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응답하라1960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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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

다시 돌아온

1 6 9 1 라 하 답 응 고하며...' 회 을 년 0 4 의 서 한국에 '이무열 선교사,

우리루터란에 연재되었던 이무열(Hilbert Werner Riemer) 선교사님의 '한국에서의 40년을 회고하며'의 13회 연재 되었었고, 이후 선교사님께서 새로이 글을 작성하셨습니다. 번역은 박일영 교수님이 해 주셨습니다.

2016

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 교회협력국

1961


제19호

한국에서의 40년을 되돌아보며 (자서전적 회상) 힐버트 리머 박일영 교수 옮김

나의 자서전적 회상 제19호에서 나는 계속해서 1958년과 1966년 사이의 한국 루터교 선교회(KLM) 시절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번 이야기의 주제는 한국 루터 교 선교 초기에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한 인물, 지원상 목사에 관한 것이다. 그는 1998년 4월 미국 나이로 70세에 별세할 때까지 한국 루터교회(LCK)를 위해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사람이었다.

지난 15호에서 나는 1958년 1월에 처음 한국에 도착한 세 사람의 첫 미국 선교

지원상 목사 1966년

사, 즉 보스, 바틀링, 도로우 목사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 다음 16호와 17호에서 1958년 9월에 조국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KLM의 일원으로서 큰 역할을 한 지원 용 박사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18호는 그 후에 KLM에 동참한 두 명의 선교사, 즉 1960년 11월에 한국에 온 라우어 목사와 1964년 2월에 한국에 온 하디 목사를 위 해 할애되었다. 나와 내 아내는 1961년 9월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 다음으로 KLM 공식 멤버가 된 사람이 지원상 목사이다. 그는 1965년 3월에 안수를 받고 KLM에 합류하였다. 앞 선 글들에서 지원상 목사에 관련된 특별한 사건 들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는 미공군 군목 메이어(W. Meyer) 목사, 그리고 1954년 한국에 파견되어 선교 가능성을 조사했던 미조리 시놋 팀과 연관이 되었었다.

지원용 박사의 동생인 지원상 목사는 지금 북한에 속한 작은 마을인 재령에서

1965년 3월 임마누엘 루터교회에 서 목사 안수를 받는 지원상 목사

1927년 10월 9일 여섯 자녀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지역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 북쪽을 지배했던 공산주의자들은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었다. 지원상 목사는 그들이 벽에 쓴 잔인한 문구들을 보면서 1947년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탈출하였다. 지원용 박사와 지원용 목사가 어떻게 북에서 탈출 했는지 이야기를 들어 보면 두 사람이 겪었던 위험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지원용 박 사는 1946년 탈출을 했고, 지원상 목사는 1947년에 탈출을 했다.


2차 세계대전 후 한반도가 둘로 분단되며 한국의 역사는 참으로 슬프고 비극적인 일들을 겪게 된다. 강제로 이별을 하게 된 가족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더 깊은 비극을 느낄 수밖에 없다. 지 목사 형제의 경우, 그들은 북쪽에 남은 그들의 아버지나 어머 니, 혹은 세 명의 여동생과 한 명의 남동생들과 어떤 접촉도 불가능했고 그들에 대한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1985년 사진.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리머 선교사, 지 목사, 1954년 수원에서 지 목사 를 처음 만났던 은퇴 공군 군목 아더 메이어 목사

지 목사는 고향인 재령에서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당시 한반도 전체 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다. 일본은 1910년 한국을 공식적으로 합병하였었 다. 일본의 지배는 억압적이었고 학교에서는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전 화위복이었는지 혹은 하나님이 악을 선용하시는 예가 되었든지 지 목사는 강제로 일 본어를 익히게 되었다. 당시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었다.

미조리 시놋을 대신하여 아시아 지역 고문의 역할을 맡았던 폴 스트레게(Paul Strege) 목사가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그와 지 목사는 일본어로 편안하게 의사소통 을 할 수 있었다. 스트레게 목사는 일본에서 장기 선교사로 오랫동안 경험을 가진 사 람으로 미조리 시놋 아시아 지역을 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그는 일본어에 능통하였다. 지 목사는 설교가로서 의사소통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단지 모국어인 한국말을 사용할 때만이 아니었다. 수 년 동안 나는 몇 일본의 목사들이 지 목사가 일 1966년 6월 일본으로 떠나는 지 목사를 김 포공항에서 마중하는 가족과 친구들

본어로 설교할 때 일본인 목사들 보다 훨씬 설교를 잘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58년 9월에 지원용 박사가 한국에 돌아 왔을 때, 그는 특별한 과제와 지위와 직 책을 받았는데, 그것은 한국 루터란아워(KLH) 라디오 선교를 시작하고 지도하는 역 할과 관련된 것이었다. 동시에 그의 소명에는 다른 미국 선교사들과 같은 방식으로 복음 전도 사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1961년 9월 내가 한국에 도착하였을 때, 한국 루터교 선교회(KLM) 이름으로 많 은 활동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이름으로 30분짜리 다큐멘터 1960년대 김포 국제공항

리 형식의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 것은 1959년 11월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전에 많은 연구와 조사와 준비 작업이 선행되었다.

기독교 통신강좌(CCC) 프로그램은 루터란아워 후속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다. 방송을 듣고 성경공부 자료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조그만 책자를 보내고 뒷면에 문제 에 답을 적어 보내오면 그것을 채점해 기록을 해서 모든 과정을 마친 사람들에게 개 개인의 이름을 새긴 수료증을 주며, 『소교리문답서와 해설』 책을 선물로 보내 주었 다. 기초과정은 12과로 되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거의 매 주 우편물이 큰 짐을 이룰 정도였고, 직원들이 지게를 지고 우체국에서 그 짐을 기독교 통신강좌 사무실로 가져 오곤 하였다. 1963년 서울 거리의 전차, 버스, 그리고 1960년대 지프차들


루터란아워의 연계 기구로 ‘컨콜디아사’라는 이름으로 출판사 등록을 신청하였는 데, 출판사 설립 허가가 난 것은 1959년 8월이었다. 컨콜디아사는 기독교 통신강좌 자료를 출판한 것 외에 마르틴 루터와 16세기 종교개혁 운동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성경 공부를 위한 특별한 자료들을 출판해서 한국교회 전체를 위해 공헌하였다.

지원상 목사 부부가 1974년 작별 인사차 방문했을 때 폴 스트레게 목사 부부에게 사진을 선물로 주고 있다.

『새생명』라는 이름의 월간지 발행도 라디오 선교와 통신강좌 후속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다. 그 월간지에는 최근 통신강좌를 수료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넣어 그들이 계속해서 공부를 하도록 격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원상 목사가 한국 루터교 선교회에서 실행되는 모든 활동들을 돕 는 총무직을 맡게 되었다. 정말 많은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1961년 9월에 한국 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지원용 박사가 덕수빌딩 4층에 있는 기독교 통신강좌 사무 실에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소개해 주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런 일에 행정 적인 감독과 보조가 필요했던 것은 불가피했고, 그 일을 지원상 목사가 맡게 된 것이 다. 세 명의 직원들이 바쁘고 행복한 모습으로 기독교 통신 강좌 업무를 하고 있다.

동시에 지 목사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그의 형인 지 원용 박사, 선교사 바틀링, 도로우, 그리고 내가 개인교습 형식으로 지 목사를 가르쳤 고 1965년 3월에 지 목사는 루터교회 목사로서 안수를 받게 되었다. 지 목사는 이전 에 이미 서울에 있는 한국신학대학교에서 1949년과 1957년 사이에 충분한 신학교 육을 받았었다. 그 때는 1960년 6월 25일 시작되어 1953년 7월 휴전협정 서명까지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인해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목사 안수를 받자 마자 지 목사는 즉시 한국 루터교 선교회 일원으로 인정되고 받 한 기독교 통신 강좌 직원이 수료증에 도 장을 찍고 있다.

아들여졌다. 그는 큰 환영을 받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 는 일이었다. 그 당시에나 그 후에나 외국 선교사들과 국내 목사들은 모든 평등한 관 계라고 하는 이해를 분명히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조리 시놋 루터교회를 포함해 다른 많은 선교 현장들에서는 우리의 경우와 같은 입장이나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선교사들의 초기 선구적 사역들은 꼭 충분한 의미에서 “교회”로 인정되지는 않았었다. 현지 리더십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고, 자치뿐 아니라 자립을 하고 스스로 선교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준비하는 한 단계 로만 여겼었다.

내 입장에서 볼 때, 나와 내 동료 외국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우리는 한국 선 지 목사가 미조리 시놋 모금 운동 디렉터 였던 마르틴 쾨네케 박사와 함께 있다. 쾨 네케 박사는 한국 루터교 선교회가 후암동 근처 두 곳의 땅을 구입하는 데 기금을 제 공해 주었다.

교 맨 처음부터 우리를 파송한 미조리 시놋보다 한국 교회들과 우리 스스로를 동일시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결코 우리를 구조와 조직에서 있어서 “선교”에서 “교회”로 인 위적인 전이를 이룰 때까지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 일종의 일시적인 외국 “선교” 사


역의 일부로 보지 않았다. 한국의 국내 교회가 선교사들로서의 우리의 활동을 위 한 초점, 맥락, 정체성이 되었다.

목사 안수를 받고 지 목사는 예관동에 있는 임마누엘 루터교회의 담임 목사로 취 임을 하였다. 지 목사는 이미 1962년부터 1964년까지 그 교회에서 파트 타임 전도 사로 일하였었다. 지 목사의 경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한국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리머 선교사, 지 목사, 이경배 장로. 이 장로는 훌륭한 평 신도 지도자로서 평생 KLM과 LCK의 출판 사업과 매스 커뮤니케이션 사역을 위해 봉사하였다.

서 안수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 루터교 목사였다는 것이다. 지 목사는 임마누엘 담임 목사로 1965년 3월부터 1966년 5월까지 봉사하고 도쿄에 있는 일본 루터교 신학 원에서 1년간의 공부를 위해 떠났다.

그 때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는 일본에 소개되었던 성인 기독교 교육 교재의 저 자, 할레이 스위감 목사가 가르치는 2주간의 베델성서연구 과정에 참여하였다. 그것 은 지 목사가 그 프로그램을 처음 접하게 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베델성서연구는 한국 전체 교회에서 초교파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환영을 받게 된 대표적 성경연구 방법이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 온 후에 지 목사는 삼위일체 교회 담임목사였던 바틀링 목사의 후 지 목사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 앞 왼쪽에 앉아 있다. 이 학생들은 모두 기독교 통신강좌 기초반을 수료한 학생 들이다

임자가 되었다. 그 교회는 후에 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 목사는 1979년까지 그 교회를 담임한 후에 당시 한국 루터교 총회장으로서, 그리고 한국 베델성서연구원 원장으로서의 과중한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사임을 하였다.

1967년은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의 성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45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 때 지원용 박사는 세인트루이스 컨콜디아 신학대학원에서 객원교수로 초빙을 받아 떠나게 되었 다. 지 박사가 없는 동안 지 목사가 지 박사를 대신하여 제동 빌딩 본부에서 진행되고 있던 모든 한국 루터교 선교회 활동들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3층에 루터교 신학원, 1층에 삼위일체 루 터교회(현 중앙루터교회)가 자리 잡고 있 는 건물을 뒤편에서 찍은 사진

지 박사가 미국과 유럽에서 맡게 된 특별한 과제들을 수행하고 돌아 온 후 얼마 되 지 않아, 그는 루터교 세계연맹(LWF) 아시아 총무직 초빙을 받게 되었다. 결과적으 로 지 박사는 가족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로 이사를 하였다. 그 초빙을 받았을 때 한국 루터교 선교회는 많은 모임과 개별적 대화들을 통해 그 문제에 대해 의논하고 숙고하 였다. 지 박사는 동료들과 장단점들에 대해 논의할 때 매우 조심하고 신중하였다. 그 러나 결국 그는 LWF 로부터의 초빙을 수락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1968년 여름에 가족과 함께 제네바로 떠났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지원상 목사가 당연히 한국 루터교 선교회와 관련된 모든 선교 사역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 당시, 그리고 1971년 2월 한국 루터교 선교회 헌법 총회를 1969년 여름 삼위일체 루터교회의 여름 성경학교에 참여한 많은 어린이들

열기까지 한국 루터교 선교회가 의결기구였고, 의장은 바틀링 목사가, 회계는 도로우 목사가 계속해서 맡았다.


1971년 2월 헌번 총회는 1년간 한국 루터교 선교회를 임시 기구로서 결정하고 바 틀링 목사와 지원상 목사를 공동의장으로 선출하였다. 2차 총회에서 명칭을 한국 루 터교회라고 바꾸었다. 그리고 그 모임들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지원상 목사의 특 별한 은사를 인정하고 그를 첫 한국인 한국 루터교회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1968년 삼위일체 루터교회 부활절에 설교 하는 지원상 목사

지 목사는 총회장으로 계속 재선되어 1993년 은퇴할 때까지 21년 간 충실하고 또 탁월하게 총회장직을 수행하였다. 그 기간 동안 지 목사는 한국 루터교회를 위해, 그

루터교 신학원 원장 실, 도서관, 교실이 있는 3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 복도를 통해 삼위일체 교회 가 예배 장소로 사 용하는 곳과 연결되 어 있다. 1972년

리고 한국에 있는 전체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 참으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지 목사는 총회장직을 물러난 뒤에도 많은 역할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특 별히 베델성서연구원장으로 매우 훌륭하고 능률적인 리더십을 보여 주었고, 그 외에 도 다른 많은 역할들을 맡아 봉사하다가 1998년 4월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났다.

나의 이 자서전적 회상 다음 20호는 계속해서 지원상 목사의 생애와 그가 남긴 유 산들을 다룰 것이다. 요약해서 소개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너무도 말할 것이 많이 지 목사가 1973년 한국을 방문한 미 조리 시놋 총회장 프로이스(J.A.O. Preus) 목사와 삼 위일체 루터교회 간판 앞에서 인사 하고 있다.

있다.

지역교회 목사와 설교자로서, 저술가와 저자로서, 교회 지도자로서, 행정가로서, 라디오 연설가로서, 초교파적인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미친 루터교 지도자로서, 대한 성서공회 지도자로서, 한국 베델성서연구원 원장으로서, 국가의 안녕과 국민들을 아 꼈던 교회/정치인으로서 지원상 목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충실한 종이었다.

20호를 기대해 주세요

글 이무열 변역 박일영 편집 최석천

1969년 삼위일체 루터교회 첫 예배 장소에서 드리는 한 주일 예배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지 목사 부부와 리머 선교사 부부

한국 루터교회 제2차 총회에 참석한 미국의 특별 손님 미조리 시놋 선교 국장 윌리암 콘 박사, 동북 아시아 지역 카운슬러 폴 스트레게 목사가 지 목사와 함께 찍은 사진 1972년 5월 6일 옥수동 루터교회에서 열린 제2차 한국 루터교회(KLC) 총회에서 총대들 과 두 명의 해외 손님들과 함께 찍은 사진

지원상 총회장, 선교사 도로우와 리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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