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덕지게어깨동무 2015 봄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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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 기념사업회 2015 봄·여름호


목차

004

006

010

여는 시

권두칼럼

포토에세이

산불감시원

협동에 대한 생각

미리 보는 현장 30년

성백술

유영우

노용헌

020

025

031

기획1

기획1

기획1

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

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

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

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은?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와 경희민주기념사업회

연세대 이한열 기념사업회

편집부

조환준

정원옥

038

050

062

어깨동무가 만나다1

특별기고

어깨동무가 만나다2

중앙대학교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해직교사 사반세기, 교육노동자 정진후

강곤이 꿈꾸는 삶, ‘현장을 살다’

이원근

강남규

정원옥

071

081

085

기획2

기획2

생각하기

91년 5월을 다시 생각하다

91년 5월을 다시 생각하다

91년 5월의 죽음들과 그 흔적

24번의 1991년과 어떤 배신

남미 과거사 청산 남미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편집부

박형오

서병훈


092

094

096

째려보기

째려보기

째려보기

박성용의 클래식 이야기

노인을 위한 삶은 무엇인가 Being Mortal을 읽고

공연소식

박성용

이홍열

조형준

100

103

105

함께하기

나누고더하기

나누고더하기

2015년 봄·여름 과거청산 기록

계절마다 바로바로

회원동정 + 페북동정

신명철

백기욱

백기욱


여는 시

산불감시원 성백술

어쩌다 나는 세상을 떠돌다 이 산골 구석에 들어와 살고 있는지 세상의 부귀영화 모든 영광이 서울에 있다는데 나는 어쩌자고 공공근로 비정규직 산불감시원이 되었는지 세상을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다던 친구의 말 아직도 귓가에 빙빙 맴도는데 가슴은 산막리 골짜기 물처럼 차갑기만 하다 산불은 크게 시작되지 않는다 담배꽁초, 똥 묻은 휴지 조각, 라면 봉지 논두렁 밭두렁 태우던 불씨 하나도 산기슭에 옮겨 붙으면 사나운 들짐승이 된다 불길은 삽시간에 마른 낙엽을 태우고 불어오는 골바람을 타고 무서운 기세로 계곡과 능선을 건너뛴다 상황 발생, 상황 발생…… 화염이 치솟고 산불감시원의 무전이 고막을 때리면 각 읍면사무소, 군청에 비상이 걸리고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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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차를 비롯한 온갖 차량이 산기슭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들 때 산불 진화대원들은 물통을 지고 산을 기어오르고 소방 헬기가 불길을 향해 날아오른다 모든 것이 검게 타버린 세월 시커멓게 죽어버린 나무들의 상처 고사목은 십자가처럼 서 있고 습기를 잃어 메마른 이파리들이 사그락거리지만 봄이면 까만 땅속에 꼼지락꼼지락 다시 뿌리를 내리는 나무들 새싹을 내미는 작은 풀꽃들 다시 시작되는 생은 얼마나 황홀한가

성백술 형의 처녀시집 『복숭아나무를 심다』(시와 에세이, 2015)에 수록된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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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에 대한 생각 유영우(논골신협 이사장)

얼마 전 ‘협동조합 청소년 캠프’에 특강을 맡게 돼 충남 홍성을 다녀온 적이 있는 데, 요즈음 우리 사회의 주요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협동조합과 사회적경 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주로 관련 이해 당 사자들, 다시 말하면 주로 어른들과 치열하게 토론이나 논의를 해온 경험은 있어도, 청소년(중학생)들과의 이야기 나눔은 처음이어서 어떻게 나의 생각을 잘 전달해 줄 수 있을지가 매우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막상 강의 내용을 정리하다보니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협동조합이 왜 중 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현대사회가 갖고 있는 다양한 문제점 을 이야기하면서, 그 대안으로 협동조합의 장점이 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쉽게 설명해야 하는데, 문제는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병폐들이 결국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문제들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죄 지은 놈이, 아직은 세상의 때가 묻지 않고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 는 아이들한테, 너희들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망쳐놓은 지 금의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곤혹스러웠던 것이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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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아이들은 각자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현시대 의 암울함을 생각하면 장차 그들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기에,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 는 인생의 선배로서 또는 부모로서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너무나도 미안함에 가슴 한편이 무너지며 아려왔고,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현대사회는 산업화 사회 이후 자본주의의 지배하에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데, 특히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오직 일등만이 살아남는 경쟁 주의가 팽배해 있고, 경제적인 잣대로 사람의 인격을 결정하는 저속한 물질만능주 의에 의하여, 오로지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극 단적인 이기주의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또한 심각한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 문제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현시대 의 상황을 아이들한테 이야기하였더니, 자기들도 잘 알고 있다는 대답이 되돌아왔 다. 너무나도 민망하여 진심으로 아이들한테 미안하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 었다. 청소년 캠프에서의 아이들과의 기억 위에, 스크린에 오버랩 되듯 시공간을 과거로 되돌려 26년 전 이내창열사가 살았던 그 시대로 되돌아가 보면, 그 당시 또한 암울 함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강산이 두 번 이상 변했을 26년이 지난 지 금의 세상도, 여전히 이내창열사가 살았던 그 시대와 같이 본질의 문제에서는 변한 것이 없고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분석하며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까? 미래의 희망인 아이들을 생각하면 더욱 초조해지고 성급한 마음이 앞선다. 지 금의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등등의 질문을 스스로 수없이 던져본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병폐와 문제들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의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가장 기초적이고 본질적인 사람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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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칼럼

의 관점에서 출발하면 ‘협동’이라는 단어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체 또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하느 냐에 따라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도 하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본래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서로 상부상조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부상조의 본성을 망각하며 지금까지 살 아왔다. 특히 18세기부터 본격화된 산업화 사회는,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을 자본에 종속시키며 물질주의, 개인주의에 의한 자본 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자본주의 발달은 인간의 본성을 피폐화하고, 빈부격차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양극화 문제를 야기시키며, 사람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자본 중심의 사회현상 을 고착시켜 왔다. 협동(協同)의 사전적 의미는, ‘서로 마음과 힘을 합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통의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협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다. 협동의 본질은, 그 누구로부터도 강요받지 않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개인 의 관계이고 연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목적은, 다른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 닌 자유롭고 평등한 개개인의 자유와 자립을 위한 것에 기반한다. 그리고 출발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필요와 욕구 때문이 아닌 오로지 나와 너의 필요와 희망을 담아내는 데서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과 몸이 함께 움직이는 방식으로서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 는 이타심이 매우 중요하게 고려된다. 또한 단순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서로에 대한 존중과 나눔이라는 철학이 함께 동반되어 성장되 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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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하는 ‘협동’은 단순히 ‘마음과 힘을 모으는 것’ 뿐 만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며, 그 무엇보 다도 자연스럽게 사람을 중심으로 사고하기에, 살맛나는 세상이 되기 위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품성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망각되고 오로지 권력과 부에 집착되어 아귀다툼이 난무하며, 세 상의 기본적인 도리마저 상실된 세상이지만 새로운 희망을 품어내는 출발은 결국 사람이기에 여전히 사람에게 희망을 가져보며, ‘협동’을 통한 ‘더불어 함께 살아가 는 공동체’를 다시 생각해본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라고 한다. 이는 머리로 생각 하는 것보다, 가슴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성이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 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가슴보다 머리로 생각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 이제는 모든 사회적관계가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따뜻하게 품어내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쉽지 않지만 머리보다는 진정성 있는 따뜻한 가슴으로 함께 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또한 이제는 ‘경쟁하는 사회’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으로 ‘협동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요즈음 날로 확산되고 있는 협동조합운동이 건강하게 성장 발전하 여, 우리 사회를 ‘협동하는 사회’로 변화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한다. ‘협동’의 출발은 각각의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따뜻한 가 슴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며, 살맛나는 세상이 우리 모두의 노력 으로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해본다.

유영우 논골신협 이사장(60세)은 1993년 서울 성동구 금호동· 행당동· 하왕십리동 지역 재개발 당시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빈민 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이끈 주역이다. 논골신협은 1997년 임시 거주시설에 살던 330여 명 철거민들이 매일 조금씩 모은 출자금 3억 원으로 출발해, 2013년 기준 자산규모 270억 원, 조합원 4000여 명의 신협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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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미리 보는

현장 30년 노용헌

사진집단 현장이 30주년을 맞아 출판 및 전시를 기획한다. 사진학과 내 소셜 다큐 멘터리(social documentary)를 지향하던 현장은 이 지난 30년을 어떻게 기록했 는지, 되돌아보고자 기획하게 되었다. 그간 많은 선후배들이 현장을 거쳐갔고, 재 학시절 사회에 대한 고민들, 사진에 대한 고민들, 수많은 고민들을 여러 선후배들과 함께 나누었고, 지금도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무엇을 기록하였는가? 과동아리로서 현장은 1985년 출범하였고, 수많은 선후배들을 배출했다.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이 이번 출판 및 전시를 통해서 역사의 현장을 담은 사진들을 정리, 30년을 되돌아본다. 30년이라는 현장의 역사는 좁게 보면 현장의 역사이지만, 넓게 보면 대한민국의 역사이기도 하다. 항상 현장은 대한 민국의 역사적 현장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가 없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도 현장은 물고기의 물과 같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현장에 있어야 하며,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 때만이 사진가는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현장은 현장에서 단련된다. 역사의 현장에 서 늘 사진가는 카메라를 들고 기록해왔다. 장성백88 <내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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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83 <철거지역> 류기남83 <시위> 양종훈84 <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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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85 <무량 스님> 이동환85 <선거 유세장>

사진집단 현장은 그런 의미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지향해야 될 점을 내포하고 있다. 현장을 항상 기본으로 하고 있는 사진가는 그 현장에서 숨쉬고, 느끼며, 고민 한다. 그리고 사진으로 그 역사의 현장을 함께 한다. 사진가에게 있어서 역사의 현 장은 기억을 넘어 기록의 현장이 된다. 사진기자들에게 있어서 현장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책에서 공부된 것이 아니라, 아마도 현장 경험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사진기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현장을 이해하고, 판단하며, 실천한다. 우리 시대의 삶의 현장, 고통받고 소외받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 그 모든 사회문제 들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은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갈 때만이 다 양한 목소리와 본질에 더욱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사진의 형식적인 면도 현장의 사진을 어떻게 표현할지, 그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담을지 하고, 진지한 고민 속에서 사실(fact)에서 단련되고, 발전될 것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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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박상후86 <온산>

변명환85 <수몰지구>

이규철87 <군대 사진전>

노용헌88 <광우병 춧불>

송정근89 <강경대 열사>

남윤중90 <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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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93 <노무현 추모제> 유수94 <광우병 촛불>

사진집단 현장은 85년 5월 교내 예술대 로비에서 창립전을 한 이후, 87년 현장 작 품집 1권(김성수, 변명환, 조승래, 서원, 이동환)과 다음해 작품집 2권(류기남, 이 동환, 서헌강, 조승래, 변명환, 김성수)을 발간했다. 매년 방중작업과 끊임없이 전 시를 해왔다. 89년 민중의 땅전 등 교내 기획전시와 함께 각 개인 구성원들의 개인 전 또한 활발하게 진행해 왔다. 올 1월 30일 방배동 ‘사람과 숲’ 사무실에서 첫 현장 30주년 관련 기획회의를 가 지고 현재까지의 족적을 되돌아보았다. 현장의 회원은 144명으로 이외 많은 사람들 이 거쳐갔다. 30년의 시간동안 수많은 사진들이 잘 보관되어 있는 것도 있었고, 세 월의 풍파에 사라진 자료들도 있었다. 이사를 가면서 원저작자의 필름도 없어진 경 우도 있었고, 디지털로 전환된 시기에 디지털 백업된 하드를 통째로 날려버린 것들 도 있었다. 이러한 많은 자료들을 추리고, 출판은 2권으로 기획했다. 1권은 “스무 살, 현장을 보다!”이고, 2권은 “서른 살, 현장의 이야기”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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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한향란94 <광우병 촛불>

김성진97 <청계천>

유진경97

윤종규00 <세운상가>

형지은99 <황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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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01 <태백>

이재각03 <용산참사>

김재연08 <’11년 강정>

박정훈07 <’09년 노무현추모제> 김동혁10 <두물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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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1권은 20대 청년이 기록한 사진작업 위주로 편집하였고, 30주년 관련 자료집의 형태를 5년 단위로 구분하여 기획하였다. 85년~90년은 현장작품집 1권, 이내창 열사 사진전 91년~95년은 군대사진전, 5월 광주 사진전 96년~2000년은 마찌꼬바 사진전, IMF 사진전 2001년~2005년은 변화하는 태백, 월드컵의 이면 2006년~2010년은 용산 Squat 사진전, 두물머리 사진전 2011년~2015년은 밀양 사진전, 강정 사진전

2권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매체작업을 진행했던 각 개인들의 작업, 그리고 사진과는 별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잡지 형태로 기획하 려고 한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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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도 현장 고사 교내전시 현장 MT 현장 동아리방

현장의 시위참여

위 두 권의 책은 사진집단 현장의 30년 역사를 정리하고자 기획하였으며, 144명 의 회원들이 저자가 되어 함께 만드는 책이 되고자 하였다. 또한 전시도 함께 진행하 려 한다. 대학생활을 보냈고, 출발점이 되었던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예술대 교정 에서 올 10월 말 경 현장 30주년 기념 사진전을 열고, 졸업한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 여 지난 30년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전시는 1층에서는 현장 30년史에 대한 사진전이며, 2층에서는 故 서원(85) 선배 의 유작전을 연다.

노용헌은 1988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입학. 사진집단 <현장>에서 활동했다. 현재 이내창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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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_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

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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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은? • 외부 사례 소개 - 경희대 이수병 기념사업회 - 연세대 이한열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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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_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

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은? 편집부

2014년 8월 14일~15일에 광주 망월묘역에서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 원으로 내창이형을 모셔오는 이장 행사가 무사히 치러졌다. 내창이형을 기억하는 안성·흑석 동문들 수백 명이 중대병원 장례식장에 모인 8월 14 일의 추모제는 흡사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이십여 년 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건네면서 밤을 꼬박 새워 이야기꽃을 피 웠다. 8월 15일에도 내창이형의 이장을 지켜보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수 많은 동문들이 달려왔다. 이내창기념사업회가 보유한 가장 우수한 자원 인 문화적 역량이 총집결되어 내창이형의 삶과 정신을 이어받자고 노래 했고, 새로운 안식처에서 내창이형이 조금이라도 더 편히 쉴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축제는 끝났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른 지금, 기념사업회는 해마다 반복적으로 해오던 사업들을 진행하면서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이완하면서 내실을 기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어 떻게 내실을 기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기약 없는 이완만 계속되고 있는 것이 지금 기념사업회의 분위기다. 지금이야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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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이장 이후의 기념사업회가 어떤 방향으로 사업을 해나가야 할지 다 각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이라는 주제는 너무 크고 추상 적이다. 2009년 내창이형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국가의 인정을 받으면 서 추모사업회에서 기념사업회로 개명하여 활동하고 있지만, 추모사업 회와 기념사업회의 사업 방향과 내용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해 서도 아직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기념사업회의 향후 방향은 몇몇 운 영위원들이 책상 앞에 앉아서 머리를 맞대고 그림을 그려서 해결할 수 있 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내창기념사업회의 전체 회원들과 기념사업 회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모으고 토론하고 합의해서 도출해야 할 문제다. 이 문제는 한두 번의 토 론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고, 비생산적인 논의만 지지부진 이어질 수 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내창기념사업회가 어 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내용들을 가질지에 대해서 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다각적으로 폭넓게 논의되어야 한다. 이내창기념사업회 회칙에 따르면, 기념사업회는 다음과 같은 목적과 사업내용을 갖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제1장 제2조(목적) 기념사업회는 1989년 당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 으로서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민중들 의 삶을 개선하며 민족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다가 안기부 등 당 시의 정부기관에 의해 살해당한 이내창 열사의 사인 진상을 규명하고 그 의 삶과 정신을 기리며 그가 염원하던 사회를 이루기 위한 일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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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_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

제3조(사업) 본 기념사업회는 위2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일을 한다. 1) 이내창 열사 사인진상 규명 2) 기념사업회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 행사와 사업 3) 타 추모(기념)사업회 및 민족민주운동 단체와의 연대사업

회칙은 이내창기념사업회가 “열사의 사인진상을 규명하고 그의 삶과 정신을 기리며 그가 염원하던 사회를 이루기 위한 일들을 한다”라고 목 적을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업내용은 대단히 막 연하게 설정되어 있다. 특히, 기념사업회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 행사와 사업이라는 2)항은 이내창기념사업회의 특성과 역량에 맞게 더 구체화 될 필요가 있다. 추모사업회에서 기념사업회로의 전환에 따른 목적이나 사업내용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도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편집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해 ‘기념사업회의 방향’ 에 대한 지속적인 기획기사를 싣고자 한다. 이내창기념사업회 회원뿐만 아니라, 내창이형을 기억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토론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양한 정보와 토론의 쟁점에 대한 공유가 이루 어져야 한다. 이번 호에서는 추모사업회에서 기념사업회로 전환한 다른 기념사업회의 사례로 경희대의 이수병기념사업회와 연세대의 이한열 기 념사업회의 경험과 현황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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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조사1 ::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와 경희민주기념사업회

항일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가 우리의 뿌리 조환준

사무실은 학교 정문에서 조금 떨어 진 곳에 있었다. 학교 풍광이 뛰어나기 로 소문난 경희대학교. 정문에서 내려와 홍릉의 과학기술원 쪽으로 향하는 주택 가 밀집지역 도로변 평범한 다세대주택 3층이 사무실이다. 이수병선생기념사업 회와 경희민주기념사업회가 같이 사용하고 있는 곳에서 상근 활동가 김 종욱 사무국장(사학 92)을 만났다. 경희대 민주동문회는 작년 법인으로 전환했다. 지금은 ‘경희민주기념 사업회’가 공식 명칭이다. 김종욱 국장은 2003년 졸업 후 당시 민주동 문회의 기획부장으로 활동했다. 2009년 말부터 전임 이창훈(지리 86, 현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의 뒤를 이어 지금까지 사무국장으로 활 동하고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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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_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

법인으로 전환한 배경이 궁금하다 장단점이 있는데, 우리 경우 장점이 많다고 여겨져 운영위 논의 를 거쳐 법인으로 전환했다. 법인으로 하면 무엇보다 회비를 납부 하는 회원들에게 사업회 명의로 기부금 영수증을 발행할 수 있다. 그리고 후배들에 대한 장학 사업도 안정적인 구조 속에 진행할 수 있다. 단점이라면 등록할 때 준비할 것이 많고, 매년 정부로부터 감사를 받아야 하기에 잔손이 많이 가나 익숙해지면 별 일도 아니 다. 많은 학교의 민주동문회가 법인으로 전환하고 있는 추세다. 성대가 가장 빨랐다. 성대는 2006년경에 법인으로 전환했고, 가 까이 있는 고려대도 2013년에 법인으로 전환했다. 회비는 몇 명 정도 내고 있나 매달 약 600명 넘는 인원이 회비를 납부하고 있다. 많은 학교의 민동과 민주기 념사업회가 대개 이 정도 한다. 우리 보다 더 많은 학교도 있다.

600명. 이내창기념사업회의 10배에 달하는 숫자다. 또 그만큼 쓴다 는 것이 김 국장의 얘기다. 상근 활동가만 사무국장 포함 3명이고, 사무 실 임대료가 1억 4천만 원이다. 상근자들은 민주기념사업회와 이수병선 생기념사업회의 일을 모두 처리한다. 기념사업회 내에는 학과나 단대, 동아리별로 지부가 있고, 지부장을 중심으로 운영위원회가 구성된다. 처음부터 회원이 많았나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웃음). 1988년 8월에 경희 민주동문회가 창립되었다. 당시 민족민주운동에 대한 헌신성이 요구되던 시기에 약간의 반강제성이 있었던 것으로 들었다. 예를 들면 3회 이상 회비 납부를 안 하면 제명하고, 소속 지부장 에도 책임을 묻는 등의 조치다. 그러던 것이 중요한 사업이 있을 때마다 회원들이 배가되었던 것 같다. 사업을 해야 하면 사람과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동문들에게 다가가기에도 수월했던 것 같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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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어떠한 사업을 하는가 1988년 창립 이후 크게 3가지의 장기사업목표를 설정했었 다. 첫째, 이수병 선생님 관련하여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사업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2005년 국정원 진실위에서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발표하고, 2007년 1 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2007년경에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에서 승소했다. 그래서 이 사업은 어느 정도 성과 를 남겼고, 이후 후속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둘째는 민 족문제연구소 설립과 친일문제 청산이다. 이것은 우리 민동 역 사와 관련있는데, 초대 민동 회장이 김봉우 선배(영문 70)다. 그 분이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을 겸임하면서 친일 청산에 적극적이 었다. 지금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많이 정착되었고,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 등 가시적 성과물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경희대학교의 뿌리 찾기 운동이다. 경희대 학교의 전신은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신흥무관학교’다. 이것은 신흥무관 학교를 경희대학교만의 역사로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 뜻과 역사 를 계승하겠다는 의지이고, 올바른 역사를 세우겠다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많 은 선배 동문들이 이 일에 적극 나서고 있으나, 재단과 학교 측과 문제를 푸는 일 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는 어떻게 출발하게 되었나 김봉우 초대 민동 회장이 민동과 함께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선배가 80년대 초에 수감생활을 한 적이 있다. 감옥 안에서 여 러 선생님들을 만났는데, 어느 날 어떤 분으로부터 “자네 이수병 선생이라고 아 나?” 하는 질문을 받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던 선배는 꾸지람도 들으면서 이수 병 선생과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곤 출소하자마자 바로 민주동문회와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를 만들고 민족문제연구소도 같이 출 범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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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_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

민동과 기념사업회는 어떻게 관계되어 있나 명칭은 다르지만 한 몸이라고 보면 된다. 사무국 3명의 상근일꾼이 두 조직 의 일을 같이 한다. 민동은 매월마다 정기 운영위원회를 하고 시의성 있는 사건 때마다 집회에 참여하고 소식지를 제작하면서 동문 회원들간의 소통을 유지하 고 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사업과 함께 추모식 에 참여한다. 고령(苦嶺) 이수병 선생은 일제 강점기인 1937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중 학 시절을 한국전쟁 속에서 보냈고, 1953년 4월 부산사범학교에 전교 4등으로 입학했다. 2학년인 이듬해 가을에 사회과학 학습모임 ‘암장(巖漿)’ 결성에 참여 하였고, 1956년 3월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하면서 부산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1년 수료 후 의령의 갑을초등학교에서 교사로 1년간 재직하다 1959년 당시 신 흥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이듬해 4·19혁명이 일어나자 민 족통일전국학생연맹과 민자통에서 활동했으며, 5·16군사쿠데타로 체포되어 7 여년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에도 민족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다가 군사정 부가 조작한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되어 1975년 4월 9일 ‘사법 살 인’을 당했다. 당시 선생의 나이는 38세다. 후배들이 선생의 삶을 기리기 위해 평전을 만들기로 했고, 선생이 처음 사회과 학 연구 모임에 참여했던 모임의 명칭을 따서 1992년 ‘암장’이라는 제목으로 처 음 평전이 발간되었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무죄 2005년에 민족문제연 구소에서 이수병 평전을 발간하였다. 장학사업은 언제부터 하였나 2009년에 이수병장학위원회를 구성해서 진행해오고 있다. 명칭은 선생의 호 를 따서 ‘고령(苦嶺) 이수병 장학금’이라 했고, 서울과 수원 양 캠퍼스에서 3명 씩 선정해서 1인당 2백만원씩 지급한다. 1천 2백만 원의 장학기금은 전액 유족 이 출연한다. 장학위원회에는 이수병 선생 부인 이정숙 여사와 선생의 동료이자 동지인 박중기 선생 등 4명의 어른과 기념사업회 회장, 대학노조위원장, 의료노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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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원장 등 학교 단체도 포함되어 있다. 절차는 공고를 내고 사무국에서 서류심 사를 해서 2배수로 추린 후 장학위원회에 상정한다. 서류심사에서는 자기 소개 서와 추천서만으로 심사하는데, 제출자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논 술한 서류를 주되게 심사한다. 매년 40명 가까이 신청하고, 3월 둘째 주에 장학 금 수여식을 한 후 장학생들과 유족, 이수병 선생 지인들, 민동과 기념사업회 일 꾼 등이 같이 4월 8일 있는 이수병 선생 추모식에 참여한다. 추모식은 매년 묘소 참배만 할 수 없어 대구경북 지역의 양민학살 유적지를 돌아보거나 노근리를 경유해서 올 때도 있었고, 진주의 문화단체 ‘큰들’과 연계 하여 문화행사를 갖기도 했다. 올해는 부인 이정숙 여사의 칠순 잔치를 겸해서 했다. 그간 어려움은 없었는지 선배님들이 가꾸어놓은 터전 위에서 하는 거라 별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민주 동문회의 사업이 관성화될 때가 좀 힘들긴 했다. 운영위원회, 수련회, 체육행사 등 뻔한 일상 사업과 그때 그때 터지는 시국사건에 참여하다 보면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일을 벌여나갔던 것 같다. 사업을 추진해야 사람이 모이 고, 또 돈도 모인다. 상근 일꾼 중에 2006학번 후배가 있다. 속된 말로 일부러 박 아 둔 거다. 그래야 2000년대 학번들에게 연락이 가고, 어떻게든 만나게 되니까 말이다. 또 민동이 관성화되거나 느슨해질 때 그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이수병선 생이었다. 인혁당재건위사건이 고문 가혹행위에 의한 조작이었음을 알려내야 했 고, 이수병 선생에 대해서도 알려야 했고, 이를 위해 다시 책자를 만들고 돈을 모 으고 하면서 기념사업회와 민동이 서로 상승 작용을 했다고 본다. 당면해서는 서 울캠퍼스 내에 ‘민주공원’ 조성 사업이 있다. 서울캠퍼스 교내에 있는 4.19 기념 탑이 있는데, 그 주변을 민주공원으로 조성해서 그 안에 이수병 선생 동상을 제작 할 계획이다. 또 사람과 돈이 필요하지 않겠는가(웃음). 이내창기념사업회에 한말씀 해달라 소식지 <끈덕지게 어깨동무>를 보면 상당히 부럽다. 매달 발간하는 우리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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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1년 2회 발간하지만 어쨌든 질적인 면에서 월등하다(웃 음). 감히 당부의 말씀은 가당찮고, 저와 동시대에 같이 대학 생활을 보낸 이들과 공유하고 싶은 게 있다. 92년에 대학에 들어와 소위 운동권으로 지내고, 2003년부터 민동 집행부로 생활하는 동안 인혁당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이수병 선생 의 삶이 명예회복 될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되더 라. 나도 거기서 놀랐다.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는 역사의 변 곡점을 분명 우리 시대에 갖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내창열 사의 사인진상규명도 반드시 될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그 믿 음과 희망을 같이 공유하고 싶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1주기 즈음이다. 마침 경희대 인근 외대 주변 에 사는 관계로 거의 매일 회기동 도로를 지나치게 되는데, 어느 날 갑자 기 이 지역 도로가에 노란 현수막이 질서 정연하게 부착되어 있었다. 세 월호 선체 인양과 시행령 개정,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작고 네모난 현수 막 말이다. 그런데 부착한 단체 명이 없다. 그 많은 현수막을 부착한 모 양새로 봐서는 분명 정부나 지자체, 아니면 어느 진보적인 정당에서 했 음직한데, 알고 보니 바로 경희대 민동에서 한 일이다. 그리고 회기역 앞 에서 매일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단다. 이렇게 그들은 역사를 조금씩 바 꾸고 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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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조사2 :: 연세대 이한열 기념사업회

기념사업회로의 전환: 이한열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정원옥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멀지 않은 주택 가 안쪽에 모던한 양식으로 지어진 4층 건 물, 이한열기념관이 있다. ‘운동화프로젝 트’ 전시회를 홍보하는 현수막이 한쪽 벽면 에 크게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한열기념관을 찾은 것은 지난 6 월 22일이었다. 이경란 관장과 문영미 학예연구실장이 반갑게 맞아주었 다. 추모사업회에서 기념사업회로 전환하게 된 계기, 기념사업회의 사업 내용을 중심으로 이한열기념사업회의 근황을 들었다. 이경란 관장(이하 이경란): 1997년 이한열 10주기 때 행사를 크게 하고 망했 던 적이 있어요. 그 때 빚을 많이 졌어요. 오랫동안 간사도 못 구하고 활동이라고 는 6월 9일 추모제하고, 7월 5일 묘소 참배 가는 것밖에 못했지요. 추모사업회 로는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2008년도에 장학 사업을 하기로 하고 2009년부터 ‘이한열장학금’을 주기 시작했거든요. 장학 사업을 계기로 추모사 업회 운영진이 다시 꾸려지면서 법인체를 만들자는 논의가 되었고, 2010년 법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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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으로 등록하는 과정에서 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로 토론을 했어요. 추모사 업회가 개인에 대한 추모로 한정된다면 기념사업회는 추모가 되는 대상보다 추 모를 하는 사람들에게 방점을 찍는 이름이다. 앞으로는 개인에 한정되기보다는 추모를 하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방점을 두면서 활동해야 하 기 때문에 추모사업회에서 기념사업회로 명칭이 바뀌어야 된다. 이렇게 의견이 모아져서 기념사업회로 법인을 만들게 되었지요. 문영미 학예연구실장(이하 문영미): 얼마 전에 ‘이한열기념비’ 를 새로 만들었잖아요? 원래는 추모비인데 이번에 기념비로 바 꾼 거예요. 어머니는 그 얘기를 듣고 되게 서운해 하시더라고요. 어머니에게 기념은 아들이 역사적 인물이 되어서 점점 더 멀어지 고, 추모는 아직도 그 사람을 슬퍼하고 기억한다는 느낌이신 것 같아요. 그래서 내 아들을 더 이상 추모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 못 내 서운하신 거예요. 우리는 그런 생각을 못한 거죠. 추모비는 작 았지만 한열이의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한 인물을 추모 하는 것 같은데, 기념비는 엄청나게 큰 돌덩어리에 숫자만 적혀 있고 한열이는 조그맣게 들어가 있으니까 어머니께서 우리 아들이 이제 돌덩어리 가 되어 버렸네, 하시는 거예요. 한열이를 기억해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섭섭하시고, 묻어두고 싶기도 하고 알리고 싶기도 하고, 유족의 입장이란 게 참.

이한열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추모사업과 기념사업은 주체와 대상에서 차이가 있다. 추모사업은 이한열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잊지 않으 려는 마음에서 전개된다. 자연히 열사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진다. 반 면, 기념사업은 이한열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해도 더 많은 사람들과 ‘함 께’ 그의 죽음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기 위해 전개된다. 그것은 이 한열의 죽음과 ‘6월 항쟁’의 의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라는 살아남 은 자들의 부채의식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러한 의미로 보자면, 추모 사업회에서 기념사업회로의 명칭 전환은 이한열을 잊지 않는 것을 넘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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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더 적극적으로 그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족의 입장에서는 열사가 더 이상 슬픔이나 그리움 이 아니라, 기억의 대상으로 역사화 되는 것이 서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추모사업회에서 기념사업회로 명칭이 전환된 이후 이한열기 념사업회의 사업 내용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이경란: 기념사업회 사업은 크게 다섯 가지 영역이 있어요. 첫째는 열사 추모에 관한 것, 둘째는 기념관 관리·운영에 관한 것, 세 번째 연대 사업과 연구 교육 사업이 있는데 이 부분은 심화 시키지는 못하고 있고요. 네 번째 가 장 활발하게 되고 있는 것이 장학 사 업이고, 마지막으로 조직 강화 홍보 사업이 있어요. 열사 추모 관련해서 는 연례적으로 해오던 일들이 있는 데, 여기에 추가된 것이 유물을 보존 하는 작업이죠. 그것이 박물관 등록으로 연결이 됐어요. 올해 같은 경우는 운동 화 복원 처리한 것 하고 기념비 세운 게 있고요. 대개는 사람들이 박물관을 한 번 만 가고 잘 안 가잖아요? 우리는 1년 동안 상설 전시와 개인 전시 두 번 해서 전 시회를 세 번 해요. 사람들이 여러 번 와도 그 때 그 때 다른 전시를 볼 수 있기 때 문에 방문객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추세예요. 문영미: 초등학생의 경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프로그램이 있어요. 우리 기념관하고 박종철기념관, 서대문형무소, 이렇게 가는 건데요. 우리는 문 열어주 고 협조만 해주면 그 쪽에서 다 알아서 하니까 꾸준히 오는 수요가 있죠. 이경란: 이번 가을엔 ‘보고 싶은 얼굴들’이라는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어요. 열 사 한 분하고 예술가 한 분을 연결해주는 거예요. 열사하고 유족, 작가를 연결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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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작가가 그 사건에 대해 공부하고 유족도 만나서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들어내 요. 이번에 여섯 열사가 선정됐고 여섯 분의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어주면 그것 갖 고 전시를 하는 거죠. 도록을 충실하게 만들고, 해마다 만든 도록을 모아서 한국 현대인물사가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에요.

최근 이한열기념사업회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사업은 기념관 운영과 전시회 기획이다. 이한열 기념사업회가 사무국 체 제로 움직이지 않고 관장과 학예연구실장이라는 박물관 체제로 운영되는 것 또한 전시사업이 가장 일상적이고 실질적인 사업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3 층 기획전시실에서는 올해 진행한 ‘기억과 보존Ⅰ: 운동화 프로젝트’가 전시되고 있었다. ‘운동화 프 로젝트’는 1987년 6월 9일 이한열이 최루탄에 피격 되었을 당시에 신고 있던 신발을 복원하고 보존처리 하는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미술품보존연구 전문 가가 세 달에 걸쳐 신발의 손상된 부분을 복원하고 보존처리했으며 그 과정에 얽힌 이야기를 전시회로 담아냈다. ‘운동화 프로젝트’ 전시회는 9월 25일까 지 진행되며, 4층 상설전시장에서는 이한열의 옷과 소지품, 책상, 애장품들을 관람할 수 있다. 이경란: 장학 사업은 세 가지 영역으로 하고 있어요. 1년에 두 번, 열 명 정도 에게 각 150만원씩 주는 일반 영역이 있고요. 그 다음에 한열이가 만화동아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한열만화사랑’ 장학금이 있고요. 마지막으로 연세대 교지에서 ‘이한열문학상’을 하다가 학내지원금이 줄어들면서 못하겠다고 해서 우리가 그 상금을 주기로 하고 이어서 계속하고 있어요. 장학 사업은 6년 정도 하면서 지금 은 매뉴얼화 되어서 규칙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어요. 장학금 수혜 대상은 우리 사 회 민주화에 기여한 자의 자녀, 사회적 약자, 깨어 있는 시민으로 활동하는 자, 사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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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적 활동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는 자예요. 그 학생들에게 권고하는 게 세 가지 가 있어요. 6월 9일 추모제에 참여해 달라, 깨어 있는 시민으로 살아 달라. 경제 활동을 하게 되면 이한열 기념사업회의 후원회원이 되어 달라. 1년에 20명 남짓, 3천만 원 가량 지급이 되고, 현재까지 115명에게 장학금을 줬어요. 그 가운데는 졸업하고 취업해서 후원회원이 된 사람들도 있죠. 이내창기념사업회가 지금 당 장 시작하기에 좋은 사업은 아마도 장학 사업일 거예요. 문영미: 이한열장학금의 경우 처음에는 동문 위주로 시작했지만 지 금은 전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해요. 이한열은 워낙에 국민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6월 항쟁이라는 사건의 상징이기 때문에 동문 위주의 사 업에서 끊임없이 확장하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이내창은 예술대 출 신이라고 하니까 거기는 예술상 같은 거 제정해도 좋겠네요. 이경란: 처음에 장학 사업 시작할 때 얼마를 모으면 몇 명까지 줄 수 있겠다, 라고 누가 계산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몇 명 정해놓고 일 하지 않겠다.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겠다, 바깥에 우리 이만큼 한다고 드러내기 위해서 스스로 힘들게 하는 것은 안 하겠다. 어디 보여주려고 크게 하려는 생각은 없어요. 문영미: 그럼, 누가 이렇게 일을 많이 벌인 거야?! 이경란: 그러게. 크게 안 한다고 마음먹고 시작했는데도 일을 너무 많이 벌여 서 죽을 지경이에요. 아마도 여자 둘이 주축이 돼서 일을 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디에 보여주려고 일해오지는 않았어요. 이런 마음이 길게 갈 수 있는 힘인 것 같아요. 문영미: 아기자기하게,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조금씩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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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_이장 이후, 기념사업회의 방향

전시회장을 꾸미는 것에서부터 기념관의 구석지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곳까지 두 여성 활동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다. 이한열을 떠올 리게 하는 상징들이 기념관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사무국 운영 방식 도 독특하다. 관장, 학예연구실장, 수장고를 관리해주는 학예사까지 전 체 활동가가 모이는 날은 월요일뿐이다. 관장과 학예연구실장은 이틀씩 만 상근을 하고 나머지 날에는 각자 개인적인 일들을 한다. 상근활동가 가 지치지 않고 기념사업회 일을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배려한 운영 시 스템이다. 이경란: 회원들을 위한 사업은 크게 없어요. 우리가 하고 있는 사업을 꾸준히 알리는 메일링. 우리 시대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일을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자 기 삶을 꾸려가면서 만 원을 내서 이 일을 굴러가게끔 하는 일이 회원들에게는 참 여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거고, 자신이 낸 돈이 헛되게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 인하면 되는 거죠. 큰살림이에요. 600여 명의 회원들로부터 받는 회비가 있고, 임대료 수입이 있고, 특별회비 내시는 분들도 있고, 클라우드 펀딩을 받기도 하 기 때문에 예산 규모가 작지 않죠. 올해 같이 운동화프로젝트를 한다 하면 또 내 시는 분들이 있고. 제가 이한열 기념사업회 통장을 화수분이라고 하는데,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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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 게 딱 필요한 만큼만 돈이 들어와요. 기념비 할 때도, 운동화 프로젝트 때도 딱 그 만큼만 들어왔어요. 문영미: 돈은 사업을 시작해야 모여요. 프로젝트 같은 것을 해야 모금이 되는 거죠.

유가족이 마련해준 공간이 있고, 회비를 내는 후원회원이 600여 명 에 이르고, 무엇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두 명의 상근활 동가가 있는 이한열기념사업회와 우리 기념사업회를 비교하면서 부러워 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 다만,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우리 보다 먼저 고민을 시작하고 다양한 시도들을 해온 이한열기념사업회의 경험은 충분히 참조할 만하다. 이한열기념사업회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추모사업회에서 기념사업회로의 전환은 명칭의 변경 문제가 아니다. 기 념사업회의 위상에 맞는 목표를 세우고 그에 부합하는 사업내용을 새롭 게 구상하고 실천해야 하는 일임을 이한열기념사업회의 사례로부터 배 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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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1

해직교사 사반세기, 교육노동자 정진후 김선주, 서병훈, 이원근, 정원옥 정리: 이원근 사진: 서병훈 인터뷰:

정진후는 1957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후에 교사가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학교 를 다녔으되 제대로 다닌 적은 없다”고 말한다. 적만 두었을 뿐 학생으로서의 본분은 잊고 지 냈다는 소리다. 그것은 교사가 되고서도 마찬가지. 사반세기를 교단보다는 차디찬 거리에서 풍찬노숙으로 살았다. 해직과 복직, 노동자와 교사로서의 등성이를 굽이굽이 돌다가 지금은 ‘의원님’ 소리를 듣는다. 지난 7월 21일 늦은 밤, 경기 안양시 흥안대로 434번 길에 위치한 후원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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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어떻게 만났나(첫 질문 치고는 이상 하지만 이미 이야기가 진행 중이었다).

야 답장이 왔다. 제대 무렵이었다. 그때 원주에서 운전병으로 군 생활할 땐데 친

군대 있을 때 만났다. 당시 복무기간

구랑 둘이 면회를 왔더라. 면회를 왔는

이 36개월이었다. 길고 혹독했다. 후반

데도 둘 중 누구인지 몰랐다. 편지 주인

기교육대에서 매일 집에다 편지를 쓰게

공이 누구냐고 몇 번을 물어도 배시시 웃

했는데, 난 정말 편지 쓸 데가 없었다. 아

기만 할 뿐 답을 안 해줬다.

무 소식 없으면 탈영 안 한 거지. 무슨 부 모님께 매일 편지를 쓰나. 내가 안 쓰니

막상 보니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단체로 기합을 받았다. 완전군장하고 연

수천 통 고백을 줄기차게 해놨는데 어

병장을 돌았다. 편지 할 데도 없어 서러

찌 마음을 한 번에 접을 수 있겠는가. 게

운데다 기합까지 받으니 힘들었다. 두 번

다가 여자가 많은 곳에서 봐야 이 사람

째 기합을 받으니까 옆 동기가 주소를 하

저 사람 비교를 하겠는데, 달랑 군 면회

나 쥐어 주더라. 여기다 보내라고. 그게

실에서 만났으니 예뻐 보일 수밖에. 제대

아내의 주소였다.

하는 날 서울 집에 찾아가 인사를 하고 는 밤새 술 퍼마시고 거기서 잤다.

인연이…… 좀 그렇다.

첨엔 답장이 없었다. 그래도 중이 고기

정진후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았다.

맛을 보니 절간에 빈대가 안 남는다고.

이른바 문제아였다. 고교를 자퇴한 뒤 군대

자대배치 받으니 편지질이 더 늘게 됐다.

를 다녀왔고, 그 뒤 어렵사리 검정고시를 거

명색이 문창과라고 뭘 쓰고 싶은 욕구가

쳐 1983년에야 대학에 들어갔다.

생길 때마다 대학노트 앞뒤로 빽빽하게 네 장 씩 써서 보냈다. 줄기차게 작품 쓰

학창시절은 어땠나.

듯 그렇게 써 보냈다. 말년에는 한꺼번에

내가 문중의 장손이었다. 장손은 도회

스무 통도 보냈다. 대학노트 네 장씩 스

지에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 해서, 초등

무 통이니 앞뒤로 총 160페이지씩 보낸

학교 5학년 때 광주로 보내졌고, 거기서

거다. 그런데도 답장이 한 통도 안 왔다.

자취를 시작했다. 발랑 까질 수밖에 없 는 구조였다. 도시를 나와 보니 밤에 잠

이내창기념사업회

039

그러니까 답장이 한 통도 안 왔다고?

이 안 왔다.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만화

물량공세가 그리 이어지니까 나중에

방에서 죽치고 살았다. 만화와 무협지,


어깨동무가 만나다1

된다. 제주에서는 귤 박스 만드는 작업 을 한 20여 일 하기도 하고. 막바지엔 학 교에서 자퇴 원서를 챙겨 보냈더라고. 제 발 알아서 관둬 달라고. 청소년기를 방랑으로 보낸 건가.

입대영장을 받아놓고 영광 불갑사에 딸려 있는 암자에 가 있었다. 20여 일을 있었다. 세상의 녹슨 때를 벗겨놓고 군 에 가려고. 그냥 갔다간 자칫 사고 칠 것 같더라고. 암자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대하고 나는 무얼 할 것인가. 세상에 그 두 개가 내 청소년기를 지배했다. 학

하고 싶은 게 하나도 없는데, 그나마 유

교에 가보니 재미가 있을 턱이 있나. 바

일하게 하고 싶은 게 딱 한 가지. 글 쓰는

깥세상에 재밌는 게 천지인데 수학공식

거였다. 그렇게 찍어놓고 군대에 갔다.

이 귀에 들어왔겠는가. 당시 조대부중 도서관에 만 몇 천 권의 장서가 있었다.

1979년이었나.

거기서는 또 소설에 푹 빠져들었고. 거

그쯤이다. 군대에서 격변기를 다 겪었

기 관리하셨던 선생님께서 아예 도서관

다. 79년 10·26부터 시작해 사북사태,

열쇠를 내게 맡기셨다. 수업시간에는 혼

80년 광주, 10·27법난을 차례로 다 보냈

자 도서관에서 놀고, 집에 오면 또 밖에

다. 광주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광

서 돌고. 조금 머리가 큰 다음에는 가출

주에 있었더라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을 일삼았다. 제주, 서울 뭐 이런 먼 데

군에서 무사히 보낸 거지.

로 다녔다. 군 제대 후는 어땠나. 돈은 어쩌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81년,

촌에서 등록금 받아오면 자취방에 짐

82년 학원에서 공부만 했다. 첫 버스 타

내려놓자마자 탕아처럼 돌아다녔다. 중

고 나가서 막차 타고 집에 돌아왔다. 입

고교 시절 학교를 아예 안다녔다고 보면

시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내가 대학 끈덕지게 어깨동무

040


들어갈 때는 영어가 선택이었다. 영어 대

생님들이 문예반에서 회의를 하고 있더

신 일본어를 선택해 치렀는데, 두꺼운

라고. 그래서 내가 담배랑 음료수랑 빵

책 하나 달달 외우고 거의 만점을 맞다

이랑 사다주고 오곤 했다. 그러다 대자

시피 했다. 남들은 국영수, 국영수 하는

보도 대신 써주게 됐고, 명색이 문학선

데 나는 국일수 때문에 대학엘 갔다. 그

생이니 틀린 문장도 바로잡아주고. 그러

리고는 대학 3학년 때인 85년에 군에서

다 싸움에 나도 모르게 휘말리게 됐다.

펜팔로 사귄 그 여성과 결혼했다.

성명서하고 대자보 대신 써준 것 밖에 없 었는데,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연락이 왔

우여곡절의 연속인데, 어떻게 교사가 됐나.

교직과목을 들어둔 덕분에 교사자격 이 있었다. 정작 첫 부임은 엉겁결에 이

더라고. 다음 학기부터 나올 필요 없다 고. 그게 말하자면 해고인 거지.

뤄졌다. 졸업하고 여성잡지에서 기자생

해고통고를?

활을 하고 있었는데, 연예인을 취재하다

그렇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오는데

물을 먹고 말았다. 난 너무 순진하게 그

갑자기 울컥 못가겠더라고. 이대로 가면

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불러주는 대로

앞으로 인생이 험악해질 것 같고 이렇게

받아썼는데 그게 전부 거짓말이었고, 그

순응하면서 복종하면서 살 순 없다 생

달에 다른 잡지에선 특종이 튀어나왔던

각이 들고. 그래서 다시 돌아가 교장 연

거다. 에라 못하겠다, 사표를 던졌다. 내

락처를 달라고 했지. 해고를 당하더라도

길이 아니더라고. 그 와중에 학교엘 가

이렇게 당하면 안 될 것 같다, 정식으로

게 됐다. 안양예고였는데 정교사도 아니

문제를 삼겠다고 했다. 1주일 뒤에 학교

고 시간강사였다.

엘 갔다. 마침 교무회의 날이었다. 사람 들은 내가 아마 잘 가겠다고 인사를 하

교사생활은 어땠나.

이내창기념사업회

041

러 온 줄 알았을 거다. 마이크를 잡고 떠

그냥 아이들하고 재밌게 잘 놀면 되

들었다. ‘이게 내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는 줄 알았는데, 여름방학 직전에 선생

모두의 문제다. 이 학교에 오래있고 싶어

들이 쑥덕쑥덕 하더라고. 그때가 이사

서가 아니다. 이런 형태로 쫓겨날 순 없

장이 전권을 휘두를 때였다. 사학비리가

다. 학교에서 인사 조치를 철회하고 내

아주 심했다. 족벌경영에 공금횡령까지

문제를 정식으로 처리해주기 바란다. 이

어마어마했다. 당시 징계위에 회부된 선

런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 해결


어깨동무가 만나다1

되면 그때 내 발로 나가겠다’ 고래고래

그래서 금강사 간다고. 그랬더니 금강사

소릴 질렀지.

는 왜 가냐고. 아니 내가 거기 가서 살려 고 그런다고. 그랬더니 이놈이 막 웃더

1988년 안양예고는 뇌물을 통한 인사청

라고. 거기 비구니 절이에요. 그냥 여기

탁 및 부당한 교권침해가 많았다. 시간강사

계세요, 그러더라고. 그 다음 날부터 졸

정진후의 해고통고를 기화로 20여 명의 이

지에 산장주인이 됐다. 어느 날 어떤 사

른바 문제교사들이 함께 일어섰다. 불합리한

람이 산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대

학교 현실을 바로잡고자 재단과 싸우기 시작

서 찍었더니 충무로에 내가 알피니스트

한 것이다. 그길로 드러내놓고 온 대자보를

로 사진이 떡하니 걸려 있더라고.

학교에 붙였다. 재단이 저지른 온갖 비리, 특 히 족벌비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결국 비리재단이 두 손을 들게 됐고, 이는 곧 정진후에 대한 해고 철회로 이어졌다.

그러다 안양예고 선생들이 다시 찾아왔다 면서.

그 당시 교사들이 재단과 협상을 했는 데 11가지 학교발전 사항 중 맨 마지막

해고 철회로?

조항이 ‘교사는 공채를 통해 선발한다.

개학하고 나서 내가 들어갔던 모든 교

이전 안양예고에서 근무한 교사는 우선

실에 한 시간씩 들어가 마지막 수업을 했

채용한다’는 조항을 만들어 놓은 게 있

다. 꼬박 1주일이 걸렸다. 그리고 내 손

었다. 근데 공채를 하게 됐으니 오라는

으로 사표 쓰고 나왔다. 처음 약속을 지

거였다. 1주일을 망설이고, 고민했다. 그

킨 거지.

러다 원서를 내고 다시 안양예고에 정교 사로 채용됐다.

첫 교직생활이 그렇게 끝난 건가.

딱 6개월 근무한 거다. 허탈했다. 내

다시 돌아온 학교, 어땠나.

인생이 이렇게 벽에 부닥치는구나. 보따

이미 교육운동의 중요성을 깨달은 데

리 싸들고 산에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다 싸움에서 이겨본 경험도 있으니 그 이

혈기왕성했으니까. 오대산 청학산장이

후부터는 파죽지세였다. 분위기도 그렇

란 데를 갔다. 거기 산장에 들어갔더니

게 돌아갔다. 들어가자마자 지역의 교사

산장지기가 아주 이상하고 험악하게 생

협의회를 만들고 경기도 사립학교법 싸

긴 놈이 나보고 어디 가냐고 묻더라고.

움에 들어갔다. 여관 잡아놓고 1주일씩 끈덕지게 어깨동무

042


각 학교를 분석했다. 그때가 88년이었 다. 그 당시 주요 내용이 채용기부금을 돌려받는 거였다. 그때는 사립학교 교사 가 되려면 채용기부금이 관행이었다. 배 달사고도 많았다. 89년 초까지 그 싸움 이 이어졌다. 양심선언이 무수히 나왔 다. 그러면서 전교조 분회결성을 하는 데, 경기지부장을 사립에서 맡자 해서 안양예고에서 맡았다. 그러면서 내가 경 기지부 집행부로 따라 나갔다. 밤새 토 론하고 새벽 4시에 집에 들어와 샤워하 고, 다시 학교 가서 일곱 시간 수업하고

89년도 6월 9일자 한겨레신문은 당시를 이렇게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몇 달을 미친 듯이 살았다. 5일

경기도에서는 맨 처음으로 안양시 안양3

간 단식수업도 했다. 그리고 89년에 해

동 안양영화예술고등학교가 8일 오후 5시께

직됐다.

이 학교교사 56명 중 30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내 소강당에서 교직원노조 분회 결성대회

그러면 학교 들어간 지 1년 만에 다시 짤

를 가졌다.

렸다고?

그랬다. 두 번째 짤린 거였다. 89년 5

수업은 수업대로 했다면서.

월 28일 연세대에서 전교조가 결성되었

낮에는 수업 다했고. 재단이사장 불러

는데, 6월 8일 날 전국에서 처음으로 분

다가 분회원들이 앉혀놓고 교육청의 어

회 결성을 했다. 우리보다 몇 분 빠른 곳

떤 협박에도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징계

이 있었는데 그곳은 몇 명이 모여서 후

안하겠다는 약속도 받고 했다. 그랬는데

딱 선언하고 끝낸 것이었지만, 우리는 교

도 해직이 됐다.

사 33명이 소극장에서 무려 1시간동안

이내창기념사업회

043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서를 완벽하게,

그 다음 복직은 언제 했나.

분회 규약까지 모두 만들어서 했고. 장

그러니까 그게 99년이다. 10년만이었

학사 30여 명이 소극장 밖에서 지켜보는

다. 전교조 경기도지부장, 편집실장, 사

데도. 굳건하게 버텨냈다.

무처장 등을 그간 했다. 해직교사들 1


어깨동무가 만나다1

신임교사로 의왕에 있는 백운중학교로 갔다. 국회에서 하도 미발령자들 왜 발 령 안내냐 해서 경기도교육청에서 고르 고 고르다가 가장 조용한 학교로 보낸 거 였다. 학교에 교사 70여명이 있는데 전 교조 교사가 한 명도 없는 곳이었다. 교 무실은 본관에 있는데 나는 별관에 작 은 방 하나를 따로 내주고, 직원조회에 도 나오지 말라고 했다. 일명 왕따 교사인가.

그런 셈이지.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차 복직을 시켰는데, 나도 그때는 사정 이 아주 안 좋았다. 막내동생이 교통사 고가 나 하반신을 못 쓰는 상태였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찾아와서 사정을 하더 라. ‘한번만 뒷걸음질 쳐달라고.’ 내가 그때 아버지한테 모질게 말했다. ‘절벽 에서 차라리 절 밀어버리세요.’ 그랬더 니 아버지가 두 말 않고 그냥 가셨다. 누 군가는 남아 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런 생 각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99년에야 복 직을 했다. 전교조 합법화되고 DJ정권 때였다. 그동안은 생계비 월 20만원, 30 만원 받으면서 일했다.

전교조 얘기는 한 마디도 안했다. 열심 히 수업하고 애들하고 실컷 뛰어놀았다. 소문이 조금씩 나긴 했지만 그냥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가 빈 시간에 먹 갈아서 미술실에서 서예를 했다. 그게 소문이 나면서 교장까지 같이 와서 함께 서예를 했다. 몇 달 지나자 어떤 선생님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전교조 가입하면 어 떻게 해야 되냐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내 가 ‘조금 더 지켜보다 하세요’ 했다. ‘정 말 필요할 때 하세요’ 그랬다. 그랬더니 어떤 선생 하나는 자기 책상을 들고 아 예 내 방으로 오더라. 1년이 지나니까 조 합원이 28명이 되더라고.

두 번째 해직에 이은, 복직이다.

교육부의 복직이라는 게 말하자면 특 별채용 형식으로 신규발령을 내는 거다.

그러다가 다시 전교조로 간 것인가.

3월 1일자로 복직을 했는데, 10월 달 끈덕지게 어깨동무

044


에 전교조에서 날 좀 보자고 하더라고.

급을 받았다.

그러더니 전임으로 나오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고. 이제 제대로 봉급 받기 시작

그러니까 네 번째 교사생활인가?

한지 채 열 달도 안 된 사람한데 다시 나

그렇지. 네 번째 교직이었다. 그 와중

와 달라니 이게 무슨 소리냐. 정말 어이

에 1년 반을 재판 받으러 다녔다. 아마

가 없었다. 하지만 겨울방학 하던 날 다

2003년일 꺼다. 학교에다 수업을 오전

시 올라갔다. 방학 동안에 사무처장을

에 몰아달라고 하고, 오후에는 주로 재

맡았다. 교사들 겨울연수하고 교육부하

판을 받으러 다녔다. 그렇다고 애들 수업

고 실무교섭하고. 첫 번째 단체교섭을

을 안 하면 안 되니까. 그렇게 하다 보니

그렇게 성사시켰다. 그때 교육부장관이

나중에는 오후시간이 많이 남았다. 학

문용린이었다. 그 와중에 집행유예 3년

교를 돌아보니 체육관 옆에 공터가 아주

을 받고 다시 해직이 됐다. 세 번째 해직

큰데, 거기에 온갖 쓰레기가 넘쳐났다.

이었다.

거기에 밭을 만들고 온갖 작물을 다 심 었다. 조롱박을 심어 올리고, 1년 내내

인생이 뭐 이리 굴곡지나. 세 번째 해직?

농사를 지었다. 오전 4교시가 끝나면 바

그때는 몸도 마음도 다 망가진 상태였

로 삽 들고 나가 농사를 지었다. 학생 전

다. 다 내려놓고 백두대간 종주를 했다.

체가 상추를 뜯어먹고도 남았다. 은행

노무현 정부에서 사면복권 될 줄 알고

나무도 한 가마니를 털어 나눠먹었다. 1

상고도 하지 않았는데, 그만 노대통령이

년 동안 정말 재밌게 지냈다.

탄핵을 받으면서 사면복권이 물 건너가 버렸다. 즉시 복직이 또 어려워진 거다.

1년이라니?

탄핵 풀리고 사면복권이 돼서 다시 초임 발령을 받은 게 수원제일중학교였다.

정진후는 2007년도 전교조 수석부위원장 이 됐다. 조합원이 조합비를 내면 중앙통장

무슨 해직과 복직의 파노라마다

으로 들어오게 해서 각 지역으로 다시 나눠

수원제일중학교 시절이 그래도 제일

주는 재정통합을 이뤄냈다. 그러면서 전교조

행복했다. 그때 전교조에서 채용한 상근 자보다도 내가 임금이 더 작았다. 언제 나 신규발령이니까. 매번 초임 교사 월 이내창기념사업회

045

가 힘이 세졌다. 감사위원장을 맡고는 전교 조 전임자들의 임금체불을 해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2008년에 전교조 위원


어깨동무가 만나다1

장이 되고서는 교육감 직선제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어

16개 시도지역을 다니며 시민사회단체, 학

려웠다. 내가 교단에서 겪었던 문제들,

부모단체, 교원단체를 만나 좋은 교육감 후

고민했던 문제를 실제적인 입법과 정책

보를 만들어달라고 설득했다. 이때 혁신학교

으로 어떻게 담아낼까만 생각했지. 그것

라는 새로운 모델도 만들어냈다.

외에 다른 정치적인 행위들이 오히려 우

전교조 위원장하면서 가장 잘한 일을 꼽으 라면?

혁신학교와 교육감 직선제 만들어낸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국회의원은 어떻게 된 것인가.

전교조 위원장 마치고는 민주노동당 에서 비례대표 제안이 왔을 때 그걸 받 아들였다. 그때도 누굴 보낼 것인가로 갑론을박이 많았다. 사표내면서 다시 네 번째 교직을 접었다. 그때도 우여곡절이 많았다면서.

사표를 수리하지 않아서다. 왜냐하면 재판 중이었으니까. 근데 이미 민노당에 가입했는데 그게 말이 되는가. 공무원이 정당 활동을 하는데, 사표를 안 받아주 면 너희들이 공무원의 정당 활동을 인정 하는 것 아니냐 따졌다. 국회법에 의해 자동적으로 그 이전의 직은 사퇴 처리하 는 것으로 간주한다 해서 마무리됐다. 어떤가. 교단과 정치판은 확연히 다를 텐데.

리 정치판에서는 큰 비중으로 다뤄진다 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교육의 변화에 대한 사명을 갖고 왔는데, 1년 지 나니까 같이 토론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졌다. 적응하는데 1년 걸렸다. 꼬마 정당(정의당)에서 힘들겠다.

겸임 상임위가 있는데 국회 운영위 에 나 혼자 들어간다. 새누리 절반, 새 정치 절반에 나 하나다. 그 운영위를 1 년 했다. 진주의료원 국정조사에 참여 했고,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 국민안전 혁신특위, 공무원연금개혁특위도 참여 했다. 이를 통해 정부조직의 운영, 위기 관리 체계, 국가운영 전반 시스템을 속 속들이 들여다봤다. 기재부를 중심으로 한 정무위원회와 국방위만 안가보고 나 머지 사회문제는 다 들여다봤다. 꼬마정 당에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세월호는 현재진행형이다.

세월호는……아이들이지 않나. 게다 가 전 국민이 그 순간을 실황으로 봤고. 또 경기지역 아이들이고. 난 교사 출신 끈덕지게 어깨동무

046


이고. 여러 인연이 얽혀 있다. 그래서 내

한다. 공무원 연금특위, 안전혁신특위

가 정보를 제일 많이 제공했다. 우리 방

등에서 발언했다. 비정규직 교사라고 해

을 통해 모든 보도자료가 다 나갔다. 시

서 그 역할을 하다 돌아가셨으면 더 나

민사회를 연결시켜준 것도 나다. 국회에

은 예우를 해줘야지 어떻게 차별을 하는

서 농성할 때도 도움을 많이 주려고 노

가. 인사혁신처장이 지난 주 찾아왔다.

력했다. 세월호 특별법도 제안했다. 하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본다. 어제

지만 결과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렀

안산을 다녀왔다. 하다하다 안되면 소급

다.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세월호 특조

법안이라도 만들 거라고 했다. 예산 지

위에 기재부가 예산 안 주려고 하는 것

급과 기간제교사 순직 문제만 풀면 내가

주게 만드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하는 것 아닌

이다. 또 세월호에서 순직하신 우리 기간

가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는 아이들 추

제 교사들, 비정규직 교사들 순직처리

모사업 문제, 그리고 유가족들 문제.

하는 것 그게 두 번째다. 내가 또 비정규 직으로 출발하지 않았나. 책임을 통감 이내창기념사업회

047

오늘 마침 (원내대표) 이취임식 있었다.


어깨동무가 만나다1

심상정 대표가 취임식 한 거고. 나는 한 달 전에 취임했다. 사실 원내대표는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이다. 소수정당이 니까. 이곳저곳 사정하다가 볼일 못 본 다. 다섯 명 의원들이 원내대표라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때 안타깝 다. 의원 수는 적은데 해야 할 일은 다른 정당과 같다. 겸임상임위가 4개다. 소수 구조라 하더라도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 는 뒷바라지가 내 역할이라 생각한다. 심 대표는 정치적 선배다. 나름대로 역 할을 통해 그 분들이 충분히 활동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로 당선될 힘을 없을지언정 다른 당을 떨

진보정당 통합의 문제는.

안 을) 내려와 있는 것도 진보정치를 조

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번 선거는 그냥

금이라도 확장시켜야 한다는 뜻에서다.

선거가 아니다. 살아남느냐 죽느냐의 선 거다. 그러기 위한 플랫폼을 만드는 것 이다. 진보정치는 이미 사분오열돼서 가 라앉았다. 그러나 필요성은 인정되기 때 문에 지금은 두 가지다. 사장돼 있는 승 자독식의 제도를 바꿔서 소수의 의견도 협상이 가능한 쪽으로 가야한다. 선거 제도를 바꿔야 한다. 이번에 어려우면 다음 선거에서 각 당이 공약으로 내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보다 나은 체제로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과 같이 분열돼서는 안 된다. 힘이 있어야 정치 협상이든 정책협상이든 가능하다. 스스

어뜨릴 수는 있어야 한다. 여기(안양 동

이 지역은 야당이 대선에서 깨진 지역이 고, 시민사회에서 해도 안 되는 지역이 라고 ‘내다 놓은 지역’이다. 계속해서 동 일한 인물이 붙어서 떨어진 곳이다. 희 망이 없는 곳이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또 안 되는 곳이다. 이런 어려운 지역에 와서 그 구조를 깨는 역할은 오히려 낫 지 않을까란 생각이다. 내가 만날 이런 소리 하고 돌아다닌다. ‘다른 분이 나오 신다면 지원하겠다. 하지만 그런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내가 나갈 테니 도와주지 말고, 함께 하시자. 새정치한테만 맡겨 놔선 안 되는 것 아니냐. 난 단일화하자 끈덕지게 어깨동무

048


는 소리 안한다. 내가 나오면 그 사람들

관련해서 전단 들고 찾아온 것을 기억한

완전 떨어지는 것 아니냐. 내가 안 나와

다.

도 떨어졌는데…….’(웃음) 의정활동 계획은 어떠한가.

나를 포함해 여야 의원 모두 지금의 시 대정신이 양극화(불평등) 해소라는 것 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양극화 해결 방안이 서로 다르다. 나는 양극화 해소 방안을 교육에서 찾고 싶다. ‘기회의 평 등’의 핵심이 바로 ‘교육의 평등’이다. 한 마디로 출발선이 공정해야 한다. 더욱이 교육 불평등이 사회 양극화를 고착화시 키는 주범이다. 또 정치혁신에 앞장서고 싶다. 구태로 고여 있는 대한민국 정치 의 물꼬를 시민들을 향해 터놓고 싶다. 이내창기념사업회에 대한 생각은.

이장할 때도 잠깐만 들렸었다. 끈을 놓지 않는 것, 잊지 않는 것. 끊임없이 매달리면서 준비하는 것. 정치상황에 따 라 해결할 수도 있고 묻힐 수도 있겠지 만, 늘 잊지 않고 매달리면서 준비하고 각오하고 기록하고 하는 것이 매우 중요 하다. 그런 점에서 고맙게 여기고 있다. 89년 전교조 싸움이 한창일 때 내창이 정진후_ 안양예고, 백운중, 수원제일중 전 교사/ 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정의당 원내대표/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 세월 호국정조사특위위원/ 진주의료원국정조사특위위원/ 공무원연금개혁특위위원/ 국민안전혁신특위위원/ 중동호흡기증후군대책 특위위원으로 활동하거나 활동 중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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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ㅣ중앙대학교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중앙대학교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강남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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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중앙대, 구조조정부터 김철수까지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2월 26일 학사

사를 밝혔다. 전현직 교수협의회(이하

구조 선진화 계획(안) 발표 직후부터 4월

교협) 회장과 전현직 교수평의원회 의장

말 계획안이 이사회에서 의결될 때까지,

등 6명으로 구성된 교수대표 비상대책

온갖 사건들이 발생하고 또 어지럽게 뒤

위원회(이하 비대위)가 이 날 구성됐다.

섞여 왔다. 도대체 고작 두 달 사이에 중 앙대학교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큼직 한 장면을 중심으로 정리해봤다.

서울캠퍼스에는 기자들이 분주하게 학생들의 의견을 묻기 위해 돌아다녔고, 학생들은 “처음 듣는 사실”이라고 답했

#1_ 2월 26일 “시작”

개강을 4일 앞둔 이 날 오후, ‘학사구

다. #2_ 3~4월 “반대 릴레이”

조 선진화 계획(안)’이 기자 간담회를 통

계획안은 즉각 반대에 부딪혔다. 사회

해 공개됐다. 계획안은 학과제 폐지와 신

과학대, 자연과학대, 인문대, 예술대,

입생 광역모집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법학전문대학원, 생명공학대, 사범대, 약학대, 의과대, 체육대, 적십자간호대,

이 날 간담회장 앞에서는 몇 명의 교 수들이 항의행동을 벌였다. 앞서 진행

공과대/창의ICT공과대 등 대부분 단과 대 교수들의 성명서가 연일 발표됐다.

된 전체교수회의에서 교수들과 합의되

이내창기념사업회

051

지 않은 계획안을 일방 통보한 것에 대

각급 학생 단체들의 성명서도 미디어

해 항의하는 것이었다. 교수들은 전체교

커뮤니케이션학부 학생회를 신호탄으로

수회의 직후 계획안에 대한 자체 찬반투

캠퍼스를 뒤덮었다. 곧 타 대학 인문대

표를 실시, 전체교수 중 87%가 반대 의

학생회와 교수회의 등 연대의 뜻을 밝


특별기고 ㅣ중앙대학교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히는 성명서들도 모여들었다. 이 와중

퍼스 총학생회는 단독으로 비대위를 비

에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계획안을 지

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각급

지하고 비대위를 비판하는 뉘앙스의 성

학생회에서는 중앙운영위원회를 거치지

명서를 발표하는데, 이후 총학생회를 비

않은 총학생회 성명서 발표가 절차 위반

판하는 성명서들이 다시 캠퍼스를 뒤덮

이라며 규탄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었다. 총학생회 성명서가 중앙인에 업로드 4월 3일, 대학본부는 이 성명서들을

된 직후인 11시 35분에는 홍보팀이 기

일제히 철거했다. 본부 관리 게시판뿐만

자들에게 “중앙대 총학생회, 교수 비대

아니라 학과 자치 게시판의 성명서들도

위 규탄 성명 발표”라는 보도자료를 배

철거됐다.

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보도자료는 왜곡이었다. 총학생회가 발표한 성명서

#3_ 3월 12일 “혼란”

에 나와있지 않은 표현과 요구사항 등이

비대위는 계획안에 대한 전체 교수의

보도자료에 적혀 있었다. 확인 결과 이

의견을 묻는 총투표를 실시했다. 이 날

는 중앙운영위원회 채팅방에서만 공유

오전 11시 총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투

된 성명서 ‘초안’을 바탕으로 작성된 보

표 대상자(전체 전임교원 1003명 중 교

도자료였다.

수회의에서 의결권이 부여되지 않는 별 정제 전임교원, 강의전담교수, 연구전담

홍보팀이 ‘초안’을 어떻게 접수했는가

교수, 산학협력중점교수와 총장 등 139

를 두고 진실공방이 벌어졌다. 홍보팀은

명 제외) 864명의 64.2%인 555명이 투

“세부적 문구 차이는 있으나 전체적 맥

표했고, 투표자 중 92.4%인 513명이 반

락은 같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세부적

대에 투표했다.

문구’가 초안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점에 서 의혹은 여전했다. 홍보팀은 더 이상

한편 총투표 결과발표 기자회견이 진

해명하지 않았고, 결국 4월 6일 비대위

행되던 시각인 오전 11시 20분, 서울캠

는 명예훼손 혐의로 홍보팀을 고소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052


#4_ 3월 18일 “반격 ㅡ 3007″

과대학 단위로 광역화하여 모집하고, 세

‘중앙대학교 학생 구조조정 공동대책

부사항 논의를 위해 교수와 학생 대표가

위원회(이하 공대위)’가 출범했다. 자연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한다”는 수정안

대·인문대 운영위원회와 인문대·사회과

을 내놓았다.

학대·예술대 소속 14개 학과 학생회가 한데 모였다. 이는 계획안 발표 이후 20

#6_ 3월 26일 “외출”

여 일 동안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여온 총

정문 교훈석 앞에서 ‘중앙대 사태에

학생회를 대체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즈음한 긴급 대토론회’가 실시됐다. 중

계획안이 마무리되기까지 비대위-교협·

앙대 교협이 주관하고 비대위와 공대위,

공대위·총학생회·대학본부의 4분할 구

총학생회 등이 공동주최하는 행사였다.

도가 정립됐다.

계획안 발표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각 단 위가 공동으로 치른 공개행사였기에 의

공대위는 이후 계획안 대응 진행과정

미가 컸다.

을 알리는 선전전을 중심으로 활동했

당초 이 날 행사는 R&D센터 대강당

고, 특히 계획안 반대 연서명 운동을 집

에서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행사 당일 갑

중적으로 벌였다. 공대위는 4월 13일까

작스럽게 영신관 앞 잔디밭으로 변경 공

지 3007명의 성명을 모아 대학본부에

지됐다가 다시 정문 교훈석 앞에서 치르

전달했다.

는 것으로 확정됐다. 이러한 사태의 원 인은 대학본부에 있었다. 이강석 교협

이내창기념사업회

053

#5_ 3월 24일 “후퇴”

의장은 이미 3월 둘째 주부터 대강당을

한 달 가까이 지속된 비대위와 공대위

대여한 상태였다. 하지만 행사 하루 전

활동의 결과, 교무위원회가 이 날 수정

에야 대학본부는 “외부단체가 참여한

안을 의결했다. 교무위원회는 “교내외

다”는 이유로 대관을 취소시켰다.

로 혼란을 초래한 것에 대한 책임을 통

이 같은 문제는 이후 각급 단위에서

감”한다면서, “학부/학과의 틀을 유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4월 22일 ‘이사

하며, 전공예약자를 포함한 신입생을 단

장 사퇴에 즈음한 기자회견’ 때도 몇 차


특별기고 ㅣ중앙대학교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례 대관 불허 끝에 교수연구동 4층 복도 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해야 했다.

결국 박 전 총장은 5월 7일 검찰에 구 속됐다. 검찰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사립학교법 위반, 업무상 횡령, 특정경

#7_ 3월 27일 “비리”

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특정범죄가

사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분수령을

중처벌법상 뇌물, 사기 등 6개 혐의를 적

맞이했다. 아침부터 온 언론이 중앙대

용했다.

를 주목했다. 박범훈 전 총장이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재

압수수색 직후 한동안 대학본부는 업

직하면서 중앙대에 ‘특혜’를 제공했다는

무가 마비돼 계획안 추진이 무산되는 것

혐의를 검찰이 포착해 서울캠퍼스 본관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을 압수수색한 것이다.

의혹을 산 본분교 통합과 교지 단일화 가 그간 추진돼 온 구조조정의 골간이었

압수수색 이후 매스컴은 연일 중앙대

기 때문에, 대학본부가 명분 없는 구조

와 관련한 ‘단독’을 발표했다. 매일같이

조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새로운 의혹이 쏟아졌다. 쏟아진 크고 작은 의혹들은 다음과 같다. 2011년 8

#8_ 4월 21일 “몰락”

월 본분교 통합 특혜, 2012년 교지 단일

압수수색은 더 큰 파문으로 돌아왔

화 승인 특혜, 적십자간호대 통폐합 특

다. 21일 아침부터 두 건의 기사가 중앙

혜, 중앙국악연수원 땅 투기 및 부정 사

대, 아니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박용

유화, 장녀 중앙대 조교수 채용 시 압력

성 이사장이 보직교수들과 주고받은 이

행사, 부인 두산타워 입주 특혜, 병원 매

메일이 폭로된 것이다. 박 이사장이 한

각 통한 비자금 조성, 우리은행 기부금

막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유용 의혹 등. 그 모든 과정에서 두산과 박 전 총장이 대가성 뇌물을 주고 받았 다는 혐의였다.

“(비대위 교수들이) 제 목을 쳐달라고 목을 길게 뺐는데 안 쳐주면 예의가 아 니다. 가장 피가 많이 나고 고통스러운

끈덕지게 어깨동무

054


방법으로 내가 쳐줄 것이다.” “중대신문

박 전 이사장, 그리고 황인태 부총장을

은 학교를 대변해야 한다. 이 원칙에 반

기소했다.

하는 방향으로 단 1회만 발행하면 즉시 폐간하겠다.” “(교수총투표는) 사기꾼이

#9_ 4월 27일 “강행”

운영하는 지방대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박 전 이사장이 사퇴하고 일주일이 채

일이다.”

지나지 않은 27일, 중앙대는 긴급하게 이사회를 소집했다. 이 날 이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막말들로 엄청난 파문이 일 자, 박 이사장은 이 날 오후 이사장 직과

새로운 이사장 선임과 계획안 의결이 이 루어졌다.

두산중공업 회장 직, 대한체육회 명예 회장 등 모든 직책에서 사퇴했다. 박 이

새 이사장으로 김철수 전 세종대 총장

사장은 입장문에서 “대학의 발전을 위

이 선임됐다. 그는 두산그룹이 중앙대를

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이 과

인수한 직후 중앙대 이사를 맡아왔다.

정에서 논란과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

김철수 이사장은 세종대 총장 재직 당시

학내 구성원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사학비리에 연루돼 교육부로부터 징계

밝혔다.

를 받은 전력이 있다. 회계 부정·교비 전 용 등으로 2004년 당시 세종대는 사학

이후 박 전 이사장은 검찰에 피의자 신

비리의 대명사로 통하는 학교였다.

분으로 5월 15일 소환됐다. 5월 20일에 는 또 다시 과거 막말 발언이 보도됐다.

난항을 겪으리라 관측된 계획안은 이

지식경영학부 수시모집 과정에서 입학

날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의결됐다.

사정관에게 “분 바르는 여학생들 잔뜩

2016학년도 정시모집에서만 모집단위

입학하면 뭐하느냐. 졸업 뒤에 학교에 기

를 광역화하는 것으로 수정된 계획안

부금도 내고 재단에 도움이 될 남학생

이었다. 이로써 2월 26일 시작된 ‘중앙

들을 뽑으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

대 구조조정’은 절차적으로 일단락됐다.

틀 뒤인 5월 22일, 검찰은 박 전 총장과

이내창기념사업회

055


특별기고 ㅣ중앙대학교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박용성은 떠났고 우리는 여기 남았네 박용성 이사장이 부임 7년 만에 불명

나 반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예 사퇴했다. 그가 평소 보여온 당당함 을 생각하면 사퇴는 무척 급작스럽게 이

왜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 누

뤄져, 소식을 접한 사람들 대부분 충격

구도 막지 못했나? 이는 몇 년간 이어져

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온 일련의 흐름, 즉 박용성 전 이사장 1 인으로 권력을 집중시켜 온 흐름에서 파

사퇴는 보직교수들과 주고받은 막말

악해야 한다.

이메일 내용이 보도된 당일 이루어졌다. 일각에서는 박범훈 전 총장의 비리의혹 에 따른 압박이 이사장인 자신에게도 미 친 것에 부담을 느껴 사퇴한 것으로 해 석하기도 했다. 실제로 박 전 이사장의 사퇴가 어떤 이 유였건, 이 사태에서 바라봐야 할 것은 막말 이메일과 비리의혹이 있었다는 사 실만은 아니다. 박 전 총장과 중앙대가 ‘ 위험한 거래’를 반복하면서도 누구도 제 지하지 못했다는 사실, 박 전 이사장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막말 을 이메일에 일삼아도 보직교수 누구 하

박용성은 어떻게 ‘왕’이 되었나

박 전 이사장은 취임 이래 지금까지 무 소불위의 권력을 누려왔다. 그는 취임 직후 전체교수회의를 두산중공업 창원 공장에서 소집한 뒤 이렇게 말했다. “누 구든지 두산의 대학 개혁에 발목을 잡겠 다고 나서면 그 손목을 자르고 가겠다.” 그는 대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재 단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교육 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 그 결과 외부 언론은 중앙대의 ‘교육개혁’에 대해 인터뷰할 때 총장보다 앞서 이사장

끈덕지게 어깨동무

056


을 만나는 일이 빈번했다.

기존 직선제를 임명제로 바꾼 것이다. 임 명 주체는 재단 이사회다. 이듬해 박범

박 전 이사장은 2010년 대규모 구조

훈 전 총장은 연임했다.

조정을 맨 앞에서 지휘했다. 때때로 그 만의 교육철학을 신문지상에 기고하기

주요 보직교수들은 회전문을 돌았다.

도 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2009년

입학처장이 교무처장이 되고, 교무처장

8월 중앙일보에 기고한 시평이다. ‘대학

이 대학원장이 되고, 홍보실장이 미디어

발전과 참된 주인의식’라는 제목의 이 시

센터장이 되고, 기획처장과 기획관리본

평에서 박 전 이사장은 “대학 사회에 경

부장이 각각 행정·교학부총장이 됐다.

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주인의식’이 퍼져

이번 이메일 파동에서 이 주요 보직교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고 적었다. “교

수들은 이메일의 수신자였다. 그러나 박

수와 교직원들은 어쨌건 대학을 직장으

전 이사장이 즉각 사퇴해야 할 만큼 심

로 택한 사람들”이며 “학생들은 자신의

각한 내용들에 대해서 그들 중 누구 하

수학 능력과 장래 선택할 진로를 감안해

나 먼저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스스로 대학을 선택했다 … (높은 등록 금은) 그 선택에 대한 비용으로 볼 수 있

박 전 이사장은 그의 말을 지켰다. 누

다”고 했다. 학교의 주인은 이사회고, 따

군가 “발목을 잡으면 그 손목을 자르고”

라서 이사회가 의사결정권을 쥔다는 이

갔다. 박 전 이사장과 재단은 교수사회

야기였다.

에 대해서도 연봉제를 도입하고 교수평 가를 강화했다.

이런 권력관계에서 총장은 학칙 상 지 위를 갖춘 행동대장 정도에 그쳤다. 재

박 전 이사장의 방향을 비판하며 시위

단 권력을 견제하는 총장의 역할은 기대

한 학생들에게는 퇴학·무기정학 등 징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박 전 이사장이 ‘개

를 가했다. 2009년 말, 비판적 교지 <

혁’을 밀어붙이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중앙문화>는 배포 즉시 전량 강제수거

이를 위해 두산그룹은 중앙대를 인수한

되는 수모를 겪었고, 이듬해에는 예산을

2008년에 총장 선임 방식부터 바꿨다.

전액 삭감 당하기도 했다. 최근 이메일에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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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ㅣ중앙대학교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서는 박 전 이사장이 학보사 <중대신문 >에 대해 “학교를 대변해야 한다는 원

그러나 분명한 과오마저 방어하는 것

칙에 반하는 방향으로 단 1회만 발행하

은 더 치명적인 과오를 유도하는 패착이

면 즉시 폐간하겠다”고 말한 사실도 폭

다. 압권은 이메일 파동으로 박 전 이사

로됐다.

장이 사퇴했을 때였다. 커뮤니티 등지에 서 박 전 이사장의 사퇴 책임을 교수대

누구도 막지 못한 독주, 그 결말

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와 인문

이런 상황에서 박용성 전 이사장의 독

대 학생들에게 물으려는 움직임이 나타

주를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중앙대학교

났다. 비대위 교수들과 인문대 학생들이

에 없었다. 오히려 학내에는 그의 폭주

구조조정 진행 과정에서 재단과 이사장

를 부추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을 비난해서 박 전 이사장이 사퇴했다는

가 무슨 일을 하든 비호했다. 압수수색

논리였다. 명징한 인과관계조차 제대로

직후 하루가 멀다 하고 의혹이 쏟아져도

파악하지 못한 논리였지만 실제로 이런

‘학교 발전을 위한 것’이라며 방어했다.

공격은 폭넓게 유통됐다.

물론 이런 반응들에도 이유가 없지는

무소불위의 권력과 맹목적 지지에 힘

않다. 두산 그룹이 중앙대를 인수하기

입어 박용성 전 이사장의 중앙대학교는

전인 김희수 이사장 시절, 재단은 전입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그 결과는

금을 거의 내놓지 않았다. 전 재단의 별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과 같다.

명은 ‘천원재단’이었다. 1년에 법인전입

견제와 감시 없는 권력이 실패하는 것은

금을 1천원만 냈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역사적 진실이었고, 그 진실은 중앙대에

다. 마지못해 대학을 소유하던 전 재단

서도 나타났다. 철옹성에 칼을 휘두른

과 비교해, 열정적으로 투자에 열을 올

것은 외부자, 즉 압수수색이라는 공권

리고 ‘개혁’을 앞장서서 외치는 두산 그

력을 쥔 검찰이었다. 내부 권력이 독점

룹과 박 전 이사장은 발전을 갈망하는

된 상태에서는 외부자만이 박용성 전 이

다수 중앙대학생들에게 한 줄기 빛과도

사장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같았을 것이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058


권력관계를 바꿔야 한다

장, 기획처장, 교무처장, 그리고 법인 상

다시 말해 ‘중앙대 사태’는 권력의 문

임이사와 법인 사무처장으로 구성된다.

제다. 권력관계를 바꾸지 않으면 이런 상 황을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

교무위는 “대학의 경영과 운영의 분리

꿀 것인가? 나름의 방안들이 이미 몇 가

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재단 상임이사와 사

지 제시돼 있다.

무처장이 참여하는 대학운영위원회에 서 재단 참여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개

첫 번째는 교수협의회(이하 교협)가 내

선 또는 폐지”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놓은 안, 이른바 ‘중앙대학교 혁신위원

대학본부로서는 교협의 요구에 대한 타

회(가)’이다. 교협은 5월 11일 성명서에

협안을 내놓은 셈이다.

서 “지원은 하되 지배하지 않는 사학 재 단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대학 운영의

특히 교무위 안은 그간 재단에 반기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면서, “교수,

들지 못하던 총장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

학생, 직원 대표로 <중앙대학교 혁신위

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원회>(가칭)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총 장 대행체제와 새로운 대학운영 조직을 조속히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교무위 안은 여전히 한계를 지 니고 있다. 지금까지의 사태를 통해 밝 혀진 바, 대학운영위원회에 참여하는 보

두 번째는 이용구 총장이 5월 28일 임

직교수들은 박 전 이사장의 ‘명령’을 직

시 교무위원회(이하 교무위)에서 내놓

접적으로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교

은 대학운영위원회 개혁안이다. 대학운

협의 방향대로 운영기구에 대한 교수와

영위원회는 “제 규정의 제정·개정·폐지

학생의 참여를 보장하지 않고서는 실질

에 관한 사항, 각 학문단위 및 부서간 조

적인 권력 분산이 불가능하다.

정에 관한 사항, 기타 총장이 필요하다

이내창기념사업회

059

고 인정하는 사항” 등을 심의하는 기구

우리 앞에 남아있는 과제들

다. 현행 학칙에 따르면 총장을 의장으

두 가지 방안 모두 문제의 원인을 재단

로 하여 교학/연구/행정/안성/의무부총

이 부당하게 갖고 있던 권력으로 상정하


특별기고 ㅣ중앙대학교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고 있다는 점에서 정확하다. 큰 방향은

복 문제가 있다. 정관에 따르면 대학평

합의가 된 셈이다. 이제 구체적인 기구의

의원회는 대학의 발전계획, 학칙 제개

형태를 논의하는 일이 우리 앞에 과제로

정, 헌장 제개정, 예결산 등 교육에 관

남아 있다.

한 중요사항을 심의하는 기구다. 교원 7 명과 직원 3명, 학생 3명, 동문 및 대학

운영기구의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문

발전에 도움이 되는 자 2명으로 구성돼

제들도 산적해 있다. 먼저 총장 선출방

본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사실상

식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두산 직후

학생이 대학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

직선제였던 선출방식이 재단 임명제로

한 제도적 기구라는 점에서 대학평의원

바뀌었다. 그 결과 총장의 지위가 이사

회는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

장에게 복속된 권력독점 현상이 나타났 다.

하지만 대학평의원회는 지금껏 유명 무실했다. 이사회는 대학평의원회 심

하지만 이를 다시 직선제로 바꿀 것인

의 내용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교협

이 실제로 증명돼 왔다. 예를 들어 2013

역시 우려를 표하고 있다. 과거 직선제

년 구조조정 당시 대학평의원회는 학칙

시기에 교수 사회 내 파벌이 형성돼 불필

개정 절차 미흡을 이유로 심의를 거부했

요한 갈등이 초래됐음을 교협도 인정한

지만, 이사회는 아무런 문제없이 학칙개

다. 교협은 5월 18일 발행한 <중앙대 세

정안을 통과시켜 4개 학문단위 폐지를

가지 현안 토론을 위한 자료집>에서 기

확정지었다.

존 직선제에 더해 두 가지 형태의 간선제 를 제안하고 있다. 교수·동문·학생으로

대학평의원회의 심의결과가 이사회에

구성된 총장선임위원회가 총장을 선임

무겁게 받아들여지는 관례를 만들어야

하거나, 직선으로 선출된 학장(원장)이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립학

총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교법이 대학 운영 주체의 자율성을 철저 히 보장하고 있어 법적 근거의 마련이 어

한편으로는 대학평의원회의 위상 회

렵기 때문이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060


‘3주체 거버넌스’로 완성하는 개교 100주년

약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결국 기 구를 만들고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것

총학생회를 비롯한 학생사회가 권력 관계를 바꾸는 움직임에 함께 해야 하

은 학생사회의 근본적인 정치력을 강화 하는 것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는 이유가 있다. 유일하게 학생의 참여 를 보장하는 대학평의원회가 제대로 작

지금 중앙대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동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학생이

3년 앞두고 있다. 대학본부는 “2018년

보다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계 100대 대학 진입”을 목표로 ‘CAU

운영기구를 창출해내는 것이 요구된다.

2018+’이라는 이름의 발전계획을 추진

마침 교협은 혁신위원회와 총장선임위

해왔다. 올해, 그 발전계획은 검찰의 전

원회에 학생 참여 또한 보장할 것을 조

격적인 압수수색과 박용성 전 이사장의

건으로 내걸고 있다. 학생사회는 교협과

불명예사퇴, 그리고 검단 신캠퍼스 백지

손을 맞잡고 정치적 공세를 이용해 대학

화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본부를 압박함으로써 그것들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중앙대학교가 진정한 명 문사학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은 완전한

우리는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올해

쇄신을 꾀하는 것뿐이지 않을까? ‘박용

구조조정 과정에서 학생과 교수들의 거

성의 대학’이라는 오명을 지우고 명예를

센 요구로 ‘학사구조개편 대표자 회의’

회복하는 것, 그 첫걸음은 지금껏 어떤

를 얻어내지 않았던가. 이 회의체는 학

사립대학도 제대로 구현한 적 없는 ‘교

생·교수·대학본부 대표자들이 공동 참

수·학생·본부 거버넌스’에 대한 폭넓은

여해 구조조정 세부 사항을 조정하는 거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다.

버넌스(협업) 기구다. 학생이 대학운영 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는 것을 이 기구를 통해 확인한 것이다. 물론 실제 대표자 회의가 진행되는 과정 에서 학생 대표자의 발언권이 다소간 제

이내창기념사업회

061

강남규_ 2009년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으며, 현 재 ‘자유인문캠프 기획단 잠수함토끼들’의 일원으로 활동하 고 있다.


어깨동무가 만나다2

강곤이 꿈꾸는 삶, ‘현장을 살다’ 글:

정원옥

사진:

김선주

끈덕지게 어깨동무

062


강곤(문창,93)은 편집자다. ‘인권재단 사람’에서 6년 동안 격월간 잡지 『세상 을 두드리는 사람』을 만들었고, ‘오월의 봄’에서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2013)와『밀양을 살다』(2014) 등을 기 획했다. 2015년 1월, 그는 『밀양을 살 다』로 한국출판문화상 편집상을 받았 다. 그는 인권활동가이자 르포작가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기록한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후마니타 스, 2008), 용산참사 희생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여기 사람이 있다』(삶이 보 이는 창, 2009), 아홉 명의 ‘탈 시설’ 장애인들을 인터뷰한 책 『나를 위한다고 말하 지 마』(삶이 보이는 창, 2013)의 공동 집필에 참여했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이력이 더 있다. 그는 2001년 이내창추모사업회가 추모연대로 파견한 과거사활동가이기 도 하다. 그가 의문사특별법 개정을 위한 노숙농성을 하면서 그 해 겨울을 여의도 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나는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알았다. 그 이후 그는 ‘민주 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에서 3년 동안 상근활동가로 일했다. 과거사활동가에서 기자, 인권활동가, 르포작가, 편집자로 2000년 이후를 숨 가 쁘게 살아온 강곤. 그는 현재 아홉 살, 여섯 살 두 딸을 돌보며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왜 ‘오월의 봄’을 그만두고, 양육 과 가사를 맡게 된 것일까? 6월 25일, 강곤이 살고 있는 고양시 덕양구의 한 동네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평일 낮, 여성 손님들로 붐비는 ‘107 키친’에서 우리는 점심메뉴로 안동찜닭을 시켰 다. 강곤도 나도, 선주언니도 닭을 뜯는 젓가락질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실상 우리 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사이였던 것이다. “곤이구나”, “응, 누나”, 그러 고 나서 할 말이 없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는데, 뭔가 제대로 알려고 하니 그가 낯 설게 느껴졌다. 그는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은 것일까. 이렇게 나이를 먹도록 그는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다른 손님들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우리는 뙤약볕 아래 야외 테라스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음식점에서 기르는 개가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강곤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드러누웠다.

이내창기념사업회

063


어깨동무가 만나다2

문창과에 들어와서도 곤은 시인이 되 겠다는 꿈은 꾸지 않았다. 시인이 되기 엔 스스로의 배경이 너무 평범하다고 생 각했다. “시골에서 태어났던 김장근이 가 구사할 수 있는 시어를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가 없는 거야.” 학생운 동을 열심히 할 마음도 없었다. ‘진군나 팔’에 가입했지만, 1년 동안 술 마시면 서 재미있게 놀았을 뿐이다. 1학년을 마 치자마자 입대했고, 복학한 것이 96년 학생운동의 끝자락에 선 “나이 많은 선배”

도였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학

곤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쭉 반포에

생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는데, 이유는

서 살았다. 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단순했다. 학교에 사람이 없어서였다.

하면서 담배를 배웠고 술을 마시면서 박

96년 여름 연대에서 한총련 사태가 터

노해와 김남주, 황석영을 읽었다. 공부

졌고, 97년 한양대에서 ‘이석 프락치 치

와는 담을 쌓았다. 교지를 만들면서 글

사 사건’이 터졌다. 단과대 학생회장까

잘 쓴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천재 소리

지 지명 수배된 상황에서 학생회를 맡아

를 들을 정도로 시를 잘 쓴 것도 아니었

야 할 후배들이 싹 잡혀 들어가 버렸다.

다. 문창과에 갈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는 학생운동이 급격히 몰락하고 있었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공부를 안

던 98년에 예술대 학생회장으로, 99년

해서 그렇지, 하면 서울대 갈 수 있을 거

에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다. “나는 총

라고 생각했는데 해보니까 아닌 거지.

학생회장 하다가 잡혀갈 줄 알았는데 안

재수하면서 성적이 많이 올랐는데 학력

잡혀서, 자진 출두할 수도 없고, 하하.”

고사에서 떨어진 거야. 공부 열심히 한

한총련 내부가 한창 시끄럽고 혼란스러

다고 시험 잘 보는 게 아니구나. 삼수할

울 때였다. 그는 경기남부총련에 들어

때는 하고 싶고 안전한 데 가자, 해서 문

가 1년을 더 활동한 후에야 “나이 먹은

창과에 온 거지. 아버지가 학원 강사였

선배가 학생운동을 계속 하고 있는 건

거든요. 재수, 삼수에 돈이 안 들어간

아니다, 라고 해서 스스로 정리”했다.

거야, 하하.”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064


학생운동을 정리하면서 곤은 국가보

곤은 9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무슨

안법 위반으로 2개월 동안 구치소에 있

일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방황의 시

었다. “당시엔 잡히면 2, 3개월 있다가

간은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일을 도와

집행유예로 나오는 게 대부분이었을 때

달라는 추모사업회 선배들의 요청이 있

인데, 한총련 탈퇴서를 쓰면 바로 내보

었던 것이다. 2001년 의문사특별법 개

내 주었어요. 그 때 학생운동 내부에서

정을 위한 농성을 할 때, 그는 추모연대

논쟁이 붙었어요. 한총련 탈퇴서는 전

에서 상근을 하며 농성단의 일을 도왔

향서다. 절대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

다. 이내창 추모사업회가 그를 추모연

는 쪽이 있었고, 전향서 쓰고 나와서 학

대로 파견한 형식이었다. 그는 9월부터

생운동 계속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쪽도

12월까지 제일 추울 때 여의도 농성장

있었어. 그런데 탈퇴서 쓰고 나온 사람

을 지켰고, 특별법 개정을 성사시켜냈

들이 대부분 학생운동으로 돌아오지 못

다. “그거 하고 나서 좀 우울했어요. 추

하더라고요. 양심에 상처를 받았던 것

모사업회 쪽 일을 한다는 게. 계속 할 일

때문에. 그래서 저는 탈퇴서를 안 쓰겠

은 아니겠다, 해서 직장을 알아보다가

다는 공언을 했었죠. 탈퇴서 안 쓴다고

지역신문사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이

오 년 십 년을 사는 것도 아니고 두세 달

신문사가 6개월 만에 망했네. 어쨌든 6

집행유예 받고 나오는 건데, 그런데도

개월 동안 월급도 받고 카드도 만들면서

부모님은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셨

씀씀이가 늘어났는데 회사가 망하니까

죠.” 두 달 구치소 생활이 대단한 희생

급해졌지, 뭐.”

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 이 해온 행동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는

이미 서른이 넘은 나이였다. 여기저

자세를 보였다는 점에서 그의 선택은 훌

기 이력서를 넣었지만, 직장 구하기가

륭하다. 전향하지 않는 것, 천재도 아니

쉽지 않았다. 오라는 데가 보험회사 말

고, 시인도 아니고. 이름난 운동권도 아

고는 시민단체들밖에 없었다. 민변에서

닌, “나이 많은 선배”였던 곤이 학생운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고, 곤은 민변에

동을 정리한 방식이었다.

서 3년 동안 상근활동가로 일했다. “노 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포괄적 과거청

“여의도 노숙농성하고 나서 좀 우울했어 요.” 이내창기념사업회

065

산 이야기가 나와서 팀 꾸려지고, 과거 청산 사법개혁,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


어깨동무가 만나다2

그런 일들을 하면서 인권운동을 접하게

포를 한두 꼭지씩 꼭 썼는데, 장애인 운

됐던 것 같아요. 예전에는 통일운동과

동, 에이즈 감염인, 성 소수자 등 여러

노동운동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권

인권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고 다니면서

운동이라고 하는 게 되게 포괄적이다.

인권분야에서의 다양한 이슈들을 알게

노동운동과 통일운동까지 아우를 수 있

되었죠.”

는 포괄적인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민변활동이 그에게는 과거청산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을 만들면서

운동보다는 인권운동이라는 새로운 분

곤은 법학자 중심, 전문가 중심의 인권

야에 눈을 뜨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담론에 갑갑함을 느꼈던 것 같다. 활동

변호사가 아닌 상근활동가가 민변에서

가들이 스스로의 활동에 가치를 부여하

전망을 찾기는 어려웠다.

고, 그 활동이 새로운 인권담론으로 생 산될 수는 없을까? 잡지를 만들면서 인

활동가들이 생산하는 인권담론의 가능성 을 모색하다

인권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곤에게 기회가 온 것은 2006년이다. ‘인권재단 사람’이 만들어지고,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이라는 인권전문잡지가 창간되었 는데 함께 일해보자는 박래군의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인권운동 판의 『말』지 를 표방하며 나름대로 야심차게 시작했 죠. 그런데 편집장 박래군에 기자 나, 달랑 둘! 박래군 편집장은 맨날 투쟁현 장에 가 있고, 나 혼자 잡지 만들고. 매 번 잡지 발간하기에도 급급한 형편이었 죠.” 2009년 박래군이 용산참사로 수 배를 당하게 되면서 곤이 편집장을 맡 고 잡지도 격월간으로 발간되는 체제 전 환이 있었다. “그 때부터는 인터뷰나 르

권담론을 넓혀보자, 라는 다양한 노력 들이 시도되었다. “다른 단체의 활동가 라든지, ‘수유너머N’과 같은 연구 집단 이라든지, 문화인류학과 같은 법학 이 외의 학문과 접목 혹은 횡단을 시도했던 것은 의미가 있었어요.” 그러한 노력들 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권활동가들에게 잡지의 지면이 제공되는 결과로 나타났 다. 글 쓰는 인권활동가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르포가 소설가, 시인 등 작가들을 중심으로 해 서 나왔는데 2000년대 중반부터 활동 가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어요. 『여기 사 람이 있다』도 그렇고, 『금요일엔 돌아오 렴』 같은 경우도 거의 대부분 인권활동 끈덕지게 어깨동무

066


가들이 참여했어요. 활동가들이 참여 해서 만든 르포들은 아무래도 결이 다 른 것 같아요. 작가들은 자기가 쓴 부 분에 대해 되게 예민한데, 활동가들은 쿨해요. 자기 활동의 연장이라고 생각 하는 부분이 있어서 공동 작업이 더 잘 되는 것 같아.” 잡지를 만드는 동안, 곤 도 두 권의 책을 만드는 공동 작업에 참 여했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파업을 기록 한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와 용 산참사 이후 철거민들의 삶을 인터뷰한 『여기 사람이 있다』가 그것이다. 법과 제

1년이 채 안되었던 시점인데 그 전부터

도 차원의 인권담론, 이론 중심의 인권

내가 잡지에 썼던 필자들을 소개시켜줘

담론에서 벗어나 현장과 피해자 중심의

서 단행본으로 나오고 이런 것들이 있

인권담론, 활동가 중심의 인권담론이 생

어서 같이 하면 좋겠다, 해서 들어가게

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책들이라

된 거죠.”

고 할 수 있다. ‘오월의 봄’에 들어간 이후, 곤이 미처

이내창기념사업회

067

“나도 현장에 가고 싶다”

기획을 하기도 전에 인권단체에서 기획

곤은 2011년, 『세상을 두드리는 사

했던 책들이 ‘오월의 봄’에 제안되기 시

람』의 편집장을 그만두었다. 외부적으

작했다.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

로는 ‘인권재단 사람’이 잡지의 규모를

다』가 대표적인 경우다. ‘인권운동사랑

축소하기로 한 결정이 있었다. 하지만

방’은 프로젝트 팀을 꾸려서 미혼모, 이

그것보다는 자신이 매너리즘에 빠졌다

주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다양한 차

는 판단이 더 컸다. 6년 동안 반복되는

별받는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했고,

일을 해왔으니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기

그것을 소설, 탄원서, 편지 등의 형식으

도 했다. ‘오월의 봄’ 대표이자, 문창

로 각색해서 책으로 내고 싶어 했다. “어

과 후배인 박재영이 곤을 기다리고 있

떤 출판사에 갔는데 출판사에서 이 부

었다. “박재영이 ‘오월의 봄’을 만들고

분은 좀 더 드라마틱하게 해줬으면 좋겠


어깨동무가 만나다2

다, 하는데 거기에서 탁 부딪힌 거죠.

지만 교정 교열이 안 늘더라고요. 변명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출판사가 어딜까

을 하자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

해서 ‘오월의 봄’으로 오게 되고. 그 작

아요. 내가 한 번 본 것을 박재영이 다시

업을 했던 사람들이 용산 책 작업을 같

봐야 돼, 하하하. 박재영이 나를 못 믿는

이 했던 사람들이라서 그 책을 공동기

거야. 내가 하도 듬성듬성 보고 이러니

획으로 하게 됐고, 그 다음에 밀양도 해

까. 단행본 기획하고 필자 만나고 하는

줬으면 좋겠다, 해서 밀양 책도 하게 되

거는 재밌고 맞는데, 교정 교열은 안 늘

고. 어제 책이 나왔는데 형제복지원 작

더라고. 더 큰 문제는 밀양이나 이런 작

업도 하게 되고.” 인권활동가들은 수정

업하면서 현장에 가서 나도 하고 싶은 거

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믿을 만한 출판

야. 앉아서 모니터만 보고 있는 것이 갑

사를 찾았고, ‘오월의 봄’은 인권 분야

갑하더라고.” 대한민국에서 르포작가를

의 독보적 위치를 갖게 된 셈이다. 곤이

전업으로 할 수 있을까, 단체에서 상근

매개 역할을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을 하면서 활동해야 할까? 현재, 곤은

할 수 있다.

쉽게 풀 수 없는 고민을 안고 있다.

출판사 일은 재미있었지만, 편집자가

“세월호 이후,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

곤의 적성에 딱 맞는 것은 아니었다. “꼼

곤은 캠퍼스 커플이다. 99년도, 총학

꼼하지 못한 성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

생회장을 할 때 동아리 회장을 하고 있 던 한국학과 후배인 이은영을 만나 연애 를 시작했고, 2004년 민변에서 활동하 고 있을 때 결혼을 했다. 이은영은 미술 치료 상담을 하다가 심리학과 대학원 과 정을 거쳐 소아정신과에서 아동심리상 담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그녀 는 교정 공무원이 됐다. “와이프가 인터 넷에서 교정직 상담 공무원을 채용한다 는 것을 보고 시험을 봐서 덜컥 된 거야. 화성교도소로 발령이 나서 갔는데 교정 청에서는 이런 게 필요하다고 해서 뽑 끈덕지게 어깨동무

068


아 놨는데 일선 교도소에서 아무런 준비 가 없는 거야. 그래서 사회복지 파트에 잠깐 있다가 지금은 일반 교도관을 하 고 있는데, 거기 들어가니까 7시 출근 하고 집에 오면 8시니까 내가 그만두겠 다, 얘기하고.” 아내가 취직이 되면서 두 딸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오월의 봄’을 그만둔 것 이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재택근무 형 식으로 일을 했었다. 그러다가 완전히 그만두게 된 데는 세월호 사건의 영향 이 컸다. “후회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해 야겠다, 그런 생각과 함께 흔히 말하듯 세월호 전후가 달라져야 되지 않을까,

에 집을 지었다.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

내 삶에서부터.” 곤은 아이들이 더 자

가시고 나서 생각지도 않았던 유산이 들

라면, 언젠가 여건이 되면 하리라, 했

어와서 빚 갚고 벼락치기로 집을 지었어

던 르포작가로서의 활동을 더 이상 미

요. 결혼하고 나서 이사를 여덟 번 다녔

루지 않기로 했다. “세월호 사건 터지고

어요. 어린이집 때문에 여기 전세로 들

나서 재난안전가족협의회라는 게 구성

어왔는데 1년 만에 집 주인이 집 팔렸다

이 됐어요. 씨랜드 사건이나 해병대 캠

고 나가라고. 그게 너무 스트레스가 돼

프 사건, 장성요양병원 재난 참사 가족

서. 큰애가 여기 초등학교 입학했으니

등이 모여 있죠. 세월호 사건 터지고 얼

까 10년은 살아야 되겠다, 해서 땅콩집

마 지나서 거기서 생존자들 인터뷰하자

처럼 지었죠.” 늘 마이너스 인생이었다

고 이야기되어서 나는 고양버스터미널

가 이제야 겨우 적자도 면하고 안정적인

화재 사건 피해자들 만나서 인터뷰 작업

보금자리도 갖게 된 것이다. 육아와 살

하고 있어요.”

림, 르포작가로서의 일을 병행하는 일 의 어려움을 묻자 그는 웃었다. “10시

곤은 올해 2월에 지금 살고 있는 동네 이내창기념사업회

069

부터 4시 사이에 뭘 하기도 애매하고,


어깨동무가 만나다2

했다는 것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곤에 대해 알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알게 된 것이 기뻤다. 곤은 어떠했는지? “섭외가 와 서, 낯설고.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기가 창피하고, 어쨌든 한 번 돌아보게 되었 고. 기념사업회에 대한 고민은 하나도 안 하고 나와서 반성도 하고, 하하하, 좋았어요.” 곤이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궁금해진다. 곤과 나누지 못한 많은 이 야기들은 향후 국가폭력, 인권피해의 현장의 전달하는 그의 생생한 르포를 통 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강곤의 ‘현장을 와서 청소하면 한두 시간은 쓱 가고. 책

살다’를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봐야지 했다가 영화 한 편 보면 두 시간 쓱 날아가고. 이런저런 작업들은 조금 씩 하는데…….” 전업주부가 되면서 딸 들을 보는 마음도 더 애틋해졌다. “멀 리까지 고민하게 되는. 아빠 그 때 뭐했 어, 이런 것을 의식하게 되는. 어릴 때 는 아빠, 아빠 하는 것이 힘들었는데 지 금은 2학년이 되니까 아까워요, 몇 년 안 남았네.” 곤은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다. 자기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처럼도 보이지 않는다. 나의 갑작스러운 인터 뷰 요청이 그에겐 당황스러웠을 수도 있 고, 그가 거절을 하지 못해 인터뷰에 응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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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5월을 다시 생각하다 • 91년 5월의 죽음들과 그 흔적 • 24번의 1991년과 어떤 배신


기획2_91년 5월을 다시 생각하다

91년 5월의 죽음들과 그 흔적 편집부

지난 5월 14일, ‘유서대필 사건’에 대한 진실 공방이 마무리되었다. 대법원이 유서 대필과 자살방조 혐의에 대한 강기훈의 무죄를 확정한 것이다. 24년 만에 강기훈은 억울한 누명을 벗었지만, 이 사건은 아직 해결된 것이 아니다. ‘유서대필 사건’을 조 작한 가해자들이 잘못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유서대필 사건’은 한 청년의 인생만 망가뜨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91년 5월의 죽 음들을 훼손하고, 운동세력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이 사건을 전후하여 제 기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김지하의 망발과 “배후에 분명히 죽음을 조 종하는 선동세력이 있다”는 서강대 전 총장 박홍의 음모론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의 망언은 죽음을 통한 시민들의 항거를 전염병에 휩쓸린 것으로, 운동세력을 악마적 집단으로 둔갑시키는 역할을 했다. 91년 5월 투쟁에는 ‘분신정국’이라는 꼬리표가 달렸고, 그 과정에서의 죽음들에는 시대의 희생양이라는 혐의가 덧씌워졌다. 분신 정국이 남긴 상처는 강기훈의 법정 공방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트라우마의 형태로 우리 사회에 되돌아오곤 했다. 이 글은 91년 5월 투쟁 과정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스스로 죽음 을 선택한 ‘열사’들의 흔적을 가능한 만큼 모아보려는 것이다. 강기훈의 무죄 확정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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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대필 사건’의 해결이 아니듯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호명된다고 해서 91년 5 월의 죽음들에 대한 우리의 빚을 다 갚은 것은 아니다. 91년 5월의 죽음들을 어떻 게 기억해야 할까. 편지와 일기, 유서와 유언 등에서 발견되는 ‘열사’들의 요청과 대 면함으로써 91년 5월의 죽음들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되짚어본다.

91년 5월의 죽음들 ‘91년 5월 열사’는 모두 11명이다. 그들의 죽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국 가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경우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경우가 그것이다. 전자에 는 강경대, 김귀정, 박창수가 속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91년 5월 투쟁은 강경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91 년 4월 26일, 명지대 1학년이었던 강경대가 ‘학원자주화 완전승리와 총학생회장 구 출투쟁’을 하던 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구타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경 대 폭행치사에 항의하며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리면서 5월 투쟁이 촉발되었다. 박창수 사건은 91년 5월 투쟁에서는 예외적인, 의문사로 분류 된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는 1991년 2월에 구속,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5월 4일 이마에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하였다가 5월 6일 의 문의 죽음으로 발견되었다. 마지막으로 김귀정의 죽음은 91년 5월 투쟁 과정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경우다. 성균관대 불어불문학과 4학년이었던 김귀정은 5 월 25일,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 시위 도중 대한극장 부근에서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폭력에 의해 사망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시민들의 항거로는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윤용 하, 이정순, 정상순, 김철수가 있다. 전남대 2학년이었던 박승희는 강경대 폭행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사흘 후인 4월 29일, ‘고 강경대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퇴진 결의 대회’ 도중 “노태우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 2만 학우 단결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했고, 5월 19일 운명했다. 5월 1일에는 안동대 민속학과 2학년 김영균 이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고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대인 결의대회’ 도중 “공안통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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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_91년 5월을 다시 생각하다

치 분쇄,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 운명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5월 3일, 경원대학교 전산학과 2학년 천세용이 ‘강경대학우 폭력살인 자행한 노태우정권 타 도를 위한 결의대회’ 도중 분신 후 투신하여 운명했다. 1주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세 명의 대학생이 잇따라 분신한 일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5월 5일,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망언을 조선일 보에 실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5월 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이었던 김기설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폭력살인 만행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분신, 투신하여 운명했다. 같은 날, “죽음을 조종하는 배후세력이 있다”라는 박홍 의 기자회견이 있었고,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정구영이 “분신자살 사건의 배후에 이 를 부추기는 조직적 세력이 있는지를 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한국판 뒤레퓌 스 사건이 된 ‘유서대필 사건’은 이러한 배경에서 조작된 것이었다. 김기설의 죽음 이후에도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분신과 투신은 끊이지 않 았다. 5월 10일에는 성남피혁에 근무하던 윤용하가 전남대에서 “노태우정권타도” 를 외치며 분신, 운명했다. 5월 18일, 강경대의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연세대 정문 앞 철교 위에서 시민 이정순이 분신 후 투신하여 운명하였다. 같은 날, 보성고등학 교 3학년이던 김철수가 보성고 운동장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하였 고, 6월 2일 운명했다. 5월 22일에는 김철수의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시민 정상 순이 전남대학교 영안실 위에서 “노태우 물러가라”고 외치며 투신, 5월 29일 운명 하였다.

삶의 흔적들: “한 순간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91년 5월의 죽음들이 남긴 흔적은 국가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경우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경우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국가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경 우, 생의 마지막 순간에 ‘열사’가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우 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열사’의 요청은 살아생전 그가 남긴 글이나 말을 통해 유추될 수밖에 없다. 다음에 소개되는 박창수의 편지와 김귀정의 일기는 죽음의 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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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이라기보다는 삶의 흔적들이다. 거기에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 지 않는 낙관과 “한 순간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자기 단련의 수사들이 넘쳐난다. ① 아내에게 보낸 박창수의 옥중서신 중 일부 울보 찬이 엄마! 이 편지 보면서 많이 짤 것 같은데, 울고 싶을 때는 실컷 우는 것도 건 강에 좋은 일이오. 나는 울고 싶어도 울지도 못하는 신세라오. 하지만 석방되는 그날 의 기쁨을 고대하면서, 외로운 징역살이를 이제는 거의 완벽하게, 환상적으로 적응하 고 있으니, 조금도 염려하지 말아요. 여보!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는 말도 있듯 이, 희망찬 내일을 위해 이 순간의 고통은 힘들더라도 참고 견뎌 나갑시다. 개구쟁이 용찬이 귀여운 공주 예란이에게 과자 많이 사주길 바라며, 건강하고 안부 또 전하리다. 1991. 4. 5. 당신을 진짜 좋아하는 찬이·예란 아빠가 ②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에게 보낸 박창수의 옥중서신 중 일부 총자본이 연대하여 탄압을 하고 있듯이 우리 노동자도 총연대로 맞서 나가야 할 것입 니다. 끝으로 노조집행부는 위원장 석방투쟁에 너무 무리한 투쟁을 전개하지 말고 대 내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91 인금인상, 단체협약에 온 힘을 몰두할 수 있도록 치밀한 계획과 조직을 정비하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옥중에 있지만 더욱 강하게 단련되어 나 의 보금자리인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1)

아내와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박창수는 구속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운동적 삶에 대한 낙천적 태도를 보여준다. “외로운 징역 살이를 이제는 거의 완벽하게, 환상적으로 적응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아내 에게 큰소리를 치는가 하면, “더욱 강하게 단련되어 나의 보금자리인 한진중공업으 로 돌아갈 것”이라고 조합원들에게 약속하기도 한다. 현실의 시련과 고통을 낙천적 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단련하는 과정으로 전화할 수 있는 힘은 운동의 정당성 1) http://archives.kdemo.or.kr/View?pRegNo=0009732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즈 참조. 노동열사 고 박창수 위원장 전국 노동자장 장례위원회 죽음을 넘어 노동해방으로-고 박창수 위원장의 삶과 투쟁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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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낙관 속에서 나온다. 이렇듯 가족을 끔찍이 생각하고, 운동에 대한 굳건한 신념과 낙관으로 가득 찼던 박창수가 신변을 비관하여 자살하 였다고 믿기는 어렵다. “희망찬 내일을 위해 이 순간의 고통은 힘들더라도 참고 견뎌 나갑시다”라는 그의 당부는 죽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삶을 향한 욕망을 강하게 표 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③ 김귀정의 일기, “10년 후에 나는” 전문 날마다 반성하고 날마다 진보하여/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 을 경계하며/모든 것을 창조적으로 바꾸어가며/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고/내 작 은 힘이 타인의 삶에/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역사와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자/그래 한 순간도 머물러서는 안 된 다./난 무엇이 될까?/10년 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난 나 의 미래가 불안하고 자신도 확신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위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 다./결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박창수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김귀정의 일기 역시 90년대 초반 운동 주체들에게 삶 과 운동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삶이 곧 운동이고, 운동 적 삶이야말로 자신과 세계를 바꾸는 주체의 존재양식이다. 김귀정은 “끊임없이 역 사와 함께 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 “한 순간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두 번 이나 강조한다. “날마다 반성하고 날마다 진보하여” 세계와 스스로를 바꾸어야 한 다는 그녀의 사명의식은 거의 강박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의 미래가 불안하고 자신도 확신도 없다”고 토로할 만큼 유약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시대 와 역사가 부여하는 운동의 요청에 충실을 다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언젠가는 타협하 고 변질될 수도 있는 자기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감추고 있었던 것 또한 90년대 초반 운동 주체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이중성이다. “나의 일신만을 호위호식하 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김귀정의 다짐은 소박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2015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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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움이 있다.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 호식하며 사는 것에 어떤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시대를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지 않은가.

죽음의 흔적들: “나를 생각하며 힘차게 전진하라” 국가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경우와 달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은 유서 를 쓰거나 유언을 남기는 방식으로 자기 죽음의 의미를 세상에 알릴 기회를 가졌다. 다음은 박승희,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의 유서 혹은 유언을 모은 것이다. ① 박승희의 유서 중에서 사랑하는 내 친구들아/나는 항상 너희가 자랑스러웠다/내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니/ 힘들고 괴롭더라도/나를 생각하며 힘차게 전진하라/내 서랍에 코스모스 씨가 있으 니/2만 학우가 잘 다니는 곳에 심어주라/항상 함께하고 싶다 2) ②김기설의 유서 전문 단순하게 변혁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역사의 이정표가 되고자 함은 더욱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맑은 현실과는 다르게 슬프게 아프게 살아가도 이 땅의 민 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 속에 얻은 결론이겠지요. 노태우 정권은 퇴진 해야 합니다. 민자당은 해체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슬픔과 아픔만을 안겨주는 지금 의 정권은 꼭 타도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죽음과 아픔을 안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죄악스러운 행위만을 일삼아온 노태우 정권 을 향해 전면전을 선포하고 민중권력 쟁취를 위한 행진을 위해 모두가 하나 되어야 합 니다. 3)

2) 박승희열사추모문집발간위원회, 『해방의 코스모스: 박승희 열사 추모문집』, 심미안, 2011, 246쪽. 3) http://archives.kdemo.or.kr/View?pRegNo=0083433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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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윤용하의 유언 중에서 현 정권은 김기설 동지가 분신을(…) 그 책임을 이른바 운동권 세력에게 돌리려 한다. 누가 분신을 배후조종한단 말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그 누가 버리라고 한단 말인 가. 그렇다. 바로 살인을 만행하는 현정권 노태우(…)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죽음으로 총칼 휘둘려온 현 정권뿐이다. 민주화를 외쳐대던 우리의 청년학우여 우리는 그렇게 당했다.(…) 아버지 전 갑니다. 이 땅의 젊은이로서 이제야 조국을 위해 떠납니다. (…) 아들아 잘했다. 조국 위해 간다.(…) 아버지 전 이제야 할 일……” 4) ④ 이정순의 유서 전문 백골단 해체/군사독재 물러가시오/서로 아끼며 살아갑시다/ 모든 국민에게 부탁합 니다/ 분쟁은 악이다/나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자랑스런 자녀에게 바치나이다/ 하 느님 아버지/ 모두를 아버지 뜻대로 바칩니다/ 받아주소서/이루어주소서/ 광명과 사 랑으로 평화, 통일 이루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아멘. 1991년 5월 18 일 이정순 5) ⑤ 정상순의 유서 중에서 제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도로에다 뿌려주십시오. 전사들이 제 육신을 발로 밟아가면 서 투쟁하고 저도 항상 투쟁하며 죽어서까지도 승리하렵니다. 국민이 제 육신을 발로 밟으며 가슴 가슴에 뜨거운 5월에 하늘을 불사를 겁니다. ⑥ 김철수의 유언 중에서 앞으로 여러분 무엇이 진실한 삶인지 하나에서 열까지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 하는 일마다 정의가 커져 넘치는 그런 사회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제 겐 힘이 없습니다. 3주일 동안 밥 한 술도 못 먹고 하루에 물 한 컵만 먹고 지금까지 여 4) http://archives.kdemo.or.kr/View?pRegNo=0085514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즈 참조. 대전 민주청년회 윤 용하 열사 추모사업 준비모임, 『다시는 저들에게 무릎을 꿇지 맙시다: 고윤용하 열사 추모 문집』, 1991. 5. 5) http://archives.kdemo.or.kr/View?pRegNo=0053682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즈 참조. 폭력살인규탄과공 안통치종식을위한천주교대책위원회, “민주시민 故 이정순 카타리나 영결식 및 영결미사”, 1991.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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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분의 용기되게 해주기 위하여 지금까지 힘차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확실히 믿습니다. 다음에 살아서 더욱 힘차게 만납시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숨을 거두기 3일전 철수의 요청에 따라 병상에서 녹음된 내용임) 6)

91년 5월 투쟁 과정에서 분신을 통해 항거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유서와 유언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요청은 자신을 ‘대신하여’ 싸워달라는 것이다. “나를 생각하여 힘차게 전진하라”는 박승희의 요청이 그렇고, “모든 국민에게 부탁합니다”라는 이 정순의 요청, “제 육신을 발로 밟아가면서” 투쟁해달라는 정상순의 요청, “제겐 힘 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확실히 믿습니다”라는 김철수의 요청이 그렇다. 그 들은 노태우 정권의 퇴진과 더 나은 세상의 건설을 위해 싸워달라는 요청을 하며 자 신의 육신을 불사른 것이다. 91년 5월의 죽음들을 욕되게 할 마음은 없지만, 한 점 의문은 왜 그들은 죽을힘 으로 싸워서 세상을 바꾸지 않고,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의 죽음을 선택해야만 했을 까, 하는 것이다. 김기설은 노태우정권을 “우리에게 슬픔과 아픔만을 안겨주는” 정 권이라고 썼다. 윤용하는 “살인을 만행하는” 정권,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죽음으 로 총칼 휘둘려온” 정권이라고 말했다. 강경대를 죽이고,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 몬 살인 정권을 타도하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살인 행위를 방조하고 묵인하고 간접 적으로 돕기까지 하고 있다는 죄의식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이 노태우 정권을 타도하지 않아서 강경대를 죽게 만들었다는 가해자로서의 죄의식이 그들을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야스퍼스는 “내가 있는 곳에서 불법과 범죄가 자행되고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가 는데 나만 살아남았다면, 내 안에서 하나의 소리가 들리고 이를 통해 나는 안다. 살 아남아 있다는 것이 나의 죄”라고 말했다.7) 홀로코스트와 같은 극단적 범죄와 관련 하여 시민은 법적인 죄, 정치적인 죄, 도덕적 죄, 형이상적인 죄 등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나의 죄”가 되는 것은 형이상학적 죄에 속한다. 이 6) http://archives.kdemo.or.kr/View?pRegNo=0000511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즈 참조. 7) 카를, 야스퍼스, 『죄의 문제: 시민의 정치적 책임』, 이재승 역, 앨피, 2014.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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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승은 형이상학적 죄라는 개념에 대해 “그것은 도덕적인 잘못에 기초한 죄가 아니 라 일종의 부채감이며, 흔히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으로 나타난다”고 해석한다. 8) 형이상학적 죄라는 개념에서 보자면, 91년 5월의 죽음들이 왜 직접 싸우는 삶이 아니라, 투쟁의 씨앗이 되는 죽음을 선택했는지 짐작 가능하다. 노태우 정권의 타 도는 개인의 힘, 운동세력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강경대의 죽 음에도, 이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잇따른 분신에도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 러한 현실에서 누구보다 깊고 예민하게 죄책감을 느꼈던 5월의 죽음들은 강경대와 운명을 같이 하는 방식으로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 까.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의 죽음이야말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을 것이다. 죽음을 통해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책임을 다하는 방식은 1990년대 초반이었기 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박창수의 편지와 김귀정의 일기에서 볼 수 있듯이, 1990년대 초반은 운동에 대한 신념과 낙관이 넘쳤던 시대다. 내가 죽더라도 대신 하여 싸워줄 동지들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던 시대였다. 하지만 인간 상호간에 연 대와 소통, 조국과 민중, 변혁과 해방이 절대적 가치였던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시민 으로서의 정치적 책임 의식은 실종된 지 이미 오래다. “내가 있는 곳에서 불법과 범 죄가 자행되고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나는 나의 일신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 지는 않은가. 91년 5월 투쟁 과정에서의 죽음들이 남긴 흔적이 우리에게 묻고 있 다.

8) 이재승, 「형이상학적 죄로서의 무병(巫炳): 현기영의 <목마른 신들>읽기」, 『민주법학』57, 2015,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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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번의 1991년과 어떤 배신 박형오 (문예창작 90, 협동조합 솜리커피문화공장(준))

이미지 출처 : cafe.daum.net/cosmos91 해방의 코스모스 박승희 열사 카페

아침이면 부고처럼 대자보가 나붙었다. 날마다 사람들이 죽었다. 스무 살짜리 대 학생은 등굣길에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했다. 거리로 나가 ‘더 이상 죽이지 말라’ 고 외치는 것이 유일한 일과이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강의는 휴강이나 자체휴강 가 운데 하나였다.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의 손에는 펜 대신 매직과 청테이프, 작품 대 신 유인물이 들려 있었다. 4월은 잔인했다. 1991년에도. ‘트라우마’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대에 성수대 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이전에 이미 당시 젊은이들에게 정신적 외상으로 남아 버린 시간이었다. 그렇다. 사건이 아니라 시간.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화인이 었고 돌아 보는 일조차 스스로에게 금기가 되었다. 한 시절이, 한 세대의 청춘이 ‘하 얗게’ 봉인되었다. 어쩌면 그 지점이 나와 친구들, 선후배들에겐 ‘잃어버린 시간’이 거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였다. 권력의 죽임과 젊은이들의 죽음에 이어진 ‘어떤 배신’ 이 트라우마가 되어 기억을 진공시켰다. 우파 언론이 정원식 총리에 대한 한국외대 학생들의 밀가루와 달걀 세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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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를 ‘패륜’으로 단정한 것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서강대 박홍 총장의 ‘ 배후설’도 미안하지만 원체 그런 사람이었다고 ‘포기’할 수 있었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 젊은 벗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 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당신들은 잘못 들어서고 있다. 그것도 크 게!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다. 젊은 당신들의 슬기로운 결단이 있기를 학수고대하 고 있었다. 숱한 사람들의 간곡한 호소가 있었고, 여기저기서 자제요청이 빗발쳐 당 연히 그쯤에서 조촐한 자세로 돌아올 줄로 믿었다. 그런데 지금 당신들 무슨 짓을 하 고 있는가? 조선일보 1991년 5월 5일자 김지하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 중에서

펜은 칼보다 강했다. 활자는 대문짝만 했고 꼭 그만큼 충격이었다. 한 시대를 봉 인한 ‘부적’을 쓴 주인공은 다름아닌 저항시인 ‘김지하’였다. <오적>, <타는 목마름 으로>, <황토>의 시인이던 그는 조선일보에 칼럼 ‘죽음의 굿판’을 실어 순식간에 모든 것을 바꿔 버렸다. 그의 ‘격문’이 신호였을까. 수세에 몰렸던 노태우 정권과 우 파 언론은 주춤했던 여론을 ‘토끼몰이’ 했고 공안정국은 여당의 총선 압승으로 귀 결되었다. 김형수 등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신문 지면을 빌어 김지하와 우파신문에 반격하고 반론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의 생명사상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민주주의는 어떤 것이었을까. 젊은이들의 죽음에 그토록 결연 하던 그는 왜 권력의 죽임에는 초연했을까. 자신도 군부 독재에 의해 죽임 당할 처지 에 놓였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스무 살의 문학청년은 자연스럽게 ‘문학이란 무엇인 가, 시란 어떤 것인가, 또 작가란 누구인가’ 스스로를 향해 묻고 또 물었다. 집요한 추궁이자 지독한 회의였을 것이다. 누군가 분서갱유를 이야기할 때 <황토>나 <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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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태우지 않은 것은 다만 그것들이 어떤 증거가 될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 때문이었다. 이 ‘급진적’ 생명사상가는 급기야 자신이 저항하던 독재자를 유산으로 내세우는 자본가 정당의 후보이자 독재자의 생물학적 자식의 지지자가 되어 ‘대통령 만들기’ 를 거들었다. 그가 지지한 정권의 2년차에 또 한 번 잔인한 4월이 우리를 관통해 갔 다. 배는 비명까지 껴안은 채 침몰했고, 미디어는 호들갑스럽게 침묵했다. 그들에 따 르면 모두의 책임이었으니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알리바이 를 보트 삼아 가장 먼저 책임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대통령이었다. 스스로와 모두의 죄를 사한 이 인자한 전지적 심판자는 이전 정권들과 자신이 지 금껏 그래왔듯 자본을 위한 질주를 멈추지 않고 있다. 세금은 낮추고 규제를 풀어 모든 것을 사유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고삐 풀린 그것을, 권력은 창조경제 라 일컫지만 결국 ‘극단적 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오직 이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려는 이 ‘자본의 굿판’에 어떤 민주주의와 생명존중정신이 깃들어 있 는지 김지하는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1978> 첫 부분.

그때 노태우 정권의 공안 조작에 의해 ‘유서를 대필하고 친구를 죽음으로 내몬 패 륜아’로 낙인 찍혔던 한 젊은이는 중년이 되는 동안 다만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만 24년만에 가까스로 누명을 벗은 그는 지금 ‘암’이라는 다른 형벌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에 대한 ‘낯선’ 무죄 선고와 투병 소식이 시 간을 갑자기 1991년의 봄으로 돌려 놨다. 눈 뜨면 부고 같던 대자보를 읽고 거리로 달려나가던 그 시절로 돌아간 순간, 제멋대로 방망이질 하는 심장은 말을 들으려 하 지 않았다. 고통스러웠다. 꿈에서조차 기다려 왔을 무죄 판결에도 기어이 미디어에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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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무언의 메시지’를 통해 그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순간 나는 그가 한국 사회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상징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 했다. 김지하가 혹은 수많은 ‘내’가 2015년 5월을 살아가고 있을 때, 그를 포함한 누 군가는 ‘1991년 5월’과 ‘2014년 5월’을 살며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 :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적 요소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복합적 중층성(complex overdetermination) 또는 불균등연합발전(uneven and combined development)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철학자 에른스 트 블로흐가 1930년대 독일 사회를 규정하면서 쓴 용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늘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외형적으로만 동일한 현재에 존재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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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과거사 청산

남미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서병훈

<끈덕지게 어깨동무>는 2회에 걸쳐 20세기 이후 일어난 지구촌 과거사 청산을 되짚어 보고 있다. 독 일과 일본의 제 2차 세계대전 과거사 청산을 살핀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는 남미로 눈길을 돌려본다. 남미는 20세기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빈번하게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독재정권이 출현했다. 박정희 정권과 마찬가지로 남미 독재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국가폭력과 인권침해를 저질렀다. 민주화 이후 과 거사 청산이 이루어졌고, 현재도 진행이다. 그 과정을 현지 취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해야 마땅하나 훗 날을 기약하며 오늘은 자료에 기대어 수박 겉만 핥아본다.


생각하기

웅장하고 신비로운 고대문명을 꽃피운 잉카 문명의 대륙 ‘남미’. 그 남미가 8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많은 기념사업회원들에게는 ‘혁명의 땅’이었다. 『타오르는 산』, 『니 카라구아 혁명사』등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든 총의 역사를 읽으며 산으로 들어가는 혁명가를 꿈꿨다. 혁명은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던가. 대부분 남미 국가들에게는 비슷한 근현대사가 관통했다. 19세기 초중반부터 20 세기 초 에스파냐 등 유럽으로부터 독립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독재정권이 출 현하고, 이에 반발한 반체제 세력은 총을 메고 산으로 들어가거나 도심 지하로 스며 들었다. 독재정권은 미국이 지원한 총칼로 반체제 세력과 동조한 민간인을 무자비 하게 학살한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냉전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미국은 해병대까지 파견해 독재정권을 돕는다. 1948년 11월 15일 타임지에 따르면, 루즈벨트 미국 대 통령은 “그 놈은 개자식이지만, 그래도 우리 편인 개자식이다”라며 니카라과의 독 재자 소모사를 두둔한다. 개자식인 줄 알면서도 자기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는 이유 만으로 사람을 무는 데도 목줄을 풀어놓고 양껏 먹이는 주는 사람은 무얼까. 그도 개자식이 아닐까. 남미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독재정권의 학살은 극에 달 했지만, 반체제 무장세력은 동지의 피가 흐르는 개울을 건너 적의 심장을 향해 전 진을 거듭했다. 그만큼 독재정권에게 형제를 잃은 민중의 한이 뼈에 사무쳤고, 민 주화를 향한 염원은 뿌리 깊었다. 독재정권은 부정부패로 썩을 대로 썩어 무너져 내 렸다. 일부 독재자는 미국에서 지원받은 무기를 이웃나라 무장세력에게 팔아 사금 고를 채울 정도였다. 80년대 초부터 남미는 민주화 이행기에 들어섰다. 90년대 냉정체제 붕괴 이후 미 국이 남미에서 한발을 빼면서 민주화 물결을 급물살을 탔다. 끝까지 버티던 몇몇 독 재정권은 민주화의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홍수로 인해, 독재정권이 타살하여 산속에 묻거나 호수에 버린 시신들이 드러났다. 남미 각국은 과거사 청산에 들어갔고, 대부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물론 저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길은 휘거나 비틀리었다. 과거사 청산 또는 정리는 흔히 진상규명, 피해자의 명예회복, 가해자의 법적 책임 규 명과 처벌을 통해 ‘정의’의 실현, 피해자와 가해자 사아의 화해와 통합, 그리고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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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비극을 후속세대에게 교육하는 일 등을 포함한다. 그렇지만 원칙적인 과거사 정 리 해법이 정연하게 실현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가해자 처벌로 상징되는 ‘정의’의 실현을 우선시하는 사례뿐만 아니라 그것이 야기할지 모를 대립과 갈등을 고려해 ‘정 의’를 관철시키기보다 예컨대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을 바탕으로 우회적인 회해 정책 을 구사하는 경우를 비롯해 해당 사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태가 펼쳐진다. 1)

‘오월광장어머니회’는 울지 않는다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울지 않는다. ‘오월광장어머니회’는 더더욱 울지 않는다. 1983년 12 월 22일 알폰신 대통령은 법령을 통해 군부 통치자들이 제정한 자동사면법을 폐기 하고, ‘실종자조사국가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984년 위원회가 낸 5만 쪽에 달하는 보고서에는 실종자 8960명의 명단과 비밀수용소 약 340곳의 위치가 폭로되었다. 1만5000명이 넘는 군인이 인권 탄압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밖에도 군부가 임산부와 아이들까지 고문한 사실까지 밝혀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연방항소법원은 군부 지도자 9명에게 중형을, 전직 대통령들 에게 16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하는 등 가해자에 대한 처벌에 나섰다. 그러나, 다섯 차례에 걸쳐 쿠데타 시도한 군부의 무력시위와 보수세력에 밀려 ‘기소종결법’과 ‘강 요에 따른 복종법’ 등 사면법이 제정되어 가해자 처벌이 무력화되었다. 급기야 알폰 신 후임자인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이 1989년과 1991년에 대사면까지 실시하여 교 도소에는 더 이상 가해자가 남지 않았다. 강산이 한번 바뀐 뒤, 2003년 5월 취임한 키르츠메르 대통령은 사면법과 대사면 을 무효화하는 시도에 나섰다. 2005년 6월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1986년 기소종결법을 무효화하고 국가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또한, 2005 년 10월 연방검찰은 인권유린 가해자 295명 등 460여 명 이상을 구속 수감하고 추 가로 762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신청하기도 했다. 2) 1) 박구병, 「진실·화해위원회 이후:아르헨티나와 페루의 배·보상과 추모 정책」, 『이베로아메리카硏究』 21-1. 2010. 2) 노용석, 『라틴아메리카의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과테말라와 엘살바드로의 경험을 통해 본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산지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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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가해자 처벌은 오롯이 ‘오월광장어머니회’의 승리이다. ‘오월광장어머니회’는 좌절 앞에 눈물보다는 결연한 의지로 오월광장에 섰다. 10년 여 동안 이곳에서 실종자 문 제의 진상규명을 끈질기게 요구하며 잦아들던 과거청산의 불씨를 횃불로 되살렸다. 한편, 1991년 12월 23일 공표된 ‘계엄령 기간 동안 행정부 지배에 의해 피해자들 에게 수여된 혜택’은 정치적 수감자를 비롯한 ‘더러운 전쟁’ 3)의 피해자들에 대한 배 상 기준을 마련했다. 이 법에 따라 다양한 금전적 배상뿐만 아니라 의료 보험, 군 복 무 면제 등 혜택이 피해자와 그 유족에게 주어졌다. 배상금 수령을 둘러싸고 피해자 단체들에서 뜨거운 논란이 일었다. 오월광장어머 니회는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전까지 정부 차원의 물질적 배·보상을 거부한다는 방침 을 세웠다. 일부 회원은 오월광장어머니회-설립자노선을 구성하고 배·보상을 받아 들였다. 설립자노선과 일부 인권단체들은 정부 차원의 배·보상은 정부가 구금이나 실종에 대한 책임을 상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는 판단으로 경제적 지원을 부정적 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진실규명과 가해자 처벌 없이 배·보상이나 화해는 있을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과거사 청산 기념사업은 유해발굴과 이장, 거리나 학교 명칭에 희생자의 이름을 붙이는 명명식, 박물관 또는 추모기념관 건립 등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해군기 술학교 4)를 기억 박물관으로 전환시킨 프로젝트가 눈길을 끈다. 1990년대 말 정부 는 해군기술학교를 부수고 평화 공원 조성 계획을 세웠다. 민중의 강력한 반발에 부 딪혀 계획은 무산되고, 2003년 말 정부는 원형을 보존한 상태에서 이곳에 국립기 억자료보관소를 설립하였다. 또한, 군부 압제를 상징하는 탄압기록을 보관시켰다.

피노체트 체포로 살아난 과거사 청산(칠레) 1998년 피노체트가 스페인 사법당국에 전격적으로 체포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이를 계기로 보수당이나 군부가 피노체트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태도를 보인 것이 3)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은 1976년에서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군사정권이 국가에 의한 테러, 조직적인 고문, 강제 실 종, 정보 조작을 자행한 시기를 일컫는다. 학생·기자·페론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게릴라 및 동조자가 주피해자이다. 약 1 만 명 정도의 몬토네로스와 인민혁명군의 게릴라가 실종됐고, 최소 9000명에서 최대 3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실종되거나 살해된 것 으로 추정된다. 더러운 전쟁은 콘도르 작전의 일부로 시작됐다(위키백과 참조). 5) 군부쿠데타의 주역 가운데 한명인 에밀리오 마세가 제독이 설립한 해군기술학교는 340곳 비밀수용소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기업의 터’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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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998년 8월 소집된 대화위원회는 정부·군·민간인으로 구성되어 군의 협조를 받 아 6개월간 조사를 진행했다. 여기서 180여 명의 실종자 명단이 확인되었는데, 그중 150여 명은 바다나 호수에 투기된 사실이 밝혀졌다. 5)

1990년, 칠레는 과거사 청산에 나섰다. 군사쿠데타 후, 16년간 폭압통치한 피노 체트를 대통령선거에서 꺾고 집권한 아일윈 대통령은 군부통치 아래에서 실종되거 나 사망한 사람들을 조사하려고 진실화해국가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992년 위원 회는 보고서를 통해 3428건의 실종과 학살, 고문, 납치가 이루어졌고, 비밀정보 기 구였던 DINA가 주도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보고서 발표 직후 3주 동안 3건의 정치적 암살이 자행되었다. 그 뒤에는 피노체트와 군부, 보수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정치 분열을 우려한다는 이유로 수 만 부의 보고서와 함께 과거사 청산은 창고의 어둠 속에 봉인되었다. 피노체트 체포로 인해 봉인이 해제된 과거사 청산은 2004년 제2기 진실위원회에 서 다루어졌다. 제1기 위원회와는 달리 억압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고문과 인건침 해 사례를 조사하였다. 이 내용은 칠레 정부가 피해자에게 연금 및 각종 혜택을 지 급할 때 자료로 사용되었다. 칠레 과거사 청산은 진실위원회와 별도로 ‘보상과 화해를 위한 전국재단’이 설립되 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 재단은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과 유해 발굴을 진행하였다.

무풍지대에 부는‘새바람’(브라질) 남미 강국 브라질은 과거사 청산의 무풍지대였다. 이웃 나라들이 과거사 청산으 로 부산한 가운데 브라질만은 1979년에 제정된 사면법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심 지어 브라질 연방대법원은 2010년 사면법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 렸다. 1964년 3월 31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군사정권은 1985년까지 21년 동안 집 권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구금되거나 외국으로 추방당했

5) 정현백, 「글로벌 시각에서 본 과거청산의」, 『역사비평』9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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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군사정권은 1979년 사면법을 제정해 군사정권 전후에 벌어진 정치적 사건에 대 한 처벌을 막았다. 2012년 무풍지대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1960년대 후반 게릴라 활동에 가담했 다 수감된 경험이 있는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국가진실위원회를 설치했고, 진실 위는 2년 반 활동 끝에 2014년 12월 보고서를 발표했다. 진실위는 인권범죄 희생자 434명과 인권범죄에 연루된 377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보고서 발표를 계기로 인권단체와 법조계에서 군사정권의 인권범죄 연루자 처벌을 사실상 금지한 사면법 수정을 촉구하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6)

진실위 활동과 더불어 브라질 정부는 인권유린 가해자에 처벌에 나섰다. 2012 년 3월 14일 브라질 검찰은 군사정권 시대의 인권유린과 관련해 전직 대령을 기소 하였다. 브라질 검찰이 좌파 게릴라 5명을 납치한 혐의로 대령 출신인 세바스치앙 지모라를 기소했다. 브라질 검찰은 4년 여의 조사 끝에 지모라가 지휘하는 부대가 아직도 행 방불명 상태인 이들을 납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브라질 공산당 계열인 피랍자들 은 중부 아라과이아강 유역에서 군정에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전개한 이들로 남성이 3명 여성이 2명이다. 당시 아라과이아 게릴라 그룹에서는 모두 62명이 실종됐다. 7)

브라질의 과거사 청산은 만만치가 않다. 진실위 보고서가 발표되자 군인 관련 단 체와 가족들이 반발했다. 퇴역군인단체는 진실위 보고서가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면 서 군사정권 시절 좌파 무장단체에 의해 살해된 120여 명의 군인과 경찰관, 민간인 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들 유족 일부는 최근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 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6) 김재순, “브라질 과거사 진상규명 난항…군인단체·가족 반발”, 『연합뉴스』, 2015년 1월 30일. 7) 이본영, “브라질 40년 만에 ‘과거 청산’”, 『한겨레신문』, 2012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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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 열사 26주기 추모제 & 1박 2일 어깨동무 여름캠프

우리 마음속에 영원한 청년으로 살아있는 내창이형! 형을 광주 망월묘역에서 경기도 이천의 ‘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이장하고 첫 추모제를 치릅니다. 하여 올해는 조금 색다르게 준비했습니다. 의혈중앙 동문과 가족, 재학생들이 참여하여 추모제를 치르고 인근에 위치한 안성의 리조트에서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8월 15일, 우리 곁에 다가온 내창이형과 함께 한동안 보지 못했던 동문과 함께 그 시절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마주하고 싶습니다.

추모제 일정

여름캠프 일정

일시 : 2015. 8. 15(토) 11시

일시 : 2015. 8. 15(토) 오후2시 ~ (1박 2일)

장소 :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장소 : 안성 내츄럴 리조트(www.naturalresort.co.kr)

프로그램 : 추모제, 다 같이 그리는 추모 걸개그림

프로그램 : 물놀이, 오카리나 강습, 바비큐 파티, 별별토크쇼 등

오시는 길 : 자가용 카풀을 권장합니다.

준비물 : 물놀이 복장, 돗자리

* 내비게이션에 ①경기 이천시 모가면 어농리 622-14

회비 : 졸업동문 6만원, 초등생 이하 2만원, 재학생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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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② ‘이천농업 테마공원’ 찍고 오세요^^

문의 : 노용현 사무국장(010-3715-1572)


드뷔시 ‘바다’ 무작정 올라탔던 오징어배에서 만난 풍랑 박성용

바다는 내게 낭만과 레저의 대상만은 아니다. 물 공포증이나 잠수 공포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뱃사람들의 억센 삶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 어 있기 때문이다.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된 20대 초반, 나는 선배가 있는 군 산으로 편도 차비만 들고 무작정 내려갔다. 그때 군산에는 나보다 먼저 내려간 왕 고참 선배가 어선을 타고 있었다. 이미 뱃사람이 다 된 그 선배는 날 보더니 대뜸 같 이 배에 타자고 권유했다. 나도 딱히 군산에서 할 일도 없고 또 호기심이 생겨 고개 를 끄덕였다. 이렇게 어느 허름한 술집의 백열전구 아래서 ‘어부결의’를 한 우리는 뱃사람들과 어울리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해망동 부둣가를 누비고 다녔다. 우리가 탄 묵호수 협 소속 오징어잡이 배는 제법 큰 목선이었다. 정비를 마치고 보급품을 실은 배는 서 해의 공해상까지 나가 조업을 했다. 오징어잡이는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이었다. 캄 캄한 바다 한복판에서 대낮 같은 집어등을 밝힌 분주한 갑판은 때론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어떤 날에는 바다가 장판처럼 잔잔해 뛰어들고픈 충동이 일기도 했다. 배에 는 선장을 비롯하여 갑판장, 기관장, 조기장 등의 본 선원과 우리 같은 뜨내기들 10 여 명이 한데 뒤엉켜 지냈다. 바다에 나간 선원들은 부둣가에서 겪었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가족의 생계를 온몸으로 떠안았던 그들은 바다와 맞서며 때로는 순응하면서 성실한 가장으로 변 신했던 것이다. “뱃놈은 바다에 나가야 순해진다”는 부둣가에 떠돌던 속설이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웬만한 파도에도 굴하지 않은 그들은 “오징어가 더 잘 잡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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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며 뱃머리에서 낚싯줄을 끌어올렸다. 풍랑이 심한 날에는 조업을 중단하고 방 에 둘러앉아 기우뚱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아가면서 점당 오징어 한 마리가 걸린 고 스톱을 쳤다. 그러다 선장의 다급한 소리가 들리면 다들 뛰쳐나가 만일의 사태에 대 비했다. 폭풍우가 불어 닥친 바다는 그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돋았다. 해변에서 보았던 것 과는 차원이 달랐다. 집채만한 파도가 덮칠 때마다 목선치곤 꽤 컸던 배는 그야말 로 일엽편주 신세였다. 잠시 파도가 잠잠해진 틈을 타서 바다에 띄었던 가빠와 닻을 걷어 올리고 한밤중에 가까운 섬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어청도와 가까워질수록 날 씨는 개고 바다는 평온을 되찾았다. 방파제에 배를 묶고 나자 온몸의 긴장이 풀렸 다. 땅 냄새가 그리웠던 우리는 선창가 술집으로 몰려가 젖은 몸을 말리며 밤새 술 잔을 기울였다. 그때 낡은 유리문 너머로 교교한 달빛이 검푸른 바다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드뷔시의 <바다·La mer>는 ‘3개의 교향적 스케치’란 부제가 붙어 있다. 1곡 바 다의 새벽부터 낮까지, 2곡 파도의 희롱, 3곡 바람과 바다의 대화 등 각 곡마다 표제 가 달려 있다. 일본 화가의 판화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된 이 작품은 인상파 음악의 상징이기도 하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부터 낮까지 끊임없이 변하는 바다, 하얀 물보 라를 일으키며 장난치는 파도, 천둥소리와 바람에 출렁이는 바다를 치밀한 관현악 기법으로 풀어내고 있다. 색채감과 농밀한 묘사에서 남다른 재주를 발휘한 카라얀 의 음반에 손이 자주 간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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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삶은 무엇인가 Being Mortal을 읽고 이홍열

한 팟캐스트를 듣던 중 우연히 Being Mortal 이라는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인터넷을 찾아보 았지만, 번역본으로 출간되어 있지 않았다. 짧은 영어실력이지만, 내게도 언젠가는 반드시 다가올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갖기 위 해 이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 Being Mortal의 저자는 인도계 미국인 의사 다. 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노화와 죽음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들을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 노인들 의 삶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미국의 선각자들 이 여러 차원에서 시도한 다양한 노력들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준 책이라고 보면 된다. 첫 번째 이야기는 노인의 삶의 질에 대한 문제다. 미국에는 양로원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안전을 우선시하여 모든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시스템으로 인해 노인들의 삶의 만족도가 상당히 떨어진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인들을 위한 작은 지역사회를 만들고, 생활 전반을 자율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려 한다. 결국 이 이야기는 노인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나 자율적인 삶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느냐에 따라 삶의 질에 현격한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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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는 말기 암환자가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과정을 실제 사례를 통해 생 생하게 보여준다. 생존 가망이 희박해진 말기 암환자들의 경우 환자 본인보다는 주 위 가족, 친지들의 성화로 인해 검증되지도 않은 항암치료 등에 매달리다 삶의 질을 더욱 악화시키고 종국에는 감당하기 힘든 의료비에 허덕이며 삶을 마감하게 된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저자는 호스피스 제도를 이용하도록 적극 권장한다. 더 나아가 집에서 간호사를 호출하는 서비스를 받고, 집에 머무르는 동안 가족과 생의 마지막 을 정리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서비스는 우리나라에서도 받을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더 확대될 필요가 있다. 국민의료보험이 적용되어 적정한 대가를 치르더라 도 모든 국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로 정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지막 이야기는 저자의 친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친아버지도 의사였고 의 료 활동 이외에도 왕성한 사회사업을 해오던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모든 사람은 죽 는다는 명제 아래, 어느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간 명하게 보여주었는데, 결국 암에 걸린다. 본인이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에 대 한 진단은 물론 이후의 치료 과정 및 예후에 관해 철저히 전문의의 손에 맡긴다. 그 리고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때가 오게 되면, 생물학적 생명만을 이어가는 연명치료를 거부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밝힌다. 죽음을 미리 준 비하고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그의 태도는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대해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부분이다.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이라면 운명적으로 맞이해야만 하는 죽음. 바쁘고 힘겹게 살아가는 세태 속에서 한 번은 이 죽음이라는 주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깊은 고 민과 성찰을 해보았으면 한다. 그렇다면 좀 더 여러 측면에서,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되지 않을는지…….

* 아툴 가완디의 Being Mortal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출판사 부키에서 지난 6월에 출간되었다. 이홍열은 1988년에 중앙대학교에 입학했다. 직장생활 19년 차로 글로벌 포딩 회사에서 감사역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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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소식 조형준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 리사이틀 시적인 감성, 폭풍 같은 격정, 눈부신 기교의 조화 이 시대 최고의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내한공연

어떠한 장르의 공연에 관심이 없다 하

이어지는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

여도 사는데 전공 필수처럼 한번쯤은 보

를 선사할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공

아야 할, 아니 봐줘야할 것 같은 공연이

연으로 8월29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있습니다. 클래식 콘서트 같은 경우도

해돋이극장, 9월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

내공이 깊은 거장의 공연이 느닷없이 당

홀 그리고 9월4일 울산 현대예술관 대공

신의 영혼을 뒤흔들어 딛고 있는 세상과

연장에서 막이 오르는 <미샤 마이스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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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첼로 리사이틀>을 추천합니다.

첼로 음악의 정수를 경험할 수 있는 레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는 로스트로

퍼토리들로 꾸며집니다. 로스트로포비

포비치와 피아티고르스키를 사사한 유

치가 극찬한 “시적인 감성과 폭풍 같은

일한 첼리스트입니다. 로스트로포비치

격정, 눈부신 기교의 조화”를 느낄 수 있

는 “젊은 세대의 첼로연주자 중 가장 뛰

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번 내한

어난 재능을 가진 연주자. 그의 연주에

공연에서 자신의 가장 편안한 파트너라

서는 대단한 열정, 뛰어난 테크닉과 더

고 이야기한 바 있는 그의 딸이자 피아

불어, 시적 감성과 매우 아름다운 섬세

니스트인 릴리 마이스키와 함께 남다른

함을 느낄 수 있다.” 라며 미샤 마이스

부녀 케미스트리의 호흡을 선사합니다.

키를 극찬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내한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이어지는 계절

공연에 연주할 곡은 바흐 비올라 다 감

에, 거장의 음악에 한번 심취해 우리의

바 소나타, 쇼스타코비치 첼로 소나타,

인생을 현의 흐름에 띄워 관조하는 것도

부르흐의 콜 니드라이, 데 파야스페인

의미 있는 인생의 하루가 될 것이라 생

민요모음곡, 피아졸라의 라그랑 탱고로

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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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려보기

만주전선 90분간, 역사의 뒤편을 정조준한 인간 욕망의 막장드라마 박근형 연출 특유의 입심과 상상력이 풀어낸 굴절된 인간의 욕망!

2014년 박근형 작 연출의 창작 초연

술가들과 함께 한 단둥과 집안 등의 중

작품이 있었다. 박근형 연출은 우리 연

국여행이 어떤 계기가 되지 않을까 개인

극계에 ‘청춘예찬’, ‘물속에서 숨쉬는 자

적으로 추측해봅니다. 실제 그때 그 여

하나도 없다’, ‘경숙 경숙이 아버지’등의

행을 갔다 온 예술가들이 그 이후 한반

자신만의 색깔로 한국연극의 지형을 뒤

도의 역사와 갇혀서 정체되는 남한 사회

흔들 정도의 충격과 신선한 자극을 준

의 답답함을 토로하는 ‘환도열차’(장우

작가 겸 연출가입니다. 새롭게 씌어져 무

재 작 연출), ‘뺑뺑뺑’(김은성 작,부새롬

대에 오른 작품은 <만주전선>. 2013

연출) 등의 작품으로 주목받은 바 있습

년 겨울에 김석만 교수님이 이끈 공연예

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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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연극 <만주전선>의 몇몇 언 론 리뷰를 간추려 보겠습니다.

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돌아보 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풍운의 꿈이 굴곡진 현실에서 어떻게 왜곡이 되

“스토리는 재미있고 대사는 찰지다. 한국 연극계 가 건져 올린 문제작 가운데 하나!” - 경향신문 “탄탄한 극본, 개성 캐릭터... 이게 진짜 연극” - 한 국경제 “세상을 향해 쏟아내는 그의 시선은 한국사회의 갈

하게 만드는 공연입니다. 그렇다고 한 없 이 진지한 극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박 근형 작 연출 특유의 엉뚱한 상상력으로

“말도 안되는 역사의 쇠퇴를 웃음으로 유인해 묵직

오히려 그들의 본질적 모습을 적나라하

극작, 연기, 음악, 소품, 그 밖에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 오마이뉴스

그리고 이 연극은 2014년 월간 한국 연극이 선정하는 ‘한국연극 BEST7’에 도 뽑혔습니다. 극의 내용은 70 여 년 전 풍진 날리는 만주벌판에 풍운의 꿈을 가득안고 떠난 조선의 젊은 청년들의 사랑과 우정, 그 리고 그들의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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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을 규정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

라진 틈을 바라보고 마주하게 된다” - 국민일보 한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 작품은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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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그 왜곡된 그들의 삶이 어떻게 오늘의

게 내보이는 과정에서 우리는 뜻하지 않 은 헛웃음을 터뜨리게 됩니다. 더 이상은 스포일러가 될 터, 이 공연 은 올해 5월에 서울연극제 초청작으로 공연된 후, 요즈음은 지역 투어공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안산문화예술의전 당 별무리극장에서 9월10-12일 공연됩 니다. 목,금 20:00 / 토 15:00, 19:00


혼자가 아님을 알 때, 더 단단해졌다

2015년 봄여름 과거청산 기록 신명철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2차 유해발굴 및 토론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2차 유해발굴지를 대전 산내골로 확정하고 2월 23일부터 3월 1일까지 유해발굴 작업 을 진행했다. 이 기간에 40여 구의 유해와 탄피 등을 발굴했다. 대전 산내골은 1950년 6~7월,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 및 보도 연맹원 등 민간인 4000명에서 최대 8000명을 한국 군인과 경찰이 집 단 학살해 매장한 곳이다. 지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산내에서도 한 차례의 발굴이 진행돼 30여 구 의 유해가 발굴되기도 했다. 이번 유해발굴은 공동조사단과 지역의 시민단체가 함께 공동대책위 를 꾸려 유해발굴을 진행했고, 6월 7일에는 65주기 합동추모제가 현 장에서 치러지기도 했다. 6월 18일에는 국회 의원회관 2층 세미나실에서 ‘2차 유해발굴 보고대회 및 토론회’가 열렸다. 대전 산내 골 유해발굴 성과를 보고하고, 3차 유해발굴을 준비하는 자리가 1부로 진행됐고, 2부에서는 국회의원 강 창일의 대표발의로 입법 발의한 한국전쟁기 유해발굴 관련 법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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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긴급조치 국가배상판결 규탄 기자회견 및 토론회 3월26일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가 사후적으로 법원에서 위헌, 무 효로 선언되었다고 하더라도,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 긴급조치 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에 대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 다‘고 판시하였다. 이는 유신의 품에 안긴 대법원의 판결로 6줄로 쓴 고도의 정치성을 띤 지록위마(指鹿爲馬) 판결이고, 그동안 소멸 시효를 인정한 판결을 애써 외면한 외눈박이 판결이며 사법적 잔인 한 폭력이다. 민변을 비롯한 긴급조치 피해자 대책위, 49통일평화 재단, 포럼진실과정의, 계승연대,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 역 사정의실천연대, 한국전쟁유족회 등은 3월 30일 대법원 앞에서 규 탄기자회견을 열었고, 헌번소원을 제기하기로 하였다. 6월 22일에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대법원 유신 면죄부 판결 규탄 토론회’가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렸다. 조영선 민변 사무총 장의 사회로 한상희 건국대 교수, 문병효 강원대 교수, 이재승 건 국대 교수의 발제와 이상희 변호사와 박석운 진보연대 대표의 토 론이 있었다. 토론을 마치고 참석자와 함께 공개질의서를 체택해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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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기

검찰의 과거사 흠집내기 수사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 등을 밝히는 등 국가와 예민하게 맞섰던 민변이 횡액을 당하고 있다. 과거사 관련 국가기구(의문사위원회, 군·국정원·경찰과거사위, 진실화해위 등)에서 일을 했던 변호사들이 의문사 등 인권침해사건을 수임했고, 국가배상 판결에 따른 수임료를 받았던 일을 가지고 변호사법 위반 등으로 수 사에 착수해 기소하였다. 국가공무원으로 취득한 정보를 이용했다는 것이 이유이나 현 정권의 도덕성에 문제제기를 하는 과거청산 운동에 족쇄를 채우려는 정치적 행보이다. 일부 변호사의 과도한 사건 수임 의 문제는 있으나, 이를 침소봉대해 전체 민변 변호사의 도덕적인 문제인 것처럼 왜곡하고, 종편을 통해 확대재생산 하고 있다. 목 안의 가시 같은 과거사 사건을 왜곡 호도하기 위한 검찰을 앞세운 폭거는 재판 을 통해 진실을 밝히는 과제가 되었다. 과거사에 대한 바른 인식과 완전한 해결의 계기로 삼아 적극적으 로 대처해야 하겠다.

24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 6월 7일 청계광장에서 24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열렸다. 사전부문행사인 학생열사합 동추모문화제가 열려 보신각에서 청계광장까지 영정을 앞세우고 행진했으나, 사전에 협의하지 않아 행 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내창 열사의 고등학교 동창이 행사에 참석해 영정을 모시고 본행사장까지 행 진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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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욱

이름

지역

농장

주문

유영길

경남 거창

온새미로농원

010-5412-6131

이제성 & 김은희

충북 괴산

김태호 & 우지영

충북 괴산

방상운 & 송은진

장성백 & 최현주

은희네 농장

010-2735-5337

물품

언제?

딸기

12~5월

딸기잼

3월부터~

현미, 백미

연중

산마, 산마씨

10월 수확예정

올해는 농사를 조금만 하는 해 입니다.

경북 의성

충북 괴산

림이네 농장

사과현 농장

장감독 농장

010-6891-0778

010-4705-4036

010-6361-8540

대학찰옥수수

7~8월

무시래기, 무말랭이, 무차

11~12월

사과(홍월)

9월

사과[후지(부사)]

11월

사과생즙

연중 - 전화문의필요

현미, 백미, 찹쌀, 찹쌀현미

연중

고춧가루, 된장

연중

토마토

7~8월

감자

7~8월

고구마

10월

자연산 송이, 능이, 잡버섯

9~10월

돼지감자, 야콘 예약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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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더하기

이름

박형오

지역

전북 익산

상호

솜리커피

주문

010-3025-0505

물품

언제?

로스팅원두

연중

주문 후 바로 로스팅합니다. 더치커피

연중(6~9월에 더 맛나요^^)

3만원이상 배송비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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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동정 + 페북동정 5월1일 메이데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2014년 칼막스의 묘, 런던 하이게이트 송정근 (사진 89)

시인 성백술 시집 발간 - 복숭아나무를 심다 성백술

괴산 농부 장성백 선배가 기른 친환경 토마토가 도착했습니다. 맛 좋아요! 김성룡 (사진 93)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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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중 사고 빠른 쾌유를 빕니다. 이규성 아래는 페북에 올라온 글입니다. ★ 공지말씀 드립니다 ★ 페이스 북 소식이 잠시 중단되어, 그간 경유 등 에 대해 간단하게 올리고자 합니다. ‘세계일주 자동차 여행’ 그룹을 리더하며, 이 곳 페이스북에서 생생한 흔적을 남겨오신 ‘이 규성’님 께서 ‘이르쿠츠크’ 인근에서 예기치 못 한 사고로 현지병원으로 이송 입원치료 중이라 는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ㅠ 지금까지 현지 의 료진 및 동행하신 관계자 분 등의 의견을 종합 하면 앞으로 약 일주일여의 현지 치료와 안정이 필요해 보인다는 소견입니다. 더불어 갑작스러 운 사고에도 불구하고, 같이 동행하시는 두분 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현지 외교부 러시아 영 사관 관계자님들,현지 의료진 그리고 한국에서 물심양면 관심과 격려 주시는 관계자 여러분께

김동규 동문을 위한 모금 결과 보고 - 총 모금액 : 5,760,000원 - 참여동문 수 : 26명

가족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

김동규 계좌 : 650,000원

니다 ^^ 더불어....... 자동차를 통한 새로운 도

(송은진, 방상운, 노용헌, 고재영, 신성호, 김성룡, 장은실)

전에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예측치 못한 변수는 항상 상존 하리라 보입니다. 이러한 시 련의 브레이크를 잘 극복하고, 힘찬 ‘엑셀레이 터’를 조만간 다시 밟을수 있게 되길 기원해 봅

정재오계좌 : 5,110,000원 (김지훈, 정재오, 이홍열, 한선희, 이원근, 이계현, 김경주, 김성수, 노태성, 오병석, 장미경, 고아람, 김영일, 전경미, 한준, 이경호, 김진희, 우유섭, 강동길)

얼마전 부산 근처에서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합 니다. 염려해 주신 모든분께 감사인사 부탁하여 전합

니다. 또한...... 여러분의 ‘마음과 마음으로의

니다. 8월 18일에 서울에 올라올 예정이오니 시간 되

응원’이전해져 빠른 회복에 크나큰 도움이 되

시는 분들은 직접 만나 자세한 근황 듣고 힘주세요^^

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91학번 이경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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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집 요즘 산을 많이 타시는 듯 이주현

<뿔>, 마지막 공연까지 잘 마쳤습니다. 내일 이록이 방과후 교실 반찬 만들어가야 하지만 마이너스 난 것에 대한 정산 작업 해야 하지만, 일단 오늘은 술 먹고 죽을랍니다. 8월 2일 김관 (연극영화 90)

5월 22일 조환준, 노용헌, 김경주, 이지원, 정원옥 4·16 국민상주단으로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광화문 농성장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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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세요 담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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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들어요. 하나, 2015년 가을 · 겨울호 편집위원 되기 자주 안 모입니다. 회의는 짧게, 뒤풀이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일은 찾아서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합 니다. 느릿느릿 갑니다. 끈덕지게 함께 갈 열의와 책임감이면 충분합니다.

l 찍은 날

2015년 8월 12일

l 펴낸 날

2015년 8월 14일

l 펴낸 이

강내희

l 펴낸 곳

이내창 기념사업회

l 연락처

사무국장 노용현 010-3715-1572

cafe.daum.net/19890815

둘, 기고하기 어떤 형식과 내용의 글이라도 좋습니다. 나누고 싶 은 생각,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 소소한 일 상의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 음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회원 자녀의 기고에는 소 정의 원고료가 지급됩니다.

김선주, 서병훈, 조환준, 김경주, 이원근, 정원옥, 백기욱, 신성호가 함께 만들었습니다. ‘미리 보는 현장 30년’에 사진을 제공하고 표 지 및 내지에도 쓸 수 있도록 허락해준 현장 식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인터뷰에 응해준 이수병기념사업회와 이한열기념 사업회의 간사님, 정진후 선배님과 강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권두칼럼을 보내주신 논골신협 유영우 이사장님과 기고 를 해준 강남규, 박형오, 박성룡, 조형준, 이홍열님, 모두 고맙습니다. 페이스 담벼락의 사진과 글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회원 여 러분께도 늘 감사드립니다. 인쇄는 상지사, 발송은 신성호가 애써주었습니다. 온라인 소식지 관리는 백기욱이 담당합니다. <끈덕지 게 어깨동무>는 naechang.kr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밴드 <묻지말고 응답해라 의혈중앙>에서 근황을 나누시고 기념사업회 소식 을 공유하셔도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끈덕지게 어깨동무>를 기다리고 애독해주시는 회원 여러분께 감사드 립니다. 매번 그랬지만, <끈덕지게 어깨동무>의 발간이 자꾸, 많이 늦어져서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끈덕지게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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