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루터란 110호 특집 (2005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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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40년을 되돌아보며(10)" 이무열 / 루터대학교 명예총장
1961-1966년의 선교사 생활: 도로와 교통 「우리루터란」 이번 호에서 다룰 주제를 생각하다가, 내가 처음 한국에서 보낸 5년간 당시 의 한국 상황에 대해 쓰기로 하였다. 1961년 9월 나와 내 아내 단 둘이 서울 김포공항에 도 착한 때부터 5년 후 1966년 여름 처음으로 휴가를 얻어 딸 켈리와 아들 마이클과 함께 미국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을 때까지 내가 본 상황을 회상해 보고자 한다.
젊은 세대 한국 사람들은 1960년대 한국의 생활 형편이 어떠했는지 이해하 기 어려울 것이다. 당시 텔레비전은 매 우 귀한 것이었다. 물론 채널 수도 몇개 되지 않고 칼라가 아닌 흑백 텔레비전 이었다. 전화도 매우 귀했다. 누구나 핸 드폰을 지니고 다니는 오늘날 사람들은 그 때 상황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불어 닥친 변화
1966년. 여름. 딸. 켈리, 아들. 마이클과 함께 찍은 이무열 선교사 부부
와 성장의 바람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교통 분야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잘 포장된 광범위한 도로망, 그 위를 달리 는 셀 수도 없이 많은 “한국제” 자동차, 버 스, 다양한 종류의 트럭들, 공사를 위한 중 장비들과 건설 장비들, 여의도의 63빌딩을 비롯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은 아파트 와 사무실 건물들, “우리 자금, 우리 기술, 우리 지하철”이라는 구호 아래 지어진 훌 륭한 지하철망. 그리고 냉장고, 에어컨, 컴 퓨터 등의 세계적 수준의 전자 제품들 등 등.
1966년 5월. 이무열 선교사 부부
우리루터란 110호 특집 (2005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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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까지 한국의 경제 발전은 매우 미진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 때 북한의 경제 상 황이 남한보다 더 좋았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은 발전을 위한 토대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상점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당시 유명했던 화신, 신신, 신세계 백화점들도 제품을 많이 갖추지 못했 다. 미군 부대에서 구한 빈 깡통 반을 잘라 재털이를 만들 었고 굴뚝도 그러한 깡통들을 붙여 만들었다. 심지어 지 붕널도 깡통을 펴서 만들었다.
비무장지대 양편으로 대규모의 군부대가 배치되어 있 었고, 어디에서나 군부대를 볼 수 있었다. 한국 전쟁의 흔 적이 아직 뚜렷이 남아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전쟁이 1953년 휴전으로 끝났지만, 글자 그대로 휴전 상
빈 깡통으로 만든 큰 탑,1969년
태였고, 지금까지 그 상태는 계속되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1910년 일제침탈 이후 한국은 큰 고통을 겪었다. 2차세계대전이 다시 한 국에 큰 고통을 가져다 주었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은 분단 이 되었다. 경제적 발전에 필요한 안정적 기초를 놓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다시 한국 전쟁이 발발해 한국은 폐허가 되었다.
1961년부터 1966년까지 한국은 아직 “미개발 국가”로 분류되었다. 제조업은 미약했고,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형편없었다. 사정이 나은 농부들은 황소의 힘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 었지만 대부분 맨 손으로 일을 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기계들은 없었다.
편지봉투나 작은 봉투들은 미군부대에서 버려진 종이들로 만들어졌다.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받은 봉투에서 종종 재미있는 것들을 읽을 수 있었다.
도로는 거의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나마 좋은 조건도 아니었다. 1961년 9월 김포공 항에서 서울까지 오는 길은 자갈길이었다. 그러한 도로를 달리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보행 자, 자전거, 마차 등 위험한 장애들이 많았다. 먼지도 많았고, 비가 올 때는 진흙탕이 되었다. 딸 켈리는 지프차를 타고 나가고 싶어할 때 “쿵쾅하러 가자”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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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 길에서는 타이어가 쉽게 펑크가 났다. 나는 타이어집 고용인의 주 업무가 매일 아침 100m 간격으로 길에 못을 뿌려 놓는 것 같다고 농담을 하곤 하였다. 타이어가 펑크가 나면 바로 수리를 해야 했다. 물론 당시 타이어는 튜브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언제나 스페어 타이어를 준비해야만 했고, 거의 매주에 한 번씩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 한 번은 하루에 세 번이나 펑크가 난 적이 있 었다. 미국 감사절 휴일인 1965년 11월 마지막
1964년 펑크난 타이어를 수리하는 이무열 션교사
목요일, 아들 마이클이 태어 나기 한 달 전의 일 이었다. 7월말 혹은 8월초쯤 비가 심하게 내릴 때 대천을 가던 길에 펑크가 나서 타이어를 바꾸 다가 지나가던 버스가 진흙탕 물을 튀겨 그것을 뒤집어 쓴 일도 있었다. 튜브가 없는 타이어가 나온 것은 참으로 놀라 운 일이다. 타이어 펑크와 관한 한 요즘은 얼마나 편리해 졌는지 모른다. 요즘에는 타이어에 별로
1964년 여름 시골길에서 조안이 딸 기저귀를 갈고 있다.
신경을 쓰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은 펑크가 나면 스페어타이어, 재크나 다른 도구들을 찾느라고, 또 어떻게 그 도구들을 사용하는지 당황해 할 것이다. 여름 장마철에는 물에 덮힌 도로를 건너야 할 때도 많이 있었다. 어떤 때는 길을 돌아서 가야 할 때도 있었다. 1964년 여름, 대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예산쯤 왔을 때 물이 넘 쳐 다리가 봉쇄된 적이 있었다. 다리가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우리는 대천으로 돌아가 다시 하루를 더 보내야만 했다. 그 다음날 나는 아내 조안과 석 달 된 딸 켈리를 대천역에 내려 놓고 나 혼자 다른 길로 돌아서 서울로 돌아 왔다.
랜드로바 지프로 물이 넘치는 길을 건너다. 1969년 7월
우리루터란 110호 특집 (2005년 10월 1일) 그 길에도 물이 채 빠지지 않은 강을 건너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 때 차가 랜드로바 지 프가 아니었다면 나는 서울로 돌아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일반 승용차로는 그런 길을 건널 수 없었을 것이다.
도로 공사 현장에서는 아주머니들이 돌과 자갈을 날랐고, 돌과 자갈 위에 아스팔트 포장 을 해서 새 길이 되었다. 길에는 자동차가 많지 않았다. 주유소도 많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서울시 전체에 주유소가 오직 두 곳만이 있었다. 한 곳은 서대문에 있었고, 또 한 곳은 청량리에 있었다. 그 런 사정이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1960년대 초 한국이 보유한 전체 외화의 절반이 기름을 수 입하는데 사용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한국이 아직 미개발 국가로 간 주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시골 지역으로 나가게 될 때는 여분의 20리터 휘발유 통을 가지고 가야만 한다. 가까운 주유소가 없는 곳에서 휘발유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동안 서울에 서도 휘발유를 20리터 통을 기준으로 판 매한 때가 있었다. 펌프는 핸들을 손으로 돌려서 했다. 오늘날 주유소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1965년 2월 연희동 집으로 연결된 길
경제 발전의 변화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66년 즈음이었다. 그 때부터 발전의 속도가 매 년 그 이전 해들의 총합에 이를만큼 괄목할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1961년 9월에 한국에 도착했지만, 실제로 내가 한국 선교사 소명을 받은 것은 그 해 4월이었다. 1961년 5월에 박정희의 쿠데타가 있었다. 그 소식을 우리는 라디오와 신문 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사람들은 각기 다른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는 확실히 강하고 권위적인 지도자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독재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강 의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1961년부터 1979년 10월 살해되기까지 박정희가 통치했던 18년 동안 한국의 경제는 믿을 수 없을 만 큼 성장하였다. 그는 한국을 경제 세계의 지도 위에 올려 놓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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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고속도로를 건설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을 통해 경제적 원조를 얻게 되었다. 정유소들이 건설되었고 자동차 제조 산업이 시작되었다. 오늘날 한국은 자동차 분야에서 세계 시장의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다. 1960년대 초 자동차나 버스 를 군대 지프나 버스를 개조해서 사용하였던 때, 오늘날처럼 한국이 자동차 강국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1960년대 도로 위에는 참으로 차가 적었다. 역사적인 관심 에서 교통 수단을 범주별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 한다.
가장 값싼 교통 수단은 전차였다. 전차는 1966년까지 존재했다. 나는 1965년 경 태평로, 서울역, 남대문을 운행하는 전차를 찍은 사진을 갖고 있 다. 전차는 좁고 높지 않았지만, 노란 색, 녹색의 전차가 다니는 모습은 보 기 좋았다. 서울의 전차, 1965년
그 다음은 버스였다. 당시 버스들은 옛 기름통을 펴서 만든 것들이었다. 엔진은 군용차들 에서 사용되었던 것을 재생해서 사용하였다. 버스는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버스들은 검 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서울의 공기를 오염시키는 데 한 몫을 하였다. 좌석들은 매우 불편하 였다. 키가 좀 큰 사람들은 머리를 버스 천장에 부딪혀 상처를 입을 각오를 해야 했다. 나는 버스를 탈 때는 주로 버스 천장에 앞 뒤 두 군데에 있었던 환기구 쪽에 섰다. 버스를 탈 때는 조심해야 했다. 특별히 충격 완화기가 없는, 혹은 스프링이 부러진 버스는 도로를 뒤뚱거리 며 달리는 것 같았다.
조금 비싸고 상류층 사람들이 사용하던 교통은 합승이었다. 합승차 역시 오래된 군인 지 프의 엔진을 쓴 것인데, 12내지는 15사람이 탈 수 있도록 개조를 하였다. 합승은 버스보다 더 많은 정류장에서 섰는데, 버스 보다 조금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그 다음 범주는 이미 당시 주요 교통 수단이 되었던 택시이다. 한국 택시는 미국의 경우 와 달랐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특별한 상황에서만 택시를 이용하였다. 1960년 초반부에 택시는 작은 것들이었다. 2차대전이나 한국전쟁 때 폐기된 차들에게서 재생한 엔진을 사용 하였다. 그런 택시를 타고 길을 달리자면 발 밑 틈새로 빠르게 지나가는 땅바닥을 보기도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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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군인 지프와 소수의 세단들은 정부 관리, 영사관에서 일하는 외국인들, 국제개발 미국지회 (USAID), 혹은 미국 해외선교부(USOM), 사회 복지 단체들, 스칸디나비아 의료센타, 그밖의 사 업가들, 해외 선교사들이 사용하였다.
수원문 근처에서 찍은 두 다른 유형의 합승차
이들 대부분의 차들은 윌리스(Willys) 지프나 영국제 랜드로바 타입의 사륜구동차였다. 1970년대가 되어서야 땅에 가까이 붙어 달리는 승용차가 서울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도로 에 깊이 파인 도랑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땅으로부터 충분한 높이를 갖지 못한 승용차 타입의 차는 어려움을 당했다.
미쓰비시 디젤 지프를 라우어 선교사 가족과 함께 사용했는데 그것은 일본에서 수입된 지붕 이 없는 차였다. 서울 퇴계로 근처 한 정비 공장 에서 지붕을 만들었다. 지붕 없는 차와 지붕을 단 차 사진을 비교해 보면 얼마나 달라 보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를 수입하려면 복잡한 서류를 작성해야 했다. 그러나 그 차는 우리 두 가정을 위해 수년 간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1962년 봄 일본에서 온 미쓰비시 지프
어쨌든 우리가 한국에서 보낸 첫 5년 동안의 도로 사정을 회상해 볼 때 오늘날 한국의 상황이 얼마나 편리해 졌는지 말할 수 있다. 요즘은 도로 정체 현상 때문에 불평하지만, 그 당시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해진 상황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지붕을 단 미쓰비시 지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