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응답하라1961 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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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

다시 돌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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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며...'

$%년을 회 의 서 에 국 한 , '이무열 선교사

우리루터란에 연재되었던 이무열(Hilbert Werner Riemer) 선교사님의 '한국에서의 $%년을 회고하며'의 45회 연재 되었었고, 이후 선교사님께서 새로이 글을 작성하셨습니다. 번역은 박일영 교수님이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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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 교회협력국


제21호

한국에서의 "#년을 되돌아보며 (자서전적 회상) 힐버트 리머 박일영 교수 옮김

“나의 자서전적 회상” 이번 21호에서 나는 지원상 목사의 삶과 그가 남긴 유산에 계속해서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는 그의 탁월한 지도력을 통해 기독교 한국루 터회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 전체를 위해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지도력은 한국 루 터교선교부(KLM) 초기에 시작되어서 1998년 지 목사가 소천하기까지 계속 되었 다.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지만, 나는 특별히 의미 있는 몇 영역과 예들을 선택 서울 크리스천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열린 첫 번째 한국 베델성서연구 세미나에서 강 의하고 있는 할레이 스위감 목사

해서 왜 그가 그렇게 생생하면서도 영구적인 유산을 남겼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호에서 나는 한국 개신교 초기의 1907년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 장로교회의 지도자들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었고, 그 위원회가 한국 루터란아워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선교에 특별한 감사장을 준 것에 대해 언급하였 었다. 1958년 한국 루터란아워의 첫 창설자이자 책임자였던 지원용 박사가 한국 기독교회 전체의 복음 전도를 위해 의미 있는 공헌을 한 그 매스 커뮤니케이션 선 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00주년 기념 위원회가 또 하나 특별한 감사 대상으로 선정한 기독교 한국루터회 의 두 번째 사역이 한국 베델성서연구 프로그램이었다. 한국 베델성서연구는 첫 번째 2주간의 강사 세미나를 서울 북동쪽에 위치해 있는 수유리의 크리스천 아카 데미 하우스에서 1974년 1월 27일부터 2월 8일까지 가졌다. 그 첫 세미나에 57 1974년 한국베델성서연구 첫 번째 워크숍 때 말굽 형태로 놓은 회의석상에서 강의하 고 있는 스위감 목사.

명이 참석하였다. 원래 베델성서위원회는 앞으로의 참고자료를 위해 관심도를 측 정할 수 있도록 등록 인원을 50명으로 제한하였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지원하여서 한국 베델성서위원들은 지원서를 검토하 고, 또 지원자들에게 첫 세미나에 참석할지 아니면 다음 기회에 다시 지원할 것인 지 물어 보아야 했다. 1974년의 첫 한국 베델성서연구 세미나를 위해서 1969년 부터 5년간의 기획과 준비 과정이 선행되었다. 한국에서 베델성서연구 프로그램 이 시작하게 된 뒷이야기, 그리고 급성장을 하고 매우 폭 넓게 영향을 끼치게 된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이 “자서전적 회상”에서 한번이나 두 번에 걸쳐 다룰 가치 한국베델성서연구원 원장 지원상 목사가 구약성서 1과 그림 옆에 서 있다.

가 있는 것이다.


지원상 목사가 그 프로그램 성공에 있어서 특별하고도 뛰어난 공헌을 하였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의 리더십과 능력이 없었다면 한국 베델성서 가 그렇게 크게 성공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 때문에 100주년 기 념위원회가 지난 100년 동안 한국교회에 가장 영향을 미친 100명의 지도자 가 운데 한 사람으로 지원상 목사를 선정하기도 하였다.

100주년 기념 준비위원회는 역사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교회 사역들을 밝히고 , 이전 세기 동안 특별히 뛰어난 역할을 한 사람들을 선정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 1974년 1월 서울 수유리 크리스천 아카데 미 하우스 입구에 걸린 베델성서연구 현 수막

국 루터란아워와 한국 베델성서연구 두 사역 모두가 한국 교회 전체를 위해 특 별히 공헌을 한 점에 대해 인정을 받고 선정되었다. 그 때 100명의 수상자들 가 운데 기독교 한국루터회 총회장 지원상 목사가 “교회 연합, 화홰, 그리고 관 계”의 분야 수상자에 포함되었다.

그러한 특별한 인정에 대해 기억해야 할 놀라운 측면은 상대적으로 한국에서 루 터교회와 루터교회의 사업은 그 역사가 매우 짧았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명예를 인정받은 것은 기쁜 일이기도 하지만 더욱 우리를 겸손케 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기독교 한국루터회가 한국에서의 루터교 선교와 사역을 한국에 있는 전체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기 위한 것으로 목표를 설정한 우리의 전략이 부정적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물론 지원상 총회장의 리더십과 재능이, 특별히 한국 베델성서연구원 원장으로 1985년 롤핑 목사의 강의를 동시 통역할 때 사용하는 헤드셋을 끼고 강의를 듣고 있는 지원상 목사

서의 그의 역할과 책임을 통해 드러낸 그 리더십과 재능의 실체와 스타일이 그 러한 영예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지 목사의 베델성서 사역은 모든 교단들의 경 계를 넘어서, 심지어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까지 포함하였다. 한국 베델성서연 구원 세미나에 모든 교파들로부터 신학적으로 훈련받은 성직자와 교회 사역자 들이 참여하였다. 그 당시 그러한 적극적인 반응은 한국교회가 그런 프로그램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앞으로 나는 “때가 차서”라는 개 념을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1970년대 당시 베델성서연구 프로그램의 소개에 적 용하여 이 주제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8면으로 된 강의실에서 찍은 1974년 1월 27일부터 2 월 8일까지 크리스천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열린 첫 번째 베델성서연구 세미나 단체 사진

베델성서와 연관하여 특별히 한국 베델성서연구원 원장 지원상 목사가 “유명”하 게 된 것은 그의 유머 감각 때문이었다. 베델성서연구 세미나 시작 때마다 간단 히 개회 예배를 가진 다음에 참석자 모두 간단하게 자신이 대해서, 즉 어디서 왔 는지, 어느 교회 출신인지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각자의 소개가 다 끝나면 지 목사는 자신에 대해 상당히 긴 시간을 할애해 소개한다.

197년 첫 번째 한국베델성서연구 세미나 때 8면으 로 된 강의실 뒷면에서 찍은 사진


그는 인도 마드라스에서 있었던 한 국제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1주 정도 그 곳을 방문했던 경험을 이야기 한다. 그 기간 중에 사도 도마의 유해가 매장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장소를 방문하는 여행 시간이 있었다. 전통에 따르면 사도 도마는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종종 도마는 “의심하는 도마”라고 불린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도마는 다른 지 목사, 스위감 목사, 일본 베델성서연구원장 오시 바 목사, 그리고 8명의 다른 한국베델성서 연구위원 회 위원

제자들의 말을 의심했다. 그리고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 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 겠노라”라고 말한다.

도마의 무덤에는 그 관광지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관리자는 복음을 인도에 전파한 도마에 대한 전설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무덤 지하실에 비밀 장소가 있는데, 그곳에는 실제로 예수님이 8일 후에 다시 도마가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졌던 도마의 손가락이 화석이 되어 보관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그 때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 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개정 요 20:27)고 말씀하셨다. 그 때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였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이 성 도마의 고백을 요한복음의 정점으로 여긴다.

이러한 이야기를 먼저 소개한 다음에 지 목사는 세미나에 참여한 사람들에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이라는 베델 성서 로고가 새겨진 실로 짠 현수막

게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한다. 함께 여행했던 그룹이 그 자리를 떠난 후에 지 목사는 그 자리에 혼자 남아 그 무덤 관리자와 이야기 를 계속한다. 지 목사는 자세하게 그 관리자와 협상을 해서 마침내 그 관리 자의 안내를 받아 지하 방까지 내려가 특별한 유물로서 보존되어온 “도마의 손가락”을 직접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지 목사는 20달러 미국 지폐를 무덤 관리자에게 주어서 그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고 첨가한다.

카타콤 같이 생긴 공간에 있는 그 비밀방에 도착하자 그 관리자는 지 목사에 게 상자를 열어 더 잘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그 관리자가 다시 돌 아서려는 짧은 시간에 지 목사는 손을 뻗어 실제로 화석이 된 “도마 손가 락”을 만지고, 그 상자에서 꺼냈다. 그러자 갑자기 그 관리자는 다시 돌아서 화를 내며, 지 목사에게 분개하였다. 그는 지 목사에게 정말 화가 나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여기에 내려와 ‘도마 손가락’을 보는 것만 허락했습니다. 그 손가락을 직접 만지는 것은 애초 거래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은 끝 난 뒤였다. 다시 그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국베델성서연구원 강사 롤핑 목사와 원장 지 목사가 수유리 크리스천 아카데 미 하우스 입구에 함께 서 있다


지 목사는 그 이야기를 대단히 놀라운 방법으로, 극적인 효과를 나타낼 수 있도록 잘 이용했다. 지 목사는 베델성서연구 세미나가 열릴 때마다 첫 날 늘 그 이야기를 했다. 첫 날 세미나 참석자 모두가 간단하게 자기의 이름과 소속을 이야기한 다음, 지 목사는 휴식을 갖기 전 자기 소개를 하 고서는 늘 이렇게 자신의 손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 의 창 자국을 만졌던 도마의 손가락을 만진 손이라고 말했다. 이제 참석 자들은 지 목사의 손을 만질 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한국 문법에 있 1973년 가을 베델성서연구 위원회 모임 후 이경 배 장로가 한국어 번역이 완성된 베델성서연구 교재 첫 판을 지원상 원장에게 건네고 있다.

어서 영어와 달리 지 목사의 강조점은 맨 뒤에 오기 때문에, 그의 말은 훨 씬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한국 베델성서연구원 원장으로서 지 목사는 전국의 많은 교회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설교하고 베델성서 프로그램을 소개하였다. 새로운 베델성 서반을 시작할 때 입학식에 초청을 받거나, 혹은 원래 교재인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과정을 마친 후 갖는 졸업식을 위해서나, 혹은 그 후 나중에 추 가된 네 개의 짧은 과정으로 이루어진 속편 과정을 마쳤을 때, 지 목사는 강사로 초청을 받곤 하였다. 내 생각에 지 목사의 “도마 손가락” 이야기를 1976년 세 번째 베델성서연구 세미나 롤핑 목사가 강의하고 있다.

들은 한국의 기독교인들 숫자는 수만 명이 아니라 수십만 명에 이를 것이 다.

지 목사가 1974년부터 1998년 4월 그의 소천까지 한국 베델성서연구원 장으로 수고한 이래로, 그는 그 이야기를 할 기회를 꽤 많이 가질 수 있었 다. 그는 대단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 그 의 유머와 이야기 솜씨는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

1974년 1월 27일부터 2월 8일까지 한국에서 베델성서 세미나가 처음으 1982년 1월 베델성서연구 세미나에 참석한 다섯 명 의 로마 가톨릭 수녀들이 강의에 몰두하며 노트를 하고 있다.

로 열렸을 때, 베델성서연구 교재의 저자인 할레이 스위감(Harley Swiggum) 목사가 직접 강사로 와서 2주간 내내 가르쳤다. 그 강의는 동 시통역으로 한국말로 옮겨졌는데, 늘 최소한 두 사람의 통역이 있어야 했 다. 한국 베델성서연구 역사에 있어서 그 세미나를 위해서 누구보다도 통 역으로서 많은 수고를 한 사람은 김선회 목사였다.

1975년 두 번째 세미나에서 스위감 목사는 첫 주 동안 구약 부분만 가르 치고, 그 이후 강의는 말티 롤핑(Marty Rohlfing) 목사가 맡았다. 롤핑 목사는 그 후 1992년 8월까지 정규 베델성서 강사로서 18년 동안 강의 를 하였다.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위스콘신 주 메디슨 시에 있는 베델성 서 본부 주강사로, 그리고 호주, 독일 등 해외의 베델성서 세미나에서 강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장 지원상 목사와 베델성 서연구 저자 할레이 스위감 박사. 1993년 8월.

의하였다.


롤핑 목사는 1992년 8월 일주간의 속편 세미나에서 강의를 한 후 미국 고향으 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한 병에 걸리게 되었다. 롤핑 목사를 검진한 의사들은 롤핑 목사가 앞으로 2년 밖에는 살 수 없다고 판정을 하였고, 그들의 판정은 매우 정확해서 처음 진단을 받은 정확히 2년 뒤인 1994년 9월 18일에 소천하였다.

한국베델성서연구 주 강사 말티 롤핑 목사와 원 장 지원상 목사

주 강사를 잃은 한국 베델성서를 돕기 위해 스위감 목사 자신이 한국에 강사로 돌아 왔다. 그는 1993년 8월과 1994년 1월에 2주간의 세미나에서 모두 강의 하였다. 1993년 8월 세미나 때 스위감 박사는 지 목사에게 특별한 선물을 준비 해 전해 주었다. 그는 돌로 잘 조각한 “도마의 손가락”이었다. 스위감 목사는 그 작품을 한 조각가에게 부탁해 만들었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듯이 그 특별한 세 미나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 선물 이벤트는 대단한 히트였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가까운 미래에 나는 한 호 전체를 할애해서 한국에서 베델 성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배경과 실행 과정,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어떻 게 한국에 있는 전체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에 있는 한국 그리스도인들 1989년 지원상 목사와 사모

을 위해 큰 축복이 되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번 호에서는 베델성서 프로그램을 큰 성공으로 이끌고, 그로인해 널리 인정을 받게 된 지원상 목사의 리더십과 그의 뛰어난 유머 감각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친다.

나는 한국 베델성서 세미나 중 지 목사가 어떤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듣고는 기 가 막힌 방법으로 되받아 치면서 그 유머를 더욱 더 재미있게 만들곤 하던 많은 예들을 기억하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강의 중 스위감 박사가 한번은 일 본이나 다른 아시아 문화권에 특별히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한 재미있는 이야기 를 한 적이 있었다. 1994년 여름 타워호텔에서 열린 베델성서연 구 프로그램의 속편 세미나에서 인사하고 있는 지원상 목사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일본의 시골에 사는 한 노인이 낯선 큰 도시에 와서 도쿄에 있는 한 고급 호텔 로비에 서 있었다. 그는 그저 서서 사람들이 오고가 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 옷을 잘 차려입은 할머니 한분이 로비의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벽으로 다가갔는데 그곳에 갑자기 문이 열리자 상자 같은 것 이 나타났고, 그 할머니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시 기적과도 같이 나타난 상자같이 생긴 곳 안으로 들어갔다. 그 문은 다시 기적과도 같이 닫히고 문이 닫히고 할머니는 사라졌다.

1992년 1월 한국베델성서연구 세미나에서 마 지막으로 구약과 신약을 강의하고 있는 말티 롤핑 목사


놀라서 그 시골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그 벽을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다시 상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상자에서 대학생 나 이쯤의 젊은 여성이 나왔다. 그 할아버지는 더욱 더 놀라서 감탄을 했 다. “와우! 놀라운 상자네!” 그 상자가 조금 전에 들어간 할머니를 이렇 게 젊은 사람으로 바꿔 놓은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끝 내자 사람들은 그 재미난 이야기에 큰 소리로 웃었다. 한국베델성서연구 프로그램을 위해 수년 간 수고 한 팀원 다섯 명: 왼쪽부터 이경배 장로, 주대범 장로, 박종삼 박사, 김선회 박사, 강성훈 목사. 1988년 1월.

그 때 지 목사 올라가 스위감 목사가 말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사실이라 고 확인을 한 다음,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그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그 호텔 로비에 서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비에 또 다른 잘 차려 입은 할머니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문이 열리자 다시 나타난 그 상자 안으로 들어갔고, 다시 문은 닫혔다. 이번 에도 그 시골 할아버지는 눈을 돌리지 않고, 닫힌 문을 응시하고 있었 다. 그런데 이번에 그 문이 열리자 그 상자에서 귀엽고 옷을 잘 차려 입 은 유치원생 나이의 어린 아이가 걸어 나왔다. 이번에 그 할아버지는 더 욱 놀랐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쿠! 이번엔 그 할머니가 그

크리스천 아카데미 하우스의 8면으로 된 대 강 의실과 음향 시스템 및 동시 통역시설이 있는 2 층의 창문들

상자 안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구나!”

그러한 예를 하나 더 이야기해 보겠다. 1983년 11월에 나는 지 목사를 수행해서 루터교세계연맹(LWF)이 지원하는 아시아 지역 루터교 교회 지도자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나의 역할은 통역이었다. 그 회의는 수마트라 인도네시아 섬에서 열렸는데, 인도네시아는 많은 LWF 회원 교회를 가지고 있었고, 특별히 바탁(Batak) 종족 가운데 5백만 명 이상 의 교인이 그 교회들에 속해 있었다. 한국베델성서연구원장 지원상 목사, 리머 선교 사, 이경배 장로

회의 기간 중 일요일 아침, 회의에 참석한 나라들의 지도자들은 서로 나 뉘어서 바탁 교회 중 여러 지역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지 목사 는 우리가 머물러 있는 곳에서 지프 모양의 차를 타고 대략 2시간가량 간 후에 도착한 한 시골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바탁 그리스도인 들은 재미있는 예배 전통과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 예배에 최소한 3시간이 걸렸다. 각 교회마다 많은 다른 성가대들이 있었고 매 주일 예 배 때마다 모든 성가대들이 각기 많은 찬송들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리 고 매주일 예배 때마다 헌금을 하는 순서가 세 번이 있는데, 각 헌금 순 서마다 별도의 헌금 목적이 정해져 있었다.

강의 시간 중간 휴식 때 찬양을 인도하고 있는 주대범 장로


어찌되었든 지 목사는 설교자였고, 나는 통역자로서 그의 한국말을 영 어로 옮겼다. 그리고 또 다른 통역자가 있었는데, 그는 나의 영어를 다 시 바탁 언어로 통역을 하였다. 나무로 지어진 그 교회는 대단히 큰 교 회였다. 멀리 끝과 옆면을 따라 많은 발코니가 놓여 있었다. 강단은 상 당히 큰 편이였지만, 세 명이 한꺼번에 서 있자니까 붐비는 느낌이었 다.

1985년 8월 강의를 마친 후 한국베델성서연구원 장 지원상 목사가 롤핑 목사에게 특별한 제의복 을 선물하고 있다.

강단에서 우리 세 사람이 번갈아 말을 하는 동안 복도 중간에 갈색의 큰 개 한 마리가 누워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개는 한 눈에 보기에 도 평범한 길거리 개였고 별로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순종이라 고 등록된 그런 종류의 개는 아니었다. 나는 한국말을 사용해 그런 경 우 “쌍놈”이나 “시골때기”라고 분류하곤 했다. 분명 “양반” 모습의 개는 아니었다. 분명 그 개는 족보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예배 중에 본 개 를 “쌍놈”이나 “양반” 등의 범주로 분류하고 족보라는 말을 사용하며 나는 하나의 농담을 만든 것이다.

1993년 타워 호텔에서 열린 2주 세미나에서 스 위감 박사가 강의하고 있다.

한국 베델성서연구 세미나 때 내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그 개에 대해 무엇인가 더 발견한 것이 있었다고 말했다. 내가 지 목사 의 설교를 한국말에서 영어로 옮길 때마다 그 개의 귀가 쫑깃 올라가고 눈이 커지면서 분명히 나의 말을 기쁜 마음으로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하 고, 더욱이 아주 열심히 꼬리까지 흔들면서 행복해 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내 영어를 바탁교회 목사가 바탁어로 옮긴 후 다시 지 목사가 한국말로 설교를 하게 되면, 그 개의 반응이 금방 달라지면서 입을 크 한국베델서연구원 사무실의 한 벽이 첫 번째 세미나 사진부터 1998년 4월 지 목사 소천 이 전에 마지막 가진 1998년 1월 세미나까지의 단체 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

게 벌려 하품을 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지 목사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나는 말했다.

지 목사가 다시 마이크를 잡을 기회가 오자, 지 목사는 기가 막힌 방법 으로 응수를 하였다. “내가 말하는 동안 그 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리 머 목사가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내가 눈치챈 것은 그 교회 안 에 앉아서 설교를 듣고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는 것입니 다. 내가 말할 때 그들은 기쁘게 긍정적으로 반응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이 개의 반응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지요.”

내가 지 목사를 우습게 만들려고 했던 유머에 지 목사는 더 나를 우습 게 만드는 방식으로 응수했고, 사람들이 더 크게 웃었던 것은 물론이 서울 타워 호텔에서 그의 한국에서 의 마지막 강의가 된 베델성서 세미 나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할레이 스 위감 목사.

다.


이번 호는 지원상 목사가 한국 베델성서연구원 원장으로 사역하면서 발휘한 그의 탁월한 리더십, 특별히 그의 유머 감각에 대해 말한 큰 부록처럼 되어 버 렸다. 수년 간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그 프로그램을 도운 직원들 가운데 도 훌륭한 팀워크가 이루어졌었다. 내가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베델성서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교파를 초월한 전체 한국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큰 도움을 준 일에 대해 내가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는 큰 특권이었다.

1975년부터 1992년까지 한국베델성서 주 강사로 수고한 말티 롤핑 목사. 1992년 6 월.

수마트라에 있는 교회 건물 내부 사진. 여기에서 1983년 11월 지원상 총회장이 설교자로 초청을 받 아 설교를 하였다

1983년 11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 있는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알 수 없는 한 마리 길거리 개가 안으로 들어 왔다. 993년 8월 스위감 목사가 지 목사에게 깜짝 선물로 줄 “도마의 손가락”을 가지 고 있다.

지원상 총회장과 리머 선교사

22호를 기대해 주세요

글 이무열 변역 박일영 편집 최석천 놀랍고 감사한 표정의 지 목사가 베델성 서 저자 스위감 목사에게서 선물로 받은 “도마 손가락” 포장을 뜯어 보이며 즐거 운 모습으로 웃고 있다.

이경배 장로와 리머 선교사가 한국베델성서연구 세 미나 사진들이 담긴 앨범을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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