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AFTS FALL/WINTER,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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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김희종

한지명장 강갑석

PEOPLE

VOL.5 값 12,000원

엄태준 이천시장 ICHEON CERAMIC

차리다 키친 PALACE GARDENS

BRAND

예올

ART & LIVING

목공예가 권원덕

PLACE FALL / WINTER, 2018



FALL / WINTER,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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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우리 문화를 전승(傳承)한다는 자부심으로 지난 수십 년간 도자기를 빚어온 명장들이 있다. 명장은 단순히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명장이란, 시대를 초월한 작품을 만드는 이에게 나라에서 내리는 칭호이다. 매일같이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급변하는 유행(流行)은 명장들에게 맞춰 나가야 할 대상도, 피할 수 없는 흐름도 아닌, 명예로운 도전일 것이다. 크라프츠가 만나본 이천시 소속 7인의 명장들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지난 10월 파리 루브 르박물관 지하 ‘카루젤 홀’에서 열린 제24회 세계문화유산박람회에서 이들 명장은 도자기 제작 시연으로 프랑스 영부인 브리지트 마크롱 여사의 감탄사를 자아냈다. 분청 위에 새겨진 기계로 찍어낸 듯 정교한 꽃무늬부터 여러 흙을 섞어 표현한 연리문(練理紋) 청자의 대리석 문양, 그 자체만으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는 듯 한 맑은 달항아리. 제작 과정에서 명장의 기준에 충족하지 못한 도자기들은 가차 없이 깨지기 일쑤다. 우리 고유의 재료와 기법으로 흙에 혼과 열정을 담아오고 있는 명장들은 젊은 도공뿐만 아 니라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본보기 역할을 해오고 있다. 효율성과 대량생산의 시대에서 ‘세기의 명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철학과 타협 하지 않는 기술력, 정교함은 시대를 막론한 귀중한 정신이다. 명장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형태, 색, 문양은 그대로 전승되어 각 세대를 이어주기도 한다. 젊은 예술인에게는 새로운 창작의 영감을, 보는 이에게는 깊은 울림과 감동을 끌어낸다. 앞으로도 중요한 것은 선대의 철학과 기술을 이해하고 지키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문화 적 밑바탕 위에 현대 가치와 감성이 더해져 새로운 전통이 탄생할 수 있다. 그 일은 비단 명장들만의 몫이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크라프츠 편집장

박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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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프츠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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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kraftsmagazine.com 주소 크라프츠 서울특별시 강남구 언주로 30길 21 A동 1503호

@kraftsmagazine KRAFTS VOL.5 FALL / WINTER 2018 ISBN 2586-3975

인쇄 영은문화 발행인 김향남 COVER PHOTO: 권원덕

크라프츠는 전국 아티스트와 브랜드를 찾아다니며 만드는 현대공예 계간지입 니다. 모든 물건이 쉽게 쓰이고 버려지는 세상에서 정말 아끼고 사랑할 수 있 는 물건을 찾기 위한 여정이 담겨있습니다. ‘나만의 것’이 넘치는 개성 강한 사

COPYRIGHT© 2018 크라프츠(KRAFTS). 이 책의 저작권은 크라프츠에 있습니다. 본지에 수록된

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글과 사진은 크라프츠의 서면 허가 없이 사용이 불가합니다.

KRAFTS is a quarterly magazine for Korean crafts based in Seoul. Each issue is a snapshot of our journey to find things that we can truly love and cherish in an age of disposability. It is our aim to build a society that values uniqueness and craftsmanship.

ALL RIGHTS RESERVED. THIS MATERIAL MAY NOT BE PUBLISHED, BROADCAST, REWRITTEN, OR REDISTRIBUTED IN ANY FORM WITHOUT THE WRITTEN PERMISSION OF KRAFTS.

12 | 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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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 광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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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 BMIX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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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 류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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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 유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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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 ‘1년의

기다림’ 강갑석 한지 명장

The year-long wait. Master Hanji maker, Kang Kap-seok PEOPLE |

설레는 파동을 전하다, 김희종 작가 A maker of waves, Kim Hee-jong

PLACE |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시작... 문화복합공간 예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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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 조선 가구를 재해석하다, 목공예가 권원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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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LIVING | 김은아 심승규 부부가 ‘아름답게 차리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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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LIVING | 왕이 사랑한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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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 오카와치야마에서 마주한 조선 도공들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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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 예술인의 흔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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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작품, 다수의 상품 BRAND | ICHEON CERAMIC

16 | Table of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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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RIBUTORS

FALL / WINTER, 2018

편집

박세환 | 편집장

박세환 최예선 김성우 최유미 조혜영

사진

교열•·교정

배수경 | 포토그래퍼

최예선

디자인

경영·광고

임태규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최유미 | 이사

법률고문

발행인

김기화 | 마케팅

김향남 | 대표

박지선 | 법률사무소 장율

KRAFTS 제5호/2018년 VOL.5 발행처: 크라프츠(KRAFTS) 서울특별시 강남구 언주로30길 21 A동 1503호

잡지등록일: 2017년 11월 17일 등록번호: 서초, 마00098호

대표전화: 02-573-5513

인쇄: 영은문화㈜

팩스: 070-7755-5513

발행일: 2018년 11월 12일

17 | Editor’s Note Contributors


KWANGJUYO GROUP

DESIGN | 광주요

도자기, 음식, 술, 공간 등 한국의 문화자산을 이끄는 “대한민국 식문화(食文化) 전문기업”

광주요그룹은 1963년 이래 한국 식문화의 고급화라는 ‘가치’에 투 자해 왔다. 끊어진 전통 도자기의 맥을 잇고 대중화하는 데 25년, 고급 도자 사업에서 식문화 사업으로, 또 주류 사업으로 그 영역을 넓혀왔다. 광주요(도자기), 화요(술), 그리고 가온과 비채나(음식) 라는 고급 브랜드를 키워 온 광주요그룹은 전통의 현대화를 통해 세 대를 이어 전할 수 있는 ‘가치’, 즉 문화를 창조하는 기업으로, 세계 속에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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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IX STUDIO

DESIGN | 비믹스

친환경 시멘트와 공예의 만남

‘석면 프리(FREE)’ 인증서’를 받은 차별화된 시멘트를 사용하여 인체에 무해하고 친환경적으로 제작한 BMIX STUDIO의 핸드메 이드 디자인 소품과 탁상시계. 백열전구의 내부를 LED 조명으로 교체하여 에너지는 절약하고 사용기간은 연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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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종대

DESIGN | 류종대

일상이 예술이 되는 아트퍼니처 (Art Furniture)

류종대 작가는 아트퍼니처를 통해서 사용자에게 일상이 예술적 배경 이 되고 그 속에서 이색적이고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을 작업의 목표로 삼고 있다. 현대미술의 어려운 문법을 이해하지 못하 는 관람객들과 미술관 사이의 간극을 좁혀줄 수 있는 것이 아트퍼니처 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무와 같은 자연재를 주 재료로 하되, 짜맞춤 등의 아날로그적인 가 구제작법과 3D프린팅(PRINTING)과 같은 디지털 가공기술을 적절히 어우러지도록 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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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권

DESIGN | 유남권

자연과 현대 풍경을 모티브로 풀어낸 전통 기법

유남권 작가는 전통 마감 도료인 옻칠을 이용하여 작업한다. 남원 과 서울을 오가며 작가가 직접 보고 느끼는 것들에서 작업이 시작되 어 대부분 옻칠로 마감이 된다. 현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3호 옻 칠장 박강용의 이수자로, 전통 기법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풀어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촛대 시리즈 남원의 풍경을 모티브로 제작된 작업. 목선반 기술로 제작된 촛대에 옻칠을 마감하고 서울의 을지로에서 제작한 황동 촛대 받침에 촛대 를 끼워 넣어 조화를 이룬다.

스툴 도시풍경 시리즈 남원과 다른 대도시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도시풍경 시리 즈의 첫 작업. 대체로 자연물을 토대로 도안이 그려지는 옻칠공예 를 벗어나 인간에 의해 지어진 도시의 건물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 한 형태의 스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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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 강갑석 한지 명장

‘1년의 기다림’ 강갑석 한지 명장 The year-long wait. Master Hanji maker, Kang Kap-seok

글·사진 박세환 Words˙Photos Bak Se-hwan

깨끗한 물과 좋은 나무로 생산되며 예로부터 문방사우(文房四友) 중 하나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 온 우리나라 전통 한지. 한지는 글씨를 쓰 거나 그림을 그리는 용도뿐만 아니라 생활용품을 제작하거나 공예 재 료로 예술을 표현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진상품으로 쓰이기도 했다. 한지 생산지 중 특히 전주는 수질이 뛰어나고 닥나무 생산량이 높아 최고의 한지 제조 기술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한지 사용이 급격히 줄 어든 오늘날에도 옛 명성을 유지하며 전통을 지키는 장인들이 있다.

Hanji, traditional Korean paper, is made with clean water, and high-quality wood. Hanji has long been loved as one of the four essential items of study, or munbangsawoo (文房四友). The uses of Hanji paper have not been limited for writing, but also used as a material for crafts. During the Goryo and Joseon dynasties, Hanji products were among items given as tribute to the royal families. Among the many Hanji producing cities, Jeonju has attracted the best Hanji makers due to the high quality of the water supply and due to the city’s abundant sup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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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 강갑석 한지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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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에서 만나본 강갑석 전주 한지명장 및 전주전통한지원 대표가 그 중 한 명이다. 한옥으로 지어진 박물관과 체험관, 가게들이 즐비한 이곳 마을의 한 골목에 자리잡은 전주전통한지원은 전통 한지제조 기법이 오롯이 재 현되는 곳이다. 한 켠에 겹겹이 쌓여있는 영롱한 빛을 내뿜는 염색 화 선지와 더불어 황토벽지용 한지, 참숯한지, 공예용 한지 등이 생산돼 대부분 일본에 수출된다. 이제는 전주의 10여 곳밖에 남지 않은 한지 제작소에서 전통의 명맥 을 이어간지 어느덧 40여 년. “당시 23살에 우연찮게 한지 가게에 발 을 디뎠던게 시작이었죠. 먹고 살기 위해서 공장에서 한지를 배우면서 지금까지 왔네요 여기서 일한지는 이제 16년째고요. 전에는 공예인들 도 많이 모여들던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해서 이 제 오늘날의 전주한옥마을이 된겁니다.” 그때와 지금, 우리나라 한지 산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선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고 강 대표는 말한다. “우리 한지가 90년대 초까지만해도 수출 효자 품목이었죠. 국내 한지 쓰임새도 사용처도 많았고요. 과거에는 서예 학원도 많아서 한지가 많 이 쓰였지요. 유리문화가 없을 때 거의다 문, 창문에 창호지라고해서 한지 쓰임이 높았습니다. 현재는 공예쪽으로 수요가 있긴 하지만 배우 는 사람들이 많지가 않아요. 그래서 벽지쪽으로도 한지가 쓰일 수 있 도록 개발중입니다.” 한지 수요가 줄기 시작하면서 업계에서는 단가를 낮추기 위해 중국산 수입 한지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질보다 단가가 우선인 현실 속에서도 강 대표가 전통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백 번을 만져야 한 장이 나온 게 한지입니다. 자연 그대로 닥나무와 물만 가지고 만들기 때문에 섬유질이 길다보니까 질기고 보존성이 있 고 기공이 있어서 숨을 쉬는 종이입니다. 그래서 천년 간다는 옛말이 있는 것이지요. 기계로 생산을 대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돼야 합니다. 중국산 기계 한지 는 무늬만 한지인 가짜이지요.” 강 대표의 설명 만큼이나 기자가 직접 본 한지 제작 과정은 정성으로 가득했다. 우선 핵심 재료인 닥나무는 강 대표가 직접 심어서 1년 가 까이 기다려 12월~2월 사이에 색출한 것이다. 이후 솥에다 삶아 수 피를 벗겨내고 다시 겉껍질을 벗겨내면 백피가 된다. 이 과정을 닥무 지라 부른다. 백피를 삶고 다시 흐르는 물로 잿물기를 씻어낸 후 햇빛에 말려 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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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mulberry trees. Even today, when the demand for Hanji has plummeted, the city is home to master crafters who keep the traditions alive. Master Kang Kap-seok, whom KRAFTS met at the Jeongju Hanok Village, is one of the masters and the president of Jeonju Traditional Hanji Center. Jeonju Traditional Hanji Center is nestled among museums and shops the in the form of traditional Hanok. It is where the traditional method of Hanji production comes to life. The diverse range of Hanji products stacked in one corner are mostly exported to Japan. Kang has spent more than 40 years keeping the tradition of Hanji alive here in Jeonju. “It all began when I went to a Hanji store when I was 23 years old. I began the craft to make a living, and that has led to where I am now. I have been working here for 16 years now,” Kang said. “Before, this area was home to many craftsmen. Today, it has become a tourist attraction and become the Jeonju Hanok Village.” How has the Hanji industry changed over decades? According to Kang, the culture has changed the most. “Until the early 90s, Hanji was a big export item. And there was also big demand on the domestic market. There was a time when calligraphy academies were common, and they were a major consumer,” Kang said. “Before glass became common, most people used Hanji to cover windows. Today, there is some demand from craftsmen, but there aren’t many who are learning such crafts. So we are developing Hanji-based wallpaper.” As the demand fell, the industry turned to cheap Chinese imports. Kang, however, continues to stick to traditional methods. “A sheet of Hanji requires a hundred touches from the maker. Because only water and mulberry trees are used, the fibers are long and tough, so Hanji has a long lifespan. Hanji also contains many pores, so the paper breathes,” Kang said. “There is an old saying that Hanji will last a thousand years. It’s not a process that can be replaced with machine-production methods. Everything must be done by hand, Chinese products are in effect fake Hanji.” Just like Kang’s words, the production process requires meticulous care. Kang uses mulberry trees he cultivated for nearly 1 year, and selected between December and February. First, wood from selected trees are boiled to remove the bark. The outer layer under the bark is then removed to reveal the white inner layer. This process is known as “Dakmu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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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 강갑석 한지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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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킨 뒤 표피, 티꺼리 등의 잡티를 하나하나 손으로 골라낸다. 한지 제 조 공정 중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그 후 평평한 곳에 1~2시 간 정도 방망이로 두들겨 준 후 원료를 종이 뜨는 지통에 넣어 닥풀즙 과 함께 막대기로 잘 저어준다. 이후 종이 뜨는 발에 넣고 좌우로 흔들 어 종이를 떠내고 물을 빼고 말리면 한지가 탄생된다. “한 평생 한지만 만들다보니 한지에 대한 애착이 클 수밖에 없어요. 한 지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한지로 만들 수 있는 건 다 만들고 있습니다. 사진 인화지, 상장 용지, 한지 수의도 개발 중입니다. 외부 사정에 굴 하지 않고 끝까지 전통 문화를 지켜나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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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then washed in running water, and sundried. Kang then removes the tiniest impurities by hand. The end product is then beaten for an hour or two, and mixed with hibiscus extract. Once the mixture is ready, paper-sifting frame is used to collect the fibers. The resulting sheet of fiber is then dried, and Hanji is born. “I dedicated my life to Hanji, so I have great love for the art. I make anything that can be made with Hanji to vitalize the Hanji industry,” Kang said. “I am developing photographic paper made with Hanji and even shrouds made with Hanji. I hope to keep the traditional art 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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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 강갑석 한지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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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 김희종 작가

설레는 파동을 전하다, 김희종 작가 A maker of waves, Kim Hee-jong

글·최예선 사진·배수경 Words˙Choi Ye-seon Photos ˙Bae Soo-kyung

“도자기는 만드는 사람, 사용하는 사람, 그리고 대접받는 사람 모두에 게 ‘파동’이에요. 제가 만든 그릇을 사용하는 사람은 그릇을 통해 좋은 파동을 얻어요. 이는 대접하는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죠. 나중에

“Ceramics, they are a ‘wave’ to everyone, the creators, users and those who are served. People who use my tableware receive a positive wave, and that is passed on to the guests. When I get positive feedback about

제 그릇을 사용해보고 ‘너무 좋았다’라는 의견이 있으면 그게 저에게

my creations, then that is another wave that comes to

또 파동으로 다가와요. 그릇 만드는 사람들은 소비자에게 감동을 줘야

be,” Kim Hee-jong says. “I think a ceramicist needs to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도자기는 생필품이 아니거든요. 나름의 철학을

move the consumers. Ceramics aren’t necessities, so I

담아 소비자에게 긍정적인 파동을 줘야 하는 것 같아요. 저의 목표도

feel that you need to put your philosophy into it to send a positive wave. That’s what I want to achieve, to keep

그겁니다. 좋은 파동을 계속 주고받는 것.”

giving and receiving positive waves.”

김희종 작가가 그릇에 담고 싶은 ‘파동’은 무엇일까. 그의 공방 이름,

What is this ‘wave’ Kim wants to capture? The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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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 김희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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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 김희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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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 김희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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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작품이 그 답을 갖고 있었다. 식구기(器). 경기도 이천의 도자 기 마을, 예스파크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공방 상호였다. “저희 어머님 이 돌아가시기 전에 식구라는 말을 자주 쓰셨어요. 함께 먹고 사는 식 구들이 마주 앉아 음식을 먹는 것만큼 소중한 게 어디 있을까 싶어요. 그릇이란 것도 그런 거 같아요. 밥 먹는 식구들이 쓰는 그릇. 그래서 식 구기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그의 작품에도 이러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널찍한 그릇 한가운데 배 꼽을 연상시키는 동그란 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배꼽은 생명의 근원 일 수도 있고, 밥을 먹는 식(食)문화와도 연결되고, 가족을 하나로 이 어주는 근원 같기도 해서 배꼽 문양을 넣기 시작했어요. 나름의 제 철 학을 담은 거죠.” 김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은 합(盒)이다. 동그랗고 넓은 뚜껑으로 덮 은 그릇이 김 작가의 주력 작품이다. 용도를 묻자 “특별한 용도를 염 두에 두고 만든 것이 아니다”며 “철저하게 소비자들에게 맡기고 싶다” 고 답했다. “쓰임을 생각하고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용도에 갇혀버리는 거 같 았어요. 옛날 어른들이 차(茶) 사발에 우주를 담는다고 했는데, 그 안 에 막걸리도 담고 밥, 국도 담잖아요.” 대부분 작품이 희디흰 백자인 이 유기도 했다. “저는 백자가 너무너무 좋아요. 소비자에게 도화지를 주 고 싶어요. 그 그릇을 어떻게 사용하든 소비자들에게 주어지는 거죠.” 김 작가는 지난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최대 홈리빙 박람회 ‘2018 메종오브제(MAISON ET OBJET)’ 참가를 위해 다른 9명의 도예가와 함께 이천시에서 선발됐다. 이번 메종오브제를 위해 기존에 만들던 작은 합의 크기를 키웠다. 샐러드 보울 등이 발달한 프랑스의 식문화와 잘 어울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해외 페어(FARE)에 항상 관심을 가졌지만 참여하는 건 이번이 처음 이에요. 좋은 기회를 얻게 돼 감사하고 이번 이천 도자기의 메종오브제 참여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적인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으면 합 니다. 또, 이번에 저희 작가들이 가서 좋은 성과를 거둬서 내년, 또 내 후년에도 더 많은 작가가 참여해 한국 도자기가 세계 무대에서 거듭나 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어떤 도예 작가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물에 살짝 젖어 있는 스 펀지가 되고 싶다”는 답이 되돌아 왔다. 흙을 빚는 솜씨만큼이나 언어 를 빚는 솜씨도 빼어난 작가였다. “마른 스펀지는 물에 둥둥 뜨는데 물에 살짝 젖어 있는 스펀지는 물을 모두 빨아들이거든요. 조금 젖어있는 스펀지 같은 사람이라면 늘 좋은 걸 흡수하고 다양한 걸 받아들이면서 더 나은 그릇을 만들고 더 나은 파동을 줄 수 있는 작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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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that question was in his works, and the name of his ART & LIVING | PALACE GARDENS PARIS studio the “Kim Heejong’s Sicgugi.” The name is one of the most unique among the workshops located in Ye’s Park, the ceramic arts village in Icheon, Gyeonggi Province. “My mother, before she passed away, used the word ‘sicgu’ a lot. I now feel that perhaps the sicgu (family) sharing a meal is the most precious thing,” he said. “Tableware is the same. Tools that the family use in sharing a meal, and the name Sicgugi came from that.” It’s not hard to see this philosophy in his works such as a large plate with a small circle in the middle, reminiscent of the bellybutton. “The bellybutton is where life begins, I also feel a link to food culture, and a sense that it is an anchor that links the family together. In a sense, the bellybutton pattern contains my philosophy,” he said. One of Kim’s main works are the “hap (陶)” (a bowl with a matching, detached lid). “I didn’t make them with a purpose in mind. I want to leave that completely up to the users,” he said, when asked what they were designed for. “Having an idea of the use is important, but I feel that it can be a trip. Our ancestors used to say that the tea bowl contains the universe, (the tea bowl) can also be used for liquor, rice and soup,” he said. Such approach is also the reason behind his favoring the color white. “I love it. I want to give the user a blank canvas. How a piece of pottery is used is up to the consumer.” For MAISON&OBJET on November this year in Paris, France, he made larger hap pieces, taking food stylist Roh Young-hee’s advice that larger pieces could be better suited to French lifestyle where salad bowls and similar tableware are commonly used. “I have always been interested in overseas fairs, but this is the first time participating. I am grateful for the opportunity, and I hope I get to participate on a regular basis,” he said. “I also hope that we (Korean artists) make a mark this year, so that more Korean artists have the opportunity to take part in coming years, and give Korean ceramics a larger presence in the international stage.” Asked about his goal as a ceramicist, he said that he wants to “become a moist sponge.” “A dry sponge will float, but a moist one absorbs water. If I was like a moist sponge, I would absorb new things and make better tableware, and create even more positive wa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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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 예올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시작... 문화복합공간 예올 글·박세환 사진·배수경

“우리말 ‘예’는 ‘예쁘다’와 ‘오래전’이란 의미에서 출발했습니다. ‘올’

지켜온 장인의 작품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전

은 실이나 줄의 가닥이란 의미로 ‘올곧다’와 ‘올바르다’라는 쓰임새가

통문화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전시품을 관람할 수 있다. 기자가 방

있습니다. ‘예올’은 우리나라 훌륭한 고전의 문화를 오늘에도 올바르게

문했을 때에는 예올이 선정한 ‘올해의 장인’ 주물장 김종훈의 무쇠 가

이어가고 세계에 그 가치를 알리기 위해 태어난 재단입니다.”

마솥과 ‘올해의 젊은 공예인’ 유리공예가 양유완의 유리 제품들을 만

서울 북촌의 빌딩 숲 사이에 자리 잡은 재단법인 예올은 그 의미를 반

나볼 수 있었다.

영하듯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화이트 톤의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전시관을 지나 자연스럽게

최근 새롭게 개관한 복합문화공간 ‘예올 북촌가’는 우리나라 전통을

시선이 간 곳은 예올의 자그마한 전통 한옥 전시관. 화원이 조성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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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 예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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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맞은편 다실에 앉아 낮은 뷰로 주위를 둘러보니 눈으로, 냄새로

PLACE | 예올

자연스럽게 예올의 전체적인 풍경을 느껴볼 수 있었다. ‘전통’이라는 무거운 주제 앞에서도 소박함이 느껴져 좋았다. 한옥 다실에서 만난 이상철 예올 프로젝트 디렉터는 “북촌을 방문하 는 분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움을 나누고 보여드리기 위해 기존 한옥 앞의 건물을 예올 북촌가로 조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옥 공간이 예올의 철학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면, 예올 북촌가는 새로운 전시 가 지속해서 열리는, 예올 프로젝트의 성과물을 보여줄 수 있는 미래 의 공간인 셈입니다.” 한옥 전시관은 주로 예올 직원들이 중요한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 간으로 이용되지만 일반 시민들도 들어와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매 해 전시 공예품을 선정하는 큐레이팅 업무에서부터 한옥 설계를 담당 했던 이 디렉터에게 예올의 공간은 어떤 의미일까. “맞벌이 현대인이 주로 식사를 외부 식당에서 하기 시작하면서 집 에 제대로 된 반상 문화가 조성되기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어요. 간 단히 식사하거나 차를 마시더라도 그 순간만큼 한국적인 정서와 분 위기를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의 한 예시로 만든 곳이 이곳 한옥 전시 관입니다.” ‘먹는 음식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말이 있듯이 음식은 인간의 생활 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다. 그렇다면 그 음식만큼이나 그것을 담 기 위해 만든 그릇도 중요한 것이 아닐까. 물을 마시려면 물잔이, 그 물잔을 올려놓으려면 상이 필요하다. 음식에서 시작했지만 전체 공간 의 모습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실제로, 차를 마시며 둘러본 다실에는 찻잔뿐만 아니라 곳곳에 공예 품들이 공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하지만 막상 ‘옛것’의 모 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목공예가 권원덕 선생이 만든 감나무 테이 블과 벽 한켠에 놓여있는 느티나무 선반 모두 현대 주거 공간 어디에 놓아도 멋스러워 보일 것 같았다. “한옥 전시관과 이번에 개관한 북촌가 두 공간의 공통점은 ‘현대적’이 라는 것입니다. 가구부터 소품, 휴지통, 방 전등 스위치부터 누가 봐 도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 있는 공예품뿐입니다. 아름다움을 직접 체 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과 현대의 조 화입니다. 즉, 한옥 공간 내에서 현대적인 쓰임에 맞는 디자인과 기능 의 공예품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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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디렉터가 생각하는 ‘좋은’ 공예품의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PLACE | 예올

“공예라는 것이 실제로 필요에 의해 탄생하는 제품이기 때문에 쓰임 새가 우선시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에 와서 다양한 소재와 기술로 아트나 오브제 특징이 두드러지는 공예품이 많지만 그만큼 실용적인 부분을 놓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얼마든지 실용적인 공예품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예올이 평생 우리 전통의 기 술로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과 젊은 작가들을 위한 지원사업을 펼치는 이유입니다. 그 기술을 전수해 앞으로도 현대 쓰임새와 맞는 공예품 이 계속 개발될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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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 권원덕

조선 가구를 재해석하다, 목공예가 권원덕 글·박세환 사진·배수경

목공예가 권원덕의 작업장에 들어서면 벽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낡

았어도 가끔 손보면서 만족해할 정도로 잘 쓰고 있습니다(웃음).”

고 오래된 연장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그가 애정을 가지고 쓰고 있

‘목수라는 호칭이 가장 좋다’고 말하는 그의 작업실 ‘농방’은 전북 익

다는 대패와 끌을 포함해 대부분 연장이 무형문화재 제19호이자 스승

산에 자리 잡고 있다. 작업실 내부는 그의 손때묻은 도구만큼이나 소

인 소목장 고(故) 조석진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다.

박하고 따스한 목가구들로 가득했다. 중앙에 전시된 먹감나무 누비 의

“이곳에서 저보다 나이가 어린 도구들은 없는 것 같아요. 처음 공방

자가 눈에 들어왔다. 선과 면이 기교 없이 미니멀한 형태로, 있는 듯

문을 열었을 때 사정이 넉넉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제 은사님을 보

없는 듯 공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직접 앉아보니 누비의 포

면서 거창한 도구 없이도 명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낡

근함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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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가구의 형태나 구조를 보면 당시 제작자의 의도와 생각, 소비자

PLACE | 권원덕

들의 생각까지도 살펴볼 수 있어요. 가구에 모두 담겨있죠. 저는 현대 에 살면서 후대에 지금의 전통이란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요. 사방탁자 를 모티브로 한 의자이지만 좀 더 가볍고 튼튼하면서도, 나무로만 제 작하지 않은 누비 의자가 한 예입니다. 기존 나무를 이용하면서도 앉 았을 때 편안한 소재인 누비를 적용해 현대 소비자에 더 적합한 형태 가 된 것입니다.” 올해 13년 차 나무를 만지고 있다는 권 작가는 매일 아침 일찍 작업실 에 나와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그날 작업 계획을 머릿속에 정리한다. 원래는 개인 작업만 진행하는 공간이지만 수업도 진행해달라는 요청이 많아 수업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수강생들이 많아 건너편 건물에 회원 들이 쓰는 공방도 따로 마련했다. “나무는 그런 재미가 있어요.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활용해 만든 목가 구는 공간에 따라 갈라진 모습 하나하나 가치를 발휘합니다.” 실제로 권 작가는 모든 목가구의 형태를 쓰이는 나무를 보고 결정한 다. 어떤 가구 하나 똑같은 디자인이 나올 수 없다. 틀어지고 갈라진 모양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리는 것이 목가구의 멋이 다. 세월이 지나 자연스럽게 모습이 정제되는 나무도 있다. 느티나무 가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나무의 물성이 좋았다는 권 작가. 시골이다 보니 예전부 터 늘 산에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주변에는 항상 나무가 있 었고 심심하면 나무껍질을 벗겨 장난감을 만들었다. 대학교에서는 반 도체를 전공한 까닭에 2007년 졸업하자마자 관련 업계에서 일을 배웠 지만, 차갑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반도체의 물성이 맞지 않아 오래되 지 않아 일을 관두게 됐다. 그 무렵, 권 작가는 집 근처 공방에서 우연히 소목장 조석진 장인을 만 났다. 그때부터 공방을 드나들며 청소를 하고 나무를 나르면서 틈틈이 조선 목가구의 응축된 디자인과 정밀한 제작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수받은 전통 기술을 바탕으로, 권 작가는 이후 조선 가구를 재해석해 현대 생활양식을 반영하기 위해 홍익대학교 목조형가구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나무의 자유로운 현대적 표현을 배웠다. “대학원에서 디자인을 배울 당시, 전통 가구와 아트퍼니쳐가 풍기는 한 국적인 냄새가 정말 비슷해서 놀랐어요. 꼭 형태만을 전통으로 고집해 야 전통인지, 그걸 잘 해석해서 현대적인 가구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죠. 고민 끝에 충분히 전통적인 요소를 담으면서도 현대적인 목가구를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 고민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권 작가가 새롭게 해석한 사방탁자다. 사각 이라는 기본 틀 안에서 현대 생활양식에 맞게 형태와 크기에 변화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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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책과 화병 등을 올려놓았던 과거 용도에서 벗어나 공간 인테리어 소

PLACE | 권원덕

품으로 활용될 수 있게끔 디자인을 바꾸기도 한단다. “과거에는 없던 형태의 가구가 많이 생기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가구 의 기존 용도를 고집할 필요는 없어요. 조선 가구의 소박하면서 정제된 디자인 특징을 살리면서도 요소에 새로운 변화를 주는 것이 전통과 현 대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권 작가는 조선 목가구의 현대화에 힘쓴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 2016 년, 문화재청 산하 비영리단체인 재단법인 예올의 ‘2017 젊은 공예 인’에 선정됐다. 다양한 형태와 용도의 가구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만큼, 권 작가의 가구 에 쓰이는 나무 종류도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나무마다 특성과 쓰임이 다 달라 버릴 게 없습니다. 나무에 따라 가볍 거나 무늬가 좋거나 단단한 특성이 있는데 그것에 맞게 가구 부분 부분 에 배치합니다. 뼈대는 튼튼해야 하니 단단하고 견고한 나무를 사용하 는 반면, 안쪽에 보이지 않고 공간만 채워야 하는 역할은 가볍고 스트 레스를 덜 받는 나무를 씁니다. 옷, 책을 보관하기 위한 가구에는 습도 조절에 용이한 나무를 쓰죠. 비슷한 형태의 나무라도 색감이 달라 결 과물에 맞는 적합한 나무를 골라 씁니다. 결과적으로 한 가구에 쓰이는 나무 종류는 10가지가 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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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LIVING | 차리다 키친

김은아 심승규 부부가 ‘아름답게 차리는’ 공간 글·최유미 사진·배수경

가랑비가 흩뿌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던 어느 가을날의 오후, ‘김은아의

렸을 적 할머니 부엌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노스탤지어를 자극

부엌 BY 차리다’ 스튜디오를 찾았다. 이태원의 조용한 골목에 자리 잡

하는, 은은한 복고의 느낌이다.

은 이곳은 김은아 푸드스타일리스트 겸 차리다 대표와 심승규 차리다

“이곳은 작업공간이기보다는 제 개인 공간이에요. 내부 느낌이 한국

디렉터 부부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이다. 스튜디오를 들어서자마자 가

적이지요?”

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호젓하게 놓인 둥그런 가마솥이었다. 전체적

차리다 김은아 대표가 따듯한 차 한잔을 내밀며 말을 건네 왔다. 합정

으로 짙은 회색으로 칠해진 벽 한 켠에는 괜히 한번 쓸어보고 싶은 짚

과 한남동에 각각 자리한 다른 차리다 스튜디오와 달리, 이곳은 김은아

으로 만든 빗자루가 놓여있었다. 스튜디오 내부를 둘러보고 있자니 어

씨가 개인적인 작업을 하고 지인들과 휴식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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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스튜디오 이름도 ‘차리다 스튜디오’가 아닌, ‘김은아의 부엌 BY 차

ART & LIVING | 차리다 키친

리다’이다. 김 대표는 휴식을 취하면서도 영감을 주는 자신만의 공간을 ‘향수를 자극하지만 올드하지 않은’ 공간으로 꾸미고 싶었다. 우선 한 옥 창틀 업체에 의뢰해 유리창을 만들었다, 가마솥의 높이는 아일랜드 식 주방보다 낮게 내렸고 휴식공간인 방 안에 평상을 넣었다. 그다음, 부부는 “인생을 아름답게 차리다”라는 자신들의 모토처럼, 삶을 채워 나가듯이 빈 공간을 하나하나 함께 작업하고 여행하며 모 은 공예품들로 채워나갔다. “여기에는 완전히 한국적인 것만 있지는 않아요. 핸드드리퍼, 찻잔도 있고 한식기들이 많긴 하지만 대부분 모던한 한식기이예요. 방에 있 는 족자는 오이뮤(OIMU) 제품으로, 민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그림 이 그려져 있죠. 대부분 한국적인 느낌을 베이스로 다양한 것들이 섞 인 것들이에요.” 특히 푸드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에 걸맞게, 방마다 벽 한 칸을 채우는 크기의 식기장이 놓여있다. “저는 대학생 때부터 그릇을 사 모았어요. 하지만 비싸고 예쁜 그릇 은 모으기만 했지, 쓴 적이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야식 으로 먹을 배달 치킨을 로열코펜하겐 케이크 스탠드에 담아왔어요. 덴마크 여행에서 구매한 이후로 한번도 쓰지 않은 그릇을요.” 그때 깨달음을 얻은 김 대표는 그때 이후로는 비싼 제품도 개의치 않고 사용한다고 한다. 남편 심승규 디렉터는 처음에 아내가 값비싼 그릇을 사는 것을 이해 못 했다고 한다. “그러다 함께 일하게 되면서, 공예품만의 아름다움과 사 용하는 느낌을 깨닫게 됐어요. 기성품은 한동안은 잘 쓰지만, 쉽게 버 리게 되는 데 반해 공예품은 살 때는 비싸더라도 평생을 두고 애장할 수 있습니다. 다른 촬영 스튜디오 제품들은 기성품부터 다양한 제품들 이 있지만, 여기에 있는 그릇들은 대부분 실제로 사용하고 저희가 정말 좋아하고 곁에 두고 쓰고 싶은 공예품들만 있습니다.” 이 스튜디오에서 가장 아끼는 그릇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 대표는 나 무 수저 2짝을 꺼내왔다. “이 수저는 최성우 작가님의 작품이에요. 은평구 한옥마을의 한 레스토 랑에 갔었는데, 한 사람당 소반 하나에 음식이 나왔습니다. 소반 위에 최성우 작가님의 커틀러리가 나왔는데 숟가락의 면이 얇은 느낌이 좋 았어요. 직접 사용하고는 마음에 쏙 들어서 레스토랑의 전시장에서 구 매했어요. 집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그릇은 도자기를 쓰면서 만족했는 데, 수저가 늘 아쉬웠거든요. 이제 테이블이 완성된 느낌이 든달까요? 밥 먹는 시간이 더 즐거워졌습니다.” 수저 세트에 이어 김 대표가 가지고 나온 것은 다름 아닌 밥공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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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제주도에서 공방하시는 분의 플레이트를 보고 반해 그분의 공

ART & LIVING | 차리다 키친

방에 찾아가, 제품 개발과 협업 제안을 했습니다. 1년 동안 미팅을 하 고 샘플까지 제작했지만, 생산적인 문제로 결국 제품 출시는 못 했지 요. 그때 만든 샘플들은 전량 저희가 매입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야말로 리미티드에디션이라, 다른 푸드스타일리스트분들이 항상 어디 제품이냐고 물어보세요(웃음)” 김 대표는 푸드스타일링 뿐만 아니라, 음식에 맞는 식기 개발에 한동안 힘썼다. 여러 작가와 협업하며 독자적인 제품 라인을 구성하여 ‘차리다 서울’이라는 플랫폼에서 판매되고 있다. 새로운 제품 라인 개발은 잠시 쉬는 중이라는 김 대표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과제다. “지금은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공예 작가님들과의 협업은 잠시 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일할 젊고 유망한 신진작가분들을 항상 찾아다 니고 있어요. 작가분들이 저희 ‘차리다’와 함께 커나갈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 언젠가는 다시 시작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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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VING | PALACE GARDENS PARIS ARTART & LIVING | PALACE GARDENS PARIS

왕이 사랑한 정원 글·사진 최유미

아름다움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자연의 숲과 나무, 호수를 울타리 속으로 옮겨 놓았다. 이러한 욕망은 언어로서 더욱 명확해진다. 둘러싸인 공간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GAN’과 기쁨을 의미하는 ‘EDEN’의 합성어인 GARDEN은 단어 그 자체에 탐미주의가 깃들여 있다. 프랑스 절대왕정의 막강한 권력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정원, 베르사유(VERSAILLES)정원의 모습을 크라프츠가 직접 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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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LIVING | PALACE GARDENS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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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LIVING | PALACE GARDENS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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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카와치야마 ART & LIVING |CULTURE PALACE GARDENS PARIS

오카와치야마에서 마주한 조선 도공들의 발자취 글·사진 헤럴드경제 김성우 객원기자

‘오카와치야마(大川内山)’는 야마(山ㆍ산)라는 이름에 걸맞은 장소다. 마을 주변에는 큼지막한 봉 우리들이 우뚝 서 있고, 그 사이는 구름과 안개가 메우고 있다.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선 300여 채 기와집들 사이로는 가마와 굴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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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나베시마(오늘날의 사가) 번의 영주였다. 1675년 나

CULTURE | 오카와치야마

베시마 번의 번주는 아리타 지역의 가마 일부를 첩첩산중인 오카와치야마로 옮겼다. 도공들이 기술발전에 전념하고, 그 기술은 밖으로 퍼지지 않길 바 랐기 때문이다. 오카와치야마는 장인들의 피와 땀이 담긴 장인정신의 마을 인 셈이다. 그 기대를 반영하듯 오카와치야마는 ‘이마리 도자기 마을’이라는 별칭으로 가라쓰ㆍ아리타와 함께 사가 현의 3대 도자기 마을로 꼽힌다. 세 도자기 마 을의 제품들은 과거 이 고장의 이름을 딴 ‘나베시마 도자기’로 불리며 명성 을 축적해가고 있다. 기자는 최근 이곳 오카와치야마에 다녀왔다. 첩첩산중에 위치한 만큼 오카와 치야마는 접근성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도자기 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인근 대도시에서 최소 2차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후쿠오카에서는 버스로 3 시간, 사가에서는 버스로 2시간 반이 걸린다. 도시 중심부인 이마리역에 도 착한 뒤 버스를 또 한 차례 타야 하는데, 이 버스가 평일에는 6번, 주말에는 5번만 운행한다. 오카와치야마를 찾은 것은 조선 도공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15~17세기 조선인 도공 다수가 사가현에 정착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사가 번주 에게 많은 수가 잡혀 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본 자기의 아버지’로 이삼평이다. 그의 출생연도는 알려 지지 않았다. 살던 곳도, 가족관계도, 정확한 신분도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그만큼 조선사회에서 천민이었던 도공들의 삶은 흐릿했다. 그런데 일본 고서에는 ‘이삼평은 금강 출신’이라는 내용이 남아있다. 생전 행 적과 사망한 연도에 대한 기록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삼평은 현재 ‘요(窯ㆍ도자기)업계의 대은인’으로 칭송 받고 있다. 일본에 자 기를 처음 도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삼평의 등장 전 도기(질흙을 원료로 하여 빚어서 비교적 낮은 온도로 구운 그릇) 중심이던 일본의 그릇 문화는 그 가 도착한 이후 자기(사기ㆍ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구워 유리질화된 그릇)를 도입하며 일본 도자기 공예에 새 지평을 열었다. 그는 백자를 구울 백토를 찾기 위해 사가 곳곳을 헤맸다고 한다. 아리타 부근 의 이즈미야마에서 백토 광산을 찾은 뒤에는 그곳에 정착했다. 현재의 아리타 현이다. 오카와치야마는 그 뿌리를 공유한다. 마을을 설립하는데 조선 도공 들이 주축이 됐기 때문이다. 조선 도공들의 흔적은 오카와치야마의 상징인 ‘도자기 다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리에는 푸른색과 적색 염료로 물든 도자기 조각들이 한가득 박혀있 다. 다리 중간에는 마찬가지로 푸른색과 적색 염료로 물든 도자기가 우뚝 서 있다. 조선 도공들이 남긴 색이다. 크게 3가지로 분류되는 나베시마 도자기 중 하나인 ‘이로나베시마’다. 백자 자기에 옅은 청색과 붉은색, 노란색의 3가지 염료로 덧그림을 그린 도자기 다. 오카와치야마에서는 이로나베시마 외에도 ‘나베시마 소메스케’와 ‘나베 시마 청자’를 3대 나베시마 도자기로 분류한다. 중국 도자기가 대체로 검은 색 염료를 쓰는 것과 달리, 푸른색 염료를 주로 사용해 선명한 청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오카와치야마를 상징하는 푸른색은 마을 지도와 이정표, 가게에 진열된 도자 기 곳곳에서 선명한 색을 발휘하고 있다. 이곳의 수많은 가마들은 동시에 각 자의 색깔을 발전시켜왔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조선 도공들로부터 도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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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카와치야마 ART & LIVING |CULTURE PALACE GARDENS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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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 오카와치야마

배운 일본 장인들이 자신만의 색으로 기술을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각 가게에 진열된 그릇에 어떤 청화가 그려져 있는지 유심히 확인해보세요. 청화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은 그대로도 매력이 있고요.” 나베시마 청자를 취급하는 쵸우슌카마 안주인은 유창한 영어로 오카와치야마 의 가마들을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실제 가게마다 다루고 있는 청화는 조금 씩 달랐다. 흔히 생각하는 조선 도자기에서처럼 사군자를 그린 도자기 가마도 있는가 하면, 매년 해에 걸맞는 십이지신을 그리는 도자기 가게도 있었다. 일 반적 나베시마 도자기와 다르게, 초록색 염료를 사용한 가게도, 아예 청화를 그려 넣지 않은 도자기도 있다. 가마들은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마을 곳곳에는 직접 도자기를 굽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는데, 가마의 도공들은 끊임없이 도자기를 굽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한 가마를 찾아가 촬영을 요청하자 “환영한다”면서 “가게의 경쟁력은 장인 정신이니 공개돼도 좋다”고 했다. 가마마다 다른 각자의 노하우, 그리고 모 든 가마가 추구하는 ‘장인정신’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이 또한 조선 도공들 이 남긴 발자취였을까. 가마 점원들은 외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했다.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거나, 불 어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을에 많은 관광객이 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이마리 도자기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것은 또 다른 이유 다. 이마리 도자기는 16세기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을 통해 세계 각지로 퍼졌다. 유럽 귀족들은 이마리 도자기를 으뜸으로 쳤다. 현재까지도 그 명성 은 이어져서 이마리 도자기란 이름 자체가 고유명사로 취급될 정도다. 오카와치야마는 최근 관광지로서도 많은 각광을 받고 있다. 도자기에 차(茶) 와 음식을 담아 파는 가게들이 가마 곳곳에 들어서 있고, 각 상점에서는 도자 기로 만들어진 체스와 액세서리 등도 기념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번주가 직접 소유했던 도자기 가마터에는 현재 갖가지 도자기 조형물로 구성된 ‘나베시마 한요 공원’이 조성돼 있다. 조선인 도공의 흔적은 마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마을 곳곳에는 ‘고려교 (高麗橋)’라는 이름의 조그만 다리들이 있었다. 고려인을 위한 비석이나, 도공 들의 무덤도 수백 개가 남아있었다. 도공들의 무덤에는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 꾸지 않은 듯, 김(金) 씨, 신(辛) 씨, 이(李) 씨인 경우도 자주 보였다. 조선인 도공들은 끌려온 신분이었던 만큼 거주지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다. 조 선 땅은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천민이었던 조선에서 와는 다르게 융성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고향인 조선 땅은 어떤 의미였을까? 성 씨를 바꾸지 않고 살았던 그들의 인생, 고향 땅에서와는 달랐 을 일본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함께 생각할 때면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을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여든 살이 노인을 만났다. 그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는 기자에게 “자신의 할아버지도 한국 사람”이라 고 말했다. 그는 도공과 가족들은 매년 옛 가마터에 모여 선대를 기리는 의미 로 제사를 지낸다고 말했다. 제사를 지내는 날이면 오래된 가마에서 불을 때 며 조상의 넋을 기린다고 했다. 이름을 바꾸지 않았던 조상들을 그 후손인 도 공들이 3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숭배하고 있는 셈이다. 조선을 뿌리 삼으면서 타지에서도 그들만의 도자기를 만들어 온 조선 도공들. 지금은 옛 문헌에서만 그 명성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들이 꽃피운 문화는 여 전히 오카와치야마 곳곳에서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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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 조혜영

예술인의 흔들리는 마음: 하나의 작품, 다수의 상품

글·조혜영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사무처장

한국 공예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국내˙외 시장의 특성에 대해 고려

공예 시장은 현대 미술 시장과 과연 동일한지, 그리고 회화 작품처럼

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능동적인 시대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가치와 가격이 상승할 수 있다고 전제할 수 있을까?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즐겨야 하며, 머물러 있기보다는 유동적으

공예 작품의 소장가치에 대해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유명한 작가의

로 끝없이 흐르기를 요구하는 시대다. 공예 전시와 페어 행사가 활발

섬유 작품이 10년 후에 그림과 유사한 가치로 여겨질 것인가? 옻칠 장

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공예 시장의 공급과 수요 개념에 집

인의 현대화 된 작품이 세계 미술경매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팔릴 수

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공예의 다양성이 유지되며 다각도로 공예 분야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공예를 럭셔리 아이템으로 가격을 높게 책정

가 생존할 수 있다.

하여 소장 가치를 향상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국내 시장을 살펴보자. 우리나라 공예는 우리의 생활 방식과 밀접하게

한국의 공예 현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개인, 또는

연결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의식주를 기반으로 다양한 공예품이

기관에 소장되며 판매로 이루어지고 있다. 전시, 페어, 비엔날레, 인

탄생해 왔다. 그 예로, 한국의 옹기는 한국인의 밥상을 책임진 발효 음

스타그램(INSTAGRAM) 등 여러 통로로 유통되고 있다. 또한 아트시

식 저장을 위한 용기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작품으로 승화돼 많은 사람

(ARTSY)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해외로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이 기법에서부터 재료까지 연구하며 형태를 변형시키고 있다. 국내 공

주요 페어로는 영국의 콜렉트(COLLECT) 페어, 프랑스의 메종오브제

예인들이 지금 우리 사회의 생활 방식을 반영한 트렌드가 무엇인지 민

(MAISON ET OBJET), 뉴욕의 콜렉티브(COLLECTIVE) 디자인 페

감하게 인지해야 하는 이유다.

어, 미국 시카고 소파(SOFA), 지난해에 처음 설립된 스위스 바젤의 트

해외 시장은 어떻게 다를까. 지난 2017년, 명품 브랜드 회사 로에베

레소르 현대공예(TRESOR CONTEMPORARY CRAFT) 등이 있다.

(LOEWE)의 문화재단 아시아 지역 자문으로 일하면서 느낀 점은, 예

세계 미술시장에서 공예 분야의 행사가 많아진다는 것은 수요가 그만

술성이 높은 공예 작품은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관심의 대

큼 증가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상이 돼 인정받는다는 사실이다.

국내 젊은 공예인들은 공예 분야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이득을 얻고

로에베 공예 상(LOEWE CRAFT PRIZE)을 수상한 독일의 에른스트 갬

싶어 한다. 작품도 만들고 상품도 만들면서, 특정 갤러리나 단체에 소

펄(ERNST GAMPERL)과 영국의 제니퍼 리(JENNIFER LEE)의 공통

속되어 있기보다는 자신이 중심축이 돼 제작부터 판매까지 모두 직

점은 재료적 특성에 집중된 방법으로 본인만의 언어로 작품을 제작한다

접 하기를 원한다. 그러다 보니 문제도 발생하고 전문성을 갖추지 못

는 점이다. 수상자 외 30명의 수상 후보명단을 보면 출품된 작품들이 모

한 딜러가 접근했을 때 곤란에 빠지는 경우를 흔히 보곤 했다. 참 안

두 재료적인 측면에서 충실했다(장연순의 섬유, 김준용의 유리 외).

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로에베 공예상의 기준이 해외 공예 시장을 이해하는 데 절대적이

갤러리 또한 컬렉터 군이 한정된 곳이 대다수라 제작자를 관리하며 책

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공예 분야에서 예술성을 겸비한 작품의 시장

임질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고 있다. 결국 만드는 이는 직접 금전적 이

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익을 창출해도 자신의 노동력을 환원받는 것밖에 안 된다. 과연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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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품 하나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니면 휴식 시 간도 없이 상품만 만들어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공예인은 갈림길에 서 서 고민한다. 작품도 상품도 아닌 어중간한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없 는 현실이다. 국내 시장은 저렴하고 부담 없는 공예 상품을 원한다. 세계 시장은 한 국적 미가 물신 담겨 있는 소장 가치의 작품을 원한다. 만드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범주에 속하고 싶은지 결정하고, 그 결정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내˙외 공예 행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시점에서 방향성만 잘 정한다면 공예인으로서의 브랜드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 각한다. 정체성을 찾아 자신만의 목소리를 높일 때가 왔다. 조혜영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사무처장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대학원 조형예술학과(미술이론) 박사수료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대학원 도예학과 석사 영국 브리스톨미술디자인대학교 도예전공 학사

주요경력 【전시감독】 2017년 필라델피아 크레프트 페어 큐레이터 2017년 일본 가나자와 공예 아트 페어 기획 2017년 스위스 현대공예 페어 “트레조” 한국대표 2017년 한국현대도예 전시, 영국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 2017년 밀라노 법고창신 전시, 이태리 밀라노디자인위크 2016년 공예트렌드 페어 총괄, 예술감독 2016년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전시, 프랑스 베르나르도 재단 (프랑스 자기 회사) 한국현대도예 전시 2016년 한국현대공예와 음식전시 “여름나기; 맛, 멋, 쉼”국립민속박물관 2015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주제전시 2014년 유네스코 지정 국제도자협의회 IAC 한국도자 전시 2013년 경기도자비엔날레, 국제 커미셔너로 활약 【자문위원】 2018년 서울국제핸드메이드 페어 2018/2017년 로에베 공예상(LOEWE CRAFT PRIZE) 2018/2017년 일본 가나자와 공예 아트 페어 2019/2018/2017년 스위스 트레조 현대공예 페어 【주요저서 및 기고】 “한국의 미술(현대도자분야)”,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박물관 영국 CERAMIC REVIEW, 미국 CERAMIC MONTHLY, 호주 GARLAND 등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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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뻗어가는’ 이천 도자 산업 육성의 수장, 엄태준 이천시장 글·박세환 사진·배수경

올해 유네스코 ‘창의도시’ 공예 부문 의장도시로 선정 된 경기도 이천.

세계 모든 문화의 흥망성쇠가 그렇듯, 우리나라의 도자기 역사도 급변

이는 도자기 문화 발전을 위한 이천시의 노력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

하는 시대 상황 때문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다행히 우리 선조와 근

다는 의미다. 지난 6월, 새롭게 이천시를 이끌어갈 지도자로 뽑힌 엄

대 이후 도예인들의 노력에 힘입어 현재까지 이천 도자기의 역사와 전

태준 시장의 도자 산업 육성 행보에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다. “이천

통이 이어져 오고 있지요.

시의 대한민국 도자 도시로의 역할에 어깨가 무겁습니다. 대한민국 최

크라프츠: 도자 사용 활성화를 위한 이천시의 대표적인 노력이 무엇인지

대 공예 마을인 예스파크(이천도자예술마을)에 호텔 설립 등을 계획

엄태준 시장: 이천시는 일찍이 우리 시가 가지고 있는 문화와 예술 인

중에 있으며, 현재 도자박물관도 건축 중입니다. 또한 적극적인 홍보

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덕에 대

로 많은 분이 이천시를 찾을 수 있도록 다각도로 신경을 쓰고 있습니

한민국 대표 도자 도시이자 세계적인 도자 예술 도시로 명성을 쌓고

다.” 지난 10월, 크라프츠가 엄 시장과 함께 이천시 도자 산업의 오늘

있습니다.

과 내일을 살펴보았다.

사실 모든 분야의 활성화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자기뿐

크라프츠: 이천시와 도자기의 인연은 언제부터인지

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특히 문화 예술 분야는 생산자(제

엄태준 시장: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를 살펴보면 세계 최초로 고려청자

작자)와 소비자(소유자)가 함께 고민하고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우리

가 만들어졌으며, 조선 왕실에서 사용했던 백자는 특유의 고상함으로

의 일상으로 녹여 내기가 참 힘듭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부터 구

예로부터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달항아리는 시대를 불문하

입해서 사용하고 감상하는 사람들까지 도자기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고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함께 공감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경기도 이천은 조선백자 생산의 요지였습니다. 예로부터 이곳은 한양

따라서 이천시는 이천이 가진 우수한 도자 예술 분야 홍보는 물론 장

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과 풍부한 자원, 기술 좋은 도공 덕분에 왕실 납

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도자기라는 재료의 장점, 왜 도자기를 사용해야

품 도자기를 제작하던 공방이 즐비했던 곳입니다. 특히 사기막골 도예

하는지, 또 가장 중요한 ‘왜 도자기는 이천이라고 말하는지’에 대해 시

촌 근방에는 예전의 가마터 흔적이 남아있어 이천이 도자기의 요충지

민들에게 체계적으로 홍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즘 세계적으로 플라스틱 사용을 자제하자는 의식변화와 운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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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이천시 역시 도자기 활성화에

크라프츠: 10월에 열린 ‘2018 세계문화유산박람회(THE INTER-

적극 동참할 계획입니다.

NATIONAL HERITAGE FAIR)’에 이천시도 참가했는데, 이천시 무

크라프츠: 얼마 전 공예예술마을 예스파크가 조성됐는데, 소개를 해

형문화유산 홍보 및 관광산업 촉진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주신다면

엄태준 시장: 한국 도자기가 세계 도자 역사상 큰 역할을 했음에도 불

엄태준 시장: 예스파크는 270개가 넘는 다양한 예술 공예 공방이 산과

구하고 우리 전통 도자기 기법과 장인들은 국제적으로 베일에 싸여 있

들로 둘러싸인 12만3천 평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예술가는 다양한 꿈

는 것이 사실입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조선이 서양과 문호개방에

을 펼칠 수 있고, 시민들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이천시에서는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웃하는 중국이나 일본 도자기보다 해외

이러한 마을을 세계적인 문화ㆍ관광지로 발전시켜 나갈 예정입니다.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도심에서 벗어나 예술가들의 특색있는 공

그러나 그 덕분에 한국의 도자기는 외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고

방에 방문해 보고 느끼고,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문화예술복합 공간

유한 전통과 문화를 유지해 올 수 있었기에 오늘날에 가치가 더 크다

입니다. 이를 위해 예스파크에는 도자 공방, 전통가마, 가구공방, 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의 전통 도자기, 제작기법, 도자 명장들

리공예, 종이공예, 금속공예, 가죽공예 등의 다양한 공방들에서 체험

의 삶과 작품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싶어 하는 세계인이 많습니다.

과 교육, 전시, 판매가 모두 이뤄지고 있습니다. 또한 국내ㆍ외 방문객

그래서 이천 도자기 명장들이 한국의 전통 도자기를 알리고자 직접 해

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카페 거리 등 다양한 문화지원시설을 갖추고

외로 나섰습니다.

있습니다. 약 270개의 다양한 도자공예 공방, 예술적인 건물들, 예술

이천에는 활발히 활동 중인 23명의 도자기 명장(대한민국명장 7명 이

적 감성이 녹아있는 골목 구석구석이 방문객의 눈을 사로잡기 충분한

천도자기명장 17명 중복 3명)이 있습니다. 이천시는 이 중 7명의 대

명실상부 대한민국 대표 예술 공예 마을입니다.

한민국 이천 도자기 명장들의 모시고, 문화의 중심 ‘프랑스 파리 루

크라프츠: 이천시가 최근 ‘수출 맞춤형 컨설팅’을 진행하였는데, 앞으

브르 박물관 (MUSÉE DU LOUVRE)’ 내 박람회 홀에서 열리는 세

로 국내 도자기의 시장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이 같은 지원 사업을 확

계문화유산박람회에 현장에서 명장들이 직접 도자기 제작 시연을 선

대할 계획인지

보였습니다.

엄태준 시장: 이천시가 진행하고 있는 주요 해외 사업 중 하나는 ‘프랑

현재 세계적인 케이팝 그룹 방탄소년단과 한식 인기 등에 힘입어 세계

스 파리 메종오브제(MAISON ET OBJET)’ 박람회 참가입니다. 올

가 한국 문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음

해로 4년째 참가하였고, 지속적인 해외 홍보 및 판로개척 사업을 통

악부터 음식, 역사까지 한국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세계인들이 많아진

해 이천 도자기의 인지도를 꾸준히 높여왔습니다. 이제는 이천 도자

다는 얘기는, 그만큼 우리가 우리 문화를 제대로 잘 알리면 상당한 홍

기를 보러 각국에서 일부러 이천 도자기 홍보관을 찾는 바이어가 있

보 효과의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수십 년째 한

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길만을 걸으며 도자 문화 계승과 발전에 힘써온 이천 도자기 명장들

특히 올해는 지난 몇 년간 참가해 오면서 축적했던 해외 바이어와 트

의 전통 도자기 제작 시연 역시 세계 한류 문화 바람에 큰 힘을 실어

렌드 데이터를 분석해 국내 최고 푸드스타일리스트 등 전문가와 1:1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맞춤형 컨설팅 프로그램을 진행해 참가를 준비했습니다. 국내외 식문 화에 적합한, 그 그릇을 사용하는 외국인들의 입장에서 함께 고민해 제작된 도자 그릇들이 이번 박람회에서 소개되면서 파리 현지에서 엄 청난 지지를 받았습니다. 또한 이천 도예인들을 대상으로 그릇에 직접 요리를 담아내는 디스플레이 교육도 함께 진행됐는데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평소 쉽게 접할 수 없던 분 야의 전문가들과 이천 도예인들 간의 만남의 장을 열어주는 것은 앞으로 도자 산업 육성과 활성화의 돌파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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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풂의 미학, 백자. 이향구 명장 글·최예선 사진·배수경

이향구 명장의 ‘남양도예’ 공방 입구에는 큼지막한 장작 가마가 터를 잡

이 명장이 처음 도자기를 시작한 건 49년 전 1969년, 중학교를 졸업

고 있다.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구워내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 선조

하자마자다. ‘도공의 기술을 배워 평생 먹고 살겠다’는 일념으로 도자

도공들이 이용한 제작 방법을 보존, 발전시키자는 생각으로 이 가마를

기 물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고향인 삼천포에서 유일하게 돈을 벌

만들었습니다. 제 요장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전통을 생각하는 제 마음

수 있는 곳이 도자기 공방이기도 했다. 3년 후, 기술을 인정받아 서울

이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금도 가마에 도자기를 굽고 있습니다.”

에 있는 도자기 완구 공장에 스카우트 돼 상경하게 됐다. 당시에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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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더 컸다. “그때만 해도 명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냥 도자기 기술을 더 빨리 잘 배우고 싶단 생각 뿐이었어요.” 도자기를 시작한 지 10년 뒤, 경기도 이천에 내려와 도자기 공장에 취직하고 그때부터 투각 백자 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에 투각 기법은 까다롭고 어려웠는데, 손재주 가 좋았던 이 명장은 투각 도자기를 만들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 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공장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도자기를 빚으 며 한 우물만 파던 그는 2005년 ‘이천 도자기명장’이 되었다. 이 명장의 공방은 ‘백자’ 일색이다. 젊었을 땐 백자, 청자, 분청을 모두 빚었지만 지금은 백자 전문가로 불린다. “백자의 매력은 그림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어요.” 이 명장의 백자에는 민화부터 전통 문양까지 다양 한 그림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이 명장은 백자에 특별함을 입히는 우리 전통 그림의 중요성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도자기는 종합 예술이에요.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 리고 유약을 바르고 며칠씩 가마 불을 때서 굽는 것까지. 성형도 그림 도 유약도, 불을 때는 방식 모두가 내 손을 안 거치는 게 없어요. 도자 기는 제 삶이자 제 일부인 겁니다.” 이 명장의 자녀들도 도자기를 빚는다. “어려서부터 흙과 함께 놀고 자 란 큰딸과 막내아들이 제 뒤를 이어 도자기를 한다는 게 뿌듯하고 자 랑스럽습니다.” 내년이면 도자 인생 50년을 맞는 이 명장. 앞으로 빚어가고 싶은 삶은 무엇일까. “명장이 되기 전까지는 도자기 기술을 누구에게 알려주지 않 았어요. 그런데 명장이 되고서 명장으로서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어 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가진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 게 전해주는 게 내게 주어진 의무이자 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라 가 저를 명장으로 뽑아 준 이유도 거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부터 꿈이 생겼습니다. 남은 인생은 제가 평생 쌓은 기술을 더욱 많 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데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이미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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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건 푸르른 빛만이 아니었다. 최인규 명장 글·최예선 사진·배수경

“청자 말고 다른 걸 해볼 생각은 안 했느냐고요? 청자를 하기에도 시간

바닥에는 ‘푸를 벽(碧)’에 ‘구슬 옥(玉)’, ‘벽옥’이라 적혔다. 벽옥같이

이 없어요. 아마 평생 청자를 만들어도 다 못 만들 것 같아요. 아직도

푸르다는 뜻처럼 청자만 바라보며 한 길을 걸어왔다. 스승이었던 고(

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백자나 분청을 만들 생각은 안 해봤냐는 질문

姑) 해강(海剛) 유근형 선생을 만난 건 47년 전. 공업고등학교 재학 중

에 되돌아온 답이었다.

도자기를 배우러 현장 실습을 나갔던 곳이 해강의 작업실이었다. 철없

최인규 명장은 도자기 일생 내내 청자를 빚었다. 그가 만든 청자의 밑

던 시절 도자기와의 첫 조우는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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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제대 후 도자기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발길을 돌린 곳은 다시 이 천의 해강도요였다. “도자기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우연은 그렇게 최 명장을 운명처럼 끌어당겼다. “그야말로 시계처럼 작업했어요. 그만두고 싶다거나 다른 곳에 눈을 돌 릴 겨를이 없었어요.” 능력 있고 성실한 도공 청년에게 수많은 유혹과 역경이 있었지만 최 명장은 그런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우직하게 한 스 승 곁을 지켰다. 성실하고 곧은 성품에 스승도 곧 그를 인정했다. 20년 을 한결같이 배운 끝에 1991년, 지금의 ‘장휘요’ 간판을 걸고 독립했 다. 그리고 2005년 ‘이천 도자기명장’ 에 이어 2017년 9월 ‘대한민국 명장’ 칭호를 얻게 됐다. 명장이 된 뒤에도 배움에는 끝이 없었다. 지금도 매일같이 스승의 유작 이 전시된 박물관을 찾아 눈에 담고 돌아와 빚기를 반복한다. “유작을 꺼내 보고 있으면 ‘스승님을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어 요. ‘언제쯤이면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하면서 또다시 작업에 몰두하 는 거죠. 지금도 배우는 중이에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최 명장에게 앞으로 남은 숙제는 ‘탈(脫) 해강’이 다. “해강 선생님에게 배웠기 때문에 저를 이만큼 인정해주는구나 하는 생각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선생님의 작품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을 보면 ‘아 최인규 명장 작품이구나’라고 알아볼 수 있는 저 다운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최 명장의 작업실 한쪽에는 초벌구이 상태 의 작품부터 아직 가마에 구워지지 않은 작품들이 줄지어져 있다. 불 에 구워지지 않아 무채색의 빛을 띤 채로, 푸른빛을 가슴 깊숙하게 감 추고 있는 것처럼. “저는 작품을 빚고 바로 가마에 넣지 않아요. 굽고 싶은 생각이 들 때 까지 절대 굽지 않는 거죠. 구우면 어떤 모습이 될지를 오랜 시간을 두 고 상상해봐요. ‘이젠 구워도 되겠다’ 싶을 때, 그때 가마에 넣어요. 굽 기까지 5년이 걸린 작품도 있었을 정도니까요. 그래야 제 맘에 드는 빛 깔이 나오는 것 같아요.” 굽고 난 뒤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도자기의 특 성상 쉽게 가마에 넣지 못했으리라. 특히, 1200도가 넘는 불을 견디고 나서야 제 빛깔이 나오는 청자는 더욱 그러했을 터. 하지만, 최 명장의 청자를 더욱 빛나게 하는 건 흙에서부터 굽기까지 걸리는 인고의 시간 이 아니라 도자기를 대하는 그의 우직하고 올곧은 성품과 정성을 다하 는 마음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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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에 꽃을 피우다. 유용철 명장 글·최예선 사진·배수경

거칠어 다루기 힘들고 소성하는 동안 불순물이 녹아 표면에 검은 점 무

그가 만든 분청 위의 꽃은 어느 무늬 하나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

늬가 번진다. ‘투박하고 서민적인 그릇.’ 그래서 정이 갔다. 고려 시대

이 없다. 기계로 찍어낸 듯 정교한 꽃무늬는 유 명장의 고집스러운 철

청자와 조선 시대 백자 사이에 불같이 일어나 서민들의 생활에 자리 잡

학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았던 분청. 유용철 명장은 지난 35년간 서민들의 삶을 닮은 분청 위에

“인화문(印花紋)(꽃 모양으로 도장을 찍는 기법)을 하는 데 보통 5개

꽃을 피워냈다.

종류 도장을 3~4000번 정도 새겨요. 그중에 하나라도 힘 조절을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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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깊이 들어가거나 찌그러지면 가차 없이 깨버려요. 수정을 할 수도 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좋은 도자기는 도예가 스스로 만족하는 작품입 니다. 저한테 완벽하지 않은 도자기는 남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 각해서 아깝지만 그렇게 깨버립니다.” 유 명장은 태어날 때부터 흙을 만졌다. 유 명장의 아버지는 외할아버지 에게 도자기를 배웠고 유 명장은 또 아버지에게 도자기를 배웠다. 처음 부터 도예로 진로를 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몸이 고된 도 자기 일보단 공부를 하길 원하셨다. 그 뜻에 따라 대학에 진학했고 항공 사에서 정비 일을 하게 됐다. 하지만 머릿속에 늘 아른거리는 것은 다 름 아닌 도자기였다. 군대에 다녀오자마자 아버지에게 도자기를 배우 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에겐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당시 나이 24살. 극구 만류하던 아버지도 결국 유 명장에게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처음 인화문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분청 표면 에 꽃 모양 도장을 찍는 작업만 10년을 했죠.” 지금은 눈 감고도 찍는다 고 하지만, 일정한 깊이로 찍는다는 것은 고되고 오랜 수행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약 15년 후,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유 명장은 아버지로부터 독 립해 이곳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왔다. 독립하자마자 인화문이 아닌 다 른 기술을 사용한 도자기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양한 기법을 배우 고 싶은데 물어볼 데가 없었던 게 제일 답답했어요. 그래서 마음껏 물 어볼 수 있는, 또 물어보는 게 의무인 학교에 가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렇게 45살 늦은 나이에 학교 문을 두드렸고 작품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2016년, ‘이천 도자기명장’의 칭호를 얻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난 후였다. “상을 받아도 ‘이런 작품으로 어떻게 상을 받았냐’고 말씀하시던 분이었어요. 아들에겐 한없이 엄격하셨기에 속으로는 좋으 면서 표현을 그렇게 했던 거죠. 아마 제가 명장이 된 걸 보셨다면 분명 좋아하셨을 거예요.” 3대째 가업을 이어 도자기를 빚어온 유 명장. 수만 개, 어쩌면 수천만 개에 이르는 꽃을 찍을 동안 포기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천직’이 라는 생각이 들어요. 도자기를 하고 있을 때 마음이 제일 편하고 작품 을 하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해요. 앞으로도 분청에 꽃을 피워낼 수 있 는 동력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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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물레로만 빚은 청자. 김용섭 명장 글·최예선 사진·배수경

“전통도자기에 대한 환상이랄까, 거기서 시작된 거죠.” 환상으로 시작

나지 않아요. 내 천직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까지 해요. 재밌어요. 지

된 도자기는 이제 현실이자 일상이 돼 물레를 돌리는 동력이 됐다. 전

금도, 여전히(웃음).”

통도자기를 배우겠다고 이천으로 내려온 지 35년, 김용섭 명장이 청년

그가 도자기에 처음 발을 들인 건 도공을 양성하는 6개월짜리 도자기

시절 가졌던 환상은 깨지기는커녕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고민으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대부분 도자기 공장 등에 취직해 도기 제품을 만

로 채워졌다. “싫증 나지 않냐고요? 전혀요. 온종일 앉아 있어도 싫증

드는 길로 빠졌지만 김 명장은 전통 도자기를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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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무작정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와 전통도자기 공방을 찾아다녔다. 그때 만난 스승이 혁산(赫山) 방철주 선생이었다. 그 밑에서 22년을 배웠다. 김 명장이 2004년 독립을 하자마자 처음으로 한 일은 공방에 있는 성 형 기계를 전부 버리는 거였다. “온전히 물레 성형으로만 하자고 마음 먹었어요.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옆에 기계가 있으면 자꾸 그걸 사용하 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거든요.근데 아예 없으면 생각조차 안 하잖아 요. 그래서 고물 장수에게 팔아버렸죠. 당시엔 사람들이 저한테 다 바 보라고 했어요. 그래도 저는 무조건 손으로만 만들겠다고 다짐했어요. 지금도 100% 물레 성형으로 모든 걸 다 만들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명장이 된 것 같기도 해요.” 지금까지 모든 작품을 물레를 차서 만들었다는 김 명장. “지금도 물레 가 제 주전공이에요. 수백, 수천 개를 기계처럼 똑같이 만들 수 있어요. 제가 바로 살아있는 기계가 된 셈입니다(웃음).” 그렇게 독립한 지 단 10여 년만인 2015년, ‘이천 도자기명장’에 선정됐다. “명장이 된 뒤 로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있어요. 사소한 행동이라도 남한테 모범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작품을 할 때도 계속 수작업을 고집하 는 이유기도 해요.” 김 명장의 대표적인 작품은 색이 다른 흙을 섞어 대리석 같은 문양을 내는 ‘연리문(練理紋)’ 청자다. 반죽을 너무 많이 하면 흙 끼리 서로 완 전히 섞여 무늬가 나오지 않고, 반죽을 덜 하면 공기가 빠지지 않아 구 웠을 때 균열이 생긴다. 매우 까다로운 작업 중 하나지만, 김 명장이 가장 애착을 가지고 공을 들이고 있는 기법이다. “불량이 나올 가능성 이 높다는 건 그만큼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될 가능성도 높다는 말이잖 아요. 실패율이 높고 시행착오가 많을수록 좋은 작품이 나오는 법이니 까요. 그래서 대형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불량이 나올 확률도 매우 높지만 평생 가지고 가고 싶은 그런 작품이 나올 수 도 있는 거니까요.” 김 명장은 35년 동안 물레를 돌렸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물레질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전통방식 으로 도자기를 만든다는 것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작업이에요. 생각 지도 않은 실수와 생각지도 않은 값진 작품이 나오기도 하는. 평생을 배 워야 하는 게 도자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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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에 그린 한 폭의 풍경화. 박래헌 명장 글·최예선 사진·배수경

’원정(垣亭).’ 낮은 정자. “담이 낮아 누구나 쉽게 넘나들고 향유할 수

도 한몫한다. 분청 한 점 마다 한 폭의 벽화를 연상시키는 그림이 특징

있지만 저만의 정자, 저만의 색깔과 고집이 있다는 의미에요. 제가 만

이다. “내가 느끼는 대로 표현하고 하고 싶은 대로 모두 다 구현해 낼

드는 작품들도 이러한 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수 있는 게 분청의 멋이에요. 저는 도자기에 회화의 세상을 펼치고 싶

박래헌 명장의 분청은 그의 호(號)이자 공방 이름처럼 누구에게나 친근

어서 분청을 택했어요. 도자기 위에 있는 그림들을 펼쳐놓고 보면 한 폭

하게 다가가면서도 고유의 색깔을 갖고 있다. 서양화를 전공했던 이력

의 그림이 돼요. 저의 이런 회화적 장점을 극대화해준 것도 분청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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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했던 것 같아요.” 박 명장은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찌감치 예술에 눈을 떴 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아버지의 권유로 도자기를 배웠다. “ 물감으로 그리는 것보다 흙을 가지고 입체로 만드는 게 더 좋았어요. 힘든 줄 모를 만큼 재미있었어요. 도자기를 할 팔자라는 생각을 그때 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와 물레를 배웠다. 그리고 1996년, 전승공예대전에서 21년 만에 처음 도자기 부문으로 대통령상 을 받는 쾌거를 거뒀다. “그 당시에는 제 작품이 파격적이었어요. 도자 기에 창의적이고 회화적인 부분을 접목한 경우가 거의 없었거든요. 큰 상을 받고 도자기를 더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듬 해 대학원에 진학해 또다시 학생으로 돌아갔어요. 지금도 배움에는 끝 이 없다고 생각해요(웃음)” 박 명장의 분청에는 유독 산이 많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집 근처 산에 서 뛰어놀던 기억이 고스란히 반영됐다고 한다. “산을 제 관점으로 재 구현한 거죠. 제가 분청에 그린 그림들은 대부분 제 어린 시절 기억 속 에 있는 자연이에요. 산부터 연못, 새까지. 대부분의 작품이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에요.” 그의 작품은 등장하는 모든 생물이 ‘쌍’을 이루고 있는 것도 특징 중 하 나다. “제 작품에서는 모든 것들이 쌍을 이루고 있어요. 사랑을 의미하 는 거죠. 다 같이 더불어 사는 그런 세상을 작품에 담는 거예요.” 그는 작품 대부분에 수려한 화폭을 그리거나 조각해 넣지만 단 하나, 그가 시 도하지 않는 작품이 있다. 바로 달항아리다. “저는 옛것을 그대로 모방 하지 말자는 주의인데, 달항아리만큼은 예외에요. 달항아리는 그 자체 만으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이기도 하고 사람의 몸이기도 해요. 그냥 두 고 보는 것만으로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같아요.” 그림부터 시작했지만 도자기에 발을 들인 지 올해로 반평생이 지났다. 그리고 지난 2016년 ‘이천 도자기명장’이라는 값진 이름을 얻게 됐다. “저한테 명장은 새 옷을 하나 더 입은 느낌이에요. 33년 전 도자기를 처 음 시작했을 때의 초심을 잊지 말라고 입혀준 옷 말입니다. 저의 바람은 전통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서 현시대에 맞는 작품을 만드는거예요. 앞으로 계속 이 마음가짐으로 작업에 임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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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사명을 띤 회령과 분청의 대가. 이규탁 명장 글·최예선 사진·배수경

“사람한테는 일생에 3번의 기회가 온대요. 제게 도자기가 그중 하나

째 바꿔놓았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팔산(八山)의 11대

입니다.”

후손인 다카토리 세이잔이 고국인 대한민국의 젊은 도공에게 회령도자

대학에 진학하려던 평범한 청년이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 도자기의 혼을

기술을 전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안고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만 40년의 이규탁 명장의 도자기 인생은

반신반의하며 지원한 국비 도자 장학생 공모에 덜컥 붙게 됐고, 그렇게

참 흥미롭다. 지난 1978년, 우연히 본 신문기사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의 도자기를 배우게 됐다. “일본에서 제 스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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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더군요. ‘내가 도자기를 그만하면 우리 조선 도공 가문의 맥이 여 기서 끊기겠구나. 선조들은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그 혼이 나마 돌려보내 줘야겠다,’ 그런 맘으로 결심하신 일이라고.” 낯선 이국땅에서 어려운 점도 많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일본에서 배 웠다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이를 극복하고자 이천에서 바닥 부터 다시 도자기를 배우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이 명장이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러한 스승의 뜻 때문이었다. “일본으 로 끌려갔던 선조들의 혼을 돌려보내고자 했던 스승의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곳에서 배웠던 것들을 한국에 알리고 후손들에게 남 겨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었어요. 그런 의무감 때문에 지금도 소 홀히 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 이 명장의 주 분야는 분청이지만 회령에 대한 애정이 깊 다. “회령은 조선시대 때 일본으로 넘어간 건데,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 들은 이걸 일본의 것이라고 생각해요. 회령이란 뜻이 함경북도 회령에 서 주로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저라도 이걸 알려야겠다 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사명감 때문에 분청을 하면서도 쉽게 놓지 못 하고 있어요.” 회령이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라면, 분청은 그가 작품을 통 해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펼치는 장이다. “제가 생각하는 분청의 소박함은 투박하고 거친 소박함이 아니라 들꽃 처럼 예쁘고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정제된 소박함이에요. 그런 걸 표현 하고 싶은 제 맘을 분청으로 표현하는 거죠. 나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작품이 청자나 백자보다는 분청이라고 생각했던 점도 이 부분이에요. 그런 소박함을 작품에 담고 싶었어요.” 그렇게 도자기의 세계로 들어온 지 올해로 41년이 됐다. 그리고 2017 년, ‘이천 도자기명장’이 됐다. “이천 도자기명장은 곧 한국문화 홍보 대사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 라 도자기가 세계시장으로 나가는 데 있어서 모범이 되고 앞장서 알려 야 된다는 책임을 느껴요. 도자기의 고향이 대한민국이라는 것,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세계로 통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선조들의 것을 배우고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에 맞게 변 화시키는 작업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명장은 감투가 아 니라 그런 역할을 하라는 책임을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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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을 담고 ‘시대’를 반영하다. 이연휴 명장 글·최예선 사진·배수경

“흙에서 흙으로. 흙에서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게 참 신기했어요. 어떻

도자기를 처음 배운 건 고향 집 옆에 우연히 들어선 도자기 작업장에

게 보면 무에서 유를 만드는 거랄까요. 알수록 궁금하고 신기했어요. 계

서였다. 더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그의 나이 스무 살, 이천

속 배워보고 싶고. 그렇게 이곳에 발을 들인 거죠.”

으로 올라와 해강(海剛) 유근형 선생 슬하에 들어갔다. “배워도 배워

이연휴 명장은 그렇게 48년을 줄곧 도자기를 빚었다. 공방 이름인 ‘여

도 끝이 없더라고요. 어느 정도 성취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앞으로

천(如泉).’ 흐르는 물처럼 한결같았던 세월이었다.

더 나아가야 할 것들이 보이니까. 세월 가는 줄도 몰랐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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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유약 실험을 하고 있었어요. 맨 처음 시작할 때도 유약을 만드 는 작업을 했었는데, 50년이 다 된 지금도 여전히 실험의 연속이에요.” 아직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다고 말하는 이 명장. “박물관에 가서 옛 선조들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언제 저렇게 만들까, 내가 재주가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요. 뭘 만들어도 만족이 없는 것 같아요.” 겸손이란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도자기에 대한 애정과 올곧은 심성이 한껏 배어날 뿐이었다. 한결같이 흐르던 강은, 그사이 더 깊이 흐르고 있었다. 오랜 세월의 연속은 속절없이 흘러갔지만 ‘혼’만은 깊게 서렸다. “작품 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의 혼이 안 들어갈 수가 없어요. 항상 모든 작 업을 할 때 제 혼을 담는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합니다. 재주만 부릴 게 아니라 혼을 담아야 한다는 게 제 철학이에요. 하나의 도자기를 빚더라 도 혼을 담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끝없는 실험과 만족을 모르는 노력의 결과였을까, 이 명장은 2004년 에 명장으로 선정됐다. 명장이 된 뒤로는 하나의 시대적 사명을 부여받 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감이 들었어요. 우리가 과거 시대의 청자, 백자, 분청을 조상들에 게 물려받았듯이 우리가 후손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이 시대의 도자기 는 무엇일까 생각했어요. 우리처럼 과거의 것을 언제까지 답습할 수 없 잖아요. 이 시대의 도자기를 또 후손들에게 남겨줄 수 있다면 좋겠다 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 낸 게 ‘황(黃)자’ 였다. 여러 번의 유약 실험 끝에 황색을 띠는 도자기를 만들어 냈고, 기존의 청자나 백자와는 다른 빛 깔을 입혔다. “청자는 조금 차가운데, 황자는 따뜻한 느낌이 들어요. 아직 낯설어 하 는 사람들도 있지만 좋아해 주는 분들도 있어요. 계속 연구를 해서 후 손들에게 백자나 청자처럼 이 시대에 맞는 도자기를 물려주고 싶어요. 그게 제게 앞으로 남겨진 역할인 것 같아요.” “그냥 주어진 대로, 힘닿는 대로 작업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실패해도 원인을 알 수 없고 잘돼도 마찬가지예요. 여긴 완벽한 끝이 있는 게 아 니라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과정만 있을 뿐이에요.” 반세기를 이어온 백발 도자기 노장의 결심은 세계 도자기 종주국으로써 한국, 이천의 나아갈 길을 다시금 되짚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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