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획
다시 돌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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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며...'
$%년을 회 의 서 에 국 한 , '이무열 선교사
우리루터란에 연재되었던 이무열(Hilbert Werner Riemer) 선교사님의 '한국에서의 $%년을 회고하며'의 45회 연재 되었었고, 이후 선교사님께서 새로이 글을 작성하셨습니다. 번역은 박일영 교수님이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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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 교회협력국
제20호
한국에서의 "#년을 되돌아보며 (자서전적 회상) 힐버트 리머 박일영 교수 옮김
나의 자서전적 회상 지난 19호에서 나는 주로 지원상 목사에 대해, 특별히 1971년 공식적으로 한국 루터교회(LCK)가 조직되기까지 한국 루터교 선교회 와 관련된 그의 선교 사역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 하였다. 이번 20호에서도 지원 상 총회장에 대해서, 그의 놀라운 삶의 이야기, 그리고 뛰어난 교회 지도자로서 의 지 목사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할 것이다. 지원상 목사는 성서공회 회의 때 기도하던 중 갑자기 쓰러진 후 며칠 뒤인 1998년 4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누구나에게나 죽음이란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것이지만, 어떤 사람의 경우 죽음을 더욱 갑작스러운 순간에 맞기도 한다. 지 목사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그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장이자 루터신학교 이사 장인 지원상 목사가 신갈 캠퍼스의 메이나드 도 로우 학장 사무실에 앉아 있다. 1984년 3월.
때 그는 미국 나이로 70세 밖에 되지 않았고, 한국 루터교회뿐 아니라 더욱 넓 은 범위의 많은 교회 사업을 위한 지도자로서 대단히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 다. 그의 죽음의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지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서 별 하나가 떨어졌다 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말은 지 목사가 한국 루터교회뿐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를 위해 많은 면에서 얼마나 큰 존경을 받아 왔고, 그리고 얼마나 많은 공헌 을 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 목사의 장례식은 서울에 있는 중앙루터교회에서 있었다. 한국 루터교회 본부 위층에 있는 중앙교회에 이르는 계단과 긴 통로는 많은 사람들이 보내 온 크고 많은 화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지 목사는 분명히 그의 생애 동안 그가 관 련했던 많은 일들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번 호에서 지 목사에 대해서, 그가 보여 준 훌륭한 리더십과 그 결과 그가 남 긴 뛰어난 유산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원상 목사 장례식 때 비치되었던 추모 화환 중 하나. 리본에는 영어로 “위스콘신 메디슨에 있는 베델성서연구원 직원들로부터 진심으로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1998년 4월.
지원상 목사의 리더십과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한 특별한 증언이 루터대학교가 고 지원상 목사 추모기념 특집으로 발행한 『신학과 신앙』 1999년 제10호에 실
려 있다. 그 책에는 단지 여러 교파의 교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지 목사를 알고 있었던 전 세계의 많은 국제적인 지도자들이 기고한 글들이 실려 있다. 재선을 거듭하며 22년 동안 한국 루터교회 총회장으로 봉사했던 지 목 사는 1993년 10월 에 열린 기독교 한국루터회 총회에서 은퇴를 선언하기 까지 그의 지도력을 늘 다시금 분명하게 인정받았다. 루터교회의 총회장직 고 지원상 목사 묘에서 찍은 사진. 왼쪽으로 부터 리머 선교사, 한영복 목사, 박성완 목사, 지원용 박사, 이경배 장로, 김해철 목사, 엄현 섭 목사, 강현길 목사. 2005년 가을.
은 큰 책임이었다. 단지 영적 지도와 사역뿐만 아니라 행정적 책임과 한국 루터교회가 벌이고 있는 모든 다른 사업들에 대한 감독 역할도 해야 했다. 원래 기독교 한국루터회 총회 규정에는 총회장직 연임 횟수에 아무런 제 한이 없었다. 수년 후 법이 바뀌어서 총회장직은 4년 임기를 두 번만 연임하 도록 되었다. 연임 횟수 제한이 없을 경우 일반적으로 총회장은 국제적으로 더 일관성 있게 정책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디아포라이다. 즉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문제이다. 어찌되었든 지원상 목사가 계속해서 재선 이 되었던 것은 그가 지도자로서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을 확증하는 것이었다.
폴 바틀링 목사가 1997년 한국에 돌아와 중앙루터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지원상 목사 와 함께 찍은 사진.
지 총회장은 한국 루터교회 목사들을 양육하는 신학교육 프로그램을 정 착시키는 일에 깊이 관여하였다. 처음 한국 루터교선교회(KLM)는 1966년 3월 지원용 박사를 제1대 원장으로 해서 루터교신학원(Lutheran Theological Academy: LTA) 체제로 네 명의 학생들을 받아 교육을 시작 하였다. 지 목사는 1965년 3월 안수를 받은 후 신학교육을 위한 이 KLM 계획에 참여하였다. 지원용 박사는 특별한 과제를 맡아 1967년 대부분을 미국과 유럽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1968년 7월 루터교 세계연맹 아시아 총무직을 맡아 스위스 제네바로 떠났다. 이때부터 지 목사는 새로 루터교 신학원 원장이 된
루터교센터 총회장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지원상 총회장. 1982년.
메이나드 도로우 선교사와 함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신학교육 사업을 추진 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지 목사는 기독교 한국루터교회 신학교육 프로그램을 발전시 키는 데 큰 몫을 담당하게 된다. 루터교 신학원은 처음 제동빌딩 4층에서 시 작하였다가 중앙루터교회가 처음 자리 잡았던 곳 옆에 위치했던 3층짜리 빨 간 벽돌 건물의 3층으로 옮겼다. 1975년 루터교 센터 빌딩 건축이 완료된 후 루터교 신학원은 후암동 루터교 센터 2층으로 옮겨 그곳에 사무실, 도서 관, 교실 등을 마련하였다. 루터교신학원(LTA)은 루터신학교(Luther
지원상 총회장과 선교사 리머가 루터신학원 2 층 교실에서 미국 미주리시노드 루터교회 총 회장인 J.A.O 프로이스가 회의중 발언하는 것을 듣고 있다. 1972년.
Seminary)로 모양을 바꾸고 야간에 교육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초기 의 그러한 교육 프로그램들은 한국 정부 교육부의 인가를 받지 못한 것이었 다.
1980년대 초기의 여러 위기들을 겪은 후에 루터신학교는 지금 용인시 신 갈에 있는 현재의 캠퍼스 부지를 구입하고 이전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남쪽으 로 40km 떨어진 곳이었다. 루터신학교(Luther Seminary)가 처음 교명이었 는데 점차 단계를 거쳐 1997년 12월 5일 정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아 루터 신학대학교(Luther Theological University: LTU)로 개명하였다. 그 교명 은 다시 루터대학교(Luther University)로 바뀌었지만 이니셜은 그대로 LTU를 사용하였다. 루터대학교 안에 신학교(Seminary)도 계속 운영되었다. 왼쪽으로부터: 미주리시노드 선교국장 윌리암 콘 박사, 지원상 총회장, 미주리시노드 선교국 지역 고문 폴 스트레게 목사. 1972년 5월 기 독교 한국루터회 제2회 총회 개최장소에서.
위에서 신학교 발전에 대해 대단히 간단하게 요약을 하였지만, 그러나 그 과정은 매우 길고 복잡한 것이었다. 그런 발전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사 람이 지원상 총회장이었다. 여러 체제의 조직과 구조가 이어져 왔지만, 지 목 사는 늘 그 학교들의 이사장으로 수고를 하였고, 세상 떠나기까지 그 이사장 직을 수행하였다. 교육부로부터 학력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을 충족해야만 했다. 적절한 학위를 가진 교수진, 자격을 갖춘 이사회를 둔 학교 운영 체제, 교실 등 필요한 공간의 건물들, 행정 직원들과 교수들을 위한 사무실, 도서관과 충 분한 양의 도서 등 이런 조건의 목록은 끝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건물들 을 수용할 수 있는 학교 부지를 해야 필요한 공간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지 목사 60세 환갑 잔치 때 지원상 목사와 사 모님 박순희. 1987년 10월.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원상 목사의 리더십과 그의 적극적이 고도 주도적인 참여가 없었다면 학력인가를 갖춘 루터대학교는 결코 존재하 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협상에 능했고 뛰어난 설득력을 갖고 있 었다. 그 시기는 지 목사의 그러한 은사들과 역량들을 크게 시험하는 시기였다. 왜냐하면 한국 루터교 목회자들을 양육해야 하는 필요성과 비전을 실행에 옮 기기 위해서는 매우 큰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계획을 세우고
987년 10월 기독교 한국루터회 총회 제17차 총회 때 일본에 있는 네 루터교단 중 세 교단 총회장이 지원상 총회장에게 그림 선물을 전 하고 있다.
필요한 경비를 계산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루터교 목회자 양육을 위한 신학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위해 필요한 직원과 행정 체제를 갖추어야 했 고, 또 그들이 현장에 나가 새로운 교회들을 개척하게 될 때 그들을 지원하는 정책도 세워야 했다. 지역 교회를 개척하려면 부지를 구입해야 하고 목회자가 살 집도 마련해 주어야 하고, 최소한의 생활비도 보조해 주어야 하는데, 그런 지원을 위해서 는 적지 않은 기금이 필요하였다. 임대 형식으로 시작할 수도 있었고, 또 부지 를 구입하고 그곳에 예배 및 교육 공간과 목회자 가족이 지낼 사택을 지어 새 로운 교회를 시작할 수도 있었다.
1989년 10월 도봉루터교회에서 열린 제19 차 총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지원상 총회장.
그것은 무리하게 여길 수 있을 정도의 큰 도전이었다. 나는 지 목사가 그 문제를 위해 수 년 동안 협상을 하는 모임에 도로우 목사나 내가 통역자로 서 함께 일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대부분 그런 회합들은 미주리시노드 루터교회의 선교국 임원들, 예를 들어 지역 총무나 실행위원들과의 협상으 로 진행되었지만 때로는 미주리시노드 루터교회의 고위 책임자들, 어떤 때 는 미주리시노드 총회장들과 직접 협상할 때도 있었다. 나는 지 총회장이 리머 선교사와 지원상 총회장. 1987년.
그러한 논의나 협상 자리에서 늘 주도적이고 적극적이었던 모습을 기억한 다. 단 한 번도 그런 회합을 부정적인 모습으로 끝낸 것을 보지 못했다. 지 목사와 함께 수행한 선교 사역들을 회고함에 있어서 한국루터교선교 부(KLM) 시절 때 이미 그가 매스 커뮤니케이션 선교 등과 같은 사역에서 우리와 맺었던 관계를 간과할 수가 없다. 앞으로 적당한 기회에 나는 결국 내가 1967년부터 1998년까지 31년 간 책임을 맡게 된 루터란아워 라디오 선교에 대해 더 이야기할 것이다. 그 러나 지금은 단지 지 목사가 나중에 목사가 김동진 씨, 그리고 이경배 장로 를 비롯해 많은 사무직원들과 함께 일하며 그 사업을 큰 성공으로 이끈 사
1991년 10월 신갈 루터신학교 캠퍼스에서 열린 21차 정기총회에서 사회를 보는 지원상 총회장.
람이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다. 나는 예산을 관리하고 국제루터란 평신도연맹과 미국의 루터란아워 본 부와 연락을 담당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좋은 한국인 동료들이 있었기에 그 매스 커뮤니케이션 선교 사업이 그렇게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계속될 수 있었다. 국제루터란 평신도연맹은 처음 지원용 박사가 한국 루터 란아워의 첫 창설자 및 책임자가 되었던 1958년부터 재정 지원을 해 주었 는데, 그 지원은 1992년까지 계속되었다.
1983년 10월 방배동교회 정기총회에서 사회 를 보는 지원상 총회장.
그러나 그 선교가 큰 성공을 거두고 한국 루터교선교부(KLM)와 기독교 한국루터회(LCK) 산하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선교 사역에 있어서 모범적인 사업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오는 데는 지 목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더 놀라운 일은 그러한 일들을 수행하는 가운데도 지 목사는 1967년부터 1979년까지 삼위일체교회(중앙루터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한국 루터란아워의 텔레비전 선교는 1962년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프 로그램으로 시작되었다. 그 프로그램은 미국에서 수입한 30분짜리 16mm 필름을 한국어로 더빙한 것으로서 당시 운영되었던 몇 방송국을 통해 방송
1993년 10월 총회장직을 은퇴하는 지원상 목사가 후임 총회장 김해철 목사에게 의사봉 을 전달하고 있다. 왼 쪽에 새로 선출된 서기 김광웅 목사와 오른 쪽에 새로운 부총회장 허 송 목사가 서 있다.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1967년경에 이르러 그러한 정규적인 프로그램을 유 지하기에는 재정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우리는 몇 계절 특집을 만들어서 방 송하였다. 그런 특집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극작가 대회를 주최하고, 제
출받은 작품들 가운데서 방송할 만한 것으로 판단되는 가장 좋은 작품을 선 정해 예를 들어 성탄절이나 부활절 특집을 만들어 방송하였다. 선정된 작가 에게는 후한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다. 지 총회장은 항상 극본을 검토하고 선 정하는 위원회의 주요 멤버로 역할을 하였다.
1997년 후암동에 있는 삼위일체/중앙루터 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네 사람이 함께 사진 을 찍었다. 왼쪽으로부터 한영복 목사 (1994-2009), 지원상 목사(1967-1979), 폴 바틀링 선교사(1967년1월부터 6월까 지), 김해철 목사(1979-1994).
지 총회장은 또한 자신이 직접 “인생의 갈림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서 한국 루터란아워에서 10분간의 음악과 메시지 형식으로 매주 방송을 하 기도 하였다. 이것은 전국적인 상업방송인 문화방송(MBC)을 통해 방송되었 다. 후에 지 총회장은 종교 방송국인 극동방송(FEBC) 스튜디오에서 그러한 프로그램들을 직접 녹음해 방송하기도 하였다. 그 “인생의 갈림길” 프로그램의 원고는 나중에 책으로 엮어 기독교 한국 루터회가 운영하는 컨콜디아사에서 출판하였다. 그것은 매스 커뮤니케이션 을 협력적으로 잘 이용한 좋은 경우였다. 지 총회장은 1972년부터 1993년 까지 최소한 10권 이상의 책을 써서 출판하였다.
왼쪽으로부터 일본 베델성서연구원 원장 오시바 목사, 베델성서연구 프로그램 저자 할레이 스위감 목사, 한국 베델성서연구원 장 지원상 목사가 1997년 11월에 나고야 에서 열린 일본 베델성서 30주년 특별행 사에 참석하였다.
한편 기독교 통신강좌(CCC) 부서 역시 보조를 맞추어 함께 잘 진행되었 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방송 마지막에 청취자나 시청자 중 관심 있 는 사람에게는 무료로 특별한 자료를 우송하겠다고 광고하였다. 거기에 응답 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는 자료를 요청하 였다. 그러한 모든 활동과 사역에 지 총회장은 밀접하게 관여하였다. 그는 전체 를 총괄하는 행정적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늘 바쁘게 일했고 또 필요할 때는 적당히 다른 사람들에게 임무를 부여해 주는데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1985년 9월“인생의 갈림길” 1000회 방 송기념 축하회 때 가운데 함께 앉아 있는 지원상 총회장과 한국 루터란아워 책임자 인 리머 선교사.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은 세 방송국에서 온 대표들이다.
또한 지 총회장이 비중 있는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분야 중 하나가 대한성서공회(KBS)였다. 실제로 지 총회장은 1965년부터 그가 1998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한성서공회의 이사로 봉사하였고, 그 기간 중에 여러 번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나는 수 년 간 대한성서공회 총무를 지냈던 두 사람들과의 대화중에 그들이 지 목사가 대한성서공회 이사로서 얼마나 소 중한 사람이었는 내게 말해 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또 앞서 언급한 사람들은 영어로 방송되는 루터란아워 방송 설교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오스왈드 호프만 박사가 끼친 역할과 공헌에 대해서도 감사했던 것을 기억한다. 호프만 박사의 루터란아워 활동은 한국 루터란아워
1985년 9월 방송 1000회를 기록한 날 에 한국 루터란아워 책임자 리머 목사가 극본 작가인 지원상 총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를 지원하였던 미주리시노드의 국제 루터란 평신도연맹의 지원으로 진행되 는 것이었다. 호프만 박사는 연합성서협회(United Bible Societies) 회
장으로 수년간 수고하였었다. 그 협회는 전 세계 각 국가 성서공회 대표들 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성서공회 대표들이 투표를 통해 회장을 선 출하고 회장은 계획된 회의들의 의장 역할을 하였다. 호프만 박사에게 그 회장직은 큰 명예였고, 특히 루터교회에 큰 기여가 되었다. 호프만 박사와 지 총회장은 상당히 친한 관계였다. 두 사람 모두 뛰어 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둘이 만날 때마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농담 지원상 총회장과 영어 루터란아워 설교자이자 이전 연 합성서공회 회장이었던 오스왈드 호프만 박사가 후암 동 루터교센터 총회장실에서 농담을 하며 웃고 있다. 1978년 12월.
을 주고받았다. 호프만 박사는 꽤 자주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특별히 추 수감사절과 성탄절 기간에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을 방문하였는데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는 한국, 일본, 태국, 베트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한 해외 방문 일정 중 호프만 박사는 한국 루터교회가 루터교센터 빌딩을 헌당할 때 마침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때가 1975년 12월 14일이었고, 그 헌당예배에서 호프만 박사는 설교를 맡아 주었다. 대한성서공회 사업은 특히 한국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아직도 대한성서공회에서 성경을 반포하는 규모가 미국성서공회나 영국성서공회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2위에 해당하 는 것이다. 그 대한성서공회를 위해 지 목사가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것은 그에게 특별하고도 의미 있는 명예였다. 지원상 목사에 대해 이야기할 거리는 훨씬 많이 있다. 때문에 나는 다
지원상 총회장이 대한성서공회 창립 100주년 축하회에서 그의 많은 공헌 에 대해 찬하를 받았다. 1995년 11월.
음 21호에서도 계속해서 지 목사의 특별한 삶과 그가 남겨준 유산에 대해 다룰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복음 사역을 위해 지 목사를 통해 큰 일들을 이루셨다.
21호를 기대해 주세요
지원상 총회장이 기독교방송(CBS)을 통해 방송된 다큐멘터리 드라마 시리즈 “신사도행전” 1200회 축하모임에서 인 사 말씀을 하고 있다. 1990년 1월..
글 이무열 변역 박일영 편집 최석천
왼쪽으로부터 도로우 선교사, 일본에서 온 이시다 박사, 지원상 목사, 리머 선교 사. 1997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