니네의 예쁜 태양열 양옥집은 새 집답게 깨끗하고 아 담하고 멋졌다. 언니, 하룻밤 편안히 잘 묵고 갑니다. 너무 좋았어요. 애 많이 쓰 셨어요. 저녁 준비하는 동안 동네 마실 겸 은희 언니네 집에도 잠시 들렀다. 정성 스런 손길이 느껴지는 예쁜 마당과 은희 언니표 핸드메이드 가구, 커튼으로 가득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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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기

찬 집을 구경하고서 게으른 나를 꾸짖고 싶어졌다. 은희 언니도 고생하셨어요. 현주 언니네 앞마당에 나무 판넬로 마감한 넓은 베란다에서 뒤풀이 겸 바비 큐&와인(현지 한살림 직원에게 협찬 받음) 파티로 캠프의 마지막 밤을 근사하게 마무리했다. 별이 초롱초롱 빛나는 아름다운 괴산에서의 마지막 날 밤이 행복하 게 무르익는다. 어깨동무 캠프에 오면 다른 모임과 다르게 참 매력적이고 편안하 다. 이 모임은 쭉 오래 롱런하겠다는 강한 믿음이 간다. 벌써 이런 캠프가 몇 년 째인가? 요즘같이 힘든 세상살이, 내년에는 동문들끼리 더욱더 진솔하고 서로에 게 도움되는 내용으로, 새로운 얼굴들과 함께 더 멋진 캠프가 진행되면 좋겠다. 해민스님의 ‘우리 잠시 쉬었다 가요’에 소개된 “꽃밭에서” 노래로 마무리해 본 다.

꽃밭에 앉아서/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어디에서 났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이렇게 좋은날에/이렇게 좋은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얼마나 좋을까 아 꽃밭에 앉아서/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났을까/아름다운 꽃송이 힐링이 필요한 요즘 세상, 우리 잠시 어깨동무 캠프에 와서 쉬었다 가요!

유혜연_ 유아의류 전문기업에서 용품MD로 일하다가 유아쇼핑몰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지금은 아동심리학을 공부하 기 위해 대학원 입학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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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거나 말거나 음반잡설 글 사진

박성용 황병기 가야금 작품집 <밤의 소리> 가야금 산조의 거장 황병기 선생의 네 번째 앨범이다. 처음 출시된 1993년도에는 타이틀이 <밤의 소리>였지만 2001년도에 <춘설> 로 표지가 바뀌었다. ‘밤의 소리’ ‘하림성’ ‘남도환상곡’ ‘소엽산방’ ‘춘설’ 등 5곡의 수록되어 있다. 이중 소엽산방(掃葉山房)이 늦가을 에 어울리는 곡이다. ‘낙엽이 쌓인 뜰을 쓸면서 사는 사람의 산방’이 라는 곡명처럼 허허롭고 유유자적하지만 짙은 여운을 안겨주는 음악 이다. 부부싸움하고 나서 늦은 밤 홀로 들으면 바로 머리 깎고 입산 할 수도 있다.

브람스 피아노 소품집 환상곡, 간주곡, 소품 등 브람스가 만년에 작곡한 피아노 음악들이 다. 허세와 장식을 뺀 간결한 어조로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음악이 다. 젊은 시절의 뜨거웠던 사랑과 열정을 말년에 이르러 담담하게 되 돌아보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곡도 짧고 간명하다. 대개 예술가들 이 그렇듯 죽음을 앞둔 거장의 인생 고해성사 같은 작품집이다. 기름 기를 쫙 뺀 브람스 실내음악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빌헬름 켐프의 연주가 해석과 음질 모두 훌륭하다. 아는 사람한테 돈 떼이고 열폭 중 일 때 들으면 그깟 돈!

쇼팽 <녹턴> 녹턴은 우리말로 야상곡(夜想曲)이다. 한마디로 센티한 음악이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밤의 우수와 감상을 전체 21곡에 담았다. 가을밤이나 겨울밤에 들으면 고래심줄 같은 사 람도 감상에 젖어들게 할 만큼 마성이 강한 음악이다. 특히 유작인 19번, 20번은 녹턴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녹턴은 아일랜드 작곡가 존 필드가 맨 먼저 작곡했다. 쇼팽 녹턴은 그에게 영향을 받아 탄생 한 작품이다. 음반은 우아한 해석이 독보적인 클라우디오 아라우 연 주가 가슴을 친다. 문득 첫사랑이 떠오를 때 들으면 지지리 궁상을 떨 수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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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녹이는 블랙커피 같은 공연 두 편

모던 발레 <Life is…>와 연극 <거기> 조형준 ‘2012년도 어느덧······’ 하면서 먼 산 바라보며 한숨 쉬는 계절이다. 벌써 일 년이 다 갔네. 세월 빠르 다 빨라, 하면서. 여기저기서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송년용 공연·행사·방송프로그램 등의 예고편을 볼 때마다 올 한 해는 무엇을 했나 돌아보게 된다. 때이른 추위에 엄청난 한파가 예고되고 있어서일까. 올 겨울엔 삶의 의미, 가족의 의미, 이후에 대한 희망, 삶에 대한 기대를 다시 품게 만드는 공연들이 더더 욱 그립다. 이번 호에는 바로 그런 삶에 대한 성찰과 생에 대한 기운을 북돋을 수 있는 공연 두 편을 소 개할까 한다.

공연 하나

서울발레시어터의 모던 발레 <Life is…> 안산문화예술의전당 해돋이극장 (2012.12.21.(pm.7:30), 22(pm.4:00) 공연문의 080-481-4000 공연 소개

크리스마스 시즌에 즐기는, 오케스트라 연주+노래+4色의 모던발레 작년에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되어 시선을 집중시켰던 서울발레시어터의 모던 발레 <Life is···>가 올 연말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막을 올린다. 45인조 모스틀리오케스트라와 서울발레시어터, 그리고 첼리스트 정재윤이 함께하는 <Life is···>는 죽음에서 시작해 탄생에 이르는 삶의 역순을 4가지 색(色)으로 보여준다. 제임스 전 의 감각적인 안무와 무대 위에 오케스트라와 모던 발레의 어울림만으로도 충분히 함께 공유해 볼 만한 공연이다. Requiem, 죽음. by Wolfgang Amadeus Mozart. BLACK 만년의 모차르트가 죽음을 앞두고 몸과 마음이 지쳐 있을 당시 작곡 한 ‘죽은 이의 넋을 달래기 위한 곡, ‘레퀴엠’에 영감을 받아 안무한 작품이다. Life is - Requiem

Tango for Ballet, 사랑, 열정. by Astor Piazzolla. RED 무수한 안무가 및 영화인의 창조적 감성을 뒤흔들어 온 탱고의 전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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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토르 피아졸라가 부에노스아이레스 8중주단을 위해 만든 탱고 발 레곡에 제임스 전이 독창적인 동작을 덧붙인 작품이다.

Soloist, 외로움. by Johann Sebastian Bach. BLUE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에 맞추어 고독한 현대인의 모습을 그린 제 임스 전의 신작으로, 현실과 내적 갈등 속에 충돌하며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인간상을 첼로 솔로 연주곡의 선율에 실어 그 외로움과 그리 움을 담아낸다.

Love, Bolero, 탄생. by Maurice Ravel. WHITE <볼레로>는 사랑과 기다림, 생명의 탄생 과정을 이야기한다. 모리 Soloist_2011_photoby정광진

스 라벨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멜로디에서 끌어내어지는 무용수의 몸 짓은 오케스트라 연주와 더불어 점진적으로 절정에 다다르고, 클라이 맥스 부분에 이르러 남녀 간의 사랑을 격정적으로 표현한다.

Love,Bolero 2_서울발레시어터

공연 둘

극단 차이무의 <거기>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2012.9.7.~2013.2.24) 공연문의 02-762-0010(내선8번) 공연 소개

지친 삶을 위로 받고 싶은 당신을 위한, 힐링 연극! 두 번째 추천공연은 드라마 <골든타임>의 강신일, 이성민, 정석용, 송선미 등이 출연하여 매 진 행렬을 잇고 있는 연극 <거기>이다. 유명한 배우들이 나온다고 해서 추천하는 연극은 절대 아니다. 2002년 초연 때, 한국연극협회 <베스트7>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베스트3>에 선 정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2006년 재공연되었다가 다시 6년 만에 막이 올랐다. 아일 랜드 작가 코너 맥퍼슨의 원작을 강원도 허름한 카페를 배경으로 그려내 사전정보를 모르고 보 면 우리나라 순수창작극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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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허름한 카페에 늘 모이는 네 명의 사내와 모든 것이 새로운 낯선 여자의 등장, 사내들은 그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서로 귀신 이야기들을 해대는 공연이다. 점점 그 귀신 이야기들이 펼쳐지며, 어릴 때 할머니의 귀신 이야기에 더 품속으로 파고들어 안심하며 잠이 들 듯 관객들 은 무대 위의 이야기에 삶을 위로받고 세상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한다. 이 공연은 <골든타임> 출연배우뿐만 아니라 대학로 연극계와 영화에서 한 번씩은 봤음직한 연기파 배우들이 번갈아 출연한다. 그러므로 예매할 때 출연배우의 정보를 미리 살펴보는 것 도 중요하다. 줄거리 알고 공연 보는 것을 싫어하는 터라, 오늘의 이 공연은 리뷰에 대한 짤막 한 정리로 대신할까 한다.

맥주처럼 톡 쏘고 소주처럼 씁쓸한 그들의 이야기. 뛰어난 리얼리티로 현실을 담담하게 그 려내는데, 스토리텔링이나 서사가 아니 어떠한 정서로 몰입을 이끌어낸다. <국민일보> 잔잔함의 백미! 자극적인 것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잔잔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작품! 극단 차이무의 연극은 늘 믿을 만하다. <인터파크 ka**님> 쉽지 않은 현실을 담담하게, 차라리 별것 아니게 만들어 버리는 이 연극은 ‘중독성’이 있 다. <인터파크 kran**님>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 슬픔, 두려움, 사랑, 그리움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곁에 있는 모두일지도 모른다. <인터파크 go**님>

조형준_ 87년도 입학. 아르코예술극장 수석공연기획자로 오랫동안 일했다. 현재는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공연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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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장에 가기 전에 봐둘 3편의 영화

추억과 기록, 그리고 복수의 삼박자 정리

김선주

MB의 추억 2007년 우린 낚였다! 2012년 지금, 2007년의 MB를 되돌아보는 정산코미디!

정치인이 선거에 출마할 때면 허리와 고개가 생고무가 되지 만 일단 당선만 되면 그 유연하던 허리와 고개가 단단한 시멘 트로 변한다. 한마디로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 2012년 유권자 관점에서 2007년 MB의 대선 활동을 되돌 아보면, 참 황당하게 ‘낚였다’고 자책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땐 그게 제대로 먹혔다. 2007년 MB의 관점에서 2007년 의 유권자는 어떤 집단이었을까? 시간을 뒤섞어 보자. 2012년 우리는 2007년의 MB를 만 나러 간다. 당시 경제를 살릴 ‘준비된 지도자’ MB는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유권자 의 입맛에 맞는 말들을 MB는 막 던졌고 탐욕적인 유권자들은 열광했다. 2007년 유세 중 MB가 당시 여당을 향해 내뱉은 공격적인 말들은 대부분 지금 MB 자신과 현재 여당에 해당하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레알 코미디 같은 상황이지만 MB는 2012년에도 여전히 나름 대통령직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고, 5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말들에 대해 아무도 정산하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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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1985 故 김근태의 자전적 수기를 바탕으로 한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의 잔인한 기록

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하 직위 생략)의 자전 적 수기 『남영동』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김근태 자신이 겪은 비인간적 고문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원고가 출판 사에 도달한 시기는 1987년 1월 17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 있은 몇 개월 뒤다. 이미 원고는 여러 출판사를 거친 탓에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당시 정치 분위기로 봤을 때 출간 자 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출판사의 굳은 결심 아래 『 남영동』은 세상의 빛을 보았고, 2012년 지금까지 5쇄를 거 듭하며 꾸준히 읽히고 있다. 영화 <남영동 1985>는 영문도 모른 채 남영동 대공분실 에 끌려간 김종태가 간첩 활동에 대한 거짓 진술을 토해내는 22일간의 고문과정을 그리고 있다. 김근태 외에도 피해자는 수없이 많았다. 당시 고문 피해는 학생 운동, 민주화 운동 관 계자 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상이 의심되는 자는 여지없이 각 지역 분실로 연행돼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스스로 빨갱이라고 진술 한 뒤 반송장이 되거나 죽어서야 고문실을 나갈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이 름 아래 자행된 일이었다. 정지영 감독은 주인공을 김근태 개인에게 한정시키지 않고 고문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김종태’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고문기술자 역시 시대가 만 들어 낸 괴물이라는 의미로 실명 대신 ‘이두한’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남영동1985>는 수많은 피해자들을 대변해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사실들을 덤덤하면서도 날카롭게 들이미는 한편, 고문공화국이라 불렸던 대한민국의 한 시기, 날 선 과거를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독재정권 하의 고문 실체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남영동에서의 순간을 모두 기억하는 김종태가 20년 뒤 교도소에서 이두한과 만나는 장면은 보는 이들을 고통스러우면서도 숙연하게 만든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죄수 이두한을 바라 보는 김종태는 지난 20년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을 다시금 떠올린다. “과연, 저 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여기서 관객들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나는, 그리고 대한민국은 과연 이 치욕스러운 현대사를 용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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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다시 살아난 80년 5월 18일 광주의 비극 역사적 사실에 과감한 상상을 더한 팩션

영화 <26년>은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과 연관된 조직폭 력배, 국가대표 사격선수, 현직 경찰, 대기업 총수, 사설 경 호업체 실장이 26년 뒤 바로 ‘그날’, 학살의 주범인 ‘그 사람’ 을 단죄하려는 액션 복수극이다. 1980년 5월에 일어난 광주의 아픔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 지 않고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현재’로 시점을 옮겨 그 날의 비극이 결코 박제된 역사가 아닌,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여전 히 계속되고 있는 아픔과 상처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특히 학 살 주범인 ‘그 사람’을 단죄한다는 과감한 상상력을 더한 파 격적인 소재로 결코 잊어서도, 잊혀져서도 안 되는 비극적인 역사를 상기시키며 관객들에게 단죄에 대한 의미있는 질문 을 던진다. 영화 <26년>은 기존의 역사적 소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던 기존 팩션 영화들과 달리 원작 이 가지고 있는 오락적 요소와 진정성의 균형이 잘 맞추어진 재미있는 장르 영화로 탄생했다.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받으며 상상하기조차 힘든 철통 경호를 받고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인 연희동 저택으로의 침투 과정은 그야말로 어느 액션 스릴러 못지않은 재미를 전한다. 완벽 경호를 뚫기 위한 주인공들의 치밀하고도 다층적인 암살 계획이 전개되면서 긴장감 넘치는 에 피소드들로 채워진다. 또 점점 좁혀오는 수사망과 좌절되는 암살 시도, 팀원 내부의 갈등과 돌 출 행동으로 인한 위기, 마지막 순간까지 예측할 수 없는 결말 등을 통해 장르 영화로서의 궁 극의 재미를 선사한다. 작전 D-DAY가 될 때까지 시한폭탄처럼 이어지는 일촉즉발의 상황 전개와 사거리 시가 총 격전, 연희동의 집단 결투, 원거리 저격 장면 등 강렬한 액션이 인물들의 사연과 심리적 변화 와 맞물리면서 관객들의 감정적인 공감을 자아낸다. 또 과거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아픔의 치유를, 현재의 관객들에게는 액션 복수극으로서의 재미, 그리고 진정성 있는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 이 영화가 가고자 하는 궁극의 지향점이다.

김선주_ 83년에 입학했다. 독서모임을 하면서 집 바깥으로 나왔고, 떠밀려서 소식지의 편집장을 맡고 난 뒤로 사는 게 너무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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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님을 알 때, 더 단단해졌다

추모단체, 추모제 소식 신명철 홍수정

추모제

매년 8월15일, 광주행 버스를 탈 때면 조금은 섭섭하고 쓸쓸해지곤 했다. 조금씩 달아서 작아지는 지우개처 럼, 내년에 또 얼마나 작아져 있을까, 빈자리를 세어보게 된다. 사는 모양이 그러할진데 괜한 욕심이다 싶으 면서도 공복감이 몰려오는 건 나이 탓일까. 망월동까지 꾸역꾸역 찾아와 자리를 채워주는 추모연대 식구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우리도 좀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사라도 올리는 것이 부조일 것이고, 우리를 지키는 일이다 싶었다.

장준하 선생 37주기 추모제 파주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 옆에 장준하공원이 세

워졌다. 37기 추모제를 겸해서 공원 제막식 행사가 치러졌다. 염천 더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넘쳐났

다. 백기완 선생을 비롯한 재야 어른들도 오시고, 옛 동지들인지 백발에 노인들이 가득했다. 작년 수해로 공원묘지가 유실되어 망연자실할 때 파주시에서 나 서서 공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장준하

선생의 공원이 만들어지는 것은 기쁘고 축하할 일인

데, 그 시작은 우리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노동운동가 박태순 20주기 추모제 마석 모란공원, 열사들이 모여 있는 묘역 맨 아래쪽에 박태순이 자리 잡은 지 20 년. 박태순 친구, 선후배들이 중년의 모습을 하고 모여들었다. 한신대 총학생회장 이 인사말을 하고, 재학생들의 춤 공연도 있었다. 식순도 있고, 마이크도 동원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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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민중가수의 추모노래도 헌정되는 등 격식을 갖춘 자리였다. 한신대는 매년 10 월 학교에서 추모제를 치른다고 한다.

수원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박태순은 기무사의 내사 과정에서 행방불명됐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시흥역에서 열차사고로 사망한 사실을 밝혀냈으나, 사 망 원인과 국가기구의 개입 여부는 채 밝혀내지 못했다.

최우혁 27주기 추모제 추모연대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묘지가 장흥에 있다는데, 가까운 곳에서 다른 시간을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한경공원묘지 넓게 뚫린 송추 의정부간 도로

에서 좌회전하니, 골목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공원묘지로 가는 좁은 1차선 오솔 길, 포장이 되어 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최우혁을 묻으러 왔을 때는 얼마나 좁고 험했을까, 선한 아버님의 얼굴 보기가 자꾸 미안해진다.

서울대에 들어간 자랑스러운 아들이 시위에 나서고,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자마 자 불안한 어머니는 아들을 억지로 군대에 보낸다. 그리고 어느 날 믿기지 않는 소

식을 접한다. 생때같은 아들이 불을 뒤집어쓰고 자살을 했다고. 어머니는 자신이 아들을 죽였다고 가슴을 치다가 몇 년 뒤 아들이 있는 곳으로 먼 길을 떠났다. 선 한 아버지는 아들의 진상규명을 위해 매일이다시피 유가협을 드나든다.

최종길 교수 39주기 추모제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이고 그를 기리는 사람도 많으니, 추모제는 꽤나 성대할 거

라 생각했다. 그래 여긴 가지 않아도 되겠지 했는데, 그 동안 가족 뿐이었다고 한 다. 목사님만 유일하게 빠짐없이 참석해서 예배를 보아 주었다니, 편견은 참 무 섭다.

올해도 과거사 문제 때문에 억지로 대담 행사에 내세우지 않았다면 예년처럼 무 심히 넘어갔을 텐데, 빚진 마음에 이끌려 마석 모란공원을 찾았다. 석관은 쓸쓸하 다. 9살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참 반듯하게 살았구나, 감히 그런 생각을 했다. 항

상 웃는 얼굴에 명랑한 모습이 보기 좋다. 10여 만에 뵙게 된 어머님은 여전히 겸 손하고 차분하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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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놓기

과거청산

4.11 총선 실패와 진보진영의 혼란이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더구나 과거사 문제가 불거지면서 피해자와 과거사 단체의 역할이 절실했다. 작은 노력이라도 해야 되겠다 싶어, 역사정의실천연 대 과거사특위에 참석했고, ‘유신잔재 청산과 역사정의를 위한 민주행동’에 이내창 기념사업회 가 참여하였다. 장준하 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의 유골 법의학 감정도 돕고 있다.

과거사 입법 활동 2011년부터 일부 유족과 단체 활동가 중심으로 과거청산 과제의 실현 방도를 모색해 왔는데, 올

해 들어 그 폭을 넓혀 역사정의실천연대 과거사특위로 조직체계를 잡았다. 과거사정리를위한진 실과화해위원회의 조사 범위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서 권위주의 통치 시대의 인권침해

사건까지 광범위하기 때문에 참여 단체와 유족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한국전쟁 시기의 집 단학살 유족이 중심이고, 의문사 사건의 비중도 매우 약해졌다.

매주 특위 회의를 진행하고, 내부 토론을 거쳐 대통령 선거가 있는 올해 입법 발의가 가능하도록

준비하기로 했다. 9월 17일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중단된 과거청산 어떻게 할 것인가’란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고, 과거사특위에서 과거사법 제정 준비와 입법 초안을 마련해 유족 및 단

체 내부 토론을 거쳐 현재 민변에서 검토 중에 있다. 11월15일 과거사 입법 초안을 점검하는 토 론회가 국회 제1세미나실에서 열렸고, 12월 초에 공청회가 예정되어 있다.

중단된 과처청산 어떻게 할 것인 가 포스터

중단된 과거청산 어떻게 할 것인가 (9.17)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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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과거청산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

포괄적 과거청산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 (11.15)

민주행동 유신 40년인 2013년에 유신의 부활을 막고, 실체를 확실하게 알리자는 준비가 올 초부터 있어 왔다.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평화박물관, 전태일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 행되어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전시회를 필두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였다. 교양과 선전, 그 리고 소통이 중심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의 피해자가 결합하면서 전국 단위의 조직을 꾸리고, 다 양한 행사가 계획되었다.

8월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시민단체 책임자 간담회가 열렸고, 8월22일에는 ‘유신잔재 청산과 역 사정의를 위한 민주행동’ 출범식을 가졌다. 이내창 기념사업회도 참여하였고, 영화, 전시회, 공 연, 추모제, 학술심포지움, 강좌, 역사소풍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가칭)유신잔재 청산과 역사정의를 위한 민주행동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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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동정 + 페북동정 알림

회원들의 결혼사진을 특별기획물로 구성하기로 하고 섭외하 였으나, 편집을 해보니 마땅치가 않아 이번 호에 게재하지 못하였습니 다. 귀한 사진을 보내주신 박희성, 김혜숙, 이주현, 전경미 회원께 거 듭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오인호(82) 동문이 요즘 공부에 빠져 지내고 있다고 소식을 보내

왔습니다. 회원은 지역아동센터와 여성단체, 사회적기업 등지에서

여성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면서 회원 여러 분의 안부를 물어왔습니다.

졸업 이후 17년간 전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임재영(86) 동문

이 종로구 광화문역 인근에 사무실을 내고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퇴근길에 우연히 만난 한 회원은 “학창시절 과 하나도 변하지 않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면서 “집이 파주

라 술자리를 갖기 어렵다는 게 못내 아쉬울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88들 벙개모임 이어 MT까지 지난 10월18일 홍대 앞 일원에 서 88학번 벙개모임이 있었습니다. 모두 4개 단과대 6개학과 출신

11명이 모인 이날 벙개는 1차 막걸리집, 2차 삼겹살집, 3차 맥주

집으로 이어져 홍대 앞에서 전문 취객들을 상대로 수십년간 영업해 온 주인장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참석자는 상길 미 림 학진 원근 원옥 지원 산환 경락 동길 성원 석우 등 총 11명입니

다. 한편 이들 중 4명은 12월1일 변산반도로 학번 MT를 다녀오기 도 했습니다.

김재한(91) 동문이 2013년 1월 6일까지 어쿠스틱 뮤지컬 “김광

석,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연출합니다. 이 공연은 김광석의 노래

를 들을 수 있는 콘서트 형식의 창작 뮤지컬로 먼저 김광석의 고향 인 대구에서 공연을 시작해 차차 수도권으로 북상할 계획이라고 합 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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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권(94) 회원이 지난 10월22일 득녀했

습니다. 무려 7년을 기다린 끝에 얻은 딸이 라 모두들 더욱 더 기뻐했습니다. 아이가 생 기니 생전 안하던 페이스북에 아이 사진을 올리고 난리라고 합니다.

박찬일(85) 2012.11.19. 비빔밥. 나누는 행 위. 노동음식의 한 절정. 경상북부 내륙은

그다지 먹을 게 없다보니 소박하게 비비는 음식이 잦다. 부친 고향마을 재종숙 집에 서.

장미경(91) 2012.10.22. 내가 집에서 나와

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야.구. 때문이었

다. 주말마다 거실을 점령하고 두산 경기에

일희일비하고 있을 때의 어느 날 낮잠을 주

무시던 울 아빠가 나의 탄성에 잠이 깨신 거 다. 가뜩이나 연애도 안하는 나를 탐탁치않

게 생각하고 계셨는터라 두산의 홈런으로 쇼파에 올라서 고함을 지르는 중년의 딸이 장미경_막걸리, 두산 그리고 나

용서될 리 없으셨던거다. 난 지금까지 살면

서 야구만큼 나에게 행복을 느끼게 한 것이 없다. 물론 사랑하는 남자가 없은 이후에 알

게 된 일이다. 남자와 야구 나 이외의 나를 채워주는 것들. 나는 지금 누가 이겨도 상

관없는 야구 경기를 보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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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희 우리나라공연 -잘지내시나요

전권_아빠와 아들

김성희_아내와 집뒤 백사실 산책. 우람한 플라타나스

정보영_출근길 낙엽송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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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영_농부시장에서

정종희 대학로뮤지컬센터가 곧 오픈합니

다.신영복 선생님이 써 주신 대학로뮤지컬 센터 현판.

박성용

2012.11.20. 세상이 미쳐 돌아간

다. 가난뱅이가 대기업과 부자만을 사랑하 는 정당과 후보를 지지하고, 아이들 한 끼

밥에 목숨 걸고 달려들고, 평일 밤늦도록 시덥잖은 연예 프로가 판을 치고, 촛불로

추위를 견디던 할머니와 손주가 화마를 당 해도 무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600만

가까이 되고, 투표시간 연장 비용 100억원 미친세상 브라우니 물어

대는 아깝고 박정희기념사업에 들인 1200 억원이 넘는 돈은 아깝지 않고, 북한 세습

은 욕하면서 독재자의 딸은 대선후보가 되 고, 남북화해를 말하면 빨갱이가 되고, 민 주주의를 외치면 좌파가 되고, 정부시책을

비판하면 좌빨이 되는 이 세상을 브라우니, 꽉 깨물어버렷!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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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움직이니 마음이 따라 움직였다 정리

사무국

7월27~29일 여름캠프(괴산) 25명 참석 / 천연염색 등 다채로운 체험활동 가져

2012년 여름캠프가 7월27일부터 사흘간 충북 괴산에서 열렸습니다. 현지 코디네이터인 삼송리 마을 반장 이제 성 회원이 섭외한 빈 집에서 열려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 고 안락한 캠프를 열 수 있었습니다. 캠프 후에는 회비가 남아서 참여회원들에게 얼마씩 돌려주기도 하였습니다.

2012-07-28 여름캠프

27일 밤에 집결한 회원들은 밤늦도록 못나누었던 이야기 를 주고받고 다음날 농사일손 거들기와 염색하기, 물놀 이 등을 하였습니다. 특히 우지영, 김은희 회원이 준비한 천연염색은 온 가족이 함께하는 색다른 체험이었습니다. 또 식사총괄을 맡은 고재영 회원 덕에 맛있는 밥상이 매 끼니 제공되었습니다. 마지막날 이원근 회원의 사회로 아나바다를 벌였고 참석자 모두가 괴산의 친환경 농산물

2012-07-28 여름캠프

을 장보기하여 차 한가득 실어갔습니다. 항상 즐겁게 회 원들을 맞아주시는 장성백, 이제성 가족에게 감사 인사 드립니다.

7월27일, 8월3일 한겨레신문 이내창 열사 관련 기사 게재 (김형태 변호사 비망록 2편)

한겨레신문이 김형태 변호사 비망록 칼럼에서 이내창 의 문사를 다루었습니다. 7월27일과 8월3일자 연재 기사에서 김형태 변호사는 당 시 상황을 되짚어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내창_한겨레신문

“나는 결론을 보지 못하고 의문사위원회를 떠났고 나중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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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아쉬웠다.‘안기부가 이내창을 민미련과 전대협의 중요 연결고리로 삼아 내사공작을 하 였고 그 과정에서 이내창이 사망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국정원은 내사기록 및 관련자 존안자료에 대해 비 협조로 대응함으로써 관련자 신원 확보와 이내창에 대한 가해과정을 정확히 확인하지 못하였다.’ 나는 한 편의 첩 보영화 같은 추리를 해본다. 당시 안기부는 북에서 임수 경 전갈을 들고 온 사람이 있는 양 이내창을 거문도로 유 인하는 역공작 중이었다. 그런데 이 사정을 모르는 경찰 쪽에서 민미련 사건 수사차 이내창을 미행해 거문도까지 쫓아왔다. 그리고 이내창 일행을 체포하려는 과정에서 이내창이 역공작을 눈치채게 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8월15일 23번째 기제 30여 명 참석

올해도 어김없이 다녀왔습니다. 유가족을 포함해 30여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2012-8-15-23주기

8월15일 아침 9시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서울과 안 성에서 참가자들은 정시에 모여 출발하였습니다. 광주에 서 김형균 동문이 음식준비를 해주었습니다.

9월1일 끈덕지게 어깨동무 2012 가을·겨울호 편집회의 시작 12월11일 발행 및 발송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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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8일 하반기 운영위원회(예정) 하반기 운영위원회가 12월18일 열립

2012년 전반기 사업보고

(자세한 소식은 어깨동무 2012 봄·여름호 참고)

니다.

1월14일

이내창기념사업회 총회

받을 예정입니다.

1월15일

통혁당 박기래 선배 부의금 전달

2월3일

소식지 편집기획회의(1차)

2013년 1월26일

3월6일

소식지 제호 제안 시작

2013년 이내창기념사업회 총회

3월10일

핵없는 세상만들기 반핵행동 참가(서울광장)

1월26일 2013년 이내창기념사업회

3월14일

소식지 편집기획회의(2차)

총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3월19일

제주 강정마을 음식 만들어 보내기

이날 총회에서는 2012년 전체 사업보

4월2일

소식지 편집회의(3차)

고와 회계결산 보고, 2013년도 사무

4월9일

과거청산 왜곡부정 새누리당 규탄 기자회견 (여의도 새누리당)

4월21일

추모연대 의문사관련 회의

회원 여러분의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

4월21일

쌍용자동차 노동자 추모 및 정리해고철폐 범국민추모대회 참가(평택)

다.

5월4일

상반기 운영위원회

6월10일

21회 범국민추모제와 610합창대회 참여

2013년 사업 논의와 사무국장 추천을

국장 선출 및 집행국 인준 등의 안건을 다룰 예정입니다.

나누세요 담으세요 • naechang.kr • facebook.com/naechang

• cafe.daum.net/19890815 • naechang.lee@gmail.com

함께 만들어요. 하나, 2013년 봄·여름호 편집위원 되기

둘, 기고하기

자주 안 모입니다. 회의는 짧게, 뒤풀이 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일은 찾아서 하 고, 할 수 있는 만큼 합니다. 느릿느릿 갑니다. 끈덕지게 함께 갈 열의와 책임 감이면 충분합니다.

어떤 형식과 내용의 글이라도 좋습니다. 나누고 싶은 생각,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보 내주세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확 인하고 싶습니다. 회원 자녀의 기고에는 소정의 원고료가 지급됩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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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함께하니 당당해졌다 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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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회비 결산이자 추모위원회비 추모연대회비 이자세금 소계 6월잔액 회비 소식지회의비 소식지인쇄비 소식지편집비 소식지우편료 소식지봉투제작 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수 련회비 소계 7월잔액 회비 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회비 기제지원 소계 8월잔액 회비 결산이자 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회비 기제현수막 소계 9월잔액 회비 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회비 소계 10월잔액 회비 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회비 근조배송 한숙영원고료 추모연대 조의금 소계 11월27일 현재잔액

출금

200,000 50,000 370 250,370

265,000 1,000,000 400,000 432,080 130,000 50,000 20,300

입금 657,980 2,689

660,669 24,585,568 678,000

50,000 20,300 591,140 661,440

50,000 20,300 27,000 97,300

50,000 20,300 70,300

50,000 20,300 87,000 50,000 100,000 307,300

박성훈 권향숙 이동희 이민진 김용수 구혜영 이금숙 조환준 김기수 최호식 황선태 고재영 박희성 강혜연 이남영 곽현희 신명철 정보영 이태경 김성희 박지훈 김현동 이주현 이상재

200,000 2,497,380

내 마음이 편해지는 길

678,000 22,766,188 578,300

구은경 김학진 노병진 이영은 우유섭 조형준 신성호 백기욱 정순호 김현숙 홍미숙 전경미 김형구 박응식 정원옥 위상혁

578,300 22,683,048 818,240 190

818,430 23,404,178 798,260

798,260 24,132,138 718,940

김산환 강동길 고철주 황광우 원순재 이상길 김태호 이혁승 노민옥

여기에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보태주세요.

자동이체 및 후원 계좌입니다.

국민 0250 - 1036 - 8426 추모사업회 (정원옥) 718,940 25,319,488


l 찍은 날

2012년 12월 7일

l 펴낸 날

2012년 12월 10일

l 펴낸 이

강내희

l 펴낸 곳

이내창 기념사업회

l 연락처

사무국장 백기욱 010-4163-6260

cafe.daum.net/19890815

김선주, 김경주, 이원근, 정원옥, 백기욱, 신성호, 김지훈이 함께 만 들었습니다. 송정근이 표지 사진 게재를 허락해 주었고, 제호와 마 침로고는 김경주가 캘리그래피로 디자인하였습니다. 강영희가 편 집 디자인을 맡아 주었습니다. 인쇄는 신명철, 발송은 김기수가 수 고하였습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는 naechang.kr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온라인 소식지 관리는 박형록이 담당합니다. 바쁜 시 간을 쪼개어 원고를 보내 준 회원들에게 감사드리며, 회원 자녀 와 기념사업회 외부에서 원고를 주신 분들에게 특별히 감사드립 니다. 페이스북 담벼락의 사진과 글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회 원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소식지 재창간에 많은 관심 과 의견을 주신 운영위원 및 모든 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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