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돌아온응답하라1961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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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

다시 돌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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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루터란에 연재되었던 이무열(Hilbert Werner Riemer) 선교사님의 '한국에서의 40년을 회고하며'의 13회 연재 되었었고, 이후 선교사님께서 새로이 글을 작성하셨습니다. 번역은 박일영 교수님이 해 주셨습니다.

2016

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 교회협력국

1961


제18호

한국에서의 40년을 되돌아보며 (자서전적 회상) 힐버트 리머 박일영 교수 옮김

한국에서 루터교 선교사로 40년 이상 보낸 후에 이 자서전적 회상을 다시 쓰면서 나 는 14호부터 17호까지 주로 1958년 1월에 공식적으로 시작된 초기의 루터교 사역에 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개인들에 대해서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쿠르트 보스 목사, 폴 바틀링 목사, 그리고 메이나드 도로우 목사가 한국루터교 선교 부(KLM)를 구성했던 첫 세 공식 회원이었다. 15호에서 나는 이 세 미국 선구자들에 대 해 소개를 하였었다. 1958년 지원용 박사가 한국에 왔고, 지 박사 이야기가 나의 회상 16호와 17호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지 박사는 처음 KLM에, 그리고 결국에는 한국 루 터교(LCK)의 모든 국면에 중대하고도 특별한 공헌을 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라우어 목사 내외와 세 자녀. 1975년 12월

이번 18호에서 나는 1960년대에 KLM에 합류했던 다른 미국 목사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맨 처음 소개할 사람은 제임스, 혹은 짐 라우어(한국 이름 나우열) 목사이다. 1960년 6월에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컨콜디아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그는 1960년 11월 그의 아내 록산느(Roxanne)와 갓난아기인 첫 아들과 함께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 첫 아들의 이름 역시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제임스라고 지었지만, 모든 사람은 그를 “제이미”(Jamie)라고 불렀다. 그는 한남동 유엔 빌리지 41호로 이사하였다. 그 집은 한 국 주택공사가 운영하던 서양 스타일의 임대 주택이었다.

약 10개월 후 나는 같은 해 6월에 세인트루이스 컨콜디아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1961년 9월에 아내와 함께 한국에 도착하였는데, 잠시 그들 집에 손님으로 머물러 있 었다. 얼마 후 우리는 이웃인 한남동 유엔 빌리지 40호로 이사하였다. 라우어 목사 내외 는 대단히 친절하였고, 우리에게 자세하고도 훌륭한 오리엔테이션을 해 주어서 우리는 쉽게 주변을 익힐 수 있었다.

리머 목사는 아래에 서 있고, 라우어 목사는 사 다리에 올라가 두 집 사이에 전화선을 연결하고 있다. 1961년 10월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 라우어 목사는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6단계 중 2번째 단계를 마친 상태였다. 우리는 용산구 한남동에 살았기 때문에 서대문구 연희동 연세대까지는 차로 30분가량 걸렸다. 우리는 차 한 대를 함께 사용하였는데, 그 차를 타고 어학당과 도시 반대편에 있는 우리의 집을 오갔다.


라우어 목사는 또한 미육군 예비군의 군목/장교였다. 그리고 그는 1961년 11월 25일 그들의 집 거실에서 나의 미육군 예비군 군목/장교 임관 서약식을 맡아 주었다. 나는 신학대학원 졸업 전인 1961년 이른 봄에 군목이 되는 과정을 신청하였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한국에 가서 선교사로 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그 신청 과정은 시작에서 결말까지 원래 보다 훨씬 긴 8개월이나 소요되었다. 그렇게 연장된 이유 중 하나는 필요한 서류들이 배편으로 운송되었기 때문인데, 당시에는 평 라우어 목사와 사모 록산느, 그리고 리머 사모가 유엔 빌리지에 있는 라우어 목사 집에서 야외 소 풍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1962년 8월

균 3개월 혹은 그보다 더 오래 걸렸다.

그러나 비록 그 과정이 오래 연기되었긴 하지만, 나는 내가 미 육군 예비군 군목으 로 일하게 된 것에 대해 결코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1994년 12월 14일 공식 으로 은퇴하기까지 33년 동안 군목으로 봉사하였다. 반면 군목으로서의 봉사는 내게 특별히 의미 있는 “부차적” 사역이 되었다. 나의 언어 능력과 타문화 간 교류에 대한 통찰들이 도움이 되었다.

바틀링 목사 가족이 미국에서 1년 간 휴가를 마치고 돌아 온 1964년 여름 당시에, KLM을 섬기던 미국인 선교사들 중 3명의 선교사들이 동시에 미육군 예비군 군목이 었다. 대단히 높은 비율이었다! 우리 세 명 모두 가능한 정기적으로 용산에 있는 미군 본부 기지에서 매주 훈련을 받았다. 리머의 유엔 빌리지 집에서 있었던 미국 군인들 과 루터교인 시민들과의 모임. 흰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있는 사람이 라우어 목사이다. 1962년 12월

라우어 목사는 KLM을 약 4년 반 섬긴 후에 그의 고향 주인 미네소타 주에 있는 한 교회에서 소명을 받아 1965년 봄에 한국을 떠났다. 수 년 동안 지역교회 담임 목사로 일한 외에도 그는 미국 루터교회에서 여러 개의 책임 있는 지위를 맡아 수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현역 미육군 군목으로 오래 동안 봉사한 후에 대령 계급으로 제대하였 다.

라우어 목사는 세 아들을 두었다. 흥미로운 것은 “제이미”라고 부른 첫 아들과 “마 크”라는 이름의 둘 째 아들 모두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 다는 것이다. 둘 다 미 육군 장교로서 20년 동안 일했는데, 또한 둘 다 헬리콥터 조종 사였다. 또 다른 재미있는 것이 있다. 제임스(한 살이 채 안되었을 때 한국에서는 비 공식적으로 “제이미”라고 불렀었다)는 한국에 두 번 일 년 동안의 순회 근무를 한 적 한남동 루터란 서비스센터에 있는 당구대 주위 에 서 있는 사람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라우어 선교사, 미8군 군목 헤르만 호이어, 선교사 폴 바틀링, 미 공군 군목 바링거. 1964년 9월

이 있었고, 둘째 아들 마크는 한 번 한국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셋째 아 들 폴은 루터교 목사가 되었다. 라우어 목사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한국에 4년 반 정도 밖에 머물 지 않았지만, 그는 독특하고도 의미 있는 공헌을 많이 하였다. 예를 들어 1960년대 한국에는 전화번호에 대한 공급과 수요에 문제가 있어서, 라우어 목사 가족과 이웃에 사는 우리는 전화 한 대를 함께 사용하였다. 나는 라우어 목사가 1961년 10월에 한 남동 유엔 빌리지에 있는 우리 두 집 사이에 전화선을 연결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는 부동산을 복덕방에서 취급하듯 전화번호를 사고파는 복덕방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당시 전화번호 하나를 취득하는데 미국 돈으로 1,200 달러나 되었 다. 그것도 1961년 당시의 환율로 그러하였다. 그 때에 그 금액은 매우 큰돈이었다.

역관동 지역에 있었던 임마누엘 교회의 제단과 성단소를 찍은 사진을 보면, 제단 뒤 벽면에 골이 지게 디자인된 독특한 나무 조각들, 나무 십자가, 그리고 강단과 제단 을 볼 수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라우어 목사의 디자인이었다. 그는 목재를 다루는 데 라우어 선교사가 설계한 루터란 서비스센터/ 국제루터교회 채플

있어서 매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라우어 목사는 또한 여러 개의 건축 프로젝트를 위한 계획, 디자인, 그리고 초벌 그 림들을 만드는데 있어서 평균 이상의 전문적 기술을 보여 주었다. 한남동에 있는 루 터교 서비스 센터의 원래 건물 건축은 1961년 시작되었다. 두 번째 건축 과정에서 채 플은 지상에, 그리고 뒤에 있는 목사관은 지상보다 높게 지었는데, 그러한 계획을 수 립하는데 있어서 라우어 목사가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64년 한국루터교 선교부가 미국 선교국으로부터 선교사 가족들을 위한 사택 건 축 자금을 허락받았을 때, 라우어 목사는 연희동에 짓게 될 사택들 건축을 위한 처음 계획과 디자인을 만드는데 깊이 관여하였다. 미국 선교국은 점차 오르게 될 집세 비 선교사들 휴양 센터로 이용되었던 대천 해수욕 장의 KLM 휴양소. 라우어 목사가 기본 설계를 하였다.

용을 계속 지불하는 것보다 건축을 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투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연희동에 지은 그 사택들은 1986년까지 수 년 동안 한국루터교 선교부와 기독교 한국루터회 활동에 기여하였다. 1986년에 그 땅과 건물은 맞교환 방식으로 서울시에 넘겨졌는데, 그 부지 대신 한국 루터교회는 지금 베델회관이 서 있는 양재동 부지와 지금 루터회관이 서 있는 잠실 부지를 얻게 되었다.

1964년 11월에 그 사택에 바틀링 목사 가족이 처음으로 이사를 하였고, 다음에 우 리 가족이 이사를 하였다. 우리는 1964년 11월부터 1966년 미국으로 휴가를 떠날 때까지 그 사택에서 살았다. 한국에 다시 돌아 와 우리는 같은 집에서 1970년부터 1986년까지 살았는데, 1986년에 우리는 후암동 루터교 센터 뒤편에 새로 지은 사택 리머 목사 가족이 1964년부터 1966년까지, 그리고 1971년부터 1986년까지 살았던 연희 동 지역의 사택

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라우어 목사의 또 하나 참으로 의미 있는 공헌은 덕수 빌딩 구입 이후 1962년 초 제동 빌딩 구입 계획에 대한 후속 조치였다. 처음 덕수 빌딩 계획을 제안한 것은 당시 한국 루터교 선교부 회계를 맡았었던 도로우 목사였다. 도로우 목사가 1962년 6월 가족과 함께 1년 휴가로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 책임을 라우어 목사가 맡게 되었 다. 그 때 라우어 목사는 제동 빌딩 구입 제안서를 새로 만드는 일에 밀접하게 관련케 되었다.


1962년 10월에 제동 빌딩 구입을 위한 대출이 승인되고 20년 내에 그 대출을 상환하는 계획을 성사시킨 것은 한국 루터교 선교부와 기독교 한국 루터회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존 하디(John Hodde, 한국 이름 하대위) 목사와 그의 아내 바바라, 그리고 갓 난 아기 딸 드보라가 1964년 2월에 한국 루터교 선교부에 동참하게 되었다. 우리 가 한국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 라우어 목사 가족으로부터 따뜻한 대접과 도움을 얻 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디 목사 가정을 위해 따뜻한 대접을 베풀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에 밟게 되는 과정은 사실상 그들이 미국을 출발하기 전에 이미 많은 의사소통을 주고받음으로 준비를 한 것이었다.

1963년 6월에 세인트루이스 컨콜디아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하디 목사가 처음 받은 소명이 한국 선교였다. 그 때까지 보스 목사를 제외하고 모든 한국루터교 서울 북아현동에 있는 하디 목사 집에 이르는 가파른 돌계단

선교부의 선교사들도 같은 경우였다. 보스 목사는 이전에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 하였었다.

하디 목사는 1964년 2월부터 1972년 5월에 미국으로 돌아가기 까지 10여 년 간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적이고 탁월한 사역을 하였다. 1972년 여름에 하디 목사 는 3개월 미국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그 휴가 중에 성 요한 루터교회 목사로 소명 을 받고, 그 소명에 응하였다. 그 교회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 있는 크고 안정된 교 회였다.

하디 가족은 한국에 올 때 세 명이었다. 10년이 지난 1972년에 그 가족은 일곱 명으로 늘었다. 그 동안 두 명의 딸을 얻고, 그 다음 쌍둥이를 낳았는데, 딸과 아들 쌍둥이였다. 세 명의 딸 가운데 아들을 얻게 되어 그들 가족뿐만 아니라 한국 루터 교회의 모든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연희동에 있는 논들 사이에 있는 루터교 선교사 가족을 위해 지었던 사택으로 가는 좁은 길. 1964년

하디 목사는 한국루터교 선교부, 그리고 1971년 공식적으로 조직된 기독교 한 국루터회(LCK)를 위해 특별한 유산을 남긴 훌륭한 친구요 동료였다. LCK가 출범 된 후 1년 반 후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특별히 1971년 10월에 모였던 2주간의 집중적인 회의와 토론을 계획하고 실행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리더 십을 발휘하였다. 그 때 모임 주제가 “기독교 교육에 관한 협의”(Consultation on Christian Education)였는데, 그 행사는 한국루터교 선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랜드마크이자 분수령이 되었다.

그 특별한 모임의 중요성은 단지 그 때 2 주간의 회의를 통해 승인된 진술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일치된 승인을 이끌어내는 과정 때문이었다.


소위 그 “기독교 교육에 관한 협의” 행사는 내가 한국에서 40년 동안 선교사로 봉 사한 것을 회상하는 이 자서전적 회상에서 앞으로 별도의 장에서 취급할 것이다.

하디 가족은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는 한 집에 이사해 수년간 살았다. 도로 우 가족이 그 이전에 그 일본식 집에서 살았었다. 그 집은 집 안 문틀이 낮았기 때문 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문틀에 머리를 받혀 머리카락이나 살가죽을 벗길 수 대천 해수욕장 근처 길에서 1964년 여름에 하디 가족과 리머 가족이 예기치 않게 만나 찍은 사진.

있었다.

1960년 대 서울시에는 안정된 전기 공급과 물 공급을 위한 기본 시설이 매우 빈 약하였다. 예를 들면 서울시의 오래된 지역에는 수돗물이 항상 제공되지 않았다. 서 울시의 수도관리부는 특정 지역에 수돗물이 공급되는 날과 시간들을 조정하였다. 때 문에 일 주 매일 24시간 물 공급을 바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집을 건축할 때는 수돗 물 공급이 없을 때를 대비해 물을 담아 두는 저수탱크를 마련해야 했다. 더욱이 그 저수탱크는 필요한 물을 낮은 데까지 공급하기 위해 높은 곳에 설치해야 했다.

전기 공급 경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어떤 날 어떤 때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않 았다. 그러나 가끔 사전에 아무런 경고도 없이 전기가 끊어지기도 하였다. 오늘날 한 국에서 물과 전기 공급과 같은 기본적인 편의가 50년 혹은 60년이 지나 이렇게까지 존 하디 목사와 그의 아내 바바라가 1964년 2월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그들의 갓난아기를 안고 있 는 모습

발전하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도로우 목사 가족이 살았었고 하디 목사 가족이 이사하게 된 그 집은 또 다른 하나 기억할 만한 특징이 있었다. 그 집은 위에 있는 길에서도 아래에 있는 길에서도 들어 갈 수 있었다. 어떤 길로 들어가든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커다랗고 거친 돌들로 만 들어진 대단히 가파른 돌계단을 거쳐야 했다. 이 가파른 돌계단을 찍은 사진이 있는 데, 이 호에 그 사진을 포함하였다.

아래 길에서 그 집에 들어갈 때 잘 보이지 않지만 왼 쪽으로 나가는 또 다른 좁은 길이 있었다. 그 길은 지나갈 수 없고 끝이 막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방문객들 을 그 집으로 데려갔을 때 그들이 종종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었다. 왜냐하면 차를 그 기독교 한국루터회 총회장 지원상 목사와 하디 목 사 부부,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과 시카고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함께 찍은 사진

돌계단에 부딪히지 않게 벗어날 장소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루터교 선교부의 새 구성원이 된 선교사 하디가 처음 맡게 된 임무는 2년 동 안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다니는 일이었다. 그 어학당에서 6단계 교육을 1966년 마 친 후에 하디 목사는 나와 내 가족이 일 년간 미국 휴가를 얻어 떠나게 되었을 때 나 의 임무였던 왕십리 루터교회 책임목사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가 맡은 모든 임 무에 하디 목사는 성실했고 왕십리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서도 열심을 다하였다.


한국루터교 선교부에서 다른 많은 특별한 과제들이 하디 목사에게 맡겨졌다. 그 책임 중 하나가 제동 빌딩에서 거리를 내다보는 자리에 컨콜디아 서점을 세우는 일 이었다. 그 서점 개점은 공식적으로 1966년 2월 25일에 이루어졌다. 그 거리는 태평로라 불리었는데 대단히 번잡한 거리였고 당시에는 차량 통행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서울 심장부의 남대문과 시청 사이 에 위치한 그 거리는 지금도 매우 번잡한 거리이다.

컨콜디아 서점은 루터란 그리스도인 증거를 위해 그리고 한국루터교 사업 홍보 존 하디, 폴 바틀링 목사가 대지 구입을 위해 한 장소를 방문 중 KLM 직원 박문신씨와 함께 서류 를 검토하고 있다.

를 위해 특별한 중심지가 되었다. 동시에 그 서점은 신학생, 목사, 신학교수들이 영 어나 다른 언어로 된 수입 책들을 보다 쉽게 구입할 수 있는 훌륭한 장소가 되었다. 나는 컨콜디아 서점을 통해 한국 루터교회가 그들에게 끼친 유익이 참으로 고마웠 다고 내게 말해 준 다른 교파의 많은 목사들과 신학생들을 만났다. 그 서점 계획은 하디 목사의 책임 가운데서 주도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모든 것들을 고려해 볼 때, 하디 목사가 봉사했던 때는 한국루터교 선교부 초기 시기였고, 그는 한국루터교 선교부가 부딪히게 될 도전들, 그리고 가야 할 방향을 생각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어떤 면으로 하디 목사는 새로 탄생하게 될 한국 교 회를 위한 일종의 “교회협력부”의 첫 번째 지도자로 역할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6년 가 196 한 리머 요 할 역 클 부모 들 마이 부가 대 부 사의 아 교 디 선 리모 있다. 하 를 받고 1월 세례 하였다. 을 대신

것이다. 한국 교회는 1971년 1월 서울의 삼위일체교회(현 중앙교회)에서 제1회 총회를 가짐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 총회에서 하디 목사는 당시 임시로 한국루터 교 선교회라고 불렀던 임원회의 일원으로 선출됨으로 그의 신실한 봉사를 인정받 았다.

나의 가족과 나는 한국에 있는 동안 하디 목사 가족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 를 즐겼다. 하디 목사는 언어를 배우는 동안 왕십리 루터교회에 소속되었다. 나의 아들 마이클이 1966년 1월 왕십리 루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하디 목사 부 부가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직접 참석할 수 없었던 대부모(godparents)를 대 신해 임시 대리 대부모가 되 주었다. 그 1월 달의 추운 날에 찍은 사진에는 쇠로 된 석탄 난로까지도 찬 공기를 찬 공기를 막아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1968년 요한 하디 선교사가 루터란 서비스센터 에서 KLM 직원들과 토의를 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1964년 12월 홍콩으로 일주일 간 함께 가족 여행을 가졌었다. 우 리와 하디 가족 모두에는 한 살 반 된 딸들이 있었다. 그 여행은 우리가 한국에서 보낸 5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떠난 여행이었다. 우리는 함께 휴식, 쇼핑, 관광 등 을 즐겼고 또한 함께 신학교를 다니고 여름 선교학교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을 공 부했던 동창들과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도 가졌다.


하디 목사가 성 요한 루터교회 목사로 소명을 받아 시카고로 이사 를 한 후에 기독교 한국루터회 총회장 지원상 목사와 나는 하디 목사 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었다. 우리는 반갑게 그들을 만났다. 가족 모두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그 때 특별히 놀라운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교회 청년부 중 한 사람이 한국 루터교회 선교를 위해 특별 헌금을 한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귀중한 헌금이었다. 그것은 하디 목사 자신이 그의 생애 중 10여 년간을 헌신했던 한국 루터교회의 존 구에 있는

입 한 루터교회 시카고 성 요 말 푯 십자가와 환영

재와 사역을 위해 계속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이 었다.

19호를 기대해 주세요 글 이무열 변역 박일영 편집 최석천 1986년 9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한국 베델성서 강습회 기간 중 하디 목 사와 리머 목사가 잠깐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시카고 성 요한 루터교회 청년부의 한 교 인이 지원상 총회장에게 선교 헌금을 전달 하고 있다. 옆에 서 있는 사람이 하디 목사

1965년 12월 한국루터교 선교부 가족 들의 어린이들. 요한, 메리, 피터 도로 우; 빅토르, 아다이하, 에이미, 헤르다 바틀링; 켈리 리머; 데비 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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