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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R September 2013 Vo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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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진숙 에코팜므 대표

이 것 인 적 가장 개인 다 이 힘 한 가장 강력 54

난민여성들과 함께 가는 사회적 기업을 꿈꾼다 People &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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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외국 여성들을 볼 수 있다. 관광객, 유학생, 주재 원 등 다양한 외국여성들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아예 우리 땅에 정착해서 살아가 는 이들도 있다. 주로 결혼을 통해 정착하거나 아니면 불가피한 사정으로 난민이 된 여성들이다. 이들을 돕는 에코팜므라는 단체가 있다. 단순히 돕는 NGO로 그치지 않고 그들의 문화적 재능을 활용하여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오 해하지만 난민 이주여성들은 그들 나라에서는 대개 엘리트였다. 그들의 교육, 문화 적 재능과 솜씨가 들어간 제품은 꽤 수준높은 작품이 된다. 만만치 않은 이들과 만 만치 않은 사업을 꾸려가는 에코팜므의 박진숙 대표를 지난 8월 20일, 에코팜므가 입주해 있는 함께일하는재단 3층 소셜인큐베이팅센터에서 만났다.

미디어를 통해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아직

갔다. 당시 사법연수생 신분으로 공부를 하고 도왔

CMR 독자들에게 에코팜므는 낯선 기업이다. 소개

는데 아프리카 불어권의 자료는 읽기 어려웠다. 마

를 부탁한다.

침 내 전공이 불문학이었다. 졸업 후 불어를 사용

에코팜므는 2009년에 5월에 설립된 NGO기반

하지 않은지 오래되었으나 남편의 자료번역, 인터

사회적 기업이다. NGO이기도 하고 동시에 사회적

뷰 통역 요청에 아르바이트 하는 심정으로 응했다.

기업이기도 하다. 핵심은 이주여성이다. 이주여성

당시는 주부이자 아동가족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의 문화를 비즈니스 방식으로 발굴하고 서비스나

신분이었다. 한번은 법정에 통역을 하러 갔는데,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주여성들이 만든 제품

판사들도 난민에 대해 잘 모르고 난민에 대한 오해

을 유통해서 수익을 창출하려고 한다. 공장에서 제

들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한 명의 난민을 받아주

작된 획일적인 수준의 제품이 아니라 수작업 방식

면 마치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 난민들이 몰려들 것

으로 상당한 수준의 다양성이 확보된 질 높은 문화

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의문이 생기기

를 보여주는 것이 목표다. 그래서 이주여성의 이미

시작했다. 왜 잘 모르면서 선입견을 갖고 있을까.

지를 바꾸고 싶고, 이주여성들도 우리 사회에 기여

아동가족학을 공부하며 논문을 써야 하는 시점이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

기도 했다. 학문적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로 문화다양성의 확산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에 코팜므를 통해 한국사회가 다양해졌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2007년에 콩고 난민여성을 대상으로 한글반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한글 반 수업을 그 해 4월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리

왜 이주여성에 주목하게 되었나? 특별한 계기 가 있었나?

아이들이나 나 역시 흑인들을 보고 놀라고 겁을 내 기도 했다. 나는 성격상 한번 하면 끝까지 하는 스

난민여성부터 시작했다. 내가 찾아간 것이 아니

타일이다. 한글반을 맡고 나서는 열심히 했다. 그

라 난민여성이 어느날 나에게 찾아왔다. 인권변호

렇게 어려운 1년을 지나며 이들이 가진 재능을 보

사의 꿈을 가진 남편(공익법센터 <어필APIL>을 운

게 되었다. 나 역시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니 못 배

영하는 김종철 변호사)의 영향이 컸다. 남편이 ‘피

우고 하류층일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이 있었다. 그

난처’의 이호택 대표님과 함께 컨퍼런스를 하면서

러나 그들은 모국에서 대학을 나왔거나 대학을 다

난민을 위해서 법률적 지원을 하는 연구 모임에 나

니다가 온 사람들이다. 소위 많이 배운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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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래서 한글만 가르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들

며 프로그램을 종료해야 하는 때가 왔다. 11월 14

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눌려있다는 것을 보게

일에 마지막 수업을 했는데 이주여성들이 너무 슬

되었다. 가족학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낮은 자존감

퍼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을 어떻게 높여줄 수 있을까, 엄마의 자존감이 높

없다라고 생각하다가 그들의 반응을 보며 마음이

아야 아이들도 자존감이 높아질텐데’라는 고민이

아팠다. 안타까운 마음에 개인적으로 해볼까 하는

들었다.

생각을 했지만 지속가능성 확보가 어려울 것 같아

마침 캐나다에서 열리는 국제난민회의에 참가

서 단체를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해서 2009년 5월

할 일이 있었는데 이주여성들이 리더가 되어 주도

30일 난민 이주여성들을 위한 단체, 에코팜므를 만

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주여성들

들게 되었다. 에코(eco)는 경제(economy)와 생태

이 그린 그림을 봤는데 화려한 색채나 느낌에 매료

(ecology)를 뜻하고, 팜므는 프랑스어로 여성이라

되었다. 반면 한국의 난민 여성은 수동적으로만 지

는 뜻이다. 생태적인 방식으로 이주여성과 일을 해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에는 어떤 식으

서 경제적 자립을 도모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

로든 변화를 주고 싶었던 때였기에 그림을 통해 자

렇지만 단체를 만들 때는 난민여성에게만 집중할

존감을 높이고 스킬을 늘려 리더가 되면 좋겠다는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들이 원한다면 결

마음이 있었다. 나는 미술 전공자도 아니지만 캐나

혼 이주여성도 포함하기로 했다. 통칭하여 이주여

다에서 본 이주여성의 그림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

성으로 부르고 있다.

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주여성들과 그림과 미술

개인적이고 스페셜한 동기가 아니라면 시작하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림을 하며 이들이 치유

기도, 지금껏 지속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되고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고 가장 강

여성부 지원으로 2008년 다문화공방사업을 하

력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 버릴

다가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 그렇듯이 지원이 끊기

것이 없더라. 내게 허락하신 동안에는 이것을 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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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진행될지는 몰랐

것은 치유라고 생각한다. 치유에서 성장 그리고 자

다. 하나님께서 오묘하게 나의 인생을 만지심을 느

립의 단계가 있다면 현재는 치유가 가장 중요하다

낀다. 프랑스어와 가족학 공부, 영화와 문화에 대

고 생각한다. 치유 즉 마음의 힘을 얻게 하는 것이

한 관심(문화평론가에 대한 나의 꿈), 라브리 간사

중요하다.

경험 등이 이렇게 사용되고 있다.

경영학자 중 어떤 분이 자립이 곧 치유가 아닌 가 하는 의견도 있으나 그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이주여성은 얼마나 되나? 그

잠시 자립이 가능하겠지만 마음의 힘이 있는 사람 만이 자립할 수 있고 실패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과정을 최장 5년으로 잡고 있다. 길다고 느껴지긴 하지만 오랜 기간이 걸리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함께 하는 콩고 여성 도 6-7년 정도 되니 독립적으로 되었다. 난민여성은 가족 내에 어려움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결혼 이주여성은 미성숙한 상태에서 와서 많은 경우 핍박을 받는데서 오는 갈등과 어려움이 있다. 이슈가 다르긴 하지만 이들에게도 상처들이 있다. 농어촌에 결혼 이주여성이 많을 거라는 생각 들을 하지만 실제로는 일자리를 위해서 60%가 수 도권에 있다. 인구밀도 때문에 농어촌에 많아 보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이 거처가 불분명하여 이주민 들의 범죄율이 높을 거라는 인식들이 있는데 일자 리와 자녀를 낳고 커뮤니티가 생기면 이동이 어렵 다. 삶의 기반이 생기면 이동이 어려운 것은 이들

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가?

도 우리와 비슷하다.

경제적 이유로 온 노동 이주여성은 잘 모르겠 고, 결혼 이주여성만 14만 명 정도라고 알고 있다. 주로 중국, 베트남, 필리핀, 몽골 순으로 비율이 높

이주여성을 돕는 방법에는 여러 방법이 있을텐 데, 왜 사회적 기업이라는 방법을 택했나?

다. 그 중 난민여성은 극소수이다. 이들이 공통적

처음부터 사회적 기업에 대해 알고 시작한 것은

으로 가진 문제는 이주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러

아니다. 2008년 말 단체를 준비하며 어떤 단체가

나 목적이 다르다. 탈북여성과 난민여성이 가장 비

되어야 할지 고민했다. 단순히 교육에 그치지 말고

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비자발적인 이주를 한 경

우리도 자립하자라는 생각을 했다. 한두 번 바자

우이기 때문이다.

회에서 판매했던 경험을 떠올려 직접 만든 물품을

그렇기 때문에 난민여성은 초기 적응이 매우 어

팔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다. 마침 한 후배

렵다. 삶의 기반이 완전히 옮겨지기 때문이다. 일

가 사회적 기업이라는 것이 있는데 한번 알아보라

반 이주여성보다 급격한 사회적, 경제적 추락에서

며 알려줬다. 그 때만 하더라도 전혀 들어보지 못

오는 격차와 어려움이 크다. 불안감과 두려움, 트

한 개념이었다. 그런데 알아보았더니 내가 생각하

라우마로 겪는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가장 시급한

는 방향과 너무 잘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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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에 사회적 기업 경연대회에서 수상

에 없기 때문이다. NGO적인 순수성, 창의성, 독립

했다. 다른 팀과 다르게 나는 혼자 참여했다. 경험

성을 유지하기 위해 규모를 아주 크게 키울 욕심은

도 없고 사업계획서도 쓸 줄 모르던 나였는데 우수

없다. 스탭은 5명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상으로 200만원 상금을 탔다. 전국대회 자동출전

주여성도 숫자를 늘리기 보다는 소수를 깊이 키우

권이 있었다. 멘토링도 받고 강의도 들으며 이후

는 것에 집중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바꿀 수 있

진출한 전국대회에서도 우수상으로 1500만원 상금

다고 생각한다.

을 받고 지원금으로 3000만원을 받았다. 경영에 대 해선 전혀 모르면서도 당시에는 수상의 기쁨으로

사회적 기업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인재가 아닌가

들떠 사업을 확장했다. 그것이 함정이었다. 홍대

싶다. 에코팜므는 어떤 인재를 원하나? 직원들과

근처에 매장을 냈으나 수익이 없어 지출만 자꾸 늘

함께 에코팜므를 어떤 일터로 만들고 싶은가?

어났다. 융자를 받아 간신히 꾸려 나갔다. 융자를 6

함께 일하는 사람이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월 쓰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래서는 안

처음에는 이주여성들에게만 집중했다. 그러다 일

되겠다 싶어 함께 일하는 이들과 고통분담을 하기

본 미라이공업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TV에서

로 하고 융자받은 것도 반환했다. 당시에 ‘예비사회

본 적이 있는데 인상적이었다. 조직경영에 대해서

적기업’으로 인증을 받으면 정부 지원도 있었지만,

는 잘 모르지만 그 이후부터는 대표로서 스탭의 행

그것은 다시 지원금에 의존하는 길이라 생각해서

복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정신과 가치를

받지 않기로 했다. 오로지 후원금과 수익금으로 살

어떻게 공유해갈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보기로 해서 2010년 7월부터 지금까지 독립해서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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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에코팜므는 주4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 으며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정해진 기

경영의 어려움으로 고생한 이후에 어떤 포맷으

간까지 업무만 하면 된다. 또 가능한 행정업무를

로 갈지 고민하게 되었다. 비영리 마케팅 수업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서류를 거의 없앴다. 주로 지

비롯해서 경영지원 수업을 받으면서 틀을 갖추는

메일, 카카오톡, 문자로 일을 한다. 그리고 단순 보

훈련을 받고 전체를 조망하는 것, 기획과 준비에

고가 아닌 공유시스템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래

대한 사고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소셜벤처인큐베

서 스탭들끼리 서로 만날 일도 많지 않다. 이런 유

이팅센터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1년여 정도가

연함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업무 스타일을

걸렸던 것 같다. 2011년부터는 수준에 맞게 차근차

paperless green working style 이라고 이름 붙여보

근 시행착오를 거쳐서 배워가면서 해왔다. 멘토링

았다. 상표권을 내볼까 생각 중이다(웃음). 후원자

도 받았지만 우리가 개척하고, 선택하고, 집중해서

외에는 남에게 보고도 거의 하지 않는다. 몇 달 동

운영했다. 물질적 위기가 있을 때도 있고 정신적

안 복사를 몇 장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위기가 있기도 했지만, 극복이 되면서 이제는 우리

또한 평등한 관계 문화를 지향하려고 서로를 직

가 집중할 것이 무엇인지, 안해야 할 것이 무엇인

책이 아니라 별명으로 부른다. 이주여성들이 우리

지 알아가는 것 같다. 뺄 것이 없는 상태가 완전한

이름을 부르기 어려워하는 것도 한 이유이다. 우리

상태라고 하지 않는가. 시도를 하며 실패율을 줄여

가 독특한 조직문화를 만들어가는 것도 우리가 할

가는 것이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방향성을 잡고

수 있는 부분이자 숙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유

가는 단계가 되지 않았나 싶다.

롭게 창의적으로 일하고 있다. 봉급은 다른 NGO

우리는 규모가 크지 않고 크게 할 생각도 없다.

나 근무일 기준으로 적지는 않다. 물론 근무 일수

그렇게 된다면 초기 정신이나 가치가 희석될 수밖

가 적으니 절대적 액수는 적다. 그래서 쉬는 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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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발하면서 자유롭게 시간 활용하며 일할 사람,

일을 할 것 같다. 회복, 화해, 소통이 나의 키워드

자신이 가진 문화적 재능을 개발할 사람, 다양성을

인데 지금은 이주여성 특히 난민여성이 키워드이

좋아하고 약자에 대한 안타까움 특히 이주여성에

다. 에코팜므만 4년, 그 전에 난민여성과 한글반 생

대한 마음이 있는 사람, 그러나 베푼다는 인식이

활까지 하면 7년이 되었다. 내가 많이 성장했다고

아니라 함께 간다는 의식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느낀다. 공부를 계속해서 박사가 되어 강의를 하 고 있다면 안정적인 생활은 누렸겠지만 내가 이렇

에코팜므를 통해서 삶이 향상되었거나 기억에 남는 이주여성의 사례를 소개해 달라.

게 될 수 있었겠나? 나는 에코팜므를 하며 나 그리 고 우리 가족이 가장 큰 수혜자라고 생각한다. 하

미야라는 이름의 콩고 여성은 한글반 할 때부터

나님은 나에게 주신 여러 경험과 재능을 사용하고

함께 하고 있는 친구로 나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

계신 것 같다. 성장시키시고, 사용하시고, 또 성장

다. 미야는 콩고 미국대사관에서 일하던 여성으로

케 하신다. 다채로운 삶이 된 것 같다. 20대 때보다

엘리트였다. 부유하고 직업도 괜찮은 사람이었는

더 많은 에너지가 생기고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데 스파이라는 누명을 써서 혼자 20대 초반에 한국

나도 즐겁고 다른 이도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 와서 갖은 고생을 하다가 7년 만에 난민 인정을

너무 진지하고 헌신만 강요하면 탈진(burn-out)되

받았다. 나에게 필요한 이야기, 옳은 이야기를 해

는 것 같다. 돈이 없고, 사람이 없으면 그만 하는 것

주는 사람이다. 돌아보면 새로운 모든 프로그램을

이 맞다. 라브리 정신이 그렇다. 억지로 하는 것은

이 친구와 같이 했다. 남편이 이 친구의 변호사이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에코팜므를

고 물적, 심적 지원을 해왔는데 한번은 방송사 인

안한다면 사람, 문화, 외국 다니는 것과 관련된 일

터뷰에서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을

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평생하게 될 것이라고 생

때 ‘그녀는 내 곁에 항상 있어주었다’고 답하더라.

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설립자가 단체에 너무

전율을 느꼈다. 가장 큰 칭찬이다.

욕심을 부리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신이 잘 계승된다면 새로운 대표가 해도 좋을 것 같다.

현재 대표적인 여 성 사회적 기업가, 복 귀에 성공한 경력단절 여성으로 소개되고 있 다. 현재 삶에 만족하 는가? 20대에는 문화평론 가, 커리어 우먼으로 살고 싶었다. 30대 초 반 2년 정도 라브리 공 동체에서 간사로 생활 하면서 사람에 대한 관 심이 깊어졌다. 앞으 로도 사람을 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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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사람을 회복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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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사회적 기업가로서의 삶은 어떻게 연결 되어 있나? 삶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현재 나의 신앙과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분리란 있을 수 없다.

아닐 수도 있다. 자족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 같다. 지금 너무 천천히 성장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고민 이 가끔 있지만, 나를 제일 잘 아시고 그렇게 인도 해 가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CMR

하나님께서 모든 삶을 주관하신다고 믿는다. 그렇 기 때문에 기독교사회적기업협회 같은 단체와는

진행: 최삼열

거리를 둔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

정리 및 사진: 강현주

라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하나님이 주신 것 이고 내 삶의 원칙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별도로 무언가 일부러 드러내고 상징적으로 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내가 살아가는 것, 선을 끼치는 것, 영향력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 한다. 나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 책임감이 있 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 상황 속에 서 어떻게 풀어가야할까 하나님 앞에 묻다보니 자 연스럽게 해온 것이다. 의도적으로 했다면 하지 못 했을 것이다. 교육만 하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만, 거기서 그치고 싶지 않았다. 교육 이후 활동을 하 고 그것을 통해 삶이 조금 더 나아지도록 교육 다 음 단계로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와 내 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화해하고 회복해야 한다 는 것을 경험했다. 나 역시 에코팜므를 통해 가정 도 회복되었다. 우리 아이들도 에코팜므를 해서 단 점은 엄마가 바쁜 것이지만 장점은 이주여성을 도 울 수 있는 점이라고 말한다. 아이들도 함께 성장 하고 있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마당이 있는 3층 건물이 있으면 좋겠다. 1층은 카페 겸 워크숍 공간, 2층은 사무실, 3층은 쉼터로 꾸려보고 싶다. 캐나다엔 그런 곳이 있더라. 로메 로 하우스라고 동네의 일원이 되어 있는 그들을 보 면서 부러웠다. 10년 정도 후에는 이주여성 메인 작가 10명이 계속 자신의 나라의 문화를 활용한 컨 텐츠를 만들어내도록 하면 좋겠다. 현재를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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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 미래는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표 를 정해놓고 채우며 가는 것만이 반드시 좋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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