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획
다시 돌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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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며...'
$%년을 회 의 서 에 국 한 , '이무열 선교사
우리루터란에 연재되었던 이무열(Hilbert Werner Riemer) 선교사님의 '한국에서의 $%년을 회고하며'의 45회 연재 되었었고, 이후 선교사님께서 새로이 글을 작성하셨습니다. 번역은 박일영 교수님이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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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 교회협력국
제22호
한국에서의 "#년을 되돌아보며 (자서전적 회상) 힐버트 리머 박일영 교수 옮김
한국 루터교회를 위해 선교사로 봉사한 40년의 세월을 자서전적 형식으로 회상하 는 나의 글 22호에서도 나는 지원상 목사의 삶과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초점을 맞 추고자 한다. 이전 19호에서 나는 한국에서의 루터교회 선교 초기, 특별히 1960년 처음 10년 동안 지 목사가 처음으로 관여하였던 일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했 었다. 그 글에서 나는 지 목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맺었었다.
지역교회 목사와 설교자로서, 저술가와 저자로서, 교회 지도자로서, 행정가로서, 라디오 연설가로서, 초교파적인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미친 루터교 지도자로서, 대 1982년 5월 이경배 장로와 지원상 총회장. 이 장로는 한국 루터교선교부와 기독교 한 국 루터회에서 오랫동안 직원으로 일했다. 은퇴 후에는 “사랑실천운동”의 실무자로 봉 사하였다.
한성서공회 지도자로서, 한국 베델성서연구원 원장으로서, 국가의 안녕과 국민들을 아꼈던 교회/정치인으로서 지원상 목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충실 한 종이었다. 지원상 목사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 20호에서도 계속 되었다. 그 글에서 나는 그의 장례식 때 한국 전역에서뿐 아니라 많은 다른 나라에서도 지 목사 소천에 대한 애도 의 표현들이 들와 왔음을 이야기했다. 길게 설명하지 않은 채 나는 그가 기독교 한국 루터회 총회장으로서 22년 간 보여 준 뛰어난 지도력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지 목사가 한국 루터교회 신학 교육 프로그램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의 수고로 1997년 12월에 교육부로부터 공식 대학 인가를 받은 교육기관을 갖게 되었 고, 그 학교가 지금의 루터대학교가 되었음을 언급하였다. 지금 그 대학교에는 대학 원도 있고, 그 중 국제적으로 학력이 인정되는 목회학 석사(M. Div.) 프로그램도 있
왼쪽으로부터: 이경배 장로, 지원상 목사, 이무열 선교사
다. 또한 나는 지원상 목사가 한국 루터교회 선교 사업을 진척시키기 위해 파트너 교 회들과 협상을 할 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이야기하였다. 한국 루터교회 와 한국 루터란아워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선교를 위한 지 목사의 공헌은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 넓은 에큐메니컬 영역에서 지 목사는 특히 대한성서 공회를 위해 중요한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는 것도 언급하였다. 지난 21호에서 나는 한국 베델성서연구 프로그램이 전체 한국 교회의 영적 삶과 교회 성장을 위해 특별한 공헌을 한 이야기를 회상해 보았다. 한국 베델
사랑의 실천운동 본부 창립자이며 국장인 지원상 목사, 후임 총회장 김해철 목사(왼 쪽), 주대범 장로(오른쪽). 김 목사와 주 장 로는 헌혈에 여러 번 참여하였다. 1995년 4 월
성서 연구의 성공은 처음부터 지 목사가 1998년 4월 소천하기까지 한국 베델 성서연구원 원장으로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 지 목사의 뛰어난 유머 감각이 큰 몫을 담당하였고, 그의 유머, 특 별히 그의 “도마 손가락” 이야기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
한국에서의 루터교 선교 역사에서 지 목사가 공헌한 중요한 역할에 대해 참으로. 할 이야기가 더 많이 있다. 나는 후에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온전히 할애하여 지. 목 사의 삶과 사역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들을 보충하고자 한다. 1993년 총회장. 자 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지 목사는 한국 베델성서연구원 원장으로 계속 봉사하였다. 그는 또한 계속해서 다른 많은 초교파적인 에큐메니컬 활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한 국 루터교회가 방송하는 10분짜리 주간 프로그램인 “인생의 갈림길”의 각본을 쓰 사랑의 실천운동 본부의 헌혈 캠페인 포스 터 앞에 서 있는 지원상 증경 총회장, 후임 총회장인 김해철. 1995년 4월
고 낭독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1993년 10월 기독교 한국루터회 총회장직에서 공식으로 은퇴하기 2년 전부터 지 목사는 다른 중요한 일을 주도적으로 시작하였다. 그것은 대한 적십자의 헌혈을 돕기 위한 초교파적인 캠페인 운동이었다. 그는 “사랑 실천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1991년 그 운동을 시작하였다. 영어로는 “Love in Action Campaign”으로 결정 하였지만 한국어로는 “사랑 실천 운동”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결정하였다. 그 프로 그램의 창설자이자 운영자로서 지 목사는 한국 전역의 지방 교회들의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였다. 그 때 적십자 헌혈 관계자들이 그 교회를 함께 방문하여 현장에서 사랑의 실천운동 본부의 헌혈 캠페인 포스터 앞에 서 있는 지원상 증경 총회장과 주대범 장로. 1995년 4월
헌혈을 받았다. 그 프로젝트는 수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숫자에 비해 혈액 공 급이 현저히 부족해 거의 위기 수준에 있었던 당시 상황에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지 목사는 이 “사랑 실천 운동”의 창립자요 운영자로서 공헌한 것에 대해 대한민 국 정부와 대한 적십자사로부터 여러 번 특별한 감사장을 받았다. 이경배 장로가 지 목사의 오른 팔이 되어 그 사무실 관리자로서 일정을 조정하고 필요한 기록을 관리하는 일들을 도왔다. 또 다른 한 사람, 비서가 있어서 그 일을 도왔다. 그 프로 그램은 지 목사가 소천한 후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경배 장로가 그 일을 맡아 수 1973년 6월 3일 주일 오후에 여의도 빌리 그 램함 전도 집회 마지막에 참여한 사람은 공 식적으로 1,100,000명으로 집계되었다.
고하고 있다. 이경배 장로는 40년 이상 나의 가까운 친구와 동료로서 지내온 사람 이었는데, 가벼운 농담으로 나는 그를 “흡혈귀”라고 부르곤 하였다. 그는 “사랑 실 천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헌혈 캠페인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지원상 목사가 초교파적으로 활동한 에큐메니컬 사업이 한국 기독교 지도자협의 회이다. 나는 한국에 있는 동안 지 목사와 정부와 사회에 관련된 교회의 역할에 대 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여러 한국 교회 교단들의 지도자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또 그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내가 알기로 지 목사는 한 국에서 개신교를 대표하는 일차적이고 유일한 연합기구로 여겨지는 한국기독교협 집회 장소에 한국말과 영어로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주제 성구 가 적힌 큰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의회(KNCC) 때문에 성가심을 당했는데 당시 기독교 한국루터회는 그 기구의 회 원 교단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 목사가 보기에 문제점은 KNCC 가입 교단은 실제로 한국 전체 개신교회의 1/3정도만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기구에서 지도적 역 할을 하는 소수의 개인들이 관심하는 영역과 주요 의제들에 대해서도 의혹을 가질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관심이 실제로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관점들 을 정확하고도 충분하게 반영한 것인가? 그러나 당시 그 기구만이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조직된 교회 연합기구였고, 교회 지도자들은 그 기구를 통해 정
1973년 6월 3일 여의도 광장으로 향하는 교통 모습.
부 대표자들과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기독교 한국루터회 총회장으로서 지 목사는 주도적인 역할 을 하여 한국 기독교 지도자협의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정부가 관련된 문제들 에 대해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그리고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 과 교인들의 관심과 견해를 대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주요 관심사를 다룰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수 년 동안 지 목사는 그 지도자 그룹의 회장으로서 봉사 1973년 6월 3일 여의도 광장 아스팔트 위 에 앉아 있는 군중들
하였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협의회 설립에 따른 많은 직접적이고도 간접적인 곁가지 일들이 있었다. 1970년대 10년 동안 대한민국은 괄목할 만한 교회 성장을 이 루었다. 1961년 9월 내 아내와 내가 처음 한국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가 듣기 로 당시 기독교인 인구 비율은 전체 인구의 5에서 7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42년이 지난 2004년에 우리가 은퇴하여 한국을 떠날 때 한국의 기독교인 인 구 비율은 전체 인구의 25에서 30퍼센트에 달하였다! 대학생 선교회(CCC)가 주최한 1974년 8월 여의도에서 열린 엑스폴로 74.
그 성장의 대부분은 특별히 1970년대와 1980년 초에 이루어 진 것이었다. 그 20여 년 동안 남한에는 놀라운 교회 성장과 전도 폭발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국에서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가 열린 것은 1973년 여름이었다. 그 행사는 전 세계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이었다. 지 목사는 그 행사를 위한 고문위 원회에 속한 한 위원이었다. 전도 활동을 더 격려하기 위해 지역교회 차원에서 벌인 홍보활동들 외에 한강 중간에 위치한 여의도 광장에서 저녁 야외 집회가 열렸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1974년 8월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햇볕을 피하기 위해 혹 비가 올 경 우 사용할 우산이나 파라솔을 들고 있다.
1973년 6월 3일 마지막 일요일 오후 전도집회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참석 인원이 1,100,000명에 달했다. 그 집회는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 역사상 가장 많은 군중이 모인 역사적인 집회로 기록되었다. 나도 직접 일요일 오후 집회에 참여하였는데, 내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사진들을 찍었다. 내가 그 사진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줄 때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지금 1,100,000명으로 추 산되는 군중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정확한 그 군중 의 숫자는 1,100,001명이라고 덧붙인다. 왜? 나는 사진을 찍고 있었기 때문 에 나는 그 사진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한 특별 기도회”가 1977년 여의 도에서 수 만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전체 참가 인원 숫자가 엄청났다는 것 이외에도 대부분 서양인들은 그 군중 이 여의도 광장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다.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그러한 종류의 행사가 있을 때는 사람들이 넓은 스타디움 안에 서 관람석 의자에 앉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한꺼번에 백만 명 을 수용할 수 있는 스타디움은 전 세계에 없다. 주 강사들과 다른 귀빈들은 열 린 광장 가운데 크게 세워진 강단 위에 자리를 잡았고, 또한 10,000명에 달하 는 대형 찬양대는 측면에 앉도록 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땅 바닥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집회에 참여했다. 옷이 더럽혀 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
나를 위한 특별 기도회에 참석한 군중들 너 머 왼쪽으로 국회의사당 건물이 보인다.
들은 바닥에 신문지 같은 것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앉기도 했다.
그 행사는 잘 조직이 되었고, 그런 준비는 그렇게 큰 행사를 위해서는 절대적으 로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큰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 준비해야 할 일들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 없이, 그 행사는 후에 한국 기독교인들을 위한 다 른 대형 집회들을 위한 모범이 되었다. 그 때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한국에 있어서는 요동의 시대였다. 한국 주변의 정치적 사건들로 야기된 불안과 긴장이 1974년 8월,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 현수막
고조에 달했던 때였다. 동남아시아에 공산주의의 진출과 위협이 남한 사람들에게 걱정을 안겨 주었고, 베트남 전쟁은 어려워지는 상황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군대가 남한을 침략하였을 때, 남한을 돕는 국제연합(UN)의 결의문이 통과 되었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때에는 그러한 국제연합의 행동이 없었다. 시간과 상황은 변해 있었다.
지 목사 자신이 일찍이 북한 공산주의로부터 탈출한 피난민이었기 때문에, 그 는 그러한 공산주의의 소란이 다른 나라들에도 미칠 수 있는 위협의 심각성에 대 해 민감하였다. 그러한 염려가 한국 기독교 지도자 협의회를 시작한 주요 동기 중 1984년 8월 여의도 광장 집회 때 아스팔트 위 에 앉아 있는 군중
의 하나였다. 즉 그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과 국가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고자 하였다.
한국기독교 지도자협의회는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와 같은 프로그램에 대해 관 심을 갖고 지원을 하는데 촉매 역할을 하였다. 그 다음 해 8월에 엑스플로 74가 후원한 그리스도를 위한 캠퍼스 크루세이드가 대단히 뜨겁고 습기찬 여름에 열렸 다. 후에 또한 같은 여의도 광장에서 대형 집회가 열렸다. 국가를 위한 기도회 같 은 것이 그것인데, 그런 모임은 한국이 한 국가로서 신앙과 자유를 유지할 수 있 198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예배 때 주요 연사나 귀빈들이 앉은 곳을 저녁 시간에 찍은 사 진
기 위해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기도를 결집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 러한 행사들은 후에 매년 갖게 되는 국가 기도의 날과 같은 특별한 기도회들도 포 함하였다. 특별히 정부와 교회들과 한반도 통일을 위한 기도들이 포함되었다.
같은 여의도 광장에서 갖는 대규모 집회들 중 하나가 매해 부활절 새벽 5시 30 분에 연합예배를 갖게 된 것이었다. 이 예배는 여의도의 넓은 광장이 다른 건축물 로 들어차게 됨으로써 중단되기까지 꽤 수년 동안 열렸다. 그 때 지금 여의도에 위치한 수많은 사업체와 방송국 본부들이 지어지고 그에 따른 교통량을 수용하기 위해 넓은 도로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곳은 또한 국회의사당 건물이 건축된 것 외 1987년 4월 19일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새벽기도회에서 지원상 총회장이 사회를 보 고 있다.
에도 지금 주요한 부동산 지역이 되어 있다.
여의도에서 열린 그 부활절 연합예배는 참으로 큰 행사였다. 그리고 그러한 큰 행사를 성공적으로 갖기 위해서는 사전에 상당히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필요로 했고, 또 그것을 하기 위한 조직이 필요하였다. 기독교 한국루터회 총회장이었던 지원상 목사는 그 준비 과정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준비위원회는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순서를 맡을 교회 지도자 선정을 위해서 적절한 관심을 기 울여야 했다. 지원상 총회장은 1978년 3월 26일에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 때 설 1987년 4월 19일 약 750,000명이 모인 부활절 연합새벽기도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지원상 총회장
교자로 선정이 되었다. 이것은 지원상 목사가 교회 지도자로서 상당히 높은 지명 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 해에 부활주일은 일찍 왔다. 나는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날씨는 참으로 좋지 않았고, 계절에 맞지 않게 상당히 쌀쌀했다. 추위를 느낄 정도였고 간간히 비도 내렸다. 그 주말에 일본 루터란아워 책임자인 마사루 (마이크) 하라다씨가 서울을 방 문 중이었다. 나는 남대문과 남대문 시장 건너편 북쪽에 위치한 그랜드 호텔에서 그 를 태우고 그 예배에 참석하였다. 모든 종류의 교통편이 여의도를 향하고 있었다.
그 때 공식 집계된 참석 인원이 500,000명이었다. 750,000명까지도 참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예배의 설교자가 지원상 목사였다. 참으로 198년 4월 19일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새벽기도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지원상 목사를 많은 기자들이 촬영하고 있다.
그것은 지 목사에게는 큰 영광이었다. 500,000명이 모인 군중 앞에서 당신이 말씀 을 전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 행사 이후 나는 해외 손님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지 목사를 그들에게 소개할 때 500,000명이 참석한 부활절 연합예배 때 설교를 맡았던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덧붙 였다. 거의 예외 없이 그 손님들은 감탄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하 며, 원래 준비위원회는 750,000명 정도 참여하리가 기대하였지만, 250,000만 명이 그날 설교자가 누구인가를 알고서는 참석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물론 손님들이나 지 1987년 4월 19일 부활절 연합새벽기도회에 참 여한 사람들 중 김해철 목사와 교환 학생으로 한국에 온 두 명의 컨콜디아 신학대학원 학생 들이 보인다.
목사나 나의 말을 유머로 받아 들였다.
거의 10여 년이 지난 후, 지 목사는 1987년 4월 19일 새벽 5:30에 시작되는 연합 부활절 새벽 예배 준비위원회 위원장 겸 그 예배 사회자로 선출이 되었다. 위원장의 자리는 설교자로 선출되는 것보다 훨씬 책임이 큰 자리였다. 그리고 더 큰 영예와 특 권이었다. 이번에 준비위원회는 참석 인원을 1,000,000명으로 계산을 하였다. 그러 나 실제로 참석한 사람들의 숫자는 750,000명으로 집계가 되었다.
지 목사가 두 번째로 중요한 책임을 맡았던 부활절 이후 손님들이 방문하면 나는 1987년 4월, 연합 새벽기도회에서 모인 750,000 군중의 일부
지 목사를 소개할 때 두 경우의 부활절 연합새벽기도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1978년 에 지 목사가 설교할 때 250,000명이 참석을 거부했었는데, 1987년 지 목사가 사회 자가 되었을 때 다시 250,00명이 참석을 거부했다고 덧붙였다. 지 목사 사무실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부활절 연합예배 장면을 찍은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기 때문 에, 그 이야기를 이야기하기에 매우 쉬웠다. 그 일들은 지 목사의 일생에 있어서 매우 흥미 있고 중요한 일이었다.
지 목사가 첫 주요 위원으로 참여하며 시작된 한국기독교 지도자협의회의 주도로 1990년 4월 15일 여의도에서 열린 부활절 연 합새벽기도회가 열리기 전 새벽
다른 많은 주요 집회들이 그 다음에도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다. 종종 특별한 국가적 위기를 느낄 때 교회 지도자들은 거기에 대해 더 큰 규모로 응답하는 것이 적절하고 유익하다고 생각을 하였다. 예를 들면 1977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대 규모 집회를 위해 크게 써 붙인 현수막에는 “국가를 위한 특별 기도회”라고 쓰여 있었다.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그러한 대규모 집회 중 특별히 의미 있는 다른 행사는 개신 교 한국 선교 100주년 기념식이었다. 그 행사는 1984년 8월에 열렸다.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 선교 집회”는 관련 성서구절을 이사야 43:19 말씀, “보라 내가 새 일 1990년 4월 14일 부활절 연합새벽기도회 모습
을 행하노라”에서 인용했다.
내가 느끼게 된 흥미로운 곁가지 생각 하나는 한국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10년 혹 은 15년 전과 비교해 볼 때 훨씬 자신감과 독립심을 키워 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1973년 전도 집회 때 존경 받는, 그리고 인기 있는 교회 지도자는 국제적으로 잘 알 려진 빌리 그래함 목사였다. 아무도 그 때 그 행사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그의 위치와 영향력을 최소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87년 8월 19일 주일에 열렸던 선교 100 주년 기념식 때 빌리 그래함 목사가 직접 한국을 방문하고 그 예배에 참석하였지만, 그는 마지막 시간에 간단하게 인사하는 시간만을 허락을 받았다. 그 외 다른 순서를 맡았던 모든 중요한 인사들은 모두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지원상 총회장과 미주리시노드 루터 교회 총회장 프로이스(J.A.O. Preus, 오른쪽)와 브라질 루터교회 총회장 요 하네스 게드라트(Johannes Gedrat). 1975년 11월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
간단하게나마 언급할 필요가 있는 지원상 목사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또 하 나 다른 국면은 국제무대에서의 그의 활약이다. 그 측면에 있어서도 지 목사는 뛰어 난 리더십의 유산을 남겼다. 이것은 그가 위촉을 받았거나 선출을 받았거나 맡게 된 많은 자리 때문에 참석하게 된 회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국제 여행을 했는지를 보면 곧 알 수 있다. 나는 외국인으로서 통역을 위해 지 목사를 수행해 그러한 모임에 참석 한 유일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 면에 있어서는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여행을 하 게 되었다.
길게 상술할 필요 없이 나는 지 목사의 여러 책임 있는 “자리 때문에 간 여행” 중 몇 가지에 대해서만 언급할 것이다. 첫 번째는 “국제루터교협의회(International Lutheran Conference: ILC)”이다. ILC는 전 세계 루터교회 중 일반적으로 보수적 인 루터교회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회원 교회 중 가장 큰 교회는 미주리 시노드 루터교회(LCMS)이다. 1978년 8월 국제루터교협의회(ILC) 회의 중 휴식 시간에 지원상 목사는 바 닥에 앉아 있고, 파푸아 뉴기니의 구트 니우스 루터교회의 바에사 감독은 나 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다.
이 특별한 모임의 첫 회의가 1975년 11월 남미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Porto Alegre)에서 열렸을 때 나는 지 목사와 함께 그 회의에 참석했다. 그 회의는 국제 교 회 지도자들 간의 관계를 형성하고 대화를 나누는 중요한 기회였다. 그 다음 모임은 3년 후인 1978년 파푸아 뉴기니 고지에서 열렸는데, 그곳에서 파트너 교회들 간의 관계와 실천적인 문제에 관련된 중요한 관심사를 더 토의하였다. 파푸아 뉴기니에서 열린 모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그리고 멋진 경험을 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왜냐하 면 그곳 교회가 이전에는 와박(Wabag) 루터교회로 불렸는데 이제 구트니우스 (Gutnius) 루터교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며 그곳에서 시작된 루터교 선교 30 주년을 축하하는 행사를 그 때 가졌기 때문이다.
1981년 국제루터교협의회(ILC)는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렸다. 원 래 중미 과테말라에서 열기로 했었는데, 그 나라의 정치적 불안이 심해 급히 장소를 옮겨 모임을 가진 것이다. 그 다음 회의는 1984년 11월에 아프리카의 나이제리아에 서 열렸는데, 상당히 외지고 동 떨어진 오봇 이딤(Obot Idim)에 회의 장소가 있었 미주리시노드 총회장 프로이스와 지 원상 총회장이 아름다운 꽃 나무 앞에 서 악수하고 있다. 1978년 8월.
다. 그 회의 때는 교통 문제와 물류 수송과 관련하여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겪어 서 특별히 인상에 남는다. 1987년 5월 모든 회원 교회 지도자들이 유럽 대륙의 독일 베를린에 모이게 되었다. 그 모임 역시 특별한 경험이었는데, 당시 독일은 아직 분단 국가였기 때문이다. 두 진영을 나누는 벽이 아직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1989년에는 한국 타워호텔에서 그 모임을 가졌다. 실제로 그 때에는 국제루터교 협의회(ILC)뿐만 아니라 한 신학적인 학술회의, 그리고 범 아시아 루터교 신학교 육협회, 이렇게 세 가지 회의를 함께 가졌다. ILC는 홍콩 대표자의 제안을 받아들 여 그 다음 모임을 홍콩과 중국 본토에서 1991년 10월 4-13에 갖도록 결정을 하 였다. 중국 본토에서는 베이징과 난징 지역에서 일부 모임을 갖도록 조정이 되었 다.
1993년 9월에 ILC는 다시 과테말라 안티구아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곳은 이전에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연기된 적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곳 모임에서 교 회 지도자들은 ILC모임을 위한 일종의 “지침서”를 만들었고, International Lutheran Conference라는 명칭에서 Conference를 Council로 바꾸기로 결정 1977년 독일 노이엔데텔자우 바바리아 복음루 터교회의 세계 선교국장 베커 목사(Rev. Horst Becker)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원상 총회장
하였다. 그 모임은 지 목사가 기독교 한국루터회 총회장으로 참석했던 마지막 ILC 회의가 되었다. 지 목사는 1993년 10월에 총회장직을 은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지 목사는 많은 토의 가운데서 상식적이고도 적절한 판단에 기초한 좋은 의견 을 많이 제시하였었다.
지 목사가 아시아 루터교 교회 지도자로서 그의 상식과 적절한 판단과 지혜를 보 여 주었던 또 다른 국제 모임은 루터교 세계연맹(Lutheran World Federation: LWF)이었다. 그는 LWF 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1990년부터 1997년까지 7년간 봉사하였다. 그 위원회는 매 년 다른 대륙에서 모였다. 지 목사가 맡게 된 분야는 국제 문제와 인권 관련 위원회였다. 그런 분야에 선정된 배경에는 지 목사가 이념 1987년 7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LWF 총회가 열 리기전 동독 루터교회를 방문 중인 지원상 총회 장. 왼쪽에 동독 루터교회 목사, 오른쪽에 인도네 시아 수마트라의 루터교 감독. 그 때 동독은 아직 공산주의 지배 하에 있었다.
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 그의 반생을 보낸 경험이 있었다.
LWF와 관련해서도 나는 지 목사의 통역자로서 그를 수행해 많은 회의에 참석했 었다. 매 번 모임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지만, 그중 몇 이야기들은 기록으로 남겨 둘 필요가 있다. 사정이 허락된다면 이 부분으로 다시 돌아 와 그 이야기들을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LWF 총회는 보통 6년이나 7년에 한 번씩 모인다. 지 목사와 내가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던 첫 번째 총회는 1977년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Dar-esSalaam)에서 모인 총회였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그곳에 갈 수 없었다. 탄자니아 정부가 대한민국이나 대만 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입국을 허락하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때 결국 가지 못하게 된 탄자니아 여행과 관련해 일어난 일들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고, 또 그럴 생각이다. 그 때 독일 바바리아 복음루터교회의 세계 선교부 국장이었던 베커 박사(Dr. Horst Becker) 가 영향력을 발휘해 여행 취소 대신 교회 지도자의 큰 역량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 었다. 1983년 11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 열린 LWF 의 한 모임에 참석 중인 지원상 총회장과 이 무열 선교사
1984년에 지 목사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LWF 총회에 참석하였다. 당 시에는 아직 동독이 소련 공산주의의 지배 가운데 있었었는데, 총회 이전 2주간 동 독에 있는 루터란들을 공식 방문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지 목사는 그 부다페 스트 총회 때 특별히 의미 있고 용기 있는 공헌을 하였다.
그 다음 LWF 총회는 1990년 1월 29일부터 2월 8일까지 브라질 큐리티바에서 열렸 다. 브라질은 남반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곳 여름은 매우 더웠다. 그 총회 이후 지 목사는 국제 관계와 인권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 책임은 홍콩에서 열린 1997넌 총회때까지 유지되었다.
자문위원으로 지명이 되었기 때문에 지 목사와 나는 매 년 LWF 위원회 모임에 참여하 게 되었다. 1990년에는 제네바, 1991년에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 1992년 9월에는 인도 지원상 총회장이 1984년 나이제리아 루터교 회의 한 지방 지도자에게 구리 십자가를 걸 어 주고 있다.
의 마드라스(케나이), 1993년에는 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안산드(Kristiansand), 1994년 에는 스위스 제네바, 1995년 6월에는 아프리카 남비아의 윈드호엑(Windhoek), 1996 년 9월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모임들이 그러한 모임들이었다.
지 목사가 자문위원으로서 공식 사절로 참석한 LWF 총회는 홍콩에서 1997년 7월에 열린 회의였다. 1997년 7월 7일은 이전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이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지배로 넘어간 날이었다.
이 외에도 특별히 아시아의 루터교회 지도자로서 지원상 목사가 존경과 찬사를 받았던 더욱 많은 경우들이 있다. 그런 때마다 특히 그의 쾌할한 성격, 예리한 지성, 그리고 예민 한 통찰력은 그가 참석했던 수 많은 국제 회의들에서 유감없이 나타났다. 지원상 총회장 왼쪽에 있는 사람은 한국의 첫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인 폴 바틀링 목사가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아프리카 나이제리 아에서 2년 동안 준목으로 일하였을 때 언어 도우미로 봉사했던 사람이다. 1984년 11월 사진.
미주리시노드 세계선교국장 웨스트콧 박 사(Dr. Ed Westcott)와 지원상 총회장 부 부. 1989년 9월 타워호텔
1993년 6월 노르웨이 크리스티안산드에 서 모인 LWF 위원회에 참석 중인 지원상 총회장과 미국 복음루터교회 감독 칠스트 롬 박사(Dr. Herb Chilstrom)
글 이무열 변역 박일영 편집 최석천
23호를 기대해 주세요
1989년 서울 타워호텔에서 열린 ILC 모 임 때 지원상 목사, 이무열 선교사, 그리고 인사말을 하고 있는 지원용 박사.
1993년 LWF 총무 구나를 슈탈세트 박사 (Rev. Dr. Gunnar Stalsett)가 지원상 총 회장 사무실에서 감사패를 받고 있다.
1990년 2월 브라질 큐리티바에서 열린 LWF 총회에 서 지원상 총회장과 LWF 총무 칼 마우 박사(Dr. Carl Mau)
1997년 홍콩에서 열린 LWF 50 주년 기념 총회에 참석한 5명의 기독교 한국루터회 대표들. 왼쪽 으로부터 청년 대표 이지성, LWF 위원회 위원 지원상 목사, 김해철 총회장, 기독교 한국루터 회 연합여신도회 회장 한영순, 이 무열 선교사. 1997년 7월.
미주리시노드 세계선교국장 웨스트콧 박사(Dr. Ed Westcott)와 지원상 총회 장 부부. 1989년 9월 타워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