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창 기념사업회 2014 가을·겨울호
목차
004
006
014
여는 글
포토에세이
가로지르기
다른 방식으로 보기
사진으로 본 25년만의 해후
대한민국이 버린 사람들
김선주
노용헌
정석희
017
021
025
가로지르기
특집
특집
사무국장을 마치며
이내창, 25년만의 해후
이내창, 25년만의 해후
내창이형을 유골로 마주하던 순간을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잠시 우리 곁을 다녀간 형
내창이형, 잘 가, 편히 쉬세요
이주현
김선미
신기정
028
030
037
특집
특집
특집
이내창, 25년만의 해후
이내창, 25년만의 해후
이내창, 25년만의 해후
이내창 선배
여름방학 동안 밖에서만 살았어요 25년 만의 해후, 사람이 남다 <사진집단 현장>의 조현희를 만나다
강남규
조환준
이원근
046
058
069
어깨동무가 만나다
기획
기획
다시 세월호다
다시 세월호다
자연을 ‘꾸러미’하는 여인, 화가 장순복의 자연을 닮은 삶
세월호 참사 229일, 광화문 농성장 140일 -4월30일부터 11월30일까지-
4·16 이후의 내 삶
이원근
노용헌
고상현
그림_장순복
073
076
078
기획
째려보기
째려보기
지금 세월호를 바라보며 :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박성용의 클래식 이야기
<다이빙벨>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논란의 전말과 내막
신주욱
박성용
조종국
082
084
095
째려보기
생각하기
함께하기
다시 세월호다
세계의 과거사 청산 ①
영화 족구왕
과거사 미청산, 아물지 않는 상처
2014년 가을·겨울 과거청산 동정
노민옥
서병훈
신명철
098
100
102
함께하기
함께하기
나누고더하기
계절마다 바로바로
페북동정
2014년 사업보고 및 재정보고
백기욱
백기욱
이주현 김기수
여는 글
다른 방식으로 보기 편집장:
김선주
안녕. 새해 모두 건강하시길. 근데, 뭐 하나 질문이 있는데. 큰아이가 여자 친구 를 데리고 온다는데 어째야 하는지? 밥만 먹여서 보낼까? 아님 뭐, 선물이라도 들려 보내야 하나? 용돈을 줘? 빈손으로 가게 해도 괜찮나? 한때는 기념사업회 내 열렬 독서모임이었으나 서서히 책을 멀리하게 된 ‘무브온’ 친 구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굶주린 하이에나들이 사냥감을 놓칠 리 없다. 한시간 반 동안 쏟아진 폭풍 댓글. 의견에 따르면, 일단 내가 예쁘게 하고 있어야 한단다(내가 선을 보는 것이므로). 둘째 거창한 음식 만드느라 부산떨지 말란다(여자 친구가 가 시방석일 테니). 셋째 선물은 필요 없다는 것(개인 취향 있어서 주고서도 티 안 난다 고), 마지막 조언은 가볍게 생 까는 분위기, 다시 안 볼 수도 있다는 쿨한 마음가짐 을 가지라는 것(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번외 의견들이 많았으나(시댁 모드로 가 는 것 같다, 처자 입장에서 생각하자 등등),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머리만 더 복 잡해졌다. 그 날 오후, 큰아이가 여자 친구를 데려왔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만나자마자 살갑게 인사하는 아들의 그녀. 나는 허둥대며 “어서 들어오세요”라고 그녀를 맞는 다. 차를 준비하고 얌전히 과일을 깎는다, 내가. 가슴이 답답하다. 왜 이렇게 외롭 지? 지금. 끈덕지게 어깨동무
004
아들의 그녀를 본다. 부드럽고 민감하지만 건강해 보이는 피부. 무슨 말이든 다 접 수할 듯 영민하게 반짝이는 눈. 걷거나 여행하거나 책장 넘기기를 좋아할 것 같은 발 과 손, 편리하게 낮추거나 높일 수 있는 키,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매력적인 목소리, 계산에 집착하지 않을 것 같은 우아한 태도, 자기 의견을 주장하지만 섣불리 타인의 말을 비난하지 않을 것 같은 담담한 몸짓.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런 평범하지 않은 요소를 한 가지도 갖고 있지 않은 아이다. 나는 그 평범함에 안도하고 그녀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그녀가 각별해진다. 이제 새 로이 맞닥뜨린 아들과 그녀와 나의 관계. 이제 내가 살면서 세상을 바라봐온 방식 을 바꾸거나 수정할 때가 온 것은 아닌가 싶다. 조금만 달리 보면 너무도 명백한 것 들, 작심하고 못 본 척 회피하려고만 했다. 쓸쓸하지만 웃으며 받아들여야 할 일들 이 자꾸만 늘어난다. 모두 어떤 마음으로 2015년을 시작하고 있는지? 만나서 얘기 나누고 싶습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005
포토 에세이
내창이형과 함께 한 1박 2일, 그와 나눈 끝나지 않을 이야기들 글:
편집부
사진:
‘현장’(최호식, 임솔비, 조현희, 박주원 작업)
광주 망월묘역에서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형을 모셔오는 일은 유가족의 뜻을 존중한 결정이었 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형의 마음이 어떨지 끊임없이 살피면서 의례의 형식과 내용을 채워나가는 일 이기도 했다. 의문사 유가족들은 가해자가 밝혀진 사건이 단 한 건도 없다는 점에서 의문사는 아직 해 결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의문사 가운데는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지 못해 명예회복도, 보상도,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안장될 자격도 얻지 못한 사건들이 많다. 무엇보다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의 조성 과정에서 깊어진 유가족들의 갈등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형의 평소 성격이라면 이러한 상황에 서 남들보다 먼저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안장되는 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 족들과 선후배들 가까이로 오게 된 것은 기쁜 일이지만, 25년 동안 함께 했던 오월 영령들과 헤어지게 된 것을 형은 더 서운해 했을 수도 있다. 이렇듯 이장은 단순히 묘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형의 시선에 서 매 순간 생각하고, 질문하고, 답을 구해야 하는 지난한 대화의 과정이었다. 형에게 말을 걸고 형의 말 없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형을 만났던 시간, 내창이형과 나눈 이야기들을 글과 사진으로 담았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006
개묘. “놀라지 마요, 우리 곧 만날 거예요” 간이천막 위로 빗방울 듣는 소리가 요란하다 서울서부터 따라온 빗줄기다 형. 우리 곧 만날 거예요. 놀라지 마요. 자꾸자꾸 불러내고 잠들지 못하게 해 미안해요. 삽질 소리, 빗물 내음, 쏟아져 들어올 빛과 바람에 놀라지 마요. 천천히, 천천히 눈을 떠요.
이내창기념사업회
007
포토 에세이
형을 망월동에 묻던 날. 만장 숲 사이에서 쳐다보느라 얼마나 깊이 묻었는지 알지 못했다 사람 키만한 흙더미를 걷어내고 형이 썼던 안경이, 관을 덮었던 태극기가, 어느 여학우가 던져 넣었을 은반지가 세상에 나온 뒤 형이 나왔다. 예의 무덤덤한 표정, 생각에 잠긴 얼굴로 형이 누워 나왔다. 망월묘역을 떠날 즈음, 신기하게도 빗방울이 잦아들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008
추모제. “25년을 메운 하룻밤의 이야기” 흑석동 중대병원은 북적였다. 단지 하룻밤 우리 곁에 머무는 시간, 우리가 서로 만나는 하룻밤. 형의 뼈를 닦고 살아있는 몸의 순서대로 맞췄다. 종이에 싸고 천으로 묶었다.
그 자리는 지난해 원이 형이 누웠던 자리 국가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형과 사인진상규명 공동대책위의 위원장을 맡았던 원이 형,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두 사람과 그 둘을 만난 우리들. 밤새 인사와 추억이, 폭음과 노래와 다툼이 25년의 사이를 채우기 위해 분주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009
포토 에세이
노제. “형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묻다” 정든 학교, 나무를 깎고 돌을 쪼던 실기실, 학우를 만나러 다니던 진입로, 예술대와 총학생회. 사랑이 움텄던 조소학과. 형을 영원한 청년학생으로 만든 의혈중앙. 형은 왜 학교를 떠나 그때 머나먼 거문도로 간 것인가.
끈덕지게 어깨동무
010
안장. “그대들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지길” 나는 채 피지 못한 꽃이다. 다 살지 못한 몸이다. 몸으로 살아온 스물일곱, 흙에서 지낸 25년이 길지 않았다, 오래되지 않았다. 걱정마라 친구들, 단 하루도 지루한 적 없었다. 이곳은 따뜻하고 평온하구나 땅은 평평하고 하늘은 크다 가릴 것 없이 트여 볕 아래 누워있기 편하다.
이내창기념사업회
011
포토 에세이
그대들은 위태롭게 늙어가는구나. 캄캄한 바닷속 찬 기운이 오히려 그대들 산몸에서 느껴진다. 몸을 어서 구하라. 삼베 열 필에서 나를 꺼내고 나의 뼈를 세심하게 어루만져 어긋남이 없을 때 그대들의 사랑, 추억, 외로움, 삶이 다 손에서 전해졌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012
나는 여기 머물면서 해가 지고 그대들은 가고 해가 뜨지만 우리는 멀어지지 않기를. 또 오시게 친구들.
이내창기념사업회
013
대한민국이 버린 사람들 정석희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을 병든 다리 절어 절어 다리머리 들어오는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열아홉 꽃봉오리 피어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에서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 갈 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천석꾼 부잣집 막내딸 열아홉 처녀 박순례가 학살의 골짜기로 끌려가면서 자신의 애통한 심정을 노래로 표현한 <산동 애가>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014
이 노래는 학살의 현장에 있었던 군인과 경찰이 몰래 부르면서 전해져 불려진 노 래이지만 여순사건의 아픔을 노래한 <여수블루스>와 함께 불온한 노래로 취급돼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졌을 뿐 드러내놓고 부를 수 없었던 금지곡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 6월 여수 MBC에서 특집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면서 반세기 만에 가수 문선 영이 다시 불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여기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빨갱이 소탕 이라는 이름으로 이승만이 저지른 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애처로이 스러져간 한 희생자의 단장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60년 4월 혁명 후 전국유족회가 장면정부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는 114만 명(서울 2만 명, 경기 6만 명, 충남 3만 명, 충북 5만 명, 전남 21만 명, 전북 19만 명, 경남 25만 명, 경북 22만 명, 강원 3만 명, 제주 8 만 명)에 이른다. 이들 뒤에 남겨진 수백 만의 1세대 유족이 64년이 지난 지금은 천 만 명이 훨씬 넘는 희생자 유족의 울타리 속에 살고 있다. 1981년 3월 25일 연좌제가 폐지될 때까지 30여 년간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은 희 생자 유족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하여 철저한 신원관리와 사상검열 등으로 희 생자 유족들의 정상적인 사회 진입을 가로막는 부관참시를 서슴지 않았다. 유족들 은 그저 땅이나 파먹는 농투성이로, 남의 집 머슴살이나 식모살이로 우리 사회의 가 장 밑바닥을 전전하면서 찍소리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다. 멸족의 문턱에서 고아원에 맡겨진 유족들은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소리는 들었을망정 빨갱이 새끼 라는 손가락질만은 그래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엄혹한 독재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누가 대놓고 6 · 25적 얘기를 꺼낼 수 있으며 왜,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침묵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나 도 잘못 걸려들면 아버지처럼 어디론가 끌려가 개처럼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숨죽이며 60여 년을 살아왔다. 이들은 이미 대한민국 국 민이 아니었다. 주홍글씨처럼 빨갱이 자식으로 낙인 찍혀 평생을 비국민으로 살아 온 것이다. 법전에도 없는 “국가범죄”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여 책을 펴낸 건국대 이재승 교 수는 과거사 청산이 국가범죄 청산이자 민주주의 실천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며 법에 의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체포, 구금, 사형 등의 부당 한 처벌을 받을 수 없는 게 법의 원리다. 법에 의하지 아니하고 휘두른 초법적 국가 이내창기념사업회
015
가로 지르기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는 필연적으로 과거사 청산을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밖에 없 다고 말한다. 2005년 12월 1일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여 2010년 12월 31일 종료될 때까지 진실화해위원회가 6 · 25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군·경에 의해 학살된 보도연맹원, 부 역혐의자, 예비검속자, 형무소재소자 및 미군폭격에 의한 피해자 등 이른바 한국전 쟁 민간인 집단희생 진실 규명자는 9,698명에 불과했다. 백만이 넘는 희생자 수에 비하면 1%도 채 미치지 못하는 아주 미미한 결과이다. 이들에게마저 사법부는 국가 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서를 참고자료 정도로 폄하하거나 소멸시효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여 소송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등 형평성을 잃은 들쭉날쭉한 판결로 오히려 이중의 고통을 안겨 주고 있다. 이러한 소송에 따른 비효율성과 불합 리성을 막기 위해서라도 특별법을 제정하여 아직 신청조차 하지 못한 99%의 미신 청 희생자에 대한 포괄적 해결 방안을 세워야 할 것이다.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 잡는 일은 어느 정권이나 어느 정파의 이해관계를 뛰어넘 어 민족대화합의 차원에서 결자해지하여야 한다. 이는 오로지 대한민국 국민의 생 명과 인권을 책임지고 있는 민주공화국의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박근혜 정부는 더 늦기 전에 이명박 정부가 내동댕이친 진실화해 기본법을 다시 꺼 내 손질하고 보완하여 실질적인 화해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정석희님은 한국전쟁유족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016
내창이형을 유골로 마주하던 순간을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사무국장:
이주현
“내창이를 보낸 후 단 하루도 행복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입니다. 형을 생각 하면 이 말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제가 매년 8월 15일이면 망월동으로 향했던 이 유이기도 합니다. 2014년은 내창이형 25주기이면서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의 이장이 예정 되어 있었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기로 할 때 생각이 많았 습니다. 일상적으로 고민을 해야 하고 업무가 많은 자리가 아님에도 ‘이내창’이라는 이름이 주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열사 이내창’의 의미에 걸맞게 정성을 쏟을 수 있을지에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혹 이장하는 과정에서 소홀하여 유가족에게 예를 다하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손 하나 보탠다는 심정으로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고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기념사업회는 예년과 달리 이장을 하기 위한 이장추진위원회 체계로 운영되었습 니다. 4월 예정이었던 합동안장식이 취소되고, 기일인 8월 15일에 이장을 한 것이 1 년 동안 진행한 유일한 사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행위원장을 맡은 신명철 선배와 간사를 맡은 이원근 선배를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실행위원에 참여하여 수 고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라는 사업을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내창 이형의 정신을 잇고 있는 재학생 후배들을 후원하는 사업입니다. 이 사업을 통해 <자유인문캠프>와 <사진집단 현장>의 후배들을 만났던 것이 가장 보람 있고 즐 거웠습니다. 특히 안성교정의 경우, 대부분의 운동 동아리가 사라진 상황에서 예술 대의 <진군나팔>과 <현장>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운동의 길을 즐겁게 가는 후배들의 모습은 선후배 관계를 떠나 저의 생활을 돌아보는 계기 가 되었습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017
가로 지르기
회의를 위해 서울과 안성을 오갔던 시간, ‘25년만의 해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역할을 나누고 노력했던 실행위원, 흑석동과 이천에서 치른 두 번의 추도식을 풍성하게 꾸미기 위해 돈과 재능을 기꺼이 내놓았던 안성 동문들, 휴가철임에도 불 구하고 내창이형을 만나기 위해 찾아와주었던 흑석 동문들을 만났던 기억은 2014 년의 가장 의미 있는 추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내창이 형은 서울에서 1시간 정도, 제가 사는 안성에서는 30여 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이장 후 처음으로 형을 만나고 왔습니다. 8 월 15일 덮었던 잔디가 자리를 잡았고, 각종 조형물과 현대적인 건축물도 화려합니 다. 주위에 44위의 열사들이 모셔져 있어 적적함 또한 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 람이 다녀간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곳이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인 지 알 길이 없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을 민주주의 역사의 체험·교육장으로 만 들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져야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우리 를 비롯하여 기념·추모단체의 새로운 과제로 여겨집니다. 내창이형의 이장을 무사히 마친 후, 어머니의 말씀만큼이나 강렬한 기억 하나를 갖게 되었습니다. 망월동에서 내창이형을 유골로 다시 마주하던 순간의 먹먹함입니 다. 이 두 기억을 가끔은 떠올리면서 살도록 하겠습니다. 동문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이주현_1989년 안성 교정 경영학과에 입학하였다. 2014년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안성의 시민단체 <소통과 연 대>의 대표이자, 정의당 당원으로 활동 중이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018
망한 새해사진 콘테스트 시초는 조환준이었다. 새해 새아침에 걸맞는 흥겨운 분위기를 자 아내보자고 한 것은. <2015 어깨동무 새-해 사진 콘테스트>는 그렇게 오카리나를 입에 물고 태동했다. 그러나 없어도 너무 없 었다. 응모한 이는 고작 4명. 그들도 모두 어깨동무 편집부였다. 신혼의 단꿈을 등짐 진 설악산 호랑이도, 20년 전 흑백 염가사진 대방출도 별 무소용이었다. 그리하여 야심차게 시작한 새해 이벤 트는 소리 소문 없이 사그라들었으니, 여기 ‘망한 새해 콘테스트’ 란 이름으로 응모작들을 싣는다. <편집자주>
▲ 2015년을 맞으며 2014년 12월 31일,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안에서 추위를 녹이는 장성백 가족과 노용헌, 정원옥. 그들은 그렇게 노숙하며 새해를 맞았다.
▲ 94년, 여주 준하네(불나기 전) 집 마당에서 캠프파이어를. 다들 젊다. 온몸으로 거부하는 무늬를 힘겹게 안은 이는, 故 서원이다.
▲ 백기욱 이차연이 2014년 가족과 함께 한 여행지 3월 제주 곽지 일몰 : 프랑스 사는 동 생네와 함께 봄 제주여행 9월 추석 남도여행 : 곡성 섬진강변 두가헌 한옥숙소에서
▲ 2015년 1월 2일, 설악산 밑에서. 황선태·김경주와 딸 소윤의 가족여 행. 일명 그림자 사진, 제목은 “황가 네 만쇠”. ◀ 94년, 여주 준하네(불나기 전) 집 김원주·장순복의 아들 준하, 신명철· 김선주의 큰아들 진혁, 김성수·최인숙 의 아들 무늬가 일렬로 하나둘셋.
이내창기념사업회
019
▲ 1989년 정순호가 동아리연합회 회장에 출마했다. 중앙극회 소품인 양복 윗도리를 빌려 입고 음대가는 길에서 장성백이 툴툴 대며 찍었다. 이날 사진이 잘 나와서일까.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
잠시 우리 곁을 다녀간 형 김선미
형! 살아서는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데, 벌써 25년 째 ‘내창이형!’이라 부 르고 있네요. 저는 생전 한 번도 형과 사적인 이야기 한 마디 해본 적이 없어요. 형이 총학생회장에 출마했을 때도 주변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만 믿고, 그냥 인상이 좋아서 한 표를 주었을 뿐이에요. 아, 검은 색 두루마기를 입 고 강의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선거운동을 하던 형이, 예술대 로비로 가는 길목에서 재잘거리고 있던 저와 친구들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 한 적은 있어요.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였어요. 아마도 형을 가장 가 까이서 본 유일한 기억 같아요. 단지 그뿐이에요. 그런데 25년이나 형의 이름을 부르다보니 어느새 진짜 피붙이 같이 느 껴져요. 여전히 형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사람들과도 미우나 고우나 너무 정이 들어버렸어요. 그동안 우리에겐 세상에 없던 아 이들이 태어났고, 해마다 8월 15일이면 영문도 모르고 광주 망월동으로 ‘ 내창이 삼촌’을 만나러 가던 2세들도 어느덧 청년으로 자랐어요. 25년이 란 그런 시간이네요. 저는 스무 살이 되던 그 해 여름을 잊을 수가 없어요. 1989년 8월 15일, 역사상 가장 뜨거운 여름날이었죠. 오후 2시 22분, 전대협 대표 임수경 과 정의구현사제단의 문규현 신부님이 판문점을 통과해 북에서 남으로 군 사분계선을 넘어 돌아온 바로 그 날. 공안정국이라 불리던 시절, 학교 안 팎은 통일운동의 열기로 뜨거웠던 때죠. 하지만 저는 한 발짝 떨어져 구경 만 하던 평범한 대학 2학년생이었어요. 그날도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걸 아쉬워하며 고등학교 친구들과 고향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어요. 개학을 이내창기념사업회
021
특집
하면 뿔뿔이 각자의 학교로 돌아가 한 동안 만나지 못할 친구들과 ‘사랑 의 불시착’ 같은 유행가가 흘러나왔을 독일식 호프집에서 생맥주 잔을 치 켜들고 있었지요. 그런데 조금 늦게 도착한 친구가 테이블 앞에 앉기가 무 섭게 말하는 거예요. “야, 너희 학교 총학생회장 아는 사람이야?” “잘 몰라. 그냥 예술대학 선배지 뭐. 왜?” “그 사람 죽었대. 방금 뉴스에 나왔어.” 그래요. 형이 저녁 6시 30분 여수 거문도 유림해수욕장 인근 바닷가에 서 ‘의문의 변사체’라는 이름으로 발견되면서 온통 뉴스를 도배하던 그 순 간이에요. 대체 무슨 일일까. 섬뜩했어요. 그때까지 내가 알던 사람이 죽 었다는 소식을 가까이서 들어본 적이 없던, 그렇게 어린 나이였어요. 공중 전화 부스로 달려갔어요. 학교 소식을 알만한 친구와 선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아무도 연락이 닿는 사람이 없었어요. 기분이 이상해서 일찍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다음날 무작정 학교로 갔죠. 도대체 전화를 받는 친구들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거든요. 문창과 사무실도 텅 비었고, 족구를 하거나 장구 치는 사람들로 늘 떠들썩하던 소설세미나실 앞 잔디 밭도, 방학 때도 작업하는 학생들로 북적이던 예술대학 건물이 썰렁했어 요. 그러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는데, 낯익은 얼굴 이 보였어요. 얼굴만 알고 지내던, 총학생회에서 일하던 선배님이셨어요. “어쩐 일이니?” “그냥 뉴스보고 궁금해서 학교에 왔는데 과에 사람이 없네요.” “다 여수로 갔을 거야. 너 바쁘지 않으면 이것 좀 도와줄래?” “네? …… 그러죠 뭐.” 그렇게 난생 처음 대자보라는 것을 쓰게 되었어요. 총학생회장이 변사 체로 발견된 사실을 학우들에게 알리는 속보, 사고 전후 형을 본 목격자 들을 찾는 호소문, 그리고 이어지는 사인진상규명 투쟁에 대해 선배들이 쓴 대자보를 베껴 쓰고, 질긴 청테이프를 뜯어 교정 곳곳에 잘 보이는 벽 마다 붙이고 다녔어요. 그런 일을 어떻게 마다할 수 있었겠어요. 당시 형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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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여수로 달려간 학생들만 3백여 명이었고, 이후 10 월 6일 전대협장으로 망월동 5·18묘역에 형을 안장하기까지 진상규명 싸 움 과정에서 수많은 친구와 선배들이 구속되고 연행되고 부상을 당한 걸 요. 겁이 많은 저는 그저 수많은 무리 속에 숨어 팔이 빠져라 대자보를 쓰 는 것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지요. 정말 무서웠어요. 무고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죽어가는 일 은 영화나 뉴스에서나 보았는데, 내가 이름과 얼굴을 아는 사람도 희생자 가 될 수 있는 세상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어요. 그러니 형을 아끼고 사랑하던 가족과 친구들의 슬픔과 분노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겠지요. 애 절한 사랑을 시로 쓰고 싶어서 대학에 입학했는데, 한동안은 원고지 대신 대자보와 플래카드 그리고 만장 위에 날이 선 글자들만 쓰게 될 줄이야. 형은 그렇게, 저와 친구와 선후배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어요. 우리는 25년 전 망월동에 형을 묻으면서 눈물범벅인 채로 이를 악물며 얼마나 많은 다짐들을 했을까. 그 중에 얼마나 이루었을까. ‘의문사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수용하도록 유가족들과 함께 싸웠고, 결국 국가기구에 의한 조사 가 이루어졌어요. 하지만 형의 ‘사망과 민주화운동 관련성은 사실로 인정 되나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적인 행사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진 상규명불능’ 판정이 내려졌지요. 그리고 지난 8월 15일, 유가족들의 뜻에 따라 형을 25년 만에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모시게 되었어요. 큰 형님이신 내석이형님도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셨잖아요. 줄곧 시동생 제 사상을 차리시던 형수님은 또 어떻고요. 형이 가족들 가까이 온다니 연 로한 어르신들 마음이라도 편안한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 졌어요. 하지만 25년 만에 무거운 봉분을 걷어내고 형을 다시 만난다고 하니, 다 들 생각이 복잡했던 것 같아요. 형의 육신은 무덤 밖 햇살과 바람과 조우 하는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인생에서 지난 25년이란 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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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간과 마주했어요. 형의 이장을 마치기까지 힘들었던 사람들도 많았을 거예요. 그만 외면하고 잊어보려고도 했던 일들까지 또렷이 살아났을 테 니까요. 형을 덮었던 태극기, 관 위에 올려놓았던 뿔테 안경, 누군가 던져 넣은 반지까지 고스란히 흙 속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들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 들도 그렇게 되살아났지요. 그래서 우리 슬픔을 고스란히 품고 다독여주 었던 광주와 망월동의 품이 얼마나 고마웠는지도 새삼 깨달았어요. 우리는 망월동의 그 자리를 잊지 못할 거예요. 아마도 형이 떠난 뒤에 도 계속 그 곳으로 찾아올 사람도 많을 거예요. 유골이 다른 곳으로 옮겨 진다고 해도 형의 피와 살이 스며든 땅이니까요. 그곳에서 해마다 새싹이 돋아나고 무덤가에 그늘을 드리우던 배롱나무도 변함없이 꽃을 피우겠지 요. 형과 영혼의형제를 맺은 철규형이 거기 있고, 형을 만나러 갈 때마다 담배 한 개비, 술 한 잔씩 바치던 김남주 선생님도 여전히 있으니까요. 무 엇보다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남몰래 형의 무덤가를 찾아가, 방명록에 깨 알 같은 편지를 쓰며 마음을 달래던 우리들의 지난 청춘이 거기 그대로 있 으니까요. 그래서 25년 동안 형이 누웠던 그 자리에, 우리의 추억도 고스 란히 빈 관에 채워 묻고 왔어요. 우리 마음을 아는지 그날 망월동엔 추적 추적 비가 내렸어요. 형, 어느새 우리들 머리도 희끗희끗해진 거 보셨지요. 형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던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지 오래고, 작년엔 사인진상규명대책위 학생대표를 맡았던 사진과 서원 형도 세상을 떠났어 요. 올 초에는 제게 처음 대자보를 쓰게 했던 영화과 이장길 형도 하늘로 갔어요. 이미 모두 만나셨나요? 어느덧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 떠나는 게 남의 일이 아닌 나이가 되었어요. 우리도 그렇게 하나 둘 늙고 병들어 자연스럽게 소멸해가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죽음에 대해 무지하고 두려워요. 그래도 죽어서도 계속 우리 곁에 살아 있는 형을 보면서, 죽음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힘이 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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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까 생각했어요. 죽음이 있어야 삶도 유의미하다는 데 고개를 끄덕이면 서 말이죠. 망월동에서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형이 잠시 우리 곁을 다녀간 동안, 형을 그리워하던 많은 사람들이 다시 만났어요. 그새 서로 이름도 학번도 잊어버린 사람도 많았지만,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좋다고 했나요. 그냥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어요. 다들 아직 살아 있어줘 서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우리는 그렇게 악수하고, 끌어안고, 술잔 도 기울이면서…… 형을 통해 뜨겁던 청춘의 한 시절과 만났어요. 고마워요, 형. 우리 참 질기게 하나로 이어져온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 럴 거예요. 그날 새로 가슴에 쓴 이야기는 굳이 여기에 하지 않겠어요. 그냥 지금은 서로에게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싶어요.
김선미_1988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월간 <MOUNTAIN> 기자로 오랫동안 일했다. 현재는 살림 하며 글을 쓴다.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살림의 밥상』, 『좁쌀 하나라도 우주가 담겨 있단다』,『소로우의 탐하 지 않는 삶』,『산이 아이들을 살린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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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내창이형, 잘 가, 편히 쉬세요 신기정
89년 8월 새벽, 총학생회실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내창형이 거문도에 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준 사람 이 누구인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도 아는 사람 으로 추정은 되는데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봅니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어서 한동안 멍하기만 했습니다. 시간이 일 분, 이 분 그리고 한 시간 두 시간 지나기 시작하면서 이게 현실이든 꿈속이든 생 각할 겨를도 없이 뭔가를 해야 했고 많은 선배, 동료, 후배들이 거문도로 내려갔습니다. 형이 왜 죽어야 했는지 우리 의혈 학우들은 형의 이동경로 를 따라 주변 식당 및 모든 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하고 샅 샅이 알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형은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으로 조용히 서울 에 있는 우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형이 왜 죽어야 했는지 싸웠 고 또 싸우고 지금까지 싸우고 있습니다.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는 유능한 수사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확한 이동경로, 사고가 일어난 매우 한정 된 공간과 꽤나 분명한 시간,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다수의 목격자들 등 이러한 조건이면 비전문가인 나에게도 ‘수사권이 있으면 어 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러나 너무도 명백해 보이는 일들이 얼마 나 쉽게 감춰지고 왜곡되는지 우리는 지금도 늘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전 히 변한 것이 없는 현실이 저의 그러한 상상이 부질없음을 일깨워줍니다. 형, 내창이 형! 10월에 광주에서 형을 묻고 25년이 지난 지금 다시 형을 우리 곁으로 모 셔왔습니다. 좀 더 가까운 곳으로 형을 모시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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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친근해지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형을 떠올리면 말하기 어려운 뭔가 혼란스럽고 힘겨움을 느꼈 는데요...... 그 느낌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아서 더 그랬나 봐요. 왜 형이 하루아침에 우리 곁을 떠나야 했는지, 아니 왜 우리 곁에서 누군 가 형을 앗아가 버렸는지? 형이 떠나야 했던 이유를 밝히지 못한 분함과 무기력함이 얼마나 저를 억눌렀는지? 25년 전 형을 떠나 보내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저는 그런 생각으로 지내 왔습니다. 그래서 형과의 이별을 마음으로 안타까워하고 슬퍼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형 이름을 계속 부르고 싶습니다. 내창이형, 내창 이형! 형이 우리 곁을 떠난 후 어쩌면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 꼭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내창이형, 잘가! 내창이형, 편히 쉬세요. 그리고 지금부터는 더 편안한 마음으로 형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차피 형은 이승에서 우리의 이별 이 어떤 이유 때문인지 분명히 알고 있을 테니까요.
신기정_1986년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으며, 1989년 흑석 교정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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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이내창 선배 강남규 이내창 열사의 이장행사에 참여한 후 재학생 강남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본인의 동의를 구해 싣는다.(편집자)
이내창 선배 (1) 열사 선배들이 자랑스러웠다. 4·19 때 여섯 열사, 그리고 이내창 열사를 후배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하곤 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라고, 이들의 희생 위에 우리가 서 있는 거라고. 그런데 오 늘 이후로는 열사를 마냥 자랑스러워만 했던 태도를 버려야겠다. 아침 일찍 광주 망월동에 내려가 이내창 선배의 이장 작업을 지켜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관은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인부들이 한참을 파낸 뒤에 야 관의 표면이 나왔다. 뚜껑 위에는 선배가 생전에 썼던 뿔테안경이 온전 하게 놓여 있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선배들이 빗물에 뿔테안경의 흙을 씻겨내는 걸 가만 히 지켜봤다. 그리움과 반가움이 반반 섞인 표정이었다. 안경을 어루만지 며 이내창 선배와의 기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관을 열고 수의를 열어 유골이 드러나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내 창 선배의 큰형님과 사업회 선배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큰형님은 “내 창아 미안하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그들은 울 음을 멈췄다. 아, 그들에겐 이내창이 동생이고 형이었다.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수 업을 듣고 운동하고 노래하고 춤췄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저 자랑스러워 만 했는데, 그들은 이내창 선배를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있었다. “민주주 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선배들”이라고 후배들에게 소개했던 내가 한 없이 부끄러웠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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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라는 그 선배들도 살고 싶었을 거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가족 연 인과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었을 거다. 그런데 내가 멋대로 그들의 죽음을 ‘희생’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모르겠다. 이내창 선배 (2) 그렇다고 ‘열사’라고 부르지 말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들은 분명 열사라 고 대답하고 싶다. 이내창기념사업회 소식지 이름이 왜 그들이 열사인지를 충분히 보여준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끈덕지게, 정말 생각도 못했던 단어 아닌가? 오늘도 선배들은 ‘끈덕지게’ 어깨를 걸었다. 광주 개묘식에는 40명 가까이 되는 이 내창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참석했고, 저녁 추도식에는 어림잡아 2~300명은 온 것 같다. 이내창 선배가 죽은 지 25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이들을 아직까지도 모이게 만든 건 단연 열사의 힘이다. 이들 대부분은 아직도 사 회운동에 이바지하고 있거나, 전념하진 못해도 매번 힘을 보태려 노력하고 있는 사 람들이다. 김성희 선배가 쓴 ‘이내창의 삶과 죽음’이라는 글의 일부를 인용한다. “그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 두려움, 분노……, 그 일을 외면한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 갈 수는 없게 만드는 가책, 이런 복잡한 마음 때문에 우리들은 예외 없이 참 힘겨웠 다. 그렇게 25년이 지났다.” 열사는 선배들을 끈덕지게 어깨 걸게 했고, 그 선배들이 끈덕지게 다져놓은 토양 위에 내 선배들이 섰고 내가 서 있으며 내 후배들이 설 것이다. 열사를 기억하고 기 념해야 하는 이유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강남규_2009년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으며, 현재 ‘자유인문캠프 기획단 잠수함 토끼들’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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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 동안 밖에서만 살았어요 -<사진집단 현장>의 조현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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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로 은행나무엔 가지만 앙상히 남아 있었다. 드문드 문 노란 잎이 가을이 쉽게 감을 아쉬워하듯 바람에 떨 고 있을 뿐. 몇 해 만인가. 이렇게 호젓하게 이 길을 걸 어 올라감은 아마도 졸업 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기숙 사와 대식당으로 향하는 길의 가로수도 더 커졌다. 수상 무대 연못엔 아기거위 몇 놈이 엄마를 쫓아 유유히 떠다 니고 있었다. 이제는 자기 집이니 넘보지 말라는 듯 꽉 꽉 울어댄다. 늦었다. 반가움과 설레는 마음을 안고 내리 쪽으로 발길 을 재촉했다. 겨울로 넘어가는 구비에 사진과 재학생 후 배들이 내창이형의 이장과 25주기 추모 행사 사진전을 열었다고 하니 얼마나 고맙고 기특한 일인가. 학교 다닐 때 없었던 건물이다. 예술대 무용과 뒤편에 신축 건물이 하나 들어섰고, 그 건물에서 내리 쪽으로 향하는 입구에 소박한 전시장이 있었다. 누가 봐도 학생 들의 발길이 많을 법한 곳. 작지만 준비한 이의 정성이 묻어나는 느낌이다. 사진은 익히 봐왔던 터. 일행과 후 배들이 기다리고 있을 뒤풀이 장소로 갔다. 청춘 특유의 풋내가 묻어나는 얼굴들. 그들과 마주 앉 아 잔을 나눈다. 인터뷰를 하기로 했던 사진학과 동아 리 <현장> 회장 조현희는 예술대 학생회 선거 출마 관 계로 늦게 왔다. 바쁜 와중에 짧게 나눈 대화와 나중에 전화로 나눈 대화를 정리하여 인터뷰 원고를 게재한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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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환준
특집
어쩌다 사진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나
을 하는데, 그걸 그냥 작업이라 해요.
고2때 까지는 취미로 사진을 찍었어요.
저 1학년 때는 경남 함양군 문정댐 건
시간이 지나도 과거를 회상할 수 있게
설 반대 현장에 갔었어요. 댐을 건설하
그 순간을 기록할 수 있어서 사진을 좋
게 되면 그 곳에 몇 개 지역이 수몰되고,
아했는데, 고3때부터 사진학과에 입학
거주하던 주민들도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기 위해서 공부를 시작했죠. 필름 카
해야 하는데, 정부에서 국가사업이라는
메라에 대해서도 따로 공부하고.
이유로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식 사업을 하다
<현장>에 가입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보니 함양군민들과 지역 주민들의 반발
고3때 공부하고 있는데, 사진학과 인터
을 불러일으켰거든요.
넷 카페에 어떤 <현장> 선배님이 글을 올리셨어요. 강원도 어떤 지역에, 눈이
20명 정도가 3주 동안 머물면서 촬영하
되게 많이 오는 곳이었는데 그곳에 방중
고 평가회 하고 했는데, 그 때 사실 선
작업하러 가신다고 해서 저도 따라가려
배들한테 많이 깨지면서 배웠어요. 그
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죠. 대학생이 되
전까지 다큐사진에 대해서 잘 몰랐거든
고 난 뒤면 모르겠는데, 아직 너는 안 된
요. 관심만 많았지. 그런데, 처음 방중
다고 하면서 반대하셨어요. 그래서 저
작업 가서 나름대로 열심히 찍긴 찍었
는 학교 입학하자마자 <현장>에 가입
는데, 선배들 눈에는 어떤 어떤 결함들
했어요.
이 다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평가할 때 는 정말 눈물이 쏙 빠지도록 깨졌다니
‘작업’이라 하면
까요. 근데 그게 정말로 큰 공부가 되
주로 방학을 이용해서 열흘이나 2주일
었어요.
정도 사회적 이슈가 되는 지역을 가서 사진을 찍고 서로 조언하고 비판하는 일
지금 3학년인데, 그런 방중 작업으로 어디 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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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갔었나
이번 여름에는 농활도 다녀왔다던데
작년(2013년)에 삼척 갔고, 올해 밀양
농활은 매년 가요. 올해는 문창과 <진
갔었어요. 삼척은 핵발전소 유치 건으
군나팔>하고 안성으로 갔는데, 예년 같
로 문제가 되었는데, 거기서는 뭐랄까
으면 총학생회가 주관해서 가는데, 올
약간 실망감 같은 게 들었어요. 자기 지
해는 우리가 총학을 뺏긴 상태였잖아
역에 대한 애착이 있는 주민들이라 예상
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진군나팔>하
했는데, 우선 주민들이 좀 부유한 편이
고 <현장>이 자체 회비 걷어서 안성으
었고, 심지어 보상금을 노리고 고의로
로 농활 간 거죠. 재미있었어요. 올해는
주소지를 변경해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
밭일을 많이 했는데, 양파밭하고 마늘
들도 있었으니까요.
밭에서 주로 일했어요. 7월 초에 농활 7 박 8일 하고, 바로 밀양으로 가서 3주간
저희가 작업 가기 전에 사전 답사를 하
작업하고, 이어서 이내창 열사 이장 행
거든요. 평창으로 할까 밀양으로 할까
사에 결합했으니까 뭐 여름방학 동안은
고심하다가 밀양으로 결정했는데, 평창
거의 밖에서 산 거죠(웃음). 아, 나중에
은 동계올림픽 개최한다고 주변 가리왕
밀양에 또 갔어요. 할머니들 보고 싶기
산을 밀어버렸잖아요. 밀양에서는 할머
도 하고 남은 작업도 좀 있어서, 하하.
니들하고 참 정이 많이 들었어요. 밤에 도 자다가 갑자기 뛰어나가는 일이 다반
내창이형 이장 행사에 참여한 소회는 어떤가
사였으니까요. 새벽에도 레미콘 차량이
저는 광주에서 개묘할 때부터 쭉 결합
올라와서 공사를 강행하는 거예요. 나
했거든요. 근데, 놀란 게 돌아가신 지
중에 작업 끝내고 할머니들이 헌법재판
오래 되었잖아요. 25년이면. 근데도 한
소에 올 때도 있었는데, 그 때마다 저희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애도하고 그
에게 전화하셔서 저희가 당일치기로 일
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대
도 도와드리고 했어요.
해 너무 놀랐어요. 서울 장례식장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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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그렇고,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도
대로 이어지는구나. 그 많은 징검다리들을 누가
선배님들이 많이 오셨잖아요. 그래서
다 놔주었을까.
선배님들 많이 뵐 수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그랬죠.
기억에 남는 선배가 있나
작년도 <현장> 회장이었던 임솔비 선 혹 정서적으로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었을 텐데
배님이요. <현장> 총회 때 이내창 열
아뇨. 저는 특별히 어려운 점 없었어요.
사에 대해서 강의식으로 교양을 해주었
1학년 때 농활 갔을 때였는데, 선배님
어요. 그리고 김영식 선배님하고 문창
들이 교양시간에 이내창 열사에 대한 얘
과 전유상 선배님 등 많아요.
기를 많이 해주었어요. 정치적 의문사 이고, 지금도 사건은 해결되지 못했고,
장례식장에선 열사의 유골을 염하는 장면을
열사의 생전 활동 등에 대해서. 그리고
촬영하였는데
<진군나팔> 동아리방에 가면 지금도 이내창 열사 영정 사진이 있고, 열사에 대한 책자와 자료집도 되게 많아요. 거 뭐죠? 아 갑자기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저 그 때 뭐랄까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촬영하면서 그 전에 구타당한 흔적이 있 는 사진들이 계속 오버랩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소중한 분이, 정말 꼭
데, 두꺼운 표지 책자였는데.
살아계셔야 하는 분이 돌아가셨다는 사
1999년 10주기 때 만든 백서 『의문의 죽음, 그리
요. 생전에 열사가 총학생회장이 되어
고 10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일부러 책 표지를
서 임기 동안 8천 학우를 세 번씩 만나보
‘하드커버’로 결정했던 기억이 난다. 어디를 굴러
겠다고. 그런데 지금 총학생회장은 우
다니더라도 쉽게 훼손당하지 말 것을 염두에 두고 서 말이다. 순간 뜨거운 기운이 가슴 밑에서 달아 올랐다. 이렇게 내창이형은 한 세대에서 또 한 세
실에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랬잖아
리에게 코빼기도 안 보이고 하는데, 이 런 현실이 너무 싫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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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는데
들이 쉽게 알아채더라는 거예요. 상대
이번 여름 농활에 같이 갔던 박경섭(문
후보를 두고 학생들이 “쟤네는 학교 측
창과 12학번)과 같이 출마했는데, 투
에서 미는 애들이다, 쟤네는 안 되고 기
표 바로 전날 밤 11시에 선관위에서 납
호 2번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언제
득할 수 없는 이유로 경고를 세 번 연달
부터인가 학우들 사이에 쫙 퍼져 있고,
아 주면서 후보자 자격을 박탈하는 거예
내리 음식점 사장님들도 다 알고 있더
요. 저희가 선관위에 이의제기하고 학
라니까요.
생지원처에 선거지도위원회 회의개최 등을 요구하였지만, 결국 상대 후보가
이른바 대세가 굳어졌다는 분위기. 다급해진 학교
당선이 되었죠.
측에서 편법을 동원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선거 기간 동안 동아리 지원금에 대해 말들이 많았어요. 상대 후보 측에서는 예술대 동아리를 중앙동아리로 편성하 여 동아리 지원금을 없애겠다는 것을 공 약으로 들고 나왔어요. 그런데, 예술대 동아리는 단과대 특성상 전공 연계성 이 많은 동아리예요. 대표적으로 저희 <현장>과 <진군나팔> 등이 있는데, 비단 저희 동아리 회원이 아니더라도 예 술대 학생들에게 이런 공약은 오히려 반 발감만 불러일으켰죠.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학교 측의 플랜이라는 것을 학우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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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대목이다. 과거 한때 학생회 선거 ‘꾼’으로서 한 수 조언을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곧 이어 그 속내가 경솔했음을 알 수 있었다.
예술대 단과대 교지 <중앙예술>을 복 간할 계획이예요. 언제부터인지 교지 발간이 중단되었는데, 이걸 복간해서 학우들의 목소리를 담으려고요. 그리고 학생회는 반드시 되찾을 겁니다. 하하. 실로 오랜만에 듣는 청춘의 싱그러운 웃음소리. 이미 그와 또래들은 충분히 홀로설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내창이형은 또 누 군가에 부단히 이야기될 것이다.
특집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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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경과보고
25년 만의 해후, 사람이 남다 정리_이원근 이장위원회 간사
천천히 곱씹어 보았습니다. 되뇔 때마다 말에서 흙내가 났습니다. 지난 해 12월 어느 날의 이야기입 니다. 묘를 파고 형을 꺼낸다. 25년 만이다. 봉분을 헐고 형의 몸과 마주한다. 25년간의 세월을 들춰내 고 진실을 목도한다……. 단순히 묘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형이 25년 만에 우리 곁에 다녀간다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25년만의 해후’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장입니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이하 민보위)가 ‘민주화운 동관련자’들에 대한 심의를 마친 후 그 후속조치로 경기도 이천에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여 묘 역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129위의 민주열사를 한 곳에 안장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안에 내창이형이 들 어 있습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는 지난 1월 18일 열린 기념사업회 신년총회에서 이를 준비하기 위한 ‘(가칭)이내창 열사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이장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실행위원장으로 신명철 선배를 모셨 습니다. 그리고 김성희, 원순재, 서병훈, 조환준, 이주현 등 20여 명으로 실무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먼저 이장 시기를 4월 3일부터 5일까지로 정하고, 4월 3일 광주 망월묘역에서 개묘하여, 4일 흑석교 정에서 추모식을 가진 다음, 5일 안성교정을 들러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안장한다는 계획을 세웠 습니다. 4월 5일 이장에는 내창이형뿐만 아니라 먼저 민보위에 이장 신청을 한 여러 분의 민주열사와 함 께 이장을 해야 하는 사정이 있었기에, 관련 추모사업회와 유족들과 상의하여 합동안장식을 거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가 실무의 총대를 맸습니다. 기나긴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유가협의 어르신을 일일이 찾아뵙고 양해를 구하는 일부터 하 였습니다. 망월묘역을 떠나는 것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부터 굳이 이내창이 앞장서서 가야겠냐는 타박 까지 묵묵히 받아내었습니다. 학교 측과는 이장일정과 비용 문제, 재학생 참여 및 여러 행사문제를, 민 보위와는 묘역 조성, 합동안장식 관련 제반 실무를 다각도로 협의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장일 전 1주일을 추모기간으로 선포하고, 흑석과 안성의 재학생들과 연계하여 각 교정 에서 사진전을 열고, “국가폭력과 인권”을 주제로 한 강연회도 마련하고 전문가를 섭외하였습니다. 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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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과정에서 학교 측과는 ‘국가폭력’을 다른 단어로 바꿔달라는 요청과 홍보용 포스터 등을 게시할 때 학생 처의 승인 도장을 받으라는 등 시대착오적 요구가 몇 가지 있었으나 이용구 총장과의 면담과정에서 총장 께서 이장 추진위원회의 명예위원장을 맡기로 하면서 제반 문제가 원활히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났습니다. 당초 합동안장식에서 묘역 조성과 실무 편의 정도만 지 원하겠다던 민보위가 돌연 합동안장식에서 ‘민주열사’ 칭호를 쓰지 말라는 방침을 내세우고 안장식 자 체를 훼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유족들과 추모사업회가 반발하였고 논의 끝에 안장 자체를 거부 하게 됩니다. 결국 합동안장식은 무산되었고, 이장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당초 계획한 4월 3~5일 흑석교정, 안성교정 사진전과 강연회는 예정대로 진행하였고, 4월 4일 조촐하게나마 150 여 명의 동문, 재학생이 모여 보고대회도 가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4월 16일 세월호가 가라앉았고 3백 여 명의 무고한 생명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이장위원회는 유족과 상의 끝에 8월 15일, 내창이형의 25주기 기일에 맞춰 이장하기로 결정하였습니 다. 8월 14일 흑석동 중앙대병원 영안실은 300여 명의 동문, 재학생으로 북적였습니다. 그날 오전 내창 이형은 망월동 양지바른 곳을 뒤로 한 채 선후배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망월묘역을 떠나 올 때는 초혼장이라고 해서 봉분을 다시 세웠습니다. 내창이형이 그간 지냈던 땅 속에는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낸 10주기, 20주기 백서 2권과 정원옥의 박사논문, 그리고 25년 간 망월묘역을 찾은 이들의 발 자취를 땅 속 깊이 남겨두었습니다. 김원주 형이 글씨를 쓰고, 김서경·김운성 선배가 만든 표지석도 한 쪽에 세워 이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8월 15일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형을 모셨습니다. 앞이 탁 트인 전망 좋은 자리입니다. 후배들이 형 모시는 자리에 노래를 부르고 영혼을 달래는 춤을 추었습니다. 이제 형이 한층 더 가까운 곳으로 왔습니다. 왕복 한나절 거리입니다. 더 가까워진 만큼 자주 찾아보고 자신을 돌아보고 다듬는 계 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8개월 간의 이장 과정을 거치면서 가장 먼저 재학생, 동문 등 사람이 남았습니다. 그간 모두 8차례 에 걸쳐 관련 회의가 열렸고, 20여 명이 넘는 이장위원회 일꾼들이 관련 사업을 차근차근 준비했습니 다. 학생들과 연대하였고, 두 개 재학생 단체에 장학금을 지급하였습니다. 사진집단 현장은 지난 11월 이장 과정을 담은 사진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기록이 더해지고 풍부해졌으며, 우리 기념사업회가 어떻 게 지내왔는지, 지난 25년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학교 측이 열사 추모의 한 주체로 함께한 것도 크 나큰 성과입니다. 아래는 지난 8월 28일 열린 평가회 및 해단식에서 나온 최종 평가서입니다. 신명철 선배가 초안을 잡 아 제출한 뒤, 이장위원회의 토론을 거쳐 정원옥이 마무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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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 열사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 이장 평가서 이내창 열사의 이장은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이하 민보상법)에 의한 민주공 원 설립에 따라 추진되었다. 하지만 민주공원 설립은 십여 년 넘게 표류하였고,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서 야 가시화될 수 있었다. 민주공원 설립을 둘러싸고 불거진 유족들의 분열과 갈등이라는 현실은 이내창 기념사업회의 입장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모두가 함께 하는 민주공원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지만, 큰 형님의 심정도 헤아려야 했기 때문이다. 기념사업회는 유족을 뜻을 존중하기로 결정했고, 질시와 비난 을 받아 안기로 했다. 유가협의 어른들께 먼저 이해를 구했다. 유가협 어른들은 오히려 찾아와 주어서 고 맙다고, 잘 치르라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아직도 이내창 열사의 이장을 따갑게 바라보는 외부의 시 선들이 있지만, 이내창기념사업회는 늘 그렇듯 우리의 길을 걷는다.
1. 이장의 의미 〃〃 25년 만에 세상에 나온 열사와 해후하고, 그를 기리는 모든 분을 모시는 자리 〃〃 진상규명을 이루지 못한 미안함을 사죄하고 결의를 다지는 자리 〃〃 열사의 삶의 모습대로 소박하고 진지하게 모시는 장례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안장하는 과정을 통해 이내창 열사의 삶과 생각을 다시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이내창기념사업회 회원 확대의 계기로 삼음 √√이내창을 비롯한 희생자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과거청산 운동에 관심을 갖고, 유족들의 상처를 위무할 수 있는 자리가 되도록 노력함
2. 이장 추진 기조 〃〃 이내창 열사 개묘와 안장 절차를 엄숙히 진행하고 기록으로 남김 〃〃 중앙대학교 재학생과 동문이 함께 하는 이내창 다시 보기 〃〃 의문사 등 희생자를 통한 현대사 바로 알기와 과거청산 운동을 배우는 계기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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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3. 이장추진위(준비위) 구성 〃〃 안장준비위원회는 이내창 열사의 개묘에서 안장까지 실무 총괄 〃〃 안장준비위원회 구성은 이내창기념사업회 회원으로 함 〃〃 안장준비위는 실무 준비 조직으로, 공식적인 행사 조직과는 별도임(예 : 장례추진위) 〃〃 기획, 총무, 행사, 치산, 대외협력 등 조직 구성
√√이장준비위가 실질적인 기획, 총무, 대외협력, 실무까지 사업 전반을 책임짐 이에 따라 이장준비위를 이장추진위로 개편하고 이장 사업을 완수함
4. 경과
유족 요구 (사)유가협
합동안장식 진행 이장준비위 결성
민보위 훼방 독자적 행사 진행
개별 이장 결정 이장추진위 준비
8·15 25주기 추모 및 이장 거행
⑴ 유족 요구(1월) 〃〃 2013년 8월 15일 기제 시부터 유족은 이장을 바랐고, 뜻에 따르기로 함 〃〃 2014년 4월 (사)유가협과 이장을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옴 〃〃 이내창기념사업회에서 이장 전체를 받아서 준비하기로 함
⑵ 합동안장식 및 이장준비위 구성(1월) 〃〃 강민조(강경대 열사 부, 사단법인 유가협 회장) 선생과 협의, 관련 추사와 공동 준비하기로 함 〃〃 이장 행사를 체계적으로 준비할 조직으로 이장준비위 구성함 〃〃 이장 준비위 주요 행사 기획, 유가협 어른 면담 등 대외협력 사업 진행
⑶ 민보위 훼방과 독자적 행사 진행(3월) 〃〃 민보위 산하 ‘국가기념사업및추모사업지원분과위원회’, 합동안장식 행사명과 묘비명 등에 ‘민주열사’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없다는 일방적 통고로 합동안장식이 무산됨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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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내창기념사업회는 ‘민주열사’ 칭호 불허 방침의 철회와 유족들에 대한 공개사과를 민보위에 요구하며 이장을 무기한 연기함 〃〃 합동안장식에 맞추어 준비한 사진전, 토론회 등 이내창기념사업회의 행사는 독자적으로 진행함
⑷ 이장추진위 구성 및 이장 준비(4월) 〃〃 유족의 뜻에 따라 8월 15일, 이내창열사의 25주기에 맞추어 이장하기로 결정함 〃〃 ‘이내창열사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 이장위원회’를 구성함 〃〃 이장 행사는 망월동 개묘-흑석동 중대병원 추모제-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 안장식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내창 열사 단독으로 이장이 진행된다는 점 외에는 4월 합동안장식을 준비했을 때의 기조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음 〃〃 이장이 연기된 기간 동안 학교 측 담당자가 명예퇴직을 하는 등 변수가 생겼지만, 합동안장식 때 약속했던 학교 측의 협조가 대부분 이뤄짐에 따라 큰 무리 없이 행사가 진행됨
5. 주요 행사 ⑴ 이내창 사진 전시회, <25년만의 해후> 〃〃 사진집단 ‘현장’의 선후배들이 이내창을 기억하기 위한 목적으로 안성교정과 흑석교정 두 군 데에서 사진전을 개최함(3.31∼4.5) 〃〃 흑석교정의 경우, (구)해방광장에서 야외전시로 사진전이 개최되었는데 총학생회, 중앙문화, 사회학과, 사회복지학과 등 학내 단위들이 시간표를 짜서 상주 인원으로 참여함 〃〃 현재 온라인 전시회로 전환됨
⑵ 중앙대 자유인문캠프 강좌, <국가폭력과 인권> 〃〃 이내창기념사업회, <자유인문캠프>가 공동기획하여 “국가폭력과 인권”을 주제로 3회의 연 속 강좌를 진행함 (김영수, ‘인권과 국가권력’(3.31)/ 이재승, ‘국가폭력과 과거청산’(4. 3)/ 김민환,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을 가해자인 국가가 기념할 수 있는가?’(4.4)) 〃〃 이내창에 대한 기억의 문제에서 국가폭력과 인권, 민주주의의 문제로 의문사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됨 〃〃 <자유인문캠프> 고두현이 편집한 20주기 동영상을 매 강연회에 앞서 상영함으로써 이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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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창을 현재화하고 새롭게 기억하는 계기가 됨
⑶ 개묘식 및 초혼장(8월 14일) 〃〃 개묘식에는 유가족, 기념사업회 회원, 재학생 등 30여 명과 이철규열사추모사업회, 광주전 남추모연대 등에서 참여함 〃〃 김철수열사추모사업회가 걸어 놓은 “내창이형 보고 싶을 거예요”라는 플래카드에 화답이 라도 하듯 이내석 형님은 “살은 망월동에 묻고 뼈만 가져간다”라고 유족 인사 말씀을 하심 〃〃 초혼장은 열사의 유품, 25년 동안 묘지를 다녀간 사람들의 비망록, 기념사업회 소식지, 백 서, 논문 등을 관에 담아 묻는 의식으로 치러짐. 비석 옆에는 김원주의 글씨에, 김운성·김서 경의 조각으로 완성된 표지석을 남김
⑷ 추모제(8월 14일) 〃〃 추모제에 앞서 망월동에서 흑석동 중대병원으로 모셔온 이내창의 유골을 염습하고 입관절 차를 밟음 〃〃 추모제에는 300명에 가까운 흑석, 안성 교정 동문들과 재학생, 외부 인사들이 참여하여 성 황을 이루었음. 이내창을 애도하고 기억하기 위한 추도사와 조시 및 편지낭독, 문화공연 등 이 진행됨 〃〃 이장 행사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으며, 추도식 이후에는 오랜만에 만난 동문들의 축제의 장이 됨
⑷ 안장식(8월 15일) 〃〃 7시 30분 발인하여 10시 경 안성교정에서 노제를 치르고 11시 경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 에서 안장식을 거행하고, 매장 절차를 밟음. 유족과 장임원 전 이내창기념사업회 회장, 동문, 재학생 등 100여 명이 참여함 〃〃 안성교정 동문들의 문화적 역량을 총결집하여 소박하지만 정성을 다한 행사로 꾸며짐. 나원 영의 바이올린 연주, 조환준의 오카리나 연주, 산하의 노래공연, 가반데 김은희의 살풀이, 이 상하의 음향 등 문화예술 역량이 풍부한 안성교정의 특색을 잘 드러낸 행사라고 할 수 있음 〃〃 개묘식에서 안장식까지 노용헌과 <현장>의 재학생들, <자유인문캠프>의 고두현 등이 사 진과 동영상 촬영을 통한 기록 작업을 수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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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가 ⑴ 총평 〃〃 이장 준비위의 구성에서부터 기념사업회는 유족의 뜻을 최대한 존중하고 받는다는 것을 원 칙으로 삼았는데, 이러한 원칙을 끝까지 잘 지켜 유족의 마음에 흡족한 이장을 치러냈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됨 〃〃 민보위의 훼방으로 4월 합동안장식이 무산된 이후 사진전, 강연회 등의 행사가 탄력을 받지 못하고 행사 주체들의 맥이 풀린 느낌이 있음 〃〃 개묘에서 안장식까지 1박 2일의 이장 관련 행사는 이내창 열사 장례식 이후 가장 많은 사람 들이 결집한 행사라고 할 수 있음. 기념사업회의 25년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자, 의혈 의 집단역량과 개인역량이 총결집되었던 행사로 평가할 수 있음 〃〃 25년 만의 짧은 해후였지만, 이내창을 오래 기억할 수 있는 큰 여운을 남긴 행사였음. 이내 창을 기억하고, 그 동안의 부채의식을 다소나마 내려놓으며, 의문사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 작을 결의하는 자리가 되었을 것으로 봄
⑵ 이장 과정에서 얻은 성과 〃〃 사람을 남긴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음. 기념사업회에 참여하지 못했던 혹은 단절되 었던 안성교정 동문들과 흑석교정 민주동문회, 재학생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 이내창을 기억하고 의문사 문제를 함께 해결할 것을 결의하는 자리가 됨. 특히, ‘이내창의 후배들’을 통 해 인연 맺게 된 재학생들의 적극적인 행사 참여는 기념사업회의 새로운 주체의 구성, 향후 모교와의 지속적인 연대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해줌 〃〃 이장 행사에 최대의 동력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끈덕지게 어깨동무> 재발간의 힘이 컸으 며, 재학생 지원프로그램인 ‘이내창의 후배다’의 진행, 밴드와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한 지 속적인 회원 관리 등 그동안 축적해온 인적 네트워크의 힘이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음. 〃〃 총장의 참여를 성사시키고, 학교 측의 협조를 이끌어낸 것은 중앙대에서 이내창의 존재를 공식화한 것으로 큰 의미가 있음. 향후에도 학교 측을 주체로 내세우고 협조를 이끌어내는 지속적인 관계 유지가 필요함 〃〃 기록을 남긴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이장 행사의 또 하나의 큰 성과임. 이장을 준비하는 과정 에서 생산된 다양한 자료와 홍보물들, 이장 진행 전 과정을 사진 및 동영상 기록으로 남긴 것 은 25년을 정리하고, 결산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음(현재 노용헌 등이 25주기 동영상 작 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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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장 행사를 통해 선보인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들은 이내창 기념사업회의 독특성, 기념사업 회 회원들의 문화예술적 역량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가 됨 〃〃 마지막으로, 개묘와 염습 과정에서 이내창 유골의 손상을 확인해 타살의 구체적 증거를 확 보함. 과학적·법의학적 감정을 진행 중에 있음
⑶ 준비 과정의 문제점 혹은 아쉬움 〃〃 25년 만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원 확대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쏟지는 못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89년 당시 총학생회 간부를 비롯하여 기념사업회와 단절되어 있던 몇몇 동문들이 CMS에 참여해준 것은 소중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음 〃〃 4월 합동안장식이 무산됨으로써 안성농민회 등 안성 지역에서 이내창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합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음 〃〃 전성태의 기고 등 이내창 사건을 사회적으로 알리기 위한 언론 홍보활동을 하기로 계획하였 으나, 4월 합동안장식이 무산된 이후로 세월호 정국 속에서 이를 진행하지 못함
⑷ 훈훈한 마무리 〃〃 이장이 무사히 치러지도록 협조해준 학교 총장과 외부 단체에 감사의 글 보내기. 학교에는 대자보 형식으로 감사의 글 붙이기 〃〃 이장 행사에 인적, 물적 지원을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글과 소정의 선물 보내기. (표지석: 김원주, 김운성·김서경/ 국화꽃: 심윤정/ 엠프 음향장치: 이상하/ 노래: 한선희/ 바이올린: 나원영/ 진혼무: 김은희/ 리플렛 등 인쇄물: 이규중) 〃〃 장임원 선생님과 유가협, 한겨레 두레 등에도 감사의 글과 작은 선물 전달
7. 향후 진로 〃〃 올해의 중심 사업이었던 이장을 치르고 이장추진위가 해산을 하니 이후 이내창기념사업회 를 어떻게 운영할 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함 〃〃 민주동문회와의 관계, 재학생 후배와의 소통, 이내창기념사업회의 발전방향과 사업계획 등 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기임 〃〃 이내창을 비롯한 의문사 진상규명 사업에 대한 고민과 주체의 형성에 대한 고민도 시급한 과제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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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수입지출 내역
지출
수입
현수막2종
89,000
표석화물비
50,000
리플릿
200,000
문자 발송 충전
100,000
개묘식대
247,000
입관 제사상, 식대
1,180,000
장례식장식비외
2,893,700
김밥 아세톤 대야펜외 통행료
90,000 6,800 11,000 2,000
통행료 외
12,800
개묘인부
200,000
입관인부
200,000
식대
24,000
음료
36,000
꽃
30,000
버스 톨비 수고료
100,000
복사
20,000
제수비용
35,000
염습외
560,000
부의금
2,430,000
내석형님
300,000 6,087,300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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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 지출
2,730,000
3,357,300
어깨동무가 만나다
자연을 ‘꾸러미’하는 여인, 화가 장순복의 자연을 닮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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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사립문이 등 뒤에서 닫히자 죽은 듯 사위가 고요해 졌다. 불빛 하나 없이 캄캄했다. 멀찌감치 저 아래쪽을 향해 오줌을 갈기는데, 등 뒤가 섬뜩섬뜩했다. 나는 고 양이처럼 부르르 떨었다. 주위사방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은 듯한 고요와 정적이 두려웠다. 겁이 덜컥 났다. 힘 주어 마지막 오줌방울을 털어내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 다. 그곳은 따뜻하고 시끄러웠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난 시골에선 못살아. 절대 못살겠어. 나는 그곳이 산인지, 들인지, 논인지 알지 못했다. 세상 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결국 무지(無知)가 나약한 공포를 한가득 불러 왔다. 지난해 12월 19일 여주시 북내면 장순복 회원(회화 85) 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눈이 겹겹이 쌓인 집 주변 은 달빛도 없어 고즈넉했다. 개도 안 짖었다. 글: 이원근
동행인터뷰: 김선주 · 정원옥
▲ 6년 만에 개발에 성공한 ‘뚜껑 없는 요술주전자’. 이름 그대로니,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데운 술을 넣어 마시면 운치가 있다. 다시 말한다. 뚜껑이 없다. ▼ 물감을 씻은 듯 연분홍치마색 맨드라미 차다. 기침감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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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안 무섭나. 불빛 하나가 없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건가
무섭기는. 시골서 산지 25년이 넘었다.
1986년 초겨울부터다. 그전에도 문창
처음엔 새댁이었으니까 좀 무서웠는데,
과, 회화과 해서 몇몇이 모여 공부를 했
그리고 여기 사람들이 벌컥벌컥 문 열
는데, 컴컴한 지하실 같은 방에서 이상
고 들어서면 좀 그랬는데. 지금은 그럴
한 소리들을 하도 듣다보니 무서워졌
사람도 아예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다. 그래서 몇 번 가다가 말았다. 그런
은 죽었고, 나머지는 다 떠났다. 몇 집
데 86년에 김원주씨가 복학해서 회화과
안 남았다.
내에 스터디를 하나 만들었다. 그림 잘 그리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애들 몇몇
화가가 되려는 생각은 언제부터
을 모아서 조직을 했는데 나한테도 오라
아주 오래됐다. 어릴 때부터였다. 그냥
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들
그림이 좋았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될
말이 원주형이 사람이 너무 괜찮다고들
줄 알았다. 왜 있잖은가. 당연한 거.
하는 거다. 평판도 좋고 게다가 그림도 잘 그린다고 하고.
30년 전으로 거슬러 가보자. 학교는 왜 그만 두었나(장순복은 2년을 다니고 그만두었다)
글쎄. 재미가 없었다. 굳이 학교 안에서 무엇을 하는 것보다 밖에 나와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학 교 안이 무의미해졌다. 강의실에 앉아 예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무의해졌다는 뜻이다. 그림 자체가 의 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내 삶 자 체, 학교 안의 나 말이다.
그림도 잘 그린다고
실기실에 가서 원주씨가 그린 그림을 살 짝 엿보고 왔는데…… 무엇보다 그림이 그렇게 좋은 거다. 잘 그렸더라고. 그래 같이 공부하자고 하니 선뜻 발을 디뎠 다. 그러다가 현실에 눈뜨게 되고 여름 방학에 대성리에 MT를 가서 한 열흘 사 물놀이도 배우고, 서울역에서 부산 갔 다가 다시 부산에서 광주 망월동까지 도 끈덕지게 어깨동무
048
보여행을 하기도 하고…… 한 다섯 명
육남매 중 넷째다. 나는 나 혼자 큰 것
쯤 갔을 거다. 그게 거의 한 달 동안의
처럼 생각하고 쭉 살아왔다. 오밀조밀
여정으로 이어졌다. 내가 서울에 잠시
한 형제들 가운데 여러 틈이 있다면, 나
올라와 자금을 조달해서 또다시 내려가
는 그 틈 속에서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
곤 했다.
다. 싫어하셨지만 마지못해 따라다니셨 다. 죄송하다.
그 때 원주형과 사귀고 있었나
아니다. 사귀기 전이었다.
사랑고백은 누가 먼저 했나
30년 전 일이다. 누가 먼저 한 게 무슨 원주형은 어떤 상황이었나
의미나 있나. 가물가물하다. 고백은 내
87년에 예술대 동아리 ‘한솔’ 관련해
가 먼저 한 게 맞다. 하지만 주변에서 분
서 구속됐고. 한솔의 다른 선배가 조사
위기를 그렇게 몰아간 측면이 크다. 막
를 받다가 원주씨 이름을 댔는데, 아마
걸리집에서 술 먹다가, 내가 먼저 좋아
다른 사람을 보호하려고 댔을 거다. 정
하면 안 될까 털어놓긴 했다. 주변에서
작 사건과는 전혀 관련 없음에도 불구하
다들 원주형이 나를 좋아한다고 하도 말
고, 그렇게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뒤
들을 해대고, 거기 비춰보면 또 그런 증
집어썼다고 했다. 수원교도소에 있었는
거들이 드러나고 그래서. 그런데 자기
데, 보호자를 데려와야만 면회를 시켜
는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뗀다.
준다고 해서, 우리 아버지를 울고불고 모시고 수원까지 면회를 다니곤 했다.
학교 관두고는 뭐했나. 그래, 의미 있는 일 을 찾았나
그때 아버지는 뭐라 하시던가
서울서 공장 몇 달 다니다가, 그러다보
워낙 형제가 많았다. 하나둘 속 썩이는
니 또 그림이 그렇게 그리고 싶은 거다.
건 아마 그러려니 하셨을 것이다. 내가 이내창기념사업회
049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그림을 쉽게 못
어깨동무가 만나다
원래 살던 집은 도예작품 전시장으로 쓴다. 큰 가마터와 장순복의 작업실이 또 하나씩 딸려 있어 집이 두 채에 건물로만 따지면 모두 4동이다. 부자다.
놓는다. 그래서 작업실 마련하기 위해
세월은 사람의 기억을 흩뿌려놓기 일쑤라, 여기서
돈 벌려고 일본엘 갔다.
기억이 오락가락한다. 장순복은 결혼 전이었는지
돈 벌려고 일본엘
89년에 요코하마에 있는 도시락공장을 두 달 다녔다. 그런데, 도시락공장 들어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임신한 걸 알았다. 결혼 전이었고, 내 나이 스물다 섯이었다. 너무 놀랐겠다
그때는…… 그래서…… 어쩌겠나. 바로 돌아와서 양가 부모님께 인사하고……,
아기 돌 때였는지 또는 그 한참 뒤였는지 혼란스 러워 했는데, 남의 사소한 일 하나하나 디테일까 지 기억해내는 것이 취미이자 습성인 김선주의 증 언에 따르면, 준하 돌잔치 때 원주형은 교도소에 있었다고 한다. 확인해보니, 원주형이 서울민미련 사건으로 구속된 것은 1991년 3월이었다. “민중 미술을 내세워 좌경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1명 의 미술인을 잡아가뒀다.
포장마차 얘기부터 다시 해보자. 장사에 소 질이 있던가
노량진수산시장에서 멍게 같은 거 이것
그렇게 됐다.
저것 사다놓고 썰어 팔면 장사가 의외
좀 허무하다. 이후 삶은 어땠나
가, 사업을 키워보자 해서 봉천동에다
서울민미련이라고 그 쪽 일을 하고 있었
아예 포장마차를 근사하게 열었다. 거
는데, 안기부에서 계속 도청하고 했던 모양이다. 결혼 뒤에는 서울민미련 활 동과 생계를 병행했다. 봉천동에서 미 술학원도 열었고 포장마차를 하기도 했 다. 그러다가 조직사건이 터져 (김원주 씨가) 구속됐다.
로 잘 됐다. 한강둔치에서 그렇게 하다
기서 부침개도 팔고 전도 팔고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단골이 여럿 생길만큼 장사가 제법 잘됐다. 그런데 민미련 활 동을 하니까. 쉬는 날도 많아지고 포장 마차를 못나가게 되니 관두게 됐다. 때 려치웠다는 말이 맞다. 오래는 안했고 한 반 년 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050
둘은 스스로 볼 때 어떤 스타일인가
……
일이었으니까. 우리 어디 촌에 확 내려 가 살까. 김용문이라고 도자기하는 사
(김선주) 순복이가 열정이 더 강하고, 원
람이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었고, 여주
주는 오히려 분위기를 요렇게 만드는 스
에 그 선배가 있고, 두 집 중 어디로 갈
타일이지.
까 하다가 그날로 여주로 내려갔다.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건가.
와, 즉흥적이다
계산 없이 살아왔다. 아니 계산이랄 것
우리 삶이 즉흥적이었다. 여주 와서 선
도 없고 간단하게 결론이 나는 삶이었 다. 내 인생이 어떻게 될까 이렇게 따지
배한테 얘길 했다. 우리가 이사를 좀 와 야 할 것 같다고. 그랬더니 급하게 결정
면 불안해지고 막막해지고 하는 건데.
하지 말고, 우리 집에 방 하나 내줄테니
계산이 없다는 건 계획이 없다는 거고 무엇보
사 왔다.
살면서 알아보라 해서 바로 다음날로 이
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다는 건가.
시골로 가자는 것도 내가 먼저 꺼냈다.
짐도 참 단출했나보다. 바로 그 다음날이라
서울 살다가 인천에 큰 집을 얻었다. 작
니
업할 공간이 있는 상가주택이었다. 그 런데 거기 문제가 뭐냐 하면 물 사정이 아주 안 좋다는 거였다. 물이 안 나와 밥 을 못해먹을 정도였다. 그래서 매번 식 당에서 밥을 사먹다가 문득, 여주에 아 는 선배가 하나 있었는데 가끔 가보면 사는 모습이 아주 편안해보이더라. 그 때만 해도 시골에 집 얻는 건 너무 쉬운 이내창기념사업회
051
그렇게 살았다. 준하가 세 살 때, 개월 수로는 17,8개월 때였다. 이성강이랑 3인전을 하기로 해서 그 때 작업하기 위 한 공간과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무작 정 그림만 그리고 살았다. 한 1년을, 돈 벌이 없이. 집 앞에 물도 흐르고. 그림 그리고 물 보고 그렇게 살았다.
어깨동무가 만나다
역시 그림이었나보다
깐 이렇게 도자기에 그림 넣은 것을 다
아무래도 집중할 수 있는 게 있으니까.
양하게 해보자 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을 오토바이에 싣고 전시장들
생활이 됐나
을 돌면서 팔러 다녔다. 그런데 그 사람
안됐다. 그러다가 도자기공장에 화공으
들이 그런 작품을 보지 못했으니까, 첨
로 취직하면 돈을 굉장히 번다고 해서.
보니까 그냥 놔두고 가봐라, 이래서 하
그때 돈으로 화공 월급이 200만 원 쯤
나도 못 팔았다.
했다. 엄청 큰돈이었다. 전시 끝나고 생 활이 막막하니까 김원주씨가 화공으로
그때쯤 집에 불이 났다던데
취직한 거다. 첫 월급이 60만원이었다.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작업하고 이럴
그러다가 물레 한 번 배워보고 싶으니
때. 다른 학교 후배들이 와서 며칠 집
까. 물레 차는 걸 대장한테 조금씩 배웠
을 빌려줬는데, MT같은 걸로 집을 내
다. 그렇게 도자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
줬는데, 불을 얼마나 세게 땠는지 집에 불이 난 거다. 자야 되니까 장작불을 땠
도자기, 어떻던가
는데 불길이 세지니까 불이 기둥을 타
그때만 해도 청화라고, 푸른 빛깔 나는
고 지붕 위로 옮겨 붙고, 그때 그 집에
종류 외에는 몇 색깔이 안 들어갔다. 안
마침 물이 안 나왔다. 물이 없으니 불도
료는 색이 다양한데 도자기 만드는 분들
못 끄고. 속수무책으로 그냥 홀라당 탄
이 그 색을 제대로 못 쓰는 거였다. 물감 칠해진 데가 있으면 또르르 말려서 그걸
거다. 연락을 받고 맨발로 뛰어나와 집 이 타는 걸 지켜보고 서있는데…… 원주
해결하는 노하우가 필요한 거였다. 마
씨가 슬그머니 다가와 어깨를 감싸더니
지막으로 월급 받고 다니던 도자기 공장
“야아, 영화 같지 않냐?” 위로랍시고 하
사장과 친해져서 색 쓰는 걸 도모하게
는데, 정말 속까지 활활 타더라. 그동안
됐고, 화려한 색들이 다양하게 나오니
그렸던 작품들, 전시했던 작품들 몽땅 끈덕지게 어깨동무
052
다 타고, 준하 사진, 돌 사진까지 하나
다. 물레 살 돈이 없으니까. 원주씨의
남김없이 다 탔다. 그때까지 가졌던 것
장점은 자기가 안 해 본 것도 무대뽀로
들이 한순간에 공중으로 사라진 거다.
부딪쳐서 한다는 거다. 얼마 전에는 원
재가 된 거지.
주씨가 혼잣말처럼 “내가 생활력이 없 지” 그러는 거다. 그래서 내가 “무슨 소
열 안 받았나
리냐, 우리가 살려고 얼마나 몸부림 쳐
어쩌겠나. 누구 잘못도 아닌데. 나중에
왔는데” 그랬다. 지금도 원주씨는 거의
걔네들이 물어준답시고 돈 80만원을 장
반목수가 다 됐다. 오늘은 커피 드럼 만
만해 와서, 그 집 주인할머니께 다 드
들러 갔다.
렸다. 이 집에서는 언제부터 살았는가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그게 한 번이건 두 번이건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던 집인데 소설가
큰 불이 나서, 가졌던 재산이 홀라당 타버렸다면,
김영현씨가 600만원인가에 이 집을 샀
그것만큼 큰 사건이 어디 있겠는가. 근데 장순복 은 이 화재사건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다가, 김선 주가 귀띔해 주고서야 비로소 툭툭 중간을 끊어 가며 더듬어내기 시작했다.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큰일도 아니라는 듯이, 맞아 그런 일도 있 긴 했지 하며.
본격적으로 도예에 들어선 건 언젠가
물레도 차고 가마도 우리가 만들자 해 서 이리로(경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이사를 왔다. 옹기 하는 데 매력을 느 껴서 물레도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들었 이내창기념사업회
053
다. 한 일이년 작업하고 나서 이집을 우 리한테 쓰라고 준 거다. 그래서 그냥 쓰 고 있다. 김원주(52. 회화84)는 그렇게 도예가가 되어 막 사발을 빚고 있다. 원래 살던 집은 막사발 전시장 으로 꾸며져 있는데, 작은 술잔에서부터 입이 큼 지막한 막걸리잔과 접시들, 보시기, 찻그릇, 종지 들이 칸칸이 그득하다. 한 쪽에는 곡선이 정말 탐 스런 젖가슴 같은 달항아리와 요즘 판로를 찾고 있 는 ‘뚜껑 없는 요술주전자’도 여럿 각양각색의 담 음새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깨동무가 만나다
지금까지 보낸 꾸러미들. 꾸러미에 들어간 손 편지. 메모장.
‘꾸러미’ 시작은
몇 명까지인가. 가능한 선이
처음에는 도자기 이런 것까진 생각 못했
글쎄 한 20명까지가 최대치 아닐까. 지
고, 농산물과 반찬류 이런 거 생각하다
금 월 꾸러미 받는 사람이 6명이고, 격
가 도자기도 넣어주고 하자 해서 생겼
월로 받는 사람이 4명 정도다. 나만 먹
다. 첫 꾸러미는 5월에 보냈는데 봄에
자고 음식을 조금씩 하다가 꾸러미 꾸
나는 매화꽃 같은 꽃차, 땅두릅장아찌,
리느라 많이 해버릇하니까 처음에는 시
우리가 볶은 커피하고, 돼지감자차, 신
행착오도 많았다. 봄여름가을로 산으로
우대로 만든 과일포크, 그리고 양상추,
들로 뛰어다닌다. 약초들 캐느라고. 꾸
쌈채소, 부추, 망초대나물 등등 머 이런
러미 덕분에 건강해졌다.
거를 보냈다. 지금까지 여덟 달째 보내 고 있다.
장순복은 요즘 꾸러미를 꾸려 보내고 있다. 올해
1년 꾸러미를 보내보면 프로그램이 딱 서겠
들, 그리고 도예 작품을 넣어 보낸다. 한 달 10만
다
그럴 것 같다. 상품으로 보내는 거라 여 러모로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처음부 터 받는 사람들 생각하니깐 힘에 부치 긴 하지만 맘은 좋다. 점점 더 좋게 보내 야 된다는 부담감은 있다. 매달 25일에 발송하는데, 이달엔 크리스마스가 있어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어 보내느라 열 흘 정도 앞당겨 보냈다. 천연솔방울가 습기 같은 거는 반응이 참 좋다.
총 8번을 꾸렸다. 그달그달 나온 채소와 반찬류 원의 회비로 꾸러미 가족이 될 수 있다. 격월회원 도 가능하다.
원래 요리는 잘했나
누구에게 따로 배운 게 아니고 여기저기 서 주워듣고 맛을 내는 수준이다. 맛난 거 먹어보면 대충 뭐뭐 들어간 건지는 안다. 또 한 번 해보면 되고. 원주형은 어디 갔나
커피 드럼을 만들러 갔다. 오늘 (내놓 은) 커피는 탄자니아AA다. 종로 부암 끈덕지게 어깨동무
054
동의 유명 커피집에 가서 도자기 사발
화가 장순복은 2007년 개인전 ‘들녘에서 만나다’
10개를 갖다 주고, 커피 생두를 종류별
를 열었다. 당시 한겨레신문은 “등이 굽은 옆집
로 얻어왔다. 우리 집 프라이팬으로 로 스팅한 거다. 옆에서 바라본 김원주는 어떤 사람인가
흥이 넘치는 사람이다. 천상 예술가다.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그 림을 그리고, 도자기를 빚는다. 목수일 도 한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봉분 위에 뛰어 올라가 덩실덩실 춤을 춘 사
할머니, 퍽퍽한 땅을 일구는 호호 할머니, 보따리 인 아주머니 등. 할미꽃, 민들레, 쑥부쟁이, 엉겅 퀴 등 흔한 풀꽃들. 금방 비를 뿌릴 것 같은 들녘 하늘, 겨울바람 부는 둑방의 말라비틀어진 풀. 경 기도 여주로 퇴촌해 16년 동안 지켜본 농촌 현실 보고서다. 자유무역협정에 노출돼 속절없이 여위 어가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또 그 해에는 시인 김준태와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이번 호 지면 곳곳에서 장순복의 그림을 볼 수 있 다.)
람이다. 장순복의 그림세계는 무엇인가 다시 그림 얘기하자. 그림을 그리고 싶진 않
나는 사람과 자연이 소통하면서 그림이
은가. 너무 쉬지 않았나
자연스레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난
그림에 대한 욕심은 항상 나를 지배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곳에서 자연스러운 그
있다. 작업을 해야겠다는. 지금 이 꾸러
림을 그리고 싶다. 자연 속에서 사람도
미도 그림 그리듯 하고 있다. 생각하고
풍경도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준비하고 만들고 하는 것이 다 작업처럼
사는 환경이, 여기 환경이 순 할머니 할
느껴진다. 좀 지나면 또 캔버스 위에 그
아버지들이 밭에서 일하는 거였다. 농
림을 그리게 되겠지. 그리고 개인전 한
촌이 거의 끝나간다. 생산력도 끝나가
번 해보니까 그런 욕심, 욕망 이런 게 다
고 이 분들이 돌아가시면 이제 없다. 여
털어지더라고. 전시를 하니까 또 발가
기 할머니 할아버지들 보면 마른 풀들과
벗겨진 것 같고 창피하기도 하고.
닮아 있고, 또 여기 풀들 나무들 보면 이
이내창기념사업회
055
어깨동무가 만나다
곳 할머니들 손가락과 닮아 있다. 자연
장순복의 삶은 자연스러웠나
과 사람이 곧 하나다.
그랬던 것 같다. 모자란 것은 분명 있 었겠지만, 자연스러워 행복했던 것 같
자연이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다. 자연이 곧 내가 아닐까. 나랑 별반 다르지 않다.
다. 원주씨 뒷모습을 바라보면 애잔하 고, 안타깝고, 불쌍하다. 서로 늙어간 다. 그게 자연스럽다.
스무 살 즈음에 안성 내리의 논둑길을 걷다가 1학
장순복의 그림 속에선 모두 어딘가로 바람이 분
년생 장순복은 김선주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자
다. 어여쁘지 않은 꽃은 땅에 박혀 단지 견디는 중
연스럽다는 말이 너무 좋지 않아?” 그 말을 듣고
이다. 꽃들은, 풀들은 척박하고 위태롭고 끈덕지
김선주 학생은 골똘히 생각하다 논둑 아래로 떨어
다. 바짝 말라버린 풀 위로 바람이 한바탕 불면 손
졌다고 한다.
끝이 다 닳아 없어진 갈퀴 같은 노인네들이 덩달 아 기우뚱거린다. 그리고 또 다시 고단하게 떼 지
집 앞이 공사 중이던데
평창 동계올림픽의 영향이 여기까지 미 칠 줄은 몰랐다. 서울에서 평창까지 이
어 오는 바람들. 바로 그 사이 어느 기울어진 언덕 에서 장순복이 다음해를 기다리는 나무등걸처럼, 질경이처럼, 넝쿨처럼 자연스레 산다.
어지는 도로를 내고 있는데 그게 고래산 을 지나 마을을 가로지른다. 우리 집 닭 장에서 불과 30미터쯤 앞에 도로가 지 나간다. 차가 지나다니면 아마 어마어 마한 소음을 낼 것이다. 고속도로가 나 면 여기에 카페를 낼까 진지하게 생각 중이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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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세월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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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세월호 참사 229일, 광화문 농성장 140일 -4월30일부터 11월30일까지노용헌
세월호 투쟁을 기록해야겠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4월 16일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전 9시에 출근하 니 사무실에서는 MBN, JTBC, TV조선, YTN, 채널A 등 다섯 개 채널이 속보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전쟁 보도라도 하듯 죽음의 현장이 생중계되고 있었 는데, 영상의 폭력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내가 동아일보에 입사한 95년에 삼풍 백화점 사고가 터졌었다. 그때도 삼풍백화점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경찰관, 소 방관, 기자들, 자원봉사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뒤얽혀 우왕좌왕했었다. 초기에는 적절한 폴리스라인, 사고현장에 접근하는 기자들의 취재라인도 사실상 없었다. 4 월 16일, 그날의 보도는 오보의 연속이었다. 방송사는 전원구출이란 오보의 책임 을 정부에 떠넘기기에 바빴고, 대규모 인력이 총동원되어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만 전하기 바빴다. 그렇게 4월 16일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은 졸 업작품으로 세월호를 생각하고 있으며, 진도 팽목항 현장에서 사진작업을 하면 어 떻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세월호를 졸업작품으로 생각한 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다. 단지 큰 이슈가 있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사진으로 담 는다는 것은 피사체에 대한 착취라고 생각하고, 유가족과의 커뮤니케이션 없이 슬 퍼하는 유가족의 사진을 찍지 마라. 단 촬영을 하겠다면 사건의 당사자보다는 그들 을 돕는 제3자, 봉사자들 중심으로 촬영을 하는 게 나을 듯싶다.” 이렇게 대답했던 나는 4월 30일 대한문 앞에서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주최 로 열린 <탐욕스런 자본과 무능한 정권에 희생된 세월호 희생자와 모든 이웃을 위 한 참회의 거리미사>에 참여한 이후, 세월호 투쟁을 기록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더욱이 유가족대책위 대변인인 유경근이 중학교 동창이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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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는 초기부터 의문투성이였다. 양파껍질을 벗기듯 새로운 추측과 의 혹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거문도에서 의문사를 당한 내창이형 사건처럼 진실을 알고자 하는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정부와 언론은 진실을 속 시원히 파헤치기 보다는 의문만을 눈덩이처럼 불리고 있었다.
나는 사진을 찍는다
5월 10일 안산에서 ‘세월호 희생자 추모와 진실을 밝히는 국민 촛불’ <행동>이 열렸다. 이날 화랑유원지에서 ‘노란리본 잇기’ 행사로 3천여 명의 시민들이 합동분 향소를 에워싸는 노란색 인간띠를 만들었고 단원고를 거쳐 안산 문화광장까지 행진 을 했다. 집사람과 나는 이날 안산 분향소를 찾아 첫 분향을 했고, ‘현장’의 재학생 들(백승환, 이동훈, 최수정, 구인혜)과 현장기록에 참여했다. 고잔역에서 분향소 로 걸어가는 동안 안산지역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던 날이었다. 내내 가슴이 먹먹 했다.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잊지 않겠다, 행동하겠다는 나는 무엇을 해 야 하는가? 답은 간단했다. 기록에 남기기 위해서 나는 사진을 찍는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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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광화문에서 팽목항까지 6월 21일,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67일째 되던 날.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 고 청계광장에서는 <철저한 진상조사를 위한 시민행동선언의 날> 집회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제정 촉구 천만인 서명운동이 전국 20곳에서 펼쳐졌 고 많은 시민들이 서명에 참여했다. 이날 130만 명의 시민들이 서명한 서명용지를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전달했고, 유가족들의 눈물 위로 거센 폭우가 쏟아졌다. 6월 5일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서울 대한문에서 출발하는 팽목항 실종자 가족들의 ‘기 다림의 버스’가 운행되었다. 세월호 투쟁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팽목항에 가보고 싶어졌다. 1989년 8월 15일 내창이형이 거문도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당시, 나는 성남의 한 공장에서 여름방학 중 공활을 하고 있 었다. 한 달간의 공활을 정리하고 학교로 돌아와 전국 대학에 내창이형 사건을 알 리기 위한 선전전에 참여했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위해 서명용지 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교차된다. 거문도에는 가지 못했지만, 팽목항엔 꼭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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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쌍용자동차 해 고자를 위한 거리미사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집사람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나보다 더 가슴아파했다. 팽목항에 한 번 가보자는 내 말에 집사람은 흔쾌히 동의했고, 우 리는 7월 11일 진도 팽목항으로 향하는 ‘기다림의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기다림 의 버스’는 금요일 오후에 출발해서 무박일정으로 진행되었다. 밤늦게 도착하여 진 도VTS 관제센터에서 팽목항까지 걸어가며 실종자들이 하루 빨리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길 기원하는 일정이 전부였다. 이 날 우연하게도 현장 후배 김영식(사진과 00학번)과 대학생 친구들이 이 버스에 함께 탔다. 차가운 밤바다의 파도소리가 귓 가에 울림으로 다가왔다.
유가족들의 목숨을 건 투쟁 7월 14일 수사권과 기소권이 포함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유민아빠’ 김영오씨 등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 농성이 시작되었다. 이 날 이후로 많은 사람 들이 광화문 광장에서의 동조단식에 참여하였다. 대한문 앞에서 월요일마다 열렸 던 미사는 7월 15일 국회 앞에서의 매일미사로 이어졌다. 매일 7시에 열린 거리미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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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사에 참여한 집사람과 나는 미사가 끝나고 나면 국회에서 농성 중이던 경근이를 만 나고 집에 돌아오곤 했었다. 가톨릭미사에 항상 참여하셨던 성호어머니 등 많은 사 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국회의 조속한 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아예 안산 합동분향소를 떠나 국회 앞에 주저앉아버렸다. 7월 19일 시청 광장 촛불문화제에서는 유가족들이 집회의 전면에 나섰다. 만 명 이 넘는 시민들이 시청 앞 광장에 나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정치권이 하루속히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외침이자 유가족에 대한 연대였다. 지난 16일은 단원고 생존학 생들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40km 도보 행진이 있었다.
7월 24일, 세월호 참사 100일째 되던 날. ‘수사권’을 포함하는 내용의 특별법 제 정을 요구하는 유가족의 국회 단식 농성이 장기화되고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안산 합동 분향소에서 서울광장까지 1박 2일 40km, 100리 길을 걸어왔다. 비오 는 날 시청광장의 수많은 참가자들과 유가족은 청와대 행진을 시도했고, 차벽과 경 찰들로 프레스센터 앞에서 밤새 대치를 했다. 하지만 시위대열은 광화문 단식 농성 장까지도 가지 못했다.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 등 두 번의 선거를 치르는 동 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비를 흠뻑 맞으며 경찰과 대치했던 그 날 밤의 상황은 내창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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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을 모시고 광주 망월동 묘지로 가는 길에 톨게이트 앞에서 밤샘 대치를 했던 기 억과 불현듯 겹쳐졌다.
교황의 메시지,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 124위 시복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광화문 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던 중 차에서 내려 단식 농성중인 유민이 아버지 김영오씨를 위로하였다. 교황도 유가족을 위로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은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유가족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8월 18일, 한국 방문을 마 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세기 안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라고 세월호 유족에 깊은 관심을 보인 이유를 설명 했다. 이어 교황은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 나자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고 물었다”라고 전했다. 이에 대한 교황의 답은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중립이란 무엇일지? 8월 23일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국민대회>가 열렸다. ‘특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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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제정하라, 대통령이 책임져라’라고 외치며 청와대로 향한 행진이 엄청난 경찰 력에 가로막혀 있을 때 세월호 참사 일반인 유가족 대책위는 세월호법 여야 재합의 안을 수용하기로 했다는 발표를 했다. 이 날, 우리는 정부로 향하는 화살을 딴 곳으 로 돌리기 위한 온갖 분열과 회유, 언론플레이를 지켜보아야만 했다.
청와대의 외면과 조장된 분열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 등장했던 명박산성이 8월 25일 차벽으로 다시 등장 했다. 8월 27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단식기 도회>를 이어갔다. 천주교의 거리 미사에도 경찰은 바짝 긴장하여 혹시나 청와대 로 행진하지는 않을까, 하고 차벽으로 광화문광장을 둘러쌌었다. 8월 28일 ‘유민 이 아버지’ 김영오씨(47)는 46일만에 건강악화로 단식을 중단했다. 유가족들은 국 회, 광화문광장 농성에 이어 8월 22일부터 특별법 제정에 대한 청와대의 결단과 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5월 16일 박 근혜 대통령이 유가족들과의 면담을 통해 언제든지 만나주겠다고 한 약속은 거짓 에 불과한 쇼였던가. 교황이 와도, 유민아빠의 건강이 악화되어도 병원에 와서 대 통령은 유가족의 손 한 번 잡아주지 않았고, 눈길 한 번 마주쳐주지도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천주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단체들의 단식기도회가 이어졌다. 8월 30일 국민대회의 구호는 “특별법을 제정하라! 청와대는 응답하라!”였다. 청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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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대는 빗장을 꽁꽁 닫아 건 철옹성처럼 보였다. 일베와 우익단체가 광화문 광장으 로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피자 100판을 돌리는 폭식투쟁으로 그들은 단식을 조 롱하고 유가족들을 우롱했다. 나아가 세월호를 정치적·이념적으로 몰아가면서 국 민 분열을 조장하는 데 앞장섰다. 우익들이 자신의 그릇을 지킬 필요가 있을 때마 다 내세우는 것이 좌빨, 종북놀음인 것이다.
세월호를 잊지 않는 사람들, 행동하는 사람들 9월 8일, 고유명절인 추석이 되었다. 4월 16일 봄을 지나 여름, 가을이 지나고 있었고, 가족들은 아직도 거리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가슴에 묻은 유 가족들은 진실을 알려달라고 호소하며 거리에서 추석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날 광 화문광장에는 거대한 세월호 배 풍선이 하늘로 띄워졌다. <세월호 가족과 함께하 는 국민한가위> 행사였다. 9월 22일 이화여대, 23일 고려대, 24일 연세대에서 <세월호 유가족, 이호중교수 초청 대학생 강연회>,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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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유가족과 대학생간담회>, <세월호 유가족 국민간담회> 등이 열렸다. 10월 4일, 가족대책위와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는 “독립적인 수사권과 기소 권을 보장하지 않는 특별법으로는 참사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면서 광화문광장에 서 <성역 없는 진상규명 가로막는 청와대, 양당 규탄 촛불 문화제>를 열었다. 세 월호 유가족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은 전국 곳곳에서 노란리본 달기와 현수막 달기로 이어졌다. 가로 60cm, 세로 100cm의 족자형 현수막 달기 는 이날 광화문 곳곳에 노란 물결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 다음날 구청직원들로 보 이는 사람들로부터 철거되기는 했지만.
10월 25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촛불문화제에 유가족들이 앞장서서 청와대 행 진을 시도하였고, 경찰은 이를 철저히 막았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를 기억 하고,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참여했다. 노란리본을 만들거나 서명을 받거나, 예술가들은 동조 단식을 하였고, 영화인협회 주최로 10월 31일에는 <세월호 추모 영상제>가 열렸다. 부산영화제에 출품한 <다이빙벨>도 논란이 많았지만, ‘세월 호 특별법 제정 촉구 영화인 모임’에 참여하고 있던 최정화(사진 89학번)도 추모영 상을 준비하여 세월호 참사를 표현하고 전달하려 했다.
11월 1일 세월호 참사 200일, 문화예술인들이 <세월호 연장전>을 기획했다. 문화예술인들이 창작의 도구로 쓰는 ‘연장’들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의미여야 하 는지를 예술인들은 자신들의 ‘연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표출했다. 11월 7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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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참사 206일 만에 세월호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리고 209일 만인 11월 11일, 유가족들은 실종자 9명의 수색작업을 중단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11월 15일 전국문화예술인행동 주최로 <세월호 연장展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열렸다. 광화문 광장에는 빈 책상과 의자 304개가 놓여졌다. 김서경, 김운성 선배 의 기획이었다. 304개의 책상과 의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295명과 실종자 9명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시인과 소설가들은 4시간 16분간 희생자들을 추모하 고 기억하는 낭독회와 음악회를 진행했다. 이 날 책상으로 쌓은 탑 위에 올라간 단 원고 2학년 7반 고 오영석 학생의 어머니 권미화씨는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자 식에게 국화꽃을 전하는 현실이 너무 힘들다”며 “그래도 이 추운 날씨에 가슴이 뜨 거운 국민 여러분이 있기에 대한민국은 썩지 않았다”고.
세월호가 남긴 과제 나 또한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 연장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나는 과연 나의 연장 으로 무엇을 말하고 전달하고 있었는지. 사진을 시작한 지도 27년이 지났다. 다큐 멘터리 사진을 하면서 항상 질문하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객관적 시각에 대한 물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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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었고, 기록에 기반을 둔 사진에 객관적 시각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지에 대 해서. 항상 어느 편도 아닌 객관적 시각을 가지려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정공 법적인 접근 방식을 가져왔지만 그렇다고 결코 중립적인 시각이란 없다는 것을 알 고 있다. 내가 객관적 시각이라 주장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 와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에 의해서 언제나 변질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에 세월호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너 무나 가슴이 아프다. 우리 사회는 민주화되었건만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통제된 사회인가. 내창이형 사인진상규명을 위해 도심에서 알렸던 그때에는 언론 에서 다루어주지 않았었고, 유일하게 한겨레신문에서 다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언론은 앵무새처럼 온종일 보도하고, 사실(fact)과 진실 (truth)사이는 온통 유언비어로 난무하다. 7월 14일 광화문 농성장이 들어서고 매 일 출퇴근길에 들려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을 해왔다. 농성장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록이었다. 기록자로서, 증언 자로서, 목격자로서,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서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접근하고 가 야할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도 하루가 지나가고, 많은 담론과 이야기들이 잊혀져간다. 누군가가 내게 말한다. 별로 다를 것 없는 현장인데 사진을 찍느냐고. 나는 말한다. “다른 누군가가 볼때는 똑같아 보이는 일상이라도 작은 변화는 있었 다. 현장에 와 보지 않고서는 현장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현장을 느끼고 싶었다.” 기록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기록이 나에게는 보잘 것 없는 기록이지만,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선배로서 후배들이 아픈 역사를 이해할 최소한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현장의 느낌이 후배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록을 넘어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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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이후의 내 삶 고상현
하나. 안산 단원고 앞 임시 분향소에 다녀온 것은 사고 발생 얼마 후였다. 비가 추 적추적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일요일 아침. 아내와 애들과 함께 고요하고, 조용한,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안산 단원고 앞길을 다녀왔다. 분향소에 들어서서 느낀 그 압도적인 느낌…….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둘. 비통, 침통, 애통……. ……悲痛, 沈痛, 哀痛. . .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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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다음 달이면 어느 덧 40대 중반에 들어선다. 40대를 목전에 두었던 몇 년 전 만 해도 불혹의 나이에 입성한다는 것이 아주 괴롭고, 힘들고, 인생의 후반전에 다 다른 것처럼 그런 하릴없고 애잔한 인생무상의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세 월조차 지나가고 나니 이젠 정말 인생의 반환점을 지난 시점에 서 있다. 격물치지(格物致知)라 했던가. 근래 수 삼년의 시절은 어릴 적부터 하고 싶었던 천문학과 바둑, 사물의 이치, 단어의 근본 뜻과 같은 기본적이면서도 나름대로 인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분야에 집중해서 독서와 인터넷, 티브이 시청 등의 취미생활 을 열심히 해 왔었다. 하지만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慘事)는 나의 모든 일 상을 거의 바꾸어 놓았다. 그날 이후 나는 그렇게 좋아하던 바둑, 독서, 인터넷 서 핑 등의 취미생활을 모두 중단하고 이 사건의 해결과 유가족들의 아픔을 나누는 데 무슨 일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내 생활의 대부분을 바쳐왔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바라며 각종 문화제 및 광화문 집회 등에 참여하고 있다. 넷. 사건 이후 8개월이 지났다. 그간 일주일에 적어도 2,3일 이상은 광화문에 들 렀으며, 인터넷과 페이스북에 유가족의 주장과 진실을 담은 글을 쓰기도 하고 퍼 나르기도 하며 지내왔다. 그러던 중에 진상규명의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그 나마 간신히 얻어낸 특별법이 제정돼서 1월부터는 진상조사위 활동이 시작된다고 한다. 제대로 된 진실규명을 기대하기 힘든 법이지만 그래도 뭔가 새로운 것이 나 왔으면 하는 작은 바람은 있다. 최소한 기존 증거의 인멸이라도 막을 수 있다면 다 행이라고 생각한다. 사건 이후 진실의 규명만을 놓고 보자면 아직 채 한걸음도 떼 지 못했다고 본다. 그래서 지금도 계속 4월 16일이다. 240여 일 넘게 반복된 “4월 16일”. 다섯. 지난 10월 중순경 안산 화랑분향소 앞마당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이 참여한 캠프가 열렸다. 1박 2일의 캠프동안 소수이지만 중요한 사람들을 직접 만났고 티 브이와 인터넷에서만 보았던 유가족들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되었다. 처연하지만 일 상의 모습을 유지하며 고통과 평정심의 경계를 오가는 그분들의 말과 행동을 지켜 보면서 캠프에 참여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고, 앞으로의 결의를 더 다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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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었다. 그날 병원 앞 토스트집에서 사간 토스트와 음료를 그곳에서 만난 청소 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잘 먹겠습니다”라고 외칠 때 그 간 막연하게만 느껴오던 사회운동, 시민운동, 내 주변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작은 활동이 뭔지 비로소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다. 세월호 참사는 의대생일 때 학업을 병 행하며 뛰어들었던 학생운동,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학생운동의 목표와 사회에 나 가서 하고 싶었던 사회활동의 모든 것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환경운동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가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 라”였던가. 학생 때 우리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던 그 심정과 목표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지만 그간 생활인의 찌든 때에 묻혀, 일상의 삶에 치우쳐서 살아왔었던 것 같 다. 이제야 비로소 내 주변에서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들에 눈이 트이게 된 기분이다. 지하철역에서 수년간 봐왔던 노숙인 자활사업 중 하나인 <빅이슈> 잡 지를 스스럼없이 살 수 있게 되었고, 광화문에서 피켓과 서명, 기도와 미사를 드리 는 한 분 한 분에게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홍세화 선생님이 자문위 원으로 있는 <작은 책>이라는 소책자의 정기구독권을 끊게 되었고, 주변에서 성 금모금 부탁이 왔을 때 진실한 활동에 쓰이는 모금이라고 판단되면 선뜻 지갑이 열 리게 되었다. 유가족 분들의 이성적이고 올곧은 마음씀씀이에서 언제나 작은 일에 “삐치는” 나의 소심함과 행동에 합류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본받 게 되었고, 인생 후반기의 반환점을 도는 시기에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 지를 깨닫게 되었다. 여섯. 12월의 첫째 주말 꼭 가고 싶었던 팽목항을 단체버스로 다녀오게 되었다. 팽목……. 사람들이 먼 바다를 내다보며 아이들이 있던 맹골수도를 바라보며 있을 때에 나 는 바로 내 눈 밑의 바닷물을 바라보았다. 저기에 빠졌단 말이지……. 하아……, 또다시 비통, 침통, 애통의 밤이었다. 일곱. 자동차 디자이너가 꿈이었던 휘범이와 엄마 신점자님, 반장으로서 애들 을 침착하게 이끌며 여러 생명을 구해낸 유미지양과 아버님, 청운동, 팽목항을 오 가며 농성장을 지키고 계신 훤칠하고 모델이 꿈이었던 순범이 엄마 최지영님, 외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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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들을 잃고 부부 모두 모든 농성장을 지금도 안방마님처럼 사수하고 있는 영석 이 엄마, 아빠. <야 이 돼지야>라는 자작곡을 남기며 음원발표까지 했으며, 급변침 당시 동영 상을 찍어 진실규명의 단초를 열게 했고, 배안에서 예수님께 기도를 올렸던 깨박이 시연이와 엄마 윤경희님, 동글동글 언제나 주변에 기쁨을 주고 친구들은 가까스로 마지막에 생존했던 그래서 더더욱 아픈 귀요미 도언이와 엄마 이민자님, 너무나 예 쁘고 참한 모습에 숱한 페이스북 친구들의 눈물과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수정이와 아빠 김종근님, EBS 다큐에서 눈물의 모정을 보여줬던 김지인양과 엄마 이미영 님, 특별히 내세울게 없지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미소가 예쁜 수진 이와 엄마 김인숙님, 프랑스 TV에 온전한 모습의 시신이 잠깐 방송돼서 많은 이들 의 탄식을 자아낸 석준이와 아빠 이병수님, 생계는 중요치 않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을 남기신 시찬군과 아빠 박요섭님, 해외출장 중이라 서 4개월 동안 못 본 상태에서 처음으로 시신으로 아들을 만나게 된 최성호군의 아 빠 최경덕님과 엄마 엄소영님. 가수가 꿈이었던 너무나 참한 예은이와 아빠 유경근님, 디자이너가 꿈이었으며 사건 초기 전시회로 유명해진 세월호 마지막 동영상의 주인공 박예슬양과 엄마 노 현희님, 사고 당시 갑판 위로 올라왔지만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내려갔다 못 올라온 양온유양과 엄마 백영란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억겁의 시간과 공간들의 무게가 4·16 이후 우리의 삶으로 파고 들어왔다. 여덟. 어떤 위로도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될 수 없다. 어떠한 말과 행동도 자식을 잃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될 수는 없다. 단 하나, 미궁에 빠져 있는 진실을 향한 추적만이 그들에게 먼발치에서나마 위로 의 향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길이 되리라 믿고 싶을 뿐이다. 그 길에 나는 나섰다.
고상현은 1991년 중앙대학교 의학과에 입학했으며 현재 서울 여의도의 한 산부인과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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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월호를 바라보며 :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신주욱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지
의 가족이었고 이웃이었고 친구였으며
지만 이제는 내가 안 해도 될 일처럼 느
선생이었고 어른이었습니다. 그런데 먹
껴지는 것.
고 살기 바쁜 탓인지 다 알면서도 모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척 잊어버린 척 떠나버리는 사람들이 하
는데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이 도태되 는 일처럼 느껴지는 것…….
나 둘 늘어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자신
저는 지금 광화문 광장을 바라보며 이
러다가 우리에게도 4·16과 같은 일이 닥
런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눈물
친다면 그 때 우리는 누구에게 하소연을
이 솟구치고 목이 메고 가슴이 먹먹해
하고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그들
지는 4월 16일. 사건이 발생한 지도 벌
과 똑같은 처지가 될 수밖에 없는 게 아
써 8개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입니다. 연
닐까요.
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
말행사니 모임이니 들뜬 기분으로 12월
이렇게 글을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지
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많겠지요. 하
만 지금, 너무나 안타깝고 처참한 기분
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직 시작되지도
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원고를
않은 진실규명을 위한 거북이걸음을 하
청탁받았을 때만 해도 상황이 이렇게 어
고 있습니다. 그들은 200여 번째의 4월
렵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시간이 얼마
16일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지난 것도 아닌데, 너무나 쉽게 흘러가
매일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똑
는 계절처럼 자연스럽게 지금이 되어버
같은 4월 16일의 아픔과 눈물이 그들의
렸습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을 알
눈에 고여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우리
았지만, 이처럼 빨리 마음에도 겨울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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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터닝 포인트.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현실에 너무나 슬펐고, 이 사 건이 조작되어지고 계획되어졌다는 것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라는 글 귀가 쓰인 그림으로 1인 시위를 하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많은 사람들을 만 나고 이야기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지내 고 있습니다. 사는 곳도 나이도 직업도 계층도 각기 다른 사람들, 서로 다른 삶 을 살아왔지만 세월호 참사로 인해 세상 을 바라보는 시각이 같아진 사람들, 그 동안 정부 쪽 이야기만 듣고 지지하다가 세월호 참사로 인해 인생이 180도 바뀐 사람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서 세월호참사가 정말 엄청난 사건이고 너무나 슬픈 터닝 포인트였음을 알게 되 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세월호 참사 가 자기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예전엔 강 건너 불 구경처럼 느껴지던 일들이 이번에는 너 무도 강렬하게 생활에 밀려들어왔습니 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나의 울분에 못 이겨 미쳐서 죽을 것만 같은 공포도 느꼈 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뀌어야만 했던
에 너무나 분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진실규명을 위한 아무런 후속조치 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오히려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막고 은폐하려는 현 정부 에 엄청나게 화가 나는 이 현실. 세월호 참사는 이런 현실에 눈을 뜨게 해준 한 국의 슬픈 터닝포인트였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린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제 생각이지만 대답은 “많이 바뀌지 않았다!”입니다. 힘겨운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살아내 는 사람들이 많아진 세상에서 내 가족과 친구가 아닌 누군가의 어려운 처지나 사 고, 죽음은 더 이상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된 듯합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해놓고 결국엔 천천히 닮아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 실입니다. 세월호와 같은 엄청난 참사에 잠시 혀를 차고 눈물을 흘리고 화를 내 지만 자고 일어나면 누군가의 죽음이 대 수롭지 않게 되어버리는, 허무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감정상태가 오히려 당 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실을 너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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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습
국가는 우리와 같은 국민들이 뭉쳤을 때
니다. 세월호 참사 농성의 선두에 섰던
진정한 좋은 국가가 되는 것이라고 당당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알려진 “
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라는 그림을
는 우리들이 되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살
안팎으로 들고 뛰며 많이 힘써보았지만
아야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높았던 이상에 비해 현실은 눈물과 좌절
우리는 세월호참사로 인해 사회에 산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
재된 수많은 부조리들과 나쁜 정부의 모
람들이 조금은 변했고, 진심으로 그러
습을 보았습니다. 이대로가 좋습니까?
했기를 바랍니다. 부질없는 믿음일지라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는 다시 개편되
도 이 믿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이 나라
어야 하고 우리의 의식도 처음부터 다시
에서 살아갈 수 없기에 저는 오늘도 광
시작해야 합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처음
화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믿고 행동하고
의 마음이 싹을 틔우고 나무가 되고 숲이
외칩니다. 절대로 “진실은 침몰하지 않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면 정말 좋겠습니
습니다”라고.
다. 세월호 참사는 그렇게 되어야 상처
이번에 예수회센터에서 공동체의 회
가 아물고 새살이 돋을 것입니다. 아직
복과 평화와 사랑을 위한 작은 전시회를
늦지 않았지만 더 늦어서도 안 됩니다.
열면서 ‘우린 어떻게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의 한국을 우리 힘으로 만들어가는
를 살아야 할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
올바른 국민이 되어 살아갑시다. “진실
습니다. 정말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거
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대한 슬픔 앞에 놓인 여러 군상들을 바라 보면서 적어도 의식 있는 우리들은 어떻 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 고민합니다. 슬 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우리들이 되는 것. 외칠 때 함께 외치고 걸을 때 함께 걸으며 뛸 때 같이 뛰고 싸 울 때 같이 싸우는 우리. 우리가 있기에 사회가 있고 사회가 있기에 국가가 있고 신주욱은 1999년도에 중앙대 의류학과에 입학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라는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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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의 클래식 이야기
그리그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노인봉 산장에서 보낸 하룻밤 진고개 휴게소에서 만난 노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막걸리부터 시켰다. 평일에도 행 락객들로 북적거리던 휴게소는 겨울이 깊어가자 인적이 거의 끊어졌다. 나와 후배 는 해가 기우는 휴게소 밖을 내다보며 출발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지만, 술 한 모금 을 들이켠 노인은 긴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노 인은 초조해하는 우리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자네들도 한 잔씩 하게나.” 해지기 전에 노인봉 산장까지 가려면 지금 일어서야 하는데, 느릿하면서도 단호한 노인의 어투가 발길을 붙잡았다. 그는 산장과 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노인봉 산 장에 정착하게 된 사연과 그간 겪었던 돼먹지 않은 산꾼들의 행태를 꼬집었다. 눈이 많이 쌓이면 산악스키로 산장과 주문진 바닷가를 오르내리면서 술을 마신다는 그 의 산중생활은 풍류처럼 다가왔다. 노인의 고약한(?) 성미를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또 그의 말을 들으면서 바깥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진 솔한 면모를 발견하기도 했다. “강원도의 산에서 자작자작한 눈을 만나면 무조건 하산해야 돼. 함박눈보다 이런 눈은 며칠씩 내리기 때문에 위험하거든.” “저희 먼저 올라갈 테니 뒤따라오십시오.” “산장 문은 열려 있으니까 먼저 가서 쉬게나.”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발을 뿌릴 듯 꾸물꾸물해지고 저녁 어스름이 시작됐다. 오 대산을 크게 한 바퀴 돌기 위해 꾸린 대형배낭에는 야영장비가 들어 있지만, 날이 어두워지자 마음이 급해졌다. 결국 헤드랜턴을 켜고 도착한 산장은 적막강산. 산장 옆에는 노인의 살림집인 움막이 낮게 엎드려 있었다. 부랴부랴 배낭을 내려놓고 물 을 뜨러 샘터에 내려갔다. 해가 떨어진 산골은 기온이 뚝 떨어져 산장까지 오는 동안 코펠에 그새 살얼음이 끼었다. 또 멧돼지가 방금 헤집고 간 흔적을 보자 머리카락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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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뼛 섰다. 어두운 산길에 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귀 신이 아니라 멧돼지 아니 던가. 밤이 되면서 다행히 하늘은 개었다. 저녁을 해 먹고 산장 마당에서 야경 과 팝콘 같은 별들을 감상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노인봉 정상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중무장을 하고 나섰는데 도 정상에 오르니까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붉은 여명 속에서 꿈틀거리는 첩첩산줄기를 보자 추위는 사라지고 가슴이 뭉클하게 데워졌다. 멀리 공제선에 걸린 설악산의 하얀 능선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산장에 내려와서 아 침을 준비할 때 노인이 올라왔다. 그는 움막으로 가더니 따뜻한 차를 가져왔다. 직 접 채취한 여러 약초로 끓인 차였다. 노인과 맺었던 이때 인연은 그가 하산해서 서울 상계동에 차린 주점 노인봉 주막으로 한동안 이어졌다. 노르웨이 출신의 그리그는 바이올린 소나타를 세 곡 남겼다. 이중 3번 C단조 op.45는 깨끗하고 투명한 북유럽의 자연과 서정을 담은 작품. 열정적인 1·3악장 사 이에 낀 2악장 로만차는 오로라가 넘실대는 북구의 겨울 하늘을 연상케 한다. 코끝 은 차갑고 가슴은 뜨거워지는 노인봉 일출에서도 그런 감흥을 느꼈다. 뭉크의 그림 ‘기차 연기’를 재킷에 담은 이 음반은 표지부터 인상적이다. 한 음 한 음이 또렷한 별 빛 같은 마리아 주앙 피레스의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난 뒤 아스라이 가슴 한쪽을 시리게 하는 오귀스탱 뒤메이의 바이올린 음색은 찰떡궁합이다. 소나타 세 곡이 모 두 수록됐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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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탕 그림_장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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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빙벨>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논란의 전말과 내막 조종국
<다이빙벨>은 올해의 영화로 단연 첫 손가락 에 꼽을 화제작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실제 일화 를 소재로 1,130만 명이 넘는 관객을 극장으로 불 러 모은 <변호인>이나, 한국영화사상 전대미문의 관객수 1,760만 명이라는 기록을 세운 <명량> 등 도 쟁쟁하지만 ‘이슈’로 보자면 <다이빙벨>이 독보적이다. 하지만 <다이빙벨>이 화제가 된 것은 영화의 내용이 아주 돋보이거나 상당한 성취를 내포한 작품성이 아 니었다. 영화와는 무관한 정치적 외압으로 불거진 논란이었고 미약하나마 영화로 담아낼 수 있던 미덕마저 공방에 묻히고 오히려 소모된 측면도 있어 아쉬움이 크다. ‘다이빙벨’이 세월호 구조 관련이 아닌 영화 관련 뉴스로 등장한 것은 영화 <다 이빙벨>의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 상영 논란 때문이었다. 사실 지난 9 월 부산영화제 초청작을 발표할 당시에 <다이빙벨>은 312편 중 한 편으로 별로 눈 에 띄지도 않았다. 도화선은 부산영화제의 조직위원장인 서병수 부산시장이 코앞 에 닥친 부산영화제에 “<다이빙벨>을 상영하지 말라”고 직접 주문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부터다. 이런 보도가 나가자 정작 부산영화제에서는 서 시장이 직접적으로 상영 취소를 요구한 사실이 없는 것처럼 어물쩍 둘러댔다. 서 시장은 오히려 언론을 통해 다시 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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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공개적으로 <다이빙벨> 상영 취소를 단호하게 요구했고 부산영화 제는 머쓱해졌다. 서 시장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일련의 진상이 제 대로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입장을 담은 영화라 서 상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부산시장의 <다이빙벨> 상영 취소 요구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정치적인 이유로 특정 영화를 상영하 지 말라고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헌법을 들먹이고 표현의 자유를 주창하지 않아도 세계적인 명성이 자자한 국제영화제의 초청작으로 발 표한 작품의 상영을 취소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일반 상식 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더욱이 부산영화제의 조직위원장인 부산시장이 초청작 선정에 대해 공개적으로 압력을 행사했다는 점은 한마디로 몰상식한 일이다. 영화 제는 통상 영화제 운영 조직의 행정적인 대표성을 상징하는 조직위원 장과 실질적인 운영을 책임지고 총괄하는 집행위원장 체제로 굴러간 다. 이를테면 조직위원장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을 제공하고 행정적 인 지원을 담당하며, 영화제 운영의 모든 실무는 집행위원장에게 위임 해 시행하는 것이다. 영화제의 독립성이 위협받거나 고유성을 훼손당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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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우려가 있을 때 이를 막아주는 역할을 해야 할 조직위원장이 영화 제를 흔드는 선봉장 노릇을 한 꼴인 셈이다. 게다가 실제로 영화를 보지도 않고 상영하라마라 요구하는 것도 어 불성설이다. 당시 <다이빙벨>은 제작진과 상영작 선정 여부를 판단 하는 부산영화제의 프로그래머 몇 사람 이외에는 영화를 본 사람이 없 었다. 어떤 내용인지 무슨 주장을 담고 있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 다. 세월호 참사 구조현장에서 논란이 되었던 ‘다이빙벨’이 소재인 다 큐멘터리라는 것과 몇 줄의 소개 글이 공개된 정보의 전부였다. 부산영화제는 그 전에도 상영 당시 논란이 된 영화를 적지 않게 틀었 다. 영화제 초창기인 1997년 제2회 때 제주 4·3 항쟁을 정면으로 다룬 다큐멘터리로 감독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까지 청구했 던 <레드 헌트>, 2003년 제8회 때 북한에서 직접 가져온 북한영화 7 편도 상영한 적이 있다. 2013년에는 작고한 김근태 선생의 고문 실화 를 다룬 <남영동1985>와 제주도 강정마을 미군기지 건설을 고발한 <구럼비-바람이 분다>도 상영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이빙벨>은 부산영화제에서 두 번 상영했고, 극 장에는 예상대로 일반적인 영화제 관객들과는 행색이 확연하게 다른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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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관객들이 적지 않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예년에도 논란이 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는 어김없이 국정원 직원과 정보과 형사들 이 들락거려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영화제에서 상영한 영화 몇 편으 로 세상이 뒤집어지지도 않았고, 정권은 치명상도 입지 않았으며 영화 제가 좌파나 극렬한 반정부 세력의 해방구도 되지 않았다. 국정원 직 원들과 정보과 형사들이 하품하면서 영화만 잘 봤다는 후일담이 있을 뿐이었다. <다이빙벨>은 부산영화제 이후 일반 상업영화와 비교하면 아주 미 미한 규모로 개봉해 약 4만 6천명(12월 15일 현재)의 관객이 영화를 봤다. 오히려 부산영화제 상영 취소 압력 논란이 아니었다면 관객 수 가 이보다도 훨씬 적었을 것이라는 게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 다. 하지만 <다이빙벨> 상영을 집요하게 저지하려던 공세를 <다이빙 벨> 흥행에 득이 된 노이즈마케팅 효과 정도로 안도할 수 없다. 작금 의 현실이 너무 ‘비정상’이고 퇴행적이라 오히려 비현실적이기 때문이 다. 조종국_1984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꽤 오래 전 영화주간지 <씨네21>기자로 일했으며, 영화제작사 대표, 부산국제영화제 기획실장, 부산영상위원회 사무처장 등을 거쳐 지금은 <씨네21> 편집위원으로 이름을 걸어두고 소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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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흥건한 <족구왕> ‘내일’이 아닌 ‘오늘’을 말하다 노민옥
족구장이 사라지고, 팩차기(컵차기)가 사라졌 다. 한때 족구의 전설이라 불리며 여자들만 넘쳐 나던 식공과를 족구 결승전까지 올려놓았던 예비 역 선배 형국, 이제는 ‘철’이 들어 공무원 시험에 열공 중인 형국은 이제 막 제대 해 세상물정 모르 는, 그래서 사라진 족구장을 재건하겠다는 둥 공 무원 시험은 관심 없고 연애가 꿈이라는, 팩차기나 하는 찌질하고 한심한 주인공 만 섭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뭘 믿고 그렇게 낭만이 흥건하냐?” 적어도 캠퍼스 내에선 청춘과 가장 거리가 있어 보이는 예비역이 청춘과 가장 거리 가 먼 스포츠 중의 하나로 보이는 족구를 하는 영화 <족구왕>은 그렇게 내 청춘, 내 낭만의 시대를 들춰냈다. MT가서 게임만 하고 온다는 선배들의 우려 속에서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와 ‘동 지가’를 함께 불렀던 낭만의 막차 시대 95학번. 시험 전날 딱 50개만 차고 끝내자며 시작하곤 45개에서 발끝을 스치며 떨어진 컵 때문에 기어코 발악 끝에 5시간을 채 우고야만(그래서 결국 시험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컵차기의 시대를 살았던 나는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보다는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청춘의 특권이 살아있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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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나도 비정규직 ‘장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청춘들에게 이 시대는 영화 속 예비역 선배처럼 “넌 청춘이 영원할 것 같지? 학교 밖을 나서는 순 간 그 청춘이 니 뒷통수를 친다”는 경고와 “공무원시험만 합격하면 안나(이름에서 도 느껴지는 이 퀸카스러움)같은 애들은 알아서 집 밖에 줄을 선다”는 달콤한 회유 를 함께 던진다. 물론 우리는 다 안다. 다 개뿔 헛소리라는 걸 말이지. ‘시험 잘 보면’ ‘대학만 가면’ ‘취업만 하면’ 과 같은 ‘~하면’ 시리즈들은 결국 <미생> 속 김대리의 말처럼 하나의 문을 여는 것에 불과하거나 혹은 거대한 사회를 모난 돌 없이 움직여 가기 위해 개개 인들이 작은 성공에 자위하도록 훈련하는 것임을 말이다. 오늘날 캠퍼스에서도 캠퍼스 밖에서도 족구를 왜 하냐는 질문에 “재밌잖아요”라 고 대답하는 만섭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힘들다. 재미보다는 유용성의 가치에 등 떠 밀려 숨 가쁘게 살아가는 시대! 영화 <족구왕>은 족구가 있고, 체육대회가 있고, 과 점퍼가 있던 낭만의 시대를 살아온, 그러나 이제는 캠퍼스 밖으로 나온 우리에게 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안녕하냐고, 혹시 또 다른 ‘공무원시험’에 당신의 오 늘을, 당신의 청춘을 저당 잡힌채 살고 있진 않냐”고 말이다. ‘중앙대 연극영화과가 만든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중대 냄새가 물씬 나는 <족구왕>은 홍대 출신 감독이 건대 출신 배우와 함께 중앙대 안성 캠퍼스에서 촬 영했다. 덕분에 우리에겐 수상무대며 중앙 식당이며 눈 돌리는 곳곳이 낭만 코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더해 듣보잡 배우들의 명연기가 기가 막힌 영화. 덕분에 간만에 컵차기가 하고 싶어졌다. 내리에 가고 싶어졌다. 안성 순대국밥이 먹고 싶어졌다. 킬킬대며 웃다가 아직 청춘인 나의 삶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한국판 ‘빽투더퓨쳐’ <족구왕>을 강권한다.
노민옥_1995년 중앙대 영어학과에 입학했다. 구성작가로 일하고 있다. EBS <다큐프라임>, KBS <VJ특공대>, <수요기획> 등을 집필했으며, 현재 KBS <한국 한국인>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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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과거사 청산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거사 미청산, 아물지 않는 상처 서병훈
“2010년 12월 31일, 대한민국에서 실시되었던 과거사 정리를 위한 ‘1차 실험’이 막을 내렸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와 연관된 사회적 문제들은 거의 해결된 것이 없는 실정이다. 1991년 공안정국에서 기획 되었던 유서대필 사건은 강기훈이라는 젊은이가 중년이 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 국 민보도연맹으로 학살되었던 이들의 유해도 2014년 현재까지 끊임없이 발굴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해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 발굴 사업을 총괄하였 던 부산외대 노용석 연구교수의 저서 『라틴아메리카의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머리말의 일부이다. 노 교 수 말고도 과거사 정리와 직·간접적 관련된 그 누구도 과거청산이 완료되었다고 느끼는 이는 없을 것이 다. 타의에 의해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정권 교체로 숨고르기를 끝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짬을 이용해 1차 과거사 청산에 대한 잘잘못을 헤아리며 다시 시작될 과거청산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끈덕지게 어깨동무>는 2회에 걸쳐 20세기 이후 일어난 지구촌 과거사 청산을 되짚어본다. 이 번 호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의 과거사 청산을 살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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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2월 7일, 검은 외투를 입은 한 남자가 독일 나치 정권의 희생자를 기리 는 추모비 앞에 섰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의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지 않았다. 묵묵히 비를 맞고 있던 그가 추모비 앞 계단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낮게 흐느 꼈다. 그는 다름 아닌 폴란드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 각본에 없던 총리 행동에 보좌진은 당황했고, 세계에서 몰린 취재진도 서둘러 카메라를 들이댔다. 서양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완전한 복종을 뜻한다. 독일 총리가 다른 나라에서, 그것도 비 내리는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이상 완전한 사과가 어디 있겠는 가. 당시 전 세계 언론도 ‘무릎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 였다’라며 빌리 브란트의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눈이 멀게 된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전 대통령이 한 말이다. 어두운 과거에 대한 반성만 이 오늘과 미래를 눈 뜨고 사는 길이다. 전쟁과 독재 등에 대한 반성-과거사 청산은 인권의 세기라고 할 수 있는 20세기 중반부터 이루어졌다. 2차 대전 이후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에서 과거사 청산이 인류 역사상 처음 시작되었다.
전범에 대한 군사재판 20세기 전후,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침략 전쟁과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 위를 처벌해야 한다는 의식이 형성되었다. 1899년과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서 열린 두 차례의 만국평화회의에서 이런 논의가 시작되었다. 2차 회의에 참가한 44개국 대표는 독가스 사용 금지, 포로 학대 금지, 점령지 민간인 살상·약탈·강간 금지 등의 법규를 담은 ‘헤이그 조약’을 체결했다. 헤이그 조약에 의거하여 전쟁범죄를 저지른 개인에 대한 처벌은 2차 대전 이후 이뤄졌다. 연합국은 1945년 8월 ‘런던 협정’을 체결하고 국제재판을 통해 독일과 일본의 지도자와 군부 요인 등을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독일)과 ‘도쿄 군사재판’(일본)이 열렸다.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1945년 11월부터 약 1년 동안 열 렸다. 이 법정에서 나치의 핵심인물에 대해 교수형 12명, 종신형 3명, 20년 징역 형 2명, 15년 징역형 1명, 10년 징역형 1명의 판결이 내려졌다. 나치 2인자였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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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링은 자살했고, 나머지 사형수에 대한 형이 바로 집행되었다. 이후, 미군정은 단독으로 후속재판을 열어 나치 주요인물 184명을 재판에 회부 하여 24명에게 사형선고를 했다. 대량학살을 집행한 현장 책임자 등을 상대로 한 재판도 열렸다. 미국 군정지역에서 1941명을 재판에 회부하여 1517명이 유죄판 결을 받았는데, 그중 324명이 사형을, 247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영국 군정 지역에서는 1985명을 재판에 회부하여 240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군정 지역에서도 2107명이 재판에 넘겨져 10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밖에 벨기 에, 덴마크, 네덜란드 등에서도 전범에 대한 사법처리를 진행했다. 서방에 비해 사회주의국가들은 과거청산에 좀 더 단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 련은 적과의 협력을 이유로 법정에 세운 독일인의 두 배 이상 되는 자국민을 처벌 했다. 폴란드는 당국이 독일인 전쟁범죄자와 폴란드인 협력자를 구별하지 않아 정 확한 통계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전범자 수가 18,000~20,000명에 이르고, 이중 독일인이 약 1/4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연합군 군정은 사법적 청산과 병행하여 엄격한 탈나치화 작업을 시작했다. 나치 당원 여부에 따라 약 14만 명 정도를 공직에서 추방했다. 미군정은 종전 이후 1년 여 동안 10만 명의 독일인을 수용소에 구금하였다. 그러나, 물리적 역량 부족과 동 서냉전으로 인해 미국의 청산 의지는 수그러들었다. 결국 미군정은 탈나치 업무를 독일인에게 위임했고, 이는 1946년 9월말 바이에 른에서 수용소에 구금된 전체 대상자의 93.1%가 무혐의자로 처리되는 결과로 나 타났다. 독일인이 전개한 후반기 청산작업은 대다수를 ‘단순가담자’로 규정하면서 나치 전력자에게 면죄부를 발급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군정 의 과거청산정책이 좌절한 것이 이미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음을 고 려한다면, 초기의 청산작업이 미군정의 인력과 자원으로는 결코 제대로 추진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인들의 적극적인 청산의지가 존 재하지 않는 한 전범처리가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웠다는 현실로부터 실패의 원인 을 찾아야 할 것이다. 1) 1) 정현백, 「글로벌 시각에서 본 과거청산의 의미」, 『역사비평』 93, 2010,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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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까지 독일 사회는 과거사에 대해 ‘침묵의 공동체’였다. 오이겐 코곤 같은 지식인은 50년대 초 “어제의 인물들이 조용하고, 은밀한, 동시에 멈출 줄 모르며 복귀”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실제로 서독 대통령이 된 하인리히 뤼프케는 나치 의 집단 수용소 건물을 설계했고, 수상청 장관 글로브케는 뉘른베르크 인종법 제 정의 핵심이었고, 인종법 위반 사건을 주로 담당했던 볼프강 프랭켈이 검찰총장이 되었다. 1961년 이스라엘이 국제사회에 공개한 아이히만 재판 과정은 독일 사회에 커다 란 충격을 던졌다. 뒤이어 유대인에 대한 참혹한 범죄를 낱낱이 드러낸 아우슈비 츠 재판(1963~1965), 나치 범죄에 대한 공소 시효 논쟁(1965)을 겪으면서 과거 사 청산의 불이 다시 붙었다. 60년대 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적 정서와 ‘68혁명’ 에 힘입어 과거청산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바르샤바 게토에 있는 유대인 추모 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 수상이 바로 그 상징이었다. 아이히만 재판 이 후, 강제수용소 관련자에 대한 사법절차가 이루어졌다. 서독에서 1990년까지 총 98042건의 기소가 이루어졌고, 12명이 사형, 162명이 종신형, 6197명이 징역, 114명이 벌금형을 받았다. 나치 전범에 대한 처벌은 아직 진행형이다. 79년 독일 국회는 “나치 범죄에는 시 효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독일 루트비스부르그 시(市)와 16개 주에는 전범 추적 기관이 설치되어 지금까지 과거청산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해 초 독일 검찰은 아 우수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의료진으로 일하며 수용자 살상에 가담한 93세 나치 전 범 용의자를 체포했다. 이스라엘 유대인 인권단체 시몬비젠탈센터는 ‘작전, 마지 막 기회’라는 전범 추적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현재까지 1천 명의 나치 전범 기소 를 주도하였다. 전후 후속조치가 다자간 협조주의로 이루어졌던 유럽과 달리, 미국은 일본에 대 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양자간 일방주의로 진행했다. 냉전이 본격화 되자 미국 은 동아시아 전략의 측면에서 일본에 반공세력 온존 및 육성에 힘을 기울이는 방향 으로 대일점령정책을 삼았다.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 상황은 일본의 전략적 가치 를 더욱 높여주었다. 그 결과, 뉘른베르크전범재판은 연합국간의 다자간 이해관계에 기반 하여 재판 과 전후처리가 이루어진 반면, 도쿄전범재판의 전범처리는 문제투성이였다. 피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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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인 아시아 각국의 참여 부재,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불기소, 천황 면책 등이 이 루어졌다. 이 재판에는 도조 히데키와 히로다 코키를 비롯한 전직 수상 4명, 외상 3명, 육군상 4명, 해군상 2명, 대사 6명, 재계인사 3명, 황족 1명 등 모두 28명이 심판대에 세워졌다. 2년 6개월에 걸쳐 진행한 재판기간에 중 법정에 출두한 증인만 419명이었고, 검 사와 변호사 측에서 제출한 증거만 무려 4336건에 달했다. 약 30만 명의 중국인 이 학살된 난징 대학살과 100여 곳에서 자행되었던 대규모 학살과 고문 등의 증거 가 제출되었지만 일본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종군위안부 강제 동원, 조선인 강제 동원,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 반인도적 문제는 소홀히 다뤄지거나 아예 거론 조차 되지 않았다. 30개월에 걸친 심리가 끝나고 1948년 11월 전범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재 판과정에서 사망한 2명과 정신이상 1명을 제외한 25명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는 데, 7명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나머지 18명 전범은 종신형, 20년 형 등을 받았 지만 단계적으로 전부 석방하였다. 총리가 된 기시 노부스케, 전후 우익 실세 고다 마 요시오와 사사가와 료이치 등이 사면된 전범들이다. 그 후, 단 한명의 전범도 일본 법정에 세워지지 않았다. 60년 말 이후 전범 재판 에 적극 나선 독일과는 극명하게 비교가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학자들이 과거사 극복을 둘러싼 독일과 일본의 차이를 언급하였다. 그 가운 데 역사적으로 접근한 모치다 유키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모치다는 네 가지 원인을 제시하였다. 첫째, 두 나라가 겪은 점령체제의 차이다. 그로 인해 나치의 전쟁 범죄가 철저히 추궁된 반면, 일본에서는 천황의 전쟁 책임과 식민지 지배 등에 대한 철저한 추궁 을 피해갈 수 있었다. 일본 국민은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 둘째, 전후 경제 성장 배 경이다. 서독은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 과정에서 유럽 여러 나라와의 교역이 필수 적이었기 때문에 사죄와 보상 등 관계 개선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했다. 일본은 피해를 준 아시아 국가와 관계개선보다는 승전국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개선이 우 선이었다. 셋째, 양국 국민의 전후 인식에 강렬한 영향을 남긴 것으로 아우슈비츠 체험과 히로시마 체험의 차이이다. 전자로부터는 역사상 유례없는 가해자 의식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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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되었다면 후자로부터는 피해자 의식이 성장할 수 있었다. 2)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도쿄 전범재판의 차이점 3)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도쿄 전범재판
재판대상
독일 나치 전범
일본 전범
재판기간
1945년 11월~1945년10월
1946년4월~1948년 11월
피고인
헤르만 괴링 사령관 등 22명
도조 히데키 총리 등 25명 (히로히트 천황 및 황족 제외)
적용죄목
평화에 대한 죄, 통상의 전쟁범죄, 반인도범죄 (홀로코스트 포함)
평화에 대한 죄, 살인, 통상의 전쟁범죄 (군 위안부 강제 동원 등 반인도범죄 제외)
선고결과
19명 유명(교수형 12명)
25명 유죄 (교수형 7명)
최종처리
처결 전 자살한 1명을 제외한 11명 교수형 집행
7명 교수형 집행, 옥사한 3명 제외한 15명 사면
패전국의 이후 조치
국내 특별법 제정 등 통한 재판정신 계승, 전범의 유럽대륙 내 공직 취임 금지 등 자격제한
없음
뉘른베르크 전범
2) 전중굉 외, 『기억과 망각, 독일과 일본, 그 두 개의 전후』, 이규수 역, 삼인, 2000. 3) 유지혜, 「상반된 2차대전 ‘전범재판’」, 『중앙일보』, 2013.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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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 및 보상 전후 전범재판의 결과는 배상 및 보상, 평화교육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 쟁에 의한 국가배상은 전쟁 종결 후 강화조약이나 배상협정 등 국가 간 조약에 의 해 규정된다. 전후 독일은 패전 즉시 연합국에 의해 동서로 분할 점령되었고 이로 인해 전쟁의 주체인 독일제국 자체가 존속되지 못했다. 연합국은 독일이 통일될 때 까지 평화조약의 체결을 유보하는 조치를 취했다. 1992년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 지만 여전히 통일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강화조약 체결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독일에 있어서 전후보상이란 대체로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나치 박해의 희생자 에 대한 보상’이라는 개념이다. 독일 정부는 1990년 말까지 약 865억 마르크를 지 불했다. 이 중 80%는 1956년 제정된 나치스 박해 희생자를 위한 보상에 관한 연 방법에 의거해서 지급했다. 연방보상법은 보상권리자의 범위를 속지주의로 규정 하였다. 기본적으로 서독에 주소를 가진 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보상권리자는 박 해를 받은 본인뿐만 아니라 피 박해자의 근친자로서 박해를 받은 자, 살해된 피 박 해자의 유족, 그리고 오인으로 박해받은 자 등도 포함되었다. 유대인은 집단적 박 해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어 개개의 박해사실을 입증할 필요가 없이 보상권리자로 인정해줬다. 독일에 점령된 서측 지역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나치에게 박해를 받았던 시민은 국지주의로 인해 독일에 직접 청구권을 갖지 못했다. 이를 대신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 10개국 정부는 보상을 요구했다. 독일은 이 들 나라에 모두 9억7100만 마르크를 지불했다. 유럽 동구권에서도 보상을 주장했 다. 그러나, 전쟁 중 독일에 연행되어 강제노동에 종사한 약 800만 명에 이르는 폴 란드 노동자에 대한 보상을 두고 이견이 나왔다. 독일 연방정부는 1986년 보고서 에서 강제노동은 ‘전쟁과 점령지배의 일반적인 수반현상’으로 국가배상의 문제에 속한다고 밝혔다. 앞서 밝힌 대로 국가배상은 미결 과제로 남아 있었다. 1989년6 월 야당 녹색당은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며 ‘나치스의 강제노동에 대한 보상을 위한 연방재단’을 설치하는 법률안을 제출하고 동시에 폴란드와의 사이에 ‘나치스 지배 하에서 폴란드인 강제 노동자에게 개인적 보상을 행하기 위한 포괄협정’의 체결을 제안했다. 이 문제는 독일 통일 후 급속하게 진전을 보았다. 1992년4월 독일 정부 끈덕지게 어깨동무
090
도쿄 전범
와 폴란드 정부는 나치스 희생자와 강제 노동자에 대한 보상을 행하기 위해 폴란드 에 ‘화해기금’을 창설하여 독일 측이 여기에 5억 마르크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강제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을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2000년 8월 독일 정부와 약 6000개 독일 기업은 각각 50억 마르크를 출자하여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연 방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나치 정부에게 강제 노동에 동원된 피해자들에 대 한 배상이 주 목적이었다. 2007년까지 100개국이 넘는 나라의 1700만 명에게 배 상을 하고 지급을 종료했다. 그러나 재단은 화해를 위한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지원 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일본에 대한 전후 처리의 기본방침을 정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배상 및 보상에 관한 규정이 확정되었다. 냉전의 격화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던 배상은 일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대폭 완화되었다. 강화조약에는 과대한 배상징수로 인해 일본경제에 지나치게 과중한 부담을 주어 서는 안 된다는 사과방식이 관철되었다. 즉, 징벌적인 요소가 배제되고 존립가능 이내창기념사업회
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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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동남아 4국에 대한 배상 국가
협정체결
배상총액
미얀마
1955.4.16
720억 엔(2억 달러)
필리핀
1956.7.23
1980억 엔(5억5000만 달러)
인도네시아
1958.4.15
803억880만 엔(2억 2308만 달러)
베트남
1960.1.12
140억4000만 엔(3,900만 달러)
일본의 준(準) 배상(경제협력, 재산-청구권) 국가
협정체결
금액
타이
1955.7.9. 1962.1.31
54억 엔(특별 엔 해결협정) 96억 엔(경제협력협정)
라오스
1958.10.15
10억 엔
캄보디아
1959.3.2
15억 엔
미얀마
1963.3.29
473억3600만 엔
한국
1965.6.22. 1965.6.22
677억 2800만 엔(유상 2억 달러) 1020억 9300만 엔(무상 3억 달러)
싱가포르
1967.9.21. 1970.10.9
29억 4000만 엔(무상) 29억 4000만 엔(유상)
말레이시아
1967.9.25
29억 4000만 엔
미크로네시아
1969.4.18
18억 엔(신탁통치지역 미일협정)
한 경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대폭 완화된 것이다. 냉전적 대결체제 아래에서 공 산주의 방위와 자유주의 진영 강화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일본의 존재방식이 규 정되었다. 4) 일본에 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가진 국가는 필리핀, 라오스, 캄보디아, 인도네 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네델란드, 영국, 미국으로 한정되었다. 이 중 미국, 영국 등 연합국은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였고,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배상을 요구하지 않 았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만 배상협정 을 체결하였다. 최대 피해자지만 정치적 4) 이원덕, 「일본의 전후 배상외교에 관한 고찰」, 『동북아역사논총』 22, 2008,16쪽.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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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문제로 협상에 초청받지 못한 중국과 대만, 한국과 북한은 개별적인 교섭을 해 야 했다. 일본은 경제협력방식을 한국에 제안하였고, 박정희 정부가 수용하였다. 경제협 력방식은 재산청구권 항목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변제하는 방식을 배제하고 무 상, 유상의 총액자금을 공여함으로써 재산청구권의 권리를 완전 소명시키는 방식 이다.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과 더불어 ‘한일 청구권·경제협력 협정’을 맺었다. 전쟁의 최대 피해자인 중국은 1972년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하면서 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 대만이 포기한 배상청구권 포기를 계승한 결정이었다. 일본이 중국에 대해 제공한 장기적이고 천문학적인 경제개발원조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은 현재 유일하게 북한과의 전후처리만 남아 있다. 일본의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배상만을 고집하며 강제노동자, 종군위안부 등 전 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개인에 대한 보상을 철저히 외면해왔다. 최근까지 부단히 전쟁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해온 독일과 상반된 모습이다.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잇따른 각국 간 배상협정을 통해 배상 및 청구권을 지불했을 뿐, 피해자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보상에는 일체 응하지 않는 원칙을 견지해 왔다. 일본 정부의 이러한 원칙하에 수많은 아시아의 전쟁 피해 희 생자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 제기해 왔다. 5)
전쟁 재발을 위한 평화교육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도쿄 전범재판이 열린 재판정은 오늘날 똑같이 박물관· 기념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전시물과 내용은 다르다. 독일은 반성과 교육을 일깨우는 반면, 일본에는 복고와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이것이 과 거청산에 대한 두 나라의 입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독일 빌리 브란트 수상에 이어 콜 전 총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1989)에서, 슈뢰더 전 총리는 부헨발트 유대인 수용소(2005)에서 참회했다. 독 일 다양한 교육기관은 나치시기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정당과 지방 자치정부는 5) 이원덕, 위 논문, 32쪽. <표>일본의 동남아 4국에 대한 배상, 일본의 준(準) 배상은 같은 논문 25~26쪽을 재인용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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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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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를 막론하고 나치 범죄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각종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학계는 다양한 기억 문화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독일 콘스탄츠 대학 알라이다 아스만 교수는 “청산은 국가 간 경계 넘어 유럽이 공유하는 경험으로 간주되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은 유럽공동체의 정체성 형 성에 근간을 이룰 것“이라고 밝혔다. 많은 전문가들에 따르면, 일본 사회에는 소수 군부 지도자에 대한 처벌로 종식 되었던 도쿄 전범재판과 함께 전쟁책임 문제는 본질적으로 청산되었다는 공감대 가 형성되어 있다. 의식 속에는 원폭투하의 희생자라는 의식까지 자리 잡고 있다. 일본 범죄는 한반도와 중국 등 먼 지역에서 자행되어 죄의식이 희박한 반면, 일본 영통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인해 피해자 의식이 형성되었다 는 것이다. 때문에 과거에 대한 반성은커녕 1955년부터 교과서 왜곡을 본격적으로 시작했 다. 패전을 선언한 8월15일을 ‘종전 기념일’로 미화하고, 2007년 이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공식 적으로 신사 참배에 나섰다. 아베총리는 2012년 선거 과 정에서 일본의 식민지 침략과 지배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수정하겠다고 밝혔 다. 급기야 일본 정부가 전후 조치의 산물로 탄생한, 전쟁과 군대 보유를 금지하고 있는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박진완_「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의 설립에 관한 법률을 통한 국가사회주의시대의 강제노동자에 대한 배
상에 대한 검토」, 『세계헌법연구』 19-1, 2013. · 유지혜_「상반된 2차대전 ‘전범재판’」, 『중앙일보』 2013. 7.11. · 이진모_「두 개 의 전후-서독과 일본의 과거사 극복 재조명」, 『역사와경계』 82, 2012. · 이원덕_「일본의 전후 배상외교에 관한 고찰」, 『동북아역사 논총』 22, 2008. · 전중굉 외_『기억과 망각, 독일과 일본, 그 두 개의 전후』, 이규수 역, 삼인, 2000. · 정현백_「글로벌 시각에서 본 과거청산의 의미」, 『역사비평』 93, 2010.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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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님을 알 때, 더 단단해졌다
2014년 가을 · 겨울 과거청산 동정 신명철
2014년은 세월호 참사 투쟁과 이내창의 이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 진상을 밝히는 기 억투쟁에 앞서, 오늘 우리가 바로 서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한 해 동안 고민하고 실천하였다. 간 략하게 요약한다. 8월 15일 이내창 이장은 기념사업회의 실력과 마음들이 모여, 무사히 잘 치를 수 있었다. 교황 방문과 겹쳐 과거청산 관련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을 보내왔다. 그 긴박한 순간에도 이천민주화 운동기념공원까지 찾아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대신 올린다. 이장 이후에는 세월호특별법 제정과 진 상조사위원회 설립을 위한 준비에 집중했다. 특별법은 우여곡절 끝에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유족들이 수 락하는 과정을 안타깝게 지켜보았고, 이석태 변호사의 결단으로 조사위원회의 구성도 가능해졌다. 현 재 위원회설립준비기획단이 구성되어 파견 공무원과 시행령, 직제 등 규칙, 인선 등의 내용을 두고 협의 중에 있고, 1월 19일 위원회 출범을 목표로 일을 하고 있다. 이제 세월호 투쟁은 2단계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진상규명은 국가기구의 몫이 되었고, 위원회에 참여한 민간 위원과 조사관들의 분투를 기대한다. 위원회와 시민단체, 유족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좋은 결과 가 있기를 기대하고, 지원과 감시의 역할을 놓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할 것이다. 과거청산과 관련하여 2014년 하반기에 진행된 일들을 꼽아본다. 10월 20일에 한국전쟁유족회 창립 50 주년 기념식이 있었고, 11월 2일에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하재완 열사의 이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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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모의재판 형제복지원 사건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비극적 이고 파탄적인 인권침해 사건이다. 현재 국회에 특별법안이 발의되어 심의 중에 있고, <한겨레신문> 등에서 심도 깊게 다 뤄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바 있다. 형제복지원 대책위의 끈질 긴 노력의 결과이자, 성과다. 한편, 대책위와 인권법학회 회원 들이 예비 법조인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이 바로 2014년 9월 29일 건국대학교 모의법정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모의재판>이다. 모의재판을 준비한 사람들은 형제복지원 사건을 효과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리면서도 이 사건 피해자들 의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사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 하였다고 한다. 제목은 “형제복지원 국민법정-끝나지 않는 악몽을 고발합니다”이다.
과거청산 내부 토론회 현재까지 과거청산 과제는 역사정의실천연대 과거사특위가 중심이 되어 수행해왔다. 과거사특위는 시 민단체의 활동가와 연구자, 전직 조사관, 추모·기념사업회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연대 단위이다 보니 한계가 많다. 구성원의 자발성에 의지해 일을 만드는 사람 중심으로 풀어왔고, 귀속력 또한 약할 수밖에 없다. 2013년부터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기 위한 조직개편 논의가 있어 왔고, 집중할 수 있는 구성과 강 제력 등이 지속적으로 요구되고 논의되었다. 대부분 과거청산 과제에 10여 년 이상 매달리고 있는 단체 와 활동가들이지만, 과거청산의 과제가 외연을 확대하지 못하는 한계가 내부 모순으로 드러나고 있는 형편이다. 2014년 봄에 이러한 문제를 재논의하면서 전환을 모색하던 시기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모두 세월 호 참사 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국회에 발의된 과거사특별법은 뒤로 미루어졌고, 조직개편 논의도 잠복해야 했다. 하지만 휴면 상태에 들어간 것이 아니니, 소멸시효 등을 주제로 하는 토 론회를 조직하는 등 세월호 투쟁 과정에서 만나고, 논의하고, 모색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세월호 싸움 에 전력을 다해야 하지만, 외연을 확대하고 내용을 채우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동의 가 있었다. 그리고 어렵게 내부 토론회를 성사시켰다. 2014년 11월 13일 법무법인 한결 회의실에서 관련 활동가, 변호사, 연구자 등 20여 명이 모여서 조직개편과 발전 전망을 두고 자유로운 토론이 있었고, 2015 년부터는 사업계획을 세우고, 매월 정례 세미나 등 연구와 실천 사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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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 보고대회 한국전쟁 민간인희생 1차 유해발굴 보고대회가 12월 2일(화) 늦은 3시, 신촌 다래헌에서 열렸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지난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10 여 일간 진주군 명석면 용산리 일대를 발굴했다. 39구의 유해 와 카빈소총 탄피 등 82점의 유품이 나와 발굴지 옆 컨테이너 박스에 임시 안치했었다. 보고대회는 <1차 공동조사 보고서>를 제작·발표하고, 2차 유해발굴을 위한 대상지를 선정, 발표하는 자 리였다. 2차 유해발굴 대상지는 경주, 대구, 고양, 전주 등으로 2015년 1월에 추가 답사를 해 최종 발굴지 를 확정하기로 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장을 맡아주신 박선주 교수 등에게 감사패 와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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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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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지역
농장
주문
물품
1월
2월
3월
4월
딸기 딸기잼 현미, 백미 감자 대학 찰 옥수수 참깨, 참기름 고춧가루 토종 찰 옥수수 땅콩 들깨, 들기름 고구마 수세미즙 메주콩, 서리태콩 예약주문-재배-배송 대학찰옥수수 유기농설탕에 절인 오미자 무시래기, 무말랭이, 무차 무차 사과(홍월) 사과[후지(부사)] 사과생즙 현미, 백미, 찹쌀, 찹쌀현미 고춧가루, 된장 토마토 감자 유기농설탕에 절인 오미자 고구마 절임배추 메주 자연산 송이, 능이, 잡버섯 예약주문-재배-배송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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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림이네 무차 무말랭이 무시래기 온새미로농원 딸기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1병(700g)(딸기75%,설탕25%) 3월부터 가능합니다. 연중(10, 20kg) 10, 20kg 일주일 가량(30개/한자루) 소주1병/360ml 500g/1근 단위 9월 중순 1kg 단위 말일경 소주1병/360ml 월초 10kg 중순(50포 한박스) 월말(1kg단위) 1자루/30개 10kg 무시래기+무말랭이+무차 (각150g씩)=25,000원 무차 300g 25,000원 홍월 수확 후지(부사) 수확 연중(1~20kg 포장가능) 연중 5~10kg 포장 5~10kg 포장 10kg 5~10kg 5~10kg 반말~한말 자연산 송이, 능이, 잡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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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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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동정 + 페북동정
책을 보면서 눈물이 난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자신을 ‘벌레 같았다’고 말한 연남동 서서갈비 사장 이대현씨의 말은 그 화려한 역사 속에 담긴 한 개인의 험난하고 비참한 삶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물론 그것을 옮겨 적은 솜씨는 박찬일 세프의 것이었다... 박찬일님이 공유한 정동현님의 신간 ‘백년식당’을 읽으며 11/21
누님이 보내준 대봉감을 베란다에 놓고 일주일쯤 두웠더니 홍시가 됐다. 그 홍시를 냉동실에 꽁꽁 얼렸다 꺼네니 하얗게 서리가 생겼다. 2시간쯤 이렇게 두면 홍시 샤베트가 된다. 세상에서 이보다 맛있는 디저트가 없다. 감사합니다. 김산환 11/20 끈덕지게 어깨동무
100
아무 것도 낚지 않으면 어때..... 낚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정보영 10/23
이인식 선생님과 두 시간 걷고, 쉬고, 느끼고 신명철님의 ‘우포의 아침’ 11/23
우리나라 15주년 공연 한선희 이내창기념사업회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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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함께하니 당당해졌다
회계결산보고 월
구분
출금
2013년 이월 회비
1월
499,540
1,210,000
엽서포스터제작
263,640
이장관련식대 외
516,010
이종남추모위원
50,000
근조기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300
소계
추모연대회비
50,000
4월잔액
소계
208,300
499,540
83,000 4,442,650
544,020
추모연대회비
5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소계
70,000
열사달력/양말
330,000
5월잔액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000
소계
400,000
5월
회비
668,460
이자
523
624,180
결산이자
27,713,072 6월
3,211
근조기
25,000
추모연대회비
5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이자세금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000
소계
소식지발송비
665,750
6월잔액
포스터
150,000
회비
청소아줌마지원
30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300
강연회 외 근조기 사진전지원
1,000,000 73,000
7월
1,000,000
48,000 70,300
소계
184,000
7월잔액
이장관련식대
292,000
회비
3,834,750
3월잔액
668,983
추모연대회비
24,547,305
회비
549,140
8월
574,470
100,000
100,000
627,391 21,659,746
한연우회장 부조
표석장학금지원
소계
460 95,460
근조기
지원탈락단체 선물
544,020 21,127,815
회비 749,220
549,140 20,653,795
회비
27,363,852 749,220
입금
어깨동무 인쇄비
40,000
4월
출금
2,000,000
박형록포상
2월잔액
4월
구분 후배단체지원
48,000
회비
3월
월
근조기
1월잔액
2월
입금 27,072,612
574,470 22,163,916 564,230
5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000
어깨동무 편집비
300,000
장준하선생부의
300,000
어깨동무 원고료
10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근조기
123,5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000
이장관련
7,747,300
끈덕지게 어깨동무
102
월
8월
구분
출금
어깨동무 발송 외
714,510
어깨동무 제작비
1,260,000
근조기 제작
160,000
염습사진프린트
100,000
준비위 회의비
154,000
소계
10,729,310
8월잔액
9월
20,000
감사선물사과대금
336,000
소계
406,000
5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20,000
범추모제기금
200,000
추모연대양말구입
330,000
49재단 주점 후원
100,000
소계
700,000
10월잔액
20,000 105,000
소계
175,000
11월잔액
12월
이내창기념사업회
103
534,290 645,321
20,000
우종원열사부조
100,000
계승연대 후원
100,000
소계
270,000
12월잔액
10,604,270
50,00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안인숙 자동이체 신성호 김산환 백기욱 정순호
내창-안녕
22,680,586
회비 추모연대회비
박응진 서정헌 이광희 안명숙
황광원 원순재 서병훈 김태호
50,000
총장, 처장 선물
김성희 박지훈 김현동 이주현
정원옥 김산환 강동길 고철주
534,29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곽현희 신명철 정보영 이태경
김현숙 홍미숙 김형구 박응식
22,321,296
회비
고재영 박희성 강혜연 이남영
이영은 우유섭 조형준 박성용 824,190
10,000,000
추모연대회비
김기수 최호식 델리후레쉬
이상재 구은경 김학진 노병진
604,270
큰형님
11월
564,230
12,417,026
회비
추모연대회비
김용수 구혜영 박철민 조환준
50,000
9월잔액
10월
박성훈 권향숙 이동희 이민진
824,190
수도권추모연대회비
내 마음이 편해지는 길 cms
11,998,836
회비 추모연대회비
입금
645,321 23,055,907
추모연대 cms 이혁승 노민옥
여기에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보태 주세요. 자동이체 및 후원 계좌입니다.
국민 0250 - 1036 - 8426 추모사업회 (정원옥)
나누세요 담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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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fe.daum.net/19890815 • naechang.lee@gmail.com
함께 만들어요. 하나, 2015년 봄 · 여름호 편집위원 되기 자주 안 모입니다. 회의는 짧게, 뒤풀이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일은 찾아서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합 니다. 느릿느릿 갑니다. 끈덕지게 함께 갈 열의와 책임감이면 충분합니다.
l 찍은 날
2015년 1월 19일
l 펴낸 날
2015년 1월 23일
l 펴낸 이
강내희
l 펴낸 곳
이내창 기념사업회
l 연락처
사무국장 이주현 010-3207-8113
cafe.daum.net/19890815
둘, 기고하기 어떤 형식과 내용의 글이라도 좋습니다. 나누고 싶 은 생각,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 소소한 일 상의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 음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회원 자녀의 기고에는 소 정의 원고료가 지급됩니다.
김선주, 서병훈, 조환준, 김경주, 이원근, 정원옥, 백기욱, 신성호가 함께 만들었습니다. 인터뷰와 표지 및 내지 그림을 허락해주신 장 순복 님과 원고를 보내주신 한국전쟁유족회 공동대표 정석희 님을 비롯해 고상현, 신주욱, 조종국, 노민옥 님께 감사드립니다. 노용 헌과 사진집단 현장이 이내창 열사 이장 관련 사진을 정리해주었습니다. 제호와 마침로고 및 표지 디자인을 김경주가 하였고, 편집 은 강지우가 수고해주었습니다. 인쇄는 상지사, 발송은 신성호가 애써주었습니다. 온라인 소식지 관리는 박형록이 담당합니다. <끈 덕지게 어깨동무>는 naechang.kr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밴드<묻지말고 응답해라 의혈중앙>을 통해 근황을 서로 나누셔도 좋습 니다. 페이스북 담벼락의 사진과 글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회원 여러분과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는 회원들 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매번 그랬지만, 이번호는 더 많이 늦어져 죄송합니다. 하지만 끈덕지게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