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덕지게 어깨동무 2013 봄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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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2 모두가 외면하고 싶어지는 순간

김선주

¶ 생각하기

4 포토에세이

최호식, 조환준

√ 특별기획

더 나은 삶, 다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힘, "공부하기"

12 <가장자리>에서 만난 홍세화 25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시민대학>을 준비하는 강내희

정원옥, 김선주 정원옥, 최호식

↶ 되살리기

36 서원 추모기획

편집부

↓ 후벼파기

장준하와 이내창, 그리고 장준하특별법

52

장준하특별볍 제정과 국가기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실현되는가

신명철

66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계기로 본 국가폭력 사건의 해결 과제

안경호

↔ 어깨걸기

78 어깨동무가 묻고 선희가 답하다

편집부

↘ 가로지르기

90 요리사, 사람을 움직이고 마음을 요리하다

장예진

∞ 구르기

99 박근혜 대통령, 국민의 외침을 똑바로 들어야

조환준

☺ 놀기

102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김진휘

106 음악으로 떠나는 아웃도어

박성용

⊹ 엿보기

108 나이듦에 대하여

성백술

110 인간은 정말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하는 것일까?

김문영

⌘ 함께하기

113 추모단체, 추모제 소식

편집부

= 털어놓기

114 오빠가 돌아왔다

이원근

116 여행의 일부처럼 눌러앉았다

이원근

120 회원동정 + 페북동정

편집부

124 몸이 움직이니 마음이 따라 움직였다

사무국

127 마음을 함께하니 당당해졌다


여는 글

모두가 외면하고 싶어지는 순간 김선주

고등학교 1학년인 둘째가 ‘국정원 불법

였고, 서둘러 학원 앞에 아이를 내려주고

선거개입 규탄 시국선언’에 참여하러 서

돌아오는 길에 난 참 한심하게 늙어 가는 구나라고…… 낯을 붉혔습니다.

울 동아일보사 앞에 가야 한다고 했습니 다.

아들은 세상을 날서게 보기 시작했고,

“음…… 그래? 참여했구나?”

난 여전히 적당한 핑계거리만 찾고, 보고

“응.”

싶은 것만 보려고 빈둥거렸습니다. 아이

“동혁아, 오늘은 비가 너무 많이 내린

의 눈에 엄마가 한심해 보이기 시작했겠

다.”

지요.

“응, 그런데?” “시국선언 참여하러 친구랑 같이 가?”

장마가 참 깁니다. 그래도 이른 아침,

“아니, 혼자.”

깊은 밤엔 분명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

“동혁아!” “…….”

했고, 또 가을에게 자리를 내주겠지요.

“오늘은 그냥…… 영어 학원에 가자. 시험 앞두고 빠지면 손해잖아. 그리고 비 도 너무 오고.”

이번호엔 나이 들어 살아가는 세상살이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었습니다. 삼월에 친구를 멀리 보내고 상심하고 나서, 한편으론 정신이 번쩍 들어 기획했

“엄마.”

었더랬지요.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마주

“응?”

보며 그 모습을 이야기하기를 어려워하셨

“엄마, 뭐 그래??”

어요. 한번 더 용기를 내서 다음호에 다시 시도해 볼 작정입니다. 글 보내주신 선배

학교 앞에서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 차

님들 감사드립니다.

안에서, 아들과 대화. 집으로 돌아와 서둘러 간식을 챙겨 먹

시 한편 올립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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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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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호식 / 글 조환준


현 대통령의 아버지이면서 그 또한 전직 대통령이었던 사람에 대해 저들은 왜 자꾸 죽은 자를 들먹이냐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 남은 명예를 지키고자 스스로 삶을 던졌던 또다른 전직 대통령에 대해선 끊임없이 정치적 굴레들 덧씌우는 무리들. 다시 더 단단하고 더 큰 연대가 절실하다.


“국민들이 성났다.” 국정원의 불법 정치개입을 규탄하는 국민들의 성난 목소리가 거세다. 지난달 6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범국민 촛불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한목소리로 ‘국정원 퇴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는 이 날을 비롯해 매주 토요일마다 ‘국정원 대응 시국회의’ 주최의 촛불집회에 참석 중이다. 한편 ‘국정원 대응 시국회의’는 7월 2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 사건은 대한민국과 국민 주권에 대한 중대한 공격”이며 “진상 규명과 국정원장 해임 및 국정원 개혁”을 주장했다.





더 나은 삶, 다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힘,

“공부하기” <가장자리>의 홍세화와 <노나메기 시민대학>의 강내희를 만나다 글

정원옥 / 사진 김선주, 최호식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기 위한 공부를 하 자고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자리>를 만든 홍세화와 <노나메기 시민대학>을 준비 중인 강내희가 그들이다. <가장자리>는 인문학적 교양의 습득을 통해 우리 자신으로부터 진보운동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노나메기 시민대학>는 다양한 학문 영역을 가로질러 가르치는 사람과 배 우는 사람의 역량이 함께 커지는 지식 순환을 실현함으로써 자본 주의의 위기에 대응하고자 한다. 이처럼 다른 색깔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가장자리>와 <노나메 기 시민대학>에는 공통점이 있다. 시민교육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협동조합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진보운동의 새 로운 주체를 만들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요컨대, 홍세화는 <가장자리>를 통해, 강내희는 <노나메기 시민대학>을 통해 ‘왜 지금 다시 공부인가’라는 긴박한 물음을 진보운동 진영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자리>와 <노나메기 시민대학>, 이러한 시민교육의 공간 이 우리 기념사업회 회원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홍세화와 강내희를 만나 물어보았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정직한 꿈꾸기가 시작되는 곳”,

<가장자리>에서 만난 홍세화

5월 8일, 서교동에 위치한 <가장자리> 사무실에서 홍세화 선생님을 만났다. 인 터뷰를 시작하기 전, 나는 이내창을 아느냐고 물었고, 그는 안기부가 개입된 사 건으로 이내창 사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89년, 그는 파리에 있었다. 인터뷰

정원옥 / 사진 김선주


우리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자 정원옥(이하 정) 사이트에서 <가장자리>를 소개한 동영상을 봤어

요. 동영상을 보면, ‘우리는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라고 묻고 ‘우 리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자’라는 답을 내놓고 있는데요. 우리 자신 으로부터 출발하자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출발이 왜 공부 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홍세화(이하 홍)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에스트

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는 결국 오지 않죠. 거기에서 우리가 기다리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으로부 터 출발하자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고요. 제가 보기에 제일 중요했던 것이 인간에 대한 물음, 존재에 대한 물 음, 이런 것이 부족한 채 사회과학의 성을 허술하게 쌓았던 게 아닌 가라는 반성이었어요. 아주 짧게 말씀드리면 정규직이라든지 8시간 노동제라든지 이런 제도가 구미에서 자리 잡히기까지 한 세기 이상의 피눈물 나는 노동 운동의 과정이 있었어요. 2차 세계대전 때 민중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과정에서 이러한 제도가 확보된 것이었지요. 자본과 노동의 이러한 균형이 30년 동안 지속되어 오다가 이것이 오일쇼크로 깨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지배 블록에 의해 신자유 주의 담론이 착착 준비되죠. 그것이 한국 사회를 완벽하게 덮친 게 IMF 위기 때였는데 파견법이니, 정리해고법이니, 비정규직법이 니 하는 것들이 정말 역설적이게도 자유주의 정권에 의해 자리 잡히 게 됩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의해서 말이죠. 저는 이렇게 봅니다. 자유주의 정권이 IMF의 강제와 신자유주의 의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노동 분할정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지 만, 실상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을지는 그들 자신도 몰랐 던 것이죠.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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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그렇다면 진보운동 진영은 그 과정에서 얼마만큼 싸웠느냐? 물론 일부 싸우기는 했지만, 헤게모니 투쟁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지요. 노동 분할의 엄중함, 벌거벗은 생명들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고, 분단의 질곡으로 인해 민족주의 가 지나치게 대변되는 문제가 있었어요. 이런 흐름들에 대해 제대 로 토론하는 과정 없이 노동현장에서의 권력, 진보정치 영역에서 의 권력을 위해 내부의 문제들을 온존시켜 오다가 파열한 게 작년 의 일이었다고 봐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존재의 떨림이라든지 인간에 대한 탐색 없이 사회과학의 성을 허술하게 쌓았던 것, 이것이 진보운동 이 무너지게 된 원인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부터 되 돌아보고 공부를 해야 된다는 얘기를 하게 된 것이죠.

진보의 교양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다 정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자라는 말은 곧 진보운동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부터 시작하자라는 말과 공명되는 것이겠군요. 홍

그렇지요. 현재 진보운동은 구멍이 숭숭숭 뚫려 있습니다.

배제된 자들의 민주주의, 배제된 노동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진보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저는 진보의 교양으로부터 그 토대가 잡혀야 겠다고 보는 겁니다. 정

하지만 인문학적 교양을 습득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게

느껴집니다. 특히 진보에게 교양이 요구되는 이유라도 있을까요? 홍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초·중·고의 사회 과목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게 자본주의거든요.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자본주의이고, 사 회과목을 공부하는 건 사회적 동물로서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를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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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하라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사회시간에 공부해야 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게 자본주의인데, 우리의 교육에는 이것이 싹 빠져 있 다는 거예요. 또 다른 문제는, 일제 때부터 시작된 주입식 교육이 우리 모두를 사 유하는 주체가 아닌, 암기하는 기계로 형성시켰다는 겁니다. 심지 어는 진보조차도 주입된 진보일 가능성이 높지요. 한국에서 진보적 인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어떤 주체적인 과정을 거친 게 아니라, 선배가 어떤 성향인가에 따라서 이른바 정파까지 결정 되는 경우가 많죠. 이 자체가 주입된 진보의 한계라는 겁니다. 그 러다 보니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있지만 다 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태도를 보이죠. 저는 그런 것 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학교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 는 사유하는 주체로 서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미완의 상태입니다. 당신이 이미 완성 단계에 이 르렀냐고 물어보면 아무도 감히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없지요. 미완의 단계에 있는데 완성 단계에 이른 양 살아가고 있는. 진보진 영에 속한다고 고집은 또 얼마나 센가요, 얼마나 단호하고. 진보 진 영이 의식이 깨어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 인간과 사회에 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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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한 탐색에 있어서 정말 충실하게 내용을 가져가고 있나? 그렇지 않 다는 것이에요. 정

그런데 배제된 사람들이라고 하면 소수자나 비정규직도 있

겠지만, 저 자신도 배제된 사람 같거든요. 우리 모두는 이미 잠재 적으로 배제된 자들 아닌가요? 홍 고원의 평등이 계속 축소되고 있

는 상황이죠. 다수에게는 이미 허용되 지 않는 것이 고원의 평등이라는 겁니 다. 고원의 평등까지 올라가는 자체가 어려운 것이고 이제는 내려가는 일밖 에 없는, 이 구조 자체를 바꾸어야 되 는 그런 상황인 거지요. 노동의 분할이라는 게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이렇게 둘로 나누 는 거잖아요? 일부는 포함된 대로 놔두고 그 다음에 배제하는 노동 의 분할은 처음에는 자본과 권력에 의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것 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면 포함된 자들이 자기 보존 논리에 의하여 이 구도를 강화시키면서 둘 사이의 장벽을 더욱 더 적대화 하기에 이르죠.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게 노동 자체가 그럴 때 이미 인 간성이 파괴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체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고 있는 노동에 대한 모독인 거죠. 노동뿐 만 아니라 다양한 지점들에서 배제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고 무관심 해지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인간성이 파괴되고 있 기 때문인 거죠. 『경제적 공포』를 쓴 비비안느 포레스테는 무관심을 잔인한 것이라 고 했어요. 무관심이 훨씬 더 활동적이고 강력한 힘을 갖는다. 왜 냐하면 무관심은 권력과 자본의 남용과 탈선을 허용해 주기 때문이 라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 우리가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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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치열하게 탐색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죠.

진보운동은 패배의 연속,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정

공부에 대한 열망은 있는데, 막상 공부하겠다고 덤벼들기

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공부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시간을 내는 것도 어렵고, 무엇보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목표가 불분명하니까요. 공부를 해서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나? 이 런 것에 대한 회의나 비관이 상당히 많이 누적되어 있는 듯싶어요. 홍

진보진영에서 누가 공부할까? 공부 안 합니다. 정말 공부

안 하잖아요. 과연 책을 읽나? 책도 많이 안 읽습니다. 공부 안 하 고 책 안 읽어도 진보 진영의 인사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미 권력만 작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인간의 어떤 숭고함이 랄까, 어떤 섬세함이랄까 이런 것들이 진보운동에서 실종되어 버렸 어요. 제가 프랑스에서 경험한 것이 있어요. 물론 어느 사회라고 완벽하 겠습니까. 그렇지만 프랑스에는 그래도 인간의 숭고함에 끝까지 매 달리려고 하는 존재들, 그 존재들의 떨림이 있습니다. 예컨대 지난 2월 말에 돌아가신 스테판 에셀 같은 그런 분이 존재할 수 있는 풍토 가 있지요.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게 참 아쉽습니다. 어차피 현실에서의 진보운동은 언제나 패배의 연속입니다. 패배의 연속 속에서 그래도 인간을 붙들고 가는 것이고, 거기에서 피어오 르는 내용이 결국 인간의 숭고함과 섬세함이거든요. 그런데 한국 의 진보운동 진영에서는 그런 것을 찾아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정 : 최근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레닌을 인용하셨더라고요. 진 보운동 진영이 그 동안의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의 미에서 사용하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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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레닌이 신경제 정책을 단행하면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 걸 인용했지요. 2004년만 해도 13%의 지지율이 있었 던 것이 지금은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진보신당 다 합쳐 봐야 4%로 곤두박질치게 된, 이런 상황에 대해 진보운동 진영은 분석조 차 하지 않습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는 그런 식이지, 과 연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돌아보려고 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까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제 표현이 지나칠 수 있어요. 그 동안에 엄청난 투쟁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정말 헤게모니 투쟁이 라도 제대로 했나? 그것도 못했다라고 한다면, 알량한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대의와 원칙조차 놓쳐 버렸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냐라는 겁니다. 정

선생님께서는 시간의 무게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요.

진보진영의 현재 상황이 바로 시간의 무게가 결여되어 온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홍

이상(理想)이라는 단어를 끌어안고 가는 한, 사람의 경우

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의 현실 속에 있는 일상 세계가 있고요, 이상이 작용하는 세계관의 세계가 있죠. 세계관의 세계에 비해서 일상세계는 지극히 작습니다. 일상세계에서 만나는 인간은 세계관의 세계로 보면 가까운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이것도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 안에는 갈등이 있어요. 진보진영 운동에서 가장 어려운 게 인간관계잖아요? 정파니 뭐니 부닥치고 갈라질 땐 아예 안 만날 놈, 이런 식으로 되는 건 일상세 계의 함정에 빠져 있는, 바로 인간에 대한 탐색이 부족해서인 거 죠. 너무 오만해요. 아무리 지금 갈 길이 달라서 갈라지더라도 다 음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은 항상 열어둬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질 않아요. 진보운동이 끊임없는 패배의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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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다름도 이 운동의 일부로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었던, 제가 시간의 무게가 결여되어 있다는 표현을 썼던 것은 바 로 그런 의미에서죠. 정

선생님은 또 길게 보며 가자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제가 해

석하기에 공부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삶의 문제로 계속 안고 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요. 죽을 때까지 계속 해야 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공부이고, 운동 아닌가요? 홍

그렇죠. 토크빌도 얘기했지만, 민주주의라는 것도 우리가

그게 민주주의인가 하고 다가갈 때 이미 저 멀리 떨어져 간다. 그러 니까 완성이라는 게 없는 거죠. 하물며 우리가 말하는 진보라는 것 이, 물론 제도를 통하여 하나의 매듭을 짓는 작은 진전들은 있겠지 만 결국은 끝이 없는 거죠. 때로는 후퇴했다가 밀려났다가 조금 더 진전하고, 이런 과정의 연속이 역사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 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그래도 역시 진보한다는 믿음은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죠. 문제는 조급함이에요. 이 조급한 것이 결국엔 권력욕하고 만나요. 물론 권력욕이 아주 없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연대할 땐 연대 하고, 갈라질 땐 갈라지기도 하는 것이죠. 저는 형용모순이지만 한 국의 진보는 지극히 미성숙 상태에 있기 때문에 진보부터 진보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의문사진상규명, 우리의 힘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가 정

화제를 조금 바꾸어볼게요. 이내창기념사업회는 의문사진

상규명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인데요. 의문사 역시 단기간에 해 결되는 게 아니라, 길게 바라보며 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공부를 하면 좋을지 조언해 주실 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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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까요? 홍

지금까지 부딪혀 오면서 저보다 더 잘 아시겠죠. 제가 오

히려 배워야죠. 굳이 말씀드리자면,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와 한일 관계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어요.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연합의 쌍 두마차잖아요? 그들이 현재의 힘을 갖게 된 것이 독일의 전후청산 과 또 그것과 맞물려서 프랑스에서의 콜라보, 나치 협력자들에 대 한 철저한 청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독일과 프랑 스의 과거청산이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맞물려서 진행되었다는 점이 중요하죠. 그런데 한일관계는 어떻습니까? 한국도 일제 부역 세력을 청산하 지 않았고, 일본도 전범세력들이 계속 실권을 쥐고 있죠. 지금 아베 만 해도 기시의 외손자잖아요? 옛날 총리의 외손자가 계속 해먹고 있는 이런 상황이 한국의 과거청산과도 맞물려 있다는 겁니다. 일 제 부역 세력의 청산은 우리만이 아니라, 일본의 과거청산과 맞물 린 것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과거청산은 결국은 힘의 역학 관계죠. 저들이 힘이 워낙 센 거고, 그 뒤에서 미국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힘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이냐가 항상 과 제죠. 결론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우리의 힘을 키워나가기 위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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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도가 될 수 있겠죠. 정

제도적인 과거청산이 시작된 지도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이 얘기를 계속하는 것에 사람들이 좀 지친 것도 같아요. 가해 자의 반성은 없고, 피해자의 억울함만 계속 들어왔으니까요. 피해 자에 대한 보상이나 명예회복 쪽으로만 진상규명이 되는 과거청산 을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홍

이게 참으로 슬픈 일인데요. 우리는 제대로 제압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압해 본 적이 없어요. 이건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김 대중 대통령이 “용서한다”라는 말을 했을 때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 었어요.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사죄하지 않는데 먼저 용서를 하는, 참으로 이상한 상황인 거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힘이 없다는 것 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죠. 그 자신은 대통령까지 됐으니까 용서할 수 있는지 몰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그런 점에서 저는 그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과거청산은 결국 우리의 힘을 최대한으로 키울 수밖에 없다. 다만 저는 영역을 확장할 필요는 있다고 봐요. 그것은 그것대로 하되, 과거청산은 국민의 감수성, 인식 능력을 키우는 작업과도 연결되 어야 합니다. 프랑스에서 역사 교수하고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 를 하다가 제가 다짜고짜 “우리가 왜 역사를 공부해야 되냐?”라고 물어보니까 그 교수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 더군요. 그 때 정말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가장자리>에서도 여력이 생기면 청소년들과 같이 역사기행 같은 것을 해볼 생각입니다. 그런 식으로 폭을 넓혀서 어떻게 힘을 키울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지요. 진보운동도 그렇고, 의문사진상규명도 그렇고 길게 보고 적극적으 로 해야 되는 거라고 봅니다. 단기간에 뭔가 열매가 있을 거라는 기 대, 이런 조급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거죠. 공부하고 실천하는 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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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정 자체가 나의 존재를 확장시킬 수 있다고 보는, 이런 접근이 필요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유하고 실천하는 자율적 학습공동체를 꿈꾸다 정

<가장자리>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저는 <가장자리>가 협동조합으로 운영된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 습니다. 협동조합의 운영과 공부는 실제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 가요? 홍

아직은 실험 단계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

는 건 아니에요. <가장자리>를 만드는 일과 <말과 활>이라는 격 월간지를 만드는 일이 함께 진행이 됩니다. <가장자리>가 자율적 학습 공동체라면, <말과 활>은 조합원들에게 읽을거리, 토론거리 를 제공하는 텍스트가 되는 셈이죠.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자금도 없는 사람들이 격월간으로 책을 낸다 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일단은 조합방식을 활용하 는 셈이고요. <말과 활>의 독자가 좀 더 적극적으로 <가장자리> 에 참여한다는 주체화의 의미도 있는 거지요. 물론 강좌도 있겠지 만, <가장자리>는 조합원들이 주체적으로 읽고 토론하는 소그룹 위주의 모임이 될 겁니다. 이러한 방식을 택한 것은 노동운동 과정에서도 나타난 문제, 결국 노동의 정치세력화라는 것이 노동 상층의 정치적 진입을 위한 것이 었다고 볼 때, 일반 노동자들은 언제나 동원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 다는 점에 대한 반성인 것이죠. 그래서 학습의 과정 자체에서부터 주체화, 조직화할 수 있게끔 하려는 것이죠. 내가 완성된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면 성숙의 계기를 스스로 창출해 야 될 것이고, 자기 자극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건 어떻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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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까? 아무래도 사람이기 때문에 혼자 공부해서는 어렵고, 함께 공 부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기회가 생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물과 현상을 보는 눈이 떠지는 만큼 자기 존재가 확장된다고 할 때 서로 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감이랄까, 자존감 이런 것을 북돋우면서 함 께 커나갈 수 있는 장이 필요한 것이죠. 정

조합원들에게, 또 조합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특별

히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홍

6월 초부터 5회에 걸쳐서 대한문 앞에서 <길 위의 인문학

>이라는 행사를 하려고 합니다. 몇 분이나 올지는 모르겠지만, ‘쌍 차’, ‘재능’ 투쟁하시는 분들하고 함께 할 겁니다. 저는 묻고 그 분 들이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건데, 그런 자리에 조합원들이 같이 참여했으면 좋겠고, 그렇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같이 지각함, 그게 친구의 진정한 의미 라면 같이 지각함으로써 같이 인식하고 같이 사유하고, 그걸 통해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사유와 실천의 공동체 라는 이름을 <가장자리>에 붙인 이유이지요. ‘소굴’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모여서 공부할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입니다. 그 전에는 좁지만 여기에서 열 명이라도 둘 러앉아 책읽기 모임부터 하자! <가장자리>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 고, 모든 게 실험입니다. 정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출발하

자는 <가장자리>의 제안을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사유하고 실 천하자는 것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홍

그렇죠. 자기가 확장되는 속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지

요. 이것이 나를 피곤하게 해서는 지속성이 없습니다. 내가 보람을 느끼고 나아가서 행복도 느낄 수 있는, 그래서 인문학이 필요한 것 이죠.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언제 내면의 충일감과 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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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람을 느끼는 존재인가? 작은 하나하나의 실천들, 만남들, 끊임없 는 미완의 상태이겠지만 이 속에서 조금이라도 자아가 확장되고 성 숙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것. 이것이 공부 고, 진보의 교양 쌓기인 거죠. 저는 이러한 것이 진보운동의, 그리 고 민주적인 시민의 출발점이 되어야 된다고 봅니다.

<가장자리에 참여하기> 출자금 1구좌(5만원) 이상 납부/ 조합 운영비(월 1만원) 이상 납부 cafe.daum.net/bords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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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교육운동의 실험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시민대학>을 준비하는 강내희

<노나메기 시민대학>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머지않아 문을 열게 될 대학 이다. 그런데 지식순환, 협동조합, 노나메기, 시민대학, 단어 하나하나가 낯설고 수상하다. 마침 우리 기념사업회 회장인 강내희 선생님이 이 대학을 만드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5월 24일, 중앙대학교에서 그를 만나 <노나메기 시 민대학>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았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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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옥 / 사진 최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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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일하고 ‘나누어 먹고’ 다함께 잘 살자 정원옥(이하 정) 시민대학을 이야기하기 전에 노나메기가 무엇인지

부터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강내희(이하 강) 노나메기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백기완 선생

의 사상입니다. 백기완 선생이 황해도 분이잖아요? 황해도 사투리 로 노나메기라는 말을 쓰는데 경상도 말로는 노나 먹는다고 해. 노 나 먹기, 노나메기, 노나 먹이기, 모두 ‘나누어 먹다’의 변형인 거 지. 노나메기 사상이란 무엇이냐? “썩어문드러진 자본주의 문명을 한 사위로 갈라서서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 사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벗나래(세상) 날아가는 길을 아리아리 만들어나갈, 알통밖에 없는 무지렁이들의 자생적 변혁의 사상적·학 문적·철학적·예술적·실천적 지혜의 찬 샘이다!” 또 노나메기다운 삶이란 건, “피눈물 알고, 꼭 필요한 것 말고는 다 내주고 매일 같이 하루하루 커져가는 버선발 같은 사람, 그래서 의 식화되고 아리아리 깨우쳐서 없는 길도 찾아가고 만들어가는, 그 런 게 아리아리 정신이야!” 이게 다 백기완 선생의 말이거든. 한 마 디로, 같이 일하고 같이 나눠 먹고 다함께 잘 살자! 이게 노나메기 의 취지인 거죠. 정

백기완 선생님은 우리 기념사업회와도 인연이 깊어요. 내

창이형이 돌아가셨을 때 문익환 목사님과 함께 가장 먼저 학교에 오 셨고, 장례식 때까지 함께 싸웠으니까요. 얼마 전 장준하 선생님 겨 레장 때에도 먼발치에서 뵈었어요. 강

장준하 선생하고 백기완 선생은 인연이 깊거든. 두 분이 아

주 친하게 지냈다고 그러더라고. 백기완 선생은 만날 때마다 놀라 워. 그 양반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놀 라운 말을 많이 한다고. 팔순이 넘었는데 누구보다도 정신이 맑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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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정신이 맑다는 것은 헛소리 안 한다는 게 아니라, 누구보다도 예리하다고. 긴장이 늦춰진 것 같으면 누구보다 예리하게, 바로 긴 장하게 말을 탁 하고 그런다고. 정

노나메기 사이트에 가보니까 재단 설립 추진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사업들이 기획되고 있던데요, 어떻게 시민대학 설립을 먼저 추진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이 궁금해요. 강

2010년 여름인가, 백기완 선생이 노동자들, 민중이 올 수

있는 터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셨어요. 그리고 마중물이 될 기금을 내놓았지. 자기가 갖고 있는 돈을 탈탈 털겠다는 선생의 말씀에 모 두들 감동 받아서 한 번 해보자, 이렇게 된 거죠. 2011년 6월에 <노나메기 재단 설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는 데, 산하에 전략기획위원회라는 게 있어요. 2011년 여름부터 작 년까지 한 달에 한 번은 내부 워크숍을 하고, 한 번은 공개토론회 를 진행해오면서 노나메기 재단을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 궁리했죠. 한편으로는 씽크탱크를 만들자!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마당도 만들 고, 민중의 집도 만들고, 민중마을도 만들고, 민중도시도 만들자! 그런 계획들을 다 세워놨어요. 그런데 이게 잘 안 되는 거야. 잘 안 되지. 최근 와서 잘 된 일이 없 잖아? 정세도 안 좋고, 여러 가지로 힘을 못 받았어요. 이런 분위기 를 반전시키기 위해서 나온 게 지식순환협동조합인 거야. 노나메기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통로를 이걸로 잡자! 그래서 <노나메기 시민 대학>의 설립을 먼저 추진하게 된 거죠.

자본주의의 위기와 새로운 주체 형성의 시급함 정

노나메기 운동뿐만 아니라, 진보운동 전체가 침체를 벗어

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죠. 지금 이 시점에서 시민대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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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필요한지, 어떤 목표로 만들어지는 대학인지 말씀해 주시겠어 요? 강

사실 이 학교의 제일 중요한 목표는 노나메기 주체를 만들

자고 하는 것인데,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이런 얘기가 나왔지. 옛날 에 퇴계가 ‘십만양병론’을 말했는데, 우리도 그런 대비를 해야 할 때라고. 저는 지금이 혁명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봐요. 대체로 주기가 있어.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데 1910년대 말 1920 년대 초에 세계 혁명이 일어났고, 1968년에 일어났고, 2008년부 터 세계경제가 공황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계속 공황으로 가는 거야. 공황이 일어나게 되면 격변이 일어나. 격변이 일어나는데, 그 격변이 좌로 가느냐, 우로 가느냐로 갈리는 거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미국이 헤게모니를 잡았다고. 그러니까 세계 전체가 우경화가 되고 자유주의가 지배하게 된 거 야. 한국 사람들은 자유주의라고 하면 다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자유주의는 우파고 자본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입니다. 돈 많고 잘 난 놈들한테만 좋은 거란 이야기죠. 그 동안 자본주의는 세 종류의 자유주의를 거쳐 왔어요. 고전적 자 유주의에서 수정 자유주의로 갔다가 현재는 신자유주의죠. 신자유 주의가 도입돼서 사회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무슨 일이 생 기는가 하면 못 먹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일자리 잃는 사람들 이 많이 생겨나는 거지요. 또 신자유주의는 물건을 만들어 돈을 버 는 게 아니라, 돈이 돈을 버는 금융자본주의로 갔다고. 자본은 돌아 야 이윤이 나는 건데, 돈이 돌지 않으면 죽어나는 거야. 그래서 돌 리고 돌리다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 딱 끝장이 난 거지.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는 상황 까지 왔다고 봐요. 이러한 변화가 어디로 갈 것인가, 누가 헤게모 니를 잡을 것인가? 그래서 지금부터는 주체의 문제가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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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 진보 세력도 늙어서 60대, 50대가 대부분이 고 40대도 별로 없어요. 객관적인 정세는 어마어마한 변동이 일어 나게 되어 있는데, 주체 세력이 너무 부족해 보이는 거지요. 제일 무서운 게 파시즘이에요. 1930년대를 지나면서 독일이 파시즘으 로 갔는데, 파시즘으로 갈 때 독일의 좌파들이 실수를 많이 한 거 예요. 우리는 그런 걸 막아야 한다고. 자칫 잘못하면 우리 내부에 서 어마어마한 살육이 일어날 수 있다고. 그러니까 노나메기 주체 를 형성해야 될 필요성이 더더욱 급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 제라고 보는 거지요.

교육운동의 실험, ‘지식순환’과 협동조합이 만나다 정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응할 시민 주체를 만들어내는 장소로

서 시민대학이 요구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노 나메기 시민대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나눠 보겠습니다. 우 선 시민대학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하겠다는 것이 눈에 띄었어 요. 협동조합 방식을 선택한 것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나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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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협동조합

법이 바뀌어서 소수로도 협동조합을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러니까 협동 조합을 쉽게 만들 수 있 는 조건이 만들어졌다는 이런 게 있고. 또 협동조 합은 조합원들이 만들어 가는 거니까 참여도가 다를 거라는 기대가 있 지요. 처음부터 많은 사 람들이 참여하기는 어 렵겠지만, 예를 들어 천 명 정도를 참여시킬 수 있다. 그러면 충분한 거 예요. 기본적으로 수강생이 확보되니까 일정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갈 수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으로 하는 게 유리하겠다. 그런데 협동조합이 과연 진보적인 모델이냐는 문제가 있어요. 이건 좌파운동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요. 협동조합을 우리가 하 나의 코뮨(commune)으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이걸 가지고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연합으로 갈 수 있는가, 없는 가? 이거는 한 번 해봐야 아는 거지요. 정

그런데 협동조합 앞에 지식순환이라는 처음 보는 표현이

붙어 있어요. 지식이 어떻게 순환된다는 이야기인가요? 강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일 수도 있고, 배우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기본 전제는 이런 건데 그래도 아무나 가르치는 건 아니겠지요. 나름대로 어떤 분야의 전문성이라든가 식 견이 있고 또 경험이 있어야 가르칠 수 있으니까. 지식순환이라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는 서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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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 순환을 해야 된다. 지식이 일방향으로만 가는 게 아니라, 지 식이 돌아가면서 저 쪽에서 이리로 오고 이쪽에서 저리로 가는 그런 방식으로 가자. 그런 의미의 순환인 거고요. 그러나 이제 막 교과과정을 짜는 작업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기 때문 에, 아마 거기에서 사람들의 선호도라든가 참여 여부가 많이 결정 될 것 같아요. 얼마나 좋은 프로그램이냐? 준비하는 사람들은 가능 하면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지요. 정

지식순환이라는 개념으로 보자면, 학생도 더 이상 교육의

대상만이 아니라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식순환이 되면, 공부하는 방식이나 내용도 달라지는 건가요? 강

공부라는 게 한편으로는 교육운동인 거죠. 교육운동이라

고 그러면 전교조가 가장 선두에 선 조직이고 다양한 교육단체들이 있는데, 대개는 교육민주화운동이에요. 교육현장 내에서의 권력을 민주화하는 운동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교육 내용하고는 바로 관련 이 없어요. 교육운동이라는 게 뭐냐 하면 80년대에 지하 써클로 하던, 그게 진 짜 교육운동이야. 스터디하고, 세미나하고, 그게 교육이란 말이 지. 교육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학습하면서 그래서 사람이 바뀌는 그런 운동이어야 되는데, 이 지식순환협동조합의 취지가 바로 그런 운동을 하자는 거지요. 스스로 배우고 익히고, 스스로 바뀌고 실천 하고 그래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는 그런 걸 하자!

공부하고, 연대하고, 실천하는 전인적 지식인을 만드는 주체화 과정 정

사이트에 공개된 워크숍 녹취록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

몇 가지 여쭤볼게요. 거기에 보면 노나메기 주체는 적 · 녹 · 보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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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를 통해 구현된다는 말이 있어요. 적 · 녹 · 보라 연대란 게 뭔가 요? 강

적색은 사회주의, 녹은 생태주의, 보라는 여성주의를 말하

는 거지요. 자본주의로 인해서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가 완전히 파 괴되고 있다고 여기는 큰 세력을 보자면 이 세 가지란 말이야. 사회 주의자들하고 생태주의자들하고 여성주의자들. 그 동안엔 이 세 세력들의 입장이 서로 갈등하면서 협동을 못하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이 세 세력이 연대할 수 있고, 공 동전선으로, 협력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냐? 그래서 노나메 기적 주체는 적 · 녹 · 보라의 가치를 구현한 주체라고 볼 수 있는 거 지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정

우희종 선생님이 발표하신 글 같은데요. 인간의 세 가지 능

력으로 지식, 감성, 영성을 꼽고 있어요. 지식, 감성은 많이 들어왔 던 것인데 영성은 좀 생경해서요. 왜 철학적 사고가 아니고 영성이 라는 것이 노나메기 주체에게 중요하게 요구되는 건지요? 강

그런 부분이 쟁점이 될 수 있죠. 그 동안에 우리는 이성 중

심으로 살아왔거든. 이성이 가장 우위에, 가장 중요한 인간능력이 라고 보고, 어떻게 하면 더 이성적인 활동을 활성화할 것인가? 여 기에 주된 관심을 두고 일해 왔다고 볼 수 있지요. 감성이라고 하는 건 문화적인 거, 이런 부분이 중요하다고 해서 넣었는데 그러면 왜 영성인가? 영성은 종교성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근데 여기서는 종교 없는 종교 성으로 이해하는 거지. 기본적으로 인간은 영성이 있다고 보는 거 예요. 예를 들면 하늘 위에 저 멀리 무엇이 있을까, 신비로운 느낌. 내가 속해 있는 이 세계 자체도 모두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느끼는 것만 아는 게 아니라, 나를 넘어서는 뭔가가 있다고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태도! 신적인 세계가 있을 수 있다고. 근데 신적인 세계를 믿어라, 그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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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그런 부분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하지 않느냐? 그래야 다른 생 물에 대해서라든가, 또는 우리가 속한 세계 이외의 다른 세계에 대 한 조심스러움, 배려, 이런 거를 생각할 수 있을 거라고요. 나는 그 런 부분을 영성이라 부를 것이라고 보고, 그런 부분이라면 충분히 같이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정

아직 제안 수준이기는 하지만, 노나메기 주체가 되기 위해

서는 공부해야 할 게 너무 많더라고요. 예술, 인문학, 사회과학, 자 연과학, 기술공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한 공부는 물론이고 실 습과 워크숍 등등, 교과과정이 광범위한 데 놀랐어요. 강

변혁적인 주체, 노나메기 주체는 모든 걸 다 아우를 수 있

는 능력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죠. 우리가 어느 분야의 전문가를 만 들려는 게 아니고, 학자를 만들려는 게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의 전 인적 지식인을 만들려는 거지요. 노나메기 주체가 되는 데 필요한 교과목, 가능하면 그런 거를 배치하자. 정

앞으로 <노나메기 시민대학>의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9월쯤에는 협동조합을 띄워야 되지 않느냐, 그 다음에 발

기인대회는 9월 정도에 하자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는 그보다는 준 비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과과정을 잘 짜야지, 그리고 취지 문을 제대로 써야지. 취지문을 잘 만들고 교과과정을 잘 짜는 게 현 재로서는 더 급하다는 거죠.

의식화 혹은 결의와 결단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정

우리 기념사업회 회원들 중에서도 <노나메기 시민대학>

에 관심이 있거나 조합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올 거라 생각합 니다. <노나메기 시민대학>이 기념사업회 회원들과는 어떻게 연 결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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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89년에 이내창이 죽은 이유가 어

떤 경우든 세상을 바꾸자는 운동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봐야 되잖아 요? 그런데 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세 상을 바꾸자고 하는 이내창의 염원을 추모하고 그런 정신을 이어받겠다고 한다면, 세상을 바꾸는 실천을 하는 데 동참해야 하는 거지요. 세상을 바꾸는 실천을 하기 위해서는 내 가 실천을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바뀌면서 세상을 바꾸어야 된단 말이지요. 옛날에는 의식화라는 말을 썼는데, 그건 내가 미리 의식화되어 있 고, 의식화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배워라, 물으면 이런 거다, 전수하듯이 후배들을 키워온 방식이죠. 그런데 그런 의식화는 80년대 당시 한국 사회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가능 했던 거고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는 안 되거든요. 지금은 내가 바뀌어야 돼요. 자기가 바뀌면서 더불어 다른 사람을 바꾸고, 다른 사람하고 자기하고 동시에 같이 바뀌어야 하는데 이 바뀌는 것이 교육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교육이라고 그러면 누구를 가르치다, 가 아니라 서로 순환해서 가 르치고 배워서 육, 크자, 커간다! 그런 거니까 지금이라도, 나이가 40대라도 공부해야 된다는 거예요. 정

마지막 질문입니다. 의문사진상규명을 하는 데 공부하기

가 실제적으로 어떻게 힘이 될 수 있을까요? 기념사업회의 존재 목 적에 충실하기 위해 회원들이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강

그 질문은 사실 답이 머리에 바로 들어오는 건 아니죠. 어

떻게 공부를 해야 좋을지 그거는 잘 모르겠는데 의문사 진상규명과 관련해서 실패했다, 제대로 못했다고 했을 때 왜 못했느냐? 이유야 간단한 거죠. 우리가 힘이 없어서 못한 거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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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가 열심히 했으면 됐나?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아니지. 우리 힘이 약하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거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진상규명을 하려고 그러면 힘이 있어야 돼요. 힘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주체가 많이 만들어져서 그 힘이 저 쪽 힘을 압 도해야만 그래야 진상규명이 되는 거죠. 우리 힘이 크게 되면 진상규명이 안 되더라도 괜찮을 수도 있어요. “그래, 세상에는 해결 안 되는 것도 있으니까, 가자” 하고 우리가 털고 갈 수도 있는데, 우리가 아직도 당하고 있고, 우리 자신이 억 압받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진상규명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자 꾸 더 생길 거란 말이죠. 결론적으로 우리의 힘을 키우는 방법이 뭐냐? 그게 공부라는 거예 요. 교육이란 거지요. 옛날에는 사람들이 으쌰으쌰 해가지고 얕은 수준의 의식화하고 결의하고 결단만 하면 되는 걸로 생각했는데 이 게 결의, 결단으로 되는 게 아니란 거지. 능력을 길러야 된다는 거 지요. 우리의 실제 역량을 길러야만 되는데 역량은 여러 가지 의미 에서의 공부에 의해서만 길러진다는 겁니다. 책만 읽어서 되는 게 아니고, 책도 읽고 토론도 하고 우리가 스스로 지금보다 훨씬 더 역 량이 큰 사람이 되고, 우리 역량이 크게 됨으로써 우리 옆에 다른 사 람들의 역량도 커지고 이게 퍼져서 일파만파로 나가는 그러한 운동 을 해야만 된다. 그래야만 의문사 진상규명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그런 거지요.

<노나메기 추진위원회 회원 가입하기> nonamegi.jinbo.net

<노나메기 벽돌쌓기 운동에 참여하기> 국민은행, 031601-04-165797(예금주, 노나메기추진위원회)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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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은 1963년 전남 벌교에서 사진관집 큰아들로 태어나, 조대부고 1학년 때 광주민중항쟁을 겪었다. 1985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 입학했다. 한 손에 카 메라를 든 채 시위현장을 누비던 그는 사진학과 내의 다큐멘터리 사진동아리 ‘현장’에서 활동했으며, 1988년에는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부총학생회장을 지 냈다. 1989년 8월 15일, 이내창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총학생회장이 국가폭력에 의 해 살해당한 뒤 거문도 유림해수욕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 이 벌어지 자 그는 ‘사인진상규명을 위한 범중앙인 공동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학생대책 위원장을 맡아 진상규명에 앞장섰다. 학교를 떠난 뒤에는 1991년부터 3년 동안 경기도 안산에서 노동자로 살았다. 그는 시위를 주도한 대가로 대학 재학 중에 한 차례, 안산에서 노동운동을 하 던 와중에 또 한 차례, 두 번 징역을 살았다. 1993년 노동현장을 떠난 뒤로는 <내일신문> 사진부 기자로 일하다가 사진 스튜디오와 편집기획사를 운영하 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뿌리깊은나무>의 2000년대 판이라고 할 수 있는 계간지 <디새집>에서 수석 사진기자, 편집장을 지냈다. 2004년부터는 땀 흘려 땅을 일구는 일이 진정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 라는 믿음으로 경남 거창군 북상면으로 이주해 유기농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 었다. 또 농한기에는 사진을 찍어 책을 만들어 내곤 했다. 2012년 12월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 2013년 3월 8일 영면했다. 유 족으로는 아내 정주은, 딸 해, 아들 강이 있다. 고향인 벌교읍 칠동리의 작은 교회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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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리기

자네는 벌교의 아들이었고 광주와 무등산의 자식이었네. 서울의 골목길 정도나 추억으로 가지고 있는 내 게 자네가 들려주는 벌교 갯벌과 꼬막의 원초적인 생명력이나 조대부고 1학년 때 겪었다는 광주항쟁의 생 생한 경험담은 놀랍기까지 했네. 우리가 말과 글로 겨우 이해하고 어설프게 말하는 것들을 자네는 생생한 날것으로 겪어 알고 있었으며, 모태에 새겨진 갯벌의 유전자와 으스러져라 안고 부비며 전달하는 남녘의 남다른 깊은 정이 있었네. 벌교 사진관집 아들로 태어나 사진가의 꿈을 꾼 일에 대해 첫사랑의 기억을 고백이라도 하듯이 말했었지. 학원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또래들에 비해 자네는 벌교 갯벌의 생명력과 사진관집 아들의 가슴에 피어난 열정밖에는 없었다고. 입시에 두 번 실패한 뒤 자네는 사진학과 교수님께 장문의 편지를 썼다고 했네. 왜, 무엇을, 어떻게 찍는 사진가가 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지. 한두 번 실패한 뒤에도 자기 신념을 관철하 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보는 순정함. 그게 당신이었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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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자네는 맑은책집이 있던 2차교사동 앞에서 뙤약볕 아래 메가폰을 들고 혼자 외치고 있었네. 지나 가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전두환 구속과 5공비리청산을 주장하는 당신의 이야기를 대개는 귀담 아 듣는 것 같지도 않았네. 그러나 초록색 가로줄무늬 셔츠를 입은 자네는 한 손으로 연신 땀을 훔쳐가며 지나치다싶도록 목청껏 외치고 있었네. 전경들에게 연행되어 그토록 얻어맞고도 주눅이 들기는커녕 경찰서 에 찾아가 치료비를 물어내라고 호통을 치던 게 서원! 바로 당신이었네. 1989년 8월15일 내창이 형이 거문도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해 살해당한 다음날. 예상 못한 충격에 우리 모 두는 당황한 채 학생회관 바닥에 둘러앉아 눈물바람으로 대책회의를 했지. 고백하자면 내 마음 속에도 이 내창 형이 왜 그 먼 거문도로 훌쩍 떠났을까, 학생회 일이 너무 힘겨웠던 것은 아닌가, 혼돈스런 의문이 있 었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자네는 이렇게 말했네. “우리가 아는 그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거기부터 출발하자. 그가 단 한 번이라도 책 임을 회피한 적 있었나. 그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회피한 적이 있었나. 그렇다면 분명하다. 그는 끌려가거나 유인돼 살해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당연히 자네를 대책위원장으로 내세워 어렵고 힘겨 운 싸움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감당했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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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리기

함께 안산에서 공장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네. 자네는 도무지 망설임이나 물러섬이 없는 사람이었지. 함 께 노동현장으로 갔던 다른 학교 출신들이 모두 다른 생각으로 입장을 바꾸고 우리들을 찾아와 자신들과 동조할 것을 종용할 때, 자네는 그들이 그릇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어 안타깝다며 잔업을 마친 밤늦은 시 간에도 매일매일 그들을 찾아가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지. 결국 그들은 우리들을 설득하는 일을 포기한 것 은 물론이고 이제는 그만 찾아와달라고 애원을 하는 웃지못할 일들이 있었네. 서원 당신이 아니면 누가 그 렇게 하겠는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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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농부, 서원입니다. 철 따라 바뀌는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며 물 안개가 걸쳐있는 산자락들이 눈앞에 펼쳐 진 아침을 맞이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서 울을 훌쩍 떠나 이곳 덕유산 남쪽자락 거 창에 둥지를 마련한지 한 해가 가까워 갑 니다. 봄에 첫 농사로 300여 평 남짓 되는 밭에 씨감자 3박스를 심어 이번에 50여 박 스를수확했습니다.반거충이도못되는농사 꾼에게 땅이 주는 과분한 선물입니다. 작고 크고를 고르지 않고 캐는 대로 박스에 담았 습니다. 지금 나머지 밭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생강 조금과 모종을 구해 옮겨 심은 고추가 자라고 있고요. 껍질이 까맣고 속이 푸른 속푸리콩과 조금 작은 쥐눈이콩이 자 라고 있습니다. 이제 감자 캐고 난 밭에는 모종을 부어서 자라고 있는 들깨와 노란 메주콩, 팥, 그리고 가을배추와 무우를 심으 면 저에겐 넓고도 넓게 보이던 밭이 다 채 워질 것 같습니다.이번에 보낸 감자는 시골 로 농사를 짓겠다며 훌쩍 떠나면서 여러 심려를 끼쳐드렸던 분들과 아직은 소량이지 만 앞으로 농사가 잘 되서 도시에 사시는 분들에게 자연이 주는 먹을거리를 지속적으 로 나눌 가능성이 보이는 분들(이건 순전히 근거 없는 저에 판단임)에게 이제 농부가 된 첫인사로 보내려고 합니다. 덕유산 자락 에서 산들바람과 함께 사는 서 원. 2005년 7월 1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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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리기

예! 서원 잘 있습니다. 너무 걱정들 마세요. 제가 좋은 소식으로 대박을 터트려야 하는데 연초부터 걱정과 심려를 끼쳐서 미안할 따름입니다. 작년 12월 28일이니까 정신적인 충격은 2,3일 잠깐이었으나 꽤 오랜 침묵이었습니다. 공개되고 난 후에도 글을 올리려고 했으나 뭔가 궁금증을 풀어주는 글을 올려야 한다는 부담에 여유가 없었습 니다.이젠 아주 간단하게나마 스마트폰으로라도 근황에 대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저는 그 냥 누구나 아프듯이 아프지만 그 정도가 조금 강할 뿐이고, 아직 몸은 독감 앓는 거보다 심하게 고통을 느낀 적이 없으니 감기를 좀 길게 앓는다는 셈치고 여러분의 응원과 격려 속에 이겨내겠 습니다. 서로 쫄지말고 부담없이 일상처럼 전화도 주고 받고 합시다. 여러분이 제게 주신 격려와 도움. 마음씀에 대해 건강한 모습으로 몸과 마음이 새롭게 태어난 서원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여러 분,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과분한 사랑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에너자이저 서원! 화이팅! 2013년 2월 24일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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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게도 자네는 쓰러졌네. 너무도 아쉽게도 자네는 예의 그 감당키 어려운 일들을 혼자서 끌어안고 끙 끙 앓았겠지. 경주에서 거창으로 가던 마지막 귀가길에 그런 일들을 애통해하면서 “나는 책임감이 강한 게 아니라 그런 척을 했을 뿐이야. 뭐가 책임감이 강하단 말인가. 아내도 저 어린 자식들에게도 나는 제 일 무책임한 자가 되고 말았잖은가.” 가슴을 저미는 말이었네. 왜 우리는 늘 잘못하지도 않은 일들에 대 해 남들은 하지도 않는 처절한 반성을 이토록 아프게 해대야만 하는가. 누군가에게라도 따져 묻고 싶어 가 슴속으로 많이 울었네. 자네와 함께한 삼십 년 가까운 세월. 정말 고마워. 사랑한다. 편안히 가게. 자신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을 아무 가책 없이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세상. 누구를 미워하지 않 아도 되는 그런 세상에서 다시 만나세. 2013년 3월 10일 못난 벗 성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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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리기

다섯 살 강이는 장례식장 테이블 사이를 비집고 이 리저리 뛰어다녔다. 조용한 농촌에서만 살다가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니 덩달아 신이 난 모양이었다. 아 버지의 부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천진난만함 속 에 늘 사람 좋아하던 그 아버지의 존재가 오버랩되 어 가슴이 먹먹했다. 그 강이를 두고 눈을 감아야 했을 형을 생각하니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연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밤새 토론하고, 술 마시고, 빈 소주병에 신나를 부 어 같이 화염병을 만들던 동지들을 십수 년 만에 만 났는데 환하게 웃으며 반가운 표시를 하기도 좀 그 래서 ‘건배’없이 마시는 술잔처럼 조용히 눈인사로 대신했다. 가장 그리운 사람들을 가장 슬픈 순간에 만 났으니. 학교 다닐 때 노안 소리를 듣던 선배 한 명은 여태 그 얼굴 그대로여서 다행이었고, 몇 학번 아래의 어느 후배는 벗겨진 머리 탓에 말 낮추기가 좀 어려웠다.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대충 얼버무린 사람도 있었고, 선밴지 후밴지 당최 알 수가 없어 말끝을 흐 리기도 했었다. 100년 만에 만난 후배 만복이(가명)가 나에게 키가 작아진 것 같다고 했다. 원래 작았는데 학교 다닐 때는 그래도 좀 커 보였을지도...... 선배라는 ‘키높이 완장’을 차고 있었으니. ‘만복아, 형도 크 고 싶었는데 그냥 늙기만 했구나. 미안하다.’ 영정 속 형 얼굴이 너무도 해맑아서였을까. 성희형 추모사를 들으며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의 끝 구절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를 부를 때는 다들 목이 메 거의 흐느낌에 가까 운 소리가 났다. 그렇게 맨날 앞서 나갔으면 이젠 뒤에서 따르기만 했어도 좋았을 것을 뭐가 그리 급해서 이번에도 앞장을 섰는지...... 집이 전주라서, 지금 가야 막차라도 탈 수 있을 것 같아서, 내일 아침에 회의가 있어서... 형의 마지막을 함 께하지 못하겠다는 핑계로는 너무도 구차해서 아무도 모르게 도바리치듯 그곳을 나왔고, 20분을 추위에 떨며 기다린 끝에 겨우 빈자리가 난 고속버스를 탔다. 새벽녘 집에 다다를 때쯤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시팔, 봄인데. 2013년 3월 11일 이정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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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읍 칠동리에 있는 원이 묘소에 가족들과 함께 참배하고 올라 갑니다. 그 새 계절이 또 흘렀네요. 봄꽃들이 지고 나무에 새잎이 돋았어요. 길가에 핀 머위 잎이 어른 손바닥만큼 자랐고 말입니다. 원이는 잘 지내고 있겠지요. 2013년 4월 27일 김성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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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한 사진가 서원은‘흙

으로 빚은 이야기 디새집’에서 일하며 사진 을 찍고 글을 썼다. 이후 프리랜서로 활동하면

서‘왜사는가’(열림원), ‘목수’ ‘이보다 , 더 좋을 순 없다’ 등의 출판작업도 함께했다. 거창으 로 내려가 둥지를 튼 뒤로는 주로 농한기에 사 진을 찍었다.

“항상 살아봐도 돌래 살제. 이 해 좀 괜찮을까 그르 믄, 이 해도 그냥 넘어가고, 저 해 괜찮을까 그러믄, 그 해도 그냥 그러고. 긍게 사람이 길을 걷다보므는 앞산도 나오고, 비탈길도 나오고, 가시밭길도 나오 고, 좋은 길도 나오고, 팽지도 나오고, 내리막길도 나오고, 사람이 항상 돌래 산거요.” 『디새집』 2호(2001,여름)에 실은 「섬진강 가에서 종 이 뜨는 김씨」에서 서원 녹취.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재학 중 찍은 작품 사진. 서원은 자신의 무기가 사진이라고 말하곤 했다.

우시장사람들 연작.


거창에 터를 잡은 뒤에 거창 북상초등학교 학교운영위원회 위원장으로서‘교장공모제 취소 철회’ 를 요구하며 경남도교육청에서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다.

2009년 8월.



장준하와 이내창, 그리고 장준하특별법 »» 장준하특별법 제정과 국가기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실현되는가

- 신명철

»»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계기로 본 국가폭력 사건의 해결 과제

- 안경호


2012년 8월 장준하 선생 묘소가 홍수에 유실되면서 이장을 하게 되었고, 이 과 정에서 장준하 선생 유골에서 함몰골절을 발견했습니다. 타살의 명백한 흔적은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장준하 선생 암살 의혹 규명에 나서게 되었습니 다. 이후 6개월여의 과학적 분석과 조사 끝에 이정빈 전 서울대 법의학과 교수에 의해 타살 후 추락했다는 감정결과를 이끌어냈습니다. 암살의혹 규명에서 암살 진상규명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여야 정치권에서도 장준하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나서겠다고 합니다. ‘장준하선생암살의혹규명국민대책위’는 장준하 선생 진상규명을 위해 나서기 로 했습니다. 그리고 37년 만에 세상에 드러낸 장준하 선생님 유골을 다시 모시 는 겨레장을 치렀습니다. 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다녀갔고, 서울시청 광장은 만 장으로 가득찼습니다. ‘장준하특별법’에는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여야 를 불문하고 장준하 선생만의 특별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힘을 얻고 있었습 니다. 의문사 사건의 부담도 없이, 장준하 선생의 이름을 성과로 가져갈 수 있 기 때문이지요. ‘장준하선생암살의혹규명국민대책위’는 내부 토론회 등을 거쳐 입장을 정리합니다. 장준하만의 법을 반대하고, 의문사를 비롯한 인권침해사건 을 해결하는 특별법을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장준하선생암살의혹규 명국민대책위’를 발전적 해산하고, 특별법 제정에 집중하고자 ‘장준하특별법제 정시민행동’을 출범시켰습니다. 장준하 선생과 이내창 열사는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1기 의문사진상규명위 원회에서부터 주목받았고, 타살의 개연성을 확인하는 데까지는 조사가 진행되 었습니다. 하지만 두 의문사 사건 모두 여러 난제들로 인해 현재까지 불능인 사 건입니다. 결국 장준하 선생과 이내창 열사는 한배를 탄 운명입니다. 같이 어려 운 시절을 해쳐나갈 수밖에 없고, 의지하고 어깨를 걸 수밖에 없습니다. 장준하특별법이 통과되면 이내창 사건의 조사도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얼마 나 유효할지, 진상규명이 가능할지는 지금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내창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지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장준하특별 법이 이내창기념사업회에게도 특별합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문제인 것입 니다. 장준하특별법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우리가 고민하고 나서야 합니다. 알아야 합니다.


장준하특별법 제정과 국가기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실현되는가 신명철

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의문사 진상 규명 투쟁의 지난함을 잘 알기 때문이기 도 합니다. 21세기를 의문사 진상규명이 라는 과업을 안고 시작했으나, 무수한 갈 등과 분노, 절망을 안고 십수 년을 지내야 했습니다. 물론 눈물겨운 날들이었고, 뜨 거운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길고도 난해한 시간들을 보기 좋게 직조하기도 어렵고, 혼돈과 오류를 극복 하기보다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식의 비상식이 가득한 시기이기도 해서, 쉽게 설명할 자신은 없습니다. 자칫 단순 비교 를 하다 보면 국가기구와 유족 · 단체라는 장준하특별법 제정은 어떤 경로를 거쳐 야 할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 절을 겪게 될지, 이 일을 시작하는 마음이

이분법적 시각으로 왜곡될 수도 있고, 문 제점을 중심으로 놓으면 우리 안의 갈등 과 무지함이 과도하게 부풀려질 수도 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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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다 싶습니다. 모든 일이 사람이 한 것

갱이 딱지는 숨 쉬는 것도 어렵게 만들었

이라, 거명이 된다는 점도 조심스럽기도

고, 연좌제의 위력은 20세기를 관통했습

합니다.

니다. 암살, 테러, 학살이 자행되던 시절

제 글은 철저히 개인의 입장과 판단에

에 죽은 자의 억울함보다는 가족이 살아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않다는

있음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 숨죽임의

것을 전제합니다. 저와는 다른 생각과 실

세월, 인고의 세월이 20세기의 끝자락까

천이 가능하며, 그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

지 이어졌습니다. 물론 매 시기마다, 사

고 생각하고요. 또 제 경험의 한계로 인

건이 일어날 때마다 투쟁은 이어졌지만

해 의문사 진상규명 운동의 전 과정을 꿰

산발적이고, 수세적이었습니다.

뚫지 못하고 일부분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감안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다 1988년 기독교회관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 어머니가 한두 명씩

과거의 법이 얼마나 완결성을 가졌는

모이기 시작합니다. 독재정권 시절에 기

지, 국가기구가 어떤 성과를 냈는지에 집

독교회관에서 의문사를 밝혀달라고 농성

중하기보다는 의문사를 해결하려면 ‘어떤

을 시작합니다. 135일을 이어갑니다. 군

관점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어떤 과정

에서 죽은 아들, 바닷가에 돌을 묶고 떠

을 거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아보

오른 대학교 1학년 귀염둥이, 불신검문을

고자 합니다. 그 과정으로, 과거의 법과

받고 연행됐다가 행려병자로 처리되어 죽

국가기구, 조사 활동, 그리고 유족과 피

어간 형을 가슴에 안은 동생, 어머니들이

해자단체, 진보진영의 세월을 반추해 보

모였습니다. 의문사는 그렇게 세상에 알

겠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지난 20여 년을

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개괄하고, 국가기구 특성과 생몰의 과정

그리고 ‘전국민족민주열사유가족협의

을 간략하게 짚어본 다음, 유족, 조사관,

회’가 생기고, 투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

피해단체, 시민단체의 시각에서 성과와

든지 달려갑니다. 최루탄이 터지는 최일

한계, 문제점 등을 진단해 보려 합니다.

선에는 늘 늙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앞장 섭니다. 억울한 죽음을 알아달라고, 같이

과거청산 과제 속의 의문사

싸워 달라고, 내가 당신들과 함께 할 테 니, 당신들도 함께 해달라고 매일같이 길

해방 이후 반민특위로부터 시작되는 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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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나섭니다.

거청산의 길은 국가권력과의 싸움인 만큼

그러다 각오를 합니다. 의문사를 해결

처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빨

할 법을 만들자고 작정합니다. 민변 변호


후벼파기

사들의 도움을 얻고, 야당 국회의원들이

었고, 지난한 협상과 노숙농성 투쟁으로

나서준다니, 이제는 될 때까지 싸우는 일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민간조사단은 ‘의

밖에 없습니다. 1998년 11월입니다. 국

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들어가서 조사를

회의사당 앞 국민은행 건물 앞에 천막을

했습니다.

쳤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이 422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위원회 출범 직전에 국가기구와 민간조 사단 활동을 지원하고 검열하며, 예상되

마침내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는 투쟁 국면에 대응하기 위한 전국 조직

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

인 계승연대를 꾸렸습니다. 이때의 민간

에관한법률안’ 두 개의 법이 통과됐습니

조사단은 결사체였습니다. 의문사를 통

다. 애초의 법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

해 과거청산 과제의 파열음을 낸다는 목

래도 국가에서 직접 나서서 해결한다고

표를 가지고, 의문사 사건의 진상규명에

하니 용기백배입니다. 두 법이 통과되자

매진한 것입니다. 유족과 계승연대에 민

사람들의 관심은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

간조사단 소환권이 부여됐고, 의문사위

회복법으로 집중되었습니다. 의문사진상

와 함께 대국민 홍보, 콘서트, 남아공 진

규명법은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

실위 초청 토론회 등을 함께 하기도 하고,

니다.

국방부 등에 항의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법은 만들어졌

습니다.

지만, 의문사 사건을 이해하는 사람은 유

1기 위원회에서는 기간 연장을 포함해

족과 그 주변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진보

총 1년 6개월 동안 조사가 가능했습니다.

진영은 할 일은 많고 세상은 넓은데 과거

유족이 다시 노숙농성에 돌입했고, 법개

의 일에 집착한다는 미래지향적인 탄식과

정을 통해 2기 위원회가 출발합니다. 하

김대중 정부 안에 들어가는 건 개량화 되

지만 2기 위원회는 1년이라는 짧은 조사

는 게 아니냐는 지사적 태도가 대부분이

기간과 많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문

었습니다. 어렵고, 잘 모르는 분야이기도

을 닫습니다.

했습니다.

1기 의문사위 준비와 조직 구성이 모범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에서 소외된 의문

사례라고 하지 않습니다. 많은 문제가 있

사 진상규명의 과제는 유족과 피해자 단

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조직 대오는

체의 몫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입 장벽

유지되었고, 국가기구와 진보진영이 연

은 높았습니다. 예상대로 법을 형해화 하

대하고, 때로는 내부 투쟁하면서 동일한

려는 시도가 행정안전부 중심으로 시도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조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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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대오는 2기 위원회 출범 시기에 완전

기소를 도맡았던 검찰은 꿈쩍도 하지 않

히 와해됩니다. 노무현 정권의 치적, 최

았다는 것이, 이 과거사 기구의 본질적인

고의 성과물로 자기 위치를 잡은 위원회

문제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와 결사체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개별화

하지만 국가의 자기반성 기조는 민간인

된 민간 조사관, 그리고 유족만 남기고 리

학살 유족의 투쟁 과정에서 특별법의 제

더십이 실종된 채 무기력해져 버린 연대

장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모든 과거사 사

조직이 불협화음과 갈등을 야기하다 각자

건을 모아서 한꺼번에 해결하겠다는 ‘진

의 길을 갑니다.

실 ·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4년 시한으로 출범합니다. 이를 준비한 민간 대오인 ‘과거청산을 위한범국민위’도 의문사 특별법을 제정 하던 시절과 비슷한 경로를 겪었다 합니 다. 제가 이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시 기에 공안기관별 과거사위원회 등 국가기 구가 여럿 생겨나면서 조사관의 수는 양 적으로 늘어났고, 민간인학살 단위 등과 의 결합으로 유족과 피해자 단체, 활동가 들의 활동 범위는 넓어졌으나, 입법과 국 가기구의 출범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이

이후 의문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

발생했습니다. 이 상처가 아직도 남아,

와 맞물려서 국가기관이 직접 자신의 과

저변에 불신을 깔려 있는 게 현실입니다.

거를 청산하겠다고 나섭니다. 노무현 대

진화위의 성과를 논하기는 쉽지 않습니

통령의 과거청산 의지를 반영해, ‘국방부

다. 한국전쟁 전후 집단학살 사건들을 조

과거사위원회’, ‘경찰과거사위원회’, ‘국

사해 배상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과 ‘재

정원과거사위원회’ 등이 자체 조사를 하

일동포간첩단’, ‘납북어부 간첩사건’ 등

기도 했습니다. 이 과거사위들은 성과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외롭고 어두운 간첩

있었고, 자료를 확보하기도 했습니다만

조작 사건의 진상을 밝혀냈다는 점, 긴급

대체로 한계 중심의 평가가 이루어지고

조치 위헌판결의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

있는 듯이 보입니다. 게다가 모든 사건의

서 과거청산 국가기구로서 역할을 하기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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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했습니다. 하지만 의문사 사건의 조사를

현 · 한희철 사건, 군의문사 사건은 이이

방기했다는 점에서는 과오를 인정해야 합

동 · 이창돈 · 박종근 · 우인수 · 노철승, 정

니다. 과거청산의 과제를 안은 진화위는

연관 · 정도준 · 박필호 · 김소진 · 허원근 ·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 뉴라이트의 장악과

이승삼 · 박상구 · 송종호 · 박상은 · 최우

공세적인 사건의 결정 및 조작 등으로 만

혁 사건 등입니다.

신창이가 되어 문을 닫습니다.

학생운동 사건으로는 서울대 민추위 관 련 김성수 · 우종원 사건, 87년 6월항쟁,

의문사 사건 요약

대선 고정희, 정인택, 박인순 사건, 89년 통일운동 이철규, 이내창 사건 등이 있습

장준하 사건으로 대표되는 의문사 사건

니다. 노동운동 사건으로는 인천 연안가

은 70년대 중앙정보부에서 간첩 조작을

스 신호수, 창원 대우정밀 정경식, 구로

하다 고문치사당한 최종길 사건, 인혁당

대원전기 오범근, 서울 광무택시 문용섭,

간첩 조작 및 사법살인 사건과 관련환 장

인천 심재환, 인천 협신사 이재호, 인천

석구 사건, 비전향 장기수 사건인 김용성

아암도 노점상 농성 이덕인 등이 있습니

· 변형만 사건, 보안사에서 연행 조사 과

다. 김상원, 문영수 등 평범한 시민이 의

정에서 사망한 임기윤 사건, 금산 지구당

문사가 되기도 하고, 위원회 직권으로 실

위원장이었던 양상석 사건, 목포 야당 선

종사건인 박태순, 안치웅, 탁은주 사건

거 조작 공작 사건인 김창수 사건 등을 들

과, 비전향장기수 남민전 이재문 사건 등

수 있습니다.

을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80년대에는 삼청교육대와 관련한 박영

1기 위원회에서 민주화 과정에서 위법

두 · 전정배 사건과, 군 녹화사업 사건인

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했다고 인정한

정성희 · 최온순 · 김두황 · 이윤성 · 한영

사건은 총 19건입니다. 이 중 사건의 전 끈덕지게 어깨동무

56


서 위원회를 이어갔기 때문에 특별한 성 과를 내기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짧은 모를 밝힌 사건, 결정적인 증언을 확보한 사건 등과 특별법이 규정한 대로 자살 또 는 사고사임에도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가 있었다는(녹화사업, 구사대, 철거 등) 사 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 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의문사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를 달성했느냐의 시각으로 보 면, 불능이든 기각이든 상관없이 쟁점이 되었거나 의제로 형성되었다면 그것 자체 가 성과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 은 위원회 최고의 쟁점 사건이기도 하고,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으며, 이후 국방부 특조단과의 공방을 통해 다시 한 번 국민 을 헷갈리게 한 사건인 허원근 사건이 민 주화운동 관련성이 없다고 기각되었다는 위원회의 결정을 상기해 보면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2기 위원회는 1년간 조사기간을 연장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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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동안 많은 조사를 했지만, 1기 위원 회 조사를 보강하는 차원을 넘지는 못했 습니다.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시한 이 촉박해 그대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국가기구의 변천 과정 요약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시작 으로 10여 년에 걸쳐 과거청산을 위한 국 가의 직접적인 해결 시도가 있었습니다. 유족과 진보진영의 투쟁의 결과로 생긴 국가기구이기 때문에 대통령 소속의 독 립기구로 출발했습니다만 예산과 인력을 쥐고 있는 행정 조직의 영향권 안에 있었 습니다. 이후 통치권자의 성과물로 자리 매김하면서 과거청산의 과제를 실현하는 조직의 성격보다는 국가 민원을 처리하는 조직으로 성격이 강화되는 과정이었습니 다. 여기서는 기구의 직제와 내용을 간략 하게 표로 정리했습니다.


후벼파기

김대중정부

노무현정부

1기 의문사진상 규명위원회

유족농성

2기 의문사진상 규명위원회

이명박정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

양승규, 한상범

한상범

송기인, 안병욱, 이영조

조직

1위원장, 2상임, 6비상임, 4과장

1기와 동일함

1위원장, 4상임, 11비상임

기간

2000.10~2002.10 6개월 조사, 3개월 2회 연장 2회 법 개정으로 기간 연장

2003.7~2004.6 법 개정 과정에서 위원회 종료

2005.12~2010.6 4년 조사, 2년 연장 6개월 연장하고 종료

인선

위원, 조사관 모두 유족, 진보진영과 협의 후 청와대 재가

위원 선임 청와대와 협의 과장 협의, 조사관 공채

위원 선임 청와대 협의, 공채

범위

권위주의 통치시기

1기와 동일함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 적대세력, 인권침해사건

유족

자문위원으로 참여, 중간 조사 결과 브리핑

유족과 단체에 대한 불신과 경계심이 심화

유족 민원인 취급

민간

민간조사단 조직적 진입

민간조사단 해체, 개별 진입 사무국장 출범 전 해임

민간 진영 분열, 각개 약진

특별법 제정 과제 김영삼 정부 이후 일제하 강제징집을 비 롯해 수많은 과거사 관련 법안이 만들어 졌고, 국가기구가 과거청산 작업을 했습 니다. 성과 유무를 떠나서, 과거사와 관 련된 입법과 국가기구에서의 활동 경험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의문사를 비롯한 인 권침해 사건으로만 국한해도 두 번의 특 별법과 몇 차례의 개정안 발의의 경험도 있습니다. 따라서 특별법 법안의 내용을 만드는 일은 의문사 과업의 복잡함과 난 해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습니

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고민되는 지점 이 많아지고, 세심하게 검토해야겠지만 큰 틀에서 보면 별다른 어려움은 없어 보 입니다. 그보다는 입법 과정이 중요할 수 있습니 다. 입법 운동이 청원 운동의 성격을 갖기 때문입니다. 유족과 단체, 국민의 요구를 담아 법안을 만들어도 이를 법으로 만들 겠다고 나서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 습니다. 그것은 입법부인 국회의 고유 권 한입니다. 그래서 국회의원을 우리 편으 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가 동일한 생각과 지향, 목표 끈덕지게 어깨동무

58


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결국

티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

입법안이 발의되고 행안위에서 법률 축조

다. 조급함과의 싸움입니다.

심의가 이뤄져 삭제하고 붙이고 하는 과 정에서 애초의 법안과는 아주 다른 괴물 이 태어나기도 합니다. 진화위법을 누더기법이라고 부르는 것 도 이 과정에서 보수세력의 억지와 타협 의 산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법안 이 행안위를 거쳐 법사위의 심의를 받고 전체 의결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도 갈가 리 찢겨 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아무 리 좋은 법안을 만들어도 현실적으로 실 현 가능한 내용은 한정적이라는 것입니

국가기구

다. 어쩌면 법안 내용을 얼마나 훌륭하게 만

장준하특별법이 제정이 된다고 바로 국

드느냐보다 어디까지를 마지노선으로 하

가기구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국가기구

고, 무엇을 반드시 관철시킬 것인가 내부

를 만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가는 것입니

적으로 의견을 조율하고, 대오를 통일하

다. 국가에서는 예산이 있어야 뭐라도 할

는 일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의문사

수 있으니, 예산 확보에 들어갈 것이고(

특별법을 만들 때 의문사 유족의 강고한

필요하면 추경예산을 편성하면서), 행안

투쟁 의지 때문에 민주화법이 시행 안된

부에 준비기획단을 구성해서 국가기구 세

다고 설움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부 사항을 조율하게 됩니다. 이때 장준하

후 군의문사와 통합 논의 과정에서 군의

국대위, 피해자단체, 시민단체 등에서 협

문사가 독립해 나가기도 하고, 진화위법

상 파트너를 선발해 조율에 들어갑니다.

이 누더기가 되어도 일부 유족이 타협하

이 과정의 성패에 따라 국가기구의 성격

면서 대오가 흐트러져 버리는 등의 사례

과 위상, 내용 등이 규정되고 맙니다. 힘

는 차고 넘칩니다.

겨루기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결국 법 제정 투쟁은 법률안의 완성도가

그런데 타협의 산물로 법이 통과됐다

아니라 대오와 신념, 단결의 과정입니다.

면, 다시 말해 보수세력의 입김과 현 집권

원칙을 지키고 반드시 관철될 때까지 버

여당의 의지가 관철됐다면, 시행령 제정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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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과 국가기구 설치 준비 과정은 일방적으

니다. 따라서 위원회가 일반 국가기구와

로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힘의 우

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게

위에 누가 서 있느냐의 문제이고, 진보진

다가 특별법 제정 과정을 보더라도 국가

영의 실력이 판가름 내는 것입니다. 의문

의 자발적이 노력이 아니라, 유족의 간고

사특별법 통과 후 시행령을 만들기 위해 1

한 투쟁의 결실이었다는 점에서 위원회라

년여가 걸렸고, 종합청사 앞에서의 비타

는 국가기구의 존립기반이 어디에 서 있

협적 투쟁의 결과로 협상 테이블이 열렸

는가 분명해집니다.

다는 경험은 모범 사례로 받아들일 수 있 습니다.

투쟁의 산물인 위원회는 그 활동 자체 가 민주화운동 과정이어야 합니다. 즉 위

의문사 진상규명은 늘 어렵고 불편한 과

원회는 민주화운동에 복무해야 하며, 우

제였습니다. 계륵이기도 합니다. 소위 민

리 사회의 진보적 변화에 기여해야 한다

주정부에서는 국가의 성과물로 포장할 수

는 자기규정성을 갖고 있습니다.

있는 정도의 기구가 되어 주길 바라고, 보

민주화운동은 과거 사실의 해석이 아니

수정부에서는 아예 태어나지 않기를 바랍

라, 현재진행형의 진보적 흐름이라는 인

니다. 어느 경우나 타협을 요구한다는 어

식이 위원회에 대한 해석의 출발점이며,

려움이 있습니다.

이 규정 속에서 위원회 결정의 효력이 발 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원회의 구성 원이 활동가 출신이든 수사기관 파견자이 든, 행정공무원이든 상관없이 위원회에 서 일을 하는 한 민주화운동에 복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운영기조가 간부진과 공유되고 관철될 때 위원회는 제역할을 다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위원회는 수사기관과 민 주진영의 대립투쟁의 산물이며, 수사기

⑴ 국가기구의 성격

관의 민주화과정에 있습니다. 의문사는 수사기관의 조작 · 은폐 · 과실치사 · 공

의문사 사건의 해결을 위해 위원회라는

모 · 가해의 의혹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국가기구를 설립하는 것은 의문사 사건의

기 때문에 대립할 수밖에 없지만, 이 과

배경에 국가권력이 있었음을 인정한 것입

정에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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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인권친화적인 국가기관으로 재정립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으니, 우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사기관의 민주

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준비해야 하겠습니

화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위원회

다. 과거청산의 과제를 해결하는 대의는

는 과거 공안기관의 역할을 한 수사기관

같지만, 과거사와 관련된 단체와 개인들

이 환골탈태할 때까지 대립할 수밖에 없

이 국가기구와 정세를 보는 시각과 조건

습니다. 위원회 활동의 성패를 좌우할 핵

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전제하

심입니다.

고, 다름을 인정하고 출발해야 지나치게

위원회의 출발은 철저한 상호불신이며, 이 불신이 이해의 접점을 형성하는 근간

낙관적이거나 패배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 다.

이 됩니다. 민간과 파견 조사관이 대립투

과거의 사례를 보면, 거의 유일하게 조

쟁의 출발점일지, 상호 이해의 과정일지

직적으로 진입하고, 운영하고, 대응해왔

는 궁극적으로 위원회 정책과 운영기조에

던 시기는 1기 의문사위뿐입니다. 공과

의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는 차치하고 조직적 성격만 보면 그렇다

⑵ 민간 대오의 구성

는 것입니다. 1기 의문사위를 준비한 민 간조사단은 결사체의 성격을 갖습니다.

국가기구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개인적

유일하게 사건을 분석한 조직이고, 시행

으로는 존재 이전의 장이 되기도 하겠지

령과 국가기구의 내용을 조율했으며, 국

만, 진보진영 전체로 보면 최전선이고 근

가기구에서는 정책 기능을 수행했고, 위

거지가 되는 것입니다. 호랑이굴에 들어

원회 내부 보수 세력의 준동을 차단하는

가는 것이죠. 국가권력의 막강한 힘과 예

싸움을 전개했습니다. 다만 국가기구 외

산을 쥐고 흔드는 노회한 관료, 수십년 동

부의 계승연대라는 범국민적 조직이 너무

안 쌓아온 노련함 앞에 의문사 진상규명

약해 진보진영의 견제와 지원을 받지 못

의 의지와 개인의 성실성만으로는 감당할

해 혼선을 빚었다는 점은 반면교사로 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직이 필요한 것입

아야 합니다.

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조직은 지금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조직은 어떤 조직일까

서는 꿈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특별법이

요? 진보진영의 대표로서 위원회에 들어

제정되고 국가기구가 설치되려면 몇 년의

가 의문사 진상규명의 과제를 풀어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기간 동안 연구하

사람들이기 때문에 위원장부터 조사관까

고, 조직하고, 투쟁하면서 조직한다면 그

지 단일 대오가 형성되면 가장 좋습니다.

냥 죽 쒀서 뭣 주는 식은 되지 않을 것입

이내창기념사업회

61


후벼파기

니다. 그 길에 한 걸음씩 차분히 나가야 합니다.

⑶ 국가기구 인선 과정 민간 대오를 꾸리고, 진상규명 투쟁을 하는 일은 20첩 반찬으로 가득 찬 밥상을 누군가에게 차려주는 일이 아닙니다. 누 구에게 선물을 주거나, 부탁을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과정은 입 법과 진입 투쟁과 국가기구에서의 활동으 로 이분화되어 있습니다. 즉 싸움은 유족 과 단체가 하고, 다 만들고 나서 이곳에 서 진두지휘할 사람, 일을 할 사람을 찾는 일이 반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위원회에 서 위원으로 활동하려면 교수나 법조인이 어야 하는 법률적 한계도 있었지만, 국가 기구에서의 활동과 책임은 우리 몫이 아 니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평 생을 의문사 진상규명에 바친 유족의 한 많은 삶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법률적 · 역사학적 의미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국가기구의 간부와 충돌하게 됩니다. 과 거청산의 과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 기 위한 투쟁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국가 기구를 꾸리는 일에서부터 그 안에서 일 을 할 사람, 조사지휘를 할 사람, 기구를 운영할 사람 등등에 대한 복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미리 학습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⑷ 조사활동 조사활동은 조사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위원회의 성패는 결국 조사관에 달렸다고 도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조사관을 봤고, 절망도 많이 했습니다. 유족을 민 원인 취급하는 민간조사관, 위원회 조사 실에서 끝도 없이 참고인을 불러대는 검 찰수사관 같은 조사관, 조사관도 여러 유 형입니다. 여기서 세부적인 내용은 빼고 기본적인 것만 점검합니다. 공정성 문제가 있습니다. 일부 조사관 들은 조사활동을 공정하게 하기 위하여 민관합동기구를 꾸린 것이라면서, 공정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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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사는 아무 예단없이 백지 상태에서

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수사가 종결되었

사실관계를 확인하여야 한다고 말합니

고, 결정된 바가 있는 사건을 다시 조사하

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웃기는 얘기입니

는 것인데, 그 수사결과에 여러 의혹이 있

다. 이런 사고는 위원회의 역할과 자기규

어 10여 년이 넘게 진상규명을 위해 투쟁

정성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

해 왔는데, 어떻게 판단을 배제할 수 있겠

기는 것입니다.

습니까. 이는 예단이 아니라, 의혹 지점

위원회를 구성한 것 자체가 의문사 사건 이 국가권력으로부터 희생당했을 개연성

에 대한 확인, 진정인의 진정 내용인 것 입니다.

을 인정한 것이고, 국가권력으로부터 행

따라서 백지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해진 위법한 공권력에 대한 조사를 하는

지극히 형식적인 잣대로 위원회 조사를

것이 위원회 역할이라는 점을 방기한 사

바라보는 것이고, 위원회 조사를 국민고

고입니다. 따라서 위원회 조사는 자타살

충처리위원회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행위

을 구분하는 감별사 역할이 아닙니다. 어

입니다.

떤 경로를 통해 죽음에 이르게 됐는가, 그 과정에서 죽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

과거청산 과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은 어떤 것인가, 이 모든 과정의 배경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과거사 조직은 과거청산 과제를 실현할

명백하게 드러났는가, 죽음 이후에 의문

대오를 꾸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로 남게 된 주요 원인은 무엇 때문인지

1기 의문사위 때처럼 결사체는 가능하지

등등 낱낱이 밝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않겠지만, 과거청산 과제를 중심에 두는

결과로 죽음의 성격이 자살인지, 타살인

단일 대오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 대오

지가 나오는 것이죠.

는 각 분야의 전문가와 활동가의 결합체

공정하다는 것은 좌도 우도 아닌 중간

입니다. 장준하국대위, 피해자단체처럼

에 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위원

과제를 자신의 과업으로 받아들인 사람과

회 설립 취지에 맞게 의문사 사건을 정확

조직이 전면에 나서야 하고, 연대해야 하

하게 해석하고 조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

며, 힘을 키워야 합니다.

다. 즉 과거 숨겨진 사실을 완전히 밝히

국가기구에서 조사 활동을 할 사람 또

겠다는 조사 의지가 바로 공정성입니다.

는 조사 경험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 현대

의지를 실현하는 노력이 공정성의 발현

사 · 사회학 등에서 과거청산 문제를 과제

이지, 판단을 배제하는 것이 공정성이 아

로 삼고 있는 연구자, 인권활동가, 대중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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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운동 또는 홍보와 교양 사업 전문가가 결

과거청산의 과제는 늘 주목받지 못했

합한 조직입니다. 이 조직에서 과거청산

습니다. 직접 나서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

의 과제와 내용에 대해 토론도 하고 연구

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족과 피해

도 하면서 성과를 집적해 발표하고, 토론

자단체의 전유물일 수는 없습니다. 과거

회 · 강좌 등을 개최해 대중의 공감대를 넓

의 아픈 기억들이 반면교사가 되어야 합

혀 갑니다. 이런 내용 등을 설계 디자인하

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조직

고, 카페 등을 통해 다양한 홍보를 해나가

은 과거청산 과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

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실력 있는 조사

는 구체적인 방도를 내올 수 있는 조직이

관과 연구자가 배출될 것이고, 조직의 활

되어야 합니다. 과거청산 과제를 해결할

동력은 높아지면서 과거청산에 대한 이해

수 있는 전문 인력의 확보와 법률적 · 학술

와 국민적 동의가 확산될 것입니다.

적 보강, 국민 대중의 광범위한 동의가 중

이런 대오의 구성과 운영, 집중을 전제

요합니다. 내적 역량이 강화되지 않고서

로 해서 전국 단위의 연대 기구를 구성하

는 어떤 투쟁도 주체적이지 못하며, 유족

면 현재의 시점에서 필요한 대응에 급급

의 대리인 또는 지원 활동에 불과합니다.

하지 않을 수 있고, 비로소 과거청산 과제

완전한 의문사 진상규명은 민주주의 완

를 실현하는 진보적 연대 기구가 꾸려질

성 이후에 공안통치기구의 역할을 수행했

수 있습니다.

던 국가기구의 변화와 반성을 전제로 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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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사보다는 대척점에 서는 것이 명예롭고, 혁명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 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은 대놓고 방해하는 것보다 나쁠 수 있습니다. 작은 일부터 해결하다 보면, 어느새 정 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오늘의 투쟁이 내 일의 터전이 될 것이고, 내일의 터전이 다 음날 도약의 발판이 된다는 믿음으로 작 은 틈새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의문사를 해 결하는 길이고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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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계기로 본 국가폭력 사건의 해결 과제1) 안경호

들어가며 장준하 선생께서 다시 세상에 나오셨다. 일제 하 항일독립군으로서의 형형했던 눈빛은 세월 속에 잃어버렸지만, 군사독재정 권의 절대권력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장중한 발걸음도 시간 속에 묻혀 버렸지만, 37 년 만에 당신은 스스로 역사의 한가운데로 돌아오셨다. 6천리 대장정이 이보다 더 길 고 지루했을까. 원형에 가까운 지름 6cm 두개골 함몰골절, 이보다 명백한 타살의 증 거가 있을까. 이보다 더 엄격한 타살의 증거가 필요할까. 이보다 분명한 정치적 타살 이 있을까. 장준하 선생을 살해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개인이나 기관은 사건 발생 이후 지금 까지도 무죄입증을 못하고 있다. 자신을 목격자라고 주장하는 김용환은 장준하 선생 이 추락하였다는 장소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적조차도 소명하지 못했다. 장준하 선생 이 설령 추락하여 사망하였다면, 김용환은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해서라도 추락장소와 행적을 입증해야 한다. 이를 소명하지 못한다면 김용환은 가해자들과 특수관계에 있다 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장준하 선생 사망사건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최고 권력자 박 정희는 죽을 때까지 이 사건에 대해서 아무 말도 없었다. 자신의 혐의에 대해서 소명하

1) 2012. 9. 17.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발표한 원고를 현재시점에 맞게 수정, 보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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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았고, 대신 장준하 선생 사인에 대해서 떠들고 다니거나, 기사를 쓰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장준하 선생이 죽음으로써 이득을 본 집단과 개인은 누구인가. 바로 그들이 장준하 선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을 온전하게 져야 한다. 임종(臨終) - 사람이 생명을 다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 흔히 부모의 죽음 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이유 없이 죽지는 않는다. 법의학적으로 보면 분명한 사망의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장준하 선생과 같이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발생한 죽 음들은,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폭압통치를 연장하고, 정권의 안위를 위하여 정치적 반 대자나 민주화 운동의 일선에 섰던 양심적인 사람들을 잘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죽 음에 이르게 한 ‘의문사 사건’이다. 그들이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 아무도 그 죽 음을 확인해 주지 않았다. 누구에 의해, 언제, 어디서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 없는 죽 음들이었다. 유가협 아버지, 어머니들이 422일 동안 여의도에서 천막농성을 하며 천신만고 끝에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한국 현대사의 치부를 본격적으로 조 사하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다. 많은 성과를 내지 못하였지만, 우리는 육탈된 유골 로, 부검사진과 감정서로 의문사한 분들의 임종을 지키려 했다. 빛바랜 부검사진 속 의 망자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들으려고 했다. 그 분들이 어떠한 이유로 사망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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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누가 무엇 때문에 죽인 것인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그 분들의 임종을 지켜드 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분들의 삶의 궤적을 정리해서 남아있는 유족들에 게 드리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수많은 의문사가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유족들은 여전히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의문사는 과거사가 아니라 현대사이며, 유족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 다. 유족은 의문사뿐만 아니라 전쟁전후 학살 피해 유족도 있고, 국가폭력 피해 유족 도 있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과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사건에 대 한 조사활동이 2010년 말 마무리되었다. 의문사위를 시작으로 국가기구에 민간이 결 합하는 방식의 10년간 조사도 종료되었다. 입법을 통한 국가기구 설립과 국가기관에 의한 과거사건 조사는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냈지만, 많은 문제점과 한계도 드러 났다. 피해자와 사건 관련자에 머물던 시민사회 단체가 기관의 자체 과거사위를 비롯하여 각종 과거사 위원회의 활동에 사건 조사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경험 이자 기회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10년간의 활동평가를 통하여 향후 과거사 청산 운 동이 어떻게 진화해 나갈지 잘 따져봐야 한다. 우리의 역량과 한계를 잘 드러내야 향 후 오류를 줄이고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조사 사건을 비롯한 과거청산 과 제에 대한 해결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도 실패의 경험들은 계속 공유하고 보완해 나 갈 필요가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신청사건을 중심으로, 이후 인권침해 분야의 미조사 사건에 대 한 현황과 과제를 대체적으로 정리해 보았다. 여전히 피해자가 존재하고, 무엇보다 도 국가의 책임이 막중한 만큼 조속히 시일 내에 입법을 통한 문제 해결에 함께 나서 기를 바란다.

1. 과거사 청산, 다시 시작해야 할 때 식민지 시대에 뒤이은 분단과 전쟁 그리고 반공을 앞세운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불행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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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역사를 극복하는 길은 실로 험난하기 만 했다. 우리는 지금껏 일제식민기의 친 일문제로부터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 한 의문사 사건과 조작의혹 사건들에 이 르기까지 제대로 마음먹고 따져보지 못했 다. 장기간 조사는 했지만 그 실체를 규명 하기에 한계가 있었고, 가해자를 특정하 여 처벌하지도 못했다. 한 역사학자는 국가기구를 통한 과거청산 활동을 평가하면서, 사건 가해자들에 대해서 아무도 ‘처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한탄하며, 한국의 과거 청산은 ‘처벌’을 죽여 버린 과거청산이라고 자조하였다. 10여 년간의 과거사 활동에 대해서 할 만큼 했다는 인식과 이제는 그만해도 된다는 인식이 퍼져있는 것도 사실이다. 방송들이 앞장서서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 친일반 민족행위자 백선엽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도발 은 보수언론을 장악한 현 정권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로써 완전하게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면 진실도 정의도 모두 가해자들에게 빼앗긴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재심사건 재판부들은, 과거 검찰의 공소장을 그대로 인용하다시피 해서 유죄판결을 선고한 원심재판을 뒤집고 무죄판결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 재판부는 선배 판사들을 대신하여 사과와 반성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항소와 상고를 거듭하고 있 다. 최근 헌법재판소로부터 긴급조치 1, 2, 9호에 대한 위헌판결이 내려진 뒤로 긴급 조치 관련 형사 및 민사 재판은 탄력을 받고 있다. 하지만 국가를 상대로 한 배상소송 의 경우, 수구신문들은 국가예산이 과도하게 집행되고 있다는 논리를 앞세워 보수적 인 법관들을 흔들고 있다. 나아가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과거청산을 ‘괴 물’ 취급하고 있다. 잘못된 과거는 바로 잡아야 하고,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식민지 잔재의 청산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 살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권위주의 통치시기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들도 따져 봐야 한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에 미군정을 거치면서 반공체제가 굳건해졌고, 그 결 과 전쟁시기 보도연맹 등을 통해 벌어진 양민학살은 독재정권기에 수많은 조작사건들 과 간첩을 양산해 내는 근원이 되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가는 국가폭력으로 희 생되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져야 한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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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 과정은 민주화 과정이고, 이 사회가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구조 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었다. 완전한 과거청산은 밝은 미래의 출발점인 것이다. 용서 와 화해는 엄격한 형식과 내용을 갖추어야 하고, 때가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진영 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민족적 자부심과 건강한 정신을 품은 집단지성 들이 모여 우리의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세력이 만든 진영에서 과거사를 다뤄 야 한다. 올바른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역사적 사실 앞에 한 발 짝 다가설 수 있다.

2. 정치권의 과거사 인식과 동향 전임 이명박 정권은 인수위원회 시절부 터 정부조직법을 개정하여 과거사 관련 기관들을 통폐합시켜 행정안전부 산하에 두거나 위원회를 하나로 묶어 효율적으로 통제 · 관리를 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신청 인과 시민사회 단체의 반발로 조사기간 연장 없이 법적 활동기간이 만료되면 없애는 방식으로 과거사위원회들을 정리시켰다. 얼마든지 수명 연장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시한부 자연사’를 시킨 것이다. 위원회 활동기관 중에도 이명박 정권과 보수언론들은 조사활동이 법률로 보장되어 있음에도 위원회 예산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활동을 위축시켰다. 조사활동 과정에서도 시빗거리를 만들어 끊임없이 위원회를 흔들었으며, 위원회 설립 목적과 존립근거를 부정하면서 과거사 활동을 저지하는 데 몰두하였다. 법원이 과거 국가기관의 위법한 행위에 대해서 금전적 징벌 방식의 손해배상을 선고해도 이들은 국가예산, 국민 부담 을 들먹이며 물타기를 시도하곤 하였다. 또한 위원회 조사를 통하여 뒤늦게 밝혀진 사 실은 좌파의 이데올로기 공세라며 조사결과를 부정하였고, 확정판결 사건에 대한 재 심권고는 법적 안정성 운운하며 사법질서를 내세워 애써 무시하였다. 국방부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종북세력 실체인식 집중 정신교육’을 실시하면서 반 유신, 반독재투쟁을 모두 종북으로 몰아갔다. 이는 국기를 뒤흔드는 도발행위와 다름 없다. 과거 공안사건들에 대해서 이 나라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재심을 통해 속속 무죄 를 선고하고 있고, 피해자들에 대해서 손해배상 판결을 내리고 있는 마당에 독재정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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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맞서 싸웠던 이들을 이념논쟁의 희생물로 삼아 종북으로 규정하는 것은 헌법과 법 률을 부정하는 짓이다. 대통령 후보 시절 박근혜는 인혁당재건위 사건과 관련하여 두 개의 판결문이 존재한 다며 유족을 두 번 죽였다.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엄격한 재심을 거쳐 무죄로 확 정된 사건에 대해서 원판결과 재심판결이 마치 양립하는 것처럼 호도하면서 사법부를 부정하였다. 이들의 과거사 인식은 5.16군사쿠데타와 삼선개헌, 유신을 합법화하는 데 있고,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신념화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 극우 신문과 매체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 · 왜곡하고, 뉴라이트가 주도하는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 하는 일들은 이미 예고된 참사이다. 국정원은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지난 대선을 비롯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에 직접 뛰어들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정치를 교란시켜왔다. 일베충을 앞세운 댓 글 알바는 애교 수준이다. 대통령 기록물을 흔들며 국민을 우롱하고 대한민국을 통치 하려 한다. 내란상태와 다름없다. 박근혜는 대선 기간 동안 국정원을 이용한 적도 없 고, 국정원의 도움을 받은 적도 없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국기를 흔들고 대선에 개입한 국정원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바로 최대의 수혜자가 책임져야 마땅하다. 현재의 사건이 차곡차곡 쌓여 시간의 흐름에 의해 또 하나의 과거사로 남게 된다. 방 해와 도전으로 지금 당장 진실규명이 안되더라도, 설령 공소시효가 지나더라도 범죄 집단에 대한 양심의 추적은 계속 될 것이며, 이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단죄를 받을 것 이다.

3. 진실 규명을 기다리는 사건들 의문사 사건의 경우 1기 의문사위에 접 수된 사건은 84건으로, 2기 의문사위에 서 44건이 재진정 되었으며, 진실화해위 원회에 신청된 사건은 40건이다. 이 사건 들의 처리 결과는 진실규명 4건, 불능 4 건, 각하 5건, 조사중지 2건, 이송 1건으 로, 나머지 24건은 2010. 1.경 모두 취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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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인권침해사건은 총 768건으로, 이 사건의 처리결과는 진 실규명 238건, 진실규명 불능 41건, 각하 373건으로 그 외 100여 건은 타 기관에 이 송되거나 취하 또는 조사중지되었다. 위원회에서 진실규명 된 사건은 법원의 확정판 결 사건과 일반적인 인권침해 사건이 주류를 이루었다. 위원회 활동 중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반공법, 국방경비법 관련 판결문을 다수 입 수하였는데, 이에 비하면 위원회의 신청사건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대 법원에서 검토하여 국회에 제출한 판결에 문제가 있는 사건인 224건에 비교해도 위원 회에서 조사한 사건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정판결 사건 중 진실위원회가 재심권고한 사건은 73건에 불과하다. 그동안 발생 된 의혹이 있는 확정판결사건 중 일부만이 접수되어 조사되었고, 그 중 진실규명된 사 건을 중심으로 재심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 반 사건 이외에도 국방경비법이나 수산업법, 긴급조치 등의 피해자도 발굴하여 조사 가 필요하다.

⑴ 진실화해위원회 인권침해사건 처리현황 1) 신청사건 유형별 분류(564건 기준) 2) 강제연행 가혹행위

확정판결사건 134건

24%

131건

의문사 28건

5%

23%

강제해직 49건

군의문사 28건

5%

9%

전향공작 32건

6%

노동권 12

2%

의문사조사위 40

7%

언론자유

재산권

4건

44건

다른 유형의 사건 19건

3%

8%

기타 43

8%

2) 사건 처리 현황 처리건수

진실규명 범위

인권침해

768 3)

진실규명

진실규명불능

각하

취하

이송

조사중지

238(134)

41(30)

373(360)

73

29

14(11)

※ ( )의 수는 실제 사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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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실규명사건의 후속 처리 • 진실규명 사건 134건 중 73개 사건에 대해 재심 권고, 이 중 71개 사건이 재 심을 통해 무죄확정이 되거나 재심 진행 중 4)

• ‘김종옥 홍복동 부역조작의혹사건’, ‘고창표 국가보안법위반사건’의 경우, 재 심권고가 없음에도 재심을 통해 무죄 확정, 또는 재심 항소심 진행 중

• 확정판결에 해당되지 않는 진실규명사건의 경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 구소송을 통해 승소하였거나 진행 중인 사건 다수 5)

• ‘박순애 간첩조작의혹사건’의 경우 불능으로 결정되어 재심 청구 기각 • ‘김장길 사건’ 등의 진정사건의 경우, 각하결정 되었으나 재심을 통해 무죄 확정

• 위원회에서 조사한 사건과 유관한 긴급조치위반사건, 납북어부사건, 재일간 첩사건, 특수범죄처벌에관한법률위반사건 및 국방부과거사위 등에서 조사한 일부 사건 등이 재심을 통해 무죄확정 되거나 진행 중

⑵ 추가조사와 관련하여 • 확정판결 외 사건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에서 인권침해사건은 ‘1945년 8월 15일부터 권위주의 통 치시까지 헌정질서 파괴행위 등 위법 또는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발생한 사망상해실종사건, 그 밖에 중대한 인권침해사건과 조작의 혹사건’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음. 인 권침해사건으로 신청된 다수의 조작 2) 종합보고서 4권 5~6쪽, 사건의 유형분류 참조. 2006.11.30. 접수종료일 기준으로 작성되어 이송, 취하, 이관사건이 포함되지 않아 통 계수치가 신청건수와 맞지 않음. 3) 신청사건 760건, 직권조사사건 8건 4) 무죄확정 후에는 형사보상 및 손해배상청구소송 진행 5) 김익환일가 고문가혹행위사건, 임성국 사망사건, 남현진 의문사사건, 문영수 의문사사건, 신호수 의문사사건, 노동사건 등 다수. 사법 시험 면접탈락사건의 경우, 불합격은 취소되었으나 손배소송에서는 패소함. 재일교포 북송저지사건의 경우 재일교포북송저지특수임 무수행자보상에관한법률을 통해 보상금 지급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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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사건들은 상당기간의 불법구금과 가혹행위가 인정되어 재심사유를 인정 받았는데, 이로 인해 오히려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 행사의 정도를 축소 해석하 는 경향이 있음. 일반인의 인권침해사건을 발굴하기는 힘들더라도 신청된 사 건은 적극적인 해석 필요

• 권위주의통치시기 : 법제정 당시 ‘권위주의통치시기’는 범위에 대한 확대 해석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노태우 정권시기까지로 한 정하여 조사개시 결정을 함. 6) 2010년 위원회는 권위주의통치시기를 오히려 1987. 6월항쟁 이전까지로 하여 ‘동의대 화재 수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사 건’, ‘방양균 간첩조작의혹사건’을 각하 처리함. 7) 법제정 당시의 입법취지를 적극적으로 해석 필요

• 신청보다는 직권조사 필요 : 진실화해위원회의 경험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사건 발굴과 유형별 접근을 통해 직권조사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으며, 오히려 직권조사를 통해 그간 미흡했던 사건의 역사적 배경과 피해현황을 종합적으로 정리 필요

• 후속처리에 대한 정리 :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 등으로 인해 많은 사건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손해배상소송도 상당수가 진행 되고 있음. 재심사건의 경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판결문모음집 6권이 내부용 으로 발간된 일이 있음. 그 후, 특수범죄처벌법 위반사건, 긴급조치 위반사 건, 재일동포 및 일본관련 사건 재심판결문 모음집이 15권 분량으로 발간되었 으며, 재심 및 소송관련 자료 등 후속처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 필요

4. 미조사 사건 해결을 위해 다시금 과거사 청산 문제를 내세우는 이유는, 이제 제대로 마무리를 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국가기구 설립에서부터 조사 그리고 후속조치까지 마무리하려면 오랜 세 월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은 아마도 10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100년이 걸릴지

6) 실제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된 1993년 이후 사건은 총 25건으로 24건이 각하, 1건이 취하됨. 1995년 독일유학생간첩조작사건의 경 우 사전조사 결정은 있었으나 별다른 조사를 진행하지 못한 채 2008년 취하하였고, 1994년 신건수의문사사건의 경우 조사범위에 해당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각하됨. 7)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제정 후 곧이어 제정된 ‘군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의 경우, 과거사법의 종기가 권위주의통 치시기까지임을 감안하여 시작시점을 ‘1993년 2월 25일’로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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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모른다. 입법이 좌절될 수도 있고, 국 가기구 설립단계에서 좌초할 수도 있고, 조사가 어려워 포기할 수도 있고, 아무것 도 남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기 해서는 안 된다. 과거청산운동을 멈추면 패배지만, 멈추지 않고 쉼없이 가면 우리 는 패배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싸워 보 지 않고 먼저 패배의 이유를 찾으려고 한 다면 우리는 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과거사는 국가기관의 자발적인 노력보다는 피해 당사자들의 투쟁의 결과 로서 입법이 되었고, 일정 정도의 결과물 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싸워 서 이기면 과거청산의 기선을 잡는 것이고, 지더라도 경험을 얻을 것이다. 한 번 쏘아 진 화살은 그 자체 동력에 의해서 계속 날아가게끔 되어 있다. 오욕의 역사에 진실과 정의의 화살이 꽂히는 순간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그간 위원회 결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어디까지로 봐야 할지 확인하거나, 합의한 바가 없었다. 위원회 결정의 권위는 선택적으로, 편의적으로 인정하거나 무시되어 왔 을 뿐더러 진실화해위원회 막판에는 ‘진실’이라는 표현조차도 다수결에 의한 진실로 폄훼되었으며, 결국 그 ‘진실’은 다수에 의해 언제든지 번복이 가능한 ‘기능성 진실’이 되고 말았다. 성과와 한계를 온전히 드러냈던 위원회 활동을 지켜보면서 답답함과 무 관심 속에 많은 사람들이 돌아서기도 했다. 위원회 활동 과정에서 조사를 회피하거나 부정하면서 저항하던 국가기관과 대립각을 세워보지도 못했고, 그나마 진실규명된 사 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것에 화나 있고, 사회적 모순과 정치적 폭압에 저 항하려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세상과 각을 세 워 한판 하고 싶은 사람들이 세력을 만들고 힘을 기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야 진짜 힘이 나올 수 있다. 한 사회가 역사적으로 경험한 내용에 따라 과거사 문제는 질과 격이 다를 것이고, 정 권의 성격이나 사회의 발전 정도에 따라서도 과거사 문제는 그 결이 다를 것이다. 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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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벼파기

거 수많은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경험들 중에서 그 당시의 세력과 정신이 우리에게 계 승되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성공한 사례이다. 과거사 청산 문제도 이처럼 후세에 민주화운동으로 기억되고, 역사적 세력으로 정신이 계승되는 여정에 함께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해 12월 5일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모셔내어 정밀감정을 진행하였고, 과학적, 의학적 검사 결과에 의해 선생께서 타살된 것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올해 3 월 30일 선생을 겨레장으로 모셨다. 장준하 선생의 겨레장을 계기로 이후 과거청산의 역사적 흐름을 만들어내고, 힘을 모아 나가야 한다. 민주세력을 형성해서 역사와 정 의를 부정하는 세력과 맞설 준비도 해야 한다. 불의한 국가권력과 맞서고, 보수정권과 극우언론, 기득권층과도 맞서야 한다.

5. 무엇을 해야 하나 지난 10년 간의 활동에 많은 한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시민사회의 역량과 인 식의 한계, 내용과 준비 부족 등 잘못된 것도 많았다. 안팎이 서로의 역할에 대해서 합 의하지 못하고, 또 조응하지 못한 채 제 살을 갉아먹던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 의 의도와 계획대로 과거사 밑그림을 그려 보고, 우리들의 합의로 큰 그림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큰 그림 속에서 10년 간의 경험을 돌아보며, 이제는 성공의 경험을 한 번 만들어 한다. 우리는 다시금 과거청산의 불씨를 되살려 과거청산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세워야 한 다. 과거사 의제와 이슈를 어떻게 선점할 것인지, 사업 경로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 연구자와 활동가의 결합방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부문과 지역의 결합 형태는 또 어떠 해야 하며, 이론과 실천, 집행과 책임의 정도를 어떻게 나눌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 고 국민의 지지와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도, 시민사회진영이 세력을 구축할 수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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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계기도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아니면 다른 누구도 이 일을 해낼 수가 없기 때문 이다. 과거청산의 사회화 방안이 무엇인지, 대중화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토론해야 한 다. 우리가 과거사 문제를 과제로 안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과거에 대한 해석보다 는 미래의 예측이 중요하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그 지혜와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우리 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를 알기 위해 우리가 이전에 어디에서 출발하여 왔는 지 알려고 하는 것이다. 과거청산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나아가 새로운 사회의 규범을 만들고, 공 동체를 복원하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근간은 과거청산을 통해서 민족의 정통성 을 확립하는 일이다. 국기를 흔들고 민심을 교란한 그 어떤 국가권력도 언젠가는 법 적,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더라도 진실과 정의를 반드시 세워야 한다. 과거사정리기본법 제1조에 헌법적 가치를 넣은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경호_ 4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의문사위·진화위 조사관 등 2000년부터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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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묻고 선희가 답하다

광화문 네거리에 촛불이 없어도 그녀의 노래는


한선희 회원을 서울 망원역 근처에서 만났다. 여전히 달덩이 같은 얼굴과 매력적인 목소리는 17, 18년 만의 해후에도 불구하고 여전했다. 91년도 노래패 산하에 들어가마자 2, 3학년을 물리치고 메인 가수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그녀는 어떻게 살 고 있을까? 91년도 전대협출범식과 92년도 이내창·이철규열사 영혼 의형제 결연식의 집체극에서 열창을 했 던 그녀는, 2013년 오늘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20여 년간을 줄곧 노래만 불러온 그녀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근황에 대한 궁금증으 로부터 시작되었다.

성호

집이 망원역 근처예요?

선희

선희

응. 집도 근처고 작업실도 이 근

명이 있는데 노래 연습실과 사무실이 있

처야. 그래도 일하는 곳이 가까워서 다행

는 공간이에요. 가수들 5명은 각각 개인

이지.

별 연습부스가 있구요.

성호

이쪽이 성미산 공동체라고 하는

가수 5명과 대표 1명, 기획자 1

성호

오! 개인별 연습부스가 있어요?

마을 아닌가요?

선희

임대료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선희

맞아. 공간적으로는 그 울타리 안

가수는 어찌되었든 노래 연습이 중요하

에서 살고 있는 건 맞는데, 내가 그 공동

잖아. 그래서 개인연습실을 만들었는데

체에 속해 있지는 않아. 성미산 공동체의

MB정부 들어서 우리를 불러주는 곳이 없

구성원이 되려면 돈과 시간이 있어야 하

어져서 많이 힘들어졌지.

고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야 하거든. 그런

기욱

데 나는 돈도 없고 그렇게 참여를 할 수

되었지?

있는 시간적인 여유도 없어. 게다가 성미

선희

산 공동체의 구성원들 중에 많은 사람들

리마 출신들과 서울 지역의 몇몇이 의기

이 전문직 엘리트 중심이라 내 성향하고

투합해서 99년도에 ‘우리나라’를 창립했

도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어요.

기욱

기욱

작업실이라고 하면 노래 연습을

하는 곳인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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잖아?

가창그룹을 결성한 지는 얼마나 98년도에 늦깎이 졸업을 하고 천

천리마가 경기남부총련 노래단이


어깨걸기

네 천리마가 그래도 인기가 괜찮

창 바쁠 때는 일주일에 3~4번씩 공연을

았죠. 그래서 산하 사람들을 내가 많이 불

하고 주말에도 공연 때문에 개인적인 시

렀고 같이 천리마 활동을 했구요.

간을 내기가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그런

성호

누구누구였어요?

데 해가 갈수록 불러주는 곳이 줄어들면

선희

상하 오빠, 은진이, 경호, 류재영

서 인원도 조금씩 줄었고 지금은 남아 있

오빠, 정표, 성룡이 등이 천리마를 거쳐

는 사람들이 몸을 빼려고 해도 눈치를 보

갔지.

게 되요. 내가 빠지면서 ‘우리나라’가 해

선희

성호

그럼 누나가 주동을 해서 ‘우리나

체될 수도 있으니 아무래도 더 조심스럽

라’도 만든 거예요?

고 서로서로를 더 보듬게 되는 거 같아요.

기욱

성호

그래. 얘가 아주 골수에다 선동가

‘우리나라’가 벌써 횟수로 14년

야 선동가. (웃음)

이나 되었으니 내용이나 형식면에서도 많

선희

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때요?

(웃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

냥 다같이 시작을 했죠. 10여 명이 함께

선희

시작을 했고 집회 현장이나 단체들에서

는 통일이나 노동운동과 같이 전통적인

많이 불러줘서 즐겁게 노래를 했어요. 한

주류 운동세력의 내용을 담았다면 점점

음악적 내용으로 본다면 이전에

끈덕지게 어깨동무

80


갈수록 환경이나 인권운동, 일상 생활의

형식들도 바뀌면서 ‘우리나라’ 홍보에 대

내용 등 다양한 분야로 폭을 넓혀서 가고

한 문제의식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있어. 예를 들면 나를 포함해서 ‘우리나

선희

라’의 여자 가수들이 모두 아이의 엄마라

도 없이 집회 현장이나 다양한 공간에서

는 점에 착안해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이 꽤 많았었어.

림책을 노래로 만드는 등 다양한 시도를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조금씩 투쟁의 현

하고 있거든. 형식적으로는 집회에서나

장 자체가 적어지고 운동세력이 위축되면

부를 수 있는 강한 분위기의 노래들에서

서 ‘우리나라’도 같이 위축이 되었지. 홍

좀 더 부드러운 분위기로 가거나, 여러 명

보의 필요성은 인식하는데 실제 홍보활동

이 함께 부르는 중창의 형태에서 개인 솔

을 진행하는 건 쉽지가 않더라고. 꾸준히

로 작업들도 많이 해보고 그러고 있지.

했던 건 주변에 아는 사람들을 후원회라

성호

는 형식으로 묶어서 운영을 해오고 있는

솔로는 누나가 또 강하지 않나

2005년도까지는 홍보라고 할 것

요? (웃음)

게 전부라 할 정도로 말이야.

선희

그건 옛날 얘기지. (웃음) 옛날에

성호

아, 후원회라는 게 있어요?

핏대 세우고 목에 힘주고 그러니까 좀 잘

선희

응 행사를 아무리 많이 다녀도 운

하나 보다 그러는 거였고.

동권 그룹에서 주는 공연료는 얼마 되지

기욱

가 않아서 한계가 있거든. 그래서 초창기

담배를 많이 펴서 솔로에 영향이

있는 거 아닌가?

부터 후원회를 모집하고 소식지도 만들어

선희

그렇지는 않고요. (강한 부정) 그

서 발송하기도 하고 후원회원을 위한 공

냥 나이가 좀 먹으니까 하이톤보다는 중

연을 하기도 했었어. 주현이 형이나, 지

저음 쪽으로 목소리 톤이 좀 바뀌는 것 같

훈이 형 그리고 몇몇 기념사업회 회원들

기는 해요.

도 후원을 해주고 있어서 항상 고맙게 생

기욱

나도 예전에는 노래방에서 김경

각하고 있고. 그런데 행사나 공연이 줄어

호 노래 막 겁나게 부르다가, 이제는 안

들면서 후원회원도 비슷한 시기에 조금씩

되더라구. 그래도 선희가 의혈중앙 꾀꼬

줄어들고, 우리도 예전에 비해 더 신경을

리였거든. 몸짓은 안되도 노래는 죽였으

못 쓰게 되고. 여러 가지로 상황들이 함께

니까. (웃음)

안 좋아지고 있어서 고민이 좀 많지.

성호

기욱

이내창기념사업회

81

시대가 바뀌고 노래의 내용이나

요즘도 전대협출범식이나 범민족


어깨걸기

그룹 내에서는 활발하게 논의가 되는데, 나는 거리에서 운동 현장에서 우리를 필 요로 하는 이들에게 배신감을 주는 것 같 아서 많이도 주저했던 것 같아. 그게 벌써 7~8년 전의 일이니까 지금은 내 의식도 많이 변했어. 그래도 여전히 나는 팀활동 중심이고 ‘우리나라’ 내에서는 개인 활동 이 별로 없는 편이야. 기욱

그러면 개인 활동을 열심히 하는

멤버들은 주로 어떤 활동들을 하는 거지? 선희

민중가요의 가창 그룹으로서 집

단으로 무대에 서는 것 이외에 개인 솔로 앨범을 내거나, 개인이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에 서게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시에 곡을 붙이기도 하고 시인과 함께 시낭송 대회와 같은 대규모 행사들이 있어서 스

회를 하거나 토크 콘서트 등에서 노래를

타 민중가수들이 양성될 수 있는 토양이

부르기도 하구요. 뭐 생각보다는 꽤 다양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게 제일 어려운

해요.

부분일 것 같아.

기욱

선희

에게 잊혀지지 않을 히트곡을 하나 만들

김호철 씨나 안치환 씨 그 외 소

나는 개인적으로 선희가 사람들

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민중가수들이 설

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자리가 없어져 버렸어요.

선희

성호

문에 무대를 못 떠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그러면 ‘우리나라’가 변화하는 모

그래서 많은 가수들이 그 한방 때

습과 누나가 생각하는 변화의 방향하고는

한방이 너무 힘들어. (웃음)

맞는 것 같아요?

기욱

선희

초반에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자기가 가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가고 있

갈등이 되기도 했어. 가수 개인의 역량을

다는 것이 대단한 거거든. 운동이고 뭐고

높이고 솔로활동이나 작업을 하는 쪽으로

를 떠나서 직업으로 10년 넘게 가수 활동

그래도 선희는 정말 멋진 후배야.

끈덕지게 어깨동무

82


을 하고 있다는 게 쉽지가 않으니까. 선희

이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대

단한 사람들인 거 같아요. 히트곡이라도 1~2곡이 있어서 시즌 되면 저작권료라 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인데, 나를 비롯해 서 대부분의 가수들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고 나는 남편이 연극을 하는데 연극판은

요. 기욱

민중가요도 저작권료를 받고 있

내가 도와줘야 할 판이니 참으로 가시밭

나? 선희

노래판보다 더더욱 열악해서 도움은커녕

물론 예전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

길이기도 해.

구요. 5~6년 전부터는 ‘우리나라’도 노

성호

래마다 저작권협회에 등록을 해서 저작권

던 시간들을 돌아보았을 때 후회가 되거

료를 받고 있어요. 내 노래는 아직 저작권

나 아쉬웠던 건 없어요?

협회에 등록한 건 없는데 앞으로는 생길

선희

것 같구요.

데, 노래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

기욱

대한민국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노래만 보고 달려와서 다른 것들에 대해

해결한다는 게 정말 힘들다고 생각하는

서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거. 그런 것들이

데 민중가수라는 직업은 더더욱 힘든 직

좀 아쉬울 때가 있어. 쉬운 예로 알바를

업군인 것 같아. 그래도 지금까지 14년여

하려고 해도 이 나이까지 할 줄 아는 게 없

를 여전히 노래를 하고 있는 선희가 멋지

으니 노래 말고는 식당에서나 일할까 할

다.

수 있는 게 없는 거야. 그런 순간에는 좀

성호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돈도 되면 좋

노래를 포함해서 그동안 지나왔

그런 건 별로 없는 편이기는 한

아쉽더라고.

겠지만, 하고 싶은 걸 하더라도 돈이 되지

기욱

그거야 뭐. 뭐든지 한 분야에서만

않으면 항상 고민의 연속일 것 같은데, 어

일을 하다보면 다들 그렇게 된다고 볼 수

때요?

있지. 맞아 정말 고민의 연속이야. 젊을

선희

그런가. (웃음)

때는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패기로 넘길

성호

노래운동을 꾸준히 해온 건데 보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고. 그리

람을 느꼈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였어요?

선희

이내창기념사업회

83


어깨걸기

딱 노랫말 같은 거야. 일본 동포들이 노래 를 들으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더라고. 우리도 노래 부르면서 같이 울었는데 노 래를 통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순 간, 노래로 관객과 가수가 하나가 되는 순 간이 만들어지면서 그런 순간은 잊혀지지 가 않고 너무 보람되는 거지. 성호

시민사회단체의 행사에 초청을

받으면 어떤 노래를 불러요? 선희

그때그때 이슈와 행사의 내용에

따라서 곡을 만들어서 많이 불렀어. 사립 학교법 철폐나 전쟁 반대, 미국쇠고기 반 대 등등 발 빠르게 창작곡을 만들어서 행 사장에서 노래를 부른 거야. 그때는 다양 한 이슈와 현장이 있었기에 개별 이슈를 선희

노래운동을 잘 해보자 하고 시작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접근했었지만,

은 했는데 결국은 노래에 천착하게 된 것

그것도 이제는 예전의 얘기야. 현장이 위

아닌가 싶어.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노래

축되면서부터는 좀 더 보편적이고 포괄적

라는 무기로 뭔가 변화발전을 만들어냈다

인 내용을 담은 노래를 더 많이 만들고 부

고 하기에는 결과물이 좀 없어 보이고. 그

르고 있어.

렇지만 기존의 민중가요의 틀보다는 좀

‘다시 광화문에서’라는 노래가 있는데 노

더 새로운 방식과 표현으로 이념을 표현

무현대통령 노제 때 극적으로 불리게 되

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노래의 질을 높이

면서 좀 알려지게 되었어. 광화문에서 노

는 작업을 함께 해 왔던 거 같아. 노래운동

무현대통령 노제를 지내는 데 윤도현, 양

도 역시 노래인지라 듣는 사람과의 교감

희은 씨가 노래를 하고 우리는 윤민석 씨

이 중요하거든. 한번은 일본 동포들 앞에

의 조가를 부르고 모든 순서가 끝났는데

서 통일을 노래하는데 그들의 절절한 고

도 운구차가 오지를 않는 거야. 그래서 급

향에 대한 그리움과 통일에 대한 바람이

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찾다가 우리가

끈덕지게 어깨동무

84


‘다시 광화문에서’를 부른 거지. ‘다시 광

추모 공연에는 항상 불려 다녔어요. 그때

화문에서’ 가사 중에 ‘광화문 네거리에서

는 정말 괜찮았죠. (웃음)

우리 다시 만나요’라는 부분이 음이 높아

기욱

지면서 ‘우리 다시 만나요’ 하고 클라이막

창 MB 정부에서 한가해질 때라서 정말

스로 치닫고 있는데 운구차가 서서히 광

괜찮았겠다.

화문으로 들어오는 거야. 그러니까 광화

성호

누나는 평소에 무슨 노래 들어요.

문에 있던 시민들이 막 눈물을 흘리더라

선희

(웃음)

고. 노래를 부르는 우리도 눈물을 흘리고

기욱

JYJ 좋아하니까 JYJ 노래 듣겠

마침 방송 3사에서 생방송이 되면서 ‘우리

네.

나라’의 ‘다시 광화문에서’ 노래가 실시간

성호

검색어 1위로 뜨고 난리가 났어.

부르고 들을 수 있는 노래도 있겠지만 집

사실 이 노래는 미순이 효순이 사건이 났

에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노래도 많이 창

을 때 한창 촛불집회가 이뤄지는 광화문

작되면 좋을 것 같아요.

현장에서 부르려고 창작을 한 건데 4~5

선희

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고 예전의 민중가요라는 틀도 지금의 시

된 거지.

대에 맞게 내용과 형식의 폭이 넓어져서

기욱

야, 대박이다. 이거 완전히 히트

그렇게 갈 수밖에 없어. 상업가요의 반대

곡이네.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나 이용의

편에 있던 우리들도 생활 속에서 느끼는

‘잊혀진 계절’ 뭐 이런 노래들이 어떤 시기

일상과 감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나 공간에서 항상 자주 불리는 그런 노래

우리가 정서적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 노

들이잖아. 그런 것처럼 광화문에서 촛불

래들을 만들게 되더라고. 나도 이제는 나

집회가 있을 때면 항상 불리는 노래가 되

이가 들면서 마구 달릴 수 있는 노래를 부

겠는데. 이 노래를 들으려면 벅스나 멜론

르는 것도 힘에 부쳐. 얼마 전 철도 노조

에서 찾아보면 되나?

집회현장에서 ‘대결’이라는 노래를 부르

선희

벅스나 멜론에도 있구요. 유튜브

는데 숨이 차고 힘들어서 아 이제 기운이

에서 찾아보면 노제 때의 사진까지 함께

달리는구나. 이런 것도 느끼게 되고…….

다 볼 수 있어요. 이 노래가 완전히 히트

(저녁 9시40분 집에 혼자 있는 외동딸에

를 쳐서 그 이후 한동안은 노무현대통령

게서 언제 들어 오냐고 전화가 온다)

이내창기념사업회

85

전성기라고 하기에는 그래도 한

투쟁 현장이나 운동의 현장에서

이제는 투쟁의 현장 자체가 줄었


어깨걸기

성호

지금 시간이 이런데 아이는 혼자

떠맡게 되었지. 급여도 제대로 없이 일만

있어요? 경락이 형도 연극하고 누나도 일

하는 운영자야. (웃음)

을 같이 하면서 아이 돌보는 일이 쉽지 않

기욱

았겠는데요?

생활을 하냐!

선희

선희

응 오늘도 그렇지만 형이 집에 일

월급이 제대로 안 나오면 어떻게 그러게 남들은 나이가 들면서 생

찍 들어오기가 힘들어. 그래서 아이 서너

활이 안정이 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오히

살 이럴 때는 공연장에 그냥 데리고 갔어.

려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으니 이건 뭐 거

그러다 보니까 나도 힘들고 아이도 힘들

꾸로 가고 있는 거지.

고 정말 그건 말로 하기 힘들 정도였지.

기욱

다행히도 5살 때는 이웃집에 또래가 있었

은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는데 그 집 엄마가 내가 하는 일을 많이

생활이 절대 어렵지가 않거든. 우리나라

이해해 주면서 항상 돌봐줬어. 그 엄마가

도 좀 그런 시스템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으면 아이를 어떻게 했을지 상상이

어려워. 나는 애가 없으니까 내가 직업을

가지 않을 정도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아

선택하는 데 좀 쉽지. 다른 사람들은 정말

이가 학교 가고 하면서는 이제 아이도 익

쉽지가 않아.

숙해져서 그럭저럭 잘 지내. 요즘은 5학

성호

앞으로 계획은?

년인데 같이 가자고 해도 그냥 자기는 집

선희

내가 개인 음반을 2003년도에

에 있겠다고 하더라고. 오늘도 같이 오자

냈으니까 벌써 10년 됐거든. 그래서 다

고 했는데 집에 있겠다고 해서 그냥 혼자

시 개인 음반을 준비할 계획이고, 엄마가

나왔거든.

아이들 동화에 노래를 만들어서 불러주는

성호

컨셉으로 작업을 준비 중인데 이걸 잘 마

집안일이나 육아에 있어서 경락

영국의 옥스팜과 같은 단체는 좋

이 형이 도움이 별로 안 되겠는데.

무리하는 게 단기적인 계획이야.

선희

성호

도움도 별로 안 되고 같이 사고치

그동안 롤모델이나 멘토 이런 사

는 스타일이야. 얼마 전에는 자기 극단을

람은 혹시 있었나요?

운영했는데 잘 안 되서 정리하고, 지금은

선희

성미산에 마을극장이라고 있는데 거기에

람들과 어울리고 술 마시고 하는 건 좋아

서 운영자로 근무를 해. 처음에는 같이 일

하니까 사람들과 만나면서 에너지를 얻고

하는 사람으로 있다가 어쩌다가 운영을

그냥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면서 동기부여

그런 건 별로 없었던 거 같아. 사

끈덕지게 어깨동무

86


를 하는 편인가 봐. 그리고 사람들을 만 나다 보니까 참 좋고 배울 점도 많다고 생 각했는데 결정적인 단점이나 결점을 보게 되면 또 실망을 하게 되더라고. 예를 들면 자기관리에 충실하고 노래연습 열심히 하 면서 후배들도 격려하고 독려하고, 그러 던 선배가 직원을 해고하면서도 수입 가 구를 사고 그런 것들을 본 적이 있어. 그 런 류의 실망은 기대가 높을수록 크더라 고. 그런 과정들이 있다 보니 롤모델이나 멘토라고 누군가를 마음에 품기보다는 그 냥 있는 그대로 사람들을 보게 되는 거 아 닌가 싶기도 하고. 점점 갈수록 그냥 평범 한 아줌마가 되어가는 것 같아. (웃음) 기욱

가수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그러

한 화려한 모습에 비해서 실생활의 모습 은 다르잖아. 나는 진정한 가수라면 개인 적으로 사생활이 조금 안 좋더라도 무대 에서 모든 것을 발산하고 그 무대에서 노 래 한 곡을 부르고 죽더라도 멋있어야 될 것 같아. 청객들의 마음을 진짜 들었다 놨 다 하는 그런 멋진 무대를 만들어야 하는 거지. 그게 바로 가수가 아닌가 싶어. 성호

뭐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지만 않

는다면 괜찮겠죠. 기욱

선희는 캐릭터가 좋아. 그래도 인

물이 괜찮으니까 한방을 준비해야 해. 어 차피 가수 인생에 노래 하나만 잘 뜨면 되

이내창기념사업회

87

거든. 성호

이제 2집 솔로 앨범을 준비하니

까 이번에는 마케팅이나 홍보에도 신경을 써서 준비를 해 봐요. 선희

아, 이 바닥에서 마케팅은 너무

힘들어. 정말 기획사를 통하지 않으면 업 계에서 홍보가 되지를 않아. 어떻게 보면 정말 절망적이지. 기욱

그래도 요즘은 홍대 인디밴드들

을 비롯해서 나름 언더그라운드 가수들 이 알려지는 방법들이 많이 생긴 것 같더 라고. 민중가요도 넓은 의미의 포크송이 라고 생각하고 마케팅이나 홍보를 고민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 성호

타 업종하고의 교류도 필요한 것

같아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하고만 만 나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타 업종의 작은 회사들이 마케팅하고 홍보하는 방법들을 잘 변용하면 노래를 홍보하는 데도 도움


어깨걸기

나 혹시 바라는 거 있었나요? 선희

그냥 죄송한 마음뿐이지. (웃음)

가본 적도 너무 오래되었고. 언제인가 두 번 정도 되는데…… 원옥 언니하고 경주 언니였나? 총회인가 어떤 행사에 와서 노 래를 해달라고 했는데 한번은 공연 일자 랑 겹쳐서 못 갔고, 한번은 ‘우리나라’ 내 부 방침이 혼자 어느 곳에 가서 노래하는 걸 금지하고 있어서 가지를 못 했어. 그리 고 그때는 혼자 부를 만한 레퍼토리도 없 었고. 지금까지도 너무 미안하더라고. 기욱

그런데 선희 네가 가수고 프로잖

아. 그러니까 당연히 섭외를 해야 하는 거 지. 선희

그래도 내창이형 일이니까 열일

이 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주변에 일을

을 제치고 갔었어야 하는데 나도 ‘우리나

잘하는 사람, 작은 회사라도 잘 운영하는

라’도 융통성이 없을 때라서 더욱 그랬던

사람들하고도 만나고 정보도 교류하고 하

것 같아요. 아무튼 이번 기회를 빌어서 다

면서 나한테 적용해 볼 것들을 많이 고민

시 한번 죄송한 마음을 전할게요. 이해해

해 보는 것도 방법인 것 같아요. 이제는

주세요.^^

노래 잘하고 연극만 잘 한다고 오랫동안 노래하고 연극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정 말 홍보와 마케팅은 중요해요. 기욱

그래 선희 노래가 상품으로 치면

퀄리티가 좋거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마 케팅이나 홍보가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선희

그러게요 쉽지가 않아서 말이죠.

성호

기념사업회에 하고 싶었던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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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질문과 함께 그녀는 기념사업회와 함께 하지 못했던 아쉬움, 그리고 미안함을 많이 얘기했다. 민중가요, 노래운동, 직업 가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 이외의 가치를 꾸준히 추구하면서 산다는 것은, 그 리고 실천한다는 것은 거의 종교 수행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의든 타의든 자본 을 쫓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흐름과 다른 이들은 주류와 소통하지 못하는 고독을 즐길 수밖에 없다. 즐기지 않으면 지는 것이다!! 종교 수행을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고독일 수도 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오늘도 가수 한선희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고, 노래 부르는 그 순간이 즐겁다는 것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촛불이 없어 도 자본의 유희와 정처 없는 방황이 유령처럼 떠다닌다 하더라도 그녀의 노래가 우리를 어루만지고 스스로 에게 위안을 주게 될 것이다.

다시 광화문에서 기억해요 우리를/ 광화문 네거리/ 하얗게 밝히던 우리 기억해요 우리를/ 수많은 밤들에 피어나던 노래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우리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우리 촛불의 바다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우리 다시 만나요/ 오늘의 함성 뜨거운 노래/ 영원히 간직해요 광화문 네거리에서/ 우리 다시 만나요/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다시 한번

‘우리나라’_ 통일조국의 새로운 만남 민족의 노래 ‘우리나라’는 한국사회 진보적 음악의 대중화를 추구하며 활동하는 민중가요 노래패 이다. 1999년 7월 창단해서 매년 200여 회가 넘는 공연을 소화해내고 있으며, 2008년 발매된 5집을 포함하여 4장의 기획음반, 3장의 개 인음반을 포함하여 총 12장의 음반을 발표하였다. 매년 정기콘서트뿐 아니라, 현장과 지방순회콘서트, 일본콘서트 등으로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뜨거운 무대를 보여주고 있다. 대표곡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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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들이 있기에’, ‘우리 하나되어’, ‘다시 광화문에서’ 등. ‘다시 광화문에서’ 외 ‘우리나라’의 노래는 벅스나 멜론 등 음악사이트에서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요리사, 사람을 움직이고 마음을 요리하다 박찬일 & 장예진의 솔직담백 Talk 장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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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찬일 셰프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 다. 푸드스타일리스트가 되고 싶어 요리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읽고 있던 나에게 엄마는 친한 선배가 쓰 신 책이라며 박찬일 셰프의 <지중해 태양 의 요리사>라는 책을 추천해 주셨는데, 이탈리아 요리에 관한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 책이 굉장히 신선하고 새 로웠다. 책을 읽고 나서 독후감을 쓰다 보 니 ‘나중에 박찬일 셰프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래서 박찬일 셰프가 쓰신 다른 책들도 많이 찾아보고, 엄마한테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이후 나는 중등대안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에서 나의 진로를 찾는 ‘징검다리 프로젝트’라는 자기주도 수업을 하게 되면서 박 찬일 셰프를 인터뷰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박찬일 셰프의 전화 번호로 연락을 드렸더니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해 주셨다. 인터 뷰 2주 전부터 박찬일 셰프께 여쭤 보고 싶은 것들을 적고, 학교 에서도 친구들에게 “혹시 평소에 요리사들에게 궁금했던 거 없 어?” 하며 열심히 인터뷰를 준비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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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셰프의 길 인터뷰를 하기로 했던 5월 25일이 되자 ‘왠지 무서운 분일 것 같 아’, ‘가서 뭘 제일 먼저 해야 하지?’ 하는 걱정이 됐다. 그렇지 만 이런 걱정도 잠시, 도착하자마자 박찬일 셰프는 “뭘 좀 마시 고 해야지! 뭐 마실래?” 하시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덕분에 긴 장이 풀리면서 머리에 인터뷰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충 그림 이 그려졌다. 박찬일 셰프가 주신 자몽에이드를 마시며 에이드의 맛에 감탄을 하는 사이, 박찬일 셰프께서 요리사의 힘 든 점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요리사는 첫째, 돈을 받고 뭔가 팔아야 한다는 게 가장 부담스럽고 힘들다. 돈을 받고 팔아 야 됨으로 해서 결국은 경쟁을 해야 한다. 둘째, 요리사는 남들의 즐거움을 위해 자 신의 즐거움을 희생, 포기해야 한다. 왜냐면 사람들이 즐겁게 음식을 먹을 때 나는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야 하니까. 자연인으 로서 가족들과 중국집에 가고 싶지만 그 시간에 그곳에 갈 수 없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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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가더라도 제한된 시간을 함께 하죠. 그 시간에 일을 해야 한 다는 게 괴롭죠. 셋째, 사람들은 요리에 있어서 보수적이다. 그 래서 요리사가 뭔가 창의적으로 하기가 상당히 어렵고 그런 한 계를 가지고 있는 게 요리다. 이런 게 참 힘든 거죠.” 요리사들의 고충을 들어보니 요리사라는 직업도 참 고되고 만 만치 않은 직업인 게 확실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힘든 점 속 에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요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 수지만. 내가 대안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생긴 고민인데, 대안학교 학생이라는 것 자체가 학력 면에서는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는 만큼 요리 쪽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특성화고나 요리학교 를 졸업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스펙과 학력 을 중요시 여기는 요즘 사회에서 혹시 뒤처지지는 않을까 하는. 그러나 박찬일 셰프의 말씀은 달랐다. “요리사는 학력을 따지지 않아서 좋아요. 학력은 필요 없죠. 요리 유학을 갔다고 좋은 것 만도 아니죠. 물론 유리하긴 하죠. 그렇지만 요리사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서 학력은 별로 따지지 않아요. 상대적으로 학력을 따지지 않기 때문에 민주적인 직업이라 할 수 있죠.” 박 찬일 셰프의 말씀을 듣고 나니 ‘그래, 대안학교를 나왔다고 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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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못할 게 뭐가 있어?!’ 하는 자신감이 생겼다. 잘 닦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사람보다 어쩌면 힘들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 더 일에 능숙하고 발 빠른 대처를 하기 쉬울 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리사, 새롭게 다가서기 요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손님과 즐거웠던 일화에 대 해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장예진이죠. 하하. 기억에 남는 손님 은 내 음식을 사랑해 주고 존중해 주는 사람들이죠. 박박 긁어 먹는 사람이 제일 좋죠 . 아, 베를린 필하모니오케스트라가 내 한공연 중에 저의 식당을 찾았죠. 제 음식을 먹어 보더니 대뜸 독일에 와서 장사를 하라고 말했던 게 기억나네요. 요리사는 즐 거운 일화가 그닥 없어요. 또 즐거운 일화를 들라면 사장이 밤새 돈을 셌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죠. 하하” 라며 답해 주셨다. 즐거운 일화가 그닥 없다는 말이 슬프게 느껴졌다. 고된 육체노 동을 하는데도 즐거운 일이 별로 없다는 게 얼마나 슬픈지……. 요리사는 어렸을 때부터 꿈꾸고 차근차근 해야만 성공할 수 있 다고 생각했던 나는 박찬일 셰프가 기자의 삶을 살다가 요리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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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전업을 하게 된 과정과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안정적인 직업 을 정리하고 굳이 요리를 하려고 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자라는 직업이 제게 잘 맞지 않았죠. 하면 할수록 죽겠더라 고. 그래서 그냥 소박하게 생각했죠. 요리사는 남한테 뭘 해야 할 것도 없고, 조직생활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죠. 저희 엄 마가 요리사여서 요리하는 것을 조금 알았고, 관심이 많았죠. 그 당시에는 기자를 하다가 요리사의 길을 걷는 경우가 거의 없 어 전 특이한 케이스였죠. 확실히 요리는 개인적인 일이고 그러 면서 상대적으로 진입하기가 쉽고, 잘 하기는 어렵지만 어지간 히 소박하게 생각하면 요리사의 길을 걸을 수 있죠.” 내가 생각했던 요리와 박찬일 셰프가 생 각했던 요리는 달랐던 것 같다. 나는 요리 를 뭔가 거창하고 꾸며내야 하는 걸로 생 각했지만 박찬일 셰프는 소박함과 자유로 운 것으로 생각하신 것같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굳이 요리라고 해서 꾸며내야 할 ……. 이유가 없구나 그냥 재료를 이용해서 내가 생각한 대로 만 들어내고, 그것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들에게서 즐거움을 얻 으면 되는 것 아닌가?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먹고 합시다! 개인적으로 내가 박찬일 셰프의 책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인데, 이 책을 쓰게 된 이유가 굉장히 궁금했다. 뭔가 굉장한 이유가 있을 것 같기도 했고. 그러나 박 찬일 셰프의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엄 마하고 가족들한테 바치는 글을 쓰고 싶어서였죠. 그 분들에게 너무 미안했고 고마워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고 그 기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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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어요.. 내가 말로 할 수 없었던 마음을 담은 거죠. 사 람은 지난 인생을 돌이켜 본다고 하죠. 추억에 젖으면서 인생을 돌아보는 재미가 있어요. 그 생각들을 글로 남기는 것이 즐거워 서 쓰게 됐죠.” 나도 나중에 그런 책을 써보고 싶어졌다. 내면에 있던 말을 글로 적어내는 것이 힘들겠지만 다 쓰고 나면 내가 박 찬일 셰프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것처럼 누군가도 내 책을 재 미있게 읽어주지 않을까? 인터뷰 후반쯤에는 철학적이고 멋진 질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 던 나는 “박찬일 셰프에게 요리란 무엇인가 요?” 하고 질문했다. 그러자 박찬일 셰프는 “와 진짜 질문 한번 철학적이네요. 요리는 생 계를 가능하게 해주죠. 너무 단순하고 소박 한가요? 원래 요리사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요리를 함으 로써 글을 쓰게 됐고, 요리가 글을 쓰는데 무 한한 영감을 안겨 주었어요. 그런 게 바로 요 리죠”라고 답했다. ‘삶의 원동력’, ‘삶의 낙’ 같은 답을 예상했던 나는 박찬일 셰프의 ‘생 계’ 라는 답변이 참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준비해 왔던 나의 마지막 질문. 오늘 인터뷰의 핵심 질문이기도 하다. “요리사나 요리 쪽의 직업을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무엇인가요?” 박세프는 “너무 단순한 답변 일지 몰라도 튼튼해야 합니다. 체력이 좋아야 하죠. 하루 12시 간 이상을 서서 일해야 하기 때문이죠. 두 번째로 외국어도 잘해 야 해요. 열심히 하는 사람이 성공하게 되죠. 소질이 아무리 좋 은 사람이라도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는 이길 수 없어요. 그리고 결정적인 건 영상이나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요리사의 세계는 허 황된 이미지예요. 과장되게, 아름답게 포장된 이면에 있는 진짜 힘들고 어려운 요리세계의 현실을 직시해야 되죠. 이왕 배워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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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이 진짜 어떤지 알아보는 노력이 필요해요. 요리사는 실상 좋은 직업은 아니죠. 어떤 의미에서 그러냐면 근로시간이 너무 길어요. 그것을 할 수 있는지,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꾸 물 어보았으면 합니다”라고 답해주었다. 나를 많이 돌아보게 하는 답변이었다. 이미 요리사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은 없어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혹시 내가 매체들을 통해 접하는 요리사와 푸드스타일리스트의 겉면만 보고 요리를 하 고 싶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재확인을 하게 되었다. 인터뷰를 하고 나니 징검다리 프로젝트에서 나아가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도 머지않아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될 텐데, 어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갈지 궁금해졌다. 내가 커서 정말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되어 있을지 의심이 들지만 이 의심이 그저 의심으로만 끝 나기를. 제발! 마지막으로 평범한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전화로 인터 뷰 신청을 드렸는데도 거절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인터뷰에 응해 주신 박찬일 셰프님께 정말 감사드린다. 내가 성인이 되어 나의 10대를 돌아볼 때 유익하 고 행복했던 시간 중 하나로 기억되지 않을까?

☎ 인스턴트 펑크_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34-105 (녹사평대로 26길 2) / 070-8711-6444

* 이번 기획기사는 잡지사 기자의 길을 걷다 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문창과 85학번 박찬일 셰프와, 푸드스타 일리스트가 꿈인 불이학교(고양 소재 대안중고등학교) 중3 장예진(문창과 87학번 장순철의 큰딸)의 대담으로 엮었습니다. -편집자 주.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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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국민의 외침을 똑바로 들어야 조환준

18대 대통령선거에서 국가정보원의 불법선거개입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국회 국정 조사특위가 난항을 겪고 있다. 어느 정도 예견했던 바이기는 하지만 집권여당의 안하 무인격 자세를 보면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야당의 특위 위원 선정에서 횡포를 놓더니, 회의를 비공개로 해야 한다는 구실로 국정조사를 보이콧 한 데 이어, 국정원 기관 보 고의 자리에 남재준 국정원장이 불참했다. 새누리당은 국회 회의의 비공개 주장의 근 거로 국회 정보위원회를 비롯하여 국정원의 업무를 다루는 각종 회의가 비공개로 운영 돼 왔다는 구실을 대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정원의 합법적 활동을 다룰 때의 얘기다. 대통령선거에 개입한 경위와 사실 은폐 의혹 등 불법성 여부와 그에 대한 책 임 범위에 대해 국민의 조사를 받아야 할 자들이 또다시 그 알량한 국가정보와 안보의 방패막에 숨으려 들고 있다. 국정조사가 며칠간 진행되면서 국정원의 증거인멸 내지 서울경찰청의 은폐 · 축소 행 위를 알 수 있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나름 셈을 했겠지만, 스스로 자신들의 불법행위를 자인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정치공작은 1961년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이래 주 요한 정치적 변곡점에서 끊임없이 국민적 의혹을 양산시켜 왔다. 한 예로 1992년 3월 국회의원 총선거 과정에서는 현직 안기부원 네 명이 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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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1992년 3 · 24 총선을 며칠 앞둔 18일께부터 한씨 소유의 승용차를 타고 강남구 개포동 주공아파트 1단지 일대를 돌며 당시 홍사덕 후보의 여자 관계를 폭로한다는 내용의 흑색선전물을 아파트 우편함과 차량 유리창 등에 꽂아 넣는 방식으로 뿌리다가 민주당 선거운동원들에게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들은 경찰에 신병 이 넘겨진 후 불과 15시간 만에 서둘러 구속됐다. 불충분한 조사를 거쳐 검찰 수사에 서도 피고인들의 묵비권 행사 등으로 이들에게 유인물을 건네주었다는 사람의 정체, 즉 배후를 밝히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아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놀라 운 사실은 이들이 당시 안기부 수사단 소속 직원이라는 사실이다. 일부 언론 보도에 따 르면 이 수사단은 총선 7개월 전에 3개 수사과를 모체로 발족하였으며, 안기부가 선거 에 개입하기 위해 이 조직을 만든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음에도, 단순한 개인범죄로 처리된 전례가 있다. 당시는 종이 유인물이었지만 18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댓글’로 표현되는 인터넷상 의 여론전이었다. 한 언론사가 공개한 검찰수사기록에 따르면 국정원 직원들이 전라 도 사람들을 비하하는 전라디언, 홍어라는 표현을 입에 담아가며 전라도 사람들을 씨 를 말렸어야 한다는 극언을 인터넷 댓글로 달았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지역차별과 국민을 분열시키는 발언을 국가공무원이 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즉각 파면감이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국민들은 요구하고 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단독으로 부하직원들에게 명령을 지 시한 것인지,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암묵적 재가가 있었다는 것인지, 또한 국정원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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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선거개입 사실이 드러났을 때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수사 축소 은폐가 있었다 면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 국정원의 선거개입 조직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 등 국 정원의 대선 개입의 전모를 밝혀야 함은 물론이고, 범죄 행위자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사법 책임을 구할 것을 말이다. 1970년대 당시 모든 언론사에는 중앙정보부원이 상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문사 와 방송사의 기사 제목에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개입하며, 언론을 통제 하였다. 고분고분 순응하지 않는 언론인에 대해서는 남산으로 연행해 폭행과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던 시대, 그리 오래된 시대가 아니다. 다시금 사회를 과거로 회귀시켜 ‘정치적 갑’의 위치에 서고자 하는 무리들이 지금껏 이룩한 민 주주의를 짓밟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는 지금 촛불을 든 국민들의 외침을 직시해야 한다. 대학생들에서 시작한 시 국선언은 이제 교수와 고등학생, 직장인, 사회단체, 종교단체 등으로 번지고 있으며, 국민들은 이미 전직 대통령 이명박과 현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 부분을 향하고 있기 때 문이다. 집권여당과 정부에서는 더 이상 사건을 호도하거나 본질을 흐리려는 처사로 는 국민의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뿌리는 처사임을 역사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다. 박 근혜 대통령도 이 사건에 대해 흐지부지 덮거나 책임 회피를 한다면 과거 부친이 대통 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민주인사를 고문하고 인권을 탄압하던 정보부를 부활시켜 유 신체제로 회귀하고자 한다는 지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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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김진휘

벗들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벗들이 먼 곳에서 찾아오진 않았고 벗들과 함께 먼 곳을 찾았다. 찾아오기만 해도 엄 청난 즐거움이거늘, 함께 먼 곳을 찾으니 그 즐거움은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이를 먹어 그런가 한참 전 이야기 같다. 88학번 동기들과 함께 안성 청룡저수지 근처에 위치한 운모석 캠핑장을 찾았다. 안성이면 그리 먼 곳은 아니네 하실 분도 계 시겠지만 대부분 서울이 생활권이고 시간을 내서 안성을 찾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20 년 전에는 서울과 안성을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했었는데 지금은 1년에 한 번 가 기도 쉽지 않다. 캠핑전문가 산환이가 동(?)을 뜨고 인석이, 학진이가 선발대로 먼저 출발하고 나머지는 시간되는 대로 참석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캠핑 장비를 모아 10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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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에 가까운 인원이 텐트 3개동에 의지하 여 밤을 보냈다. 모든 캠핑이 그러하듯이 선발대가 사이 트 구축하고 타프 치고 모닥불 만들고 한 명 두 명 캠핑장소에 도착하고 먹기 시작 한다. 음식도 술도 각자가 조금씩 준비한 다. 그 옛날(?) 자주 써먹던 말처럼 힘 있 는 사람은 힘을 내고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시간 있는 사람은 시간을 내고 장비 있 는 사람은 장비를 내며 그렇게 모였다. 물론 기본적인 비용은 1/N. 기본적으로 삼겹 살과 학진이와 미림의 준비로 광어회와 새우가 등장하고 산환이가 미리 주문한 소라와 피조개가 등장한다. 준비한 음식과 술은 넉넉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두런두런 주 고받는 농담과 진담 속에 그렇게 안성의 밤은 깊어만 간다. 의외로 오래 버텼다. 일찍부터 마셔댄 인석이와 준비하느라 고생한 산환이는 일찌 감치 떨어지고 몇몇은 결국 아침을 보고서야 텐트 안으로 들어간다. 4월인데도 산골 의 밤 기온은 두꺼운 파카를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전기장판에 의지해서야 잠을 청한 다. 캠핑 경험이 좀 되는 나와 산환이는 야전침대와 함께 타프 아래에서 새벽이슬을 피한다. 많이 모이지는 못했다. 내창이형과 함께 했던 88학번 동기들의 수에 비하면 캠핑에 모인 인원은 10분의 1이나 될까? 함께 하자고 여기 저기 연락도 돌려봤지만 인원이 늘 어나진 않았다. 대학시절 함께 거리를 달리던 친구들, 서울올림픽과 함께 대학에 들 어와 올림픽 꿈나무로 불리던 친구들, 어떤 친구는 그 꿈나무가 활짝 꽃을 피운 친구 도 있고, 나처럼 여전히 겨울인 친구도 있고, 너무 추워 함께 하지 못한 친구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닌데 단지 캠핑이 싫어 오지 않은 친구도 있고, 단순히 함께할 의사가 없 는 친구도 있고. 매번 동기모임을 할 때마다 드는 아쉬움은 함께 하는 인원수가 아닐 까 싶다. 매번 모이면 제일 먼저 하는 이야기는 “아무개 기억나니? 걔 요즘 어떻게 사 니? 누구누구 시골 내려간데, 누구누군 늦둥이 봤다더라, 걔 있지 왜?, 누구? 그때 걔 랑 사귀던 놈!, 아! 걔!, 응, 걔!, 돈 좀 벌었다더라 등등. 그 옛날(?) 함께 했던 이들 의 소식이다. 그리운 얼굴들, 보고 싶은 모습들. 오래된 추억들 속에, 내창이형과 함 께 했던 기억들 속에 보이는 얼굴들의 소식과 소문이 가장 큰 이슈이자 이야기거리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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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한참 술잔이 돌고 안 주가 떨어져 갈 무렵 모자라 는 안주를 대신 하는 것도 결 국은 사람들 소식이다. 좋은 얘기, 나쁜 얘기, 가끔 험담 도 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기 원도 하고 이래저래 술잔이 늘어간다. 의견이 분분하다. 동기 모 임을 확대해서 더 많은 사람이 모이도록 하자는 의견과 무리해서 모임 확대해 봐야 모 이는 사람 거기서 거기이니 현상유지라도 잘하자는 의견. 모두 일리 있는 의견들이고 정식으로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다. 그러나 모두들 공통적인 생각은 보고 싶은 사람 들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보고 싶은 사람들을 어떻게 어떤 곳에서 보느냐인데 이건 정말 풀기 어렵다. 워낙 순수했던 시절, 순수 그 자체로 만나고 정의와 진리를 배워가 며 만났고 마음을 열어야만 가능한 일들을 하면서 만났기에 상처가 생기게 되면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돼 버리고 만다. 대학에 들어와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고민 하고 나보다는 남을 위해 살려고 노력하고 정의와 진리가 무엇인지 찾아다니며 만난 친구들이니 그 어떤 친구들보다 그 내용과 깊이에서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 을 닫으면 비난 들을 일도 없고 상처 받을 일도 없고 아파할 일도 없을 텐데 마음을 닫 으면 만날 수가 없는지라 마음 터놓고 세상을 마주 했으니 그 상처 또한 드넓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미 학교를 떠난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그 상처들은 아물 기회를 갖지 못 하고 그냥 마음으로 덮어 놓고 살거나 또는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나에게 상처 준 사람 만을 기억해 만남을 기피하게 되는 일만 남게 된다. 결국 모임 소식을 들어도 함께 하 고픈 생각이 나질 않게 된다. 물론 모임에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유가 상처만 은 아닐 것이다. 지금 지니고 있는 마음의 온도가 그리 따뜻하지 못하여 함께 하기 어 려운 경우도 있다. 인연이 아닌 경우도 있을 거다. 하지만 단언컨대, 함께 할 수 있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들 모두 아련한 기억 속에 내 창이 형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는 원망하며 젊은 시절 거리를 내달렸던 기억으로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며 그 시절을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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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워할 거라는 것이다. 졸업 이후 학생시절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그 두꺼웠던 사회 과학서적이며 시집 소설 한 번 펼쳐 본 적 없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히 알고 있 을 것이며 결국엔 누가 승리할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보고 싶은 이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보고 싶지 않은 이들도 있다. 저 멀리 누군가의 소식이 들려온다. 같은 동네 사는 누구를 몇 년 만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학교 다닐 때 거리가 조금 먼 친구였는데 우연히 만나 술잔 기울이다 보니 이젠 더없는 친구 가 돼 버렸다. 난 저 형이 싫다. 저 누나가 싫다. 저렇게 싸가지 없는 후배는 처음 본 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그 누나가 보고 싶다. 결혼해서 독일 갔다던데 잘 지내실 까? 이태원에 식당 개업한 형이 마냥 그립다. 찾아가 보지도 못하면서! 학교 다닐 때 빌려준 돈, 지금 달라면 줄까? 내가 짝사랑하던 그 친구는 뭐하고 살려나? 그 놈, 나 버리고 가더니 그 꼴 날 줄 알았다. 저 형이랑 같이 사업하면 뭘 해도 잘 될 텐데. 형 그 러지 말고 나 좀 챙겨 줘요. 그 놈이랑 같이 농사나 지어야겠다. 돈 벌면 꼭 맛난 거 사 주고 싶은 형이 있다. 산을 좋아하고 구스타프 말러를 좋아하는 형이다. 많은 생각들 이 서로를 오간다. 그 중심에는 내창이형이 살아계신다. 김진휘는 연극학과 88학번 김경락이다_ 극단을 운영하다가 접고, 지금은 성미산 마을극단 운영자로 일하고 있다. 배우로 살기 위해 ‘지 극히 배우다운’ 이름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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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떠나는 아웃도어 박성용

자유롭지만 고독하다 슈베르트 환상곡 '방랑자' & 슈만 환상곡

자연과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눈동자는 미지의 세계 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들끓고 있어 건수만 있으 면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 자유롭지만 고독한 존재 인 그들은 도식화되고 획일화된 사유와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어느 게스트하우 스에서 젖은 양말과 신발을 말린다. 음악에서 보면 환상곡이라는 장르는 이런 자유로운 영혼과 코드가 가장 비슷하다. 떠 오르는 악상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낸 것이 환상곡이다. 상상력과 개 성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이 매력적인 곡은 낭만파 시대에서 빛을 발하였다. 한마디로 작곡가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가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의 그림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표지로 삼은 이 음반은 수록된 곡도 기가 막히지만 재킷 그림 자체가 모든 걸 설명해 준다. 바 위에 올라 지팡이를 짚고 발아래 운해를 바라보는 방랑자의 뒷모습은 고독하지만 주 눅 들지 않은 당당함이 느껴진다. 산꾼이라면 이 그림이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천 왕봉이나 대청봉 또는 인수봉 꼭대기에서 저런 장엄한 풍경 앞에 넋을 잃었던 추억이 다들 있기 때문이다. 이 음반은 슈베르트와 슈만의 환상곡을 담았다. 슈베르트 작품에는 ‘방랑자’라는 표제 가 붙었다. 둘 다 낭만파 시대의 환상곡을 대표하는 피아노 작품들이다. 두 곡 모두 꿈 틀거리는 열정과 그윽한 서정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듣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마우리 치오 폴리니의 연주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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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들킨 날에는 하산주가 길어졌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산에서 만난 후배 중에 역마살이 꽉 낀 녀석이 하나 있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코끝에 바람 냄새가 느껴 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마음이 끌렸다. 서글서글하 게 붙임성이 좋은 그는 선후배들한테 인기가 좋았 다. 게다가 산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뜨거워 항상 히말라야와 알프스를 동경했다. 그와 함께 낄낄거 리며 산과 술집을 헤매고 다녔다. 나는 유쾌발랄한 그의 모습 속에서 종종 똬리를 튼 외로움을 보았다. 가끔 인수봉 정상에서 건너편 백운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뒷 모습은 쓸쓸했다. 나한테 고독을 들킨 날에는 하산주가 길어졌다. 그가 즐겨 부르는 <파초>의 여운도 진했다. 10여 년 전, 그는 그토록 갈망하던 알프스를 다녀왔다. 마터호른(4478m) 회른리 능 선을 등반하고 왔는데, 정상에는 올라가지 못했다. 악천후 때문에 솔베이 대피소에 서 하룻밤을 자고 발길을 돌린 것이다. 날씨가 너무 안 좋아 하산 과정도 위험했다고 한다. 알프스 4대 북벽을 해치운 선배가 함께 갔지만, 대자연 앞에 인간은 한낱 미물 에 불과했다. 요즘 마터호른 회른리 등반은 여행사 상품으로도 나오고 있는데, 그 당 시만 해도 원정의 차원이었다. 마터호른 정상에 오르진 못했지만 미친 듯이 흘러 다 니는 구름과 바람소리, 그리고 거대한 봉우리를 턱 밑에서 보고 온 것만으로도 후배 는 만족했다. “마터호른 바위 맛이 어떠냐?” “바위가 다 그렇지 뭐.” 무덤덤하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 알프스 연봉이 펼쳐졌다. 나중에 녀석은 에베레스 트 원정도 다녀왔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그는 몇 년 잠적하다가 어머니 상을 치르고 미국으로 떠났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자리 잡은 그는 역마살을 속박하려는 고모들한테 가끔 가출을 무기로 ‘협박’도 하고, 때론 삼겹살에 보드카를 마시며 모국의 바위와 산 꾼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들으 면 그와 함께 자일을 묶고 다녔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가장 독일적인 지휘자로 꼽히 는 루돌프 켐페가 이끄는 드레스덴국립관현악단은 입산부터 정상, 하산 과정에서 만 나는 22개의 알프스 풍경을 중후한 연주로 담아내고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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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에 대하여 성백술

아무것도 해 놓은 것 없이 내 나이 어

고 모든 게 확 뒤집히지 않으면 끝나지 않

느새 50이 넘었다. 나이 4, 50대가 되면

을 이 싸움에서 우리의 나이는 어떤 의미

육체적 정신적으로 누구나 조금씩 노화가

를 지닐까.

진행된다고 한다. 노안이 오고 머리칼이 조금씩 희어지고 이빨이 빠지거나 기억력 이 떨어지기도 한다. 나이 100세까지도 사는 시대에 이런 소리를 하면 애늙은이 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경험 한 사실에 비추어 그것은 현실적인 문제 이다. 혹자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정력적인 의욕을 불태우는 분들도 계시지 만, 나이를 먹을수록 늙어간다는 것은 자 연의 섭리요 이치인 까닭이다.

2, 30대가 패기와 도전의 시기라면 4, 50대는 지혜와 용기의 시기이다. 물불 안 가리고 싸우는 전사도 필요하지만 지금 은 좀더 유연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 시 기이다. 건전한 상식과 평화 통일에 대한 염원마저도 종북 좌파라 공안몰이를 하고 있는 보수 꼴통들의 하는 꼬락서니를 보 면 참으로 가관이다. 그들은 옛날의 친일 파, 친미 사대주의를 반북으로 교묘히 위 장하고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지키려

4, 50대는 중년의 시기이다. 남편과 아

는 기만 술책을 쓰고 있다. 모두가 썪은

내로서,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모시는 아

짓거리들이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

들과 딸로서,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

두가 썪은 것 투성이다. 모든 법과 제도가

들의 아버지, 어머니로서 삶의 무게가 결

가진 자들의 재산과 이득을 보호하고 증

코 가볍지 않은 시기이다. 우리 이내창기

식시키기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 내창

념사업회 회원들의 나이가 어느덧 4, 50

이를 죽인 국가정보기관인 국정원을 동원

대가 되었으니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

하여 선거에 개입 하는가 하면 청문회에

다. 진상규명투쟁 20여 년, 정권이 바뀌

나오는 자마다 부정과 비리를 밥 먹듯 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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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뿐이다. 조금 잘 산다는 사람들의 면 면을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권력 에 기생해서만 돈을 벌 수 있도록 모든 것 이 구조화되어 있다. 어찌 그들에게 나라 를 맡기고 하루라도 맘 편히 살 날이 있을 것인가. 이 땅의 4, 50대라면 필히 이 나 라의 역적들을 몰아내고 진정한 민주주의 를 세우는 기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쌍한 노년 생활을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나는 일찍이 나이 40까지만 살고 싶다 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은 덤으로 살고 있는 인생이지만, 고 교 시절부터 예술가나 천재는 요절을 해 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때의 객 기였겠지만 그게 멋진 인생처럼 보였고 지금의 나는 너무 오래 살고 있는 셈이다.

요는 나이가 든다는 것은 늙어간다는

그러나 불혹의 나이를 넘어 지천명의 시

점이다. 강이 흐를수록 스스로 깊어가듯

기에서 이내창 열사나 원이와 같은 지인

이 나이가 들수록 속이 깊어가는 게 우리

들을 먼저 보내고 난 뒤 나의 느낌은 바로

인생사의 당연한 순리이다. 그런데 문제

황망함 그 자체였다. 이 땅의 젊은 예술가

는 어떻게 곱게 늙어가느냐 하는 것인데,

들이, 아직도 할 일이 많은 투사와 예술가

중년의 시기에 정신적 신체적으로 심신을

들이 그렇게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단련하지 않으면 나이가 들수록 고지식하

다는 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닌가 싶다.

고 보수적인 노인네가 되는 반면에, 늘상

그동안 나의 생각도 바뀌었다. 이 한세상

노력하고 수련하여 넉넉하고 자연스러운

오래도록 살면서 그 젊은 죽음들을 증언

그래서 아름다운 노년이 있다. 인생의 황

하고 이 잘못된 세상을 조금씩이나마 바

혼을 아름답게 맞이하려면 젊을 때 열심

꾸어 나가는 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

히 준비해야 한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

가 아닐까.

으로나 준비되지 않은 황혼은 외롭고 쓸 쓸하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 둘 것이 없다. 굳이 개미와 베짱이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젊은 시절에 일하지 않으 면 늙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할 길이 없을 것이다. 진정한 사회복지국가도 아닌 우 리나라에선 늙고 병들면 나만 서럽고 불

성백술_ ’80년에 입학했다. 소설 쓰면서 사회과학서점 등 다양한 일을 하다 귀향해 자연과 함께 살고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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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기

인간은 정말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하는 것일까? 김문영

지난해 11월 30일 나는 타임머신을 타

이때 만들어진 제1회 언저리산유회(회

고 80년대로 돌아가 광란의 질주를 했다.

장 이창호 83, 총무 박성용 84 필명 박시

꼭 그 시절처럼 놀았다. 노래방도 가지 않

우)는 지난 1월 12일(토) 오전 10시 지하

고 1차 음식점에서 젓가락 두드리며 놀았

철 1호선 도봉산역 인근 포돌이광장에서

다. 빈소주병에 숫가락 끼워 마이크 만들

시작되었다. 예정된 시간에 현장에 도착

어 노래도 불렀다. 소설가, 시인, 사진작

한 언저리서 놀기 좋아한 멤버는 73부터

가, 농민…… 등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

시작하여 86에 이르기까지 모두 9명이었

과 75학번부터 88학번까지 여러 명이 모

다. 수십 년 만에 만나는 감격에 서로 얼

여 그때 그 시절처럼 망가졌다. 술자리가

싸안고 눈물의 상봉이 이뤄지는 동안 산

끝날 때까지 특정 후보를 찍으면 안 된다

유회 고문(79 임헌갑)과 총무(84 박성용)

고 징징 우는 친구도 있었다. 광란의 질주

가 코스 결정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모습

를 하다가 쓰러져 다음날 오전까지도 엉

을 보였다. 총무는 도봉산장 가서 커피향

엉 울며 엄마를 찾는 덩치 큰 귀여운 사나

으로 운우지정을 나누고 원점 회귀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 술자리에서는 ‘언저리

‘장애인을 위한 놀이코스’를 주장했고 고

산유회’라는 조직도 만들어 매월 첫째 주

문은 원통사를 거쳐 우이동으로 빠지는

토요일에 산놀이도 하기로 했다.

‘경로우대 놀이코스’를 추천했다. 아주

나의 대학시절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부활시킬 때 온몸과 마음으로

민주적인 다수결 의견에 따라 경로우대 놀이코스로 결정되었다.

동행했던 84학번 김성희(총학생회장 출

산놀이가 시작되고 20분 정도나 지났

신)가 조직하여 모임이 성사되었다. 눈물

을까? 허름한 자연상회가 나타나고 눈에

겨운 만남이었다.

덮힌 원탁 평상이 보이자 누가 먼저랄 것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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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없이 각자 가지고 온 간식 꾸러미를 풀

다는 등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급

어놓았다. 시판 중인 소주 중 알콜도수가

변사태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일치 단결하

가장 높은 플라스틱 병에 담긴 찬 소주가

여 사태를 수습했다. 막내 2명이 좌장을

일행의 오감을 자극했다. 떡이며 과일,

호송하여 하산키로 결정했다. 단 어떤 상

마른안주, 유기농 찐고구마 등이 푸짐하

황이라도 하산주는 함께하기로 했다.

게 쏟아져 나왔다. 눈밭 위에서 찬 소주 한 잔씩을, 나름의 사연을 간직한 가슴에 쓸어 넣으며 몸서리쳐지는 과거의 외로움 이 야속하다는 듯이 정겨운 뜨거운 눈물 을 소주잔에 떨구었다.

나머지 6명의 전사들은 예정된 놀이를 계속했다. 원통사에 닿았을 때는 각자의 재킷을 배낭에 넣었는 데도 김이 무럭무 럭 나도록 몸속에 찌든 나쁜 기운을 발산 해 냈다. 하산 도중에 또 한 명의 늙은 전

‘마냥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좌장의

사가 오른쪽 종아리 쥐발생을 호소했으나

성화와 ‘언저리서 퍼질러 앉아 놀자’는 막

뭐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내의 투정이 부딪치는 틈새를 ‘걸으면서

오후 2시가 넘어서 공식적인 산유회는 마

놀자’는 중간 학번의 제안이 어우러지면

무리되었다. 하산 지점에서 출발할 때의

서 원통사를 향한 소풍이 어울렁더울렁

모든 멤버가 합류했다. 뿐만 아니다. 산

이어졌다.

유회 중간에 여기저기서 전화가 날아오고

문제는 놀이코스의 3분의 1지점에서 발생했다. 호기롭게 앞장서 길을 재촉하 던 좌장의 발에서 쥐가 났다. 예상치 못한

SNS가 춤을 추더니 ‘고촌’이라는 객주집 에 여장을 풀었을 때는 모두 13명으로 전 투대원이 늘어났다.

급변사태가 발생하자 일행은 술렁였다.

도토리묵에 시원한 막걸리로 시작한 하

‘장애인 놀이코스’를 선택하는 것이 옳았

산주 행사는 능이버섯오리백숙, 토종닭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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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기

도리탕, 능이버섯 추가 등의 걸쭉한 안주

나는 지금까지 청춘인 줄 알면서 생활

와 소주 맥주 등의 온갖 주류 형제들이 합

해 왔다. 아니 그리 노력했다는 표현이 정

세하면서 주체사상을 더욱 확고히 하는

확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위에

분위기가 만연되었다.

서 얘기한 두 차례의 모임을 갖고 나서 몸

해가 떨어지면서 비틀거리던 하산주 행 사는 누군가의 제안에 의해 해산주 행사 로 이어졌다. 서로 계산하겠다고 실랑이 가 벌어졌고 덕분에 난 돈 한푼 내지않고

이 천근만근이 되었다. 다음날 하루 종일 고생했다. 이게 나이 드는 모습인 모양이 다. 서럽고 원통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물밀 듯이 몰려온다.

공짜 놀이를 즐겼다. 다음 놀이 때는 나도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천명(知

돈 좀 쓰겠다고 빡빡 우겨야겠다. 해산주

天命)을 지나 이순(耳順)으로 가고 있지

이후에 어떤 일행은 서로 배낭을 바꾸어

않은가?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리대

귀가했으며 또 어떤 일행은 서교동서 동

로 살아야 하는 비참한 나이로 치닫고 있

문이 운영하는 술집으로 향하기도 했다.

는데 매양 청춘인 줄 착각하고 있으니 나

이후 매달 언저리산유회는 꼬박꼬박 이 어지고 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 도 모른다. 마지막 1명이 남더라도 산유 회는 이어지도록 하자는 결의는 있었지만 사람 없으면 결국 조직은 와해되는 것 아

는 철이 들려면 아직도 먼 것 같다. ‘네 자 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음성이 귓 전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떠랴! 나는 철없이 젊게젊게 살려고 노력하련다. 우우우

니겠는가! 김문영_ ’80년에 입학했다. 한국전문신문협회 이사로 <말산업저널>을 발간하고 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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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님을 알 때, 더 단단해졌다

추모단체, 추모제 소식

22회 민족민주열사 · 희생자 범국민추모제 개최 지난 6월 8일 광화문 광장에서 스물두번째 민족민 주열사 · 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있었다. 500여명

의 추모객이 참여하여 추모제를 마친 후 대한문까 지 ‘민중올레’를 하려 했으나, 경찰의 봉쇄로 무산되 었다. 교보빌딩 앞에서는 보수단체에서 반대집회를

하였고, 추모제 도중 몇 번은 행사장에 난입하는 등 집회를 방해하면서 볼썽사나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추모제에는 박창수, 신호수, 최우혁 등 의문사 열사들의 유족들이 많이 참여하였으나, 이미 고령이 되어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하는 모습들로 안타까움이 컸다.

고 박창수 열사 22주기 추모대회 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고 박창수 열사의 추모

대회가 지난 5월 9일 안양샘병원 앞에서 한진중공

업과 경기지역 노동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박창수열사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과 대기업연 대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다 1991년 5월 6일 경기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990 년 전노협 출범 이후 공안기구에서는 개별 노조에 대한 와해공작이 한창 진행될 때였고, 박창수 열사

또한 사망 직전 안기부 직원으로부터 지속적인 회 유를 받았던 정황이 있었음이 의문사위 조사 결과 확인된 바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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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이원근

조곤조곤한 말투에 튀지 않은 몸가짐. 적당히 활달하고 충분히 진지한 사람. 고등학 교 시절 이미 허리디스크 수술로 불편했을 터인데도 아스팔트에서 꿋꿋이 양반자세로 버텨내던 사람. 운동을 하면서도 3.0을 훌쩍 넘는 학점으로 4년 만에 졸업장을 받아 낸 사람. 그리고 1년여 더 5학년 운동을 하다 갑자기 ‘사라진 오빠’. 90년대 중반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던 김영상(87) 회원이 대학교수가 돼 돌아왔다. 일종의 ‘오빠가 돌아왔다’다. 김 회원은 92년부터 2년 남짓 모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갑작스레 도미(渡美), 97년 조지아주립대에서 파이낸스로 석사를, 2003년에 서던일리노이대에서 같은 전 공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그로부터 딱 10년간 미국 대학에서 재무관리를 가르치다 이 번에 숭실대로 자리를 옮겼다. 미국에선 항상 이방인이었고, ‘뭐 때문에 사는 걸까’, ‘다르게 살 순 없을까’ 하는 생 각에 돌아왔다고 한다. 이제 곧 쉰을 바라보는 나이.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 지역에서 교육사업과 봉사활동에 투신하고 싶다는 오랜 꿈도 귀국 결정에 한몫했다고.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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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동안에 청바지 차림이지만, 대학생 자식이 둘이나 된다. 첫째 관아와 둘째 무 겸이는 각각 신시내티와 오하이오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고, 늦둥이 윤겸이는 올해 초 등학교에 입학함으로써 가족의 세 번째 학생이 됐다. 김영상 회원만 먼저 들어왔다. 중앙대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원룸에서 혼자 지내 면서 끼니는 주로 학생식당에서 해결한단다. 중고차도 구입했다. 대학 때 자아비판을 생활화한 이래 방향을 바꿔 요즘은 교회에서 참회와 반성, 새로운 계획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당연시한다. 아직은 한국사회 전반을 이해하고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학에 들어오자 마자 ‘스펙’과 ‘취업’에 올인하는 아이들을 보면 “잔인한 경쟁의 시대에 당연히 비굴해 질 수밖에 없는 매우 불쌍한 아이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돌아온 오빠. 아직은 미국식 사고와 실용주의적인 가치관이 더 몸에 배어 있다. 스 스로도 “한국사회에서 더 많이 부닥치고 깨져야 된다”고 말한다. 6개월 뒤, 1년 뒤를 기대해 본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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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일부처럼 눌러앉았다 이원근

터키, 시리아, 요르단, 산티아고 순례길, 세네갈, 타클라마칸 사막 등을 외로이 돌아다니며 낯선 세계를 희롱 하던 박정호(85) 회원이 제주에 정착했다는 풍문이다. 게다가 밥집을 열었다니! 이름도 거창하다. 제주도 공 인 사회적기업인 ‘월평마을협동조합’의 ‘달마루집’ 운영자 ‘달마루 삼촌’이란다. 주소지는 서귀포시 월평동 502-9번지. 올레7코스 종점이다. 초록방과 푸른방으로 꾸며져 있고, 달국수를 주먹밥 한 덩이와 함께 5000원에 내온다. 브랜딩 커피는 물 론, 핸드드립에 더치커피도 조제해 준다. 가능한 모든 식재료를 키우며,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냉동 도 거부한단다. 그의 책 <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은 이제 사라진 것인지, 회원과 두 차례 이메일 인터뷰를 가졌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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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는가.

제주에 정착한 지 석 달 되었다. 근 10개 월간 중남미 여행을 한 뒤 돌아와 바로 제 주로 향했다. 별다른 뜻이나 계획은 없었 다. 그저 여행의 일부처럼 제주에 눌러 앉 은 것. 정착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제주도는 너무 뜬금없다. 정착 배경은?

제주에 한번 살아보면 어떨까 막연히 생 각해 보았다. 제주는 나에게 미지의 영토 였고 그래서 알고 싶은 곳 중 하나다. 정 착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어 쩌면 나는 정착할 곳을 찾아 떠돌았는지 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제주에 정착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금세 또 떠날 것 같은 말투다.

원래 지루하거나 식상한 것을 못 참는 변덕스러운 성격이다. 제주가 싫증나거나 사람 들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주저없이 떠날 것이다. 난 그런 인간이다. 달마루집이란 무엇인가. 운영 형태도 독특하다.

달마루집은 밥집 겸 카페다. 주로 현지 식재료를 갖고 가능한 한 가공하지 않은 음식 을 제공하려 한다. 물론 가공식품이나 감미료는 넣지 않는다. 모든 재료를 손수 만들 기 때문에 품과 비용이 많이 든다. 월평마을 주민들과 이주한 도시 청년들이 함께 만 든 협동조합에서 운영을 한다. 최근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돼 최저 임금을 정부로 부터 지원받는다. 형의 역할은.

나는 협동조합 조합원으로 달마루집을 운영한다. 아침에 문을 열고 청소하고 커피를 내리며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비우며 시간 날 때마다 파리를 잡고 장을 보고 문닫을 때면 하루 매출을 계산하며 한숨을 쉰다.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된다. 명칭은 매니저지 만 그냥 종업원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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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놓기

음식만들기에 소질이 있는가. 반응은 어떤가.

소질까지는 모르지만 만들기는 좋아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주로 사먹거나 남이 만들어 주는 밥을 먹 었지만 여행을 하면서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때 하 나 둘씩 익혀 둔 조리법이 제법 손에 붙었다. 그래 봐야 몇 가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김치도 담 글 줄 아니 이전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람들 반응은 한마디로 어떻게 만드는 건 지 알려달라는 사람이 제법 있을 정도면 괜찮다는 거 아닌가? 근황이 늦었다. 형의 최근 10년을 말해 달라.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주저없이 한국을 떠나 인 도와 네팔을 비롯해 30여 개국을 떠돌아 다녔다. 여행하며 사진과 글을 틈틈이 썼고 별 것 아닌 이야 기들을 묶어 책을 3권 냈지만 별 신통치는 않았다. 물론 돈도 안 됐다. 작년 4월에 1년쯤을 기약하고 중남미 여행을 했고 박근혜정부가 다시 들어섰을 때 칠레 산티아고에 머물며 한국에 돌아올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스페 인어나 영어가 조금만 됐어도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언어 장벽이 너무 커서 결 국 돌아오고 말았다. 정치적이다. 결국 말이 통하는 사회로 돌아왔단 소린가.

정치적이랄 것도 없다. 길지도 않은 인생 더러운 꼴 보면서 살 필요가 있을까? 나만 편 하면 되는가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소시민이다. 나 자신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 이 없다고 생각한다. 많이 돌아다녔다. 가장 기억나는 여행지와 사람이 있다면. 무슨 이유로.

라다크다. 정말 세상에 이런 곳이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순수’라는 의미 그 자체였다. 끝없이 황량한 영토와 강렬한 태양, 그리고 종교적인 삶은 내가 지 금까지 봐 왔던 인간들의 세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 곳은 가장 자본주의적 욕망에서 자 유로운, 유일한 자유의 땅이다. 그렇다면 가장 끔찍한 기억으로 남은 곳은 어디인가. 다시 보내진다면 어떡할 것인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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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인도, 처음 갔을 때의 꼴까따. 40도가 넘는 기온 에 평균 습도 99% 로, 사람이 이런 곳 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 로웠다. 정신적 고 민 따위는 사치였 다. 육체적으로 너 무나 피곤하고 괴로웠다. 꼴까따 파라곤 호텔의 푸른 독방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여기 서 죽는다면 참 비참하겠구나 느꼈다. 그래도 다시 가보고 싶다. 형은 떠다니는 사람이다. ‘떠나지 않으면 견딜수 없다’고도 하지 않았나. 떠나지 않는 다른 이유 가 있나. 아님 또다시 떠날 것인가.

여행이 오래되다 보니 조금은 지쳤고 다른 세상이 새롭지도 않았다. 내 내면을 돌아볼 시기가 온 것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이 선다면 다시 떠날 것 같다. 단지 물 리적 이동에 불과한 여행은 하고 싶지 않다. ‘라디오스타’처럼 묻겠다. 형에게 ‘여행’이란.

연인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 때로는 불타오를 때도 있지만 차갑게 식을 때도 있다. 너무나 보고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너무나 밉고 속상한 순간도 많다. 밉고 속상할 땐 무엇으로 이겨내는가.

술을 마시고 꽐라가 된다. 형에게 달마루집이란.

잠시 숨을 고르고 쉬어가는 곳. 마지막 질문이다. 형은 <어깨동무>가 무슨 소년잡지냐고 물어올 정도로 기념사업회와 떨어져 지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회원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죄송하고 아프다…….. 뜨겁지 않은 나를 욕하기 바란다. * 더 자세한 소식은 회원의 블로그 명랑여행연구소(blog.daum.net/adventure)를 찾아보기 바란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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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동정 + 페북동정 캠핑에 이어 요리까지 김산환 회원이 더치오븐 무수분 닭찜을 SNS에서 선

보여 화제입니다. 물 한 방울 넣지 않고 90분간 중약 불에 올려두면 이렇게 맛난 닭찜이 된다네요. 남은 육 수에는 물을 조금 더 부어서 라면사리를 넣어 먹으면 된다고 합니다. 닭찜 좋은데, 저 더치오븐이 더 부럽 네요. 더치오븐은 주철냄비인데 일종의 무쇠솥 같은 거랍니다.

시코쿠 자건거 순례

김신환_더치오븐닭찜

김성희 회원이 지난 6월 3주간 회사 안식월을 틈타 일 본 시코쿠 자전거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주로 캠핑을 하며…… 시코쿠 순례 마치고 돌아오니 장마가 와 있네요. 자전거와 함께 매일 산을 넘으며 80km 가량 달려야 하는 고된 여정이었지만……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습니다. 일상이 여행과 다르지 않다 는 걸 새삼 느꼈다는 것 정도.”

카잔유니버시아드에서 광주유니버시아드 홍보

김성희_시코쿠 자전거순례

김형균 회원이 멀리 카잔까지 날아가 2015년 광주 유

니버시아드 대회를 홍보하였다고 하네요.

근데 카잔이 어디 있는 곳인가요? 카잔은 러시아연방 에 속한 타타르 공화국의 수도입니다. 김형균_카잔유니버시아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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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생산자대회

백기욱_2013한살림생산자대회

백기욱 회원이 지난 7월 19일 전북 부안에서 열린 2013년 한 살림 생산자대회에 다녀왔답니다. “생산 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지는 한 살림”이라는군요.

첫 개인전 송정근_첫 개인전 ‘polarity’

사진가 송정근 회원이 첫 개인전 ‘polarity’를 서울 삼청동 공근혜 갤러리에서 지난 6월 4일부터 16일까 지 열었습니다. 물을 주제로 양극 혹은 극성을 표현한 이번 전시는 총 3개의 시리즈로 구성했다는데요. 특히 태평양의 어느 섬들에서 찍었다는 물 사진들은 자연의 치유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는 평입니다.

창경궁 다식수업과 댄스 창경궁봉사활동, 다식수업 너무 더웠는데 재미있었어 요

이상길_다식수업 / 댄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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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퇴직한 뒤 댄스와 다과에 빠져있는 이상길 회 원의 두 개의 사진입니다. 말 그대로 양극화입니다.


뉴욕자연사박물관 기후변화와 해양환경전 - 국립해양박물관 부산환경운동연합에서 일하는 정호선 회원이 국립 해양박물관에서 열리는 뉴욕자연사박물관 기후변화 와 해양환경전에서 일한다고 합니다. 관람을 원하시 는 분은 맘껏 연락주세요 www.facebook.com/hosun.cheong 이번 휴가는 부산으로 가야겠네요. 정호선_뉴욕자연사박물관 기후변화와 해양환경전

김재한_바람이 불어오는 곳

김재한 앵콜공연 여름은 또 가고 있네요. 가득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 응원해 주시는 모든 분 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절대 초심 잃지 않고 또 다듬고 느끼겠습니다. 연장공연 마지막 주가 이렇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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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엄마 품으로 월남리 힐링~♥ 흙 밟고 공기 마시고 하모니카 불고, 여기는 대한민국 전라 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입니다! 2013. 07. 21 @ 엄마 품 속에서 백선영_ 여름휴가 엄마품으로

25년 전 농활대 사진 25년 정도 된 것 같다.

정왕룡_25년 전 농활대 사진

농활대장이 되어 후배들을 이끌고 충주로 달려갔던 모습이다. 볼이 푹 들어가 있고 외 국 이주 노동자 같은 모습이기도 하다. 식량닷컴 칼럼을 쓰려다 찾아낸 사진이다. 지 금의 내가 나일까, 이때의 내가 나일까? ㅎㅎㅎ -사진 속 김포대두 정왕룡을 찾아보세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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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움직이니 마음이 따라 움직였다 정리

사무국

이내창기념사업회 총회

1월 26일

올해 이내창기념사업회 총회는 흑석교정을 벗어나 서울 위쪽의 성북구 길음동에서 열렸습니다. 식당 연회실이 80년대 영화 세팅장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곳이었지 만, 이동이 없고 긴 시간 아주 편하게 사용할 수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는 평이 있었습니다. 애국의례 이후에 진행된 안건은 5년 만에 회칙을 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간만에 열띤 논의가 잠깐 이어지면서 오늘의 상황에 맞게 회칙을 개정하였습니다. 이어서 2012년 사업보고와 회계보고가 있었으며, 2013년 사무국장, 집행부, 운영위원 선출이 있었습니다. 2013년 사무국장은 순서(?)에 따라서 신성호 회원이 선임이 되었으 며, 신임 사무국장은 2013년의 활동계획으로 이내창기념사업회의 장기프로젝트 사업의 초안을 기획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2013년 운영위원은 가나다 순으로 김기수, 김성희, 박지훈, 신명철, 원순재, 이동희, 이 상재, 이원근, 이주현, 조환준, 황선태 회원이 수고를 해 주시기로 했으며, 이주현 회원 은 내년의 사무국장 결의를 해 주어서 당연직(?)으로 올해 운영위원에 합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행부는 백기욱 회원이 홍보, 김기수 회원이 총무, 이상재 회원과 조환준 회원이 연대사업을 맡기로 했습니다.

서원 회원(사진85) 장례식과 추도집회

3월 8일~11일

이내창기념사업회의 큰 기둥이었던 서원 회원이 3월 8 일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2월에 암 투병 소식을 듣고 십 시일반으로 마음의 표시를 하였던 회원들에게는 너무나 빠른 부고 소식에 놀라움과 슬픔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 다. 3월 10일에는 기념사업회의 전 회원들이 장례식장 에서 추도집회를 통하여 서원 회원의 삶과 실천을 되짚어보며 애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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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 겨레장 참가

3월 28일

고석배, 김선주, 김성희, 신명철, 정원옥, 조환준, 이예 진, 김선미 회원이 이내창기념사업회 만장과 조의금을 준비해서 참가했습니다. 1천 명이 넘는 시민들과 함께 오전에 서울광장에서 발인 제를 진행하고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노제를 진 행하였습니다. 서울광장 동편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분향이 진행되었으며, 오후에 파주시 장준하 공원에서 유골을 안장하였습니다. 이번 겨레장은 장준하 선생님 유골을 다시 안장하면서 사망 당시 의혹을 밝히지 못한 채 안 장해야 했던 아픔을 되새기고 그의 뜻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이 됐습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회원 가게 리스트 작성 작업

5월 20일~6월 30일

이내창기념사업회의 회원 간 상호부조의 기회를 도모코자 회원 사업체의 알찬 기본 정보 를 담아서 어깨동무 소식지와 구글지도에 등록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차 수집 된 가게 정보는 상반기 어깨동무 소식지에 실리며 추가로 상시적인 업데이트를 할 예정이 니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담당자 연락처_ 백기욱 010-4163-6260 메일 naechang.lee@gmail.com 수집된 회원 사업체 정보는 회원 간 공유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가게를 운영하는 회원들은 어깨동무 까페의 공지글에 들어가서 아래의 항목을 표기하여 보내 주시면 됩니다.

* 필수항목 1. 어깨동무 회원 성함(학과학번)을 입력해 주세요 * 예) 홍길동(경영88) 2. 상호명을 입력해 주세요 * 예) 진퉁 평양만두 3. 가게 대표전화번호을 입력해 주세요 * 예) 02-222-2222 ‘ - ’표시도 빠짐없이 입력해 주세요. 4. 운영 중이신 가게의 주소를 입력해 주세요 * 예) 제주시 노형동 720-5번지 용문빌딩 1층 입력해 주신 주소 정보를 바탕으로 구글 지도와 연계하여 회원님들께 가게의 위치 정보를 제공할 예정입니다. 5. 우리가게 특징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세요. (우리 가게 자랑 및 홍보) * 예) 진퉁 평양만두는 정통 평양식 손만두집입니다. 맛집찾기 달인 원그니 와 홍보달인 기우기가 함께 오픈했습니다. 평양만두의 맛과 영양 그대로를 담았습니다. 1호점 성공하면 평양만두 협동조합을 꾸려 외식프랜차이 즈의 새장을 열어볼 예정입니다. 전국 택배 가능합니다. 택배주문번호 1500-0000 ^^ 6. 기타 건의사항 및 남기실 말씀 있으시면 글 남겨 주세요.

이내창기념사업회 기획 설문작업 진행

5월 20일~8월 30일

이내창기념사업회가 올해로 스물네 살의 청년이 되었습니다. 24년. 이 숫자에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하루의 끝이자 또 하나의 시작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24K 순금처럼 변함이 없을 것 같았던 우리들은 지금 어떤 모습인 지 잠시 거울 앞에 서고자 합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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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업회 가족들의 소중한 의견들이 모여 스물네 살 청년이 된 기념사업회가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걷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설문 참여 (어깨동무에 까페에서 설문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https://docs.google.com/forms/d/1_YeHhlTfaenJOxBaJx-2GDNGyUxQD_TOQcfFB4284UQ/viewform

22회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범국민 추모제 참가 6월 22일 김선주, 김현숙, 신명철, 신성호, 조환준, 이예진 회원 이 참가를 했습니다. 행사는 추모사와 추모공연, 지지발언, 유가족발언, 분향 등의 순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대략 400여 명 정도의 추모객들이 모여서 행사와 분향에 참여를 했습니다. 주변에는 어버이단체와 같은 보수단체들이 반대집회를 하는 어수선한 분위기와 추모객들 보다 3~4배는 더 많은 경찰들의 모습이 마음을 산란하게 했습니다. 주최측은 어김없이 거리행진을 준비했지만, 몇 배나 많은 전투경찰들에 막혀서 행진은 하 지 못하고 시국발언만 하는 데 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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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들어요. 하나, 2013년 가을 · 겨울호 편집위원 되기

둘, 기고하기

자주 안 모입니다. 회의는 짧게, 뒤풀이 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일은 찾아서 하 고, 할 수 있는 만큼 합니다. 느릿느릿 갑니다. 끈덕지게 함께 갈 열의와 책임 감이면 충분합니다.

어떤 형식과 내용의 글이라도 좋습니다. 나누고 싶은 생각,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보 내주세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확 인하고 싶습니다. 회원 자녀의 기고에는 소정의 원고료가 지급됩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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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함께하니 당당해졌다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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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2012년 이월 회비 호스팅3년연장 편집위활동지원 운영위지원

출금

15,300 202,900 35,800

사무국장문자비용

19,000

추모연대회비 소계 1월잔액 회비 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회비 사무국장문자비용 열사달력/양말 소계 2월잔액 회비 이자 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회비 장준하선생만장 소계 3월잔액 회비 장준하선생부의 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회비 추모제지원 소계 4월잔액 회비 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회비 근조기 소계 5월잔액 회비 결산이자 범국민추모제후원 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회비 이자세금 소계 6월잔액 회비 추모연대회비 수도권추모연대회비 소계 7월잔액

50,000 323,000

50,000 20,000 40,000 100,000 330,000 540,000

50,000 20,000 100,000 170,000

300,000 50,000 20,000 10,000 380,000

50,000 20,000 23,000 93,000

200,000 50,000 20,000 460 270,460

50,000 20,300 70,300

입금 23,860,983 808,240

808,240 24,346,223 718,500

내 마음이 편해지는 길 cms 박성훈 권향숙 이동희 이민진 김용수 구혜영 박철민 조환준 김기수 최호식 델리후레쉬 고재영 박희성 강혜연 이남영 곽현희 신명철 정보영 이태경

718,500 24,524,723 668,460 203

김성희 박지훈 김현동 이주현 이상재 구은경 김학진 노병진 이영은 우유섭 조형준 자동이체 신성호 김산환 백기욱 정순호

668,663 25,023,386 788,420

김현숙 홍미숙 김형구 박응식 정원옥 김산환 강동길 고철주 황광우 원순재 서병훈 김태호 내창-안녕

788,420 25,431,806 728,460

728,460 26,067,266 668,460 3,211

추모연대 cms 이혁승 노민옥

여기에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보태주세요. 자동이체 및 후원 계좌입니다.

671,671 26,468,477 718,460

718,460 27,116,637

국민 0250 - 1036 - 8426 추모사업회 (정원옥)


l 찍은 날

2013년 8월 9일

l 펴낸 날

2012년 8월 12일

l 펴낸 이

강내희

l 펴낸 곳

이내창 기념사업회

l 연락처

사무국장 신성호 010-9033-1821

cafe.daum.net/19890815

김선주, 장순철, 조환준, 김경주, 이원근, 정원옥, 백기욱, 신성호, 김지훈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인터뷰를 선뜻 허락해주신 홍세화 · 강내희 두 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최호식이 표지 사진 게재 를 허락해 주었고, 제호와 마침로고는 김경주가 캘리그래피로 디 자인하였습니다. 강지우가 편집 디자인을 맡아 주었습니다. 인쇄 는 윤용희, 발송은 김기수가 수고하였습니다. '서원 추모기획'에 도움주신 유가족에게 깊은 감사드립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는 naechang.kr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온라인 소식지 관리는 박 형록이 담당합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원고를 보내 준 회원들 에게 감사드리며, 회원 자녀와 기념사업회 외부에서 원고를 주신 분들에게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페이스북 담벼락의 사진과 글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회원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소식지에 많 은 관심과 의견을 주신 운영위원 및 모든 회원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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