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획
다시 돌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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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며...'
$%년을 회 의 서 에 국 한 , '이무열 선교사
우리루터란에 연재되었던 이무열(Hilbert Werner Riemer) 선교사님의 '한국에서의 $%년을 회고하며'의 45회 연재 되었었고, 이후 선교사님께서 새로이 글을 작성하셨습니다. 번역은 박일영 교수님이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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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 선교협력국
제24호
한국에서의 "#년을 되돌아보며 (자서전적 회상) 힐버트 리머 박일영 교수 옮김
나의 자서전적 회상 24호에서도 나는 계속해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있었던 한국루터교선교부(KLM)의 활동들에 대해 집중하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 때의 멤버들은 1958년 1월에 한국에 온 바틀링, 도로우, 보스 목사와 그 해 9월에 도착한 지원용 박사, 1960년 11월에 도착한 짐 라우어 목사, 1961년 9월에 도착한 나, 그리 1961년 선교사 리머의 세인트 루이스 컨 콜디아 신학대학원 졸업 사진
고 1964년 2월에 도착한 존 하디 목사였다. 몇 명 안 되는 작은 그룹이었지만 우리는 어떻게 한국적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지 그 무거 운 과제에 대해 심사숙고를 거듭하였다. 앞서 쓴 나의 글들에서 언급한대로 한국에 도착한 직후 내게 주어진 첫 주요 임무는 연세대학교 한국어 학당에서 2년 동안 풀타임으로 언어를 익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언어 공부 외에도 여러 다른 일들로 인해 나는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예를 들면 다 음과 같은 일들이었다:
1963년 6월 14일, 연세대학교 한국어 학당에서 교사들과 함께 찍은 마지막 6 레벨 졸업반
◆ KLM 회의 참석 ◆ 서기로서의 회의록 작성 ◆ 월간지 새생명 잡지에 실을 글쓰기 ◆ 한남동에 있는 루터란 서비스 센터(현 국제루터교회)와 서울 북부 지역에 위치 했던 미육군 사단 교회를 비롯해 전국의 미군 부대 채플에서 영어로 예배를 인도 하거나 설교하기 ◆ 미육군 예비군 군목으로서 매주 훈련에 참여하기 ◆ 한국 교회를 지원하는 미국에 있는 교회들과 연락하기 ◆ 손님들이나 방문객 접대하기
KLM 멤버였던 지원상 씨가 1965년 3 월에 목사 안수를 받기 전 사무실에서 일하던 모습
◆ 여러 단계로 발전 과정에 있었던 TV 선교 사업 추진
이런 일들이 한국어 어학당에 "풀타임"으로 다니는 동안인데도 내가 해야 할 일들 이었다. 나는 1961년부터 수첩에 매일의 활동들을 기록해 두었는데 그 수첩을 다시 볼 때 내가 당시 얼마나 많고 다양한 일들에 종사하였는지 스스로 놀랍게 생각한다. 앞서 이 회고록 제5호에서 나는 이미 그 때 초기 한국루터교선교부의 주요 활동들에 왼쪽의 바틀링 선교사와 오른쪽의 지원용 박사 사이에 미 육군 군목 헤르만 호이어 대 령이 서 있다. 그는 KLM이 사용하기 위해 주문했던 특별한 영사기를 미국에서 한국으 로 가져다 주었다; 1963년 1월.
대해 소개하며, KLM이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매스 미디어를 통한 선교를 위해 노력 하였던 것을 언급하였었다. 이 두 매체를 통한 선교를 우리는 한국루터란 아워라는 동 일한 이름으로 후원하며, 그 이름으로 청취자와 시청자에게 접근하였다.
이 프로그램들은 모두 30분짜리 정규 방송 프로그램으로서, 가정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였는데 마르틴이라는 목사가 고정 배역으로 등장하였다. 이 드라마 는 일류 여배우, 남배우들이 연기를 맡고 헐리우드식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일류 프로그램이었다. 미주리 시노드 미국 루터교회가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생소했던 한국 루터란아워 책임자 지원용 박사가 미국 미주리 시노드 TV 선교부에서 수입한 "이것 이 인생이다" 프로그램 극본의 번역을 검토 하고 있다; 1962년 12월
매스 커뮤니케이션 선교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효과적으로 한 교파로 인정을 받 고 있었다. 처음부터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각 매 방송마다 특별하게 설정된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밝혔다.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마 르틴 목사의 말을 통해 복음 증언을 표현하였다. 물론 다른 배역들의 입을 통해 서도 적절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미국에서 "이것이 생명이다" 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30분짜리 TV 드라마 극본 들을 수입해 그것들을 가급적 한국적 상황에 적합하고 문화적으로 어색하지 않
KLM TV 선교 프로그램 방송을 위해 한국말 로 녹음하는 남녀 성우들이 잠시 휴식을 취 하고 있다; 1965년.
은 이야기로 각색하였다. 그 드라마들은 모두 16미리 필름으로 만들어 져서 그 필름을 보려면 16미리 영화 상영기가 필요하였다. 소리는 광학 사운드 트랙으로 녹음되어 있었다. 물론 영어로 녹음되어 있었다. 그 필름을 한국에서 이용하려면 한국어 사운드 트랙이 추가되어야 했다. 그 한국어는 KLM이 미국에서 주문한 16미리 필름의 특별한 매그네틱 줄에 추가되었다. "이것이 인생이다" 방영분 중 특별한 에피소드를 선택하면 그 극본을 함께 받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그 한국어 대사를 한국의 전문 성우들 목소리로 녹 음을 한 후 한국어 사운드 트랙으로 삽입하였다. 한국말이 배우의 입술의 움직임
KLM TV 선교부가 지원하는 TV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동안 조종실에서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 1965년
과 맞도록 립싱크를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였다. 이것은 보통 생각하는 것보 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숙련된 전문 성우들이 30분짜리 내용을 더빙하는데 최 소한 8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작업을 해야 했다. 또한 이 녹음 작업은 밤 12시에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밤 시간이 버스, 전차, 자동차 등 교통으로 인한 소음의 간 섭을 최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KLM은 미국의 Bell &Howell 회사가 만든 특별한 장치가 있는 16미리 필 름 영사기를 주문하였는데, 이 영사기는 16미리 필름에 별개로 적용된 1/4 인치 의 마그네틱 줄에 두 번째 사운드 트랙을 녹음하고 또 재생할 수 있는 특별한 기
백의민족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흰 옷을 입고 서 있는 한 할아버지; 1965년.
능을 가지고 있었다. 영사기에는 있는 스위치를 간단히 조작하는 것만으로 원래 광학 영어 사운드 트랙을 듣거나 또한 마그네틱 줄에 녹음된 한국어 대사를 듣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한 특별한 영사기가 한국에 오게 된 과정에는 재미 있는 뒷 이야기가 있 다. 우리가 마그네틱 줄에 별도의 녹음을 추가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춘 영사기를 주문한 후에, 그 영사기는 미국에 있는 군목 헤르만 호이어(Hermann Heuer) 대령 집으로 배달이 되었다. 호이어 군목은 용산에 있는 미 8군에서 군종감으로 13개월 간으로 예정되어 있는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
지게에 짚을 싣고 운반하는 한 한국인 농부; 1964년 여름.
안 공식적인 업무로 다른 상관들을 만나기 위해 여러 번 워싱턴 D.C. 에 있는 펜 타곤으로 돌아가야 했었다. 그러한 왕복 여행 중 호이어 군목이 KLM이 주문한 특별한 영사기를 한국으로 가져온 것이다. 그로서는 대단히 관대한 친절을
베풀어 준 것이었고, KLM 은 그 일에 대해 그에게 대단히 고마워했다. 그리고 그 영 사기는 우리의 사업에 특별한 도움을 주었다. 그 영사기를 통해 한국에 있는 많은 사 람들이 드라마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신의 언어로 들을 수 있었다. 호이어 군목과 관련하여, 그가 KLM과 한국 사람들을 위해 좋은 친구였고 또 지 33편으로 된 30분짜리 토착적인 TV 극 "향 나무집 식구들"의 한 장면. 이 극은 동양방 송을 통해 방영되었다; 1965년.
원자가 되었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재미 있는 이야기가 있다. 나의 아내와 내가 은퇴 하고 2004년 3월에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우리는 많은 교회들을 방문하던 끝에 공식 으로 성 베드로 루터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교회의 교인이자 오랫 동안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하였던 유니스 캐닝(Eunice Kanning)이 바로 1963년과 1964년 사이에 한국에서 근무하였던 호이어 군목의 조카라는 사실을 우연한 대화 끝 에 알게 되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우리는 "와우 정말 좁은 세상이다"고 외쳤다. 내가 수첩에 표시해 둔 것을 보면 우리가 실제로 "이것이 인생이다" 필름을 첫번 째로 한국말로 더빙 준비를 한 것은 1962년 가을이었고, 실제 더빙을 한 것은 1962 년 12월이었다. 그 녹음 작업은 옛 세브란스 병원 빌딩 건너 편 서울역 근처에 있는 임시로 지은 모양의 스튜디오에서 이루어 졌다. 이 일이 성사되기 이전에 KLM 과 미 국에 있는 "이것이 인생이다" 프로그램 담당자들과의 수 없이 많은 연락을 주고 받아 야 했다. 지원용 박사와 내가 실제로 KLM을 대표하여 TV 프로그램 위원으로 봉사하였
"향나무집 식구들"의 또 다른 장면. 주태 익 씨가 극본을 썼다; 1965년.
다. 지박사는 주로 극본을 검토하고 번역하는 일에 종사한 반면 나는 해외 협력을 위 한 서신 교환 책임을 맡았다. 나는 1962년과 1965년 사이에 KLM이 후원하는 TV 선교와 관련하여 놀랄만큼 많은 메모들과 회의들을 내 수첩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연세대 한국어학 당에서 풀타임으로 공부를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1963년 6월 14일 2년 과정을 졸업 하기 이전부터 그러한 일에 관여해야만 했었다. 곁가지 이야기를 하나 덧붙이자면 2 년 한국어학당 과정을 마치고 받은 졸업장이 한국어와 영어 두 언어로 쓰여져 있었다 는 사실을 나는 늘 재미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인생이다" 프로그램은 정부가 운영하는 한국방송(KBS-TV)을 통해 방영되 었다. 영화 배우의 입술 움직임에 맞추는 립싱크를 하여 한국말로 더빙하는 데 드는 비용 이외에 방송 시간에 따르는 비용, 그리고 물론 극본을 번역하는데도 비용이 들었 다. 그 당시 그러한 비용들은 상당히 싼 편이었다. 한국에서 막 시작된 TV시장에 질 좋은 프로그램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 모든 TV는 흑백 영상이었고, 1980 년대 초에 들어서야 칼라 영상이 등장했다. 당시에는 수준 높은 TV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KLM이 만든 "이것이 인 생이다" 방송은 원래 예상된 것보다 훨씬 많이 재방이 되었다. 1963년 대부분과 1964년에 들어서도 우리는 30분짜리 방송 "이것이 인생이다"를 많이 수입해 1/4인 치 마그네틱 줄에 한국말 대사를 추가 녹음, KBS 방송국을 통해 전국에 방영하였다. 매 방송 끝에 내보내는 광고(CM) 메시지는 근본적으로 한국루터란아워 라디오
KLM이 크리스마스 특집 프로그램으로 만 들어 국영 KBS-TV를 통해 방영한 극의 한 장면.
방송 때 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통신강좌(CCC) 교재를 소개하는 일은 미디어 선교의 후속 프로 그램으로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나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KLM의 TV 선교와 관련해 가진 많은 회의와 업무, 그리 고 특별히 "이것이 인생이다" 필름에 한국말을 녹음하는 스튜디오를 위해 여러 장소들을 옮겨가며 해야 했던 일들로 바쁜 일정을 보내야 했다. 서울역 건너 편에 있는 스튜디오를 한동안 사용했던 것 이외에도 한국말 사운드 트랙을 녹음하기 위해 당시 남산 꼭대기 근 처에 있던 KBS 라디오 방송국 스튜디오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라디오 방송국은 몇년 후에 여의도로 이전을 하였다. KLM TV 선교 프로그램 촬영 중의 조종실 모습; 1965년.
그러나 그 30분짜리 "이것이 인생이다" TV 프로그램은 국영 방송이었던 KBS-TV를 통해서 방영되는 것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그 자료는 예관동에 있었던 임마누엘 루터교회와 1963년 9월에 지원용 박사에 의해 시작된 왕십리 루터교회의 여러 행사를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또한 그 자료들은 루터란 서비스센터나 미8군 수양관(Retreat Center)에서 미군 루터란들을 가졌던 수양회 같은 모임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당시 그 수양관은 지금 하이야트 호텔이 있는 근처 남산에 위치해 있었다. 그 시기에 KLM이 수행하였던 또 다른 하나의 참으로 중요하였던 프로젝트는 "마르틴 루터"라는 제목의 영화를 수입해 상영한 것이었다. 그 영화는 1950년대 중반에 미국 극 장에서 상업 목적으로 상영되었던 흑백 영화였다. 그 영화가 처음 상영되었을 때에 예를 들면 시카고나 뉴욕 같은 미국 내 큰 도시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기 위해 극
미국에서 수입한 30분짜리 "이것이 인생이 다" 첫 번째 TV 드라마를 위해 립싱크 작업 을 하고 있는 한국 성우들; 1962년 12월
장 앞에 긴 줄을 서곤 하였다. 그것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그랜드 스케일의 역사극으로서 1시간 45분짜리의 훌륭한 영화였다. 세계 주연급의 배우들이 출연을 하였다. 그 영화는 마르틴 루터가 수도원에 들 어가기로 결심한 1505년부터 1530년 6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루터교 회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제출하기 까지 루터의 생애를 다룬 영화였다. 그렇게 명백히 종교적인 영화에 사람들이 특별한 흥미와 반응을 보인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 영화는 아직도 마르틴 루터를 그린 영화로서 신뢰도와 솔직함에 있어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 영화에서 묘사된 많은 장면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특별 히 내게 인상이 깊은 것은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보인 루터의 당당한 모습인데, 1521년 4월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한 그 극적인 장면의 루터는 아일랜드 출신 배우 니 알 맥긴즈(Niall MacGinnes)가 연기하였다. 그 장면이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였고, 피 날레는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를 따르는 사람들이 루터가 지은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 요"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한 시골 길에 지게를 내려놓고 있는 한 노인; 1964년
그 시절의 내 수첩을 훑어보면서 나는 그 영화를 상영해 달라는 요청이 얼마나 많았는 지 새삼 놀랐다. 그 영화를 상영한 곳들 중엔 구세군 훈련 센터, 육군사관학교도 포함되 어 있었고,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아 KLM이 종로에 있는 태화관에서 상영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다른 많은 곳에서도 그 영화를 상영하였다. 마그네틱 필름에 한국말로 녹음한 사 운드 트랙을 들려 줄 수 있는 두 개의 스위치가 달린 영사기는 매우 편리하였다. 영화 마르틴 루터 상영 시간이 거의 두 시간에 가까웠기 때문에 필름을 담는 두 개 의 커다란 릴이 필요로 하였다. 하나는 상영되는 필름을 담고, 다른 하나는 영사기를 지 나간 필름을 담는데 필요한 것이었다. 가끔 위험할 수 있었던 것은 사용된 필름을 담는
다섯 명이 공동으로 삽질을 하여 땅을 파 는 모습; 1962년 5월
릴이 넘쳐 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필름이 영사기를 통과하는 것을 잘 지켜보아야 했다. 특별히 한국말로 배우들 입을 맞추어 녹음한 마그네틱 줄이 자리를 벗어나 소리가 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앞서 이 회상록 제4호에서 나는 그 초기 시절에 KLM이 하였던 TV선교에 대해, 그 사업이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원래 수입된 자료를 그대로 사용하기 보다는 상당히 토착적으로 재구성 하였던 것을 이야기했었다. 그러한 노력은 매우 선구자적인 것이었다. 특별히 "향나무집 식구들" 시 리즈의 33개의 에피소드를 매 주 방영한 일이라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TV 선교를 가 능한 오랫동안, 그리고 수준 높은 질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일들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한 청년이 송아지들을 마을 시장으로 몰고 가고 있다; 1964년 여름
결국 그러한 토착적인 TV선교 프로그램을 장기간 유지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게 되었다. 그 러나 무엇보다 그 사업은 루터교회가 자료, 경험, 전문성 등에 있어서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에 가능했었던 특별한 종류의 복음 선포 방법이었다. 그것은 또한 단지 교파적 경쟁을 위해서가 아 니라 한국적 상황에서 루터란의 신학과 영적 은사들을 전체 교회를 위해 사용할 것을 선교 방향으로 삼았던 KLM의 목적과 자기 이해에 부합되는 사업이었다. 그러한 동기는 비기독교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93%에 해당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한국 전체를 향해 복음을 선포하려는 우리의 순수하고 분 명한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1964년과 1965년에 상당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준비를 요구했던 또 다른 하나의 활동은 당시 KLM 멤버였던 지원상 씨의 신학 교육을 위해 두 과목을 가르치는 일이
한 시골 마을의 우시장 모습; 1964 년 여름.
었다. 지원용 박사, 바틀링, 도로우 목사도 지원상 씨가 목사 안수 자격을 갖추는데 필요한 신학 교 육에 참여하여 과목을 가르쳤다. 그 때의 교육은 훌륭하고도 가장 이상적인, 즉 학생과 교수가 일대 일로 만나 공부하는 특별한 것이었다. 나는 1964년 1월에 지원상 씨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일주일에 세 번, 한 번에 두 시간씩 공부하는 스케줄이었다. 내가 회상하기로는 내가 그 때 가르쳤던 과목 중 하나가 실천신학 분야의 "복음과 세 계 이슈"였다. 또 다른 과목은 나중에 오랫동안 계속해서 가르치게 된 성서학 분야의 "요한복음"이 었다. 그 교육은 1964년 7월 기말고사를 끝으로 마감되었다. 지원상 씨를 대상으로 한 그 루터교 신학교육 프로그램의 정점은 그를 한국 최초의 루터교 목사로 안수한 일이었다. 지원상 목사 안수는
시골 길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한 국 여인들; 1964년 여름.
한국에서는 첫번째라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인데, 그의 형인 지원용 박사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1957년 미국에서 안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한국에 온 그 초기시절부터 나는 선교사로서 KLM을 위해 여러 형태로 봉사하며 바쁘게 지 냈다. 회상해 볼 때 나는 그 초기 시절에 그리스도와 교회를 섬기는 선교 사업에 독특하고도 의미 있 는 기회들을 갖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서울 거리 모습. 교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62년 10월.
서울 북쪽의 한 산에서 조각해 놓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의 돌 석상: 왼쪽의 작 은 인물은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나타 낸다; 1964년 가을.
25호를 기대해 주세요
설악산; 1964년 여름.
글 이무열 변역 박일영 편집 최석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