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동무 2014 봄여름호 웹용 저용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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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권 제5호

이내창기념사업회 2014 봄·여름호(이내창열사이장특별호)


1989년 8월 15일 조각가를 꿈꾸던 스물일곱 청년이 거문도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총학생회장 이내창, 우리는 그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기억에서 그치지 않고, 말하고 증언하며, 전하고 기록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발언할 수 있는 모든 곳, 싸울 수 있는 모든 지점에서 곳곳에서, 도처에서 밝혀질 때까지. 이내창 그의 또다른 이름은 진실입니다.


여는 글

청년 이내창과 25년을 추스르고,

2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김선주

↘ 가로지르기

4 이내창 열사여, 어둠에서 한줄기 빛을 봅니다

장임원

↔ 어깨걸기

7 내려오니 좋으니껴? 야 참 좋으니더

송은진

↓ 특집 이내창, 25년만의 해후

16 이내창의 삶과 죽음…2014년 25주년

김성희

24 신문으로 본 1989년

신명철·김성희

40 다시 살아 싸우는 열사

조환준

48 이내창 선배와 나

고두현

53 열사와 선배 사이

강석남

56 내창이형이 맺어준 인연

사진집단 현장

64 해마다 8월이 오면!!

정왕룡

∇ 만나기

66 열두 살 눈높이로 바라본 세상은

김선주·이원근

§ 추모하기

지금쯤 둘이 신나게 어울려 막걸리 마시면서

76 연극 얘기 하고 있을 거다

김진휘

√ 잊지 않기

80 우리는 만나고 또 만나자, 이길 때까지

강남규

86 정녕 침몰한 것은 세월호 뿐인가

조환준

91 세월호 이후의 세상을 산다는 것은 과연 뭘까

정은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95 1차 공동조사 참가 보고

신명철

♬ 클래식 친해지기

103 그냥 가면 섭하지, 입수 한 번 하고 가

박성룡

⌘ 함께 하기

108 2014 봄여름 과거청산 기록

신명철

= 털어놓기

112 회원동정 + 페북동정

편집위원회

114 마음을 함께 하니 당당해졌다

사무국

116 독자목소리

연창훈·박희성·김현숙


포토에세이 여는 글

청년 이내창과 25년을 추스르고,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김선주(편집장)

세월호 참사 111일째입니다. 어깨동무를 받아 볼 때쯤에는 120일쯤 될 듯합니다. 이내창 25주기가 세월호 참사 122일이네요. 오전에 광화문에 나가봤습니다. 전날 태 풍 때문에 천막을 걷고, 광화문 지하로 급히 자리를 옮긴 터라 걱정이 되기도 했고요. 새누리당 의원 말대로 노숙을 하기 위한 대형 천막들이 속속 세워집니다. 사람의 힘은 위대하지요.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는 것은, 안전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뜻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저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이구나 싶습니다. 그래서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쉽게 할 수 없었습니다. 서울 도심을 행진해도 구호가 잘 나오 지 않았습니다. 약속이란 게 참 모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25년의 세 월을 살아왔으니까요. 그래서 아이들의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어야 하고, 내 안의 슬픔과 함께 버무려져야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창이에게 물었습니다. “봤니, 내창아. 너처럼 바닷물 거품을 가득 문 아이들을?” 그리고 빌었습니다. “네가 어떻게 힘 좀 써봐라. 이제 그 만 올라오라고.” 팽목항에 갈 때마다, 배를 타고 세월호가 가라앉은 현장에서도 기도 는 가녀리고, 파도는 넘나듭니다. 이내창이라면 어찌 했을까요. 중요한 일이 있거나, 판단이 필요할 때마다 묻는 질문 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질문을 합니다. 아마 당신만의 방식으로 잊지 않겠다는 약 속을 지키라고 주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을 제대로 살아내기를 기대하지 않을 까, 그게 내창이답다 생각합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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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 25살 내창이만큼의 청년이 되도록 그가 왜 죽었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지 못합니다.” 엄마의 위치에 서면 세월호나 이내창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인터넷 검색만 하면 기 본 정보를 알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내창은 여전히 무거운 이름입니다. 그와 의 시간들을 떠올리는 것도, 그의 죽음과 관련된 무수한 소문과 온갖 추론들을 입 밖 에 꺼내는 것 모두가 불편함을 동반합니다. 그 불편함을 감수하며 진상규명 과제를 안 고 25년을 지켜왔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긴 시간을 더 눈 부라리며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지내고 보니 이만큼 견뎌온 기념사업회가 든든합니다. 지난 4월에 이내창 이 장을 준비하며 학생들과 강좌도 함께 하고, 이내창 사진 전시회도 열면서, 다들 잘 살 고 있구나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8월 15일에는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이 장합니다. 이내창이 2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봅니다. 광주 망월묘역을 떠나 이천으로 모시는 길에, 중앙대병원에서 동문과 옛 동지들을 만나 해후하려 합니다. 청년 이내창 과 25년을 추스르고,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8월 15일 25주기 이내창을 대신해서 당 신을 기다립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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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지르기

이내창 열사여, 어둠에서 한줄기 빛을 봅니다 장임원

이내창 열사 25주기를 맞는 오는 8월

한치 앞도 뚫지 못했으니 말이다.

15일, 본래의 민주성지 망월동 묘역에서

민주정권하에서 꾸려진 의문사진상규

이천에 새롭게 조성한 ‘민주화운동기념공

명위원회, 그리고 진실화해위원회 등이

원’으로 이장한다. 이 묘역에는 강경대 등

나름 최선의 노력을 다해 사법부의 오판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함께 안장된다 하

을 바로 잡은 경우들은 더러 있었지만 국

고, 입법 취지대로라면 민주열사들에 대

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의문사의 경우,

한 국가적 예우로 이루어지는 만큼 묘역

제대로 된 진실규명은 한 건도 없어 안타

이전은 큰 의미를 갖는다.

깝다.

그럼에도 이내창, 당신과 관련해서 글 을 쓴다는 게 마음 한구석이 저려오고 염 치없이 느껴짐은 어쩔 수 없다.

사실규명을 거의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 렀음을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 정부의 공백을 거쳐, 지금의 박

의문사 꼬리를 붙인 채 당신과 헤어진

근혜 정권은 한 술 더 떠 광주민중항쟁 등

지 25년이 지났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

각종 민주투쟁의 기념식에서의 ‘임을 위

니었다.

한 행진곡’을 불용하더니 마침내 ’민주열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당신의 의문사 꼬리를 명쾌하게 아직 지우지 못하고 있 으니 부끄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사’라는 호칭까지도 시비를 걸고 나섰다. 이렇게 된 바에야, 국가권력이 선이든 악이었든 그 절대적 존재의 당위성을 어

군사정권, 보수정권에서는 말할 것도

차피 넘어설 수 없을 바에야 관행으로 굳

없고 이른바 국민의 정부, 열린 정부 등

어진 ‘의문사’라는 용어의 사용을 버리고

10년의 민주정권에서조차도 진상규명은

차라리 ‘국가권력에 의한 죽음’으로 규정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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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 아무래도 현명하고 백번 옳지

나누어 갖기를 거부하는 성장만을 가치

않나 싶다.

이념으로 추구하는 추악한 보수의 종착

이제 집권 1년 반이 지난 박근혜 정부 를 살펴보자.

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무게중심이 아래에 있을수록 선박의

한마디로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니다. 우

복원력이 유지되듯 한 국가의 위기로부터

리는 세월호의 침몰에서 이 나라의 침몰

의 복원력은 민중의 삶에 무게중심을 둘

을 동시에 목격한다.

때 강화되고 억압적 국가권력에 의한 통

대선공약에서 선포한 신뢰에 바탕을 둔 대통합은 이미 실종됐고 그 자리엔 불신 과 분열만이 대신 채워지고 있으며 국가 경영은 무능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다.

치나 보수언론에 의해 오도되는 여론몰 이는 결국 복원력을 훼손시킬 뿐이었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희미하나마 한 줄 기 밝은 햇살이 보인다.

세월호 침몰이 있자마자 한 사람의 희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의 진보진영의 획

생도 없이 전원 구조해야 한다는 박 대통

기적 진출은 미래의 대한민국에 희망의

령의 언급, 어처구니없이 한 사람도 구조

새움을 돋게 할 것이다.

하지 못한 채 300명이 넘는 꽃 같은 젊은

우리 교육을 경쟁보다는 협동을, 성장

생명이 희생됐으니 신뢰는 전무라고 말할

보다는 나눔을, 독선보다는 소통을 배우

수밖에 없다. 정부 출범 초기에 야단법석

고 실천하는 체제로 전환시켜 사랑과 평

이었던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의 파기는

화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돌이켜 보건대 사치스런 불만이었다.

기대한다.

잃어버린 신뢰의 회복, 이것 역시도 보

이 귀중한 미래 교육의 새싹이 움츠림

이지 않는다. 한 오라기의 진정성도 보이

없이 성장, 언젠가 그 거목을 민주열사들

지 않는다. 너무나 막막하다. 캄캄하다.

에게 헌정하고 싶다.

국민에게 만천하에 세월호의 참사에 사죄 하며 물러나기를 선포했던 정홍원 국무총 리의 유임이라는 ‘고뇌에 찬’ 박 대통령의 결단 앞에선 아연실색이며 신뢰와 진정성 의 완전무결한 상실을 확인한다. 사실 엄밀히 따져 말하면 예측 가능한 사태였다. 수단방법과 탐욕을 가리지 않은 경쟁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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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임원 선생님은 전 중앙대 의대 교수로 이내창 열사의 부검에 참여하는 등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함께 투쟁하였으며, 이내창 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셨다.



어깨걸기

매년 후지 수확 마지막 날엔 사진을 찍는다

내려오니 좋으니껴? 야, 참 좋으니더 송은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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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그동안 평안하셨지요? 오랜만에 인사드리는 문창과 91학번 송은진입니다. 저는 예 술대학 단대지 <중앙예술>을 만들다 정든 사진학과 91학번 방상운과 결혼했구요, 13살과 10살인 아들들이 있습니다. 2011년에 경북 의성군 옥산면으로 내려와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4년차 초보농부입니다. 시골로 내려와 농사지으며 사는 걸 귀농이라 부르지요. 저는 서울에서 나고 자라 뼛속 깊은 도시여자였기에 “귀농”했다는 말과 어울리는지 모르겠어요. 모든 걸 새로 배워가는 출발점이 되었으니 “출농”이라 부르는 게 더 맞을 듯합니다. 귀농 후에는 으레 자급자족하는 삶, 공동체적인 삶을 이룰 거라 여기시지만, 과수 농가인 저희는 다른 분들과는 좀 다릅니다. 일단 농사짓는 면적이 넓고 병충해 피해를 막기 위한 방제가 필수입니다. 땅 한 평만 있어도 사과나무를 심는 이곳에선 개별 과 수원 작업이 중심이라 재배기술이 뛰어나고 소득이 높아야 인정을 받습니다. 생계유 지의 삶이니 자연 속에 살아도 그리 낭만적이거나 여유롭지도 않네요. 과수원 일에 바 빠 풀을 잡지 못해 텃밭도 소꿉장난하듯 겨우 식구들 먹을 정도만 키웁니다. 아직도 귀가 열리지 않아 어르신들 말씀하시면 못 알아듣고 조용히 웃고만 앉아 있는 어리버 리한 새대기(새댁)랍니다.

눈싸움할 때는 두 아이가 한편이 돼서 아빠의 항복을 받아낸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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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꽃은 품종마다 생김새가 다르다

시골생활이 어떤지 몰랐기에 쉽게 동의했던 귀농 이렇게 살려고 그랬는지 신혼시절부터 귀농운동본부에서 펴내는 <귀농통문>을 열 심히 읽고 있습니다. 책 속의 삶은 열정으로 가득 찬 신세계 그 자체였습니다. “와 대 단하다!”며 감탄사를 연발하던 저와 달리, 시골에서 나고 자라 농사의 고단한 일상을 아는 남편은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짚어보며 읽더군요. 그 모습에서 “귀농”이 나의 삶이 될 수도 있을 거란 예감은 하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내려갈 수 도 있겠구나 싶었지 당장에 준비할 미래는 아니라 여겼지요. 그러나 큰아이가 세 살이던 2004년 여름, 맞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생활이 힘들기 만 했던 남편은 귀농을 하면 어떻겠냐며 저의 동의를 구하더군요. 남과 비교·경쟁하 며 조직의 부속품으로 마모되는 생활에 지치고, 취미생활조차 돈이 없으면 누리기 힘 든 도시생활은 자기와는 맞지 않다고요. 분당의 지역 생협에서 조합원 활동가로 지내 던 저 역시나 늘 물질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깊고, 자라는 아이들의 다른 성장과정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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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조차 우위를 가리려는 모습들에 지치던 때였습니다. 남편이 어 렵게 꺼낸 이야기에 그 자리에서 가겠노라 대답은 했습니다. 농

남편이 만든 가구로 채운 집 의 모습

사에 대한 경험이라고는 농활기간이 전부고, 시골살이에 대해 서도 글로 아는 게 다였지만 왠지 가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 었습니다. 그렇지만 뭐부터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 기도 했습니다.

귀농준비는 자식농사부터 일단 아이가 좀 더 자랄 때까지 우리에게 맞는 농작물과 내려 갈 지역을 정하기 위한 조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지역농 협과 농민들 취재를 다니는 일을 하니 준비가 어렵지는 않았습 니다. 시골에서 같이 커갈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둘째도 낳았습니다. 사실 둘째가 유치원 다닐 때까지의 긴 시간 동안 “내려간다더니 언제 가냐?”며 주변에선 수없이 물을 정도로 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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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과수원 연못에서 버들치 를 잡은 작은 아이 현민 오른쪽 진돗개 복실이가 낳은 강아지를 안고 있는 큰아이 현송

비기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 이유는 평소 나무를 키우고 싶다 던 남편 뜻에 따라 과수농사를 짓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과 수원은 면적이 있어야 하니 남편은 더 열심히 일하고, 저는 알뜰 히 모아야 했지요. 어떤 과일을 재배할지에 대한 결정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가 장 좋아하는 사과를 실컷 먹으면 좋을 테니까요. 하지만 사과는 과일 중에서도 재배가 어렵고 힘들기로는 으뜸이라 합니다. 전 국의 무농약 이상 유기재배농가 수가 얼마 되지 않은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렇지만 남편이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이라 무농약 사 과를 재배하는 전북 장수의 농가에서 몇 년간 사과 키우는 법도 배웠고, 장수지역을 중심으로 사과생산지들을 돌아보며 우리에 게 맞는 땅이 있는지 찾아 다녔습니다. 땅도 인연이 있다더니 원하는 과수원은 그리 쉽게 나타나질 않더군요. 그러다가 2010년, 경북 영주에서 마음에 쏙 드는 땅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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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을 만났습니다. 부석사에서 5분 거리인 과수원은 주인 분께서 건강이 악화되어 어쩔 수 없이 내놓으셨다고 했습니다. 한창 열매솎기로 바쁜 5월에 계약을 하여 남편은 하 던 일도 그만두고 과수원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전 주인 분이 쉬어보니 건강이 좋 아졌다며 계약을 물리자고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마음 착한 남편은 계약금만 돌 려받고 7월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덕분에 본격적으로 매매로 나온 과수원들을 알아보다 그해 가을, 단지 땅값이 싸다 고 들러봤던 의성에 4300평 과수원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농민운동을 하던 분이 짓던 밭이라 잘 관리되지 못했어도 우리 손으로 일궈낸다면 더 좋아질 수 있을 것 같 았습니다. 이 지역은 사과의 주산지라, 부모가 지으시던 농사를 물려받아 들어오는 귀 농이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아무 연고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불쑥 들어온 우리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도 곱지만은 않았습니다. 손에 익지 않은 농사일의 어려 움은 그러려니 해도 쉼터가 돼야 할 집이 계속 문제를 일으키더군요.

왼쪽 과수원에서는 주로 사다리 위에서 작업한다 오른쪽 후지 사과를 수확하고 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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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사한 집은 종일 보일러를 돌려도 실내온도가 14도를 넘지 않아 추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지하수를 쓰던 수도관마저 얼어버려 더운물을 쓰려면 솥에 불을 땠고, 물을 끌어올리던 모터는 고장이라 쓸 때마다 마중물을 부어줘야 했습니다. 비만 오면 흙탕물이 나와 애먹었지요. 가져온 짐의 반도 풀지 못하는 낡고 좁은 집이지만 그럭저 럭 고쳐가며 정붙이며 살았습니다. 가을이 되자 그 집이 속한 땅의 주인이 바뀌면서 집을 비워달라는 통보를 하시더군 요. 내려와서까지도 집 없는 설움은 컸습니다. 다행히 면에 빈집이 나서 좋아했더니 얼 기설기 지은 시골집은 겨울에 무지 춥고, 여름은 절절 끓었습니다. 그래도 오래 살 수 만 있다면 좋겠다 싶었지만 친척분이 이사 오셔야 한답니다. 결국 2012년 여름에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생활이 안정되려면 집짓기가 최우선이 었습니다. 전부터 바라던 “단열이 잘 되고 햇빛이 잘 드는 집”은 경량목조주택으로 결 정했습니다. 그리고 시공사를 통하지 않고 공정마다 전문가를 불러 작업하는 직영방 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덕분에 필요한 자재를 괜찮은 가격에 구하러 돌아다녀야 했 고, 시공팀과의 일정조율에 속도 많이 태웠습니다. 6월에 시작한 집짓기는 9월이 되어서야 마무리가 되고, 살림에 필요한 가구들은 남 편이 직접 만들어 공간을 채웠습니다. 집짓고 남은 자재를 활용하니 비용도 절약되어 좋았습니다. 집을 짓는 게 단순한 자재의 결합이 아닌, 짓는 이들의 마음과 정성이 합 쳐져야 제대로 완성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답니다. 새 집에 들어오고 나니 비로소 여기가 내가 살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작스레 시작하게 된 사과 직거래 귀농 첫해부터 계절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이 ‘번호표를 뽑아들고 대기하고 있 나’싶게 정신없이 일해야 했습니다. 내려올 땐 “밥만 해주면 된다”던 남편의 말과 달리 일손 하나가 아쉬운 데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과농사는 단계마다 필요한 일 을 때맞춰 끝내야 그 다음 작업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경험 부족으로 일머리가 부 족하고 손이 더디니 생각만큼 진척이 되지 않고, 병충해 피해도 입으니 불안한 마음에 부부싸움도 했더랬지요. 그러다 정작 제일 중요한 사과판매에 대한 고민 없이 사과 수 확을 맞았습니다. 아니 실정을 모르니 고민할 줄 몰랐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겁니다. 사과만 맛있게 잘 키워낸다면 판매에 대해선 걱정할 게 없다던 자신감은 첫 공판장 경매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상품으로 인정받는 사과는 크고 색이 잘난 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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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과였습니다. 무조건 남들보다 빠른 시기에 출하해야만 높은 가격을 받는다는 것도 알 았습니다. 성장촉진제나 착색제, 비대제 없이 친환경 재배한 작고 못난 우리 사과는 기대 이하의 값어치 낮은 상품이 되어버렸습니다. 공판장 선별기에 올라가자마자 함부 로 취급받는 사과를 보는 게 얼마나 속상하던지요. 우리의 재배법이 공판장 판매에는 맞지 않으니, 크기보다는 맛을 중요시하는 직거래 가 필요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때를 맞춘 듯 아는 분들의 소개만으로도 믿고 주문 하겠다는 분들의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인연들 덕분에 첫해부터 지금까지 농 민회를 통해 생협에 들어가는 일부를 제외하고 생산한 사과 대부분을 직거래로 판매 하게 되었습니다.

일을 잘하든 못하든 내 몫은 하며 산다는 기쁨 사과밭 일은 가지치기, 풀베기와 방제 같은 힘든 일은 남자의 몫이지만 열매솎기와 인공수분, 잎 따주기와 가지유인처럼 부부가 분담할 일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가운데 두고 나란히 서서 일하곤 하지요. 남편과는 24시간을 같이 지내니 내려오기 전부터 “대화하기” 연습을 해두었던 게 도움이 많이 됩니다. 농부의 일은 공휴일도 없고 비 오는 날은 그날대로 할 일이 있습니다. 직거래를 하니 겨우내 택배작업으로 바빠 정작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 미안하기도 합니다. 전 교생이 40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라 늘 친구가 고픈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친구 노 릇을 해줘야 하는데 말이지요. 그렇지만 부모에 의지하지 않고 바르게 커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비록 몸 쓰는 게 고달프고 가뭄과 더위, 추위에 힘들지만, 건강한 나무에서 좋은 사 과가 생장하는 과정을 알아가는 재미가 새록새록 늡니다. 일의 시작과 끝이 분명하고, 일한 만큼의 성과가 바로 나타나니 농사일은 내 몫은 해내며 살고 있다는 성취감을 줍 니다. 일손들을 위해 밥과 참을 준비하려니 요리 실력도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습니다. 내려와서 얻은 행복이라면, ‘지금 여기의 삶에 만족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나 미래 에 휘둘리지 않고 바로 이 순간의 일상에 집중하며 살아갈 수 있음이 좋습니다. 만족 할 줄 아는 마음은 농사가 준 가장 기쁜 선물이랍니다.

송은진은 72년 쥐띠. 대학 생활의 8할은 <중앙예술> 방과 예술대 학생회실에서 보냈다. 졸업 후 학원 국어강사와 자유기고가로 일했 다. 지금은 ‘사과현농장’의 안주인이며 말도 한 마리 키워보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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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이내창, 25년만의 해후 이내창의 삶과 죽음 - 2014년 25주년 신문으로 본 1989년 내창이형이 맺어준 인연


특집

이내창의 삶과 죽음 - 2014년 25주년 이내창 기념사업회 운영위원

김성희

25년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예술대학 조소학과 86학번. 그는 1989년 8월 15일 해질녘, 아무 연고도 없던 거문도 유림해수욕장에서 변사 체로 발견되었다. 대지를 녹일 듯 뜨겁던 태양이 잠시 구름이 가리워지고 바 람이 거세던 여름날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당시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동료들에게도 큰 충 격을 주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나섰던 수많은 사람 들이 목숨을 바쳐야 했던 일들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들의 소박한 저항이 정말로 목숨까지 요구하는 일이었구나. 도대체 군부독재정권(당시 노태우 정권)이 젊은 대학생을 무참히 살해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느닷없는 사건이 준 충격에 우리들은 몸서리를 쳤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우리들은 ‘목 숨 걸고 끝까지 싸우자’는 말을 밥 먹듯이 했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닥칠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한 어린 대학생들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에 는 미처 잘 몰랐지만, 그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 두려움, 분노… 그 일을 외 면한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 갈 수는 없게 만드는 가책, 이런 복 잡한 마음 때문에 우리들은 예외 없이 참 힘겨웠다. 그렇게 25년이 지났다.

이내창의 성장기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현, 이내창기념사업회)는 1999년, 그의 10주기를 맞아 《의문의 죽음, 그리고 10년》이라는 자료집을 펴냈다. 소설가 전성태(문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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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과 89학번)는 여기에 ‘청년예술가의 삶과 죽음’이라는 그의 약전을 실었 다.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그는 어떤 삶을 살았던가. 전성태가 자료를 정리하 고 관련자들을 인터뷰한 뒤 작성한 그 자료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이내창은 9남매의 막내였다. 그의 아버지는 경기도 포천의 가난한 농부였 다. 부잣집 딸로 자라난 그의 어머니는 머리가 명석하고 감성이 풍부한 분이 었다고 한다. 1989년, 자식을 잃고 절규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 억하고 있다. 그 일이 일어난 뒤, 더할 수 없는 절망감에 침통해 하시던 그 분 의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늘 가슴이 아렸다. 이내창의 부모님들은 경기도 포천에 살던 무렵 이미 6남매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둘을 병명도 알지 못한 채 잃고 말았다고 한다. 벽촌이라 변변한 병 원도 없던 그곳에서 아마도 자식을 살리고 가르쳐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내창의 부모님들은 솔가해서 서울로 이주했을 것이다. 서울 청량리, 창신 동 일대를 전전하며 전구공장, 포목점, 쌀가게 등을 운영했지만 사업은 신통 치 않았고 가정 형편도 나아지지 않았다. 서울로 이사한 뒤 아들 셋이 더 태 어났고 그 가운데 1962년에 태어난 이내창은 7남매의 막내가 되었다. 사업 이 계속 실패하면서 부모님은 나머지 자식들을 서울에 남겨놓은 채 막내인 이내창만 데리고 고향인 포천으로 돌아가 2년 남짓 농사를 짓기도 했다. 아 버지가 한전에서 운영하던 전차 차장으로 취업을 하면서 가족들은 비로소 다시 서울 신당동 언덕바지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이 때부터 가정 형편이 차츰 안정되었다고 한다. 이내창은 신당동에 있는 청구초등학교, 인근의 대경중학교를 거쳐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중동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청구초등학교 시절 그는 자폐증 을 앓던 친구와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는데, 그 영향으로 다른 친구들도 그 친구를 그렇게 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내창은 형과 누나들 사이에서 귀여 움을 받으며 자랐다. 중학교 때까지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공부도 곧잘 했 다. 중동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무렵 감수성이 예민한 그의 삶에 충격을 준 일들이 발생했다. 먼저 1979년에 아버지가 혈압으로 쓰러져 돌아가신 일이 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보다 스무 살 많은 맏형은 한양공대를 졸업한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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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어머니와 동대문에 포목점을 차려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이내창은 중동고등학교 시절 졸업생 선배들의 영향으로 사회의식에 눈뜬 고등학생들이 사회봉사를 하던 ‘정우회’라는 동아리에 속해 있었다. 1980 년 5월. 비록 고등학생들이었지만 이내창은 친구들과 광주학살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만들고 서울시내 고등학생들이 연합해 규탄대회를 준비했다. 그러 나 학내 선전전을 시작하던 날, 사전에 발각돼 친구 일곱 명이 구속되었다. 용케 구속을 면했지만 그는 친구들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대학입학 예 비고사 시험을 보기 전날까지 그들을 면회 가서 사식을 넣어주곤 했다. 그는 그해 대학입시에 낙방했다. 한 해 재수를 하며 본격적으로 미술대학 입학을 준비해 인천대학 미술학과에 입학했다. 미대 진학을 결심한 데에는 감성이 풍부한 모친과 형님 두 분이 미술을 전공하고 누나가 연극을 하던 집안 분위 기에 영향 받았을 것이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뒤 바로 군에 입대해 강원도 고성에서 30개월을 복무 했다. 구타가 횡행하고 견디기 힘든 인권침해가 일상이던 당시의 병영문화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더욱 확고하게 다져주었다. 그는 군에서 전 역하며 다시 대학입시를 치르고 1986년 중앙대학교 조소학과에 입학했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힘이 되던 그 1986년 중앙대학교 안성교정에도 학생운동 조직이 막 뿌리를 뻗어나가 고 있었다. 그 무렵 전국적으로도 학생운동은 커다란 방향전환을 하고 있었 다. 소수의 운동 이론가들이 대중들을 ‘견인한다’는 식의 시각에 대한 자성 이 일고,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품성과 생활태도에서도 모범을 보여 학생대 중들에게 신망을 얻고 그들과 함께 변혁운동의 주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이 광범하게 퍼져가고 있었다. 학생운동 그룹에 만연해 있던 수직적인 권위 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이 일고 운동가들은 선배의 ‘오더’에 따라 이끌려가는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자기 삶과 운동의 주인으로 우뚝 서며, 서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하자는 생각이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었 다. 선배도 후배도 서로에게 배우는 ‘학형’으로 대하며 서로를 ‘형’으로 부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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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문화가 일반화되었다. 학생운동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이제 이론의 정 교한 논리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는 따뜻한 심성과 품성이었다. 군 전역 후 동기생들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나이로 조소학과에 입학한 이 내창은 전공수업과 조소 작업에 치열하게 매달렸다. 학과 성적도 수석을 차 지했고 전공 창작도 열심인데다 작업실 청소도 늘 앞장서는 그에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론으로만 강조되던 ‘품성을 갖춘 운동가’로 그만큼 골고루 자 질을 갖춘 사람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학생운동 그룹의 리더도 아니었고 학과에서 전공 창작에 몰두하던 그가 1988년 초겨울에 치러진 학생회장 선 거에서 총학생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당시 안성교정 에는 학생처를 앞세운 경찰과 정보기관의 공작에 앞장서던 이른바 ‘백색’ 학 생들이 호시탐탐 학도호국단 시절 장악하고 있던 학생자치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 준동하고 있었다. 학도호국단의 간부들은 재학중에는 교내 자판기 사 업이나 졸업앨범과 같은 학내 이권을 주무르다가 졸업과 동시에 은행 등 금 융권에 취업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학생운동 전통이 길지 않았던 안성교 정에서 조직폭력배들과 다름 없던 ‘백색’들의 세력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었던 때문에 학내 모든 진보적 학생그룹이 전부 단결해 단일 후보를 출마시 켰다. 총학생회장 후보는 이내창, 부총학생회장은 다른 정파였던 사회대 87 학번이었다. 그들은 58표 차로 아슬아슬하게 겨우 당선되었다.

모든 학생들을 세 번씩 만나겠어요 “모든 학우들을 세 번씩 만나겠어요. 한 번은 친해지기 위해, 두 번째는 토 론하기 위해, 세 번째는 투쟁의 현장에 함께 하면서요.” 그가 총학생회장 시 절에 한 이 말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우직할 정도로 성 실하게 총학생회장 역할을 수행했다. 매일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으며 연 설을 하고,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총학생회장이 된 뒤로는 장발머리를 덥 수룩하게 기르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곧잘 하던 예술대학의 자유분방한 그의 모습을 보기 힘들어졌다. 늘 흰 셔츠에 한 벌뿐인 양복바지를 입고 교내 를 묵묵히 걸어 다니며 마주치는 모든 학생들에게 목례를 하며 웃음 띤 미소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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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던졌다. 그러나 총학생회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정파간 연합으로 꾸려진 집 행부와 단과대학교 학생회장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는 사소한 문제들을 가 지고도 사사건건 부딪쳤다. 힘겨운 상황이 길어지면서 집행부들도 지쳐갔 다. 1986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임수경 이 참석하면서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이 거세졌다. 그런 상황에서 안성교정 의 학생운동을 다시 추스르고 2학기부터 새롭게 도약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 되었다. 6월 하순에 여름농활이 끝난 뒤 7월부터 근 한 달 동안 학교 주변 마을 곳곳에 조별 학습 단위가 꾸려지고 8월 둘째 주에는 조소학과 강의동 에 비밀스럽게 마련한 강의실에서 그간 학습한 내용을 총화하는 ‘정치학교’ 가 일주일 동안 진행되었다. 학습도 토론도 열띤 분위기 속에 이어졌다. 모임 에 참여한 활동가들의 가슴은 2학기부터 학생운동을 쇄신할 수 있다는 기 대와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고 주말부터 일주일 남짓 각자 휴가가 주어졌다. 몇몇은 학교에 그대로 남았다.

국가권력이 살해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살해되었다. 1989년 8월 15일 저녁, 이내창은 거문도 유림해수욕장 바닷물 속에 엎드린 채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여름날 이었지만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외딴 섬의 해수욕장에는 야영객이 몇 있었 지만 한산했다. 그해 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선배인 차일환과 화가 홍성담 등이 그린 걸 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가 서울대학교와 중앙대학교 등을 돌며 전국에서 전시되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른바 '홍성담 차일환 간첩사건'을 조작한 공안당국은 차일환을 심문하면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가 그 자금을 댄 경 위 등을 수사했다. 또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는 그해 임수경씨가 북한을 방문하는 전대협 대표로 정해지기 전에 사진학과의 한 학생을 북한에 파견 하기 위해 준비를 했었다.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경기도 경찰청은 그 첩보를 입수하고 중앙대학교에 대한 내사를 벌였다고 한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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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기 전날인 8월 14일 오전,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젊은 남녀가 이내 창을 찾아왔다. 그들과 무엇인가 심각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을 학교 앞 슈퍼 주인 등이 목격했다. 그 뒤로 그의 학교와 안성 시내를 두 차례 이상 오 가면서 무엇인가를 준비했다. 저녁에는 수원에 있던 서울 농대에서 열린 수 원지역대학생대표자회의(수대협)에 참석했다. 다음 날인 8월 15일 수원역 광장에서 열기로 한 ‘민족해방절행사’ 준비 등을 논의한 것이다. 각 대학 총 학생회장들이 모이던 이 회의는 매월 한 차례 이상 열렸지만 회의가 끝나면 수배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학교 안에서 비밀리에 열렸으며 저녁을 같이 먹 고 밤늦게까지 회의가 이어지곤 했다. 더러는 술도 함께 마시고 새벽이나 아 침에 뿔뿔이 학교를 빠져나가는 식으로 진행되곤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이 내창은 “중요한 약속이 있다”며 저녁 무렵 서둘러 서울농대를 빠져나갔다. 이후 이내창의 행적이 확인된 것은 다음 날인 8월 15일, 오전 8시 여수 여 객터미널 승선신고서를 통해서다. 나중에 안기부 인천부실 여직원으로 밝혀 진 도아무개와 그의 남자친구라는 백아무개 등 세 사람의 이름과 인적사항 이 그의 필체로 함께 적혀 있었다. 이내창이 탄 여객선은 낮 12시 30분 거문 도에 도착했다. 배 안에서 그가 줄곧 서너 명의 사내들에게 감시 당하고 있 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는 배에서 내리자마 무슨 일 때문인지 급히 도주했 다. 선착장 인근에 있는 남아무개씨 집에 뛰어 들어가 다급한 목소리로 “방 있습니까?”라고 외치며 신을 신은 채 마루에 뛰어올랐다가 뒷문으로 그대로 뛰어 달아났다. 쫓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섬은 닫힌 공간이었다. 약 두 시간쯤 뒤인 오후 2시 20분 그는 희망식당에서 혼자 볶음밥을 먹었 다. 그리고 오후 3시 삼호다방에서 당시 다방 종업원이던 최아무개의 증언에 따르며 서울말을 쓰는 '머리끝이 곱슬한 단발형, 왼쪽 눈에 움푹 파인 것 같 은 자국이 있고 빨강 꽃무늬 상의와 실밥이 풀어진 7부 청바지에 망사로 된 샌들을 신고 있던' 안기부 직원 도아무개와 마주 앉아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 었다. 그리고 다방 밖에서는 신체가 건장한 사내가 다방 안을 감시하고 있었 다. 다방을 나온 이들은 유림해수욕장이 있는 서도로 건너가기 위해 뱃사공 이 아무개가 운행하는 나룻배에 승선했다. 서도로 건너간 후부터 저녁 6시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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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경 변사체로 발견될 때까지 이내창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의 머리와 얼굴에는 심하게 얻어맞은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부검 한 결과에 의하면 그것이 직접 사인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심하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은 채 바다에 던져져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웃옷은 벗겨진 채 발 견되지 않았고 늘 입고 다니던 두터운 양복바지에 캐주얼 가죽 신발을 신은 채였다. 시신 바로 옆에서 차고 다니던 전자시계와 허리띠가 발견되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전해들은 유가족들과 학생들은 바로 거문도와 여수 로 내려가 목격자들을 찾아내, 이제까지 밝힌 내용들에 대한 증언을 수집했 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 보면, 당시 안기부 등 공안당국이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총학생회에 대한 내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총학생회장이던 이내창 이 모든 약속을 파기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어떤 공작에 의해 거문 도까지 유인되었으며, 죽기 직전까지 안기부 직원이 이내창과 동행하며 무엇 인가를 종용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내창이 죽은 8월 15일은 북한을 방문했던 전대협 대표 임수경이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온 날이다.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내창의 동문들은 국가기관에 의해 그가 유인당 해 살해됐다는 확신을 가졌다. 당시의 노태우 정권은 학생운동이 주도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을 어떤 식으로든 누그러뜨려야 할 필요가 있었고, 간첩 조작 사건이나 조직사건을 터뜨리며 대규모 검거선풍을 일으키곤 하던 상황 에서 무엇인가를 ‘공작’하던 과정에서 이내창을 굴복시킬 수 없어 아예 살해 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진전 없는 진실 규명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의문사 유가족 등 민족민주운동유가족 협의회의 유가족들은 무려 422일 동안이나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한 끝에 ‘의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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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진상규명을위한특별법’을 제정하고 하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1기와 2기가 약 5년 동안 이내창사건 등을 조사했다. 이내창 사건에 대해 그들이 내놓은 조사결과는 사건 직후 학생조사단이 밝혀낸 사실들 중 일부를 공식적으로 확인해준 수준이었다. 그러나 여전 히 당시 안기부였던 국정원 관련 자료에 대한 조사, 국정원이 학생운동조직 에 대해 진행했던 내사 자료, 국정원이 운영했던 학생운동 조직 내의 프락치 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사건의 진행, 조작 은폐에 일정하게 관여했다는 점 은 드러났지만 그밖의 핵심적인 내용들에 대한 조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의 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이어 2005년 12월 출범해 2010년 12월까지 활동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원회) 역시 사건조사 를 진정한 지 3년이 넘게 조사를 진행하지 않다가 위원회 활동이 마무리 되 는 시점에야 사건조사를 재개한 뒤 조사를 마무리했다. 이내창의 어머니는 아들을 그렇게 보내고 난 이듬해 뇌졸중으로 쓰러져 15년 넘게 병상에서 통한의 세월을 보내다 2007년 안타까운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건이 나던 해 마흔 아홉 살 아직 젊었던 그의 큰형 이래석은 그 후 로 줄곧 동문들과 함께 진실규명을 위해 동분서주 했는데 이제 칠십대 노인 이 되었다. 그와 함께 활동하던 이십 대의 동료들은 오십 전후의 중년이 되 었다. 우리들은 할 수 있는 한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과 조사한 내용들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기려고 노력해왔다. 10주년과 20주년, 계기 때마다 상세 한 백서를 발행했고 수차례 비공식적인 인터뷰와 탐문을 전개해 정황에 대 한 좀 더 구체적인 파악을 한 부분도 있다. 우리들이 도달한 지점으로부터 언제든 조사는 앞으로 내딛을 것이다. 역사를 규명하고 책임을 가리는 문제 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는 점. 지난 봄 가라앉은 세월 호가 우리들에게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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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으로본

1989년

이내창 열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1989년 한국 사회의 정세를 신문기사로 정리한다(편집자 주).

노동운동이 성장해 노태우 정 권에 대한 강력한 저항세력이 되었다. 위기를 느낀 정권과 사 측은 1989년은 풍산금속 안강 공장 파업과 무력진압, 현대중 공업 노조에 대하 식칼테러사 건을 저질렀다. 노동운동의 왕 성한 흐름은 1990년 1월 민주 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이 결성 으로 이어진다.

위기에 몰린 정권은 연방제 검 토, 전교조 허용 등 유화책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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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4월 총선에서 국민들 은 5공화국 정치군인들의 쿠데 타를 심판해 헌정사상 최초로 ‘여소야대’가 이루어진다. 이를 바탕으로 1988년 5공비리특별 위원회가 구성되고 ‘광주청문 회’가 진행되어 전두환을 증인 석에 출석시킨다.

위기에 몰린 노태우정권은 남 북교류 추진, 연방제 제안, 소 련 중국과의 수교 등을 통해 정권의 활로를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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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유월항쟁이 만든 유화국 면, 여소야대 국회 등의 분위기 속에서 장세동 등 5공 세력들이 차례로 구속되고 국가보안법에 대한 폐지 여론이 높아졌다.

남북 간 유화국면 속에서 정주 영 현대그룹 회장은 북한을 방 문해 금강산사업 등 남북협력사 업에 대해 합의한 사항을 발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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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정권의 유화 제스처 속 에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리 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남측 대 학생들의 참가를 허용할 것처럼 제스처를 펼쳤고 전대협에서도 대중적인 방북논의를 진행했으 며, 중앙대학교에서도 예술대학 등이 남북청년학생 예술교류 등 을 추진하기도 했다. 결국 합법 적인 방북은 정부에서 허가하지 않아 무산되고 전대협대표 임수 경이 방북을 강행하게 된다.

노태우는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 면이 조성되고 중간평가를 통해 신임을 얻을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에 자신의 주요 공약인 ‘중 간평가’를 취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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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가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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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공안탄압과 민족민주운동 진영 내의 논쟁을 불러왔으나, 남북 간의 대화를 독재정권 이 독점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의식을 확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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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위기여론까지 확산된 상황에서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빌미로 공안세력은 대대적인 반격을 벌인다. 이영희 백낙청 선생 을 연행하고 <한겨레신문>을 압수수색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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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목사 방북을 계기로 노태우정권은 공 안정국을 조성하며 공안합수부를 가동하며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야당에 대한 탄압의 수 위를 높여간다.

문익환목사와 함께 방북했던 재일동포 작가 정경모씨를 북한공작원으로 몰고 남한의 민 주화운동 진영을 북과 연계된 불순세력으로 몰아가려는 것이 노태우정권이 택한 위기 탈 출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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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5월 학내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학원민주화운동을 벌이던 동의대학교에 전경들이 난입하는 과정에서 인화물질이 폭발하고 전경 7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진다. 이 사건을 빌미로 정권은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가속화한다.

잔인한 5월이었다. 경찰에 쫓기던 조선대학교 ‘민주조선’편집장 이철규 열사가 검문을 받고 달아난 지 일주일 만에 참혹한 고문으로 살해된 모습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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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사태’로 불리는 중국의 민주화요구도 인민해방군에 의해 민간인 875명이 살해당 하며 진압되었다.

위기에 몰린 정권은 연방제 검 토, 전교조 허용 등의 유화책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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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농민운동가 출신 서경원의원이 1988년 평양을 방문했다고 밝히며 스스로 밝 히고 국가보안법으로 처벌 받 게 된다.

정부와 대표단 파견 협상을 벌 이던 전대협은 합법적인 방북 이 어렵게 되자 비밀리에 외국 어대학교 임수경을 전대협 대 표로 평양에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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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 대표의 방북은 방북을 허가할 권위가 과연 이 정권에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의 성격 도 있었다. 그러나 또 다시 민 주화운동진영 내에 논쟁과 공 안탄압의 회오리를 불러왔다.

노태우 정권은 전교조를 불법 으로 낙인찍고 가입 교사들을 대량 해고 했다. 이들은 4년 가 까이 지난 1993년에 와서야 복직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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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임수경 대표를 보호하기 위해 문규현신부를 평양에 파견한다. 물론 정부의 허가를 받 은 것은 아니었기에 문규현신부 역시 국가보안법에 의한 처벌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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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경 대표는 1989년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남으로 귀환한다. 바로 이날 이내창 열사가 거문도에서 피살 된다. 이내창기념사업회는 이내창열사를 거문도로 유인한 일과 임수경대표의 귀환 사이에 관련이 있을 것으 로 추정한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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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탄압의 칼끝이 평민당 김대중 총재에게까지 겨누어지면서 평민당은 공안탄압분쇄 투쟁에 나서게 된다. 실제로 공안세력은 광주전남지역과 전대협 등 학생운동, 야당까지 한꺼번에 엮어 간첩단과 연루된 대규모 조직사건을 터트려 국면을 전환시키려 했었다는 추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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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거문도에서 이내창 열사가 살해되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사건 발생 직후 진행된 현장조사를 통해 안기부 직원이 이내창 열사와 동행했다는 증거와 진술을 수집할 수 있었다.

신명철 회원이 기사 정리를, 김성희 회원이 기사에 해설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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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 싸우는 열사 - 이내창 열사의 묘지 이장을 준비하며 이내창기념사업회 연대사업부장

조환준

해마다 8월 15일이면, 우리는 광주 망월묘역으로 향했다. 아직 도 내창이형의, 이내창의 죽음에 분개하는 사람들, 동시대를 같이 살았던 동문과 지인들, 그리고 형의 가족들과 함께 기일에 맞춰 추 모제를 지내러 간다. 그도 벌써 올해로 25년째 맞이하고 있으니 적 지 않은 세월 동안 해마다 서울에서 광주를 오가며 추모제를 치르 느라 애썼다 할 수 있으나, 쌓인 햇수만큼의 무게가 마음 한쪽을 누 르고 있음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으리라. 그 때나 지금이나 세상이 별반 달라진 것은 없으나, 그래도 이것 을 그간의 노력 덕이라고 해야 하는지.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 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 결정을 받은 후속 조치로 경기도 이천에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해서 고인 들의 묘역을 조성하고 129위의 민주열사를 한 곳에 안장한다 했 다. 오래 전부터 묘역의 부지 선정을 두고 의견이 나뉘어왔고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음을 모르지 않으나, 다른 것은 몰라도 묘지 선정 의 선택은 유족들의 의사가 우선이겠다. 1989년, 사건 현장인 거문도에서 서울로 올라와 학교 교정에서 학생들을 앞에 두고 거짓말 하는 놈들과 죽인 놈들을 반드시 찾아 내라며 절규하던 형의 어머니는 이미 고인이 되셨다. 그 때 그 어머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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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를 부축하며 학생들을 독려하던 내창이형의 큰형님이 벌써 75세 가 되셨다. 이러니 당신이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국가가 제공하는 묘역이 조성되는데 그곳을 선택하겠다는 유족의 심정을 젖혀두고 운동과 대의를 논한다는 것은 우리 정서와 거리가 멀었다. 이장을 하는 데 있어 모든 일을 유족에게만 맡길 수는 없는 일이 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다가 그 때 그 사람들이 모였다.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해보자 했다. 내창이형의 이장은 기념사업회 만의 일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한 많 은 동문이 같이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보고자 했다. 그리고 재학생들에게도 내창이형에 대해 알려주고, 소식을 전해주는 자리 가 필요했다. 1989년 8월 15일, 형의 사망일로부터 그 해 10월 전대협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기까지 청춘의 한 시절을 사인진상규명 투쟁에 같이 했던 서울캠퍼스 동문들(중앙대학교 민주동문회)과 추모식을 같 이 하기로 했다. 4월 3일 광주망월묘역에서 개묘를 해서 서울 중앙 대 병원에 유골을 안치한 후 4월 4일 저녁에 동문들과 추모식을 가 진 다음, 4월 5일 토요일 아침에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가 서 안장식을 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막상 개묘를 해서 광주 망월묘 역을 떠나올 생각을 하니, 그간 매년 광주를 찾아 추모제를 지냈던 기억과 이철규 열사 추모사업회와 함께 거리에서 싸우고 한 목소리 로 외쳤던 날들, 광주전남추모연대 등 지역 단체 사람들과 함께 했 던 일들이 영화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8월 15일 추모제를 지내고 선 이철규 추사 사람들과 어울려 공도 차고, 함께 어울려 음식도 지 어 먹고 술도 먹고. 같은 시기,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정치적 의문사 로 규정된 정서적 동질감에 영혼의형제도 맺고, 일꾼들도 스스럼없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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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이 만났고 무엇보다 남도 사람들 특유의 구성진 억양과 고향 친구 같은 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광주 망월동 내창이형 묘지에는 초혼묘를 만들기로 했다. 유 골이 있던 자리에는 그간 비망록과 백서, 열사의 유품 등을 정성껏 담아 두기로 하고 말이다. 그리고 표석을 만드는 데 형의 과 동기들 이 자원하고 나섰다. 4월 5일 이장에는 내창이형뿐만 아니라 먼저 민주화운동보상심 의위원회에 이장을 신청한 20여 분의 민주열사가 같이 이장을 하 는 사정이 있었다. 열사의 유족들과 관련 추모사업회 등과 상의를 하면서 합동안장식을 하기로 했다. 어렵게 기획안을 만들고 추도사 를 하실 분과 추모 공연을 할 수 있는 단체와 동문들을 섭외하느라 분주히 돌아갔다. 한편에선 재학생들과 연계하여 서울 흑석동 교 정과 안성 교정에 각 사진전을 준비하였다. 1989년 사인진상규명 투쟁과 장례투쟁 당시의 사진, 그리고 기념사업회의 활동사진과 내 창이형의 활동사진 등을 중심으로 사진전을 하기로 했다. 동문들 을 수소문하며 보유하고 있던 사진과 영상자료 등을 수집하는 데 또 발걸음이 바빠졌다. 그리고, 강연회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당초 계획한 4월 5일 합동 안장식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의 기만적인 조치로 취소하기 에 이르렀지만 이번 이장식을 준비하면서 몇 가지 내부적으로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기념사업회와 같이 내창이형 의 뜻과 삶을 같이 이어가면서 무엇인가 같이 할 수 있다는 학생들 을 만났다는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학생회는 비운동권 성향으로 전락한 지 오래 다. 여기에 중앙대학교를 모 기업이 인수하면서 학교는 학과 축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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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강연 사진 아래 국가폭력과 인권 강연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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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로 대표되는 구조조정부터 시작해서 청소노동자들의 처우개선 투 쟁에 이르기까지 큰 내홍을 겪고 있던 터였다. 학생운동이 예전에 비해 현격히 축소되고 위축된 조건에서 과연 재학생들과 무엇을 할 수 있고, 예전 우리와 같은 재학생 조직이 아직 학교에 있을지 회의 감이 앞섰다. 설령 있다 하더라고 그들과 무엇을 같이 할 수 있을지 시간도 촉박한 조건이었다. 뜻밖에도 그런 학생들이 써클 형태로 남아 있었고, 학교 교지 편집부 등의 일도 하고 있었다. 그들과 같 이 “국가폭력과 인권”이라는 주제로 3명의 외부 강사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하기로 했다. 강사들에 대한 섭외가 어렵게 진행 중일 때 걸림돌이 생겼다. 실 무 협의를 하던 학교 행정부서에서 강연회의 주제어에서 “국가폭 력”을 다른 용어로 바꿨으면 한다는 것과 사진전의 장소 제공이 여 의치 않다는 것, 그리고 홍보용 포스터와 현수막 등은 게시 전에 학 생처의 승인 도장을 받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 순간 우리들은 모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했다. 아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70 년대로 학교가 돌아간 것 아니냐고 말이다. 학교 총장과의 면담에 서 총장이 ‘이내창 열사 민주화기념공원 이장 추진위원회’의 명예위 원장을 하기로 하면서 학교 측에서도 제반 행사를 원활히 약속해주 기로 하면서 얽힌 문제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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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의 후배다 - 사진집단 현장 후원증서 전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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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장애물이 나섰다. 당초 4월 5일 1차 합동안장식에서 묘역 조성과 이장을 위한 실무와 편의 정도만 지원 하겠다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유족과 단체 측에서 제 안한 ‘민주열사 합동안장식’에 위원장이 추도사를 하면서 소요되 는 예산을 지원하겠다면서 합동안장식에 ‘민주열사’라는 칭호를 사 용할 수 없다는 방침을 전달했다. 이것은 당장 유족들의 반발을 샀 으며, 우리 사업회 또한 대책을 논의한 끝에 안장을 거부했다. 결국 합동안장식은 무산되었다. 이내창기념사업회에서는 민주 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 성명서를 공식 전달했다. 2000년 국민의 정부에서 출범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는 그간 정권이 보수 성향의 정권으로 바뀌면서 위원들도 많이 교체되었다. 상황과 조건 이 아무리 바뀌었다 해도 위원회를 출범시키기 위해 422일간 펼친 유족들의 노숙농성과 위원회 출범 목적에 비추어볼 때 이대로 들 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분노와 안타까움, 아쉬움 등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그간 생활에 쫓겨 관계가 소원했던 동문들도 봄날, 내창이형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기회로 많은 관심을 나타내면서 실로 십 년, 20여 년 만에 동문들끼리 재회하는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딸 아들 같은 후배 동문들과도 교감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내창이 형이 우리들 모두를 전부 다 불러 모으는 것만 같았고 모두가 들뜬 마음이었으나,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민주주의를 일구고자,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자신의 한 목숨 아끼지 않고 독재 정권에 맞서 결연히 싸우고 항거했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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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들에 대한 명예를 지키는 일. 그런 활동 자체가 바로 더 나은 사 회로 옮겨가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 계기였다. 그래서 유족과 상의 끝에 8월 15일, 내창이형의 25주기 기일에 맞춰 이장식을 하기로 결정했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의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고, 다른 열사들과의 합동안장식이 아니라 우리 이내창기념사업회만의 이장 식을 우리 식대로 갖기로 했다. 중간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장 마와 더위로 준비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도 지친 면이 있었지만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었다. 25년 만에 갖게 되는 형의 특별한 추모식이다. 광주 망월묘역에 서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이장하는 자리. 2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시절 그 때 그 사람들은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내창이형이 지리적으로 보다 가깝게 우리 곁으로 오는 날, 조 금은 기쁜 마음으로 오랜 벗들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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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창이형이 맺어준 인연 1

이내창 선배와 나 고두현

저는 1986년에 태어났습니다. 이내창 선배가 늦깎이 신입생으로 쑥스러 이 학교 교정에 들어섰을 그 해입니다. 회기동 단편선이라는, 저처럼 1986년 에 태어난 동갑내기 음악가가 있습니다. 그의 첫 앨범 ‘백년’에는 ‘소독차’라 는 노래가 있는데, 참 좋은 노래입니다. 혹시나 지금, 곁에 컴퓨터가 있으시 다면. 없으시다면 핸드폰으로라도 유투브에 접속해 ‘단편선 소독차’ 정도의 키워드로 검색을 하셔서 노래와 함께 이 글을 읽으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 습니다. “저녁의 학원은 너무 지루해 / 나는 마음 둘 곳이 없어요 / 하지만 이미 집 나 온 나는 / 공원을 빙빙” 2006년, 한 해 재수하고 늦깎이로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새내기 배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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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터였는지, 신입생 환영회였는지, 술잔을 기울이며 어색함을 견디던 어느 술자리에서, 그때 아마도 처음으로 이내창 선배에 대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 선배가 있다고. 의롭게 운동을 하다가, 80년대 말에 안기부 요원에게 죽 음을 맞은. 그 때 저는 어렸고, 그것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무시무시한 폭력의 시대는 과거의 일로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새내기의 4월. 우연히 도서관 앞을 지나다 의혈탑 앞에서 추모식을 보았습 니다.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에서 스러져간 여섯 분의 선배들을 기리 는 자리였습니다. 한 발자국 옆에 이내창 선배가 서 있었습니다. 며칠 뒤인 가, 다시 도서관을 가다 의혈비 앞에 멈춰 돌에 새겨진 얼굴들을 보았습니 다. 먼저 이 공간에서 공부하며 배운 것을 실천했던 선배들의 삶은 분명 저 에게 울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금세 그 곳을 떠나고 말았습니 다. 선배들의 이야기는 가슴 뛰지만 빛바랜, 옛날 옛적의 신화 정도로 들렸 기 때문입니다. “벌써 땅거미 질 무렵인지 / 그때쯤 멀리서 희부옇게 / 피어오르는 연기 / 재 빠르게 번져나가는” 1960년 4월, 1987년 6월, 선배들이 학교를 다닐 때는 최루탄 연기가 교 정에 자욱했다고 들었습니다. 2011년에 제가 복학을 했을 때는, 공사장에 서 날라 오는 먼지가 교정을 메웠습니다. 제가 휴학한 사이 기업이 학교를 인 수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낡은 건물을 허물었습니다. 교정 곳곳 공사장 가 림벽 아래로 학생들은 콜록거리며 광장을 에둘러 강의실로 향했고, 학생 사 회에서 실천을 말하는 이들은 먼지 연기 속에서 점점 사라져만 갔습니다. 성 과와 효율이라는 칼날 앞에 학문의 자유와 자치의 영토는 용납되지 않았고, 학교 발전이라는 이름은, 구조조정과 탄압의 알리바이로 작동했습니다. 그 제야 저는, 무시무시한 폭력의 시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고, 그것은 한 번도 끝난 적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빛나는 대리석 건물들이 광장 위에 세워졌고, “사람이 미래다”라는 구호 앞에 이제는 더 이상 누구도 과거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복학생의 4월, 다가 오는 시험 기간에 도서관 앞은 공부하는 학생들로 붐볐지만, 의혈탑 앞에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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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창이형이 맺어준 인연 1

드문드문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과 점퍼를 입은 2학년으로 보이는 학생 들이 새내기를 데려와 의혈비를 소개하고 있었고, 초로의 선배들 몇 분이 의 혈비에 헌화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잠깐 멈춰서 묵념을 하며, 사 라진 것은 건물만이 아님을. 학생 사회를 잃기 전에 우리는 학생 공동체의 기억을 잊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느새 그 뒤를 쫓고 있다 /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다 / 우리는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우리들은 하얗게 불타오르는 / 저녁 긴” 부족하지만, 뒤늦게나마 제가 발붙인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자본 권력이 그 려둔 지도를 거스르고 우회하여, 빼앗긴 광장을 되찾고 다시 학문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목적을 두고 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 기업의 발전 사로 점철된 중앙대학교의 역사를, 어떻게 다시, 학생 공동체의 역사로 복원 시킬지 망설이던 찰나에, 이내창 기념사업회 선배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4월, 이내창 선배의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의 이장이 예정되었고,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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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간에 맞추어, 중앙대학교 학내에서 이내창 선배의 삶을 학생들이 되짚 고 기억하는 추모 주간을 정원옥 선배와 함께 준비하였습니다. 앎과 삶을 지 속적으로 연결 짓기를 희망하던 저에게, 25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서도 꾸준 히 활동을 이어나가는 이내창 기념사업회의 모습은 중요한 지침이 되었습니 다. 그리고 기념사업회의 선배들은 제가 하는 학내 운동을 지지해주시고, 따뜻하게 환대해주셨습니다. 정원옥 선배께서 지난 10주기와 20주기에 만 들어진 자료들을 넘겨주셨고, 사진과 동영상 속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이내 창 선배의 이미지와 인사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25년의 시 간을 넘어 이 자리에서 어떻게 제가 이내창 선배와 관계 맺을지 고민하게 되 었습니다. “차는 언젠간 멈추고 우리는 흩날려가는 / 시간은 언젠간 멈추고 우리는 흩 날려간다” 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를 전공하면서, 기억과 기록의 문제에 골몰하던 무 렵이기도 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다보면, 현장에서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낡은 문서 표면의 글자들, 흑백 사진 위 이미지, 저화질 영상 속 화소에서도 그 안에 남아 있는 영혼들과 만나게 됩니다. 사람의 인 연은 참으로 끈질겨서, 비록 그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그 영혼은 살아 있는 이들을 묶어주고, 그 영혼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이어집니다. 말하 지 못하는 그 영혼들과 그들이 이어준 인연에 살아있는 저는 대신 답할 의무 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용기 내어 정원옥 선배께, 단순히 학내 추모 행사를 준비하고 운영 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장식을 촬영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고 말씀드렸 습니다. 더불어 저의 생각을 정리할 겸 지난 20주기에 제작된 12분 가량의 영상을 다시금 편집하여 4분 44초의 영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추모 주간에 준비된 강연에 앞서 영상을 상영했고, 그 곳에 온 모두가 진지하게 영상을 바라봐 주었습니다. "http://youtu.be/CCQjfFI0OwI"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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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창이형이 맺어준 인연 1

인터넷에서 위의 URL을 입력해주시면, 추모 주간에 제가 만들었던 영상 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들은 노래, ‘소독차’가 영상의 배경음악입니 다. 이 노래는 비상업적 용도의 저작물 제작에는 사용할 수 있게 허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작권만을 이유로 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을 읽으시며 여러분은 이 노래를 어떻게 들으셨는지, 그리고 제 영상을 보시고는 다시 이 노래의 가사가 어떻게 읽히실지 모르겠 습니다만. 저는 저의 기억과 이내창 선배의 기록, 그리고 이 노래가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가 자꾸만 읽혀왔습니다. 회기동 단편선은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 노래가 “어릴 때 학원에 가기 싫 어 옆길로 샜다 만난 소독차의 기억에서, 어린아이 특유의 불안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을 환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저는, 회기 동 단편선의 작가적 의도와 다르게 노래의 분위기와 의미를 오용하였습니 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5년 전 이내창 선배의 삶이 노래에 간섭한 탓일 테고, 25년간 이내창 기념사업회가 성실히 남겨둔 기록 이 노래에 무게지운 까닭입니다. 저는 그저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그 삶과 기록에 우연히 연결 지었을 따름입니다. 저 역시 이 글을 쓰며 다시금 회기동 단편선의 ‘소독차’를 듣습니다. 이제 는 이 노래가 다르게만 들려옵니다. 예정과 달리 이장식은 연기되었고, 다가 오는 8월, 저는 광주 망월동 묘역에, 이내창 선배를 만나러 갑니다. 대학이 라는 공간에서 저보다 앞서 배운 것을 실천해온 여러 선배들처럼, 제가 의 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여전히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저 는, 제가 할 수 있는 기록의 실천을 이어가려 합니다.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저의 의무는 잘 기록하고 잘 정리하여 잘 물려주는 일입니다. 어느 술자리 의 청취가, 어느 추모식의 목격이, 그리고 수많은 만남들이 저를 지금 이 위 치에 오게 만들었습니다. 저의 영상이 다음의 누군가를 다시 불러내기를 바 랍니다. 그리고 이내창 기념사업회 선배들이 즐겨하시는 말씀처럼, 앞선 그 들과 저, 그리고 다음에 올 그들은 “끈덕지게 어깨동무”하고, 앎과 삶을 이 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고두현_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다큐멘터리를 공부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흑석동에 살며 중앙대학교 학내에서 자유인문캠프 활동을 이어가고, 활동과 기억/기록 영상 작업을 꾸준히 연 결 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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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와 선배 사이 강석남 이내창 ‘열사’를 처음 만난 곳은 2012년 5월의 광주, 망월동이다. 그때 나 는 새내기였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교지 <중앙문 화>의 수습위원으로 취재차 광주를 찾았고, 마침 한 선배로부터 중앙대 출 신의 열사가 망월동에 있으니 꼭 한번 들러보라는 말을 들었을 따름이다. 선 배는 그 열사가 안성 캠퍼스의 총학생회장이었으며, 학우들을 만나 이야기 하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라고 전해주었다. 막연한 상상을 했다. 안성캠 총학생회장이 무슨 사연으로 망월동에 모 셔진 건지. 그곳에는 광주민중항쟁과 관련된 이들의 자리만 있다고 생각했 었다. 나는 아마 열사의 고향이 광주이며 무슨 사연으로 고향을 찾았다가 5·18 당시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망월동 한편에 자리 잡은 그의 묘소와 그의 삶을 간략히 소개한 팻말을 보 고나서야 나의 무지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내게 ‘열사’였다. 광주에서 돌아와 의혈탑 앞에 세워 진 열사의 추모비를 찾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저 열사의 삶과 죽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혜택이, 엄혹했던 시절 ‘영웅적인’ 그의 희생으로부터 가능했다고 믿었지만 그뿐이었 다. 열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의 삶과 그의 죽음이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돌아볼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가끔 추모비를 지날 때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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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창이형이 맺어준 인연 2

열사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고 눈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어느 틈에 나도 선배 가 되어 만난 새내기 후배들에게 의혈탑과 추모비의 맥락을 설명해주기도 했 지만, 내게 열사는 아득한 과거의 사람이었다. 그렇게 열사와 서먹한 사이가 됐다. 사실 흑석캠에서 열사의 흔적을 찾기 란 쉽지 않고, 열사를 기억하는 학우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내창이 누구 인지도 모르는 학우들이 대다수다. 이번 겨울, 어느 인문학 강연의 뒤풀이 자리에서 정원옥 선배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학교 선배라고 자신을 소개한 원옥선배와 이런 저런 학교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배가 이내창기념사업회에 속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이름 석 자만 기억하고 있었던 열사를 기념하고 기억하는 선배들의 모임이 수십 년 째 이어져 오고 있다니 마냥 놀라우면서도 조금 감격스러웠다. 사실 기념사 업회의 존재보다 흥미로웠던 건 원옥선배가 열사를 ‘내창이형’이라고 부르는 장면이었다. 내게는 과거의 기억이자 역사의 인물인 사람을 ‘형’이라 부르는 모습이 사뭇 낯설다. 심지어 원옥선배마저도 까마득한 옛날 사람처럼 느껴 질 정도였다. 그만큼 내게 이내창이라는 사람은 과거의 사람이었나 싶었다. 이 생소한 만남을 계기로 원옥선배로부터 기념사업회가 기획 중인 학내 행 사를 함께 준비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흔쾌히 그러겠노라 했다. 열사를 기 억하기 위한 행사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동시에 이내창을 ‘형’이라 부르는 것의 의미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일은 열사의 생전 모습을 기록한 사진전을 진행할 학내 단위의 조직이었다. 양 캠퍼스 총학생회와 대학원 총 학생회, 그리고 함께할 만한 과 학생회와 학내 단위의 문을 두드렸다. 선뜻 함께하겠다는 단위도 있었고, 망설이는 단위도 있었다. 특히 흑석캠 총학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최근 중앙대 학생사회의 반운동권적 기 반을 토대로 선출되어서일까. 총학의 망설임에는 이내창과 그를 기억하는 행 사의 ‘운동권스러움’에 대한 반감이 서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단위 도 아닌 총학생회를 설득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많은 고민이 들었 다. 당장 나부터도 ‘열사’를 과거의 기억 속에 가둬두었었는데, 어떻게 망설 이는 이들에게 이내창을 기억해야할 당위를 설명해야 하나. 답은 의외로 가 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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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을 준비하며 원옥 선배를 자주 만났다. 그리고 틈틈이 선배로부터 ‘내창이형’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얼마 전 동창모임에서 만난 사람을 이 야기하듯 내창이형은 분명 과거의 사람만은 아니었다. 또한 그는 특별한 영 웅이라기보다 평범한 사람이었고 좋은 형이었다. 이내창을 ‘내창이형’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를 먼 과거의 사람으로 묶어두는 대신, 그를 현재로, 현실 로 불러오는 초혼과 같은 것이 아닐까. 열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학생사회의 열기는 사그라들었지만 내창이형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이어지는 까 닭이 여기에 있겠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이내창을 ‘열사’가 아니 라 ‘선배’로 부르려 노력한다. 그래서 나는 ‘이내창의 후배들’이라는 이름의 단위 모임을 조직했다. 우리 선배 이내창을 기억하자는 취지였다. 양 캠 총학, 대학원 총학, 사회학과, 사 회복지학과 학생회, 교지 <중앙문화> ‘후배들’이 함께 했다. 이들과 함께 야외에서 사진전을 진행하며 사진 앞을 지나는 학우들에게 ‘내창 선배’를 소 개했다. 그렇게 이내창은 내게 ‘선배’가 되었다. 그를 열사로 인정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 열사다. 하지만 열 사이기에 앞서 이내창이 나와, 그리고 우리와 가까이 있는 선배라 부르고 싶 다. 차마 부끄럽고 그를 ‘형’이라 부를 자격도 염치도 없어 나는 이내창을 내 창 선배라 부른다. 시간이 흐르면, 그리고 내창 선배와 그를 기억하는 다른 선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자격이 생긴다면 한 번쯤은 내창이형이라 부르고 싶다. 그때까지 이내창의 후배로서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강석남_ 2012년 중앙대학교 사회학과에 들어왔으며, <중앙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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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창이형이 맺어준 인연 3

사진집단 ‘현장’은 열사추모주간에 이내창 사진전을 기획하고 주최하였다. 이 사진전은 89년 당시 장성백, 노 용헌, 송정근 등이 촬영한 사진들과 이내창기념사업회가 소장하고 있던 사진들을 ‘이내창의 후배들’이 작업하 여 개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사진전 개최에 참여하였던 ‘현장’ 후배들의 소감을 싣는다(편집자 주).

이내창 열사도 누군가에게는 선배였고 후배였고 동기였구나 손태호

2010년에 대학에 입학하고 학과 건물 뒤편의 이내창 열사상 을 봤던 것이 기억납니다. 잘 모르는 선배였습니다. 민주화운 동 중에 의문사를 당했다는 것만이 약력에 붙어 있는 전부였습 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2014년 이내창 열사 의 이장을 학교 동아리 차원에서 촬영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촬영뿐만이 아니라 당시 동아리에서 촬영한 사진들 또한 선별 하여 그 분을 기리기 위한 전시회로 기획하게 되었고, 그런 과 정에서 이내창 열사에 대해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들어온 학교, 그리고 민주화운동, 총학생회장이 되어서 모든 학생들을 세 번은 만나겠다고 한 이야기들. 보면 볼수록 열사의 모습은 인간적이며 정열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거문도에서의 의문의 죽음. 사실 이내창 열사에 대해 공부하면서 아직까지 이 분의 죽음 이 의문사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더구나 당 시에 안기부 직원들이 등장하는 의문점들까지 충격의 연속이 었습니다. 아직도 진상은 감추어져 있고, 더구나 이제는 너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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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중 묘를 이장하는 데 있어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 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는 열사 칭호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장은 중단되었고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고 한 발짝씩 그 동안 잘못되었던 것을 교정해 나가야 하는 지금 오히려 중단되어버렸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열사라는 칭 호의 의미를 충분히 알 텐데, 그 쪽에서도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거의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이제 좀 마무리 를 하려 하는 건데. 그렇게 중단이 되고 이내창기념사업회에서 하는 뒤풀이에서 이내창 열사의 선배, 후배, 동기 분들에게서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데 기분이 묘했습니다. 너무나 먼 선배인 줄 알았던 이내창 열사도 누군가에게는 선배였고 후배였고 동기였구나. 그리고 그 때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내 주위의 분들처럼 있으시겠구나. 다시 일이 재개되어 이장이 무사히 되었으면 합니다. 원인도 밝혀져 의문사라는 단어를 더 이상 안 써도 되기를 또한 바랍 니다. 손태호_ 2010년 사진학과에 입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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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창이형이 맺어준 인연 3

생기 없던 동상에서 생명력 넘치는 인간으로 다가온 이내창 조연호 중앙대 안성캠퍼스 교정에는 망치를 든 동상이 있습니다. 사 진 전공인 나로선 예술대 뒤뜰에 있는 이 동상을 무수히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동상을 무심코 지나쳤고 그가 누구인지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2 학년이 되던 올해 초 동아리를 통해 이내창 열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동상의 주인공이 이내창 열사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가 들고 있던 망 치가 나의 머리를 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계 기로 나는 이내창 열사 사진전을 준비하는데 참여하게 되었고, 그의 삶에 좀 더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자 생기 없는 동 상으로 존재했던 그가 생명력 넘치는 인간으로서 나에게 다가 왔습니다. 이내창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민주화 운동가라고 말하지만 그 이전에 그는 나와 같이 예술을 하는 학생이자,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힘쓰던 청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삶을 이해하고 기억했으면 합니다.

조연호_ 2013년 사진학과에 입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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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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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창이형이 맺어준 인연 3

영웅이 아닌,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 백승환

교정에 있는 이내창 열사의 조각상을 보아왔습니다. 농활에 가면 이내창 열사에 대한 교양을 통해 늘 들어왔던 선배님이었 습니다. 이내창 열사 추모 사진전시를 준비했습니다. 사진 속에 계신 선배님은 제 생각 속에 있던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우리와 같은 대학생의 모습이셨습니다. 담배를 피셨고, 여느 조소학과 학생들처럼 조각을 하고 계셨으며 환한 웃음을 짓는 선배님이셨습니다. 그렇게 ‘평범한’ 이내창 열사는 민주화 운동 을 하셨고, 끊임없이 학우들의 권익을 위해 힘쓰셨습니다. 그 리고 어느 날, 의문사를 당하셨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졌습니다. 과연 나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가. 그리고 전진하기 위해 실천하고 있는가. 이내창 열사님을 추모합니다. 의문사의 진상이 밝혀지길 소 원합니다.

백승환_ 2013년 사진학과에 입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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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같이 평범했던 사람이 추구한 진실, 가치 박주원

우리 학교 잔디밭에는 손을 들고 힘차게 구호를 외치고 있는 한 동상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이내창 열사의 동상입니다. 많 은 학우들은 현재까지도 이내창 열사를 내창이형이라 부르고 선배들로부터 내창이형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내창이형은 항상 바르게 학창시절을 보냈을 것 같았는데 이야 기를 들어보니 그는 참으로 평범하게 우리들처럼 사랑도 하고 술도 많이 마시고 그랬다고 합니다.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그렇게 우리와 같이 평범했던 사람이 치열하게 투쟁하며 추구 하고자 했던 진실, 가치에 대해 한 번 더 깊게 생각해보게 되었 습니다. 내창이형을 본받아 나 또한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들 을 잊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박주원_ 2013년에 사진학과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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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창이형이 맺어준 인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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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 열사를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현희

학교 입시를 위해 2012년 중앙대학교 안성 캠퍼스에 처음 왔을 때, 이 학교에 꼭 합격하리라는 다짐을 하며 교내를 걷다가 이내창 열사의 동상을 처음 본 것 같습니다. 그 때에는 이 동상을 3월 달에 도 꼭 볼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뿐이었는데 지금은 이내창 열사 의 동상을 보는 마음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현장 선배님들께서는 술자리에서 내창이형의 이야기를 많이 하 셨습니다. 한우리라는 죽을 파는 가게에서 현장 술자리를 가지곤 했는데 한우리 할머님과 이내창 열사가 함께 찍은 사진도 보여주셨 습니다. 총학생회장을 하며 많은 학우들을 만나기 위해 주머니가 항상 동전으로 가득 차 있었다던 이내창 열사님. 중앙대 안성 캠퍼 스 모든 학우들을 만나보고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내창 열 사에 비하면 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는 저는 정말 작은 사람이었습 니다. 몇 명 안 되는 동아리 회원들 챙기기도 어렵다고 생각했던 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내창 열사 같은 분이 계셨기에 지금 제가 이 학교에 있을 수 있 는 것이겠지요. 많은 학우들이 이내창 열사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 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진전을 함께 진행했습니다. 앞으로도 계 속해서 다른 학우들도 이내창 열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바랍니 다.

박주원_ 2013년에 사진학과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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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해마다 8월이 오면 !! 정왕룡 8월이 다가온다. 어릴적 8월은 광복절이

다한 젊음 투쟁으로 함께 하리니......’라

있는 달로 기억되었다. 또한 방학이 막바

는 처절한 구호와 함께 지금도 귓가에 쟁

지로 치닫는 시점으로 밀린 방학일기 몰

쟁하다.

아서 쓰느라 바쁜 가운데서도 개울가에 서 물장구치고 멱을 감고 원두막 그늘아

내창이형과 나는 개인적 친분도 교류도

래서 참외를 먹었던 추억이 쌓이는 달이

없는 사이다. 88년 문리대 학생회장을

었다.

그만둔 뒤 89년에 흑석동 교정 농활대 장을 하면서 양 캠퍼스 등록금 투쟁 연

그런데 1989년 8월을 지나면서 마주친

합집회 등을 통해 먼 발치에서 지켜봤을

이내창이라는 이름은 어릴적 이런 기억

뿐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나의 삶을

들을 지워버린 채 평생 잊혀질 수 없는

바꿔놓아 버렸다. 운동의 일선에서 물러

아픔으로 대체되어 지금도 내 가슴을 찌

나 도서관에서 공부에 열중하고자 했던

르고 있다. 8월 15일 이후로 여수 거문도

나를 대책위 활동과 함께 다시 투쟁의 전

에서 용산병원, 흑석동 교정, 안성교정, 광주진입로 대치상황, 망월동 묘역......,

선으로 몰아넣은 계기를 제공했고 그 이

그리고 안기부 응징투쟁, 90년 이철규

용하기도 했다. 학교 졸업 후 결혼도 하

이내창 영혼 의형제 결연식의 기억에 이

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어느 날 의문

르기까지 숱한 기억의 족적들이 ‘그대 못

사진상규명위에서 연락이 와서 국가인권

듬해 총학선거에 출마하게 된 동기로 작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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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무실을 방문하여 여러시간 동안 대 책위 활동을 증언했던 기억도 난다. 정권

으로 비쳐진 가을풍경이 왜 그리도 쓸쓸 하던지....... 이듬해 흑석동 교정 등록

교체까지 이뤄졌음에도 사인 진상규명

금 투쟁집회 현장에서 늦은 저녁 집회 대

과정에 우리가 넘지 못하는 알수 없었던

오가 흐트러지려하자 ‘지난해 가을 광주

벽의 실체를 놓고 고민했던 단상을 지역

진입로에서 내창이형의 시신을 부여잡고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렇듯 이내창

온밤을 지새우던 일을 잊지 말자’며 분위

형의 죽음은 캠퍼스를 떠나온 뒤에도 여

기를 추스렸던 기억이 새롭다.

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내 삶에 8월이라는 시간과 함께 강한 규정력으로 여전히 작

다시 8월이 다가온다.

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해마다 8월이 오면 찾아왔다 떠나가는 이름 이내창.

개인적 연이 없는 그의 죽음이 나에게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와 내가 조우할 날

무슨 작용을 한 것일까? 80년대를 내달

도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때 뜨거

렸던 이땅의 청년학생으로서 변혁을 향

운 8월을 함께 했던 학우들도 이제 각자

한 의분과 열정 말고도 그 무엇이 있었을

생활의 현장이 달라지고 생각도 다양해

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아마도 군 제대

지고 몇몇은 내창이형 곁으로 먼저 떠나

후 예비역으로 비슷한 나이에 늦깎이 운

가기도 했다. 그래도 8월은 이내창이라

동에 뛰어들었던 공통점, 그리고 조소

는 이름과 함께 평생 지워지지 않을 아픔

과 실기동 건축추진 등 학우들의 관심사

이다. 마치 8.15 광복절이 분단과 함께

를 통해 학생회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자

우리 민족에게 평생의 아픔을 남겼듯이.

했던 그의 활동 등에서 남다른 동질감과 부채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때 외쳐보았던 구호를 조용히 되뇌어

나중에 알고보니 내창이형이 복무했던

본다.

군 부대도 나와 같은 사단 소속이었다.

‘그대 못다한 젊음 투쟁으로 함께 하리 니......’

지금도 광주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운구 행렬을 가로막는 관제데모꾼과 대치하면 서 내창이형 시신을 부여잡고 가을밤을 지새우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렵게 망월 동에 형을 모신 뒤 돌아오는 길 차창 밖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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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왕룡은 1964년에 태어나 중앙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참여정책 연구원 지방자치센터장으로 활동했고 김포지역을 중 심으로 풀뿌리 지방자치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지금은 재선 김포시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어깨동무가 만나다

열두 살 눈높이로 바라본 세상은 김선주, 이원근

이미애는 1964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여고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다. 대학 2학 년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로 등단했고, 한동안 손을 놓고 살다가 1994년 <눈 높이아동문학상>과 <새벗문학상>을 동시에 쥐면서 다시 시인으로 살았다. 2000년 장 편동화 『꿈을 찾아 한 걸음씩』으로 <삼성문학상>을 수상하고부터 동화작가로서의 길을 넓혔다. 스스로는 “말랑말랑한 글을 쓰는데 재주가 있다”라고 말한다. 동화와 동시를 쓰 기 위해 항상 열두 살짜리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지만, 최근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기 시작하면서 전국 곳곳의 투쟁현장과 광장, 페이스북에서 더 많이 목격되고 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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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에서 인터뷰를 한다고 해

명인사가 됐다. 지금은 활동가로서 여성

서 놀랐다고 들었다.

과 인권을 위해 싸우고 있다. 이 말랄라

아하. <어깨동무>라고 해서 소년소녀잡

에 대한 얘기를 동화로 쓰고 있다. 그런

지인 줄 알았다. 게다가 이내창기념사업

데 자료가 너무 없다. 상상에 의존해서

회가 어깨동무로 왜 날 만나나 싶어 어깨

쓰려니 힘들다.

동무랑 무슨 연관이 있나 찾아봤다. 그 러다가 알게 된 건데, 참 ‘어깨동무’라는

- UN에서 무슨무슨 상인가를 받았다는

이름으로 사업이 많더라. 남북경협 사업

얘길 들은 것 같다.

이름도 어깨동무였고.

아니다. 상은 받지 못했고, 반기문 UN 총장이 말랄라 데이를 정했다. 하여튼

-지금 괜찮은가. 오후 6,7시면 막 일어

이와 관련된 자료를 모으는데 지난 몇 개

날 때라고 들었다.

월을 꼬박 썼다.

걱정마라. 오후 2, 3시에 일어났으니, 지 금이 가장 명료하고 정신이 또렷할 시간

소녀의 이름은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이다.

Yousafzai)다. 2012년 여자 아이도 학교에 다닐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다 탈레반의 총격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가.

을 받았다. 총탄은 말랄라의 머리와 목을 뚫

파키스탄의 말랄라라고 아는가, ‘말랄라

고 지나갔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이후 아

데이’도 있다. 11살 소녀다. 이 아이가 자 기는 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내용을 블로 그 같은 데 써댄 거다. 당연히 이를 금지 시하는 탈레반의 눈엣가시가 됐다. 파키 스탄과 탈레반의 사정을 서방이 이 아이 의 일기를 통해 알게 된 거니까. 탈레반 은 말랄라에게 ‘넌 서방세계와 연결된 아 이다, 널 죽일 거다’ 협박했다. 그리고 등 교하는 말랄라에게 총을 쐈다. 영국이 말랄라를 데려가서 낫게 했고 그 이후 유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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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과 여성, 인권문제를 다루는 활동가가 됐다. 2012년 UN은 11월 10일을 ‘말랄라 데이’로 선포하고 아동이 누려야 할 교육권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로 삼고 있다. 하지만 어디 파키스 탄과 말랄라만의 문제일까. 나이지리아의 보 코하람은 지금도 수백 명의 여학생들을 납치 해 인신매매 시장에 내다 팔고 있다. “서구식 교육은 죄악이며, 여학생들은 결혼해야 한다” 고 그들은 주장한다.


만나기

- 계기는 무엇인가. 말랄라를 쓰게 된.

‘한살림’ 친구들도 만나게 되고. 그렇게

어쨌든 나는 예전에는 책이 좀 잘 팔리

어찌어찌 밖으로 나왔다고나 할까.

는 작가였다. 나는 말랑말랑하고 따뜻 한 가족 이야기를 주로 썼다. 나는 요리 사라는 직업이 각광받지 않을 때 그런 특 이한 꿈을 꾸는 아이들, 뚱뚱하고 소외 된 아이들, 그런 남들이 쓰지 않는 특이 한 소재를 갖고 글을 썼다. 그게 먹혔다. 책이 많이 팔렸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 참여적인 문제, 팩트에 근거한 이런 이야 기들을 쓰려고 한다. 말랄라도 마찬가지 관점이다. 아동인권에 대해 나온 책이 있 는데 다들 딱딱하고 재미가 없다. 난 재 미있게 스토리 중심으로 쓸 수 있을 거 같아서다. 게다가 아이들 문제를 아이들 에게 들려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좀 어렵다. 소재가 나한테 오고 일 년을 묵혔다. 금방 쓰지 못하겠다.

- 전래동화도 쓰지 않았나. 영화를 갖고 동화를 쓴 것도 봤다. 전래동화, 그건 스테디셀러다. 아직도 많 이 팔리고 있다. <각설탕> 같은 영화를 동화로 바꾸는 작업도 했다. 나는 집에 서 10년 이상 사람도 안 만나고 돈이 되 는 동화를 썼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 가 젊은 NGO친구들, ‘두물머리’ 운동 할 때부터 만나게 됐다. 성희형 직장동료

- 가방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은 무 엇인가. 여러 운동단체들에서 나온 뱃지들이다. 각자 이슈를 담고 있다. 예뻐서 달고 다니 는 것이다. 지난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유기농업이 수질 을 오염시킨다며 경기도 양평군 팔당 두물머 리 유기농민들을 하루아침에 수질오염의 주 범으로 몰았다. 그리고 4대강 정비사업 계획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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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두물머리를 편입시켰다. 두물머리 유기농

- 어떻게 그들과 친구가 되는가.

민들은 그 후 4대강 사업에 맞서 3년 4개월간

다들 을이고 비정규직이니까. 나도 비정

싸웠다.

규직 집필노동자 아닌가. 서로 같으니까 몇 번 꾸준히 얼굴 보면 친구가 된다.

- 그렇게 밖으로 나왔다는 건 어떤 건가. 수요집회가 있다. 그럼 거기서 사람들을

- 페친이 4600명에 달한다고 들었다.

만난다. 거기서 만난 친구들이 또 어디

페친도 가려 받거나 하는데 난 안 그런

에 뭐가 있다 그러면 그쪽엘 간다. 거기

다. 나보다 20살 어린 친구가 지금은 페

서 만난 사람과 또 다른 곳엘 간다. 그렇

이스북 시대라고 해서 뭣 모르고 시작했

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말 되는대로 산

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배웠다. 예를 들

발적으로 막 다녔다. 왜? 모르니까. 이주

어 두물머리 운동을 올리면 난 대단한 운

노동자 문제가 있을 때는 그쪽 친구들 많

동은 못하는 대신, 동화적으로 짤막짤막

이 만나고 인터뷰도 했다. 네팔, 베트남

한 문장으로 내가 보고 들은 거 생각한

친구들과는 정말 친구가 돼서 일 년에 몇

거 뭐 이렇게 올렸다. 그러면 이게 또 먹

차례씩은 서로 보는 사이가 됐다. 동화

히고, 답이 오고 하니까, 그게 반응이 오

작가라고 하면 다들 거부감 없이 받아들

니까 그런 방식으로 운동에 보탬이 된다

여준다. 그게 편하고 좋다. 처음엔 나 스

고 생각한다. ‘좋아요’가 3백 개 이상씩

스로를 경계하기도 했다. 현장엘 가서 듣

달린다. 어떤 이슈를 회자되게 하고 싶을

다가 이걸 소재로 하면 정말 위험하겠다

때 의도적으로 열심히 댓글 단다.

는 생각도 들더라. 그냥 난 정말 쪽수 하 나 보태겠다는 생각으로 간다. 그리고 그

- 얼마 전에 산 서랍장은 맘에 드시고?

이후로는 갔다 온 얘기들, 그쪽 소식들

헤헤헤. 페북 봤나. 맘에 쏙 든다. 일상

을 페이스북에다 올리게 됐는데 그게 반

도 많이 올린다. 너무 운동하는 것만 올

응이 좋았다. 거기서 또 몰랐던 사람들

리면 또 그럴까봐. 내가 반찬타령 해서

을 서로 알게 되고. 요즘은 누구보다 많

‘좋아요’ 누른 사람이 결국 밀양 얘기도

이 찍고 많이 쓴다. 난 수다스럽고 잘 끼

세월호 얘기도 보는 것 아닌가. 망가진

어든다. 지금은 (운동)단체 사람들 명함

모습도 숨기지 않고 다 올린다.

이 200개가 넘는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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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기

- ‘데모당’도 마찬가지인가.

다. 뭐 특별한 직함은 없지만. 여튼 데모

아까도 말했지만, 이렇게 저렇게 계속 사

당이 손을 내밀어서 나를 잡아준 거다.

람이 연결된다. 그런데 그렇게 연결된 사

그 전까지는 외톨이였다.

람이 제일 많은 게 ‘데모당’이다. 어디 소 속 없이 늘 혼자 다니는 편이었는데, 데

- ‘데모당’ 당적이 있는가.

모당이 나를 안아준 거다. 밀양을 두 번

‘데모당’ 자체가 유머러스하지 않은가.

내려갔는데 페이스북에서 봤다면서 데모

나 늘상 두 번째 줄에서 따라다닌다. 일

당 일원이 나를 찾아왔다. 데모당이라면

착으로 도망가는 스타일이다. 심한 몸싸

서, 입당을 권유했다. 밀양 기차역 앞에

움이 벌어지면 나 같은 민폐 스타일은 빠

서 스카웃당한 거다. 이름도 재미있고,

져줘야 한다. 딸도 데모당원이라 딸하고

나도 그런 생각으로 재미로 들어갔다. 나

같이 나간다.

같은 경우는 홍보위원 식으로 불러준 거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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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모당’ 면면은 어떤가, 괜찮은가.

- 글 쓰는 가장으로 살다가 어떻게 밖으

2백여 명 넘게 있는 것으로 안다. 입당하

로 나가게 됐나.

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전원회의에 부친

딸도 준데모당원이었다가 데모당원이 됐

다. 사실 SNS로 훑어보면 그 사람이 어 떤 이인지 대충 알게 된다. 어지간하면 숫자 늘리는 차원에서 잘 받아준다. 거 리집회에서는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언제 어디서든 4,5십 명은 대충 모이는 것 같다. 뒤풀이 때도 서로 뭐하는 이인 지 안 물어보는 것이 불문율이다.

- 정기적인 모임이 있는가. 데모는 늘상 일어나지 않는가. 특히 요즘 처럼 도저히 집안에서만 있을 수 없을 때 는 데모가 곧 모임이 된다. 요즘은 세월 호 관련 집회가 있으니 매주 나간다. 데모당. 빨간색 바탕에 고딕체로 씌어진 깃발 이 눈길을 사로잡는 당. 사실 이름만큼이나 적 극적인데다 데모 방법도 유머러스해서 요즘 시 위현장에서 가장 핫한 이름이 되고 있다. ‘나 는 데모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이 당의 모토 이다. 입당 조건은 무엇보다 실천(데모)을 담보 로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최소 한 달 에 한 번은 데모현장에 나오고 인증샷을 페이 스북에 올릴 것.” 여건이 안 되면 군자금을 대 거나, 손가락데모(전파, 댓글, 전화데모 등등) 라도 하라는 지침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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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금 우리 학교 4학년에 올라간다. 처음부터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다. 가족 들이 내가 밀양을 간다거나 이러면 되게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 딸이 장편을 두 편 썼다고. 그러게 말이다. 나도 놀랐다.

- 대학 2학년 때인 87년에 동시로 등단 했다고 들었다. 얼마 전 작가회의에서 전화가 왔다. 1987 년 등단으로 돼 있던데 97년을 잘못 쓴 거 아니냐고 물어보더라. 2학년 때 등단 했다. 어릴 때부터 글을 많이 썼고, 잘 썼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시집을 냈다. 대구에선 유명해 이미애, 하면 다 알았 다. 동생이랑 나랑 글을 많이 썼다. 그래 서 엄마가 소박한 생각으로 애들 이름으 로 책이나 하나 엮어보자 한 게 그렇게 일이 커졌다. 그냥 처음엔 등사기로 밀자 하다가 인쇄하면 어떨까 이렇게 된 거다. 어떤 출판사가 우리가 책을 내 주겠다 해 서 나온 책이 『꿈초롱 둘이서』다. 공짜로 책을 내니깐 좋았지. 그게 소문이 났는 지,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영화감


만나기

- 그때 TV에도 출연했다면서. <인간극장>같은. 당시엔 이름이 <카메 라출동>이었다. 2시간짜리 다큐를 찍었 는데, 나는 시내 변두리에 살았는데, 우 리 자매를 수덕사 같은 산골로 데리고 가 서 막 슬프고 불쌍하고, 아름답게 포장 해서 찍곤 했다. 연기를 시킨 거다. 그렇 게 1주일을 찍었고 그때 아하, 방송은 가 짜구나 깨달았다. 1977년작 영화 <꿈초롱 둘이서>(최현민 감 독, 이정길, 서미숙, 최정미 주연)의 내용은 실

독이 찾아와서 영화도 만들어지고.

- 영화라고? 그렇다. 가난한 두 자매의 역경을 이겨낸 스토리가 탄생한 거다. 아버지는 전기기 술자, 아빠 밑에서 일을 하던 오빠가 감 전사 하고 하는 내용이었는데. 이건 내가 겪은 이야기를 쓴 것이기 때문에. 이정길 이 아빠로 나오고 그랬다.

- 영화 제목은 뭐였나. 유명한 영화는 아 닌 것 같다. 당연히 <꿈초롱 둘이서>지. 유명한 영 화, 아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TV에서도 봤다. 깜놀했다.

제 책 내용과 같다. 미애와 정림은 아빠를 따 라 대구로 이사한다. 고아 순철도 대구에서 함 께 살게 된다. 아빠의 사업은 실패하고 순철 이 감전사고로 죽는다. 아빠는 다시 구미로 옮 기고 가족들과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게 되는 데……. 리틀엔젤스가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 범에 참여했고, 어린이날 행사장에서 상영되 었다고 전설처럼 전해진다.

- 이미애는 어떤 어린이였나. 내가 어릴 때 돈 때문에 불안했던 것이 사 실은 다 자본주의 때문이구나, 다 큰 다 음에야 깨달았다. 나는 늘상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불안 초조 어린이였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학비조달이 어려워 등단을 애써한 거고, 등단장학금이란 게 있어 학

끈덕지게 어깨동무

72


교를 마칠 수 있었다. 학과 동기들 하고도

꼬물 글 쓴다”고 만화에 썼더라.

친하기 어려웠던 게 4년 내내 교직원들 틈 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했다. 일하다가

- 지금은 어떤가. 항간에는 이미애는 10

수업시간이 되면 들어가곤 했으니 친구

년 동안 쓸 게 계약돼 있다고 들었다.

를 사귄다거나 할 틈이 없었다.

에고, 그게 수년 전 얘기다. 세월이 지났 으니 지금은 5년간 쓸 게 남았다. 농담이

- 동화는 어떻게 시작했나.

다. 나는 동화의 르네상스시대에 글을 쓴

등단한 것도 잊고 살다가 결혼하고 애를

거다. 책 한 권마다 40,50쇄까지도 찍어

낳고. 애를 안고 재워야 하지 않는가. 그

봤다. 지금은 시장이 안 좋아도 너무 안

런데 내가 언치지 않는가-나는 속이 얹

좋다. 부모들이 동화책을 안 읽힌다. 아

혔다(체했다)는 줄로 알아들었다, 나중

이들 독서마저도 항상 정권 따라간다.

에 음치라는 걸 알았다- 내가 음치라 노

그래도 노무현, 김대중 때는 교육 자체

래를 못한다. 그래서 대신 동시를 읽어

가 책도 읽히고 쓰기도 많이 시키고, 도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읽는데 시가 맘에

서관도 짓고, 미술관도 빡빡했다. 지금

안 드는 거다. 그래, 맞아. 나 동시로 등

은 일제고사 생기면서 엄마들이 아, 이젠

단했잖아. 그래서 애가 잘 때 한 편 두 편

공부가 전부구나, 공부밖에 없구나 한

쓴 게 두 권 분량이 되더라. 그래서 <새

다. 책도 못 읽게 한다. 그렇게 저렇게 영

벗문학상>과 <대교문학상>에 냈는데

향이 가는 거다. 엄마들이 그렇게 민감

둘 다 떡하니 당선된 거다. 재고신인 인거

하다.

다. 또 애가 크니까 이번엔 동시로 안 되 더라. 그래서 동화 읽어주다가 또 내가

- 망한 책도 있나. 지난 해였나. 경제책

쓰게 된 거다. 그러다 카페 냈다가 IMF

을 낸 것이.

때 쫄딱 망하고 다시 영천 시골로 내려갔 다가 누에치다가 쌀도 하고 고구마도 하 고 농사지었다가 글을 직업적으로 쓴 거 고. 이때는 만날 동화만 썼다. 딸이 어릴 때 네컷 만화를 그렸더라. “엄마는 햄스 터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일어나 꼬물

이내창기념사업회

73

‘나꼽살’이라고 꽤 인기 끈 팝캐스트가 있었다. 경제는 경쟁이 아니라 소통이라 는 거였다. 내가 그걸 동화로 써봐야겠다 해서. 사실 내가 경제를 뭘 알겠는가. 공 부하면서 쓴 거다. ‘나꼽살’을 하나도 빼 놓지 않고 다 듣고 공부해가며 책을 썼는


만나기

데. 관점을 담은 책이 그게 처음이었다.

다. 단지 부자를 바라는 거다. 그게 내가

출판사도 아주 쎈 데서 내고 싶었다. 그

관점을 담은 첫 책이었는데, 사실 그게

래서 레디앙이라고 88만원 세대 책 내고

개망해서 한 1년 동안 글을 못 썼다. 지

한 진보적인 출판사에서 냈다. 레디앙어

금까지는 따뜻한 책만 냈는데 앞으론 변

린이 1호책이었는 데 그게 말 그대로 개

할 거다. 맨날 여우가 어떻고 늑대가 어

망했다. 팝캐스트 힘을 얻지 못했고, 좀

떻고 하는 얘기 썼지만 지금 쓰는 여우

늦게 나와서 팝캐스트가 다 잊힌 뒤에 나

늑대는 다른 여우, 늑대다. 그건 내가 변

왔다. 그냥 묻혔다.

했으니까.

- 책 제목이 뭔가.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 보도 새퍼가 지었

‘나꼽살과 순악질 마녀의 착한경제 팍

다. 제목 그대로 철부지 소녀 키라가 어떻게

팍’, 좀 길다.

부자가 되는지를 조목조목 알려주는 어린이 경제동화다. 히트를 쳐서 여러 권이 줄줄이 나

『나꼽살과 순악질 마녀의 착한 경제 팍팍』(레

왔다.

디앙어린이 펴냄)은 팟캐스트를 통해 5백만 명 이상이 청취했던 경제방송 <나는 꼽사리다>

- 앞으로는 어떤 걸 쓸 것인가.

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재구성한 어린이 경

동화라는 장르가 그렇다. 엄마 손에 안

제책이다. 경쟁과 승리가 아닌, 협동과 배려를

쥐어지면 그걸로 끝이다. 쥐어지더라도

통해 ‘다 함께’ 잘사는 경제를 주제로, ‘개망했

애들이 안 읽어주면 또 별 볼일 없다. 그

다’고 전해진다.

두 가지를 다 잡아야 한다. 말랄라 책을 쓰면, 엄마들은 노벨상 후보에 올라간

- 이미애가 말하는, 동화책이란 뭔가.

11살짜리 여자애의 영웅담이나 입지전

독자가 둘이다. 제1독자가 어린이라면 제

적인 아이 이야기로 그 책을 잡을지도 모

2독자는 엄마다. 그런데 책은 제2독자가

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읽

산다. 엄마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거다. 엄

히는 게 중요하다. 요 다음에 쓸 것은 무

마는 착한 경제를 원치 않는다. ‘부자가

히카 대통령이다. 팩트를 갖고, 그럼 전

된 키라’를 원하는 거다. 그 책은 대박쳤

해주기도 싶고 마케팅도 되는. 호세 무히

다. 협동이나 소통, 그런 거? 원치 않는

카 대통령은 우루과이의 가장 가난한 대

끈덕지게 어깨동무

74


통령이다. 대통령 궁을 노숙자에게 서슴

을 쓰니 작가다. 하지만 운동에 보탬이

없이 준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다. 이런

되고 싶다. 어떤 것이 됐든, 열심히 내 몫

일련의 작업을 계속 해나갈 것이다.

을 할 거다.

- 다음에는 코트디브와르의 드록바를

- 수다 많이 떨었다. 슬슬 마무리하자.

쓰면 되겠다. 드록신으로 불린다.

나는 2000년부터 가장으로서 동화쓰기

드록바가 누구인가. 잘 모르겠다.

를 했다. 그때부터 난 항상 열두 살에 맞 춰서 살았다. 무슨 일이 터지면 열두 살

- 오늘 여러 얘기를 새롭게 알게 돼 기쁘

짜리는 이럴 때 어떻게 생각할까로 자연

다. 에너지 소모가 심하겠다.

스럽게 간다. 그렇게 쭈욱 살아왔다. 지

나이든 걸 느끼는 요즘이다. 집회 한 번 나가면 다음날 하루는 꼬박 누워야 한 다. 밀양 한 번 다녀오면 2박 3일간 몸져 눕는다. 글을 못 쓰는 이유는, 핑계지만 힘들어서다. 그리고 요즘은 선생님은 작 가냐, 활동가냐며 핀잔도 듣는다. 나는 작가다. 이번엔 데모당 깃발 아래, 다음

금 내 나이 쉰하나다. 어찌 힘들지 않았 겠는가.

- 말랄라는 언제 나오는가. 아직 그림도 안 그렸다. 동화는 그림이 또 나와야 한다. 북멘토라는 출판사에서 아마 내년쯤 나올 거다.

엔 작가회의 깃발 아래 서있을 테지만 글

이미애의 작업실은 홍대역 부근에 있다. 이 인터뷰는 월드컵 러시아전이 열린 지난 6월 18일에 매우 시끌 벅적한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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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하기

지금쯤 둘이 신나게 어울려 막걸리 마시며 연극얘기 하고 있을 거다 김진휘

장길이형, 만중이형. 이 두 양반에 대

거려 본다.

한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받았을 때, 사

두 사람과의 자취방생활은 그리 길지 않

실 좀 난감했었다. 이 사람들과의 추억

았다. 장길이형과는 형의 부탁으로 한 학

을 쓰자니 몇 가지 고르는 게 고역일 테

기 같이 살아 준거고 만중이형과는 형이

고, 전기나 평전처럼 쓰자니 전기나 평

복학한 후 마땅히 지낼 곳이 없어 내 자

전에는 왠지 어울리는 사람들은 아닌 것

취방에 들어오면서 같이 지내게 됐다. 이

같고. 비교하는 것이 뭐하지만 그렇다고

때는 내가 막 선희와 연애를 시작하느니

내창이형과 같은 삶을 살다가 간 것도 아

마느니 ‘밀당’을 할 때라 솔직히 만중이

니고. 아무튼 무슨 얘길 어떻게 해야 하

형이 밉기도 했었지만, 형이 술 한 잔 걸

나 한참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공교롭게

치고 알아듣기 힘든 말로 들려주는 세상

도 예술대 전체를 통틀어 두 사람 모두

이야기, 연극이야기, 음악이야기들이 마

와 자취방생활을 해본 사람이 나밖에 없

냥 좋았던 것 같다. 하긴 자취방을 같이

는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게 원고작성의 고

쓰던 안 쓰던 학교에 올라오면 매일 보는

통을 넘기느니 그냥 내가 하고 말겠다는

사람들이었으니 자취방생활을 같이 했

생각으로 맡아 버린 것이다. 분량도 얼마

다는 것이 어떤 큰 의미를 주지는 못하겠

안 되는데 형식이나 문장구조 등등, 소

다. 학과수업보다는 장길이형이나 만중

위 글빨과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초월해

이형과 함께 동아리방에서 지내는 시간

서 생각나는 순서로 주저리주저리 끄적

이 더 많았으니 말이다. 이 사람들과 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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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어떤 기억이 있을까 되짚어보니, 그 시

이었다. 그 곳에는 막걸리 몇 병과 장구,

간들이 내가 살아온 삶의 반 이상을 차

꽹과리가 놓여 있었다. 만중이형은 직접

지한다. 하긴 내창이형을 처음 만난 게

‘오방진’, ‘삼채’, ‘휘몰이’ 가락 등을 쳐주

89년도였고, 이 두 사람은 내창이형보다

며 이 가락을 알아야 제대로 된 연기를

먼저 알게 된 사람들이다. 당연하다. 학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가락을 알면 연

과 선배들이었으니까.

기가 쉬워져”, “알아야 돼.” 뭐가 뭔지도

장길이형, 만중이형 모두 연극영화학과

모르고 그냥 그 소리가 좋아 따라 치기

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가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해 “풍물가락과 연

진 사람들이다. 장길이형은 제천인지 어

기훈련의 상관관계”는 내 석사논문의 주

딘지가 고향이고 만중이형은 논산 근처,

제가 되어버렸다. 만중이형과 함께 막걸

말 그대로 두 사람 모두 깡촌 출신이다.

리와 풍물가락에 취해 내리로 내려오면

외모는 더욱 그렇다. 장길이형은 160cm

그곳에는 장길이형이 있었다. 역시 막걸

가 겨우 넘는 키에 얼굴은 특별한 분장

리는 빠지지 않았고 장길이형의 문학, 역

없이도 동남아시아인의 연기를 할 수 있

사, 세상이야기는 그 어떤 안주보다 맛있

을 법한 얼굴이었고, 만중이형은 키 외

었다.

모 어느 하나 부족하진 않지만 연극영

어느 학과든지 학생운동의 역사가 있는

화학과스럽지(?) 않은 수더분함이 학교

학과라면 누군가는 시작이 있을 것이고

에서는 내리주민으로 착각할 정도였으

전설로 불리는 선배들이 있다. 연극영

니 말이다. 사실 학과 내에서 만중이형

화학과에선 장길이형과 만중이형이 바

의 외모는 동기였던 손창민 선배하고 견

로 그런 존재다. 몇 분 선배들이 더 계시

주어도 손색없다는 얘기가 많았다. 그러

긴 하지만, 88학번인 내 시각에서 보기

나 아쉽게도 만중이형은 과내에서 지내

엔 이 두 사람이 그런 존재다. 87년도에

는 시간보다 후배들이나 다른 과 사람들

있었던 연극영화학과 부정입학관련 학

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과 투쟁을 주도한 사람이 이 두 사람이

그 유명했던 쌍팔년도 시절, 어리버리 콧

기 때문이다. 결과로는 부정입학과 관련

물 질질 흘리며 과사무실 앞에서 서성대

된 교수 두 분이 물러나고 부정입학이 사

고 있던 나의 손목을 잡아 학과 앞 잔디

라졌다. 만약 이 두 사람이 부정입학관

밭으로 끌고 간 선배가 있었다. 만중이형

련 학과 투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어쩌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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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하기

면······, 어쩌면······, 나를 비롯하여 내창

미 연극동아리에 가입해 대본을 쓰고 시

이형과 만났던 그 많은 연영과 후배들을

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장길이형의 자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취방에서 본 시집은 여느 문창과 선배들

생전에 두 사람은 싸우기도 많이 싸웠

의 자취방에서 본 시집보다 많았다. 내

다. 두 사람 모두 워낙 불같은 성격인지

기억으로는 시골출신답게 형은 ‘신경림’,

라 한때는 서로 얼굴 안보겠다 할 정도로

‘김용택’의 시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1

싸웠던 적도 있었다. 연영과 후배들 중

학년 때 기억으로는 총학생회 일을 마치

에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실망스러웠

고 자취방에 와서는 시를 쓰고 희곡을

기도 했겠지만 난 그런 모습들이 모두 두

쓰곤 했다. 실제로 글재주는 연기나 연출

사람의 열정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만

보다는 좋았던 것 같다. 형이 쓴 희곡으

중이형은 연출과 연기 모두 능력이 있었

로 두 번의 공연을 했으니 말이다.

지만, 특히 음악으로 연극에 접근했다.

졸업 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자취방 시절,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된다. 만중이형은 극단 아리랑, 극단 현

어느 악기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선지 노

장에서 연극음악을 하게 되고, 장길이형

트에 악보를 그려가던 모습은 아직도 눈

은 충무로에서 출판기획사를 차린다. 만

에 선하다. 난 20세기에도 모차르트 같

중이형은 민족극운동으로 학생시절 꿈

은 사람이 있나, 하는 생각에 당시엔 좀

을 이어갔고, 장길이형은 출판기획사를

무서웠던 것 같다. 잊을 만하면 불후의

통해 노동조합의 선거를 도우며 그들과

명곡 <동지가>의 작사 작곡자가 만중이

연을 맺어 학생시절의 꿈을 이어갔다. 잠

형이라는 설이 들린다. 그러나 내가 알기

시도 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두 사

로는 아니다. <동지가>의 작곡자가 만

람 모두 말이다.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중이형이라는 얘기는 가반데 철민이형이

둘 모두 엄청나게 부지런하고 고집이 세

처음 농담조로 하신 얘기다. 사실이 아

며 기존의 관습, 법칙 등과 부딪혀 싸우

닐 가능성이 높다(철민이형 미안!) 이후

려는 공통점이 있었고 가장 큰 공통점은

내가 형에게 직접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열정’이었다. 그 ‘열정’이 서로 싸우게도

형과 지내온 시간을 돌이켜 보면 아닐 확

만들고, 서로 지치게도 만들고, 서로 공

률이 더 높다. 아무튼 그렇다. 장길이형

통점도 만들어간 것이다.

은 춘천고(아마 맞을 거다) 유학시절, 이

장길이형 장례식에 만중이형은 매일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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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왔다. 장길이형 생전 별명이 짱돌(이

보내는 게 얼마나 아쉬웠으면 ‘가시는 님

별명을 갖게 된 이유는 작은 외모에 단

못 가게 신발이라도 숨길’ 심정으로 신

단한 성격 탓도 있지만, 교문에서 전경들

발을 바꿔 신고 갔을까? 그로부터 몇 달

과 싸움을 벌일 때 작은 외모에 짱돌 던

후, 만중이형도 조용히 갔다. 지금쯤 둘

지는 모습이 그리 아름다웠다나 뭐라나)

이 신나게 어울려 막걸리 마시며 연극얘

이었는데 만취가 된 상태에서 찾아와 장

기 하고 있을 거다. 내창이형이 무대장치

례식장 구석에 앉아 “짱똘, 짱똘” 외치

를 맡고, 원이형이 사진 찍고, 장길이형

며 장길이형을 찾았다. 웃자고 하는 얘기

이 대본 쓰고, 만중이형이 노래 부르고

인데, 만중이형은 장길이형 장례식에 이

연기하며 그렇게 놀고 있을 거다. 아! 어

틀 연속으로 찾아와 이틀 연속으로 신발

쩜 내창이형이 연기할지도 모르겠다. 내

을 바꿔 신고 갔다. 자기 신발 놔두고 남

창이형은 나한테 연기해보고 싶단 얘기

의 신발을 신고 간 것이다. 그것도 이틀

하신 적 있다. 잘 하실 거다.

연속으로 말이다. 만중이형이 장길이형

김진휘_ 연극학과 88학번 김경락이다. 성미산 미술극단 운영자로 일하고 있다. 그가 연출하고 직접 출연한 연극 <연장 혹은 도구>가 지난 6월 28일~29일 대학로에서 공연되었고, 10월에 대학로에서 연장 공연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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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않기

우리는 만나고 또 만나자, 이길 때까지 -자유인문캠프 라운드테이블, “지금 대학에서 정의를 꿈꾼다는 것”-

강남규 창인이가 자퇴하기 얼마 전, 내게 만나

얘길 더 나눠보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서 할 얘기가 있어 만나자고 전활 걸어왔

창인이한텐 줄곧 빚진 기분이었기에 내

다. 자퇴 때문에 그러는구나, 예상했다.

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당연히 돕

며칠 전 다른 친구에게 창인이가 자퇴를

고 싶었다. 그날 저녁 바로 ‘터방내’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

창인이를 만났다. 4월 초 인문대 선거가

이다. 아마도 자퇴 당일 기자회견 준비

또 다시 엎어진 뒤로 학교에 거의 나오지

를 도와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리라. 어

않았던 창인이였다. 오랜만에 만난 창인

쩌면 아직 자퇴 결심을 굳히지 못해 나와

이는 대인기피증이 생길 지경이라고 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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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마음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조차 편치 않았다. 되는 대로 말했다. 침묵하는 대학에 경 종을 울리기만 하면 된다고. 그거면 충 분히 도와주는 거라고. 창인이는 알겠다 고 했다. 그리고 5월 7일, 창인이는 자퇴 했다. 기자회견을 정말 많은 사람이 지켜 봤다. 떠나면서 자퇴 선언 대자보를 붙였 다. 겨울 이후 처음으로 붙은 자필 대자 보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날 저녁 학우들의 지지 대자보가 붙었다. 다 음 날 새벽 모든 대자보가 철거됐다. 우 리는 다시 대자보를 모아 붙였지만, 반나 절 만에 또 다시 철거됐다. 그날 이후 중 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누구와 도 연락하지 않은 채 집에만 박혀 살았다 고 한다. 근황을 조금 묻고 나니 역시나, 자퇴 얘 기를 꺼냈다. 알고는 있었지만 당사자에 게 직접 전해 들으니 또 다른 기분이었 다. 그러나 창인이가 자퇴 얘기를 내게 하는 이유는 내가 짐작했던 것들이 아니 었다.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창인이는 그걸 묻기 위해 날 만나자고 한 것이다. 당장 자기 인생이 바뀔 결정을 하면서도, 어떻게 이 학교를 고치는 데 도움이 될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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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대학교에서 창인이의 자퇴에 대한 얘 기는 더 이상 들려오지 못했다. 우리는 침묵하는 대학에 경종을 울리지 못했다. 대학은 자신을 향해 울리는 경종을 외면 했다.

창인이의 이야기를 완성하자는 기획 그렇게 시간이 지나던 어느 날 ‘안녕들 하십니까’ 북콘서트에 들렀다. 창인이가 패널로 참석한 행사였다. 참석한 청중들 이 모두 자기소개를 했는데, 마흔 남짓한 사람들 중 중앙대 학생이 두 명 있었다. 창인이가 왜 자퇴했는지, 자세한 얘길 듣 고 싶어서 북콘서트에 왔다고 했다. 그


잊지않기

때 많은 생각을 했다. 중앙대 학생이 중

교수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앙대 자퇴생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중앙

많은 단위만큼, 많은 얘기가 쏟아졌다.

대가 아닌 외부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는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역시 교수들의 자

것이 생각 하나였고, 중앙대에 창인이의

발적인 참여였다. 패널로 참석한 김누리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교수가 첫 발언에서 유머러스하게 말한

것이 생각 둘이었다.

것처럼, 이번 라운드테이블에서 듣고 싶

북콘서트 직후, ‘자유인문캠프’에서 창인

었던 얘기는 ‘교수는 왜 가만히 있는가’

이를 패널로 하는 라운드테이블을 기획

에 대한 교수의 답변이었다. 사실 교수들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북콘서트에서 했

의 ‘변명’을 듣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던 생각도 있기에 적극적으로 기획했다.

정부에 대한 시국선언은 하면서 왜 재단

단, 패널로 창인이 말고도 여러 단위 대

에 대한 비판은 하지 못하는지, 그들 나

표자를 섭외하는 것이 우리의 복안이었

름대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라는 명제

김누리 교수는 교수 사회가 아직 살아 있

는 부분적으로만 옳다. 교수와 교직원,

다고 말했다. 청중으로 참석한, 보직교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학교는

수를 역임했던 한 교수는 보직을 수행하

삶의 터전이다. 학생보다도 더 오래 학교

러 갈 때마다 ‘적진에 가고 있다’는 생각

에 남아 있을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들

이 들었다고 말했다.

도 주인인 것이다(노동자를 역사의 주인

두 교수는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그 내

이라고 말하면서, 학교 노동자들은 주인

용이 어떻든 ‘왜 가만히 있는가’라는 질

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창인이의

문이 무색해보일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자퇴 선언에는 이 ‘주인들’에 대한 얘기도

청중으로 참석한 다른 교수 또한 적극적

담겨 있었다. 침묵하는 교수, 떠미는 교

으로 발언했다. 그는 교수에 대해 얘기

직원을 비판했고, 투쟁의 최전선에 나섰

하기보다 대학생에 대해 얘기했다. ‘대학

던 청소노동자들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

생 인권조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러므로 창인이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참신한 시각이었다. 실제로 이뤄진다면

은 그들 모두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만

하나의 중요한 선언이 될 것이다. 고등학

완성될 수 있었다.

생도 아니고 대학생이, “대학가면 누릴 수 있다”라고 ‘보장’받던 바로 그 ‘인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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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하라고 요구하는 조례라니! 대자보

극적으로 내놓았다. 학생들의 다소는 의

붙일 권리, 집회할 권리, 온당치 못한 일

심스러운 눈빛에도 교수들은 숨어들지

에 저항할 권리, 그런 것들을 보편적인

않고 당당히 목소리를 냈다. 라운드테이

‘인권’으로 위치시킨다는 점에서도 탁월

블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

한 아이디어였다.

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유익했다.

정리하면 세 명의 교수가 라운드테이블

‘교수가 가만히 있었다는 말은 사실이다.

에 참석했고, 제각기 나름의 담론을 적

그러나 그들이 체제에 순응하기 때문에

이내창기념사업회

83


잊지않기

가만히 있었다고 말한다면 틀린 말이다.

‘안녕들 하십니까’의 조직형태를, 모임을

그들이 여태 가만히 있었던 것은 학생들

조직해내기 위한 최적의 형태로 내세우기

이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선

도 했다. 가장 낮은 수준의 연대를 이루

봉으로 나서면 교수들은 튼튼한 우산이

기에 적절하고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이

되어 학생들을 지켜줄 각오가 돼 있다.’

에 반해 김창인은 ‘학생회’를 복원해야 한 다고 일관되게 말했다. 학생사회 기층으

만나자, 어떻게든, 어디서든

로부터 지금 대학에 필요한 정체성을 녹

그렇다면 그 학생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여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학생회라고 제시

어떻게 해야 할까. ‘의혈, 안녕들 하십니

했다. 최소의 사상 기반과 정치적 활동의

까’에서 나온 안태진 학우와 김창인이 라

‘과정’을 학생회의 활성화를 통해 학생들

운드테이블 전반에 걸쳐 답하고, 또한 동

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에 물은 질문이다. 둘은 학생들이 움직

달랐지만 접점은 분명히 있었다. 학생사

이지 않는 데 대해 같은 진단을 내렸다.

회에서의 지속적인 만남이 그것이다. 어

사람이 없었고, 두산 이후 5년 동안 짓눌

떤 형태로든 말이다. 어떤 계기로든 학생

리기만 하면서 그나마 있던 사람들도 피

들은 서로 만나야 했다. 이번 라운드테

로해져 떠났다는 것이다. 학생은 단 한 번

이블 또한 하나의 계기였다. 창인은 어떤

도 재단을 이기지 못했고, 재단은 효과적

특별한 의제를 내세우는 것보다도 정치

인 당근을 던져 학생들을 끊임없이 유혹

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해냈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싸우는 ‘방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일리 있는 말이지

법’조차 후배들에게 전하지 못했다. 비단

만, 여전히 잘 마련된 의제 하나는 과정

중앙대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의 수고로움을 효과적으로 덜어줄 수 있

둘은 이런 진단에 어떤 처방을 내렸을까?

다. 다시 말해 창인이 인정하든 않든, 이

처방은 조금 달랐다. 안태진 학우는 ‘나

것은 창인이의 자퇴라는 의제가 만들어

의 불안’이 ‘나의 정치’로 확장돼 마침내

준 소중한 계기였다.

‘우리의 정치’가 되는 연대의 과정을 제시 했다. ‘나의 정치’를 모아내기 위해 학생

패배한 경험이 없기에 끝까지 싸웠다

사회에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모임을 조

중앙대학교는 다시 복원될 수 있을까. 그

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태진 학우는

의문에 ‘될 수 있다’고 증언한 것은 청소

끈덕지게 어깨동무

84


노동자였다. 비정규직 노동자 학생 서포

만나고, 다시 만나자

터즈, ‘비와 당신’에서 나온 권세은 학우

교수는 학생이 선봉에 설 때 움직이고,

는 노동자들이 위축돼 있던 모습이 학생

학생은 노동자들과 함께 일어선다. 그러

사회에 반영돼 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나 그것이 정형화된 공식은 아닐 것이다.

즉, 노동자들이 투쟁한다는 것은 곧 학

마찬가지로 교수가 선봉에 서면 학생이

생사회를 깨우는 일인 것이다. 지난 겨

뒤따를 것이고,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울, 청소노동자들은 일어나 싸웠고, ‘안

결국 대학 사회의 주체들은 서로 연결돼

녕들 하십니까’와 맞물려 유례없이 많은

있다. 함께 싸우는 것이다. 이번 라운드

학생들이 연대했다. 그러고 보면 권세은

테이블이 분명하게 확인해준 것은 바로

학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 사실이다.

교수와 학생들이 침묵하는 상황에서 청

단위들은 단위끼리, 혹은 단위 안에서 끊

소노동자들이 어떻게 치열하게 싸울 수

임없이 만나야 한다. 참석한 패널들이 공

있었냐는 질문에 권세은 학우는 그들에

통적으로 ‘만남’을 외쳤다. 학생과 학생의

게 패배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

만남, 교수와 학생의 만남, 노동자와 학

했다. 이전까지 학생 단위들이 ‘승리의

생의 만남, 교수와 노동자의 만남. 이 날,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지쳤다’

학생과 노동자와 교수들은 만났다. 아쉽

고 말하고 있었는데, 권세은 학우의 이

게 당일 행사에 모든 단위를 섭외하지는

말은 그것의 묘한 대우였다. 첫 싸움이었

못했다. 대학원생과 교직원도 함께 했다

기 때문에 청소노동자들에게는 패배의

면 더욱 알찼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라운

경험이 없었고, 그래서 끝까지 싸울 수

드테이블에서 작은 희망을 봤고, 그러므

있었다.

로 우리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런 자리를 다시 마련하려 한다.

강남규_ 2009년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으며, 현재 ‘자유인문캠프 기획단 잠수함토끼들’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85


잊지 않기

정녕 침몰한 것은 세월호뿐인가 조환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있던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참사라는 점 등을

날. 우리는 내창이형의 묘역 이장을 준비

제기하며 의혹의 시선을 감출 수 없었으

하기 위해 각자 일을 마친 후 종로 모처

나 제한된 정보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에서 만나 회의를 하고 늦은 저녁식사 겸

무척 짧았다.

반주를 나누고 있었다. 예의 그 좁다란 골목길 허름한 술집에서 말이다. 늘 보면

이튿날부터다.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현

서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

장의 상황을 보고선 일을 제대로 할 수

들. 서로 사는 얘기부터 해서 회의에서

가 없었다. 처음에 배에서 탈출한 학생과

못다 나눈 잡담이 오가던 중 세월호 얘

시민들 외에는 모두 배에 갇힌 채 그대

기가 나왔다. 몇 가지 의문이 든다고 하

로 바다로 침몰하고 있었고, 해경도, 해

면서.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

군도, 정부와 관계당국도 무엇을 어찌 한

몇 백 명이 탄 배인데, 출항을 할 것인지

다는 말만 무성할 뿐 무엇 하나 제대로

말 것인지 하다가 출항을 하게 되었고,

하고 있는 것이 없었다. 멀리서 뉴스만

선장이 원래 선장이 아니라 하고, 지자체

보는 사람도 그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끈덕지게 어깨동무

86


굴렀는데, 하물며 제 자식이, 제 부모가,

어 세월호 사건 보도를 청와대에서 통제

제 형제가 그대로 바다 속으로 꺼져 들어

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배 침

가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몰의 원인부터 구조를 할 수 있는 최적의

가 없었던 가족들의 심정은 오죽 했겠는

시간대에 관제센터와 세월호가 교신을

가. 한동안은 무기력증에 빠져 컴퓨터 앞

한 녹음 파일이 편집되었다는 보도가 나

에 앉아서 뉴스를 보며 그저 한숨만 지었

온 데 이어 민간 잠부사의 투입과 해군의

고, 토요일이면 광장에 나가 시민들과 촛

구조를 해경이 차단하였다는 의혹이 불

불을 들었을 뿐 뭐를 할 수가 없었다.

거지고 살신성인의 자세로 구조에 임해 야 할 정부에서 외려 구조 방안을 유가

세월호 참사 사건 이전까지 세간의 관심

족에게 묻는 등 정부와 관계당국의 무능

을 모았던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 여부

함과 불성실함에 유족은 물론 국민들의

와 간첩조작 개입여부 사건은 종적을 감

분노가 결국 촛불로 모아져 청와대로 향

췄고, KBS 보도국장의 막말파동에 이

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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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기

한 이유 등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 다. VTS 교신 기록은 왜 편집되었고, 최 초 신고시간 전 배에서 발생한 이상 징후 는 없었는지, 또한 청와대의 KBS 외압 설 및 SNS 통제 의혹 등에 대해서도 지 위여하를 불문하고 성역 없는 조사를 펼 쳐 응당 책임져야 할 사람과 기관에 대해 서는 엄격한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다. 며칠 전 국회 국정조사에서 기관보고가 끝났다. 그러나 허무하다. 청와대는 특 위에서 요구한 자료의 3%만 제출하였 고, MBC는 ‘언론의 자유’를 내세워 출 석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여야 가 합의하지 않으면 동행명령 등 제재수 단을 발동할 수 없는 형편이고, 위원들도 부족한 자료를 가지고 새로운 사실을 들 추어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국정조사에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세월호 참사에서 풀

출석한 기관장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어야 할 의혹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만 보였다.

초 사고발생 시각부터 시작해서 청와대

당장 대통령비서실장부터 청와대는 ‘법

의 콘트롤타워 역할 수행 여부, 해경이

적으로’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라는

탈출 방송도 하지 않고 선장과 선원들만

말만 되풀이하면서 대통령이 물에 들어

먼저 구출한 이유와 민간 잠수사의 투입

가 구조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그 책

과 해군의 투입을 막은 이유, 그리고 피

임을 해경과 해경을 감독해야 할 해양수

의자 신분인 선장과 선원들을 특별관리

산부로 미뤘다. 국정조사가 책임을 면하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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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한 방탄조사로 전락한 것이다. 8월

척사유에 해당하는 것이다. 지극히 마땅

초부터 청문회가 있을 거라고 하나 별다

하다. 특별법을 두는 이유가 무엇인가.

른 기대가 가지 않는다.

해경과 검찰의 수사마저도 불신하기 때 문에 그러한 것 아닌가. 때문에 위원 구

이러한 국정조사를 하게 된 과정을 돌이

성에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반

켜보자. 지난 5월 28일 밤, 유족 70여 명

절 정도를 추천을 하고 유가족들의 추천

이 국회에서 철야농성을 하면서 국정조

을 받아서 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유가족

사에 대한 여야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

들의 법안이 입법취지에 비춰볼 때 절대

다. 그리고 그 유족들이 지금 수사권과

무리한 것이 없다.

기소권을 가진 진상조사위원회를 위해 특별법을 요구하며 국회와 도심 한복판

다음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의 문제가 있

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어찌 이 나

다. 우리는 지난 정부에서 의문사진상규

라는 피해자들이 농성을 하고 더 큰 자기

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 등 과거청산

희생을 감내하면서 요구를 해야 하는지

기구의 경험을 통해 강제성 있는 수사권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이 아닌 미약한 조사권한만으로는 국가

그 특별법도 여당의 반대로 제정 여부가

폭력과 인권침해 내용에 대한 진상 규명

불투명하다. 핵심은 수사권 부여에 있다.

에 그 한계가 있었음을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 이는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이

이내창기념사업회

89

특별법 제정에 있어서 유가족들의 주장

끝난 사안이다. 여당과 정부에서는 현행

은 이렇다. 가칭 ‘4.16 참사 특별위원회’

법 체계상 맞지 않는다고 하나 다른 법률

를 두고 전체적으로 조사를 주도하는데,

가들과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방

그 위원 구성에서 정부의 참여를 최대한

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부와

배제하자는 것이다. 이유는 정부는 조

여당에서는 안 된다는 입장만 반복할 것

사의 대상이 되고 진실규명을 받아야 될

이 아니라 무엇이 국민을 위한 것이고,

입장인데, 역으로 조사의 주체로 들어가

무엇이 진상규명에 최선의 길인지 같이

는 것은 일종의 법률적으로 얘기하면 제

머리 모아 방안을 도출해내야 한다.


잊지 않기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까지 유가족

해서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호도하고 소

들의 고생은 말과 글로 다 못하리라. ‘세

모적인 여론을 조성하려는 행위에 대해

월호 가족버스 전국순회보고대회’가 있

국민이 나서서 바로 잡아야 하겠다. 이번

던 청계광장에서 유가족 중 한 분은 이렇

사건을 통해 국민의 자발적인 후원과 성

게 호소했다. 못난 아빠는 제 자식이 어

금으로 운영되는 대안 언론사들의 활약

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누구 때문

상을 우리는 어느 때보다 잘 보았다. 이

에, 누구의 책임으로 죽었는지도 모르는

처럼 어렵게 운영되는 언론사와 언론인

데, 그래서 그 못난 아빠는 국민의 힘을

들이 있기에 송두리째 사장될 뻔했던 진

빌어 사건을 해결하고자 이렇게 거리에

실이 그나마 드러났던 것 아니겠는가. 침

나섰다며 울분을 토했다. 특별법 제정을

몰하는 나라를 구해낼 이는, 누구도 아

위해 전국을 돌며 국민 서명을 받던 유가

닌 국민에게 있음을 세월호 참사는 말해

족들을 향해 어떤 이들은 자식을 팔아서

주고 있는 것 아닌가.

한 밑천 잡으려 한다며 손가락질을 해댔 다 한다. 하루아침에 혈육을 잃은 슬픔 으로 제 한 몸 가누기조차 힘든 유가족 에게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여론을 호도하려는 망발에 유가족들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으리라. 특별법이 제정되었다고 해서 끝난 게 아 니다. 법안이 어떤 내용을 담아 제정되는 가도 중요하지만 제정 이후, 위원회가 출 범한 이후에도 국민적 감시와 참여가 반 드시 필요하다. 바로 국민이 수사와 조사 의 주체라는 생각으로 조사에 불응하거 나 불성실한 인사와 기관에 대해 국민이 나서서 심판을 내려줘야 한다. 언론에 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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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의 세상을 산다는 것은 과연 뭘까 정은진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해서였는데, 진도체육관 앞마당에 들어

잠들기까지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잠이

서는 순간 바로 알았다. 여기서 내가 할

들더라도 밤새 꿈에 시달리다 피곤하게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틀 동안

눈을 뜨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체육관 3층 구석

4월 16일. 그 이후로 거짓말처럼 꿈을 꾸

에 숨죽이고 앉아, 나즈막한 울음의 파

지 않는다.

동이 점점 커져 통곡이 되고 무능한 관

하루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베개에 뺨을

리들을 향한 절규가 되었다가 다시 잦아

대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지기 일쑤고, 얼

드는, 반복적인 과정을 지켜보는 것뿐이

마 잔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아침인가

었다.

하고 눈을 뜨는 일이 반복된다. 한동안

생지옥이 이 곳이었다.

은 아침에 일어나면 멍하니 앉아 생각했

속수무책 돌아온 안산도 도시 전체에 낮

다. 지금 이 일이 진짜로 일어난 일인가,

은 울음소리가 깔린 듯했다. 차도 사람

아니면 그냥 나쁜 꿈을 꾼 것인가 하고.

도 많이 보이지 않았고, 어쩌다 길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다음날 진도에 내려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조

다. 안산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을 찾기 위

용조용 움직였다. 한 다리만 건너면 다

한 현장 상황 파악과, 가능하다면 진도

아는 아이들이란 건 과장이 아니었다.

의 가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

후배 회사 식당 아주머니의 딸, 아는 중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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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기

학생 아이의 선배, 이모가 다니는 교회

텔레비전 앞에 앉아 세월호의 머리 부분

집사님들의 자녀들, 몇몇 단체의 회원의

이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보고

아들, 딸들······. 어느 밤 촛불을 함께 준

만 있던 시민들은, 결국 자발적으로 촛

비한 동료들과 들어간 어느 식당에선,

불을 들기 시작했다. 급히 꾸려진 안산

방금까지 웃으며 김치찌개를 가져다주던

시민대책위에서 내가 맡은 일은 시민촛

앳된 알바생이 친구가 발견되었다고, 잠

불 집회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이다. 매

자는 듯 곱게 올라왔다고 식당사장님에

일 매일 촛불을 준비하며 가장 괴로웠던

게 울며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

일은 딱 하나, 하루 종일 세월호와 관련

히 숟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다.

된 내용을 찾아서 읽어야 하는 일이었다.

분명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는데

세월호 소식이 실린 기사는 물론 실종자

이 슬픔과 분노의 무게가 너무 크고 압도

와 희생자를 위한 시나 편지를 있는 대로

적이어서 백배, 천배의 무게로 짓누르는

찾아 읽고, 하루에 영상을 일이십 편, 필

듯했다.

요하다면 여러 번 반복해 보는 일이 하루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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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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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였다. 눈앞에 펼쳐진 이 상황만으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으러 거리

도 이미 견딜 수가 없는데, 굳이 아직 널

로 나가면, 만나는 시민의 3분의 1은 ‘서

리 알려지지 않은 사연들까지 찾아다니

명했어요, 고생 많으시네요’, 다른 3분의

다 보니 신경이 다 마모되어 닳아 없어질

1은 ‘서명해야죠, 수고해주셔서 감사합

것만 같았다.

니다’,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이제 그

대책위의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을

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난 싫어, 안 해!’

것이다. 그렇지만 슬픈 마음을 나누며

이렇게 말한다. 같은 안산이라도 동네에

눈물을 흘리거나 누군가의 가족사를 화

따라 체감온도가 정말 다르다.

제에 올려 이야기하는 일은 약속이나 한

이는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는 그

듯 서로 피했다. 모두들 묵묵히 맡은 일

만 듣고 싶다는 진심어린 말일 수도 있지

을 했고 회의 때도 거의 모든 안건을 굳

만, 한편으로는 정서적 피로감을 호소하

이 실무적으로만 논의했다. 동료들 사이

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너

에서는 드러내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것

무 오래 괴로운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보

조차 희생자 가족들에게 미안한 일이라

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 슬픔에서

는 공감이 있었다. 우리가 당사자보다 더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 말

아플 수는 없다. 내 눈물과 절규를 드러

이다. 그리고 이런 참사는 예전에도 있었

내기보다는,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지

고,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결국은 흐

금 가장 필요한 일에 전력을 다하자, 이

지부지 없던 일처럼 되어버린 것을 본 경

런 생각. 촛불의 방향이 실종자 무사귀

험이 많다보니, 아무리 전 국민을 충격에

환에서 조속한 구조로, 또 다시 진상규

빠뜨린 이번 세월호 참사라 해도 결과적

명으로 바뀌는 동안, 실종자의 숫자는

으로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묻혀버리리

희생자의 숫자로 바뀌었고 실종자 가족

라 체념하는 무기력.

은 유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진도 앞바다

태안 해병대캠프 사고로 아들을 잃은 아

에는 아직도 11명이 남아 있다. 그동안

버님이 말씀하셨다. “삼풍백화점, 대구

많이 울었고 또 많이 화가 났다. 그렇게

지하철 사고가 났을 때 내가 아무것도 하

70일간 촛불을 지켜왔다.

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내 아들이 죽었


잊지 않기

다”라고. 단원고 다니던 딸을 잃은 어머

서로 확인하기 위해. 언제 침몰할지 모를

님이 거리서명에서 말씀하셨다. “이 천만

우리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밝힌다.

인 서명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

세상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다. 바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를 위한

한다. 내게 세월호 이후의 세상을 산다

것입니다”라고.

는 것은 과연 뭘까.

그동안 매일 광장에서 들던 촛불을 이제

잘못된 걸 알면서도 덮어버리거나 외면

는 안산 구석구석 동네마다 밝힌다. 도무

했던 것들을 이제는 정면으로 바라보기.

지 익숙해질 것 같지 않던 현실에 우리가

내가 세상에 외치는 구호만큼의 무게로

점점 적응해서 시나브로 무뎌지지 않기

내 삶을 돌아보기. 이렇게 조금씩 뜯어

위해. 이번만큼은 반드시 두 눈 부릅뜨

내고, 꿰매고, 새로 심다보면 이 긴 악몽

고 지켜보며 행동할 것을 약속하기 위해.

에서 깨어날 수 있겠지.

진정한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이웃끼리

정은진_ 1992년 중앙대학교 식생활학과에 입학했다. 남편 이상하, 아들 정후와 함께 안산에 살고 있으며, 안산 민예총 사무국장, 안 산시민대책위 촛불기획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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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1차 공동조사 참가 보고 신명철

죽음의 의문은 풀렸지만 아버지는 주검으로

누워 있다.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만 있다면

라도 돌아오지 못했다. 정부는 진실화해위를 만들어 진상을 규명했으나 유해까지 찾아주

발굴하여 양지바른 곳에 모시어 매일 찾아가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지는 않았다. 2007년부터 진실화해위는 국가

아버지를 불러보고 싶은 게… 마지막 소원입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민간인 학살지 유해발

니다.” 지난 24일 진주시 명석면사무소에서

굴을 진행했다. 다만 3년간 고작 열 곳, 1617

열린 개토제에서 한국전쟁유족회 진주유족회

구를 찾는 데 그쳤다.

장으로서 호소문을 읽던 ‘늙은’ 아들은 이 한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에서는 보도연맹원·진

문장을 읽다 두 번 울음을 터뜨렸다.1

주형무소 재소자 718명이 학살당했다고 알려 졌다 국가가 유해발굴 손 놓은 사이 시민단체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 유해발굴 공동

들의 힘으로 땅을 팠다. 두개골, 팔다리 뼈, 허 리띠 버클… 하나둘씩 모습 드러내지만 세상

조사단 1차 발굴조사에 동행한 한겨레

에 나와도 갈 곳이 없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번에 1차 발굴지로 선정되어, 유해를 수

때마다 찾아가 볼 곳 있으면 좋겠습니다.”

습하는 상주의 입장에서 공동조사단을

아버지는 지금도 진주 어딘가의 차가운 땅에

맞은 강병헌 진주유족회장의 심경이 그

신문 김민경 기자 르뽀의 도입글이다. 이

1 김민경, “29살 아버지가 그리운 64살 아들…방치된 유예, 예산은 0원”, <한겨레신문>, 2014년 3월 2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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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기

대로 드러난다. 밭에서 일하다 새참으

골로 가다는 죽다의 속어이다. 국어사전에도

로 국수를 말아놓았다 해, 점심 먹으려

나와 있는 말이다. 이 말이 처음으로 생겨나

다 면사무소에서 찾는다 하여 잠시 다녀

게 된 유래의 장소가 대구 가창골이다. 아이러

오겠다고 하고 나간 게 마지막이라 한다.

니하게도 지금은 영남대 재단의 땅으로 바뀌

아버지를 그렇게 잃은 자식은 칠순이 넘

었지만 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 대구교도소

어서도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

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를 포함하여 민간인 1

해,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그런 부모와

만여 명이 군과 경찰에 의해 총살당한 우리나

자식이 100만에 이른다는 것이다.

라 최대의 학살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가창골 로 가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길이 되

왜 여태껏 유해도 수습하지 못한 것일까.

고 말았으니 그때부터 “골로 가면 곧 죽음”이

국가가 방치한 것은 잘못이지만 유족은

라는 의미로 구전되어 일상용어가 되어버린

무엇을 한 것일까? 왜 해결하라고 요구

것이다. 어디 가창골 뿐 만일까? 한국전쟁은

하지 못한 것일까. 전쟁과 죽음을 역사로

전국 방방곡곡이 죽음의 굿판이고 집단 학살

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리 말할 수 있

지였다. 얼마 전 화쟁코리아 백일 순례길의 도

다. 합리적 의심이기도 하다. 하지만 레

법 스님을 모시고 천도재를 올렸던 진주시 명

드컴플렉스라고 하는 빨갱이 연좌의 두

석면 용산고개, 경산 코발트광산, 함평 불갑산

려움은 우리가 상상하는 수위를 쉽게 넘

도 그중 한 곳이다.

는다. 두려움은 트라우마가 되어 햇빛이

이 야만스런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족

비추는 것조차 피하게 했다. 2005년 진

들은 나도 잘못 걸려들면 아버지처럼 어느 골

실화해위원회에서 한국전쟁기 민간학살

짜기로 개처럼 끌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신청을 받았

와 불안감에서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채 60

을 때도, 대다수는 신청을 하지 않거나,

년 세월을 숨죽여 살아야 했다.2

조사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다.

2 정석희, “<왜냐면> 60년의 어둠을 거둬내야 한다”, <한겨레신문>, 2014년 4월 14일

끈덕지게 어깨동무

96


‘골로 간다.’, 부모를 하루아침에 빼앗기

기록하여 과거의 잘못과 비극을 경계하는 일

고, 빨갱이 자식으로 현대사를 살아내야

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

했던 당사자의 피끓는 표현이다.

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적절한 장소에 안치시 킴으로써 피해자와 유족들의 한을 조금이나

다행히 노무현 정부 시절 한국전쟁기 민간인

마 풀 수 있게 하는 일은 산자들이 가져야할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최소한의 윤리적인 책무이기도 합니다.

한을 풀기 위해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하여

이를 위해 한국전쟁유족회가 요청하고 관련

유해 실태의 일부를 조사한 바 있습니다. 당

단체들이 뜻을 모아 민간 차원에서 ‘한국전쟁

시 전국 158개 지역에 대한 지료조사를 실시

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구성

하여 13개 지역을 발굴하고 1,617구의 유해와

하여 오는 2월 24일 진주 지역 발굴을 계기로

5,600여의 유품을 수습한 뒤 충북대학교 내

매년 지속적인 유해 발굴사업을 해 나가기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관’에 임시 안치

했습니다.

했습니다. 그리고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안장을 위한 건의’를 대통령과 국회에 제출하

조사 제안서’의 일부이다. 국가가 하지 않

여 국가 차원의 후속 조치를 요청했습니다. 그

으니 우리라도 나서자 해서 한국전쟁유

러나 이명박 정부와 현재의 박근혜 정부에 이

족회, 과거사 단체와 시민단체 등이 모여

르기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습니

공동조사단을 구성했다. 2013년 2월 18

다. 국가가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가져

일 성프란체스코 성당에서 공동조사단

야 할 법적•정치적 책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결성 선언과 1차 발굴조사지 발표를 했

윤리적 책임조차 지지 않는 태도에 우리는 실

다. 1차 발표지는 전주시 명석면 용산고

망을 넘어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개로 진주 유족이 추정하는 학살지 가운

그러나 아픈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그 상처를

데 한 곳이다.

치유하는 일은 국가만의 몫일 수는 없습니다.

발굴조사단장은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

시민사회 차원에서 지속적인 유해 발굴사업

수가 맡아주었다. 발굴팀은 노용석 부산

을 수행함으로써 민간인학살 사건의 실상을

여대 교수, 총괄진행은 안경호(49평화통

이내창기념사업회

97


잊지 않기

일재단), 기획팀은 김민철(민족문제연구

될 수 있도록 국민적 관심을 모아내며 민

소), 조직팀은 조동문(한국전쟁유족회)

간차원에서 과거청산 작업을 지속적으

등이 책임을 맡아 진행했다. 2월 24일부

로 이어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함을

터 3월 2일까지 12일간의 짧은 조사기간

목적으로 한다.

이지만 39구의 유해 등을 발굴하는 성 과를 이뤄냈다. 그 내용을 보고서 형식

2. 준비 과정

으로 간략하게 설명한다.

국가기구인 진실화해위원회의 유해 발굴 사업 이외에 민간 차원에서도 유해 발굴

1. 조사 목적

사업이 있긴 했으나 일시적인 성격이 컸

이번 조사는 과거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다. 그러나 이번 사업은 유족회와 시민단

6.25 전쟁 전후 희생된 민간인의 유해를

체가 지속적인 유해 발굴 사업의 의지를

인도적 차원에서 발굴·안치하고, 실질적

가지고 공동조사단을 구성하여 공동으

인 과거청산에 필요한 법과 제도가 구비

로 추진했다는 점에서 일차적인 의의를

끈덕지게 어깨동무

98


들 수 있다. 또한 대통령 선거 이후 진화

3. 발굴조사 지역

위법과 배보상특별법 입법 추진이 큰 힘

6•25 전쟁 당시 진주지역 희생자가 가장

을 갖지 못한 채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

많이 묻힌 곳 중의 한 지점은 진주 명석

하에서 민간 차원에서 실질적인 사업을

면 용산리 산 241-1, 산 417-2 용산 고

시작함으로써 장기적인 전망을 어느 정

개(일명 용산치) 일대이다. 당시 용산리

도 확보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하

에는 3번 국도를 가로지르는 3 개의 골

겠다.

짜기 중 5 군데에 718구의 시신을 매장

시간에 쫓겨 바쁘게 진행한 것으로는 비

했다고 조사 보고되어 있다. 이번 조사

교적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예

는 그 중 한 지점으로 진주에서 산청으로

비 답사, 출범식 등은 비교적 무난하게 진

가는 3번 국도 중 용산고개 바로 전 왼

행되었다. 그러나 준비 과정에서 교육 프

편에 있는 3 개 골짜기 중 가운데에 자리

로그램을 활용한 홍보를 하지 못한 채 실

한다. 골짜기의 개울을 오른쪽으로 하고

무 준비만 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200여 미터쯤 산경사를 오르면 75~80

이내창기념사업회

99


잊지 않기

m 높이에 명석배수지가 자리한다. 배수

4. 조사방법

지 입구에서 개울을 건너면 편편한 공터

유해매장 추정지는 처음 7x4m 정도의

가 완만한 산자락 끝에 자리한다(북위

편편한 모양을 하고 있어 길이 가로 4m,

35°13‘58“/동경 128°0‘15”). 유해매장

세로7m, 너비 0.5m, 깊이 0.3m 정도

추정지 뒤쪽(북서방향) 산정상은 196m

의 도랑(트랜치)을 파서 유해의 존재여부

의 높이로 산너머 골자기와 이어지며, 매

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조사 직후 유해

장지 서쪽 방향의 정상은 203m의 높이

가 확인되어 추정지를 1x1m로 구획 정

로 정상으로 아래 골자기와 만난다. 북

리하여 작업을 계속하였다. 본격적인 작

동방향으로는 3번 국도 너머로 용산리

업 첫날부터(25일) 유해가 노출되어 (3월

소재 산봉오리(228.4m)와 지내저수지

1일) 지표하 30cm에서 유해가 산자락을

가 자리한다.

따라 가로로 길게 출토되었다. 유해는 주 로 매장지 좌우에 몰려 있었으며 2~3명

끈덕지게 어깨동무

100


이 겹쳐서 나타났다.

불어 발굴된 유해의 적절한 안치시설의

이번 발굴조사는 민간차원에서라도 먼

설치가 요구된다.

저 아픈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나서기로 했다는 점에서

“영령들이시여!

큰 의미가 있고 시사하는 바도 크다. 하

가해자가 누구인지, 왜 죽였는지조차 제대로

지만 이번 발굴에서 수습한 유해를 현장

밝히지 못하고 저희 유족들은 가슴의 피멍과

근처 컨테이너 박스에 임시 안치할 수밖

한을 삭이지 못하며 백발이 성성한 채로 늙어

에 없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크다. 불

가고 있습니다. 수십년 해원하지 못하고 캄캄

법적인 국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

한 땅속에 내팽개쳐진 원혼들을 생각하면 도

된 분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적절한 장소

저히 잠을 청할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정부가

에 안치하는 것은 피해자와 유족의 한을

나서서 유해발굴과 안장시설을 조성하여 주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가장 기본적인 조

시기를 간곡히 호소드립니다.”

치이다. 이번 발굴을 통해 국가가 국민에

컨테이너 속 플라스틱 상자에 임시로 보관중

대한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를 되새겨

인 유골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던 진주 유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족회장 유복자 강병현의 아픔이 이 나라의 아 픔이어야 한다. 이 외침을 외면해선 안 된다.3

발굴조사 결과 최소 39 개체의 유해를 발굴하였으나 이 지역에서 모두 713분이

한국전쟁과 민간인학살을 이해하고, 국

희생당했다는 조사 보고에 따르면 아직

가의 책임과 민간의 직접 발굴이 갖는 의

도 많은 유해가 용산고개 일대에 묻혀 있

미를 논하려면 현대사를 관통하는 논쟁

음을 알 수 있다. 이번 발굴에서 보듯이

과 학습이 필요하겠다. 하지만 다음 기회

유해는 거의 삭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로 넘기고 이번 호에서는 간략한 소개로

모두 삭아 없어 질 것으로 보인다. 추가

만족하고 정석희 한국전쟁유족회 상임

발굴조사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더

대표의 글로 마무리한다.

3 정석희, “<왜냐면> 60년의 어둠을 거둬내야 한다”, <한겨레신문>, 2014년 4월 14일 신명철_ 81년에 입학했다. 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1과 팀장으로 국정원 관련 의문사를 조사하였다. 현재는 (주)우리교 육의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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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 피아노 오중주곡 ‘송어’

“그냥 가면 섭하지. 입수 한 번 하고 가” 박성용

지루한 장마전선이 잠시 남쪽으로 내려 갔다. 근 한 달 동안 무겁게 가라앉았던 잿빛 하늘이 살짝 열리자 슈베르트의 피 아노오중주 ‘송어’ 음반을 꺼냈다. 상쾌 하고 발랄한 음악은 눅눅해진 마음을 뽀 송뽀송하게 해주는 ‘물먹는 선율’이기 때 문이다. ‘짠’하고 1악장이 시작되자 잠시 후 가평의 경반계곡이 생각났다. 피아노 와 네 대의 현악기가 서로 화답하듯 선율 을 주고받고 또 한데 섞어 이어가는 이 음 악은 맑은 물이 흰 바위를 옥구슬처럼 굴 이내창기념사업회

103


클래식 친해지기

경반계곡과 경반분교 캠프장 경반계곡은 서울에서 1시간 30분밖에 안 걸리지만 세상과의 단절감은 강원 도 어느 깊은 산골이나 다를 바 없다. 칼봉산(900m)과 매봉(929.2m) 사이의 수락폭포에서 시작되는 경반 계곡은 경반리를 거쳐 가평천과 합류한다. 이중 수락폭포에서 경반사와 경반분교 캠프장을 지나 백학동 한 석봉마을까지 약 4km에 달하는 계곡이 압권이다. 이 계곡을 따라 걷는 트레킹은 크게 힘들지 않으면서 개 울을 여섯 번이나 건너는 백패킹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가평역에서 백학동 한석봉마을까지 택시비 8천원.

끈덕지게 어깨동무

104


러가는 계곡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말 그대로 계곡 전체가 거대한 거울처럼 투명한 경 반(鏡盤). 문득, 지난해 이 무렵 계곡에서 만났던 할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길은 안 끊어졌어.” 장맛비에 크고 작은 바위들이 파헤쳐진 두 번째 개울이 길을 막는 바람에 차를 한쪽 에 세우고 걸어서 가기로 했다. 비가 그친 지 이틀이 지난 계곡의 물살은 빨랐지만 여전 히 투명하고 맑았다. 개울을 다섯 번 건널 때마다 종아리를 툭툭, 치고 지나가는 물살 이 반가웠다. 평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피서철인데 30분가량 산길을 느긋하게 걸어 가는 동안 사람 구경을 못했다. 오기 며칠 전부터 전화를 해도 연락이 닿지 않았던 할아 버지는 다행히 무탈했다. 올해 일흔 네 살인 박해붕 경반분교 캠프장 주인할아버지다.

“경반리 임도로 오지 그랬어. 거기는 그래도 다닐 만해.” 모처럼 햇볕이 들자 할아버지는 방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불쑥 손님이 찾아오자 얼 굴에 환한 기색이 돌았다. 1996년에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왔으니 벌써 17년째 다. 1982년 폐교될 때 경반분교에는 학생 3명이 있었다. 100여 가구의 화전민들이 모 여 살았을 때에는 학생 수가 8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박 할아버지는 83년 학교 건물 과 부근의 땅 3천 평을 구입했다. 팔려고 내놓은 학교가 나가지 않자 마을 노인이 어머 니한테 사라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인연이 닿은 경반계곡엔 정년퇴직을 하고나서 혼 자 들어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기는 들어오지 않는다. 냉장고, 텔레비전은 꿈도 꾸 지 못한다. 유선전화는 바깥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다. 핸드폰은 캠핑장 끝에 가야 겨우 터진다고.

“주말에만 사람들이 조금 올 뿐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뿐이야. 전기가 없으니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그런데 물소리가 너무 커서 잠을 설칠 때가 많아.” 그런데 세상이 바뀐 건지 이런 오지가 5~6년 전 캠퍼들에게 입소문이 돌면서 TV에 도 소개된 것. 특히 <1박2일>에 나오면서 유명세를 탔다. 박 할아버지는 <1박2일> 이 그렇게 인기가 좋은 프로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전기 없는 캠핑장이 오히려 사람들 의 관심을 끄는 매력으로 통한 것이다. 편한 세상에 불편한 하루를 체험하기 위해 일 부러 찾아온단다. 수도는 따로 없고 관사 뒤편의 일급수 계곡물을 받아서 쓴다. 신식 화장실과 개수대가 없어도 산골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고맙기만 하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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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친해지기

송원막국수 허영만의 만화 <식 객>에 나온 가평의 맛집. 막국수 하나로 20년이 넘은 음식점답게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많 다. 깔끔하고 매콤한 맛이 특징인 막국수는 주전자에 담아온 차가 운 육수를 부어야 제맛이 난다. 보 통 6천원, 대 7천원, 사리 3500 원, 수육 15,000원. 가평읍 읍내 7리 363-1. 031-582-1408.

“요즘 놀이문화가 성숙해졌어. 흔적도 없이 뒷마무리를 잘 해. 밤 10시가 넘으면 알 아서 불을 낮추고, 캠핑장에 늦게 오는 차는 불도 끄고 조용히 들어오거든.” 높이 30여 미터인 수락폭포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여전히 캠핑장은 텅 비었고 주인의 낡은 자동차만 네 문을 열어놓고 몸을 말리고 있었다. 대접할 게 이것밖에 없다며 할아 버지는 귀한(?) 캔 맥주를 들고 왔다. 100년은 족히 넘었을 아름드리 층층나무 아래의 평상에 걸터앉아 목을 축였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춰들자 나뭇잎들은 일제히 푸른 실핏줄을 드러냈다. 맞은편 둥근 돌에 앉은 주인할아버지의 얼굴이 투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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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면 섭하지. 입수 한 번 하고 가.” 그는 박찬호가 얼음을 깨고 들어갔다는 계곡 웅덩이를 가리켰다. 몇 번 망설이다가 지금 아니면 언제 다시 알탕을 하랴, 하는 심정으로 옷을 다 벗고 물에 뛰어들었다. 경 쾌한 물살이 송어의 4악장 주제와 변주 같은 다양한 선율로 온몸을 휘감고 흘렀다. 파울 바두라-스코다가 빈 콘체르트 하우스 사중주단, 바릴리 사중주단과 함께 모 노&스테레오로 녹음한 이 음반은 우아하고 경쾌한 송어를 들려준다. 송어를 회로 먹 다가 얼큰한 매운탕으로 마무리하는 느낌이다. 실내악 녹음에 강한 웨스트민스터 레 이블이다. 간혹 이 산길을 4륜 SUV들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러나 국지성 호우나 큰비가 자주 내리는 여름철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칼봉산 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 약 50m 전쯤 도로 왼쪽에 임도가 있다. 자동차로 약 25분 걸리는 이 임도의 끝은 콘크리트 다리. 수락폭포로 가는 길과 만나는 이 다리 오른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경반분교 캠프장 이 나온다. 승용차는 겨우 갈 수 있지만 4륜 차량이 아니면 포기하는 게 좋다. 현재 공 사 중인 임도가 올 10월에 완공되면 개울을 건너지 않고 캠프장에 갈 수 있게 된다. 경반분교 캠프장에서 수락폭포까지는 약 30분. 임도 통행차단기 직전 계곡으로 내 려가면 약 100미터 정도 계곡물을 헤치고 가야 한다. 차단기를 통과해 약간 올라가면 왼쪽으로 계곡을 한 번만 건너 폭포로 갈 수 있는 길이 나온다.

경반분교 캠프장 사용료는 1인 1만원 기준이다. 단, 오토캠핑인 경우 혼자라도 한 가족 3명 기준으로 잡고 3만원을 받는다. 백패킹으로 오면 1인 1만원이다. 전기는 물론 매점도 없어 미리 음식을 준비해서 와야 한 다. 경반분교 캠프장 031-582-8009. 010-5339-7816.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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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기

혼자가 아님을 알 때, 더 단단해졌다

2014년 봄•여름 과거청산 기록

4•16일 세월호 참사는 과거청산 과제의 실현하려는 노력을 수면 아래로 들어가게 했다. 추모하고 기념하는 일은 서둘지 않아도 되었고, 이유없이 죽어간 생명들의 진상을 밝히는 일이 그 무엇 보다 우선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과거청산 운동을 벌여온 유족 과 활동가, 추모·기념사업회 회원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 키기 위해 세월호참사국민대책위에 결합해 활동하고 있다. 4월 부터 7월까지 아주 많은 일들과 활동이 있었고, 계속 되고 있지 만, 세월호 참사 100일을 앞두고 특별법 제정을 위한 투쟁이 정 점에 다달아 있기 때문에 이내창기념사와 과거사특위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활동은 다음호에 정리해 싣기로 한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의 상처는 치 유되지 않고, 억울한 죽음은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더 구나 100만 명에 이른다는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유해 대부분 은 여전히 차가운 광산 지하에, 이름 모를 산 속 어딘가에 버려 진 채이다. 아픈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국가만의 몫일 수는 없어, 시민사회 차원에서 지속적인 유해 발굴사업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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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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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기

수행하고자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꾸려 1차로 진주군 명석면 용산리 일대를 발굴하기로 했다.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10여 일간 박선주(충북대 고고미술 사학과 명예교수) 단장 지도 아래 연구자, 시민단체 활동가, 자 원봉사자 등 수십여 명이 참가해 발굴 작업을 벌였다. 민족문제 연구소 진주지회와 진주 시민단체, 학생 등도 참여했고, 진주유 족회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39구의 유해와 카빈소총 탄피, 탄두와 버클, 허리띠, 단추 등 82점이 출토되었다.

국가폭력 토론회 진화위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그동안 과거 간첩사건과 민청 학련 등 인권침해사건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고, 국가 배상 절 차를 밟아왔다. 피해자들의 명예회보과 배상이 정상적으로 이 루어지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노골적인 정치적 판결 로 피해자들을 두 번 고문하고 있다. 소멸시효를 기준 없이 적용 하는가 하면 이자가산일을 변경해 배상액을 대폭 줄이거나, 재 판을 아예 미루는 등 국가의 잘못을 뉘우치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할 국가의 책무를 내팽개치고 있다. 이런 현상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민청학련 관계자를 중심으로 문 제제기가 있어, 국가폭력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토론회 를 개최했다. 이 토론회에서 70년대 간첩사건, 재일간첩사건, 긴급조치, 노동사건 피해자들의 증언이 있었고, 이재승 교수가 ‘국가범죄와 과거청산’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고, 조영선 변호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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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2차 국가폭력, 민주화보상법을 논하다’ 발제에 이영재 박 사의 ‘과거청산과 민주화운동 보상법’ 토론이 있었고, 이상희 변 호사의 ‘시효 학살, 그 법리적 문제점’의 발제와 최광준 교수의 ‘소멸시효와 법의 정신’ 토론이 있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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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놓기

회원동정 + 페북동정

위 왼쪽 사진현장후배들 - 밀양1 위 오른쪽 김형균 - 파주이사오고텃밭 아래 왼쪽 자유인문캠프 - 이내창기념사업회가 후원. 후배들이 열심히 공부합니다 아래 오른쪽 사진현장후배들 - 밀양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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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송정근 - 직진도 좌회전도 안된다 우회전도 유턴만 된다 아래 왼쪽 조정래 - 영화귀향 제작두레 guihyang.com 아래 오른쪽 문창사진현장 - 농활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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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함께하니 당당해졌다 월

구분

출금

2013년 이월

499,540

300,000 50,000

추모연대회비

박형록포상

4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이종남추모위원

50,000

후배단체지원

2,00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300

어깨동무 인쇄비

1,21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208,300

4월

499,540 27,363,852

회비 추모연대회비

50,000

열사달력/양말

33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000

소계

400,000

2월잔액

749,220

668,460

이자

523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000

소식지발송비

665,750

포스터

150,000

청소아줌마지원

300,000

강연회 외 근조기 사진전지원

184,000

이장관련식대

292,000

3월잔액

3,834,750

근조기

83,000 4,442,650

544,020

추모연대회비

5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000

소계

70,000

624,180 3,211

근조기

25,000

추모연대회비

5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000

이자세금 소계

460 95,460

6월잔액

668,983 24,547,305

574,470

추모연대회비

5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300

근조기

48,000

한현우회장 부조

100,000

소계

70,300

7월잔액

627,391 21,659,746

회비

7월

544,020 21,127,815

결산이자

6월

549,140 20,653,795

회비

1,000,000

지원탈락단체 선물

516,010

5월잔액

73,000

100,000

소계

5월

1,000,000

표석장학금지원

263,640

회비

회비

50,000

엽서포스터제작

4월잔액

27,713,072

추모연대회비

20,000

이장관련식대 외

소계

749,220

입금 549,140

장준하선생부의

48,000

1월잔액

3월

출금

근조기

소계

2월

구분 회비

27,072,612

회비

1월

입금

574,470 22,163,916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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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편해지는 길 cms 박성훈 권향숙 이동희 이민진 김용수 구혜영 박철민 조환준 김기수 최호식 델리후레쉬 고재영 박희성 강혜연 이남영 곽현희 신명철 정보영 이태경 김성희 박지훈 김현동 이주현 이상재 구은경 김학진 노병진 이영은 우유섭 조형준 자동이체 신성호 김산환 백기욱 정순호 김현숙 홍미숙 김형구 박응식

모바일 이내창기념사업회 CMS 이체 신청방법 아래의 내용으로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내주세요. 신청 후 1~2개월 뒤부터 출금됩니다. 문자 보낼 번호

010-5222-5600(이내창기념사업회 총무 김기수) 문자메시지 내용

신청자 이름, 학번, 주민번호, 전화번호, 거래은행, 계좌번호, 월납입액, 이내창기념사업회 CMS 이체 신청합니다. (예) 김기수, 91, 700911-1234567, 010-5222-5600, 국민은행, 1233456-7890, 2만원, 이내창기념사업회 CMS 신청합니다.

여기에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보태 주세요.

정원옥 김산환 강동길 고철주 황광원 원순재 서병훈 김태호 내창-안녕 추모연대 cms 이혁승 노민옥

자동이체 및 후원 계좌입니다.

국민 0250 - 1036 - 8426 추모사업회 (정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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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들어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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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4년 가을 · 겨울호 편집위원 되기

둘, 기고하기

자주 안 모입니다. 회의는 짧게, 뒤풀이는 길어 질 수 있습니다. 일은 찾아서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합니다. 느릿느릿 갑니다. 끈덕지게 함께 갈 열의와 책임감이면 충분합니다.

어떤 형식과 내용의 글이라도 좋습니다. 나누 고 싶은 생각,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회원 자 녀의 기고에는 소정의 원고료가 지급됩니다.


독자 목소리 소식지가 회원들에게 반가운 우편물인지, 회원들의 관심과 요구를 충족하고 있는지, 소식지에 바라는 이야기들은 없는지 듣고 소통하기 위해 <끈덕지게 어깨동무>에서는 이번 호부터 회원들 의 목소리를 싣습니다. 따뜻한 격려와 날카로운 충고, 바랍니다. 소식지 만드는 데 큰 힘으로 삼 겠습니다.

독자목소리 1. “고수가 알려 주마”와 같은 꼭지 어떤가요? 선배님들, 후배님들 안녕 하신지요? 저는 축산학과 92학번 가반데 연창 훈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글로나마 인사드리게 되어 반갑고 죄송스럽 습니다. 조만간 오프라인에서 꼭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렇게 졸필이라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못난 동기 신성호(92) 때문입 니다. 저보고 <어깨동무>의 발전된 방향, 나아가야 할 방향 뭐 이런 것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청탁이 왔습니다. 왜? 나한테? 내가 그런 글을 쓸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나의 동기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적당하다” 잘 모르니까 마구 끄적거리면 된다고……. 그래서 그 말에 용기 를 얻어 마구 끄적거려 봅니다. 요즘 들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아니 항상 시끄러웠지만.^^ 세월호, 월 드컵, 인사청문회, 지방선거, 보궐선거……., 각종 언론, 인터넷, 그리고 나의 개똥철학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제대로 생각 하는 건가?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게 맞는 건지 저게 맞는 건지 헛갈릴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 이건 이거야!!! 이렇게 알려 주면 좋겠다. 이럴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것의 옳고 그름 또한 내가 판단해야할 문제이지만 그냥 나에게 주어지는 이 세상의 무차별한 정보를 좀 거르고 어루만져서(?) 알기 쉽게 우리의 언어로 설명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했습니다. 그러면 동문들 모임 하더라도 같이 논의할 거리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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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만들어 질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시작은 훌륭한(?) 선배님들이 많이 계시니 시작을 해주시고 그것에 대한 반응 및 댓글(밴드 와 공유)등을 다음호에 다시 게재한다던지 해서 즉각적인 소통은 아니지 만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을 다시 들추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런저런 고민들이 많습니다. 물론 노하 우도 조금은 있겠지요.ㅎㅎ 그래서 예를 들어 “고수가 알려 주마” 이런 꼭 지 하나 어떨까 합니다. 맛집의 소개든지, 여행을 다녀왔는데 이러 이러한 코스로 이렇게 다녀오니 좋더라, 여기 여기는 가지 마라, 육아상식 및 노 하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실질적인 노하우를 전수하는 꼭지가 있 었으면 합니다. 물론 블로그나 인터넷 포탈 등에 많은 자료가 있지만 막상 홍보적인 내용들이 많고 또 너무 많은 자료들로 인해 검색하다 하루가 다 ~ 가는 일이 많습니다.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삶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공 간이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궁금한 내용 등은 밴드나 카페를 통해 접수를 받는다든지 해서 소통의 장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밴드 의 활성화도 가능할 것 같고요. 두서없이 마구 끄적였습니다. ^^ 어깨동무조차 매번 꼬박꼬박 챙겨보는 것도 아닌 제가 이런 말씀 드려 죄송하고요. 다시 만날 때까지 모두들 건 강하시고 사업 자알~되시고 돈 많이 버세요.^^ 감사합니다. - 축산학과 92 연창훈

독자목소리 2. 전자우편으로도 보내주세요 후배들이 기념사업회 소식지에 관해 건의사항이 있으면 건의해 달라한다. 소식지는 잘 만들어지고 있는데!! 무얼 이야기하라고 하는지? 사실 말을 하게 되면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이 있다. 그래서 지적질을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가끔 오는 소식지 내용은 다시 꼼꼼히 읽어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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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다. 아니 정독을 한다. 필진의 의도는 무엇인지도 눈여겨보면서 말이 다. 하지만. 집으로 오는 소식지는 내 손에 들어와 읽어보기는 쉽지 않다. 요즘 서울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안성에는 주말에만 간다. 그래서 소식지 가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른다. 눈에 들어오면 꼼꼼히 보지만. 그래서 전자 우편 보내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다 있 지만…….). 두 번째는 회원들의 근황이 가장 눈여겨보는 쪽인 것 같다. 번거롭고 취재 하기도 어렵겠지만 자주 못 보는 회원들의 근황을 자주 보았으면 한다. 특 별하지 않아도 소식지 지면으로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취재 용기가 필 요한 부분이라 쉽지 않은 부분은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회원도 늘어나 지 않을까 한다. 작지만 서로에게 힘이 된다. 하나 더 하자면 기획기사도 좀 더 실었으면 한다. 인권과 평화뿐만 아니 라, 학교소식, 시사에 관한 기사도 더 실어주었으면 한다. 필진이 고생하 겠지만, 자신감을 갖고 이슈를 던지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회원들의 분야 별 이야기도 함께 실을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 서양화학과 87 박희성

독자목소리 3. 올바른 역사인식을 할 수 있는 책을

추천해주었으면……

안녕하세요? 너무 오래간만에 글을 쓰려고 하다 보니, 내가 글이란 걸 써 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결혼한 지 14년에 초등5학년과 3학년 남자애를 둔 엄마로 애 낳을 때 말고는 그동안 쭉 다녔던 회사를 그 만둔 지 두 달째 되어갑니다. 남편과는 대화가 잘 안 되는 관계로 요샌 아 예 말을 거의 안하고 살고 있어요, 흑흑. 결혼하고는 모임에도 거의 못나갔어요. 너무 속상했을 때 “우리는 늘 그 자리에 있을게. 걱정 말고 결혼생활에 충실해라”던 원근오빠의 말이 많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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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되었습니다. 기념사업회는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는 친구 같습니다. 하지만 친구도 늘 만나고 이야기해야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 올해는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한때는 세상을 바꿔 보겠다고 했는데……. 소중한 가정을 위해서 내가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 니라 내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다. 나는 이내창기념사업회와 함께하고 그 구성원들을 보아야 행복하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세상으로 가야겠 다!!! 이런 마음을 먹고 2014년을 시작했습니다. 어찌 알았는지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 작은 일이라도 해야 하는데…… 저 는 <어깨동무>가 신기합니다. <어깨동무>를 만든 사람들의 능력도 대 단해 보입니다. “기본소득을 말하다”라는 내용이 신선했습니다. 그 이전 에 다른 곳에서 기사를 보고 이런 게 가능할까? 뭐지? 라고 생각했던 부 분이었는데, <어깨동무>에서 다뤄주니 좀 더 이해가 쉬운 듯한 느낌과 동시에 믿음, 뭐 이런 것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어깨동무>가 다뤄주었 으면 하는 기사는 이건 뭔가, 먼저 알고 시작해야 할 것들, 준비해야 하는 이슈들을 다루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에 문득 3학년 둘째가 엄마 6.25는 누가 일으켰어? 왜 일으켰어? 5 학년 큰애가 대답합니다. 북한이 공산화하려고 일으켰어. 넌 그것도 모르 냐? 그럼 누가 이겼어?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했다고 기뻐하는 우리 아이 들을 보면서 반미를 외치던 나는 뭐라도 말해주고 싶었으나 갈수록 입을 다물게 됩니다. 신간이 아니라도 이미 많이 알고 있는 책이라도……. 올바 른 역사인식을 할 수 있는 좋은 책을 <어깨동무>에서 추천해주었으면 좋 겠습니다. 내창이형이 계시니 너무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가끔 <어깨 동무>를 통해서 낯익은 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볼 수 있으니 반갑습니다. - 원예육종학과 91 김현숙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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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찍은 날

2014년 8월 6일

l 펴낸 날

2014년 8월 8일

l 펴낸 이

강내희

l 펴낸 곳

이내창 기념사업회

l 연락처

사무국장 이주현 010-3207-8113

cafe.daum.net/19890815

김선주, 서병훈, 장순철, 조환준, 김경주, 이원근, 정원옥, 백기 욱, 신성호, 김지훈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지난 25년간 우리 곁 을 든든히 지켜주신 장임원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이 장을 준비하면서 노용헌이 여러 동영상을 비롯해 이번호 포토 에세이까지 작업해 주었습니다. 특별히 표지디자인과 속표지 디 자인을 김경주가 하였고, 편집은 아픈 강지우를 대신해 성호와 회사 동료가 수고해주었습니다. 강지우의 쾌유를 빕니다. 인쇄 는 상지사, 발송은 신성호가 하였습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는 naechang.kr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묻지말고응답해라의혈중 앙> 밴드에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페이스북 담벼락의 사진과 글 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회원들과 바쁜 시간을 쪼개어 원고를 보내 준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8월14, 15일 이틀간 뵙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은 이천농업테마파크 바로 근처입니다. 내비게이션 찍으실 곳은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리 105번지 열사묘역과 잔디밭, 휴게실과 추모행사장, 기념전시관도 있습니다. 올해 초 발족한 이내창열사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 이장위원회(위원장 장임원, 문병란)가 소박하지만 격식을 갖춰 부족함 없이 안장하겠습니다. 서로서로 많이 알려주세요. 함께 가자 해주세요. 8월 14일 추도식, 8월 15일 안장식. 25년 전 그 날 망월동을 뒤덮었던 만장을 생각하며, 여러분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멀어서 못갔다, 시간 없어 그랬다, 일이 많다 바쁘다, 너무 오래됐다, 사실은 부끄러워서... 사는게 어렵다 어려워... 가까운 곳으로 옵니다. 반성과 성찰이 없을 때 광주 망월동에서 역사는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옵니다.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 옵니다.

차로 길어야 한두 시간 거리 주말 반나절 공을 들이면 형을 볼 수 있습니다.

더러운 과거가 살아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금 여기서 똑똑히 겪고 있는 일입니다.

25년 만에 25년의 거리를 뛰어넘어 형이 옵니다.

스물하고도 다섯 해입니다. 그 날의 우리들은 어디에 있나요. 잊으면 한낱 과거가 됩니다.

8월 14일(목) 오후 8시 추도식(흑석동 중앙 대학교 부속병원 장례식장) 8월 15일(금) 오전 7시 30분 중대병원 출발 -오전 9시 안성교정 노제–오전 10시 30분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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