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동무 2016 vol10 가을겨울호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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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기념사업회 2017 Vol.10


목차 한편의 시

우리 안의 폴리스라인

송경동

권두칼럼

새 민주공화국의 기회와 위기

강내희

포토에세이

2016-17년 가을에서 겨울까지, 촛불행동의 현장들·얼굴들

과거청산

80과 30 그리고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특집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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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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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부인의 카르텔을 어떻게 깰 것인가

정원옥

역사를 ‘그들만의 성역’ 안으로 끌어 앉힌 박근혜 정부

김영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기억전쟁

이준식

다시 과거청산 : 진실의 부인과 국가책임의 회피

홍수정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서병훈

기획연재

진실규명 없이는 끝나지 않을 이야기 - 황지익·김정자

정원옥

어깨동무가 만나다

‘아트 박’이 그린공동체의 그림은

이원근

옥상 위에 그들, 우리들

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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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나누기

어깨걸기

함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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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노래 : <경복궁타령>과 판소리 열사가

이수정

블랙리스트와 블랙텐트, 그리고 타인의 고통

김경락

알파고가 바꿀 미래, 누가 수혜자가 될 것인가

혁이

“간첩은 잡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한 기록들

강곤

“자주문예가 무엇인가요?”, 끊임없이 묻고 답하기

이은진

아득히 멀어도 함께 내딛는 진정한 평화의 길

한대윤

네 마리 토끼를 노린 <자백> 상영회 펀딩 사업

이혁승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게 한 시간

안종민

한국은 나쁜 나라예요.

조현재

2017년 겨울 안성, 선비마을에서 만난 12명의 女人

장미경

회원동정

백기욱

2016년 하반기 사업보고

편집부

이내창기념사업회를 후원해주세요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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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

우리 안의 폴리스라인 송경동

이제 그만 그 거대한 무대를 치워주세요 우리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게 작은 사람들의 작은 테이블로 이 광장이 꽉 찰 수 있게

이제 그만 연단의 마이크를 꺼주세요 모두가 자신의 말을 꺼낼 수 있게 백만 개의 천만 개의 작은 마이크들이 켜질 수 있게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는 친절한 안내를 멈춰 주세요 나의 시간을 내가 선택할 수 있게 광장이 스스로 광장의 시간을 상상할 수 있게

전체를 위해 노동자들 목소리는 죽여라고 소수자들 목소리는 불편하다고 말하지 말하주세요 집을 가진 이들은 집을 갖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몰라요

어떤 민주주의의 경로도 먼저 결정해두지 말고 어떤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한계도 먼저 설정해두지 말고 최선의 꿈을 꿔볼 수 있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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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관리하려 하지 말고 광장보다 작은 꿈으로 광장을 대리하려 하지 말고 대표자가 없다는 말로 권한이 없다는 말로 오늘 열린 광장이 어제의 법과 의회 앞에 무릎 꿇지 않게 해주세요

위만 나쁘다고 위만 바뀌면 된다고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나도 바꿔야 할 게 많아요 그렇게 내가 비로소 말할 수 있을 때 내가 나로부터 변할 때 그때가 진짜 혁명이니까요

송경동_2001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 등이 있다. 천상병시문학상, 신동엽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을 수상했다. “우리 안의 폴리스라인”은 2016년 겨 울, 박근혜퇴진투쟁 기간 동안 광화문캠핑촌에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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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민주공화국의 기회와 위기 강내희

지금 한국은 새로운 사회로 탈바꿈할 기회, 30년 만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게이트가 보여준 나라꼴에 분노한 시민대중이 사회 구 조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통령 탄핵과 집권여당 응 징, 나아가 새로운 민주공화국 건설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주말마다 대규모 집회를 벌인 지가 벌써 석 달 가까이 된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헬조선’이요, 자신은 ‘흙수저’라고 여기며 패배의식에 빠져있던 대중이 많았음을 생각하면 이것은 엄청 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인은 이제 새로운 꿈과 희망을 품고 더 나은 나라를 만 들 기회를 다시 갖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사회를 바꿀 기회란 찾아오기는 어렵지만 사라지 기는 더 쉽다. 알다시피 기회의 또 다른 이름은 위기이며, 위기가 위기인 것은 두 갈 래로 나뉘는 분기점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가 맞은 변화의 기회도 위 기의 그런 성격을 면할 수 없다. 이번에 한국은 박근혜와 최순실, 그들의 부역자들 로 구성된 ‘이익 공동체’, ‘그들만의 리그’를 해체하고 ‘헬조선’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 등이 보장되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주말마다 백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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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의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나와 ‘박근혜 탄핵!’을 외친 것도 그런 기대 때문 아니 겠는가. 그러나 기회가 위기라는 것은 이번에 찾아온 기회가 꼭 그런 행복한 결말 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음을 경고해준다. 잘못되어 죽 쑤어 개주는 일은 얼마든지 생 길 수 있다. 지금의 촛불집회 국면은 한국사회가 세 번째로 맞은 대변화의 기회에 해당한다. 과거에 찾아온 두 번의 기회는 각기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꿀 가능성을 제시했 지만, 유감스럽게도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해방 이후 한국의 역사에서 사회를 근본적 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처음 찾아온 것은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 혁명이 일 어난 때다. 하지만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 기회는 알다시피 곧바로 일어난 5·16 군사쿠데타로 무산되고 말았다. 한국인들이 박정희 정권의 겨울공화국 에서 오랫동안 몸을 옴츠리고 지내야 했던 것은 그때문이다. 한국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는 6·10 항쟁이었다. 이 항쟁으 로 수립된 ‘87년 체제’는 ‘민주화 체제’로 불리기도 하며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약속 하는 듯싶었지만, 역시 실패로 끝났다고 봐야 한다. 지금 규탄 받고 있는 박근혜 정 권을 탄생시킨 것이 바로 그 체제다. 이 체제에서 ‘민주정부’로 불리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배출되기도 했지만, 이들 정부 또한 진정한 민주공화국 건설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보수 정권이 추진한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6·10 항쟁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한국사회는 해방 이후 세 번째로 대변화의 국면을 맞고 있다. 그러나 이번의 기회도 위기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선 지점은 한국의 미래로 향한 두 갈래 길이 시작되는 분기점이다. 한쪽으로는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게 될 길이 있고, 다른 쪽으로는 그런 기대가 또 무너질 길이 펼쳐져 있다. 후자의 길로 가게 되면 대한민국은 오늘날의 ‘헬조선’과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박 근혜와 최순실, 그리고 김기춘과 우병우, 조윤선 등 반민주 개인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개인들만 퇴출시킨 채 불평등한 사회 구조는 그대로 두게 되면 새로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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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은 건설되지 못한다.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재용 같은 재 벌은 계속해서 갑질을 해댈 것이고, 정유라 같은 금수저는 온각 부정 특혜를 그대로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래서 바뀌지 않는다면 수백 명 목숨을 앗아 간 세월호도 다시 생길 것이요, 백남기 농민을 죽인 물대포도 그대로 남을 것이다. 이내창 열사 죽음의 진상도 밝힐 수 없다. 이번에 온 기회를 그래서 잘 잡아야 한다. 30년 만에 맞은 대변화의 기회, 이 기회 를 잘 살려내야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을 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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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2 0 1 6 - 1 7 년 가을에서 겨울까지, 촛 불 행 동 의 현장들•얼굴들


2016년 10월 25일 박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에 나섰다. “연설문과 홍보물에서 최씨 도움 받았다”는 게 요지. “좀 더 꼼꼼 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심려 끼쳐 죄송하다”고 했다.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10월 30일 최순실이 귀국했고, 11월 3일 구속됐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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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두 번째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자괴감 들어”가 유머와 조롱의 대상이 됐 다. 11월 29일 3차 대국민 담화는 압권이었다. “진퇴문제를 국회에 맡기겠다”면서 “안정되게 정권 이양하는 방법을 만 들어주시면 그 일정과 법 일정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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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민심은 10월 29일부터 매주 뜨겁게 불타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발의가 미뤄진 12월 3일에는 전국 230만 명의 국민이 광장에 모여 “지금 당장 탄핵”을 외쳤다. 12월 9일 드디어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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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1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70일 간의 수사를 개시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한 달 사이에 이렇게 큰 성 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가 특검 집행비가 지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박 검사가 개인 돈으로 사무실 임대 계약하고 미리 세팅 해 놓은 상태에서 특검 개시 첫 날부터 일사불란하게 수사를 진행시켜서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이병용(국민TV) 트위터.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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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일은, 박 대통령이 출입기자단 신년 인사회를 통해 탄핵소추 사유를 전면 부인하는 코미디를 보여주는 것 으로 시작됐다. 박근혜는 이후 탄핵소추에 대한 자신의 최종 입장에서 “나는 결백하며, 안종범, 최순실, 정호성의 잘못” 이라고 국정농단 등 네 가지 탄핵 사유를 전면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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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7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전격 구속됐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 구속 다음날 열린 16차 촛불집회는 잔치 분위기였습니다. 시민들은 휴대전화 불빛으로 붉은색 종이를 비추는 ‘레드카드 퍼포먼스’를 펼치며 이재용 다음으 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했습니다.” -<뉴스타파> 트위터.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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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운동의 기록

80과 30 그리고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신명철

초등학교 다닐 때쯤인가 성북동 골목길 따라 언덕바지에 올라가면 장구소리가 반 갑고, 기름진 냄새에 살짝 달뜨곤 하던 기억이 난다. 회갑연, 고희연을 주로 여는 연 회장인데, 기생이 창을 하고 춤을 추며 흥을 돋우던 시절이었다. 요즘엔 회갑에 잔치 를 벌이면 눈총 받겠지만, 자식들 얼굴이 불콰해져서 통 크게 판을 키우는 걸 보면, 살 만큼 살았다는 자부심, 어려운 시절 잘 살아줘서 고맙다는 뿌듯함 같은 것이 느껴 지곤 했다. 일 년에 몇 번씩 몇 해를 다니다 뚝 끊어진 걸 보면, 그쪽 판도 박정희 독 재의 서슬에 철퇴를 맞은 게 아닌가 싶다. 아스라한 기억이 가끔 떠오르는 건 아쉬움이 같은 게 남아서이겠다. 이십대에 아 버지를 보내, 많지 않은 기억이 어린 날들의 골목길을 걷게 한다. 빈 시간이 함께 한 시간을 넘어서고서야, 나의 경제활동의 결과로 그와 소주잔을 나눈 적이 없다는 사 실이 와락 다가왔다. 되돌릴 수도 없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그 자리는 늘 비어 있다. 그리고 이제는 내 아들이 애비의 그때 나이보다 수를 더 세야 하니 오래되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유독 애틋했다. 여의도 농성장에서, 추모연대 지하 골방에 서 만난 의문사 유족은 사무치게 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모습에서 내 아버지의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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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봤기 때문일까. 오월의 어느 날 이후로 아버지의 삶도, 나도 변했듯이, 유족 을 만나고서 몸살을 앓아야 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천년의 시간은 그 리 흔들렸다.

지난 호에 신호수 아버님 인터뷰를 내보내고, 보강 취재를 해 그의 삶 전체를 그려 보려 했다. 하지만 몇 차례 대화를 나눠보고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판단했다. 신념화 된 기억 뒤에 숨어 있는 삶의 기록들을 만나려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아 버님은 여전히 선봉대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다. 박창수 어머니,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기로 했다. 시간은 쏜살같다. 팔순이란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여덟 번 돌았다는 얘기다. 신호수 아버지도, 박창수 어머니도, 문승필 아버지도 다들 팔십이란다. 저 마다 감당할 수 없는 병들을 안고, 노령연금을 받아 생활한다. 그래도 여의도에 나 오고, 1인 시위를 한다. 가끔은 알 수 없는 불신으로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2016 년 여름에서 겨울까지는 노골적이고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게 악의적인 왜 곡과 비방을 일삼는 부류가 있어서겠지만, 20년 세월이 무상하다. 그래도 어쩔 것인 가. 조근조근 설명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내 삶의 빈자리를 채웠던 의문사 유족들이 자연 수명을 다해서도 그렇고, 곡해와 몰이해로 호두껍질처럼 단단해지면서 조금씩 비어 간다. 그래도 그들을 만나고 얘 기 나누고, 기록한다. 10월 과거청산결의대회에서 아버님들과 추모연대와 급조된 회의를 하고는 날을 잡았다. 49통일평화재단에서 문승필 부모님 식사 대접하는 자 리에 얹어서 박창수 아버지도 함께 보기로 했다. 박창수 어머니는 운신을 못하니 집 에서 뵙기로 하고. 일이 엉켜 문승필 아버지하고만 밥을 먹고, 박창수 부모의 집으 로 찾아갔다. 문승필 아버지 김준기 선생은 서울농대 출신으로 4H운동을 하며 가톨릭농민회를 만든 사람이다. 어린 시절 얘기가 궁금했다.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독재정권을 거 쳐 오늘까지 살아낸 사람들 공통의 수난사를 들을 수 있었다. 소설 등을 통해 널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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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남부군 말고, 낯선 동부군 이야기와 학살, 어린 나이에 부산으로 도망가 살아 낸 이야기 등등. 시간이 부족했다. 그의 삶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똬리를 튼다. 그가 <농민가>를 만든 이다. 박창수 부모의 집에는 정원옥과 안경호(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와 갔다. 걸음 을 제대로 못 옮기는 어머니는 처음엔 안경호만 기억하더니, 이내 기억을 해냈다. 그 리고 밝아졌다. 예전만 못하지만 활달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몇 년 전에만 해도 술에 마음을 풀고 노래도 흥얼거렸는데, 몸이 안 되니 카랑카랑한 술추렴도 더는 들 을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가 밥하고 빨래하고 부인 잔소리 받아주는 단단한 살림꾼 이 되었다. 꼼꼼하기 그지없는 일상이 그가 살아온 시간을 말해주는 듯했다. 유족을 볼 때마다 참으로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하루가 다르고 같은 말을 반복해 도 좋았는데, 간절했던 얼굴, 의문사위 출발 때 기대에 가득 찬 모습은 보이지 않는 다. 당연하지만 서운하기는 하다. 그들이 붙잡고 있는 희망은 희망적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의문사를 주제로 한 독립영화 제목이다. 그들을 볼 때마다 묻 고 또 묻는다.

2016년 여소야대 정국은 과거청산운동에도 희망을 갖게 했다. 세상이 나아지거 나, 과거청산에 호의적이지 않아도 유족들은 알아서들 고무되고 기대를 키운다. 행 사장에서 서명도 받고, 국회 앞에서 시위도 한다. 유족은 유족대로 역할을 하고, 우 리는 중심을 세우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활동가, 변호사, 교수, 연구자 등등이 모 여 공부도 하고, 과제를 분석하기로 하고 5월부터 매주 모임을 가졌다. 특히 변호사 들은 입법 과제 검토에 집중해 과거사법 개정안, 유해발굴법안, 과거사재단 법안, 배 상법안 등 여러 법안을 준비했다. 그리고 우선 과제로 과거사법 개정안을 삼았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논의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한 사안도 있어, 순차 적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이제 과거청산운동도 탄력이 붙어가는 듯했다. 그 첫 순서로 가칭 과거청산네트워 크 입법회의 주최로 7월 11일 17시 민변회의실에서 유족 간담회를 가졌다. 과거사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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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개정안 등 법안 내용과 이후 로드맵을 설명하는 자리이다. 하지만 간담회는 준비 에서부터 난항을 겪고 말았다. 유족회 사이에 갈등이 불거져 마침내 한국전쟁유족 회가 불참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전에 논의하지 않았다고 항의하는 유족회도 있 고, 의문사를 배제한 한국전쟁 관련 법안이라고 곡해해서 비난하는 의문사 유족도 있고, 늘 하던 대로 비방과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전쟁 유족끼리 멱살 잡이 직전까지 가는 소란 끝에 법안 설명회는 끝이 났고, 점잖은 모습으로 상대를 비 난하면서 사과를 하는 모습까지 언제나처럼 치러졌다. 예상은 했지만 눈앞에 벌어진 모습은 진저리나는 일이다. 과거청산운동을 유족 의 대행 또는 보조하는 역할로 국한하거나, 유족을 운동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오류 가 그나마 있는 작은 힘마저 조각내고 만다. 애써 묻고 지운다. 그냥 앞만 보고 가기 로 했다. 과거청산운동의 모든 일을 ‘포럼진실과정의’의 이름으로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중점 과제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미신청 유족의 조직화와 과거사법 발의를 위한 준비로 정했다. 2016년 여름부터 겨울까지는 간담회, 추모제, 토론회, 결의대회와 준비모임이 거 의 격주 단위로 이어졌다. 입법을 위해서는 국회의원 보좌관과 함께 법안 공부를 하 고, 발제와 토론에 나서고, 행사를 치러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자발적인 소수의 헌 신에 의존해야 했고, 우여곡절 끝에 과거청산운동을 과거의 기억에서 오늘의 과제 로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8월 21일 한국전쟁유족회 하계수련회에 조영선 변호사가 참석해 강연 형식의 설 명회를 가졌고, 9월 21일 입법 토론회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최대 120명까지 들어가는 회의실이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과거청산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일이 유족 들에게는 귀하고 소중한 자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재승 교수와 서중희 변 호사 등이 발제를 하고 정원옥이 토론자로 나섰다. 10월 20일에는 전국합동추모제 및 유해 이전 안치식이 세종시에서 열렸고 미신고 자 간담회를 겸했다. 11월에는 경주, 전주 미신고 유족 간담회를 진행했다. 법안 발 의를 위해서는 국회의원들이 나서줘야 하는데, 19대에 이어서 진선미 의원이 나서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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줬지만 더불어민주당의 당론 발의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인재근, 강창일 의원 과 간담회를 열었고, 관심과 지지를 약속받았다. 소병훈 의원이 대표해서 준비하기 로 했다. 국민의당에서는 권은희 의원이 나서기로 했고, 정의당에서도 한국전쟁 유 해발굴 관련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이 과정을 거쳐 12월 12일에 국회도서관 대강당 에서 과거청산 결의대회를 열었다. 강당의 500석 좌석이 가득 차고 계단에 앉거나 뒷자리에 섰지만, 미처 입장하지 못한 유족들이 문 앞에 서성이는 상황까지 벌어졌 다. 광화문처럼 피켓을 들기로 했다. 노인네들 목청이 어찌 좋은지, 앞자리에 앉은 국회의원들 등골이 서늘해졌겠다 싶었다. 국회의원 결의대회가 된 셈이다. 이 날의 효과일까. 행안위 소위원장인 권은희 의원이 행안위 중점 과제로 삼겠다고 선언해, 과거사법을 우선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2017년 설을 전후해서 진선미, 소병훈, 권 은희 의원의 대표발의로 3개의 법안이 발의가 되었다. 8개여 월의 여정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구 좋은 일 시켜도, 배상에 만 관심을 가져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자 마음먹는다. 이 일로 인해 누군가 명예를 얻거나 관운이 트인다 해서 탈 날 것도 없다. 가져갈 것은 다 가져가도 좋다. 의문사 사건의 진실이 한 꺼풀씩 벗겨지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과거청산운동을 ‘포럼 진실과정의’로 집약하기로 했지만, 포럼이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 학술적이고 지식 인 중심이라는 성격을 극복해야만 중심에 바로 설 수 있다. 2017년 탄핵과 대선으로 이어지는 열린 공간에서 포럼진실과정의가 과거청산운 동의 한 획을 그으려면, 우리가 그 이름으로 과거청산운동에 매진할 수 있으려면, 광 화문 촛불이 진화하듯 일일신우일신해야 한다. 기대한다. 내부 민주주의의 실현, 자 잘하고 소소한 잔일들, 실무라는 이름의 준비와 실천, 대중과 함께 어깨를 나누는 일, 이 모든 것에 스스럼없어야 운동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겠다. 세상이 바뀌긴 많 이 바뀐 셈이지만, 그래도 과거청산의 길은 험하고 집요하다.

해마다 몇 분의 추모제는 빠트리지 말자 마음먹었는데 2016년에는 한 곳도 참석 하지 못했다. 무에 그리 바빴을까. 세월이 무뎌지게 하긴 하나보다. 그중 박태순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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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가보자 했는데 놓치고 말았다. 이내창과 비슷한 시기에 한신대를 다니다 노동운 동에 뛰어들었으니 80년대 중반 우리 친구들과 행보가 비슷하다. 보안사 요원에게 쫓기다 시흥역에서 열차에 치여 사망했으나, 행불자로 처리돼 오랫동안 실종 상태 였다가 의문사위원회에서 사망사실을 확인해 실종자에서 의문사로 바뀐 안타까운 사건이다. 그의 죽음은 8월 말이다. 그에게서 이내창을 떠올리는지, 서원이 느껴지 는지, 아니면 지금은 소원해진 이름들을 떠올리는지, 그곳에 다녀오면 가을이 시작 된다. 이내창을 만나는 일은 이제 쉬워졌다.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 거리이니 훌쩍 다녀 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가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은 번듯하지만 왠지 김 이 빠진 느낌이다. 매년 닭을 보내주던 이름 모르는 고마운 벗의 손길도 끊어지고 염 천 볕 아래 둘러앉아 음식과 소주잔을 나누던 풍경도 사라졌다. 제사에 음복이 빠지 고,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지 의심스러운, 관점이 모호한 기념관을 둘러보는 일도 맥없다. 또 꼰대 짓이다. 그래도 솥단지 걸고 국밥 말아주진 못해도 같이 몸으로 한 끼 나누는 자리가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나만 그런가 몰라도. 박태순은 마석에, 이내창은 이천에 있다. 중년이 된 벗들이 죽은 동지를 찾는다. 그들도 아프고, 사는 일에 지치고, 늙어간다. 얼마나 더 이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 조금씩 옅어지다 소멸하겠지만, 그렇게라도 조금 더 가보자 한다. 그래서 주문처럼 30이란 수를 센다. 이내창 30년, 의문사 30년. 총기 있고 근력이 남았을 때 힘을 더 내볼 일이다. 팔순, 팔십의 노인을 마음속에서 밀어내지 말자고 다독인다. 성남시 외 곽 아파트 9층에서 주차장까지 내려가면서 꼭 잡은 손을 놓지 않는 박창수 아버지, 그의 손을 먼저 놓지는 말자고. 아직도 자식을 묻지 못하는 의문사 아버님, 어머님들 이 있으니, 할 일이 남아 있다 자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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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역사 부인의 카르텔을 어떻게 깰 것인가

정원옥

역사를 ‘그들만의 성역’ 안으로 끌어 앉힌 박근혜 정부

김영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기억전쟁

이준식

다시 과거청산 : 진실의 부인과 국가책임의 회피

홍수정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서병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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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부정하고 망각하는 역사 부인의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민감하고, 지 난하며, 복잡한 사회문제의 하나다. 2016년 한일위안부문제협상의 기습적 타결 은 진정한 사과를 원했던 위안부할머니들의 꿈을 무참히 짓밟았으며, 국가 주도 의 역사 다시 쓰기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시대착오적 프로젝트로 진행 중이 다. 과거청산을 통해 어렵게 밝혀낸 공식기억이 뒤집히는가 하면, 희생자들을 조롱 하고 혐오하는 문화적 부인 현상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국가와 사회가 집단적·조직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과거를 망각하려는 현상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역사의 부인이 세월호참사와 같은 재난참사, 백남 기 농민의 죽음과 같은 국가폭력사건,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사건 등 동시대 적 사건의 해결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는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기획되었다. 이번 특집에는 역사 부인의 문제를 다룬 다섯 편의 글을 실었다. 정원옥의 “역사 부 인의 카르텔을 어떻게 깰 것인가”는 역사 부인의 등식을 이론적으로 살펴보면서 동 시대적 사건에 대한 부인이 역사 부인의 카르텔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분석 한다. 김영수는 “역사를 ‘그들만의 성역’ 안으로 끌어 앉힌 박근혜 정부”에서 지난 4년 동안 박근혜 정부가 친일세력과 유신세력의 유산을 어떻게 ‘선’의 역사로 변신 시키려 시도했는지 분석하고 있다. 이준식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기억전 쟁”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이라는 아집에 사로잡힌 대통령 박근혜가 친일과 독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근·현대사를 변조하려고 했다고 비판한다. 홍수정은 “다시 과거청산: 진실의 부인과 국가책임의 회피”에서 허원근 사건, 인혁당 사건 유가족에 대 한 국가의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 박정희의 긴급조치권 행사에 면죄부를 준 대법원 판 결, 국가배상의 소멸시효 문제 등 과거청산의 성과를 뒤집는 반전의 사례들을 분석하 였다. 마지막으로 서병훈의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는 국가폭 력에 의한 죽음인 백남기 사건이 왜곡과 은폐로 일관되었고, 여전히 국가의 사과가 없 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다섯 편의 글은 공통적으로 역사의 부인이 미흡한 과 거청산의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적시하고 있다. 다시 과거청산을 시작해야만 하는 절박함은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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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역사 부인의 카르텔을 어떻게 깰 것인가 정원옥

역사의 부인(historical denial)이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망각, 기억상 실, 기억의 조작 등이 개인적·집단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불편한 진실을 사람 들이 잊어버리기를 바라면서 국가 주도로 역사를 다시 쓰는 것 또한 역사의 부인이 다. 그런데, 역사의 부인이 ‘과거사’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 가 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진실이 부정되는 ‘동시대적 부인’ 또 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동시대적 부인이 벌 어지고 있는 순간들을 지겨울 정도로 목격하고 있다. 국정농단 주범들과 부역자들 의 후안무치한 거짓말과 모르쇠, 유체이탈 화법의 변명들, 그리고 ‘대통령 구하기’에 나선 태극기 시위대가 쏟아내는 혐오발언들은 모두 사건의 진실을 호도하거나 부정 하는 동시대적 부인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부인이 역사 부인의 표현과 매우 닮아 있다는 점이다.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하고 주도한 혐의로 구 속된 김기춘과 조윤선의 말 바꾸기를 예로 들어보자.

“블랙리스트는 본 적도 없다.” (김기춘·조윤선) “예술인들 지원을 배제하는 명단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조윤선) “블랙리스트가 불법인 줄 몰랐다.” (김기춘)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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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 왜 국가와 사회는 인권침해를 부인하는가』를 쓴 스 탠리 코언에 따르면, 역사를 부인하는 등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엄연한 사실이 일 어나지 않았다거나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문자적 부인’,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으나 단어를 바꾸고, 완곡어법을 구사하며, 기술적인 전문용어를 써서 인지적 의 미를 부정하면서 사건을 다른 범주에 재배치하는 ‘해석적 부인’, 합리화, 발뺌, 방관, 침묵을 비롯하여 어떤 사실이 남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 도덕적·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건을 냉소적으로 달리 명명하는 ‘함축적 부인’이 그것이다. 요컨대, “‘부인’은 인지(사실을 시인하지 않음), 감정(느낌이 없음, 괘념치 않음), 도덕성(잘못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도 부정함), 그리고 행위(알고 있음에도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음)를 모두 포함한다.”1) 이러한 등식을 김기춘과 조윤선의 발화에 적용해 보면, “블랙리스트는 본 적도 없다”(블랙리스트는 작성되지 않았다)는 문자적 부인, “예술인들의 지원을 배제하 는 명단은 있었다”(그 명단이 블랙리스트는 아니었다)는 해석적 부인, “블랙리스트 가 불법인 줄 몰랐다”(좌파 예술가들을 척결하기 위한 블랙리스트는 정당했다)는 함 축적 부인에 해당한다. 이 세 가지 등식의 부인은 모두 블랙리스트를 작성·관리하였 다는 범죄 사실을 시인하지 않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다. 범죄 사실을 부인하고 합리화하는 김기춘과 조윤선의 부인 논리는 낯설지 않다. 사실이 아니다, 기억나지 않는다, 모른다 등등 부정과 기억상실의 표현은 국가폭력 가해자들의 단골 멘트였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진행된 과거청산에 서 가해자들은 이러한 역사 부인의 논리로 도덕적·법적 책임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명박·박근혜 정부 하에서는 과거청산을 통해 어렵게 밝혀진 공식 기억이 뒤집히거나 왜곡·훼손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5·18민주화운동을 북 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라고 주장하면서 희생자들을 모독하는 ‘일베’가 등장했는가 하 면, 극우보수 지식인들과 일부 관료들은 4·3사건을 공산주의 폭동이라고 주장하면 1) 스탠리 코언(2009),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 왜 국가와 사회는 인권침해를 부인하는가』, 조효제 역, 창비, 58~62쪽. 강 조는 코언. 이하에서는 쪽수만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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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서 사건의 본질을 왜곡했다. 국가 주도의 역사 부인 시도도 잇따랐다. 국가가 인혁당 사건의 유가족들에게 ‘부당이익금 반환 소송’을 하여 이미 지급된 배상금을 반환하 라고 하는가 하면, 의문사위가 타살로 발표한 허원근 사건의 경우 손해배상청구소 송에서 끝내 타살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 외에도 열거하려면 끝이 없다. 그 가운데서 도 한일위안부문제협상의 기습적 타결, 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은 국가가 주도한 역사 부인의 결정판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 부인의 현상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동시대적 부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앞서 말했다시피, 역사의 부인은 과거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용산참사, 세 월호참사 등 재난참사의 책임을 묻는 문제에도 역사 부인의 논리가 동원되고 있다. 일례로, 세월호참사의 책임 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이다. 7시간의 행적을 밝히는 것은 재난 발생 시 대통령의 역할은 무엇인지, 국가의 재난 대응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되어야 하는지를 재정립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 통령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커녕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부인하기 에 급급하다. 대통령에게 도덕적·법적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기 위한 부인의 표현들 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다.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 (문자적 부인) “세월호참사는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다.” (해석적 부인) “대통령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있다.” (함축적 부인) “대통령은 24시간 재택근무체제다.” (함축적 부인)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말은 대통령이 세월호참사에 대해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문자적 부인에 해당한다. “세월호참사는 기본적으로 교통사 고다”는 교통사고까지 대통령이 책임질 수는 없다는 해석적 부인이다. 최근 국정농 단사건에서 대통령의 7시간이 또다시 쟁점이 되자, 변호인들은 “여성으로서의 사생 활”과 “24시간 재택근무체제”라는 함축적 부인의 표현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대통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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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이기 이전에 여자로서의 사생활이 있다”는 7시간의 행적을 추궁하는 것은 여성대 통령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결례라는 논리로 대통령의 직무유기를 합리화한다. “대 통령은 24시간 재택근무체제”라는 말은 대통령이 집무실에 있었건 관저에서 있었 건 정상근무를 한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법적으로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 하는 것이다. 이렇듯 과거사가 아니라, 동시대적 사건에 대해 도덕적·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부인은 이번 국정농단사건에서도 여지없이 재연되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범법을 저지른 피의자들은 하나같이 억울하다고 호소한다. 자신은 결백하며, 누군가 시켜 서 한 일이고, 기억이 나지 않으며, 몰랐거나 심지어 무능했다라고 토로한다. 법 전 문가인 김기춘은 “블랙리스트가 불법인 줄 몰랐다”라고까지 했다. 그의 변명은 좌파 예술가들을 배제하고 척결하기 위한 블랙리스트의 작성은 정당했다는 함축적 부인 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진실일 수도 있다.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재일동포유학생간첩단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등 권위주의정권 하에서 온갖 조작사건과 인권침해사건을 저지르고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던 그에게 블랙리 스트 작성 따위로 구속되는 일은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궁금한 것은 국정농단사건의 주범들과 부역자들이 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대해 역사 부인의 표현을 사용하는가라는 점이다. 오래된 과거의 일이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세월호 당일의 행적, 불과 몇 개월 전의 일까지도 그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알지 못한다”라며 버티고 있다. 막무가내로 부인만 하면 그들은 처벌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코언에 따르면, “역사적 부인과 동시대적 부인 사이에는 흥미로운 연관성이 있다. 인권침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가해자들은 자기 행동이 불러올 파장을 피하기 위해 역사적 부인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의도적이고 교묘하게 완곡어법을 사용하고, 이 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어휘를 구사하며, 법적으로 문제되는 문서를 인멸해버린다 면 이런 표현은 사건 발생 이후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 (70) 코언의 분석은 국정농단사건의 피의자들이 왜 역사 부인의 표현을 사용하는가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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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이 기대고 있는 것은 시간이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거짓말과 변명들, 부인의 수사들에 우리들이 지치고 무감각해져서 자신들의 범죄가 지나간 일, 과거사로 망각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역사의 부인은 동시대적 부인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부인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관제데모에 동원되고 있는 ‘박사모’, ‘엄마부대’ 등 극우시민단체들의 태극기 집회 또한 동시대적 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집단적 부인’ 현상에 해당한다. 코언은 공적 역사에 대한 집단적 부인은 “공식 국가정책(고의적인 은폐, 역사 다시 쓰기)를 통하거나 아니면 정보가 사라져버리는 문화적 소실 과정을 통해” 일어나며, “조직 화된 부인은 사람들이 “진상을 알아봐야겠다는 마음이 없을 때” 가장 잘 작동한다” 라고 말한다(288).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태극기집회에 동원된 사람들은 그저 일당이나 받기 위 해 나온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들은 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신념체계와 생존방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것으로 봐야 한다. 그들의 신념 체계에서 대통령은 곧 국가이며, 반공은 곧 애국이다. 대통령이 무너지는 것은 국가 의 정체성이 위태로워지는 일이며, 지배 권력에 기생하며 살아온 자신들의 삶의 기 반이 흔들리는 일일 수 있는 것이다. 일당을 받고 관제데모에 나섰더라도 지금까지 자신들이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법은 대통령을 완전무결한 구국의 여신으로 신성화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완전히 무능하며 오로지 사익을 위 해 헌법을 유린하고 국정을 농단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 요도 없는 불편한 진실일 뿐이다. 위기에 빠진 대통령과 대한민국을 구해야 한다는 편향된 애국주의에서 쏟아지는 부인의 표현들은 너무나 익숙한 끔찍한 것들이다. 다 음과 같은 표현들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은 아무 잘못이 없다. 잘못은 최순실이 한 것이다.” (문자적 부인) “대통령은 국가와 국민과 결혼했다.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다.” (해석적 부인) “대통령 탄핵은 종북세력이 기획한 것이다.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 군인정신으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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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빨갱이들을 때려잡아야 한다.” (함축적 부인)

국정농단사건의 진상을 밝힘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이정표로 삼자는 일이 “빨갱이들을 때려잡아야 한다”로 끝나는 결론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국가폭력의 가해자들이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해온 논리가 다름 아닌, 반정 부세력과 불순세력의 제거, 빨갱이는 살육되어 마땅하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동시대적 사건에 대한 부인은 반공과 애국의 망령을 다시 소환함으로써 역사 부 인의 카르텔과 숙명적으로 연결된다. 국가폭력이 자행되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과 보고도 모른 체했던 사람들이 동시대적 부인이 횡행하는 현재의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진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온 국민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던지 간에 지금 당장의 위기만 모면하면 살 길이 열릴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동시대적 부인이 피해자들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무감각과 망각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역사 부인의 내용과 너무도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지난 70년 동안 가해자들과 방관자들의 역사 부인이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와 한을 남겼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너무도 닮은꼴인, 사회적 고통을 재생산하고 있는 동시대적 부인과 역사 부인의 카르텔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이 물음이 긴급한 과제로서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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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역사를 ‘그들만의 성역’ 안으로 끌어 앉힌 박근혜 정부 김영수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관계의 산물에서 벗어난 역사적 사건들이 그 어디에 있겠는가. 삶의 소소한 거리 만이 아니라 관계의 거대한 부딪힘도 너와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사건들이다. 그 속 에는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의 소중한 숨결이 머물러 있다. 사람들이 있고, 사 람들의 관계가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인권이나 생명권이나 행복 권이 부여되고 인정되는 것도 아마 그 이유가 아니겠는가. 너무나 흔한 이야기지만, 국가와 사회의 구성원이 없는 국가와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국민으로 혹은 시민으 로 호명되든, 민중이나 인민으로 불리든, 그들과 일상의 관계가 곧 국가이고 사회였 다. 어떤 국가나 사회든, 역사를 특정한 세력이 독점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국가와 사회의 지배세력은 자신을 사회적 관계의 ‘선’한 주인공으로 남기 려 하거나 ‘악’한 행위의 정당성이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의 명분을 찾으려 한다. 주요 하게 사용되는 방식은 권력의 힘으로 구성원들의 권리를 배제하고 역사적 사실들을 ‘그들만의 성역’ 안에서 재구성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역사적 사실들을 과대 포장하거나 미화하고, 심지어 신성시한다. 국가와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 과정에서 지배세력이 요구하는 복제형 인간으로 치부된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4년 동안 친일 세력과 유신세력의 유산을 ‘선’의 역사로 변신시키는데 몰두하였다. 대표적인 수단 은 대한민국의 수립시기를 새로 정립하는 정책,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는 정책, 그 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상징물을 광화문에 건립하는 정책 등이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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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에게 해방과 독립이었던 1945년 8월 15일 2016년 8월 15일을 전후로 광복절과 건국절이 다시 맞닥뜨렸다. 1948년 8월 15 일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곧 근대적인 국가의 건립과 등치시키려 하는 건국 절. 대한민국의 출현을 1919년 임시정부의 성립으로 보면서 1948년 8월 15일보다 1945년 8월 15일의 광복과 해방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는 광복절. 박근혜 정부는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볼 것인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할 것인지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박근혜 정부는 이런 논란 속에서 2015년 8월 15일을 ‘광 복 70주년’으로 정하고, 그에 걸맞는 각종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추진했던 것도 그 연장이었다. 건국절 논란은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가 종결된 시기나 정부수립의 시기를 둘러 싼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1945년 8월 15일’의 의미를 통일적으로 규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스스로가 해방인지, 광복인지, 건국인지, 아니면 독립 또는 분 단인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어 떤 의미를 택하든, 8·15 때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래서 대한 민국 초대 정부는 1948년 8월 15일에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고, 1949년 10월 1일에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지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1949년 10월 1일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8·15’는 독립기념일이라는 이름으로 제안되었는데, 친일유산의 새 로운 권력장치라 해도 과언이 아닌 국회에서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변경하였다. 여 기에서는 누가, 왜 바꾸었는가를 보자는 것이 아니다. 광복과 해방이라는 개념 속에 들어가 있는 주체의 측면으로 이해하면, 문제를 파악하는 변별력이 생긴다. 독립운 동가들이 ‘광복조국’과 ‘광복독립’이라고 외치면서 투쟁의 고통을 이겨냈던 전략에 비중을 둔다면, ‘광복’의 주체는 국가이다. 하지만 일제 총독부를 자신의 국가로 바 라본 친일파에겐, 8·15는 곧 국가패망이었을 것이고, 일제 총독부의 억압과 착취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인민’에게 다가온 8·15는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의미의 ‘해 방’이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전제로 볼 때, ‘광복과 해방’의 주체는 ‘인민’이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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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대한민국을 수립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정부는 1919년 임시정부이다. 국제 적인 차원에서 독립외교의 주체로 인정받기도 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인민’이 임시정 부를 자신의 새로운 권력대리인으로 인정할만한 근거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민’은 상실된 자신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3·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임시정부는 ‘인 민’의 일반의지에 상응하는 ‘인민’의 정부를 임시로 선포하였다. 그동안 대한제국이라 는 황제의 국가와 식민지 총독부의 권력대리인들과는 다르게 ‘인민’의 권력으로 만들 어지는 국가의 정체성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회사무처도 1948년 7월과 8월에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규명하였다.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반일 민주주의에 기반한 3·1운동에서 찾아야 하고,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이 그것을 계승하고 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추진하 기 위한 행정고시를 2015년 11월 3일에 발표하고, 국사편찬위원회는 그 정책을 받아 서 ‘역사 국정교과서 집필자’들과 함께 국정 역사교과서를 2016년 12월에 발간하였는 데, 그 국정 교과서는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수립일’로 정하였다. 수많은 전문 가들이 ‘역사 국정교과서’의 집필을 거부하는 선언에 동참하면서 우려했던 대로, 국 정 역사교과서는 친일유산과 유신유산을 미화하는 편향성의 오류에 빠졌다. 그 의미 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해 본다. 첫째는 하나의 역사관을 강요하는 국가주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책은 국가 중심의 복제형 인간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려는 의도에 불과하다. 30년을 평 균으로 해서 보더라도, 세대 간의 시간 거리가 멀게 느껴진 것이 사실이었는데, 나이 가 들어보니, 꼭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식 세대들의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간은 약 20년에 불과했다. 자식 세대들 스스로 머리가 컸다고 여기면서 부 모에게 뻐기기 시작하는 20세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성장 시기에 만 들어지는 자식들의 역사의식을 오로지 국가만이 지배하고 관리한다면, 자식 세대들 은 국가의 길들임에 익숙한 복제형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쉽다. 국민교육헌장이 나 국기에 대한 맹세, 그리고 국기하강시간에 맞추어 가던 길도 멈추고 국기에게 경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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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표시했던 국가주의적 사실들이 역사의 힘을 획득하게 된다면, 역사 국정교과 서는 곧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관계의 다양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시 각과 진배없다. 또 다른 측면은 역사적 사실의 단면만을 인식하는 절름발이형 인간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려는 것이다. 내 자식에게 역사적 사실을 말할 때마다 들었던 고민은, 내가 배우고 알았던 역사적 사실들이 반쪽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역사의 전문가가 아 닌 이상, 나머지 반쪽의 사실들을 알고 싶어도,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절름발이 역 사를 자식에게 말한다는 것이 오히려 힘들어서, 역사의 나머지 절반을 찾아 헤맨 끝 에 내린 결론이 있었다. 역사 속의 승리자나 권력자들은 지속적으로 역사적 사실들 을 재구성하거나 왜곡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는 주체와 객체, 승자와 패자, 성 공과 실패, 긍정과 부정, 가해와 피해, 행복과 고통 등을 동시에 품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의 단면만을 앞세워, 자식 세대를 절름발이형 인간으로 순치시키려 하는 것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상징의식의 조형물조차 그들만의 것으로 전직 대통령들은 죽어서도 각종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있다. 1948년 8월 15일을 전국절로 하자는 움직임과 함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소위 ‘국부’로 부활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의 위기와 맞물려 경제발전의 메시아가 출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자, 또한 민주화가 경제성장의 방해요소임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열망으로 되 살아났다.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동상을 광화문 광장에 세우겠다는 정책까지 추진하고 있다. 유신잔당이 유신주역을 국가와 사회의 전면으로 떳떳하게 내세우려는 것이다. 통치전략의 기본을 ‘당근과 채찍’에서 찾게 하고, 통치자의 리더십과 관련된 지혜 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언제든 ‘적과의 동침’까지 염두에 두는 동맹과 연합의 정치 를 강조했던 15∼16세기의 마키아벨리도 죽고 난 이후 약 500년 가까이 되어가지 만,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부활하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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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국가의 출현을 인공적으로 창조된 공통의 의식과 행동에서 찾았다. “국가는 세련된 구조와 조직으로 장착된 행정기구와 군대와 법 그리고 정부의 여러 기구들을 만들 어 낸 인간의 정신과 행동에 의해 짜인 인위적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국가는 권력 을 이용하여 인민을 지배할 정당성도 만들어 냈고, 그것을 위한 상징화, 허구적 원리, 기호, 개성, 유행가, 장례식과 같은 생활문화까지 지배수단으로 유도하였다. 1970년 대 유신체제는 출판물, 음반, 영화, 연극, 가요 등을 국가의 기준대로 단속하였고, 심 지어 미니스커트나 장발도 그 대상으로 삼았다. ‘우리 것’이라고 하는 것들이 정말 ‘인 민을 위한 우리 것’인지, 아니면 ‘권력과 국가를 위한 우리 것’인지 잘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징들이다. 죽은 자에 대한 상징의식의 정치는 권력과 국가 중심의 복제형 인간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수단 중에 대표적인 것이다.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자가 주기적으로 일어 나서 권력과 국가의 정당성을 한껏 부풀려 놓는 것이다. 물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참배자들도 대부분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권력과 국가는 맹신자들의 마음속에 격한 열정이 타오르도록 불을 지피고 부채질한다. 응집력이 높은 맹신자들을 상대 로, 또는 권력과 국가에게 동화된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상징의식의 정치인 것이다. 상징의식의 정치는 권력과 국가를 위해 개인의 개성을 철저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여긴다. 권력과 국가는 맹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타고난 적성과 욕구의 많은 부분이 억눌리거나 무뎌지도록 한다. 권력과 국가는 허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작동 하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가동시킨다. 권력과 국가는 ‘인민’에게 요구한다. 권력과 국 가를 위해 자신의 권리를 잠시 포기하라고 하거나, 권력과 국가를 그저 ‘긍정의 힘’ 으로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권력의 정치’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민’ 의 모습은 참으로 하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자기를 버리고 권력과 국가라는 전 체에 밀착할 수 있어야만, ‘인민’ 스스로 자신이 보잘 것 없는 개인으로, 아니 국가 중 심의 복제형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고약한 국가주의와 끔찍한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 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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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이 없는 껍데기 권력의 역사는 이제 그만 역사는 유기체적인 신체와 같다고 생각한다. 신체구조만큼 복잡해서, 알고 싶어 도 알기 어려운 부분을 끌어안은 채 존재하는 것이 역사이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종족이나 인종이 같은 인류이면서도 다른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다 름과 같음이 복잡하게 얽히고 섞여 있는 것이 역사다. 이러한 유기적 복합성 때문에, 역사의 시간과 공간도 사회적 관계의 단절과 계승을 동시에 보유한다. 그래서 역사 야말로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또 다른 사실을 머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오히려 다양한 역사관을 장려 하는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들은 시민사회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국가나 권력이 자신 들만의 성역 안으로 역사를 꿇어앉히는 것은 ‘인민’이 없는 껍데기 권력의 역사에 불 과하다. 너와 나의 관계들 모두가 미래에 가서 되돌아볼 수 있는 역사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었지만, 제대로 된 역사교과서로 다시 공부하고 싶다. 이유는 간단 하다. 스스로 복제형 인간이나 절름발이형 인간의 역사의식을 넘어서고 싶은 마음 에서다. 정말 다양한 모습의 역사적 사실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질 수 있다면, 그 자체 가 또 다른 역사라고 여기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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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기억전쟁 이준식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정책위원장

2013년 박근혜정권이 출범한 직후부터 ‘아버지는 군사쿠데타, 딸은 역사쿠데타’ 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친일군인 출신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헌법과 민주주의를 파괴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박근혜는 대통령이 된 뒤 4년 내내 아버지의 명예회복이라는 아집에 사로잡혀 친일과 독재를 정당화하는 방 향으로 근·현대사를 변조하려고 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 직후 교원노조에 ‘용공’혐의를 씌워 탄압했듯이 얼토당토않 은 이유로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몰아가더니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TV토론에서 통합진보당 대통령후보 이정희가 박정희를 ‘다카키 마사오’로 부른 데 앙심을 품었 는지 ‘내란음모사건’을 앞세워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켰는가 하면 단돈 10억 엔에 ‘일 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어린 눈물을 극우 성향의 일본 아베정권에 팔아넘겼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역사쿠데타의 정점은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인 교학사 고등 학교 교과서를 준(準)국정교과서로 만들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중·고등학교 역 사교과서를 아예 국정으로 내겠다고 밀어붙인 것이다. 1년 전에 교육부가 국정화 방침을 처음 발표했을 때만 해도 찬반여론이 팽팽했 다. 그런데 곧 여론이 반전되었다. 박근혜정권이 국정화를 밀어붙이면서 내세운 명 분은 단순했다. 박근혜정권은 국정화 회귀의 명분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 라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사회적 특수성”에 비추어 국론 통일이 필요하고 따라서 하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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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역사만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강변했다. ‘분단국가’론은 역대 독재 정권이 독 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논리였다. 만약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하나의 역사 교과서가 필요하다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단 상태인 중국과 타이완이 국정제 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 의 비극을 겪은 직후에도 국정제가 도입되지 않았고 지금보다 남북 이념대립이 훨 씬 심각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의 냉전체제에서도 국정제가 도입되지 않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국정제는 유신독재시대에 박정희정권의 유지를 위 해 도입된 것이다. 북한이 국정제를 채택하고 있으니 우리도 국정제를 채택해야 한 다는(새누리당 이명수 의원의 발언) 극단적 주장이야말로 국정제 주장 이면에 깔린 반민주적, 반헌법적 발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북한 독재에 대한 한국 자유민주주 의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에 어긋나는 국가의 역사교육 통 제를 강행하겠다는 것은 모순이다. 분단은 결코 국정제로의 회귀 명분이 될 수 없다. 하나의 국가정체성이란 군국주의 일본이나 나치 독일, 아니면 옛 소련 같은 전체 주의에 어울리는 것이다. 다원화된 민주주의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도 다 양성과 창의성을 특징으로 하는 지식정보사회에 돌입했다. 이미 다양성과 다원성이 라는 민주주의 가치에 익숙해진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국가 정체성이란 독재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는다. 국정화 고시 강행을 전후해 많은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거리 에 나와서 국정제 반대를 외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박근혜정권이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색깔론으로 매 도하면서 국정화를 밀어붙인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려는 것이다. 박정희하면 늘 따라다니는 친일파와 독 재자라는 비판을 지우고 싶은 것이다. 국정제를 강행하는 이면에 박정희 미화라는 검은 속내가 있다는 것을 초등학교 학생들도 알고 있다. 다른 하나는 한국사회 전체를 이념대결의 장으로 몰고 감으로써 이른바 민주진보 진영을 위축시켜 앞으로 있을 총선과 대선에서 보수정권의 승리를 확고하게 하려는 것이다. 일본 자민당 정권처럼 보수정권의 집권을 영구화하기 위해서는 젊은 사람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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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들의 역사관을 오른쪽으로 이끌 필요가 있는데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중 시하는 기존의 검정 역사교과서와 이들 교과서를 바탕으로 한 역사교육으로는 이것 이 불가능하니까 있지도 않은 종북 좌편향 이야기를 꺼내든 것이다. 그런데 그 ‘종북좌편향’ 교과서를 검정에서 통과시킨 게 박근혜정권의 국사편찬 위원회와 교육부였고 검정통과를 확정하기 직전에 청와대에서 불법적인 ‘검수’까지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정화 논리는 ‘사상누각’이 되었다. 역사학계와 역사교 육계가 좌편향되었기 때문에 정권이 정한 ‘하나의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 다는 주장 이면에 친일파이자 독재자인 박정희의 역사를 세탁하려는 사악한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간파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근혜정권은 좌우의 이념대립으로 국정교과서 문제를 몰아가려고 했지만 박근 혜정권의 강력한 지지기반이라고 알려진 경상도 지역에서조차 국정교과서 강행을 납득할 수 없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여기에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역사학자들조차 국정교과서 반대운동에 한목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박근혜정권의 국정화 강행은 민 심과 동떨어진 대표적인 나쁜 정책으로 꼽혔다. 실제로 작년 4·13총선에서 새누리 당이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참패를 기록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국정교과서 강행으 로 상징되는 박근혜식 일방통행 정책이 민심의 이반을 불러일으킨 데 있다는 새누 리당 자체 분석까지 나온 적이 있었다. 실제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에 서 꼽은 ‘국정 5적’ 가운데 두 명, 곧 국정제 고시를 한 당사자인 황우여 전 교육부장 관과 새누리당 교과서개선특별위원장으로 국정화를 앞장서서 외치던 김을동 전 의 원이 현역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낙선한 데는 국정교과서에 대한 심판여론이 크게 작 용했다. 박근혜정권의 국정교과서 강행이 반헌법적이고 반민주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서 반대여론이 찬성여론을 앞질렀다. 올 초만 해도 그 비율은 대체로 2대 1 정도였 다. 그런데 작년 11월 말 교육부에서 현장검토본을 공개한 뒤 반대여론은 더 높아졌 다. 갤럽이 현장검토본 공개 직후인 2016년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실시한 여 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찬성 17%, 반대 67%로 나타났다. 1년 전에 비해 찬성여론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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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반 토막 수준으로 떨어진 반면에 반대여론은 더 높아져서 반대와 찬성 비율이 4대 1에 이르렀다. 더욱이 현장검토본 공개 인지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정교과서의 내용이 적절하다는 의견은 11%에 그친 데 반해 적절하지 않 다는 71%로 나타났다. 공개된 현장검토본의 실체는 친일·독재 미화로 교육현장에서 퇴출당한 교학사 교 과서를 능가하는 불량품이면서 박정희를 위한 박근혜의 효도 교과서일 뿐이었다. 역 사학계와 역사교육계의 긴급분석 결과에 따르면 현장검토본의 오류는 8백 개 정도 에 이른다고 한다. 지금도 전문가들이 계속 현장검토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1천 개 가 넘는다는 이이야기도 나온다. 작년 12월 8일 열린 ‘국정교과서 폐기 촉구 역사학계 원로 기자회견’에 참석한 서 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국정교과서가 방향성은 잘못됐어도 사실관계는 틀리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렇게 반대하는 것을 억지로 만들었으니 보고 또 보며 고치지 않 겠나 싶었죠. 첫 페이지부터 읽으면서 너무 놀랐어요. 이런 누더기를 책이랍시고 만 들다니…”라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현대사를 서술한 Ⅶ단원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 서 오류가 발견됐다”고도 했다. 이는 현대사 서술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 장검토본의 첫 쪽에서부터 마지막 쪽에 이르기까지 사실 오류, 왜곡·편향 서술, 부정 확하거나 부적절한 서술, 자료 변조, 용어 혼란 등이 넘쳐난다. 그래서 현장검토본은 ‘제2의 교학사 교과서’라고 단언할 수 있다. 교학사 교과서는 교육 현장으로부터 철 저하게 외면당했다. 현장검토본도 똑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국정교과서에 대한 국민의 심판, 학계의 심판은 이미 끝났다고 보아도 좋다. 그런데 아직 국정교과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교육부가 작년 12월 27일, 내년에 는 희망하는 학교를 ‘연구학교’로 지정해 국정교과서를 사용하도록 하겠으며 2017 년에 검정교과서를 개발하여 2018년부터는 국정교과서와 검정교과서를 경쟁시키 겠다는 국·검정 혼용을 발표한 데는 국정교과서에 대한 국민의 심판여론이 크게 작 용했다. 그런데 교육부의 일보후퇴는 사실상 끝내 국정교과서 간행을 밀어붙이겠다 는 대 국민 선전포고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부의 발표에서 가장 눈여겨 볼 부분은 국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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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정제 1년 유예가 아니라 2017년 3월 국정교과서의 간행이다. 단 한 권이라도 국정교 과서를 교육현장에 보급시켜 국정교과서에 담긴 친일·독재 미화 역사인식을 기어 이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겠다는 데 박근혜정권의 검은 속내가 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사실상 국정교과서는 폐기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야말로 박근혜정권의 꼼수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박 근혜가 아직 자신이 대통령인 것처럼 행세하듯이 국정교과서도 아직 살아 있다. 지 금 잘 대처하지 못하면 천 권이 될지 만 권이 될지는 몰라도 내년 3월 2일 교육부에 서 펴낸 국정교과서가 교육현장에 보급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그러니 국정교과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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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과거청산 : 진실의 부인과 국가책임의 회피 홍수정 49통일평화재단 자료실장

우리 사회의 과거청산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를 시작으로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까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 치면서 그 대상과 폭도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그 성과 역시도 주목할 만한 결과를 만 들어냈다. 소위 간첩조작사건의 경우, 조작사건으로 의심을 받았더라도 형사소송법 상 재심요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재심을 받는다는 것은 요원한 것이었다. 그런데 진 실화해위의 조사를 통해 확정판결을 받은 수많은 사건들이 재심의 기회를 얻어 무죄 선고를 받았다. 또한 민사상 소멸시효의 벽에 막혀 있던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 자들의 손해배상소송도 울산보도연맹사건 판결 이후 국가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성과들만 보면 국가기구를 통한 과거청산은 이제 어느 정도 끝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전이 있다. 국가기구가 어렵게 밝혀낸 진실 을 국가가 부인하거나 책임지지 않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음은 과 거청산의 성과를 뒤집는 반전의 사례들이다. 반전 1. 허원근은 자살? 1984년 4월 2일 오전 11시경, 강원도 화천군 제7사단 내 중대장 전령으로 근무하 고 있던 허원근 일병은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약 50m 떨어진 폐유류고 뒤에서 가슴 에 2발, 머리에 1발의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30년이 지난 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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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금까지도 가장 대표적인 의문사사건으로 꼽힌다.

2002년 의문사위는 허원근이 내무반에서 총기 에 의해 타살되었으며 이를 군에서 조직적으로 은 폐하였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곧바로 국방부 는 특별조사단을 구성해 의문사위의 조사결과를 부정하면서 허원근이 자살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4년 2기 의문사위는 종전의 결과와 같이 허원 근의 죽음은 타살이라고 발표했다. 허원근의 유족 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 면서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당초 1심 재판부는 “의문사위의 증거자료와 헌병대 및 국방부 특조단의 수사자료, 시신의 법의학적 소 견을 토대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한 결과 허원근의 사인은 자살이 아니라 소속 부대 군인에 의한 타살로 판단된다. 또한 당시 헌병대는 사건의 조작과 은폐에 관여했다” 면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거의 모든 중대 원들이 새벽에 총기사고가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고, 공소시효가 넘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사망 원인이 자살인 이상 은폐조작 주장 은 성립하지 않는다”라며 허원근은 자살한 것으로 판단하고 헌병대 부실수사의 책 임만을 인정하였다. 대법원은 “망인이 타살됐다는 점에 부합하는 듯한 증거들과 이 를 의심케 하는 정황들만으로는 망인이 소속 부대원 등 다른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 집행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됐다는 사실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 여 망인이 폐유류고에서 스스로 소총 3발을 발사해 자살했다고 단정해 타살 가능성 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도 없다”라며 수사기관의 부실조사로 고통 받은 유족들에게 위자료 지급을 판결했다.

계속된 조사와 법원의 판결을 거쳤지만 허원근사건에 대한 수많은 의혹들은 또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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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별 의문사 사건 처리현황> 계

인정 (진실규명)

기각

기타

진실규명 불능

각하

1기 의문사위

82

19

33

30

2기 의문사위

44

11

7

24

2

진실화해위

40

4

4

5

취하

이송

조사중지

24

1

2

시 원점으로 되돌려졌다. 유족들은 대법원의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며 재심을 청구 하였지만 대법원은 이를 기각하였다. 의문사 사건은 허원근사건에서 보여주고 있듯 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반전 2. 부당이득금을 반환하라! 1974년 1월, 유신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박정희는 대통령 긴급조치를 발동하면서 일체의 반유신 활동을 금지하였다. 19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는 민 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이 있다며 ‘인혁당재건위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으 로 도예종 등 8명이 대법원의 확정판결 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사형이 집행되었 으며, 관련자 17명에게 징역 5년에서 무기징역형까지 선고되었다. 의문사위와 국정원발전위원회의 조사결과, 인혁당재건위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 해 조작되었음이 확인되었다. 2007년 1월 사형수 8명에 대한 재심에서 서울중앙지 법은 무죄를 선고하였고, 이듬해 1월까지 관련자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검 찰은 지법판결을 수용하고 항소하지 않았다. 재심 무죄판결 이후 사형수 유족들은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하였고, 대한민국은 항소를 포기 하여 배상액이 확정되었다. 사형수 외 관련자들 또한 재심무죄판결 이후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 송을 하였고, 이 역시 관련자 및 그 가족들이 모두 승소하였다. 1심판결 이후 대한민 국은 관련자 및 가족들에게 전체 배상액의 2/3를 우선 지급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는 대한민국이 항소를 하였다. 2011년 1월 대법원은 위자료에 대한 지연손해금 기 산일에 대해 당초 불법행위가 있었던 1975년부터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원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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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심판결을 뒤집고 위자료 산정의 기준시점이 변론종결 당일로부터 발생한다고 판결 하였다. 불법행위 시와 변론종결 시 사이에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되어 통화가치의 상당한 변동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이 판결로 대법원의 판결 액수보다 관련자 및 가족들에게 먼저 지급된 액수가 더 많아진 결과가 초래되었다.

서울중앙지법 2009.6.19. 대법원 2011.1.27.

피고는 원고들에게 별지 목록 인용금액란 기재 각 해당 금원 및 각 이에 대한 1975.4.9.부터 2009.6.19.까지는 연 5%의,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 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 원심판결의 지연손해금에 관한 부분 중 피고에 대하여, 원고에게 제1심판결 주문 제 1항 기재 각 해당 금원에 대하여 2009.11.13.부터 2011.1.27.까지는 연 5%, 그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각 초과하여 지급을 명한 피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그 부분 제1심판결을 취소하며, 그 부분에 해당하는 원 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대한민국은 곧바로 관련자와 그 가족들에게 배상액 초과분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2013년 7월 관련자 및 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을 냈다. 대한민국은 이 소송에서 모두 승소했다. 법원은 2011년 1월 이후 국가를 상대로 한 거의 모든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지연손해금 기산일을 해당소송 변론종결일을 기 준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법원은 여전히 “상당한 기간”에 대한 법률적 해석을 명쾌 하게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반전 3. 고도의 통치행위? 진실화해위는 2006년 하반기에 <긴급조치위반 판결분석 보고서>를 통해 위원회 가 입수한 판결문 1,412건 중 긴급조치 위반자가 모두 1,140명에 달한다고 밝힌 바 있다. 진실화해위는 입수한 판결 중 긴급조치 1호 위반사건 중 오종상 사건에 대해 직 권조사를 하여 진실규명과 함께 재심을 권고하였다. 2010년 12월 재심을 맡은 대 법원은, 재심대상 판결의 적용법령이 폐지된 경우에도 그 범죄사실에 관하여 적용 할 법령이 당초부터 위헌이라면 이를 적용할 수 없어 무죄가 선고되어야 하며, 긴급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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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 제1호는 위헌 무효라고 하면서 면소판결을 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하 였다. 이후에도 대법원은 긴급조치 제4호와 제9호 역시 위헌 무효와 함께 무죄를 선 고하였다. 헌법재판소 역시 2013년 3월 21일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는 모두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정을 하였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모두 공히 긴급조치가 위헌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그런데 2015년 3월 26일, 대법원은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 을 띤 국가행위이고 대통령은 국민 전체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개개인의 권리 에 법적 의무를 지지는 않기 때문에 긴급조치를 발령한 행위가 국민 개개인에 대해 불법 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밝혔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 자체는 국가배상법에서 정한 공무원의 불법행위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긴급조 치로 인한 피해자는 국가배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문병효 교수는 “헌법상 절차와 한계를 벗어나 발동한 긴급조치라고 법원이 판단해놓고, 대통령의 명백한 고의·과실에 의한 행위 임에도 단지 정치적 행위라는 이유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권의 보 루로서의 대법원 책무를 포기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최근 하급심에서는 대법원의 위와 같은 판결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 위반자에 대한 국가책임을 인정하는 이례적 인 판례 항명이 이어지고 있다. 반전 4. 국가배상의 소멸시효 영화 <7번방의 선물>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정원섭 목사는 1972년 강원도 춘 천에서 만화방을 운영하고 있던 중 파출소장의 딸을 성폭행한 뒤 살해하였다는 혐 의로 15년간 복역하였다. 2007년 진실화해위의 조사를 통해 가혹행위를 통해 자백 을 받고 증거를 조작하였음이 밝혀졌으며, 2008년 시작된 형사재심은 검찰의 계속 된 상소에도 불구하고 2011년 10월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후 진행된 국가배상소송 에서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해 26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있었다. 그러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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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목사는 국가로부터 한 푼의 배상금도 받지 못했다. 대법원이 느닷없이 국가배상 소송의 소멸시효 기간을 형사보상 확정일로부터 6개월이라고 못을 박았기 때문이 다. 2012년 5월 8일 형사보상을 받은 정 목사는 2012년 11월 28일 배상소송을 제기 했기 때문에 6개월 20일 후에 제기한 이 소송은 소멸시효가 도과되었기 때문에 배상 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원섭 목사는 진실을 밝히겠다며 다시 국가와 사건 당시 고문 경찰, 기소한 검사, 재판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고, 법원은 당시 경찰들에게만 배상책임 을 인정하는 판결을 하였다. 이번에도 국가의 배상책임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 에 정 목사는 곧바로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올해 80세가 넘은 정 목사의 국가책임 을 묻기 위한 여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008년 1월 24일, 노무현대통령은 울산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추모식에서 “과거 권력이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면서 울산보도연맹사건을 비롯 한 국가권력의 불법행위에 대해 포괄적인 사과를 했다.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 정 후 울산보도연맹사건 희생자들의 유족들은 2008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하였고, 2011년 6월, 국가가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해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신 의성실의 원칙에 반한다는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을 통해 2012년 국가의 배상책 임이 인정되었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에 대해 최초로 국가의 배상책임 인 정 판결이 난 것이다. 울산보도연맹사건의 배상판결 이후 민간인 희생사건 유족들에 의한 국가 상대의 손해배상소송이 이어졌다. 그러나 법원은 민사소송의 시효와 관련해 진실화해위 결 정일로부터 3년임을 못 박았다. 이로 인해 2007년에서 2008년에 걸쳐 진실화해위 의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사건들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소멸시효 도과로 인해 배상 소송에서 패소하였다. 다시 과거청산 백만 명이 넘게 희생되었다고 알려진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 중 진실화해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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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확인한 희생자는 16,500여 명에 불과하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공히 위헌임 을 명확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긴급조치 위반사건 피해자의 재심은 60%정도 이며 이조차도 현재는 국가가 배상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국방경비법’, ‘특수범죄처 벌에관한특별법’,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 반인권적 법률에 의한 피해자들의 규모 는 그 현황조차 파악되어 있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 과거청산의 시발점인 의문 사 사건들의 진상규명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2010년 말 진실화해위가 활동을 중단한 뒤 지난 19대 국회에서 10여 건의 진실화해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하였지만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이제 20대 국회에서 온전한 과거청산법이 만들어지 기를 기대하는 한편, 진실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험난한 여정에 다시 힘과 지혜를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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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서병훈

어렵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버거웠다. 원고 마감을 한참 넘겼다. 한 줄도 채우지 못 한 게으름을 뒤로 하고 내 의식은 30년 전 기억으로 소환당한 채, 그 속에서 허우적 거렸다. 1987년 겨울, 나는 여의도 광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단상 쪽 스피커는 찢어질 듯 이 웅웅거렸고, 광장에 운집한 수십만 명은 “김영삼”을 연호했다. 수천, 수만의 무리 는 “김대중”을 외치며 구름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6월 항쟁의 승리에 취한 나는, 소 위 우리 386세대는 ‘비판적지지’(김대중 후보 지지), ‘후보단일화’(김영삼 후보 지지) 로 갈려 선거판을 부유했다. 6월항쟁 정신도, 박종철도, 이한열도 휩쓸려 떠내려갔 다. 박종철과 이한열은 이철규, 이내창 그리고 또 다른 열사가 싸늘한 시신으로 떠 올랐다.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의 면담 뒤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 대화합’ 이라는 명분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시켰다. 구속된 지 불과 2년만이었다. 1심 에서 전두환은 법정 최고형인 사형, 노태우는 유기징역 최고형량인 징역 22년 6개 월을 선고 받았는데 말이다. 전용철(쌀 협상 비준저지 집회 참가), 이상림(용사참사 희생자)··· 국가 폭력의 희생자는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백남기 농민. 박근혜 대통령이 약속한 추곡 수매가를 지키라는 농민의 외침을 경찰은 물대포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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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백남기 농민이 사경을 헤매는 동안 박근혜 정권은 사과는 커녕 강압과 변명만 늘어놓았다. 농민의 주검마저 조작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발버 둥을 쳤다. 진정한 사과나 위로는 없었다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지 이틀 후, 경찰이 입을 열었다. 폭력 책임자인 구은수 서울 지방경찰청장은 “경찰 살수차 운용은 전반적으로 문제가 없었다”라고 밝혔다. 같은 날 경찰총수인 강신명 경찰청장은 전국 경찰 지휘부 화상회의에서 ‘민중총괄 기 집회’를 불법폭력시위로 규정했다. 그는 “채증 자료를 바탕으로 불법시위 주도자 와 폭력 행위자를 끝까지 추적해 엄정하게 책임을 묻고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 겠다”라며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여권에서 경찰을 감싸고 나섰다. 황교안 총리는 총리공관에서 열린 시민사회발전 위원회와의 오찬 간담회에서 “경찰과 공무원에게 상해를 입히는 일은 없어져야 한 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백남기 농민의 이름 석 자는 그의 말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새누리당 초재선 의원들이 공권력의 정당성을 들고 나왔다. 새누리당 초선인 이완 영 의원은 국회에서 열린 초재선모임인 ‘아침소리’ 정례회동에서 “폴리스라인을 벗 어나면 우리가 (알기로) 흔히 미국 경찰은 막 패버린다. 그것이 정당한 공권력으로 인정받는다”라며 “최근 미국 경찰이 총을 쏴서 시민들이 죽는데 10건 중 80, 90%는 정당한 것으로 나온다”라고 주장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새누리당은 이미 위헌 판결이 난 ‘복면금지법’을 발의하기에 이르 렀다. 박근혜 대통령은 “복면시위는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IS도 그렇게 지금 하고 있지 않습니까”라며 대통령으로서는 적절치 못한 발언을 했다. 지금 돌이켜 보 니 이도 최순실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 역시 국가폭력 은폐의 공범이 되었다. 민중총궐기 대회를 무법천지라고 지면에 도배를 한 조선일보 어디에도 백남기 농민에 대한 국가 폭력은 보이지 않았다. 보수 매체는 백남기 농민의 장례를 치르는 그날까지 복면, 폭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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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

력, 난동, IS, 종북 등 선정적인 키워드를 쏟아냈고, 한 목소리로 국가폭력을 감쌌다. 왜곡과 은폐로 일관하다 당시 현장 영상을 보면, 경찰 물대포에 맞고 쓰러진 뒤 주변 시민들이 백씨를 부축 하고 있다. 이 영상에 등장하는 빨간 우의를 입은 인물이 물대포에 맞으면서 백남기 농민 방향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난다. ‘일간베스트저장소’를 비롯한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 영상을 근거로 “백 씨의 부상이 경찰 물대포 때문이 아니라 빨간 우의 남성의 폭행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김수남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그 주장을 그대 로 인용했다. 새누리당 김도읍 의원은 인사청문회에서 “약간 모호하지만, 빨간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농민에게 주먹질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이 찍혀 있 다”라고 밝혔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백남기 국감에서도 ‘빨간 우의’를 들고 나와 핵 심 논점을 희석시켰다. 박근혜 정권은 주검을 두고 또다시 왜곡에 나섰다. 사망진단서를 들고 부검을 고 집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음모의 썩은 내가 진동했다. 조승래 의원은 국감에서 “故 백남기 농민의 전자의무기록이 무려 27,178건이나 비정상적으로 조회되었다”면서 외부 유출 의혹을 제기하였다. 서울대병원은 자체 조사를 통해 총 27,178건의 조회기록 중 무려 86명이 업무 외의 목적으로 열람되었 다고 밝혔다. 백남기 농민이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의무기록이 수사기관 이나 정보기관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 언론은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은 백남기 선생의 사망 앞뒤로 김재원 청와대 정 무수석에게 고인의 병세와 유족의 반응 등을 알리고 대응책을 협의했다”라고 보도 했다. 병원이 생명 연장을 제안했으나 가족들이 원치 않았다는 사실까지 세세하게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한다. 고인의 사망 후, 주치의인 백선하 교수는 사망원인을 ‘병사’라고 기재한 사망진단 서를 내놓았다. 백남기 농민이 사망한 시각은 13시 58분경이며, 이로부터 한 시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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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에 유가족은 병원 측으로부터 사망진단서를 받았다. 이 사망진단서는 검시가 이 루어진 저녁 6시까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종로경찰서는 그날 14시 49분 28초에 서울대병원 측에 ‘수사협조의뢰’ 공문을 발 송한다. 사망진단서를 받은 지 불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내용은 ‘변사자 백남 기 농민 주치의 백선하 등의 진술조서’와 ‘변사자 백남기 농민 관련 진료기록 일체’에 대한 자료인데 수사의 증거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밝혔다. 종로경찰서가 서울대병원에 공문을 보낸 시점은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과 관련 된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을 때였다. 다시 말해, 사인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시점 이었다. ‘변사’ 란 자연사 이외에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죽음을 뜻하는 것으로, 변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망진단에 대한 확인이 우선되어야 한다. 청와대가 그린 밑그림에 따라 서울대병원, 경찰 등이 꼼꼼하게 채색을 한 정황이 명확해보였다. 유족과 여론의 반발에 부딪혀 경찰이 주춤하자 여당과 보수단체들 도 붓을 들었다. 새누리당은 부검영장 재신청 포기와 관련해, “올바른 국가를 지향하는 공권력이 무기력으로 드러나 충격과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평했다. 보수시민단체들은 민중 세력과 시민세력이 백남기 사망 원인 확인에 동의하지 않고 있으며, 경찰도 법 집행 을 미온적으로 하여 국가 공권력을 훼손하였다고 주장했다. 엄마부대 주옥순 대표 는 서울대병원 앞에 상복을 입고 나타나 “물대포를 쐈는데 이마에 멍이 시퍼렇게 들 고 골절이 될 수가 있냐”라며 “신속하게 부검을 실시해야 한다”라고 목청을 높였다. 우리 사회는 백남기 농민의 주검을 지켜냈고, 장례식은 11월 5일 민주사회장으로 엄숙히 치러졌다.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 가해자 처벌 등은 오롯이 숙제로 남았다.

2017년 초 겨울, 나는 광화문 광장에 서 있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농단 위로 벚꽃대선 물결이 출렁인다.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어 몸이 흔들리지 않게 버틴다. 오 늘 다시, 1987년 풀지 못한 숙제가 나에게 주어졌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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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기획연재 2. 국가폭력 사건 피해자들의 목소리 이번 기획연재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과거 청산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폭력 사건이 유가족에게 어떤 고통을 남겼는지,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싸움에서 유가족들 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기록하는 것은 같은 범죄의 재발을 막는 데 기 여할 수 있다. 의문사,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사건, 간첩사건 등 국가폭 력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워온 피해당사자들의 삶과 투쟁을 통해 국 가폭력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는 것의 다층적 함의를 생각해본다. 두 번째 순서로 의문사한 박창수의 유가족인 황지익·김정자 부모님의 목소리를 싣 는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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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규명 없이는 끝나지 않을 이야기 박창수 열사의 부모님, 황지익·김정자 일시 장소 참여

2017년 1월 6일 금요일 성남시 중원구 자택

신명철, 정원옥(정리)

유가족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박창수 부모님의 자택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09년 초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 다. 의문사 사건의 유가족을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때도 명철이형 과 함께였다. 내창이형 20주기 백서를 준비하면서 형은 의문사 유가족들의 증언을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를 들려주었고, 의문사를 다루는 연구자가 거의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아, 그렇구나……’ 했다. 그 날, 형은 커다란 수박 한 덩이를 샀고, 마치 부모님 집을 방문한 듯 친밀하고 다정하게 박창수의 부모님을 대 했다. 그때만 해도 정정하셨던 어머니는 삼겹살을 구워주며 소주에 가요 한 자락을 구성지게 뽑으셨다. 처녀 적 어머니의 꿈이 가수였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들었다. 어머니는 흥도, 눈물도 많아보였다. 아버지는 온화하고 차분하면서도 심지가 곧은 분 같았다. 나는 20주기 백서에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에 진상규명할 거야”라는 제목으로 박창수 부모님의 구술을 정리하여 실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2011년 겨울,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박 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박창수 부모님의 댁을 다시 찾았다. 그때는 나 혼자였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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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데, 2년 사이에 어머니의 건 강이 많이 나빠지셨다. 어머 니는 화병이 나서 문을 못 닫 고 주무신다고 했다. 골다공 증, 난청, 두통 등의 지병이 있어 약을 달고 사신다고 하 셨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구술을 시작했는데, 서너 시간 동안 놀라운 에너지로 쉬지도 않고 말씀하셔서 놀랐 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도 두 번을 더 인터뷰를 했고, 박사논문이 완성된 2014년 봄 에 다시 찾아뵈었다. 그때도 2년만이었는데, 어머니의 건강은 손님 접대를 하는 것 이 어려울 정도로 더 나빠져 있었다. 아버지가 차와 과일을 내주셨고, 어머니는 몸이 아프니까 자꾸만 아버지에게 짜증을 내게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는 역시 기운이 넘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 이미 여러 차례 들었던 같은 레퍼토리의 이야기를 서너 시간 동안 다시 들어야 했다. 해 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에야 집을 나설 수 있었는데, 어머니는 “지금 가면 언제 오 냐”며 눈물을 비치셨다. 금방 다시 찾아뵙겠다고 했지만, 명철이형, 49통일평화재단의 안경호 사무국장과 함께 이번에 방문한 것은 또다시 2년만이었다. 그 사이에 어머니의 건강은 더 나빠 지셔서 집안에서도 거동이 불편할 정도가 되었다. 거실에 앉아 있다가 화장실이라 도 다녀오려면 벽을 잡고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듯 한 발 한 발 힘겹게 발을 떼셔야 했 다. 난청도 더 심해져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나마 이 야기를 하는 동안에는 기운을 차리셨지만, 이야기를 맛깔나게 엮어내는 솜씨가 예 전 같지는 않으셨다. 이야기는 뚝뚝 끊어졌고, 기억은 처녀 시절로, 어린 시절로, 더 먼 과거로 달려가는 듯했다. 이제 살림은 아버지가 도맡아하신다고 한다. 주방과 욕실은 물 때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청결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온다고 준비했다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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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만두를 굽고 손수 양념장을 만드셨다. 지금까지는 주로 어머니가 말씀하시고 아버지는 간간히 끼어드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아버지도 하실 말씀이 많은 듯했 다. “나도 말 좀 하자”며 어머니가 끼어드는 것을 자르기 도 하면서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꿋꿋하게 다하셨 다. 언제나 어머니 중심이었고, 어머니 곁을 묵묵히 지 키던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2009년 명철이형과 처음 방문했던 때로부터 되짚어 보자면, 10년 가까운 세월을 2년 간격으로 박창수 부모 님을 찾아가 뵌 셈이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달라진 것 과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달라진 것은 어머니의 건강이 뵐 때마다 나빠지고 있다 는 것이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 어머니는 힘이 난다는 것이다. 물론 그 힘은 긍정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분노, 슬픔, 원망, 증오, 서 러움, 한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가 이야기하기를 통해서 분출되는 듯했다. 아들을 잃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온 세월의 한이 자신의 이야기 를 들어줄 누군가가 나타나면 병마도 잊을 정도의 신명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셨지만, 우리를 떠나보낼 때는 또 아쉬움이 가득했다. 진실규명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말해도 어머니의 이야기 는 충족될 수 없을 것이다. 마무리될 수 없는 이야기, 결코 끝나지 않을 이야기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진상이다 이미 여러 차례 구술을 받았기 때문에 연대기적으로 삶을 재구성하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하시고 싶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듣는 자리였다. 보상금 이야기 가 가장 먼저 나왔다.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으면서 박창수의 유가족에게는 1 억 3천만 원 가량의 보상금이 나왔다. 어머니는 자기 몫의 보상금을 모두 손자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내가 혀를 댈끼고? 창수 죽음하고 바꾼 돈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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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다”라는 것이 어머니가 보상금을 받을 수 없는 이유였다. 최근 큰 수술을 받았고, 통 원치료도 계속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 보상금은 사실 어머니에게 더 절박한 것이었 다. 그런데도 보상금을 손자에게 모두 보낸 것은 그 돈이 단지 아들의 죽음 값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 돈에는 손자의 홀로서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 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마음, 나중에라도 손자가 아들의 죽음을 밝혀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늘 “돈이 문제가 아니라,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진상은 밝 히지 못했지만, 보상금에 손을 대지 않음으로써 부모님은 자신들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신 것이다. 하지만 보상금 문제까지 마무리되고 나니 아버지는 새삼 지난 세 월의 설움이 새록새록 되살아나시는 듯했다. 친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감당해야 했던 세간의 편견과 오해의 시선은 항상 돈 문제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의붓아비라 설움 많이 받았어. 안양에서도 그랬고, 유가협에서도 첨엔 내 가 돈 보고 나오는가 했을 거야. 그래서 난 돈 말은 일절 안했어. 돈이 문제가 아니라, 진상이다. 25주년인데 추모 때마다 한 번도 안 빠지고 부산에 내려 가. 초창기에는 김치니 떡이니 꼭 해서 내려갔어. 20년 가까이 되니까 한진 애들도 째. 내가 저들한테 돈 달라고 한 적 없어. 내가 움직여야 먹고 살지, 어 떻게 먹고 살아? (보일러) 기관실에 나가면서, 20년을 다닌 거야. 오늘 아침 에 나가면 내일 아침에 나오잖아. 광주니 어디니 가야 하면 아침나절에 가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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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에서 버스 타고 광주를 내려가는 거야. 밤에 올라와서 그 이튿날 또 일 하러 다닌 거야.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만큼 쫓아다녔고, 먹고도 살아야 되 겠고. 유가협에서도 몇 년 지나고 나니까 의붓아비도 그런 게 아니구나. 창수 아버지, 창수아버지 그러지. 우혁이 아버지도 내가 가면 막걸리 한 잔 하고 가 라고 꼭 붙잡고. 내가 돈이나 바라고 했어봐? 20년 동안 다니면서 내가 어디 서 돈을 받았어, 뭘 했어! 내가 직장이라도 다녔으니까 회비도 내고 그러면서 싸웠지. 돈 따지고 그랬으면 못했지.

미혼모인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아버지는 네 살 때부터 창수를 키웠다. 호적엔 올 렸지만 성을 바꾸지는 않았다. “살아 있을 동안은 같이 살지만, 내가 죽고 나면 각자 분가해서 사는 건데 성만큼은 제 성을 갖게 해주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성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진상규명운동을 하는 동안 아버지가 받았던 설움은 의붓아버지 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했던 모양이다. 30년을 같이 살고, 20년 넘는 세 월을 진실규명을 위해 싸웠다면 누가 뭐래도 ‘창수 아버지’인데도 아버지는 늘 조심 스러워하셨고, 어머니를 대신하는 역할을 묵묵히 해왔다. 더 이상 오해받을 일이 없 게 되어서야 아버지는 처음으로 그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씀을 꺼내신 것이다. 아버지만 금반지 해주고, 나는 안 해주고…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어머니는 자꾸만 옛날이야기를 하셨다. 예 전에는 “백지(공연히) 와 가지고 과거 이야기를 하게 하노? 과거 이야기를 하면 내 가 마 죽고 싶다”면서 진저리를 쳤던 어머니였는데, 이번에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옛날이야기를 꺼내셨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던 이야기, 아홉 살에 해방이 되어 귀 국한 후에 고향마을이라고 찾아가서 오빠와 함께 밥 동냥을 다녔던 이야기, 부산으 로 돌아와 열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오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한 이 야기, 열 살 때부터 전구공장, 사탕공장, 과자공장, 성냥공장 등을 다니면서 돈을 버 느라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고생한 이야기들이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툭툭 터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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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져 나왔다. 아버지를 만난 것은 산전수전 고생을 다 겪고 마음의 상처도 이미 많이 받은 후였다.

창수가 세 살 때였나. 옥상에 빨래 널러 가면 바로 옆이 서울여관이었어. 아 버지도 객지에 나와서 여관에 살면서 직장 다닐 때였는데, 아버지가 싱겁하 잖아? 뭐라고, 뭐라고 말을 걸거든. 나도 뭐라고 대꾸하고. 한 번은 영화 구 경하러 가자고, 아버지가. 그게 인연이 될라고 그랬는가. 그 영화가 <삼손과 데릴라>인가, 그걸 보러 갔어. 보고 나와서 현대극장에서 쭉 올라오면 용두 산 길이야. 요기 좀 앉아서 쉬었다 가자 그래. 그때 과거 이야기 싹 다했지. 나 는 초등학교도 못 댕겼고, 창수가 있다. 그때 아버지가 “창수 있는 거야 키워 서 장가보내면 되고” 그러더라고. 나는 아기가 있어서 안 된다고 이라이께네 아부지 말이 그러더라고. “내 한 사람 희생함으로써 두 사람을 살린다” 그러 더라고. 아이고, 첨에는 안 믿기더라고. 그래도 한 번 그러고 나니까 바람이 났는가, 옥상에 안 올라갈 것도 올라가고 그래 되더라. 그래가지고 영화 보러 잘 댕겼어, 아버지하고. 왔다갔다 3년을 사귀다가 혼인신고하고 결혼하고.

창수는 아버지를 잘 따랐다. 낚싯대를 만들어달라고도 하고, 저녁을 먹고 나면 오 목을 두자고 아버지를 보채곤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딱 한 번 “아버지 성하고 똑같이 만들어줄 수 없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지만, 그러고 나서는 속 한 번 썩인 적 없이 잘 자라주었다. 생전 아버지와 갈등이 없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창수 는 인문계를 가고 싶어 하고 아버지는 실업계를 가라고 해서 잠깐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창수는 결국 부산기계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는데, 아버지는 창수가 죽고 난 다 음에 “인문계 보냈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공업고등학교 보내서 그래서 죽었어, 내가 죽였어”라며 후회를 하셨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인문계를 포기했지만, 창수는 아버 지를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버지에게만 금반지를 해주어서 어머니를 서운하게 한 적이 있었다. 한진중공업에 들어간 이후였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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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수 시신 탈취

박창수 열사 추모제

지는 한진에 있고, 우리는 충주에 살 땍인데, 아부지 누나가 야구르트 대리 점을 했어. 야구르트 대리점을 남 맡기는 것보담은 동생인데 맡기는 게 낫다 해서 올라오게 됐어. 그 땍에 봉급 이십 만원 받았어. 동생들은 다 중학교 다 니제, 이십 만원 갖고 묵고 살기 힘들었어, 진짜. 그래서 나도 사과 따러도 댕 기고, 식당일도 댕기고 그랬어. 그럴 땍인데, 저그 아버지는 서 돈짜리 금반 지 딱 해서 주고, 마후라도 사주고, 나는 안 해주는 거라. 지도 어렸지, 돈만 있으면 엄마도 해주고 아버지도 해주면 좋은데, 그래도 엄마보다는 아버지다 싶어서 그래 해줬는데 나는 서운한 거라. 샘이 났지. 지금 가만 생각하니까 니 가 참, 에미가 안 시키도 참, 니가 된 놈이다. 아부지 그 마후라 넣어놓고 창수 보듯이 본다. 그거 넣어놓고 있다.

충주에 살다가 성남으로 와서 가판대 관리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갈 때도 박창수는 컬러텔레비전을 사서 보내기도 하고, 시간이 나면 아들을 데리고 놀러오곤 했다. 방 하나짜리에 살다가 큰 방 하나에 작은 방 둘, 거실까지 있는 집을 얻어서 이사를 했 을 때, 박창수는 “아이고, 어머니, 아버지! 인제는 우리 올라오면 여기서 자도 되겠습 니더”라고 좋아했다고 한다. 그것이 박창수가 마지막으로 부모님 댁을 찾은 것이었 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박창수는 연행이 되었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에 머리를 다쳐서 안양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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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어머니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어머니는 서울구치소와 안양병원으로 아들을 면회하러 갔던 일, 한밤중에 연락을 받고 안양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아들이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누워 있던 일, 아들 의 시신을 탈취하려고 영안실 창문을 깨고 들어오는 백골단과 죽기 살기로 싸워야 만 했던 일 등을 이번에는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아들이 살아 있었을 적의 이야기, 덜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야기들만 하고 싶으신 듯했다.

창수 살아 있을 땍에, 은행동에 살 적에 창수가 한 번씩 올라오면 소주를 한 병 사다놔 놓고 지랑 나랑 한 잔씩 마시고 그랬다. 어머니 한 잔, 아들 한 잔 짠해서 마시고. 인상도 하나도 안 찌푸려지는 기라. 우리 창수가 박재홍씨가 부른 <울고 넘는 박달재> 그 노래를 잘 불렀어. 박재홍씨를 내가 오빠, 오빠 했거든. 부산에서 이웃에 살고, 내가 가수하고 싶어서 쫓아다녔어. 창수가 그 노래를 참 잘 불렀어.

금반지를 사주지는 못했지만, 박창수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소주를 함께 마셔주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는 것으로 효도를 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울 고 넘는 박달재>가 어머니의 애창곡이며, 어머니의 꿈이 가수라는 것을 박창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과자공장에 다니던 소녀의 원대한 꿈도, 배우지 못해서 그 꿈을 펼치기도 전에 접어야 했던 소녀의 한도.

그 땍에 재홍이 오빠가 부산방송국에 전속가수로 있었어. 그래가지고 부산 방송국에도 내가 들락날락하고, 오빠 보러 들락날락하고. “오빠, 나도 가수 했으면 좋겄다” 이라이까네 “집으로 와” 그래. 그래서 집으로 한 번 갔어. 가 니까 오빠가 기타를 딱 내놔 놓고 탁 치면서 노래해보라고 해서, 재홍이 오빠 가 불렀던 노래 <향수>를 내가 불렀거든. 오빠가 듣더니 “조금 연습하면 되겠 다” 했는데 참, 내가 아이고, 이 콩나물 대가리를 볼 줄을 알아야 가수를 하든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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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노래를 부르든지 하지. 나중에 오빠가 “아, 안 되겠다. 악보를 봐야 되는데 악보를 못 봐서 안 되겠다” 그래. 가수 꿈은 되게 큰데 악보를, 콩나물 대가리 를 모르니까 우째 하노? 그래서 못했어. 가수! 가수를 못했어. 그래서 내가 죽 어서 다시 태어나면 공부 좀 많이 해서 가수 한 번 꼭 하고 말 끼다.

진상규명운동을 하는 동안 같은 아픔을 지닌 부모들과 나눠 마시는 소주 한 잔과 노래 한 자락은 어머니를 버티게 해준 힘이었다. 그런데 이제 어머니는 소주도 마시 지 못하고, 노래를 부르지도 않으신다.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희망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 어머니에게서 노래를 빼앗아가 버렸다. “누가 무엇 때문에 창수를 죽였는 지”, 진상규명의 가능성이라도 엿보이게 된다면 어머니는 다시 한 맺힌 노래 한 자락 을 들려주실지도 모른다. 다음번에 찾아뵙게 될 때는 어머니의 노래를 다시 듣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박창수는 1990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당선되어 부산노련 부 의장 겸 전노협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고, 대기업연대회의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91년 2월, 경기도 의정부에서 열린 대기업연대회의에 참가한 후 의정부경찰서로 강제연행되었다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서울구치 소 운동장에서 운동 중 벽 모서리에 부딪혀 두개골 함몰 골절상을 입었고, 안 양병원으로 호송되어 입원치료를 받던 중 1991년 5월 6일, 변사체로 발견되 었다. 그의 죽음은 안기부의 개입 등 국가폭력에 의한 타살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었지만, 국가기구에 의한 조사에서 의문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1기 의문 사위와 2기 의문사위는 박창수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고, 진실화해위에서는 유가족들의 진정철회로 사건이 취하되었다. 민보상위에 서는 30%의 기여도로 박창수의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하였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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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복공동체 계획짜기


‘아트 박’이 그린 공동체의 그림은 박희성 따복공동체지원센터 성장지원실장 인터뷰·글

이원근

2017년 1월 21일, 세종문화회관 앞은 영하의 날씨

의 판로지원, 성장지원, 관계협력 관련 일을 책임

에도 불구하고 촛불로 그득했다. 눈발이 갑작스레

지고 있다.

거세졌다. 그는 혼자 왔다고 했다. 경복궁역에서부 터 걸어왔노라고. 박희성의 어깨에서 김이 모락모

따복공동체, 뭐하는 곳인가.

락 피어올랐다. 세종문화회관 뒤 커피집에 앉았는

따복공동체란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

데도 광장에서 외치는 스피커 소리가 또렷하게 들

해서 지역 내 관계망을 형성하고, 주민들

려왔다. 박희성은 자리에 앉자마자 ‘따복’부터 말하

이 풍요롭고 행복하게 지속적으로 살아갈

기 시작했다. 박희성은 현재 경기도 따복공동체지

수 있는 삶터를 만드는 데 주력하는 사업

원센터(www.ddabok.or.kr)에서 성장지원실장으

이야. 요즘에는 경기도의 사회적경제 브

로 일한다. 민·관이 함께 하는 경기도 따복공동체

랜드를 한 번 만들어보자 해서 ‘따복상단’

지원센터는 경기도가 설립하고, 사단법인 마을과

으로 정했어. ‘따복가게’로 하자 했는데 너

사회적경제가 수탁 운영하는 ‘마을과 사회적경제

무 구멍가게 느낌이라고 해서 ‘상단’으로

통합지원기관’이다. 여기서 박희성은 사회적경제

좀 더 커보이게 하려고. 사회적경제라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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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2006년 한여름 따복공동체 건강모임을 진행하며

2001년 일본의료생협 견학-119개 의료생협이 대학급 병원과 요양시설까지 갖추고 지역주민 중심의 반모임을 하는 것을 보 고 충격

것은 사회적기업에, 협동조합, 자활기업,

부를 비롯해 사회초년생과 대학생, 고령

마을기업 등 공동체 중에 자치적으로 활

자와 취약계층에 제공돼. 수원하고 화성,

동하는 곳들 있잖아. 그걸 통틀어 사회적

동탄, 성남 등에서 계속 짓고 있어.

경제 영역이라고 하지. 따복하우스에는 오픈키친, 피트니스센터, 공동육 사회적경제는 이윤의 극대화가 최고의 가치가 아

아나눔터, 실내놀이터 등 입주민 공유공간과 어린

니라고 말한다. 사람 중심의, 사람의 가치를 중시

이집 등 지역주민 공유공간이 마련된다. 수원 광교

하는 데 주력하면서,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를 따

신도시와 화성 동탄신도시, 성남, 광주, 평택, 안산,

르고 자본에 따른 수익배분을 제한한다. 사회적기

안양, 화성 등지에서 순차적으로 입주가 이뤄질 예

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자활기업, 공정무역, 지역

정이다.

화폐 등의 활동이 사회적경제 영역에 속한다.

옛날 안성의료생협부터 얘기해보자. 따복하우스는 들어봤다.

92년에 내가 총학생회 연대사업국장이었

따복은 ‘따뜻하고 복되다’는 뜻이야. 따복

거든. 그때부터 안성지역 농민회 형님들

하우스는 출산에 따라 주거비가 경감되고

하고 형, 동생 하면서 자주 만났지. 94년

공동육아가 지원되는 주거복지 모델이야.

도에 안성에 의료생협이 만들어졌어. 87

두 자녀 출산하면 주변 시세의 40% 수준

년부터 연대 의대생들이 이 지역으로 의

에서 안정적인 주거가 가능하지. 신혼부

활을 왔어. 고삼 가유리라는 곳이었는데,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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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리 청년회랑 한 7,8년을 꾸준히 인연 을 맺다보니까 처음 1학년 때 따라온 학생 들이 이제 의사가 된 거야. 그럼 안성에서 의원을 열어보자 이렇게 된 거지. 이인동, 권성실 같은 가정의학과 의사들이 지금 의 료생협 의사들이야. 94년에 <농민의원>을 처음으로 열게 돼. 초기 발기를 197명이 해서 출자했는데, 지금은 5,000세대에서 출자금이 7억 5천여 만 원이 넘어. 안성시 민 전체가 19만여 명 정도 되니까 5,000세 대면 거의 10%에 육박한다고 볼 수 있지. 농민의원, 농민한의원, 생협치과, 공도생 협의원, 우리생협, 재가장기요양기관 등 이 있어. 생협 의원이 되게 많아. 지금은 의료사협(안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으로 바뀌었어.

2015년 독도산행-의료생협산악회에서 함께한 색다른 경험

쓰고. 이걸 ‘적정진료’라고 하는데, 가능하 의료사협과 일반 병원의 차이라면 어떤 것이 있

면 환자입장에서 설명하고 치료하는. 그

을까.

러니 이곳에서는 환자들 모임, 자조모임,

병원 가보잖아. 어때? 목 아파요 하면 약

소모임 같은 것도 굉장히 중요시 여기지.

주고, 콧물 나와요 하면 약주지? 그게 다 항생제야. 사회적 가치를 신뢰자본이라고

의료협동조합은 지역주민과 의료인이 협동해 ‘치

하는데, 다른 병원이 달랑 30초만 문진한

료’와 ‘예방’을 결합함으로써 건강한 마을공동체

다면 여긴 충분히 조합원들의 건강을 얘기

를 만들기 위해 조직됐다. 1994년 안성에서 처음

하지, 주치의로서. 과잉진료나 과다처방

문을 열어 현재 전국 21개 지역에서 양·한방 의원

하지 않고, 당연히 여기는 항생제도 줄여

과 치과, 검진센터, 운동센터, 재가장기요양센터,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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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요양병원 등이 운영 중이다. 의료협동조합이 추구

생협에선 자꾸 바깥일 하니까 속도 상하고

하는 것은 건강마을 만들기에 있다. 의사의 권위적

했지. 의제 중에 ‘마을만들기’가 있어. 도

의료행태가 아닌, 공동체가 스스로 치유의 주체로

시를 쾌적하게 하고, 생활의 불편함을 개

살도록 돕는 데 있는 것이다.

선하는 게 주 역할이야. 스스로 찾아내고 스스로 이야기해서 개선해 나가는 게 도

안성의료생협 활동할 때도 다른 일하고 병행한

시분과의 모토야. ‘마을만들기’, ‘동네한바

것으로 아는데.

퀴’, ‘꿈의 지도’ 이런 게 다 같은 맥락의 이

지역 청년회 활동, 시민모임 등도 하다가

름들이야. 지속가능한 경제, 지속가능한

의제 활동도 했지. 의제가 무엇이냐 하면

환경, 지속가능한 관계. 꿈의 지도를 그리

지속가능발전협의회(의제)라고 해서, 대

다보면 동네 한 바퀴도 돌고, 서로 친해지

략 98년부터 시민과 같이 논의를 해서 환

고, 과제도 해결하고 하는.

경문제, 경제문제, 농업문제, 도시적 건강 문제 등을 논의하는 거야. 이때 마을만들

아휴, 복잡해. 예를 들면 어떤 일들인가.

기도 했고 나중에 정당 활동도 했고. 좀 복

동사무소 가서 해결해 달라 하고, 또 어느

합적이지.(웃음)

기관 가서 이건 문제 있다고 하고, 그런 활 동들이지. 의료생협 본점에서 일하다가

마을만들기란 무엇인가.

한경대(옛 안성농전) 뒤에 2002년쯤인가

의제에서 의제 계획을 짜는데, 사회보장

의료생협이 의원을 하나 더 내자, 분점을

위원회는 심의의결기구야. 여기서 의결

내자고 의견을 모았어. 그럼 먼저 조직하

하면 시는 예산을 줘야 해. 2년마다 계속

려고 들어가는 선발대가 필요할 거 아냐.

짜는 거야. 의제에서 계획을 내왔으면 실

그럼 내가 들어가는 거지. 가서 조사해서

천해야 하잖아. 내가 속한 곳이 도시분과,

건강한 동네를 만들기 위해 여러 문제를

경제분과, 복지분과였는데 시에서 예산을

상의할 거 아냐. 그럼 거기서 논의된 거를

주는 거지. 2012년까지 도시분과장을 했

다시 의제에서 논의하는 거야. 그런 식이

고 나중에 안성의제 부위원장도 했어. 의

지. 자치활동도 되고 복지활동도 되고 이

료생협 하면서 의제 활동도 한 거야. 의료

게 다 연결된 거야. 그때 한 50여 개 정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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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과제를 찾아냈어. 지금 딱 10년 지났거

‘꿈 지도 만들기’는 지역주민이 직접 스스로의 필

든. 그때 찾아낸 과제들이 지금 얼마나 바

요에 따라 여러 곳을 손보고 새로 디자인하는 도

꾸었나, 재작년에 한 번 돌아봤어. 한 80%

시재생 프로젝트다. 당연히 주민의 일상과 이동경

는 해결됐더라고. 여기에 공원 만들어야

로, 이해와 요구가 그대로 반영된다. 동네 한 바퀴

한다, 보도 턱 없애야 한다, 쓰레기 여기

를 돌면서 불편한 곳은 뜯어 고친다. 편한 길이 새

버리면 안 된다, 여기 너무 어두우니 밝게

로 나고, 쉴 곳이 생긴다.

해야 한다, 산책로는 이렇게 만들어야 한 다, 차도와 인도 구분이 되어야 한다. 뭐

형은 대체 일을 동시에 몇 개를 하는 것인가.

이런저런 소소한 것들이야. 그러니까 큰

의료생협의 가치나, 의제의 가치나, 삼동

게 아니야. 보도블럭 까딱까딱 해서 만날

자치위원의 가치나 난 다 똑같아. 신나서

거기서 누군가 넘어지는데 그거 고치자는

일을 했어. 정당 활동도 그래서 했어. 그러

것들이야. 우린 어려운거 안 해.

다가 안성에서 출마도 하려고 했어. 2009 년 일이야. 의료생협에서 콜이 왔어. 안성

아주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자활센터를 맡아 달라고. 내가 그래서 의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삼동 자치위원 할 때

료생협에서 운영하는 지역 자활센터, 그

구나.

러니까 안성자활센터 센터장이 됐어. 지 역자활센터는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자치위원도 했어?

계층의 자립 자활을 지원하는 기관이야.

안성 삼동. 알어? 중앙대 지나서 예전에

궁극적으로는 자활사업을 통해 취업을 이

는 대덕면이었잖아. 의료원, 한경대, 금산

루게 하는 곳이야. 다양한 인적자원이 또

로터리 있는 데까지가 삼동이야. 삼동 동

의료생협에 있으니까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장이 그걸 보더니 나보고 한 번 오라고 하

있었지. 자활센터장도 시에서 운영하는

더라고. 보도 턱이 다 막혀있을 때야. 삼동

것이니까 산하기관장 중 하나야. 기관장

동장이 3천만 원을 주더니 우리한테 고쳐

급이 된 거지. 한 2년간 했어. 근데 거기서

보라 하더라고. 그래서 그걸 공사업체 발

사단이 난거야. 의제활동 했지, 자치활동

주해서 턱을 다 낮췄잖아. ㅎ

했지, 의료생협 했지, 청년활동 했지, 농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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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박희성(52세)의 고향은 전남 영광이다. 영광에선 밭일과 뱃일 두 가지를 함께 해야 했다. 일손은 많 았지만 할 일은 더 넘쳐났다. 가난했고 먹을 것은 항상 모자랐다.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자 연스레 집안의 ‘식순이’가 되었다. 산에서 땔감을 92년 재단투쟁 때 모습

구해와 식구들이 오기 전 저녁밥을 지었다. “내가

민회랑 밀접하지 이러니까 당(민노당)에

가마솥에 밥을 해놓지 않으면 그날은 식구들이 굶

서 자꾸 출마하라고 부추긴 거야. 혹했지.

는 날이었다.”

그래서 안성에서 출마한 것인가, 2012년 총선

형이 미대 출신이라고 하면 다들 놀라지 않나?

에?

영광은 바닷가야. 구름이 만들어지는 곳

아니. 못했어. 처음에는 나보고 나가라고

이야. 바람은 서풍이야. 중국에서 바람이

하더니, 나중엔 분란이 나서 자기들이 직

불어오면서 찬바람과 뜨거운 바람이 만나

접 해야겠다고 하더라고. 음지에서 일하

서 구름이 돼. 구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던 친구들이 양지로 막 쏟아져 나갈 때야.

보면서 그림을 상상 속에서 그렸어. 중학

나를 추대하다가 갑자기 말을 바꾸더라

교 때 광주로 전학을 갔는데 미술부를 뽑

고. 그때 크게 실망했지.

는 거야. 그런데 그때 손을 못 들었어. 영 광 촌놈이 무슨 그림을 그리느냐고 비난

그때는 그럼 다 일을 놓았을 때 아냐?

받을까 두렵고 부끄러워서. 그 해에 시화

정치활동 하려면 의료생협을 그만 두어야

전을 여는데 그게 너무너무 부럽더라고.

해. 자활센터장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결국 갑자기 일을 다 놓게 된 거야. 게다

그림은 광주상고 2학년 때부터 시작했다. 당시 미술

가 준비단계에서 말이 바뀌니까 결국 나

교사였던 우제길 화백에게 반한 그는 “그림 그리는

는 다 놓아버린 상태에서 아무것도 안하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가족에게

게 된 거지. 결국 포기했어. 그때 상처를

여러 번 으름장을 놓고서야 미술학원 문턱을 넘을

많이 받았어.

수 있었다. 그렇게 재수 끝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80


믿기지 않는다. 형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본 적 도 없거니와 상상도 안 된다.

87년에는 그래도 그림을 열심히 그렸고. 군대 갔다 와서는 좀 뜸해졌지. 그림보다 는 다른 쪽에 충실하기 시작했으니까. 그 래도 89년에 내창이형이 죽지 않았다면 지금도 미술 쪽 관련된 일 하고 있지 않을 까 싶기도 해. 하여튼 미술은 2학년 때 때 려치운 거나 다름없지. 예술대 학생회 일 하고, 그 다음엔 연대사업 일하고 하다가 결혼하고는 우유배달하고, 한겨레신문 배 달하다 지국장 하고, 그리고 잠깐 다시 미 술학원 열었다가 IMF를 맞았지. 서울에 서도 잠깐 살았어. 둘째 형 밑에서 일했는 데, 그러다가 안성에서 2001년도에 법인 그림이 절실했나.

이 만들어지면서 다시 합류했지.

미술을 안 하니까 못살겠더라고. 우제길 선생님 밑에 가서 조수를 했어. 캔버스 짜

박희성의 별명은 ‘아트 박’이다. 스스로 붙인 별명

서 퉁 튀기면 북소리 나게 해놓고, 잘못 그

이다. 캔버스에 그릴 그림을 마을과 공동체에 그려

렸다 지워놓으라 하시면 뻬빠로 다 지워놓

나간다는 뜻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그리고

고. 따까리를 한 거야. 그러다 고등학교 2

있다, 지역과 공동체와 사회적경제와 작은 마을에

학년 말부터 화실이라는 데를 다녔어. 입

서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시미술을 배워야 대학 갈 수 있거든. 얼마 나 열심이었나 하면 다들 피는 담배도 나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2012년 총선 출마가

만 안 배웠어. 단지 건강하게 그림 오래오

무산된 뒤에는 그래서 어떻게 됐나.

래 그리려고. (웃음)

한동안 너무 힘들었어. 마냥 겉돌고 뭐 그

이내창기념사업회

81


어깨동무가 만나다

1993년 결혼

1995년 중대 수장무대 건너편 식당마당에서 나들이. 진영 백일 쯤.

랬지. 힘들어하니까 미숙이가 히말라야라

산 같은 것이거든. 사회적경제는 지역주

도 가보라고 하더라고. 거기서 며칠 있으

민들이 스스로 사업체를 만들고 그 고리

면서 마음을 다잡았어. 사는데 힐링이 필

를 통해서 마을의 가치를 변화시키는 것

요하긴 해. 그리고는 서울 강북구에 가서

이지. 사업체니까 당연히 뭔가를 팔아야

건강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를 같이 했어. 3

하잖아. 그러려면 신뢰관계가 형성되어야

월에 시작해서 12월에 끝났어. 그 다음에

하고, 합작하여야 하고.

는 2013년 박원순 시장이 사회적경제지 원센터를 만들었는데 또 의료사협연합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가.

추천으로 결합해 2015년까지 한 2년 일했

따복공동체지원센터는 마을활동, 사회적

지. 이때는 신당동 처갓집에서 문간방살

경제 하셨던 분들이 동네 중심, 가치 중심

이를 했어. 그리고는 따복이 만들어져서

으로 변화하자고 하는 운동이야. 사회적

그쪽으로 옮긴 거야.

가치 지향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이면서 동 네 지역 중심적이지. 고민하는 거야. 커뮤

안성은 의료생협이었다면 따복은 마을공동체,

니티를 중요시하면서, 작은 동네 작은 사

사회적경제 일 아닌가.

람들의 목소리, 아이템을 찾아내고 지원

따복은 마을 영역과 사회적경제 영역을 같

해야 해. 경기도가 엄청 크잖아. 그래서 본

이 하는 거야. 마을의 관계를 회복하고 사

부는 의정부에 있고, 남부사무소는 수원

람냄새가 나는 마을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

에 있어. 이 두 곳을 왔다 갔다 해.

이고, 그런 사례들이 서울의 마포구 성미 끈덕지게 어깨동무

82


모습이 매우 신산했다. 대체 얼마나, 어떻게 키워 야 나무로 자랄 것이며 나무 구실을 하기는 할 것 인가. 이 여린 것들이 엄동설한과 폭우를 어찌 견 뎌낼 것인가 말이다. 그때 그가 검은 호스를 등으 로 지고와 우리 앞에 턱 내려놓았다. “50년 뒤를 보 라고, 숲을 이루고 있을 테니!” 그는 10년이 아니라 에버랜드 갔을 때

30년, 50년을 내다보고 있었다. 지금 그 나무들은

10년 뒤엔 어떤 모습일까.

어디로 갔는지 얼마만큼 컸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놀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 난 놀고 싶은데.

그가 키워온 것들이 어느새 돌이켜보면 쑥쑥 자라 나 있으리라는 믿음만 그곳에 있을 뿐.

놀고 싶다고? 노는 DNA는 없는 것 같은데.

진짜 가족의 최소한의 것이 유지된다면 놀 고 싶어. 사회복지사 1급 자격도 있고, 대 학원도 마쳤어. 내가 재주가 많기도 하지 만 재주가 아주 없기도 해. 재밌게 뭐 그 런 다른 협동조합을 또 만들고 있지 않을 까. 공동체와 관계된 그런, 어려운 부분들 을 막 긁고 있지 않을까. 아파트 하나를 변 화시키는 것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때는 그림도 그리고 싶고. 2007년 즈음 안성 박희성의 집을 찾은 적이 있다. 그는 이른 아침 우리를 어느 언덕배기로 몰고 갔 다. 비옥한 땅은 아니었다. 거기서 어린 묘목을 키 우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엔 무슨 나무막대기를 꽂아 놓았나 했다. 한 뼘 남짓 될 만한, 나무랄 것도 없는 나무들이 삐뚤빼뚤 줄지어 박혀 있었는데 그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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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옥상 위에 그들, 우리들 <옥상 위에 버마>를 찍은 고두현 감독을 만나다 인터뷰·글

강곤

그를 만난 날은 공교롭게도 12월 18일, 세계 이주

고두현은 그러한 이주민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민의 날이었다. 광화문에서는 ‘사망 이주노동자 추

<옥상 위에 버마>를 찍은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이

모제’와 함께 고용주의 허락 없이는 회사를 옮길

영화에 등장하는 버마 이주민 또한 불법체류자, 혹

수 없게 한 고용허가제 폐지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

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렸다. “이주의 문제는 노동만이 아니라 주거, 여성,

이미지, 이를테면 언제 단속에 걸릴지 모를 불안과

결혼, 아동, 교육, 의료, 교육 등 한 사람이 살면서

초조, 산재와 체불임금에 대한 분노, 무수한 차별

겪게 되는 모든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 사실을

을 받으며 겪는 고통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하루

당시에 나는 몰랐다. 그리고 20년이 지나서야 이

일과를 마친 뒤 동료와 어울려 술을 마시고 휴일이

제 겨우 한국사회가 깨닫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면 애인이나 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는 그들의

이주민 인권 문제에 20여 년을 매달리고 있는 활

일상이 카메라에 담겨 있을 뿐이다.

동가이자 연구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한 세계가 오는 것이란 어느 시인의

이주민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말도 있지 않은가.

“일단은 이주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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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발언하고 있는 고두현 감독

음의 풍경을 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

다, 그런 마음이었죠.

어요. 둘이 지하철로 마석까지 촬영을 하

이 작품이 제 두 번째 작품이고 첫 번째 작

러 갔다 왔다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

품은 <요요와 나>라는 작품이에요. 친구

눴죠. (<옥상 위에 버마>는 고두현, 오현

중에서 요요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어

진 두 감독의 작품이다) 실제로 대대적인

요. 제 나이 또래 친구들이 다들 가지고 있

단속이 발생하지 않는 상황이고. 예전에

는 고민이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 수

는 단속의 부당함, 이주노동자들이 노조

있을까 하는 것이죠. 특히 요요로 거리 공

를 결성해서 투쟁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

연을 하는 건 더 더욱 마이너한 거잖아요.

가 많았지만 그건 10년 전 상황이죠. 그리

그 친구들이 홍대와 상암동에서 거리 공연

고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사는 동안 어떻

을 했는데 마지막으로 본 고장이라고 할

게 살고 있는지, 사람들이 그 과정 속에서

수 있는 영국 에든버러에 가서 공연하고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 겪고 있는지

정리를 하자, 정리하고 취업하자면서 에

담아서 그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

든버러로 갔어요. 그때 마침 제가 유럽에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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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였죠. 그래서 그 친

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지 연구를 하고

구들이 부탁해서 기록을 하게 되었죠. 저

계세요. 그래서 수업에서 답사를 많이 가

도 친구들이 정말 그만둘까 궁금했어요.

요. 아시아를 다룬다고 해서 다른 아시아

그 전에는 막연히 영상 찍는 것을 좋아했

나라를 가는 게 아니라 한국 안에서 아시

지만 어떤 영상을 만들지에 대해 깊은 고

아를 발견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주민들

민이 없었죠. 그런데 찍으면서 현실 속에

이 사는 마석에도 가게 되었죠.”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그 고민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

한국에서 미얀마로, 미얀마에서 만난 한국

는지, 그런 변화들, 어떤 선택을 하고 그

마석 가구단지는 한국의 대표적인 이주노동자들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되게 재미있게 느

이 모여 사는 곳으로 10여 년 전에는 출입국관리소

껴지더라고요.”

의 집중 단속에 대항해 이주노동자들과 고용주들 이 바리게이트까지 치며 저항을 했던 곳이다. 이제

신방과 06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학교에서도 대안

는 많은 이들이 떠난 그곳에서 다큐멘터리에 등장

미디어 쪽에 관심을 가졌으나 학부에서의 커리큘

하는 버마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럼은 미국의 양적 연구 중심이어서 갈증이 컸다. 2013년 학교를 졸업 한 뒤 <요요와 나>를 찍으면

“처음에는 2년차, 3년차 친구들을 만났는

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다

데 한국어가 서툴러서 서로 말이 안 통하

음해 한국예술종합대학에 다큐멘터리 전공으로

니까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 힘든 거

입학을 하게 되었다.

예요. 그래서 고민이었는데 그 친구들도 고민이었나 봐요. 계속 한국에서 대학생

“한예종에 전규찬 선생님이라고 계신데

들이 오는데 뭔가 할 이야기도 없고. 몇 번

그 분의 연구 주제가 아시아예요. 지금까

만나다보니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지 다큐멘터리가 국내 문제를 많이 다루

한 친구가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영화에서

고 있지만 사실 문제가 국내에만 국한되

토미라고 문신한 형이 나오잖아요. 그 형

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아시아로 확장

을 소개시켜준 거죠. 그 형이 와서 너무 유

해서 한국 안의 문제가 어떻게 다른 나라

창한 한국말로 “너무 고맙다, 이야기 많이 끈덕지게 어깨동무

86


<옥상 위에 버마> 스틸컷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 온

기록되지 않고, 여기에 살다 갔는데 몰래

지 오래된 분들을 만나게 된 거죠. 그때 만

들어왔다가 이렇게 조용히 떠나버리는 게

났던 분들 중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았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이 분들

만 18년 동안 살다 저희를 만나고 한 달 정

의 이야기를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도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어요.

찍게 되었죠.

그 분을 공항까지 배웅을 갔거든요. 공항

주말마다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술도 같

에서 출국 등록을 하고 나니 바로 공익 같

이 마시고 하며 작업을 하던 중에 또 한 분,

은 사람이 강제로 끌고 간 것까지는 아닌

쏘라는 분이 고향으로 간다고 해요. 여기

데 그대로 출국장으로 보내버리더라고요.

서 10년, 15년 살다 간 사람이 고향에 돌

저희하고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전화로

아가면 어떻게 정착할지 궁금하더라고요.

작별인사를 하며 들었던 생각이 저 사람

그것도 또 하나의 이주의 과정이란 생각

도 18년 동안 한국에 머물렀던 사람이고,

이 들어서 따라가기로 했죠. 촬영이랑 시

2002년 월드컵 때 어땠다는 등 이러저러

기가 잘 맞아서 가기 전 고민도 들을 수 있

한 기억도 많이 이야기했는데, 아무것도

었고, 버마로 돌아가서의 생활도 담을 수

이내창기념사업회

87


어깨동무가 만나다

있었고. 6개월 뒤에 다시 한 번 찾아갔죠.”

에 다니시다가 IMF 때 명예퇴직을 하셨

다큐멘터리에는 그 당시 총선의 열기로 후끈 달아

고. 그 뒤로 인테리어를 하셨어요. 어머니

오른 버마의 모습, 유세 현장에서 아웅산 수지의

는 주부셨다가 아버지 명퇴 후에는 부업

민주민족동맹(NLD) 지지자들 틈에 섞여 있는 쏘

들을 하셨고. 아버지는 한국노총 소속이

의 알듯 모를듯 한 표정이 담겨 있다. 버마는 한국

어서 그런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편이

의 87년 6월 항쟁 다음해인 88년 8월에 민주항쟁

셨죠. 그렇지만 아무래도 노동자들의 도

이 벌어졌었다. 한국은 절반의 성공이었으나 버마

시다보니까, 특히 IMF 때 기억이 크죠. 그

는 처참하게 패배했고 근 30년만에 다시 한 번 민

게 분기점이죠. 집안 사정이 너무 많이 변

주주의의 일대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했으니까요. 아버지 같은 경우는 명예퇴 직을 해서 퇴직금도 받아서 그나마 가게

“저희도 찍으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쏘

를 차리고, 상황이 엄청 좋지는 않았지만

형 같은 경우 한국 정치에 관심이 매우 많

유지가 됐는데 친척들, 삼촌들, 작은아버

더라고요. 자기 나라의 경제 사정이 나빠

지, 이런 분들이 작은 하청 기업에 정규

진 것은 정치의 실패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직으로 다 가정을 잘 꾸리시고 그랬는데

많이 했죠.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애

IMF 이후 상황이 안 좋아졌어요. 그런 것

정 같은 정서가 있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을 겪으면서 사회나 정치, 경제가 개인의

까 더 가까워진 측면도 있죠.”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아요. 또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다큐 감독 이전에 고두현

평준화시기였죠. 정말 저한테는 행운이라

그는 노동자 대투쟁을 한 해 앞둔 86년 울산에서

고 생각하는데, 저는 공립 고등학교를 다

태어났다. 그는 물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한국 사

녀서 다양한 계층이 섞여 있었고 그런 친

회 노동운동이 언 땅을 깨부수고 솟아나던 시기였

구들이 지금 졸업하고 울산 공장에서 일하

다. 이야기는 <옥상 위에 버마>에서 인간 고두현으

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그런 친구들과 지

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금도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이 친구들이 어 떤 고민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되죠.

“아버지는 지금 SK에너지로 바뀐 유공

대학 진학할 때는 특별히 구체적인 뭐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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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던 것이 아니라 막연하게 어릴 때부터

“학교 안에서 대안적 활동으로 자유인문

방송이나 영화 보는 걸 좋아했으니까 신문

캠프를 하면서 기념사업회를 만나게 되었

방송학을 배워보고 싶었죠. 그런데 다큐

죠. 그때 이내창 선배 25주기이면서 이장

멘터리를 하게 된 것은 당시 학교 분위기

도 겹쳤을 때였죠. 기념사업회에서 재학

가 영향을 많이 미친 것 같아요. 06학번인

생들이랑 뭔가를 하고 싶다, 그런 고민이

데 학생회, 이런 것의 끝물이었거든요. 제

있었던 것 같아요. 80년대 이내창 열사 또

가 학생운동을 하거나 학생회를 했던 것은

래 선배들이 주로 활동을 많이 하시잖아

아니고 주변에 그런 친구들이 있었죠. 새

요. 2000년대 이후 후배와 연결고리가 많

내기배움터에 가거나 대동제도 하고. 다

이 없으니까 기념사업회도 한 동안 침체기

같이 어울리면서 운동하는 친구를 지지하

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준

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2008년 두산이 들

비할 수 있는 것 해보자고 해서 8월이 되

어오고 나서 급속도로 대학이 개인화되기

어서 이장식을 영상으로 기록도 하고 그러

시작했어요. 제가 2008년도 1학기를 다니

다 운영위원으로 제안을 하셔서 하게 되

고 고향에 가서 공익근무를 하고 복학을

었죠.

했는데 학교가 구조조정이 진행하면서 대

이장식을 하면서 매우 좋았어요. 제 후배

학 안의 공동체성이 와해되고. 그런 과정

들도 많이 참여했고. 이내창 선배가 돌아

에서 내가 뭔가 미디어를 하든 무엇을 하

가신 분이잖아요. 내가 죽은 사람하고도

든 영향력 있는 것을 해보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인연을 맺을 수 있구나, 그런 생각

내 삶이 사회정치적인 것과 관련이 없을

을 했거든요. 그리고 한예종을 막 들어갔

수는 없구나, 시각이 바뀐 거죠.”

을 때였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고 민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신방과 나와

그는 올해부터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이 되었다. 솔

서 방송국 들어간 선배들을 많이 만나봤는

직히 흑성동 캠퍼스를 졸업한 기념사업회 회원, 게

데 좋으신 분들도 있지만 별로 인 선배들

다가 운영위원이라. 그가 기념사업회를 바라보는

도 많이 만났어요. 너무 마초적이고, 보수

시선이 궁금해졌다.

적이기도 하고. 그런 분들을 보면 내가 저 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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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옥상 위에 버마> 스틸컷

죠. 기념사업회 선배들을 만나면서 이 선

게 물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배들은 어쨌든 이내창이라는 사람 때문에

해보죠. 지금은 다들 갓 취업해서 정신없

아직까지도 고민을 계속 하면서 사는 것

을 때니까 어렵고.

을 보면서, 저렇게 나이 들면 되게 좋겠다

다음 작품이요? 졸업작품을 찍어야 하는

는 생각도 하죠.

데… 이주 문제는 아니고요. 현대사를 생

나이 차이로 이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

각하고 있어요. 최루탄을 통해서 한국 현

지만 제가 독립 다큐를 하고 있어서 공통

대사를 비춰보는 것? 4.19 때 김주열 열

점을 더 많이 느껴요. 한살림에 계신 선배

사가 최루탄을 맞고 돌아가셔서 4.19 혁

도 있고 예술 계통에서 활동하시는 분들

명이 촉발된 것이잖아요. 그 최루탄은 어

이 많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선배

디서 왔을까, 궁금했어요. 2014년쯤인가

들이 많아서 큰 이질감은 못 느꼈어요. 좀

한국에서 최루탄을 수출한다는 이야기

장기적으로 보면 저도 나중에 내 또래 친

를 들었죠. 거기서부터 역사적으로 거슬

구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이내창 선배와 그

러 올라가보니 김주열 열사까지 갔죠. 그

또래 선배들에게 뭔가 물려받고 후배들에

최루탄은 이승만 정부에서 미국 원조금으 끈덕지게 어깨동무

90


로 산 것이더라고요. 3·15부정선거 이전 부터 최루탄 사격연습을 했거든요. 80년 대에는 최루탄 생산 업체가 삼양화학이라 고 한영자 사장이 납세 1위에 오를 정도 였죠. 1998년 김대중 정부 때부터 최루탄 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는데 최루탄 수출 문제는 김영삼 정부 때 국정감사에서 문 제가 되기도 해요. 이제는 최루탄만이 아 니라 살수차, 경찰장비, 차벽, 이런 것을 한국에서 생산해서 판매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것과 연결해서 다뤄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어갈지는 계 속 고민이에요.”

흥미롭다. 서른두 살.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 도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니 매우 고단한 조합이지 만 이 또한 흥미롭다. 작품 속 옥상은 쓸쓸하고 황 폐했지만 한편으로 따뜻한 인간의 온기가 흐르는 공간이었다. 그의 옥상의 풍경도 그러하길.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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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이수정의 국악이야기 두 번째

저항의 노래: <경복궁타령>과 판소리 열사가 이수정

지금으로부터 약 150여 년 전 광화문 거리에는 <경복궁타령>이 울려 퍼졌다. 혹 모르는 노래라 할지 모르지만 <경복궁타령>은 대부분 학창시절에 배웠던 노래이다. 노랫말을 보면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산천이 밝아온다. 에----얼럴럴 거리고 방아 로다. 을축사월 갑자일에 경복궁을 이룩하세. 에----얼럴럴 거리고 방아로다. 도편수의 거동을 봐라 먹통을 들고서 갈팡질팡한다. 에----얼럴럴 거리고 방아로다. … 조선 여덟도 유명한 돌은 경복궁 짓는데 주춧돌감이로다. 에----얼럴럴 거 리고 방아로다. 우리나라 좋은 나무는 경복궁 중건에 다 들어간다. 에----얼럴럴 거리고 방 아로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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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역사가 언제나 끝나 그리던 가속(家屬)을 만나나 볼까. 에----얼럴 럴 거리고 방아로다.

<경복궁타령>은 고종 2년(1865)에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 중 건 공사를 시작할 무렵 만들어졌다. 메기는 소리는 공사 과정을 설명하고, 받는 소리 는 반복하는 구조를 가진 전형적인 민요형태이다. 당시 대원군은 경복궁을 지을 재 원을 마련하고자 원납전을 발행하여 경제를 파탄에 빠트리고, 전국을 뒤져 쓸 만한 나무를 베어왔으며 힘깨나 쓰는 장정들은 곳곳에서 부역에 시달렸다. 경복궁을 짓 느라 벌어진 국정농단 사태가 <경복궁타령> 노랫말에 투영되었다.

<경복궁타령> 1절은 “남문을 열고 파 루를 치고 있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서울에서는 통행금지 해제를 위해 종 각에서 파루(罷漏)를 33번 치고 나서 대문을 열었다 한다. 현대를 살고 있는 「영건도감감동좌목」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867년 근정전 중 수공사에 참여한 156명의 관리 이름목록. 공사담당 기술자와 인 부의 이름은 없지만 기술 책임자의 이름은 남겨두었다.

우리는 이 노랫말에서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하지만, 문이 이미 열렸는데 파 루를 치고 있는 상황은 당시로서는 나

라의 기강이 무너진 엄중한 상황이다. 문란해진 기강을 한마디로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2절의 노랫말에도 ‘갑자을축병인정묘…’의 순서로 구성된 하늘과 땅의 세계 관을 ‘을축사월 갑자일’로 뒤바꾸어 배치하였다. 당시가 을축년(1896)이어서 이 말 이 쓰이기도 하였지만, 갑자와 을축이 뒤바뀐 것은 기본이 전도된 형국을 묘사한 것 이다. 노랫말 곳곳에서 경복궁 중건의 무리함을 신랄하고 의미심장하게 풍자하고 있 다. 그런데 음악은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경쾌하고 발랄하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되 너무 무거워서 힘겨워하지 않고, 슬프되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아서 희망적이다. 민 요는 이렇게 2016년 광화문과 매우 닮아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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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판소리 열사가와 박동실 1930년대 이후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음악에 대한 검열이 있었다. 그 시작은 대개 이러하였다. 판소리 단가 중 <진국명산>은 매우 유명한 곡이다. 1930 년대까지 송만갑·이동백·박기홍·박녹주·장판개 등 쟁쟁 한 판소리 명창들은 각각 유성기 음반을 취입할 정도로 인 <박동실> (사진출처 : 송방송, 「한겨 레음악대사전」) 한국전쟁 이후 월 북하여 북한에서 공훈배우와 인민 배우 칭호를 수여받았다.

기가 높았다. 진국명산은 “진국명산만장봉(鎭國名山萬 丈峯)이요, 청천삭출금부용(靑天削出金芙蓉)이라~~~” 이라는 노랫말로 시작하여 곡명이 <진국명산>이다. 노랫

말은 한양 주변을 둘러싼 산천의 아름다움과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내용인데, 이것이 애국심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나아가 <진국명산>을 부르는 행위만으로도 독립운동으로 확대 해석하였다. 공연장에서는 판소리 창자를 감시하였고 판소리를 일본어로 부르라고 강요하거나, 일정한 시험을 통과하여 기예 증(技藝證)을 발급받아야 무대에 설 수 있게 하는 등 억압이 있었다.

열사가.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내창 열사를 부를 때와 같은 열사(烈士)를 의미 한다. <윤봉길열사가>·<이준열사가>·<유관순열사가>·<안중근열사가> 등은 열사의 일 대기를 상세히 알려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과 반일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한 창작판소 리다. 박동실 명창에 의해 해방 전후한 시기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해방 직후에는 이 런 열사가류의 창작판소리가 유행되어 새로운 곡이 쏟아져 나왔다. 이순신·권율·김 좌진·전봉준·민영환의 일대기와 일제에 의해 억눌렸던 역사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반 만년역사가> 같은 곡도 새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열사가는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털 어내고 자긍심을 세우는데 일조하였기 때문에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열사가 류의 판소리는 1960년대까지 판소리 창자가 공연에서 짤막하게라도 부르는 레퍼토리 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판소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살았다. 1961년 군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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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권 집권 후 굴욕적인 한일협정 및 한일국교정상화를 실시하면서, 군사정권은 열 사가를 암묵적으로 공개된 자리에서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군사정권의 추악 한 태생은 역사와 열사를 언급하는 것이 불편하였나 보다. 따라서 열사가는 명창 한 승호·김동준·장월중선·김소희에 전해졌지만 1960년대 이후 거의 부르지 못하다가 1980년 무렵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어 알려졌다. 우리가 알지 못하였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군사정권의 불랙리스트는 이런 식으로 탄생한 것이 아닐까. 다시, 남문을 열고 파루를 쳐야 한다 판소리 같은 전통 음악은 창자를 거치면서 다듬어져 완성되어가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적으로 성장해야 될 그 시기에 열사가 판소리를 처음 만들었던 박동실 은 월북하였고, 남한 정권에서는 부르지 못하게 하니 다듬어지지 못하고 날것인 상 태로 남게 되었다. 열사가의 사설은 열사의 삶과 사건을 골격으로 하고 영웅적 면모와 박진감 있는 상황 설명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곳곳에 ‘대한독립만세’가 등장하며 열사의 죽음에 대한 비분강개한 감정이 드러나 있다. 장단 구성도 아니리(설명조 가창방식)가 많 고, 비분강개한 감정을 중모리(보통빠르기 정도의 박자)정도의 빠르기로 표현하였 다. 사설이 즐겁고 재미난 내용이 아니라 창법도 다채롭지 않고 음악적 간결함보다 는 시의성과 사실성을 위주로 표현하여 거칠다.

[아니리] 이렇듯이 슬퍼하며 고향으로 돌아오시고 왜적은 일로인하여 고종을 양위시켜 융희년으로 고치고 약한정치 실시되어 전경찰권을 일본이 손에 쥐 니 민심이 더욱 소란하고 친일파 이완용(李完用)과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 원망이 극도에 다다랐을 제, 그때에 이등박문은 대한을 장악해 넣 고 만주를 손댈양으로 노국대신과 할빈에서 만나자는 조약이 있었구나 <안중근열사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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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모리] 군종속에서 어떤 사람이 번개같이 일어서서 백천 앞으로 우루루루, 폭탄을 던져. 후닥툭탁 와그르르르 불이 번뜻 백천(白川義則,시라카와)이 넘 어지고 중광((重光葵,시게미쓰)이 꺼꾸러지고 야촌(野村吉三, 노무라)이 쓰 러지고 시종관이 자빠지다 혼비백산 오합지졸이 도망하다 넘어지고 뛰어넘 다 밟혀죽고... [아니리] 손을 번쩍 들다가 왜놈 헌병에게 붙들렸구나. “허나 아무렇든 나 할 일 다 했으니 네놈들 맘대로 하여라.” 만족한 웃음을 씩씩하게 웃고 기운차게 “대한독립만세”를 불러노니 삼천리 상응하여 잠들었던 동포들은 깜짝 놀래 여 일어나고...이차대전 연합군이 승리하니 일본이 패망하야 을유 팔월 십오 일 날 대한이 해방되었구나... <윤봉길열사가> 중에서

열사가는 독립운동가의 삶과 대중의 열망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노래하였으나 억 압 속에 잊혀졌다. <안중근열사가> 속에 등장하는 이완용은 호의호식하며 천수를 누 리다 죽었고, 그 후손 이병도(식민사학자), 증손자 이장무(전 서울대 총장, 현 대한민 국학술원회원, 현 카이스트 이사장), 증손자 이건무(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전 문화재 청장)까지 안락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은 일 제강점기에 친일한 인사 4,389명을 잊지 않도록 기록해 두었다. 이 블랙북의 역할은 기록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이번엔 제대로 파루를 치고 남문을 열어야 한다.

이수정_1985년 중앙대 국악과에 입학하였다. 2015년 『이왕직아악부의 조직과 활동』이라는 논문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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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락이의 <연극으로 세상읽기>

블랙리스트와 블랙텐트, 그리고 타인의 고통 김경락

최순실, 박근혜, 그리고 김기춘, 조윤선의 공작에 의해 블랙리스트가 탄생되었고 결국 ‘블랙텐트’라는 이름의 극장이 광화문 광장에 세워졌습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 들은 생략하기로 하지요. 블랙리스트로 인해 관객과 만날 길이 막혔던 공연들을 블 랙텐트를 만들어 공연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술인들이 광화문광장에 검은색의 천 막극장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여러 공연들이 상연되고 있고요. 유심히 지켜보신 분 들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상연되는 공연들 대부분이 일반극단들의 작품입니다. 소 위 ‘일반 극단’들입니다. 다시 말해 8,90년대 운동권문화를 주도했던 민중문예극단 들이 아니란 이야기죠. 일반극단들이 더 열심입니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예술인들, 특히 연극인들이 무척이나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예술인들이 실천행동을 보 여주셨는데요(실천행동이 없으면 분노했다 말할 수 없겠죠), 그 중에서도 연극인들 이 맨 앞에 서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 봅 니다. 박근혜정권의 블랙리스트 이전에는 과연 블랙리스트가 없었을까요? 그 누구도 없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순간 이해가 안 되는 부 분이 있습니다. 바로 블랙리스트의 존재죠. 말이 블랙리스트지 비슷한 유형의 명단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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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박근혜의 블랙리스트 이전에도 여 러 형태로 존재했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 시는 대다수가 관할 경찰서 정보과에 이 름을 올렸을 것이고, 과거의 안기부 현재 국정원의 눈길을 받았을 것이며, 여러 정 보기관으로부터의 사찰을 경험했을 것입 니다. 심지어 쫓겨 다니거나 손발이 묶여 영어의 세월을 보내기도 하고, 고문을 받 기도 하고,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지요. 왜 그때는 블랙텐트가 만들어지지 못했 을까요? 블랙텐트의 탄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뒤늦게나 마 예술인들의 자각을 환영하고 적극적 으로 응원하고 동참해야겠지요. 이승만 이 있었기에 박정희가 있을 수 있었고, 박 정희가 있었기에 전두환·노태우가 있었 고, 신자유주의의 김대중·노무현이 있었 고 이명박근혜정권이 그 뒤를 이었습니 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 동소이합니다. 오히려 저들은 점점 더 치 밀해지고 간교해지고 있습니다. 근본적 인 문제의 해결 없이는 제2, 제3의 박근 혜는 언제든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 다. 예술인들이, 연극인들의 근본적인 자 각 없이는 언제든지 검은 색 천막을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는 얘기지요. 80년대, 90년대 수많은 민중예술가들이 끌려가고 잡혀가고 목숨을 잃을 때는 왜 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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랙텐트를 만들지 못했을까요? 내 일이 아니어서 그랬을까요? 예술가 개개인의 준 비정도가 미약했기 때문일까요? 제발 블랙텐트가 ‘내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만들 어진 것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블랙텐트가 탄생하게 된 원인의 첫 번째는 당연히 박근혜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책임을 박근혜에게 돌린다면 그것만한 책임 회피도 없을 것입니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평소에 예술가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가 해왔던 이야기들, 즉 작품들이 박근혜 일당에게 동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또 다른 박근혜의 탄생을 조장하고 있었던 것은 아 닌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대중들과 이야기합니 다. 더불어 자신이 한 이야기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지도 모릅니다. 나는 중립적인 이야기만 해왔다고. 그러 나 이명박근혜정권의 종편 방송을 보면서도 여전히 중립적인 문화가 존재한다고 믿 는다면, 그것은 박근혜는 절대 잘못이 없다고 믿는 일부 어르신들과 다를 것이 없 습니다. 물론 블랙텐트가 이번 정국을 헤쳐 나가는데 커다란 도움이 주고 있음을 믿어 의 심치 않습니다. 또 블랙텐트를 계기로 많은 예술가들이 자각과 진보의 길로 나갈 것 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자신들이 생산해내는 작품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진일보한 고민이 필요하며, 중립적이라고 주장하는 문화가 결국 누구를 위하여 봉 사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미국의 글쟁이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란 저서에서 예술작품에서 다루는 현 실이 그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이 연민 과 동정은 현실을 타파하고자 하는 실천행위를 포기하거나 무디게 만든다고 주장했 습니다. 예술작품이 현실 문제를 다룬다고 해서 반드시 현실을 개혁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란 얘기겠지요. 이번 세상읽기에는 비교적 주장이 좀 강했습니다. 눈살을 찌푸리실 분들도 분명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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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계실 텐데요. 그만큼 작금의 현실이 암담하다는 증거 정도로 이해해주셨으 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연 두 개 소개하고 물 러갈까 합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블랙 텐트의 공연소개겠지요. 일단 2월까지 정해져있는 공연계획입니다. 박근혜가 퇴진할 때까지 공연은 계속 된다고 하 니 한번쯤 벗들과 손잡고 방문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두 번째 공연소식은 우 리 극단 공연입니다. 제목은 <윤동주 특별사면>입니다. 시인 윤동주와는 아무 관계 없는 내용의 코미디입니다. 3월 23일부터 시작하여 4월 16일 막을 내립니다. 제가 쓰고 제가 연출합니다. 출연을 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전화주시면 예약해드립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김경락_88년 중앙대 연극학과에 입학했다. 현재 극단 <새녘>의 대표로 활동 중이며, 배우로서의 그의 이름은 진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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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이의 <데이터사회의 인간학> 혁이의 [데이터사회의 인간학]은 다음 순서로 계속 연재됩니다. 1.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세상에서 우린 행복할 수 있을까? 2. 알파고의 이해와 활용 가능한 분야 3. 빅데이터의 이해와 분석의 예 4. 기술발전을 삶의 질로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

알파고가 바꿀 미래, 누가 수혜자가 될 것인가 혁이

얼마 전 건강검진을 했다. 언제나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쪽과는 꽤 거리가 있 는 성격인지라 검진 결과는 화려했다. 뭔가에서 높은 성적을 받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이번 건강검진에서는 전 영역에서 고루 꽤 높은 등급을 받았다. 특히 혈 압, 고지혈, 비만도에서는 영광스러운 삼관왕을 차지했지만 나는 그 영광을 스트레 스에게 돌렸다. 내가 이번에 받은 검진 중에는 초음파 지방간 측정이 있었다.의사가 배에 젤을 바 르고 스캐너를 문지르는 그 어두운 공간에는 누워 있는 나와, 앉아 있는 의사, 그리 고 GE에서 만든 모니터가 있었다. 모니터를 보는 나에게 의사는 친절하게 이건 간 이고, 저건 콩팥이고 등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의사가 간이라고 한 그때에 모니 터에 보인 것은 ‘극한직업’에서 본 어군탐지기의 화면이었다 또 의사가 콩팥이라고 했던 시점에는 분명 멸치 떼 같은 것이 지나가고 있었다. 모든 의학분야가 마찬가지이겠지만. 내가 앞서 받은 초음파검사 등의 영상의학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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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에서는 의사의 전문성과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뭔지도 모를 화면, 움직이는 흐릿한 영상에서 초기 병변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찾아낸 병변 의 형태를 판정하고 위험도를 진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알파고에 관한 글을 기대했는데 왠 뜬금없는 검진과 영상의학에 대한 이야기인지 의아해하실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바둑을 두는 인공지능으로 알고 있는 알파고가 가장 빨리 응용될 수 있는 분야로 앞서 이야기한 영상의학분야를 꼽는 과학자가 많 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그 연관성을 이해 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면 정확성 을 담보하는 이런 전문분야에서 왜 과학자들은 바둑이나 두는 알파고가 더 뛰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 이제 그 이유를 알아볼 차례인 듯하다.

알파고를 만든 데미스 하사비스는 ‘롤러코스터 타이쿤’이라는 게임을 개발한 인물 이다. 게임개발자에서 인공지능 개발자로의 변신과 그 성과가 놀랍기도 하지만 자 신이 만든 인공지능을 구글에게 판매한 것 그리고 그 시험과 홍보무대로 바둑이라 는 게임을 택한 것 등등 그의 천재성은 오히려 사업가적 수완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에 하사비스가 알파고를 바둑게임머신으로 세상에 데뷔시킨 것은 하 사비스의 인공지능의 이해, 게임의 이해, 그리고 대중의 이해를 잘 융합한 말 그대로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알파고가 바둑이라는 게임에서 프로기사들에게 승리한 것은 체스게임에서 인간 을 이기고 챔피언이 된 디퍼블루(세계 체스 챔피언을 완전히 꺾은 인공지능은 1세대 딥블루가 아닌 2세대 디퍼블루였다)와는 완전히 다른 맥을 가진다. 기존 게임형 인공지능에서는 얼마나 빠른 계산이 가능한가가 성능평가의 지표였 다. 즉 오목이건 체스이건 경우의 수를 얼마나 빠르게 연산하는가 그리고 이 연산의 결과에서 승률이 높아지는 최적화된 수를 얼마니 빨리 결정하는가가 결국 승리를 하 기 위한 핵심요인이었던 것이다. 체스 챔피언을 이긴 체스게임머신인 디퍼블루는 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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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2억 건의 연산을 수행할 수 있었고 따라서 디퍼블루의 승리는 인공지능의 완성도 를 높였다는 평가보다는 연산속도를 높인 기술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알파고가 도전한 바둑은 기존에 인공지능의 시험무대였던 체스와는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한 분야였다. 그것은 경우의 수가 체스와는 다르게 너무나 많다는 점 때문이었다. 알파고가 승리하기 위해 계산하여야 하는 수는 대략 10에 768승 (체 스의 경우 10에 120승, 해당 수치는 정확한 수치는 아니며 룰에 따라 경우의 수는 달 라진다)에 이르는데 만약 이를 기존 딥퍼블루가 접근한 방식으로 처리하려면 초반 8 수까지의 계산만 해도 4만 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이런 식이라면 디퍼블루와 바 둑게임은 말 그대로 도끼자루가 썩는 게임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의 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 기존 게임 형 인공지능에서는 연산에 제한시간을 걸어두고 강제로 연산을 종료하고 그때까지 연산된 결과에서 최적의 수를 찾는 방식을 활용하거나 모든 수가 아닌 무작위 또는 적절한 방법으로 발췌된 경우의 수에서 최적의 수를 찾는 방식을 활용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으로 최적의 수를 두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좋은 수가 발췌되는 행운 (?)이 필요하고 이 때문에 한 수 한 수가 승패를 결정할 수 있는 프로기사와의 대국에 서는 이 방식을 쓴다면 승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알파고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했기에 세계 최정상급 프로기사들을 이 길 수 있었을까? 알파고는 두 가지의 새로운 접근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 첫째는 패턴 학습을 통한 경우의 수 줄이기 방법이었다. 알파고는 바둑에 서 존재하는 기보에 집중했다. 모든 바둑은 기보를 남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방대 한 양의 기보가 채록되어 있고 정상급 프로기사들의 대국 기보는 수십 년 간의 기록 이 데이터베이스로 존재하고 있었다. 알파고는 이러한 정상급 기보를 최소 16만개 이상 학습했다고 전해진다.

알파고의 학습은 확률적 분석 알고리즘에 기반한다. 먼저 알파고는 기존 수많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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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보에서 두지 않는 수를 확률적으로 분석했다. 예를 들어 바둑의 첫수에서 바둑판 의 모서리의 끝점에 둔 기보는 거의 없으니 첫수에서 이 경우의 수를 배제하면 계산 하여야 하는 기본적 연산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이런 식으로 알파고는 첫수, 둘째 수로 수가 더해질 때마다 기존 학습된 기보에서 확률적으로 두지 않는 수 를 배제하고 확률적 개연성이 높은 수 위주로 계산함으로써 한정된 리소스를 효율 적으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방법과 함께 해당 수를 두었을 때 승리할 수 있는 확률도 동시에 계산하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최적화된 수를 찾 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학습방식을 교사학습 (supervised Learning)이라 한다. 이 방식은 인간 이 누군가에게 방법론을 교육받는 형태와 유사성이 꽤 높다. 그동안 우리가 경험(기 보 학습에서의 확률배제)에 의한 직관(해당 수를 착수했을 때의 승률)이라 말해온 것 이 적어도 바둑이라는 게임 영역에서는 알파고에 의해 로직화되었다고 생각해도 좋 을 것 같다(지난 호 <어깨동무>에 인간과 기계가 다른 점이 있는가? 인간의 생각은 로직으로 재구현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상기해 주시기 바란다).

아무튼 이러한 학습에 의한 확률적 접근을 방식을 통해 알파고는 인간의 게임인 바둑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교사학습에 의한 확률적 접근에서도 문제점은 있다. 그것은 바로 따라두기의 문제점이었다. 학습된 기보에서 바둑의 수를 확률적 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알파고가 교사학습의 방식만을 활용한다면 최적화된 수는 결 국 기존 기보를 따라 하는 형태에 지나지 않게 되고 어떠한 기보를 학습했고 누구 와 대결하는가에 따라 승패의 확률은 현저히 차이가 나게 되는 한계점을 지니게 된 다. 알파고가 고수를 이기려면 이 한계점을 보완해야 했다. 그래서 찾은 히든카드는 강화학습(딥러닝, 기계학습이라는 단어를 같은 맥에서 이해하셔도 좋겠다)이었다. 앞서 인간을 이기기 위한 첫 번째 접근인 교사학습이 알파고에게 직관을 주었다면 두 번째 접근인 강화학습은 알파고에게 스스로 성장하는 힘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알파고의 강화학습은 교사학습을 받은 두 알파고를 복제하여 이루어졌다. 알파고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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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1와 알파고ver.2에게 바둑게임을 반복적으로 서로 시키면서 이기는 수에 대한 가중을 두도록 프로그램화하고 승률이 높은 새로운 알파고로 계속 버전업을 하는 방 식이다. 이런 식의 수십만 번 이상의 게임에서 알파고는 더 많은 승리의 방식과 자 신 스스로가 생성한 기보를 습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종합적 과정을 거쳐 완성된 알파고류(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이어지는 바둑을 두는 특성)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알파고의 강화학습과정에서 프로그램을 통한 인간의 임의개입 이 없었다는 점이다. 즉 어디에 무엇을 두라는 개념이 아니라 승리 확률이 높았던 방 식에 가중치를 더 두라는 측면의 원칙만 프로그래밍 된 것이기에 이 과정에서 알파 고의 최적수 선택은 철저히 알파고의 자율에 맡겨진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 로 알파고가 형성한 알파고류는 프로그램이 아니고 기계 스스로가 결정한 판단의 종 합적 결과이기에 어떻게, 그리고 왜 그 수를 두었는가에 설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는 아이러니가 있다. 과거 컴퓨터 공학계에서 기계학습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았던 이유도 입력값과 출력값만 있지 그 과정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참 좋 은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읎네…’라고나 할까).

이제 알파고 얼굴이 어렴풋하게 보이실 것도 같다(<어깨동무>에서 이 정도까지 깊 숙한 공학적 이야기라니…). 글의 첫머리에 영상의학분야에서의 알파고 활용에 대 해 이야기했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예시를 통해 생각해보자. 일단 알파 고에게 그동안 모아온 방대한 양의 진단영상을 입력해 두자. 그리고 그 영상과 연계 한 치료와 예후를 학습시키자. 어떤 영상에서 발견된 병변이 어떤 치료과정을 거쳤 는지를 변수로 두고, 이제 마지막으로 예후를 입력해주자. 알파고는 방대한 영상데이터와 치료데이터와 그 결과를 분석할 것이다. 그 방법 은 바둑에서 최적점을 찾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영상은 바둑판이고 치료는 바둑 돌이다. 어떤 치료는 예후가 나빴고 어떤 치료는 예후가 좋았다. 바둑의 판세를 읽고 적절한 수를 선택하듯이 그저 병변(영상)의 진행상태에 따라 최적의 치료를 추론하 면 되는 일이다. 영상판독 명의가 일생 동안 경험한 일이 알파고에겐 1초도 걸리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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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않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과학자들의 기대가 먼 미래의 공상과학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이해되실 것 같다.

이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겠다. 알파고가 우리사회를 들썩거리게 했던 지난 해 정부는 한국형 알파고를 위해 2조 원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게 창조경제라고 했다. 차세대 먹거리라고도 했다. 온통 돈 이야기였다. 사고의 한계는 도구의 쓰임을 결정한다. 돈을 벌기 위한 도구로 알파고를 인식한 순간.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게 될 것이다. 단지 어떤 분야에 알파고를 쓰 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의학이건 금융이건 전쟁시뮬레이션이건 모든 분야에 서 함정은 잠복해 있다. 의료분야에 알파고가 쓰이면 모두가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병원이 새로운 수익원으로 알파고를 생각하고, 알파고 병원이 생기고, 돈벌이로서 경쟁을 시작하고, 진단의 효과를 높여주는 데이터는 공유되지 못하고, 데이터는 또 다른 돈벌이가 될 것이고, 진단을 위한 비용은 높아질 것이고, 의료서비스는 양극화 차별화 된다면 과연 누가 좋아진 건가? 인공지능을 돈으로 바라보기 이전에 그 좋다는 물건을 잘 쓰기 위해 윤리의 문제, 공익의 문제, 활용의 원칙 등의 사회적 방향성과 공감대를 이야기 할 수는 없는가?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야바위판처럼 돈 놓고 돈 먹는 사회로 변했는지는 알 수 없지 만 산업화가 양극화가 되었던 그 경험에서 미래가 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 쯤은 배웠기를 바란다.

혁이_90년도 후반 산업정보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국내기업에서 빅데이터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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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곤의 현장들, 기록들(3)

“간첩은 잡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한 기록들 강곤

김기춘이 구속됐다. 어쩌면 공항에서 우연히 뉴 스타파 최승호 피디와 마주치면서 본의 아니게 간 첩 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자백>에 출연하 게 된 때부터 이미 예고된 것은 아니었을까. 서도원, 도예종, 송하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 원, 이수병, 여정남, 장석구, 이재문, 전재권, 유진 곤, 조만호, 정만진, 이태환, 이재형, 나경일. 김기춘이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던 1974 <폭력과 존엄 사이> 은유 지음, 지금여기에 기획, 오월의봄, 2016

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판결 18시간 만에 사 형을 당했거나 이후 복역 후유증으로 사망한 분들 이다.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그의 손을 거쳐 간첩으

로 조작된 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안기부 제1차장을 하다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정 형근과 함께 그는 간첩은 잡지 않고 만드는 것임을 몸소 보여줬던 ‘공안’의 상징적 인 물이다. 이들이 검찰총장으로, 법무부장관으로, 국회의원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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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 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존엄의 훼손과 회복의 기록 <폭력과 존엄 사이>의 저자인 은유 작가는 지난해 초 ‘지금여기에’라는 단체에서 연락을 받았다. ‘지금여기에’는 진실화해위원회 변상철 조사관이 위원회를 그만둔 뒤 간첩 조작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피해자들의 치유를 돕기 위해 몇몇 사람들과 의 기투합을 하여 만든 곳이다. 내용은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들과 인터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작가는 너무 낯선 사람들과 사건이라 처음에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인터뷰 작업이 “국가폭력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견뎌내야 했던 삶, 그리고 끝내 무죄를 밝히고 존엄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이라는 사실에 조심스레 용기를 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폭력과 존엄 사이>다. 이 책에는 모두 7명의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의 생애사가 담겨 있다. 딸이라서 배움 의 기회를 잃고 모진 시집살이와 가부장제의 폭력에 견디던 이, 입하나 덜기 위해 열 네 살부터 고깃배를 타던 이, 열악한 노동환경을 바꾸고자 했던 이, 일본에서 태어 나 한국에 온 뒤 고향 갈 날을 기다리던 이. 그런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간첩이 되었 고 온갖 협박과 고문에 못 이겨 결국 거짓 자술서에 손도장을 찍고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린 것은 스스로의 존엄만이 아니라 그 가족을 비롯한 모든 사회적 관계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게 되기까지의 지난한 시간, 그 시간은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다. “아니, 왜 국가에 의해 조작된 사건을 다시 국가에게 심사해달라고 해야 되?” 1990년대 초 간첩 조작 사건 재심 청구 운동을 최초로 시작했던 민가협 활동가가 징그럽게 많이 들었다는 질문이자 비판이다.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 국 국가의 잘못을 국가에게 묻는 일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국가에 의해 훼손된 존엄을 피해자가 회복해가는 길이기도 했다. 앞서 저자도 밝혔듯이 이 책에는 그 인 간 존엄의 처절한 훼손은 물론 눈물겨운 회복의 과정이 때로는 소설처럼 때로는 시 처럼 수놓아져 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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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되고 고립된 존재들 <보안사>의 저자 김병진은 이 책의 ‘어느 조작 간 첩의 보안사 근무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조 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이자 그때문에 보안사에 근 무를 해야 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일본 고베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3세로 그는 1980년 한 국으로 건너와 연세대 대학원을 다니며 삼성종합 연수원 일본어 강사를 하던 중 1983년 보안사에 연 <보안사> 김병진 지음, 이매진, 2013

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결국 자신이 북한 공작원이 라는 기자회견까지 열게 된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

다. 그는 보안사에 의해 강제로 특별 채용이라는 형식을 통해 약 2년 동안 재일교포 간첩 조작에 통역과 번역으로 동원 되어야 했다. 그리고 보안사를 퇴직한 바로 다음 날 일본으로 망명하여 그동안 자신이 겪은 일을 쓴 회고록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야말로 생생한 간첩 만들기의 실상을 볼 수 있다. 피해자를 어떻게 고립시키고 회유와 협박하는지. 고문과 가혹행위를 통해 마침내 ‘내가 간첩 이 맞다’는 자백을 받아내는 저들의 기술, 그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은 1988년 한국에서 번역되어 출간되자마자 전량 압수당했지만 수사관의 실명이 그대 로 적힌 탓에 이후 재일교포 간첩 조작 사건 재심에서 법정 증거로 채택되어 진실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또한 2012년에는 저자의 고발로 재선 양천구청장 이었던 추재엽의 보안사 시절 고문 전력이 밝혀지고 마침내 추재엽은 법정 구속되 어 형을 받기에 이르렀다. 1970, 80년대 조작간첩 사건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납북되었다 가 돌아온 어부나 월북한 가족이 있는 이들이고 또 하나는 재일교포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하나는 ‘진짜이지 않을까?’하는 의심될만한 존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간첩으로 조작해도 주변에서 아무런 지원이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존재, 국 민이지만 언제든 비국민이 될 수 있고 시민이지만 시민권을 얻지 못한 존재라는 점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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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사회에서 그런 존재가 하나 더 생겼다. 바로 북한 이주민, 흔히 말하는 탈북자들이다. <폭력과 존엄 사이>의 말미에는 부록으로 간첩 ‘조작 사건 무죄 목록’이 실려 있다. 이 목록이 말해주는 것은 적어도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간첩 조작이 이루어 지지 않다가 이명박 정권부터 다시 간첩 조작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탈북 자 조작 간첩 사건이 그것이다. 정권의 성격이 바뀌면 언제든 과거의 국가폭력이 다 시 등장하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만큼 허약했던 것이지 않을까. 결국 문제는 조금 더 민주적인 정권을 만드는 일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들도 배제되지 않는 사회 를 만드는 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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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문예가 무엇인가요?”, 끊임없이 묻고 답하기 이은진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선 대통령의 탄핵이 가결되었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 연에서 운명처럼 광화문으로 모였다. 그리고 ‘조기탄핵’을 외치며 혹은 여전히 ‘대통 령 하야’를 외치며 촛불을 들었다. 2016년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현재진행형으로 마 무리되었고 새해를 맞이했다. 진군나팔도 숨 돌릴 새 없이 이후의 투쟁을 기약했다. 진군나팔은 2016년도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사업 공모에 당선됐다. 이는 진 군나팔의 기조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진군나팔의 2016년 주요 활 동이라고 하면 28년의 전통을 가진 이 진보적인 동아리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올해도 비가 내렸다 2년 전부터 진군나팔의 본격적인 활동은 4월 16일을 기준으로 시작되었다. 세월 호참사 당일부터 천 일이 넘을 때까지 매년, 4월 16일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비가 내 렸다. 이번 해, 세월호참사 2주기 광화문 집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매우 많았 음에도 불구하고 말소리 보다 빗소리가 더 크게 들릴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다. 이동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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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차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해가 지고 본격적인 집회가 시작할 때까지 우리는 우산을 쓰고 기다렸다. 본격적 인 집회가 시작되기 전, 무대 스크린에 나오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 유가족들 그리고 생존 자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며 그 공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본격적인 추모 집회가 시작되고 세월호참 사를 애도하는 발언들이 거센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해가 완전히 저문 광화문에서 사람 들은 세월호참사 이후 세상을 지배한 무기력 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매순간, 발언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었지만 우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도 침묵하지 않았다. 내년에도 4 월 16일이 되면 모두가 광화문으로 모일 것이 라는 암묵적인 약속과 함께 집회가 마무리되 었으나 비는 그치지 않았다. 생존자들을 위한 세월호참사 2주기 낭독·좌담회 2016년 4월 18일, 진군나팔은 세월호참사 2주기를 기념하는 낭독 및 좌담회를 진 행했다. 집회 때도 내린 비가 좌담회 당일에도 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일 일정은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했다. 1부는 세월호 집회에 참여한 학생들의 감상문과 ‘사진 학과 동아리, 사진집단 현장’의 세월호 추모집회를 담은 사진 전시 등 세월호참사를 추모하는 내용의 투고작을 낭독한 후, 이 행사를 주최한 진군나팔이 선언문을 읽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2부는 세월호참사와 관련된 세 개의 주제를 토대로 자유롭게 진 행했다. 2부 좌담회는 참석한 학우들이 참사 당시 각자 무엇을 하고 있었고 어떤 생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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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을 했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어 세월호참사에 대한 현재 한국사회의 태도와 마지막으로 희생자도, 유가족도 아닌 ‘우리’라는 주체, 예술 을 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한 청년으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우리에 대해 서 토론하며 좌담회를 마무리했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 우리가 목격한 것은 단순히 한 척 배의 침몰이 아니었 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사회를 옭아맨 부조리한 관계망의 실체를 엿보 았고, 그 막막한 깊이와 넓이에 좌절했습니다. 좌절의 한편에는 뼈아픈 자기 성찰이 자리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약자인 동시에 강자로서 일상 가운데에 그 참사에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일상은 더 불편한 것이 되어야 하며 추모는 더 안온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관성적인 평화를 거부하고 일상을 더 낯설고 먼 장소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는 그런 정 치적 목적이 있습니다.” 2016 진군나팔, 세월호참사 2주기 낭독 및 좌담회 선언문, ‘크나큰 정적 속에서’ 中

좌담회에 참석한 문예창작학과 학우들과 사진학과 학우들 중 어느 누구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일의 자리에서는 사건이 발생하고 가해자와 피 해자가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계속 의구심을 던지는 이유에 대해서 토론했다. 희생 자도 유가족도 아닌 우리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발화했다. ‘세월호 참사 2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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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낭독 및 좌담회’라는 자리는 ‘세월호’라는 세상에서 존재하고 있는 생존자들을 위 한 자리였다. 광주기행 2016년 5월 15일부터 2박 3일 동안 진군 나팔은 광주기행에 다녀왔다. ‘임을 위한 행 진곡’을 부르면서 시작한 기행이었다. 망월 동 신묘역을 시작으로 구묘역과 전남대까지 의 여정이었다. 신묘역 앞에 있는 추모탑과 군 상, 신묘역 내부의 묘들을 보며 사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후 ‘망월동 묘 지’라고 불렸던 구묘역에서는 민중항쟁 당시 산화한 영령들의 묘들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많은 열사들과 함께 새 묘역으로 이장했지만 그 잔해가 보존되어 있는 이내창 열사의 묘 앞 에서 진군인 몇몇은 ‘의혈가’를 불렀다. 마지 막으로 전남대에서는 5·18 당시 현장과 이후 투쟁 정신을 이어온 열사 선배님들에 대한 기 록을 볼 수 있었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당시의 광주는 그저 고립되기에는 많 은 것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현재 광주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토론 을 하게 된다면 빠질 수 없는 얘기다. 그 시작과 끝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 항쟁 을 이유 없이 묻어버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관련되어 있다. 과거에서부터 이 어져오는 현재의 5·18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고민했다. 오래 전부터 고립된 광주 와 현재의 한국사회 사이에는 새롭게 연결되어야 하는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새로 운 연결고리에는 사람들의 외면으로 발생한 공석이 있다. 2016년에 와서 우리가 그 공석에 앉는 의미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며 광주기행을 마무리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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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창이형 2016년 8월 15일, 굉장히 뜨거운 하루를 보 냈다. 이내창열사의 8·15기제가 있는 당일이 었다. 우리는 기념사업회의 박희성 선배님의 배려로 추모제 장소인 이천민주화기념공원 까지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기념사업회 선배 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며 추모제가 시작되었다. 추모제 내 내 이내창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발언을 들으며 단순히 한 개인을 잃은 것과는 온전히 다른 층위의 추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추모가 끝나고 선배님들과 함께 박물관 을 구경했다. 기념사업회에는 진군나팔 창단 멤버이신 선배님들도 많았는데 학교에 서 말로만 듣던 선배님들을 뵙게 되어서 매우 신기했다. 우리는 귀가를 한 후 뒤풀 이에서 이내창 열사를 추모하는 기념사업회와 학우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에 대해 서 논의했다. 우리는 한 편으로는 ‘내창이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렵기도 하다. 수업을 듣기 위 해 내창이형 동상을 지나칠 때마다 가끔 그 동상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다. 선배님들이 ‘내창이형’이라고 호명할 때면 마치 한 시대를 부르는 것 같았다. 지금 시기에는 그것이 더 와 닿기도 했다. 매년, 8·15기제를 준비하시는 선배님들께 감사 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는 진군인의 말이 떠올랐다. 이내창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 들을 늘리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자백> 상영회 2016년 10월 2일, 진군나팔은 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하는 <자백>상영회에 참석했다. <자백>은 2012년도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화교출신 탈북자인 유우성씨가 국가정보원 에 의해 억울하게 간첩으로 내몰린 사건인 ‘서울시공무원간첩조작사건’의 실화를 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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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영화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라는 조작된 사건으로 탈북자를 매우 손쉽게 매장시켜버리 는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이내창 열사부 터 이 사건의 피해자까지 사건이 세상에 알려 지는 시간 동안 국가는 약자를 더 극한 상황 으로 내몰았다. 무고한 사람을 매장시키는 매 우 간단하고 잔인한 방법은 프레임을 씌우는 일이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가 된 사람은 유 우성씨 한 사람이 아니다. 이 사건에 놀아난 전 국민은 프레임에 갇혔다. 오랜 세월 동안 국가와 사회를 향한 국민들의 분노가 지속되 는 시점에서 우리는 마땅히 통일과 민주에 대 해서 토론하고 실천할 수 있는 권리를 침탈당 했다. ‘자백’이라는 것은 더 이상 무고한 시민 의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자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상이 누구인지 국가는 알 아야 한다.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이유 2015년 11월 14일에 진행되었던 민중총궐기 당시, 진군나팔 깃발도 다른 깃발처 럼 물대포에 젖어 결국 깃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백남기 선배님 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셨다. 2016년 11월 12일, 사람들은 백남기 선배님이 쓰러 진 자리를 찾아 다시 광화문으로 모였다. 작년 민중총궐기 때 물대포가 난무하던 광 화문에는 진군나팔 깃발만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올해는 중앙대학교 문예 창작학과의 깃발이 그 어떤 깃발보다도 거대하고 자유롭게 펄럭였다. 학과 단위로 집회에 참여한 것은 2015년 12월, 2차 민중총궐기 이후로 처음이었다. 국정농단 사 태가 벌어지고 학과 내에서도 다시 ‘시국’이라는 단어를 중요하게 사용하기 시작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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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당일, 백만이라는 숫자 이상의 인구수를 함께 체감하게 되었다. 모두 하 나의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을 했고 처음 집회에 나온 한 학우는 자신이 어느새 ‘박근 혜 퇴진’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에 대해서 낯설어했다. 올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꼽자면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이다. 백남기 선배 님을 비롯하여 이내창 열사까지, 과거를 돌이켜보면 권력은 늘 가만히 있으라는 말 을 악용해 약자가 상처에 익숙해지게끔 만들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한국사회를 무 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번 집회와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번 현상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대두되고 있지만 사람들이 광화문에 나오게 된 것은 예상할 수 있는 결과일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우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더 이상 상처에 익숙해지지 않겠다고 발화한 지점이다. 우리는 행진 을 하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대답했다. 자주문예, 다시 고민합니다 “자주문예가 무엇인가요?” 올해도 진군나팔에서 어김없이 나온 질문이다. 그리 고 매년 그렇듯이 많은 담론이 재생산되었고 관점이 거론되었다. 진군나팔이 자주 문예 정신으로 발족했던 1990년부터 2016년까지 진군나팔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 집단의 정체성과 기조에 대해서 집단의 구성원들은 항상 물음을 갖는다. 알게 모 르게 자주와 민주, 인권을 실현하고 있는지 성찰한다. 자주문예에 대해서 고민한다 는 것은 진군나팔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일상까지 침투하는 질문이 되었다. 2016년에 와서 더 소중한 질문이면서도 앞으로도 여전히 고민하는 태도를 지속할 것이다. 곧 내년을 맞이하고 그 이후로도 상처에 익숙해지는 것에 있어서 좌 시하지 않고 이 운동성을 계속 유지하는 집단이길 바란다. 그런 집단이 진군나팔이 길 바란다.

이은진_문예창작학과에 재학 중이며, 진군나팔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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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멀어도 함께 내딛는 진정한 평화의 길 한대윤

<중앙대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 위안부 피해자기림의 날인 8월 14일부터 8월 15일까지 ‘평화나비 FESTA’일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후 중앙대 평화나비는 특별한 일정이 하나 더 있었다. 이내창 선배님의 기일인 8월 15일에 소녀상을 건립하는 일정이었다. 지난 반 년가량의 노 력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중앙대 평화의 소녀상>제막식은 중앙대 학생들(소녀상 서포터즈)과 동작구의 여 러 단체들이 힘을 합쳐 흑석역 3번 출구 앞에서 이루어졌다. 소녀상 서포터즈는 ‘평 화나비’와 ‘의혈하다’가 함께 하고 있는데 서포터즈 대표 송종원(경영12) 학우의 사 회로 제막식이 진행되었다. 제막식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했다. 동작구 시민 난타 공연 팀, 중앙대 국궁 동아리 ‘쏜살’ 지도교수님 등 많은 분들이 공연에 힘써주셨고 동작구 관계자 분들도 참여했다. 공연도 좋지만 무더운 날씨에 참가해준 학우들에게 정말 고마웠다. 한 학 우는 “학내에서 캠페인 할 때 서명했었다. 이렇게 제막식을 한다고 해서 방학인데도 찾아왔다”고 전했다.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미안했었지만 그 마음만큼은 잊지 않으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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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 마음먹었다. 중앙대 평화나비 회원들에게도 소녀상 제 막식에 대한 의미는 아주 컸다. 소녀상을 세 우는 과정은 학우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 제를 알리는 과정이자 학우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서명에 참여한 사람들, 모 금에 함께 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며 듣고 보았 중앙대 동작구 평화의 소녀상 건립식

다. 캠페인을 하는 하루하루는 우리가 학우들 에게 얼마만큼 다가갔는지 확인할 수 있는 날

들이었다. 이제 중앙대학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메시 지인 평화의 소녀상과 학우들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된 것이다. ‘소녀상 서포터즈’의 이름으로 직접 그 과정을 만든 것이 자랑스럽고 중앙대에서 함께 하면 뭐든 함께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서포터즈 회원 모두가 고마움과 보람으로 고무 되는 8월 15일이었다. 선후배가 함께 한 <자백> 상영회 지난 4월 평화나비를 열심히 해보고 싶다는 결심을 하고 난 뒤 나는 어느새 중앙대 평화나비의 대표가 되 어 있었다. 대표가 되어서 가장 먼저 한 연대활동은 ‘이 내창 기념사업회’ 선배들과 함께 한 <의혈인이 함께 보 는 ‘자백’ 상영회>였다. 평화나비는 과거 통일운동을 하 시다가 의문사 당하신 故이내창 열사(조소학과 86학번) 의혈인이 함께 보는 <자백> 상영회 포 스터 (출처- 자유인문캠프)

의 뜻을 이어나가고 있는 후배들이라는 의미로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라는 재학생 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자백>상영회는 그동안 재학생 지원 사업에 선정된 3개의 중앙대 단체(중앙대 평화 나비, 진군나팔, 자유인문캠프)와 중앙대 선배님들, 재학생들까지 함께하는 연대 상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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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회였다. 영화 <자백>은 기득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행되었던 ‘서울시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의 이야기와 그 의미를 고발한 영화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레드콤플렉스와 레 드콤플렉스로 인해 우리가 속아 넘어가면서 생기는 가슴 아픈 피해들이 무엇인지 영 화는 이야기한다.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담은 <자백> 상영회에서 재학생들은 홍보를 맡아서 진행했고 중앙대 평화나비는 행사 스텝에 몇 명 지원하기도 했다. 생각 했던 것 이상으로 이 행사에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재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상영회에 다녀 온 평화나비 안종민 학형은 소감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상영회 준비회의에 갔을 때 선배님들께서는 “중앙대 이내창 기념사업회 선배들과 후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행사를 만들기 위해 이번 행사를 기획하였다” 고 말씀하셨다. 이내창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도 노력하시며 후배들에게 그 정신을 물려주고 싶어 하시는 선배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금 ‘의혈’이란 이름 에 부끄럼 없이 살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다음에도 더 많은 의혈인이 함께 하는 행 사들을 기획하고 싶다. 제3차 학내 수요시위 2학기가 시작되면서 중앙대 평화나비를 통해 더 많은 학우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 은 마음이 커졌다. 그래서 개최하게 된 것이 ‘제3차 중앙대 평화나비 촛불문화제’다. 중앙대 촛불 문화제는 1차, 2차, 3차 모두 같이 준비 했었는데, 제1차 촛불문화제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중앙대 학생지원처에서는 갖은 이유로 문화제를 불허했 지만, 평화나비 이름으로 대자보를 붙이는 등 문화제를 성사시키기 위한 노력을 많 이 했었다. 학생지원처에서 문화제를 감시하였지만 결국에는 문화제도 성사시키고 100여 명의 학우들도 참가하였던 제1차 촛불문화제를 감동의 순간으로 기억한다. 제1차 수요시위와 같은 감동의 기억을 학우들과 함께 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를 열린 공간에서 함께 알리고 싶었다. 3차 수요시위에서는 전처럼 ‘의혈하다’에서 같이 주최하면서 도움을 받았다. 식순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신 故정서운 할머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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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육성을 담은 <소녀이야기> 애니메이션을 보고 학우들의 문화 공연과 발언이 있었다. 이번 공연에는 문학동인회 회원 2명(변원영 중어중문13 ,문정현 문헌정보 16)의 시낭송과 노래공연(조지현 건축학부 16)이 있었다. 무대에 서는 것이 쉽지만 은 않았을 텐데 문화공연을 보여준 친구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제3차 수요시위를 기획하는 것은 크게 어 렵지 않게 느꼈었다. 제안서, 기획서, 준비물 제 3차 평화나비 촛불 문화제 현수막

품들은 뭐가 필요한지, 식순은 어떻게 구상할 지 이미 다 머릿속에 있었다. 몸을 움직이기

만 하면 해결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행사를 시작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 었다. 학생지원처는 불편해했지만 바로 허가를 내주었고, 행사 당일에 감시하러 나 오거나 옆에서 사진을 찍지도 않았다. 음향물품들도 평소 알고 있던 동아리들에서 빌렸다. 그러나 행사를 마치고 나서 많은 반성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평화나비 대표 로서 준비한 제3차 수요시위는 제1차 수요시위에 비하여 훨씬 적은 학우들이 참여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3차 수요시위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다. 좀 더 치열 하게 준비하고 학우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고, 당연하게 많은 학우들이 참여 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 날 참여 해준 모든 학우들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 더라도 ‘절대 자만하고 나태해지지 말자’고 결심한 날이었다. 다시금 그날 행사를 만 들어준 모든 학우들에게 고마움의 말을 전하고 싶다. 서울대 병원에서 농성과 백남기 선배님 합동 추모분향소 운영 2016년 9월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과 가장 기억나는 일이 모두 있는 달이 다. 백남기 선배님께서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소식이 있자 평화나비 네트워크에서 서울대 병원 농성을 이어나가기로 하였다. 경찰에서 사망원인 조작을 위해 백남기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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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의 시신을 탈취해갈 것이란 소문과 근거들이 낭자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병원에 갔던 첫 날이 기억난다. 자정이 넘은 시간, 운동을 하면서 만났던 다른 학교 및 다른 지역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모여 장례식장 앞을 지키고 있었다. 평화나비 네트워크 친구들, 민중연합당 당원들, 청년하다 회원들, 의혈하다 친구들, 이곳저곳 집회에서 만난 동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날 새벽은 번갈아가며 불침 번을 서면서 제대로 씻지도 쉬지도 못하고 초췌한 모습들로 긴장한 사람들이 서로 를 의지하며 하룻밤을 버텼다. 낮이 되어 몇몇 사람들이 더 와주었지만 장례식장엔 30여 명의 사람들만 있었다. 우리가 그 많은 경찰들을 막기엔 역부족이란 걸 모두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선배님 이 살아계신 와중에 침탈을 예고하는 경찰 앞에서 물러서고 싶어하는 사람은 하나 도 없었다. 백남기 선배님에 대한 부채감, 생명에 대한 존엄함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서 우러나오는 힘이 그 긴장감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똑같이 두렵고 똑같 이 지키고 싶은 나의 친구 동지들이 있어 막연하지만 굳게 믿을 수 있었다. 그 마음 은 누구나 마음이 강하기 때문도, 이 상황이 자연스러웠기 때문도 아니라 사람이라 면 느끼는 분노에서 온 용기였다. 경찰과의 충돌이 자주 있은 뒤로 나는 신발 끈이 풀리지 않게 묶는 습관이 생겼다. 긴장한 마음에 신발을 몇 번이나 확인 했다. 신발 끈은 이미 묶은 뒤였다. 우리는 바 리게이트를 만들고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오가 지났고 서로의 마음을 얘기하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백남기 선배님의 부고가 있은 뒤, 우리는 슬퍼 할 겨를도 없이 달려드는 경찰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장례식장 앞으로 들 이닥치는 경찰들은 지키고 있는 사람보다 3~4배는 많아 보였다. 너나 할 것 없이 모 두 경찰들이 침탈할 수 없게 온 몸으로 막아섰다. 경찰들을 완벽히 제지할 수는 없지 만 잠시 지체시켰다. 그때 선배님의 시신을 운구하는 응급차가 들어왔고 응급차 주 변에 이중 삼중으로 시민들이 에워싸며 차를 보호했다. 직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사 람들이 어디선가 마구 달려와 주었고 장례식장 앞을 가득 메웠다. 나는 그 순간에 잠 시 기적이 일어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남기 선배님의 부고 뒤, 짧은 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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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동안 많은 시민들이 서로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달려와 준 것이다. 그 뒤에 우리는 눈물로 집회를 이어나갔고 한 번에 다 적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 을 경험했다. 익명의 이름으로 농성장에 후원물품들이 들어와 농성장을 가득 채웠 고 시민들 스스로 농성장의 질서를 만들어 해방의 공간이 되었다. 농성을 이어나가 기 위해 서울대병원에서 적극적으로 파업을 이어나갔던 노동자 분들에게도 감사드 린다. 중앙대 평화나비에서 함께 농성할 때 국민TV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말씀만 전 하고 큰돈을 직접 쥐어주시고 가시는 분도 만나 뵈었다. 백남기 선배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학내 로 들어와 바로 중앙대 재학생들과 함께 선배 님의 합동분향소를 운영했다. 생각보다 많은 단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분향소를 설치하 고 가꾸고 관리해나갔다. 선배님의 장례를 치 중앙대 백남기 선배님 합동분향소

르기 전까지 운영했고 정말 많은 학우들의 서 명과 추모의 글을 받았다. 재학생들뿐만 아니

라 중앙대 선배님들과도 뜻깊은 일이 있었다. 처음으로 중앙대 동문 이름으로 서울 대 병원에서 추모문화제를 만들어냈다. 추모문화제에서는 “정권에 마음에 들지 않 으면 국가 폭력에 피해자가 되고 정권은 힘으로 진실을 덮으려는 이 총체적인 문제 를 함께 해결하는 데에 주저하지 말자”, “의혈의 이름을 기억하자”라는 취지의 이야 기를 이어나갔다. 감사하게도 나는 중앙대 평화나비 대표로서 발언 요청을 받아 “백 남기 선배님 옆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면 선배님이 그렇게 돌아가시진 않았을 것이 란 생각이 계속 든다. 선배님께서 제일 앞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셨다. 이제는 우리가 주저하지 말로 앞서 나가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던 기억이 난다. 백남기 선배님은 평범한 분이셨다. 직접 뵌 적은 없지만 함께 사는 세상이 좋은 세 상이라는 당연한 마음을 버리지 않으셨던 분이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우리밀’ 을 알리고 손자들과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시던, 1남 2녀의 자녀를 둔 아주 평범하신 분이셨다. 그런 분을 국가의 이름을 사용하는 자들이 공격하여 생명을 빼앗아갔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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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백남기 선배님을 기억하는,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백남기 선배님은 그저 평범한 분일 수 없다. 민중총궐기는 모든 민중의 요구였다. 그 총궐기대회 자리 에서 물대포에 맞아 위험할 수 있었던 나와 나의 동지들, 모든 다른 사람들 대신 쓰 러져 가신 분이시다. 개개인만 보면 서울대병원에 모여 밤샘 농성을 이어나간 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찰과의 대립을 버티 며 선배님의 장례가 있기 전까지 농성장을 지켜냈다. 농성을 지켜나가는 데에 보탬 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이 지킨 것은 직접적으로는 백남기 선배님 한 분이지만, 모두 가 지킨 것은 우리 스스로의 사람 된 모습과 우리사회가 잃어버릴 뻔한 사람의 모습 이다. 사람을 지켜준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민중 총궐기 심화 세미나와 2016년 민중총궐기 11월 12일이 다가오자 많은 학우들이 “민중총궐기에 관심이 있다”, “참가하고 싶 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백남기 선배님이 쓰러지시고 난 뒤에 사람들의 관심이 폭발 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을 느꼈다. 선배님의 학교 후배들인 만큼 중앙대학교 학우들 과 총궐기를 잘 준비하기 위해 움직이던 중 “참가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잘 모르고 두렵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평화나비 심화세미나로 민중총궐 기 교양시간을 만들어 기존 평화나비 회원들뿐만 아니라 관심 있는 학우들도 함께 참여하여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었다. 민중총궐기 교양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직접 조사해 나가면서 스스로가 더 많 은 것을 알게 되었다. “민중은 무엇인가? 왜 11월 12일에 총궐기를 할까? 2015년, 2016년의 요구안은 무엇인가? 2016년 민중총궐기에서 차이는 무엇이고 어떤 의미 가 있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변을 발제 내용으로 삼았다. 2부 순서에서는 세월 호 참사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평화나비 회원들이 아닌 학 우들도 많았는데 다들 열띤 토론을 이어나갔고 세미나는 “꼭 총궐기에 같이 가자”는 다짐들로 마무리 되었다. 민중총궐기 당일, 평화나비의 이름으로는 모이지 않았지만 평화나비 회원들을 포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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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한 많은 학우들이 의혈로 뭉쳤다. 100명이 넘 은 학우들이 참여한 첫 집회였다. 중앙대 학우들 이 의혈이란 이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자부 심을 느끼며 모여드는 경험을 했다. 학교에 4년 중앙대 민중총궐기 심화세미나

을 있었지만 의혈로 앞장서서 나가자고 했을 때 이렇게 많은 학우들이 함께 모인 경험은 처음이

었다. 민중총궐기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중앙대 학우들이 함께 총궐기에 나가 자 단과대 학생회도, 총학생회도 함께 나가자는 이야기가 너나 할 것 없이 마구 확산 되어 지난해 마지막 대학생 집중 집회인 12월 17일까지 이어나갈 수 있었다. 새내기 때 의혈 깃발을 처음으로 들었는데 의혈을 외치며 활동하는 게 항상 쉽지 만은 않았다. “학교를 대표하지 마라”, “의혈기를 들지 마라” 등 많은 비판들도 있었 지만 결국 끝까지 의혈기를 지켜내어 중앙대 평화나비도 생기고, 많은 학우들과 의 혈기 밑에서 함께 의혈을 외칠 수 있었다는 것은 2016년에 이룬 가장 큰 성과라고 하 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는 ‘의혈’이란 말이 가장 보람된 말이다. 중앙대 평화나비 네트워크 민중총궐기 이후 한국 사회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박근 혜 탄핵’ 구호가 가속화 되어 현재는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한 미일 군사정보 보호협정이나 한국사 국정교과서 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이 아직 해결 되지 않고 있다. 한창 국정 이슈로 뜨거울 때에 한일군사보호협정을 맺고 국정교과 서 집필 명단이 공개되었다. 평화나비에서는 한일군사보호협정에 반대하는 24시간 농성을 이어나가고 한일군사 동맹 비판 성명이나 시국선언 등으로 학내 대자보 운 동을 전개했었다. 국정교과서 집필진이 있는 학교에서는 플랜카드를 게시하거나 강 의실 앞에서 1인 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중앙대학교 교수 중에서도 국정교과서 집필진이 있었다. 바로 경영대 김승욱 교수이다. 그래서 중앙대 평화나비는 경영경 제관 건물 앞에 플랜카드를 달아 많은 학우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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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교과서 집필진 김승욱교수 비판 현수막

중앙대 평화나비 나들이

모든 세미나 일정이 끝난 뒤에는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 다녀왔고, 종강총회 를 하고 평화나비 후원주점을 하는 등 송년회 준비로 바쁘게 지냈다. 글을 쓰고 있 는 지금은 2017년 중앙대 평화나비를 준비하는 ‘평화나비 동계 워크숍’을 다녀온 뒤 다. 2016년 평화나비 안에서 활동하며 평소에 학습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느끼며 즐 겁게 공부했다.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 힘을 얻었고 혼자라면 할 수 없었던 학습과 농성도 적극적으로 전개해나갈 수 있었다. 2학기에 대표가 되면서 오히려 욕심을 너 무 많이 부리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한다. 모든 것들은 회원들과 함께 어깨 걸고 나 란히 이뤄내었어야 하는 것인데 발걸음이 급해 종종 먼저 튀어나가고 싶어 했었다. 2016년을 마무리하며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감사’이다. 이 시대의 과제를 내가 앉은 자리부터 고민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어나갈 수 있는 해였다. 그 사실에 감사드 린다. 이내창 열사의 후배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도록 새해 소원을 빈다. 2017년에 더 많은 학우들과 함께 진정한 평화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부족함이 없 는 내가 되고자 다짐한다. 우리가 가는 길은 먼 길이지만 한 발씩 내딛어 가면 그 끝 에 도달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오늘도 같이 어깨 걸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옆에 있음에 감사하며 작은 한 발을 내딛는다.

한대윤_중앙대 철학과 13학번이며, <중앙대 평화나비>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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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 상영회 결산

네 마리 토끼를 노린 <자백> 상영회 펀딩 사업 이혁승

기념사업회를 북적이게 할 수 있을까 나는 2016년에 기념사업회의 운영위원이 되었다. 어떻게 운영위원이 되었는지 기억이 분명치는 않다. 선배의 권유가 있었지만, 단 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10년 동안 수구 정권에서의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아이가 커 가는데 점점 더 기묘해지는 사회에 대한 불 안감 때문이었는지. 마흔 살이 넘으면 하는 일 에 의혹이 없어야 한다지만 이상한 것은 이전 과 다르게 ‘나’ 스스로가 기념사업회에 참여하 고 싶었다는 점이다. 2016년 1월 23일, 십 수 년 전 추모사업회 총회에 참석한 이후 처음으로 기념사업회 총회에 참석했다. 예전에 비해 참여인원 이 많이 줄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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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오랜만이어서가 아니라 그런 침체된 분위기가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한 달쯤 뒤 드디어 첫 운영위원회가 열렸다. 운영위원회에서는 30주년 을 준비하는 TF의 성격과 방향성 그리고 사업회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 다. 두 가지 주제가 모두 지난 30년간의 고민을 함축하는, 나에게는 듣기만 해도 묵 직한 주제여서 운영위원 분들과 도무지 말을 섞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건지, 이어지는 건지도 아리송했을 무렵, 겁이 덜컥 나기 시작했다. ‘내 가 여기서 무얼 할 수 있을까?, 왜 하고 싶었을까?’ 어지러운 그 시점에 운영위원 선 배들은 친절하게 내 의견을 듣고자 했고 ‘무슨 말을 해도 이해해줄게’라는 암묵적 동 의에도 아는 게 없으니 의견 또한 의미가 없었다. 첫 회의가 끝난 뒤풀이에서 애꿎은 주꾸미를 씹는 것으로 발언을 대신했다. 곰곰이 생각했다. 수십 년을 압축해서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방향성을 논의하고 제시하는 일은 분명 내 몫은 아니었다. 무얼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의 생 각에서 나는 그저 주변판이나 정리하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참여했던 십 수 년 전의 기념사업회 총회와 지금의 직관적 차이점이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 이었고, 그것이 내가 집중할 주변판이었다. 예전처럼 ‘다시 사람을 북적이게 하는 일’, 그게 내가 그나마 접근해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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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과 이내창기념사업회를 잇는 연결고리, 국가폭력 3월이 지날 무렵 자주 듣던 한 팟캐스트에서 <자백>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 한 소개를 들었다. 국정원의 간첩조작사건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했지만, 상영 관 확보가 힘들어 개봉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소셜펀딩을 통해 3억 원이 모이면 시사회를 통해 개봉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마음이 움직였다. 오래전 PD수첩의 터줏대감이었던 최승호PD를 돕고 싶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몇 만 원 정도 보태야겠다고 생각하고 노트북을 열고 소셜펀딩의 내용을 훑어봤다. 만원에 시사회권 한 장. 두 장을 신청하려고 했는데, 100만원이면 “단독시사회+ 감독과의 대화+크레딧”이라는 펀딩딜이 눈에 띄었다. 꽤 괜찮은 딜이란 생각이 들 었다. 펀딩딜을 보는 순간, 기념사업회가 떠올랐다. 명분이 있었고 인권, 국가폭력에 의 한 피해라는 주제가 <자백>과 ‘이내창기념사업회’를 이어주고 있었다. 내부의 재결 집과 외부로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서도 <자백> 상영 펀딩은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리소스였다. 회원들의 자발적 기부로 운영되고 있는 기념사업회에서 100만 원은 큰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돈 문제로 각종 사업의 축소가 논의되던 시점이었 다. 기념사업회에 재정적 부담을 줄이면서도 상영회를 개최하는 일은 회원들의 도 움이 필요한 일이었다. 어떻게 도움을 받을 것인가? 특별회비를 모금하는 일은 쉽 지만, 그것은 기념사업회에 부담을 전가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실행할 것 인가가 문제였다. 고민 중에 펀딩딜 속의 펀딩을 생각했다. 내가 영화에 흥미가 있었 던 것과 같이 기념사업회의 회원들도 흔쾌히 펀딩에 참여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펀 딩을 진행하되, 이내창기념사업회의 명의로 묶어내면 실행될 수 있는 그림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면 다음세대를 위한 준비도 될 터였다. 그렇게 선배가 후배들의 표 값을 내주는 1+1 펀딩의 아이디 어가 완성되고 있었다. 이후 개최된 운영위원회에서 기획안이 만장일치로 추인되었다. 운영위원들은 스 스로 역할을 분배하고 지원을 했다. 그간의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회원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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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들에게 알리고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운영위원들은 전화로, 밴드로, 카톡으로 열심 히 참여의 말과 글을 옮겼다. 회원들의 참여는 폭발적이었다. 민주동문회, 세대 등의 단체참여가 있었고 <끈덕 지게 어깨동무>를 받아보는 많은 동문들이 펀딩과 후배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었 다. 그렇게 2주도 지나지 않아 156개의 자리가 예약되었다. 기획초기에 100석을 목 표로 불안해하며 진행한 펀딩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표를 훌쩍 상회 했다. 객석 채우기가 실행되어야하는 시점에서 재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회원들의 참여를 독려해야 했고 후배들에게도 알려야 했다. 고두현 운영위원은 졸업시기가 가장 최근이라는 이유로 후배들과의 소통 역할을 맡아 훌륭 하게 일을 진행해주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사업이 기념사업회의 큰 자산이라는 것이 새삼 입증되었다. 그간 이 사업을 통해 연결된 자유인문캠프, 진군나팔, 평화나비 등 의 학내단체들은 시험기간에도 홍보를 위해 포스터를 만들고 게시하고, 다양한 방식 으로 재학생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가장 어려운 부분들은 이렇게 해결되었다. 156 석은 선배와 재학생들로 완벽히 채워지고 있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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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뚫고 모인 마음들에서 희망을 찾다 상영일 아침, 비가 내렸다. 참석하려 했으 나 급작스러운 일들이 생겼다는 문자도 도착 하고 있었다. 벌써 두세 시간 전에 도착한 운 영위원들은 불안해지고 있었다. 과연 상영회 가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는 악천후였다. 포스터 작업부터 함께 했 던 후배들은 스텝을 자원하여 한 시간 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로의 노력이 헛되지 않 기를 기원하는 눈빛이 교환되고 있었다. 상영 시간 30분전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하나둘 아는 얼굴들이 극장을 찾아주었다. 그리고 간 간히 보이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그것만 으로도 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영시간 10분 전 자리의 80퍼센트가 차 있었다. 최종 결과는 기대를 넘는 성공. 남아 있는 좌석 가 운데 제일 나쁜 자리를 찾아가서 앉는데, 저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영회를 추진한 기념사업회 운영위원들은 <자백>상영회로 네 마리의 토끼를 잡 고자 했다. 첫째는 <자백> 시사회 펀딩 목표의 달성을 통한 정식 극장 개봉, 둘째는 개봉된 영화 및 행사준비 과정에서의 기념사업회 홍보, 셋째는 회원참여 이벤트를 통한 재결집, 넷째는 상영회를 통한 신규회원 유입이었다. 결론적으로 앞선 세 가지 의 목표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게 진행되었다. <자백>은 정식으로 개봉되었고 앞으로 자백이 상영되는 모든 곳에서 이내창기념사업회의 이름이 엔딩 크레딧으로 올라갈 것이다. 게다가 시사회에 참여한 반가운 얼굴들은 12월 총회에도 함께 했고 그 중 몇 명은 새로운 운영위원으로 합류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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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아쉬운 점은 회원배가와 후배들과의 소통이 체계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했다 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부족한 점은 새로 참여하고 또 좀 더 가까워진 회원들이 함 께 메꿔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운영위원회의 사람이 늘었다. 그리고 2017년, 다시 어깨동무의 시작이다. 덧붙이는 자랑하나. 자백상영회에 들어간 기념사업회의 예산은 총 14만 3천원이 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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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 관람기 하나.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게 한 시간 안종민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간첩 조작사건의 역사를 나열해 주었다. 내가 알고있지 못한 새로운 사실들이 이렇게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슬 픔이 밀려왔다. 내가 믿었던 사회, 내가 꿈꾸었던 행복한 사회는 결코 이 영화 속에서 펼쳐진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펼쳐진 사회는 도대체 저 사람들은 무슨 상식을 가지고 자신과 똑같은 생명을 부여받은 사람에게 저런 악행을 저지르는지 전 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니 너무 가슴 아프고 두 번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아니, 일어나서는 안 되는 범죄라는 생각을 했다. <자백>은 국가란 나에게 어떤 존재로 인식되어져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주었던 영화였다. 사실 나는 국가라는 단어에서 부정적인 인식보다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 고 있었다. 국가는 개인들이 임의로 자신들의 생활의 질을 보다 높이기 위해 만들어 진 하나의 큰 단체이고, 그 국가에서는 국민들을 위해 생명 보호, 다양한 기본적 권 리 보장, 복지 정책 등을 포함한 다양한 민의를 받아들이기 위해 국민들이 제공하는 세금이라는 형태의 금전적인 지원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가는 국민에게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단체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고, 교육과정 속에서도 자랑스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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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운 우리나라의 모습만을 배우고 자라왔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내가 느꼈던 국가라 는 이미지는 대한민국에서 제공한 사회제도 내에서는 당연히 모든 국민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가설이 머릿속에 장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말을 거꾸로 해석한다면, 국가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나를 포함한 대 부분의 사람들의 머릿속에 장착시킨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머릿 속을 지배하고 있는 누군가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으며 100% 신뢰하며 살아왔던 기 억이 강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깨닫고 매우 공포스러웠다. 그 이유는 세상이 존재하 고, 사회가 운영되는 원리로 ‘성선설’을 믿어왔기 때문이다. 세상에 선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더 많으면 세상은 이미 멸망하고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영화를 통해 소수의 권력이 선사해주는 정보만을 받아들인 다수의 선한 사 람들이 기본권을 침해당하고 생명을 약탈당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바라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아직 나에게는 벌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웃사회에서 벌어지고 있 는 악한 현실에 대해 무시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미래의 사회에 긍정적 이고 선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역사를 통해서 바라보 았을 때, 다수의 선한 사람들은 소수의 권력이 주장하는 노예제에 대해 반발하여 저 항했고 결과적으로 노예제라는 악한 제도는 폐지되었다. 소수의 권력들이 제공하는 정보가 과연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시대와 다르게 다수 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는지 강한 의심이 생 겼다. <자백> 영화 관람은 나에게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의 국가에 대해 사색을 던지게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안종민_중앙대학교 재학생이며 ‘평화나비’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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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 관람기 둘.

한국은 나쁜 나라예요.* 조현재

우리 가족 사진첩을 꺼내보던 중, 부모님의 대학생 때 사진을 봤다. 20여 년 전, 내 나이였을 때의 부모님, 80년대 대한민국의 대학생들, 군사정권에 맞서 투쟁하던 대 학생들이었다. 이런 부모님 밑에서 자라며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철저한 사상교 육(?)을 받아온 나는, 당연히 나 자신은 또래보다 정치적인 것들에 대해 많이 알고, 바른 가치관을 가진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백>을 보면서, 고등학교 때 인터넷에서 본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이라 는 이슈로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났다. 친구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봤는데, 중국 공문서를 위조하기까지 했으며 이로 인해 이번 사건이 중국과의 외교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걸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종종 상상할 수 없을 정도 의 정신 나간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정신 나간 사람들이 휘두르 는 권력에 인생이 무너지는 억울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가

* <자백> 제작진이 김승효 씨를 방문했을 때, 일어를 계속 쓰던 중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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슴 아프지만, 현실이다. 수차례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있고 나서, 사건 그 자체보다 더 화가 나고 싫 었던 것은, 이 나라의 지독한 냄비근성이다. 처음에는 불같이 분노했던 사람들도 시 간이 지나면 세월호를 잊어버리고, 위안부 문제를 떠올리지 않고, 국정교과서에 분 노했던 것을 잊어버리곤 하니 말이다.

부모님이 젊은 날을 불태웠던 시대는, 누군가 정의를 말하는 것이 당연했던, 이 땅 의 모순을 자각한 이들이라면 모두가 정의를 외치는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정의로운 세대가 낳은 정의로워야 할 아이들은 20대가 되어, 정의를 외치는 것을 쪽팔려하고, 오글거려 한다. 수능공부 때문에, 학점관리 때문에, 취업준비 때문에, 돈 버느라, 살기 바빠서. 수 많은 인생들의 수많은 살기 바쁜 이유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망각’이라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되어 역사의 피해자들을 더욱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세월호를 침몰시 키고, 할머니들이 눈을 감으실 때까지도 한을 품게 만들고, 국정교과서를 만들어 역 사를 왜곡한 것은, 지금의 비참한 대한민국, 나쁜 나라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 일조 한 것 또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피곤해한다. 귀찮아한다. 그러니 <자백> 전체 관 객 수가 15만 명 정도에 그쳤으리라. 열거한 수많은 살기 바쁜 이유들 속에서 영화 한 편의 여유를 찾는 사람들의 눈에는, 유우성 씨를 비롯한 피해자들이 얼마나 억울 하고 비참한 누명을 썼는지 밝히는 것보다는, 유명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 하는 완전 쎄고 화려하고 멋있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나 하나 쯤 그런 것에 관심 끄고 마냥 즐기며 산다고 해서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누군가 사람들에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을,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 람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이 나라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쟤는 정 치병 걸렸어”, “너 잘났어”라는 말을 듣는다. 4월 달에 학생회관 앞에서 세월호 진 상규명 서명운동을 외치는 학생들을 보면서 어떤 과 선배는, “쟤네 약간 그 뭐냐, 빨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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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친구들인데?” 라며 낄낄거렸다. 이것이 나쁜 나라, 대한민국 청년들의 현주소라 고 생각한다.

이런 지독한 무관심과 정치혐오증 속에서 역사의 피해자들이 잊혀져가고 있을 때, 20년이 넘는 시간을 잊지 않고 노력해오신 분들,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처 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나누는 분들 이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어릴 때는 그저, 엄마 아빠 따라서 엄마 아빠 친구들이 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 모임 정도로 생각했으나, 대학생이 된 지금, 그 긴 세월 을 이어져온 기념사업회에 어떤 의지가, 어떤 무게가 실려 있는지 감히 말할 수 없 음을 느낀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많이 부담스러웠다. <자백>에 출연한 실재하는 역사의 피해 자들도,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고 한 편의 묵직한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도, 내 나이 때 최루탄 연기 속에서 정의를 부르짖었던 세대도, 내가 그 2세라는 것도. 내가 살고 있는 세상. 전공공부, 과제, 동아리, 술, 알바로 차 있는 시시껄렁한 세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존재들이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억 울한 이들을 잊어버리고, 무관심해졌던 ‘평범한’ 사람들 중에는 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변명이요, 합리화였다는 것을, <자백> 시사회에서, 그 의미 있는 자리 를 함께하는 중앙대학교 학생들을 보며 인정했다. 내 또래의 대학생들. 똑같이 전공 공부, 과제, 알바 등등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주체성 없이 그저 기념 사업회 2세라는 부담감에 서 나온 나와 달리, 이내창기념사업회라는 부모님 뻘 선배 들이 준비한 뜻깊은 행사에 참여하겠다는 ‘선택’을 한 재학생들. 바른 가치관을 가진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건, 그런 청춘들이 아닐까. 그런 멋있는 분들이 대한민국에는 아직 많이 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내 모습을 깨닫고 인정하게 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고, 100만 명을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 왔다.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도, 자꾸만 의심을 했다. 어차피 몇 주 지나면 대부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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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귀찮다고 안 나올 거라고. 12월이 오고 날씨가 추워지면, 모두들 마음속 으로 응원한다고 말하며 전과 같이 마냥 즐거운 토요일 저녁을 보내리라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토요일이 거듭될수록 사람들은 더 늘어났다, 내 편협한 예상과 는 다르게. 그 중 많은 사람들이 20대 대학생들이었다. 2016년의 마지막 두 달은, 그 런 청춘들도 불의에 분노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부모님 세대가 그랬듯이 이 나 라의 최고 교육을 받는다는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가 시위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기간이었다. <자백> 시사회에서 중앙대 학생들을 보고 느낀 부끄러움이 다 시금 떠올랐다. 20년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평화시위로, 부조리한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을 벌 하고자 다시 한 번 이 나라는 정의를 외치는 흐름에 휩싸여 있다. 부디 이 흐름이 지 치지 않고 이어지기를, 부모님 세대가 이룩한 근현대사를 배우고 자란 청춘들이 그 못지않은 열정을 태우며, 나쁜 대한민국에서 한 걸음 나아가기를. 머지않아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고, 타락하고 부조리한 권력자들, <자백> 제작진의 추궁 앞에서 도 우산 속에서 들려오던 비열한 웃음, 청문회에서조차 전 국민을 상대로 국가를 모 독하는 뻔뻔함, 이 모든 악행을 심판하는 결과로 이어져 ‘좋은 나라’ 대한민국으로 나 아가기를 바라며, 2016년을 보낸다.

조현재_조환준·이예진 회원의 차남으로 건국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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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겨울 안성, 선비마을에서 만난 12명의 女人* 장미경

겨울은 추워야한다지만 유난히 추웠던 1월의 어느 날,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를 다녔었다 는 인연으로 12명의 여자들이 모였다. 토요일마다 광화문 광장에서 만나왔던 사람 들도, 처음 인사를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는 지금 을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여인들이었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 산 세월이, 누구 의 딸이라는 세월이 모두 모여 이제 반 백 살 여인이 되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고, 밉기도 했던 남편은 다시 친구 혹은 동지 가 되었다. * <그녀들만의 1박 2일 나들이>에는 이수정, 심윤정, 홍우림, 김경주, 이예진, 이상길, 이지원, 정원옥, 이계현, 이차연, 장미경, 고재영 등 12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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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다르지 않았다. 나라를 걱정하고, 가족을 생각하고,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관계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부모님과의 관계, 자식과의 관 계, 선후배와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국가와의 관계. 우리는 지금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을까? 나와 가장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지난 몇 해는 내 인생에 있어 유난히 힘든 시간들이었다. 부모님이 지방으로 내려가셨고, 오빠는 늦은 결혼을 했으며, 나는 사업이란 것을 시 작했다. 엄마가 많이 아프셨고, 친구처럼 지내던 오빠와는 소원해졌으며, 사업은 힘들었다. 견디기 힘든 시간들은 견뎌야했고, 기대고 싶은 부모님은 오히려 내가 버팀목이 되 어주어야 했다. 힘든 시간을 함께 힘들어한 친구들도 있었고, 힘들어하는 나를 외면하는 친구들도 있었으며, 그깟 게 뭐 힘들다고 징징대냐며 질책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관계는 변한다. 국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불평불만만 하던 대상에서 이제 올바른 국가의 모 습을 찾기 위해 구체적으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깊게 생각하는 대상이 되 었다. 그래서 토요일만 되면 광장으로 뛰쳐나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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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잘 버텨주었다. 관계 이전에 오롯이 ‘나’라는 존재가 무엇보다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나간 삶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다시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우리는 의혈 중앙인이라는 관계를 맺고 있다. 대단한 관계는 아닐지라도 따뜻한 관계는 이어갔으면 좋겠다. 언니들과 내가 그리고 후배들이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맘씨 좋은 여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함께 나누고 도울 수 있는 넉넉한 여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정의로웠으면 좋겠다.

그날 청명했던 안성의 겨울하늘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언니들이 준비한 맛있는 음식들과 함께 각자의 삶의 향기가 어우러진 그날 밤을 잊 지 못할 것 같다. 2017년 안성, 열 두 명의 여인 모두 고맙습니다.

장미경_1991년 중앙대학교 식생활학과에 입학했다. 6세~초6학년 아이들이 직접 스토리텔링해서 자신의 그림동화책을 만드 는 미술학원, ‘바퀴달린 마포공덕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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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님을 알 때, 더 단단해졌다

2016년 하반기 사업보고 2016년 이내창기념사업회 사업일지 일시

장소

내용

1월 23일

서울NPO지원센터

이내창기념사업회 총회(사무국장 노용헌 연임)

2월 10일

보라매병원장례식장

최봉규(최우혁의 부) 장례식 및 추모제

2월 17일

서울지방법원

김형태 변호사 인혁당 사건 수임 건 재판 증인 참여

2월 18일

49통일평화재단

이내창기념사업회 운영위원회(1차)

-- 서병훈 운영위원장 선출, 고두현 운영위원 선임, 30주년 TF팀 구성 -- 운영위원회 정례화(두 달에 1회)

2월 24일~

충남 홍성군

제3차 유해발굴 공동조사 참여(공동조사단 성원)

2월 26일

YMCA 강당

강내희 회장 정년퇴임식 및 출판기념회

2월 27일

중앙대-서울시청

백남기 농민 쾌유와 국가폭력 규탄 도보행진 및 4차 민중총궐기대회 참여

추모연대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23차 정기총회 참여

벌교 기독교공원

서원 3주기 기제

3월 5일

<끈덕지게 어깨동무> 2015-2016 가을에서 봄 발간

3월 16일 4월 8일 4월 9일

홍대 인근 카페 프란체스코성당 제기동 역사문제연구소

이내창기념사업회 운영위원회(2차)

--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심사 및 선정: <평화나비>, <진군나팔>

40주기 인혁당재건위 사건 열사 추모제 세월호 참사 2주기 포럼, <세월호 2년, 시민행동의 의의와 과제>

-- 노용헌 발표(“사진 아카이브로서의 세월호 기록: 세월호광장 사진으로 보 는 700일”)

4월 16일

광화문광장

세월호참사 2주기 참여

4월 23일

상암동 노을공원

어깨동무 봄나들이 치맥파티

5월 19일

서울시민청 동그라미방

이내창기념사업회 오픈운영위원회(3차) 및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시상식

5월 20일

충남 홍성군

유해 발굴 보고대회 및 안치

5월 26일

위생병원 장례식장

인혁당재건위 사건 이성재 선생 추모의 밤

6월 4일

광화문

전국민족민주열사범국민추모제

7월 8일

운영위원장 사무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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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기념사업회 운영위원회(4차)

-- 기제 점검/기념사업회 전망과 비전에 대한 발제(김성희) -- 재학생 활동 후원에 대한 내부 기준 마련(김기수) -- 영화 <자백> 스토리펀딩 모금과 행사 기획(이혁승)


함께하기

일시

장소

내용

7월 12일

민변 회의실

과거사 입법을 준비 한국전쟁 유족 간담회 <끈덕지게 어깨동무> 2016. vol.9 발간

8월 3일 8월 12일

조계사 불교문화원

제25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30주년 기념식 참여

8월 15일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

이내창열사 27주기 기제(53명 참가)

8월 25일

운영위원장 사무실

이내창기념사업회 운영위원회(5차)

9월 21일

국회도서관

과거청산을 위한 입법토론회(중단 없는 과거청산, 다시 시작이다)

9월 26일

중앙대 교정

백남기 선배 분향소 교내 설치 지원

10월 1일

대학로

백남기 선배 단체 조문 및 추모대회 참여

10월 2일

충무로 대한극장

의혈인이 함께 보는 <자백> 시사회 및 감독과의 대화

10월 7일

제주 아스타호텔

제주4·3 제68회 기념학술대회

10월 8일

부산 국제영화제

고두현 감독의 <옥상 위에 버마> 상영

10월 18일

서울대병원

백남기 선배 추모문화제

10월 27일

영동 노근리평화공원

박선주 교수(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장) 노근리 평화상 수상

10월 29일

청계광장

박근혜 하야 촉구집회(1차 촛불) 참여

11월 5일

광화문 광장

백남기농민 영결식 참여 및 박근혜 퇴진 2차 촛불집회 참여

11월 11일

프렌스센터 19층

임종국상 시상식(조영선 변호사, 김상숙 박사 수상)

11월 12일

시청광장/광화문 일대

박근혜 퇴진 민중총궐기 대회(3차 촛불집회) 참여

11월 18일

운영위원장 사무실

이내창기념사업회 운영위원회(6차)

11월 19일

광화문

박근혜 퇴진 4차 촛불집회 참여

11월 30일

전주 전북도청

한국전쟁 미신고자 유족 간담회

11월 26일

광화문

박근혜 퇴진 5차 촛불집회 참여

12월 3일

광화문

박근혜 퇴진 6차 촛불집회 참여

-- 이내창기념사업회, 민주동문회 공동주최, 기념사업회 주관 -- 기제 평가(재학생, 유가족, 외부인사, 민주동문회 등의 참여가 늘어나는 것 을 고려, 기제 이후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이 필요) -- 정원옥 토론자로 참여

-- 선배, 재학생, 동문 가족 등 159명 참석 -- 감독과의 대화: 최승호(감독), 정원옥(토론), 고두현(사회) -- 정원옥 발표(“끝나지 않은 애도: 4 ·3 피해여성은 말할 수 있는가”) -- 다큐멘터리 and 펀드 부문 선정작

-- 민주동문회. 기념사업회, 민교협, 재학생 참여

-- 기념사업회와 민주동문회의 연대 방안 논의 -- 30주년 관련 사업계획 논의(의문사 관련 아카이브, 거문도기행 등)

중앙대 R&D센터

민주동문회 총회 및 송년회 참여

12월 10일

광화문

박근혜 퇴진 7차 촛불집회 참여

12월 12일

국회 도서관

진실과 정의를 위한 과거청산 결의대회

12월 17일

흑석동 음식점

이내창기념사업회 총회 및 송년회

12월 24일

광화문

박근혜 퇴진 9차 촛불집회 참여

12월 31일

광화문

박근혜 퇴진 10차 촛불집회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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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이내창기념사업회 결산 월

1월

수입

2015년이월

지출

출금

입금

회비 형님식대미지불 추모연대 양말구입

3월

5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웹호스팅

15,300

783,910

복면회담진행비

40,000

강내희회장선물

125,000

최우혁열사 부친 부의

100,000

회비

803,670 50,000 25,000

강남규원고료

10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회비 근조기

84,000 1,315,905

어깨동무 배송외

504,280

회비

689,260 이내창의 후배다 뒷풀이지원

50,000 2,000,000 120,000

회비

648,820

이자

493 이성재선생 부의 추모연대회비 자캠후원 어깨동무 편집디자인비

153

50,000 100,000 1,000,000 659,170

도메인 연장

이내창기념사업회

100,000

회비 추모연대회비

8월

이동희, 이계현

121,300

어깨동무제작비

추모연대회비

7월

김재한

718,850

편집회의비

6월

60,000 300,000

추모연대회비

근조기

5월

200,000

회비

추모연대특별회비

4월

비고

633,750 동아리 지원

2월

18,065,088

50,000 99,000

범추모제기금

10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이재정 원고료

50,000

신지영 원고료

50,000

회비

639,190


함께하기

수입

지출

출금

한대윤 원고료

50,000

근조기 회비

659,190 50,000

백남기선배 분향

200,000

기제지원

440,300

회비

619,370 추모연대회비

50,000

어깨동무 제작

1,108,278

어깨동무 발송비 외 11월

488,560

복사볼펜(자백시사회)

13,000

추모연대회비

50,000

회비

639,130 백남기 추모위원

10,000

자백시사회 홍보운영비

130,000

근조기 12월

김봉석

540,000

추모연대회비

10월

비고

30,000

기제 도시락 9월

입금

25,000

백남기

회비

65,000

이자

252

10,244,923

이월금

15,380,220 10,244,923

수입항목

회비

수입결산

정기회비

지출항목

7,559,310 사업비

특별회비 사업수입

행사참가비

기타수입

이자

연대사업 745 홍보비

2,000,000 300,000

3%

700,000

7%

단체경조

410,000

4%

기타

425,000

4% 달력양말, 선물

어깨동무제작

2,424,183

7,560,055 지출계

24%

992,840

10%

1,000,000

10%

편집회의비

121,300

1%

어깨동무 원고료

250,000

2%

815기제

980,300

10%

자백시사회

143,000

1%

조문기 및 부의금

164,000

2%

행사뒷풀이

220,000

2%

총회

0% 호스팅, 도메인

수입계

비고

20%

비정기지원

비품 업무추진

%

추모연대회비

편집디자인비

경조비

7,560,055

지출결산

후배다 지원

발송비

행사

25,625,143

114,300

1%

10,244,923

100%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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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하반기 운영위원회 회의 보고

5차 운영위원회 일시 : 8월 25일(목), 오후 7시 장소 : 당산동 서병훈 운영위원장 작업실 참석자 : 서병훈, 노용헌. 이혁승, 고두현, 이원근, 정원옥

1. 815 기제 평가 및 이후 방안 -- 53명 참가 -- 기념공원 측에서 엠프, 천막, 의자 등 각종 편의시설 마련해줌으로써 기존 회원들의 수고를 덜 수 있었음. -- 이천으로 이전한 뒤 무엇보다 가족단위 자가용으로 이동이 가능해져 기제 뒤 음주가 사라지고, 따라서 지 체하는 시간도 매우 짧아짐. -- 식후 도로정체 등을 염려해 곧바로 이동하는 것도 새로운 경향임. -- 프로그램 관련해 기념공원 전시관 투어는 이제 그만하도록 하고(내용부실), 식사도 도시락에서 현지조달 뷔페식으로 변경하기로 함. -- 과일 등 먹거리는 농협 구매보다는 회원이 직접 농사지은 것으로 대체하도록 함. -- 1부 기제 행사는 무더위 아래서 간소화하고, 식사 후 2부 행사를 어떻게 풍성하게 할 것인가에 집중하도 록 함. -- 재학생, 유가족, 외부인사, 민동 등의 참여가 느는 것을 고려할 때 2부 행사를 어떤 프로그램으로 할지에 대 한 추가 논의 필요함.

2. 영화 <자백> 펀딩 -- 28명이 참여해 현재 총 157명(졸업생 76명 + 재학생 81명)이 관람 가능함. -- 월요일까지 고지하고 뉴스타파 측과 일정 협의(예- 10월7일 금요일 오후 7시 메가박스 이수점 상영 등) -- 참여자 문자 및 통화 안내 -- 일정 및 장소 확정 뒤 재학생 관람자 모집 시작(학내 홍보, 학내외 제 단체 및 이내창의후배다 선정 단체 섭 외(흑석,안성 쿼터 나눠), SNS 홍보 등) -- 재학생 관람 응모자 늘어날 시에는 기념사업회가 추가부담하든지, 아니면 졸업생 관람자를 조정하는 방 향으로 접근. -- 노쇼를 대비해 150% 정도 접수받고, 관람일 이틀 전까지 계속 확인함으로써 참여 확인함. -- <자백> 상영 뒤 이어지는 ‘감독과의 대화’를, 전문가 패널 추가해 <국가폭력>, <이내창열사> 의 내용으로 확 장함 -- 이와 관련 브로셔 등 안내책자 제작함. -- 기념품 및 경품 고려함(기념사업회 사업비 예상됨). -- 이를 준비하기 위한 실무단 모임을 9월 2일 갖도록 함. -- 준비총괄 이혁승, 재학생 모집 및 홍보 고두현. 예산 김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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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념사업회 향후 방향성 관련 논의 -- 진상규명, 국가폭력, 동문회 성격 등 총체적으로 고민하도록 함.

6차 운영위원회 일시: 11월 18일(금) 오후 7시 장소: 당산동 서병훈 운영위원장 작업실

1. 총회 및 송년회 -- 올해는 신년회를 하지 않고 송년회로 진행 -- 송년회는 12월17일(토) 5시 흑석동 중대후문 차이홍에서 진행. -- 송년회 프로그램은 미정. -- 2016년 사업보고 및 예산보고(노용헌, 김기수) -- 2017년 운영위조직개편(회장 및 사무국장 선출)

2. 민동과의 조직적 연대 -- 민동 운영위원회 회의에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또는 대리인이 참여하고, 민동도 -- 이에 준해서 기념사업회 회의에 참여

3. 기념사업회 30주년 준비사업 -- 의문사 유가족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인터뷰와 녹취, 영상 기록 작업) -- 내년 5,6월쯤 거문도 기행 행사 준비

이내창기념사업회 총회 및 송년회 보고 2017년 총회는 신년회 대신 송년회를 겸하여 2016년 12월 17일, 흑석교정 인근 차이홍에서 열렸다. 2016년 주요사업 및 재정 보고를 한 이후에 2017년 사업 제안이 있었다. 2017년 사업은 크게 진상규 명사업, 기념사업, 조직사업으로 나뉠 수 있는데, 진상규명사업으로는 과거사 입법 노력을 비롯해 대 외협력 및 연대사업이 포함되고, 기념사업회 내 진상규명사업 주체를 재생산할 필요성에 대해 논의 되었다. 기념사업으로는 모교지원사업인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발간>, 기 제 준비 등 기존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한편, <의문사 유가족들의 삶·투쟁을 담은 디지털 아카 이브 구축>, <이내창기념사업회 30년사> 등이 30주기 준비사업으로, <회원·동문·재학생과 함께 하 는 거문도 답사>가 신규사업으로 제안되었다. 조직사업으로는 기존 운영위원회 체제에서 운영위원 들의 역할 분담과 책임을 보다 분명히 하는 분과체제로 재정비하고, 회원배가운동, 민주동문회·재 학생 단위와의 조직적 연대 방안을 마련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신임 사무국장으로 정원옥(문창 88)이 선출되었으며, 민주동문회 심규한 회장과 정상길 사무국장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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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이내창기념사업회에서 일할 사람들 2017년 1월 21일(토)에 열린 1차 운영위원회에서 서병훈 운영위원장이 연임하기로 했고, 신명철, 홍 우림, 김경주, 노용헌, 이예진, 박응진, 김용수, 전경미를 신임 운영위원으로 위촉했다. 2017년 이내창 기념사업회에서 일할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운영위원장 서병훈 사무국장

정원옥

총무

김기수

운영위원

고두현, 김경주, 김성희, 김용수, 노용헌, 박응진, 백기욱, 신명철, 이예진, 이원근, 이혁승, 전경미, 조환준, 홍우림

편집위원

김선주, 서병훈, 조환준, 김경주, 이원근, 정원옥, 백기욱, 신성호, 강곤, 김용수, 강지우

27번째 기제 사진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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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덕지게 어깨동무>를 사랑해주시는 독자 여러분, 이내창기념사업회를 후원해주세요 이내창기념사업회는 사무공간이 없습니다. 간사도 없습니다. 매달 후원회비는 60여 만 원에 불과합 니다. 소식지를 만들고, 기제를 치르고, 장학사업과 연대사업까지 벌이기에 빠듯한 금액이지만, 알뜰 살뜰 아껴가며 살림을 꾸려왔습니다. 현상 유지만 하겠다고 하면 지금의 후원회비로도 명맥은 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19년이면 내창이형을 잃은 지 30주기가 됩니다. 유가협 의문사지회가 설 립된 지도 30주년이 됩니다. 내창이형을 비롯하여 대다수 의문사 희생자들의 죽음을 밝히지 못했기 에 30주년은 단순한 기억이나 기념에 머물 수 없습니다. 진상규명운동의 새로운 시작을 만드는 전환 점으로 30주년을 힘차게 준비해야 합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3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사업들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운동 30 년의 기록 : 의문사유가족의 구술·사진·영상 아카이브 구축>, <이내창기념사업회 30년사 : 어깨동무 특별판>, <회원·동문·재학생들과 함께 하는 거문도 답사> 등의 사업 외에도 문화제·학술제 등의 기 념행사가 30주년에 치러질 것입니다. 이러한 사업들을 내실 있게 준비하기 위해서 기념사업회는 지 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회원배가운동을 해보려 합니다. 기념사업회를 후원해달라고 적극적 으로 말을 걸고, 손을 내밀려 합니다. 단지 회비만 내는 회원이 아니라, 함께 30주년을 준비하자고 제 안할 것입니다. 그동안의 게으름과 수줍음을 떨치고 직접 연락도 드리겠습니다. 당황하지 않으셨으 면 좋겠습니다. 기념회사업회를 후원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CMS 출금 이체 신청서’를 작성하여 김기수 총무에게 보내주시면 됩니다. ‘CMS 신청방법’과 ‘작성 전 알아두셔야 사항’도 참조해주세요. 독자 여러분의 자발적 후원, 기다리겠습니다.

이내창 기념사업회 CMS 신청하는 법 방법 1. CMS 신청서 작성해서 신청하기 (양식은 뒷표지 안쪽에 있습니다) 1. CMS 신청서를 작성한다(날짜와 서명까지 모두 작성해주세요). 2. CMS 신청서 전체가 나오도록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서 총무(010-5222-5600)에게 문자로 발송한다(기재 한 내용이 잘 나오게 보내주세요). 3. 기념사업회에서 보내는 CMS 신청완료 문자를 확인한다(신청 후 1주일 이내 발송). 방법 2. 인터넷 또는 모바일로 접속하여 신청하기 1. https://goo.gl/ExLvHj으로 접속하여 신청한다(010-5222-5600으로 CMS신청 인터넷 주소를 문자요청 해주시면 답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2. 기념사업회에서 확인 후 전화가 오면 확인 통화를 진행한다(녹음됩니다). 3. 기념사업회에서 보내는 CMS 신청완료 문자를 확인한다(녹취 후 1주일 이내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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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 기념사업회 CMS 신청 관련 알아두셔야 할 사항 1. CMS를 신청하시면, 별도의 해지 신청이 있을 때까지 1달에 한 번씩 설정하신 통장에서 월납입액이 자동 으로 이체됩니다. 2. CMS 신청 시 반드시 기재항목(입력항목)을 전부 기재(입력)하여야 신청이 가능합니다(기재시 정자로 또 박또박 작성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CMS 신청 시 작성된 신청서 사진파일이나 녹취록이 없으면 CMS 신청이 불가합니다(꼭 자필 작성 시 - 작 성 후 사진 촬영 후 문자로 보내주시거나 인터넷 신청 시 - 녹음 전화를 잘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4. 월 납입액은 1만 원 이상으로 희망하시는 금액으로 적어주세요. 5. 이내창기념사업회는 정부에 기부금 단체로 등록되지 않아 기부금 영수증(연말정산용)을 발행해 드릴 수 없습니다. 6. 기타 CMS 신청 관련 문의 사항은 이내창기념사업회 총무 김기수(010-5222-5600)으로 문의 주시면 자 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https://goo.gl/ExLvHj

흑석교정 민주동문회의 후원회원이 되어주세요 2016년부터 이내창기념사업회와 흑석교정 민주동문회가 연대하고 있습니다. 27주기 기제를 공동 주최로 치렀고,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자백> 시사회에 민주동문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가 하 면, 민주동문회가 주관한 <백남기 선배 추모문화제>에 기념사업회도 함께 했습니다. 2017년부터는 민주동문회의 운영회의에 기념사업회가 참여하고, 기념사업회의 운영회의에 민주동문회가 참여하 는 등 조직적으로 더 긴밀히 연대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민주동문회회원이 기념사업회를 후 원하고, 기념사업회 회원이 민주동문회를 후원하는 것은 작지만 의미 있는 지지와 연대, 결속의 밑 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민주동문회 회원 가입은 연회비 3만 원 이상입니다. 계좌는 신한은행 110-459-640553 신기정입 니다. 네이버 밴드 [의혈 민주동문회]에서 민주동문회에 대한 더 자세한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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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세요 담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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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들어요. 하나, 2017년 다음호 편집위원 되기 자주 안 모입니다. 회의는 짧게, 뒤풀이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일은 찾아서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합니 다. 느릿느릿 갑니다. 끈덕지게 함께 갈 열의와 책임 감이면 충분합니다.

l 찍은 날

2017년 3월 6일

l 펴낸 날

2017년 3월 9일

l 펴낸 이

강내희

l 펴낸 곳

이내창기념사업회

l 연락처

사무국장 정원옥 010-2373-3387

cafe.daum.net/19890815

둘, 기고하기 어떤 형식과 내용의 글이라도 좋습니다. 나누고 싶 은 생각,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 소소한 일 상의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 음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회원 자녀의 기고에는 소 정의 원고료가 지급됩니다.

김선주, 서병훈, 조환준, 김경주, 이원근, 정원옥, 백기욱, 신성호, 강곤, 강지우가 힘을 합쳐 만들었습니다. 매번 발행일을 지키 지 못해 송구합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늦어졌습니다. 여는 시를 보내주신 송경동 시인께 감사를 드립니다. 광화문캠핑촌의 살 에는 칼바람 속에서 쓰신 시라는 것을 잘 알기에 존경을 보냅니다. 이번 호 권두칼럼은 강내희 기념사업회 회장님께서 주셨 습니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포토에세이는 백기욱이 5개월간 광장에서 찍은 사진으로 묶었습니다. 여러분과 의혈의 얼 굴을 찾아보세요. 특집 <역사를 부인하는 국가 그리고 사회>에 원고를 보내주신 김영수, 이준식, 홍수정 님께 특별히 감사드립 니다. 페이스북 담벼락의 사진과 글을 쓰도록 허락해주신 모든 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인쇄는 상지사, 발송은 신성호가 애써주었습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는 온라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밴드 <묻지말고 응답해라 의혈중앙>에서 근황 도 나누시고, 기념사업회 소식도 공유하시기 바랍니다. 깊은 애정과 관심으로 <끈덕지게 어깨동무>를 기다리고 애독해주시는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 걸음 더 끈덕지고 살갑게 다가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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