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획
다시 돌아온
1 6 9 1 라 하 답 응 고하며...' 회 을 년 0 4 의 서 한국에 '이무열 선교사,
우리루터란에 연재되었던 이무열(Hilbert Werner Riemer) 선교사님의 '한국에서의 40년을 회고하며'의 13회 연재 되었었고, 이후 선교사님께서 새로이 글을 작성하셨습니다. 번역은 박일영 교수님이 해 주셨습니다.
2016
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 교회협력국
1961
제17호
한국에서의 40년을 되돌아보며 (자서전적 회상) 힐버트 리머 박일영 교수 옮김
지난 호 제16호에서 한국 루터교 선교의 첫 네 선구자 중 한 분이었던 지원용 박사 에 대한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나는 마지막 부분에서 이번 17호에서도 지 박사 이야기 를 계속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하였다. 왜냐하면 지 박사가 KLM 초기 시절에 보여 주었던 그의 지도력과 그의 공헌은 실제로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인격과 학생들과 동료들에게 끼친 그의 엄청난 영향력 때문이었다. 그들 가 운데는 한국 루터교회를 위해 지난 50여 년 동안 함께 수고한 한국인 동료들, 외국 선교 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진실로 지 박사는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었다. 2003년 루터대학교 총장실에서 지 박사를 환영하고 있는 리머 선교사
지 박사는 가끔 그의 경력을 10년 단위로 나누어 생각하곤 하였다. 그는 1948년부터 1958년까지 미국과 독일에서 공부하며 장차 교회를 위한 일꾼으로서의 준비를 하였다. 1958년부터 1968년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주로 한국에서 KLM을 위해 전념하였다. 그리고 1968년부터 1978년까지 다시 10년 동안 그는 한국 밖에서, 즉 스위스와 독일 에서 살며 일하였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7년 동안 LWF 아시아 총무로 일했고, 그 다음 3년 동안 독일 노이엔데텔자우에 있는 바바리아 복음루터교회의 세계선교국에서 신학 고문으로 일하였다. 그 다음 십년 1978년부터 1988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주로 미주리 세인트루이스 컨콜디아 신학교 교수로 일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세월 동안에 지 박사는 항상 한국 루터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 고 있었다. 그는 그의 한국인으로서의 뿌리를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그의 모국 한국과 모국의 교회와 늘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만일 그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더라면, 또 그렇게 해서 한국 여권이 아니라 미국 여권을 가지고 국제적으로 여행을 하였더라면, 그의 삶은 훨씬 쉽고 단순했었을 것이라는 사실에도 그는 한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 각하였다. 특별히 1968년부터 1975년까지 냉전시대에 LWF 아시아 총무로서 스위스 에서 살았을 때 그러한 필요는 더욱 중요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그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통전성에 관련된 문제였다. 그것은 결코 같은 환경에서 다 른 선택하였을 사람들에게 어떤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입장에서가 아니었다.
그 면에서 지 박사는 한국인으로서 참된 애국자였다. 나는 많은 세월 동안 지 박 사와 나눈 대화들 가운데서 그는 결코 미국 시민권 취득에 대해 결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왜냐하면 시민권 취득 과정에서 진술해야 하는 말 가운데는 태어난 나라의 국적을 포기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포기한 다(renounce)”는 대단히 강한 동사이다. 지 박사는 결코 그 단어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외국에 있으면서도 한국과의 관계를 중요시한 그의 확고한 마음과 태도는 그가 컨콜디아 신학교와 합의한 계약에 잘 나타나 있다. 지 박사는 미국 학교의 4학기제도 (Quater system)에 따라 정규 학기인 봄, 가을, 겨울 학기 중 2/3만, 즉 가을과 겨울 학기만 수업을 하기로 하였다. 봄에는 한국에 있는 루터신학교에 와서 한국의 2학기 2001년 세인트루이스의 한 레스토랑에서 그의 부모와 리머 사모 뒤에 서 있는 지현철
제도(Semester system)에 따라 3월에 시작하는 봄학기에 6주 동안 학생들을 가르 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루터신학교(후에 1997년 12월에 루터신학대학교 로, 그리고 2001년에 루터대학교로 교명이 바뀜)에서 2학기 중 1학기 정규적인 수업 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지 박사는 미국의 또 다른 4학기 중 하나인 여름 학기 과목을 위해서 미국으로 돌아가곤 했다. 와우! 확실히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셈 법”이었다! 2/3와 1/2과 1/4을 모두 합쳐 전체 1이상을 만든 것이다. 내 계산으로는 그 기간은 12개월 중 17개월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 일 년에 그는 일 년 반에 해당하 는 학기의 수업을 한 것이다.
가르치는 일을 지 박사는 매우 즐겨 하였다. 나는 지 박사가 한국에 와서 공식적 이든 비공식적이든 교실에서나 다른 곳에서 학생들이나 동료들과 교류를 나누며 가르 칠 때, 그는 가장 행복해 하였다고 믿는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나 동료들과 함께 일을 할 때 언제나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그들을 자극하고 또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주었다. 그는 참으로 신학교수로서 그에게 주어진 과제들을 수행하는 가운데 활기를 찾았고, 그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그 역할을 감 당했다. 1988년 지원용 박사와 그의 아내 김애경 지 박사는 2012년 12월 31일 컨콜디아 캠퍼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 은 그의 자택에서 소천하였다. 6년 가까이 긴 병을 앓은 뒤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미국 나이”로 88세였다.
지 박사는 2007년 2월 말 경 세인트루이스 컨콜디아 신학교에서 겨울학기를 마 감할 즈음 교실에서 가르치는 도중에 쓰러졌다. 수업을 듣던 학생 중 하나인 스콧 부 사커(Scott Busacker)가 미네소타 주에 있는 나의 집에 전화를 걸어 나와 내 아내에 게 그 소식을 알려 주었다. 스콧은 우리가 2004년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 나 가게 된 교회의 교인이었고, 우리와 지 박사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 르면 수업을 마칠 때 지 박사의 말이 어눌해지고 몸의 중심을 잡기 어려워 보였다고 한다.
곧 우리는 지 박사의 아들 현철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고, 그는 계속해서 지 박사 의 건강상태에 대해 우리에게 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의사들은 정확한 진단과 치료 절차에 대해 합의를 보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뇌졸중 의 경우 진단 가능한 국면들에 대해 들은 것을 기억한다. 뇌가 붓거나 뇌에 종양이 생 길 때 그 종양이 양성일 수도 있고 악성일 수도 있다. 의사들은 치료를 위해 많은 다 른 가능한 방법들을 제안하였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리고 내가 이해하는 대로는 그 중 한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가족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 왼쪽으로부터: 새로 총회장으로 선출된 허 송 목사, 증경 총회장 김해철 목사, 루터대 학교 총장직에서 은퇴한 도로우 목사, 새로 총장으로 선출된 리머 목사, 지원용 박사 (1998년 6월 5일 루터대학교 신갈 캠퍼스 채플-강당에서 열린 송별 및 취임 축하 예 배에서)
인된 검진 뇌수술을 진행하였다.
그 때 이후로 지 박사는 다시 교실에서 가르칠 수도 없게 되었고 설교할 수도 없 었다. 이전에 간단한 언급을 하는 기회나 긴 시간이 허락된 기회에도 언제나 심오한 의견을 말해 주는 열정적이고 예리한 그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는 수개월 동안 병원과 재활센터 혹은 요양센터에서 보낸 후 그의 나머지 생애를 그의 아들 현 철의 돌봄을 받으며 집에서 지냈다. 현철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효도의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였고, 유럽에 살고 있는 그의 세 딸들도 기회가 주어지 는 대로 자주 그들의 아버지를 방문하였다.
한국에서 2006년 가을 학기에 있었던 한 일이 특별히 기억에 새롭다. 그 때 지 박사는 최고의 건강한 모습으로 한국에 와 있었다. 거의 82세의 나이였지만, 그는 이 전과 마찬가지로 열정을 다해 가르쳤다. 그 때 그는 단지 루터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학생들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세인트루이스 컨콜디아 신학교에서 온 세 명 의 미국인 교환학생들에게도 영어로 두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들은 매우 우수한 학생들이었다. 나도 그들에게 두 과목을 가르치면서 그들을 알게 되었다.
지 박사가 그 세 명의 교환학생들에게 가르친 과목 중 하나가 세계 종교였다. 수 업의 일환으로 지 박사는 그들을 데리고 서울 시내에 있는 한 불교 사찰인 조계사를 방문하였다. 그 방문은 단지 수학여행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다다미 바닥 위에 세 시 간 동안 쪼그리고 앉아서 차를 마시며 한 스님으로부터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강의를 1991년 후암동 리머 선교사 집 부엌에서 저녁 식사 후 접시를 씻고 있는 영화배우 윤여정과 접시를 말리고 있는 지원용 박 사와 탤런트 김종찬
듣고 질문과 대답을 나누는 수업이었다. 내 아내와 나도 그 때 그들과 함께 갔었다.
지 박사가 병을 앓게 된 후에 내 아내와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세인트루 이스를 방문하여 그를 만났다. 자동차로 여행을 갈 경우에는 가능하면 도중 여행 일 정에 세인트루이스 방문을 포함시켰다. 병원에서나 재활원에서나 복지센터에서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간호원이나 돌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돌보는 지 박사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설명하곤 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돌보는 환자가 국제적으로 이름 이 높은 유명인사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의 마지막 수 년 동안 지 박사는 집에 머물면서 조금씩 계속 회복되는 모습 을 보였다. 그의 아내와 아들이 정성껏 돌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지 박사를 방문하면 온 가족을 서양식이나 중국식 뷔페식당으로 모시고 가서 식사를 하였다. 지 박사는 특별히 그렇게 집 밖으로 나가는 기회를 갖는 것을 매우 고마워했을 것이 다.
지 박사를 만나면 우리는 한국에서의 옛날 시절을 회상하곤 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며 많이 웃기도 하였다. 우리의 방문은 지 박사의 기분을 매우 좋게 만들었고, 그 때마다 우리는 가까이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여러 해 동 안 그렇게 회복되는 기간에 우리가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었더라면 지 박사는 더욱 반가워하고 치료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 박사와 나눈 이야기 중 재미있는 한 이야기 거리는 지 박사와 나는 똑 같이 동양의 12개 띠 중 같은 “쥐띠”라는 사실이다. 지 박사는 1924년 7월 19일(음력 6 2001년 10월 31일 중앙루터교회에서 열 린 루터대학교 부속 루터연구소가 주최한 루터강좌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지 박사
월 19일)에 태어났고, 나는 12년 뒤인 1936년 5월에 태어났다. 모두 쥐띠 해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졌다는 것에 대해 농담을 하였다. 그러나 지 박사는 눈을 반짝이며 1924년 쥐띠와 1936년 쥐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924년에는 “양반 쥐”가 태어난 해이고, 1936년에는 “쌍놈 쥐”가 태어난 해였다고 구분을 하였다.
지 박사는 2012년 12월 31일 소천하였지만, 공적인 장례예배는 2013년 4월 3일 세인트루이스 컨콜디아 신학교 캠퍼스 채플에서 가졌다. 유럽에 살고 있는 지 박사의 세 딸들이 모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늦어졌다. 그 날은 부활 절 후 화요일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봄 방학 혹은 부활절 휴가가 시작되는 기간과 겹치는 날이었다.
그 장례예배 때 나는 기대하지 못했던 큰 영예를 받게 되었다. 지 박사의 가족 이 나에게 장례예배 설교를 부탁한 것이다. 그 예배는 정규적인 화요일 아침 채플 시간에 열렸다. 교수들과 학생들은 물론, 미국 서해안 지역에 살고 있는 지 박사 친 척들과 세인트루이스 지역에 살고 있는 많은 한국인들이 참석하였다. 신갈 루터대학교 총장실에 있는 병풍 앞에 서 있는 지 박사
지난 16호에서 나는 KLM 초기 역사에서 1958년부터 1968년까지의 기간 동안 지 박사가 중요한 사업들을 실제로 기획하고 또 시작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몇 예를 이야기했었다. 이 사업들 가운데는 한국 루터란아워 방송선교와 그 방송 선교와 연계되어 시작된 기독교 통신강좌 프로그램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리고 이것은 다시 컨콜디아사라는 이름의 출판 사업으로 이어졌다. 컨콜디아사는 1959년 8월 8일, 등록번호 3-45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컨콜디아사는 월간지 새생명
을 비롯해 다른 문서들을 출판해 루터교회로서 전체 한국교회를 위해 큰
공헌을 하였다. 지 박사는 확실히 매스 미디아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창의적으로 사 용하고, 또 다른 여러 미디아를 연결시켜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하는데 있어서 뛰 어난 공헌을 하였다.
이전 글들에서 이미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들을 다루었었다. 그러나 그 글들에 서는 선교 초기에 시작한 중요한 한국 루터교회 사역들을 위해 지 박사의 역할이 얼 마나 크게 작용하였는지에 대해 적당한 언급을 하지 못했다. 14호에서는 KLM의 텔 레비전 선교가 중요한 이야기 주제였고, 15호에서는 지 박사가 1959년 2월에 개척 해 첫 목사가 된 임마누엘 루터교회에 대해 다루었다. 이것은 특히 지 박사가 지역교 회 목회 분야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그의 소명에 얼마나 충실하였는 가를 잘 보여 주는 예이다. 지 박사는 또한 1963년 9월에 설립된 왕십리 루터교회의 창립 목사였다.
한국 루터교 선교 15주년을 기념하여 1973년 1월에 지 박사에게 수여된 감사 장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면서 나는 지 박사가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서 공헌을 하였는 지, 뿐만 아니라 얼마나 높은 질의 능력과 일관성을 보여 주었는지를 새롭게 인식하 게 되었다. 지 박사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나는 1958년 한국 루터 교회를 설립하는데 있어서 그의 선구자로서의 역할, 그리고 한국 루터교회 존재와 사역을 위해 단단한 근거를 마련하는데 도움을 준 그의 예리한 신학적 통찰력을 다 시 강조하고 싶다.
지 박사가 그의 전 생애 동안 관련하였던 사역의 영역들을 나타내려면 많은 호 칭들의 목록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글의 목적을 위해서 나는 KLM의 초기 역 세인트루이스 지 박사 집에서 지 박사 부부 와 리머 사모
사에 국한해서 그 몇 호칭들만 언급하고자 한다.
지 박사는 유능한 저자, 편집자, 그리고 번역가였다. 지 박사는 [루터의 소교리 문답서와 해설]을 한국말로 번역 출판하여 한국 전체에 널리 보급하였다. 특별히 이 책은 기독교 통신강좌 기초반을 수료한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전 세계 모든 루터교회에게 가장 기본적인 자료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한국판은 1965 년 6월 25일 출간되었다. 출판 날짜인 6월 25일은 1530년 독일 아우구스부르크 제 국의회에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처음 제출된 바로 그 날짜이다. 또한 이 날 은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한국 전쟁이 일어난 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병에 걸리기 전까지 지 박사의 전 생애 동안 저자, 편집자 그리고 번역가로서의 그의 경력은 계속되었다.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세 가지 다른 언어, 즉 한국어, 영어, 그리고 독일어로 저술을 한 것도 기억되어 야 할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다른 언어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모국어를 제 외한 다른 외국어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 것이다.
저자, 편집자, 그리고 번역가로서의 공헌을 1958년부터 1966년까지만 제한하 더라도, 지 박사의 저서 [말틴 루터: 생애와 사상]은 특별한 상을 수상하였다. 그 당 시 나는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수상식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있었는지 모른다. 내게 기회가 허락되었더라면 분명 나는 그 때 나의 카메 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 책은 특별히 두 가지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책이었다. 하나는 루터 생애의 중요 날들을 당시 중요한 역사적 사건 날짜와 병행하여 연대기적으로 밝힌 부록1이다. 부록2는 말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교 회 문에 붙인 95개 논제의 내용을 네 가지 다른 언어, 즉 라틴어, 독일어, 영어, 그 리고 한국어로 싣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본 적이 없 다.
또한 지 박사는 신학자, 학자, 교육자, 그리고 교수였다. 그는 루터교 신학원 (Lutheran Theological Academy: LTA)을 설립하였다. KLM 초기부터 공식 신 학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문제에 대해 폭 넓은 논의가 있었다. 1963년과 1964 년에 지 박사는 바틀링 목사, 도로우 목사, 그리고 나와 함께 지 박사의 동생인 지 원용에게 신학수업을 시작하였다. 그 과정을 마친 지원상은 1965년 3월에 서울 임 마누엘교회의 담임목사로 안수를 받고 취임하였다. 그 때의 수업은 이상적인 것이 었다. 학생 대 교수 비율이 1대1이었다. 그러나 미래를 내다 볼 때, 우리는 앞으로 한국 루터교회의 미래를 담당할 인재를 키우는 신학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를 느꼈다.
한 편 지 박사는 한국에 있는 여러 신학교들, 대학 및 대학교들에 초청을 받아 2000년 여름 미국을 방문 중인 한영복 목사 부부, 박일영 목사 부부, 그리고 일리노이즈 벨빌에 거주하고 있는 김효종 목사 부부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지 박사 부부
수업이나 특강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몇 학교에서는 협동 교수로 봉사하였다. 그런 요청이나 초청을 받으면 지 박사는 항상 KLM 회원들의 이해와 승인과 지원을 얻 기 위해 매우 민감하고 조심스럽게 응했다. 지 박사는 루터와 종교개혁 학자로서 명성을 인정받았고, 그의 학문적 실력과 지성인으로서의 재능은 한국에서 널리 인 정되었다.
지 박사는 “스승”으로서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었다. 이 “스승”이라는 한국말은 영어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말을 찾기 어려운 말이다. 또한 그는 “팔방미인”이었다. 네 한자로 이루어진 이 단어 역시 영어로 정확하게 옮기기 어려운 것인데, 비슷한 말을 찾자면 좋은 의미에서의 “jack of all trades”정도가 될 것이다. 지 박사는 좋 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신실하게 증거한 모범이었 다. 나 자신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지 박사로부터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진정 값진 동료였고, 그리스도인 신사였고, 소중한 친구였다. 그는 실로 “동방에서 온 현자”였다!
지 박사의 삶과 일에 대해, 특별히 그가 교회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위해 공 헌한 일들의 양과 질에 대해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그리고 그 복음을 세상에게 전하는 일에 깊고도 확고한 헌신의 모습을 보 여 주었다.
2013년 4월 부활주일 후 화요일에 세인트루이스 컨콜디아 신학교 채플에서 열린 지 박사의 장례 예배 때, 나는 나의 간단한 설교의 본문으로 시편 118:17 말 씀을 선택하였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시리로 다.” 시편 118편, 특히 17절 말씀은 말틴 루터가 좋아했던 구절로서 지 박사도 이 구절을 좋아하였다. 지 박사는 그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그의 종이 된 자신을 통해 일을 하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해 왔 다.
지 박사가 좋아 한 또 다른 성경 구절은 빌립보서 3:20의 사도 바울의 말씀 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예 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즉 죽음에 대해 언제나 서슴
범성과 교 승려 불 의 사 하며 0월 조계 론에 참석 1 토 년 와 6 0 화 대 20 컨콜 닥에 앉아 지 박사와 다다미 바 를 마시고 있는 들 차 교환 학생 새로 끓인 세 명의 온 서 교에 디아 신학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이 지상에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시간과 삶에 대해 감사하는 표현을 늘 하였지만, 동시에 주님이 언제 자신을 하늘에 부르시든 간에 늘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해 왔다.
1993년에 지 박사는 빌립보서 말씀을 근거로 “우리의 참 시민권”이라는 제목 의 찬송가를 한국어로 작사하였다. 이근용이라는 작곡가가 그 가사에 맞추어 작곡 을 하였다. 나의 동료 선교사인 셜리 도로우 사모와 데이비드 수산 목사가 지 박사 와 협력하여 영어로 번역을 하였다. 그 곡의 가사들은 지 박사의 신앙과 소망에 대 한 웅변적인 증언이었고, 시편 저자의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시리로다”라는 말씀에 대한 또 개인적인 확증이었다.
삼 절로 되어 있는 이 가사의 후렴은 다음과 같다:
은혜의 주님이 주시는, 날마다 새로운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요, 늘 소망 가운데 살리라.
조계사 승려 범성과 직원, 그리고 컨콜디아 신학교에서 온 세 명의 교환 학생들과 지 박 사와 리머 사모
그리고 1절과 2절과 3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하늘의 시민, 우리의 고향은 이곳이 아닐세. 이 악한 세상 사는 동안 두려움 없이 여행하리라.
2. 우리의 참 고향 길에, 하나님 나라 준비되었으니 우리 이웃을 그리스도 섬기듯이 돕고 돌보리라.
3. 지금부터 우리 영원히 살리라, 그리스도 우리 모두 은혜로 묶으셨네. 함께 감사의 목소리로 찬양 노래 부르리라.
나는 내 아내와 함께 처음 한국에 온 1961년 이래 개인적으로 지 박사를 신 실한 친구와 동료로, 소중한 정신적인 “스승”,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파트너로 50년을 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을 큰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 박사와의 관계를 내 혈육인 세 형제와 같이 가까운 관계로 여긴다. 주 님께서 그를 통해 큰일을 성취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06년 가을 열린문 루터교회에서 영화배 우이자 탤런트인 임동진 목사 부부와 리머 선교사 부부와 함께 한 지 박사
18호를 기대해 주세요
2006년 가을 열린문 루터교회에서 임동진 목사 부부, 리머 사모와 지 박사
글 이무열 변역 박일영 편집 최석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